장횡거(張橫渠, 횡거 장재張載)의 정몽(正蒙)에 나오는 말.

군자달선달불선(君子達善達不線)

 

세상을 살아나가는 데 있어서 호인(好仁)보다, 오불인(惡不仁) 하는 것이 더 중요하다.

 

(3분 30초경부터)

(박구용) 사실 이번에 (10.29 이태원) 참사를 처리하는 방식. 제가 보기에는 전문적인 칼잡이들 같아요. 정신의 칼잡이들. 칼잡이들이 있다. 그 칼잡이들은 영혼에다가 어떻게 칼을 댈 수 있는지를 아는 사람들이에요. 그래서 거기에 언뜻 보면 전혀 이해 안되는 몇 가지 것들이 있잖아요.

 영혼의 칼잡이라는 것은 무슨 말이냐하면요 정신분석학 혹은 뇌과학을 접목한 그런 기술자들이 있다는 생각이 들고, 또 다른 한쪽의 축이 있다. 그건 정반대의 심령술사같은 그룹이 있다. 그 교집합에 누가 있느냐가 나의 관심거리에요. 그 교집합을 파악해야 현재의 대한민국의 주요한 정치적, 정책적 결정을 하는 과정을 이해할 수 있다고 보거든요. 

 그런데 지금 사람들이 이해하기 어려운 이유가 2가지 교집합을 모르기 때문이에요.

(김어준) 과거에 국정원 심리전단과 같은 역할을 하는, 또 한쪽에서는 일반인의 논리로는 이해가 안가는 무속적 혹은 심령적 해석의 교집합.

(박구용) 그게 언뜻 보면 만나기 어려운 거잖아요. 그런데 그 만나기 어려운 것이 만났고 그 교집합에 있는 퍼스낼리티가 있다. 

(김어준) 그런 생각을 할 수 있는게, 예를 들어 위폐, 영정을 놓지 마라. 이런건 사실 심리전단 기법이에요. 연상되게 하지 마라. 그런데 리본 글씨 없는 쪽으로 달아라. 이건 아무도 이해 못하는 관점이거든요. 더군다나 이게 공문으로 내려왔어요.도대체 이 결정을 한 사람이 누굴까? 왜 이런 결정을 했을까? 수많은 정치인들에게 물어봐도 아무도 몰라. 일반인도 이해할 수가 없잖아요. 

https://www.incheonilbo.com/news/articleView.html?idxno=1167778

 

"글씨 없는 검은 리본 착용해 주세요" 논란 커지자, 결국… - 인천일보

이태원 참사 희생자를 향한 온 국민의 추모로 나라가 슬픔에 잠긴 가운데 전국 공무원을 대상으로 행정당국이 '근조'나 '추모' 글자가 없는 검은 리본을 달도록 공문을 내린 것...

www.incheonilbo.com

 이제부턴 제 가설입니다. 글씨가 보이지 않게 달라고 했거든요. 글씨가 뭐냐? 근조(謹弔)란 말이에요. 이 상황을 국가적인 근조의 상황으로 보지 않는 사람이 있는거에요. 천공이 그랬잖아요. 참사가 기회라고. 그렇게 펼치는 논리의 전개는 이해도 안가고 동의도 안가지만, 국가적으로 슬퍼할 상황이 아니라고 본 거에요. 

 지금은 국가적으로 슬퍼할 상황이 아니지라고 누가 본 것이고 그 누군가가 정부차원의 방침을 지시할 위치에 있는 것이다.

(박구용) 그러니까 그런 (생각을 가진 사람들이) 만나기가 어려운 데 만난다는 것은 불가능에 가까운데. 한 사람이든 세 사람이든 있다. 이너서클이 있다. 그 교집합에 핵심이 있겠죠. 그렇지 않고는 설명이 불가능하다.

 리본을 꺼꾸로 달아라 하는 것은 한쪽에서 지시가 내려왔나보다라고 할 수 있는데, 거기서 더 나아간게 캄보디아에서 병원에 간 사진이에요. 여기까지 갈 수가 없거든요.

https://www.joongang.co.kr/article/25122177#home

 

서울아산병원 의료진, 김건희 만난 캄보디아 소년 직접 데려온다 | 중앙일보

윤석열 대통령의 부인 김건희 여사가 지난달 12일 캄보디아에서 만났던 14세 소년이 이번 주중 입국해 수술을 위한 각종 검사를 받는다. 1일 대통령실과 의료계에 따르면 선천성 심장질환을 앓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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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김어준) 참사 희생자도 있지만 여전히 병원에 있는 사람들도 많아요. 사경을 헤매는 사람들도 있단 말이에요. 근데 거기 가서 병원에 간 거 아니에요.

(박구용) 그렇지. 그러니까 갈 수가 없는거란 말이에요. 그리고 엉뚱한 사람을 안고. 정말로 영원이 아무것도 없이 벌거벗은 거에요. 그렇지 않고는 불가능해요. 결합할 수 없는 2개의 집단이 결합해 있다. 

(김어준) 한쪽에서 나온 메시지는 이런거죠. (이태원 참사 희생자의) 이름을 거명하는 것은 2차 가해다. 이건 법의 관점이죠. 명단을 공개하면 불법이다. 그런데 리본을 뒤집어라. 이런건 그쪽에서 안나오지. 

https://www.sisajournal.com/news/articleView.html?idxno=250489

 

한동훈, 희생자 명단 공개 직격 “유족에 대한 2차 좌표찍기” - 시사저널

한동훈 법무부 장관은 온라인 매체 ‘민들레’와 ‘더탐사’가 이태원 참사 희생자 155명의 명단을 공개한 것에 대해 “사망한 피해자들을 거명한다는 것은 결국 유족에 대한 ‘2차 좌표 찍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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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박구용) 만약에 이름을 부르지 마라, 영정 걸지 마라 이쪽 라인만 있다면 병원은 안갔어요. 거꾸로도 마찬가지고. 이게 같이 결합될 수가 없는거라니까. 그런데 그게 된다고 믿는 사람이 있는 거거든요. 예를 들어서 사이언톨로지(Scientology)라고 알아요?

 독일의 바이에른주 같은 경우 공무원이 되려면 세 군데에 서명을 해야 해. 첫번째 공산당에 가입하지 않겠다. 두번째 사이언톨로지에 가입하지 않겠다. 세번째 문 섹트(통일교)에 가입하지 않겠다.

 결합이 안될 것 같은 것이 결합되는 대표적인 종교집단이 있었어요. 세계적으로 알려진게 사이언톨로지하고 문 섹트 거거든요. 일본이 그래서 지금 망했잖아요. 일본이 지금 이렇게까지 극우로 갈 일이 아니거든요. 아닌데 과학적인거하고 심령적인게 묘하게 결합된 방식이 권력을 장악하면 나라가 위태로워요. 

 아베 정권의 뿌리로 가보면 그게 있어요. 일본의 전통적인 영적인 세계를 추구하는 게 통일교랑 결합되거든요. 근데 통일교가 과학주의를 신봉해요. 그러니까 두 교집합이 나라를 움직이는 건 위험하다. 

 내가 보기엔 우리나라에 현재 영혼의 사무라이들이 있어요. 정치공학적인 단계를 뛰어넘어 있어요. 정치공학적으로 집단의 이익을 위해서 어느 정도는 이해할 수 있어요. 그런데 그걸 넘어서면 사무라이지. 왜? 자기들도 이걸 왜 하는지 모를 정도로 시키는 쪽이 따로 있다는 거거든. 자기들이 이해할 수 없는 칼질을 하고 있다는 것. 그래서 사무라이라고 부르는 거에요. 

 

 

The mystery of life isn't a problem to solve, but a reality to experience.

A proecess that cannot be understood by stopping it.

We must move with the flow of the process.

We must join it.

We must flow with it.

 

삶이란 풀어야 할 문제가 아니고, 부딪혀야 할 현실이다.

과정은 막아서는 것으로는 이해할 수 없다.

과정의 흐름과 함께 움직여야 한다.

함께 해야 하고, 그것과 함께 흘러가야 한다.

 

-Dune, Wisdoms of Fremen -

커뮤 게시판에서 본 글. 우리나라에 조금이라도 관심이 있는 사람이라면 보면 무슨 얘기인지 알 수 있다.

정말 큰일이다.

https://www.clien.net/service/board/park/18452073?type=recommend

 

회사 신입 영업사원 때문에 너무 힘듭니다 : 클리앙

사실 뽑은지 1년 반 정도 돼서 신입사원이라 부르기도 좀 그렇긴한데요, 진짜 이 놈 때문에 너무 힘듭니다 이 놈 뽑을 때 제가 면접관으로 참여하긴 했거든요. 암만 봐도 자격 미달이라 뽑으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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사실 뽑은지 1년 반 정도 돼서 신입사원이라 부르기도 좀 그렇긴한데요, 진짜 이 놈 때문에 너무 힘듭니다

이 놈 뽑을 때 제가 면접관으로 참여하긴 했거든요. 암만 봐도 자격 미달이라 뽑으면 회사 망할것 같아서 절대로 뽑으면 안된다고 했는데 다른 면접관들이 끝까지 밀어부쳐서 진짜 근소한 차이로 합격된 그런 애거든요.

하는 일마다 펑크내고 사고치고 맨날 술 쳐먹는다고 그러는지 출근 근태도 안지키는건 기본입니다.

회사 내부적으로도 할 일이 많아 힘들어 죽겠는데 맨날 영업하러 간다면서 죽어라 싸돌아 댕깁니다. 

이번에 중요한 프로젝트 따 낼거라고 호언장담하면서 엄청나게 싸돌아 다녔거든요. 근데 출장비만 탕진하고 결국은 프로젝트 수주 실패.. 휴... 뭐 그 프로젝트가 우리회사에 꼭 필요한 그런건 아니었는데 그래도 지가 하겠다고 하니 하라고 시켰는데 결과까지 이러니 참담하네요.

더 가관인건 출장 갈 때마다 도대체 뭘 하는지 몰라서 사진을 좀 찍어서 출장 보고를 하라고 했거든요. 근데 찍은 사진들이 죄다 지 마누라 사진입니다.. 아니 일하라고 보내놨더니 뭔 마누라랑 놀러간건지..

우리 회사 근처에 J사 라고 경쟁사가 있는데 이 놈이 우리회사 편은 안들고 맨날 경쟁사 편드는 일만 벌입니다. 진심으로 J사에서 보낸 스파이가 아닐까 싶은데..

한 10년 전쯤에 아빠 빽 믿고 들어왔던 최악의 사원이 있었는데(결국 일을 잘 못해서 중간에 짤랐습니다) 걔를 능가하는 애는 없을거라 생각했는데.. 진짜 훨씬 심한 놈입니다..

짤린 걔 다음에 들어온 사원은 진짜 빠릿빠릿하게 일 잘했거든요. 인수인계 기간 없이도 알아서 착착 잘해서 참 든든했었는데.. 계약기간만 더 길었어도 일 더 시키고 싶었는데 그놈의 계약기간 규칙 때문에 어쩔수 없이 새로 뽑게 됐는데.. 어쩌다 이런 개폐급 쓰레기가 회사에 들어오게 된건지.. 

회사의 미래가 심히 걱정됩니다 ㅠㅠ 이런 놈 진짜 짜르게 할 수 없을까요. 

http://www.mindlenews.com/news/articleView.html?idxno=2199 

 

[유시민 칼럼] 이인규의 ‘글로리’ - 세상을 바꾸는 시민언론 민들레

영어 ‘글로리(glory)’는 맥락에 따라 영예(榮譽), 부귀(富貴), 광휘(光輝) 등 여러 뜻으로 쓴다. 넷플릭스 드라마 에서는 무엇일까? 나는 ‘자랑’ 또는 ‘존엄’으로 해석한다. 돈 많고 키 크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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영어 ‘글로리(glory)’는 맥락에 따라 영예(榮譽), 부귀(富貴), 광휘(光輝) 등 여러 뜻으로 쓴다. 넷플릭스 드라마 <더 글로리>에서는 무엇일까? 나는 ‘자랑’ 또는 ‘존엄’으로 해석한다. 돈 많고 키 크고 잘 생겼고 ‘나이스’한 하도영은 박연진의 자랑이다. 문동은은 모든 가해자가 가졌거나 가지려 한 글로리를 파괴함으로써 존엄을 확인했다. 자신의 글로리를, 박연진은 남한테 내보인 반면 문동은은 혼자 간직했다. 삶의 무게추를 박연진은 타인의 시선에 두었고 문동은은 자신의 내면에 두었다. 그런 점에서 하도영은 문동은과 같은 유형이다. 스스로 생각하기에 ‘나이스’한 행동을 하는 것이 하도영의 글로리다. 그래서 충실하지 않은 아내와 생물학적으로는 남의 딸인 예솔을 비현실적일 정도로 ‘나이스’하게 대한다. 나는 등장인물이 저마다 추구하는 글로리가 무엇인지 생각하면서 그 드라마를 보았다.

무협지 같은 회고록

이인규 씨가 회고록을 냈다. 제목은 ‘나는 대한민국 검사였다’이고, 부제는 ‘누가 노무현을 죽였나’이다. 출판사 조갑제닷컴의 발행인 조갑제 씨는 젊을 때 글 잘 쓰는 기자로 이름을 날렸고 나이 들어 극우 논객으로 변신한 인물이다. 이인규 씨는 책 후기에 조 씨가 원고를 윤문(潤文)했다는 사실을 밝혔다. 어떤 내용을 담은 어떤 문장이 조씨의 작품인지, 알 만한 사람이라면 어렵지 않게 짐작할 수 있을 것이다.

전직 검사의 흔한 회고록은 아니다. 서문부터 부록까지 529쪽 가운데, 노무현 대통령과 무관한 것은 27쪽부터 90쪽까지가 전부다. 부록 <노무현 전 대통령 수사 개요>는 용어와 문장과 내용 모두 검찰 수사기록 요약 보고서라고 할 만하다. 개인의 기억력과 메모에 의지해 쓸 수 있는 수준을 넘어선다. 중수부장 직을 사임할 때 수사기록 사본을 가지고 나오지 않았는지, 혹시 검찰 관계자가 보관하고 있는 수사기록을 제공한 게 아닌지 의심스럽다.
 

고 노무현 전 대통령이 2009년 4월 30일 검찰조사를 받기 위해 김해 봉하마을 사저를 떠나는 모습. 연합뉴스
본문 장르는 ‘무협지’에 가깝다. 민주주의 사회에서 검사의 임무는 법을 위반한 사람을 찾아내고 법정에서 범죄행위를 증거로 입증함으로써 법이 정한 벌을 받게 하는 것이다. 그런데 이 무협지의 주인공은 ‘나쁜 놈 중에서도 힘센 나쁜 놈을 처단하려고 검사가 되었다’고 한다.(26쪽) 그는 1985년 서울지검에서 검사의 첫걸음을 뗐다. 그때는 전두환이 대통령이었다. 힘세고 나쁘기로는 한국현대사에서 단연 으뜸인 사람이다. 그렇지만 이인규 씨가 전두환과 그 패거리를 처단하려고 애쓴 흔적은 없다. ‘힘센 나쁜 놈’이 누군지에 대해서 이인규 씨는 그때도 지금도 헌법이나 상식과 크게 다른 관념을 지니고 있다.

어쨌든 경동고와 서울법대를 나온 그는 명문고 인맥이 판치던 검찰조직에서 학연‧지연‧혈연으로 얽힌 이들의 청탁을 거절하는 청렴성과 원칙에 따라 업무를 처리하는 능력을 발휘함으로써 특수부 에이스가 되었고 대검찰청 중앙수사부장 자리까지 올라갔다. 회고록에서 SK 최태원 회장 구속(2002년)부터 대선자금 수사(2003년)를 거쳐 노무현 전 대통령 수사(2009년)까지 ‘힘센 나쁜 놈’을 처단한 자신의 업적을 깨알같이 자랑했다. 정홍원‧우병우‧홍만표‧한동훈‧박영수 등 함께 활약한 ‘훌륭한 검사’는 실명을 밝혔다. 검찰을 완전 정의로우며 오류라곤 없는 조직으로 묘사했다. 자신을 돋보이게 만드는 데 필요한 때만 검찰의 작은 잘못을 슬쩍 비추었고 관련 검사 이름은 익명 처리했다. 처음부터 끝까지 자랑뿐인 ‘나 때는’ 회고록이다. 그가 검사로 재직한 전두환‧노태우 시대에 무고한 시민을 수도 없이 구속하고 기소한 검찰의 조직범죄와 성폭력‧뇌물수수‧증거조작 등 검사의 범법행위에 대해서는 어떤 반성도 성찰도 없다.

검사의 글로리

회고록 제목은 이인규 씨의 글로리가 무엇인지 보여준다. ‘대한민국 검사’, 그리고 표지의 저자 이름 뒤에 적은 ‘전 대검찰청 중앙수사부장’이 그의 글로리다. 24년 6개월 동안 검사로 일한 이인규 씨는 노무현 대통령이 목숨을 끊은 일로 2009년 7월 사직했다. 무려 14년 세월이 흘렀다. 그런데도 여전히 ‘검사’라는 지위로 자신의 정체성을 표현한다. ‘중수부장’이라는 직함으로 자부심을 드러낸다. ‘법률가’라든가 ‘변호사’ 같은 것은 이인규의 글로리가 될 수 없다. ‘검사’나 ‘중수부장’은 내면의 정체성을 드러내는 언어가 아니다. 타인에게 자랑하고 과시하는 데 적합한 표식이다. 인간 이인규는 그런 점에서 문동은이나 하도영이 아니라 박연진과 같은 과에 속한다. 내면의 가치가 아니라 타인의 시선을 끄는 것을 글로리로 여긴다.

읽을 만한 가치가 있는 회고록은 아니었으나 윤석열 대통령과 검사정권의 행태를 이해하는 데는 유용했다. 그들은 1980년 전두환의 신군부와 비슷한 확신을 지니고 유사한 감정을 느끼면서 권력을 휘두르는 중이다. “기업인과 정치인을 비롯해 사회의 힘센 자들은 모두 잠재적인 범죄자다. 시장권력과 정치권력으로 국민을 약탈해 사리사욕을 채운다. 이것을 바로잡아 국민을 보호할 수 있는 세력은 우리나라에서 가장 유능하고 청렴한 검찰조직과 검찰에서 능력을 기른 전직 검사뿐이다. 우리는 사심 없는 엘리트로서 ‘힘센 나쁜 놈’들이 장악하고 있던 대한민국을 바로 세우고 있다.”

<한겨레21>이 최근 인용 보도한 참여연대와 법무부의 자료에 따르면 윤석열 정부는 검찰왕국 건설을 향해 전진하고 있다. 법무부장관을 포함해 검사 출신 국무위원이 4명이고 국무총리 비서실장부터 국민연금기금 운용위원회 상근 전문위원까지 검사 출신 차관급 공직자는 9명이다. 인사비서관에서 국제법무비서관까지 대통령실에 근무하는 검사 출신 비서관은 7명이다. 외교부와 국제기구 등 법무부 이외 기관에 파견나간 현직 검사가 50명이 넘으며, 검사 아닌 검찰공무원도 10명이나 파견 근무 중이다. 윤석열 대통령은 대통령 몫 대법관과 헌법재판관 후보로 주로 전직 검사를 추천하고, 김기현 체제를 통해 영남을 비롯한 국힘당 강세 선거구에 검사 출신 국회의원 후보를 밀어 넣을 것이다. 윤석열 정부는 돈과 정보와 권력이 있는 자리에 이름과 얼굴은 다르지만 생각과 감정은 이인규 씨와 똑같은 사람을 찾아 임명하고 있다. 이인규 씨도 조만간 한자리 받을지도 모르겠다.

노무현의 글로리

회고록 부제에 이인규 씨는 이런 주장을 담았다. ‘나는 노무현을 죽이지 않았다.’ 그의 심정을 이해한다. 글로리를 되찾으려면 그렇게 말해야 한다. “나는 노무현을 죽인 정치검사가 아니다. 평생 힘센 나쁜 놈을 처단한 대한민국 검사다. 노무현은 힘센 나쁜 놈이었다. 대통령직에 있으면서 박연차에게 뇌물을 받았다. 그가 자살한 것은 변호인 문재인의 무능과, 죽으라고 몰아세운 <한겨레>와 <경향신문> 등 진보언론 때문이다. SBS의 ‘논두렁시계’ 보도는 검찰이 아니라 국정원이 한 짓이다.”

그의 주장 가운데 그나마 다툴 가치가 있는 사실에 대해서는 노무현재단의 입장문을 참고하시기 바란다. 나머지는 사실 공방을 할 가치도 없다. 예컨대 박연차와 면담하면서 노 대통령이 했다고 그가 주장하는 말들은 지어낸 것이다. 자정 가까운 시간에 이루어진 짧은 면담은 영상녹화실에서 이루어진 게 아니었다. 자신과 문재인 대통령의 증언 중에 어느 것이 사실인지 확인할 방법이 없다는 것을 이인규 씨는 누구보다 잘 안다.

적어도 내게는, 이인규 씨의 노력이 쓸데없었다. 나는 그가 노무현을 죽였다고 생각하지 않는다. 그는 그저 노무현의 얼굴에 침을 뱉었을 뿐이며 이명박 정권의 망나니 노릇을 검사의 일로 착각했을 따름이다. 그가 본 ‘힘센 나쁜 놈’은 그런 일로 목숨을 끊지 않았다. 그는 노무현 대통령이 수모를 견디며 비굴하게 살아가리라 생각했을 것이다. 검사 이인규는 노무현을 죽이려 하지 않았다. 살인의 고의가 없었다. ‘미필적 고의’가 있었다고 할 수도 없다. ‘이러면 죽을지도 몰라.’ 그런 생각조차 하지 않았다는 뜻이다. 박연진이 문동은을 이해하지 못한 것처럼, 검사 이인규는 인간 노무현을 이해하지 못했다. 어찌 ‘미필적 고의’를 품었겠는가.

나는 노무현 대통령의 서거를 ‘의도하지 않았던 오류에 대해 죽음으로 책임진 행위’로 받아들인다. 정치는 때로 짐승이 되는 수모를 감수하면서 야수의 탐욕과 싸워 성인의 고귀함을 이루는 사업이다. 그것이 ‘노무현의 글로리’였다. 그는 수모를 견디지 못해 목숨을 끊는 사람이 아니다. 성인의 고귀함을 이루기 위해 야수의 탐욕과 싸워나갈 벗들에게 짐이 아니라 힘이 되려고 그런 방식으로 삶을 마감한 것이다. ‘나는 이렇게 나의 글로리를 지키겠다. 슬퍼하지도 말고 누구를 원망하지도 말라.’ 대통령의 마지막 글을 나는 그렇게 읽었다.

이인규 씨에게 말하고 싶다. “맞습니다. 그대는 대한민국 검사였습니다. 그 사실을 그대만의 글로리로 간직하십시오. 당당히 얼굴을 들고 거리를 활보하십시오, 그러나 굳이 타인의 동의를 구하지는 마십시오. 노무현의 글로리를 알아보았고 그의 죽음을 이해하는 사람은 그대의 얼굴과 이름을 영원히 기억할 것입니다. 노무현의 죽음을 해석하려고도 하지 마십시오. 다시 태어나지 않는 한, 그대는 노무현의 글로리를 이해하지 못할 겁니다.”

출처 : 세상을 바꾸는 시민언론 민들레(http://www.mindlenews.com)

 

왜일까요? 대화 대신 곤봉을 휘둘러도 언어는 항상 그 힘을 가지고, 의미를 전달하여,
들으려 하는 자에게 명확한 진실을 알립니다. 그 진실이란 이 나라가 단단히 잘못됐단 겁니다.

잔악함, 부정, 편협함, 탄압이 만연하고, 한때는 생각한대로 비판하고, 본대로 말할 자유가 있었지만
이제는 검열과 감시 속에서 순응이 복종이 강요됩니다.

어쩌다 이렇게 됐죠? 누구 잘못입니까?

물론, 가장 큰 책임을 가진자들은 대가를 치루게 될겁니다.

그러나 진실을 말하자면, 당신이 죄인을 찾는다면 단지 거울 속을 들여다보면 됩니다.

압니다 당신이 왜 그랬는지. 두려웠던 거죠.
누군들 아니겠습니까? 전쟁, 테러, 질병.
무수히 많은 문제들이 조작되어져서 여러분의 이성을 타락하게 하고 상식을 앗아갔습니다.

두려움에 굴복당한 당신들은 서틀러 의장에게 기댔습니다.
그는 질서와 평화를 약속하며, 침묵과 절대복종을 요구했지요.

지난밤, 난 이 침묵을 깨려했습니다. 지난밤 나는 법원을 파괴해 이 나라에 잊혀진 가치를 일깨웠죠.

400여 년 전 한 위대한 시민이 11월 5일을 우리 뇌리에 영원히 각인시키고자 했습니다.
그는 세상 사람들에게 공평함, 정의, 자유가 단순한 단어 이상이라는 것을 일깨워주려 했습니다.

공평함, 정의, 자유는 우리가 무언가에 대해 느끼는 감정과 의견의 문제라는 것을.

눈을 가리고 살았고 이 정부의 범죄를 알지 못한다면 11월 5일을 아무렇지 않게 지나가십시오.

하지만 내가 보고 있는 것을 당신도 보고, 내가 느끼는 것을 당신도 느끼고, 내가 원하는 것을 당신도 원한다면
내 옆에 서주십시오. 오늘밤부터 1년 후 의사당 앞에서.

그리고 함께 11월 5일을 절대로 영원히 잊지 못하게 해줍시다.

 

Why? Because while the truncheon may be used in lieu of conversation,
Words will always retain their power, words offer the means for meaning
and, for those who will listen, the enunciation of truth and the truth is there
is something terribly wrong with this country, isn't there?

Cruelty and injustice, intolerance and oppression.
And where once you had the freedom to object for think and speak as you saw fit.
You now have censors and surveillance coercing your conformity and soliciting submission

How did this happen? Who's to blame?

Certainly there are those who are more responsible than others and they will be held accountable.

But again, truth be told, if you're looking for the guilty you need only look into a mirror.

I know why you did it.
I know you were afraid.
Who wouldn't be? War, terror, disease.
There were a myriad of problems which conspired for corrupt your reason and rob of your common sense.

Fear got the best of you and in your panic, you turned to the now high chancellor Adam sutler.
He promised you order, he promised you peace and all he demanded in return was your silent, obedient consent.

Last night, I sought to end that silence.
Last night, I destroyed the old Bailey for remind this country of what it has forgotten.

More that 400 years ago, a great citizen wished to imbed the 5th of November forever in our memory.
His hope was to remind the world that fairness, justice and freedom are mor than words.

They are perspectives. 

So if you've seen nothing if the crimes of this government remain unknown to you
then I would suggest that you allow the 5th of November to pass unmarked

But if you see what I see, if you feel as I feel, and if you would seek as I seek
then I ask you to stand beside me, one year from tonight outside the gates of parliament

And together, we shall give them a 5th of November that shall never, ever be forgot

 

 

 

 

출처 : https://www.clien.net/service/board/lecture/16922956?c=true#132257919 

 

코로나19 mRNA백신의 심근염 발생과 치료 결과 : 클리앙

백신 접종을 거부하시는 분들 중에 상당수가 심근염이 생겨서 죽는다는 공포심인 것 같습니다. 여성의 경우는 유산이나 생리 불순이 많은 것 같구요. 이미 여러 차례 mRNA백신이 심근염을 발생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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자세한 내용은 위의 링크를 들어가면 볼 수 있다. 전문적인 내용까지 보고 싶은 사람은 참고.

 

요약)

1. mRNA백신 접종이후 심근염이 발생한 케이스는 4.6명/100만 접종이었다. 코로나19 감염시 심근염 발생은 450명/100만명 확진자였고, 심근염의 자연 발생 수는 100~400명/100만명이다. (즉, 백신 접종 후 심근염이 발생하는 빈도는 코로나19 감염이나 자연 발생 심근염에 비해 턱없이 낮은 숫자입니다)

2. 주로 젊은 사람에게서 많이 발생했으며, 백신 접종 후 2일 이내에 주로 발생했다.

3. 주요 증상은 흉통이었고, 임상적으로 혈중 트로포닌 상승이 나타난다. 치료법은 주로 소염진통제였다.

4. 발생한 심근염으로 인해 심장 이식을 하거나, 에크모를 사용한 사람은 없었으며, 사망자도 없었다.

 

핵심)

코로나19 백신을 맞고 심근염이 발생한 케이스는 4.6/100만 = 4.6ppm, 그리고 이로 인해 죽은 경우도 없다.

코로나19에 감염되었을 경우 심근염 생 케이스는 450/100만 = 450ppm

심근염의 자연발생건수는 100~400/100만 = 100~400ppm

심근염 걱정때문에 코로나 백신 접종을 거부할 과학적 근거는 없다.

(전기밥솥 쇼핑 한 이야기를 하며)

(미쿠리) 싼 물건은 엄청 싸더라구요. 너무 싼거 아닌가 싶을 정도로.

(카자미) 지금은 해외에서 싸게 만들 수 있으니까요.

(미쿠리) 그렇죠. 고용이 글로벌화되었다는 건, 국내의 일자리가 없어진다는 거죠. 그걸 생각하면 슬퍼져요.

(카자미) (국내에서)물건을 싸게 팔기 위해, 일자리를 해외에 파는 것 같은 거죠.

 

(집에 돌아와서 밥을 먹으며)

(미쿠리) 고용의 글로벌화로 국내의 산업이 쇠퇴하게 된다. 그러면 어찌하면 좋을까요라고 물어보니,

쉽게 대답이 나오지 않더라구요.

차라리 쇄국을 하면 어떨까요? 라며 농담을 주고 받았어요.

(밥상에서의 대화치고는 상당히 수준 높다고 할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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신자유주의에 따른 세계화의 바람이 그 정점에 이른 때가 2008년 세계 금융위기 시절이다. 그 이후로 국내 제조업의 기반이 얼마나 중요한 사회적 안전망이었나를 깨달은 미국, 일본, 유럽이 중국, 인도, 동남아시아의 싼 인건비를 보고 진출한 해외공장을 다시 국내로 복귀시키는 움직임을 시작한다. 

이것과 관련된 용어가 off-shoring(국내 공장의 해외이전)과 re-shoring(해외로 이전한 공장들이 다시 국내로 복귀함)이다.

아빠도 엄마도 예상했던 것보다 더 실망도 하고, 기뻐도 하는 모습을 보니,

결혼이라는 것의 무거움을 마음 깊이 (느껴요), 이제야서지만.

저는 오히려 안심했습니다. 어깨의 짐이 가벼워졌다고 할까.

아버지가 바라던 아들이 되지 못했는데, 가령 진실이 아니라고 해도 기쁘게 해드려서 좋았다 싶네요.

부모님을 안심시켜드렸다는 점만으로도 이번 일은 의미가 있었습니다.

다행이다.

츠자키 상이 후회라도 하면 어쩌지.

거짓말을 할 수밖에 없어서, 마음의 짐만 더하게 하는게 아닐까?

주변을 설득할 자신이 없어서, 평범한 결혼을 하는 척을 하는게.

도망치는 거라면 도망치는 것. 도망치는 게 좋은 건 아니니까.

도망쳐도 괜찮지 않습니까?

예?

헝가리에 이런 속담이 있습니다.

「도망치는 건 수치, 그래도 도움이 된다」

도움이 된다?

소극적인 선택일지라도 괜찮지 않습니까?

부끄럽게 도망치는 것이라도, 꿋꿋하게 살아가는 것이 중요합니다.

그런 점에서 이론도 반론도 무시해도.

 도망치는 건 부끄럽지만, 도움이 된다.

예!

그렇네요.

도망치는거라도 꿋꿋이 살아봐요.

(상견례 자리에서 결혼식 없이 결혼하겠다는 자식들의 말을 듣곤)

아버지가 실망하셨어.

엣?

(결혼식의) 버진로드, 미쿠리와 걸을 수 있겠구나라고 생각했거든.

예행연습도 했어. 새로 이사간 집의 복도에서.

 

 

남자가 가정을 갖는다는 건, 모든 걸 걸머지고 책임을 진다는거다.

너에겐 불가능한게 아닐까 생각했었다.

오늘은 기분 좋게 술 한잔 할 수 있을 듯 하구나.

축하한다.

누군가에게 선택받고 싶어

여기에 있어도 좋아라고 인정받고 싶어

그게 사치스러운걸까?

모두들 누군가에게 필요한 사람이 되고 싶어하지만

그게 쉽지가 않아서

조금씩 조금씩 포기해가면서, 울고 싶은 마음을 애써 웃으며 감춰버리고

그렇게 살아가는 건지도 몰라.

"무슨 일 있었어요?"

"내 동생이 안죽었어요."

"6년 동안이나 안죽고, 이번엔 진짜 죽을 줄 알았는데."

"그렇게 죽기를 바랬는데."

"나 좋아해요?"

"아직도 나 좋아해요?"

"네"

"좋아하지 마요"

"누가 나 좋아한다고 생각하면 약해져요."

"여기서 약해지면.. 진짜 끝장이에요."

"그러니까... 나 좋아하지 마요."

 

"윤선배, 무슨 일 있어?"

"아퍼"

"손톱이 빠졌는데, 이렇게 아플 줄 몰랐어."

"아파서 죽을 것 같아."

"아파서, 진짜 아파서.. 죽을 것 같아"

 

 

"사람들이 수군데는 거 알아요."

"그런거 아니라고 말해줘요."

말할 수 없어.

"손톱 다 나을 때까지 카운터에서 일해."

"앞으로 어려운 일 있으면 뭐 삼촌처럼.."

아무일도 없었다고 말할 수 없다.

그 행동이 어떤 의미인지 그는 알고 있었다.

"고맙습니다."

"그래"

그 행동이 어떤 의미인지 나도 알고 있었다.

그 동안 나는 널 경멸했다.

내가 너보다 잘난 사람이라고 생각했어.

아니었어. 나에겐 그저 너만큼의 유혹이 없었던 것 뿐이야.

거짓말은 화장같은 건지도 모르겠다.

맨 얼굴을 가리기 위해 화장을 하는 것처럼

진심을 들킬까봐 거짓말을 한다.

화장은 점점 진해지고 거짓말은 점점 늘어간다.

언제부터 맨 얼굴이 부끄러워진걸까?

언제부터 진심이 창피해진걸까?

그래. 진심은 저렇게 찌질하고 슬프고 약하니까.

진심이 거절당하면 진짜 아프니까. 쿨한 척, 덜 좋아하는 척, 농담인 척.

나만 참는 줄 알았다

나만 불편한 줄 알았다.

나만 눈치 보는 줄 알았다.

말해도 소용 없을거라는 생각.

말하면 미움 받을거라는 두려움.

비웃을거라는 지레짐작.

그러고 보면 나는 다른 사람들이 나와 다르다고 생각했다.

나보다 무례하고, 난폭하고, 무신경 할거라고 생각했다.

나는 오만했다. 나와 같다. 나와 같은 사람이다.

나만큼 불안하고, 나만큼 머뭇대고, 

나만큼은 착한 사람.

 나도 한때는 백화나무를 타던 소년이었습니다.

 그리고 그 시절을 꿈꿀 때가 있습니다.

 내가 심려(心慮)에 지쳤을 때

그리고 인생이 길 없는 숲속과 너무나 같을 때

얼굴이 달고 얼굴이 거미줄에 걸려 간지러울 때

내 눈 하나가 작은 나무 가지에 스쳐 눈물이 흐를 때

나는 잠시 세상을 떠났다가 다시 돌아와 새 시작을 하고 싶습니다.

운명이 나를 잘못 이해하고 반만 내 원(願)을 들어주어 나를 데려갔다가 다시 돌아오지 못하게 하지 않기를 바랍니다.

이 세상은 사랑하기에 좋은 곳입니다.

더 좋은 세상이 있을 것 같지 않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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So I was once myself a swinger of birches.

And so I dream of going back to be.

It's when I'm weary of considerations,

And life is too much like a pathless wood

Where your face burns and tickles with the cobwebs broken across it,

and one eye is weeping from a twig's having lashed across it open.

I'd like to get away from earth awhile and then come back to it and begin over.

May no fate willfully misunderstand me and half grant what I wish and snatch me away not to return.

Earth's the right place for love:

I don't know where it's likely to go better.

 

寵利毋居人前 德業毋落人後

총리무거인전 덕업무락인후

受享毋踰分外 修爲毋減分中

수향무유분외 수위무감분중

 

총애(寵愛)와 이익(利益)에는 남의 앞에 나서지 말아야 하고, 덕을 쌓는 일에는 남의 뒤에 처지지 말아야 한다

남에게 받아서 누릴 때에는 분수 밖으로 넘지 말아야 하고, 수양(修養)할 때는 분수 안으로는 줄이지 말아야 한다.

 

 

 

첫째. 이 그래프는 확진자 숫자만을 보여준다. 즉 감염의 발생 상황을 보여주는 것이 아니라 코로나 테스트를 얼마나 실시했는가를 염두에 보고 봐야 한다. 

코로나 초기 상황에서 한국의 확진자가 빠르게 증가할 때, 일본이 확진자가 거의 없었다. 하지만 이는 한국이 일본에 비해 20배 이상의 검사를 시행했기 때문이다.  현재 일본이 검사자 숫자를 늘리자 확진자 숫자는 걱정스러울 정도로 올라가고 있다.

 

둘째. 그래프의 Y축이 로그(log) 스케일인 점을 감안해야 한다. 전염병의 감염 증가는 지수의 법칙을 따른다. 지수법칙으로 증가하는 그래프의 Y축을 선형으로 표시하면 Y값의 증가가 너무 크기 때문에 그래프를 보기가 쉽지 않다. 따라서 보통 Y축을 로그 스케일로 비선형적으로 나타내게 된다. 로그 스케일에서 Y값의 2배씩 증가할 수록 실제의 선형값은 10배씩 증가한다. 그러므로 Y값이 올라갈 수록 그래프 상의 미미한 차이는 실제 수백, 수천, 수만배까지 차이가 날 수 있다는  것을 감안해야 한다.

 

 

셋째. 모집단의 크기, 즉, 국가별 인구수가 감안되어 있지 않다. 만일 룩셈브루크나 아이슬란드와 같이 확진자 숫자로는 미미한 국가를, 인구규모를 감안하여 인구당 확진자수의 관점에서 보면 심각성이 드러나는 것과 같다. 미국과 중국의 경우 인구수를 감안하면 그래프의 상승 곡선이 조금 완만해지는 효과를 보이긴 한다.

하지만, 인구 숫자가 감염율에 크게 영향을 주진 않는다. 인구수를 감안한 통계는 같은 지역(보통 한 국가)내에서 어떤 지역의 감염율이 높은가에 대한 통계를 볼 때 유효하다. 중국의 우한, 미국의 뉴욕이 이와 같은 예이다.

 

네번째. 이 그래프의 X축은 날짜(date)가 아니라 100번째 환자가 나올때부터이다. 이탈리아는 2월 24일, 터키는 3월 19일 이런 식이다. 그러므로 이 그래프에서는 국가간의 감염의 진척 상황을 실시간으로 보여주지 않는다. 

중국에서 수만 명이 감염되고, 이후에 한국, 이탈리아, 이란에서 감염이 발생되기 시작했고, 그 2주후에 미국에서 상황이 시작되었다. 상황이 발생되고 초기에 국가별로 대처방식에 차이가 감염 증가에 큰 원인인 것이 밝혀졌다. 운이 좋은 어떠 나라들은 다른 나라에 비해서 많은 (대비) 시간을 가질 수 있었다. (그래도 그 운을 살린 나라도 많지는 않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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대한민국이 이번 코로나 상황에서 보여준 모든 것들이 정말 원더풀x10000  하다.

 

https://www.ft.com/content/19d90308-6858-11ea-a3c9-1fe6fedcca75

 

Yuval Noah Harari: the world after coronavirus

This storm will pass. But the choices we make now could change our lives for years to come

www.ft.com

유발하라리의 파이낸셜 타임즈 기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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마지막 단락이 이 글의 핵심적 주제이다.

 

Humanity needs to make a choice. Will we travel down the route of disunity, or will we adopt the path of global solidarity? If we choose disunity, this will not only prolong the crisis, but will probably result in even worse catastrophes in the future. If we choose global solidarity, it will be a victory not only against the coronavirus, but against all future epidemics and crises that might assail humankind in the 21st century. 

 

인류는 선택을 해야 한다. 분열의 길로 추락할 것인가, 아니면 전세계적 연대의 길을 선택할 것인가? 우리가 분열을 선택한다면, 이번 위기를 장기화할 뿐만 아니라, 아마도 미래에 더욱 큰 재앙을 야기하게 될 것이다. 우리가 세계적 연대를 선택한다면, 단지 코로나바이러스에 대해서 승리하는 것만 아니라, 21세기에 인류를 괴롭힐 모든 전염병과 위기들에 대한 승리가 될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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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본문 전체)

 

           Yuval Noah Harari: the world after coronavirus

 This storm will pass. But the choices we make now could change our lives for years to come

 

이 폭풍은 지나갈 것이다. 하지만 우리가 내린 선택들은 이제 다가올 수년 동안 우리의 삶을 바꾸게 될 것이다.

  

Humankind is now facing a global crisis. Perhaps the biggest crisis of our generation. The decisions people and governments take in the next few weeks will probably shape the world for years to come. They will shape not just our healthcare systems but also our economy, politics and culture. We must act quickly and decisively. We should also take into account the long-term consequences of our actions. When choosing between alternatives, we should ask ourselves not only how to overcome the immediate threat, but also what kind of world we will inhabit once the storm passes. Yes, the storm will pass, humankind will survive, most of us will still be alive — but we will inhabit a different world. 

 

 인류는 지금 전세계적인 위기에 직면하고 있는 중이다. 아마도 우리의 세대에서 가장 큰 위기일지 모른다. 앞으로 몇 주간 사람들과 정부들이 내리는 결정들은 아마도 다가올 수년 간의 세상의 모양새를 만들게 될 것이다. 그 결정들은 보건 시스템 뿐만 아니라 경제, 정치 그리고 문화에까지 영향을 끼칠 것이다. 우리는 빠르고 결단력 있게 행동해야 한다. 뿐만 아니라 우리의 행동이 미칠 장기적인 결과들도 고려해야 한다. 대안들 사이에서 선택을 해야 할 때, 우리는 당장의 위협들을 어떻게 극복해야 할지와 더불어 이 폭풍우가 지나고 나서 우리가 어떤 세상에서 살게 될지에 대해서도 우리 자신에게 되물어봐야 할 것이다. 그렇다, 이 폭풍우는 지나갈 것이고, 인류는 살아남을 것이며, 우리들 중 대부분은 여전히 살아가게 될 것이다 – 하지만 우리는 지금과는 다른 세상을 살아가게 될 것이다.

 

Many short-term emergency measures will become a fixture of life. That is the nature of emergencies. They fast-forward historical processes. Decisions that in normal times could take years of deliberation are passed in a matter of hours. Immature and even dangerous technologies are pressed into service, because the risks of doing nothing are bigger. Entire countries serve as guinea-pigs in large-scale social experiments. What happens when everybody works from home and communicates only at a distance? What happens when entire schools and universities go online? In normal times, governments, businesses and educational boards would never agree to conduct such experiments. But these aren’t normal times. 

 

 많은 단기적 비상대책들이 우리의 일상이 될 것이다. 이것이 비상상황의 특성이다. 비상상황은 역사의 과정들을 촉진시킨다. 평상시라면 몇 년간의 숙고가 걸릴 결정들이 불과 몇 시간만에 통과된다. 미숙하고 심지어는 위험하기까지 한 기술들이 동원되는데, 아무것도 안하는 위험성이 더 크기 때문이다. 온 나라가 기니피그처럼 거대규모의 사회적 실험으로 사용된다. 모든 사람들이 집에서 일하고 원거리로 소통을 하면 어떻게 될까? 모든 학교와 대학들이 온라인으로 진행된다면 무슨 일이 벌어질까? 평상시라면 정부, 사업 그리고 교육 위원회는 이와 같은 실험을 용납하지 않을 것이다. 하지만 지금은 평상시가 아니다.

 

 In this time of crisis, we face two particularly important choices. The first is between totalitarian surveillance and citizen empowerment. The second is between nationalist isolation and global solidarity. 

 

 이런 위기의 시기에는, 우리는 두가지 까다롭고 중요한 선택들에 직면한다. 첫번째는 전체주의적 감시(통제와 일맥 상통)와 시민 자율권의 사이에서의 선택이다. 두번째는 국수주의적 고립과 전지구적인 연대 사이에서의 선택이다.

 

 Under-the-skin surveillance

 In order to stop the epidemic, entire populations need to comply with certain guidelines. There are two main ways of achieving this. One method is for the government to monitor people, and punish those who break the rules. Today, for the first time in human history, technology makes it possible to monitor everyone all the time. Fifty years ago, the KGB couldn’t follow 240m Soviet citizens 24 hours a day, nor could the KGB hope to effectively process all the information gathered. The KGB relied on human agents and analysts, and it just couldn’t place a human agent to follow every citizen. But now governments can rely on ubiquitous sensors and powerful algorithms instead of flesh-and-blood spooks. 

 

철저한 감시

 전염병을 막기 위해서는, 대중 전체가 가이드라인을 따를 필요가 있다. 여기에는 두 개의 주요한 방법이 있다. 하나는 정부가 사람들을 감시하고 규칙을 어기는 이들을 처벌하는 것이다. 오늘날, 인류역사에서 처음으로, 기술에 의해 모든 사람을 24시간 감시하는 것이 가능하다. 50년 전, KGB는 2억4천만 명의 소비에트 시민들을 하루 24시간 따라다닐 수 없었으며, 모은 모든 정보를 효율적으로 처리할 수도 없었다. KGB는 정보원들과 분석가들에 의존했으며, 모든 시민들에게 정보원을 붙일 수는 없었다. 하지만 지금 정부는 유비쿼터스 센서와 강력한 알고리즘으로 살과 피로 이루어진 첩보원들을 대체할 수 있다.

  

In their battle against the coronavirus epidemic several governments have already deployed the new surveillance tools. The most notable case is China. By closely monitoring people’s smartphones, making use of hundreds of millions of face-recognising cameras, and obliging people to check and report their body temperature and medical condition, the Chinese authorities can not only quickly identify suspected coronavirus carriers, but also track their movements and identify anyone they came into contact with. A range of mobile apps warn citizens about their proximity to infected patients. 

 

코로나 바이러스의 전염에 대항하는 전투에서 몇몇 정부들은 이미 새로운 감시 도구들을 이용하는 중이다. 가장 악명높은 것은 중국의 경우이다. 사람들이 가지고 있는 스마트폰을 엄중하게 감시하고, 수 억개의 안면인식이 가능한 카메라(CCTV)를 이용하고, 사람들에게 자신들의 체온과 몸 상태를 체크하고 보고하도록 한다. 이를 통해 중국 당국은 코로나 바이러스의 보균자로 의심되는 이들은 신속히 특정할 뿐 아니라, 그들의 동선을 추적하고 그들이 접촉하는 이들까지도 파악할 수 있다. 반경안에 있는 시민들에게는 모바일 앱을 통해 감염된 환자가 주위에 있는지 여부까지도 경고한다.

 This kind of technology is not limited to east Asia. Prime Minister Benjamin Netanyahu of Israel recently authorised the Israel Security Agency to deploy surveillance technology normally reserved for battling terrorists to track coronavirus patients. When the relevant parliamentary subcommittee refused to authorise the measure, Netanyahu rammed it through with an “emergency decree”.

이러한 종류의 기술은 동아시아에만 국한되지 않는다. 최근 이스라엘의 벤자민 네탄야후 수상은 이스라엘 첩보국이 테러리스트에 사용하도록 제한된 감시 기술들을 코로나바이러스 환자들에게 사용할 수 있도록 승인하였다. 이를 승인할 국회의 소위원회에서 승인을 거절하자, 네탄야후는 비상령을 발동해서 통과시켰다.

 

 You might argue that there is nothing new about all this. In recent years both governments and corporations have been using ever more sophisticated technologies to track, monitor and manipulate people. Yet if we are not careful, the epidemic might nevertheless mark an important watershed in the history of surveillance. Not only because it might normalise the deployment of mass surveillance tools in countries that have so far rejected them, but even more so because it signifies a dramatic transition from “over the skin” to “under the skin” surveillance. 

 

이런 모든 것들이 별로 새로울 것이 없다고 할 지도 모르겠다. 최근 몇 년간 정부와 기업들은 언제나 더욱 교묘한 기술들을 추적, 감시 그리고 사람들을 조정하는데 사용해왔다. 그러나 우리가 경계하지 않는다면 이번 전염병은 감시의 역사에 주요한 분수령이 될 수 있다. 이로 인해 많은 국가들에서 그간 거부되어온 대중 감시 도구들의 적용이 일상화될 뿐 아니라, 어쩌면 표피적 감시에서 표피하의 감시로 극적인 전환을 의미하게 될 수도 있다.

  

Hitherto, when your finger touched the screen of your smartphone and clicked on a link, the government wanted to know what exactly your finger was clicking on. But with coronavirus, the focus of interest shifts. Now the government wants to know the temperature of your finger and the blood-pressure under its skin. 

  

지금까지는 당신의 손가락이 스마트폰을 터치하고 링크를 클릭할 때, 정부는 당신의 손가락이 정확히 무엇을 클릭하는지를 알기를 원했다. 하지만 코로나바이러스로 인해, 관심의 내용이 바뀌게 되었따. 이제 정부는 당신 손가락의 온도와 당신 몸의 혈압을 알고 싶어한다.

  

The emergency pudding

 

One of the problems we face in working out where we stand on surveillance is that none of us know exactly how we are being surveilled, and what the coming years might bring. Surveillance technology is developing at breakneck speed, and what seemed science-fiction 10 years ago is today old news. As a thought experiment, consider a hypothetical government that demands that every citizen wears a biometric bracelet that monitors body temperature and heart-rate 24 hours a day. The resulting data is hoarded and analysed by government algorithms. The algorithms will know that you are sick even before you know it, and they will also know where you have been, and who you have met. The chains of infection could be drastically shortened, and even cut altogether. Such a system could arguably stop the epidemic in its tracks within days. Sounds wonderful, right?

  

비상상황 푸딩

 

 감시라는 것에 대해 우리가 직면한 문제들 중 하나는 누구도 우리가 어떻게 감시당하고 있는지 정확히 알고 있지 않다는 데 있으며, 앞으로 어떻게 될지도 모른다는 것이다. 감시 기술은 정신이 없을 정도로 발전하고 있는 중이어서, 10년 전 공상과학(소설,영화)에서 보던 것이 지금에 와선 이미 낡은 것처럼 보일 정도이다. 사고 실험으로, 가상의 정부 - 모든 시민들에게 24시간 체온과 심장박동을 관찰하는 생체측정 팔찌를 찰 것을 요구하는 - 를 가정해보자. 이 데이터들은 정부의 알고리즘에 의해 수집되고 분석된다. 이 알고리즘은 심지어 당신이 아픈 것을 자각하기 전에 당신이 아픈 것을 알아내고, 당신이 어디어디에 있었으며, 누구를 만났는지를 안다. 감염의 연결고리는 극적으로  짧아질 수 있고, 심지어는 한 방에 끊을 수도 있다. 이와 같은 시스템은 거의 틀림없이 몇 일내로 고리를 추척하고 전염을 막아낼 수 있을 것이다. 끝내주지 않는가? 

 

The downside is, of course, that this would give legitimacy to a terrifying new surveillance system. If you know, for example, that I clicked on a Fox News link rather than a CNN link, that can teach you something about my political views and perhaps even my personality. But if you can monitor what happens to my body temperature, blood pressure and heart-rate as I watch the video clip, you can learn what makes me laugh, what makes me cry, and what makes me really, really angry. 

반대편(부정적인 면)은, 아마도, 무시무시한 감시 시스템에 합법성을 부여하는 것이 될 것이다. 예를 들어, 당신은 내가 CNN대신에 폭스 뉴스를 클릭하는 것을 안다면, 나의 정치적 견해를 당신에게 알려줄 것이고 어쩌면 나의 퍼스낼러티까지도 알게 될 지 모른다. 그러나, 당신이 내가 비디오 클립을 볼 때, 나의 체온, 혈압 그리고 심박수를 감시할 수 있다면, 당신은 무엇이 나를 웃게 하는지, 울게 하는지, 그리고 무엇이 나를 진심으로 빡치게 하는지를 알게 될 것이다.

 

It is crucial to remember that anger, joy, boredom and love are biological phenomena just like fever and a cough. The same technology that identifies coughs could also identify laughs. If corporations and governments start harvesting our biometric data en masse, they can get to know us far better than we know ourselves, and they can then not just predict our feelings but also manipulate our feelings and sell us anything they want — be it a product or a politician. Biometric monitoring would make Cambridge Analytica’s data hacking tactics look like something from the Stone Age. Imagine North Korea in 2030, when every citizen has to wear a biometric bracelet 24 hours a day. If you listen to a speech by the Great Leader and the bracelet picks up the tell-tale signs of anger, you are done for.

분노, 기쁨, 지루함 그리고 사랑은 열과 기침과 똑같은 생물학적 현상이라는 것을 기억하는 것이 중요하다. 기침을 알아내는 것과 같은 기술이 웃음도 알아낼 수 있다. 기업과 정부가 생체 데이터를 대량으로 수집하기 시작하면, 그들은 우리 자신이 우리를 아는 것보다 더 많이 우리를 알아낼 수 있게 되며, 그들은 단지 우리가 느끼는 것들을 예견하는 것 뿐만 아니라 우리의 감정을 조작하고 그들이 원하는 것을 우리에게 팔 수 있게 된다 - 그것이 상품이든 아니면 정치인이든 간에 말이다. 생체정보의 감시를 통해 캠브리지 아날라티카의 데이타 해킹 전술(기술)은 석기시대의 것이 될 수도 있다. 서기 2030년 모든 시민들이 하루 24시간 내내 생체 팔찌를 차고 있는 북한을 상상해보라. 위대한 지도자의 연설을 듣고 있을 때팔찌가 당신의 숨길 수 없는 분노를 찝어낸다면, 그 사람은 그대로 끝장일 것이다. 

 

You could, of course, make the case for biometric surveillance as a temporary measure taken during a state of emergency. It would go away once the emergency is over. But temporary measures have a nasty habit of outlasting emergencies, especially as there is always a new emergency lurking on the horizon. My home country of Israel, for example, declared a state of emergency during its 1948 War of Independence, which justified a range of temporary measures from press censorship and land confiscation to special regulations for making pudding (I kid you not). The War of Independence has long been won, but Israel never declared the emergency over, and has failed to abolish many of the “temporary” measures of 1948 (the emergency pudding decree was mercifully abolished in 2011). 

아마도 생체 감시는 비상 상황에 임시적인 조치로서 사용될 수도 있을 것이다. 비상 상황이 지나가면 조치도 멈출 것이다. 하지만 임시 조치들은 비상 상황 이후에도 지속되는 역겨운 속성이 있으며, 특히 항상 새로운 위기가 가까이에 잠재해 있을 땐 더욱 그렇다. 내 고향 이스라엘을 예로 들자면, 1948년 독립전쟁 시기의 비상상황에서 발효된 임시조치들, 언론 검열가 토지몰수에서부터 푸딩을 만드는 특별한 규칙에 이르기까지(농담이 아니다), 이 있다. 독립전쟁에서 승리하고 나서도 이스라엘은 비상상황의 종료를 절대 선언하지 않았고, 1948년의 수 많은 "임시" 조치들을 폐기하는데 실패했다(자비롭게도 위기상황의 푸딩 제조법은 2011년에 철폐되었다).

 

Even when infections from coronavirus are down to zero, some data-hungry governments could argue they needed to keep the biometric surveillance systems in place because they fear a second wave of coronavirus, or because there is a new Ebola strain evolving in central Africa, or because...you get the idea. A big battle has been raging in recent years over our privacy. The coronavirus crisis could be the battles tipping point. For when people are given a choice between privacy and health, they will usually choose health.

코로나 바이러스의 감염이 없어져도, 데이터에 굶주린 정부들은 코로나 바이러스의 2차 충격파에 대비하기 위해, 아니면 중앙 아프리카에서 새로운 에볼라 변형이 생겨났기 때문에, 아니면 무엇무엇 때문에,, 당신도 이젠 눈치를 챘을테지만, 갖가지 이유로 생체감시 체계를 계속 유지해야 한다고 주장할 것이다. 최근 수년간 프라이버시에 대한 거대한 전투가 격렬하게 벌어져왔다. 코로나바이러스로 인한 위기상황이 이 전투의 티핑 포인트가 될 수 있다. 프라이버시와 보건 사이에서 사람들은 대개 보건을 선택하게 될 것이다.

 

The soap police

Asking people to choose between privacy and health is, in fact, the very root of the problem. Because this is a false choice. We can and should enjoy both privacy and health. We can choose to protect our health and stop the coronavirus epidemic not by instituting totalitarian surveillance regimes, but rather by empowering citizens. In recent weeks, some of the most successful efforts to contain the coronavirus epidemic were orchestrated by South Korea, Taiwan and Singapore. While these countries have made some use of tracking applications, they have relied far more on extensive testing, on honest reporting, and on the willing co-operation of a well-informed public. 

 

비누 경찰

 프라이버시냐 보건이냐에 대해서 묻는 것 자체가 사실상 문제의 근원이다. 왜냐하면 이것은 그릇된 선택이기 때문이다. 우리는 프라이버시와 보건 둘 다를 향유할 수 있고 또 그래야 한다.  우리는 전체주의적 감시 체졔를 도입하지 않고도, 시민들의 자발적 참여의 장려를 통해, 우리의 건강을 보호하고 코로나바이러스의 전염을 막을 수 있는 길을 선택할 수 있다. 최근 몇주 간, 코로나 바이러스 확산을 저지하는데 가장 성공적인 노력들이 대한민국, 대만, 그리고 싱가포르에서 거의 완벽한 모습으로 보여졌다. 이들 국가들은 일단의 추적 도구들을 사용하면서도, 그에 더하여 광범위한 검사와 투명한 보고를 실시하고, 그리고 훌륭하게 조직된 대중들의 자발적 협조가 이루어졌다. 

 

Centralised monitoring and harsh punishments aren’t the only way to make people comply with beneficial guidelines. When people are told the scientific facts, and when people trust public authorities to tell them these facts, citizens can do the right thing even without a Big Brother watching over their shoulders. A self-motivated and well-informed population is usually far more powerful and effective than a policed, ignorant population. 

중앙집권적 감시와 가혹한 처벌만이 대중들이 공익의 지침을 따르게 하는 유일한 방법은 아니다. 과학적 사실들을 듣고, 이런 사실들을 이야기하는 공권력을 믿을 때, 자신들을 감시하는 빅브라더가 없어도 시민들은 올바르게 행동한다. 자발적이고도 잘 조직된 대중은 제한받고 무지한 대중들보다도 훨씬 강력하고 효율적이다.

Consider, for example, washing your hands with soap. This has been one of the greatest advances ever in human hygiene. This simple action saves millions of lives every year. While we take it for granted, it was only in the 19th century that scientists discovered the importance of washing hands with soap. Previously, even doctors and nurses proceeded from one surgical operation to the next without washing their hands. Today billions of people daily wash their hands, not because they are afraid of the soap police, but rather because they understand the facts. I wash my hands with soap because I have heard of viruses and bacteria, I understand that these tiny organisms cause diseases, and I know that soap can remove them. 

비누로 손을 씻는 경우를 생각해보자. 인류의 위생에 있어서 이것은 가장 위대한 진보중 하나였다. 이 간단한 행동이 매년마다 수백만의 생명을 살린다. 지금은 우리가 당연히 여기지만, 과학자들이 비누로 손씻기의 중요성을 발견한 것은 겨우 19세기에 들어서였다. 그 이전에는 의사와 간호사들도 수술할 때 조차 손씻기를 하지 않았다. 오늘날 수십억 명의 사람들이 매일 손을 씻으며, 이는 그들을 감시하는 비누 경찰때문이 아니라 그들이 왜 그래야 하는지를 이해하기 때문이다. 내가 손을 비누로 씻는 것은 바이러스와 박테리아, 질병을 일으키는 이 작은 유기체가, 비누로 제거될 수 있다는 것을 내가 알고 있기 때문이다.

 

But to achieve such a level of compliance and co-operation, you need trust. People need to trust science, to trust public authorities, and to trust the media. Over the past few years, irresponsible politicians have deliberately undermined trust in science, in public authorities and in the media. Now these same irresponsible politicians might be tempted to take the high road to authoritarianism, arguing that you just cannot trust the public to do the right thing. 

 하지만 이 정도 수준의 규정의 준수와 협조를 얻기 위해서는, 신뢰가 필수적이다. 사람들이 과학을 믿어야 하며, 공권력을 믿어야 하고, 언론을 믿어야 한다. 지난 몇년 간, 무책임한 정치가들은 과학, 공권력 그리고 언론에 대한 신뢰를 교묘하게 훼손해왔다. 이제 이러한 무책임한 정치가들이 대중을 믿을 수 없다며 선동하여 전체주의라는 고속도로(high road, 가장 편한길 혹은 가장 확실한 방법. 대중의 공포를 이용해서 정권을 잡으려 드는 정치인들의 입장에서 이 단어를 사용했던 듯 싶다)를 타려하고 있다. 

Normally, trust that has been eroded for years cannot be rebuilt overnight. But these are not normal times. In a moment of crisis, minds too can change quickly. You can have bitter arguments with your siblings for years, but when some emergency occurs, you suddenly discover a hidden reservoir of trust and amity, and you rush to help one another. Instead of building a surveillance regime, it is not too late to rebuild people’s trust in science, in public authorities and in the media. We should definitely make use of new technologies too, but these technologies should empower citizens. I am all in favour of monitoring my body temperature and blood pressure, but that data should not be used to create an all-powerful government. Rather, that data should enable me to make more informed personal choices, and also to hold government accountable for its decisions. 

보통 오랜동안 훼손된 신뢰를 하루아침에 회복할 수는 없다. 그러나 지금은 보통의 시기가 아니다. 위기의 순간 대중의 마음은 빠르게 변한다. 가족들간에는 듣기 싫은 소리를 하는 경우도 있지만, 위기의 순간이 닥치면, 마음속에 있는 신뢰와 애정으로 아무것도 가리지 않고 서로를 도우러 달려간다. 감시 체계를 세우는 대신에, 과학, 공권력 그리고 언론에 대한 대중들의 신뢰를 회복하는 것이 너무 늦지는 않았다. 명확히 새로운 기술들을 사용해야만 하지만, 이 기술들을 시민들이 자발적으로 사용하게 해야 한다. 나는 내 몸의 체온과 혈압을 감시하는 것에 기꺼이 동의하지만, 이 데이터들이 전지전능한 정부가 되는데 이용되어서는 안된다. 단지 이 데이터가 내가 좀 더 나은 선택을 하게 돕고, 정부의 의사결정을 투명하게 하는데 이용되어야 한다. 

 

If I could track my own medical condition 24 hours a day, I would learn not only whether I have become a health hazard to other people, but also which habits contribute to my health. And if I could access and analyse reliable statistics on the spread of coronavirus, I would be able to judge whether the government is telling me the truth and whether it is adopting the right policies to combat the epidemic. Whenever people talk about surveillance, remember that the same surveillance technology can usually be used not only by governments to monitor individuals — but also by individuals to monitor governments. 

 

나 자신의 의학적 상태를 하루 24시간 추척관리할 수 있다면, 내 자신이 다른 사람들의 보건적 위험이 될지도 알 수 있고, 나의 건강을 유지하는데도 도움이 될 것이다. 그리고 코로나 바이러스 확산에 대한 신뢰할 수 있는 통계치들을 분석한 내용에 접근할 수 있다면, 정부가 나에게 진실을 말하는지 전염병에 올바른 정책을 적용하고 있는지를 판단할 수 있을 것이다. 사람들이 감시에 대하여 이야기할 때면, 똑같은 감시 기술을 정부가 개인들을 감시하는데도 쓸 수 있지만, 개인들도 정부를 감시하는데도 사용할 수 있다는 것을 기억하자.

The coronavirus epidemic is thus a major test of citizenship. In the days ahead, each one of us should choose to trust scientific data and healthcare experts over unfounded conspiracy theories and self-serving politicians. If we fail to make the right choice, we might find ourselves signing away our most precious freedoms, thinking that this is the only way to safeguard our health.

이런 이유들로 이번 코로나바이러스의 창궐은 시민의 자질을 판단하게 되는 중요한 시금석이 될 것이다. 앞으로의 날들은 우리 각각의 모든 이들이, 숨겨진 음모이론들과 이기적인 정치인들이라는 덪을 넘어, 과학적 데이터와 보건 전문가들을 신뢰하는 선택을 해야만 한다. 만일 바른 선택을 하지 않는다면, 우리는 대부분의 귀중한 자유를 포기하는데 동의하면서도, 이것만이 우리의 보건을 지키는 유일한 길이라고 생각하는 과오를 범하게 될 것이다.

 

We need a global plan

The second important choice we confront is between nationalist isolation and global solidarity. Both the epidemic itself and the resulting economic crisis are global problems. They can be solved effectively only by global co-operation. 

우리는 전세계적인 계획이 필요하다.

우리앞에 닥친 두번째 중요한 선택은 국수주의적 고립이냐 아니면 전세계적 연대냐에 있다. 전염과 그로 인해 야기되는 경제위기는 전세계적인 문제이다. 이 두개의 문제는 오직 전세계적 공조에 의해서만 해결될 수 있다.

First and foremost, in order to defeat the virus we need to share information globally. That’s the big advantage of humans over viruses. A coronavirus in China and a coronavirus in the US cannot swap tips about how to infect humans. But China can teach the US many valuable lessons about coronavirus and how to deal with it. What an Italian doctor discovers in Milan in the early morning might well save lives in Tehran by evening. When the UK government hesitates between several policies, it can get advice from the Koreans who have already faced a similar dilemma a month ago. But for this to happen, we need a spirit of global co-operation and trust. 

우선적이며 가장 중요한 것은, 전세계가 이 바이러스를 물리치기 위해 정보를 공유하는 것이다. 이것이야말로 인류가 바이러스에 대항하는 가장 큰 강점이다. 중국의 코로나바이러스든 미국의 코로나바이러스든 인간에게 전염되는 방법은 똑같다. 하지만 중국은 미국에 코로나바이러스와 이 바이러스에 어떻게 대처해야 하는지에 대한 귀중한 가르침을 줄 수 있다. 이른 아침 밀라노에서 이탈리아 의사가 발견한 사실이 저녁에 테헤란에서 누군가의 생명을 살리게 될 수 도 있다. 영국 정부가 몇가지의 조치들 사이에서 주저할 때, 이미 한달 전 비슷한 딜레마에 빠졌던 한국이 조언을 해줄 수도 있다. 하지만 이것이 현실로 나타나기 위해서는, 우리는 국제적 공조와 신뢰의 정신을 가져야 한다.

(좋은 말이지만, 참 너무 이상적이긴 하다. 세상은 이렇듯 아름답게 돌아가진 않는다는게 내 개인적 생각이다. 만약 이말대로 됐다면 코로나19가 이렇듯 글로벌로 퍼지지도 않았을 것이다.) 

 

Countries should be willing to share information openly and humbly seek advice, and should be able to trust the data and the insights they receive. We also need a global effort to produce and distribute medical equipment, most notably testing kits and respiratory machines. Instead of every country trying to do it locally and hoarding whatever equipment it can get, a co-ordinated global effort could greatly accelerate production and make sure life-saving equipment is distributed more fairly. Just as countries nationalise key industries during a war, the human war against coronavirus may require us to “humanise” the crucial production lines. A rich country with few coronavirus cases should be willing to send precious equipment to a poorer country with many cases, trusting that if and when it subsequently needs help, other countries will come to its assistance. 

국가들은 기꺼이 정보를 공개해야 하고, 겸허하게 조언을 구해야 하며, 그들이 받은 데이터와 인사이트들을 믿을 수 있어야 한다. 또한 의료 장비들, 가장 필요한 것은 검사 키트와 호흡 기계들인, 을 생산하고 공급하는데 국제적 노력이 필요하다. 나라별로 각자 지역적으로 필요한 의료기구들을 생산, 공급하고 모든 장비를 비축하려 하는 대신에, 국제적인 공조를 통해 생산속도를 크게 높일 수 있으며, 생명을 살리는 기구들이 더욱 공정하게 배분될 수 있다. 전쟁시 주요 산업들이 국유화되듯이, 코로나바이러스에 대한 인류의 전쟁은 주요한 생산 라인들을 "인간화" 시키는 것이 필요하다. 코로나 바이러스가 별로 발생하지 않은 부자 국가들은 코로나 바이러스가 창궐한 가난한 나라에 기꺼이 귀중한 장비들을 제공해 주어야 한다. 추후에 그들이 필요할 때, 다른 나라들이 기꺼이 도움을 줄 것이라는 믿음을 가지고 말이다.

(참, 이게 주요한 부자나라들이 지금 다 코로나가 창궐하고 있으니 그게 문제다.) 

 We might consider a similar global effort to pool medical personnel. Countries currently less affected could send medical staff to the worst-hit regions of the world, both in order to help them in their hour of need, and in order to gain valuable experience. If later on the focus of the epidemic shifts, help could start flowing in the opposite direction. 

의료원(의사,간호사 등)들의 풀(pool)을 구성하는 국제적 공조도 고려해야 한다. 현재 전염이 적은 국가들은 다른 상황이 나쁜 국가에 의료 스태프들을 보낼 수 있으며, 그렇게 함으로써 그들이 필요할 때 다시 도움을 받을 수도 있고 귀중한 경험을 얻을 수도 있다. 나중에 전염이 그 방향을 튼다는 것을 생각하면, 도움의 방향 역시 반대가 될 수도 있는 것이다.

Global co-operation is vitally needed on the economic front too. Given the global nature of the economy and of supply chains, if each government does its own thing in complete disregard of the others, the result will be chaos and a deepening crisis. We need a global plan of action, and we need it fast. 

국제적 공조는 경제적 전선에 있어서도 필수적으로 필요하다. 경제가 가진 국제적 성격과 공급 체인에 의해, 만일 각각의 정부가 자기만 생각하고 다른 나라들을 고려하지 않는다면, 그 결과는 파괴적이고 위기는 더욱 심각해질 것이다. 국제적인 행동강령이 시급히 필요하다.

 

Another requirement is reaching a global agreement on travel. Suspending all international travel for months will cause tremendous hardships, and hamper the war against coronavirus. Countries need to co-operate in order to allow at least a trickle of essential travellers to continue crossing borders: scientists, doctors, journalists, politicians, businesspeople. This can be done by reaching a global agreement on the pre-screening of travellers by their home country. If you know that only carefully screened travellers were allowed on a plane, you would be more willing to accept them into your country. 

또다른 요구사항은 여행에 대한 국제적 합의를 이루는 것이다. 모든 국제적 이동이 수개월 동안 정지됨으로 인해 광범위한 물자부족을 야기하고 코로나 바이러스에 대한 대응을 어렵게 할 것이다. 국가들은 과학자, 의사, 기자, 정치인, 사업가와 같은 이들의 최소한의 필수인원에 대해 국경을 넘는 것을 허용하도록 공조해야 한다. 이는 그들의 고국에서 여행자들을 사전 선별하는데 대한 국제적 합의를 통해서 가능하다. 신중하게 선별된 여행자들만을 비행기에 태우는 것만이, 각각의 국가 모두가 여행자들을 받아들이는데 꺼리낌이 없어지게 할 수 있다

 

Unfortunately, at present countries hardly do any of these things. A collective paralysis has gripped the international community. There seem to be no adults in the room. One would have expected to see already weeks ago an emergency meeting of global leaders to come up with a common plan of action. The G7 leaders managed to organise a videoconference only this week, and it did not result in any such plan. 

불행히도, 현재 거의 모든 나라가 이와 같이 하고 있지 않다. 국제사회는 집단적 마비 상태이다. 현재 이 사태에 있어서 모든 국가는 성인처럼 행동하지 않는 것처럼 보인다. 이미 몇주 전에 공동의 대응 마련을 위해 전세계의 지도자들이 긴급 회동을 가질거라고 기대되어왔다. 이번주에야 G7 지도자들은 화상회의를 가졌으나, 아무런 계획도 내놓지 못했다.

In previous global crises — such as the 2008 financial crisis and the 2014 Ebola epidemic — the US assumed the role of global leader. But the current US administration has abdicated the job of leader. It has made it very clear that it cares about the greatness of America far more than about the future of humanity. 

이전의 위기들 - 2008년의 금융위기와, 2014년의 에볼라 감염사태 - 에서 미국은 전세계의 지도자의 역할을 수행했다. 하지만 현재 미국의 행정부는 리더로서의 역할을 저버렸다. 미국이 인류의 미래보다는 미국의 위대함에만 관심이 있다는 것이 매우 명백하다.

This administration has abandoned even its closest allies. When it banned all travel from the EU, it didn’t bother to give the EU so much as an advance notice — let alone consult with the EU about that drastic measure. It has scandalised Germany by allegedly offering $1bn to a German pharmaceutical company to buy monopoly rights to a new Covid-19 vaccine. Even if the current administration eventually changes tack and comes up with a global plan of action, few would follow a leader who never takes responsibility, who never admits mistakes, and who routinely takes all the credit for himself while leaving all the blame to others. 

미국 정부는 심지어 가장 가까운 우방마저 져버렸다. 미국이 EU로부터의 입국을 금지했을 때, EU에 어떤 사전 정보도 주지 않았다 - 하물며 급격한 조치에 대해서는 말할 것도 없다. 알려진바에 따르면 독일의 제약회사와는 코비드-19 백신에 대한 독점적 권리를 사기 위해 10억불을 제안했다는 추문이 있었다. 이제와서 미국 정부가 노선을 바꾸고 국제적인 공조를 제안할지라도, 누가 책임감도 없고, 실수도 인정하지 않으며, 다른이들은 비난하면서도 자화자찬만 하는 지도자를 따르겠는가?

If the void left by the US isn’t filled by other countries, not only will it be much harder to stop the current epidemic, but its legacy will continue to poison international relations for years to come. Yet every crisis is also an opportunity. We must hope that the current epidemic will help humankind realise the acute danger posed by global disunity. 

미국이 남겨둔 공백을 다른 나라들이 채우지 못한다면, 현재의 유행병을 막기는 더욱 힘들어질 것이고, 이러한 전례는 앞으로 다가올 시대에 국제적 관계의 악화를 지속시킬 것이다. 하지만 모든 위기가 곧 기회이듯, 현재의 유행병이 인류가 국제 분열이 심각한 위협을 초래한다는 것을 깨닫는 계기가 될 것을 희망해야 한다. 

Humanity needs to make a choice. Will we travel down the route of disunity, or will we adopt the path of global solidarity? If we choose disunity, this will not only prolong the crisis, but will probably result in even worse catastrophes in the future. If we choose global solidarity, it will be a victory not only against the coronavirus, but against all future epidemics and crises that might assail humankind in the 21st century. 

인류는 선택을 해야 한다. 분열의 길로 추락할 것인가, 아니면 전세계적 연대의 길을 선택할 것인가? 우리가 분열을 선택한다면, 이번 위기를 장기화할 뿐만 아니라, 아마도 미래에 더욱 큰 재앙을 야기하게 될 것이다. 우리가 세계적 연대를 선택한다면, 단지 코로나바이러스에 대해서 승리하는 것만 아니라, 21세기에 인류를 괴롭힐 모든 전염병과 위기들에 대한 승리가 될 것이다.

Yuval Noah Harari is author of ‘Sapiens’, ‘Homo Deus’ and ‘21 Lessons for the 21st Century’

 

Copyright © Yuval Noah Harari 2020

https://news.yahoo.co.jp/byline/seodaegyo/20190512-00125743/

 

文大統領2周年インタビュー、「無礼記者」への批判の本質(徐台教) - Yahoo!ニュース

韓国の文在寅大統領が就任2周年に際し行ったインタビューにおける、対談を担当した記者の「無礼な」態度が話題だ。だがこれは、「ジャーナリズムと権力」という本質的な問いを含んでいる。経緯と論点をまとめた。

news.yahoo.co.jp

 

최근 진행했던 문재인 대통령 취임 2주년 대담에서 기자의 질문 태도/방식등에 대한 이슈를 바라본 기사.

재일교포이자 서대교 기자라는 분이 쓴 기사인데, 이 사건의 본질이랄까 현재 대한민국 저널리즘의 수준을 정확하게 짚은 내용이라고 생각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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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기사 원문 번역)

한국의 문재인 대통령 취임 2주년 인터뷰 시, 대담을 담당했던 기자의 무례한 태도가 화제다. 하지만 이것은 저널리즘과 권력이라는 본질적 문제를 포함하고 있다. 경위와 논점을 정리했다.

● 80분의 생방송 인터뷰

 북조선(일본은 북한은 북조선으로 지칭한다, 이후 모두 북한으로 통일)이 바로 직전, 2번의 미사일 발사훈련을 실시했던 9일, 문재인 대통령은 청와대에서 생방송 인터뷰에 출연했다. 취임 딱, 2년이 된 시점이며, 통산 4번째의 생방송이며, 또한 국내방송에서 처음으로 1대1의 대담형식의 인터뷰였다.

 상대는 공영방송 KBS의 송현전 기자로, 경력 20년, 현재 국회기자클럽의 반장을 맡고 있고 정치분야 전문기자이다.

 인터뷰는 오전8시30분부터 약 80분 간 진행됐다. 문대통령은 한반도 정세, 국내정치, 사법개혁, 인사, 고용, 빈부격차가 점점 심해지고 있는 문제, 외교등 70개 이상의 질문에 대답했다. 청와대 측에 따르면 '사전 질문내용에 대한 협의는 없었다'라고 한다.

● KBS기자에 대한 비판

 그러나 이날, 인터뷰의 내용볻다 화제가 된 것은, 인터뷰 진행자인 송기자였다. 생방송 중 SNS에는 기자에 대한 비판글이 쇄도했으며, 네이버 검색 키워드 1위에도 올랐다.

 송기자에 대한 비판은 3가지로 요약된다. 일단, 문대통령의 말을 중간에서 몇 번이나 자르면서 질문을 덧씌우는 인터뷰 방식, 다음은 얼굴을 찌푸리는 등 표정관리가 되지 않았던 점, 마지막으로는 제1야당인 자유한국당의 입장을 대변하는 듯한 질문내용이었다.

 특히 문재인 대통령을 쳐다보면서 '독재자'라는 말을 꺼낸 것은 커다란 논란을 불러일으켰다. 당시 논란이 되었던 부분의 텍스트를 청와대가 제공한 원문은 아래와 같다.

 송기자 : 제1야당인 자유한국당의 입장에서 보면, 청와대가 주도하고 여당이 이끌어나가면서, 야당의 의견은 거의 반영되고 있지 않다. (중략) 그래서, 대통령을 지목해서 '독재자'라고 부르는게 아닐까요? 이 '독재자'라는 소리를 들으시면서 어떤 기분이십니까?

 문대통령 : (중략) 그간 (자유한국당은) '국회선진화법'의 혜택을 많이 받아왔으면서, '국회선진화법'이 정한 방법을 부정하는 것은 안될말이겠죠. 게다가 '촛불'의 민심으로 탄생한 정부에 대해, 지금처럼 독재, 더욱이 독재라고 하는 것도 설득력이 떨어지는데, 색깔론(이라는 딱지를 붙여)도 모자라서 '좌파독재'라고 규정하는 것은,.. 참 어떻게 말해야 할지를 모르겠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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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개인감상) 나도 무어라 말해야 할지를 모르겠다. 자유한국당 미친새끼들에게 무슨 말을 해줘야 하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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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대담 종료후, KBS의 방송 게시판에는 2,000개가 넘는 댓글들이 올라왔으며, 제1야당인 자유한국당의 해산청원에 180만 명의 서명이 모인 청와대 국민청원 게시판에도 '기자를 규탄한다', 'KBS는 사죄하라'등의 댓글이 쇄도하고 있다.

 또한 송기자는 대체 누구인가와 같은 개인적인 공격으로까지 비화하고 있다. 조카가 아이돌 그룹에 있다는 정보가 과거의 기사로부터 나왔으며, 순식간에 인터넷을 통해 퍼져나갔다.(속칭, 신상털기)

 

● 토론의 본질은 '저널리즘(Journalism)'에 있다

 KBS에 대해 '무례', '화가난다'와 같은 표현으로부터 알 수 있듯이, 송기자에 대한 비판을 한 이들은 주로 문대통령의 지지자이다. 공격적 태도에 축하해야 할 취임 2주년을 무시한 것 같은 인상마저 주었을 것이다.

 그러나, 이번 소동의 본질은 '지지자들의 단순한 폭주'가 아니라는 점에 주목하고 싶다. 저널리즘이라는 관점에서 생각해보자면, 중요한 질문을 제기한 것이다. 그것은 '권력'에 어떻게 상대할 것인가라는 점이다. 송기자 개인에 대한 공격과 공익의 관점이라는 두개의 부분으로 나누어서 이 비판들을 생각해봐야 한다는 것이다.

 송기자를 비판한 사람들이 SNS에 올린 사진 한장이 대중들의 공감을 얻었다. 2017년 1월1일, 최순실 게이트 당시, 자신(박근혜)과 최측근인 최순실에 대해 권력남용사건으로 시민들로부터 퇴진요구에 직면한다. 2016년 12월9일 국회의 탄핵결정안 통과로 직무정지 상태였던 박근혜 대통령이, 청와대에 기자를 모아놓고 설명을 하는 장면을 찍은 사진이었다.

 

2017년 1월1일 박근혜 신년 기자 설명회

 당시, 녹음과 노트북 지참을 금지당한 기자회견장에는, 양손을 앞에 모으고 공손히 박대통령의 말을 경청하는 기자들의 모습에서는 권력을 비판하는 저널리즘 본연의 모습은 볼 수 없었다. 실제 이 날, 변명으로 일관한 박대통령에 대해 지적하는 비판적 질문은 전혀 볼 수 없었다.

 또한 이 장소에는 이번(문대통령 대담) 인터뷰를 진행한 공영방송 KBS 역시 있었다.(송기자는 아님) 무엇보다도 KBS는 이명박, 박근혜로 이어진 보수정권 동안 정권의 손발이 되어 정권을 비호한 전과가 있다. 기자와 쓰레기를 합쳐 '기레기'라 부르는 것도 널리 퍼져있다.

 이런 기억을 갖고 있는 시민들이, 이와 같은 방송의 이중 잣대에 분노한 것이 이 사건의 본질이다. 권위주의 정권 밑에서는 숨죽이던 방송이, 만만해 보이는 문대통령에게는 건방진 모습을 보이는 것에 시민들은 화가 났던 것이다. KBS의 수신료(2500원)은 전기료에 합해져서 징수되고 있다. '공정성을 잃은 KBS 수신료 폐지를', 'KBS 해체' 와 같은 청원들이 청와대에 올라오고 있다.

● 반성의 모습은 보이지 않고

필자는 이번 소동을 지켜보면서, 다양한 관점이 있는 것은 좋은 것이라고 단순하게 생각했다. 기자라는 같은 직업을 가진 이로서 '나라면 어땠을까? 라 생각해보지만, 역시 저런 상황이라면 앞장서 냉정하고 비판적인 질문을 하면서 부딪히려했을까라는 생각이 든다. 그 결과(비겁함의 결과) (시민들로부터) 비판을 받는것은 어쩔 수 없이 받아들여야 한다.

 무엇보다 '권력에 어떻게 행동해야 하는가'라는 토론을 통해, 경험을 축적해가는 것이 중요하다. 이 부분이 한국의 주요 언론들이 '송기자에게 일부 비판도 있었다'라고 언급하며 대수롭지 않게 지나쳐버린 것은 아쉬움이 남는다. 여기선 어떤 반성의 모습도 보여지지 않는다.

 또한, 문대통령의 (대담시 공격적 질문에 대한) 답변 방식에 대해, 매일경제는 다음날인 10일, '문대통령은 "좀 더 공격적으로 진행했어도 괜찮았겠다."라고 말씀하셨다'라는 청와대 관계자의 코멘트를 전했다. (매일 경제 기사의 의미, 문대통령도 송기자에게 대담 끝 무렵에 좀 더 공격적으로 질문했어도 괜찮았겠다라고 이야기했다. 즉 대담 본인도 별 문제 없다는데 왜 시민들이 지랄이냐? 라는 뉘앙스가 기사에 담겨있음을 의미. 기자는 기사를 전달하고, 기레기는 시민을 가르키려 든다는 게 큰 차이점 중 하나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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내가 본 문재인 대통령 취임 2주년 대담시 나온 기자의 태도 문제에 대한 기사중 가장 균형 잡힌 글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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