현재 대한민국 축구 최고의 스타.

손흥민의 첫 에세이집. 유럽리그 진출의 10년간에 대한 그의 주요 기억들을 다루고 있다.

에피소드 자체가 잘 알려져 있어서 친숙하고 술술 읽힌다. (아마도 편집자가 잘 다듬어 준 것일 듯 하다)

축구를 어느 정도 아는 사람이면 상당히 재밋을 것이다.

----------------

p94.

 몸은 무겁고 경기도 풀리지 않는 상태로 2010-11 시즌이 막을 내렸다. 개인 기록은 시즌 15경기(선발 8회) 3골이었다. 만족할 만한 기록은 아니어도, 프로 데뷔전에서 골을 넣었고 국가대표팀에 뽑혀 아시안컵에도 다녀왔다. 타지에서 2년 넘게 버틴 고생을 생각하면 나름 의미를 부여할 수 있는 내용이라고 생각했다. 하루라도 빨리 한국으로 돌아가고 싶었다. 가족도 그리웠고 집밥도 실컷 먹고 싶었다. 아시안컵에서 친해진 형들과 만나서 놀고도 싶었다.

 

 하지만 어떻게든 아버지를 설득해야 했다. 시즌이 거의 끝나갈 즈음에 아버지가 "나는 자존심 상해서 못 돌아간다"라고 선언했기 때문이다. 아시안컵 직후 무너진 밸런스와 (SNS의 재미를 알아버린?) 나의 태도가 아버지의 분노를 샀다. 아버지가 무서워서 나는 한국에 돌아가고 싶다는 말은 꺼내지도 못하고 속으로 끙끙 앓았다.

 

 고민 끝에 아버지를 붙잡고 사정사정했다. 한국에 돌아가서 시키는 건 뭐든지 다 할테니 제발 돌아가자고, 무슨 훈련을 하라고 하든, 힘들어서 죽든 말든, 무슨 말이든 다 들을 테니까 제발 아버지... 나는 한국에 너무 돌아가고 싶었고, 무너진  내 밸런스도 되찾고 싶었다. 아버지는 기나긴 충고와 훈계를 주시면서 겨우 귀국에 동의했다. 드디어 한국으로 돌아갈 수 있게 되었다. 한국만 가면 숨을 쉴 수 있을 것 같았다.

 

 귀국하자마자 춘천으로 갔다. 대표팀에서 알게 된 선후배, 친구들에게 일단 나중에 보자고 메시지를 남겼다. 아버지의 훈련이 영원히 이어지진 않을 테니까. 독일로 돌아가기 전에 휴가를 즐길 수 있을 거라고 생각했다.

 

 엄청난 착각이었다. 다음날부터 나는 죽었다. 아침 8시에 밥을 먹고 체력 단련장에 가서 아버지와 함께 근력 운동을 했다. 그리고 뒷산의 높다란 계단을 오르락내리락했다. 웨이트가 끝나면 운동장으로 향했다. 아버지는 축구공 20개를 들고 내 앞에 나타났다. 나는 위치를 옮겨 가면서 슛을 때리기 시작했다. 매일 1천 개씩. 그렇다. 1천 개다. 같은 골문을 향해서 오른발 500번, 왼발 500번 슛을 때렸다. 내가 슛 능력을 타고났다고 말하는 사람들이 있다. 전혀 사실이 아니다. 나의 슈팅은 2011년 여름 지옥훈련이 만들어 낸 결과물이다.

 

 성미 급한 초여름 햇살이 내 정수리를 열정적으로 찔러 댔다. 죽을 것 같았다. 정말 죽을 수도 있겠다는 생각이 들었다. 슈퍼마켓에서 사온 초콜릿과 바나나를 입안에 욱여넣어 떨어진 당을 채웠다. 서 있기만 해도 다리가 후들거렸다.

 하지만 매일 아버지의 성에 찰 때까지 슛 훈련은 계속되었다. 입에서 신맛이 났다. 페널티박스 지점마다 오른발로 감아 차고 왼발로 감아 찼다. 적당히 하는 것 같다 싶으면 불호령이 떨어졌다. 아버지에게 나는 분데스리가 유망주가 아니라 그냥 철부지 축구선수일 뿐이었다. 옛날에 봤던 <공포의 외인구단>의 장면들이 떠올랐다. 척박하기 짝이 없는 독일 클럽하우스 숙소로 돌아가는 게 낫겠다는 생각까지 들었다.

 

 훈련을 끝내고 집에 돌아오면 저녁을 먹자마자 쓰러져 자기 바빴다. 스마트폰을 들어 올릴 힘조차도 남아 있지 않았다. SNS는 끊긴 지 오래였다. 대표팀 형들의 각종 경조사도 모두 스킵했다. 혹시나 사람들이 내가 건방 떤다고 생각하지 않을까 걱정도 들었다. 누워서 그런 걱정을 하다가 이내 잠에 곯아떨어졌다. 다음 날 일어나면 지옥훈련이 다시 시작되었다. 그렇게 5주를 보냈다. 하루도 쉬지 않았다.

 

 함부르크의 여름 프리시즌 훈련 일정에 맞춰 독일로 향했다. 아버지는 다른 일이 있었던 탓에 나 혼자 비행기에 올랐다. 5주 훈련은 지옥 같았지만 그 과정을 버틴 몸은 천국의 날개 달린 천사처럼 가벼웠다. 살면서 이런 컨디션은 처음이었다. 함부르크 국제공항에 내리자 익숙한 독일의 공기 내음이 몸 안으로 들어왔다. 분데스리가로 돌아왔다는 실감이 확실했다. 힘든 기억밖에 없어도 익숙한 감정은 어쩔 수 없는 것 같다.

 공항으로 티스(손흥민 에이전트)가 마중 나오기로 했다. 게이트를 빠져 나오자 티스가 보였다. 손을 들어 인사를 했는데 반응이 없었다. 시즌 막판에 몸 관리에 실패했다고(이전 내용 보충 : 귀국 전 아시안컵 국가대표로 차출되었을 때 오랜만에 접한 한식에 정신이 빼앗겨, 시합기간 동안 몸무게가 4kg 증가. 이후 복귀한 리그에서도 불어난 체중으로 컨디션이 저하되어서 활약이 저조했음) 티스도 화가 많이 나 있었는데 아직 풀리지 않았나? 다시 손짓을 했다. 티스와 눈이 마주쳤다. 그러더니 티스는 좀비라도 본 것처럼 "Oh man! 한국에서 도대체 무슨 일이 있었던 거야?"라며 넋을 일었다. 살이 빠져 얼굴이 반쪽이 된 데다 땡볕에 새카맣게 탄 바람에 티스가 나를 알아보지 못한 것이다.

(이후 내용 보충 : 복귀한 분데스리가에서 맹활약을 하게 된다.)

 

p105.

 시간이 흐른 뒤에 들은 이야기가 있다. 첫 시즌을 마치고 한국으로 돌아갈 때 구단에서는 나를 거의 포기했다고 한다. 내부적으로 '손흥민은 이제 끝났다. 저렇게 불어난 체중에 휴가까지 다녀오면 절대 원래 모습으로 돌아오지 못한다'라고 진단했다. '반짝 유망주'로 끝날 것이라는 자체 판단이었다. 에이전트인 티스는 이런 분위기에 관해서 우리 가족에게 입도 벙긋하지 않았다. 다행히 나는 완전히 달라진 모습으로 돌아왔다. 구단에서는 나의 격변이 큰 화제였다. 아버지의 지옥훈련 내용을 살짝 알려주자 다들 혀를 내둘렀다. 구단에서는 "아버지가 너를 살렸다"라고 말했다.

 

p113.

 세상 어디에나 편견이 있다. 유럽에 온 한국인 선수는 '축구 못하는 동네에서 온 녀석'이라는 편견을 극복해야 한다. 유럽 기준으로 동양 선수들은 의사 표현이 소극적인 편이이서 만만하게 보기도 한다. 인종 차별과는 약간 다르다. 유럽의 '축구 부심'이 샛길로 빠졌다고 해야 할까.

 

 나도 독일에 처음 왔을 때 그런 편견과 싸워야 했다. 팀 동료들은 내게 패스를 주지 않았다. 말도 잘 걸지 않았다. 내가 먼저 가서 볼을 빼앗아 와야 했고, 내가 먼저 다가가 독일어로 말을 걸어야 했다. 마음의 담을 무너트리려면 경기장 안에서 실력을 입증해야 하고, 밖에서는 '내가 너희 문화를 배우려고 노력 중이다'라는 모습을 보여야 한다. 

 

 가끔 세게 나가야 할 때도 있다. 예를 들어 소위 '썩은 사과'와 맞닥뜨릴 때다. 한국이든 독일이든 '썩은 사과'가 있기 마련이다. 그런 상황에서는 강하게 나가야 한다. 내가 행동하려는 의지가 있다는 사실을 상대에게 분명히 알려야 한다.

 

 2012-13 시즌 프리시즌 훈련 중 팀 동료와 한판 붙은 적이 있다. 그날따라 훈련을 시작하기 전부터 라이코비치(세르비아 선수로 2019년 현재 세리에 리그의 팔레르모에서 뛰고 있다.)가 약을 올렸다. 당연히 이유는 몰랐다. 처음에는 농담으로 받아 줬는데 훈련이 진행되면서 그 친구의 실언이 계속되었다. 안에서 서서히 열이 오르기 시작했다. 그러다가 임계점에 도달했다. 라이코비치가 먼저 내게 달려들자 나도 펑 하고 터졌다. 나는 그를 피하면서 킥(격투기로 따지면 미들킥 정도?)을 날렸다. 둘이 마구 엉키자 주위에 있던 동료들이 달라붙어 둘을 말렸다. 그 와중에 라이코비치의 주먹이 나를 말리던 동료의 이마를 스쳤다. 정신을 차리고 보니 내 단짝 톨가이 아슬란이 피를 흘리고 있었다. 눈이 뒤집혔지만 동료들에게 온몸이 포박(?)당한 탓에 분을 삼켜야 했다

.

 현장에 있던 모든 사람이 원인 제공자가 누구인지 잘 알고 있었다. 그날 이후 라이코비치는 리저브팀으로 쫓겨났다. 나는 벌금을 내야 했다. 정당방위든 뭐든 일단 주먹다짐에 연루되었기 때문이다. 장기영 대표는 "잘했다"라고 하면서도 "그래도 두 번은 안 된다."라고 충고했다. 특히 유럽에서 미들킥은 절대 안 된다고!

 

p155.

 

 프리시즌의 마무리는 레버쿠젠의 한국 방문이었다.  LG전자가 주선해서 성사된 투어에서 우리는 FC서울과 친선경기를 갖게 되었다. 긴 인연은 아니지만 FC서울 산하 유스인 동북고가 나의 마지막 한국 축구와의 연결고리였기 때문에 내심 반가웠다. 팀 동료들에게 한국을 보여 줄 수 있어서 기분이 좋았다.

 그런데 한국 방문 직전에 아버지가 한 언론사로부터 전화를 받았다. 내 사생활을 찍은 사진의 공개 여부를 놓고 모종의 제안을 해왔다고 했다. 아버지는 "내 아들이 범죄라도 저질렀는가?"라면서 모두 거절했다. 레버쿠젠이 한국에 도착하던 날에 맞춰 파파라치 사진들이 공개되었다. 악마적 타이밍이었다. 상상할 수 없을 만큼 많은 기사가 쏟아졌다.(부연 설명 : 당시 걸그룹 멤버와 터진 열애설을 의미한다.) 멀리 한국까지 온 동료들에게 폐를 끼치는 것 같아서 레버쿠젠 투어 3박4일 내내 가시방석에서 지냈다. 동료들에게 맛있는 한국 음식을 먹여 가면서 재미있게 시간을 보내려던 계획은 산산이 조각났다. 마음 같아선 호텔 방에 콕 박혀 있고 싶었지만 한국 투어 중 잡힌 각종 행사에서 나는 항상 주인공 역할을 해야 했다. 속으로 울면서 겉으로 관객을 웃겨야 하는 코미디언이라도 된 듯한 기분이었다.

 독일로 돌아가서도 축구선수인 나는 축구와 무관한 기사들의 주인공으로 끊임없이 소환되었다. 생전 본 적도 없는 언론사들까지 인터넷에서 돌아다니는 정보를 짜맞춰서 기사를 쏟아냈다. 새 시즌 준비에 집중해도 모자랄 판에 이런 일에 신경 써야 하는 상황이 너무 화가 났다. 이 일은 우리 가족에게 언론의 어두운 면을 일깨워 주는 계기가 되었다. 공식 기자회견을 제외한 인터뷰 횟수가 급격히 줄어든 출발점이었다.

 

p209.

 지금 감사하며 즐겨야 한다. 나의 행복 철학이다. 그라운드에서 서서 축구공과 함께 있는 순간을 최대한 즐기는 것이 행복이다. 어제를 떨치지 못하거나 내일을 걱정하는 삶은 오늘의 행복을 방해한다. 영국에서 나는 '스마일 보이'라는 소리를 자주 듣는다. 동료들도 "어떻게 너는 매일 아침 웃으면서 돌아다닐 수 있는 거냐?"라면서 신기해한다. 간단하다. 웃어서 행복한 거다. 매일 아침 일어나서 '오늘 하루도 행복하게'라고 다짐한다.

 

 

 

+ Recent posts