5.18의 희생자들의 피와 살, 그리고 뼈와 고통, 슬픔의 흔적들. 그 흔적들 속에 숨겨진 소리 없는 절규를 작가는 애끓는 마음을 통해 읽어내어, 그들의 절규에 피와 살을 붙여, 그들의 얼굴과 목소리를 되살려낸다. 이 소설은 광주민주화항쟁에 스러져간 우리의 평범한 이웃들에 건내는 애달픈 진혼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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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장. 어린 새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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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 과정에서 네가 이해할 수 없었던 한가지 일은, 입관을 마친 뒤 약식으로 치르는 짧은 추도식에서 유족들이 애국가를 부른다는 것이었다. 관 위에 태극기를 반듯이 펴고 친친 끈으로 묶어놓는 것도 이상했다. 군인들이 죽인 사람들에게 왜 애국가를 불러주는 걸까. 왜 태극기로 관을 감싸는 걸까. 마치 나라가 그들을 죽인게 아니라는 듯이.
조심스럽게 내가 물었을 때, 은숙 누나는 동그란 눈을 더 크게 뜨며 대답했다.
군인들이 반란을 일으킨 거잖아. 권력을 잡으려고. 너도 봤을 거 아냐. 한낮에 사람들을 때리고 찌르고, 그래도 안되니까 총을 쐈잖아. 그렇게 하라고 그들이 명령한 거야. 그 사람들을 어떻게 나라라고 부를 수 있어.
전혀 다른 질문에 대한 대답을 들은 것처럼 너는 혼란스러웠다. 그날 오후엔 유난히 신원 확인이 많이 돼, 복도 여기저기서 동시에 입관이 치러졌다. 흐느낌 사이로 돌림노래처럼 애국가가 불러지는 동안, 악절과 악절들이 부딪치며 생기는 미묘한 불협화음에 너는 숨죽여 귀를 기울였다. 그렇게 하면 나라란 게 무엇인지 이해해낼 수 있을 것처럼.
p20
저녁이면 계엄군과 대치한 외곽 지역에서 총을 맞은 사람들이 실려왔다. 군의 총격에 즉사하거나 응급실로 운반되던 중 숨이 끊어진 이들이었다. 죽은 지 얼마 되지 않은 사람들의 형상이 너무 생생해, 끝없이 쏟아져나오는 반투명한 창자들을 뱃속에 집어넣다 말고 은숙 누나는 강당 밖으로 뛰어나가 토하곤 했다.
p21
저들이 시키는 대로 무조건 무기를 돌려주고 항복할 순 없습니다. 저들이 먼저 우리 시민들의 시신을 돌려줘야 합니다. 끌고 간 시민 수백명도 풀어줘야 합니다. 무엇보다 여기서 일어난 일들의 진상을 전국에 밝혀서, 우리 명예를 회복시킨다는 약속을 받아내야 합니다. 그런 다음 총기를 반납하는 게 옳지 않겠습니까 여러분.
와아아, 외치며 박수 치는 사람들의 소리가 부쩍 작아졌다고 너는 느낀다. 군인들이 철수한 다음 날 열린 집회를 너는 기억한다. 도청 옥상과 시계탑 위까지 빽빽하게 사람들이 올라가 있었다. 차량이 다니지 않는 바둑판식 거리에, 건물 자리만 남겨놓고 수십만의 사람들이 어마어마한 물결처럼 출렁거렸다. 수십만층의 탑을 아스라하게 쌓아올리며 애국가를 불렀다. 수십만개의 폭죽을 연달아 터뜨리는 것처럼 손뼉을 쳤다. 어제 아침 진수 형이 선주 누나와 나누던 대화를 너는 들었다. 군인들이 다시 들어오면 시민들을 모두 죽일 거란 소문이 돌고 있다고, 공포 때문에 집회의 규모가 빠르게 줄고 있다고 그는 진지한 얼굴로 말했다. 그럴수록 우리들의 수가 만하야 함부로 못 들어올 텐데... 느낌이 안 좋아요. 관들은 점점 많아지는데, 사람들은 점점 집 밖으로 나오지 않아요.
너무 많은 피를 흘리지 않았습니까. 어떻게 그 피를 그냥 덮으란 말입ㄴ까. 먼저 가신 혼들이 눈을 뜨고 우릴 지켜보고 있습니다.
p24
학교 앞 서점에서 문제집을 사려고 혼자 집을 나선 지난 일요일이었다. 갑자기 거리에 들어찬 무장 군인들이 어쩐지 무서워서 너는 천변길로 내려가 걸었다. 신혼부부로 보이는, 성경과 찬송가 책을 손에 든 양복 입은 남자와 감색 원피스 차림의 여자가 맞은편에서 걸어오고 있었다. 날카로운 고함 소리가 몇차례 위쪽 도로에서 들리더니, 총을 메고 곤봉을 쥔 군인 셋이 언덕배기를 타고 내려어 그 젊은 부부를 둘러쌌다. 누군가를 뒤쫓다 잘못 내려온 것 같았다.
무슨 일입니까? 지금 저흰 교회에...
양복 입은 남자의 말이 채 끝나기 전에, 사람의 팔이 어떤 것인지 너는 보았다. 사람의 손, 사람의 허리, 사람의 다리가 어떤 일을 할 수 있는지 보았다. 살려주시오. 헐떡이며 남자가 외쳤다. 경련하던 남자의 발이 잠잠해질 때까지 그들은 멈추지 않고 곤봉을 내리쳤다. 곁에서 쉬지 않고 비명을 지르다 머리채를 잡힌 여자가 어떻게 되었는지 너는 모른다. 덜덜 턱을 떨며 천변 언덕을 기어올라 거리로, 더 낯선 광경이 펼쳐지고 있는 거리로 들어섰기 때문이다.
p31
처음 누나들을 만났을 때 네가 한 말 중 사실이 아닌 게 있었다.
역전에서 총을 맞은 두 남자의 시신이 리어카에 실려 시위대의 맨 앞에서 행진했던 날, 중절모를 쓴 노인부터 열두어살의 아이들, 색색의 양산을 쓴 여자들까지 인산인해를 이뤘던 저 광장에서, 마지막으로 정대를 본 건 동네 사람이 아니라 바로 너였다. 모습만 본 게 아니라, 옆구리에 총을 맞는 것까지 봤다. 아니, 정대와 너는 처음부터 손을 맞잡고 선두로, 선두의 열기 쪽으로 나아가고 있었다. 귀를 찢는 총소리에 모두 뒤돌아 뛰기 시작했다. 공포다! 괜찮다! 누군가 외치는 소리에 한 무리의 사람들이 앞 대열로 돌아가려는 아수라장 속에서 정대의 손을 놓쳤다. 다시 총소리가 귀를 찢었을 때, 모로 넘어진 정대를 뒤로 하고 너는 달렸다. 셔터가 내려진 전자제품점 옆 담벼락에 아저씨 셋과 함께 붙어섰다. 그들의 일행인 듯한 남자가 합류하려고 달려오다가 어깨에서 피를 뿜으며 엎어졌다.
시상에, 옥상이여.
네 옆에 서 있던, 머리가 반쯤 벗겨진 아저씨가 숨차게 중얼거렸다.
... 옥상에서 영규를 쐈어.
옆 빌딩 옥상에서 다시 총성이 울렸다. 비트적비트적 일어나려던 남자의 등이 튀어올랐다. 배에서부터 번진 피가 삽시간에 상반신을 감쌌다. 옆에 선 아저씨들의 얼굴을 너는 올려다봤다. 아무도 말하지 않았다. 머리가 벗어진 아저씨가 입을 막으며 소리 없이 떨었다.
너는 눈을 가늘게 뜨고 거리 가운데 쓰러진 수십명의 사람들을 봤다. 네가 입은 것과 똑같은 하늘색 체육복 바지가 얼핏 보인 것 같았다. 운동화가 벗겨진 맨발이 꿈틀거린 것 같았다. 네가 뛰쳐나가려는 순간, 입을 막고 떨고 있던 아저씨가 네 어깨를 붙들었다. 동시에 옆 골목에서 청년들 셋이 달려나갔다. 쓰러진 사람들의 겨드랑이에 손을 끼워 막 일으키려 했을 때, 광장 중앙과 군인들 쪽에서 연발 총성이 터졌다. 맥없이 청년들이 쓰러졌다. 너는 거리 맞은편의 넓은 골목을 건너다봤다. 삼십여명의 남자와 여자들이 양쪽 담벼락에 붙어서서 얼어붙은 듯 그 광경을 지켜보고 있었다.
총성이 멎은 뒤 삼분쯤 지나, 맞은편 골목에서 유난히 키가 작은 아저씨가 한달음에 뛰쳐나왔다. 쓰러진 사람들 가운데 한사람을 향해 온 힘을 다해 달렸다. 다시 연발 총성이 울리고 그가 쓰러지가, 여태 너를 붙들고 있던 아저씨가 두꺼운 손바닥으로 네 눈을 가리며 말했다.
지금 나가면 개죽음이여.
아저씨가 네 눈에서 손을 뗀 순간, 마치 거대한 자석에 이끌린 것처럼 맞으면 골목의 남자 둘이 쓰러진 젊은 여자를 향해 달려가 팔을잡고 일으키는 것을 너는 봤다. 이번엔 옥상에서 총성이 울렸다. 남자들이 나동그라졌다.
더이상 아무도 쓰러진 사람들을 향해 달려가지 않았다.
정적 속에 십여분의 시간이 흘렀을 때, 군인들의 대열에서 2인 1조로 이십여명이 걸어나왔다. 앞쪽의 쓰러진 사람들을 신속하게 끌고 가기 시작했다. 그때를 기다린 듯, 옆 골목과 맞은편 골목에서도 여남은명이 달려나가 뒤쪽에 쓰러진 사람들을 들쳐업었다. 이번엔 옥상에서 총을 쏘지 않았다. 하지만 너는 정대를 향해 그들처럼 달려가지 않았다. 네 곁에 있던 아저씨들은 숨이 끊어진 일행을 업고 서둘러 골목 사이로 사라졌다. 갑자기 혼자 남은 너는 겁에 질려, 저격수의 눈에 띄지 않을 곳이 어디일까만을 생각하며 벽에 바싹 몸을 붙인 채 광장을 등지고 빠르게 걸었다.
p42
동호야아, 부르는 소리에 너는 고개를 든다.
엄마가 트럭들 사이로 걸어오고 있다. 이번엔 작은형 없이 혼자다. 가게에 나갈 때 교복처럼 입는 회색 블라우스에 헐렁한 검은 바지를 입었다. 늘 단정히 빗는 커트 머리가 비에 젖어 부세부세 헝클어졌다는 것만 평소와 다르다.
너도 모르게 반갑게 일어서서 계단을 뛰어내려가다 멈춘다. 엄마가 허겁지겁 계단을 뛰어올라와 네 손을 잡는다.
집에 가자.
물에 빠진 사람처럼 무섭게 손을 끌어당기는 엄마를 떨쳐내려고 너는 손목을 뒤튼다. 남은 손으로 엄마의 손가락들을 하나씩 떼어낸다.
군대가 들어온단다. 지금 집에 가자이.
억센 엄마의 손가락을 마침내 다 떼어냈다. 너는 날쌔게 강당 안으로 도망친다. 뒤따라 들어오려는 엄마를, 집으로 관을 옮겨가려는 유족들의 행렬이 가로막는다.
여섯시에 여기 문 닫는대요. 엄마.
행렬 사이로 너와 눈을 맞추려고 엄마가 깨금발을 디딘다. 우는 아이처럼 힘껏 찡그린 그녀의 이마를 향해 너는 목소리를 높인다.
문 닫으면 나도 들어갈라고요.
엄마의 얼굴이 그제야 펴진다.
꼭 그래라이. 그녀가 말한다.
해 지기 전에 와라이. 다 같이 저녁밥 묵게.
p45
체머리 떠는 노인의 얼굴을 너는 돌아본다. 손녀따님인가요, 묻지 않고 참을성 있게 그의 말을 기다린다. 용서하지 않을거다. 이승에서 가장 끔찍한 것을 본 사람처럼 꿈쩍거리는 노인의 두 눈을 너는 마주 본다. 아무것도 용서하지 않을 거다. 나 자신까지도.
ㅇㅇㅇ
2장. 검은 숨
p46
우리들의 몸은 열십자로 겹겹이 포개져 있었어.
내 배 위에 모르는 아저씨의 몸이 구십도로 가로질러 놓였고, 아저씨의 배 위에는 모르는 형의 몸이 다시 구십도로 가로질러 놓였어. 내 얼굴에 그 형의 머리카락이 닿았어. 그 형의 오금이 내 맨발에 걸쳐졌어. 그 모든 걸 내가 볼 수 있었던 건, 내 몸 곁에 바싹 붙어 어른거리고 있었기 때문이야.
그들이 다가왔어. 얼룩덜룩한 군복에 철모를 쓰고, 팔엔 적십자 완장을 차고서 빠르게. 그들은 2인 1조로 우리들의 몸을 들어올려 군용 트럭에 던져넣기 시작했어. 곡물 자루들을 운반하는 것같이 기계적인 동작으로 난 내 몸을 놓치지 않으려고 뺨에, 목덜미에 어른어른 매달려 트럭에 올라탔어. 이상하게도 나는 혼자였어. 그러니까 혼들은 만날 수 없는 거였어. 지척에 혼들이 아무리 많아도, 우린 서로를 볼 수도 느낄 수도 없었어. 저세상에서 만나자는 말따윈 의미없는 거였어.
내 몸은 다른 몸들과 함께 묵묵히 흔들리며 트럭에 실려갔어. 피를 너무 쏟아내 심장이 멈췄고, 심장이 멈춘 뒤로 계속 피를 쏟아낸 내 얼굴은 습자지같이 얇고 투명했어. 눈을 감은 내 얼굴을 본 건 처음이라 더 낯설게 보였어.
시시각각 저녁이 오고 있었어. 시가지를 벗어난 트럭은 어둑한 벌판 가운데로 난 텅 빈 길을 달렸어. 참나무들이 우거진 낮은 언덕길을 오르자 철문이 나타났어. 트럭이 잠시 멈추자 보초병 둘이 경례를 붙였어. 보초병들이 철문을 열 때 한번, 닫을 때 다시 한번 길고 날카로운 쇳소리가 울렸어. 트럭은 거기서부터 좀더 언덕길을 올라가, 단층 콘크리트 건물과 참나무 숲 사이 공터에서 멈췄어.
그들이 운전석에서 걸어나왔어. 트럭 후미의 잠금쇠를 푼 뒤, 다시 2인 1조로 우리들의 팔다리를 잡고 나르기 시작했어. 턱으로, 뺨으로 미끄러지며 매달려 내 몸을 따라가면서 나는 불 켜진 단층 건물을 올려다봤어. 무슨 건물인지 알고 싶었어. 여기가 어디인지, 지금 내 몸이 어디로 가고 있는지.
공터 뒤의 덤불숲 사이로 그들은 들어갔어. 상관으로 보이는 사람이 지시하는 대로 다시 열십자로 차곡차곡 몸들을 쌓아올렸어. 내 몸은 아래에서 두번째에 끼여 납작하게 짓눌렸어. 그렇게 짓눌려도 더이상 흘러나올 피는 없었어. 고개가 뒤로 꺽인 채 눈을 감고 반쯤 입을 벌린 내 얼굴은 숲 그늘에 가려 더 창백해 보였어. 맴 위에 놓인 남자의 몸에다 그들이 가마니를 덮자, 이제 몸들의 탑은 수십개의 다리를 지닌 거대한 짐슴의 사체 같은 것이 되었어.
p49
너를 문득 떠올린 건 그 낯설고 생생한 밤이 끝나갈 무렵, 먹색 하늘에 마침내 파르스름한 새벽빛이 배어들기 시작하던 무렵이었어. 그렇지, 네가 나와 함께 있었는데. 차가운 몽둥이 같은 게 갑자기 내 옆구리를 내려치기 전까지. 내가 헝겊 인형처럼 고꾸라지기 전까지, 아스팔트가 산산이 부서질 것 같던 발소리를, 고막을 찢는 총소리들 속에서 내가 팔을 뻗어올릴 때까지. 옆구리에서 솟구친 피가 따뜻하게 어깨로, 목덜미로 번지는 걸 느낄 때까지. 그때까지 네가 함께 있었는데.
p50
그렇게 정오가 가까워졌을 때 불현듯 깨달았어.
이곳에 너는 없었어.
넌 여기 없을 뿐 아니라, 아직 살아 있었어. 그러니까 혼이란 건 가까이 있는 혼들이 누구인지는 알지 못하면서, 누군가가 죽었는지 죽지 않았는지만은 온 힘으로 생각하면 알 수 있는 거였어. 이 낯선 덤불숲 아래에서, 썩어가는 수많은 몸들 사이에서 아무도 아는 사람이 없다고 생각하자 나는 무서워졌어.
더 무서워진 건 다음 순간이었어.
두려움을 견디며 나는 누나를 생각했어. 이글거리는 태양이 남쪽으로, 더 남쪽으로 팽팽히 기우는 걸 보면서, 뚫어지게 내 얼굴을, 감긴 눈꺼풀들을 들여다보면서 누나를, 누나만을 생각했어. 견디기 어려운 고통이 느껴졌어. 누나는 죽었어. 나보다 먼저 죽었어. 혀도 목소리도 없이 신음하려고 하자, 눈물 대신 피와 진물이 새어나오는 통증이 느껴졌어. 눈이 없는데 어디서 피가 흐르는 걸까, 어디서 통증이 느껴지는 걸까. 아무것도 흐르지 않는 내 창백한 얼굴을 나는 들여다봤어. 더러운 내 손들은 움직이지 않았어. 핏물이 산화돼 진한 벽돌색이 된 손톱들 위로 소리 없이 불개미들이 기어나디고 있었어.
p57
썩어가는 옆구리를 생각해.
거길 관통한 총알을 생각해.
처음엔 차디찬 몽둥이 같았던 그것.
순식간에 뱃속을 휘젓는 불덩어리가 된 그것.
그게 반대편 옆구리에 만들어놓은, 내 모든 따뜻한 피를 흘러나가게 한 구멍을 생각해.
그걸 쏘아보낸 총구를 생각해.
차디찬 방아쇠를 생각해.
그걸 당긴 따뜻한 손가락을 생각해.
나를 조준한 눈을 생각해.
쏘라고 명령한 사람의 눈을 생각해.
그들의 얼굴을 보고 싶다. 잠든 그들의 눈꺼풀 위로 어른거리고 싶다. 꿈속으로 불쑥 들어가고 싶다. 그 이마, 그 눈꺼풀들을 밤새 건너다니며 어른거리고 싶다. 그들이 악몽 속에서 피 흐르는 내 눈을 볼 때까지, 내 목소리를 들을 때까지. 왜 나를 쐈지, 왜 나를 죽였지.
p59
가장 먼저 탑을 이뤘던 몸들이 가장 먼저 썩어, 빈 데 없이 흰 구더기가 들끓었어. 내 얼굴이 거뭇거뭇 썩어가 이목구비가 문드러지는 걸, 윤곽선이 무너져 누구도 더이상 알아볼 수 없게 되어가는 걸 나는 묵묵히 지켜봤어.
p61
그들 중 하나가 트럭으로 돌아가, 두 손에 커다란 석유통을 들고 천천히 걸어왔어. 허리와 어깨와 팔로 플라스틱 통들의 무게를 버티며, 비틀거리며 우리들의 몸을 향해 다가왔어.
이제 끝이구나, 나는 생각했어. 수많은 그림자들이 갸날프고 부드러운 움직임으로 파닥이며 내 그림자에, 서로의 그림자들에 스며들었어. 떨며 허공에서 만났다가 이내 흩어지고, 다시 언저리로 겹쳐지며 소리 없이 파닥였어.
기다리고 있던 군인들 중 두사람이 걸어나가 석유통을 받아들었어. 침착하게 뚜껑을 열고 몸들의 탑 위에 기름을 붓기 시작했어. 우리들의 몸 모두에게 고르게, 공평하게. 통에 남은 마지막 한방울의 기름까지 털어 뿌린 다음 그들은 뒤로 물러섰어. 마른 덤불에 불을 붙여 힘껏 던졌어.
p64
그때 너는 죽었어.
그게 어디인지 모르면서, 네가 죽은 순간만을 나는 느꼈어.
빛이 없는 허공으로 번지며 나는 위로, 더 위로 올라갔어. 캄캄했어. 도시의 어느 방향으로도, 어느 구역, 어느 집에도 불이 켜져 있지 않았어. 눈부신 불꽃들이 뿜어져나오는 곳은 멀리 있는 한 지점뿐이었어. 연달아 쏘아올려지는 조명탄 불빛들을, 번쩍이며 홑튀는 총신들의 불꽃을 나는 봤어.
그때 그곳으로 가야 했을까. 그곳으로 힘차게 날아갔다면 너를, 방금 네 몸에서 뛰쳐나온 놀란 너를 만날 수 있었을까. 여전히 눈에서 피가 흐르는 채, 서서히 조여오는 거대한 얼음 같은 새벽빛 속에서 나는 어디로도 움직일 수 없었어.
3장. 일곱개의 뺨
p69
그 순간 왜 분수대가 떠올랐는지 모른다. 짧게 감은 눈꺼풀 속에서 유월의 분수대가 눈부신 물줄기를 뿜었다. 버스를 타고 그 앞을 지나가던 열아홉살의 그녀는 눈을 질끈 감았었다. 하나하나의 물방울들이 내쏘는 햇빛의 예리한 파편들이, 달궈진 눈꺼풀 안쪽까지 파고들어 눈동자를 찔렀다. 집 앞 정류장에서 내리자마자 그녀는 공중전화 부스로 들어갔다. 책가방을 바닥에 내려놓고, 이마에 흐르는 땀을 주먹으로 훔치며 전화기에 동전을 넣었다. 114버튼을 누르고 기다렸다. 도청 민원실 부탁합니다. 안내받은 전화번호를 누르고 다시 기다렸다. 분수대에서 물이 나오고 있는 걸 봤는데요, 그래서는 안된다고 생각합니다. 떨리던 그녀의 목소리가 점점 또렷해졌다. 어떻게 벌써 분수대에서 물이 나옵니까. 무슨 축제라고 물이 나옵니까. 얼마나 됐다고, 어떻게 벌써 그럴 수 있습니까.
p76
그날 학생식당에서 그녀는 늦은 점심을 먹고 있었다. 큰 소리로 유리문이 열리며 학생들이 뛰어들어왔다. 고함 소리와 함께 사복 형사들이 뒤따라 들어왔다. 식당 곳곳으로 흩어지는 학생들을 쫓아가 곤봉을 휘두르는 사내들의 모습을, 그녀는 숟가락을 쥔 채 멍하게 지켜보았다. 한 형사가 특별히 흥분해 있었다. 기둥 옆에 혼자 앉아 카레라이스를 먹던 퉁퉁한 남자애 앞에 멈추더니, 맞은편에 놓여 있던 접이식 의자를 집어들고 휘둘렀다. 남자애의 이마에서 터진 피가 얼굴을 덮었다. 그녀의 손에서 숟가락이 떨어졌다. 그걸 주우려고 무심코 허리를 수그렸다가 바닥에 떨어진 유인물을 주웠다. 굵은 글씨가 눈에 들어왔다. 학살자 전두환을 타도하라. 그 순간 억센 손이 그녀의 머리채를 움켜쥐었다. 유인물을 뺏고 그녀를 의자에서 끌어냈다.
p88
진수 오빠가 노크를 하고 그 방에 들어온 것은 열한시경이었다. 무전기를 들고 다니는 모습은 늘 봤지만, 총까지 멘 모습은 처음이라 낯설어 보였다. 세명만 남아주시겠습니까,라고 그는 말했다. 아침까지 가두방송을 해주실 세분만 있으면 됩니다. 나머지는 집으로 돌아가세요.
p89
남기로 한 세 여자들 중에서는 선주 언니가 호신용으로 카빈 소총을 받았다. 선주 언니는 작동법에 대해 간단한 설명을 들은 뒤 어설프게 총을 어깨에 걸쳐메고, 따로 뒤돌아 인사하지 않은 채 여대생 둘을 따라 일층으로 내려갔다.그녀들에게 진수 오빠는 말했다.
사람들이 나오게 해주세요. 날이 새자마자 도청 앞에 시민들이 꽉 차게, 우린 아침까지만 어떻게든 버텨볼 겁니다.
남은 여자들은 새벽 한시경에 도청을 나왔다. 진수 오빠가 다른 대학생과 함께 남동성당 골목까지 동행해줬다. 침침한 가로등이 밝혀진 골목 입구에서 그들은 멈춰 섰다.
여기서 흩어지세요. 아무 집에라도 들어가 숨으세요.
그녀에게 영혼이 있었다면 그때 부서졌다. 땀에 젖은 셔츠에 카빈 소총을 멘 진수 오빠가 여자들에게 인사하기 위해 웃어 보였을 때. 어두운 길을 되밟아 도청으로 돌아가는 그들의 뒷모습을 얼어 붙은 듯 지켜보았을 때. 아니 도청을 나오기 전 너를 봤을 때 이미 부서졌다. 하늘색 체육복 위에 교련 점퍼를 걸친, 아직 어린애 같은 좁은 어깨에 총을 메고서 고개를 끄덕이고 있는 너를 발견하고 그녀는 놀라며 불렀다. 동호야, 왜 집에 안 갔어? 장전하는 법을 설명하고 있던 청년 앞으로 그녀는 끼어들었다. 이 애는 중학생이에요. 집에 보내야 돼요. 청년은 놀라는 기색이었다. 고등학교 2학년이라고 해서 그런 줄 알았는데... 아까 고등학교 1학년까지 내보낼 때 이 애는 안 갔어요. 그녀는 목소리를 낮춰 항의했다. 말이 안돼요. 어딜 봐서 이 얼굴이 고등학생이에요.
진수 오빠의 뒷모습이 어둠속으로 완전히 사라지자 여자들이 흩어지기 시작했다. 취사조의 여대생이 그녀에게 물었다. 이 근처에 아는 집 있어? 그녀가 고개를 젓자 여대생이 제안했다. 나하고 전대병원으로 가자. 거기 외사촌이 입원해 있어.
전대 부속병원 로비는 어두웠고 출입문은 잠겨져 있었다. 한참 문을 두드리자 경비가 손전등을 들고 나왔다. 수간호사도 뒤따라 나왔다. 모두 긴장한 얼굴이었다. 군인이 온 거라고 생각했던 것이다.
복도와 비상계단도 소등되어 있었다. 손전등을 든 경비의 안내로 여대생의 사촌이 입원한 6인실로 들어섰다. 솜이불을 창에 걸어 놓은 실내는 칠흑같이 어두웠다. 환자들과 보호자들은 어둠속에서 깨어 있었다. 여대생의 이모가 조카의 손을 잡으며 속삭이듯 물었다. 어쩌까나 군인들이 들어온담서. 부상자들은 전부 총살해버린담서.
그녀가 창 아래 벽에 기대앉자, 옆 침대 환자의 보호자인 듯한 아저씨가 말했다.
창 앞에 안지 마소, 위험하다마시.
어둠 때문에 그의 얼굴은 보이지 않았다.
군인들 퇴각하던 날에도 총알이 날아와서, 여그 창가에 걸어논 옷에 구멍이 뚫렸다마시. 사람이 서 있었으면 어떻게 됐겄는가.
그녀는 창으로부터 두걸음 옆으로 옮겨앉았다.
호흡이 고르지 않은 위중한 환자가 있어, 이십분 간격으로 간호사가 손전등을 들고 들어왔다. 서치라이트 같은 불빛이 병실을 훑을 때마다 공포에 굳은 환자들과 보호자들의 얼굴이 드러났다. 어쩌까나. 군인들이 참말로 이 병원까지 쳐들어온다냐. 죄다 총살해 버릴 것 같으면, 해뜨자마자 얼른 퇴원해야 안 쓰겄냐. 니 언니는 의식 차린 지 하루밖에 안됐는디, 꿰맨 자리가 터져블면 어쩌까나. 아주머니가 속삭여 물을 때마다 여대생은 더 작은 소리로 속삭여 대답했다. 저도 모르겠어요, 숙모.
얼마나 시간이 흘렀을까. 머리서 들려오는 가냘픈 목소리에 그녀는 창 쪽으로 고개를 돌렸다. 메가폰을 쥔 여자의 목소리가 차츰 가까워졌다. 선주 언니는 아니었다.
시민 여러분, 도청으로 나와주십시오. 지금 계엄군이 시내로 들어오고 있습니다.
거대한 풍선 같은 침묵이 병실의 모서리들을 향해 부풀어오르는 것을 그녀는 느꼈다. 트럭이 병원 앞길을 지나가며 목소리가 크고 선명해졌다.
우리는 끝까지 싸울 것입니다. 함께 나와서 싸워주십시오.
그 목소리가 멀어진 지 십분이 채 되지 않아 군인들의 소리가 들렸다. 그런 소리를 그녀는 처음 들었다. 수천사람의 단호한, 박자를 맞춘 군화발 소리. 보도가 갈라지고 벽이 무너질 것 같은 장갑차 소리. 그녀는 무릎 사이에 얼굴을 묻었다. 어느 침대에선가 어린 환자가 애원했다. 엄마, 창문 닫아줘. 닫았어. 더 꽉 닫어. 꽉 닫았나니까. 마침내 그 소리들이 지나가자 다시 가두방송이 들렸다. 도심의 침묵을 가로질러, 여러 블로 너머에서 아득히 들려오는 소리였다.
여러분 지금 나와 주십시오. 계엄군이 들어오고 있습니다.
마침내 도청 쪽에서 총소리가 들렸을 때 그녀는 잠들어 있지 않았다. 귀를 틀어막지도, 눈을 감지도 않았다. 고개를 젓지도, 신음하지도 않았다. 다만 너를 기억했다. 너를 데리고 가려 하자 너는 계단으로 날쌔게 달아났다. 겁에 질린 얼굴로, 마치 달아나는 것만이 살길인 것처럼. 같이 가자, 동호야. 지금 가이 나가야 돼. 위태하게 이층 난간을 붙들고 서서 너는 떨었다. 마지막으로 눈이 마주쳤을 때, 살고 싶어서, 무서워서 네 눈꺼풀은 떨렸다.
p96
그 오전 분수대에서 물줄기가 뿜어져나오지 않았다. 도청 담장 앞에 던져진 주검들 옆으로, 총을 멘 군인들이 새로운 주검들의 다리를 끌고 왔다. 주검들의 등과 뒤통수가 함부로 바닥에 쓸리고 튀어올랐다. 몇몇 군인들은 커다란 방수 모포를 펴서 네 귀를 나눠 잡고, 도청 안마당에서 여남은사람의 주검을 한번에 쓸어담아 나왔다. 어릿어릿 먼 곁눈질로 그 광경을 보며 걷고 있을 때, 빠르게 다가온 군인 셋이 그녀의 가슴에 총을 겨눴다. 어디서 오는 겁니까. 이모 병문안하고 집에 가는 길이에요. 태연스럽게 대답하는 그녀의 인중이 떨렸다.
그들이 명령한 대로 광장을 등지고 걸어 대인시장 어귀에 이르렀을 때, 거대한 장갑차들이 굉음을 내며 대로를 행진해 지나갔다. 다 끝났다는 걸 모두에게 보여주려는 거야, 얼핏 그녀는 생각했다. 다 죽였다는 걸.
대학가와 가까운 그녀의 동네는 전염병이 지나간 것처럼 인적없이 괴괴했다. 그녀가 초인종을 누르가 아버지는 기다렸던 듯 달려나와 그녀를 들이고는 대문을 잠갔다. 다락에 그녀를 감춘 뒤, 다락문이 눈에 띄지 않도록 비키니 옷장을 옮겨놓았다. 오후부터 군인들의 발소리가 들렸다. 미닫이문을 열고 누군가를 끌어내는 소리, 무엇인가 부서지는 소리, 애원하는 소리 들이 들려왔다. 아니라우, 우리 아들은 데모 안했어라우, 총 같은 건 만져본 적도 없어라. 그들은 그녀의 집 초인종도 눌렀다. 마당이 쩌렁쩌렁 울리게 아버지가 대답했다. 우리 집은 딸이 고3이오. 아들들은 인자 중학생 초등학생인디, 누가 데모를 했겄소.
다음 날 저녁 그녀가 다락에서 내려왔을 때, 어머니는 시청 청소차들이 주검들을 싣고 공동묘지로 갔다고 말했다. 분수대 앞에 던져진 주검들뿐 아니라, 상무관에 있떤 관들과 미화긴 시신들까지 모두 싣고 갔다고 했다.
관공서와 학교가 문을 열었다. 셔터를 내렸던 상점들도 영업을 시작했다. 계엄은 계속되었으므로, 저녁 일곱시 이후에는 통행이 금지되었다. 통금 전이라 해도 수시로 군인들의 검문검색이 이뤄져, 신분증을 가지고 나오지 않은 사람들은 연행되었다.
수업 결손을 메우기 위해 대부분의 학교가 팔월 초순까지 수업을 했다. 방학하는 날까지 그녀는 날마다 정류장 옆 공중전화 부스에서 도청 민원실에 전화를 걸었다. 분수대에서 물이 나와서는 안된다고 생각합니다. 제발 물을 잠가주세요. 손바닥에서 배어나온 땀으로 수화기가 끈적끈적했다. 예예, 의논해보겠습니다. 민원실 직원들은 인내심 있게 그녀를 응대했따. 꼭 한번 나이 든 여사무원이 말했다. 그만 전화해요, 학생. 학생 같은데 맞지요. 물이 나오는 분수대를 우리가 어떻게 하겠어요. 다 잊고 이젠 공부를 해요.
p99
꿈속처럼 느린 걸음으로 남자들의 모습이 사라졌을 때 여자가 말하기 시작한다. 아니, 말하기 시작한 것 같다. 아니, 여자는 아무것도 말하지 않는다. 소리 없이 입술을 달짝이고 있을 뿐이다. 그 입술의 모양을 그녀는 또렷하게 읽을 수 있다. 서 선생이 원고지에 펜으로 쓴 희곡을 그녀가 직접 입력해 삼교까지 봤기 때문이다.
당신이 죽은 뒤 장례식을 치르지 못해,
내 삶이 장례식이 되었습니다.
여자가 등을 보이며 뒤돌아선다. 동시에 객선 가운데의 긴 통로로 조명이 덜어진다 누덕누덕 기운 삼베옷을 걸친 건장한 체격의 남자가 통로 끝에 서 있다. 거칠게 숨을 몰아쉬며 그가 무대를 향해 걸어온다. 표정과 동작이 초연했던 좀 전의 남자들과 달리 그의 얼굴은 일그러져 있다. 두 팔이 힘껏 허공으로 뻗어올라온다. 목마른 물고기처럼 그의 입술이 달싹인다. 음성이 높아져야 할 부분에서 신음처럼 끼익, 끽 소리가 난다. 그 입술 모양도 그녀는 읽는다.
어이, 돌아오소.
어어이, 내가 이름을 부르니 지금 돌아오소.
더 늦으면 안되오. 지금 돌아오소.
최초의 당혹한 웅성거림이 객석을 쓸고 지나간 뒤, 이제 관객들은 무서운 침묵과 집중력으로 배우들의 입술을 응시하고 있다. 통로를 밝히던 조명이 어두워진다. 무대 중앙의 여자가 객석을 향해 몸을 돌린다. 여전히 소리 없이 초혼(招魂)하며 걸어오는 남자를 침착하게 응시한다. 입술을 열어 달싹인다.
당신이 죽은 뒤 장례를 치르지 못해,
당신을 보았던 내 눈이 사원이 되었습니다.
당신의 목소리를 들었던 내 귀가 사원이 되었습니다.
당신의 숲을 들이마신 허파가 사원이 되었습니다.
마치 눈을 뜬 채 꿈을 꾸는 듯 허공을 향해 끼익, 끽 소리를 내며 여자가 입술을 움직이는 사이, 삼베옷의 남자가 무대에 올라선다. 두 팔을 허공에 휘저으며 여자의 어깨를 스쳐지나간다.
봄에 피는 꽃들, 버드나무들, 빗방울과 눈송이들이 사원이 되었습니다.
날마다 찾아오는 아침, 날마다 찾아오는 저녁들이 사원이 되었습니다.
눈부신 조명이 다시 객석 사이로 쏘아져내려온다. 앞쪽 좌석에서 그녀가 고개를 돌리자, 열두한살로 보이는 어린 소년이 어느새 통로 가운데 서 있다. 하얀 반소매 체육복 상하의에 흰 운동화를 신고, 조그마한 해골의 머리를 추운 듯 가슴에 끌어안고 있다. 소년이 무대를 향해 걷기 시작하자, 네발짐승들처럼 허리를 구십도로 구부린 배우들의 무리가 어두운 통로 뒤편에 나타나 뒤를 따른다. 남녀가 섞인 여남은명의 그 무리는 검은 머리칼을 괴기스럽게 아래로 늘어뜨린 채 행진한다. 쉴 새 없이 입술을 달싹러리며, 끼이익, 끄으윽, 신음을 내며 체머리를 떤다. 소리가 커질 때마다 자꾸 뒤돌아보며 멈칫거리는 소년을 앞질러, 그들이 먼저 무대 앞 계단에 다다른다.
고개를 뒤로 꺽은 채 그 모습을 지켜보던 그녀의 입술이 자신도 모르게 달싹인다. 배우들을 흉내 내듯 목구멍을 쓰지 않고 부른다. 동호야.
행렬 끝에 있던 젊은 남자가 수그린 몸을 돌려 소년에게서 해골의 머리를 빼앗아 든다. 늘어뜨려진 손에서 손으로 옮겨간 해골이, 행렬의 맨 앞에 기역 자로 허리를 구분린 노파에게서 멈춘다. 반백의 긴 머리를 풀어내린 노파는 해골을 보듬고 무대 위로 올라간다. 무대 중앙에 있던 흰옷 입은 여자의 삼베옷이 남자가 순순히 길을 터준다.
이제 움직이고 있는 사람은 노파뿐이다.
그 걸음이 너무나 느리고 고요해, 한 관객의 기침 소리가 아득한 바깥 세계의 것처럼 들린다. 소년이 움직이기 시작한 것은 그 순간이다. 순식간에 소년은 무대로 뛰어올라가 노파의 굽은 등허리에 바싹 몸을 붙인다. 업힌 어린아이처럼, 혼령처럼 살금살금 뒤를 따른다.
.....동호야.
그녀는 아랫입술 안쪽을 악문다. 색색의 만장들이 일제히 무대 천장에서 내려오는 것을 본다. 무대 아래 네발짐승처럼 모여 있던 배우들이 별안간 꼿꼿이 허리를 편다. 노파가 걸음을 멈춘다. 업힌 아이처럼 바싹 붙어 걷던 소년이 객석을 향해 몸을 돌린다. 그 얼굴을 바로 보지 않기 위해 그녀는 눈을 감는다.
네가 죽은 뒤 장례식을 치르지 못해, 내 삶이 장례식이 되었다.
네가 방수 모포에 싸여 청소차에 실려간 뒤에.
용서할 수 없는 물줄기가 번쩍이며 분수대에서 뿜어져나온 뒤에.
어디서나 사원의 불빛이 타고 있었다.
봄에 피는 꽃들 속에, 눈송이들 속에, 날마다 찾아오는 저녁들 속에. 다 쓴 음료 병에 네가 꽂은 양초 불꽃들이.
뜨거운 고름 같은 눈물을 닦지 않은 채 그녀는 눈을 부릅뜬다. 소리 없이 입술을 움직이는 소년의 얼굴을 뚫어지게 응시한다.
4장. 쇠와 피
p104
평범한 볼펜이었습니다. 모나미 검정 볼펜. 그걸 손가락 사이에 교차시켜 끼우게 했습니다.
그야 왼손이죠. 오른손으론 조서를 써야 하니까.
예, 그렇게 비틀었습니다. 이 방향으로도 이렇게.
처음엔 견딜 만했습니다. 하지만 날마다 같은 곳에 그렇게 하니까 상처가 깊어졌어요. 피와 진물이 섞여 흘렀습니다. 나중엔 이 자리에 하얀 뼈가 들여다보였습니다. 뼈가 드러나니까 알코올에 적신 약솜을 끼어주더군요.
제가 수감된 방에는 남자들만 약 아흔명이 있었는데, 절반 이상이 같은 자리에 약솜을 끼우고 있었습니다. 대화는 금지돼 있었어요. 손가락 사이에 끼운 약솜을 눈으로 확인하면, 잠깐 서로 마주보다가 시선을 피했습니다.
저도 그렇게 생각했습니다. 뼈가 드러났으니 그 자리는 이제 그만할 거라고. 그렇지 않았습니다. 더 고통스러울 걸 알고, 약솜을 뺀 다음 더 깊게 볼펜을 끼우고 짓이겼습니다.
p107
그곳의 한끼 식사는 식판에 담긴 밥 한줌과 국 반그릇, 김치가 전부였습니다. 그것을 우리들은 2인 1조로 나눠 먹었습니다. 김진수와 한조가 되었을 때, 서서히 혼이 빨려나간 짐승과 같은 상태였던 나는 안도했습니다. 그는 많이 먹을 것 같은 사람이 아니었으니까요. 얼굴이 창백하고 눈언저리는 병자처럼 어두웠으니까요. 두 눈은 생기도 표정도 없이 공허하게 번쩍였으니까요.
한달 전 그의 부고를 들었을 때 가장 먼저 떠오른 것이 바로 그 눈이었습니다. 멀건 콩나물국에서 콩나물을 골라 먹다 말고 멈칫 나를 보던 눈. 그가 콩나물을 다 먹어버릴까봐 긴장하고 있던 나를, 우물거리는 그의 입술을 혐오하며 쏘아보고 있던 나를 묵묵히 마주 바라보던, 나와 똑같은 짐승이었던 그의 차갑고 공허한 두 눈.
p109
김진수는 우리 중에서도 특별히 변칙적인 고문을 더 당한 것으로 알고 있습니다. 아마 외모가 여성적이어어서 그랬던 것 같습니다.
아니요, 당시에는 말하지 않았습니다. 십년쯤 지난 뒤에 들은 이야깁니다.
성기를 꺼내 탁자에 올려놓게 하고, 나무 자로 내려치겠다며 위협했다고 했습니다. 하체를 발가벗기고 영창 앞 잔디밭으로 데려가, 팔을 뒤로 묶고 엎드려 있게 했다고 했습니다. 굵은 개미들이 세시간 동안 김진수의 사타구니를 물었다고 했습니다. 석방된 뒤 거의 매일 밤 벌레와 관련된 악몽을 꾸었다고 들었습니다.
그전에는 모르는 사이였습니다. 오며 가며 상황실에서 얼굴만 봤지요.
김진수는 그해에 대학 신입생이었으니, 아직 뺨에 솜털이 나 있었습니다. 얼굴이 희고 속눈썹이 유난히 짙어서 눈에 띄었습니다. 볼 때마다 무척 빠르게 걸어다닌다는 느낌이었는데, 팔다리와 허리가 가늘고 길어서 더 그렇게 보였던 것 같습니다.
희생자 파악하고, 시신 관리를 총괄하고, 관이며 태극기를 구해와서 장례 준비하고... 주로 그런 일을 했던 걸로 압니다.
사실 그 친구가 마지막 밤에 남을 거라곤 생각 못했습니다. 총기를 모두 회수한 뒤 계엄군이 들어오기 전에 도청을 깨끗이 비워놓자고, 단 한사람도 희생되어선 안된다고 말하는 학생들 중 하나일 거라고 생각했습니다. 저녁에 남은 걸 보고도 의심했습니다. 저 친구는 자정이 되기 전에 빠져나갈 거라고.
김진수와 나를 포함해 열두명이 한조가 되어 이층 소회의실에 모였습니다. 처음이자 마지막이라고 생각하고 통성명을 했습니다. 각자 간단한 유서를 써서 이름과 주소를 적고는 찾기 쉽도록 셔츠 앞주머니에 넣었습니다. 당장 닥쳐올 일들이 실감나지 않았던 것도 사실입니다. 하지만 계엄군이 시내로 진입했다는 무전이 들어오기 시작하자 그제야 긴장이 되었습니다.
상황실장이 복도로 김진수를 불러낸 건 자정 무렵이었습니다. 여자들을 호위해 도청 밖으로 데려다주라는 상황실장의 우렁우렁한 목소리가 회의실 안까지 들렸습니다. 상황실장이 김진수를 지목해 그 일을 맡긴 건, 유난히 갸날프게 생긴 그 친구가 돌아오지 않아도 좋다는 생각에서였을 거라고 나는 짐작했습니다. 김진수가 자신의 총을 챙겨 굳은 얼굴로 나가는 모습을 보며 생각했던 기억이 납니다. 그래, 너는 돌아오지 말아라.
그러나 짐작과 달리 그는 삼십분이 채 지나지 않아 돌아왔습니다. 나갈 때와는 달리 긴장이 완전히 풀린 얼굴이었습니다. 밀려오는 졸음을 견딜 수 없는 듯 가늘게 뜬 눈으로 총을 벽에 세워놓더니, 창 아래 놓인 인조가죽 소파에 모로 누워 잠들어버렸습니다. 내가 흔들어 깨우자 신음하듯 말했습니다. 죄송합니다. 조금만 잘게요.
이상한 일은, 그 모습을 지켜보던 다른 사람들도 별안간 기운이 빠진 듯 벽에 기대앉았다는 것입니다. 하나둘 꾸벅꾸벅 졸기 시작했습니다. 나도 막막한 마음이 되어 김진수가 누운 소파 옆에 웅크려앉았습니다. 어떻게 설명할 수 있을까요. 졸음이 오기는커녕 신경이 가장 날카롭게 곤두서야 할 시간, 냉정한 정신력에 의지해야 할 그 시간에, 우리들은 눈도 귀도 입도 없는 뭉클뭉클한 잠 속으로 정신없이 빠져들고 있었습니다.
조심스럽게 문이 열렸다가 소리 없이 닫히는 기척에 나는 눈을 떴습니다. 조그맣고 말간 얼굴에 알밤처럼 머리를 깍은 중학생이 어느 사이 소파에 기대앉아 있었습니다.
누구냐, 나는 잠긴 목소리로 물었습니다.
너 누구냐, 어디서 왔어.
눈을 질끈 감으며 소년이 대답했ㅅ브니다.
너무 졸려요, 조금만 잘게요, 여기서 형들이랑.
그 목소리를 듣자마자, 죽은 듯 잠들어 있던 김진수가 소스라치며 눈을 떴습니다.
어떻게 된 거야.
소년의 팔을 붙들며 그가 숨죽여 물었습니다.
내가 아까 가라고 하지 않았어. 너도 간다고 하지 않았어.
김진수의 목소리가 점점 높아졌습니다.
네가 대체 여기서 뭘 하겠다는 거야. 총 쏠 줄은 알어.
머뭇머뭇 소년이 말했습니다.
.... 화내지 마요, 형.
두사람의 실랑이에 사람들이 부스럭부스럭 깨어났습니다. 소년의 팔을 놓지 않은 채 김진수는 반복해서 말했ㅅ브니다.
적당한 때 너는 항복해라. 알겠지, 항복하라고. 손들고 나가. 손들고 나가는 애를 죽이진 않을 거야.
p117
아니요, 쏘지 않았습니다.
누구도 죽이지 않았습니다.
계단을 올라온 군인들이 어둠속에서 다가오는 것을 보면서도, 우리 조의 누구도 방아쇠를 당기지 않았습니다. 방아쇠를 당기면 사람이 죽는다는 걸 알면서 그렇게 할 수가 없었습니다. 우린 쏠 수 없는 총을 나눠 가진 아이들이었던 겁니다.
나중에 알았습니다. 그날 군인들이 지급받은 탄환이 모두 팔십만발이었다는 것을. 그때 그 도시의 인구가 사십만이었습니다. 그 도시의 모든 사람들의 몸에 두발씩 죽음을 박아넣을 수 있는 탄환이 지급되었던 겁니다. 문제가 생기면 그렇게 하라는 명령이 있었을 거라고 나는 믿고 있습니다. 학생 대표의 말대로 우리가 총기를 도청 로비에 쌓아놓고 깨끗이 철수했다면, 그들은 시민들에게 총구를 겨눴을지도 모릅니다. 그 새벽 캄캄한 도청 계단을 따라 글자 그대로 콸콸 소리를 내며 흐르던 피가 떠오를 때마다 생각합니다. 그건 그들만의 죽음이 아니라, 누군가의 죽음을 대신한 거였다고. 수천곱절의 죽음, 수천곱절의 피였다고.
방금 전까지 눈을 마주치며 대화했던 사람들에게서 흘러나오는 피를 곁눈질로 보며, 누가 죽고 누가 남았는지도 파악하지 못한 채 나는 복도에 머리를 박고 엎드렸습니다. 그들이 매직으로 내 등에 무엇인가 글씨를 쓰는 것을 느꼈습니다. 극렬분자, 총기 소지. 그렇게 썼다는 것을 상무대 유치장에서 다른 사람이 알려주었습니다.
p118
김진수와 나는 여전히 식판 하나를 받아 한줌의 식사를 나눠 먹었습니다. 몇시간 전에 조사실에서 겪은 것들을 뒤로하고, 밥알 하나, 김치 한쪽을 두고 짐승처럼 싸우지 않기 위해 인내하며 묵묵히 숟가락질을 했습니다. 실제로 어떤 사람들은 식판을 내려놓고 소리쳤습니다. 참을 만큼 참았어. 그렇게 네가 다 쳐먹으면 난 어쩌란 말이야. 으르렁거리는 그들 사이로 몸을 밀어넣으며 한 남자애가 더듬더듬 말했습니다. 그, 그러지 마요. 좀처럼 입을 떼지 않는, 늘 주눅 든 듯 조용한 아이였기에 나는 놀랐습니다.
우, 우리는... 주, 죽을 가, 각오를 했었잖아요.
김진수의 공허한 눈이 내 눈과 마주친 것은 그때였습니다.
순간 깨달았습니다. 그들이 원한 게 무었이었는지. 우리를 굶기고 고문하면서 그들이 하고 싶었던 말이 무엇이었는지. 너희들이 태극기를 흔들고 애국가를 부른 게 얼마나 웃기는 일이었는지, 우리가 깨닫게 해주겠다. 냄새를 풍기를 더러운 몸, 상처가 문드러지는 몸, 굶주린 짐승 같은 몸뚱어리들이 너희들이라는 걸, 우리가 증명해주겠다.
p123
재판장님이 입장하십니다.
서기의 말이 떨어지자 앞문이 열리며 법무장교 셋이 차례로 들어왔습니다. 깊이 고개를 숙이고 있던 내 귀에 이상한 소리가 들린 건 그때였습니다. 앞에서 두번째 줄 정도였습니다. 반쯤 고개를 들고 나는 앞쪽을 살폈습니다. 누군가가 소리 죽여 흐느끼듯 애국가 첫 소절을 부르기 시작하고 있었습니다. 그가 어린 영재라는 걸 깨달았을 때, 누가 먼저랄 것 없이 이미 합창이 시작돼 있었습니다. 자력에 이끌린 것처럼 나도 따라 불렀습니다. 죽은 듯이 고개를 숙이고 있던 우리들이, 땀과 피와 고름이었던 우리들이 조용히 노래 하는 동안, 어째서였는지 그들은 제지하지 않았습니다. 소리치지도, 개머리판으로 머리를 내리치지도, 위협했던 대로 벽으로 몰아 넣어 총살하지도 않았습니다. 우리가 노래를 끝마칠 때까지, 소절과 소절 사이마다 위태한 침묵이 풀벌레 소리와 함께, 간이재판소의 서늘한 공기 속에서 도사리고 있었습니다.
p132
군인들의 명령대로 이층 복도에 머리를 박고 있던 우리들이 도청 마당으로 끌려내려간 건 동틀 무렵이었습니다. 뒤로 손이 묶인 채 마당 가장자리에 일렬로 무릎 꿇고 앉은 우리들에게 한 장교가 다가왔습니다. 그는 흥분해 있었습니다. 한사람씩 군화로 등을 밟아 흙바닥에 머리를 박게 하며 욕설을 퍼부었습니다. 씨팔, 내가 월남 갔다 온 사람이야. 내 손으로 죽인 베트콩 새끼들이 서른명도 넘는다, 더러운 빨갱이 새끼들. 그때 김진수는 내 옆에 있었습니다. 장교가 김진수의 등을 밟자, 하필 자갈에 찧은 이마에서 피가 흘렀습니다.
다섯명의 어린 학생들이 이층에서 두 손을 들고 내려온 것은 그때였습니다. 계엄군이 대낮같이 조명탄을 밝히며 기관총을 난사하기 시작했을 때 내가 소회의실 캐비닛에 숨으라고 명령했던 네명의 고등학생과, 소파에서 김진수와 짦은 실랑이를 벌였던 중학생이었습니다. 더이상 총소리가 들리지 않자 그들은 김진수의 말대로 무기를 버리고 항복하러 내려온 것이었습니다.
저 새끼들 봐라, 김진수의 등을 밟고 있던 장교가 여전히 흥분한 채 소리쳤습니다. 씨팔 빨갱이들, 항복이다 이거냐? 목숨은 아깝다 이거냐? 한발을 여전히 김진수의 등에 올린 채 그는 M16을 들어 조준했습니다. 망설이지 않고 학생들에게 총을 갈겼습니다. 나도 모르게 고개를 들어 그의 얼굴을 봤습니다. 씨팔, 존나 영화 같지 않냐. 치열이 고른 이를 드러내며 그가 부하를 향해 말했습니다.
아시겠습니까. 그러니까이 사진에서 이 아이들이 나란히 누워있는 건, 이렇게 가지런히 옮겨놓은 게 아닙니다. 한줄로 아이들이 걸어오고 있었던 겁니다. 우리가 시킨 대로 두 팔을 들고, 줄을 맞춰 걸어오고 있었던 겁니다.
p154
그러나 스무살이 되기 전까지 당신이 했던 일은 달랐다.
당신은 하루에 열다섯시간 일했고 한달에 이틀 쉬었다. 봉급은 남자 공원의 절반이었다. 잔업수당은 없었다. 하루 두알씩 타이밍을 먹어도 잠이 쏟아졌다. 선 채로 잠들면 작업반장이 욕을 하거나 뺨을 쳤다. 오후부터 묵직하게 붓던 종아리와 발등, 물품을 빼돌릴지 모른다는 이유로 퇴근하는 여공들을 몸 수색하던 경비들. 브래지어 언저리를 더듬을 때 느려지던 그들의 손. 치욕. 기침. 잦은 코피. 두통. 가래를 뱉으면 뭉쳐나오던 거무스레한 실밥 덩어리들.
우리는 고귀해.
성희 언니는 자주 그렇게 말했다. 쉬는 일요일마다 청계피복노조 사무실에서 노동법 강의를 듣던 그녀는, 자신이 배운 것을 빼곡히 노트에 정리해와 소모임에서 강의했다. 한자 공부를 할 거란 성희 언니의 말에 당신은 별다른 두려움 없이 그 모임에 들어갔었다. 실제로 언니들은 모이자마자 한자부터 공부했다. 1800자는 알아야 해, 신문은 읽을 수 있어야지. 각자 펜글씨 공책에 서른자씩 쓰고 암기하는 일이 끝나면 성희 언니의 어색한 노동법 강의가 시작되었다. 그러니까.... 우리는 고귀해. 말문이 막히거나 기억이 얼른 안 날 때마다 성희 언니는 추임새처럼 그 말을 넣었다. 헌법에 따르면, 우리는 모든 사람들과 똑같이 고귀해. 그리고 노동법에 따르면 우리에겐 정당한 권리가 있어. 그녀의 목소리는 초등학교 여선생님처럼 상냥하고 낭랑했다. 이 법을 위해 죽은 사람이 있어.
어용노조를 큰 표 차로 꺽고 뽑힌 노조 간부들을 구사대와 경찰들이 끌고 가던 날, 2교대를 하려고 기숙사를 나와 출근하던 여공들 수백명이 사람의 벽을 만들었다. 많아야 스물한두살, 대부분이 십대인 여자애들이었다. 제대로 된 구호도 노래도 없었다. 잡아가지 마요. 잡아가면 안돼요. 소리치는 그녀들을 향해 각목을 든 구사대가 달려들었다. 헬멧과 방패로 중무장한 경찰 백여명을, 차창마다 철망이 쳐진 전경차들을 당신은 보았다. 무엇 때문에 저렇게 무장했을까, 얼핏 생각했다. 우린 싸움을 못하고 무기도 없는데.
성희 언니가 큰 소리로 외친 것은 그때였다. 옷을 벗어. 우리 다 같이 옷을 벗자. 누가 먼저랄 것 없이 그녀들은 옷을 벗었다. 잡아가지 마요. 소리치며 블라우스와 치마를 벗어 흔들었다. 그녀들이 지닌 가장 은밀한 것, 모든 사람들이 귀중하다고 말하는 것, 처녀들의 벗은 몸을 그들이 만질 수 없을 거라고 믿었기 대문이다. 그러나 그들은 브래지어 차림의 여자애들을 흙바닥에 끌고 갔다. 등허리의 맨살이 모래에 긁혀 피가 흘렀다. 머리가 헝클어지고 속옷이 찢겼다. 안돼, 잡아가면 안돼, 고막이 터질 듯 쨍쨍한 울부짖음 사이로, 그들은 수십명의 노조원들을 곤봉과 각목으로 때려 닭장차에 집어넣었다.
열여덟살인 당신은 마지막에 끌려가다 모랫바닥에 미끄러져 넘어졌다. 서두르던 사복형사가 당신의 배를 밟고 옆구리를 걷어 찬 뒤 가버렸다. 흙바닥에 엎드린 당신의 의식이 아득하게 흐려졌다 돌아왔다. 여자애들의 쨍쨍한 고함 소리가 멀어졌다 가까워졌다.
응급실로 업혀간 당신은 장파열 진단을 받았고, 입원해 있는 동안 해고 통보를 들었다. 퇴원한 후 언니들과 함께 복직투쟁을 하는 대신 당신은 고향 집으로 내려갔다. 몸을 추스린 뒤 인천으로 돌아와 다른 방직공장에 취직했지만 일주일을 못 채우고 해고됐다. 당신의 이름이 블랙리스트에 올라 있었던 것이다. 결국 당신은 이년 남짓한 방직공 경력을 포기하고, 친척의 주선으로 광주 충장로의 양장점에 미싱사 시다로 취직했다. 급료는 여공 시절보다 더 형편 없었지만, 그만두고 싶을 때마다 막연히 성희 언니의 목소리가 떠올랐다... 그러니까, 우리는 고귀하니까. 그럴 때면 그녀에게 편지를 썼다. 나는 잘 지내고 있어요, 언니. 쉽게 미싱사가 될 수 있을 것 같지는 않지만요. 기술이 어렵다기보다는 잘 안 가르쳐주는 게 문제에요. 그래도 인내심 있게 배워봐야죠. 기술, 인내심 같은 단어들은 소모임에서 배웠던 한자로 반듯하게 획을 살려 썼다. 성희 언니가 자주 걸음하는 산업선교회 주소로 편지를 부치면 답장은 아주 가끔씩 짧게 왔다. 그래야지, 너는 어디서 뭘 해도 잘할 거야. 그렇게 한해 두해 시간이 흐르며 서로 연락이 끊어졌다.
어렵게 배운 기술로 삼년 만에 미싱사가 됐을 때 당신은 스물한 살이었다. 그해 가을, 당신보다 어린 여공이 야당 당사에서 농성을 하다 죽었다. 사이다 병 조각으로 스스로 손목을 긋고 삼층에서 뛰어내렸다는 정부의 발표를 당신은 믿지 않았다. 퍼즐 맞추기를 하듯 신문에 실린 사진들을, 검열되어 텅 빈 공란들을, 격앙된 사설의 어둑한 반대편을 들여다봐야 했다.
당신의 배를 밟고 옆구리를 찼던 사복형사의 얼굴을 당신은 잊지 않았다. 중앙정보부가 구사대들을 직접 교육하고 지원하고 있다는 것을, 그 폭력의 정점에 군인 대통령이 있다는 것을 잊지 않았다. 당신은 긴급조치 9호의 의미를 이해했고, 대학 정문에서 스크럼을 짠 학생들이 외치는 구호를 이해했다. 이어서 부산과 마산에서 일어난 일들을 이해하기 위해 신문 속 퍼즐을 맞췄다. 부서진 전화 부스들과 불타는 파출소, 투석적은 벌이는 성난 군중. 오직 상상으로 유추해야 하는 공란 속의 문장들.
대통령이 돌연히 죽은 시월 당신은 자문했다. 이제 폭력의 정점 이 사라졌으니, 더이상 그들은 옷을 벗어들고 울부짖는 여공들을 끌고 가지 못하는가? 넘어진 여자애의 배를 밟아 창자를 터뜨리지 못하는가? 박 대통령의 신임을 받았다는 젊은 소장이 장갑차를 이끌고 서울에 입성하는 것을, 곧이어 중앙정보부장을 겸직하는 것을 당신은 신문을 통해 지켜보았다. 조용히 소름이 끼쳤다. 무서운 일이 생길 것 같아. 임 양은 신문이 그렇게 좋아? 중년의 재단사는 당신을 놀리곤 했다. 젊어 좋겄어. 그렇게 잔글씨가 안경도 없이 뵈고.
그리고 그 버스를 당신은 보았다.
양장점 주인이 대학생 아들을 데리고 영암의 동생네돌 내려가러빈 화창한 봄날이었다. 낮에 갑자기 할 일이 없어져 서름서름 거리를 걷던 당신의 눈에 그 시내버스가 들어왔다. 계엄 해제, 노동삼권 보장, 차창 아래 길게 걸어놓은 흰 현수막에 파란 매직으로 쓴 글씨가 보였다. 작업복 차림의 전남방직 여공 수십명이 버스를 가득 채우고 있었다. 햇빛을 못 봐 데친 버섯같이 얼굴이 창백한 여자애들이 나무 막대들을 들고, 차창 밖으로 팔을 내밀어 차체를 치며 노래를 불렀다. 당신이 기억하는 쨍쨍한 목소리, 무슨 새나 어린 짐승들이 한꺼번에 내는 것 같은 목소리였다.
우리들은 정의파다 좋다 좋다
같이 죽고 같이 산다 좋다 좋다
무릎 꿇고 살기보다 서서 죽길 원한단다
우리들은 정의파다
똑똑히 기억하는 그 노래를 따라, 당신은 홀린 듯 그 버스가 사라진 방향으로 걸었다. 수십만의 군중이 거리 곳곳에서 몰려들어 광장으로 향하고 있었다. 이른 봄부터 스크럼을 짜고 몰려다니던 대학생들은 보이지 않았다. 노인들, 초등학생 아이들, 작업복 차림의 남녀 공원들, 넥타이를 맨 젊은 남자들, 투피스에 힐은 신은 젊은 여자들, 그것도 무기라고 장우산을 들고 나온 새마을 점퍼 차람의 아저씨들. 그 모든 사람들의 행렬 앞에, 신역에서 총을 맞은 청년들의 시신 두구가 수레에 실려 광장으로 나아고 있었다.
p161
거대한 빙하가 당신의 몸을 내리누른다. 고체인 당신은 으스러진다. 빙하 아래로 흐르고 싶다고 당신은 생각한다. 바닷물이든 석유든 용암이든, 어떤 액체가 되어서 이 무게로부터 벗어나야 한다. 그 길밖에 없다.
p162
입원 병동이 있는 본관 로비에는 조명이 완전히 꺼져 있다. 별관 측면의 응급실 입구에만 환하게 불이 밝혀져 있다. 방금 위급한 환자를 수송한 듯, 지방 병원의 구급차 한대가 비상 깜박이를 켜고 뒷문을 열어놓은 채 정차하고 있다.
활짝 열려 있는 현관을 통과해 당신은 응급실 복도에 들어선다. 신음과 다급한 목소리, 무엇인가를 세차게 흡입해내는 의료기구의 기계음, 환자용 침상을 옮기는 소란한 바퀴 소리를 듣는다. 수납창구 앞에 여러줄로 놓인 등받이 없는 의자에 걸터앉는 당신에게 창구의 중년 여자가 묻는다.
어떻게 오셨습니까?
.....누구를 만나려고요.
사실이 아니다. 당신은 여기서 아무도 만나기로 하지 않았다. 면회가 허락되는 아침이 된다 해도, 성희 언니가 당신을 만나기를 원할 것인지도 알지 못한다.
등산복 차림의 중년 남자가 동료의 부축을 받으며 걸어들어온다. 거친 솜씨로 팔에 부목을 한 것으로 미루어 야간산행 중 부상당한 것 같다. 괜찮아, 이제 다 왔어. 배낭 두개를 겹쳐 어깨에 둘러 멘 동료가 다친 남자를 달랜다. 두사람의 얼굴이 비슷한 표정으로 일그러져 있는 것을 당신은 본다. 다시 보니 동료가 아니라 형제인 듯 이목구비가 닮아 있다. 조금만 참아. 곧 의사가 올거야.
곧 의사가 올거야.
주문처럼 그가 되풀이하는 말을 들으며 당신은 의자 끝에 꼼짝 않고 앉아 있다. 오래전 당신에게 의사가 되고 싶다고 말했던 여자애를 생각한다.
성희 언니가 소모임에 신입 회원을 받자고 해서 당신이 말을 꺼내봤던 아이였다. 당신처럼 중학교를 마치기 전에 나이를 속이고 공장에 들어온, 키가 자그마하고 웃음이 송글송글하던 그애는 거절했다. 저는 조합 활동 적극적으로 못해요. 해괴되면 안되거든요. 동생 학비도 보내야 하고, 언젠가 저도 공부를 할 거니까요. 의사가 되고 싶어요.
장파열로 당신이 입원해 있었을 때였다. 명동성당에서 농성하다 잠깐 문명 온 동료가 말했다.
.....사방에 흩어진 우리 신발을, 정미가 전무 모아서 노조 사무실에 갖다놨대. 쪼그만 게 그렇게 서럽게 울더란다.
연행되지 않으려고 몸부림치다 벗겨진 신들이 사방에 널려 있었을 것이다. 열여섯살 난 그애는 무엇이 자신을 울게 하는지도 모르면서 그 신들을 가슴에 안고 이층 노조 사무실로, 아무도 남아 있지 않은 빈방으로 걸어올라갔을 것이다.
그날 오후 회진을 온 말쑥한 얼굴의 의사와 레지던트와 인턴들을 당신은 유심히 올려다봤다. 그애는 그들 같은 의사가 될 수 없다고 그때 생각했다. 동생을 대학 졸업시키면 이십대 중반이 될 것이고, 그때부터 중학교 검정고시를 준비한다 해도.... 아니, 그애는 그때까지 공장에서 버티지도 못할 것이다. 그애는 자주 코피를 쏟았고 깊은 기침을 했다. 발육이 덜 돼 열무처럼 가는 종아리로 방직기 사이를 뛰어다니다가, 기둥에 기대서서 의식을 잃듯 깜박 졸았다. 어떻게 이렇게 시끄러워요? 아무 말도 안 들려요. 처음 일을 배우던 날엔 방직기 소음에 놀라, 겁에 질린 듯 동그랗게 뜬 눈으로 당신에게 외쳤다.
p166
기억해달라고 윤은 말했다. 직면하고 증언해달라고 말했다.
그러나 그것이 어떻게 가능한가.
삼십 센티 나무 자가 자궁 끝까지 수십번 후벼들었다고 증언할 수 있는가? 소총 개머리판이 자궁 입구를 찢고 짓이겼다고 증언할 수 있는가? 하혈이 멈추지 않아 쇼크를 일으킨 당신을 그들이 통합병원에 데려가 수혈받게 했다고 증언할 수 있는가? 이년 동안 그 하혈이 계속되었다고, 혈전이 나팔관을 막아 영구히 아이를 가질 수 없게 되었다고 증언할 수 있는가? 타인과, 특히 남자와 접촉하는 일을 견딜 수 없게 됐다고 증언할 수 있는가? 짧은 입맞춤, 뺨을 어루만지는 손길, 여름에 팔과 종아리를 내놓아 누군가의 시선이 머무는 일조차 고통스러웠다고 증언할 수 있는가? 몸을 증오하게 되었다고, 모든 따뜻함과 지극한 사랑을 스스로 부숴뜨리며 도망쳤다고 증언할 수 있는가? 더 추운 곳, 더 안전한 곳으로 오직 살아남기 위하여.
p169
모든 셔터가 내려져 있었다.
모든 창문이 걸어잠겨 있었다.
그 어두운 거리 위로, 얼음의 눈동자 같은 열이레 달이 당신이 탄 소형 트럭을 내려다보고 있었다.
대부분의 방송은 여대생들이 했다. 그녀들이 완전히 지쳤을 때, 목이 갈라져 더이상 소리를 낼 수 없다고 말했을 때 당싱는 사십여분 분 동안 메가폰을 잡았다. 불을 켜주세요, 여러분. 당신은 그렇게 말했다. 캄캄한 창문들을 향해, 누구의 기척도 느껴지지 않는 골목을 향해 말했다. 제발 불이라도 켜주세요, 여러분.
군이 그 트럭을 새벽까지 버려둔 것은 병력의 이동 경로를 노출하지 않기 위해서였다는 것을 당신은 나중에 알았다. 동트기 직전에 체포된 여자들은 광산경찰서 유치장으로, 운전을 맡았던 청년은 상무대로 끌려갔다. 총기를 소지하고 있었으므로 당신은 여대생들과 따로 수감되었고 보안부대로 이송되었다.
그곳에서 당신은 이름 대신 빨갱이년으로 불렸다. 과거 여공이었고 노조 활동을 했기 때문이었다. 사년 동안 지방 도시의 양장점에서 숨어지내며 간첩 지령을 받아왔다는 각본을 완성하기 위해 그들은 날마다 당신을 조사실 탁자에 눕혔다. 더러운 빨갱이년. 아무리 소리 질러봐라. 누가 달려오나. 조사실의 조명은 가늘게 떨리는 형광등이었다. 일상적인 그 환한 조명 아래, 당신이 하혈 끝에 의식을 잃을 때까지 그들은 멈추지 않았다.
성희 언니를 다시 만난 것은 교도소에서 석방된 이듬해였다. 산업선교회와 크리스찬 아카데미에 그녀의 행방을 수소문해 구로동의 국숫집에서 만났다. 당신의 이야기를 들은 그녀는 놀란 듯 고개를 저었다.
네가 감옥에 있었던 줄은 꿈에도 몰랐어. 조용히 잘 살고 있을 줄 알았는데.
수년 동안 도피와 수감을 반복해온 성희 언니의 얼굴은 볼이 움푹 패어 다른 사람처럼 보였다. 이제 스물일곱인데, 나이보다 열살은 더 들어 보였다. 흰 김을 피워올리며 식어가는 국수 앞에서 그녀는 잠시 침묵했다.
정미가 그 봅에 실종됐다데, 알고 있었니?
이번에는 당신이 고개를 저었다.
그애가 잠깐 노조 일을 거들었더랬어. 그런데 우리가 블랙리스트 때문에 고생하는 걸 보고 걱정이 됐던지, 해고되기 전에 먼저 공장을 그만뒀어. 그러곤 소식이 끊겼다가... 그 얘긴 나도 최근에 들었어. 일산방직에서 같이 야학엘 다녔다는 동료한테서.
모국어를 이해할 수 없게 된 것처럼 당신은 가만히 성희 언니의 입 모양을 지켜보았다.
너, 거기 사년 살았다면서, 큰 도시도 아닌데, 오며 가며 한번도 못 만났니.
당신은 얼른 대답할 수 없었다. 그애의 얼굴을 제대로 기억할 수도 없었다. 무엇인가를 애써 기억해내기에 당신은 지쳐 있었다. 몇 조각의 희끗한 파편들이 떠올랐다 사라졌다. 흰 피부, 오종종한 앞니. 의사가 되고 싶어요. 노조 사무실까지 그애가 끌어안고 올라갔다던, 이제는 이름을 잊은 동료가 병원에 가져다준 당신의 운동화.
그게 다였다.
4:00
죽기 위해 그 도시에 다시 갔어.
석방된 뒤 얼마간은 오빠 집에 신세를 졌지만, 일주일에 두번씩 경찰이 찾아오는 걸 더 견딜 수 없었어.
이월 초순 새벽이었어. 내가 가진 가장 깨끗한 옷을 꺼내 입고, 간단히 가방을 사서 시외버스를 탔어.
언뜻 그 도시는 변한 게 없어 보였어. 하지만 모든 게 변했다는 걸 곧 느낄 수 있었어. 도청 별관 외벽엔 총탄 자국들이 패어 있었어. 어두운색 옷을 껴입은 행인들의 얼굴은 투명한 흉터가 새겨진 것처럼 일그러져 있었어. 그들과 어깨를 부딪치며 나는 걸었어. 배가 고프지 않았어. 목이 마르지도, 발이 시리지도 않았어. 날이 저물 때까지, 다음 날 새벽이 올 때까지도 계속 걸을 수 있을 것 같았어.
그러다 너를 본 건 금남로에서였어.
카톨린센터 외벽에 방금 학생들이 붙여놓고 간 사진을 들여다 봤을 때였어.
언제든 경찰들이 나타날 수 있었어. 그 순간도 어디서 날 지켜보고 있는지도 몰랐어. 나는 재빨리 사진 한장을 뜯었어. 둘둘 말아서 쥐고 걸었어. 큰길을 건너 골목으로 깊이 들어갔어. 못 보던 음악감상실 간판이 보였어. 오층 계단을 숨차게 걸어올라가, 동굴 같은 안쪽 방에 자리를 잡고 커피를 시켰어. 종업원이 커피를 가져다줄 때까지 꼼짝 않고 기다렸어. 분명 음악 소리가 큰 곳이었을 텐데. 깊은 물속에 잠긴 것처럼 아무것도 들리지 않았어. 마침내 완전히 혼자가 됐을 때 사진을 펼쳤어.
너는 도청 안마당에 모로 누워 있었어. 총격의 반동으로 팔다리가 엇갈려 길게 뻗어가 있었어. 얼굴과 가슴은 하늘을, 두 다리는 벌어진 채 땅을 향하고 있었어. 옆구리가 뒤틀린 그 자세가 마지막 순간의 고통을 증거하고 있었어.
숨을 쉴 수 없었어.
어떤 소리도 낼 수 없었어.
그러니까 그 여름에 넌 죽어 있었어. 내 몸이 끝없이 피를 쏟아낼 때, 네 몸은 땅속에서 맹렬하게 썩어가고 있었어.
그 순간 네가 날 살렸어. 삽시간에 내 피를 끓게 해 펄펄 되사레했어. 심장이 터질 것 같은 고통의 힘, 분노의 힘으로.
p173
오래전 동호와 은숙이 조그만 소리로 나누던 대화를 당신은 기억한다. 왜 태극기로 시신을 감싸느냐고, 애국가는 왜 부르는 거냐고 동호는 물었다. 은숙이 어떻게 대답했는지는 기억나지 않는다.
지금이라면 당신은 어떻게 대답할까. 태극기로, 고작 그걸로 감싸보려던 거야. 우린 도륙된 고깃덩어리들이 아니어야 하니까, 필사적으로 묵념을 하고 애국가를 부른 거야.
그 여름으로부터 이십여년이 흘렀다. 씨를 말려야 할 빨갱이 연놈들. 그들이 욕설을 뱉으며 당신의 몸에 물을 끼얹던 순간을 등지고 여기까지 왔다. 그 여름 이전으로 돌아갈 길은 끊어졌다. 학살 이전, 고문 이전의 세계로 돌아갈 방법은 없다.
p176
내 책임이 있는 거야, 그렇지?
입술을 악문 채, 눈앞에서 일렁이는 파르스름한 어둠을 향해 당신은 묻는다.
내가 집으로 가라고 했다면, 김밥을 나눠 먹고 일어서면서 그렇게 당부했다면 너는 남지 않았을 거야, 그렇지?
그래서 나에게 오곤 하는 거야?
왜 아직 내가 살아 있는지 물으려고.
p177
아니
언니를 만나 할 말은 하나뿐이야.
허락된다면.
부디 허락된다면.
장례식장과 응급실로, 병동과 병원 정문으로 갈라지는 도로를 밝히던 외등들이 일제히 꺼진다. 도로 가운데 그어진 흰색의 직선을 따라 당신은 얼굴을 들고 걷는다. 선득한 빗방울이 당신의 정수리에, 당신의 운동화가 내딛는 아스팔트에 떨어져 번진다.
죽지 마.
죽지 말아요.
6장. 꽃 핀 쪽으로
p178
그 머시매를 따라갔다이.
어시매 걸음은 빠르고 나는 늙었는디, 아무리 걸어도, 따라잡을 수 있어야제. 조금만 옆으로 고개를 돌려주면 옆얼굴이 보일 것인디. 아무 데도 안 둘러보고 앞으로, 앞으로만 가야.
요새 어느 중학생이 그리 짧게 머리를 깍겄냐이. 동그스름한 네 두상을 내가 아는디, 분명히 너였다이. 느이 작은형이 물려준 교복이 너한테는 너무 컸다가 3학년 올라감스로야 겨우 몸에 맞았제. 아침에 네가 책가방 들고 대문을 나서먼, 한없이 뒷모습을 보고 섰고잪게 옷 태가 났제. 그란디 그 머시매는 책가방은 어디다 놓고 빈손으로 훌훌 걸어가더라이. 하얀 하복 반소매 아래 호리호리한 팔뚝이 영락없이 너였단게. 좁은 어깨하고 길쭉한 허리하고 걸음걸이가, 고라니같이 앞으로 수그러진 목이 꼭 너였단게.
네가 나한테 한번 와준 것인디, 지나가는 모습이라도 한번 보여줄라고 온 것인디, 늙은 내가 너를 놓쳐버렸어야. 시장통 좌판 사이로, 골목골목으로 한시간을 뒤지고 댕겨도 없어야. 무릎 속이 쑤시고 어찔어찔 골이 흔들려 바닥에 주저앉았다이. 하지만 동네 사람이라도 만나면 큰일인게, 아직 어지러워도 땅을 짚고 일어섰다이.
시장통까지 널 따라갈 적엔 먼 길인 줄도 몰랐는디, 돌아오는 길엔 바짝바짝 목이 타드라이. 동전 하나 주머니에 안 담고 나와서, 아무 가게라도 들어가 찬물 한잔 얻어묵고 자팠다이. 그래도 누가 비렁뱅이 노인네라고 욕할까 무서운게, 벽이 나올 때마다 손으로 짚음스로 싸묵싸묵 걸어왔다이. 어지럽게 먼지 날리는 공사판 옆을, 입을 꽉 막고 기침함스로 지나왔다이. 갈 적에는 어째서 몰랐으까이. 그렇게 시끄러운 공사판이 있었던 것을. 그렇게 무참하게 길바닥을 뚫어쌓고 있었던 것을.
p180
알 수 없다이, 그날은 왜 내가 이름 한자리 못 불러봤는지. 입술이 달라붙은 사람맨이로, 쌕쌕 숨만 몰아쉼스로 뒤를 밟았는지, 이번에 내가 이름을 부르면 얼른 돌아봐라이. 대답 한자리 안해도 좋은게, 가만히 돌아봐라이.
아니제.
그럴 수 없는 것을 내가 알제.
내 손으로 너를 묻었은게. 하늘책 체육복에다 교련복 윗도리를 입고 있던 너를, 하얀 하복 샤쓰에다 아래위 까만 동복으로 갈아입혔은게. 혁대도 단정하게 매주고 깨끗한 회색 양말을 신겼은게. 베니어판으로 짠 관에다 너를 넣고 청소차에 식도 갈 적에, 너를 지킬라고 내가 앞자리에 탔은게. 청소차가 어디로 가는 줄도 모르고, 네가 있는 뒤쪽만 뚫어져라고 지켜보고 있었은게.
환한 모래언덕에 까만 옷 입은 사람 수백명이 개미같은 관을 들고 걸어가던 것이 생각난다이. 느이 형들이 입술을 꽉 물고서 울고 섰던 것도 아슴아슴 떠오른다이. 느이 아부지 생전에 나한테 하던 말이, 그때 내가 울지도 않고 뗏장 옆에 풀을 한움큼 끊어서 삼켰다든지. 삼키고는 쪼그려앉아서 토하고, 다 토하면 또 풀을 한움큼 끊어다 씹었다든디. 근디 나는 하나도 기억이 안 나야. 묘지로 가기 전 일들만 또렷해야. 관 뚜껑 닫기 전 마지막으로 봤던 네 얼굴이 얼마나 핼쑥했던지. 네 살이 그렇게 희었던 줄 그때 처음 알았다이.
나중에 느이 작은형이 그러드마는 총을 맞고 피를 너무 흘려서 네 얼굴이 그리 희었다고. 그래서 관이 가벼웠다고. 네가 아무리 덜 컸다고 해도, 그렇게 관이 가벼울 수는 없었다고. 그람스로 두 눈에 핏발이 서드라이. 이 원수는 내가 갚을랍니다. 그것이 뭔 소리다냐. 깜짝 놀라서 내가 그랬다이. 나라에서 죽인 동생 원수를 무슨 수로 갚는다냐. 너까장 잘못되면 나도 따라 죽을 거이다.
그라고 삼십년이 흘러가도록, 너하고 느이 아부지 기일에 그 자석이 가만히 서서 입 다물고 있는 것을 보면 마음이 이상해ㅑ. 네가 죽은 것이 지 때문이 아닌디, 왜 친구들 중에 제일 먼저 어깨가 굽고 머리가 하얗게 세었을까이. 저것이 아직도 원수 갚을 생각을 하고 있단가. 생각하면 가슴이 내려앉아야.
그래도 느이 큰형은 흔적 없이 밝게 지낸다이. 한달에 두번 각시하고 같이 내려오고, 혼자도 몰래 당일로 내려와서 밥도 사주고 용돈도 주고, 가까이 사는 네 작은형보다 다정하다이.
느이 아부지나 큰형이나 너나, 허리가 길고 어깨가 수긋한 내력이지야. 기름한 눈매하고 앞니 살짝 벌어진 것은 너하고 큰형이 똑같았지야. 요새도 느이 큰형이 웃음스로 토끼같이 넓적한 앞니가 드러나먼, 눈가에 주름은 깊이 패었어도 청년같이 순진해 보인다이.
느이 큰형이 열한살 묵었을 때 네가 태어났는디, 그 자석은 그때부터 가이내 같은 머시매라서, 애기가 보고 잪다고 학교만 끝나면 달려왔는디, 네가 웃는 것이 이쁘다고, 조심조심 목을 받쳐안고는 까르르 웃을 때까지 흔들었는디, 돌 지난 너를 포대기로 등에 업혀주먼, 겅중겅중 마당을 돎스로 박자도 안 맞는 노래를 불렀는디.
그렇게 가이내 같은 자석이 느이 작은형하고 싸울 줄을 누가 알았겄냐이. 이십년도 넘게 지금까장도 서로 서먹서먹해갖고 긴 이야기를 안 나누게 될 줄을.
느이 아부지 상 치르고 돌아와 삼우제 준비할 적이었다이. 갑자기 뭣이 깨지는 소리가 나서 달려가봤더니, 스물일곱살, 서른두살 먹은 다 큰 머시매들이 씨근거림스로 서로 멱살을 쥐고 있어야.
그 쪼그만 것 손 잡아서 끌고 오면 되지, 몇날 며칠 거기 있도록 너는 뭘 하고 있었냐고! 마지막 날엔 왜 어머니만 갔냐고! 말해봤자 안 들을 것 같았다니, 거기 있으면 죽을 걸 알았담서, 다 알고 있었담서 네가 어떻게!
그란게 느이 작은형이 으어어어, 마로 아니고 뭣도 아닌 소리를 지름스로 지 형한테 달라들더니 방바닥에 넘어뜨렸다이. 짐승맨이로 울부짖음서 말을 한게, 무슨 이야긴지 뜨문뜨문하게밖에 안 들렸다이.
형이 뭘 안다고... 서울에 있었음스로.... 형이 뭘 안다고...
그때 상황을 뭘 안다고오.
둘이 그 꼴로 엎치락뒤치락하는 것을 말릴 생각도 못하고 나는 부엌으로 돌아왔다이. 아무 생각도 하고 싶지 않은게, 아무 소리도 안 들리는 것맨이로 전을 부치고 산적을 꿰고 탕을 끓였다이.
인자는 암것도 모르겄어야.
마지막 날에 내가 너를 찾아갔을 적에, 넥 그리 순하게 저녁에 들어갈라요, 말하지 않았더라면 어땠으까이. 나는 안심을 하고 집에 가서 느이 아부지한테 그랬어야.
여섯시에 문 잠그고 집에 온다요. 다 같이 저녁 묵자고 약속했소.
그란디 일곱시가 되도록 네가 안 들어온게, 느이 작은형하고 나하고 둘이서 집을 나섰다이. 계엄이라 일곱시가 통금인디, 그날 저녁 군대가 들어온다 한게 귀신 그림자도 안 보이더라이. 꼬박 사십분을 걸어서 가본게 상무관에는 불이 꺼지고 아무도 없어야. 도청앞으로 간게 총 든 시민군들이 지키고 섰드라마는. 우리 막내아들을 만나봐야겄다고 사정한게, 어리디어린 그 시민군들은 파랗게 얼굴이 굳어갖고 안된다고, 아무도 들여보내년 안된다고 딱 잘라 말하더라이. 금방 계엄군이 탱크를 몰고 들어온다고, 위험하게 얼른 집으로만 가라고만 하더라이.
제발 들어가게 해주소, 하고 나는 빌었어야.
우리 막내 불러라도 주소, 하고 나는 빌었어야.
보다 못한 느이 작은형이 직접 들어가서 동생을 찾겄다고 한게 시민군 하나가 그러더라이.
지금 들어가면 못 나옵니다. 저 안에는 죽을 각오가 된 사람들만 남았습니다.
느이 작은형이 알겄다고, 일단 들어가게만 해달라고 언성을 높일 적에 내가 말을 막았다이.
그 아그가 기회를 봐서 제 발로 나올라는 것이여... 분명히 나한테 약속을 했단게.
사방이 너무 캄캄해서 내가 그렇게 말을 했다이. 금방이라도 어둠속에서 군인들이 나타날 것 같아서 그렇게 말을 했다이. 이라다가 남은 아들까장 잃어버릴 것 같아서 그렇게 말을 했다이.
그렇게 너를 영영 잃어버렸다이.
내 손으로 느이 작은형 팔을 끌고, 내 발로 돌아서서 집으로 갔다이. 모두 다 죽어버린 것맨이로 캄캄한 사거리를, 사십분을 둘이 울면서 걸어 돌아갔다이.
인자 나는 암것도 알 수 없어야. 겁이 나서 얼굴이 파랗게 굳어있던 시민군들, 어리디어리던 그 자서들도 죽었으까이. 그리 허망하게 죽을 것을, 왜 끝까장 나를 안 들여보내줬으까이.