검찰개혁을 시작한 조국. 그의 실패의 발자취를 다룬 내용.

언젠가는 다시 시작될 검찰개혁의 쓴약이 되기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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p31

 조국 수석은 평생 학자로 살아왔지만 민정수석실 업무 특성을 바로 파악했다. 불과 한 시간 남짓 이뤄지는 나의 보고에도 바로 적응하고, 의사결정도 매우 빠른 상사였다.

 

p32

 처음 민정수석실 근무를 시작했을 때, 조국 수석은 점심시간에 혼자 나갔다가 한참 지나서 들어오곤 했다.

 "수서님, 어디 다녀오시나요?"
 "구내식당에 다녀오는 길입니다."
 "왜 혼자 다녀오셨어요?"
 "황 국장도 개인적인 점심 약속이 있을 것 같아 불편하게 하지 않으려고 혼자 먹었습니다."
 "수석님께서 업무에 집중하실 수 있도록 보좌하는 것이 제 일입니다. 잘 보좌하기 위해서는 수석님의 뜻을 잘 알아야 하는데 워낙 업무가 바쁘셔서 의중을 들을 기회가 없어서 걱정입니다. 앞으로 점심 약속이 없으시면 식사를 저랑 같이 하시는 게 좋겠습니다. 그리고 수석님께서 혼자 구내식당에서 식사를 하시면 제가 수석님을 소홀히 모신다고 욕먹습니다. 혼자 점심을 드시러 가시는 것은 저를 도와주시는 것이 아니라 '나쁜 보좌관'을 만드시는 것입니다."

 그 이후 우리는 함께 점심을 먹었다.

 

p34

  일 이야기 외에는 대부분 책에 관한 이야기를 나누었다. 조국 수석은 청와대에 근무하면서도 교수 재직 시절 출간했던 책 2권의 개정판을 내기도 했다. 주 6일 근무다 보니 딱 하루 쉬는 휴일에 집필로 휴식을 대신했다. 몸은 물론 머리도 하루쯤은 다 내려놓고 쉬시라고 여러 번 부탁 아닌 부탁을 드렸지만, 책을 읽고 쓰는 일이 휴식과 다름없다는 대답만 들었다.

 조국 수석이 출간한 책들을 읽은 독자라면 익히 알고 있겠지만, 조 수석은 법학자 출신답게 정확한 기록이 몸에 밴 사람이다. 특히 수석의 기억력은 따라올 사람이 없었다. 드라마 <이상한 변호사 우영우>에 등장하는 우영우처럼 포토그래픽 기억력의 소유자였다. 그래서 다른 말을 하기 어려운 상사였다. 그런 그가 윤석열 검찰이 앞뒤 잘라내고 왜곡한 사실들로 사냥을 당했으니 그 정신적 고통은 짐작하기조차 어렵다.

 

p39

 2017년 7월 18일 청와대 페이스북에는 '청와대 민정수석실의 수상한 장비 철거 작전'이라는 동영상이 올라왔다.

 

청와대 민정수석실로 올라가는 계단 앞에 '계단 가림막'과 '검색대'를 철거하는 장면이었다. 언뜻 평범한 검색대처럼 보이지만, 자세히 보면 철제 난간 사이마다 설치해 종이 한 장도 빠져나가지 못하도록 막은 가림막이었다. 검색대 옆에 있는 커다란 철제 장비는 특수용지를 감지하는 센서였다. 박근혜 정부 민정수석실이 설치한 것들이었다. 이것을 처음 발견해 철거를 제안한 사람이 바로 나였다. 청와대에 들어올 때부터 있었던 것이었기에 무심코 지나다녔지만 '저게 왜 있지?'라는 의문이 들어 여러 사람에게 물어 용도를 확인한 후 조국 수석에게 철거를 제안했다. 

 박근혜 정부 민정수석실은 모든 문건을 작성할 때 반드시 특수처리된 용지를 사용하도록 했다고 한다. 이 용지를 들고 검색대를 통과하면 경고음이 울린다. 최순실의 남편이자 박근혜 전 대통령의 보좌관 출신인 정윤회가 비선 실세라는 문건이 언론에 유출된 직후, 당시 민정수석이었던 우병우의 지시로 이런 시설물과 장비를 설치했던 것이다.

 

p49

 민정수석실에서 가장 미안한 마음을 가진 사람들은 문재인 대통령의 자제들이었다. 다른 특수 관계인들보다 자제들에 대해서는 더욱 엄격했다. 어려운 점을 듣기보다, 그것이 무엇이든 하지 않는 것이 최선임을 주지하다 보니 그들이 할 수 있는 일이 거의 없었다고 해도 과언이 아니다. 뭘 하지 못하도록 하는 게 민정수석실의 주된 역할이다 보니 자제들은 친인척을 관리하는 민정비서관실의 특별감찰반 자체를 불편해했다고 한다. 자제를 관리해야 하는 특별감찰반의 고충도 많았다고 들었다. 양쪽 다 하소연할 데가 없는 사람들끼리의 불편한 만남이었을 것이다. 아마도 문 대통령의 자제들에게 '우리 아버지가 대통령'이라는 사실은 자랑스러움에 앞서 속박이었을 것이다.

 

p50

 조국 수석에게는 제자가 많았다. 제자뿐 아니라 사회 곳곳에 조 수석과 인연이 있는 사람들이 많았다. 청와대에서 일하고 싶은 사람들이 여러 경로를 통해 조 수석에게 추천을 부탁하기도 했다.

 어느 날 조국 수석이 아무개를 아느냐고 내게 물었다. 나도 잘 알고 있는 후배였다. 이 후배가 정부 부처에 있는 국장하고 수석을 방문한다고 하는데 어떻게 하면 좋을지 물었다. 나는 단호하게 만나지 말라고 했다. 시기도 문제거니와 사적인 친분으로 민정수석을 만난다면 사전 점검이 필요하다고 했다. 사실 수석의 질문에도 '만나면 안 되는 일'이라는 답이 담겨 있었고, 당연히 내가 그렇게 말할 것을 수석도 알고 있었다. 보좌관인 내가 정리해주기 바란다는 요청을 담은 질문이었다.

 나는 아무개에게 전화했다. "사적인 인연으로 공직의 관례를 깰 수는 없으니 필요한 내용에 따라 민정수석실 선임 행정관이나 담당 행정관을연결해주겠다. 그리고 민정수석에게 사적인 친분을 이용해 면담 요청을 하지 말라"고 경고했다.

 조국 수석은 청와대에서 일하고 싶어 하는 제자가 있을 경우 자신이 청와대에 있는 동안에는 추천하기 어렵다고 명확하게 선을 그었다. 하지만 사람 마음이란 것이 서운함이 우선인지라 조 수석을 원망하는 사람들이 있었고, 이런 이야기를 들을 때면 수석도 많이 속상해했다. 내가 당사자에게 전화해서 "민정수석이라는 자리는 청와대의 공직기강과 인사 추천의 문제까지도 점검해야 하는 자리다. 제자를 추천할 경우 제대로 역할을 하지 못하고, 영이 서지 않는다. 이해를 바란다"고 말하며 문재인 정부의 성공을 위해서 감수해달라고 요청했다. 

 청와대에서 원하는 업무 능력을 갖추고 있던 한 제자는 조국 수석이 청와대를 떠난 이후에야 행정관으로 일하게 되었다. 그는 청와대에 온 이후 업무 기여도, 전문성 모두 인정받았다. 다만 조국의 제자라는 이유로 청와대 입성이 늦어졌을 뿐이다.

 

p54

 박근혜 정부에서 임명한 황찬익 감사원장이 임기를 마치고 퇴직할 무렵이 되자 후임 감사원장을 추천받고 검증을 시작했다. 문재인 대통령은 법률가, 특히 판사 출신이 좋을 것 같다고 생각하셨던 것으로 기억한다. 그리고 많은 사람이 후보군으로 추천되었다. 하지만 검증을 통과하지 못했다. 황당한 일이었다. 내가 직접 검증 업무를 담당한 것이 아니다 보니 계속 '검증 중'이라는 말만 들었는데, 알고 보니 20명 넘게 검증했다고 한다. 한국 사회 지도충 사람들의 민낯을 확인하는 것이기도 했다. 

 결국 감사원장 후보로 지금은 국민의힘 국회의원이 된 최재형으로 결정되었다. 최재형은 검증 과정에서 특별한 문제는 없었지만, 지나치게 보수적인 생각을 가진 사람이었다. 그리고 그는 보수 언론과 원자력발전 분야 주요 인사와 친인척 관계였는데, 이 점이 나중에 문제를 일으킬 소지가 있었다. 나는 조국 수석에게 다음과 같이 의견을 드렸다. "본인은 물론이고 주변 인사들이 너무 보수적인 분들이어서 문재인 정부 국정전찰에 동의하지 못할 것입니다. 그리고 지금은 그렇지만 나중에 보수 인사들의 영향을 받아 어떻게 변할지 모릅니다."

 판사 출신 인재 후보군의 인력 풀이 좁다는 것이 문제인데다가 인사 추천은 민정수석실의 몫이 아니었다. 민정수석실을 검증만 할 뿐 최종 결정을 하는 단위는 아니었다. 조국 수석도 여러 걱정을 했지만 인재 후보군의 한계로 더 이상 감사원장 후보자를 찾기 어렵다는 이야기를 듣고 있었다. 매우 보수적이지만 공직자로서는 구체적으로 드러나는 흠결이 없어 중요 기관장을 마냥 공석으로 비워둘 수도 없는 상황이었다. 이런 상황과 맞물려 최재형 후보자는 감사원장이 되었다. 하지만 이후 나의 우려는 결국 현실이 되고 말았다.

 

p101

 청와대 민정수석실 초대 반부패비서관은 검사 출신의 박형철 변호사였다. 그는 대검찰청 공안2과장, 서울중앙지방 검찰청 공공형사부장을 거쳐 2013년에는 윤석열 당시 수원지검 여주지청장이 팀장을 맡았던 국정원 대선 개입 수사팀의 부팀장을 맡았다. 이 때문에 박근혜 정부에 의해 좌천되어 부산고등검찰청 검사로 근무하다가 2016년에 검찰 조직을 떠나 변호사로 활동하고 있었다. 아마도 이런 이력 때문에 일찌감치 반부패비서관으로 천거되었던 것 같다.

 내가 후일 조국 민정수석에게 박형철 비서관이 임명된 경위를 물었더니 조국 수석은 "글쎄요, 저보다 하루 늦게 임명되긴 했지만, 제가 민정수석에 취임했을 때 이미 반부패비서관으로 내정되어 있더군요."라고 답했다. 박형철 비서관은 나중에 '유재수 감찰 무마' 사건, '울산 하명 수사' 사건, 특감반원 김태우 사건 등 윤석열 검찰이 문재인 대통령과 청와대를 겨냥한 사건들에 직/간접적으로 관여하게 된다.

 

 박형철 비서관은 초대 특감반장으로 공안검사 출신인 이인걸 변호사를 추천했다. 청와대 내에서 공안검사 출신을 임명하는 것에 대한 반대의 목소리가 터져 나왔었다. 특히 민정수석실 내부 반발도 심했다. 박형철 비서관은 "비선관이 선임행정관 하나도 추천 못 합니까?"라며 조국 수석에게 항변했다. 조국 수석은 결국 박형철의 손을 들어줬다. 결국 공안 검사 출신을 특검반장에 임명함으로써 특감반은 박형철 비서관의 완벽한 통제권 안에 들어갔다. 만약 그때 다른 선택을 했다면 뒤에 언급할 특감반 사태를 일어나지 않았을지도 모른다. 

 조국 수석은 검찰 출신인 그가 청와대에 들어와서 행여 고립될까 봐 염려해 그를 많이 배려하라고 나에게도 여러 차례 당부했다. 그러나 박형철 비서관과 나는 늘 부딪혔다. 내가 보기에 그는 문재인 정부의 국정철학에 동의하지 않았다. 그는 검/경 수사권 조정이 본격화되자 드러내놓고 검찰의 입장을 옹호했다. 나는 2019년 8월 이른바 '조국 사태' 당시에 그가 윤석열을 위해 움직였다고 생각한다. 사태 초기 청와대는 중요한 국면마다 박형철을 통해 전해 들은 검찰의 입장에 기울어 오판을 거듭했다. 내 생각에, 박형철은 결국 검사였고 윤석열의 사람이었다.

 

 박형철 비서관은 같이 일해보니 스마트한 사람이었다. 업무능력도 좋았고, 운동도 잘했다. 처세에도 능했던 그는 검사직을 떠났음에도 검찰의 이익이 침해될 우려가 있을 때에는 늘 검찰 입장을 대변했다. 조국 수석의 배려를 이용하여 늘 교묘하게 검찰의 이익을 청와대 내부에서 관철하려고 애썼다. 그는 퇴근길에 윤석열 중앙지검장이 살고 있는 아크로비스타로 가서 함께 술을 마셨다고 자랑하고는 했다. 그때는 그러려니 했지만, 나중에 조국 법무부 장관 후보자에 대한 수사가 시작되고 난 다음 그 얘기를 떠올리고는 등골이 서늘했다.

 그런 박형철 비서관에게 수사권 조정이나 검찰 과거사 문제는 결코 소홀히 할 수 없는 일이었을 것이다. 그는 검찰의 수사 역량이 얼마나 뛰어난지, 그에 비해 경찰이 수사를 얼마나 못하는지 등을 틈나는 대로 민정수석실 사람들에게 설파했다. 박형철은 내가 청와대에서 나오고 나서도 한참 동안 민정수석실에서 일했다. 조국 수사 국면에서 그는 "조국이 사모펀드의 주인이라고 큰 소리를 쳤다"고 했으며 "검찰이 아무 근거 없이 그랬을 리 없다"고 말했다고 한다.

 나는 이 얘기를 전해 듣고 쓴웃음이 났다. 조국이 민정수석을 그만둔 것이 2019년 7월이었으니, 박형철 비서관이 조국 수석과 함께 일한 기간은 만 2년이 넘는다. 그동안 박형철은 도대체 조국의 어떤 모습을 보았던 것일까. 내가 지켜본 조국 수석은 결코 공적 영역에 사적인 이해를 끌어들이는 사람이 아니었다. 실제 수사 결과도 조국 수석이나 정경심 교수 모두 사모펀드의 주인이 아닌 것으로 밝혀졌다.

 검찰 출신인 박형철 비서관이 검찰 입장이나 이해에 공감하는 것까지는 불가피했다고 본다. 그렇더라도 조국이 민정수석의 자리에서 사모펀드를 운영했다는 누명에 대해 단호하게 "그럴 사람이 아니다. 신중해라. 증거를 잘 살펴봐라."라고 말하지는 못할망정 "검찰이 아무 근거 없이 그랬을 리 없다"고 하다니.

 박형철 자신도 검찰에 의해 울산 하명 사건과 유재수 사건으로 두 건이나 기소당했다. 이 두 사건은 이른바 '조국 사모펀드'설을 입증하지 못한 윤석열 검찰이 조국을 옭아매려고 캐비닛을 뒤져 만든 사건들이다. 당시 박형철 비서관은 검찰이 의도하는 대로 진술했다고 들었다. 그러고도 자신 또한 기소를 면하지 못했다.

 엘리트 검사로 살아온 박형철은 자신이 보피했던 민정수석의 범죄를 캐기 위한 검찰 수사에 피조사자로 출석했을 때 기분이 어땠을까. 검사 앞에 앉아 추궁을 당하고, 일일이 변명할 때 어떤 심정이 들었을까. 조사에 적극 협조했는데도 기소되어 피고인이 된 심정은  또 어땠을까. 어쩌면 그 또한 회한을 느끼고 있을 것이다. 윤석열 검찰의 조국 수사는 옳은 일이었는가? 윤석열 검찰의 당신에 대한 수사는 올바른 일이었는가?

 

p139

 나는 2019년 1월에 청와대 근무를 마치고 그해 3월부터 민간기업의 상임감사로 재직하고 있었다. 재무구조가 부실한 기업에 대한 채무 재조정을 비롯해 신규 자금 지원을 통한 기업 정상화, 비핵심 자산 매각 등 사업 재편, 핵심 자산 매각 등을 통한 한계기업 구조조정을 전담하는 기업이었다.

 2019년 5월 어느 날, 정책실과 협의할 일이 있어서 청와대에 갔다가 조국 민정수석에게 인사차 집무실에 들렀다. 조국 수석이 반갑게 맞아주더니 "저녁에 식사 약속 있나요?"라고 물었다. 웃으면서 대답했다. "수석님이 물으시니, 있던 약속도 없어야죠."

 단둘이 마주 앉아 저녁을 먹는 자리에서 조 수석이 고민을 털어놓았다. "대통령께서 거듭 법무부 장관직을 권하시네요. 요즘 그 문제로 고민 중입니다." 어느 정도 예상했던 일이었다. 조 수석은 이미 오래전부터 문재인 대통령과 '검찰개혁'에 대해 의기투합한 사이였고, 문재인 정부가 출범한 이후에는 중요한 국정과제인 권력기관 개혁을 도맡아서 청사진을 그린 민정수석비서관이다. 대통령이 그가 이 일을 끝까지 마무리해주기 바란다는 것은 불문가지였다.

 내가 물었다. "수석님은 어떻게 하고 싶으신가요?" 조 수석은 "나야 학교로 돌아가고 싶죠." 그의 대답도 역시 내가 예상했던 대로였다. 그는 결코 권세를 탐하지 않는 천상 학자였다. 문재인 정부 초대 민정수석을 맡았던 것도 일종의 '공익 근무'였다. 그런데 바로 그 '공익에 대한 책임감'이 그의 발목을 잡았던 것 같다. 문재인 정부의 권력기관 개혁에 깊이 관여해 온 처지인데 일을 하다 말고 혼자 마음 편하게 학교로 돌아가는 것이 못내 마음에 걸렸을 것이다.

 "다른 분들과도 상의하셨을 텐데, 뭐라고들 하던가요?"
 "노영민 실장을 비롯해 몇 분과 상의했는데, 다들 '도망칠 생각하지 말고 문재인 정부와 운명을 함께해야 한다'더군요. 장관을 맡기 싫으면 내년 총선에 부산 출마라도 해야 한다네요."
 "죄송하지만, 저도 같은 말씀밖에 못 드리겠네요. 학자로 살고 싶은 수석님의 마음과 무관하게 수석님은 이미 문재인 정부의 개혁을 상징하는 인물이 되셨습니다. 함께 책임을 지실 수밖에 없습니다."

 그리고 말을 이었다.

 "그런데 제 생각에는 법무부 장관직을 맡으시는 것보다는 총선 출마가 나을 것 같습니다. 지금 방배동에 살고 계시니 서초갑에 출마하시면 좋겠습니다. 아시다시피 강남/서초는 자유한국당의 텃밭인데, 수석님이라면 해볼 만합니다. 더불어민주당의 불모지에 출마하셔서 내년 총선의 '선봉장' 역할을 하시면 문재인 정부에 큰 기여를 하시는 셈이죠. 출마하신다면 선거 준비는 제가 다 하겠습니다."

 10여 년 전 <검찰개혁을 말하다>라는 토크 콘서트에서 당시 교수였던 조국 본인이 "검찰개혁을 시도하는 법무부 장관은 검찰로부터 거센 저항과 보복을 당할 것"이라고 예언했었다. 지난 수십 년 동안 검찰이 무소불위의 권력을 휘둘러 온 것을 생각하면 당연히 예상할 수 있는 일이었다. 조국 수석은 장관직 수락은 그런 위험을 감수한 결단이어야 했다. 그 와중에 벌어질 살벌한 권력투쟁을 조국 수석 같은 '선비'가 감당할 수 있을지 걱정이 앞섰다. 그래서 나는 총선 출마를 권했다.

 검찰은 자기 조직의 기득권을 지킬 의사나 능력이 없다고 판단되면 조직의 수장인 검찰총장도 하극상으로 몰아내는 집단이다. 2012년 11월 당시 한상대 검찰총장은 회삿돈을 횡령한 혐의로 불구속 기소된 최태원 SK 회장을 봐주려다가 검찰 안팎의 거센 반발에 부딪혔다. 한 총장은 상황을 반전시키기 위해 '대검 중수부 폐지'를 제기했다가 검찰 내부의 조직적 반발을 초래해 임기가 9개월이나 남은 상태에서 후배 검사들에 의해 밀려났다.

 이 과정에서 맹활약했던 자가 서울중앙지검 특수1부장이었던 윤석열이다. '사람에 충성하지 않는다'는 것은 본인의 앞날에 방해가 되는 자는, 검찰 권력에 방해되는 자는 누구든 봐주지 않겠다는 말이었던 것이다. 하물며 검찰 선배도 아닌 학자 출신의 법무부 장관에게 검찰이 더욱 거세게 저항할 것은 불 보듯 뻔했다.

 조 수석이 대답했다. "다른 분들도 대부분 총선 출마를 권하시더군요. 그런데 저는 학교로 돌아가고 싶어요. 임명직 공무원이 되면 휴직을 하는 거라서 임기를 마치고 학교로 돌아갈 수 있는데, 총선에 출마해서 선출직 공무원이 되면 학교에 사표를 내야 합니다. 나로서는 학자로서의 정체성이 소중합니다. 그래서 출마는 하기 싫습니다."

 그 말을 들으니 더 이상 출마를 권할 수 없었다. 당시 상황으로는 출마를 안 하는 유일한 방법이 입각入閣하는 것이었다. 당/청 모두 조국 수석이 전국 단위의 이목을 집중시킬 수 있는 인물이라고 생각하고 있었다.

 

 

p176

 2013년 10월 19일 서울고등검찰청에서 열린 국회 법제사법위원회의 서울고검 및 서울중앙지검 등에 대한 국정감사에서 당시 새누리당(현 국민의힘) 소속이었던 정갑윤 의원이 증인으로 출석한 윤석열 당시 수원지검 여주지청장을 불러냈다. 윤석열 지청장은 당시 채동욱 검찰총장의 지시로 '국정원 댓글' 사건 특별수사팀장을 지휘하다가 "수사에 외압이 있었다"고 폭로해 이른바 '항명 파동'에 휩싸여 있었다.

 "증인은 혹시 조직을 사랑합니까?"
 "예, 대단히 사랑하고 있습니다."
 "사랑합니까? 혹시 사람에 충성하는 것은 아니에요?"
 "저는 사람에게 충성하지 않기 때문에 제가 오늘도 이런 말씀을 드리는 겁니다."

 이날의 어록 "사람에 충성하지 않는다"로 검사 윤석열은 '의로운 강골 검사의 표상'이 되었다. '국민 사기극'의 시작이었다. 이후 2016년 11월 '박근혜 정부의 최순실 등 민간인에 의한 국정농단 의혹 사건 규명을 위한 특별검사'(국정농단 특검)의 수사팀장을 맡게 되면서 윤석열 검사는 일약 '국민 영웅'으로 떠올랐다.

 이런 인기에 힘입어 문재인 대통령은 2017년 5월 19일 윤석열 대전고검 검사를 서울중앙지검장으로 발탁해 임명했다. 조국 수석에게 들은 이야기지만 윤석열은 정권 출범 초기부터 이미 서울중앙지검장에 내정되어 있었다고 한다. 그리고 그 당시 민정수석실 진용은 채 짜여 있지 않아 충분한 검증을 하지 못했다. 민정수석실에는 조국 민정수석 외에 극소수만 근무하는 상황이었다. 대통령선거 이후 즉시 임기를 시작한 촛불 정부의 운명이었다.

 게다가 문재인 정부 출범 직후 '검찰 돈봉투 회식' 사건이 터지면서 공석인 검찰총장 인선을 비롯해 검찰 인사를 서둘러야 했다. 이런 상황이다 보니 윤석열의 중앙지검장 임명은 속전속결로 진행되었다. 당시 민정수석실에는 장관 내정자들에 대한 검증 수요가 넘쳐 이미 국민 영웅이 된 윤석열을 제대로 검증할 여력이 충분하지 않았던 것이 사실이다. 이후 윤석열은 적폐 청산 수사를 주도하며 검찰 특수부 패밀리의 수장이 되어갔다. 만약 문재인 정부도 다른 정부와 같이 정상적인 인수위 과정을 거쳐 출범했다면 많은 것이 달라졌을 것이다.

 두고두고 아쉬운 점은 서초동에서 윤석열 대망설이 나오고 있었으나 윤석열은 그럴 그릇도 못 되거니와 특수부 측근 몇 사람이 꿈꾸는 허망한 지라시일 거라고 간과하고 넘어갔다는 것이다. 이것이 윤석열 검찰 쿠데타의 시작이었을지도 모른다.

 그로부터 2년 후 윤석열이 검찰총장 후보로 지명되었을 때 뉴스타파가 그의 변호사법 위반 혐의를 폭로했지만, 귀담아듣는 사람은 많지 않았다. 그만큼 다들 '의로운 검사'에 목말라 있었다. 온 국민이 속았고, 대통령도 속았다.

 

 그러나 윤석열의 본색이 드러나는 데에는 그리 오래 걸리지 않았다. 2019년 7월 25일 검찰총장으로 취임한 그는 한 달 후인 8월 27일 문재인 대통령이 지명한 조국 법무부 장관 후보자에 대한 대대적인 압수수색을 벌였다. 자신의 상급자인 박상기 법무부 장관에게 보고하지도 않고 기습적으로 벌인 일이었다. 대통령이 임명한 검찰총장이 대통령의 인사권을 부정하고 정면으로 반기를 든 것이다.

 사실 윤석열의 검찰총장 발탁 과정에서 그의 권력욕과 포악한 본성, 각종 비리 의혹 등을 알고 우려했던 이들이 없었던 것은 아니다. 특히 법조계에서 오랫동안 그를 봐왔던 이들은 그의 검찰총장 임명에 반대 의견을 제출했었다. 청와대 민정수석실에서 공직기강비서관으로 근무했던 최강욱 비서관도 그중 한 명이었다. 공직 후보자에 대한 인사 검증을 담당했던 최 비서관은 윤석열이 부적격자라는 보고서를 두 번이나 제출했었다.

 사실 조국 민정수석도 같은 의견이었다. 일각에서는 조국 수석이 윤석열을 천거하지 않았느냐고 오해하는 이들도 있지만, 그렇지 않다. 조국 수석은 내심 당시 김오수 법무부차관과 봉웅 대검찰청 차장을 검찰총장 후보로 꼽고 있었다고 나중에 말했다.

 그러나 문재인 대통령은 결국 윤석열을 검찰총장으로 임명했다. 오늘날 이를 두고 대통령을 비난하는 이들이 많다는 것을 잘 알고 있다. 윤석열에 의해 조국 일가가 '멸문지화'를 당하는 것을 가까이에서 지켜본 나도 솔직히 대통령에게 원망스러운 마음이 들 때가 없지는 않다. 그렇지만 당시 사정을 어느 정도 이해한다. 내 생각엔 문재인 대통령이 윤석열을 검찰총장으로 발탁하게 된 데에는 네 가지 배경이 있다.

 첫째, 윤석열의 '돌파력'이 검찰개혁에 도움이 될 것이라는 판단이었다. 수십 년 동안 기득권 카르텔을 형성하고 자신들의 기득권이 위협받는 경우 집단으로 저항하는 검찰을 내부에서부터 제압하려면 윤석열 같은 인물을 검찰 조직의 리더로 세워야 한다고 생각하는 이들이 많았다. 게다가 당시에 윤석열은 "사람에게 충성하지 않는다"라는 어록과 적폐 청산 수사등으로 대중적 인기를 누리며 '국민 검사'로 칭송받고 있었다.

 둘째, 검찰개혁에 대한 윤석열의 적극적인 태도였다. 2019년 당시 검찰총장천위원회가 추천한 후보는 윤석열(서울중앙지검장), 김오수, 봉욱, 이금로(수원고검 검사장) 등 4명이었다. 이 중 윤석열이 검찰개혁에 대해 가장 강력한 의지를 밝혔다. 조국 수석은 각 후보자 면담에서 윤석열 후보자만 수사/기소 분리에 적극 찬성이었고, 다른 후보자들은 소극적이었다고 했다. 최강욱 비서관에 따르면, 윤석열은 검/경 수사권 조정을 넘어 '수사와 기소의 분리'에도 동의했으며 고위공직자범죄수사처도 당연히 신설되고 권한이 강화되어야 한다고 주장했다고 한다. 얼마 안 가서 드러났듯이, 검찰총장이 되기 위해 본심과 전혀 다른 새빨간 거짓말로 대통령을 속인 것이다.

 셋째, 대통령 주변에 이미 윤석열과 친교를 맺고 그를 적극적으로 천거하는 인물들이 있었다. 이들이 대통령의 판단을 흐리게 만들었다. 이미 널리 회자되고 있는 인물들이어서 여기서는 굳이 실명을 언급하지 않겠다(좀 언급해 주지 아쉽네). 이들도 지금은 윤석열에 대한 배신감을 토로하고 있다.

 마지막으로 조국 수석이 좀 더 적극적으로 반대하지 못했기 때문이다. 대통령의 의중을 읽은 조 수석은 그럴 수 없었다. 조국 수석은 김오수 차관이 적임자라고 생각했다. 하지만 전임자인 문무일 검찰총장이 광주 출신으로 관례상 다시 호남 출신인 김오수 차관을 검찰총장에 임명하는 것은 정치적 부담이 컸다. 후보군 중에 강력하게 천거할 만한 사람이 없었던 것도 조국 수석이 반대하기 힘든 이유였다. 문재인 대통령도 마찬가지였을 것이다. 아직도 지역감정으로 인한 정무적 고려가 필요한 시점이라는 것이 안타깝다.

 권력의 실세라고 불리는 사람들이 윤석열과 술자리를 가진다는 이야기도 돌았다. 그중 일부는 윤석열에게 민주당 대선 후보로 나서야 한다는 말도 했다고 한다. 평소 이들은 민주당에 대선 후보가 많아져야 정권 재창출이 가능하다고 주장하던 사람들이었다. 윤석열에게 치열한 경쟁을 거쳐 대선 후보가 된다면 적폐 청산 수사로 국민에게 인기가 많으니 당신도 못 할 이유가 없다고 부추긴다는 소문이 무성했다. 

 윤석열의 대권에 대한 꿈은 어쩌면 야당이 아닌 '민주 진영'에서 심어준 것일지도 모르겠다. 윤석열이 대놓고 그런 뜻을 내비치지는 않았지만, 안희정, 박원순 등 유력 대선 후보들의 문제가 잇따라 불거지자 대권이 꿈이 아닐지도 모른다고 생각했을 것이다. 남은 방해물은 '조국'이 유일했다. 그래서 조국 법무부 장관 후보자 인사 청문회 과정에서 문제가 제기되자마자 득달같이 달려들어 조국을 사냥했던 것이다.

 2019년 12월 6일 자 <경향신문>에 <윤석열 "충심 그대로...정부 성공 위해 악역">이라는 제목의 기사가 실렸다.

https://m.khan.co.kr/national/court-law/article/201912060600025#c2b

 

[단독]윤석열 “충심 그대로…정부 성공 위해 악역”

윤석열 검찰총장(사진)이 “문재인 대통령에 대한 충심에는 변화가 없다”면서 “이 정부의 성공을 위해 내가 악역을 맡은 것”이라고 말한 것으로 전해졌다. 검찰은 패스트트랙(신속...

m.khan.co.kr

 유명한 친검親檢 기자 유희곤이 쓴 '단독' 기사였다. 이 기사는 "윤석열 검찰총장이 '문재인 대통령에 대한 충심에는 변화가 없다. 이 정부의 성공을 위해 내가 악역을 맡은 것'이라고 말한 것으로 전해졌다"로 시작한다. 요컨대 윤석열 검찰총장이 딴마음을 먹고 문재인 대통령에 대한 반란을 일으킨 것이 아니라 오히려 문재인 정부의 성공을 위해 욕먹을 각오를 하고 조국에 대한 수사와 '울산 사건'등의 수사를 감행했다는 것이다.

 그러나 이 기사는 황당무계한 '윤비어천가'였다. 이미 윤석열은 노골적으로 야욕을 드러내며 청와대에 칼끝을 겨누고 공공연하게 반란을 도모하고 있었다. 윤석열 일당에 의해 만신창이가 된 조국 전 장관은 2021년 3월14일 자신의 페이스북에 위 기사를 소개하면서 다음과 같이 글을 올렸다.

 당시 이러한 윤 총장의 정치적 언동을 접하면서 옛말이 떠올랐다. '구밀복검' 당시 윤 총장은 대통령을 겨누는 '울산 사건' 수사를 진행하고 있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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p187

 종편 방송인 채널A는 9월 21일 <"정경심 처음 봤다"던 병원장은 서울대 동기>라는 기사를 보도했다. "정경심 교수가 입원한 병원의 원장이 서울대 의과대 81학번인데, 정 교수도 서울대 영문과 81학번이다"라면서 "하지만 이 병원장은 '정 교수를 이번에 처음 봤다. 다른 환자들과 똑같은 입/퇴원과 진료 절차를 거쳤다'고 설명했다"라는 내용이었다. 채널A는 한 학년에 수천 명씩 다니는 종합대학에서 각각 의과대와 영문과를 다닌 두 사람이 서로 몰랐다는 사실이 정말 기삿거리라고 생각했을까.

https://voda.donga.com/view/3/all/39/1853586/1

 

[단독]“정경심 처음 봤다”던 병원장은 서울대 동기였다

별별뉴스 20190921

voda.donga.com

 

 이런 언론의 취재 경쟁으로 일부 병원에서는 정경심 교수의 치료를 거부하기도 했다. 전쟁 중에도 아군과 적군에 상관없이 치료해야 할 의료인들이 언론 보도가 집중되자 다른 환자의 치료에 방해된다는 이유로 치료를 거부한 것이다. 조국 장관은 정경심 교수가 치료받을 병원을 찾기 위해 애썼다.

 조국 장관의 동생은 넘어져 앰뷸런스를 타고 병원에 입원했다. 의사는 수술이 필요하다는 진료 소견을 가지고 있었고 동생은 수술을 위해 뒷머리까지 삭발했다. 하지만 담당 의사는 의사 출신 검사를 만난 후 수술이 필요 없다고 입장을 바꿨다. 영화 <그대가 조국>에 출연한 동생의 지인은 "찾아가는 병원마다 기자들이 쫓아와서 의료진이 부담스럽다고 환자로 받아주지 않았다"고 울분을 토했다. 

https://www.ytn.co.kr/_ln/0103_201910180431596961

 

조국 동생 "수술 필요 소견서, 검찰 온 뒤 달라져"

[앵커]조국 전 장관의 동생, 조 씨는 YTN 취재진을 만나 ...

www.ytn.co.kr

 

p189

 윤석열 검찰은 2019년 9월 6일 조국 후보자 인사청문회 진행 도중에 전격적으로 배우자 정경심 교수를 기소했다. 조민에게 발그된 봉사 활동 표창장을 정 교수가 위대했다는 혐의였다. 동양대 총장 최성해의 "표창장을 발급해준 적 없다"는 일방적인 주장만을 근거로 피의자 소환 조사도 압수수색도 없이 기소를 감행한 것이다. '검찰개혁을 추진하겠다는 장관의 임명을 막으려는 폭거'라는 비판이 일었다. 조국 장관 관련 온갖 의혹들을 반신반의하던 시민들은 분노하기 시작했다.

 억지 기소로 궁지에 몰린 검찰을 구원해준 것은 다음 날인 9월 7일 자 <조국 아내 연구실 PC에 '총장 직인 파일' 발견>이라는 제목의 SBS 단독 보도였다.

https://news.sbs.co.kr/news/endPage.do?news_id=N1005428668

 

[단독] "조국 아내 연구실 PC에 '총장 직인 파일' 발견"

지금부터는 조국 후보자 관련 소식 이어갑니다. 어젯밤에 청문회가 끝나갈 무렵에 검찰이 후보자 부인 정경심 동양대 교수를 기소를 했습니다. 딸의 총장 표창장을 위조한 혐의입니다.

news.sbs.co.kr

 "검찰이 이 PC를 분석하다가 동양대 총장의 직인이 파일 형태로 PC에 저장돼 있는 것을 발견한 것으로 SBS 취재 결과 확인됐습니다. 검찰은 총장의 직인 파일이 정 교수의 연구용 PC에 담겨 있는 이유가 석연치 않다고 보고 있습니다. 딸 조 씨에게 발행된 총장 표창장에 찍힌 직인과 이 직인 파일이 같은 건지 수사하고 있습니다."

 정 교수가 표창장을 위조했다는 검찰과 최성해의 주장을 뒷받침해주는 이 보도가 검찰에 대한 비판 여론을 순식간에 잠재웠다. 그런데 이 보도는 처음부터 끝까지 허구였다. 총장 직인 파일이 발견된 것은 '연구실 PC'가 아니고 '강사 휴게실 PC'였다. 게다가 이 강사 휴게실 PC는 SBS 보도 3일이나 지난 9월 10일 검찰이 동양대에서 임의 제출받은 것이다. 그 후에도 일주일 동안의 디지털포렌식을 거쳐 9월 17일에야 총장 직인 파일이 발견되었다.

 즉 "정경심 교수 연구실 PC에서 '총장 직인 파일'이 발견됐다"던 SBS의 보도는 파일이 발견된 PC가 틀렸을 뿐만 아니라 발견되기 10일 전의 '예언 보도'였던 것이다. SBS가 '타임머신'을 보유하고 있지 않다면 불가능한 일이다.

https://www.hani.co.kr/arti/society/media/950541.html

 

방심위, ‘정경심 PC서 총장 직인 발견’ SBS 보도 중징계 확정

방송통신심의위원회(방심위)가 ‘조국 전 법무부 장관의 부인인 정경심 동양대 교수의 업무용 컴퓨터에 동양대 총장의 직인 파일이 저장되어 있었다’고 보도한 <에스비에스>(SBS)에 대해 법정

www.hani.co.kr

 어쨋든 SBS의 예언 보도로 인해 정경심 교수의 '표창장 위조'를 사실로 믿는 사람이 많아졌다. 이런 여론이 정 교수의 재판 과정에서 매우 불리하게 작용했을 수밖에 없다. 그러나 SBS는 아직도 이 '예언 보도'에 대해 해명도 사과도 하지 않고 있다.

 

p205

 2023년 봄 이재명 더불어민주당 대표는 부모님의 묘가 훼손되는 수모를 당했다.

https://www.ohmynews.com/NWS_Web/View/at_pg.aspx?CNTN_CD=A0002909211

 

이재명 부모 산소 훼손당해... 사방에 구멍나고 돌 꽂혀

돌 발견한 지관 "무속테러" 주장... 이 대표, 페북에 사진 공개 "무슨 의미인가"

www.ohmynews.com

(나중에 이 행위는 이재명 대표의 문중에서 기 불어넣기라는 식의 물타기 기사가 나왔는데, 말도 안되는 헛소리다. 문중에서 진짜 그런 뜻으로 이런 행위를 했다면 적어도 자식인 이재명 본인에게 미리 알리고 의사를 물었어야 한다. 자식도 모르게 이런 행위를 했다는게 말이 되는가?)

 당시 나는 비슷한 수모를 겪은 조국 수석이 떠올라 더 참담했다. 2022년 조 수석 자택에서 함께 차를 마시며 이야기를 하던 중 수사 과정에서 가장 화났을 때가 언제인지 물은 적이 있었다. 조 수석은 인사청문회 과정에서 있었던 일을 이야기했다.

 다름 아닌 김진태 의원이 조국 수석 부친의 묘지석 사진을 공개했던 일이다. 

https://www.chosun.com/site/data/html_dir/2019/08/20/2019082002253.html

 

野 "2013년 사망한 조국 부친 묘비에 2009년 이혼한 며느리 이름"

野 2013년 사망한 조국 부친 묘비에 2009년 이혼한 며느리 이름

www.chosun.com

 당시 공개된 사진을 보면 묘를 밟지 않고는 찍을 수 없는 구도로 촬영되었다는 것을 쉽게 알 수 있었다. 
 "이렇게 찍으려면 아버님 묘에 올라서지 않고는 불가능하지요?" 조국 수석은 담담하게 말했지만, 화가 사그라들지 않은 눈빛이었다. 조 수석은 그 당시를 떠올리며 격분했었다고 말했다. 돌아가신 아버님께 불효를 저질렀다고 괴로워했다.

 부모의 묘를 훼손하는 것은 남은 가족에게 대놓고 수모와 치욕을 주는 행위나 다름없다. 조 수석과 이재명 대표에게 일어난 일 모두 사람으로서의 도리를 넘어선 것이다.

<1호기 속 수상한 민간인>이라는 기사를 통해 알려지고, <바이든 날리면> 사태의 시발점이며, 대통령 도어스테핑 질의/응답 중에 날카로운 질문으로 윤석열의 심기를 건드려서 파장을 일으켰던 MBC의 이기주 기사의 에세이.

이 책의 에필로그에 이런 구절이 있다.

 '얼마 전 한 강연에 초청받아 갔다가 "기자가 다 그렇지는 않을 텐데 지금처럼 피곤하게 살면 결국 고독하지 않겠냐"라는 기습 질문을 받았다. 예상치 못한 질문에 잠시 말을 할 수 없었다. 돌이켜보면 최고 권력에 대한 취재부터 '바이든 날리면' 사태, 도어스테핑 충돌 같은 연쇄 폭탄이 터질 때마다 나는 고독했다. 후폭풍을 이겨내는 것도 나 혼자 해야 할 몫이었다. 다른 선택지는 없었다.'

 

 어떤 면에서 보면 제대로 된 어른, 제대로 된 사회인이 되기 위해선 고독해지는 것을 피할 길은 없어보인다. 그리고 그 고독한 길을 피하지 않아야만 제대로 된 어른이 될 수 있지 않나 싶다. 

 

 

 

이 책일 읽은 소감은 과연 현상과 그 해석은 실무전문가가 제일 낫다는 점이다.

하지만 우리나라의 부동산 문제는 실무전문가로서는 해결할 수 있는 단계가 지나갔다.

(다른 나라도 그렇겠지만) 대한민국의 부동산 문제도 많은 복마전이 도사리고 있고 이미 기형화되어 있는 부분이 많다. 즉 병들어 있는 것이다. 병든 부분을 낫게 하려면 몸은 고통을 겪어야 한다. 즉 대한민국의 부동산 문제를 해결하려면 돈이 있는 사람이나 돈이 없는 사람이나(또는 중간에 있는 사람), 즉 모든 국민이 어느 정도의 고통을 감수해야 한다(마치 국민연금 문제처럼).

 지도자(우리나라에서는 거의 대통령을 의미하겠지)는 제대로 된 전문가 그룹과의 심도 있는 토의를 통해서 현황을 정확히 파악하고 대한민국의 부동산 정책이 추구할 방향을 일단 정하고 이를 국민들과 컨센서를 맞춰야 한다. 그리고 이 컨센서스로 도출된 방향과 그 정책들은 효과가 나타날때까지 10년이고 20년이고 꾸준히 실행하는 것이 필요하다. 중간에 당연히 어디가 아플 것이고 국민들은 못살겠다고 아우성을 칠 수 있지만 그걸 넘겨야 한다. 그럴 의지와 실행력을 갖춘 지도자가 나와야 한다.  그래서 매우 힘든 일이다. 어찌 보면 국민연금 개혁은 부동산 문제에 비하면 난이도가 절반도 되지 않는 일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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p143

 

 문재인 정부가 보유세를 제대로 올리지 않아서 집값이 폭등했다는 사람들조차, 고가/다주택자만 올리자는 포퓰리즘에 포획되어 있다. 우리나라에서 보유세를 강화하자는 것은 "고가/다주택자만 보유세를 올리자"는 것과 사실상 동의어다. 이렇게 해서는 세금을 많이 내는 사람들이 '징벌적'이라는 반발을 달랠 방법이 없다. 또 어디까지가 고가/다주택인가? 서울 아파트의 대부분이 종부세에 해당하는 상황이 되자 서둘러 세금을 낮추는 것을 보지 않았던가.

 

 비싸고 많은 부동산을 소유하면 더 많은 세금을 내는 것은 당연하다. 그러나 비례적으로 이를 많이 내는 것과 누진적으로 많이 내는 것은 다른 문제다. 여러 주택을 전국적으로 합산해서 훨씬 더 많이 내게 하는 것은 한국만 시행하고 있는 방식이다. 이 때문에 여러 채를 가지고 임대하는 경우 과다한 세금을 부담해야 하는 상황이 불가피하다. 이것이 임대사업자 등록시 임대료 인상을 억제하는 대신 종부세를 면제해준 이유다. 그랬더니 이번에는 다주택자에게 세금 혜택을 주었다는 비난이 이어졌던 것을 기억할 것이다. 

 

 사실 보유세를 높일 수 있는 가장 확실한 방법은 공시가격을 올리는 것이다. 하지만 이는 전체 부동산 소유자의 부담을 높이는 결과를 가져온다. 정치적으로 이것을 감당하지 못한 문재인 정부 당시 여당이었던 민주당은 금방 다시 깍아주겠다고 나섰다. 그렇게 해서 전체 주택의 95%에 대한 재산세율을 낮췄다. 물론 이재명 후보가 주장했던 모든 토지를 과세 대상으로 하는 국토보유세는 이를 모두 올리되 저가주택 소유자에게 대해서는 되돌려준다는 것이다. 조삼모사이며 결과는 같다. 결코 정치적으로 성공할 수 없을 것이다. 이렇게 명문에 집착한 비현실적이고 이상적인 목표에 끌려다니지 말아야 한다.

 

 내가 부동산 정책에 관여할 때까지 바로 이 대목에서 이른바 개혁주의자들과 입장이 달랐다. "보유세는 집값을 잡는 세금이 아니다"는 김동연 부총리의 발언(국회 답변, 2018년 8월 27일)은 내 생각과 같았다. 보유세 실효세율이 세계에서 가장 높다는 미국이 역설적으로 전 세계에서 가장 집값이 많이 오른 것을 어떻게 설명할 것인가? 그 나라는 유동성 때무닝고, 우리는 세금이 낮아서 그런가?

 

 따라서 보유세에 대한 냉정한 이해와 현실적 목표가 필요하다. 우리 보유세는 역사적으로 '고가/다주택'을 차등적으로 높게 과세하는 체제가 굳어져 있다. 대다수 국민들의 보유세 부담을 높이려는 시도는 사실상 노무현 대통령이 유일했지만, 실패했다. 왜 그랬을까? 세금은 역사성과 경로의존성이 있기 때문이다. 개혁, 반개혁의 문제가 아니라 먼저 국민을 설득하고 동의를 구해야 한다. 취득세 비중이 왜 높을까? 부동산 구입 시 내는 세금이라 조세 저항이 적기 때문이다. 그래서 취득세를 선납 보유세라고 보는 사람들도 있다. 조세 저항이 큰 보유세의 몇 해분을 일시에 받는 방식이라는 것이다.

 

 결국 보유세는 아파트, 단독주택, 상가, 토지 등 부동산의 종류와 소재 지역에 따른 과세 형평성을 단계별로 높여가는 가운데, 점진적으로 부담을 높일 수밖에 없다. 국민들이 화가 나 있다고 고가/다주택만 올리려 해보지만, 그 고가의 기준 설정 때문에 다시 갈팡질팡했던 것이 2019년 말부터 2021년 중반까지 정부/여당의 모습이었다. 실제 종부세를 강화했더니 서울 아파트의 반 이상이 그 대상이 되었고, 이에 놀란 정부와 민주당은 서둘러 세금을 다시 낮추려 허둥지둥했다. 특히 2021년 서울시장 보궐선거를 앞두고는 이전에 종부세를 올려야 한다는 목소리는 그 어디서도 찾아볼 수 없었다.'

 

p146. 국토보유세와 기본소득

 

 내가 이해한 것이 맞다면, 국토보유세와 기본소득 구상은 이렇다. "모든 토지에 대해 국토보유세를 물려서 실효세율을 1%로 하게 되면 약 50조 원의 재원이 발생하는데, 이를 재원으로 전 국민에게 나눠주는 것이 기본소득이다. 그럼 전체 토지 소유자의 부담이 증가할 것으로 우려하지만, 90%는 기본소득으로 돌려받는 것이 더 많게 된다. 또 실수요자나 업무용의 경우 감면하고, 고령자 등에게는 과세 이연할 수 있다. 사람별로 전국의 소유 토지를 합산해서 누진 과세하므로, 결국 고가/과다 토지 보유자만 더 많은 세금을 부담하고 일반 국민은 더 많은 혜택을 볼 수 있을 것이다."

 

 이재명 후보는 2017년 경기도지사 시절부터 적극적으로 기본소득과 국토보유세 추진을 준비하면서, 심지어 경기도만이라도 시행할 수 있게 해달라고 요구하기도 했다. 다양한 우려를 받게 되자 "90%의 국민은 이득이다"는 점을 강조함녀서, 이를 반대하는 것은 악성 언론과 부패 정치 세력에 놀아나는 '바보짓'이라고 항변한다(2021.11.15)

 

 그러나 우려가 계속되자 "국민들이 동의한다면"이란 전제를 달고 한발 물러서게 된다(2021.11.30). 이후 이재명 후보는 공시가격 현실화로 재산세가 크게 늘어나서 서민들의 피해가 예상되므로 공시가격 전면 재검토가 필요하다고 정부에 요구한다(2021.12.20). 이와 함께 2주택자에 대한 종부세 중과 완화 필요성도 언급하게 된다(2021.12.12). 국토보유세 정신은 온데간데없게 된다. 그러나 지지층의 반발이 우려되자, 며칠 뒤에는 세금이라는 이미지를 반대로 적용해서 토지이익배당금재로 이름을 바꾸어 추진하겠다는 의지를 밝힌다(2021.12.28).

 

 이재명 후보의 국토보유세는 이 책이 강조하고 있는 전형저긴 보유세 포퓰리즘 사례다. 포장을 어떻게 하든, 고가/과다 보유자만 올리자는 것이 그것이다. 실무적으로도 토지의 대부분을 차지하지만 소출은 거의 없는 산지, 녹지에 대해서도 1% 세금을 매기자는 것인기, 또 농지나 공장용지 같은 생산용도 토지는 어떻게 할 것인지 등에 대해서는 불분명하다. 더구나 결정적으로, 선거운동이 본격화되고 보유세 관련 여론이 악화되자 그동안 국토보유세를 강조해오던 정신과는 반대로 가고 말았다. 선거 캠프 내부에서는 당선 이후 추진하면 되지 않느냐고 이를 정당화했다는 얘기를 들었다. 하지만 '보유세 1%'는 이렇게 편법으로 달성할 수 있는 일이 아니다.

 

 

p207

 

 이명박 대통령식 반값 아파트였던 토지 임대부 보금자리주택은 정권 차원의 대대적인 추진에도 불구하고, 서초구 우면동(358가구)과 강남구 자곡동(402가구)에서 단 두 차례 760가구만 공급되었을 뿐이다.

 

 김헌동 사장(현 SH공사 사장, 과거 경실련 본부장으로 문재인 정부의 부동산 정책을 신랄하게 비판)은 이명박 정부 당시 보금자리주택 반값 아파트 공급 때문에 강남 집값이 떨어졌다고 주장한다. 그래서 이명박 대통령이 부동산 정책을 가장 잘했다는 얘기를 스스럼없이 한다. 궤변이다. 노무현 정부 동안 쌓인 거품, 그동안 누적된 공급 물량이 금융위기 이후 조정받았기 때문에 가격이 내린 것이다.

 

 

(감상) 사실 내가 저 당시(2012년도에서 2013년도) 서초,양재,우면,강남 일대의 부동산에 관심이 있어서 어느 정도 가격 동향을 알고 있다. 일단 내 경험상으로는 저 당시 우면동과 자곡동에 풀려나온 보금자리주택 물량으로 인해서 주변 아파트 시세에는 영향을 미쳤다. 보금자리주택과 비슷한 수준의 20~30평대 아파트의 경우 당시 1억까지 하락한 아파트도 있다. 그리고 이에 대한 연구결과도 존재한다.

 

https://www.mk.co.kr/news/realestate/8019630

 

보금자리주택, 주변 집값 5∼7% 떨어트렸다 - 매일경제

거래량도 다소 줄어…가격 안정성 측면에선 긍정적

www.mk.co.kr

 

당시 완공되서 입주가 시작된 보금자리주택의 영향으로 강남의 부동산값이 영향을 받자 당시 막 들어선 박근혜 정부는 이명박의 보금자리주택 계획을 백지화시킨다.

 

https://www.nocutnews.co.kr/news/1013431

 

이명박 정부 ''보금자리주택''…4년만에 중단 위기

{IMG:-1}이명박 정부의 주거정책인 ''보금자리주택''사업이 시행 4년만에 전면 재수정될 것으로 보인다. 박근혜 정부가 추진하는 ''행복주택''사업을 위해선 보금자리주택 사업의 축소 또는 일부

www.nocutnews.co.kr

 

 개인적인 견해로는 이명박의 보금자리주택이 계획대로 서울과 수도권에서 150만호 건설이 이루어졌으면 부동산 특히 대한민국 부동산 시세를 견인하는 아파트 가격의 거품은 많이 걷히지 않았을까 하는 생각이 있다.

 

 

 

p229

 우리가 일반적으로 접하는 주택의 금융화의 대표적인 현상은 금융을 매개로 한 자가 소유 열풍이다. 대부분의 서구 선진국들은 1990년대 중반부터 자가 소유가 늘어나 2000년대 초 정점에 이르렀는데, 특히 미국, 영국의 경우 10여 년 동안 5%p 이상 증가했다. 이때 자가 소유 확대를 견인한 것이 금융권의 장기주택담보대출, 즉 모기지였다. 그러나 금융 시스템을 매개로 증가한 자가 소유는 2008년 금융위기 전후 한계에 달하면서 자가율은 상당수 국가에서 정체되고 있다. 특히 미국, 영국은 늘어났던 자가율이 과거보다 더 낮아져버렸다. 이 과정에서 소득과 비교해 대출을 무리하게 받은 가구들이 집을 차압당하고 경제적으로 어려워지는 문제가 발생했다. 모기지는 금융산업 성장의 가장 큰 동력이었지만, 이런 대단위 모기지 시대가 '금융의 저주'를 불러온 것이다.

 이처럼 과다한 모기지 시대는 역설적으로 자가 소유의 한계를 가져왔다. 낮은 금리의 모기지가 더 많은 사람들이 부동산을 소유할 수 있도록 도왔지만, 거꾸로 부동산 가격 상승을 초래하면서 집값을 감당할 수 없게 만든 것이다. 이런 상황에서 특히 청년층과 소수 인종 가구들은 자가 소유율이 현격히 떨어졌다. 자가 소유 열풍이 역설적으로 세대별 격차와 소득 계층별 불평등을 확대한 것이다. 미국, 영국은 물론이고 북유럽 국가들조차 과도한 금융화의 결과로 집값과 임대료가 급등하고, 소득 대비 부채가 세계에서 가장 높은 수준이 되면서 주택시장이 불안정하고 취약하게 변해버렸다.

 

p230. 임대로 살 수밖에 없는 세대 VS  임대업자 세대

 대다수 선진국에서 자가 소유의 한계가 드러나는 가운데, 그동안 핵심적인 주택 정책이었던 공공임대주택마저 후퇴하는 중이다. 1990년대부터 대부분의 선진국은 공공임대주택 공급을 대폭 축소하거나 심지어 기존에 있던 물량까지 줄이고 있다. 이런 상황에서 민간임대에 거주할 수밖에 없는 세대·계층이 늘어나고 고착화되고 있다. 영국을 예로 들면, 2003년에는 자가율이 70%였던 것이 2015년에는 64%로 줄어들었는데, 같은 기간 35세 이하의 경우는 50.3%에서 28.9%로 자가율이 급감했다. 반면 민간임대에 사는 비율은 27.2%에서 50.4%로 급증했다. <그림 11-1>은 영국, 미국의 세대별 자가거주율 변화를 나타낸 것으로 중·고령 세대를 제외하면 자가율이 빠르게 내려가는 것을 확인할 수 있다. 이는 서방 선진국 외에도 일본 등 동아시아 국가들에서도 비슷한 상황이다. 

 우리나라는 아직 10년 정도 통계에서는 이런 추세가 명확히 드러나지는 않는다. 어떤 세대에서도 자가율이 떨어지는 경향이 뚜렷하지 않다. 40대에서는 눈에 띄게 늘어나기도 했다. 이는 주거실태조사의 통계적 문제 때문일 수도 있는데, 다른 연구에서는 이른바 에코 세대인 30대까지는 과거보다 자가율이 떨어지고 있다는 보고가 많다. 다만 소득 계층별로는 중상위층과 하위층 간 자가율 차이는 분명하다. 특히 저소득층 중 노령 가구를 제외할 경우 청년층 자가율은 더욱 낮아질 것이다.

 그렇다면 늘어난 민간임대 수요는 누가 공급할까? 영국의 경우 1998년과 비교해 2015년에는 민간임대업자의 수와 그들이 제공하는 주택이 모두 두 배로 늘었다. 이들 대다수는 1960~1970년대에 출생한 고도성장 세대로 임대주택 구입용(Buy-to-let) 모기지 등을 활용해서 추가로 주택을 구입했다. 일본의 경우도 55세 이상의 26%는 다주택 소유자들이다. 공공임대주택 거주 비중이 가장 높은 나라인 네덜란드도 금융위기 이후 다주택자가 빠르게 늘어나 암스테르담 20%, 마하스트리트 27%를 넘을 정도다. 이런 추가 주택을 통한 소득 보충은 영국, 미국과 같은 자유주의 복지국가뿐 아니라, 복지 수준이 상대적으로 높은 중·북부 유럽 국가들에서도 연금 보충 차원에서 확산되고 있다.

 다수이 1980~1990년대에 출생한 청년층들이 '임대로 살 수밖에 없는 세대(generation rent)'가 되었다면 1960~1970년대에 출생한 세대들은 '임대업자 세대(generation landlord)'가 되었다고 할 수 있다. 이들 임대업자 세대는 자신의 돈이 아니라 금융을 활용해서 집을 늘리는 중이다. 미국, 일본, 영국, 호주 등에서 "서브프라임이 무너뜨린 잔해 위에서 더 강하고 금융화된 민간임대업자 시대"가 출현한 것이다. 결국 고도성장 세대와 저성장 세대가 주택자산을 매개로 세대 간에 현격한 격차를 보이게 되어싸. 그러나 이는 세대간 문제에 그치지 않고 세대 내 격차로 확대된다. 젊은 세대 중에서 부모가 능력이 있는 경우 부모 지원, 즉 '엄마 아빠 은행'을 활용하여 주택을 구입하거나 심지어 임대사업을 하는 경우가 늘고 있는 것이다.

 민간임대 확대는 개인 임대업에 머물지 않는다. 금융위기 이후 임대사업 기관 투자가도 빠르게 확산되고 있다. 이들은 금융권 대출을 이용하거나 헤지펀드, 리츠 등을 통해 주택에 투자한다. 캐나다에서는 금융화된 임대사업자들이 전체 캐나다 아파트의 10%를 소유하고 있다. 1999년 조사에서는 전혀 없던 현상이다. 미국에서는 소형 1인 가구용 임대주택 리츠, 독일에서는 등록 부동산투자운영 회사가 확대되고 있다. 스페인 바르셀로나에서는 금융위기로 압류된 수십만 채를 리츠가 사들여 임대사업을 하고 있다. 미국, 호주도 마찬가지로, 더 전문적으로 금융화된 투자자들이 출현했다. 2000년대 이후 완화된 임대차 규제는 민간임대시장을 더욱 활성화하는 계기가 되었다. 반면 임차인은 더 나쁜 상황에 빠지고, 여러 곳에서 임대료 인상을 둘러싼 갈등이 표출되고 있다. 특히 금융화가 강하게 진행된 나라일수록 소득 증가보다 임대료 증가 속도가 훨씬 빨라서 주거비 부담이 커졌다. 

 이렇게 민간임대주택이 금융 투자의 대상이 되면서 이전과는 다른 주택의 금융화 단계가 시작되었다. 종전 금융을 활용한 단기 거래 중심의 주택 투자가 '금융화 1.0'이라고 한다면, 운용 수익을 계속 얻기 위한 장기 민간임대사업은 '금융화 2.0'이라고 부르기도 한다. 과거와 달리 임대 부분이 금융화의 최전선에 등장함으로써 '임대' 주택의 금융화 단계에 들어섰다고 할 수 있다.

 

p274. 전 세계 부동산 문제의 핵심은 주택의 금융화다.

 집값 불안은 우리나라만의 문제가 아니다. 부동산 경기 순환과 주기적인 거품 형성과 붕괴는 거의 모든 선진국이 공통적으로 겪고 있는 일이다. 특히 최근 20년 동안은 예전에 경험하지 못한 수준으로 집값의 급등락이 반복되고 있다. 기억에 생생한 미국의 서브프라임 모기지 사태와 뒤이은 2008년 금융위기는 주택 거품이 촉발제였다. 당시 '대공황 이후 최대 거품 붕괴'라고 했지만 부동산 거품은 10년 만에 오히려 이전보다 더 커져버렸다. 게다가 코로나19로 풀린 돈들은 부동산으로 더 몰렸다. 최근 중국에 부상하고 있는 경제위기도 본질은 부동산 거품에 있다.

 이런 상황에 대해 많은 학자들은 주택의 금융화 현상이 전면화되었기 때문이라고 진단한다. 원래 주택은 생활 필수품이면서 투자 수단이라는 양면성이 있었는데, 2000년대부터 주택의 금융화 현상이 확산되면서 상품 성격이 더 강화되었다. 과잉 자본이 부동산에 몰릴 수 있는 물꼬가 활짝 열린 셈이다. 그만큼 유동성과 금융의 영향이 부동산시장을 압도하고 있는 것이다. 그 결과 집값 불안과 세대·계층 간 주택 문제의 양극화가 만성화되었다. 임대로 살 수밖에 없는 세대와 임대업자 세대가 고착화되는 신주거계급 시대가 출현한 셈이다.

 따라서 집값 급등락은 과거의 부동산 경기순환으로만 이해할 수 없고, 후기 자본주의의 구조적인 차원도 함께 생각해야 한다. 부동산 정책도 우리나라 특유의 문제와 더불어 세계적인 주택금융화 현상을 함께 고려해야 한다. 문재인 정부의 부동산 정책이 제때 효과를 거두지 못한 데는 부동산 과잉 수요를 유발하는 금융화 현상의 위험성을 충분히 인식하지 못한 측면이 크다. 과거 경험에 따른 수요 관리, 공급 확대의 정책 패키지로는 너무 커져버린 유동성과 금융화 현상에 제대로 대처할 수 없었던 것이다.

 그런 점에서 부동산 문제의 핵심 요인과 부차 요인을 혼동하면 안 된다. 핵심은 넘치는 돈이 자산시장으로 흘러들어가는 구조이며, 공급, 세제, 그리고 청약제도 등 한국적인 제도들은 부차적인 요인이다. 그런 점에서 주택의 금융화 시대에 대응하는 금융 정책의 새로운 차원이 요구되고 있다.

 

p285. 이제 정부는 집값 잡겠다는 약속을 하지 말자

 이미 세계 10위권 경제 대국이 된 우리나라는 세계 경제 동향과 함께할 수밖에 없다. 주택이 점점 더 투자 상품화되는 주택금융화 경향과 전 세계적인 유동성 상황은 우리나라에도 그대로 반영되고 있다. 우리 주택문제가 갖는 보편적 성격이라 할 수 있다.

 반면 우리 특유의 문제도 있다. 무엇보다 전세제도가 그렇다. 강한 가족주의는 전세제도를 강화하는 역할을 해왔다. 그만큼 주택 문제에 대한 전 국민의 관심이 높고, 이는 특유의 평등주의가 더 부추기고 있다.

 이런 상황에서 우리 정부는 세계 그 어느 나라보다 집값 동향에 민감하게 반응해왔고, 가격 안정을 위한 것이라면 무리한 시장 개입도 주저하지 않았다. 게다가 정부는 민심을 달래는 차원에서, 또 시장과의 심리전 차원에서 집값, 특히 강남 아파트값을 잡겠다고 공헌해왔다. 하지만 정부의 약속이나 호언장담은 여지없이 헛말이 되고 만다. 전 세계 선진국 중에서 정부 수반이 집값을 잡겠다고 얘기하거나 집값을 못 잡았다고 사과하는 나라는 거의 없다.

 이제 정부에서 집값을 잡겠다는 말을 기대하지 말자. 정확한 시장 상황이나 정책 계획을 밝히는 등 필요한 일만 하게 하자. 시장에는 시장의 일이 있듯이, 정부는 자신들의 몫을 하면 된다. 형평성 있는 세제와 개발이익환수 체제만 작동한다면, 굳이 강남 아파트값에 전전긍긍하며 심리전을 펼 필요는 없다. 여기다 좋은 주택이 빨리 공급될 수 있도록 택지 공급과 도시계획 인센티브 관리만 하면 된다. 주거복지를 튼튼히 구축해서 주거 취약계증을 보호하는 일도 중요하다. 나머지 약속은 기대하지 말자.

 

자전적 에세이. 전반부는 성장기의 에피소드 후반부는 사회에 나가서 정치에 입문하기까지의 과정 그리고 정치입문 후의 역경을 다루고 있다.

이재명에 대해 알고 싶으면 함 봐두면 좋을 내용. 사실 인터넷에도 많이 퍼져있는 내용이라 이재명에 관심이 있는 이들이라면 웬만큼은 알만한 내용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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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p48

 무려 프레스공! '나름 성공한 열다섯이었다.'라고 쓰려다 만다. 성공은커녕 고무기판 연마기에 손이 남아나질 않아 공장을 옮겼더니 더 위험한 샤링기를 만았고, 샤링기에서 떠나니 프레스기 앞에 앉아 있었다.

 세상은 소년공의 안전에 아무 관심이 없었다.

 대양실업에서는 사흘이 멀다 하고 권투경기가 열렸다. 권투가 인기 있던 시절이었다. 경기는 점심시간 공장창고에서 벌어졌다. 직원 단합이나 복지 차원의 경기는 아니었다. 선수는 신참 소년공들이었고, 선수 지명권은 반장과 고참들에게 있었다. 지명당한 소년공들은 무조건 글로브를 끼고 나가 싸워야 했다. 그리고 고참들은 자기들이 먹을 '부라보콘' 내기를 걸었다. 그리고 그 부라보콘 값은 권투 아닌 격투기에서 진 신참 소년공의 몫이었다.

 하고 싶지도 않은 경기를 해야 하는 소년공은 경기에 지면 돈까지 내야 했다. 나도 지목당하면 꼼짝없이 경기에 나갔다. 한달 용돈이 500원인데, 부라보콘은 100원이던가? 경기에서 지면 부라보콘 세 개 값인 하루 일당을 고스란히 빼앗겼다. 정말 '개떡' 같은 경기였다.

 나는 그때 이미 왼팔을 제대로 쓸 수 없었다. 벼락같이 떨어지는 육중한 구형 프레스기가 왼쪽 손목을 내리치는 사고를 당한 것이다. 조금만 더 늦게 팔을 뺐다면.... 손목이 부어올랐지만 타박상이려니 하고 빨간약과 안티프라민 연고나 바르고 말았다. 손목뼈가 깨졌을 거란 생각은 하지 못했다.

 하지만 부기가 가라앉은 뒤에도 통증은 가시지 않았고 프레스기 작업을 제대로 할 수 없을 만큼 아팠다. 내색하면 프레스공 지위를 잃는다는 생각에 아픈 걸 참고 숨기며 더 열심히 일했다. 그게 평생의 장애가 될지 그땐 몰랐다. 프레스기에서 밀려나지 않는 것만 중요했다. 

 

p71

 악착같이 공부하겠다는 마음으로 도금실에서 락카실로 옮겼다. 락카실은 이중으로 밀폐된 구역이어서 방해를 덜 받았다. 나는 최고 속도로 작업 물량을 끝내놓고 남은 시간에 공부했다. 그 시간이 내겐 유일한 도피처였다.

 그런데 몸이 자꾸 말썽을 부렸다. 두통이 잦아졌고 코가 헐기 시작했다. 락카실은 독성물질이 배출되지 않아 화공약품 냄새가 지독했다. 결국 나는 그곳에서 후각의 반 이상을 잃었다. 좋아하는 복숭아 냄새를 맡을 수 없게 됐다.

 프레스기에 치인 손목도 통증이 심해지고 있었다. 한 해 키가 15센티나 컸는데, 두 개의 손목뼈 중 성장판이 파손된 바깥뼈만 자라지 못하고 있었다. 팔이 눈에 보일 정도로 뒤틀리면서 밤새 끙끙 앓는 날이 많았다.

 

p76

 아버지에 대한 내 감정도 양가적이었다. 비 오는 어느 새벽 아버지와 쓰레기를 치우는데 급기야 일을 못 할 정도로 빗줄기가 굵어졌다. 우리는 시장통 처마 밑에 쪼그리고 앉았다. 비가 잦아들기를 기다리며 꼬박꼬박 조는 내 모습을 본 아버지가 가게 좌판에 누워 눈 좀 붙이라고 했다.

 새벽에 누가 깨웠다. 엄마였다. 흠뻑 젖은 작업복을 입고 오들오들 떨며 자고 있는 내 모습을 보고 엄마는 말없이 눈물을 쏟았다. 그때 아버지는 희뿌연 여명 속에서 비를 맞으며 혼자 쓰레기를 치우고 있었다.

 "재명이 댈꼬 드감더."

 엄마가 소리쳤다. 아버지가 천천히 돌아보더니 들어가라고 손짓했다. 아버지의 그 모습이 문득 아렸다.

 생각하면 아픈 것들투성이.

 그래도 아버지, 그래서 아버지였다.

 

p79

 손목 통증으로 밤새 끙끙 앓는 날이 많았다. 하지만 치료받을 길은 요원했고 치워야 할 쓰레기는 끝도 없이 나왔다. 밤새 쓰레기를 치우고 오면 나는 젖은 박스처럼 구겨져 잠이 들었다.

 어느 날 잠결에 엄마와 아버지가 하는 얘기가 들렸다.

 "재맹이가 저러다 평생 빙신이 되머 우야니꺼?"

 "돈 벌어서 수술하머 될끼라."

 "집 살라꼬 모다돈 돈으로 아 수술부터 시켜야 되잖겠니껴?"

 엄마의 말에 의식이 또렷해졌다.

 "그 돈은 아무도 손 못 대."

 엄마와 아버지의 말이 머릿속에서 수없이 재생됐다. 한창 예민한 열입곱 살이었다. 가난은 아득해 보였고 한 팔을 못 쓰는 사람이 되어서도 살아갈 수 있을지 자신이 없었다. 온갖 절망적인 생각이 나를 삼키고 있었다. 눈물이 베개를 적셨다.

 

 다락에 연탄불을 피우고 수면제를 먹었다. 잠은 쉬 오지 않았다. 세상과의 영원한 작별이었다. 슬프기도 했지만 홀가분하기도 했다. 

 얼마가 지났을까? 나는 멀쩡하게 눈을 뜨고 다시 깨어났다. 연탄불을 꺼져 있었고 정신은 말짱했다. 공장 친구들은 그 정도면 죽는다고 했는데... 수면제가 부족했던 모양이었다. 다시 기회를 보기로 했다.

 

 다시 약국에 들렀다. 또 수면제를 달라고 하면 이상하게 여길 듯해 이번에는 동생 핑계를 대고 수면제 20알을 샀다. 약사가 잔소리가 많았ㅈ만 귀에 들어오지 않았다.

 유서를 썼다. 엄마에게 미안했다. 하지만 달리 방법이 없어 보였다. 너무 지쳤다고 말하고 싶었다. 눈물 때문에 글씨가 잘 보이지 않았다.

 다시 연탄불을 붙이고 꾸역꾸역 수면제를 삼켰다. 

 

p.156

 나는 승률이 높은 변호사였다. 사건을 치밀하게 분석하고, 법리는 물론 최신 판례까지 샅샅이 뒤져 변론을 준비했기 때문이다. 재밋게도 내가 노동자들을 변론하느라 재판정에서 맞붙었던 회사와 기업주들이 나에게 다른 사건을 의뢰하고 소개하기도 했다. 그들은 나로 인해 패소했지만 그래서 오히려 내가 자기들 변호사였으면 싶은 생각이 들었다는 것이다. 그런 기업들은 노사문제가 아닌 민사사건을 가지고 왔다. 수임료가 괜찮았다. 

 법률상담도 열심히 했다. 답을 못 찾겠으면 며칠 뒤 다시 오라고 한 뒤, 책 사서 공부하고 판례를 분석해 답을 찾았다.

 지금은 인터넷으로 최신 판례를 손쉽게 확인할 수 있지만, 당시에는 책자로 만들어 전국의 변호사 사무실로 팔러 다니는 사람들이 있었다. 성남에서 최신 판례집을 빠짐없이 구입해 탐독하는 건 나뿐이었다.

 "돈도 안 받는 무료상담을 왜 그렇게 열심히 하는 거야?"

 하루는 무료상담이 끝난 후 이영진이 물었다. 얼굴에 의아함이 가득했다.

 "내가 답을 찾아주지 않으면 저 사람들은 성남 어디 가서도 답을 찾지 못할 거야. 성남의 변호사인 내가 해야지."

 나의 대답에 대한 감상평이랄까. 이영진은 그 시절의 나에 대해 이렇게 전한다.

 "재명이는 늘 공부했어요. 보통 변호사 되고 나면 공부 안 하거든요. 그래서 머리가 굳고 생각도 굳는데, 재명이는 안 그래요. 또 재명이는 질 사건은 맡지 않았어요. 질 게 분명한 걸 가지고 소송하려고 하면 하지 마라, 해도 진다, 시간과 돈만 날린다, 그렇게 얘기했어요. 그런데도 우리 말 안 듣고 기분 나빠하며 다른 사무실 찾아가서 소송한 사람들 어떻게 되었겠어요? 지고 나서 후회하며 우리한테 와서 그때 변호사님 말 들을 걸 그랬다고 후회하죠.

 

p162

 '파크뷰 특혜사건'은 분당 백궁/정자지구의 상업/업부용 토지를 주거용으로 용도변경하고 정/관계 유력인사들에게 특혜분양한 권력형 비리였다. 토지를 용도변경해 아파트를 짓는 일은 건설업자에게 엄청난 차익을 안겨주는 것이었다. 나는 1999년 말부터 용도변경의 부당성을 지적하며 반대운동에 나섰다. 하지만 주민들의 강력한 반대에도 불구하고 성남시는 용도변경했고, 이 땅의 가치는 천정부지가 되었다. 사건을 파헤쳐 나갈수록 배후에 토건업자와 정관계, 검찰, 언론으로 이어지는 막강한 고리가 버티고 있음을 알 수 있었다. 지역의 변호사 한 명과 시민단체가 맞서 싸우기에는 너무나 거대한 상대였다. 주변에서 다친다며 물러서라는 권유가 잇달았다. 무모하다고 했다.

 나라고 두렵지 않은 것은 아니었다. 하지만 몰랐다면 모를까 부정이 행해지고 있음을 알게 된 이상 물러서는 것은 옳지 않았다. 

 결심은 그러했지만 실제의 상대는 예상보다 막강했다.
 토건세력은 처음엔 회유책으로 나를 포섭하려 했다. 내가 지역의 노동자와 시민을 위한 언론사를 만들고 싶어한다는 사실을 알아낸 뒤 20억을 투자해주겠다고 제안을 해왔다. 20억, 천만 원도 없어 사무실 개업비용을 빌렸던 내게 20억이라.. 나는 이런 제안이 들어왔다는 사실을 동료들에게 얘기했다. 그리고 이렇게 반문했다.

 "우리가 양심을 팔려면 얼마를 받아야 할까?"

 돈으로 사람도, 영혼도 살 수 있다고 믿는 세력들이었다. 나는 한 5천억은 받아야 하지 않겠냐고 했다. 성남시민모임과 같은 단체를 전국적으로 2~3백 개쯤 만들어 운영하려면 그 정도는 있어야 하지 않을까 싶었다. 모두가 웃었다. 웃픈 농담. 그들은 이날의 농담을 소문냈다. 이재명이 20억이 적다며 5천억을 요구했다고.... 덕분에 내 양심의 공시지가는 20억에서 5천억으로 급격히 상승했다.

 회유가 먹히지 않으니 다음 단계는 협박이었다. 나를 향한 협박까지는 견딜 만했다. 하지만 가족을 해치겠다는 협박에는 나도 힘들었다. 그들은 사무실은 물론 집으로도 전화를 해댔다. 새벽에 전화해서 아내에게 아이들이 다니는 학교와 반까지 대면서 좋지 않을 거라고 했다. 아내가 무척 고통스러워했다. 경찰에 신고해도 소용없었다. 나중에 보니 경찰서 간부도 한패였다.

 결국 나는 허가를 받고 6연발 가스총을 구비했다. 양복 주머니에 총을 넣고 다녔다.

 상대는 거대한 골리앗이었다. 어떻게 할 것인가? 나는 생의 방향을 결정할 커다란 물음 앞에 서 있었다.

 

p168

 아파트 특혜분양은 곁가지였다. 몸통은 땅의 가치를 천정부지로 뛰게 한 용도변경이었다. 어마어마한 이득이 발생하는 지점. 나는 사건의 본질을 추적하는 KBS '추적 60분' 팀의 취재와 인터뷰에 응했다. 나와 인터뷰 도중, 내 사무실에 오기 전 수차례 검찰을 사칭해 시장 비서진과 통화하며 시장과의 연결을 요청한 KBS 피디에게 시장으로부터 통화하자는 음성메시지가 왔다. 용도변경의 최종 인허가권자였던 성남시장에게 전화한 피디는 자신이 파크뷰 사건 담당검사라며 솔직하게 전모를 털어놓을 것을 종용했다. 당시 성남시장(인터넷 검색해보면 나온다. 김병량 시장이다)은 내막을 털어놓았고, 기자는 통화를 녹취했다.

 며칠 후 녹취가 '추적 60분' 방송으로 나갔지만 반향이 없다. 나는 피디에게 통사정해 녹취파일을 받아 기자회견장에서 공개했다.

 마침 지방선거와 맞물려 세상이 뒤집혔다. 당황한 성남시장은 피디의 검사사칭 배후로 나를 지목했고, 검찰은 나를 공범으로 기소했다. 억울해서 대법원까지 가며 싸웠지만 결국 유죄로 벌금 150만 원을 받았다. 사칭한 PD는 선고유예였다.

 '파크뷰 특혜사건' 싸움은 몇 년에 걸쳐 계속됐다. 무려 499세대를 정관계, 법조계, 언론계의 유력자들에게 특혜분양한 사실이 드러났고, 도움을 주고 돈을 받은 경기도지사 부인, 성남시장, 경찰간부, 언론인, 정치인 등 관계자들이 줄줄이 구속되었다.

 돌이켜 생각하면 그 사건은 나와 부동산마피아, 음험한 기득권 세력과의 전선이 구축되는 순간이었다. 이 일을 두고 어떤 평론가는 내가 '부동산 패권주의 세력의 역린을 건드린 것'이라 표현하기도 했다.

 문제는 이 싸움이 아직 끝나지 않았다는 것.

 부동산투기 세력은 지금까지 면면히 이어지고, 땅을 통한 그들의 이익 추구는 만족을 모른다.

 그들은 전방위적인 수단을 동원해 부동산값 상승을 부추기고, 서로 결탁해 범법하며 천문학적 이득을 취한다. 그들은 이기기 어려운 거악이자 우리 사회의 숨은 실력자들이다.

 

p170

 토건마피아와의 싸움은 지금도 계속된다.

 대장동 개발사업 또한 다르지 않다. 대장동 건은 이미 2018년 경기도지사 선거 때도 내가 검찰에게 기소당한 사건이다. 검찰은 개발이익금 5,503억 원을 시민 몫으로 환수했다는 내 발언이 허위사실 공표라고 기소했다. 결론은?

 '무죄'였다.

 검경은 이미 그때 현미경을 들이대듯 대장동 사업을 자세히 들여다보았을 것이다. 내게 부정과 비리가 있었다면 이미 그때 그 점을 문제 삼지 않았겠는가.

 원래 LH의 공공개발로 추진되던 대장동 개발사업을 민간개발로 바꿔놓은 것 국민의힘 세력이다.

(대장동 개발사업에 대해 자세히 알고 싶은 사람은 다음 포스팅을 참고하라)

https://lachezzang.tistory.com/1332

 

[PD수첩]대장동, 설계자와 쩐주(1/3)

시행사인 성남의 뜰이 원주민에게 토지구입을 한 후, 도로와 기반시절 공사를 한 후에 택지를 건설사들에게 판매하게 됨. 이 판매과정에서 택지분양수익이 나게 됨. 그 판매 수익을 표와 같이

lachezzang.tistory.com

https://lachezzang.tistory.com/1333

 

[PD수첩]대장동, 설계자와 쩐주(2/3)

대장동 사업 초기인 2009년부터 자문변호사로 일하던 남욱 변호사는 인맥 활용을 위해 김만배 기자를 영입함. 강원도 지사 출마시 불법선거 운동으로 훅간 엄기영 당시 앵커. 대장동 개발에 대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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https://lachezzang.tistory.com/1334

 

[PD수첩]대장동, 설계자와 쩐주(3/3)

화천대유는 우선계약자로 다른 업체들과 달리 다섯 곳의 택지를 비교적 싼 가격에 매입할 수 있었음. 그리고 이 다섯 곳의 택지에 아파트를 건설해서 분양하면서 총 4천억 원 대의 이익을 남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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하지만 나는 성남시장이 되면서 민간개발을 막고 성남시 공공개발을 추진했다. 공공개발로 시민 모두의 이익이 돼야 한다는 것이 내 원칙이었다.

 국민의힘 세력의 저지로 공공개발이 막히자 공공민간 합동개발이라도 해서 최대한 공익환수를 하기로 했다. 이가 없으면 잇몸이라도 써야 한다. 국민의힘 세력이 장악한 시의회의 반대로 지방채 발행이 막혀 성남시 예산만으로는 개발자금을 조달할 수 없어 민간투자를 받아야 했다. 이에 나는 원칙을 세웠다.

 자본은 민간이 댄다. 손해와 위험은 민간이 진다. 성남시는 사업이 어떻게 되든 고정이익을 취한다.

 오히려 민간사업자가 계약을 꺼릴만큼 성남시에 일방적으로 유리한 사업방식이었다.

 25억을 투자한 성남시는 당초 예상이익의 70%인 4,400억가량을 환수했고 1조 3천억을 투자한 그들은 몫은 30%인 1,800억이었다. 나중에 지가 상승으로 그들의 이익이 2천억가량 늘어났지만 성남시가 업자들에게 1,400억을 더 부담시켜 전체이익의 60% 가량을 환수해 시민들에게 돌린 결과가 됐다. 내가 아니었으면 5,800억도 그들 업자와 정치인, 전직 검사들의 몫이 되었을 것이다.

 부동산 투기세력은 나의 기습에 또다시 당한 셈이다. 토건마피아가 지금까지도 결사적으로 나를 반대하는 배경이다.

 땅을 통한 그들의 이익 추구는 매일매일 성실히 일하며 살아가는 시민들에게 박탈감을 준다. 상승하는 부동산 가격으로 다수의 사람들을 벼락거지로 만든다. 공동체 전 구성원들로 하여금 이 사회의 공정과 정의를 회의하게 만든다.

 불로소득은 누군가의 손실이다. 부동산 불로소득은 누군간의 피눈물이다. 이 적폐를 뿌리 뽑지 않고서는 공정과 정의를 기대하기 어렵다.

 세계 10위의 경제대국 대한민국이다. 이제 국가가 국민의 기본권으로서 주거권을 보장할 때다

 지역균형발전, 수도권 집중완화, 대규모 주택공급, 기본주택등의 영민한 정책집행이 필요하다. 하기로 작정하고, 용기있게 결정하고, 과감히 실행하면 얼마든지 가능하다. 그런 자신감이 내게는 있다.

 국민들의 머릿속에서 집 걱정 사라지게 하는 것이 내 목표 중 하나다. 혼자서는 불가능하겠지만 부정과 불의를 끝내겠다는 백만, 천만 국민의 뜻과 의지가 있다고 믿는다.

 

p173

 대학교 1학년 때 일이다. 1주일의 군사학교 입소훈련을 앞두고(*1988년까지 고등학교, 대학에 교련교육이 있었다. 남자의 경우 대학 1학년때 문무대에 입소해서 1주일간의 기초군사훈련을 받았으며, 2학년때는 전방 군부대에 입소해서 1주일간경계 근무 체험 -  GOP에서 철책선 근무, 매복 등 -을 하게 된다. 학생 때 힘든 경험일 순 있는데 문무대 1주일 입소 혜택이 군대 45일 면제, 1주일 군부대 입소가 군대 45일 면제, 합하면 90일, 무려 3달의 군대 기간 면제 혜택이 있었다. 당시 일반적 육군의 복무기간은 30개월이었는데, 이 혜택 여부에 따라서 대학을 나온 후임병장이 그렇지 않은 선임병장보다 먼저 제대를 하는 경우도 있었다. 그런 이유 때문인지 이 당시 대부분의 대학생들은 2학년을 마치고 나서 휴학을 하고 군대를 가는 것이 일반적인 관행이었다) 교련 교관이 장애를 증명하는 진단서를 떼어오라고 했다. 성남의 가장 큰 병원으로 갔다. 진단비가 2만 원이라고 했다. 돈이 없던 나는 발길을 돌렸고, 다음날 어렵게 2만 원을 마련해 들고 갔다. 그런데 병원에선 접수비 1천 원을 더 내라고 하더니 X-선비 1만8천 원도 추가로 요구했다. 무려 3만9천 원이었다. 화가 났다. 다른 병원에 정화를 걸어봤지만 취급하지 않는다는 답변만 돌아왔다.

 병원은 에누리 없는 시장논리로 사람을 대하고 있었다. 의료보험 혜택을 받을 수 없어 치료도 포기했던 나였다. 마음이 씁쓸했다. 나는 진단서를 포기했다. 그리고 경험 삼아 입소를 하기로 하고, 다른 친구들과 똑같이 군사훈련을 받았다.

 그런 일을 겪으며 의료에서 공공성이 얼마나 중요한지를 깨달았다. 다급한 생명의 문제이지 않은가? 성남시립병원 설립 추진운동은 다수 서민들을 위한 길이었다. 결국 나는 추진위원회의 공동대표를 맡게 됐다.

 우리는 시립병원을 세우기 위해 주민발의 조례제정에 나서기로 했다. 주민발의 조례제정은 지방자치에 처음 만들어진 제도였고 교과서에나 있는 것이었다. 그것을 현실에서 실현하겠다고 꺼내 든 것.

 지역 정치인들이 비웃었다. 압력을 행사하기 위한 퍼포먼스 정도일 거라 생각하는 사람도 많았다. 하지만 우리는 진심이었다. 나 또한 그때도 지금도 한다면 하지 시늉만 하는 사람은 아니다.

 한파가 몰아치는 겨울, 우리는 노상에서 핸드마이크를 들고 주민발의 참여자를 모집하기 시작했다. 노조원들과 성남시민모임뿐만 아니라 변호사 사무실 상근자들까지 달라붙었다. 새벽 2시까지 일하는 날들이 반복됐다.

 그렇게 주민발의자 18,595명을 모았다. 주민발의자는 자신의 거주지와 신원을 증명하는 주민증까지 확인해야 한다. 그런 발의자를 3주 만에 2만 명 가까이 모은 것이었다. 설립 지지 성명에는 20만 명이 넘는 시민이 참여했다. 구도심 지역 시민의 절반에 가까운 숫자였다. 시민들의 뜨거운 반응에 우리 모두가 놀랐다.

 

p176. 47초 만에 무산된 시민의 꿈

 마침내 2004년 3월 24일, '성남의료원 설립 및 운영조례안'이 성남시의회에 상정되었다.

 당일 시의회 참관인석에 자리 잡은 우리는 시장과 시의원들이 시립의료원을 설립하라는 성남시민의 압도적인 바람과 여론을 쉬 무시하지 못할 거라 여겼다. 하지만 잠시 후 믿을 수 없는 장면이 연출됐다. 단 47초 만에 '심의보류'가 선포된 것이다. 심의보류는 사실상 부결이자 폐기였다. 최소한의 찬반 토론도 없이 그랬다. 경악스러웠다.

 유동인구 50만이 넘는 성남 본시가지에 변변한 종합병원은 물론 공공의료시설이 제대로 없었다. 주민들은 가장 필요한 것을 스스로의 노력으로, 또 정당한 권리와 방법으로 요구하고 있었다. 그러나 단 47초 만에 날치기로 묵살당했다. 한나라당이 장악한 성남시의회는 시민을 발끝에 차이는 돌부리만큼도 여기지 않았다. 분노한 우리는 본회의장으로 들어가 강하게 항의했다. 놀란 시의원들은 서둘러 꽁무니를 뺐다.

 텅 빈 회의장에 주저앉아 모두 울었다. 그러면 안 되는 것이었다. 주권재민은 사전에만 있는 죽은 언어란 말인가.

 

 일은 그것으로 끝나지 않았다. 성남시의회는 한술 더 떠 시민대표와 나를 특수공무집행 방해로 고발했다. 그것이 시민을 대하는 그들의 태도였다. 나는 체포를 피해 시청 앞 주민교회 지하실에 숨었다. 체포가 두려워서가 아니라 고발당한 시민들에 대한 대책을 마련할 시간이 필요했기 때문이다.

  "변호사님, 우리는 이제 어떻게 해야 합니까?"

 교회 지하실로 찾아온 인하병원의 노조위원장 정해선이 물었다.

 "우리가 만듭시다."

 내가 대답했다.

 "어떻게요?"

 "우리가 시장 합시다. 그리고 우리가 병원 만듭시다."

 그 일로 벌금 500만 원을 선고받아 파크뷰 사건에 이어 두번째 전과가 생겼다.

 그로부터 10년이 지난 2013년 나는 성남시장으로서 성남시 의료원 착공식에 착공 기념 발파 버튼을 눌렀다.

 

p180. 이재명 제거 작전

 이명박, 박근혜 정권 때 나흘에 3일꼴로 압수수색과 조사, 감사, 수사를 받았다.

 집무실과 집에 대한 압수수색은 기본이었고, 검경은 해외출장 시 퉁화한 목록, 어머니가 시청에 출입한 CCTV 기록까지 요구했다. 성남시 공무원 수십 명이 조사를 받기도 했으며, 시청과 집에 50명의 검사와 수사관이 들이닥치기도 했다.

 2012년 이명박 정권은 나에 대한 40쪽 분랸의 보고서를 작성했다. 청와대와 행안부, 한나라당 소속 김문수 지사의 경기도가 성남시에 대한 내사에 들어가 2개월에 걸쳐 조사한 결과다.

 당시 청와대 내부에서는 나를 물너나게 해야 하며, 성남의 보수 시민단체를 움직여 주민소환 투표를 유도한다는 구체적인 방법론까지 거론됐다고 한다.

 최근까지도 크게 다르지 않았다. 문재인 정권이 개혁하려 했던 구태 검찰세력은 나를 잡기 위해 온갖 시도를 했다. 때문에 선출직 공직자 생활 12년 동안 처음 2년을 뺀 나머지 기간 내내 정치적 명운을 건 사법투쟁을 계속해야 했다.

 나는 기득권의 표적이며 끝없이 감시받아 왔다.

 왜 그러한가. 덤볐기 때문이다. 공익을 위해 덤볐다. 적폐와 손잡지 않았다. 그 과정에서 온갖 의혹이 더해졌고 '아니면 말고' 식의 언론보도로 수없이 고약한 이미지가 덧대졌다. 나는 내가 어항 속 금붕어임을 잘 알고 있다. 호시탐탐 나를 제거하려는 세력은 지금도 매순간 나를 캐고 흔들어댄다. 이는 팩트이다. 그러하니 부패가 내겐 곧 죽음이다.

 내가 희망하는 사회는 더불어 함께 사는 세상이다. 그런 세상을 만드는 데 내가 도움이 될 수 있길 희망한다.

 하지만 누구나 더불어 함께 잘 사는 그런 세상은 가만히 기다린다고 오는 것이 아니어서, 나의 싸움은 아직 마무리되지 않았다. 다만 혼자 싸워서는 절대 이길 수 없음을 절절히 느낀다. 함께 싸워줄 동지들이 필요하다.

 

대한민국이 다음 단계로 발전하기 위한 조국의 2가지 화두에 대한 제안.

대한민국의 사회권 확대와 경제민주화를 위해서는 독재에 까지 이른 검찰권력의 해체 그리고 재벌 해체의 이유와 그 의미에 대해서 고찰한 내용을 담고 있다.

전작인 가불선진국과 어떤 면에서는 이어지는 내용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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p30

 군사독재 시절에는 물론 '1987년 헌법체제' 아래에서도 검찰은 현재의 "살아 있는 권력"에 충성했다. 2023년 10월 18일 김의겸 민주당 의원은 국회 법사위 국정감사 질문에서 다음과 같이 말했다.

 "YS(김영삼 정부) 때 검찰에 출입했는데, 그때 서울(중앙)지검의 모 차장 검사가 기자들 앞에서 '우리는 개다. 물라면 물고 물지 말라면 안 문다'고 했다. 

 2013년 11월 고 이용마 MBC 기자는 월간지 《참여사회》 11호에서 다음과 같이 일갈했다.

 "검사라면 가장 먼저 떠오르는 생각은 '권력의 사냥개'다. 주인이 "가서 물어!"라고 시키면 물불 가리지 않고 달려가서 무는 존재, 주인이 시키기 전에는 절대 물 수도 없는 존재다.   하지만 최근엔 이런 사냥개 이미지에 한 가지 더 덧붙여졌다. 권력자에게 빌붙어 아양을 떠는 애완견 이미지다. 돈 많고 힘센 권력자들의 무법 행위 앞에서 비굴하게 꼬리를 내리고 기분에 맞추려고 보이는 형태는 빗댄 것이다."

 

 김영삼 정부 출범 후 검찰은 전두환-노태우가 주도한 12·12 쿠데타와 5·17 군사반란에 대해 "성공한 쿠데타는 처벌할 수 없다"는 해괴한 논리로 불기소처분을 했다. 검찰의 정치적 편향을 잘 보여주는 사례인데 자신들의 '부역附逆'을 사후적으로 정당화하는 것이었다. 이 결정의 주임검사를 맡은 서울중앙지검 공안1부 장윤석 부장검사는 후일 참여정부 시절 검찰 게시판에 정부 비판 글을 올리고 사직한 후 국민의힘 전신인 한나라당 국회의원(경북 영주시)이 된다. 물론 이 '성공한 쿠데타 처벌 불가론'은 국민적 공분을 일으켰고, 그 여파는 김영삼 대통령의 특별지시와 군사반란 주모자들에 대한 공소시효를 정지시키는 '5·18 특별법' 제정으로 이어졌다.

 정치적 민주화 이후 검찰은 점점 조직의 외연과 영향력을 넓혀가면서 독자적 '준準정당'으로 변화해 갔다. 개발독재 단계에서는 소수의 조직화된 군부 엘리트가 쿠데타를 일으켜 정권을 잡고 권력을 독점적으로 운영했다면, 개발독재를 벗어나는 시점부터 여러 다른 권력 엘리트 집단이 목소리를 내게 된다. 그들은 정권 초기에는 정치권력과 협력하고 정권 말기에는 미래의 권력에 줄을 대고 현재 정치권력을 공격하면서 독자적 힘을 키워나갔다. 같은 맥락에서 김누리 교수는 "'폭력의 지배Autocracy'에서 '자본의 지배Plutocracy'를 거쳐 '기술관료의 지배Technocracy'로 이행한 것"이라고 분석했다.

 특히 '검사동일체'와 '상명하복'을 조직 운영 원리로 삼고 있던 검찰은 다른 엘리트 집단에 비해 우위에 섰다. 대한민국 검찰은 OECD에 속한 다른 국가의 검찰과 달리 '수사권', '경찰에 대한 수사지휘권', '기소권', '영장청구권' 등을 독점하고 있었기 때문에 다른 엘리트 집단을 손쉽게 제압할 수 있었다. 이러한 '무기'를 가진 검찰은 정치권력과도 힘겨루기를 시작했다. '권력의 사냥개'에 그치지 않고, '주인'인 정치권력이 약해진다 싶으면 '주인'을 물어뜯었다. 이즈음 "정권은 유한하고 검찰은 무한하다"라는 건배사가 검찰내에서 공유되었다.

 군부의 총칼이 최고의 무력이었던 시간이 끝나가면서, 수사권·기소권·영장청구권 등 이른바 '검찰권'이 최고의 무력이 되는 시간이 다가오고 있었다. 법보다 주먹이 앞서는 시대가 끝나가면서, 법이 주먹 같은 역할을 하는 시대가 열린 것이다.

 

p34

 2012년 이명박 정부 말기, 제18대 대통령 선거운동 기간에 국가정보원 소속 심리정보국 요원들이 댓글공작을 전개한다. 당시 야당이었던 민주통합당이 국정원 전현직 관계자로부터 제보를 받고 경찰에 신고했고, 민주통합당과 경찰은 심리정보국 요원 중의 한 명인 김하영 씨가 작업을 하던 오피스텔을 찾아가 대치하는 상황이 벌어진다. 국가정보원이 자행해 온 불법 대선 개입이 발각된 것이다.

 당시 김용판 경찰청장이 권은희 수서경찰서 수사과장에게 전화를 걸어 압수수색영장 신청을 신중히 결정하라는 취지의 말을 했고, 권 과장이 이를 폭로하자 총경 승진에 탈락하고 관악경찰서 여성청소년과장으로 발령이 난다. 이후 2013년 경찰은 이 사건을 국정원의 선거 개입으로 결론을 내리고 기소 의견으로 검찰에 송치했다. 검찰은 윤석열 서울중앙지검 특수1부장(사법연수원 23기)을 팀장으로 특별수사팀을 구성해 수사를 전개했고, 원세훈 국정원장, 김용판 경찰청장 등을 기소한다. 당시 부팀장은 박형철 부장검사(사법연수원 25기)였다. 이후 윤석열은 인사상 불이익을 받았고, 박형철은 검찰을 떠났다. 그렇지만 권력기관 내 국정원의 절대 우위는 무너지게 된다. 10·26 사태 이후 중정이 보안사에 의해 타격을 받았다면 이제는 검찰에 의해 타격을 받았고, 이 검찰 수사는 대중적 지지를 받았다.

 김용판 청장은 이후 2020년 국민의힘의 전신인 미래통합당의 국회의원(대구달서병)으로 당선되는데, 윤석열 검찰총장은 훗날 국민의힘 대선후보가 된 후 김 의원을 만나 "미안하다"고 사과한 뒤 막걸리를 마시며 화해했다고 보도되었다. 나는 이 대목에서 권력을 얻기 위해서는 언제든지 치고, 언제든지 손잡는 정치의 민낯을 보았다. 나는 대체 윤 후보가 김 의원에게 무엇이 미안했던 것인지 의아했다.

 이 국정원 선거 개입 수사 과정에서 국정원과 맞섰던 윤석열, 권은희 두 사람은 대중적 인기를 얻었고, 범진보 진영은 이들에게 열렬한 응원을 보냈다. 나 역시 두 사람에게 박수를 보냈다. 특히 윤석열 국가정보원 댓글사건 특별수사팀장은 2013년 10월 21일 국정감사에서 조영곤 전 서울중앙지검장 등 윗선의 수사 축소 압력을 폭로했고, 이 자리에서 그가 한 말 "저는 사람에게 충성하지 않는다"는 크게 회자되었다. 그런데 이 유명한 말 앞에 이루어진 문답은 제대로 알려지지 못했다. 즉, "조직을 사랑합니까?"라는 당시 여당 새누리당 정갑윤 의원의 질문에 윤 검사는 "네, 대단히 사랑하고 있습니다"라고 답했다. 그의 답변을 종합하면, "사람에 충성하지 않고 검찰 조직에 충성한다"는 뜻이었다.

 박근혜 정권에 의해 인사불이익을 받은 윤석열 검사는 2016년 '최순실 게이트'와 박근혜 정권의 국정농단을 수사하는 박영수 특별검사에 의해 수사팀장으로 발탁된다. 수사팀장으로 내정된 윤 검사가 한 말도 인기를 끈다. "검사가 수사권 가지고 보복하면 그게 깡패지, 검사입니까?"가 그것이었다. 윤석열 검사는 이러한 두 번의 특별수사 과정 속에서 국민적 스타가 되었다. 

 

 

p37

 2017년 촛불혁명은 단지 '진보'의 전유물이 아니었따. '국정농단'이라는 희대의 사태를 맞이해 진보와 중도 보수가 연합해 이루어낸 성과였다. 박근혜 대통령 탄핵도 유승민, 김수성 등 당시 여당 새누리당 안의 '비박非朴' 인사들이 동참했기에 가능했다. 이러한 맥락에서 문재인 대통령과 문재인 정부는 국정농단에 분노하고 박근혜 탄핵에 동참했던 합리적 보수 인사를 포용하기 위해 많은 노력을 기울였다. 문재인 대통령은 취임 직후 2017년 5월 19일 윤석열 검사를 검사장으로 승진시키면서 서울중앙지검장으로 파격 발탁했다. 당시 이 발표를 들은 청와대 출입기자들의 탄성을 기억한다. 당시 범여권 내에서 "윤석열은 검찰주의자일 뿐이다"라는 우려 섞인 지적도 있었지만 대중적으로 윤석열은 검찰 내 '개혁 세력'의 상징적 인물이 되어 있었다.

 문재인 정부는 검찰을 제도적으로 개혁하려 했지만, 수사와 기소에는 일절 관여하지 않았다. 과거 정부는 민정수석비서관을 검찰 고위 간부 출신으로 임명해 주요 사건의 수사와 기소를 검찰 수뇌부와 '조율'한 것으로 알려져 있다. 그러나 검찰개혁 추진을 시대적 사명으로 생각한 문재인 대통령에게 이러한 '거래'는 검찰개혁의 후퇴를 초래할 수 있기에 용납할 수 없는 것이었고, 그래서 학자 출신인 나를 민정수석비서관으로 선택했다. 검사들이 비검사 학자의 '수사지휘'를 들으려 하겠는가. 청와대가 검찰 수사를 막거나 압력을 가했다면 이후 모두 직권남용죄로 기소되었을 것이다. 검찰의 수사와 기소에 청와대가 일절 관여하지 않을 테니, 검찰도 검찰개혁에 관여하지 말라는 것이 문 대통령의 확고한 소신이었다. 나는 민정수석비서관 재직 동안 검찰개혀게도 방안 논의와 검찰 인사 협의를 위해 문무일 총장과 회동을 가진 적은 있지만, 수사와 기소 문제로는 어떠한 검사에게도 연락한 적이 없었다. 그래서 나는 청와대 안팎에서 검찰 수사에 대한 불만을 들어야만 했다. 정부 초기 검찰은 전병헌 정무수석과 김은경 환경부장관에 대한 수사와 기소를 감행했는데, 청와대는 사후 통보를 받았을 뿐이었다. 문재인 대통령 역시 이 수사와 기소에 대해서는 일언반구도 없었다.

 단, 검찰의 '사법농단' 수사가 개시되었을 때 나느 이 수사가 과도하다는 생각을 갖고 있었음을 밝히고 싶다. '사법농단'과 관련 판사들에 대한 법원 내부 징계가 지연되는 상황에서 검찰이 전격적으로 강제수사에 들어간 데에는 이번 기회에 검찰에 대한 거의 유일한 사후통제기관이었던 법원을 길들이려는 검찰의 조직적 목표와 이익이 있었을 것으로 추측된다.

 수사권 조정이 진행되는 과정에서 윤석열 서울중앙지검장은 공수처 신설과 검경수사권 조정합의안에 모두 동의한다는 의사를 박형철 반부패 비서관을 통해 전해왔다. 윤 지검장은 검찰총장 후보 당시 청와대의 검증 인터뷰에서도 같은 뜻을 표명했다. 검찰에 대한 검사의 수사지휘권도 폐지하거나 대폭 축소할 수 있다고 했다. 게다가 검찰총장 후보 청문회에서는 수사와 기소의 '분리'에 대해서도 장기적으로 옳은 방향이라고 답변했다.

 그러나 윤석열 검사장이 검찰총장으로 임명된 후 검찰개혁에 대한 이러한 입장이 180도 바뀌었음은 확인된 사실이다. 2022년 2월 12일 노영민 전 대통령 비서실장은 오마이TV와의 인터뷰에서 "검찰총장 면접 당시엔 윤 후보가 4명의 후보 중에서 공수처의 필요성 등 검찰개혁에 가장 강력하게 찬성했는데 총장이 된 후부터 태도가 바뀌었다"면서, "그때 거짓말을 했다", "정직한 사람이 아니다"라고 비판한 바 있다. 이러한 '거짓말'과 관련해 유시민 작가는 2023년 7월 19일 '매불쇼'에 출연해, 윤석열의 행동양식을 침팬지의 행동양식에 비유해 설명했다. 집단 우두머리가 되고자 하는 수컷 침팬지는 우두머리가 되기 위해 온갖 일을 다 하고, 우두머리가 되면 서열 밑에 있는 침팬지를 괴롭히고 그 위에 군림한다. 유 작가는 윤석열은 "말의 내용이 중요하지 않은 " 사람이기에, 우두머리가 되기 위해서는 무슨 말이든 다 하고 "출제자의 의도"에 맞추어 답을 할 뿐이라고 분석했다. 이에 반해 침팬지와 달리 수평적 관계를 중시하는 다른 유인원 보노보에 가까운 문재인 대통령은 윤석열의 말을 믿었다고 보았다. 

 윤석열 검찰총장이 문재인 정부에 대한 공세를 펼치기 시작한 이후 누가 윤석열을 검찰총장으로 밀었느냐 등에 대한 비판적 문제 제기가 계속되었다. 윤 총장에 대해 당시 집권 세력 전체가 기만당했고 그 결과 오판을 했다. 그러나 누구를 탓하기 전에 단지 고위 공직자 검증을 최종적으로 책임지는 민정수석비서관으로서 윤 검사에 대한 내부 검증을 철저히 하지 못했던 것이 아닌가 자성한다. 민정수석실 내부에서도 윤 검사에 대한 평가가 갈리었는데, '검찰지상주의자'라는 비판을 더 심각하게 생각했어야 했던 것이 아닌지 자책한다. 요컨대, 다름 아닌 내가 최고 인사권자인 문재인 대통령을 보좌하는 역할을 충분히 하지 못했다.

p87

 헌법은 '무죄추정의 원칙'을 규정하고 있으나, 기소되고 나면 일반 사회에서는 '유죄추정의 원칙'이 작동하기에 피고인은 오랫동안 사회적 편견과 낙인에서 벗어나기 힘들다. 2021년 온 사회를 떠들썩하게 했던 윤미향 의원 수사를 생각해 보자.

 언론과 정치권은 '윤 의원이 위안부 할머니들을 이용해 돈을 챙겼다', '공금을 유용해 딸을 유학시켰다', '단체 자금을 유용해 개인 부동산을 구입했다', '안성힐링센터를 헐값에 팔았다', '배우자 회사에 일감을 몰아줬다' 등등 이후 허위로 판명된 수많은 혐의를 부각시키며 몰아세웠다. 그리고 검찰은 보조금관리법 위반, 지방재정법 위반, 사기, 기부금품법 위반, 준사기, 업무상 배임, 업무상 횡령, 공중위생관리법 위반 등 자그마치 8개 혐의로 기소하고 징역 5년을 구형했다. '먼지털이 수사'에 이어 '투망식 기소'를 한 것이다. '투망식 기소'는 수사를 마친 후, 최종적으로는 무죄가 나오더라도 온갖 혐의를 다 모아 일단 기소부터 하는 기법이다. 즉 '투망'을 던져 '뭐든 하나만 걸려라'라는 식의 기소를 뜻한다. 대중에게는 피고인이 수많은 범죄를 저질렀다는 인식을 심어 주고, 법원에는 모든 혐의에 무죄판결을 할 수 없게 심리적 압박을 가하는 효과가 있다.

 그러나 1심 법원은 이 중 7개 혐의에 무죄를 선고하고, '10년 동안 1700만 원을 가져다 썼다'는 업무상 횡령 혐의에만 벌금형을 선고했다(유죄판결이 난 건의 경우 오랜 시간이 흘러 영수증을 확보하지 못한 탓이 컸다). 그렇지만 윤 의원에게 붙은 딱지는 좀처럼 떨어지지 않고 있다. 그는 민주당으로 복당도 하지 못하고 있다. 그에 대해 마녀 사냥을 전개했던 사람들은 전혀 사과하지 않고 있다. 오히려 여전히 회심의 미소를 짓고 있을 것이다.

 

p124

 우리는 '법치', 즉 '법의 지배rule of law'는 '법을 이용한 지배rule by law'가 아니라는 점을 명심해야 한다. '법치'는 단지 권력자가 법을 통해서 통치 또는 지배한다거나, 국민은 그 법을 무조건 준수해야 한다는 의미가 아니다. '법을 이용한 지배'에서 법은 통치의 도구이자 수단일 뿐이다. '법을 이용한 지배'는 조선시대에도, 일제강점기에도, 권위주의 정권, 군사독재 정권하에서도 이루어졌다. 권위주의 정권, 군사독재 정권하에서 제정된 각종 '반민주악법'에 대한 예는 생략하기로 하자. 당시 '법치'는 (노동자 시인 백무산 씨의 시 구절을 빌려 말하자면) 국가권력이 "법대로 테러"하는 것에 불과했다.

 게다가 윤석열 정부는 자신이 내세우는 '법치'가 '법의 지배'가 아니라 '법에 의한 통치'라고 공문서에 명기했다(법무부는 'rule by law'를 '법에 의한 통치'라고 번역했다). 법무부는 세칭 '검수완박법'이라고 불리는 검찰 직접수사권 축소 법률에 대해 헌법재판소에 권한쟁의 심판을 청구했다. 그런데 법무부는 그 청구서에서 "법치주의는 법에 의한(rule by law)  통치를 의미하는 개념"이라고 밝혔다. 이 문서를 접했을 때 나는 내 눈을 의심했다. 그러나 분명히 "rule of law"가 아니라 "rule by law"라고 적혀 있다. 이 문서는 온라인상에서 쉽게 찾을 수 있다. 과거 권위주의 또는 군사독재 정권도 자신들의 '법치'가 '법에 의한 통치' 또는 '법을 이요한 지배'라고 말하지는 않았는데, 윤석열 정부는 노골적으로 이를 표명한 것이다. '법치'가 '법을 이용한 지배'가 될 때 법은 법의 외피를 쓴 폭력이 된다.

 

(검수완박법에 대한 권한쟁의 심판 청구는 법무부장관인 한동훈이 제기했으며, 헌재에서 각하 - 검수완박법은 합헌이다라는 의미 - 됐다)

https://www.newspim.com/news/view/20230323000843

 

[종합] 헌재, '검수완박' 효력 인정…법무부·검찰 권한쟁의는 각하

[서울=뉴스핌] 김신영 기자 = 헌법재판소가 '검수완박(검찰 수사권 완전 박탈)' 입법 과정의 위헌성을 일부 인정했다. 다만 법안 무효확인 청구는 기각해 법안 효력이 유지될 전망이다. 이와 별

newspim.com

 

 

 

p131

 막노동으로 생계를 꾸리던 70대 노인이 뇌경색으로 쓰러진 처의 병 수발 때문에 대한주택공사를 찾아갈 수 없어서 결혼 후 분가한 딸의 명의로 임대차계약을 체결하고 공공임대주택에 입주했다. 처가 사망한 후 노인은 홀로 임대주택에서 살았는데 대한주택공사가 집을 비워달라는 소송을 제기했다. 딸 이름으로 계약이 되어 있었기 때문에 법대로라면 노인은 집을 나가야 했다. 그래서 1심 판결에서는 주택공사가 이겼다. 그런데 제2심 판견은 노인의 손을 들어줬다. 이 사건은 이후 대법원을 거쳐 조정으로 종결됐는데, 제2심 판결문 일부를 소개한다.

 "가을 들녘에는 황금물결이 일고, 집집마다 감나무에 빨간 감이 익어간다. 가을걷이에 나선 농부의 입가에선 노랫가락이 흘러나오고, 바라보는 아낙의 얼굴엔 웃음꽃이 폈다. 홀로 사는 칠십 노인을 집에서 쫓아내 달라고 요구하는 원고(대한주택공사)의 소장에서는 찬바람이 일고, 엄동설한에 길가에 나앉을 노인을 상상하는 이들의 눈가엔 물기가 맺힌다. 우리 모두는 차가운 머리만을 가진 사회보다 차가운 머리와 따뜻한 가슴을 함께 가진 사회에서 살기 원하기 때문에 법의 해석과 집행도 차가운 머리만이 아니라 따뜻한 가슴도 함께 갖고 해야 한다고 믿는다. 이 사건에서 따뜻한 가슴만이 피고들의 편에 서 있는 것이 아니라 차가운 머리도 그들의 편에 함께 서 있다는 것이 우리의 견해이다."

 

 이 판결을 접하면서 뉴욕 시장을 세 번이나 연임했던 이탈리아계 정치인 피오렐로 라과디아Fiorello La Guardia가 떠올랐다. 그는 1930년대 초 대공황 시기에 잠시 뉴욕시 치안판사로 재판을 하게 됐다. 그는 배가 고파 빵을 훔친 어느 노파에게 10달러 벌금형을 선고했다. 이어 그는 이렇게 말했다.

 "배고픈 사람이 거리를 헤매고 있는데 나는 그동안 너무 좋은 음식을 배불리 먹었습니다. 이 도시 시민 모두에게 책임이 있습니다. 그래서 나 자신에게 10달러의 벌금형을 선고하며, 방청객 모두에게 각각 50센트 벌금형을 선고합니다."

 방청객들은 순순히 벌금을 냈고, 라과디아는 이렇게 걷은 57달러 50센트를 노인에게 줬으며, 노인은 10달러의 벌금을 낸 후 47달러 50센트를 갖고 법정을 떠났다.

 

p136

 법률은 하늘에서 떨어진 것이 아니다. 사람이 만드는 것이다. 역사를 돌아보면 법은 대개 특정 사회의 계급·계층·집단의 이익과 욕망, 그리고 꿈이 충돌하고 절충되어 만들어진다. 여기서 '강자' 또는 '가진 자'가 유리한 조건에 서게 됨은 분명하다. 그래서 법학을 제대로 공부하려면 바로 이러한 현실을 직시하는 눈이 피료하다. 각 계급·계층·집단의 요구와 주장과 논변論辯이 무엇인지 꿰뚫어야 한다. 법전을 넘어 현실 세상이 돌아가는 이치를 알아야 한다. 특히 '약자'나 '갖지 못한 자'가 부당하게 대우받는 일을 막아야 한다.

 

 법률은 정치의 자식이다. 정치를 모르고 법률을 알 수 없다. 정치의 논리와 동학動學에 무관심하면 법률의 핵심을 놓치게 된다.

 정치는 투쟁의 영역인 동시에 타협의 영역이다. 각 정당은 자신들의 방향성을 담은 정강정책이나 소속된 정치인의 활동을 통해 그들의 비전과 가치를 확산시키고 이에 따라 사회를 바꾸고자 한다. 이때 치열한 논쟁과 논박論駁은 필연적이며 필수적이다. 이러한 토쟁은 종종 '선 대 악'의 방식으로 전개되지만, 궁극적으로 중간 중간 타협의 이루어질 수밖에 없다. '당동벌이黨同伐異'(옳고 그름은 따지지 않고 뜻이 같은 무리끼리 돕고 다른 무리는 배척한다)가 아니라 '구동존이求同存異'(같은 것을 추구하되 다른 것은 남겨둔다)로 가야 한다. 효율적인 정치는 이러한 타협의 영역을 많이 확보하고 이를 법률에 적극적으로 반영하는 정치다. 정당 사이에 공유하는 영역이 많아지고 이것이 신속한 법률로 마무리된다면 소모적인 정쟁은 줄어든다. '적'의 입장을 이해하고 이견이 있는 부분까지 공감대를 형성한다면 더할 나위 없을 것이다. '구동존이'를 넘어 '구동화이求同化異'(같은 것을 추구하고 이견이 있는 부분까지 공감대를 확대한다)에 이르는 길일테니 말이다.

 그러나 야당을 처벌해야 할 '범죄자' 집단으로 파악하는 윤석열 정권 아래에서는 '구존동이'나 '구동화이'가 이루어질 가능성은 매우 적다. 윤석열 정권 출범 이후 대통령과 야당 대표와의 만남이 이루어지지 않고 있는데, 2022년 정진석 당시 국민의힘 비대위원장은 그 이유를 "대통령이 지금 범죄 피의자와 면담할 때는 아니라고 생각합니다"라고 밝혔다. 2021년 대선 후보 토론회에서 윤 후보는 "제가 이런 사람하고 토론을 해야 되겠습니까? 참 어이가 없습니다. 정말 같잖습니다."라고 말했는데, 이러한 인식이 집권 세력 전체에 공유되어 있는 것이다. 요컨대, 윤석열 정권의 정치 방침은 '당동벌이' 그 자체다.

 

p146

 법률을 해석하는 입장도 시대적 흐름에 따라 달라진다. 소수의견이 다수의견이 되고, 그 반대가 되기도 한다. 시대정신과 헌법정신에 충실한 법 해석은 초기에는 소수의견에 머물지라도 궁극적으로는 다수의견의 지위를 획득한다. 이 점에서, 존재하는 판례를 그저 암기만 하는 것은 법을 제대로 공부하는 것이 아니다.

 이상에서 확인되듯이 법 공부를 잘하려면, 제일 먼저 사람과 세상을 보는 눈을 정립해야 한다. 법학은 '가치지향적 학문'이지 '가치중립적 학문'이 아니다. 어떠한 가치를 중심에 놓을 것인가를 스스로 분명히 하고, 다른 가치와의 소통과 타협을 추구해야 한다. 그리고 법학을 제대로 공부하려면 철학, 정치학, 경제학, 사회학 등 다른 학문을 알아야 한다. 법학은 독자적인 학문체계와 논리를 갖고 있고 또 그래야 하지만, 다른 학문의 시각과 성과를 흡수해야 한다. 그렇지 못하면 법학은 편벽便辟하고 건조한 개념과 논리의 묶음에 머물고 말 것이다.

 

p152

 민주주의 형법은 존재하고 있는 법률의 내용이 정당한지, 실정법률이 국미느이 법 의식이나 법 관행을 초과하는지, 그리고 위반자에게 부과되는 제재가 과도한지 등을 따지고 물어야 한다. 그리고 피치자被治者 국민데 대한 공감과 배려가 필수적이다. 요컨대, 민주주의와 인본주의를 지향하는 사회에서 법의 이념인 정의는 후자의 정의, 즉 "연민의 정의"를 추구해야 한다. "타인의 고통을 목격하면서 지성만이 아니라 몸과 마음으로 그 고통을 함께 느끼는 것", 바로 이것이 정의의 출발점이다.

 

p157

 전통적 정의론에서 강조하는 재화의 공정한 배분 - "각자에게 각자의 것을"이라고 요약되는 '배분적 정의' - 에 집중하는 한편 "지배와 억압"을 문제 삼아야 한다. "공정으로서의 정의"를 막는 것이 바로 지배와 억압이기 때문이다. 16세기 영국에서 사상가이자 대법관으로 활약했던 토머스 모어는 1516년에 쓴 <유토피아>에서 일반 서민들에게만 적용되는 정의인 "쇠사슬에 묶인 채 바닥을 기는 정의"와 군주들의 정의인 "원하는 것은 다 하고, 원하지 않는 것은 하지 않아도 되는 정의"를 대비시켰다. 전자에 대한 후자의 지배와 억압을 해결하지 않으면, 사회적 재화의 공정한 배분은 불가능하다.

 

p192

 나는 정치사상가 샹탈 무페Chantal Mouffe가 민주주의에 대한 경고로 남긴 글의 진짜 의미를 확실히 알게 되었다.

 

 "민주주의는 불확실하고 일어날 법하지 않은 어떤 것이며, 당연한 것으로 받아들여서는 안 된다. 민주주의는 항상 허약한 정복이며, 심화시키는 만큼 방어도 중요하다. 일단 도달했다고 해도 그 지속성을 보증할 민주주의의 문턱 같은 것은 없다."

 

 '검찰독재'와 '경제독재', '검찰공화국'과 '삼성왕국' 모두 무섭고 두렵다. 그러나 민주주의의 핵심 중 하나는 '일인일표제'다. 한 표를 가지 주권자 한 명이 검찰이나 재벌과 싸워 이길 수 없다. 한 표, 한 표가 모이면 달라진다. 또한 민주주의는 '대의민주주의'외 '광장민주주의'를 요구한다. 촛불 하나하나가 모이면 달라진다.

 

p210

 어려운 시절이기에 안토니오 그람시의 유명한 말을 되새긴다. "이성으로 비관하되 의지로 낙관하라." 그는 어린 시절 사고로 꼽추라는 장애를 가진 채 성장했고, 이후 이탈리아의 대표적 공산주의자로 반파시즘 투쟁에 앞장섰다가 20년 징역형을 선고받고 약 11년을 감옥에서 보낸 후 건강 악화로 석방되었으나 얼마 지나지 않아 사망했다. "이성적 비관"과 "의지적 낙관", 이는 재벌공화국을 사는 우리에게 필요한 덕성이다.

 

p212. 사회주의의 진짜 의미

 1987년 헌법체제 이후 여러 번의 민주정부가 들어섰지만, 1997년 'IMF 체제'가 요구한 신자유주의의 요구는 우리 사회의 근본을 바꿔놓았다. 정치적 민주화는 경제적 민주화로 이어지지 못했다. 반독재·민주화운동의 투사들도 심화되는 자본주의의 모순과 싸우는 데는 주저했다. 안착된 줄 알았던 정치적 민주주의도 흔들리고 있다. 소련 등 국가사회주의가 붕괴했지만 자본주의의 모순은 전혀 사라지지 않았다. 오히려 더욱 심화되고 첨예해지고 있다. 지그문트 바우만의 예고는 우리나라 상황에도 딱 들어맞아 공포스럽기까지 하다.

 

 "현재 추세대로라면, 경제 성장은 우리 대부분에게 더 나은 미래를 약속하지 않는다. 오히려 이미 압도적 다수인데도 여전히 그 수가 급증하고 있는 많은 사람들이 지금보다도 더 심각하고 냉혹한 불평등과 더 불안정한 조건 및 더 많은 추락과 원통함과 모욕과 굴욕을 겪게 될 것임을 예고한다. 즉, 사회적 생존을 위한 지금보다 훨씬 더 힘든 싸움을 예고한다."

 

 

 자본주의 모순을 비판하는 최고 이론은 여전히 사회주의다. 그럼에도 우리 사회는 오랫동안 사회주의에 대해 '빨갱이'라는 딱지를 붙이고 악마시하는 데 급급했다. 역사학자 토니 주트의 서술 또한 21세기 한국의 상황과 맞닿아 있다. 

 "사회주의라는 말에 당황스러운 침묵으로 대응하는 것은 오직 미국만의 특수한 현상이다.  미국에서 이루어지는 공공 정책에 대한 논쟁의 방향을 바꾸는 데 필요한 과제 가운데 하나는 '사회주의'의 기미가 보이거나 그 같은 성향을 지닌 것으로 판단될 수 있는 그 무엇에 대해서든 의심부터 하고 보는 미국인들의 뿌리 깊은 성향을 극복하는 것이다."

 

 자본주의의 모순을 해결하는 데 사회주의 논리가 도움이 될 수 있는데도 '냉전의 논리'로 무작정 반대하는 것은 또 다른 폭력이다. 자본주의의 문제점을 지적하고 대안을 마련할 수 있는 사회주의를 비롯한 다양한 이론과 사상을 제대로 공부하지 않고서는 그와 같은 모순을 없애거나 줄일 수 없다. 조지 오웰은 이렇게 말했다.

 "지금은 사회주의가 평등과는 아무런 관계가 없다고 말하는 것이 유행임을 나도 잘 안다. 세계 모든 나라에서 상당한 수의 어용 문사와 말주변 좋은 교수들이 사회주의가 약탈적 동기를 그대로 놓아둔 계획적 국가자본주의에 불과하다는 것을 '증명'하느라 바쁘다. 보통 사람들이 사회주의에 매력을 느끼고 사회주의를 위해 목숨을 거는 이유, 즉 사회주의의 '비결'은 평등사상에 있다.

 자본주의가 온갖 모순을 드러내고 있는 대한민국 사회에서 '평등사상'은 여전히 소중하다. 이 사상을 구현하는 것이 시대적 과제다. 알랭 바디우는 "어떻게 하면 더 많은 사람에게 더 많은 평등한 기회를 부여할 수 있는가에 대한 답을 해야 하는 것이 정치의 고민이다"라고 하지 않았던가. 국가사회주의 붕괴 이후에도 리영희 선생이 공언한 다음과 같은 말씀의 무게는 묵직하다.

 "소위 '신자유주의'라는 무한경재 시장경제의 비인간성, 사회적 다윈이즘의 극단 형태인 사회·경제적 약육강식과 그 무자비성, 윤리성을 상실한 과학·기술 만증주의, 자본의 과학·기술 지배구조로 말미암은 인간과 인류의 미래에 대한 공포 등 사회주의에 대해서 21세기가 거는 요구와 기대는 19세기나 20세기의 소수 국가들에서 보였던 체제로서의 사회주의에 못지않다고 나는 확신하고 있어요."

 

 

윤석열의 가장 큰 문제는 말과 행동이 완전히 따로 논다는 거다. 

자유,공정,정의를 외치지만 실제론 가장 자유가 억압받고 불공정한 사회가 바로 지금이다.

윤석열 정부의 실상을 알고 싶은 사람들은 보면 좋을 내용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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p135

이광수 : 경제라는 건 결국 잠재성장률이 굉장히 중요하거든요. 잠재성장률을 높이기 위해선 세 가지가 중요합니다. 하나는 노동인데요, 인구가 증가하면 잠재성장률도 증가하죠. 그런데 한국은 인구가 줄고 있습니다. 두 번째는 자본인데요, 자본의 효과도 우리나라는 제조업 고도화를 넘어서는 단계이기 때문에, 일본 사례처럼 자본을 투입하면 성장률이 나오는 구조가 끝나가고 있다고 봐야 합니다. 세 번째가 생산성, 총요소생산선이라고 하는 건데, 각 요소들이 융합하고 만들어내는 혁신을 통해서 경제가 성장할 수 있다는 겁니다. 혁신이 일어나려면 가장 큰 전제조건이 격차가 적어야 한다는 겁니다. 임금 격차와 빈부 격차가 줄어들어야 하는 거죠. 그래야 혁신이 발생할 수 있습니다. 못 살면 보수화가 되지 않습니까? 그런데 우리는 격차가 점점 더 벌어지는 사회입니다.

 통일부 공무원을 시작으로 30년간 남북 통일을 담당하는 업무를 맡아왔으며, 김대중, 노무현 정권에서 통일부 장관을 지낸 경험을 바탕으로 한 남북의 교류 및 이에 따른 국제외교 관계에 대한 깊은 통찰이 담겨있다.

 남북의 교류를 위해서 대한민국이 나아가야 할 바에 대한 현실적이며 이론적인 지침서라 할 수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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p100

 이승만 대통령이 왕조적 개념이 아직 남아 이썬 전환기의 인물이라는 점도 영향을 미쳤을 거다. 1960년 3월 15일 대통령 선거를 앞두고 내가 중 3이었던 1959년 말인가 1960년 초에 헬기를 타고 전주까지 와서 전주공설운동장에 전주 시민과 학생들을 모아놓고 연설을 할 때였다. 그때 나는 그분 연설을 직접 들었는데, 국민이라는 단어를 써야 할 대목에서 계속 백성이라는 표현을 썼다. 매우 의아했다. 백성? 왕조 시대 임금이나 대신들이 쓰던 말 아닌가? 미국 유학까지 했다면서 백성이라는 말이 입에서 쉽게 나오다니 참 이상하다는 생각을 하지 않을 수 없었다.

 

p102

 이승만 대통령이 다시 한번 북쪽으로 밀고 올라가 압록강, 두만강을 수복해야 한다고 휴전을 하는 바람에 우리가 6.25 전쟁 휴전협정에 서명을 못 했다고 얘기하는 사람도 있다. 하지만 그건 잘 못 알고 있는 거다. 이승만 대통령이 휴전을 반대한 건 사실이지만 전시작전통제권이 없어서 휴전협정에 서명할 자격이 없었기 때문에 서명을 못 한 것이다. 휴전협정이란 원래 군사령관들이 서명하는 법적 권능을 가진 조약이다. 1950년 6월 25일에 전쟁이 터지고 사흘 만에 부산으로 피신했고, 전쟁 발발 19일 만인 7월 14일 유엔군 사령관 모자를 쓴 주한미군 사령관한테 한국군의 전시작전통제권을 넘겨준 사람이 바로 이승만 대통령이다.

 

p104

 박정희 대통령은 자주국방의 기치를 내걸었다. 1970년대 국방부 건물 꼭대기에 쇠로 크게 자주국방이라고 새겨놓았다. 미국은 우리가 진짜 자주국방을 이뤄서 한미동맹 위상이 부차적으로 떨어지면 주한미군을 나가라고 할 수 있다고 여겨서, 이때부터 미국과 박정희 대통령과의 사이가 불편해졌다. 우리가 자주국방으로 갈 수 없도록 만드는 미국의 미사일 사거리 제한 같은 조치도 이때 나왔다.

 

p106

 노태우 정부가 놓치지 않은 국제정세의 변화란 어떤 것이었나? 1980년대 중반부터 소련에서도 개혁-개방Perestroika-Glasnost이 시작되면서 동유럽 국가들의 체제 전환 움직임이 나타나기 시작했다. 소련은 미국과의 우주 경쟁 등을 포기하고 미-소 공존을 모색했다. 연장선상에서 1989년 12월 2~3일 지중해의 몰타섬에서 미국의 조지 부시 대통령과 소련의 미하일 고르바초프 공산당 서기장의 정상회담이 열렸다. 당시 소련의 최고 권력자였더 고르바초프가 미국에 사실상 항복하면서 동서 냉전이 끝나게 됐다. 노태우 정부는 이런 판세를 잘 읽어내고 적시에 움직였기 때문에 1990년 9월 소련, 1992년 8월 중국과 수교하며 북방정책이 결실을 거둘 수 있었다. 더 이상 반북-반공이 정권의 존재 이유와 정당성의 근거로 쓰이지 않게 된 것이다. 국제질서의 변화가 국내 정치의 통치 명분과 통치 구조를 바꾼 사례라고 할 수 있다.

 소련, 중국과의 수교는 경제적 의미가 있을 뿐만 아니라, 두 나라가 군사동맹 수주의 우방국인 북한에게 주는 정치,외교,군사적 지원을 약화시키고 둔화시키는 효과도 있었다. 연결해서 북한으로 인해 발생하는 우리나라의 미국 의존도를 줄이는 효과도 있었다고 할 수 있다. 대표적으로 노태우 대통령이 소련과 수교하면서 빌려 준 차관을 무기로 돌려받은 일을 들 수 있다. 소련에 30억 달러를 차관으로 주기로 약속하고 수교했는데, 1차로 15억 달러를 먼저 지급한 후 그에 대한 원리금 상환이 시작되면 2차로 나머지 15억 달러를 주겠다는 조건이었다. 그런데 소련이 1991년 완전히 쪼개졌고 소련을 승계한 러시아는 경제력이 확 떨어졌다. 세계 최대의 밀 수출국 우크라이나에서 들어오던 돈을 비롯해 소련 시절 연방 가맹 공화국들로부터 오던 돈줄이 끊겨버리자 러시아는 돈이 없다고 차관을 갚지 않았다. 결국 러시아는 1998년 모라토리엄을 선언했다. 돈을 갚지 않은 상황에서 우리나라에 나머지 15억 달러를 마저 달라고 요구했고, 우리는 합의문대로 원리금 상환이 먼저라고 일축했다. 이에 러시아는 고육지계로 군사 장비와 기술로 차관을 상환하겠다고 제안했고 한국 정부가 이를 수락했다. 바로 '불곰사업'이라고 알려진 것이다. 그때 미국에서 난리가 났다. 미국 입장에서는 한국 무기 체계의 대미 의존도를 100퍼센트로 유지하고 싶은데, 러시아 무기가 차관 상환금 대신 한국에 들어오면 한국의 무기 체계에서 미국에 대한 종속성이 떨어지고 10퍼센트든 20퍼센트든 미국 무기 사는 데 쓰는 돈이 줄어드니까, 무기 시장을 잠식당한다는 생각 때문에 미국이 난리를 쳤지만 우리는 결국 미국의 동의 없이 러시아 무기를 들여왔다. 북한의 무기 체계가 결국은 소련의 무기 체계로부터 시작됐기 때문에 북한 무기 체계에 대한 이해를 높인다는 명분과 우리가 빌려준 돈을 받고 러시아에 2차 차관을 제공하겠다는 약속도 지켜야 한다는 논리로 노태우 대통령이 버텨서 실행한 거다.

 노태우 정부 때 북방정책을 추진하는 과정에서 소련 무기를 들여온 것은 우리 무기 체계를 다각화하고, 미국의 의존도를 줄이고, 북한 무기를 직접 파악할 수 있게 되면서 지피지기 원리에 입각해 우리가 상대적으로 북한보다 우위에 설 수 있는, 내지는 견제할 수 있는 능력을 갖추는 결과로 이어졌다. 그 덕에 러시아 무기를 모방하거나 역설계해서 독자적으로 만든 무기도 많이 있다. 러시아가 나로호 발사를 도와준 것도 그 연장선이었을 거다. 미국은 절대 우리게에 로켓 기술을 알려주지 않는다. 노태우 정부가 차관 상환금 대신 러시아의 무기를 받은 것은 일타쌍피 정도가 아니라 일타오피였다.

 하지만 노태우 정부 역시 미국과는 상하관계였다. 군인이었던 박정희, 전두환은 쿠데타로 대통령 자리를 차지했기 때문에 국민 정서상 정통성을 인정받지 못했다. 그래서 미국이 인정해주어야만 그나마 정통성이 생기는 구조였다. 우리 국민은 군사정권을 인정할 수 없지만 미국은 항상 옳고 미국이 인정한다면 우리도 따라갈 수밖에 없다는 인식이 있었다. 국민 의식이 그러니 그때 한미관계는 완전히 상하관계가 될 수밖에 없었다.

 

p123

 1960~1970년대 중국은 아프리카 국가들에 많은 경제원조를 하면서 자기편으로 끌어들이려고 시도했는데 결국 소용없었다. 아프리카 국가들은 과거 식민 종주국이었던 영국이나 프랑스의 품을 떠나지 못하고 있다. 예를 들면 아프리카 대륙 서쪽에 프랑스 식민지였던 말리, 코트디부아르, 니제르, 기니, 모리타니, 부르키나파소 같은 나라들은 다닥다닥 붙어 있는데도 그 나라들끼리 직접 전화 연결이 안 됐었다. 말리와 코트디브아르가 직접 연결이 안 되고 말리에서 프랑스를 거쳐야 코트디브아르로 연결할 수 있었다. 오래된 일이지만 1970년대 말, 발레리 지스카르 데스탱 이 프랑스 대통령일 때 아프리카 국가 대사관에 근무하던 친구에게 들은 얘기가 놀라웠다. 프랑스 대통령이 아프리카 식민지였던 나라들을 쭉 한 바퀴 돌면서 한 해 동안 밀렸던 월급을 다 해결해 준다고 했다. GDP 규모가 크든 작든 국가가 예산을 세우고 국민에게 돌아갈 복지 예산, 공무원 임금 등등을 써야 하는데 자기네 세금으로 월급을 못 줬다는 거다. 그러니까 자기 대통령보다는 프랑스 대통령을 더 모신다는 거다.

 프랑스 식민지였던 아프리카 국가들이 대부분 독립한 지 60년이 넘었지만 프랑스는 그 나라들에 여전히 강압적으로 영향력을 행사하는 것 같다. 원자재 같은 천연자원을 헐값에 가져가는 등 프랑스가 지금까지 얻었던 이익을 지키기 위해서다. 프랑스가 설계하고 프랑스 재정부가 발행하고 통제하는 CFA 프랑을 쓰는 나라가 아프리카에서 10개국이 넘는다. 프랑스는 심지어 자국민의 활폐를 도입하려는 나라에 위조지폐를 뿌려 경제를 붕괴시키도 했다. 프랑스의 지배에서 벗어나려는 지도자들을 주저앉히기 위해 암살하고 반군을 지원하고 학살을 묵인했다. 직접 군대를 보내 이들 정부를 무너뜨리기도 하면서 프랑스는 아프리카에서 영향력을 놓지 않으려 했다. 프랑스가 나쁜 놈들이다. 프랑스 지도층과 결탁해 권력과 이익만 챙기는 아프리카의 지도자들도 문제다. 2006년까지 아프리카에 수출을 가장 많이 하는 나라가 프랑스였고, 2022년 현재 아프리카 55개 나라 중 프랑스어를 공용어로 지정한 나라가 23개국이다. 프랑스는 또한 아프리카 8개국과 방위협정을 맺었고 프랑스 특수부대 1만여명이 차드, 중앙아프리카공화국, 가봉, 세네갈 등지에 주둔하고 있다. 프랑스 품 안에서만 살아서는 안 되겠다고 각성하는 사람들도 아프리카에서는 아직 힘을 갖지 못하는 것 같다.

 영국은 동부 아프리카에서 탄탄한 세력 기반을 갖추고 있다. 케냐에는 주둔군도 나가 있고 7개국의 공식 공용어가 영어다. 아프리카 국가의 수출은 식민 모국과의 관계에 크게 의존하고 있고, 프랑스와 영어, 두 언어를 공용어, 공동 공용어로 지정한 나라가 40개국이 넘는다. 아프리카는 미국의 직접 영향권은 아니지만 아프리카에 지대한 영향력을 가진 프랑스와 영국이 미국 영향권 안에 있다.

 그런데 프랑스가 아프리카에서 민심을 많이 잃고 있다. 중국과 아프리카 국가들의 관계가 급속도로 가까워지고 있다. 중국은 경제면에서 EU에는 뒤지지만 2009년부터 2021년까지 12년 연속 아프리카 최대 무역 파트너의 지위를 유지하고 있다. 2010년대 내내 아프리카 3대 경제대국 중 하나인 남아프리카공화국의 최대 교역국도 중국이었다.

 

p127

 일본이 G2로 미국 GDP에 가장 근접했을 때도 미국 GDP의 40퍼센트 미만이었는데 미국 레이건 정부는 선진국들을 모아 환율을 조정해서 일본을 주저앉혔다. 1985년 '플라자 합의'인데 사실상 미국이 압력을 넣어 환율 조작을 받아들이도록 한 거다. 그런데 중국의 경우는 미국이 제압할 타이밍을 놓쳤다. 미국이 20세기의 우선순위대로 유럽, 중동에 신경을 쓰는 동안 중국이 급속히 커지면서 일본한테 썼던 방식을 쓸 수 없을 지경이 되어버린 거다. 2010년 G2로 올라선 중국이 GDP 면에서 미국을 따라잡는 속도에는 가속도가 붙은 것 같다. 2010년에 미국이 GDP의 40퍼센트를 달성하면서 G2로 올라서더니 2021년에는 74퍼센트까지 치고 올라왔다.

 이렇게 빠른 속도로 치고 올라오는 중국에게 멱살을 잡히지 않기 위해 미국은 총력을 다하고 있으나 혼자 힘으로는 역부족이 되니까 동맹국들을 자꾸 끌어들이고 있다. 2020년 미국, 일본, 호주, 인도를 묶는 4자 안보기구인 쿼드가 생겼고, 미국과 영국이 호주의 핵잠수함 건조를 지원한다면서 2021년 호주, 영국, 미국이 오커스AUKUS라는 삼각동맹을 맺었다.

 이게 전부 중국을 견제하기 위한 미국의 세계 전략 일환이다. 그러다 보니 북핵 문제는 우선순위에서 멀어져 버렸다.

 

p132

 일본몽도 있다. 대동아공영권은 지난 얘기가 아니다. 지금 일본은 자위대의 힘을 키우고 해외 출병이 가능하도록 헌법을 고치려 노력하고 있지 않나. 군사력을 키워놓고 미국의 힘이 빠질 때 그 자리를 차지할 수 있는 나라가 돼야겠다는 거다. 우리는 일본이 밉고 싫지만, 일본의 그런 목표를 비도덕적이다, 비윤리적이다 말할 수 없다. 국제정치도 정치인데 거기에다가 도덕의 잣대를 들이대면 바보다. 국내정치든 국제정치든 정치는 현실이고 현실은 선악이 아니라 결국 유불리로 결정 나는 거다. 그래서 미국도 패권을 잃지 않고 계속 군림하려고 하는 거 아닌가. 정책가가 러시아의 우크라이나 침략을 옳다 그르다로 판단하는 마인드를 가졌다면 제대로 일할 수 없다. 러시아가 영토를 넓히려는 것은 자연스럽다. 힘이 있으면 번영과 권위를 추구할 수 있다는 마인드로 현실을 읽고 국가의 이익에 부합하는 정책을 실행해야 한다. 때때로 정책가의 자리에 앉아 있는 사람들이 국가이익보다는 여론에 휘둘리거나 자기 머릿속에 들어 있는 잣대에 따라 일하려는 경우를 보는데, 그러면 실패한다. 내 나라의 이익을 추구하는 것이 자국 중심성이고 실용 외교다. 내 나라의 안전, 번영, 권위에 도움이 되는가, 해가 되는가를 따지는 것이 자국 중심성이지 내가 옳다고 믿는 나의 윤리에 맞추어서 활동하는 것은 자구 중심성이 아니다.

 그런 식으로 머리가 돌아가기 시작하면 인간적으로 좀 사악해질 수밖에 없다. 정치판에는 의로도 없고, 설령 있다고 해도 도구처럼 쓰이는 것 아닌가.

 정치는 유불리로 움직인다. 선악이 없다. 그리고 유불리를 잘 계산해야 한다. 한쪽에 계속 붙어 있는다고 유리하지 않다.

 

p138

 2021년 9월 미국이 갑자기 호주에게 핵잠수함 기술을 줬다. 중국을 압박하는 데 호주를 앞장세우고 싶은데 호주가 대가 없이 미국의 이익에 장단을 맞춰주지 않아서였을 것이다. 그 바람에 호주에 잠수함 기술을 팔기로 먼저 약속했던 프랑스가 미국한테 뒤통수를 맞았다. 그러자 프랑스가 바로 미국이 하는 일에 어깃장을 놨다. 2022년 미국이 베이징올림픽을 외교적으로 보이콧한다는데도 프랑스 정부 공식 대표단은 베이징올림픽에 간 것이다. 그동안 유럽은 먹고사는 데 미국이 도움이 되고, 유럽에 버티고 있는 5만 명 가까운 나토군을 미국이 통제하며 국제 안보질서를 장악하고 있으니까 함부로 반대하지 못한다. 하지만 프랑스가 결정적인 이해관계를 침범받자 미국과 다른 자기 목소리를 낸 것이다.

 

p139

 중국이 군사력을 강화하고 미국 중심의 국제질서가 흔들릴 수 있는 수준까지 부상하자 불안해진 미국은 아시아에 힘을 쏟기 시작했다. 미국은 외교/군사정책의 중심을 중동에서 아시아로 이동시키겠다는 '피봇 투 아시아' 그리고 아시아에서 미국의 영향력을 확대하겠다는 '리밸런싱 아시아' 정책을 정립했다. '리밸런싱 아시아'는 미국이 중국보다 월등한 우위에 있는 동안 중국은 한참 밑에 있었고, 그것이 미국에게는 정상이었는데 중국이 갑자기 치고 올라오기 시작했으니 다시 찍어 눌러서 미국이 압도적 우위였던 예전 상태로 되돌려 놓겠다는 거다.

 미국의 절대 다수 전문가들은 중국을 무시한다. 팍스 아메리카나는 영원하리라는 오만과 WASP(White Anglo-Saxson Protestant, 미국의 주류 백인 집단)만을 주류로 여기는 편협함 때문이다. 라틴계인 이탈리아, 스페인도 주류로 생각하지 않고 북유럽은 앵글로색슨이 아니라고 구분한다. 게다가 중국이 자신들이 멸시하는 공산독재국가이기 때문에 역설적이게도 더 빠른 속도로 발전하고 있따는 이 불편한 진실을 못 받아들이는 것 같다. 민주국가들은 민주국가는 무한정, 무한대로 발전할 수 있고 믿지만 독재국가는 발전에 한계가 있다고 본다. 환상이고 착각이다. 독재가 좋은 건 아니지만, 독재국가이기 때문에 발휘할 수 있는 잠재력이 따로 있다. 대표적으로 북한은 2005년 9월 미국의 방코델타아시아의 금융 제재만 17년째 받고 있다. 또 2006년 10월 1차 핵실험 이후 6차 핵실험까지 북한에 가해진 유엔 안보리 제재가 15~16개임에도 불구하고 아직까지 체제가 유지되고 있는 것은 불가사의한 일이 아닐 수 없다. 더구나 그런 제재 속에서도 경비가 적지 않게 드는 핵실험과 미사일 개발을 계속하는 것을 보면, 자유민주주만이 경제를 발전시킨다는 믿음은 미국이 믿고 싶은 신화일 뿐이고 대북제재 유지를 정당화하는 명분일 뿐이라는 생각을 하지 않을 수 없다.

 미국은 중국이 더 이상 크지 못하게 막고, 2차대전 이후 동아시아에서 행사해 온 헤게모니를 계속 유지해야겠는데 턱밑까지 치고 올라오는 중국과 무력으로 싸울 수는 없으니 중국 압박을 정당화하는 명분을 자꾸 만들어 낼 수밖에 없다. 민주주의, 자유, 수호, 인권, 동맹 등이 그런 용도로 강조되고 쓰이는 중이다. 미국의 국력이 큰 흐름으로 볼 때 쇠퇴하고 있지만 과거의 영광에 대한 추억은 남아 있다. 현실을 재인식하기보다 어떻게든 동맹국들을 이렇게 저렇게 묶어서 잘 끌고 가면 부상하는 중국을 견제할 수 있고, 자신들의 헤게모니를 계속 유지할 수 있을 것 같다는 생각이 미국의 속내로 보인다.

 

p152

 김대중 대통령이 집권한 후로도 미국은 해오던 대로 한국을 관리하려고 했다. 2001년 1월 취임한 조지 부시 대통령과 그 정부는 2000년 6.15 남북정상회담 후 남북장관급회담이 정례적으로 열리면서 남북관계가 빠른 속도로 진전되는 데에 불편해하는 기색이 역력했다. 2001년 3월 워싱턴에서 열린 한미정상회담에서 부시 대통령이 김대중 대통령을 'this man'이라고 지칭해서 논란이 되기도 했다. 그 자리에서 부시 대통령은 김대중 대통령에게 "나는 김정일 위원장에 대해 '회의적인 생각sceptisism'을 가지고 있다"고 말했다. 김정일 위원장을 어찌 믿고 남북관계를 그리 빨리 끌고 가려 하느냐는 비판을 한 셈이다. 김대중 대통령이 부시 대통령과 가진 첫 한미정상회담에서 부시 대통령의 견제가 있었지만, 그 후에도 남북장관급회담은 정례적으로 열렸다. 그런데 2002년 1월 29일 오전 부시 대통령이 의회 연설에서 "이란, 이라크, 북한은 '악의 축'이다"라고 규정을 하는 '사고'가 났다. 북한과 관계 개선을 통해 한반도 평화를 일궈내려는 김대중 대통령의 햇볕정책이 암초를 만난 것이다. 미국이 협조하지 않거나 방해하면 한반도 평화는 사실상 기대하기 어려운 것이 현실 아닌가. 부시 대통령이 '악의 축' 발언을 한 2002년 1월 29일 통일부 장관 임명장을 받은 나는 난감했다. 미국이 북한을 '악의 축'으로 규정하고 압박을 강화해 나가면 통일부 혼자서 햇볕정책을 밀고 나가기 어렵기 때문이다. 그런데 김대중 대통령이 직접 부시 대통령을 설득해서 미국도 북한과 대화를 하겠다고 공언하게 만들었다. 그날이 2002년 2월 20일이다.

 부시 대통령이 한미정상회담을 하기 위해 한국에 왔고, 2월 20일 오전에 청와대에서 회담이 열렸다. 그리고 오후 3시쯤 남북철도 연결 시발역인 도라산역에서 한미 정상들이 연설을 하게 되어 있었다. 외교, 안보, 통일 분야 장관들과 청와대 참모들이 김대중 대통령과 함께 서울에서 대통령 전용열차를 타고 도라산역으로 갔다. 그런데 불과 21일 전 북한을 악의 축이라고 규정했던 부시 대통령이 연단에 오르더니 전혀 예상 밖의 연설을 했다. '나는 북한을 공격할 의도가 없다. 그리고 김대중 대통령의 권고에 따라 미국도 북한과 대화를 하겠다. 인도적 지원사업도 하겠다'라는 요지의 연설이었다. 부시 대통령이 먼저 연설한 다음 김대중 대통령이 연설을 시작했지만, 김 대통령의 연설을 귀에 들어오지도 않고 부시 대통령의 연설 내용만 귓전을 때렸다. 2002년 2월 20일 오전 정상회담에서 무슨 조화가 일어난 것일까?

 행사가 끝나고 서울로 돌아오는 기차에 앉아 있는데 대통령 수행 경호원이 우리 칸으로 건너와서 "대통령님께서 통일부 장관님 부르십니다" 하길래 대통령 전용칸으로 갔다. 김대중 대통령이 "건너편에 앉으시오" 하시더니 곧장 "아까 부시 대통령 연설 들었소?"라고 물으셨다. 당연히 들었다고 했더니 "정 장관, 오늘 오전 내가 100분 동안 젖 먹던 힘까지 끌어내서 뷔 대통령을 설득했소. 그랬더니 아까 그런 연설을 한 거요. 나는 이제 할 일을 했으니 나머지는 통일부 장관이 알아서 일하시오" 하셨다. 속으로 '아~!' 하는 감탄사가 절로 나왔다. 역시 김대중 대통령이구나 하는 생각을 하면서 자리로 돌아왔다. 김정일 국방위원장에 대해 회의적인 생각을 가지고 있었고 북한을 악의 축으로 규정한 부시 대통령을 설득해 북한을 공격하지 않고, 북한과 대화할 거고, 북한에 인도적 지원도 하겠다는 연설을 하도록 만든 논리와 이론이 궁금했지만 여쭤볼 기회는 없었다. 

 아무튼 김대중 대통령은 부시 대통령도 설득하고 구슬리면서 통일부가 남북관계 개선을 계속할 수 있는 여건을 만들어 주셨다. 외교부나 국방부, 통상교섭본부 등 한미 안보협력이나 경제협력 담당부처도 대통령의 협상력과 설득력의 덕을 많이 보았을 것이다.

 햇볕정책의 첫 번째 성과는 금강산 관광이다. 김대중 대통령 임기 초인 1998년 11월 18일 시작한 금강산 관광은 김대중 대통령의 결기가 아니었으면 엄두조차 낼 수 없는 '사건'이었다. 미국에 물어보지 않고 독자적으로 저질러 버리는 식으로 결행하고 사후에 미국을 설득했다. 그렇게 결국 미국이 어쩔 수 없도록 만들어 끌고 갔던 것이다. 김대중 대통령은 한미관계, 남북관계를 비롯한 국제정치에 대한 공부를 많이 해서 상당히 탄탄한 이론을 갖추고 있었다. 그리고 대통령이 직접 미국 대통령을 설득했다. 그건 대단한 거다. 이론이 아무리 빵빵해도 엄두를 내어 미국 대통령과 마주한 그 자리에서 직접 설득하는 건 또 다른 문제다. 김대중 대통령이 그렇게 할 수 있었던 건 군사정권에서 모질게 시달리면서도 굴하지 않고 자기 입장을 절대 바꾸지 않으며 계속 버텼던 경험, 결국 대통령까지 된 데서 오는 자신감이 바탕이 된 것 같다.

 첫 금강관 관광객을 태운 현대금강호가 금강산 자락 장전항으로 떠난 1998년 11월 18일 클린턴 미국 대통령은 도쿄에 있었고 그 다음다음 날인 11월 20일 청와대에서 한미정상회담이 잡혀 있었다. 클린턴 대통령은 금강산 관광선이 출발하는 장면을 도쿄에서 TV로 보았다면서 이렇게 말했다고 한다. "금강산 관광선 출항 장면은 매우 아름다웠습니다. 축하합니다." 금강산 관광은 그렇게 이루어졌고 이후 미국의 간섭은 없었다. 미리 미국으로 관료들을 보내 구구절절 설명을 하면서 미국의 동의를 구하려고 했다면 당시 국제정세의 상황으로 보아 금강산 관광은 원래 계획대로 시작되지 못했을 것이다.

p172

 북한 입장에서는 전시작전통제권을 가진 한국이 더 무섭다. 그 동안 북한이 위협해도 전시작전통제권을 가진 미국 입장은 국지전도 부담이니 '한 대 맞고 끝내라'였다. 그런데 한국이 전시작전통제권을 가지면 '때릴 수 있는' 것이다. 게다가 한국은 국방비를 매년 8퍼센트 증액하고 있다.

 노무현 정부는 한미연합사령부가 행사하도록 되어 있는 전시작전통제권을 우리나라 합참의장이 지휘하도록 찾아오게 만들어 놓았지만, 이명박 정부는 전시작전통제권의 환수 여부조차 향후에 검토하겠다고 했다. 북한이 밀고 내려올 때 미국이 자동으로 개입하도록 하려면 미군이 전시작전통제권을 가지고 있는 편이 우리한테 더 안전하다는 논리였다. 미군이 199개국에 나가 있지만 주둔한 나라 군대의 전시작전통제권을 가지고 있는 경우는 한 곳밖에 없다. 우리나라, 한국.

 

2장. 우리는 북핵 문제를 어떻게 풀 수 있을까?

 

p215. 북한의 첫 핵실험, BDA 사건

 2003년부터 시작된 6자 회담의 성과라고 할 수 있는 2005년 '9.19 공동성명'에서 북한은 모든 핵무기를 파기하고 NPT, IAEA로 복귀한다는 약속을 했다. 그 대가로 미국은 한반도 평화협정, 단계적 비핵화, 핵무기 불공격, 북미 간의 수교 등을 북한에게 약속했다. 북한이 첫 핵실험을 하기 약 1년 전의 일이다. 그런데 '9.19 공동성명'은 그다음 날 사실상 깨져버렸다. 미국 재무부가 9월 20일 자 관보에 마카오에 있는 방코델타아시아BDA를 북한 불법 자금 세탁의 주요 우려 대상으로 지정했다고 게재한 거다. 미국 국무부와 백악관이 '9.19 공동성명'을 만들었다면 바로 그다음 날 미국 재무부가 북한에 대한 실질적인 금융 제재를 가한 셈이다. 그러자 북한은 미국을 믿을 수 없다, 철석같이 약속해 놓고 그다음 날 약속을 깨는 미국과 이제 협상은 없다, 결국 핵을 보유할 수밖에 없다고 공개적으로 반발하면서 핵 활동 상황을 중계방송하듯이 공개했다. '지금 영변 원자력발전소 가동을 시작했다', '원자로 가동을 일시 중단하고 연료봉을 꺼냈다', '꺼낸 연료봉을 재처리해서 플루토늄을 추출했다.' 그러고는 2006년 7월 4일, 미국 독립기념일에 중거리 미사일 한 발을 발사하더니 "10월 3일부터 10일 사이 좋은 날을 잡아 핵실험을 하겠다"고 공개적으로 선언했다. 그리고 2006년 10월 9일 1차 핵실험을 단행했고 성공했다.

 북한이 핵무기를 만들 수 있따는 가능성을 탐지해서 6자 회담도 하고 '9.19 공동성명'도 합의했지만, 미국은 그때까지도 북한이 실제로 핵실험을 못 할 줄 알았던 것 같다. '북한이 무슨 핵실험까지 해, 뻥이야'라고 생각했는데 막상 일을 벌이고 나니 미국은 놀랐을 것이다. 미국은 '돈 없으면 아무것도 못 한다'고 생각한다. 북한이 핵무기, 미국 본토까지 날라갈 수 있는 ICBM을 못 만들 거라고 판단했을 것이다. 자본주의식으로만 사고하기 때문인데 북한은 다르다는 것을 염두에 두지 않는다. '고난의 행군'은 자본주의를 전제로 삼는 미국인들은 꿈도 꿀 수 없는 생존 방식이다.

 사실 미국이 북한을 상대하는 걸 보면, 작은 나라나 약소국에 대한 편견을 가지고 있는 듯하다. 예컨대 '저것들이 뭘 하겠어, 미국의 막강한 군사력으로 겁을 주고, 동맹국들을 동원해 압박하고, 또 필요하면 유엔을 통해 제재 결의안을 통과시켜서 북한을 제외한 나머지 모든 국가들이 북한 제재에 동참하면 결국은 손 들게 돼 있다' 하는 믿음을 가지고 있는 것 같다. 그런데 그 믿음이 북한한테는 안 통했다. 사람도 그렇지 않나. 잃을 것이 없는 사람이 악을 쓰고 덤비기 시작하면 잃을 것이 많은 사람은 이기지 못한다. "부자 몸조심"이라는 속담도 있지 않나. 북한이 그런 식으로 핵실험을 성공하고 나니까 비로소 미국 부시 대통령이 노무현 대통령한테 BDA 제재 때문에 사실상 파기된 거나 다름없던 '9.19 공동성명'에서 합의한 방식으로 북핵 문제를 풀 수밖에 없다는 것을 고백한 바 있다. 북한이 1차 핵실험을 한 다음 달인 2006년 11월 하노이에서 열린 아세안지역안보포럼에 참석했던 한국 대통령과 미국 대통령이 별도로 정상회담을 하면서 말했던 내용이 그렇다. "북한이 핵실험까지 했는데 그대로 놔두면 2차, 3차, 4차로 이어질 거고 결국 사실상 핵보유국이 된다. 초동 단계에서 막아야겠다. 그러려면 당신과 내가 함께 김정일 국방위원장을 만나서 한국전쟁의 공식적인 종료를 선언하는 문제를 협의하자. 종전선언을 해줘야만 끝날 것 같다." 종전선언을 해준다는 의미는 전쟁협정을 평화협정으로 바꾸는 협상을 시작한다는 의미다. 그리고 평화협정 협상을 한다는 말은 미국과 북한 사이에 적대적인 군사관계를 끝장낸다는 의미고, 평화협정이 마무리되면 미국과 북한이 외교적으로 수교를 할 수 있는 법적 토대가 마련된다는 것이다. 전쟁했던 나라끼리 평화관계를 유지하자하고 합의하면 바로 수교로 건너갈 수 있는 관계로 바뀌는 것이다. '9.19 공동성명'에서 말했던 대로다. 물론 대신 북한이 핵 개발을 포기해야 한다.

 

p272

4장. 우크라이나 사태, 북핵 문제에 영향

 우크라이나 사태는 우리에게 국제정치의 민낯을 보여주었을 뿐만 아니라 북하의 핵 문제를 더욱 긴박한 국면으로 옮겨놓았다. 우크라이나 사태를 지켜본 북한은 더더욱 핵을 포기하려고 하지 않을 거다. 그런 북한을 어떻게 상대할 것인가는 윤석열 정부의 발등에 떨어진 과제다. 이 문제는 한미동맹 강화만으로는 해결이 안 된다.

 

p273. 우크라이나가 믿은 약속

 우크라이나가 미국, 영국, 러시아의 약속을 믿지 않았다면, 즉 국제정치의 냉혹함을 잊지 않았다면 핵을 가지고 있었을 거다.

 우크라이나는 1994년 '부다페스트 안전보장 양해각서'로 미국과 러시아 등 6개국으로부터 핵과 미사일을 내놓으면 확실하게 체제안전을 보장해 주겠다는 약속을 받았다. 소련 해체로 핵무기를 보유하게 된 카자흐스탄과 우크라이나, 벨라루스를 비핵화하기 위해 미국 여야가 공동 발의해서 거의 만장일치로 통과시킨 넌-루가 법에 따라 미국이 돈을 대고 소련이 핵무기 해체 군사기술을 제공하기로 했다. 미국, 러시아에 더해 유럽의 강자인 영국까지 우크라이나에게 수교와 경제 지원, 체제 안전 보장을 약속했다. 인접 국가인 벨라루스, 폴란드도 우크라이나의 보호를 약속했다. 과거 소련 땅이었던 국가들의 약속은 중요하지 않겠지만, 어쨋든 이들도 우크라이나 보호 약속에 동참했다. 

 지난 2022년 2월 우크라이나를 침공한 러시아 군대를 막는 데 결국 누가 나섰나. 미국 다음가는 군사강국인 러시아가 국경을 맞댄 우크라이나를 치고 들어오는데 미국은 최강국이지만 멀리 떨어져 있기 때문에 손을 못 쓴다. 그나마 러시아를 경제적으로 압박한다는 미국의 말에 영국은 적극적으로 동조하지만 프랑스만 해도 한 발 거리를 뒀다. 앞서 말했듯이 프랑스는 미국한테 삐쳤으니까. 호주에 핵잠수함을 팔아먹으려고 했는데 미국이 중국을 압박하는 데 호주를 끌어들이려고 핵잠수함을 호주한테 그냥 주는 바람에 프랑스가 완전히 장사를 망쳐버린 것이다. 프랑스는 미국이 상도의에서 어긋났다는 명분으로 자기 행동을 정당화하고 싶겠지만 사람들은 국제사회가 그런 데인 줄 몰랐냐고 할 거다. 외교라는 게 다 각자 실속 차리는 일이고, 호주가 프랑스한테 의리 지킬 일이 뭐 있나. 호주는 기본적으로 영국 편이고 영국은 미국 편이다. 프랑스의 잠수함 장사가 그만큼 성사됐던 건 어떤 면에서는 그때 운이 좋아서 아니었겠나. 게다가 프랑스는 앵글로색슨이 아니다. 과가에 영국의 식민지였다가 독립하면서 영연방을 구성한 호주, 뉴질랜드 캐나다는 완전히 미국 편이다. 주요 국제정치 문제에서 영연방 국가들은 영국과 보조를 같이하니까 미국은 영국 단추만 잘 누르면 영연방 국가들이 우르르 따라 들어온다. 그나마 믿을 수 있는 계보끼리 움직이는 조폭 세계처럼. 영연방은 동남아와 아프리카에도 있다. 인도, 말레이시아, 싱가포르, 남아프리카 공화국, 케냐 등등. 그러니까 영연방 내지는 앵글로색슨들이 함께 움직여서 손해를 봤던 프랑스나 독일은 때로 미국과 보조를 맞추지 않고 엇박자로 움직인다.

 우크라이나가 무자비하게 짓밟히는데, 러시아가 핵무기를 쓰겠다는데도 미국은 말뿐이지 행동을 못 한다. 그러니 우크라이나가 1990년대 초에 미국과 러시아의 약속을 믿고 그 감언이설에 속아 핵을 내놨던 것이 불행의 원인이 된 것이다.

 더 거슬러 올라가 보자. 영국과 미국의 합작품인 2003년 리비아 핵 개발 계획 포기 사건, 카다피는 핵을 개발하지 않겠다고 약속하면 미국이 경제 지원도 해주고 수교도 해준다는 약속을 믿고 핵 개발을 포기했다. 그리고 경제 지원이 들어왔고 3년 후인 2006년 미국과 수교도 했다. 그러나 수교 이후에 미국 쪽 공작의 결과라고 볼수밖에 없는 반군이 생겨나면서 정부군과 반군이 싸우는 와중에 2011년 10월 20일 카다피는 길거리에서 나토의 지원을 받은 반군의 총에 맞아 죽었다. 카다피는 미국과 영국의 선의를 믿지 않고 계속 핵개발 노력을 했더라면 그런 일은 절대로 없었을 거다.

 우크라이나도 미국과 러시아의 선의, 더 노골적으로는 감언이설에 속아서 150개나 되는 핵폭탄과 1,700개의 미사일을 팔지 않았더라면, 핵폭탄을 10개라도 가지고 있었다면 저런 꼴은 안 당했을 것이다. 미사일이 100개만 있었어도 그렇게 건드리지 못한다. 아무것도 없다고 러시아가 마음 놓고 두들겨 패는 거다.

 

 

 

 청소년기는 급격하게 심신이 성장하는 기간이다. 대부분은 성장통을 겪게 된다. 신체적으로 몸이 커지고, 동시에 성장, 성 등에 대한 호르몬이 휘몰아치면서 심신이 왕성해지면서 소위 '질풍노도의 시기'를 보내게 된다. 생각이 많아지면서 고민도 많아지고, 여기저기 몸이 아프기도 하고, 살이 트고 몸의 균형이 무너지는 상황이 벌어지는 경우가 있다. 그럴 때는 음식 섭취를 골고루 하고, 적절한 휴식, 적절한 운동, 적절한 교우와 대화, 독서, 음악/영화 감상 등과 같은 다양한 개인/사회/문화적 활동을 통해 한 인간으로서 심신의 균형을 잡아나가며 사회적으로 균형 잡힌 성인으로서 성장해나가게 된다.

 이 책은 대한민국이라는 국가가 이제 성인의 문턱에 다다랐는데, 여기저기 불안정한 부분에 대해 어떻게 균형을 잡을 수 있는가에 대한 방법들을 이야기하고 있다. 

 그 화두가 연대와 공존을 통해 더불어 살아갈 수 있는 나라를 만들어 갈 것인가에 대한 조국 장관의 생각을 담고 있다.

 조국 장관의 가족의 현실을 감안할 때 참 가슴이 아프고, 그런 와중에 이런 책을 쓰셨다는 점에 고마운 마음이 든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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p20

 나는 박 의장이 던진 질문 "그래서 우리는 선진국이 된 것일까?"에 대하여 긍정의 답을 하면서도, 지속 가능한 선진국이 되기 위해서 '사회권'을 강화하는 사회 경제적 제도 개혁이 긴급함을 말하고자 한다.

 사회권은 우리나라에 여전히 익숙하지 않은 개념이다. 헌법학에서는 단결권, 단체교섭권, 단체행동권 등 노동 3권, 근로의 권리, 인간다운 생활을 할 권리, 주거권, 보건권 또는 건강권 등을 사회권으로 분류한다. 국제적으로 유엔의 '경제적, 사회적, 문화적 권리에 관한 국제 협약'에 규정되어 있는 권리다. 풀어 말하면 노동, 주거, 복지, 생계, 의료 등의 분야에서 사회/경제적 약자가 인간으로서의 존엄과 행복을 유지하고 살아갈 수 있도록 보장받아야 할 권리를 말한다. 그런데 우리나라에서 사회권은 시민의 '권리'가 아니라 국가의 '시혜'인 것처럼 인식되고 있다. 이 점에서 이 책은 박태웅 의장과 다른 측면에서 선진국 대한민국이 부족한 면을 지적하고 해결해야 할 과제를 제시하고자 한다.

 

p21

 선진국 대한민국은 사회/경제적으로 취약한 계급/계층/집단의 희생에 기초하여 이루어졌고, 불평등과 양극화라는 심각한 문제점을 내포하고 있다. 선진국이라는 칭호는 이러한 문제점에도 불구하고, 한국이 이런 문제를 해결할 것이라고 기대하면서 미리 당겨 받은 칭호다. 이 점에서 대한민국은 '가불 선진국'이다. 나는 교수로 재직하던 2017년 <사회권의 현황과 과제>라는 책을 엮으면서 다음과 같이 말했다.

 "OECD와 G20 가입 국가로서 복지국가를 실현할 물적 토대를 이미 다 갖추고 있다. 이에 반해 OECD 가입 국가 중 한국의 복지 수준이 가입 국가의 최저 수준인바, 한국은 '복지 저개발 국가', '사회권 저개발 국가'라 불러 마땅하다.

 선진국이 되었다고 시쳇말로 "국뽕이 차오른다!"라고 기뻐할 수만은 없는 상황이다. 이러한 문제점을 그대로 두면 선진국 한국의 지속 가능성은 약해진다.

 

p22

 20세기 초중반 아르헨티나는 세계 10대 부국에 속했다. 수도 부에노스 아이레스는 '남미의 파리'라고 불렸는데, 화려한 바로크식 건물이 즐비했으며 1913년에 지하철이 운행되기 시작했다. 아르헨티나는 유럽 여러 나라 노동자들이 이민 가고 싶어하는 나라였다. 

 그러나 1976년 쿠데타로 집권한 비델라 군부 정권이 반대파 탄압을 위해 벌인 '더러운 전쟁'과 최저임금 폐지, 해고 자유화 등 '신자유주의' 정책의 폐해, 1989년 정치적 민주화 이후 발생한 경제 위기 등으로 아르헨티나는 선진국에서 완전히 멀어졌다. 

 우리는 대한민국이 식민지, 전쟁, 그리고 군사독재와 권위주의 체제를 겪은 후 선진국이 되었음에 자부심을 가져도 좋다. 그러나 충분한가? 아니다 '외연적 발전'을 넘어 '내포적 발전'을 이룩하기 위한 사회 개혁이 필요하다. '국뽕'을 넘어 선진국 대한민국에 필요한 사회/경제적 제도 개혁을 고민해야 한다. 심각해지는 자산 및 소득 격차를 해소하지 않으면 지속적 발전과 국민 통합은 어렵다. 확보된 '자유권' 보장은 기본으로 하면서 '사회권' 보장을 '자유권' 보장 수준으로 높여야 한다. 그래야만 선진국 반열에 오르기 위해 '가불'했던 '빚', 그래서 여전히 남아 있는 '빚'을 갚을 수 있다.

 

 p29

 문재인 정부 말기가 되니, 보수 야당과 언론은 문재인 정부를 폄훼하는 데 여념이 없었다. 이들은 과거 김대중, 노무현 정부에 대해서도 그랬다. 임기 내내 나라가 망한다고 비난과 저주를 퍼부었는데, 임기 종료 후 비로소 그 성과를 인정하는 것이 이들의 행동 유형이다. 그들에게는 죽은 김대중과 죽은 노무현만 좋은 김대중, 좋은 노무현이다. 지금은 두 분 대통령을 '존경'한다고 하는 보수 야당과 언론이 두 분 생존시에 내뱉었던 비방, 악담, 저주를 생각해보라.

 문재인 정부는 촛불혁명의 정신에 기초하여 국정을 운영했고 대한민국을 최초로 '선진국' 대열에 진입시킨 정부다. 문재인 정부의 최고 성과는 외교, 안보, 방역에 있다. 세계적으로 한국의 위상이 높아지고 한국 정부의 발언권도 강해졌다는 것, 남북 사이에 군사적 긴장이 거의 느껴지지 않을 정도로 최소화되어 '코리아 디스카운트'라는 말이 사라졌다는 것은 주지의 사실이다.

 2021년 독일잡지 <투리투에디션turi2edition>은 2021년을 결산하는 특집 기사로 '2021년의 승리자들'을 뽑았다. 국가로는 유일하게 한국을 선정하면서, 그 이유를 다음과 같이 밝혔다.

 아시아의 선도적인 문화국가 한국은 2021년을 접수했다. K-팝은 세계를 정복했고 <서바이벌> 잔혹극 <오징어 게임>은 넷플릭스의 모든 신기록을 깼다. 이것으론 충분하지 않다는 듯, 한국은 판데믹 방역에서도 진정한 모범국이다.

 코로나 위기 이후 한국 보수 야당과 언론은 백신 효능에 의문을 제기하고 문재인 정부의 방역을 줄기차게 비난했지만, 한국의 방역은 세계적인 찬사를 받고 있다. 미국의 방역학자 빈센트 라즈쿠마는 2021년 11월 7일 트위터에 다음의 글과 표를 올렸다. "한국은 역학의 교과서적 원칙을 따랐다. 인구의 75퍼센트가 백신을 완전히 접종할 때까지 사망률을 40배 낮게 유지했다. 이것이 성공이다."

 2020년 12월 국제표준화기구는 한국의 감염병 진단 기법을 국제 표준으로 지정했다. 2021년 11월 23일 <블룸버그>는 한국과 노르웨이, 덴마크, 핀란다, 아랍에미리트, 캐나다, 스위스 7개국을 "코로나 19 방역 MVP"라고 평가했다. 또한 2021년 12월 독일의 '베텔스만 재단'은 'C19 국가 비상 시기 국가 위기관리 능력 순위'를 발표했는데 1위 뉴질랜드, 2위 대한민국, 3위 스웨덴, 4위 덴마크, 5위 독일, 6위 아일랜드, 7위 캐나다, 8위 스위스, 9위 그리스, 10위 핀란드 순이었다.

 그러나 2021년 12월 한국에서 코로나 발생자가 급증한 반면 일본에서는 급감하자, 한국의 일부 교수와 저자는 "K-방역은 실패했다", "J-방역을 배워야 한다" 등의 주장을 쏟아냈다. 그러다 2022년 1월 초 일본의 코로나 신규 확진자가 60배 폭증하여 하루 6,000명을 돌파하자 이들은 침묵했다. 이들은 2019년 아베 정권이 무역 전쟁을 선포했을 때 한국 정부와 대법원을 비난했다. 이들에게는 '넘버 원 일본' 하고가 뿌리 깊게 박혀 있다.

 

p32. 연성 독재? - 완전한 민주주의

 보수 야당과 언론, 그리고 일부 자칭 '진보' 지식인은 문재인 정부를 "연성 독재", "파시즘으로 가는 단계" 운운하며 비판했다. 예컨대 윤석열 후보는 "총과 칼만 안 들었을 뿐 연성 독재, 연성 전체주의를 시도"한다고 비난했다. '좌파' 지식인 중 진중권 씨는 문재인 정부를 "연성 독재"라고 비방했고, 권경애 변호사는 "문재인 정권은 나치즘과 거의 흡사하다"라고 매도했다. 안철수 후보는 문재인 정부로 인하여 한국이 "전체주의 국가가 되가고 있다"라고 주장했다. 모두 객관적 현실에 부합하지 않는 정치적 선동에 불과하다.

 영국 <이코노미스트>가 매년 발표하는 <민주주의 지수>에 따르면 한국은 '완전한 민주국가'다. 문재인 정부 동안 표현의 자유 등 정치적 민주주의는 최고 수준으로 보장되었다. 단적인 예가 문 대통령을 "공산주의자"라고 부른 고영주 전 방송문화진흥회 이사장에게 대법원이 명예훼손죄 무죄 취지로 파기환송했고, "문재인은 간첩", "문재인이 대한민국의 공산화를 시도했다"라고 연설한 전광훈 목사에게 1.2심 재판부가 무죄 판결을 내린 것이다. 대통령에 대한 저열하고 극단적인 비방조차 형사처벌에세 사실상 자유로워졌다.

 '국경없는 기자회'가 발표하는 '언론자유지수'는 2016년 180개 국가 중 70위였으나, 2018년 43위, 2019년 41위, 2020년 42위, 2021년 42위를 기록하여 3년 연속 아시아권 1위를 지키고 있다. 문재인 정부는 언론에 대하여 어떠한 개입이나 압박도 하지 않았다. 현재 언론이 정부가 무서워 기사를 쓰지 못한다는 얘기는 들어보지 못했다. 여당인 더불어민주당이 '징벌적 손해배상' 도입 등을 내용으로 하는 언론 개혁 법안을 준비하자 보수 야당과 언론은 거칠게 비판했다. 그러나 이는 언론의 자유를 침해하는 것이 아니라 언론의 고의,중과실에 대하여 책임을 묻는 것일 뿐이다. 영국 옥스포드대 부설 로이터저널리즘연구소의 보고에 따르면, 한국언론의 신뢰도는 2017년 이후 2020년까지 4년 연속 꼴찌를 기록했다. 한국 언론은 누리는 자유만큼 책임도 져야 하지 않을까.

 한편 대한민국 건국 후 70여 년 동안 유지된 권력기관의 구조가 개혁되었다. 불법적 정치 개입과 민간인 사찰을 금지하기 위해 업무 범위에서 국내 보안 정보를 삭제하고 대공 수사권을 경찰에 이관하는 국가정보원 개혁이 이루어졌다. 댓글 공작, 세월호 민간인 사찰, 계엄령 문건 작성 등 불법을 범했던 기무사령부를 순수한 방첩 보안 기관으로 바꾸는 안보지원사령부 신설도 이루어졌다. 그리하여 과거 정권하에서 음습한 공작을 일삼던 정보기관의 행태는 자취를 감추었고, 이명박, 박근혜 정부가 자행한 민간인 사찰은 완전히 사라졌다. 이제 평범한 시민이 국정원이나 안보지원사령부를 두려워하지 않는 세상이 되었다.

 반면 2021년 12월 14일, 윤석열 후보는 관훈클럽 토론회에서 자신이 대통령이 되면 국정원과 검찰 등을 동원하여 인사 검증을 하겠다는 경악스러운 발언을 했다. 문재인 정부하 국정원 개혁이 이루어지면서 북한, 간첩, 산업스파이 등과 관련된 민간인 외에는 국정원의 인적 정보 수집이 금지되었다. 국정원 국내 정보담당원도 모두 철수했다. 그런데 윤석열 후보가 이를 재개하겠다고 한 것이다.

 수사, 기소 기관의 구조 개혁도 이루어졌다. 해방 후 계속 유지되어온 검찰의 권한 독점과 압도적 우위가 해체되었다. 검찰과 경찰 간의 견제와 균형을 보장하는 검경수사권 조정이 성사되었고, 검사의 범죄를 수사하고 기소할 수 있는 독립적 부패 수사 기구인 고위공직자범죄수사처(공수처)가 설치되었다.

 이러한 개혁에 대하여 검찰과 이를 후원하는 보수 야당과 언론은 막무가내로 비난했고 격렬하게 저항했다. 이들은 수사권 조정이 이루어지면 형사사법체계가 붕괴하고 중국식 공안 경찰이 탄생하여 세상을 쥐락펴락할 것이라고 흑색선전을 벌였지만, 그런 일은 일어나지 않았다. 공수처 관할 사건 외에는 기소권을 독점하고 있는 특수 수사 분야에 대한 직접 수사권을 보유한 검찰의 힘은 여전히 강력하다.

 공수처는 원래 시민단체나 법무부가 제시했던 구도에 비하여 현저히 적은 규모(현재 광주지검 순천지청 규모)로 출범했다. 법 제정 당시 패스트트랙에 법안을 올리기 위해 보수 야당의 동의를 얻어야 했기 때문이었다. 그 결과 인력과 경험 부족으로 인하여 큰 성과를 내지 못하고 있다. 특히 공수처가 존재 이유를 입증할 수 있었던 '고발 사주 의혹 사건'에서 성과를 내지 못하자 실망감이 커졌다. 이에 윤석열 후보는 공수처 폐지를 주장했다. 검찰총장 출신으로 검찰 개혁의 상징물인 공수처를 없애고, 자신과 관련된 수사도 막고 싶은 것이다. 그러나 공수처는 '보강'해야지 '폐지'할 조직은 아니다. 검찰의 범죄를 철저히 수사하고 막강한 검찰 조직을 견제할 수 있는 조직이 공수처다. 비판은 하되 재정비의 시간을 주어야 한다. 그리고 인전/물적 지원을 확대해야 한다.

 아울러 1차적 수사권을 보장받는 경찰 수사의 독립성을 훼손하지 않도록 국가수사본부(국수본)도 설치되었다. 검찰의 보완 수사 요구가 보장되기에 국수본 수사의 효율성과 완결성에는 미흡함이 있지만, 국수본은 빠르게 자리 잡을 것으로 예상한다. 그리고 경찰 조직의 비대화를 막기 위하여 광역 단위에서 자치경찰제가 전국적으로 실시되었다. 자치경찰은 생활 안전, 교통, 경비 등 주민밀착형 치안 서비를 제공한다. 그리하여 경찰은 국가경찰, 국수본, 자치경찰 등 3개로 분립되었다.

 공수처, 국수본, 자치경찰 등 세 기구는 이제 갓 걸음마를 내디뎠다. 일정 기관 뒤뚱거림과 넘어짐이 있을 것이다. 그러나 권력기관의 분산과 상호 견제라는 대원칙을 포기할 수는 없다. 대한민국 정부 수립 시기부터 공유되었던 검찰 개혁의 최종 목표인 '수사와 기소의 분리(검찰청의 '기소청'으로의 개편)'는 다음 정부의 과제로 미루어졌지만, 이상과 같은 권력기관의 구조 개혁은 역대 어느 정부도 이루지 못한 역사적 성과였다.

 그런데 대선 과정에서 윤석열 후보는 공수처 관할 사건도 검찰이 수사하도록 하고, 법무부 장관의 수사지휘권은 폐지하며, 검찰총장에게 독자 예산권을 부여하겠다고 공약했다. 문재인 정부의 검찰 개혁 이전보다 훨씬 더 강한 검찰 권력을 만들겠다는 야심을 드러낸 것이다. 비유하자면 국방부 장관의 통제에서 자유로운 육군참모총장을 만들겠다는 것이다. 대한민국 역사에서 법무부 장관의 수사지휘권은 폐지된 적이 없으며, 검찰총장이 독자 예산권을 가진 적도 없다. 문재인 정부의 검찰 개혁으로 '검찰 공화국'이 약화되자, 윤 후보는 아예 '검찰 왕국'을 건설하려 하는 것이다. 물론 이는 국회에서 법률이 통과되어야 가능하다. 다수당인 더불어민주당이 이를 동의할리 만무하다. 그러나 윤 후보는 포기하지 않을 것이다. 대통령이 되면 집요하게 검찰 권력을 강화하기 위해 음양의 노력을 다할 것이다.

 

p39. 인사 실패에 대한 변명

 2017년 촛불혁명은 적폐 청산과 국민 대통합을 동시에 요구하고 있었다. 그리하여 문 대통령은 정부가 출범한 후 포용적인 인사 선택을 했다. 예컨대 2017년 5월 문 대통령은 박근혜 정부 청와대에서 기획비서관으로 일한 홍남기 씨를 초대 국무조정실장으로 임명했다. 2018년 3월에는 박근혜 대통령이 임명한 이주열 한국은행 총재를 연임시켰다. 1978년 이후 40년 만에 이루어진 연임 사례였다. 문 대통령은 야당 소속이라고 하더라도 박근혜 탄핵에 찬성한 합리적 보수 인사를 내각에 포함하려고 진지한 노력을 했다. 예를 들면 비극적으로 고인이 된 정두언 의원이 있다. 인사 문제는 공개해서는 안되지만, 대상자 스스로 고사를 했다고 생전에 밝힌 바 있다.

 장관급 후보자의 경우 인사청문회에서 본인은 물론 전 가족의 신상이 다 털리고 망신을 당하는 일이 계속되어, 적임자라고 판단된 사람들이 손사래를 치고 고사하는 경우가 매우 많았다. 툭하면 야당은 인사청문회 경과보고서 체택을 거부했다. 특히 윤석열, 최재형 두 사람의 대권 출마 사태 이후 진보,개혁 진형 내에서는 인사권자인 문재인 대통령에 대한 비판 또는 불만이 나왔다. 그런데 당시 문 대통령을 포함해 그 누구도 이들이 '태극기 부대' 수준의 사고를 가진 사람인지 알지 못했다. 당시 인사 검증을 맡았던 청와대 민정 수석실은 두 사람에 대하여 비판적 의견을 냈다. 하지만 민정수석실이 확보한 자료로는 두 사람이 이 정도일 것이라고 판단하지 못했다. 민정수석실 책임자로서 이 점에 대한 비판을 달게 받을 것이다.

 2017년 문재인 정부 출범 전후에는 진보,개혁 인사 대부분이 당시 윤석열 검사를 호평하고 있었다. 그는 박영수 국정농단 특별 검사팀 수사팀장으로 활약하였기에 촛불혁명의 '공신' 또는 '우군'으로 인식되었다. 예컨대 2019년 검찰총장 인사청문회에서 윤석열 후보는 문재인 대통령의 측근으로 알려진 양정철 전 민주정책연구원장을 여러 번 만났고, 총선 출마 제안을 받았다고 말했다. 당시 양 전 원장은 윤석열 검사에 대하여 우호적 평가를 하고 있었기에 그런 제안을 했을 것이다. 2017년 대선 당시 이재명 후보는 대선 공약 1호로 윤석열 검사를 검찰총장으로 임명하겠다고 밝히기도 했다.

 문재인 정부 출범 전후 극소수의 사람을 제외하고는 윤 검사에게 검찰총장을 넘어 대통령을 노리는 야심이 있었음을 어찌 감지했겠는가. 단, 당시 최강욱 전 공직기강비서관(현 더불어민주당 최고위원)이 밝혔듯 공직기강비서관실은 윤석열 총장 후보자에 대한 불가 보고서를 세 번이나 올렸다. 검증 보고서 작성 시 심각한 문제점이 있는 부분은 붉은색으로 표시하는데, 윤석열에 대한 보고서는 온통 빨강이었다. 윤석열 검찰은 최 비서관이 얼마나 미웠으면 이후 검찰과 국민의힘 합작으로 최 의원에 대한 고발사주를 감행했다. 그 결과 최 의원은 세 개의 사건에서 피고인이 되어 재판을 받는 수모를 겪고 있다. 그리고 애초부터 윤석열 검사에 대한 비판적 시각을 견지하고 있던 한상진 기자 등 <뉴스타파>팀은 인사청문회에서 윤 후보자가 윤우진 전 용산세무서장(윤대진 검사의 친형)의 변호인 선정에 도움을 주는 육성 녹음을 공개한 후, 진보층으롭터 공격을 받고 많은 후원 회원이 탈퇴하는 등 곤욕을 치렀다.

 노영민 전 대통령 비서실장은 언론 인터뷰에서 윤석열 후보에 대하여 다음과 같이 말했다. 문재인 정부 인사들의 마음을 대변한 것이 아닌가 싶다.

 저런 사람이 정말 모든 주변 사람을 속이고 이렇게 한 거 아니겠어요? 어떻게 보면 배신의 칼을 가슴속에 품고 세상을 속였다. 저는 이제 그런 거 아닌가... 이런 생각을 하고요.

 검찰총장 면접 당시엔 윤석열 후보가 4명의 후보 중에서 공수처의 필요성 등 검찰 개혁에 가장 강력하게 찬성했는데, 취임하자마자 180도 다른 모습을 보였다. 그때 거짓말을 했다.

 윤석열 검사의 마음속에 권력욕의 씨앗을 심어준 '마녀'는 누구였을까? '대호 프로젝트' 운운하며 '윤석열 대통령 만들기'에 나선 이들은 누구였을까. 서울중앙지검 시절 만났다는 <조선일보> 방상훈 회장과 <중앙일보> 홍석현 회장이 포함될 것이다. 윤석열 개인에게 충성했던 '윤석열 라인' 전현직 정치 검사 등도 유사한 역할을 했을 것이라 추측한다. 홍 회장과의 만남에서 동석한 관상가, 김건희 씨와 연을 맺고 있었던 건진 법사 등 여러 주술가도 바람을 잡지 않았을까 싶다.

 

p134. 사법 기관을 지방으로

 국민의힘은 사법기관을 지방으로 이전하자는 제안을 하지 않았고 과거 '신행정수도' 건설에도 반대했기에 이 정책에 반대할 것이다.

 반면 노무현 정부는 행정수도로서의 세종시를 건설하는 역사적 업적을 쌓았다. 대선 과정에서 더불어민주당에서는 사법기관을 지방으로 분산하거나 '사법수도'를 신설하자는 제안이 나왔다.

 나는 여권 초선 의원 모임인 '처럼회'의 획기적 제안에 주목한다. 2021년 7월 더불어민주당 김남국, 김승원, 김용민, 문정복, 민병덕, 민형배, 윤영덕, 이수진, 장경태, 최혜영, 홍정민, 한준호, 황운하 의원과 최강욱 당시 열린민주당 대표는 검찰/사법 개혁의 정점을 찍는 방안으로 사법기관의 지방 분산 배치를 제안했다. 처럼회는 "사법 선진국 독일은 대법원과 헌법재판소가 수도에 있지 않고 전국에 분산, 사법 권력과 정치권력의 분리를 통해 실질적 권력분립을 ㅣ루고 있다"라며, "대법원을 대구로, 헌법재판소를 광주로, 대검찰청을 세종으로 이전"하겠다고 선언했다. 이는 공공기관 지방 이전의 효과를 가져옴과 동시에, 사법 권력을 정치권력으로부터 물리적/심리적 거리를 둘 수 있는 곳으로 떨어뜨려 놓아 정치적 중립성과 독립성 그리고 공정성을 확보하겠다는 구상이다.

 대법원 재판은 법리 판단만 하므로 당사자의 출석이 필요 없다. 대검찰청은 검찰청장을 보좌하고 지검의 수사와 기소를 지휘하지 직접 수사를 담당하지 않는다. 헌법재판소는 하위 기관이 없는 단출한 기관ㅇ다. 따라서 세 기관이 서울에 있을 이유가 없다. 대법원 이전을 위해서는 법원조직법 개정이 필요하고, 헌법재판소 이전을 위해서는 헌법재판소법 개정이 필요하지만, 대검찰청 이전은 대통령령 개정으로 족하다.

 한편 더불어민주당 대권 후보였던 김두관 의원은 헌법재판소, 대법원, 서울중앙지방법원 등을 지방 도시 한 곳에 이전하여 사법 수도를 만들자는 제안을 하고, 법안을 제출했다. 이는 남아프리카 공화국의 사례를 참조한 것인데, 남아공의 행정수도는 프리토리아, 입법수도는 케이프타운, 사법수도는 블룸폰테인으로 나누어져 있다.

 김 의원은 2021년 6월 28일 자신의 SNS에 "법조 카르텔의 지리적 기반"인 서울 서초동을 해체해야 한다고 주장했다. 그는 "경찰과 법원으로 이뤄진 법조 세력의 최상층부는 권위주의 정부 이후에 정치까지도 사법의 영역으로 포섭해 영향력을 발휘했다"라며 대법원 주변의 수많은 변호사, 법무사 등 관련 업계가 세력을 형성하면서 이들이 부동산, 교육, 소비 등 모든 면에서 '강남공화국'을 굳건히 떠받치고 있다고 보았다. 이런 맥락에서 그는 '법조 카르텔의 시스템, 즉 구고적인 해체도 필요하지만 거점의 해체와 재구성도 필요하다"라고 주장한 것이다. 비법률가 정치인의 날카로운 통찰이었다.

 처럼회 안과 김두관 안 중 어느 것을 택할지는 국회 논의가 필요할 것이다. 나는 지역 균형의 관점에서 사법기관을 한 개 도시에 모으는 것보다는 분산하는 것이 타당하다고 보기에 처럼회 안에 동의한다. 이런 변화가 이루어지면 메가시티 발전에도 큰 도움이 될 것이 분명하다.

 

p148. 노동시간 단축 - 주 4.5일 노동제를 도입할 시간이다

 2003년 근로기준법이 개정되면서 한국도 '주 40시간 주 5일 노동제'가 법제화되었다. 단, 당사자 합의에 따라 주 최대 12시간 '연장 근로'가 허용되고, '탄력적 근로시간제'에 합의하는 경우 주 40시간 - 주 5일 노동제의 원칙에 대한 예외가 허용된다. 지금은 당연히 받아들이고 있는 주 40시간 주 5일 노동제가 시행되기 전 경제계와 보수 언론은 이 제도를 실시하면 생산성이 저하하고 임금이 상승하여 경제가 어려워질 것이라고 강하게 반대했다. 그러나 그런 일은 발생하지 않았다.

 2021년 8월 OECD가 발표한 통계에 따르면, 2020년 한국의 연간 평균 노동시간은 1,908시간으로, OECD 38개국 중 세 번째다. OECD 평균 노동시간은 1,687시간이다. 한국 노동자가 OECD 국가 평균보다 221시간 더 많이 일하고 있다. 연장 근무나 야근 수당을 받아 노동 소득을 올리기 위하여, 또는 제시간에 퇴근하기가 쉽지 않은 조직 문화 때문에 '연장 근로' 또는 '탄력적 근로'를 하게 된다. 1970년 영미권에서 사용된 용어인 '워라벨'이 근래 한국에서도 회자했지만, 현실은 아직 멀었다.

 노동운동가들이 흘린 피와 땀의 결과 '하루 8시간 노동제'는 20세기 초 국제 노동 기준으로 자리 잡았다. 그러나 이는 최소 기준이다. 이후 OECD 나라에서는 노동시간을 더 줄이는 시도가 계속되고 있다. 대표적인 나라의 예를 보자.

 먼저 독일은 1967년 주 40시간 노동제를 도입했는데, 1995년부터는 전 산업군에 걸쳐 '주 38.5시간 노동제'를 시행했다. 자동차, 기계, 철강 등 제조업 직군에서는 '주 35시간 노동제'를 시행하고 있다. 이에 더하여 초과 노동시간을 저축해서 휴가 등으로 활용할 수 있는 '근로시간 저축 계좌제'를 도입했다. 벤츠, 보쉬 등 독일의 대표적인 세계적 기업이 모여있는 독일 바덴뷔르템베르크주는 2018년부터 '주 28시간 노동제'를 도입했다. 이 주의 노동자들은 자신의 희망에 따라 최대 2년간 주 28시간만 근무할 수 있다.

 프랑스는 2000년 '주 35시간 하루 7시간 노동제'를 통과시켰다. 연장 근로는 연간 총량 220시간으로 제한되며, 이를 초과하는 경우 직업별 단체협약 또는 근로감독관의 사전 승인이 있어야 한다. 2004년 프랑스 노동부는 이 제도를 시행함으로써 35만 개의 일자리가 새로 창출되었다고 발표했다.

 스페인은 2021년 3월 200~400개 기업의 신청을 받아 임금 삭감 없이 주 4일 노동제를 시험 도입한다는 방침을 발표하고, 이후 3년간 실시하고 있다. 제도 도입으로서 발생하는 기업의 비용은 정부가 첫해에는 100퍼센트, 2년 차에는 50퍼센트, 3년 차에는 33퍼센트를 보전해준다.

 스웨덴 등 북유럽 국가의 기업들은 하루 6시간 노동제를 시행하고 있다. 예컨대 스웨덴의 디지털 미디어 제작 회사인 백그라운드AB, 애플리케이션 개발사인 필리문두스, 토요타 서비스 센터, 살그렌스카 대학 병원 등이 6시간 노동제를 시행 중이다. 아이슬란드는 2015년부터 2019년까지 4년간 유치원 교사, 회사원, 사회 복지사, 병원 종사자 등 여러 직군을 대상으로 주 4일 노동제를 국가 차원에서 시범 운영하는 실험을 했다. 아이슬란드 전체 노동 인구 중 1퍼센트가 이 실험에 참여했는데, 실험 종료 후 참가자 10명 중 8명이 근무 시간이 더 짧은 회사로 이직했다.

 미국의 경우 1930년대 초 켈로그사의 소유주 켈로그와 사장 루이스 브라운은 기존 8시간 3교대 대신 6시간 4교대제를 도입했다. 그 결과 작업장 사고율이 50퍼센트 줄었고, 5년 뒤에는 40퍼센트에 달하는 인력이 추가 고용되었으며, 여가 확보로 인하여 노동자들의 삶의 질도 달라졌다. 그러나 켈로그가 경영에서 물러난 후 새 경영진은 1985년 8시간 노동제를 복구시켰다.

 사실 하루 6시간 노동제의 원조는 토머스 모어다. 그는 명저 <유토피아>에서 지금 봐도 놀라운 비전을 제시했다.

 유토피아 사람들은 하루 24시간 중 여섯 시간만 일에 할당합니다. 이들은 오전에 세 시간 일하고 점심을 먹습니다. 점심 식사를 한 후에는 두 시간 정도 휴식을 취하고 다시 나머지 세 시간 일을 하러 갑니다. 그 후에 식사를 하고 8시에 취침하여 여덟 시간을 잡니다.

(실제로 유럽의 여러나라 특히 스페인이 이렇게 산다. 내 개인적으로 겪기도 했고, 주변인들에게 들어본 것이니 그리 특별한 경우는 아닐 것이다. 9시에 업무시간이 시작되면 삼삼오오 모여서 커피를 마시고 담소를 나눈다. 10시쯤 업무를 보기 시작하고 12시 점심시간이 되면 칼처럼 밥을 먹으러 간다. 급한 업무가 있는 사람들은 회사내에 있는 스낵바같은데서 햄버거나 간단한 스낵으로 끼니를 떼우는 경우도 있지만, 대다수는 차를 타고 밖으로 나간다. 마드리드 같은 대도심의 다운타운은 건물이 밀집해있어서 한국의 일반도시처럼 주변에 걸어서 갈 거리에 식당들이 많이 있지만 차로 30분 정도만 나가도 5층 이하의 건물이 펼쳐친 광활한 배후지역이기 때문에 걸어서 갈만한 거리에 식당이 있는 경우는 드물다.

 점심도 느긋하게 먹다 보면 1시간은 훌쩍 넘기는 경우가 대부분이다. 회사로 돌아오면 거의 2시 남짓이 되고 또 커피 한잔을 마시면서 오후 업무를 시작한다. 5시가 되면 하나둘 퇴근을 시작하고 보통 사무실에 남는 사람은 일이 남아 있는 한국사람들 뿐이다. 그들은 겉으로는 한국 사람들이 열심히 일을 한다고 칭찬하지만 속마음으로는 왜 저렇게 살까?라는 것이 그들의 일반적인 생각이다.

 평일에는 퇴근 후 식구들과 저녁 식사와 담소를 나무며 2시간 정도를 보내고, 보통 10시쯤에는 잠자리에 든다. 금요일에는 가까운 친지 혹은 이웃들을 초청해서 새벽까지 파티를 하거나, 젊은이들의 경우는 시내로 나가서 친구,연인과 새벽까지 불금을 즐긴다.

 이런 여유로운 생활을 옆에서 지켜보다 보면 이 인간들은 정말 행복하게 사는구나 싶었다.)

 

 오랜 시간이 흐른 후 2021년 12월 미국 민주당 소속 마크 타카노 하원 의원은 13명의 민주당 의원과 함께 '주 32시간 근무법'을 공동 발의한다. 1938년 시행된 공정근로기준법을 개정해 표준 근로시간을 현행 주 40시가에서 32시간으로 단축하고, 이 시간을 초과해 근무할 경우 시간당 근무 수당을 별도로 지급해야 한다느 것이 요지다. 타카노 의원은 자신의 홈페이지를 통해 다음과 같이 말했다.

 나는 노동시간을 주 32시간으로 줄이기 위해 이 법안을 제출한다. 그 어느 때보다 사람들은 임금이 정체된 상태에서 더 긴 노동시간을 일해야 하기 때문이다. 우리는 이를 우리의 현실로 계속 받아들일 수 없다. 주 4일 노동을 실험해본 많은 나라와 기업은 이 제도가 압도적으로 성공적이라는 점을 확인했다. 생산성은 높아졌고 임금은 증가했다. 코로나19라는 세계적 유행병이 수백만 명의 미국인을 실업 상태 또는 일이 충분하지 않은 상태로 남겨놓은 후, 줄어든 주 노동시간은 더 많은 사람이 더 좋은 임금으로 노동시장에 참여할 수 있도록 만들 것이다.

 이러한 흐름 속에 아랍에미리트는 세계 최초로 2022년 1월 1일부터 주 4.5일 노동제를 도입했다. 이에 따라 아랍에미리트의 모든 정부 기관은 월요일부터 목요일까지 평일에는 오전 7시 30분부터 오후 3시 30분까지 8시간 근무하고, 금요일은 오전 7시 30분에 일을 시작해서 정오에 마치게 된다.

 한편 한국에서는 농부 철학자 윤구병 대표가 경영하는 '보리 출판사'가 선도적으로 하루 6시간 노동제를 시행했다. 연장 근무를 너무 오래 허용하게 되면서 6시간 근무제가 의미 없어지니, 연장 근무 시간을 월 18시간 이내로 제한했다. 노동시간은 줄었지만 월급은 줄이지 않았다. 보리출판사는 주 5일 노동제가 우리나라에 정식으로 도입되기 3년 전인 2001년부터 주 5일 노동제를 이미 실시했다. 노동시간을 단축해야 가족 관계와 사회 공동체가 개선되고 노동자의 건강과 삶의 질이 향상될 수 있다는 윤 대표의 철학이 구현된 것이다. 윤 대표는 말한다.

 

 노동시간이 길어지면서 한 식구가 밥상머리에 모여 앉아 식사할 시간도 없어지고 가정생활이 깨졌다. 국가정책으로 6시간 노동제가 시행돼야 한다. 우리 사회가 소수 부자에게 부를 집중하는 일에만 관심이 있지, 고루 나누는 데에는 관심이 없기 때문에 노동시간이 길어지게 됐다. 청년 실업 문제 해결을 위해서도 노동시간을 줄여야 한다. 부모들 중엔 자식을 교육시키고, 먹고 살려고 하루 10시간 넘게 일하는 분들이 있지만, 그게 역설적으로 자녀들 일자리를 뺏는 결과로 나타났다.

 2022년 1월에는 대기업인 CJ에서 큰 변화를 시작했다. CJ ENM 엔터테인먼크 부문은 2022년 매주 금요일 오후를 사무 공간 밖에서 자율적으로 외부 활동을 하는 '비아이 플러스Break for invention plus'를 시행한다. 이에 따라 직원들은 주 4.5일(36시간)만 사무실에서 근무하게 된다. 매주 금요일 4시간의 오전 업무가 종료되면 별도의 신청 없이 일괄적으로 업무용 PC가 종료된다.

 

p159

 중대재해처벌법은 2022년 1월 27일부터 시행되었다(상시근로자가 50인 미만이거나 공사 금액이 50억 원 미만이면 3년 뒤인 2024년 1월 27일부터 법이 적용된다). 중대재해처벌법 적용 1호 기업은 삼표산업이 되었다. 고용노동부가 2022년 1월 29일 경기도 양주시 소재 삼표산업 양주 사업소에서 발생한 노동자 매몰 사망 사고를 '중대재해처벌법 1호'로 적용 사고로 판단하고 수사에 착수했다.

 중대재해처벌법 시행을 앞두고 고용노동부는 중대 재해 발생 등 산재 예방 조치 의무를 소홀히 한 사업장 1,243개소의 명단을 공개됐다. 명단에 포함된 곳은 중대 재해 발생 등으로 산업안전감독관이 수사,송치해 법원에서 형이 확정된 사업장, 산재 은폐 또는 미보고로 과태료가 부과된 사업장, 중대 산업 사고 발생 사업장 등이었는데, 절반 이상이 건설업이었다.

 중대재해처벌법 시행을 앞두고 여러 기업은 대응을 마련하여 시행했다. 예컨대 현대건설은 안전 관리 우수 협력사에 포상 물량을 총 5,000억 원 규모로 확대하는 '안전 보건 인센티브 5,000억 원' 제도를 실시했다. 삼성물산 건설 부문도 2021년 우수 제보자 포상, 위험 발굴 마일리지 적립 등 6개월간 1,500명, 약 1억 6,600만원의 인센티브를 지급했고, 공사에 차질이 빚어지면 협력사의 손실을 보전해주는 제도를 운용 중이다. 포스코건설은 2021년부터 '무재해 달성 인센티브 제도'를 도입했는데, 상반기 중에 전사에 중대 재해가 발생하지 않은 경우 직원들에게 50만 원을 지급하며, 하반기에도 중대 재해가 발생하지 않으면 추가로 100만 원을 지급한다. 이러한 긍정적 변화는 중대재해처벌법의 덕분이다.

 한편 주요 기업들과 일부 건설사들은 대표이사인  CEO의 책임을 면하기 위해 앞다투어 '최고안전보건책임자 Chief Safety Officer CSO'라는 자리를 만들었다. CSO는 대표이사에 준하는 안전 보건에 관한 조직과 인력, 예산을 총괄하고 권한과 책임을 갖는다. 예컨대 현대건설, GS건설, 포스코건설, 대우건설, 롯데건설, 삼성물산 건설 부문, 한화건설 등은 안전 전담 조직을 확대하고 임원급 CSO를 선임했다. 호반건설은 안전 담당 대표이사를 신설했다. CEO가 처벌받지 않기 위해 '빨간 줄 임원'을 선임한 속셈이 엿보이지만, 이러한 조직 구도 속에는 중대 재해가 발생할 경우 CSO가 법적 책임을 지게 되므로 CSO는 산업재해 예방에 진력할 수밖에 없을 것이다.

 

p162

 둘째, 노동자의 '작업중지권'을 확대해야 한다. 작업중지권은 산업안전보건법과 중대재해처벌법에 규정되어 있는데, 노동자가 산업재해 또는 중대 재해가 발생할 '급박한 위험이 있는 경우' 작업을 중지할 수 있는 권리다.

 2021년 2월 포스코의 최정우 회장은 작업중지권을 적극적으로 알리고 사용되도록 할 것을 지시했고, 포스코건설은 노동자에게 '위험작업 거부권'을 부여했다. 이는 노동자가 현장에서 안전시설이 미비하거나 불안정한 상황이 발생해 작업을 진행할 수 없다고 판단될 경우 작업 중지를 요청할 수 있는 권한이다. 이 권리는 협력사와 모든 현장 근로자를 포함해 누구라도 현장의 안전 담당자에게 연락해 즉시 행사할 수 있으며, 이에 따른 불이익은 전혀 없다. 2021년 12월에는 서울시설공단이 산하 24개 사업장 근로자에게 위험작업 거부권을 전면 보장키로 했다고 발표했다. 서울시설공단은 서울어린이대공원, 지하도상가, 고척스카이돔, 청계천, 서울월드컵경기장, 공공자전거 따릉이 등을 운영하고 있다.

 2021년 3월 삼성물산은 '작업 중지 권리 선포식'을 열고, 이를 확대해 '급박한 위험'이 아니더라도 근로자가 안전하지 않은 환경이나 상황이라고 판단할 경우 작업중지권을 적극적으로 사용할 수 있도록 보장했다. 2021년 8월 삼성물산은 작업중지권을 전면 보장한 이래 월평균 약 360건의 작업중지권이 행사됐다고 밝혔다. 국내외 84개 현장에서 총 2,175건의 작업중지권이 행사됐으며, 이 가운데 98퍼센트(2,127건)가 작업 중지 요구 후 30분 내 조치가 이뤄졌다.

 

p168

 그렇지만 향후 기본소득의 범위와 신복지의 범위를 결정하는 과정에서 긴장이 재현될 것이다. 류덕현 중앙대 경제학과 교수의 의견을 경청할 필요가 있다.

 기본소득 제도의 취지를 기존 복지 제도를 확충해 실현할 수도 있다. 가령, 월 10만 원의 기본소득을 전 국민에게 지급한다면 소요되는 재원은 60조 원인데 이는 2021년 복지,보건,노동, 부분 예산 199조 원의 30퍼센트 수준을 차지할 정도의 큰 규모다. 이와 비슷한 규모의 재원이 있다면 기존 복지 제도를 충분히 두텁게 하고 중산층 및 청년 세대에게 돌아갈 혜택을 크게 늘리는 방식으로 사용하는 것이 보다 효과적이다. 예를 들면, 저소득층에 대한 소득 보장 확대에 15조 원, 전국민고용보험제도 도입에 15조 원 등을 투입할 경우 현행 복지 제도의 포용성은 크게 확대될 수 있다.

 한편 더불어민주당 대선 후보였던 김두관 의원의 '기본 자산' 제안이 잊혀 아쉽다. 김 의원은 신생아 때부터 1인당 3,000만 원의 기본 자산을 지급하고, 기본 자사 예금액에 대한 예금이자 금리는 연 4퍼센트 단일 금리를 적용하도록 하는 '기본 자산에 관한 법률'을 대표 발의했다. 방법은 다르지만 더불어민주당 이용우 의원이 대표 발의한 '청년 기본 자산 지원에 관한 법률'도 같은 취지다. '청년 기본 자산' 기획의 내용은 출생 시점부터 청소년기까지 월 20만 원을 국가가 적립하고, 적립금 통합 기금 운용을 통해 성인(18세)이 되었을 때 약 6,000만 원의 기본 자산을 마련하며, 고등교육, 주거, 창업 등 용도에만 한정 지급하도록 한다는 것이다. 이러한 기본 자산 제도가 안착되면 청년들이 사회에 진출할 때 서게 되는 출발선이 상당 수준 같아질 것이고, 청년 빈곤이나 저출산 문제도 크게 해결될 수 있을 것이다.

 요컨대 기본소득, 신복지, 기본 자산 등의 구상과 계획을 상호 배제적으로 생각하지 말고, 현 단계 국민의 필요와 국가 재정을 고려하여 적정하게 절충, 조합해야 한다. 그것이 정치의 역할이다.

 

p182

 협력이익공유제는 2020년 6월 법안까지 마련했으나 성사되지 못했다. 협력이익공유제에 대하여 국민의힘과 재계는 위헌이라고 반대했고, 정의당은 한계가 있는 제도이므로 부자 증세로 가야 한다고 주장했다.

 사실 협력이익공유제는 김종인 전 국민의힘 총괄선대위원장이 박근혜 후보를 도우면서 제창했던 경제민주화의 일환이다. 현행 헌법 제119조 2항은 "국가는 균형 있는 국민경제의 성장 및 안정과 적정한 소득의 분배를 유지하고, 시장의 지배와 경제력의 남용을 방지하며, 경제 주체 간의 조화를 통한 경제의 민주화를 위하여 경제에 관한 교제와 조정을 할 수 있다"라고 규정하고 있다. 문재인 대통령은 이 조항은 더 구체화하여 개헌안에 담았다. 즉, 경제민주화는 경제 주체 간의 조화뿐만 아니라 상생을 통해서도 실현될 수 있으므로 경제민주화 조항에 '상생'을 추가했고, 양극화 해소, 일자리 창출 등 공동 이익과 사회적 가치 실현을 위해 상호 협력과 사회 연대를 바탕으로 경제활동이 이루어지는 사회적 경제가 활성화 될 수 있도록 국가에 사회적 경제의 진흥 의무를 부과했다.

 국가는 균형 있는 국민경제의 성장 및 안정과 적정한 소독의 분배를 유지하고, 시장의 지배와 경제력의 남용을 방지하며, 경제 주체 간의 상생과 조화를 통한 경제의 민주화를 실현하기 위하여 경제에 관한 규제와 조정을 할 수 있다. (제125조 제2항)

 국가는 중소기업과 소상공인을 보호 육성하고, 협동조합의 육성 등 사회적 경제의 진흥을 위하여 노력해야 한다. (제130조 제1항)

 개헌안도 법안도 통과되지 못한 상황에서 남양유업은 2020년 1월 협력이익공유를 시행했다. 사상 처음 있는 일이었다. 대리점 대상 물량 밀어내기와 수수료 갑질로 손가락질을 받고 공정거래위원회의 조사를 받던 남양유업이 상황 타개를 위해 자진 시정 방안으로 시작한 것이다. 남양유업은 2013년 대리점 동의 없이 제품을 강매하고 영업 직원이 대리점주에게 폭언을 퍼붓는 등 갑질을 한 것으로 드러났다. 본사가 주문 시스템을 조작해 대리점주가 주문한 양의 두 배를 대리점에 떠넘겼고, 대리점은 '울며 겨자 먹기'로 유통기한이 임박한 상품을 처리하기 위해 '1+1 행사'를 하거나 자체 폐기 처붆게 되었다. 이로 인하여 국민적 분노가 폭발하고 불매운동이 벌어지지, 남양유업은 물러섰다.

 

p200

 동성애자에 대한 차별 중 제일 예민한 것은 '동성혼' 인정 여부다. 현행 법률과 판례는 동성혼을 인정하지 않고 있다. 동성 커플은 법적 혼인을 할 수 없고, 일상생활에서 이성 커플이 공기처럼 누리는 혜택을 누릴 수 없다. 예컨대 가족수당, 세금, 연금, 보험, 병원 면회권, 상속 등에서 혜택을 받을 수 없다. 2021년 2월 국민건강보험공단을 상대로 동성 배우자를 건강보험 직장 가입자의 피부양자로 인정해달라는 소송을 제기했다가 패소했던 소성욱 씨는 말한다.

 사람들은 '우리가 언제 차별했어'라고 따져 묻는다. 하지만 당연히 누리는 그들의 권리가 우리에게는 주어지지 않는다는 사실은 잘 모른다. 우리는 평생을 같이 살아도 한 사람이 세상을 떠났을 때 장례 절차에 개입할 권리가 법적으로 보장되지 않는다. 유산상속도 안되고, 임차인 승계권도 없다. 모든 권한은 (법적) 원가족에게 돌아간다.

 그래서 동성 커플은 유언장, 사전 의료 지시서, 임의 후견인 제도 등 '3종 세트'를 준비해야 한다. 레즈비언 작가 김규진 씨가 2019년 발표한 에세이집 <언니, 나랑 결혼할래요?>에서 밝혔듯이, 국내 항공사 마일리지의 가족 결합도 동성 커플에는 적용되지 않는다. 김 씨가 미국 맨해튼에서 혼인신고를 하고 이 혼인 증명서를 국내 항공사에 제출하여 가족 결합 혜택을 따냈다는 점을 읽으면서 쓴웃음이 났다. 해나 아렌트의 유명한 개념을 빌리자면, 동성애자는 시민임에도 '권리들을 가질 권리'가 보장되지 않고 있다.

보수적 유교 전통이 자리 잡고 있고 보수적 기독교의 발언권이 강한 한국 사회에서 동성혼 합법화는 쉽지 않을 것이다. 해외에는 최초로 동성혼을 합법화한 네덜란드(2001년)을 위시한 서구의 여러 나라와 2019년 아시아 최초로 동성혼을 합법화한 대만 등의 예가 있다. 하지만 동성혼을 당장 인정하는 것이 부담된다면, 미국 버몬트주, 뉴욕주 등 6개 주와 워싱턴D.C. 및 다수의 유럽 국가처럼 '시민 결합'이라는 별도의 제도를 도입하여 동성애 커플의 삶을 보호해줄 수 있다. 일본의 경우 법률은 아니지만 이바라키현 등 다섯 군데 광역자치단체에서 조례로 '동성 파트너십'을 인정하고 있다.

 2022년 1월 7일 서울 행정법원 행정6부(재판장 이주영)는 앞에서 언급한 김용민, 소성욱 커플의 소송에 대하여 패소판결을 내리면서 이렇게 밝혔다.

 구체적인 입법이 없는 상태에서 개별 법령의 해석만으로 곧바로 혼인의 의미를 동성 간 결합으로까지 확대할 수는 없다. - 호주나 유럽연합 여러 나라가 동성혼을 인정하고 있고, 이탈리아 등 여러 나라가 동성 동반자 제도를 두는 등 세계적으로 혼인할 권리를 이성 간으로 제한하지 않는 것이 점진적 추세다. 결혼 혼인 제도 인정 여부는 개별 국가 내 사회적 수요와 합의에 따라 결정될 일이기 때문에 원칙적으로 입법의 문제다.

 그런데 노동운동 차원에서 중대한 변화가 일어났다. 2021년 12월 국내 최대 산업별 노동조합 전국금속노동조합(이하 금속노조)가 회사 내 성적 지향, 성별 정체성에 따른 차별금지 조항을 포함하는 모범 단체협약안을 승인한 것이다. 이 안은 '배우자'를 '법률상 혼인 여부와 상관없이 사실혼 관계의 배우자 및 동거인을 포함'하는 개념으로 정의했고, '가족'도 법률상 혼인에 국한되지 않고 성적 지향, 성별 정체성 등을 고려한 여러 가족 형태를 포함하도록 했다. 이에 따라 본인과 배우자 경조사 휴가, 가족 돌봄 휴직등이 사실혼 동거 관계에 있는 동성 커플을 포함한 다양한 가족에게 적요외는 길이 열리게 된 것이다. 이러한 모범 단체협약안 개정 이후 주한민국대사관은 2021년 12월 22일 공식 페이스북 계정에 "한국 내 다양한 가족 형태의 고용주로서, 금속노조가 모든 조합원에게 동등한 혜택을 주는 것을 지지하게 되어 기쁘게 생각한다"라는 글을 올리고, 지지 의사를 표명했다.

 금속노조는 시민 결합 제도를 노조 차원에서 수용한 것이다. 인류 역사에서 동성애는 존재해왔고, 앞으로도 존재할 것이다. 자신의 도덕관, 종교관과 별도로, 동성애 시민도 이성애 시민이 누리는 시민으로서의 혜택을 누릴 수 있어야 한다는 것이 인권의 기본 원칙이다. 인권의 '인人'을 성적 지향을 이유로 갈라쳐서는 안 된다.

 

저출산, 고령화를 바라보는 여러가지 시점을 통해 왜 이런 현상이 발생하는지에 대한 원인들을 다각도로 보여주는 내용.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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p56

 열정 혹은 감정을 나타내는 영어 단어 passion과 '수동적이다'를 뜻하는 단어 passive는 어원이 같습니다. 고대 서양 철학자나 현인들은 감정을 인간의 탁월한 능력, 즉 생각의 힘을 무력화하는 일종의 방해꾼으로 보았습니다. 감정에 휩싸이면 냉철한 판단이나 자기 통제가 불가능해지는 매우 수동적인 존재로 인간이 전락한다고 생각한 것이죠. 고대 사상가들로부터 내려오는 감정에 대한 경계의 메시지, 혹은 부정적 편견의 흔적은 많은 심리학 이론에도 녹아 있습니다. 합리적 사고와 비합리적 감정이 맞붙은 대결에서 합리성에 판정승을 내려주는 경우가 많았던 것이죠. 하지만 이 시각이 최근에는 바뀌고 있습니다. 좀 더 큰 관점에서 보면 합리적 사고력보다 감정 시스템의 역할이 오히려 생존과 더 밀접하게 관련있을 수 있다고 여러 학자가 주장하고 나선 것입니다.

 

 그래서 최근 사회심리학에서도 감정의 중요성에 주목하고 있습니다. 인간도 정말 중요한 결정은 무의식적이고 감성적인 수준에서 처리하고, 이성적 생각은 큰 방향이 정해진 뒤 거기에 그럴듯한 설명을 붙이는 경우가 많다는 사실이 밝혀졌습니다. 이미 사랑에 빠진 뒤 상대의 장점을 손꼽아보는 모습과 비슷합니다. 이때 상대방이 좋은 이유를 차분히 생각해서 조목조목 나열해보도록 하면, 이 커플은 오히려 헤어질 가능성이 더 높아질 수도 있습니다.

유명한 심리학 연구를 하나 소개해드리겠습ㄴ다. 사회심리학 실험에 참여한 피험자들에게 수고의 보상으로 몇 개의 추상화를 보여준 뒤, 하나를 집에 가져가도록 했습니다. 한 조건(이유 조건)에서는 선택한 추상화가 왜 좋은지를 설명한 뒤 가져가도록 했습니다. 다른 조건(느낌 조건)에서는 아무 이유를 달지 않고 그냥 가지 느낌에 좋은 그림을 가져가도록 했지요. 몇 주 뒤, 연구자들이 피험자들에게 전화해서 이렇게 말했습니다. "혹시 지난번에 가져간 추상화가 마음에 들지 않으면 와서 바꾸어 가셔도 돼요." 흥미롭게도, 그냥 느낌이 좋아서 그림을 가져갔던 사람들보다 왜 그 그림이 좋은지를 설명해야 했던 사람들이 더 많이 그림을 바꾸어 갔습니다. 즉, 인간의 결정과 선택에 강력한 힘을 발휘하는 것은 사실 생각보다 감정입니다. 그림 선택만이 아니라 출산과 같은 중대한 결정에도 해당됩니다.

 이유와 논리는 감정이 내린 선택을 그럴듯하게 포장하는 역할을 하는 경우가 많습니다. 그러나 이런 감정의 위력을 우리는 잘 의식하지 못해요. 그래서 논리와 합리적 생각이 우리의 행동을 지배한다고 착각합니다. 그렇지만 어쩌면 정작 선택의 밥상을 차려 놓은 것은 감정적 느낌이고, 여기에 슬며시 수저를 올려놓는 것이 이성일 수 있습니다. 우리가 의식을 하든 못하든 감정적 경험은 우리 일상에 막대한 영향력을 행사하는데, 거기에는 그럴 만한 이유가 있습니다. 감정은 긴 진화의 여정에서 습득한 생존 지혜를 담고 있기 때문입니다.

 

p71

 매년 OECD 가입국을 대상으로 실시하는 행복 조사에 이런 문항이 있습니다. "당신은 어려움에 처할 때 도움을 청할 사람이 있습니까?" 이 질문에 "Yes"라고 대답하는 비율이 가장 낮은 국가가 한국입니다. 왜 이런 안타까운 현상이 발생할까요? 한 가지 중요한 이유로, 개개인의 관심과 따뜻한 심성이 가족을 비롯해 가까운 몇 사람에게 과하게 편중된다는 점을 들 수 있습니다. 일상에서 마주치는 대부분의 사람은 이 울타리 밖의 사람들인데, 그들에 대해서는 철저히 무관심하거나, 위협이나 경쟁의 대상으로 생각하는 경우가 많아요. 상호 신뢰가 바탕이 되는 사회적 자본이 축적되기 어려운 분위기죠. 또 다른 이유로는 과도하게 타인 중심적인 삶을 산다는 사실을 들 수 있습니다. 항상 남을 평가하고,  또 남의 평가에 쉽게 위축되기 때문에 관계에서 즐거움보다는 스트레스를 느끼는 경우가 더 많지요. 이런 사회적 분위기에서는 서로 친구가 되기 어렵습니다.

 바로 이런 부분에서 행복감이 높은 국가들은 정반대의 모습을 보입니다. 가령, 스칸디나비아 국가들에는 사회적 금기가 하나 있다고 합니다. 타인의 삶을 함부로 평가하지 않는 것, 그저 서로 다른 삶을 각자 사는 것뿐인데, 주제넘는 참견을 하지 말자는 것이죠. 다양한 삶을 인정하는 열린 태도로 관계의 기본을 지키고 존중하는 사회입니다. 이런 사회 분위기가 높은 출산율을 이끌어냅니다. 덴마크 코펜하겐 시내의 특이한 장면 중 하나가 인도에 가지런히 세워진 유모차 행렬입니다. 유모차 속에서 아기가 잠이 든 사이, 부모는 카페에 들어가 커피를 마십니다. 행복한 사회의 단면입니다.

 예전에 읽은 에릭 에릭슨이라는 유명한 발달심리학자의 말을 떠올리게 됩니다. "좋은 엄마가 되려면 단지 좋은 사람이기만 해서는 부족하다. 행복한 사람이 되어야 한다." 아이를 낳아 키우는 여정은 보람과 의미가 있지만, 고되고 힘든 순간들도 분명 찾아옵니다. 행복은 이 긴 여정을 시작할 용기뿐 아니라, 어려움을 이기며 순항하는 지혜와 힘도 준다고 생각합니다.

 

p106

 그 누구도 완벽한 엄마일 필요는 없고, 실제로 완벽한 엄마가 될 수 없겠지만, 많은 사람이 아이에게 완벽한 환경을 제공해줄 자신이 없어 출산을 주저합니다. 즉, 정말 아이를 원하지 않아서가 아니라 '아직 집을 마련하지 못해서' '아직 내 인생도 잘 살지 못해서' ' 아직 부모로서 소양을 덜 갖췄기 때문에'와 같이 아이를 낳을 수 없다며 출산 결심을 지연하거나 비출산을 결정합니다. 

 그러나 이는 심리학적으로 아주 틀린 이야기입니다. 부모는 그저 최적의 좌절을 제공할 최상의 상태를 유지하면 됩니다. 예상되는 장애물들을 미리 제거해두고 아이의 욕구가 언제나 즉각 충족될 수 있는 무균실과 같은 환경을 제공해주는 것은 아이가 결국 스트레스에 취약해지는 결과를 낳습니다. 아이가 깊은 수준의 자기 통찰을 할 수 있으며 회복탄력성과 유연성을 갖춘 꽤 괜찮은 성인으로 자라는 과정에서, 부모의 불완전함은 아이에게 좋은 시험대를 제공해줄 것입니다. 즉 좋은 주 양육자는 '그럭저럭 괜찮은 엄마'면 됩니다. 정작 필요할 때에는 없어서 화가 나기도 하지만 문득 돌아보면 계속 그 자리에 있어주는 사람 말이죠. 그래서 소아정신건강 분야의 권위자인 아주대 병원 조선미 교수는 '살아만 있으면 좋은 엄마'라고 종종 말합니다. 그러니 너무 많은 책임감과 완벽주의적 기대를 가지고 출산과 비출산을 결정하지는 말아주세요.

 다만 우리는 좋은 개인이 되어야 하고, 좋은 커플이 되어야 합니다. 많은 학생, 그리고 내담자가 종종 이런 이야기를 합니다. "우리 엄마가 정말 불행해하면서 모든 자원을 투입해 만든 게 저에요. 그런데 제가 그렇게까지 행복하지는 않아요. 저는 엄마처럼 할 자신도 없는데, 그럼 제 아이는 얼마나 더 불행하겠어요? 우리 엄마는 왜 그렇게까지 애쓰면서 살았을까 생각하면 또 너무 안됐고요." 다시 말하자면 애초에 부모 세대가 가족 내 생활에서 편안한 행복감을 느껴왔다면 청년들의 비혼이나 비출산 문제는 지금과 다른 양상이었을 것입니다. 하지만 안타깝게도 그러지 못했어요. 시집살이와 친척들의 과도한 간섭, 경제적 문제, 가부장제 문화에서 마주하는 다양한 문제와 억압, 불합리한 허식들이 성인과 성인의 진솔한 정서적 교류를 막았습니다. 그래서 기혼자들이 모인 곳에서는 결혼생활의 고통을 과장되게 토로하고 불행을 경쟁했으며 미디어에서는 이를 희화하하기 일쑤였지요.

 그러나 부모가 그럭저럭 유쾌하고 행복하다면 자녀는 비혼을 결심할 때 부정적 감각의 부당한 영향 없이 이성적으로 자기 삶의 방향을 정할 수 있을 것입니다. 아이들에게 제일 좋은 아빠는 '엄마한테 잘하는 아빠'라고 합니다. 부부가 재미있게 잘 지내는 것마으로 자녀들의 행복감은 높아집니다.

 그러므로 지금까지 말씀드렸던 개인의 심리적 요인들을 고려할 때, 복지 시스템의 보완만으로 비혼, 비출산 결정을 내린 사람들의 행동 변화를 이끌어내기란 쉽지 않을 것입니다. 다만 그럭저럭 좋은 개인 혹은 그럭저럭 좋은 부부와 같은 모습을 젊은 세대에게 보여주고 기다리는 것이 자연스러운 태도 변화를 가져올 것입니다. '저렇게 살아도 괜찮겠구나' '내 삶에 아이가 한 명쯤 있어도 괜찮겠구나' 하는 생각이 조금씩 들도록 말이죠.

 

 

 

 

추미애의 인생관, 철학, 법무부장관 1년간의 검찰개혁의 기록, 정치관 등을 두루두루 알 수 있는 대담집 형태의 에세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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p36

 정치의 기본이 무엇입니까? 출세하려고 정치하는 게 아니잖아요. 공공의 목적을 위해 자신을 던지는 일이잖아요. 저는 어떤 선택 앞에서 제 앞날을 고민하며 일한 적이 한 번도 없습니다. 방탄조끼를 입고 일한 적이 없어요. 문제가 있다면 바로 뛰어들었습니다. 판사를 할 때도, 국회의원 준비를 할 때도, 국회의원과 법무부장관을 할 때도 제 자신을 모두 던지면서 살아왔습니다.

p51

 사실 제가 서울 목동에 살면서 인천지법으로 출퇴근하다가 아이를 낳기 위해 남편의 고향인 정읍으로 갔어요. 남편의 의견을 따른 거에요. 그 아이가 태어나기 전해에 대선이 있었는데 그때 김대중 대통령이 선거에서 졌어요. 남편이 너무 속상해하더라고요. 선거에 패배한 이유는 지역주의를 깨지 못한 탓이라며 지역주의 타파를 위해 이 아이는 호남에서 낳아야 한다고 하더라고요. 지금 생각하면 촌스러운 이야기라고 할 수 있지만 그땐 그만큼 호남분들의 절박함이 컸습니다. 그래서 아들을 남편의 뜻에 따라 전북대 병원에서 낳고 전북 주민등록번호를 받았어요.

 아이가 크면서 운동을 좋아했어요. 그래서 스포츠매니지먼트과를 나와서 전북 FC구단에 들어갔어요. 정말 기뻐하더라고요. 그런데 어느 날 왜 자기만 전북산이냐고 물었습니다. "아빠가 널 담보잡은 거란다. 오죽 절절하면 그랬겠냐"라고 그때 이야기를 해줬더니 "처음 들었다"면서 놀라더라고요. 이 아이가 선거 때 저를 많이 도와줬어요. 2016년 선거에서 제가 식도염을 앓았는데 목소리가 잠겨 있으니 아들이 엄마를 대신해 선거 유세차에 올라 유세를 했어요. 청문회 때는 아들도 많이 힘들었는지 술에 취해 들어와서 저한테 한마디 하더라고요. "엄마, 존경해요"라고요.

 오히려 더 미안했습니다. 저는 아들에게 존경한다는 말보다 사랑한다는 말을 듣고 싶었어요. 존경한다는 말은 제가 죽었을 때나 하는 말이라고 생각했거든요. 거리감이 느껴졌어요. 그러고는 이렇게 말하더라고요. "엄마 나 힘들었어요. 열심히 살고 싶었어요. 엄마한테 부담 안 주려고 다리 아픈 것도 관리했고, 운동 많이 하면 다리 아프니까 하고 싶은 운동도 제대로 못 했고, 그런 상태로 군대도 갔고.."라고요.

 아들은 군대 가서 아픈 게 아니라 가기 전부터 아팠어요. 제가 아들에게 말했어요. "엄마가 공인이니까 엄마 때문에 네가 억지로 결정하지 마라. 아프면 순리대로 하자. 그에 맞는 법과 제도가 있으니 솔직하게 아프다고 말하고 그렇게 하자"라고요. 그런데 오히려 아들이 "대한민국 사회에서 군대를 안 가면 엄마한테 시빗거리가 만들어질 것 같다"며 입대했거든요. 정치를 하다 보니 가족의 건강에 신경 쓸 수가 없었어요. 그런 와중에도 스스로 잘 자라주고 엄마 생각해서 아픈 다리를 이끌고 군대까지 갔는데 그런 일이 생겼으니 기가 막힐 노릇이었지요. 제가 병원을 데리고 가줍니까. 먹는 거라도 제대로 챙겨줍니까. 저는 아들에게 항상 미안해요.

 

p77. 겂없는 초등학생

 

추미애 : 제가 1958년 개띠잖아요. 1965년도에 초등학교에 입학했어요. 그 시절 대구도 모두가 가난했어요. 학교 담벼락에 천막집이 다닥다닥 붙어 있었고, 여름엔 검은색 팬티 같은 내의만 입고 학교에 오는 아이들도 많았습니다. 가난이 일상이었지요. 그러나 그때는 가난이 창피한 것도 두려운 것도 아니었어요. 모두가 가난했으니까요. 5학년에서 6학년 올라갈 무렵인 1970년 초반까지 가난의 풍경은 거의 변하지 않았어요.

 1970년도에 6학년에 올라갔어요. 배정된 반을 찾아갔더니 먼저 온 아이들이 모여서 담임선생님 흉을 보는 거에요. "아, 우리가 선생님을 잘못 만났다. 선생님은 부자 아이들만 좋아한다. 학부모에게 촌지를 받고 성적을 높여준다. 이 선생님한테 과외를 받지 않으면 성적을 잘 받을 수가 없다." 뭐 이런 내용이었던 것 같아요. 그 이야기를 듣고 저는 제자리로 갔어요. 누군가 "선생님 온다"라고 하니까 아이들도 후다닥 자리로 가 앉았어요. 그런데 선생님 얼굴이 무척 화가 난 표정이었어요.

 담임선생님이 들어오자마자 "누가 나를 흉봤어? 당장 나와!"라고 소리치니 아이들이 쥐 죽은 듯이 조용하잖아요. 그런데 선생님이 제일 앞에 앉아 있던 아이를 일으켜 세우더니 토끼귀 잡듯이 왼손으로 귀를 잡은 채 오른손으로 아이가 기절할 정도로 막 때리는 거에요. 다른 아이들은 겁에 질려 있었고요.

 선생님이 분을 삭이지 못한 목소리로 "앞으로 너희 같은 놈들은 안 가르쳐. 싫으면 다 나가" 그러는 거에요. 그때 저는 그 선생님한테 더는 배울 것이 없다고 생각했어요. "나가!"라고 하는데 아무도 안 나가면 선생님은 자신이 옳다고 생각할 것 아니에요? 전 그걸 받아들일 수가 없는 거에요. 새로 받은 교과서를 가방에 탁탁 집어넣고 교실 밖으로 나가버렸어요.

 

p100

 전두환 시절이었어요. 1985년 제 첫 부임지는 춘천지방법원이었고요. 그 이듬해인 1986년 10월 28일 대학생 1,500여 명이 참가한 건국대학교 점거농성 사건이 있었습니다. 구속된 학생만 1,000여 명이었고 그 중 400여 명이 국가보안법과 집시법으로 기소되는 상황이 벌어졌어요.

 이른바 불온서적 압수수색이 전국적으로 일제히 시작되었어요. 판사들이 차례로 당직 근무하면서 영장업무를 맡았어요. 사건 관련 검사가 춘천의 제일 큰 서점인 '청구서점'에 대한 압수 수색 영장을 청구했는데, 저는 그 영장청구서를 읽으면서 가슴이 꽉 조여왔습니다.

 압수수색 목록이 기가 막혔어요. 리영희의 <전환시대의 논리> <8억인과의 대화>, 김대중의 <옥중서신>, 조세희의 <난장이가 쏘아올린 작은 공> 등이었는데 왜 이 책을 압수수색하는지 이유를 모르겠더라고요. 국민을 바보로 아는 건가 싶었어요. 영장청구 사유가 경범죄 처벌법상 '유언비어 유포'라가 되어 있었어요. 근거도 없고 법적 정당성도 없었지요. 어떻게 하면 좋을지 고민했어요.

(영장청구, 기각할 생각이셨나요?)

 네, 그렇지요. 어떤 논거로 기각할지 궁리했습니다. 그냥 기각하면 공안정국 분위기로 저를 몰아세울 게 뻔하니 반박하기 어려운 논리를 세워야 했어요. "국민의 알 권리는 헌법상 보장된 기본권이다. 경범죄 처벌법에도 이 법을 남용하여 기본권을 침해해서는 안 된다는 남용 금지 조항이 있다. 영장청구서에는 혐의 사실에 대해 구체적으로 밝히지 않았다. 책을 유언비어라고 볼 근거 자료도 없다." 이것이 제 논리였어요.

 사실 그 다음 일이 경악스러웠어요. 알고 보니 전국 법원에 같은 영장이 접수되었는데 모두 영장이 발부되었더라고요. 저 혼자서만 기각한 거지요.

(무섭지 않으셨어요?)

 두려움보다는 부끄러운 판사로 남지는 않게 되었구나 하고 가슴을 쓸어내렸어요. 그렇게 써놓은 건 그다음 당직 판사가 그걸 참고해서 영장청구 근거로 삼으라는 뜻도 담겨 있었지요.

 (아, 또 다른 영장이 접수되면 기각의 근거로 쓸 수 있는 논리를 남긴 것이기도 하군요.)

 네, 그런데 다음 날 당직 판사에게 전화가 걸려왔어요. 기각된 영장이 다시 접수되었다고요. 기각된 영장을 재청구하려면 지적된 사항을 보완해서 제출해야 해요. 그런데 검사가 마치 처음 청구하는 것처럼 만들어 영장을 접수시켰어요.

(속인 거네요)

 그렇지요. 형사소송법 절차를 무시하고 법원을 속인 겁니다. 이걸 이상하다고 여겨 당직 판사가 확인차 전화를 건 거였는데 결국 그분은 공안정국의 힘에 밀려 영장을 발부할 수밖에 없었다고 해요. 결국 제 뜻대로는 안 되었지만 당시 법원장님은 그 이후로 저를 진지하게 대해주셨어요.

 

p180. 문재인과 추미애의 인연

 

 문재인 대통령은 2012년 대선후보 경선과정에서 만나게 되었습니다. 그때 제가 '민주통합당 대선후보 경선준비 기획단장'이었는데 경선 규칙을 정하려고 후보들 의견을 듣기 위해 한 분씩 만나게 돼요. 손학규, 문재인, 정세균 세 후보 중에 문재인 후보를 가장 마지막에 만났어요. 문재인 후보는 선하고 지성이 넘치는 온화한 풍모셨지요. 수고 많다고 덕담을 먼저 거네시더라고요. 그러면서 본인은 어떤 규칙이라도 상관없다. 당이 하나로 모였으면 좋겠다고 하시면서 경선 과정에서 서로 상처되는 말을 주고받게 되면 응어리지지 않을까 염려를 많이 하셨어요.

 "반민주 세력에게 또다시 정권을 내준다면 불행한 일 아닙니까"라고 결의에 차서 말씀하셨어요. 내부 논란과 분열을 걱정하시면서 "당내 경선이 자칫 네거티브로 흐르면 본선보다 힘들어집니다. 오히려 본선에서는 국민들도 이명박 정권을 끝내야 한다고 생각할 것이기 때문에 단합이 될 수 있어요. 잡음 없이 당내 경선을 치르는 것이 매우 중요합니다. 그러니 경선 규칙에 대해서는 당에 모두 일임하겠습니다"라고 말씀하셨어요. 통 크고 대범한 모습을 보여주셨지요.

 2012년 대선 당시 역할은 국민통합위원장이었습니다. 당시에 캠프가 여러 갈래로 나뉘어져 있었는데 그러다 보니 국민 통합이 대단히 중요한 사안이었고 문재인 후보가 직접 국민통합위원장에 윤여준 전 장관 등 보수 쪽에서 건너오신 분들도 공동으로 참여지시자고 했습니다. 저는 유세 일정을 짜서 전국 유세를 다녔습니다.

 선거운동 마지막 날까지 밤늦게 유세를 마치고 기진맥진햇 서울로 올라왔는데, 결국 패배결과를 보고 실망이 컸지요. 그때 우리 쪽 패착이 뭐냐 하면 선거를 지휘해야 할 당의 중심이 흔들린 거예요. 마지막에 당 안팎에서 문재인, 안철수 후보단일화를 위해 지도부 총사퇴를 해달라고 했어요. 그 당시 이해찬 대표와 제가 최고위원이었는데, 지도부 전원 사퇴를 하게 되니까 당이 선거지원을 제대로 못 하는 거예요. 제가 국민통합위원장이 되어 전국을 다녀보니 공조직은 대부분 팔짱만 끼고 있더라고요. 매우 안타까웠습니다. 선거에서는 당 중심으로 당원과 지지자가 후보를 알리고, 일사분란하게 움직이는 것이 절대적으로 중요하다는 것을 절감한 거지요. 2018년에 문재인 대통령께서 이해찬 대표가 중간에 사퇴해서 2012년 선거에 패배했다고 말씀하시기도 했어요. 그만큼 당의 중심을 바로 세우는 것이 매우 중요했던 것입니다.

(2017년도 대선에서 당 중심 선거를 치러낸 이유가 그런 뼈아픈 경험에서 우러나온 것이군요)

 2012년의 경험이 큰 교훈이 되었지요. 박근혜 대통령 탄핵으로 조기대선을 치루게 되어 선거 준비기간이 짧았던 상황에 차질 없이 정권교체를 완수해야 하는 막중한 입장이었습니다. 그럼에도 처음부터 끝까지 당 중심 선거를 실현해냈어요.

(2012년과 2017년 대선 사이인 2015년에는 전당대회가 있었습니다. 그때 문재인 후보와 박지원 후보의 대결이 첨예했지요. 그 선거가 끝나고 지명직 최고위원이 누가 되는지 모두 궁금해 했는데, 당대표로 선출된 문재인 대표가 뜻밖에 추미애 의원을 지명직 최고위원으로 임명하셨어요)

 사실 처음에는 더 좋은 분을 모셨으면 좋겠다고 사양했습니다. 나중에 들어보니 누군가 문재인 대표에게 저를 강력히 추천했다고 해요. "정치를 몇 선을 하는 동안 처음과 같은 자세로 변하지 않는 유일한 사람이 추미애다. 지명직 최고위원을 시키면 상징적인 의미가 클 것 같다. 여성으로서 통합과 개혁의 이미지가 있고, 여러 세력을 하나로 아우를 수 있는 상징성을 갖고 있다"는 이유였다고 들었어요. 과분한 추천이었습니다. 그래서 저도 선거에서 진 후 생겨난 패배주의를 극복하고 당의 분열을 막기 위해, 반드시 문 대표를 도와서 다음 대선에서 이기겠다는 각오를 세우고 최고위원 지명을 따르게 되었습니다.

 

p193. '의혹'이라는 이름의 인권유린

 (청문회 과정에서 아들 병역 문제가 불거졌어요. 예상하셨나요?)

 전혀 예상하지 못했어요. 병역문제의 경우 대체로 병역 이행 여부를 따졌으니까요. 병역기피 사실이 없으니 생각하지도 않았지요. 예상 질문에도 없었고요.

 청문회 당일에 관련 질문이 나왔을 때 대수롭지 않게 생각했어요. 준비한 자료 중에 진단서 등 증명할 수 있는 것들이 충분해서 덤덤하게 사실 그대로를 말했지요.

 (그런데 문제가 커졌잖아요. 언론이 대서특필하면서 판이 달라졌어요)

 언론의 테러였엉. 교수님과 대담하는 이 순간에도 <문화일보>는 '오후여담'이라는 칼럼(2021.5.6)에서 '공인 의식 파탄자들'이라는 제목으로 문재인 정부의 인사정책을 공격하며 "추장관 아들 탈영의혹"이라고 썼어요. 만기제대한 아들에게 탈영이라 하니 어처구니가 없죠. '의혹'만 붙이면 빠져나갈 수 있다고 생각하나 봐요. 이건 언론이 아니지요. 테러 그 자체에요.

 (언론이 그야말로 공개처형장이 되버렸어요. 무허가 재판을 벌이고 낙인찍어 죄인으로 만들어버리는 겁니다. 인권유린도 이런 인권유린이 없습니다. 조국 전 장관의 경우에는 입시 문제, 추미애 장관의 경우에는 군대 문제를 꺼내, 대한민국에서 보통 사람들이 가장 민감하게 느끼는 덫을 놓은 셈이었어요. 병역기피 사실은 없으니까 군대에서 특권을 누렸다는 식으로 부각했지요)

 처음에는 대응할 가치를 못 느꼈어요. 진실이 너무 확실하니까 저러다 말겠지 생각했어요. 문젯거리가 없으니까요. 그런데 언론은 사실에 관심이 없는 거에요. '의혹'이라고 빠져나갈 단어를 붙인 다음 일방적으로 매도하더군요. 공인은 그런 근거 없는 의심도 문제제기 차원에서 받아들여야 한다는 식이었어요.

 (언론이 아니라 정치공작이라고 할 수 있지요. 방향과 목적을 정해놓고 그걸 이루기 위해 모든 수단을 동원하는 겁니다. 이런 식의 언론은 저널리즘의 본령과 완전히 배치됩니다. 언론이 이렇게 타락하고 부패해버린 현실에 대해 깨어 있는 시민들은 분노를 금치 못하고 있어요)

 그 과정에서 누군가는 엄청난 고통을 겪게 되는 거지요. 가장 기본적인 인권이 무너져요. 방어권을 박탈해버리는 건데. 우리 언론의 현실은 그런 점에서 너무나 처참한 지경입니다.

 (그런 적대적 환경을 뚫고 나아가야 했던 거지요. 그런 과정을 거치면서, 미처 예상하지 못했지만 확실히 보게 된 것들이 있다면 무엇일까요?)

 언론개혁의 필요성을 뼈저리게 느꼈지요. 언론이 하도 크게 부풀려서 아들 병역 문제를 청문회에서 중요하게 다뤘다고 생각하는 분이 많겠지만, 정작 아들 문제는 청문회 현장에서 큰 문제가 아니었어요. 그보다는 제가 낙선한 후 남은 정치자금을 어떻게 처리했느냐, 횡령한 것 아니냐는 문제가 제기되었어요.

 하도 오래된 일이라 횡령이 아니라고 입증하는 증거를 확보하는 데 애먹었어요. 15~16년 전 일인 데다가 액수가 1억 원이나 되었어요. 하지만 결국 입증해냈습니다. 한국백혈병어린이재단과 한국심장병재단에 각각 5,000만 원씩 기부했는데 그 증명 자료를 찾았습니다. 해당 단체에 가서 기부금 영수증을 받아오니까 저를 어떻게 해보려 한 이들이 뻘쭘해졌지요.

 (그런 일은 언론이 보도를 안 해요. 일단 목소리를 크게 해서 상당히 문제가 있는 것처럼 만들어버리는 거지요. 그렇다면 아들 병역 논란은 어떻게 점점 커졌나요?)

 청문회 때 그 문제가 본격적으로 제기되었으면 진단서 등으로 다 해명했을 거예요. 그런데 해명할 기회를 안 주는 거지요. 처음에는 그냥 지나가나 보다 했어요. 그런데 청문회가 끝나고 나니까 법사위 간사인 김도읍 의원이 주도하여 자유한국당(현 국민의힘) 이름으로 고발했어요.

 다 해명된 사안을 고발하니까요. 청문회 때 아들 병역 문제는 가벼운 질문 정도로 나와서 제가 충분히 답변했거든요. 아들이 원래 다리가 아팠었고, 군 복무 중에 수술이 필요해서 절차를 밟아 병가를 얻어 치료를 받았다. 그런데 추가치료가 필요한 상황에서 병가 연장이 안 된다고 하니, 방법을 찾아보다가 개인 휴가를 쓰면 된다고 해서 절차대로 추가 치료를 받고 복귀한 뒤 만기 전역했다고 설명하는 것으로 끝났어요. 그날 본회의에서 공수처법이 통과됩니다. 그러니까 청문회가 진행되는 저녁 무렵에 공수처법이 통과되고, 별다른 심각한 질문 없이 서로 웃으면서 잘 끝났어요. 그런데 그다음 날 바로 고발 조치를 취한 겁니다.

(해명이 다 되었는데, 저쪽은 전혀 다른 생각을 하고 있었던 거잖아요)

 고성이 오가지도 않고 큰 한 방 자체도 없었어요. 그때 김도읍 의원이 야당 간사로서 제 검찰개혁 의지를 여러 차례 확인했고, 어차피 자기들이 반대한다고 임명을 막을 수 있는 것도 아니니 그렇게 나온 게 아닌가 싶었어요. 이후의 이야기지만, 법무부장관 재임 때인 2020년 4월에 채널A 사건이 터지면서 검찰이 엄청나게 흔들렸고, 제가 윤석열 검찰총장에 대한 수사지휘권을 발동하자 엄청난 반발이 있었죠. 바로 그런 상황에서 뜬금없이 아들 병역 문제가 재점화된 거예요. 병역 문제의 불씨가 꺼질까봐 계속 들쑤신 거지요.

 

p197. 인사혁신과 윤석열의 저항

 (채널A 사건이 터지기 전의 상황도 사실 윤석열 검찰총장의 입장에서는 상당히 불편했던 거 아닌가요?)

 그랬을 거예요. 1월에 대검 검사급, 검사장 32명의 인사를 단행했고요. 그때 이른바 '윤석열 사단'이 해체됩니다. 제 개혁 조치 가운에 첫 번째가 '검찰 인사 비정상의 정상화'였어요. 김영삼 대통령이 신군부 세력의 중심인 하나회를 척결한 일에 비교할 수 있겠네요. 2019년 여름, 윤석열은 검찰총장이 되자마자 박상기 법무부장관을 제치고 법무부 윤대진 검찰국장과 청와대 비서관을 시켜 기수를 무시하고 자기 쪽 사람들을 초고속 승진시켰습니다. 이른바 특수통 중심으로 검찰을 장악한 인사 전횡을 저지른 것인데, 그 여파로 70여 명이 검찰을 떠났어요. 그래서 '윤석열 사단'이라는 말이 떠돌았던 것입니다. 인사 정상화를 통해 이런 검찰 내 세도정치를 일차적으로 혁파한 거예요. 연달아 2월에는 중간 간부 인사까지 마무리지었어요.

 (윤석열 총장이 가만 있었을 리 없잖아요.)

 윤 총장은 추 장관이 법무부 인사 내용을 제대로 알 리 없다며 청와대가 배후 조정자라고 판단한 것이 한동훈 검사장의 녹취록에도 드러나지요. 인사발표 며칠 후인 1월 10일 검찰은 청와대를 압수수색해요. 청와대의 울산시장 선거개입 의혹수사를 한다며 대통령이 집무를 보는 청와대 여민관의 자치발권 비서관실에 영장집행을 시도했다가 8시간 만에 철수하는 수사활극을 벌였지요. 얼마나 기가 막힌 일인가요. 저는 인사 정상화를 위해 사전에 치밀하게 조사하고 연구해서 인사 조처했어요. 윤 총장은 청와대 압수수색 이후 곧바로 제 아들 병역 문제를 수사하기 시작했다고 언론에 흘립니다. 그런데 수사할 게 없거든요. 수사에 착수했으면 진단서를 보자고 하는 등의 조사과정이 있게 마련인데, 검찰이 실제로 진단서를 본 때가 8월이에요. 인사에 불만을 품은 윤석열 총장이 저를 겁박하고 여론을 조작하느라 언론 플레이를 했다고 밖에는 볼 수 없지요.

 (인사는 어떻게 한 겁니까?)

 검사장급 인사가 제일 중요하고, 그 다음 고검 검사급 인사를 하지요. 평검사 인사는 법적으로 일정이 정해져 있어요. 2월 첫째 주 월요일에 부임할 수 있도록 해야 하고, 그 10일 전에 인사안을 발표해야 합니다.

 (검찰개혁을 바라는 이들은 검찰의 지휘체계가 정상화될 것이라고 기대했지요. 하지만 청와대 압수수색, 추 장관 아들 병역 문제가 재점화되는 등 개혁에 저항하는 반격이 이어졌습니다.)

 2월에 청와대가 관련되어 있다면서 울산시장 선거개입 의혹사건을 만들고, 이어 유시민 노무현재단 이사장이 연루되어 있다면서 2020년 4.15 총선을 앞두고 신라젠 사건을 터뜨립니다. 한마디로 검찰이 정치공작을 했던 겁니다. 그에 더해 라임 사건을 수사하면서도 청와대 고위직과 여권 정치인들을 엮으려고 했던 것이 한참 후에 김봉현 전 스타모빌리티 회장의 진술로 다 드러나지요. 검찰이 수용자를 압박하고 회유해 사건을 어떻게 조작했는지 말입니다. 검사 술접대 사건이 폭로되었지만 연루된 검사들을 아무 문제 없는 것처럼 처리한 것과는 상반되지요. <뉴스타파>의 심인보, 김경래 기자가 쓴 <죄수와 검사>를 읽어보면 검사들이 사건을 어떻게 조작하는지 자세히 나와요. 당하는 쪽에서는 지옥이지요.

 라임 사건에서는 강기정 수석을 겨냥했고, 옵티머스 사건에서는 임종석 실장을 겨냥했지요.

 (정리하면 법무부장관으로 취임해 인사를 통해 검찰의 지휘체계를 정상화하자 반격이 계속되었던 상황이네요. 지휘체계의 정상화는 결국 인사에서 나오니까요. 조국 전 장관 때도 윤석열 검찰총장이 지휘체계를 교란해 장관을 흔들고 정치검찰의 결속을 다졌지요. 이른바 '검찰의 난' '검란' '검찰 쿠데타'라고 할 수 있는 움직임이 있었습니다. 군대의 쿠데타와는 달리 법과 제도의 영역 안에서 이뤄지기 때문에 일상에서 잘 감지되지 않아 '조용한 쿠데타(Silent Coup)'라고 불리기도 하는데, 국가권력의 핵심을 자신들이 장악하겠다는거지요. 심지어 대통령까지 제압하는 방식을 취합니다. 이를 민주적으로 통제하는 지휘체계를 확립해나가는 것이 검찰개혁의 핵심과제라고 봅니다. 윤석열 총장의 대선 등판은 검찰의 쿠데타를 정치적으로 완결하겠다는 수순으로 판단됩니다. 이를 한국 사회의 지배 카르텔이 합심해 밀고 있고요. 법무부장관 임명 직후부터 이런 엄중한 현실을 인식하셨다고 알고 있는데, 주변 사람들의 판단은 어떠했나요? 간극이 있지는 않았나요?)

 

p239

 수사와 기소를 분리시키면 수사정보를 쥐고 이상한 짓을 못 하게 할 수 있어요. 있는 사건 덮고, 없는 사건 만드는 구조가 깨집니다. "부패검사는 어제는 없는 사건을 만들어서 이름을 얻고, 오늘은 있는 사건을 덮어서 돈을 번다"라는 말도 있잖아요. 이걸 깨야 사법정의, 민생정의가 확보되지요.

 

p292

김민웅 : 그렇지요. 민생과 개혁을 분리하면서, 민생을 소홀히 하고 개혁에 집중했기 때문에 민생이 어려워졌다는 논리를 펴는 것인데, 그건 개혁과 민생이 하나라는 걸 부인하는 것입니다. 개혁의 목표는 민생입니다. 과학기술의 해법에만 집중하다 보면 생태환경에 치명상을 입히는 것처럼, 개혁 없는 민생을 말하면 기득권이 장치해놓은 덫에 걸린 민생의 현실이 보이지 않게 되지요.

추미애 : 저는 개혁과 민생을 별개로 나누는 이분법은 신자유주의적 계략이라고 봅니다. 시장을 지배하는 세력의 계략이지요. 그들은 "개혁은 정치 주제이고 민생은 경제 줒다. 정치가 개혁을 명분으로 경제를 간섭하고 위축시킨다. 따라서 정치와 경제를 분리하고 정치가 경제를 간섭하지 못하도록 하는 작은 정부여야 한다. 정치인은 경제에 무식하고 무능하다"는 논리를 자꾸 퍼뜨리고 주입시킵니다. 정치의 힘을 빼고 자본에 대한 간섭을 못 하게 만들려는 의도입니다.

 

p302

추미애 : 김 교수님의 진단이 바로 현실이에요. 비교적 돈에 덜 쪼들리는 중산층도 자신들의 노후나 자녀 결혼 등을 위해 돈을 불려보려고 주식투자하다가 금융자본 기득권 세력의 먹잇감이 됩니다. 거기에는 또 검피아가 역할을 하지요. 라임이나 옵티머스 사건 같은 경우도 관피아,모피아,검피아가 합세해서 일반 투자자들에게 막대한 피해를 입힌 금융사기 사건이거든요. 이런 금융시장 교란 행위를 바로잡으라고 검찰조직에 증권범죄합동수사단을 만들었던 것인데 거기가 오히려 범죄의 온상이 되어버린 거예요.

김민웅 : 그래요? 그런데 언론을 보면 증권범죄합동수사단이 폐지되어 금융범죄를 신속하게 수사할 수 없다고 비판하잖아요?

( https://www.asiatime.co.kr/article/20210901500321?1=1 , 추미애 장관이 폐지한 증권범죄수사단은 현재 다시 설치됐다)

추미애 : 지난해 초 검찰 조직을 개편할 때, 증권범죄전담수사 기구 자체를 없앤 건 아니었어요. 서울 남부지검의 증권범죄합동수사단 대신 금융조사 1,2부가 금융 증권범죄를 전문적으로 수사하도록 하면서 기존 합동수사단의 카르텔을 허물려고 한 것이지요. 다만 그들이 마치 법무부가 정권수사를 못 하게 하기 위해 증권범죄합동수사단을 폐지한 것처럼 왜곡 주장하는 이유는 그들만의 부패 특권 카르텔을 다시 부활시키고 싶다는 의도예요. 부활시키기 이전에 특권 카르텔을 깨는 장치가 있어야 합니다.

김민웅 : 증권범죄합동수사단은 금융시장 질서 교란을 막기 위해 절대적으로 필요한 조직이라고 사람들이 이해하고 있지 않습니까?

추미애 : 잘 알려지지 않아서 그렇지 비리의 온상이 되었어요. 여러 차례 주가 조작으로 재벌이 된 전관변호사 박OO과 거물사기꾼인 증권자 대표 유OO이 있었어요(http://www.newsfreezone.co.kr/news/articleView.html?idxno=241577, 이 링크를 보면 누군지 알 수 있다).

박 변호사와 유 회장은 저축은행 '상상인'의 대주주이기도 한데, 상상인에서 대출받은 돈으로 '기업사냥'을 해요. 그리고 그 기업에 관한 허위 정보를 흘려 주가 조작을 하고 주가가 올라가 최고점을 찍을 때 주식을 팔아치우는 거지요. 그런 먹튀 수법으로 엄청난 돈을 벌었어요. 전관변호사 박OO은 곧 재벌변호사라고 알려졌지요. 그들이 단숨에 수십, 수백억 원을 가로채는 동안 허위정보를 믿고 투자에 뛰어든 수많은 서민들은 주식이 하루아침에 휴짓조각이 되어 막대한 피해를 입었습니다. 그런 식의 범죄 행각은 2015년부터 2018년 사이에 이루어졌는데, 무려 10개의 회사를 기업사냥했어요. 상상인의 돈이 어느 기업에 멀쩡하게 투자된 것처럼 속이면 주식 가격이 치솟아 고점에 이르렀을 때 팔아치우지요. 그들은 사냥한 기업의 경영에는 애당초 관심이 없었기 때문에 해당 회사자금도 횡령해 부도를 내고 멀쩡한 기업을 고사시켰습니다. 공장 가동이 멈추면서 대량해고가 일어나기도 했습니다.

 자본시장을 어지럽히고 기업을 고사시킨 이 사건들을 관할했던 서울 남부지검 증권범죄합동수사단은 초창기부터 제대로 수사하지 않았어요. 그래서 피해규모와 금액, 피해자의 수가 막대하게 커졌습니다. 2015~2016년 증권범죄합동수사단장은 김OO 부장검사였어요(https://www.mk.co.kr/news/special-edition/view/2015/05/518373/).

 

[토요 FOCUS] 서울남부지검 라인업…문찬석 차장 끌고 김형준 부장 밀고

서울남부지검이 금융·증권범죄 중점 수사청으로 거듭나면서 검찰 내 위상이 한층 높아졌다. 검찰은 몸집이 커진 남부지검 조직에 2차장검사를 신설했다. 1차장검사가 기존 형사1~4부를 담당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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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는 과거 법무부장관을 지냈고 골프장 성추행사건으로 유명해진 전 국회의장의 사위이기도 하지요(https://www.mk.co.kr/news/special-edition/view/2015/05/518373/).

나중에 알고 보니 어이없게도 김 부장검사가 전관변호사 박OO의 범죄를 제대로 수사할 수 없는 처지에 놓여 있었어요. 그는 감옥에 있는 자신의 동창생이자 친구의 뒤를 봐주면서 뇌물도 받았는데, 나중에 뇌물 받은 것이 들통나자 이를 무마시키는 데 필요한 비용을 박OO 변호사가 대주었습니다. 이미 박 변호사의 비리에 대해 수사를 할 수 없을 정도로 엮여버린 것이지요. 현직검사와 전관변호사의 부패로 초기에 금융비리를 막지 못하는 바람에 유사한 피해가 반복 확대된 것입니다.

 나중에 증권범죄합동수사단에서 금융을 잘 아는 수용자를 활용해 불법수사를 했다는 것도 함께 드러났어요. 검사실에 출정시켜 수용자에게 감방을 벗어날 수 있는 편의를 제공하면서, 범죄정보를 얻고 수사표적이 된 수용자의 자백을 유도하는 심부름도 시키고 별건수사를 한 것도 드러났어요. 최근에도 라임 사건에서 김봉현 씨가 66회나 검사실로 불려 다니면서 라임 사건 수사와는 관계 없는 정치권 인사를 대라는 회유를 당했다고 폭로했지요. 검찰은 그런 버릇을 여전히 버리지 못하고 있습니다.

김민웅 : 듣고 보니 더 기가 막히네요. 전쟁이나 전염병으로 민생이 어려워지면 사람들은 정치적 메시아를 찾는 심리에 빠지게 됩니다. 그런 심리적 불안과 공황상태를 이용해 파시스트가 등장한 역사가 있었고 이들이 민주주의의 위기를 초래했지요. 우리도 경제 전문가에 대한 환상으로 이명박을 압도적으로 지지해 대통령으로 선출했고, 지금은 정치검사 윤석열 총장에 대한 환상을 여론으로 부추기고 있지요. 윤석열 총장은 대권수립용으로 속성 과외도 받고 심지어 금융전문성이 있다고 주변에 알리고 있기도 합니다.

추미애 : 경제범죄 전문가라고 하면 모를까 금융사건 수사 경험을 가지고 경제 전문가라고 할 수는 없지요. 금융범죄 전문가라고 하기도 그런 것이 윤석열 전 총장이 서울중앙지검장으로 재직할 때 옵티머스 펀드에 투자했던 정부기관인 전파진흥원이 수사의뢰를 요청했어요. 그런데 당시 중앙지검은 김재현 옵티머스 대표 등에게 무혐의 처분을 내렸어요. 무혐의 처리했던 부장검사가 윤 총장 청문회에 관여했고 이후 핵심보직으로 이동했지요. 옵티머스 변호인도 검찰총장과 긴밀한 관계에 있었던 유명 변호사였어요. 그런데 서울남부지검에서 옵티머스가 투자자금을 횡령했다고 기소했거든요. 만일 중앙지검에서도 무협의로 하지 않고 제대로 기소했었더라면 초기에 큰 피해를 막을 수 있었을 것입니다. 왜냐하면 검찰이 무혐의로 처리해준 이후 마사회나 한국전력 등 공기업도 믿고 투자를 하고 민간투자도 뒤따라 급증하면서 투자금액이 1조 5,000억 원에 이르렀지요.

 옵티머스 자산운용의 금융범죄 진화과정을 살펴보면 기업 편법탈취와 기업사냥이 진행되는 동안, 금융검찰이라 할 금융감독원이 제대로 감독하지 않은 것, 그 위에 모피아라는 금융관료들의 막강한 로비가 있었던 것이지요. 검찰, 법원 등의 수사,기소,재판 단계에서는 전관변호사들의 로비가 이루어진 것인데, 대형 로펌을 중심으로 단계적,체계적으로 이루어진 것임을 알 수 있습니다. 이것이 우리 사회의 가장 지능적 특권층인 최상위 포식자들의 모습이에요. 그런데 3,000억 원 정도는 흔적도 찾지 못했습니다. 이 거대한 규모의 범죄를 누가 설계한 것인지, 전파진흥원이 수사 의뢰할 때도 680억 원 상당을 수사의뢰했는데 중요 사건으로 보고되지 않았던 경위 등도 조사되어야 한다고 봅니다.

김민웅 : 금융시장이 그런 식으로 비리와 범죄의 복마전이 되기도 합니다. 금감원과 검찰이 제 구실을 하기는커녕 범죄를 키운 것 아닙니까.

추미애 : 금융산업을 보호하는 목적은 민생을 윤택하게 하려는 것이잖아요. 그런데 우리 사회 특권 카르텔이 금융산업을 이용해 민생을 고사시키고 있어요.

 

p309

 예를 들어 아파트 1층과 2층 사이의 콘크리트를 21센티미터는 유지해야 층간소음을 줄일 수 있다고 가정하면, 거기서 콘크리트 1센티미터만 줄여도 남는 돈이 어마어마해요. 그 돈이 부패자금으로 조성되는 거고요, 피해는 고스란히 소비자인 입주민들의 몫이고, 그로 인해 이웃 사이에 살인사건까지 일어나기도 하는데, 지금 그걸 누가 감시하고 따지고 처벌하나요? 검찰권력도 이를 봐주면서 부패와 비리의 고리가 서로 짝짜꿍이 되어 손잡고 돌아갑니다. 이명박 정부가 그랬고, 그 휘하에서 큰 검찰이 그 맛에 푹 빠져 성장했고, 그게 오늘날 정치검찰의 물적,정치적 토대가 되었어요. 바로 그게 '스폰서 검사' 문화지요. 스폰서를 둔 검사. 그러니까 부패검사를 말하는데 김학의 전 법무차관 성접대 사건도 건설업자 윤중천이 김학의 스폰서였고, 부산 LCT 비리 사건의 이영복 회장도 검사들의 스폰서였지요. 그래서 김학의 전 법무차관 사건도, LCT 특혜분양 사건도 수사나 기소가 제대로 되지 않았던 것입니다. 윤석열 총장이 "이명박 시절이 제일 쿨했다"고 한 말이 그냥 나온 게 아니라고 봐요. 노무현 대통령은 그런 특권에 온몸으로 저항하고 개혁하려 하시다가 이명박 집권 시기에 대검의 정치공작에 몰려 죽음에까지 이르신 거 아닙니까. 이런 뿌리를 잘라내야 해요. 타워크레인에서 사고가 일어나도 그저 기계조작 잘못, 개인의 잘못, 과실치사, 그것도 업무상 과실치사라고 덮어버립니다. 그러니 검찰의 수사방해, 감찰방해는 그들의 입장에서는 절박했던 거지요. 죄가 다 드러나게 생겼으니까요.

 

p379

김민웅 : 정치지도자는 때로는 국민에게 "이건 아닙니다. 이렇게 생각해야 하지 않을까요?" 라고도 할 수 있어야 하지 않나 싶습니다. 잘난 척하고 가르치려 들기보다는 관성에 빠진 의식에 도전하능 의미로 말이지요. 극작가 출신으로 체코 대통령이 된 하벨은 과거 스탈린주의 정치의 잘못은 체코 시민들에게도 책임이 있다고 말했습니다. 표를 얻어야 하는 정치인으로서는 하기 어려운 말인데, 하벨은 "정치란 진실과 양심을 본질로 삼아야 한다"라고 했어요. 그래야 힘을 합쳐 어두운 베일을 거둘 수 있다고 믿은 거지요. 앞서 언급한 아렌트는 <어두운 시대의 사람들>이라는 책에서 로자 룩셈부르크, 칼 야스퍼스, 발터 베냐민 등 고통을 견디고 어둠을 뚫고 나간 이들의 의식세계를 조명합니다. 기존의 교육과 언론이 왜곡시킨 현실인식의 지층이 너무 두터울 때 용기를 내서 긍정할 것은 긍정하고 부정할 것은 부정해야 하지 않을까 하는 거지요.

 

조국 장관이 법무부 장관에 오르고 난 후, 검찰과 언론의 잔혹한 사냥을 당했던 2년 간의 기록.

사법개혁의 당위성, 사법 기득권의 반발의 자세한 내막, 검찰과 언론의 막가파식 수사와 가짜뉴스의 공조를 통해

한 가정을 조리돌림하는 잔혹함을 담담하게(하지만 필자인 조국 장관 본인은 굉장히 고통스러웠을 것이다) 기술한다.

이 시대의 화두인 언론개혁과 검찰개혁에 대해 조금이라도 그 진상을 알고 싶다면 읽어보면 좋을 책이다.

중간 중간 가슴 아픈 이야기들도 많고, 사법개혁이 왜 필요한지에 대한 역사적 배경, 제도적 보완점 들을 대한민국 최고 전문가의 관점을 통해서 알 수 있는 좋은 기회이기도 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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p54

 필명 '이소룡'으로 책을 낸 조성식 전 <신동아> 기자의 진단이다.

 

 "윤 총장은 검찰 안팎에서 지지만큼이나 원성도 샀다. 보수 성향이 강한 검사들 눈에는 진보정권에서 출세한 윤 총장이 곱게 보일 리 없었다. 윤 총장으로서는 검사들의 반감을 달래고 조직을 안정적으로 장악할 필요가 있었다. 가뜩이나 여권이 환호하는 적폐수사로 정치적 중립성까지 의심받는 터였다. 윤 총장은 자신의 표현대로 뼛속 깊이 보수주의자다. 검찰에 강한 불신을 가진 진보주의자 조국 전 장관과는 한 상에서 마주 앉을 수 없다. 청와대 민정수석으로서 검찰개혁을 설계하고 주도한 조국은 검사들에게 공공의 적이었다. 그런 점에서 조국 수사는 다목적 카드였다. 친정권 검찰이라는 오해를 벗소, 정의로운 검찰 이미지도 과시하고, 검찰개혁 흐름도 견제하고, 검찰 내부 불만도 다독이고."

 

p91

 

해명 1 : 나는 왜 <죽창가>를 올렸는가

 2019년 7월 26일 민정수석 퇴임 이전, 나는 우리 대법원의 2012년 및 2018년 강제징용 노동자 판결을 옹호하고 일본 정부를 비판한 것 때문에 공격을 받았다. 특히 7월 13일 당시 인기 있던 SBS 드라마 <녹두꽃> 마지막 회를 보다가 <죽창가>가 배경음악으로 나와서 이를 간략히 페이스북에 올렸는데, 장관 지명 후에 공격 소재가 되었다. 이에 항변하지 않을 수 없다.

 일본 정부 입장은 ①일본과 조선은 합법적으로 한 나라가 되었다. ②강제징용 피해자의 손해배상청구권은 1965년 한일청구권협정으로 소멸되었다. ③한국 대법원 판결을 이를 무시했고, 이를 방치한 문재인 정부는 잘못이다. ④이렇듯 한국이 국가 간의 약속을 어겨 일본 기업에 피해를 주므로 '수출규제'를 한다는 것으로 요약된다.

 대법원 판결이 나온 후 민정수석실에서는 이 판결이 미치는 영향과 대책 보고서를 작성해 청와대와 관련 부서에 회람했다. 대법원 판결을 옹호하면서 일본 정부 입장에 맞서야 한다는 취지였다.

 그런데 일부 한국 정치인과 언론은 이러한 일본 정부 입장에 반박하기는 커녕 노골적 또는 암묵적으로 동조하면서 한국 대법원과 문재인 정부를 매도하는 데 앞장섰다. 대법원 판결이 공연히 한일 관계에 분란을 일으켰다고 불만을 표하는 사람도 많았다. 희한하다. 일본의 양심적 법률가들은 한국 대법원의 판결을 지지했는데 말이다. 대표적으로 전영기 <중앙일보> 논설위원의 주장을 보자.

 "요즘 상황은 한국의 대법관들이 첫 단추를 이상하게 끼우는 바람에 비롯된 측면이 있다. 2012년 판결문의 취지 '1919년 한국이 건립되었으니 1919~45년까지 일본의 한반도 지배는 그 자체로 불법이다'는 국제법적으로는 전제 불성립의 오류로서 국제사회에 보편타당하게 받아들여지지 않을 것이다. 민족적 감성을 앞세운 주관주의적인 오류는 다른 곳에서도 나타났다. 한국은 국제법상 일본에 승전국이 아니기에 처음부터 배상권을 행사할 수 없는 관계였다. 사정이 이렇게 명백한데도 2018년의 대법관들은 법적인 배상 청구권을 기어이 행사해야 한다고 주장. 사고는 대법원이 치고 고통은 국민이 속절없이 당하는 형국이다."

 

 어이가 없었다. 일본 극우파의 논리를 한국에 전파하는 책 <반일종족주의>의 공동저자로 <강제징용은 허구>라는 글을 쓴 이우연 낙성대경제연구소 연구위원은 일본의 최대 일간지 <문예춘추> 특별판 '저주받은 한일관계'에 <징용공(徵用工) 판결은 역사 날조다>라는 글을 싫었다. 분노가 일어났다. 통상적으로 '우파'는 '국익'을 최우선으로 하는 법인데, 한국에서는 정반대다. 이러한 사람들을 '토왜(土倭)'가 아니면 뭐라고 불러야 하는가.

 대한민국의 정통성과 (사법)주권이 타국, 특히 과거 우리의 주권 침탈국이었던 일본에 의해 공격받고 있는 상황에서, 일본 정부의 입장에 동조하거나 이를 옹호하는 것을 용납할 수가 없었다. 일본 정부가 수출규제 협박을 하고 있는 상황에서 청와대나 관련 부처가 일본 정부의 입장을 반박하기는 어려웠다. 이에 민정수석 개인자격으로라도 싸움을 벌이고, 이후 문제가 발생하면 책임을 져야겠다고 판단했다. 일본 정부의 경제보복이 예상되었지만, 점검해본 결과 이겨낼 수 있다고 판단했다.

 당시 거의 유일하게 나의 의도적 공격 취지를 알아채고 옹호한 사람은 민주평화당 박지원 의원이었다. 박 의원은 MBC 라디오 '김종배의 시선집중'에서 말했다.

 "(일본에 대한) 공격을 (여당에서) 아무도 안 하니 '열혈 청년' 조 수석이 나선 것이다. 조 수석이 일부 비판을 받는다 해도 조국을 위해서, 대통령을 위해서 한마디한 것이다. 조 수석마저 안하면 지금 (대일 여론전을) 누가 하느냐."

 깊이 감사했다. 당시 내가 페이스북에 올린 일련의 글 가운데 핵심은 다음과 같다. 먼저 7월 20일에 올린 글이다.

 

 "법학에서 '배상(賠償)'과 '보상(補償)'의 차이는 매우 중요하다. 전자는 '불법행위'로 발생한 손해를 갚는 것이고, 후자는 '적법행위'로 발생한 손실을 갚는 것이다. 근래 일부 정치인과 언론은 이 점에 대해 무지하거나 또는 알면서도 문재인 정부를 흔들기 위해 황당한 주장을 펼치고 있다.

 대한민국 대통령의 법률보좌가 업무 중 하나인 민정수석으로서(그 이전에 법을 공부하고 가르쳐온 법학자로서), 이하 세 가지 점을 분명히 하고자 한다.

 1. 1965년 한일협정으로 한국은 일본으로부터 3억 달러를 받았지만, 당시에도 지금도 일본은 위안부, 강제징용 등 불법행위 사실 자체를 부인한다. 그러므로 이는 일본의 전쟁범죄에 대한 '배상'을 받은 것이 아니다.

 2. 2005년 참여정부 시절 민관공동위원회는 ①1965년 한일 협정으로 받은 자금에는 강제징용 피해자들에 대한 정치적 '보상'이 포함되어 있을 뿐, 이들에 대한 '배상'은 포함되어 있지 않고, ②한국 정부가 일본 정부를 대상으로 다시 '보상'을 요구하는 것은 안 되지만, 한국인 개인이 일본 정부의 불법행위에 대해 손해 '배상'을 청구하는 것은 가능함을 확인했다.

 3. 2012년 대법원(제1부, 김능환 대법관 주심)이 "외교 협정으로 개인청구권이 소멸할 수 없다"라는 취지로 파기 환송해 신일본제철(현 일본제철)에 대한 '배상'의 길이 열린다. 이 판결은 양승태 대법원장과 박근혜 청와대 사이의 '사법거래' 대상이 되었으나, 2018년 확정된다.

 1965년 이후 일관된 한국 정부의 입장과 2012년 및 2018년 대법원 판결을 부정, 비난, 왜곡, 매도 하는 것은 정확히 일본 정부의 입장이다. 나는 이런 주장을 하는 한국 사람을 마땅히 '친일파'라고 불러야 한다고 생각한다. 일본 정부가 '경제전쟁'을 도발하면서 맨 처음 내세웠던 것이 한국 대법원 판결의 부당성이었다. "1965년 일본으로부터 거액을 받아 한국 경제가 이만큼 발전한 것 아니냐"라는 식의 표피적 질문을 하기 전에, 이상의 근본적 문제에 대해 한 번이라도 생각해보길 바란다. 일본의 한국 지배의 '불법성'을 인정하느냐가 모든 사안의 뿌리다.

 다음은 7월 22일에 올린 글이다.

 

 "일본 국력, 분명 한국 국력보다 위다. 그러나 지레 겁먹고 쫄지 말자. 외교력 포함 현재 한국의 국력은 1965년 한일청구권 협정 체결 시기와는 비교할 수 없을 정도로 성장했다. '병탄(倂呑)을 당한 1910년과는 말할 것도 없다. 법적, 외교적 쟁투를 피할 수 없는 국면에는 싸워야 하고, 또 이겨야 한다. 국민적 지지가 필요하다."

 

 1965년 한일청구권협정은 당시 양국 정부의 '타협'의 산물이었다. '청구권'이라는 단어를 선택한 것이 단적인 예다. 협정 체결자인 시나 에쓰사부로 당시 일본 외상은 일본 정부가 제공한 5억 달러는 '배상'이 아니라, '독립 축하금'이라고 참의원에서 발언한 바 있다. 일본 정부는 그 이전도 그 이후도 식민지배의 불법성을 인정한 적이 단 한 번도 없다. 덜 알려졌지만, 일본 정부는 미쓰비시가 중국 강제징용 노동자들에 대해 '배상' 성격의 '화해금'을 지급하는 것을 허용했다. 왜 한국 강제징용 노동자에게는 배상을 거부하냐고? 조선 지배의 불법성을 인정하지 않고 '강제징용'도 없었다고 강변하므로 배상할 수 없다는 것이다.

 이러한 점에서 일본의 식민지배와 강제동원이 불법임을 선언한 2012년과 2018년 한국 대법원 판결의 의의는 너무도 중요하다. 이를 부정하는 것은 대한민국의 정체성과 헌법정신을 부정하는 것ㄱ이다. 1965년 협정은 존중되어야 한다. 한일 간 '무역전쟁'의 신속한 종결을 위해 외교와 협상은 당연히 필요하다. 그러나 2012년과 2018년 대법원 판결의 의미를 몰각(沒却), 부정하면 헌법 위반자가 된다.

 당시 일본 정부가 '무역전쟁'을 개시했을 때, 야당과 언론은 한국의 패배를 예견하고 대법원 판결과 문재인 정부를 비난했다. "4개월밖에 못 버틴다" 운운한 <조선일보> 기사가 생각난다. 야당과 언론은 내가 '반일선동'을 한다고 엄청난 공격을 퍼부었다. 일본 언론은 나를 '대일 초강경파'라고 불렀다.

 2년이 지난 지금 한국 경제가 망했는가? 전혀 아닌 것이 확인되었다. 일본의 수출규제 핵심인 불화수소 가운데 액체불화수소는 100% 국산화에 성공했다. 오히려 일본 기업이 타격을 받았다는 일본 내부 평가가 나오고 있다. 물론 '소부장(소재, 부품, 장비)' 국산화의 길은 멀다. 무역을 포함해 일본과의 관계도 더 개방적으로 가야 한다. 그러나 한국의 (사법)주권을 흔드는 일본의 행태에 대해서는 절대 타협이 없어야 한다. 감히 말하자면, 되돌아보아도 당시 나의 '대일 강경노선'이 명분과 실리 모두에서 오류였다고 생각하지 않는다.

 

p283. 검찰은 죽을 때까지 찌른다

 

 장관 사직 후 검찰은 나를 소환조사했다. 서울중앙지검은 2019년 11월 14일과 21일 그리고 12월 11일 나를 소환했는데, 나는 진술거부건을 행사했다. 내가 뭐라고 해명하건 검찰은 정경심 교수의 '공범'으로 기소를 정해두었기에 진술할 필요가 없다는 것이 변호인단의 일치된 권고였다. 오래전 일이고 대부분 내가 제대로 알지도 못하고 관여하지도 않은 일인데, 불완전한 기억에 따라 진술했다가 추후 조금이라도 사실과 다른 점이 나오면 검찰은 언론에 흘려서 "거짓말했다"라는 공격을 받도록 만들 것이라고 경고했다.

 제3장에서 보앗지만, 2019년 12월 국회를 통과한 검찰개혁법안이 2022년 1월 발효되기 전까지 '검사작성 피의자신문조서'의 증거능력은 '번관면전 조서'에 준하는 강력한 효력을 가진다. 검사 앞에서 한 말을 법정에서 변경하면 법정 진술이 우선적으로 인정되는 것이 아니라, '말 바꾸기'한 사람이 되어 신빙성을 의심받게 된다.

 금태섭 전 의원이 2006년 서울중앙지검 검사 시절 <한겨레>에 <현직검사가 말하는 수사 제대로 받는 법>이라는 칼럼을 쓰면서 제1원칙으로 진술거부를 권한 이유도 바로 이 점 때문이었다.

 "조금이라도 유리한 점을 찾아내서 수사에 대응해야 하지 않겠는가. 그러나 그렇게 생각하는 순간 당신은 이미 파멸로 이끄는 길에 한 걸음을 내닫는 것이다. 공개가 원칙인 재판과는 달리 수사를 받는 피의자는 충분한 정보도 없이 어둠 속에서 헤매야 하는 것이다. 아무것도 모르는 상태에서 섣불리 행동하면 상처를 입는다. 수사기관의 행동에 섣불리 대응하지 않고 변호인에게 모든 것을 맡기는 것은 가장 기본적인 피의자의 권리이며 이러한 정당한 권리를 포기하지 않는 것이야말로 현명하게 수사를 받는 제1의 원칙이다."

 

 진술거부권이 헌법적 기본권(헌법 제12조 2항)임은 명백하나 검찰 조사실에서 이를 실천하는 것은 쉬운 일이 아니다. 먼저 진술거부권을 행사하겠다고 의사 표시를 하면 신문을 즉각 중단하는 미국과 달리, 한국의 경우 일본의 예에 따라 몇 시간이고 신문을 감수하고 앉아 있어야 한다. 한국에서 '미란다(Miranda) 원칙'은 체포와 신문 시에 피의자에게 진술거부권을 고지해야 하는 원칙 정도로 이해되고 있지만, 이 원칙의 또 다른 핵심은 피의자가 진술거부권을 행사할 경우 신문이 즉각 중단되어야 한다는 것이다. 서울중앙지검 조사 시 나는 이 점을 밝히며 신문 중단을 요구했으나 거절당했고, 장시간 신문에 진술거부 의사를 반복해서 밝히며 앉아 있어야 했다. 이러한 관행은 헌법 위반이라고 생각한다.

 얼토당토않은 추궁이나 유도 질문을 받으면 피의자는 답변을 하고 싶은 충동이 생기게 되어 중간에 진술거부를 포기하는 경우가 많다. 그렇지만 나는 논문과 강의에서 강조했던 이 권리를 제대로 실천할 순간이 왔다고 판단했다. 이러한 법리적 측면과 별도로, 나는 가족에 대한 전면적/전방위적 저인망 수사에 대한 진술거부를 통해서라도 검찰에 항의해야겠다고 마음먹고 있었다. '멸문'을 꾀하는 수사에 대해 시민으로서 항의할 방법은 진술거부밖에 없었기에.

 내가 진술거부를 했다는 보도가 나오자, 언론과 야당은 일제히 맹비난했다. 자유한국당 황교안 대표가 패스트트랙 사건 경찰 수사에서 진술거부를 했을 때와는 대조적인 분위기였다. 시민이 자신에게 보장된 헌법적 기본권을 행사했다고 비난하는 것 자체가 반헌법적인 행태였다.

 

p286. 사전구속영장 청구

 서울중앙지검은 자신들이 조사한 자료로는 구속영장이 발부되지 않을 거이라고 판단했을 것이다. 그래서 2019년 12월 23일 서울동부지검은 유재수 전 금융위원회 금융정책국장 관련 감찰무마 의혹을 이유로 나에게 '직권남용죄'를 적용해 사전구속영장을 청구했다.

 정경심 교수를 구속하는 데 성공했지만 관련 혐의로 나까지 구속시킬 수는 없을 것 같다고 판단한 검찰은 '유재수 사건'으로 나의 구속을 시도한 것이다. 이 과정에서 대검이 중심이 되어 서울중앙지검과 동부지검의 행보를 조율했을 것이고, 나에 대해 공적 업무상의 비리로 영장을 청구해야 명문이 선다고 판단했을 것이다.

 유재수 사건을 간단히 설명하면 다음과 같다. 2017년 10월 말 11월 초 민정수석실의 박형철 반부패비서관은 청와대 특별감반(이하 '특감반')이 금융위원회 유재수 금용정책국장의 비리 제보를 받았음을 나에게 보고했고, 나는 감찰을 지시했다. 박 비서관으로부터 유 국장이 '구명' 운동을 벌이고 있음을 보고받은 후에도 감찰을 계속하라고 지시했다. 이후 참여정부 인사들과 연이 있는 백원우 민정비서관에게 상황을 점검해보라고 지시했고, 백 비서관은 상황을 점검한 후 나아게 보고했다. 검찰은 이를 유 국장의 '구명 로비'에 백 비서관이 호응한 것이라고 규정했지만, 이는 민정비서관의 통상적 '업무'였다. 만약 내가 유 국장을 봐주려고 생각했다면, 감찰 계속을 지시하지 않았을 것이다. 나와 유 국장은 일면식도 없는 사이며, 내가 이 사람을 봐주어야 할 이유도 봐주어서 얻을 이익도 없었다.

 감찰을 통해 확인했던 유 국장의 비리는 골프채, 골프텔, 기사 딸린 차량 서비스 이용 등이었는데, 이는 2019년 검찰의 강제수사를 통해 밝혀진 비리와 큰 차이가 있었다. 일반적으로는 덜 알려져 있지만, 특감반은 대통령비서실 직제 제7조에 따라 - 강제수사권과 징계권은 없고 - '비리 첩보 수집'과 '사실관계 확인' 권한만을 갖는다. 특감반 조사와 검찰 조사가 차이날 수밖에 없는 이유가 여기에 있다. 그럼에도 검찰과 언론은 이를 무시하고 검찰이 밝힌 것을 청와대가 덮었다는 식으로 비판했다.

 영장청구 소식을 접하고 "검찰은 죽을 때까지 찌른다"는 속언이 떠올랐다. 구속된 상태에서 소환조사를 받게 되면 정신적/육체적으로 위촉/약화되어 결국에는 자포자기하고 검사가 원하는 대로 끌려가는 경우가 많다. 게다가 대중적으로 '구속=유죄'라는 관념이 유포되어 있고, 이러한 인식은 이후 재판에도 영향을 미친다. 구속을 해두어야 이후 수사/기소/재판에서 유리한 고지를 차지할 수 있다고 검찰은 판단했을 것이다.

 2019년 12월 23일 윤도한 청와대 국민소통수석은 나에 대한 사전영장 청구 서면 브리핑에서 밝혔다.

 "당시 민정수석비서관실은 수사권이 없어서 유재수 본인의 동의하에서만 감찰 조사를 할 수 있었고, 본인이 조사를 거부해 당시 확인된 비위 혐의를 소속 기관에 통보했습니다. 그 상황에서 검찰수사를 의뢰할지 소속 시관에 통보해 인사조치를 할지는 민정수석실의 판단 권한이며, 청와대가 이러한 정무적 판단과 결정을 일일이 검찰의 허락을 받고 일하는 기관이 아니라는 입장을 다시 한번 밝힙니다."

 유재수 사건의 출발은 검찰수사관 출신 김태우 전 특별감찰반원의 고발이었다. 김 씨는 청와대 내부 감찰로 자신의 비리가 발견되어 징계 및 수사 의뢰가 이루어지자, "민정수석실에서 민간인을 사찰했다"라는 허무맹라한 주장을 했다. 이에 야당과 보수언론은 청와대에 대해 파상공세를 펼쳤다. 특감반 책임자인 박형철 비서관은 직접 청와대 춘추관에 나가 브리핑을 하면서 억울해 눈물까지 흘렸다.

 야당은 '김용균법'(산업안전보건법) 등 법안 처리르 놓고 민정 수석의 국회출석을 집요하게 요구했다. 이에 문재인 대통령은 "민정수석은 국회에 출석하지 않는 것이 관례이지만, '김용균법'의 연내 통과를 위해서라면 출석하라"라고 지시하셨다. 12월 27일 아침 대통령께서는 국회 상황을 한병도 정무수석에게 보고받은 후, 나에게 짧게 질문하셨다. "나갈 준비되어 있지요?" 나느 답했다. "네, 잘 준비해서 나가겠습니다." 대통령께 "또박또박 답변하면 됩니다"라고 격려해주셨다.

 2018년 12월 31일 국회 운영위원회에 출석하자 야당 의원들이 유재수 사건과 관련해서 '민간인 사찰' '별건 감찰' 여부를 추궁했고, 나는 그런 적이 없다고 단호하게 해명했다.

(2021년 1월 8일, 김태우 씨는 공무상 비밀누설 혐의로 징역 1년, 집행유예 2년의 유죄판결을 받았다. 이 판결로 청와대의 직권남용이 없었음이 확인되었다)

 당시만 해도 유재수 사건은 주변적인 사안이었다. 그런데 2019년 2월 김태우 씨는 유재수 사건을 이유로 나를 고발했다. 김 씨는 유튜브 방송을 통해 문재인 정부 공격에 나섰고, 2020년 4.15 총선에서는 국민의힘 전신인 미래통합당 후보로 출마해 낙선했다. 어떻게 이런 사람이 문재인 정부의 청와대 특감반에 들어올 수 있었을까.

 나는 유재수 사건으로 검찰조사를 받을 것이라고는 전혀 예상하지 못했다. 2017년 10월 이후 청와대 민정수석실 산하 특감반의 감찰이 있은 후 유재수 국장을 사직토록 했기에 상황이 종결되었다고 생각하고 있었다.

 

p290. 사냥의 최종 목표

 특감반이 포착한 비리 가운데 유 국장은 차량 제공만 인정하고 나머지는 대가성을 강력히 부인했고, 이후 감찰에 불응하고 병가를 낸 후 연락을 끈혹 잠적했다. 청와대 특별감찰은 대상자의 동의에 기초해서만 진행되는 것이고, 공직자가 청와대 특별감찰을 거부하는 일은 드물었기에 당황스러웠다. 청와대 특감반은 강제수사권이 없어서 감찰이 사실상 불가능하게 되었다. 이러한 과정에서 유 국장이 감찰을 받고 있고 이후 병가를 냈다는 사실은 금융위원회는 물론 관가에 파다하게 퍼져 있었다. 공무원 사회에서 어떤 사람이 청와대로부터 감찰을 받았다는 것은 순식간에 알려지기 마련이다.

 이 상태에서 나는 박형철 비서관에게 감찰 결과 및 복수의 조치 의견을 보고받았다. 특감반 업무 관례상 조치의견은 감찰이 종결되거나 불능상태에 빠져 마무리할 때 기재된다. 당시 백원우 비서관은 "빨리 잘라 국정부담을 덜어야 한다. 고위직은 옷 벗기는 것이 최고의 징계다"라는 의견을 피력했고, 박형철 비서관은 "검찰에 수사를 의뢰하는 것이 좋겠다"라는 의견을 피력했다. 정치인 출신과 검사 출신 비서관의 감감에는 차이가 있었다.

 나는 두 의견을 청취한 후 유 국장이 현직을 유지하는 것은 곤란하다고 판단하고, 유 국장의 비리와 상응한 인사조치 필요를 금융위원회에 알릴 것을 결정했다. 민정수석실은 유 국장에 대한 징계권이 없으므로, 징계 여부를 금융위원회가 판단할 것이라고 생각했다. 나는 민정수석으로 감찰 '중단'을 지시한 것이 아니라, 대상자의 감찰 불응으로 감찰이 '불능'상태가 된 상황에서 최종 조치를 결정한 것이었다. 특감반은 강제수사권이 없기에 감찰에 불응하는 사람을 특감반이 강제로 추가 조사할 방법은 없고, 만약 그렇게 하면 불법이 된다.

 당시 박 비서관에게 이인걸 특별감찰반장이 조치 결정에 불만을 표시했다는 말을 들었으나, 특감반 업무의 한계로 어쩔 수 없는 일이라고 생각했다. 박 비서관도 자신의 의견이 체택되지 않아 불만이 있었겠지만, 당시에는 특별한 반대 의사를 표시하지 않았다. 특별감찰의 시작/전개/종결에 대한 최종 권한은 민정수석에게 있음을 알고 있었기 때문일 것이다. 박 비서관은 법정 증인신문에서 유재수 사건의 처리 방향에 이견이 있었지만, 최종 판단 권한은 민정수석에게 있었고 민정수석실에는 수사권이 없기 때문에 사표 처리 결정을 수용했다고 진술했다.

 2019년 11월 이후 검찰 수사를 통해 유재수 국장의 비리가 더 드러났지만, 나는 강제수사권이 없는 청와대 특감반의 감찰 결과에 기초해 위의 조치를 하는 것이 나의 정무적 재량 범위 안에 있다고 생각했다. 이것이 '직권남용죄'에 해당할 것이라고는 꿈에도 생각하지 못했다. 2017년 하반기 나의 주된 관심은 국정원/검찰/경찰 등 권력기관 개혁의 청사진을 마련하는 것에 집중되어 있었기에 - 2018년 1월 14일 이 방안을 춘추관에서 내가 직접 발표했다 - 이 사안에 대해서는 큰 비중을 두고 있지도 않았다. 유재수 사건은 당시 민정수석이 결재하는 수많은 사건 가운데 하나에 불과했기에 비중을 두고 처리하지도 않았다.

 결과적으로 보면, 유 국장 감찰 중단 상황에서 박 비서관의 의견에 따라 이 사건을 아예 수사기관에 넘겼다면 문제가 없었을 텐데라는 후회를 한다. 형사처벌은 '최후수단'으로 사용되어야 한다는 소신과 판단이 이후 검찰이 내게 칼을 들이대는 빌미를 제공한 것이다.

 그런데 2019년 9월 6일 법무부장관 인사청문회 종료 후, 검찰이 유재수 사건을 다시 들여다본다는 언론 보도가 나왔다. 미래통합당 김도흡 의원은 2019년 10월 7일 검찰에 대한 국정감사에서 전직 특감반원(김태우 씨)의 진술을 거론하며 유재수 사건을 부각했다. 검사 출신 김 의원의 언동에는 이유가 있었다.

 추후 공판 과정에서 알게 되었지만, 검찰은 감찰반원들을 차례차례 불러 감찰이 강제로 '중단'되었다는 취지의 진술을 얻어내고 있었다. 검찰의 수사 방식은 최종 목표를 정해놓고 밑에서부터 차례차례 올라가면서 최종 목표에 불리한 진술을 확보하는 것이다. 당시 검찰수사관 출신 특감반원들에게 나는 쓸모없는 카드에 불과했을 것이다. 아내는 구속되었고 본인도 피의자가 된 전직 상관이 무슨 필요가 있겠는가.

 이와 같은 특감반 관계자들에 대한 수사내용을 당시에는 알지 못했지만, 분위기가 이상하다는 말이 여기저기서 들려왔다. 검찰 출신 변호사 지인들은 내 가족 관련 수사에서 나온 혐의로는 나에 대해 영장을 청구하기 어려우니, 유재수 사건을 끄집어내 영장을 청구할 것이라고 알려주었다. 한 지인의 말이 오랫동안 뇌리에 남았다.

 "검찰은 특수부 엘리트 검찰 술신으로 윤석열 총장이 아끼던 우병우 민정수석도 구속했다. 따라서 조국 수석 사건은 더 가혹하게 할 것이다."

 검찰이 벌이고 있던 사냥의 최종 목표는 나라는 것이 분명해졌다. 배우자와 동생을 구속시킨 것만으로는 부족했던 것이다. 유재수 사건을 김경수 경남도지사, 윤건영 청외대 국정기획상황실장, 천경득 청와대 총무비서관실 선임행정관 등과 연결하는 보도가 쏟아졌다. 권력형 비리 프레임이 가동된 것이다. 이 세 사람이 기소되지 않았음은 물론이다.

 나에게 영장을 청구한 동부지검의 검사장은 조남관이었다. 그는 노무현 정부 시절 청와대 사정비서관실 특별감찰반에 근무했고 문재인 정부 출범 후 국정원 감찰실장으로 발탁되어 국정원 개혁 과정에서 중요한 역할을 했다. 동부지검에 출석해 조사를 받으면서, '조 검사장이 청와대 특감반 근무를 한 사람이라 특감반 역할과 한계, 민정수석의 권한 등을 잘 알고 있을 텐데' 하는 생각을 했다. [조남관도 윤석열과 별로 다를 바 없는 넘임은 이미 널리 알려져있다. 아는 놈이 이랬으니 참 악랄한 넘이다]

 이런 마음을 주변 법률가 친구와 지인에게 드러냈더니, 그들의 조언은 한결같았다.

 "순진한 생각하지 마라. 검사는 검사일 뿐이다. 조직이 결정하면 집행한다. 기대하면 실망만 커진다."

 내가 2019년 8월 9일 법무부장관으로 지명된 후 검찰은 나를 최종 목표로 가족 전체에 대한 '사냥'을 전개했고, 기필코 나를 '우리'에 가두고자 했다. 어떤 명목으로건 나를 구속시켜 유죄 낙인을 찍고 방어권을 무력화시켜 결국 나를 정신적/심리적으로 붕괴시키려는 검찰의 의지는 분명했다. 검찰이 들이대는 칼날의 번뜩이는 살기를 느낄 수 있었다.

 

p294. 최악의 크리스마스

 영장청구가 예상되는 상황에서 나는 '급난지붕'(急難之朋), 즉 급박한 어려움이 있을 때 도움을 줄 친구와 지인에게 연락을 해야 했다. 이미 배우자가 구속되었는데 나마저 구속된다면, 연로하신 어머니와 자식들을 챙겨줄 사람이 필요했기 때문이었다. 책임질테니 걱정하지 말라고 답을 준 이들에게 다시 한번 감사한다.

 법률가 친구와 지인들은 터무니없는 영장청구이니 발부될 리 만무다하도 위로해주었다. 그러나 불안감은 사라지지 않았다. 수 개월 동안 검찰발 언론 보도를 통해 유죄확증을 각인시키는 여론 재판이 진행되고 있었기 때문이다. 판사도 여론의 영향을 받는다. 최악의 상황을 대비해야 했다. 어머니와 자식들에게는 마음 굳게 먹으라고 당부했다. 12월 24일에는 서울구치소에 수감되어 있는 정경심 교수를 면회하고 창살 너머 사색이 된 얼굴을 보면서 마음을 더 굳게 먹으라고 강조했다. 그렇게 내 삶에서 최악의 크리스마스를 맞았다.

 변론을 맡고 있던 변호사들은 크리스마스 휴일을 반납하고 영장실질심사를 준비해야 했다. 특히 대학 동기인 법무법인 LKB의 김종근 대표변호사는 오래전 예약해둔 가족 해외여행까지 포기하고 영장실질심사 준비를 이끌어주었다.

 12월 26일 아침, 집을 나섰다. 걱정 가득한 어머니와 자식들의 눈길이 뇌리에서 떠나지 않았다. 대학 동기 법무법인 예강의 김진수 대표변호사 사무실에서 동부지검으로 출발했다. 동부지검에 도착해서는 동부지검이 준비한 차를 타고 10시 5분쯤 동부지법 입구에 내려 걸어 들어갔다. 비가 부슬부슬 내리고 있어 김 변호사가 우산을 씌워주었다.

 동부지법 근처는 응원의 목소리와 비난의 목소리가 뒤섞여 난리였다. 걸어 들어가는 왼편에서 "장관님, 힘네세요"라는 우렁찬 소리에 고개를 돌려보니, 프로레슬러로 활발하게 사회활동을 하는 김남훈 씨가 서 있었다. 고마웠다. 눈으로만 인사를 하고 포토라인 쪽으로 걸어 들어가 말했다.

 

 "122일입니다. 첫 강제수사 후 122일째입니다. 그동안 가족 전체를 대상으로 하는 검찰의 끝이 없는 전방위적 수사를 견디고 견뎠습니다. 혹독한 시간이었습니다. 저는 검찰의 영장 신청 내용에 동의하지 못합니다. 오늘 법정에서 판사님께 소상히 말씀드리겠습니다. 철저히 법리에 기초한 판단이 있으리라고 희망하고 그렇게 믿습니다."

 

 권덕진 영장전담 부장판사가 주재하는 영장실질심사는 오전 10시 30분쯤 시작해 점심을 거르고 오후 2시 50분쯤 종료했다. 영장실질심사에서는 검찰 측이 제출한 수사자료가 판사에게 제출되지만, 변호인 측은 이 자료를 보지 못하고 대응해야 하기에 불리한 상황이었다. 검찰의 언론 플레이로 나에 대한 부정적 인식이 담당 판사에게도 전파된 상황이었다. 검찰 측은 집요하게 구속의 필요성을 강조했다. 영장이 발부되어야 자신들이 벌인 수사의 정당성이 인정된다고 생각하는 듯했다.

 변호인단은 검찰 측의 주장이 사실과 다름은 물론 법리적으로도 잘못되었다고 강력히 반박했다. LKB의 김종근, 이승엽 변호사는 수사내용의 법리적 잘못을 하나하나 치밀하게 비판했고, 예강의 김진수 변호사는 과거 유사한 직권남용 사례를 제시하면서 구속의 부당함을 주장했다. 다산의 김칠준 변호사는 누구의 권리가 방해되었는지가 불분명함을 지적했다. 법정은 긴장으로 팽팽했다.

 

p296. '우리'에 갇히다

 심사가 종료된 후 나는 동부구치소로 입감되었다. 동생이 이미 구속되어 있는 장소였다. 동부지법을 떠날 때 변호인들이 "기각될거라고 봅니다. 힘내십시오"라고 말해주었지만, 불안감은 사라지지 않았다. 동부구치소로 들어가 하늘색 수감자용 운동복으로 갈아입고 하얀 고무신을 신었다. 얼마 전 교정업무의 최고책임자였던 전직 법무부장관으로서 참담한 심정이었다. 교정직원들의 표정이 묘했다. 늦은 점심으로 컵라면이 나왔는데, 몇 젓가락 뜨다 말았다. 이후 6층 맨 구석 독방으로 들어갔다. 철문히 닫혔고, 기약 없는 기다림이 시작되었다.

 1993년 6월 23일 국가보안법 위반으로 서울구치소에 갇힌 경험이 있지만, 그때와는 느낌이 달랐다. 구치소 독방 크기는 비슷할텐데, 더 좁게 느껴졌다. 1993년에는 '반정부' 운동 참여로 구속되었고, 2019년에는 고위공무원의 '직권남용' 혐의로 갇힌 것이라 기묘한 감정이 일었다. 1993년에는 검찰 공안라인이, 2019년에는 검찰 특수라인이 영장청구의 주도자였다. 1993년 검찰은 극우 보수적 정치관으로 무장한 채 체제의 수호자로 민주화운동 세력을 탄압하는 선봉에 서 있었다면, 2019년 검찰은 조직의 이익을 수호하기 위해 언론과 야당과 손잡고 문재인 정부와 싸움을 전개하고 있었다.

 6층 독방에서도 동부구치소 주변 찬반 집회 소리가 들렸다. "조국 수호"와 "조국 구속"의 함성이 섞여서 들렸다. 많은 지지자들이 실질심사가 진행되는 내내 구호를 외치고 있음을 알았다. 중간중간 부부젤라 소리가 들려왔다. 답답한 시간이었지만, '이분들의 마음을 생각하자' '무너져선 안 된다'라고 되뇌었다. 집에서 불안과 공포에 떨고 있을 어머니와 자식들을 생각했다. 서울 구치소에서 전전긍긍하고 있을 정경심 교수와 동부구치소 어느 방에서 내 소식을 듣고 마음 졸이고 있을 동생을 떠올렸다. 나를 믿어주고 격려해준 친애하는 벗과 동지들을 생각했다. 추후 동영상을 통해 당일 추운 날씨에 심야까지 나를 응원해주며 고생하신 분들의 모습을 보았다. 가슴이 찡하고 목이 울컥했다. 진심으로 깊은 감사를 표하고 싶다.

 막막한 10시간이 지나고 27일 새벽 1시가 되기 전 영장이 기각되었다는 연락을 받았다. 구겨진 양복을 찾아서 입고 컴컴한 복도를 지나 새벽 1시 30분쯤 구치소를 나왔다. '우리'에서 풀려난 것이다. 나 때문에 늦게까지 수고한 구치소 직원들에게 인사하고 구치소 문을 나서는데, 담장 바깥에서 일부가 나를 향해 쌍욕을 퍼붓고 있었다. 언론사의 카메라 플래시가 터지고 있었다. 평소 이웃으로 친교를 나누던 구승희,구관희 씨 형제가 자동차를 준비하고 기다리고 있었다. 구치소를 빠져나오자, 나를 응원하는 분들의 모습이 보였다. 가슴이 찡했다.

 아파트에 도착하니, 주차장에 동네 주민 몇 분이 나와서 위로와 격려 인사를 해주셨다. 집에서는 어머니와 딸, 아들이 환한 표정으로 기다리고 있었다. 한 번씩 안아주었다. 최악의 상황을 대비해 26일 저녁부터 가족들과 함께 있어 주었던 고마운 사람들이 독주를 준비해놓고 기다리고 있었다. 같이 마셨다. 새벽 3시쯤 그분들이 돌아간 후 잠을 청했다. 그러나 긴장이 풀리지 않은 데다가, 여전히 갇혀 있는 정 교수와 동생을 생각하지 쉽게 잠들지 못했다. 생애 가장 긴 하루가 그렇게 끝났다.

 <한겨레> 이재성 기자가 12월 26일 당일 '인권연대' 소식지에 쓴 글을 나중에 알게 되었다.

 

 "늑대가 된 검찰에게 가장 큰 천적은 이른바 '검찰개혁 세력'이다. 그대로 뒀다간 검찰이 사냥을 못하게 되거나 번식이 불가능해질 수 있기 때문이다. 검찰에게 조국은 호랑이 새끼 같은 존재였다. 더 크기 전에 물어 죽여야 했다. 조국 하나를 잡기 위해 청와대와 총리실, 기획재정부, 경찰청 등 가리지 않고 들이닥쳤다. 전국의 검찰 조직을 총동원해 넉 달 동안 뒤진 끝에 고작 '감찰 무마' 직권 남용 혐의로 구속영장을 청구했다. 채용 비리 혐의를 받은 자유한국당 김성태 의원 등에게는 구속영장의 ㄱ자도 꺼내지 않은 검찰이다. 표적수사이자 문어발식 별건수사일 뿐 아니라 친검 편파 수사로서 검찰 흑역사에 영원히 남을 것이다."

 

p299. 직권 남용죄의 남용

 나에 대한 구속영장이 기각되자 서울중앙지검은 12월 31일 나를 불구속 기소했고, 서울동부지검은 다음 해 1월 17일 추가로 기소했다. 나는 피고인이 되었다. 예정된 수순이었다. 형사법 교수, 민정수석, 법무부장관 등을 역임한 사람이 형사피고인이 된 것이다. 얄궂은 운명이었다.

 2019년 12월 31일 서울중앙지검 기소 후 변호인단은 입장문을 배포했다.

 

 "오늘 서울중앙지검은 조국 전 법무부장관을 공직자윤리법 위반, 형법상 위계공무집행방애 및 업무방해, 뇌물수수, 증거은닉 및 위조 교사 등으로 기소했습니다.

 법무부장관 지명 이후 검찰이 조 전 장관을 최종 목표로 정해놓고 가족 전체를 대상으로 총력을 기울여 벌인 수사라는 점을 생각하면, 초라한 결과입니다.

 이번 기소는 검찰의 상상과 허구에 기초한 정치적 기소입니다. 기소내용도 검찰이 인디언 기우제식 수사 끝에 어떻게 해서든 조 전 장관을 피고인으로 세우겠다는 억지기소로밖에 보이지 않습니다.

 입시비리, 사모펀드 관련한 검찰의 기소내용은 조 전 장관이 배우자인 정경심 교수에 대한 기소내용을 모두 알고 의논하면서 도와주었다는 추측과 의심에 기초한 것입니다. 조 전 장관이 증거은닉과 위조를 교사했다는 혐의와 조 전 장관의 딸이 받은 부산대 의전원 장학금이 뇌물이라는 기소내용도 검찰의 상상일 뿐입니다.

 이제 검찰의 시간은 끝나고 법원의 시간이 시작됐습니다.

 그동안 언론을 통해 흘러나온 수사내용이나 오늘 기소된 내용은 모두 검찰의 일방적인 주장일 뿐이비다. 앞으로 재판과정에서 하나하나 반박하고 조 전 장관의 무죄를 밝혀나가겠습니다.

 끝으로 법치국가에서 범죄혐의에 대한 실체적인 진실과 유무죄는 재판정에 합법적인 증거들이 모두 제출되고, 검사와 피고인이 대등한 지위에서 공방을 벌인 후, 재판부의 판결을 통해서 비로소 확정됩니다.

 그럼에도 그동안 조 전 장관과 가족들은 수사과정에서 아직 확정되지도 않은 사실과 추측이 무차별적으로 보도됨으로써 회복할 수 없는 피해를 입었습니다. 앞으로는 근거 없는 추측성 기사를 자제해주실 것을 다시 한번 당부드립니다.

 2020년 1월 17일 서울동부지검 기소 후 나는 입장문을 발표했다.

 "작년 12월 31일 서울중앙지검에 이어, 오늘은 서울동부지검이 저를 기소했습니다. 법무부장관 지명 이후 시작된, 저를 최종 표적으로 하는 가족 전체에 대한 검찰의 전방위적 총력수사가 마무리된 것입니다.

 검찰의 공소장을 보더라도, 언론이 대대적으로 보도했던, 민정수석의 지위를 활용해 이익을 챙긴 '권력형 비리' 혐의는 없습니다. 그러나 가족 관련 문제에서 '공정의 가치'가 철두철미 구현되지 못한 점이 확인되었던 바, 도덕적 책임을 통감합니다. 사후적으로 볼 때, 민정수석으로서 정무적 판단에 미흡함도 있었습니다. 이유 불문하고, 전직 민정수석이자 법무부장관으로서 국민 여러분께 죄송하고, 국정 운영에 부담을 초래한 점을 자성합니다.

 그렇지만 저의 법적 책임에 대해서는 법정에서 사실과 법리에 따라 철저히 다투고자 합니다. 장관 재직 시 검찰수사에 대해 어떠한 개입도 어떠한 항변도 하지 않고 묵묵히 감수했지만, 이제는 한 명의 시민으로서 자신을 방어할 것입니다.

 '결론을 정해둔 수사'에 맞서 전면적으로 진술거부권을 행사한 혐의에 대해 검찰은 저를 피고인으로 만들어놓았지만, 법정에서 하나하나 반박하겠습니다. 감찰 종료 후 보고를 받고 상대적으로 가벼운 조치를 결정한 것이 직권남용이라는 공소사실에 대해서도 그 허구성을 밝힐 것입니다.

 학자/민정수석/법무부장관으로서 염원하고 추진했던 권력 기관 개혁이 차례차례 성사되고 있기에 기쁘지만, 이를 피고인으로 지켜보아야 하니 만감이 교차합니다. 날벼락처럼 들이닥친 비운이지만, 지치지 않고 싸우겠습니다. 송구하고 삼사합니다."

 

 사실 검찰은 2019년 3월 김은경 환경부장관에 대해서 직권남용 혐의로 구속영장을 청구했고, 이후 2020년 12월 백운규 산업통상자원부장관에 대해서도 구속영장을 청구했다. 두 장관에 대한 영장은 모두 기각되었다. 내 사건의 경우 1심 재판부가 유재ㅜ 사건에 대한 공판을 마무리한 상태다.

 제8장에서 보겠지만, 문재인 정부의 세 장관에 대한 검찰의 태도를 종합하면, 정권교체 후 산하기관 인사에 대한 장관이 개입(김은경), 감찰 종료 후 조치에 대한 민정수석의 재량 판단(조국), 원전 폐쇄에 대한 장관의 정책 판단(백운규) 등에 대해 형사처벌의 칼을 들이대겠다는 것이다." 이러한 검찰의 개입은 전례가 없는 것으로 안다. 검찰에 의한 '직권남용죄의 남용'이었다.

 피고인이 되어 재판을 준비하고 재판에 출석하는 일은 힘들었다. 오래전 일이라 나에게 유리한 증거를 찾을 수 없는 경우도 있었고, 무슨 이유인지 검찰에 가서 사실과 다른 진술을 한 사람들이 있음도 알게 되었다. 걱정도 되었고 화도 났다. 마틴 루터 킹 목사의 금언을 되새기며 결의를 다진다.

 

 "날 수 없다면, 뛰어라, 뛸 수 없다면, 걸어라. 걸을 수 없다면, 기어라.

 모든 수단을 다 써서 계속 전진하라."

 

 현재 나와 내 가족에 대한 재판은 진행 중이다. 정경심 교수는 1심에서 유죄판결을 받았고, 2심이 진행 중이다. 나도 피고인이라는 굴레를 쓰고 1심 재판을 받고 있다. 장관직을 끝까지 고사하고 학교로 돌아갔어야 했다는 후회를 여러 번 한다. 

 그러나 과거는 되돌릴 수 없다. 대법원 판결까지 얼마가 걸릴 지 모르지만, 사실과 법리에 기초해 검찰의 공소사실에 대해 철저히 다툴 것이다. 나의 정무적/도덕적 불찰과 실수는 사과할 것이다.

 

p335. 계속된 문재인 정부 타격 수사

 울산 사건 외에 몇 가지 사건을 더 보자.

 첫째. '라임/옵티머스 사건'이 있다. 검찰은 김봉현 전 스타모빌리티 회장을 회유해, 이강세 전 스타모빌리티 회장을 통해 강기정 청와대 정무수석에게 5,000만 원을 전달했다는 진술을 얻어냈다는 정황이 드러났다. 김 전 회장은 변호인을 통해 "A 변호사가 여당 정치인들과 강기정 수석을 잡아주면 윤석열 검찰총장에게 보고한 후 보석으로 재판받게 해주겠다고 말했다"라는 내용의 입장문을 공개했다.

 강수석은 격분해 이러한 검찰 행태를 강력히 비판했다. 결국 검찰은 강 수석을 기소하지 못했다. 전형적인 표적수사였다. 강 수석은 MBC라디오 '김종배의 시선집중' 인터뷰에서, " 이건을 중심으로 해서 문 재인 대통령의 권력, 민주당 정부와 한번 싸움을 걸어봐서 잘되면 공수처 문제 이런 것도 무력화가 될 거고 안 돼도 최소한의 손해볼 일은 없지 않느냐(라고 검찰이 생각한 것 같다)"라고 분석했다. 강 수석 외에도 김영춘 국회 사무총장, 기동민 더불어민주당 의원 등 여권 인사 연루 의혹이 검찰발로 계속 보도되었다. 이 세 사람에 대해서는 기소가 이루어지지 않았다.

 둘째. 김은경 환경부장관 사건을 '환경부 블랙리스트 사건'으로 규정했다.

 청와대가 밝혔듯이, 문재인 정부 출범 당시 이전 정부에서 임명한 공공기관 임원(공공기관장 330명 + 상임감사 90여 명) 대부분이 임기를 마치거나 적법한 사유와 절차로 퇴직했다. 김은경 장관 사건에서 사표를 제출했다는 환경부 산하 공공기관 임원 13명 역시 상당수가 임기를 끝까지 마쳤다. 문재인 정부가 이전 정부처럼 '블랙리스트'를 만들어 운영했다면, 이런 일이 발생할 수 없다.

 이명박 정부가 들어선 후 2008년 3월, 유인촌 문화부장관은 실명을 거론하면서 노무현 정부에 의해 임명된 산하기관장과 단체장들의 사퇴를 노골적으로 종용했다. "이전 정권의 정치색을 가진 문화예술계단체장들은 스스로 물러나는 것이 자연스럽다. 산하기관장들 가운데 이명박 정부와 이념이나 철학이 맞지 않는 사람들은 스스로 물러나야 한다." 이윤호 지식경제부장관도 "코드가 맞지 않는 사람들이 임기가 남았다고 해서 끝까지 있는 것은 곤란하다"라고 강조했다. 보수언론 역시 사퇴 촉구 사설을 썼다. 유 장관은 한 번도 검찰 조사를 받지 않았다. 그러나 김은경 장관은 환경부 산하 임원교체 과정에 부당하게 개입했다는 이유로 기소되었고 1심에서 유죄가 선고되어 법정구속되었으며 현재 항소심이 진행 중이다.

 셋째. '월성 1호 폐쇄 사건'에서 검찰은 백운규 산업통상자원부장관에게 구속영장을 청구했다. 

 월성 1호 원전의 경제성을 일부러 낮게 평가하도록 만들고 한국수력원자력에 부당한 지시를 내렸다는 혐의였다. 영장은 기각되었으나, 조만간 불구속기소할 것이라는 보도가 흘러나온다. 영장 청구 전후 백 장관 외에 당시 김수현 청와대 사회수석 연루 의혹이 계속 흘러나와 보도되었다. 검찰수사의 최종 목표는 언제나 청와대였다.

 탈원전정책 또는 에너지전환정책이 세계적 추세이자 문재인 정부의 대선 공약으로 산업통상자원부장관은 이를 추진할 의무를 진다는 점, 원전 폐쇄를 결정하는 데는 경제성 외에 안정성 등이 고려되어야 한다는 점 등을 검찰은 전혀 고려하지 않았다. 문재인 정부의 탈원전 정책에 타격을 주기 위한 수사라고 의심하지 않을 수 없다.

 

 넷째, 김학의 전 법무차관의 출국금지 사건이다.

 제 3장에서 보았지만, 은폐되었던 김학의 전 법무차관의 별장 성 접대 의혹이 다시 불거지고 김 전 차관의 출국 시도가 무산되어 결국 유죄판결이 내려진 후, 검찰은 출국금지 절차에서 '불법'이 있었다는 이유로 차규근 법무부 출입국본부장에게 구속영장을 청구했고, 영장이 기각되자 불구속기소했다. 긴박한 상황에서 김학의를 알아보고 제 때 출국을 막아낸 담당자를 칭찬해도 모자랄 상황에 처벌이라니, 주객전도도 이만저만이 아니다.

 검찰은 2021년 4.7 재보궐선거 직전에는 김 전 차관에 대한 수사가 청와대의 기획인 양 언론 플레이를 했다. 2019년 3월 18일 문재인 대통령이 버닝썬 사건과 김 전 차관의 별장 성 접대 의혹 및 고 장자연 씨 사건등 세 사건에 대한 철저한 수사를 지시한 것을 두고, 당시 이광철 민정수석실 선임행정관이 김 전 차관 사건을 부각해 버닝썬 사건을 덮으려 했다는 것이다. 청와대는 이 행정관의 관여가 전혀 없었음을 밝혔다. 문재인 정부 청와대가 불법적 음모를 꾸몄다는 낙인을 찍으려는 것이 검찰의 의도임이 분명했다.

 다섯째. 4.7 재보궐 선거가 끝나자 대전고검은 김상조 전 청와대 정책실장에 대한 재수사명령을 내렸다. 김 전 실장이 공정위원장이던 2018년 3월 유선주 전 공정위 국장이 공정위 전원회의 합의 과정이 담긴 녹음기록(파일)이 파기된 것을 이유로 김 전 실장을 고발했다. 대전지검은 "회의 종료 후에 이뤄지는 '합의'는 회의에 포함되지 않는다. 합의 과정의 녹음은 실무자의 업무 편의를 위한 것이라 녹음기록의 필요성이 소멸한 뒤 폐기하라고 지시한 것이 부당하다고 보기 어렵다"라며 각하했다. 그러나 검찰은 다시 뚜껑을 연 것이다.

 2020년 12월에는 비검찰 출신이기는 하지만, 현직 검사장급 간부가 '검찰 쿠데타론'에 힘을 실었다. 한동수 대검 감찰부장은 윤석열 총장 징계 사유 가운데 하나인 '채널A 사건' 감찰 및 수사 방해 의혹과 관련해 법무부 조사를 받으며 다음과 같이 진술한 것으로 보도되었다.

 "군대에 의한 무력 쿠데타가 아니라 검찰수사를 통한 쿠데타를 의식하고 있는 것 아닌가 하는 생각이 든다. 윤 총장은 총선에서 야당이 이길 것으로 생각한 듯하고 이 사건은 한동훈 검사장 혼자 한 것이 아니라 총장이 같이 한 것이다."

 대검 감찰부장으로서 검찰 내부 상황에 대한 정보를 취합하고 있는 한 부장이 이 정도의 진술을 했다는 것은 무슨 의미인지 심각하게 생각하지 않을 수 없다.

 

p339. 피해자 윤석열?

 보수언론과 야당은 추미애 법무부장관을 비롯한 여권이 윤석열 총장을 감찰하고 징계를 청구하는 등 괴롭혀서 윤 총장이 어쩔 수 없이 정치를 하게 되었다는 논리를 만들어 전파하고 있다. 윤석열은 '피해자'라는 것이다 그러나 이들은 윤 총장이 울산 사건을 위시한 일련의 문재인 정부 공격 수사를 지휘했고, 제3장에서 본 한명숙 총리 관련 모해위증 교사 의혹 사건과 채널A 사건 등에서 드러난 검사 비리에 대한 감찰을 철저하게 막았다는 점은 조명하지 않는다.

 윤 총장은 '조국 수사' 착수 시점에는 '권력형 비리'라고 생각하고 수사를 진행했을 것이라 믿는다.[조국 장관이 말을 곱게 한 것일 뿐이라고 믿는다. 윤 석열은 처음부터 검찰개혁이라는 기치를 들고 법무부장관에 오는 조국을 찍어내려고 마음을 먹고 있었을 뿐이다] 압수수색 후에는 '조국펀드설'이 근거 없음을 알았지만, 일수불퇴를 선택한 것으로 보인다. 검찰 조직의 자존심은 물론 윤 총장의 자존심이 걸린 문제였기 때문이다. 검찰과 검찰총장은 '무오류'여야 하기 때문이다. 그들은 확전에 확전을 거듭했고, 조국 수사를 넘어 문재인 정부를 총공격하는 수사를 벌였다. 수사를 통해 "택군(澤君)의 시간"을 연 것이다. 여당인 더불어민주당과 진보진영이 강하게 비판하는 것은 너무도 당연하다.

 윤석열은 '공격자'였다. 윤 총장은 수구보수진영의 환호와 구애를 받았고, 차츰차츰 검찰총장을 넘어 '미래 권력'으로 자신의 위치를 설정했다고 추론한다. '택군'을 넘어 '군주'가 되기로 한 것이다. 박용현 <한겨레> 전 편집장의 비유를 빌리면, 윤 총장은 스포츠 시즌 중 경쟁 팀 사이에 판정 시비로 다툼이 생기자 한 팀을 위한 편파 판정을 하고는 그 팀의 감독으로 변신했다. 

 일본 '록히드 뇌물 사건' 주임검사로 일본 전후 28대 검사총장을 역임한 요시나가 유스케는 경고한 바 있다.

 "수사로 세상이나 제도를 바꾸려 한다면 검찰 파쇼가 된다. 그건 있을 수 없는 일이다."

그러나 2019년 하반기 이후 한국 검찰은 윤석열 총장의 지휘 아래 이러한 경고를 완전히 무시하는 행태를 보였다. 검/언/정 카르텔을 활용하고 선택적 정의를 집행하면서 검찰은 세상을 들었다 놓았다, 쥐락펴락을 반복했다.

 한국 검찰은 선출된 권력이 아니지만, 수사권과 기소권으로 선출된 권력을 좌지우지할 수 있고 심지어 교체할 수 있다고 생각해왔고, 실천해왔다. 검찰은 '곧 죽을 권력'에 대해서 결정적 일격을 가하고 '새로운 권력'을 세우는 데 일조해 조직의 이익을 보전하는 수사와 기소를 벌여왔다. '곧 죽을 권력'이라고 판단하면, '죽여야 할 권력'이 되는 법이다. 이 과정에서 검/언/정 카르텔이 긴밀하게 소통하면서 공통의 목적을 달성하기 위해 각자의 역할을 했다.

 

p341. 대의민주주의를 위협하는 수사 권력

다른 나라의 예를 보더라도 '검찰,법조 쿠데타'는 새로운 현상이 아니다. 넷플릭스 다큐멘타리 <위기의 민주주의>는 브라질에서 룰라 대통령이 어떻게 구속되는지, 후임자 지우마 대통령이 어떻게 탄핵되는지를 생생히 보여준다. 결정적 역할을 한 세르지우 모루 연방 판사(한국의 검사와 유사한 역할)는 '세차(洗車) 작전'으로 불린 수사를 했다. 이 수사와 기소로 룰라, 지우마 두 대통령이 이끌던 '노동당' 정부가 무너지고, 극우파 정치인 자이르 보우소나루 대통령이 집권했으며 모루는 법무부장관으로 발탁된다. 이후 모루는 보우소나루 대통령과 불화로 사임했고, 현재는 2022년 대선 출마를 고려하고 있다. 고려대 임혁백 명예교수는 다음과 같이 평가했다.

 "브라질 민주주의 위기의 특징은 검찰과 사법부의 법 기술자들이 법적 수단과 장치를 동원해, 보이지도 않고 의식할 수도 없는 가운데 점진적으로 야금야금 민주적 제도와 규범을 침식해 민주주의를 전복시키는 사법 쿠데타라는 것이다. 브라질의 신흥 민주주의는 과거처럼 군부 쿠데타에 의해 전복되는 것이 아니라, 사법권력과 법률지식을 동원한 검찰과 언론에 의해 소리 없이 스텔스적인 방식으로 전복되고 있다."

 룰라는 실형 선고를 받고 복역하다가 대법원 심리에 들어가면서 불구속 상태로 재판을 받게 되었다. 그런데 이후 '세차 작전'에서 모루와 연방검사들이 룰라 기소에 앞서 텔레그램을 이용한 비밀대화를 통해 의견을 조율했다는 내용이 보도되었다. 2021년 3월 브라질 연방대법원은 모루의 재판 진행과 판결이 부당하고 수사과정에서 수집한 룰라 관련 증거를 재판에서 사용해서는 안된다는 판결을 내렸고, 4월 15일 연방대법원 전원회의는 룰라에 대한 실형 선고 무효 결정을 다수 의견으로 재확인했다.

 한편, <한겨레> 정의길 선임기자는 이집트에서 최초로 민주적으로 선출된 무함마드 무르시 대통령이 무바라크 체재에서 자리잡은 검사와 판사들의 집요한 공격에 의해 무너지고 결국 옥사하게 된 상황을 개탄하면서, "조국 사태와 무르시의 죽음에서 기시감"을 느낀다고 했다. 정 기자는 경고했다.

 "장관 청문회 직전에 그 후보자와 가족에 대한 대대적인 수사를 펼치고, 거의 사돈의 팔촌까지 털어서 별건 혐의를 찾았다. 검찰개혁을 초래하게 된 검찰의 행태에 대해서는 한마디 반성의 목소리가 없고, 검찰개혁은 검찰 독립성을 해친다는 집단적임 목소리만 들린다. 급기야, 검찰 수장이 자신의 직위를 놓고 행정 소송을 내면서 대통령과 맞서는 모습을 서슴없이 연출한다. 이 모두가 검찰의 합법적 권한이기는 하다. 또한, 트럼프 세력과 이집트 '법치 세력'들이 보여준 자의적이고 과도한 법적 권한과 수단의 행사이기도 하다. 국가 형벌권에 대한 권한을 자의적이고 과도하게 행사하는 집단의 행태를 제어하지 못한다면, 이 역시 장기간에 걸쳐 진행하는 연성 쿠데타로 귀결될 것이다."

 2019년 하반기 이후 윤석열 검찰이 진행한 수사를 검찰 쿠데타 또는 검란이라고 부르지 않더라도, 검찰이 문재인 정부를 타격하는 수사를 집요하게 벌였음은 아무도 부인하지 못할 것이다.

 나는 브라질이나 이집트의 사례 이외에, 윤석열 총장의 모습에서 미국 FBI 초대국장 존 에드가 후버의 모습을 보았다. 후버는 48년 동안 FBI 국장 자리에 있으면서 트루먼, 닉슨, 케네디 등 대통령을 협박하며 권력을 유지했다. 대통령도 후버의 눈치를 봐야 했다. 트루먼 대통령이 국외 첩보를 전담하는 CIA를 창설한 것도 후버의 막강한 권력을 막기 위함이었다.

 후버는 선출되지 않은 무소불위의 권력자였다. 그는 수사권 남용을 넘어 허위정보를 언론에 흘려 무고한 사람들을 탄압했다. 사회주의 성향의 유명 여배우 진 세버그가 사산한 아이의 생부가 흑인 좌파단체 '블랙 팬더당' 당원이라는 허위정보를 유포해 그녀를 자살하게 만든 사건은 대표적인 악례다(그녀는 아이의 장례식장에 몰려든 기자들에게 관 뚜껑을 열어 죽은 아이의 피부색이 흰색임을 공개해야 했다). 한국은 이제 선진국인데 검찰이 그럴 리가 있겠는가 하는 사람들에게 후버의 예를 보라고 말하고 싶다. 대의민주주의 바깥에 있는 수사권력은 언제든지 대의민주주의를 위협할 수 있다.

 

p353

 권위주의 체제 종식 이후 군부,국정원,기무사,경찰 등 권력 기관은 자신들의 과오로 인해 '외과수술'을 받았다. 그러나 검찰은 개혁의 무풍지대가 되었다. 오히려 검찰은 독접하고 있는 수사권과 기소권을 선택적으로 사용함으로써 막강한 '살아 있는 권력'이 되었다. 검찰의 권한을 건드리지 않는 집권 세력에게는 적극 협조하고, 검찰 출신 법무부장관이나 민정수석의 수사지휘는 군소리 없이 받아들였다. 그러나 검찰개혁을 추진하는 집권세력에 대해서는 '범정'(개검 '수사정보기획관실'의 약칭) 캐비닛을 열어 집요한 수사로 흠집을 내고, 집단으로 저항했다. 영화 <더킹>에서 '전략수사1부' 검사들이 사건 파일로 가득 찬 방에서 수사할 사건을 고르는 장면을 떠올려보라. 검찰권력 관련 사안에서는 선택적 수사와 선택적 기소가 암묵적 행동준칙이었다.

 윤석열 총장은 검찰에 대한 통제가 필요하다는 비판이 일어나자, 2020년 11월 이후 '국민의 검찰론'을 꺼냈다. '국민의 검찰론'의 요체는 검찰은 국민으로부터 '직접' 권한을 수권했기에 국민에게만 '직접' 책임지겠다는 것이다. 여기에는 검찰이 형식적으로 대통령 산하 행정부의 일부지만, 검찰은 대통령이나 법무부장관이 통제를 받아서는 안 된다 또는 받을 필요가 없다는 함의가 숨어 있다. '왕권신수설' 느낌을 주는 '검권민수설'이다.

 이는 극히 위험한 반헌법적 논리다. 대한민국 헌법체제에서 국민으로부터 권한을 '직접' 받은 사람은 대통령과 국회의원 등 선출직 공무원밖에 없다. 그 외의 사람은 아무리 잘나고 똑똑해도 '민주적 정당성'이 없다. 검찰권은 애초에 국민으로부터 직접 부여된 적이 없다. 국민은 검찰총장을 선거로 뽑은 적이 없다. 그는 법무부장관의 제청으로 대통령이 임명한 사람이다. 검찰총장의 정당성은 대통령의 '민주적 정당성'에서 파생했을 뿐이다. 따라서 검찰총장은 국민에게 책임지기 이전에, 대통령과 법무부장관에게 먼저 책임을 져야 한다.

 

p364

 2016년경 나는 <한겨레> 김의겸 기자(현 열린민주당 의원)와 세상 돌아가는 이야기를 나누었다. 김 기자가 나에게 "정권교체가 안 되면 어쩌지요?"라고 물었고, 나는 "그렇다면 15년 연속 보수집권이 되는 건데, 세상과 등지고 책 읽고 논문 쓰면서 살아야지요"라고 답했다. 그러자 김 기자도 "나도 정치부 기자는 그만두고 문화부로 가야겠네요"라고 말했다. 이에 나는 "정약전이 흑산도로 귀양갔을 때 왜 물고기만 연구하며 <자산어보>를 썼는지 이해가 간다"라고 덧붙였다.

 이 역시 자기 예언이었을까. 정권교체를 이루고 민정수석과 법무부장관직을 수행했지만, 2019년 하반기 이후 나는 정약전의 처지가 되었고 그 마음을 생각하며 살아가고 있다. 김의겸 기자는 청와대 대변인으로 근무하던 중 전세금, 부인 퇴직금, 은행대출 등을 모아 흑석동 건물을 샀다가 '부동산투기' 공격을 받고 사퇴했다. 그는 이 건물을 팔고 세금을 낸 후 남은 3억 7,000만 원을 기부했지만, 부동산투기 낙인은 사라지지 않았다. 이 흑석동 건물 앞에서 김 대변인을 규탄하던 국민의힘 의원 가운데 박덕흠 의원이 있었다. 박 의원은 서울 강남 지역 아파트와 상가, 창고, 임야 등을 포함해 총 289억 원(신고가액)의 부동산 자산을 보유하고 있다. 또한 그는 국회 국토교통위원회에서 활동하며 피감기관으로부터 수천억 원대 공사를 수주하고 엄청난 이익을 얻은 정황이 드러나자 국민의힘을 탈당했다. 그렇지만 박 의원에 대한 언론의 조명과 비판은 미미했고, 김 대변인을 향한 '선택적 분노'는 여전했다. 김진애 의원이 서울시장 후보로 나가기 위해 의원직을 사퇴하면서 김 대변인은 의원직을 승계하게 되어 '유배'가 풀렸다. 시련을 이겨낸 김의겸 의원의 활약을 조용히 기원한다. '박근혜, 최순실 국정농단 사건' 특종을 냈던 그가 의정활동에서도 특종을 내리라 믿는다.

 2021년 영화 <자산어보>가 개봉되어 아들과 보러 갔다가, 영화가 끝나자 아들이 말했다. "우리 집 이야기 같네요." '멸문지화' 그리고 이를 극복해가는 일이 남의 일 같지 않았던 것이다. 아들의 등을 두드리며 영화관을 나왔다.

 

박원순 성추행 사건에 대해 손병관 기자가 취재한 내용을 정리한 책. 이 사안의 심각성과 사회적 파장, 페미니즘의 성역화 등으로 인해 기사화되지 못한 내용들을 포함해서 이 사건을 입체적으로 조망할 수 있는 자료들을 폭넓게 제시한다.

이 사건의 전말에 대해 어느 정도의 궁금증을 해소하는 역할을 해준다.

 

이 책을 읽고 난 감상은, 참 더럽게 엮였다라는 생각이다. 박원순도 그렇고 잔디라는 가명의 여성분도 그렇고.

이 세상은 선의만으로 살아가기엔 참 어려운 세상임엔 틀림없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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p30

 많은 사람이 서울시장 자리를 대권으로 가는 징검다리로 생각하지만, 박 시장이 처음부터 대선을 의식했던 것은 아니다. 

 취임 6개월 시점(2012년 4월 26일)에 한 기자가 "이명박 시장 하면 청계천이 떠오르는데, 박 시장은 임기 안에 꼭 이루고 싶은 게 뭐냐"고 묻자 그는 "아무것도 안 한 시장이 되고 싶다"고 답했다.

 박 시장은 2013년 3월 14일 페이스북에 당시 발언의 취지를 구체적으로 설명했다.

 

 이전의 시장들은 임기 중에 뭔가 뚜렷한 사업으로 인상을 남겨서 재선이나 더 큰 선거에 나가고자 했으며, 그러다 보니 무리하게 되어 많은 문제점들이 생기곤 했다. 시민의 삶은 경제부터 문화까지 너무나 다양한 분야가 있다. 시장이 어느 것 하나 소홀하면 안 되는 것인데 한두 개의 업무만 집중하다 보니 다른 분야는 방치하게 되는 것이다.

 

 이 때문에 임기 내내 "한 게 없다"는 비판에 시달렸지만, 박 시장의 이런 안목이 임기 마지막 해에 빛을 발하기도 했다.

 박원순은 시민 처지에서 공공의료 문제를 들여다본 최초의 서울시장이었다. 시민들에게 각인될 '랜드마크'에 집착한 시장이라면 공공의료라는 무형의 가치에 주목하지 않았을 것이다.

 서울시는 공공의료 인프라 차원에서 시립병원 12곳을 운영하는데, 매년 1,000억 원 가까운 세금이 들어간다. 특히 서울의료원에 마련된 격리음압병상은 서울시의회가 열릴 때마다 '혈세 낭비', '활용도가 떨어진다'라는 지적을 받아왔다.

 박 시장은 그런 지적이 나올 때마다 "가난한 사람은 어디서 치료받으란 말이냐", "시립병원들이 적자지만, 시민이 낸 세금을 시민에게 다시 돌려드리는 것이기 때문에 앞으로도 투자를 아끼지 않겠다"고 화답했다.

 그의 선견지명은 코로나19 사태가 터지자 재평가를 받을 수 있었다. 

 서을의 코로나 사태 첫 3개월(1월23일~4월24일) 동안 서울 확진자의 71%(628명 중 446명)를 시립병원 4곳에서 치료했다. 서울의 공공의료 인프라가 받쳐준 덕에 '빅4' 대형병원들도 코로나19 병상 확보의 부담을 느끼지 않고 일상 진료를 지속할 수 있었다.

 

 

p37

 기자는 2017년 12월 8일 박 시장을 인터뷰했다. 그는 3선 도전 질문에 "이미 다 알고 있다면서요?"라며 허허 웃었다.

 박 시장이 마음을 굳히자 시장실 참모들도 "시장에게 여의도 정치가 반드시 겪어야 할 통과의례는 아니다. 박 시장에게는 '박원순의 길이 있는 것 아니냐"며 3선 도전을 돕기로 마음먹었다.

 박 시장은 이듬해 5월 10일 상반기 직원 조례에서 이 문제에 대한 심경을 직접 밝혔다.

 "저도 사실 시장을 한 번 더 해야 하는가에 대한 고민이 많았습니다. 정치적으로 보면, 서울시장을 두 번 하나 세 번 하나 마찬가지이기 때문에 더 이상 할 필요가 없죠. 실제로 많은 분들이 그렇게(3선 불출마) 권했습니다. 그런데, 출마를 고민하게 된 것은 우리가 시작했던 많은 비전과 실험들이 문재인 정부와 더불어 전국화되고 있는데 이런 모멘텀을 이어아야 하지 않나? 비록 나에게는 정치적으로 도움이 안 되더라도 적어도 시민들이 원한다면 (3선 시정을) 완성하는 것이 중요하지 않나 하는 고민을 했습니다."

 그에게는 남모를 고민이 또 있었다. 서울시 산하기관, 유관단체에 터 잡은 일부 참모들은 그가 서울시청을 떠나는 것을 원치 않았고, 이로 인한 무언의 압박도 적지 않았던 것이다.

 더불어민주당의 대표적인 박원순계 박홍근 의원(서울 중랑을)의 말이다.

 "2014년 지방선거 때 박 시장을 따로 만나 대선 나가면 돕겠다고 말씀드린 사이다. 가능성 크지 않은 줄 알면서도 2017년 대선도 도왔고, 2018년 지방선거에도 3선은 나가지 말라고 끝까지 고집했다. 처음에는 찬반 의견 팽팽했는데, 일주일 정도 지나니 시장 마음이 3선으로 기울더라. 박 시장이 내게 전화로 최종 결심을 밝혔을 때 내가 '시장님, 돕기는 하겠지만 대권에서 멀어지신 겁니다'라고 답한 기억이 난다. 지금 일을 생각하면, 내가 그때 확실히 말렸어야 한다는 후회가 든다."

 

p43

 2020년 7월 10일 새벽 서울대병원 장례식장 앞에서 부고 기사를 마감한 뒤 집으로 돌아온 나는 그대로 뻗어버렸다.

 점심 무렵 깨어나 보니 이미 많은 일이 벌어진 상태였다. 인터넷에는 '박원순 서울시장 성추행 전문'이라는 출처 불명의 글이 퍼지고 있었다.

 온라인 공간에서는 진위가 불분명한 루머가 그럴듯한 가공이 입혀지는 가짜뉴스들을 많이 볼 수 있지만, 문제의 글은 서울시청과 시장실 내부 사정을 모르는 사람의 작품치고는 너무 정교했다. 훗날 이 글은 피해자가 법률대리인 김재련 변호사와 함께 작성한 '1차 진술서'라는 것이 밝혀졌다.

 

p44

 박 시장이 2022년 대선 도전을 염두에 두고 기용한 '마지막 비서 실장' 고한석이었다. 재직 기간은 100여 일 남짓에 불과했지만 나와는 뭔가 통하는 구석이 많았다.

 그는 안희정이 충남지사 시절 보수성향의 재향군인회를 우군으로 삼아 충청권의 맹주로 올라선 것에 착안해 박 시장의 역사관을 바꾸 보려고 했다. 내가 "덩샤오핑은 마오쩌둥의 공과를 모두 인정해야 한다고 하지 않았냐"고 하자 고 실장이 "그걸 설득시키기가 참으로 어렵더라"고 말문을 열었다.

 "민주당 사람들에게는 그 부분이 어렵더라. 중국은 마오쩌둥이고, 우리나라는 박정희다. 이른바 민주화 세대가 박정희의 공을 거의 인정 안 하려고 한다. 그 점에서는 안희정이 탁월한 지점이 있었던 거다. 박 시장과도 그 얘기를 오래 했지만, 정책보다 더 어려운 게 역사관을 바꾸는 거였다. 어느 정도 필요성을 수윽하면서도 나아가지 못했다. 자기 입으로 공론화할 경우에 닥칠 파장에 대한 걱정을 많이 했다. 그래도 최근 들어서 시장이 뭔가 달라지고 있다고 생각했는데..."

 

p45

 피해자에 대해 "내 입으로 말해줄 수는 없다"고 버티던 S가 병원담길을 걸어가면서 슬쩍 운을 뗐다. "시장실 데스크 앞에 있던 00이 기억 안 나나? 시장실 자주 왔으면 아마 기억날 텐데."

 그 순간 2018년 지방선거가 끝난 6월 27일 시장을 접견할 때 집무실을 드나들던 비서의 얼굴이 어렴풋이 떠올랐다.

 그 무렵 서울경찰청 여성청소년계 수사관들은 박원순 사건의 참고인으로 불려온 시장실 전/현직 직원들 앞에서 그 비서를 '김잔디'라고 부르기 시작했다. 이제 잔디에 관해 얘기해보려고 한다.

 

p46. '2차 가해' 논란 속에서

 7월 13일은 박 시장의 시신이 서울을 떠나 경남 창녕의 선영에 안장되는 날이었다.

 그날 오전 10시경 박 시장의 유해가 서울추모공원에 도착했다.

 더불어민주당 윤준병 의원과 허영 의원, 민병덕 의원, 문석진 서대문구창과 김주명, 오성규 전 서울시 비서실장 등 박 시장과 인연이 깊었던 6명이 화장로까지 운구를 맡았다.

 그와 동시에 일부 여성단체들이 서울 은평구 여성의전화 사무실에서 기자회견을 연다는 예고 기사들이 나오기 시작했다. 시장의 마지막 길을 전송하려고 모인 조문객들의 얼굴이 하나둘 굳어갔다.

 몇몇 사람이 이때 피해자와 김재련 변호사에게 전화를 걸거나 문자메시지를 남겼다. 송다영 서울시 여성가족정책실장은 11시 40분 경 김 변호사에게 전화를 걸었고, 변호사가 전화를 받지 않자 "통화를 하고 싶다"라는 메시지를 남겼다.

 11시 44분에는 비서실장을 지낸 김주명이 참지 못하고 피해자에게 텔레그램 메시지를 보냈다. 장례 둘째 나에도 김주명은 피해자에게 "필요할 때 힘이 돼주지 못해 미안하다"는 메시지를 보냈고, 피해자도 "저를 나무라시고 원망하실 줄 알았는데 너무 죄송하다"는 답신을 보낸 상황이었다.

 한국여성의전화와 성폭력상담소는 3일 후 발표한 공동 입장문에서 "서울시 전/현직 직원 중 7월 8일 이후 피해자에게 연락을 취하는 이들이 있다"며 "너를 지지한다면서 정치적 진영론에, 여성단체에 휩쓸리지 말라고 '조언'하고 힘들어겠다고 위로하며 기자회견은 아닌 것 같다고 만류했다"라고 폭로했다.

 이 메시지를 보낸 사람이 김주명이었다. 사건 발생 석 달이 지난 후 만난 기자에게 그는 두 사람이 주고받은 메시지를 보여줬다. 장문의 메시지는 시장의 죽음 이후 피해자의 심경을 담고 있다. 사건을 이해하는 데 도움이 될 내용이라 전문을 공개한다.

 

 김주명 : 네가 얼마나 큰 상처와 아픔을 겪었는지 나는 짐작도 할 수 없을 것 같다. 내 무능이 원망스럽기도 하다. 하지만 네가 나를 신뢰한다면 꼭 해주고 싶은 말이 있다. 너를 비난하는 소리 조금도 신경 쓰지 마라. 함께 일했던 사람들은 오히려 네 걱정을 하고 있다. 너를 이용하려는 부추김에도 흔들리지 말아라. 네가 마음의 평화를 얻는 선택을 하렴. 마음의 소리를 따르고 기도의 응답을 구하렴. 꼭 부탁하고 싶은 것은 진영 싸움에 휩쓸려 들어가지 말라는 것이다. 보수/진보 할 것 없이 유불리를 따라 너를 이용할 뿐이다. 네 삶이 끝없는 싸움의 소용돌이에 빠지지 않기를 바란다. 지금 고통이 승화될 길은 마음의 소리를 따르는 것이다.

 특히 오늘 시장님을 보내는 날인데 법률대리인이 기자회견을 한다는 소식은 도저히 믿기지 않는다. 그건 정말 아닌 것 같다. 오늘 시장님을 떠나보래고 한 번 볼 수 있었으면 좋겠다.

 잔디 : 실장님.. 저는 정치도 모르고 진영도 몰라요. 최근에 있었던 일을 아시겠지만, 그 일로 제 트라우마가 폭발했던 것은 맞아요. 실장님께서 어디까지 알고 계시는지 모르겠어요. 제가 시장실에서 이 악물로 참으며 웃으며 지냈던 시간을 누군가 손가락질하는 것이나 저를 살인자 취급하는 사람들 때문에 충동적으로 그러는 것이 아니에요.

 저는 여전히 시장님의 작고가 저의 결정과 무관하길 바라고, 혹여 관계가 있더라도 무책임하게 돌아가실 분이 아니라고 생각하는 마음에서 용기를 내었어요.

 저희 가족은 시장님의 유서 중 '모두'에 저와 제 가족이 포함된다고 믿으려고 해요. 그렇다면 과연 시장님께서 이 일을 묻어두려고 하셨을까요..? 저희 아버지께서는 유서에 제 이름을 남기지 안흔 것조차, 저를 위한 마음이었다고 생각하시는 선한 분이세요. 그런 가족들이 저 때문에 힘들어하잖아요. 유명하고 대단하신 시장님과 그분의 가족들, 지인들만 명예가 있는 것이 아니에요. 보잘것 없는 저희 자고도 지키고 싶은 자존심이라는 것이 있어요.

 저는 어떠한 계획으로 증거를 모은 것도 아니었어요. 참아 내다 힘들 때 겨우 주변에 작은 목소리 한 번씩 내던 거였어요.

 저는 시장님께서 혹여 저의 고소 사실로 그러한 선택을 하셨다고 하더라도 지금 저의 선택을 지지하리라 믿어요. 어쩌면 시장님게서 어디엔가 살아계시고 북녘으로 넘어가셨을지도 모른다는 상상을 해보기도 해요.

 이 일을 시장님과 저 둘만의 문제가 아니었어요. 우리 모두는 미숙했어요. 그걸 바꿔야 한다고 생각해요. 그래야 우리 모두처럼 또 다른 사람들이 상처받지 않을 수 있다고 생각해요.

 저는 절대로 지금도 그때에도 시장님을 해하려고 그런 것이 아니었어요. 악의가 없었어요. 저는 저를 지키려고 한 거였고, 평범하게 살고 싶었어요.

 시장님을 추모하며 두 가지 문구가 떠오르더라고요. 정의가 강물처럼, 함께 꾸는 꿈은 현실이 됩니다. 살아있는 사람들이 시장님을 애도하는 방식은 다양할 수 있다고 생각합니다.

 실장님 죄송해요. 기자회견 이후에도 저를 만나고 싶어 해주시면 좋겠습니다.

 김주명 : 어떤 가족도 보잘것없는 가족은 없어. 가족의 소중함. 너를 보면 느낀 적이 많지. 모든 걸 덮자는 것도 아니야. 다만 오늘 하루만 피하면 안 될까?

 잔디 : 그 일정은 제가 정한 것이 아니라 어려울 것 같아요. 저를 도와주시는 분들께서도 너무 정치적으로 이용되는 것을 염려하셔서 오늘로 정하신 걸로 알고 있어요. 죄송해요.. ㅠㅠ

(개인적감상 : 잔디라는 분의 글에서 보면 심리적으로 거의 패닉에 가까운 상태에서 쓴 글이라는 느낌이 든다. 논리는 거의 찾아볼 길 없고 중언부언만이 있을 뿐이다. 그리고 자신의 생각보다는 주변에 떠넘기거나 의지하는 그런 글이다. 가련한 느낌이 든다)

 

 김주명은 훗날 경찰 조사에서 "그날은 고인을 추모하는 시간이었다. 진상규명이든 뭐든 (기자회견은) 그날 하루만 피하면 되다고 생각했다" 고 회고했다. (개인감상 : 당연한 말이다. 굳이 발인날 기자회견을 해서 무엇을 얻을 수 있을까? 박원순 나쁜놈 정도의 선빵 효과? 정말 진상을 밝히고 싶으면 피고인이 죽은 마당에 그들이 주장하는 확실한 증거를 제출하고 정당한 절차로 재판을 진행하면 될 일이다. 그런 합법적 절차를 마다하고 주요 피의자가 죽은 마당에 굳이 여론전으로 가겠다는 건 그 의도를 의심하지 않을 수 없는 상황이다)

 또 다른 참모 X도 "설령 판도라의 상자가 열리더라도 오늘 하루는 마음껏 울고 싶은 심정이었다"고 말했다.

 오후 2시 기자회견은 예정대로 열렸다. 지금까지도 온 사회를 흔들어놓은 쟁점들이 모두 이 자리에서 배태됐다.

 "피해자는 부서 변경을 요청했으나 시장이 이를 승인하지 않으면 불가능했다. 박 전 시장은 본인의 속옷 차림 사진을 전송하고, 비밀 텔레그램 방을 개설할 것을 요구하고, 음란한 문자를 발송하는 등 점점 수위는 심각해졌고, 심지어 부서 변동이 이뤄진 이후에도 개인적 연락이 지속됐다."(이미경 한국성폭력상담소 소장)

 피해자는 박 시장을 통신매체이용 음란, 업무상위력에 의한 추행 그리고 강제추행 혐의로 고소했다.

(개인감상 : 이후에 난 어떤 매체에서도 이때 주장한 음란한 문자에 대해 증거를 제시했다는 기사를 본 적이 없다)

 

p59

 여성단체들의 요구사항 중 눈에 띄는 것이 더 있었다. "서울시 관계자들은 언론에 피해자에 대한 일방적인 코멘트를 중단하고, 언론 인터뷰 시 전/현직 직급과 부서를 밝히라."

 나는 이것을 언론과 취재원 양쪽에 대한 압박으로 받아들였다. 이 또한 나중에 밝히겠지만, 내가 만난 취재원 중에는 익명을 전제로 시장실 시절 얘기를 해준 경우가 많았다.

 기사 신뢰성을 위해 취재원을 밝히는 것이 합당하지만, 자신을 드러냄으로써 취재원들이 볼 피해에 대해서도 생각하지 않을 수 없었다. 아마도 '신원 공개'의 어려움을 누구보다 잘 알고 있을 피해자 측이 상대방 입장을 고려하지 않고 '신원 공개'를 요구하는 것은 공정하지 않다고 생각한다. 어쨌든 이런 식의 압박은 동시다발로 밀려왔고 나에게도 예외는 아니었다.

 비서실장 반응들을 담은 기사 부제 <"일 잘하고 밝은 친구" 증언도>는 나중에 수정됐다.

 비서실장들은 모두 피해자의 업무 능력 자체는 높이 평가했다. 피해자의 기자회견으로 자신들의 책임론이 제기되는 상황에서 원인 제공자에 대한 호평이 이례적이어서 기사에 "일 잘하고 밝았다", "가장 오랫동안 근무한 비셔였고 시장실에 긍정적인 에너지를 불어넣는 존재"라는 평을 넣었다.

 그런데 노조 공보위를 중심으로 일부 후배 기자들이 "피해자의 성격을 굳이 묘사할 필요가 있냐"는 문제 제기를 편집국장에서 했다고 한다. 나는 이해가 가지 않았다. 굳이 이유를 추론해보자면 ▲ 피해자의 성격을 묘사하는 것을 '2차 가해'의 범주에 들어간 것으로 이해하거나 ▲ 비서실장들의 호평 이면에 '다른 의도'가 있었던 것으로 의심했던 게 아닌가 싶다.

 또한, 공보위는 7월 16일 "사건의 성격, 과거 보도 사례 등을 살펴 볼 때 이번 사건 역시 '피해자'라고 호칭하는 것이 적절하다고 봤다"며 상근기자의 취재, 편집 과정에서는 '피해자' 용어를 사용해달라고 권고했다.

 공보위 권고가 강제성은 없었지만 내 입장도 명확했다. 구체적인 피해 사실을 가해자가 인정하거나 또는 법정에서 확정되지 않는 한 진실을 다투는 사람은 '고소인'으로 통일해야 한다는 것이다.

 

p71. 시장실 사람들, 말문을 열다

 여성단체들의 보이콧으로 서울시 차원의 진상조사는 없던 일이 되어버렸다.

 황인식 서울시 대변인은 7월 22일 오후 "민관 합동조사단 구성은 현실적으로 어려운 상황이 됐다."며 "피해자가 국가인권위원회 진정을 통해 조사를 의뢰할 경우 조사에 적극 협조하겠다"고 발표했다. 김 변호사와 피해자 지원단체들은 7월 28일 오전 서울광장에서 인권위 직권 조사를 촉구하는 '보랏빛 우산 퍼포먼스'를 벌이며 한껏 기세를 올렸다.

 서울시 발표 직전 7월 22일 오전 11시에는 피해자 지원단체의 2차 기자회견이 열렸다. 기자회견의 핵심은 피해자가 시장으로부터 당한 성폭력 피해를 알리며 도움을 구한 서울시 직원이 20명이라는 것.

 "(피해자가) 정확하게 얼마나 자세히 말했냐"는 질문에 김재련 변화사는 "피해자가 (2019년) 부서 이동 전에 17명, 이동 후에 3명에게 말했다. 이 중에는 피해자보다 높은 직급, 이 문제에 대해서 더 책임 있는 사람에게 전달해야 하는 인사담당자가 포함됐다"고 부연 설명했다.

 송란희 여성의전화 사무처장은 "박원순의 개인적인 문제를 넘어 권력에 의해 은폐, 비호, 지속된 조직적 범죄"라고 규정했다.

  이 2차 기자회견으로 박원순 사건은 새로운 국면으로 접어들었다. 종전까지는 박 시장의 은밀한 사생활이거나 설령 그런 일이 있었다 해도 개인의 일탈로 치부될 수 있었는데, 직원들의 피해 호소 묵살은 조직의 문제가 되기 때문이다.

 이 무렵 취재를 거부하거나 '노 코멘트'로 일관하던 시장실 일부 직원들의 태도가 변하기 시작했다. 사태 초기 시장실 직원들은 '수인의 딜레마'에 빠져 있었다.

 박 시장의 갑작스러운 죽음과 함께 피해자의 폭로가 이어지면서 이들은 심리적으로 큰 충격을 받았다. 피해자 주장에 반신반의하면서도 혹시 자신이 모르는 뭔가가 있을지 모른다는 생각에 이들은 극도록 말을 아꼈다. 마치 공범 혐의를 받고 별도로 격리된 두 죄수가 상대방이 무슨 말을 할지 모르는 상황에서 어떤 대처가 현명한 선택인지 몰라서 번민하는 상황이었다.

 서울시장실에서 경력을 쌓거나 박 시장의 정치적 동지를 자처했던 '박원순계' 의원 10명의 상황도 마찬가지였다. 기동민, 김원이, 남인순, 민병덕, 박홍근, 박상혁, 윤준병, 천준호, 최종윤, 허영이 그들이다.

 '윤준병 사태'는 이들을 더더욱 얼어붙게 했다. 윤준병 의원은 서울시에서만 30년 가까이 공무원 생활을 하다가 행정1부시장까지 오른 인물이다. 여러 가지 사업들을 의욕적으로 벌이려는 박 시장에게 '늘공' 입장에서 행정적으로 가능한 것과 불가능한 것을 설명해주는 게 그의 일이었다. 생전 박 시장은 그의 능력을 인정하면서도 "윤준병 말대로만 하면 내가 할 수 있는 게 없어"라고 불편함을 드러냈다.

 윤준병 의원은 2020년 7월 13일 오후 박 시장의 유해를 고향에 묻고 오면서 피해자의 기자회견 뉴스를 접했다.

 윤준병은 페이스북에 "행정1부시장으로 근무하면서 피해자를 보아왔고 시장실 구조를 아는 입장에서 이해되지 않는 내용들이 있었다. 침실,속옷 등 언어의 상징조작에 의해 오해 가능성에 대처하는 것은 남아 있는 사람들의 몫"이라고 썼다.

 이 글을 놓고 "피해자 말을 의심하는 거냐"는 비판 기사들이 쏟아졌다. 2020년 7월 16일 가로세로연구소의 강용석 변호사는 역대 비서실장들을 추행 방조 및 위계에 의한 공무집행 방해로 고발하면서 윤 의원도 끼워 넣었다.

 그렇게 피해자의 '피해 호소 20명' 주장이 나오면서 시장실 사람들은 '성추행 공범' 이미지를 덮어쓰게 됐고, 이들은 더더욱 입단속을 경계하게 됐다. 나의 취재가 더욱 어려워졌음은 물론이다.

 그러나 피해자 지목으로 경찰서를 다녀온 사람들이 하나둘 늘어나자 이들 사이에서 "내가 왜 이런 대우를 받아야 하나", "피해자가 해도 너무 한다"는 비판론이 부상했다.

 시장실에서 1년 6개월간 근무했던 Y는 박 시장이 사망한 직후부터 피해자를 지지하는 쪽이었다. 그가 그로부터 다섯 달이 지난 뒤 해준 얘기다.

 "지금 생각해보면, 가세연 강용석의 고발은 없었다면 좋았겠다는 생각이 든다. 그 일이 많은 사람을 멀어지게 만들었다. 12월 26일 '2차 가해 반대' 공동성명 건으로 잔디와 통화할 일 있었는데, 잔디가 하는 말이 '동료들에게 법적인 책미을 물을 생각은 없었다'고 한다.

 사람들 기억이 100% 정확할 수 없지 않나? 피해자 말에도 사실이 아닌 게 끼어이쏙, 동료들 말도 마찬가지일 거다. 만약 경찰 조사가 아니라 사적으로 만나서 얘기했다면 동료들도 '네 사정이 그런 줄 몰랐다'고 넘어갈 수 있는 문제였다. 그런데 경찰을 매개체로 말이 오가면서 양쪽 모두 전면전으로 갈 수밖에 없게 됐다"

 

기자 : 가세연 고발이 피해자의 뜻과는 무관했다고 보는 거냐?

Y : 그렇다.

기자 : 가세연 고발에 이어 김재련 변호사가 '피해 호소인 20명'을 얘기할 때 사람들은 그걸 피해자의 의지로 받아들였는데?

Y: 그것도 사실이다. 다만, 돌이켜보면 피해자와 지원단체가 그렇게 안 했다면 더 좋았을 것이라는 생각을 지울 수가 없다. 그러나 당시에는 그런 것까지 생각할 수 없었을 거다. 그런면에서 비극적이라고 본다.

 

 어쨌든 그동안 알고 지내던 시장실 사람들도 기자의 전화를 피하는 등 이 시기 취재가 어려웠던 것은 사실이다.

 

p76

 그래서 나는 일반직과 별정직을 가리지 않고 '시장실 직원 20명'을 찾아보기로 했다. 그 결과물이 7월 31일 저녁에 출고된 <서울시청 6층 사람들 "성추행 방조? 난 들은 적 없다">이다. 일단 기사 내용을 전재하겠다.

 

 국가인권위원회가 고 박원순 전 서울시장의 성추행 의혹에 대해 직권조사를 시작한 가운데, 성추행을 방조했다는 혐의로 조사 또는 수사 대상이 될 수 있는 서울시청 '6층 사람들'이 입을 열기 시작했다. 하지만 이들은 방조 의혹에 대해 피해자의 호소를 들은 적 없다고 말했다. 관련 압수수색 영장이 기각되고 유족 측의 요청으로 박 전 시장의 휴대폰 포렌식도 중단된 상태에서 관계자들의 진술이 엇갈리는 상황이라 진상규명에 어려움이 예상된다.

 <오마이뉴스>는 조사 대상이 될 수 있는 이들 입장을 듣기 위해 피해자가 시장실에 근무하기 시작한 2015년 7월부터 올해까지 5년 동안 서울시청 6층에서 근무한 공무원 20명과 접촉했다. 6층은 박 전 시장의 업무를 돕는 시장실, 행정부시장실, 정무부시장실, 정무수석실, 소통전략실, 정책보좌관실, 젠더특보실, 공보특보실 등이 모여있다.

 김재련 변호사와 한국성폭력상담소 등은 13일 기자회견 이후 피해자가 박 전 시장의 성적 괴롭힘, 인사 고충을 호소했음에도 불구하고 전보 조치를 취하기 위한 노력을 하지 않았다며 '6층 사람들'의 추행 방조 혐의를 주장해왔다. 성폭력상담소는 16일 보도자료에서 "2016년 1월부터 매 반기별 인사이동을 요청함. 번번이 좌절된 끝에 2019년 7월 근무지 이동 후, 2020년 2월 다시 비서 업무 요청이 왔다"고 전했고, 김 변호사는 지난 22일 '2차 기자회견'에서 '피해자가 기억하는 내용만 해도 부서 이동 전에 17명, 이동 후에 3명에게 말했다'고 밝혔다. 6층에서 근무하는 시장 보좌진들은 40~50명에 이른다.

<오마이뉴스>가 접촉했던 20명이 피해자 측이 지목한 20명인지는 확인되지 않았다. 다만 피해자와 같은 공간에서 근무했거나 시장 결재 때문에 수시로 얼굴을 볼 수 있었던 관계로, 최소한 참고인 조사가 유력한 인물들이다. 일부는 이미 경찰에서 조사를 받았다. 박 전 시장이 기용한 별정직과 공채 출신의 일반직이 모두 포함돼 있다.

 사건 초기에는 취재에 잘 응하지 않던 이들은 하나둘씩 자신 입장을 밝히기 시작했다. 이들은 모두 피해자가 박 전 시장과의 관계에서 불편함을 호소하거나 그로부터 인사이동을 요청하는 얘기를 들은 바 없다고 말했다. 이에 따라 본격적인 조사 또는 수사 국면에서는 엇갈리는 진술을 넘어서는 증거가 관건이 될 것으로 보인다.

 취재에 응한 이들의 핵심 발언을 추려서 소개하면 다음과 같다.

 △ 김주명(2017년 3월~2018년 7월 비서실장)

"고소인이 불편해하는 낌새를 못 느꼈고, 심지어 (2019년 7월 시장실을) 그만두는 순간까지도 몰랐다."

-비서실장을 그만둔 이후의 상황을 어떻게 아느냐?

"고소인과는 올해 3월까지도 통화를 하는 사이였다. 그(고소인)는 시장실 최장기 근무자였고, 내가 아는 '최고의 비서'였다. 이 정도만 얘기하겠다."

 

△ 오성규(2018년 7월~2020년 4월 비서실장)

"비서에게 그 정도로 심각한 문제가 있었다면 비서실의 최고책임자인 나 같은 사람에게 직접 얘기를 했겠냐. 2019년 11월 14일 안부를 묻는 텔레그램 메시지를 주고받은 이후 내가 고소인에게 연락을 한 적도, 고소인이 내게 연락을 한 적도 없다. 지난 2월 시장실 데스크 여비서 2명을 순차적으로 바꿔야 할 상황이 발생했지만, 그때도 내가 고소인을 찾을 일은 없었다.

△ 박 전 시장의 핵심 참모 A씨(남)

"하루 한두 번은 시장실에 들어갔는데, 지금 같은 얘기가 나올 줄을 까맣게 몰랐다. 고소인이 얼굴을 찌푸리거나 스트레스를 받는다는 느낌은 없었다."

△ 고소인의 직속 상관 B씨(남)

"고소인이 얘기를 하지 않아서 그런 사실을 몰랐다 고소인이 근무하는 동안 데스크에서 함께 일했던 여비서 2명은 계속 바뀌었다. 당사자가 요청하면 바꿔주는데 피해자는 공식적으로 얘기한 적이 없다."

- 혹시 상사가 남자라서, 어려워서 얘기를 못 한 건 아닌가.

"다른 직원들은 나가겠다고 해서 바꿔줬는데, 왜 그 직원만 얘기를 안 했을까? 그 친구로부터 요청받은 게 없었다.

△ 별정직 공무원 C씨(시장실 떠난 후에도 피해자와 가끔 연락하고 만남)

"고소인이 박 시장과의 관계에 대해 어려움을 호소한 적이 없다. 반대로 내 앞에서 자랑한 기억은 난다."

△ 일반직 공무원 D씨

"워낙 오랫동안 근무하다 보니 박 전 시장이 고소인을 편하게 생각했던 것은 맞다. 고소인도 근무 기간에 서울시장의 비서로 일한다는 자긍심을 숨기지 않았다. 데스크는 9급이나 8급이 주로 맡아왔는데 7급으로 승진한 사람을 다시 불러들이는 것은 상식에 맞지 않는다."

△ 서울시 관계자(6급 이하 공무원 인사 담당)

"2월에 시장실로부터 (비서를 고소인으로 충원해달라는) 그런 요청을 받은 바 없다."

△ 윤준병 더불어민주당 의원(2018~2019년 서울시 행정1부시장)

"본부장 시절 박 시장의 결재를 기다리는데 대기시간이 길어지면 피해자가 시장실 안으로 얼굴을 들이밀고 '밖에서 사람이 기다리고 있다'는 사실을 알려주는 센스가 있었다. 예의 바르고 친절했다. 고소인으로부터도 불편하다는 말을 들은 적이 없다."

 

 이 기사를 올린 것은 7월 29일 오전 9시 25분이지만, 최종 출고는 7월 31일 오후 7시 30분에 이뤄졌다. 내부 검토에만 이틀 반이 걸렸다는 얘기다.

 "피해자가 20명에게 피해를 호소했다"는 주장이 처음 나왔을 때 나는 "사실이라면 적어도 내가 아는 사람 몇 명은 그 20명 중에 반드시 끼어있을 것"이라고 확신했다.

 서울시청 6층에는 시장 업무를 돕는 시장실은 물론이고 행정부시장실, 정무부시장실, 정무수석실, 소통전략실, 정책보좌관실, 젠더특보실, 공보특보실 등이 모여있었다. 모두가 시장실과 밀접한 업무 연관성이 있었고, 이들은 집무실 데스크 앞에 있던 피해자의 모습을 기억하고 있었다.

 그러나 모두가 "피해자로부터 박 전 시장과의 관계에서 불편함을 호소하거나 인사이동을 요청하는 얘기를 들은 바가 없다"고 답했다.

 7월 한 달 내내 언론들이 피해자 주장만 대서특필하는 상황이었다. 또한, 피해자가 경찰 조사에서는 피해 사실을 알렸다고 구체적으로 지목한 사람들도 있었던 만큼 사건 초기 이들의 진술을 확보한다는 의미도 있었다.

 기사 한 꼭지를 쓰려고 취재한 20명의 반응을 취합하는 것은 나로서는 전무후무한 시도였다. 7월 29일 오전 기사를 쓴 뒤 봉은사 3재에 참석했던 나를 편집국장은 광화문 회사로 불러들여 "일체의 해설 없이 직원들 얘기만 그대로 보도하자"고 제안했다.

 7월 16일 가세연 강용석의 '강제추행 방조' 고발로 경찰 조사를 받게 된 오성규, 김주명, 윤준병의 경우 "실명으로 보도해도 좋다"는 허락을 어렵사리 받아냈는데 기자의 시각이 반영될 수 있는 일체의 해설을 지우라는 얘기였다.

 

 

 한편, 정치권에서는 박원순 사건과 관련한 엄청난 양의 논평들을 쏟아냈다. 이 중에서 정의당의 논평 몇 건은 기록으로 남기려고 한다.

 "이런 성희롱 사안이 벌어지게 된 서울시의 '구조'를 반드시 밝혀내야 한다고 생각한다. 개인의 일탈로 넘어갈 수 있지만, 그게 아니라 조직화된 구조적 문제라는 생각이 든다. 그런 문제는 사실 광범위하게 법률적으로 의율될 수 있는 범죄가 아니라 서울시 관행의 문제이기 때문에 아주 심각할 것이다. 바로 그 문제를 정확히 조사해야 한다는 것이다.(배복주 여성본부장)

 

 "성폭력 문제는 한 개인의 일탈이 아닌 구조적인 문제인 만큼 여성가족부 장관은 부처의 취지와 목적을 똑바로 인식해 제 역할을 다하길 바란다."

 

 "서울시가 모범적으로 공들여서 성희롱, 성폭력 방지 매뉴얼을 만들었는데 이게 왜 현장에서 먹통이었는지 그 이유를 정확하게 파악해야 한다고 본다. 특히 성희롱, 성폭력 가선처리 매뉴얼이 최고 권력자 앞에서 작동이 멈췄다는 것에 대해서 서울시는 뼈아픈 반성과 보완책 마련이 필요하다고 봅니다.

 

 나는 정의당 사람들을 만날 때마다 "서울시장실 사람들 얘기도 들어보고 판단하라"고 조언했지만, 그들은 내 말을 듣지 않았다.

 해가 바뀌자 김종철 대표가 같은 당 장혜영 의원을 성추행한 것에 책임을 지고 사퇴하는 일이 발생했다. 이 사건을 조사하고 발표한 사람이 배복주였다.

 정의당 주장대로 성폭력은 개인 일탈이 아니라 구조적인 문제일까? 그렇다면, 당 대표의 문제에 대해 정의당에는 어디까지 책임을 물려야 할까?

 

p93

 잔디와 근무 기간이 2년 가까이 겹쳤던 여성 D의 말이다.

 

 "시장실에 들어올 때 마음에 없이 억지로 왔다는 식으로 주장하는 데, 그럴 리 없을 거에요. 시장실 근무는 특별한 경험이기 때문에 오고 싶어 하는 사람은 엄청 많아요. 따라서 오기 싫다는 사람이 들어 올 수가 없다는 것은 나도 경험했죠. 피해자 또래의 시청 직원 중에 '시장실 일이 많아서 꺼림칙했지만 승진과 인사에는 도움 될 것 같아서 경험 쌓는 차원에서 왔다'고 하는 사람이 많았습니다. 일단 시장실에 들어와도 적응 못 하는 사람들은 후임자 정해지는 대로 그때그때 내보내 주곤 했어요."

 D의 얘기는 계속 이어졌다.

 "시장에게 결재받으러 가면 데스크 비서들과 마주칠 수밖에 없어요. 그럴 때마다 잔디는 약간 비음 섞인 목소리로 '어서 오세요, 어서 오세요' 하며 반갑게 맞아줬던 기억이 납니다. 함게 있던 비서들에 대해서는 잔디만큼의 기억이 없어요. 그래서 '비서가 성추행 고소했다'는 뉴스가 처음 나왔을 때 다들 잔디가 아니라 또 다른 친구를 떠올렸을 거에요."

 역시 시장실을 자주 드나들었던 별정직 E와 L, T는 피해자가 박 시장에게 넥타이를 매주는 모습을 기억했다. E의 얘기다.

 "박 시장이 행사 때마다 넥타이를 고쳐 매야 하는데 피해자가 시장 목에 넥타이를 직접 매줬어요. (다름 사람들은 그렇게 안했나요?) 다른 사람들은 자기 목에 넥타이 걸어서 매듭 만든 다음에 시장에게 전해주기만 했죠."

 L의 기억은 이렇다.

 "내가 보고하는 와중에 잔디가 시장에게 '외부행사 나가야 한다'며 넥타이를 매어주는 데 그 모습이 아내가 남편 넥타이 매주는 듯한 느낌이었어요. 또 한번은 잔디가 넥타이 매주려는 것을 시장이 '이건 내가 할 수 있다'고 뿌리치는 것을 봤어요. 그걸 보고 다른 참모들에게 '잔디가 시장실에 너무 오래 있었으니 내보낼 때가 아니냐'는 의견을 준 적이 있습니다.

 

T는 "내가 지켜보는 자리에서도 잔디가 시장의 넥타이를 고쳐매 주더라. 시장 몸에 손댈 수 있는 사람이 누가 있겠나 싶었다"고 말했다.

 B와 C는 시장 관련 영상 촬영 업무를 했다. C의 증언이다.

 "우리 팀이 일을 하다 보면 시장의 몸에 마이크를 장착할 때가 많은데, B가 마이크를 주면 시장이 직접 장착하곤 했어요. 그런데 피해자는 밖에서 다른 일을 하다가도 그걸 보면 달려와서 본인이 시장 몸에 마이크를 채워주곤 했죠."

 어쨌든 2015년 시장실 입성 이후 2016년 하반기까지 피해자가 박 시장과 관련해 특별히 문제 제기한 흔적은 드러나지 않았다.

 2016년 2월 25일 피해자가 박 시장에게 보낸 손편지에는 당시 시장에게 느낀 감정이 고스란히 드러난다.

 

 자랑스러운 박원순 시장님께 드려요.

 시장님~ 생신을 진심으로 축하드립니다.

 작년에 첫 발령을 받고 공무원이 된 지 4개월 만에 시장님을 모시게 되어서 얼마나 무섭고 떨리는 마음이 들었는지 몰라요!

 그런데 시장님게서 늘 잘 가르쳐주시고, 웃음으로 대해주셔서 항상 감사하고 행복한 마음으로 생활하고 있답니다. 서울시 공무원으로서, 또 한편으로는 서울시민으로서 시장님의 생각이나 정책, 사소한 행동들 모두 존경스럽고 그런 부분들을 저도 본받아 좋은 공무원, 좋은 사람이 되고 싶어요.

 시장님이 계시기에, 우리 서울의 미래가, 대한민국의 미래가 기대됩니다.

 그러니까 꼭 건강하셔야 돼요! 비서실, 아니 서울시 통틀어서 제일 건강하시지만, 건강하실 때 관리하셔야돼요.

 시장님 생신 축하드리고 사랑합니다.

 시장실 막내 잔디 올림

 

 그러나 피해자는 "2016년 1월 당시 5급 비서관에게 전보 요청을 했고 같은 해 11월 인사담당자에게 전보를 요청하는 메일을 보냈다"라고 주장하고 있다. 피해자 측은 "인권위와 경찰 등에 증거를 제출했다. 그중 일부"라면서도 구체적인 내용을 공개하진 않았다.

 기자는 박 시장의 수행비서관을 3년 6개월간 지낸 A를 여러 차례 만났다. 일반직 공무원이었더 A는 박 시장이 외부로 출타할 때마다 '그림자'처럼 따라붙었다. 박 시장이 시장실에 머무는 동안에는 피해자가 시장의 일정을 관리하고, 밖에 있을 때는 A가 피해자가 하던 일을 맡았기 때문에 시장실 그 누구보다도 업무 연관성이 높았다. 두 사람이 함께 근무한 기간은 2년 6개월이 겹쳤다. 다음은 A와의 일문일답이다.

 

기자 : 피해자는 6개월마다 부서를 옮겨달라는 요청했다는데, 그 정도 빈도면 수행비서관도 알았을 것 같다.

A : 인사 문제 상담을 자주 한 편이다. 나에게는 자기가 언제 나가는 게 좋을지, 어느 타이밍이 좋을지를 물었다.

기자 : 피해자가 전보를 원했다는 뜻인가?

A : 본인이 남는 게 유리하다고 생각하면 남고, 그게 아니면 떠나는 것 아니냐? 나가고 싶다고 의사를 밝히면 다 내보내 줬다. 시장이 각별하게 생각했던 것은 맞다. 하지만, 아무리 시장이라도 나가겠다고 강하게 얘기하는 직원을 막을 방법이 없다. 옆자리에서 같이 일한 비서 3명은 차례로 다 나갔다. 그 친구들도 안 나갔다면 내가 이런 얘기하지도 않는다.

기자 : 피해자가 일 잘한다고 인정받았고, '시장실 업무를 굉장히 좋아했다'는 얘기를 많이 들었다.

A :  그건 맞다. 시장실 4년 동안 9급에서 7급으로 승진해서 나갔다. 원래부터 7급 달면 나가려고 했었다. 9급, 8급으로 밖에 나가면 허드렛일 하는 부서에서 고생할 수도 있으니까.

 

 한 가지 분명한 것은, 잔디가 시장실 직원들에게 '비서 이상의 비서'로 강렬한 인상을 줬다는 점이다.

 CBS 기자 출신인 김주명 서울시평생교육진흥원장은 2017년 7월부터 박 시장의 미디어 특보(8개월), 비서실장(1년 2개월)으로 잔디와 함께 일했다. 그는 8월 13일 서울시경에서 3시간 30분 동안 이어진 피의자 조사에서 잔디를 이렇게 평가했다.

 "<오마이뉴스> 인터뷰에도 말했지만 '최고의 비서'다. 굉장히 자부심도 있었고 자기 일을 즐거워하면서 했다. 따로 내가 무언가를 지시하거나 주문한 적이 없었던 것으로 기억한다. 시장이 외신 보도를 직접 챙기고 스크랩도 하는 등 자료 관리를 꼼꼼히 하는 편이었다. 시장이 그런 일을 할 때 나는 도와준 적이 없는데 잔디는 자기 일이 아닌데도 시장을 도와드리곤 했다.

 잔디는 내 비서 일도 했다. 내가 '직원들 격려 좀 해야겠다'고 하면 나에게 '어느 부서가 일을 잘해서 좋은 기사가 나갔다'는 식으로 팁을 줬다. 그러면 내가 시장 명의로 피자를 보내곤 했다. 비서실장인 내가 알아야 할 기사가 있으면 텔레그램으로 보내주기도 했다.

 경찰이 '비서실에서 잔디가 하는 일이 뭐냐'고 묻자 김 전 실장은 이렇게 답했다.

 "가장 핵심적인 일은 시장 일정이 원활하게 돌아가게 하는 것이다. 시장의 하루 일정이 20개가 넘는다. 10분 단위로 면담, 회의가 잡혀있다. 그런데 면담자들은 그 10분도 짧게 느껴서 가능한 한 오래 하려고 하는데 그때 누군가 들어가서 면담을 종료시켜야 한다. 저와 잔디, 그리고 같이 일하는 비서 3명이 그 역할을 했다. 그리고 시장 일정이 많으니까 하루에도 방문객들이 아주 많다. 그분들을 응대하는 일들이 저와 비서 2명이 주로 했던 일들이다."

 "박시장이 잔디를 대하는 태도는 어땠나?"

 "신뢰감을 갖고 있었던 것 같다."

 "그렇게 판단하는 이유는?"

 "일정을 중간에 자르는 게 쉽지가 않다. 그런데 그 일을 잘했다. 시장은 일 잘하는 사람에 대한 평가가 좋았고, 그런 사람을 좋아했다."

 

p104

 피해자가 선임으로 올라선 뒤 만난 3명과는 갈등이 적지 않았다고 한다. 6층 동료 직원의 말이다.

 

 "데스크 여비서들과 갈등이 있었던 것은 사실이다. 피해자 스스로 '나는 젊은 꼰대다', '완벽주의자'라는 얘기를 많이 했는데, 윗분들이 그런 스타일을 좋아해도 옆 사람은 굉장히 피곤하겠다는 생각은 들었다. 후임 비서들이 '동기끼리 잘 부탁해요'라는 식으로 편하게 다가가면 피해자는 '내가 선임인데 동기 얘기가 왜 나오냐'고 받아쳤다. 피해자가 내게 '어떻게 선임인 나에게 감히 이런 식으로 대하지'라는 식의 불평을 종종 하곤 했다.

 데스크 비서들을 제외하곤 박 시장은 물론이고 여타 직원들과의 관계는 비교적 원만했던 것으로 보인다. 피해자는 2016년에 이어 2017년 2월 15일에도 시장에게 '생일 축하' 편지를 보냈다.

 

 

 반짝반짝 빛나는 박원순 시장님께

 

 시장님 안녕하세요. 저 잔디에요^^

 시장님을 모시면서 벌써 이렇게 두 번째로 생신을 축하드리게 되었어요.

 제가 2015년 7월에 처음 시장실에 왔으니, 기간은 2년이 채되지 않지만 벌써 세해째 시장님을 모시고 있네요.

 시장님, 항상 정신없고 바쁘신 일정 속에 힘드실텐데도 뵐 때마다 한번이라도 더 웃어주시고, 격려해주시고, 좋은 말씀해주셔서 감사드립니다. 덕분에 얼마나 기쁘고 힘이 나는지 몰라요. 시장님을 곁에서 지켜보면 참으로 힘이 납니다. 더 열심히 살아야겠다는 생각이 들도록 만들어주시는 분이세요.

 아주 짧은 시간이 주어질지라도 모든 일에 집중하시는 능력과 매순간 최선을 다하시는 모습에서 뜨거운 열정과 놀라운 능력을 느낍니다. 또 모든 사람을 똑같이 대하시는 모습에 감동을 받습니다.

 식사도 거르시고 화장실도 못가시며 지키고 계신 우리 서울과 꿈이라는 꽃봉오리. 긴 겨울 지난 곧 활짝 필 때까지 응원하겠습니다. 시장님 생신 축하드려요.

 2017. 2. 15 잔디 올림

 

(... 세상에서 사람이 가장 무섭다.)

 

p106

 2018년 6월 13일 지방선거에서 김문수, 안철수 두 경쟁자를 가볍게 제압한 박 시장은 7월 7일 세계도시정상회의 참석차 3박 4일 싱가포르 출장길에 나선다.

 오성규 전 비서실장이 2020년 12월 3일 국가인권위에 보낸 의견서에 싱가포르 현지의 A와 피해자가 7월 9일 오후에 주고받은 텔레그램 메시지를 공개했다.

 

피해자 : 저 한 번은 데리고 가셔야 하는 것 아니예요? 팀장님이 힘 써주세요... ㅋㅋㅋㅋ 시장님은 백퍼 데려간다고 하는데.. 에스파뇰 몰라~~

A : 국제과에 물어보니 이렇게 준비 중이야. 스페인 어때요?

피해자 : 짱좋 ㅠㅠㅠㅠ 제발 플리즈

A : 세뇨리따~~ 이건 아닌가? ㅋㅋ

피해자 : 승진이고 뭐고 순방 부심 한번 ㅋㅋㅋ

 

의견서 발표 다음날 <중앙일보> 온라인판에 피해자 측의 반박 기사가 실렸다. 김재련은 <중앙일보>와의 통화에서 "피해자는 박 전 시장과 함께 해외 출장을 가게 해달라고 요청한 적이 없다"고 말했다. 

 그는 "이미 박 전 시장과 함께 해외 출장을 떠난 비서관 중 한 명이 출장 사진을 피해자에게 보내며 '너도 다음에 가게 해달라고 하라'라고 해 해외에 간 것에 대한 부러움을 표시했을 뿐"이라고 설명했다. 아울러 그는 이 같은 대화 내용이 들어있는 메시지 내용 앞부분을 오히려 실장 측이 편집했다고 주장했다.

 피해자 측이 편집 의혹을 제기한 만큼 둘의 대화가 어떤 맥락에서 시작됐는지 궁금했다. 그러나 오성규는 "두 사람의 사적 대화이기 때문에 그걸 공개할 수는 없다. 둘이 다른 사람들 험담한 내용도 있는데 그런 걸 어떻게 다 보여주냐"고 반문했다. 그러면서도 그는 말했다.

 

 "대화 내용을 다시 봐라. 부러운 마음에 그냥 한 얘기가 아니라 스페인이라는 목적지까지 구체적으로 언급하고 있잖은가? 편집이라니 황당하다. 지원단체들은 그동안 피해자 측 주장을 내보내면서 자기들이 유리한 방향으로 편집하지 않았나? 우리에게 편집 운운하는 것은 자기들이 그동안 해온 행동을 스스로 부정하는거다."

 어쨌든 A가 피해자에게 알려준 대로 박 시장은 9월 27일부터 9박 11일 동안 스페인이 포함된 해외 출장을 다녀왔다. 그러나 피해자 바람은 이뤄지지 못했다. 박 시장의 해외 출장에 여러 차례 동행했던 서울시 일반직 공무원의 말이다.

 "매년 서너 차례 시장의 해외 순방 일정이 잡히지만, 시장실 늘공 중에서는 수행비서관만 같이 갔다. 해외에서는 시장 일정이 훨씬 촘촘하게 짜이고 수행원들의 업무도 그만큼 세분되는데, 시장실에 배정된 인원은 1명이기 때문이다. 해외 출장은 시장실 아무개가 따라가고 싶다고 해서 갈 수 있는 게 아니고, 시장 마음대로 결정할 수 있는 것도 아니다."

 박 시장이 유럽 출장에 앞서 한 달간 옥탑방살이를 할 때도 피해자는 현장에 모습을 드러냈다. 당시 삼양동에서 시장 부부와 숙식을 함께 하다시피 했던 L은 "2018년 8월 초순 잔디가 퇴근 후 서너 명의 직원들과 함께 작은 화분을 사 들고 찾아온 적이 있다. 삼양동이면 집도 먼 편인데 굳이 올 필요가 있나 싶었다"고 말했다.

 

p115

 그러던 차에 나타난 사람이 일반직 공무원 B(여성)였다. 시장실에서 2년 9개월간 일했던 B는 공무원 선배이자 인생 선배로서 잔디와는 막역한 사이였다.

 시장실의 별정직들은 "우리 얘기보다는 잔디가 마음을 터놓고 얘기했던 일반직 공무원들 얘기를 들어보라"는 조언을 하곤 했다. B는 그런 조건에 부합한 사람이었고, 이번 사건과 관련해 7월 18일 경찰 조사를 마친 상태였다.

 9월 11일 나는 "사건이 터지기 전 잔디가 카카오톡 프로파일에 박 시장과 함께 찍은 사진을 올렸고, 그걸 본 B가 '둘이 너무 가까이에서 찍은 사진 아니냐'는 반응을 보였다"는 얘기를 들었다.

 해가 바뀌자 "박원순이 피해자에게 문자나 사진을 보낸 것이 확인됐다"는 발표가 계속 나왔다.

 

 2021년 1월 14일 서울중앙지법 형사합의31부 조성필 부장판사가 이른바 '4월 사건' 가해자 Z에게 징역형을 선고하면서 "박원순이 서울 시장 근무 1년 반 이후부터 야한 문자와 속옷 차림의 사진 등을 보냈고, (피해자는) '냄새가 맡고 싶다', '몸매가 멋있다', '사진 보내달라'는 등의 문자를 받았다"고 말했고, 같은 해 1월 25일 국가인권위도 "박 시장이 늦은 밤 피해자에게 부적절한 메시지와 사진, 이모티콘을 보낸 것은 사실로 인정 가능하다"고 발표했다. 인권위는 "피해자로부터 들었다거나 메시지를 직접 보았다는 참고인들의 진술이 있었다"고 말했다.

 이 발표로 박원순에게 실망한 사람들이 많았을 것이다. 그렇다면 피해자로부터 피해 사실을 인지한 동료들은 왜 아무런 조치를 취하지 않았을까? 나는 이들의 얘기가 중요하다고 보지만, 판사와 인권위 모두 이 부분은 입을 다물었다.

 결론적으로 얘기하면, 목격자 B는 국가기관들의 발표가 나오기 전에 나의 의문점을 풀어준 사람이다.

 2020년 10월 13일 오전 나는 B에게 전화를 걸었다. '여는 글'에서 나는 취재원 50명의 얘기를 들었다고 밝혔지만, 취재에 불응한 사람들은 뺀 수다. 그중에 여러 차례 설득 끝에 취재에 응하기로 해놓고 만나기로 한 날 인터뷰 장소에 나오지 않은 사람도 있었다. 많은 취재원이 "아직도 그 사건 생각하면 가슴이 콩닥콩닥 뛴다", "당신이 믿을 만한 기자라는 것을 내가 어찌 알겠냐"는 등의 이유를 들어 사양했다.

 다행히도 기자와 면식이 전혀 없는 B는 "시장실에 대해 억측이 많은 상황에서 관련 기사를 꾸준히 쓰는 기자"로 나를 인지하고 있었다. B는 10일 간격으로 두 차례 전화 통화에서 자신의 경험을 얘기해줬다. 다음은 B와의 문답을 정리한 내용이다.

 

B : 박 시장이 3선 출마하려고 사퇴한다(2018년 5월 14일)는 얘기가 나와서 시장실이 어수선한 시기였던 것으로 기억한다. 시청 공무원드른 자체 행정포털망에 접속해서 사용하는 PC용 메신저와 텔레그램 둘 다 사용하는데, 피해자가 사내 메신저로 '잠깐 얘기 좀 할 수 있냐'고 말을 걸었다.

기자 : 잔디가 사내 메신저로 불렀을 때 특별한 얘기를 할 것이라고 생각했나?

B : 그런 건 아니다. 평소에도 고민 상담을 자주 했는데, 그날은 보안을 의식한다는 느낌은 들었다. 6층 접견실에서 얘기할 수도 있지만, 왔다 갔다 하는 사람들이 많은 공간이다. 그래서 사람들이 잘 안 오는 7층의 한적한 공간, 화장실 옆 벤치로 이동했다. 피해자가 내게 텔레그램을 보여주길래 그 내용을 얼핏 봤다.

 그러면서 피해자가 하는 말이 '안희정 사건으로 시끄러운데 다른 사람들이 보면 오해할까 봐 걱정된다. 시장이 나를 손녀딸처럼 예쁘게 생각한다는 것을 나는 아니까 괜찮은데'라고 말했다. 시장의 스마트폰은 다른 사람들도 업무상 볼 수 있지 않냐는 뉘앙스였다. 당시 상황을 떠올리면, 박 시장의 3선 도전 때문에 시장이 의지하던 참모들이 하나둘 떠나고 있었다. 그러나 잔디에 대한 (시장의) 의존 심리가 더 강해졌던 게 아닐까 싶다.

기자 : 다른 사람들이 보면 오해할 수 있는 메시지가 뭐였나?

B : 제일 마음에 걸렸던 표현은 '잔디 냄새 좋아 킁킁'. 또 하나는 업무지시 등의 별다른 이유 없이 밤에 메시지를 보냈다는 점. 그 외 나머지는 친근감을 표현하는 메시지들이었다. 그러나 피해자와 시장이 허물없이 편하게 지낸다는 사실을 알고 있었기 때문에 딱히 거슬리지는 않았다. 시장이 피해자에게 보낸 다른 사진이 있을지는 모르겠지만,, 내가 본 사진은 다른 지인들에게도 보낸 적 있는 러닝셔츠 입은 사진이었다.

기자 : 두 사람의 메시지 전송이 빈번했나?

B : 그런 건 아니라고 생각했다. 피해자가 '메시지를 빈번하게 보낸 날이 있는데, 이날은 시장님이 혹시 술을 드신 게 아닌가 싶어서 아무개 비서관에게 이날 술을 많이 드셨는지 물어봤다'고 했기 때문이다. 거기에 대해 내가 뭐라고 답했는지는 정확한 기억이 없다.

 답을 했다면 '시장실에 오래 근무를 하기도 했으니 부서를 이동하거나, 해외 연수 프로그램에 지원해보는 게 어떠냐'고 하지 않았나 싶다. 피해자 답변도 정확히는 기억하지 못하는데 '알겠다' 정도로 답하지 않았을까? 이런 대화가 10분 안팎으로 이어졌던 것 같다.

기자 : 이때의 대화 내용은 박 시장이 죽은 후 떠오른 거냐. 피해자의 지목으로 경찰 조사를 받게 돼서 떠오른 거냐?

B : 그 전부터 마음 한 구석에 있었던 기억이지만, 크게 담아둔 것은 아니었다.

기자 : 이 문제로 나중에 얘기를 더 하지 않았나?

B : 그게 문제가 됐다면 피해자가 나에게 얘기를 했을 텐데 더 이상 하지 않았다. 이후에도 진로 문제 등 다른 주제로 나와 몇 차례 상담했고, 몇 번 식사도 했는데 그 일에 대해서는 더 이상 내색하지 않았다. 시장이 3선하고 돌아온 후에는 시장실이 엄청나게 바빴다. 바로 옥탑방 한 달 살이 나가셨고, 돌아온 후에는 후속대책 내놓느라고.

 

 B는 시장실을 떠난 이후인 2019년 3월 28일에도 김주명, H 등과 함께 무교동에서 만찬을 한 적이 있다. B는 "우리는 떠난 상황이라 피해자가 시장실 분위기를 전해줬는데, 그때도 박 시장에 대해 안 좋은 얘기를 하지는 않았던 것으로 기억한다"고 전했다.

 B의 "둘의 관계는 두 사람만 아는 거지만 언론이 너무 편향적으로 해석하는 것 같다"며 "이 사건이 권력에 의해 진실이 은폐됐다는 식으로 얘기되지 않았으면 좋겠다. 내가 한 얘기도 '잔디 냄새가 좋아 킁킁' 이런 식으로 제목을 달아주진 말아달라"고 당부했다.

  전화 통화가 끝난 뒤 나는 곰곰이 생각했다. 피해자가 박 시장으로부터 성추행 피해를 당했다고 주장하는 20명을 찾아 나선 후 석 달 동안 내가 만난 시장실 직원들은 "들은 바 없다"라는 부인으로 일관했다. 그런데 처음으로 시장에게 입은 피해로 추정되는 말을 실제로 들은 사람을 찾아낸 것이다. B가 전해준 2018년 잔디의 전언에도 중요한 의미가 담겨있었다.

 그해는 '미두'라는 성폭력 고발 운동이 거세게 일어나던 시기였다. 박 시장이 타운홀 미팅에서 "추석 때 <82년생 김지영> 책을 읽고 눈물을 쏟았다"는 기사를 본 모 시인이 "2014년 박원순 캠프에서 성추행을 당했다"고 2월 28일 페이스북에 글을 올리는 일이 있었다.

 같은 해 3월 5일 안희정 충남지사의 수행비서를 지낸 김지은 씨가 JTBC 인터뷰에서 안 지사의 성폭력을 고발해 큰 파문이 일었다. 3월 10일 박 시장은 시인을 시장실로 불러 위로했고, 그는 이틀 뒤 페이스북에 "시장님을 뵙고 오니 그간 마음고생으로 얻은 상처가 많이 치유됐다"는 글을 올렸다.

 2018년 시장실 직원들 모두가 안희정 사건과 이 사건을 지켜봤고, 이 사건들이 지방선거에 미칠 영향을 예의주시했다. 만약 박 시장이 잔디에게 심각한 성폭력을 저질렀다면 그로서도 용기를 낼 수 있는 타이밍이었다. 그러나 잔디는 B에게 이렇게 말했다.

 "안희정 사건으로 시끄러운데 다른 사람들이 보면 오해할까 봐 걱정된다. 시장이 나를 손녀딸처럼 예쁘게 생각한다는 것을 나는 아니까 괜찮은데"

 박 시장과 잔디 사이에 어떤 일이 있었는지는 당사자들만이 안다. 그러나 당시 잔디가 시장이 자신에게 한 행동이 안희정의 그것과는 다르다. 손녀딸처럼 생각한다고 인식했다는 점은 분명히 드러난다.

 그해 5월 14일은 박 시장의 직무가 정지되고 3선에 도전하기 위해 서울시장 예비후보를 등록한 날이었다. 잔디는 이날 시장에게 이런 편지를 건넸다.

 

 존경하고 사랑하는 박원순 시장님께!

 

 시장님~~ 오랜만에 편지를 드리네요. 오늘은 정말 특별한 날이니까 시장님께 작게나마 제 마음을 전하고 싶어서요~

 

 시장님 순방 기간이 길어봐야 8~9일 정도였는데... 이렇게 한달 동안이나 못 뵌다는 생각을 하니 참 마음이 뻥 뚫린 것같고 가끔은 울컥하는 느낌까지 드네요. 더 나은 서울, 더 나은 미래를 준비하러 나가시는데 개인적인 마음으로는 시장님 몸과 마음의 건강을 가까이서 챙겨드리지 못하고, 또 시장님께서 재미있는 농담을 해주시는 것과 셀카 찍는 일들을 한달 도안 못한다고 생각하니 너무너무 아쉽고 슬퍼요 ㅜ.ㅜ

 그래도 시장님! 저는 소원이 있어요. 제 소원을 꼭 들어주셨으면 좋겠어요. 시장님께서 작년 초에 대선을 준비하실 때 하셨던 말씀이 참 기억에 남아요. 그때 말씀하시길 '5년 후 손주 손을 잡고 광화문광장을 거니는 삶을 살고싶다. 그런 대통령을 꿈꾼다고 하셨거든요.

 시장님. 저는 정말로 제 삶에 있어서 박원순이라는 '시대의 리더'와 함께 했다는 그 사실 하나로 너무 기쁘고 행복하고 감사해요. 그렇지만 제 소원은 여기가 끝이 아니라, 이 시대에 다시 없을 소중한 박원순이라는 존재가 이 세상을 바꾸고, 사람의 마음을 움직이고, 우리 모두가 행복한 시간을 누린 그 이후에.. 정말 역사에 길이 남을, 마지막까지 훌륭한 리더로 인전받고 모두가 존경받는 지도자로 칭송받는 그날을 꿈꿔요.

 시장님은 너무도 현명하고 지혜로우시며 새로운 생각과 놀라운 추진력으로 이미 저명하시잖아요~!! 꼭 반드시 그렇게 되리라 믿습니다!!

 더불어 시장님~ 제 소원 이뤄주시려면 건강도 잘 챙기셔야되는 거 아시지요??? 약 잘 드시고요 차에서 잠깐씩 쪽잠 꼭 주무시고~ 전화는 너무 많이 하지마세요 ㅋㅋㅋ

 시장님, 한달 뒤 옥수수랑 수박 잘 길러놓을게요. 힘내시고! 사랑합니다!

 2018. 5. 14 시장실 잔디 드림

 

민경국이 12월 23일 오후 2시 13분 이 편지를 공개하자 여성단체와 일부 언론은 피해자 이름을 공개했다며 '2차 가해' 공세를 가했다. 민경국은 같은 날 2시 14분에 나를 비롯해 몇몇 기자에게 카카오톡으로 자기 페이스북을 봐달라고 요청했고, 나는 공개된 편지에 이름이 없는 것을 확인했다.

 민경국이 "언론이 기초적인 확인도 하지 않은 채 사실과 다르게 내가 피해자의 실명을 노출한 것처럼 기사화하였고, 본질을 훼손하고 있다"고 항의하자 <한겨레>의 경우 다음날 "피해자 지원단체의 문제제기에 타당한 점이 있다고 판단해 이를 반영했지만 사실관계에 틀린 점이 있었다"며 사과했다.

 이 편지가 논란이 되자 이런 반응도 나왔다.

 "최근 박원순 전 수일시장의 생일을 앞두고 만들었던 롤링페이저와 편지가 사회관계망서비스(SNS)에 올라왔다. 모두가 똑같이 종이에 편지를 써서 고리에 한데 묶은 카드 모음, 그 뻔한 모양의 생일 축하 메시지조차 누군가에게는 특별해 보였나 보다."

 나는 시장실의 몇몇 직원들에게 "박 시장에게 보내는 롤링페이퍼를 쓴 적이 있냐"고 물었다.

 별정직 D는 "박 시장만이 아니라 시장실 떠나는 직원에게 남아 있는 사람들이 돌아가며 이별의 말을 적어주는 경우는 종종 있었다"고 말했고, 같은 별정직 M도 "2018년 말에서 2019년 새해로 넘어가는 시기에 한 번은 써 본 것 같다. 돌아가면서 한 줄 쓰는 거라서 큰 부담은 없었다"고 말했다.

 반면, 같은 시기에 근무했던 R은 "연말연시엔 신년사 작업하느라 그런 것에 응할 짬이 없었고, 시장 생일에는 써 본 기억이 없다"고 말했다.

 이들 중 일부는 "누군가 시장 생일 축하 동영상을 찍자고 제안해서 카메라 앞에서 덕담을 건넨 기억은 있다"고 말했다. 그러나 피해자처럼 박 시장에게 손편지를 써서 전했다는 직원은 나타나지 않았다.

 

p148

 노무현 대통령은 2007년 6월 16일 노사모 총회에 보낸 영상메시지로 유명한 말을 남겼다.

 "민주주의의 최후의 보루는 깨어있는 시민의 조직된 힘입니다."

 곱씹어봐도 명언이라고 생각한다. 하지만, 그의 말대로 민주주의를 지키기 위해서는 시민이 깨어있고, 조직화되어야 한다. 내가 만난 '박원순 시장실 사람들'은 정도의 차이는 있지만 깨어있는 시민들이었다.

 한편으로는 나날이 값이 뛰는 서울의 집은 언제 살 것이고, 자녀 교육은 어떻게 시킬 것이며, 이민 가서 살기 좋은 나라가 어디일까를 꿈꾸는 '소시민들'이었다.

 이들 모두는 "박원순 사건에 대해 부풀려진 얘기들을 바로잡고 싶다"는 대의명분과 "그러한 행동이 나에게 작게나마 불이익으로 돌아오지 않을까? 나 대신 누가 해줬으면..."이라는 도피심리 사이에서 번민했다.

 왜 말과 행동이 따로 노느냐고 그들을 책망할 수도 없다. '20년 기자질' 하는 동안 나는 수많은 유형의 취재원들을 만났다. 각자에게 '소우주'라고 할 만한 사연들이 있었고, 나는 잘잘못을 가리는 판관이 아니었다. 다만, 그들을 관찰하고 기록을 남긴다는 소명을 거스르진 않았다.

 

p143

 박 시장 사건이 논란이 된 후 박 시장과 잔디의 생전 모습이 담긴 동영상들이 잇달아 올라왔다. 9월 17일 <열린공감TV>가 유튜브 채널에 올린 '생일 동영상1', 9월 18일 <고발뉴스TV>가 올린 '생일 동영상 2'와 '재래시장 동영상'이 그것이다.

(생일 동영상1)

 

'생일 동영상 1'에는 2019년 3월 26일 잔디가 시장실에서 박 시장과 함께 생일 케이크를 자르는 모습이 담겼다. 이때 시장 옆에 자리 잡은 잔디가 오성규 비서실장 등 다른 직원들에게도 같이 사진을 찍자고 요청하면서 박 시장의 어깨에 손을 올리는 모습이 화제가 됐다. 20여 명이 이 모습을 지켜봤다. 김우영 정무부시장은 이와 관련해 "내가 구청장을 8년 했지만, 부하 직원이 내 어깨에 손 올린 적이 한 번도 없다. 내가 아무리 편하게 대해도 대부분의 구청 직원들은 나와 거리를 뒀다"고 말했다.

 

(생일동영상2, 재래시장 동영상)

 

'생일 동영상 2'에서 잔디는 시장실 동료들과 함께 "저희는 시장님을 위해 태어난 사람들이에요. 언제나 힘내시구요. 지금처럼 밝고 건강하게 행복하시길 바랍니다"라고 축하 인사를 건넸다.

 '재래시장 동영상'에는 야외공간에 나란히 앉은 박 시장과 잔디가 카메라를 보며 포즈를 취한 모습이 담겨있다.

 C는 이날 현장에 우연히 동행했던 사람이다. 동영상이 촬영된 2018년 10월 29일은 국회 국토교통위원회 국정감사 마지막 날이었다.

 "올해 국감 잘 마무리됐으니 남은 직원들끼리 오랜만에 밥이나 먹자는 얘기가 나왔어요. 우리 방에서는 나만 남아 있다가 시장 일행을 따라갔죠. 그날은 데스크 비서 두 명 포함해서 6~7명이 같이 움지였는데, 박 시장이 시장으로 걸어가면서 '일전에 고쳐놓으라고 했던 보도블록 아직도 안 해놨다'고 한마디 한 기억이 나요."

 C는 틈나는 대로 시장의 일상적인 모습을 사진 또는 동영상으로 찍어서 소셜미디어에 업로드하는 일을 맡았다. 여느 때와 같은 회식 자리였지만, 박 시장을 알아보는 시민들이 많았기 때문에 C는 긴장의 끈을 늦출 수 없었다.

 "지나가던 시민들이 시장에게 계속 인사를 걸었고, 나도 스마트폰을 손에서 뗄 수 없었어요. 그런데 잔디가 갑자기 '시장님, 저의 사진 찍어요'라면서 자연스럽게 시장에게 안기는 포즈를 취했어요. 시장은 30분 정도 우리와 함께 있다가 다른 일정을 이유로 헤어졌습니다."

 

p219

이듬해 1월 14일 열린 1심 선고 공판에서 Z는 징역 3년6개월(법정구속)과 성폭력 치료 프로그램 40시간 이수 명령이라는 중형을 받았다. 이 사건의 성폭력 증거 채취를 위한 정액 검사 결과는 '음성'이었지만, 재판부는 피해자가 사건 당일 깨어나 30분 동안 샤워를 한 점 등을 들어 "Z가 피해자와 강제로 성관계를 하지 않았다고 단정할 수 없다."고 결론 내렸다. Z는 재판 결과에 불복해 항소했다.

[최근 이 항소 2심의 결과가 나왔는데 1심과 동일한 형량을 확정한다. 이 재판결과가 좀 황당한게 성관계를 했다는 확실한 증거가 있는게 아니라, 성관계를 하지 않았다고 단정할 수 없다라고 한 점이다. 즉 피해 사실을 증명한게 아니라, 가해자가 가해를 하지 않았다는 걸 증명할 수 없다라는 논리다. 이런 논리가 통용되는 세상이라면 남자들은 여자를 데리고 모텔을 들어가려면 인생을 걸어야 될 수도 있다. 모텔 들어가기 전에 합의서라도 받아야 되고, 들어가선 동영상으로 증거라도 남겨야 되는 거 아닌가 싶다.]

 

p296

 박원순 사건 후 내가 하도 답답해서 여성단체연합 간부에게 '이런 일이 생기면 가해자로 지목된 사람에게도 확인하는 절차가 있어야 하는 것 아니냐?'고 물었다. 그 간부가 말하길, 단체에서 마련한 성폭력 대응 매뉴얼에 '피해자가 원하지 않으면 가해자에게 확인하지 않는다'고 되어있다고 답하더라. 나도 여성운동을 지지하는 입장이지만, 그 말을 듣고 '그렇다면 그 매뉴얼이 이상하네'라는 말이 내 입에서 나오더라."

 

 우리는 권위주의 정부 시절 검찰, 경찰, 그리고 국정원의 일방적 '주장'을 그래도 받아들여 간첩으로 확정한 사람들이 재심 끝에 혐의를 푸는 시대를 살고 있다. 지금까지 나온 피해자 얘기만 듣고 박원순의 혐의를 확정하기에는 논거가 너무 빈약하다는 게 나의 결론이다.

 사회적 약자에 대한 배려의 시선으로 시작된 '피해자' 호칭은 어떤 식으로든 가해자를 만들어내고 이들을 응징해야 한다는 강박관념으로 이어진다. 이런 상황에서 가해자는 혐의를 따져보기 전에 죄인의 낙인을 받는다.

 시시비비를 가려야 할 언론계가 무책임한 담론을 확대 재생산해 결과적으로 대중의 혼란을 증폭시켰다는 점에서 박원순 사건을 '2020 언론 대참사'라고 명명해도 손색이 없다고 본다. 그런 면에서 일부 기자들이 무비판적으로 수용해온 페미니즘의 서사, '피해자 중심주의'와 '2차 가해', '피해자다움'도 재고해볼 필요가 있다.

 

p312

 1990년대 사회주의 이데올로기의 흥망성쇠를 멀찌감치서 목도한 뒤부터 어떠한 이념 세례도 나에게 특별한 감흥을 주지 못했다. 페미니즘도 예외는 아니었다. 사견이지만, 모든 운동 노선은 '마틴 루서 킹의 길'과 '맬컴 엑스의 길'이 있다고 본다.

 1960년대 미국 흑인들의 온전한 시민권을 회복하는 방안을 놓고 전자는 린드 존슨 대통령이라는 리버럴 성향의 백인들을 포섭해 민권법을 개정하는 길을, 후자는 '흑인 해방'을 위한 흑인 국가의 건설을 대안으로 각각 제시했다.

 그러나 미국 사회의 실질적이고 점진적인 변화를 끌어 낸 것은 마틴 루서 킹의 온건 노선이었지, 맬컴 엑스[멜컴 액스라니가 좀 어색하네.  말콤 엑스로 워낙 많이 들어서]의 '사이다 해법'이 아니었다. "백인들은 죽어도 흑인을 이해하지 못해"라는 식의 언설은 운동의 주체들에게 자기 위안을 줬을지는 모르지만, 운동의 확장에는 별 도움이 되지 못했다. '이데아'가 강한 분들에게는 유쾌하게 들리지 않을 얘기지만, 언젠가는 나의 진심이 전해지길 바란다.

 

알릴레오에서 이 도서를 다룬 방송을 본 후에 읽기 시작했다. 미국의 민주주의의 역사 그리고 현재의 진행 상황이라고 할 수 있다. 현재 대한민국의 민주주의의 상황에서도 참고할 점이 많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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p49

 간단하게 말해서 미국 사회는 끊임없이 전제주의 위협을 겪었다. 코글린과 롱, 매카시, 그리고 윌리스 같은 인물이 30퍼센트에서 심지어 40퍼센트에 달하는 지지율은 얻은 것은 미국 정치사에서 드문 일이 아니었다. 미국인들은 종종 그들의 정치 문화가 전제주의 위협에서 그들을 안전하게 지켜주고 있다고 주장하지만, 그건 장밋빛 안경을 쓰고 역사를 바라볼 때에만 납득할 수 있는 말이다. 잠재적 독재자의 위협으로부터 미국 사회를 지켜준 것은 민주주의에 대한 국민의 확고한 의지가 아니라 민주주의 문지기, 다시 말해 미국의 정당 체제였다.

 

p52

 이러한 문지기 역할은 미국의 건국 시점으로까지 거슬러 올라간다. 1787년 미국 헌법은 세계 최초로 대통령제를 만들어냈다. 대통령제는 문지기 역할을 중요한 과제로 남겼다. 의원내각제에서 총리는 의회의 일원이며, 다수당이 선출한다. 그렇게 때문에 총리가 되기 위해서는 정치 내부자들의 인정을 받아야 한다. 그리고 내각 수립 과정은 그 자체로 하나의 필터 기능을 한다. 반면 대통령은 의회의 일원이 아니며, 다수당이 선출하지도 않는다. 적어도 이론적으로 대통령은 국민이 뽑느다. 그리고 누구나 대선에 출마할 수 있으며, 최고 득표자가 대통령이 된다.

 건국의 아버지들은 문지기 역할에 주목했다. 그들은 헌법과 선거제도를 설계하는 과정에서 오늘날 미국 사회에 여전히 남아 있는 다양한 딜레마와 씨름했다. 그들은 군주가 아니라 선출된 지도자가 공화국 이념을 존중하고 국민의 뜻을 따르는 대통령제를 추구했다. 그러나 다른 한편 건국자들은 국민이 후보자의 자질을 객관적으로 판단할 수 있다고 완전히 신뢰하지는 않았다. 알렉산더 해밀턴은 대통령 선거제도가 대중의 공포와 무지를 이용해서 선거에 당선되고 난 뒤 본색을 드러내는 독재자에게 쉽게 농락당할 수 있다고 걱정했다. 해밀턴은 <페더럴리스트 페이퍼>에서 이렇게 언급했다. "우리는 처음에 국민에게 아첨했다가, 대중선동가로 변신하고, 결국에는 폭군으로 군림해서 공화국의 자유를 허물어뜨린 인물들의 역사에서 교훈을 얻어야 한다." 해밀턴과 그의 동료들은 대통령을 투표로 선출하기 위해서는 이러한 위험을 걸러내는 특별한 장치가 필요하다고 보았다.

 건국자들이 고안한 장치는 바로 선거인단Electoral College이었다. 해밀턴이 <페더럴리스트 페이퍼> 68편에서 다음과 제시했던 근거에 따라 미 헌법 제2조는 간접선거 방식을 규정하고 있다.

 직접선거는 지위에 어울리는 자질을 분석할 줄 알고, 신중한 판단력 및 합당한 근거와 동기를 조화롭게 갖춘 사람들에 의해 이뤄져야 한다.

 간접선거제에서 각 주의 유명 인사로 구성된 선거인단이 최종적으로 대통령을 선출하는 책임을 진다. 해밀턴은 이러한 시스템에서는 "자격을 갖추지 못한 인물이 대통령 자리에 오르는 일은 없을 것이며", 또한 "음모를 꾸미고 인기에 영합하는 천박한 재능"을 지닌 인물은 걸러질 것이라고 확신했다. 그렇게 선거인단은 미국 정치의 고유한 문지기 역할을 맡게 되었다.

 그러나 이 시스템은 그리 오래가지 못했다. 이유는 건국자들의 고유한 설계에 두 가지 결함이 있었기 때문이다. 첫째, 헌법은 대통령 후보 선출 방식에 대해 아무런 말도 하지 않는다. 선거인단은 국민투표가 모두 끝난 '이후에' 활동을 시작하기 때문에 후보 선정 과정에서는 아무런 역할도 하지 않는다. 둘째, 헌법은 정당에 대해서도 아무런 말을 하지 않는다. 토머스 제퍼슨과 제임스 메디슨은 양당 시스템을 설계하는 과정에서 정당의 존재에 대해 심각하게 고민하지 않았다.

 1800년대 초 정당이 성장하면서 미국 선거제도의 작동 방식이 바뀌었다. 건국자들이 구상했던 것처럼 지역 유명 인사를 대의원 선거인단으로 선출하는 대신, 각 주는 정당 지지자를 선출하기 시작했다. 대의원은 이제 정당의 대리인이 되었고, 이 말은 곧 선거인단이 문지기 역할을 정당에 넘겨주었다는 뜻이다. 이후 정당들은 이러한 시스템을 계속 유지했다. 

 이제 정당은 미국 민주주의의 관리인이 되었다. 정당은 대통령 후보를 선출함으로써 위험한 선동가가 대통령이 되지 못하게 막는 권한(그리고 책임)을 부여받았다. 이러한 점에서 정당은 두 가지 역할 사이에서 균형을 잡아야 한다. 우선 민주주의 관리자로서 유권자의 뜻을 가장 잘 대변하는 후보자를 선출해야 한다. 다음으로 정치학자 제임스 시저가 언급한 '걸러내기' 기능을 해야 한다. 즉, 민주주의에 위협이 되거나 대통령직에 어울리지 않는 인물을 사전에 걸러내야 한다.

 인기 있는 후보를 선택하고, 동시에 선동가를 걸러내야 하는 정당의 두 역할은 때로 상충하기도 한다. 만일 선동가를 선택한다면? 이는 건국시대에서 오늘날에 이르기까지 대선 후보를 선출하는 과정의 핵심 문제이다. 하지만 정당이 문지기 역할에만 집중할 때 후보 선출 과정이 비민주적으로 이루어질 위험이 있다. 즉, 국민은 물론 일반 당원의 뜻을 제대로 반영하지 못하는 보스 정치로 전락할 수 있다. 반대로 '국민의 뜻'에만 집중해도 위험에 빠질 수 있다. 자칫 민주주의를 위협하는 선동가를 후보로 선출할 수 있기 때문이다. 정당이 이러한 상충 관계에서 벗어날 방법은 없다. 문제는 언제나 균형을 잡는 일이다.

 

p86

 '집단적 포기', 다시 말해 민주주의를 위협하는 인물에게 권력을 넘기는 행동은 일반적으로 두 가지 이유 때문이다. 첫째, 잠재적 독재자를 통제하거나 길들일 수 있다는 착각이다. 둘째, 사회학자 이반 에르마코프가 '이념적 공모'라고 부른 개념으로, 이는 집단적 포기를 택한 주류 정치인들의 이해관계가 잠재적 독재자의 이해관계와 맞아떨어지는 경우에 해당된다. 하지만 잠재적 독재자가 등장했을 때 기성 정치인들은 모든 방법을 동원하여 그를 제어함으로써 민주주의 제도를 지켜야 한다. 비록 이를 위해 달갑지 않은 경쟁자와 잠시나마 손을 잡아야 한다고 해도 말이다.

이는 2016년 대선을 앞둔 공화당 인사들에게 더 중요한 말이었다. 그들은 민주주의 기본 규범을 위협하는 트럼프를 어떻게든 저지했어야 했다. 그러나 그 역할을 저버림으로써 미국 민주주의는 위기에 처했다. 민주주의를 잃는 것은 선거에서 패배하는 것보다 훨씬 더 비극적인 일이다. 이러한 사태를 막기 위해서 공화당은 평소에는 생각할 수 없었던 결단, 즉 힐러리 클린턴을 지지하는 과감한 선택을 내렸어야 했다. 미국은 양당체제다. 2016년 대선에서 양당의 두 후보가 맞붙었고, 그중 한 명은 대중선동가였다. 2016년 대선은 공화당의 정치 결단력을 시험하는 중요한 무대였다. 과연 국가의 번영을 위해 단기적인 정치 희생을 기꺼이 감내할 수 있을 것인가?

 앞서 살펴보았듯이 우리는 비슷한 선례를 알고 있다. 2016년 오스트리아 보수 진영은 극우파 급진주의자인 노르베르트 호퍼의 당선을 막기 위해 녹색당 후보 알렉산터 판데어벨렌을 지지하기로 결단을 내렸다. 그리고 2017년 프랑스 보수 진영 후보 프랑스와 피용은 극우파 후보 마린 르펜이 권력을 잡지 못하도록 막기 위해 중도좌파 후보인 에마뉘엘 마크롱을 지지하도록 당원들을 설득했다. 두 사례에서 우파 정치인들은 이념적 경쟁자를 지지했다. 이러한 결정으로 많은 당원들의 불만을 사긴 했지만, 상당수 유권자의 마음을 돌려 극단주의자가 권력의 자리에 오르지 못하도록 막았다.

 

p140

 자제 규범은 특히 대통령제 민주주의에서 그 가치가 높다. 후안 린츠가 설명한 것처럼 의회 분열은 교착 상태와 기능 장애, 그리고 헌법 질서의 위기로 이어질 수 있다. 견제받지 않는 대통령은 사법부를 친정부 인사로 채우고, 행정명령을 남발하여 의회를 우회한다. 반대로 의회가 막강한 힘을 가졌을 경우, 대통령의 모든 제안을 거절하고 예산 권한을 빌미로 행정부를 혼란에 빠트리겠다고 위협할 수 있다. 혹은 석연치 않은 근거를 내세워 대통령 탄핵을 추진할 위험도 있다.

 

p181. 차별로 유지된 민주주의의 종착점

 미국 민주주의 제도는 20세기를 거치는 동안 여러 차례 위협을 받았다. 그러나 매번 위기를 슬기롭게 극복했다. 민주주의 가드레일은 온전히 유지되었고 양당정치인, 때로는 사회 전반이 민주주의를 침해하는 시도에 저항했다. 그 결과 치열한 정쟁에도 불구하고 미국 사회는 1930년대 유럽, 그리고 1960년대와 70년대에 남미의 민주주의가 빠져들고 말았던 '죽음의 소용돌이'를 피할 수 있었다.

 그러나 이제 우리는 경고의 목소리에 귀 기울여야 한다. 미국 정치 시스템을 떠받치는 규범은 사실 인종차별에 의존해왔다. 재건 시대부터 1980년대에 이르기까지 미국 사회의 평화는 그 원죄에 뿌리를 두고 있었다. 다시 말해 1877년 타협과 이후로 이어진 남부 지역의 반민주화 흐름, 그리고 흑인 차별법인 짐 크로 법을 근간으로 남았다. 인종차별은 20세기 미국 정치의 특성을 규정했던 정당의 협력과 태도에 직접적인 영향을 미쳤다. '전통적인 남부'는 민주당 내에서 강력한 보수주의 세력으로 떠올랐고, 시민권에 반대함으로써 공화당과 협력을 가능하게 만드는 역할을 했다. 남부 민주당 인사와 보수주의 공화당 인사 사이의 이념적 친밀도는 정치 양극화를 완화해주었고, 양당 협력을 가능하게 만들어주었다. 하지만 동시에 이는 정치적 논의 테이블에서 흑인 시민권을 치워버리고, 미국 사회를 전면적인 비민주화로 흘러가게 내버려두는 중대한 사회적 희생을 요구했다.

 미국 민주주의 규범은 차별에 근간을 두었다. 정치 공동체가 대부분 백인의 영역으로 제한되었던 동안 민주당과 공화당에는 뚜렷한 공통점이 존재했다. 정당은 서로의 존재를 위협으로 바라보지 않았다. 그러나 제2차 세계대전이 끝나고 시작된, 그리고 1964년 시민권법과 1965년 선거권법을 통해 가속화된 미국 사회의 인종 포섭의 과정은 마침내 미국을 완전한 민주주의 사회로 바꾸어놓았다. 그러나 이러한 민주화 흐름은 미국 사회를 양극화시켰고, 재건 시대 이후로 이어져 내려온 상호 관용과 자제의 규범에 최고의 도전 과제를 안겨다주었다.

 

p217

 그러나 공화당을 극단주의로 내몬 것은 단지 언론과 외부 이익단체만은 아니다. 사회적, 문화적 변화 역시 중요한 역할을 했다. 지난 수십 년 동안 다양성이 꾸준히 높아졌던 민주당과는 달리 공화당은 문화적 차원에서 오랫동안 동질적인 상태로 남아 있다. 이는 대단히 중요한 사실이다. 공화당의 핵심 지지층인 백인 개신교 집단은 그냥 일반적인 유권자가 아니다. 그들은 200년 가까이 미국 유권자의 대다수를 차지했고 정치적, 경제적, 문화적으로 미국 사회에서 우월한 위치를 누렸다. 그러나 이제 백인 개신교 집단은 다수의 지위를 잃었고 그 규모는 계속해서 줄어들고 있다. 그리고 공화당 안에만 틀어박혀 있다.

 1964년 역사가 리처드 호프스태터는 '지위 불안'이라고 하는 개념을 통해서 집단의 사회 지위, 정체성, 소속감이 위협받고 있다고 인식될 때 "미국 정치의 편집증적 성향"이 나타나고, 이는 결국 "과열되고, 상대를 지나치게 의심하고, 과도하게 공격적이고, 극단적이고, 종말론적인" 정치 접근방식으로 이어지게 된다고 주장했다. 그로부터 반세기가 흘러 호프스태터의 주장은 지금의 미국 사회에 더욱 적절한 말로 들린다. 과반의 지위를 잃어버린 오늘날 미국 우파의 특성이라 할 수 있는 극단적인 적개심은 더욱더 활활 타올랐다. 설문 조사 결과는 많은 티파티 공화당 지지자들이 "급격한 사회 변화 속에서 그들이 자라난 '진정한' 미국이 사라져가고 있다"고 믿고 있다는 사실을 말해준다. 사회학자 알리 혹실드가 최근 발표한 책의 제목을 인용하자면, 그들은 스스로를 "자기 땅의 이방인들"이라고 생각하고 있다.

 이러한 인식은 '진정한 미국인'을 진보 진영의 민주당 지지자들과 구분하는 담론이 어떻게 등장했는지 설명해준다. '진정한 미국인'을 미국땅ㅇ 태어나서 영어를 쓰는 백신 개신교 신자로 정의할 때 '진정한 미국인'의 규모가 줄어들고 있다는 것은 분명한 사실이다. 앤 콜터가 냉소적으로 꼬집었던 것처럼 "미국 유권자는 왼쪽으로 이동한 것이 아니라 줄어들고 있는 것이다." 미국이 사라지고 있다는 많은 티파티 공화당 지지자들의 인식을 고려할 때 "미국을 되찾자" 혹은 "위대한 미국을 다시 한번"과 같은 슬로건이 어떻게 큰 호응을 얻을 수 있었는지 이해할 수 있다. 하지만 이러한 사회현상의 위험성은 민주당 지지자를 진정한 미국인이 아니라고 규정함으로써 상호 관용의 규범을 직접적으로 공격한다는 사실에 있다.

 뉴트 깅리치에서 도널드 트럼프에 이르는 공화당 정치인들은 양극화된 사회에서 경쟁자를 적으로 바라보는 관점이 쓸모가 있으며, 정치를 전쟁으로 인식하는 입장이 많은 걸 잃어버릴지 모른다고 두려워한는 유권자의 마음을 비집고 들어갈 수 있게 해준다는 사실을 깨달았다. 상호 관용과 자제의 규범을 향해 더욱 거세지는 공격은(완전히는 아니라고 해도 대부분 공화당 인사들에 의한) 세계의 많은 지역에서 민주주의를 죽음으로 내몰았던 정쟁으로부터 미국 사회를 오랫동안 지켜주었던 연성 가드레일을 흔들고 있다. 2017년 1월 도널드 트럼프가 대통령으로 취임했을 때만 해도 그 가드레일은 그대로 남아 있었다. 그러나 지금은 한 세기에 비해 더욱 심하게 흔들리고 있으며, 그 강도는 점점 더 심해질 것으로 보인다.

 

p249

 민주주의 사회의 시민에게는 정확한 정보에 접근할 기본적인 권리가 있다. 선출된 지도자의 행동에 관한 신뢰할 만한 정보가 나와 있지 않다면 미국 시민은 선거권을 올바로 행사할 수 없다. 미국 대통령이 국민에게 거짓말을 늘어놓을 때 신뢰할 만한 정보에 접근할 수 있는 권리는 위협받게 되고, 정부에 대한 신뢰도는 추락한다(당연한 사실 아니겠는가?). 국민이 선출된 지도자를 신뢰하지 않을 때 대의 민주주의 근간이 허물어진다. 그들이 선택한 지도자를 믿지 못할 때 선거제도의 가치는 사라진다.

 

p263

 힘을 잃거나는 다수민족이 기존의 지배적인 지위를 평화롭게 넘겨준 역사적 사례는 찾아보기 힘들다. 레바논의 경우 지배적인 기독교 집단의 인구가 줄어들면서 15년간의 내전이 시작되었다. 이스라엘의 경우 요르단 강 서안 지구를 사실상 병합함으로써 생긴 인구통계 변화로 그 나라는 두 명의 전직 총리가 인종차별 정책에 비유했던 정치 시스템으로 흘러가고 있다. 그리고 미국의 경우 흑인에 대한 선거권 부여로 촉발된 위협에 대해 남부 민주당은 재건 시대 이후로 한 세기 가까이 아프리카계 미국인에게서 선거권을 박탈하는 방식으로 대응했다. 

 

p272

 그러나 우리 두 저자의 관점에서 볼 때 민주당이 '공화당처럼 싸워야 한다'는 생각은 착각에 불과하다. 첫째, 외국 사례들은 이러한 대응 전략이 오히려 전제주의가 등장할 가능성을 높여주었다는 사실을 보여준다. 일반적으로 이러한 전면적인 전략은 중도 진영을 위협함으로써 야당의 지지도를 떨어뜨린다. 반면 여당 내 반대파조차 야당의 강경한 태도에 맞서 단결하게 함으로써 친정부 세력을 집결하는 역할을 한다. 게다가 야당이 진흙탕 싸움에 뛰어들 때 정부는 이들을 탄압하기 위한 정치 정당성을 확보한다.

 

p273

 설령 민주당이 강경 전술을 통해 트럼프를 무력화하거나 자리에서 끌어내리는 데 성공했다고 해도, 그러한 승리는 상처뿐인 영광이다. 그 이유는 다음 정권이 가드레일이 사라진 민주주의를 물려받게 될 것이기 때문이다. 트럼프 행정부가 야당 공세에 무릎을 꿇는다면 혹은 양당의 합의 없이 탄핵을 당한다면 애초에 트럼프에게 기회를 가져다주었던 당파적 적대감과 규범 파괴는 더욱 고착화될 것이다. 그리고 적어도 미국 국민의 3분의 1은 트럼프 탄핵을 좌파 세력의 거대한 음모라고 혹은 쿠데타라고 여길 것이다. 그러면 미국 정치는 위태로운 상태로 계속해서 부유할 것이다.

 이러한 국면은 웬만해서 해피엔딩으로 끝나지 않는다. 민주당이 상호관용과 자제 규범을 회복하려는 노력을 기울이지 않을 때 다음번 대통령도 수단과 방법을 가리지 않고 그를 끌어내리려는 야당을 상대해야 할 것이다. 그리고 정당 간 갈등의 골이 깊어지고, 성문화되지 않은 규범이 지속적으로 허물어질 때 미국은 트럼프보다 훨씬 더 위험한 대통령을 맞이하게 될 것이다.

 물론 트럼프 행정부의 전제주의 행보에 대해서는 강력하게 대응해야 한다. 하지만 그 과정에서 민주주의 규범을 어기지 않도록 주의해야 한다. 가능하다면 의회와 법원, 그리고 선거를 통해 저항을 해야 한다. 민주주의 제도를 기반으로 트럼프가 실패하게 만들 수 있다면 미국 민주주의 토양은 더욱 단단해질 것이다.

 우리는 저항을 이와 같은 관점에서 바라보아야 하다. 모든 민주주의 사회에서 대중의 저항은 기본적인 권리이자 중요한 책임이다. 하지만 저항의 목표를 관리와 제도를 뒤엎는 것이 아니라 지키기 위한 것이어야 한다.

 

p279

 우리는 미국의 양극화를 고착화하는 두 가지 요인에 집중해야 한다고 생각한다. 두 가지 요인이란 인종적, 종교적 재편, 그리고 점점 더 심각해지는 경제 불평등을 말한다. 이러한 근본적인 문제를 해결하기 위해 우리는 정당이 대변하는 대상이 바뀌어야 한다고 생각한다.

 

p286

 물론 경제 불평등을 해소하기 위한 정책은 어떻게 설계하느냐에 따라 정치 양극화를 완화할 수도, 오히려 심화시킬 수도 있다. 많은 다른 선진 민주주의 국가와는 달리 미국의 사회정책은 소득이나 생활수준이 특정 기준에 못 미치는 사람을 가려내기 위한 자산 조사 방식에 크게 의존해왔다. 그러나 자산 조사를 바탕으로 한 복지 정책은 중산층들 사이에서 가난한 사람만 복지 혜택을 받는다는 인식을 키웠다. 게다가 역사적으로 미국에서는 민족과 빈곤이 상당 부분 중첩되었기 때문에 이러한 복지 정책은 특정 인종을 하위 계층으로 낙인찍는 결과를 낳았다. 이러한 복지 정책에 반대하는 인사들은 일반적으로 인종차별과 관련되 표현들을 사용한다. 가령 로널드 레이건이 언급한 '복지 여왕'이나 식료품 할인 구매권을 가지고 스테이크를 사 먹는 사람들을 의미하는 '영벅스'가 대표적이다. 오늘날 미국에서 '복지'는 경멸적인 표현이 되었다. 그것은 복지 수혜자들이 그러한 혜택을 받을 만한 정당한 자격이 없다는 사회 인식 때문이다.

 반면 북유럽 국가들은 엄격한 자산 조사를 기반으로 한 제한적인 복지 정책이 아니라 보편적인 모델을 추구한다. 이러한 방식의 복지 정책은 정치 양극화 해소에 도움이 된다. 사회보장제도나 메디케어처럼 사회 구성원 대다수에게 혜택을 주는 복지 정책은 사회적 적대감을 누그러뜨리고, 미국의 다양한 유권자 집단을 연결하는 다리의 기능을 한다. 이러한 정책을 장기적으로 추진함으로써 인종 갈등에 따른 역풍은 일으키지 않으면서 소득 불평등을 해소할 수 있다. 대표 사례로 포괄적 의료보험제도를 꼽을 수 있다. 더 나아가 보다 적극적인 사례로 최저임금 상승이나 보편적 기본소득이 있다. 실제로 기본소득 정책은 예전에 진지한 논의가 이뤄졌으며, 닉슨 행정부 시절 하원의 안건이 된 적도 있다. 또 다른 사례로는 '가족 정책'이 있다. 가족 정책이란 부모에게 유급 휴가를 주고, 맞벌이 부부에게는 탁아소 이용을 지원하고, 혹은 대다수 유아를 대상으로 어린이집 교육을 제공하는 정부 프로그램을 말한다. 최근 가족 정책과 관련된 미국 정부의 지출 규모는 선진국 평균의 3분의 1 정도로 멕시코나 터키와 비슷하다. 마지막 방안으로 민주당은 포괄적인 노동시장 정책도 고려할 수 있다. 여기에는 광범위한 직업훈련, 근로자를 교육하고 채용하는 기업에 대한 임금 보조금, 고등학교나 커뮤니티 칼리지 학생을 대상으로 한 실무 경험 프로그램, 해고 근로자를 대상으로 하는 교통비 지원 등이 있다. 이러한 정책은 사회 적대감과 양극화를 자극하는 경제 불평등을 해소할 수 있을 뿐 아니라, 미국 정치를 재편하게 될 광범위하고 지속적인 연합 형성에 기여할 수 있다.

 사회적, 경제적 불평등을 해소하기 위한 이러한 정책을 실행에 옮기는 것은 물론 정치적으로 대단히 힘든 일이다. 부분적인 이유는 이러한 정책을 가로막는 장애물이 바로 양극화(그리고 그에 따른 제도적 정체)이기 때문이다. 우리는 소수민족 집단, 그리고 백인 노동 계층을 아우르는 다민족 연대 형성을 가로막는 장애물이 쉽게 사라질 것이라 기대하지 않는다. 또한 보편적인 복지 정책이 이러한 연합의 근간을 마련해줄 것이라고 확신하지도 않는다. 다만 현재의 자산 조사 방식의 복지 정책보다는 더 나은 결과를 가져다줄 것으로 예상할 뿐이다. 물론 쉬운 일은 아니겠지만, 민주당이 사회 불평등 해소에 기여해야 한다는 것은 시대의 과제다. 결국 그 과제는 단지 사회정의에 관한 문제만은 아니다. 바로 여기에 미국 민주주의의 생존이 달려 있다.

 

p288

 미국의 운명이 위기를 맞았던 제2차 세계대전의 암울한 한 시점에, 작가 E.B. 화이트는 미 연방정부의 '작가 전쟁위원회'로부터 '민주주의란 무엇인가?라는 질문에 짤막한 답변을 들려달라는 요청을 받았다. 이에 화이트는 겸손하면서도 많은 생각을 하게 만드는 대답을 내놓았다. 그의 이야기를 들어보자.

 

 

 물론 위원회는 답을 알고 있을 것이다. 민주주의란 올바른 길로 인도하는 지침이다. 민주주의는 'don't shove(밀지 마세요)'에서 'don't'에 해당하는 말이다. 민주주의는 톱밥을 가득 채운 셔츠에 난 구멍이며, 높은 모자 위에 움푹 들어간 곳이다. 민주주의는 국민의 절반 이상이 절반 이상의 경우에서 옳다는 생각에 대한 끊임없는 의심이다. 투표장에서 느끼는 프라이버시, 도서관에서 느끼는 교감, 곳곳에서 느끼는 활력이다. 민주주의는 편집자에게 보내는 편지이며, 9회 초의 점수다. 민주주의는 아직 반증되지 않은 이념이며, 타락하지 않은 노래 가사다. 민주주의는 핫도그에 바른 머스터드,, 그리고 배급받은 커피에 넣은 크림이다. 민주주의는 전쟁이 한창인 어느 아침에 민주주의가 무엇인지 대답해달라는 전쟁위원회의 요청이다.

 

 

 화이트가 언급한 평등과 예의, 그리고 자유와 공동의 목표에 대한 인식은 20세기 중반 미국 민주주의의 정신이었다. 그러나 그 정신은 오늘날 위기에 처했다. 미국 민주주의를 구하기 위해 이제 미국 국민은 지금껏 그들의 민주주의를 지켜주었던 기본 규범을 되살려야 한다. 그리고 더 나아가 그 규범을 사회 전반으로 확산해야 한다. 규범이 포함하는 범주를 넓혀가야 한다. 미국 민주주의 규범의 핵심은 지금까지 면면히 이어져 내려왔다. 그러나 역사의 많은 시간 동안 인종차별과 함께했고, 또한 그것 때문에 유지될 수 있었다. 이제 그 규범이 인종 평등과 관계 없는 민족 다양성 시대에서도 제대로 기능하도록 만들어야 한다. 지금까지 다민족을 기반으로 한 진정한 민주주의 사회는 없었다. 그것은 이제 미국 사회의 도전 과제로 남았다. 그리고 동시에 기회로 남았다. 미국 국민이 그 과제를 완수한다면 미국은 역사상 진정으로 특별한 나라가 될 것이다.

 

 기후변화를 막기 위해 핵심적인 온실가스 배출, 즉 제로탄소로 가기 위한 청사진을 담고 있다.

빌 게이츠 정도의 영향력이 있는 인사가 지은 책이기 때문에 그 의의가 있을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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p37

 햇볕이 잘 드는 곳에 차를 주차해본 사람은 이미 작은 규모의 온실효과를 경험한 셈이다. 자동차 앞유리가 햇볕을 받아들이고 자동차 내부에 열을 가둔다. 그래서 자동차 내부의 온도가 외부의 온도보다 훨씬 뜨거워지는 것이다.

 하지만 이 설명에는 더 많은 질문이 뒤따른다. 태양에서 방출된 열이 온실가스를 뚫고 지구에 도달할 수는 있지만, 왜 바로 그 온실가스에 의해 지구 대기권에서 벗어나지 못하고 갇히게 되는걸까? 이산화탄소는 거대한 반투명 거울인가? 그리고 이산화탄소와 메탄이 열을 가둔다면, 산소는 왜 열을 가두지 않는가?

 이 질문들에 대한 답은 화학과 물리학에서 찾을 수 있다. 물리학 수업에서 분자는 진동한다고 배운 것을 기억하는가? 분자는 더 빨리 진동할수록 더 뜨거워진다. 특정 종류의 분자들이 특정 파동의 복사선과 충돌하면 이 분자들은 복사선은 막고 에너지는 흡수하며 더 빠르게 진동한다.

 그렇다고 모든 파장의 모든 복사선이 이런 효과를 내는 것은 아니다. 예를 들어 태양열은 흡수되지 않고 대부분의 온실가스를 그대로 통과한다. 지난 수억 년 동안 그랬던 것처럼 대부분의 햇빛은 지구 표면에 도달해 지구를 따뜻하게 한다.

 문제는 여기에 있다. 이 모든 에너지들은 지구에 영구히 잔존하지 않는다. 만약 그랬다면 지구는 이미 참기 힘들 정도로 뜨거워졌을 것이다. 대신 지구는 이런 에너지의 일부를 다시 방출한다. 이렇게 방출된 에너지 중 파장이 긴 에너지는 온실가스에 흡수된다. 아무런 피해를 끼치지 않고 그저 사라지면 좋겠지만, 이렇게 온실가스에 흡수된 에너지는 온실가스 분자와 충돌하고 이들이 더 빨리 진동하게 만들어 대기의 온도를 높인다. (그럼에도 우리는 온실효과에 감사해야 할 부분이 있다. 온실효과가 없다면 지구는 우리가 살기에 너무 추운 행성이 되었을 것이다. 문제는 필요 이상으로 많은 온실가스가 배출되어 온실화가 과도하게 진행된다는 점이다.)

 

 그렇다면 왜 모든 가스는 이런 방식으로 움직이지 않을까? 질소나 산소와 같이 동일한 원자 두 개로 구성된 분자는 복사선을 그대로 통과시킨다. 이산화탄소나 메탄과 같이 두 개의 다른 원자로 구성된 분자는 복사선을 흡수하고 열을 발산할 수 있는 구조를 가지고 있다.

 

 

p139

 전력을 보다 일관되게 사용하는 방식인 부하 이전load shifting(최대 사용 시간을 피해 전기를 사용하도록 유도하는 수요관리 방식)과 수여 이전demand shifting이 있다. 부하 이전을 대규모로 할 수 있다면 전기에 대한 우리의 생각에 중대한 변화가 될 것이다. 현재 우리는 전기를 사용할 때 생산하는 경향이 있다. 예를 들어 한밤에 도시의 전등을 켜기 위해 발전소를 가동시킨다. 하지만 부하 이전 방식을 사용할 경우 우리는 전기 생산이 가장 쌀 때 전기를 사용한다.

 예를 들어 당신의 온수기는 오후 7시가 아니라 전력 수요가 적은 오후 4시에 전원이 켜질 수 있을 것이다. 또는 집에 도착해서 전기차를 충전기에 연결하면 새벽 4시까지 자동으로 충전을 기다리게 된다. 새벽 4시에는 전기 사용량이 적어서 전기료가 가장 저렴하다. 산업 차원에서 보자면, 폐수 처리나 수소원료 생산과 같이 에너지 집약ㅈ거인 행위들은 전력이 가장 쌀 때 수행될 수 있다.

 부하 이전을 제대로 실행하려면 정책 변화와 기술 발전이 필요하다. 전력회사들은 전기의 수요와 공급을 파악할 수 있도록 실시간으로 전기 가격을 업데이트해야 한다. 그리고 온수기와 전기차와 같이 전기로 구동되는 제품들은 가격 정보에 따라 행동할 수 있도록 '스마트'해야 한다. 극단적인 경우, 전기 공급량이 적을 때는 전기가 가장 필요한 곳(예를 들어 병원 등)에 전기를 먼저 공급하고 중요하지 않은 곳에는 전기 공급을 차단하는 방식으로 수요의 우선 순위를 정해야 한다.

 

p226

 좋은 소식은 우리가 친환경 빌딩 짓는 방법을 알고 있다는 것이다. 그린 프리미엄을 기꺼이 지불할 용의만 있다면 말이다. 극단적인 예는 세계에서 가장 친환경적인 상업용 건물로 알려진 시애틀의 불릿 센터Bullit center 다. 

 불릿 센터는 자연적으로 겨울에는 따뜻하고 여름에는 시원하도록 설계되어 계절에 따라 인위적인 난방이나 냉방을 할 필요가 없다. 그 외에도 초효율적 엘리베이터와 같은 다양한 에너지 절약 기술도 갖추고 있다. 불리 센터는 종종 지붕 위에 설치된 태양광 패널을 사용해 소비하는 에너지보다 60퍼센트나 많은 에너지를 생산하기도 한다. 다만 이 태양광 패널은 시애틀의 전력망에 연결되어 밤이나 특히 구름이 잔뜩 낀 날에 도시 전력망으로부터 전기를 수급받기도 한다.

 불릿 센터에 사용되는 많은 기술은 널리 사용되기에는 아직까지 너무 비싸다(그렇기에 건물이 완공된 지 7년이 지난 지금까지 세계에서 가장 친환경적인 상업용 건물인 것이다). 그래도 우리는 건축가들이 '엔벨로프envelope'라고 부르는 건물용 외피로 건물 안팎의 공기 흐름을 차단해 온도를 유지하고, 좋은 단열재와 3중 유리창, 효율성이 높은 문을 통해 적은 비용으로 집과 사무실의 에너지 효율을 지금보다 높일 수 있다. 나는 방을 시원하게 할 때는 유리창이 자동으로 어두워지고, 반대로 방을 따뜻하게 할 때는 유리창이 더 투명해지는 이른바 스마트 글라스에 흥미를 느꼈다. 새로운 건축법이 제정되면 이 같은 에너지 절약 아이디어를 홍보하는 데 도움이 될 수 있으며, 관련 시장을 확대하고 비용을 줄이는 데도 기여할 수 있을 것이다. 비록 불릿 센터만큼은 아니더라도 지금보다 더 많은 건물의 에너지 효율을 높일 수 있다.

 

p250

 이 모든 비용이 얼마나 될까? 기후변화에 적응하기 위해 우리가 해야 하는 모든 일들에 가격표를 매길 수는 없지 않은가? 하지만 내가 속한 위원회는 다섯 개의 주요 분야(조기 경보 시스템 구축, 기후 회복력이 뛰어난 인프라 구축, 농작물 생산량 증대, 물 관리, 맹그로부 나무 보호)에서 발생한 지출을 분석한 결과, 2020년에서 2030년 사이에 1조 8,000억 달러를 투자하면 7조 달러 이상의 이익을 얻을 수 있다는 사실을 밝혀냈다. 이 금액을 10년에 걸쳐 투자한다고 생각하면, 세계 GDP의 0.2퍼센트를 투자해 거의 네 배에 가까운 수익금을 얻는 셈이다.

 이 투자의 '수익'은 '예방된 나쁜 일'들로 측정할 수 있다. 물 부족으로 인한 내전(시리아 내전의 여러 이유 중 하나는 물 부족이었다), 가뭄이나 홍수로 인한 농작물 파괴, 허리케인으로 인한 도시 파괴, 기후재앙으로 인한 피난민 발생이 일어나지 않았다면, 이 모든 것들을 '수익'이라고 할 수 있다. 아니면 좋은 일로도 측정할 수 있다. 충분한 영양소를 섭취하고 자라는 어린이들, 빈곤에서 벗어나 세계 중산층에 진입한 가정들, 날씨가 계속 뜨거워져도 성장하는 기업, 도시, 국가들로 말이다.

 어떻게 생각하든 경제적으로나 도덕적으로나 우리가 이 일을 왜 해야 하는지는 명확하다. 비록 코로나19로 인해 지금까지 우리가 이룬 많은 성과가 훼손되기는 했어도, 극심한 빈곤을 겪는 인구는 1990년 세계 인구의 36퍼센트에서 2015년 10퍼센트로 지난 25년 사이 급격하게 감소했다. 하지만 기후변화는 이런 발전을 훨씬 더 많이 지워버릴 수 있고 극심한 빈곤을 겪는 인구의 비율을 13퍼센트까지 높일 수 있다.

 기후변화에 가장 많이 영향을 끼친 사람들은 세계의 나머지 사람들이 살아남을 수 있도록 도와야 한다. 우리는 그들에게 많은 빚을 졌다.

 

p324

 코로나19로 가장 큰 고통을 받은 사람들은 가장 선택권이 없는 사람들, 예를 들어 집에서 일하거나 사랑하는 가족을 돌보기 위해 잠시 일을 쉬는 사람들이다. 그리고 이런 사람들 대부분은 저소득 유색인종이다.

 미국에서 흑인과 라틴계 사람들은 다른 인종에 비해 코로나 바이러스에 감염돼 사망할 확률이 불균형적으로 높다. 흑인과 라틴계 학생들은 또한 백인 학생들보다 온라인 수업을 들을 확률이 낮다. 노인 의료 보험 제도의 수혜자들 가운데 가난한 사람들은 코로나19에 감염돼 사망할 확률이 다른 수혜자들보다 네 배나 높다. 이러한 격차를 줄이는 것은 미국에서 코로나19를 통제하는 데 중요한 단서가 될 것이다.

 전 세계적으로 코로나19로 인해 빈곤과 질병 부문에서 인류가 지난 수십 년 동안 이룩한 발전이 무위로 돌아갔다.. 많은 나라들이 예방접종 프로그램을 포함해 다른 우선순위에 배정된 돈과 인력을 팬데믹 대응에 전용해야만 했다. 보건계측 및 평가연구소에 따르면 2020년 예방접종률은 1990년대 수준으로 떨어졌다. 우리는 불과 25주 만에 25년의 발전을 잃은 것이다.

역사학자이며 언론인. 최근에는 SNS에 시사에 대한 비판글을 많이 올리시는데 이 책은 그러한 글들을 모은 것 같다.

페북을 통해서도 자주 이 분의 글을 접하곤 하는데 이렇게 일목요연하게 모아놓으니 편한점이 있다.

인터넷을 통해서 간간히 글을 읽긴 했지만, 이렇게 책으로 읽다보니 왜 이 분의 글이 언론에 거의 노출이 되지 않는지 이해가 된다. 기레기들에게는 거의 이 분의 글 하나하나가 다 비수와 같이 느껴질게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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p197.  부동상 문화재 투기 1

 

 SBS기자가 전화로 이것저것 물어서 대답은 해줬는데, SBS의 이번 보도 태도를 신뢰할 수 없기 때문에 제 이야기를 토대로 '이런 의견도 있다'는 기사를 작성하는 건 무방하지만, 제 이름이나 변조된 목소리가 나가는 건 절대로 허용하지 않겠다고 했습니다. 그래도 어떻게 왜곡돼서 나갈지 모르기 때문에, 미리 질문과 답변의 요점만 간추려서 적겠습니다.

 

 1) SBS 기자들의 취재가 불성실했다고 보는 이유가 뭔가?

 손혜원 의원의 친척, 지인들이 산 집과 집값에만 집착했을 뿐, 그들이 어떤 배경과 맥락에서 해당 건물을 구입했는지에 대해서는 전혀 관심을 기울이지 않았다. 각 지자체의 도시재생사업이 어떻게 진행되고 있으며, 도시재생사업 지구 내 낡은 건물들을 어떻게 처리하고 있는지를 함께 조사했다면, '투기 의혹'이라는 제목을 붙일 수 없었을 것이다.

 지자체가 낡은 건물을 매입해서 리모델링한 후 주민 커뮤니티 센터나 카페로 활용하는 것은 도시재생사업에서 흔히 사용하는 방법이다. 그런 사업을 하면 당연히 해당 지역의 집값도 오르지만, 재개발 '호재'와는 비교조차 할 수 없는 수준이다. 손의원이 목포 구시가지에서 폐가를 매입하고 리모델링해서 카페와 게스트하우스로 바꾼 것은 바로 '지자체의 도시재생 방법'을 개인이 시행한 것이다. 지자체가 하면 '공익사업'이고 개인이 하면 '투기'인가? 각 도시의 도시재생사업에서 지자체가 어떤 일을 하고 있는지 전혀 몰랐기 때문에 이런 보도를 한 것 아닌가? 당신네 보도는 도시재새사업 자체의 정당성마저 공격하는 거다.

2) 자기 이름으로 하지 않고 차명으로 구입한 건 뭔가 숨기려고 했기 때문 아닌가?

 정치인에게는 SNS가 공정인 의사소통 수단이다. 자기 조카에게 목포에 집 사서 살라고 했다는 얘기를 페이스북에 올린 게 언제인데, 그것조차 보지 않고 기사를 썼다는 건가? 조카가 자금을 지원받고 증여세까지 낸 뒤 구입한 건물이고, 그 사실을 이미 주변에 다 밝혔는데, 세상에 그런 차명 매입 방법도 있는가? 손의원에게 조카들만 있을 뿐 자녀가 없다는 사실은 취재 안 했는가? 또 누구처럼 자기가 살지도 않을 집을 자기와 가족 이름으로 사서 소유만 하고 있다면 투기 의혹을 품을 만하지만, 구입자들은 목포에 살면서 해당 건물을 리모델링해서 사용하고 있다. 본인이 이미 사실을 공개했고 구입자가 해당 건물을 실제로 사용하고 있는데, 이걸 차명 투기라고 보는 건 납득되지 않는다.

 

 3) 그 동네를 문화재로 지정하는 데 압력을 행사했을 가능성은 크지 않나?

 다른 뉴스는 체크 안 하나? 박지원 의원이 그건 자기 '공'이라고 이미 얘기했다. 애초에 도시재생사업 지구였던 곳을 문화재 지구로 바꾸자고 국토부 장과과 문체부 장관을 설득한 게 자기라고. 그리고 문화재로 지정되는 건 그린벨트로 지정되는 것보다 재산권 행사에 더 제약 조건이 많다. 자기 건물이 있는 동네를 그린벨트로 지정해 달라고 요구하는 부동산 투기꾼이 세상에 어디 있나? 이미 지정된 곳에 건물을 산 뒤 해제해 달라고 요구하는 경우는 많지만, 그 반대의 경우를 본 적이 있나? 나도 문화재 위원 등으로 문화재 행정에 오래 관여한 사람이지만, '부동산 문화재 투기'라는 말은 처음 듣는다. 개인적으로는 정말 그런 투기가 생겼으면 좋겠다. 그러면 도시의 역사가 무참하게 사라지는 일을 막을 수 있을 거다.

 

p210. 비하

 [단독] 이승만, 박정희 비하, DJ, 盧 칭송 -- 공공기관의 고3 퀴즈(중앙일보 단독)

 중앙일보 기자가 박정희 비하라고 주장한 문제는 "1961년 쿠데타를 주도하여 권력을 장악한 뒤, 1979년 사망할 때까지 18년 동안 장기집권을 이어갔던 인물은?" 입니다.

 중앙일보 기자가 이승만 비하라고 주장한 문제는 "첫 헌법에 따르면 대통령의 임기는 4년, 두 번까지만 할 수 있었다. 그런데 1950년대 내내 한 사람이 대통령 자리에 있었다. 헌법을 바꾸어가면서 12년 동안 권력을 독점했던 이는?"입니다.

 여보세요, 저건 '사실'이지 '비하'가 아닙니다.

 "한 달 후 대한민국"처럼 문재인이 대통령 되면 나라 망한다고 근거 없이 저주하거나, "한국인이어서 미안합니다"처럼 한국인 전체를 모욕하는 글 정도는 돼야 '비하'죠. 모두 중앙일보에 실린 글이군요.

 

p240. 성희롱

 1993년, '서울대 우조교 사건'이라고 불리는 일이 일어났습니다. 지금이라면 '서울대 교수 성희롱 사건'이라고 이름 붙였겠지만, 당시에는 '성희롱'이라는 개념조차 없었습니다. 강간, 강간미수, 준강간, 강제추행만 범죄로 인정되던 때였죠. 당시 가해자의 동료 교수 일부는 "피고소인이 평소 남녀 가리지 않고 옆에 앉은 사람 허벅지를 주무르는 습관이 있었다"며 '성범죄'가 아니라고 두둔하기도 했습니다. 하지만 당시 피해자의 변호를 맡은 박원순 변호사는 '성희롱'이라는 개념을 도입하여 6년 만에 승소했습니다. 변론서는 당시 박원순 변호사와 함께 일했던 이종걸 변호사가 쓴 걸로 아는데, 그는 박 변호사가 "역사에 남을 변론서가 될 테니 정말 잘 써야 한다"고 해서 정말 고심하면서 썼다고 얘기해 줬습니다. 이 사건 이후 '성희롱'이 법적 개념으로 정착했고, 공공과 민간을 막론하고 모든 기관에서 '성희롱 예방 교육'이 시행되었습니다.

 작년 서울북부지방법원 자리에서 서울생활사박물관이 문을 열었습니다. 개관 준비 과정에서 유물 수집과 전시 기획을 도와줬는데, 막상 개관한 뒤에 보니 중요한 전시 주제라고 생각했던 항목이 빠져 있었습니다. 서울 변두리였던 지역 특성상 '종점 동네' 사람들 얘기가 필수적이라고 생각했는데, 버스 차장(안내양) 관련 전시물이 안 보이는 겁니다. 담당자에게 물었더니 젠더자문관이 "버스 안내양 관련 전시는 여성에 대한 왜곡된 인식을 심어줄 수 있다"고 해서 뺐다는 겁니다. 여러 가지 생각이 들었습니다. 실재했던 역사를 지우는 게 '왜곡되지 않은 인식'을 심어주는 방법인가? 젠더자문관이 아무것도 지적하지 않는 것은 직무유기로 비칠 수 있다고 생각해서 가볍게 한 말을 담당자가 너무 민감하게 받아들인 건 아닌가? 공무원으로서 일단 지적 사항이 있으면 조치할 수밖에 없으니 어쩔 수 없었겠다고 생각하면서도, 일종의 '검열' 같아서 기분이 씁쓸했습니다. 하지만 박 시장도 이런 방식이 '검열'로 비칠 수 있다는 걸 모르지 않았을 겁니다. 그런데도 '젠더자문관'이라는 직책을 만들어 서울시의 모든 간행물과 전시물을 젠더 감수성 측면에서 재점검하는 걸 보고는 그가 얼마나 세심하게 여성의 마음을 헤아리려 하는지 알 수 있었습니다.

 제가 알기로, 1986년 부천서 성고문 사건 변론을 맡은 이래 박원순보다 더 여성 인권의 신장에 기여한 변호사는 거의 없었습니다. 박원순보다 더 여성의 안전과 권익을 위해 노력한 지자체장도 없었습니다. 그가 왜 이런 선택을 했는지 판단하기에는, 아직 모르는 일들이 많습니다. 그런데도 그가 해온 모든 일을 '위선'으로 단정하고 비난부터 퍼붓는 사람이 너무 많습니다. 그가 평생 가면을 쓰고 여성을 대해 온 '위선자'일까요? 그가 이 땅의 여성들에게 남긴 모든 것을 다 내다 버려야 하는 것일까요?

 

 

p259. 쓸개

 "이른 새벽 통근차 고동 소리에 고무공장 큰 아기 벤또밥 싼다. 하루 종일 쭈그리고 신발 붙일 제, 얼굴 예쁜 색시라야 감 잘 준다나. 감독 앞에 해죽해죽 아양이 밑천. 고무공장 큰아기 세루치마는 감독나리 사다 준 선물이라네." 일제강점기 세간에서 유행했던 '근대 민요' <고무공장 큰아기>의 가사입니다.

 일제강점기 고무신 공장에서는 기술자들이 고무신 '감'과 접착제에 농간을 부려 여자 직공들을 괴롭히곤 했습니다. 직공이 불량품을 만들면 벌금을 물리는 게 당시 관행이었는데, 하루에 불량품이 한두 켤레만 나와도 일당보다 많은 벌금을 내야 했습니다. 악질 기술자들은 이 관행을 이용해 여자 직공들과 '부적절한 관계'를 맺곤 했습니다.

 악질 기술자들은 먼저 '얼굴 예쁜 색시'에게 나쁜 감을 주어 자주 불량품을 내게 만들었다가, '부적절한 관계'를 맺은 뒤에는 '좋은감'을 주는 수작을 부리곤 했습니다. '얼굴 예쁜 색시라야 감 잘 준다나'라는 가사는 앞의 한 단계가 생략된 셈입니다.

 아베가 수출규제로 한국을 압박하는 게 저 시절의 고무신 공장 악질 기술자가 하던 짓과 똑같습니다. 한국인들을 '부품과 소재'로 협박하고 겁탈하려는 거죠. 지금의 한국인 중에도 악질 기술자가 시키는 대로 고분고분 따르고 '세루치마'라도 한 벌 얻어 입는 게 최고라고 믿는 쓸개 빠진 것들이 많습니다. 저 '쓸개 빠진 것들'을 척결하지 못하면, 일본 우파는 언제까지고 한국인 전체를 노리개 취급 할 겁니다. 토착왜구 척결은, 한국인 전체의 자존에 관련된 문제입니다.

 

p290. 엽기(獵奇)1

 10여 년 전 고등학생이 교외 체험활동에 참가했냐 아니냐를 '법정'에서 따지는 건, 전 세계 재판 역사상 유례를 찾기 어려울 겁니다.

 세계사상 유례가 드문 일에 어울리는 수식어는, '엽기적' 또는 '극도의 몰상식'입니다.

 한국 검찰과 언론의 행태에 어울리는 '수식어'이기도 합니다.

 

엽기2

 매사에 자유한국당을 편드는 뉴스타운이라는 인터넷 언론이 '고유정과 문재인의 닮은 점'이라는 칼럼을 실었습니다. 내용은 너무 극악무도해서 생략합니다.

 그런데도 나경원 씨는 지금이 "문 대통령이 곧 국가인 시대"라며 "문 대통령을 건드리면 반역이 된다."고 주장했습니다. 그러나 문 대통령의 인격을 극악무도한 언사로 분쇄하려는 자들이 공공연히 설치는 현실은, '문 대통령이 곧 국가인 시대'를 증명하는 게 아니라 '나경원 씨의 한결같은 인격'을 보증할 뿐입니다.

 사실 저런 글은 '국가에 대한 반역'을 넘어 '인륜에 대한 반역'입니다. 만약 어떤 언론에 '고유정과 나경원의 닮은 점'이라는 칼럼이 실린다면, 나경원 씨가 어떻게 반응할지는 너무 뻔해서 궁금하지도 않습니다.

 언론이 자국 대통령을 '희대의 엽기 살인마'와 똑같다고 매도하는 글을 유포할 수 있는 나라는, 지구상에 몇 되지 않습니다. 언론 자유도를 최상위로 올려놓은 정권을 '독재정권'이라고 비난하는 자들도, 지구상에 자유한국당 사람들뿐일 겁니다. 한국과 같은 민주국가에서 이런 정당이 제1야당이라는 현실이야말로, '엽기적'입니다. 이런 '엽기성'을 청산하는 일은 이념의 문제가 아닙니다. '보편 인간'의 자격을 얻기 위한 전제입니다.

 

p301. 원순 씨

 49재를 지냈지만, 아직 원순 씨를 보내지 못했습니다.

 그가 평생에 걸쳐 이룬 일들과 '성범죄'는 다른 문제라는 사람도 많지만, 둘은 무관할 수도 없고 무관해서도 안 됩니다. 그가 정말 '성범죄자'이면서 겉으로만 여성 인권을 위해 노력하는 것처럼 행세한 위선자였다면, 그가 이끈 시민운동의 역사도 당당할 수는 없습니다.

 지난 49일간 SNS를 쉬면서 진상을 알아보려 애썼고, 사람들의 얘기에도 귀를 기울였습니다.

 원순 씨의 삶과 인품을 모르는 자들이 죽은 원순 씨를 향해 쓰레기 같은 악담들을 쏟아부을 때도 그러려니 했습니다.

 정의당 국회의원들이 조문 안 가겠다고 선언했을 때도, 대통령에게 누구 편인지 밝히라고 요구했을 대도, 그저 한숨만 나왔습니다.

 강용석이 그를 조롱하고 진중권이 그를 모욕했을 때도 헛웃음이 나왔습니다.

 그러나 권인숙, 정춘숙 등이 그를 '성범죄라'로 단정했을 때는, 절망했습니다.

 30년 넘게 알고 살아온 사람의 인격에 대한 신뢰를 한순간에 패대기치는 그 경박한 단호함에 소름이 끼쳤습니다. "박원순이 그랬다니 믿기지 않는다. 아직 단정하기에는 이른 것 같다." 정도의 반응을 기대한 게 무리였을까요? 원순 씨는 알았을 겁니다. 자기가 아무리 해명해도, 이런 '경박한 단호함'에 맞서 이길 수 없다는 것을. 어떻게든 버틴다 해도 만신창이가 되어 주저앉을 수밖에 없다는 것을.

 원순 씨의 '여성운동 동지' 정춘숙 씨가 <시사인>과 인터뷰하면서 '박원순은 한국 현대 여성운동의 모든 장면에 다 있었다. 박원순이 그럴 리 없다고 생각했지만, 그럴 리 없는 사람은 없다. 이 사건은 박원순을 빼고 봐야 한다'고 했습니다. 저는 이 말에 동의할 수 없습니다. 첫째, '박원순을 빼고 봐야' 보인다면 그건 당연히 박원순을 본 게 아닙니다. "박원순을 빼고" 박원순을 보는 황당한 생각은 하면서 "다른 사람을 넣고" 박원순을 보는 생각은 왜 못 한 걸까요? 둘째, "그럴 리 없는 사람은 없다."는 명제는 왜 원순 씨에게만 일방적으로 향하는 건가요? 한쪽은 언제나 그럴 리 없고, 다른 쪽은 언제나 그럴 리 있다고 보는 태도에 굳이 이념의 태도를 붙이자면, '맹목주의'일 뿐입니다. 맹목주의는, 광기의 일종입니다.

 

p307. 유서

 평생 죽음의 역사를 연구한 프랑스 역사가 필립 아리에스는 자살이 인간의 지성으로 접근하기 어려운 영역에 있다고 했습니다. 죽은 사람의 말을 들을 수는 없으니까요. 어떤 사람이 죽음을 선택한 동기를 알 방법은 '유서'를 분석하는 것뿐인데, 유서를 남기고 자살하는 사람이 적은 데다가 그 유서조차 온전한 '진실'을 담았다고 단정하기는 어렵다는 것이 수많은 유서를 분석했던 그의 견해입니다. 유서를 쓰는 순간의 그가 '본래의 그'였는지, 아니면 '일시적 충동에 사로잡힌 그'였는지를 제대로 판단할 방도는 없습니다.

 하지만 그가 유서에 쓴 내용을 다 믿지는 못하더라도, 유서의 '수신인'이 그의 죽음과 직접 관련된다는 사실까지 부정할 수는 없을 겁니다. 유서는 자기의 죽음으로 인해 가장 큰 영향을 받을 사람들-가족과 가까운 친지-에게 남기는 것이 보통입니다. 간혹 자기 죽음이 '집단 각성'의 계기가 되기를 바라며 불특정 다수에게 쓰는 유서도 있습니다. 을사늑약 직후 민영환의 유서나 독재정권 시절 민주 열사들의 유서가 이에 해당합니다. 그 외에 '남'에게 쓰는 유서는 그 남이 적어도 자기 죽음과 '직접 관련'된다는 증거일 수밖에 없습니다. 몇 해 전 고 성완종 씨가 남긴 메모가 이 경우에 해당할 겁니다.

 자살한 검찰 수사관이 윤석열 총장에게 따로 유서를 남겼답니다. 언론에 보도된 내용은 "윤석열 총장께 면목이 없지만, 우리 가족에 대한 배려를 바랍니다."와 "화장해서 보무님 산소에 뿌려 주십시오."뿐인데, 자기 사후처리 문제까지 부탁한 것으로 봐서는 그가 목숨을 끊음으로써 대신하고자 했던 '말'은 윤석열 총장에게 한 것으로 간주해야 할 겁니다.

 을사늑약 나던 해 연말에는 많은 채무자가 채권자 집 앞에서 스스로 목숨을 끊었습니다. 해를 넘긴 빚을 '묵은 빚'이라고 하는데, 묵은 빚은 탕감해 주는 게 당시 관행이었습니다. 그렇다고 일부러 목은 빚을 만들어서는 안 됐습니다. 묵은 빚을 남기면 새 빚을 얻을 수 없는 것도 관행이었기 때문입니다. 직업을 세습하던 시대에 장사꾼이 새 빚을 얻지 못하면, 본인이 망할 뿐 아니라 자식들 앞길까지 망쳤습니다. 그래서 채무자들은 자기 목숨을 끊음으로써 '채권자의 양심'에 호소하여 남은 가족의 앞날을 부탁했습니다.

 죽기로 작정한 사람이 '가족'을 부탁하는 상대는, 자기가 죽은 뒤에도 자기 가족을 괴롭히거나 그 운명을 좌우할 사람이라고 보는 게 이치에 맞습니다. 자살한 검찰 수사관이 왜 '극단적 선택'을 했는지 정확히 알 도리는 없습니다. 하지만 그 '선택'에 윤석열 총장이 '직접' 관련된다는 점은 상식으로 판단할 수 있습니다. 그가 죽음으로써 호소한 대상은 '윤석열의 양심'이었을 겁니다. 그런데도 검찰은 당사자가 '윤석열 총장에게 죄송하다'는 유서를 남겼다고 사실을 왜곡해서 언론에 알렸고, 언론들은 이 주장을 그대로 보도하면서 이 '선택'의 '배후사정'이 다른 데에 있는 것처럼 사람들은 호도하고 있습니다. 지금 이 사건의 '진실'에 가장 가까이 있는 것은, '윤석열의 양심'일 겁니다.

 

p309. 의義

 의열단은 '의로운 일을 맹렬히 수행한다'는 취지로 붙인 이름입니다. 그런데 그들에게 '의로운 일'은 과연 무엇이었을까요? 마이클 샌델의 <정의란 무엇인가>를 보아도 '정의'가 무엇인지는 알기 어렵습니다. 사실 영어 justice가 한자 '의義'에 정확히 대응하는지도 의문입니다.

 의義는 갑골문자에서부터 나오는 글자로, 한자 중에서도 가장 오래된 글자에 속합니다. 본래 톱날이 달린 창 모양의 제기祭器를 형상화한 글자였다고 합니다. 아마도 악귀를 물리치는 무기였을 겁니다.

 방위로는 서西, 계절로는 가을, 오행으로는 금金에 해당하며 그 기운은 '서늘함'과 '굳건함'입니다. 인仁은 따뜻하고 너그러우나 의義는 싸늘하고 단호합니다. 용서하는 것이 인仁이라면 용서하지 않는 것이 의義입니다. 그러니 인의仁義를 겸한다는 건 매우 어려운 일입니다. 그런데 유교는 왜 이 둘을 겸하라고 주문했을까요? 아마도 청와대 여민관에 걸려 있다는 '춘풍추상春風秋霜'의 의미와 같을 겁니다. 남을 대할 때는 인仁, 자기를 대할 때는 의義.

 의에는 의치義齒, 의수義手, 의족義足처럼 '가짜'라는 뜻도 있습니다. 가짜라기보다는 '본래 자기 것이 아님'이라는 뜻이겠죠. 친형제가 아니라서 의형제이고, 관군이 아니라서 의병입니다. 자기와 자기 가족을 위해서 하는 일에는 '의'자를 붙이지 않습니다. 마지못해 하는 일에도 '의'자를 붙이지 않습니다. 자기가 굳이 나서서 하지 않아도 될 일을 스스로 나서서 하는 게 '의'입니다. 억울한 남을 돕는 일, 위태로운 지경에 빠진 남을 구하는 일이 '의'입니다. 자기와 관계도 없는 약자의 편에 서서 강자의 횡포에 맞서는 게 '의'입니다.

 어떤 분이 의열단에 대비되는 '친일파'에 대해 물었습니다. 저는 이렇게 답했습니다. "친일파는 불의한 세력에 빌붙어 사욕을 채운 자들이었습니다. 지금도 그런 자들이 많습니다. 누구다 의열단원들처럼 살 수는 없습니다. 그러나 의롭게 죽진 못하더라도 더럽게 살진 말아야 할겁니다.

 '의'와 뜻이 반대인 글자는 없습니다. 그래서 '불의'라고 합니다. 하지만 '불의'는, '정의롭지 않다'가 아니라 '더럽다'는 뜻으로 해석해야 할 겁니다.

 

p311. 의료보험법

 우리나라 의료보험법은 1963년에 처음 제정되어 1964년부터 시행됐습니다. 당시 군사정권은 '무상의료'를 자랑하는 북한에 맞서기 위해 '선전용'으로 이 제도를 만들었지만, 임의가입 방식이었기 때문에 가입자는 거의 없었습니다. 고용주와 피고용인이 보험료를 분담하는 강제 가입 방식의 의료보험 제도가 시행된 건 1977년이었습니다. 이때는 공무원, 군인, 교사, 상시 500인 이상을 고용하는 대 기업 노동자만 의료보험에 가입할 수 있었습니다.

 1977년은 유신체제가 종말을 향해 치닫던 때였습니다. 특히 당시 주력 수출산업으로 육성하던 중화학 공업 분야 대기업 노동자들은 극단적인 저임금에 불만이 매우 높았습니다. 대기업에서 파업이 일어나면 '국민경제'에 미치는 영향이 심각하리라고 판단한 박정권은 대기업 노동자들을 회유하는 한편, 공무원 군인 교사 등 정권의 중추를 이루는 사회 세력의 환심을 사기 위해 '특권적 의료보험 제도'를 만들었습니다. 당시 의료보험증은 특권층의 신분증 구실을 했습니다. 으료보험증만 맡기면 어느 술집에서나 외상술을 먹을 수 있을 정도였습니다. 그러니 박정희가 만든 건 빈부를 따지지 않는 한국의 현행 건강보험보다는 일부 사람만 혜택을 받는 '미국식 의료보험'에 가까웠다고 볼 수 있습니다. 박정희가 만든 의료보험을 지금까지 쓰고 있다면, 중소기업 직장인이나 자영업자 절대다수는 코로나에 감염되어도 병원 문턱을 넘을 수 없을 겁니다.

 1987년 6월항쟁 이후, 민정당 노태우는 '전 국민 의료보험 혜택'을 공약으로 내세우지 않을 수 없었습니다. 의료 보험증이 우리 사회의 불평등 양상을 두드러지게 표현하는 '증거물'이었기 때문이죠. 이 '가시적인 불평등의 증거물'을 없애지 않고서는, 6월항쟁으로 뜨겁게 분출한 민주화 열기를 가라앉힐 수 없는 상황이었습니다. 1989년부터 '전 국민 의료보험 제도'가 시행된 건 이 때문입니다.

 현재의 국민 건강보험 제도는 박정희가 준 '선물'이 아닙니다. 우리 국민 스스로 살인적 폭력과 최루탄에 맞서 싸워 만든 제도입니다. 자기 자신이, 또는 자기 부모가 싸워서 얻은 권리를 남이 '선물'한 것으로 생각하면, 허무하게 빼앗기기 쉽습니다. 우리 스스로 만든 것을 누구라도 함부로 훼손하게 놔둬선 안 됩니다. '민영 의료보험증'을 가진 사람이 공공연히 특권층 행세하는 시대로 되돌아가서도 안 됩니다.

 

p312. 의료수요

 1940년 - 527,964명

 1950년 - 633,976명

 1960년 - 1,080,535명

 1970년 - 1,006,645명

 1980년 - 862,835명

 1990년 - 649,739명

 1940년 이후 10년 단위로 본 출생아 수입니다.

 의료 서비스의 주 소비자는 70~80대의 고령층입니다. 지금은 1940~50년대 출생자들이지만 10년 후에는 1950~60년대 출생자, 20년 후에는 1960~70년대 출생자들입니다.

 다른 변수를 제외해도, 당분간 의료수요는 급증하다가 1990년생이 70대가 되는 2060년에야 지금 수준으로 돌아올 겁니다.

 물론 미용성형 소비자는 줄어들겠지만, 생사의 갈림길에 선 위급환자는 지금보다 훨씬 많은 상태로 유지될 겁니다.

 36시간 연속 근무에 시달린다고 호소하는 젊은 의사 여러분, 당신들 밥그릇은 향후 수십 년간 줄어들지 않습니다.

 오히려 당장 의사를 늘리지 않으면 10년 후 당신 후배들은 48시간 연속 근무하면서도 응급실에서 죽어가는 환자 멀뚱히 쳐다보는 잔인한 의사가 될 겁니다.

 그런 잔인한 마음으로 의사가 된 건 아니겠죠.

 의사 늘리는 것 말고, 환자 폭증에 대처할 방법이 있다면 스스로들 제안해 보시기 바랍니다.

 

p324. 

 '정의'는 이성으로 판별하고 감정으로 실천하는 인간의 덕목입니다. 그래서 '정의감'입니다. 근대 이후 일본 역사에서 일본인들이 '정의감'에 기초해 이루어 낸 일이 무엇인지, 알지 못합니다. 그러나 한국인들은 '이성적 계산'만으로는 도저히 대적할 수 없는 상대를 '정의감'으로 물리친 역사를 만들어 왔습니다.

 기회주의자, 사익 지상주의자, 토왜들이 '감정적 대응은 안 된다'고 하는 건, 그들이 이성을 '계산'의 용도로만 쓰기 때문입니다. 정의와 불의를 판별하는 것이 인간 이성의 가장 중요한 용도입니다. 그 정의를 실천할 수 있게 해주는 '정의감'은, 인간만이 가질 수 있는 고귀한 감정입니다.

 '정의감 없는 타산적 이성'이야말로, 인간을 짐승 이하 수준으로 타락시키는 악덕입니다. 토왜들에게 '친일'은 부차적 문제입니다. 그들의 진짜 문제는 '정의감' 없이 '타산적 이성'만 가진 존재라는 점입니다. 저들이 한국 시민들의 일제 불매운동을 편협한 '반일 감정'의 소산이라고 단정하는 것도, '정의감'이 무엇인지 모르기 때문입니다.

 

p326. 이완용1

 '그'는 어려서부터 우봉 이씨 가문에서 가장 똑똑하고 공부 잘하는 아이로 소문났습니다.

 그 덕에 우봉 이씨 가문에서 제일 잘나가던 이호준의 양자가 됐습니다

 나라에서 똑똑한 젊은이들을 모아 육영공원에 입학시켰을 때, 그 학생이 됐습니다.

 우수한 성적으로 졸업하여 초대 주미공사관 참전관이 됐습니다.

 '그'는 공부를 참 잘해서 나라 덕을 많이 보았지만, 나라 팔아먹는 '매국노'가 됐습니다.

 그는 처음 '친미'였으나, 자기 이익을 위해 '친일'로 태도를 바꿨습니다.

 이완용 얘기입니다.

 제 이익만 밝히면서 공부 잘하는 인간보다 세상에 더 해로운 물건은 없습니다.

 

p329. 이해력

 코링크 최고 의사 결정권자는 이봉직, 이창권, 조범동이며 정경심 씨의 돈은 투자금이 아니라 '대여금'이라는 판결이 나왔지만, 일부 언론매체는 '조국 일가 사모펀드'라는 말을 계속 씁니다.

 판결문도 이해하지 못하는 수준의 사람들이 여론을 주무른다는 건, 정말 끔찍한 일입니다.

 

이해충돌

 

 한국에서 최고의 투기 대상이 '부동산'이라는 데에는 거의 이견이 없습니다. 부동산 투기의 성패를 좌우하는 건 당연히 '개발 정보'입니다. 박정희 정권이 강남을 개발할 때 '복부인'이 사회악으로 지목되어 온갖 비난을 받은 적이 있습니다. 그런데 사실 복부인은 '정보'를 받아서 투기를 실행했을 뿐, 진짜 사회악은 '복부인'들에게 정보를 준 그들의 남편이나 친척들이었습니다. 복부인에게 정보를 준 자들은 과연 누구였을까요?

 강남 개발 당시 청와대 경호실장이던 박종규가 서울시 건축과장 윤진우에게 강남땅을 사 모으라고 했다느 얘기는 이미 상식이 됐습니다. 윤진우는 후일 자기 이름으로는 땅 한 평도 사지 않았다고 했지만, 그 정보를 친척이나 친구들에게 누설하지 않았다고는 하지 않았습니다. 저는 그에게 땅 사는 심부름하는 동안 술을 엄청나게 먹었다는 말을 직접 들었는데, 누구와 술을 먹었는지는 밝히지 않았습니다. 어쩌면 그는 술 먹는 데 돈 쓸 필요가 없었을지도 모릅니다. 아마도 그 시절 그와 함게 술을 먹었던 사람들, 술자리에 함께 있었던 종업원들은 그가 가진 '정보'를 알았을 겁니다. 그에게 술 사 줄 기회를 잡으려고 애쓴 사람은 무척 많았을 겁니다. 물론 그의 친척들은 술 사 주지 않고도 알았을 거고요.

 이제껏 부동산 투기를 통해 가장 큰 이익을 본 사람들은 개발계획을 세운 사람들과 그 정보를 남보다 먼저 입수한 사람들입니다. 개발 정보가 위에서 아래로 흘러내리는 피라미드형 경로에서 '기자님'들은 꼭대기 가까운 곳에 있습니다. 중언부언 길게 쓸 필요는 없을 겁니다. '잘 아는' 기자님 덕에 개발 정보를 미리 입수해서 부동산 투기에 성공했다는 사람, 저도 더러 봤습니다. 유력 언론사의 역대 간부들 부동산 거래 내역과 소유 현황을 취재하면, 흥미로운 '단독 특종' 기사가 나올 겁니다.

 유력 언론사 기자님들이 열심히 보도한 덕에 이제 '이해충돌' 문제에 관해서는 국민적 '공감대'가 형성됐습니다. 이참에 정부가 추진 중인 '이해충돌 방지법'을 속히 제정하면 어떨까요? 개발계획을 수립하는 부처의 공무원과 계획을 심의하는 각종 위원회 의원, 국회의원과 지자체 의원, 개발 정보를 먼저 입수하는 기자 및 그들의 가족, 친척, 친지들은 당사자 재직 중 부동산을 매수할 수 없게 하거나, '개발 정보'와 무관하다는 사실을 충분히 소명한 후에야 매수할 수 있도록 하면, '부동산 투기'도 확실히 줄어들 겁니다. 물론 국회에서 이런 법을 만들 리 없고 기자님들이 이런 법을 지지할 리도 없으니, 그저 몽상일 뿐이지만. 20190126.

 

p374. 정정보도문

 "이 기사로 상처를 받은 분과 독자 여러분께 심심한 사과의 말씀을 드립니다. 아울러 본지 보도로 조 전 장관과 정 전 교수의 명예에 누를 끼친 데 대해 깊은 유감을 표합니다."

 조주빈 사진을 넣을 자리에 조국 전 장관 부부 사진을 실었던 세계일보의 '정정보도문'입니다. 한국 언론의 처참한 수준을 잘 보여주는 문장이비다.

 '유감'은 '마음에 꺼림칙한 점이 있다'는 뜻이고 '사과'는 '내가 지나쳤다'는 뜻이며, '사죄'는 '죄를 지었으니 용서해다오'라는 뜻입니다. 조 전 장관 부부에게 '사죄'해도 모자랄 일을 저질러 놓고 '유감'이라니요. 제3자인 독자에게 사과하고 피해 당사자에겐 '유감'? 말을 바로 쓸 책임이 있기에, 언론입니다.

 책임 있는 언론사라면, 이렇게 써야 합니다.

 "본지가 큰 잘못을 저질러 조 전 장관과 정 전 교수의 명예를 심각하게 훼손한 데 대해 깊이 사죄드리며, 합당한 책임을 지겠습니다."

 저런 신문도 언론사라는 사실에, '깊은 유감'을 표합니다.

 

p407. 진영숙

 1960년 4월19일, 한성여중 2학년 열다섯 살 진영숙은 어머니에게 편지를 남기고 시위에 참가했다가 총에 맞아 죽었습니다. 유관순이 삼일운동의 상징이 된 것처럼 진영숙도 4.19의 상징이 될 자격이 충분하다고 봅니다. 아래는 진영숙의 편지 내용입니다.

 

 시간이 없는 관계로 어머님 뵙지 못하고 떠납니다.

 끝까지 부정 선거 데모로 싸우겠습니다.

 지금 저와 저의 모든 친구들, 그리고 대한민국 모든 학생들은

 우리나라 민주주의를 위하여 피를 흘립니다.

 어머니, 데모에 나간 저를 책하지 마시옵소서.

 우리들이 아니면 누가 데모를 하겠습니까.

 저는 아직 철없는 줄 잘 압니다.

 그러나 국가와 민족을 위하는 길이 어떻다는 것을 잘 알고 있습니다.

 저의 모든 학우들은 죽음을 각오하고 나선 것입니다.

 저는 생명을 바쳐 싸우려고 합니다.

 데모하다가 죽어도 원이 없습니다. 

 어머닌 저를 사랑하시는 마음으로 무척 비통하게 생각하시겠지만,

 온 겨례의 앞날과 민족의 해방을 위하여 기뻐해 주세요.

 이미 저의 마음은 거리로 나가 있습니다.

 너무도 조급하여 손이 잘 놀려지지 않는군요.

 부디 몸 건강히 계세요.

 거듭 말씀드리지만 저의 목숨은 이미 바치려고 결심하였습니다.

 시간이 없는 관계상 이만 그치겠습니다.

 

 

p414. 창립기념일

 경향신문은 1906년 천주교에서 창간해 1910년까지 발행했습니다. 일제의 한국 강제병합과 동시에 폐간되었다가 해방 후인 1946년 천주고 서울교구가 같은 제호로 다시 발간했는데, 이때 '속간續刊이 아니라 창간創刊'이라고 선언했습니다. 이름은 계승하나 해방 이전의 역사와는 단절하겠다는 의지를 밝힌 것이라과 봐야 할 겁니다. 이후 경향신문 경영권은 여러 차례 이동했지만, 지금도 경향신문은 1946년 10월 6일을 창간일로 삼습니다.

 3.1운동 이후 서간도에 설립된 신흥무관학교는 수많은 독립투사를 양성했지만, 재정난으로 1년 반 만에 폐교되었습니다. 해방 후 신흥무관학교 부활위원회가 조직되어 1947년 2월 신흥전문학원을 세웠고, 1949년에는 신흥초급대학으로 승격했습니다. 한국전쟁 중이던 1951년, 피난 중이던 부산에서 교무과장이 학교 경영권을 인수해 1960년 경희대학교로 개명했습니다. 지난 2019년 신흥무관학교 설립 100주년 이었지만, 경희대학교는 이를 창립일로 기념하지 않았습니다. 경희대학교가 신흥무관학교의 역사를 계승하지 않는 데에는 나름의 생각이 있겠죠.

 조선일보는 3.1운동 이듬해인 1920년 3월 5일, 친일 경제단체인 대정실업친목회-대정大正은 당시 일본의 연호입니다-가 사이토 마코토 총독의 '민족 분열 통치'에 협조하기 위해 창간한 신문입니다. 창간 1년 뒤에는 다시 초특급 매국노 송병준이 조선일보를 인수해 3년 넘게 운영했습니다.

 조선일보 사옥에 "창간 100년'을 자랑하는 글귀가 걸린 지 꽤 됐습니다. 며칠 후엔 '창간 100주년 기념호'가 나오겠죠. 일제의 민족 분열 책동에 적극 협조한 초특급 매국노의 정신을 '창간 정신'으로 기념하는 것이 자랑스러운 일인지, 생각해보기 바랍니다.

 

전직 기자로서 껄끄러운 내용이 좀 있어서 필명으로 책을 냈다. 내용을 보면 동아일보 출신이라는 것까진 알 수 있고, 주변 사람들은 누군지 다 알것이다.

 

20년 이상 기자생활을 하면서 경험한 어두운 이야기 위주로 내용이 펼쳐진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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p57

 임은정 검사는 2012년 12월 과거사 재심사건 때 백지구형을 하라는 검찰 상부의 지시를 어기고 무죄구형을 했다는 이유로 정직 4개월의 중징계를 받았다. 뒷날 법원에서 징계취소 판결이 나온 데서 알 수 있듯이, 임 검사의 구형은 관련 규정에 비춰 위법하지 않았다. 위법한 행위를 한 것은 오히려 검찰 간부들이었다. 그런데도 언론은 검찰의 조직논리를 그대로 반영해 임 검사를 매도하기에 바빴다. 대법원 확정판결이 나온 뒤에도 정정보도를 내보내거나 임 검사에게 사과하지 않았다.

 

 

p235

 2019년 12월 발생한 <경향신문> 사태에서도 알 수 있듯이, 기사와 광고를 맞바꾸는 방식은 여전히 위력적이다. <경향신문> 사장과 편집국장, 광고국장의 줄사퇴를 몰고 온 해당 기사는 중국에서 벌어진, S그룹이 관리하는 유명 제과점의 상표권 분쟁을 다뤘다.

 S그룹에서는 기사를 싣지 않는 조건으로 5억 원을 제시하자 이 신문사 사장은 기자에게 이를 알리고 기사를 뺐다. 그러자 기자가 사표를 제출했다. 기자들은 총회를 열어 이를 공론화하고 책임자 사퇴를 요구하기에 이르렀다.

 

CSI 드라마가 유행하던 2010년 초에 나왔던 책. 당시까지는 유명인이 되기 전인 경찰대학 교수 시절의 표창원 씨가 저술한 책이다.

책의 내용은 과학수사의 기본적인 개념과 필요성을 실제 미제 사건 사례와 함께 소개하기 때문에 꽤 흥미롭다.

특히 오제이 심슨 사건과 김성재 살해 사건에 대해서 자세한 수사와 재판의 경위가 정리되어 있어서 자극적인 언론의 내용과는 차별화되는 지식을 얻을 수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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p74

 기계에 의한 자동 검색, 각종 잠재 지문 현출 장비의 출현 속에서 '지문 전문가'의 역할을 무엇인가?

 

 지문을 컴퓨터 자료로 관리하고 그 자료를 자동으로 검색하는 장비를 개발하면서부터 지문 전문가의 중요성이 다소 떨어지는 것 같다. 지문 자동 식별 시스템(AFIS) 프로그램을 활용하는 기초 지식만 습득하면 활용 여부에 따라서 누구나 지문 전문가가 될 수 있다. 컴퓨터는 등록한 지문을 토대로 특징점을 추출해 주기 때문에 사용자는 육안으로 관찰한 후 맞지 않는 부분만 체크하면 되고, 컴퓨터가 입력된 값을 토대로 시스템에 등록된 자료와 비교 검토한 후 판단 결과를 보여 준다. 지문에 관심이 있다면 누구나 단시간 내에 동일한 작업을 반복할 수 있다. 또한 자동 검색 시스템의 프로세스가 계속 개선되기 때문에 입력한 사람과 관계없이 프로그램의 정확도도 매우 높아진다.

 잠재 지문 현출 장비도 비슷하다. 사람에 관계없이 동일한 결과를 보여 준다. 한 예로 LUVIS를 들 수 있다. 현장에서 잠재 지문을 찾고자 할 경우, 기기를 작동시키고 매뉴얼에 있는 방법대로 조작한 뒤 현장을 돌아다니면 된다. 그럼 지문 전문가의 역할이 될까? '컴퓨터에 넣을 지문을 얼마나 좋은 품질로 현출해 내는가'다 현장에 제아무리 좋은 지문이 남겨져 있다 한들 그걸 체취하는 데 실패한다면 차후에 이루어지는 확인 과정은 무의미해질 것이다. 결국 첨단 장비를 개발해 현장에서 활용한다고 해도 사람이 수집한 증거물에 의해서 모든 과정이 진행되므로 지문 전문가의 역할은 항상 중요하다. 물론 지문 전문가가 자만심에 빠져서 최신 정보를 받아들이지 않은 채 노력과 연구를 게을리 한다면 이미 지문 전문가의 자격을 잃은 셈이다.

 

 북유럽 방식의 보편복지로 가기 위해 보편증세가 선제적으로 이루어져야 한다는 주장을 차근차근 풀어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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p35

 이처럼 1990년대 스웨덴 노인들의 삶의 질이 상승한 것은 기업과 은행이 연쇄 도산을 하고 실업자가 발에 치이는 와중에 벌어진, 어떻게 보면 매우 비상식적인 사건이다. 모두 알다시피, 한국의 자살률이 IMF 사태 이후 오랫동안 OECD 1위에 머문 것은 끔찍하게 치솟은 노인 자살률 때문이다. 경제위기 이후 극명하게 갈린 두 나라 노인들의 삶을 통해 한국 사회가 얻을 교훈이 있으리라 생각한다. 하지만 그런 것을 생각하기에 앞서 착잡함에 할 말을 잃게 된다. 우리 사회의 가난한 노인들이 겪어야 했고, 또 지금도 변함없는 그 딱한 처지가 떠오르기 때문이다.

 

p43

 세금과 복지의 선진국이란, 사회구조적으로 구성한 한 명 한 명이 서로 긴밀한 도움을 주고받는 연대적 관계로 맺어지는 사회를 의미한다. 물론 이런 사회라고 해서 사악한 행동과 이기적 인간 군상이 없는 것은 아니다. 사회연대의 손길이 미치지 못하는 사각지대도 남아 있다. 하지만 이러한 사회에선 구성원 대다수가 상호 도움을 주고받는 사회구조에 편입되어 있다. 바꿔 말하면, 세금과 복지를 발전시킨 나라에서는 '선의 평범성'이 사회구조에 따라 자동적으로 실현된다. 한 사회에 속한 개인의 취향이나 가치관과는 맞지 않더라도 사회구조가 그러하기에 따라야 할 삶의 규율이 제대로 작동하고 있는 것이다.

 반대로 세금과 복지의 후진국은, 거기에도 선한 행동과 이타적인 사람들이 없는 것은 아니지만 '악의 평범성'이 사회구조에 따라 자동적으로 발현된다. 대부분의 사회 구성원이 연대적 관계를 맺지 못한 채 도움이 필요한 동료들을 비정하게 방치한다. 한국은 이를 극명하게 보여주는 사례다.

 나는 나와 당신의 세금이 우리 모두의 삶을 책임지는 사회를 희망한다. 이것은 사회의 모든 문제가 말끔히 해결된 그런 유토피아가 아니다. 세금과 복지를 튼튼히 한다는 것은 '기본을 해놓자'는 의미이지 이것만 잘되면 만사가 문제없다는 만병통치론이 아니다. 하지만 대한민국 사회가 이 기본에 충실할 때, 우리들의 세금은 짜증과 스트레스의 요인이 아닌 우리 삶의 든든한 버팀목이 될 수 있을 것이다.

 

p63

 OECD 주요국 거의 모두가 한국에 비해 '1인당 GDP 대비 1인당 고등교육비'가 한결 높다는 것은 '한국의 등록금이 비싸다'는 인식에 오류가 있음을 보여준다. 이 고등교육비는 정부든 가계든 누군가는 비용을 치러야 한다. 만약 개별적인 학비 지출이 적고 정부 부담 교육비가 많은 유형의 나라들에서 한국처럼 각자 알아서 학비를 내는 방식으로 전환한다면, 이들의 높은 '1인당 GDP 대비 1인당 고등교육비'를 고려할 때 부담 없이 싼 가격으로는 고등교육을 이수할 수 없다. 결국, 한국의 등록금이 비싸다는 것은 세금을 인상해 학비를 공동으로 지불하는 방식을 택하지 않기 때문이지, 정말로 등록금이 터무니없이 비싸기 때문은 아니다.

 그동안 밑도 끝도 없이 일어났던 수준 미달의 대학들과 한국의 유달리 높은 대학 진학률, 그리고 지나치게 낮은 '1인당 GDP 대비 1인당 고등교육비'는 서로 연결되어 있다. 이런 점에서 무턱대고 등록금 인하를 주장해온 한국의 대학생 및 시민단체들은 관점을 교정할 필요가 있다. 그들은 보편적인 세금인상을 터부시하는 가운데 본디 비싸기 마련이며, 여타 국가들에 비해 비싸다고 보기도 어려운 '학비'를 내려야 한다고 다분히 억지를 부려왔던 것이다. 여기에 정치권은 등록금이 비싸다는 아우성만을 받아들여 등록금 인상을 간접적으로 억제함으로써 고등교육의 수준을 떨어뜨리는 데 일조했다. 우리 사회는 아예 철저한 미국식을 택해 등록금과 학자금 대출이 천정부지로 치솟도록 내버려둠으로써 대학의 질적 향상을 도모하든가, 아니면 복지강국의 방식을 택하여 세금을 더 걷는 대신 개별 교육비 지출을 최소화하고 고등교육에 대한 공적 투자를 늘리는 방식으로 가야 한다.

 한국의 후자의 방식을 택하려 한다면 대학 구조조정이 필수이다. 유달리 많은 한국의 대학생들에게 여타 국가에 준하는 '1인당 GDP 대비 1인당 고등교육비'를 투입하는 것은 곤란하기 때문이다. 이는 세금의 누수이고 고등교육의 낭비이다. 증세를 통한 개별 학비의 최소화하는 대학 구조조정, 세금과 복지의 총체적인 개혁, 나아가 노동시장의 정상화까지 모두 한 세트로 추진돼야 한다.

 

p66 

 연 30조 원대의 사교육비가 쓰이는 것이 현실이다.

 이런 대규모의 사교육비는 한국의 이례적인 소비 행태다. 막대한 사교육비가 전부 세금으로 납부돼야 할 필요까진 없겠지만, 이로부터 일정 부분 보편 증세가 이뤄질 수 있고 또 그렇게 되어야 올바르다. 웬만해서 사교육비를 쓰지 않고 그것이 가구의 여유소득이 되며, 그 여유소득 중 일부를 세금으로 내어 복지를 발전시키는 사회가 합리적이다. "사교육에 지출하고 나면 남는 것도 없고 노후도 대비하지 못할 지경"이라는 사연이 언론의 단골 기사로 올라오는 현실은 기괴하기 짝이 없다. 이런 자해적인 소비 행태를 지속하느니 세금을 더 내고 복지 발전을 요구하는 것이 당사자에게도 모두에게도 이득이다. '사교육비 때문에 버겁다'는 헬조선적 션실이 아득한 추억이 될 수 있도록 사교육비의 일부는 필히 세금으로 전환돼야 한다.

 

 

 

p155. 저급 정치인들은 조세저항을 먹고 자라난다

 

 상품이나 서비스의 구매자가 저렴한 비용을 지불할 때와 고액의 대가를 치를 경우 기대하는 품질은 천양지차다. 쉬운 예로 특별한 날을 기념하고자 수십만 원대의 고급 음식점을 찾는 손님은 위생, 맛, 직원의 서비스, 장소의 시원함이나 따듯함, 쾌적하고 기분 좋은 인테리어와 분위기 등등 여러 가지 까다로운 기준을 가지고 품질을 평가한다. 반면에 길거리 포장마차에서 간단한 요깃거리를 사 먹는다면, 위생 상태에 예민해하지도 않고 추운 날씨도 개의치 않으며 기막힌 맛이나 호사스러운 서비스를 기대하지도 않는다.

 세금 역시 마찬가지다. 많은 세금을 내는 국민은 그만큼 정치를 대하는 눈높이가 높아지고, 제발 정치에 관심 좀 가지라고 누가 타이르고 보채지 않아도 알아서 야무지게 정치를 감시하게 된다. 고가의 재화를 구입하는 소비자가 그에 상응하는 고품질을 깐깐하게 따지듯, 높은 세금에 부응하는 고품질의 정치를 엄격하게 따지는 것이다. 이렇게 다져진 냉철하고 단호한 정치의식은 뛰어난 정치를 이끌어내는 거대한 압력으로 작용한다.

 최정상의 복지국가에서 평범한 국민은 소득세, 사회보험료 등 수입에서 원천 징수되는 세금에다 소비할 때 납부하는 간접세를 더해, 세금이 충실하게 복지로 돌아오지 않을 경우 생활수준이 현저히 떨어질 만큼 무거운 부담을 진다. 세금이 잘못 쓰여 복지에 차질이라도 생긴다면, 나라가 발칵 뒤집힐 만한 정치 지형이 조성돼 있다.

 반면 한국인들은 직접세에 간접세까지 죄다 더해도 어느 소득계층이건 자신의 소득 단계가 달라지지는 않게끔 세금을 낸다. 세금이 작으니 복지도 작고, 복지강국과는 달리 세금과 복지에 따라 삶의 조건이 좌우되지도 않는다. 사람들은 늘 세금이 줄줄 새고 복지가 부족하다고 불만이지만, 콕 집어 이 때문에 정치판을 갈아엎기는 어려운 정황이다. 국민으로서는 이래저래 답답한 환경이지만 저급 정치인들에겐 한국 같은 꿀단지가 따로 없다. 높은 조세저항과 낮은 세금은 팍팍한 삶의 근원인 동시에, 정치에 대한 허술한 감시망의 토양이기 때문이다.

 

 세금을 올리는 일은 흔히 '고양이 목에 방울 달기'로 비유되곤 한다. 하지만 조세 문명이 발달한 현시대에 이런 사고는 업그레이드될 필요가 있다. 정치의 기강을 바로잡는 세금의 위력을 감안할 때 증세는 '호랑이 목에 방울 달기'가 될 수 있고 또 그래야 한다. 언제 어느 때나 정치는 국민을 두려워해야 하고, 그들에게 있어 '얼마든지 세금을 늘리라는 국민'처럼 무섭고 불편한 존재도 찾기 힘들다. '진짜' 세금폭탄을 얻어맞는 복지강국의 국민은 사소한 낭비나 비리에도 냉혹한 심판을 내린다. 한국 국민도 만만찮은 세금 출혈을 감수한다면 복지가 잘 굴러가는지, 정치인들이 일을 똑바로 하는지 '날마다 일상에서, 그냥 저절로, 두 눈을 시퍼렇게 뜨고' 지켜보게 된다. 돈이 아까워서라도 정치에 대한 단속을 게을리하기 어려워진다. 결국, 조세저항을 극복한 국민의 등장은 한국의 구태 정치인들에게 청천벽력 같은 소식이다.

 물론, 세금이 폭증해야만 불량 정치인들이 철퇴를 맞고 정치 선진국으로 발전하는 것은 아닐 것이다. 그러나 고질적인 정치 후진국 한국에서 정치를 제자리로 돌려놓고 또 그 상태를 유지하기 위해 세금은, 이미 앞선 국가들에서 검증을 마친, 더할 나위 없이 확실한 대안이다. 평범한 소득층마저 '살벌하게' 세금을 내고 대다수 인생의 성패가 복지의 성패에 달려 있다면, 이것은 분명 우수한 정치를 안착시키는 단단한 기반이 된다.

 

 

p160. '낙수효과'와 '부자증세'는 거울에 비친 듯 닮아 있다.

 

 '낙수효과'의 기본 논리는 부자가 막대한 부를 자유로이 쓰도록 내버려둘 때 이들의 소비와 투자가 늘어나 나머지의 후생이 증대된다는 것이다. 반대로 '부자증세'는 낙수효과란 허구이므로 부자의 막대한 부를 세금으로 걷어 유용한 곳에 써야 한다는 입장이다. 이처럼 낙수효과와 부자증세는 서로 상반된 주장을 한다. 하지만 이는 표면적인 대립일 뿐 실제로 이 둘은 공통된 성격과 목표를 가지고 있다. 조세저항을 기저에 깔고 고약한 '대기주의'를 종용하며 자잘한 세수 증대를 내세운다. 복지 발전이 관심사가 아니라는 점도 이들이 만나는 지점이다.

 부자증세가 왼쪽 버전의 '수동적 대기주의'라면 낙수효과는 그 오른쪽 버전의 쌍둥이다. 우측에서 수동적 대기주의를 조장하는 이들은 '부자나 기업이 돈을 풀어야 일자리가 창출되므로 그때까지 사람들은 참고 기다리는 게 상책'이라고 주장한다. 복지를 명분으로 세금을 올리거나 하면 경제 활력을 해치니까 괜한 간섭은 삼가라는 것이다. 낙수효과가 실현될 때까지 이제나저제나 인내력을 발휘하는 것이 사람들이 지켜야 할 덕목이다.

 낙수효과란 이름의 조세저항을 뒷받침하기 위해 근거가 빈약하거나 협박이나 다름없는 논리까지 동원된다.

 

 "분배는 성장을 저해한다."

 "세금으로 일자리를 늘리다간 나라 망한다."

 "일자리는 민간에서 나오지 정부에서 나오는 게 아니다."

 "부자의 세금이 오르면 투자 의욕이 감퇴되어 일자리가 사라지고 애꿎은 서민만 피해를 입는다."

 "부자와 기업이 투자를 확대해 경제가 성장하면 자연히 세수가 증가하니(이렇게 늘어난 세금이 얼마 되지 않는다는 건 내 알 바 아니고) 억지로 세금을 인상할 이유가 없다."

 

 

 이 모든 주장들을 관통하는 것은 (부유층의) 조세저항이고, 낙수효과의 출발점도 조세저항의 정당성을 보이는 것이다.

 부자증세에 몰두하는 이들은 낙수효과와 반대 방향에서 시작하지만, 결론에서는 낙수효과와 똑같이 '수동적 대기주의'를 조장하고 (부자가 아닌 이들의) 조세저항을 옹호한다. 소수의 상위층만을 추궁하는 부자증세파는 '탐욕스러운 부자와 대기업이 내놓을 때까지 나머지는 나서지 말라'고 설교한다. 부유층에서 복지재원을 빼내 와야 사회정의가 실현되니 이에 어긋나는 행동은 자중해야 한다는 것이다. 이때는 부자증세로 조세 정의가 구현될 때까지 부자와 기업의 허물만을 욕하며 기다리는 것이 미덕이 된다.

 부자증세파는 흔히 부자와 기업을 악랄한 수탈자로, 나머지는 순결하고 가련한 피수탈자로 묘사한다. 하지만 이는 허상이지 사실이 아니다. 물론, 부자와 기업에게 많은 과오가 있는 것은 사실이고 노블레스 오블리주가 됐든 뭐가 됐든 사회적 책무를 다하지 않는 것도 분명하다. 하지만 그렇다고 대다수의 한국인이 날마다 실천하고 있는, 나보다 조금이라도 약자를 착취하는 이기적인 생활양식이 가려지지는 않는다.

 사실상 부자증세파는 복지는 핑계고 단지 부자의 세금을 올리는, 그 자체에 함몰된 성격이 짙다. 부자증세로 걷히는 세금으로는 강력한 복지를 구축하는 데 턱없이 모자라다는 사실이 이들에게는 하나도 중요하지 않다. 또한 이들은 보편 증세가 윤리적으로 옳지 않다고 비판한다. 이들이 보기에 모두가 세금 분담에 협력하여 복지를 강화하는 것은 서민층과 중산층에 대한 강탈에 지나지 않는다. 이 같은 부자증세의 윤리를 맹종하다 보면, 연대를 추구하는 자유의지에 따라 같이 사는 세상을 앞당기는 데 일익이 되고 싶을지라도 부자가 아니라면 그것은 부도덕한 행동이 된다.

 표면적으로 '낙수효과'와 '부자증세'는 대립하는 입장이다. 그러나 '가만 있으라'를 종용하여 사람들의 삶을 해친다는 측면에서 이 둘은 다르지 않다. 조세저항을 무리하게 두둔하기 위해 여러 가지 해로운 논리를 전파한다는 점에서도 서로 닮아 있다. 충분한 세금의 확보를 가로막으며 복지 발전을 방해 한다는 점도 동일하다.

 낙수효과가 부유층의 조세저항을 합리화한다면, 부자증세는 부자가 아닌 이들의 조세저항에 정당성을 부여한다. 여기에 중첩되어 조세 정의의 확립을 명분으로 하는 또 다른 조세저항 합리화 논리가 완고하게 형성돼 있다. 무작정 세금 인상에 반대하는 것은 옳지 않지만, 조세 정의가 미흡한 상황에서 증세를 거부하는 것은 지당하다는 논리이다. 물론 세금이 올바르게 걷히고 쓰이는 일은 이루 말할 수 없이 중요하다. 하지만 이를 절대적인 선결 과제로 내세우는 것은 도리어 조세 정의를 저해하는 발상이다. 누구나 증세에 동참하여 세금에 대한 주인의식이 고양될 때, '눈먼 돈'이 줄기 마련이고 '숨은 돈'도 드러나게 된다.

 세금에 대한 여론조사를 보면 언제나 부자와 대기업을 타겟으로 한 '부자증세'가 압도적인 지지를 얻는다. 여기에는 내 돈은 허투루 쓰일지 모른다며 증세를 반대하는 이들이 부자의 돈은 그러거나 말거나 개의치 않는다는 의미도 담겨 있다. 이런 인식으로는 조세 정의에 불만을 갖는 이들이 흡족해 할 만큼 그것이 개선될 리 만무하다.

 세금과 복지의 증대에 찬성하지만 그러기엔 신뢰가 부족하므로 보편 증세는 불가하다는 이들은, 애초에 세금이나 복지를 내심 반기지 않는 이들과 자신들을 다르다고 여길 것이다. 그러나 종내에는 양측의 입장이 만나 서로 의기투합을 한다. 한국에서는 오직 각자도생만이 살길이라는 생각을 간직한 채 말이다.

 

p168

 문제는 현 정부 여당에게 미래에 대한 계획이 없다는 것이다. 국제적으로 볼 때 한국의 가장 부실한 분야 중 하나는 조세와 복지인데, 현 정부 여당의 가장 취약점 중 하나도 바로 이 분야다. 장래 한국의 세금과 복지를 어떻게 발전시킬 것인지 개연성 있는 구상이 나온 게 없다. 앞으로 세금과 복지가 몰라보게 나아질 것이라는 기대를 사람들에게 전혀 주지 못하고 있다. 세금과 복지는 사회구조의 문제이자 삶에 직결되는 제도이므로 이 부문에 대한 기대가 미약하면 실제로 내 삶과 사회가 나이질 것이라는 기대도 위축된다.

 복지에 우호적인 입장을 가진 최대 정파가 제자리를 찾고 중심을 잡아야 한다. 나의 삶도, 그리고 타인의 삶도 세금과 복지를 활용한다면 정말 달라질 것이라는 확실한 근거를 제시해 줄 수 있어야 한다. 

 

p170

 문 대통령은 취임 2개월을 맞았을 때 "증세를 하더라도 대상은 초고소득층과 초대기업에 한정될 것'이며, "일반 중산층과 서민들, 중소기업에게는 증세가 전혀 없을 것"이라고 밝힌 바 있다.

 "이는 5년 내내 계속될 기조"이니, "중산층과 서민, 중소기업이 불안해하지 않도록 해달라"는 당부도 덧붙였다. 그렇다고 문 대통령의 증세 화살표가 초고소득층과 초대기업으로만 향하는 것은 아니다. 그는 "대기업과 부자들의 세 부담부터 늘리고 그래도 부족하다면 국민의 동의를 얻어서 보편 증세로 나가는 것이 순서"라는 입장을 가지고 있다. 보편 증세로 나아가는 시기가 언제일지는 아무도 모른다는 맹점이 있기는 하나, '선 부자증세, 후 보편 증세'는 종종 볼 수 있는 단계적 증세론의 하나다.

 문재인 대통령이 '초고소득층과 초대기업'에 대한 증세를 언급하자, 추미애 당시 민주당 대표는 이에 대해 "초대기업과 초고소득자 스스로 명예를 지키며 사회적 책임을 다하는 '명예과세'"라고 명명했다. 김태년 당시 정책위의장은 "법인세 더 내면 기업이 사랑받을 수 있으니 '사랑과세'가 어떠냐"고 말했다. 그는 "초고소득자 증세로 세금을 더 내면 부자들이 국민으로부터 존경받는 '존경과세'는 어떠냐"고도 덧붙였다.

 나는 이들의 말에 공감하지 않는다. 내가 바라는 사회는 돈이 없어도 누구나 병을 고치고 공짜로 대학원까지 갈 수 있는 복지강국이 아니다. 그렇게 풍성한 삶의 자유가 모두에게 보장되기 위해 모두가 성큼 자기 몫을 내어놓는 나라가, 내가 희망하는 세상이다. 그러한 복지 권리가 모두에게 부여되기 위해 일부 부유층만이 그 밑천을 내놔야 한다고 다그치는 나라는 별 울림도 끌림도 없다.

 나는 이제껏 가난한 이들까지 번듯한 집에서 살 수 있는 그런 복지를 원한 적이 없다. 노인들에게 80~90만 원씩 노후 연금을 지급하하는 복지국가 또한 내가 그려온 세상이 아니다. 요람에서 무덤까지 온갖 혜택을 선물해주는 나라가 아니라, 누구나 인간다운 삶을 살 수 있도록 누구든 힘을 보태는 나라야말로 내가 희망하는 세상이다. 부자가 아니면, 나눔과 연대를 일단 모른 척하라고 닦달하는 사회는 흉하고 슬프다.

 더 많이 나누고, 더 많이 연대하며 살고자 하는 인간의 자유의지는 더 가진 이든, 덜 가진 이든 다 같이 대등하고 소중하다. 세금을 더 내고 복지를 늘리는 일에 부자가 아니니까 빠지라는 주문은, 빈부와 무관하게 고결한 이타심과 희생정신을 가진 모든 인간에 대한 모독이다. 한국인들도 사람인데, 그래서 내 몫을 더 내어놓고 같이 살고픈 욕망을 품고 있을 텐데, 한국에는 그런 인간다운 본성을 거세하려는 자들이 판을 친다.

 먼저 대단한 상류층으로 성공부터 하라고, 그래야 세금을 더 낼 명예도 존경도 얻는 거라고 차별하는 자들이 득세한다. 세상이 아무리 삭막하게 시들어가도 무슨 갑부가 아니라면 그저 자기 것을 꽉 부여잡고 있으라고 쪼아대는 자들이 난무한다. 당신들은 부자가 아니니까 나누고 연대할 자격이 없는 거라고 천시하는 자들이 권세를 누린다. 그토록 집요한 혹세무민에 파묻힌 한국인들은 그들도 인간이기에 지닌 존엄한 연대심을 끊임없이 억눌리며 살아간다.

 

 

p180

 무상복지는, 그것을 성토하는 이들과 별개로, 복지를 표상하기에 적합한 표현이 아니다. 우선, 처음부터 복지는 무상일 수 없다. 우리는 도로와 다리, 공원을 이용할 때 일반적으로 개별 요금을 내지 않지만 무상도로, 무상다리, 무상공원 같은 말을 전혀 쓰지 않는다. 세금이라는 비용이 들어갔기 때문이다. 무상국방과 무상치안을 논하지 않는 것처럼, 무상보육이니 무상급식이니 구태여 무상이라는 사족을 가지고 왈가왈부할 이유는 조금도 없다. 공보육, 공공의료, 국공립 어린이집, 급식비 지원 확대 등으로 표현한다고 큰일이 나는 것은 아니다.

 

p182

 복지가 값진 것은 무상이라서가 아니라 세금이라는 무거운 대가를 치르기 때문이다. 복지의 한 단면에 불과한 '무상'을 복지의 정수인 양 규정하는 것은 올바른 복지의 의미를 정립하는 데 하등의 도움이 되지 않는다.

 

p191

 그런데 특히 자원이 한정되어 있을 경우 저소득자와 실업자에게만 급여를 지급하는 것이 더 낫다는 견해가 종종 사회민주당 내에서도 제기되었다. 이런 방법으로 하면 어려운 사람들을 집중적으로 지원할 수 있고 그들이 원하는 것들을 실제로 보장해줄 수 있다는 것이다. 그런데 이러한 주장은 소득이 많고 어떠한 사회적 혜택도 받지 못할 것 같은 사람들이, 가장 어려운 사람들을 대대적으로 지원하기 위해 기꺼이 세금을 낼 수 있을 것이라고 가정하고 있다. 하지만 많은 경험들은 일이 이런 식으로 돌아가지는 않는다는 것을 말해주고 있다. 오히려 많은 연구들은 보편적 복지시스템이 자산조사를 중시하는 복지시스템보다 실제로 더 많은 혜택을 사회적으로 어려운 집단들에게 제공하고 있다는 것을 보여주고 있다.

 만약에 가장 어려운 사람들만이 아동수당, 무상의료 또는 무상교육의 혜택을 받는다면, 나머지 사회집단들은 그러한 혜택이 가능한 한 값싸게 지급되는 데 관심을 가질 것이다. 그들은 온갖 이유를 들면서 급여의 비용을 줄이려 할 것이다. 왜냐하면 이 급여는 자신들은 받지 못하는 것이고, 또 여기서 제공되는 서비스의 질이 나쁘다고 해도 자기들에게는 직접적인 영향이 미치지는 않기 때문이다(카를손. 잉바르 · 린드그랜. 안네마리네 2009/1996 : 139~141)

 

 

책 서문에서도 밝혔지만, 친일(친일이라기보다 일본 극우파의 논리를 그대로 베껴다 쓴) 서적인 반일종족주의의 허구적 주장을 논박하기 위해 호사카 유지 교수가 쓴 책.

이런 책을 써주신 자체가 고맙기도 하고, 한국인으로서 부끄럽기도 하다. 호사카 유지 교수의 전작인, <아베, 그는 왜 한국을 무너뜨리려 하는가>와 <호사카 유지의 일본 뒤집기>, <대한민국 독도>의 3권의 핵심적인 내용을 요약 집대성 했다고 볼 수도 있다.

강제징용, 위안부, 독도 문제에 대해 일본 극우의 허구적 논리를 논박한다는 부분에서 그 가치가 높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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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

『반일 종족주의』라는 책의 주장 중 핵심 부분은 일본 우파의 주장을 그대로 옮겨놓은 것이라고 해도 과언이 아니다. 그렇다면 우선 앞에서 쓴 세 가지 문제(위안부, 강제징용, 독도)에 관해 일본 우파가 주장하는 논리가 언제 어떤 식으로 만들어졌는지를 알아볼 필요가 있다.

(아래 부분은 호카가 유지 교수의 전작들인 『호사카 유지의 일본 뒤집기』, 『아베, 그는 왜 한국을 무너뜨리려 하는가』에도나오는내용들이다)

 그 시작은 1993년 8월 자민당의 미야자와 정권의 관방장관 고노 요헤이가 '고노 담화'를 발표한 직후였다. '고노 담화'는 '위안부'가 일본군에 의해 강제적으로 동원되었다는 사실을 인정했다. 그리고 일본군 '위안부' 피해자들에게 사과와 반성의 마음도 표했다.

 그러자 자민당 내 극우 세력이 반발하고 나섰다. 그들은 '위안부'가 자발적으로 매춘을 한 여성에 불과하다며, 일본군에 의한 강제연행이나 강제 동원은 없었다고 주장했다. 나아가 '고노 담화' 폐기를 목표로 본격적인 활동을 하기 시작했다.

 그 결과 자민당 내에 '역사검토위원회'가 결성되었고, 우파 논객들을 강사로 초빙해 모임을 지속해서 가졌다. 그러면서 자민당 내에 극우 세력이 대두하기 시작했다.

 그로부터 2년이 지난 1995년 8월15일, 일본 정부는 '종전 50주년'을 맞이해 '무라야마 담화'를 발표했다. '무라야마 담화'는 일본의 침략 전쟁과 과거 식민지 지배에 대해 당시 무라야마 도미이치 총리가 세계 앞에 사과하는 내용을 담고 있었다. 그런데 이에 대해서도 자민당 내 극우 세력이 강하게 반발했다.

 일본 우파의 최종적인 목표는 '고노 담화'와 '무라야마 담화'를 부정하는 데 있었다. 그 목표를 달성하기 위해 그들은 후지오카 노부카쓰 교수 등이 내세운 '자유주의 사관'을 도입했다.

 '자유주의 사관' 학설이란 일본이 침략 전쟁을 일으킨 것이 아니라, 아시아를 백인 지배에서 해방시킨 '해방 전쟁'을 수행한 것이라고 주장한다. 또한 난징 대학살이나 '위안부' 강제연행을 부정하며, 일본이 아시아 국가들을 식민지배하면서 근대화시켰다고 강변한다. 그뿐만 아니라 일본의 과거를 사죄하는 태도를 '자학 사관'적 태도라고 매도하면서, 일본의 사과 외교는 일본의 진보 세력에 의해 만들어진 정치적 행위라고 주장한다.

 1993년 '고노 담화'를 발표한 이후 자민당은 호소카와 내각에 정권을 넘겨주고 말았다. 창당 이래 무려 38년 동안 여당의 지위를 유지했던 자민당이 야당으로 전락한 것이다. 이와 같은 현상이 자민당 내 우파의 위기감을 자극해 우파의 논리 구축을 촉진시킨 결과 '자유주의 사관'을 도입하게 되었다.

 이는 1997년 '새역사교과서를 만드는 모임'과 극우 단체 '일본회의' 결성으로 이어졌고, 일본 내에서 역사 왜곡을 심화시키는 주체적 역할을 해나갔다. 그들은 또한 틈만 나면 '좌경화된 일본인의 의식을 바꾸어 놓아야 한다'고 목소리를 높였다.

 그런데 1998년 한국에서 김대중 정권이 성립된 이후, 한국 내에서도 일본과 비슷한 현상이 일어났다. 바로 진보 세력에 대항하는 '뉴라이드'의 등장이다. 한국의 '뉴라이트'는 2000년경에 등장했는데, 일본과의 유사점은 한국 내 보수 우욱이 1998년 정권을 상실한 것을 계기로, 정권 재창출을 위해 보수 우익의 논리를 추구한다는 데 있다.

 2005년 11월 8일에 뉴라이트 전국연합이 발족되었다. 이때 주최 측은 "역사에 대하 보복 정치로 대한민국의 가능성과 장래성이 소진되는 모습을 더 이상 좌시할 수 없다. 대한민국은 새로운 비전으로 무장하고 이를 실천시킬 수 있는 선진화 세력이 주도해야 한다. 건전한 우파의 가치를 일상적이고 전국적으로 국민에게 확산시켜야 한다"라고 천명했다.

 

 이어서 2006년 안병직 서울대 명예교수가 뉴라이트재단을 창립해 초대이사장으로 취임했다. 이런 일련의 움직임은 뉴라이트의 가치관이 한국 진보 세력의 역사관에 대항하기 위해 만들어진 것이고, 결국은 보수 정권의 재창출을 목표로 했음을 보여준다.

『반일 종족주의』의 대표 저자 이영훈 낙성대경제연구소 이사장은 안병직 명예교수 등과 함께 조선시대부터 현대에 이르는 한국 경제사를 연구해왔다고 한다. 일제강점기 조선 경제를 연구한 것으로 알려진 그는 소위 '식민지 근대화론자'인 셈이다. 특히 그는 "일제강점기 한국이 땅과 식량을 수탈당했다는 한국사 교과서의 저술은 왜곡된 것"이라고 주장하며, "한국인들이 식민지 시대를 아는 집단적 기억은 상당 부분 만들어진 것이고 교육받은 것"이라고 주장해왔다.

 본서에서는 그들의 정치적 색깔을 문제시하는 것이 아니라, 그들의 논리와 주장을 문제로 삼았다. 본서는 특히 강제징용 문제, 일본군 '위안부' 문제, 독도 문제 등에 관한 그들의 논리가 매우 잘못되었음을 입증해 나간다.

 

(5%)

 필자가 분석한 결과, 특히 이영훈과 이우연 낙성대경제연구소 연구원의 글에는 큰 결함과 왜곡과 은폐 등이 다수 발견되었다. '노예근성'으로 가득 찬 잘못된 주장을 대중을 향해 펼치는 것은 정말 위험하다.

 성병을 앓고 있는 환자가 자신이 성병 보균자라는 사실을 모른 채 성관계를 하면 그 피해는 시간이 흐를수록 점점 확산되어 많은 피해자를 양산하게 된다. 하지만 스스로 병을 인지하지 못한 상태에서 벌어진 일이기 때문에 비난할 명문이 크게 약화된다.

 그런데 자신이 성병 보균자라는 사실을 알고 있으면서도 그 사실을 숨긴 채 불특정 다수와 성관계를 가졌다면 상황은 정반대가 된다. 어떤 이유로도 용서될 수 없는 명백한 범죄일 뿐만 아니라, 재론의 여지 없는 '악마' 그 자체라고 할 수 있기 때문이다. 사람들이 생각하는 이영훈이나 이우연은 과연 어느 부류에 속해 있는지 자뭇 궁금해진다.

 

 

(28%)

 먼저 (1), 즉 국제법이나 국제관계에서 식민지배 피해에 대한 배상 같은 건 인정하지 않는다는 주장인데, 이는 가해자인 제국주의 국가들의 논리일 뿐이다. 그리고 이번 대법원 판결은 개인이 국가에 대해 제기한 소송에 대한 판결이 아닌, 개인이 기업에 제기한 소송이므로 기업의 범죄 행위가 인정되면 기업이 개인에게 배상해야 한다는 것은 당연하다.

 실제로 2012년 5월 당시 신 일본제철(현 일본제철)이 패소하면서 4명의 한국인 강제징용 피해자(원고)에게 1억 원씩의 위자료를 지급하라고 한국 대법원이 선고를 내렸을 때, 기업 측은 처음에 그렇게 깨끗이 처리하고 싶다고 밝히기도 했다. 한국 대법원 판결대로 하겠다는 의사 표현을 한 것이다. 하지만 얼마 후 일본 정부가 끼어들어 방해하면서 개인 대 기업의 재판을 마치 나라 대 나라의 재판인 것처럼 왜곡했다. 그러므로 본래의 입장, 즉 개인 대 개입의 입장에서 생각하면 일본 기업은 당연히 한국인 피해자 개인에게 배상해야 마땅하다.

 

 다음은 (2)에서 말한 샌프란시스토 조약은 일본과 연합국이 맺은 조약일 뿐, 한국은 조약의 당사자가 아니다. 그러므로 샌프란시스코 조약의 조문은 기본적으로 한국을 구속하지 못한다. 그리고 샌프란시스코 조약상 한국이 일본에서 분리된 지역으로 규정되었으니 한국이 일본에 배상을 청구할 수 없다는 주장은 참으로 이해하기 어려운 논리다.

 샌프란시스코 조약 4조는 일본국 및 그 국민에 대한 피해국 당국 및 그 주민의 청구권 처리는 일본과 피해국 당국 사이에서 특별히 결정하는 주제로 한다고 밝혔으므로, 일본은 한국의 청구권 문제를 특별히 결정해야 했다. 일본이 각 나라와 개별적으로 협상해야 한다고 연합국과 일본이 합의한 이와 같은 샌프란시스코 조약의 조문으로 한국은 일본에 보상이나 배상을 요구할 수 있다. 한국이 일본으로부터 분리된 지역이므로 배상을 요구할 수 없다는 주익종의 논리가 어디서 나오게 되었는지 이해할 수가 없다.

 

 그리고 (3)의 주장, 즉 한일회담 첫 회의에서 한국 측은 배상이 아니라 한국 측 재산의 반환을 청구한다는 입장을 일본 측에 밝혔기 때문에, 이제 한국은 일본에 배상을 요구할 수 없다는 말도 이상한 논리다. 한국이 일본에 한국 측 재산의 반환을 요구했다고 해도 국민이 그것을 청구한 것이 아니므로 국민 청구권은 남아 있기 때문이다.

 

 (4)에서는 미국이 한국 내의 일본인 재산을 몰수해서 한국으로 인도했으므로, 한국의 대일 청구권은 어느 정도 충족되었다고 주장했다. 그런데 한국 입장에서 볼 때 일본인의 한반도 진출 자체가 침략 행위이자 불법 행위였으므로 한국 내에 남은 일본인 재산은 원래 한국의 재산이고, 그 재산은 당연히 한국으로 귀속되어야 하는 성격을 띤다. 따라서 한국인들이 배상을 요구하는 문제와는 별개다. 더구나 일본은 한국을 35년간이나 불법으로 지배했으므로 몰수한 일본인의 재산으로 충족되는 한국 측 피해는 극히 일부에 불과하다고 할 수 있다. 그러므로 몰수한 일본인의 한국 내 재산으로 배상이 어느 정도 상쇄되었다는 주장은 터무니없는 주장이다.

 

 (5)에서는 일본이 일본 국민과의 형평상 살아 돌아온 생환자에 대한 보상은 불가능하다고 하는 것은 일본 측 입장에 불과하다. 일본은 가해자이기 때문에 살아서 한국으로 돌아온 한국인들에게는 당연히 보상과 배상을 해주어야만 한다. 2018년 10월 한국 대법원의 확정판결은 살아 돌아온 생환잗르이 낸 소송에 대한 선고였다. 일본이 피해당한 한국인에 대해, 특히 생환자에 대해 보상과 배상을 하는 것은 지극히 당연한 일이다. 더구나 1965년 청구권 협정에 생환자의 보상금이나 보상금이 포함되지 않았으니 개인이 기업에 배상금을 청구할 권리는 그대로 남아 있다.

 

 (6)에서는 1965년 4월 17일 이동원 - 시이나 합의로 개인 청구권이 소멸되었다는 주장이다. 하지만 그 합의는 당시 대한민국 정부의 입장일 뿐, 피해를 입은 당사자들의 입장이 아니다. 비록 국가에 의해 국민의 청구권이 소멸되었다고 해도 국민들이 동의하지 않으면 소용이 없다. 국가의 주체는 국민이기 때문이다.

 더구나 한일회담을 통한 국가 대 국가의 교섭에 있어서도 일본 정부는 한국 측에 성실한 태도를 보여주지 않았다. 일본 측은 한일회담에서 당초부터 한국 정부가 증거를 제출하지 않는다면 보상할 수 없다는 태도를 유지했다. 그래서 한국 정부는 법률관계와 사실관계를 밝히기 위해 일본 정부에 피징용자들의 피해 등에 관한 자료 제출을 요구했다.

 실제로 일본 정부는 당시 한일국교정상화를 준비하기 위해 각 기업에 명령하여 피징용자의 미불 임금 등에 대해 조사했다. 그 결과 일본 정부는 1953년 시점에서 각 기업의 피징용자에 관한 정보를 수집한 상태였다. 그 자료는 기업명, 미불금의 종류와 액수, 피징용자 인원수 등에 관한 정보였다.

 하지만 일본 정부는 그 자료를 한국 측에 넘겨주지 않았다. 주익종은 한일회담 당시 '애당초 한국 측이 청구할 게 별로 없었다'고 주장하지만, 그것은 일본 측이 자료를 은닉한 결과였다. 결국 일본 측의 불공평한 태도로 결정된 1965년 한일 청구권 협정 자체가 근본적으로 문제를 안고 있으므로, 일본 측도 1991년에는 개인 청구권이 소멸되지 않았음을 스스로 인정하게 되었다.

 

일본 정부는 개인 청구권을 인정했다.

 

 2018년 10월 한국 대법원의 판결이 확정되었을 때 당시 일본 외무상 고노 타로도 11월 14일 일본 국회 외무위원회에 참석해 개인 청구권이 남아 있음을 인정했다. 그런데 개인 청구권이 법적으로 구제받지는 못한다고 말을 바꾸었다.

 그러나 개인의 배상 문제가 1965년의 청구권 협정에 포함되지 않았음을 일본 정부는 역시 인정했다. 한국 대법원 판결에 대한 일본 정부의 견해는 일본의 국회의사록에서 다음과 같이 확인할 수 있다.

(201년 11월 14일 일본 국회 중의원 외무위원회 회의록 참고)*

 

 이상의 인용문을 보면 2018년 11월 시점에서도 일본 정부는 개인 청구권은 소멸되지 않았고, 배상 문제는 한일 청구권 협정에 포함되지 않았다고 분명히 인정했다. 그런데도 일본 측은 양국이 약속했기 때문에 재판에서 개인은 구제받지 못한다는 또 다른 주장을 내놓았다. 일본 측은 한국이 1965년에 일본과 맺은 약속을 어겼다고 강변하기 시작했다.

 일본 정부의 주장은 항상 국가 대 국가의 약속이라는 말로 마지막을 장식한다. 그러나 개인 청구권이 남아 있다는 뜻은 개인이 해당 기업에 보상이나 배상을 청구할 수 있다는 의미다. 더구나 이번 소송들은 한국인 피해자가 일본이라는 국가를 상대로 제기한 것이 아니라, 개인이 기업을 상대로 소송을 제기했다. 그리고 일제 강점기의 불법성에 의해 기업이 피해자들에게 불법 행위를 저지른 사실에 대한 배상을 대법원이 명령했기 때문에 국가는 이번 판결 문제에서 빠지고, 전범 기업들이 성실히 판결을 이행하는 것이 올바른 순서다.

 기업이 판결을 지키지 않는다면 기업의 한국 내 자산을 압류해 현금화한 뒤 피해자들에게 나눠줘야 한다. 그것만이 답이다. 한국 측의 판결 결과 집행에 대해 일본 정부가 한국에 대한 경제 보복을 다시 시작한다면, 그 결과는 일본의 국제적 고립으로 이어질 뿐이다.

 

 

(32%)

 미군의 포로 심문 보고서에는 다음과 같은 내용도 있다.

 그녀들은 '위안부'가 포로가 되었음을 보도하는 리플릿은 사용하지 말아 달라고 (미군에게) 요망했다. 그녀들이 포로가 되었다고 일본군이 알게 된다면 아마도 다른 곳의 '위안부'들의 생명이 위험해지기 때문이다.

 

 위와 같이 포로가 된 조선인 '위안부'들의 증언은, 군 위안소에 있는 조선인 '위안부'들이 언제라도 일본군에 의해 살해당할지도 모르는 상황에 놓여 있다는 것을 보여준다. 이는 일본이이 아닌 조선인을 비롯한 타민족 '위안부'들의 운명이었다.

 이 심문 보고서 내용은 그녀들이 일본군의 성 착취의 도구였고, 일본군이 적군에 밀리면 언제든지 증거 인멸을 위해 조선인을 비롯한 타민족 '위안부'들을 살해하고 도주할 수 있었다는 사실을 상기시키는 이야기다. 그런데 이영훈은 이런 부분을 인용하지 않고 철저히 외면했다. 그러면서 그는 다음과 같은 억지 주장을 했다.

 

 요컨대 미군의 심문기록은 위안소가 군에 의해 편성된 공창제로서 고노동, 고수익, 고위험의 시장이었음을 더없이 생생하게 뒷받침하고 있습니다.

 

 관련 연구자라면 모름지기 '위안부'들의 상황을 정확하게 파악해야 한다. 여성들은 취업 사기로 속아서 버마로 연행되었고, 본인이 원하지 않은 매춘을 강요당했지만, 전차금 때문에 도망갈 수 없는 상황에서 성을 착취 당했다. 계약 기간이 끝나면 귀국 허가가 나왔다 하더라도 계약 기간 중에는 폐업의 자유가 없었던 '성노예'였다는 것은 엄연한 사실이다.

 그러나 이영훈은 자신의 논리 - '위안부'들은 좋은 대우를 받았고, 돈도 많이 벌었으며, 자유롭게 지내며 폐업도 자유롭게 했으니 성노예가 아니었다 - 라는 논리에 유리해 보이는 부분만 인용했고, 자신의 논리에 맞지 않는 부분은 외면했다. 그와 같은 행위가 학자로서 올바른 태도인지 묻지 않을 수 없다.

 

(35%)

 한편 안병직은 박치근의 1943년 7월 29일 일기 일부분을 거론하며 일본군이 결혼을 위해 '위안부'를 폐업한 여성 2명에게 명령을 내려 다시 '위안부'로 삼은 실제 사례를 소개했다. 다음은 그날의 박치근 일기 전문이다.

 

 1943년 7월 29일 목요일, 흐리고 비

 인센 요마(Yoma) 거리의 무라야마 씨 댁에서 일어나 아침을 먹었다. 아라이 씨와 병참에 가서 콘돔을 배급받았다. 위안부 진료소에 가서 등록되지 않은 2, 3인의 위안부에게도 진찰을 받게 했다. 이전에 무라야마 씨 위안소에 위안부로 있다가 부부 생활하러 나간 하루요(春代)와 히로코(弘子)는 이번에 병참의 명령으로 다시 위안부로서 김천관에 있게 되었다더라. 중국인 거리에 들러 저녁에 인센으로 돌아와 저녁을 먹고 밤 1경에 자다.

 

 안병직은 '위안부'로 있다가 결혼해서 위안소를 나간 두 여성이 병참의 명령으로 다시 '위안부'가 된 사례를 거론하면서 '위안부'들이 자유롭게 폐업할 수 없었다고 인정했다.

 이처럼 '위안부'로 있다가 결혼하게 된 여성들이 병참의 명령으로 다시 '위안부'로 돌아온 경우는 어떤 경우일까. 생각하면 슬픈 일이다. 두 사람은 누구하고 결혼했을까? 다시 '위안부'로 돌아와야 한다고 명령이 내려졌을 때, 그녀들과 그녀들의 남편들은 그 명령을 어떻게 받아들였을까? 여러 생각이 교차하지만, 안병직은 다음과 같이 또 하나의 포로 심문 보고서를 인용하면서 전투지, 최전선에서의 위안소에서 폐업이 어려웠던 사실을 설명했다. 아래 인용문의 큰따옴표 안의 이야기는 미군의 포로 심문 보고서 '연합국 최고사령부 연합번역통역 조사보고'에 나오는 내용의 재인용이다.

 

 그리고 다 같은 버마라고 하더라도 전투지에서는 폐업이 더욱 어려웠던 것으로 보인다. 왜냐하면, 외국에서 일본군의 보호를 받지 못하면 위안부들에게는 위안소의 밖이 바로 지옥이기 때문이다. "어느 여자든 이자를 합하여 그녀의 가족에게 지불한 돈을 갚을 수 있을 때, 그녀는 조선까지의 무료귀환교통권을 받고 자유로운 것으로 간주되었다. 그러나 전쟁 상황 때문에 포로(미군에 체포된 포주)가 데리고 있는 그룹의 어느 누구도 지금까지 위안소를 떠나는 것이 허용되지 않았다. 1943년 6월에 제15군사령부가 빚으로부터 자유로운 그녀들을 고향으로 돌아가도록 주선했지만, 이런 조건을 충족하고 귀환하기를 원하는 여자도 머물러 있도록 쉽게 설득되었다.

 

 위의 인용문으로, 전쟁이라는 특수 상황 때문에 전차금을 다 상환하여 폐업할 수 있는 상황이 되었다 하더라도 '위안부'들은 일본군의 보호를 받지 못하게 될 조선으로의 귀환을 포기할 수밖에 없었다는 사실을 우리는 확인할 수 있다. 1944년 8월 10일 조선인 '위안부' 20명과 함께 미군 포로가 된 일본인 포주들에 대한 심문 보고서가 따로 있고, 그것이 위에서도 인용한 '연합국 최고사령부 연합번역통역 조사보고'인데, 이 보고서에는 그들이 생포되기 전에 "네 명은 여행 중에 죽고 두 명은 일본인 군인으로 오인되어 총살되었다"고 기록되어 있다. 그렇게 생명의 위협이 항상 존재하는 것이 최전선이었다. 그런 상황에 있던 최전선으로 강제연행된 조선인 여성들에 대해 이영훈처럼 단정적으로 '그녀들은 돈을 벌기 위해 갔다'고 말하는 것은 대단히 부적절하다.

 이와 같이 버마의 위안소에 끌려간 '위안부'들의 생활은 이영훈이 말하는 "어디까지나 위안부 개인의 영업"이 절대 아니었다. 이영훈은 이와 같은 내용이 담긴 『일본군 위안소 관리인의 일기』를 출판하기 위해 자신도 연구회에 참여했고, 자신의 연구소에서 출판한 이 책 내용과는 정반대의 주장을 태연하게 책 『반일 종족주의』에 서술하기까지 했다.

 이영훈은 "위안부들 역시 전쟁 특수를 이용하여 한몫의 인생을 개척한 사람들"이었다고 하면서 '위안부'들이 거금을 벌었다는 식으로 주장한다. 그러나 안병직은, 전시 하이퍼인플레이션을 생각할 때 버마에서는 매달 11~14%의 인플레이션이었으므로 가장 많이 벌었다고 일본 우파가 야유하는 버마의 '위안부' 피해자 문옥주 씨의 경우에도 1943년 4월부터 1945년 9월까지 번 돈이 약 26,000엔이었지만 그 금액은 인플레이션으로 결국 500~1,000엔의 가치밖에 없었다고 하면서, 문옥주 씨의 예금통장에 관한 고바야시 히데오 교수의 현재 금액으로의 환산을 소개했다. 안병직은 그런 화폐를 해외에서 조선으로 송금할 때와 조선에서 인출할 때는 상당한 제약이 있었을 것이므로 '위안부'들이 돈을 많이 벌었다고 할 수 없다고 덧붙였다. 그리고 군인들은 위안소를 이용할 때 군표를 사용했는데, 군표가 패전으로 휴지 조각이 되어, 결국 패전까지 '위안부업'을 한 여성들은 한 푼도 벌지 못한 것이 사실이다.

 한편, 문옥주는 그녀가 고생해서 저축해 고향으로 송금한 우체국예금을 끝내 돌려받지 못했다. 문옥주는 그녀를 돕는 모리카와 마치코와 함께 일본의 우정성에 예금 지급을 요구하는 운동을 시작했다. 그러나 우정성은 1965년 한일 청구권 협정으로 모두 끝난 일이라고 해서 예금 지급을 거부했다.

 일본의 우파는 문옥주처럼 위안부들은 돈을 벌기 위해 자발적으로 '위안부'가 된 매춘부라고 주장한다. 이영훈의 주장도 이에 가깝다. 그러나 '제4차 위안단'의 조선인 '위안부'들은 조선총독부의 계획하에 취업 사기로 모집되었고, 부상한 병사를 대상으로 간호사처럼 일한다는 말에 속아서 버마까지 갔다. 그렇게 해서 그녀들은 본인의 의사에 반해 성매매를 강요당했다.

 전차금을 받았기 때문에 그녀들은 구속된 상태였고, 계약 기간 동안 '성노예'였다. 그녀들이 돈을 벌기 위해 해외로 간 것은 사실이지만, 매춘을 하리라고는 전혀 생각하지 않았다. 최전선까지 데려간 후 이제 도망갈 수 없으니 매춘을 해야 한다고 강요하는 수법은 사람으로서 할 짓이 아니다. 일본군과, 군에 고용된 포주들은 태연하게 여성에 대한 인권유린을 저지른 것이다.

 전차금을 모두 상환해서 고향으로 귀국해도 좋다는 허가가 내려져도 그녀들은 최전선이라는 특수 상황 때문에 생명의 위험을 무릅쓰면서까지 귀국할 수는 없었다. 결국 조선인 '위안부'들은 계속 일본군에 구속된 상태가 되었다. 최전선으로 배치된 것이 조선인 '위안부'들의 특징이다. 일본인 '위안부'들은 보다 안전한 후방 지역에 있었다는 다음과 같은 조사 기록이 있다.

 

 후방지역에서는 위안소에 일본인 여자들도 있었는데, 예컨대 메이묘(Maymyo)에는 8개 위안소 중에서 일본인 위안소가 둘이 있었으나, 거기로부터 전방에는 일본인 위안소는 없었다.

 

 위에 인용한 연합군의 조사 기록에 의하면 일본인 '위안부'들은 조선인 '위안부'들보다 안전한 후방 지역에 배치되었다. 모든 지역에서 그랬다면 일본군은 조선인 '위안부'들을 최전선에 배치했다는 민족적 차별을 자행했던 것이다. 아무도 자발적으로 가지 않는 최전선에 일본군과 조선총독부가 선정한 포주들이 조선인 여성들을 취업 사기로 속여서 연행했다는 사실이 조선인 '위안부'가 자발적으로 '위안부'가 된 게 아니라는 진실을 말해주고 있다.

 그런 진실을 왜곡하는 일본 우파나 한국의 신친일파들은 하늘이 용서하지 않을 인권유린주의자들이다.

 

(49%)

 미즈시 시게루는 자신이 그린 만화책 『카란코론 표박기 게게게 선생 만히 말한다』 중에서 「종군위안부」라는 제목으로 8페이지에 걸쳐 파푸나 뉴기니 코코포에서의 경험을 상세히 소개했다.

(해당 만화를 소개한 포탈 글을 Link)

http://m.todayhumor.co.kr/view.php?table=bestofbest&no=401932

 

미즈키 시게루의 종군위안부 만화

미즈키 시게루가 그린 종군위안부 관련 에세이 만화가 있길래, 번역. 소개해 본다.코믹 에세이 종군위안부(従軍慰安婦) (카랑코롱 표박기 中)전시중, 전쟁터의 병사들 사이에서는 종군위

m.todayhumor.co.kr

 

 

(88%)

 문재인 정부는 위안부 합의를 파기하지 않았다.

  『반일 종족주의』 3부 '종족주의의 아성, 위안부'에서 이영훈은 "예컨대 박근혜 정부는 일본 정부와 이 문제를 최종적으로 완전히 청산한다는 협약을 체결하였습니다. 그렇지만 문재인 정부는 이를 파기하였습니다"라고 썼다. 그러나 이 주장은 크게 틀린 말이다. 결론부터 말하면, 문재인 정부는 일본과의 위안부 합의를 파기하지 않았다.

 2018년 1월 9일 문재인 정부는 위안부 합의에 대한 검증을 실시하여 후속 조치를 발표하면서 일본 정부에 파기라든가 재협상을 요구하지 않겠다는 입장을 분명히 했다. 2015년 12월 28일 한일 두 나라가 맺은 위안부 합의가 양국 간의 공식 합의였으므로 이를 일방적으로 파기하거나 재협상을 요구하지 않겠다는 뜻이었다. 그러나 문재인 정부는 이 합의로 위안부 문제가 다 해결되었다고는 생각하지 않는다고도 했다. 이 견해는 위안부 합의 이후 UN 인권위원회가 줄곧 견지해온 견해와 동일하다.

 그 후 2018년 11월 21일 한국의 여성가족부는 위안부 합의헤 의해 설립된 화해치유재단 해산의 법적 절차에 들어간다고 공식 발표했다. 화해치유재단은 한일 위안부 합의에 입각해 '한국 정부가 위안부 피해자들의 지원을 목적으로 하는 재단을 설립하고, 이에 일본 정부가 일본 예산으로 자금을 일괄 거출한다'는 약속에 따라 2016년 7월 서울에 설립되었다.

 일본이 출연한 기금은 10억엔(약 103억원)이었다. 재단의 임무는 위안부 피해자 및 유족에게 현금을 지급하는 것이었고, 재단은 해산 결정 시검에서 피해자 34명, 사망자 58명(유족이 대신 기금 수령)에게 총 44억 원의 '상처 치유금'을 지급했다.

 그런데 문재인 정부가 화해치유재단을 해산한 것은 위안부 합의를 파기하기 위해서가 아니었다. 재단 이사장들과 이사들이 모두 사임하여 5명의 직원만 재단을 지키는 상황에서 재단 유지비용만 들어가는 낭비를 막기 위해서였다. 그런 다음 문재인 정부는 남은 59억 원 정도의 일본 지원금을 일본 정부와 협의해 적절하게 사용하겠다고 발표했다.

 따라서 이영훈의 '문재인 정부가 (위안부 합의를 ) 파기했다'는 주장은 엄연한 거짓이다. 화해치유재단을 해산하여 한일 위안부 합의 파기를 주장해온 것은 문재인 정부가 아니라 '위안부' 피해자 여성들과 지원 단체들이다. 피해자들을 지원하는 나눔의 집은 논평을 통해 "피해자를 철저히 배제한 채 한일 정부가 정치적 야합으로 발족한 화해치유재단의 해산 소식에 나눔의 집 일본군 '성노예' 피해 할머니 모두 기뻐했지만, 일본이 보애 온 10억 엔 처리 문제는 여전히 남아 있다"며 "피해자들 요구대로 일본이 보내온 10억 엔의 조속한 반환을 바라며 이를 바탕으로 2015년 한일 위안부 합의안을 파기 또는 무효로 하는 데 정부가 힘써주기를 바란다"고 밝혔다. 이와 같은 나눔의 집 논평을 봐도 위안부 합의 파기를 원하는 것은 문재인 정부가 아니라 피해자들이었다.

 나눔의 집에 따르면 이옥선 할머니는 "일본의 돈을 받아 재단을 설립한 것은 이전 정부가 할머니들을 도로 팔아먹은 것과 같다. 이제라도 해체돼 다행"이라고 말했고, 강일출, 박옥선 할머니 등도 "일본의 사죄도 받을 수 있도록 정부에서 힘써 주었으면 좋겠다"고 하면서 "일본이 보낸 돈 10억 엔도 하루빨리 돌려주길 바란다"고 했다.

 이영훈은 사실을 왜곡하여 문재인 정부가 위안부 합의를 파기했다고 주장했다. 하나하나 왜 사실대로 정직하게 쓰지 않고 일부분만을 취해서 그럴싸하게 거짓을 만들거나 왜곡시켜 사람들을 현혹시키는 걸까?

 

(89%)

 지금부터는 필자의 일제강점기에 대한 견해를 밝히고자 한다.

 1905년 11월 일본 제국주의는 한국과 강제로 을사늑약을 체결했다. 그로 인해 한국은 일제에 외교권을 박탈당했고, 일본은 한국을 자신들의 보호국으로서 침탈해버렸다. 한국의 많은 역사학자들처럼 필자 역시 을사늑약 자체가 무효라는 입장이다. 을사늑얀에 고종 황제의 옥새가 찍혀 있지 않았기 때문이다.

 당시 대한제국은 국회가 없어서 황제의 윤허로 국가의 대사가 결정되었다. 그러므로 외국과의 조약 승인 절차에는 반드시 황제의 인가가 필요했다. 따라서 인가를 의미하는 옥새가 찍혀 있지 않았다는 것은 그 조약이 무효임을 뜻한다. 또한 을사늑약을 비롯하여 을사늑약 체결이 토대가 되어 조인된 19010년 8월의 한일병합조약도 당연히 무효이다. 원천적으로 무효인 협정이나 조약이 1945년 8월 15일 일본 패전까지 유효인 것처럼 시행되었다.

 일본 측은 독도가 1905년 2월 22일에 시마네현 오키섬에 편입되었으므로 을사늑약 체결 이전의 문제라며 독도가 일본 영토라고 주장한다. 하지만 그것은 일본 국내법으로 볼 때만의 이야기다. 독도가 일본 영토가 되었다고 일본이 한국에 알린 시점이 1906년 3월이었다. 을사늑약 체결 이후이므로 국제법상 독도 편입 자체가 무효다

 1910년 8월 22일 한일병합조약 체결, 8월 29일의 조약 시행 이후 이루어진 한국에 대한 강제 동원, 일본군 '위안부' 강제연행, 침략 전쟁을 위한 한국인 지원병 모집이나 한국인 징병제 등도 모두 원천적으로 무효다. 을사늑약이나 한일병합조약 자체가 불법이자 무효이기 때문이다.

 1965년 6월 22일 체결된 한일기본조약 제2조에는 한국과 일본 간에 "1910년 8월 22일 이전에 체결된 모든 조약 및 협정은 이미 무효"라고 기재되어 있다.

 이 조문은 1910년 8월 22일 체결된 한일병합조약을 비롯해 그 이전에 체결된 한일 간의 모든 조약과 협정이 원천적으로 무효라는 뜻이다. 그러나 일본은 이 조문을 패전한 1945년 8월 15일 이후부터 모든 조약과 협정이 무효라고 해석한다. 그것은 일제강점기를 합법으로 정의하고 싶은 일본의 입장일 뿐이다. 또한 일본 법원은 일제강점기 자체는 합법이라는 입장을 유지한 채 한국인 피해자들이 제소한 재판을 기각하거나 한국 측을 패소하게 만들었는데, 이 역시 일본 측 입장에서 선고된 판결에 불과하다.

 한국 측의 법적 입장은 일제강점기가 어디까지나 '불법'이고, 당시의 조약 및 협정이 원천적으로 무효라는 것이다. 그렇기에 한국 대법원이 일제강점기의 불법성을 거론하면서 일제강점기에 벌어진 한국인 강제 징용자에 대한 일본 기업의 불법성을 이유로 일본의 전범 기업에 유죄를 선고한 것은 당연한 귀결이다. 한국 내의 법적 입장을 반영한 판결이므로 다른 나라가 개입하는 것은 부당하다.

 그리고 일본군 '위안부', 한국인 학도병과 한국인 징병자 문제도 모두 일제강점기에 일제의 침략이 원인이 되어 생긴 문제이므로 죄다 불법이다.

 이처럼 한국의 입장이 분명한데도 신친일파들은 일본 측 입장을 옹호한다. 여기는 한국이다. 당연한 말이지만 한국의 법이나 관습이 통하는 곳이다. 예를 들면 싱가프로에서는 여성에 대한 성폭력 범죄는 태형에 처해진다. 맞다가 엉덩이가 찢어지면 상처가 회복된 후에 다시 형을 속행한다. 외국인에 대해서도 똑같이 형을 집행한다. 이렇듯 어느 나라든 자국의 법이 적용된다.

 한국에는 한국법이 있다. 그런데도 한국에서 일본법을 주장하는 사람들이 있다는 것은 아이러니하다. 자국을 침략한 나라를 옹호해주고 이상한 논리로 침략국을 참싸는 데도 그것이 옳다고 한다면, 자라나는 아이들이 무엇을 배운단 말인가.

 신친일파 청산은 국가의 존망과도 연결된다. 친일 청산은 반드시 이뤄져야 하고 신친일파의 잘못된 사상도 바로잡아야 한다.

 아베의 경제보복 조치로 촉발된 반일의 분위기에 어느 정도 편승한 책이라는 감이 있다.

저자의 일본 생활(어느 정도 살았는지에 대한 정보는 책에서 찾을 수는 없다.)에서 경험한 일본의 표리부동한 면과 아베 정권 이후 극우로 흐르는 일본의 분위기를 전하는 점에서 의의가 있을 듯 싶다.

뒤로 갈수록 계속 하던 말을 반복적으로 하며 내용은 빈약해지는 감이 있다. 아마도 물들어 올 때 노젓는다는 심정으로 쓴게 아닐까 싶게 뒤로 갈수록 마무리가 아쉽다.

요즘 한일 갈등 국면에서는 그래도 일독의 가치가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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p22. 일본에게 대한민국은 철저한 을이다.

 일본이 다른 나라에게 절대 사과하지 않는 두 번째 이유, 이른바 '갑을 문화' 때문이다. 일본은 갑과 을로 관계를 명확히 가르는 성향이 있다. 말 그대로 갑은 을에게 어떤 행위를 해도 용납이 되는 이른바 '갑질'의 주체라고 할 수 있다. 반대로 을은 갑의 의사에 반하는 어떤 행동도 해서는 안된다. 설사 갑의 의견 혹은 요구가 틀린 것이라고 해도 말이다. 이처럼 일본에는 을에게 불합리한 선택과 행동을 강요하는 특유의 갑을 문화가 존재한다. 이는 세계에서 오직 일본인만이 갖고 있는 '종특', 다시 말해 종족 특성이다.

 일상에서 흔히 접할 수 있는 예를 들어보자. 일본인은 식당에서 나이에 상관없이 종업원에게 무조건 반말을 한다. 아주 어린 청년이 흰머리가 성성한 어르신에게 손가락으로 메뉴를 가리키며 거만한 태도로 "고레초다이(이거 저)"라고 외친다.

 우리로서는 전혀 이해하지 못할 상황이지만 일본에서는 흔히 볼 수 있는 모습이다. 아이러니한 사실은 종업원도 그것에 대해서 전혀 불편해하지 않고 당연하게 생각한다는 점이다. 손님과 식당 종업원이라는 '갑을 관계'가 확실히 성립이 됐기 때문이다.

 손님, 즉 '갑'으로서 식당을 방문한 이들도 자신들의 일터에서는 '을'로 취급받는 걸 당연하게 생각한다. 식당에서 어르신에게 "초다이"를 외치던 청년들은 자신들이 일하는 식당에서 똑같이 대우를 받는 걸 거리낌 없이 받아들인다. 손님의 언사를 아니꼬워하거나 자신보다 어린 학생에게 '왜 반말을 하느냐'고 따져 묻지 않는다. 한국, 아니 전 세계 어디에서도 볼 수 없는 일본만의 문화다.

 한 가지 더, 일본 남성은 부인 혹은 여자친구를 '오마에お前‘라고 부른다. '오마에'는 '너'라는 뜻으로 상대방을 하대할때 사용하는 단어다. 조금 더 자세히 설명하면 '앞 전 前'자를 써서 한국말로 하면 "어이, 거기 앞에 있는 놈"이라는 의미를 갖고 있다. 그런데 일본 남성은 부정적인 의미를 가진 '오마에'를 부인이나 여자친구를 부를 때 일반적으로 사용하는 것이다.

 이는 전통적으로 남자가 갑이고, 여자를 을로 취급한 일본 역사에서 그 이유를 찾을 수 있다. 일본 남성과 여성은 오래 전부터 갑을 관계가 확실히 정해져 있었다. 그래서 남성이 여성을 하대하는 걸 당연하게 생각한다. '잃어버린 10년'이라고 부르는 '버블시대' 당시 잠시 페미니즘이 득세했지만 그건 말 그대로 잠깐일 뿐이었다. 여자들 역시 자신이 '오마에'라고 불린다고 해서 그것을 전혀 불편하게 생각하지 않는다. 여자들도 자신이 을의 입장에 있다는 걸 인정하는 것이다.

 일본은 사장이 직원에게 함부로 대하는 것에 대해서도 당연하게 생각한다. 직원들은 별다른 불만을 얘기하지 않는다. 정치인들이 시행하는 정책에 대해서 크게 반대하지 않는 이유 역시 같은 맥락이다. 사장이든 정치인과 같은 '높으신 분'이든 그들 문화에서는 철저한 갑의 위치에 있는 사람이기 때문이다.

 제2차 세계대전에서 일본이 패망했을 때 한 미군 병사가 쓴 편지를 인터넷에서 읽은 적이 있다. 당시 일본은 가미가제 특공대를 필두로 끝까지 저항했기 때문에 미군 병사는 점령군으로서 일본에 상륙하면서도 굉장한 두려움을 갖고 있었다. 혹시 누군가 폭탄을 품에 안고 미군 주둔지에 오지는 않을까 밤에 잠을 자지 못했다고 한다.

 그런데 막상 일본에서 만난 일본인들은 너무나 예의 바르고 깍듯했다. 품 속 폭탄은커녕 자신들이 숨겨두 꿀단지까지 내놓을 만큼 납작 엎드린 태도를 보인 것이다. 전쟁에서 승리한 미군과 패망한 일본 사이에 '갑을 관계'가 형성된 까닭이다.

 만약 같은 상황에서 우리나라가 패했다면 미국은 우리의 철천지원수가 됐을 것이다. 우리나라 도시에 핵폭탄 두 방을 쏘는 바람에 죄 없는 수많은 시민들이 죽었다고 가정한다면 미국과는 평생 한 하늘을 이고 살지 못할 터다. 하지만 일본은 '찍소리'조차 하지 않는다. 전쟁에 이긴 미국은 갑이고 패배한 일본은 을이기 때문에 아무 말 없이 매우 친절하게 미군을 '받들어 모신 것'이다.

 이렇게 갑을 관계를 확실히 하는 일본인의 특성을 봤을 때, 일본이 우리에게 진정한 사죄를 하지 않는 서글픈 이유를 짐작할 수 있다. 과거 제국주의를 표방한 일본은 강력한 나라, 즉 갑이었다. 일본이 식민지로 삼았던 우리나라를 비롯한 아시아의 많은 국가들은 약한 나라, 즉 을이었다. 일본인이 생각하는 갑을 관계에서 한국은 철저한 을이기 때문에 강력한 갑이었던 일본에게 불만을 얘기할 수 없다고 생각하는 것이다.

 물론 일본인이 다른 나라에 사죄를 하지 않는 것은 '섬'과 '갑을 문화' 외에도 여러 가지 이유가 있을 것이다. 하지만 나는 이 두 가지야말로 근본적인 이유라고 확신한다. 일본인 기저에 깔린 가장 강한 본성이 바로 거기에서 비롯되는 것이라고 생각한다.

p31. 반려동물 살처분 세계 1위

 최근 우리나라에서는 모 동물권 단체 대표가 유기견을 무분별하게 안락사한 사실이 밝혀져 큰 충격을 안긴 사건이 발생했다. 반려동물 1000만, 관련 시장 5조 원 이상의 규모를 자랑하는 우리나라는 물론 반려문화가 완벽하게 정착된 미국과 해외 여러 나라에서도 한 생명의 삶을 인위적으로 끝내는 안락사에 대한 논란은 여전히 뜨겁다.

 그런데 일본은 안락사도 아닌 '살처분'을 세계에서 가장 많이 하는 나라로 악명이 높다. 일본에서는 한 해에 개 10만 마리, 고양이 20만 마리가 살처분된다. 매년 30만에 이르는 무고한 생명이 강제로 자신의 삶을 강탈당하는 것이다. 전 세계 어느 나라와도 비교할 수 없을 만큼 압도적인 수치다.

 참고로 우리나라는 모든 동물을 합쳐 약 2만 마리, 영국은 7000여 마리, 독일은 놀랍게도 0마리라고 한다. 여담이지만 독일에 비교하면 아직 우리나라의 반려동물 문화도 갈 길이 멀다고 생각한다. 

p36. 농약사용량 세계 1위

 전 세계에서 농약을 가장 많이 사용하는 나라는 어디일까? 언뜻 중국이나 미국을 떠올리기 쉽지만 일본이 농약을 가장 많이 사용한다. 좁은 땅덩어리에서 미국의 20배에 달하는 농약을 살포한다. '농약범벅'이라는 표현이 어울릴 정도다.

 아이러니하지만 우리나라 사람들은 이렇듯 농약으로 키워 가공한 일본 식품의 안전성을 강하게 신뢰하려는 경향이 있다. 쉽게 말해 '일본산 제품은 품질이 좋은 것'이란 막무가내식 편견에 사로잡혀 있는 것이다.

 물론 농약을 사용하는 것이 무조건 나쁘다고 할 수는 없지만, 무분별하게 사용하는 것은 많은 위험성을 내포하고 있는 것이 사실이다. 잠재적 위험에 대해 무관심으로 일관하는 일본의 또다른 이중성을 엿볼 수 있는 대목이다.

 p61.

 일본에서는 '탕 목욕 문화'가 일반적이다. 매일 탕에 따뜻한 물을 가득 채워 목욕을 하는 문화가 발달한 것이다.

 나는 시간이 오래 걸리고 과정이 복잡한 일본 탕 목욕 문화의 배경이 '청결함'에 있다고 생각했다. 하지만 일본인은 생각보다 청결하지 않다. 지금까지 점심시간에 양치를 하는 일본인을 본 적이 없다. 한국인은 점심식사 후 너도나도 양치를 하는 데 반해 일본인은 곧바로 업무에 들어간다. 여름철 대중교통을 이용할 때면 땀으로 범벅이 돼 매캐한 체취를 풍기는 사람들 때문에 눈물이 날 정도다.

 일본에서 탕 목욕 문화가 발달한 이유는 바로 비효율적인 난방 시스템 때문이다. 전기세가 높고 난방 시설이 미흡해서 따뜻한 물은 채운 욕조에 몸을 담그는 문화가 일반적으로 자리 잡은 것이다. 비싼 난방 비용을 감당하지 못해 선택한 궁여지책이다. 누군가 목욕을 마치고 나오면 "이제 몸이 따뜻해졌어?"라고 묻는 것도 같은 맥락이다.

 일본은 세계적으로도 손꼽히는 고물가 나라 중 하나다. 물론 아주 저렴한 프랜차이즈 덮밥집 같은 곳도 있지만 괜찮은 일본 레스토랑에서 한 끼 식사를 하는 비용을 원화로 계산해보면 깜짝 놀랄 정도로 비싼 경우가 많다. 2019년 현재는 한국의 일본 불매운동으로 인해 순위가 '떡락'했지만 지난해까지 '한국인이 선호하는 연휴 광광지 1위'에 선정된 오사카에서는 150그램도 안 되는 스테이크 한 덩이를 무려 4천 엔(약 4만 원)에 팔고 있을 정도다. "시간만 있으면 유럽을 가겠다"는 볼멘소리가 나오는 이유다. 

 경제주의를 체택하고 있는 나라는 모두 마찬가지겠지만, 일본은 특히 돈이 없으면 최소한의 인간적인 삶을 유지하기 힘든 곳이다. 돈으로 생활의 질이 결정되는 일본인들이 새삼 안타까워지는 순간이다.

 p69.

 나는 일본 도박의 현재가 '제2차 세계대전'과 맞닿아있다고 나름대로 결론을 내렸다. 일본이 전쟁에서 패배하고 미국 맥아더 장군이 일본에 상륙하는 동시에 GHQ(General Headquarter)라는 이름의 연합군 최고 사령부가 설치되었다. 이후 GHQ에서는 일본의 우민화 정책으로 여러 가지 방안을 내놓는데 그 중 '3S 정책'이 일본에 도박이 만연해진 역사와 관련이 있다.

 3S는 'Sex, Sports, Screen'을 의미하는데, 스크린에는 영화나 드라마뿐만 아니라 그 외 모든 오락도 포함된다. 즉, 도박 역시 3S 정책의 핵심 중 하나였던  것이다.

 미국의 3S 정책이 본격적으로 시행되자 일본인은 한층 더 국가에 순응하게 됐다. 도박을 유연하게 받아들인 것 역시 같은 맥락이다. 패전 후 어떤 방식으로든 경제를 살려야 했기에 국가 차원에서도 도박을 장려할 수밖에 없었다. 이래저래 도박 산업이 발전할 수밖에 없는 상황이었다.

 한 가지 놀라운 점은 200조 원에 이르는 일본 파친코 시장의 90% 이상을 점유하고 있는 게 바로 재일교포들이라는 사실이다. 일제강점기 시대에 일본으로 건너간 사람들로부터 역사가 시작된 재일교포는 직업을 선택할 때 제한을 받았다. 공무원은 물론이고 대기업은커녕 작은 기업에 취직하는 것도 낙타에게 바늘구멍처럼 극도로 힘들었다. 생존을 고심하던 재일교포들은 선택의 여지없이 파친코 업계에 뛰어들었다. 소프트뱅ㅋ크 창업자인 손정의 집안도 파친코를 경영했다. 당시 대다수 재일교포들은 주로 직업 선택의 제한 때문에 파친코를 비롯해 대부업, 연예계, 스포츠 등 일반적이지 않은 직업을 울며 겨자 먹기로 선택 할 수밖에 없었다.

 그런데 당시 재일교포들의 불가항력적인 파친코 업종 선택은 현재 아이러니한 상황으로 이어졌다. 파친코 사업으로 막강한 재력을 거머쥔 일본 재일교포들은 새로운 종교단체인 창가학회를 만들었고, 이를 기반으로 이후 공명당 창당에까지 이른 것이다. 현재 공명당은 일본 보수정당인 자민당과 연립정권을 세워 막강한 권력을 자랑하고 있다.

 일본 우익이 한국과 재일교포를 싫어함에도 불구하고 결코 무시할 수 없는 이유가 바로 여기에 있다. 미군의 우민화 정책과 재일교포의 불가피한 파친고 산업 투신이 비정상적인 현재로 이어진 모양이다.

 일본에서 도박 산업은 결코 사라지지 않을 것이다. 중독과 같은 위험성 여부를 떠나 일본 경제 자체를 지탱하는 기둥 중 하나인 까닭이다. 분명한 것은 일본의 도박 산업에서 우리나라가 배울 점은 단 하나도 없다는 사실이다.

 p94.  여성이라는 이유로 야유받은 정치인의 눈물

 일본 도쿄도 의원인 시오무라 아야카는 위원회에서 여성의 임신과 출산에 대한 의견을 말하는 도중 남성 의원들에게 집중적인 야유 세례를 받았다. 다른 남성 도의원들이 "그렇게 남자가 좋으면 너나 결혼해라", "그 나이에 임신은 가능하냐?"와 같이 선을 넘은 야유를 퍼부은 것이다. 결국 시오무라 아야카는 자신이 준비한 것을 모두 풀어내지도 못하고 눈물을 흘리며 단상에서 내려올 수밖에 없었다.

*(보충)2014년 6월14일 일본 지방의회에서 야당 소속의 시오무라 아야카 의원의 발언 도중 자민당 측에서 나온 야유성 발언으로 이슈가 됨(하기 해당 동영상), 이후 자민당에서 공식 사과를 했음. 

시오무라 아야카(塩村 文夏), 1978년 7월6일생, 그라비아 아이돌 출신으로 탤런트, 방송작가를 거쳐 정치에 입문. 이 사건으로 아이러니하게 지명도를 얻었으며 올해(2019년) 참의원선거에서 입헌민주당 소속으로 당선됨.

  이후 시오무라 아야카는 자신의 트위터에 "여성으로서 안타까운 야유를 들었습니다."라는 내용의 글을 올렸다. 하지만 이 게시물에도 남성들의 무차별적인 비아냥이 이어졌다. 국민이 뽑은 도의원이지만 남성과 여성이라는 성별 차이가 사회적 위치의 상하 가름으로 이어진 어처구니없는 사건이다.

 일본인의 이런 인권유린 사태는 비단 여성에게만 국한되지 않는다. 일본에서 장애인과 같은 사회적 약자에 대한 처우는 '인권 최빈국'이라는 평가조차 아깝게 느껴진다. 일본에는 구 우생보호법旧 優生保護法(1948년 제정, 1996년 모체보호법이라는 명칭으로 바뀜.) 이라는 말도 안 되는 법률이 20여 년 전까지 존재했다. 구 우생보호법은 제2차 세계대전 패전 후 베이비 붐으로 인구가 급격하게 늘어나며 식량 및 각종 물자가 부족해짐에 따라 유전병과 지적장애를 가진 아이를 출산할 가능성이 높은 사람을 대상으로 강제로 불임이나 낙태를 시킬 수 있는 근거로 사용했다. 쉽게 말해 '장애인 출산 가능성이 있는 사람에 대해 강제적으로 불임 및 낙태 수술을 시행할 수 있다'는 국가의 인식이 반영된 최악의 인권유린 법안인 셈이다.

 이로 인해 1945년부터 1996년까지 약 2만 5000명이 불임수술이나 중절수술, 정관수술을 받아야만 했다. 특히 이 중 1만 6500명 이상은 본인 동의 없이 국가가 강제적으로 각종 수술을 시행했으며 여기에는 9살 어린이도 포함되었다.

 일본이 아닌 다른 나라에서 이런 말도 안 되는 법률이 시행됐다면 진즉 폭동 수준의 강렬한 시위가 전국적으로 일어났을 것이다. 하다못해 소송을 통한 거액의 피해보상이라도 받을 수 있었을 터다.

 하지만 일본에서는 지난해 여성 피해자 2명의 소송으로 불거진 구 우생보호법 관련 재판의 판결이 엉뚱하게 나왔다. 한 사람당 7천만 엔(약 7억 원)을 배상해달라는 소송에 대해 일본 법정은 "구 우생보호헙은 행복을 추구하는 권리 등을 정해놓은 헌법 13조를 위반한 위헌이지만 국가의 배상 책임은 인정하지 않는다."는 판결을 내렸다. (일본의 사법체계를 그대로 따라온 대한민국의 사법부가 개판인 이유)

P100

 현재 일본 취업시장이 호황인 건 사실이다. 하지만 결코 아베노믹스 효과 때문은 아니다.

 일본에서는 '단카이 세대'라고 부르는 1945년 전후 출생자의 은퇴가 수년 전부터 이어지고 있다. 이들은 이른바 '베이비부머 세대'에 해당하며 매년 200만 명가량 은퇴를 하고 있다. 일할 사람이 물리적으로 부족해진 것이다.

 반면 매년 취업시장에 유입되는 젊은 층의 수는 100만 명 정도에 불과하다. 은퇴하는 단카이 세대의 절반 수준이다. 기업에서는 당장 2명의 직원이 필요한데 뽑을 수 있는 후보자가 1명뿐이니 능력이나 인성과는 상관없이 일단 채용하고 보는 것이다. '구직 희망자'가 품귀현상을 보이는 현재 일본에서는 누구나 쉽게 취업할 수 있다. 통계의 허점을 아베 정부가 교묘하게 자신들에게 유리한 방향으로 이용한 것이다.

 이 같은 현상은 앞으로 더욱 심화될 전망이다. 일본의 인구는 날이 갈수록 줄고 있다. 출생자보다 사망자가 월등히 많을 정도다. 인구 감소는 곧 국가 경쟁력 하락으로 이어질 가능성이 높기 때문에 많은 전문가는 일본의 경제력 또한 점차 악화될 것이라는 예측을 내놓고 있다.

 수년 사이에 일본으로 입국하는 해외 노동자가 급격히 늘어난 것도 같은 맥락이다. 별다른 스펙이 필요하지도, 뛰어난 능력을 요구하지도 않는 현재 일본은 취업에 힘겨워하는 해외 젊은층이 훌륭한 차선책으로 여기고 있다. 내가 교수로 재직했던 사이타마현의 모 대학교에는 수년째 취업률 99% 이상을 기록하고 있다. 한국, 중국, 베트남 등 국적을 가리지 않고 내가 직접 가르친 유학생들 모두 예외 없이 취업에 성공했다. 성적표를 C로 도배해도 취직에는 아무 문제가 없다. 과장을 조금 보태면, 정신적으로 문제만 없으면 무조건 취직이 된다고 표현해도 될 정도다.

 한국에서는 목숨처럼 여기는 스펙도 필요치 않다. 내가 담당한 학생들은 토익시험을 본 적도 없다. 유학생은 JPT, JLPT 2급만 따도 취업이 되고, 1급을 따면 좋은 조건으로 회사가 '모셔가는' 수준으로 채용이 된다.

 일본의 취업 기준은 한국에 비해 굉장히 낮다. 일본 대학 중 수준이 낮은 곳의 토익 평균은 겨우 400점대다. 600점만 되면 대기업 취직이 가능하다. 한국에서는 800점은 넘어야 겨우 명함을 내민다고 하는데, 일본에서는 800점을 넘으면 거의 미국인과 동급으로 대우받을 수 있다. 

 컴퓨터를 다루는 능력도 턱없이 부족하다. 집에 컴퓨터가 없는 대학생도 흔할 정도다. 스마트폰으로 타이핑한 후 학교 컴퓨터로 프린트를 해서 과제를 제출하는 학생들도 많이 봤다.

 한국에서는 평균 스펙을 가진 대학생도 일본에 오면 엘리트로 인정받는다. 그만큼 대부분의 분야에서 수준이 매우 낮다.

 게다가 일본 청년들은 성공에 대한 의욕도 없고, 돈을 벌고 싶은 마음도 없다. 설사 대기업에 취직을 해도 해외 주재원이 되는걸 꺼린다. 적은 급여로 힘겨워도 자신만의 루틴으로 이뤄진 일상을 유지하면 된다는 '적당주의'가 팽배해 있는 까닭이다.

 물론 모든 직장이 대기업처럼 복지나 급여가 만족스러운 것은 아니다. 일부 열악한 조건의 직장에 취업하는 경우도 꽤 많다. 하지만 우리나라처럼 취업 자체가 힘든 것은 아니다.

 문제는 취업 후에 직면한다. 일본 평균 초봉은 약 20만 엔 선, 우리나라 돈으로 200만 원 정도다. 세금을 제외하면 17만 엔 정도가 신입사원 손에 쥐어진다.

 만약 부자 부모 덕분에 자가로 사회생활을 시작한 경우가 아니라면, 매달 일정 금액의 월세를 감당해야 하는 팍팍한 삶이 기다리고 있다. 도쿄 시내에서는 정말 코딱지만 한 원룸도 월세가 최소 5~6만 엔이다. 세금과 월세를 빼면 12만 엔(약 120만 원) 정도가 통장에 남는 셈이다.

p152.

 그런데 왜 일본은 우리나라 영토를 대상으로 자꾸 분쟁을 일으키는 것일까? 꽤나 많은 부분을 정치적 이유가 차지하겠지만, 일본인 중에는 독도가 실제로 자기네 영토라고 생각하는 사람이 많다. 우리나라가 완벽하게 실효지배하고 있는 독도가 국내법적으로는 전혀 문제가 없는데, 왜 일본은 존재하지도 않는 문제를 애써 만들어내는 것일까?

 숨겨진 속내는 국내 법적으로 한국이 실효지배하고 있는 독도를 분쟁지역화해서 국제적 문제로 키우고자 하는 것이다. 국제적 분쟁을 담당하는 국제사법재판소ICJ(International Court of Justice)에 소속된 전/현직 일본인 재판관은 이와사다 유지, 오다 시게루, 다나카 코타로, 오와다 히사시 등 무려 4명이다. 특히 마지막으로 언급한 오와다 히사시란 사람은 현재 일본 왕비인 마사코의 친아버지로, 2012년까지 국제사법재판소 소장을 역임했고 이후 2018년까지 재판관으로 재임했다. 이처럼 국제사법재판소에서 일본의 영향력은 굉장히 크다. 일본이 국제사법재판소에 많은 자금을 지원하고 있기도 하다. 이에 비해 한국은 아직까지 국제사법재판소의 재판관을 배출하지 못했다.

 바로 이것이 일본이 국제사법재판소로 독도영유권 문제를 끌고 가려는 의도다. 일본은 장기적인 관점에서 한국의 독도를 분쟁지역화라혀는 다향한 프로젝트를 꾸준히 추진하고 있다.

 국내 법적으로 실효지배를 하고 있다면 아무 문제가 없지만, 영토분쟁의 상대 국가가 계속 이의를 제기하면 해당 지역이 '점유지'가 된다는 사실을 파고든 것이다. 일본이 지금처럼 끊임없이 독도에 관한 논란을 일으키면 '실효지배'가 아니라 '점유지'로 인식되기 때문에 국제사법재판속의 판단을 받아야 할 경우가 생길 수도 있다.

 국제사법재판소에서 강력한 영향력을 행사하는 일본이 독도를 자꾸 국제적 문제로 키우려고 하는 수작인데, 우리가 이에 반응하면 일본의 의도대로 되는 것이다. 나는 이러한 일본의 독도 분쟁지역화 시도에 대해 '무반응'으로 일관하는 게 좋다고 생각한다.

p175.

 경제보족 조치는 종교적으로도 악영향을 끼쳤다. 앞서 '도박 천국 일본'에서 다룬, 아베 총리와 자민당과 함께 연립여당을 구성한 '공명당'의 모체는 창가학회(Soka Gakkai International)라는 종교단체다. 창가학회는 세계 평화를 기본 철학으로 삼는다. 특히 한일관계와 평화를 중시하는 창가학회는 '일한관계', '일한평화'와 같이 일본을 단어 앞에 놓는 다른 일본인들과 달리 '한일관계', '한일평화'처럼 한국을 우선한다. 한국을 존경해야 하는 형님과 같은 존재라고 생각하는 것이다. 이처럼 한국에 우호적인 이유는 창가학회의 기둥이 재일교포에 있기 때문이다. 창가학회는 재일교포의 재력과 노력으로 유지되고 있는 종교단체라고 할 수 있다.

 우리나라 불매운동의 시작점인 '유니클로'의 야나이 회장은 대표적인 창가학회 신자다. 야나이 회장은 한국에 굉장한 호감을 가진 인물로 유명하다. 실제로 일본 본사에서 한국인 직원을 많이 뽑고 있으며 야나이 회장은 아베 정권에 대해 비판적인 의견을 내고 있는 사람이다. 다이소 역시 창가학회 계열의 기업이다.

 물론 "유니클로나 다이소의 회장은 한국을 사랑하는 창가협회와 공명당의 회원이니까 불매운동을 하지 마라"라는 말을 하겠다는 게 절대 아니다. 개인적으로는 현재 한국이 불매운동을 적극적으로 지지하고 있다는 걸 분명히 밝힌다.

 다만 이들 기업이 한국에서 입는 경제적인 피해를 연립여당인 공명당이 대변할 가능성이 있다는 점을 설명하고자 한다. 공명당은 원래부터 자민당이 헌법을 개헌해 전쟁이 가능한 나라를 만드려는 시도를 극렬하게 반대한 정당이다. 공명당과의 연정 덕북에 자민당이 현재의 힘을 가졌지만, 반대로 공명당이란 존재 덕분에 자민당의 폭거를 막을 수 있었던 것이다. 

만약 한국의 불매운동이 이들 기업에게 더 큰 피해를 입힌다면, 공명당에서는 어떤 방식으로든 자민당을 압박할 가능성이 높다. 부가적으로 창가학회 회원들의 지지도 떨어져 나갈 게 뻔하다. 다시 말해 우리의 불매운동은 계속돼야 한다는 의미다.

 일본에서는 재일교포의 힘이 매우 강하다. ABC 마트의 창업자 미키 마사히로도 재일교포로 본명이 강정호로 밝혀졌다. 이외에도 재일교포 자본의 일본계 회사는 다 열거하기 힘들 정도다. 소비자 금융(대부업), 도박산업, 서비스산업 등 일본에서 재일교포들의 경제력은 엄청나다. 일본의 돈줄을 쥐고 있다는 표현이 그리 틀리지 않다.

 이번 경제보복 조치로 인해 발동한 불매운동 탓에 재일교포들이 피해를 입게 됐고, 이들이 한목소리로 아베 정권에 불만을 내뱉을 가능성이 높아지고 있다. 아베의 현재 상황은 그야말로 사면초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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