5.18의 희생자들의 피와 살, 그리고 뼈와 고통, 슬픔의 흔적들. 그 흔적들 속에 숨겨진 소리 없는 절규를 작가는 애끓는 마음을 통해 읽어내어, 그들의 절규에 피와 살을 붙여, 그들의 얼굴과 목소리를 되살려낸다.  이 소설은 광주민주화항쟁에 스러져간 우리의 평범한 이웃들에 건내는 애달픈 진혼가다.

------------

1장. 어린 새

p17

 그 과정에서 네가 이해할 수 없었던 한가지 일은, 입관을 마친 뒤 약식으로 치르는 짧은 추도식에서 유족들이 애국가를 부른다는 것이었다. 관 위에 태극기를 반듯이 펴고 친친 끈으로 묶어놓는 것도 이상했다. 군인들이 죽인 사람들에게 왜 애국가를 불러주는 걸까. 왜 태극기로 관을 감싸는 걸까. 마치 나라가 그들을 죽인게 아니라는 듯이.

 조심스럽게 내가 물었을 때, 은숙 누나는 동그란 눈을 더 크게 뜨며 대답했다.

 군인들이 반란을 일으킨 거잖아. 권력을 잡으려고. 너도 봤을 거 아냐. 한낮에 사람들을 때리고 찌르고, 그래도 안되니까 총을 쐈잖아. 그렇게 하라고 그들이 명령한 거야. 그 사람들을 어떻게 나라라고 부를 수 있어.

 전혀 다른 질문에 대한 대답을 들은 것처럼 너는 혼란스러웠다. 그날 오후엔 유난히 신원 확인이 많이 돼, 복도 여기저기서 동시에 입관이 치러졌다. 흐느낌 사이로 돌림노래처럼 애국가가 불러지는 동안, 악절과 악절들이 부딪치며 생기는 미묘한 불협화음에 너는 숨죽여 귀를 기울였다. 그렇게 하면 나라란 게 무엇인지 이해해낼 수 있을 것처럼.

 

p20

 저녁이면 계엄군과 대치한 외곽 지역에서 총을 맞은 사람들이 실려왔다. 군의 총격에 즉사하거나 응급실로 운반되던 중 숨이 끊어진 이들이었다. 죽은 지 얼마 되지 않은 사람들의 형상이 너무 생생해, 끝없이 쏟아져나오는 반투명한 창자들을 뱃속에 집어넣다 말고 은숙 누나는 강당 밖으로 뛰어나가 토하곤 했다.

 

p21

 저들이 시키는 대로 무조건 무기를 돌려주고 항복할 순 없습니다. 저들이 먼저 우리 시민들의 시신을 돌려줘야 합니다. 끌고 간 시민 수백명도 풀어줘야 합니다. 무엇보다 여기서 일어난 일들의 진상을 전국에 밝혀서, 우리 명예를 회복시킨다는 약속을 받아내야 합니다. 그런 다음 총기를 반납하는 게 옳지 않겠습니까 여러분.

 와아아, 외치며 박수 치는 사람들의 소리가 부쩍 작아졌다고 너는 느낀다. 군인들이 철수한 다음 날 열린 집회를 너는 기억한다. 도청 옥상과 시계탑 위까지 빽빽하게 사람들이 올라가 있었다. 차량이 다니지 않는 바둑판식 거리에, 건물 자리만 남겨놓고 수십만의 사람들이 어마어마한 물결처럼 출렁거렸다. 수십만층의 탑을 아스라하게 쌓아올리며 애국가를 불렀다. 수십만개의 폭죽을 연달아 터뜨리는 것처럼 손뼉을 쳤다. 어제 아침 진수 형이 선주 누나와 나누던 대화를 너는 들었다. 군인들이 다시 들어오면 시민들을 모두 죽일 거란 소문이 돌고 있다고, 공포 때문에 집회의 규모가 빠르게 줄고 있다고 그는 진지한 얼굴로 말했다. 그럴수록 우리들의 수가 만하야 함부로 못 들어올 텐데... 느낌이 안 좋아요. 관들은 점점 많아지는데, 사람들은 점점 집 밖으로 나오지 않아요.

 너무 많은 피를 흘리지 않았습니까. 어떻게 그 피를 그냥 덮으란 말입ㄴ까. 먼저 가신 혼들이 눈을 뜨고 우릴 지켜보고 있습니다.

 

p24

 학교 앞 서점에서 문제집을 사려고 혼자 집을 나선 지난 일요일이었다. 갑자기 거리에 들어찬 무장 군인들이 어쩐지 무서워서 너는 천변길로 내려가 걸었다. 신혼부부로 보이는, 성경과 찬송가 책을 손에 든 양복 입은 남자와 감색 원피스 차림의 여자가 맞은편에서 걸어오고 있었다. 날카로운 고함 소리가 몇차례 위쪽 도로에서 들리더니, 총을 메고 곤봉을 쥔 군인 셋이 언덕배기를 타고 내려어 그 젊은 부부를 둘러쌌다. 누군가를 뒤쫓다 잘못 내려온 것 같았다.

 무슨 일입니까? 지금 저흰 교회에...

 양복 입은 남자의 말이 채 끝나기 전에, 사람의 팔이 어떤 것인지 너는 보았다. 사람의 손, 사람의 허리, 사람의 다리가 어떤 일을 할 수 있는지 보았다. 살려주시오. 헐떡이며 남자가 외쳤다. 경련하던 남자의 발이 잠잠해질 때까지 그들은 멈추지 않고 곤봉을 내리쳤다. 곁에서 쉬지 않고 비명을 지르다 머리채를 잡힌 여자가 어떻게 되었는지 너는 모른다. 덜덜 턱을 떨며 천변 언덕을 기어올라 거리로, 더 낯선 광경이 펼쳐지고 있는 거리로 들어섰기 때문이다.

 

p31

 처음 누나들을 만났을 때 네가 한 말 중 사실이 아닌 게 있었다.

 역전에서 총을 맞은 두 남자의 시신이 리어카에 실려 시위대의 맨 앞에서 행진했던 날, 중절모를 쓴 노인부터 열두어살의 아이들, 색색의 양산을 쓴 여자들까지 인산인해를 이뤘던 저 광장에서, 마지막으로 정대를 본 건 동네 사람이 아니라 바로 너였다. 모습만 본 게 아니라, 옆구리에 총을 맞는 것까지 봤다. 아니, 정대와 너는 처음부터 손을 맞잡고 선두로, 선두의 열기 쪽으로 나아가고 있었다. 귀를 찢는 총소리에 모두 뒤돌아 뛰기 시작했다. 공포다! 괜찮다! 누군가 외치는 소리에 한 무리의 사람들이 앞 대열로 돌아가려는 아수라장 속에서 정대의 손을 놓쳤다. 다시 총소리가 귀를 찢었을 때, 모로 넘어진 정대를 뒤로 하고 너는 달렸다. 셔터가 내려진 전자제품점 옆 담벼락에 아저씨 셋과 함께 붙어섰다. 그들의 일행인 듯한 남자가 합류하려고 달려오다가 어깨에서 피를 뿜으며 엎어졌다.

 시상에, 옥상이여.

 네 옆에 서 있던, 머리가 반쯤 벗겨진 아저씨가 숨차게 중얼거렸다.

 ... 옥상에서 영규를 쐈어.

 옆 빌딩 옥상에서 다시 총성이 울렸다. 비트적비트적 일어나려던 남자의 등이 튀어올랐다. 배에서부터 번진 피가 삽시간에 상반신을 감쌌다. 옆에 선 아저씨들의 얼굴을 너는 올려다봤다. 아무도 말하지 않았다. 머리가 벗어진 아저씨가 입을 막으며 소리 없이 떨었다.

 너는 눈을 가늘게 뜨고 거리 가운데 쓰러진 수십명의 사람들을 봤다. 네가 입은 것과 똑같은 하늘색 체육복 바지가 얼핏 보인 것 같았다. 운동화가 벗겨진 맨발이 꿈틀거린 것 같았다. 네가 뛰쳐나가려는 순간, 입을 막고 떨고 있던 아저씨가 네 어깨를 붙들었다. 동시에 옆 골목에서 청년들 셋이 달려나갔다. 쓰러진 사람들의 겨드랑이에 손을 끼워 막 일으키려 했을 때, 광장 중앙과 군인들 쪽에서 연발 총성이 터졌다. 맥없이 청년들이 쓰러졌다. 너는 거리 맞은편의 넓은 골목을 건너다봤다. 삼십여명의 남자와 여자들이 양쪽 담벼락에 붙어서서 얼어붙은 듯 그 광경을 지켜보고 있었다.

 총성이 멎은 뒤 삼분쯤 지나, 맞은편 골목에서 유난히 키가 작은 아저씨가 한달음에 뛰쳐나왔다. 쓰러진 사람들 가운데 한사람을 향해 온 힘을 다해 달렸다. 다시 연발 총성이 울리고 그가 쓰러지가, 여태 너를 붙들고 있던 아저씨가 두꺼운 손바닥으로 네 눈을 가리며 말했다.

 지금 나가면 개죽음이여.

 아저씨가 네 눈에서 손을 뗀 순간, 마치 거대한 자석에 이끌린 것처럼 맞으면 골목의 남자 둘이 쓰러진 젊은 여자를 향해 달려가 팔을잡고 일으키는 것을 너는 봤다. 이번엔 옥상에서 총성이 울렸다. 남자들이 나동그라졌다.

 더이상 아무도 쓰러진 사람들을 향해 달려가지 않았다.

 정적 속에 십여분의 시간이 흘렀을 때, 군인들의 대열에서 2인 1조로 이십여명이 걸어나왔다. 앞쪽의 쓰러진 사람들을 신속하게 끌고 가기 시작했다. 그때를 기다린 듯, 옆 골목과 맞은편 골목에서도 여남은명이 달려나가 뒤쪽에 쓰러진 사람들을 들쳐업었다. 이번엔 옥상에서 총을 쏘지 않았다. 하지만 너는 정대를 향해 그들처럼 달려가지 않았다. 네 곁에 있던 아저씨들은 숨이 끊어진 일행을 업고 서둘러 골목 사이로 사라졌다. 갑자기 혼자 남은 너는 겁에 질려, 저격수의 눈에 띄지 않을 곳이 어디일까만을 생각하며 벽에 바싹 몸을 붙인 채 광장을 등지고 빠르게 걸었다.

 

p42

 동호야아, 부르는 소리에 너는 고개를 든다.

 엄마가 트럭들 사이로 걸어오고 있다. 이번엔 작은형 없이 혼자다. 가게에 나갈 때 교복처럼 입는 회색 블라우스에 헐렁한 검은 바지를 입었다. 늘 단정히 빗는 커트 머리가 비에 젖어 부세부세 헝클어졌다는 것만 평소와 다르다.

 너도 모르게 반갑게 일어서서 계단을 뛰어내려가다 멈춘다. 엄마가 허겁지겁 계단을 뛰어올라와 네 손을 잡는다.

 집에 가자.

 물에 빠진 사람처럼 무섭게 손을 끌어당기는 엄마를 떨쳐내려고 너는 손목을 뒤튼다. 남은 손으로 엄마의 손가락들을 하나씩 떼어낸다.

 군대가 들어온단다. 지금 집에 가자이.

 억센 엄마의 손가락을 마침내 다 떼어냈다. 너는 날쌔게 강당 안으로 도망친다. 뒤따라 들어오려는 엄마를, 집으로 관을 옮겨가려는 유족들의 행렬이 가로막는다.

 여섯시에 여기 문 닫는대요. 엄마.

 행렬 사이로 너와 눈을 맞추려고 엄마가 깨금발을 디딘다. 우는 아이처럼 힘껏 찡그린 그녀의 이마를 향해 너는 목소리를 높인다.

 문 닫으면 나도 들어갈라고요.

 엄마의 얼굴이 그제야 펴진다.

 꼭 그래라이. 그녀가 말한다.

 해 지기 전에 와라이. 다 같이 저녁밥 묵게.

 

p45

 체머리 떠는 노인의 얼굴을 너는 돌아본다. 손녀따님인가요, 묻지 않고 참을성 있게 그의 말을 기다린다. 용서하지 않을거다. 이승에서 가장 끔찍한 것을 본 사람처럼 꿈쩍거리는 노인의 두 눈을 너는 마주 본다. 아무것도 용서하지 않을 거다. 나 자신까지도.

ㅇㅇㅇ

 

2장. 검은 숨

p46

 우리들의 몸은 열십자로 겹겹이 포개져 있었어.

 내 배 위에 모르는 아저씨의 몸이 구십도로 가로질러 놓였고, 아저씨의 배 위에는 모르는 형의 몸이 다시 구십도로 가로질러 놓였어. 내 얼굴에 그 형의 머리카락이 닿았어. 그 형의 오금이 내 맨발에 걸쳐졌어. 그 모든 걸 내가 볼 수 있었던 건, 내 몸 곁에 바싹 붙어 어른거리고 있었기 때문이야. 

 그들이 다가왔어. 얼룩덜룩한 군복에 철모를 쓰고, 팔엔 적십자 완장을 차고서 빠르게. 그들은 2인 1조로 우리들의 몸을 들어올려 군용 트럭에 던져넣기 시작했어. 곡물 자루들을 운반하는 것같이 기계적인 동작으로 난 내 몸을 놓치지 않으려고 뺨에, 목덜미에 어른어른 매달려 트럭에 올라탔어. 이상하게도 나는 혼자였어. 그러니까 혼들은 만날 수 없는 거였어. 지척에 혼들이 아무리 많아도, 우린 서로를 볼 수도 느낄 수도 없었어. 저세상에서 만나자는 말따윈 의미없는 거였어.

 내 몸은 다른 몸들과 함께 묵묵히 흔들리며 트럭에 실려갔어. 피를 너무 쏟아내 심장이 멈췄고, 심장이 멈춘 뒤로 계속 피를 쏟아낸 내 얼굴은 습자지같이 얇고 투명했어. 눈을 감은 내 얼굴을 본 건 처음이라 더 낯설게 보였어.

 시시각각 저녁이 오고 있었어. 시가지를 벗어난 트럭은 어둑한 벌판 가운데로 난 텅 빈 길을 달렸어. 참나무들이 우거진 낮은 언덕길을 오르자 철문이 나타났어. 트럭이 잠시 멈추자 보초병 둘이 경례를 붙였어. 보초병들이 철문을 열 때 한번, 닫을 때 다시 한번 길고 날카로운 쇳소리가 울렸어. 트럭은 거기서부터 좀더 언덕길을 올라가, 단층 콘크리트 건물과 참나무 숲 사이 공터에서 멈췄어. 

 그들이 운전석에서 걸어나왔어. 트럭 후미의 잠금쇠를 푼 뒤, 다시 2인 1조로 우리들의 팔다리를 잡고 나르기 시작했어. 턱으로, 뺨으로 미끄러지며 매달려 내 몸을 따라가면서 나는 불 켜진 단층 건물을 올려다봤어. 무슨 건물인지 알고 싶었어. 여기가 어디인지, 지금 내 몸이 어디로 가고 있는지.

 공터 뒤의 덤불숲 사이로 그들은 들어갔어. 상관으로 보이는 사람이 지시하는 대로 다시 열십자로 차곡차곡 몸들을 쌓아올렸어. 내 몸은 아래에서 두번째에 끼여 납작하게 짓눌렸어. 그렇게 짓눌려도 더이상 흘러나올 피는 없었어. 고개가 뒤로 꺽인 채 눈을 감고 반쯤 입을 벌린 내 얼굴은 숲 그늘에 가려 더 창백해 보였어. 맴 위에 놓인 남자의 몸에다 그들이 가마니를 덮자, 이제 몸들의 탑은 수십개의 다리를 지닌 거대한 짐슴의 사체 같은 것이 되었어.

 

p49

 너를 문득 떠올린 건 그 낯설고 생생한 밤이 끝나갈 무렵, 먹색 하늘에 마침내 파르스름한 새벽빛이 배어들기 시작하던 무렵이었어. 그렇지, 네가 나와 함께 있었는데. 차가운 몽둥이 같은 게 갑자기 내 옆구리를 내려치기 전까지. 내가 헝겊 인형처럼 고꾸라지기 전까지, 아스팔트가 산산이 부서질 것 같던 발소리를, 고막을 찢는 총소리들 속에서 내가 팔을 뻗어올릴 때까지. 옆구리에서 솟구친 피가 따뜻하게 어깨로, 목덜미로 번지는 걸 느낄 때까지. 그때까지 네가 함께 있었는데.

 

p50

 그렇게 정오가 가까워졌을 때 불현듯 깨달았어.

 이곳에 너는 없었어.

 넌 여기 없을 뿐 아니라, 아직 살아 있었어. 그러니까 혼이란 건 가까이 있는 혼들이 누구인지는 알지 못하면서, 누군가가 죽었는지 죽지 않았는지만은 온 힘으로 생각하면 알 수 있는 거였어. 이 낯선 덤불숲 아래에서, 썩어가는 수많은 몸들 사이에서 아무도 아는 사람이 없다고 생각하자 나는 무서워졌어.

 더 무서워진 건 다음 순간이었어.

 두려움을 견디며 나는 누나를 생각했어. 이글거리는 태양이 남쪽으로, 더 남쪽으로 팽팽히 기우는 걸 보면서, 뚫어지게 내 얼굴을, 감긴 눈꺼풀들을 들여다보면서 누나를, 누나만을 생각했어. 견디기 어려운 고통이 느껴졌어. 누나는 죽었어. 나보다 먼저 죽었어. 혀도 목소리도 없이 신음하려고 하자, 눈물 대신 피와 진물이 새어나오는 통증이 느껴졌어. 눈이 없는데 어디서 피가 흐르는 걸까, 어디서 통증이 느껴지는 걸까. 아무것도 흐르지 않는 내 창백한 얼굴을 나는 들여다봤어. 더러운 내 손들은 움직이지 않았어. 핏물이 산화돼 진한 벽돌색이 된 손톱들 위로 소리 없이 불개미들이 기어나디고 있었어.

 

p57

 썩어가는 옆구리를 생각해.
 거길 관통한 총알을 생각해.
 처음엔 차디찬 몽둥이 같았던 그것.
 순식간에 뱃속을 휘젓는 불덩어리가 된 그것.
 그게 반대편 옆구리에 만들어놓은, 내 모든 따뜻한 피를 흘러나가게 한 구멍을 생각해.
 그걸 쏘아보낸 총구를 생각해.
 차디찬 방아쇠를 생각해.
 그걸 당긴 따뜻한 손가락을 생각해.
 나를 조준한 눈을 생각해.
 쏘라고 명령한 사람의 눈을 생각해.

 

 그들의 얼굴을 보고 싶다. 잠든 그들의 눈꺼풀 위로 어른거리고 싶다. 꿈속으로 불쑥 들어가고 싶다. 그 이마, 그 눈꺼풀들을 밤새 건너다니며 어른거리고 싶다. 그들이 악몽 속에서 피 흐르는 내 눈을 볼 때까지, 내 목소리를 들을 때까지. 왜 나를 쐈지, 왜 나를 죽였지.

 

p59

 가장 먼저 탑을 이뤘던 몸들이 가장 먼저 썩어, 빈 데 없이 흰 구더기가 들끓었어. 내 얼굴이 거뭇거뭇 썩어가 이목구비가 문드러지는 걸, 윤곽선이 무너져 누구도 더이상 알아볼 수 없게 되어가는 걸 나는 묵묵히 지켜봤어.

 

p61

 그들 중 하나가 트럭으로 돌아가, 두 손에 커다란 석유통을 들고 천천히 걸어왔어. 허리와 어깨와 팔로 플라스틱 통들의 무게를 버티며, 비틀거리며 우리들의 몸을 향해 다가왔어.

 이제 끝이구나, 나는 생각했어. 수많은 그림자들이 갸날프고 부드러운 움직임으로 파닥이며 내 그림자에, 서로의 그림자들에 스며들었어. 떨며 허공에서 만났다가 이내 흩어지고, 다시 언저리로 겹쳐지며 소리 없이 파닥였어.

 기다리고 있던 군인들 중 두사람이 걸어나가 석유통을 받아들었어. 침착하게 뚜껑을 열고 몸들의 탑 위에 기름을 붓기 시작했어. 우리들의 몸 모두에게 고르게, 공평하게. 통에 남은 마지막 한방울의 기름까지 털어 뿌린 다음 그들은 뒤로 물러섰어. 마른 덤불에 불을 붙여 힘껏 던졌어.

 

p64

 그때 너는 죽었어.

 그게 어디인지 모르면서, 네가 죽은 순간만을 나는 느꼈어.

 빛이 없는 허공으로 번지며 나는 위로, 더 위로 올라갔어. 캄캄했어. 도시의 어느 방향으로도, 어느 구역, 어느 집에도 불이 켜져 있지 않았어. 눈부신 불꽃들이 뿜어져나오는 곳은 멀리 있는 한 지점뿐이었어. 연달아 쏘아올려지는 조명탄 불빛들을, 번쩍이며 홑튀는 총신들의 불꽃을 나는 봤어.

 그때 그곳으로 가야 했을까. 그곳으로 힘차게 날아갔다면 너를, 방금 네 몸에서 뛰쳐나온 놀란 너를 만날 수 있었을까. 여전히 눈에서 피가 흐르는 채, 서서히 조여오는 거대한 얼음 같은 새벽빛 속에서 나는 어디로도 움직일 수 없었어.

 

 

3장. 일곱개의 뺨

 

 p69

 그 순간 왜 분수대가 떠올랐는지 모른다. 짧게 감은 눈꺼풀 속에서 유월의 분수대가 눈부신 물줄기를 뿜었다. 버스를 타고 그 앞을 지나가던 열아홉살의 그녀는 눈을 질끈 감았었다. 하나하나의 물방울들이 내쏘는 햇빛의 예리한 파편들이, 달궈진 눈꺼풀 안쪽까지 파고들어 눈동자를 찔렀다. 집 앞 정류장에서 내리자마자 그녀는 공중전화 부스로 들어갔다. 책가방을 바닥에 내려놓고, 이마에 흐르는 땀을 주먹으로 훔치며 전화기에 동전을 넣었다. 114버튼을 누르고 기다렸다. 도청 민원실 부탁합니다. 안내받은 전화번호를 누르고 다시 기다렸다. 분수대에서 물이 나오고 있는 걸 봤는데요, 그래서는 안된다고 생각합니다. 떨리던 그녀의 목소리가 점점 또렷해졌다. 어떻게 벌써 분수대에서 물이 나옵니까. 무슨 축제라고 물이 나옵니까. 얼마나 됐다고, 어떻게 벌써 그럴 수 있습니까.

 

p76

 그날 학생식당에서 그녀는 늦은 점심을 먹고 있었다. 큰 소리로 유리문이 열리며 학생들이 뛰어들어왔다. 고함 소리와 함께 사복 형사들이 뒤따라 들어왔다. 식당 곳곳으로 흩어지는 학생들을 쫓아가 곤봉을 휘두르는 사내들의 모습을, 그녀는 숟가락을 쥔 채 멍하게 지켜보았다. 한 형사가 특별히 흥분해 있었다. 기둥 옆에 혼자 앉아 카레라이스를 먹던 퉁퉁한 남자애 앞에 멈추더니, 맞은편에 놓여 있던 접이식 의자를 집어들고 휘둘렀다. 남자애의 이마에서 터진 피가 얼굴을 덮었다. 그녀의 손에서 숟가락이 떨어졌다. 그걸 주우려고 무심코 허리를 수그렸다가 바닥에 떨어진 유인물을 주웠다. 굵은 글씨가 눈에 들어왔다. 학살자 전두환을 타도하라. 그 순간 억센 손이 그녀의 머리채를 움켜쥐었다. 유인물을 뺏고 그녀를 의자에서 끌어냈다.

 

p88

 진수 오빠가 노크를 하고 그 방에 들어온 것은 열한시경이었다. 무전기를 들고 다니는 모습은 늘 봤지만, 총까지 멘 모습은 처음이라 낯설어 보였다. 세명만 남아주시겠습니까,라고 그는 말했다. 아침까지 가두방송을 해주실 세분만 있으면 됩니다. 나머지는 집으로 돌아가세요.

 

p89

 남기로 한 세 여자들 중에서는 선주 언니가 호신용으로 카빈 소총을 받았다. 선주 언니는 작동법에 대해 간단한 설명을 들은 뒤 어설프게 총을 어깨에 걸쳐메고, 따로 뒤돌아 인사하지 않은 채 여대생 둘을 따라 일층으로 내려갔다.그녀들에게 진수 오빠는 말했다. 

 사람들이 나오게 해주세요. 날이 새자마자 도청 앞에 시민들이 꽉 차게, 우린 아침까지만 어떻게든 버텨볼 겁니다.

 남은 여자들은 새벽 한시경에 도청을 나왔다. 진수 오빠가 다른 대학생과 함께 남동성당 골목까지 동행해줬다. 침침한 가로등이 밝혀진 골목 입구에서 그들은 멈춰 섰다.

 여기서 흩어지세요. 아무 집에라도 들어가 숨으세요.

 그녀에게 영혼이 있었다면 그때 부서졌다. 땀에 젖은 셔츠에 카빈 소총을 멘 진수 오빠가 여자들에게 인사하기 위해 웃어 보였을 때. 어두운 길을 되밟아 도청으로 돌아가는 그들의 뒷모습을 얼어 붙은 듯 지켜보았을 때. 아니 도청을 나오기 전 너를 봤을 때 이미 부서졌다. 하늘색 체육복 위에 교련 점퍼를 걸친, 아직 어린애 같은 좁은 어깨에 총을 메고서 고개를 끄덕이고 있는 너를 발견하고 그녀는 놀라며 불렀다. 동호야, 왜 집에 안 갔어? 장전하는 법을 설명하고 있던 청년 앞으로 그녀는 끼어들었다. 이 애는 중학생이에요. 집에 보내야 돼요. 청년은 놀라는 기색이었다. 고등학교 2학년이라고 해서 그런 줄 알았는데... 아까 고등학교 1학년까지 내보낼 때 이 애는 안 갔어요. 그녀는 목소리를 낮춰 항의했다. 말이 안돼요. 어딜 봐서 이 얼굴이 고등학생이에요.

 진수 오빠의 뒷모습이 어둠속으로 완전히 사라지자 여자들이 흩어지기 시작했다. 취사조의 여대생이 그녀에게 물었다. 이 근처에 아는 집 있어? 그녀가 고개를 젓자 여대생이 제안했다. 나하고 전대병원으로 가자. 거기 외사촌이 입원해 있어.

 전대 부속병원 로비는 어두웠고 출입문은 잠겨져 있었다. 한참 문을 두드리자 경비가 손전등을 들고 나왔다. 수간호사도 뒤따라 나왔다. 모두 긴장한 얼굴이었다. 군인이 온 거라고 생각했던 것이다.

 복도와 비상계단도 소등되어 있었다. 손전등을 든 경비의 안내로 여대생의 사촌이 입원한 6인실로 들어섰다. 솜이불을 창에 걸어 놓은 실내는 칠흑같이 어두웠다. 환자들과 보호자들은 어둠속에서 깨어 있었다. 여대생의 이모가 조카의 손을 잡으며 속삭이듯 물었다. 어쩌까나 군인들이 들어온담서. 부상자들은 전부 총살해버린담서.

 그녀가 창 아래 벽에 기대앉자, 옆 침대 환자의 보호자인 듯한 아저씨가 말했다.

 창 앞에 안지 마소, 위험하다마시.

 어둠 때문에 그의 얼굴은 보이지 않았다.

 군인들 퇴각하던 날에도 총알이 날아와서, 여그 창가에 걸어논 옷에 구멍이 뚫렸다마시. 사람이 서 있었으면 어떻게 됐겄는가.

 그녀는 창으로부터 두걸음 옆으로 옮겨앉았다.

 호흡이 고르지 않은 위중한 환자가 있어, 이십분 간격으로 간호사가 손전등을 들고 들어왔다. 서치라이트 같은 불빛이 병실을 훑을 때마다 공포에 굳은 환자들과 보호자들의 얼굴이 드러났다. 어쩌까나. 군인들이 참말로 이 병원까지 쳐들어온다냐. 죄다 총살해 버릴 것 같으면, 해뜨자마자 얼른 퇴원해야 안 쓰겄냐. 니 언니는 의식 차린 지 하루밖에 안됐는디, 꿰맨 자리가 터져블면 어쩌까나. 아주머니가 속삭여 물을 때마다 여대생은 더 작은 소리로 속삭여 대답했다. 저도 모르겠어요, 숙모.

 얼마나 시간이 흘렀을까. 머리서 들려오는 가냘픈 목소리에 그녀는 창 쪽으로 고개를 돌렸다. 메가폰을 쥔 여자의 목소리가 차츰 가까워졌다. 선주 언니는 아니었다.

 시민 여러분, 도청으로 나와주십시오. 지금 계엄군이 시내로 들어오고 있습니다.

 거대한 풍선 같은 침묵이 병실의 모서리들을 향해 부풀어오르는 것을 그녀는 느꼈다. 트럭이 병원 앞길을 지나가며 목소리가 크고 선명해졌다.

 우리는 끝까지 싸울 것입니다. 함께 나와서 싸워주십시오.

 그 목소리가 멀어진 지 십분이 채 되지 않아 군인들의 소리가 들렸다. 그런 소리를 그녀는 처음 들었다. 수천사람의 단호한, 박자를 맞춘 군화발 소리. 보도가 갈라지고 벽이 무너질 것 같은 장갑차 소리. 그녀는 무릎 사이에 얼굴을 묻었다. 어느 침대에선가 어린 환자가 애원했다. 엄마, 창문 닫아줘. 닫았어. 더 꽉 닫어. 꽉 닫았나니까. 마침내 그 소리들이 지나가자 다시 가두방송이 들렸다. 도심의 침묵을 가로질러, 여러 블로 너머에서 아득히 들려오는 소리였다.

 여러분 지금 나와 주십시오. 계엄군이 들어오고 있습니다.

 마침내 도청 쪽에서 총소리가 들렸을 때 그녀는 잠들어 있지 않았다. 귀를 틀어막지도, 눈을 감지도 않았다. 고개를 젓지도, 신음하지도 않았다. 다만 너를 기억했다. 너를 데리고 가려 하자 너는 계단으로 날쌔게 달아났다. 겁에 질린 얼굴로, 마치 달아나는 것만이 살길인 것처럼. 같이 가자, 동호야. 지금 가이 나가야 돼. 위태하게 이층 난간을 붙들고 서서 너는 떨었다. 마지막으로 눈이 마주쳤을 때, 살고 싶어서, 무서워서 네 눈꺼풀은 떨렸다.

 

p96

 그 오전 분수대에서 물줄기가 뿜어져나오지 않았다. 도청 담장 앞에 던져진 주검들 옆으로, 총을 멘 군인들이 새로운 주검들의 다리를 끌고 왔다. 주검들의 등과 뒤통수가 함부로 바닥에 쓸리고 튀어올랐다. 몇몇 군인들은 커다란 방수 모포를 펴서 네 귀를 나눠 잡고, 도청 안마당에서 여남은사람의 주검을 한번에 쓸어담아 나왔다. 어릿어릿 먼 곁눈질로 그 광경을 보며 걷고 있을 때, 빠르게 다가온 군인 셋이 그녀의 가슴에 총을 겨눴다. 어디서 오는 겁니까. 이모 병문안하고 집에 가는 길이에요. 태연스럽게 대답하는 그녀의 인중이 떨렸다.

 그들이 명령한 대로 광장을 등지고 걸어 대인시장 어귀에 이르렀을 때, 거대한 장갑차들이 굉음을 내며 대로를 행진해 지나갔다. 다 끝났다는 걸 모두에게 보여주려는 거야, 얼핏 그녀는 생각했다. 다 죽였다는 걸.

 대학가와 가까운 그녀의 동네는 전염병이 지나간 것처럼 인적없이 괴괴했다. 그녀가 초인종을 누르가 아버지는 기다렸던 듯 달려나와 그녀를 들이고는 대문을 잠갔다. 다락에 그녀를 감춘 뒤, 다락문이 눈에 띄지 않도록 비키니 옷장을 옮겨놓았다. 오후부터 군인들의 발소리가 들렸다. 미닫이문을 열고 누군가를 끌어내는 소리, 무엇인가 부서지는 소리, 애원하는 소리 들이 들려왔다. 아니라우, 우리 아들은 데모 안했어라우, 총 같은 건 만져본 적도 없어라. 그들은 그녀의 집 초인종도 눌렀다. 마당이 쩌렁쩌렁 울리게 아버지가 대답했다. 우리 집은 딸이 고3이오. 아들들은 인자 중학생 초등학생인디, 누가 데모를 했겄소.

 다음 날 저녁 그녀가 다락에서 내려왔을 때, 어머니는 시청 청소차들이 주검들을 싣고 공동묘지로 갔다고 말했다. 분수대 앞에 던져진 주검들뿐 아니라, 상무관에 있떤 관들과 미화긴 시신들까지 모두 싣고 갔다고 했다.

 관공서와 학교가 문을 열었다. 셔터를 내렸던 상점들도 영업을 시작했다. 계엄은 계속되었으므로, 저녁 일곱시 이후에는 통행이 금지되었다. 통금 전이라 해도 수시로 군인들의 검문검색이 이뤄져, 신분증을 가지고 나오지 않은 사람들은 연행되었다.

 수업 결손을 메우기 위해 대부분의 학교가 팔월 초순까지 수업을 했다. 방학하는 날까지 그녀는 날마다 정류장 옆 공중전화 부스에서 도청 민원실에 전화를 걸었다. 분수대에서 물이 나와서는 안된다고 생각합니다. 제발 물을 잠가주세요. 손바닥에서 배어나온 땀으로 수화기가 끈적끈적했다. 예예, 의논해보겠습니다. 민원실 직원들은 인내심 있게 그녀를 응대했따. 꼭 한번 나이 든 여사무원이 말했다. 그만 전화해요, 학생. 학생 같은데 맞지요. 물이 나오는 분수대를 우리가 어떻게 하겠어요. 다 잊고 이젠 공부를 해요.

 

p99

 꿈속처럼 느린 걸음으로 남자들의 모습이 사라졌을 때 여자가 말하기 시작한다. 아니, 말하기 시작한 것 같다. 아니, 여자는 아무것도 말하지 않는다. 소리 없이 입술을 달짝이고 있을 뿐이다. 그 입술의 모양을 그녀는 또렷하게 읽을 수 있다. 서 선생이 원고지에 펜으로 쓴 희곡을 그녀가 직접 입력해 삼교까지 봤기 때문이다.

 

 당신이 죽은 뒤 장례식을 치르지 못해,
 내 삶이 장례식이 되었습니다.

 

 여자가 등을 보이며 뒤돌아선다. 동시에 객선 가운데의 긴 통로로 조명이 덜어진다 누덕누덕 기운 삼베옷을 걸친 건장한 체격의 남자가 통로 끝에 서 있다. 거칠게 숨을 몰아쉬며 그가 무대를 향해 걸어온다. 표정과 동작이 초연했던 좀 전의 남자들과 달리 그의 얼굴은 일그러져 있다. 두 팔이 힘껏 허공으로 뻗어올라온다. 목마른 물고기처럼 그의 입술이 달싹인다. 음성이 높아져야 할 부분에서 신음처럼 끼익, 끽 소리가 난다. 그 입술 모양도 그녀는 읽는다.

 

 어이, 돌아오소.
 어어이, 내가 이름을 부르니 지금 돌아오소.
 더 늦으면 안되오. 지금 돌아오소.

 

 최초의 당혹한 웅성거림이 객석을 쓸고 지나간 뒤, 이제 관객들은 무서운 침묵과 집중력으로 배우들의 입술을 응시하고 있다. 통로를 밝히던 조명이 어두워진다. 무대 중앙의 여자가 객석을 향해 몸을 돌린다. 여전히 소리 없이 초혼(招魂)하며 걸어오는 남자를 침착하게 응시한다. 입술을 열어 달싹인다.

 

 당신이 죽은 뒤 장례를 치르지 못해,
 당신을 보았던 내 눈이 사원이 되었습니다.
 당신의 목소리를 들었던 내 귀가 사원이 되었습니다.
 당신의 숲을 들이마신 허파가 사원이 되었습니다.

 

 마치 눈을 뜬 채 꿈을 꾸는 듯 허공을 향해 끼익, 끽 소리를 내며 여자가 입술을 움직이는 사이, 삼베옷의 남자가 무대에 올라선다. 두 팔을 허공에 휘저으며 여자의 어깨를 스쳐지나간다.

 

 봄에 피는 꽃들, 버드나무들, 빗방울과 눈송이들이 사원이 되었습니다.
 날마다 찾아오는 아침, 날마다 찾아오는 저녁들이 사원이 되었습니다.

 

 눈부신 조명이 다시 객석 사이로 쏘아져내려온다. 앞쪽 좌석에서 그녀가 고개를 돌리자, 열두한살로 보이는 어린 소년이 어느새 통로 가운데 서 있다. 하얀 반소매 체육복 상하의에 흰 운동화를 신고, 조그마한 해골의 머리를 추운 듯 가슴에 끌어안고 있다. 소년이 무대를 향해 걷기 시작하자, 네발짐승들처럼 허리를 구십도로 구부린 배우들의 무리가 어두운 통로 뒤편에 나타나 뒤를 따른다. 남녀가 섞인 여남은명의 그 무리는 검은 머리칼을 괴기스럽게 아래로 늘어뜨린 채 행진한다. 쉴 새 없이 입술을 달싹러리며, 끼이익, 끄으윽, 신음을 내며 체머리를 떤다. 소리가 커질 때마다 자꾸 뒤돌아보며 멈칫거리는 소년을 앞질러, 그들이 먼저 무대 앞 계단에 다다른다. 

 고개를 뒤로 꺽은 채 그 모습을 지켜보던 그녀의 입술이 자신도 모르게 달싹인다. 배우들을 흉내 내듯 목구멍을 쓰지 않고 부른다. 동호야.

행렬 끝에 있던 젊은 남자가 수그린 몸을 돌려 소년에게서 해골의 머리를 빼앗아 든다. 늘어뜨려진 손에서 손으로 옮겨간 해골이, 행렬의 맨 앞에 기역 자로 허리를 구분린 노파에게서 멈춘다. 반백의 긴 머리를 풀어내린 노파는 해골을 보듬고 무대 위로 올라간다. 무대 중앙에 있던 흰옷 입은 여자의 삼베옷이 남자가 순순히 길을 터준다.

 이제 움직이고 있는 사람은 노파뿐이다.

 그 걸음이 너무나 느리고 고요해, 한 관객의 기침 소리가 아득한 바깥 세계의 것처럼 들린다. 소년이 움직이기 시작한 것은 그 순간이다. 순식간에 소년은 무대로 뛰어올라가 노파의 굽은 등허리에 바싹 몸을 붙인다. 업힌 어린아이처럼, 혼령처럼 살금살금 뒤를 따른다. 

 

 .....동호야.

 

 그녀는 아랫입술 안쪽을 악문다. 색색의 만장들이 일제히 무대 천장에서 내려오는 것을 본다. 무대 아래 네발짐승처럼 모여 있던 배우들이 별안간 꼿꼿이 허리를 편다. 노파가 걸음을 멈춘다. 업힌 아이처럼 바싹 붙어 걷던 소년이 객석을 향해 몸을 돌린다. 그 얼굴을 바로 보지 않기 위해 그녀는 눈을 감는다.

 

 네가 죽은 뒤 장례식을 치르지 못해, 내 삶이 장례식이 되었다.
 네가 방수 모포에 싸여 청소차에 실려간 뒤에.
 용서할 수 없는 물줄기가 번쩍이며 분수대에서 뿜어져나온 뒤에.
 어디서나 사원의 불빛이 타고 있었다.
 봄에 피는 꽃들 속에, 눈송이들 속에, 날마다 찾아오는 저녁들 속에. 다 쓴 음료 병에 네가 꽂은 양초 불꽃들이.

 

 뜨거운 고름 같은 눈물을 닦지 않은 채 그녀는 눈을 부릅뜬다. 소리 없이 입술을 움직이는 소년의 얼굴을 뚫어지게 응시한다.

 

 

4장. 쇠와 피

p104

 평범한 볼펜이었습니다. 모나미 검정 볼펜. 그걸 손가락 사이에 교차시켜 끼우게 했습니다.

 그야 왼손이죠. 오른손으론 조서를 써야 하니까.

 예, 그렇게 비틀었습니다. 이 방향으로도 이렇게.

 처음엔 견딜 만했습니다. 하지만 날마다 같은 곳에 그렇게 하니까 상처가 깊어졌어요. 피와 진물이 섞여 흘렀습니다. 나중엔 이 자리에 하얀 뼈가 들여다보였습니다. 뼈가 드러나니까 알코올에 적신 약솜을 끼어주더군요.

 제가 수감된 방에는 남자들만 약 아흔명이 있었는데, 절반 이상이 같은 자리에 약솜을 끼우고 있었습니다. 대화는 금지돼 있었어요. 손가락 사이에 끼운 약솜을 눈으로 확인하면, 잠깐 서로 마주보다가 시선을 피했습니다.

 저도 그렇게 생각했습니다. 뼈가 드러났으니 그 자리는 이제 그만할 거라고. 그렇지 않았습니다. 더 고통스러울 걸 알고, 약솜을 뺀 다음 더 깊게 볼펜을 끼우고 짓이겼습니다.

 

p107

 그곳의 한끼 식사는 식판에 담긴 밥 한줌과 국 반그릇, 김치가 전부였습니다. 그것을 우리들은 2인 1조로 나눠 먹었습니다. 김진수와 한조가 되었을 때, 서서히 혼이 빨려나간 짐승과 같은 상태였던 나는 안도했습니다. 그는 많이 먹을 것 같은 사람이 아니었으니까요. 얼굴이 창백하고 눈언저리는 병자처럼 어두웠으니까요. 두 눈은 생기도 표정도 없이 공허하게 번쩍였으니까요.

 한달 전 그의 부고를 들었을 때 가장 먼저 떠오른 것이 바로 그 눈이었습니다. 멀건 콩나물국에서 콩나물을 골라 먹다 말고 멈칫 나를 보던 눈. 그가 콩나물을 다 먹어버릴까봐 긴장하고 있던 나를, 우물거리는 그의 입술을 혐오하며 쏘아보고 있던 나를 묵묵히 마주 바라보던, 나와 똑같은 짐승이었던 그의 차갑고 공허한 두 눈.

 

p109

 김진수는 우리 중에서도 특별히 변칙적인 고문을 더 당한 것으로 알고 있습니다. 아마 외모가 여성적이어어서 그랬던 것 같습니다. 

 아니요, 당시에는 말하지 않았습니다. 십년쯤 지난 뒤에 들은 이야깁니다.

 성기를 꺼내 탁자에 올려놓게 하고, 나무 자로 내려치겠다며 위협했다고 했습니다. 하체를 발가벗기고 영창 앞 잔디밭으로 데려가, 팔을 뒤로 묶고 엎드려 있게 했다고 했습니다. 굵은 개미들이 세시간 동안 김진수의 사타구니를 물었다고 했습니다. 석방된 뒤 거의 매일 밤 벌레와 관련된 악몽을 꾸었다고 들었습니다.

 

 

 그전에는 모르는 사이였습니다. 오며 가며 상황실에서 얼굴만 봤지요.

 김진수는 그해에 대학 신입생이었으니, 아직 뺨에 솜털이 나 있었습니다. 얼굴이 희고 속눈썹이 유난히 짙어서 눈에 띄었습니다. 볼 때마다 무척 빠르게 걸어다닌다는 느낌이었는데, 팔다리와 허리가 가늘고 길어서 더 그렇게 보였던 것 같습니다.

 희생자 파악하고, 시신 관리를 총괄하고, 관이며 태극기를 구해와서 장례 준비하고... 주로 그런 일을 했던 걸로 압니다.

 사실 그 친구가 마지막 밤에 남을 거라곤 생각 못했습니다. 총기를 모두 회수한 뒤 계엄군이 들어오기 전에 도청을 깨끗이 비워놓자고, 단 한사람도 희생되어선 안된다고 말하는 학생들 중 하나일 거라고 생각했습니다. 저녁에 남은 걸 보고도 의심했습니다. 저 친구는 자정이 되기 전에 빠져나갈 거라고.

 김진수와 나를 포함해 열두명이 한조가 되어 이층 소회의실에 모였습니다. 처음이자 마지막이라고 생각하고 통성명을 했습니다. 각자 간단한 유서를 써서 이름과 주소를 적고는 찾기 쉽도록 셔츠 앞주머니에 넣었습니다. 당장 닥쳐올 일들이 실감나지 않았던 것도 사실입니다. 하지만 계엄군이 시내로 진입했다는 무전이 들어오기 시작하자 그제야 긴장이 되었습니다.

 상황실장이 복도로 김진수를 불러낸 건 자정 무렵이었습니다. 여자들을 호위해 도청 밖으로 데려다주라는 상황실장의 우렁우렁한 목소리가 회의실 안까지 들렸습니다. 상황실장이 김진수를 지목해 그 일을 맡긴 건, 유난히 갸날프게 생긴 그 친구가 돌아오지 않아도 좋다는 생각에서였을 거라고 나는 짐작했습니다. 김진수가 자신의 총을 챙겨 굳은 얼굴로 나가는 모습을 보며 생각했던 기억이 납니다. 그래, 너는 돌아오지 말아라.

 그러나 짐작과 달리 그는 삼십분이 채 지나지 않아 돌아왔습니다. 나갈 때와는 달리 긴장이 완전히 풀린 얼굴이었습니다. 밀려오는 졸음을 견딜 수 없는 듯 가늘게 뜬 눈으로 총을 벽에 세워놓더니, 창 아래 놓인 인조가죽 소파에 모로 누워 잠들어버렸습니다. 내가 흔들어 깨우자 신음하듯 말했습니다. 죄송합니다. 조금만 잘게요. 

 이상한 일은, 그 모습을 지켜보던 다른 사람들도 별안간 기운이 빠진 듯 벽에 기대앉았다는 것입니다. 하나둘 꾸벅꾸벅 졸기 시작했습니다. 나도 막막한 마음이 되어 김진수가 누운 소파 옆에 웅크려앉았습니다. 어떻게 설명할 수 있을까요. 졸음이 오기는커녕 신경이 가장 날카롭게 곤두서야 할 시간, 냉정한 정신력에 의지해야 할 그 시간에, 우리들은 눈도 귀도 입도 없는 뭉클뭉클한 잠 속으로 정신없이 빠져들고 있었습니다.

 조심스럽게 문이 열렸다가 소리 없이 닫히는 기척에 나는 눈을 떴습니다. 조그맣고 말간 얼굴에 알밤처럼 머리를 깍은 중학생이 어느 사이 소파에 기대앉아 있었습니다.

 누구냐, 나는 잠긴 목소리로 물었습니다.

 너 누구냐, 어디서 왔어.

 눈을 질끈 감으며 소년이 대답했ㅅ브니다.

 너무 졸려요, 조금만 잘게요, 여기서 형들이랑.

 그 목소리를 듣자마자, 죽은 듯 잠들어 있던 김진수가 소스라치며 눈을 떴습니다.

 어떻게 된 거야.

 소년의 팔을 붙들며 그가 숨죽여 물었습니다.

 내가 아까 가라고 하지 않았어. 너도 간다고 하지 않았어.

 김진수의 목소리가 점점 높아졌습니다.

 네가 대체 여기서 뭘 하겠다는 거야. 총 쏠 줄은 알어.

 머뭇머뭇 소년이 말했습니다.

 .... 화내지 마요, 형.

 두사람의 실랑이에 사람들이 부스럭부스럭 깨어났습니다. 소년의 팔을 놓지 않은 채 김진수는 반복해서 말했ㅅ브니다.

 적당한 때 너는 항복해라. 알겠지, 항복하라고. 손들고 나가. 손들고 나가는 애를 죽이진 않을 거야.

 

p117

 아니요, 쏘지 않았습니다.

 누구도 죽이지 않았습니다.

 계단을 올라온 군인들이 어둠속에서 다가오는 것을 보면서도, 우리 조의 누구도 방아쇠를 당기지 않았습니다. 방아쇠를 당기면 사람이 죽는다는 걸 알면서 그렇게 할 수가 없었습니다. 우린 쏠 수 없는 총을 나눠 가진 아이들이었던 겁니다.

 

 

 나중에 알았습니다. 그날 군인들이 지급받은 탄환이 모두 팔십만발이었다는 것을. 그때 그 도시의 인구가 사십만이었습니다. 그 도시의 모든 사람들의 몸에 두발씩 죽음을 박아넣을 수 있는 탄환이 지급되었던 겁니다. 문제가 생기면 그렇게 하라는 명령이 있었을 거라고 나는 믿고 있습니다. 학생 대표의 말대로 우리가 총기를 도청 로비에 쌓아놓고 깨끗이 철수했다면, 그들은 시민들에게 총구를 겨눴을지도 모릅니다. 그 새벽 캄캄한 도청 계단을 따라 글자 그대로 콸콸 소리를 내며 흐르던 피가 떠오를 때마다 생각합니다. 그건 그들만의 죽음이 아니라, 누군가의 죽음을 대신한 거였다고. 수천곱절의 죽음, 수천곱절의 피였다고.

 방금 전까지 눈을 마주치며 대화했던 사람들에게서 흘러나오는 피를 곁눈질로 보며, 누가 죽고 누가 남았는지도 파악하지 못한 채 나는 복도에 머리를 박고 엎드렸습니다. 그들이 매직으로 내 등에 무엇인가 글씨를 쓰는 것을 느꼈습니다. 극렬분자, 총기 소지. 그렇게 썼다는 것을 상무대 유치장에서 다른 사람이 알려주었습니다.

 

p118

 김진수와 나는 여전히 식판 하나를 받아 한줌의 식사를 나눠 먹었습니다. 몇시간 전에 조사실에서 겪은 것들을 뒤로하고, 밥알 하나, 김치 한쪽을 두고 짐승처럼 싸우지 않기 위해 인내하며 묵묵히 숟가락질을 했습니다. 실제로 어떤 사람들은 식판을 내려놓고 소리쳤습니다. 참을 만큼 참았어. 그렇게 네가 다 쳐먹으면 난 어쩌란 말이야. 으르렁거리는 그들 사이로 몸을 밀어넣으며 한 남자애가 더듬더듬 말했습니다. 그, 그러지 마요. 좀처럼 입을 떼지 않는, 늘 주눅 든 듯 조용한 아이였기에 나는 놀랐습니다.

 우, 우리는... 주, 죽을 가, 각오를 했었잖아요.

 김진수의 공허한 눈이 내 눈과 마주친 것은 그때였습니다.

 순간 깨달았습니다. 그들이 원한 게 무었이었는지. 우리를 굶기고 고문하면서 그들이 하고 싶었던 말이 무엇이었는지. 너희들이 태극기를 흔들고 애국가를 부른 게 얼마나 웃기는 일이었는지, 우리가 깨닫게 해주겠다. 냄새를 풍기를 더러운 몸, 상처가 문드러지는 몸, 굶주린 짐승 같은 몸뚱어리들이 너희들이라는 걸, 우리가 증명해주겠다.

 

 

p123

 재판장님이 입장하십니다.

 서기의 말이 떨어지자 앞문이 열리며 법무장교 셋이 차례로 들어왔습니다. 깊이 고개를 숙이고 있던 내 귀에 이상한 소리가 들린 건 그때였습니다. 앞에서 두번째 줄 정도였습니다. 반쯤 고개를 들고 나는 앞쪽을 살폈습니다. 누군가가 소리 죽여 흐느끼듯 애국가 첫 소절을 부르기 시작하고 있었습니다. 그가 어린 영재라는 걸 깨달았을 때, 누가 먼저랄 것 없이 이미 합창이 시작돼 있었습니다. 자력에 이끌린 것처럼 나도 따라 불렀습니다. 죽은 듯이 고개를 숙이고 있던 우리들이, 땀과 피와 고름이었던 우리들이 조용히 노래 하는 동안, 어째서였는지 그들은 제지하지 않았습니다. 소리치지도, 개머리판으로 머리를 내리치지도, 위협했던 대로 벽으로 몰아 넣어 총살하지도 않았습니다. 우리가 노래를 끝마칠 때까지, 소절과 소절 사이마다 위태한 침묵이 풀벌레 소리와 함께, 간이재판소의 서늘한 공기 속에서 도사리고 있었습니다.

 

 

p132

 군인들의 명령대로 이층 복도에 머리를 박고 있던 우리들이 도청 마당으로 끌려내려간 건 동틀 무렵이었습니다. 뒤로 손이 묶인 채 마당 가장자리에 일렬로 무릎 꿇고 앉은 우리들에게 한 장교가 다가왔습니다. 그는 흥분해 있었습니다. 한사람씩 군화로 등을 밟아 흙바닥에 머리를 박게 하며 욕설을 퍼부었습니다. 씨팔, 내가 월남 갔다 온 사람이야. 내 손으로 죽인 베트콩 새끼들이 서른명도 넘는다, 더러운 빨갱이 새끼들. 그때 김진수는 내 옆에 있었습니다. 장교가 김진수의 등을 밟자, 하필 자갈에 찧은 이마에서 피가 흘렀습니다.

 다섯명의 어린 학생들이 이층에서 두 손을 들고 내려온 것은 그때였습니다. 계엄군이 대낮같이 조명탄을 밝히며 기관총을 난사하기 시작했을 때 내가 소회의실 캐비닛에 숨으라고 명령했던 네명의 고등학생과, 소파에서 김진수와 짦은 실랑이를 벌였던 중학생이었습니다. 더이상 총소리가 들리지 않자 그들은 김진수의 말대로 무기를 버리고 항복하러 내려온 것이었습니다.

 저 새끼들 봐라, 김진수의 등을 밟고 있던 장교가 여전히 흥분한 채 소리쳤습니다. 씨팔 빨갱이들, 항복이다 이거냐? 목숨은 아깝다 이거냐? 한발을 여전히 김진수의 등에 올린 채 그는 M16을 들어 조준했습니다. 망설이지 않고 학생들에게 총을 갈겼습니다. 나도 모르게 고개를 들어 그의 얼굴을 봤습니다. 씨팔, 존나 영화 같지 않냐. 치열이 고른 이를 드러내며 그가 부하를 향해 말했습니다.

 아시겠습니까. 그러니까이 사진에서 이 아이들이 나란히 누워있는 건, 이렇게 가지런히 옮겨놓은 게 아닙니다. 한줄로 아이들이 걸어오고 있었던 겁니다. 우리가 시킨 대로 두 팔을 들고, 줄을 맞춰 걸어오고 있었던 겁니다.

 

p154

 그러나 스무살이 되기 전까지 당신이 했던 일은 달랐다.

 당신은 하루에 열다섯시간 일했고 한달에 이틀 쉬었다. 봉급은 남자 공원의 절반이었다. 잔업수당은 없었다. 하루 두알씩 타이밍을 먹어도 잠이 쏟아졌다. 선 채로 잠들면 작업반장이 욕을 하거나 뺨을 쳤다. 오후부터 묵직하게 붓던 종아리와 발등, 물품을 빼돌릴지 모른다는 이유로 퇴근하는 여공들을 몸 수색하던 경비들. 브래지어 언저리를 더듬을 때 느려지던 그들의 손. 치욕. 기침. 잦은 코피. 두통. 가래를 뱉으면 뭉쳐나오던 거무스레한 실밥 덩어리들.

 우리는 고귀해.

 성희 언니는 자주 그렇게 말했다. 쉬는 일요일마다 청계피복노조 사무실에서 노동법 강의를 듣던 그녀는, 자신이 배운 것을 빼곡히 노트에 정리해와 소모임에서 강의했다. 한자 공부를 할 거란 성희 언니의 말에 당신은 별다른 두려움 없이 그 모임에 들어갔었다. 실제로 언니들은 모이자마자 한자부터 공부했다. 1800자는 알아야 해, 신문은 읽을 수 있어야지. 각자 펜글씨 공책에 서른자씩 쓰고 암기하는 일이 끝나면 성희 언니의 어색한 노동법 강의가 시작되었다. 그러니까.... 우리는 고귀해. 말문이 막히거나 기억이 얼른 안 날 때마다 성희 언니는 추임새처럼 그 말을 넣었다. 헌법에 따르면, 우리는 모든 사람들과 똑같이 고귀해. 그리고 노동법에 따르면 우리에겐 정당한 권리가 있어. 그녀의 목소리는 초등학교 여선생님처럼 상냥하고 낭랑했다. 이 법을 위해 죽은 사람이 있어.

 어용노조를 큰 표 차로 꺽고 뽑힌 노조 간부들을 구사대와 경찰들이 끌고 가던 날, 2교대를 하려고 기숙사를 나와 출근하던 여공들 수백명이 사람의 벽을 만들었다. 많아야 스물한두살, 대부분이 십대인 여자애들이었다. 제대로 된 구호도 노래도 없었다. 잡아가지 마요. 잡아가면 안돼요. 소리치는 그녀들을 향해 각목을 든 구사대가 달려들었다. 헬멧과 방패로 중무장한 경찰 백여명을, 차창마다 철망이 쳐진 전경차들을 당신은 보았다. 무엇 때문에 저렇게 무장했을까, 얼핏 생각했다. 우린 싸움을 못하고 무기도 없는데.

 성희 언니가 큰 소리로 외친 것은 그때였다. 옷을 벗어. 우리 다 같이 옷을 벗자. 누가 먼저랄 것 없이 그녀들은 옷을 벗었다. 잡아가지 마요. 소리치며 블라우스와 치마를 벗어 흔들었다. 그녀들이 지닌 가장 은밀한 것, 모든 사람들이 귀중하다고 말하는 것, 처녀들의 벗은 몸을 그들이 만질 수 없을 거라고 믿었기 대문이다. 그러나 그들은 브래지어 차림의 여자애들을 흙바닥에 끌고 갔다. 등허리의 맨살이 모래에 긁혀 피가 흘렀다. 머리가 헝클어지고 속옷이 찢겼다. 안돼, 잡아가면 안돼, 고막이 터질 듯 쨍쨍한 울부짖음 사이로, 그들은 수십명의 노조원들을 곤봉과 각목으로 때려 닭장차에 집어넣었다.

 열여덟살인 당신은 마지막에 끌려가다 모랫바닥에 미끄러져 넘어졌다. 서두르던 사복형사가 당신의 배를 밟고 옆구리를 걷어 찬 뒤 가버렸다. 흙바닥에 엎드린 당신의 의식이 아득하게 흐려졌다 돌아왔다. 여자애들의 쨍쨍한 고함 소리가 멀어졌다 가까워졌다.

 응급실로 업혀간 당신은 장파열 진단을 받았고, 입원해 있는 동안 해고 통보를 들었다. 퇴원한 후 언니들과 함께 복직투쟁을 하는 대신 당신은 고향 집으로 내려갔다. 몸을 추스린 뒤 인천으로 돌아와 다른 방직공장에 취직했지만 일주일을 못 채우고 해고됐다. 당신의 이름이 블랙리스트에 올라 있었던 것이다. 결국 당신은 이년 남짓한 방직공 경력을 포기하고, 친척의 주선으로 광주 충장로의 양장점에 미싱사 시다로 취직했다. 급료는 여공 시절보다 더 형편 없었지만, 그만두고 싶을 때마다 막연히 성희 언니의 목소리가 떠올랐다... 그러니까, 우리는 고귀하니까. 그럴 때면 그녀에게 편지를 썼다. 나는 잘 지내고 있어요, 언니. 쉽게 미싱사가 될 수 있을 것 같지는 않지만요. 기술이 어렵다기보다는 잘 안 가르쳐주는 게 문제에요. 그래도 인내심 있게 배워봐야죠. 기술, 인내심 같은 단어들은 소모임에서 배웠던 한자로 반듯하게 획을 살려 썼다. 성희 언니가 자주 걸음하는 산업선교회 주소로 편지를 부치면 답장은 아주 가끔씩 짧게 왔다. 그래야지, 너는 어디서 뭘 해도 잘할 거야. 그렇게 한해 두해 시간이 흐르며 서로 연락이 끊어졌다.

 어렵게 배운 기술로 삼년 만에 미싱사가 됐을 때 당신은 스물한 살이었다. 그해 가을, 당신보다 어린 여공이 야당 당사에서 농성을 하다 죽었다. 사이다 병 조각으로 스스로 손목을 긋고 삼층에서 뛰어내렸다는 정부의 발표를 당신은 믿지 않았다. 퍼즐 맞추기를 하듯 신문에 실린 사진들을, 검열되어 텅 빈 공란들을, 격앙된 사설의 어둑한 반대편을 들여다봐야 했다.

 당신의 배를 밟고 옆구리를 찼던 사복형사의 얼굴을 당신은 잊지 않았다. 중앙정보부가 구사대들을 직접 교육하고 지원하고 있다는 것을, 그 폭력의 정점에 군인 대통령이 있다는 것을 잊지 않았다. 당신은 긴급조치 9호의 의미를 이해했고, 대학 정문에서 스크럼을 짠 학생들이 외치는 구호를 이해했다. 이어서 부산과 마산에서 일어난 일들을 이해하기 위해 신문 속 퍼즐을 맞췄다. 부서진 전화 부스들과 불타는 파출소, 투석적은 벌이는 성난 군중. 오직 상상으로 유추해야 하는 공란 속의 문장들.

 대통령이 돌연히 죽은 시월 당신은 자문했다. 이제 폭력의 정점 이 사라졌으니, 더이상 그들은 옷을 벗어들고 울부짖는 여공들을 끌고 가지 못하는가? 넘어진 여자애의 배를 밟아 창자를 터뜨리지 못하는가? 박 대통령의 신임을 받았다는 젊은 소장이 장갑차를 이끌고 서울에 입성하는 것을, 곧이어 중앙정보부장을 겸직하는 것을 당신은 신문을 통해 지켜보았다. 조용히 소름이 끼쳤다. 무서운 일이 생길 것 같아. 임 양은 신문이 그렇게 좋아? 중년의 재단사는 당신을 놀리곤 했다. 젊어 좋겄어. 그렇게 잔글씨가 안경도 없이 뵈고. 

 그리고 그 버스를 당신은 보았다. 

양장점 주인이 대학생 아들을 데리고 영암의 동생네돌 내려가러빈 화창한 봄날이었다. 낮에 갑자기 할 일이 없어져 서름서름 거리를 걷던 당신의 눈에 그 시내버스가 들어왔다. 계엄 해제, 노동삼권 보장, 차창 아래 길게 걸어놓은 흰 현수막에 파란 매직으로 쓴 글씨가 보였다. 작업복 차림의 전남방직 여공 수십명이 버스를 가득 채우고 있었다. 햇빛을 못 봐 데친 버섯같이 얼굴이 창백한 여자애들이 나무 막대들을 들고, 차창 밖으로 팔을 내밀어 차체를 치며 노래를 불렀다. 당신이 기억하는 쨍쨍한 목소리, 무슨 새나 어린 짐승들이 한꺼번에 내는 것 같은 목소리였다.

 우리들은 정의파다 좋다 좋다
 같이 죽고 같이 산다 좋다 좋다
 무릎 꿇고 살기보다 서서 죽길 원한단다
 우리들은 정의파다

 똑똑히 기억하는 그 노래를 따라, 당신은 홀린 듯 그 버스가 사라진 방향으로 걸었다. 수십만의 군중이 거리 곳곳에서 몰려들어 광장으로 향하고 있었다. 이른 봄부터 스크럼을 짜고 몰려다니던 대학생들은 보이지 않았다. 노인들, 초등학생 아이들, 작업복 차림의 남녀 공원들, 넥타이를 맨 젊은 남자들, 투피스에 힐은 신은 젊은 여자들, 그것도 무기라고 장우산을 들고 나온 새마을 점퍼 차람의 아저씨들. 그 모든 사람들의 행렬 앞에, 신역에서 총을 맞은 청년들의 시신 두구가 수레에 실려 광장으로 나아고 있었다.

 

p161

 거대한 빙하가 당신의 몸을 내리누른다. 고체인 당신은 으스러진다. 빙하 아래로 흐르고 싶다고 당신은 생각한다. 바닷물이든 석유든 용암이든, 어떤 액체가 되어서 이 무게로부터 벗어나야 한다. 그 길밖에 없다.

 

p162

 입원 병동이 있는 본관 로비에는 조명이 완전히 꺼져 있다. 별관 측면의 응급실 입구에만 환하게 불이 밝혀져 있다. 방금 위급한 환자를 수송한 듯, 지방 병원의 구급차 한대가 비상 깜박이를 켜고 뒷문을 열어놓은 채 정차하고 있다.

 활짝 열려 있는 현관을 통과해 당신은 응급실 복도에 들어선다. 신음과 다급한 목소리, 무엇인가를 세차게 흡입해내는 의료기구의 기계음, 환자용 침상을 옮기는 소란한 바퀴 소리를 듣는다. 수납창구 앞에 여러줄로 놓인 등받이 없는 의자에 걸터앉는 당신에게 창구의 중년 여자가 묻는다.

 어떻게 오셨습니까?

 .....누구를 만나려고요.

 사실이 아니다. 당신은 여기서 아무도 만나기로 하지 않았다. 면회가 허락되는 아침이 된다 해도, 성희 언니가 당신을 만나기를 원할 것인지도 알지 못한다.

 등산복 차림의 중년 남자가 동료의 부축을 받으며 걸어들어온다. 거친 솜씨로 팔에 부목을 한 것으로 미루어 야간산행 중 부상당한 것 같다. 괜찮아, 이제 다 왔어. 배낭 두개를 겹쳐 어깨에 둘러 멘 동료가 다친 남자를 달랜다. 두사람의 얼굴이 비슷한 표정으로 일그러져 있는 것을 당신은 본다. 다시 보니 동료가 아니라 형제인 듯 이목구비가 닮아 있다. 조금만 참아. 곧 의사가 올거야.

 곧 의사가 올거야.

 주문처럼 그가 되풀이하는 말을 들으며 당신은 의자 끝에 꼼짝 않고 앉아 있다. 오래전 당신에게 의사가 되고 싶다고 말했던 여자애를 생각한다.

 성희 언니가 소모임에 신입 회원을 받자고 해서 당신이 말을 꺼내봤던 아이였다. 당신처럼 중학교를 마치기 전에 나이를 속이고 공장에 들어온, 키가 자그마하고 웃음이 송글송글하던 그애는 거절했다. 저는 조합 활동 적극적으로 못해요. 해괴되면 안되거든요. 동생 학비도 보내야 하고, 언젠가 저도 공부를 할 거니까요. 의사가 되고 싶어요.

 장파열로 당신이 입원해 있었을 때였다. 명동성당에서 농성하다 잠깐 문명 온 동료가 말했다.

 .....사방에 흩어진 우리 신발을, 정미가 전무 모아서 노조 사무실에 갖다놨대. 쪼그만 게 그렇게 서럽게 울더란다.

 연행되지 않으려고 몸부림치다 벗겨진 신들이 사방에 널려 있었을 것이다. 열여섯살 난 그애는 무엇이 자신을 울게 하는지도 모르면서 그 신들을 가슴에 안고 이층 노조 사무실로, 아무도 남아 있지 않은 빈방으로 걸어올라갔을 것이다.

 그날 오후 회진을 온 말쑥한 얼굴의 의사와 레지던트와 인턴들을 당신은 유심히 올려다봤다. 그애는 그들 같은 의사가 될 수 없다고 그때 생각했다. 동생을 대학 졸업시키면 이십대 중반이 될 것이고, 그때부터 중학교 검정고시를 준비한다 해도.... 아니, 그애는 그때까지 공장에서 버티지도 못할 것이다. 그애는 자주 코피를 쏟았고 깊은 기침을 했다. 발육이 덜 돼 열무처럼 가는 종아리로 방직기 사이를 뛰어다니다가, 기둥에 기대서서 의식을 잃듯 깜박 졸았다. 어떻게 이렇게 시끄러워요? 아무 말도 안 들려요. 처음 일을 배우던 날엔 방직기 소음에 놀라, 겁에 질린 듯 동그랗게 뜬 눈으로 당신에게 외쳤다.

 

p166

  기억해달라고 윤은 말했다. 직면하고 증언해달라고 말했다.

 그러나 그것이 어떻게 가능한가.

 삼십 센티 나무 자가 자궁 끝까지 수십번 후벼들었다고 증언할 수 있는가? 소총 개머리판이 자궁 입구를 찢고 짓이겼다고 증언할 수 있는가? 하혈이 멈추지 않아 쇼크를 일으킨 당신을 그들이 통합병원에 데려가 수혈받게 했다고 증언할 수 있는가? 이년 동안 그 하혈이 계속되었다고, 혈전이 나팔관을 막아 영구히 아이를 가질 수 없게 되었다고 증언할 수 있는가? 타인과, 특히 남자와 접촉하는 일을 견딜 수 없게 됐다고 증언할 수 있는가? 짧은 입맞춤, 뺨을 어루만지는 손길, 여름에 팔과 종아리를 내놓아 누군가의 시선이 머무는 일조차 고통스러웠다고 증언할 수 있는가? 몸을 증오하게 되었다고, 모든 따뜻함과 지극한 사랑을 스스로 부숴뜨리며 도망쳤다고 증언할 수 있는가? 더 추운 곳, 더 안전한 곳으로 오직 살아남기 위하여.

 

p169

 모든 셔터가 내려져 있었다.

 모든 창문이 걸어잠겨 있었다.

 그 어두운 거리 위로, 얼음의 눈동자 같은 열이레 달이 당신이 탄 소형 트럭을 내려다보고 있었다. 

 대부분의 방송은 여대생들이 했다. 그녀들이 완전히 지쳤을 때, 목이 갈라져 더이상 소리를 낼 수 없다고 말했을 때 당싱는 사십여분 분 동안 메가폰을 잡았다. 불을 켜주세요, 여러분. 당신은 그렇게 말했다. 캄캄한 창문들을 향해, 누구의 기척도 느껴지지 않는 골목을 향해 말했다. 제발 불이라도 켜주세요, 여러분.

 군이 그 트럭을 새벽까지 버려둔 것은 병력의 이동 경로를 노출하지 않기 위해서였다는 것을 당신은 나중에 알았다. 동트기 직전에 체포된 여자들은 광산경찰서 유치장으로, 운전을 맡았던 청년은 상무대로 끌려갔다. 총기를 소지하고 있었으므로 당신은 여대생들과 따로 수감되었고 보안부대로 이송되었다.

 그곳에서 당신은 이름 대신 빨갱이년으로 불렸다. 과거 여공이었고 노조 활동을 했기 때문이었다. 사년 동안 지방 도시의 양장점에서 숨어지내며 간첩 지령을 받아왔다는 각본을 완성하기 위해 그들은 날마다 당신을 조사실 탁자에 눕혔다. 더러운 빨갱이년. 아무리 소리 질러봐라. 누가 달려오나. 조사실의 조명은 가늘게 떨리는 형광등이었다. 일상적인 그 환한 조명 아래, 당신이 하혈 끝에 의식을 잃을 때까지 그들은 멈추지 않았다.

 성희 언니를 다시 만난 것은 교도소에서 석방된 이듬해였다. 산업선교회와 크리스찬 아카데미에 그녀의 행방을 수소문해 구로동의 국숫집에서 만났다. 당신의 이야기를 들은 그녀는 놀란 듯 고개를 저었다.

 네가 감옥에 있었던 줄은 꿈에도 몰랐어. 조용히 잘 살고 있을 줄 알았는데.

 수년 동안 도피와 수감을 반복해온 성희 언니의 얼굴은 볼이 움푹 패어 다른 사람처럼 보였다. 이제 스물일곱인데, 나이보다 열살은 더 들어 보였다. 흰 김을 피워올리며 식어가는 국수 앞에서 그녀는 잠시 침묵했다.

 정미가 그 봅에 실종됐다데, 알고 있었니?

 이번에는 당신이 고개를 저었다.

 그애가 잠깐 노조 일을 거들었더랬어. 그런데 우리가 블랙리스트 때문에 고생하는 걸 보고 걱정이 됐던지, 해고되기 전에 먼저 공장을 그만뒀어. 그러곤 소식이 끊겼다가... 그 얘긴 나도 최근에 들었어. 일산방직에서 같이 야학엘 다녔다는 동료한테서.

 모국어를 이해할 수 없게 된 것처럼 당신은 가만히 성희 언니의 입 모양을 지켜보았다.

 너, 거기 사년 살았다면서, 큰 도시도 아닌데, 오며 가며 한번도 못 만났니.

 당신은 얼른 대답할 수 없었다. 그애의 얼굴을 제대로 기억할 수도 없었다. 무엇인가를 애써 기억해내기에 당신은 지쳐 있었다. 몇 조각의 희끗한 파편들이 떠올랐다 사라졌다. 흰 피부, 오종종한 앞니. 의사가 되고 싶어요. 노조 사무실까지 그애가 끌어안고 올라갔다던, 이제는 이름을 잊은 동료가 병원에 가져다준 당신의 운동화.

 그게 다였다.

 

 4:00

 죽기 위해 그 도시에 다시 갔어.

 

 석방된 뒤 얼마간은 오빠 집에 신세를 졌지만, 일주일에 두번씩 경찰이 찾아오는 걸 더 견딜 수 없었어.

 이월 초순 새벽이었어. 내가 가진 가장 깨끗한 옷을 꺼내 입고, 간단히 가방을 사서 시외버스를 탔어.

 언뜻 그 도시는 변한 게 없어 보였어. 하지만 모든 게 변했다는 걸 곧 느낄 수 있었어. 도청 별관 외벽엔 총탄 자국들이 패어 있었어. 어두운색 옷을 껴입은 행인들의 얼굴은 투명한 흉터가 새겨진 것처럼 일그러져 있었어. 그들과 어깨를 부딪치며 나는 걸었어. 배가 고프지 않았어. 목이 마르지도, 발이 시리지도 않았어. 날이 저물 때까지, 다음 날 새벽이 올 때까지도 계속 걸을 수 있을 것 같았어.

 그러다 너를 본 건 금남로에서였어.

 카톨린센터 외벽에 방금 학생들이 붙여놓고 간 사진을 들여다 봤을 때였어.

 언제든 경찰들이 나타날 수 있었어. 그 순간도 어디서 날 지켜보고 있는지도 몰랐어. 나는 재빨리 사진 한장을 뜯었어. 둘둘 말아서 쥐고 걸었어. 큰길을 건너 골목으로 깊이 들어갔어. 못 보던 음악감상실 간판이 보였어. 오층 계단을 숨차게 걸어올라가, 동굴 같은 안쪽 방에 자리를 잡고 커피를 시켰어. 종업원이 커피를 가져다줄 때까지 꼼짝 않고 기다렸어. 분명 음악 소리가 큰 곳이었을 텐데. 깊은 물속에 잠긴 것처럼 아무것도 들리지 않았어. 마침내 완전히 혼자가 됐을 때 사진을 펼쳤어.

 너는 도청 안마당에 모로 누워 있었어. 총격의 반동으로 팔다리가 엇갈려 길게 뻗어가 있었어. 얼굴과 가슴은 하늘을, 두 다리는 벌어진 채 땅을 향하고 있었어. 옆구리가 뒤틀린 그 자세가 마지막 순간의 고통을 증거하고 있었어.

 숨을 쉴 수 없었어.

 어떤 소리도 낼 수 없었어.

 그러니까 그 여름에 넌 죽어 있었어. 내 몸이 끝없이 피를 쏟아낼 때, 네 몸은 땅속에서 맹렬하게 썩어가고 있었어.

 그 순간 네가 날 살렸어. 삽시간에 내 피를 끓게 해 펄펄 되사레했어. 심장이 터질 것 같은 고통의 힘, 분노의 힘으로.

 

p173

 오래전 동호와 은숙이 조그만 소리로 나누던 대화를 당신은 기억한다. 왜 태극기로 시신을 감싸느냐고, 애국가는 왜 부르는 거냐고 동호는 물었다. 은숙이 어떻게 대답했는지는 기억나지 않는다. 

 지금이라면 당신은 어떻게 대답할까. 태극기로, 고작 그걸로 감싸보려던 거야. 우린 도륙된 고깃덩어리들이 아니어야 하니까, 필사적으로 묵념을 하고 애국가를 부른 거야.

 그 여름으로부터 이십여년이 흘렀다. 씨를 말려야 할 빨갱이 연놈들. 그들이 욕설을 뱉으며 당신의 몸에 물을 끼얹던 순간을 등지고 여기까지 왔다. 그 여름 이전으로 돌아갈 길은 끊어졌다. 학살 이전, 고문 이전의 세계로 돌아갈 방법은 없다.

 

p176

 내 책임이 있는 거야, 그렇지?

 입술을 악문 채, 눈앞에서 일렁이는 파르스름한 어둠을 향해 당신은 묻는다.

 내가 집으로 가라고 했다면, 김밥을 나눠 먹고 일어서면서 그렇게 당부했다면 너는 남지 않았을 거야, 그렇지?

 그래서 나에게 오곤 하는 거야?

 왜 아직 내가 살아 있는지 물으려고.

 

p177

 아니

 언니를 만나 할 말은 하나뿐이야.

 허락된다면.

 부디 허락된다면.

 장례식장과 응급실로, 병동과 병원 정문으로 갈라지는 도로를 밝히던 외등들이 일제히 꺼진다. 도로 가운데 그어진 흰색의 직선을 따라 당신은 얼굴을 들고 걷는다. 선득한 빗방울이 당신의 정수리에, 당신의 운동화가 내딛는 아스팔트에 떨어져 번진다.

 죽지 마.

 죽지 말아요.

 

6장. 꽃 핀 쪽으로

p178

 그 머시매를 따라갔다이.

 어시매 걸음은 빠르고 나는 늙었는디, 아무리 걸어도, 따라잡을 수 있어야제. 조금만 옆으로 고개를 돌려주면 옆얼굴이 보일 것인디. 아무 데도 안 둘러보고 앞으로, 앞으로만 가야.

 요새 어느 중학생이 그리 짧게 머리를 깍겄냐이. 동그스름한 네 두상을 내가 아는디, 분명히 너였다이. 느이 작은형이 물려준 교복이 너한테는 너무 컸다가 3학년 올라감스로야 겨우 몸에 맞았제. 아침에 네가 책가방 들고 대문을 나서먼, 한없이 뒷모습을 보고 섰고잪게 옷 태가 났제. 그란디 그 머시매는 책가방은 어디다 놓고 빈손으로 훌훌 걸어가더라이. 하얀 하복 반소매 아래 호리호리한 팔뚝이 영락없이 너였단게. 좁은 어깨하고 길쭉한 허리하고 걸음걸이가, 고라니같이 앞으로 수그러진 목이 꼭 너였단게.

 네가 나한테 한번 와준 것인디, 지나가는 모습이라도 한번 보여줄라고 온 것인디, 늙은 내가 너를 놓쳐버렸어야. 시장통 좌판 사이로, 골목골목으로 한시간을 뒤지고 댕겨도 없어야. 무릎 속이 쑤시고 어찔어찔 골이 흔들려 바닥에 주저앉았다이. 하지만 동네 사람이라도 만나면 큰일인게, 아직 어지러워도 땅을 짚고 일어섰다이.

 시장통까지 널 따라갈 적엔 먼 길인 줄도 몰랐는디, 돌아오는 길엔 바짝바짝 목이 타드라이. 동전 하나 주머니에 안 담고 나와서, 아무 가게라도 들어가 찬물 한잔 얻어묵고 자팠다이. 그래도 누가 비렁뱅이 노인네라고 욕할까 무서운게, 벽이 나올 때마다 손으로 짚음스로 싸묵싸묵 걸어왔다이. 어지럽게 먼지 날리는 공사판 옆을, 입을 꽉 막고 기침함스로 지나왔다이. 갈 적에는 어째서 몰랐으까이. 그렇게 시끄러운 공사판이 있었던 것을. 그렇게 무참하게 길바닥을 뚫어쌓고 있었던 것을.

 

p180

 알 수 없다이, 그날은 왜 내가 이름 한자리 못 불러봤는지. 입술이 달라붙은 사람맨이로, 쌕쌕 숨만 몰아쉼스로 뒤를 밟았는지, 이번에 내가 이름을 부르면 얼른 돌아봐라이. 대답 한자리 안해도 좋은게, 가만히 돌아봐라이.

 

 

 아니제.

 그럴 수 없는 것을 내가 알제.

 내 손으로 너를 묻었은게. 하늘책 체육복에다 교련복 윗도리를 입고 있던 너를, 하얀 하복 샤쓰에다 아래위 까만 동복으로 갈아입혔은게. 혁대도 단정하게 매주고 깨끗한 회색 양말을 신겼은게. 베니어판으로 짠 관에다 너를 넣고 청소차에 식도 갈 적에, 너를 지킬라고 내가 앞자리에 탔은게. 청소차가 어디로 가는 줄도 모르고, 네가 있는 뒤쪽만 뚫어져라고 지켜보고 있었은게.

 환한 모래언덕에 까만 옷 입은 사람 수백명이 개미같은 관을 들고 걸어가던 것이 생각난다이. 느이 형들이 입술을 꽉 물고서 울고 섰던 것도 아슴아슴 떠오른다이. 느이 아부지 생전에 나한테 하던 말이, 그때 내가 울지도 않고 뗏장 옆에 풀을 한움큼 끊어서 삼켰다든지. 삼키고는 쪼그려앉아서 토하고, 다 토하면 또 풀을 한움큼 끊어다 씹었다든디. 근디 나는 하나도 기억이 안 나야. 묘지로 가기 전 일들만 또렷해야. 관 뚜껑 닫기 전 마지막으로 봤던 네 얼굴이 얼마나 핼쑥했던지. 네 살이 그렇게 희었던 줄 그때 처음 알았다이.

 나중에 느이 작은형이 그러드마는 총을 맞고 피를 너무 흘려서 네 얼굴이 그리 희었다고. 그래서 관이 가벼웠다고. 네가 아무리 덜 컸다고 해도, 그렇게 관이 가벼울 수는 없었다고. 그람스로 두 눈에 핏발이 서드라이. 이 원수는 내가 갚을랍니다. 그것이 뭔 소리다냐. 깜짝 놀라서 내가 그랬다이. 나라에서 죽인 동생 원수를 무슨 수로 갚는다냐. 너까장 잘못되면 나도 따라 죽을 거이다.

 그라고 삼십년이 흘러가도록, 너하고 느이 아부지 기일에 그 자석이 가만히 서서 입 다물고 있는 것을 보면 마음이 이상해ㅑ. 네가 죽은 것이 지 때문이 아닌디, 왜 친구들 중에 제일 먼저 어깨가 굽고 머리가 하얗게 세었을까이. 저것이 아직도 원수 갚을 생각을 하고 있단가. 생각하면 가슴이 내려앉아야.

 

 그래도 느이 큰형은 흔적 없이 밝게 지낸다이. 한달에 두번 각시하고 같이 내려오고, 혼자도 몰래 당일로 내려와서 밥도 사주고 용돈도 주고, 가까이 사는 네 작은형보다 다정하다이.

 느이 아부지나 큰형이나 너나, 허리가 길고 어깨가 수긋한 내력이지야. 기름한 눈매하고 앞니 살짝 벌어진 것은 너하고 큰형이 똑같았지야. 요새도 느이 큰형이 웃음스로 토끼같이 넓적한 앞니가 드러나먼, 눈가에 주름은 깊이 패었어도 청년같이 순진해 보인다이.

 느이 큰형이 열한살 묵었을 때 네가 태어났는디, 그 자석은 그때부터 가이내 같은 머시매라서, 애기가 보고 잪다고 학교만 끝나면 달려왔는디, 네가 웃는 것이 이쁘다고, 조심조심 목을 받쳐안고는 까르르 웃을 때까지 흔들었는디, 돌 지난 너를 포대기로 등에 업혀주먼, 겅중겅중 마당을 돎스로 박자도 안 맞는 노래를 불렀는디.

 그렇게 가이내 같은 자석이 느이 작은형하고 싸울 줄을 누가 알았겄냐이. 이십년도 넘게 지금까장도 서로 서먹서먹해갖고 긴 이야기를 안 나누게 될 줄을.

 느이 아부지 상 치르고 돌아와 삼우제 준비할 적이었다이. 갑자기 뭣이 깨지는 소리가 나서 달려가봤더니, 스물일곱살, 서른두살 먹은 다 큰 머시매들이 씨근거림스로 서로 멱살을 쥐고 있어야.

 그 쪼그만 것 손 잡아서 끌고 오면 되지, 몇날 며칠 거기 있도록 너는 뭘 하고 있었냐고! 마지막 날엔 왜 어머니만 갔냐고! 말해봤자 안 들을 것 같았다니, 거기 있으면 죽을 걸 알았담서, 다 알고 있었담서 네가 어떻게!

 그란게 느이 작은형이 으어어어, 마로 아니고 뭣도 아닌 소리를 지름스로 지 형한테 달라들더니 방바닥에 넘어뜨렸다이. 짐승맨이로 울부짖음서 말을 한게, 무슨 이야긴지 뜨문뜨문하게밖에 안 들렸다이.

 형이 뭘 안다고... 서울에 있었음스로.... 형이 뭘 안다고...

 그때 상황을 뭘 안다고오.

 둘이 그 꼴로 엎치락뒤치락하는 것을 말릴 생각도 못하고 나는 부엌으로 돌아왔다이. 아무 생각도 하고 싶지 않은게, 아무 소리도 안 들리는 것맨이로 전을 부치고 산적을 꿰고 탕을 끓였다이.

 인자는 암것도 모르겄어야.

 마지막 날에 내가 너를 찾아갔을 적에, 넥 그리 순하게 저녁에 들어갈라요, 말하지 않았더라면 어땠으까이. 나는 안심을 하고 집에 가서 느이 아부지한테 그랬어야.

 여섯시에 문 잠그고 집에 온다요. 다 같이 저녁 묵자고 약속했소.

 그란디 일곱시가 되도록 네가 안 들어온게, 느이 작은형하고 나하고 둘이서 집을 나섰다이. 계엄이라 일곱시가 통금인디, 그날 저녁 군대가 들어온다 한게 귀신 그림자도 안 보이더라이. 꼬박 사십분을 걸어서 가본게 상무관에는 불이 꺼지고 아무도 없어야. 도청앞으로 간게 총 든 시민군들이 지키고 섰드라마는. 우리 막내아들을 만나봐야겄다고 사정한게, 어리디어린 그 시민군들은 파랗게 얼굴이 굳어갖고 안된다고, 아무도 들여보내년 안된다고 딱 잘라 말하더라이. 금방 계엄군이 탱크를 몰고 들어온다고, 위험하게 얼른 집으로만 가라고만 하더라이.

 제발 들어가게 해주소, 하고 나는 빌었어야.

 우리 막내 불러라도 주소, 하고 나는 빌었어야.

 보다 못한 느이 작은형이 직접 들어가서 동생을 찾겄다고 한게 시민군 하나가 그러더라이.

 지금 들어가면 못 나옵니다. 저 안에는 죽을 각오가 된 사람들만 남았습니다. 

 느이 작은형이 알겄다고, 일단 들어가게만 해달라고 언성을 높일 적에 내가 말을 막았다이.

 그 아그가 기회를 봐서 제 발로 나올라는 것이여... 분명히 나한테 약속을 했단게.

 사방이 너무 캄캄해서 내가 그렇게 말을 했다이. 금방이라도 어둠속에서 군인들이 나타날 것 같아서 그렇게 말을 했다이. 이라다가 남은 아들까장 잃어버릴 것 같아서 그렇게 말을 했다이.

 그렇게 너를 영영 잃어버렸다이.

 내 손으로 느이 작은형 팔을 끌고, 내 발로 돌아서서 집으로 갔다이. 모두 다 죽어버린 것맨이로 캄캄한 사거리를, 사십분을 둘이 울면서 걸어 돌아갔다이.

 인자 나는 암것도 알 수 없어야. 겁이 나서 얼굴이 파랗게 굳어있던 시민군들, 어리디어리던 그 자서들도 죽었으까이. 그리 허망하게 죽을 것을, 왜 끝까장 나를 안 들여보내줬으까이.

 

자본주의의 구조적 모순, 그리고 신자유주의로 인해 더욱 그러한 모순들이 강화되면서 성장의 패러다임 속에서 양극화는 극단으로 치닫고 전세계에서 왜 점점 더 빈곤이 증가하는지에 대한 통찰을 담고 있다.

 ----------------

p34

 월드비젼은 내게 스와질란드에서 진행한 개발 활동이 왜 기대대로 성과를 내지 못하는지 분석하는 일을 맡겼고, 나는 월드비전의 개입이 정작 중요한 핵심을 놓치고 있었기 때문이라는 사실을 발견했다. 세상을 설명하는 그들의 이야기에 기반해서, 그들은 스와질란드 사람들에게 필요한 것은 빈곤에서 벗어나도록 도와줄 약간의 자선이라고 가정했다. 월드비전은 죽어가는 에이즈 환자들을 돌보고, 실업자를 위해 소득 창출 프로그램을 실시하고, 농민들에게 새로운 농사법을 교육하고, 아이들의 교육을 위해 자금을 지원했다. 물론 이런 프로젝트가 도움이 안된 것은 아니지만, 문제의 진짜 원인을 다루고 있지는 않았다. 애초에 에이즈 환자들은 왜 죽어가고 있었는가?

 

p46

 글로벌 남부 전역에서 신생 독립국들은 미국의 조언을 무시하고 자신의 발전 어젠다를 추구했으며 무역 장벽, 보조금, 의료 및 교육에 대한 사회적 지출 등 보호주의와 재분배 정책을 통해 자국 경제를 일구고 있었다. 그리고 이 방식은 아주 효과가 있었다. 1950년대부터 1970년대까지 이들 국가에서 소득이 증가하고 빈곤율이 떨어졌으며, 역사상 처음으로 부유한 국가와 가난한 국가 사이의 간극이 좁혀지기 시작했다. 여기에 놀라지 말아야 한다. 이 시기에 글로벌 남부 국가들이 사용한 정책은 서구 국가들이 그들의 경제를 강화하던 시기에 썼던 것과 정확히 같은 정책이었으니 말이다.

 미국, 영국, 프랑스 등 서구 열강은 글로벌 남부 국가들이 발전해 나가는 게 못마땅했다. 글로벌 나뭅에서 펼쳐지고 있는 정책들은 서구 기업의 이윤을 갉아먹었고, 서구가 값싼 노동력과 값싼 자원에 접근하던 것을 어렵게 만들었으며, 서구의 지정학적 이해관계를 손상시켰다. 이에 대한 대응으로, 서구는 글로벌 남부 전역에서 민주적으로 선출된 지도자 수십 명을 축출하고 서구의 경제적 이득에 친화적인 독재자를 세우기 위해 은밀히 개입했다. 그리고 나면 그 독재자들의 권력은 서구의 원조로 지탱되었다. 관심을 갖고 지켜본 사람이라면 누구나 알 수 있었듯이, 이러한 쿠데타는 트루먼이나 로스토 같은 사람들의 이야기가 거짓이었으며 글로벌 남부의 지도자들이 내내 주장했던 바가 옳았음을 말해주고 있었다. 서구가 지원한 쿠데타는 이르게는 로스토가 한창 <경제 성장의 단계>를 집필하던 1950년대에도 자행되었다. 이란과 과테말라가 그런 사례다. 로스토는 이러한 초창기 쿠데타들을 자행한 아이젠하워 행정부와 가까웠고, 따라서 무슨 일이 벌어지고 있는지 잘 알고 있었을 것이다. 1960년대에 미국이 지원한 브라질의 쿠데타는 그가 국무부에서 일하던 시기에 일어난 일이었으므로 그가 관여했을 수도 있다.

 

p54

 하지만 빠져나가는 돈의 가장 큰 부분은 자본 이탈이다. 국제금융 청렴기구의 계산에 따르면 1980년대 이래 기도국이 자본 이탈로 잃은 돈은 총 23.6조 달러에 달한다. 가장 비중이 큰 것은 국제수지상의 '누출'인데 연간 9730억 달러로 추산된다. 또 다른 경로는 '교역 송장 조작trade misinvoicing'이라고 불리는 불법 행위를 통한 것이다. 기업들이 개도국에서 조세 피난처, 공식 용어로는 '비밀성 관할구역secrecy jurisdiction'으로 돈을 옮겨 은닉하기 위해 송장 가격으 가짜로 보고하는 것을 말한다. 개도국이 매년 교역 송장 조작으로 잃는 돈은 약 8750억 달러다. 또한 매년 그와 비슷한 만큼의 유출이 '이전가격 조작transfer mispricing'에 의해 발생한다. 이것은 다국적 기업이 서로 다른 나라에 있는 자회사들 사이에서 불법적인 방식으로 이윤을 이전하는 것을 말한다. 대개는 세금을 회피하는 것이 목적이지만 돈 세탁이나 자본 통제 회피를 위해 자행되기도 한다.

 개도국에서 빠져나가는 연간 순유출액 3조 달러는 선진국들이 개도국에 주는 원조 예산의 24배가 넘는다. 개도국이 받는 원조 1달러 당 24달러의 순유출이 일어난다는 말이다. 물론 이는 개도국을 전체적으로 본 것이므로 그중 어떤 나라는 더 심각하고 어떤 나라는 덜 심각할 것이다. 하지만 어느 경우든 자금의 순유출은 개도국의 개발과 발전에 쓰일 수도 있었을 중요한 소득원과 자금원이 빠져나갔다는 의미다. 또한 국제금융청렴기구에 따르면, 이러한 자금의 순유출은 증가하고 있고(2009년 이래 연간 약 20%의 속도로 증가하고 있는 것으로 나타났다) 이것이 개도국의 경제 성장률과 생활 수준 하락에 직접적인 원인이 되고 있다.

 

p59

 마르티니크 출신의 유명한 철학자이자 알제리 반식민주의 운동의 주요 사상가였던 프란츠 파농이 이를 더없이 유려하게 표현한 바 있다.

 식민주의와 제국주의가 우리의 영토에서 철수했을 때, 그들은 그들이 진 빚을 청산하고 가지 않았다. 제국주의 국가들의 부는 우리의 부다. 유럽은 말 그대로 제3세계의 창조물이다. 제3세계의 목을 조르고 있는 부유한 자들은 저개발국 국민을 약탈한 자들이다. 따라서 우리는 저개발국을 위한 원조가 '자선'으로서 제공되는 것을 거부한다. 원조는 이중 의식dual consciousness의 마지막 단계로 여겨져야 마땅하다. 이중 의식이란, 식민 지배를 받았던 저개발국 입장에서 그 돈이 원래 자신의 것이라는 의식과 자본주의 열강 입장에서 그것이 마땅히 그들이 갚아야 하는 돈이라는 의식을 말한다.

 

p60

 몇 년 전에 팔레스타인 서안을 방문할 기회가 있었다. 유난히 더운 어느 오후, 나를 초청해준 사람들이 차로 요르단 계곡에 데려다주었다. 우리는 물 문제에 대해 그곳 농민들을 인터뷰하러 가는 참이었따. 비포장도로를 울퉁불퉁 달리다 보니 사막의 바위에 흰색 표지판이 생뚱맞게 서 있는 것이 보였다. 미 국제개발처USAID가 새 우물을 지어 이 일대에서 "반복적으로 발생하는 물 부족 문제를 완화하기 위해" 노력하고 있다는 메시지였다. 펄럭이는 성조기 아래로 바위에는 자랑스럽게 이렇게 쓰여 있었다. "이 프로젝트는 미국인들이 팔레스타인 사람들에게 주는 선물입니다."

 무심코 지나가는 사람은 감동했을지도 모른다. 미국 납세자의 돈이 척박한 사막에서 생존을 위해 고투하는 가난한 팔레스타인 사람들을 돕기 위해 인도주의적 정신에서 너그럽게 제공되었다니 말이다. 하지만 1967년에 미국의 지원을 받아 서안을 점령한 이스라엘은 이 영토의 대수층에 대해 완전한 통제권을 주장했다. 그리고 이곳 물의 상당 부분, 사실 90% 가까이를 이스라엘 정착지의 대규모 산업용 농장에 관계용수를 대는 데 사용했다. 지하수가 낮아지면서 팔레스타인 지역의 우물들이 말라갔다. 팔레스타인 사람들은 이스라엘의 허가 없이는 우물을 더 깊이 파거나 새 우물을 지을 수 없었는데, 허가는 거의 내려진 적이 없었다. 그래서 다들 그러듯이 허가 없이 우물을 지으면, 다음 날 이스라엘쪽이 와서 밀어버렸다. 팔레스타인 사람들은 자신들의 물을 자의적으로 정해진 비싼 값을 주고 이스라엘보부터 다시 사와야만 한다.

 이것은 비밀이 아니다. 공개적으로 일어나고 있는 일이고, 내가 이야기를 나눠본 농민들 모두가 잘 알고 있었다. 그들에게 USAID의 표지판은 상처에 모욕을 더하는 격이다. USAID의 메시지가 암시하는 것과 달리 팔레스타인 사람들은 물이 부족한 것이 아니다. 문제는 이스라엘이 그들에게 물을 훔쳐가고 있는 것이다. 그것도 미국의 지원을 받아서 말이다. 2012년, 내가 방문하기 겨우 2개월 전에 유엔총회는 팔레스타인 사람들이 그들 자신의 물에 대한 권리를 회복해야 한다고 촉구하는 '결의안 66/225'를 체택했다. 투표에서 167개국이 찬성했고, 미국과 이스라엘은 반대했다.

 이 에피소드를 이야기한 이유는 원조가 종종 얼마나 핵심을 놓치고 있는지뿐 아니라 더 큰 진실을 드러내기 위해서다. 가난한 나라들은 우리의 원조를 필요로 하지 않는다는 진실 말이다. 그들이 필요로 하는 것은 우리가 그들을 궁핍화하는 과정을 멈추는 것이다. 글로벌 빈곤을 추동하는 구조적인 요인을 조준하지 않는다면, 즉 부를 추출하고 축적하는 기저의 구조를 조준하지 않는다면, 몇십 년을 하더라도 개발 노력은 계속 실패할 것이다. 빈곤과 관련된 통계 숫자들은 계속 커질 것이고 부유한 나라와 가난한 나라의 격차는 계속 벌어질 것이다. 선한 의도로 개발 이야기를 설파해온 수백만 명에게는 받아들이기 어려운 진실일 것이다. 핵심 신화의 붕괴에 직면하는 것은 두려운 일일 수 있다. 적어도 나는 그랬다. 하지만 핵심 신화의 붕괴는 흥미로운 가능성들의 세계를 열어주고 새로운 미래를 위한 길을 내어주기도 한다.

 

p93

 1990년 이래 글로벌 1인단 GDP는 45% 성장했지만 하루 5달러 이하로 살아가는 사람의 수는 3억 7000만 명 이상 늘었다. 성장이 왜 빈곤 감소에 도움을 주지 못할까? 성장의 산출이 매우 불균등하게 분배되기 때문이다. 경제 성장을 통해 새로운 창출된 전 세계 소득 중 세계의 가장 가난한 60%가 가져가는 몫은 5%에 불과하고 가장 부유한 40%에게 소득의 95%가 돌아간다. 그나마 이조차도 가장 좋은 시나리오일 때의 이야기다. 

 

p134

 오늘날 영ㅇ국의 식민주의를 옹호하는 사람들은 영국의 인도 식민화와 중국에 대한 무력 개입이 인도와 중국의 '발전'을 가져왔다는 논리를 댄다. 하지만 우리가 살펴본 실증 근거들은 그와 정반대의 이야기를 들려준다. 영국과 아시아 사이에 '발전 격차'가 생긴 시기가 바로 강요된 시장 통합이 이러우졌던 식민주의 시기였다. 18세 중반에 유럽의 평균적인 생활 수준은 아시아보다 약간 낮았다. 늦게는 1800년까지도 중국의 1인당 소득이 서구 유럽을 앞섰고, 아시아 전체적으로도 1인당 소득이 유럽 전체보다 나았다. 중국의 문해율은 유럽 국가들보다 높았고, 여성들 사이에서도 그랬다. 출생률은 더 낮았다. 18세기에 인도 남부에서 노동자들은 영국보다 높은 소득을 올렸고 더 안정적으로 생활했다. 인도의 장인들은 유럽 평균보다 식생활이 좋았고 유럽보다 더 탄탄한 권리를 가지고 있었기 때문에 실업률도 더 낮았다.

 인도의 1인당 소득은 1757년에 동인도회사가 들어왔을 때부터 1947년 독립까지의 식민 시기 동안 증가하지 않았다. 오히려 영국의 개입이 정점이었던 19세기 후반부에 인도의 소득은 50% 이상 줄었다. 소득만 낮아진 것이 아니었다. 1872년부터 1921년 사이에 인도인의 평균 기대수명도 20%나 떨어졌다. 아대륙은 탈발전되었다. 

 인도와 중국이 글로벌 GDP에서 차지하는 비중이 줄고 있던 식민주의 시기 동안 유럽이 차지하는 비중은 20%에서 60%로 증가했다. 유럽이 식민지를 발전시킨 것이 아니라 식민지가 유럽을 발전시킨 것이다.

 

p161

 서구 열강의 정부와 기업들은 이런 일(식민지였던 나라들에서 발전주의적 혁명과 민족주의 정치권력이 확대되는 일)이 계속되는 것을 보고만 있을 생각이 없었다. 전에 누리던 시장과 자원에 대한 접근을 다시 획득하기 위해 이들은 모종의 반혁명이 필요했다. 하지만 케인스주의가 풀아낸 개념들에 대해 대중의 저항이 일지도 않았고, 글로벌 남부에서 경제적 독립의 열마이 높아지는 것을 억압할 길도 없었다. 

 1953년에 미국 대통령이 된 드와이트 아이젠하워는 발전주의에 맞서는 결정적인 조치를 취했다. 그는 발전주의가 미국이 다국적 기업들의 상업적 이해관계를 위협한다고 보았고 자신의 견해에 동조하는 두 사람을 행정부에 고용했다. 존 포스터 덜레스 국무장관과 그의 동생인 앨런 덜레스 CIA 국장이었다. 덜레스 형제는 '설리번 앤 프롬웰'이라는 로펌에서 일한 적이 있는데, 글로벌 남부의 발전주의 때문에 잃고 있는 것이 많다고 느끼고 있는 JP모건, 쿠바 사탕수수 코퍼레이션, 유나이티드 프루트 컴퍼니 같은 거대 기업들이 이 로펌의 고객사였다. 하지만 아이젠하워 행정부는 평등, 정의, 독립의 원칙에 깊이 뿌리를 두고 있는 운동을 공격한다면 정당화되기 어려우리라는 것을 잘 알고 있었다. 그는 매국 대중의 눈에 합당해 보일 만한 방법을 찾아야 했고, 냉전 레토릭에 강하게 의존함으로써 이 문제를 해결했다. 

 발전주의가 공산주의로 가는 첫 단계라는 프레임을 씌우면서 발전주의 국가들을 소련과 연결지었고, 미국인들의 인식에서 발전주의의 이미지를 훼손할 수 있었다.

 아이젠하우어의 백래시의 첫 대상은 이란이었다. 민주적으로 선출된 이란의 지도자 모하메드 모사데크는 발전주의의 견고한 버팀목이었다. 큰 키에 위엄 있는 풍체를 지녔으며 파리에서 교육받은 모사데크는 진보적인 정치인으로 이란에서 인기가 많았다. 총리 시절에 실업 보상과 아프거나 다친 노동자에 대한 복지 급여를 도입했고 농촌의 강제 노동을 철폐했으며 부자들의 세금을 올려 농촌 개발 프로젝트의 재원을 마련했다. 또한 가장 유명하게, 영국의 '앵글로 이란 오일 컴퍼니'(현재의 BP)가 소유하고 있던 이란의 유정에 대한 소유권 재협상을 시도했다. 그리고 앵글로 이란 오일 컴퍼니가 회계 감사에 협조하기를 거부하자 이란 의회는 투표를 통해 만장일치로 이 회사의 자산을 국유화했다.

 이 일로 이란에서 모사데크의 인기는 한층 더 높아졌지만 영국 정부는 분노했고 미국에 도움을 청했다. 군사 개입이라는 선택지가 테이블에 올라왔다. 하지만 소련이 이란 쪽에서 개입해 대리전 양상으로 비화할지 모른다는 점이 우려되었고, 결국 '아작스 작전Operation Ajax'이라고 불리는 비밀 프로젝트가 진행되었다. 이 작전은 CIA가 이끌었고 커밋 루스벨트(시어도어 루스벨트의 손자로, 할아버지 루즈벨트는 먼로 독트린을 확대한 '루즈벨트 계론'으로 미국의 해외 개입주의에 길을 닦은 바 있다)가 담당했다. 계획은 치밀했다. 우선 [이란] 정치인들에게 뇌물을 주어 이들 사이에 반정부 정서를 불러일으켰다. 그리고 모사데크가 사람들에게 인기가 없다는 가짜 이미지를 불러일으키키 위해 바람잡이를 매수해 거리 시위를 하게 했다. 이어서 이란 군대를 지원해서 모사데크를 내말고 왕가인 모하마드 레자 팔라비가 권력을 잡게 했다. 계획은 성공했다. 1953년 8월, 쿠데타가 일어나 모사데크가 밀려났고 샤(왕조)가 군부 정권이자 절대 왕정으로서 권력을 잡았다. 이후 팔라비는 26년간 이란을 통치했다. 그는통치 시기 대부분에 걸쳐 미국의 지원을 받았고 이란의 정책은 이 지역에서 서구의 또 다른 주요 위성국인 사우디에서와 마찬가지로 서구의 석유 기업들에 유리한 방향으로 수립되었다. 모사데크는 이후 평생을 가택 연금 상태로 지냈다.

 아작스 작전은 미국이 외국 정부를 전복한 초창기 작전 중 하나였고, 분명 마지막 작전은 아니었다. 곧이어 1954년에 덜레스 형제는 본격적으로 실력 발휘에 나섰다.

 1931년부터 과테말라를 통치하고 있던 군부 독재자 호르헤 우비코는 미국이 소유한 유나이티드 프루트 컴퍼니에 비옥한 토지를 방대하게 넘기는 대가로 미국의 지원을 받았다. 그 땅의 대부분은 마야 원주민 농민들에게서 탈취한 땅이었다. 우비코의 잔혹한 통치를 오랫동안 견디다 못한 민중이 혁명을 일으켜 그를 몰아냈고, 처음으로 과테말라에서 민주적인 선거가 치러질 수 있게 되었다. 이 선서로 1945년에 집권한 철학 교수 출신 후안 호세 아레발로는 전임자와 정반대였다. 우비코가 지배층의 이해관계에 따라 과테말라를 통치한 반면 아레발로는 가난한 사람들을 정책의 더 높은 우선순위로 삼았다. 그는 최저 임금법을 포함해 가난한 사람들을 위한 정책을 도입했다. 우비코 정권하에서 자행되었던 토지 강탈로 대대적인 궁핍화가 벌어진 것을 되돌리기 위해서였다. 그의 임기 6년 동안 과테말라는 전례 없는 정치적 자유와 안정을 구가했고, 임기가 끝난 그는 선고로 다음 주자에게 정권을 넘기기 위해 물러났다. 그리고 그의 행정부 장관이었던 하코보 아르벤스가 당선되었다.

 스위스계 인물로 '빅 블론드Big Blonde'라는 별명을 가지고 있었던 아르벤스는 아레발로의 진보적인 정책을 이어갔다. 그는 '농협개혁법'으로 토지 개혁을 실시했다. 당시에 과테말라에서는 3%도 안 되는 사람들이 토지의 70%를 소유하고 있었다. 아르벤스의 토지 개혁은 사용되지 않고 있던 많은 민간 토지를 국유화해 토지가 없는 농민에게 분배한다는 계획이었다. 토지가 없는 농민들 대부분은 우비코 시절에 생긴 빚 때문에 노예화된 피해자들이었고, 농업개혁법은 이들이 농사를 지어 안정적으로 기아를 면할 수 있게 하려는 목적을 가지고 있었다. 그런데 우연히도 45만 에이커의 땅이 유나이티드 프루트 컴퍼니 소유였다. 몰수 토지에 대해서는 완전한 보상을 하겠다고 했는데도 회사는 협조를 거부했다. 협조는커녕 미국 정부에 아르벤스를 축출해달라고 로비를 하고 냉전 레토릭을 이용해 아르벤스 축출에 대한 미국 대중의 지지를 불러일으켰다. 아르벤스를 러시아의 꼭두각시로, 과테말라를 소련의 위성 국가로 보이게 한 것이다.[형과 함께 회사를 대리하는 변호사로 일하며] 유나이티드 프루트에서 38년간 보수를 받았던 앨런 덜레스의 지휘하에 CIA가 기꺼이 이 일에 나섰다. 코드면 'PBSUCCESS'라ㅗ 불린 이 작전에서, 이들은 과테말라의 수도를 폭격하고 아르벤스를 몰아낸 뒤 카를로스 카스티요 아르마스를 군부 독재자로 세웠다. 과테말라에서 10년간의 희망적이던 민주주의 시기는 이렇게 끝났다. 새 정부는 빠르게 외국인 투자 규제를 완화했고 아르벤스 시절의 정책을 되돌렸으며, 그에 비판하는 사람들 수천 명을 감옥에 보냈다. 과테말라는 1996년까지 미국의 지원을 받은 일련의 군부 독재자들이 통치했다. 이 시기 내내 정권은 마야 원주민에게서 토지를 빼앗았고, 과테말라는 서반구에서 가장 빈곤율이 높은 나라 중 하나가 되었다. 정부를 반대하는 목소리가 커지면 가혹하게 진압했다. 20만 명가랴의 마야인이 토지 강탈에 저항하다 살해되었다.

 과테말라 침공은 프랭클린 루스벨트 시절의 라틴아메리가 불개입주의였던 '선린 외교 정책'이 겨우 20년간의 평화 이후에 종말을 고했음을 의미했다. 과테말라 침공으로 아이젠하워는 먼로 독트린을 사실상 부활시켰고, 미국이 라틴아메리카에 폭력적으로 개입해 권력을 투사하던 오랜 버릇도 되살렸다.

 브라질에서도 미국이 지원한 쿠데타가 일어났다. 1961년에 대통령이 된 전직 축구 선수이자 국민 영웅이었던 주앙 굴라르는 그의 대표 업적이라 할 수 있는 '기본 개혁'을 시작했다. 문맹자에게도 투표권을 확대하고 가난한 사람들에게 성인 교육을 제공했으며 다국적 기업이 국외로 가지고 나가려고 하는 모든 수익에 과세했고 생산적으로 쓰이지 않는 토지를 600헥타르 이상 소유하고 있는 경우 회수해 재부배했다. 이러한 개혁은 가난한 사람들에게 득이 되었지만 브라질 지배층은 달가워하지 않았다. 미국의 다국적 기업도 달가워하지 않았다. 1962년에 브라질 정부는 사업이 난항을 겪던 미국 전화 서비스업체 ITT 코퍼레이션을 국유화했다. 그런데 이 회사의 CEO 헤럴드 제닌은 CIA의 국장과 친한 사이였다. 제닌은 브라질의 정책에 대해 불만을 제기했는데, ITT의 브라질 지사가 걱정이어서라기보다는 라틴 아메리카의 다른 국가들에서도 민주적으로 선출된 지도자들이 굴라르의 정책을 따라 할 경우 ITT의 이익이 크게 훼손될지 모른다고 우려해서였다. 케네디 대통령은 개입에 반대했지만, 린든 존슨이 대통령으로 당선되고 얼마 뒤 CIA는 영국의 협조를 받아 행동에 나섰다. 1964년에 '브라더 샘Brother Sam' 작전에서 미국은 굴라를 축출하기 위한 군사 쿠데타를 지원했고, 이렇게 해서 권력을 잡은 독재자가 21년 동안 브라질을 통치했다. 새 정권은 노골적으로 서구 기업 친화적이었고 외국인 투자에 대한 규제를 대폭 완화했다. 시장 자유화가 빠르게 이뤄지면서 굴라르가 빈곤 타파 전선에서 달성했던 성과가 예전으로 되돌아갔고 미국과 유럽 기업들의 이윤 수준도 옛날로 돌아갔다. 사람들의 불만이 높아지자 독재자는 민주적 자유를 억압하고 정치적 반대자들을 공객적으로 고문하고 암살했다.

 서구가 은밀하게 라틴아메리카에 개입한 사례는 한참 더 이야기할 수도 있다. 1953년에 영국은 가이아나에서 세계 최초로 민주적으로 선출된 마르크스주의자 대통령을 축출했다. 1961년에는 미국이 쿠바의 혁명 정부 전복을 시도했다. 이것이 그 유명한 '피그만 침공Bay of Pigs Invasion'인데, 성공하지는 못했다. 1965년에는 도미니카 공화국에서 군부 독재에 맞서 민중 반란이 일어나자 미국의 존슨 대통령이 이를 진압하기 위해 도미니카 공화국 침공을 명령했다. 엘살바도르에서도 미국은 폭압적인 군사 정부에 1980년대까지도 무기 등 여러 지원을 계속했도, 민중 혁명을 억누르기 위한 '죽음의 부대' 활동과 민간인에 대한 고문 및 대규모 강제 이주를 암묵적으로 승인했다. 니카라과에서도 민주적으로 선출된 다니엘 오르테가 정부를 전복시키기 위해 친미 우익 민병대('콘트라'라고 불린다)에 1980년대 내내 불법적인 재정 지원과 군사 지원을 했다. 오르테가가 발전주의와 사회민주주의에 헌신하는 사람으로 잘 알려져 있었기 때문이다. 또한 미국은 볼리비아, 에콰도르, 아이티, 파라과이, 온두라스, 베네수엘라, 파나마에서도 우익 독재자를 이런저런 시기에 각각 지원했다. 이러한 작전의 기술적, 전술적 지원은 상당 부분 '아메리카 스쿨School of the Americas'에서 이루어졌는데, 조지아주와 미군 기지에 위치한 이곳은 오랫동안 암살자와 독재자를 훈련시키는 역할을 했고 여기에서 훈련받은 사람들은 미국의 이해관계를 위해 라틴아메리카 전역으로 파견되었다. 이곳은 오늘날에도 '안보 협력을 위한 서반구 연구소WHINSEC'라는 이름으로 운영되괴 있다.

 

 미국이 발전주의를 짓밟으려고 한 곳은 라틴아메리카만이 아니었다. 브라질에서 미국의 지원으로 쿠데타가 일어난 이듬해에 이와 비슷한, 아니 더 파괴적인 일이 인도네시아에서 벌어졌다. 초등학교 교사의 아들로 태어나 네덜란드 식민 통치기에 독립 운동을 이끌었던 지도자 수카르노가 독립 후에 대통령이 되어 표준적인 발전주의 정책등을 펼쳤다. 인도네시아 경제를 값싼 외국 수입품으로부터 보호했고 가난한 사라들에게 부를 재분배했으며 국제통화기금과 세계은행을 몰아냈다. 서구 열강은 수카르노의 정책에도, 그리고 그가 비동맹 운동 조직화에 앞장서는 데도 분노했다. 그런던 중 수카르노가 석유, 고무 등에서 미국과 유럽인이 통제하던 자산을 국유화하기 시작했고, 서구 열강은 이를 개입의 빌미로 삼았다.

 군부의 권력을 약화시키려는 수카르노의 정책에 분노해 있던 수하르토 장군은 CIA가 쿠데타를 지원할 의사를 분명히 하자 자신이 쿠데타를 일으키겠다고 제안했다. 1965년에 수하르토 장군은 미국에서 정보와 무기를 지원받아 50만~100만 명에 육박하는 수카르노 대통령 지지자를 살해했다. 20세기 최악의 대량 학살이라 할 만했다. 1967년이면 수카르노 대통령의 기반은 사라졌거나 위협에 눌려 항복했고 수하르토 장군이 국가를 장악했다. 그의 군부 통치는 1998년까지 계속되었고 서구 기업들의 이해관계에 활짝 문을 열었다. 《타임》이 1960년대에 인도네시아에서 벌어진 정치적 변화를 두고 "서구 입장에서는 지난 몇 년 사이 아시아에서 들려온 가장 좋은 소식"이라고 표현한 것은 유명하다. 수하르토 정권은 포드 재단의 지원으로 캘리포니아 대학 버클리 캠퍼스에서 유학한 인도네시아 경제학자들에게 경제 정책 수립을 맡겼다. '버클리 마피아'라고 불리는 이들은 수하르토와 긴밀히 협력하면서 시장을 자유화하고 발전주의의 잔재를 마지막까지 남김없이 제거했다.

 아프리카에서는 가나가 서구 열강의 요주의 국가였다. 1957년에 가나는 아프리카 최초릐 독립국 중 하나가 되었고 해방 운동 지도자 파메 은크루마가 초대 대통령으로 선출되었다. 아프리카의 선도적인 발전주의 사상가이던 은크루마는 가나의 제조업 발달을 촉진했고 유럽산 수입품 의존도를 상당히 줄였다. 또한 광산을 국유화했고 외국 기업을 규제했으며 무상 의료와 무상 교육을 실시했고 농촌 인프라 건설에 사람들을 고용했다. 은크루마는 여타 아프리카 지역의 해방을 위해서도 목소리를 냈다. 그는 아프리카가 경제적, 정치적으로 협력해야 한다고 주장하며 범아프리카 비전을 구상했다. 또한 식민주의 시기에 식민주의자들이 그들의 이익을 위해 강요하고 조장한 모든 인위적은 분열을 철폐해야 한다고 주장했다. 그의 비전은 아프리카로만 한정되지 않았다. 인도네시아의 수카르노 대통령처럼 은크루마도 비동맹운동의 창립 멤버였다. 그는 1950년대와 1960년대 초에 글로벌 남부 각지에서 서구의 지원을 등에 업은 쿠데타가 벌어지는 것을 보면서 서구가 글로벌 남부에 지속적으로 개입하는 것에 대해 맹렬한 비판자가 되었다. 그가 1965년에 펴낸 《신식민주의: 제국주의의 마지막 단계Neo-Colonialism: The last stage of Imperialism》는 이러한 비판을 유려하고 힘 있게 담고 있는 명저로, 글로벌 남부 사람들이 느끼고 있던 좌절에 강력한 목소리를 실어주었다.

 이 모든 것이 은크루마를 즉각적인 공격 대상이 되게 만들었다. 이르게는 1961년부터 영국과 미국은 그의 제거를 계획하기 시작했다. 그리고 1966년에 실행되었다. 은크루마가 국빈 방문으로 해외에 갔을 때 CIA가 지원한 쿠데타가 일어나 그의 정부를 무너뜨리고 군부 독재 정권을 세웠다. 독재자는 국제통화기금과 세계은행을 불러와 경제를 관리하게 했고 국가 자산을 민영화했으며 외국 기업에 대한 장벽을 없앴고 가나를 예전처럼 천연자원 수출국 역할로만 한정시켰다. 은크루마는 남은 생을 기니의 코나크리에서 망명자로 살았고 다시는 고향으로 돌아가지 못했다. 

 아프리카의 다른 많은 국가들도 발전주의 실험을 했고, 사하라 이북 국가들에서 특히 두드러졌다. 하지만 서구의 개입이 너무나 빨라서 전혀 기회를 갖지 못한 곳도 많았다. 콩고에서 1960년에 독립 후 첫 지도자로 선출된 젊은 범아프리카주의자 파트리스 루뭄바는 2개월밖에 자리를 지키지 못하고 벨기에와 미국이 기획한 폭력적인 쿠데타로 살해되었다. 아이젠하워 대통령이 직접 지시한 일이었다. 미국은 루뭄바가 콩고의 광대한 광물 자원, 특히 핵 프로그램에 필요한 우라늄과 제트 엔진에 필요한 코발트 등에 대한 미국의 통제력을 훼손할지 모른다고 우려했다. 루뭄바는 살행당했고 시신은 토막 나 통에서 불태워졌다. 그의 자리에 서구 정부들은 장교 출신의 모부투 세세 세코를 앉혔다. 세코는 세계에서 가장 악명 높은 독재자로, 미국, 프랑스, 벨기에의 지원을 받아 거의 40년이나 콩고를 통치했다. 그는 서구의 지원 대부분을 해외에 있는 자신의 금고로 빼돌렸다. 모부투의 긴 통치 시기 동안 콩고(자이르로 이름이 바뀌었다)의 1인당 소득은 연 2.2%씩 감소했다. 이는 실로 어마어마한 붕괴여서, 콩고의 빈곤은 벨기에의 식민지이던 시절보다도 심해졌다.

...

이러한 기록들을 보면 아프리카 정치에 대해 흔히들 떠올리는 통념에 의구심을 갖게 된다. 서구인의 상상에서 아프리카의 전형적인 이미지는 부패한 독재자에 의해 고통받는 대륙이다. 여기에는 아프리카 사람들은 서구 스타일의 민주주의 가치를 알기에는 너무 '원시적'이라는 가정이 깔려 있다. 하지만 식민주의 시기가 끝난 이래 아프리카 사람들이 민주주의를 일구기 위해 내내 노력했지만 서구에 의해 적극적으로 가로막혔다는 것이 더 정확한 진실이다. 아프리카에서 독재가 지속된 것은 대체로 서구의 개입 때문이었다. 아프리카 사람들이 민주주의의 가치를 몰라서가 아니었다. 서구 열강은 진정한 독립을 이루려는 아프리카 사람들의 시도를 수없이 좌절시켰다. 이러한 사실은 서구가 민주주의와 대중 주권의 횃불이라는 일반적인 이미지에 의구심을 갖게 한다.

 

p174

 서구의 지배층이 케인스주의의 부상으로 자신들의 이익이 훼손되고 있다는 느낀 것은 해외에서만이 아니었다. 서구 안에서도 케인스주의적 정책이 확산되면서 성장률이 높아지고 빈곤이 줄었으며 사회적 후생이 증가하는 등의 성과를 내고 있었지만, 그에 적대적인 사람들이 있었다. 도금 시대Gilded Age와 '광란의 20년대'에 너무나 크게 이득을 얻었던 지배층은 케인스주의적 정책이 도입되면서 상당한 금전적 타격을 입었다. 미국 국민소득 중 상위 1%가 가져가는 몫이 절반으로 줄어 8%가 되었다. 상위 0.1%가 가져가는 몫은 더 극적으로 줄어서, 1960년대와 1970년대에 역사적으로 낮은 수준에 도달했다.

 한 가지 이유는 상류층에게 부과된 조세가 높아졌기 때문이었다. 1940년대와 1950년대에 미국의 최고한계세율은 90%에 달했다(오늘날 흔히 정치인들은 높은 조세가 경제를 둔화시킨다고 하지만 과거 데이터를 보면 미국에서 성장률이 가장 높았던 시기는 최고한계세율이 90%인 시기였다). 또한 노동자들의 권력이 강화되어 (노조를 통해) 이윤을 더 공정하게 나누자고 협상할 수 있게 되면서 노동자들이 더 높은 임금을 받게 된 것도 국민소득 중 상류층이 가져가는 몫이 감소하는 데 일조했다. 1940년대와 1950년대에 미국의 노조 가입률은 약 35%로, 이전 어느 때보다 높았다.

 세금이 오르고 노동자들의 임금이 높아져서 부가 잠식된 지배층은 절박하게 해법을 구하고 있었고 프리드리히 하이에크와 밀턴 프리드먼에게서 해법을 발견했다. 미국 경제학자인 프리드먼은 동유럽계 이주민 출신 부모에게서 태어났다. 그의 부모는 뉴저지주에서 저임금 노동력을 사용하는 직물 공장을 운영했는데, 그의 아버지는 노조 규제 등 수익을 갉아먹는 것이라면 무엇이든 맹렬하게 반대하는 사람이었다. 프리드먼도 자라면서 비슷한 견해를 갖게 되었고, 1930년대 이래로 내내 뉴딜 철폐를 공개적으로 주장했다. 특히 그는 가격 고정과 임금 고정 조치를 비판했다. 그에게 주된 영감을 준 사람은 오스트리아 출신 경제학자로 런던정경대학에 있던 하이에크였다. 1944년 저서 <노예의 길>에서 하이에크는 경제에 대한 개입은 그게 무엇이든 간에 반드시 전체주의로 귀결된다고 주장했다. 파시스트 국가 독일이나 공산주의 국가 러시아처럼 말이다. 하지만 당시에는 이런 견해에 호응하는 사람이 별로 없었다. 그 시절에는 모두가 케인스주의자였고, 대공황의 기억이 여전히 생생했던 사람들은 자유방임 자본주의의 위험한 시절로 돌아간다는 아이디어에 손사래를 쳤다. 그럼에도, 프리드먼과 하이에크는 언젠가는 세를 얻으리라 기대하면서 자신의 견해를 계속 설파했다. 1947년에는 같은 이데올로기를 공유하는 자유시장 경제학자들을 모아 몽페를랭 소사이어티를 결성했다. 이는 모임이 처음 열린 스위스의 휴양 도시 이름을 딴 것으로, 최대한 빠르고 긴급하게 대중 담론에 자유시장주의적 개념들을 밀어 넣는 것을 목적으로 삼았다.

 1950년에는 하이에크와 프리드먼 둘 다 시카고 대학 경제학과에 있었으며, 시카고 대학은 곧 경제학에서 자유주의를 부흥시키는 허브가 된다. 학과자으로서 프리드먼은 자신의 사상을 운동가적 열정으로 밀어붙였다. 그는 순수한 시장이라는 비전을 전적으로 믿었고 경제가(그가 생각하기에) 인간의 개입으로 왜곡되기 전의 '자연적인' 상태로 돌아가야 한다고 생각했다. 그는 인위적인 왜곡이 없어지면 시장이 자체의 작동 원리에 따라 부드럽고 완벽하게 기능해서 부와 재화를 가장 효율적인 방식으로 분배할 것이라고 주장했다. 프리드먼이 유토피아적 완벽성을 추구했다고도 말할 수 있을 것이다. 단순하고 논리적인 경제 모델에 따라 돌아가는 우주, 모두가 자신의 이기심에 따라 행동할 때 모두를 위한 최대의 이익이 달성되는 우주 말이다. 프리드먼이 볼 때 높은 인플레나 실업 같으경제적 문제는 시장이 전적으로 자유롭지 않아서 생기는 문제였고 따라서 인공적인 개입은 모두 제거되야 했다.

 프리드먼의 아이디어가 그렇게 강력할 수 있었던 이유는, 자유시장이 경제의 자연법칙을 따를 뿐 아니라 자유와 민주주의의 가치에도 부합한다고 주장했기 때문이었다. 그는 대중의 상상 속에서 시장의 자유와 개인의 자유를 강하게 연동시키고자 했다. 그에 따르면, 우리는 모두 시장에서 우리의 욕망을 자유롭게 풀어놓아야 했고 이것이 바로 민주적 참여의 본질이었다. 이 견해는 그의 1962년 저서 <자본주의와 자유>의 기초가 되었다. 프리드먼 버전의 자유는 케인스주의적 개념에서의 자유와 충돌했다. 후자의 의미에서 보면 진정한 자유는 결핍으로부터의 자유였고 이를 달성하려면 지배층의 축적을 제한해야 했다. 하지만 프리드먼과 하이에크가 보기에 이런 제한은 [자유롭게 풀려 있을 때 더욱] 아름다웠을 시스템을 훼손하고 자유의 가능성을 침식하는 악이나 다름없었다. 이 이론은 너무나 우아하고 유려해서 호소력이 있었다.

 프리드먼과 그의 추종자들에게는 미국의 케인스주의만이 아니라 유럽의 사회민주주의와 글로벌 남부의 발전주의도 적이었다. 프리드먼은 이 모두가 자본주의의 오염된 형태라고 보았고 정화되어야 한다고 생각했다. 가격 통제는 기본적인 재화의 가격을 더 많은 사람들이 구매할 수 있는 수준으로 낮추었다. 최저 임금제는 노동자를 착취로부터 보호했다. 교육과 의료 같은 공공 서비스는 모든 이의 접근을 보장하기 위해 시장에서 완전히 벗어나 있었다. 이러한 정책들은 사람들의 삶을 향상시키고 있었다. 하지만 프리드먼은 이러한 정책이 시장 균형을 교란해 숨겨진 피해를 일으키고 있다고 주장했다. 그에 따르면 가격 통제, 보조금, 최저 임금제는 철폐되어야 했다. 교육, 의료, 연금, 국립공원 등 모든 정부 서비스와 공기업은 이윤 논리에 따라 운영되도록 민간에 매각되어야 했다. 노동 시장을 교란하지 않기 위해 정부는 사회적 지출을 줄여야 했다. 세율은 누진적이면 안 되었다. 기업은 자신들의 제품을 세계 어디에서든 팔 수 있어야 했다. 프리드먼은 이런 정책들이 적용되면 전례 없는 성장과 번영이 올 것이라고 주장했다. 

 이와 같은 경제 이데올로기는 곧 '신자유주의'라고 불리게 된다. '신新'이 붙은 이유는 대공황 이후 사라졌던 고전 시장 자유주의를 되살렸다는 의미에서였지만, 정말로 새로운 요소들도 있었다. 우선 시장 자유의 개염이 개인의 자유와 같은 의미로 등치되었다. 이것은 전에 없었던 새로운 면이었고 신자유주의 이데올로기의 독특한 특징이었으며 서구에서 신자유주의 이데올로기가 정치적으로 성공을 거두는 데 핵심적인 역할을 했다. 또한 신자유주의는 정치적 의제를 추구할 때 중립성을 표방하지 않았다. 신자유주의는 보조금, 노동자 보호, 노조를 지원하는 규제에는 명시적으로 반대했고, 그와 동시에 부유한 사람들을 위한 보조금과 보호, 그리고 거대 기업을 지원하는 규제는 전혀 문제 삼지 않았다.

 1970년대에 신자유주의 개념들은 기업 세계와 상류층에서 지지를 얻었다. 이들은 프리드먼을 비롯해 '시카고학파'의 형태로 나타난 나팔수 학자들의 등장에 환호했다. 자신들의 경제 어젠다에 정당성의 휘광을 둘러주었기 때문이다. 오래지 않아 시카고학파에 기업의 후원이 쇄도했다. 유일한 문제는, 일반 시민들이 이 이데올로기를 지지하게 만들 방법이 없다는 점이었다. 케인스주의가 평범한 사람들에게 큰 이득을 주었기 때문이다. 미국이나 유럽에서는 신자유주의로 근본적인 변화를 일으키는 데 필요한 정치적 자본을 획득하는 것이 여의치 않았다.

 하지만 그 사이에 이 이론을 해외에서 먼저 실험해보는 것은 가능했다.

 

 

p179

 1950년대와 1960년대에 미국은 칠레를 특히 우려했다. 칠레는 유엔의 '중남미 및 카리브해 연안 경제위원회'와 라울 프레비시 같은 학자들이 활동하는 곳으로, 라틴아메리카 발전주의 사상의 중심지였다. 미국은 발전주의 사상이 칠레를 넘어 중남미 대륙의 다른 지역에까지 퍼질 것을 걱정했다.

 그러한 경향을 막기 위해 미국 정부는 1956년에 칠레 프로젝트를 시작했다. 목적은 칠레 경제학자들(약 100명)을 신자유주의 사상으로 훈련시켜 발전주의에 맞서게 하는 것이었다. 10년 뒤 이 프로그램은 라틴아메리가 전체로 확대되었고 시카고 대학에는 '중남미 및 카리브해 연안 경제 연구센터'가 설립되었다. 이것은 이데올로기 전쟁이었다. 사회 안전망, 무역 장벽, 유치산업 보호, 가격 통제, 공공 서비스 등 당시에 진보적인 라틴아메리카 경제학자들이 촉진하고 있던 정책들을 일축할 새로운 경제학자들을 훈련시키려는 것이었기 때문이다. 1990년대에 칠레의 장관이던 후안 가브리엘 발데스는 이 작전을 "미국이 그들의 직접적인 영향권에 있는 나라들에 이데올로기를 체계적으로 이식하기 위해 진행한 놀라운 사례"라고 묘사했다. 흥미롭게도 이 프로젝트는 예전에 트루먼이 시작한 '포인트 포'의 기치하에 고안되었고 미 국제협력국(나중에 미 국제개발처가 된다)이 수행했으며 자금은 포드 재단에서 나왔다. 말하자면, 이것은 미국이 공식적으로 진행한 첫 '국제개발' 프로그램이었다.

 하지만 미 국제개발처나 포드 재단 같은 기관이 수백만 달러를 부었음에도 이 기획은 영 성공적이지 못했다. 발전주의는 계속해서 라틴아메리카에서 속도를 얻고 있었고 많은 유권자들이 더 많은 국가주의, 토지 개혁, 그리고 글로벌 남부 국가들 사이의 협업을 요구하고 있었다.

 칠레보다 이것을 더 분명하게 보여주는 사례는 없을 것이다. 칠레에서 발전주의는 유권자들이 살바도르 아옌데를 선출하면서 추동력을 얻었다. 굵은 테 안경에 사려 깊고 겸손한 의사 출신인 아옌데는 진보적인 견해로 인기가 많았다. 당시 칠레는 인구 중 다수가 여전히 극빈곤 상태인 반면 소수의 지배층은 방대한 토지와 부의 대부분을 소유하고 있었다. 아옌데는 더 나은 임금, 더 나은 공립 학교와 의료와 주거, 더 정당한 임대료 등 더 공정한 사회를 약속하며 권력을 얻었다. CIA와 미국 기업들이 아옌데의 우파 쪽 경쟁자 호르헤 알레산드리에게 유리하도록 선거를 조작하려 했음을 생각하면, 아옌데의 승리는 실로 놀라운 성취였다.

 아옌데 정부는 약속을 이행했다. 최저 임금제를 도입했고, 빵 가격을 낮추었으며, 학교에서 무상 급식을 실시했고, 저소득층 주거를 확대했고, 노동자 계급 동네에 대중교통을 확대했다. 또한 구리 광산을 국유화했고 토지 소유에 80헥타르의 상한을 두었다(그 이상 소유하고 있었던 모든 민간 소유자에게 완전하게 보상했다). 그리고 식민지 시대의 대장원을 없애고 토지를 소농민에게 재분배했다.

 이 조치들은 효과가 있었다. 임금이 올랐고 빈곤율이 떨어졌고 취학률은 기록적인 수준에 도달했다. 하지만 미국은 이것이 마뜩하지 않았다. 아옌데의 국유화와 토지 개혁은 미국의 경제적 이익에 위협으로 보였다. 미국 기업들은 칠레에 9억 6400만 달러를 투자한 상태였고 평균적으로 17.4%의 수익을 올리고 있었다. 아옌데는 투자 자산을 잃은 사람 모두에게 완전한 보상을 약속했지만, 이것으로는 미국을 달랠 수 없었다. 미국은 아옌데의 인기가 높아지면 라틴아메리카의 다른 나라들에까지 좌파적 전환이 확산될 것을 우려했다. 당시 라틴아메리카는 미국 해외 투자의 20%를 차지하고 있었고 미국 기업은 라틴아메리카에서 5436개의 자회사를 두고 있었다. 한마디로, 미국은 여기에 걸려 있는 것이 아주 많았고, 칠레의 이웃 국가들 중에서 아옌데 스타일의 정부가 더 생겨나는 것을 원하지 않았다.

 처음에는 비군사적 압력을 써서, 즉 칠레 경제의 목을 조를 수 있는 모든 수단을 동원해서 아옌데가 국가주의적 프로그램을 철회하게 만들려고 했다. 미국의 리처드 닉슨 대통령이 CIA 국장 리처드 헬름스에게 "경제가 비명을 지르게 하라"고 지시한 것은 유명하다. 미국은 칠레로 가는 정부 대출을 막았고 민간 은행들도 칠레에 대출을 중단하도록 독려했다. 또한 칠레산 구리에 대해 6개월간 수입 중지를 선언해 칠레의 외환 보유고를 고갈시켰다. CIA는 미국의 다국적 기업 ITT가 소유한 신문인 <엘 메르쿠리오>를 활용해 반反아옌데 프로파간다도 퍼트렸다. 하지만 이 모든 노력도 소용이 없었다. 1973년에도 아옌데는 여전히 권력을 잡고 있었고, 오히려 이전 3년 사이에 아옌데의 정당은 지지율이 더 높아져 있었다. 미국은 더 공격적인 방식으로 전환하는 것 외에 방법이 없다고 판단했다. 과테말라와 인도네시아에서 사용했던 전술, 즉 오랜 옛 친구인 쿠데타를 사용하기로 한 것이다. 1972년 9월 11일에 아우구스토 피노체트 장군이 CIA가 주도한 '퓨벨트 작전Operation FUBELT'의 지원을 받아 쿠데타를 일으켰다.

 CIA가 주문한 영국제 폭격기가 산티아고의 상공을 낮게 날더니 대통령궁에 미사일과 포를 퍼부었다. 지붕과 벽이 날아가고 기둥에서 먼지와 연기가 피어올랐다. 살바도르 아옌데와 칠레 국민들의 희망은 이렇게 끝났다. 숨지기 몇 분 전에 아옌데는 전국에 방송된 마지막 연설을 했다 "제 이야기에 억울함은 없겠지만 실망스러움은 있을 것입니다." 그의 연설을 이렇게 시작했다. "저는 제 생명으로 국민에게 충성을 바칠 것입니다. 저는 수많은 칠레인들이 선한 양심으로 심은 씨앗이 영원히 마르지 않을 것이라고 확신합니다. 이 나라의 노동자 여러분. 정의를 향한 커다란 열망에 대해 통역자에 불과했던 한 사람에게 보여주신 신뢰에 깊이 감사드립니다. 저는 칠레와 칠레의 운명을 믿습니다. 배신자가 승리하는 쓰디쓴 순간에도 또 다른 사람들이 이 어둠과 고통의 순간을 극복해낼 것입니다."

 그가 쏟은 모든 노력의 결과, 아옌데는 머리에 크게 손상을 입은 채 집무실의 붉은 소파에 쓰러져 사망하는 것으로 생을 마감했다. 그의 안경은 부서진 채로 바닥에 떨어져 있었다. 리처드 닉슨은 5000마일 떨어진 곳의 비슷하게 생긴 집무실에서 승인의 의미를 담아 고개를 끄덕였다.

 피노체트의 권력 장악은 신속하고 잔혹하게 이루어졌다. 기밀 해제된 CIA 문서에 따르면 대통령궁 폭발이 있고서 피노체느는 아옌데의 사상을 지지하던 8~10만 명을 체포해 수감했다. 대부분은 소농민이거나 노동자였다. 3200명이 실종되거나 처형되었다. 정권 초기에 많은 이들이 죽음의 수용소로 바뀐 스포츠 경기장에서 처형되었고 20만 명이 국외로 도피해 정치적 망명자가 되었다.

 칠레에서의 쿠데타는 그보다 이른 시기에 미국의 지원으로 자행된 쿠데타들과 스타일이 비슷했지만 매우 중요한 새로운 요소가 있었다. 단순히 미국 기업에 친화적인 지도자를 심는 것이 아니라 경제 정책을 자유시장 원칙에 따라 완전히 개조하려 한 것이다. 이러한 경제 기조는 모든 반대 세력이 분쇄되었기 때문에 가능했고, 오로지 그랬기 대문에 가능했다. 1975년에 미국 상원의 한 위원회가 실시한 조사에 따르면 "CIA의 협력자들이 초창기에 전반적인 경제 계획에 관여했고, 이것이 칠레 독재자[피노체트]의 핵심적인 경제적 의사결정에 기초가 되었다." CIA가 자금을 댄 칠레 경제학자 집단(시카고 대학에서 학위를 받아서 '시카고 보이즈'라고 불린다)은 <자본주의와 자유>에서 프리드먼이 개진한 처방을 실행하기 위해 피노체트 정권에 경제 자문을 제공했다. 프리드먼 본인도 피노체트 정권의 핵심 자문이었다.

 프리드먼이 칠레에서 한 실험은 파괴적인 결과를 낳았다. 쿠데타 직후부터 하이퍼인플레이션이 시작되어 높게는 인플레율이 341%에 달했다. 시카고 보이즈가 인플레를 꺽기 위해 통화 공급을 줄이자 불황이 왔고 실업율이 9% 가까이로 올라갔다(아옌데 시절 3%). 이후 몇 년 동안 칠레에서 거의 500개의 국영 기업이 민영화 대상에 올랐다. 여기에는 은행도 있었고, 공립 학교도 있었으며, 심지어는 사회보장 시스템도 민영화되었다. 또 시카고 보이즈가 관세 장벽을 없애면서, 쿠데타를 지원했던 제조업마저 값싼 수입품이 낮은 가격으로 치고 들어온다고 불만을 토로했다. 보조금과 가격 통제가 없어지자 생활비가 급등했고 사회 서비스 지출은 반으로 줄었다. 그러는 동안 군에 들어가는 지출은 증가했다. <이코노미스트>마저 이것을 "자해의 잔치"라고 불렀을 정도다.

 1978년 이후에 경제가 약간 회복되긴 했지만 이는 해외에서 투기적 금융 자본이 들어와서 떠받친 회복이었고 1982년이 되자 경제는 또다시 심각하게 붕괴했다. 하이퍼인플레가 다시 시작되었고 실업률은 35%에 달했다. 점차 상황은 피노체트가 시카고 보이즈 상당수를 해고하고, 민영화되었던 기업과 은행 다수를 다시 국유화하지 않을 수 없을 정도로 나빠졌다. 경제가 완전한 붕괴로 치닫지 않게 해준 유일한 버팀목은 민영화되지 않은 국영 구리 광산 기업 코델코가 국가 수입의 85%를 대어준 것이었다. 1988년에 경제가 회복되고서야 프리드먼과 시카고 보이즈는 실험의 성공을 선포할 수 있겠다고 느낄 수 있었다. 그런데 누구를 위한 성공이었는가? 빈곤율은 41%였다. 평균 임금은 14% 낮아졌다. 최저 임금의 실질 가치는 42%나 낮아졌다. 기아가 만연했고 가장 가난한 40%의 식품 섭취는 하루 2000칼로리에서 1600칼로리 떨어졌다. 심지어는 1993년까지도 1인당 GDP가 쿠데타 이전 수준보다 12%나 낮았다. 피노체트 시절의 새 경제 체제에서 이득을 본 사람은 지배층뿐이었다. 은행과 외국인 투자자 들은 규제로부터 '해방'되어 호시절을 맞았다. 가장 부유한 10%가 국민 소득 중에 차지하는 비중은 28%나 증가했다. 칠레는 세상에서 가장 불평등한 사회 중 하나가 되었다.

                                                                                                  

p208

 원래 국제통화기금(IMF)은 국제수지 불균형 문제를 겪고 있는 국가들에 국제통화기금 자체가 가진 자금으로 대출해주기 위해 세워진 기구였다. 그 나라들이 정부 지출을 지속할 수 있게 해서 또다시 대공황으로 치닫는 것을 막기 위한 것이었다. 이것은 산업화된 국가들이 어려운 시기에 가라앉지 않도록 부양해야 한다는 존 메이너드 케인스의 개념에 입각한 계획이었다. 하지만 이제 G7 ㄱㄱ가들은 국제통화기금을 완전히 다른 목적으로 사용하고자 했다. 글로벌 남부 국가들이 국내 프로그램에 정부 지출을 멈추고 그 돈을 서구 은행에 부채를 상환하는 데 사용하게 한다는 것이었다. 다른 말로, 이제 국제통화기금은 빚 갚으로 독촉하는 글로벌 빚쟁이 역할을 할 예정이었다. 

 국제통화기금 임무의 근본적인 전환은 이 시기에 자크 드 라로지에르 총재를 비롯한 국제통화기금 고위층이 케인스주의적 철학을 지지하던 사람들을 체계적으로 몰아내고 그 자리를 신자유주의 이데올로기에 더 친화적인 사람들로 채운 덕분에 이루어질 수 있었다.

 이 계획의 작동원리는 다음과 같았다. 국제통화기금은 개도국들이 일련의 구조조정 계획에 동의할 경우 그들이 부채를 더 조달해 자금을 얻을 수 있게 돕는다. 그 구조조정 계획은 기본적으로 두 가지의 부채 상환 매커니즘을 포함해야 한다. 첫째, 해당 개도국은 기존의 모든 현금 흐름과 자산을 부채 상환으로 돌려야 한다. 즉 의료, 교육, 농업, 식품 등에 들어가는 보조금과 유치산업 보조금 등을 줄여야 하고 통신이나 철도와 같은 공기업을 매각해 공공 자산을 민영화해야 한다. 한마디로, '발전'을 위해 진행하던 개혁을 되돌려야 한다. 이렇게 지출을 마련한 돈과 민영화로 들어온 자금은 월가에 돈을 갚는 데 써야 한다. 공공 자산과 사회적 지출이 사후적으로 대외 부채의 담보물이 된 것이다. 물론 원래 대출을 받았을 당시에는 이런 조건이 없었다. 글로벌 남부 국가들이 미국 은행들이 저지른 고위험 행위에 대한 손실을 자국민의 돈 수백억, 수천억, 심지어 수조 달러를 끌어다 메꿔주는 셈이었다. 즉 가난한 글로벌 남부 국가들이 금고를 탈탈 털어서 서구의 가장 부유한 은행들로 부를 이전하는 격이었다.

 두 번째 메커니즘은 이보다는 약간 덜 직접적이었다. 구조조정 프로그램이 부과된 국가들은 급진적으로 규제를 완화하도록 압력을 받았다. 무역 장벽을 없애고 시장을 외국 경쟁자들에게 개방하고 자본 통제를 철폐하고 가격 통제를 없애고 노동 규제와 환경 규제를 없애서 경제가 '외국인 직접 투자에 매력적'이고 더 '효율적'이게 해야 했다. 이와 같은 자유시장적 개혁이 해당 국가의 경제 성장율을 높여서 빠르게 부채를 상환할 수 있게 해줄 것이라는 논리였다. 즉 이들 은행가들이 말하듯이 그 국가에서 "부채에서 벗어나 성장"할 수 있으리라는 것이었다. 또한 구조조정 프로그램에 따르면 채무국은 부채 상환에 쓸 현금을 더 많이 확보하기 위해 경제를 수출 쪽으로 재구성해야 했다. 이는 발전주의 시기에 매우 효과를 보았던 수입 대체 프로그램을 포기해야 한다는 말이었다. 이에 더해 구조조정 프로그램은 채무국이 인플레를 낮게 유지하도록 강요했다. 일종의 화폐 긴축을 강요한 것인데, 이는 채무국이 인플레를 통해 부채의 가치를 절하할 수 있다는 미국 은행들의 우려 때문이었다. 이것은 글로벌 남부 국가들에 큰 타격이었다. 부채를 인플레로 줄이지 못하게 되었을 뿐 아니라 통화 팽창 정책으로 고용과 성장을 촉진하지도 못하게 되었기 때문이다.

 

p230. 민영화의 수혜자와 피해자

 민영화(Privatization)는 투자자들에게 굉장한 기회를 창출해주지만 가난한 사람들에게는 너무나 자주 재앙적인 결과를 초래한다. 공공 유틸리티가 공적으로 소유되어 있을 때는 대개 전체 인구에게 서비스를 제공하는 것을 책무로 삼는다. 그런데 민간이 소유한 공공 유틸리티는 이윤을 올리는 것을 책무로 삼으므로 돈을 낼 여력이 없는 사람들에게는 서비스를 제공할 이유가 없게 된다. 바로 이것이 1980년대와 1990년대에 세계은행이 부과한 민영화 기간 동안 벌어진 일이었다. 가장 잘 알려진 사례는 볼리비아다. 1990년대 중반에 세계은행은 볼리비아 정부가 코차밤바의 물 공급을 민영화하도록 압력을 넣었다. 이 계약은 미국 기업 벡텔이 따냈고 벡텔은 물값을 35%나 올렸다. 너무나 기본적인 자원인 물을 구매할 돈이 없어서 2000년에 코차밤바 사람들은 저항에 나섰고 이것은 민영화에 맞서는 저항의 세계적인 상징이 되었다. 하지만 세계은행은 이 정책을 계속 고수했다. 2008년 말에도 세계은행의 한 고위 당국자는 수도 민영화가 가난한 사람들에게 피해를 준다는 증거가 쌓여가고 있는데도 왜 세계은행이 민영화를 지지하느냐는 질문에 이렇게 대답했다. "우리는 깨끗한 물과 위생 서비스를 제공하는 것이 진짜 비즈니스 기회라고 생각합니다."

 세계은행과 국제통화기금이 G7 국가들에게 얼마나 중요한지는 과장해서 말하는 것이 불가능할 것이다. 발전주의와 싸우는 데 가장 강력한 도구일 뿐 아니라 서구 자본주의의 위기를 '공간적 해법'으로 해소할 수 있는 길을 제공하기 때문이다. 서구 자본주의는 1970년대 말에 자신의 한계에 부닥쳐 위기를 맞았지만 가난한 나라들을 투자, 추출, 축적의 새로운 변경으로 삼으면서 자신의 한계를 넘고 자신의 내적 모순을 피해가며 지속될 수 있었다. 적어도 단기적으로는 말이다. 물론 이것은 위기를 타개하는 진정한 해법이 아니라 위기의 위치를 지리적으로 옮기는 데 불과했다. 하지만 이렇게 하지 않았다면 미국과 유럽의 자본주의는 시장 포화, 생태적 고갈, 계급 갈등의 한계에 부닥쳐 진즉에 부서졌을 것이다. 이것이 세계은행과 국제통화기금이 미국 정부와 월가에 그토록 소중한 이유이다. 이 기구들은 서구 자본주의 시스템을 유지하는 데 꼭 필요하다.

 이는 세계은행과 국제통화기금이 왜 계속해서 그들의 정책을 고수하는지 이해하는 데 도움을 준다. 빈곤 감소를 위해서가 아니다. 그들의 공식적인 슬로건과 마케팅 문건들이 우리로 하여금 그렇게 믿도록 만들려  하지만 말이다. 사실 '빈곤'이라는 단어는 세계은행의 설립 협정분에 한 번도 등장하지 않는다. 제1항에서 천명한 목적은 "민간 투자"와 "국제 교역의 성장을 촉진"하는 것이라고 되어 있다. 이러한 기준에 따르면 세계은행은 실패가 아니라  굉장한 성공을 거두었다고 말할 수 있다. 그리고 여기에 놀라지 말아야 한다. 월가와 미국 정부의 통제를 받으며 수십억, 수백억 달러를 쓰는 기관을 '실패'하게 놔뒀을 리가 없지 않은가?

 이러한 렌즈로 보면 역대 세계은행 총재가 모두 국제개발 전문가가 아니었다는 사실도 이해가 된다. 빈곤 감소와 개발에 헌신하는 조직이라면 국제개발 전문가여야 할 것 같은데, 미국의 군 출신이나 월가 경영인 출신이 이곳의 총재를 맡았다. 글로벌 경제 시스템에서 미국의 역할에 전략적인 이해관계가 있는 사람들이었던 것이다. 여기 역임 순서대로 역대 세계은행 총재 명단이 있다.

 존 맥클로이, 미 전쟁부 차관
 유진 블랙, 체이스 은행 경영자
 조지 우즈, 퍼스트 보스톤 코퍼레이션 은행 경영자
 로버트 맥나마라, 미 국방 장관, 포드 자동차 경영자
 올던 클로센, 뱅크 오브 아메리카 경영자
 바버 코너블, 미국 의원
 루이스 프레스턴, JP모건 은행 경영자
 제임스 울펀슨, 기업 변호사이자 은행가
 폴 울포위츠, 미 국방부 차관
 로버트 졸릭, 미 국무부 차관 및 미 무역 대표부 대표

 

 미국 정부가 세계은행 최고위직으로 누구를 선택했는지는 세계은행의 진정한 목적이 무엇인지에 대해 명백한 실마리를 준다. 2012년이 되어서야 국제개발 전문가인 김용이 임명되었는데, 이는 버락 오바마 대통령이 세계은행의 평판을 되살리기 위한 시도로서 한 일이었다.

 

p250. 비교 우위론의 헛점과 자유무역의 기만성

  자유주의는 가난한 나라들이 발전하는 데 필요한 것과 상충한다면, 왜 대부분의 주류 경제학자는 계속해서 자유무역을 주창하는 것일까? 

 한 가지 이유는 자유무역 이론이 상당히 설득력 있게 들린다는 점일 것이다. 현대 자유무역 이론의 주춧돌을 놓은 사람은 19세기 초의 영국 경제학자 데이비드 리카도다. 리카도는 각국의 기술적 조건이 주어져 있을 때 모든 국가가 타국 대비 비교 우위가 있는 영역에 특화하면 글로벌 경제의 생산성과 효율성이 최고 수준으로 달성된다고 주장했다.  포르투갈이 상대적으로 와인을 잘 생산하고 잉글랜드가 상대적으로 의복을 잘 생산한다면 잉글랜드가 와인 생산에 시간을 낭비하는것은 합리적이지 않다. 의복 생산에 집중하고 와인은 포르투갈에서 수입하는 것이 더 낫다. 

 이 모델은 너무나 합리적으로 보인다. 아니, 자명하게 옳은 논리로 보인다. 하지만 이 이론은 글로벌 불평등을 자연스러운 것으로 만들어버림으로써 해로운 영향을 미친다. 이 모델은 각 국가가 생산 요소의 특정한 부존량을 자연적으로 가지고 있다고 가정한다. 우리가 부유한 나라들은 자연적으로 자본이 비교적 풍부하고 가난한 나라들은 자연적으로 싼 노동력이 풍부하다고, 마치 신이 별자리에 새겨놓은 운명처럼 원래부터 그렇게 되어 있었다고 생각하게 만드는 것이다.

 우리는 다음과 같은 질문을 해봐야 한다. 애초에 왜 가난한 나라에서는 노동력이 그렇게 싸고 애초에 왜 부유한 나라에서는 자본이 그렇게 풍부한가?

 독일의 한 경제학자가 1848년의 유명한 연설에서 자유무역 이론과 유럽의 제국주의에 대해 다음과 같이 날카로운 비판을 했다.

 '우리는 자유무역이 국제 분업을 발생시키고 그에 따라 각 국가가 자신의 자연적 우위와 가장 잘 조화되는 것을 생산하게 되리라는 설명을 자주 듣습니다. 여러분은 커피와 사탕수수 생산이 서인도제도의 자연적인 운명이라고 믿으실지 모르겠습니다. 하지만 상업에 관심이 없는 자연은 두 세기 전에 사탕수수도, 커피나무도 그곳에 심어놓지 않았습니다.'

 

 칼 마르크스가 여기서 지적한 것은 자본과 노동의 상대적 부존량은 역사적, 정치적 과정의 산물이라는 점이다. 인간이 만든 것이지 자연적으로 주어진 것이 아니라는 뜻이다. 부유한 국가에서 노동력이 비싼 이유는 오랜 역사를 거치면서 강한 노조와 노동법이 형성되었기 때문이다. 부유한 국가에서 자본이 풍부한 이유는 오랫동안 관세로 보호해서 자국 산업을 발달시킬 수 있었기 때문이다. 가난한 나라에서 노동력이 싸고 자본이 부족한 이유는 식민주의 시기 동안의 박탈, 불평등 조약, 그리고 구조조정의 오랜 역사를 지녀왔기 때문이다. 비교 우위는 주어진 것이 아니라 만들어진 것이다. 

 

 글로벌 남부 국가들은 관세와 보조금을 전략적으로 사용해 국내 산업을 일굼으로써 부존 자본량을 늘릴 수도 있었다. 실제로, 독립을 하고 나서 구조조정이 강요되기 전이던 1950년대와 1960년대에 글로벌 남부 국가들은 바로 그러한 일을 시작했다. 하지만 이런 종류의 산업 전략에는 신중한 계획과 정부 개입이 필요한데, 계획과 개입은 자유무역주의자들이 '자연적인' 질서를 교란한다며 맹렬하게 반대하는 것이다.

 

p322

 과학자들이 알려주는 바로, 재앙적인 기후 변화를 피하려면 지구 기온이 기준점보다 1.5도 이상 높아지면 안 된다. 2015년에 각국 정부가 제21차 유엔 기후변화협약 당사국총회COP21를 위해 파리에 모였을 때 합의한 목표치도 1.5도 이내 상승이었다. 하지만 협정문의 내용을 보면 실천 의지는 그에 훨씬 못 미쳐서, 목표치가 립 서비스에 불과했음을 보여준다. 파리 협정은 전적으로 각국의 자발적인 참여에 달려 있다. 이제까지 제출된 것이 다 이행된다 해도(이것도 있을 법하지 않은 일이다. 이 감축 목표에는 구속력이 없기 때문이다) 1.5도 이내라는 목표치에 한참 못 미친다. 아마 우리는 2.7도나 3.7도 정도의 상승을 향해 가게 될 것이다.

 66%의 확률로 상승폭을 1.5도 이내가 되게 하려면 2015년부터 금세기 말까지 지구 대기에 205기가톤 이상의 이산화탄소를 배출하지 말아야 한다. 이것을 '탄소 예산'이라고 부른다. 현재 매년 40기가톤을 배출하고 있으므로 1.5도 기준 탄소 예산은 2020년이면 바닥나게 된다. 205기가톤 배출 이내로 우리의 활동을 제약하는 데는 막대한 노력이 들 것이다. 세계의 화석 연료 매장량이 이산화탄소 2600기가톤을 배출할 수 있는 양에 해당하기 때문이다. 이것은 오늘날의 기술과 경제 조건에서 추출 가능한 양으로 알려진 것이다. 다른 말로, 현재 우리는 우리 지구의 한계를 13배나 넘겨서 화석 연료를 사용하겠다는 계획을 세우고 있다(축산, 산업적 농경, 시멘트 생산, 삼림 파괴 등 탄소 배출의 다른 주요 요인들 이야기는 아직 하지도 않았다). 1.5도 이내로 상승폭을 묶으려면 우리는 추출 가능한 화석 연료의 93%를 매장된 채로 그냥 두어야 한다.

 그런데 파리 협정은 이 빨간 선에 대해서는 언급하지 않는다. 사실, 파리 협정은 화석 연료 사용에 대해서는 어떤 한계도 부과하고 있지 않다. 게다가 파리 협정은 2020년까지 실행되지 않는다. 즉 협정 체결 이후 5년간 각국은 계속해서 탄소를 배출할 수 있다. 그리고 그 시점이면 1.5도 상승폭은 달성할 수 없게 된다. 탄소 예산이 아무리 빠듯하다고 해도 5년의 이행 기간은 필요하지 않느냐고 생각할 수도 있을 것이다. 하지만 우리는 인류세의 기후 위기를 적어도 1960년대부터 알고 있었고, 국제 협상으로 탄소 배출을 줄이기로 한 것도 적어도 1990년부터다. 그런데도 지난 20년 사이에 연간 탄소 배출은 줄기는커녕 61% 증가했다. 국제통화기금의 가장 최근 추산에 따르면 정부들은 여전히 화석 연료 산업에 연 5.3조 달러에 달하는 보조금을 준다. 그와 동시에, 어처구니없게도 세계무역기구의 법정을 이용해 태양광 패널 같은 대안적인 기술에 보조금을 주는 것을 막고 있다.

 현재 경로대로 갈 경우에 예측되는 대로 상승폭이 3.7도나 4도 정도가 되면 지구는 어떤 모습일까? 보수적으로 추산치를 잡아도 지구에서 500만 년간 본 적 없는 폭염이 닥칠 것이다. 이탈리아, 스페인, 그리스 등의 남유럽 국가들은 사막이 될 것이다. 2100년이면 해수면이 1.24미터 올라가서 암스테르담부터 뉴욕까지 많은 도시가 물에 잠길 것이다. 40%의 생물종이 멸종 위기에 처할 것이고 삼림의 상당 부분이 시들어 없어질 것이다. 작물 산출은 35% 정도 떨어질 것이고 핵심 식량 작물인 인도 밀이나 미국 옥수수 생산은 60%나 급감할 것이다. 이는 특히 글로벌 남부 지역에서 광범위한 기근으로 이어질 것이다. 상승폭이 4도가 되면 그린란드의 빙하와 서남극 빙상이 완전히 녹는데, 이는 해수면을 6미터 더 상승시킬 것이고 전 세계에서 수억명의 사람들이 터전을 잃고 피신해야 할 것이다. 

 기후 과학자들은 상승폭 4도의 공포를 경고하고 있다. 2012년에 세계은행이 펴낸 보고서에 따르면 상승폭 4도는 "극단적인 폭염, 글로벌 식량 재고의 감소, 생태계와 생물종 다양성의 파괴, 생명을 위협할 정도의 해수면 상승"을 일으킬 수 있다. 매우 보수적인 주장이 아니면 잘 하지 않는 '기후 변화에 관한 정부 간 협의체IPCC'도 가까운 미래에 대한 예측치조차 암울하다고 언급했다. 이에 따르면 라틴 아메리카는 '아마존 동부가 열대 우림에서 사바나로 바뀔 것이고 인간 소비와 농경, 에너지 생산을 위한 수자원 가용량이 현저하게 바뀔 것'으로 예측된다. 아프리카에서는 "2020년까지 7500만 명에서 2억 5000만 명의 사람들이 물 부족 심화를 겪을 것으로 보이며 빗물 농경 산출이 몇몇 지역에서는 50%까지도 줄어들 수 있고 식품 생산과 접근성이 심각하게 훼손될 것"으로 보인다. 아시아에서는 "중앙아시아, 남아시아, 동아시아, 동남아 아시아에서 2050년까지 가용담수량이 줄어들고 몇몇 지역에서는 가물과 홍수와 관련된 질병으로 사망율이 증가할 것으로 보인다."

 요컨대 상승폭이 4도가 되면 우리가 알고 있는 인간 문명이 존재할 수 없다. 물리적으로 폭염을 견디고 연안 도시들에서 도망치는 것은 어떻게 할 수 있다 쳐도, 농업이 붕괴할 것이므로 먹을 것을 충분히 확보할 방법이 없어진다.

 그리고 우리가 아직 완전히는 예측하지 못하고 있는 되먹임 고리가 있다. 몇 년 이내에 북극에서는 여름 동안 빙하가 없어질 것이다. 이미 북극 빙하의 소실은 막대한 메탄 배출을 야기하는 길로 가고 있다. 수백만 제곱마일에 걸쳐 과학자들이 예측한 것의 2배나 되는 메탄이  바다 표면 아래에서 부글거리고 있는 것이다. 국제에너지기구는 아직 우리가 완전히 알지 못하는 이러한 문제들까지 포함하면 기온 상승폭이 6도가 넘을지도 모른다고 추산한다. 이 시나리오에서 다른 것은 몰라도 이것만큼은 확실하다. 이 저도로 급격한 기후 변화는 빈곤 타파에 쓰여야 할 모든 곡물을 쓸어 없애고 지난 반세기간 발전을 통해 이룩한 기대 수명의 증가를 다 무위로 되돌리고도 남을 것이다. 미래의 학자들은 오늘을 돌아보면서 발전이라는 개념을 기후가 충분히 안정적이어서 인류가 더 나은 미래를 상상하는 것이 말이 되던 마지막 시기인 홀레세의 진기한 몽상이었다고 말하게 될 것이다.

 

p326

 자본주의 자체가 지구의 위기를 막아야 할 절박할 필요와 모순을 빚고 있는 것은 아니다. 문제는 특정한 종류의 자본주의다. 정부 예산을 가차 없이 잘라내고 국가가 경제를 규제할 수 있는 권한을 갉아먹는 종류의 자본주의가 문제인 것이다. 긴축과 민영화를 해야 하는데 어떻게 국가가 탄소 제로를 위한 인프라를 구출할 수 있겠는가? 조세와 규제라는 개념 자체가 사회주의적이라거나 전체주의적이라는 오명을 쓰고 심지어는 몇몇 국제 협정에 의해 불법이라고 규정되는 마당에 어떻게 국가가 화석 연료 회사들을 규제할 수 있겠는가? (물론 미국의 농업 기업과 화석 연료에 대한 보조금은 예외적으로 허용하면서) 보조금을 '자유무역'의 원칙에 위배된다는 이유로 금지하는데 어떻게 재생 에너지 혁신에 투자할 수 있겠는가? 국가의 예산이 깍이고 공공 서비스가 줄었는데 어떻게 국가가 임박한 인도적 위기에 대응하기를 기대할 수 있겠는가?

 우리가 지난 몇십 년간 일궈온 경제 시스템은 21세기의 가장 심각한 도전에 맞서는 것을 불가능하게 만들었는지도 모른다.

 

p331

 악의 뿌리를 공격하는 사람이 한 명 있다면, 가지만 잘라내는 사람은 천 명쯤 있다. 또한 가난한 사람들에게 가장 많은 돈을 주는 사람은 자신의 삶의 방식으로 인해 자신이 헛되이 완화하려는 바로 그 비참함을 산출하는 데 가장 큰 기여를 하고 있는지도 모른다.

- 헨리 데이비드 소로

 

p333

 오스카 와일드가 언급했듯이, 감정은 지성보다 더 빠르게 자극된다. '고통에 공감하는 것이 사상에 공감하는 것보다 쉽다'는 것이다. 그리고 빈곤에 대해 생각할 때, 우리는 이 위기가 우리에게 요구하는 바가 무엇인지를 더 진지하게 생각해볼 필요가 있다.

 사람들은 주위에서 끔찍한 가난과 흉측한 추악함과 무시무시한 기아가 펼쳐지고 있는 것을 본다. 이 모든 것에 크게 마음이 움직이지 않기는 어려울 것이다. 그래서 존경할 만한 의도를 가지고 매우 진지하고 감상적으로 자신이 보고 있는 악을 고치기 위한 일에 나선다. 하지만 그들의 시도는 질병을 치료하지 못하며, 질병을 연장할 뿐이다. 사실, 그들의 치료는 질병의 일부라고 할 수 있다. 예를 들면, 그들은 빈곤 문제를 가난한 사람이 그저 생존해 있을 수 있게 도움으로써 해결하려 하지만, 이것은 해법이 아니고 오히려 어려움을 악화시킨다. 적합한 목표는 빈곤을 발생할 수 없도록 사회에 기반을 재조정하는 것이다. 그런데 이타적인 미덕은 이 목적의 수행을 가로막는다. 최악의 노예 소유주는 자신의 노예에게 친절한 소유주듯이, 그래서 그 제도의 끔찍한 면을 그것 때문에 고통받는 사람들이 깨닫지 못하게 하고 그 제도에 대해 고찰하는 사람들도 그것을 파악하지 못하게 하듯이, 선한 일을 하려고 가장 열심히 노력하는 사람이 가장 크게 해를 끼치는 사람이다. 자선은 타락을 가져오고 의욕을 떨어뜨린다.

 

 와일드의 언급은 많은 통찰을 준다. 우선, 자선은 가난한 사람들의 삶을 즉각적이고 일시적인 의미에서 향상시킬 수는 있지만 애초에 그들을 가난하게 만든 환경으로 곧바로 그들을 되돌려보낸다. 결국, 아무것도 변하지 않는 것이다. 그리고 돕고자 하는 박애주의자로서의 충동이 일단 충족되고 나면 사람들은 그 문제를 고찰하거나 실제 원인과 씨름하는 데 더 이상의 노력을 쏟지 않을 것이다. 즉 자선은 변화에 대한 의욕을 떨어뜨린다.

 하지만 와일드는 한 걸음 더 나아간다. 그는 자신이 빈곤의 궁극적인 원인, 즉 시스템의 중심에 있는 부패에서 우리의 관심을 돌려놀을 뿐 아니라 고통받는 당사자들마저 문제의 본질을 잘 알지 못하게 만든다고 주장한다. 자선은 그들이 자기 자신을 비하하고 그들의 정치적 주체성을 박탈하는 세력에 직접적으로 도전할 수 있는 능력을 떨어뜨릴 수 있다. 심각한 결함이 있는 시스템의 모순을 약간만 완화함으로써 시스템이 더 오래 지속되게 하는 것이다. 물론 대부분의 경우 박애주의자들이 그런 의도를 가지고 있는 것은 아니다. 하지만 때로는 명시적으로 그런 의도에서 자선이 이루어지기도 한다. 일례로, 몇몇 연구자들은 서구가 제공하는 식량 원조가 최악의 기근을 막고 사람들이 딱 생존할 만큼의 칼로리를 얻게 하는 정도까지만으로 신중하게 계산되고 있다고 지적했다. 이 정도에도 미달해 기근이 발생하면 세계 경제 체제의 불공정함이 너무나 명백해져서 정당성이 무너지고 정치적 격변이 뒤따를 것이기 때문이다. 그러한 결과를 피하기 위해, 부자들 중 정치적으로 명민한 사람들은 딱 그만큼의 자선에 자신이 가진 잉여 재산의 일부를 기꺼이 투자한다.

 

p335

 조지 소로스나 록펠러 가문 같은 저명한 자선가들이 취하는 접근 방식이 낮에는 무지막지하게 돈을 벌고 저녁에는 가난한 사람들의 삶을 개선하기 위해 돈을 기부하는 것이다. 하지만 우리는 어려운 질문을 던져야 한다. 애초에 그들의 부는 어디에서 왔는가? 소로스의 재산 대부분은 1997년 아시아 금융위기에 직접적인 원인이 된 통화 투기에서 나왔고, 이 위기는 수백만 명을 빈곤으로 몰아넣었다. 록펠러 재단은 화석 연료 산업을 독점함으로써 부를 일궜다. 거의 모든 경우에서 우리는 그들의 기부를 가능하게 한 부의 축적이 기부로 해결하고자 하는 바로 그 문제를 야기한 과정을 통해 이루어진 것임을 발견할 수 있다.

 스타벅스는 에티오피아 커피 재배 지역 빈민들의 건강을 개선하기 위해 기부를 했지만 에티오피아 커피 재배자들에게 지극히 낮은 임금을 지불해 비난을 받았다. 코카콜라는 과테말라의 가난한 지역을 돕기 위해 약간의 기부를 하고 있지만 과테말라 사탕수수 농장의 임금이 오르는 것을 막기 위해 노조 운동가들에 대한 폭력을 사주했다는 혐의를 받고 있다. 공정이 자선보다 낫다. 공정이 없으면 자선은 사기가 된다. 똑같은 주장을 서구의 공식적인 원조 활동에 대해서도 할 수 있다. 세계의 빈곤을 줄이려면 미국 정부는 원조를 제공할 게 아니라 애초에 빈곤을 초래한 주 요인인 구조조정, 탈세, 불공정한 무역 규정 등을 없애야 한다.

 

p357

 이상하게도 파리 협정은 화석 연료와 화석 연료 회사들에 대해서는 언급하지 않았는데, 이것은 치명적인 빈틈이다. 가장 강력한 기후 변화 저감 조치 중 하나가 화석 연료 회사에 대한 보조금을 없애는 것이기 때문이다. 현재 연간 5.3조 달러에 달하는 지원을 없애면 화석 연료가 재생 에너지에 비해 경쟁력을 잃게 만들 수 있을 것이다. 나아가 그 5.3조 달러를 조류, 풍력, 태양열 등 재생 에너지에 투자해야 한다. 하지만 바이오 연료는 피해야 한다. 바이오 연료 생산에는 토지가 필요한데, 이것이 토지 탈취를 일으키기 때문이다. 또한 토지가 식량 생산에서 에너지 생산으로 용도 전환되면 식량 안보에도 문제가 생긴다. 기후 변화와 관련해 진정한 진전을 이루려면 전 지구적으로 정책 결정에 막대한 영향력을 행사하는 홧헉 연료 산업을 타격하는 것이 꼭 필요하다. 보조금을 줄이는 것에 더해, 대학, 재단, 도시 등이 화석 연료에 기금을 투자하지 말아야 하는데, 이러한 운동은 이미 상당히 세를 얻고 있다.

 

 

p361

 어느 정도 미치지 않고서는 근본적인 변화를 수행할 수 없습니다. 그러한 광기는 순응하지 않을 용기, 옛 공식에 등을 돌릴 용기, 미래를 발명할 용기에서 나옵니다. 

 - 토마 상카라

 

p362

 발전주의의 표준 모델은 가난한 나라들이 부유한 나라를 따라잡을 수 있을 만큼 산업 경제를 (그리고 소득을) 성장시킬 수 있다고 전제한다. 이렇게 성장하려면 자원 소비를 늘려야 하고, 그에 따라 폐기물, 오염, 탄소 배출도 증가하게 된다. 이것은 정상적이고 어느 정도는 불가피한 과정이기도 하다. 하지만 불행히도 우리의 지구는 자원 측면에서도, 온실 가스를 흡수할 수 있는 역량 측면에서도, 그러기에 충분한 생태적 역량을 가지고 있지 않다. 과학자들의 추산에 따르면 현재의 전 세계 소비 수준에서도 이미 우리는 지구의 생태 역량을 매년 60% 가량씩 초과하고 있다.

 이는 전적으로 부유한 국가의 과다 소비 때문이다. 오클랜드에 있는 '글로벌 생태 발자국 네트워크'의 데이터에 따르면 지구는 우리 각자가 연간 1.8글로벌헥타르를 소비할 수 있는 생태 용량을 가지고 있다. 글로벌헥타르는 인간의 자원 사용, 폐기물 배출, 오염, 탄소 배출 등을 모두 고려한 생태 발자국의 표준 단위다. 우리의 소비가 1.8글로벌헥타르 수준을 넘어서면 자원 소비분이 다시 채워질 수 없거나 폐기물이 흡수될 수 없다. 즉 생태가 점점 더 악화되는 경로에 고착된다. 1.8글로벌헥타르는 가나와 과테말라의 평균 소비 수준과 비슷하다. 대조적으로 유럽은 1인당 4.7글로벌헥타르, 미국과 캐나다는 평균 8글로벌헥타르를 소비한다. 공정한 정도보다 몇 배나 많이 소비하고 있는 것이다. 전 세계 인구 모두가 고소득 국가의 평균 시민처럼 살 경우 지구 3.4개만큼의 생태 용량이 필요하다는 점을 생각해보면, 선진국의 과다 소비가 얼마나 극단적인지 감이 잡힐 것이다.

 과학자들은 인간이 지구 생태계를 너무나 과도하게 착취한 결과 매년 14만 종의 동식물이 사라지고 있다고 추산하는데, 이 정도의 멸종 속도는 산업혁명 이전에 비해 100~1000배가량 빠른 것이다. 멸종 속도가 오죽 빠르면, 과학자들은 현재를 지구 역사상의 '여섯 번째 대멸종'이라고 부른다. 직전의 대멸종인 '다섯 번째 대멸종'은 6600만년 전에 있었다.

 그나마 이 숫자들은 모두 현재 수준의 경제 활동, 즉 부유한 나라와 가난한 나라의 소비 수준이 현재와 같은 경우를 상정한 것인데, 가난한 나라들이 빈곤을 타파할 수 있을 정도로 솝를 늘리면 재앙으로 가는 속도는 더 빨라질 것이다. 그러니까, 부유한 나라들이 소비를 줄이지 않는다면 말이다.

 

p364

 부유한 나라들이 소비를 줄이게 하는 것이 간단한 일처럼 보일 수도 있다. 또한 그것은 공정하고 합리적인 일이기도 하다. 하지만 현재의 경제 구조에서는 상상할 수 없는 일이다. 거의 모든 경제 전문가와 거의 모든 정치인이 정확히 그와 정반대, 즉 GDP의 더 많은 성장을 추구한다. GDP 성장률을 높인다는 말은 생산과 소비를 매년 더 증가시킨다는 말이다. 아마도 이것은 오늘날 모든 경제학 개념을 통틀어 가장 강력한 개념일 것이다. 너무나 일반적으로 받아들여지고 있어서 아무도 여기에 의문을 제기할 생각조차 하지 않을 정도다.

 우리는 GDP라는 지표를 마치 늘 존재했던 것처럼 당연히 여기는 경향이 있다. 대부분의 사람들은 GDP가 실은 매우 최근에야 발명된 것인 줄 모른다. GDP 지표는 태고부터 존재한 것이 아니라 역사를 가진 산물이다. 1930년대에 경제학자 사이먼 쿠즈네츠와 존 메이너드 케인스가 정책 결정자들이 대공황에서 벗어날 방법을 알아내는 데 도움이 되도록 경제적 총계를 내는 방식을 고안하는 일에 착수했다. 그 목적은, 한 국가에서 생산되는 재화와 서비스 전체의 금전 가치를 계산해서 어디에서 무엇이 잘못되고 있고 무엇을 고쳐야 할지를 더 구체적으로 파악할 수 있게 하는 것이었다. 쿠즈네츠는 사회가 후생 극대화를 추구하는 데 지침으로 삼을 수 있고 인간 후생의 개선을 시간에 따라 추적할 수 있게 해줄 지표가 되려면 GDP 계산에서 광고, 긴 통근 시간, 치안 운영과 같은 부정적인 것들을 제외해야 한다고 보았다. 그런 것들이 증가하면 정부가 실제로는 그렇지 않은데도 국민의 삶이 나아지고 있다고 말할 수 있을 것이기 때문이다. 하지만 2차 세계 대전이 닥치고서 케인스는 쿠즈네츠의 의견 대신 부정적인 것까지 포함해 화폐 기반의 모든 활동을 측정하자고 주장했다. 그래야 전쟁 수행 노력에 동원될 수 있는 생산력을 모두 포함할 수 있을 것이기 때문이다. 케인스가 이겼고, 그가 제시한 버전의 GDP 지표가 쓰이게 되었다.

 GDP는 전쟁 시의 지표로서 개발되었다. 그래서 너무나 이랑적이고 심지어는 폭력적이다. GDP는 인간에게 유용한 것인지 파괴적인 것인지를 구별하지 않고 화폐 기반의 모든 활동을 계산에 넣는다. 삼림을 베어 목재를 팔면 GDP가 올라간다. 탄광을 열기 위해 산을 뚫으면 GDP가 올라간다. 노동 시간을 늘리고 은퇴 연령을 늦춰도 GDP가 올라간다. 그런데 비용은 차감하지 않는다. 이산화탄소를 포집하는 숲을 잃는 비용도, 멸종 위기 종의 보금자리인 산맥을 잃는 비용도, 과도한 업무가 사람들의 신체와 정신과 인간관계에 미치는 악영향의 비용도 잡지 않는다. 나쁜 것을 계산에 넣지 않는 것도 문제지만, 유용하고 좋은 활동을 금전화되지 않는다는 이유로 감안하지 않는 것도 문제다. 먹을 것을 직접 만들고 집을 직접 청소하고 노인을 직접 돌보는 활동에 대해 GDP는 아무것도 말하지 않는다. 화폐 거래가 개입되지 않았기 때문이다. 돈을 주고 구매할 때만 이러한 활동들이 GDP에 들어간다.

 물론 어떤 것은 측정에 넣고 어떤 것은 빼는 것 자체가 잘못된 것은 아니다. GDP 지표 자체는 실물 경제에 영향을 주지 않는다. 하지만 GDP 성장 지표는 영향을 준다. GDP 성장에 초점을 맞추기 시작하는 순간, 우리는 GDP가 계산 넣는 것들을 촉진하게 될 뿐 아니라 그러한 것들을 무한히 증가시키려 하게 된다. 바로 이것이 1960년대 이래로 우리가 내내 해온 일이다. GDP는 냉전 시기 서구와 소련 사이에 경합이 벌어지던 와중에 널리 사용되기 시작했고, 양 진영 모두의 정치인들이 GDP 성정을 촉진하는 데 맹렬히 나섰다. 쿠즈네츠는 너무나 많은 파괴에 경제적 인센티브를 일으킬 수 있으므로 GDP를 경제적 성공을 재는 일반적 지표로 사용하면 안 된다고 경고한 바 있다. 하지만 우리는 정확히 그가 우려한 대로 했고, 그 다음에는 이것이 세계은행과 국제통화기금에 의해 세계의 다른 지역에도 빠르게 강요되었다. 오늘날에는 부유한든 가난하든 거의 모든 나라가 GDP 성장이라는 하나의 목표에만 강박적으로 초점을 맞추고 있다.

 

 

p368

 [동물학자] 데이비트 애튼버러의 말을 빌리면, "유한한 지구에서 무한하게 성장할 수 있다고 생각하는 사람은 미친 사람이거나 경제학자일 것"이다.

 현재의 소비가 지구의 생태 용량을 크게 초과하고 있다는 사실에 기하급수적 성장이라는 요소를 더해보면 어떻게 될까? 가까운 미래조차 전망이 암울하다. 과학자들은 2050년이면 성숙한 열대 삼림이 사라질 것이라고 말한다. 생물종 다양성은 10%가 추가로 감소할 것이다. 현재 우리가 채취하고 있는 해산물은 1950년 수준에 비해 평균 90% 이상 급감할 것이다. 금, 구리, 은, 아연 등 주요 금속 대부분도 매장량이 고갈될 것이다. 납, 인듐, 안티몬 등 재생 에너지 기술에 사용되는 핵심 금속들도 그렇가. 일론 머스크 같은 실리콘밸리 기업가들은 달이나 또 다른 행성에서 이러한 금속들을 찾을 수 있으리라고 말하지만, 우주에서 자원을 추출한다 해도 우리의 삼림이나 어류 위기에 대응하는 데 그리 도움이 되지는 않을 것이다. 토양 위기도 마찬가지다. 현재의 표토 고갈 속도대로라면 전 세계 농경지의 포툐는 2050년이면 거의 사용할 수 없게 될 것이고 2075년이면 아예 사라질 것이다.

 이러한 명백한 문제에도 불구하고 어떤 이유에선지 우리는 GDP 성장을 인간의 진보와 동일한 것으로 등치시키곤 한다. GDP가 올라가면 우리의 삶이 나아질 것이라고 가정한다. GDP가 올라가면 소득을 올려줄 일자리가 창출되고 학교와 병원이 더 좋아질 것이라고 생각한다. 전 세계 인구가 비교적 적었고 지구의 풍성함에 비해 인간의 생태 발자국도 비교적 작았던 과거에는 그랬을지 모르지만 불행히도 더 이상은 그렇지 않다. 지난 반세기 동안 미국에서 GDP는 꾸준히 증가했지만, 소득 중앙값은 정체 상태였고 빈곤율은 높아졌으며 불평등도 증가했다. 전 세계적으로도 마찬가지다. 1980년대 이래 전 세계 실질 GDP는 3배 가까이 늘었지만 하루 5달러 이하로 살아가는 사람은 11억 명이 늘었다. 왜 그럴까? 어느 정도 지점을 넘어서면 GDP 성장은 부보다 '병폐'를 더 많이 만들기 때문이다. 긍정적인 것보다 부정적인 것을 더 많이 생성하기 시작하는 것이다. 토지에 울타리를 치고 토양을 고갈시키고 물을 오염시키고 인간을 착취하고 기후를 변화시켜서 다른 이들에게 피해를 입히지 않고서도 자본을 축적할 수 있는 변경이 더 이상 존재하지 않기 때문이다. 우리는 GDP 성장이 빈곤을 없애기는커녕 만들어내고 있는 지점에 도달했다.

 전 세계의 주요 정치 주체들이 GDP 성장이라는 목적에 경도되어 있으면 인간과 자연의 시스템은 막대한 압력을 받게 된다. 이 압력이 인도에서는 가령 토지 탈취의 형태로 나타나고, 영국에서는 공공 서비스의 민영화라는 형태로 나타나며, 브라질에서는 아마존의 삼림 파괴로 나타나고, 미국과 캐나다에서는 타르샌드와 수압 파쇄 공법(오일샌드와 그로 인한 수자원 감소 및 환경파괴를 의미함)으로 나타날 것이다. 세계 곳곳에서 이것은 더 긴 노동 시간, 더 비싼 주거 비용, 고갈되는 토양, 오염되는 도시, 버려지는 대양, 그리고 무엇보다 기후 변화를 의미한다. 이것이 다 GDP 성장을 위해 벌어지는 일이다. 이러한 파괴적인 경로를 밀어붙이는 것에 반대하는 사람들은 정부의 무관심에 무력감을 느낀다. 정부가 무관심한 이유는, 그들이 가장 중요시하는 진보의 척도에 따르면 파괴가 좋은 것으로 계산되기 때문이다. 따라서 그들은 그 모든 비용에도 불구하고 파괴적인 경로를 지속해야 한다. 이것은 인간이 내재적으로 파괴적인 속성을 가지고 있어서가 아니다. 우리가 파괴적인 방식으로 행동하도록 촉진하는 규칙을 만들었기 대문이다. 조지프 스티글리츠가 언급했듯이 "우리가 무엇을 측정하는가는 우리가 어떻게 행동할 것인가에 지침을 준다. 엉뚱한 것을 측정한다면 우리는 엉뚱한 행동을 하게 될 것이다."

 

p381

 GDP 성장은 가장 중요한 공적 명령일 수 있지만, 기업의 주주 수익 극대화라는 사적 명령도 있다. GDP와 마찬가지로 주주 수익 극대화도 늘 존재했던 것은 아니다. 시초를 따지자면 미국 대법원이 '닷지 대 포드 자동차' 사건에서 결정적인 판결을 내린 1919년으로 거슬러 올라갈 수 있다. 당시에 포드 자동차는 상당한 잉여 자본이 있었고 헨리 포드는 그중 일부를 노동자의 임금을 올리는 데 쓰기로 했다. 이미 포드의 임금은 상당히 높은 수준으로 알려져 있었는데 여기에서 더 올리기로 한 것이다. 이에 회사의 최대 주주였던 닷지 형제가 포드의 임금 인상 결정에 반대해 소송을 걸면서 포드의 자본은 주주들에게 속하며 포드가 불필요하게 임금을 올림으로써 주주의 돈을 훔친 것이나 다름없다고 주장했다. 법원은 그들의 손을 들어주었고 판례가 성립되었다. 이제 기업의 의사결정은 주주의 수익을 최우선으로 고려해서 내려져야 했다. CEO들이 주주에게 돌아가는 몫을 줄이고 임금을 올리거나 환경을 보호하는 데 지출을 늘리고 싶어도 이제 그것은 가능하지 않다. 그렇게 하는 것이 사실상 불법이기 때문이다. 오늘날 기업들은 대체로 이 지상 명령에 지배되며, 따라서 이러한 지상 명령이 없었을 경우보다 더 탐욕스러워져야 한다. 기업들이 다른 우선순위들을 고려할 여지를 갖게 하려면 주주 가치 극대화 원칙을 버리는 것은 꼭 필요한 일일 것이다.

 

p387

 애초에 왜 우리의 정치인들은 그렇게 열렬리 성장을 추구하게 되었을까? 하나의 이유는 분배라는 어려운 문제를 피해 갈 수 있게 해주었기 때문일 것이다. 파이가 커지기만 한다면 기존의 조각들을 어떻게 분배할지 정해야 하는 압력은 덜 받을 수 있으니 말이다. 전 연준 위원 헨리 윌리치는 이렇게 언급한 바 있다. "성장은 소득 평등의 대체재다." 맞는 말이다. 대부분의 정치인들은 부유한 사람들의 세금을 올려서 소득을 재분배하기 보다는 GDP를 올린 다음 어찌어찌 그 혜택이 아래로 내려가기를 바랄 것이다. 하지만 우리는 윌리치의 논리를 뒤집어서 말할 수도 있다. 성장이 평등의 대체재라면, 평등이 성장의 대체재일 수도 있는 것이다.

 우리는 풍요로운 행성에 살고 있고 우리의 경제는 모두를 위해 충분한 것보다 더 많이 생산한다. 우리는 우리가 이미 가지고 있는 것들을 더 공정하게 나눌 방법을 찾아야 한다. 그렇게 한다면 지구를 더 약탈할 필요가 없어질 것이다. 즉 평등은 더욱 생태적인 경제를 일구기 위한 핵심 열쇠다.

 이를 달성하는 빠른 방법 하나는 노동이 아니라 자본 및 축적된 부, 그리고 토지나 자원과 같은 공공재 사용에 과세해서 마련한 재원으로 보편 기본소득을 운영하는 것이다. 대개 기본소득은 자동화로 인한 기술적 실업으로부터 사람들의 생계를 보호하고 빈곤을 줄이는 전략의 하나로 이해하는 경향이 있지만, 불평등을 줄여 성장 압력을 완화하는 데도 핵심적인 전략이 될 수 있다. 이에 더해, 단순히 생계를 유지하기 위해 사회적으로 의미 없는 일을 매주 40시간, 60시간씩 해야 할 필요에서 벗어나게 해줌으로써 우리가 불필요한 것들을 덜 생산하고 지구 자원에 가해지는 압력을 줄일 수 있게 해줄 것이다.

 

 

 윤석열을 대통령으로 뽑아 줌으로 해서 대한민국이 겪는 고통과 망가져 가는 부분들에 대한 저자의 생각. 그리고 이를 극복하기 위해서 어떤 정치적 방법들이 있는가를 차근차근 생각한 내용들을 풀어나가고 있다.

 윤석열은 민주주의적 방법으로 합법적으로 대한민국 국민이 선출한 합법적 대통령이다. 그러므로 윤석열이 잘못한 데 대한 책임은 대한민국 국민들이 책임지는 것이 당연하다.

 물론 윤석열을 안찍은 사람들도 찍은 사람들 못지 않은 다수이다. 그러나 그게 민주주의다. 윤석열을 뽑지 않은 이들도 연대 책임을 지는 것. 그것이 바로 민주주의라는 것이다.

 대한민국이 망하는 최악의 사태가 와도 그 책임은 결국 윤석열이 아니라 대한민국 국민들에게 있는 것이다.

----------------------

p36

 정치의 목적은 위대하지만 일상은 남루하다. 정치인은 이 역설을 견뎌야 한다. 그럴 의지가 없으면 정치에 발을 들이지 않는 게 좋다. 오직 정치를 해야만 이룰 수 있는 이상을 품었거나, 정치 말고는 달리 충족할 수단이 없는 욕망에 사로잡혔거나, 둘 중 하나라야 정치의 남루한 일상을 감내할 수 있다. 나는 둘 모두 아니었다. 십 년을 하고서야 알았다 그래서 정치를 "떠났다. 정치비평은 해도 되고 하지 않아도 그만인 일이다. 구설이 따르지만 정치에 비하면 지극히 사소한 위험이다. 그래서 필요하다고 느낄 때 가끔 공영방송이나 유튜브 비평 프로그램에 나가서 말을 한다.

 

 진보 정치는 더 큰 위험이 따른다. 노무현 대통령과 노회찬 의원을 생각해 보라. 노무현의 삶과 죽음에 대해서는 많은 이들이 헤아리기 어려울 정도로 다양한 평가와 해석을 내놓았다. 나는 어느 시민의 블로그에서 본 문장을 가장 먼저 떠올린다. '의도하지 않았던 오류에 대해 죽음으로 책임진 사람.' 이 해석이 노무현의 선택을 모든 면에서 설명하는 것은 아니지만 나는 받아들였다.

 노회찬이 삶을 거두었을 때는 아무도 듣지 않는 곳에서 탄식했다. 완벽하지 않았다는 이유로 죽어야 한다면 누가 감히 진보 정치를 할 수 있겠는가. 그를 마지막으로 보았을 때 나는 이렇게 말을 건냈다. "대표님, 걱정해야 할 일이 있는지 모르겠지만, 만에 하나 그런 일이 있다 해도 괜찮아요. 다 던져 버리고 같이 낚시 다녀요. 시간 지나면 방송도 함께 하고요. 그러면 되죠." 그는 아무 말도 하지 않았다. 완벽한 사람이라서가 아니라 좋은 사람이라서 나는 그를 좋아했다. 오류를 책임지는 방식으로 죽음을 생각하고 있다는 것을 눈치채지 못했다.

 소위 '조국 사태'가 터졌을 때도 무서웠다. 노회찬이 떠나고 일 년밖에 지나지 않은 시기였다. 또다시 늦은 후회를 하고 싶지 않았다. 그래서 참전했다. 윤석열과 싸우다가 본의 아니게 범했던 오류를 약점 삼아 검찰이 역공했다. 한동훈 검사의 명예를 훼손했"다고 1심과 2심 법원이 벌금형을 주었다. 대법원이 판결을 뒤집지 않아도 마음의 상처를 입지는 않을 것 같다. 그 정도야 뭐, 하며 넘길 수 있다. 이기려고 참전했던 게 아니었다. 이길 수 없는 싸움이란 것을 처음부터 알았다. 그러나 법무부장관 조국이 패배하는 싸움을 견뎌내는 데 힘이 되고 싶어서 나름대로 있는 힘을 다했다.

 조국의 법대 친구들이 이런 문자를 보냈다는 사실을 나중에 들었다. "국아, 저들은 '공소권 없음' 결정을 원한다는 걸 잊지 마." 조국을 볼 때마다 하고 싶었지만 하지 못한 말이었다. 검찰은 노무현과 노회찬에 대한 수사를 '공소권 없음' 결정으로 종결했다.

 윤석열은 조국 가족을 사냥함으로써 보수 세력의 정권 교체 요구를 대변하는 정치인이 되었다. 검찰총장으로서 문재인 정부를 공격한 실적을 내세워 대통령 자리를 차지했다. 가신이나 다름없었던 한동훈을 법무부장관과 국힘당 비대위원장에 앉혔다. 그는 '사모펀드 비리'를 용납할 수 없다면서 수사를 시작했지만 권력형 비리를 찾지 못하자 조국과 가족의 '완벽하게 합법적이지는 않았고 완전하게 선하지 못했던' 일상을 들추어냈다. 기자들은 특종 정보로 조종해 위선자 낙인을 찍었다. '불완전한 선'을 위선이라고 비난하는 방법으로 공정과 상식이라는 의제를 차지했다. 권력을 장악한 다음에는 선한 척조차 하지 않고 사적 이익을 위해 권력을 휘둘렀다. 

 2022년 3월 9일, 한국 유권자는 '위선'이 싫다고 악을 선택했다.

 

p116

 정치인은 언론에 의존했다. 언론인에게 잘 보이려 했다. 언론에 굴복하고 굴종했다. 그것을 거부하고 대결한 정치인은 노무현이 처음이었다. 결국 언론이 검찰과 손잡고 그를 죽였다.

 

p171

 용산 대통령실 도청 의혹 처리 과정을 보라. 미국 언론은 2023년 4월 미국 정부가 국가 비밀문서를 유출한 용의자를 체포했다고 보도했다. 비밀문서에는 대한민국 정부에 관한 정보도 있었다. 한국 정부는 미국에 155밀리 포탄을 제공했다. 2022년 10만 발을 판매했고, 2023년에는 50만 발을 빌려주기로 했다. 미국 정부가 한국산 포탄을 직접 우크라이나에 주었는지, 아니면 미군이 창고에 있던 포탄을 우크라이나에 주고 한국 포탄으로 재고를 채웠는지는 확실치 않았다. 어쨌든 분쟁지역에 살상무기를 수출하지 않는다는 한국 정부의 외교 원칙을 파기하고서도 국민에게 숨겼다는 사실이 드러났다. 그런데도 윤석열은 아무 해명을 하지 않았다.

 비밀문서에는 포탄 제공 사실보다 더 민감한 정보가 있었다. 대통령실 외교안보팀 핵심이었던 안보실장과 외교비서관이 그 문제를 두고 나눈 대화에 관한 정보였다. 미국 정부는 그걸 어떻게 알았을까? 과거 청와대 평화 · 군비통제비서관과 외교부 차관으로 일하면서 미국을 상대한 경험이 있는 연세대 정치외교학과 최종건 교수가 <김어준의 겸손은 힘들다 뉴스공장>에서 설명했다. 그 문서에는 'TS/SI-G/OC/NF'라는 분류코드가 있었다.

 유출 문서는 미국 합동참모본부 보고서였다. 분류코드의 TS는 '최고비밀등급(Top Secret)'이고, SI는 '통신을 가로채' 얻은 정보라는 표시다. G는 '국가원수에 관한 내용'을 포함하고 있다는 뜻이다. OC는 '문서 작성자가 정보를 가공해(Originator Controlled)' 출처를 감추었다는 것이고, NF는 '동맹국을 포함해 어떤 나라와도 정보를 공유하지 말라(Not releasable to Foreign nationals)'는 지시다.

 대통령을 자문하는 합참의 최고 등급 비밀문서 분류코드에 오류가 있을 가능성은 희박하다. 이것은 미국 정보기관이 대한민국 대통령실 외교안보 책임자들의 전화 통화나 대화를 도청(盜聽)했다는 증거다. 언론은 '도 · 감청'이라는 말을 사용해 문제의 본질을 감추려 했다. 감청(監聽)은 권한을 가진 국가기관이 법원의 영장을 받아 누군가의 통신을 엿듣는 행위를 말한다. 미국 정보기관이 한국 대통령 참모들의 통신을 몰래 엿들은 행위는 감청이 될 수 없다. 미국 정보기관은 용산 대통령실을 도총했다. 대한민국의 법률을 짓밟고 주권을 훼손했다.

(비슷한 요지의 글이 민들레 뉴스에 올라온 적이 있다.)

https://www.mindlenews.com/news/articleView.html?idxno=2642

 

사대(事大)와 사대주의(事大主義) - 세상을 바꾸는 시민언론 민들레

(본 칼럼은 음성으로 들을 수 있습니다.)미국 정부가 비밀문서 유출 용의자를 체포했다. 문서 유출 사건 자체는 미국 정부의 일이다. 우리하고는 관계가 없다. 그런데 이제 더는 비밀이 아닌 그

www.mindlenews.com

 

p270

 어느 쪽이 이길까? 나는 '사필귀정(事必歸正)'이나 정의가 이긴다는 말을 믿지 않는다. 싸움은 강한 자가 이긴다. 이긴자가 의롭지 않으면 불의가 판을 친다. 어떤 불의는 한 세대가 흘러도 바로잡지 못한다. 정의도 가끔은 이긴다. 역사를 보면 그렇다. 이번 싸움은 윤석열이 진다. 그는 강하지 않다. 강하다고 착각해서 강한 척을 할 뿐이다. 유능하지도 않다. 자신이 얼마나 무능한지 몰라서 무엇이든 마음대로 하는 것이다. 국민이 불신하고 미워하는 대통령의 권력은 역사의 밀물이 들면 모래성처럼 허물어진다.

 2천여 년 전 사마천은 『사기』의 「백이숙제열전」에서 '하늘의 도'라는 게 있는지 모르겠다고 했다. "백이숙제와 같은 사람은 인과 덕을 쌓고 청렴 고결하게 살다가 굶어 죽었다. 그러나 도척은 죄 없는 사람들을 죽이고 사람의 간을 회치는 등 도당을 모아 천하를 더럽혔는데도 천수를 누렸다. 나는 의심한다. 하늘의 도는 과연 있는가." 중국 춘추 시대 강도 도척과 고결하게 산 백이 · 숙제를 비교해 세상의 부조리를 개탄한 것이다. 

 사마천의 심정에 공감한다. 하늘의 도 따위는 없다. 천벌 같은 것도 없다. 하지만 무력이 권력의 향방을 결정했던 시대는 지나갔다. 대한민국의 권력은 물리적인 힘이 아니라 국민의 지지에서 나온다. 바다가 배를 엎어버리듯 민심이 권력을 뒤엎는 세상이다. 도는 하늘에 있지 않다. 사람의 마음에, 사람의 관계에, 사람의 본성에 있다. 윤석열의 권력은 국민이 주었다. 그 권력을 국민이 다시 빼앗을 수 있다.

 

p278

 워터게이트 사건은 1972년 6월 17일 워싱턴 DC의 워터게이트 호텔 민주당 전국의원회 사무실에 괴한이 침입해 도청기를 설치했다가 들킨 데서 시작해 1974년 8월 9일 닉슨의 사임으로 끝난 정치적 소용돌이를 통칭한다. 특검 수사, 언론의 닉슨 연루 의혹 폭로, 상원 특별 위원회 청문회, 백악과 대통령 집무실의 녹음테이프 존재 확인, 특별검사의 닉슨 소환과 닉슨의 특별검사 해임 시도, 사법 방해 · 권력 남용 · 의회모독 혐의를 사유로 한 연방 하원의 세 차례 탄핵 권고 결의, 공화당 상원의원 일부의 탄핵 찬성, 그리고 대통령의 사퇴까지 워터게이트는 우여곡절 많은 드라마였다.

 닉슨은 사퇴를 강요당했다. 사퇴하지 않으면 상원이 탄핵하고 법원이 중형을 내릴 것이라는 걸 알았다. 백악관 집무실 바닥에 앉아 권력을 빼앗긴 알파 메일 침팬지처럼 주먹으로 가슴을 치고 위를 보며 울었지만 닉슨은 현명한 결정을 했다. 대통령직을 승계한 제럴드 포드는 닉슨의 모든 범죄 혐의에 대해 '놀리 프로시콰이(nolle prosequi), 항구적 불기소 특별사면)'를 선언했다. 닉슨은 조사도 재판도 받지 않았다. 범죄를 저지르고도 처벌을 피했다.

 

 사실상 강제된 사퇴라 할지라도 대통령의 사임을 원한다면 상응하는 이익을 주어야 한다. 미국과 같은 제도가 있었으면 박근혜도 국회가 탄핵하기 전에 사임했을지 모른다. 야당은 특검법안과 함께 사면법 개정안도 내는 게 바람직하다고 나는 판단한다. 퇴로를 열어주고 탄핵을 추진하는 게 현명한 전략이다. 쥐도 구석에 몰리면 고양이를 문다는 데, 대통령이 그냥 물러날 리 있겠는가.

 정치인 김대중은 이렇게 말한 적이 있다. "춘향이의 한은 이 도령을 만나서 푸는 것이다." 대통령 탄핵의 목적은 무능하고 부적합한 공무원을 파면하고 일 잘하고 믿을 만한 사람을 그 자리에 세우는 것이다. 누구를 감옥에 보내는 것이 아니다.

 

 

p284

 국민이 사임을 원할 때는 대통령이 국회의 탄핵과 헌법 재판소의 탄핵 심판을 기다리지 않고 물러나는 것이 좋다. 그런 결단을 북돋우려면 '인센티브'를 제공해야 한다. 사면법을 개정해 미국식 '놀리 프로시콰이'제도를 도입하는 것이다. 감옥에 보내야 마땅한 악당을 풀어준다고 비난하지 말라 그런 감정을 느끼는 것은 이해할 만하지만 이 제도는 범죄를 저지른 대통령만 사면하는 제도가 아니다. 그런 사람을 알아보지 못해 대통령으로 선출한 국민의 잘못도 함께 사면하는 제도다. 주권자인 국민이 후임 대통령을 통해 자기 자신을 사면하는 것이다. 

 

 

 

 몇 페이지만 읽어봐도 왜 그가 위대한 대통령이었는지 알 수 있다.

 

--------------------

p10. 서문

 식민지의 역사는 외세에 의한 분단과 동족상잔의 전쟁으로 이어졌고, 그 아픔이 지금까지도 우리 삶을 규정짓고 있습니다.

 

 

 우리 정치는 여전히 역사에 대한 반성과 절치부심이 부족합니다. 친일청산을 제대로 못했고, 분단을 극복하지 못했으며, 평화를 이루지도 못했습니다. 그리고 여전히 사대외교에서 벗어나지 못하고 있습니다. 역사의 실패를 되풀이하지 않겠다는 절치부심이 부족하기 때문입니다. 이것이 내가 가진 문제의식입니다.

 

 

 문재인 정부의 외교와 안보 분야의 성과를 자랑하려고 이 책을 쓴 것은 아닙니다. 그런 목적이라면 문재인 정부의 국정백서에 잘 정리되어 있습니다. 이 책에서 나는 문재인 정부가 어떤 구상으로 한반도 평화프로세스를 추진했으며, 어떤 마음자세로 외교·국방·보훈·방산 정책을 다루었는지 말하고 싶었습니다.

 

 미중 간의 경쟁과 갈등이 격화되면서 우리 외교의 여건이 더욱 힘들어졌습니다. 거기에 더해 전략적 모호성을 버린 현 정부의 과도하게 이념적인 태도가 우리 외교의 어려움을 더 키우고 있습니다. 남북관계의 위기는 사상 최악으로 치닫고 있습니다. 북한의 도발이 걱정이지만, 우리 정부의 과한 대응도 함께 걱정됩니다. 무엇보다 큰 걱정은, 위기가 고조되고 있는데도 대화를 통해 위기를 낮추려는 노력이 전혀 보이지 않는다는 사실입니다.

 

 

---------------------

미국 첫 순방 관련

-----------------------

p26. 

최종건 : 취임한 지 불과 50일도 안 된 6월 28일에 3박5일 일정으로 미국을 가십니다. 돌아오자마 7월 5일에 독일로 가서 G20 정상회의에 참가하시고요. 정상외교를 하는 데 국내 민주주의의 발전(촛불혁명으로 인한 무혈혁명에 의한 박근혜 탄핵과 선거에 의한 합법적이 정권 교체를 의미)이 이떤 도움을 줬습니까?

문재인 : 처음 외교무대에 나가면 낯설죠. 서먹함이 있고요. 나는 그런 어려움이 거의 없었다 할 정도로 해외 정상들이 친근하게 다가왔어요. 그들이 느낀 한국 국민의 저력과 성숙함, 기적 같은 민주주의의 회복, 그런 것이 세계 민주주의의 희망이 되고 있다는 인식이 한국과 나에 대한 큰 호의로 나타났던 거죠. 그래서 처음 외교무대에 나가면서 별로 어색하지 않게 다른 정상들과 쉽게 교류할 수 있었어요. 결국 우리 국민의 힘이죠. 피플파워, 내가 그것을 대표하고 있었기에 그만큼 더 당당할 수 있었고, 대접받을 수 있었습니다. 외교를 하는 동안 그 나라의 민주주의 수준과 도덕성, 문화 같은 소프트파워가 국제무대에서 큰 호감으로 작용하고, 그것이 외교의 힘이 된다는 사실을 늘 느꼈습니다.

 

 최종건 : 대통령이 되신 후에 '아, 왜 하필 트럼프야?'하는 생각은 안하셨습니까? 트럼프가 가지고 있는 대외적인 명성(?)이 있지 않습니까? 좀 거칠고 기존의 정치인들과 다르고요.

문재인 : 우리만이 아니라 트럼프 대통령은 모든 나라에 특별했어요. 공화당이지만 공화당의 주류와도 다르고요. 그래서 다들 트럼프 대통령이 어떤 사람인지, 어떻게 접근해야 하는지 어려움을 겪었어요. 게다가 괴팍한 성격이라고 알려져 있었지요. 아베 총리와 시진핑 주석이 트럼프 대통령을 방문했을 때 많은 선물 보따리를 가져갔는데도 대접받지 못했다는 이야기도 있었고요. 우리도 첫 대면 때 트럼프 대통령에게 어떻게 다가가야 할지 긴장했죠.

 접근할 수 있는 인맥이 없었어요. 민주당이든 공화당이든 다리가 될 만한 인맥이 있기 마련인데, 트럼프 대통령은 새로운 얼굴이어서 전혀 없었던 거죠. 그래서 트럼프란 사람을 알기 위해 <거래의 기술> 등 그의 저서를 대충 다 읽어봤어요. 그런데 막상 만나보니 매우 잘 대해주었어요. 첫 통화도 정중했고요. 처음에는 공격적인 질문을 몇 가지 하더니 내 대답이 괜찮았는지 굉장히 친근하게 대했어요. 트럼프 대통령 스스로가 "문 대통령과 케미스트리가 정말 잘 맞는다. 최상의 '케미'다"라고 여러 번 이야기할 정도였죠.

 그에 대한 부정적인 평가도 있지만, 내게는 동맹외교의 파트너로서 아주 잘 맞는 편이었습니다. 무례하고 거칠다는 평가도 있지만, 나는 그가 솔직해서 좋았습니다. 웃는 얼굴을 하지만 행동은 달라서 속을 알 수 없는 사람이 오히려 상대하기 힘들죠. 트럼프 대통령은 자신의 요구를 솔직히 말했고, 그러면서도 자신의 공약을 지키기 위해 노력하듯이 내가 한국의 대통령으로서 국민에게 한 공약을 지키기 위해 노력해야 한다는 점을 인정하고 존중해주었습니다.

 

p32

문재인 : 처음 미국을 방문할 때 우리는 일본이나 중국처럼 거창한 선물 보따리를 가져갈 수 있는 형편이 안 되니, 말하자면 진정성을 가지고 미국을 대하기로 했던 거죠. 우리가 준비한 것은 미국 도착 첫 일정으로 장진호 전투 기념비를 참배하고, 거기서 메시지를 내는 거였어요. 그것이 미국에 준 최고의 마음의 선물이 됐죠.

 장진호 전투는 위대한 승리라고 이야기하지만 사실 미국으로서는 굉장히 아픈 전투였습니다. 미군이 6·25 전쟁 동안 3만 5000명 정도 전사했는데 10분의 1 정도가 장진호 전투에서 발생했거든요. 두만강 유역까지 전진했다가 중공군의 갑작스러운 개입으로 대규모 후퇴 작전이 벌어졌고, 이어서 완전히 포위된 상황에서 흥남에 집결한 많은 병력과 피난민을 해상으로 철숫기키는 작전을 성공적으로 치러내 위대한 승리라고 평가받지만, 그 과정에서 미군들이 영하 30~40도의 혹한과 큰 어려움을 겪은 참혹한 전투였어요.

 그래서 미국에서 '잊힌 전투'라고 부르고 있었는데, 한국의 신임 대통령이 장진호 전투 기념비 앞에서 그 전투의 위대함을 말해주고, 그 전투를 겪은 분들에게 최대한의 경의를 표하면서 한미가 혈맹관계라는 사실에 대한 공감을 다시 일깨운 것이지죠. 내 가족의 이야기와 결부시켜 호소력 있게 이야기하고자 했던 건데, 큰 효과를 거뒀습니다.

 

최종건 : 나중에 들어보니 매티스 당시 국방장관과, 아버지가 6·25 전쟁 참전 용사였던 펜스 부통령은 대통령님이 백악관에 도착하시기 전에 연설문을 다 읽어봤다고 합니다. 그게 상당히 중요한 기획이었던 것 같아요.

문재인 : 그 연설문을 당시 정의용 국가안보실장이 사전에 맥매스터 안보보좌관을 통해서 트럼프 대통령 책상 위에 올려 놓았다는 겁니다. 트럼프 대통령은 내게 대단히 훌륭하고 감동적인 연설이었다고 인사를 했습니다.

 그날 행사와 연설은 장진호 전투를 치른 미 해병 1사단에서 라이브로 중계됐어요. 그것이 미국의 군 쪽에 매우 긍정적인 효과를 미쳤고, 좀 어려울 수도 있었던 트럼프 대통령과의 첫 만남을 좋은 분위기로 만드는 데 큰 역할을 했죠. 대선을 치르면서 외교 로드맵을 마련할 때 방미 첫 일정으로 구상해두었던 건데, 의도했던 대로 효과를 거뒀다고 생각합니다.

 

 

p49

최종건 : 당시 제가 평화기획비서관으로서 제재 담당이었는데요. 대통령님의 생각을 시민사회나 학계와 소통했는데, 시민사회는 국제제재나 미국의 제재를 앞세우다 보면 남과 북 사이에 할 수 있는 일들이 너무 적은 것 아니냐고 반론했습니다.

문재인 : 그렇죠, 맞는 말이에요. 그래서 답답한 것이 사실이죠. 앞에서도 말했지만, 노무현 정부의 2007년 10·4 남북정상회담 때는 그런 제재의 틀이라는 게 없었기 때문에 남북 간에 마음껏 합의할 수 있었지만, 우리는 2018년 판문점과 평양 두 번의 남북정상회담을 통해서 아주 풍성하고 실용적인 합의를 이루어냈어도 제대로 이행되지 않았어요. 결국은 제재의 벽을 넘지 못한 것이죠. 답답하고 아쉽습니다. 화도 나고요. 그렇지만 남북 간에 저지르듯이 할 수는 없는 거에요. 미국이나 국제사회를 설득하고, 우리가 북한을 견인하듯이 미국도 우리가 견인해나가는 노력이 필요한 거죠. 실제로 2019년 하노이 북미정상회담이 노딜로 끝나지 않았다면 거의 가능했던 거 아닌가요? 우리가 정상에 오르지는 못했지만, 정상을 봤죠. 정상을 봤고... 언젠가 다시 노력이 재개된다면 그때는 정상에 오를 거라고 믿습니다.

 진보 진영의 비판은 다분히 결과론적인 비판이죠. 그러나 평화라는 것은 끊임없는 과정이에요. 이루지 못한 부분을 갖고 평가할 것이 아니라 이루어낸 부분을 평가해야죠. 진보 진영은 민주정부가 이룬 개혁의 성과를 당연한 일로 치부해버리는 경향이 있어요. 그러나 수십 년간 지속되어온 기득권 질서를 바꾼다는 것은 한 걸음 한 걸음이 무척 힘든 일입니다. 그 과정과 성과가 온당하게 평가 되어야죠. 많은 개혁과 성과를 거두고 남북관계에서도 새로운 장을 연 김대중 정부와 노무현 정부에 대해서도 당시 진보 진영은 실패한 정부로 규정하는 평가의 오류를 범한 바가 있습니다.

 

 

p55. 하노이 북미회담 노딜에 대한 문재인 대통령의 뒷얘기

문재인 : 트럼프 대통령 본인도 나중에 내게 후회하는 말을 하며 미안해했어요. 자신은 수용할 생각이 있었는데 볼턴 국가안보보좌관이 아주 강하게 반대했고, 그래서 폼페이오 국무장관에게 당신 생각은 어떻소 물어보니 폼페이오도 볼턴에게 동조해서 어쩔 수 없었다는 거에요. 아마 트럼프 대통령으로서는 다음에 다시 기회가 있을 거라고 생각했을지 모르죠. 말하자면 다음에 더 유리한 거래를 하고자 했을 수도 있는데, 안타깝게도 그 후 미국이 대선 국면에 들어서고 또 코로나 상황이 되고 하면서 다시 기회가 오지 않았던 거죠. 트럼프 대통령이 트윗으로 제안한 판문점 삼자회동으로 한번 흐름을 바꿔보려고 노력을 했지만, 그것으로 끝나고 말았고요.

 그거 참... 두고두고 통탄스러운 일이죠. 북한도 북미회담이 시작된 이후로는, 북미회담을 통해서 제재를 해결하고 그 속에서 개성공단이나 금강산관광이 함께 해결되는 프로세스를 바랐던 것인데, 지금 지나고 보니 그거라도 해두었으면 하는 아쉬움이 아주 크죠.

 

p60

문재인 : 박근혜 정부 때 주한미국대사였던 리퍼트 Mark Lippert가 그런 말을 한 적이 있어요. "아무런 이견이 없는 동맹이 건강한 동맹이 아니라 이견을 마하고 서로 토의하는 것이 건강한 동맹이다." 내가 경험해봐도 우리가 합리적인 제안을 하면 미국이 수용할 뿐만 아니라, 미국이 뭔가 요구할 때도 그것이 합리적이지 않다고 생각되면 그렇지 않다고 반대 의견을 분명히 이야기하면 미국에서 수긍을 합니다. 면전에서 아무 소리 하지 않고 그냥 넘어가는 것을 꼭 좋아하는 건 아니라는 걸 많이 느꼈습니다.

 첫 번째 정상회담 때 미사일 지침 해제에 합의한 후에 트럼프 대통령이 한미 FTA 개정 문제를 제기햇어요. 당신들 너무 협상도 잘하고 장사도 잘한다. FTA 하고 나니까 한국만 덕을 많이 보고 미국은 적자를 본다고요. 예상됐던 일이어서 내가 공부를 미리 하고 갔어요. 그래서 한미 FTA 이후에 오히려 한미 간 적자폭이 줄어들었다. 또 근래 적자가 개선되고 있다. 그래서 이게 우리만 혜택 보는 것이 아니라 미국도 혜택을 봐서 서로에게 이익이 되고 있다고 이야기했죠. 그래도 어쨋든 한국이 계속 흑자를 보고 있는 건 사실이니까, 그렇다면 양국 간에 워킹그룹을 만들어서 한미 FTA의 성과에 대해 함께 검증을 해보자. 그러고서 논의하자고요. 이렇게 내가 제안했는데 트럼프 대통령이 수긍하는 겁니다. 더 이상 무리한 주장을 하지 않았어요. 그런 검증 과정을 거쳤기 때문에 우리가 수용할 수 있는 개정으로 그칠 수 있었지요.

 사드 문제 같은 경우도, 그냥 기존에 들어온 사드는 우리가 전 정부의 합의를 존중해서 그대로 받아들이되 환경영향평가 등 우리가 국내법 절차를 거쳐야 하고, 추가 배치는 우리와 합의 없이는 받아들이기 어렵다는 입장을 분명히 했고, 미국도 우리 의견을 수용했죠.

 

최종건 : 네, 결국은 그때 우리 대내외적인 토킹 포인트가 민주주의적 절차를 지킨다는 거였고, 미국도 우리의 국내법 절차를 당연히 존중한다는 것이었어요. 미국도 이런저런 협의를 하거나 협상을 할 때 자기네가 좀 궁해지면 미국 국내법을 이야기하거든요. 우리가 그렇게 얘기할 수 있는 것도 국내법을 어긴 대통령을 우리가 탄핵시킨 법치주의와 민주주의 역사가 있었기 때문입니다.

 2015년 한일위안부합의도 마찬가지죠. 이 두 사안은 어쨌든 전 정부가 했기 때문에 우리가 좀 불편했어요. 내용도 마음에 안 들었고, 여러 가지 실질적인 피해도 있었고요. 그럼에도 대통령님은 외교의 연속성을 받아들이신 것 같아요. 대통령으로서 어려운 결단이었어요. 사드 배치에 비판적이었던 진영, 그리고 2015년 한일위안부합의에 매우 비판적이었던 진영에서는 몹시 실망했던 걸로 기억합니다. 왜 그렇게 연속성을 중요하게 여기신 겁니까?

문재인 : 나도 반대했던 입장이니 비판을 이해하지만, 정부 입장에서는 그래야 하는 것 아닌가요? 정부 간에 합의했으면, 개인적으로 반대되는 생각을 갖고 있다 하더라도 다음 정부에서 합의를 그냥 깨뜨릴 수는 없는 것이지요. 그래서 사드에 대해서는 이미 대선 때 공약을 수정했어요. 내가 야당 대표일 때는 사드 배치를 반대하고 철회해야 한다고 주장했지만, 대선 때는 사드의 효용성과 관련 국내법 절차에 대해서 다시 검토하겠다고 한발 물러섰죠. 대통령이 됐을 때 입장이 같을 수가 없기 때문이었어요.

 진보 진영에서는 왜 야당 때 주장했던 것처럼 선명하게 철회하지 않냐 이야기할 수 있고, 반대로 미국 측에서는 사드 배치를 철회하는 쪽으로 가는 거 아니냐고 의구심을 가질 수 있었겠죠. 그때 사드 배치 결정을 철회하고 다시 가져가라고 할 수 는 있었겠지만, 만약 그렇게 했다면 한미동맹에 큰 균열이 생기는 거죠. 그것을 국민들이 동의할 리가 없고요. 그렇게 되면 평화프로세스를 힘 있게 추진하기는 불가능해지죠. 그러면 대한민국의 국제적이 신뢰도 무너지게 되는 것이죠.

 

p69

최종건 : 저는 기억나는 게, 트럼프 대통령이 "문 대통령님! 내가 사는 트럼프타워에 LG TV만 있어요. 한국은 우리가 지켜주는 사이에 LG TV 같은 거 만들어서 우리나라에 파는데 우리는 무역적자가 많잖아요!"라고 하니까, 그때 대통령님이 "그 LG TV 다 텍사스에서 만드는 겁니다. 메이드 인 텍사스! 그러니까 그거 자랑하고 다니셔도 됩니다!"라고 하셨어요. 그러자 트럼프 대통령이 반론하지 못하더라고요. 트럼프 대통려이 자기 식대로 계속 방위비 분담금의 대폭 인상을 요구할 때는 대통령님이 "우리는 한국전쟁 이후에 미국이 한 전쟁에 다 나갔어요. 그래서 우리가 피로 맺은 혈맹입니다. 미국의 동맹국 가운데 우리가 유일하죠!" 하면서 대응하셨어요.

 우리 정부 출범 당시에, 트럼프-문재인 조합이 2018년에 보여준 것처럼 그렇게 많은 일을 함께 할 수 있을 거라고 상상도 못했습니다. 트럼프 대통령하고 케미가 맞는다, 말이 통할 것 같다고 느꼈던 포인트나 시기가 언제쯤이었나요?

문재인 : 첫 번째 정상회담 때 뜻밖에 잘 통했어요. 트럼프 대통령 측근 참모들이 신기하다고 이야기했어요. 트럼프 대통령이 나와 스타일이 전혀 다른데, 어떻게 그렇게 케미가 잘 맞냐고... 트럼프 주변 사람들이 이야기했죠.

최종건 : 2017년 2월에 맬컴 턴불 호주 총리가 트럼프 대통령 당선을 축하하려고 전화했는데... 트럼프가, 그들은 통역 없이 영어로 얘기했을 거 아닙니까, 전화를 확 끊어버린 일이 있었습니다.

문재인 : 화가 나서 그랬다는 거죠. 그런 게 알려져서 독일 메르켈 총리도 나한테 "어휴! 트럼프, 김정은 그 두 터프가이를 어떻게 서로 마주 앉혔어요? 비법이 뭡니까?"라고 묻기도 했어요.

 

p78

문재인 : 이명박·박근혜 정부의 외교의 협소함, 그걸 우리가 넘어서야겠다는 비판적인 목표의식이 있었고요. 미국뿐 아니라 EU 및 ASEAN과의 관계, 중국 및 러시아와의 관계를 고루 발전시키는 균형외교를 해야겠다는 외교 철학을 가지고 있었죠. 그래서 대선을 준비할 때부터 대통령 취임 즉시 그쪽 지역에도 특사를 보내겠다는 구상을 하고 있었어요. 그 구상대로 미국, 일본, 중국, 러시아뿐 아니라 ASEAN과 EU에도 특사를 보냈습니다. 마침 당시 김희중 대주교님이 바티칸 가는 길에 자청해주셔서 바티칸에도 김희중 대주교님을 특사로 보냈고요. 그 특사 외교가 바티칸과의 외교관계를 크게 발전시킨 것은 물론 한반도 평화프로세스에 교황님과 바티칸의 지원을 받는 데 큰 도움이 됐죠.

 

최종건 : 균형외교가 왜 중요한가요? 균형외교가 한미동맹을 약화시키는 것처럼 왜곡하는 사람들도 있지 않습니까?

 

문재인 : 균형외교는 세계 모든 나라가 추구하는 것이에요. 특히 우리나라는 지정학적인 조건 때문에 균형외교가 중요합니다. 미·중·일·러 4대 강국에 둘러싸인 나라는 세계에서 우리나라밖에 없습니다. 그런 지정학적 조건 때문에 우리는 역사상 많은 외침을 겪었죠. 지금의 남북분단도 외세에 의해 초래된 것이고요. 그래서 우리에게 균형외교는 안보를 위해서나 경제를 위해서나 반드시 하지 않으면 안 되는 가장 중요한 국가 생존전략입니다. 그런데 과거 역사에서, 또한 근래에 와서도 편향된 이념에 사로잡힌 편중외교 또는 사대외교로 국난을 초래하곤 한 것은 참으로 통탄할 일이죠.

 균형외교는 외교를 다변화해야 한다는 것뿐만 아니라, 경제 면에서도 중국 편중을 벗어나 포스트 중국을 찾아야 한다는 현실적인 필요 "때문에 매우 중요하 국정과제였습니다. 한편으로 매우 엄중했던 안보위기 또는 전쟁위기 상황을 평화 국면으로 전환시키는 평화프로세스를 성공시키기 위해서도 주변국들의 지지와 협조가 반드시 필요했죠.

 균형외교라고 하면 보통 미국과 중국을 놓고 생각하는데, 더 확장할 필요가 있습니다. ASEAN 국가 가운데는 북한과 오랫동안 수교해온 나라가 여럿 있어서 그들의 적극적인 지지는 한반도 평화프로세스 추진에 큰 힘이 됩니다. 실제로 싱가포르와 베트남은 두 차례 북미정상회담의 장소를 제공해 큰 기여를 했죠. ARF(아세안지역안보포럼)는 남북한 유일하게 함께 참여하는 다자안보협의체이기도 합니다. 신북방국가들도 북한과 전통 우방국들입니다. 러시아는 6자회담 참가국이지요. 몽골도 비록 성사되지는 않았지만, 남북대화의 중재 역할을 자임하기도 했고, 북미정상회담 장소 제공을 제안하기도 하면서 적극적인 지지를 보내주었습니다. EU의 중요성은 말할 것도 없죠. 우리 정부의 균형외교는 중국과 러시아뿐 아니라 신남방국가, 신북방국가, EU를 포괄하는 것이라고 말할 수 있습니다.

 

 우리가 최근에 엑스포 유치 경쟁에서 고배를 마셨죠. 국제기구의 수장이나 이사국이 되기 위해서 또는 UN 안보리 비상임이사국이 되거나 세계대회를 유치하려면 경쟁해야 하고 투표로 결정하게 되는데, 그때 든든한 지지 세력이 있다는 것이 굉장히 중요하거든요. 예를 들어 프랑스 같은 경우, 유럽 국가들뿐 아니라 아프리카 지역 국가들의 지지를 받기 때문에 늘 든든한 배경을 가지고 경쟁우위에 서게 되죠. 그런 것이 우리에게도 필요합니다. 친구 국가를 많이 확보하는 것, 그것이 국가의 경쟁력이 되니까요.

 한편으로 우리가 남북관계 발전, 화해협력, 평화공존 정책에서 구상했던 것이 한반도가 갖는 특수한 지정학적 위치를 살려서 대륙과 해양을 잇는 교량국가가 되자는 것이었습니다. 우리가 말한 교량국가에는 또 하나의 의미가 있습니다. 개도국에서 선진국으로 발전한 경험을 살려 개도국들과 선진국들을 잇는 가교국가가 되자는 의미입니다.

 그래서 북쪽으로는 북한을 거쳐 대륙으로 나아가기 위해서 북방국가들과 신북방정책을, 남쪽으로는 해양을 통해 ASEAN 및 인도와 신남방정책을 펼쳣어요. 그런 외교적인 큰 그림을 가지고 신남방정책과 신북방정책을 추진했다고 말씀드릴 수 있습니다. 이 같은 외교적인 상상력의 확대는 노태우 정부의 북방정책에서 영감을 받은 것이기도 해요.

 

 

p86

문재인 : 남북 간의 대화를 위해 필요 때문에 한미연합훈련을 연기하거나 유예하거나 한 것이 처음은 아니었습니다. 과거 노태우 정부 때 팀 스피릿 훈련을 중단한 것이 있었지요. 그 같은 적극적인 노력 덕분에 이후 남북합의의 출발점이 된 1991년 남북기본 합의서가 만들어질 수 있었죠.

 그런 선례가 있었기 때문에 평창동계올림픽을 평화 올림픽으로 전환시키고 또 거기에 북한이 참가하게끔 유도하기 위해서는 적어도 그 기간만이라도 한미연합훈련을 유예해야 한다는 현실적인 필요가 대두됐죠. 그러나 다른 한편으로는 정례적이고 방어적인 성격의 훈련이기 때문에 정세 변동과 무관하게 중단 없이 계속돼야 한다는 인식이 한미 양국의 군 쪽에서 강했습니다.

 청와대 참모들도 의견이 갈렸기 때문에 내가 결단을 해야 했어요. 정례적인 군사훈련을 함으로써 얻는 안보상의 이익도 중요하지만, 그보다는 평창올림픽을 평화 올림픽으로 대전환시키고 거기에 북한이 참가하게 해서, 2017년 1년간 지속됐던 전쟁위기를 불식하고 평화 국면으로 전환해내는 것이 안보 면에서 보더라도 훨씬 가치가 크다고 최종적으로 판단했던 거죠.

 결국 한미연합훈련 유예 방침이 2018년 1월 1일 김정은 위원장의 유화적인 신년사부터 북한의 평창올림픽 참가까지 국면의 대전환을 이끌어내는 데 결정적인 역할을 했지요.

최종건 : 저는 당시 군비통제비서관이어서 훈련을 유예하자는 청와대 목소리의 한 부분이었는데요, 브룩스 당시 한미연합사 사령관도 모든 옵션을 다 검토하고 있었는데, 북한이 평창에 온 것은 연합훈련 유예가 결정적인 역할을 한 것으로 분석한다는 거예요. 그리고 그것이 한미연합사 사령관으로서 한반도 안보를 관리하는 데 매우 도움이 됐다고 평가했습니다. 군의 관점에서도 긴장관계가 고조되는 것보다 아무래도 평화프로세스가 진행되면 부담이 줄어드는 거죠. 그렇다고 해서 미국 사람들이 브룩스 사령관을 두고 온건파라고 얘기하진 않거든요. 오히려 더 강경한 군인인데 그런 군인들도 평화 혹은 평화적인 환경을 더 선호한다는 데 큰 의미가 있는 것 같아요.

 

문재인 : 그렇게 하기 위해서, 취임 직후부터 길게 내다보면서 안보와 국방을 중시하는 여러 행보를 계속해왔습니다. 취임 직후 한미연합사를 방문한다거나 우리 합동참모본부와 국방부를 방문하기도 하고, 트럼프 대통령 방한 때는 평택미군기지를 방문해 거기서 트럼프 대통령을 맞이하고 장병들과 함께 식사를 하기도 했죠. 현무미사일 발사시험을 참관하고 북한의 미사일 도발에 맞서 우리 역시 상응하는 미사일을 발사하고 공중폭격 훈련을 실시하는 등 강력하게 맞대응하기도 했습니다. 그러헤 안보를 중시함녀서 강한 국방, 강한 한미동맹, 강력한 연합방위 대세를 강조하는 행보를 축적해놓았기 때문에 연합훈련을 유예한다는 결단을 크게 저항받지 않고 할 수 있었다고 생각합니다.

최종건 ; 저도 자료를 찾아봤는데요, 대통령님의 당시 언어가 어느 보수 대통령보다 강했습니다. 이를테면 2017년 9월 3일 북한이 핵실험을 했습니다. 수소탄 시험에 완전 성공했다고 하고요. 그때 대통령님이 NSC 전체회의를 주관하셨는데, "심대하고 엄중한 도전이다. 무모하고 무책임하다. 선택은 북의 몫이다. 이런 식으로 가면 자멸이다"라고 강력하게 규탄하는 말씀을 하셨어요.

 9월 15일 북한이 미사일 화성-12형을 발사합니다. 그때도 대통령님은 NSC 전체회의를 주관하면서 "북한이 핵과 미사일을 포기하는 것이 안보와 경제발전을 보장받는 진정한 길이다"라고 강조하시고, 다음 날 트럼프 대통령과 통화하셨습니다.

 9월 17일 트럼프 대통령과의 통화에서 두 분 정상은 그간 미국이 취한 대북한 압박과 제재 정책 그리고 한미가 8월 7일 강원도 마차진에서 공동으로 미사일을 대응 발사한 것을 높이 평가했습니다. 동시에 북한은 곧 대화로 나와야 할 것이라는 강력한 메시지를 보도자료로 냈습니다.

 이렇게 한미 간의 신뢰 구축과 연합훈련 유예 발표가 합쳐져서 북한이 나올 수 있는 길을 열어줬다고 저는 생각합니다. 돌이켜 보면, 한반도 평화프로세스를 사람들은 2018년에 시작한 것으로 보지만, 전쟁의 기운이 가장 높았던 시기에 시작된 거라는 생각이 듭니다.

 

p99. 혼밥 논란과 공공외교

최종건 : 한미 신뢰와 한중관계의 중요성에 대해서 말씀 나누고 있는데요, 이 표현을 아십니까? '문재인 대통령 아침세트' 베이징의 식당에 가면 문재인 대통령 아침세트가 있습니다. 그러니까 대통령님이 방중하셨을 때 일종의 공공외교 차원으로 베이징 시민이 일상적으로 가는 아침 식당에서 조찬을 하셨습니다. 그게 어이없게도 혼밥 논란으로 퍼집니다. 그런데 한 번도 거기에 대해서 말씀을 안 하셨거든요.

https://www.hankyung.com/politics/article/2017121835317

 

文 대통령 다녀가자…중국 식당 '문재인 세트' 출시

文 대통령 다녀가자…중국 식당 '문재인 세트' 출시, 정치

www.hankyung.com

 

https://m.blog.naver.com/wlgusthgus36/221317815800

 

[중국/북경] 永和鲜浆 (용허센장)- 문재인 대통령 세트 하나 주세요

문재인 대통령께서 다녀가신 북경의 아침 식사 식당 永和鲜浆 우리는 북경역에 짐을 맡긴 뒤 북경 도착 첫 ...

blog.naver.com

 

문재인 대통령이 베이징의 서민식당을 방문한 것은 친서민 이미지를 위한 계획적인 행보인데 조선이 이걸 비틀어서 혼밥으로 중국정부에게 홀대받았다며  매도하는 프레임을 잡았으며 이게 꼴통보수들을 통해서 널리 퍼지게 됨.

 

문재인 : 우리 스스로 수준을 떨어뜨리는 이야기지요. 예를 들면, 오바마 대통령이 베트남에 가서 쌀국숫집을 방문해 서민적인 음식을 먹고 하는 것은 베트남 국민에게 다가가 마음을 얻으려는 큰 성의 아닙니까? 외교는 상대 국가와 그 국민들의 마음을 얻는 것이거든요. 그런 면에서 보자면, 무슨 관광 명소를 방문하는 것보다 대중적인 시장을 찾아간다든지 또는 서민들의 식당을 방문해서 그들과 같은 음식을 먹는다든지 하는 행보만큼 효과적인 것이 없는거죠.

 더구나 해외순방 때 오찬이나 만찬은 외교 일정 속에 들어갈 때가 많지만 아침은 원래 숙소에서 따로 먹는 건데, 그 시간에 서민 식당을 이용하는 비공식 외교를 한 것이지요. 서민식당 이용은 중국에서만 한 것이 아니라 이탈리아와 베트남 등에서도 여러 번 시도했어요. 그것이 현지에서 매우 좋은 평가를 받아서 지금도 중국 식당에서는 그때 내가 먹은 음식이 '문재인 대통령 아침세트'라는 메뉴로 만들어져 많이 팔리고 있고, 내가 앉았던 좌석도 표시해놓았다고 들었습니다. 최근에 중국 여행을 다녀온 분이 사진을 찍어 왔는데, 그 식당은 그 때문에 장사가 잘돼서 크게 확장했다고 하고, 4면 벽에 우리 일행이 식사하는 장면을 찍은 사진과 동영상을 게시했더군요. 그런데 그것을 혼밥 논란으로 만들어버리니까, 우리 외교를 굉장히 후지게 전락시키는 거죠. 기본적으로 공부가 부족하고 상상력이 부족한 것이라고 봅니다.

 

(이런게 사실 진짜 외교임)

https://m.blog.naver.com/seungohhan/221236589918

 

문대통령님이 방문하신 쌀국수집 Phở 10 Lý Quốc Sư

안녕하세요. 오늘은 문대통령님께서 방문하신 베트남 하노이에 위치한 쌀국수집에 대해 소개해드리고 현지 ...

blog.naver.com

 

 

p109

문재인 : 미국 중심 외교를 하다가 냉전이 무너지는 시기를 맞아 공산권과 수교하고 1991년에 남북한 UN 동시 가입을 한 노태우 정부의 북방정책은, 외교정책에서 그야말로 대전환을 한 겁니다. 북방정책을 통해서 우리 외교가 다변화된 것은 물론이고, 경제적인 면에서도 우리가 개방통상국가로 나아가면서 중진국으로 성장하는 계기가 됐죠. 당시 진보 진영에서는 남북한 UN 동시 가입이 분단을 고착화한다는 비판을 했는데, 그런 인식 때문에 국제법적으로 두 국가가 된 남북한의 관게에 대한 담론이 발전하지 못한 측면이 있었어요.

 1991년 남북기본합의서 체결로 남북관계에 획기적 전환도 있었고요. 결국은 남북기본합의서가 2000년 6·15 남북공동선언, 2007년 10·4 남북정상선언, 2018년 판문점과 평양에서의 남북정상선언으로 계속 이어졌습니다. 아쉬운 것은, 북방정책을 통해서 남북한이 동시에 UN에 가입할 당시 우리는 소련, 중국, 동구권과 수교를 했지만, 북한은 미국이나 일본과 관계 정상화를 못한 것이죠. 당시 한국 정부가 견제를 많이 했다고 하는데, 그것이 사실이라면 멀리 보지 못했다는 아쉬움이 남습니다.

 결국 그런 과정을 거쳐서 남북 간에 한국의 비교우위가 더 커지게 됐죠. 우리로서는 좋은 점이었지만, 한국의 비교우위가 커질수록 북한이 비대칭 전력인 핵과 미사일 개발로 나가게 된 측면이 있는 것이죠. 그렇게 보면 당시 북한도 미국, 일본과 수교해 관계를 정상화하도록 용인하고 이끌어주는 더 통 큰 정책을 펼쳤다면, 남북 관계가 크게 달라지지 않았을까 하는 아쉬움이 있습니다.

 어쨋든 우리가 북한과 새로운 관계를 맺어서 경제협력을 할 수 있게 된다면, 그것이 한반도에 국한되지 않고 북한을 거쳐서 북방으로 이어질 수 있어요. 예를 들면 철도가 러시아나 중국의 철도와 이어져서 유럽까지 갈 수 있는 철도협력이나, 러시아의 천연가스가 배관을 통해서 북한을 거쳐 남쪽으로 내려오게 하는 에너지협력 등 우리의 경제영역이 북한을 지나 대륙으로, 북방으로 뻗어가는 그런 시대가 우리가 꿈꾸는 미래라고 생각합니다. EU의 역사처럼 동북아 철도공동체와 에너지공동체가 다자안보체제로 발전해가는 큰 구상을 할 수 있다면 얼마나 좋겠습니까?

 역사적으로 볼 때, 우리가 고구려시대처럼 영토상으로는 아니더라도 우리의 경제력이나 문화가 대륙까지 미치는 시대를 다시 복원한다는 면에서도 가슴 뛰는 일이지요. 신북방정책의 대상 국가들, 특히 중앙아시아 국가들은 우리와 인종적으로 근친성이 있습니다. 500만 고려인이 살고 있기도 하고요. 무엇보다 한국과의 경제협력을 절실히 바라고 있어서, 우리의 경제성장 경험이나 모델을 공유할 수 나라들이죠.

 

한겨레 기자로 최순실 국정농단 사태의 취재를 통해 박근혜 탄핵을 이끌어냈던 김의겸의 인생과 정치역정에 대한 자전적 내용.

한국 현대사의 중요한 순간들에 대한 이야기들이다.

-----------------

p52. '오송회' 선생님들

 불온한 기운이 학교 안에 퍼지고 있다고 했지만, 그건 우리의 착각이었을 것이다. 세상은 아랑곳하지 않았다. 전두환이 대통령으로 취임하며 제5공화국이 시작되었고, 학력고사는 점점 다가왔다.

 무력하고 순진한 반항아들에게 세상은 너무나 견고하고 높은 성벽이었다. 우리는 성벽 안에 갇힌 채 탈출구를 찾는 수인만 같았다. 내 마음이 바로 그랬다. 그런 어느 순간 우리의 눈에 몇몇 선생님들의 모습이 들어오기 시작했다.

 이광웅 선생님과 박정식 선생님이었다. 두 분은 국어를 가르쳤다. 그런데 두 분의 가르침은 남달랐고, 그래서 기이하게도 보였다. 

 어느 날 이광웅 선생님은 수업에 빈손으로 들어와 칠판에 '葛藤(갈등)'이라는 두 한자를 큼지막하게 썼다. 특유의 정갈하면서 미려한 글씨였다. 그러더니 이렇게 말했다.

 "갈등은 참 여러 가지야. 마음속의 갈등, 나와 타인의 갈등, 나와 세상의 갈등, 오늘은 각자 자신이 가진 갈등에 대해 생각해 봅시다. 노트에 그걸 써보도록."

 학력고사가 코앞에 다가왔는데, 이광웅 선생님은 그렇게 한 시간을 보냈다. 선생님의 마음속 의도는 알 수 없었지만, 그것은 우리가 단순히 입시 기계가 아니라 생각하는 주체임을 깨우쳐 주려는 것처럼 보였다. 목마른 자가 만난 샘물 같은 순간이었다.

 왜소한 체구에 지극히 순한 눈빛을 지녔던 이광웅 선생님은 실은 남다른 감화력을 지닌 분이기도 했다. 우리 학교는 규율이 몹시 엄격하고 체벌이 많은 곳이었다. 사소한 잘못도 그냥 넘어가는 법이 없이 지도부 선생님들의 기합과 매질이 가해졌다. 이광웅 선생님은 전혀 달랐다.

 어느 날 우리 반 아이들 몇이 짤짤이를 하다 이광웅 선생님에게 들켰다. 막 국어 시간이 시작된 참이었다.

 선생님은 짤짤이를 하던 친구들을 앞으로 불러냈다.

 "화장실에 가서 주전자에 물을 담고, 대야와 함께 가져와."

 의아한 지시였다. 아무튼 아이들이 시킨 대로 했다. 그러자 선생님은 주전자를 들고 짤짤이를 하던 아이들의 손을 씻겨주었다.

 "냄새 나는 손을 씻었으니 다들 자리로 돌아가 수업을 시작하자."

 

 박정석 선생님은 차분한 음성과 풍부한 감성을 지닌 분이었다. 교과 진도가 끝나면 교과서에 나오지 않은 글을 읽어주곤 했다. 특히 김수영과 신동엽의 시를 낭송하는 목소리를 가히 압도적인 것이었다. 낭랑한 목소리에 실린 시의 의미와 울림이 굉장했다.

 

 이슬비 오는 날,
 종로 5가 서시오판 옆에서
 낯선 소년이 나를 붙들고 동대문을 물었다.

 밤 열한 시 반,
 통금에 쫓기어 군상 속에서 죄 없이
 크고 맑기만 한 그 소년의 눈동자와
 내 도시락 보자기가 비에 젖고 있었다.

 국민학교를 갓 나왔을까.
 새로 사 신은 운동화 벗어 품고
 그 소년의 등허리선 먼 길 떠나온 고구마가
 흙 묻은 얼굴들을 맞부비며 저희끼리 비에 젖고 있었다.
 -신동엽, <종로5가> 중에서

 

 그리고 김수영의 시 <어느 날 고궁을 나오면서>는 내게 깊은 공감을 불러일으켰다.

 왜 나는 조그마한 일에만 분개하는가
 저 왕궁 대신에 왕궁의 음탕 대신에
 50원짜리 갈비가 기름 덩어리만 나왔다고 분개하고
 옹졸하게 분개하고 설렁탕집 돼지 같은 주인년한테 욕을 하고
 옹졸하게 욕을 하고

 한 번 정정당당하게
 붙잡혀간 소설가를 위해
 언론의 자유를 요구하고 월남 파병에 반대하는
 자유를 이행하지 못하고
 20원을 받으며 세 번씩 네 번씩
 찾아오는 야경꾼들만 증오하고 있는가

 

 시인이기도 했던 이광웅 선생님이나 박정석 선생님이나 말하지 않고도 많은 말을 해준 분들이다. 

 

 그러던 어느 시험 기간이었다. 국어 시험에 '우리를 슬프게 하는 것들'을 주제로 자유롭게 글을 쓰라는 문제가 출제되었다. 그때 국어 시험이 그랬다. 서른개의 문제가 출제되는데, 마지막 문제는 늘 주제를 제시한 작문이었다.

 

 '우리를 슬프게 하는 것들'은 당시 국어 교과서에 실려 있던 안톤 슈낙의 수필 제목이었다. 그런데 나를 비롯해 팍스 코리아나 친구들은 상의하지 않았는데도 답안에 사회와 교육에 대해 비판적인 의식을 담아냈다.

 그 가운데 우리 일원인 김민수의 글이 가장 눈에 띄었나 보다. 박정식 선생님이 민수를 따로 불렀던 모양이다.

 "어떻게 이런 답안을 쓴거야? 생각이 넓고 깊더라고. 기특하고 궁금해서 그런다."

 선생님의 물음에 답하며 이런저런 대화를 나누는 중에 민수는 저절로 우리의 존재를 알리게 되었다. 그 뒤로 팍스 코리아나는 선생님의 관심을 받게 되었고, 어느 순간부터 우리는 이광웅 선생님이나 박정석 선생님 댁으로 놀러 다니기 시작했다.

 이런저런 얘기를 나눴고, 때로는 막걸리도 한 모금씩 얻어 마셨다. 두 선생님의 격의 없고 개방적인 태도는 놀라운 것이었다. 사제 간의 사이가 친밀한 선후배 같았다. 늘 지적 갈증을 느꼈던 우리는 선생님들의 책꽂이에 있는 책들을 빌려서 돌려 읽을 수 있었다. 우리가 대학에 들어가서도 선생님과 제자의 친밀한 관계는 그대로 이어졌다.

 

p60. 야만의 시간

 1982년, 우리가 대학 1학년 때의 여름이었다. 우리는 방학을 맞아 모처럼 고향에서 뭉쳤는데, 누군가 선생님께 빌린 책을 돌려줘야 한다고 했다. 시인 오장환의 <병든 서울>이었다. 해방 직후의 혼돈 속에서 느끼는 기쁨과 좌절과 분노, 그리고 희망의 의지를 담아낸 시집이었다.

 

병든 서울, 아름다운, 그리고 미칠 것 같은 나의 서울아
네 품에 아무리 춤추는 바보와 술취한 망종이 다시 끓어도
나는 또 보았다.
우리들 인민의 이름으로 씩씩한 새 나라를 세우려 힘쓰는 이들을……
그리고 나는 외친다.
우리 모든 인민의 이름으로
우리네 인민의 공통된 행복을 위하여
우리들은 얼마나 이것을 바라는 것이냐.
아, 인민의 힘으로 되는 새 나라

-오장환, <병든 서울> 中 일부.

 

 그 시집은 1946년에 출간된 데다 시인이 월북한 이력이 있어 당시로서는 시중에서 구할 수 없는 희귀본이었다. 더구나 우리가 가진 책은 선생님이 젊었을 때 시집을 손수 옮겨쓴 필사본 노트였으니, 어쩌면 더욱 소중한 것이었다. 반드시 돌려주어야 하기에 우리는 선생님 댁으로 가는 시외버스를 탔다. 그런데 우리는 오랜만에 만나 얘기 꽃을 피우느라 엉겁결에 시집 필사본을 버스 좌석에 놓고 내렸다.

 그 버스의 안내양은 신고 정신이 투철했던 모양이다. 그 시집에 나오는 '인민'이며 '새 나라' 같은 표현은 시가 발표된 1945년에는 누구가 흔히 쓰는 단어였지만, 안내양의 눈에는 지극히 불온한 북한식 어휘로 보였을 것 같다. 안내양은 경찰서로 달려갔고, 시집은 '사건'을 만들어내는 결정적 단서로 쓰였다.

 경찰은 필사본에서 단서를 발견하고 추적하여 책 주인인 이광웅 선생님을 찾아냈다. 경찰은 그 뒤 몇 달 동안 미행과 도청으로 선생님들의 일거수일투족을 감시했다. 그런 줄도 모르고 선생님들은 여전히 막걸릿집에 모여 시국을 한탄하고 전두환 정권을 비판했다.

 마침내 경찰은 1982년 가을에 대대적인 검거에 들어갔고, 선생님들은 '일망타진'되었다. 그것이 이른바 '오송회'사건이다. 오송회라는 조직은 세상에 있지도 않았고, 경찰의 상상력이 만들어낸 허구의 이적단체였다. 그러나 오송회는 선생님들과 우리들의 삶을 전혀 다른 것으로 만들어 버렸다.

https://ko.wikipedia.org/wiki/%EC%98%A4%EC%86%A1%ED%9A%8C_%EC%82%AC%EA%B1%B4

 

오송회 사건 - 위키백과, 우리 모두의 백과사전

위키백과, 우리 모두의 백과사전. 오송회 사건은 1982년 전라북도 군산제일고 전·현직 교사 9명을 경찰이 나서 이적단체 조직과 간첩행위 등으로 구속한 사건이다. 1980년대 전두환 정권 시절 벌

ko.wikipedia.org

 

1982년의 쌀쌀한 늦가을, 전주의 대공 분실(지금의 전북경찰청 모래내 별관) 지하실에는 밤도 낮도 없이 신음이 이어졌다. 신음과 함게 고문경찰의 카랑카랑한 목소리가 울려 퍼졌다.

 "너 간첩이지? 조직원을 다 불어. 불지 않으면 살아서 못 나갈 줄 알아. 너희 같은 빨갱이 새끼들 죽여도 우린 괜찮아. 죽ㅇ면 길가 아무데나 버리면 왜 죽었는지 아무도 몰라 임마!"

 "그러면 제발 죽여주시오!"

 박정석 선생님의 절규였다. 온몸이 발가벗겨진 채 통닭처럼 긴 막대에 두 손과 두 발이 묶여 거꾸로 매달린 채였다. 처음에는 고문 경찰들에게 "살려 달라"고 빌던 선생님이 나중에는 제발 죽여주기를 빈 것이다. 이 절규를 이광웅 선생님이과 다른 선생님들은 다시 자기에게 돌아올 순번을 기다리며 옆방에서 들어야만 했다. 

 오랜 세울이 흐른 뒤 박정석 선생님은 한 방송 인터뷰에서 이렇게 회고했다.

 "그렇게 몇 시간이고 계속되는 신음을 듣고 있으면, 나는 자지러질 지경이 되는 거에요. 저러다 이광웅 형이 죽겠구나, 그런 처참한 생각이 절로 들었죠."

 그런 무지막지한 폭력 앞에서는 없는 말도 지어내야 할 형편이었다. 국가보안법의 이적단체 조직과 간첩 행위로 기소된 '오송회' 사건은 그렇게 조작되었다. 문학을 논하고 시국을 한탄하던 선생님들의 술 모임은 어이없게도 자생적인 간첩 조직이 되어버린 것이다.

 1982년 5월에 이광웅과 박정석 선생님들 비롯한 다섯 선생님들은 5.18을 맞아 학교 뒷산에 올랐다. 그곳 소나무 아래서 막걸리 한 병을 놓고 조촐한 위령제를 지냈다. 그렇게 다섯이 소나무 아래서 광주 희생자 위령제를 지낸 것에서 '오송회'라는 조직명이 붙여졌다.

 선생님들이 잡혀가고 머잖아 우리 팍스 코리아나 친구들도 차례차례 경찰로 끌려가거나 불려갔다. 우리는 으름장과 주먹다짐과 발길질을 받으며 선생님들의 '이적행위'를 낱낱이 일러바쳐야 했다.

 일러바친다는 표현은 온당하지 않다. 그것은 있지도 않은 이적행위를 만들어내는 과정이었다. 앞서 친구의 진술서에 다음 친구가 뭔가를 덧붙이고, 그다음 친구가 다시금 뭔가를 덧붙이는 것이다. 그 과정에서 심문하는 경찰이 제시하는 말이 진술로 첨가되기도 했다. 경찰이 구상한 시나리오가 그런 식으로 완성되었다.

 

 그런데 이듬해 5월 전주지방법원에서 열린 1심 재판에서 뜻밖의 일이 벌어졌다. '오송회' 사건으로 기소된 아홉 분의 선생님 가운데 여섯 분이 선고유예로 풀려난 것이다. 그 엄혹한 5공화국 초기에도 용기 있는 부장판사 이보환이 있었던 거다. 풀려나지 못한 세 분 선생님은 2심에 기대를 걸고 항소했다.

 하지만 7월에 열린 광주고등법원의 항소심 법정은 아비규환이 되고 말았다. '주범' 이광웅 7년, 박정석 5년, 전성원 3년으로 형량이 높아졌을 뿐 아니라, 선고유예를 받았던 여섯 분이 모두 법정 구속된 것이다. 가족들은 땅을 치며 통곡했고, 허공을 향해 울부짖었다.

 항소심 재판관 이재화의 이름을 잊을 수 없다. 그는 판결문에서 선생님들을 향해 "잘못을 뉘우치는 기색 없이 변명만 한다"라고 했다. 그리고 1심과 2심 사이에 도대체 무슨 일이 있었던 걸까. 그 내막은 20여 년 뒤, 박철언의 회고록 <바른 역사를 위한 증언>을 통해 드러난다.

 1983년 어느 날, 전두환이 청와대로 대법원장과 대법원 판사들을 불러 모아 만찬을 열었다. 그 자리에서 전두환은 사회나 정치의 불안 요소에 과감하게 대처할 것을 주문했다. 그런데 특별히 '오송회' 사건을 예로 들며 "빨갱이를 무죄로 하는 것은 안 될 일"이라고 말했다는 것이다.

 전두환의 이 언급이 '오송회' 사건의 1심과 2심 결과를 완전히 다르게 만들어 버린 것이다. 

 그로부터 26년이 흐른 2008년 '오송회' 사건은 재심을 통해 모두 무죄를 선고받았고, 선생님들은 뒤늦은 명예를 회복했다. 재심의 주심이었던 이한주 부장판사는 판결문에서 이렇게 적었다.

 

 법원에 가면 진실이 밝혀지겠지 하는 기대감이 무너졌을 때 여러분이 느꼈을 좌절감과 사법부에 대한 원망, 억울한 옥살이로 인한 심적 고통 등에 대해 많은 고민을 했다. 그동안의 고통에 대해 법원을 대신해 머리 숙여 사죄드린다.

 

 하지만 육신과 영혼이 찢긴 상처가 어떻게 아물겠는가. 그리고 이날 '주범' 이광웅 선생님은 그 자리에 없었다. 사건을 겪고 징역을 사는 동안 몸과 마음이 피폐해진 선생님은 병을 얻어 1992년에 벌써 세상을 뜨신 지 오래였다.

 그리고 다른 선생님들은 이미 연로해지셨다. 청춘을 돌려받을 방법은 없다. 그중 조성용 선생님은 2022년 여름에 세상을 떠났다. 또한 선생님의 자녀들은 민감한 성장기에 숱한 상처를 받아서 그 상흔이 이러저러한 형태로 여전히 남아 있다. 법조계의 유명한 말처럼, 지연된 정의는 정의가 아니다.

 나는 가끔 금강 하구를 찾아간다. 그곳 둑 근처에는 이광웅 선생님의 시비가 소나무와 함께 서 있다. 선생님을 아끼고 따른던 문인들과 제자들이 중심이 되어 1998년에 세운 것이다. 바윗돌에는 이광웅 선생님의 육필로 시가 새겨져 있다.

 이 땅에서
 진짜 술꾼이 되려거든
 목숨을 걸고 술을 마셔야 한다

 이 땅에서
 참된 연애를 하려거든
 목숨을 걸고 연애를 해야 한다

 이 땅에서
 좋은 선생이 되려거든
 목숨을 걸고 교단에 서야 한다

 뭐든지
 진짜가 되려거든
 목숨을 걸고
 목숨을 걸고...
 - 이광웅, <목숨을 걸고>

 

 

 

p208. 아베의 오래된 꿈

 2018년 2월 8일, 문재인 대통령과 아베 일본 총리의 정상회담이 열렸다. 평창 동계올림픽 개막식 참석을 위해 아베 총리가 방한한 것이다. 나로서는 아베를 실물로 처음 보는 자리였다. 아니, 문재인 정부에서 한일 정상회담 자체가 처음이었다. 

 한일 정상의 첫 회담이니만큼 한일 관계에 조금이나마 진전이 있기를 바랐다. 그러나 그런 기대는 처음부터 두 동강이 나고 말았다. 아베 총리는 회담장의 자리에 앉자 노트를 꺼내들고 일방적으로 읽어나갔다. 두 정상의 의자는 서로를 비스듬히 앉도록 배치가 됐는데, 그는 문재인 대통령에게 눈길 한 번 마주치지 않았다.

아베 총리로서는 두 가지가 불만이었다. 일본군 위안부 피해자 문제, 그리고 북한 문제였다. 문재인 대통령은 경직되고 고압적인 태도로 일관하는 아베 총리의 옆얼굴을 빤히 바라보았다. 답답하다는 건지 한심하다는 건지 모를 표정이었다.

 아베의 말이 끝나고 문재인 대통령의 반격이 시작되었다. 대통령은 때로 목소리를 높이기도 하고, 때로 하소연하기도 했다. 두 사람의 주장은 끝내 평행선을 달렸다.

 정상회담이 진행되는 동안 나는 내용을 빠르게 받아적으면서도 걱정이 되었다. 이 회담 내용을 그대로 공개할 수는 없었다. 그날은 평창 동계올림픽을 여는 축제의 날이다. 불과 몇 시간 뒤 밤 8시에 개막식이 열린다. 북한에서 김영남 최고인민회의 상임위원장과 김여정 부부장 등 손님이 내려온 날이다. 남북 관계가 해빙되고, 북미 대화가 시작되기를 학수고대하는 날이다.

 그런데 두 정상의 대화 내용을 그대로 언론에 전달했다가는 축제에 찬물을 끼얹게 될 것 같았다. 회담을 마친 후, 나는 외교부 관계자를 찾았다. 어디까지 언론에 공개할지 상의하고 싶었다. 그러나 일본통이라는 외교부 관계자도 남감해했다.

 "글쎄요."

 그러나 그런 고민은 오래가지 않았다. 일본 쪽이 먼저 아베 총리의 발언을 일본 언론에 공개한 것이다. 그러면 우리 쪽은 그에 대응하여 우리 대통령의 발언을 소개하는 것으로 균형을 맞추면 될 것 같았다.

 다음 날 우리 언론은 '문 대통령-아베 위안부 합의 정면 충돌'이라는 식으로 보도를 내보냈다. 북한과 관련한 두 정상의 논쟁은 위안부문제에 비해 상대적으로 적게 보도되었다. 그건 대변인인 내가 최대한 둥글둥글하게 두 정상으 대화를 소개했기 때문이다. 날카롭게 대립한 부분은 깍아버리고 브리핑을 한 결과였다.

 그런데 그건 대통령의 뜻이 아니었다. 다음 날 문재인 대통령과의 티타임 때, 대통령이 말했다.

 "오늘 아침 신문들을 보니, 북한 문제와 관련한 내용이 없더군요. 추가로 브리핑하세요. 일본 말만 일방적으로 보도되고, 우리는 주권 국가인데 아무런 응대도 하지 못한 것으로 비치면 안 되죠."

 말은 부드러웠지만, 사실상 질책이었다. 그래서 9일의 정상회담 내용 중 중요한 부분을 하루가 지나서 다시 추가로 브리핑해야 했다.

 9일 정상회담 때 아베 총리가 한 말은 이러했다.

 "북한의 비핵화에는 진지한 의사와 구체적인 행동이 필요합니다. 한미 합동 군사훈련을 연기할 단계가 아닙니다. 한미 합동 군사훈련은 예정대로 진행해야 합니다. 북한이 절박한 위기를 직시할 수 있도록 최대한의 압박을 가해야 합니다. 흔들지 않도록 해야 합니다."

 이에 대해 우리 대통령이 반박했다.

 "한미 간 군사훈련을 연기하지 말라는 총리의 말은 북한의 비핵화가 진전될 때까지 아무것도 하지 말라는 말로도 이해하게 됩니다. 이는 주권과 내정에 관한 것으로, 이를 직접 거론하는 것은 곤란합니다."

 이런 식의 대화가 오고 갈 때, 두 정상의 눈에서는 불꽃이 튀기는 듯했다.

 사실 한일 정상회담 직전에 문재인 대통령과 트럼프 미국 대통령은 정상 간 통화를 하고, 평창 동계올림픽 기간에는 북한이 민감하게 반응하는 한 군사훈련을 하지 않기로 합의했다. 그런데 아베가 이를 무시하고 한미 합동 군사훈련을 계속하라고 압박을 가한 것이다. 

 아베의 이런 무례함은 그날 저녁에도 이어졌다. 9일 저녁에는 만찬이 준비되어 있었다. 만찬장의 헤드테이블에는 마이크 펜스 미국 부통령과 아베 일본 총리, 그리고 김영남 북한 최고인민회의 상임위원장이 같이 앉게 배치되어 있었다.

 다들 일찍 만찬장에 들어와 자리에 앉았는데, 아베 총리와 펜스 부통령이 나타나지 않았다. 둘이서 별도로 회담을 한다는 것이었다. 그들을 기다리던 문재인 대통령은 할 수 없다는 듯이 만찬을 시작했다.

 내 마음이 다급해졌다. 만찬장 입구에서 서성이는 중에 아베 총리와 펜스 부통령이 나타났다. 그때라도 만찬장에 들어올 줄 알았는데, 둘은 엉뚱하게도 방향을 틀어 다른 방으로 들어가는 게 아닌가.

 그들을 따라가 보았다. 둘은 그 방에서 사진을 찍으며 시간을 흘려보냈다. 문재인 대통령이 그 방으로 들어와 두 사람에게 만찬장으로 가자고 권유했다. 그제야 아베 총리와 펜스 부통령은 마지못한 듯 만찬장으로 들어갔다. 이미 40여 분 정도가 흐른 뒤였다.

 하지만 펜스 부통령은 헤드테이블의 지정된 자리에 앉지 않고 몇몇 다른 나라의 정상과 선 채로 악수하고는 5분여 만에 빠져나갔다. 아베 총리는 김영남 상임위원장과 잠시 헤드테이블에 앉았으나 눈길도 마주치지 않으려고 했다.

 일본은 한반도 평화를 바라지 않는 것인가. 그리고 그 이유는 무엇일까. 여러가지를 생각하게 만드는 장면이었다.

 그런 의문은 석 달 뒤 어느 정도 풀렸다. 2018년 5월 9일, 일본 총리 공관에서 한일 정상회담이 열렸다. 일본 쪽은 '문재인 대통령 취임 1주년을 축하드립니다'라는 카드가 꽂힌 딸기 케이크도 준비하는 등 화기애애하게 시작되었다.

 하지만 여전히 두 정상의 의견 차이는 좁혀지지 않았다. 아베 총리의 말 중에서 확 귀에 들어오는 말이 있었다.

 "한반도 평화 체제가 구축되면 한국에 있는 유엔군 사령부가 폐지되는 거 아닙니까? 주한 미군의 역할, 그리고 동아시아의 미군 존재에도 영향을 미칠 것입니다."

 아베 총리는 일본의 재무장과 군비 증강을 일관되게 추진한 인물이다. 중국은 당연히 이를 동아시아의 군사적 긴장을 악화시키는 행동이라 비판하고 나섰다. 한국도 일본의 군국주의 망령이 부활하려는 전조 증상이라며 비판에 가세하는 중이었다.

 아베 총리로서는 한반도에 부는 평화의 훈풍이 군사 대국을 향한 자신의 구상에 방해가 된다고 보았다. 그래서 기를 쓰고 남북과 북미 사이의 평화협상 진전에 찬물을 끼얹었던 것이다.

 아베 총리는 퇴임 후 2022년 7월 암살당했지만, 한반도 평화 정착에 반대하는 그의 염원은 사후에 이어지고 있다. 그의 뜻은 지금 한국의 윤석열 정부를 통해 드디어 실현되려는 듯하다. 미국을 중심으로 하는 한미일 삼각동맹은 아베가 오래도록 꿈꾸던 것이다.

 여담이지만, 청와대 대변인을 하면서 가장 안타까웠던 건 정상회담 동안의 식사와 만찬이었다. 그런 자리에서는 응당 그 나라의 최고 음식이 선보인다. 그러나 대변인은 잿밥에 신경 쓸 처지가 못 된다. 정상의 대화 내용을 적느라 오른손을 바쁘게 움직여야 하기 때문이다. 그래도 일부 국가의 음식은 왼손으로 포크를 사용할 수 있어서 눈치 봐가며 먹을 수 있다.

 그러나 최악의 상황은 일본에서 열린 한일 정상회담이었다. 일본 음식은 젓가락을 사용하니 왼손으로는 도저히 어떻게 해볼 도리가 없다. 점잖은 자리에서 손으로 먹을 수도 없는 일 아닌가. 그래서 아베 총리의 공관에서는 점심을 먹지 못하고 쫄쫄 굶고 나왔다.

 문재인 대통령도 그럴 경우가 많았다. 대통령은 받아적을 일은 없지만 온 정성을 다해 대화에 집중한다. 한마디라도 더 듣고 더 말하려고 식사를 건성으로 하는 경우가 많았다. 진수성찬에 손도 못 대고 밤 늦게 숙소로 돌아와서 컵라면을 찾고는 했다.

 

p215. 진심의 사람, 문재인

 2018년 2월의 어느 날 아침, 문재인 대통령은 한국 GM 이 군산 공장을 폐쇄하기로 했다는 소식을 보고 받았다. 분위기가 어두웠다. 나는 군산 사람이니 마음이 무거운 게 당연했다. 그런데 대통령의 표정은 나보다 훨씬 어두운 게 아닌가.

 한참 침묵이 흐른 뒤 대통령은 불쑥 이렇게 말했다.

 "내일이라도 당장 군산에 내려갑시다."
 "네?"

 모두가 깜짝 놀랐다. 임종석 비서실장이 나섰다.

 "안 됩니다. 대통령께서 직접 가시게 되면 군산 시민들은 무슨 해결책이나 선물을 들도 오는 줄 알고 기대할 터인데, 지금 아무것도 준비된 게 없습니다."

 대통령은 고집을 피웠다.

 "꼭 뭔가를 들고 가야 합니까? 빈손으로 가면 안 됩니까? 그냥 내려가서 군산 시민들을 뵙고 껴안아주면 안 됩니까?"

 결국 그날 회의는 다른 '합리적 대안'을 찾는 걸로 마무리를 지었다. 군산 지역을 '산업위기대응특별지역'으로 지정한 것이다. 

 나는 그 내용을 기자들에게 브리핑하고 나오면서도 이런 의문이 들었다.

 '대통령은 왜 그렇게 군산 문제에 감상적인 태도를 보였을까?'

 그 뒤 대통령을 지켜보며 나름대로 찾아낸 이유는 두 가지다.

 첫째로는, 후보 시절 현대중공업 군산조선소를 정상화하겠다고 약속했는데 못 지켰고, 거기에 더해 한국GM 군산공장마저 문을 닫는다고 하니 책임감이 마음을 짓누른 것이다. 둘째로는, 조선업계의 불황으로 자신의 고향 거제가 힘든 걸 누구보다 잘 아는 터라, 같은 처지인 군산이 남의 일로 여겨지지 않은 것이다.

 그래서일까, 문재인 대통령은 재임 기간에 유독 군산을 많이 찾았는데, 중소 규모의 도시로는 이례적으로 네 번이나 방문했다.

 문재인의 진심은 국내뿐만 아니라 해외에서도 우러나왔다.

 대통령을 수행하여 아랍에미리트UAE를 방문했다가 사막을 체험한 적이 있다. 대통령은 차를 타고 20분가량 달려가 사막 한복판에 섰다.

 함께 간 아랍에미리트 장관이 설명했다.

 "모래가 아주 뜨겁습니다. 하지만 우리 아랍인은 여길 맨발로 걱기도 합니다. 건강에 좋다고요."

 장관은 그저 지나가는 말로 툭 던진 것인데, 문재인 대통령이 눈을 반짝이며 바로 이 말을 낚아챘다.

 "아, 그래요? 그렇다면 저도 한번 해보죠."

 대통령은 신발과 양말을 벗고 뜨거운 모래 위를 껑충껑충 뛰어다녔다.

 "앗, 뜨거워. 아, 정말 뜨겁네요."

 그렇게 소리를 지르면서도 대통령은 왼발과 오른발을 바꿔가며 호들갑스럽게 모래밭을 돌아다녔다. 그걸 지켜보고 있던 김정숙 여사가 만류했다.

 "아휴, 발 데어요. 그만하세요."

 대통령은 아랑곳하지 않았다. 아랍에미리트 장관은 허리가 휘도록 웃으며 박수를 쳐댔다.

 평소에 과묵하고 매사에 진지한 문재인 대통령이다. 그가 이토록 개구쟁이 같은 모습을 연출한 이유는 무얼까. 나는 나름대로 짐작이 갔다.

 '온통 사막인 나라, 그래서 자랑할 풍경이라곤 모래밭뿐인 나라. 그런 나라가 모래에 애정과 자긍심을 느낀다면 기꺼이 호응해주리라.'

 이런 심정이지 않았을까.

 문재인이라는 사람을 설명하려면, 노무현을 빼놓을 수 없다. 문재인 대통령은 가끔 참모들에게 '번개'를 쳐서 점심을 함께했다. 그런 뒤에는 꼭 청와대 경내를 한 바퀴 산책했다.

 산책 코스는 거의 정해져 있어서 청와대를 둘러싼 돌담 안쪽을 끼고 돌았다. 그런데 어느 날인가는 돌담 밖으로 멀리 나간 적이 있다. 북악산으로 바로 올라가는 코스였다. 대통령은 주말에 청와대 경내를 산책하다 더 땀을 흘리고 싶으면 올라가는 코스라고 설명했다. 조금 올라가 보니 쉴 수 있는 정자가 있고 주변이 잘 정돈된 공간이 나타났다.

 "이 나무가 어떤 나무인지 압니까?"

 대통령은 잘생긴 아름드리나무를 가리키며 물었다. 수형이 웅장하고 가지가 옆으로 쭉쭉 퍼진 게 주변을 압도하는 모양새였다. 대답이 나오지 않았고, 대통령이 설명했다.

 "이건 김대중 대통령께서 심은 나무죠."

 그러더니 '김대중 나무' 맞은편에 있는 나무를 가리켰다.

 "그러면 이 나무는 아나요?"

 그 나무는 앞의 나무와는 달리 몸통이 얄브스름하고 가지가 위쪽으로만 뻗어 올라가며 자라는 나무였다. 역시 대꾸하는 이가 없었고, 대통령의 설명이 이어졌다.

 "김대중 대통령께서 심은 나무를 방해하지 않으려고 일부러 위로만 자라고 옆으로는 퍼지지 않는 나무를 골라 심은 겁니다. 노무현 대통령이요."

 이 말을 하고 문재인 대통령은 한참 침묵을 지키다 이렇게 덧붙였다.

 "노무현 대통령의 사람 됨됨이가 드러나는 나무죠."

 문재인은 노무현 대통령의 사람 됨됨이를 말했으나, 나는 이 말이 문재인의 됨됨이를 나타내는 말로도 들렸다.

 문재인 대통령 퇴임은 우리 같은 옛 수하들에게 어쩌면 큰 선물이기도 했다. 재임 중에는 만나기가 어려웠지만, 퇴임 후 평산 마을로 내려간 뒤에는 마음만 먹으면 만날 수 있기 때문이다.

 문재인 대통령과 함께 통도사를 병풍처럼 감싸고 있는 영축산 한자락을 오른 적이 있다. 윤도한 전 국민소통수석비서관, 더불어민주당의 최강욱 의원과 함께했다. 우리는 헉헉대며 산을 오르다 너른 바위를 만나 겨우 숨을 고를 시간을 가졌다.

 "대통령님께서는 히말라야도 다녀오셨으니 이 정도는 아무것도 아니시죠?"

 우리 중 누군가의 물음에 대통령은 이렇게 답했다.

 "아닙니다. 높은 산은 높은 산대로, 낮은 산은 낮은 산대로 다 힘이 듭니다. 산이 높으면 우리 몸이 미리 온 기운을 끌어올려 쓰고 산이 낮으면 우리 몸이 아예 긴장을 풀어버립니다. 그래서 높낮이와 관계없이 몸이 힘든 건 다 마찬가지입니다."

 우리 인생도 그런 것 같았다. 지위가 높으나 낮으나 일이 잘 풀릴 때나 꼬일 때나, 어렵고 힘든 건 매한가지인 듯싶다. 어려우면 어려운대로, 쉬우면 쉬운 대로 흔들리지 않고 여여如如하게 살아가라는 뜻으로, 대통령의 말씀을 받아들였다. 이런 마음가짐은 지금의 시국을 헤쳐가는 우리의 자세에도 적용될 수 있을 것 같다. 올라갈 때도 내려갈 때도 있겠지만, 마음의 동요 없이 "꾸준하게 전진하는 것 말이다.

 대통령 말씀을 듣다보니, 그 내용과 수염을 기른 풍모가 참 잘 어울렸다. 처음에는 이발사가 수염을 다듬어줬는데, 이제는 자신이 배워서 직접 다 한다고 한다. 이발사도 그 솜씨에 놀랐다고, 대통령을 보좌하는 오종식 비서관이 귀띔해줬다. 그리고 이발사가 이런 말도 했다고 한다.

 "처음에는 대통령님 머리결이 아주 푸석푸석했습니다. 그런데 이제는 결도 고와지고 윤기가 나기 시작합니다."

 대통령으로 재임하던 동안의 힘겨움이 머리카락에도 나타났던 거라고 짐작했다.

 문재인 대통령의 뒤꿈치를 보며 산을 오르다 잠시 한눈을 팔면, 대통령은 저만치 바람처럼 가 있고는 했다. 대통령의 건강을 확인하고 지혜를 얻어 와서 뿌듯한 산행이었다. 앞으로도 오래오래 그렇게 문재인 대통령을 만날 수 있기를 소망한다.

 

 

 기후변화를 막기 위한 노력과 그 장애물. 궁극적으로 이로 인해 야기될 식량위기에 대처하는 우리의 현재, 그리고 앞으로 나가야 할 방향.

 이미 정해진 미래인 기후위기와 식량위기에 준비하기 위해 우리가 알아야 할 것들.

---------------------

p20

 1914년 8월 2일 독일이 러시아에 전쟁을 선포한 바로 다음 날, 프란츠 카프카는 체코 프라하에서 일기장에 다음과 같이 적었다.

 독일이 러시아에 전쟁을 선포했다. 오후 수영 강습소.

 후세의 역사가들이 역사적인 사건으로 평가하는 일도 동시개 최고의 지성인에게는 그저 그런 일상으로 인식된다. 수백만 명이 죽게 될 전쟁과 오후의 수영 강습은 같은 비중으로 취급된다. 

 역사가 일어나는 순간에도 인간은 현재를 체험한다. 그 당시의 사람들도 역사적 사건을 중대하게 인식했을 것이라는 우리의 생각과는 달리 시대의 비극조차 사후에나 이해된다.

 

p22

 아직도 기후가 변했느냐고 묻는 사람들이 가끔 있다. 물론 그렇게 용기 있는 사람이 많지는 않다는 데 그나마 위안을 느끼낟. 그리고 기후가 정말 변할 것인지를 묻는다. 하지만 논점이 틀렸다. 지금의 기후는 30년 전 부모들이 젊었던 시절의 기후와는 전혀 다르다. 앞으로 30년은 지금까지 인류가 살아보지 못한 전혀 다른 지구를 경험할 것이다. 우리의 문제는 그 변화를 언제 깨달을 것인가이다. 이미 강원도 철원에서 사과가 재배되고 제주도의 한라봉은 남해안까지 올랐왔다. 

 

 이미 변해버린 것을 부여잡고 변화가 언제 올지를 묻는 사람에게 변했다는 것을 이해시키기는 쉽지 않다. <기후전쟁>의 저자 하랄트 벨처는 이를 '지시 프레임reference frame'의 관점에서 설명한다.

 미디어나 주변을 통해 더 자주 특정 정보를 접하게 되면 사람들은 비정상적인 상황을 정상적인 것처럼 여기게 되는 '바탕 교체baseline shift'현상을 겪게 된다. '바탕 교체'는 나란히 달리는 기차를 바라보면서 마치 정지해 있다고 느끼는 것처럼, 무엇이 옳고 그른지 방향을 안내하는 '지시 프레임'을 변화시킨다.

 

 기후변화만 그런 것도 아니다. 가습기 살균제에서도 똑같은 일이 있었다. 가습기 살균제가 위해하다는 정부 발표는 몇몇 학자들의 불완전한 연구 결과로 희석되었다. 언론은 기계적 중립을 지킨다. 사실과 거짓 앞에서 진실의 편에 서기보다는 기계적 중립을 선택한다. 논란은 커져가고 결국 지루한 법적 공방을 거쳐 사실이 인정될 때까지 피해는 확산된다. 미국의 담배 소송에서 벌어졌던 일이고 우리나라의 가습기 살균제 사건에서 벌어졌던 일이다.

 

p25

 나는 IPCC 제4차 보고서AR4를 체택하는 회의에 참석한 적이 있다. 처음에는 과학적인 결과를 놓고 치열하게 토론하는 장면을 상상했다. 그런데 실제 회의장 분위기는 예상과는 너무 달랐다. 회의에서는 과학자들이 제출한 요약 보고서를 회의장 앞 스크린에 띄우고 단어 하나, 문장 하나하나를 분해하면서 과학적인 증거가 있는지를 따져 물었다. 어떤 날은 조동사 하나를 선택하는 데 하루를 보내기도 했다. 예를 들면, 과학자들이 쓴 "기후 변화가 영향을 미쳤다"라는 표현은 협상가들의 지루한 다툼을 거치면서 '기후변화가 영향을 미쳤을 가능성이 약간 있다"라는 정도로 완화되었다. "화석연료가 원인이다"라는 문장은 "온실가스 증가가 영향을 미쳤을 수도 있다"라는 정도로 바뀌었다. 가능하면 화석연료가 직접적으로 언급되는 것을 필사적으로 막았다. 주로 러시아, 중국 그리고 미국의 대표들이 기후변화가 영향은 있지만 아직은 불확실하다는 입장을 고수했다. 유럽 대표단는 과학자들의 표현을 그대로 남기기 위해 노력했지만 성공적이지는 못했다 . 이런 논쟁이 일주일 내내 아침부터 새벽까지 이어졌다. 그렇게 IPCC는 과학자의 모임이지만 정부 간 협의체로 불리고, 요약본 한 문장 한 문장은 국가간 협약만큼의 힘을 갖는다.

 

p26

 IPCC는 우리가 어떤 노력을 하고 어떤 탄소중립 시나리오를 적용하더라도, 늦어도 2040년에는 1.5도까지 올라갈 것이라고 결론을 내렸다. 이는 3년 전의 'IPCC 특별보고서'에 비해 그 시기가 10 년 앞당겨졌다. 어쩌면 2030년에 FIFA 월드컵이 개최디ㅗ기 전에 이미 1.5도의 미래를 맞이할 수도 있다. 그리고 전 인류가 열심히 노력하면 2100년 정도에는 다시 사람이 살 만한 지구가 될 수 있다는 평가 결과를 제시했다.

 이 뉴스를 훑어보면서 어쩌면 올해가 내가 살아갈 시간 중 가장 시원하 해였을 수도 있겠구나 하는 생각이 스쳐 지나갔다.

 며칠 후 요약본의 원문을 구해 읽었다. 첫 느낌은 "봐, 우리 과학자들이 하는 말이 맞지!"라고 말하는 듯했다. 제6차 보고서에서는 이전 보고서의 기후 모델에서 예측한 그대로 지구 평균기온이 올라갔다는 것을 여러 번 강조했다. 그리고 이전 보고서서 했던 처럼 다시 한번 경고했다.

 "인간의 영향이 대기, 바다, 육지를 온난화시켰다는 것은 명백하다. 대기,해양, 빙권 그리고 생물권에 광범위하고 급격한 변화가 생겼다. 기후 시스템의 여러 측면을 고려하더라도최근에 벌어진 기후 시스템 전반에서 일어난 변화의 규모는 수 세기에서 수천 년에 걸쳐 전례가 없는 수준이다.

 

p31

 육지와 해양은 인간이 배출한 온실가스의 56%만 흡수했고, 이 비율은 거의 변하지 않았다. 인간은 자연이 흡수할 수 있는 이산화탄소의 거의 2배를 배출하고 있다.

 이렇게 배출된 온실가스는 지구의 평균기온을 1.4도까지 올렸다. 그렇지만 화석연료의 연소 중에 배출된 미세먼지와 매연 등 에어로졸이 햇볕을 차단해 0.3도만큼 지구의 온도를 떨어뜨려 결과적으로 1.1도만큼 상승했다. 

 

p32

 기후 과학자들은 가장 이상적으로 온실가스를 줄이는 경우부터 재생에너지 중심으로 에너지를 바꾸고 친환경적인 경제 발전 경로를 택하는 경우 등 여러 가지 기후변화 대응 노력을 가정해 미래 기후를 예측한다. 우리는 이것을 '기후변화 시나리오'라고 부른다. 기후변화 시나리오는 이상적인 경로부터 현재처럼 화석연료를 사용하는 경로까지 다섯 개의 시나리오로 미래를 예측한다. 그중 현실적으로 달성하기 불가능한 가장 이상적인 경제 발전 경로(SSPI-1.9)를 전세계가 택한 경우에도 100년 전(1850~1900)과 비교해 100년 후(2081~2100)에는 1~1.8도(최적 추정 1.4도)가 증가할 것으로 추정했다. 다섯 개 시나리오 중 가장 현실적인 목표로 생각되는 중간 경로(SSP2-4.5)를 택했을 때, 2.1~3.5도(최적 추정 2.7도)가 상승한다. 이미 1.5도의 목표를 넘어설 뿐만 아니라 파리협약에서 합의한 파국을 막기 위한 2도도 가뿐히 넘는다. 가장 높은 시나리오 SSP5-8.5의 경우에는 3.3~5.7도(최적 추정 4.4도)까지 높아질 것으로 예상된다. 지구에서 있었던 다섯 차례의 대멸종이 일어났던 수준이다.

 그럼 현재로서는 가장 가능성이 높은 시나리오인 2.5도 상승은 무엇을 의미할까? 이렇게 설명하면 느낌이 바로 올지도 모르겠다. 최근 300만 년의 지구 역사 중 가장 높은 평균 기온을 금세기 말에 경험하는 것이다. 그러면 우리가 원하는 1.5도의 상승에서 멈추려면 어떤 경로를 따라야 할까? 안타깝게도 가장 이상적이라고 평가했던 SSPI-1.9의 경로이다.

 1.1도가 상승한 세계는 폭염과 집중호우, 가뭄과 산불의 증가, 열대성 저기압의 강도와 빈도의 증가, 북극의 해빙, 빙하와 영구 동토층의 감소를 나타내며 인간 사회의 가장 취약한 곳부터 무너뜨리고 있다. 1.5도의 세상은 우리가 결코 견딜 만하다고 느끼기는 어렵지만 그래도 우리가 택할 수 있는 이상적인 미래이다.

 

p195

 가끔 탄소중립에 대한 강의를 마치고 나면 빠지지 않고 나오는 질문이 있다.

 "혹시 탄소중립 약속을 이행하지 않으면 무슨 제재가 있나요?"

 그런 질문을 받을 때면 이렇게 대답한다.

 "파리협약에서는 약속을 이행하지 않는 것에 대해 어떤 제재도 포함하지 않습니다."

 그러면 안도하는 표정이 스쳐가는 것이 느껴진다. 그럴 때마다 더 한마디 덧붙이고 싶어진다.

 "신뢰를 잃으면 모든 것을 잃는 것입니다. 지금은 어떻게 가능한 방법을 찾을 것인가 머리를 맞대야 할 때입니다. 우리가 설사 탄소중립 약속을 이행하지 못할 수도 있습니다. 그래도 최대한 노력해서 목표치와 비슷하게 맞춰야 변명이라도 할 수 있지 않을까요?"

 

p230

 도시 국가인 싱가포르는 자국에서 생산되는 농축수산물이 자국 소비량의 10퍼센트 정도에 불과하다. 식량 공급만의 안저성은 매우 취약한 것이다. 농경지가 별로 없는 싱가포르는 식량자급율을 2030년까지 30퍼센트까지 높이는 '30 바이by 30' 정책을 추진하고 있다. 주로 어류 양식이 큰 부분을 차지한다. 특이한 것은 무려 170개국에서 식품을 수입한다는 사실이다. 전략적 수입선 다변화의 결과이다. 싱가포르가 이런 다변화 정책을 펴는 데는 이유가 있다. 싱가포르는 말레이시아와 물 공급 협정에 따라 전체 물 소비량의 절반 이상을 공급받는다. 그런데 말레이시아는 여러 번 물 공급 협정을 갱신하지 않겠다고 위협해 싱가포르를 긴장하게 만들었다. 식량 역시 일부 국가에 대한 의존도가 커질 경우 같은 위협에 노출될 수 있다. 현재 코로나19로 인해 어려운 경제 상황을 겪고 있지만, 곧 다가올 기후 위기에 비하면 대수롭지 않은 피해일 수 있다. 식량을 전적으로 해외에 의존할 수밖에 없는 싱가포르는 나름대로 최선의 선택을 하는 것이다.

 

p247

 우리나라 농업은 경제 수준에 비해 낙후되어 있다. 경제는 선진국인데 농업은 개발도상국 수준이라고 평하기도 한다. 이 책의 목적이 우리나라 농업의 문제를 다루는 것은 아니기 때문에 왜 그런지 간략히만 설명하고 넘어가고자 한다.

 선진국의 농업 발전 과정을 보면 농장 규모는 커지고 농업 인구는 줄어드는 과정이었다. 농기계가 도입되면서 한 명의 농부가 경작할 수 있는 면적이 늘어나면서 나타나는 현상이었다. 아프리카의 농업 현장을 방문했을 때 의아했던 적이 있었다. 넓은 땅을 가진 국가임에도 불구하고 가족이 경영하는 농경지 면적은 1~2헥타르에 불과했다. 이유는 단순했다. 작물이나 영농 방식에 따라 차이가 있지만 농기계를 사용하지 않고 농사를 지을 수 있는 규모의 한계이기 때문이다. 우리나라 농가당 경지면적은 1.08헥타르이다. 전형적인 개발도상국형 농업이다. 반면에 네덜란드와 독일의 농장 규모는 대체로 30헥타르를 넘어간다. 물론 농가 수로는 5헥타르 미만의 소농이 절반 이상을 넘어가지만, 실제 농업 생산에서 담당하는 비중은 5퍼센트 내외에 불과하다. 반면에 50헥타르 이상을 경작하는 대농은 5퍼센트 정도에 불과하지만 농업 생산 비중은 50퍼센트를 크게 상회한다. 일본은 불과 20년 전만 하더라도 우리나라와 비슷한 농업 구조였지만 지금은 유럽과 비슷한 구조로 빠르게 전환하고 있다. 

 농가의 규모가 문제가 되는 것은 생산성을 높이고 농업 환경을 개선할 수 있는 정밀 농업기술을 적용하려 해도 투자 대비 효율성을 얻는 것이 어렵기 때문이다. 농촌의 공동화와 고령화로 농기계 역할이 더 중요해졌지만 투자 대비 효율성의 문제로 농기계에 대한 투자 역시 지체되면서 농촌의 일손 부족 문제도 심각해졌다. 영농 규모를 확대하기 위해 들녘 단위 농업경영체 육성처럼 다양한 방법이 시도되었지만 성공적이지는 못했다. 이러한 문제에 대한 근본적인 원인을 찾아가다 보면 우리나라 국민이 지니는 농업에 대한 인식의 한계에 다다른다. 농사를 하나의 사업으로 보기보다는 삶의 방식으로 대하는 것이다.

 

p313

 유럽이 처한 상황과 자연환경 조건 역시 우리와는 너무 다르다. 우리는 힘들게 해야 겨우 비슷하게라도 할 수 있다. 유럽은 멈추면 쉬어가는 환경이지만, 우리 농업은 멈추면 넘어진다. 이것이 우리나라를 이렇게 빠르고 혁신적인 국가로 만들어온 배경이기도 하겠지만 끊임없이 인재를 갈아넣어야 지속되는 시스템이기도 하다. 여기까지 온 것이 대견하게 느껴지지만 언제까지 가능할까라는 우려도 든다.

 

p315

  재생에너지 전환에 가장 열심인 독일은 에너지 전환 프로젝트를 코페르니쿠스라고 명명했다. 그리고 그 코페르니쿠스의 추진 전략 수립을 위한 프로젝트에 아리아드네의 이름을 붙였다. 에너지 전환이라는 미궁을 헤쳐나가 지구온난화라는 괴물을 잡기 위해서는 길을 안내할 아리아드네의 실이 다시 필요했기 때문이다

 독일은 이 프로젝트의 추진을 위해 26개 파트너가 참여하는 컨소시옴을 구성하고 과학, 정치, 비즈니스 등 다방면에 대한 연구와 시민 사회단체 간 공동 학습 과정을 통해 에너지 전환의 방향을 설정한다. 그런데 내가 놀랐던 것은 다른 데 있었다. 독일은 에너지 전환 프로젝트에서 두뇌 역할을 하는 아리아드네 프로젝트, 즉 기후 위기 대응 에너지 전환 정책과 전략을 수립하는 연구에 3년간 400억 원을 지원한다는 것을 봤을 때이다. 우리나라는 걸핏하면 2000만 원, 삼 개월에서 육 개월짜리 정책 분석 또는 대안 개발 과제를 발주한다. 수의계약 범위를 넘지 않기 위해서이다. 많아도 1억 원 정도의 정책 과제만 보다가 3000만 유로라는 수치는 보고도 믿기지 않았다.

 

p327

 물리학자 막스 플랑크는 "새로운 과학은 당대의 반대론자들을 설득해 승리하는 것이 아니라, 반대자들이 모두 죽은 후 새로운 세대에게 수용되면서 승리를 거두는 법"이라는 명언을 남겼다. 기후변화에 대한 대응 역시 마찬가지일지 모른다. 기후변화를 초래한 것은 우리 세대이지만 우리는 결코 이 문제를 해결할 수 없을지도 모른다. 다음 세대가 정치적 의사 결정의 전면에 등장하면서 기후 위기도 해결 국면에 접어들 것이다.

 

p331

 농장주의 평균 연령은 67세를 넘어가고 40세 이하는 1퍼센트에 불과하다. 이대로 가면 이미 낮은 식량자급률마저 지키는 것이 요원하다.

 

경제학자가 제시하는 대한민국이 경제적 민주주의로 가는 방법론. 

------------------

p33

 불환화폐(신용화페)라는 (중앙)은행권은 금 대신 정부가 가치를 보장하는 화폐(채권)이다. 왕이나 오늘날의 대통령 등이 아닌 정부의 경제력이 보증하는 것이다. 국가가 없어지지 않는 한 정부는 마르지 않는 샘에 해당하는 조세권이라는 경제력을 갖고 있기 때문이다. 즉 금 대신 사회 전체 생산물 중 사회몫에 해당하는 생산물이 금의 역할을 대체한 것이다. 국민이 함께 만든 생산물로 불환화폐의 가치를 보증하여 (보유금의 양에 의해 제한되었던) 은행에게 돈놀이의 장애물을 제거해주었기에 (영란등 중앙)은행의 설립 목표를 '공공선과 인민의 이익The public Good and benefit of our People 촉진'으로 설정한 것이다.

 이처럼 불환화폐의 가치가 사회 구성원 모두가 함께 만들어낸 생산 중 사회몫으로 뒷받침된다는 점에서 사회 구성원 모두는(생계에 필요한 최소소득을 사회소득으로 배분받을 권리가 있듯이) 최소한의 신용 이용에 대한 기본권리를 갖는다. 이재명 대표가 주장하는 '기본금융' 개념은 여기서 비롯한 것이다. 모든 국민은 세금을 납부하기 때문이다. 국민이 모두 함께 불환화폐 가치를 보증했기에 불환화폐의 혜택인 이른바 '사회금융' 혹은 '공공금융'을 누릴 권리를 갖는 것이다.

 

<정부 부채는 이자만 갚아나가도 괜찮은 이유 - 근거, 사례 및 설명?

p41.

 한국은행법을 보면 제1장 총칙이 시작되기 전에 해당 기관을 관할하는 상위 정부조직이 표기된다. 한국은행법에는 '기획재정부(거시정책과)'가 표기되어 있고 해당 기관의 전화번호(044-215-2831)도 옆에 기재되어 있다. 이것은 정부 조직법 가운데 행정각부의 역할을 규정한 제4장의 (기획재정부 역할을 규정한) 27조 ①항에서 화폐에 관한 사무를 기획재정부가 갖고 있음을 규정하고 있기 때문이다. ("① 기획재정부장관은 중장기 국가발전 전략수립, 경제/재정정책의 수립/총괄/조정. 예산/기금의 편성/집행/성과관리/화폐/외환/국고/정부회계/내국세제/관세/국제금융, 공공기관 관리, 경제협력/국유재산/민간투자 및 국가채무에 관한 사무를 관장한다.") 즉 화폐 발행의 원천적 권한은 중앙은행이 아니라 정부라는 이야기이다.

 한국은행법 제5절은 정부 및 정부대행기관과의 업무를 설정하고 있는데 정부와의 업무를 72조부터 75조까지 규정하고 있다. 그런데 정부에 대해 돈을 빌려주는 업무를 규정한 제75조(대정부 여신 등)의 ①항에서 "한국은행은 정부에 대하여 당좌대출 또는 그 밖의 형식의 여신을 할 수 있으며, 정부로부터 국채를 직접 인수할 수 있다"고 규정하고 있고, ③항에서 "제1항에 따른 여신에 대한 이율이나 그 밖의 조건은 금융통화위원회가 정한다"고 되어 있다. 즉 한국은행은 정부가 원하는 어떠한 방식으로든 돈을 빌려 줄 수 있게 되어 있다.

 이러한 규정은 세계 모든 중앙은행의 공통 요소이다.

 

p43 

 중앙은행의 독립성은 국민이 부여한 임무(예:물가안정)를 정치적 잣대에 휘둘리지 말고 수행하라는 정도의 의미이다.

 

p44

 세계에서 정부 부채가 가장 많은 일본의 경우 <그림1>에 따르면 1990회계년도의 일본 정부가 상환해야 할 국채 규모는 166조 엔이고 이자부담액은 10.8조 엔이었다.

https://www.mof.go.jp/english/policy/budget/budget/fy2023/02.pdf

<그림1. 위 링크 22페이지>

 

2010회계년도에는 각각 636조 엔과 7.9조 엔이었다. 그리고 2022회계년도에는 각각 1,043조 엔과 7.3조 엔으로 정부 부채는 급증했는데 이자 부담액은 오히려 줄어들었다. 1990년과 2022년 사시에 정부가 상환해야 할 국채 규모는 877조 엔이나 증가했는데 이자 부담액은 오히려 3.5조 엔이 줄어든 것이다. 국채 평균 조달 금리가 6.1%에서 0.8%로 하락했기 때문이다. (IMF <글로벌 부채 보고서Global Debt Monitor>에 따르면) 2022년 기준 일본의 중앙정부 부채가 214.27%로 전 세계에서 가장 높은 규모임에도 불구하고 견디는 이유 중 하나는, 일부 사람들이 생각하듯이 엔화가 준기축통화라서가 아니라 국채에 대한 이자 부담이 오히려 줄어들어 재정 부담이 줄었기 때문이다. 다른 한편, 이는 일본이 인플레이션과 엔저 속에서도 금리를 인상하지 못하는, 즉 통화정책의 정상화를 하지 못하는 이유이기도 하다.

 

 한국은 어떨까? <그림2>에서 보듯이, 2011~2021년의 10년간 국고채 발행 잔액은 340.1조 원에서 843.7조 원으로 약 2.5배 증가했다. 그런데 그에 대한 이자 부담액은 13.5조 원에서 15.1조 원으로 12%도 증가하지 않았다. 

일본처럼 초저금리는 아니지만 한국도 조달금리가 낮아진 것은 마찬가지이다. 세계적 인플레와 금리 인상에 따라 조달금리가 다시 3%대로 올라간 2022년의 경우 국고채에 대한 이자 부담액이 약 30조 원으로 2021년에 비해 약 2배로 증가했다. 이처럼 정부 재정의 지속 가능성은 정부 채무의 절대 규모보다 이자율에 의해 영향을 크게 받는다.

 물론 미국을 제외한 나머지 나라들은 외국자본의 갑작스러운 유출에 따른 충격도 고려해야만 한다. 국고채를 매각하고 철수할 때 환율 급등을 포함한 외환시장이 충격을 받을 수 있기 때문이다. 2023년 12월 기준 외국인은 219.5조 원 규모의 국고체를 보유하고 있다. '1달러=1,300원'을 기준으로 할 때 약 1,688억 달러 규모에 해당한다. 참고로 일본은 2022년 12월 말 기준 외국인이 약 165.3조 엔 규모의 일본 국채를 보유하고 있다. 이는 '1달러=140엔'을 기준으로 할 때 약 1조 1,800억 달러 규모에 해당한다.

 2023년 12월 기준 한국의 외환보유액은 약 4,201억 달러, 일본의 외환보유액은 1조 2,950억 달러 정도이니 한국이 상대적으로 더 여유가 있다고 할 수 있다. 일본이 엔화 하락을 막으려면 달러를 매각하여 엔화를 사들여야 한느데 외환보유액 사정으로 달러를 적극적으로 시장에 풀기 어렵다. 금리도 인상하기 어려운 상황에서 달러 투입도 어렵다 보니 엔화 가치를 방어하기 어려운 것이다.

 이처럼 정부 채무는 기본적으로 이자를 상환할 수 있으면 지속 가능하다. 이자 지급액은 세금 등 정부 수입에 달려 있고, 정부 수입은 조세율이 변하지 않을 경우 경제성장률에 크게 의존하기에 정부 채무의 지속 가능성을 따질 때 정부의 자금조달 금리(국채 발행 이자율)와 성장률을 비교하는 이유이다. 물론, 외국인의 갑작스러운 자금 유출을 대비해 외국인 보유 규모를 고려한 외환 방어벽이 필요하다. 이런 점에서 크루그먼이나 아베 등이 정부 채무의 원금을 상환하지 않아도 된다고 한 이유는 맞는 말이다. 이는 영란은행 설립 과정에서 보듯이 중앙은행의 설립 이유가 정부 재정 공급을 위한 것이기 때문이다.

---------

[Insight]

1. 국가채무는 원금의 상환능력은 중요하지 않다. 이자상환능력을 통해 국채를 지속적으로 운용할 수 있는가가 관건이다.

2. 국가채무가 자국통화로 이루어져 있다고 해도, 외국인이 투자한 금액은 외국인이 투자를 외수할 경우 언제든지 외환(보통 달러)으로 유출될 수 있으므로 국가채무 중 외국인 투자분에 해당하는 최소한의 외환보유고 방어벽이 필요하다.

3. 민간채무가 과도하여 소비위축등 경제적 패닉이 발생할 때는 국가가 재정확대를 통해 민간채무를 흡수하여 국가채무를 증가시키면서 민간경제 활성화가 필요하다. 

-----

 

p51

 민주주의가 작동하지 않으면 1원 1표 원리, 즉 돈의 힘이 지배하는 시장만 남고, 사회는 극단적 불평등을 향해 치닫고 결국 붕괴한다. 역설적으로 들리겠지만, 최소한 민주주의가 제대로 작동해야만 자본주의가 생명을 유지할 수 있는 것이다. 1930년대 대공황이나 2008년 글로벌 금융위기 등은 기본적으로 불평등 심화의 결과라는 것이 학계의 정설이다.

 

p55

 '돈의 흐름'을 의미하는 금융을 시장에만 맡겨놓으면 사회는 순식간에 야만화되고 그런 사회는 지속이 불가능하다. 불환화폐를 사용하기 시작한 이른바 화폐경제 시대의 경제 문제는 '돈의 배분' 문제로 귀착한다. 함게 생산한 생산물은 대부분 화폐로 표현되고, 그 생산물의 배분은 결국 돈의 배분이기 때문이다. 그런데 함께 생산한 사회적 생산의 화폐적 배분을 어떻게 시장에만 맡길 수 있다는 말인가.

 공공금융의 복원은 좌파적이거나 진보적 사회를 의미하지 않는다. 민주주의와 시장이라는 두 개의 축으로 출발했고, 양축이 균형을 맞추었기에 번영을 만들어냈다는 점에서 근대 사회의 본래 정신으로 돌아가자는 것이다. 공공영역에서 금융을 분리하여 시장(민간)금융 중심으로 바꾼 것이 (사회 전체를 금융 자본의 논리로 재구성한) 이른바 금융화였고, 그 결과는 필연적으로 공공영역의 축소로 이어졌다. 재정 지출 최소주의, 감세, 작은 정부, 그리고 그 연장선에서 불평등의 심화 및 가계 부채와 정부 채무의 급증 등이 그 산물들이다.

 

p59

 은행은 불환화폐를 도입 및 사용할 때부터 엄청난 특혜를 입었다. 게다가 가장 낮은 금리(비용)의 불환화폐를 이용한다. 그런데 그 불환화폐가 통용될 수 있도록 실질적 가치를 공동 보증한 일반 납세자 국민은, 특히 사회경제적 약자층은 중앙은행의 혜택을 전혀 보지 못하고 있다. "공공선과 모든 인민의 이익을 촉진시킨다"는 중앙은행의 설립 목적이 사문화되었기 때문이다. 정치와 민주주의가 실종된 결과이다.

 

p60

 '사방 백리 안에 굶어 죽는 사람이 없게 하라'는 가훈으로 유명하여 한국 부유층의 롤모델로 불리는 경주 최부잣집 이야기는 역설적으로 시스템이 무너진 상황에서 개인의 선의가 해결책이 될 수 없음을 보여준다. 국토가 황폐해지고 백성이 도탄에 빠진 양란 후 삼남(三南 : 충청,경사,전라도의 총칭)에 큰 흉년이 들었을 때인 1671년, 경주 최부자 최국선은 곳간을 헐어 모든 굶는 이들에게 죽을 끓여 먹이도록 하고, 헛벗은 이에게는 옷을 지어 입히도록 했다. 경주 부자 최국선은 한 걸음 더 나아가 아들에게 서궤 서랍에 있는 담보서약 문서를 모두 가지고 오게 한 후 "돈을 갚을 사람이면 이러한 담보가 없더라도 갚을 것이요, 못 갚을 사람이면 이러한 담보가 있어도 여전히 못 갚을 것이다. 이런 담보로 얼마나 많은 사람이 고통을 당하겠느냐. 땅이나 집문서들은 모두 주인에게 돌려주고 나머지는 모두 불태우라"고 했다. 오늘날 은행금융 자본이라면 죽음과 절망에 놓여 있는 없는 사람을 상대로 부를 엄청나게 증식할 기회로 삼았을 것이다.

 경주 최부자 집이 10여 대 300년 동안 만석군의 부를 현명하게 지켜내며 어려운 많은 이들에게 도움을 주었지만, 게다가 조선 말기 다산 정약용 등 많은 토지개혁 사상가들이 그렇게 노력을 기울였ㅈ만 조선은 폭동과 민란과 농민전쟁 등을 피할 수 없었고, 끝내 망국의 길을 가지 않았는가.

 

p71

 공공금융의 해체로 재벌 자본에 더해 '월가 자본의 아바타인 금융 자본'이 시장 권력을 더욱 공공화했다. 돈의 힘은 사람들을 욕망의 포로로 만들고, 민주주의가 고개를 들 때마다 무참히 짓밟았다. 돈의 힘이 통제되지 않는 한, 정치는 돈의 힘에 좌우되고, 민주주의의 자리는 금권 과두정이 차지할 수밖에 없기 때문이다. 공공금융은 민주주의 그 자체이기에 사회를 구성하는 민주주의와 시장 중 민주주의가 죽으면 시장만 남게 되고, 시장만 남은 사회는 죽어갈 수밖에 없다.

 

p73

 공공금융의 사망은 대한민국을 부동산 카르텔 공화국으로 변화시켰다. 재벌 자본의 건설회사와 금융 자본의 부동산 금융이 결합한 산물이었다. 공공선과 국민 이익의 촉진은 뒤로 밀려났다. 그 결과가 세습성이 강한 부동산자산 중심 경제 구조의 등장이었다. 2000년대 20년(2001~2021년)간 국내  GDP는 약 1,373조 원 증가한 반면 국내 부동산자산은 이보다 약 9배 많은 1경 1,845조 원 증가했다. 가계로 국한해도 마찬가지이다. 가계의 처분가능 소득이 706조 원 증가하는 동안 가계 부동산 자산은 약 10배 많은 6,969조 원 증가했다.

 이러한 변화를 스스로를 보수라 지칭하는 보수정권에서나 진짜(?) 보수정권인 민주당 정권에서나 별 차이가 없었다. 오히려 노무현 정부나 문재인 정부 시절 글로벌 유동성의 폭발과 맞물려 부동산자산 중심의 경제 구조는 더욱 고착화됐다. 참고로 국제결제은행BIS에 따르면 한국은 중국, 멕시코, 튀르키예, 이란 다음으로 외화 신용이 많은 나라이다. 경제 성장률은 2001~2007년간(김대중/노무현 정부 기간) 연평균 7.5%에서 2008~2016년간(이명박/박근혜 정부 기간) 연평균 5.3%, 그리고 다시 2017~2021년간(문재인 정부 기간) 연평균 3.6%로 하락하는 동안 부동산자산의 연평균 증가율은 각각 14.0%, 5.0%, 8.3%로 민주당 정권에서 부동산자산 증가율이 소득 증가율을 크게 앞질렀다. 가계 소득과 부동산자산을 비교해도 차이가 없다. 소득 증가율은 연평균 6.1% → 4.9% → 3.7%로 하락했지만 부동산자산 증가율은 연평균 14.4% → 4.5% → 8.7%로 소득 증가율을 2배 이상 앞질렀다.

 노무현 정권 때는 일본은행의 제로금리와 양적완화(2001.3~2006.3) 그리고 미국 연준의 1% 초저금리(2003.7~2004.6)가 맞물려 글로벌 유동성이 폭발하며 글러벌 주택시장에 붐이 있었고, 문재인 정권 때는 코로나 팬데믹에 대한 대응으로 주요국이 초금융완화로 천문학적인 돈을 쏟아내면서 부동산을 포함한 글로벌 자산시장에 붐이 일었던 기간이다.

 

p75

 글로벌 유동성의 폭발이 부동산 가격의 폭등을 모두 정당화하지는 못한다. 이는 국내 가계 신용의 영향도 있었음을 보여준다. 예를 들어, 한국의 가계 신용은 팬데믹 직전 2년간 연 평균 6.5% 증가한 반면, 팬데믹 기간 2년간은 8.3% 증가했다. 국내 신용증가율이 글로벌 신용증가율보다 높았다. 반면 노무현 정권 때는 상대적으로 글로벌 신용증가율(연 16.4%)보다 국내 신용증가율(연 10.4%)이 낮았다. 문재인 정권에서의 부동산 자산가치 급등은 국내 신용에 대한 통제 실패도 한 요인으로 작용했음을 보여주는 것이다.

 실제로 세계 주요국 모두가 가격 폭등을 경험하지는 않았다. 예를 들어, IMF가 발표하는 58개 국가의 전체 주택의 실질가치 변화율을 보면 2021년에 12개 국가는 변화율이 마이너스를 기록한 반면, 한국은 11.7%로 8번째로 높았다. 폭등을 겪었던 미국의 10.6%, 캐나다의 9.8% 등보다 높았을 뿐 아니라 독일, 싱가포르, 일본 등의 6%대 상승률이나 프랑스의 3%대보다 크게 높았다. 

 이는 (앞에서 일부 언급한) 부동산 투기에 적합한 사회경제적 구조를 갖추고 있기 때문이다. 이 구조를 혁파하지 못한 대가는 고스란히 무주택자나 정부를 믿고 부동산 투기에 뛰어들지 않은 사람들에게로 돌아갔다. 예를 들어, 문재인 대통령은 2020년 신년사에서 "부동산 시장의 안정, 실수요자 보호, 투기 억제에 대한 정부의 의지는 확고합니다. 부동산 투기와의 전쟁에서 결코 지지 않을 것입니다"라며 부동산 투기에 뛰어들면 손해를 볼 것처럼 계속 강조했지만, 대통령 말을 믿고 무리하게 빚을 내 집을 사지 않은 사람들에게 돌아온 것은 이른바 '벼락 거지'였다.

 코로나 팬데믹 상황인 2020년과 2021년 2년간 그 피해는 상상 이상이었다. 2년간 시중 통화량은 700조 780억 원이나 풀렸다. 그리고 정부 채무도 2478조 5,000억 원이 증가할 정도로 정부가 푼 돈 역시 사상 최대였다. 그런데 시중에 풀린 돈 중 실물경제로 들어간 돈은 시중 통화량의 22%에 불과한 155조 7,000억 원밖에 되지 않았다. 나머지는 자산시장으로 흘러 들어갔고 그 결과 국내 부동산자산은 2년간 GDP의 약 12배에 해당하는 1,845조 9,000억 원 증가했다. 가계의 경우는 더 끔찍했다. 소득은 80조 원 증가한 반면 부동산자산은 소득의 20배가 넘는 1,658조 원 이상이 증가했다. 생존 위기로 내몰리는 팬데믹 상황에서도 부동산 투기를 외면하고 열심히 땀 흘리며 살던 무주택자들에게는 날벼락이 되어 돌아온 것이다.

 부동산 카르텔 공화국을 해체하지 않은 산물이다. 외환위기 이후 대한민국에서 돈이 가장 집중되는 곳은 부동산이 되었고, 따라서 대한민국의 가장 강한 힘들은 부동산(돈)을 매개로 자연스럽게 네트워크가 형성되었다. 부동산자산 중심의 경제 구조는 고인물 사회를 만든다.

 

p77

 부동산자산 중심의 경제 구조는 대한민국을 전 세계 주요국 중 최악의 자산 불평등 국가로 만들었다. 자산 불평등이 가장 심한 선진국 중 하나인 미국의 경우 팬데믹 기간에 주식 자산가치 증가가 부동산 자산가치 증가보다 약 3배 컸던 반면, 한국은 정반대였다. 부동산자산은 주식자산보다 불로소득 성격이 강하다. 한국에서 부동산은 모든 것을 빨아들이는 블랙홀이었고, 그 결과 정부와 기업과 가계 모두가 부동산의 인질이 되었다.

 1995~2022년간 기업이 만들어낸 부가가치에 해당하는 기업 영업잉여(=영업이익+감가상각비-금융비용)는 208조 원 증가한 반면 기업의 부동산자산 가치는 15배가 넘는 3,020조 원이나 증가했다. 가계 부채가 세계 최고 수준이 되었어도 계속 증가하는 이유나 건설회사의 부실을 정부가 나서서 막아주는 이유가 그것이다. 정부가 부동산 시장 부양을 중단하지 않을 것이란 믿음이 '부동산 불패'라는 잘못된 인식을 심어주었다. 건설경기에 대한 높은 의존과 부동산 자산가치 하락이 가져올 가계 부채 충격 등으로 인해 부동산 자산가치를 떠받쳐야만 사회와 경제가 생존할 수 있는 지경이 된 것이다.

 문제는 저금리 시절에는 높은 가계 부채의 이자 부담이 은폐됐지만, 고금리의 장기화는 모르핀으로 연명한 부채 모래성의 실체를 드러낸다는 점이다. 현재 부동산 카르텔 공화국이 진퇴양난 상황에 놓여 있듯이 내부적으로 개혁하지 못한 부동산 카르텔 공화국의 운명은 자명하다. 경제성장(소득 증가)과 인구 증가등이 떠받치는 부동산 가치 증가는 정당성을 확보하지만 유동성이나 가계 부채 증가 등으로 밀어 올린 부동산 가치 증가는 가계의 소득(과 일자리) 증가 등이 뒷받침되지 않는 한 기본적으로 지속 가능하지 않다. 가계 부채 증가가 가계의 소득과 소비를 억압하여 성장의 둔화 및 정체, 가계 소득(일자리)의 정체로 이어지면서 시한폭탄 같은 가계 부채의 위험성이 현실화되고 있기 때문이다.

 

p85

 김대중 정부와 노무현 정부에서 예산 부문을 재정경제부에서 분리했지만 (모피아 사고에 젖어 있는) 경제관료가 장악하는 한 공공금융에 대한 사고를 처음부터 기대할 수 없었다. 노무현 대통령이 '균형재정' 신화에 갇혀 있는 '(경제)관료에 포획'되어 예산을 장악하지 못한 후회를 퇴임 후 토로한 배경이다.("이거 하나는 내가 좀 잘못했어요. 내가 잘못했던 거는 오히려 예산을 가져오면 색연필을 들고 '사회정책 지출 끌어올려' 하고 위로 쫙 그어버리고, '여기에서 숫자 맞춰서 갖고 와' 이 정도로 나갔어야 하는데, (...) 지금 생각해보면 그래요. 그래 무식하게 했어야 되는데 바보같이 해서..." 노무현 <진보의 미래> 중에서)

 그 결과가 오늘의 공룡 기재부이고, '사실상 기재부의 나라'가 된 것이다.

 

 오늘날 기재부는 사실상 정부 전체를 장악하고 있다고 말해도 결코 과언이 아니다.

 중장기 국가발전전력 수립이 바로 정부 주도 개발을 추진한 군부 권력의 경제기획원 권한이고, 예산 편성권은 김대중·노무현 정권의 기획예산처 권한이다. 또한 내국세제 권한으로 부동산 관련 세제를 매개로 국토교통부의 부동산 정책에 개입하고, 화폐 업무로 한국은행을 관리하고, 외환 업무 포함 국제금융 사무와 (사실상 국무조정실장의 코치를 받는 국무총리의 통제를 받고 기재부 차관이 당연직 금융위원회 의원인) 금융위를 사실상 관리한다. 한국은행이 모피아의 '남대문 출장소'로, 금융위-금감원이 '여의도 출장소'로 불리는 배경이다. 그리고 산하에 국세청, 관세청, 조달청, 통계청 등 4개나 되는 청을 갖고 있는 부서이다.

 막대한 권한으로 경제 관련 부서의 장도 쉽게 차지한다.

 

 심지어 예산 배분 권한으로 정부 조직의 숱한 기관장 자리까지 차지하곤 한다.

 

 기재부의 권한은 일반 국민의 상상을 초월한다. 예산 심의를 하는 국회의원들도 지역구 예산 배정을 결정하는 기재부 권한에서 자유롭지 못하다. 대통령실 경제비서관이나 정책실도 기재부 사정권에 놓여 있다. 문재인 정권에서 '어공'인 홍장표 경제수석이 2018년 6월 사실상 경질된 후 윤종원/이호승/안일환 등 경제관료(늘공)가 경제수석을 장악했듯이 경제관료 조직은 사실상 선출 권력조차 좌지우지한다.

 

p88

 모피아는 퇴직 후에도 금융계와 정치계 등을 넘나든다. 특정 정당 및 정권과도 관계없다. 김진표는 그 상징이다. 그는 김대중 정권에서 재정경제부 차관, 청와대 정책기획수석, 국무조정실장을 거쳐 노무현 정권의 인수위 부위원장, 초대 재정경제부 장관, 교육부 장관을 지냈다. 이후 국회 진출을 위해 열린우리당 정책위 위장을 거쳐 18대부터 국회에 진출한 그는 문재인 정권에서 국정기획자문위원히 위원장과 더불어민주당 부동산특별위원회 위원장을 거치고 21대 국회 후반기 의장까지 차지하고 있다. 노무현과 문재인 정권에서 부동산정책이 성공할 수 없었던 이유를 극명하게 보여준다. 현재 윤석열 정권의 국무총리인 한덕수는 김대중 정권의 경제수석과 노무현 정부의 재정경제부 장관을 지냈다. 초대 기재부 장관을 역임한 추경호는 김대중 정권의 대통령직 인수위원회 인수위원을 한 후 김대중 정권 초기부터 대통령비서실 경제수석 비서관실과 정책기획수석 비서관실에서 근무했다.

 이처럼 "정권은 유한하지만, 모피아는 영원하다"

 

 물리력으로 통치하던 군부독재 시대에는 시장(자본)이 전근대적 방식인 물리력으로 통제되었다. 그런데 군부독재의 종식과 더불어 시장(자본)에 대한 통제 자체가 해체되었다. 물리력에 기초한 통제 방식을 (공공금융 성격이 더 강화되는) 사회적(민주적) 통제 방식으로 바꾸어야만 했다. 김영삼 정권의 역사적 과오였다. 김영삼 대통령은 본인 입으로 시인했듯이 경제에 문외한이었을 뿐 아니라 금융에는 문맹 수준이었다. 오히려 노태우 정권에서도 최대한 늦추려 했던 금융 자유화와 자본시장 개방을 적극 추진하면서 재벌 자본의 운신의 폭을 넓혀주고, 자청해서 대한민국을 월가 자본의 먹잇감으로 바쳤다. 

 외환위기 이후 김대중 대통령은 전통 산업들에 대한 이해는 어느 정도 있었으나, 역시 금융에는 문외한이었다. 대한민국에서 첫 번째 가계 부채 사태인 '카드 사태'가 김대중 정권의 작품인 배경이다.

 

 김대중 정부의 경제팀이 선택한 (신용)카드는 '내수 부양책'으로 포장됐지만, 그 내용은 가계가 빚을 내서 소비하고 집을 사게 하는 '부채주도성장' 방안이었다. 

 당시 길거리에서 카드 모집인이 상환능력이 거의 없는 대학생들을 상대로 카드를 발급하는 모습도 볼 수 있을 지경이었다.

 당시(2000년) 김대중 정권의 재정경제부 장관이었던 '이헌재표 내수부양책'이었다.

 내수부양책으로 카드활성화 정책과 더불어 부동산 규제 완화가 2000년에도 확장되었고, 심지어 1가구 다통장 보유 기능과 각종 세제 혜택 등이 추가되었다. 그 결과는 380만 명의 신용불량자 양산과 부동산 가격의 급등이었다. 특히 2002년 한 해 동안 아파트값은 서울 45%, 신도시 25.1%, 수도권 23% 등 전국적으로도 22.5%의 상승률을 기록했다. 1999년 말 GDP 대비 45.1%(267조 원)였던 가계 부채는 2002년 말에는 64%(502조 원)까지 급증했다. 반면 같은 기간 정부 채무는 GDP 대비 9.3%에서 9.7%로 거의 증가하지 않았다. 공공금융의 역할 없이 가계 희생으로 재벌 건설 자본과 금융 자본의 배를 불려려준 것이다.

 2003년 카드 사태는 노무현 정권에 커다란 부담이 되었다. 2003년 1분기 성장률은 직전에 비해 반토막이 나고 3분기까지 자유낙하 하듯이 하락했다. 노무현 정권을 탄생시키는 데 1등 공신 역할을 했던 유명 인사(?)는 당시 카드 사태는 김대중 정부에서 반든 것인데 노무현 정부가 뒤집어썼다며 억울함(?)을 토로했다. 그런데 카드 사태는 노무현 정권에게는 양날의 검이었다. 2000년 9.1%에서 2001년 4.9%로 급갑했던 성장률은 가계 부채 기반의 부양책 덕분에 (대통령 선거가 있었던) 2002년 7.7%로 반등하며 노무현 후보 당선에 도움이 된 측면이 있었고, 부양책 후유증(카드 사태)으로 임기 첫해 3.1%로 성장률이 급감했기 때문이다.

 카드 활성화 대책이나 부동산/건설 경기 부양 모두 금융 및 재벌 자본의 이익과 직결되는 것이었다. 이처럼 김대중 정부 때부터 가계 부채는 부동산 카르텔의 숙주 역할을 하기 시작했다.

 

p93

 모피아의 뿌리에 해당하는 이헌재와 강만수 등이 김대중-노무현-이명박 정부에서 주요 정책을 좌우했듯이 권력의 성격과 모피아는 관계없다. 윤석열 정부의 초대 기재부장관인 추경호가 김대중 정부 출범 인수위원회 인수위원이자 김대중 대통령 경제비서관을 지냈고, 이명박 정부의 윤증현은 노무현 정부의 금융감독위원장을 지낸 후 김앤장에 있다가 이명박 정부에서 기재부 장관을 역임했고, 이명박 정부와 박근혜 정부의 핵심 경제전략을 만들었던 김동연과 홍남기가 문재인 정부의 전후반 기재부 장관을 지냈고, 한덕수가 김대중 정부에서 경제수석, 노무현 정부에서 재정부 장관을 지내고 김앤장에 머물다가 윤석열 정권에서 다시 돌아왔다. 민주당 정권이나 국민의힘 정권이나 핵심 경제정책에서 큰 차이를 보이지 않는 이유이다.

 모피아는 심지어 공적 자원의 사유화에도 거리낌이 없다. 다음은 2022년 8월15일자 <MBC 뉴스데스크>의 보도 내용이다.

새 정부 들어서 공기업들에 대한 압박이 거세지고 있습니다.
기획 재정부가 나서서 공공 기관들의 경영이 방만하니까, 
가지고 있는 사옥 건물이나 땅을 팔라고 압박하고 있는데요.
그런데 이런 일이 처음이 아닙니다.

박근혜 정부 때도 기획 재정부가 공공 기관들에게 자산을 팔라고 했고, 
실제로 한국석유공사가 사옥을 팔았습니다.
그런데 이 건물을 누가 샀는지, 이 거래로 누가 이익을 얻었는지, 
저희가 취재를 해 봤더니, 기획 재정부 관료 출신들이 만든 
부동산 투자 회사였습니다.

 

 노태우 정부에서 재무부 장관을 지냈던 이규성은 김대중 정부의 초대 재정경제부 장관으로 등용된다. 공직에서 물러난 후 2001년 일종의 사모펀드인 코람코(KORAMCO, 한국부동산자산관리회사) 설립을 주도한다. 코람코의 회장을 장기간 역임하는 중에도 이규성은 2004년 노무현 정부의 국민경제자문회의 부의장(의장은 대통령)도 역임한다. 2010년에는 코람코자산운용사도 설립한다. '작은 정부를 내세운 박근혜 정부 들어 공공기관 민영화가 추진되며 박근혜 정부의 기재부는 이명박 정부의 자원외교 실패로 부채가 급증한 석유공사 매각을 추진한다. 석유공사 매각은 자본의 하수인 역할을 넘어 스스로 공적 자원을 사유화하는 모피아의 탐욕을 보여준다.

 

 석유공사는 본사 건물을 2,000억 원에 매각하고, 매각 대금을 부채 상환에 사용하지도 않고 사업비와 정기예금 등으로 운용했다. 건물 매각 후 임대하며 지불한 임대료율은 4.87%였다. 그런데 석유공사가 자금이 필요해 조달할 때의 조달비용, 이른바 석유공사 채권 이자율은 2.67%에 불과했다.

 

p100

 불환화폐(신용화폐)의 가치는 정부가 보증하는 것이다. 정부 보증의 힘은 정부 경제력에서 나오는 것이고, 정부 경제력은 세금 수입에서 나온다는 점에서 국민 전체가 불환화폐의 가치를 함께 보증한 것이다. 즉 오늘날 사용하는 법정화폐는 그 사회의 국민 전체가 함께 보증한 신용이다. 출범 때부터 영란은행을 공공선과 인민 이익의 촉진을 위한 정부 은행으로 성격을 못 박은 이유가 여기에 있다. 정부의 재정 자원은 물론이고 모든 국민이 은행시스템의 기본 혜택을 누릴 권리가 있는 이유이다. 소득과 금융에 대한 국민의 기본권이 존재하는 것이다.

 이런 점에서 공공금융은 생산과 금융에서 사회몫을 의미한다. 사실 근대 화폐경제에서 생산과 금융은 분리 자체가 불가능하다. 공공금융을 '재정'으로 번역한 것은 생산측면으로 좁혀 잘못 부르는 것이다. 금융을 민간금융만으로 축소한 금융 자본의 이해를 반영한 개념이다.

 

p104

 정부 채무 겁박론은 국가 채무의 실상을 왜곡한다.

https://www.seoul.co.kr/news/economy/2023/04/04/20230404500151

 

나랏빚 첫 1000조 돌파, 文정부 5년 새 408조 급증… 국민 1인당 빚도 2000만원 돌파

정부, 2022 회계연도 국가결산보고서 의결 관리재정수지 적자 규모 117조 ‘사상 최대’ 국가채무 1068조, 국가부채 2326조 ‘최대’ 고금리 여파에 국가 자산 가치 30조원 감소, 지난해 나랏빚이 사

www.seoul.co.kr

 

 

IMF 기준을 따르는 기재부의 'e-나라지표'에 소개되어 있듯이, 정부 채무는 중앙정부와 지방정부의 순채무 합으로 구성된다. 기재부는 정부 채무를 적자성 채무와 금융성 채무로 나누고 있다. 2022년 말 기준 정부 채무액 약 1,069조 원은 적자성 채무 678조 원과 금융성 채무 391조 원으로 구성되어 있다.

https://www.index.go.kr/unity/potal/main/EachDtlPageDetail.do?idx_cd=1106

 

지표서비스 | e-나라지표

국가채무 : 정부가 직접적인 상환의무를 부담하는 확정채무(IMF기준)로서, 국채, 차입금, 국고채무부담행위, 지방정부순채무로 구분 (국가채무 = 국채 + 차입금 + 국고채무부담행위 + 지방정부 채

www.index.go.kr

 

이 두 채무의 성격을 기재부가 해당 사이트에 소개하고 있는 내용 그대로 소개해보자. '적자성 채무'는 "조세 등 국민 부담으로 상환해야 하는 채무"인 반면, '금융성 채무'는 "정부가 상환할 수 있는 자산을 가진 채무"로 국민 부담이 없는 채무이다. 예를 들어, 외평채(외국환평형기금채권)나 국민주택채권 발행에 의한 금융성 채무는 정부가 확보한 외환 자산 매각이나 융자금 회수 등으로 상환할 수 있기 때문이다.

 그래서 2022년 말 기준 국민이 부담할 '진짜' 채무액은 1,069조 원이 아니라 678조 원에 불과한 것이다. 대통령과 언론, 여당 등이 미래 세대를 겁박한 1,000조 원은 391조 원이나 과장한 수치인 것이다.

 

p115

 이처럼 여러 문제를 갖고 있는 재정 운용 기준은 한 나라의 정부가 도입하는 것은 (국민이 이러한 문제점을 파악하지 못하는 점을 악용하여) 막대한 공공자금에 대한 통제권을 독점하겠다는 것이다. 법제화 조치는 바로 대통령 등 선출 권력조차 건드리지 못하게 하겠다는 의도가 담긴 것이다. 수사권과 기소권을 독점하여 막강한 권력을 행세하는 '제2의 검찰'이 되고 싶은 것이다. 막강한 공적 권한의 사유화는 지금보다 더한 부정부패로 이어질 수밖에 없고, 그 피해는 고스란히 경제적 약자층에 집중된다.

 

p118

  재정관리를 관리수지로 변경한다고 하여 정부 채무 증가 속도가 멈추거나 줄어든다는 보장이 없다는 것이다. <표6>에서 보듯이 2002년보듯이 2000년 이후 코로나 팬데믹이 발발했던 2020년 이전까지 관리수지의 적자 규모가 GDP 대비 -3%를 초과한 경우는 금융위기 때밖에 없었다. 즉 관리수지가 -3% 이내에서 관리가 되었어도 정부 채무가 지속해서 증가해왔다는 것이다. 그리고 코로나 팬데믹 2년간의 대규모 재정 적자는 대부분 주요국이 겪었던 것으로 불가피했다. 그런 점에서 윤석열 정부가 관리수지를 기준으로 재정을 관리한다고 해서 정부 채무 증가가 멈춘다는 보장도 없고, GDP 대비 정부 채무 60% 이내 관리도 어렵다. 무엇보다 관리수지 적자를 -3% 이내로 해서 정부 채무를 60% 이내에서 관리하겠다는 '재정준칙 법제화'를 추진하는 윤석열 정권 18개월 동안의 관리수지는 131.3조 원으로 이는 GDP 대비 3.9%의 규모이다. 그 결과 문재인 정권이 사실상 종료됐던 2022년 4월 중앙정부 채무 비중(GDP 대비 %) 47.5%도 2023년 10월 50.1%로 증가했다.

 문제는 자신들이 공언한 관리수지 목표를 지키려다 보니 지출을 무리하게 줄이고 있다는 점이다. 자신들이 써야 할 돈이라며 국회로부터 승인까지 얻어낸 예산조차 쓰지 못하고 있다. 예를 들어, 2023년 10개월 동안 지난해보다 77.8조 원 규모의 지출을 축소했고, 이는 GDP의 3.5%가 넘는 규모이다. 최근 1년간(2022년 4분기~2023년 3분기) 연간 성장률이 1.1%로 추락한 배경이다. 모피아의 욕망(재정준칙 법제화)이 재정수지 관리도 망치고, 성장률은 후퇴시키고, 다시 재정수지와 정부 채무를 악화시키는 악순환을 만들어내고 있다.

 

p120

 이제 재정건전성 논리가 기초하는 '재정 지출 최소주의'를 살펴보자. 결론부터 말하면 재정 지출 최소주의는 '과학'이 아닌 '이데올로기'이다. 앞에서 인간 사회의 구성과 운영 원리를 말했다. 사회가 지속하려면 민주주의와 시장, 즉 정치와 경제의 상호견제와 균형이 필요하지만, 자본의 탐욕은 끊임없이 정치와 민주주의를 약화하려 하고, 심지어 제거하고 싶어 한다. 역으로 자본의 탐욕을 원천적으로 제거하고 싶어 하는 욕망도 작동한다. (셜실 사회주의 체제에서 경험했듯이) 시장을 통제하고, 정부가 직접 자원을 배분하는 '정치의 과잉'이 그것이다. 정치의 과잉은 시장이 만들어내는 경제 활력을 약화하고 심지어 (인민독재로 위장한) "또다른 독재'로 이어지곤 한다. 자본 탐욕은 극단적인 불평등으로 이어지고, 필연적으로 경제위기를 낳는다. 사회 붕괴와 경제위기가 동전의 앞뒷면인 이유이다.

 

p122

 앞에서 보았듯이 재정준칙이 설정한 재정 적자 관리로는 한국의 정부 채무 증가를 막을 수 없다. 재정준칙을 동원해도 정부 채무 증가를 막을 수 없다면 두 가지 선택밖에 없다. 하나는 경제성장률을 현재보다 높게 만들거나, 아니면 정부 수입을 늘리는 길이다. 그리고 정부 수입을 늘리려면 증세가 불가피하다. 윤석열 정부의 재정 지출 최소주의가 재정 파탄을 가져온 이유도 증세는커녕 감세를 추진했기 때문이다. 게다가 무리한 재정 지출 축소로 국가의 미래 성장 동력을 만들어내는 연구개발R&D 예산까지 줄이면서 성장률 둔화와 재정 파탄의 악순환을 만들고 있다. 이런 점에서 윤석열 정부가 재정건전성을 핑계로 재정준칙의 법제화를 추진하는 것은 기만적이다. 재정건전성에는 애당초 관심이 없는 것이다.

 그렇다면 모피아가 재정준칙을 도입하려는 목적은 무엇인가? 모피아가 대변하는 금융 자본의 이해를 생각하면 의도가 선명하게 드러난다. 모피아는 미래 세대에게 부담을 주는 정부 채무 증가를 막겠다는 것을 명분으로 포장해 재정건전성 논리를, 정부의 재정 운용 및 서비스 등에 대한 국민의 불만 정서를 이용하여 재정 지출 최소화 논리를, 그리고 재정 지출을 줄일 것이기에 감세 논리를 내세우고 있다. 이에 대해 우리가 알아야 할 것은 첫째, 재정 지출 최소화는 모든 부분에 균등하게 영향을 미치지 않는다는 것이다. 공무원 보수 등 경직성 비용은 줄이기 어렵다. 그리고 일반적으로 힘이 있는(?) 부서보다 사회경제적 약자층 지원과 관련된 부서의 예산이 일차적인 조정 대상이 된다. 둘째, 공공자금의 지원이 축소되면 그에 비례해 민간금융에 대한 의존이 증가할 수밖에 없다. 국민을 (높은 이자 놀이를 하는) 금융 자본의 먹잇감으로 던지는 것이다. 셋째, 감세는 고소득층일수록 혜택이 크고, 특히 금융 고소득층에게 가장 많은 혜택이 돌아간다. 게다가 재정 지출 최소화에 따른 재정 적자를 정부 차입(국채 발행)으로 해결하고, 그로 인해 정부 채무를 증가시킨다. 역설적으로 재정 건전성이 재정 악화를 낳는 것이다.

 

 

p125

 2021년 최저임금이 시간당 8.720원이었다. 이를 연소득으로 환산하면 2,187만 원이다. 그런데 2021년 소득활동자 중 상위 60% 선이 최저임금 수준의 연소득보다 낮은 2,180만 원이었다. 하위 41%의 규모는 약 1,040만 명에 해당한다. 이들의 평균 소득은 980만 원에 불과했다. 약 2만 5천명에 해당하는 상위 0.1%의 평균 소득은 18.5억 원이니 하위 41%의 평균 소득에 비해 188.8배나 되는 규모이다. 상위 0.1%의 총소득 46.9조 원은 29%에 속하는 745만 4천명의 총소득 46.7조 원보다 많은 규모이다. 약 2만 5천명의 소득이 745만 4천명의 소득보다 많은 사회인 것이다.

 자산 불평등은 더 극심하다. 지난 거의 한 세대(1995~2022년) 간의 대한민국 전체 소득(GDP)은 437조 원에서 2,205조 원으로 1,768조 원이 증가했는데 부동산자산은 2,205조 원에서 1경 2,506조 원으로 1경 301조 원이나 증가했다. 많은 사람이 새로운 가치를 창출하는 경제활동보다 부동산 재테크에 관심을 갖는 이유이다. 그 결과 부동산자산의 핵심인 토지 소유의 불평등은 정말 끔찍하다. (약 2,371만 세대로 구성된 대한민국의) 2022년 개인의 토지 소유를 보면, 전체의 38%가 넘는 901만 세대는 땅을 한 조각도 갖고 있지 못하는데 약 1.2%에 해당하는 29만 세대는 약 1,258조 원 가치의 토지를 소유하고 있다. 이들의 토지소유액은 땅이 있는 나머지 62%에서 상위 10%를 제외한 나머지 약 52%인 1,220만 세대의 토지 소유액(1,263조 원)과 비슷한 규모이다. 앞에서도 언급했듯이, 지니계수가 0.8이 넘으니 토지 소유가 집중되었던 조선왕조 말기보다 그 정도가 더 심한 것이다.

 이런 점에서 대한민국의 사회는 사실상 해체되었다. 사회란 무엇인가? 사회는 우리가 함께 살아가는 '집'이다. 먹을 것을 나눠 먹고, 비바람을 함께 피하고, 아프면 서로 돌봐주고, 그리고 혼자라는 외로움을 갖지 않게 해주는, 더불어 사는 공간이기 때문이다. 그런데 우리 사회는, 찬바람이 부는 집 밖 허허벌판에 버려진 사람이 있고, 홀로 고립되어 죽어가는 이른바 고독사가 청년층에까지 확산하고 있고, 집 안에서조차 소수만이 아랫목을 차지하는 그런 '가짜 집'이다. 모두가 참여해서 사회적 생산액(GDP)을 만들었는데 생존에 필요한 최소한의 소득이 보장되지 않는다면, 그 집은 함게 사는 집이 아니다. 그리고 아파도 돌봄을 받지 못한다면 그것 또한 함께 사는 집이 아니다. 사회 속에 살면서 혼자라는 느낌을 준다면 사회라 할 수 없지 않은가. 대한민국은 사회가 실종된 나라이고, 사회가 붕괴한 나라이다.

 

p129

  최소 소득은 시혜가 아니고 누구나 법적으로 보장받을 권리이고, 이는 (사회 전체 생산액의 배분 방식의 하나인) 세금으로 해결해야만 하고, 특히 출발선의 차이를 만드는 유산에 대해서는 최대한 세금으로 환수해야만 한다는 생각은, 자본주의가 하나의 사회 체제로 출발할 때부터 정상적인 사고를 하는 사람들에게는 지적 상식이었다.

 그런데 대한민국은 이런 상식조차 작동하지 않는 사회이다. 이렇게 불평등이 극심한 상황에서는 상속세 완화나 폐지를, 그것도 저출산 대책으로 거론하고 있다. 경제학에서 저출산은 낮은 결혼율에서 찾고, (경제이론과 한국은행의 실증 분석에 따르면) 한국의 낮은 결혼율은 임금 불평등과 주거비, 그리고 자녀 교육비 등의 순서로 영향을 받는 것으로 확인된다. 정규직과 비정규직 사이의 결혼율 차이는 그동안 여러 연구에서 확인되었다.

 

 

 이런 현실에서 대다수 국민의 사회소득을 늘리는 것은 매우 중요하다. 실제로 증세와 (전통적인 취약계층 중심의) 소득 이전 정책은 많은 중산층이 거부감을 갖는다. 소득이 극소수에게 집중되어 있다 보니 (기계적으로 구분된) 중산층조차 많은 사람이 자신을 중산층이라 여기지 않기 때문이다. 실제로 가장 편하게 중산층을 설정하는 하위 30%에서 상위 30% 사이의 소득 규모를 보면 (2021년 국세청 소득활동자 자료를 기준) 세전 평균 소득은 1,500만 원에서 4,192만 원 사이의 소득계층이다. 개인 소득이라도 중산층이라기에는 너무 적은 소득 수준이다. 자신도 지원받아야 할 소득계층에게 더 어려운 극빈층 지원을 위해 세금을 더 납부하라 하면 거부할 가능성이 크기 때문이다. 

 가장 좋은 방식은 사회소득을 모두에게 지급하는 방식이다. 예를 들어 모든 소득활동자에게 사회소득 100만 원을 지급하기 위해 필요한 추가 재원은 약 25.4조 원이다. 이를 현재의 소득세율을 기초로 25.4조 원을 배분할 때 추가 세금 부담은 상위 16%에 국한된다. 2021년 모든 소득활동자 기준 세전 소득이 18.5억 원(세후 소득 11.94억 원)인 상위 0.1%는 추가로 약 2억 원의 세금을 더 부담한다. 그리고 상위 16%선에 있는 소득활동자의 경우 2021년 세후 소득이 6,052만 원인데, 추가로 2만 원만 더 부담하면 된다. 이 정도의 추가 세금으 객관적으로 볼 때 큰 부담이 되지 않는다.

 반면, 하위 50%는 최소한 91만 원에서 100만 원을 지급받을 수 있다. 앞에서 하위 41%까지는 연소득이 최저임금 수준보다 작다고 말했다. 2023년 기준으로 최저임금을 1만 원으로 인상하기 위해서는 시간당 380원을 인상해야 하고, 1년간 95만 1,000원이 더 필요하다. 그런데 사회소득 100만 원을 지급하면 최저임금 대상자의 시간당 1만 원 소득은 쉽게 달성된다.

 여기에 (2022년 기준 약 98만 2,500개의) 법인을 대상으로 소득활동자 모두에게 100만 원을 지급할 25.4조 원을 배분하면, 세후수입이 3조 1,367억 원인 0.1%의 법인은 추가로 154.5억 원을 부담하고, 세후 수입이 543억 원인 10% 선의 법인은 추가로 2억 3,541만 원을 부담한다. 세후 수입이 34억 원인 상위 20% 선에 있는 법인이 추가로 부담할 세금은 808만 원, 세후 수입이 4.7억 원인 50% 선의 법인은 추가로 171만 원만 부담하면 된다. 모두 감당할 수 있는 수준이다.

 이것으로 모든 소득활동자에게 사회소득 100만 원을 추가로 지급할 수 있다. 개인소득보다 법인소득, 그리고 소득보다 토지 등 자산 집중이 더 심한 상황이기에 자산에 대한 사회소득 재원 확보는 소득보다 저항이 더욱 적고, 추가 부담을 해야 하는 계층의 경제적 부담도 적다.

 이렇게 사회 생산이나 사회 자산에 대한 사회몫에 해당하는 사회소득을 사회 구성원에게  배분하게 되면 국민의 80% 이상이 현재보다 최소 수백만 원 이상의 추가 소득을 확보할 수 있다. 전통적인 재분배와의 차이라면 사회소득세를 거두어서 바로 현금 혹은 (일부는) 지역화폐로 배분한다는 점이다. 관료가 배분을 (결정) 하는 것이 아니라 바로 돌려주는 방식이다. 저소득층일수록 배분받는 사회소득이 크고 초고소득층에게 세금 부담이 집중되기에 소득재분배 효과가 클 뿐 아니라 (대다수가 혜택을 받기에) 조세 저항도 크지 않고, 무엇보다 정권이 바뀌더라도 이전으로 돌려 놓기가 쉽지 않다. 정기적으로 들어오던 수입이 줄어들게 된 국민 80% 이상의 저항이 만만치 않을 것이기 때문이다.

 

p145

 싱가포르는 경상수지 흑자와 더불어 유입된 외국자본을 외환보유액Official Foreign Reserves, OFR으로 축적하여 이를 싱가포르통화청MAS, 싱가포르 국부펀드를 운용하는 싱가포르투자청Government of Singapore Investment Corportation, GIC, 싱가포르 국책투자 사업을 수행하는 테마색Temasek Holdings이 활용해 재정에도 지원하고 있다. 사실, 한국도 외환위기 이후 경상수지 흑자액이 1조 달러에 달하는데 현재 외환보유액은 4,201억 달러(2023년 12월 기준)에 불과하다는 점에서 적극적으로 외환보유액 축적을 하지 않은 것이다. 일부에서 과도한 외환보유액 축적은 (외화보유 확충에 따라 풀리는 국내 여신을 흡수하기 위한 통화안정증권 발행 등에 따른 제반 비용인) 불태환 개입비용 부담을 증가시킨다고 지적하지만, 싱가포르의 경우 축적한 외환으로 더 높은 투자 수익을 만들고 있고, 또한 높은 신용등급으로 기업들은 해외자금 조달 비용을 낮출 수 있다. 무엇보다 (외환위기 때처럼) 외국인 자금의 갑작스러운 유출 상황에서 금융 및 외환시장의 방어벽 역할을 한다.

 2023년 12월 기준 한국의 국고채에 대한 외국인 보유액은 약 219.5조 원(약 1,688억 달러, 1달러 = 1,300원 기준)에 달한다. 외국인 보유 국고채가 모두 일시에 처분될 가능성은 매우 낮지만, 주식시장 유입액(약 5,085억 달러, 2023년 12월 8일 기준)이나 단기 외화차입액(1,416억 달러, 2023년 3분기 기준), 3개월 수입액(2,438억 달러, 2022년 수입액 기준) 등을 고려하면 한국의 외환보유액이 결코 충분하다고 말할 수 있는 전문가는 없다. IMF가 제시하는 적정외환보유액 기준에 미달하는 배경이다. 국제금융시장이 불안정해질 때마다 원화가 가장 취약한 통화로 전락하는 이유이다. 해외자금 조달 비용이 올라가는 이유도 국제금융시장 환경에 취약할 수밖에 없는 외환 불안정석에 있다.

 

 

 예를 들어, (인도 중앙은행 총재 시절) 라구람 라진이 기축통화국 중앙은행이 세계 나머지 국가들의 입장을 고려하지 않을 때 신흥국 경제는 산업경쟁력에 필요한, (과도한 통화가치 절상 방지 등) 자국의 화폐가치 안정을 위해 외환시장에 개입하는 '대외적 양적완화(Quantitative External Easing. QEE)'를 선택할 수밖에 없다고 주장한 배경이다. (자신이 주장을 정당화하기 위해 버냉키 화법을 사용해) 라잔 역시 신흥국의 외환시장 개입은 신흥국의 경제성장에 기여할 것이고, 신흥국의 경제성장은 선진국 경제에도 기여한다는 점에서 외환시장 개입이 '근린궁핍화' 정책이 아니고, '근린부유화' 정책이라고 받아쳤다.

 이처럼 해외 지식인들이 화폐 주권을 당연시하는 풍토와 달리 (미국인보다 더 미국적으로 사고하는) 한국의 많은 지식인은 미국의 요구를 수용하는 것을 당연시한다. 이들에게 대한민국의 이익 추구는 '사치'에 불과하다.

 

p148

 <그림7>은 대한민국 경제의 현실을 상징적으로 보여준다. 

 기간은 지난 30년(1992~2023년 2분기)이다. 지난 30년은 일본의 '잃어버린 30년'과 일치하는 기간이다. 그림의 곡선은 현재의 시장 가치와 자국 화폐 단위로 평가한 세 나라의 GDP(명목 GDP 혹은 경상 GDP)를 해당국의 시중 유통 전체 통화량으로 나눈, 이른바 '화폐유통속도'이다. 사전적으로 화폐유통속도는 화폐 한 단위가 일정 기간 동안 경제 구성원들의 상품 거래 혹은 소득을 창출하는 거래에 평균적으로 몇 회 사용되었는가를 나타내는 지표를 말한다.

 예를 들어, 2023년 3분기(9월말) 기준 대한민국의 명목 GDP는 약 2,205조 원이고, 총통화량은 약 3,818조 원이다. 이는 3,818조 원 중 2,205조 원만이 소득창출과 관련 있는 상품 거래에 연결되었음을 말한다. 나머지는 수익을 좇아 자산시장으로 대부분 흘러 들어간다.

 그런데 한국은 외환위기 충격 이후 1값 밑으로 떨어져 계속 하락해, 자산시장 거품 붕괴 충격 이후 1값 밑으로 떨어진 일본을 빠르게 따라잡고(?) 있는 중이다.

 경제 내용상으로 사실상 한국 경제 역시 '잃어버린 30년'을 향해 질주하고 있는 셈이다. 실제로 지난 2023년 3분기 기준 연간 성장률은 1.1%였는데 이는 일본의 1990년대 이른바 잃어버린 10년(1992~2001년)의 연평균 성장률 수준이다. 이 값이 내려가면 돈을 풀어도 새로운 가치 창출보다는 자산 불평등의 심화라는 부작용으로 이어질 가능성이 크다.

 지난 30년(1992~2001년) 사이에 한국의 명목 GDP는 약 1,725조 원 증가했는데, 국내 부동산자산은 약 9배에 달하는 1경 4,710조 원이나 증가했다. 가계로 국한해도 마찬가지 모습이 확인된다.

 가계의 처분가능소득은 약 928조 원 증가했는데, 가계의 부동산 자산은 약 8배에 달하는 7,077조 원 증가했다. 비금융법인이 만든 부가가치, 이른바 영업잉여는 약 208조 원 증가했는데 비금융 기업이 보유한 부동산자산은 약 15배에 해당하는 3,020조 원 이상 증가했다. 다른 기준으로 비교하면, 유가증권 이른바 코스피 상장기업 매출액은 2004~2022년 사이에 약 2,075조 원 증가했는데 비금융기업의 부동산자산은 2,311조 원 이상이 증가했다. 지난 30년의 가계와 기업, 국가 경제 모두에서 부동산은 돈을 빨아들이는 '블랙홀'이었다. 선진국 중 가장 자산 불평등이 심한 나라가 미국인데 미국보다 불평등이 더 심하면서 내용이 좋지 않은 나라가 대한민국이다. 무엇보다 미국은 주식자산이 부동산자산 증가를 압도한다. 한국은 그 반대이다.

 게다가 돈을 빨아들이는 부동산자산의 핵심 원천인 토지자산 소유 상태를 보면 정말 끔찍하다. (2,370만 5,814세대로 구성된) 2022년 대한민국에서 상위 0.62%에 해당하는 14만 6,952세대가 보유한 토지가액 943.4조 원은 전체 세대의 (38%의 땅이 한 평도 없는 901만 세대를 포함) 85%(약 2,018만 세대)의 토지보유액 949.7조 원과 맞먹는 규모이다. 오죽하면 필자가 전정田政 문란과 토지개혁 등으로 채색된 조선왕조 말기보다 오늘날의 토지 소유가 더 집중되었다고 하겠는가.

 두 번째 주목할 점은, 이러한 경향이 지난 30년간 정권의 성격과 무관하게 진행되었다는 사실이다. 부동산에 돈이 몰리는 구조는 대한민국의 힘의 역학 구조와 깊은 관련성을 갖고 있다. 돈을 중심으로 세력의 이해관계가 형성되기 때문이다. 사회 일각에서 대한민국을 '부동산 공화국'이라 부르는 배경이다. 또한 오래전부터 시중에 회자하는 말이 "권력은 유한한데 자본(모피아)은 영원하다"이다.

 

p152

 흥미로운 점은 김대중 정권에서 (GDP대비) 가계 소비 비중이나 성장률의 하락폭이 가장 컸다는 사실이다.

이는 외환위기 충격도 원인으로 작용했지만, 2000~2002년 3년간 기준으로 가계 부채가 역대 최고로 증가한 사실에서 비롯한다. 김대중 정권에서 3년 간 18.9%p의 가계 부채 증가는 문재인 정권에서의 2018년 3분기~2021년 3분기까지의 3년간 14.5%p보다 높았고, 1년 기준으로도 (가계 부채 증가 속도가 가장 빨랐던 시기를 기준으로) 김대중 정권의 2001년 3분기 이후 2002년 3분기까지의 10%p 증가가 문재인 정권의 2020년 1분기 이후 2021년 1분기까지의 8.8%p 증가보다 높았다. 이는 '평화적 정권 교체' 및 최초의 남북 정상회담(6.15 공동선언)등 민주주의와 남북 관계에 이정표를 세운 업적에도 불구하고 민주주의의 알맹이인 공공금융의 '사실상' 해체의 산물이었다.

 김대중 정부 이래 가계 부채의 증가는 가계 소비를 억압하는 요인으로 작용했다. GDP 대비 가계 부채가 10%p 상승할 때마다 GDP 대비 가계소비는 2.4%p 감소했다. 그리고 가계 소비 감소는 성장률 하락으로 이어졌다. 김영삼 정권에서의 연평균 8% 성장률은 문재인 정권에서의 연평균 2.4%까지 하락했다. 약 60%에 달했던 GDP 대비 가계 소비 비중이 46%까지 하락한 결과였다. 가계 소비 비중이 1%p 하락할 때마다 성장률은 0.87%p씩 하락한 것이다. 내수의 핵심인 가계 소비의 둔화는 수출 의존도를 높이고, 이는 다시 국민총소득에서 가계 소득의 비중을 낮추었다.

 결과적으로 GDP 대비 가계 부채 10%p 증가는 (국민총소득에서) 가계 처분가능소득 비중을 2.3%p 감소시켰다. 특히, 내수 의존도가 절대적인 자영업자에 타격을 입혔다. 임금노동자 1인당 평균 소득 대비 자영업자 1인당 평균 소득의 비중은 (가계 소비와 가계 소득을 감소시킨) 가계 부채 증가에 따라 하락했다. 가계 소득과 가계 소비가 1%p 하락할 때마다 (임금노동자 소득 대비) 자영업자의 상태 소득에 각각 -4.1%p(가계 소득)와 -3.6%p(가계 소비)의 영향을 미쳤다.

 한국은 오래전에 격차 사회가 되었다. 대기업과 중소기업 종사자의 소득 격차, 정규직과 비정규직 노동자 간 소득 격차, 그리고 임금노동자와 자영업자 간 소득 격차가 그것들이다. 이 중에서 가장 큰 소득 격차가 임금노동자와 자영업자 간 소득 격차인 데 이 격차는 한국 사회의 특성이기도 하다. 1인당 자영업자 평균 실질소득이 2001년 정점을 찍고 최근까지 계속 하락하고 있고, 물가 변화를 반영하지 않은 명목소득도 2011년 이후 계속 하락하는 배경이다.

 그 결과 1990년대 초까지만 해도 격차가 거의 존재하지 않았던 임금노동자와 자영업자 간 소득 격차는 문재인 정부 출범 전후에 40%가 무너졌다. 작은 충격만 받아도 자영업자가 폐업에 내몰리는 배경이다. 절대적인 소득 취약성으로 가계 부채 못지 않게 자영업 부채가 급증하는 배경이다. <표9>에서 보듯이 자영업자 1인당 명목소득은 지난 10년간 연평균 0.7%씩 줄어들어왔다. 실질소득 기준으로 보면 지난 20년 넘게 연평균 2.3%씩 하락해왔다.

 

 

p166. 사회 소득을 위한 세율 조정 방안.

 

p170

 지금까지 간단히 소개한 사회소득만 강화해도 대부분 가계는 최소 연 300~400만 원의 사회소득을 확보할 수 있다. 그리고 그 효과는 엄청나다. 첫째, 가계의 소비 여력을 강화함으로써 국민 경제의 성장뿐 아니라 가계의 소득과 일자리 증가 등에도 기여한다. 둘째, 소득 불평등의 개선, 특히 불평등 발생의 최대 용인인 토지 부동산자산에 대해 과세와 소득이 낮을수록 많은 배당을 받는 소득 이전으로 불평등을 크게 개선하게 된다. 셋째, 부동산 투기에 따른 기대 불로소득이 낮아짐으로써 투기를 완화한다. 넷째, 세금을 거둔 후 그 세금을 바로 국민에게 배당해줌으로써 재경 관료의 개입을 원천적으로 차단한다. 국민 주권 강화의 효과가 있다. 다섯째, 사회소득이나 토지배당 등의 일부를 지역화폐로 나누어 주면 지역경제 활성화와 자영업자 소득 개선에도 기여한다. 여섯째, 저소득층이 가장 큰 혜택을 입음으로써 저소득층의 최저임금에 대한 의존도를 낮출 수 있고, 그 결과 사회 경제적 약자들인 을과 을 사이의 갈등을 해소할 수 있다. 일곱째, 설사 보수정권으로 바뀌어 사회소득세 및 토지배당세를 이전으로 환원시키게 되면 대다수 국민의 소득 감소로 이어져 정치적 저항에 직면하기 때문에 감세가 불가능한 불가역적 증세 방식이다. 여덟째, 노동소득 이외의 추가 소득이 발생하면 많은 국민이 자신이 하고 싶었던 일을 시도할 수 있어, 개인적으로 삶의 질 향상과 사회적으로는 혁신 활동화 등을 기대할 수 있다. 특히 사회금융까지 결합할 경우 창업 활성화 효과도 기대할 수 있다. 현재 주저앉는 대한민국 경제를 살리려면 가계 소득 강화와 혁신 활성화가 무엇보다 필요하다는 점에서 사회소득 강화와 사회금융 복원이 가장 현실성 있는 대안이다.

 

p173

 2023년 (금리인상으로 가처분소득의 감소로 이자를 감당못해 자산가치 붕괴 조짐이 생기는) '민스키 모멘트'가 도래하자 정부가 정책주택금융 지원으로 붕괴를 일시적으로 막았다. 실제로 2008년 이후 2022년까지 정책주택금융의 분기당 증가율은 3.2%였으나 2023년 3분기 동안 증가율은 4.2%로 증가했다.

 그러나 문제는 정책주택금융으로 주택 거래의 일시적 회복을 자극했으나 가계의 소득 감소와 식비 축소까지 진행될 정도로 가계 부채가 임계점에 도달한 상황에서 정책주택금융으로는 방어가 쉽지 않다는 점이다. 그 결과가 태영건설 워크아웃이다.

 본질적으로 태영건설 워크아웃은 수십 년간 진행해온 부동산 부채 모래성 쌓기의 결과로 인한 건설업의 과잉에서 비롯된 것이다.

 그동안 경제관료들은 해외사례 베끼기, 그것도 실패한 일본 사례 베끼기를 하고 있다. 금융지원으로 부실기업 연명시키기, 정부의 대규모 토목건설 사업으로 건설사 수입 만들어주기, 금리 인하로 주택시장 부양하기 등이 그것이다.

 

 일본은 이와같은 잘못된 정책으로 1990년대 10년 동안 '잃어버린 10년'이라는 비싼 비용을 지불하고 나서 1999년부터 산업 구조조정을 시작한다. 

 일본의 구조조정이 성공했더라면 '잃어버린 20년' 혹은 '잃어버린 30년'은 없었을 것이다. 통·폐합에서는 성과를 거둔 반면 창조산업 육성은 처참하게 실패했기 때문이다. 

 창조산업 육성이 처참히 실패한 이유는 제조업과 전혀 다른 창조산업을 제조업 육성 방식으로 접근했기 때문이다.

 지금 윤석열 정부가 태영건설을 처리하는 방식을 보면 2015년 대우조선해양(현 한화오션)을 처리할 때가 연상된다. 당시 2,000억 원이라는 천문학적인 자금 수혈이 산업은행 주도로 추진됐다. 박근혜 정부가 2016년에 도입한 것이 '기업 활력 제고를 위한 특별법'(일명 원샷법)이었다. 그런데 이 법은 일본의 1999년 '산업활력재생특별법'을 베낀 것이었다. 그리고 박근혜 정부의 상징인 '창조경제' 육성도 일본의 '창조산업' 육성의 베끼기였다. 그리고 지금 윤석열 정부가 부동산과 건선 부문의 부실 문제에 접근하는 방식도 자산시장 거품이 꺼지자 일본 정부가 내놓은 대책과 정확히 일치한다.

 

  가게 소빙, 기업 설비 투자, 그리고 수출 등 성장 에너지가 악화한 상황에서 부동산 시장의 침체는 자산가치의 하락을 의미하고, 이로 인해 소비의 추가 침체의 악순환으로 이어질 수밖에 없다. 이미 일본의 잃어버린 10년 수준으로 성장률이 하락한 상태에서 부동산 시장 침체가 더해지면 향후 한국 경제의 성장률은 일본의 1990년 잃어버린 10년보다 더 낮아질 가능성이 크다. 

 이를 막으려면 가계 구제에 초점을 맞춘 '한국적 양적완화'가 불가피하다. 주택금융공사가 금융권의 주택담보대출을 인수한 후 주택금융공사가 매입한 주택을 장기공공임대로 전환하는 것이다. 주거 불안을 겪는 많은 세입자의 주거 문제를 아넝화하는 계기로 만들 수 있다. 모든 국민이 기본적인 주거시설을 확보할 권리를 실현하는 것이다. 게다가 주택 매물 압력은 완화할 것이고 주택 소유를 포기한 가계도 여유 자금을 확보할 수 있을 것이다. 그리하여 부채 상환 부담에서 해방되고 소비 여력도 확보하게 될 것이다. 이는 차기 정권의 과제이다.

 

p184

 대개 산업화 혹은 공업화로는 1인당 소득 1만 달러까지 도달한다. 한국의 경제성장을 흔히 압축성장이라 부르듯이 한국은 '압축적 공업화'를 이루어냈다.  1만 달러 이후 한국은 탈공업화가 일본에 비해 2배나 빠를 정도로 압축적으로 진행됐고, 그 결과 많은 노동력이 저부가가치 서비스 부문으로 이동했다. 대표적인 분야가 자영업이고, 오늘날 플랫폼 노동자가 21세기형 저부가가치 서비스 부문 종사자들이다.

 그런데 AI와 로봇 기술의 발달은 이러한 저부가가치 서비스 부문의 노동력조차 소멸시키고 있다. 한국 사회의 일자리 문제가 심각한 배경이다. 이로 인해 의사나 변호사처럼 일부 고부가가치 서비스 부문의 진입장벽이 높은 일자리를 들어가기 위한 교육 경쟁이 극심해지고 있다.

문제는 디지털 생태계에 필요한 인간상과 갈수록 멀어지고 있다는 점이다. 스스로 문제를 찾아내고 다른 사람과의 협력을 통해 문제를 해결하는 역량이 필요한데, 한국 사회에서 교육받은 학생은 대개가 스스로 문제를 찾아낼 줄도 모르고, 다른 사람과 협력을 만들어내는 데도 익숙지 못하기 때문이다.

 제조업 생태계와 디지털 생태계가 전혀 다른 인간상을 요구한다는 것을 이해해야만 산업혁신이 가능하다. 교육 혁명과 더불어 국민의 경제 기본권들을 구현할 때 새로운 집을 위한 최소조건을 갖추었다고 말할 수 있다.

 

p191

 1980년대 이후 금융화가 새롭게 부상한 금융 자본의 지배력을 상징하듯이 화폐 권력에 변화가 발생했다. 금융혁신이라 불리는 '증권화'는 금융사에서 하나의 분기점이었다. '증권화'란 유동성이 낮은 자산을 현금화하는 기법을 말한다. 대표적인 것이 주택저당증권(Mortgage-Backed Securities, MBS)이다. 주택은 대부분 대출이 포함되어 있다. 전통적으로 대출을 해준 금융회사는 원리금을 회수할 때까지 대출금을 채권  형태로 보유했다. 이 대출 채권은 대출 만기까지 온전히 현금화할 수 없다는 점에서 유동성이 낮은 자산이다. 또 다른 대출을 하려면 추가 예금을 확보하거나 자금을 조달해야 한다. 그리고 추가로 조달할 수 있는 자금은 기본적으로 중앙은행이 공급하는 본원 통화량의 크기에 의존한다. 그러나 주택을 담보래 대출해 준 채권 자산을 담보로 증권을 만들어 매각하면 현금이 확보되고 이 현금으로 또 다른 대출을 만들 수 있다. 이 증권이 바로 주택저당증권MBS 이다.

 여기서 힌트를 얻어 자동차 대출금, 신용카드 사용 채권, 학자금 대출금, 공장 대출금 등에서부터 심지어 엔터테인먼트 로열티까지 다양한 비현금성 자산을 증권화하게 되었고, 이를 통용해서 자산담보증권Asset-Backed Securities ABS이라 부른다. 유동성이 낮은 자산을 모아 현금 흐름을 만들고, 이를 통해 유동성 낮은 자산의 가치를 높이고 동시에 소비자에게는 더 낮은 차입비용을 제공하고, 투자가에게는 고품질 고정수입이라는 매력적인 수익률을 보장해준다는 점에서 금융시장은 이를 최대 혁신으로 평가했다. - *2008년 금융위기가 바로 이 MBS가 부도처리 되면서 발생한 것임.

 

 자산담보증권은 출현하자마자 폭발적으로 성장했고, 2021년에 자산담보증권의 시장 규모는 2조 1,371억 달러에 달했다. 자산담보증권의 출현은 금융회사가 자금을 시장에서 직접 조달하게 되었음을 의미한다. 전통적으로 시중의 통화량 공급은 중앙은행에 의해 결정되었다. 이른바 중앙은행의 통화공급 독점력이다. 그런데 금융 자본이 중앙은행의 자금 지원 없이도 상당한 자금을 조달할 길이 열린 것이다. 전문가들은 이를 금융의 외생성外生性에서 내생성內生性으로의 진화라 부른다. 중앙은행의 화폐공급 독점력에 금이 가기 시작한 것이다. 시장 상황에 따라 화폐공급이 달라지면서 전통적인 통화정책이 통화량 중심에서 이자율 중심으로 변경한 배경이다.

 

p202

 '제재'는 2022년 우크라이나 전쟁에 대해 미국이 러시아를 해외 금융거래를 위한 달러화 결제시스템, 이른바 스위프트SWIFT, Society for Worldwide Interbank Financial Telecommunication 에서 퇴출시킨 조치를 말하고, 러시아-우크라이나 전쟁은 탈달러의 중요한 분기점으로 작용했다. 즉 스위프트는 금융기관을 연결하는 국제금융결제망으로 '글로벌 공공재'에 해당한다. 러시아 경제의 파산을 의도했지만, 기대한 목적은 달성되지 못하고 오히려 탈달러의 모멘텀으로 작용했다. 미국으로서는 자기 발등을 찍은 겨이 되었다. 

 게다가 뒤이은 러시아와 거래하는 제3국 단체/개인에 대한 제재인 세컨더리 보이콧 등과 더불어 인플레 불을 붙이면서 탈달러와 미국채 파동은 시작되었다. 2024년 새해가 시작하며 브릭스BRICs에 사우디아라비아가 공식 가입함으로써 탈달러는 가속 페달을 밟게 될 것이다. 이란과 아랍에미리트 등이 브릭스에 합류하는 것이 기정사실화 되면 이들의 석유공급은 전 세계의 약 42%를 차지하게 되기 때문이다.

p209

 많은 전문가는 금융위기 이후부터 코로나 팬데믹 이전까지 경험했던 저물가와 그에 기초한 초저금리 시대는 다시 경험하지 못할 것이라는 점에 동의한다.

 이는 금융위기 이후의 '이지 머니' 공급에 의한 자산시장 부양은 어렵다는 사실을 말한다. 사실 이는 저임금 중국 경제의 세계 시장 편입으로 상징되는 세계화와 기술진보 등이 가져다준 저물가로 가능했다.

 

p210

 이러한 대응 방식은 기본적으로 시간 벌기에 불과하다는 한계를 갖는다. 미국채 공급 과잉 우려는 구조적 문제이기 때문이다. 시장에 공급되는 미국채 규모는 금융위기 이전(2001~2008년)에는 연 6,795억 달러(GDP 증가분의 120%)씩 증가하다가 금융위기 이후부터 코로나 팬데믹 이전(2009~2019년)까지는 연 1조 1,365억 달러(GDP 증가분의 171%)씩 증가해왔다. 그리고 코로나 팬데믹 이후(2020~2022년)에는 연 3조 1,485억 달러(GDP 증가분의 210%)씩 증가하고 있다.

 

 이는 미국채 가격의 안정성 악화가 '상수'가 되는 시대의 도래를 의미한다. 그리고 이는 달러 힘의 약화를 의미한다. 앨런이 "준비금의 자연스러운 다변화 욕구"를 미국이 준비해야 한다고 말한 배경이다.

 

p214

 현재 블록체인 기술에 기반한 암호화폐(비트코인, 이더리움 등)가 분산과 공유와 개방 등을 속성으로 갖고 있는 분산형 네트워크 화폐임에도, 즉 국가와 금융 자본이 독점하던 화폐 권력을 해체하는 화폐시스템의 혁명임에도, 실질 가치를 만들어내는 플랫폼 사업모델이 뒷받침되지 않아 새로운 화폐시스템으로 발전하지 못하고 있다.

 그러나 분산형 네트워크 화폐는 절대 없어지지 않는다. 일부 논자들은 암호화폐는 실질 가치가 없고 버블에 불과하다고 말하나, 비트코인이나 이더리움 등 분산과 개방과 공유의 특성을 실현한 블록체인형 암호화폐는 디지털 생태계의 특성에 부합하는 분산형 네트워크 화폐라는 가치를 갖는다. 단지, 디지털 생태계에서의 신용 역시 실질가치가 뒷받침되지 않는다면 불완전할 수밖에 없다. 이것이 화폐로서보다 자산으로서 자리매김되는 배경이다.

 

p216

 미국은 금융위기의 대외적 원인으로 '글로벌 불균형=글로벌 과잉 저축'에 돌리며 미국 이익을 위해 '나머지 세계'에 희생을 강요했다. 경제 주권의 충돌이다. 경상수지 흑자 축소를 둘러싼 미국과 주요 교역국들 간의 갈등, 더 나아가 미·중 간 경제패권을 둘러싼 갈등 등이 화폐 권력을 둘러싼 갈등인 이유이다. '통화정책 독립성의 약화'라는 미국 화폐 주권의 손상은 기본적으로 중심통화가 달러와 경제력 다원화의 미스매치에서 비롯한 것이다. 그런데 미국은 자신의 화폐 주권을 위해 나머지 세계에 경제력 신장을 포기하라고 요구하는 것이다. 하지만 현실적으로 외환위기에 대한 자기 보험 차원이든, 경제 주권의 차원이든 간에 나머지 세계의 달러 축적을 막을 권리가 미국에는 없지 않은가.

 결국 준비금의 다원화가 하나의 대세라면 국제금융시스템의 안정성을 위한 국제 협력은 선택을 넘어 필수 사항이다. 문제는 패권주의 사고에 젖어 있는 미국이 준비금의 다원화를 현실로 받아들일 수밖에 없는 순간이 도래할 때까지는, 먼저 모두의 경제 주권을 인정하기 어려울 것이라는 점이다. 경제 블록화나 독자적 공급망 구축 등으로 나타나는 세계 경제의 지정학적 파편화Geo-economic fragmentation는 그 산물에 불과하다. 분산형 네트워크 화폐처럼 준비금의 다원화 역시 시대적 대세임에도 준비금 권력을 독점하려는 달러의 힘으로 인해 국제통화시스템 및 국제금융 시스템 모두 이행기적 혼란을 피할 수 없다.

 이처럼 적어도 21세기 전반부는 불확실성과 혼란 등이 극대화될 수밖에 없다. 새로운 시대에 필요한 사회혁신들을 만들어내는 길밖에는 다른 선택의 여지가 없고, 그것은 바로 정치의 역할이다. 인간 사회가 직면한 공동 과제를 푸는 일이 정치이고, 이를 통해 미래에 대한 희망을 만드는 것이 바로 정치이기 때문이다.

 

p219

 불평등과 경제적 양극화가 심해지며 또한 양극화된다. 정치인들이 자신의 지지 세력의 목소리만을 대변하면서 정치가 극단의 길로 가게 되는 것이다. 사실 경제적 양극화가 정치적 양극화로 이어지는 것은 많은 연구로 밝혀졌는데, 사실 이는 연구 이전에 상식의 문제이다. 정치적 양극화가 심해지면 상대방에 대한 혐오와 증오, 심지어 폭력 등으로 이어진다. 관용과 사랑 등은 점점 설 자리를 잃어간다. 이는 사람의 정신과 마음이 병들어 가는 것을 의미한다. 

 

 한국이 이렇게 망가지 이유는 한국 사회와 경제가 '부동산 카르텔'이 만들어낸 사실상의 세습사회가 되었기 때문이다. 모든 것을 빨아들이는 블랙홀인 부동산으로 인해 경제 활력도 잃어버렸고, 인구도 축소되고, 급기야 사회가 사실상 붕괴되었다. 그리고 이제 부동산 모래성이 무너질 위기를 맞이하고 있다. 소비, 투자, 수출, 소득 등이 모두 마이너스 행진을 하며 지난 2023년의 스테그플레이션은 조만간 디플레이션으로 전활될 가능이 크다. 낡은 집(사회질서)이 무너진 후 새로운 집을 지어야 할 순간이 다가오고 있다.

 

 제로에서 시작한다고는 하지만 수준이 낮지는 않다. 현재의 사회,경제,정치적인 이슈를 기반으로 자본론의 현대적 의의와 적용방안에 대해서 저자가 고민한 바를 풀어서 설명하고 있다. 상당히 도움이 되는 내용이다.

 

---------------------------

p13

 한 남자가 동독에서 시베리아로 보내졌습니다. 그는 자산의 편지를 검열관이 읽는 것을 알고 있습니다. 그래서 그는 친구에게 이렇게 말했습니다. "암호를 정해 두자. 만약 내 편지가 파란 잉크로 쓰였다면, 편지의 내용은 진실이다. 하지만 만약 빨간 잉크로 쓰였다면 그것은 가짜다." 한 달 후 그의 친구가 편지를 받았을 때, 모든 것이 파란색 잉크로 쓰여 있었습니다. 거기에는 이렇게 적혀 있었습니다. "이곳에서의 생활은 매우 훌륭하다. 맛있는 음식도 많다. 영화관에서는 서양의 재미있는 영화를 상영한다. 집은 넓고 고급스럽다. 여기서 살 수 없는 것은 빨간 잉크뿐이다."

 

이 농담은 소련의 '사회주의'를 다뤘지만, 자본주의 생활에도 그대로 적용될 수 있을 것입니다. 지금 우리가 누리는 '자유'와 '풍요'는 바로 이 파란 잉크로 쓰인 편지의 세계입니다.

 

 지금 우리에게 필요한 것은 빨간 잉크입니다. 그리고 우리가 한 번은 버린 <자본론>이 바로 그 빨간 잉크입니다. 왜 그럴까요? 그것은 <자본론>을 읽음으로써 우리는 이 사회의 부자유를 정황하게 표현할 수 있기 때문입니다. 또 그것은 잃어버린 자유를 회복하는 첫걸음이 될 것입니다.

 

p19

 도시에서 열심히 일하는 사람과 남쪽 섬에 사는 어부가 나누는 이야기를 들어 본 적 있나요?

 "왜 너는 매일 그렇게 게으름을 피우는 거야. 좀 열심히 일해서 돈을 벌어라."
 "그렇게 열심히 일해서 모은 돈으로 뭘 할 건데?"
 "돈 많이 벌어서 은퇴하면 느긋하게 낮잠 자고 낚시하며 살고 싶으니까."
 "어, 나는 벌써 그렇게 하고 있어."

 우리는 도대체 무엇 때문에 매일매일 힘들어하면서 그렇게 많은 일을 하고 있을까요? 맛있는 것을 먹으려고? 해변에서 휴가를 보내려고? 아니면 여유로운 노후를 보내기 위해서? 그렇다면 위 이야기의 어부는 도시에 사는 우리보다 훨씬 나은 삶을 사는 것 같습니다.

 

p20

 인간은 다른 생물과 마찬가지로 끊임없이 자연에 작용하여 다양한 것을 만들어 내면서 이 지구상에서 삶을 영위합니다. 의식주 등을 얻기 위해 인간은 적극적으로 자연에 적용하고 그 모습을 변화시키며 자신의 욕구를 충족합니다. 이러한 자연과 인간의 상호작용을 마르크스는 생리학 용어를 사용하여 '인간과 자연의 물질대사'라고 말했습니다.

 

p21

 이 책은 물질대사론을 바탕으로 <자본론>을 읽어 나간다고 해도 과언이 아닙니다. 필자는 마르크스를 따라 '노동'이라는 행위를 중시하기 때문입니다.

 다시 말해 인간이 자연과의 물질대사를 조절하는 통제하는 행위가 바로 '노동'입니다.

 마르크스는 다음과 같이 '노동'을 정의하고 있습니다.

 노동은 우선 인간과 자연 사이의 한 과정, 즉 인간이 자신의 행위로 자연과의 물질대사를 매개하고 규제하고 제어하는 한 과정이다.

 

p24

 우리의 삶과 사회, 그리고 그것을 둘러싼 자연환경의 모습은 우리가 자연에 어떻게 작용하느냐에 따라 결정됩니다. 이 작용 방식을 크게 잘못하면 사회와 자연은 황폐해집니다. 그래서 노동은 인간의 자유와 번영을 위해 매우 중요한 활동인 것입니다. 

 이상에서 알 수 있듯이 마르크스가 '노동'이라는 개념에 주목한 것은 노동자계급의 착취를 백일하에 드러내고 하는 정치적 의도가 있어서가 아니라, 물질대사라는 인간과 자연의 본원적 관계를 중시했기 때문입니다.

 하지만 이 사실을 막연하게만 파악한다면 어느 시대든 인간은 자연과 물질대사를 해 왔다고 말할 수 있습니다. 하지만 그 구체적 모습은 시대와 지역마다 크게 다르죠. 그리고 바로 이 점이 중요합니다.

 즉, 마르크스는 인간의 의식적이고 합목적적인 활동인 '노동'이 자본주의에서 어떻게 수행되는지를 고찰함으로써 인간과 자연의 관계에 결정적 변화가 있음을 밝히고, 거기서 자본주의의 특수성에 접근한 것입니다.

 

p28

 화폐로 측정할 수는 없지만, 한 사람 한 사람이 풍요롭게 살아가는 데 필요한 것이 풍부한 상태, 그것이 바로 사회의 '부'입니다.

 

p33

 사회의 '부'가 '상품'으로 변한다는 것은 쉽게 말해 가격표가 붙은 '매물(賣物)'이 된다는 뜻입니다.

 

p37

 마르크스에 따르면 '상품생산이 전면화된 사회', 즉 모든 것이 상품화되는 자본주의사회에서는 물건을 만드는 목적, 즉 노동의 목적이 다른 사회와 크게 다릅니다.

 

p39

 왜 이런 상황(부의 양극화가 점점 심해지는 상황)이 벌어지는가 하면, 자본주의 사회에서는 '인간의 욕구를 만족시키는 것'보다 '자본을 늘리는 것' 자체가 목적이 되어 버렸기 때문입니다. 그 메커니즘에 대해서는 다음 장에서 자세히 살펴보겠지만, 자본주의는 이윤추구를 멈출 수 없습니다. 설령 그것이 서점을 없애는 등 사회의 '부'에 파괴적인 결과를 가져오는 결과를 낳는다 해도 눈앞의 돈벌이를 멈출 수 없는 것이 자본주의입니다.

 

p40

 생산 활동의 주요 목적이 '인간의 욕구 충족'에서 '자본을 늘리는 것'으로 바뀌면 당연히 생산방식도, 생산되는 물건도 달라집니다.

 자본주의사회에서 생산되는 '상품'은 사람들의 삶에 정말 필요한지, 정말 중요한지보다 얼마나 비싸고, 얼마나 팔리겠는지, 다시 말해 얼마나 자본을 늘리는 데 기여하는지가 더 중요해집니다.

 

 

 '돈이 되는 물건'과 '필요한 물건'이 반드시 일치하지는 않습니다. 이 점에 대해 마르크스는 '상품'에는 두 가지 얼굴이 있다고 지적합니다. 

 하나는 '사용가치'라는 얼굴입니다. '사용가치'란 인간에게 도움이 되는 것(유용성), 즉 인간의 다양한 욕구를 충족하는 힘입니다. 물에는 갈증을 해소하는 힘이 있고, 식료품에는 굶주린 배를 채우는 힘이 있습니다. 마스크에도 감염병의 확산을 막는 '사용가치'가 있습니다. 생활에 필요한 '사용가치'가 바로 자본주의 이전 사회에서 생산의 목적이었습니다.

 하지만 자본주의에서 중요한 것은 상품의 또 다른 얼굴인 '가치'입니다.

 

p44

 '사용가치'를 위해 물건을 만들던 시대는 말 그대로 인간이 '물건을 사용하던' 시대였지만, '가치'를 위해 물건을 만드는 자본주의에서는 입장이 역전되어 인간이 물건에 휘둘리고 지배당합니다. 이 현상을 마르크스는 '물상화(物象化)'라고 불렀습니다. 인간이 노동에서 만든 물건이 '상품'이 되는 순간, 신비한 힘으로 인간의 삶과 행동을 지배하게 된다는 것입니다.

 

p47

 그와 동시에 광고업과 마케팅이 늘어납니다. 왜 그런가 하면, 소비자들도 바보가 아니라서 자신이 쓰레기를 샀다는 것을 금새 알아차리기 때문입니다. 그러면 상품의 마법이 풀려서 싫증이 납니다. 그래서 계속해서 제품을 바꾸고, 새로운 쓰레기를 매력적인 상품으로 만들어 판매해야 하는 것입니다.

 

p48

 '상품'의 영역이 넓어지면 넓어질수록 물상화의 힘은 강해지고, 인간은 점점 더 물건에 휘둘리게 됩니다.

 

 모든 것을 시장에 맡기면 경쟁 원리가 작동해 효율성이 높아진다고 생각한 이가 영국의 마거릿 대처 전 총리였습니다. 하지만 그 후 신자유주의가 '전 세계로 퍼져 나가면서 물상화의 힘을 강화한 결과, 예상하지 못한 많은 부조리와 비효율, 독점을 낳고 있습니다.

 

 민영화라고 하면, '독재적'이고 비효율적이던 공영/국유사업이 민간의 손에 의해 '민주적'이고 효율적으로 관리/운영된다는 이미지를 가진 사람도 있을 것입니다. 하지만 이는 단어의 마술입니다. 원어인 프라이비티제이션(privatization)은 직역하면 '사유화'입니다. 프라이빗(private)의 어원은 '빼앗기다' '분리되다'라는 뜻입니다. 사람들이 공유하고 관리하던 '코먼'을 빼앗긴 상태라는 뜻이죠. 민영화의 실체는 특정 기업의 권리 독점이며, '상품'의 영역을 넓히는 현대판 '울타리 치기'입니다.

 시장은 결코 '민주적'이지 않습니다. 시장에 접근할 수 있는 사람은 돈을 가진 사람뿐이기 때문입니다. 민영화가 진행되면서 공영/국유이던 시절에는 접근이 가능했던 의료나 교육 같은 공공서비스에서 많은 사람이 배제되었습니다. 

 또 시장에서는 '이익'이 우선하기 때문에 수익성 없는 물건이나 서비스는 가차 없이 삭감됩니다. 예산도, 인력도 삭감됩니다. 정말 쓸모없는 것은 당연히 줄여야 하지만, '사용가치'를 무시한 효율화는 꼭 필요한 물건과 서비스까지 삭감하거나 질을 떨어뜨려 사회의 '부'를 빈약하게 합니다.

 

p54

 가치 논리의 내면화를 보여 주는 잘 알려진 예가 바로 '가성비(코스파, cost performance)'의 사고입니다. 모든 일의 수익률을 추정하고 그에 따라 효율화를 꾀하는 태도죠.

 

 이렇게 가사나 육아는 외주화, 상품화되고 있습니다. 그리고 그것이 효율적이고 바람직하다고 생각하고 이용하는 사람이 늘어나기 때문에 서비스산업도 점점 늘고 있습니다.

 하지만 가성비 사고에 더 깊이 빠져들면 돈이 되지 않는 주민 회의나 축제, 학부모/교사 모임(PTA), 노동조합 등에 참여하는 일이 모두 가성비가 나쁜 것이 되어 버립니다. 가족이나 지인을 돕는 것조차 말이죠. 결국 공동체는 점점 더 말라비틀어지고, 끝내는 붕괴됩니다.

 물론 집안일을 모두 여성에게 맡기거나, 동네 모임에서 '장로'가 거드름을 피우던 옛날이 더 좋았다고 말하려는 것이 아닙니다. 다만 상품화하지 않더라도 가사나 육아에 남녀가 동등하게 참여할 수 있는 방법도 있고, 커뮤니티의 힘을 효과적으로 활용할 수 있는 선택지도 있다는 것입니다.

 하지만 그런 선택을 하는 대신 우리 사회는 모든 것을 상품화하고, 남는 시간을 점점 더 돈벌이에 바치고 있습니다. 그렇다고 해서 더 풍요로워지지는 않습니다.

 이 역설을 미하일 엔데가 쓴 <모모>의 세계를 떠올리게 합니다. '시간 은행'에 홀린 이발사 푸지는 시간을 절약하게 되었는데도 전혀 여유가 없습니다.

 

 푸지 씨는 점점 더 흥분하고, 침착하지 못한 사람으로 변해 간다. 한 가지, 떨어지지 않는 것이 있기 때문이다. 절약한 시간은 사실 조금도 남아 있지 않았다. 마치 마술처럼 흔적도 없이 사라져 버리는 것이다. 푸지 씨의 하루하루는 처음에는 몰랐지만 점점 더 뚜렷하게, 그리고 조금씩 사라져 갔다.

 

가성비를 더 높이고 시간을 절약한다고 해서 인생이 풍요로워지는 것은 압니다. 오히려 여가가 점점 줄어들고, 가족이나 이웃과 소통할 수 있는 여유도 없어집니다. 그리고 조금의 낭비도 용납하지 못하는 짜증 나는 인간들만 가득한 사회가 되어 버리는 것입니다.

 

p82

 노예는 단지 외부의 두려움에 의해 노동하지, 자신의 생활(자신의 것은 아니지만 보장되어 있는)을 위해 노동하는 것이 아니다. 이에 반해 자유노동자는 자신의 필요에 의해 노동한다. 자유로운 자기결정, 즉 자유에 대한 의식과 그에 따른 책임의 감정은 자유노동자를 노예보다 훨씬 더 나은 노동자로 만든다.

(마르크스, <직접적 생산과정의 결과들>)

 

 노동자들을 움직이는 것은 '일자리를 잃으면 생계를 유지할 수 없다'는 두려움보다는 '내가 스스로 선택해서 자발적으로 일한다'는 자부심입니다. 그렇기 때문에 '직무를 제대로 수행해야 한다'는 책임감이 생깁니다. 실제로 취업 면접에서 "무슨 일이든 죽기 살기로 하겠습니다!"라며 자신의 자유를 기꺼이 포기한 경험이 있는 사람이 많을 것입니다. 최저한의 생활을 보장받으며 마지못해 일하는 노예와는 분명 차이가 있습니다.

 자기책임감을 갖고 임하는 노동자는 억지로 일하는 노예보다 더 일을 잘하고, 더 좋은 일을 합니다. 그리고 실수하면 자신을 탓합니다. 불합리한 명령도 받아들이고 스스로를 몰아세웁니다. 이는 자본가가 바라지도 않았던 바입니다. '자본가에게 유리한' 사고방식을 노동자가 스스로 내면화함으로써 자본의 논리에 편입되는 것입니다. 정치학자 시라이 사토시는 이를 가리켜 '영혼의 포섭'이라고 말했습니다.

 본래 끝없는 가치 증식을 추구하는 자본가의 이해관계와 인간다운 삶을 원하는 노동자의 이해관계는 양립할 수 없습니다. 그런데 자유롭고 자발적인 노동자는 자본가가 원하는 노동자의 모습을 마치 자신이 지행해야 할 모습, 인간적으로 우수한 모습인 양 착각하게 됩니다. 고도성장기의 '모레쓰 사원(猛烈社員)'이나 버블경제기에 유행한 영양 음료의 캐치프레이즈 "24시간 싸울 수 잇습니까"가 그 좋은 예일 것입니다.

 자본주의사회에서는 노동자의 자발적 책임감, 향상심, 주체성이 자본의 논리에 '포섭'된다고 마르크스는 경고했습니다.

 

p86

 노동운동이나 노사 교섭에서도 '임금인상'은 가장 큰 쟁점입니다.

 하지만 흥미롭게도 마르크스는 임금인상보다 '노동일 제한(단축)'이 더 중요하다고 지적합니다. 당시 임금이 지금보다 훨씬 낮았는데도 말입니다.

 노동일의 제한은, 그것 없이는 모든 해방의 시도가 실패로 끝날 수밖에 없는 선결 조건이라고 우리는 선언한다. (319/410)

 

 임금이 인상되더라도 장시간 노동이 해소되지 않으면 으미가 없다는 말입니다.

 자본가가 임금인상 요구를 받아들이면 분명 착취는 완화됩니다. 그러나 자본의 논리에 포섭된 자본주의사회의 노동자는 "그럼 우리는 열심히 일하겠습니다!"라고 말할 것입니다. 이는 오히려 기업에 유리하게 전개되는 사태입니다. 임금을 조금만 올려 주고 그 대신 노동자가 장시간 노동도 마다하지 않고 '자발적으로' 열심히 일해 준다면 잉여가치, 즉 자본가의 이윤은 오히려 늘어날 수 있기 때문입니다.

 자본가의 목적은 노동력이라는 '부'를 '상품'으로 가둬 두는 것입니다. '상품'으로 가둬 두는 것은 자유 시간을 빼앗는 것입니다. 임금인상에 따른 장시간 노동이 임금노예 제도를 유지하는 것입니다.

 실제로 임금이 조금 오른다 해도 시간을 빼앗긴 노동자에게는 아이와 놀거나 취미를 즐길 여유가 없습니다. 일하다 지쳐서 책을 읽거나 인생이나 사회문제에 대해 생각할 여유도 없습니다.

 바빠서 직접 요리할 시간이 없게 되면 외식이라는 '상품'이 팔립니다. 빨래를 해도 건조할 시간이 아깝게 되면 세탁기와 건조기가 팔립니다. 자동 청소기도 마찬가지입니다. 최근에는 가사 대행 서비스도 유행입니다.

 하지만 이런 편리한 서비스가 우리를 여유롭게 해 주는 것은 아닙니다. 그 대가를 지불하기 위해 노동시간이 점점 늘어날 뿐입니다. 이렇게 노동일을 '무제한'으로 만들면 '상품'의 영역이 점점 더 넓어지고, 자본가들의 사업 기회가 확대됩니다.

 

p98

 자본주의는 엄청난 부를 가져다준 것처럼 보이지만, 우리의 생활은 오히려 여유가 없어지고 있습니다. 그 결과 욕구와 감성이 메마르고 빈곤해졌습니다. 180년 전, 20대 중반의 젊은 마르크스는 이 상태를 '노동의 소외'라고 불렀습니다. 소외된 삶에 대해 마르크스는 분노를 담아 다음과 같이 썼습니다.

 빛, 공기 등 가장 단순한 동물적 청결도 이간에게 욕구된 것을 중지한다, 더러움, 인간의 이 퇴폐, 타락, 문명의 하수구의 오물(이것은 문자 그대로 해석해야 한다)이 인간의 생활 기반이 된다. 완전히 부자연스러운 황폐, 부패한 자연이 인간의 생활 기반으로 된 것이다.

(마르크스, <경제학 철학 초고>)

 

p101

 상품을 값싸게 하기 위해, 그리고 상품을 값싸게 함으로써 노동자 자체를 값싸게 하기 위해 노동생산력을 증대하는 것은 자본의 내재적 충동이자 끊임없는 경향이다. (338/436)

p102

 임금은 시장의 수요와 공급의 관계로만 결정되지 않습니다. 예를 들어, 지금 일본은 일손이 부족하다고 하지만 임금은 전혀 오르지 않습니다. 마르크스는 노동자가 생활하는 데 얼마가 필요한지에 따라 임금이 결정된다고 말합니다.

 하루 일하고 지친 노동자는 먹고 자고 다음 날도 일할 수 있도록 자신의 '상품'인 노동력을 회복해야 합니다. 마르크스는 이를 '노동력의 재생산'이라고 표현했는데, 노동력의 재생산 비용은 일상생활에 필요한 것을 생산하려면 얼마나 일해야 하는지에 따라 결정됩니다.

 '필요'의 내용은 시대와 지역에 따라 다양합니다. 음식, 집세, 의복, 여가 비용은 물론이고, 오늘날에는 스마트폰과 인터넷 요금도 포함될 것입니다. 지방에서는 자동차도 필요합니다. 장기적으로는 자녀 교육비, 노후 자금 등을 충당할 수 있을 정도여야 합니다.

 한편, 지금까지는 일당 1만 엔을 받아야 살 수 있었지만, 생산력이 높아지면 패스트패션과 패스트푸드 덕분에 예를 들어 8,000엔으로도 이전과 비슷한 생활을 할 수 있게 됩니다. 그러면 자본가는 노동자에게 지급하는 일당을 8,000엔으로 낮출 수 있습니다. 구체적으로는 비저유직 등을 늘려서 비용 절감을 할 수 있습니다.

 생산력이 높아져 싸게 생활할 수 있게 되었을 뿐, 이 노동자가 한 시간 노동으로 창출하는 가치는 변하지 않습니다.

 한 시간에 2,000엔인 가치를 창출한다고 가정할 때, 노동시간이 이전과 같은 여덟 시간이라면 일당 감소분 2,000엔은 고스란히 자본가의 잉여가치가 됩니다.

 이처럼 노동력가치의 저하로 인해 발생하는 잉여가치를 마르크스는 '상대적잉여가치'라고 했습니다.

 왜 '상대적'일까요? 앞 장에서 살펴본 '절대적잉여가치' 생산에서는 노동일의 절대 길이가 연장됨으로써 하루에 생산되는 가치 자체가 증가했습니다. 반면 '상대적잉여가치' 생산에서는 노동일의 길이는 변하지 않기 때문에 하루에 생산되는 가치의 합계는 그대로입니다. 하지만 노동력의 가치가 낮아짐에 따라 이윤이 늘어나는 구조입니다.

 

p105

 자본가들이 생산력을 높이는 기술혁신, 즉 이노베이션에 기대하는 것은 '가치'의 증식만이 아닙니다. 그들의 또 다른 목표, 그것은 노동자에 대한 '지배' 강화입니다. 오히려 이것이 자본주의가 가져오는 생산력 증대에 대해 마르크스가 가장 문제 삼은 점입니다.

 자본가는 특별잉여가치를 획득하고자 상품을 최대한 싸게 만들려고 노동자가 '효율적으로' 일하게 하려고 합니다. 즉, 생산성을 높이려는 것이죠. 이때 효율성은 노동자의 '쾌적함'을 의미하지 않는다는 점이 중요합니다.

 자본주의에서 요구되는 것은 노동자를 중노동이나 복잡한 일에서 해방하는 것을 목표로 하는 신기술이 아닙니다. 그들이 무단결근도 하지 않고, 불평도 하지 않고, 지시하는 대로만 일하도록 하는 혁신, 즉 노동자를 효율적으로 지배하고 관리하는 기술입니다. 이런 '일하는 방식의 개혁'이 현대까지 이어져 왔기 때문에 케인스의 예상이 빗나간 것입니다.

 실제로 마르크스는 생산력이 높아질수록 노동자는 편해지는 것이 아니라 자본에 '포섭'되어 자율성을 잃고 자본의 노예로 전락한다고 지적했습니다.

 도대체 왜 생산력의 상승이 자본의 지배 강화로 이어질까요? 여기서 기억해야 할 것은 1장 서두에서 소개한 '물질대사' 이야기입니다. 거기서 인간이 '의식적이고 합목적적인' 노동을 통해 자연과 물질대사를 하고 있다고 이야기했습니다.

 이 의식적이고 합목적적인 노동과정은 크게 두 가지 요소로 나눌 수 있습니다. '구상'과 '실행'입니다['구상'과 '실행'이라는 정리는 마르크스 본인이 아니라 해리 브레이버맨이라는 뛰어난 마르크스 연구자가 <노동과 독점자본>이라는 책에서 <자본론>을 연구하면서 쓴 말입니다]

 

p110

 그렇다면 '구상'과 '실행'을 어떻게 분리할 수 있을까요?

 가장 간단한 방법은 생산공정을 세분화하여 노동자들에게 분업을 시키는 것입니다. 옹기 하나가 만들어지기까지 어떤 공정을 거치는지, 각 공정에서 구체적으로 어떤 작업을 어떤 두고와 방식으로 진행하는지, 몇 분이 걸리는지 등을 자본가가 관찰하고, 직인이 각자의 고유한 방식으로 하는 작업을 획일적인 단순 작업으로 분해하는 것입니다.

 

 물론 현대사회에서도 직인만이 만들 수 있는 물건이 있습니다. 하지만 그런 상품들은 애초에 자본주의 생산에서는 요구되지 않습니다. 자본가들이 만들고 싶은 것은 수작업으로 만든 예술적인 옹기가 아니라, 싸고 나름대로 튼튼한 물건입니다. 깨지거나 부서지면 언제든 저렴한 가격으로 교체할 수 있는 대량생산품입니다. 그런 것들은 직인 한 명이 정성스럽게 만드는 것보다 여러 사람이 분업해서 흐름작업으로 만드는 것이 효율도 좋고, 싸게 많이 생산할 수 있습니다.

 자본주의가 확산되면서 가격경쟁의 물결에 휩쓸려 길드는 해체되어 갔습니다. 장사가 안되는 직인들은 폐업하거나 생계를 위해 자본가들의 분업에 동참할 수밖에 없었습니다. 이리하여 길드의 힘은 약해지고, 그만큼 자본가의 힘은 강해졌습니다.

 그 결과 18~19세기 영업의 자유 원칙을 내세운 각국의 입법에 의해 길드의 특권은 폐지되었습니다. 마르크스의 조국 독일에서도 1869년 길드제의 역사는 막을 내렸고, '규칙 없는 자본주의'는 이렇게 해서 형성되었습니다.

 

p112

 애초 노동자가 자신의 노동력을 상품으로 자본가에게 팔아야 햇던 이유는 물리적 생산수단, 즉 생활에 필요한 물건을 만들 수단이 없었기 때문입니다. 그런데 분업이라는 시스템에 편입됨으로써 무언가를 만드는 생산능력마저 잃게 되었다고 마르크스는 갈파했습니다.

 몇 년을 일해도 단순 작업만 할 수 있는 노동자는 분업 시스템 안에서만 일할 수 있습니다(더 이상 자기 혼자로는 완제품을 만들 능력이 없습니다!). 그래서 먹고 살기 위해서는 자본의 지휘 감독과 명령에 따를 수밖에 없습니다. 분업과 협업은 이렇게 자본주의적 방식으로 재편되어 노동자의 주체성을 빼앗아 갑니다.

 게다가 누구나 할 수 있는 단순 작업이기 때문에 공장 밖에는 나를 대신할 사람이 얼마든지 있습니다. 일자리를 잃고 싶지 않다면 꿈을 포기하고 불평불만을 꾹꾹 눌러 참으며 할당량을 달성하기 위해 묵묵히 일할 수밖에 없습니다. 그렇게 되면 점점 더 자본가와의 주종 관계가 강화됩니다. - 자유로운 재량의 여지가 사라진 일터야말로 노동이 고통으로 되는 소외의 원인입니다.

 

p113. 인간다움을 앗아 가는 테일러주의

 구상과 실행을 철저하게 분리한 사례로 20세기 초의 '테일러주의'를 소개하겠습니다. 테일러주의는 미국의 기술자이자 <과학적 관리법의 원리>의 저자 프레더릭 테일러가 주장한 관리법입니다. 테일러는 기계공장에 견습생으로 들어가 기계공, 기술 부장을 거쳐 컨설턴트가 된 인물로, 지금은 미국 경영학의 원조로 여겨집니다.

 테일러는 먼저 생산공정을 세분화하여 각 공정의 동작과 절차, 소요시간을 분석해 공정별 표준 작업시간을 확정해습니다. 작업의 낭비를 철저히 없애기 위해 동작에 따라 체형과 능력 등을 고려해 재배치하고, 전용 공구를 개발하고, 공구와 부품의 위치까지 세밀하게 정했습니다. 즉, 생산의 기술적 조건이 자본가에 의해 근본적으로 바뀐 것입니다.

 또 생산을 계획하고 관리하는 사람과 실제 작업하는 사람을 완전히 분리했습니다. 이는 실제 작업을 하는 사람의 의식을 '정해진 시간 내에 자신의 업무를 완수하는 것'에만 집둥하도록 하기 위해서입니다. 그리고 시간 내에 일을 끝내지 못하면 벌금을 물거나 해고하고, 일정량 이상의 일을 해낸 사람에게는 보상을 하는 차별성과급제도도 도입해 경쟁심을 부추기며 단순노동에 매진하도록 했습니다.

테일러가 이런 일을 한 이유는 그가 제철소에서 일하기 시작한 초창기, 부하인 현장 공원들이 그의 명령을 조금도 듣지 않았기 때문입니다. 한편, 테일러는 자신의 지식과 기술이 '공원들의 지식과 손재주의 총합과는 거리가 멀다'는 것을 통감했습니다. 요컨대 공원들은 그를 우습게 보고 있었습니다.

 이러한 경험을 바탕으로 테일러는 공원들의 지식과 손재주, 즉 구상과 실행을 철저하게 해제하고, 모든 공원이 자신의 지시에 따라 '최대의 노력, 최고의 근면 성실'을 발휘할 수 있는 구조를 고안하고 이를 체계화했습니다.

 테일러는 경영의 개념을 정립한 '과학적 관리법의 아버지'로 불리지만, 테일러주의는 생산에 관한 노동자들의 지식이라는 '코먼(공유재산)'에 울타리 치는 행위에 다름 아닙니다. 생산에 관한 지식과 노하우를 자본이 독점하고, 자본의 편의에 따라 재구성된 생산시스템에 노동자를 강제로 복종시키기 때문입니다.

 그래도 일시적으로 생산성이 높아져 실적 상승의 혜택을 노동자들도 임금인상이라는 형태로 받을 수 있습니다. 그래서 노조 측도 자본에 구상을 빼앗기는 것을 용인해 왔습니다.

 하지만 고도 경제성장 시대가 끝나면 자본은 더 이상 노동자에게 그런 '덤'을 주지 않습니다. 노동자의 입지는 점점 약해지고, 임금도 낮아지고, 노동시간도 쉽게 연장됩니다.

 자본주의는 생산력을 높이면서 노동자의 자율성도, 인간다운 풍요로운 시간도 사정없이 빼앗아 갑니다. 그래서 생산력이 아무리 발전해도 자본주의가 지속되는 한, 케인스가 예견한 여가사회는 결코 실현될 수 없습니다.

 

p116

 1장에서 인간이 상품의 '가치'에 휘둘린다는 이야기를 했고, 2장에서는 '자본의 운동'에 휘둘린다는 이야기를 했는데, 대공업 시대의 노동자는 더 나아가 '기계'에 휘둘립니다. 기계라는 사물과 노동자의 입장이 역적, 전복된다는 의미에서 이것은 바로 생산과정의 '물상화'라고 할 수 있습니다.

 생산과정에서 생동감 있게 움직이는 것은 기계이고, 기계는 "살아 있는 노동력을 지배하고 빨아들이는 죽은 노동"(446/571)이 됩니다. 이렇게 '정신노동'과 '육체노동'의 분리에 기반한 자본의 지배가 완성됩니다.

 

 기계 노동은 신경계를 극도로 피곤하게 하는 한편, 근육의 다면적 작용을 억압하고 심신의 모든 자유로운 활동을 봉쇄힌다. 심지어 노동의 완화조차도 고통의 원천이 된다. 왜냐하면 기계는 노동자를 노동에서 해방하는 것이 아니라 노동을 내용에서 해방하기 때문이다. (445~446/571)

 

 흥미롭게도 이 구절에서는 기계로 인해 노동이 쉬워지는 것조차 노동자에게는 고통의 원천이 된다고 지적하고 있습니다. 왜냐하면 기계가 노동자를 '노동'에서 해방하는 것이 아니라 노동의 '내용'에서 해방하는 것, 즉 내용 없는 단순노동을 강요하기 때문입니다. 내용이 없다는 것은 자신의 손으로 무언가를 만들어 내는 기쁨도, 성취감도, 충실감도 없는, 한마디로 소외된 상태라는 뜻입니다. 그리고 내용이 없으니 언제, 누구와도 대체가 가능하고 노동자의 힘은 점점 약화되는 것입니다.

 자본의 지휘/명령, 즉 경영자의 의도에 따라 노동이 실현될 수밖에 없는 상태를 마르크스는 '자본의 전제(專制)'라고 불렀습니다.

 자본의 전제가 완성되면 비약적으로 향상된 생산력도 모두 자본가의 것으로 나타난다고 마르크스는 말햇습니다. 실제로는 노동자들이 '협동'하여 수행한 노동이 생산력을 높였지만, 그것은 '노동자의 생산력'으로 나타나지 않고 '자본의 생산력'으로 나타납니다. 왜냐하면 노동자들이 자신의 의지로, 자율적으로 협업한 것이 아니기 때문입니다.

노동자가 자동차를 만들 수 있는 것도, 컴퓨터를 만들 수 있는 것도 자본 아래 모여서 그것의 지시에 따라 일하기 때문입니다. 자본의 지휘와 명령 없이는 우리는 더 이상 아무것도 만들 수 없습니다. 이리하여 생산력이 증대될수록 자본의 지배는 오히려 강화된다고 마르크스는 비판한 것입니다.

 

 

p120

 기계의 자본주의적 사용은 한편으로 노동일의 무제한적 연장에 새로운 강력한 동기를 제공하고, 이 경향에 대한 저항을 분쇄하는 방식으로 노동 양식 자체와 사회적노동 유기체의 성격을 변화시킨다. 다른 한편으로 노동자계급 중 이전에 자본의 손이 닿지 않던 계층을 편입시키고 또는 기계가 쫓아낸 노동자들을 하는 일 없게 만듦으로써, 자본의 명령에 복종하지 않을 수 없는 과잉 노동인구를 만들어 낸다. (430/551)

 

 기계가 육체노동을 대신하게 되면 비숙련노동자뿐 아니라 여성과 어린이 등 '이전에 자본의 손이 닿지 않던 계층'도 일할 수 있게 됩니다. 트랙터와 경운기 등의 도입으로 농업의 공업화는 농촌에 과잉인구를 만들어 많은 젊은이가 도시로 향하게 됩니다. 이들을 노동시장에 '편입'시키면 상대적 과잉인구는 점점 더 늘어날 것입니다.

 공장 밖에서 '더 낮은 임금을 받고 일하겠다' '더 열악한 노동조건에서도 일하겠다' '어쨌든 일하게 해 달라'는 사람이 늘어나면 공장 안의 노동자들은 그들에게 일자리를 빼앗기지 않기 위해 필사적으로 더 오래, 더 성실하게 일하게 됩니다.

 하지만 얄궂게도 그들이 필사적으로 일할수록 생산력이 높아져 자본가들이 '그렇게 많이 일해 준다면 지금은 100명 체제로 생산하는데 80명 정도면 되겠네'라고 생각하여, 상대적과잉인구는 더 증가하고 맙니다.

 

 노동자계급 중 취업자들의 과도 노동은 예비군 대열을 팽창시키는 반면, 예비군이 경쟁을 통해 취업자들에게 가하는 압박의 강화로 취업자는 과도 노동을 하지 않을 수 없고 자본의 명령에 복종하지 않을 수 없다. (665/866~867)

 

 이러한 상황은 실업자와 취업자의 분열을 낳고, 단결할 수 없는 노동자는 자본 앞에서 더욱더 힘이 약화됩니다. 힘이 약해지면 저항할 수 없게 되고, 더 많은 '과도 노동'을 받아들일 수밖에 없게 됩니다. 이 끝없는 악순환의 내막과 문제점을 마르크스가 강한 어조로 비판한 것이 다음 대목입니다.

 

 자본주의 체제 내에서 노동의 사회적 생산력을 높이는 방법은 모두 개별 노동자의 희생으로 이루어지며, 생산을 발전시키는 모든 수단은 생산자들을 지배하고 착취하는 수단으로 전환되어 노동자를 부분적 인간으로 불구화하고 기계의 부속품으로 전락시키며, 노동의 고통으로 노동 내용을 파괴한다. 그리고 과학이 자립적 역능으로 노동과정에 합체될수록 노동과저의 정신적 역능은 노동자로부터 소원해지게 된다. 또 이러한 방법과 수단은 노동조건을 왜곡학로, 노동과정에서 극히 비열하고 혐오스뤙 전제 지배에 노동자를 복종시키며, 그의 생활시간을 노동시간으로 전환시키고, 그의 처자를 자본이라는 저거너트의 수레바퀴에 던져 넣는다. (674/878~879)

 

p127

 애초에 사회적으로 그다지 중요하지 않은 일, 당사자조차 의미 없다고 느끼는 고임금 일자리는 오히려 늘고 있습니다. 문화인류학자 데이비드 그레이버는 '불쉿 잡(bullshit job)'이 광고업과 컨설팅업을 중심으로 최근 급속히 증가하고 있다고 지적했습니다.

 쓸데없는 회의, 서류 작성, 쓸데없는 캐치프레이즈 만들기, 매너 교육, 모두 '불쉿 잡'입니다. 이는 생산력이 너무 높아져 무의미한 노동을 억지로라도 만들어 내지 않으면 엘리트들이 주 40시간 이상 일하는 환경을 유지할 수 없는 상태가 되어 간다는 반증입니다. 즉, 케인스의 예측이 빗나간 이유는 자본주의가 무의미한 일자리를 대량으로 만들어 내기 때문이라는 것이 그레이버의 주장입니다.

 무익한 고임금 불쉿 잡이 넘쳐 나는 반면, 사회에 꼭 필요한 필수 노동자들은 열악한 노동조건을 강요당합니다. 이것이 자본주의가 고도로 발달한 현대사회의 현실입니다. 보람 없는 무의미한 노동도, 가혹한 장시간 노동도 삶을 가난하게 만든다는 점에서 동일합니다.

 

p128

 인간이 모든 노동에서 해방되어 일하지 않고도 살 수 있는 사회가 되면 좋다는 뜻은 아닙니다. 마르크스가 원한 것은 인간을 대신해 무엇이든 해 주는 기계나 로봇을 우리가 맥구 한잔 마시며 멍하니 바라보는 그런 미래 사회가 아닙니다.

 왜냐하면, 우리가 반복해서 보았듯이, 그가 무엇보다 문제 삼은 것은 구상과 실행이 분리되어 자본의 지배 아래 사람들의 노동이 무내용화되는 것이기 때문입니다. 인간의 노동이라는 풍부한 '부'를 회복하기 위해 마르크스는 구상과 실행의 분리를 극복하고 노동의 자율성을 되찾는 것을 목표로 삼았습니다. 가혹한 노동에서 벗어나는 것뿐 아니라, 보람 있고 풍요롭고 매력적인 노동을 실현하는 것입니다. 즉, 로봇이나 AI로 '노동' 자체를 없애겠다는 발상은 마르크스의 말을 빌리자면 문제의 소재를 잘못 짚는 것입니다.

 마르크스가 상상하는 미래 사회의 노동자는 '전면적으로 발달한 개인'입니다. 나사만 조이고 돈만 버는 개인이 아니라, 구상과 실행 모두에서 자신의 능력을 발휘하고, 개개인이 자신의 노동력이라는 '부'를 활용하면서 사회 전체의 '부'를 풍요롭게 만들어 가는 것입니다. 그렇게 함으로써 우리는 서로를 지지하면서 자율적으로 살아갈 능력과 감수성을 되찾을 수 있고, 그것이 바로 소외를 극복하는 길이라고 마르크스는 생각했습니다.

 

p142

 자본주의는 진정한 의미의 인간적 부를 빈곤하게 한다고 마르크스는 말했습니다.

 

p144

 자본주의의 끝없는 운동은 일부 국가의 일부 사람에게 유리한 독점적 형태('대토지 소유')로 전 세계를 상품화합니다. 세계화의 결과, 한 국가의 '도시와 농촌의 대립'은 국경을 넘어 확대되고 있습니다. 그런데 자본주의는 가치 증식을 '무한'하게 추구하지만, 지구는 '유한'합니다. 자본은 항상 비용을 '외부화'하는데, 지구가 유한한 이상 '외부'도 유한합니다.

소련 붕괴 이후 자본주의 세계화가 점점 가속되면서 환경 위기 또한 세계화되었고, 이 위기와 무관하게 지낼 수 있는 장소가 지구에는 더 이상 남지 않는 지경에 이르렀습니다. 실제로 일본과 같은 선진국에서도 기후 위기와 영향이 슈퍼태풍과 폭염으로 확실하게 나타나고 있습니다. '물질대사의 균열'은 돌이킬 수 없을 정도로 깊어지고 있습니다.

 

p147

 사회의 물질적 생산력은 일정한 발전단계에 이르면, 그 과정에서 지금까지 움직여 온 기존의 생산관계, 또는 그 법칙 표현에 불과한 소유관계와 모순된다. 이러한 관계는 생산력의 발전 형태에서 그 질곡으로 전화한다. 이때 사회혁명의 시대가 시작된다. (<전집> 제13권 6쪽)

 

 자본주의는 지구환경을 파괴하지 않고는 이미 생산력을 더 이상 발전시킬 수 없습니다. 사적소유와 이윤추구 아래 약탈을 반복하는 시스템에서는 누구의 것도 아닌 지구환경을 지속 가능한 형태로 관리할  수 없습니다. 이는 자본주의가 더 나은 사회발전에 '질곡'이 된 상태입니다.

 인간과 자연의 물질대사 사이의 '회복 불가능한 균열'이 문명을 파괴하기 전에 혁명적 변화를 일으켜 다른 사회 시스템으로 이행해야만 한다고 마르크스가 생각한 것은 이 때문입니다.

 

 

 

p164

 자유투자사회에서 우리는 모든 행위와 선택을 '투자'로 간주하게 됩ㄴ다. 그런 사회의 귀결은 궁극적인 가성비 사회입니다. 결혼의 가성비? 육아의 가성비? 문화의 가성비? 민주주의의 가성비?

 당연히 인생에서 행위 대부분이 자산 형성으로 이어지지 않습니다. 따라서 가성비 사고를 철저히 하게 되면 소통, 문화, 정치 참여, 세상의 많은 활동을 쓸데없는 것으로 여기게 되고, 커뮤니티와 상호부조는 쇠퇴하고 사회의 부는 점점 더 앙상하게 됩니다.

 인생의 가성비를 따지자면 "당장 관 속에 들어가는 것이 가장 좋다"라고 요로 다케시(養老孟司, 1937~)는 비꼬아 말하지만 궁극적으로 삶의 의미 따위는 사라지게 될 것입니다. 여기에서 자본주의에 의한 '영혼의 포섭'이 극에 달한 것입니다.

 

p174

 그 사회가 자본주의인지 아닌지는 정부의 규모나 국유 비율과는 무관합니다. 중요한 것은 자본을 늘리기 위한 잉여가치의 착취가 있느냐 없느냐입니다. 따라서 정부가 작아지고 시장에 맡기면 더 자본주의적으로 된다는 '신자유주의' 발상은 일면적입니다. 실제로 시장이 잘 작동하도록 정부가 적극적으로 개입하는 중국은 신자유주의는 아니지만 세계 최고의 자본주의국가입니다.

 

p176

 자본주의의 본질은 상품의 등가교환 이면에 숨은 노동자 착취에 의한 잉여가치 생산에 있습니다.

 이 문제를 해결하려면 단순히 사유에서 국유로 소유 형태를 바꾸는 것만으로는 충분하지 않습니다. 착취를 둘러싼 문제를 생산수단을 누가 소유하느냐의 문제로만 보고 노동의 문제로 보지 않는다면, 소련과 같은 과오를 범하게 될 것입니다. 자본주의를 극복하는 데 필요한 것은 착취 없는 자유로운 노동의 존재 방식을 만들어 내는 것입니다.

 

p177

 마르크스에게 자본주의에 저항하는 데 중요한 것은 국가권력의 탈취나 정치체제의 변혁이 아니라 경제 영역에서 이 물상화의 힘을 억제하는 것이었습니다. 이렇게 말하면 어렵게 느낄 수도 있지만, 요컨대 상품과 화폐에 의존하지 않고도 살아갈 수 있도록 일상에서 선택의 여지를 넓혀 가는 것입니다.

 

p178

 독일은 사정이 많이 다릅니다. 대학을 4년 만에 졸업하는 사람이 적고, 6년 정도 걸리는 것이 보통입니다. 유학 초기에, 박사과정까지 포함하면 20년 정도 학생인 사람들도 있다는 사실에 충격을 받았어요.

 왜 그런 일이 가능하냐면, 학비가 무료이기 때문이죠. 그뿐 아니라 한 학기 2만 엔 정도면 전철과 버스를 무제한으로 탈 수 있는 정기권이 붙은 학생증을 받을 수 있습니다. 학생증만 있으면 학식도 몇백 엔으로 먹을 수 있고, 미술관이나 콘서트 할인도 받을 수 있습니다. 그 유명한 베를린 필의 콘서트도 15유로(약 2000엔)로 즐길 수 있습니다. 물론 기숙사비는 한 달에 3만 엔 정도로 저렴하고요.

 대학 등록금뿐만이 아닙니다. 독일에서는 의료도 원칙적으로 무료이고, 간병 서비스도 후합니다. 실업수당, 직업훈련 등도 충실합니다. 그래서 육아에도 돈이 들지 않고, 노후까지 2000만 엔을 모을 필요도 없습니다. 그렇게 되면 싫은 일을 하면서도 필사적으로 버텨야 한다는 압박감이 약해집니다.

 이것이 바로 복지국가 연구자인 괴스타 에스핑아네르센이 '탈상품화'라 부른 상황입니다. 즉, 생활에 필요한 재화(주거, 공원)와 서비스(교육, 의료, 대중교통)를 무상으로 이용할 수 있을수록 탈상품화가 진행된다는 것입니다. 이러한 재화와 서비스는 필요한 사람에게 시장에서 화폐를 사용하지 않고 의료나 교육 등의 형태로 직접 현물급부됩니다.

 현물급부의 결과, 우리는 화폐를 얻기 위해 일할 필요가 줄어들게 됩니다. 복지국가는 물론 자본주의국가입니다. 하지만 탈상품화가 물상화의 힘에 제동을 걸고 있음을 알 수 있습니다.

 

p179. 국유화보다 어소시에이션이 선행했다.

 소련도 교육, 의료 등을 무상으로 제공했기 때문에 복지국가와 차이점을 알기 어려울 수도 있습니다. 하지만 소련에서는 국유화가 먼저 선행되었죠. 반대로 복지국가의 경우, 물상화의 힘을 억제하려는 사회운동이 선행되었습니다. 이 운동을 마르크스는 '어소시에이션'이라고 불렀습니다.

 노동조합, 협동조합, 노동자 정당, 모두 다 어소시에이션입니다. 요즘으로 치면 NGO나 NPO도 해당됩니다. 마르크스가 지행한 것은 소련과 같은 관료 지배 사회가 아니라, 사람들의 자발적인 상호부조와 연대를 기초로 한 민주적 사회였습니다.

 어소시에이션의 중요성은 복지국가에서 제공하는 다양한 서비스의 역사적 형성 과정을 보면 알 수 있습니다. 예를 들어, 실업보험은 노동자 스스로가 임금의 일부를 모아 만든 것입니다. 일자리를 원하는 사람이 많아, 낮은 임금을 받고 일하는 사람이 많아지면 노동운동의 대오는 흐트러집니다. 그래서 일정 수준 이하의 임금으로 일하지 않도록, 실직한 노동자들의 삶을 스스로 지탱할 수 있는 구조가 만들어진 것입니다.

 그 외에도 사회보험이나 연금부터 공공도서관, 공공의료에 이르기까지 모두 그 발단으로 거슬러 올라가면 노동조합, 이웃 상호부조 조직, 협동조합 등의 실천이 있습니다. 자본의 힘 앞에서 사람들이 자신의 삶을 지키고 풍요롭게 하기 위해 상호부조 시스템을 자발적으로 만들어 냈던 것입니다.

 요컨대 이 모든 것이 탈상품화를 위한 어소시에이션 운동이었으며, 그것이 20세기에 들어서면서 노동자들 자신이 아니라 국가가 세금을 사용해 보편적 형태로 국민에게 제공하게 된 것입니다. 즉, 어소시에이션 운동은 국유화를 당과 관료가 추진했던 국가자본주의와는 순서가 반대입니다. 보편적 서비스로서 국유화는 어소시에이션이 발전한 다음에 이루어졌습니다.

 어소시에이션이 경제의 기초에 있기 때문에 생활보장의 모든 것을 국가의 관리나 개입에 의존할 필요가 없습니다. 예를 들어, 독일에는 최근까지 전국적이고 일률적인 법정최저임금이 없었습니다. 독일에서는 노동조합이 일본처럼 기업별이 아닌 산업별로 조직되어 있습니다(금속산업노조는 IG금속, 서비사업은 ver,di처럼). 이 산별노조가 각 기업과 산업별로 노사 협정을 맺어 일정한 최저임금을 지키도록 하기 때문에 굳이 국가가 시장에 개입할 필요가 없었습니다.

 어쨌든 물상화와 탈상품화라는 관점에서 보면, 복지국가는 마르크스가 생각한 비전과 겹치는 부분이 있습니다. 어소시에이션이라는 관점에서 보면, 노동조합운동을 금지하고 국유화 아래 관료가 의사결정을 독점하는 소련이나 중국과 같은 '사회주의국가'보다 자본주의 복지국가가 마르크스의 생각에 더 가깝습니다.

 

p182. 기본소득이라는 '법학 환상'

 '국가자본주의'와 '법학 환상에 대한 마르크스의 비판은 오늘날 그 중요성이 더욱 커지고 있습니다. 이러한 환상은 과거에 국한된 이야기가 아니기 때문입니다. 노동운동이 침체되고 어소시에이션이 약화되는 가운데, 국가의 강력한 힘을 이용한 자본주의 개혁안이 다시금 제기되고 있습니다.

 예를 들어, 2000년대부터 인기를 끌고 있는 기본소득(BI, Basic Income)은 '법학 환상'의 상징입니다. 모든 사람에게 화폐를 나눠 주는 법을 만들면 된다는 BI의 발상은 언뜻 보기에 매우 대담합니다. 충분한 돈을 자동으로 받을 수 있다면 굳이 싫은 일을 하지 않아도 됩니다. 좋아하는 일을 하면서 자유 시간도 늘어나고, 풍요로운 삶을 살 수 있다는 것입니다.

 정말이지, BI는 마치 기사회생의 특효약처럼 보일 수 있습니다. 하지만 월 2~3만 엔을 지급받는 대신 연금이나 사회보장비를 삭감당하면 소용이 없습니다. 한편, BI로 매월 10만 엔 정도를 전 국민에게 지급하려면 재원으로 대기업과 부유층에 상당한 부담을 지우게 됩니다.

당연히 자본은 모든 수단을 동원하여 그러한 증세에 저항할 것입니다. 글로벌기업들은 일본 정부가 BI를 위해 높은 세금을 부과하면 회사를 접고 세금 부담이 적은 해외로 도피하겠다고 협박할 가능성이 높습니다. 그렇게 되면 세수는 줄고, 주가는 떨어질 것입니다. 이것이 자본의 위협, '자본 파업'입니다.

 자본은 국가를 넘어 좋아하는 곳, 좋아하는 것에 투자할 자유를 갖고 있으며, 이 자유가 이동하지 못하는 노동자와 국가에 대한 자본의 권력과 우위의 원천이 되고 있습니다. 이 자유를 방패 삼아 '자본 파업'을 발동하려는 것입니다. 그래서 BI를 도입하려면 국가가 이 자본 파업을 이겨 내야 합니다. 그러기 위해서는 상당한 힘의 사회운동이 뒷받침해 주어야 합니다.

 하지만 만약 사회운동 진영에 그 정도의 강력한 힘이 있다면 국가가 화폐를 나눠 주는 것 외에 다른 사회변혁의 길을 추구할 수 있을 것입니다. 예를 들어, 의료, 고등교육, 보육, 돌봄, 대중교통 등을 모두 무상화하여 탈상품화하는 것입니다.

 그런데 애초에 BI라는 제안이 나온 배경에는 노동운동이 약화되고, 불안정 고용과 저임금 노동이 증가하고 있다는 점을 들 수 있습니다. 노동운동에 의존할 수 없으니, 그 대신 국가가 화폐의 힘으로 국민의 삶을 보장해 주자는 것이 BI입니다.

 물론 매달 손에 쥘 수 있는 돈이 늘어나면 노동자들의 생활에 여유가 생기고, 노동자계급의 힘이 강해질 수도 있습니다. 하지만 이런 방식은 생산의 존재 방식에는 손을 대지 않기 때문에 자본이 가진 힘을 약화시킬 수 없습니다. 그렇기 때문에 BI를 요구하는 세력이 얼마나 힘을 가지고 자본 파업에 맞설 수 있을지는 미지수입니다.

 앞서 말했듯이 BI에 담긴 사고방식은 화폐가 힘을 가진 현재의 상황을 상당히 소박하게 전제하고 있습니다. 그렇다면 우리가 BI를 도입한다 할지라도 상품과 화폐의 힘에 계속 휘둘리지 않을까요? 물상화의 힘은 전혀 약화되지 않습니다.

 이에 반해 물상화의 힘을 억누르려고 한 마르크스는 화폐와 상품이 힘을 갖지 않는 사회로의 변혁을 목표로 삼았습니다. 물론 이 목표는 화폐의 힘을 아무리 사용해도 달성할 수 없습니다. 화폐의 힘에서 자유로워지기 위해서는 화폐 없이 살 수 있는 사회의 영역을 어소시에이션의 힘으로 늘리는 수밖에 없습니다.

 

p184. 피케티와 MMT의 사각지대

 BI와 비슷한 '법학 환상'은 <21세기 자본>의 저자이자 프랑스 경제학자인 토마 피케티의 세제 개혁안도 공유하고 있습니다. 사실 피케티도 최근 들어 '사회주의'를 표방하는데, 그의 방식은 소득세와 법인세, 상속세를 대폭 인상해 과감한 재분배를 실현하는 것입니다. 예를 들어, 소득세와 상속세의 최대 세율을 90퍼센트 올리고, 이를 재원으로 삼아 모든 성인에게 일천수백만 엔씩을 지급하자고 제창합니다. 물론 그런 재분배가 이루어지면 서민들의 생활이 안정되고 풍요로워질 것입니다.

 하지만 이런 대규모 증세를 싫어하는 자본 측이 필사적으로 저항할 것은 불 보듯 뻔합니다. 피케티의 설명에는 BI의 경우와 마찬가지로 자본 파업에 맞서 이런 대담한 개혁을 할 수 있는 힘이 어디서 나오는지 불분명합니다.

 결국 피케티와 같은 양심적인 엘리트들이 사회 전체를 위한 제도를 톱다운방식으로 설계한다는 '법학 환상'은 잘 작동하지 않습니다. 자본 파업을 이겨 낼 수 있는 어소시에이션의 힘을 키워야 하는데, 피케티가 제안하는 세제 개혁을 지지하는 운동이 애초에 어떻게 일어날지 분명하지 않습니다.

 그리고 최근 '반긴축파'의 이론으로 주목받는 현대화폐이론(MMT, Modern Monetary Theory) 에도 같은 문제가 있습니다. MMT는 자국 통화를 발행할 수 있는 정부는 재정적자를 확대해도 채무불이행이 되지 않기 때문에 재정적자일지라도 국가는 과도한 인플레이션이 발생하지 않는 범위에서 지출을 해야 한다는 주장으로 주목을 받았습니다.

 MMT가 주장하는 과감한 재정지출은 정부가 최저임금으로 일자리를 마련하고 원하는 모든 사람에게 일자리를 제공하는 '고용보장 프로그램'과 한 세트로 생활을 보장합니다. 이를 통해 친환경적이고 지속 가능한 사회로 전환하는 데 필요한 일자지를 적극 창출하면서 경제성장을 도모하겠다는 것입니다.

그런데 이러면 잘될까요? 적극적 재정이라 하더라도 공적 투자로 비중이 이동하여 어디에 투자할지를 정부가 결정하는 것은 자본이 여전히 싫어할 것입니다. 투자 여부의 자유로운 판단권을 완전히 장악하는 것이 자본이 가진 권력의 원천이고, 그 힘을 지키기 위해 필사적으로 저항할 것입니다.

 하지만 MMT에서 공적 투자에 의한 자본 관리는 중요합니다. 만약 화폐를 마구잡이로 뿌리는 형태가 되면 사회보장이나 친환경적 일자리뿐 아니라 군비나 불필요한 공공사업에 사용되어 버릴 수도 있기 때문입니다. 혹은 화폐를 뿌리는 과정에서 이권이 생겨 대기업만 이득을 보게 될 수도 있습니다.

 한편, 정부의 시장개입이 커지고 탈탄소, 인권보호 등 규제를 강화할수록 자본의 반발도 거세질 것입니다. 그렇게 되면 자본이 국내 투자에서 철수하기 시작하고, 통화가치가 하락해 인플레이션 압력이 높아질 수 있습니다. 그러면 증세나 금리인상을 통한 경기 긴축이 필요하게 됩니다. 이러한 자본 파업을 이겨낼 수 있는 힘이  MMT의 경제정책에는 없습니다.

 결국 톱다운식으로 대담한 정책을 실행하려고 해도 국가가 자본 파업에 굴복하지 않기 위해서는 상당한 어소시에이션의 힘이 필요합니다. 이때 어소시에이션에 요구되는 것은 노동자들이 무엇에 투자할지, 어떻게 일할지 등을 스스로 결정할 수 있도록 생산의 실권을 쥐여 주는 것입니다.

 물론 그러한 생산 영역의 개혁이 매우 어렵다는 것은 자명한 사실이지만, 그렇다고 해서 자본과 임금노동의 힘의 균형을 바꾸는 근본적인 과제에서 눈을 돌려서는 안 됩니다. 하지만 그 어소시에이션을 만드는 관점이 BI에도, 피케티에게도, MMT도 부족합니다.

 그리고 그것은 우연이 아닙니다. 계급투쟁이 없는 시대에 톱다운으로 할 수 있는 정치개혁이 BI이고, 세제 개혁이고, MMT이기 때문입니다. 이들은 정책이나 법의 논의가 선행되는 '법학 환상'에 갇혀 있습니다.

 이에 반해, 물상화, 어소시에이션, 계급투쟁이라는 마르크스의 독자적 관점을 이러한 정치개혁에 도입하는 것은 사고와 실천의 폭을 크게 넓혀 주며, 이러한 대담한 정책 제안을 실현하기 위해서도 필수적인 전제조건입니다.

 

 p187. 상향식 사회변혁으로

 이사의 논의에서 알 수 있듯이, 마르크스는 위로부터의 설계만으로 사회 전체가 좋은 방향으로 바뀔 수 있다는 사고방식을 버렸습니다.

 이 점은 매우 중요합니다. 왜냐하면 어소시에이션을 통한 탈상품화를 전략의 중심에 두는 것은 러시아혁명 이미지가 강한 20세기형 사회변혁의 비전에 큰 변화를 요구하기 때문입니다. '톱다운' 방식에서 '상향식' 으로의 대전환이라고 할 수 있습니다.

 이 변화는 마르크스 자신의 혁명관 변화에서도 드러납니다. 마르크스 역시 아직 젊었던 <공산당선언>(1848년) 단계에서는 공황을 계기로 국가권력을 탈취하고 생산수단을 국유화하는 '프롤레타리아독재'를 주장했습니다. 그러나 <자본론>에서는 논의의 초점이 크게 달라집니다. <자본론>에서 그런 공황 대망론은 찾아볼 수 없게 됩니다. 

 오히려 이 책의 2장과 3장에서도 보았듯이 마르크스는 <자본론>에서 노동시간 단축과 기능 훈련에 역점을 두었습니다. 혁명의 책인데도 강조한 것은 자본주의 내부에서 일어나는 어소시에이션에 의한 개량입니다.

 이러한 강조점 변화의 배경에는 마르크스가 혁명의 어려움을 인식한 점이 있습니다. 마르크스의 <공산당선언>에는 노동자의 궁핌화와 공황으로 머지않아 혁명이 일어나고, 이를 통해 사회주의 체제를 수립할 수 있으리라고 낙관적으로 생각한 구절이 있습니다. 그러나 1848년 혁명에서 노동자 봉기는 실패로 돌아갔고 자본주의는 되살아났습니다. 1857년 시작된 공황 때도 마찬가지였습니다.

 자본주의의 끈질긴 생명력 앞에서 마르크스는 그 힘의 원천을 탐구할 필요성을 통감했습니다. 그것이 마르크스를 경제학 비판으로 이끌었고, 그 연구 성과인 <자본론>에서 마르크스는 낙관적인 변혁 비전을 버리고 혁명을 향한 자본주의 수정에 무게를 두게 됩니다.

 이때 마르크스는 임금인상보다 노동시간 단축을 중시했는데, 이 역시 물상화라는 관점에서 보면 그 이유를 알 수 있습니다. 시급을 올리는 것도 물론 의미가 있지만, 더 오래 일해 화폐를 얻고자 하는 욕망에서 노동자들은 해방되지 못합니다. 오히려 점점 더 화폐에 의존학 됩니다. 욕망은 무한하기 때문입니다.

 실제로 서구 복지국가는 노동시간 단축을 체택했습니다. 예를 들어 프랑스는 노동시간이 주 35시간입니다. 이러한 노동시간 단축은 노동자에게 여가가 생기게 합니다. 하지만 여가가 생겨도 일요일에 모든 가게가 문을 연다면, 결국 자본주의에 먹히고 말 것입니다. 그래서 일요일에는 식당이나 미술관 등을 제외하고 백화점, 쇼핑몰, 슈퍼마켓 등은 원칙적으로 문을 닫는 것입니다.

 가게가 문을 닫았기 때문에 자본주의적 소비활동을 아예 할 수 없게 됩니다. '윈도쇼핑'은 일본에서 흔히 오해되듯이 돈이 없어 가게 밖에서 브랜드 상품을 구경하는 일을 말하는 것이 아닙니다. 일요일에 가게가 문을 닫았기 때문에 어쩔 수 없이 밖에서 구경하는 것입니다.

 가게가 문을 닫기 때문에 여가를 보내는 다른 방법이 필연적으로 생겨납니다. 카페에서 독서하고, 정치 이야기를 하는 사람도 있습니다. 스포츠 침에서 축구하는 사람도 있습니다. 정원이나 농장을 가꾸어도 좋습니다. 시위나 자원봉사를 하는 사람도 있습니다. 

 바로 탈상품화와 결합된 여가는 비자본주의적 활동과 능력 개발의 터전을 마련해 줍니다. 그것이 또 다른 어소시에이션의 발전과 탈상품화의 가능성을 넓혀 가는 것으로도 이어집니다. 이리하여 가성비 사고로 회수되지 않는 사회적 부의 풍요가 양성될 수 있습니다. 

 

p201

 자연과학과 공동체를 동시에 연구하던 마르크스는 자연의 '지속가능성'과 인간 사회의 '평등'의 강력한 연관성을 깨닫게 됩니다. 

 왜냐하면 부가 편재하면 거기에서 권력과 지배-종속 관계가 생겨나고, 이를 더욱 공고히 하기 위해 인간과 자연에서 약탈이 시작되기 때문입니다. 그 결과 자원이 고갈되면, 이번에는 서로 탈취하는 싸움이 벌어집니다. 그런 상황에서는 도저히 사회의 번영을 실현할 수 없습니다.

 

p237

 마르크스에 따르면 변화의 담당자는 '프롤레타리아트'입니다. 프롤레타리아트라고 하면 남성 공장 노동자를 떠올리는 사람도 많겠지만, 자본주의 아래에서 부정적 영향을 받는 사람은 어떤 의미에서 모두 프롤레타리아트입니다.

 장시간 노동과 저임금으로 피폐해진 필수 노동자, 일자리가 불안정해서 늘 스트레스를 받는 사람, 일에서 보람을 느끼지 못하는 사람도 마찬가지입니다. 일에서도, 일상생활에서도 우리는 시장 논리, 경쟁 원리에 휘둘리고 있습니다. 자본주의 아래에서는 우리는 모두 프롤레타리아트입니다.

 자본주의는 불평등과 분단을 낳고, 약자들로부터 더 빼앗아 왔습니다. 그리고 시장은 화폐가 없는 사람들을 배제합니다. 이 때문에 상품화의 힘을 약화하고, 사람들이 참여할 수 있는 민주주주의 영역을 경제 영역에까지 확대하자고 마르크스는 말합니다. 그것이 바로 모든 것의 '상품화(commodification)'에서 모든 것의 '코먼화(commonification)'로의 대전환을 향한 코뮤니즘의 투쟁입니다.

 

p240

 신자유주의 시대는 끝났습니다. 전염병, 전쟁, 기후 위기 등 만성적 긴급사태의 시대에는 강한 국가가 요청되기 때문입니다. 이 만성적 긴급사태를 방치한다면 국가의 힘이 점점 더 강해져 파시즘과 전체주의로 나아갈 것입니다. 스탈린이나 히틀러의 재림은 물론 허용될 수 없습니다.

 그런 '야만 상태'를 피하기 위해서는 불평등과 착취, 전쟁과 폭력, 식민지지배와 노예제 등의 문제를 직시하고 국가의 폭주에 저항하면서 자유와 평등의 가능성을 필사적으로 사고했던 사상가들의 지혜와 상상력에서 배워야 합니다.

 이것이 바로 우리가 지금 <자본론>을 다시 읽어야 하는 이유입니다.

 

                                 

 

이 책을 읽어보면 옛날 우리의 아이들은 정말로 건강한 환경에서 자라났구나라는 생각이 든다. 청소년 시기에는 친구들과  희로애락을 다 충분히 느낄 수 있는 환경에서 자라나야 한다. 그리고 자연이야말로 가장 위대한 스승이다.

 어떤 에피소드에서는 너무 울컥하고 가슴이 먹먹하여 더는 책장을 넘기기가 힘들다. 

-----------------------------

p31. 빨간 알사탕 하나

 장에 다녀오신 할머니가 모시 손수건에 싸 꼬옥 품고 온 빨간 알사탕 한 알을 입에 넣어주셨다.

 "와아 달다 할무니, 겁나게 다요. 세상에서 젤 달고 맛있다아."

 볼이 불룩한 알사탕을 빨며 나는 황홀감에 소리쳤다.

 처음 먹어 본 알사탕의 단맛은 며칠이 지나도록 내 입 속과 몸 안을 굴러다녔다. 할머니가 잘 익은 대추알을  줘도, 붉은 홍시랑 몰캉한 다래알을 입에 넣어줘도 "아 거시기 알사탕 참 달고 맛있었는디라" 온통 알사탕 생각뿐이었다.

 신식 알사탕의 강렬한 단맛은 나를 완전히 사로잡았고, 혓바닥을 물들인 빨간 색소만큼이나 진득하니 나를 끌어당겼다. 

 흰 눈이 내리고 문풍지 바람이 차운 밤, 처마 아래 매달은 대바구니에서 인절미를 꺼내 화롯불에 구워 호호 불어 조청에 찍어 입에 넣어주던 할머니가 그랬다.

 "아가 맛있냐. 수수조청 맛이 어떠냐."

 "달고 맛나요, 근디요 알사탕이 더 달고 맛나요. 최고랑께요."

 문득 할머니가 침묵하는 걸 느끼며 뭔가 잘못됐음을 알아챈 순간, 알사탕 맛을 본 이래의 내 말과 일련의 일들이 스쳐갔다.

 그랬다. 할머니는 곶감이든 떡이든 엿이든 어디선가 선물 받은 그 달고 맛난 것들을 자기 입에 넣지 않고 품고 와 내 입에 넣어주셨는데, "근디 알사탕이 더 달고 맛난디라. 그 빨간 알사탕이..." 흘린 듯이 말해왔던 나는 그만, 구수한 인절미와 달근한 수수조청을 씹으며 울먹였다.

 다른 때 같으면 "아가 울지 마라" 품에 안아주실 텐데, 울먹이는 나를 기냥 두고 구부정히 마주 앉아 아무 말도 없는 할머니가 낯설고 멀어지고, 할머니와 나 사이의 어떤 끈이 끊어져 버린 듯 아득했다.

 이윽고 할머니가 "아가, 이리 오니라" 울먹이는 내 등을 쓰다듬으며 물그릇을 들어 마시게 했다.

 "평아, 알사탕이 달고 맛나지야? 그란디 말이다. 산과 들과 바다와 꽃과 나무가 길러준 것들도 다 제맛이 있지야. 알사탕이 아무리 달고 맛나다 해도 말이다. 그것은 독한 것이제. 유순하고 담백하고 부드러운 맛을 무감하게 가려버리제. 다른 맛들과 나름의 단맛을 가리고 밀어내 부는 건 좋은 것이 아니제. 알사탕같이 최고로 달고 맛난 것만 입에 달고 살면은 세상의 소소하고 귀한 것들이 다 멀어져 불고, 네 몸이 상하고 무디어져 분단다. 그리하믄 사는 맛과 얼이 흐려져 사람 베리게 되는 것이제.

 "야아, 할머니, 알겠어라."

 "우리 평이는 겨울이면 동백꽃을 쪼옥 쪼옥 빰시롱 '달고 향나고 시원하게 맛나다' 했는디, 올해 동백꽃 맛은 어쩌드냐아. 나는 말이다, 아가. 네 입에 넣어줄 벼꽃도 깨꽃도 감자꽃도 아욱꽃도 녹두꽃도 오이꽃도 가지꽃도 다 이쁘고 장하고 고맙기만 하니라. 이 할무니한텐 세상에서 우리 평이가 젤 이쁘고 귀한 꽃이다만 다른 아그들도 다 나름으로 어여쁜 꽃으로 보인단다. 아가, 최고로 단 것에 홀리고 눈멀고 그 하나에만 쓸려가지 말그라."

 나는 고개를 끄덕이며 할머니 품에 꼬옥 안겼다.

 다음 해 문풍지 우는 화롯불 곁에 할무니, 우리 할무니는 아니 계셨다. 나는 돌아가신 할무니가 그리워 마당으로 걸어 나갔다. 하얀 눈 위에 작은 내 발자국이 총총히 따라왔다.

 

 동백나무 아래 붉고 선연한 동백꽃이 떨어져 있었다. 나는 으스스 떨면서 언 손으로 동백꽃을 한 줌 가득 주워 쪼옥 쪼옥 빨아먹으며 눈길을 걸었다.

 "아가, 맛이 어떠하냐?"

 "순하고 맑고 시려요. 달고 향그럽고 맛나요, 할무니."

 

p54

 성서는 복음서라는데, 나에게 성서는 울음의 책이었다. 호세 신부님과 함께 더듬더듬 성서를 읽어나갈 때 내 가슴에 박히는 건 눈물과 탄식과 수난과 죽음이었다. 그랬다. 세상의 큰 울음을 통하지 않고는 복음을 들을 수가 없는 것이었다. 울음이야말로 복음이었다. 눈물이야말로 은총이었다.

 가난하고 불운하고 슬픈 눈을 가진 예수. 그는 고난받으면서도 사랑이 제일이라고, 사랑이 처음이자 전부라고, 사랑이 없다면 아무것도 아니라고 하는 것이었다. 애통하고 분노하고 울면서도, 죽음보다 강한 사랑으로 '다 이루었다' 기꺼이 죽어간 예수가 좋았고, 눈물의 사제인 호세 신부님이 좋았다.

 

p57. 빗속의 등불들

 가을비를 앞두고 다들 벼 수확에 쫓겨서 부지깽이도 나설 만큼 분주한 때였다.

 일손을 구하지 못한 어머니는 혼자 겨우 벼를 베어 논바닥에 뉘어놓고는 묶지도 못하고 돌아왔다. 급히 저녁을 지어 먹고 다시 논으로 나가 볏단을 묶어 세우는데, 꾸물거리는 하늘에 천둥번개가 치고 비가 쏟아져 내리기 시작했다. 애써 베어 둔 벼가 빗물에 잠겨 들고 있었다. 탈진한 어머니는 벼를 묶어 세우느라 안간힘이었다.

 들녘은 어둡고 빗줄기는 거세고 발은 푹푹 빠지고 나락은 젖어 무겁기만 했다. 애가 탄 나는 어찌해 볼라고 볏단을 붙들고 힘을 써 봤으나 이렇게 작고 약한 내가 원망스럽고 아부지 없는 서러움이 차갑게 파고들었다.

 그때 멀리서 희미한 불빛이 일렁였다. 불빛들이 나를 향해 다가오자 나는 도깨비불인가, 더럭 겁이 났다. 어둠 속에 점점 커지는 불빛 사이로 "가스파르!" 부르는 소리가 들려왔다. 쏟아지는 빗발을 뚫고 등불과 낫을 든 흰옷의 행렬이 보였다. 동강공소에 다니는 저 건너 마을 형 누나들과 어른들이었다.

 동네 사람들도 친척들도 이런저런 나름의 일들로 도울 여력이 없었는데, 우리 집 사정을 아는 신자들이 비가 쏟아지자 서로 소식을 들리고 의견을 모아 여기 먼 마을까지 나선 것이다. 남편을 잃고 홀로 된 젊은 엄니가 이 작은 논 세마지기에 다섯 아이 생계를 걸고 사는 걸 알기에, 자기들 수확을 뒤로 한 채 십리 밤길을 달려온 것이다.

 어머니와 신자들이 서로 부둥켜 안고 인사를 나누고 일렁이는 횃불 아래 비에 젖은 얼굴들이 빛나고 있었다.

 "하이고 장해라. 엄니랑 벼를 다 베어놓았구나이."

 그러더니 논바닥의 나락을 세워 짚으로 묶고, 볏단을 지고 논두렁에다 옮겨 둥글게 쌓고, 함께 성가를 부르며 날랜 손길로 일을 해나가는 것이었다.

 차가운 빗속에 몸에 돋는 소름과 하얀 입김, 가슴을 데우는 뜨거운 온기, 어둠 속에 일렁이는 등불과 노동의 춤사위 같은 긴 그림자, 빗소리를 타고 울리는 성가 소리...

 일을 마치고 어두운 밤길로 점점이 멀어져 가는 등불을 바라보며 어머니와 나는 빗줄기 속에서 성호를 그었다.

 

p75. 나의 첫 요리

 나의 첫 번째 요리는 여덟 살 때, 그러니까 그날 정오에, 느닷없이 해버렸다.

 모내기를 앞두고서 동네 일손을 구해 우리 논에 써레질을 하는 날이었다.

 "일손은 잘 멕여아지야. 작은아들, 오늘 나 좀 도와주시제."

 엄니가 뜨끈한 가마솥에 쌀밥을 안쳐두고 매콤새콤한 서대회 감을 손질해 살강(선반)에 올려두는 사이, 나는 동강양조장에서 막걸리를 받아다 찬물에 담가두고, 갯벌 바다가 어부네에 가서 갓 잡은 커다란 갯장어 두 마리를 대바구니에 담아  끙끙 이고 왔다.

 "애썻다. 인자 아궁이에 불을 지피그라. 불티 안 날리게 은근히 때야 쓴다이."

 "걱정 마시씨요. 싸릿가지랑 솔잎으로만 곱다시 불 땔께라."

 엄니는 부뚜막 위에 된장 한 그릇, 조선파 한 다발, 어슷이 썬 무우, 여린 호박잎이랑 들깨 순이랑 토란 줄기, 절구에 굵게 빻은 고춧가루랑 마늘이랑 생강, 부엌 시루에서 기른 숙주 한 바구니를 가지런히 준비해 두고선 큰 도마를 꺼내 내 다리만큼이나 굵은 갯장어를 다듬고 토막 치기 시작했다.

 그러다 갯장어가 꿀틀, 한순간에 무서운 일이 벌어졌다. 엄니의 손에서 붉은 피가 뿜어져 나왔다. 몸서리가 치고 난 얼어붙어 버렸다.

 으음, 엄니가 신음을 토하더니 한참이나 감은 눈을 번쩍 뜨고 작으나 단호한 목소리로 나를 보며 말했다.

 "평아, 정신 차리자. 바가지에 물을 떠라. 여기 손에 부어라. 잘혔다. 방에 가 횟대에 걸어둔 옷 내오니라. 이 치마랑 저고리 벗기고 입혀라. 되었다."

 "엄니.... 얼굴에 피..."

 나는 엄니가 쓴 머릿수건을 풀어 후다닥 물에 적셔 이마와 볼에 튄 피를 닦았다. 엄니 얼굴빛이 창백해지고 입술이 파랗게 떨려 더럭 겁이 났다. 엄니는 피 흐르는 손을 감싸 위로 치켜든 채 우뚝 서너디 말했다.

 "평아, 내 말 잘 들어라. 물이 끓으면 이 장어를 넣어라. 솥뚜껑이 들썩이고 김이 오르면 여그 된장과 파를 넣고 호박잎과 야채를 넣어라. 마지막에 고춧가루랑 양념을 넣어라. 간을 잘 잡아야 쓴다. 서대회는 고루 잘 무치고 막걸리 식초는 논에 가져가서 마지막에 넣어라. 알겄냐. 다들 일 나갔을 테니 논밭에 가서 작은 엄니나 아랫집 순덕이 누나를 찾아라. 엄니가 급한 일로 출타했다 허고 늦지 않게 일손들 밥 내가그라. 알았지야, 평아, 해낼 수 있겄지야?"

 나는 아직 부들부들 떰시롱 애써 씩씩하게 대답했다.

 "알았어라, 다 해낼께라. 근디 엄니 혼자 가실라고라..."

 엄니는 팔꿈치 아래로 피가 뚝뚝 떨어지는 손을 움켜쥔 채 날랜 걸음으로 마당을 질러 멀리 떨어진 면 소재 의원으로 가는 것이었다.

 혼자 남겨진 나는 겁에 질려 아무 생각도 나지 않고 귓속에서 잉잉잉 벌이 날고 가슴에 우두두 말이 달리고 엄니의 피 묻은 얼굴만 아른거렸다. 나는 물을 한 바가지 떠서 마시고 찬물로 얼굴을 씻었다. 그리고 타닥타닥 가마솥이 끓을 때, 엄니가 불러준 순서대로 기억을 불러내며 장어 요리를 시작했다.

 "하이고 하느님, 울 엄니 살려주씨요. 울 엄니가 안 불쌍하요. 아부지 델꼬 가 불더니 울 엄니까지 뭔 죄다요. 좀 살려주시씨요."

 울며 기도하며 엄니가 맡긴 요리를 마쳤다. 그러고는 숨이 차도록 달려나가 아랫집 순덕이 누나를 찾았다.

 "누나 얼러 씼으씨요. 바쁘요이."

 나는 논흙투성이인 누나에게 두레박 물을 막 부어주며 재촉했다. 부엌으로 와서 국 맛을 본 누나가 둥그래진 눈으로 나를 바라봤다.

 "옴마야, 간이 딱 맞네. 맛나게 끓였네잉. 엄니가 한 거보다 평이가 더 맛있게 해부렸네이."

 누나는 속도 모르고 내 머리를 쓰다듬어주었다.

 "밥 늦겄소. 싸게싸게 챙기잔께라."

 누나와 나는 고봉밥을 담고 김치를 썰고 국통과 그릇을 날래게 챙겨 논가 키 큰 버드나무 아래 밥을 차리고 일손들을 불렀다.

"엄니는 으디 가고 평이랑 순덕이냐?"
"아 공소에 신부님이... 그 눈 파란 신부님이 급하게 불러서라."

 나는 애써 둘러댔다.

 "하야, 귀헌 장어국이네. 나가 오늘 뭔 복이다냐아."
 "하이고야 맛나네. 간도 딱 맞고 입에 착착 감기네잉."
 "흐미, 요 새콤매콤 달근한 서대회 맛 좀 보소. 씨원한 동강 막걸리랑. 이 맛에 나가 여그 살제잉. 아 행복지다."
 "하여튼 니 엄니 음식 솜씨는 천하제일이여."

 나는 엄니가 빈 자리에 마치 내가 우리 집안의 가장이나 되는 양 뒷짐을 지고 힘을 담아 말을 했다.

 "맛나게들 많이 많이 드시씨요. 우리 논에 정성 좀 많이 들여 주씨요잉."

 어른들이 하하하 웃으면서 나를 놀리고 순덕이 누나도 "아따아따, 쫌 있으면 장가 보내달라겄다야" 호호호 웃음을 날렸다.

 나는 집에 돌아와 설거지를 마치고 엄니를 기다렸다. 해가 저물녘에야 엄니가 핼쓱한 얼굴로 작아져서 돌아왔다. 기름 떨어진 호롱불처럼 힘이 하나도 없는 목소리였다.

 "평아, 이른 대로 했느냐?"
 "예, 걱정 마씨요. 다 잘 되었써라."

 나는 잽싸게 방으로 달려가 요를 펴고 베개를 놓았다. 그리고 핏자국이 말라붙은 옷저고리를 벗겨주었다. 자리에 누운 엄니가 눈을 감고 신음하더니 하얗게 마른 입술로 더듬거렸다.

 "손은 붙였다. 스무 바늘쯤 꿰맸다. 피를 많이 흘려 도중에 어질했으나 다 잘되었다. 감사하다. 오 하느님, 성모님..." 그러고는 스르르 잠에 들었다.

 나는 살금살금 들락거리며 내가 아파 누웠을 때 엄니가 해준 것들을 떠올리며 수건을 적셔 이마의 땀을 닦고 따끈한 물로 발을 닦고 팔 자루를 데워 배 위에 얹었다. 그리고 엄니의 낡은 기도문을 펼쳐 읽으며 울먹였다.

 엄니가 깨어났을 때 솥 안 더운 물 위에 놓아둔 장어국과 밥을 내왔다. 벽에 기대앉아 상을 받은 엄니가 나를 한참 쳐다보더니 "많이 컸네..."하셨다. 나는 머쓱한 데다 시린 마음이 들킬세라 "아따 얼른 수저나 뜨씨요" 해버렸다.

 엄니는 따끈한 장어국을 맛보더니, 밥을 말더니, 점점 빠르게 드시는 거였다.

 "맛나네, 잘했네. 아들 밥상을 다 받아보네... 속없이 맛있네."

 밥을 다 드신 엄니는 또 잠이 들었다.

 울 엄니가 크게 베인 손을 움켜쥐고 핏방울 떨구며 홀로 먼 황톳길을 걸어가던 꿈같이 어질하고 절박했던 그날 이후, 나에게 요리쯤은 아무것도 아니었다.

 예기치 않은 어느 날, 준비도 연습도 없이 맞닥뜨려야 하는 사건이 벌어지면, 울며 기도하며 내가 할 수밖에 없는 일이 주어지면, 그렇게 간절한 마음으로 꼭 해내야만 하는, 내 인생의 모든 것이 그날 정오에 시작되었다.

 생각할 때마다 아뜩하고 목이 메이는 나의 첫 요리, 내 인생의 첫 요리.

 

p98

 나는 홀로된 울 엄니의 젊음을 먹고 눈물을 먹고 기도를 먹고 어서어서 자라났는데, 엄니의 가르침대로 엄미가 바쳐준 사랑의 힘으로 이렇게 자라났는데, 엄니한테 정말 잘하고 싶었는데, 한 번은 자랑이고 싶었는데, 한 번도 그러지 못해서... 이제는 그럴 수도 없어서... 엄니 미안해.

 

p100

 다음 날부터 산과 들과 바닷가를 누비며 꽃씨를 받으러 다녔다. 고이고이 받은 꽃씨들을 종류별로 한지 봉투에 넣고 꽃 그림을 그리고 꽃 이름을 쓰고, 지끈으로 묶어 서랍에 넣어두었다.

 고광꽃 참나리 분꽃 앵꽃 꿩의다리 초롱꽃 패랭이 봉선화 솔체 접시꽃 백일홍 금낭화 붓꽃 하늘매발톱 도라지꽃 구절초 채송화 과꽃 치자 동백꽃 산국화 작약 할미꽃 해당화... 하나하나 봉투가 채워질수록 내 가슴도 부풀었다.

 

 

p179 흰 고무신 한 켤레

 우리 집 댓돌 위엔 늘 커다란 흰 고무신 한 켤레가 단정히 놓여 있었다.

 어머니는 아침이면 살아생전의 아버지가 신던 흰 고무신을 깨끗이 닦아 댓돌 위에 가지런히 올려놓고 논으로 밭으로 품앗이를 나가셨다.

 학교에 다녀오면 맨 먼저 날 반기는 건 아버지의 흰 고무신이었다. 나는 등에 비껴 맨 책보를 풀어놓고 마루에 걸터 앉아 흰 고무신에 작은 발을 가만히 넣어보곤 했다. 고무신은 내 두발을 포개 넣어도 남을 만큼 컸다.

 그 해는 가뭄이 심해 다들 보릿고개 넘기가 힘들었다. 나는 속없이 먹어도 먹어도 허기지고 어지러웠다. 해당화가 붉게 피어 향기를 날리던 날이었다. 어머니는 아버지의 흰 고무신을 씻어 댓돌 위에 놓아두고 멀리로 돈을 벌러 떠나셨다.

 학교에 다녀오면 엄마가 없었다. 텅 빈 집안이 처음으로 무서웠다. 밤이면 뒷산에서 여우 울음소리가 들리고 막내 여동생은 대숲 바람 소리에도 내 작은 품을 파고들며 엄마 엄마 부르다 잠이 들곤 했다.

 댓돌 위에 늘 희게 빛나던 고무신은 하루하루 흙먼지에 빛바래 갔다.

 가을 운동회를 마치고 공책 세 권을 상으로 받아 들고 풀 죽은 걸음으로 집으로 왔다. 마당에 들어서니 댓돌 위 고무신이 하얗게 빛나고 있었다. 엄마다!

 엄니이~ 소리치며 달려가 방문을 열었다. 엄니가 목화꽃처럼 웃고 계셨다. 깨끗이 씻긴 막내는 엄니 품에서 카스텔라 빵을 볼이 미어지게 물고 있었다. 엄니는 긴 머리를 말아 비녀를 꽂던 쪽 찐 머리를 짧게 잘라 파마를 했고 볼위 야위어선지 더 쓸쓸해 보였다.

 어머니는 매일 아버지의 고무신을 닦아 댓돌 위에 놓았다.

 "아부지가 집에 돌아오면 양복이랑 구두를 벗고 말이다, 이 흰 고무신을 신고 흙마당을 거닐 때가 젤 좋다고 웃곤 했지야. 집안에 어른의 흰 고무신 한 켤레가 놓여있어야 든든 안 하냐아."

 사흘 뒤 엄니는 서둘러 가을걷이를 마치고 다시 떠나야 했다. 엄니를 배웅하러 나간 우물가 정자나무 아래에서 동생은 엄니에게 안 떨어지려고 울며 몸부림을 쳤다. 나는 동구 밖 넘어 신작로를 걸어가는 엄니의 뒷모습이 안 보일 때까지 막내의 손을 꽉 쥐고 울지 않았다.

 눈물 젖은 동생을 데리고 걸어오는 골목길이 이렇게 길고 먼지 처음 알앗다. 집에 오자마자 동생 얼굴을 씻기고 방에 데려가 뉘었다. 학교 간 누나는 아직 오지 않았고 어두워 오는 집안에 나 혼자였다.

 나는 마루에 걸터앉아 엄니가 깨끗이 닦아놓고 간 흰 고무신에 가만히 발을 넣었다. 발등에 물방울이 툭툭 떨어졌다.

 계절이 흐르고 첫눈이 내리고 학교를 마치고 집으로 돌아왔다. 흙먼지에 뿌옇던 고무신이 댓돌 위에 하얗게 빛나고 있었다. 엄마다! 나는 한달음에 뛰어가 문고리를 당기며 울음 섞인 목소리로 엄니이~ 불렀다. 없었다. 방안이 썰렁했다. 막내만 혼자 집을 보다 아기 노루처럼 잠들어 있었다.

 나는 슬픔과 배반감에 입술을 깨문 채 한참을 서 있었다. 어린 막내 동생도 엄니가 그리웠던 것이다. 그래서 고무신을 하얗게 닦아 놓았던 것이다.

 나는 밖으로 뛰쳐나갔다. 골목을 지나 들길을 지나 방죽길을 숨이 터져라 내달렸다. 눈물이 차가웠다. 돌멩이를 집어 들고 들판으로 하늘로 바다로 내던졌다. 새 떼가 날아오르며 갈대밭이 몸을 떨었다. 나는 못 견디게 쓸쓸하고 슬퍼져서 황톳길을 따라 걷고 또 걸었다. 

다음 날 아침 나는 흙마당을 쓸고 얼굴을 씻고 아버지의 흰 고무신을 깨끗이 닦아 댓돌 위에 놓아두었다. 그러고는 아무도 없을 때면 마루에 앉아 살며시 내 작을 발을 고무신에 넣어보곤 했다. 어서어서 내 발이 커져서 아부지 고무신에 맞기를, 흰 고무신을 신고 웃으며 걷는 듬직한 아들이 되고 오빠가 되기를 소망하며.

 

 

 

 

 검찰개혁을 시작한 조국. 그의 실패의 발자취를 다룬 내용.

언젠가는 다시 시작될 검찰개혁의 쓴약이 되기를.

-------------------

p31

 조국 수석은 평생 학자로 살아왔지만 민정수석실 업무 특성을 바로 파악했다. 불과 한 시간 남짓 이뤄지는 나의 보고에도 바로 적응하고, 의사결정도 매우 빠른 상사였다.

 

p32

 처음 민정수석실 근무를 시작했을 때, 조국 수석은 점심시간에 혼자 나갔다가 한참 지나서 들어오곤 했다.

 "수서님, 어디 다녀오시나요?"
 "구내식당에 다녀오는 길입니다."
 "왜 혼자 다녀오셨어요?"
 "황 국장도 개인적인 점심 약속이 있을 것 같아 불편하게 하지 않으려고 혼자 먹었습니다."
 "수석님께서 업무에 집중하실 수 있도록 보좌하는 것이 제 일입니다. 잘 보좌하기 위해서는 수석님의 뜻을 잘 알아야 하는데 워낙 업무가 바쁘셔서 의중을 들을 기회가 없어서 걱정입니다. 앞으로 점심 약속이 없으시면 식사를 저랑 같이 하시는 게 좋겠습니다. 그리고 수석님께서 혼자 구내식당에서 식사를 하시면 제가 수석님을 소홀히 모신다고 욕먹습니다. 혼자 점심을 드시러 가시는 것은 저를 도와주시는 것이 아니라 '나쁜 보좌관'을 만드시는 것입니다."

 그 이후 우리는 함께 점심을 먹었다.

 

p34

  일 이야기 외에는 대부분 책에 관한 이야기를 나누었다. 조국 수석은 청와대에 근무하면서도 교수 재직 시절 출간했던 책 2권의 개정판을 내기도 했다. 주 6일 근무다 보니 딱 하루 쉬는 휴일에 집필로 휴식을 대신했다. 몸은 물론 머리도 하루쯤은 다 내려놓고 쉬시라고 여러 번 부탁 아닌 부탁을 드렸지만, 책을 읽고 쓰는 일이 휴식과 다름없다는 대답만 들었다.

 조국 수석이 출간한 책들을 읽은 독자라면 익히 알고 있겠지만, 조 수석은 법학자 출신답게 정확한 기록이 몸에 밴 사람이다. 특히 수석의 기억력은 따라올 사람이 없었다. 드라마 <이상한 변호사 우영우>에 등장하는 우영우처럼 포토그래픽 기억력의 소유자였다. 그래서 다른 말을 하기 어려운 상사였다. 그런 그가 윤석열 검찰이 앞뒤 잘라내고 왜곡한 사실들로 사냥을 당했으니 그 정신적 고통은 짐작하기조차 어렵다.

 

p39

 2017년 7월 18일 청와대 페이스북에는 '청와대 민정수석실의 수상한 장비 철거 작전'이라는 동영상이 올라왔다.

 

청와대 민정수석실로 올라가는 계단 앞에 '계단 가림막'과 '검색대'를 철거하는 장면이었다. 언뜻 평범한 검색대처럼 보이지만, 자세히 보면 철제 난간 사이마다 설치해 종이 한 장도 빠져나가지 못하도록 막은 가림막이었다. 검색대 옆에 있는 커다란 철제 장비는 특수용지를 감지하는 센서였다. 박근혜 정부 민정수석실이 설치한 것들이었다. 이것을 처음 발견해 철거를 제안한 사람이 바로 나였다. 청와대에 들어올 때부터 있었던 것이었기에 무심코 지나다녔지만 '저게 왜 있지?'라는 의문이 들어 여러 사람에게 물어 용도를 확인한 후 조국 수석에게 철거를 제안했다. 

 박근혜 정부 민정수석실은 모든 문건을 작성할 때 반드시 특수처리된 용지를 사용하도록 했다고 한다. 이 용지를 들고 검색대를 통과하면 경고음이 울린다. 최순실의 남편이자 박근혜 전 대통령의 보좌관 출신인 정윤회가 비선 실세라는 문건이 언론에 유출된 직후, 당시 민정수석이었던 우병우의 지시로 이런 시설물과 장비를 설치했던 것이다.

 

p49

 민정수석실에서 가장 미안한 마음을 가진 사람들은 문재인 대통령의 자제들이었다. 다른 특수 관계인들보다 자제들에 대해서는 더욱 엄격했다. 어려운 점을 듣기보다, 그것이 무엇이든 하지 않는 것이 최선임을 주지하다 보니 그들이 할 수 있는 일이 거의 없었다고 해도 과언이 아니다. 뭘 하지 못하도록 하는 게 민정수석실의 주된 역할이다 보니 자제들은 친인척을 관리하는 민정비서관실의 특별감찰반 자체를 불편해했다고 한다. 자제를 관리해야 하는 특별감찰반의 고충도 많았다고 들었다. 양쪽 다 하소연할 데가 없는 사람들끼리의 불편한 만남이었을 것이다. 아마도 문 대통령의 자제들에게 '우리 아버지가 대통령'이라는 사실은 자랑스러움에 앞서 속박이었을 것이다.

 

p50

 조국 수석에게는 제자가 많았다. 제자뿐 아니라 사회 곳곳에 조 수석과 인연이 있는 사람들이 많았다. 청와대에서 일하고 싶은 사람들이 여러 경로를 통해 조 수석에게 추천을 부탁하기도 했다.

 어느 날 조국 수석이 아무개를 아느냐고 내게 물었다. 나도 잘 알고 있는 후배였다. 이 후배가 정부 부처에 있는 국장하고 수석을 방문한다고 하는데 어떻게 하면 좋을지 물었다. 나는 단호하게 만나지 말라고 했다. 시기도 문제거니와 사적인 친분으로 민정수석을 만난다면 사전 점검이 필요하다고 했다. 사실 수석의 질문에도 '만나면 안 되는 일'이라는 답이 담겨 있었고, 당연히 내가 그렇게 말할 것을 수석도 알고 있었다. 보좌관인 내가 정리해주기 바란다는 요청을 담은 질문이었다.

 나는 아무개에게 전화했다. "사적인 인연으로 공직의 관례를 깰 수는 없으니 필요한 내용에 따라 민정수석실 선임 행정관이나 담당 행정관을연결해주겠다. 그리고 민정수석에게 사적인 친분을 이용해 면담 요청을 하지 말라"고 경고했다.

 조국 수석은 청와대에서 일하고 싶어 하는 제자가 있을 경우 자신이 청와대에 있는 동안에는 추천하기 어렵다고 명확하게 선을 그었다. 하지만 사람 마음이란 것이 서운함이 우선인지라 조 수석을 원망하는 사람들이 있었고, 이런 이야기를 들을 때면 수석도 많이 속상해했다. 내가 당사자에게 전화해서 "민정수석이라는 자리는 청와대의 공직기강과 인사 추천의 문제까지도 점검해야 하는 자리다. 제자를 추천할 경우 제대로 역할을 하지 못하고, 영이 서지 않는다. 이해를 바란다"고 말하며 문재인 정부의 성공을 위해서 감수해달라고 요청했다. 

 청와대에서 원하는 업무 능력을 갖추고 있던 한 제자는 조국 수석이 청와대를 떠난 이후에야 행정관으로 일하게 되었다. 그는 청와대에 온 이후 업무 기여도, 전문성 모두 인정받았다. 다만 조국의 제자라는 이유로 청와대 입성이 늦어졌을 뿐이다.

 

p54

 박근혜 정부에서 임명한 황찬익 감사원장이 임기를 마치고 퇴직할 무렵이 되자 후임 감사원장을 추천받고 검증을 시작했다. 문재인 대통령은 법률가, 특히 판사 출신이 좋을 것 같다고 생각하셨던 것으로 기억한다. 그리고 많은 사람이 후보군으로 추천되었다. 하지만 검증을 통과하지 못했다. 황당한 일이었다. 내가 직접 검증 업무를 담당한 것이 아니다 보니 계속 '검증 중'이라는 말만 들었는데, 알고 보니 20명 넘게 검증했다고 한다. 한국 사회 지도충 사람들의 민낯을 확인하는 것이기도 했다. 

 결국 감사원장 후보로 지금은 국민의힘 국회의원이 된 최재형으로 결정되었다. 최재형은 검증 과정에서 특별한 문제는 없었지만, 지나치게 보수적인 생각을 가진 사람이었다. 그리고 그는 보수 언론과 원자력발전 분야 주요 인사와 친인척 관계였는데, 이 점이 나중에 문제를 일으킬 소지가 있었다. 나는 조국 수석에게 다음과 같이 의견을 드렸다. "본인은 물론이고 주변 인사들이 너무 보수적인 분들이어서 문재인 정부 국정전찰에 동의하지 못할 것입니다. 그리고 지금은 그렇지만 나중에 보수 인사들의 영향을 받아 어떻게 변할지 모릅니다."

 판사 출신 인재 후보군의 인력 풀이 좁다는 것이 문제인데다가 인사 추천은 민정수석실의 몫이 아니었다. 민정수석실을 검증만 할 뿐 최종 결정을 하는 단위는 아니었다. 조국 수석도 여러 걱정을 했지만 인재 후보군의 한계로 더 이상 감사원장 후보자를 찾기 어렵다는 이야기를 듣고 있었다. 매우 보수적이지만 공직자로서는 구체적으로 드러나는 흠결이 없어 중요 기관장을 마냥 공석으로 비워둘 수도 없는 상황이었다. 이런 상황과 맞물려 최재형 후보자는 감사원장이 되었다. 하지만 이후 나의 우려는 결국 현실이 되고 말았다.

 

p101

 청와대 민정수석실 초대 반부패비서관은 검사 출신의 박형철 변호사였다. 그는 대검찰청 공안2과장, 서울중앙지방 검찰청 공공형사부장을 거쳐 2013년에는 윤석열 당시 수원지검 여주지청장이 팀장을 맡았던 국정원 대선 개입 수사팀의 부팀장을 맡았다. 이 때문에 박근혜 정부에 의해 좌천되어 부산고등검찰청 검사로 근무하다가 2016년에 검찰 조직을 떠나 변호사로 활동하고 있었다. 아마도 이런 이력 때문에 일찌감치 반부패비서관으로 천거되었던 것 같다.

 내가 후일 조국 민정수석에게 박형철 비서관이 임명된 경위를 물었더니 조국 수석은 "글쎄요, 저보다 하루 늦게 임명되긴 했지만, 제가 민정수석에 취임했을 때 이미 반부패비서관으로 내정되어 있더군요."라고 답했다. 박형철 비서관은 나중에 '유재수 감찰 무마' 사건, '울산 하명 수사' 사건, 특감반원 김태우 사건 등 윤석열 검찰이 문재인 대통령과 청와대를 겨냥한 사건들에 직/간접적으로 관여하게 된다.

 

 박형철 비서관은 초대 특감반장으로 공안검사 출신인 이인걸 변호사를 추천했다. 청와대 내에서 공안검사 출신을 임명하는 것에 대한 반대의 목소리가 터져 나왔었다. 특히 민정수석실 내부 반발도 심했다. 박형철 비서관은 "비선관이 선임행정관 하나도 추천 못 합니까?"라며 조국 수석에게 항변했다. 조국 수석은 결국 박형철의 손을 들어줬다. 결국 공안 검사 출신을 특검반장에 임명함으로써 특감반은 박형철 비서관의 완벽한 통제권 안에 들어갔다. 만약 그때 다른 선택을 했다면 뒤에 언급할 특감반 사태를 일어나지 않았을지도 모른다. 

 조국 수석은 검찰 출신인 그가 청와대에 들어와서 행여 고립될까 봐 염려해 그를 많이 배려하라고 나에게도 여러 차례 당부했다. 그러나 박형철 비서관과 나는 늘 부딪혔다. 내가 보기에 그는 문재인 정부의 국정철학에 동의하지 않았다. 그는 검/경 수사권 조정이 본격화되자 드러내놓고 검찰의 입장을 옹호했다. 나는 2019년 8월 이른바 '조국 사태' 당시에 그가 윤석열을 위해 움직였다고 생각한다. 사태 초기 청와대는 중요한 국면마다 박형철을 통해 전해 들은 검찰의 입장에 기울어 오판을 거듭했다. 내 생각에, 박형철은 결국 검사였고 윤석열의 사람이었다.

 

 박형철 비서관은 같이 일해보니 스마트한 사람이었다. 업무능력도 좋았고, 운동도 잘했다. 처세에도 능했던 그는 검사직을 떠났음에도 검찰의 이익이 침해될 우려가 있을 때에는 늘 검찰 입장을 대변했다. 조국 수석의 배려를 이용하여 늘 교묘하게 검찰의 이익을 청와대 내부에서 관철하려고 애썼다. 그는 퇴근길에 윤석열 중앙지검장이 살고 있는 아크로비스타로 가서 함께 술을 마셨다고 자랑하고는 했다. 그때는 그러려니 했지만, 나중에 조국 법무부 장관 후보자에 대한 수사가 시작되고 난 다음 그 얘기를 떠올리고는 등골이 서늘했다.

 그런 박형철 비서관에게 수사권 조정이나 검찰 과거사 문제는 결코 소홀히 할 수 없는 일이었을 것이다. 그는 검찰의 수사 역량이 얼마나 뛰어난지, 그에 비해 경찰이 수사를 얼마나 못하는지 등을 틈나는 대로 민정수석실 사람들에게 설파했다. 박형철은 내가 청와대에서 나오고 나서도 한참 동안 민정수석실에서 일했다. 조국 수사 국면에서 그는 "조국이 사모펀드의 주인이라고 큰 소리를 쳤다"고 했으며 "검찰이 아무 근거 없이 그랬을 리 없다"고 말했다고 한다.

 나는 이 얘기를 전해 듣고 쓴웃음이 났다. 조국이 민정수석을 그만둔 것이 2019년 7월이었으니, 박형철 비서관이 조국 수석과 함께 일한 기간은 만 2년이 넘는다. 그동안 박형철은 도대체 조국의 어떤 모습을 보았던 것일까. 내가 지켜본 조국 수석은 결코 공적 영역에 사적인 이해를 끌어들이는 사람이 아니었다. 실제 수사 결과도 조국 수석이나 정경심 교수 모두 사모펀드의 주인이 아닌 것으로 밝혀졌다.

 검찰 출신인 박형철 비서관이 검찰 입장이나 이해에 공감하는 것까지는 불가피했다고 본다. 그렇더라도 조국이 민정수석의 자리에서 사모펀드를 운영했다는 누명에 대해 단호하게 "그럴 사람이 아니다. 신중해라. 증거를 잘 살펴봐라."라고 말하지는 못할망정 "검찰이 아무 근거 없이 그랬을 리 없다"고 하다니.

 박형철 자신도 검찰에 의해 울산 하명 사건과 유재수 사건으로 두 건이나 기소당했다. 이 두 사건은 이른바 '조국 사모펀드'설을 입증하지 못한 윤석열 검찰이 조국을 옭아매려고 캐비닛을 뒤져 만든 사건들이다. 당시 박형철 비서관은 검찰이 의도하는 대로 진술했다고 들었다. 그러고도 자신 또한 기소를 면하지 못했다.

 엘리트 검사로 살아온 박형철은 자신이 보피했던 민정수석의 범죄를 캐기 위한 검찰 수사에 피조사자로 출석했을 때 기분이 어땠을까. 검사 앞에 앉아 추궁을 당하고, 일일이 변명할 때 어떤 심정이 들었을까. 조사에 적극 협조했는데도 기소되어 피고인이 된 심정은  또 어땠을까. 어쩌면 그 또한 회한을 느끼고 있을 것이다. 윤석열 검찰의 조국 수사는 옳은 일이었는가? 윤석열 검찰의 당신에 대한 수사는 올바른 일이었는가?

 

p139

 나는 2019년 1월에 청와대 근무를 마치고 그해 3월부터 민간기업의 상임감사로 재직하고 있었다. 재무구조가 부실한 기업에 대한 채무 재조정을 비롯해 신규 자금 지원을 통한 기업 정상화, 비핵심 자산 매각 등 사업 재편, 핵심 자산 매각 등을 통한 한계기업 구조조정을 전담하는 기업이었다.

 2019년 5월 어느 날, 정책실과 협의할 일이 있어서 청와대에 갔다가 조국 민정수석에게 인사차 집무실에 들렀다. 조국 수석이 반갑게 맞아주더니 "저녁에 식사 약속 있나요?"라고 물었다. 웃으면서 대답했다. "수석님이 물으시니, 있던 약속도 없어야죠."

 단둘이 마주 앉아 저녁을 먹는 자리에서 조 수석이 고민을 털어놓았다. "대통령께서 거듭 법무부 장관직을 권하시네요. 요즘 그 문제로 고민 중입니다." 어느 정도 예상했던 일이었다. 조 수석은 이미 오래전부터 문재인 대통령과 '검찰개혁'에 대해 의기투합한 사이였고, 문재인 정부가 출범한 이후에는 중요한 국정과제인 권력기관 개혁을 도맡아서 청사진을 그린 민정수석비서관이다. 대통령이 그가 이 일을 끝까지 마무리해주기 바란다는 것은 불문가지였다.

 내가 물었다. "수석님은 어떻게 하고 싶으신가요?" 조 수석은 "나야 학교로 돌아가고 싶죠." 그의 대답도 역시 내가 예상했던 대로였다. 그는 결코 권세를 탐하지 않는 천상 학자였다. 문재인 정부 초대 민정수석을 맡았던 것도 일종의 '공익 근무'였다. 그런데 바로 그 '공익에 대한 책임감'이 그의 발목을 잡았던 것 같다. 문재인 정부의 권력기관 개혁에 깊이 관여해 온 처지인데 일을 하다 말고 혼자 마음 편하게 학교로 돌아가는 것이 못내 마음에 걸렸을 것이다.

 "다른 분들과도 상의하셨을 텐데, 뭐라고들 하던가요?"
 "노영민 실장을 비롯해 몇 분과 상의했는데, 다들 '도망칠 생각하지 말고 문재인 정부와 운명을 함께해야 한다'더군요. 장관을 맡기 싫으면 내년 총선에 부산 출마라도 해야 한다네요."
 "죄송하지만, 저도 같은 말씀밖에 못 드리겠네요. 학자로 살고 싶은 수석님의 마음과 무관하게 수석님은 이미 문재인 정부의 개혁을 상징하는 인물이 되셨습니다. 함께 책임을 지실 수밖에 없습니다."

 그리고 말을 이었다.

 "그런데 제 생각에는 법무부 장관직을 맡으시는 것보다는 총선 출마가 나을 것 같습니다. 지금 방배동에 살고 계시니 서초갑에 출마하시면 좋겠습니다. 아시다시피 강남/서초는 자유한국당의 텃밭인데, 수석님이라면 해볼 만합니다. 더불어민주당의 불모지에 출마하셔서 내년 총선의 '선봉장' 역할을 하시면 문재인 정부에 큰 기여를 하시는 셈이죠. 출마하신다면 선거 준비는 제가 다 하겠습니다."

 10여 년 전 <검찰개혁을 말하다>라는 토크 콘서트에서 당시 교수였던 조국 본인이 "검찰개혁을 시도하는 법무부 장관은 검찰로부터 거센 저항과 보복을 당할 것"이라고 예언했었다. 지난 수십 년 동안 검찰이 무소불위의 권력을 휘둘러 온 것을 생각하면 당연히 예상할 수 있는 일이었다. 조국 수석은 장관직 수락은 그런 위험을 감수한 결단이어야 했다. 그 와중에 벌어질 살벌한 권력투쟁을 조국 수석 같은 '선비'가 감당할 수 있을지 걱정이 앞섰다. 그래서 나는 총선 출마를 권했다.

 검찰은 자기 조직의 기득권을 지킬 의사나 능력이 없다고 판단되면 조직의 수장인 검찰총장도 하극상으로 몰아내는 집단이다. 2012년 11월 당시 한상대 검찰총장은 회삿돈을 횡령한 혐의로 불구속 기소된 최태원 SK 회장을 봐주려다가 검찰 안팎의 거센 반발에 부딪혔다. 한 총장은 상황을 반전시키기 위해 '대검 중수부 폐지'를 제기했다가 검찰 내부의 조직적 반발을 초래해 임기가 9개월이나 남은 상태에서 후배 검사들에 의해 밀려났다.

 이 과정에서 맹활약했던 자가 서울중앙지검 특수1부장이었던 윤석열이다. '사람에 충성하지 않는다'는 것은 본인의 앞날에 방해가 되는 자는, 검찰 권력에 방해되는 자는 누구든 봐주지 않겠다는 말이었던 것이다. 하물며 검찰 선배도 아닌 학자 출신의 법무부 장관에게 검찰이 더욱 거세게 저항할 것은 불 보듯 뻔했다.

 조 수석이 대답했다. "다른 분들도 대부분 총선 출마를 권하시더군요. 그런데 저는 학교로 돌아가고 싶어요. 임명직 공무원이 되면 휴직을 하는 거라서 임기를 마치고 학교로 돌아갈 수 있는데, 총선에 출마해서 선출직 공무원이 되면 학교에 사표를 내야 합니다. 나로서는 학자로서의 정체성이 소중합니다. 그래서 출마는 하기 싫습니다."

 그 말을 들으니 더 이상 출마를 권할 수 없었다. 당시 상황으로는 출마를 안 하는 유일한 방법이 입각入閣하는 것이었다. 당/청 모두 조국 수석이 전국 단위의 이목을 집중시킬 수 있는 인물이라고 생각하고 있었다.

 

 

p176

 2013년 10월 19일 서울고등검찰청에서 열린 국회 법제사법위원회의 서울고검 및 서울중앙지검 등에 대한 국정감사에서 당시 새누리당(현 국민의힘) 소속이었던 정갑윤 의원이 증인으로 출석한 윤석열 당시 수원지검 여주지청장을 불러냈다. 윤석열 지청장은 당시 채동욱 검찰총장의 지시로 '국정원 댓글' 사건 특별수사팀장을 지휘하다가 "수사에 외압이 있었다"고 폭로해 이른바 '항명 파동'에 휩싸여 있었다.

 "증인은 혹시 조직을 사랑합니까?"
 "예, 대단히 사랑하고 있습니다."
 "사랑합니까? 혹시 사람에 충성하는 것은 아니에요?"
 "저는 사람에게 충성하지 않기 때문에 제가 오늘도 이런 말씀을 드리는 겁니다."

 이날의 어록 "사람에 충성하지 않는다"로 검사 윤석열은 '의로운 강골 검사의 표상'이 되었다. '국민 사기극'의 시작이었다. 이후 2016년 11월 '박근혜 정부의 최순실 등 민간인에 의한 국정농단 의혹 사건 규명을 위한 특별검사'(국정농단 특검)의 수사팀장을 맡게 되면서 윤석열 검사는 일약 '국민 영웅'으로 떠올랐다.

 이런 인기에 힘입어 문재인 대통령은 2017년 5월 19일 윤석열 대전고검 검사를 서울중앙지검장으로 발탁해 임명했다. 조국 수석에게 들은 이야기지만 윤석열은 정권 출범 초기부터 이미 서울중앙지검장에 내정되어 있었다고 한다. 그리고 그 당시 민정수석실 진용은 채 짜여 있지 않아 충분한 검증을 하지 못했다. 민정수석실에는 조국 민정수석 외에 극소수만 근무하는 상황이었다. 대통령선거 이후 즉시 임기를 시작한 촛불 정부의 운명이었다.

 게다가 문재인 정부 출범 직후 '검찰 돈봉투 회식' 사건이 터지면서 공석인 검찰총장 인선을 비롯해 검찰 인사를 서둘러야 했다. 이런 상황이다 보니 윤석열의 중앙지검장 임명은 속전속결로 진행되었다. 당시 민정수석실에는 장관 내정자들에 대한 검증 수요가 넘쳐 이미 국민 영웅이 된 윤석열을 제대로 검증할 여력이 충분하지 않았던 것이 사실이다. 이후 윤석열은 적폐 청산 수사를 주도하며 검찰 특수부 패밀리의 수장이 되어갔다. 만약 문재인 정부도 다른 정부와 같이 정상적인 인수위 과정을 거쳐 출범했다면 많은 것이 달라졌을 것이다.

 두고두고 아쉬운 점은 서초동에서 윤석열 대망설이 나오고 있었으나 윤석열은 그럴 그릇도 못 되거니와 특수부 측근 몇 사람이 꿈꾸는 허망한 지라시일 거라고 간과하고 넘어갔다는 것이다. 이것이 윤석열 검찰 쿠데타의 시작이었을지도 모른다.

 그로부터 2년 후 윤석열이 검찰총장 후보로 지명되었을 때 뉴스타파가 그의 변호사법 위반 혐의를 폭로했지만, 귀담아듣는 사람은 많지 않았다. 그만큼 다들 '의로운 검사'에 목말라 있었다. 온 국민이 속았고, 대통령도 속았다.

 

 그러나 윤석열의 본색이 드러나는 데에는 그리 오래 걸리지 않았다. 2019년 7월 25일 검찰총장으로 취임한 그는 한 달 후인 8월 27일 문재인 대통령이 지명한 조국 법무부 장관 후보자에 대한 대대적인 압수수색을 벌였다. 자신의 상급자인 박상기 법무부 장관에게 보고하지도 않고 기습적으로 벌인 일이었다. 대통령이 임명한 검찰총장이 대통령의 인사권을 부정하고 정면으로 반기를 든 것이다.

 사실 윤석열의 검찰총장 발탁 과정에서 그의 권력욕과 포악한 본성, 각종 비리 의혹 등을 알고 우려했던 이들이 없었던 것은 아니다. 특히 법조계에서 오랫동안 그를 봐왔던 이들은 그의 검찰총장 임명에 반대 의견을 제출했었다. 청와대 민정수석실에서 공직기강비서관으로 근무했던 최강욱 비서관도 그중 한 명이었다. 공직 후보자에 대한 인사 검증을 담당했던 최 비서관은 윤석열이 부적격자라는 보고서를 두 번이나 제출했었다.

 사실 조국 민정수석도 같은 의견이었다. 일각에서는 조국 수석이 윤석열을 천거하지 않았느냐고 오해하는 이들도 있지만, 그렇지 않다. 조국 수석은 내심 당시 김오수 법무부차관과 봉웅 대검찰청 차장을 검찰총장 후보로 꼽고 있었다고 나중에 말했다.

 그러나 문재인 대통령은 결국 윤석열을 검찰총장으로 임명했다. 오늘날 이를 두고 대통령을 비난하는 이들이 많다는 것을 잘 알고 있다. 윤석열에 의해 조국 일가가 '멸문지화'를 당하는 것을 가까이에서 지켜본 나도 솔직히 대통령에게 원망스러운 마음이 들 때가 없지는 않다. 그렇지만 당시 사정을 어느 정도 이해한다. 내 생각엔 문재인 대통령이 윤석열을 검찰총장으로 발탁하게 된 데에는 네 가지 배경이 있다.

 첫째, 윤석열의 '돌파력'이 검찰개혁에 도움이 될 것이라는 판단이었다. 수십 년 동안 기득권 카르텔을 형성하고 자신들의 기득권이 위협받는 경우 집단으로 저항하는 검찰을 내부에서부터 제압하려면 윤석열 같은 인물을 검찰 조직의 리더로 세워야 한다고 생각하는 이들이 많았다. 게다가 당시에 윤석열은 "사람에게 충성하지 않는다"라는 어록과 적폐 청산 수사등으로 대중적 인기를 누리며 '국민 검사'로 칭송받고 있었다.

 둘째, 검찰개혁에 대한 윤석열의 적극적인 태도였다. 2019년 당시 검찰총장천위원회가 추천한 후보는 윤석열(서울중앙지검장), 김오수, 봉욱, 이금로(수원고검 검사장) 등 4명이었다. 이 중 윤석열이 검찰개혁에 대해 가장 강력한 의지를 밝혔다. 조국 수석은 각 후보자 면담에서 윤석열 후보자만 수사/기소 분리에 적극 찬성이었고, 다른 후보자들은 소극적이었다고 했다. 최강욱 비서관에 따르면, 윤석열은 검/경 수사권 조정을 넘어 '수사와 기소의 분리'에도 동의했으며 고위공직자범죄수사처도 당연히 신설되고 권한이 강화되어야 한다고 주장했다고 한다. 얼마 안 가서 드러났듯이, 검찰총장이 되기 위해 본심과 전혀 다른 새빨간 거짓말로 대통령을 속인 것이다.

 셋째, 대통령 주변에 이미 윤석열과 친교를 맺고 그를 적극적으로 천거하는 인물들이 있었다. 이들이 대통령의 판단을 흐리게 만들었다. 이미 널리 회자되고 있는 인물들이어서 여기서는 굳이 실명을 언급하지 않겠다(좀 언급해 주지 아쉽네). 이들도 지금은 윤석열에 대한 배신감을 토로하고 있다.

 마지막으로 조국 수석이 좀 더 적극적으로 반대하지 못했기 때문이다. 대통령의 의중을 읽은 조 수석은 그럴 수 없었다. 조국 수석은 김오수 차관이 적임자라고 생각했다. 하지만 전임자인 문무일 검찰총장이 광주 출신으로 관례상 다시 호남 출신인 김오수 차관을 검찰총장에 임명하는 것은 정치적 부담이 컸다. 후보군 중에 강력하게 천거할 만한 사람이 없었던 것도 조국 수석이 반대하기 힘든 이유였다. 문재인 대통령도 마찬가지였을 것이다. 아직도 지역감정으로 인한 정무적 고려가 필요한 시점이라는 것이 안타깝다.

 권력의 실세라고 불리는 사람들이 윤석열과 술자리를 가진다는 이야기도 돌았다. 그중 일부는 윤석열에게 민주당 대선 후보로 나서야 한다는 말도 했다고 한다. 평소 이들은 민주당에 대선 후보가 많아져야 정권 재창출이 가능하다고 주장하던 사람들이었다. 윤석열에게 치열한 경쟁을 거쳐 대선 후보가 된다면 적폐 청산 수사로 국민에게 인기가 많으니 당신도 못 할 이유가 없다고 부추긴다는 소문이 무성했다. 

 윤석열의 대권에 대한 꿈은 어쩌면 야당이 아닌 '민주 진영'에서 심어준 것일지도 모르겠다. 윤석열이 대놓고 그런 뜻을 내비치지는 않았지만, 안희정, 박원순 등 유력 대선 후보들의 문제가 잇따라 불거지자 대권이 꿈이 아닐지도 모른다고 생각했을 것이다. 남은 방해물은 '조국'이 유일했다. 그래서 조국 법무부 장관 후보자 인사 청문회 과정에서 문제가 제기되자마자 득달같이 달려들어 조국을 사냥했던 것이다.

 2019년 12월 6일 자 <경향신문>에 <윤석열 "충심 그대로...정부 성공 위해 악역">이라는 제목의 기사가 실렸다.

https://m.khan.co.kr/national/court-law/article/201912060600025#c2b

 

[단독]윤석열 “충심 그대로…정부 성공 위해 악역”

윤석열 검찰총장(사진)이 “문재인 대통령에 대한 충심에는 변화가 없다”면서 “이 정부의 성공을 위해 내가 악역을 맡은 것”이라고 말한 것으로 전해졌다. 검찰은 패스트트랙(신속...

m.khan.co.kr

 유명한 친검親檢 기자 유희곤이 쓴 '단독' 기사였다. 이 기사는 "윤석열 검찰총장이 '문재인 대통령에 대한 충심에는 변화가 없다. 이 정부의 성공을 위해 내가 악역을 맡은 것'이라고 말한 것으로 전해졌다"로 시작한다. 요컨대 윤석열 검찰총장이 딴마음을 먹고 문재인 대통령에 대한 반란을 일으킨 것이 아니라 오히려 문재인 정부의 성공을 위해 욕먹을 각오를 하고 조국에 대한 수사와 '울산 사건'등의 수사를 감행했다는 것이다.

 그러나 이 기사는 황당무계한 '윤비어천가'였다. 이미 윤석열은 노골적으로 야욕을 드러내며 청와대에 칼끝을 겨누고 공공연하게 반란을 도모하고 있었다. 윤석열 일당에 의해 만신창이가 된 조국 전 장관은 2021년 3월14일 자신의 페이스북에 위 기사를 소개하면서 다음과 같이 글을 올렸다.

 당시 이러한 윤 총장의 정치적 언동을 접하면서 옛말이 떠올랐다. '구밀복검' 당시 윤 총장은 대통령을 겨누는 '울산 사건' 수사를 진행하고 있었다.

<iframe src="https://www.facebook.com/plugins/post.php?href=https%3A%2F%2Fwww.facebook.com%2Fkukcho%2Fposts%2Fpfbid0c7seUDFjCUgFe6jCLtyJ2vcMCB4YABvQbmoQkFDiuMnuziyajHTX4wP8M7ZGb9sSl&show_text=true&width=500" width="500" height="779" style="border:none;overflow:hidden" scrolling="no" frameborder="0" allowfullscreen="true" allow="autoplay; clipboard-write; encrypted-media; picture-in-picture; web-share"></iframe>

 

p187

 종편 방송인 채널A는 9월 21일 <"정경심 처음 봤다"던 병원장은 서울대 동기>라는 기사를 보도했다. "정경심 교수가 입원한 병원의 원장이 서울대 의과대 81학번인데, 정 교수도 서울대 영문과 81학번이다"라면서 "하지만 이 병원장은 '정 교수를 이번에 처음 봤다. 다른 환자들과 똑같은 입/퇴원과 진료 절차를 거쳤다'고 설명했다"라는 내용이었다. 채널A는 한 학년에 수천 명씩 다니는 종합대학에서 각각 의과대와 영문과를 다닌 두 사람이 서로 몰랐다는 사실이 정말 기삿거리라고 생각했을까.

https://voda.donga.com/view/3/all/39/1853586/1

 

[단독]“정경심 처음 봤다”던 병원장은 서울대 동기였다

별별뉴스 20190921

voda.donga.com

 

 이런 언론의 취재 경쟁으로 일부 병원에서는 정경심 교수의 치료를 거부하기도 했다. 전쟁 중에도 아군과 적군에 상관없이 치료해야 할 의료인들이 언론 보도가 집중되자 다른 환자의 치료에 방해된다는 이유로 치료를 거부한 것이다. 조국 장관은 정경심 교수가 치료받을 병원을 찾기 위해 애썼다.

 조국 장관의 동생은 넘어져 앰뷸런스를 타고 병원에 입원했다. 의사는 수술이 필요하다는 진료 소견을 가지고 있었고 동생은 수술을 위해 뒷머리까지 삭발했다. 하지만 담당 의사는 의사 출신 검사를 만난 후 수술이 필요 없다고 입장을 바꿨다. 영화 <그대가 조국>에 출연한 동생의 지인은 "찾아가는 병원마다 기자들이 쫓아와서 의료진이 부담스럽다고 환자로 받아주지 않았다"고 울분을 토했다. 

https://www.ytn.co.kr/_ln/0103_201910180431596961

 

조국 동생 "수술 필요 소견서, 검찰 온 뒤 달라져"

[앵커]조국 전 장관의 동생, 조 씨는 YTN 취재진을 만나 ...

www.ytn.co.kr

 

p189

 윤석열 검찰은 2019년 9월 6일 조국 후보자 인사청문회 진행 도중에 전격적으로 배우자 정경심 교수를 기소했다. 조민에게 발그된 봉사 활동 표창장을 정 교수가 위대했다는 혐의였다. 동양대 총장 최성해의 "표창장을 발급해준 적 없다"는 일방적인 주장만을 근거로 피의자 소환 조사도 압수수색도 없이 기소를 감행한 것이다. '검찰개혁을 추진하겠다는 장관의 임명을 막으려는 폭거'라는 비판이 일었다. 조국 장관 관련 온갖 의혹들을 반신반의하던 시민들은 분노하기 시작했다.

 억지 기소로 궁지에 몰린 검찰을 구원해준 것은 다음 날인 9월 7일 자 <조국 아내 연구실 PC에 '총장 직인 파일' 발견>이라는 제목의 SBS 단독 보도였다.

https://news.sbs.co.kr/news/endPage.do?news_id=N1005428668

 

[단독] "조국 아내 연구실 PC에 '총장 직인 파일' 발견"

지금부터는 조국 후보자 관련 소식 이어갑니다. 어젯밤에 청문회가 끝나갈 무렵에 검찰이 후보자 부인 정경심 동양대 교수를 기소를 했습니다. 딸의 총장 표창장을 위조한 혐의입니다.

news.sbs.co.kr

 "검찰이 이 PC를 분석하다가 동양대 총장의 직인이 파일 형태로 PC에 저장돼 있는 것을 발견한 것으로 SBS 취재 결과 확인됐습니다. 검찰은 총장의 직인 파일이 정 교수의 연구용 PC에 담겨 있는 이유가 석연치 않다고 보고 있습니다. 딸 조 씨에게 발행된 총장 표창장에 찍힌 직인과 이 직인 파일이 같은 건지 수사하고 있습니다."

 정 교수가 표창장을 위조했다는 검찰과 최성해의 주장을 뒷받침해주는 이 보도가 검찰에 대한 비판 여론을 순식간에 잠재웠다. 그런데 이 보도는 처음부터 끝까지 허구였다. 총장 직인 파일이 발견된 것은 '연구실 PC'가 아니고 '강사 휴게실 PC'였다. 게다가 이 강사 휴게실 PC는 SBS 보도 3일이나 지난 9월 10일 검찰이 동양대에서 임의 제출받은 것이다. 그 후에도 일주일 동안의 디지털포렌식을 거쳐 9월 17일에야 총장 직인 파일이 발견되었다.

 즉 "정경심 교수 연구실 PC에서 '총장 직인 파일'이 발견됐다"던 SBS의 보도는 파일이 발견된 PC가 틀렸을 뿐만 아니라 발견되기 10일 전의 '예언 보도'였던 것이다. SBS가 '타임머신'을 보유하고 있지 않다면 불가능한 일이다.

https://www.hani.co.kr/arti/society/media/950541.html

 

방심위, ‘정경심 PC서 총장 직인 발견’ SBS 보도 중징계 확정

방송통신심의위원회(방심위)가 ‘조국 전 법무부 장관의 부인인 정경심 동양대 교수의 업무용 컴퓨터에 동양대 총장의 직인 파일이 저장되어 있었다’고 보도한 <에스비에스>(SBS)에 대해 법정

www.hani.co.kr

 어쨋든 SBS의 예언 보도로 인해 정경심 교수의 '표창장 위조'를 사실로 믿는 사람이 많아졌다. 이런 여론이 정 교수의 재판 과정에서 매우 불리하게 작용했을 수밖에 없다. 그러나 SBS는 아직도 이 '예언 보도'에 대해 해명도 사과도 하지 않고 있다.

 

p205

 2023년 봄 이재명 더불어민주당 대표는 부모님의 묘가 훼손되는 수모를 당했다.

https://www.ohmynews.com/NWS_Web/View/at_pg.aspx?CNTN_CD=A0002909211

 

이재명 부모 산소 훼손당해... 사방에 구멍나고 돌 꽂혀

돌 발견한 지관 "무속테러" 주장... 이 대표, 페북에 사진 공개 "무슨 의미인가"

www.ohmynews.com

(나중에 이 행위는 이재명 대표의 문중에서 기 불어넣기라는 식의 물타기 기사가 나왔는데, 말도 안되는 헛소리다. 문중에서 진짜 그런 뜻으로 이런 행위를 했다면 적어도 자식인 이재명 본인에게 미리 알리고 의사를 물었어야 한다. 자식도 모르게 이런 행위를 했다는게 말이 되는가?)

 당시 나는 비슷한 수모를 겪은 조국 수석이 떠올라 더 참담했다. 2022년 조 수석 자택에서 함께 차를 마시며 이야기를 하던 중 수사 과정에서 가장 화났을 때가 언제인지 물은 적이 있었다. 조 수석은 인사청문회 과정에서 있었던 일을 이야기했다.

 다름 아닌 김진태 의원이 조국 수석 부친의 묘지석 사진을 공개했던 일이다. 

https://www.chosun.com/site/data/html_dir/2019/08/20/2019082002253.html

 

野 "2013년 사망한 조국 부친 묘비에 2009년 이혼한 며느리 이름"

野 2013년 사망한 조국 부친 묘비에 2009년 이혼한 며느리 이름

www.chosun.com

 당시 공개된 사진을 보면 묘를 밟지 않고는 찍을 수 없는 구도로 촬영되었다는 것을 쉽게 알 수 있었다. 
 "이렇게 찍으려면 아버님 묘에 올라서지 않고는 불가능하지요?" 조국 수석은 담담하게 말했지만, 화가 사그라들지 않은 눈빛이었다. 조 수석은 그 당시를 떠올리며 격분했었다고 말했다. 돌아가신 아버님께 불효를 저질렀다고 괴로워했다.

 부모의 묘를 훼손하는 것은 남은 가족에게 대놓고 수모와 치욕을 주는 행위나 다름없다. 조 수석과 이재명 대표에게 일어난 일 모두 사람으로서의 도리를 넘어선 것이다.

 저자는 30대에 관상동맥이 막혀서 죽을 고비를 넘긴 후 건강에 관심을 가지게 되었다. 개인이 건강을 회복하는 과정에서 몸으로 경험한 채소과일식의 놀라운 효과를 공유하려는 차원에서 집필한 책이다.

 사실 웬만한 사람들은 이 저자의 말처럼 따라하면 건강이 나빠지진 않을 것 같긴하다.

 저자의 최근작인 <완전배출>은  어딘가 모자란 듯한 내용인데 이 책은 그것보단 좀 충실하긴 한데 그래도 역시 어딘가 좀 모자란 느낌이 들긴 한다. 이론적인 책이라기보다는 개인의 경험을 통한 믿음 같은 것이 책의 처음부터 끝까지를 관통하기 때문에 사실상 이 책의 내용을 따라해보고 나서 개인적으로 효과를 본 사람들은 이 저자를 믿을 것이고 그렇지 않은 사람들은 그냥 참고 정도만 하고 넘어갈 것 같긴 하다.

한약사(이 책 보고 처음 알았다. 한의사, 한약사가 따로 있다는 것을)인 조승우라는 분이 쓴 디톡스에 관한 내용.

채소,과일섭취를 통한 디톡스로 건강을 되찾은 본인의 경험을 바탕으로 쓴 책.

1년 전부터 유튜브를 통해서 알려지기 시작해서 지금은 꽤 지명도를 얻은 것으로 보인다.

디톡스에 관심이 있는 사람 및 고혈압,당뇨와 같은 성인병을 가진 사람들이 참고할 만한 내용.\

이 분의 핵심적인 주장은 음식물을 소화시켜서 완전배출시키는 것이 건강의 비결이며 그러기 위해서는 채식과 과일을 위주로 식단을 구성해야 한다는 것이다.

---------------------------------

p83

 수면제 얘기가 나왔으니 이야기를 안 할 수가 없습니다. 10여 년 전 SBS '그것이 알고 싶다'에서 수면제의 진실에 관한 주제로 방송을 했었습니다. '연예인들의 끝나지 않은 사망 사건'을 다루었는데요. 그 배경에 수면제(졸피뎀Zolpidem)가 있었음을 만천하에 고발했습니다. 탤런트 최진실,최진영 남매와 수 많은 연예인들의 밝혀지지 않은 자살 사건에 대한 이야기였습니다. 최진실씨의 매니저와 지인들은 다음과 같이 말했습니다.

 "그 약이 아니었으면 절대 그런 일이 생기진 않았을 거에요. 내가 먹어보지 않았으니까 부작용을 몰랐다니까요. 알았다면 무조건 막았겠죠."

 방송 제작진은 폭식, 기억상실, 자살 시도 등 이해할 수 없었던 죽음 뒤에 수면제가 있었다고 증언했습니다. 이렇게 위험한 약물을 누구나 쉽게 처방받을 수 있는 이유는 무엇일까요? 보건당국은 이처럼 비극적인 부작용을 초래하는 이 약물을 도대체 어떻게 관리하고 있는 걸까요?

 이런 수면제의 부작용이 계속되자 언제부터인가 수면제라는 이름이 사라지고 슬그머니 '수면유도제'라는 부드러운 이름이 등장했습ㄴ다. 수면제의 부작용을 염려한 제약 회사의 발 빠른 대처인데요 내용은 그대로 두고 이름만 바꾼 것입니다. 여러분은 공장에서 만든 '악마의 약' 수면유도제 말고 천연 수면유도제인 상추를 드시기 바랍니다.

 또한 철분과 엽산 등이 풍부해서 임산부에 특히 좋습니다. 시골 장터에 가면 옛날에 약장수들이 '남자는 정력에 좋고 여자는 피부에 좋고'라며 알약을 팔곤 했는데요, 알약 말고 천연 강장제 상추를 드시기 바랍니다.

 지금은 뭐 외국에서 들여온 소고기가 흔하지만 제가 초등학교 다닐 때만 해도 돈 좀 있어야 소고기(한우)를 먹었는데요, 제 친구 하는 말이 '고기도 먹어본 놈이 먹는다'라며 소금장에 소고기만 계속 먹는 것을 보았습니다. 채소는 일절 먹지 않고 소고기만 먹는 것을 자랑스럽게 뽐냈는데요, 이거 정말 '돈 자랑'은 될지언정 바보 같은 짓입니다. 고기 먹을 때 상추와 깻잎과 마늘을 싸서 먹는 것은 다 이유가 있습니다. 상추와 깻잎 마늘, 이 3종 세트가 소화가 어려운 고기를 분해시켜주기 때문입니다.

 어쩔 수 없이 고깃집을 가시더라도 '샐러드 셀프바'가 있는 집에 가실 것을 추천합니다. 상추와 각종 채소를 가져다 먹을 수 있으니 설사 고기를 드시더라도 상추에 파무침과 마늘과 양파를 가득 넣어 쌈으로 드시면 고기 1인분의 반도 먹기 전에 배가 불러옵니다. 이것은 제 경험입데요, 채소로 배를 채우면 다음 날 아침 배변이 너무 시원합니다. 어제 먹은 파무침과 양파 냄새가 밖으로 배출되는데요, 몸속에서 소화가 완성되어 완전히 배출되었다는 증거입니다. 몸무게는 1kg이 빠져 있습니다. '굶어야 빠진다'가 아니라 '몸 청소를 해야 빠진다'가 정답입니다.

(이 책 완전배출의 핵심적인 내용이 배출을 잘해야 살이 빠지고 건강해진다는 것이고, 그러기 위해선 과일과 채식으로 식단을 바꿔야 한다는 것이다)

 

p208

 저는 개인적으로 '자연을 사랑하는 행위'를 멈추어야 한다고 생각합니다. 간섭하지 말고 내버려 두어야 한다는 뜻입니다. 자연을 사랑한답시고 산이나 공원에 '해충 포집기'를 설치하는데요, 벌레를 그렇게 잡아 가두면 새들은 무엇을 먹고산다는 말입니까? 새들은 나무의 씨앗을 먹고 배설해서 먼 곳까지 식물의 종자를 퍼트리는 역할도 합니다. 새들은 또한 대형동물인 코끼리나 코뿔소의 대변에서 아직 소화되지 못한 씨앗(과육이 남아 있는)을 먹고 그 씨앗을 널리 퍼트림으로써 자연의 순환을 완성합니다.

<1호기 속 수상한 민간인>이라는 기사를 통해 알려지고, <바이든 날리면> 사태의 시발점이며, 대통령 도어스테핑 질의/응답 중에 날카로운 질문으로 윤석열의 심기를 건드려서 파장을 일으켰던 MBC의 이기주 기사의 에세이.

이 책의 에필로그에 이런 구절이 있다.

 '얼마 전 한 강연에 초청받아 갔다가 "기자가 다 그렇지는 않을 텐데 지금처럼 피곤하게 살면 결국 고독하지 않겠냐"라는 기습 질문을 받았다. 예상치 못한 질문에 잠시 말을 할 수 없었다. 돌이켜보면 최고 권력에 대한 취재부터 '바이든 날리면' 사태, 도어스테핑 충돌 같은 연쇄 폭탄이 터질 때마다 나는 고독했다. 후폭풍을 이겨내는 것도 나 혼자 해야 할 몫이었다. 다른 선택지는 없었다.'

 

 어떤 면에서 보면 제대로 된 어른, 제대로 된 사회인이 되기 위해선 고독해지는 것을 피할 길은 없어보인다. 그리고 그 고독한 길을 피하지 않아야만 제대로 된 어른이 될 수 있지 않나 싶다. 

 

 

양자컴퓨터 자체가 아닌 응용분야에 대한 범용 해설서 같은 책.

양자컴퓨터가 과학 및 기술적으로 어떻게 활용될 수 있을 지에 대해서 다루고 있다.

-----------------------

p245

 자연의 지능은 하향식으로 창조되지 않는다.

 브룩스는 갓 태어난 새끼 동물은 곧바로 걸을 수 있도록 프로그램 되어 있지 않다는 것을 깨달았다. 한 걸음 옮길 때마다 계속 넘어지면서 어렵게 배워나가는 것이다. 자연의 키워드는 바로 '시행착오'였다.

 이것은 음악 교사가 재능 있는 학생에게 해주는 조언과 비슷하다. 카네기홀에 서려면 어떻게 해야 하냐고? 방법은 아주 간단하다. 연습하고, 연습하고, 또 연습하는 것이다.

 다시 말해서, 자연의 창조물은 시행착오를 통해 세상을 파악해나가는 일종의 학습기계로서, 실수를 저지를수록 성공에 점점 가까워진다. 

 이것이 바로 '상향식 접근법'으로, 일단 무턱대고 부딪치는 것으로 시작한다. 아이들이 어른을 흉내내면서 세상을 배워나가는 것과 같은 이치다. 예를 들어 갓난아기는 자는 동안 끊임없이 옹알이를 한다. 아이가 자는 동안 소리를 녹음했다가 나중에 들오보면 알 수 있다. 깨어 있을 때 들은 소리를 정확하게 발음할 수 있을 때까지 반복해서 연습을 하고 있는 것이다.

 

p248

 인공지능이 정체기를 겪고 있는 이유는 컴퓨터의 성능이 그 뒤를 받쳐주지 못하기 때문이다. 인공지능뿐만 아니라 학습기계와 패턴인식, 검색엔진, 로봇공학 등도 비슷한 한계에 직면해 있다. 여기에 방대한 양의 정보를 동시에 처리하는 양자컴퓨터가 도입되면 정체 상태를 벗어나 비약적 발전을 이루게 될 것이다. 디지털 컴퓨터는 한 번에 1비트씩 계산하는 반면, 양자컴퓨터는 거대한 큐비트 배열을 동시에 계산할 수 있으므로 컴퓨터의 계산 능력이 떨어져서 풀 수 없는 문제는 더 이상 존재하지 않을 것이다.

 

p252

 단백질 분자의 접힘 문제도 이와 동일한 원리로 해결할 수 있다. 즉, 아미노산의 모든 가능한 배열 중 에너지가 가장 낮은 배열을 찾으면 된다. 이것은 등산 중인 사람이 계곡의 가장 낮은 배열을 찾아가는 과정과 비슷하다. 처음에 등산객은 모든 방향으로 경사진 정도를 확인한 후, 고도가 제일 빠르게 낮아지는 방향을 선택하여 한 걸음 이동한다. 그리고 그 지점에서 조금 전에 했던 행동을 똑같이 반복하여 또 한 걸음 이동하고... 이런 식으로 내려가다가 '어떤 방향으로 움직여도 지금 보다 고도가 높아지는 지점'에 도달하면 그곳이 바로 고도가 최저인 지점이다.

 에너지가 가장 낮은 아미노산 배열도 이와 비슷한 방법으로 알아낼 수 있는데, 구체적인 과정은 다음과 같다.

 일단 작업에 들어가기 전에 문제를 단순화시켜야 한다. 분자 내부에서는 전자와 원자핵의 파동함수가 복잡한 상호작용을 교환하고 있는데, 이 모든 요인을 고려해서 디지털 컴퓨터로 계산한다면 다음 섹에 결과가 나올지도 모른다. 그러므로 결과에 큰 영향을 미치지 않는 사소한 요인들(전자와 원자핵의 상호작용, 전자끼리의 상호작용 등)은 과감하게 무시하는 게 좋다.

 이제 프로그램이 준비되었으면 본격적인 작업에 들어갈 차례다. 첫째, 다양한 아미노산을 이어붙여서 커다란 배열을 만든다. 이것은 단백질의 형태를 흉내낸 '장난감 모형'에 해당한다. 특정 원자들이 결합할 때 형성되는 각도는 주최 측이 제공한 기본정보에 포함되어 있으므로, 이로부터 단백질의 형태에 대한 초기 근사치를 얻을 수 있다.

 둘째, 선택한 배열에서 전하분포에 의한 에너지 결합이 이동하는 방식을 알고 있으므로(이 정보도 기본으로 제공됨), 이로부터 단백질 분자의 총에너지를 계산한다.

 셋째, 선택한 결합을 조금 비틀거나 회전시켜서 동일한 계산을 수행한 후, 이전의 에너지와 비교하여 작은 쪽을 선택한다. 이것은 등산객이 각 지점에서 모든 방향으로 발걸음을 내딛어보는 것과 같다.

 넷째, 에너지가 이전보다 커지는 배열을 모두 버리고, 작아지는 배열만 유지한다. 그러면 컴퓨터는 원자가 이렇게 이동해야 분자의 에너지가 작아지는지 시행착오를 통해 학습하게 된다. 

 마지막으로 아미노산의 배열을 비틀거나 통째로 바꿔서 동일한 과정을 반복한다. 단계마다 에너지가 감소하는 아미노산 배열을 찾아나가다보면, 결국 에너지가 가장 낮은 배열에 도달하게 된다.

 원자의 위치를 계속 바꾸면서 목적지로 접근하려면 엄청난 양의 계산을 수행해야 하는데, 지금의 디지털 컴퓨터로는 꿈도 못 꿀 일이다. 그래서 참가자들은 자잘한 요인들을 과감하게 무시한 채 컴퓨터를 가동하여 몇 시간, 또는 며칠 안에 단순화된 버전의 목적지에 도달할 수 있었다.

 과연 어떤 결과가 나왔을까? 처음에는 한마디로 참담함, 그 자체였다. 컴퓨터가 예측한 분자는 X선으로 알아낸 실제 모양과 비슷한 구석이 하나도 없었다. 그러나 시간이 지나면서 컴퓨터 학습 프로그램이 정교해짐에 따라 결과도 점차 개선되었다.

 지난 2021년에 '구글과 손을 잡고 알파고를 개발했던 딥마인드가 알파폴드라는 인공지능 프로그램을 이용하여 무려 35만 종에 달하는 단백질의 구조를 해독했다'는 뉴스가 터져나왔다. 그뿐 아니라 이들은 학계에 알려지지 않은 25만 종의 단백질까지 새로 발견했다고 한다. 인간유전체 프로젝트에 나열된 단백질 2만 개의 3차원 구조가 밝혀진 것이다. 뉴스에 발표된 목록에는 쥐와 초파리, 그리고 대장균에서 발견된 단백질도 포함되어 있었다. 딥마인드 창업자는 학계에 알려진 모든 단백질을 포함하여 총 1억 개가 넘는 단백질의 데이터베이스를 곧 발표할 예정이라고 했다.

 더욱 놀라운 것은 근사적 방법을 썼음에도 불구하고 최종 결과가 X선 결정학으로 얻은 결과와 거의 일치한다는 점이다. 슈슈뢰딩거 방정식에서 많은 항을 삭제한 채 계산을 수행했는데 실제와 비슷한 결과가 나왔으니, 이들의 근사법은 검증된 것이나 다름없다.

 

p274

 일반적으로 염색체의 길이는 세포가 분열될 때마다 조금씩 짧아진다. 예를 들어 피부세포는 60번쯤 재생된 후 노화를 겪다가 결국 죽은 세포가 된다. 방금 언급한 숫자 '60'을 '헤이플릭 한계Hayflick limit'라 하는데, 세포가 죽는 것은 바로 이것 때문이다. 즉, 세포에는 죽을 때를 알려주는 생체시계가 내장되어 있다.

 

p390

 코펜하겐 해석이나 다세계 해석 말고 또 다른 해석은 없을까? 있다. 주어진 계(고양이)의 파동함수가 주변 환경과의 상호작용을 통해 붕괴된다는 '결어긋남이론decoherence theory'이 바로 그것이다. 즉, 외부 환경은 이미 결어긋남 상태에 있기 때문에, 고양이의 파동함수가 외부환경과 조금이라도 닿기만 하면 곧바로 붕괴된다는 거이다.

 결어긋남이론을 도입해도 슈뢰딩거의 고양이 역설은 간단하게 해결된다. 이 문제에 '역설'이라는 꼬리표가 붙은 이유는 상자의 뚜껑을 열지 않는 한 고양이의 생사 여부를알 수 없기 때문이었다. 전통적인 답(코펜하겐 해석의 결론)은 '뚜껑을 열기 전까지 고양이는 살지도, 죽지도 않은 중첩상태에 있다'는 것이다. 그러나 결어긋남이론에 의하면 고양이의 몸을 구성하는 원자는 상자 속의 공기 원자와 이미 닿았기 때문에 뚜껑을 열기 전에 고양이의 파동함수가 분리되고, 따라서 고양이의 상태도 뚜껑을 열기 전에 둘 중 하나로 결정된다.

 양자역학의 정설로 통하는 코펜하겐 해석에 따르면 고양이의 상태는 상자의 뚜껑을 열어서 관측을 시도할 때에만 분리된다decohered. 그러나 결어긋남이론에 의하면 고양이의 파동함수가 공기 분자와 닿으면서 붕괴되기 때문에, 고양이의 상태는 뚜껑을 열지 않아도 분리된다. 즉, 결어긋남이론에서는 파동을 붕괴시키는 원인이 '뚜껑을 열고 안을 들여다보는 관찰자'에서 '상자 내부의 공기'로 대체되는 셈이다.

 2년간 문재인 대통령의 메시지 비서관을 지냈던 이의 기록. 그 기간 동안 주요한 이벤트에서 연설한 문 대통령의 연설문의 내용들과 그 뒷얘기를 알 수 있다.

 재밋다.

----------------------

p50

 취임 초기부터 추진한 개헌이 국회 문턱을 넘지 못했다. 국회에 제출했지만, 시한 내 처리되지 않았다. 2018년 5월 25일 문 대통령은 안타까움과 송구스러움을 소셜미디어에 이렇게 표현했다.

 

 촛불 민심을 헌법에 담기 위한 개헌이 끝내 무산됐습니다.
 국민과의 약속을 지키지 못해 매우 송구스럽고 안타깝습니다.
 국회는 대통령이 발의한 개헌한의 가부可不를 헌법이 정한 기간안에 의결하지 않고 투표 불성립으로 무산시켰습니다. 국회는 헌법을 위합ㄴ했고, 국민은 찬반을 선택할 기회조차 갖지 못하게 됐습니다. 국회가 개헌한을 따로 발의하지도 않았습니다. 
 많은 정치인이 개헌을 말하고 약속했지만, 진심으로 의지를 가지고 노력한 분은 적었습니다. 이번 국회에서 개헌이 가능하리라고 믿었던 기대를 내려놓습니다. 언젠가 국민께서 개헌의 동력을 다시 모아주시기를 바랍니다.
 진심이 없는 정치의 모습에 실망하셨을 국민께 다시 한번 송구스럽다는 말씀을 드립니다.

 

https://www.facebook.com/moonbyun1/photos/a.263896370383389/1450487375057610/?type=3

 

문재인 - 촛불 민심을 헌법에 담기 위한 개헌이 끝내 무산됐습니다. 국민과의 약속을 지키지 못

촛불 민심을 헌법에 담기 위한 개헌이 끝내 무산됐습니다. 국민과의 약속을 지키지 못해 매우 송구스럽고 안타깝습니다. 국회는 대통령이 발의한 개헌안의 가부를 헌법이 정한 기간 안에 의결

www.facebook.com

 

 

정경심 교수가 옥중에서 쓴 글 모음. 시집이라고 봐야 할 듯. 

절절한 마음이 그대로 느껴진다.

-------------------------------

p66. 오늘 밤

 여보
 오늘 밤은 각자의 슬픔을 
 슬퍼합시다
 내 슬픔이 너무 커서
 당신 슬픔도 너무 클 것을 알기에
 오늘 밤은 나 혼자 슬퍼하겠습니다
 당신도 슬픔에 겨워 어쩔 줄 모를 테니까요

 여보
 우리가 오늘 밤
 큰 슬픔을 슬퍼하며
 홀로이 그 슬픔을 이겨 냈음을
 잊지 맙시다
 당신과 나보다 더 아픈 마음이
 오늘 밤엔 없었음을 기억합시다

 

p78. 결국, 사람이다

 죽음의 길을 가지 않은 것은
 사람 때문이다
 결코 그 길을 가지 않으리라고 확신했던
 그가 버티고 있었고
 나를 그 길로 보내 버릴 수 있었던 아이들이
 집요하게 내 죽음의 멱살을 붙잡고 싸워 주었다
 자신도 버티기 힘든 각자의 무게 위에 서로의 무게까지
 우리는 어깨와 어깨를 맞대어
 무게를 떠안고 분산시켰다
 그리고 이곳에 이름 모를 수많은 이들이 어깨를 
 들이밀고 우리의 어깨가 흐트러지는 것을 막아 주었다
 우리를 지탱시킨 것은 우리를 살린 것은
 결국, 사람이다

 

p135. 좀 더 좋은 사람이 되고 싶다

 세상은 주고받는 것이 아니다
 받은 만큼 주는 것도 아니고
 준 만큼 받는 것도 아니란 걸
 이제야 깨닫는다

 내가 많이 준 친구는 더 달라 하고
 내게 받은 적 없는 이는 조건 없이 주려 하는
 이 불가사의에 가끔 어리둥절하다
 그리고 반문한다

 나는 누군가에게 조건 없이 얼마나 주었나
 나는 누군가를 조건 없이 얼마나 믿었나
 그리고 이제,
 나는 좀 더 좋은 사람이 되고 싶다

 

 

p139. 마음의 대화

 오늘, 당신을 만났습니다
 찬찬히 보니 주름이 많아졌습니다
 왜 아니 그렇겠습니까
 그 마음을 미루어 짐작하고도 남습니다
 아이들까지 다 내려놓은 지금
 뭐가 그리 안달복달할 게 있겠습니까
 이 일이 있기 전까진 내 속으로 낳았어도
 그리 단단한 줄 알지 못했습니다
 시련이 성숙시켰을까요
 나는 아이들만 보며 살겠습니다
 당신은 훨훨 자신의 길로 나아가세요

 오늘, 당신을 만났습니다
 자세히 보니 없던 흰머리가 셀 수 없습니다
 왜 아니 그렇겠습니까?
 우리를 가두었던 그 세월이 그러고도 남습니다
 우리 모두 다 내려놓은 지금
 광야에 헐벗고 선 듯하여 춥고 아픕니다
 이 일이 있기 전까진 감히 상상조차 못 한 일

 우리가 이리 잘 버틸 줄 알지 못했습니다
 시련이 서슬 퍼런 칼날로 닥쳤지만
 당신과 아이들이 버티어 주어
 내가 살아 있습니다

 조금만 더 힘내 주세요, 다 와 갑니다
 적어도 이 모든 일의 시작도 끝도
 당신이 잡고 있으니 매듭도 풀어 주세요
 나는 당신 옆을 지키겠습니다

 

p146. 여행

악몽을 꾸었다
여행을 가기 위해 모인 우리는
각자 비행기표를 끊었으므로
각자의 게이트로 나아갔다
제일 먼저 내가 I-50이라는 게이트를 향해 나갔지
I-50을 보고 표지판대로 길을 따라갔는데
나의 게이트는 존재하지 않았다
우왕좌왕하다 보딩 시간이 지났고
비행기를 놓쳤다 낭패한 표정으로
재발권을 위해 발권 데스크로 갔다
발권 데스크가 방금 눈앞에 있었는데
신기루처럼 사라졌다
나의 세 친구도 보이지 않는다
이제 공항 건물에는 덩그러니
두리번거리면서 나 혼자 남았다
사방을 둘러봐도 출구가 없는 공간
나는 밤새도록 출국를 찾아 헤매다 깼다
왜 악몽은 늘 기억이 나는지
나도 알고 싶다
언젠가는 꿈에 멋지게 비행기를
타고 여행을 가고 싶다
그리고 깨어나면 꼭 그 꿈을 기억하고 싶다

 

p150. 그대의 배반

그대는 진실을 티끌처럼 버리고
나를 순식간에 웃음거리로 만들며
장막 뒤에서 웃지
그대를 믿는 사람들이
하이에나가 되어 킬킬거릴 때
세상의 공기는 끈적하다
서서히 폐에 스며들어
매캐하게 질식시키는 안개처럼
그대는 진실을 그렇게 버리고
어찌 세상과 마주하는가
그 어떤 변명도 그대를 용서할 수 없다는 것을
시간이 알고 있는데

 

p157. '그냥' 말고

나는 지금 나의 시련이 그대의 생명일지
모른다고 생각합니다
그대보다는 내가 내성이 강하니까요

그대는 부디 살아 주세요
'그냥' 말고 건강하게 살아 주세요
지금 나의 시련을 위해서

나는 지금 나의 시련이 견딜 만합니다
내 시련 위에 그대의 생명이 자라고
그 생명 위에 나의 미래가 의지하고 있어서

'그냥' 말고 기꺼이 견딜 만합니다.

 

p163. 침묵

내게 성가신 일이 생겼지만
침묵하기로 한다
내게 오해가 생겼지만
침묵하기로 한다

너와 나는 서로 다른 존재
우리가 무한히 열린 마음으로
서로 사랑하며 믿지 않는다면
말보다 침묵이 더 큰일을 하기에

내게 화난 일이 있었지만
내 감정에 침묵하라고 한다
내게 슬픈 일이 있었지만
내 가슴에 침묵하라고 한다

결국은 침묵이 이겨 낼 것을 알기에

 

p169. 나는 왜 몰랐을까

나는 왜 평생 문학 공부를 하고도
몰랐을까
약속에 늦은 이가
차 사고로 늦었어요 하면
'핑계일 뿐이야, 차 사고는 개뿔'
이라고 생각하는 대신
"큰 사고는 아니었어?
안 다쳤어?
전화하고 미루지 왜 왔어?"
걱정을 쏟아 냈는지
그게 보통의 반응이라고 생각하며 살아온
나는 왜 몰랐을까
사람들은 면피를 위해 거짓말을 밥 먹듯 하고
그보다 더한 양심도 팔 수 있음을
정말 나는 왜 몰랐을까

 

p183. 아직은 충분하지 않아

아이야 울어도 된다
울지 않고 의연한 네 모습이 더욱 아프구나
세상은 그런 거라고 말하지 않으련다
세상은 그래서는 안 되니까

아이야 힘내 다오
제발 버티어 다오
지금은 그들의 시간이나
반드시 역전의 날이 올 것이다

내 육십 년의 시간이 말해 주니
반드시 너의 억울함을
이 모든 부당함을 밝혀 줄 시간이
올 것이다

그저 기다림의
그저 견딤의
그저 긍정의
마음으로 주저앉지 말거라

아이야
하늘도 우리를 결코 외면하지 않으리니
눈물을 닦고 당당하게 나아가자
아직 갈 길이 멀지 않니

그래도 너의 가는 길 걸음마다
너를 붙잡아 줄 작은 들꽃 하나
너의 은신처가 될 작은 동굴 하나
너의 추락을 막아 줄 작은 바위 하나

그러니 너는 굽이굽이 길을 돌 때마다
그저 마음만 먹어도 너에게 작은 도움을
내일 사람으로 가득했으니
그러나 나는 아직은 충분치 않아

이 길 다 걸으면 길 끝에 내가 서 있으리니
그곳에서 너의 눈물을 닦아 주고 너를 다시 세우리니
그때까지는 그 어떤 것도 충분치 않아
너에 대한 나의 계획은 아직 갈 길이 멀었으니까

 

p187. 기도2

기도는 하느님의 마음을 바꾸지 못한다
기도하는 사람의 마음을 바꿀 뿐이다

     - 쇠렌 키르케고르

 

저는 아마도 많이 부족했던가 봅니다
제게 지워 주신 십자가
너무 무거워서 견딜 수 없을 것 같았습니다
그런데 이제 제 옆에 예수님이 함께
이 길을 걷고 계심을 확신합니다
엠마우스까지 가는 길을 동행했던
그분에 기대며 끝까지 가 보겠습니다
이 십자가 끝에서
제가 조금 더 나은 사람이 되게 하여 주세요

 

p199. 손톱깍이 쓰는 날

오늘은 손톱깍이 쓰는 날
일주일에 한 번이니
늘 옆에 두고 수시로 쓰는
아들과 남편이 여기에 없는 것 또한
다행이고 감사하다
알코올 솜과 함께 지급되어
몇 분간 쓸 수 있는 손톱깍이
내 손톱에는 W023번이 잘 맞는다
발견하기까지 시간이 걸렸지만
아주 작은 쾌적함이
때로는 큰 만족을 주기도 한다
인생처럼.

 

 

p200. 길 없는 길

'길 없는 길'을 걷겠다고 한다
나는 그 길을 오래 생각했다
그대에게 묻지 않았다
물어보아야 할 이유를 찾지 못했다
그대가 그 길을 찾으면
묻지 않아도 알게 될 테니까

그대가 어떤 길을 가도 괜찮다
나는 괜찮다
그 길이 어떤 길이든
그대 곁에 있을 것이니
그대는 매인 곳 없이
자유롭기를 저 하늘의 구름처럼
가볍기를
영원하기를

 

p202. 뿌리 깊은 들품

창틀까지 웃자란 풀을 보고
고개를 갸웃합니다
제초기로 싹쓸이한 게 언제였더라?
엊그제 아니었나?
들풀의 생명력이 새삼스럽습니다
아무리 아무리 싹둑 잘려도
여봐라 문제없다 숨 가쁘게 올라옵니다
그 모든 노력을 잘라 내는 칼날이
가차 없을수록
치고 솟아나는 들풀의 의지도 가차 없습니다
'망연자실할 필요 없어요,
뿌리가 깊으면 문제 될 게 없어요"
칼날의 무자비함을 비웃고 있습니다.

 

p216. 땡큐, 끝까지 간다

사람들이 그런다
절망과 분노와 억울함으로
형편없을 줄 알았는데
꽤 괜찮은 듯해 좀 놀랐다고
내가 무심하게 뱉는다

마지막까지 다 빼앗겼는데
이제 지킬 것이 있어야
애걸복걸이라도 하지 않겠냐고
이제 남은 게 없는데 이제 미련도 없이
홀가분한데 뭐 울 일이 있겠느냐고

땡큐, 이렇게 완벽하게 정리해 줬으니
땡큐, 돌아볼 것 하나도 남기지 않았으니
땡큐, 다시 시작할 수밖에 없게 해 줬으니
땡큐, 끝까지 갈 수 있게 해 줬으니
땡큐, 땡큐, 땡큐

내 몸 하나만 가볍게 맨손으로
앞만 보고 끝까지 간다
그래 봤자 죽기밖에 더하겠나
땡큐, 땡큐, 때땡큐
끝까지 간다

 

p222. 진통제

통증이 날카로우면
진통제가 혈관을 퍼져 나가는 감각 하나하나가 느껴진다
약한 진통제는 전신에 퍼지는 데 삼십 분 걸리고
그보다 강한 놈은 십 분이면 제 할 일을 한다
내 몸은 강한 녀석을 원하지만
내 마음은 인내하라고 한다
너무 아플 때는 인내가 소용없어지고 결국
강한 놈을 불러야 하지만
마음은 늘 약한 놈 먼저 불러
삼십 분을 견딘 후 강한 놈에 의지한다
한두 번 한 일이 아닌데도
마음에는 관성이 있나 보다
어쩌지 못하는 관성이.

 

이 책일 읽은 소감은 과연 현상과 그 해석은 실무전문가가 제일 낫다는 점이다.

하지만 우리나라의 부동산 문제는 실무전문가로서는 해결할 수 있는 단계가 지나갔다.

(다른 나라도 그렇겠지만) 대한민국의 부동산 문제도 많은 복마전이 도사리고 있고 이미 기형화되어 있는 부분이 많다. 즉 병들어 있는 것이다. 병든 부분을 낫게 하려면 몸은 고통을 겪어야 한다. 즉 대한민국의 부동산 문제를 해결하려면 돈이 있는 사람이나 돈이 없는 사람이나(또는 중간에 있는 사람), 즉 모든 국민이 어느 정도의 고통을 감수해야 한다(마치 국민연금 문제처럼).

 지도자(우리나라에서는 거의 대통령을 의미하겠지)는 제대로 된 전문가 그룹과의 심도 있는 토의를 통해서 현황을 정확히 파악하고 대한민국의 부동산 정책이 추구할 방향을 일단 정하고 이를 국민들과 컨센서를 맞춰야 한다. 그리고 이 컨센서스로 도출된 방향과 그 정책들은 효과가 나타날때까지 10년이고 20년이고 꾸준히 실행하는 것이 필요하다. 중간에 당연히 어디가 아플 것이고 국민들은 못살겠다고 아우성을 칠 수 있지만 그걸 넘겨야 한다. 그럴 의지와 실행력을 갖춘 지도자가 나와야 한다.  그래서 매우 힘든 일이다. 어찌 보면 국민연금 개혁은 부동산 문제에 비하면 난이도가 절반도 되지 않는 일이다.

 

------------------

p143

 

 문재인 정부가 보유세를 제대로 올리지 않아서 집값이 폭등했다는 사람들조차, 고가/다주택자만 올리자는 포퓰리즘에 포획되어 있다. 우리나라에서 보유세를 강화하자는 것은 "고가/다주택자만 보유세를 올리자"는 것과 사실상 동의어다. 이렇게 해서는 세금을 많이 내는 사람들이 '징벌적'이라는 반발을 달랠 방법이 없다. 또 어디까지가 고가/다주택인가? 서울 아파트의 대부분이 종부세에 해당하는 상황이 되자 서둘러 세금을 낮추는 것을 보지 않았던가.

 

 비싸고 많은 부동산을 소유하면 더 많은 세금을 내는 것은 당연하다. 그러나 비례적으로 이를 많이 내는 것과 누진적으로 많이 내는 것은 다른 문제다. 여러 주택을 전국적으로 합산해서 훨씬 더 많이 내게 하는 것은 한국만 시행하고 있는 방식이다. 이 때문에 여러 채를 가지고 임대하는 경우 과다한 세금을 부담해야 하는 상황이 불가피하다. 이것이 임대사업자 등록시 임대료 인상을 억제하는 대신 종부세를 면제해준 이유다. 그랬더니 이번에는 다주택자에게 세금 혜택을 주었다는 비난이 이어졌던 것을 기억할 것이다. 

 

 사실 보유세를 높일 수 있는 가장 확실한 방법은 공시가격을 올리는 것이다. 하지만 이는 전체 부동산 소유자의 부담을 높이는 결과를 가져온다. 정치적으로 이것을 감당하지 못한 문재인 정부 당시 여당이었던 민주당은 금방 다시 깍아주겠다고 나섰다. 그렇게 해서 전체 주택의 95%에 대한 재산세율을 낮췄다. 물론 이재명 후보가 주장했던 모든 토지를 과세 대상으로 하는 국토보유세는 이를 모두 올리되 저가주택 소유자에게 대해서는 되돌려준다는 것이다. 조삼모사이며 결과는 같다. 결코 정치적으로 성공할 수 없을 것이다. 이렇게 명문에 집착한 비현실적이고 이상적인 목표에 끌려다니지 말아야 한다.

 

 내가 부동산 정책에 관여할 때까지 바로 이 대목에서 이른바 개혁주의자들과 입장이 달랐다. "보유세는 집값을 잡는 세금이 아니다"는 김동연 부총리의 발언(국회 답변, 2018년 8월 27일)은 내 생각과 같았다. 보유세 실효세율이 세계에서 가장 높다는 미국이 역설적으로 전 세계에서 가장 집값이 많이 오른 것을 어떻게 설명할 것인가? 그 나라는 유동성 때무닝고, 우리는 세금이 낮아서 그런가?

 

 따라서 보유세에 대한 냉정한 이해와 현실적 목표가 필요하다. 우리 보유세는 역사적으로 '고가/다주택'을 차등적으로 높게 과세하는 체제가 굳어져 있다. 대다수 국민들의 보유세 부담을 높이려는 시도는 사실상 노무현 대통령이 유일했지만, 실패했다. 왜 그랬을까? 세금은 역사성과 경로의존성이 있기 때문이다. 개혁, 반개혁의 문제가 아니라 먼저 국민을 설득하고 동의를 구해야 한다. 취득세 비중이 왜 높을까? 부동산 구입 시 내는 세금이라 조세 저항이 적기 때문이다. 그래서 취득세를 선납 보유세라고 보는 사람들도 있다. 조세 저항이 큰 보유세의 몇 해분을 일시에 받는 방식이라는 것이다.

 

 결국 보유세는 아파트, 단독주택, 상가, 토지 등 부동산의 종류와 소재 지역에 따른 과세 형평성을 단계별로 높여가는 가운데, 점진적으로 부담을 높일 수밖에 없다. 국민들이 화가 나 있다고 고가/다주택만 올리려 해보지만, 그 고가의 기준 설정 때문에 다시 갈팡질팡했던 것이 2019년 말부터 2021년 중반까지 정부/여당의 모습이었다. 실제 종부세를 강화했더니 서울 아파트의 반 이상이 그 대상이 되었고, 이에 놀란 정부와 민주당은 서둘러 세금을 다시 낮추려 허둥지둥했다. 특히 2021년 서울시장 보궐선거를 앞두고는 이전에 종부세를 올려야 한다는 목소리는 그 어디서도 찾아볼 수 없었다.'

 

p146. 국토보유세와 기본소득

 

 내가 이해한 것이 맞다면, 국토보유세와 기본소득 구상은 이렇다. "모든 토지에 대해 국토보유세를 물려서 실효세율을 1%로 하게 되면 약 50조 원의 재원이 발생하는데, 이를 재원으로 전 국민에게 나눠주는 것이 기본소득이다. 그럼 전체 토지 소유자의 부담이 증가할 것으로 우려하지만, 90%는 기본소득으로 돌려받는 것이 더 많게 된다. 또 실수요자나 업무용의 경우 감면하고, 고령자 등에게는 과세 이연할 수 있다. 사람별로 전국의 소유 토지를 합산해서 누진 과세하므로, 결국 고가/과다 토지 보유자만 더 많은 세금을 부담하고 일반 국민은 더 많은 혜택을 볼 수 있을 것이다."

 

 이재명 후보는 2017년 경기도지사 시절부터 적극적으로 기본소득과 국토보유세 추진을 준비하면서, 심지어 경기도만이라도 시행할 수 있게 해달라고 요구하기도 했다. 다양한 우려를 받게 되자 "90%의 국민은 이득이다"는 점을 강조함녀서, 이를 반대하는 것은 악성 언론과 부패 정치 세력에 놀아나는 '바보짓'이라고 항변한다(2021.11.15)

 

 그러나 우려가 계속되자 "국민들이 동의한다면"이란 전제를 달고 한발 물러서게 된다(2021.11.30). 이후 이재명 후보는 공시가격 현실화로 재산세가 크게 늘어나서 서민들의 피해가 예상되므로 공시가격 전면 재검토가 필요하다고 정부에 요구한다(2021.12.20). 이와 함께 2주택자에 대한 종부세 중과 완화 필요성도 언급하게 된다(2021.12.12). 국토보유세 정신은 온데간데없게 된다. 그러나 지지층의 반발이 우려되자, 며칠 뒤에는 세금이라는 이미지를 반대로 적용해서 토지이익배당금재로 이름을 바꾸어 추진하겠다는 의지를 밝힌다(2021.12.28).

 

 이재명 후보의 국토보유세는 이 책이 강조하고 있는 전형저긴 보유세 포퓰리즘 사례다. 포장을 어떻게 하든, 고가/과다 보유자만 올리자는 것이 그것이다. 실무적으로도 토지의 대부분을 차지하지만 소출은 거의 없는 산지, 녹지에 대해서도 1% 세금을 매기자는 것인기, 또 농지나 공장용지 같은 생산용도 토지는 어떻게 할 것인지 등에 대해서는 불분명하다. 더구나 결정적으로, 선거운동이 본격화되고 보유세 관련 여론이 악화되자 그동안 국토보유세를 강조해오던 정신과는 반대로 가고 말았다. 선거 캠프 내부에서는 당선 이후 추진하면 되지 않느냐고 이를 정당화했다는 얘기를 들었다. 하지만 '보유세 1%'는 이렇게 편법으로 달성할 수 있는 일이 아니다.

 

 

p207

 

 이명박 대통령식 반값 아파트였던 토지 임대부 보금자리주택은 정권 차원의 대대적인 추진에도 불구하고, 서초구 우면동(358가구)과 강남구 자곡동(402가구)에서 단 두 차례 760가구만 공급되었을 뿐이다.

 

 김헌동 사장(현 SH공사 사장, 과거 경실련 본부장으로 문재인 정부의 부동산 정책을 신랄하게 비판)은 이명박 정부 당시 보금자리주택 반값 아파트 공급 때문에 강남 집값이 떨어졌다고 주장한다. 그래서 이명박 대통령이 부동산 정책을 가장 잘했다는 얘기를 스스럼없이 한다. 궤변이다. 노무현 정부 동안 쌓인 거품, 그동안 누적된 공급 물량이 금융위기 이후 조정받았기 때문에 가격이 내린 것이다.

 

 

(감상) 사실 내가 저 당시(2012년도에서 2013년도) 서초,양재,우면,강남 일대의 부동산에 관심이 있어서 어느 정도 가격 동향을 알고 있다. 일단 내 경험상으로는 저 당시 우면동과 자곡동에 풀려나온 보금자리주택 물량으로 인해서 주변 아파트 시세에는 영향을 미쳤다. 보금자리주택과 비슷한 수준의 20~30평대 아파트의 경우 당시 1억까지 하락한 아파트도 있다. 그리고 이에 대한 연구결과도 존재한다.

 

https://www.mk.co.kr/news/realestate/8019630

 

보금자리주택, 주변 집값 5∼7% 떨어트렸다 - 매일경제

거래량도 다소 줄어…가격 안정성 측면에선 긍정적

www.mk.co.kr

 

당시 완공되서 입주가 시작된 보금자리주택의 영향으로 강남의 부동산값이 영향을 받자 당시 막 들어선 박근혜 정부는 이명박의 보금자리주택 계획을 백지화시킨다.

 

https://www.nocutnews.co.kr/news/1013431

 

이명박 정부 ''보금자리주택''…4년만에 중단 위기

{IMG:-1}이명박 정부의 주거정책인 ''보금자리주택''사업이 시행 4년만에 전면 재수정될 것으로 보인다. 박근혜 정부가 추진하는 ''행복주택''사업을 위해선 보금자리주택 사업의 축소 또는 일부

www.nocutnews.co.kr

 

 개인적인 견해로는 이명박의 보금자리주택이 계획대로 서울과 수도권에서 150만호 건설이 이루어졌으면 부동산 특히 대한민국 부동산 시세를 견인하는 아파트 가격의 거품은 많이 걷히지 않았을까 하는 생각이 있다.

 

 

 

p229

 우리가 일반적으로 접하는 주택의 금융화의 대표적인 현상은 금융을 매개로 한 자가 소유 열풍이다. 대부분의 서구 선진국들은 1990년대 중반부터 자가 소유가 늘어나 2000년대 초 정점에 이르렀는데, 특히 미국, 영국의 경우 10여 년 동안 5%p 이상 증가했다. 이때 자가 소유 확대를 견인한 것이 금융권의 장기주택담보대출, 즉 모기지였다. 그러나 금융 시스템을 매개로 증가한 자가 소유는 2008년 금융위기 전후 한계에 달하면서 자가율은 상당수 국가에서 정체되고 있다. 특히 미국, 영국은 늘어났던 자가율이 과거보다 더 낮아져버렸다. 이 과정에서 소득과 비교해 대출을 무리하게 받은 가구들이 집을 차압당하고 경제적으로 어려워지는 문제가 발생했다. 모기지는 금융산업 성장의 가장 큰 동력이었지만, 이런 대단위 모기지 시대가 '금융의 저주'를 불러온 것이다.

 이처럼 과다한 모기지 시대는 역설적으로 자가 소유의 한계를 가져왔다. 낮은 금리의 모기지가 더 많은 사람들이 부동산을 소유할 수 있도록 도왔지만, 거꾸로 부동산 가격 상승을 초래하면서 집값을 감당할 수 없게 만든 것이다. 이런 상황에서 특히 청년층과 소수 인종 가구들은 자가 소유율이 현격히 떨어졌다. 자가 소유 열풍이 역설적으로 세대별 격차와 소득 계층별 불평등을 확대한 것이다. 미국, 영국은 물론이고 북유럽 국가들조차 과도한 금융화의 결과로 집값과 임대료가 급등하고, 소득 대비 부채가 세계에서 가장 높은 수준이 되면서 주택시장이 불안정하고 취약하게 변해버렸다.

 

p230. 임대로 살 수밖에 없는 세대 VS  임대업자 세대

 대다수 선진국에서 자가 소유의 한계가 드러나는 가운데, 그동안 핵심적인 주택 정책이었던 공공임대주택마저 후퇴하는 중이다. 1990년대부터 대부분의 선진국은 공공임대주택 공급을 대폭 축소하거나 심지어 기존에 있던 물량까지 줄이고 있다. 이런 상황에서 민간임대에 거주할 수밖에 없는 세대·계층이 늘어나고 고착화되고 있다. 영국을 예로 들면, 2003년에는 자가율이 70%였던 것이 2015년에는 64%로 줄어들었는데, 같은 기간 35세 이하의 경우는 50.3%에서 28.9%로 자가율이 급감했다. 반면 민간임대에 사는 비율은 27.2%에서 50.4%로 급증했다. <그림 11-1>은 영국, 미국의 세대별 자가거주율 변화를 나타낸 것으로 중·고령 세대를 제외하면 자가율이 빠르게 내려가는 것을 확인할 수 있다. 이는 서방 선진국 외에도 일본 등 동아시아 국가들에서도 비슷한 상황이다. 

 우리나라는 아직 10년 정도 통계에서는 이런 추세가 명확히 드러나지는 않는다. 어떤 세대에서도 자가율이 떨어지는 경향이 뚜렷하지 않다. 40대에서는 눈에 띄게 늘어나기도 했다. 이는 주거실태조사의 통계적 문제 때문일 수도 있는데, 다른 연구에서는 이른바 에코 세대인 30대까지는 과거보다 자가율이 떨어지고 있다는 보고가 많다. 다만 소득 계층별로는 중상위층과 하위층 간 자가율 차이는 분명하다. 특히 저소득층 중 노령 가구를 제외할 경우 청년층 자가율은 더욱 낮아질 것이다.

 그렇다면 늘어난 민간임대 수요는 누가 공급할까? 영국의 경우 1998년과 비교해 2015년에는 민간임대업자의 수와 그들이 제공하는 주택이 모두 두 배로 늘었다. 이들 대다수는 1960~1970년대에 출생한 고도성장 세대로 임대주택 구입용(Buy-to-let) 모기지 등을 활용해서 추가로 주택을 구입했다. 일본의 경우도 55세 이상의 26%는 다주택 소유자들이다. 공공임대주택 거주 비중이 가장 높은 나라인 네덜란드도 금융위기 이후 다주택자가 빠르게 늘어나 암스테르담 20%, 마하스트리트 27%를 넘을 정도다. 이런 추가 주택을 통한 소득 보충은 영국, 미국과 같은 자유주의 복지국가뿐 아니라, 복지 수준이 상대적으로 높은 중·북부 유럽 국가들에서도 연금 보충 차원에서 확산되고 있다.

 다수이 1980~1990년대에 출생한 청년층들이 '임대로 살 수밖에 없는 세대(generation rent)'가 되었다면 1960~1970년대에 출생한 세대들은 '임대업자 세대(generation landlord)'가 되었다고 할 수 있다. 이들 임대업자 세대는 자신의 돈이 아니라 금융을 활용해서 집을 늘리는 중이다. 미국, 일본, 영국, 호주 등에서 "서브프라임이 무너뜨린 잔해 위에서 더 강하고 금융화된 민간임대업자 시대"가 출현한 것이다. 결국 고도성장 세대와 저성장 세대가 주택자산을 매개로 세대 간에 현격한 격차를 보이게 되어싸. 그러나 이는 세대간 문제에 그치지 않고 세대 내 격차로 확대된다. 젊은 세대 중에서 부모가 능력이 있는 경우 부모 지원, 즉 '엄마 아빠 은행'을 활용하여 주택을 구입하거나 심지어 임대사업을 하는 경우가 늘고 있는 것이다.

 민간임대 확대는 개인 임대업에 머물지 않는다. 금융위기 이후 임대사업 기관 투자가도 빠르게 확산되고 있다. 이들은 금융권 대출을 이용하거나 헤지펀드, 리츠 등을 통해 주택에 투자한다. 캐나다에서는 금융화된 임대사업자들이 전체 캐나다 아파트의 10%를 소유하고 있다. 1999년 조사에서는 전혀 없던 현상이다. 미국에서는 소형 1인 가구용 임대주택 리츠, 독일에서는 등록 부동산투자운영 회사가 확대되고 있다. 스페인 바르셀로나에서는 금융위기로 압류된 수십만 채를 리츠가 사들여 임대사업을 하고 있다. 미국, 호주도 마찬가지로, 더 전문적으로 금융화된 투자자들이 출현했다. 2000년대 이후 완화된 임대차 규제는 민간임대시장을 더욱 활성화하는 계기가 되었다. 반면 임차인은 더 나쁜 상황에 빠지고, 여러 곳에서 임대료 인상을 둘러싼 갈등이 표출되고 있다. 특히 금융화가 강하게 진행된 나라일수록 소득 증가보다 임대료 증가 속도가 훨씬 빨라서 주거비 부담이 커졌다. 

 이렇게 민간임대주택이 금융 투자의 대상이 되면서 이전과는 다른 주택의 금융화 단계가 시작되었다. 종전 금융을 활용한 단기 거래 중심의 주택 투자가 '금융화 1.0'이라고 한다면, 운용 수익을 계속 얻기 위한 장기 민간임대사업은 '금융화 2.0'이라고 부르기도 한다. 과거와 달리 임대 부분이 금융화의 최전선에 등장함으로써 '임대' 주택의 금융화 단계에 들어섰다고 할 수 있다.

 

p274. 전 세계 부동산 문제의 핵심은 주택의 금융화다.

 집값 불안은 우리나라만의 문제가 아니다. 부동산 경기 순환과 주기적인 거품 형성과 붕괴는 거의 모든 선진국이 공통적으로 겪고 있는 일이다. 특히 최근 20년 동안은 예전에 경험하지 못한 수준으로 집값의 급등락이 반복되고 있다. 기억에 생생한 미국의 서브프라임 모기지 사태와 뒤이은 2008년 금융위기는 주택 거품이 촉발제였다. 당시 '대공황 이후 최대 거품 붕괴'라고 했지만 부동산 거품은 10년 만에 오히려 이전보다 더 커져버렸다. 게다가 코로나19로 풀린 돈들은 부동산으로 더 몰렸다. 최근 중국에 부상하고 있는 경제위기도 본질은 부동산 거품에 있다.

 이런 상황에 대해 많은 학자들은 주택의 금융화 현상이 전면화되었기 때문이라고 진단한다. 원래 주택은 생활 필수품이면서 투자 수단이라는 양면성이 있었는데, 2000년대부터 주택의 금융화 현상이 확산되면서 상품 성격이 더 강화되었다. 과잉 자본이 부동산에 몰릴 수 있는 물꼬가 활짝 열린 셈이다. 그만큼 유동성과 금융의 영향이 부동산시장을 압도하고 있는 것이다. 그 결과 집값 불안과 세대·계층 간 주택 문제의 양극화가 만성화되었다. 임대로 살 수밖에 없는 세대와 임대업자 세대가 고착화되는 신주거계급 시대가 출현한 셈이다.

 따라서 집값 급등락은 과거의 부동산 경기순환으로만 이해할 수 없고, 후기 자본주의의 구조적인 차원도 함께 생각해야 한다. 부동산 정책도 우리나라 특유의 문제와 더불어 세계적인 주택금융화 현상을 함께 고려해야 한다. 문재인 정부의 부동산 정책이 제때 효과를 거두지 못한 데는 부동산 과잉 수요를 유발하는 금융화 현상의 위험성을 충분히 인식하지 못한 측면이 크다. 과거 경험에 따른 수요 관리, 공급 확대의 정책 패키지로는 너무 커져버린 유동성과 금융화 현상에 제대로 대처할 수 없었던 것이다.

 그런 점에서 부동산 문제의 핵심 요인과 부차 요인을 혼동하면 안 된다. 핵심은 넘치는 돈이 자산시장으로 흘러들어가는 구조이며, 공급, 세제, 그리고 청약제도 등 한국적인 제도들은 부차적인 요인이다. 그런 점에서 주택의 금융화 시대에 대응하는 금융 정책의 새로운 차원이 요구되고 있다.

 

p285. 이제 정부는 집값 잡겠다는 약속을 하지 말자

 이미 세계 10위권 경제 대국이 된 우리나라는 세계 경제 동향과 함께할 수밖에 없다. 주택이 점점 더 투자 상품화되는 주택금융화 경향과 전 세계적인 유동성 상황은 우리나라에도 그대로 반영되고 있다. 우리 주택문제가 갖는 보편적 성격이라 할 수 있다.

 반면 우리 특유의 문제도 있다. 무엇보다 전세제도가 그렇다. 강한 가족주의는 전세제도를 강화하는 역할을 해왔다. 그만큼 주택 문제에 대한 전 국민의 관심이 높고, 이는 특유의 평등주의가 더 부추기고 있다.

 이런 상황에서 우리 정부는 세계 그 어느 나라보다 집값 동향에 민감하게 반응해왔고, 가격 안정을 위한 것이라면 무리한 시장 개입도 주저하지 않았다. 게다가 정부는 민심을 달래는 차원에서, 또 시장과의 심리전 차원에서 집값, 특히 강남 아파트값을 잡겠다고 공헌해왔다. 하지만 정부의 약속이나 호언장담은 여지없이 헛말이 되고 만다. 전 세계 선진국 중에서 정부 수반이 집값을 잡겠다고 얘기하거나 집값을 못 잡았다고 사과하는 나라는 거의 없다.

 이제 정부에서 집값을 잡겠다는 말을 기대하지 말자. 정확한 시장 상황이나 정책 계획을 밝히는 등 필요한 일만 하게 하자. 시장에는 시장의 일이 있듯이, 정부는 자신들의 몫을 하면 된다. 형평성 있는 세제와 개발이익환수 체제만 작동한다면, 굳이 강남 아파트값에 전전긍긍하며 심리전을 펼 필요는 없다. 여기다 좋은 주택이 빨리 공급될 수 있도록 택지 공급과 도시계획 인센티브 관리만 하면 된다. 주거복지를 튼튼히 구축해서 주거 취약계증을 보호하는 일도 중요하다. 나머지 약속은 기대하지 말자.

재밋고 유익하다.

------------------------------

p56

 "공부 좀 했네."

 우리 부모님은 내가 평균 80점대만 받아와도 이렇게 말씀하셨다. 그래도 어쩐지 욕심이 나서 스스로 아쉬운 마음에 학원을 다녀볼까 하는 마음이 들었다. 게다가 친구들이 다 방이역에 있는 종합학원에 다닌다기에 "그럼 나도 다녀볼까?" 했더니, 친구들이 "그래, 너 왜 학원 안 다녀? 너 그러다 큰일 나, 대학 가려면 학원 다녀야 해"라고 하는 게 아닌가? 아버지께 학원에 등록하고 싶다고 얘기해서 카드를 받아다 혼자 등록했다. 이 학원을 떠올리면 지금 생각해도 손끝이 아려오는 추억이 있다.

 수업 첫날, 문제를 많이 틀렸다. 그때는 체벌이 존재할 때였고(조민 씨가 그리 나이가 많나? 하고 알아봤다. 2010년 11월 서울시 교육청이 모든 형태의 체벌을 금지했다. 아마 다른 시/도도 비슷한 시기일 것이다. 조민 씨는 1991년 생으로 기록에 의하면 2004년부터 2009년까지 중,고등학교를 재학했다. 그러니 체벌이 존재하는 시기에 중,고등학교를 보냈다. 내 생각보다는 체벌이 없어진 게 그리 오래되지는 않았다), 학원의 방침은 틀린 만큼 맞는 것이었다(내가 학교 다닐때도 이런 거지같은 경우가 아주 많았다. 첫시험에 100점을 맞고 다음 시험에 1개 틀려 95점을 맞으면 1대-문제갯수, 혹은 5대-점수대로-를 맞는 경우도 있었다. 참으로 야만의 시절이었다. 물론 나는 100점을 맞아본 적은 별로 없다). 첫날이니 뭐 아는 게 있었겠는가. 엄청나게 틀리고 손을 내밀라기에 내밀었다. 그간 체벌을 당해본 적이 없는데 - 부모님은 한번도 나를 때린 적이 없다. 미국 학교에서도 물론 - 처음으로 학원에서 손을 내밀라기에 '손을 왜 내밀까?' 했더니 회초리로 때린다는 것이다. 그것도 틀린 개수만큼.

 일단 손을 올려 한 대를 맞았다. 너무 아팠다. 두 번째 맞을 때 움찔, 피하면 더 아픈 법이다. 가만히 있었어야 했는데 피하면서 손가락뼈를 맞았다. 그래도 '때린 선생님 잘못이 아니라 피한 내 잘못'이었던 시절이다. 수업을 듣는데 나아지질 않고 점점 아파서 정형외과에 갔더니 뼈에 금이 갔다는 것이 아닌가. 내가 피하다가 뼈에 제대로 맞은 거였다. 그대로 깁스를 하고 집에 갔다.

 집에 가니 아버지는 기가 막히다며 할 말을 잃으셨다. 그간 매 한 번 들지 않고 나를 키우셨는데 제 발로 카드를 들고 가서 학원비를 긁고 오더니, 손가락뼈에 금이 가서 돌아왔으니 황당하실 만도 하다. 부모님은 바로 학원에 연락해 강력하게 항의하면서 "학원 정책은 존중하지만 내 딸 체벌하는 곳에는 못 보내겠다"고 말하고 남은 수강 일수만큼 환불받았다. 내 처음이자 마지막 체벌의 기억이다.

 

p67

 부산대 의전원 입학 취소 결정에 대한 항소를 포기할 지 생각할 때, 고민이 많았다. 주변에서는 내가 포기하면 일단 실질적 이득이 사라지기 때문에 어머니가 세상에 빨리 나올 수도 있다고 했다. 또, 재판을 받고 있는 아버지에게도 유리한 상황을 조성할 수 있다는 이야기도 들었다.

 하지만 이건 사실 내 인생이기 때문에 부모님을 이유로, 부모님을 위해 나의 지난 10년을 내려놓을 수는 없었다. 부모님께는 죄송하지만, 부모님을 1순위에 놓고 내 인생을 생각하기에는 내 삶이 우선 너무 힘들었다. 부모님 또한 부모님 때문에 내가 어떠한 결정을 내리는 것을 원하지 않으셨다. 나에게 평생의 죄책감을 느끼며 살아가기보다는 내가 옳다고 생각하는 것을 선택하라고 하셨다. 그래서 고민했다. '나 자신'에게 가장 좋은 선택은 무엇인지 고민해보았다.

 내 인생에서 사람들의 평가는 중요한 요소가 될 수 없다. 그런데도 사람들의 시선을 내 인생의 판단기준으로 삼아버리면, 그 순간부터 내 삶은 남의 것이 된다. 외적이 요소에 내 내면이 휘둘리게 둘 수는 없다. 나는 나의 깊은 내면에서 정말 내려놓을 만한 이유가 있는지 생각해보았다.

 내가 아는 '정치인 자녀'들은 대개 다음의 세 부류에 속했다.

 1. 조용히 숨어 산다.
 2. 아예 정치를 한다(혹은 정치적으로 발언하면서 정치적으로 행동한다).
 3. 변두리에서 사고를 친다.

 이 세 부류는 모두 타자화된 자신이다. 세 경우 모두 끊임없이 평생을 '누구 딸 누구' '누구 아들 누구'라는 이름표를 단 채 살아가기 때문이다. 시간이 지나도 그 이름표로만 남을 뿐이다. 조용히 살면 어떨까? 부모를 빼고는 세상에 존재하지 않게 되어버린다.

 조용히 숨어 살아도 정치인의 자녀, 정치를 하면 부모의 후광을 업은 정치인, 사고를 쳐도 사고를 친 정치인 자녀로 정리된다.

나는 그렇게 되고 싶지 않았다. 셋 중 어느 쪽도 되고 싶지 않다. 나는 정치인이 될 생각이 없다. 사회적으로 너무 알려져서 조용히 숨어 살기에는 이미 늦었고, 아버지의 후광을 이용하거나 정치와 연관된 일을 하고 싶지 않다.

 조민이라는 이름으로 성공하고 살려면 어떻게 해야 할까? 우선 정치적인 발언은 자제해야 한다고 생각했다. 그럼에도 숨어있고 싶지 않으니 세상에 나왔다. 나오되, 비정치적이고 싶었다. 비정치적으로 무언가를 이루고 싶다는 생각이 들었지만 그게 무엇인지, 어떻게 이룰지는 아직 잘 모르겠다. 찾아가는 중이다.

 어른들, 특히 정치 쪽에 몸담은 분들은 주변에서 나에게 이런 말을 많이 한다.

 "너 누구 딸인데 이렇게 행동해야 하지 않겠니?"
 "인스타에 봉사활동 하는 거 보여줘야 하는 거 아니냐?"
 "이미지 좋아지게 어려운 환경에서 땀 흘리는 것 좀 보여줘라."
 "마라톤 대회 나가서 몸 쓰는 거라도 좀 보여줘."

 정치하는 사람들은 땀 흘리는 모습, 봉사하는 모습을 참 좋아한다. 이유가 어떻든 땀 흘리는 이미 그 자체를 참 좋아하는 것 같다. 겉으로 보이는 이미지 말이다.

 내가 그분들의 말을 따르면 나는 정치인이자 사회인 '조국'의 딸로서만 이미지가 굳어질 것이다.

 사람들이 나에게 원하는 게 그것일 수도 있다. 아버지 딸로서 아버지를 서포트하고, 착하고 예쁘게 잘 자란 딸로서 행동했으면 하는 사람들의 바람과 기대를 나는 온몸으로 느끼며 자랐다.

 정말 감사한 조언들이지만 나는 하나도 듣지 않는다. 나에게는 자신의 개성이 있다. 누구 딸로서의 그런 개체가 아닌, 사람들이 원하는 나의 모습을 보여주는 것이 아니라 진정한 아 그 자체, 나 자신을 알리게 되더라도 내가 어떤 사람인지를 사람들에게 보여주고 나라는 사람을 이해할 수 있도록 하고 싶다.

 재판에 나갈 때, 브랜드 이름이 알려진 가방을 들고 나갔다. 정가 70만 원 정도 하는 가방이었다. 나는 명품을 좋아하지 않는 편이다. 실제로 그 가방도 내가 가진 것 중 비싼 축에 속하는 가방이었다. 그런데 기어이 그게 문제가 됐다. 정치계 사람들은 말했다.

 "앞으로 그 가방 들지 마라. 사람들이 비싸다고 욕한다"라고.

 하지만 내 생각은 반대다. 아예 다른 생각이다. 나는 아버지 말도 수긍하기 어렵다면 듣지 않는다.

 "그 가방 가지고 언론 기사에 여럿 나오던데 그거 꼭 들어야겠냐?"

 아버지가 말씀하셨다. 하지만 나는 그럴수록 더 들어야 한다고 생각한다. 그래서 나는 그 가방을 또 들었다. 우리집 형편이 아주 어렵지 않다는 걸 사람들은 안다. 70만 원 정도 하는 가방을 내가 드는 게 아주 못할 짓은 아니지 않은가? 내가 빚을 져서 초고가 명품을 드는 것도 아니고, 내가 돈을 벌어 구매한 것이었다. 그리고 그런 가방을 처음 들었을 때만 떠들썩하지, 같은 가방을 두 번 세번 들면 이슈도 되지 않는다. 그렇게 나는 그 가방을 들고 다시 문밖을 나선다. 

 

p119

 내가 유일하게 하지 못하게 된 것은 의사로서의 일이다. 어릴 때부터 장래희망으로 꼽았던 일을 법적으로 하지 못하게 되었다. 삶에는 언제나 득실이 있게 마련이라던데, 내 인생에서 가장 큰 실은 의사가 될 수 없다는 사실일 것이다. 이에 상응하는 득이 앞으로 내 삶에 있을까 생각해보지만, 아마 절대 없을 것 같다. 평생 꾸어온 꿈이 가로막히자, 처음에는 막막함과 동시에 앞으로 무얼 해서 먹고살아야 하나, 하면서 두려웠다. 하지만 내가 그토록 원했던 의사의 길도 인생에 놓인 여러 길 가운데 하나일 뿐일지도 모른다는 생각이 들었다. 

 사람들은 자꾸 말한다. 대학은 다시 가든, 외국에 가든 다시 시작하라고. 어떻게든 의사 면허를 되찾을 방법을 모색해보라고 말이다. 하지만 대학을 다시 가라고 하는 건 내 학력을 되돌리고 싶어 하는 일부 지인들의 희망이지 나의 희망사항은 아니다.

 나는 요즘 학력이라는 것이 나에게 어떤 의미가 있는지 곰곰이 생각해보는 중이다. 만일 내게 정말 의학 공부에 대한 의지가 있고 진정 원한다면 다시 시도해볼 것이다. 하지만 누군가 지금 내게 지금 어떠한 의지와 각오가 있는지 묻는다면 나는 "지금은 특별히 공부하고 싶은 게 없어요"라고 솔직하게 말할 것이다. 내가 지금 하고 싶은 것들을 하며 살기에도 시간이 부족한데 내가 왜 다시 학교에 가야 하는 걸까? 결국 고졸 학력으로 살아가기겐 우리 사회가 좀 만만하지 않으니까 졸업장을 따놓으라는 것 아닐까? 나는 남에게 부끄럽지 않을 정도의 '적당한 학력'을 위해 '적당한 과'를 선택해 대학에 다시 갈 생각이 없다. 물론 살면서 내가 어떤 일을 할 때 정말로 대학 졸업장이 필요한 일이 생긴다면, 또는 내가 정말 하고 싶은 일이 있는데 대졸자만 가능하다면, 그때는 기꺼이 다시 공부해서 졸업장을 따낼 것이다.

 하지만 지금의 나는 아니다. 그게 아니라고 한다면 내가 왜 지금 인생의 10년을 되돌리기 위해 또 10년을 투자해야 하는가. 그것은 내 뜻에도, 인생의 가성비에도 맞지 않는다.

 그러면 또 누군가 반문할 것이다. 의사를 하려는 의지가 원래 이렇게 희박했느냐고. 의사고 되고 싶어 한 사람이 맞긴 한 거냐고.

 나라고 10년 공부한 것이 왜 아깝지 않겠는가. 내가 인생에서 가장 간절했던 꿈은 의사가 되는 것이었다. 그중에서도 응급의학과에 꼭 가고 싶었다. 힘들게 공부하고 밤잠을 설치면서도 나는 평생을 병원에서 보낼 생각으로 살았다. 살면서 의사라는 길만 보고 달려왔기 대문에 지금처럼 어떤 제동이 걸려 있는 상황에서 내가 하고 싶은 다른 일들을 찾아보고 있는 나날이 힘겨울 때도 많다. 그러나 어쩌면 이 또한 생의 과정이지 않을까?

 나는 늘 의사가 되고 싶었다. 그런데 나는 전문의를 위한 수련 시기를 놓쳤다. 동기들과 흔히 '로컬 시장'이라고 하는데, 내가 '의사'라는 이름만 달고 싶은 거라면 인턴을 할 필요도 없이 졸업하자마자 연봉을 가장 많이 주는 동네 의원에 취직하든 개업을 하든 얼마든지 그럴 수 있었다. 당직만 서는 알바의사를 하는 방법도 있었다. 그러나 내 나람의 보람, 내가 느끼는 보라믄 로컬 시장이 아니라 응급실이라는 작지만 큰 공간 안에 있었다.

 '내가 느끼는 보람'과 '사회의 시선'이라는 대립항 사이에서 내가 의사로 일하면 지탄받는 상황이라면 내가 과연 이걸 유지하는 게 맞는가 하는 의문이 들었다. 의사 면허가 살아난다고 하더라도 만일 내가 응급의학과 수련을 못 받는다면, 의사로 계속 살 이유가 있을까?

 누군가는 내게 수련을 꼭 종합병원이나 응급의학 쪽으로 받아야 할 이유가 있느냐 묻는다. 왜냐면 작은 응급실의 경우 전문의가 부족하여 일반의도 모집하고 있기 때문이다. 하지만 작은 병원에서 형식적으로 수련받고 싶지 않았다. 그러면 나중에 현장에 투입되었을 때 대처 능력이 떨어질 수도 있고 경험이 부족해 뜻하지 않은 사고를 낼 가능성도 커진다.

 교수님의 가르침이 머릿속에서 맴돌았다.

 "훌륭한 의사는 착한 의사가 아니다. 실수하지 않는 똑똑한 의사다. 사람 생명이 왔다 갔다 하는 마당에 착하고 멍청한 의사는 아무 쓸모가 없다."

 그래, 그럴 거면 안 하는게 낫다. 생명이 왔다 갔다 하는 응급실 현장에서, 불충분한 수련을 받고 싸워낼 수 있을까? 생가가 오가는 상황에서 내가 제대로 하지 않으면 환자에게 오진을 내릴 수도 있다. 상상만 해도 끔찍하다. 수련을 제대로 못 받고 응급실에 설 거라면 안 하는 게 낫겠다는 생각이 들었다.

 

 의료 혜택이 미치지 못하는 많은 곳에, 사실상 의료 혜택을 못 받는 곳에 나의 작은 손길이 조금이나마 도움이 된다면 누군가의 삶이 완전히 달라질지도 모른다. 조건이 닿는다면 그렇게라도 살고 싶었지만, 이제는 불가능한 일이다. 명지병원도 경상대병원도 수련의로 받아주지 않았다. 나보다 성적이 낮은 사람도 붙었는데, 블라인드가 원칙이라고 모집요강에 크게 적어뒀던 경상대병원에서는 면접관이었던 병원 고위 관계자가 내 이름과 상황을 언급하며 왜 우리 병원에 지원했냐고 핀잔을 주기도 했다.

 '아, 이제 나는 아무 데서도 안 받아주는구나. 앞으로 수련은 글렀구나.'

 응급의학과는 항상 모집정원이 차지 않아 추가 모집하는 경우가 있고 가을에도 모집한다. 주변 친구들이 여기 비었다고 지원해보라고 추천을 많이 해줬다. 하지만 더 지원해봤자 기삿거리만 늘어나겠다는 생각이 들었다. 딱 거기까지였다. 의사로서의 내 앞길이 막혀버린 순간이었다.

 보건복지부에서 나의 의사 면허를 취소하기 전에 나는 의사 면허를 반납하겠다고 선언했다. 온전히 나의 선택이었다. 뉴스에서 "진심으로 반성하고 있으면 면허를 반납하고 소송을 취하해야지"라고 하던 패널이 막상 내가 면허를 반납하고 소송을 취하했더니 "기소를 피하려고 쇼하네"라고 한다. 공중파 뉴스에까지 나와서 떠드는 사람이 저렇게 앞뒤가 안 맞을 수 있을까? 또 어떤 분은 "아버지 총선 출마를 위해 네가 희생했구나, 잘했다. 넌 딸이기 때문에 아버지의 성공이 곧 너의 성공이다. 그때 시집가거라"와 같은 성차별적 망언을 쏟아냈다.

 예전에는 어른들의 말은 다 맞는 줄 알았다. 웃어른은 존경할 대상이고, 나보다 큰 지혜를 담은 사람들인 줄 알았다. 그런데 살다 보니 꼭 그런 것만은 아니다. 분명 아닌 사람도 정말 많다. 존경심은 나이에서 오는 게 아니라 정말 존경할 만한 사람일 때 생긴다는 것을 깨달았다. 

 다시 말하지만, 의사 면허 반납은 여러 요소를 고려해 심사숙고 끝에 내린 결정, 나를 위한 선택이었다.

 "인생에 레몬이 주어지면, 레모네이드를 만들라"는 격언이 있다.

 비록 지금 인생의 대부분을 부정당했지만, 이 상황을 나는 제2의 자아실현 기회로 만들어보려 한다. 한 길만 바라보고 달려온 나에게 이 같은 강제 멈춤은 아마 평생에 한 번 겪을까 말까 하는 트라우마일 것이다. 하지만 나는 이 막힌 상태를 기꺼이 누려보기로 마음먹었다. 일단 멈추어 주변을 살펴보기로 했다. 내가 지금까지 달려왔던 길이 좁고 긴 길이었던 데 반해 이제부터 펼쳐질 길은 꽃도 피어 있고 산도 보이는 그런 길일지도 모른다. 그 길을 천천히 즐기며 걷다 보면 나의 세상도 확장되어 더 큰 행복을 안겨다 줄지도 모른다.

 

p156

 지수는 고등학교 2학년 때부터 친하게 지낸 친구다. 한 살 후배여서 같은 반은 아니었지만, 함께 밴드 활동을 하며 가까워졌다. 이 친구가 성인이 되었을 때 첫 여행을 함께 갈 정도로 친했다. 친구 부모님은 지수가 나와 여행 간다고 하면 다 보내주시고 나도 이 친구와 어디든 간다고 하면 부모님도 오케이, 지원해주셨다. 

 지수를 만난 이후로 모든 생일을 함께 보냈다. 친구 부모님도 나를 정말 잘 챙겨주셨고, 서로 남자친구도 소개 해주고, 서로의 친구들도 다 소개해주었다. 함께 여행도 자주 다니고 부모님의 안부를 묻는, 정말 좋은 친구였다.

 

 아버지가 민정수석, 법무부장과으로 잘 나갈 때는 매일 같이 밥 사준다 술 사준다, 누구 소개해주고 싶다, 선 자리 마련해주고 싶다, 이 말 아버지께 꼭 좀 전해달라, 부탁할 게 있다, 돈 빌려달라 연락하던 사람들이 한순간에 툭 끊겼다. 조금 씁쓸하긴 했지만 원래도 그런 자리, 그러니까 아버지 때문에 부른 자리에 나가는 것을 굉장히 싫어했던 나는 오히려 잘 되었다 싶었다.

 내가 친하다고 생각하는 친구들은 애초에 나를 '조국의 딸'로 보지 않았다. 그냥 '조민'으로 보았다. 이런 친구들만 남으니 마음이 아주 편해졌다. 그저 집 앞에서 삼겹살에 소주 한잔 마시면서 시시콜콜한 이야기나 하고 서로 밥값 내겠다고 싸우는, 지금 남아 있는 친구들이 진짜다.

 그 친구들의 선봉에는 항상 지수가 있었다.

 집이 압수수색을 당한 날, 내 생일 전 날이었다. 가족 중 누구도 당연히 내 생일을 신경 쓰지 못했다. 나조차도 내 생일을 잊고 있었으니.

-----------------------

(2019년 9월 23일 조국 장관 자택 압수수색 뉴스, 방송 날짜는 9월24일)

---------------------------

 

 사람들이 들이닥쳐 집을 뒤지고 물건을 가져가고, 눈 앞에서 낯선 사람들이 내 방을 오갔다.

 너부 놀란 마음에 그저 앉아 있는데, 지수에게서 전화가 왔다.

 "언니, 언니 집 앞에 기자가 왜 이렇게 많아요?"

 "너 어디야? 뉴스 봤어?"

 "아니, 언니 집 근처에 한 번 왔는데 사람이 너무 많아서. 엄마가 언니 생일 밥 사주라고 카드 줬는데 어떻게 나오지?"

 "정말? 나 못 나가. 나가면 카메라 한 100대는 있을걸?"

 "언니, 뒷문으로 한번 나와봐요. 한번 어떻게든 나와봐."

 집이 털리고 있는데 내가 어떻게 어머니를 남겨두고 혼자 가겠는가. 어머니도 정신이 없는데, 그런데 통화 내용을 들은 어머니가 말씀하셨다.

 "민아, 너라도 나가. 너 혼자 나가."

 "아니, 나도 그냥 여기 같이 있을게요."

 "아니냐, 여기는 지금 사람 몇 명만 있으면 되고, 여기 있어봤자 압수수색이 언제 끝날지 몰라. 계속 지연될 수도 있고 영장 추가로 나오는 것도 기다리고 하면 12시간이 걸릴지 24시간이 걸릴지 몰라. 그러니 차라리 나가서 있다가 와라."

 그렇게 나는 기자들의 눈을 피하려 경비아저씨의 도움을 받아 옥상을 통해 옆 라인으로 가서 옆 라인 문을 통해 바깥으로 나올 수 있었다.

 지수가 나를 데려간 곳은 친구가 일하던 회사에서 임직원 할인이 되는 레스토랑 중 가장 좋은 음식점이었다. 고급 레스토랑이라 망설였는데, 지수는 나를 잡아끌었다. 이 음식점은 훗날 뉴스에 나왔다. 한 변호사가 내가 '호화 생일 파티'를 했다며 제보해 보도한 것이다.

 그래, 호화라면 호화였다. 지수와 나 여자 둘이 요리 세 가지에 음료수 한 잔씩을 마셨으니.

 그런데 정말 신박한 뉴스가 나왔다. 그 가게에서 제일 비싼 코스요리를 10명이 먹어서 돈 100만 원 가까이 나왔다면서. 아, 허위 기사라는 게 이렇게 나는구나를 그때 제대로 느꼈다.

--------------

https://biz.heraldcorp.com/view.php?ud=20190927000015

 

강용석 “조국 딸 생일파티 71만원 영수증 알고보니 가짜”

유튜브 채널 ‘가로세로연구소’가 지난 25일 조국 법무부장관의 딸 조모씨가 생일에 방문한 중식당의 식사내역이라며 소개한 영수증이 허위로 알려졌다.유튜브 채널 ‘가로세로연구소’ 운영

biz.heraldcorp.com

(당시 조민 씨 호화 생일파티 관련 가짜 뉴스, 출처는 그 악명 높은 가로세로연구소, 강용석)

-------------------

 

 우리에게는 우리만의 전통이 있었다.

 1. 생일마다 서로 풀코스로 대접하기
 2. 선물은 예산 5만 원 내로 사기

 나는 상대적으로 환경이 유복한 유학생들 사이에서 자랐고, 젊은 세대의 SNS 문화로 고가의 브랜드 쇼핑백이 담긴 선물을 주고받는 것을 심심치 않게 보는 편이었다. 그럼에도 서로 부담을 주고 싶지 않아 지수와 서로 선물을 받지 않겠다고 고집을 부리다가 마음과 진심은 주고받되, 부담을 최소화하기 위해 만든 룰이었다.

 그렇게 나는 작년 5월, 대부도로 지수를 데려갔다. 조개구이도 먹고, 전동 이륜바이크도 타고, 바다 앞에 텐트를 펼쳐놓고 고기도 구워먹었다. 지수의 생일 파티였다.

 

지수는 핼러윈 데이 저녁에 잠시 이태원에 들러야 한다고 했다. 나는 코로나 이후로 처음 맞는 핼러윈이라 사람이 많을 것 같아서 다른 친구들과 신사동에 가기로 했다. 지수에게는 신사동으로 오라고 했다

 '오늘 이태원 사람 너무 많을 것 같은데, 너도 신사동으로 와.'
 ' 그럼, 잠시 이태원에 들러 친구 지인들한테만 인사만 하고 바로 넘어갈게!'

 그런데 지수는 오지 않았다.

 정신을 차리고 보니 지수의 장례식이 열렸다.

 귀국한 지수의 부모님께서 지수를 보러 영안실에 들어가실 때 따라 들어가서 나도 그녀의 마지막을 볼 수 있었다. 

 

인스타그램에 지수 생일 때 지수와 대부도에 가서 찍은 사진을 올린 적이 있다. 내가 소중하게 생각하는 친구가 찍어준 나의 소중한 추억, 그것을 내 계정에 올려두고 싶었다. 소중한 기억, 기억하고 싶은 지수를 간접적으로 담은 장면. 그리 생각하고 올린 사진이었다.

(지수 씨가 찍어준 사진, 출처 : 조민 씨 인스타)

 

누군가는 이 사진을 올린 의도가 무어냐며 내 정신상태까지 언급했다. 얼굴도 모르는 이들이 그 사진에 이런저런 이야기를 붙인다. 말도 안되는 이야기들이다. 하지만 내가 해명한답시고 무언가 언급하는 건 도리가 아니라 생각했다. 내가 입을 열면 열수록 기사가 크게 나고, 기사가 크게 나면 지수가 뉴스에 나오겠구나 싶었다.

------------------------

https://www.news1.kr/articles/?4947103

 

조민 '대부도 캠핑' 사진 구설…"이태원 고인이 찍었나" "확대 해석 말길"

(서울=뉴스1) 소봄이 기자 | 조국 전 법무부 장관의 장녀 조민씨의 인스타그램이 연일 화제다. 이번에는 지난 1월 올린 대부도 캠핑 사진을 두고 "이태원 참사로 고인이 된 지인이 찍어준 거 아니

www.news1.kr

(당시 사이코패스 한국 언론들의 기사)

------------------------------

 

 사람들이 나를 두고 이러쿵저러쿵하는 것은 상관 없지만, 지수를 가십거리로 올리는 건 싫었다. 지수의 부모님은 또 얼마나 힘드실까 하고 그냥 내가 조금 욕을 먹고 말자고 생각했다.

 얼마 전, 지수의 어머니에게 말씀드렸다.

 "지수가 찍어준 사진으로 기사가 나서 죄송해요."
 "아니, 아줌마는 민이가 어떤 마음으로 그 사진을 올렸는지 너무나 잘 알기에, 누가 뭐라든 괜찮아. 오히려 지수와의 추억을 생각하며 사진 올려줘서 엄마로서 고맙지."

 어머니는 그 사진을 보면 나를 찍어주는 지수가 보이는 것 같다고 말씀하셨다. 그래서 그 사진을 지우지 않았으면 좋겠다고 말씀하셨다. 정말 감사했다. 내게는 소중한 친구이자 어머니에게는 사랑하는 딸인 지수는 그렇게 우리 마음에 남아있다.

 

p216

 어느 날, 백호에게 친구가 있으면 덜 외롭지 않을까 하는 생각이 들었다. 그러던 어느 날 포인핸드 앱을 보다 놀라운 사진을 보았다. 골프연습장에 고양이가 출연한 거다. 퍼팅장에서 고양이가 골프공으로 축구하며 골프장 손님들을 방해하는 사진이었다. 공들 사이로 돌아다니는 작은 고양이 한 마리가 불안해 보였다.

(백호 : 출처 조민 인스타그램)

 골프연습장 주인이 포인핸드에 입양 글을 올려두었다. 누가 보아도 한국 토종 길고양이었다. 치즈태비무늬에 초롱초롱한 눈망울이 정말이지 귀여웠다. 엄마 없는 아기 고양이인데 겨울에 얼어 죽을 것 같아 빨리 누가 데려갔으면 좋겠다고 적혀 있었다.

 지역을 보니 일산이었다. 쌍문동에 살 때라, 운전해서 가면 금방이었다. 연습장 사무실에 가서 보니 마치 아랫목처럼 전기담요 아래 푹신한 이불을 깔고 고양이가 자고 있었다. 골프연습장 주인 아주머니는 회원들이 가져다준 사료와 간식을 주었다며, 용변도 자기가 알아서 가려 흙에 가서 한다고 했다.

 "냥냥아 안녕?" 하면서 츄르를 들고 살며시 다가갔다. 태어난 지 삼 개월 쯤 되었을까, 솜털도 아직 빠지지 않아 부스스한 털을 가진 아기 냥이었다. 가만히 보니 정말 지저분했다. 여기저기 정체를 알 수 없는 것들이 묻어 있었다. 제법 츄르 먹어본 경험이 있는지 미친 듯이 먹었다. 그러더니 마구 애교를 부리고 몸을 부볐다. 백호와는 정반대였다. 

 피부병도 없고 건강해 보이는 데다가 폴짝거리는 게 너무나도 귀여웠다. 하지만 집에서 생활하려면 야외 생활은 청산해야 했기에 마음에 걸렸다. 저렇게 밖에서 노는 걸 좋아하는데.

 하도 팔짝팔짝 뛰어다녀서 잡는 건 포기하고 다시 한 번 "나랑 갈까? 츄르 줄까?" 했더니 차까지 따라왔다. 케이지에 넣어서 지퍼를 잠갔다. 심바를 데리고 떠날 때, 아주머니는 남은 사료를 챙겨주셨다. 

 골프장 아주머니와 그 가족들은 그새 고양이에게 정이 들었는지 가끔 소식을 전해달라고 했다(지금도 가끔 사진을 찍어 소식을 전하고 있다).

 이제 가자, 하고 가는데 고양이가 계속 나오겠다며 야옹거렸다. 

 껴내주었더니 뒷 좌석부터 쭉 스캔을 시작했다. 운전석 쪽으로 오지 못하게 하고 내 쪽으로 오려고 하면 옮기고 그냥 운전만 하던 어느 순간, 고양이가 무릎 위에 앉았다.

 "뭐야 너어."

 내 허벅지 위에 갑자기 딱 눕더니 잠드는 거였다. 일산에서 쌍문까지 밀리는 차 안에서 한 시간 반을 고양이는 내내 잠들어 있었다. 처음 본 인간 무릎 위에서.

 동물병원에 가보니 다행히 건강하고 귀 진드기만 조금 있었다. 한 달 정도 통원치료하면서 백호가 있던 방에 격리시켰다. 백호는 갑자기 나타난 작은 녀석이 자기 영역을 독차지하고 있으니 꼬리를 펑! 하고 경계를 늦추지 않았다. 

(심바 : 출처 조민 인스타그램)

 

 백호가 서열을 과시하기 위해 심바를 끈질기게 괴롭혔는데, 심바는 괴롭히면 괴롭히는 대로 당하는 순둥이다. 밥도 백호가 먼저 먹고 나서야 심바가 먹고, 캣타워에서도 백호가 맨 윗자리를 차지한다. 백호는 소형종이고, 심바는 중형종이라, 심바가 성장할수록 점점 백호의 크기를 넘어선다. 지금은 백호가 3.8kg,  심바가 5.4kg이다. 덩치만 보면 사실상 심바가 서열을 뒤집는 게 맞는데, 캣타워 맨 위에 있는 우주선에만 가끔 가서 잘 뿐, 나머지는 백호한테 아무리 맞아도 져준다. 백호와 심바는 이제 떨어지려야 떨어질 수 없는 자매가 되었다. 일 년에 한 번은 둘이 껴안고 자는 걸 목격했기 때문에 확실하다.

(백호와 심바 : 출처 조민 인스타그램)

 

 두 녀석이 서로 자기를 만져달라고 애웅거릴 때, 잠자고 일어나 내 곁에 곤히 잠든 녀석들을 볼 때, 집에 들어가면 꼬리를 치켜들고 반겨줄 때.... '사랑'이라는 것이 있다면 이런 게 아닐까 하고 느낀다. 

 

    너를 사랑하는 일은 아주 쉬웠어
    네 눈 속엔 우주가 담겨 있었거든
    함께하는 일상은 금방 습관이 돼
    내 작고 예쁜 보송한 천사야
    내일도 모레도 그렇게 가만히 잠들고 일어나자
  

     -미닝, 내 고양이 (My Cat) 중에서

 

 

p242

 사무엘 베케트의 <고도를 기다리며>는 유명하다고 해서 읽어본 작품인데, 나에겐 하나도 어쩐지 재미없었다. 얼마나 재미가 없었으면 제목으로만 기억나는지.... 정말이지 배우 둘이 벤치에 앉아 있다가 끝났다. 고도라는 사람이 실제로 등장했는지도 기억에 없는 걸 보니, 그는 끝까지 오지 않았던 모양이다.

 

p244

 A Poison Tree. By William Blake

 

 I was angry with my friend;
 I told my wrath, my wrath did end.
 I was angry with my foe:
 I told it not, my wrath did grow.

 And I watered it in fears,
 Night & morning with my tears:
 And I sunned it with smiles,
 And with soft deceitful wiles.

 And it grew both day and night.
 Till it bore an apple bright.
 And my foe beheld it shine,
 And he knew that it was mine.

 And into my garden stole,
 When the night had veild the pole;
 In the morning glad I see;
 My foe outstretche beneath the tree.

 

 (해석은 책에는 없는데 인터넷 등을 참고해서 내 나름대로 해석을 붙였다)

 나는 친구에게 화가 났다;
 나의 분노를 얘기했더니, 분노는 사라졌다.
 나는 적에게 화가 났다:
 나는 말하지 않았고, 분노는 자라나기 시작했다.

 나는 두려움에 떨며 그것에 물을 주었다.
 밤낮으로 흘리는 나의 눈물로:
 나는 미소로 그것에 햇빛을 쬐어주었다.
 그 미소 뒤에 교묘한 속임수를 섞어서.

 분노는 밤낮으로 자라
 밝게 빛나는 사과를 맺게 되었다.
 적은 사과가 빛나는 것을 보게 되었고,
 그것이 내것이라는 것을 알게 되었다.

 그리곤 내 정원에 숨어들어왔지,
 밤이 별빛을 가릴 때.
 아침이 되어 난 기뻤지.
 나의 적이 나무 아래 누워있는 모습을 보며.
 
 
  

 윌리엄 블레이크의 <독나무>는 내가 좋아하는 시 중 하나다. 고등학교 때 유학반에서 미국 유학을 준비하면서 처음 접한 시로, 어린 나이에 적잖이 충격받았다. 이 시에서 화자는 분노의 두 가지 표출 방법을 다루는데, 친구에게 화가 나면 분노를 표출하자 분노가 사라졌다고했다. 하지만 친구가 아닌 적에게 화가 날 때는 분노를 표출하지 않고 그 분노를 나무처럼 키워서 사과가 맺힐때까지 기다린다. 적이 그 탐스러운 사과를 훔쳐먹고 나무 아래 죽어있는 것을 보고 기뻐하는 게 시의 내용이다. 이렇게만 보면 기과하다고 생각할 수 있을 것이다. 하지만 나는 분노라는 감정을 이렇게 다룬 시를 처음 보아서인지 매우 인상적이었다. 화자의 분노를 자양분 삼아 자라는 사과라니. 분노와 눈물, 두려움을 안으로 삼키면서 겉으로는 미소만 짓고 있는 화자. 화자는 적에게 복수하기 위해 분노라는 사과를 키웠지만, 그 사과를 키우는 과정에서 그는 본인도 의도하지 못했던 변화를 경험한다. 가식적이고 순수하지 못한 사람이 되어버렸던 것이다. 분노는 상대방뿐 아니라 본인 자신도 망가뜨린다는 이야기 아닐까.

 

p254

 최근 저에 대한 사회적 관심이 깊어지면서, 제 가치관 및 삶의 일부를 드러내고 싶다는 소망이 생겼습니다. 왜냐하면 저 자신을 그대로 드러내지 않고 다른 사람이 원하는 대로 살기에 저의 가치관과 주체성은 너무나도 강하다는 것을 깨달았기 때문입니다.

 

자전적 에세이. 전반부는 성장기의 에피소드 후반부는 사회에 나가서 정치에 입문하기까지의 과정 그리고 정치입문 후의 역경을 다루고 있다.

이재명에 대해 알고 싶으면 함 봐두면 좋을 내용. 사실 인터넷에도 많이 퍼져있는 내용이라 이재명에 관심이 있는 이들이라면 웬만큼은 알만한 내용이다.

--------------

 p48

 무려 프레스공! '나름 성공한 열다섯이었다.'라고 쓰려다 만다. 성공은커녕 고무기판 연마기에 손이 남아나질 않아 공장을 옮겼더니 더 위험한 샤링기를 만았고, 샤링기에서 떠나니 프레스기 앞에 앉아 있었다.

 세상은 소년공의 안전에 아무 관심이 없었다.

 대양실업에서는 사흘이 멀다 하고 권투경기가 열렸다. 권투가 인기 있던 시절이었다. 경기는 점심시간 공장창고에서 벌어졌다. 직원 단합이나 복지 차원의 경기는 아니었다. 선수는 신참 소년공들이었고, 선수 지명권은 반장과 고참들에게 있었다. 지명당한 소년공들은 무조건 글로브를 끼고 나가 싸워야 했다. 그리고 고참들은 자기들이 먹을 '부라보콘' 내기를 걸었다. 그리고 그 부라보콘 값은 권투 아닌 격투기에서 진 신참 소년공의 몫이었다.

 하고 싶지도 않은 경기를 해야 하는 소년공은 경기에 지면 돈까지 내야 했다. 나도 지목당하면 꼼짝없이 경기에 나갔다. 한달 용돈이 500원인데, 부라보콘은 100원이던가? 경기에서 지면 부라보콘 세 개 값인 하루 일당을 고스란히 빼앗겼다. 정말 '개떡' 같은 경기였다.

 나는 그때 이미 왼팔을 제대로 쓸 수 없었다. 벼락같이 떨어지는 육중한 구형 프레스기가 왼쪽 손목을 내리치는 사고를 당한 것이다. 조금만 더 늦게 팔을 뺐다면.... 손목이 부어올랐지만 타박상이려니 하고 빨간약과 안티프라민 연고나 바르고 말았다. 손목뼈가 깨졌을 거란 생각은 하지 못했다.

 하지만 부기가 가라앉은 뒤에도 통증은 가시지 않았고 프레스기 작업을 제대로 할 수 없을 만큼 아팠다. 내색하면 프레스공 지위를 잃는다는 생각에 아픈 걸 참고 숨기며 더 열심히 일했다. 그게 평생의 장애가 될지 그땐 몰랐다. 프레스기에서 밀려나지 않는 것만 중요했다. 

 

p71

 악착같이 공부하겠다는 마음으로 도금실에서 락카실로 옮겼다. 락카실은 이중으로 밀폐된 구역이어서 방해를 덜 받았다. 나는 최고 속도로 작업 물량을 끝내놓고 남은 시간에 공부했다. 그 시간이 내겐 유일한 도피처였다.

 그런데 몸이 자꾸 말썽을 부렸다. 두통이 잦아졌고 코가 헐기 시작했다. 락카실은 독성물질이 배출되지 않아 화공약품 냄새가 지독했다. 결국 나는 그곳에서 후각의 반 이상을 잃었다. 좋아하는 복숭아 냄새를 맡을 수 없게 됐다.

 프레스기에 치인 손목도 통증이 심해지고 있었다. 한 해 키가 15센티나 컸는데, 두 개의 손목뼈 중 성장판이 파손된 바깥뼈만 자라지 못하고 있었다. 팔이 눈에 보일 정도로 뒤틀리면서 밤새 끙끙 앓는 날이 많았다.

 

p76

 아버지에 대한 내 감정도 양가적이었다. 비 오는 어느 새벽 아버지와 쓰레기를 치우는데 급기야 일을 못 할 정도로 빗줄기가 굵어졌다. 우리는 시장통 처마 밑에 쪼그리고 앉았다. 비가 잦아들기를 기다리며 꼬박꼬박 조는 내 모습을 본 아버지가 가게 좌판에 누워 눈 좀 붙이라고 했다.

 새벽에 누가 깨웠다. 엄마였다. 흠뻑 젖은 작업복을 입고 오들오들 떨며 자고 있는 내 모습을 보고 엄마는 말없이 눈물을 쏟았다. 그때 아버지는 희뿌연 여명 속에서 비를 맞으며 혼자 쓰레기를 치우고 있었다.

 "재명이 댈꼬 드감더."

 엄마가 소리쳤다. 아버지가 천천히 돌아보더니 들어가라고 손짓했다. 아버지의 그 모습이 문득 아렸다.

 생각하면 아픈 것들투성이.

 그래도 아버지, 그래서 아버지였다.

 

p79

 손목 통증으로 밤새 끙끙 앓는 날이 많았다. 하지만 치료받을 길은 요원했고 치워야 할 쓰레기는 끝도 없이 나왔다. 밤새 쓰레기를 치우고 오면 나는 젖은 박스처럼 구겨져 잠이 들었다.

 어느 날 잠결에 엄마와 아버지가 하는 얘기가 들렸다.

 "재맹이가 저러다 평생 빙신이 되머 우야니꺼?"

 "돈 벌어서 수술하머 될끼라."

 "집 살라꼬 모다돈 돈으로 아 수술부터 시켜야 되잖겠니껴?"

 엄마의 말에 의식이 또렷해졌다.

 "그 돈은 아무도 손 못 대."

 엄마와 아버지의 말이 머릿속에서 수없이 재생됐다. 한창 예민한 열입곱 살이었다. 가난은 아득해 보였고 한 팔을 못 쓰는 사람이 되어서도 살아갈 수 있을지 자신이 없었다. 온갖 절망적인 생각이 나를 삼키고 있었다. 눈물이 베개를 적셨다.

 

 다락에 연탄불을 피우고 수면제를 먹었다. 잠은 쉬 오지 않았다. 세상과의 영원한 작별이었다. 슬프기도 했지만 홀가분하기도 했다. 

 얼마가 지났을까? 나는 멀쩡하게 눈을 뜨고 다시 깨어났다. 연탄불을 꺼져 있었고 정신은 말짱했다. 공장 친구들은 그 정도면 죽는다고 했는데... 수면제가 부족했던 모양이었다. 다시 기회를 보기로 했다.

 

 다시 약국에 들렀다. 또 수면제를 달라고 하면 이상하게 여길 듯해 이번에는 동생 핑계를 대고 수면제 20알을 샀다. 약사가 잔소리가 많았ㅈ만 귀에 들어오지 않았다.

 유서를 썼다. 엄마에게 미안했다. 하지만 달리 방법이 없어 보였다. 너무 지쳤다고 말하고 싶었다. 눈물 때문에 글씨가 잘 보이지 않았다.

 다시 연탄불을 붙이고 꾸역꾸역 수면제를 삼켰다. 

 

p.156

 나는 승률이 높은 변호사였다. 사건을 치밀하게 분석하고, 법리는 물론 최신 판례까지 샅샅이 뒤져 변론을 준비했기 때문이다. 재밋게도 내가 노동자들을 변론하느라 재판정에서 맞붙었던 회사와 기업주들이 나에게 다른 사건을 의뢰하고 소개하기도 했다. 그들은 나로 인해 패소했지만 그래서 오히려 내가 자기들 변호사였으면 싶은 생각이 들었다는 것이다. 그런 기업들은 노사문제가 아닌 민사사건을 가지고 왔다. 수임료가 괜찮았다. 

 법률상담도 열심히 했다. 답을 못 찾겠으면 며칠 뒤 다시 오라고 한 뒤, 책 사서 공부하고 판례를 분석해 답을 찾았다.

 지금은 인터넷으로 최신 판례를 손쉽게 확인할 수 있지만, 당시에는 책자로 만들어 전국의 변호사 사무실로 팔러 다니는 사람들이 있었다. 성남에서 최신 판례집을 빠짐없이 구입해 탐독하는 건 나뿐이었다.

 "돈도 안 받는 무료상담을 왜 그렇게 열심히 하는 거야?"

 하루는 무료상담이 끝난 후 이영진이 물었다. 얼굴에 의아함이 가득했다.

 "내가 답을 찾아주지 않으면 저 사람들은 성남 어디 가서도 답을 찾지 못할 거야. 성남의 변호사인 내가 해야지."

 나의 대답에 대한 감상평이랄까. 이영진은 그 시절의 나에 대해 이렇게 전한다.

 "재명이는 늘 공부했어요. 보통 변호사 되고 나면 공부 안 하거든요. 그래서 머리가 굳고 생각도 굳는데, 재명이는 안 그래요. 또 재명이는 질 사건은 맡지 않았어요. 질 게 분명한 걸 가지고 소송하려고 하면 하지 마라, 해도 진다, 시간과 돈만 날린다, 그렇게 얘기했어요. 그런데도 우리 말 안 듣고 기분 나빠하며 다른 사무실 찾아가서 소송한 사람들 어떻게 되었겠어요? 지고 나서 후회하며 우리한테 와서 그때 변호사님 말 들을 걸 그랬다고 후회하죠.

 

p162

 '파크뷰 특혜사건'은 분당 백궁/정자지구의 상업/업부용 토지를 주거용으로 용도변경하고 정/관계 유력인사들에게 특혜분양한 권력형 비리였다. 토지를 용도변경해 아파트를 짓는 일은 건설업자에게 엄청난 차익을 안겨주는 것이었다. 나는 1999년 말부터 용도변경의 부당성을 지적하며 반대운동에 나섰다. 하지만 주민들의 강력한 반대에도 불구하고 성남시는 용도변경했고, 이 땅의 가치는 천정부지가 되었다. 사건을 파헤쳐 나갈수록 배후에 토건업자와 정관계, 검찰, 언론으로 이어지는 막강한 고리가 버티고 있음을 알 수 있었다. 지역의 변호사 한 명과 시민단체가 맞서 싸우기에는 너무나 거대한 상대였다. 주변에서 다친다며 물러서라는 권유가 잇달았다. 무모하다고 했다.

 나라고 두렵지 않은 것은 아니었다. 하지만 몰랐다면 모를까 부정이 행해지고 있음을 알게 된 이상 물러서는 것은 옳지 않았다. 

 결심은 그러했지만 실제의 상대는 예상보다 막강했다.
 토건세력은 처음엔 회유책으로 나를 포섭하려 했다. 내가 지역의 노동자와 시민을 위한 언론사를 만들고 싶어한다는 사실을 알아낸 뒤 20억을 투자해주겠다고 제안을 해왔다. 20억, 천만 원도 없어 사무실 개업비용을 빌렸던 내게 20억이라.. 나는 이런 제안이 들어왔다는 사실을 동료들에게 얘기했다. 그리고 이렇게 반문했다.

 "우리가 양심을 팔려면 얼마를 받아야 할까?"

 돈으로 사람도, 영혼도 살 수 있다고 믿는 세력들이었다. 나는 한 5천억은 받아야 하지 않겠냐고 했다. 성남시민모임과 같은 단체를 전국적으로 2~3백 개쯤 만들어 운영하려면 그 정도는 있어야 하지 않을까 싶었다. 모두가 웃었다. 웃픈 농담. 그들은 이날의 농담을 소문냈다. 이재명이 20억이 적다며 5천억을 요구했다고.... 덕분에 내 양심의 공시지가는 20억에서 5천억으로 급격히 상승했다.

 회유가 먹히지 않으니 다음 단계는 협박이었다. 나를 향한 협박까지는 견딜 만했다. 하지만 가족을 해치겠다는 협박에는 나도 힘들었다. 그들은 사무실은 물론 집으로도 전화를 해댔다. 새벽에 전화해서 아내에게 아이들이 다니는 학교와 반까지 대면서 좋지 않을 거라고 했다. 아내가 무척 고통스러워했다. 경찰에 신고해도 소용없었다. 나중에 보니 경찰서 간부도 한패였다.

 결국 나는 허가를 받고 6연발 가스총을 구비했다. 양복 주머니에 총을 넣고 다녔다.

 상대는 거대한 골리앗이었다. 어떻게 할 것인가? 나는 생의 방향을 결정할 커다란 물음 앞에 서 있었다.

 

p168

 아파트 특혜분양은 곁가지였다. 몸통은 땅의 가치를 천정부지로 뛰게 한 용도변경이었다. 어마어마한 이득이 발생하는 지점. 나는 사건의 본질을 추적하는 KBS '추적 60분' 팀의 취재와 인터뷰에 응했다. 나와 인터뷰 도중, 내 사무실에 오기 전 수차례 검찰을 사칭해 시장 비서진과 통화하며 시장과의 연결을 요청한 KBS 피디에게 시장으로부터 통화하자는 음성메시지가 왔다. 용도변경의 최종 인허가권자였던 성남시장에게 전화한 피디는 자신이 파크뷰 사건 담당검사라며 솔직하게 전모를 털어놓을 것을 종용했다. 당시 성남시장(인터넷 검색해보면 나온다. 김병량 시장이다)은 내막을 털어놓았고, 기자는 통화를 녹취했다.

 며칠 후 녹취가 '추적 60분' 방송으로 나갔지만 반향이 없다. 나는 피디에게 통사정해 녹취파일을 받아 기자회견장에서 공개했다.

 마침 지방선거와 맞물려 세상이 뒤집혔다. 당황한 성남시장은 피디의 검사사칭 배후로 나를 지목했고, 검찰은 나를 공범으로 기소했다. 억울해서 대법원까지 가며 싸웠지만 결국 유죄로 벌금 150만 원을 받았다. 사칭한 PD는 선고유예였다.

 '파크뷰 특혜사건' 싸움은 몇 년에 걸쳐 계속됐다. 무려 499세대를 정관계, 법조계, 언론계의 유력자들에게 특혜분양한 사실이 드러났고, 도움을 주고 돈을 받은 경기도지사 부인, 성남시장, 경찰간부, 언론인, 정치인 등 관계자들이 줄줄이 구속되었다.

 돌이켜 생각하면 그 사건은 나와 부동산마피아, 음험한 기득권 세력과의 전선이 구축되는 순간이었다. 이 일을 두고 어떤 평론가는 내가 '부동산 패권주의 세력의 역린을 건드린 것'이라 표현하기도 했다.

 문제는 이 싸움이 아직 끝나지 않았다는 것.

 부동산투기 세력은 지금까지 면면히 이어지고, 땅을 통한 그들의 이익 추구는 만족을 모른다.

 그들은 전방위적인 수단을 동원해 부동산값 상승을 부추기고, 서로 결탁해 범법하며 천문학적 이득을 취한다. 그들은 이기기 어려운 거악이자 우리 사회의 숨은 실력자들이다.

 

p170

 토건마피아와의 싸움은 지금도 계속된다.

 대장동 개발사업 또한 다르지 않다. 대장동 건은 이미 2018년 경기도지사 선거 때도 내가 검찰에게 기소당한 사건이다. 검찰은 개발이익금 5,503억 원을 시민 몫으로 환수했다는 내 발언이 허위사실 공표라고 기소했다. 결론은?

 '무죄'였다.

 검경은 이미 그때 현미경을 들이대듯 대장동 사업을 자세히 들여다보았을 것이다. 내게 부정과 비리가 있었다면 이미 그때 그 점을 문제 삼지 않았겠는가.

 원래 LH의 공공개발로 추진되던 대장동 개발사업을 민간개발로 바꿔놓은 것 국민의힘 세력이다.

(대장동 개발사업에 대해 자세히 알고 싶은 사람은 다음 포스팅을 참고하라)

https://lachezzang.tistory.com/1332

 

[PD수첩]대장동, 설계자와 쩐주(1/3)

시행사인 성남의 뜰이 원주민에게 토지구입을 한 후, 도로와 기반시절 공사를 한 후에 택지를 건설사들에게 판매하게 됨. 이 판매과정에서 택지분양수익이 나게 됨. 그 판매 수익을 표와 같이

lachezzang.tistory.com

https://lachezzang.tistory.com/1333

 

[PD수첩]대장동, 설계자와 쩐주(2/3)

대장동 사업 초기인 2009년부터 자문변호사로 일하던 남욱 변호사는 인맥 활용을 위해 김만배 기자를 영입함. 강원도 지사 출마시 불법선거 운동으로 훅간 엄기영 당시 앵커. 대장동 개발에 대한

lachezzang.tistory.com

https://lachezzang.tistory.com/1334

 

[PD수첩]대장동, 설계자와 쩐주(3/3)

화천대유는 우선계약자로 다른 업체들과 달리 다섯 곳의 택지를 비교적 싼 가격에 매입할 수 있었음. 그리고 이 다섯 곳의 택지에 아파트를 건설해서 분양하면서 총 4천억 원 대의 이익을 남김.

lachezzang.tistory.com

 

하지만 나는 성남시장이 되면서 민간개발을 막고 성남시 공공개발을 추진했다. 공공개발로 시민 모두의 이익이 돼야 한다는 것이 내 원칙이었다.

 국민의힘 세력의 저지로 공공개발이 막히자 공공민간 합동개발이라도 해서 최대한 공익환수를 하기로 했다. 이가 없으면 잇몸이라도 써야 한다. 국민의힘 세력이 장악한 시의회의 반대로 지방채 발행이 막혀 성남시 예산만으로는 개발자금을 조달할 수 없어 민간투자를 받아야 했다. 이에 나는 원칙을 세웠다.

 자본은 민간이 댄다. 손해와 위험은 민간이 진다. 성남시는 사업이 어떻게 되든 고정이익을 취한다.

 오히려 민간사업자가 계약을 꺼릴만큼 성남시에 일방적으로 유리한 사업방식이었다.

 25억을 투자한 성남시는 당초 예상이익의 70%인 4,400억가량을 환수했고 1조 3천억을 투자한 그들은 몫은 30%인 1,800억이었다. 나중에 지가 상승으로 그들의 이익이 2천억가량 늘어났지만 성남시가 업자들에게 1,400억을 더 부담시켜 전체이익의 60% 가량을 환수해 시민들에게 돌린 결과가 됐다. 내가 아니었으면 5,800억도 그들 업자와 정치인, 전직 검사들의 몫이 되었을 것이다.

 부동산 투기세력은 나의 기습에 또다시 당한 셈이다. 토건마피아가 지금까지도 결사적으로 나를 반대하는 배경이다.

 땅을 통한 그들의 이익 추구는 매일매일 성실히 일하며 살아가는 시민들에게 박탈감을 준다. 상승하는 부동산 가격으로 다수의 사람들을 벼락거지로 만든다. 공동체 전 구성원들로 하여금 이 사회의 공정과 정의를 회의하게 만든다.

 불로소득은 누군가의 손실이다. 부동산 불로소득은 누군간의 피눈물이다. 이 적폐를 뿌리 뽑지 않고서는 공정과 정의를 기대하기 어렵다.

 세계 10위의 경제대국 대한민국이다. 이제 국가가 국민의 기본권으로서 주거권을 보장할 때다

 지역균형발전, 수도권 집중완화, 대규모 주택공급, 기본주택등의 영민한 정책집행이 필요하다. 하기로 작정하고, 용기있게 결정하고, 과감히 실행하면 얼마든지 가능하다. 그런 자신감이 내게는 있다.

 국민들의 머릿속에서 집 걱정 사라지게 하는 것이 내 목표 중 하나다. 혼자서는 불가능하겠지만 부정과 불의를 끝내겠다는 백만, 천만 국민의 뜻과 의지가 있다고 믿는다.

 

p173

 대학교 1학년 때 일이다. 1주일의 군사학교 입소훈련을 앞두고(*1988년까지 고등학교, 대학에 교련교육이 있었다. 남자의 경우 대학 1학년때 문무대에 입소해서 1주일간의 기초군사훈련을 받았으며, 2학년때는 전방 군부대에 입소해서 1주일간경계 근무 체험 -  GOP에서 철책선 근무, 매복 등 -을 하게 된다. 학생 때 힘든 경험일 순 있는데 문무대 1주일 입소 혜택이 군대 45일 면제, 1주일 군부대 입소가 군대 45일 면제, 합하면 90일, 무려 3달의 군대 기간 면제 혜택이 있었다. 당시 일반적 육군의 복무기간은 30개월이었는데, 이 혜택 여부에 따라서 대학을 나온 후임병장이 그렇지 않은 선임병장보다 먼저 제대를 하는 경우도 있었다. 그런 이유 때문인지 이 당시 대부분의 대학생들은 2학년을 마치고 나서 휴학을 하고 군대를 가는 것이 일반적인 관행이었다) 교련 교관이 장애를 증명하는 진단서를 떼어오라고 했다. 성남의 가장 큰 병원으로 갔다. 진단비가 2만 원이라고 했다. 돈이 없던 나는 발길을 돌렸고, 다음날 어렵게 2만 원을 마련해 들고 갔다. 그런데 병원에선 접수비 1천 원을 더 내라고 하더니 X-선비 1만8천 원도 추가로 요구했다. 무려 3만9천 원이었다. 화가 났다. 다른 병원에 정화를 걸어봤지만 취급하지 않는다는 답변만 돌아왔다.

 병원은 에누리 없는 시장논리로 사람을 대하고 있었다. 의료보험 혜택을 받을 수 없어 치료도 포기했던 나였다. 마음이 씁쓸했다. 나는 진단서를 포기했다. 그리고 경험 삼아 입소를 하기로 하고, 다른 친구들과 똑같이 군사훈련을 받았다.

 그런 일을 겪으며 의료에서 공공성이 얼마나 중요한지를 깨달았다. 다급한 생명의 문제이지 않은가? 성남시립병원 설립 추진운동은 다수 서민들을 위한 길이었다. 결국 나는 추진위원회의 공동대표를 맡게 됐다.

 우리는 시립병원을 세우기 위해 주민발의 조례제정에 나서기로 했다. 주민발의 조례제정은 지방자치에 처음 만들어진 제도였고 교과서에나 있는 것이었다. 그것을 현실에서 실현하겠다고 꺼내 든 것.

 지역 정치인들이 비웃었다. 압력을 행사하기 위한 퍼포먼스 정도일 거라 생각하는 사람도 많았다. 하지만 우리는 진심이었다. 나 또한 그때도 지금도 한다면 하지 시늉만 하는 사람은 아니다.

 한파가 몰아치는 겨울, 우리는 노상에서 핸드마이크를 들고 주민발의 참여자를 모집하기 시작했다. 노조원들과 성남시민모임뿐만 아니라 변호사 사무실 상근자들까지 달라붙었다. 새벽 2시까지 일하는 날들이 반복됐다.

 그렇게 주민발의자 18,595명을 모았다. 주민발의자는 자신의 거주지와 신원을 증명하는 주민증까지 확인해야 한다. 그런 발의자를 3주 만에 2만 명 가까이 모은 것이었다. 설립 지지 성명에는 20만 명이 넘는 시민이 참여했다. 구도심 지역 시민의 절반에 가까운 숫자였다. 시민들의 뜨거운 반응에 우리 모두가 놀랐다.

 

p176. 47초 만에 무산된 시민의 꿈

 마침내 2004년 3월 24일, '성남의료원 설립 및 운영조례안'이 성남시의회에 상정되었다.

 당일 시의회 참관인석에 자리 잡은 우리는 시장과 시의원들이 시립의료원을 설립하라는 성남시민의 압도적인 바람과 여론을 쉬 무시하지 못할 거라 여겼다. 하지만 잠시 후 믿을 수 없는 장면이 연출됐다. 단 47초 만에 '심의보류'가 선포된 것이다. 심의보류는 사실상 부결이자 폐기였다. 최소한의 찬반 토론도 없이 그랬다. 경악스러웠다.

 유동인구 50만이 넘는 성남 본시가지에 변변한 종합병원은 물론 공공의료시설이 제대로 없었다. 주민들은 가장 필요한 것을 스스로의 노력으로, 또 정당한 권리와 방법으로 요구하고 있었다. 그러나 단 47초 만에 날치기로 묵살당했다. 한나라당이 장악한 성남시의회는 시민을 발끝에 차이는 돌부리만큼도 여기지 않았다. 분노한 우리는 본회의장으로 들어가 강하게 항의했다. 놀란 시의원들은 서둘러 꽁무니를 뺐다.

 텅 빈 회의장에 주저앉아 모두 울었다. 그러면 안 되는 것이었다. 주권재민은 사전에만 있는 죽은 언어란 말인가.

 

 일은 그것으로 끝나지 않았다. 성남시의회는 한술 더 떠 시민대표와 나를 특수공무집행 방해로 고발했다. 그것이 시민을 대하는 그들의 태도였다. 나는 체포를 피해 시청 앞 주민교회 지하실에 숨었다. 체포가 두려워서가 아니라 고발당한 시민들에 대한 대책을 마련할 시간이 필요했기 때문이다.

  "변호사님, 우리는 이제 어떻게 해야 합니까?"

 교회 지하실로 찾아온 인하병원의 노조위원장 정해선이 물었다.

 "우리가 만듭시다."

 내가 대답했다.

 "어떻게요?"

 "우리가 시장 합시다. 그리고 우리가 병원 만듭시다."

 그 일로 벌금 500만 원을 선고받아 파크뷰 사건에 이어 두번째 전과가 생겼다.

 그로부터 10년이 지난 2013년 나는 성남시장으로서 성남시 의료원 착공식에 착공 기념 발파 버튼을 눌렀다.

 

p180. 이재명 제거 작전

 이명박, 박근혜 정권 때 나흘에 3일꼴로 압수수색과 조사, 감사, 수사를 받았다.

 집무실과 집에 대한 압수수색은 기본이었고, 검경은 해외출장 시 퉁화한 목록, 어머니가 시청에 출입한 CCTV 기록까지 요구했다. 성남시 공무원 수십 명이 조사를 받기도 했으며, 시청과 집에 50명의 검사와 수사관이 들이닥치기도 했다.

 2012년 이명박 정권은 나에 대한 40쪽 분랸의 보고서를 작성했다. 청와대와 행안부, 한나라당 소속 김문수 지사의 경기도가 성남시에 대한 내사에 들어가 2개월에 걸쳐 조사한 결과다.

 당시 청와대 내부에서는 나를 물너나게 해야 하며, 성남의 보수 시민단체를 움직여 주민소환 투표를 유도한다는 구체적인 방법론까지 거론됐다고 한다.

 최근까지도 크게 다르지 않았다. 문재인 정권이 개혁하려 했던 구태 검찰세력은 나를 잡기 위해 온갖 시도를 했다. 때문에 선출직 공직자 생활 12년 동안 처음 2년을 뺀 나머지 기간 내내 정치적 명운을 건 사법투쟁을 계속해야 했다.

 나는 기득권의 표적이며 끝없이 감시받아 왔다.

 왜 그러한가. 덤볐기 때문이다. 공익을 위해 덤볐다. 적폐와 손잡지 않았다. 그 과정에서 온갖 의혹이 더해졌고 '아니면 말고' 식의 언론보도로 수없이 고약한 이미지가 덧대졌다. 나는 내가 어항 속 금붕어임을 잘 알고 있다. 호시탐탐 나를 제거하려는 세력은 지금도 매순간 나를 캐고 흔들어댄다. 이는 팩트이다. 그러하니 부패가 내겐 곧 죽음이다.

 내가 희망하는 사회는 더불어 함께 사는 세상이다. 그런 세상을 만드는 데 내가 도움이 될 수 있길 희망한다.

 하지만 누구나 더불어 함께 잘 사는 그런 세상은 가만히 기다린다고 오는 것이 아니어서, 나의 싸움은 아직 마무리되지 않았다. 다만 혼자 싸워서는 절대 이길 수 없음을 절절히 느낀다. 함께 싸워줄 동지들이 필요하다.

전작 <기사단장 죽이기> 이후 6년만에 나온 신작. 하루키 작품에 익숙한 사람이라면 이 작품의 초반부를 읽으면서 얼마되지 않아 '익숙한 스토리와 구성인데?'라고 생각하게 될 것이다.

도시를 묘사하는 부분에서부터 <세계의 끝과 하드보일드 원더랜드>를 그대로 떠올리게 된다.

소설 말미에 작가후기에서도 이 작품의 모티브가 된 중편 <도시와, 그 불확실한 벽>(1980년 문예지 '문학계' 발표)를 처음 다듬어서 쓴 장편이 1996년에 나온 <세계의 끝과 하드보일드 원더랜드>였다고 밝혀놨다.

작가는<세계의 끝과 하드보일드 원더랜드>와는 다른 대응이 또 있어도 좋지 않을까 하는 생각으로 이 소설을 집필했다고 하는데 속마음으로는 아마도 조금은 미진하거나 걸리는 부분이 있지 않았을까 하는 느낌도 든다.

개인적으로도 1996년에 발표된 작품이지만 <세계의 끝>은 최근(2년 전쯤)에 들어서야 읽어봤는데 별로 재미가 없었다.  다 읽고 나서도 뭔가 빠진 부분이 있다고나 할까?

이 작품도 그리 개운하진 않다. 카페 여주인과의 스토리를 좀 더 이어나갔으면 하는 바램이 있는데 급작스럽게 끊겨버리는 느낌이 없지 않다.

하지만 <세계의 끝>보다는 진일보한 작품이란 건 어느 정도 수긍할 수 있을 것 같다.

작품후기 말미에 작가는 이런 말을 한다.

 

 '호르헤 루이스 보르헤스가 말한 것처럼 한 작가가 일생 동안 진지하게 쓸 수 있는 이야기는 기본적으로 그 수가 제한되어 있다. 우리는 그 제한된 수의 모티프를 갖은 수단을 사용해 여러 가지 형태로 바꿔나갈 뿐이다 - 라고 단언할 수 있는지도 모른다. 

 요컨대 진실이란 것은 일정한 어떤 정지 속이 아니라, 부단히 이행 = 이동하는 형체 안에 있다. 그게 이야기라는 것의 진수가 아닐까. 나는 그렇게 생각할 따름이다.'

 

하루키의 주요한 작품은 크게 3개라고 본다.

1. 양 3연작 시대(초기) - 바람의 노래를 들어라, 1973년의 핀볼, 양을 쫓는 모험

2. 노르웨이의 숲

3. 태엽 감는 새 연대기 이후 

 

특히 <태엽 감는 새 연대기> 이후의 작품은 거의 동일한 모티프의 변주이고 그 중 최고의 작품은 <태엽 감는 새 연대기>라고 개인적으로 생각한다.

 

이번 <도시와 그 불확실한 벽>은 여전히 내겐 2% 정도 부족해보이는데, 70대가 넘는 노작가가 아직도 그의 작품 세계의 결말을 내지 않고 정진하는 모습은 어떤 면에선 감탄을 자아내게 하는 부분도 있다.

+ Recent posts