5.18의 희생자들의 피와 살, 그리고 뼈와 고통, 슬픔의 흔적들. 그 흔적들 속에 숨겨진 소리 없는 절규를 작가는 애끓는 마음을 통해 읽어내어, 그들의 절규에 피와 살을 붙여, 그들의 얼굴과 목소리를 되살려낸다.  이 소설은 광주민주화항쟁에 스러져간 우리의 평범한 이웃들에 건내는 애달픈 진혼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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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장. 어린 새

p17

 그 과정에서 네가 이해할 수 없었던 한가지 일은, 입관을 마친 뒤 약식으로 치르는 짧은 추도식에서 유족들이 애국가를 부른다는 것이었다. 관 위에 태극기를 반듯이 펴고 친친 끈으로 묶어놓는 것도 이상했다. 군인들이 죽인 사람들에게 왜 애국가를 불러주는 걸까. 왜 태극기로 관을 감싸는 걸까. 마치 나라가 그들을 죽인게 아니라는 듯이.

 조심스럽게 내가 물었을 때, 은숙 누나는 동그란 눈을 더 크게 뜨며 대답했다.

 군인들이 반란을 일으킨 거잖아. 권력을 잡으려고. 너도 봤을 거 아냐. 한낮에 사람들을 때리고 찌르고, 그래도 안되니까 총을 쐈잖아. 그렇게 하라고 그들이 명령한 거야. 그 사람들을 어떻게 나라라고 부를 수 있어.

 전혀 다른 질문에 대한 대답을 들은 것처럼 너는 혼란스러웠다. 그날 오후엔 유난히 신원 확인이 많이 돼, 복도 여기저기서 동시에 입관이 치러졌다. 흐느낌 사이로 돌림노래처럼 애국가가 불러지는 동안, 악절과 악절들이 부딪치며 생기는 미묘한 불협화음에 너는 숨죽여 귀를 기울였다. 그렇게 하면 나라란 게 무엇인지 이해해낼 수 있을 것처럼.

 

p20

 저녁이면 계엄군과 대치한 외곽 지역에서 총을 맞은 사람들이 실려왔다. 군의 총격에 즉사하거나 응급실로 운반되던 중 숨이 끊어진 이들이었다. 죽은 지 얼마 되지 않은 사람들의 형상이 너무 생생해, 끝없이 쏟아져나오는 반투명한 창자들을 뱃속에 집어넣다 말고 은숙 누나는 강당 밖으로 뛰어나가 토하곤 했다.

 

p21

 저들이 시키는 대로 무조건 무기를 돌려주고 항복할 순 없습니다. 저들이 먼저 우리 시민들의 시신을 돌려줘야 합니다. 끌고 간 시민 수백명도 풀어줘야 합니다. 무엇보다 여기서 일어난 일들의 진상을 전국에 밝혀서, 우리 명예를 회복시킨다는 약속을 받아내야 합니다. 그런 다음 총기를 반납하는 게 옳지 않겠습니까 여러분.

 와아아, 외치며 박수 치는 사람들의 소리가 부쩍 작아졌다고 너는 느낀다. 군인들이 철수한 다음 날 열린 집회를 너는 기억한다. 도청 옥상과 시계탑 위까지 빽빽하게 사람들이 올라가 있었다. 차량이 다니지 않는 바둑판식 거리에, 건물 자리만 남겨놓고 수십만의 사람들이 어마어마한 물결처럼 출렁거렸다. 수십만층의 탑을 아스라하게 쌓아올리며 애국가를 불렀다. 수십만개의 폭죽을 연달아 터뜨리는 것처럼 손뼉을 쳤다. 어제 아침 진수 형이 선주 누나와 나누던 대화를 너는 들었다. 군인들이 다시 들어오면 시민들을 모두 죽일 거란 소문이 돌고 있다고, 공포 때문에 집회의 규모가 빠르게 줄고 있다고 그는 진지한 얼굴로 말했다. 그럴수록 우리들의 수가 만하야 함부로 못 들어올 텐데... 느낌이 안 좋아요. 관들은 점점 많아지는데, 사람들은 점점 집 밖으로 나오지 않아요.

 너무 많은 피를 흘리지 않았습니까. 어떻게 그 피를 그냥 덮으란 말입ㄴ까. 먼저 가신 혼들이 눈을 뜨고 우릴 지켜보고 있습니다.

 

p24

 학교 앞 서점에서 문제집을 사려고 혼자 집을 나선 지난 일요일이었다. 갑자기 거리에 들어찬 무장 군인들이 어쩐지 무서워서 너는 천변길로 내려가 걸었다. 신혼부부로 보이는, 성경과 찬송가 책을 손에 든 양복 입은 남자와 감색 원피스 차림의 여자가 맞은편에서 걸어오고 있었다. 날카로운 고함 소리가 몇차례 위쪽 도로에서 들리더니, 총을 메고 곤봉을 쥔 군인 셋이 언덕배기를 타고 내려어 그 젊은 부부를 둘러쌌다. 누군가를 뒤쫓다 잘못 내려온 것 같았다.

 무슨 일입니까? 지금 저흰 교회에...

 양복 입은 남자의 말이 채 끝나기 전에, 사람의 팔이 어떤 것인지 너는 보았다. 사람의 손, 사람의 허리, 사람의 다리가 어떤 일을 할 수 있는지 보았다. 살려주시오. 헐떡이며 남자가 외쳤다. 경련하던 남자의 발이 잠잠해질 때까지 그들은 멈추지 않고 곤봉을 내리쳤다. 곁에서 쉬지 않고 비명을 지르다 머리채를 잡힌 여자가 어떻게 되었는지 너는 모른다. 덜덜 턱을 떨며 천변 언덕을 기어올라 거리로, 더 낯선 광경이 펼쳐지고 있는 거리로 들어섰기 때문이다.

 

p31

 처음 누나들을 만났을 때 네가 한 말 중 사실이 아닌 게 있었다.

 역전에서 총을 맞은 두 남자의 시신이 리어카에 실려 시위대의 맨 앞에서 행진했던 날, 중절모를 쓴 노인부터 열두어살의 아이들, 색색의 양산을 쓴 여자들까지 인산인해를 이뤘던 저 광장에서, 마지막으로 정대를 본 건 동네 사람이 아니라 바로 너였다. 모습만 본 게 아니라, 옆구리에 총을 맞는 것까지 봤다. 아니, 정대와 너는 처음부터 손을 맞잡고 선두로, 선두의 열기 쪽으로 나아가고 있었다. 귀를 찢는 총소리에 모두 뒤돌아 뛰기 시작했다. 공포다! 괜찮다! 누군가 외치는 소리에 한 무리의 사람들이 앞 대열로 돌아가려는 아수라장 속에서 정대의 손을 놓쳤다. 다시 총소리가 귀를 찢었을 때, 모로 넘어진 정대를 뒤로 하고 너는 달렸다. 셔터가 내려진 전자제품점 옆 담벼락에 아저씨 셋과 함께 붙어섰다. 그들의 일행인 듯한 남자가 합류하려고 달려오다가 어깨에서 피를 뿜으며 엎어졌다.

 시상에, 옥상이여.

 네 옆에 서 있던, 머리가 반쯤 벗겨진 아저씨가 숨차게 중얼거렸다.

 ... 옥상에서 영규를 쐈어.

 옆 빌딩 옥상에서 다시 총성이 울렸다. 비트적비트적 일어나려던 남자의 등이 튀어올랐다. 배에서부터 번진 피가 삽시간에 상반신을 감쌌다. 옆에 선 아저씨들의 얼굴을 너는 올려다봤다. 아무도 말하지 않았다. 머리가 벗어진 아저씨가 입을 막으며 소리 없이 떨었다.

 너는 눈을 가늘게 뜨고 거리 가운데 쓰러진 수십명의 사람들을 봤다. 네가 입은 것과 똑같은 하늘색 체육복 바지가 얼핏 보인 것 같았다. 운동화가 벗겨진 맨발이 꿈틀거린 것 같았다. 네가 뛰쳐나가려는 순간, 입을 막고 떨고 있던 아저씨가 네 어깨를 붙들었다. 동시에 옆 골목에서 청년들 셋이 달려나갔다. 쓰러진 사람들의 겨드랑이에 손을 끼워 막 일으키려 했을 때, 광장 중앙과 군인들 쪽에서 연발 총성이 터졌다. 맥없이 청년들이 쓰러졌다. 너는 거리 맞은편의 넓은 골목을 건너다봤다. 삼십여명의 남자와 여자들이 양쪽 담벼락에 붙어서서 얼어붙은 듯 그 광경을 지켜보고 있었다.

 총성이 멎은 뒤 삼분쯤 지나, 맞은편 골목에서 유난히 키가 작은 아저씨가 한달음에 뛰쳐나왔다. 쓰러진 사람들 가운데 한사람을 향해 온 힘을 다해 달렸다. 다시 연발 총성이 울리고 그가 쓰러지가, 여태 너를 붙들고 있던 아저씨가 두꺼운 손바닥으로 네 눈을 가리며 말했다.

 지금 나가면 개죽음이여.

 아저씨가 네 눈에서 손을 뗀 순간, 마치 거대한 자석에 이끌린 것처럼 맞으면 골목의 남자 둘이 쓰러진 젊은 여자를 향해 달려가 팔을잡고 일으키는 것을 너는 봤다. 이번엔 옥상에서 총성이 울렸다. 남자들이 나동그라졌다.

 더이상 아무도 쓰러진 사람들을 향해 달려가지 않았다.

 정적 속에 십여분의 시간이 흘렀을 때, 군인들의 대열에서 2인 1조로 이십여명이 걸어나왔다. 앞쪽의 쓰러진 사람들을 신속하게 끌고 가기 시작했다. 그때를 기다린 듯, 옆 골목과 맞은편 골목에서도 여남은명이 달려나가 뒤쪽에 쓰러진 사람들을 들쳐업었다. 이번엔 옥상에서 총을 쏘지 않았다. 하지만 너는 정대를 향해 그들처럼 달려가지 않았다. 네 곁에 있던 아저씨들은 숨이 끊어진 일행을 업고 서둘러 골목 사이로 사라졌다. 갑자기 혼자 남은 너는 겁에 질려, 저격수의 눈에 띄지 않을 곳이 어디일까만을 생각하며 벽에 바싹 몸을 붙인 채 광장을 등지고 빠르게 걸었다.

 

p42

 동호야아, 부르는 소리에 너는 고개를 든다.

 엄마가 트럭들 사이로 걸어오고 있다. 이번엔 작은형 없이 혼자다. 가게에 나갈 때 교복처럼 입는 회색 블라우스에 헐렁한 검은 바지를 입었다. 늘 단정히 빗는 커트 머리가 비에 젖어 부세부세 헝클어졌다는 것만 평소와 다르다.

 너도 모르게 반갑게 일어서서 계단을 뛰어내려가다 멈춘다. 엄마가 허겁지겁 계단을 뛰어올라와 네 손을 잡는다.

 집에 가자.

 물에 빠진 사람처럼 무섭게 손을 끌어당기는 엄마를 떨쳐내려고 너는 손목을 뒤튼다. 남은 손으로 엄마의 손가락들을 하나씩 떼어낸다.

 군대가 들어온단다. 지금 집에 가자이.

 억센 엄마의 손가락을 마침내 다 떼어냈다. 너는 날쌔게 강당 안으로 도망친다. 뒤따라 들어오려는 엄마를, 집으로 관을 옮겨가려는 유족들의 행렬이 가로막는다.

 여섯시에 여기 문 닫는대요. 엄마.

 행렬 사이로 너와 눈을 맞추려고 엄마가 깨금발을 디딘다. 우는 아이처럼 힘껏 찡그린 그녀의 이마를 향해 너는 목소리를 높인다.

 문 닫으면 나도 들어갈라고요.

 엄마의 얼굴이 그제야 펴진다.

 꼭 그래라이. 그녀가 말한다.

 해 지기 전에 와라이. 다 같이 저녁밥 묵게.

 

p45

 체머리 떠는 노인의 얼굴을 너는 돌아본다. 손녀따님인가요, 묻지 않고 참을성 있게 그의 말을 기다린다. 용서하지 않을거다. 이승에서 가장 끔찍한 것을 본 사람처럼 꿈쩍거리는 노인의 두 눈을 너는 마주 본다. 아무것도 용서하지 않을 거다. 나 자신까지도.

ㅇㅇㅇ

 

2장. 검은 숨

p46

 우리들의 몸은 열십자로 겹겹이 포개져 있었어.

 내 배 위에 모르는 아저씨의 몸이 구십도로 가로질러 놓였고, 아저씨의 배 위에는 모르는 형의 몸이 다시 구십도로 가로질러 놓였어. 내 얼굴에 그 형의 머리카락이 닿았어. 그 형의 오금이 내 맨발에 걸쳐졌어. 그 모든 걸 내가 볼 수 있었던 건, 내 몸 곁에 바싹 붙어 어른거리고 있었기 때문이야. 

 그들이 다가왔어. 얼룩덜룩한 군복에 철모를 쓰고, 팔엔 적십자 완장을 차고서 빠르게. 그들은 2인 1조로 우리들의 몸을 들어올려 군용 트럭에 던져넣기 시작했어. 곡물 자루들을 운반하는 것같이 기계적인 동작으로 난 내 몸을 놓치지 않으려고 뺨에, 목덜미에 어른어른 매달려 트럭에 올라탔어. 이상하게도 나는 혼자였어. 그러니까 혼들은 만날 수 없는 거였어. 지척에 혼들이 아무리 많아도, 우린 서로를 볼 수도 느낄 수도 없었어. 저세상에서 만나자는 말따윈 의미없는 거였어.

 내 몸은 다른 몸들과 함께 묵묵히 흔들리며 트럭에 실려갔어. 피를 너무 쏟아내 심장이 멈췄고, 심장이 멈춘 뒤로 계속 피를 쏟아낸 내 얼굴은 습자지같이 얇고 투명했어. 눈을 감은 내 얼굴을 본 건 처음이라 더 낯설게 보였어.

 시시각각 저녁이 오고 있었어. 시가지를 벗어난 트럭은 어둑한 벌판 가운데로 난 텅 빈 길을 달렸어. 참나무들이 우거진 낮은 언덕길을 오르자 철문이 나타났어. 트럭이 잠시 멈추자 보초병 둘이 경례를 붙였어. 보초병들이 철문을 열 때 한번, 닫을 때 다시 한번 길고 날카로운 쇳소리가 울렸어. 트럭은 거기서부터 좀더 언덕길을 올라가, 단층 콘크리트 건물과 참나무 숲 사이 공터에서 멈췄어. 

 그들이 운전석에서 걸어나왔어. 트럭 후미의 잠금쇠를 푼 뒤, 다시 2인 1조로 우리들의 팔다리를 잡고 나르기 시작했어. 턱으로, 뺨으로 미끄러지며 매달려 내 몸을 따라가면서 나는 불 켜진 단층 건물을 올려다봤어. 무슨 건물인지 알고 싶었어. 여기가 어디인지, 지금 내 몸이 어디로 가고 있는지.

 공터 뒤의 덤불숲 사이로 그들은 들어갔어. 상관으로 보이는 사람이 지시하는 대로 다시 열십자로 차곡차곡 몸들을 쌓아올렸어. 내 몸은 아래에서 두번째에 끼여 납작하게 짓눌렸어. 그렇게 짓눌려도 더이상 흘러나올 피는 없었어. 고개가 뒤로 꺽인 채 눈을 감고 반쯤 입을 벌린 내 얼굴은 숲 그늘에 가려 더 창백해 보였어. 맴 위에 놓인 남자의 몸에다 그들이 가마니를 덮자, 이제 몸들의 탑은 수십개의 다리를 지닌 거대한 짐슴의 사체 같은 것이 되었어.

 

p49

 너를 문득 떠올린 건 그 낯설고 생생한 밤이 끝나갈 무렵, 먹색 하늘에 마침내 파르스름한 새벽빛이 배어들기 시작하던 무렵이었어. 그렇지, 네가 나와 함께 있었는데. 차가운 몽둥이 같은 게 갑자기 내 옆구리를 내려치기 전까지. 내가 헝겊 인형처럼 고꾸라지기 전까지, 아스팔트가 산산이 부서질 것 같던 발소리를, 고막을 찢는 총소리들 속에서 내가 팔을 뻗어올릴 때까지. 옆구리에서 솟구친 피가 따뜻하게 어깨로, 목덜미로 번지는 걸 느낄 때까지. 그때까지 네가 함께 있었는데.

 

p50

 그렇게 정오가 가까워졌을 때 불현듯 깨달았어.

 이곳에 너는 없었어.

 넌 여기 없을 뿐 아니라, 아직 살아 있었어. 그러니까 혼이란 건 가까이 있는 혼들이 누구인지는 알지 못하면서, 누군가가 죽었는지 죽지 않았는지만은 온 힘으로 생각하면 알 수 있는 거였어. 이 낯선 덤불숲 아래에서, 썩어가는 수많은 몸들 사이에서 아무도 아는 사람이 없다고 생각하자 나는 무서워졌어.

 더 무서워진 건 다음 순간이었어.

 두려움을 견디며 나는 누나를 생각했어. 이글거리는 태양이 남쪽으로, 더 남쪽으로 팽팽히 기우는 걸 보면서, 뚫어지게 내 얼굴을, 감긴 눈꺼풀들을 들여다보면서 누나를, 누나만을 생각했어. 견디기 어려운 고통이 느껴졌어. 누나는 죽었어. 나보다 먼저 죽었어. 혀도 목소리도 없이 신음하려고 하자, 눈물 대신 피와 진물이 새어나오는 통증이 느껴졌어. 눈이 없는데 어디서 피가 흐르는 걸까, 어디서 통증이 느껴지는 걸까. 아무것도 흐르지 않는 내 창백한 얼굴을 나는 들여다봤어. 더러운 내 손들은 움직이지 않았어. 핏물이 산화돼 진한 벽돌색이 된 손톱들 위로 소리 없이 불개미들이 기어나디고 있었어.

 

p57

 썩어가는 옆구리를 생각해.
 거길 관통한 총알을 생각해.
 처음엔 차디찬 몽둥이 같았던 그것.
 순식간에 뱃속을 휘젓는 불덩어리가 된 그것.
 그게 반대편 옆구리에 만들어놓은, 내 모든 따뜻한 피를 흘러나가게 한 구멍을 생각해.
 그걸 쏘아보낸 총구를 생각해.
 차디찬 방아쇠를 생각해.
 그걸 당긴 따뜻한 손가락을 생각해.
 나를 조준한 눈을 생각해.
 쏘라고 명령한 사람의 눈을 생각해.

 

 그들의 얼굴을 보고 싶다. 잠든 그들의 눈꺼풀 위로 어른거리고 싶다. 꿈속으로 불쑥 들어가고 싶다. 그 이마, 그 눈꺼풀들을 밤새 건너다니며 어른거리고 싶다. 그들이 악몽 속에서 피 흐르는 내 눈을 볼 때까지, 내 목소리를 들을 때까지. 왜 나를 쐈지, 왜 나를 죽였지.

 

p59

 가장 먼저 탑을 이뤘던 몸들이 가장 먼저 썩어, 빈 데 없이 흰 구더기가 들끓었어. 내 얼굴이 거뭇거뭇 썩어가 이목구비가 문드러지는 걸, 윤곽선이 무너져 누구도 더이상 알아볼 수 없게 되어가는 걸 나는 묵묵히 지켜봤어.

 

p61

 그들 중 하나가 트럭으로 돌아가, 두 손에 커다란 석유통을 들고 천천히 걸어왔어. 허리와 어깨와 팔로 플라스틱 통들의 무게를 버티며, 비틀거리며 우리들의 몸을 향해 다가왔어.

 이제 끝이구나, 나는 생각했어. 수많은 그림자들이 갸날프고 부드러운 움직임으로 파닥이며 내 그림자에, 서로의 그림자들에 스며들었어. 떨며 허공에서 만났다가 이내 흩어지고, 다시 언저리로 겹쳐지며 소리 없이 파닥였어.

 기다리고 있던 군인들 중 두사람이 걸어나가 석유통을 받아들었어. 침착하게 뚜껑을 열고 몸들의 탑 위에 기름을 붓기 시작했어. 우리들의 몸 모두에게 고르게, 공평하게. 통에 남은 마지막 한방울의 기름까지 털어 뿌린 다음 그들은 뒤로 물러섰어. 마른 덤불에 불을 붙여 힘껏 던졌어.

 

p64

 그때 너는 죽었어.

 그게 어디인지 모르면서, 네가 죽은 순간만을 나는 느꼈어.

 빛이 없는 허공으로 번지며 나는 위로, 더 위로 올라갔어. 캄캄했어. 도시의 어느 방향으로도, 어느 구역, 어느 집에도 불이 켜져 있지 않았어. 눈부신 불꽃들이 뿜어져나오는 곳은 멀리 있는 한 지점뿐이었어. 연달아 쏘아올려지는 조명탄 불빛들을, 번쩍이며 홑튀는 총신들의 불꽃을 나는 봤어.

 그때 그곳으로 가야 했을까. 그곳으로 힘차게 날아갔다면 너를, 방금 네 몸에서 뛰쳐나온 놀란 너를 만날 수 있었을까. 여전히 눈에서 피가 흐르는 채, 서서히 조여오는 거대한 얼음 같은 새벽빛 속에서 나는 어디로도 움직일 수 없었어.

 

 

3장. 일곱개의 뺨

 

 p69

 그 순간 왜 분수대가 떠올랐는지 모른다. 짧게 감은 눈꺼풀 속에서 유월의 분수대가 눈부신 물줄기를 뿜었다. 버스를 타고 그 앞을 지나가던 열아홉살의 그녀는 눈을 질끈 감았었다. 하나하나의 물방울들이 내쏘는 햇빛의 예리한 파편들이, 달궈진 눈꺼풀 안쪽까지 파고들어 눈동자를 찔렀다. 집 앞 정류장에서 내리자마자 그녀는 공중전화 부스로 들어갔다. 책가방을 바닥에 내려놓고, 이마에 흐르는 땀을 주먹으로 훔치며 전화기에 동전을 넣었다. 114버튼을 누르고 기다렸다. 도청 민원실 부탁합니다. 안내받은 전화번호를 누르고 다시 기다렸다. 분수대에서 물이 나오고 있는 걸 봤는데요, 그래서는 안된다고 생각합니다. 떨리던 그녀의 목소리가 점점 또렷해졌다. 어떻게 벌써 분수대에서 물이 나옵니까. 무슨 축제라고 물이 나옵니까. 얼마나 됐다고, 어떻게 벌써 그럴 수 있습니까.

 

p76

 그날 학생식당에서 그녀는 늦은 점심을 먹고 있었다. 큰 소리로 유리문이 열리며 학생들이 뛰어들어왔다. 고함 소리와 함께 사복 형사들이 뒤따라 들어왔다. 식당 곳곳으로 흩어지는 학생들을 쫓아가 곤봉을 휘두르는 사내들의 모습을, 그녀는 숟가락을 쥔 채 멍하게 지켜보았다. 한 형사가 특별히 흥분해 있었다. 기둥 옆에 혼자 앉아 카레라이스를 먹던 퉁퉁한 남자애 앞에 멈추더니, 맞은편에 놓여 있던 접이식 의자를 집어들고 휘둘렀다. 남자애의 이마에서 터진 피가 얼굴을 덮었다. 그녀의 손에서 숟가락이 떨어졌다. 그걸 주우려고 무심코 허리를 수그렸다가 바닥에 떨어진 유인물을 주웠다. 굵은 글씨가 눈에 들어왔다. 학살자 전두환을 타도하라. 그 순간 억센 손이 그녀의 머리채를 움켜쥐었다. 유인물을 뺏고 그녀를 의자에서 끌어냈다.

 

p88

 진수 오빠가 노크를 하고 그 방에 들어온 것은 열한시경이었다. 무전기를 들고 다니는 모습은 늘 봤지만, 총까지 멘 모습은 처음이라 낯설어 보였다. 세명만 남아주시겠습니까,라고 그는 말했다. 아침까지 가두방송을 해주실 세분만 있으면 됩니다. 나머지는 집으로 돌아가세요.

 

p89

 남기로 한 세 여자들 중에서는 선주 언니가 호신용으로 카빈 소총을 받았다. 선주 언니는 작동법에 대해 간단한 설명을 들은 뒤 어설프게 총을 어깨에 걸쳐메고, 따로 뒤돌아 인사하지 않은 채 여대생 둘을 따라 일층으로 내려갔다.그녀들에게 진수 오빠는 말했다. 

 사람들이 나오게 해주세요. 날이 새자마자 도청 앞에 시민들이 꽉 차게, 우린 아침까지만 어떻게든 버텨볼 겁니다.

 남은 여자들은 새벽 한시경에 도청을 나왔다. 진수 오빠가 다른 대학생과 함께 남동성당 골목까지 동행해줬다. 침침한 가로등이 밝혀진 골목 입구에서 그들은 멈춰 섰다.

 여기서 흩어지세요. 아무 집에라도 들어가 숨으세요.

 그녀에게 영혼이 있었다면 그때 부서졌다. 땀에 젖은 셔츠에 카빈 소총을 멘 진수 오빠가 여자들에게 인사하기 위해 웃어 보였을 때. 어두운 길을 되밟아 도청으로 돌아가는 그들의 뒷모습을 얼어 붙은 듯 지켜보았을 때. 아니 도청을 나오기 전 너를 봤을 때 이미 부서졌다. 하늘색 체육복 위에 교련 점퍼를 걸친, 아직 어린애 같은 좁은 어깨에 총을 메고서 고개를 끄덕이고 있는 너를 발견하고 그녀는 놀라며 불렀다. 동호야, 왜 집에 안 갔어? 장전하는 법을 설명하고 있던 청년 앞으로 그녀는 끼어들었다. 이 애는 중학생이에요. 집에 보내야 돼요. 청년은 놀라는 기색이었다. 고등학교 2학년이라고 해서 그런 줄 알았는데... 아까 고등학교 1학년까지 내보낼 때 이 애는 안 갔어요. 그녀는 목소리를 낮춰 항의했다. 말이 안돼요. 어딜 봐서 이 얼굴이 고등학생이에요.

 진수 오빠의 뒷모습이 어둠속으로 완전히 사라지자 여자들이 흩어지기 시작했다. 취사조의 여대생이 그녀에게 물었다. 이 근처에 아는 집 있어? 그녀가 고개를 젓자 여대생이 제안했다. 나하고 전대병원으로 가자. 거기 외사촌이 입원해 있어.

 전대 부속병원 로비는 어두웠고 출입문은 잠겨져 있었다. 한참 문을 두드리자 경비가 손전등을 들고 나왔다. 수간호사도 뒤따라 나왔다. 모두 긴장한 얼굴이었다. 군인이 온 거라고 생각했던 것이다.

 복도와 비상계단도 소등되어 있었다. 손전등을 든 경비의 안내로 여대생의 사촌이 입원한 6인실로 들어섰다. 솜이불을 창에 걸어 놓은 실내는 칠흑같이 어두웠다. 환자들과 보호자들은 어둠속에서 깨어 있었다. 여대생의 이모가 조카의 손을 잡으며 속삭이듯 물었다. 어쩌까나 군인들이 들어온담서. 부상자들은 전부 총살해버린담서.

 그녀가 창 아래 벽에 기대앉자, 옆 침대 환자의 보호자인 듯한 아저씨가 말했다.

 창 앞에 안지 마소, 위험하다마시.

 어둠 때문에 그의 얼굴은 보이지 않았다.

 군인들 퇴각하던 날에도 총알이 날아와서, 여그 창가에 걸어논 옷에 구멍이 뚫렸다마시. 사람이 서 있었으면 어떻게 됐겄는가.

 그녀는 창으로부터 두걸음 옆으로 옮겨앉았다.

 호흡이 고르지 않은 위중한 환자가 있어, 이십분 간격으로 간호사가 손전등을 들고 들어왔다. 서치라이트 같은 불빛이 병실을 훑을 때마다 공포에 굳은 환자들과 보호자들의 얼굴이 드러났다. 어쩌까나. 군인들이 참말로 이 병원까지 쳐들어온다냐. 죄다 총살해 버릴 것 같으면, 해뜨자마자 얼른 퇴원해야 안 쓰겄냐. 니 언니는 의식 차린 지 하루밖에 안됐는디, 꿰맨 자리가 터져블면 어쩌까나. 아주머니가 속삭여 물을 때마다 여대생은 더 작은 소리로 속삭여 대답했다. 저도 모르겠어요, 숙모.

 얼마나 시간이 흘렀을까. 머리서 들려오는 가냘픈 목소리에 그녀는 창 쪽으로 고개를 돌렸다. 메가폰을 쥔 여자의 목소리가 차츰 가까워졌다. 선주 언니는 아니었다.

 시민 여러분, 도청으로 나와주십시오. 지금 계엄군이 시내로 들어오고 있습니다.

 거대한 풍선 같은 침묵이 병실의 모서리들을 향해 부풀어오르는 것을 그녀는 느꼈다. 트럭이 병원 앞길을 지나가며 목소리가 크고 선명해졌다.

 우리는 끝까지 싸울 것입니다. 함께 나와서 싸워주십시오.

 그 목소리가 멀어진 지 십분이 채 되지 않아 군인들의 소리가 들렸다. 그런 소리를 그녀는 처음 들었다. 수천사람의 단호한, 박자를 맞춘 군화발 소리. 보도가 갈라지고 벽이 무너질 것 같은 장갑차 소리. 그녀는 무릎 사이에 얼굴을 묻었다. 어느 침대에선가 어린 환자가 애원했다. 엄마, 창문 닫아줘. 닫았어. 더 꽉 닫어. 꽉 닫았나니까. 마침내 그 소리들이 지나가자 다시 가두방송이 들렸다. 도심의 침묵을 가로질러, 여러 블로 너머에서 아득히 들려오는 소리였다.

 여러분 지금 나와 주십시오. 계엄군이 들어오고 있습니다.

 마침내 도청 쪽에서 총소리가 들렸을 때 그녀는 잠들어 있지 않았다. 귀를 틀어막지도, 눈을 감지도 않았다. 고개를 젓지도, 신음하지도 않았다. 다만 너를 기억했다. 너를 데리고 가려 하자 너는 계단으로 날쌔게 달아났다. 겁에 질린 얼굴로, 마치 달아나는 것만이 살길인 것처럼. 같이 가자, 동호야. 지금 가이 나가야 돼. 위태하게 이층 난간을 붙들고 서서 너는 떨었다. 마지막으로 눈이 마주쳤을 때, 살고 싶어서, 무서워서 네 눈꺼풀은 떨렸다.

 

p96

 그 오전 분수대에서 물줄기가 뿜어져나오지 않았다. 도청 담장 앞에 던져진 주검들 옆으로, 총을 멘 군인들이 새로운 주검들의 다리를 끌고 왔다. 주검들의 등과 뒤통수가 함부로 바닥에 쓸리고 튀어올랐다. 몇몇 군인들은 커다란 방수 모포를 펴서 네 귀를 나눠 잡고, 도청 안마당에서 여남은사람의 주검을 한번에 쓸어담아 나왔다. 어릿어릿 먼 곁눈질로 그 광경을 보며 걷고 있을 때, 빠르게 다가온 군인 셋이 그녀의 가슴에 총을 겨눴다. 어디서 오는 겁니까. 이모 병문안하고 집에 가는 길이에요. 태연스럽게 대답하는 그녀의 인중이 떨렸다.

 그들이 명령한 대로 광장을 등지고 걸어 대인시장 어귀에 이르렀을 때, 거대한 장갑차들이 굉음을 내며 대로를 행진해 지나갔다. 다 끝났다는 걸 모두에게 보여주려는 거야, 얼핏 그녀는 생각했다. 다 죽였다는 걸.

 대학가와 가까운 그녀의 동네는 전염병이 지나간 것처럼 인적없이 괴괴했다. 그녀가 초인종을 누르가 아버지는 기다렸던 듯 달려나와 그녀를 들이고는 대문을 잠갔다. 다락에 그녀를 감춘 뒤, 다락문이 눈에 띄지 않도록 비키니 옷장을 옮겨놓았다. 오후부터 군인들의 발소리가 들렸다. 미닫이문을 열고 누군가를 끌어내는 소리, 무엇인가 부서지는 소리, 애원하는 소리 들이 들려왔다. 아니라우, 우리 아들은 데모 안했어라우, 총 같은 건 만져본 적도 없어라. 그들은 그녀의 집 초인종도 눌렀다. 마당이 쩌렁쩌렁 울리게 아버지가 대답했다. 우리 집은 딸이 고3이오. 아들들은 인자 중학생 초등학생인디, 누가 데모를 했겄소.

 다음 날 저녁 그녀가 다락에서 내려왔을 때, 어머니는 시청 청소차들이 주검들을 싣고 공동묘지로 갔다고 말했다. 분수대 앞에 던져진 주검들뿐 아니라, 상무관에 있떤 관들과 미화긴 시신들까지 모두 싣고 갔다고 했다.

 관공서와 학교가 문을 열었다. 셔터를 내렸던 상점들도 영업을 시작했다. 계엄은 계속되었으므로, 저녁 일곱시 이후에는 통행이 금지되었다. 통금 전이라 해도 수시로 군인들의 검문검색이 이뤄져, 신분증을 가지고 나오지 않은 사람들은 연행되었다.

 수업 결손을 메우기 위해 대부분의 학교가 팔월 초순까지 수업을 했다. 방학하는 날까지 그녀는 날마다 정류장 옆 공중전화 부스에서 도청 민원실에 전화를 걸었다. 분수대에서 물이 나와서는 안된다고 생각합니다. 제발 물을 잠가주세요. 손바닥에서 배어나온 땀으로 수화기가 끈적끈적했다. 예예, 의논해보겠습니다. 민원실 직원들은 인내심 있게 그녀를 응대했따. 꼭 한번 나이 든 여사무원이 말했다. 그만 전화해요, 학생. 학생 같은데 맞지요. 물이 나오는 분수대를 우리가 어떻게 하겠어요. 다 잊고 이젠 공부를 해요.

 

p99

 꿈속처럼 느린 걸음으로 남자들의 모습이 사라졌을 때 여자가 말하기 시작한다. 아니, 말하기 시작한 것 같다. 아니, 여자는 아무것도 말하지 않는다. 소리 없이 입술을 달짝이고 있을 뿐이다. 그 입술의 모양을 그녀는 또렷하게 읽을 수 있다. 서 선생이 원고지에 펜으로 쓴 희곡을 그녀가 직접 입력해 삼교까지 봤기 때문이다.

 

 당신이 죽은 뒤 장례식을 치르지 못해,
 내 삶이 장례식이 되었습니다.

 

 여자가 등을 보이며 뒤돌아선다. 동시에 객선 가운데의 긴 통로로 조명이 덜어진다 누덕누덕 기운 삼베옷을 걸친 건장한 체격의 남자가 통로 끝에 서 있다. 거칠게 숨을 몰아쉬며 그가 무대를 향해 걸어온다. 표정과 동작이 초연했던 좀 전의 남자들과 달리 그의 얼굴은 일그러져 있다. 두 팔이 힘껏 허공으로 뻗어올라온다. 목마른 물고기처럼 그의 입술이 달싹인다. 음성이 높아져야 할 부분에서 신음처럼 끼익, 끽 소리가 난다. 그 입술 모양도 그녀는 읽는다.

 

 어이, 돌아오소.
 어어이, 내가 이름을 부르니 지금 돌아오소.
 더 늦으면 안되오. 지금 돌아오소.

 

 최초의 당혹한 웅성거림이 객석을 쓸고 지나간 뒤, 이제 관객들은 무서운 침묵과 집중력으로 배우들의 입술을 응시하고 있다. 통로를 밝히던 조명이 어두워진다. 무대 중앙의 여자가 객석을 향해 몸을 돌린다. 여전히 소리 없이 초혼(招魂)하며 걸어오는 남자를 침착하게 응시한다. 입술을 열어 달싹인다.

 

 당신이 죽은 뒤 장례를 치르지 못해,
 당신을 보았던 내 눈이 사원이 되었습니다.
 당신의 목소리를 들었던 내 귀가 사원이 되었습니다.
 당신의 숲을 들이마신 허파가 사원이 되었습니다.

 

 마치 눈을 뜬 채 꿈을 꾸는 듯 허공을 향해 끼익, 끽 소리를 내며 여자가 입술을 움직이는 사이, 삼베옷의 남자가 무대에 올라선다. 두 팔을 허공에 휘저으며 여자의 어깨를 스쳐지나간다.

 

 봄에 피는 꽃들, 버드나무들, 빗방울과 눈송이들이 사원이 되었습니다.
 날마다 찾아오는 아침, 날마다 찾아오는 저녁들이 사원이 되었습니다.

 

 눈부신 조명이 다시 객석 사이로 쏘아져내려온다. 앞쪽 좌석에서 그녀가 고개를 돌리자, 열두한살로 보이는 어린 소년이 어느새 통로 가운데 서 있다. 하얀 반소매 체육복 상하의에 흰 운동화를 신고, 조그마한 해골의 머리를 추운 듯 가슴에 끌어안고 있다. 소년이 무대를 향해 걷기 시작하자, 네발짐승들처럼 허리를 구십도로 구부린 배우들의 무리가 어두운 통로 뒤편에 나타나 뒤를 따른다. 남녀가 섞인 여남은명의 그 무리는 검은 머리칼을 괴기스럽게 아래로 늘어뜨린 채 행진한다. 쉴 새 없이 입술을 달싹러리며, 끼이익, 끄으윽, 신음을 내며 체머리를 떤다. 소리가 커질 때마다 자꾸 뒤돌아보며 멈칫거리는 소년을 앞질러, 그들이 먼저 무대 앞 계단에 다다른다. 

 고개를 뒤로 꺽은 채 그 모습을 지켜보던 그녀의 입술이 자신도 모르게 달싹인다. 배우들을 흉내 내듯 목구멍을 쓰지 않고 부른다. 동호야.

행렬 끝에 있던 젊은 남자가 수그린 몸을 돌려 소년에게서 해골의 머리를 빼앗아 든다. 늘어뜨려진 손에서 손으로 옮겨간 해골이, 행렬의 맨 앞에 기역 자로 허리를 구분린 노파에게서 멈춘다. 반백의 긴 머리를 풀어내린 노파는 해골을 보듬고 무대 위로 올라간다. 무대 중앙에 있던 흰옷 입은 여자의 삼베옷이 남자가 순순히 길을 터준다.

 이제 움직이고 있는 사람은 노파뿐이다.

 그 걸음이 너무나 느리고 고요해, 한 관객의 기침 소리가 아득한 바깥 세계의 것처럼 들린다. 소년이 움직이기 시작한 것은 그 순간이다. 순식간에 소년은 무대로 뛰어올라가 노파의 굽은 등허리에 바싹 몸을 붙인다. 업힌 어린아이처럼, 혼령처럼 살금살금 뒤를 따른다. 

 

 .....동호야.

 

 그녀는 아랫입술 안쪽을 악문다. 색색의 만장들이 일제히 무대 천장에서 내려오는 것을 본다. 무대 아래 네발짐승처럼 모여 있던 배우들이 별안간 꼿꼿이 허리를 편다. 노파가 걸음을 멈춘다. 업힌 아이처럼 바싹 붙어 걷던 소년이 객석을 향해 몸을 돌린다. 그 얼굴을 바로 보지 않기 위해 그녀는 눈을 감는다.

 

 네가 죽은 뒤 장례식을 치르지 못해, 내 삶이 장례식이 되었다.
 네가 방수 모포에 싸여 청소차에 실려간 뒤에.
 용서할 수 없는 물줄기가 번쩍이며 분수대에서 뿜어져나온 뒤에.
 어디서나 사원의 불빛이 타고 있었다.
 봄에 피는 꽃들 속에, 눈송이들 속에, 날마다 찾아오는 저녁들 속에. 다 쓴 음료 병에 네가 꽂은 양초 불꽃들이.

 

 뜨거운 고름 같은 눈물을 닦지 않은 채 그녀는 눈을 부릅뜬다. 소리 없이 입술을 움직이는 소년의 얼굴을 뚫어지게 응시한다.

 

 

4장. 쇠와 피

p104

 평범한 볼펜이었습니다. 모나미 검정 볼펜. 그걸 손가락 사이에 교차시켜 끼우게 했습니다.

 그야 왼손이죠. 오른손으론 조서를 써야 하니까.

 예, 그렇게 비틀었습니다. 이 방향으로도 이렇게.

 처음엔 견딜 만했습니다. 하지만 날마다 같은 곳에 그렇게 하니까 상처가 깊어졌어요. 피와 진물이 섞여 흘렀습니다. 나중엔 이 자리에 하얀 뼈가 들여다보였습니다. 뼈가 드러나니까 알코올에 적신 약솜을 끼어주더군요.

 제가 수감된 방에는 남자들만 약 아흔명이 있었는데, 절반 이상이 같은 자리에 약솜을 끼우고 있었습니다. 대화는 금지돼 있었어요. 손가락 사이에 끼운 약솜을 눈으로 확인하면, 잠깐 서로 마주보다가 시선을 피했습니다.

 저도 그렇게 생각했습니다. 뼈가 드러났으니 그 자리는 이제 그만할 거라고. 그렇지 않았습니다. 더 고통스러울 걸 알고, 약솜을 뺀 다음 더 깊게 볼펜을 끼우고 짓이겼습니다.

 

p107

 그곳의 한끼 식사는 식판에 담긴 밥 한줌과 국 반그릇, 김치가 전부였습니다. 그것을 우리들은 2인 1조로 나눠 먹었습니다. 김진수와 한조가 되었을 때, 서서히 혼이 빨려나간 짐승과 같은 상태였던 나는 안도했습니다. 그는 많이 먹을 것 같은 사람이 아니었으니까요. 얼굴이 창백하고 눈언저리는 병자처럼 어두웠으니까요. 두 눈은 생기도 표정도 없이 공허하게 번쩍였으니까요.

 한달 전 그의 부고를 들었을 때 가장 먼저 떠오른 것이 바로 그 눈이었습니다. 멀건 콩나물국에서 콩나물을 골라 먹다 말고 멈칫 나를 보던 눈. 그가 콩나물을 다 먹어버릴까봐 긴장하고 있던 나를, 우물거리는 그의 입술을 혐오하며 쏘아보고 있던 나를 묵묵히 마주 바라보던, 나와 똑같은 짐승이었던 그의 차갑고 공허한 두 눈.

 

p109

 김진수는 우리 중에서도 특별히 변칙적인 고문을 더 당한 것으로 알고 있습니다. 아마 외모가 여성적이어어서 그랬던 것 같습니다. 

 아니요, 당시에는 말하지 않았습니다. 십년쯤 지난 뒤에 들은 이야깁니다.

 성기를 꺼내 탁자에 올려놓게 하고, 나무 자로 내려치겠다며 위협했다고 했습니다. 하체를 발가벗기고 영창 앞 잔디밭으로 데려가, 팔을 뒤로 묶고 엎드려 있게 했다고 했습니다. 굵은 개미들이 세시간 동안 김진수의 사타구니를 물었다고 했습니다. 석방된 뒤 거의 매일 밤 벌레와 관련된 악몽을 꾸었다고 들었습니다.

 

 

 그전에는 모르는 사이였습니다. 오며 가며 상황실에서 얼굴만 봤지요.

 김진수는 그해에 대학 신입생이었으니, 아직 뺨에 솜털이 나 있었습니다. 얼굴이 희고 속눈썹이 유난히 짙어서 눈에 띄었습니다. 볼 때마다 무척 빠르게 걸어다닌다는 느낌이었는데, 팔다리와 허리가 가늘고 길어서 더 그렇게 보였던 것 같습니다.

 희생자 파악하고, 시신 관리를 총괄하고, 관이며 태극기를 구해와서 장례 준비하고... 주로 그런 일을 했던 걸로 압니다.

 사실 그 친구가 마지막 밤에 남을 거라곤 생각 못했습니다. 총기를 모두 회수한 뒤 계엄군이 들어오기 전에 도청을 깨끗이 비워놓자고, 단 한사람도 희생되어선 안된다고 말하는 학생들 중 하나일 거라고 생각했습니다. 저녁에 남은 걸 보고도 의심했습니다. 저 친구는 자정이 되기 전에 빠져나갈 거라고.

 김진수와 나를 포함해 열두명이 한조가 되어 이층 소회의실에 모였습니다. 처음이자 마지막이라고 생각하고 통성명을 했습니다. 각자 간단한 유서를 써서 이름과 주소를 적고는 찾기 쉽도록 셔츠 앞주머니에 넣었습니다. 당장 닥쳐올 일들이 실감나지 않았던 것도 사실입니다. 하지만 계엄군이 시내로 진입했다는 무전이 들어오기 시작하자 그제야 긴장이 되었습니다.

 상황실장이 복도로 김진수를 불러낸 건 자정 무렵이었습니다. 여자들을 호위해 도청 밖으로 데려다주라는 상황실장의 우렁우렁한 목소리가 회의실 안까지 들렸습니다. 상황실장이 김진수를 지목해 그 일을 맡긴 건, 유난히 갸날프게 생긴 그 친구가 돌아오지 않아도 좋다는 생각에서였을 거라고 나는 짐작했습니다. 김진수가 자신의 총을 챙겨 굳은 얼굴로 나가는 모습을 보며 생각했던 기억이 납니다. 그래, 너는 돌아오지 말아라.

 그러나 짐작과 달리 그는 삼십분이 채 지나지 않아 돌아왔습니다. 나갈 때와는 달리 긴장이 완전히 풀린 얼굴이었습니다. 밀려오는 졸음을 견딜 수 없는 듯 가늘게 뜬 눈으로 총을 벽에 세워놓더니, 창 아래 놓인 인조가죽 소파에 모로 누워 잠들어버렸습니다. 내가 흔들어 깨우자 신음하듯 말했습니다. 죄송합니다. 조금만 잘게요. 

 이상한 일은, 그 모습을 지켜보던 다른 사람들도 별안간 기운이 빠진 듯 벽에 기대앉았다는 것입니다. 하나둘 꾸벅꾸벅 졸기 시작했습니다. 나도 막막한 마음이 되어 김진수가 누운 소파 옆에 웅크려앉았습니다. 어떻게 설명할 수 있을까요. 졸음이 오기는커녕 신경이 가장 날카롭게 곤두서야 할 시간, 냉정한 정신력에 의지해야 할 그 시간에, 우리들은 눈도 귀도 입도 없는 뭉클뭉클한 잠 속으로 정신없이 빠져들고 있었습니다.

 조심스럽게 문이 열렸다가 소리 없이 닫히는 기척에 나는 눈을 떴습니다. 조그맣고 말간 얼굴에 알밤처럼 머리를 깍은 중학생이 어느 사이 소파에 기대앉아 있었습니다.

 누구냐, 나는 잠긴 목소리로 물었습니다.

 너 누구냐, 어디서 왔어.

 눈을 질끈 감으며 소년이 대답했ㅅ브니다.

 너무 졸려요, 조금만 잘게요, 여기서 형들이랑.

 그 목소리를 듣자마자, 죽은 듯 잠들어 있던 김진수가 소스라치며 눈을 떴습니다.

 어떻게 된 거야.

 소년의 팔을 붙들며 그가 숨죽여 물었습니다.

 내가 아까 가라고 하지 않았어. 너도 간다고 하지 않았어.

 김진수의 목소리가 점점 높아졌습니다.

 네가 대체 여기서 뭘 하겠다는 거야. 총 쏠 줄은 알어.

 머뭇머뭇 소년이 말했습니다.

 .... 화내지 마요, 형.

 두사람의 실랑이에 사람들이 부스럭부스럭 깨어났습니다. 소년의 팔을 놓지 않은 채 김진수는 반복해서 말했ㅅ브니다.

 적당한 때 너는 항복해라. 알겠지, 항복하라고. 손들고 나가. 손들고 나가는 애를 죽이진 않을 거야.

 

p117

 아니요, 쏘지 않았습니다.

 누구도 죽이지 않았습니다.

 계단을 올라온 군인들이 어둠속에서 다가오는 것을 보면서도, 우리 조의 누구도 방아쇠를 당기지 않았습니다. 방아쇠를 당기면 사람이 죽는다는 걸 알면서 그렇게 할 수가 없었습니다. 우린 쏠 수 없는 총을 나눠 가진 아이들이었던 겁니다.

 

 

 나중에 알았습니다. 그날 군인들이 지급받은 탄환이 모두 팔십만발이었다는 것을. 그때 그 도시의 인구가 사십만이었습니다. 그 도시의 모든 사람들의 몸에 두발씩 죽음을 박아넣을 수 있는 탄환이 지급되었던 겁니다. 문제가 생기면 그렇게 하라는 명령이 있었을 거라고 나는 믿고 있습니다. 학생 대표의 말대로 우리가 총기를 도청 로비에 쌓아놓고 깨끗이 철수했다면, 그들은 시민들에게 총구를 겨눴을지도 모릅니다. 그 새벽 캄캄한 도청 계단을 따라 글자 그대로 콸콸 소리를 내며 흐르던 피가 떠오를 때마다 생각합니다. 그건 그들만의 죽음이 아니라, 누군가의 죽음을 대신한 거였다고. 수천곱절의 죽음, 수천곱절의 피였다고.

 방금 전까지 눈을 마주치며 대화했던 사람들에게서 흘러나오는 피를 곁눈질로 보며, 누가 죽고 누가 남았는지도 파악하지 못한 채 나는 복도에 머리를 박고 엎드렸습니다. 그들이 매직으로 내 등에 무엇인가 글씨를 쓰는 것을 느꼈습니다. 극렬분자, 총기 소지. 그렇게 썼다는 것을 상무대 유치장에서 다른 사람이 알려주었습니다.

 

p118

 김진수와 나는 여전히 식판 하나를 받아 한줌의 식사를 나눠 먹었습니다. 몇시간 전에 조사실에서 겪은 것들을 뒤로하고, 밥알 하나, 김치 한쪽을 두고 짐승처럼 싸우지 않기 위해 인내하며 묵묵히 숟가락질을 했습니다. 실제로 어떤 사람들은 식판을 내려놓고 소리쳤습니다. 참을 만큼 참았어. 그렇게 네가 다 쳐먹으면 난 어쩌란 말이야. 으르렁거리는 그들 사이로 몸을 밀어넣으며 한 남자애가 더듬더듬 말했습니다. 그, 그러지 마요. 좀처럼 입을 떼지 않는, 늘 주눅 든 듯 조용한 아이였기에 나는 놀랐습니다.

 우, 우리는... 주, 죽을 가, 각오를 했었잖아요.

 김진수의 공허한 눈이 내 눈과 마주친 것은 그때였습니다.

 순간 깨달았습니다. 그들이 원한 게 무었이었는지. 우리를 굶기고 고문하면서 그들이 하고 싶었던 말이 무엇이었는지. 너희들이 태극기를 흔들고 애국가를 부른 게 얼마나 웃기는 일이었는지, 우리가 깨닫게 해주겠다. 냄새를 풍기를 더러운 몸, 상처가 문드러지는 몸, 굶주린 짐승 같은 몸뚱어리들이 너희들이라는 걸, 우리가 증명해주겠다.

 

 

p123

 재판장님이 입장하십니다.

 서기의 말이 떨어지자 앞문이 열리며 법무장교 셋이 차례로 들어왔습니다. 깊이 고개를 숙이고 있던 내 귀에 이상한 소리가 들린 건 그때였습니다. 앞에서 두번째 줄 정도였습니다. 반쯤 고개를 들고 나는 앞쪽을 살폈습니다. 누군가가 소리 죽여 흐느끼듯 애국가 첫 소절을 부르기 시작하고 있었습니다. 그가 어린 영재라는 걸 깨달았을 때, 누가 먼저랄 것 없이 이미 합창이 시작돼 있었습니다. 자력에 이끌린 것처럼 나도 따라 불렀습니다. 죽은 듯이 고개를 숙이고 있던 우리들이, 땀과 피와 고름이었던 우리들이 조용히 노래 하는 동안, 어째서였는지 그들은 제지하지 않았습니다. 소리치지도, 개머리판으로 머리를 내리치지도, 위협했던 대로 벽으로 몰아 넣어 총살하지도 않았습니다. 우리가 노래를 끝마칠 때까지, 소절과 소절 사이마다 위태한 침묵이 풀벌레 소리와 함께, 간이재판소의 서늘한 공기 속에서 도사리고 있었습니다.

 

 

p132

 군인들의 명령대로 이층 복도에 머리를 박고 있던 우리들이 도청 마당으로 끌려내려간 건 동틀 무렵이었습니다. 뒤로 손이 묶인 채 마당 가장자리에 일렬로 무릎 꿇고 앉은 우리들에게 한 장교가 다가왔습니다. 그는 흥분해 있었습니다. 한사람씩 군화로 등을 밟아 흙바닥에 머리를 박게 하며 욕설을 퍼부었습니다. 씨팔, 내가 월남 갔다 온 사람이야. 내 손으로 죽인 베트콩 새끼들이 서른명도 넘는다, 더러운 빨갱이 새끼들. 그때 김진수는 내 옆에 있었습니다. 장교가 김진수의 등을 밟자, 하필 자갈에 찧은 이마에서 피가 흘렀습니다.

 다섯명의 어린 학생들이 이층에서 두 손을 들고 내려온 것은 그때였습니다. 계엄군이 대낮같이 조명탄을 밝히며 기관총을 난사하기 시작했을 때 내가 소회의실 캐비닛에 숨으라고 명령했던 네명의 고등학생과, 소파에서 김진수와 짦은 실랑이를 벌였던 중학생이었습니다. 더이상 총소리가 들리지 않자 그들은 김진수의 말대로 무기를 버리고 항복하러 내려온 것이었습니다.

 저 새끼들 봐라, 김진수의 등을 밟고 있던 장교가 여전히 흥분한 채 소리쳤습니다. 씨팔 빨갱이들, 항복이다 이거냐? 목숨은 아깝다 이거냐? 한발을 여전히 김진수의 등에 올린 채 그는 M16을 들어 조준했습니다. 망설이지 않고 학생들에게 총을 갈겼습니다. 나도 모르게 고개를 들어 그의 얼굴을 봤습니다. 씨팔, 존나 영화 같지 않냐. 치열이 고른 이를 드러내며 그가 부하를 향해 말했습니다.

 아시겠습니까. 그러니까이 사진에서 이 아이들이 나란히 누워있는 건, 이렇게 가지런히 옮겨놓은 게 아닙니다. 한줄로 아이들이 걸어오고 있었던 겁니다. 우리가 시킨 대로 두 팔을 들고, 줄을 맞춰 걸어오고 있었던 겁니다.

 

p154

 그러나 스무살이 되기 전까지 당신이 했던 일은 달랐다.

 당신은 하루에 열다섯시간 일했고 한달에 이틀 쉬었다. 봉급은 남자 공원의 절반이었다. 잔업수당은 없었다. 하루 두알씩 타이밍을 먹어도 잠이 쏟아졌다. 선 채로 잠들면 작업반장이 욕을 하거나 뺨을 쳤다. 오후부터 묵직하게 붓던 종아리와 발등, 물품을 빼돌릴지 모른다는 이유로 퇴근하는 여공들을 몸 수색하던 경비들. 브래지어 언저리를 더듬을 때 느려지던 그들의 손. 치욕. 기침. 잦은 코피. 두통. 가래를 뱉으면 뭉쳐나오던 거무스레한 실밥 덩어리들.

 우리는 고귀해.

 성희 언니는 자주 그렇게 말했다. 쉬는 일요일마다 청계피복노조 사무실에서 노동법 강의를 듣던 그녀는, 자신이 배운 것을 빼곡히 노트에 정리해와 소모임에서 강의했다. 한자 공부를 할 거란 성희 언니의 말에 당신은 별다른 두려움 없이 그 모임에 들어갔었다. 실제로 언니들은 모이자마자 한자부터 공부했다. 1800자는 알아야 해, 신문은 읽을 수 있어야지. 각자 펜글씨 공책에 서른자씩 쓰고 암기하는 일이 끝나면 성희 언니의 어색한 노동법 강의가 시작되었다. 그러니까.... 우리는 고귀해. 말문이 막히거나 기억이 얼른 안 날 때마다 성희 언니는 추임새처럼 그 말을 넣었다. 헌법에 따르면, 우리는 모든 사람들과 똑같이 고귀해. 그리고 노동법에 따르면 우리에겐 정당한 권리가 있어. 그녀의 목소리는 초등학교 여선생님처럼 상냥하고 낭랑했다. 이 법을 위해 죽은 사람이 있어.

 어용노조를 큰 표 차로 꺽고 뽑힌 노조 간부들을 구사대와 경찰들이 끌고 가던 날, 2교대를 하려고 기숙사를 나와 출근하던 여공들 수백명이 사람의 벽을 만들었다. 많아야 스물한두살, 대부분이 십대인 여자애들이었다. 제대로 된 구호도 노래도 없었다. 잡아가지 마요. 잡아가면 안돼요. 소리치는 그녀들을 향해 각목을 든 구사대가 달려들었다. 헬멧과 방패로 중무장한 경찰 백여명을, 차창마다 철망이 쳐진 전경차들을 당신은 보았다. 무엇 때문에 저렇게 무장했을까, 얼핏 생각했다. 우린 싸움을 못하고 무기도 없는데.

 성희 언니가 큰 소리로 외친 것은 그때였다. 옷을 벗어. 우리 다 같이 옷을 벗자. 누가 먼저랄 것 없이 그녀들은 옷을 벗었다. 잡아가지 마요. 소리치며 블라우스와 치마를 벗어 흔들었다. 그녀들이 지닌 가장 은밀한 것, 모든 사람들이 귀중하다고 말하는 것, 처녀들의 벗은 몸을 그들이 만질 수 없을 거라고 믿었기 대문이다. 그러나 그들은 브래지어 차림의 여자애들을 흙바닥에 끌고 갔다. 등허리의 맨살이 모래에 긁혀 피가 흘렀다. 머리가 헝클어지고 속옷이 찢겼다. 안돼, 잡아가면 안돼, 고막이 터질 듯 쨍쨍한 울부짖음 사이로, 그들은 수십명의 노조원들을 곤봉과 각목으로 때려 닭장차에 집어넣었다.

 열여덟살인 당신은 마지막에 끌려가다 모랫바닥에 미끄러져 넘어졌다. 서두르던 사복형사가 당신의 배를 밟고 옆구리를 걷어 찬 뒤 가버렸다. 흙바닥에 엎드린 당신의 의식이 아득하게 흐려졌다 돌아왔다. 여자애들의 쨍쨍한 고함 소리가 멀어졌다 가까워졌다.

 응급실로 업혀간 당신은 장파열 진단을 받았고, 입원해 있는 동안 해고 통보를 들었다. 퇴원한 후 언니들과 함께 복직투쟁을 하는 대신 당신은 고향 집으로 내려갔다. 몸을 추스린 뒤 인천으로 돌아와 다른 방직공장에 취직했지만 일주일을 못 채우고 해고됐다. 당신의 이름이 블랙리스트에 올라 있었던 것이다. 결국 당신은 이년 남짓한 방직공 경력을 포기하고, 친척의 주선으로 광주 충장로의 양장점에 미싱사 시다로 취직했다. 급료는 여공 시절보다 더 형편 없었지만, 그만두고 싶을 때마다 막연히 성희 언니의 목소리가 떠올랐다... 그러니까, 우리는 고귀하니까. 그럴 때면 그녀에게 편지를 썼다. 나는 잘 지내고 있어요, 언니. 쉽게 미싱사가 될 수 있을 것 같지는 않지만요. 기술이 어렵다기보다는 잘 안 가르쳐주는 게 문제에요. 그래도 인내심 있게 배워봐야죠. 기술, 인내심 같은 단어들은 소모임에서 배웠던 한자로 반듯하게 획을 살려 썼다. 성희 언니가 자주 걸음하는 산업선교회 주소로 편지를 부치면 답장은 아주 가끔씩 짧게 왔다. 그래야지, 너는 어디서 뭘 해도 잘할 거야. 그렇게 한해 두해 시간이 흐르며 서로 연락이 끊어졌다.

 어렵게 배운 기술로 삼년 만에 미싱사가 됐을 때 당신은 스물한 살이었다. 그해 가을, 당신보다 어린 여공이 야당 당사에서 농성을 하다 죽었다. 사이다 병 조각으로 스스로 손목을 긋고 삼층에서 뛰어내렸다는 정부의 발표를 당신은 믿지 않았다. 퍼즐 맞추기를 하듯 신문에 실린 사진들을, 검열되어 텅 빈 공란들을, 격앙된 사설의 어둑한 반대편을 들여다봐야 했다.

 당신의 배를 밟고 옆구리를 찼던 사복형사의 얼굴을 당신은 잊지 않았다. 중앙정보부가 구사대들을 직접 교육하고 지원하고 있다는 것을, 그 폭력의 정점에 군인 대통령이 있다는 것을 잊지 않았다. 당신은 긴급조치 9호의 의미를 이해했고, 대학 정문에서 스크럼을 짠 학생들이 외치는 구호를 이해했다. 이어서 부산과 마산에서 일어난 일들을 이해하기 위해 신문 속 퍼즐을 맞췄다. 부서진 전화 부스들과 불타는 파출소, 투석적은 벌이는 성난 군중. 오직 상상으로 유추해야 하는 공란 속의 문장들.

 대통령이 돌연히 죽은 시월 당신은 자문했다. 이제 폭력의 정점 이 사라졌으니, 더이상 그들은 옷을 벗어들고 울부짖는 여공들을 끌고 가지 못하는가? 넘어진 여자애의 배를 밟아 창자를 터뜨리지 못하는가? 박 대통령의 신임을 받았다는 젊은 소장이 장갑차를 이끌고 서울에 입성하는 것을, 곧이어 중앙정보부장을 겸직하는 것을 당신은 신문을 통해 지켜보았다. 조용히 소름이 끼쳤다. 무서운 일이 생길 것 같아. 임 양은 신문이 그렇게 좋아? 중년의 재단사는 당신을 놀리곤 했다. 젊어 좋겄어. 그렇게 잔글씨가 안경도 없이 뵈고. 

 그리고 그 버스를 당신은 보았다. 

양장점 주인이 대학생 아들을 데리고 영암의 동생네돌 내려가러빈 화창한 봄날이었다. 낮에 갑자기 할 일이 없어져 서름서름 거리를 걷던 당신의 눈에 그 시내버스가 들어왔다. 계엄 해제, 노동삼권 보장, 차창 아래 길게 걸어놓은 흰 현수막에 파란 매직으로 쓴 글씨가 보였다. 작업복 차림의 전남방직 여공 수십명이 버스를 가득 채우고 있었다. 햇빛을 못 봐 데친 버섯같이 얼굴이 창백한 여자애들이 나무 막대들을 들고, 차창 밖으로 팔을 내밀어 차체를 치며 노래를 불렀다. 당신이 기억하는 쨍쨍한 목소리, 무슨 새나 어린 짐승들이 한꺼번에 내는 것 같은 목소리였다.

 우리들은 정의파다 좋다 좋다
 같이 죽고 같이 산다 좋다 좋다
 무릎 꿇고 살기보다 서서 죽길 원한단다
 우리들은 정의파다

 똑똑히 기억하는 그 노래를 따라, 당신은 홀린 듯 그 버스가 사라진 방향으로 걸었다. 수십만의 군중이 거리 곳곳에서 몰려들어 광장으로 향하고 있었다. 이른 봄부터 스크럼을 짜고 몰려다니던 대학생들은 보이지 않았다. 노인들, 초등학생 아이들, 작업복 차림의 남녀 공원들, 넥타이를 맨 젊은 남자들, 투피스에 힐은 신은 젊은 여자들, 그것도 무기라고 장우산을 들고 나온 새마을 점퍼 차람의 아저씨들. 그 모든 사람들의 행렬 앞에, 신역에서 총을 맞은 청년들의 시신 두구가 수레에 실려 광장으로 나아고 있었다.

 

p161

 거대한 빙하가 당신의 몸을 내리누른다. 고체인 당신은 으스러진다. 빙하 아래로 흐르고 싶다고 당신은 생각한다. 바닷물이든 석유든 용암이든, 어떤 액체가 되어서 이 무게로부터 벗어나야 한다. 그 길밖에 없다.

 

p162

 입원 병동이 있는 본관 로비에는 조명이 완전히 꺼져 있다. 별관 측면의 응급실 입구에만 환하게 불이 밝혀져 있다. 방금 위급한 환자를 수송한 듯, 지방 병원의 구급차 한대가 비상 깜박이를 켜고 뒷문을 열어놓은 채 정차하고 있다.

 활짝 열려 있는 현관을 통과해 당신은 응급실 복도에 들어선다. 신음과 다급한 목소리, 무엇인가를 세차게 흡입해내는 의료기구의 기계음, 환자용 침상을 옮기는 소란한 바퀴 소리를 듣는다. 수납창구 앞에 여러줄로 놓인 등받이 없는 의자에 걸터앉는 당신에게 창구의 중년 여자가 묻는다.

 어떻게 오셨습니까?

 .....누구를 만나려고요.

 사실이 아니다. 당신은 여기서 아무도 만나기로 하지 않았다. 면회가 허락되는 아침이 된다 해도, 성희 언니가 당신을 만나기를 원할 것인지도 알지 못한다.

 등산복 차림의 중년 남자가 동료의 부축을 받으며 걸어들어온다. 거친 솜씨로 팔에 부목을 한 것으로 미루어 야간산행 중 부상당한 것 같다. 괜찮아, 이제 다 왔어. 배낭 두개를 겹쳐 어깨에 둘러 멘 동료가 다친 남자를 달랜다. 두사람의 얼굴이 비슷한 표정으로 일그러져 있는 것을 당신은 본다. 다시 보니 동료가 아니라 형제인 듯 이목구비가 닮아 있다. 조금만 참아. 곧 의사가 올거야.

 곧 의사가 올거야.

 주문처럼 그가 되풀이하는 말을 들으며 당신은 의자 끝에 꼼짝 않고 앉아 있다. 오래전 당신에게 의사가 되고 싶다고 말했던 여자애를 생각한다.

 성희 언니가 소모임에 신입 회원을 받자고 해서 당신이 말을 꺼내봤던 아이였다. 당신처럼 중학교를 마치기 전에 나이를 속이고 공장에 들어온, 키가 자그마하고 웃음이 송글송글하던 그애는 거절했다. 저는 조합 활동 적극적으로 못해요. 해괴되면 안되거든요. 동생 학비도 보내야 하고, 언젠가 저도 공부를 할 거니까요. 의사가 되고 싶어요.

 장파열로 당신이 입원해 있었을 때였다. 명동성당에서 농성하다 잠깐 문명 온 동료가 말했다.

 .....사방에 흩어진 우리 신발을, 정미가 전무 모아서 노조 사무실에 갖다놨대. 쪼그만 게 그렇게 서럽게 울더란다.

 연행되지 않으려고 몸부림치다 벗겨진 신들이 사방에 널려 있었을 것이다. 열여섯살 난 그애는 무엇이 자신을 울게 하는지도 모르면서 그 신들을 가슴에 안고 이층 노조 사무실로, 아무도 남아 있지 않은 빈방으로 걸어올라갔을 것이다.

 그날 오후 회진을 온 말쑥한 얼굴의 의사와 레지던트와 인턴들을 당신은 유심히 올려다봤다. 그애는 그들 같은 의사가 될 수 없다고 그때 생각했다. 동생을 대학 졸업시키면 이십대 중반이 될 것이고, 그때부터 중학교 검정고시를 준비한다 해도.... 아니, 그애는 그때까지 공장에서 버티지도 못할 것이다. 그애는 자주 코피를 쏟았고 깊은 기침을 했다. 발육이 덜 돼 열무처럼 가는 종아리로 방직기 사이를 뛰어다니다가, 기둥에 기대서서 의식을 잃듯 깜박 졸았다. 어떻게 이렇게 시끄러워요? 아무 말도 안 들려요. 처음 일을 배우던 날엔 방직기 소음에 놀라, 겁에 질린 듯 동그랗게 뜬 눈으로 당신에게 외쳤다.

 

p166

  기억해달라고 윤은 말했다. 직면하고 증언해달라고 말했다.

 그러나 그것이 어떻게 가능한가.

 삼십 센티 나무 자가 자궁 끝까지 수십번 후벼들었다고 증언할 수 있는가? 소총 개머리판이 자궁 입구를 찢고 짓이겼다고 증언할 수 있는가? 하혈이 멈추지 않아 쇼크를 일으킨 당신을 그들이 통합병원에 데려가 수혈받게 했다고 증언할 수 있는가? 이년 동안 그 하혈이 계속되었다고, 혈전이 나팔관을 막아 영구히 아이를 가질 수 없게 되었다고 증언할 수 있는가? 타인과, 특히 남자와 접촉하는 일을 견딜 수 없게 됐다고 증언할 수 있는가? 짧은 입맞춤, 뺨을 어루만지는 손길, 여름에 팔과 종아리를 내놓아 누군가의 시선이 머무는 일조차 고통스러웠다고 증언할 수 있는가? 몸을 증오하게 되었다고, 모든 따뜻함과 지극한 사랑을 스스로 부숴뜨리며 도망쳤다고 증언할 수 있는가? 더 추운 곳, 더 안전한 곳으로 오직 살아남기 위하여.

 

p169

 모든 셔터가 내려져 있었다.

 모든 창문이 걸어잠겨 있었다.

 그 어두운 거리 위로, 얼음의 눈동자 같은 열이레 달이 당신이 탄 소형 트럭을 내려다보고 있었다. 

 대부분의 방송은 여대생들이 했다. 그녀들이 완전히 지쳤을 때, 목이 갈라져 더이상 소리를 낼 수 없다고 말했을 때 당싱는 사십여분 분 동안 메가폰을 잡았다. 불을 켜주세요, 여러분. 당신은 그렇게 말했다. 캄캄한 창문들을 향해, 누구의 기척도 느껴지지 않는 골목을 향해 말했다. 제발 불이라도 켜주세요, 여러분.

 군이 그 트럭을 새벽까지 버려둔 것은 병력의 이동 경로를 노출하지 않기 위해서였다는 것을 당신은 나중에 알았다. 동트기 직전에 체포된 여자들은 광산경찰서 유치장으로, 운전을 맡았던 청년은 상무대로 끌려갔다. 총기를 소지하고 있었으므로 당신은 여대생들과 따로 수감되었고 보안부대로 이송되었다.

 그곳에서 당신은 이름 대신 빨갱이년으로 불렸다. 과거 여공이었고 노조 활동을 했기 때문이었다. 사년 동안 지방 도시의 양장점에서 숨어지내며 간첩 지령을 받아왔다는 각본을 완성하기 위해 그들은 날마다 당신을 조사실 탁자에 눕혔다. 더러운 빨갱이년. 아무리 소리 질러봐라. 누가 달려오나. 조사실의 조명은 가늘게 떨리는 형광등이었다. 일상적인 그 환한 조명 아래, 당신이 하혈 끝에 의식을 잃을 때까지 그들은 멈추지 않았다.

 성희 언니를 다시 만난 것은 교도소에서 석방된 이듬해였다. 산업선교회와 크리스찬 아카데미에 그녀의 행방을 수소문해 구로동의 국숫집에서 만났다. 당신의 이야기를 들은 그녀는 놀란 듯 고개를 저었다.

 네가 감옥에 있었던 줄은 꿈에도 몰랐어. 조용히 잘 살고 있을 줄 알았는데.

 수년 동안 도피와 수감을 반복해온 성희 언니의 얼굴은 볼이 움푹 패어 다른 사람처럼 보였다. 이제 스물일곱인데, 나이보다 열살은 더 들어 보였다. 흰 김을 피워올리며 식어가는 국수 앞에서 그녀는 잠시 침묵했다.

 정미가 그 봅에 실종됐다데, 알고 있었니?

 이번에는 당신이 고개를 저었다.

 그애가 잠깐 노조 일을 거들었더랬어. 그런데 우리가 블랙리스트 때문에 고생하는 걸 보고 걱정이 됐던지, 해고되기 전에 먼저 공장을 그만뒀어. 그러곤 소식이 끊겼다가... 그 얘긴 나도 최근에 들었어. 일산방직에서 같이 야학엘 다녔다는 동료한테서.

 모국어를 이해할 수 없게 된 것처럼 당신은 가만히 성희 언니의 입 모양을 지켜보았다.

 너, 거기 사년 살았다면서, 큰 도시도 아닌데, 오며 가며 한번도 못 만났니.

 당신은 얼른 대답할 수 없었다. 그애의 얼굴을 제대로 기억할 수도 없었다. 무엇인가를 애써 기억해내기에 당신은 지쳐 있었다. 몇 조각의 희끗한 파편들이 떠올랐다 사라졌다. 흰 피부, 오종종한 앞니. 의사가 되고 싶어요. 노조 사무실까지 그애가 끌어안고 올라갔다던, 이제는 이름을 잊은 동료가 병원에 가져다준 당신의 운동화.

 그게 다였다.

 

 4:00

 죽기 위해 그 도시에 다시 갔어.

 

 석방된 뒤 얼마간은 오빠 집에 신세를 졌지만, 일주일에 두번씩 경찰이 찾아오는 걸 더 견딜 수 없었어.

 이월 초순 새벽이었어. 내가 가진 가장 깨끗한 옷을 꺼내 입고, 간단히 가방을 사서 시외버스를 탔어.

 언뜻 그 도시는 변한 게 없어 보였어. 하지만 모든 게 변했다는 걸 곧 느낄 수 있었어. 도청 별관 외벽엔 총탄 자국들이 패어 있었어. 어두운색 옷을 껴입은 행인들의 얼굴은 투명한 흉터가 새겨진 것처럼 일그러져 있었어. 그들과 어깨를 부딪치며 나는 걸었어. 배가 고프지 않았어. 목이 마르지도, 발이 시리지도 않았어. 날이 저물 때까지, 다음 날 새벽이 올 때까지도 계속 걸을 수 있을 것 같았어.

 그러다 너를 본 건 금남로에서였어.

 카톨린센터 외벽에 방금 학생들이 붙여놓고 간 사진을 들여다 봤을 때였어.

 언제든 경찰들이 나타날 수 있었어. 그 순간도 어디서 날 지켜보고 있는지도 몰랐어. 나는 재빨리 사진 한장을 뜯었어. 둘둘 말아서 쥐고 걸었어. 큰길을 건너 골목으로 깊이 들어갔어. 못 보던 음악감상실 간판이 보였어. 오층 계단을 숨차게 걸어올라가, 동굴 같은 안쪽 방에 자리를 잡고 커피를 시켰어. 종업원이 커피를 가져다줄 때까지 꼼짝 않고 기다렸어. 분명 음악 소리가 큰 곳이었을 텐데. 깊은 물속에 잠긴 것처럼 아무것도 들리지 않았어. 마침내 완전히 혼자가 됐을 때 사진을 펼쳤어.

 너는 도청 안마당에 모로 누워 있었어. 총격의 반동으로 팔다리가 엇갈려 길게 뻗어가 있었어. 얼굴과 가슴은 하늘을, 두 다리는 벌어진 채 땅을 향하고 있었어. 옆구리가 뒤틀린 그 자세가 마지막 순간의 고통을 증거하고 있었어.

 숨을 쉴 수 없었어.

 어떤 소리도 낼 수 없었어.

 그러니까 그 여름에 넌 죽어 있었어. 내 몸이 끝없이 피를 쏟아낼 때, 네 몸은 땅속에서 맹렬하게 썩어가고 있었어.

 그 순간 네가 날 살렸어. 삽시간에 내 피를 끓게 해 펄펄 되사레했어. 심장이 터질 것 같은 고통의 힘, 분노의 힘으로.

 

p173

 오래전 동호와 은숙이 조그만 소리로 나누던 대화를 당신은 기억한다. 왜 태극기로 시신을 감싸느냐고, 애국가는 왜 부르는 거냐고 동호는 물었다. 은숙이 어떻게 대답했는지는 기억나지 않는다. 

 지금이라면 당신은 어떻게 대답할까. 태극기로, 고작 그걸로 감싸보려던 거야. 우린 도륙된 고깃덩어리들이 아니어야 하니까, 필사적으로 묵념을 하고 애국가를 부른 거야.

 그 여름으로부터 이십여년이 흘렀다. 씨를 말려야 할 빨갱이 연놈들. 그들이 욕설을 뱉으며 당신의 몸에 물을 끼얹던 순간을 등지고 여기까지 왔다. 그 여름 이전으로 돌아갈 길은 끊어졌다. 학살 이전, 고문 이전의 세계로 돌아갈 방법은 없다.

 

p176

 내 책임이 있는 거야, 그렇지?

 입술을 악문 채, 눈앞에서 일렁이는 파르스름한 어둠을 향해 당신은 묻는다.

 내가 집으로 가라고 했다면, 김밥을 나눠 먹고 일어서면서 그렇게 당부했다면 너는 남지 않았을 거야, 그렇지?

 그래서 나에게 오곤 하는 거야?

 왜 아직 내가 살아 있는지 물으려고.

 

p177

 아니

 언니를 만나 할 말은 하나뿐이야.

 허락된다면.

 부디 허락된다면.

 장례식장과 응급실로, 병동과 병원 정문으로 갈라지는 도로를 밝히던 외등들이 일제히 꺼진다. 도로 가운데 그어진 흰색의 직선을 따라 당신은 얼굴을 들고 걷는다. 선득한 빗방울이 당신의 정수리에, 당신의 운동화가 내딛는 아스팔트에 떨어져 번진다.

 죽지 마.

 죽지 말아요.

 

6장. 꽃 핀 쪽으로

p178

 그 머시매를 따라갔다이.

 어시매 걸음은 빠르고 나는 늙었는디, 아무리 걸어도, 따라잡을 수 있어야제. 조금만 옆으로 고개를 돌려주면 옆얼굴이 보일 것인디. 아무 데도 안 둘러보고 앞으로, 앞으로만 가야.

 요새 어느 중학생이 그리 짧게 머리를 깍겄냐이. 동그스름한 네 두상을 내가 아는디, 분명히 너였다이. 느이 작은형이 물려준 교복이 너한테는 너무 컸다가 3학년 올라감스로야 겨우 몸에 맞았제. 아침에 네가 책가방 들고 대문을 나서먼, 한없이 뒷모습을 보고 섰고잪게 옷 태가 났제. 그란디 그 머시매는 책가방은 어디다 놓고 빈손으로 훌훌 걸어가더라이. 하얀 하복 반소매 아래 호리호리한 팔뚝이 영락없이 너였단게. 좁은 어깨하고 길쭉한 허리하고 걸음걸이가, 고라니같이 앞으로 수그러진 목이 꼭 너였단게.

 네가 나한테 한번 와준 것인디, 지나가는 모습이라도 한번 보여줄라고 온 것인디, 늙은 내가 너를 놓쳐버렸어야. 시장통 좌판 사이로, 골목골목으로 한시간을 뒤지고 댕겨도 없어야. 무릎 속이 쑤시고 어찔어찔 골이 흔들려 바닥에 주저앉았다이. 하지만 동네 사람이라도 만나면 큰일인게, 아직 어지러워도 땅을 짚고 일어섰다이.

 시장통까지 널 따라갈 적엔 먼 길인 줄도 몰랐는디, 돌아오는 길엔 바짝바짝 목이 타드라이. 동전 하나 주머니에 안 담고 나와서, 아무 가게라도 들어가 찬물 한잔 얻어묵고 자팠다이. 그래도 누가 비렁뱅이 노인네라고 욕할까 무서운게, 벽이 나올 때마다 손으로 짚음스로 싸묵싸묵 걸어왔다이. 어지럽게 먼지 날리는 공사판 옆을, 입을 꽉 막고 기침함스로 지나왔다이. 갈 적에는 어째서 몰랐으까이. 그렇게 시끄러운 공사판이 있었던 것을. 그렇게 무참하게 길바닥을 뚫어쌓고 있었던 것을.

 

p180

 알 수 없다이, 그날은 왜 내가 이름 한자리 못 불러봤는지. 입술이 달라붙은 사람맨이로, 쌕쌕 숨만 몰아쉼스로 뒤를 밟았는지, 이번에 내가 이름을 부르면 얼른 돌아봐라이. 대답 한자리 안해도 좋은게, 가만히 돌아봐라이.

 

 

 아니제.

 그럴 수 없는 것을 내가 알제.

 내 손으로 너를 묻었은게. 하늘책 체육복에다 교련복 윗도리를 입고 있던 너를, 하얀 하복 샤쓰에다 아래위 까만 동복으로 갈아입혔은게. 혁대도 단정하게 매주고 깨끗한 회색 양말을 신겼은게. 베니어판으로 짠 관에다 너를 넣고 청소차에 식도 갈 적에, 너를 지킬라고 내가 앞자리에 탔은게. 청소차가 어디로 가는 줄도 모르고, 네가 있는 뒤쪽만 뚫어져라고 지켜보고 있었은게.

 환한 모래언덕에 까만 옷 입은 사람 수백명이 개미같은 관을 들고 걸어가던 것이 생각난다이. 느이 형들이 입술을 꽉 물고서 울고 섰던 것도 아슴아슴 떠오른다이. 느이 아부지 생전에 나한테 하던 말이, 그때 내가 울지도 않고 뗏장 옆에 풀을 한움큼 끊어서 삼켰다든지. 삼키고는 쪼그려앉아서 토하고, 다 토하면 또 풀을 한움큼 끊어다 씹었다든디. 근디 나는 하나도 기억이 안 나야. 묘지로 가기 전 일들만 또렷해야. 관 뚜껑 닫기 전 마지막으로 봤던 네 얼굴이 얼마나 핼쑥했던지. 네 살이 그렇게 희었던 줄 그때 처음 알았다이.

 나중에 느이 작은형이 그러드마는 총을 맞고 피를 너무 흘려서 네 얼굴이 그리 희었다고. 그래서 관이 가벼웠다고. 네가 아무리 덜 컸다고 해도, 그렇게 관이 가벼울 수는 없었다고. 그람스로 두 눈에 핏발이 서드라이. 이 원수는 내가 갚을랍니다. 그것이 뭔 소리다냐. 깜짝 놀라서 내가 그랬다이. 나라에서 죽인 동생 원수를 무슨 수로 갚는다냐. 너까장 잘못되면 나도 따라 죽을 거이다.

 그라고 삼십년이 흘러가도록, 너하고 느이 아부지 기일에 그 자석이 가만히 서서 입 다물고 있는 것을 보면 마음이 이상해ㅑ. 네가 죽은 것이 지 때문이 아닌디, 왜 친구들 중에 제일 먼저 어깨가 굽고 머리가 하얗게 세었을까이. 저것이 아직도 원수 갚을 생각을 하고 있단가. 생각하면 가슴이 내려앉아야.

 

 그래도 느이 큰형은 흔적 없이 밝게 지낸다이. 한달에 두번 각시하고 같이 내려오고, 혼자도 몰래 당일로 내려와서 밥도 사주고 용돈도 주고, 가까이 사는 네 작은형보다 다정하다이.

 느이 아부지나 큰형이나 너나, 허리가 길고 어깨가 수긋한 내력이지야. 기름한 눈매하고 앞니 살짝 벌어진 것은 너하고 큰형이 똑같았지야. 요새도 느이 큰형이 웃음스로 토끼같이 넓적한 앞니가 드러나먼, 눈가에 주름은 깊이 패었어도 청년같이 순진해 보인다이.

 느이 큰형이 열한살 묵었을 때 네가 태어났는디, 그 자석은 그때부터 가이내 같은 머시매라서, 애기가 보고 잪다고 학교만 끝나면 달려왔는디, 네가 웃는 것이 이쁘다고, 조심조심 목을 받쳐안고는 까르르 웃을 때까지 흔들었는디, 돌 지난 너를 포대기로 등에 업혀주먼, 겅중겅중 마당을 돎스로 박자도 안 맞는 노래를 불렀는디.

 그렇게 가이내 같은 자석이 느이 작은형하고 싸울 줄을 누가 알았겄냐이. 이십년도 넘게 지금까장도 서로 서먹서먹해갖고 긴 이야기를 안 나누게 될 줄을.

 느이 아부지 상 치르고 돌아와 삼우제 준비할 적이었다이. 갑자기 뭣이 깨지는 소리가 나서 달려가봤더니, 스물일곱살, 서른두살 먹은 다 큰 머시매들이 씨근거림스로 서로 멱살을 쥐고 있어야.

 그 쪼그만 것 손 잡아서 끌고 오면 되지, 몇날 며칠 거기 있도록 너는 뭘 하고 있었냐고! 마지막 날엔 왜 어머니만 갔냐고! 말해봤자 안 들을 것 같았다니, 거기 있으면 죽을 걸 알았담서, 다 알고 있었담서 네가 어떻게!

 그란게 느이 작은형이 으어어어, 마로 아니고 뭣도 아닌 소리를 지름스로 지 형한테 달라들더니 방바닥에 넘어뜨렸다이. 짐승맨이로 울부짖음서 말을 한게, 무슨 이야긴지 뜨문뜨문하게밖에 안 들렸다이.

 형이 뭘 안다고... 서울에 있었음스로.... 형이 뭘 안다고...

 그때 상황을 뭘 안다고오.

 둘이 그 꼴로 엎치락뒤치락하는 것을 말릴 생각도 못하고 나는 부엌으로 돌아왔다이. 아무 생각도 하고 싶지 않은게, 아무 소리도 안 들리는 것맨이로 전을 부치고 산적을 꿰고 탕을 끓였다이.

 인자는 암것도 모르겄어야.

 마지막 날에 내가 너를 찾아갔을 적에, 넥 그리 순하게 저녁에 들어갈라요, 말하지 않았더라면 어땠으까이. 나는 안심을 하고 집에 가서 느이 아부지한테 그랬어야.

 여섯시에 문 잠그고 집에 온다요. 다 같이 저녁 묵자고 약속했소.

 그란디 일곱시가 되도록 네가 안 들어온게, 느이 작은형하고 나하고 둘이서 집을 나섰다이. 계엄이라 일곱시가 통금인디, 그날 저녁 군대가 들어온다 한게 귀신 그림자도 안 보이더라이. 꼬박 사십분을 걸어서 가본게 상무관에는 불이 꺼지고 아무도 없어야. 도청앞으로 간게 총 든 시민군들이 지키고 섰드라마는. 우리 막내아들을 만나봐야겄다고 사정한게, 어리디어린 그 시민군들은 파랗게 얼굴이 굳어갖고 안된다고, 아무도 들여보내년 안된다고 딱 잘라 말하더라이. 금방 계엄군이 탱크를 몰고 들어온다고, 위험하게 얼른 집으로만 가라고만 하더라이.

 제발 들어가게 해주소, 하고 나는 빌었어야.

 우리 막내 불러라도 주소, 하고 나는 빌었어야.

 보다 못한 느이 작은형이 직접 들어가서 동생을 찾겄다고 한게 시민군 하나가 그러더라이.

 지금 들어가면 못 나옵니다. 저 안에는 죽을 각오가 된 사람들만 남았습니다. 

 느이 작은형이 알겄다고, 일단 들어가게만 해달라고 언성을 높일 적에 내가 말을 막았다이.

 그 아그가 기회를 봐서 제 발로 나올라는 것이여... 분명히 나한테 약속을 했단게.

 사방이 너무 캄캄해서 내가 그렇게 말을 했다이. 금방이라도 어둠속에서 군인들이 나타날 것 같아서 그렇게 말을 했다이. 이라다가 남은 아들까장 잃어버릴 것 같아서 그렇게 말을 했다이.

 그렇게 너를 영영 잃어버렸다이.

 내 손으로 느이 작은형 팔을 끌고, 내 발로 돌아서서 집으로 갔다이. 모두 다 죽어버린 것맨이로 캄캄한 사거리를, 사십분을 둘이 울면서 걸어 돌아갔다이.

 인자 나는 암것도 알 수 없어야. 겁이 나서 얼굴이 파랗게 굳어있던 시민군들, 어리디어리던 그 자서들도 죽었으까이. 그리 허망하게 죽을 것을, 왜 끝까장 나를 안 들여보내줬으까이.

전작 <기사단장 죽이기> 이후 6년만에 나온 신작. 하루키 작품에 익숙한 사람이라면 이 작품의 초반부를 읽으면서 얼마되지 않아 '익숙한 스토리와 구성인데?'라고 생각하게 될 것이다.

도시를 묘사하는 부분에서부터 <세계의 끝과 하드보일드 원더랜드>를 그대로 떠올리게 된다.

소설 말미에 작가후기에서도 이 작품의 모티브가 된 중편 <도시와, 그 불확실한 벽>(1980년 문예지 '문학계' 발표)를 처음 다듬어서 쓴 장편이 1996년에 나온 <세계의 끝과 하드보일드 원더랜드>였다고 밝혀놨다.

작가는<세계의 끝과 하드보일드 원더랜드>와는 다른 대응이 또 있어도 좋지 않을까 하는 생각으로 이 소설을 집필했다고 하는데 속마음으로는 아마도 조금은 미진하거나 걸리는 부분이 있지 않았을까 하는 느낌도 든다.

개인적으로도 1996년에 발표된 작품이지만 <세계의 끝>은 최근(2년 전쯤)에 들어서야 읽어봤는데 별로 재미가 없었다.  다 읽고 나서도 뭔가 빠진 부분이 있다고나 할까?

이 작품도 그리 개운하진 않다. 카페 여주인과의 스토리를 좀 더 이어나갔으면 하는 바램이 있는데 급작스럽게 끊겨버리는 느낌이 없지 않다.

하지만 <세계의 끝>보다는 진일보한 작품이란 건 어느 정도 수긍할 수 있을 것 같다.

작품후기 말미에 작가는 이런 말을 한다.

 

 '호르헤 루이스 보르헤스가 말한 것처럼 한 작가가 일생 동안 진지하게 쓸 수 있는 이야기는 기본적으로 그 수가 제한되어 있다. 우리는 그 제한된 수의 모티프를 갖은 수단을 사용해 여러 가지 형태로 바꿔나갈 뿐이다 - 라고 단언할 수 있는지도 모른다. 

 요컨대 진실이란 것은 일정한 어떤 정지 속이 아니라, 부단히 이행 = 이동하는 형체 안에 있다. 그게 이야기라는 것의 진수가 아닐까. 나는 그렇게 생각할 따름이다.'

 

하루키의 주요한 작품은 크게 3개라고 본다.

1. 양 3연작 시대(초기) - 바람의 노래를 들어라, 1973년의 핀볼, 양을 쫓는 모험

2. 노르웨이의 숲

3. 태엽 감는 새 연대기 이후 

 

특히 <태엽 감는 새 연대기> 이후의 작품은 거의 동일한 모티프의 변주이고 그 중 최고의 작품은 <태엽 감는 새 연대기>라고 개인적으로 생각한다.

 

이번 <도시와 그 불확실한 벽>은 여전히 내겐 2% 정도 부족해보이는데, 70대가 넘는 노작가가 아직도 그의 작품 세계의 결말을 내지 않고 정진하는 모습은 어떤 면에선 감탄을 자아내게 하는 부분도 있다.

나온지 꽤 된 소설이고 출간 당시에는 베스트셀러였다. 집에 굴러다닌지 오래된 책인데 책정리 차원에서 버리기 전에 읽어봤다.

책의 초반부는 흥미를 일으킬만한 요소가 있지만 중후반 이후로 힘이 확 떨어진다. 책은 읽어보지 않았지만 존 그리샴의 다른 작품을 영화화한  펠리컨 브리프를 보면서도 비슷한 느낌을 받았다.

그저그런 킬링타임용 스릴러물 정도라고나 할까?

출간 당시에는 모르겠지만 지금은 굳이 읽어볼만한 소설은 아니다.

 

 

유시민 작가님의 추천사를 듣고 보게 된 책.

아버지의 장례식이라는 모티브를 통해 딸과 빨치산 출신의 아버지가 인생의 기나긴 갈등을 치유하고 회복하는 과정을 굉장히 드라마틱하고 재밋고 그리고 감동적으로 그려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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p136

 구례는 아버지의 고향이기도 하지만 아버지의 전장이기도 했다. 아버지의 친척과 친구가 있는 곳이기도 하지만 아버지를 적으로 아는 사람도 있는 곳이라는 의미다. 그런데도 아버지는 고향에서 사는 데 거리낌이 없었다. 몇년에 한번씩 바뀌는 정보과 담당 형사들과도 허물없이 농을 주고받으며 두루두루 잘 지냈다. 감시하는 형사와 술잔을 나누고 싶냐는 내 비아냥도.

 "순겡은 사램 아니다냐?"

 아버지는 대수롭잖게 받아넘겼다.

 "몰르는 사람잉게 총질을 해대제 구례 사램들끼리는 안 그랬어야. 뽈갱이든 퍼랭이든 노상 얼굴 보고 살았는디 총이 겨놔지가니. 구례는 해방 직후에 친일파 숙청도 지대로 못했당게."

 고씨 집안사람 하나가 친일파였다. 친일로 제법 돈을 모았고, 일본에 헌납도 한 모양이었다. 해방 직후 면의 젊은이들이 그를 당산나무 아래로 끌고 왔다. 쳐 죽이라는 고함이 터져 나왔다. 혈기왕성한 젊은이 하나가 낫을 들고 다가가자 누군가 빽 소리를 쳤다. 젊은이의 어머니였다.

 "그 어른이 아니었으면 니가 시방 산 목심이 아니어야!"

 젊은이가 어린 시절 이질로 죽어갈 때 고씨가 병원비를 댄 것이다. 사람들이 한마디씩 보태기 시작했다.

 "우리 애기 학벵 끌레가게 생겼는디 고씨 어른이 손을 써줬그마요."

 고씨 성토장이 이내 미담장으로 변했다. 쳐 죽이자고 했던 젊은이들도 그만 머쓱해져서 흐지부지 흩어지고 말았다.

 "민족이고 사상이고, 인심만 안 잃으면 난세에도 목심은 부지허는 것이여."

 자신도 고씨처럼 인심을 잃지 않았으니 빨갱이라도 고향서 살 수 있다는 의미인 듯했다. 한때 적이었던 사람들과 아무렇지 않게 어울려 살아가는 아버지도 구례 사람들도 나는 늘 신기했다. 잘 죽었다고 침을 뱉을 수 있는 사람과 아버지는 어떻게 술을 마시며 살아온 것일까? 들을 수 없는 답이지만 나는 아버지의 대답을 알 것 같았다. 긍게 사램이제. 사람이 어떻게 그럴 수 있냐고 내가 목소리를 높일 때마다 아버지는 말했다. 긍게 사램이제. 사람이니 실수를 하고 사람이니 배신을 하고 사람이니 살인도 하고 사람이니 용서도 한다는 것이다. 나는 아버지와 달리 실수투성이인 인간이 싫었다. 그래서 어지간하면 관계를 맺지 않았다. 사람에게 늘 뒤통수를 맞는 아버지를 보고 자란 탓인지도 몰랐다.

 

 

 이 소설을 읽고 나서 우리가 안중근이 이토에게 총을 쏜 사건의 의미를 얼마나 피상적으로만 알고 있었는지를 재삼 깨달을 수 있었다. 

 이 소설은 안중근이 이토를 쏜 후, 사형을 당하기까지의 짧은 기간동안 일본, 한국의 정치적 현실 그리고 한국 천주교의 입장, 한국 민중들의 반응에 대해 입체적으로 농밀하게 묘사함으로써 안중근 의사가 가지고 있는 역사적 의미를 재조명하는데 그 의의가 있다.

 뒤로 갈수록 가슴이 너무나 먹먹해지고 답답해진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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p17

 제2차 한일협약 때, 병력으로 조선 황궁을 포위하고 조선 황제와 대신들을 헌병으로 협박하기는 했지만, 병력을 부딪치지 않고 도장을 받아내서 오백 년이 넘은 나라의 통치권을 인수한 이토의 역량을 메이지가 모르지는 않았을 것이었다. 러시아를 도모할 때까지도 이토는 그것이 도장으로 가능하리라고는 생각할 수 없었으나, 그후 조선 사대부들과 자주 상종할수록 이토의 뜻은 도장 쪽으로 기울었다. 왕권의 지근거리에서 세습되는 복락을 누린 자들일수록 왕조가 돌이킬 수 없이 무너져갈 때는 새롭게 다가오는 권력에 빌붙으려 한다는 사실을 이토는 점차 알게 되었다. 도장의 힘은 거기서 발생하고 있었다. 도장으로 해결할 수 있다면 살육을 피할 수 있고, 조선에서 밀려나는 서양 여러 나라들의 간섭을 막을 수 있고, 사후 처리가 원만할 것이었다. 도장을 찍어서 한 나라의 통치권을 스스로 넘긴다는 것은 보도 듣도 못한 일이었으나, 조선의 대신들은 국권을 포기하는 문서에 직함을 쓰고 도장을 찍었다.

 도장의 힘은 작동되고 있었으나, 조약 체결을 공포한 후 분노하는 조선 민심의 폭발을 이토는 예상하지 못했다. 지체 높은 사대부들이 비통한 글을 남기고 잇달아 자결했다. 그들은 독약을 마셨고 물에 뛰어들었다. 조선 황제는 자살한 신하들에게 표창을 내려서 충절을 기렸다. 오백 년을 지탱해온 나라의 관리와 식자 몇 명이 치욕을 못 견디어 자결하는 것은 있을 수 있는 일이었다. 이토는 이 죽음에 따른 민심의 동태를 주시하면서도 못 본 체했다. 이 동시다발적인 죽음들은 무력하기는 했으나 충忠의 반열에 올랐다.

 이토는 조선 사대부들의 자결이 아닌 무지렁이 백설들의 저항에 경악했다. 왕권이 이미 무너지고 사대부들이 국권을 넘겼는데도, 조선의 면면촌촌에서 백성들은 일어나고 또 일어섰다.

 

p69

 안중근이 서울에 도착하기 며칠 전에 한국 통감 이토는 한국 군대를 해산했다. 강제해산 당한 한국군이 일본군과 도심지에서 싸우고 있었다. 이토는 한국 대신들을 겁박했고, 대신들은 황제를 몰아붙여서 군대 해산의 윤허를 받아냈다. 주둔군 사령관 하세가와가 무장해제의 과정을 지휘했다. 하세가와는 맨손체조 훈련을 하겠으니 서울의 한국군 병력은 모두 비무장 상태로 훈련원으로 모이라고 명령했다. 부대 지휘관들이 맨손의 병력을 인솔해서 훈련원에 모였다. 무장한 일본군이 맨손의 한국군을 에워싸고 해산을 통고했다. 훈련원에서 일본군 대대장의 구령에 따라 해산식이 진행되는 동안에 일본 군대가 병력이 없는 한국군 부대를 접수해서 무기를 가져갔다. 황제가 조서를 내려 군인들을 달랬다.

 - 너희들은 나의 뜻을 헤아려서 각자 맞는 일거리를 찾아서 살아라.

 황제는 이어 내각에 지시했다.

 - 군대를 해산시킬 때 폭동에 미리 대비하라. 혹시 폭동을 진압할 일이 있으면 이토 통감에게 의지하고 부탁하라.

 이토는 전국의 한국군 지방 병력을 해산시키라고 각 도의 경찰관서에 지시했다. 여러 고을의 연병장에서 한국군 병력이 총검을 내려놓고 맨손체조를 하는 동안에 경관들이 무기를 수거했다.

 군대가 해산되기 한 달 전에, 고종 황제가 헤이그에 밀사를 보낸 사실을 대한매일신보가 보도했다. 이토는 고종을 꾸짖어 퇴위시키고 그 아들 순종을 황제에 자리에 앉혔다. 새 황제가 해산하는 군인들에게 은사금을 내렸다. 하사에게 팔십원, 일 년 이상 근무한 병사에게 오십원, 일 년 미만자에게 이십오원이었다. 병사들이 돈을 찢으면서 통곡했다.

 시위侍衛 1연대 1대대장 박승환이 명을 받지 않고 자살했다. 참위 남상덕이 부대원을 이끌고 거리로 나가서 일본군과 싸웠다. 일본군이 숭례문 문루에 기관총을 걸어놓고 쏘았다. 거리에 시체가 쌓였다. 한국군 병사들이 흩어져서 민가로 숨었다. 일본 군인들이 일본 여자를 앞세워서 민가의 내실을 수색했다. 잡히는 자들은 그 자리에서 때려죽였다. 달아나던 한국군 병사들은 고립된 일본 군인들을 만나면 묶어놓고 때렸다. 때려서 죽였다. 일본군이 대궐 문 양쪽에 기관포를 설치하고 한국 대신들의 집에 헌병을 세웠다. 일본군은 일본인 밀집 거주지역인 진고개의 경비를 강화했다. 한국 고관들이 가족들을 진고개 안쪽으로 옮겼다. 해산된 군인들이 의병 부대에 가세했다. 의병들은 전국 산골, 도회지, 섬에서 싸우다 죽었다. 져서 자살했고, 잡혀가 죽임을 당했다.

 

p78

 이토는 후임 통감에게 주는 문서를 비서관에게 맡기고 나서, 경시총감을 불러서 지시했다. 

 - 위생에 관한 명령이다. 서울 도성 안 거리에서 방분, 방뇨를 금하라. 아동들도 포함시켜라. 집안의 분뇨를 길에 버리지 못하게 하라. 분뇨는 반드시 수거해서 처리장에 버리도록 행정을 조직해서 시행하라. 걸인과 부랑자들의 문전걸식을 금한다. 이들을 도성 밖에 수용하라. 훈령으로 알리고 병력으로 단속하라. 같은 명령이 반복되면 권위가 훼손되어서 시행하기 어려워진다. 분뇨의 문제는 거듭 말하지 않겠다. 이번에 엄단해서 통감의 뜻을 보여라.

 이토는 서울에 처음 부임했을 때 똥냄새에 질겁을 했다. 어른과 아이들이 길바닥에서 엉덩이를 까고 앉아 똥을 누었고, 집집에서 아침마다 요강을 길바닥에 쏟았다. 장마 때는 변소가 넘쳐서 똥덩이가 떠다녔다. 똥냄새는 마을 골목마다 깊게 배어 있었고 남대문 거리, 정동 거리에도 똥 무더기가 널려 있었다. 통감부 직원들이 밤길을 돌아다니다가 똥을 밟고 미끄러졌다는 얘기를 이토는 요정에서 술 마시다가 기생들한테 들었다. 

이토는 덕수궁에서 만난 조선 대신들을 불러 세우고 거리의 똥을 치우라고 말했다. 통감이 똥 문제를 이야기하자 조선 대신들은 얼굴을 돌렸다.

 - 통감 각하의 살피심이 이처럼 세밀하시니 두렵습니다.

 - 분뇨의 문제는 인의예지에 선행하는 것이오. 이것이 조선의 가장 시급한 당면 문제요. 즉각 시정하시오.

 이토는 통감부와 조선 조정을 거듭 다그쳤으나 거리는 여전히 똥바다였다. 똥은 틀어막을 수가 없었고, 먹고 누는 일을 금할 수가 없었다. 통감부를 떠나면서 이토는 서울 도심에 공중변소를 늘리고 분뇨를 길에 버리는 자들을 엄단하라고 거듭 지시를 내렸다. 목숨의 안쪽에서 발생하는 것이므로 똥이란 당하기 어렵다... 라고 이토는 속으로 중얼거렸다. 날마다 새 똥이 거리에 널려 있었다.

 

p127

 전쟁의 결과가 섬멸적인 압승일수록 제삼국의 개입을 차단하기가 쉽고 새로운 판도를 기존 질서로 정립시키기가 쉽다는 것을 이토는 청일전쟁이 끝나고 서양 여러 나라들과 외교 분쟁을 겪으면서 알게 되었다. 그것은 수십만의 주검을 치르고 얻은 피의 교훈이었다.

 

p184

 범인이 안중근이라는 말을 들었을 때 뮈텔은 황해도 산골에서 길을 안내하던 안중근과 대학교를 세워달라고 들이대던 안중근을 떠올렸다. 이토가 죽은 뒤에 안중근이 천주교인인가를 묻는 기자들의 질문에 뮈텔은 안중근은 이미 천주교인이 아니라고 대답했다.

 개인들의 영성이 꽃처럼 피어나면 그 꽃들이 모여서 문명을 이루고 하느님의 나라가 그 위에 세워지는 평화의 구도를 뮈텔은 아직도 이 황잡한 세상에 필 수가 없었다. 적개심에 가득찬 자에게 평화를 말할 수는 없었다.

 총으로 쏘아 죽이는 방식으로 증오를 표출한 천주교인의 죄악에 뮈텔은 상심했다. 백 년이 넘는 박해의 세월을 견디면서 죽음에 죽음을 잇대는 순교의 피 위에 세속의 거점을 겨우 확보한 조선 교회가 또다시 세속 권력과 충돌한다면 교회의 틀이 위태로워질 것을 뮈텔은 걱정했다. 뮈텔은 자신의 걱정을 신부와 신도들에게 말할 수가 없었다. 안중근은 사제를 능멸했고 교회의 가르침을 배반했으며, 교회 밖으로 나가서 살인의 대죄를 저질렀으므로, 그가 비록 영세를 받았다 해도 더이상 교회의 자식이 아니라고 뮈텔은 하느님께 고했다. 하느님은 세속의 일에 관하여 대답하지 않았다.

 

p196. 19장.

 이토의 영결식은 11월 4일 도쿄 히비야 공원에서 열렸다. 이토의 관은 아침 일찍 아카사카 레이난자카의 관저를 떠났다. 기마헌병대, 군악대, 의장대가 운구 대열의 선두를 이끌었다. 그 뒤로 대령급 군인 열두 명이 이토가 받은 훈장 스물네 개를 받들었고, 이토의 관 둘레를 육군 해군 장성들이 경위했다.

 장례위원회는 통나무를 새로 벌목해서 히비야 공원에서 임식 막사 마흔 동을 새로 지었다. 껍질 벗긴 새 나무의 향기가 식장에 가득찼다.

 이토의 관이 중앙에 놓이고 그 앞에 훈장 스물네 개가 늘어섰다. 법의를 걸친 승려들이 독경했고 러시아정교회의 주교가 금빛 십자가를 들고 입장했다. 일본 황태자 내외의 어사, 한국 태황제의 어사, 한국 황제의 어사, 한국 황태자의 어사들이 차례로 입장했다. 보병, 기병, 포병 2개 사단이 식장 외곽을 경비했고 해군이 의장을 맡았다.

 메이지는 이토의 장례 절차와 규모에 대해서 소상히 보고받고 윤허했다. 메이지는 이토의 장례식에 참석하지 않았다. 메이지는 이토의 죽음에 대한 자신의 심회를 발설하지 않았다. 대신들은 메이지의 침묵 앞에서 침묵했다. 시종들은 멀리서 메이지의 눈치를 살피며 입을 다물었다.

 같은 날 서울 장충단에서 한국 황실과 내각과 민간인들이 합동으로 관민 추도회를 열었다.

 흰 베로 장막을 치고 그 안에 이토의 위폐를 모셨다. 위패에 '문충공文忠公'의 시호를 써붙였다. 황족과 각부 대신, 고위 관리, 한성부민회 임원들, 각 지역 대표들이 이토의 위패에 절했다. 서울의 모든 학교가 수업을 중지했다. 교사들이 학생을 인솔해 와서 절했다. 수도 거주민들은 대문 앞에 삼베를 감은 반기半旗를 걸었다. 이토의 위패 앞에는 조선의 예법에 따라서 이쪽에서 저쪽까지 밥, 국, 떡, 육포, 푸성귀, 나물, 과일, 생선, 고기가 펼쳐져 있었다.

 

p204

 이토의 장례식을 치르기 전부터, 서울에 이토의 송덕비와 동상을 세우자는 건의들이 통감부에 접수되었다. 통감부는 허가하지 않았따. 통감부는 건의한 자들을 불러들여서 충정은 이해하나 바닥 민심이 어수선하니 경거망동을 삼가라고 경고했다.

 이토의 동상을 세운다고 모금을 해서 돈을 떼어먹으려던 자들이 경시청에 검거되었다. 한국 황제의 어명을 받은 조문 사절을 사칭하는 자들이 대련으로 건너가서 이토의 관을 실은 배를 향해서 절했다.

 

 지방 군수와 서생들 중에서 힘있는 자들이 사죄단, 위문단을 구성해서 일본으로 가면서 그 여행 비용을 주민들에게 걷었다. 뜻있는 자들이 모여서 이토의 죽음을 사죄하러 일본에 가려고 13도 인민 도일渡日 대표단을 결성했다.

 도쿄의 한국 황태자 이은은 태사인 이토의 죽음을 애도해서 삼 개월 복을 입고 식음을 간소히 했다.

 서울의 무당 수련은 태황제의 총애를 입어서 궁녀들의 부축을 받으며 대궐을 드나들었다. 수련은 원구단에서 가까운 자리에 굿판을 벌이고 노래하고 춤추어서 총 맞아 죽은 이토의 혼백을 위로하고 극락왕생을 빌었다. 태황제는 늘 수련에게 상금 명목으로 많은 돈을 주었다. 이날 굿판에 육백여 명이 모여서 먹고 마셨는데, 비용은 모두 수련이 자비로 부담했다.

 

 일본 신문들은 이토의 죽음을 맞은 도쿄 화류계의 슬픔을 소상히 보도했다. 슬픔은 고요하고 단정했다. 도쿄 아카사카의 게이샤 우메코梅子는 이토의 여행길을 여러 번 모셔서 화류계의 선망을 받아왔다. 이토가 죽은 다음날, 우메코는 요정으로 몰려온 기자들을 만나지 않고 방안에서 나오지 않았다. 요정의 늙은 마담이 기자들 앞에 나와서

 - 우메코는 어른을 모신 일을 발설하지 않는다. 우메코는 지금 화장을 지우고 슬픔에 잠겨 있다. 인터뷰에 응할 수 없는 슬픔으로 인터뷰를 대신한다.

 라고 말했다. 기자들은 우메코의 슬픔의 품격을 평가하는 기사를 썼다. 이 요정의 주방장 아베는

 - 어른의 식성은 늘 깔끔했다. 요란한 상차림을 싫어하셨다. 생선회, 은행구이, 야채 절임과 된장국 정도였다. 계절에 민감하시어, 철마다 생선을 바꾸어 드렸다. 기름진 생선은 드시지 않았다.

 라고 말했다. 기자들이 이토의 식성을 기사로 썼다.

 진자의 게이샤 하나코는 

 - 십여 년 전에 연회에서 처음 뵌 후 자주 사랑받았다. 저의 누추한 집에도 가끔 오셨다. 술 드시면서 늘 서화와 문장을 말씀하셨다. 많이 취하시면 야한 말씀도 잘하시고 저를 간지럼 태우면서 노셨다.

 라고 말했다.

 교토 화류계의 슬픔은 더 깊고 우아했다.

 ..... 이토 공작 각하께서는 국사로 바빠서 주로 도쿄에 계셨지만 공작 각하의 마음은 늘 교토의 풍류를 그리워하시었고, 틈만 나면 교토에 오셔서 저희들을 사랑해주시었다.... 공작 각하께서는 저희들 앞에서 국사를 말씀하지 않으셨지만, 나라의 일이 순조롭게 잘 풀릴 때는 포도주를 드시고 나라의 일이 어렵게 꼬일 때는 위스키를 드신다는 것을 저희들은 눈치로 알고 있었다.... 공작 각하께서 저희들의 교태에 눈길을 주지 않으시고, 깊은 시름에 잠겨서 독한 위스키를 거푸 드시면 저희들은 마음이 아팠다..... 이런 속마음의 깊이는 풍류의 본향이 교토의 게이샤가 아니면 알 수가 없다..... 라고 기온의 늙은 게이샤가 말했다고 지방신문이 인물란에 썼다.

 

p229

 재판 과정에서 안중근의 정치적 동기를 현실에 대한 무지에서 비롯된 것으로 드러내 보이고, 문명한 절차에 따라 사형에 처한다는 것이 일본 외무성의 방침이었다. 우덕순에 대한 사법적 처리도 이 방침 안에 있었다. 외무성은 이 방침을 관동도독부 고등 법원에 전문으로 지시했다. 외무성의 전문은 재판이 시작되기 전에 미리 도착했다. 고등법원은 외무성의 방침을 지방법원에 구두로 하달하고 전보로 접수한 공문을 극비로 보관했다.

 재판장 마나베는 안중근과 우덕순 사이에 지휘 복종의 관게를 설정하기가 어려웠다. 검찰관 미조부치가 법원에 제출한 신문조서에서도 그 관계는 분명하지 않았다. 우덕순은 안중근의 제안에 따라 범행에 가담했지만 하수인이라고 보기는 어려웠고, 자신의 동기를 논리적으로 진술하지도 않았다.

 재판장 마나베가 안중근에게 물었다.

 - 이 일을 하기 위해 우에게 뭐라고 말했나?

 - 이토가 하얼빈에 오는데, 함께 가서 죽이자고 말했다.

 - 그것이 언제인가?

 - 우라지를 출발하기 이틀 전이다.

 - 우는 동의했나?

 - 동의했다.

 - 다른 의견을 말하지 않았는가?

 - 다른 말은 없었다.

 - 떠나기로 결정한 것은 언제였나?

 - 그날 밤이었다.

 - 그래서 즉시 떠났는가?

 - 다음날 역으로 갔더니 기차가 이미 떠나서 그다음날 출발했다.

 

 마나베는 우덕순에게 물었다.

 - 그대는 안중근과 나랏일을 이야기한 적이 있는가?

 - 없다.

 - 그대는 안중근과 한국의 독립에 관해 이야기한 적이 있는가?

 - 없다.

 - 그대는 안과 동행하기로 약속했는가?

 - 나는 이토를 죽일 목적이었다.

 - 안은 왜 이토를 죽이려 했는가?

 - 그것을 안중근에게 들을 필요는 없었다. 모든 한국인이 이토를 증오하고 있다.

 - 안의 제안에 대해서 그대는 뭐라고 말했나?

 - 다만, 함께 가자고 했다.

 - 그 밖에 그대의 의견을 말하지 않았나?

 - 어떤 상의도 하지 않았다.

 - 안중근은 의병으로서 한 일이라고 하는데, 그대는 의병과 관련이 있는가?

 - 나는 다만 일개의 국민으로서 했다. 의병이기 때문에 하고, 의병이 아니기 때문에 하지 않는다는 것은 있을 수 없다.

 - 그대는 안의 명령에 따른 것인가?

 - 아니다. 나는 안에게 명령을 받을 의무가 없다. 또 명령을 받을 의무가 있다 하더라도 이런 일은 명령으로 할 수 있는 일이 아니다. 나는 내 마음으로 한 것이다.

 - 이토 공은 고관으로 수행원과 경호원이 많은데, 그대는 암살에 성공할 수 있으리라고 생각했는가?

 - 그것은 사람의 결심 하나로 되는 일이다. 결심이 확고하면 아무리 경호가 많아도 성공할 수 있다고 믿었다.

 

 통역관이 우덕순의 진술을 일본말로 옮겼다. 방청석이 고요했다.

 마나베는 자신의 질문이 허물어지고 있는 것을 느꼈다. 우덕순은 마음속의 사실을 들이대며 질문에 답했고, 사실을 들이대며 질문을 부수었다. 우덕순은 행위와 관련된 사실을 말했고, 동기와 관련된 사실을 말했다. 우덕순은 마나베의 질문이 미리 설정한 틀에 갇히지 않았다.

 안중근의 진술과 우덕순의 진술을 행위의 미세한 대목까지 일치했다. 마나베는 두 피고인의 진술의 상이점을 찾아내서 그 틈새를 파고들려 했으나 쉽지 않았다. 마나베는 안중근에게 물었다.

 - 그대는 공명정대한 일을 한다면서 어째서 검찰관 신문 때 공모자 우덕순의 일을 숨기고 말하지 않았는가?

 - 우덕순이 말하기 전에 내가 말할 필요가 없다고 생각했다. 나는 내 일만 말하면 그것으로 그만이라고 생각한다.

 질문이 피고인에게 접수되지 않은 채 튕겨져 나왔다. 마나베는 동기의 정치성을 부수는 쪽으로 방향을 돌렸다.

 마나베는 안중근에게 물었다.

 - 어디를 겨누었는가?

 - 심장을 겨누었다.

 - 거리는?

 - 십보 정도였다.

 - 이토 공의 수행원에게도 쏘았는가?

 - 누가 이토인지 몰랐기 때문에 이토의 오른쪽으로도 쏘았고 그다음에 왼쪽으로 쏘았다.

 - 성공하면 자살할 생각이었는가?

 - 아니다. 한국의 독립과 동양 평화를 위해서는 단지 이토를 죽인 것만으로는 죽을 수 없다.

 - 그런 원대한 계획이었다면 범행 후 체포당하지 않으려 했을 텐데, 도주할 계획을 세웠는가?

 - 아니다. 나쁜 일을 한 것이 아니므로 도주할 생각은 없었다.

 

 질문이 답변을 누르지 못했다. 질문과 답변이 부딪쳐서 부서졌고, 사건의 내용을 일정한 방향으로 엮어나가지 못했다. 답변이 질문 위에 올라탈 기세였다. 피고인은 자신에게 불리한 진술을 힘주어 말했다. 진술은 유불리를 떠나 있었다.

 마나베는 검찰관 미조부치가 신문 과정에서 안중근에게 처자의 사진을 보여주었다는 기록을 떠올렸다. 마나베는 그것이 실속 있는 신문 기법이라고 생각했다. 마나베는

 - 그대의 범죄와는 관계없지만 참고로 알려준다.

 라고 서두를 꺼내고, 김아려와 어린 분도가 이미 미조부치의 신문을 받았다고 안중근에게 말했다.

 - 그대의 처는 그대와 부부 사이라는 것을 끝내 부인했다. 그러나 그대의 아이는 그대의 사진을 보고 아버지라고 말했다. 그대의 처는 끝까지 부인하고 있지만 나는 그들이 그대의 처자라는 것을 알고 있다.

 마나베는 안중근의 얼굴을 쳐다보며 사건과 관련 없는 사실이라고 다시 한번 강조했다. 안중근은 천장을 쳐다보고 있었다. 마나베는 검찰에서 넘어온 증거물을 제시했다. 안중근과 우덕순은 증거물들을 자신의 것이라고 인정했다.

 마나베가 말했다.

 - 유리한 증거가 있으면 말하라.

 안중근이 말했다.

 - 없다.

 우덕순이 말했다.

 - 없다.

 안중근이 이어서 말했다.

 - 나는 헛된 일을 좋아해서 이토를 죽인 것이 아니다. 나는 이토를 죽인 이유를 세계에 발표하는 수단으로 이토를 죽였다.   ... 이제부터 그 사유를 말하고자 한다.

 마나베는 더이상 재판을 공개하면 공공의 안녕질서를 해할 우려가 있다고 선언하고 방청객에게 퇴정을 지시했다. 변호사가 마나베에게 안중근의 의견을 서면으로 접수해달라고 요청했다. 

 마나베가 안중근에게 말했다.

 - 그대의 정치적 의견을 서면으로 제출하면 어떤가?

 - 나는 말하기 좋아서 여러 말을 하는 것이 아니다. 나의 거사는 의견을 진술할 기회를 얻기 위한 것이다. 공개를 금지한 이상 진술할 필요는 없다.

 - 앞으로도 진술하지 않겠는가?

 - 방청객이 없으면 진술하지 않겠다.

 

 - 그렇다면 앞으로 진술할 필요가 있다고 생각하는 바를 지금 진술하라.

 - 나의 목적은 동양 평화이다. 무릇 세상에는 작은 벌레라도 자신의 생명과 재산의 안전을 도모하지 않는 것은 없다. 인간 된 자는 이것을 위해서 진력하지 않으면 안 된다.

 이토는 통감으로 한국에 온 이래 태황제를 폐위시키고 현 황제를 자기 부하처럼 부렸다. 또 타국민을 죽이는 것을 영웅으로 알고 한국의 평화를 어지럽히고 십수만 한국 인민을 파리 죽이듯이 죽였다. 이토, 이자는 영웅이 아니다. 기회를 기다려 없애버리려고 생각하고 있었는데 이번에 하얼빈에서 기회를 얻었으므로 죽였다.

 검찰관은 내가 이토를 오해해서 죽였다고 말하는데, 나는 검찰관이 나를 오해하고 있다고 생각한다. 나는 오해해서 죽인 것이 아니다. 검찰관이 내 다섯 살 난 아들에게 내 사진을 보여주니까 아버지라고 말했다고 조서에 썼다. 그 아이가 세 살 때 내가 집을 떠났으니 아이가 내 얼굴을 알 방도가 없다. 이로써 검찰 취조가 엉터리임을 알 수 있다.

 - 유리한 증거가 있으면 말하라.

 - 나는 증거물에 대해서는 의문이 없다. 다만 나의 목적에 대해서 할말이 있다.

 - 대개 진술하지 않았는가?

 - 그렇지 않다. 십분의 일도 말하지 못했다.

 - 여기는 의견을 재판하는 자리가 아니다. 사실관계에 있어서 말할 필요가 있다면 간추려서 말하라. 사실관계 이외의 말을 하면 제지시키겠다.

 - 필요한 몇 가지를 말하겠다. 내가 이토를 죽인 까닭은 이토를 죽인 이유를 발표하기 위해서다. 오늘 기회를 얻었으므로 말하겠다. 나는 한국 독립전쟁의 의병 참모중장 가격으로 하얼빈에서 이토를 죽였다. 그러므로 이 법정에 끌려 나온 것은 전쟁에서 포로가 되었기 때문이다. 나는 자객으로서 신문을 받을 이유가 없다. 이토가 한국 통감이 된 이래 무력으로 한국 황제를 협박하여 을사년 5개 조약, 정미년 7개 조약을 체결하였다. 이것을 알기 때문에 한국에서 의병이 일어나서 싸우고 있고 일본 군대가 진압하고 있다. 이것이야말로 일본과 한국의 전쟁이라 하지 않을 수 없다....

 - 그렇게 깊이 나간다면 공개를 제지할 수밖에 없다. 방청인들은 모두 퇴정....

 

 진술을 제지하고 방청객들을 내보낼 때마다 마나베는 위기를 느꼈다. 사실관계를 파고들수록 정치성이 드러나고 있었고, 외국 언론들의 관심은 높아졌다. 마나베는 서둘러서 모든 일을 끝냈다. 

 

 안중근과 우덕순은 정치범이 아니고 사전 공모에 따라 범행한 살인범이라고 미조부치는 결론지었다. 미조부치는 안중근에게 사형을, 우덕순에게 징역 이 년을 구형했다.

 

  마나베는 안중근이 이토를 살해한 죄에 사형을 선고하고, 이미 사형을 결정했으므로 안중근이 이토의 수행원에 대해 저지른 세 건의 살인미수죄에 대해서는 형을 과하지 않는다고 선고했다. 또 우덕순에게는 법이 정한 범위 내에서 비교적 가벼운 삼 년 형에 처한다고 선고했다. 수사와 재판은 모두 끝났다.

 간수가 안중근과 우덕순에게 용수를 씌우고 마차에 실어서 여순감옥으로 끌고 갔다. 마차가 법원 마당을 떠날 때 방청객들이 몰려와서 구경했고, 기자들이 사진을 찍었다.

 

 

최근 영화 한산을 보고 생각이 나서 다시 한번 읽어봤다. 읽은지 10년이 넘어가고 이순신 장군에 대한

마음가짐이 달라진 탓인지 소설의 내용이 더욱 절절히 마음에 와닿는다.

 

문장의 농밀함과 문맥에 흐르는 힘은 김훈 작가의 글솜씨 덕분이기도 하겠지만, 이순신 장군님의 인생에 흐르는 비장함에 기인한 바도 적지 않을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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p107

 임진년에 여러 포구에서 이겼을 때, 매번 적병의 숫자를 장계에 써보낸 것이 오 년이 지난 정유년에 조정에서 문제가 되었다. 전공을 허위로 보고해서 임금을 기만하고 조정을 능멸했다는 것이었다. 그것이 내가 죽어야 할 죄목의 하나였다. 견내량에서 이겼을 때부터 나는 장계의 적병의 숫자를 적지 않았다. 그날 견내량 싸움을 끝내고 한산 통제영으로 돌아와 장계를 쓸 때, 나는 그 숫자가 어느 날 나를 죽이게 되리라는 예감에 몸을 떨었다. 그날 밤 나는 종사관을 물리치고 밤새도록 혼자 장계를 썼다. 한산 통제영에서 장계를 쓰던 임진년의 여름밤은 달이 밝았다. 나는 내 무인된 운명을 깊이 시름하였다. 한 자루의 칼과 더불어 나는 포위되고 있었고 세상의 덫에 걸려 있었지만, 이 세상의 칼로 이 세상의 보이지 않는 덫을 칠 수는 없었다. 한산 통제영에서 그리고 그후의 여러 포구와 수영에서 나는 자주 식은땀을 흘렸고, 때때로 가엾고 안쓰러워서 칼을 버리고 싶었다.

 

p108

 명량의 장계를 보낸 지 두 달 만에 논공행상이 내려왔다. 선전관은 오지 않고, 조정의 명을 받을어 도원수부가 시행됐다. 거제 현령 안위가 정삼품 통정대부의 품계를 받았고 전투에 참가했던 여러 읍진 수령과 군관들이 승진했다. 나에게는 상금으로 은전 스무 냥을 보내왔다. 스무 냥의 무게와 질감은 섬뜩했다. 그 스무 냥 속에서 남쪽 바다를 들여다보는 임금의 눈은 가늘게 번뜩이고 있었다.

 스무 냥이 내려온 지 이틀 뒤에, 임금이 보낸 선전관 이원길이 목포 앞바다 고하도 수영에 도착했다. 이원길은 수하를 거느리고 병영 막사 공사장까지 나를 찾아왔다. 서울 출신 문관인데, 바다를 평생 처음 본다고 했다. 몸매가 가냘폈고 흰 손가락이 길었다. 먼 길을 온 사람 같지 않게 그는 의관이 번듯했고 여독의 기색이 없었다. 수군 병영의 온갖 너저분한 풍경에 그는 자주 눈살을 찌푸렸다. 나는 공사장 천막에서 그를 맞았다. 나는 인사했다.

- 객고가 크시겠소, 전하께서 수군을 이처럼 염려하여주시니 감읍할 뿐이오.

- 전하의 근심이 실로 깊소이다. 달아난 배설 말이오.

 명량 전투 직전에 탈영 도주한 경상 우수사 배설을 체포해서 끌고 가는 것이 임무라고 그는 밝혔다. 그가 데리고 온 부하들 중에는 무관들이 섞여 있었다. 배설은 이미 수군에서 도망쳤는데, 배설을 체포하는 일로 선전관이 남해의 수군 수영에까지 온다는 것은 이해할 수 없는 일이었다.

- 배설은 이미 달아났지 않소? 배설을 잡으려면 이리로 오실게 아니라 그의 본가 마을로 가셔야 하지 않겠소? 경상도 성주 말이오.

- 통제공, 그게 그리 간단치가 않소이다. 성주에도 군사들을 보냈으나 잡지 못했소. 배설이 성주에 들어온 흔적도 찾지 못했소. 배설이 비록 달아났다 하나 본래 담력 있는 무장이었소. 따르던 장졸들도 많았던 것으로 아오. 이자가 달아나서 대체 무슨 짓을 하려는 것인지. 전하의 근심이 실로 여기에 있는 것이오.

 나는 겨우 알았다. 임금은 수군통제사를 의심하고 있는 것이다. 명량 싸움의 결과가 임금은 두려운 것이다. 수영 안에 혹시라도 배설을 감추어놓고 역모의 군사라도 기르고 있는 것이나 아닌지, 그것이 임금의 조바심이었다.

 이원길은 열흘 동안 수영에 머물렀다. 이원길은 데리고 온 수하들을 풀어 병영 안을 모두 뒤졌고 수영 인근 백성들의 마을 헛간까지 뒤졌다. 이원길은 명량 전투 이전과 이후의 장졸들의 숫자를 점검했고 각 읍진의 탈영자 숫자를 확인했다. 이원길의 수하들이 수영의 모든 군관들을 불러서 배설의 탈영 경위와 탈영 직전 상황을 수사했다. 이원길의 수사의 초점은 배설이 수영에서 탈영했느냐 아니냐에 맞추어져 있었다. 이원길은 귀로에 우수영, 벽파진, 삼지원까지 뒤지고 돌아갔다.

 

 

 이원길이 돌아간 지 보름 뒤에 임금이 보낸 면사첩(免死帖)을 받았다. 도원수부의 행정관이 면사첩을 들고 왔다. '면사' 두 글자뿐이었다. 다른 아무 문구도 없었다. 조정을 능멸하고 임금을 기만했으며 임금의 기동출격 명령에 따르지 않은 죄에 대하여 죽음을 면해주겠다는 것이었다. 면사첩을 받던 날은 하루 종일 비가 내렸다. 나는 '면사' 두 글자를 오랫동안 들여다보았다. 죄가 없다는 것도 아니고 죄를 사해주겠다는 것도 아니고 다만 죽이지는 않겠다는 것이었다.

 너를 죽여 마땅하지만 죽이지는 않겠다. 고 임금은 멀리서 그렇게 말하고 있었다. '면사' 두 글자 속에서, 뒤척이며 돌아눕는 임금의 해소기침 소리가 들리는 듯했다. 글자 밑의 옥새는 인주가 묻어날 듯이 새빨갰다. 칼을 올려놓은 시렁 아래 면사첩을 걸었다. 저 칼이 나의 칼인가 임금의 칼인가. 면사첩 위 시렁에서 내 환도 두 자루는 나를 베는 임금의 칼처럼 보였다.

 그러하더라도 내가 임금의 칼에 죽으면 적은 임금에게 갈 것이었고 내가 적의 칼에 죽어도 적은 임금에게도 갈 것이었다. 적의 칼과 임금의 칼 사이에서 바다는 아득히 넓었고 나는 몸 둘 곳이 없었다.

 

 

 종사관 김수철이 저녁때 막사 신축 공정과 수군 징모 실적을 보고하는 일로 내 숙사에 들었다. 서안을 사이에 두고 마주앉은 김수철은 실눈을 뜨고 담벽에 걸린 면사첩을 들여다보았다. 김수철의 얼굴이 하얗게 질렸다. 내가 한산 통제영에서 체포되었을 때 김수철은 내 함거의 뒤를 따라 서울까지 걸어서 올라왔었다. 내가 하옥되었을 때, 김수철은 임금을 대면했다. 일개 지방 수영의 종사관에 불과한 그가 어떻게 임금을 대변할 수 있었는지 나는 모른다. 아마 영의정 류성룡이 길을 열어주었을 것이다. 김수철은 임금 앞에서 이마로 대전 마루를 찧으며 울었다. 나를 심문하던 위관들이 김수철의 일들을 말해주었다. 그때 김수철은 울면서 말했다고 한다.

- 전하. 통제공의 죄를 물으시더라도 그 몸을 부수지 마소서. 전하께서 통제공을 죽이시면 사직을 잃으실까 염려되옵니다.

 임금이 대답했다.

- 너희들이 남쪽 바다에서 사직을 염려했느냐?

 김수철은 수영을 이탈한 죄로 곤장 쉰 대를 맞고 풀려났다.

 김수철의 시선은 오랫동안 면사첩에 박혀 있었다. 그가 눈물을 떨구었는데, 그의 얼굴은 흔들리지 않았다. 그가 환갑연의 덕담 같은 목소리로 말했다.

- 나으리. 오래오래 사십시오.

- 알았다. 내 그럴 작정이다.

- 보고는 내일로 미루리다. 편히 주무십시오.

- 그래라. 피곤하니 물러가라.

 김수철은 들고 왔던 문서 두루마리를 펼치지 않은 채 그대로 들고 나갔다.

 

p253

 정탐이 돌아가던 날 저녁에 남해도 현감의 급보가 수영에 도착했다. 명의 도사부都司府 담종인이 나에게 보낸 문서가 남해도에 도착했다는 것이었다. 남해 현감은 배를 탄 전령을 띄워 담종인의 문서를 나에게 전했다. 전령을 태운 협선은 열 명이 노를 저어 급히 수영에 도착했다.

 명군의 통신 축선이 적이 일부를 장악한 남해도에까지 닿아 있고 명군의 문서 연락병들이 남해도에까지 드나들고 있다는 것은 놀라운 일이었다. 붉은 비다으로 싼 그 두루마리는 개전 이후 명군 최고사령부가 나에게 보낸 최초의 문서였다. 종사관 김수철을 방안으로 불러들여 문서를 함께 읽었다.

 

  이제 일본군 수뇌부들이 속속 귀순하고 있으니 그 마음이 실로 어여쁘다. 왜는 본래 인간의 언어를 알아듣지 못하는 종자들이거니와, 우리 천자의 크고 깊은 교화의 덕이 저 금수와도 같은 왜에게까지 미쳐 일본군은 이제 군사를 거두어 돌아가려 하고 있으니 실로 천자의 덕이 아니고서야 바랄 수 없는 일이다. 그러므로 너희는 이제 함대를 해산하도 군사를 풀어헤쳐서 고향으로 돌아가거라. 인간은 인간이므로 마땅히 고향으로 돌아가야 한다. 그럿이 창생의 슬픔과 고통을 지극히 헤아리는 천자의 뜻이다. 이제 너희는 일본군 진영에 가까이 가서 공연한 싸움을 일으키지 말고 천자의 변방 남쪽 바다를 소란케 하지 말라. 내, 너희들의 수영을 한번 들여다보고 스다듬어주고 싶은 마음 간절하나 멀어서 가지 못하고 이제 글을 전하니 내가 친히 너희에게 간 것과 무엇이 다르랴. 대저 천자의 무장은 정한을 가벼이 드러내는 일을 삼가는 것이다. 그러니, 그리 알라.

 

 읽기를 마치고 김수철은 말없이 창밖으로 시선을 돌렸다. 썰물은 갯벌 위에 새들이 내려앉고 있었다. 바람과 물결이 함께 먼 바다로 몰려나가서 바다는 비어 있었다. 섬 너머 수평선 쪽에서 바람 속을 날뛰는 물결이 하얗게 일어섰다. 빈 바다에는 시간의 흔적이 없었고, 지나간 싸움의 흔적이 없었다. 내가 알지 못하는 내 마음의 오지에서 징징징 칼이 울었다.

 - 수철아, 고향으로 돌아가겠느냐?

 김수철의 시선은 바다 쪽에서 돌아오지 않았다. 바다를 바라보는 그의 눈에 물기가 번졌다.

 - 나으리, 이미 돌아갈 고향이 없습니다..

 - 일본군과 명군은 돌아갈 고향이 있을 것이다.

 김수철이 내 쪽으로 시선을 돌렸다.

 - 나으리, 이 문서는 장졸들에게 발설치 마십시오.

 - 너도 발설치 마라. 조정이 가엾구나. 우리는 가엾지 않다.

 

 

작게는 재일 조선인의 디아스포라. 넓게는 소외받는 모든 이들은 위한 찬가.

 세계인 모두에게 공감받을 수 있는 무언가가 이 작품에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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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권.

p21

 하숙인들은 가게에 갔다가 신문을 읽을 줄 아는 남자들한테서 들었다며 대공황인지 뭔지가 전 세계를 덮쳤다는 이야기를 식사 시간에 자주 꺼냈다. 불쌍한 미국인들이 가련한 소련인들과 중국인들 못지않게 굶주림에 허덕이고 있다는 이약였다. 심지어 천황의 은총 아래 무탈하게 지내던 일본인들도 배를 곯는다고 했다. 그러니 그 겨울에 살아남은 사람들은 약삭빠르고 강인한 이들이 틀림없었다. 하지만 차마 입에 담을 수 없을 정도로 참혹한 소식들이 너무나 많았다. 어린 아이들은 잠자리에 들었다가 다시는 잠에서 깨어나지 못했고, 여자 아이들은 국수 한 그릇에 몸을 팔았으며, 노인들은 젊은이들이라도 먹고 살 수 있게 죽을 곳을 찾아 남몰래 떠나버렸다.

 

p69

 "어디를 가든 썩어빠진 사람들이 있어. 그들은 좋은 사람들이 아니야. 아주 나쁜 사람을 보고 싶니? 그럼 평범한 사람은 상상도 못할 성공을 안겨줘 봐. 언제든지 하고 싶은 대로 할 수 있게 되었을 때, 어떤 행동을 하는지 한번 보는 거야."

p249

 선자는 항상 밭이 있으면 좋겠다고 생각했다. 고향에서 어머니의 하숙집에는 부엌 뒤쪽에 작은 텃밭이 있어서 하숙인들이 내는 돈보다 두 배는 더 많이 먹을 때도 음식을 제공할 수 있었다. 신선한 식품의 가격은 계속 올랐고, 노동자들은 가장 기본적인 것들을 살 여유도 없었다. 최근에는 몇몇 손님들이 김치 한 포기를 통째로 살 수가 없어서 반으로 쪼개서 조금만 살 수 있는지 묻기도 했다

p267

 조선인들이 일본이 승리하기를 바란다고? 천만의 말씀이다. 하지만 일본의 적이 이긴다면 조선인들에게 무슨 일이 일어날까? 조선인들이 스스로를 구할 수 있을까? 분명 그렇지 않을 것이다. 그러니 내 밥그릇이나 잘 챙기자는 것이 조선인들이 남모래 품고 있는 속마음이었다. 가족을 구하고, 자기 배를 채우고, 관리자들을 경계하자. 조선의 독립주의자들이 나라를 되찾지 못한다면 아이들에게 일본어를 가르쳐 출셋길을 열어주자. 적응해서 살자. 이만큼 간단한 것이 또 어디 있겠는가? 조선의 독립을 위해 싸우는 모든 애국자나 일본을 위해서 싸우는 재수 없는 조선인 개자식이나 다들 먹고 살려고 애쓰는 만 명의 동포 중 하나일 뿐이었다. 결국 굶주림을 이길 수 있는 것은 아무것도 없었다.

 

p271

 그러나 노아가 이 모든 비밀들보다 더 비밀스럽게 품고 있는 은밀한 소망은 일본인이 되고 싶다는 것이었다. 이카이노에 살면서 절대 조선으로 돌아가지 않는 것은 아무에게도 말할 수 없는 노아의 가장 큰 꿈이었다.

 

p280

 공장주인 시마무라는 비품실 크기만 한 유리로 된 사무실에 앉아 있었다. 투명한 유리창 덕분에 소녀들이 일을 잘하고 있는지 감시할 수 있었다. 일을 잘 못하는 여자아이를 발견하면 요셉을 불러 들여서 그 아이에게 주의를 주라고 시켰다. 두 번 주의를 받으면 6일 동안 열심히 일해도 주급을 받지 못했다. 시마무라는 파란 천으로 장정한 원장에다 소녀들의 이름을 기입해놓고 그 옆에 경고 횟수를 기록해두었다. 감독관인 요셉은 직원들에게 벌을 주기 싫어했지만 시마무라는 그것이 조선인의 약한 기질을 보여주는 또 다른 증거라고 생각했다. 시마무라는 모든 아시아 국가를 일본인의 효율성과 치밀함, 높은 조직 수준으로 다스린다면 아시아 전체가 번영하고 발전해서 저 무도한 서구를 물리칠 수 있다고 믿었다. 게다가 다른 대부분의 친구들과는 달리 외국인 노동자를 고용하는 자신이 아무 마음씨 좋고 공정한 사람이라고 생각했다. 친구들이 외국인 노동자들은 흐리멍덩하게 일을 한다고 지적하면 시마무라는 일본인들이 그들에게 무능과 태만을 혐오하라고 가르치지 않으면 그들이 뭘 배우겠냐고 반박했다. 뿐만 아니라 후세를 위해서 규범을 지켜야 한다고 생각했다.

 노아가 딱 한 번 공장에 들어온 적이 있었는데 시마무라는 그것을 탐탁지 않아 했다. 한 일 년 전에 경희가 열병으로 시장에서 기절을 하자 노아가 요셉을 데리러 왔었다. 시마무라는 마지못해서 요셉에게 아내를 돌봐주라고 했지만, 다음 날 아침 다시는 그런 일이 있으면 안 된다고 요셉에게 말했다. 기계로 돌아가는 공장 두 개를 유능한 정비공 없이 어떻게 돌릴 수 있겠냐는 것이 그 이유였다. 요셉의 아내가 또 아프거나 하면 그때는 동네 사람이나 다른 가족에게 도움을 청해야 했다. 요셉은 근무 시간에 공장을 떠날 수 없었다. 비스킷 생산은 전쟁 명령이었고, 전쟁 명령은 즉각 수행해야 했다. 남자들이 목숨을 바쳐 나라를 위해 싸우고 있으니 모든 가족이 희생을 감수해야 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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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권.

p326

 "그래, 멍청이들은 계속 널 건드리고 네 아버지가 파친코 주인이라는 걸 알아차릴 거야. 사람들이 어떻게 그걸 알겠어?"

 "전 말한 적 없어요."

 "모두 다 알고 있어, 솔로몬. 일본에서는 부자 조선인, 아니면 가난한 조선인이야. 네가 부자 조선인이라면 파친코와 관련이 있는 거지."

 "아버지는 훌륭한 분이세요. 믿을 수 없을 정도로 정직하고요."

 "그래, 분명 그런 분일거야." 가즈는 여전히 가슴 위로 팔짱을 끼고서 솔로몬을 똑바로 쳐다보았다.

 솔로몬이 주저하다가 결국 이야기했다. "아버지는 폭력배가 아니에요. 나쁜 짓을 하지 않아요. 평범한 사업가죠. 세금을 모두 내고 모든 일을 규칙대로 처리해요. 그런 사업을 불법적으로 하는 사람들도 있지만 아버지는 한 치도 틀림없이 정확하게 일을 처리하고 도덕적인 분이에요. 파친코를 세 개 운영하고 있지만 그건...."

 가즈가 안심하고 말하라는 듯이 고개를 끄덕였다.

 "아버지는 자기 것이 아닌 것은 아무것도 받지 않아요. 돈에도 크게 관심이 없어요. 많은 돈을 기부하고...."

 애쓰코는 모자수가 직원들 몇 명을 위해서 양로원 비용을 지불해줬다고 말했다.

 "솔리, 솔리. 그러지마. 변명할 필요 없어. 조선인들에게는 일반적인 일을 할 수 있는 기회가 많지 않아. 너희 아버지는 다른 선택의 여지가 없어서 파친코를 선택한 게 분명해. 아마 훌륭한 사업가겠지. 네 포커 기술이 무에서 나왔다고 생각해? 네 아버지는 후지나 소니에서 일할 수 있었을지도 몰라. 하지만 그런 회사에서는 조선인을 고용하지 않잖아. 알지? 어이, 컬럼비아 대학생 청년, 사실 너도 고용해줄지도 의심스러워. 일본의 많은 곳에서 아직도 조선인들을 교사와 경찰, 간호사로 고용하지 않아. 넌 돈을 많이 버는데도 도쿄에서 방을 빌릴 수도 없잖아. 빌어먹을 1989년! 뭐, 네가 그 모든 것을 공손하게 받아들일 수도 있겠지만 그건 잘못된 거야. 난 일본인이지만 멍청하지 않아. 미국과 유럽에서 오랫동안 살았어. 일본인들이 이 땅에서 태어난 조선인들과 중국인들에게 하는 것은 미친 짓이야. 완전히 제정신이 아니야. 너희들은 혁명을 일으켜야 해. 그런데 그다지 항의를 하지 않잖아. 너와 네 아버지는 이 나라에서 태어났어. 그렇지?"

 솔로몬은 가즈가 왜 저렇게 열을 올리는지 모르겠다고 생각하면서도 고개를 끄덕였다.

 "네 아버지가 청부 살인자라 해도 난 신경 안 써. 네 아버지를 고발하지 않을 거야."

 "하지만 청부 살인자가 아닌데요."

 "어이, 애송이. 그거야 당연히 아니지." 가즈가 미소 지으며 말했다. "여자친구한테 가봐. 여자친구가 매력적이고 똑똑하다며, 그건 잘된 일이야. 결국에는 머리가 조흔 게 생각보다 훨씬 더 중요하거든." 가즈가 웃으며 말했다.

 가즈는 택시를 불러서 솔로몬에게 먼저 타고 가라고 했다. 다들 가즈가 일반적인 상사 같지 않다고 했는데 그 말이 진짜라고 솔로몬은 생각했다.

 

p340

 "아버지도 가게를 파는 게 어때요? 은퇴하는 거죠. 아버지도 이제 그럴 때가 되지 않았어요? 파친코는 일이 너무 많잖아요."

 "뭐라고? 사업을 그만두라고? 파친코 사업으로 식탁에 음식을 올리고 널 학교에 보냈어. 난 은퇴하기에는 아직 젊어!"

 솔로몬이 어깨를 으쓱했다.

 "게다가 내 가게를 팔면 어떻게 되겠니? 직원들이 해고될지도 몰라. 그럼 나이 든 직원들이 어디로 가겠니? 우리는 기계를 만드는 사람들에게 일자리를 주고 있어. 일본에서 파친코는 자동차 제조업보다 큰 사업이야."

p360

 피비가 전화를 받지 않아서 솔로몬은 하나가 있는 병원으로 갔다. 하나는 깨어 있었다. 라디오에서 팝 음악이 흘러나오고 있었다. 방은 여전히 어두웠지만 댄스음악 덕분에 나이트클럽처럼 생기가 돌아싸.

 "벌써 돌아왔어? 진짜 내가 그리웠던 모양이네. 솔로몬."

 솔로몬은 하나에게 모든 이야기를 다 했고, 하나는 끼어들지 않고 가만히 들어주었다.

 "넌 아버지 사업을 물려받아야 해."

 "파친코를?"

 "그래, 파친코. 안 될 게 뭐 있어? 파친코에 대해서 나쁜 소리를 해대는 멍청이들은 부러워서 그러는 거야. 네 아버지는 정직한 사람이야. 사기를 쳤다면 더 큰 부자가 될 수 있었겠지. 하지만 그렇게 하지 않았어도 부자가 됐잖아. 고로도 좋은 사람이야. 야쿠자일지도 모르지만 그게 무슨 상관이야? 난 상관 안 해. 고로가 야쿠자가 아니더라도 야쿠자에 대해서 잘 알 거야. 이 세상은 더러워, 솔로몬. 깨끗한 사람은 아무도 없어. 살아가는 건 더러워지는 거야. 좋은 가문 출신 IBJ(일본산업은행, BOJ(일본은행)에서 일하는 근사한 사람들을 많이 만나봤어. 그 인간들은 침대에서 구역질이 나는 짓을 하는 걸 좋아해. 많은 사람들이 사업을 하면서 나쁜 짓을 하지만 잡히질 않지. 내가 만났던 대부분의 인간들은 기회가 있을 때마다 남의 것을 훔쳤어. 그 인간들은 너무 겁이 많아서 진짜 야망을 품지도 못해. 잘 들어, 솔로몬. 여기서는 아무것도 변하지 않을 거야. 알겠어?"

 "그게 무슨 말이에요?"

"아이고 이 멍청아." 하나가 웃으며 말했다. "그래도 넌 나의 멍청이지."

 하나가 놀리자 솔로몬은 우울해졌다. 솔로몬은 예전에 이토록 지독한 외로움을 느낀 적이 있었는지 기억나지 않았다.

 "일본은 절대 변하지 않아. 외국인을 절대 받아들이지 않을 거야. 내 사랑, 넌 언제나 외국인으로 살아야 할 거라고. 저래 일본인이 되지 못해. 알겠어? 자이니치는 여행을 떠날 수 없는 거 알지? 하지만 너만 그런 게 아냐. 일본은 우리 엄마 같은 사람들도 다시 받아주지 않아. 나 같은 사람들을 절대 받아들이지 않지. 우리는 일본인인데도 말이야! 난 병에 걸렸어. 오래된 무역회사를 운영하는 어떤 일본인 남자한테서 옮은 병이야. 그 남자는 죽었어. 하지만 아무도 신경 쓰지 않지. 여기 의사들도 내가 떠나버리기를 바라고 있어. 잘 들어, 솔로몬, 넌 여기 머물러야 해. 미국으로 돌아가서는 안돼. 네 아버지 사업을 물려받아야 해. 부자가 되면 무엇이든 원하는 걸 할 수 있어. 하지만 아름다운 솔로몬, 저들은 우리가 괜찮은 사람이라는 생각을 절대 하지 않아. 내 말 무슨 말인지 알겠어?" 하나가 솔로몬을 노려보았다. "내가 말한 대로 해."

 

개인적으론 그리 재밋게 본 작품은 아니다. 추리소설 장르긴 하지만 무릎을 탁 치게 만드는 플롯의 기교라든가 스토리의 기발함같은 맛은 느끼기 어렵다. 작품 자체는 평범한데 무슨 대상 수상작이라고 해서 보게 된 바가 크다.

이번에 아야세 하루카 주연으로 드라마화가 되었는데 드라마화 하기에는 좋을 수도 있다고 보인다.

소설은 평범하지만 작가의 이력은 그리 평범하지 않다.

작가인 신카와 호타테(新川帆立)는 1991년생으로 도쿄대 법학부를 나온후 24살에 사법고시에 합격해서 변호사가 되었다. 고등학교 시절 나쓰메 소세키의 <나는 고양이로소이다>에 감명을 받아 작가를 꿈꿨다고 한다. 

이제 32살밖에 안됐지만 신카와 작가의 약력을 보면 나이에 비해 꽤 파란만장(?)한 생애를 보냈다.

고등학교 시절에 바둑부 활동을 했으며 전국대회에 출전한 경력이 있고, 마작에도 흥미를 가졌고 이후 성인이 된 후에 프로마작선수 시험에 합격해서 1년간 프로마작 선수로 활동한 바가 있다.

고등학교 시절 작가를 꿈꾸면서 작가가 되기 위해서 오랜 시간이 필요하다는 것을 염두에 두고 전문직을 갖는 것을 목표로 했다고 한다. 그래서 바둑과 마작에 관심을 가졌던 것 같고 마작에는 소질이 있어서 프로마작선수로도 활동했던 것 같다.

도쿄대학교 의학부에 전기에 지원했으나 떨어지고, 후기에 법학부에 합격한다. 학부와 대학원을 졸업하고 24살에 사법시험에 합격하고 사법연수원을 들어가는데, 이 사법연수 기간에 프로마작 선수로 합격해서 1년간 프로마작 선수로도 활동한다.

2017년에 변호사가 되서 법률사무소에서 들어간다. 법률사무소에서 월 150시간이 넘는 잔업(1주일에 6일 근무라고 쳐도 하루에 6시간 잔업이니까 하루 평균 14시간 근무를 한다는 얘기니까 아무리 젊은나이라고 해도 장난이 아님)을 하던 중에 쓰러지게 된다. 이를 계기로 법률사무소를 관두고 요양을 겸하면서 본격적으로 작가수업을 시작한다.

어쨋든 밥은 먹고 살아야 하니 기업의 법무팀에 취직해서 샐러리맨으로 살아가면서 작가의 꿈을 키워나가다가 2020년 '이 미스테리가 대단해'라는 출판사 주최 미스테리 소설대회에 <전남친의 유언장>을 투고해서 대상을 수상한다.

2021년 <전남친의 유언장>이 출간되서 베스트셀러에 오르고 이를 계기고 회사를 관두고 전업작가로서의 삶을 살고 있다. 현재 국내에는 <전남친의 유언장>만 번역,출간되어있지만, 일본 현지에서는 이 작품의 후속작으로 <파산상속 그녀(倒産続きの彼女)>, <켄모치 레이코의 하룻밤 추리(剣持麗子のワンナイト推理>를 발표했으며, <켄모치 레이코의 하룻밤의 추리>의 경우는 현재 일본 추리소설 베스트셀러에 올라가 있다.

작가 본인이 동경대 법대 출신에 사법고시를 패스한 변호사 출신이라는 이력 자체가 화제성이 어느 정도 있고, 작품 자체도 꽤 재밋기 때문에 이를 일본 출판계에서 띄워주는 마케팅이 성공한 케이스라고 본다.

결혼을 했으며 남편도 같은 동경대 법학부 출신의 변호사다. 작가의 이름인 신카와 호타테는 필명인데 본명은 공개하지 않고 있다.

킬링타임용으로 부담없이 읽을 만한 소설이다. 

 

무라카미의 장편소설 중 유일하게 보다 말았던 작품인데, 도서관에서 하드커버의 양장본을 보고선

이번 기회에 읽어봐야겠다라는 생각으로 빌려서 읽기 시작했다.

읽기 시작하고 얼마 안돼서 왜 여태 이 작품만 읽어보지 않았을까 하는 걸 깨달을 수 있었다.

재미가 없었다. 2주간에 걸쳐서 겨우겨우 꾸역꾸역 읽어나가고 말았다.

결말은 마음에 들지 않는다. 소설 전체적으로 두근두근함이라든가 힘이 잘 느껴지지 않는다.

 

하루키의 작품은 확실히 상실의 시대 이전과 이후로 나뉘는 듯 하다.

 

 난 청소년 시절에 독서라는 걸 거의 하지 않았지만, 중학교 시절에 가끔 머리를 식힐 때 헤세의 작품을 읽었던 기억이 있다. 수레바퀴 밑에서를 떠올리면 상큼한 사과쥬스의 향이 여전히 느껴지고,  데미안은 웬지 모르게 수척하고 날카로운 하얀 얼굴이 떠오른다. 헤세라는 작가에 대한 인상은 조금은 나르시스적이며 나약한 지식인이라는 이미지를 갖고 있었는데, 이 작품에선 전혀 다른 느낌을 준다.

 

 기존에 읽었던 작품들이 헤세의 전성기와 그 이후의 작품이었다는 점에서, 나는 헤세의 중후반기에 대한 인상만을 가졌던 것 같다.

 이 작품은 낭만과 아름다움이 가득하다. 고색창연하지만 아직 전쟁(1차 대전)의 위협이 가시화되기 이전, 유럽에 평화가 공기와 같이 감돌고 이러한 여유에 의해 인간과 사랑에 대한 탐구에만 젊음의 고민이 집중되던 시절의 향기를 맡을 수 있다.

 카멘친트의 유소년기부터 중장년기까지의 30~40년 정도를 담아낸 듯 보이지만, 이 소설은 헤세가 26살에 쓴 소설이기에 그 내부에 흐르는 정서는 격렬하면서도 따뜻하다.

 아름다운 작품이다.

 

 일단은 소설이라고는 하지만, 에세이와 소설이 혼재해있다.

어떤 에피는 완전히 소설이지만, 어떤 에피는 에세이로 시작해서 거의 에세이로 끝날뻔 하다가 한 패러그래프 정도가 소설로서의 체면치례를 하고 있다.

 

전반부 작품들은 모호하지 않고 꽤 명확한 작가의 생각이 드러나 있다. 친절한 느낌마저 든다.

 

뒤의 3개의 작품(사육제, 시나가와 원숭이의 고백, 일인칭 단수)은 조금은 모호하다.

 

지금까지 봐왔던 하루키의 여러 작품들에서 어디선가 삐져나온 단편들을 모은 듯, 이거 어디선가 봤을듯한 느낌인데 하는 소품들로 구성되어 있다.

예의, 음악이 몇 개 등장하는데 기억에 남는 것은 '사육제'편에 등장한 슈만의 사육제이다. 잠시 유툽으로 들어봤는데 그리 인상적이진 않다.

헤드폰으로 조용히 제대로 함 들어보면 다를지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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p24

 그럼에도 그들은 증인석에 설 준비가 되어 있다. 정직하고 공정한 증인으로서. 그러나 그렇게 인내심 강한 말들을 갖춰서, 혹은 찾아내서 훗날에 남기기 위해 사람은 때로 스스로의 몸을, 스스로의 마음을 조건 없이 내놓아야 한다. 그렇다, 우리의 목을, 겨울 달빛이 내리비치는 차가운 돌베개에 올려놓아야 하는 것이다.

 

p169

 "우린 누구나 많건 적건 가면을 쓰고 살아가. 가면을 전혀 쓰지 않고 이 치열한 세상을 살아가기란 도저히 불가능하니까. 악령의 가면 밑에는 천사의 민낯이 있고, 천사의 가면 밑에는 악령의 민낯이 있어. 어느 한쪽만 있을 수는 없어. 그게 우리야. 그게 카니발이고. 그리고 슈만은 사람들의 그런 여러 얼굴을 동시에 볼 줄 알았어 - 가면과 민낯 양쪽을. 왜냐하면 스스로 영혼을 깊이 분열시킨 인간이었으니까. 가면과 민낯의 숨막히는 틈새에서 살던 사람이니까."

 

 그녀는 사실은 '추한 가면과 아름다운 민낯 - 아름다운 가면과 추한 민낯'이라고 말하고 싶었는지도 모른다. 나는 그때 그렇게 생각했다. 그녀는 필시 자신의 무언가에 대해 이야기하고 있었던 것이다.

 

 "가면을 쓰고 있는 사이 얼굴에 들러붙어서 뗄 수 없어진 사람도 있을 수 있겠네." 내가 말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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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 소설의 네번째 작품인 위드 더 비틀즈(With the Beatles)에는 아쿠타가와 류노스케의 단편 '톱니바퀴'의 일부 구절이 나온다. 그래서 그 작품을 읽어봤는데 의식의 흐름대로 쓴 작품같은 인상이다. 이 작품을 쓴 후 얼마 안있다가 아쿠타카와는 자살을 했다는데 작품 자체에 상당히 쫓기고 있다는 인상이 강하게 풍긴다.

그 소설에 이런 구절이 인상적이었다.

 

 '수릉여자(壽陵如子)라는 말을 떠올렸다. 그것은 조나라의 수도 한단(邯鄲)에서 유행하는 걸음걸이를 배우려다가 자신의 걸음걸이마저 잊어버려 엉금엉금 기어서 귀향했다는 <한비자>속의 청년 수릉의 고사 '한단지보(鄲之步)'와 관련된 말이다.

 

 

 소설의 기본 구성은 중년 남성의 위기?를 하루키식으로 변주했다고나 할까?

 개인적으로 파악하는 의미는, 국경의 남쪽은 일종의 파라다이스 혹은 오아시스를 의미하며, 태양의 서쪽은 사막을 의미한다.

 이 소설에서는 사실 희망적인 부분은 거의 없어보이고, 아주 건조하다. 그것은 그것대로 하루키의 매력이기도 하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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p40

 이곳은 이미 새로운 세계이고, 일찍이 존재했던 세계로 통하는 배후의 문은 벌써 닫혀버렸다. 나는 이 새로운 나를 둘러싼 세계 속에서, 어떻게든 나를 확립해 나가지 않으면 안 되었다.

 

p114

 우리는 이른바 운동권 세대로서, 60년대 후반에서 70년대 전반에 거친 치열한 학원투쟁의 시대를 살아온 세대였다. 좋든 싫든 우리는 그런 시대를 살았다. 아주 간략하게 말하자면 그건 전후 한 시기에 존재했던 이상주의를 배경으로 탐욕스럽게 살쪄가는 고도의, 보다 복잡하고 보다 세련된 자본주의의 논리에 맞서 주장했던 노(No)였다. 적어도 나는 그렇게 인식했다. 그것은 전환기 사회의 격렬한 발열 같은 것이었다. 하지만 지금 내가 머물고 있는 세계는 이미, 더욱 고도의 자본주의 논리에 의하여 성립된 세계였다. 결국 나는 나도 모르는 사이에 그 세계에 꿀꺽 집어삼켜지고 만 것이다.

 

p226

 "하지메, 사진으로는 아무것도 알 수 없어. 그건 단지 그림자 같은 거야. 진짜 나는 다른 곳에 있어. 그런 건 사진에는 나오지 않아."

 

p243

 타인을 위해서 올기에는 나는 너무나도 나 자신밖에 모르는 인간이었고, 나 자신을 위해 울기에는 너무 나이 들어 있었다.

 

 

 

 장르는 소설의 형식을 취하지만 내용은 논픽션이다.

읽는 느낌은 무라카미 하루키의 도쿄기담집과 매우 유사하다. 그만큼 재밋기도 하다.

이 소설집은 선생께서 여기저기에 부탁 등을 받고 써주었던 당시의 소회, 에피소드를 모은 것으로, 책 말머리에도 쓰여 있지만 본인도 이 글을 내가 썼던건가 갸우뚱 거릴 정도로 본인에겐 잊혀진 글이라고 한다. 

무라카미도 장편을 쓰고 난 후의 휴식기에 정신적 휴식을 취하는 시기에 단편을 쓰거나 번역일을 하는 등의 가벼운 작업을 한다고 하는 것과도 일맥상통한다고 하겠다.

그래서 글들의 내용은 에피소드 지향적으로 논픽션이라는 점을 빼면 소설 그 자체의 성격을 가진다.

가볍게 읽을 만한 내용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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p76

 두 번째로 품은 닭이 "낙서落書"였다. 낙서는 봉혜의 7대손인데 태어나면서부터 아주 고생을 했다. 봉혜의 씨가 말라, 봉혜의 적손들이 사는 지눌의 집에서 입양을 해왔는데, 기존의 패거리들에게 엄청 "왕따"를 당했다. 어려서부터 쪼임을 당했고, 모이를 먹을 때도 모이통에 대등하게 머리를 디밀지 못했다. 딴 놈들이 먹으면서 흐트러놓은 모이가 주변의 땅바닥에 떨어지면 빙글빙글 돌면서 재빨리 주워 먹곤 했다. 성경에도 시로페니키아의 여인이 상에서 떨어진 빵 부스러기라도 먹게 해달라고 간청하는 장면이 있다(막7:28). 그 광경은 정말 가슴이 아팠다. 일본의 중 · 고등학교 여학생들 사이에서 유행하는 극심한 왕따현상, 결국 우리나라까지 오염되고 말았지만, 그 왕따현상은 일본사회의 독특한 문화에서 유래하는 기풍이 아니라, 동물세계에서 아주 흔하게 목격되는 원초적 생리라는 것을 깨닫게 된다.

 동물세계의 원초성이 인간세의 도덕성보다 더 순박하고 아름다운 측면도 있지만, 인간세의 발전은 바로 약자를 도태시키는 것이 아니라 보호한다고 하는 협동의 국면으로부터 그 새로운 전기를 마련한 것이다. 그 전기는 이미 수렵 · 채집경제사회로부터 시작된 것이다. 수렵은 공동체 성원의 협력(cooperation)이 없이는 불가능하다. 수렵으로부터 문명이 시작되었다 해도 과언은 아니다. 그러니까 타인에 대한 복지나 관회關懷가 없으면 그것은 문명이라 말할 수 없다. 닭사회의 수준으로 전락하는 것이다. 문명이 극도로 발전한 자유민주주의 사회에서 오히려 협력을 거부하는 문명 이전의 상태로 퇴락하는 현상이 발생하는 것은 인류사회의 한 아이러니라고 말할 수 있다. 신자유주의는 문명퇴폐의 한 극상極相이다.

 

p147

 그러나 그 험난한 등반여정의 중간 길목에 있는 "깔딱고개"를 코앞에 쳐다보고 있는 느낌이다. 깔딱고개만 넘으면 그래도 나머지 등반이 수월하게 이루어질 수 있겠다는 생각이 든다. 그런데 깔딱고개는 너무도 숨이 차서 못 넘을 수도 있다. 그러면 결국 도로나무아미타불이 되고 마는 것이다. 깔딱고개란 본시 숨이 차도 무리해서라도 내친 걸음으로 힘차게 행보해야만 넘을 수 있는 것이다.

 

p198

 씨렉은 씨 섹션 c. section의 줄임말이다. 그런데 씨 쎅션의 씨(c)는 "씨세리안cesarian"이라는 말의 줄임말이다. 그런데 이것은 로마의 황제 "씨이저"라는 말의 형용사형이다. 「마태복음」 22장에 보면 "가이사의 것은 가이사에게"라는, 정치와 종교의 분리를 암시하는 아주 애매한 예수의 말이 나오고 있다. 여기 "가이사"는 영어 "씨이저"의 로마 원발음에 가까운표기이다. 이 "가이사"를 중국인들은 "개살凱撒"이라고 표기했다. 이것을 북경만다린으로 읽으면 "카이사"가 된다. 그래서 우리 아버지 때만 해도 "씨쎅"이라는 말은 없었고 "개왕절개"라는 말만 있었다. 개왕凱王은 곧 씨이저를 말하는 것이다. 그리고 때때로 "제왕절개"라는 말도 썼다. 개왕凱王은 로마의 황제였으므로 "제왕帝王"이라고 표현했던 것이다. 그레코-로망 세계를 나이브한 공화체제에서 전 세계를 지배하는 제국체제로 전환시킨 가이우스 줄리우스 씨이저Gaius Julius Ceaser라는 인물이 과연 씨쎅으로 태어났는가? 씨쎅의 발상은 얼마든지 가능한 것이지만, 19세기까지만 해도 씨쎅은 과도한 출혈과 패혈증으로 반드시 산모의 죽음을 초래하는 것이었다. 줄리우스 씨이저는 기원전 100년 7월 12일에 태어났다. 7월을 "줄라이July"라고 부르는 것은 씨이저의 탄생을 기념하여 그의 이름을 본따서 명명한 달력 때문인 것이다. 그런데 줄리우스 씨이저는 아버지는 조실했지만 훌륭한 어머니 밑에서 성장하였다. 다시 말해서 씨이저의 산모는 죽지 않았던 것이다. 따라서 개왕절개의 신화는 엉터리인 것이다. 의학사학자들은 로마의 고래로부터 내려오는 관습에 애기 낳다가 죽은 여자는 반드시 복부를 칼로 갈러보고 매장하는 전통이 있었는데 이것이 후대에 로마황제 씨이저의 칙령으로 되었기 때문에 그래서 "개왕절개"라는 말이 생겨나게 되었다고 추론하기도 한다.

 

 

p371

 나를 떠받쳐 주었던 물리적 관계가 전혀 나의 존재를 보장해주는 실상이 아닌 허상이었다는 자각에 함몰한다. 그 자각의 결론은 심각한 고독감이다. 그런데 고독이란 인간의 관계없이는 불치의 병이다.

 

 

통통 튀는 트렌디 드라마처럼 시작했다가, 한자와 나오키 같은 비즈니스 심리 스릴러로 끝난다.

이 맥락의 변화가 너무 생경해서 같은 소설인가 싶을 정도다.

그래도 전반적으로 꽤 재밋었다.

워라벨이라는 주제는 그저 구색일 따름이고, 회사 생활에서 일어나는 관계와 심리에 촛점이 맞춰져 있고 그것이 꽤 사실적이다. 한국적 사고로는 이해하기 쉽지 않은 부분도 있지만, 한국이나 일본이나 회사 생활이라는 것은 비슷한 면이 꽤 많구나라는 것도 알 수 있다.

 

 

 하루키의 초기 3연작의 마지막 작품.

바람의 노래를 들어라, 1973년의 핀볼과 이어지는 작품이다. 연작이긴 하지만 개별 작품마다 완결성을 가지고 있기도 하다.

 

이번이 재독인데 작품의 길이에 비해서 무언가 어정쩡하게 끝나는 느낌이 있다. 내가 읽은 작품은 개정판 이전의 단권으로 나온 책(1995년 출판)인데 2009년 개정판은 무엇이 바뀐 게 있을지 다시 읽어봐야 할 것 같다.

하루키 자신도 양을 쫓는 모험이 나중에 좀 미흡한 느낌이었다라는 이야기를 한 적이 있다고 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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p97

 "어쨌든 그는 그 돈으로 정당과 광고를 장악했고, 그 구조는 지금까지도 이어지고 있지. 그가 표면에 나서지 않는 이유는 나설 필요가 없기 때문이야. 광고업계와 집권 정당의 중추를 장악하고 있으면, 그야말로 불가능한 일이 없거든. 광고를 장악한다는 게 어떤 것인지 자네는 알겠나?"

 "아니."

 "광고를 장악한다는 건  출판과 방송의 대부분을 장악한 게 되는 거야. 광고가 없는 곳에는 출판과 방송이 존재할 수 없지. 물이 없는 수족관과 같다고나 할까. 자네가 보게 되는 정보의 95퍼센트까지가 이미 돈으로 매수되어서 선별된 것이라구."

 "아직 잘 모르겠어"라고 나는 말했다.

 "그 인물이 정보 산업을 장악하고 있다는 데까지는 이해하겠는데 어덯게 그가 생명 보험 회사의 PR지에까지 권력을 행사할 수 있는 거지? 그건 대형 대리점을 통하지 않고 직접 맺은 계약이잖아."

 내 친구는 헛기침을 하고 나서 완전히 식어 버린 보리차를 마셨다.

 "주식이야. 놈의 자금원은 주식이거든. 주식 조작, 매점매석, 탈취, 뭐 그런 거지. 그를 위한 정보를 그의 정보 기관이 수집하고, 그것을 그가 취사 선택하는 거야. 그중 매스컴에 흘러 나오는 것은 극히 일부고, 나머지는 선생꼐서 자신을 위해서 쥐고 있는 거지. 물론 직접적으로는 아니지만 협박 비슷한 짓도 하지. 협박이 통하지 않을 경우에 그 정보는 매치 펌프용으로 정치가에게 흘리는 거야."

 "어느 회사든 약점 한두 가지쯤은 있다 이거군."

 "어떤 회사든 주주 총회에서 폭탄 선언 같은 걸 듣는 건 원치 않거든. 그러니 대개는 하라는 대로 하게 돼 있지. 다시 말해서 선생께서는 정치가와 정보 산업과 주식이라는 삼위 일체 위에 군림하고 있는 셈이지. 이젠 이해하겠지만 PR지 하나쯤 뭉개버린다든지 우리를 실업자로 만드는 일쯤은 그에겐 삶은 달걀 껍질 까기보다도 간단한 일이라구."

 

p101

 우리는 우연의 대지를 정처 없이 방황할 수도 있다. 마치 어떤 식물의 날개 달린 종자가 변덕스런 봄바람에 날려오듯이.

 그러나 그와 동시에 우연성 같은 것은 애당초 존재하지 않는다고도 할 수 있다. 이미 일어나 버린 일은 명확하게 일어나 버린 일이며, 아직 일어나지 않은 일은 아직 명확하게 일어나 버린 일이며, 아직 일어나지 않은 일은 아직 명확하게 일어나지 않은 일이다. 다시 말해서 우리는 배후의 '모든 것'과 눈앞의 '제로' 사이에 끼인 순간적인 존재고, 거기에는 우연도 없고 가능성도 없다는 뜻이다.

 그러나 실제로 그 두 가지 견해 사이에는 별다른 차이가 없다. 그것은(대개의 대립되는 견해가 그렇듯이) 두 가지의 서로 다른 이름으로 불리우는 똑같은 요리 같은 것이다.

 

p157

 나는 두 잔째 위스키를 제일 좋아한다. 첫 잔째의 위스키로 한숨 돌린 기분이 되고, 두 잔째의 위스키로 머리가 정상이 된다. 석 잔째부터는 맛 따위는 없다. 그저 위(胃) 속에 들어부을 뿐이다.

 

p165

 그러나 정직하게 이야기하는 것과 진실을 이야기하는 것은 별개의 문제네. 정직과 진실의 관계는 선두(船頭)와 선미(船尾)의 관계와 비슷하지. 먼저 정직함이 나타나고, 마지막에 진실이 나타나는 거야. 그 시간적인 차이는 배의 규모에 정비례하고, 거대한 사물의 진실은 드러나기 어려운 법일세. 우리가 생애를 마친 다음에야 겨우 나타나는 경우도 있지. 그러니까 만약에 내가 당신에게 진실을 드러내지 않아다고 하더라도, 그것은 내 책임도 당신의 책임도 아니네."

 

p184

 '의지 부분'은 아무도 욕심을 내지 않아. 아무도 이해할 수 없기 때문이지. 이것이 내가 말하고 있는 분열의 의미야. 의지는 분열될 수 없네. 100퍼센트 계승되거나 100퍼센트 소멸되는 것들 중 하날세.

 

p259

 "맞아요. 나는 지금 당신과 이렇게 하고 있는 것만으로도 충분히 만족하고 있고, 만족스러울 때에는 메시지는 오지 않죠. 그러니까 우리는 스스로 양을 찾을 수밖에 없어요."

 

p284

 "근대 일본의 본질을 이루는 어리석음은, 우리가 아시아의 다른 민족과의 교류에서 무엇 하나 제대로 배우지 않았다는 거라네. 양에 대해서도 역시 마찬가지지. 일본에서의 면양 사육이 실패한 이유는 그것이 단지 양모 · 식육의 자급 자족이라는 관점에서만 파악되었기 때문이고, 생활에서의 사상이라는 것이 결여되어 있었던 거네. 시간을 따로 떼어 결론만을 효율적으로 훔쳐내려고 한 거야. 모든 일이 그래. 다시 말해서 발이 땅에 닿아 있지 않은 거지. 전쟁에 지는 것도 무리는 아니지."

 

 

 

 

 

 

 

 

21회 전격문고대상을 받았다고 한다. 

약 2시간 정도내로 다 읽히는 중편정도의 내용으로 아주 직관적이며 재밋고

적당히 교훈적이다.

이 소설은 무엇보다 따뜻함이 흐른다. 그것이 이 글에 흡입력을 더한다.

각박한 세상의 축축함 속에서 무언가 따뜻한 건조기같은 푹신함이 물씬 배어나오는 듯한

포근한 느낌의 소설이다. 

180페이지 정도의 세미장편 정도로 분류된다. 집중하면 3~4시간 정도면 읽을 수 있는 분량이다.


2016년 10월에 출간되었기 때문에 나온지 2년이 되어간다. 간혹 이 책의 소문을 언뜻 들을 기회가 그간 많았으나, 페미니즘이라는 주제어로 이슈가 되는 적이 많고, 주요 포탈의 게시판에서도 이 책의 내용에 대한 논쟁을 댓글들로 읽으면서 흥미를 잃었기에 읽지 않고 지나갔다.

최근 이 책의 내용을 원작으로 드라마화가 결정되고, 그 드라마에 여주인공에 내정된 여배우의 SNS가 집중포화를 당하면서 결국 SNS를 폐쇄하고 말았다. 그 사태를 보면서 도대체 어떤 내용이기에 이리도 남자(난 60년대 말에 태어나 80년대 후반 대학을 나온 전형적 386세대의 남자이다)들에게 꼴페미(꼴통 페미니스트의 약자로서 여성의 사회적 차별을 과장해서 피해자 코스프레를 하는 과도한 여성들의 피해의식에 대한 조롱조의 의미이다) 소리를 들을 정도로 이슈가 되는가에 결국 최근에 읽어보게 되었다.

결론적으로 이 책의 내용을 꼴페미로 규정하는 것은 언어도단이다. 이 소설에 나오는 82년생의 김지영의씨의 삶은 40년대에 태어나서 나의 어머니가 되신 세대들의 삶과 많이 닮아있다.(닮아있다는 것은 같다는 것이 아니다. 그 정도는 다르나 조선시대부터 유구히 내려온 남아선호와 사회적으로 여성이 남성에 비해 차별받는 프레임이 그대로 유지되었다는 것이다. 40년대의 여성과 80년대의 여성의 사회적 지위는 비교조차 불가할 정도로 상승한 것은 확실하지만 우리 사회 기저에 흐르는 남자와 여자에 대한 차별의 프레임은 여전히 유지되고 있다는 의미이다.)

남자로서, 70년대와 80년대에 걸쳐 학교를 다니고, 90년대부터 지금까지 사회생활을 해온 남자인 나의 그간의 지식과 경험으로도 책에서 나오는 김지영씨의 경험과 고민은 대부분 충분히 공감되는 내용이다.

책을 읽다보면, 작가는 최대한 그녀의 삶의 모습을 진솔하지만 감정에 치우치지 않게 묘사하려 노력했다고 느낀다. 또한 여성이 사회적으로 차별 받는 혹은 손해를 받는 주요한 에피소드에서는 객관적인 인용(기사와 같은)의 출처를 밝혀서 최소한의 객관성을 확보하려 노력했다. 소설이라는 장르에서 그런 수고로움을 하는 것을 별로 보지는 못했다. 이런 노력의 이면에는 여성작가로서 이 소설이 그저 하나의 페미니스트 소설로 한계 지워져버리는 것에 대한 최소한의 방어기제로서 작동하지 않았나 한다.

이 소설의 명확한 주제가 사회,관습,가족이라는 울타리에서 보이지 않는 차별(과거에는 그것이 차별이라는 인식조차 없었던)을 구체화시키려 하는 것이기 때문에, 드물게 맥락이 튀면서 "아, 이렇게까지 생각하는 건 좀 심하다."라는 대목이 있긴 하다. 하지만, 그것은 주어진 주제에 대해 사실을 재구성하면서 생기는 어쩔 수 없는 생경함 일 수도 있고, 아니면 남자인 내가 여성의 삶을 속속들이 알지 못하는데서 오는 이해의 모자람일 수도 있다고 생각한다.

이 소설은 여성의 삶과 그 마음을 이해하기 위해 남자들이 알 수 없는 여성들의 내밀하고 복잡한 마음의 일단들을 엿볼 수 있게 한다.

내 개인적으로는 남편과 아내, 혹은 애인 사이에서도, 혹은 아들과 어머니가, 혹은 딸과 어머니가 같이 읽고 서로의 생각을 나눌 수 있는 계기가 될 수 있는 좋은 내용이다.

남자와 여자의 관계는 젠더의 대립이 아니라, 인간대 인간으로서 변화하는 사회의 기본을 이루는 가장 기본적 요소이며, 그 때문에 남녀간의 대립이 점점 심화되어가는 지금, 이 책의 내용이 더욱 소중하지 않나 싶다.


이 책의 마지막 장에서는 작가는 중년 남자 의사를 통해 아직 이 사회의 남성들이 여성의 문제에 대해 충분히 관심을 두려 하지 않는다는 작가의 생각을 전달하고 있다. 마무리로서 약간의 여운과 아쉬움도 남긴 하지만 남성들의 시각을 바라보는 여자의 느낌이 이런거구나 하는 어느 선 같은걸 알 수 있었다.

마지막의 서평에 어느 여성학자의 글이 있는데, 사실 좀 너무 이 책의 내용을 사회적 차별에 대한 젠더 대립으로 몰고 가는 듯 해서 안타까운 면이 있었다. 책의 마지막 서평이 도리어 이 책을 둘러싼 논란을 키우는데 일조하지 않았나 하는 느낌마저 든다.

책의 내용중, 임신을 한 김지영씨에게 지하철에서 여자 대학생이 상처를 주는 부분이 있다. 서평을 쓴 여성학자도 도리어 이 책의 수준과 내용을 서평을 통해 도리어 폄훼하지 않았나 싶다. 이 책에는 젠더의 대립보다는 한 여성으로서 김지영을 이해하기를 바라는 작가의 안타까움만이 짙게 묻어나온다.

좋은 책이다.


 2018년 한경신춘문예 당선작.(처음엔 제목에 끌려서 집었는데, 읽는 중에 표지의 조그만 글자를 보고 알았다.)

 요즘 젊은이들에게 가장 큰 사회적 문제라면 역시 일자리일 것이다.(물론 나이든 사람에게도 중요하지만, 절박함이라는 측면에선 역시 

젊은이들이 더 하지 않을까 생각한다.) 20대 중반의 여주인공(이 소설은 주요 인물이 모두 여자이다. 남자는 그저 겉절이 정도의 비중으로 나온다.)

주희의 일자리, 연애등 가장 일반적이지만 절실한 고민들로 이야기가 시작된다.

젊은 여자들(주요 인물은 주인공을 포함해서 20대 여자 3명, 30대 초반의 여자 1명이 나온다.)의 개인/사회적 고민과 서로에게 위로를 받는

과정이 때로는 발랄하게 때로는 묵직한 우울함으로 그려진다. 


 길지 않은 중편정도(장편이라고는 하는데, 기준이 뭔진 잘모르겠다. 내 기준으로 400페이지는 넘어야 장편이 아닐까 싶은데.)의 분량이다.

작가도 역시 젊기 때문에 그 또래의 통통튀는 가벼움들이 문장에서 드러난다. 그 가벼움속에서도 무게감 있는 사회적 현실을 그려가면서도

젊음의 희망을 잃지 않는 풋풋한 모습을 보여주고 있다.


 도입부는 재밋으며, 말미에서 약간 스텝이 꼬이듯 도입부의 필력이 떨어지는 느낌이지만 그리 신경쓰일 정도는 아니다.

싯다르타는 부처님의 출생시의 이름이다. 


이 책이 뒷부분을 보면 헤세가 이 책을 쓴 이유로 다음과 같은 말을 남겼다.


진리는 가르칠 수 없다는 것. 이 깨달음을 나는 일생에 꼭 한 번 문학적으로 형상화하고자 했다. 그 시도가 바로 싯다르타이다.


이 책은 고타마 싯다르타(Siddhārtha Gautamamm) - 고타마는 성이며, 싯다르타는 이름이다 - 싯다르타는 모든 소원을 다 성취한 사람이라는

뜻이며(당연히 국왕인 그의 아버지가 지어준 것이며, 아들의 이름을 좋은 뜻으로 짓는 것은 당연하다.)


(역사적 싯다르타에 대한 배경 설명) - 소설에는 나오지 않으나 이 배경을 알면 소설을 보는데 도움이 된다.

싯다르타는 28세에 고귀한 신분으로서 약속된 미래의 부귀영화를 버리고, 출가후 7년의 고행을 시작한다. 

이 7년간의 고행이후 육체적 고행만을 통해서는 진정한 깨달음을 얻얼 수 없다는 사실을 깨닫고나서 고행으로 지친 몸을 추스리고, 

40일간 보리수 밑에서 명상을 통해 대각을 한다. 35세에 대각을 얻은 싯다르타는 45년간 인도를 유랑하며 자신이 얻은 깨달음을

주로 이야기를 통해 설법으로 남긴다. 부처가 남긴 이 설법은 당시의 언어인 산스크리트말로 구전된다. 즉 입에서 입으로 전승되었다.

그리고 300년 정도가 지난후 인도에서 스리랑카 지역으로 전승되면서 스리랑카 지역언어인 팔리어로 비로서 필사되어 기록된다.

그래서 부처님의 설법은 최초로는 산스크리어가 아닌 팔리어로 기록되었다.(이건 전문적인 이야기이므로 별로 알 필요는 없지만

알아둬서 나쁠 것도 없다.) 이 팔리어로 남겨진 부처님의 육성 설법 내용이 바로 아함경이다. 이 팔리어 기록은 영국 식민지 시절에

발견되었다(즉, 1900년대 초반에 발견되었다.). 그래서 영국의 학자들이 달라붙어 수십년간 이 아함경을 처음으로 번역해서 세상에

알렸고, 이후 동양에서는 일본의 석학 한분이 이 영어 번역과 팔리어 원본을 참고하여 일본어로 아함경을 번역하였다.

이후 한국에서도 고익진과 같은 학자에 의해 1980년대 이후 이 아함경이 번역되어 소개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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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감상)


헤르만 헤세는 젊은 시절(1911년 34살)에 3개월에 걸쳐 인도차이나 반도여행을 한 적이 있다. 즉, 인도를 직접 방문한 일은 없다.

헤세의 할아버지와 아버지 모두 중국과 인도철학에 조예가 깊었던 것으로 알려져 있기 때문에 그 영향으로 헤세도 불교에 대한 내용을

접했을 것이라 짐작된다.


하지만 이 소설에서는 불교의 교리가 직접적으로 언급되는 것은 없다. 아트만이라는 용어는 나오지만 그것에 대해 불교적 해설이 구체적으로

나오지도 않는다.


그리고 이 소설은 불교에 대해서 몰라도 상관은 없을 것이라 본다.


소설의 주인공인 싯다르타는 어느날 출가를 결심하고 그의 시종이자 절친인 고빈다와 유랑을 시작한다. 소설의 초반에는 고빈다는 그저 싯다르타를 사랑하고 존경하는 친구역할로만 보이지만, 후에 고타마라는 깨달은 사람 즉, 부처를 만나면서부터는 싯다르타, 고타마, 고빈다의 관계는 하나의 인물에 대한

현재와 미래, 그리고 과거를 의미하는 것으로도 볼 수 있다.


소설의 마지막 부분에서 싯다르타는 고행도 헛되고, 인생사의 쾌락과 명성 그리고 부유함 모든 것이 헛되다는 자각을 한 후에 강가에서 뱃사공인 바주데바를 만나서 뱃사공의 일을 하며 단순한 삶을 영위하면서 삶의 터전인 '강'으로부터 지혜를 깨달아나가기 시작한다.

강을 통해 싯다르타는 유유히 흐르는 강물에서 어떤 장소에도 그대로 머물지 않는다는 덧없음, 그리고 끝없는 변화, 그리고 이어지는 물의 흐름을 통해서

과거와 현재 그리고 미래가 통시적으로 연결되어 있다는 깨달음에 도달한다.

이미 미래의 부처였던 고타마는 설법을 통한 인생을 마치고 있고, 과거의 부처인(즉 고뇌하는 인간인) 고빈다는 그런 고타마의 입적을 보기 위해 가던 길에 강가에서 깨달음을 얻은 싯다르타를 다시 재회한다. 고타마 부처를 본 적이 있던 고빈다는 싯다르타를 통해 고타마의 모습을 다시 보고 감격하며 그에게 눈물을 흘리며 절을 한다.

불교의 연기란 통시적 공간에서의 인과론을 의미한다. 윤회나 열반과 같은 개념적 설명보다도 모든 만물이 시간과 공간의 고리속에서 모두 얽혀서 무한의 관계를 맺고 있는 것을 깨닫게 되면 자연스럽게 '아'니 '무아'니 하는 것들을 벗어나 길가에 풀한포기와 구르는 돌 하나에서도 '나'의 의미를 찾을 수 있다는 가르침이 그안에 있다.

헤세가 이 작품을 쓸 때, 1부가 마무리 된 시점에서 2부는 시간을 두고 썼다고 한다. 아마도 그의 불교에 대한 이해의 바탕을 넓히는 시간이 필요했던 것으로 보인다. 이 작품은 하나의 성장소설로서 봐도 무방하다. 하지만 조금 더 그 깊은 내용을 음미하고 싶다면 불교의 기본적이 교리에 대한 이해를 어느 정도 안 이후에 보면 좋을 것 같다.

불교의 기본 교리에 대한 이해는 무슨 딱딱한 책을 보는 것은 더 도움이 안된다.

추천하는 책은 도올이 쓴 달라이라마와 도올의 만남과 그 1권의 해설에 해당하는 도올의 불교강의(27강인가? 된다.)를 들으면 불교의 핵심적 내용은

어느 정도 알 수 있다.

  







다빈치 코드로 세계적인 스릴러 작가의 반열에 오른 댄 브라운의 최신 작품.

책을 잡자마자 순식간에 200페이지 가까이를 단숨에 읽을 수 있을만큼 간결한 문체와 높은 가독력을 가진 작품이다.

도입부에만 거의 120페이지에 달하는 분량을 할애하는데도 불구하고 전혀 지루하지 않다.

마치 영화를 보는 듯하게 생동감 있게 전개되는 감이 있다.(내가 스페인에서 모두 가봤던 배경이라 더욱 그럴지도 모른다.

마드리드의 팔라시오와 빌바오의 구겐하임 등, 아직 후반부를 읽지 못했는데 책표지에도 나오는 바르셀로나는 아쉽게 아직 가보진 못했다.)

전작과 마찬가지로 로버트 랭던과 1명의 미녀가 이야기를 끌어나가는 플롯인데, 한가지 구별되는 점은 이번에는 윈스턴이라는 이름의 AI가 조력자로 등장한다. 아무래도 이 AI가 이 소설의 전개와 결말에 큰 역할을 할 것 같은 느낌이 강력하게 든다.

댄 브라운의 소설이 영화화 된 작품은 다빈치 코드와 천사와 악마 그리고 인페르노의 세 편이 있는데, 오리진도 역시 영화화 될 것으로 예상한다.

그의 작품중 최고는 역시 아직까지는 다빈치 코드이다.

다 읽고 나서의 감상은 이후에 이어 쓸 예정이다.


(감상)

그간 댄 브라운의 미스터리 스릴러는 유명한 도시를 중심으로 이루어졌는데, 이 작품 역시 그렇다.

이 소설의 주요 배경이 되는 공간은 스페인의 마드리드, 바르셀로나, 빌바오, 몬세라트로 관광지로도 이미 이름이 높은 곳이며, 

도시에서 나오는 주요한 건물 역시 지명도가 높은 건물이기 때문에 한번쯤은 가볼 수도 있을 것이고, 가보진 못해도 거기가 어딘지는

알만한 도시들이 나온다. 확실히 영화화하기에도 좋은 작품인데 랭던역의 톰 행크스는 이 작품이 영화화되면 출연에 매우 긍정적인 반응을 보이고 있다고 한다. 아직 영화화는 결정되지 않았다.

영화의 줄거리에 주요 요소는 소설의 제목 그대로 오리진 즉, 기원에 대한 이야기로 구성되어 있다.

그 기원을 풀어나가면서 진화, 과학, 종교에 대한 이야기들이 심도 높게 다루어지고, 특히 A.I가 이 소설에서 극적인 역할을 하게 된다.

최근에 나온 사피엔스, 호모데우스등에서 인류의 미래에 대한 이야기들이 많이 다루어지고 있는데 이 소설도 그런 맥락에서 많은 영향을 받았다고 보인다.


특히 스페인의 주요도시를 샅샅히 돌아보면서 고증을 한 듯, 매우 디테일한 묘사들이 소설의 현실감과 박진감을 높이는 효과를 준다.

다빈치 코드와 같은 임팩트는 기대하기 힘들지만, 소설적인 재미는 좋은 편이며, 영화화를 기대할만큼 비쥬얼한 묘사들이 좋다.

킬링타임용으로 손색이 없는 작품이다.


이 소설에서 나오듯이 현대는 과학의 발전과 더불어 다분히 종교가 쇠퇴하는 느낌이 강하다. 젊은사람들은 점점 교회나 성당을 기피하고, 신을 믿는다는 행위는 점점 고리타분해지고 있다. 아직도 기독교는 낙태, 동성애와 같은 이미 문명사회라면 당연히 받아들이는 쟁점들에 대한 편견을 여전히 유지하고 있다. 언제나 고인것들을 썩기 마련이고 썩은 것은 버려지게 마련이다.

이 소설에서도 딱히 결론을 내리진 못했지만 종교, 즉 으뜸가는 가르침이라는 정의에 걸맞게 시대에 맞춰 종교도 교리와 생각을 발전시켜나가야 한다. 예수님도 안식일에 병든 이들을 고치셨으며, 모든 계명중에 사랑이 으뜸이라 하셨다. 오직 사랑만이 최후까지 올바른 몇 안되는 가치중의 하나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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