이 책을 처음 보면서 든 느낌은, 웬 의사가 왜 이리 글을 잘 써? 였다.

저자인 폴 칼라티니는 1977년생으로(2015년 우리 나이로 39살, 만일 암에 걸리지 않았으면, 

레지던트를 마치고, 스탠포드 대학병원에서 신경외과 외래와 연구교수직을 맡았을 한 마디로 이제부터

인생의 고생이 다 끝나고 창창한 앞날이 바로 펼쳐질 그 순간에 닥친 일이다.)

책의 맨 뒤 사진과 책의 내용을 보니 인도계 미국인으로 보인다.


스탠포드에서 영문학 석사학위를 받았으며, 영문학 교수가 될 꿈도 꾸었으나 문학,철학,과학,생물학등

여러 방면에 가지고 있던 관심을 충족시킬 수 있는 의대를 택하여 의사의 길을 걸었다.


이 책은 오바마 대통령이 휴가에서 읽고 추천을 한 것으로 이슈가 되었다고 들었으나, 책을 보면 그런 추천이

없었어도 확실히 뜰 수 밖에 없는 책이라고 느껴진다.


인생의 최정점을 바로 눈 앞에 두고 자신이 가장 잘아는 암에 걸린 이후, 겪는 고뇌, 일상의 변화, 인생에대한 반추,

존재에 대한 성찰, 가족의 소중함, 새로운 생명 탄생에 대한 경이와 기쁨, 담담히 죽음을 받아들이는 모습등이

짧지도 길지도 않은 분량에 밤하늘에 뿌려진 별과 같이 반짝거리며 녹아있다.


지하철에서 이 책의 말엽을 보게 되었는데, 병세가 악화되면서 시작되는 책의 말미와, 

더 이상 그 뒤의 내용을 자신이 잇지 못할 때, 부인이자 그의 평생의 동반자였던

루시가 써내려간 에필로그는 눈시울을 붉어져, 황망히 책장을 덮고 눈을 감으며 마음을 추스릴 수 밖에 없었다.


타인의 죽음을 통해 나의 생의 소중함을 느끼는 것은 죄스럽고 미안한 마음이 들지만, 저자는 그것까지 예상하듯

독자를 따스하게 품어주는 글귀들을 이 책 곳곳에 남겨놓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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프롤로그의 서문)


죽음 속에서 삶이 무엇인지 찾으려 하는 자는

그것이 한때 숨결이었던 바람이란 걸 알게 된다.

새로운 이름은 아직 알려지지 않았고,

오래된 이름은 이미 사라졌다.

세월은 육신을 쓰러뜨리지만, 영혼은 죽지 않았다.

독자여! 생전에 서둘러

영원으로 발길을 들여놓으나.


-브루크 풀크 그레빌 남작 <카엘리카 소네트 83번>-


=> 책의 서문은 매우 중요하다. 저자는 서문을 그냥 멋으로 쓰는 것이 아니다. 서문의 짧은 몇 줄의 문장으로 이 책에서 저자가

이야기하려는 관통하는 주제가 무엇인가를 독자에게 보여주려고 한다.


이 서문은 인생의 허무함속에 영속하는 인간의 존재에 대한 통찰을 보여주고 있다.

(이 풀크 그레빌이라는 이의 시집은 국내에 번역된 것이 없다. 한 번 보고 싶은데 말이다.)


이 글을 보니 내가 좋아하는 에머슨의 다음과 같은 시의 귀절이 생각난다.


잠은 잠이 아니고, 죽음도 죽음이 아니다.

죽은 것 같은 사람도 살아 있으니, 내가 태어난 집과 소꿉친구들, 노인들, 아가씨들.

하루의 수고와 그 보상마저도, 언젠가는 사라지는 허망한 이야기일 뿐.

그 어느 것도 머물지 않으니.

-랠프 월도 에머슨-


김어준이 쓰던 표현으로 하자면, 인생 뭐 있냐? 좃도 없어. 쫄지마 씨바.. 이런 이야기다.

(좀 더 성스러운 표현으로 하자면, 천국이 가까웠으니, 회개하라!도 비슷한 뉘앙스다)



1장의 서문)


주님의 손이 나에게 내리셨다.

그분께서 주님의 영으로 나를 데리고 나가시어,

넓은 계곡 한가운데에 내려놓으셨다.

그곳은 뼈로 가득 차 있었다.

그분께서는 나를 그 뼈들 사이로 두루 돌아다니게 하셨다.

그 넓은 계곡 바닥에는 뼈가 대단히 많았는데,

그것들은 바싹 말라 있었다.

그분께서 내게 말씀하셨다.

"사람의 아들아, 이 뼈들이 살아날 수 있겠느냐?"


-에제키엘서 37장 1~3절-


=> 이 이후의 내용을 보면 이 구절이 인용하는 당시의 저자의 마음이 어느 정도 이해가 된다.


이후의 내용)

내가 "주 하느님, 당신께서 아십니다."하고 대답하자,

그분께서 또 나에게 말씀하셨다. 

"이 뼈들에게 예언하여라. 이렇게 말하여라. '너희 마른 뼈들아, 주님의 말을 들어라

주 하느님이 뼈들에게 이렇게 말한다. 나 이제 너희이게 숨을 불어넣어 너희가 살아나게 하겠다.


=> 저자는 기독교 집안에서 태어나서(인도계가 아닌가?) 어릴때부터 교회를 다녔지만 과학에 관심을 가지면서

신에 대한 회의로 종교에서 멀어지게 되었다. 하지만, 암에 걸리고 죽음을 앞두고서는 신과 종교에 대해 관점을

바꾼다.(이 부분이 약간 미묘한데, 책에 내용에 나오니 그 부분에서 다시 이야기하겠지만, 그는 신의 존재를 믿는다라는

관점보다는 인간적인 면에서 신을 믿는 것이 낫다?.. 어렵다. 다시 그 부분에서 이야기해야겠다.)


이 부분에서는 죽음을 앞둔 그가 하느님께 절실하게 무언가를 갈구하는 그런 마음이 느껴진다.


p200~


 대학 입학 이후 오랫동안 하느님과 예수에 대한 내 생각은 점잖게 말하자면 좀 심드렁했다. 철저한 무신론자였던 시절, 나는

경험적 근거가 없다는 논리로 기독교 신앙을 공격했다. 기독교의 가르침보다는 계몽된 이성이 더 논리 정연한 우주를 보여주었다.

(중략)


 비록 나는 밤마다 기도하고 성경을 읽는 독실한 기독교 집안에서 자랐지만, 과학 연구에 종사하는 사람들 대부분이 그렇듯 신이나

영혼, 긴 옷을 입고 흰 피부에 수염을 기른 남자 같은 구시대적인 개념을 배제한, 완벽한 형이상학을 완성해줄 궁극의 과학적인 세계관,

물질적인 개념의 현실이 가능하다고 믿게 되었다. 나는 이십 대의 많은 시간을 이런 생각의 틀을 짜는 데 바쳤다. 하지만 결국 문제가

분명하게 드러났다. 과학을 형이상학의 결정권자로 보면 세상에서 신뿐만 아니라 사랑, 증오,의미도 함께 사라져버리고, 이런 의미가 

모두 사라진 세상은 결코 우리가 살고 있는 이 세상이라 할 수 없다. 그렇다고 인생의 의미를 믿으면 반드시 신도 믿어야 한다는 뜻은

아니다. 하지만 과학이 신에 대해 어떤 근거도 제공할 수 없다면, 마찬가지로 인생의 의미에 대한 근거도 마련해주지 못할 것이다.

그리고 결국은 인생 자체에 아무런 의미도 없다는 결론에 다다를 것이다. 다시 말해, 실존적 주장은 아무런 무게도 지니지 못하게 되고

과학적 지식이 곧 모든 지식이 되어버리고 만다.


 하지만 역설적이게도 과학방법론은 인간이 만든 산물이기에 영원불변의 진리에 도달할 수 없다. 우리는 세상을 체계적으로 정리하고 

손쉽게 조작하기 위해, 현상을 다루기 쉬운 단위들로 축소하기 위해 과학 이론을 만든다. 과학은 재현 가능성과 인위적인 객관성에

기반을 둔다. 그래서 물질과 에너지에 대해 이런저런 주장을 내세울 때는 탁월하지만, 고유하고 주관적이며 예측할 수 없는 인생의 

실존적이고 본능적인 성질에 과학 지식을 적용하는 건 불가능하다.

 

 과학은 경험적이고 재현 가능한 정보를 체계화하는 데 가장 유용한 방식일지도 모르지만, 그러한 과학의 능력은 역설적으로 인생의

가장 중심적인 측면들(희망, 두려움, 사랑, 증오, 아름다움, 질투, 명예, 나약함, 부단한 노력, 고통, 미덕)을 포착하지 못하는 데서

비롯된다.

(중략)


 많은 무신론자들이 즐겨 인용하는, 노벨상 수상자이자 프랑스 생물학자인 자크 모노의 말은 이런 계시적인 측면과 상충된다. 

"고대의 계약은 산산조각났다. 인간은 우연히 생겨난 우주라는 냉혹한 광대무변함 속에 가지 혼자라는 사실을 마침내 알게 되었다."

(중략)


 나는 예수가 전하려던 주된 메시지는 자비가 항상 정의를 이긴다는 것이라고 믿었다.

(중략)


 또한 원죄의 기본적인 메시지는 "늘 죄책감을 느끼라"는 것이 아니다. 그보다는 이런 맥락일 것이다. "우리 모두는 선하다는 게

어떤 의미인지 알고 있지만, 항상 거기에 맞춰 살지는 못한다." 결국 이것이 신약성경의 메시지이다. 설사 당신이 구약성경의

<레위기>를 잘 안다 해도 그대로 따르며 살 수는 없다. 불가능할 뿐만 아니라 어리석은 일이다.


=> 길지 않은 분량이지만, 저자의 인생 전반에 걸쳐 믿음에 대한 가치관, 생각등의 변화에 대해 이야기하고 있고 음미할 만하다.


p204


 결국 우리 각자는 커다란 그림의 일부만 볼 수 있을 뿐이다. 의사가 한 조각, 환자가 다른 조각, 기술자가 세 번째, 경제학자가

네 번째, 진주를 캐는 잠수부가 다섯 번째, 알코올 중독자가 여섯 번째, 유선방송 기사가 일곱 번째, 목양업자가 여덟 번째, 인도의

거지가 아홉 번째, 목사가 열 번째 조각을 보는 것이다. 인류의 지식은 한 사람 안에 담을 수 없다. 그것은 우리가 서로 맺는 관계와

세상과 맺는 관계에서 생성되며, 결코 완성되지 않는다. 그리고 궁극적인 진리는 이 모든 지식 위 어딘가에 있다.


 씨 뿌리는 이가 수확하는 이와 함께 기뻐하게 되었다. 과연 "씨뿌리는 이가 다르고 수확하는 이가 다르다."는 말이 옳다. 

 나는 너희가 애쓰지 않은 것을 수확하라고 너희를 보냈다. 사실 수고는 다른 이들이 하였는데, 너희가 그 수고의 열매를 

 거두는 것이다.


=> 이 책의 내용중 가장 마음에 드는 부분 중 하나다.


p214

(아직 갓난 아기인 딸 케이디에게 보내는 폴의 마지막 인사,,,, 눈물이 앞을 가려서 몇 줄 되지 않는 문장을 읽는데 힘이 들었다.)


 네가 어떻게 살아왔는지, 무슨 일을 했는지, 세상에 어떤 의미 있는 일을 했는지 설명해야 하는 순간이 온다면, 바라건대

네가 죽어가는 아빠의 나날을 충만한 기쁨으로 채워줬음을 빼놓지 말았으면 좋겠구나. 아빠가 평생 느껴보지 못한 기쁨

이었고, 그로 인해 아빠는 이제 더 많은 것을 바라지 않고 만족하며 편히 쉴 수 있게 되었단다. 지금 이 순간, 그건 내게

정말로 엄청난 일이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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장작의 불꽃은 사그라들기 직전에 가장 밝게 타오른다고 한다. 저 밑바닥 침묵과 고요의 심연에 놓여있던 신비한 영혼의 속삭임이

이 밝음에 의해 잠시나마 드러났다가 이 세상에서 사라져갔음에 감사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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