차범근 감독(현재는 감독, 해설가 등의 활동이 없으나 요즘 부르기 제일 무난한 호칭이라고 생각함)이 주로 독일에서 선수로 뛰던 시절에 대한 에피소드 위주로 이루어져 있다.

당시 스포츠 서울에 연재되던 칼럼을 모은 것이다. 칼럼의 연재연도는 1980년대 중후반으로 예상되는데, 실제 책은 1997년도에 출간했다.  거진 30년이 넘은 내용으로 당시의 축구계와 한국의 상황들을 되돌아보는 기회가 된다.

개인적으론 이런 책이 있다는 것도 몰랐다. 손흥민의 에세이를 보고 나서 당연히 차범근 감독도 이런 책이 있지 않을까 하는 생각에서 찾아봤다.

차범근 감독의 축구에 대한 생각, 그리고 세상에 대한 생각을 알 수 있다. 아마 당시는 전문편집자가 없었나하고 생각되는 부분이 있다. 글의 내용은 괜찮은데 가끔가다 문맥이 이해가 안되게 튀는 부분이 있다.

차범근 감독이 뛰는 모습을 기억하는 세대(나도 사실 차범근 감독의 선수시절 모습은 86년 월드컵에서 뛰던 모습 정도나 기억한다. 당시 분데스리가에서 활약을 하는 것은 신문으론 봤지만 TV에서 경기모습을 볼 수는 없었던 시절이다.)

이 책은 지금 절판에다가 중고서점에서도 구하기 힘들다.(그래서 어렵게 도서관에서 찾아서 읽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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p19. 나의 자랑스러운 둘째 형님

 처제들은 시골에 계시는 둘째 형님을 '일용씨'라고 부른다. 그 연속극을 나는 한번도 본 적이 없는데 처제들의 얘기인즉 [전원일기]에 나오는 '일용씨'의 모습이 둘째 형님의 모습하고 똑같다는 것이다. 형님은 지금 어머님을 모시고 고향에서 버섯 농사를 짓고 있다. 가끔 고향집에 전화를 하면 밤 열한시가 넘었는데도 어머님과 함께 버섯을 다듬고 있다고 할 만큼 일이 많은 작업이다.

 그러나, 어머님, 형수님, 그리고 형님이 하루종일 매달려야 하는 엄청난 일의 양에 비해 일년에 떨어지는 돈이 칠백만원 정도라고 해서 나는 참 심란한 기분이 들었는데 정작 형님은 그만한 수입을 올린다는 것에 보통 자부심을 갖고 계시는 게 아니었다. 그런 천성 때문인지 형님은 한번도 도시 생활을 꿈꾸거나 계획한 적이 없는 분이다. 작은 운동구점 하나라도 동생 이름 걸고 하겠다고 할 법한데 여지껏 그런 생각은 꿈에서조다도 갖고 계시지 않은 것이다. 농사 이외에는 할 수 있는 것도, 아는 것도 아무 것도 없다고 스스로 생각하시는 형님이 지난번 만났을 때 "나는 말이여, 버섯을 하면서도 뭣을 조금씩 치면 일이 훨씬 수월한데 유명한 아우 생각을 하면 절대로 그렇게 못하겠어. 내 버섯은 정말로 아우 덕에 아무 것도 치지 않고 키우는거여"하며 느릿느릿 말씀하시는 것을 보며 말할 수 없는 고마움과 형의 인격에 대한 존경심이 우러나 얼마나 자랑스럽게 느껴졌는지 모른다.

 형님은 자신의 인감도장조차도 마을일을 돌봐주는 '이장'에게 맡겨놓고 그 이장이 형님 몰래 오백만 원을 대출받아 썼는데도 몇 년씩 그 사실을 모르고 지낼 만큼 순진하신 분이다. 그런 형님이 얼마 전 축구교실을 할 만한 아주 좋은 땅이 있다는 얘기를 듣고도 머뭇거리는 나를 보자 내가 돈이 모자라서 그러는 줄 알고 몹시 딱하게 느껴졌던 모양이다. 며칠 전 전화를 했더니 "범근아! 학교 뒷산에 있는 우리 밭을 팔면 한 사천만 원 된다는 데 내가 그걸 팔아서 보태주면 그 땅을 살 수 있겠냐?"고 물었다.

 나는 정말로 할 말이 없었다. 아무리 형이라고 해도 그런 생각을 할 수 있는 사람이 이 세상에 우리 둘째 형님 말고 또 있을 수 있을까. 더구나 요즘 같은 세상에....

 고등학교 교육도 제대로 받지 못하신 형님.

 하루종일 일에서 헤어나지 못하는 초라한 모습의 농군 형님. 그러나 형님은 동생에게 폐를 끼치지 않고 살 수 있다는 것이 기쁠 뿐이고 나는 그런 형님이 박사보다도 장관보다도 더 자랑스러울 뿐이다.

 

p21. 

 그 해 6월에는 사기꾼이 처가에 사기를 치려고 했던 적이 있다. 어떤 남자가 장모님께 전화를 걸어 "내가 축구감독 김호인데 이번에 독일에 갔다 오면서 차범근이가 장모님 갖다 드리라고 주는 선물을 갖고 왔다. 그런데 세관에서 통관세 21만원을 물으라고 하니까 내 온라인 구좌로 돈을 좀 보내달라"면서 구좌번호까지 불러주더란 것이다. 평소 나나 아내는 "괜히 세관 검사대에서 떳떳하지 못하고 피곤해 할 필요가 어디 있느냐"는 생각을 갖고 있어 귀국할 때 변변한 선물은 말할 것도 없고 그 흔한 양주 한 병도 안 가지고 간다. 그래서 내 손아래 동서는 "형님! 비행기 안에서 파는 양주 한 병은 예의예요."하고 항상 불평을 하는 판이다.

 그런데 10년 동안 선물이라고는 한번도 받아 본 적이 없는 장모님 생각에 "천지개벽이 아니고선 세금까지 물어야 할 변난 것을 사서 보내겠느냐"고 생각했다는 것이다.

 장모님은 궁금하지도 않으셨는지 전화 한 통화 안한 걸 보면 평소 교육(?)의 효과가 대단했던 것 같다.

 

 p23.

 남을 위해서 참는 것, 일을 위해서 인내하는 것, 그것은 일의 종류가 어떤 것이라고 해도 매우 귀중한 것만은 틀림이 없으리라.

 

 p29.

 유럽컵과 같은 공식 유럽축구연맹 주최 경기에는 팀에서 입는 일반 유니폼을 입지 못하게 되어 있다. 같은 모양에 광고를 없앤 유니폼을 사용해야 하는데 유럽에서 열리는 3대 유럽컵 결승전은 전 유럽에 중계가 된다.

 10년 전 내가 속해 있던 프랑크푸르트 팀은 UEFA(유럽축구연맹)컵 결승전에 올랐었다.

 물론 경기장에서는 흰색 상의에 까만 팬티를 입었는데 프랑크푸르트의 마크가 왼쪽 가슴에 조그많게 달린, 규정에 조금도 어긋나지 않는 복장이었다.

 6만이 꽉찬 운동장에서 결승전을 벌인 끝에 '샤웁'이란 선수가 한 골을 넣어 1대 0으로 승리, 우승컵을 차지할 수 있었다.

 시상 준비를 하는 짧은 시간에 우리는 라커룸으로 들어갔다.

 거기에는 "옷이 적어 감기에 걸릴까봐서"라며 우리가 평소에 입던 미놀타라는 글자가 새겨진 유니폼이 가지런히 놓여 있었는데 적은 옷과 갈아 입으라는 것이었다.

 옷을 갈아입고 운동장의 환호소리에 끌려 다시 나왔을 때 수백명의 카메라맨들이 우승팀을 찍으려고 우리를 향해 몰려들었다.

 중계되는 가운데 시상식도 근사하게 끝마쳤다.

 컵을 앞에 놓고 찍은 '우승 팀 사진은 각국으로 보내져 스포츠 신문과 잡지를 장식했다.

 유럽축구협회에서 가만히 있을 리가 없었다.

 그러나 광고주는 원하는 목적을 달성했으니 느긋하게 유럽축구협회에서 프랑크푸르트로 요청한 벌금만 대납해주면 되는 것이다. 

 200만원.

 생각보다 적은 액수다.

 해볼 만한 일이라고 했을지도 모른다.

 프랑크푸르트가 이 일을 해주고 얼마나 받았을까?

 나도 모른다.

 신문에도 없다.

 다만 효과가 있기에 그런 법석을 떨었을 것이란 점만은 쉽게 이해 할 수 있을 것 같다.

 

 p37. 별난 아들 이름 '세찌'

 "야! 차붐! 넌 드디어 진짜 축구 선수가 된거야! 위대한 축구 선수는 다 얘들이 셋이거든. 펠레가 그렇고 베켄바워, 루메니게, 브라이트너, 슈스너, 그리고 나 니켈...."

 셋째를 낳았다는 신문보도가 나자 프랑크푸르트의 옛 동료 니켈이 부리나케 집으로 전화를 걸어 한 말이다.

 세찌. 이곳 독일 친구들은 저마다 들어보지도 못한 이름을 지어 이제 겨우 두리란 이름이 익숙해질 만하니까 "또 세찌를 외워야 하게 됐다고 투덜거리는데 이름 가지고 말이 많기는 서울도 마찬가지다.

 전화를 통해 "축하합니다"하고 점잖게 운을 떼고 난 [스포츠서울]의 방석순 기자는 두리 다음에 난 아기의 이름이 세찌라고 하자 "세상에 '찌'가 들어가는 이름이 어디 있어요. 그래 그 이름 호적에 올릴 참이요?"라면서 어이없어했다.

 그렇다고 이미 지어 놓은 이름, 게다가 신문에 나고 이곳 TV해설자까지 축구해설 도중 자세히 소개해 놓은 우리집 아이의 이름을 이제 와서 바꿀 수 없는 것 아닌가?

 거기다 우리 세찌 녀석은 이름만 요란한 게 아니다.

 언젠가 신문지상을 통해 1986년 10월쯤 세찌가 태어날 것이라고 밝혔더니 어느 팬이 신문사로 전화를 걸어 "차 선수와 통화할 기회가 있거든 요즈음은 하나만 낳기 운동이 한창임을 꼭 일러주라"고 했더라는 것이다.

 맞는 말이다.

 이제는 '모두가 하나'도 아니고 '한집 걸러 하나'의 추세라고 하니 우리 같은 경우는 아파트 한층의 애들을 몽땅 갖고 있는 셈이다.

 우리 한국 축구 선수들도 나이가 젊을수록 '하나만 낳고 끝'이라고 하는데 소위 선진국이라는 곳에서 수년을 산 가장 모법적이어야 할 영증(조영증)과 나만 애가 셋이니 사실 할 말이 없다.

 거기다 어찌된 영문인지 이곳 [익스프레지]지는 내가 한국 가족계획협회의 '둘만 낳기 운동'에 모델로 앞장섰다는 사실까지 알아내서 내가 얼마나 엉터리인가를 유감없이 폭로하기까지 했다.

 

p64.

 그러기 때문에 더 배운 사람, 더 높은 사람, 더 많이 가진 사람들은 항상 남들이 흉내내고자 하는 대상이 된다.

 지금 생각해보니 한국에 있을 때, 많은 어른들을 뵙고 가까이에서 그분들의 생활을 보면서 배우지 말아야 할 것도 흉내낸 적이 있고, 또 옳지 않은 것도 높은 분이 하는 것은 근사해보였던 기억이 난다.

 남편의 권력을 등에 업고 열심히 땅장사하시던 어느 사모님, 바로 그분이 내가 독일로 온 뒤 장관 사모님이 되었다는 얘기를 들었을 때의 기분은 요즘 신문을 잃고 난 뒤의 씁쓰레한 뒷맛과 별로 다를 게 없었다.

 한번은 우연히 만난 어느 재벌 총수님께 좋은 말씀 있으시면 한마디 해주십사 하고 부탁드린 적이 있다. 한국에서 열 손가락 안에 꼽히는 이 대재벌 총수님은 거짓말 같게도 갑자기 내 귀에 입을 슬며시 대시더니 "돈 있으면 금 사!" 하시는 것이었다.

 하기야 내가 낮에 묻었던 축구화 바닥의 흙이 생각나서 자다가도 뛰쳐나와 손질을 해놔야 속이 시원한 것만큼이나 그분도 자나깨나 돈버는 궁리를 해서 대기업을 이룰 수 있었는지는 모르지만 당시 나이 어린 나에게 하는 충고치고는 분명히 야(?)했었다.

 

p68. 레버쿠젠시가 온통 차붐 축제

 8년만에 UEFA컵이 서독으로 다시 돌아왔다. 그것도 내 품으로.

(참고 : 1987-88 UEFA 우승은 레버쿠젠이 차지. 당시 상대팀인 RCD에스파뇰은 바르셀로나에서 열린 1차전 홈경기에서 3:0으로 승리. 레버쿠젠의 홈경기에서 4점차 이상으로 승리해야만 하는 절대적으로 불리한 상황이었다. 바로 이 절대절명의 2차전에서 차붐이 후반 81분 극적인 3번째 골을 넣으면서 3:0으로 레버쿠젠이 승리. 이후 1,2차전 동점/동률이 된 상황에서 연장전을 진행하지만 결국 양팀 모두 골을 넣지 못하고 승부차기로 간다. 승부차기에서 레버쿠젠이 3:2로 짜릿한 우승을 차지하며 일약 차붐은 레버쿠젠의 영웅이 된다.)

 뜨거워서 터질 것 같은 팬들의 열광과 환호는 8년 전의 그것과는 비교조차 할 수 없는 감격이었다.

 하늘에서는 [원더풀, 이렇게 아름다운 날]이라는 왕츠가 높은 테너 가수의 음성으로 쏟아지고 관중들은 함성과 흥분으로 운동장을 덮고 있었는데 간간이 보이는 노란 바탕에 까만 붓글씨의 응원 플래카드는 나에게 또 다른 흥분을 더해 주었었다.

 '범근아, 너 알지 끝내줘라."

 나의 세 번째 골이 터졌을 때부터 UEFA컵은 내게 돌아오고 있었다.

 그 당시 내 나이 34세, 바로 그 감격스러웠던 순간에 나의 축구 인생에 종지부를 찍고 싶었던 충동은 너무 감상적인 것이기만 했을까.

 더 이상 바랄 것도, 바라고 싶은 것도 없었다.

 왁자지껄 집으로 몰려들었던 한국 손님들이 프랑크푸르트를 향해 떠난 것은 새벽 2시였다.

 도무지 잠자리에 들 수 없는 흥분 때문에 슬리퍼를 신은 채로 파티장에 다시 돌아갔을 때는 레버쿠젠 시도, 파티장도 온통 취해 있었다.

 깊은 밤에 빵빵거리면서 돌아 다니는 자동차, 어깨에 어깨를 걸고 훈훈한 초여름 밤을 맥주로 식히면서 춤추고 노래하는 무리들이 레버쿠젠을 온통 메우고 있었다.

 취한 경찰이 팬들과 어울려 [오! 미스터 나이스]를 신나게 부를 때 푸른 제복이 어떤 일을 하기 위해 입는 것인지를 그들은 잊은 지 이미 오래된 듯해 보였다.

 "부미!"(감독이 부르는 나의 애칭)하고 집에서 입는 옷차림으로 파티장에 들어선 나를 끌어안은 감독과 부인의 벌겋게 젖은 눈은 지난 세월 동안 그와 우리가 나눈 고통의 밀담을 소리없이 생각나게 하고 있었다.

 눈물과 웃음이 결국은 같듯이 고통과 영광은 같은 무게로 우리의 인생에 매달려 있는 모양이다.

 손수건을 링 위로 던졌다는 신문들의 빈정거림 속에 팀을 떠나겠다고 선언했던 바로 그 감독이 떠나기 1주일 전에는 레버쿠젠의 영웅이었다. "이 컵은 나의 이별의 왕관이다"라고 반쯤 취해서, 아니 하나도 안 취해 있던 감독은 소리쳤다.

 나는 그때 뭐라고 소리쳤을까.

 그 밤의 모든 일들이 꿈같이 느껴진다.

 그러나 오픈카를 타고 시민들 사이를 누비며 8년만에 안아본 UEFA컵은 어느새 살찐 아들 녀석처럼 훨씬 무거워져 있었다.

 

p87. 마라도나는 진짜 작은 거인

 1987년 크리스마스 전에 서독 축구 국가대표 팀이 남미원정 중 브라질 및 아르헨티나 국가대표 팀과 친선경기를 가졌었다. 독일에서는 한밤중에 중계가 되었는데 경기 내용이 신통치 않았다.

 그러나 그 경기의 해설자는 연방 디에고 마라도나의 화려한 모습을 보는 것만으로도 자지 않고 TV를 시청한 대가는 받은 셈이라고 말했다. 사실 그날 저녁 마라도나가 보여준 플레이는 기술이나 묘기라기보다 차라지 천진한 어린아이의 재롱 같아 보였다.

 수만 관중이 디에고를 외치면서 발을 동동 구르며 미칠 듯이 환호하는 것을 작은 키의 마라도나는 마치 우리 집 세찌가 도리도리 짝짜궁을 하면서 나를 즐겁게 해주는 것처럼 대수롭지 않게 즐거워하고 있었다. 마치 긴장이 무엇인지 아직 경험해보지 않은 아이 같았다.

 그런데 1988년 초에 마라도나가 속해 있는 이탈리아의 나폴리팀과 언젠가 내가 가려고 했던 AC밀란과의 경기에서 나는 또하나의 작고 귀여운 '마스코트'를 보고는 나에게 결정적으로 부족한, 그래서 내가 지금 서 있는 이 단계를 벗어날 수 없는 가장 큰 이유를 알 수 있을 것 같았다.

 1987년 유럽의 최우수 선수였던 네덜란드 출신의 머리를 갈래갈래 땋은 그 흑인 소년은 돌아가는 템포가 질러가는 상대 선수보다 빠를 만큼 스피드가 대단했다.

 그러나 그보다 개구쟁이 흑인 꼬마를 뻥튀기 기계에 올려놓고 튀겨놓은 것 같은 어른 개구장이의 천성이 내 눈엔 더욱 돋보이는 무기로 보였다.

 더욱이 요즘은 10년, 20년 전처럼 펠레는 영원히 브라질에, 베켄바워는 언제까지나 독일에 머무를 수 없는 세계 축구의 현실로 볼 때 이들의 낙천성이야말로 어느 곳에서든지 뿌리를 내릴 수 있는 가장 큰 비결인 듯했다.

 레버쿠젠 클럽에서 발간한 책에 실린 나에 관한 소개란에서 리벡 감독은 "그는 뛰어난 운동(육상)선수다. 그리고 그는 팀의 어느 곳에나 세울 수 있는 탁월한 재능을 가진 유일한 선수"라고 얘기했다. 이와 비슷한 얘기는 나를 가르쳤던 감독 중 특히 부흐만과 크라마가 자주 했던 것 같다. 기초가 가장 완벽하다느니 가장 뛰어난 기술을 습득한 선수라느니 하는 식으로.

 그러나 나는 분데스리가 10년 넘은 경험을 통해 볼 때 내가 서 있는 이 위치에서 마지막 단게로 올라서기엔 성격적으로 담대하지 못하다는 크나큰 약점이 있는 것을 알고 있다. 나는 내가 하는 경기에 대단한 손임이 오게 되면 마라도나처럼 즐겁고 신나는 게 아니라 부담스럽고 불편할 뿐이다. 그래서 나는 지금도 "내가 응원 많이 할 테니 잘하라"라든지 "한 골 넣어라"는 얘기는 일부러 안 들은 걸로 한다. 솔직히 말해 전혀 고맙거나 도움이 안되는 심리적인 부담만 쌓이기 때문이다.

노력으로 깰 수 없는 담, 늘 경기에 신중하게 임하는 나의 성격은 감독들 눈엔 만점일지 모르지만 사실 따지고 보면 내가 펠레나 마라도나처럼 한 단계 높은 더 뛰어난 플레이를 보여주지 못하는 걸림돌이기도 하다.

 

p106.

 고등학교 시절 허리가 아파 쩔쩔매고 있을 때 지금은 현직에서 물러나 계신 장운수 선생님은 거액의 자비를 들여 나로 하여금 한의원에서 금침을 맞게 했다.

 머리카락보다도 더 가는 금침을 척추 부위에 집어넣었는데 신기하게도 나는 그 이후 통증 없이 경기를 하게 되었다. 

 그 당시 담당 한의사의 말에 따르면 75년이 지나면 침 자체가 없어지고 효과도 사라진다는데 요즘은 이 금침이 온몸을 돌아 당시를 회상하게 만든다.

 금침은 종아리, 허벅지, 무릎, 어깨 등 이곳 저곳으로 옮겨다니는데 처음에는 무릎이나 종아리 같은 데서 전기가 오는 것처럼 당기고 아팠다. 그러나 이제는 통증이 있을 때마다 '아! 지금은 이 녀석이 이리로 왔구나!'하고 침이 있는 곳을 알게 된다.

 독일에 온 지 얼마 안돼서 허리를 다쳐 병원에 입원해 있을때 의사인 룬츠하이머가 하루는 기겁을 하고 엑스레이 사진을 들고 달려왔다.

 척추 속에 쇠가 들어 있고 신장도 '쌍둥이 신장'인 때문이었다.

동양 침술에 대해 전혀 알지 못하는 그로서는 척추에 왜 쇠가 들어가 있으며 또 어떻게 집어넣었는지 도무지 이해가 되지 않는 모양이었다.

 자기네 방식으로는 등을 째고 집어넣는 방법밖에 없을 것 같은데 내 등에는 수술한 흔적도 없으니 금침의 효과는 접어두고서라도 침을 어떻게 넣었을까 하는 점부터가 궁금했던 것이다.

 나는 신장이 양쪽에 두 개가 있다. 고무풍선에 바람을 잔뜩 집어넣으면 얇아지듯이 두 개인 경우는 그 벽이 무척 얇기 때문에 작은 충격에도 쉬 상하게 된다고 한다. 당시 나의 부상은 상당히 심해서 소변에 피가 계속 섞여 나오고 있었다.

 정상적인 신장을 가진 사람도 그 위험도가 상당히 높은데 나처럼 유난히 얇고 큰 신장을 가진 경우는 한층 더 위험하다는 의사들의 충고가 있었다.

 

p119. 배고픔.

 1985년 독일에 들른 고등학교 코치 두 분이 우리 집을 방문했다.

 모처럼 뵙는 한국 분들이라 반갑기도 했고 청소년 축구에 관심이 많았기 때문에 시간 가는 줄 모르고 서로 얘기를 하는데 갑자기 까마득하게 잊어버렸던 시골 아저씨 이름이 생각나는 것처럼 나를 깨우는 얘기가 있었다.

 고등학교 축구 선수들에게 일기를 쓰게 해서 거두어 읽어봤더니 실컷 한 번 먹어봤으면 하는 얘기가 가장 많더라는 것이다.

 '배고픔'

 지금은 나 역시도 잊고 산다.

 그렇지만 고등학교 시절 나에게 있어서도 가장 절실한 문제는 먹는 것이었다.

 언젠가 라도 한번 실컷 먹고 싶었던 라면. 운동을 마친 뒤 혜화동(참고 : 차범근이 나온 경신고등학교가 혜화동에 있음)에서 목욕하고 학교까지 올라가려면 골목골목에서 나는 찐빵, 만두 찌는 냄새, 단순한 군것질의 욕구가 아니라 성장기 청소년의 육체 바닥에서부터 나는 허기가 그것을 찾는 것이었다.

 기름기라고는 하나도 없는 반찬에 밥. 그것도 상급생이 아닌 다음에는 먹고 싶어도 숟가락을 들고 있을 수가 없었으니 나에게도 그 당시 머리에 꽉 차 있는 욕구는 "먹고싶다. 실컷 한번 먹어봤으면"하는 것이었다.

 남자의 신체는 고등학교 과정을 지나는 동안 완성된다.

 자녀를 키우는 부모님들은 성장기의 자녀들에게 옷 사대기 신발 사대기가 힘들다고 투정하시겠지만 우리의 신체가 그만한 발달을 하려면 물만 먹고는 어림도 없는 일이다.

 특별히 단백질이 가장 많이 요구되는 시기가 나는 이때라고 생각하다. 하루가 다르게 만들어지고 성장해 가는 신체의 세포들, 이 세포들의 양적 팽창과 지적(질적의 오타인듯) 향상을 도우려면 단백질, 쉽게 말해서 고기가 꼭 필요하다.

 작은 동양 사람과 큰 서양 사람, 작은 옛날 사람들과 큰 요즘 아이들만 봐도 알 수 있다.

 물론 나처럼 영양실조다 뭐다 하면서도 179cm까지 자란 사람도 있지만 어쩌면 나도 그 당시 잘만 먹었으면 김재한 형만큼이나 컸을지도 모른다.(참고: 김재한은 1947년생으로 72년부터 79년까지 국가대표로 활약했으며 키는 190cm이다)

 거짓말 같은 얘기지만 내가 26세에 독일에 왔는데 독일에서 생활하는 동안 거의 2cm가 자랐다. 이론적으로는 불가능한 일이지만 정말이다. 나는 180cm에 가깝다. 독일에 와서 처음에는 하루 저녁에 1kg의 쇠고기도 먹어치울 수 있었다. 남들은 놀랐지만 나는 먹을 수가 있어다.

 내 몸의 세포들은 피고 싶은 의지가 더 강했던지 청소년기에 다 피지 못한 것들이 늦게라도 화분에 물준 것마냥 핀 모양이다. 

 2cm. 키의 2cm는 작은 숫자가 아니다. 지금 우리의 후배들 고등학교 선수들은 잘 먹고 잘 크고 그리고 축구에 기술 향상뿐만 아니라 일반적인 두뇌 발달에 힘을 기울여야 한다고 생각한다.

 숲의 나무를 잘 기르는 것과 같은 식이다. 낙엽을 긁지 않고 놔둬서 거름이 되게 하고 적당한 비가 수분이 되었으면 한다

 대전상고 선수들은 그 학교 출신 선배들이 한 명씩 선수를 맡아서 먹이고 한 달에 한 번씩 돌아가면서 배불리 먹게 한다는 얘기를 들었는데 나는 그 얘기를 듣고 축구인의 한사람으로서 참으로 감사하다는 마음이 들었다.

 지금 이지면을 통해서도 그 도와주는 분들께 감사드린다. 그리고 이런 일이 다른 ㅎㄱ교에서도 더 많이 있었으면 하는 것이 내 개인적인 생각이다.

 도시락을 두 개씩 사와서 맛있는 반찬을 먹게 해줬던 고등학교 때의 내 짝 경일이한테도 고마운 마음을 전한다.

 

p131. 훈련량과 위장병

 한국의 9월은 더위가 한풀 꺾이기 시작하는 때다.

 7,8월 뒤통수가 띵할 정도로 더운 날 하루 세 번 훈련을 하고 나면 밥 먹기가 귀찮아 물에 말아 훌훌 마시는 것으로 한끼를 때우곤 했던 기억이 난다.

 그래서인지 우리 나라 축구 선수 중에는 위장병 환자가 유난히 많다.

 한때 독일에서 배구 선수로 활약했던 이희완 씨는 독일로 건너온 뒤 위장병이 없어지고 밥맛이 좋아졌다고 말한다. 나는 그 원인이 독일에서 훈련을 무리없이 할 수 있기 때문인 것으로 믿는다.

 사실 나는 한국의 선배들을 뵐 때마다 우리나라 축구는 훈련량이 너무 많다고 말하지만 그럴 때마다 도리어 "한국의 사정을 너무 모르는 이상론"이라는 면박과 함께 다른 데 가서는 그런 소리 하지도 말라는 충고를 듣게 된다.

 자동차의 경우 적재적량이 있어 너무 많이 실으면 고장이 나고 수명도 단축된다.

 나는 인체도 마찬가지라고 생각한다.

 단순노동도 적정 노동시간을 초과하면 능률이 줄고 사고의 위험이 높아지는데 하물며 고도의 기술과 정신집중을 요하는 운동에서 이미 지쳐 있는 몸과 마음으로 훈련을 계속할 때 부상이 속출하리라는 것은 전문가가 아니라도 쉽게 알 수 있을 것이다.

 한국의 웬만한 운동 선수치고 해마다 몇백만원씩 들여 보약을 복용하지 않는 선수가 거의 없다.

 세계적으로 가장 많은 보약 값을 들이고 또 많은 양의 훈련을 하면서도 우리나라 선수들이 국제 대회만 나가면 왜 뒤떨어지는지 한 번쯤 생각해 볼 일이다.

 우리는 곧잘 "선천적으로 타고난"이라고 말한다. 그러나 체력이야 말로 적당한 운동과 휴식, 그리고 좋은 식사로 얼마든지 향상시킬 수 있다. 이제는 옛날같지 않아서 수없이 쏟아져 나오는 연구 결과들이 우리로 하여금 효과적으로 체력을 보강하고 컨디션을 끌어올릴 수 있도록 돕고 있다.

 우리 선수들에게 도움되는 일이라면 무엇이라도 해야 할 지금 적당한 훈련량, 효과적인 훈련방법에 대해 진지하게 한번 생각해 보아야 한다고 나는 생각한다. 병난 위장에 몇백만원어치 보약을 쏟아넣는 것보다 건강한 위장에 사과 한 알이 우리 몸에는 더 유익하지 않겠는가.

 

 p153.

 내가 잘 아는 이탈리아의 한 친구는 "정신나간 듯해 보이는 포르노 배우를 국회의원으로 뽑는 너희도 참 한심한 나라다"라는 나의 공박에 천만의 말씀이라며 펄쩍 뛴다.

 이유는 '마피아가 판을 치는' 이탈리아에서 그것은 전체 정치인에 대한 일종의 침묵 시위라는 것이다. 마피아와 손잡는 정치인, 부정하고 부패한 정치인들에게 "우리는 도둑이나 강도보다는 차라리 미친 사람을 선택하겠다"는 뜻을 전하려는 의도라는 얘기다. (꿈보다 해몽이라고..)

 

p155. 독일에서 지켜본 대통령 선거.

 

 1987년 독일에서 고국의 대통령 선거를 TV로 지켜보았다.

 과정이나 결과에 무심할 수 없는 나로서는 고국에서 들려오는 소식이 무척 궁금했다. 그러나 선거가 끝나기가 무섭게 최루탄이 터지는 등의 광경을 TV로 보고 더욱 착잡해지는 심정을 떨쳐 버릴 수 없었다.

 정치에 무식하고 무관한 나 같은 사람도, 아니 어쩌면 초등학생 정도의 사고력만 가진 사람이라면 누구든 두 사람에 한 사람 꼴로만 나가 싸웠으면 멋진 승부가 되리라 생각했었다.

 그런데 "대세가 나에게로 기울어졌다"며 저마다 자기 도취에 빠진 얘기를 들은 뒤 이들이 한결같이 참패를 당하고 난 후 생각해보면 한심한 생각이 들 뿐이다. 선거를 한다는 그 자체가 자못 신기하면서도 기특하고 또 한편으로는 선거가 있기까지 최루탄 속에서 잘 참아준 시민들이나 일부 열성 학생들을 위해서라도 멋진 플레이를 발휘했어야 했다는 생각이 들었다. 물론 축구에서 해트트릭을 기록하는 것만큼이나 어려운 줄 알지만. 그래서 독일에서 1주일에 두 번씩 몰아서 오는 신문을 보기 위해서 10만 원이 넘는 돈을 지불하면서까지 구독을 했던 것이다.

 이제도 다 지나간 얘기다. '부정선거다' '관권 개입이다'하는 소리도 이제는 듣기 싫다. 솔직히 말해서 이제라도 듣고 싶고 보고 싶은 모습이 있다면 두 분이 다 많은 사람들에게 솔직하게 잘못되었던 당시의 판단을 시인하는 것이다.

 어떤 친구는 당시의 상황을 생각하면 귀신이 씌었나 보다고 한탄을 한다. 누가 돈을 먹었다는 식의 얘기보다는 훨씬 마음이 가는 한마디다. 많은 사람들의 말뜻조차도 애매하게 "그럴 줄 알았다"고 하지만 실제로 두 후보의 득표는 큰 것이었다. 

 '집안싸움'에 진력이 나서 떨어져 나간 숫자까지 합친다면 더 많을지도 모른다.

 그러나 국민들을 외면한 것은 그분들이었다.

 이제 모든 것이 일단락 된 지금 나는 두 분에게 부탁드리고 싶다. 순수하고 젊은 우리 학생들이 더 이상 데모로 희생되도록 부추기거나 방치하지 말아 달라는 것이다.

 부정선거를 따지기 전에 자신들의 판단 착오였음을 설명하고 그들이 원하는 바를 정치가답게 새로운 정부에 강력히 반영시킬 것을 약속해야 한다. 이제는 하나와 두리도 TV를 볼 때마다 자꾸 묻는다. "어떤 사람이 나쁜 사람이냐"고. 아이들이 커갈수록 대답이 자꾸 궁해지는 아빠들의 체면도 좀 생각해줬으면 한다.

 

p157. 참으성 심어주는 부모의 용기

 

 해발 3천400m에 있는 스키장까지 스위스의 전동식 톱니 기차로 올라가려면 30분은 족히 걸린다.

 그러니 플랫폼에 꽉 찬 스키꾼들 사이에서 애들이 자리라도 잡고 앉아서 가려면 여간 동작이 빨라야 되는 것이 아니다.

 그래서 미리부터 "하나야 두리야, 아빠가 너희들 스키 들고 갈테니까 너희들은 먼저 가서 앉아라"하고는 남들이 못 알아듣는 우리나라 말로 무진장 열심히 교육을 시켰다.

 그러고도 모자라 기차가 도착하자 괜히 마음이 조급해서 또 한 번 "하나야 두리번거리지 말고 앞으로 가"하고는 남들이 못알아듣는 소리지만 그래도 느낄까 봐 되도록 부드러운 멜로디로 다그쳤는데 내 뒤에 있던 꼬마 녀석도 마음이 급했던지 나를 헤집고 앞으로 갔다.

 그때 그 애의 아버지가 남부 사투리가 잔뜩 섞인 독일 말로 "천천히 타도되는데 뭘 그래"하면서 애를 끄집어 도로 내 뒤에 세우고는 "미안해요"하면서 자기 아들의 한쪽 팔을 꽉 붙드는 것이었다.

 지금까지 나는 세상 살다가 그때만큼 스스로 무안해 해본 적이 없는 것 같다.

 더구나 내 나름대로는 애들 교육을 제법 진지하게 시키고 있다고 자부하고 있었을 뿐 아니라 우리 집에서 지내던 많은 한국분들도 애들 교육이 잘돼 있다고 칭찬을 해왔던 터라 그 충격은 훨씬 더 컸던 것 같다.

 우리 나라 사람들의 가장 큰 고질병이라고 하는 조그함과 이기심을 나 자신은 얼마만큼 고쳤다고 믿어왔는데 자식에게까지 대물림을 하고 있으니 한심하기도 했다.

 언젠가 우리 두리가 학교 학예회에서 시 낭송을 하게 돼 있었는데 그만 며칠 전에 감기를 앓는 바람에 선생님이 다른 아이를 대신 시키기로 한 적이 있었다.

 며칠만에 학교에 간 아들 녀석이 너무 실망하는 것 같아서 제 엄마가 선생님께 반반 나눠서 시키자고 부탁을 했었는데 그 얘기를 들은 친한 이웃집 아줌마가 하나 엄마의 생각에 자기는 반대라고 하더라는 것이다.

 두리가 예기치 않는 사건에 부딪쳐서 참을 수 있고 받아들일 수 있는 것을 배우기에는 그보다 더 좋은 기회가 없다는 얘기였다.

 "자기애가 그랬다면 가만있겠어?"하고는 꿍얼꿍얼거리던 하나 엄마가 두 손을 들고 만 일이 나중에 또 있었다.

 그 집 애하고 두리가 같이 축구를 하러 다니는데 시합이 있다고 해서 그 집 식구가 온통 몰려갔던 모양이다.

 갔다 와서는 코치가 토마스를 경기장에 내보내지 않아서 줄곧 벤치에서 울고 있었다는 엄마의 얘기를 듣고 왜 애들 축군데 좀 얘기해서 잠깐이라도 뛰도록 해주지 그랬느냐고 했더니 물론 뛰는 것도 즐겁겠지만 참는 것도 그에 못지 않게 좋은 경험이니까 배우도록 가만 놔뒀다는 것이다.

 정말 부모로서 대단하다고 할 만한 용기다.

 예기치 않은 불이익, 손해를 비켜나가도록 도와주지 않고 받아들이도록 가르치는 교육이란 게 부모가 돼 보니 참 쉽지가 않았다.

 정작 교육을 받아야 할 사람은 바로 나인 것 같다.

 

p162

 

 "어느 한 나라의 축구가 흥하고 안하고는 골목 축구에 달려있다"는 말에 나는 전적으로 동의한다. 베켄바워가 그랬었고 마라도나, 펠레가 모두 골목 축구로 시작했다. 가난한 집에서 변변한 장난감도 없이, 또 자기가 몸담고 꿈을 키울만한 방 하나도 없이 살다보니 길거리가 곧 자기 방이 되었고 아무 것도 필요없이 맨발로도 할 수 있는 것이 축구다 보니 닥치는 대로 발로 걷어찼을 것이다.

 

p193. 골프 대중화에 입맛 씁쓸

 

 '대중화'라는 말을 좀 더 자세히 알고 싶어서 '대중'이라는 말을 사전에서 찾았더니 '수가 많은 여러 사람, 민중, 많은 사람들' 그리고는 부연해서 '특히 노동자, 농민들의 일반 근로 계급'이라고 풀이되어 있었다.

 물론 꼭 사전을 찾지 않더라도 대중이라는 말이 "대부분의 사람들을 별 무리 없이 포함시킬 수 있는 비슷한 삶의 수준을 누리는 평범한 사람들'을 뜻한다는 정도는 모두가 알고 있는 사실이다.

 그런데 요즘 신문을 통해 '골프의 대중화를 저해하는....' 이라는 기사를 대할 때면 솔직히 말해서 입 맛이 쓰다.

 엄청난게 비싼 장비에 물리는 세금과 골프장 입장료, 회원권, 캐디 팁 같은 것이 대중화를 저해 한다고 목청을 높이니까 대중화와 가장 거리가 먼 이 부분은 얘기하지 않기로 하더라도 한번 필드에 나가면 최소한으로 잡아도 18홀을 도는 데 필요한 네 시간에다 왔다갔다 하면서 소요되는 시간까지 합친다면 일반 대중에게는 월요일부터 일요일까지 어느 날을 잡아도 쉽게 낼 수 있는 시간이 아니다.

 거기다 멀찌감치 떨어져 위치한 골프장까지 한 짐이나 되는 골프채를 챙겨서 가려면 자가용이 없는 사람은 당연히 그들이 얘기하는 대중의 수준에 낄 수가 없게 된다.

 그뿐 아니라 우리 나라처럼 좁은 땅에 시립 공원 하나도 제대로 없는 판에 아무리 작은 골프장이라도 십만 평은 넘어야 하는 그 면적을 생각한다면 과연 그 넓은 그림 같은 잔디밭에서 몇 사람이나 동시에 즐길 수 있겠는가?

 염치 없는 비교가 되겠지만 가장 작은 십만 평짜리 골프장도 국제 규격의 축구장 33개에 해당되는 면적이다.

 33개의 잔디 축구장에서 700여 명이 동시에 땀을 뻘뻘 흘려가면서 뛰는 모습을 생각한다면 땅의 효용성에서도 골프는 대중화라는 말과는 거리가 멀다.

 거기다 골프를 치는 나의 입장에서 얘기해 본다면, 들이는 시간과 돈과 그 밖의 것들을 비교해 볼 때 실제적인 운동량에 있어서는 테니스나 탁구 또는 축구 같은 것들에 비해 형편 없이 못 미친다는 것이다.

 그러나 골프는 분명히 재미있는 운동이다. 넓은 필드를 가로지르는 장타가 제대로 맞았을 때에 '딱'하는 소리는 통쾌하기 그지 없다.

 그래서 나도 가끔씩 필드에 나가곤 한다. 그러나 내가 하고 싶은 얘기는 바로 이것 자체가 특권이며 고마워해야 할 일인 줄 모르고 더 많은 기득권을 얻기 위해 대중화를 앞세우는 몰염치는 삼가 주었으면 좋겠다는 생각이다.

 골프장의 사람들을 대중이라고 부르면 오늘도 점심시간에 한강 다리 및 고수 부지에서 하루종일 구부렸던 다리를 모처럼 피고 땀을 뻘뻘 흘리며 즐겁게 볼을 차는 택시 운전기사 아저씨들에게는 붙여 줄 이름이 없지 않겠는가.

 

p198. '아침의 나라'의 인정을 아시나요

 

 1988년 어느 날 독일 여성지에 실린 슈미트 전 서독 수상 부부의 사진은 무척 보기가 좋았다.

 그렇게 봐서 그런지 얼굴 색도 좋아진 것 같고 표정도 밝고 아름다웠다.

 슈미트 씨는 인터뷰를 통해 자신이 생전 처음 몇 백만 마르크를 모았노라는 자랑도 서슴지 않았다. 관직에만 있던 그로서는 돈을 벌 기회도 없었는데 이제는 책도 쓰고 강연회도 참석하면서 상당히 많은 인세와 사례비를 받는다고 했다.

 1회 강연 사례비가 2만 마르크. 한국 돈으로 8백만원이라고 하니 월급쟁이 생활에 길들여진 그분으로서는 엄청난 돈임에 틀림없다.

 그분이 수상직을 그만두고 첫 해외 여행할 때의 신문 기사를 나는 지금도 잊을 수가 없다.

 모처럼 공식 여행이 아닌 해외 나들이를 하면서 이 부부는 비행기의 서로 다른 칸에 떨어져 앉게 되었다.

 전직 수상에 대한 예우로 비행기의 1등석을 탈 수 있는 특전이 부인에게까지 허용되지 않았기 때문이었다.

 1등석은 엄청나게 비싸다. 나도 가끔 공짜로 태워 줘서 타 보면 돈 있는 사람들의 돈에 대한 존경심을 심어 주기에 충분했다.

 물론 슈미트 씨의 부인도 수상 시절에는 1등석이나 전용기를 탔을 것이다. 또 그 자신이 원하기만 했다면 아무리 월급쟁이 관료 노릇만 했다고 해도 설마 남편과 나란히 1등석에 앉을 만한 방법쯤이야 없어겠는가.

 나는 참 용기 있는 분이라고 느꼈다. 가식이나 허영보다는 정직과 진실을 더욱 자랑스럽게 여길 줄 아는 용감한 여성이었다. 

 싹둑 잘랐다고 밖에 표현할 수 없는 그분의 헤어스타일은 용기나 정직과 상당히 어울려 보였다. 결코 아름답게 치장하지도 다듬지도 않은 그분의 모습이 어느 날 유난히 눈 앞에 어른거렸다. 그것은 그 전날 뉴스에서 백담에서 은둔 중인 전두환 전 대통령 내외의 모습을 보았기 때문이다.

 한숨과 함께 눈가에 뜨뜻함을 느낀 것은 나뿐이었을까.

 5공화국이라면 눈을 길게 뜨고 째려보던 나였지만 그날 만큼은 그럴 수가 없는 것 같았다.

 개털 모자 같은 것을 쓴 전두환 전 대통령이 산사 같은 데서 누군가와 얘기하고 있는 모습을 보면서 아무리 많은 역사가들이 우리 민족이 우유부단하기만 한 바보 같은 정 때문에 역사가 걸러지는 과정을 거치지 못했다고 목소리를 높인다고 하더라도 바보 같은 정을 담은 그 우유부단한 피가 바로 내 속에서도 흐르고 있는 것을 부인할 수가 없었다.

 

p217. 나눠진 땅 갈라진 이념

 

 외국에 거주하는 한국인들의 이북 방문을 허용하는 대통령의 발표가 있었을 때, 그 발표를 듣고 전혀 생각지도 않았던 호기심이 발동했었다. (참고 : 1988년 7월7일 당시 노태우 대통령이 발표한 7.7선언을 의미한다. 이 선언의 6개항중 해외동포의 방북허용이 포함되어 있다.)

 이북에 연고가 있는 것도 아니지만 막상 법으로 이북 방문을 허용한다는 얘기를 들으니까 은근히 이북 사람들 축구하는 것도 한번 보고 싶고 절경 중에 절경이라는 금강산도 보고 싶어졌다.

 그래서 대사관, 한국 관광 공사에 전화를 걸어 물어보고 기대에 부풀기도 했었는데 불과 몇 달이 지난 후 그런 생각을 했다는 게 두려울 만큼 분위기는 완전히 바뀐 것 같았다.

 동과 서로 갈린 나라의 서쪽 한편에서 한 10년 살아본 나는 "이 사람들은 남의 탓에 갈라져 살뿐이지 자기들끼리는 통일된 것이나 다름 없다"고 나름대로 믿어왔었다.

 우선 자유롭게 서로 왕래할 수 있을 뿐만 아니라 올림픽이나 유럽의 각종 대회 때면 동독의 메달도 마치 통일된 독일의 것마냥 좋아하는 것을 볼 때 더욱 그랬다.

 얼음판의 여왕인 동독의 카타리나 비트가 두 번째 동계 올림픽 피겨 스케이팅을 제패했을 때 '우리의 카타리나'라는 표현으로 신문 1면 전체를 장식했었다.

 실제로 그녀는 서독 매스컴의 비중으로 친다면 테니스의 보리스 베커나 슈테피그라프에 못지 않았다. 그런 그녀가 1988년 겨울 뮌헨에서 시상하는 밤비상의 스포츠 부문 수상자로 결정되어 뮌헨에 도착했을 때 어떤 호텔에 묵으며 무엇을 하고 시상식에서는 어떤 옷을 입을 것인가 하는 것까지 온통 사랑 어린 관심의 대상이 되었다.

 그러나 그날 저녁 TV앞에서 수상 소감을 말하는 그녀는 '우리의 카타리나'라는 사랑이 듬뿍 담긴 얘기가 무색하도록 "당신네 나라 사람들에게 감사한다"고 말했었다.

 나는 상당히 놀랐다. 그리고 곧 "내가 이쪽에서만 보았기 때문이었지 동독은 아직도 냉랭한 모양이구나"라고 짐작했다.

 그러나 계속되는 나의 질문을 받은 꽤 많은 서독의 친구들은 자신들의 동독을 이웃나라 중 하나 이상으로 생각지 않는 것 처럼 카타리나도 그렇게 믿기 때문에 '당신네 사람'이라는 말은 당연하지 않겠느냐고 했다.

 그렇다면 나야말로 한 부분만 보고서는 내가 산 10년이란 숫자로 독일을 다 아는 것처럼 지레 믿은 셈이 되는 것이다.

 그런데 내가 이북에 가보고 싶었던 것은 무엇 때문이었을까?

 친구들이 생각하는 것처럼 단순히 한번 가보고 싶은 이웃 나라였을까 아니면 누구처럼 내가 가서 통일의 물꼬를 터야만 한다는 어마어마한 책임감 때문이었을까.

 그것도 저것도 아닌 나 같은 사람까지 뭐가 문지 모르고 구경하겠다고 날뛰니...

 

p221. 빛바랜 축구 명문 도시

 

 프랑크푸르트와 뒤셀도르프의 전력이 최근 몇 년 사이 크게 약화되면서 관중이 줄어 팀 운영에 많은 어려움을 겪고 있다고 한다. 

 프로 축구는 단순한 관람객이 아닌 고정 팬을 많이 확보해야 원만한 팀 운영을 기대할 수가 있다.

 그런데 이 두 도시는 수년 전부터 국제 도시로 탈바꿈, 깔끔하고 단정한 국제기업인들이 자리를 차지해 버리면서 축구팬을 잃게 됐다. 외국인들이 자꾸 늘어나는 현상 때문에 특유의 옷 색깔도 없어졌을 뿐 아니라 향토팬은 줄어들고 대신 뜨내기 구경꾼들이 운동장을 찾는 것이다.

 그러면서도 이 두 도시는 돈이 많아서인지 엄청난 돈을 들여 유치하는 이반 렌들이나 보리스 베커의 프로 테니스 시범 경기가 벌어질 때면 그 비싼 입장권이 몇달 전부터 매진되곤 한다.

 축구는 서민운동이다. 테니스와 달리 단순히 보는 것으로 즐기기보다는 '네편 내편'이 훨씬 중요한 비중을 차지한다.

 어쩌면 이 편가름이 프로축구의 바탕인지도 모른다. 

 향토색이 짙은 지역일수록 좋은 팬을 확보할 수 있게 되는데 바이에른 뮌헨 같은 경우가 좋은 예다. 독일의 가장 남부에 있는 이 바이에른은 스위스, 오스트리아와 인접한 알프스 지역이다.

 날씨가 좋고 지역이 방대한 데 비해 뮌헨 팀만이 이 지역을 독점하고 있어 늘 많은 팬을 확보할 수 있는데 여기에는 특유의 사투리를 쓰는 그들의 커다란 생맥주 조끼가 말해 주듯 그곳 사람들의 낙천적인 농심이 많이 작용하고 있따.

 이와 달리 중부의 루르 지방에는 반경 150km가 채 안되는 좁은 지역 안에 분데스리가 팀(18개)이 반 수 이상 속해 있다.

 물론 뮌헨과는 비교도 안될 만큼 규모가 작지만 이런 지역은 또 나름대로 팬을 모을 수 있는 요인을 갖고 있다.

 광산, 철광산업 등 늘 어두운 데서 노동하는 이 곳 주민들에게 토요일 늦게 벌어지는 축구 경기는 모처럼 소리도 지르면서 스트레스를 해소할 수 있는 좋은 기회인 것이다. 

노무자들이 대부분인 이 지역 특성대로 옆동네를, 혹은 이웃 광산을 이기고 싶은 심리가 발동, 거의 군 단위마다 팀을 만들어 놓고 있다는 것으로도 증명이 된다.

 도르트문트, 살케, 보쿰... 이런 팀들이 바로 이곳에 속해 있다. 아무튼 스포츠, 특히 축구는 양쪽 골대 뒤에서 편 갈라 싸우는 팬들이 있어야 신이 나고 구단으로서도 존재 가치가 있다.

동독에 갇혀 있는 서베를린이 수많은 세제 혜택을 주고 있음에도 불구하고 독일 인들이 그 곳에서 살기를 피하자 이제는 외국인들의 도시처럼 되어 버렸다.

 그리고 뒤따라 나타난 자연적 현상은 그 막강하던 베를린의 팀들이 모두 2부 리그, 혹은 아마추어로의 전락이었다.

 이런 것과 비교하여 우리 나라를 보면 서울은 프로 축구가 뿌리를 내리기에 가장 부적합한 곳이며 영호남 지역이야말로 팬들과 호흡하는 축구를 기대할 수 있는 곳이 아닌가 싶다.

 그런데 가장 이상적이라 할 수 있는 호남을 연고지로 하는 팀이 없어 다른 지역의 다섯 개 팀만으로 올 시즌 프로 축구 대회를 치르고 있으니 안타깝기만 하다.

 보다 근본적인 지역 연고제의 정착, 나아가 진정한 팬 확보를 위해서는 무엇보다 호남지역의 프로 팀 창잔이 선행되어져야 할 것이다.

 

p236. 한국 축구 활로 새 모델 창안뿐

 

 1990년 로마 월드컵이 끝난 후 우리나라는 물론이고 거기에 참가했던 상당히 많은 나라의 사람들이, 부러워할 것이라고는 전혀 없어 보이는데도 불구하고 '카메룬'이라는 검은 대륙의 가난한 나라를 상당히 부러워하고 있다. 나 역시도 카메론의 검은 돌풍이 지나간 후 나름대로 호기심을 가지고 이책 저책 혹은 보도 자료를 뒤적이면서 그 이유나 비결(?)이 어디에 있는 관심을 가졌었는데 솔직히 말해서 카메룬을 흉내낸다는 것은 우리의 현실로는 불가능하다는 결론에 도달했다. 그것은 그 사람들의 오늘이 엄청난 투자, 과학적인 훈련, 정부 지원, 해외 연수 같은 데 있는 게 아니었기 때문이다. 이제 우리도 돈으로 해결할 수 있는 묘책이 있다면 어느 정도는 흉내낼 수 있는 수준이 되었다고 할 수 있다. 그러나 적어도 내가 파악한 카메룬 혹은 아프리카 축구의 비결은 그들이 못살고 덜 깬 덕분에 그 곳 아이들이 널려 있는 빈터에서 짚이나 잔디를 묶어서 맨발로 공을 찰 수 있는 여유(?)에 있다고 할 수 있었다. 그것은 아르헨티나 브라질의 경우도 마찬가지였다. 로마 월드컵의 스타 한지 뮐러는 "우리는 브라질보다 훨씬 더 많은 인재들을 갖고 있다. 그 아이들은 공도 유니폼도 운동화도 없이 맨발로 공터에서 짚더미를 차고 있지만 고금만 도와준다면 우리는 세계적인 축구 강국이 될 수 있다"고 자신 있게 얘기했다. 이렇게 해서 키워진 선수들이 해외로 나가 더욱 다듬어지는 것은 그 다음 과정이다.

 나 역시도 중학교 3학년 때부터 축구를 시작했으니가 굉장히 늦게서야 제대로 된 훈련을 받아 본 셈이다. 그러나 어렸을 적에 동네 앞마당에서 애들과 어울려 고무신 신고 짚이나 돼지오줌통으로 만든 공을 공부 걱정 안하고 맘껏 차던 어린 시절이 있었고, 그때의 경험이 같은 시기에 엄격한 훈련을 받은 다름 동료들에 비해 결코 뒤지지 않는 효과를 가져다주었다고 믿고 있다.

 그러나 요즘은 아이들은 축구뿐만 아니라 어떤 것을 하더라도 뛰어 놀 만한 '시간'과 '공간'이 없으니 그 시절에 키울 수 있는 무한한 상상력과 응용력을 키워 낼 수가 없고 그저 정해 주는 생각과 방법에서 벗어나지 못하는 것이다.

 그래서 팬들은 우리 축구가 답답하다고 한다. 또 지도자들은 "독일 선수들은 위치 선정이 뛰어나다"면서 훈련 방법이나 지도비결이 있는가를 묻기도 한다.

 'ㅋ'으로 시작하는 카메룬과 콜롬비아가 1990년 월드컵 대회 첫 경기에 성공했다고 '코리아'도 벨기에를 이길 것이라는 엉뚱한 발상이 여지없이 웃음거리가 되어 버린 것처럼 세상의 모든 일을 천편일률적인 '감'이나 '방법'으로 해결할 수는 없다.

 우리에게 맞는 이상적인 제도와 훈련 방법을 연구해야 할 것이다.

 카메론의 방법은 우리에게 맞지 않는다.

 

p298. 비오는 날의 축구화

 

 비가 내리는 저녁 경기였다.

 레버쿠젠 팀에서 축구화 손질이며 유니폼 정리 같은 잡일을 하는 하랄드가 축구화의 양 사이드에 붙은 아디다스 3선에 열심히 흰색을 칠하고 있었다.

 쓸데없는 짓 같아 보여서 내 신발은 그냥 달라고 했더니 고개를 설레설레 흔드는 것이었다. 흰줄이 잘 안보이면 아디다스에서 자기에게 화를 낸다는 것이다. 한편으로는 어이가 없었지만 그들의 지독스러운 상혼에 고개가 숙여지는 면도 없잖았다.

 진땅에서 45분을 뛰고나면 흰 선은 커녕 축구화인지 발목인지조차 구분이 안되는데 TV앞에 앉아 자기네 상표가 화면에 몇 분이나 나오는지 스톱워치로 재고 있는 그들이고 보면 그냥 지나칠 일이 아닌게 분명하다.

 아디다스에서는 스타들에게 입힐 옷을 '프로모션'이라고 해서 따로 만드는데 공짜로 얻어 입는 그 옷에는 정말 염치 없으리만큼 그들의 상표를 붙일 만한 데는 다 붙인다. 심지어는 어깨 위에까지 붙어 있는데 TV카메라가 얼굴을 클로즈업 하더라도 가슴에 있는 것처럼 잘리지 않고 나올 수 있도록 한 아이디어다.

 그러나 나도 그렇지만 대부분의 선수들은 TV쇼나 가족사진을 찍을 때는 공짜로 얻은 그 옷을 잘 입지 않는다.  그래서 아디다스는 선수 개인과 계약을 해서 TV나 신문에 꼭 아디다스를 입고 출연하는 조건으로 상당한 대가를 지불한다.

 내가 독일에 처음 왔을때에도 아디다스는 이같은 계약을 제시했다.

 광고를 위한 사진 테스트도 한 적이 있는, 당시 한국에서 아디다스의 판매가 저조했기 때문에 광고가 아닌 평상시 옷을 입고 다닌다는 계약만 하자고 해서 하지 않았다. 그런데 몇 달 후 테스트용으로 찍은 사진이 내 허락 없이 한국에서 광고,판촉용 포스터로 사용되었다. 물론 아디다스 같은 대기업이 장난을 치진 않았을 것이다. 중간에 누군가의 농간이라 생각하지만 불쾌한 건 어쩔 수 없었다. 그 일이 있은 후 여지껏 아디다스에서 보내주는 애들 옷이랑 신발 등을 입히지만 탐탁치는 않다.

 얼마전 나는 눈이와서 길이 안좋은 때 400km 떨어진 뉘른베르크의 아디다스 공장을 다녀왔다. 그 동안은 클럽으로 공급되는 표준형 축구화를 문제없이 신었다. 그런데 신형 축구화가 나오고서는 내 발에 맞지 않아 불편을 겪었다. 그래서 구형을 요구하자, 어렵게 두 켤레를 갖다주었다. 하지만 구형 재고도 떨어졌는지 공장으로 와서 발 본을 떠서 전용 축구화를 공급해주겠다는 오퍼가 왔다. 내 발에 맞는 축구화를 신고 싶은 욕심에 못 이기는 체하고 멀리 떨어진 공장까지 가서 발모양을 떴다. 그런 다음 신발 속에 붙이는 보조 스펀지를 내가 원하는 대로 설명하고 요청했다. 신발 전문장인인 슈버거 씨가 "볼 잘 차는 선수들은 다 까다롭더라"면서 웃었다.

 축구화를 전용으로 만들게 되면 한 켤레에 340마르크, 한화 14만원 정도가 든다. 그러니 앞으로는 시합 전에 하랄드가 3선에 흰칠을 하고 있어도 아무말도 안해야겠다.

 현재 대한민국 축구 최고의 스타.

손흥민의 첫 에세이집. 유럽리그 진출의 10년간에 대한 그의 주요 기억들을 다루고 있다.

에피소드 자체가 잘 알려져 있어서 친숙하고 술술 읽힌다. (아마도 편집자가 잘 다듬어 준 것일 듯 하다)

축구를 어느 정도 아는 사람이면 상당히 재밋을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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p94.

 몸은 무겁고 경기도 풀리지 않는 상태로 2010-11 시즌이 막을 내렸다. 개인 기록은 시즌 15경기(선발 8회) 3골이었다. 만족할 만한 기록은 아니어도, 프로 데뷔전에서 골을 넣었고 국가대표팀에 뽑혀 아시안컵에도 다녀왔다. 타지에서 2년 넘게 버틴 고생을 생각하면 나름 의미를 부여할 수 있는 내용이라고 생각했다. 하루라도 빨리 한국으로 돌아가고 싶었다. 가족도 그리웠고 집밥도 실컷 먹고 싶었다. 아시안컵에서 친해진 형들과 만나서 놀고도 싶었다.

 

 하지만 어떻게든 아버지를 설득해야 했다. 시즌이 거의 끝나갈 즈음에 아버지가 "나는 자존심 상해서 못 돌아간다"라고 선언했기 때문이다. 아시안컵 직후 무너진 밸런스와 (SNS의 재미를 알아버린?) 나의 태도가 아버지의 분노를 샀다. 아버지가 무서워서 나는 한국에 돌아가고 싶다는 말은 꺼내지도 못하고 속으로 끙끙 앓았다.

 

 고민 끝에 아버지를 붙잡고 사정사정했다. 한국에 돌아가서 시키는 건 뭐든지 다 할테니 제발 돌아가자고, 무슨 훈련을 하라고 하든, 힘들어서 죽든 말든, 무슨 말이든 다 들을 테니까 제발 아버지... 나는 한국에 너무 돌아가고 싶었고, 무너진  내 밸런스도 되찾고 싶었다. 아버지는 기나긴 충고와 훈계를 주시면서 겨우 귀국에 동의했다. 드디어 한국으로 돌아갈 수 있게 되었다. 한국만 가면 숨을 쉴 수 있을 것 같았다.

 

 귀국하자마자 춘천으로 갔다. 대표팀에서 알게 된 선후배, 친구들에게 일단 나중에 보자고 메시지를 남겼다. 아버지의 훈련이 영원히 이어지진 않을 테니까. 독일로 돌아가기 전에 휴가를 즐길 수 있을 거라고 생각했다.

 

 엄청난 착각이었다. 다음날부터 나는 죽었다. 아침 8시에 밥을 먹고 체력 단련장에 가서 아버지와 함께 근력 운동을 했다. 그리고 뒷산의 높다란 계단을 오르락내리락했다. 웨이트가 끝나면 운동장으로 향했다. 아버지는 축구공 20개를 들고 내 앞에 나타났다. 나는 위치를 옮겨 가면서 슛을 때리기 시작했다. 매일 1천 개씩. 그렇다. 1천 개다. 같은 골문을 향해서 오른발 500번, 왼발 500번 슛을 때렸다. 내가 슛 능력을 타고났다고 말하는 사람들이 있다. 전혀 사실이 아니다. 나의 슈팅은 2011년 여름 지옥훈련이 만들어 낸 결과물이다.

 

 성미 급한 초여름 햇살이 내 정수리를 열정적으로 찔러 댔다. 죽을 것 같았다. 정말 죽을 수도 있겠다는 생각이 들었다. 슈퍼마켓에서 사온 초콜릿과 바나나를 입안에 욱여넣어 떨어진 당을 채웠다. 서 있기만 해도 다리가 후들거렸다.

 하지만 매일 아버지의 성에 찰 때까지 슛 훈련은 계속되었다. 입에서 신맛이 났다. 페널티박스 지점마다 오른발로 감아 차고 왼발로 감아 찼다. 적당히 하는 것 같다 싶으면 불호령이 떨어졌다. 아버지에게 나는 분데스리가 유망주가 아니라 그냥 철부지 축구선수일 뿐이었다. 옛날에 봤던 <공포의 외인구단>의 장면들이 떠올랐다. 척박하기 짝이 없는 독일 클럽하우스 숙소로 돌아가는 게 낫겠다는 생각까지 들었다.

 

 훈련을 끝내고 집에 돌아오면 저녁을 먹자마자 쓰러져 자기 바빴다. 스마트폰을 들어 올릴 힘조차도 남아 있지 않았다. SNS는 끊긴 지 오래였다. 대표팀 형들의 각종 경조사도 모두 스킵했다. 혹시나 사람들이 내가 건방 떤다고 생각하지 않을까 걱정도 들었다. 누워서 그런 걱정을 하다가 이내 잠에 곯아떨어졌다. 다음 날 일어나면 지옥훈련이 다시 시작되었다. 그렇게 5주를 보냈다. 하루도 쉬지 않았다.

 

 함부르크의 여름 프리시즌 훈련 일정에 맞춰 독일로 향했다. 아버지는 다른 일이 있었던 탓에 나 혼자 비행기에 올랐다. 5주 훈련은 지옥 같았지만 그 과정을 버틴 몸은 천국의 날개 달린 천사처럼 가벼웠다. 살면서 이런 컨디션은 처음이었다. 함부르크 국제공항에 내리자 익숙한 독일의 공기 내음이 몸 안으로 들어왔다. 분데스리가로 돌아왔다는 실감이 확실했다. 힘든 기억밖에 없어도 익숙한 감정은 어쩔 수 없는 것 같다.

 공항으로 티스(손흥민 에이전트)가 마중 나오기로 했다. 게이트를 빠져 나오자 티스가 보였다. 손을 들어 인사를 했는데 반응이 없었다. 시즌 막판에 몸 관리에 실패했다고(이전 내용 보충 : 귀국 전 아시안컵 국가대표로 차출되었을 때 오랜만에 접한 한식에 정신이 빼앗겨, 시합기간 동안 몸무게가 4kg 증가. 이후 복귀한 리그에서도 불어난 체중으로 컨디션이 저하되어서 활약이 저조했음) 티스도 화가 많이 나 있었는데 아직 풀리지 않았나? 다시 손짓을 했다. 티스와 눈이 마주쳤다. 그러더니 티스는 좀비라도 본 것처럼 "Oh man! 한국에서 도대체 무슨 일이 있었던 거야?"라며 넋을 일었다. 살이 빠져 얼굴이 반쪽이 된 데다 땡볕에 새카맣게 탄 바람에 티스가 나를 알아보지 못한 것이다.

(이후 내용 보충 : 복귀한 분데스리가에서 맹활약을 하게 된다.)

 

p105.

 시간이 흐른 뒤에 들은 이야기가 있다. 첫 시즌을 마치고 한국으로 돌아갈 때 구단에서는 나를 거의 포기했다고 한다. 내부적으로 '손흥민은 이제 끝났다. 저렇게 불어난 체중에 휴가까지 다녀오면 절대 원래 모습으로 돌아오지 못한다'라고 진단했다. '반짝 유망주'로 끝날 것이라는 자체 판단이었다. 에이전트인 티스는 이런 분위기에 관해서 우리 가족에게 입도 벙긋하지 않았다. 다행히 나는 완전히 달라진 모습으로 돌아왔다. 구단에서는 나의 격변이 큰 화제였다. 아버지의 지옥훈련 내용을 살짝 알려주자 다들 혀를 내둘렀다. 구단에서는 "아버지가 너를 살렸다"라고 말했다.

 

p113.

 세상 어디에나 편견이 있다. 유럽에 온 한국인 선수는 '축구 못하는 동네에서 온 녀석'이라는 편견을 극복해야 한다. 유럽 기준으로 동양 선수들은 의사 표현이 소극적인 편이이서 만만하게 보기도 한다. 인종 차별과는 약간 다르다. 유럽의 '축구 부심'이 샛길로 빠졌다고 해야 할까.

 

 나도 독일에 처음 왔을 때 그런 편견과 싸워야 했다. 팀 동료들은 내게 패스를 주지 않았다. 말도 잘 걸지 않았다. 내가 먼저 가서 볼을 빼앗아 와야 했고, 내가 먼저 다가가 독일어로 말을 걸어야 했다. 마음의 담을 무너트리려면 경기장 안에서 실력을 입증해야 하고, 밖에서는 '내가 너희 문화를 배우려고 노력 중이다'라는 모습을 보여야 한다. 

 

 가끔 세게 나가야 할 때도 있다. 예를 들어 소위 '썩은 사과'와 맞닥뜨릴 때다. 한국이든 독일이든 '썩은 사과'가 있기 마련이다. 그런 상황에서는 강하게 나가야 한다. 내가 행동하려는 의지가 있다는 사실을 상대에게 분명히 알려야 한다.

 

 2012-13 시즌 프리시즌 훈련 중 팀 동료와 한판 붙은 적이 있다. 그날따라 훈련을 시작하기 전부터 라이코비치(세르비아 선수로 2019년 현재 세리에 리그의 팔레르모에서 뛰고 있다.)가 약을 올렸다. 당연히 이유는 몰랐다. 처음에는 농담으로 받아 줬는데 훈련이 진행되면서 그 친구의 실언이 계속되었다. 안에서 서서히 열이 오르기 시작했다. 그러다가 임계점에 도달했다. 라이코비치가 먼저 내게 달려들자 나도 펑 하고 터졌다. 나는 그를 피하면서 킥(격투기로 따지면 미들킥 정도?)을 날렸다. 둘이 마구 엉키자 주위에 있던 동료들이 달라붙어 둘을 말렸다. 그 와중에 라이코비치의 주먹이 나를 말리던 동료의 이마를 스쳤다. 정신을 차리고 보니 내 단짝 톨가이 아슬란이 피를 흘리고 있었다. 눈이 뒤집혔지만 동료들에게 온몸이 포박(?)당한 탓에 분을 삼켜야 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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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현장에 있던 모든 사람이 원인 제공자가 누구인지 잘 알고 있었다. 그날 이후 라이코비치는 리저브팀으로 쫓겨났다. 나는 벌금을 내야 했다. 정당방위든 뭐든 일단 주먹다짐에 연루되었기 때문이다. 장기영 대표는 "잘했다"라고 하면서도 "그래도 두 번은 안 된다."라고 충고했다. 특히 유럽에서 미들킥은 절대 안 된다고!

 

p155.

 

 프리시즌의 마무리는 레버쿠젠의 한국 방문이었다.  LG전자가 주선해서 성사된 투어에서 우리는 FC서울과 친선경기를 갖게 되었다. 긴 인연은 아니지만 FC서울 산하 유스인 동북고가 나의 마지막 한국 축구와의 연결고리였기 때문에 내심 반가웠다. 팀 동료들에게 한국을 보여 줄 수 있어서 기분이 좋았다.

 그런데 한국 방문 직전에 아버지가 한 언론사로부터 전화를 받았다. 내 사생활을 찍은 사진의 공개 여부를 놓고 모종의 제안을 해왔다고 했다. 아버지는 "내 아들이 범죄라도 저질렀는가?"라면서 모두 거절했다. 레버쿠젠이 한국에 도착하던 날에 맞춰 파파라치 사진들이 공개되었다. 악마적 타이밍이었다. 상상할 수 없을 만큼 많은 기사가 쏟아졌다.(부연 설명 : 당시 걸그룹 멤버와 터진 열애설을 의미한다.) 멀리 한국까지 온 동료들에게 폐를 끼치는 것 같아서 레버쿠젠 투어 3박4일 내내 가시방석에서 지냈다. 동료들에게 맛있는 한국 음식을 먹여 가면서 재미있게 시간을 보내려던 계획은 산산이 조각났다. 마음 같아선 호텔 방에 콕 박혀 있고 싶었지만 한국 투어 중 잡힌 각종 행사에서 나는 항상 주인공 역할을 해야 했다. 속으로 울면서 겉으로 관객을 웃겨야 하는 코미디언이라도 된 듯한 기분이었다.

 독일로 돌아가서도 축구선수인 나는 축구와 무관한 기사들의 주인공으로 끊임없이 소환되었다. 생전 본 적도 없는 언론사들까지 인터넷에서 돌아다니는 정보를 짜맞춰서 기사를 쏟아냈다. 새 시즌 준비에 집중해도 모자랄 판에 이런 일에 신경 써야 하는 상황이 너무 화가 났다. 이 일은 우리 가족에게 언론의 어두운 면을 일깨워 주는 계기가 되었다. 공식 기자회견을 제외한 인터뷰 횟수가 급격히 줄어든 출발점이었다.

 

p209.

 지금 감사하며 즐겨야 한다. 나의 행복 철학이다. 그라운드에서 서서 축구공과 함께 있는 순간을 최대한 즐기는 것이 행복이다. 어제를 떨치지 못하거나 내일을 걱정하는 삶은 오늘의 행복을 방해한다. 영국에서 나는 '스마일 보이'라는 소리를 자주 듣는다. 동료들도 "어떻게 너는 매일 아침 웃으면서 돌아다닐 수 있는 거냐?"라면서 신기해한다. 간단하다. 웃어서 행복한 거다. 매일 아침 일어나서 '오늘 하루도 행복하게'라고 다짐한다.

 

 

 

일본의 베스트셀러 작가인 소노 아야코의 최근 수필집. 어려서부터 독실한 카톨릭 신자이며, 정치성향은 우리 입장에서 보자면 극우파에 해당한다. 1931년 생으로 젊은 시기에 일본의 패망을 맞은 노인세대라 그런 영향이 없진 않을 것이다. 

인종차별과  독재옹호, 그리고 후쿠시마 사태에 대한 꼴통발언으로 이슈가 되었으나 일본내에서의 입지는 확고한 듯 하다. 소위 일본에서 잘 나가는 극우파 작가이다. 

학력이나 쓴 글을 보면 무식해서 극우파가 된 건 아닌 듯 하고 자라난 환경 자체가 그런듯하다.

이 작가의 수필은 이것까지 포함해서 2편(누구를 위해 사랑하는가는 작가의 최고의 베스트셀러)을 봤는데 글 자체는 상당한 관록과 경지를 보여주며 그리고 엄격한 가운데 얼마간의 따뜻함도 느껴진다. 이런 글을 쓰는 사람이 사회정치적으로 상당한 꼴통 발언을 한다는 자체를 보면 인간이 얼마나 아이러니한 존재인지를 보여주는 사례라고나 할까?

현재 나이는 88세로 이번 작품은 필력이 떨어지는 가운데 요점만 짧게 1,2페이지로 정리해서 읽기는 매우 쉽다.

그러나 결국 언행의 일치와 도덕성이라는 관점에서 볼 때 글이 아무리 뻔지르해도 작가의 마음에 문제가 있다면 그 가시가 언젠가는 드러나는 법이며, 곳곳에서 그런 것이 느껴진다.

 

국내에 번역된 수필만 수 십권이 되는 관록의 여류 수필가.(이 책 보면서 첨 알았다.)

1931년 생으로 88살이다. 여전히 거의 매년 수필집 한 권씩은 내놓는 분이다.

이 수필집은 1970년 작품으로 39살에 썼다. 이제 중년을 바라보는 나이에 어느 정도 생활의 안정을 이룩한 나이에 지난 삶을 돌아보는 내용 위주로 채워져있다. 수필의 특성상 부담없이 읽을만하다.

2차 대전을 거치고, 일본의 패망 이후 젊은 시절을 보낸 세대가 느끼는 페이소스랄까? 그런것이 있다.

사실 수필은 동시대적인 느낌이랄까 그런것이 강하게 작용하는 장르라서 50년 정도가 지나면 사고가 낡은 느낌이 들기 쉽다. 이 책은 전혀 그런게 느껴지지 않는다. 상당히 리버럴하면서도 과격한 부분도 있다. 아마도 그래서 그런가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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p68.

 지금 세상에 범람하고 있는 연애가 식어서 불어터진 라면같이 된 것은 부모나 선생이나 선배나 이웃이 젊은 사람들의 연애를 지나칠 정도로 충분히 이해하고 있어서 두 사람의 사랑을 방해하지 않기 때문이다.

p86.

 인간은 누구에게나 약점이 있고, 그 약점이 없이는 자신의 존재가 성립되지 않기 때문에, 이성적인 인간이라면 자신의 존재를 인정하기 위해서라도 남을 용서하게 될 것이다.

p118.

 고통은 함께하지 않으면 남이 된다.

p154.

 하지만 자신에 대해 가장 정확한 평가를 할 수 있는 것은 사실 자기 자신뿐이다.

p156.

 인생은 괴로움을 촉각으로 삼아 다른 사람들과 관계를 맺는 것이다.

박경리 선생이 일본에 대한 소회를 강연이나 잡지 기고를 통해서 밝히신 내용을 모아놓은 에세이집.

일반적인 신변잡기라기보다는 일본 소론에 가깝다.

박경리 선생께서는 1926년 생으로 20살 청년기까지의 삶을 일본 식민지배하에서 사셨다.

그래서 일본의 역사, 문화 그리고 국가의 정체성 및 국민들의 집단심리에 이르기까지 외면과 내면적인 부분에 있어서 일본에 대한 깊은 이해와 통찰을 자연스럽게 갖게 되실 수 밖에는 없을셨을 것이고, 평생동안 선생은 한민족이 일본을 극복하는 문제에 천착해오셨던 것 같다. 

선생의 역작 토지로 식민시대를 배경으로 한민족의 애환을 담고 있다는 것은 주지의 사실이다.

이 책에도 나오듯이 박경리 선생은 식민시대를 살아온 지식인으로서 그리고 마지막 세대로서 일본에 대한 자신의 생각을 정리해서 후세에 전해야겠다는 책임과 소명을 느끼셨던 것 같다.

하지만 아쉽게도 선생은 그 꿈을 이루진 못하셨다.

이 책은 모음집이므로 편집을 그런식으로 했겠지만, 일본의 고대사에 대한 분석으로부터 일본 정신의 원형을 엿보고, 일본 제국주의 시대와 패망후의 일본의 정신사에 대한 고찰과 비판이 담겨있다.

박경리 선생이 일본에 대한 생각의 아웃라인 정도를 이 책의 내용에서 엿볼 수 있다.

아쉬우나마 이런 글이 남아있어서 다행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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p67

 

 얼마 후 잡지 <문예> 하계호가 일본에서 왔다. 그들이 말한 대로 인터뷰는 취급하지 않았고 가와무라 씨의 '반일과 향수의 틈새'라는 평론에 내 얘기가 삽입되어 있었다. 제목이 몹시 불쾌했지만 내용은 날카롭고 일단은 공정한 입장에서 성실하게 문제를 다루고 있었다.

 "한국의 반일에는 항상 역사를 동반하며 그것을 증인으로 하고 있다는 것을 우리들은 유의해 두는 것이 좋을 것이다. 왜냐하면 바로 우리들 일본인은 소위 역사적 교훈을 배우지 않는 민족이기 때문이다. 혹은 역사는 역사로서 현재와 무연한 것으로, 방편으로 씌여지는 정신적 기술이 고도로 발달되어 왔기 때문이다. 물론 이것은 만세일계를 주장해온 천황의 역사, 다시 말하자면 역사로서의 천황을 의미하고 있으며 같은 일본인의 '역사성'이야말로 근린제국(近隣諸國), 제민족(諸民族)에게는 지극히 수상쩍게 보일 것이다."

 가와무라 씨의 지적은 타당하고 평론가로서의 신뢰감을 내게 안겨주었다. 바로 그렇다 그리고 그것은 인근 민족에게만 수상쩍은 것은 아니다. 일본인 자신에게도 수상쩍은 것이다. 일본인의 역사성이 인근 민족에게 피해를 준 것처럼 일본인의 의식을 꽁꽁 동여맨 허위의 포승으로 피해자인 것은 매일반이다.

 

 "박경리 씨의 『토지』는 근원적으로 '대지(大地)'를 소유하고 사용한다는 근대적인 토지소유의 관념 그 자체에 대한 의의를 머금고 있다 할 수 있을 것이다. 그것은 물론 국유지라는 개념의 확대 부연하면 경작자로서의 조선 농민으로부터 토지를 빼앗은 일본제국주의에의 비판이기도 하지만 그 기층에 있는 것은 토지란 누구의 것이냐 하는 근대적인 경제사회 그 자체를 흔들어대는 물음인 것이다."

『토지』를 농민소설로 간주하려 드는 일부 시각에 늘 쓰거움을 삼킬 수밖에 없었고 구차스럽게 그것에 대한 설명을 하다가도 그러는 내 자신에 짜증을 내곤 했었는데 작가의 의중을 여실히 표현해준 가와무라 씨가 고마웠다. 그러나 고마움을 표시하기 위하여 그 구절을 인용한 것은 아니다. 조선 농민으로부터 토지를 빼앗은 일본제국주의에의 비판이기도 하지만 그 기층에 있는 것은 토지란 누구의 것인가 하는 근대적인 경제사회 그 자체를 흔들어대는 물음이라는 가와무라 씨의 말, 여기에는 미묘한 뉘앙스가 있지만 다른 표현으로 되풀이해 보면 민족주의 반일의 동기와 민족주의 반일의 목적, 그것에는 다 사람의 생존을 저해하는 것에 대한 저항의 필연성이 있는 것이다. 즉 삶의 터전인 땅이 토지의 소유라는 개념으로 변하면서 역사는 투쟁과 터전인 땅이 토지라는 소유의 개념으로 변하면서 역사는 투쟁과 전쟁으로 점철되어 왔고 작게는 개인에서 민족, 크게는 인류 모두가 피해자의 가해자의 위치에 있었던 것이다.

 한일합방을 전후해서 제2차 세계대전 종결까지, 제국주의 식민지시대는 가장 가혹한 땅의 유린과 생명 학살의 도가니였고 우리 민족은 살아남기 위해 민족주으의 불꽃을 간직해야만 했다. 그러면 광복 후 우리는 민족주의를 극복해야만 했는가. 그렇지가 않다.

 역사는 시작되었고 근세, 반세기 동안 약자는 삶의 터전을 잃었으며 국토가 유린당하고 민족이 살육당했던 제국주의 식민시대 죽지 않기 위해 권리를 쟁취하기 위해 우린 민족주의 반일사상의 불꽃을 간직해야만 했다. 그러나 광복 후 과연 민족주의 반일사상은 쓸모없이 되었는가? 그렇지가 않다. 세계의 현실은 여전히 약자의 호주머니를 강자가 털어내고 있으며 아흔아홉 섬의 곡식을 가진 자가 한 섬 가진 자로부터 빼앗아 백 섬을 채우려는 이것이 오늘날의 민족과 민족 간의 현실인 것이다.

 뿐인가, 영토의 침략보다 더욱 악성인 것은 땅이 죽어가고 있다는 사실이다. 그 장본인은 누구인가. 이득을 많이 챙기는 자다. 많이 벌어들이는 만큼 땅을, 지구를 파괴하고 황폐를 재촉하고 있는 것이다. 일본의 팽창주의는 과거와 다를 것이 없다. 그 해악도 다를 것이 없다. 민족주의에 대한 비판 혹은 무관심을 나타내는 일부 지식층의 이상주의 혹은 지성을 나는 지적 허영으로 본다. 토지의 일본인 오가타 지로(緒方次郎)는 코스모폴리탄이다. 그는 강자편에서, 가해자 편에서 양심을 지켜 비판하는 세계주의자다. 그러나 피해자가 불이익을 안고 과연 평등의 세계주의로 갈 수 있는 걸까? 허구요 망상이다. 한국인의 반일이 모두 그런 논리에 있는 것은 물론 아니다. 분풀이라는 본능적 감정인 것도 인정한다. 그러나 정치적 차원이지만 일본인의 의식도 간과할 수 없는 만틈 일본은 왈가왈부할 처지가 못된다. 그것은 과거의 잘못보다 오늘의 잘못이기 때문이다. 그들은 한국인의 분을 풀어주지 않았다.

 물질로 환산할 수 없는 피해였지만 그들은 거의 보상하지 않았다. 사과조차 하지 않았다. 통분이 무슨 사과인가? 그러고도 욕을 안 먹겠다는 것은 뻔뻔스런 일이다. 가와무라 씨는 한글세대는 반일이라는 대전제를 전면에 새우고 있으나 구체적 체험과 연구 관찰이라는 기회를 가지지 못하고 다만 반일이라는 민족교육으로 길러진 지식과 근본적 이미지에 의해 일본을 단죄, 규탄하는 태도를 가지기 일쑤다 했는데 동감이다. 그러나 동감의 뉘앙스는 상당히 다르다. 도식적인 교육을 떠나 생생한 역사적 사실 역사적 입김에 접할 수 있다면 한글세대는 무조건 감정적 시비를 떠나 조목조목 따지고 넘어가는 사상적 강화(强化)를 보게 될 것이다. 그리고 또 하나 일본의 전후세대도 우리 한글세대에 대한 불만을 사실에 입각하여 반박할 수 있는 역사적 사실을 관찰하고 연구해야만 한다. 대로(大路)는 결코 일방통행일 수 없기 때문이다.

 이 밖에도 가와무라 씨의 성실한 우려를 나타낸 말이 있다.

 "그것은 커다란 틀 속을 말한다면 서로 근대화를 절대로 하고 그것에서 뒤떨어지는 정도에 따라 서로가 서로를 비웃는 것 같은 구조가 극동의 아시아 속에 낭질(狼疾)과도 같이 끼워 맞춰져 있기 때문일 것이다."

 오늘 양국 간의 증오가 지극히 저질 상태인 것을 말하려고 했다기보다 그것은 엄청난 문화의 후퇴를 의미한다. 그것은 결코 민족 간의 대립을 말한 것은 아니다. 근본적으로 세계가 그릇된 방향으로 파멸의 방향으로 가고 있는 것을 물질보다 정신의 측면에서 우려로 나타난 것이라 할 수 있다. 이 말에서 나는 뜨거운 동지애를 느꼈다. 인간이 인간으로서 가장 귀한 것을 포기하고 경제적 동물로, 의식의 야만시대로 뒷걸음치고 있는 것을 말한다.

 

p75

 사실 광복을 기념하는 우리들의 국경일 8.15는 해마다 그 감격과 의의가 희석되어가는 반면, 히로시마 원폭 기념행사는 해가 거듭될수록 열기가 높아가는 것 같고 분함과 보복의 칼을 가는 듯한 분위기마저 느끼게 하는데, 그러나 그보다 좀 더 확실하게 나타나는 것이 일본의 피해의식이다. 그것은 가해자라는 또 하나의 피해의식을 상쇄하는 데는 안성맞춤의 전략적인 것이기도 해서 대충 넘어가려는 사람들을 혼란에 빠뜨리기도 한다. 왜 하필 일본에 핵폭탄이 떨어졌는가. 그 원인을 그들은 말하지 않는다. 

 

(...)

 

 다만 열심인 것은 원폭의 기념탑을 세우고 공원을 조성하고 그들 자신이 피해자임을 세계만방에 고하는 일이다.

 그러면 핵폭탄과 현재의 일본, 그 함수관계는 어떤 것일까. 전쟁 말기 청소년들을 자살 비행으로 내몰던 가미카제를 나는 기억한다. 사이판 유황도 등, 그들의 거점이 무너질 때마다 비전투원에게까지 소위 그 옥쇄라는 것을 강요했고 차마 자결하지 못하는 모친을 아들이 목졸라 죽였다는 얘기도 들은 바 있다. 그 무렵 일본은 본토 결전을 각오했으며 최후의 한 사람까지 싸워서 옥쇄한다는 것이 흔들 수 없는 명제였다. 그러나 일왕은 깊고 깊은 지하에서 무조건 항복을 녹음했으며 군인들은 궁성으로 난입하여 항복을 막으려 했다. 어쨌거나 핵폭탄의 투하는 일본인 전원 옥쇄 전에 전쟁을 끝내는 결과를 가져왔다. 원폭 세례의 원인을 만든 것은 일본이다. 원폭으로 하여 일본이 지구상에 살아남았다는 것도 신빙성이 있다는 얘기다. 끔찍스럽고도 역설적인 일이 아닐 수 없다.

 

(...)

 

 옛날 일본은 아시아에서 고도(孤島)였을 뿐만 아니라 문화에서도 고아 같은 존재였다. 기능적이며 공리적은 특성은 차라리 서쪽에 가깝다. 그리고 일본은 서쪽을 등에 업고 동쪽을 배신한 유일한 나라다.

 그러면 뭐가 다른가. 우리는 칸트, 헤겔을 위시하여 기라성 같은 철학자들이 독일인인 것을 기억한다. 베토벤, 괴테 같은 숱한 예술가의 모국이 독일인 것을 알고 있다. 그들 철학자, 예술가들은 거짓의 토양에서는 자랄 수가 없다. 진실을 추구하는 그들 후예들이 나치의 범죄를 보상하고 오욕을 씻어낸 것이다. 일본은 거짓의 두 기둥을 박아놓고 국민을 가두어왔다. 하나는 천조의 상속권 주장인 만세일계요, 다른 하나는 현신인으로 왕을 치장한 신도(神道)다. 각일각 변화하는 생명과 만상의 원리를 어기고 어찌하여 일문이 만세에 걸쳐 군림할 수 있을까. 나고 죽는 우주 질서에서 일왕도 예외가 아니거늘 어찌하여 신으로 칭하는 걸까. 거짓은 만사를 거짓으로 만든다. 그곳은 그러나 진실을 추구하는 철학과 예술, 창조를 이룩할 수 없는 허방인 것이다. 그 체제를 변호하는 한, 그 체제가 존속하는 한 일본에 지성인은 존재하기 어렵다. 지성인은 거짓말을 안 하는 사람이기 때문이다. 사상이 약하고 유리알 속의 유희 같은 탐미주의가 예술을 주도하고 있는 것도 일본이 진실을 도외시하기 때문이며, 청산하는 독일과 청산하지 않는 일본의 차이점도 바로 그곳에 있다.

 일본 전설에 우라시마라는 어부 얘기가 있다. 용궁에서 옥함 하나를 얻어 고향으로 돌아오는데 고향에는 모두 낯선 사람뿐이요, 외로워진 그는 열지 말라는 당부를 어기고 바닷가에서 옥함을 여는 순간 백발이 되었다는 내용이다. 백발은 정확한 시간의 표상이다. 그러나 일본은 옥함을 여는 것을 두려워하는데 열어야 한다. 백발이 되고 다시 태어나는 것이야말로 영원한 질서이며 진실이기 때문이다.

 

p82

 일본 문학에서 탐미주의가 정점을 이루는 것도 같은 맥락이다. 썩어가는 육체, 괴기스러움에 대한 쾌락, 그것은 일종의 도피다. 자살의 미학도 실은 일그러진 사디즘을 포장해낸 것에 불과하고 삶을 정면 돌파하려는 의지의 결여로 볼 수 있다. 산다는 것만큼 고통스러운 것은 없다. 또 아름다운 것도 없다. 진실 자체이기 때문이다. 진실의 추구야말로 문화의 시발점인 동시, 발전의 과정이기도 하다.

 

p84

 참고가 될까 싶어서 와타베(渡部良三)라는 분이 쓴 글을 발췌하여 소개할까 한다. 그는 전쟁 말기 학도병으로 전선에 나갔다가 신병 훈련용으로 살아 있는 사람을 세워놓고 십여 명의 신병이 차례차례 돌격하여 찌르는데 그러고 나면 인간은 걸레 조각같이 되고 마는 것을 목격했다. 와타베 씨는 그 훈련을 거절한 탓으로 기막힌 고초를 겪다가 패전을 맞이한 사람이다.

 

 "일본인이 피해자라는 의식을 가진다면 원폭피습보다 천황의 권력을 정점으로 하는 지배층, 특히 구(舊) 군부와 관료 중에서 사법 관료, 일본 자본주의 자본, 천황 일족에 의해 제2차 세계대전의 고통을 받게 되었다는 것을 의식해야 한다."

 "인간의 생명만큼 소중한 것은 이 지상에 없다. (중략) 사랑이 있는 군비, 자유가 있는 전쟁 같은 것은 없다."

 "천황은 신에게 기도드리며 일본과 세계의 평화를 기원하는 분입니다. 그것이 일본의 전통입니다. 이따위 말을 일류 대학 교수가 했지만 소화(昭和) 천황이 전쟁을 선포했고 무조건 항복을 받아들인 사실은 지울 수 없다."

 

p86

 그들은 조선, 맍, 타이완을 반환했다는 말 대신 잃었다는 표현을 쓰고 있다. 얼마 전 독도 망언이 있었을 때 반환이 아닌 잃었다는 그들의 발상을 생각하며 쓰게 웃은 일은 있었지만 사람의 일로써는 설명이 안 되고 오로지 만사형통인 신의 세계에서만이 있을 수 있는 일. 왜냐하면 그것에는 설명이 필요 없으니까.

 그렇다면 설명할 수 있는 지식이나 지식인이 뭣에 필요하단 말인가. 와타베 씨의 말이지만 전쟁을 성전(聖戰)이라는 세계사적 신어(新語)를 만들어서 정당화하는 것, 그것 역시 설명이 안 되는 부분에는 신을 모셔오는 것이다. 참 편리하고도 생광스런 물건이다.

 

p173

 자비(自卑)하는 것이 비천한 것과 마찬가지로 우월감의 과시도 비천한 것이며 해악적(害惡的) 요소인 것이다.

 

 

p204

 작가는 이데올로기에 대해서도 비판적이었다.

 "공산주의와 자본주의의 근간은 같습니다. 운영방법이 다를 뿐이지요. 두 가지 모두 운명은 탁습니다. 똑같이 벽에 부딪혔습니다. 지구는 공해 때문에 멸망직전입니다. 두 가지 모두 공범자예요. 이제는 궤도를 수정해야 합니다. 자본이니 공산주의니 떠드는 것은 모두 구시대적이비다. 어떻게 살아남을 것인가를 모두가 고민해야 합니다. 그렇지 않으면 탁상공론에 불과합니다."

 

 내년부터 본격적인 모습을 드러낼 지방자치에 대해서도 박씨의 논리는 분명했다.

 "단위가 적어지면 시민의식을 보다 잘 볼 수 있습니다. 지금은 각 지방이 제멋대로 놀고 있어요. 앞으로는 지방민의 감시 능력이 중요합니다. 그럴려면 의식이 높아져야겠죠. 당연히 문화가 높아져야 의식이 높아집니다. 공해를 막고 환경을 보존하기 위해서도 지방자치는 뿌리내려야 합니다. 바로 눈앞의 것을 감시할 수 있게 됩니다."

 이 책을 보게 된 계기는 얼마전 해피투게더에서 강주은 씨가 남편인 최민수랑 나온 에피소드를 재밋게 보고 흥미를 느끼게 되어서다. 

 이 책은 2017년에 출간되었다.

 책은 편집자와의 인터뷰 형식으로 되어 있으며, 강주은씨의 개인적인 삶, 남편과의 만남 이후의 결혼생활, 그리고 아이들의 육아의 이야기로 크게 3부분으로 나뉘어져 있다. 가장 많은 부분은 역시 남편 최민수씨와의 파란만장(?)한 결혼생활의 이야기들이며, 겉으로 보여졌던 것과는 완전히 다른 결의 이야기가 펼쳐진다.

 진솔한 삶의 이야기라는 것 자체로도 이 책은 읽을만하며, 진지한 삶의 철학을 가진 건강하고 슬기로운 중년여성의 지혜의 이야기로서 큰 가치가 있다.

 인생의 행복과 성공이라는 것에 쉬운 길이 없겠지만, 그녀가 겪은 길이 대중이 보던 것처럼 흐드러진 꽃길만이 아니었음을 절절히 느낄 수 있고, 배우 최민수가 대다수의 대중이 알듯이 그렇게 화려하기만 하고 철없는 사람이 아니라는 것도 알 수 있다. 

 

 이 사건이 세간의 주목을 끌던 2009년 이후로 10년 간 핵심 증인으로 12번의 증언을 했지만, 결국은 사건의 핵심 피의자들은 여전히 잘먹고 잘살고 있다.

새로운 정권에서 다시 한 번 국민청원에 의해 새로운 수사를 시작하고, 핵심증인인 윤지오씨가 실명과 얼굴을 공개하고 13번 째의 증언을 했다.

그 10년 간 윤지오씨가 개인적으로 이 사건에 얽혀서 겪었던 아픔에 대한 기록이다.

보면서 무거워지는 마음과 울분으로 책장을 넘기기가 쉽지는 않았다.

그리 긴 내용은 아닌데, 우리 시대의 가장 부끄러운 기록 중의 하나라 그런지 쉽게 읽히지는 않았다.

개인적으로 저자인 윤지오씨도 이 사건으로 너무나도 큰 고통을 감내하고 있다는 걸 재삼 알게 되었다.

장자연 사건의 진실이 밝혀지고, 윤지오씨가 조금이나마 마음의 짐을 덜었으면 한다.

 


2014년 대한항공 갑질 폭로의 서막이 되었던, 대한항공 회장 조중훈의 개망나니 장녀 조현아의 땅콩회항 사건의

최대의 피해자였던 박창진 사무장의 지난 5년간의 기록이다.


이 사태 이후로, 대한항공 일가의 상상할 수 없었던 갑질의 추악한 민낯이 드러나는 계기가 되었고, 대한항공 오너 일가 뿐 아니라

그러한 비윤리적, 비도덕적, 비상식적 갑질을 감싸왔던 내부 관리직급에 대한 각성의 촉구를 유발하는 사회적 연대의 움직임이

거세졌다.


하지만, 이 책을 보면 아직도 우리의 사법부는 대한항공의 비리에 대해 솜방망이 처벌로 일관하고 있다는 것을 알 수 있다.

이것은 재벌과 권력자들에 대해 제대로 된 법체계를 세우지 못한 임법부의 책임이자, 우리나라 사법체계의 한계때문이기도 하겠지만,

최근 양승태를 위시한 사법농단을 지켜보노라면 우리나라 사법부 또한 지금 현재 대한민국을 갑질의 천국으로 만든 한 악의 축이라는

것에도 그 원인이 있다.


한 개인으로서 감당하기 힘든 불이익과 그로 인한 피해로 육체적, 정신적으로 한계에 처해있으면서도 그가 책의 말미에 밝힌

인간으로서의 존엄(dignity)을 지키기 위해 고군분투하는 모습을 담담히 그러나 눈물겹게 그리고 있다.


현재의 사회분위기로는 박창진 씨가 대한항공 일가와 회사 내의 충성 세력과 무관심한 이들에게 승리를 거두기란 요원한 일이다.

오직 사회적인 연대를 통해 국민들이 지속적인 관심을 가지고 이 사태의 추이를 지켜보며 힘을 실어주는 것이 가장 필요한 것이

아닌가 한다.


그런 면에서 일단 이 책은 꼭 한 번 읽어봤으면 싶다.


집중하면 2시간 정도면 읽을 수 있다.


 저자는 나파 밸리 부근에서 1978년 부터 살고 있다. 와인과 관련된 일에 종사하면서 또한 그와 관련된 글도 쓰고 있다고 한다.

책의 초중반은 거진 와인과 관련된 에세이들로 재밋기도 하면서 수준 높은 글의 향기가 넘쳐난다.(1978년에 20대였다고 해도 현재 60대 정도일 것이고

필력을 보면 필자의 나이도 그 정도일 것으로 예상된다.) 


 와인 관련 지식이나 에페소드들도 와인초보자가 보면 도움이 될 내용이 많다. 와인 입문서들이 딱딱하고 잘 와닿지 않는 것에 비해 실제나 역사적

에피소드와 관련된 내용으로 와인 전문가가 옆에서 친절하게 알려주는 듯한 기분이 들고 내용 자체에 몰입이 잘 된다.


 와인 관련된 에세이와 실무지식이 혼재되어 있어서 에세이로 분류했지만, 와인 입문서로서도 손색이 없다고 생각된다.


 내 개인적으론 책 제목과 달리, 햇빛 좋은 어느 지중해 바닷가 파라솔밑에서 상큼한 상파뉴 한잔과 함께 보면 좋겠다 싶은 책이다.

대한민국은 해방 이래 단 한번도 권력형 비리에 대해 제대로 된 단죄를 한 역사가 없다.

한 개인이 권력의 정점에 선 이에 대한 비리의 실상을 이렇게 적나라하게 까발린 기록을

제공하는데도 불구하고, 대한민국의 사법이 이명박을 단죄하지 못한다면 대한민국의 경찰과 검사

그리고 판사들은 모두 국민앞에 고개를 조아리고, 집단 자결을 해야 한다고 나는 생각한다.


만일 미국에서 이런 책이 나왔다면 주진우는 벌써 퓰리처상을 받았을 것이고, 이명박은 

감방에서 죽을때까지 해를 보지 못할 것이다.


이 정도까지 한 인간의 비리를 추적해온 주진우 기자에게 고마운 마음을 전한다.



여러 분야의 사회명사들이 쓴 내 인생 후회되는 한가지라는 주제로 쓴 수필을 모은 책.


여러 분야의 인사들의 수필이라 글의 내용과 수준은 천차만별이다.


기억나는 에피소드는 박목월 시인의 장남인 박동규 작가의 어린시절의 이야기다.


어려웠던 시절, 겨울 김장을 위해 시장에서 배추를 고르기 위해 몇 일을 어머니랑 시장통을 돌아다닌 일과 배추 100포기를 사고 나서도, 어머니가 시장통이 문을 닫을때까지 기다려 배추쪼가리를 주워오던 장면, 그게 창피해서 저녁 밥상에서 그 이야기를 한 일, 그로 인해 아버지인 박목월 시인께서 언짢아 하시면서 아내에게 핀잔을 주고 그로 인해 시인의 아내이자 작가의 어머니가 늦은 밤 부엌 부뚜막에서 눈물을 훔치던 일.

마치 수 십년전의 한국의 어느 가정으로 타임머신을 타고 가서 연기 오르는 굴뚝이 달린 가정집 처마에서 어느 집안을 들여다보는 듯한 느낌이 애틋했다.

읽고 있노라면 마치 겨울날 서설에 밟히는 내 첫발자국을 보는 듯한 기분이 든다.


그저 제목에 끌려서 본 책.

자신의 전공인 건축에 대한 내용을 주로해서, 여행지에서 느꼈던 실시간의 감정들을 여백의 미와 함께

담담하게 적어나갔다.


라스베가스, 찬디가르, 생 페테르부르그, 나도 이 중에 2군데를 가봤지만 저자처럼 여유롭게 즐겨보지 못했던 듯 하다.


번잡할 때 무언가 마음을 비우고 싶을때 읽는다면 괜찮을 듯 하다.


꽤 마음에 드는 책이다.


1961년생인 저자가 퇴직후 제2의 인생을 살면서 꿈꿔오던 산티아고 순례길 31일간의 기록.

나보다 6살 위의 저자, 그리고 퇴직후 산티아고를 꿈꾼다는 점에서 웬지 동질감을 느껴 읽게 된 책.

다른 산티아고 순례기에 비해 그리 특별한 건 아니지만, 하루하루의 순례길을 걸은 평범함 기록들이

모여서 산티아고 대성당에서의 완주를 하는 과정들에서 담담한 감동이 느껴진다.


나도 언젠가 산티아고의 조개껍질이 새겨진 그 길에 서고 싶다는 생각이 들게 만든다.



1994년 출판된 이문세의 에세이.


당시 별밤지기이자 가수로서 최고의 인기를 구가하고 있던 시기에 나온 에세이집.

가벼운 에피소드 중심으로 그의 유년시절, 데뷰, 그리고 친했던 연예인들과의 소소한 이야기를 중심으로

부담없이 읽을 만한 거리이다.


나도 별밤을 듣긴 했지만, 나는 이문세보다는 한 세대 앞선 김기덕이나 이종환의 음악프로를 듣던 세대이다.

86년인가 87년인가에 나온 이문세의 4집을 계기로 그를 기억하기 때문에 디제이로서보다는 가수로서의 이문세를

더 기억하는 편이다.


요즘들어 이렇게 헌책방을 다니면서 우연히 구한 옛날 책들 읽는 재미가 쏠쏠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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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감동의 공연 , 잼 콘서트




이 책을 처음 보면서 든 느낌은, 웬 의사가 왜 이리 글을 잘 써? 였다.

저자인 폴 칼라티니는 1977년생으로(2015년 우리 나이로 39살, 만일 암에 걸리지 않았으면, 

레지던트를 마치고, 스탠포드 대학병원에서 신경외과 외래와 연구교수직을 맡았을 한 마디로 이제부터

인생의 고생이 다 끝나고 창창한 앞날이 바로 펼쳐질 그 순간에 닥친 일이다.)

책의 맨 뒤 사진과 책의 내용을 보니 인도계 미국인으로 보인다.


스탠포드에서 영문학 석사학위를 받았으며, 영문학 교수가 될 꿈도 꾸었으나 문학,철학,과학,생물학등

여러 방면에 가지고 있던 관심을 충족시킬 수 있는 의대를 택하여 의사의 길을 걸었다.


이 책은 오바마 대통령이 휴가에서 읽고 추천을 한 것으로 이슈가 되었다고 들었으나, 책을 보면 그런 추천이

없었어도 확실히 뜰 수 밖에 없는 책이라고 느껴진다.


인생의 최정점을 바로 눈 앞에 두고 자신이 가장 잘아는 암에 걸린 이후, 겪는 고뇌, 일상의 변화, 인생에대한 반추,

존재에 대한 성찰, 가족의 소중함, 새로운 생명 탄생에 대한 경이와 기쁨, 담담히 죽음을 받아들이는 모습등이

짧지도 길지도 않은 분량에 밤하늘에 뿌려진 별과 같이 반짝거리며 녹아있다.


지하철에서 이 책의 말엽을 보게 되었는데, 병세가 악화되면서 시작되는 책의 말미와, 

더 이상 그 뒤의 내용을 자신이 잇지 못할 때, 부인이자 그의 평생의 동반자였던

루시가 써내려간 에필로그는 눈시울을 붉어져, 황망히 책장을 덮고 눈을 감으며 마음을 추스릴 수 밖에 없었다.


타인의 죽음을 통해 나의 생의 소중함을 느끼는 것은 죄스럽고 미안한 마음이 들지만, 저자는 그것까지 예상하듯

독자를 따스하게 품어주는 글귀들을 이 책 곳곳에 남겨놓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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프롤로그의 서문)


죽음 속에서 삶이 무엇인지 찾으려 하는 자는

그것이 한때 숨결이었던 바람이란 걸 알게 된다.

새로운 이름은 아직 알려지지 않았고,

오래된 이름은 이미 사라졌다.

세월은 육신을 쓰러뜨리지만, 영혼은 죽지 않았다.

독자여! 생전에 서둘러

영원으로 발길을 들여놓으나.


-브루크 풀크 그레빌 남작 <카엘리카 소네트 83번>-


=> 책의 서문은 매우 중요하다. 저자는 서문을 그냥 멋으로 쓰는 것이 아니다. 서문의 짧은 몇 줄의 문장으로 이 책에서 저자가

이야기하려는 관통하는 주제가 무엇인가를 독자에게 보여주려고 한다.


이 서문은 인생의 허무함속에 영속하는 인간의 존재에 대한 통찰을 보여주고 있다.

(이 풀크 그레빌이라는 이의 시집은 국내에 번역된 것이 없다. 한 번 보고 싶은데 말이다.)


이 글을 보니 내가 좋아하는 에머슨의 다음과 같은 시의 귀절이 생각난다.


잠은 잠이 아니고, 죽음도 죽음이 아니다.

죽은 것 같은 사람도 살아 있으니, 내가 태어난 집과 소꿉친구들, 노인들, 아가씨들.

하루의 수고와 그 보상마저도, 언젠가는 사라지는 허망한 이야기일 뿐.

그 어느 것도 머물지 않으니.

-랠프 월도 에머슨-


김어준이 쓰던 표현으로 하자면, 인생 뭐 있냐? 좃도 없어. 쫄지마 씨바.. 이런 이야기다.

(좀 더 성스러운 표현으로 하자면, 천국이 가까웠으니, 회개하라!도 비슷한 뉘앙스다)



1장의 서문)


주님의 손이 나에게 내리셨다.

그분께서 주님의 영으로 나를 데리고 나가시어,

넓은 계곡 한가운데에 내려놓으셨다.

그곳은 뼈로 가득 차 있었다.

그분께서는 나를 그 뼈들 사이로 두루 돌아다니게 하셨다.

그 넓은 계곡 바닥에는 뼈가 대단히 많았는데,

그것들은 바싹 말라 있었다.

그분께서 내게 말씀하셨다.

"사람의 아들아, 이 뼈들이 살아날 수 있겠느냐?"


-에제키엘서 37장 1~3절-


=> 이 이후의 내용을 보면 이 구절이 인용하는 당시의 저자의 마음이 어느 정도 이해가 된다.


이후의 내용)

내가 "주 하느님, 당신께서 아십니다."하고 대답하자,

그분께서 또 나에게 말씀하셨다. 

"이 뼈들에게 예언하여라. 이렇게 말하여라. '너희 마른 뼈들아, 주님의 말을 들어라

주 하느님이 뼈들에게 이렇게 말한다. 나 이제 너희이게 숨을 불어넣어 너희가 살아나게 하겠다.


=> 저자는 기독교 집안에서 태어나서(인도계가 아닌가?) 어릴때부터 교회를 다녔지만 과학에 관심을 가지면서

신에 대한 회의로 종교에서 멀어지게 되었다. 하지만, 암에 걸리고 죽음을 앞두고서는 신과 종교에 대해 관점을

바꾼다.(이 부분이 약간 미묘한데, 책에 내용에 나오니 그 부분에서 다시 이야기하겠지만, 그는 신의 존재를 믿는다라는

관점보다는 인간적인 면에서 신을 믿는 것이 낫다?.. 어렵다. 다시 그 부분에서 이야기해야겠다.)


이 부분에서는 죽음을 앞둔 그가 하느님께 절실하게 무언가를 갈구하는 그런 마음이 느껴진다.


p200~


 대학 입학 이후 오랫동안 하느님과 예수에 대한 내 생각은 점잖게 말하자면 좀 심드렁했다. 철저한 무신론자였던 시절, 나는

경험적 근거가 없다는 논리로 기독교 신앙을 공격했다. 기독교의 가르침보다는 계몽된 이성이 더 논리 정연한 우주를 보여주었다.

(중략)


 비록 나는 밤마다 기도하고 성경을 읽는 독실한 기독교 집안에서 자랐지만, 과학 연구에 종사하는 사람들 대부분이 그렇듯 신이나

영혼, 긴 옷을 입고 흰 피부에 수염을 기른 남자 같은 구시대적인 개념을 배제한, 완벽한 형이상학을 완성해줄 궁극의 과학적인 세계관,

물질적인 개념의 현실이 가능하다고 믿게 되었다. 나는 이십 대의 많은 시간을 이런 생각의 틀을 짜는 데 바쳤다. 하지만 결국 문제가

분명하게 드러났다. 과학을 형이상학의 결정권자로 보면 세상에서 신뿐만 아니라 사랑, 증오,의미도 함께 사라져버리고, 이런 의미가 

모두 사라진 세상은 결코 우리가 살고 있는 이 세상이라 할 수 없다. 그렇다고 인생의 의미를 믿으면 반드시 신도 믿어야 한다는 뜻은

아니다. 하지만 과학이 신에 대해 어떤 근거도 제공할 수 없다면, 마찬가지로 인생의 의미에 대한 근거도 마련해주지 못할 것이다.

그리고 결국은 인생 자체에 아무런 의미도 없다는 결론에 다다를 것이다. 다시 말해, 실존적 주장은 아무런 무게도 지니지 못하게 되고

과학적 지식이 곧 모든 지식이 되어버리고 만다.


 하지만 역설적이게도 과학방법론은 인간이 만든 산물이기에 영원불변의 진리에 도달할 수 없다. 우리는 세상을 체계적으로 정리하고 

손쉽게 조작하기 위해, 현상을 다루기 쉬운 단위들로 축소하기 위해 과학 이론을 만든다. 과학은 재현 가능성과 인위적인 객관성에

기반을 둔다. 그래서 물질과 에너지에 대해 이런저런 주장을 내세울 때는 탁월하지만, 고유하고 주관적이며 예측할 수 없는 인생의 

실존적이고 본능적인 성질에 과학 지식을 적용하는 건 불가능하다.

 

 과학은 경험적이고 재현 가능한 정보를 체계화하는 데 가장 유용한 방식일지도 모르지만, 그러한 과학의 능력은 역설적으로 인생의

가장 중심적인 측면들(희망, 두려움, 사랑, 증오, 아름다움, 질투, 명예, 나약함, 부단한 노력, 고통, 미덕)을 포착하지 못하는 데서

비롯된다.

(중략)


 많은 무신론자들이 즐겨 인용하는, 노벨상 수상자이자 프랑스 생물학자인 자크 모노의 말은 이런 계시적인 측면과 상충된다. 

"고대의 계약은 산산조각났다. 인간은 우연히 생겨난 우주라는 냉혹한 광대무변함 속에 가지 혼자라는 사실을 마침내 알게 되었다."

(중략)


 나는 예수가 전하려던 주된 메시지는 자비가 항상 정의를 이긴다는 것이라고 믿었다.

(중략)


 또한 원죄의 기본적인 메시지는 "늘 죄책감을 느끼라"는 것이 아니다. 그보다는 이런 맥락일 것이다. "우리 모두는 선하다는 게

어떤 의미인지 알고 있지만, 항상 거기에 맞춰 살지는 못한다." 결국 이것이 신약성경의 메시지이다. 설사 당신이 구약성경의

<레위기>를 잘 안다 해도 그대로 따르며 살 수는 없다. 불가능할 뿐만 아니라 어리석은 일이다.


=> 길지 않은 분량이지만, 저자의 인생 전반에 걸쳐 믿음에 대한 가치관, 생각등의 변화에 대해 이야기하고 있고 음미할 만하다.


p204


 결국 우리 각자는 커다란 그림의 일부만 볼 수 있을 뿐이다. 의사가 한 조각, 환자가 다른 조각, 기술자가 세 번째, 경제학자가

네 번째, 진주를 캐는 잠수부가 다섯 번째, 알코올 중독자가 여섯 번째, 유선방송 기사가 일곱 번째, 목양업자가 여덟 번째, 인도의

거지가 아홉 번째, 목사가 열 번째 조각을 보는 것이다. 인류의 지식은 한 사람 안에 담을 수 없다. 그것은 우리가 서로 맺는 관계와

세상과 맺는 관계에서 생성되며, 결코 완성되지 않는다. 그리고 궁극적인 진리는 이 모든 지식 위 어딘가에 있다.


 씨 뿌리는 이가 수확하는 이와 함께 기뻐하게 되었다. 과연 "씨뿌리는 이가 다르고 수확하는 이가 다르다."는 말이 옳다. 

 나는 너희가 애쓰지 않은 것을 수확하라고 너희를 보냈다. 사실 수고는 다른 이들이 하였는데, 너희가 그 수고의 열매를 

 거두는 것이다.


=> 이 책의 내용중 가장 마음에 드는 부분 중 하나다.


p214

(아직 갓난 아기인 딸 케이디에게 보내는 폴의 마지막 인사,,,, 눈물이 앞을 가려서 몇 줄 되지 않는 문장을 읽는데 힘이 들었다.)


 네가 어떻게 살아왔는지, 무슨 일을 했는지, 세상에 어떤 의미 있는 일을 했는지 설명해야 하는 순간이 온다면, 바라건대

네가 죽어가는 아빠의 나날을 충만한 기쁨으로 채워줬음을 빼놓지 말았으면 좋겠구나. 아빠가 평생 느껴보지 못한 기쁨

이었고, 그로 인해 아빠는 이제 더 많은 것을 바라지 않고 만족하며 편히 쉴 수 있게 되었단다. 지금 이 순간, 그건 내게

정말로 엄청난 일이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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장작의 불꽃은 사그라들기 직전에 가장 밝게 타오른다고 한다. 저 밑바닥 침묵과 고요의 심연에 놓여있던 신비한 영혼의 속삭임이

이 밝음에 의해 잠시나마 드러났다가 이 세상에서 사라져갔음에 감사한다.



도올 선생께선 사실 글을 쉽게 접할 수 있게 쓰시진 않는다. 특히 용어적인 부분에서 한학자이시다보니

한자용어가 꽤 나오는 편이며 사서삼경을 배웠을리가 없는 일반인들이 대하기에는 이해가 안되는 용어도 꽤 있는

편이다. 그리고 문체는 현대적이라고 보기엔 힘들고 어느 정도는 올드하다고 봐야할 것이다.

그래도 다른 책들에 비해선 사랑하지 말자, 중국일기, 시진핑을 말한다(이건 차이나는 클라스에서 강의하신 내용을

기본으로 저술하신 책)와 같은 수필 및 역사서는 노자,맹자,논어,중용보다는 훨씬 재밋고 읽기가 쉽다.


계림수필은 자택에서 키우기 시작한 닭(봉혜)을 관찰하시면서 느끼는 일상의 감상과, 당시의 정치적 현황, 그리고

한학을 공부하시면서 떠오르는 생각들로 집필한 내용이다.


도올 선생의 일상적인 생각들을 접할 수 있는 얼마 안되는 중요한 편린이 모여있는 책이라, 선생을 좋아하는 이들에게는

추천하고 싶다. 





시인 김인육 지음.


 후레자식


고향집에서 더는 홀로 살지 못하게 된

여든 셋, 치매 앓는 노모를

집 가까운 요양원으로 보낸다


시설도 좋고, 친구들도 많고

거기가 외려 어머니 치료에도 도움이 돼요


1년도 못 가 두 손 든 아내는

빛 좋은 개살구들을 골라

여기저기 때깔 좋게 늘어놓는다, 실은

늙은이 냄새, 오줌 지린내가 역겨워서고

외며느리 병수발이 넌덜머리가 나서인데

버럭 고함을 질러보긴 하였지만, 나 역시 별수 없어

끝내 어머님 적소(適所)로 등 떠민다


애비야, 집에 가서 같이 살면 안 되나?

어머니, 이곳이 집보다 더 좋은 곳이에요

나는 껍질도 안 깐 거짓말을 어머니에게 생으로 먹이고는


언젠가 나까지 내다버릴지 모를

두려운 가족의 품속으로 허겁지겁 들어온다


고려장이 별거냐

제 자식 지척에 두고 늙고 병든 것끼리 쓸리어

못 죽고 사는 내 신세가 고려장이지


어머니의 정신 맑은 몇 가닥 말씀에, 폐부를 찔린 나는

병든 개처럼 허정거리며

21세기 막된 고려인의 집으로 돌아온다

천하에 몹쓸, 후레자식이 되어

퉤퉤, 돼먹지 못한 개살구가 되어



The Almitra spoke again and said, "And What of Marrige, master?"

And he answered saying:

You were born together, and together you shall be forevermore.

You shall be together when white wings of death scatter your days.

Aye, you shall be together even in the silent memory of God.

But let there be spaces in your togetherness.

And let the winds of the heavens dance between you.

Love one another but make not a bond of love.

Let it rather be a moving sea between the shores of your souls.

Fill each othere's cup but drink not from one cup.

Give one another of your bread but eat not from the same loaf.

Sing and dance together and be joyous, but let each one of you be alone.

Even as the strings of a lute are alone though they quiver with the same music.

Give your hearts, but not into each other's keeping.

For only the hand of Life can contain your hearts.

And stand together, yet not too near together.

For the pillars of the temple stand apart.

And the oak tree and the cypress grow not in each other's shadow.


알미트라가 다시 물었다. "그렇다면 스승님, 결혼은 무엇인가요?"

그가 대답했다.

그대들은 함께 태어났으니, 영원토록 함께일 것이다.

죽음의 흰 날개가 삶의 나날들을 흩어버릴 때도 함께일 것이다.

아, 그대들은 함께일 것이다. 신의 말없는 기억 속에서도.

허나 함께 있어도 거리를 두라.

천국의 바람이 그대들 사이에서 춤출 수 있게.

서로 사랑하되 그 사랑으로 구속하지는 말라.

사랑이 두 영혼의 육지 사이에서 출렁이는 바다가 되게 하라.

서로의 잔을 채워주되, 하나의 잔만을 비우지 말라.

서로가 빵을 나누되, 하나의 빵조각에서만 취하지 말라.

함께 노래하고 춤추고 즐기되, 각자 홀로 있게 하라.

비록 같은 음악을 울릴지라도 현악기의 줄들이 서로가 달리 있듯이.

서로의 마음을 주되, 소유하려 하지 말라.

그대들의 마음은 오직 생명의 손만이 가질 수 있는 것이니,

함께 서 있으되, 너무 가까이 하지 말라.

신전의 기둥이 서로 떨어져 있듯이,

그리고 참나무와 사이프러스 나무가 서로의 그늘에서 자랄 수 없듯이.


베스트셀러에 올라있기에 본 에세이집.

작가의 이름은 나에겐 아직 생소하다. 차분하면서도 일상의 평범한 사건과 사물들에서 자신만의 기억을 자신만의 언어로
그려냈다는 느낌이 든다. 그가 그려낸 풍경과 분위기는 질박하면서도 삶의 따스함을 느낄 수 있었다.

매 에피소도는 많아야 3페이지를 넘지 않아서 일단 내용의 양적인 면에서 매우 절제되어 있다는 느낌을 준다.

에세이의 특성상 그때 그때 떠오르는 단상들을 그 느낌이 사라지기 전에 정리한 듯한 인상도 있다.

전체적으로 무난하고, 간혹 빛이 나오려는 부분도 있으나 비범함까지는 미치지 않는것 같다.

사실 에세이에서 그런걸 바란다는 건 무리인 면도 있다.


시간과 공간 그리고 사람이 연결된 현대인들에겐 무한의 자유가 주어진 것 같지만, 도리어 어디든 갈 수 있고, 무엇이든 할 수 있는 그 자유의 과잉으로 인해 개인의 소외는 알게 모르게 깊어져간다.

이러한 역설속에서 자신의 핵심을 찾을 수 있는 방법을 제안하는 이 책의 가르침은 놀랍도록 명징하다.

몇가지의 사실적인 에피소드와 그 에피소드속에서 찾아야만 하는 핵심주제를 살짝 비틀어서 최대한 명확하게 보여주려는 저자의 글솜씨 역시 이 책의 하이라이트 중의 하나이다.

자신을 잃어가고 항상 바쁘게 무엇에 쫓겨간다고 느끼는 사람에게 잠시 쉼표를 찍을 수 있는 짧지만 지속되는 여유를 줄 수 있는 내용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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내 마음이 원하는 것을 찾아 또다시 떠나고 싶어지면 나는 다른 어디도 아닌 뒷마당을 돌아볼 거에요. 그곳에 없다면 애초에 잃어버린 적도 없을 테니까요. 

-오즈의 마법사의 도로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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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레너드 코언이 훗날 내게 힘주어 말했던 것처럼, 아무데도 가지 않는 행위는 세상에 등을 돌리고 집안에 틀어박히는 것이 아니다. 오히려, 때로는 한 걸음 물러나서 세상을 좀더 명료하게 바라보고 더 깊이 사랑하려는 행위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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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2000년도 더 전에 에픽테토스와 마르쿠스 아우렐리우스가 말했다시피, 우리는 만드는 것은 우리의 경험이 아니라 그 경험에 반응하는 태도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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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셰익스피어는「햄릿」에서 이렇게 말했다. "이 세상에 항상 좋거나 항상 나쁘기만 한 것은 없다네. 다 생각하기 나름이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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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지금 우리가 어디에 있는지 궁금하다면, 우리가 어디에 갔는지 보지 말고 세상을 보는 우리의 시각을 살펴보라. 여행을 다녀올 때마다 그 경험이 의미를 획득하고 내 자아에 깊이 뿌리를 내리는 과정은 여행을 마치고 집으로 돌아온 후에 일어난다. 집에 가만히 앉아, 내가 본 것들을 오래 지속되는 통찰력에 차곡차곡 담을 때 비로소 그 경험은 내 것이 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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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헨리 데이비드 소로는 자신으 일지에 이렇게 썼다. "당신이 어디를 여행했는지, 얼마나 멀리 여행했는지는 중요하지 않다. 사실 멀리 갈수록 대개 더 나쁘다. 그보다는 당신이 얼마나 살아 있는지가 더 중요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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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정(靜)의 틀 안에서 이루어진 동(動)이야말로 가장 풍성한 감각을 이끌어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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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그 경험은, 가본 적은 없지만 존재한다고 알고 있던 곳에서 누군가 나를 소리쳐 보르는 것과 다소 비슷했다. 아무것도 묻지 않았는데 수도사들이 불쑥 이런 말을 들려주었다. 진짜 삶의 느낌을, 다시 말해 쉽 없이 변하는 생각 뒤에서 변하지 않고 오롯이 버티는 것을 찾아내려면 발전하지 말고 기억을 더듬으라고. 정말 그랬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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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코언은 가장 솔직하게 속내를 털어놓을 때마다 이렇게 말했다. 지금까지 자신이 한 가장 위대한 여행은 내면으로 떠나는 여행이었다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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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아버지와 아들의 대화를 바탕으로 쓴 『승려와 철학자』는 프랑스에서 50만 부가량 팔렸다. 아버지로터 물려받았음이 분명한 유려한 글솜씨와 데카르트적 명료함을 살려 불교의 '정신과학'을 전달한 데 힘입은 결과였다. 가령, 이 세상에 태어나 행복을 손에 넣으리라 기대하는 것은 불구덩이에 뛰어들면서 화상을 입지 않으려는 것과 같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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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외부는 내부에서
 그 크기를 이끌어낸다
 중심의 분위기에 따라
 이것은 공작이거나 난쟁이.

 - 에밀리 디킨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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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현재 미국 기업 중 3분의 1이 '스트레스 경감 프로그램'을 시행중이다. 그런 회사는 날마다 늘어나고 있다. 직원들이 정신의 혈관이 뻥 뚫리는 느낌이 얼마나 신나고 행복한지 깨달았다는 점이 이러한 증가의 원인이다. 대형 의료 서비스 기업인 애트나에서 이 프로그램에 가입한 직원들 가운데 30퍼센트가 넘는 사람들이, 일주일에 고작 한 시간 요가를 하는 것만으로도 스트레스 수치가 3분의 1가량 떨어지는 효과를 체험했다. 컴퓨터 반도체 칩 제조사인 인텔은 '조용한 시간(Quiet Period)'이라는 프로그램을 시범적으로 시행했다. 회사는 엔지니어와 중간 관리자 300명을 대상으로, 매주 화요일마다 네 시간 동안 이메일 계정을 로그 아웃하고 휴대폰 전원을 끈 뒤, 사무실 문에 '방해하지 마시오' 팻말을 걸어두게 했다. 언플러그 상태가 되어 '생각하는 시간'을 가져보라는 취지였다. 직원들의 반응은 폭발적이었고, 이에 사측은 맑고 명료한 정신으로 사고하는 분위기를 장려하기 위해 정식으로 8주짜리 프로그램을 시작했다. 제너럴밀스에서는 이와 비슷한 7주짜리 프로그램을 수행한 후 임원의 80퍼센트가 의사결정 능력에 긍정적인 변화가 생겼다고 보고했다. 아울러 89퍼센트는 상대의 말을 더 잘 경청하게 되었다고 말했다. 이러한 변화로 미국 기업들은 연간 3000억 달러에 달하는 비용 절감 효과를 거두었다. '스트레스가 21세기의 유행병이 될 것'이라는 세계 보건기구의 발표가 널리 인용되는 세상에서, 이런 프로그램은 무엇보다 스트레스의 예방약으로 중요한 의미를 지닌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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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음악에 울림과 형태를 부여하는 요소는 다름 아닌 쉼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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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스트레스는 전염된다. 이것은 엄연한 연구 결과다. 경제적으로 쪼들리고 과중한 부담을 떠안은 엄마가 남편이나 친정어머니나 친구에게 하루에 30분이라도 아이를 맡길 수 있다면, 그녀는 분명 그 30분 후 아이들을 돌보거나 일을 할 때 더 즐겁게 힘을 낼 수 있을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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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마르크스의 말처럼 이동과 연결과 공간의 시대가 되었지만, 정작 우리의 일상은 시간에 잡아먹혀버렸다. 물론 마르크스가 이 말을 한 맥락은 지금과 전혀 달랐지만 말이다. 우리는 마음만 먹으면 언제든 어느 곳에나 연결될 수 있다고 느낀다. 하지만 지리적인 제한이 사라지자마자 시간이 점점 더 우리에게 횡포를 부리고 있다. 다른 사람들과 더 많이 어울릴수록 나 자신과 소통하는 시간은 점점 줄어드는 듯하다. 일본의 뒷골목에서 살기 위해 뉴욕을 떠날 때만 해도 나는 가진 돈은 물론 즐거움과 친목생활, 여러 가능성이 점점 줄어들 거라 각오했다. 하지만 내가 가장 소중하게 여기는 것이 더욱 풍요로워졌다. 바로 시간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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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20세기를 풍미한 위대한 유대 신학자였던 에이브러햄 죠수아 헤셸이 정의한 것처럼, 안식일은 "공간이 아닌, 시간에 세운 대성당"이다. 우리가 주중에서 비운 하루는 빛으로 가득찬 노트르담대성당의 통로처럼 아무 계획도 목적도 없이 서성거릴 수 있는 거대한 빈 공간이 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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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휴가를 보내는 시간의 양에는 관심을 기울였지만 시간의 질에는 소홀했다. 나는 비행기로 이동하는 시간을 일과 관련한 독서를 하거나, 극장에 걸려 있을 때는 그다지 끌리지 않았던 영화를 보거나, 일할 때처럼 미친듯이 나 자신을 준비하고 계획을 세울 기회로 삼았다. 리카르가 비행을 보내는 작은 안식일로 여길 수 있다고 했을 때, 나는 그런 일은 30년 동안 히말라야 산중에서 수행을 한 승려나 할 수 있지, 우리 같은 사람들에게는 해당되지 않으리라 여겼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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