행복에 대한 물음으로 시작해서 의식의 질서를 유지하는 상태가 궁극적인 행복에 이르는 길이라는 발견을 한 저자가, 그렇다면 의식의 질서를 유지하는 상태는 어떻게 우리에게 다가오는가에 대한 고민에 대한 30년간의 연구 결과를 정리한 책. 긍정 심리학이라는 분야를 창시한 위대한 저서일 듯 하다.
이번이 3번째 완독인데 읽을 때마다 새로운 깨달음을 주는 책이다.
이 책을 한마디로 표현하자면, 진지한 인생을 살고자 할 때 어떻게 해야 하는가에 대한 총체적 방법론이라 할 수 있다.
이 책은 고전으로 남을 것 같다. 사실 이미 고전의 반열에 올랐다고 할 수 있을 듯 싶다.
핵심적인 내용은, 몰입이란 자의식을 가진 상태에서 의식의 질서가 유지된 상태이다(예를 들어 저자의 표현에 의하면 마약을 해도 의식의 질서가 유지되는데, 이것은 자의식을 가진 상태에서 이루어지는 것이 아니다).
의식의 질서(쉽게 말해서 평정심을 가지고 무언가에 집중된 상태를 의미한다)는 외부적 요인(사람, 상황,...)에 의해서 도전을 받게 되면 유지 상태가 깨지면서 혼란,불안과 같은 부정적 감정을 경험한다. 이런 부정적 감정을 극복해 나가면서 자신의 정신적(육체적인 면도 중요하지만 주로 이 책은 정신적인 면을 다룬다)인 평형상태를 유지하면서 자기 목적적인 인생을 구축해나가는 방법론을 다루고 있다.
이 책에서 다루는 몰입의 과정과 그로 인해 얻은 긍정적 효과는 인생의 전 과정에서 반복되는데, 주로 이런 과정을 통해서 몰입의 과정을 통과한 사람은 복합성의 단계를 높여나간다. 복합성은 쉽게 말하자면 RPG게임에서 레벨(업)과 같은 개념으로 보면 된다. 게임 초반에는 게이머의 레벨도 낮지만 해결해야 할 미션 또한 쉽다. 레벨업이 되면서 그에 걸맞게 난이도가 높여진 미션이 나오게 되는 것처럼, 인생의 난관을 극복해나가면서 복합성이 높아진다는 개념이다.
몰입은 자신의 능력에 걸맞는 적절한 난이도의 도전과제가 주어질 때 얻어진다는 측면은 게임의 난이도가 적절해야 게임이 재밋는 것과 비슷하다.
좋은 책에도 여러가지 효용들이 있다. 지식을 효율적으로 전달하는 책, 노하우를 전달하는 책, 인생관을 바꾸는 책 등등.
이 책은 좋은 책의 거의 모든 효용들을 체감할 수 있는 매우 훌륭한 책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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서문 중.
이 책은 행복하게 살 수 있는 단순한 요령 따위를 제시하는 책이 아니다. 사실 그렇게 한다는 것은 불가능하다. 왜냐하면 즐거운 인생이란 어떤 요령을 따라서라기보다는 개개인이 창조적으로 만들어 가야 하는 것이기 때문이다. 이 책은 요령을 제시하기보다는 사람들이 따분하고 무의미한 삶을 기쁨이 충만한 삶으로 바꾸기 위한 일반적인 원리들과 이러한 원리들을 자신의 삶에 접목시킨 구체적인 예들을 제시할 것이다.
이러한 삶을 만들어 가는 데 지름길은 없다. 그러나 이 주제에 깊은 관심을 가지고 있는 독자라면 틀림없이 이 책에 담겨 있는 이론들을 끄집어 내서 자신의 삶을 변화시키기 위한 정보로 충분히 활용할 수 있을 것이다.
1장. 행복, 다시 생각해 보기(Happiness Revisited)
p25
"행복이란 것은 우연히 찾아오는 것이 아니다."
바로 이것이 나의 '발견'이다. 행복은 운이 좋아서라든지 어쩌다 생긴 기회의 산물이 아니다. 돈이나 권력으로 얻을 수 있는 것도 아니다. 행복은 외부에 있는 사물에 의해서 좌우되는 것이 아니라 오히려 우리들이 이것들을 어떻게 해석하는가에 달려 있다. 실제로 행복은 우리가 준비해야 하고, 마음속에서 키워가야 하며, 사라지거나 빼앗기지 않도록 스스로 지켜내기도 해야 하는 특별한 것이다. 자기 내면의 경험들을 조절할 수 있는 사람들은 삶의 질을 결정할 능력이 있는 것이다.
그러나 행복은 의식적으로 찾는다고 해서 얻어지는 것은 아니다. "네 스스로에게 지금 행복하냐고 물어보는 순간, 행복은 달아난다"고 철학자 밀은 말했다. 행복을 직접적으로 찾을 때가 아니라 좋든 싫든 간에 우리 인생의 순간 순간에 충분히 몰입하고 있을 때만이 행복은 오는 것이다. 오스트리아의 심리학자 빅터 프랭클은 『삶의 의미를 찾아서』라는 책에서 다음과 같이 말하고 있다.
"성공에 집착하지 마라. 성공에 집착할수록 성공하지 못할 가능성이 높아진다. 행복과 마찬가지로 성공이란 것도 의식적으로 얻으려 한다고 해서 구해지는 것이 아니다. 성공은 자기 자신의 이해보다 더 큰 목표에 헌신할 때에 얻어지는 부산물일 뿐이다."
p28
자기의 인생을 통제할 수 있는 힘을 갖는다는 것은 절대 쉬운 일이 아닐 뿐더러, 매우 고통스러운 일이 될 수도 있다. 그러나 이러한 최적 경험들을 하나둘씩 축적하다 보면 어느덧 자기가 인생의 내용을 차곡차곡 채워나가는 과정에서 소외되지 않고 주인의 역할을 하고 있다는 느낌을 갖게 될 것이다. 내 인생의 주인공은 나라는 강렬한 자각, 바로 이러한 느낌이 우리가 염원하는 행복에 가장 가까운 상태가 아닐까?
p32
모든 가치 있는 모험이 쉬운 것이 아니듯 지적인 노력 없이, 또 자신의 경험에 대해서 깊이 반성하고 숙고해 보려는 각오 없이는 이 책을 통해서 많은 것을 얻지 못할 것이다.
▶ 책의 내용을 음미하고 곱씹어보고, 내가 겪었던 인생의 경험에 비추어 반추해보고 그것으로부터 얻는 교훈들을 체화하면서 이를 개선하고자 하는 의지를 굳건히 하고 뚜렷한 목표를 세우고 이를 실천하고 피드백, 반성, 개선해나가는 노력이 없이 책만 읽는 것처럼 헛된 것은 없다.
p33
내적 경험의 최적 상태는 의식이 질서를 가지고 움직일 때이다. 이 최적 상태에서는 우리의 심리적 에너지의 주의가 구체적인 목표에 집중적으로 투자되며, 우리가 갖고 있는 기술(능력)이 최적의 상태로 활용된다. 목표를 추구할 때 우리는 주의를 기울이게 되고 목표 외의 다른 것들은 잠시 잊어버리게 된다. 따라서 의식에 질서가 생기게 된다. 이런 까닭에 우리에게 주어진 도전적인 과제들을 완수해 보려고 애썼던 시간들을 우리가 나중에 돌이켜 보면 가장 즐거운 시간이었음을 발견하게 된다(3장). 자기의 심리적 에너지를 통제할 수 있는 능력이 생기고 그 결과 이 에너지를 의식적으로 원하는 목표에 쏟아 넣는 사람들은 성숙한 인간으로 변화해 나갈 것이다. 또한 그가 가지고 있는 기술 수준을 향상시키고 좀더 어려운 과제에 도전함으로써 점차 특별한 인간이 될 수 있다.
p35
어떻게 하면 최적의 플로우 상태를 경험할 수 있는가를 설명하기에 앞서 이를 방해하는 인간의 조건들을 살펴보는 것이 필요하다. 옛날 이야기 속의 주인공들은 '그 이후로는 아주 행복하게 살았다...' 라는 행복한 결말에 이르기 전까지 항상 험난한 고비들을 넘겨야 하는데, 이는 인간의 정신에게도 해당된다. 내가 보기에 인간이 행복을 얻기가 어려운 첫 번째 이유는, 인간이 스스로를 위로하기 위해 창조한 여러 신화들과는 달리, 우주는 우리의 욕구를 만족시켜 주는 방향으로 움직이지 않고 있다는 데에 있다. 좌절은 인생에 깊숙이 관여하고 있다. 또한 우리의 기본적 욕구들이 채워지는 순간 또다시 우리는 다른 것을 원하게 된다. 이런 만성적인 불만족이 우리의 삶을 불행하게 하는 두 번째 이유이다.
p41
인간은 진화 과정을 거치면서 대자연의 변덕스러움과 가공할 만한 위협에 대처하기 위해서 부단히 노력해 왔다. 그것의 한 방법으로 인간은 신화와 종교적 믿음을 발전시켜 왔다. 문화는 어떤 형태로든지 간에 자연의 모습을 이해할 수 있는 논리적 힘과 심리적 위안의 구실을 제공해 주었기 때문이다.
문화의 핵심적 역할은 그 문화구언에 속한 사람들을 정신적 카오스 상태로부터 보호하고, 자신들이 얼마나 소중한 존재인가를 확신시켜 주는 데 있다. 에스키모 · 아마존 유역의 수렵 인종 · 중국인들 · 나바호 족 · 호주 원주민 할 것 없이 모두들 자신들이 세계의 중심에 있다고 믿었으며, 자신들이 신의 섭리에 따라 미래에는 온 세상의 주인이 될 것이라고 믿었다. 이러한 선민 의식이 없었다면 자연의 시련을 견디기가 힘들었을 것이다.
신화대로 세상이 움직일 때는 별 문제가 없지만, 때때로 호의적으로 보였던 자연으로부터 얻은 안정감이 위태로워지는 순간들이 있다. 자신이 속한 문화가 신화나 믿음을 통해서 만들어 냈던 사실적이지 못한 방패들이 그 기능을 잃어버리는 순간 믿었던 만큼의 불안감이 엄습해 오는 것이다.
이런 순간은 대부분 하필이면 그 문화의 운세가 좋아서 마치 자연의 무서운 힘을 통제하기 시작했다고 착각하는 순간에 온다. 문화의 절정기에 그 문화권에 속한 사람들은 선택받았다고 여길 것이며, 어떤 어려움도 두려워할 필요가 없다는 믿음을 갖게 되는 것은 당연할 수 있다. 몇 세기 동안 지중해를 장악해 온 로마 제국도 이런 믿음에 도달했을 것이고, 몽고 제국의 침입을 당하기 전의 중국이 그랬을 것이며, 스페인 사람들이 도착하기 전의 아즈텍 문명 또한 그랬을 것이다.
원래 인간의 욕망에는 무관심한 것이 우주 자연일진데, 자연이 우리만을 지켜 줄 것이라는 문화적 교만이 문제가 되리라는 것은 명약관화한 사실이다. 결국 보장할 수 없었던 안정감은 뼈아픈 각성을 초래한다. 이제 더 이상 그 변화를 막을 수 없다는 사실을 인정하는 순간, 사람들은 사소한 어려움에도 용기와 결단력을 잃고 만다. 한때 자신들이 그렇게 믿었던 것들이 완전히 허상임을 깨달았을 때 그들이 배워 왔던 그 모든 것들에 대한 믿음은 내팽개쳐지고 만다. 이제 자기들을 지켜 주었었던 전통 문화적 가치들이 사라졌다는 것을 깨닫고는 불안과 무관심 상태에서 허우적거리게 된다.
p48
도대체 왜 이럴까? 우리의 선조들이 꿈꾸지도 못했던 물질적 번영을 누리고 있음에도 불구하고 우리들은 왜 자꾸만 더 무기력해지는 것일까? 답은 간단하다. 그것은 우리 경험의 내용을 증진시키는 방법들에 관해서는 예나 지금이나 별 발전이 없기 때문이다.
p49
"자, 과거의 경험들이 어떠했던 간에 지금 나의 모습을 있는 그대로 인정한다면, 미래를 위해서 내가 해야 할 일은 무엇인가?"
현대의 삶에서 느끼는 불안과 우울함을 벗어나기 위해서 우리는 사회가 제공하는 당근과 채찍의 달콤한 매력으로부터 독립적인 자세를 취해야 한다. 이러한 자율성을 갖기 위해서는 자기 행동에 대해서 스스로 상도 주고 벌도 내릴 수 있어야 한다. 외적 여건이 어떻든지 간에 스스로 즐거움과 삶의 목적을 발견해 나가는 능력을 개발해야 하는 것이다. 이러한 과제는 쉽다고 할 수도 있고 어렵다고 할 수도 있다. 쉽다는 것은 이렇게 하는 것은 오로지 자기 마음먹기에 달려 있다는 점이고, 어렵다는 것은 어느 시대에서도 쉽지 않을 자기 단련과 인내를 필요로 한다는 점이다. 그러나 무엇보다도 우리가 경험을 통제하기 위해서는 무엇이 인생에서 가장 중요한 것인가에 관하여 자기 삶의 태도를 근본적으로 개혁해야 한다.
우리는 앞으로 다가올 미래가 지금보다 더 중요하다는 당연한 가르침을 받으며 자랐다. 부모들은 자녀들에게 좋은 습관을 어려서부터 익히면 어른이 되어서 잘 살 수 있을 것이라고 가르친다. 학교 선생도 공부가 지금은 재미없게 느껴질지라도 좋은 직장을 얻기 위해서는 꼭 해야만 하는 것이라고 설득한다. 회사의 간부들도 신입 사원에게 열심히 하면 남보다 빠르게 진급할 수 있다고 부추긴다. 그러나 미래를 위한 현재의 이런 분투를 마칠 때쯤이면, 은퇴의 황혼이 일찌감치 우리에게 손짓하고 있다. 에머슨이 말한 것처럼, "살아가려고 바동대기는 하지만, 정말 삶을 살고 있는 것일까?"
물론 훗날의 영광을 위해 고진감래하는 것은 어느 정도 필요한 덕목이다. 프로이트를 비롯한 많은 사람들이 말했다시피, 문명이란 것은 사람들의 욕망을 억압한 토대 위에서 만들어진 것이다. 사회 구성원이 좋아하든 싫어하든 간에 사회가 필요로 하는 기술이나 규범을 습득하지 않는다면 사회의 질서나 노동의 분화 등을 유지하기는 불가능할 것이다. 사회화 과정, 즉 인간을 사회의 유용한 구성원으로 변화시키는 것은 피할 수 없는 과정이기는 하다. 사회화의 목적은 그 구성원을 잘 통제할 수 있고, 사회에서 주는 당근과 채찍에 따라서 예측 가능한 반응을 하도록 만드는 데 있다. 가장 잘 된 사회화의 형태는 구성원들이 사회의 질서를 완전히 내면화한 나머지 이를 어기고는 한 순간도 살 수 없게 되는 것이라고 할 수 있다.
우리를 사회화하는 과정을 적극적으로 도와주는 강력한 연합군들이 있다. 바로 우리의 생존적인 욕구 및 유전자의 희망 사항이다. 사회적 통제라는 것은 궁극적으로는 우리의 생존을 위협해서 이루어진다. 예를 들면 독재 국가에서 독재자에게 복종해야 하는 이유는 말 그대로 '살기 위해서'이다. 그리 멀지 않은 과거에 가장 문명화가 되었다는 영국에서조차도 준법을 강조하기 위해서 사용했던 방법은 태형 · 채찍질 · 능지처참 따위의 야만적인 폭력이었다.
사회가 처벌만으로 잘 통제되지 않을 때 사용하는 또 하나의 방법은 쾌락이다. 아주 오래전부터 인간의 본성(성적인 욕구 · 공격 본능 · 안정에 대한 요구 · 변화에 적응하고 싶은 마음 등)은 정치인들 · 종교 단체 · 기업 · 광고주들이 선호하는 공략의 대상이었다. 16세기 투르크 제국은 용병을 모집할 때, 정복한 땅의 여성들을 겁탈할 수 있다는 유인책을 제시한 적도 있다. 오늘날에도 미군을 뽑는 광고에는 육군이 되면 '온 세상을 경험할 수 있다'는 문구가 버젓이 적혀 있지 않은가.
우리가 쾌락을 추구하는 것은 개인의 편익을 위해서라기보다 종족 보전을 위한 유전자의 반사적 반응 때문이라는 것을 깨달아야 한다. 식도락이라는 말도 결국에는 신체에 필요한 자양분을 보충하는 것의 현학적 표현이 아니던다. 이와 마찬가지로 성행위도 우리의 유전자가 자기의 영속성을 위해서 우리 몸에 집어넣은 프로그램의 일종이다. 남자가 여자에게 성적 욕망을 느낄 때, 그는 이것이 본인 스스로가 느낀 관심의 표현이라고 생각할 것이다. 그러나 실상 그의 성적 관심은 보이지 않은 유전적 부호에 의해서 조절되고 있을 뿐이다. 성적 매력을 느끼는 것이 순전히 생물학적 반사라고 한다면, 인간의 의식의 역할은 최소한에 그치고 말 것이다. 물론 이런 유전적 프로그램을 따르고 그 결과를 즐기는 것 자체가 문제가 될 것은 없다. 단지 이제 우리가 쾌락이라는 것의 실체를 파악하고, 쾌락보다 더 중요하다고 여겨 높은 순위를 매긴 자신의 일을 위해서는 쾌락 경험을 통제할 수 있다는 전제하에 말이다.
문제는, '필(feel)'을 느끼는 것만이 본질적인 것이라는 최근의 시대적 흐름이다. 오늘날 많은 사람이 가장 신뢰하는 것이 '본능'이다. 좋은 느낌이 오면, 그리고 그 느낌이 자연스럽고 자발적으로 생겨났다면, 그것은 옳다는 것이다. 그러나 지금껏 우리를 통제해 왔던 사회적이고 유전적인 힘들을 아무 의심 없이 무조건 받아들인다면 어떻게 될까? 그것은 곧 자기의 의식에 대한 통제권을 스스로 포기하는 것이나 마찬가지다. 술과 음식의 유혹을 거절하지 못하거나 섹스에만 온갖 관심이 쏠려 있는 사람은 그의 심리적 에너지를 자유롭게 활용할 수가 없다.
인간 본성에 관한 이런 '해방된' 입장, 다시 말하면 우리가 자연스럽게 느끼는 본성이나 욕망을 있는 그대로 받아들이고 인정하는 이런 입장은 자칫하면 반동적인 결과를 낳을 수 있다. 현대의 '실재론'은 과거 시절 '운명론'의 변화된 형태라고까지 말할 수 있다. 다시 말하면, 자연스러운 본능을 따라야 하는 운명을 지니고 있다는 모순적 표현이 가능하다는 말인가? 우리는 자연적으로 무지 상태에서 태어난다. 따라서 자연 상태로 있어야만 한다면, 무언가를 배우고 알아서는 안 되는 것일까? 어떤 사람들은 태어날 때부터 남들보다 많은 남성 호르몬을 몸 안에 갖고 있고, 그 결과로 좀더 공격적인 성향을 갖게 된다. 자연스럽게 행동해야 한다면 이 사람들이 폭력을 행사해도 무방하단 말인가? 자연적 현상들을 부정할 수는 없지만, 우리에게 주어진 조건을 넘어서 행동해야 하는 것 아닐까?
유전적 프로그램에 복종하는 것은 매우 위험한 일이다. 이렇게 되면 우리 스스로 무기력해지고 만다. 필요한 상황에서 유전적 지시를 무시할 수 없는 사람은 매우 허약해진다. 개인적 목표에 따라서 어떻게 행동할 것인지를 결정하는 대신에, 자신의 신체에 적용된 프로그램을 따라야 하기 때문이다. 인간은 사회적으로 건강하고 독립된 존재가 되기 위해서는 본능적 욕구를 조절할 수 있는 능력을 가지고 있어야 한다. 그렇지 못하면 이 욕구를 조작하는 남들에게 당하기 쉽다.
완전히 사회화가 된 사람은, 다른 사람들에 의해서 결정된 보상을 받고 만족하는 사람이다. 물론 그 보상은 본인이 원했던 게 아니다. 그리고 이런 보상은 종종 그의 유전적 프로그램을 착실히 수행하기 위해서 생긴 본능을 충족시켜 주는 것과 밀접한 관련이 있다. 그는 본인의 마음을 행복하게 충족시켜 줄 수 있는 많은 경험들을 이미 하고 있음에도 불구하고 이것들이 그가 바라는 것이 아니기 때문에 간과하는 것이다. 그는 오직 다른 사람들에 의해 마련된 목록들을 얻는 것에만 관심이 있다.
복잡다다한 사회에서 여러 가지의 강력한 집단들이 서로 다른 목표들을 우리에게 주입시키려고 노력하고 있다. 한편에서는 학교 · 교회 · 은행등의 집단들이 우리들을 열심히 일하고 절약하는 사람들도 만들기 위해서 노력하고, 다른 한편에선 상인 · 제조업자 · 광고주들이 우리들의 소비를 부추기기 위해서 꼬드긴다. 심지어는 전문 도박꾼 · 포주 · 마약 밀매업자등에 의해서 움직이는 어둠의 세계조차도 우리가 돈만 내면 원하는 것을 다 해주겠다는 똑같은 메시지를 전하지 않던가. 각 집단마다 전하는 메시지의 내요은 약간씩 다르지만, 그 메시지에 복종한 결과는 동일하다. 그것은 우리를 목적 달성을 이루기 위한 도구로 만들어 결국에는 우리들이 그 사회의 시스템에 의존할 수밖에 없게 되는 것이다.
물론 현대와 같이 복잡한 사회에서 생존하기 위해서 외적인 목표를 달성하고 즉각적인 만족을 뒤로 미루는 것은 중요하다. 이것은 사회의 통제에 따라 좌지우지되는 꼭두각시가 되라는 말이 아니다. 정말로 중요한 것은 사회가 제공하는 보상으로부터 자유로워지고, 이를 위해서 어떻게 사회적 보상들을 우리가 통제할 수 있는 보상으로 대체하는가를 배우는 것이다. 사회에서 원하는 일들을 포기하라는 뜻이 아니다. 오히려 이 일들 이외에 우리 스스로의 목표를 만들라는 것이다.
자신을 사회적 통제로부터 해방시키는 가장 중요한 방법은 무엇일까? 바로 순간 순간에 주어지는 보상을 발견하는 능력을 갖는 것이다. 만약 사람이 경험의 흐름에서 주어지는 의미를 발견하고 즐길 수 있다면, 그의 어깨를 무겁게 누르고 있는 사회적 통제로부터 벗어날 수 있을 것이다. 보상을 자기의 내면에서 찾을 수 있다면, 그 동안 사회에 맡겨 두었던 본인의 힘을 다시 찾을 수 있다. 이젠 더 이상 미래라는 허울 속에 숨어 버리는 목표를 달성하기 위해서 아옹다옹할 이유가 없다. 또한 언젠가는 좋은 일이 일어나겠지 위안하며 매일 따분한 하루를 보낼 필요도 없다. 손에 닿을 듯 말 듯한 목표를 위해서 영원히 노력하는 대신 삶이 주는 참 보상을 수확하기 시작한다.
이런 상태는 우리 스스로를 원초적 욕망에 탐닉하게 함으로써, 그래서 사회의 통제로부터 벗어남으로써 얻어지는 것이 아니다. 우리는 몸이 원하는 것으로부터 독립적이 되어야 하며, 우리 마음속의 조인이 되어야 한다. 고통과 쾌락은 우리 마음에서 일어나며 그 안에서만 존재하는 것이다. 우리의 생물학적 욕구를 이용해 우리를 조절하는 이 사회의 자극-반응 양식에 순종하는 한, 우리는 외부의 힘에 의해서 통제될 뿐이다. 현란한 광고에 침을 흘리고, 직장 상사의 찡그린 얼굴이 우리의 하루를 망치도록 방치하는 한 우리는 스스로의 경험을 결정할 수 없다.
우리가 경험하는 것이 현실을 만드는 것이다. 따라서 우리의 의식을 통제하고, 외부의 꼬임과 협박으로부터 우리를 자유롭게 함을로써 우리는 이 현실을 변화시킬 수 있다.
로마 제국의 철학자 에픽테토스는 오래전에, "사물 자체가 무서운 것은 아니다. 우리가 어떻게 사물을 지각하는가, 단지 이것이 무서울 뿐이다"라고 했다.
또한 아우렐리우스 황제도 다음과 같이 말하지 않았던가.
"네가 외적인 일들로 인해서 마음 고생을 하고 있다면, 그것은 그 일들때문이 아니라 네가 그것들을 어떻게 평가하고 있는가에 의해서다. 그 평가와 판단을 한꺼번에 지워버릴 수 있는 것도 너의 손안에 달려 있다."
p55
프로이트는 우리의 마음을 지배하기 위해서 날뛰는 두 개의 폭군이 있다고 지적했다. 그 하나는 유전자의 지배를 받는, 개인의 본능적 욕구인 이드(id)요, 다른 하나는 사회적 압력의 종인 초자아(superego)이다. 그리고 이들과 맞서는 것이 자신의 본질적 요구를 대변하는 자아(ego)이다.
p56
우리의 의식에 해방을 가져다주는 현명함이라는 지식은 본질적으로 누적되는 것이 아니라는 데 그 첫 번째 이유가 있다. 이것은 공식화되지 못하며, 암기해서 단순하게 적용할 수 있는 것도 아니다. 현명한 정치적 판단, 세련된 미적 감각과 같은 전문적 영역처럼 의식을 해방시키는 방법도 숱한 시행착오를 거쳐서 값지게 얻어야만 하는 것이기 때문이다.
의식을 통제한다는 것은 단순한 인지적 기술이 아니다. 지능과 비슷하다고 할까. 이것은 감정의 몰입과 의지를 필요로 한다. 이것은 앎이 아니라 행동을 통해서 얻어지는 것이다. 작곡가가 이론적으로 알고 있다고 해도 수많은 연습을 거쳐야 좋은 곳을 쓸 수 있는 것처럼 말이다. 물리학이나 유전공학처럼 가시적인 세계에서의 학문적 진보는 상대적으로 빠를 수 있다. 그러나 우리의 습관과 욕망을 변화시키기 위해서 지식이 활용되어야 하는 이 분야에서의 진보는 고통스러울 정도로 더디기만 하다.
두 번째 원인은, 우리의 의식을 어떻게 통제할 것인가에 관한 지식은 문화와 시간에 따라서 달라진다는 것이다. 신비주의자, 요가나 선 수행자들의 지혜는 그 시대의 문제를 해결하는 데 최고의 방법이었기 때문에 형성되었을 것이다. 그러나 이들을 현대의 캘리포니아에 그대로 옮겨 놓는다면 그 신비한 힘은 효력을 제대로 발휘할 수 없을 것이다. 이 지혜들은 원래의 환경들과 어울리는 요인들을 반영했을 것이다. 그런데 이런 지엽적인 요인들을 본질적 요인들과 분리하여 받아들이지 못하고 제식적 요소만 빌려 온다면 옛 지혜들은 빈 껍데기에 불과할 것이다.
의식을 통제하는 것은 제도화될 수 없다. 이것이 사회적 규범이나 제도의 한 부분이 되는 순간 더 이상 그 효력을 발휘할 수 없다. 그러나 불행하게도 이런 기계적인 관례화나 순서화는 곳곳에서 일어나고 있다. 자아(ego)를 억압하는 힘들로부터 해방하자는 프로이트의 노력은 이미 그가 살아 있을 때부터 하나의 고착된 이데올로기로 변화했다. 마르크스의 경우는 더 심하다. 경제적 착취로부터 우리의 의식을 해방하자는 그의 주장은 마르크스 자신도 섬뜩할 정도의 억압적인 사회 제도로 변질되지 않았던가. 또한 토스토예프스키를 비롯한 많은 사람들이 말했듯이, 만약 중세 시대에 예수가 자신이 설파했던 해방의 메시지를 전하기 위해서 다시 돌아왔다고 해도, 예수의 이름을 빌려 권력을 가지고 있던 세속적 종교 지도자는 다시 예수를 십자가로 못 박았을 것이다.
2장. 의식에 관해서 알아보기(The Anatomy of Consciousness)
p65
외부의 사물은 우리가 인식하지 않으면 존재하지 않는다. 따라서 의식은 어찌 보면 주관적으로 경험한 현실을 말하는지도 모른다. 우리가 느끼고, 냄새 맡고, 듣고, 기억하는 모든 것들이 의식의 내용을 구성하는 후보들이 될 수는 있다. 그러나 이들 가운데 극히 일부분만이 우리의 의식을 구성한다. 따라서 의식은 - 우리의 신체 안팎에서 무엇이 일어났는가 하는 것을 말해 주는 감각 정보를 반영하는 거울과 같지만 - 선별적으로 반영하고 능동적으로 사건들을 구성하며 이들을 새로운 현실 세계로 인도하는 것이다. 의식을 통해서 반영되는 것이 우리의 삶인 것이다.
p67
우리가 유전적으로 물려받거나 습득한 의도들은 위계를 가지고 있고, 이 위계에 따라서 우선 순위가 정해진다. 저항 운동을 하는 사람에게 정치적 변혁은 생명을 포함한 다른 어떤 것보다도 더욱 소중한 것이고, 이 목표는 다른 어떤 것들보다 우선인 것이다. 일반인들은 이에 비해서 좀더 현실적인 목표들을 가지고 있다. 그것들은 신체적인 욕구 충족을 위한 것(건강하게 장수하는 것, 섹스를 하는 것, 잘 먹고 평한하게 지내는 것 등)과 사회에 의해서 조건화된 것(모범생이 되는것, 열심히 일하는 것, 가능한 한 소비 생활을 많이 하는 것, 타인의 기대에 맞추어 사는 것 등)에 근거하고 있다. 그러나 세계 여러 문화권에서 이런 목표들을 추종하지 않는 예외적인 사례들은 얼마든지 찾아볼 수 있다. 사회적 규범을 초월하거나 일탈한 사람들(영웅 · 성자 · 현자 · 예술가 · 시인 · 광인 · 범죄자 등)은 일반인들과는 다른 삶의 목표를 갖는다. 이런 사람들의 존재는, 우리의 의식이 서로 상인한 목표와 의도들로 순서화될 수 있다는 증거로 볼 수 있다. 우리 모두는 우리 내면의 주관적 세계를 통제할 자유를 가지고 있다.
p76
지금까지의 논의를 참을성 있게 따라와 준 독자라면, 이 시점에서 나의 얘기가 약간 순환론적이지 않는가 하는 생각이 들 수도 있다. 자아라는 것이 의식의 내용물과 목표들의 총합을 나타낸다고 정의하자. 그런데 의식의 내용물과 목표들은 주의에 의해 선택된 결과물이고, 이런 주의는 자아에 의해 통제된다고 한다면, 우리는 인과가 명확하지 않은 체 계속 순환하는 논리 체계를 갖게 된다. 한편으로는 자아는 주의를 통제한다고 말하고, 또 한편으로는 주의가 자아를 결정한다고 하니까 말이다. 그러나 사실상은 두 관점이 다 맞다. 의식은 직선적으로 움직이는 것이 아니고, 순환적 인과 관계가 성립하는 체계인 것이다. 주의는 자아를 형성해 가고, 자아는 주의에 의해 영향을 받는다.
p79
물론 삶은 외적인 일들 - 예를 들어, 복권으로 대박을 터뜨리든지, 자기와 잘 어울리는 배우자를 얻는다든지, 사회 부조리를 개혁하는 데 동참한다든지 - 을 통해서 향상될 수 있다. 그러나 이러한 대단한 일들조차도 삶의 질에 영향을 주기 위해서는 우리의 의식 속에 그 자리를 마련해야 할 것이고, 우리의 자아와도 긍정적으로 관련을 맺고 있어야만 한다.
p87
우리가 가능한 한 자주 플로우를 경험할 수 있도록 의식을 조절하면 삶의 질은 저절로 향상되게 마련이다. 리코나 팸의 경우처럼 직장의 따분한 일상도 목적이 있는 즐거운 경험으로 변화되기 때문이다. 플로우 상태에서 우리는 심리적 에너지를 통제할 수 있다. 그때에는 우리가 하는 어떤 일도 의식의 질서를 더하게 만든다.
p88
플로우 경험을 하고 나면, 이전과 비교해서 우리는 더욱 복합적인 자아로 발전한다. 복합적인 자아가 됨으로써만이 성장할 수 있는 것이다. 복합성(complexity)이라는 것은 두 가지 심리적 과정을 거친 결과인데, 이 두 가지 과정은 각각 분화(differentiation)와 통합(integration)을 말한다. 분화라는 것은 자신의 유일하고 고유한 존재라는 생각으로 나아가려는 움직임이고, 또한 본인을 다른 사람으로부터 분리하는 방향으로 나아려는 경향을 말한다. 한편 통합이라는 것은 그 반대의 경우이다. 즉 다른 사람들이나 다른 아이디어들과 합하려는 경향을 말한다. 복합적 자아란 이러한 두 가지 경향을 성공적으로 결합시킨 자아를 일컫는다.
p90
분화만 되고 통합이 이루어지지 못한 사람은 큰 개인적 성취를 이룰 수는 있을 것이다. 그렇지만 지나친 이기주의가 되기 쉽다. 반대로 통합만 이루어지고 분화가 되지 못한 자아는 다른 사람과의 관계 속에서 소속감과 안전감을 느낄 수는 있을 것이지만, 자율적인 개성은 갖지 못할 것이다. 오직 한 개인이 그의 심리적 에너지를 이 두 가지 과정을 위해서 균등하게 배분할 때에, 그 결과 지나치게 이기적이거나 순응적이지 않을 때 그의 자아는 복합성을 갖추게 된다.
우리는 플로우를 경험함으로써 복합적인 자아를 갖게 된다. 역설적이게도, 다른 외적 목표를 위해서가 아니라 행위 자체를 즐길 때 우리의 삶이 향상될 가능성이 높아진다는 것이다. 하나의 목표를 수립하고 이를 위해서 최고의 집중력을 보일 때 우리가 무엇을 하든지 즐거움을 느낄 수 있다. 이런 즐거움을 맞보기 시작하면 다시 이를 경험하기 위해서 더 많은 노력을 할 것이고, 이런 과정의 순환을 통해서 우리의 자아는 성장한다.
3장. 즐거움을 통해 삶의 질 향상하기(Enjoyment and the Quality of Life)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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쾌락은 주는 경험은 즐거움을 줄 수가 있다. 그러나 쾌락과 즐거움이라는 두 가지 정서는 같지 않다. 예를 들어서 맛있는 음식을 먹고 쾌락을 느낄 수 있다. 그러나 음식을 즐기는 것은 좀 다른 문제이다. 식도락가가 음식을 즐기기 위해서는 상당한 관심과 주의를 기울여야 한다. 이 말은 정신적 노력 없이도 쾌락을 느낄 수는 있지만, 즐거움이라는 것은 비범한 주의를 기울여야 느낄 수 있다는 것이다. 즉 사람들은 아무 노력 없이도 - 뇌의 특정 부위가 전기 자극을 받거나, 약물에 의한 화학적 작용을 통해서도 - 쾌락을 느낄 수가 있다는 것이다. 그러나 주의 집중을 하지 않으면 테니스나 독서 그리고 대화를 즐기기란 불가능한 일이다.
쾌락이 매우 덧없으며 자아가 쾌락 경험에 의해 성장되지 않는 이유가 바로 이 때문이다. 복합성은, 새롭고 또한 상대적으로 도전적인 목표에 심리 에너지를 쏟는 것을 필요로 한다. 이러한 과정은 어린아이들에게서 쉽게 볼 수 있다. 태어난 후로 몇 년 동안 모든 아이들은 새로운 동작과 새로운 말을 매일 시도하는 작은 '학습 기계'가 된다. 아이들이 새로운 능력을 학습할 때 보여 주는 황홀한 표정은 즐거움이란 무엇인지를 우리에게 잘 말해 준다. 이런 즐거운 경험 하나하나가 더해져서 아이들의 자아를 복합적으로 발달시키는 것이다.
불행하게도, 성장은 곧 즐거움이라는 연관성은 시간이 지나면서 사라지는 것 같다. 아마도 학교 교육을 받기 시작함과 동시에 '학습'이 외부의 요구에 대한 반응이 되어가면서 새로운 능력을 습득한다는 짜릿한 희열이 사라지기 때문일 것이다. 사춘기에는 자신만의 좁은 자아 속에서 안주하는 경향이 있다. 그러나 새로운 곳에 심리 에너지를 투자해 보았자 외적 보상이 주어지지 않는다면 쓸데없는 짓일 뿐이라고 생각하는 순간부터 우리는 더 이상 인생을 즐기지 못하게 될 것이다. 단지 쾌락만이 우리의 기분을 즐겁게 해주는 경험이 될 뿐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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즐거움이라는 현상은 여덟 가지의 주요 구성 요소를 갖고 있음을 발견하였다. 사람들이 가장 긍정적인 경험을 할 때 어떠한 느낌을 가졌는지에 대해 반추해 보면 그들은 다음 여덟 가지 요소들 가운데 적어도 한 가지는 언급을 한다물론, 여덟 가지 모두를 말하는 사람도 있다).
첫째, 그 경험은 일반적으로 본인이 완성시킬 가능성이 있는 과제에 직면했을 때 일어난다.
둘째, 본인이 하고 있는 행위에 집중할 수 있어야 한다.
셋째와 넷째, 수행하는 과제에 대한 명확한 목표가 있어야 하고 즉각적인 피드백을 받을 수 있어야 한다.
다섯째, 일상에 대한 걱정이나 좌절을 의식하지 않고 자연스럽고도 깊은 몰입 상태로 행동할 때이다.
여섯째, 즐거운 경험은 사람들에게 본인의 행동에 대한 통제감을 느끼도록 해준다.
일곱째, 자아에 대한 의식이 사라진다. 그러나 역설적으로 플로우 경험이 끝나면 자아감이 더욱 강해진다.
마지막 여덟째, 시간의 개념이 왜곡된다. 즉 몇 시간이 몇 분인 것처럼 느껴지고, 몇 분이 몇 시간처럼 느껴지기도 한다. 이러한 모든 요소들의 결합이 즐거움을 불러일으키는데, 이것은 너무나 충만한 느낌이기 때문에 사람들은 이를 위해 많은 정력을 쏟을 가치가 있다고 생각한다.
최적 경험의 훨씬 많은 경우가 목표 지향적이고 규칙에 의해 제약을 받는 활동에서 발생한다고 보고되었는데, 그 활동들은 심리 에너지를 요구하며 적절한 기술이 없이는 할 수 없는 것들이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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여러 면에서 경쟁은 복합성을 발달시켜 주는 지름길이다. 에드먼드 버크는 "우리와 대적하는 자는 우리의 정신을 강화시켜 주고 우리의 능력을 다듬어 준다. 적은 결국에는 나에게 큰 도움을 주는 자이다"라고 말했다. 경쟁할 때 생기는 도전 의식은 자극적이며 즐겁다. 그러나 상대를 이기려는 마음이 너무 앞서게 될 때 즐거움은 사라지는 경향이 있다. 경쟁은 그것이 자신의 기술을 완성하는 수단이 될 때에만 즐거운 것이다. 경쟁 자체가 목적이 된다면 그것은 더 이상 흥미로운 도전이 아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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목표가 명확하게 설정되어 있지 못하는 창의적 활동을 할 때, 사람들은 본인이 의도하는 바가 무엇인지에 대한 강한 개인적 감각을 발달시켜야 한다. 화가는 그림을 그리면서 어떻게 보일지에 대한 시각적 영상을 갖고 있지 않을 수도 있다. 그러나 그림을 어떤 시점에까지 그리게 되면 자기가 원했던 것인지 아닌지를 알아야 한다. 그리고 자기 일을 즐기는 화가는 '좋고, 나쁨'에 대하여 내면화된 기준을 가지고 있어야 한다. 그래서 붓이 가고 난 후 "그래, 바로 이거야. 아니, 이건 아니야"라고 말할 수 있어야 한다. 그러한 내적인 지침이 없다면 플로우를 경험하는 것은 불가능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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어떤 종류의 피드백일지라도 만일 그것이 심리 에너지를 쏟았던 목표와 논리적으로 연관이 된다면 즐거운 것이 될 수 있다. 만일 내가 콧등 위에 막대를 세우고자 하는 것이 목적이라면 고개를 뒤로 젖히고는 흔들거리는 막대를 보는 것도 잠시 동안은 즐거움이 될 수 있다. 그러나 우리 모두는 서로 다른 가치를 갖도록 학습되기 때문에 자기에게 중요한 가치를 주는 정보를 더 소중히 생각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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생활 속에서 날마다 우리는 의식에서 원하지 않는 강요된 사고와 근심의 포로가 된다. 일반적으로 대부분의 직업과 가정 생활은 잡념이나 불안이 자동적으로 배제될 만큼 집중력을 요구하지 않는다. 결과적으로 일상적인 마음의 상태는 원활한 심리 에너지를 간섭하는 엔트로피의 요소를 포함한다. 바로 이 점이 플로우가 경험의 질을 변환시키고 향상시키는 한 가지 이유이다. 행동에 대한 명확한 요구가 우리의 의식에 질서는 부여하고 무질서의 간섭은 배제하기 때문이다.
p123
위의 예들이 설명하는 바와 같이 사람들이 즐기는 것은 통제되는 상황속에 존재한다는 느낌이 아니라 어려운 상황에서 스스로 통제력을 발휘하고 있다는 느낌이다. 타성에 박힌 일과의 안전함을 포기하지 않고는 진정한 통제감을 경험할 수 없다. 결과의 성공 여부가 불확실하고 자시이 그러한 결과에 영향을 줄 수 있을 때만 진정 본인이 통제력을 발휘하고 있는지의 여부를 알 수 있는 것이다.
p127
자의식의 소멸은, 플로우 상에 있는 개인이 심리 에너지에 대한 통제를 포기한다거나 몸이나 마으메서 무엇이 발생하는가에 대한 인식하지 못하는 것을 의미하지 않는다. 사실 그 반대가 성립한다. 사람들이 처음에 플로우 경험을 배울 때 자의식의 결여는 편하게 흘러가는 것, 즉 그냥 자기를 망각해 버리는 것이라고 생각한다. 그러나 사실 최적 경험은 자아의 매우 적극적인 역할을 포함한다. 바이올린 연주자는 악보마다 분석적으로 그리고 전체적인 구상의 측면에서 전체적으로 연주하고 있는 작품의 모든 형식 및 귀에 들리는 음과 함께 손가락의 모든 움직임을 잘 인식해야만 한다. 훌륭한 육상 선수는 전체적인 경기의 전략에서 경쟁 선수의 성적뿐만 아니라 자신의 호흡 리듬, 신체의 모든 관련 근육을 알고 있다. 체스 선수가 그의 기억에서 이전의 위치, 과거의 조합을 마음대로 생각해 낼 수 없다면 경기를 즐길 수 없다.
p130
플로우를 경험할 때 처음에는 자아감을 잃어버리지만 경험한 후에는 자아감이 더욱 충만해지는 것이 모순된 관계처럼 보이기도 한다. 자의식을 버리면 더 강력한 자아 개념을 구축하게 된다. 그 이유는 매우 명확하다. 플로우 상태에서는 최선을 다하도록 도전 받으며 끊임없이 자신의 능력을 향상시켜야 한다. 이런 상황에서 우리는 이러한 노력이 자아와 무슨 관계가 있는지를 성찰할 기회를 갖지 못한다. 자아에 대한 생각을 하는 순간 깊은 몰입에 들어갈 수 없기 때문이다. 그러나 플로우 경험이 끝다고 자의식이 생겨나면서부터 바라보는 자기 자신은 이미 과거의 자기가 아니다. 새로운 능력과 성취에 의해서 풍요로워진 자기를 느끼게 된다.
p133
우리의 의지와 상관없이, 처음에 강요로 인해 시작된 것들 중에서 시간이 지남에 따라 내적인 보상을 받는 결과를 낳는 것도 있다. 몇 년 ㅈㄴ에 사무실에서 함께 일하던 내 친구는 대단한 재능을 가지고 있었다. 일이 지겨워지면 그는 반쯤 감은 눈으로 고개를 살짝 들고서는 음악 작품(바흐 합창곡, 모짜르트의 협주곡, 베토벤의 교향곡 등) 하나를 콧노래로 부르기 시작했다. 그러나 그것은 단순한 콧노래가 아니었다. 그는 특정 소절에 관여하는 주요 악기를 목소리로 흉내를 내며 전체 작품을 노래하였다. 그는 바이올린과 같이 애절한 소리를 내고, 바순처럼 저음을 내며, 바로크 트럼펫 소리까지 낼 수 있었다. 사무실의 동료들은 이 소리를 듣고 무아지경이 되어 생기를 얻고는 하였다. 궁금한 것은 그 친구가 이러한 재능을 개발한 방법이다. 세 살 때부터 그의 아버지는 그를 클래식 음악 콘서트에 데리고 다녔는데, 이것은 말할 수 없을 정도로 지겨웠다고 한다. 그는 자라면서 콘서트와 클래식 음악은 물론이고 아버지마저 싫어하게 되었다. 하지만 그는 이러한 고통스러운 경험을 계속해서 강요받았다. 그러던 일곱 살의 어느 날 모차르트의 오페라의 서곡이 시작되는 동안 그는 놀라운 통찰을 경험하였다. 그때까지 구별이 되지 않던 멜로디들이 선명히 구별되기 시작한 것이다. 그는 갑자기 자신 앞에 열려진 새로운 음악적 세계를 발견했다. 무의식적이든 아니든지 간에 모차르트 음악이 주는 도전을 이해하는 능력이 발견되기까지는 3년의 고통스러운 청취의 세월이 있었던 것이다.
물론 그는 운이 좋았다. 많은 아이들은 그들이 강요된 활동을 꽃 피우기 전에 영원히 그 활동을 싫어하게 되기도 한다. 부모들이 악기를 연습하도록 강요하여 얼마나 많은 아이들이 클래식 음악을 싫어하게 되었는가? 아이들뿐만 아니라 어른들도 많은 주의가 필요한 활동에 첫 발을 딛기 위해서는 외부적인 동기가 필요하다. 대부분의 즐거운 활동은 자연스러운 것이 아니다. 이러한 활동은 처음에는 내키지 않는 노력을 요구한다. 그러나 일단 상호 작용이 개인의 능력에 대해 피드백을 제공하기 시작하면, 대개 이러한 활동은 냊거으로 보상을 주기 시작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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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러나 이미 통제감과 관련된 부분에서 살펴본 바와 같이 플로우와 잠재적인 중독성을 인식해야 한다. 우리는 이 세상의 어떠한 것도 완전히 긍정적인 것은 없다는 사실을 알아야 한다. 모든 힘은 오용될 수 있다. 사랑은 증오로 바뀔 수 있으며 과학을 파괴를 낳고 검증되지 않은 기술은 오염을 낳는다. 최적 경험은 한 형태의 에너지이며 에너지는 도움이 되거나 파괴를 낳을 수 있다. 불은 따뜻하게 만들 수도 있으며 집을 태워버릴 수도 있다. 원자 에너지는 전기를 발생할 수도 있지만 세계를 완전히 날려 버릴 수도 있다. 에너지는 힘이지만 단순한 수단에 불과하다. 에너지가 적용되는 목표는 삶을 풍부하게 할 수도 있으며 고통스럽게 할 수도 있다.
베느탐이나 여러 전쟁터의 참전 용사들은 전선에서 활동을 플로우 경험으로 설명하며, 그에 대한 향수를 가지고 있다. 로켓 발사대 옆의 참호에 앉아 있으면 삶은 매우 명확하게 집중된다. 목적은 적이 나를 죽이기 전에 적을 내가 먹저 죽이는 것이다. 선악은 자명하다. 통제의 수단은 손 안에 있다. 혼란은 없어진다. 전쟁을 싫어한다 해도 전투 경험은 보통의 생활 속에서 접하는 어떠한 것보다도 즐거운 일일 수 있다.
범죄자들은 종종 다음과 같이 말한다.
"한밤중에 남의 집에 들어가서 주인을 깨우지 않고 보석을 들고 나오는 것보다 더 재미있는 것을 보여 주기만 한다면 당장 그것을 하겠다."
청소년 비행이라고 일컫는 대부분의 것(자동차 절도 · 파괴 행위 · 일상의 난폭한 행동)은 일상 생활에서 얻을 수 없는 플로우 경험을 하고자 하는 필요성에 의해 동기화된다. 사회에서 의미 있는 도전에 대면할 수 있는 기회를 제공하지 못하고 또 그러한 도전을 즐길 수 있는 능력을 개발할 기회를 제공하지 못하는 한, 우리는 폭력과 범죄가 사람들을 유혹한다는 사실을 예상해야 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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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자유의 대가는 영원한 경계심이다"라는 제퍼슨의 격언은 정치 이외의 분야에도 적용된다. 이는 우리의 습관과 과거의 지식들이 새로운 가능성을 간과하지 않도록 우리가 하고 있는 일을 재평가해야 한다는 것을 의미한다.
4장. 플로우의 조건들 알아보기(The Conditions of Flow)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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플로우 활동이 성장과 발견을 이끌어 내는 이유는 바로 이 역동적인 특성에 있다. 어느 누구도 같은 수준에서 같은 일을 장기간 할 때 즐거움을 느끼지 않는다. 싫증을 느끼거나 좌절하게 되고, 이후 다시 즐거움을 찾고 싶은 바람에서 자기 기술을 향상시키거나 혹은 그 기술을 사용할 새로운 기회를 발견하려는 행위를 취하려 하기 때문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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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른바 '종교'라 불리는 것들은 의식의 질서를 이루려는 가장 오래된 야심찬 시도이기 때문이다. 이러한 면에서 종교 의식은 심오한 즐거움의 원천이라고까지 말할 수 있다.
오늘날의 미술 · 연국 그리고 일반적인 삶에서 초자연적인 의미는 퇴색되어 버렸다. 과거 인류 역사에서 세상을 이해하고 의미 있게 해주었던 우주 질서는 서로 무관한 단편들로 부서지고 말았다. 대신 인간의 행동 방식을 설명하기 위한 수많은 이데올로기가 등장하고 서로 경쟁을 하고 있다. 공급 · 수용의 법칙과 '보이지 않는 손'의 논리는 우리의 이성적 경제 선택에 대해 설명하고자 한다. 역사적 유물론의 바탕이 되는 '계급 갈등의 법칙'은 인간의 비이성적 정치 행동을 설명하였고, 사회생물학의 기초가 되는 유전적 경쟁 이론은 왜 인간이 어떤 사람들은 도와주고 어떤 사람들은 배척하려는지에 대해 설명해 준다. 심리학의 행동주의 이론은 우리가 인식하지 못한 상태에서도 쾌락 행동을 반복하게 되는 이유를 설명해 준다. 이러한 이론들은 사회과학에 근간을 둔 현대판 '종교'라고 할 수 있다. 그러나 이것들 가운데 어느 하나라도 우주의 질서를 설명했던 과거의 모델만큼 미적인 비전이나 또는 양질의 즐거움을 제공하지는 못하고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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문화란 우연적이고 임의적인 요인들이 우리 경험에 미칠 영향을 최소화하기 위해 설계된 방어 기제이다.
문화가 일련의 목표와 규칙을 발전시키는 데 성공하여 사람들이 갖고 있는 기술과 조화를 잘 이루고 그 결과로 구성원들이 보통 이상의 빈도와 강도로 플로우 경험을 하게 되면, 게임과 문화의 유사점은 한층 더 커진다. 이러한 경우에, 전체적으로 문화가 '굉장한 게임'이 된다고 말할 수 있다. 아마도 몇몇 고전 문명은 이러한 상태에서 성공적으로 도달했을 것이다. 아테네 시민들 · 강인함(virtus)을 통해서 행동을 표현했던 로마인들 · 중국의 지식인들 · 인도의(사제,승려 계급이자 최고 계급인) 브라만은, 춤을 통해서 얻는 희열과 같은 즐거움을 다양한 도전을 극복해 가며 경험했을 것이다. 아테네의 폴리스 · 로마의 법률 · 신권(神權)에 토대를 둔 중국의 관료주의 그리고 모든 것을 감싸 안는 인도의 영적 질서는 어떻게 문화가 플로우 경험을 촉진시키는지에 대해서 보여주는 성공적인 사례라고 할 수 있다. 물론 그 사회의 주류를 형성하고 있었던 운 좋은 사람들에게 해당되는 것이지만 말이다.
플로우를 높이는 문화가 도덕적 의미에서 반드시 선한 것은 아니다. 스파르타의 규칙은, 그 당시의 사회 구성원을 동기화시키는 데는 누가 보아도 성공적이었지만, 20세기 관점에서 볼 때는 잔인한 것이다. 유목민인 타타르 족이나 터키의 친위 보병이 전투와 학살을 통해서 쾌락을 얻었다는 것은 전설적인 예다. 1920년대의 혼란스러운 경제와 문화 충격에 당황했던 많은 유럽인들에게 나치 정권과 파시즘 이데올로기는 매력적인 게임의 계획을 제시해 주었다. 즉 단순한 목표들을 제시하였고, 그에 대한 피드백을 명료하게 주었다. 사람들이 다시 새롭게 삷에 몰두하도록 한 것이다. 결국 많은 사람들은 이전의 불안과 절망으로부터 벗어났다고 생각했다.
p163
'과도한 자의식' 역시 플로우 경험을 방해하는 또 하나의 장애 요인이다. 다른 사람이 자신을 어떻게 인식하는지에 대해 끊임없이 걱정하며, 나쁜 인상을 주지는 않을까 혹은 남이 못마땅해 할 일을 하지나 않을까 두려워하는 사람은 진정한 즐거움을 영원히 경험하지 못한다. 지나치게 자기 중심적인 사람들도 마찬가지다. 자기 중심적인 사람은 보통 자기 의식적이지는 않지만, 대신에 무엇이든 사소한 것조차도 그것이 자신의 바람과 얼마나 일치되는가를 따져서 평가한다. 그러한 사람에게는 뭐든지 그 자체로는 가치도 없다고 본다. 자신의 흥미를 끌지 않는 여자나 남자에게는 더 관심을 가질 필요도 없다고 생각한다. 완전히 자신의 목적에 맞추어 자의식이 구조화되어 있으며, 그러한 목적에 부합하지 않는 어떠한 것도 의식 안에 담아두지 않는 것이다.
자의식적인 사람들은 많은 점에서 자기 중심적인 사람들과는 다르다. 그렇지만 심리적 에너지를 충분히 통제하지 못하여 결국에는 쉽게 플로우 경험을 하지 못하는 점은 똑같다. 두 유형의 사람들 모두에게는 활동 자체를 위하여 요구되는 주의의 융통성이 부족하다. 너무 많은 심리적 에너지를 자기를 위해서 쏟고, 주의를 두는 것 역시도 자아의 욕구에 의해 엄격하게 제한된다. 이러한 조건에 있는 사람들이 상호 작용 그 자체 말고는 어떤 보상도 따르지 않는 자기 목적적 활동에 몰입한다는 것은 어려운 일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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사회 병리 상태를 기술하는 두 가지 용어, 즉 '사회적 무질서(anomie)'와 '소외'는 플로우 경험을 어렵게 하는 조건이기도 하다. 먼저 사회적 무질서란 말 그대로 '규칙의 결여'를 의미하는 것으로, 프랑스의 사회학자 뒤르켐이 행동의 규준이 혼란했던 사회 상태를 지칭했던 용어이다. 무엇이 허용되며 허용되지 않는지 더 이상 분명하지 않을 때, 대중의 의견 중 어떤 것이 가치로운지 불확실할 때, 행동은 엉뚱해지고 무의미해진다. 의식의 질서를 유지하기 위해서 사회의 질서에 의존하는 사람들은 불안해지기 시작한다. 무질서 상태는 경제가 붕괴되거나 혹은 한 문화가 다른 문화에 의해서 파괴될 때 일어날 수 있다. 또한 경제나 너무 급속하게 발전할 때나 절약과 근면이라는 가치가 더 이상 예전만큼 의미가 없을 때에도 일어날 수 있다.
소외는 여러 가지 면에서 무질서 상태와 반대로 해석된다. 즉 소외란, 사람들이 사회 체계에 의해 제한을 받기 때문에 자신의 목표와 부합하지 않는 방식으로 행동하는 상태를 일컫는다. 식구들을 먹여 살리기 위해서 작업장의 조립 라인에서 무의미하고 똑같은 과제를 수백 번씩 반복해야 하는 노동자는 소외를 겪을 수 있다. 사회주의 국가에서 소외를 일으키는 가장 짜증나는 일은, 불가피하게도 여가 시간의 상당 부분을 음식과 옷을 사기 위해서, 공연을 보기 위해서 또는 끝없이 복잡한 허가 절차를 밟기 위해서 줄을 서는 데 써야 한다는 것이다. 사회가 무질서 상태에 있을 때에는, 어떤 것에 심리적 에너지를 쏟는 것이 가치로운지 명료하지 않기 때문에 플로우 경험이 힘들다. 반면에 이와 같은 사회에서 소외가 일어날 때의 문제는, 분명히 바람직한 것이 있는 줄 알면서도 심리적 에너지를 투입할 수 없다는 것이다.
지금까지 플로우를 방해하는 두 가지 사회적 요인(사회적 무질서와 소외)을 살펴보았다. 그런데 이 두 가지의 사회적 방해 요인은 두 가지의 개인적 병리(주의력 결핍과 자기 중심성)와 기능적으로 동질적인 것이다. 개인과 집단이라는 두 수준에서 플로우 경험을 방해하는 것은, 사회적 무질서와 주의력 장애에서처럼 주의 과정의 분열로 인해서, 또 소외와 자기 중심성에서 볼 수 있는 거서럼 지나친 경직으로 인해서 문제가 된다. 개인적 수준에서 볼 때 무질서는 불안과 일치하는 것이며, 소외는 지루함에 대응되는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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의식에서 실제에 대한 표상을 하기 위해 많은 외부의 정보를 필요로 하는 사람들은 자신의 정신을 사용하기 위해서 외적인 환경에 더 의존한다. 그들은 자신의 사고에 대한 통제력이 적어지고 결국 이는 그들의 경험을 즐기는 것을 더 어렵게 만든다. 대조적으로, 의식에서 사건들을 표상하기 위해서 단지 소수의 외적 단서를 필요로 하는 사람들은 환경의 영향으로부터 좀더 자유로울 수 있다. 자신의 주의력을 융통성 있게 활용할 수 있기 때문에 외적 경험을 머릿속에 표현하는 것이 쉽고, 그 결과 더욱 자주 최적 경험에 도달하게 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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많은 연구에 따르면, 부모와 자식의 상호 작용 형태는 아이가 성장해서 어떤 유형의 사람이 되는가에 지속적인 영향을 미친다. 시카고 대학에서 라순디 박사가 실시한 연구를 예로 들어보자. 이 연구에 따르면, 자기 부모와 특정한 유형의 관계를 형성한 10대들이 그렇지 못한 또래보다 대부분의 일상에서 더 행복해하고, 만족하고, 의지가 강한 경향이 있다고 한다.
최적 경험을 유발하는 특정 가정 환경 유형의 특징을 다음 다섯 가지로 정리해 볼 수 있다.
첫 번째는 명료성이다. 아이들은 부모가 자신들로부터 무엇을 기대하는지를 명료하게 알고 있다고 생각한다. 또한 가족의 상호 작용에서 목표와 피드백이 명확하다.
두 번째는 중심성이다. 즉 이것은 부모가 자녀들이 좋은 대학이나 좋은 직장에 들어가는 것에 관심을 갖기보다는, 지금 현재 자녀들이 하고 있는 일의 구체적인 경험과 감정에 관심을 갖고 있다고 믿는 자녀의 지각이다.
세 번째로는 선택성이다. 아이들은 무엇을 선택해야 할지에 대해서 그 선택의 결과를 책임질 수 있다면 부모가 세운 규칙도 깰 수도 있다고 생각하며, 다양한 가능성을 갖고 있다고 생각한다.
네 번째의 특징은 자녀가 부모의 보호 아래 충분히 편안함을 느껴 자기가 관심 있는 어떤 것이든 간에 참여할 수 있도록 하는 부모의 신뢰성이다.
그리고 마지막은 도전성인데, 이는 자녀들에게 점차 복합적인 행동의 기회를 제공하는 부모의 헌신을 말한다.
이러한 다섯 가지의 조건은 삶을 즐길 수 있는 이상적인 연습의 기회를 주기 때문에 '자기 목적적 가정 환경'으로 일컬어진다. 분명히 다섯 가지 특징은 플로우 경험의 차원과도 매우 비슷하다. 목표와 피드백의 명료한 제시, 통제감, 당면한 과제에 대한 집중, 내적 동기화 및 도전 의식을 독려하는 가정 환경에서 성장한 아이들은 일반적으로 그렇지 않은 환경의 아이들과 비교해 볼 때, 플로우를 경험할 수 있는 더 나은 기회를 갖는다.
자기 목적적이 아닌 가정의 아이들은 많은 에너지를 끊임없는 협상과 다툼에 소진한다. 아이들은 자기가 아닌 다른 사람들의 목표에 의해서 압도되지 않기 위해, 또한 자신의 연약한 자아를 보호하기 위해 이러한 심리적 에너지를 써 버리는 것이다.
연구에 따르면, 자기 목적적 환경의 아이들은 그렇지 않은 아이보다 더 행복하고, 강하고, 명랑하고, 만족스러워했다. 이 차이는 아이가 혼자서 공부할 때나, 학교에서 공부할 때도 나타났다. 여기서도 중요한 것은, 자기 목적적 가정에서 성장한 아이들이 한층 더 쉽게 플로우 경험을 한다는 사실이다. 하지만 더 중요한 사실이 있다. 아이들이 친구와 함께 있을 때, 자기 목적적 환경의 청소년과 그렇지 않은 아이들 사이에 차이는 없다는 것이다. 즉 가정이 자기 목적적인지의 여부에 상관없이 아이들은 친구와 함께 있을 때 긍정적인 정서를 경험한다.
p177
세상에 대한 관심, 즉 적극적으로 세상과 관계를 맺으려는 욕망이 없다면 사람은 스스로 고립된다. 20세기 가장 위대한 철학자 중 한 명인 버트란트 러셀은 개인적 행복을 성취하는 방법을 다음과 같이 말했다.
"점점 나는 내 자신과 나의 결점들에 대해 무관심해지는 법을 배웠다. 점차 내 주의의 중심은 외부의 대상, 즉 만물의 상태, 다양한 지식의 영역, 내가 애정을 느끼는 개인들에게 맞추어졌다."
그는 이처럼, 자기 목적적인 성격을 어떻게 형성할 수 있는지를 짧지만 적절하게 설명해 주었다.
부분적으로 그러한 성격은 생물학적 유전과 초기의 양육을 통해 얻어진 것이다. 즉 어떤 사람은 신경학적으로 좀더 집중을 잘하고 융통성 있는 능력을 타고났거나, 또 어떤 사람은 운이 좋게도 비자의식적 개인주의를 함양시켜 준 부모가 있었을 것이다. 그러나 이러한 성격은 훈련과 훈육을 통하여 완전하게 숙달할 수 있는 기술, 즉 계발 가능성이 있는 능력이다.
p188
연구 결과, 사람들이 값비싼 물질적 자원이 필요한 여가 활동(값비싼 장비가 있어야 하거나, 자동차 운전 또는 TV 시청처럼 석유나 전기 등의 에너지를 필요로 하는 활동)을 할 때 비용이 많이 들지 않는 여가 활동 때보다 그 즐거움이 훨씬 감소한다는 결론을 얻었다. 사람들이 가장 행복하게 느낄 때는 그저 서로 담소를 나눌 때, 정원을 손질할 때, 뜨개질을 할 때 혹은 여타의 취미 생활을 즐길 때였다. 이와 같은 활동들은 외적 자원이 거의 들지 않지만 상대적으로 고도의 심리적 에너지를 집중해야 하는 일들이다. 반면, 외적 자원을 필요로 하는 여가 활동에는 상대적으로 주의를 덜 집중하기 때문에 기억할 만한 추억이 줄어드는 것이다.
p196
인도 사람들은 고도의 자기 통제 기술에 지나치게 매료된 나머지 자연 환경의 물리적 도전에 대처하는 법을 배우지 못하였다. 그리하여 대다수 국민들 사이에 무력감과 무관심이 팽배해졌고, 결국은 자원의 빈약과 인구 과잉으로 인한 좌절을 맛보아야 했다. 반면에, 물질적 에너지 사용의 극대화를 꾀한 서양은 가능한 모든 자원을 개발하고 급속도로 소모해 왔기 때문에 환경의 고갈을 초래하였다. 정신 세계와 물질 세계의 저화로운 균형을 이루는 사회야말로 완벽한 사회라 할 것이다.
산스크리트어로 요가는 '함께 있게 함'을 의미하는데, 이는 사람과 신을 일체가 되도록 하는 요가의 목적을 나타내는 것이다. 즉, 먼저 신체의 각 부분이 서로 하나가 되도록 하고, 그렇게 하나가 된 육체와 의식이 함께 질서를 찾아나가는 것이다. 약 1,500년 전에 파탄잘리에 의해 집대성 된 요가의 교본에는 이러한 목표에 이르는 여덟 단계가 제시되어 있는데, 각 단계로 올라갈수록 난이도는 점차 증가한다. 윤리적 준비를 하는 처음 두 단계는 각 개인의 태도를 변화시키고자 하는 것이다. 이 단계는 의식을 정리하는 단계라고 말할 수 있다. 즉 정신을 직접적으로 통제하려는 노력을 시도하기 전에 우선 심리적 엔트로피를 최대한 줄이고자 하는 것이다.
이를 실천하기 위한, 첫 단계인 야마(yama)에서는 거짓말 · 도벽 · 욕망 · 탐욕 등 타인에게 해를 끼칠지도 모르는 생각과 행동을 자제하라고 한다.
두 번째 단계는 순종을 의미하는 니야마(niyama)이다. 이는 곧 청결과 수련 그리고 신에 대한 순종을 질서 정연한 일과를 따름으로써 예측 가능한 형태로 만들고, 이 과정을 통해서 주의를 통제하기 쉽게 만드는 것이다.
그 다음의 두 단계는 육체적 준비를 하는 단계로, 요기라고 불리는 수행자들이 감각의 유혹을 이겨내고, 지치거나 사념에 얽매이지 않고 집중할 수 있게 해주는 습관을 기르는 단계이다.
세 번째 단계에서는 아사나(asana)라고 하는 다양한 '좌자세'나, 동일한 자세를 오랜 시간 동안 긴장이나 피로에 굴하지 않고 유지하는 것이다. 우리는 천을 두르고 머리를 땅에 대면서 발은 목뒤로 접은 채 꺼꾸로 서 있는 사람을 본 적이 있을 것이다. 바로 이것이 서양에 알려진 익숙한 요가 형태, 즉 아사나이다.
네 번째는 프라나야마(pranayama), 즉 호흡법으로서 신체의 긴장을 완화하고 호흡의 리듬을 안정시키는 것이 목적이다.
다섯 번째 단계는 지금까지의 준비 운동과 본격적 요가 수행의 연결 단계로 프라트야하라(pratyahara)라고 한다. 이것은 감각 정보 입력을 통제함으로써 외부 물체로부터 주의를 끊고 궁극적으로는 본인이 의식으로 받아들이고 싶은 것만 보고, 듣고, 느낄 수 있도록 하는 단계를 말한다. 지금까지 살펴본 단계들을 보면, 이번 장에서 설명하는 플로우 활동의 목적, 즉 의식 세계의 통제와 요가의 목적이 얼마나 유사한지를 알 수 있다.
나머지 세 단게는 지금 우리의 주제와 일치하지는 않지만 - 왜냐하면 나머지 단계에서는 육체적 기술보다는 순수한 정신 작용을 통한 의식의 통제를 다루고 있기 때문이다 - 여기서 맥락을 유지하기 위해, 또 결국에는 이런 정신적 수행이 이에 앞서 행해지는 육체적 수행에 전적으로 바탕을 두고 있기 때문에 계속 설명하기로 한다. 다라나(dharana)는 오랜 기간 동안 단일한 자극 하나에만 집중하는 것으로, 앞 단계인 프라트야하라와 일맥 상통한다고 볼 수 있다. 즉 우선 사물을 의식 밖으로 내보내는 것을 배우고, 그 다음 그것을 의식에 다시 넣는 법을 배우게 되는 것이다. 고도의 명상을 수행하는 드야나(dhyana)가 일곱 번째 단계이다. 이 단계에서는 어떤 것으로부터도 방해 받지 않고, 앞 단계에서와 같은 단일 자극도 필요치 않은 집중 상태에서 자신을 잊는 법을 배우게 된다. 최종적으로 수행자는, 명상하는 사람과 명상의 대상이 하나가 되는 상태인 사마디(samadhi)를 성취하게 된다. 사마디를 성취한 사람들은 이를 그들 생애에서 최고로 행복한 경험으로 묘사한다.
p199
요가와 플로우의 유사성을 뒷받침해 주는 또 다른 점은 해방에 이르는 마지막 단계까지도 수행자가 계속해서 의식을 통제해야 한다는 것이다. 의식의 통제 없이는 자아를 버릴 수 없으며, 자아를 버리는 그 순간조차 의식의 완전한 통제가 있어야 가능하기 때문이다. 본능과 습관 그리고 욕망이 있는 자아를 포기한다는 것은 자연스럽게 이루어지는 일이 아니다. 고도로 자신을 통제하는 사람만이 해낼 수 있는 일이다. 그러므로 요가야말로 가장 오래되고 가장 체계저그로 플로우 경험을 낳는 방법 중의 하나라고 해도 과언이 아니다.
p205
음악은 조직화된 청각적 정보라고 할 수 있다. 음악은 듣는 사람의 마음을 정리해 줌으로써, 심리적 엔트로피 - 즉 관련 없는 정보들이 우리가 목표에 집중하는 것을 방해할 때 경험하게 되는 무질서 - 를 감소시켜 준다. 음악을 들으면 지루함이나 근심 걱정을 떨쳐 버릴 수 있고, 진지하게 감상할 때는 플로우를 경험할 수 있게 된다.
어떤 이는 기술의 발달로 음악을 언제 어디서나 손쉽게 접할 수 있게 됨으로써 삶의 질이 상당히 향상됐다고 주장할는지도 모른다. 라디오 · 테이프 · CD · 레이저 디스크 등을 통해 선명하게 녹음된 최신 곡들을 하루 종일 들을 수 있게 되었기 때문이다. 이처럼 계속해서 음악을 들을 수 있다는 사실이 우리 삶을 더욱 풍족하게 만들어 주어야 이론에 들어맞는다. 그러나 이런 주장은 흔히 행동과 경험을 혼동하는 데서 나오는 것이다. 녹음된 곡을 며칠이고 계속해서 듣는 것이 몇 주일 동안 고대하던 콘서트에서 단 한 시간 음악을 듣는 것보다 더 즐거울 수도 있고, 그렇지 못할 수도 있다. 삶의 질을 향상시켜 주는 것은 음악이 귀에 항상 가깝게 있다는 사실이 아니고, 우리가 주의를 집중해서 귀를 열고 들을 때만이다. 예컨대 식당이나 가게에서 나오는 배경 음악을 들을 때 그것을 귀기울여 듣는 사람은 거의 없으며, 따라서 그로 인해 플로우를 경험하기는 극히 어려운 것이다.
다른 것과 마찬가지로 음악도 즐기기 위해서는 주의를 기울여야 한다. 현대인들은 녹음 기술의 발달로 음악을 듣기가 너무 편리해진 나머지 그것을 당연한 것으로 여기게 되었다. 그러나 음악을 통해 즐거움을 얻을 수 있는 우리의 능력도 그만큼 감소될 수 있는 것이다. 녹음 기술이 발명되기 이전에는, 종교 의식에 완전히 통합되어 있던 시절의 음악이 자아내는 것과 같은 경외감을 라이브 음악 공연을 통해 얻을 수 있었다. 교향악단은 물론이요, 마을의 무도회 반주 그룹까지도 이와 같은 조화로운 소리를 만들어 내는 신비한 기술을 잘 보여 주는 좋은 예가 되었다. 당시에는, 한 번의 공연이 유일무이한 것이며 다시 되풀이될 수 없다는 것을 잘 알았기에 사람들이 이런 행사에 거는 기대가 매우 높았던 것이다.
오늘날 록 콘서트와 같은 라이브 공연의 관객들도 어느 정도는 이와 같은 의식적 행위에 참가하는 것이라고 볼 수 있다. 이러한 경우 말고는 이처럼 많은 사람들이 모여 같은 행사를 보고, 같은 것을 생각하고 느끼며, 동일한 정보를 처리하게 되는 예가 극히 드물기 때문이다. 이와 같이 집단으로 행사에 함께 참여하는 관중들은 뒤르켐이 명명한 '집단적 흥분'을 경험하게 되는데, 이는 어떤 집단에 확고히 소속되어 있다는 존재 의식을 느끼게 되는 것을 말한다. 뒤르켐은 이러한 느낌이야말로 근원적인 종교적 경험이라고 생각했다. 이처럼 라이브 공연은 듣는 이로 하여금 음악에 집중할 수 있는 여건을 만들어 주기 때문에 재생된 음악을 들을 때보다 공연장에서 플로우를 경험할 가능성이 더 높아지는 것이다.
라이브 연주가 녹음된 음악보다도 원래 더 즐거운 것이라고 주장하는 것은 그와 반대의 경우를 주장하는 것과 마찬가지로 타당성이 희박하다. 듣는 이가 진지한 자세만 갖춘다면 어떤 음악도 즐거움을 줄 수 있다. 사실상, 야쿠이 족의 마술사가 인류학자 카를로스 카스타네다에게 가르쳐 준 바와 같이, 음과 음 사이의 정적까지도 면밀히 들으면 즐거운 것이 될 수 있다.
많은 사람들이 희귀 음반까지 탐내면서 많은 음악을 수집해 두고 있지만, 그것을 실지로 즐기지는 않는다. 몇 번 음악을 들으면서 음향 시설이 내는 선명한 음에 감탄하고서는, 더 좋은 음향 기기가 나와 그것을 새로 구입할 때까지 잊어버리고 다시는 음악을 듣지 않는다. 이와는 반대로, 음악에 내재한 기쁨의 잠재성을 최대로 살리는 사람들은 그들의 경험을 플로우로 변화시킬 수 있는 나름대로의 방법을 알고 있다. 그들은 우선 일정한 시간을 음악 감상에 할애한다. 그 시간이 되면 불을 끄거나, 제일 좋아하는 의자에 앉거나, 혹은 주의를 집중할 수 있는 자신들만의 어떤 방법을 통해 집중도를 높인다. 그들은 감상할 음악을 미리 신중히 선곡하며, 감상 시간에 맞는 구체적 목표를 설정해 둔다.
음악 감상은 처음에는 감각적 경험 단계에서 출발한다. 이 단계에서는, 우리 신경계에 유전적으로 내재되어 있는 유쾌한 육체적 반응을 유발시키는 음색에 반응을 보인다. 우리는 전 세계적으로 사랑받는 그런 특정 가락이나, 플루트의 애조를 띤 호소, 또는 활달한 트럼펫의 곡조에 반응을 나타낸다. 우리는 특히 드럼이나 베이스의 리듬에 민감하게 반응을 하는데, 이런 리듬이 록 음악의 기초가 되는 것이며, 누군가는 이와 같은 리듬이 어머니의 자궁 속에서 처음으로 듣게 되는 어머니의 심장 소리를 상기시켜 준다고 하기도 한다.
다음 단계는 유추적 감상 단게이다. 이 단계에서는 음의 양식에 따라 감정과 이미지를 떠올리는 기술을 갖추게 된다. 음울한 색소폰의 악절은 대평원 상공에서 먹구름이 몰려드는 것을 바라볼 때 느꼈던 경외감을 상기시켜 준다. 또 차이코프스키의 곡은 눈이 가득 덮인 숲 속에서 종을 딸랑거리며 썰매를 달리는 광경을 눈으로 보는 듯하게 해주기도 한다. 대중 가요도 물론 그 노래가 어떤 분위기와 어떤 이야기를 나타내는 곡인가를 가사로 명확히 알게 해줌으로써, 이와 같은 유추적 감상법을 최대로 활용한다고 하겠다.
음악 감상의 가장 복합적인 단계는 분석적 감상 단계이다. 이 단계에서는 음의 감각적 혹은 서사적 측면보다는 음악의 구조적인 요소에 관심을 기울이게 된다. 감상 기술이 이와 같은 수준이 되면, 그 작품 저변의 양식 및 그와 같은 화성을 이루어 낸 방법을 인식하는 능력을 갖게 된다. 이러한 수준의 감상 기술을 익히게 되면, 각 공연마다 상이한 음향의 질을 비교 평가할 수 있으며, 공연 작품을 그 작곡가의 초기 및 후기 작품과 비교하기도 하고, 동시대의 다른 작가가 만든 작품과도 비교할 수 있다. 또한 같은 관현악단, 지휘자, 악단의 초기 공연과 후기 공연을 비교해 보거나, 다른 악단과 지휘자는 같은 작품을 어떻게 해석했는지를 비교해 볼 수도 있다.
이처럼 분석적 감상 능력을 가진 사람들은 같은 블루스 곡을 다양하게 변화시킨 편곡 작품들을 서로 비교하기도 하고, "카라얀이 1975년에 지휘한 제7번 교향곡 제2악장이 1963년 공연 당시와 어떻게 다른가 한번 볼까?"라든지, "시카고 교향악단의 금관악기부가 베를린 교향악단보다 정말 더 나은가?"라는 생각들을 염두에 두고 감상을 하기도 한다. 그와 같은 목표를 설정해 놓았기 때문에 듣는다는 직업은 하나의 적극적인 경험이 되는 것이다. 그리고 이러한 경험을 통해, "카라얀이 빠르기를좀 늦추었네"라든지, "베를린 교향악단의 관현악부의 소리는 더 선명하지만 부드러운 맛이 좀 적군"등과 같은 계속적인 피드백을 얻는다. 이와 같은 분석적인 감상 기술을 익혀나가게 되면 음악을 즐길 수 있는 기회가 기하급수적으로 증가한다.
p215
반드시 억제한다고 해서 덕이 되는 것은 아니다. 두려움 때문에 스스로를 억제하는 삶은 필연적으로 위축되게 마련이다. 그러한 사람들은 방어적이고 완고해지고, 자아가 더 이상 성장하지 않는다. 오직 자율적으로 선택한 규율을 통해서만, 인생을 즐기면서도 이성의 한도를 벗어나지 않을 수 있다. 만일 어쩔 수 없어서가 아니라 스스로 원하기 때문에 자신의 본능적 욕망을 조절할 수 있다면, 중독되지 않고도 즐거움을 누릴 수 있다. 음식에 광적으로 집착하는 사람은 맛있는 음식을 거부하는 금욕주의자처럼 스스로에게나 다른 이에게 권태감을 준다. 이러한 양극단 사이에서 삶의 질을 향상시킬 수 있는 여지는 얼마든지 있다.
6장. 지적 활동을 통해 플로우 찾기(The Flow of Thought)
p221
운동 선수들은 어느 한계 이상으로 그들의 성적을 향상시키려면, 먼저 정신을 가다듬는 법부터 익혀야 한다는 사실을 너무도 잘 알고 있다. 그렇게 함으로써 그들이 얻게 되는 내적 보상은 좋은 컨디션뿐만이 아니라 개인적 성취감과 자긍심의 강화까지도 경험하게 되는 것이다. 역으로, 모든 정신적 활동을 위해서 신체적 상태가 중요하다. 예를 들어 체스는 가장 두뇌를 많이 쓰는 게임 중의 하나이지만, 체스의 고수들은 달리기나 수영을 하면서 늘 체력을 다져야 한다. 그들이 육체적으로 건강하지 못하면, 체스 대회에서 장시간 동안 고도로 정신을 집중한 상태에서 오래 버티지 못한다는 것을 잘 알기 때문이다.
p223
우리는 정신을 통제할 수 있는 우리의 능력이 얼마나 미약한지를 잘 깨닫지 못한다. 왜냐하면 습관에 의해 심리 에너지가 너무도 잘 배분되는 까닭에 거침없이 계속 이어지는 것처럼 보이기 때문이다. 아침에 자명종 시계가 울리면 우리는 잠에서 깨어 의식을 찾은 후 목욕탕으로 가서 이를 닦는다. 그러고 나면 문화가 규정해 주는 사회적 역할이 우리의 생각을 정리해 주며, 하루가 저물 때까지 일정한 양식에 따라 자동적으로 행동하다가 밤이 되면 잠을 자면서 의식을 잃어버린다. 그러나 특별하게 할 일이 없는 상태로 혼자 남겨졌을 때는 본능적인 무질서가 드디어 모습을 드러낸다. 별로 할 일이 없으니 이것저것 생각해 보다가 대개는 뭔가 고통스럽고 신경 쓰이는 일에 생각이 멈춘다. 생각을 정리하는 법을 알지 못하는 한, 현재 가장 문제가 되는 일로 관심이 모아진다. 실제 혹은 가상의 고통이나, 최근에 유감스러웠던 일, 또는 오래된 갈등 등에 관심이 쏠린다. 이런 쓸모도 없고 즐겁지도 않은 엔트로피가 바로 정상적인 의식의 상태이다.
이런 상태를 피하기 위해 현재 손쉽게 얻을 수 있는 정보로 - 그것이 어떤 것이든 간에 머릿속을 채움으로써, 더 이상 부정적인 생각을 하지 않으려고 하는 것은 어쩌면 당연한 일이다. 바로 이러한 이유가, 즐기는 것도 아니면서 사람들이 왜 그렇게 막대한 시간을 텔레비전 보는 일에 소모하는가 하는 의문을 풀어준다. 독서나 다른 사람과의 대화 혹은 취미 활동과 비교해 볼 때, 텔레비전은 심리 에너지를 최소한으로 투자하고도 쉽고 지속적으로 시청자들의 주의를 끌게 해준다. 텔레비전을 보고 있는 동안은 골치 아픈 개인적 문제를 떠올리게 될까봐 염려할 필요가 없다. 일단 사람들이 정신적 혼돈 상태를 극복하기 위해 이런 미봉책을 쓰기 시작하면, 그 습관을 버리기란 거의 불가능하다.
물론 TV 시청처럼 어떤 외적 자극에 정신을 내맡기기보다는, 습관을 통해서 정신을 통제하는 것이 의식의 혼돈 상태를 피하는 바람직한 방법이다. 그러나 그와 같은 습관을 들이기 위해서는 연습이 필요하며, 플로우 활동에 의레 따르는 목표와 규칙이 있어야 한다. 예를 들어 정신을 이용하는 가장 단순한 방법 가운데 하나로 공상을 들 수 있다. 이는 마음속에서 가상으로 어떤 일련의 사건들을 그려보는 것이다. 그러나 생각을 정리하는 일에 이처럼 쉬워 보이는 방법조차 사용하지 못하는 사람도 많다. 공상 및 정신적 심상에 대해 다른 어떤 학자보다 많은 연구를 한 예일 대학의 싱어 교수에 따르면, 전혀 공상을 할 줄 모르는 아이들도 많다고 한다.
공상은 유익한 점이 많다. 먼저, 공상 속에서나마 불쾌한 현실을 보상함으로써 - 자신에게 해를 끼친 사람이 벌받는 상황을 상상해 보면서 좌절감이나 적개심을 어느 정도 해소시키는 것처럼 - 감정의 질서를 수립하는 데 도움을 준다. 또한 공상은 의식의 복합성을 높이는 일에도 큰 도움을 줄 수 있다. 예컨대 아이들이 - 어른들도 마찬가지로 - 상상을 통해서 당시 상황을 반복적으로 재현해 봄으로써 지금껏 문제 해결에 최선이라고 생각해 왔던 방법을 수정할 수도 있고, 다른 대안도 생각해 보며, 예상치 않은 결과도 발견할 수 있는 것이다. 기술을 닦는다면 공상도 매우 즐거운 것이 될 수 있다.
p236
"행복이란 것은 힘이나 돈에 있는 것이 아니다. 행복은 진실과 다양함 속에 존재하는 것이다."
"유쾌함과 자신감은 최고의 선이다."
칸트가 끓는 물 속에다 자신의 시계를 집어넣고 손에다는 계란을 들고 계란이 익는 시간을 재려했을 때는, 그의 모든 심리 에너지가 추상적 사고를 조화롭게 정리하는 데 투자되었기 때문으로 볼 수 있다.
p237
내적 상징 체계가 없는 사람은 너무도 쉽게 대중 매체의 포로가 된다. 이들은 선동 정치가들에게 쉽게 현혹되며, 연예인들을 보고 쉽게 기분이 풀리고, 장사꾼들에게 이용당하기 쉬운 사람들이다. 우리가 텔레비전이나 마약 그리고 유창한 정치적 구호나 종교적 구원에 의존하게 되는 것은 의지할 것이 너무 없어서, 즉 모든 해답을 가지고 있다고 주장하는 사람들에게 우리 마음을 빼앗기는 것을 방지해 주는 내적 규칙을 갖고 있지 못하기 때문이다. 스스로 정보를 제공할 능력이 없을 때 우리의 생각은 무질서로 흘러 들어가게 된다. 의식의 질서를 찾기 위해서 자신이 아무런 통제도 할 수 없는 외부로부터의 방법을 사용할 것인가, 아니면 우리의 기술과 지식으로부터 자생적으로 성장하는 내적 방법을 따를 것인가의 여부는 각자의 선택에 달려 있다.
p240
단어를 사용해 우리 삶의 질을 고양시킬 수 있는 훨씬 더 실재적인 방법은, 오늘날에는 거의 잊혀진 '대화의 기술'이다. 지난 200여 년 동안 공리주의 관념에 따라 우리는 대화의 주된 목적이 유용한 정보를 전달하기 위한 것이라고 믿어 왔다. 그래서 오늘날 우리는 실용적 지식을 전달해 주는 간결한 의사 소통을 중시하며, 그밖의 것들은 하찮은 시간 낭비라고 여긴다. 그 결과, 사람들은 직접적으로 관심이나 지식을 갖고 있는 협소한 화젯거리를 벗어나서는 서로 대화를 나눌 수 없게 되었다. 우리들 중에서 "미묘한 대화, 그것이야말로 에덴 동산이다"라고 서술한 알리의 열정을 이해할 수 있는 사람은 거의 없다. 이것은 유감스러운 일이다. 왜냐하면 대화의 주된 기능은 무엇을 성취하는 것이 아니라 경험의 질을 향상시키는 것이기 때문이다.
p243
오늘날에는 다른 많은 의사 소통의 매체가 글을 대신하기 때문에 우리는 글쓰는 습관을 경시하게 되었다. 전화 · 녹음기 · 컴퓨터 · 팩스 등을 통해서 뉴스를 더욱 효율적으로 전할 수 있다. 만일 글을 쓰는 유일한 목적이 정보를 전달하기 위한 것이라면 글쓰는 습관이 쇠퇴하게 되는 것도 당연하다. 그러나 글은 단지 정보를 전달하기 위해서가 아니라 정보를 창조하기 위해 쓰는 것이다.
p255
수세대를 거치면서 그 제도 자체가 일으킨 문제들이 원래의 목적보다 우선하게 되는 경우를 흔히 볼 수 있다. 예컨대 현대 국가들은 적에 대한 방어 수단으로서 군대를 창설했다. 그러나 곧 군대 자체의 목적과 정치가 생겨났고, 이제는 가장 성공적인 군인이 국가를 가장 잘 수호하는 사람이 아니라 군대를 위해 돈을 가장 많이 얻어오는 사람이 되어 버렸다.
p257
다른 분야에서와 마찬가지로 철학에서도 연구자가 수동적인 소비자의 지위를 뛰어넘어 능동적인 생산자로 발돋움할 수 있는 시점이 온다. 자신이 통찰한 내용을 언젠가 후대에서 경외김을 가지고 있을 것을 기대하며 기록으로 남긴다는 것은 대부분의 경우 지나친 오만이다. 더군다나 그와 같은 '외람됨'이 인간사에 많은 악영향을 미쳐 왔다. 그러나 자신이 당면했던 주된 의문점들을 명료하게 표현하려는 내적 동기로 인해 생각을 기록하고, 자신의 경험을 의미를 이해하는 데 도움이 되는 해결책을 진술하고자 한다면, 그 아마추어 철학자는 가장 어렵지만 보람도 큰 영역에서 기쁨을 얻을 수 있는 법을 이미 배운 것이다.
p260
많은 사람들이 학교를 졸업함과 동시에 배움을 포기하는 이유는, 13~20년에 걸친 교육이 외적 동기에 의해 주어진 것이었기 때문이다. 즉 배운다는 것이 불유쾌한 기억으로 자리잡고 있는 것이다. 학생들의 주의력이 오랜 기간 동안 외부에 의해, 즉 교과서와 교사들에 의해 조종되어 왔기 때문에 그들은 졸업을 첫 자유의 날로 간주해 왔던 것이다.
그러나 자신의 상징적 기술의 사용을 포기하는 사람은 결코 자유로워질 수가 없다. 그의 사고는 이웃의 의겨니나 신문의 사설 그리고 텔레비전에 의해 좌우될 것이다. '전문가'의 조종을 받게 되는 것이다. 외적 동기에 의한 교육이 종결되는 시점을 내적인 동기로 교육을 받게 되는 출발점으로 만드는 것이 가장 이상적이다. 그 시점에서 공부의 목적은 더 이상 학점을 받거나 졸업장을 타는 것 그리고 좋은 직장을 구하는 것이 아니다. 그보다는, 주변에서 일어나는 일들에 대한 이해를 높이는 것 그리고 자기 경험의 의미를 이해하고 그 질을 높이기 위한 것이 목적이 되는 것이다. 바로 여기서 사상가는 심오한 기쁨을 느끼는 되는 것이다.
7장. 일 속에서 플로우 경험하기
p277
다시 말해 유(流)의 신비한 경지에 도달하려면 어떤 초인간적인 대도약이 필요한 것이 아니라 단지 주변에 있는 행동의 기회에 점차로 주의를 집중시켜 나가면 되는 것이다. 그리고 이에 따라 연마되는 기술이 시간이 흘러가면서 너무나 완벽한 수준에 이르러 겉보기에는 자동적이고 초월적인 것처럼 보일 정도가 되는 것이다. 위대한 바이올린 연주가나 훌륭한 수학자들의 성취는 공히 난관 극복과 점진적 기술 연마의 결과임이 확실하지만, 마치 초인적인 것처럼 보인다.
p287
일을 통해 삶의 질을 향상시키기 위해서는 두 가지의 상호 보완적인 전략이 필요하다. 그 하나는 사냥 · 가내 직조 수공업 · 수술 등과 같은 플로우 활동과 최대로 비슷해질 수 있도록 일을 재설계해야 한다는 것이다. 다른 하나는 행동의 기회를 파악하고 기술을 연마하고 합당한 목표를 설정할 수 있도록 하는 훈련을 통해서 사람들이 세라피나와 조 그리고 포정의 경우처럼 자기 목적적 성격을 개발할 수 있도록 돕는 일이다. 위의 두 전략 중 어느 하나만으로는 일을 더 만족스러운 것으로 만들 수 없다. 두 가지가 상호 보완이 되어야만 최적 경험의 창출에 지대한 공헌을 하게 되는 것이다.
p292
이것이 바로 역설적인 상황인 것이다. 직장에서 사람들은 훨씬 많은 기술을 사용하고 직면하는 도전들도 많다고 느끼기 때문에, 스스로 더 행복하고 강하고 창의적이라 느끼며 더욱 큰 만족감을 갖는다. 여가 시간에는 대체로 별로 할 일도 없고 자신의 기술도 많이 쓰이지 않는다는 생각이 들기 때문에 스스로 우울하고 약하고 지루하고 불만족스럽게 느끼는 경향이 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사람들은 일보다는 여가 시간을 더 많이 갖고 싶어하는 것이다.
이처럼 모순되는 양상이 의미하는 것은 무엇일까? 이에 대한 여러 가지 설명이 있을 수 있겠지만, 부정할 수 없는 분명한 결론이 하나 있다. 일이라고 하면 사람들은 자신의 감각이 내리는 판단을 따르지 않는다는 것이다. 이들은 직접 경험의 질은 무시해 버리고, 일에 대한 깊은 문화적 고정 관념에 의거해 자신의 동기를 결정 짓는다. 일이란 부담이고 구속이며 자신의 자유에 대한 침해이기 때문에 가능한 한 피해야 하는 것으로 여기는 것이다.
p294
연구를 통해서 우리는 미국인들이 자신의 직업에 만족하지 못하는 주된 이유 세 가지를 발견했는데, 세 가지 모두 직장에서 겪는 전형적인 경험과 관련이 있는 것들이었다. 우리가 지금껏 살펴본 바와 같이, 직장에서의 경험이 집에서의 경험보다 더 나은 경우가 많음에도 직업에 대한 불만을 갖게 되는 것이다(일반적인 생각과는 다르게, 봉급이나 다른 물질적 문제는 대체로 이들의 가장 절박한 관심사에 들지 않았다).
가장 많이 지적되고 어쩌면 가장 중요한 것일 수도 있는 불만족의 첫 번째 원인은 다양성과 도전감의 결여이다. 이것은 모든 사람에게 문제가 될 수 있으나, 특별히 단조로운 작업을 하는 하급 직책을 가진 사람들의 경우에는 더 심각한 문제가 되었다.
두 번째 불만은 직장에서 겪는 다른 사람과의 갈등, 특히 상관과의 갈등이다.
세 번째로는 심신의 소모가 지적되었다. 압력과 스트레스를 많이 받고, 자신을 위한 시간이 너무 없다는 것, 그리고 가족과 함께 보내는 시간이 부족하다는 것이었다. 이것은 특히 고위 직급에 있는 사람들, 즉 경영직이나 관리직에 있는 사람일수록 심각하게 느끼는 문제였다.
이러한 불만들은 객관적인 것들도 있지만, 각자의 의식의 주관적 변화에 따라 좌우되는 것들도 많다. 예를 들어, 다양성이나 도전은 직업이 본연적으로 갖고 있는 특징이기도 하지만, 각자가 기회를 어떻게 파악하는가에 따라 차이가 나는 것들이다. 포정과 세라피나 그리고 조는 대부분의 사람들이 단조롭고 의미가 없다고 생각하는 일에서 도전을 찾아냈다. 어떤 직업이 다양성을 갖추고 있는가는 궁극적으로 볼 때 실질적 노동 조건보다는 그 직업에 대한 각자의 접근 방식에 좌우되는 것이다.
다른 불만의 원인들도 이와 마찬가지이다. 직장 동료들이나 상사와 잘 지내는 것이 어렵기는 하겠지만, 일반적으로 이ㅘ 같은 일은 노력만 한다면 어느 정도 원만히 해결할 수 있는 문제들이다. 직장에서의 갈등이란 종종 체면이 손상될 것을 우려하여 방어적 심리를 갖게 될 때 발생한다. 자신의 특정 목표에 따라 다른 사람들이 자신을 어떻게 대해 주어야 한다는 기준을 설정해 놓고, 다른 사람들이 그 기준을 따라주기를 기대한다. 그러나 이처럼 계획된 대로 이루어지는 경우는 극히 드물다. 다른 사람들도 나름대로 설정해 놓은 기준과 목표가 있기 때문이다. 이 같은 교착 상태를 피해갈 수 있는 최선의 방법은 상사나 동료들이 그들의 목표를 달성할 수 있도록 도와주면서 자신의 목표를 성취하고자 노력하는 것이다. 단기적인 관점에서는 이 방법이 주변의 상황에는 신경도 쓰지 않고 자신의 이해만을 추구해 나가는 것보다 덜 직접적이고 시간도 많이 들지만, 장기적으로 볼 때 실패하는 확률이 거의 없다.
최종적으로 스트레스와 압력은 직업에 따르는 가장 주관적인 측면이므로 그만큼 의식의 통제를 받기 쉽다는 점을 생각해 볼 수 있다. 스트레스는 우리가 그것을 느껴야 비로소 존재하게 되는 것이다. 같은 스트레스를 받더라도 완전히 지쳐버리는 사람이 있고, 그것을 도전으로 받아들이는 사람이 있다. 스트레스를 완화하는 방법은 수없이 많다. 조직의 개선, 책임의 위임, 동료나 상사와의 좀더 원활한 의사 소통 등에 의해 해결되는 것들도 있고, 가정 생활의 개선, 여가 활동의 변화와 같이 직업 외적인 요인들이나 초월적 명상과 같은 내적 훈련 등으로 해소할 수 있는 것도 있다.
이와 같은 단편적인 해결책들도 도움이 되기는 할 것이다. 그러나 직업에서 오는 스트레스에 대처할 수 있는 유일하고도 진정한 대책은 그러한 스트레스를 전반적 경험의 질로 향상시키기 위한 도구의 하나로 보는 것이다. 물론 이것을 말로 하기는 쉽다. 이렇게 하기 위해서는 정신 에너지를 사용해야 하며, 어쩔 수 없이 정신이 산만해지는 상황에서도 자신이 설정해 놓은 목표에만 에너지를 집중해야 한다. 외적 스트레스에 대처하는 다양한 방법은 9장에서 다루기로 하고, 지금은 여가 시간의 활용을 통해 전반적 삶의 질을 어떻게 향상시킬 수 있는가를 살펴보기로 하겠다.
p297
단지 수동적으로, 그리고 자기 지위를 과시하려는 것과 같은 외적인 이유로만 주의를 기울게 된다면, 대중적 여가, 대중 문화, 심지어는 고급 문화까지도 모두 우리 정신을 좀먹는 기생충이 될 수 있다. 그것들은 심리적 에너지만을 흡수할 뿐이며, 그 대가로 어떤 실재적인 힘도 제공해 주지 않는다. 결국 우리들을 이전보다 더욱 지치고 의기소침하게 만들어 줄 뿐이다.
일이나 여가 시간 모두 우리가 통제하지 못한다면 실망스럽게 마련이다. 대부분의 일과 많은 여가 활동, 특히 대중 매체의 수동적 소비와 관련된 것들은 우리들을 행복하고 강하게 만들어 주지 못한다. 이를 통해 금전적 이득을 보는 사람들은 따로 있다. 우리가 이 상태를 그대로 방치한다면 이러한 것들은 우리 삶의 정수를 모두 고갈시켜 빈 껍데기만 남게 할 것이다. 그러나 다른 것들과 마찬가지로, 일과 여가도 우리 필요에 맞게 조정할 수 있다. 일을 즐길 수 있고, 여가 시간을 낭비하지 않는 사람은 결국 자신의 삶이 전반으로 훨씨 더 가치 있게 되었다고 느끼게 될 것이다. 브라이트빌은 "미래는 교육을 많이 받은 사람의 것일 뿐 아니라, 여가 시간을 현명하게 활용하도록 교육받은 사람의 것이 될 것이다"라고 말하지 않았던가.
8장. 혼자 있음과 함께 있음을 즐기기(Enjoying Solitude and Other People)
p304
겉으로는 서로 상충되는 것처럼 보이는 이 문제를 해결하는 것은 사실 그리 어려운 일이 아니다. 중요한 다른 어떤 것과도 마찬가지로, 관계도 좋을 때는 우리를 더할 나위 없이 행복하게 해주기도 하고, 나쁠 때는 매우 우울하게 만들어 주기도 한다. 우리가 다루어야 하는 환경 중에서 사람들이 가장 융통성이 많고 가장 변화하기 쉬운 측면을 지니고 있다. 동일한 한 사람이 아침에 기분을 좋게 만들어 주었다가도 저녁에는 비참한 기분으로 만들어 줄 수도 있는 것이다. 우리는 다른 사람들의 애정과 승인에 너무도 많이 의존을 하고 있기 때문에, 다른 사람들이 우리를 어떻게 대해 주는가에 따라 극심한 영향을 받는다.
그러므로 다른 사람들과 원만히 지내는 법을 배우는 사람은 삶의 질 전반을 크게 향상시킬 수 있다. 이러한 사실은 '친구를 얻고 사람들에게 영향을 주는 방법'과 같은 제목의 책들을 쓰고 또 읽는 사람들에게 잘 알려져 있다. 기업의 경영인들은 더욱 효과적인 경영을 위하여 의사 소통을 좀 더 원활하게 하고자 애쓰며, 사교계에 처음 나서는 사람들은 에티켓에 관한 책을 읽어 그 세계의 사람들로부터 인정을 받으려고 한다. 이러한 관심사들은 다른 사람들의 마음을 움직여 보려는 외적인 욕구를 잘 반영해 주고 있다. 그러나 단지 사람들이 우리 자신의 목표를 달성하는 데 도움을 주기 때문에 중요한 것만은 아니다. 그 자체로서 하나의 소중한 대상으로 대우를 한다면, 사람들은 가장 풍부한 행복의 원천이 된다.
관계가 갖는 바로 이 같은 융통성으로 인해 불유쾌한 상호 작용이 참을만한 것으로도, 심지어는 흥미로운 것으로도 변화될 수 있다. 우리가 사회적 상황을 어떻게 규정하고 해석하는지에 따라 서로를 어떻게 대하고, 그렇게 하면서 어떤 기분을 느끼는지가 크게 달라질 수 있다.
p308
외롭다는 것은 어째서 그렇게 부정적인 경험이 되는 것일까? 가장 기본적인 대답은 내적인 정신의 질서를 유지하기가 매우 어렵기 때문이라는 것이다. 우리에게는 계속 주의를 집중시킬 수 있는 외적이 목표와 외적 자극 그리고 외적 피드백이 필요하다. 외적 입력이 부족할 때는 주의가 산만해지고 사고의 혼란이 초래되어, 우리가 2장에서 살펴본 '심리적 엔트로피' 상태에 빠지게 된다.
청소년들이 혼자 있을 때 하는 대표적인 생각은 다음과 같은 것들이다.
"내 여자친구는 지금 무엇을 하고 있을까? 내 얼굴에 나는 것이 혹시 여드름인가? 수학 숙제를 제시간에 끝낼 수 있을까? 어제 나랑 싸웠던 녀석들이 나를 때릴까?
다시 말해, 할 일이 없으니, 부정적인 생각들이 머릿속을 차지하는 것을 저지하지 못하게 되는 것이다. 어른들도 의식을 통제하는 법을 배우지 못하면 이와 똑같은 상황을 겪게 된다. 자신의 애정 생활에 대한 염려와 건강 · 투자 · 집 · 직장의 문제들이, 눈앞에 급히 해야 할 일이 없어진 순간부터 머릿속에 떠오르기 시작한다.
바로 이런 이유 때문에 텔레비전이 그다지도 많은 사람들에게 큰 도움을 줄 수 있는 것이다. 텔레비전 시청이 결코 긍정적 경험이 되지는 못할지라도 일반적으로 사람들은 텔레비전을 보고 있을 때 수동적이고, 힘이 없고, 신경이 예민해지고, 슬픈 기분을 느낀하고 한다 - 최소한 눈앞의 깜박이는 화면이 의식에 어느 정도의 질서를 회복시켜 주는 것이다. 뻔히 예상할 수 있는 줄거리, 눈에 익은 주인공들, 심지어는 반복되는 광고까지도 일종의 안심을 주는 자극이 되는 것이다. 텔레비전 화면은 다루기 쉽고, 제한된 환경의 한 측면으로서 우리의 주의를 끈다. 텔레비전과 상호 작용을 하고 있는 동안은 우리의 머릿속에 개인의 걱정거리가 떠오루지 않는다. 화면을 통해서 전달되는 정보는 불쾌한 걱정들을 우리의 마음속으로부터 차단시켜 준다. 물론 이런 식으로 우울함을 떨쳐버리려 하는 것은 주의의 낭비이다. 크게 얻는 것도 없이 많은 양의 주의력을 소모해 버리기 때문이다.
습관적 마약의 사용으로부터 끊임없이 집안 청소, 충동적 성해위에 이르는 다양한 강박적 행위들에 의존해 고독의 두려움을 벗어나 보려는 극단적 방법도 있다. 약의 영향을 받게 되면 자아가 심리 에너지를 지휘해야 하는 책임으로부터 해방된다. 그저 느긋하게 앉아서 약이 제공해 주는 생각에 빠져들면 되는 것이고, 무슨 일이 벌어지든 내 알 바가 아니다. 텔레비전과 마찬가지로 마약도 우리가 우울한 생각에 직면하지 않도록 해준다.
술이나 향정신성 의약들도 최적 경험을 제공해 줄 수는 있다. 그러나 이러한 방법을 통해서는 복합성이 매우 낮은 수준의 경험만을 얻을 수 있을 뿐이다. 많은 전통 사회에서 행해지는 것처럼 고도로 기술적인 제식을 통해 마약을 취하지 않는 한, 실제로 마약은 우리의 판단(성취 가능한 일들은 무엇인가 그리고 우리가 한 개인으로서 무엇을 성취할 수 있는가)을 혼미하게 하는 결과를 초래할 뿐이다. 이것은 기분 좋은 상태이기는 하지만, 행동의 기회와 행동할 수 있는 능력을 '증가' 시킴으로 인해 맛보는 즐거움을 그릇되게 모방한 것에 불과하다.
마약이 정신에 미치는 영향을 이처럼 설명한 것에 대해 강력히 반론을 제기하는 이들도 있을 것이다. 왜냐하면 우리는 지난 25년 동안 마약이 '의식을 확장시켜 주며' 마약을 사용하면 창의성이 증가한다고 줄곧 들어왔기 때문이다. 그러나 약의 화학 성분이 의식의 내용과 조직을 바꾸어 주기는 하지만, 자아의 통제력을 신장시키거나 증대시켜 주지 못한다는 사실이 입증된 바 있다. 중요한 것은 무언가 창의적인 것을 성취하기 위해서는 바로 그런 통제력이 필요하다는 사실이다. 그러므로 향정신성 의약들은 정상적 감각 조건에서보다는 다양한 정신적 경험을 하게 해주는 것은 사실이지만, 그러한 경험을 효과적으로 통제할 수 있는 능력은 제공해주지 못하는 것이다.
많은 현대의 예술가들은 콜러리지가 마약에 취해서 집필한 것으로 알려진 <쿠빌라이 칸>과 같이 신비롭고 잊혀지지 않는 작품을 창작하고자 환각제를 사용해 보기도 한다. 그러나 이들은 결국 어떤 종류의 예술 작품이든 그것을 창작하기 위해서는 맑은 정신이 필요하다는 것을 깨닫게 된다. 약의 영향을 받은 상태에서 만들어진 작품은 좋은 예술 작품이 마땅히 갖추어야 할 복합성이 떨어져서 너무나 명백하고 자아 도취적인 경향을 띠게 된다. 화학 물질에 힘입어 예민해진 의식은, 나중에 작가가 명료한 정신으로 돌아와 사용할 수 있는 색다른 이미지나 생각, 감정 등을 낳기도 한다. 그러나 이렇게 되면, 정신을 점차 화학 물질에 의존하게 되어 결국은 스스로 정신을 통제할 수 있는 능력을 상실할 위험이 따르게 된다.
p312
집중이 필요하고 기술을 증진시켜 주며 더 나아가 자아를 성장시켜 주는 활동을 하면서 자유 시간을 보내는 것과 텔레비전을 보거나 마약을 하면서 남는 시간을 때우는 것에는 큰 차이가 있다. 위의 두 전략이 혼돈의 위협에 대처하는 서로 다른 방법으로 보일 수도 있고, 존재론적 불안에 대해 각기 다른 방어 기제로 보일 수도 있다. 하지만 결국, 전자는 성장으로 이끌어 주고, 후자는 정신이 이상해지는 것을 방지하는 역할을 할뿐이라는 점에 그 차이가 있다. 좀처럼 지루함을 느끼지 않고, 외부 환경의 지속적 도움 없이도 순간 순간을 즐길 수 있는 사람은 창의적인 삶의 성취 여부를 판가름하는 시험에 합격했다고 할 수 있다.
혼자 있는 시간으로부터 도피하지 않고, 그 시간을 활용하는 법을 배우는 것은 특히 젊은 시절에 더욱 중요하다. 혼자 있는 것을 견디지 못하는 청소년들은 나중에 성인이 되었을 때 진지한 정신적 각오를 해야 하는 과업을 수행하지 못한다. 방과 후 집에 돌아와서 가방을 자기 방에 던져 놓고, 냉장고에서 간식을 꺼내 먹은 후, 즉시 전화기를 들고 친구들과 통화를 시작하는 것이 많은 부모들에게 너무도 익숙한 전형적인 십대의 행동이다. 통화가 별 볼일 없어지면 전축이나 텔레비전을 켠다. 혹시라도 책을 펴는 경우가 있더라도 그 결심은 그리 오래가지 못한다. 공부를 한다는 것은 복잡한 형태의 정보에 집중을 하는 것이므로, 아무리 정신력이 강한 사람일지라도 얼마 안 지나 어려운 책의 내용을 떠나 좀더 즐거운 생각을 하려 한다. 그러나 마음대로 즐거운 생각을 떠올리는 것도 결코 쉬운 일이 아니다. 오히려 조직되지 않은 마음에 늘상 떠오르는 그런 생각들이 머리를 채우게 된다. 외모나 인기 그리고 인생의 성공 가능성 등에 관해 염려하기 시작하는 것이다. 이러한 생각을 떨쳐버리기 위해서는 자신의 의식을 점유할 다른 어떤 것이 필요하다. 공부는 너무 어렵기 때문에 별 도움이 안 된다. 이런 잡념을 떨쳐버리기 위해 십대들은 너무 많은 정신 에너지가 소모되는 것만 아니라면 그 어떤 것이라도 하려 든다. 다시 익숙한 음악이나 텔레비전 그리고 함께 시간을 때울 친구를 찾는 것이 이들 청소년들이 대체로 찾는 해결책이다.
p314
의식을 통제하는 법을 배우지 못한 청소년들은 '단련'이 되지 못한 성인으로 성장한다. 이들에게는 경쟁적이고 정보 집중적인 환경에서 살아남기 위해 필요한 복합적인 기술이 결핍되어 있다. 이보다 더 중요한 것은 이들이 삶을 즐기는 법을 전혀 배우지 못했다는 점이다. 숨겨진 성장의 잠재성을 개발하도록 이끌어 주는 도전을 찾아내는 습관을 익히지 못한 것이다.
그러나 십대의 청소년 시절만이 고독이 주는 기회를 활용하는 법을 배울 수 있는 결정적인 시기는 아니다. 불행하게도 너무나 많은 성인들이 20대나 30대에 이르면 그리고 40대가 되면 예외 없이 이미 자신의 몸에 밴 습관 속에 안주해도 좋다고 생각한다. 이미 경험을 충분히 쌓았으며, 생존에 필요한 책략들을 익혔으니 지금부터는 느긋하게 살아가면 된다고 느끼는 것이다. 결국, 극히 최소한의 내적 단련이 되었을 뿐인 이들에게는 해가 갈수록 엔트로피가 축적된다. 직장에서 느끼는 실망, 신체적 건강의 약화 그리고 일상적인 걱정거리들이 점차로 마음의 평정을 위협하는 거대한 부정적 정보로 쌓이게 된다. 이러한 문제들에 과연 어떻게 대처해 나가야 하는 것일까? 만일 혼자 있을 때 주의력을 통제하지 못하는 사람이라면, 결국 마약, 오락, 재미 등과 같이 정신을 둔화시키거나 주의를 돌려줄 수 있는 손쉬운 외적 해결책에 의존하게 될 것이다.
그러나 이 같은 대응 방법은 퇴보적인 것이어서 발전을 가져다주지 못한다. 인생을 즐기면서도 발전할 수 있는 길은, 불가피한 삶의 조건인 엔트로피부터 한층 더 고차원적인 형태의 질서를 창조해 내는 것이다. 즉 살아가면서 어려움에 직면할 때마다 그것을 억압하거나 회피해야 하는 것으로 받아들이지 말고, 배움의 기회로 그리고 기술을 향상시킬 수 있는 기회로 삼는 것이다.
나이가 들면서 체력이 약해지기 시작했다고 치자. 그러면 그 상황을 피하려고 하지 말고, 에너지를 외부 세계의 정복으로부터 심오한 내적 세계의 탐구로 전환시킬 시기가 되었다는 의미로 받아들이는 것이다. 즉 이제는 스스로 추구해 볼 만한 가치가 있다고 생각되는 것들, 예를 들면 프루스트의 작품을 읽거나 체스를 두기도 하고, 과수를 돌보거나 신에 대한 생각 등을 마침내 해 볼 때가 되었다는 의미이다. 그러나 젊은 시절에 고독한 시간을 활용하는 법을 배우지 못한 사람이 위와 같은 것들 중 하나라도 성취한다는 것은 매우 어려운 일이다.
p316
신까지 되지는 않더라도, 혼자 살려면 다른 사람들이나 직업 · 텔레비전 · 극장 · 레스토랑 · 도서관 등 문명 생활의 도움 없이도 플로우를 성취할 수 있도록 자신만의 정신적 일과를 설정해야 한다.
공간을 조직화하는 것보다 더 중요한 것은 아마도 시간을 조직화하는 일일 것이다.
사람은 고독 속에서도 살아남을 수 있다. 하지만 그러기 위해서는 엔트로피가 정신을 와해시키는 것을 방지하기 위해 주의력을 조직하는 일이 전제되어야만 한다.
p319
쾌락에 의존하는 생활 방식은, 고된 노동과 그러한 노동에서 얻는 즐거움을 기초로 형성된 복합적인 문화와 공생의 형식으로만 가능할 뿐이다. 그러나 이러한 복합적인 문화가 비생산적인 쾌락주의자들, 즉 쾌락에 중독되고 기술과 수양이 부족하여 자활 능력이 결여된 사람들을 더 이상 지원해 줄 수 없거나, 지원할 의사가 없어질 때 그들은 방향을 잃고 무력해지고 마는 것이다.
p320
고독을 즐기는 법을 배우지 않는 한, 생의 많은 부분이 그 부작용을 회피하려는 필사적인 노력으로 점철되고 말 것이다.
p322
각 공국이 두 방법 중 어느 재산상속제를 채택하였는가는 전적으로 우연의 소산이었던 것으로 보이나, 그 선택의 결과는 그들의 경제에 지대한 영향을 끼쳤다(장자상속제를 채택했던 공국들은 자본의 집중이 이루어져 결국 산업화를 이룰 수 있었던 반면, 분할상속제를 채택했던 나라들은 자본의 분산으로 산업화가 저조할 수밖에 없었다).
p324
몇 십 년 전까지만 하더라도 부모와 자녀들이 외적 이유로 인해 관계를 지속할 수밖에 없기 때문에 한집안에서 모여 사는 경향이 있었다. 과거에 이혼율이 극히 낮았던 이유는 부부간의 애정이 오늘날보다 깊었기 때문이 아니다. 남편들은 요리를 하며 살림을 해줄 사람이 필요했고, 아내들은 돈을 벌어다 줄 사람이 필요했으며, 자녀들은 먹고, 자고, 세상살이를 시작하기 위해 부모를 필요로 했기 때문이었다. 어른들이 그렇게도 많은 노력을 기울여 젊은 사람들에게 주입했던 '가족을 중시하는 가치관'은 종교적, 도덕적 명분이 앞세워졌을 때조차도, 결국은 이 같이 단순한 필요성의 반영이었던 것이다. 물론 한때는 가족을 소중히 여기는 가치관이 득세하여 사람들이 그러한 가치관을 배우게 되고, 그것이 가족의 붕괴를 막는 데 큰 몫을 담당했던 것도 사실이다. 그러나 도덕적 규칙은 외부로부터 강제되는 것으로, 그리고 남편, 아내, 자식들을 옭아매는 외적 구속으로 여겨지는 경우가 더욱 흔했다. 그러게 되면 그 가족이 겉으로는 온전한 것처럼 보일 수도 있지만, 사실 내부적으로는 갈등과 증오로 분열되어 있는 것이다. 오늘날 만연하는 가정의 '와해' 현상은 결혼 생활을 지속해야 할 외적 요인들이 서서히 사라지게 된 결과이다. 이혼율이 증가하는 것은 사랑이나 도덕적 힘이 약화되서라기보다는, 여성 인련의 채용 기회 증대로 대표되는 노동 시장의 변화와 노동을 절감해 주는 가사 용품의 보급의 영향을 크게 받았기 때문으로 볼 수 있다.
그러나 단지 외적인 이유들만으로 결혼 생활을 지속하고 가족의 범주 안에서 함께 살게 되는 것은 아니다. 가정 생활은 가정을 통해서만 경험할 수 있는 기쁨과 성장의 좋은 기회들을 제공해 주며, 이러한 내적 보상들은 과거와 마찬가지로 현재에도 얻을 수 있는 것이다. 실상, 이러한 경험을 하기에는 과거의 어느 때보다도 오늘날이 더 유리하다고 볼 수 있다. 단지 편의만을 위해 함께 사는 전통적 가족 형태가 쇠퇴하는 경향이 있다 하더라도 서로를 사랑하기 때문에 함께 견디는 가정의 수는 점차 증가 추세에 있다. 물론 아직도 외적 요인들이 내적인 보상보다는 훨씬 강력한 영향을 미치는 것이 사실이다. 때문에 앞으로도 한동안은 가정 생활의 분열이 심화될 것처럼 보인다. 그러나 바람직한 가족의 형태를 유지하는 가정들은, 자신의 의사에 반해 어쩔 수 없이 함께 사는 가정들에 비해 각 구성원들의 자아 개발에 훨씬 많은 도움을 줄 수 있다.
p327
키레로는 인간이 완전히 자유로워지기 위해서는 일련의 법규의 노예가 되어야만 한다고 저술한 바 있다. 다시 말해, 제약을 받아들이는 일이 곧 자신을 자유롭게 하는 일이라는 것이다. 예를 들면, 심리 에너지를 일부일처적 혼인에 집중적으로 투자하기로 결심함으로써, 어떠한 문제와 장애가 발생해도 혹은 나중에 다음이 더 끌리는 선택의 여지가 생겨나더라도 심리적으로 흔들리지 않을 수 있다. 전통적 혼인이 요구하는 책임들을 성실히 수행함으로써, 그리고 관례에 따라서 어쩔 수 없어서가 아니라 기꺼이 그렇게 함으로써, 자신이 올바른 결정을 내린 것인가 혹은 다른 사람들은 더 나은 방법을 택한 것이 아닌가 따위를 더 이상 걱정하지 않아도 된다. 그 결과 어떻게 살아야 할 것인가에 관한 고민으로부터 자유로워진 많은 에너지를 삶을 위해서 쓸 수 있는 것이다.
p337
프랜시스 베이컨은, "최악의 고독이란 진실한 친구가 없다는 것이다"라고 하였다. 친구 관계는 가족 관계에 비해서 한결 즐거운 것이 되기 쉽다. 우리가 공통의 관심사와 상호 보완적 목표에 입각해서 친구를 선택할 수 있기 때문이다. 친구와 함께 있기 위해 자신을 변화시켜야 할 필요는 없다. 친구는 우리의 자아 의식을 바꾸려고 하지 않고 오히려 강화해 준다. 쓰레기를 내다버린다거나 마당의 낙엽을 쓰는 일과 같이 집에서는 우리가 받아들여야만 하는 지루한 일들이 많다 그러나 친구와 함께 있을 때는 '재미있는' 일들에만 집중할 수 있다. 일상적 경험의 질에 관해 수차례에 걸쳐 이루어졌던 우리의 연구에서, 친구오 함께 있을 때 가장 긍정적인 기분을 느끼게 된다는 응답이 반복적으로 나왔다. 이는 반드시 십대 청소년들에게만 국한된 사실이 아니다. 젊은 성인들도 역시, 배우자를 포함한 다른 어떤 사람들보다 친구들과 함께 있을 때가 가장 즐겁다고 응답했다. 은퇴한 노인들도 배우자나 가족과 함께 있을 때보다 친구들과 함께 있는 것이 더욱 즐겁다고 했다.
p338
이런 종류의 사교는 친구 사이의 교제를 모방한 것이기는 하지만, 진정한 친구 관계에서 누릴 수 있는 혜택을 거의 제공하지 못한다. 누구나 때로는 잡담을 하면서 시간 보내기를 좋아한다. 그런데 마치 매일 마약 주사를 맞아야 하는 것처럼 이러한 피상적 교제에 극심하게 의존하는 사람들이 많다. 특히 고독을 참지 못하는 사람들이나, 집에서 정서적 지지를 받지 못하는 사람들의 경우 이러한 의존도가 더욱 높아진다.
강한 가정적 결속이 결핍된 십대 청소년들은 친구들 그룹에 지나치게 의존하는 나머지 그 그룹 속에 받아들여지기 위해서는 어떤 일이라도 불사하려 든다. 다음은 약 20년 전 애리조나 주의 투산에서 있었던 일이다. 규모가 큰 어느 고등학교 3학년 학생들 모두가, 그 학교를 그만두었으나 자기보다 나이가 어린 학생들과 계속 '우정'을 유지하던 한 나이 많은 퇴학생이 급우들을 죽여서는 시체를 사막에 매장해 왔다는 사실을 알고 있었다. 그러나 그들 중 누구도 이 사실을 경찰에 신고하지 않았다. 그러다가 이 사건은 경찰의 우연한 수사에 의해 밝혀지게 되었다. 모두 유복한 중류 가정의 자녀들이었던 이 학생들은, 친구들로부터 소외당할 것이 두려워 살인을 신고하지 못했다고 한다. 만일 투산의 십대 청소년들에게 강한 가족적 결속이 있었더라면 혹은 이들이 그 지역 사회의 다른 어른들과 강한 유대 관계를 맺고 있었더라면, 친구들로부터 고립되는 것이 그렇게 견디기 힘든 일이 되지는 않았을 것이다. 그러나 그들을 고독으로부터 보호해 주는 것이 또래 친구들밖에는 없었던 것이 분명하다. 불행하게도 이것이 굉장히 희귀한 사건은 아니다. 이따금씩 이와 매우 유사한 사건들이 언론에 보도되곤 한다.
p344
사람들은, 마치 가족의 관계처럼 친구 관계도 저절로 이루어지는 것으로 믿고, 관계에 금이 가더라도 그것은 어쩔 수 없는 일인 것으로 여기며 그저 상심만 하고 만다. 다른 사람들과 함께 나눌 수 있는 관심사가 많고, 관계에 투자할 만한 자유 시간도 많은 청소년기에는 친구를 사귀는 것이 아주 자연스러운 과정처럼 보일 수도 있다. 그러나 그 시기가 지나면 친구 관계는 결코 우연히 이루어지지 않는다. 친구 관계도 직장이나 가정 생활을 꾸려나가는 것처럼 열심히 가꾸어 나가야만 하는 것이다.
p345
불행하게도 공적인 분야에 종사하는 많은 사람들이 높은 복합성을 가진 행위를 하지 못하고 있다. 정치가들은 권력을 좇으며, 박애가들은 명예를 추구하고, 성자가 되려는 사람들은 자신들이 얼마나 정의로운가를 증명하려 한다. 이러한 목표들은 충분한 에너지만 투자한다면 성취하기가 그리 어려운 것들이 아니다. 한층 더 위대한 도전은 자기 자신에게 득이 될 뿐 아니라, 그 과정에서 다른 사람들에게도 도움이 되는 것들이다. 정치가들이 실제로 사회 상황을 변화시키고, 박애가들은 곤궁한 사람들을 도우며, 성자들이 다른 사람들에게도 적용될 수 있는 삶의 전형을 제시하기란 매우 어렵겠지만 그만큼 보람도 큰 일이 될 것이다.
우리가 단지 물질적인 결과만을 고려한다면, 자신만을 위해 부와 권력을 얻으려 하는 이기적 정치가들을 똑똑한 사람들이라고 생각할 수 있다. 그러나 최적 경험이 인생에 진정한 가치를 부여한다는 사실을 알게 되면, 공동의 선을 실현하기 위해 애쓰는 정치가들이야말로 보다 높은 노력의 목표에 도전함으로써 스스로 진정한 즐거움을 경험할 수 있는 기회를 그만큼 더 많이 가지게 된다는 점 때문에 말이다.
p346
지난 수세기 동안 경제적 합리주의가 너무도 만연해 왔기 때문에, 우리는 어떠한 인간의 노력이든 그 '결과'를 금전적 가치로 측정해야 한다는 생각을 당연하게 받아들였다. 그러나 인생을 경제적인 관점으로만 접근하는 것은 오히려 합리적이지 못하다. 진정한 가치는 경험의 질과 복합성에 있는 것이기 때문이다.
좋은 지역 사회의 척도는 기술적 진보나 물질적 풍요가 아니다. 사람들이 자신의 삶을 최대한 여러 측면으로 즐길 수 있는 기회를 제공해 주면서, 이들이 더 높은 도전을 추구하며 자신의 잠재 능력을 개발할 수 있도록 해주는 지역 사회야말로 이상적인 사회라 할 수 있다. 이와 마찬가지로 학교의 가치도 그 명성이나, 삶의 필요에 대처해 나갈 수 있도록 학생들을 훈련시키는 능력에 있는 것이 아니라, 얼마마늠 학생들이 배움을 평생의 즐거움으로 여길 수 있도록 가르치는가에 있는 것이다. 또 반드시 이익을 최대로 올리는 공장이 아니라, 직원들과 소비자들의 삶의 질적 향상에 큰 기여를 하는 공장이야말로 좋은 공장인 것이다. 그리고 정치의 참된 기능도 사람들을 더욱 풍요롭고 안전하게 혹은 강하게 만드는 것이 아니라, 최대한 많은 사람들이 복합성을 증가시켜 가는 삶을 즐길 수 있도록 하는 데 있는 것이다.
그러나 개인이 의식 변화가 선행되지 않고서는 어떠한 사회적 변화도 실현될 수 없다. 한 젊은이가 칼라일에게 어떻게 하면 세상을 개혁할 수 있겠냐는 질문을 했다. 칼라일은 "당신 자신을 먼저 개혁하시오. 그리 되면 세상에서 악당이 한 명 더 줄어들게 되는 것이니까"라고 대답했다. 이 충고는 오늘날에도 여전히 유효하다. 자신의 삶을 통제하는 법을 먼저 배우지도 못했으면서 다른 사람들의 삶을 개선시키려고 노력하는 사람은 결국 사태를 악화시킬 뿐이다.
9장. 혼란에서 벗어나기(Cheating Chaos)
p350
물론 구체적인 물질적 조건이 개선되고 나서야 비로소 플로우가 그들 삶의 질적 향상에 도움이 될 수 있을 것이다. 다시 말해, 최적 경험은 건강이나 부와 같이 기본적인 재료로 만들어진 케이크 위의 크림과도 같은 것이어서, 그 자체만으로는 보잘것없는 하나의 장식에 불과할 뿐이다. 더욱 현실적이고 구체적인 현실적 요건 위에서만 플로우가 삶의 주관적 양상을 만족스럽게 변화시켜 줄 수 있는 것 아닌가.
두말할 필요도 없이 이 책에서 제시하는 이론은 위와 같은 결론을 반박하는 것이다. 주관적 경험은 단지 삶의 한 측면에 불과한 것이 아니라 삶 그 자체이다. 물질적 조건들은 부착적인 것으로 우리에게 간접적인 영향을 미칠 뿐이다. 반면에 플로우는 우리 삶의 질에 직접적인 이익을 준다. 건강, 금전 그리고 다른 물질적인 편의들은 삶을 개선시킬 수도 있고, 그렇지 못할 수도 있다. 심리 에너지를 통제하는 법을 배우지 못한 사람에게는 그러한 물질적 편의도 쓸모 없는 것이 될 가능성이 많다.
이에 반해, 모진 고난을 겪고서도 그 곤경을 이겨 냈을 뿐 아니라 결국은 자신의 삶을 진정으로 즐길 수 있게 된 사람도 많다.
p365
그러나 혼란을 벗어날 수 있는 능력을 '변형적 대처'라 하고, 이러한 능력을 가진 사람들을 '용기 있는 사람'이라고 일컫는 것만으로는 이 놀라운 재능을 충분히 설명할 수 없다. 수면을 '잠자는 힘'에 의해 야기되는 현상이라고 한 몰리에르 작품 속 인물의 말처럼, 효과적인 대처가 용기라는 미덕에 의해 야기된다는 말 역시 충분한 설명이 되지 못한다. 우리에게 필요한 것은 이름과 설명뿐만이 아니라 그 과정에 대한 이해인 것이다. 불행하게도 이 문제에 대해 우리는 아직도 상당히 무지하다 할 수 있다.
p367
사람의 일생을 통해서 좋은 일들만 일어날 가능성은 극히 희박하다. 우리가 바라는 대로 모든 일이 다 이루어질 가능성도 거의 없는 것이나 마찬가지이다. 누구나 언젠가는 실망감, 극심한 질병, 재정적 위기 그리고 결국은 피할 수 없는 죽음 등 자신의 목표와 상충되는 사건들을 겪게 마련이다. 이런 종류의 사건들은 우리의 정신에 무질서를 불러오는 부정적인 피드백들이다. 이 같은 사건들은 모두 자아를 위협하고 그 기능을 저해한다. 그 충격이 몹시 크면 그 사람은 꼭 필요한 목표에 집중할 능력을 상실할 수도 있다. 이러한 상황에 처하면 자아는 이미 그 통제력을 상실하게 되는 것이다. 극심한 타격을 받게 되면 의식이 통제를 벗어나 그 사람의 '정신이 나가게' 되며, 이에 따라 다양한 정신 질환의 증상이 나타난다. 위협을 받던 자아가 살아남기는 하지만 더 이상 성장을 못하게 되는 경우도 있다. 공격을 피하려고 움츠린 채로 대량의 방어 기제를 동원하여 후퇴를 하게 되며, 계속 의심을 벗어나지 못하는 상태에서 무기력하게 지낼 수밖에 없다.
바로 이 같은 이유 때문에 정신의 소산 구조들이라 할 수 있는 용기, 회복력, 인내, 성숙한 방어 혹은 변형적 대처 등이 절대저그로 필요하다. 이런 것들이 없다면, 우리의 심리는 통제할 수 없는 상태가 되어 끊임없이 혼란을 겪게 될 것이다. 반면에, 우리가 이와 같은 긍정적 전략을 배운다면, 대부분의 부정적 사건들이 최소한 중립적인 것이 될 수 있으며, 더 나아가 자아를 강화시키고 복잡성을 높여 주는 도전으로 활용될 수도 있다.
p374
예전 동료였던 G는 그가 공군에 복무하던 시절에 겪었던 일을 들려준 적이 있다. 그것은 안전에 대한 지나친 염려 때문에 모든 신경을 그 문제에만 집중하여 현실을 망각하게 되는 것이 얼마나 위험할 수 있는가를 잘 보여주는 섬뜩한 사건이었다. 한국전쟁 때 G의 부대가 정규 낙하산 훈련을 하게 되었다. 어느 날 부대원들이 낙하훈련 준비를 하다가 정규 낙하산의 개수가 부족하다는 사실을 발견했다. 그래서 오른손잡이였던 한 병사가 어쩔 수 없이 왼손잡이용 낙하산을 착용할 수밖에 없었다. 병기 담당 하사관이 다음과 같이 말하며 그를 안심시켰다.
"왼손잡이용 낙하산도 다른 낙하산들과 다를 바 없다. 다만 펼치는 줄이 멜빵의 왼쪽에 달렸을 뿐이다. 어느 손을 사용해도 낙학산을 펼칠 수 있으나, 오른손보다는 왼손을 사용하는 편이 더 쉬울 것이다."
그 팀이 비행기에 탑승을 하고, 목표 지점 위의 2천 5백 미터 상공에 도달하여 한 명씩 차례로 뛰어내리기 시작했다. 단 한 사람을 제외한 병사 전원이 성공적으로 훈련을 마쳤다. 너무나 안타깝게도 한 명의 낙하산이 펴지질 않았던 것이다.
G는 조사 팀의 일원이 되어서 그 병사의 낙하산이 펴지지 않은 원인을 조사하도록 파견되었다. 사망한 병사는 왼손잡이용 낙하산을 받은 바로 그 병사였다. 그의 군복에서 정규 낙하산의 줄이 일반적으로 위치하게 되는 가슴 우측 부분은 완전히 찢겨 나가고 없었다. 심지어는 그의 가슴 부위 살점마저도 그의 피묻은 오른손에 의해 뜯겨져 있었다. 왼쪽으로 불과 몇 인치 옆에 바로 낙하산을 펼치는 줄이 있었건만, 그 줄에는 손을 댄 흔적이 없었다. 낙하산 자체에는 아무런 이상도 없었다. 문제는 이 병사가 그 까마득한 높이에서 떨어져 내리는 동안, 낙하산을 펼치려면 자신이 늘 잡아당기던 바로 그 위치에서 낙하산 줄을 찾아야 한다는 생각에 고착이 되어 버렸던 것이다. 그는 극심한 공포를 느낀 나머지 손을 조금만 움직이면 안전하게 낙하할 수 있다는 사실을 그만 잊었던 것이다.
위협을 느끼는 상황에 처하게 되면, 심리 에너지를 내부로 동원해 위협에 대한 방어로 사용하는 것은 자연스러운 일이다. 그러나 이러한 타고난 대응이 오히려 대처 능력을 손상시키는 경우가 흔히 있다. 즉 본능적 반응이 내적 혼란을 더 악화시키고, 대응의 융통성을 감소시키며, 최악의 경우 그 사람을 외부 세계로부터 고립시켜 홀로 좌절감을 맛보게 할 수도 있다. 반면, 주변에서 벌어지는 상황을 계속 파악하고 있다면, 새로운 가능성들이 생겨나고 새로운 대처 방안을 강구할 수 있다. 그리하여 삶의 흐름에서 완전히 차단될 가능성이 그만큼 줄어드는 것이다.
p376
우리가 살면서 겪는 거의 모든 상황이 성장의 가능성을 제시해 준다. 우리가 살펴본 바와 같이, 실명이나 신체 마비와 같은 절망적 재난들도 즐거움과 복합성을 증대시킬 수 있는 조건으로 변화될 수 있다. 심지어는 다가오는 죽음마저도 절망을 주기보다는 의식 속의 조화를 창조하는 역할을 하기도 한다.
그러나 이처럼 되기 위해서는 예기치 않은 기회를 파악할 수 있는 준비가 되어 있어야만 한다. 우리들 대부분은 유전적 소인과 사회적 조건화에 의해 형성된 관습적 상례에 너무도 젖어 있어서, 어떠한 다른 진로를 선택할 수 있는 대안을 무시해 버리는 경우가 많다. 모든 것이 순조로울 때는 전적으로 유전적 소인과 사회적 통념만을 따르며 사는 것도 괜찮다. 그러나 생물학적 · 사회적 목표들에 차질이 생기게 되면 - 이것은 장기적으로 볼 때 피할 수 없는 일이기도 하다 - 새로운 목표를 설정하여 자신을 위한 새로운 플로우 활동을 개발해야 한다. 그렇지 않으면 내적 갈등을 겪느라 모든 에너지가 낭비되고 말 것이다. 그렇지만 어떻게 해야 이러한 대체적 전략을 발견할 수 있는 것일까? 그 답은 기본적으로 간단하다. 자의식 없는 자신감을 갖고 주변 환경에 대해 언제나 깨어 있으면서 그 안에서 융통성 있게 대처하면 해결책이 나올 가능성이 큰 것이다.
인생의 새로운 목표를 찾는 과정은, 예술가가 독창적인 작품을 창장하려 애쓰는 과정과 여러 면에서 유사하다. 독창성이 결여된 화가는 무엇을 그릴 것인지 마음을 미리 정한 후 끝까지 본래의 의도대로 작품을 완성시킨다. 반면, 창의성이 풍부한 화가는 같은 기술적 수준을 지니고 있다 하더라도 마음속 깊이 느낌은 있지만 아직 확정되지 않은 목표를 가지고 작업을 시작한다. 그리고 캔버스에 나타나는 예기치 않은 색과 형태에 따라 그림을 계속 수정해 나가 결국 애초의 의도와는 전혀 다른 창작품을 탄생 시키는 것이다. 만일 화가가 자신의 내적 감정을 잘 살리고, 자신이 원하는 바가 무엇인지를 알며, 캔버스 위의 변화에 관심을 기울인다면, 좋은 작품이 나오기 마련이다. 반면, 완성된 그림이 어떠해야 한다고 미리 생각해 둔 고정 관념에만 집착하고, 자신의 눈앞에 펼쳐지는 형태가 제시하는 여러 가능성들을 무시해 버리는 화가의 그림은 진부한 작품이 되고 만다.
우리 모두는 인생에서 무엇을 원하는가에 관한 선입견을 가지고 시작한다. 여기에는 생존을 위해 우리의 유전자 속에 내재된 욕구들(음식과 안락함, 성에 대한 욕구 및 다른 동물들보다 우위를 점하려는 욕구들)이 포함되어 있다. 또한 우리의 특정한 문화가 우리에게 주입한 욕구들(날씬하고, 부자이며, 교육을 많이 받고, 다른 사람들이 좋아하는 그런 사람이 되고 싶어하는 욕구들)도 있다. 우리가 이러한 목표들을 채택하고 또 운이 좋다면, 우리가 사는 시대와 장소에서 이상적이라 여겨지는 육체적 · 사회적 이미지를 복제해 낼 수 있을 것이다.
그러나 과연 이런 것이 우리의 심리 에너지를 최대한 활용하는 길인가? 그리고 만일 우리가 이러한 목표들은 달성하지 못하면 어떻게 되는가? 캔버스에 나타나는 상황에 언제나 주의를 기울이고 살피는 화가처럼, 우리 주변에 일어나는 사건들에 언제나 관심을 기울이며, 그러한 사건들을 선입견에 좌우되지 않고 감정이 느끼는 대로 판단하지 않으면, 우리는 결코 다른 가능성들을 인식하지 못하고 말 것이다. 우리가 자아 성장의 새로운 가능성을 깨닫게 되면 우리에게 이제까지 주입되어 온 생각들은 크게 달라진다. 이를테며, 어떤 사람을 때려주는 것보다는 그 사람을 돕는 것이 더 만족을 주며, 회사 사장과 골프를 치는 것보다 두살박이 꼬마와 이야기를 나누는 것이 훨씬 더 즐거운 일이 될 수도 있다는 사실을 알게 될 것이다.
p379
'자기 목적적 자아'의 소유자는 위협의 소지가 되는 요인들을 즐거운 도전으로 쉽게 변화시킬 수 있다. 이러한 사람들은 쉽사리 권태를 느끼지 않고 좀처럼 근심 걱정에 얽매이지 않는다. 또 주변의 상황에 늘 깨어 있으면서 대부분의 시간 동안 플로우를 경험한다. '자기 목적적 자아'라는 용어는 글자 그대로 '스스로 만들어 낸 목적을 가지고 있는 자아'를 의미한다. 그리고 이런 사람들은 자아에서 만들어지지 않은 목표들을 상대적으로 덜 갖고 있다. 대부분의 사람들은 생물학적 욕구와 사회적 통념에 의해 형성되어지므로, 자기 자아에서 발현된 목표들이 아닌 것이다.
자기 목적적 자아를 가진 사람은 엔트로피를 유발할 가능성이 있는 경험을 플로우로 변화시킨다. 자기 목적적 자아를 개발할 수 있는 규칙들은 비교적 간단하다. 이 규칙들은 플로우 모델에서 직접 도출된 것들로 다음과 같이 간략하게 요약할 수 있다.
1. 목표를 설정하기
플로우를 경험할 수 있으려면 노력의 대상이 될 분명하고 혁신적인 목표들을 가지고 있어야만 한다. 자기 목적적 자아를 가진 사람은, 결혼을 하거나 작업을 정하는 등 일생 동안의 책임을 수반하는 선택에서부터, 주말 계획을 세운다거나 치과에서 진료 차례를 기다리는 동안 어떻게 시간을 보낼 것인지와 같은 사소한 결정에 이르기까지, 안달하거나 당황함이 없이 선택을 하는 법을 배우게 된다.
목표의 설정은 어떤 것을 도전으로 인식하는가와 관련이 있다. 만일 내가 테니스를 배우기로 결정을 한다면, 서브하는 법과 백핸드 및 포어핸드 사용법을 배워야 하며 지구력과 반사 능력을 키워야 한다. 혹은 그 반대로, 공을 쳐서 넘기는 것 자체가 좋아서 테니스를 배워야겠다는 목표를 세울 수도 있다. 어떤 경우든 목표와 도전은 서로 불가분의 관계를 가지고 있다.
목표와 도전을 달성하기 위한 일련의 행동 체계가 규정되면, 그 체계안에서 필요한 기술을 개발해야 한다. 내가 만일 현재의 직업을 그만두고 휴양지의 경영자가 되기로 결정한다면, 호텔 경영 · 재정 관리 · 상업적 위치 선정 등 여러 가지를 배워야 한다. 물론 역순으로 일이 시작될 수도 있다. 자신이 어떠한 기술을 가지고 있는가에 따라 그러한 기술을 활용할 수 있는 특정한 목표를 세울 수도 있다. 즉 본인 스스로 적합한 자격을 갖추고 있다고 생각하여 휴양지 경영인이 되기로 결심할 수도 있는 것이다.
기술을 개발하기 위해서는 자신의 행동의 결과에 주의를 기울여야 한다. 즉 피드백을 관찰해야 하는 것이다. 유능한 휴양지 경영인이 되기 위해서는 사업 자금을 대여해 줄 가능성이 있는 금융인들이 내가 제출한 사업 계획서를 어떻게 생각하는지를 정확히 판단할 수 있어야 한다. 또한 고객이 좋아하는 것들은 무엇이며, 또 그들이 싫어하는 것들은 무엇인지도 알아야만 한다. 피드백에 지속적 관심을 기울이지 않는 사람은 곧 행동 체계로부터 이탈되어 더 이상 기술의 발전을 이루지 못하기 때문에 유능한 경영인이 되기 어렵다.
자기 목적적 자아를 가진 사람은 자신이 어떤 목표를 추구하고 있든 그 목표를 선택한 사람이 바로 자기 자신이라는 점을 잘 알고 있다. 이는 바로 자기 목적적 자아를 가진 사람과 그렇지 못한 사람에게 나타나는 기본적인 차이점 가운데 하나이다. 이 같은 사실은 서로 상반되는 듯이 보이는 두 가지 결과를 초래한다. 그 하나는, 스스로 내린 결정이라는 점을 주지하고 있기 '때문에 자신의 목표에 더욱 충실해진다는 것이다. 따라서 이 사람의 행동은 믿을 수 있으며, 스스로 통제된다. 또 다른 하나는, 결국 자신의 결정이기 때문에 그 결정 사항을 지켜나가는 것이 더 이상 이치에 만지 않을 때는 언제고 자신의 목표를 수정할 수 있게 되는 것이다. 이런 점에서 자기 목적적인 사람의 행동은 더욱 꾸준하기도 한 동시에 더욱 많은 융통성도 가질 수 있다.
2. 활동에 몰입하기
일련의 행동 양식을 선택하고 나면 자기 목적적 성격을 가진 사람은 자신이 하는 일에 깊이 몰입한다. 전 세계를 무착륙으로 비행하든, 아니면 저녁식사 후 설거지를 하든지 간에 현재 하고 있는 눈앞의 일에 관심을 집중하는 것이다.
이렇게 되기 위해서는 행동의 기회들과 자신이 보유하고 있는 기술간의 균형을 잘 맞추는 법을 배워야 한다. 어떤 사람들은 세계를 구한다든지, 혹은 스무 살이 되기 전에 백만장자가 된다는 것과 같은 현실적이지 못한 기대를 갖고 시작을 한다. 이러한 희망이 이루어지지 않을 때 대부분의 사람들은 낙담을 하고, 헛된 시도로 인한 심리 에너지의 손실 때문에 그들의 자아는 위축된다. 또 다른 극단으로, 자신에게 잠재된 능력을 스스로 믿지 않아서 침체되는 사람도 많다. 그들은 안전은 하지만 사소한 목적을 선택하여, 최대한 가장 낮은 수준에서 복합성의 성장을 중지시키고 만다. 행도에 몰입할 수 있으려면 환경의 요구와 자신의 활동 능력간의 적절한 균형점을 찾아야 한다.
예를 들면, 어떤 사람이 사람들로 가득 찬 방으로 걸어 들어가면서 가능한 한 많은 사람들과 사귀며 즐거운 시간을 보내기로 결심을 했다고 치자. 만일 자기 목적적 자아가 결여되어 있다면, 그는 혼자서 사람들과의 상호 작용을 시작할 능력을 갖추고 있지 못하여, 구석으로 가서는 누군가가 자신을 주목해 주기만을 바라고 있을 것이다. 또는 떠들썩하게 행동하거나 지나치게 말솜씨가 좋은 척하여, 결국 이 같은 부적절하고 피상적인 친근감으로 인해 오히려 다른 사람들이 기피하는 존재가 될 수도 있다. 이런 두 전략을 가지고는 성공을 한다거나 즐거운 시간을 보낼 수 있는 가능성이 극히 희박하다.
반면에 자기 목적적 자아를 가진 사람은 그 방에 들어서자마자 주의를 자신으로부터 파티, 즉 자신이 가담하고 싶은 '행동 체계'로 돌릴 것이다. 그는 파티에 참석한 사람들을 관찰하여 그들 중 자기와 공통적인 관심사를 갖고 있으며 성격 또한 비슷한 사람이 누구인가를 가려내고, 자신이 생각하기에 쌍방 모두가 관심이 있을 듯한 주제로 그 사람과 대화를 시작할 것이다. 만약 피드백이 부정적이라면, 즉 대화가 지루해지거나 어느 한 사람에게 너무 어려워 이해가 되지 않는 주제라면 다른 주제를 택하거나 새로운 대상과 이야기를 나누게 될 것이다. 자신의 행동이 행동 체계의 기회와 걸맞을 때만이 진정한 몰입이 가능하다.
몰입은 집중력에 의해 크게 촉진된다. 주의력 결핍 증세가 있는 사람이나, 끊임없이 주의가 산만한 사람은 인생의 플로우에서 언제나 제외된 느낌을 받게 된다. 이들은 매순간의 일과성 자극에 큰 영향을 받는다. 자신의 의지와 상관없이 주의가 다른 곳으로 돌려지는 것은 통제력을 갖고 있지 않다는 가장 확실한 증거이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대부분의 사람들이 자신의 주의력을 향상시키려는 노력을 소홀히 한다는 것은 참으로 놀라운 사실이다. 만일 책을 읽는 것이 너무 어렵게 느껴지면, 우리는 집중력을 높이려 하는 대신 습관적으로 텔레비젼을 틀게 마련이다. 그러나 텔레비전 시청에는 최소한의 주의력만 있으면 된다. 더군다나 사실상 그 얄팍한 주의력조차 광고와 알맹이 없는 내용에 의해 분산되고 만다.
3. 주변 상황에 관심을 기울이기
집중을 하면 몰입을 하게 되며, 이와 같은 몰입은 지속적인 주의력 투입이 있어야만 유지될 수 있다. 육상 선수들은 경기 도중 잠시만 한눈을 팔아도 시합에 진다는 사실을 잘 알고 있다. 중량급 권투 선수가 상대방의 어퍼컷이 들어오는 것을 보지 못한다면 녹아웃되고 말 것이다. 또한 농구선수가 관중들의 함성에 정신이 팔린다면 정확히 슛을 하지 못할 것이다. 복합성의 체계에 참여하고 있는 사람 누구에게나 이와 똑같은 함정이 도사리고 있다. 그 체계 속에 계속 남아 있으려면 심리 에너지를 투자해야만 한다. 자녀의 말을 집중해서 들어주지 않는 부모는 부모와 자식간의 상호 작용을 저해시킬 수 있고, 주의가 산만한 변호사는 소송에서 패소할 수 있으며, 한눈을 파는 외과 의사는 환자를 죽음으로 몰 수도 있는 것이다.
자기 목적적 자아를 지니고 있다는 것은 몰입을 지속할 능력도 갖고 있음을 의미한다. 가장 흔하게 주의를 산만하게 하는 자의식도 자기 목적적 자아를 가진 사람에게는 문제가 되지 않는다. 이러한 사람은 자신이 얼마나 잘하고 있는지, 또한 다른 사람들에게 자신이 어떻게 보이는지에 관해 걱정을 하는 대신 온 마음으로 자신의 목표에 전념할 수 있다. 너무 깊이 몰입을 한 나머니 자의식을 느끼지 못하는 경우도 있고, 이와는 반대로 자의식이 별로 없기에 깊은 몰입이 가능한 경우도 있다. 자기 목적적 성격의 구성 요소는 상호 인과 관계의 고리에 의해 서로 연결되어 있다. 목표 선정, 기술 개발, 집중력의 향상 혹은 자의식을 없애는 일 가운데 어떤 것을 먼저 선택해 시작을 하는가는 그리 중요하지 않다. 플로우 경험이 일단 시작되면 다른 요소들도 취득하기가 훨씬 용이해지므로 어느 것을 먼저 시작해도 상관이 없는 것이다.
자신에 대해 염려하지 않고 상호 작용에 주의를 집중하는 사람은 역설적인 결과를 얻는다. 더 이상 자신을 독립된 개체로 느끼지 않지만, 동시에 그 사람의 자아가 한층 강화되는 것이다. 자기 목적적인 사람은 심리 에너지를 자신이 포함된 체계에 투자함으로써 개인의 한계를 벗어난 성장을 이룰 수 있다. 이와 같은 개인과 체계간의 결합으로 인해 자아가 복합적인 성장을 이루게 된다. 바로 이런 이유 때문에 사랑을 하고 그 사랑을 잃는 편이 한 번도 사랑을 해보지 않는 것보다 낫다고 할 수 있는 것이다.
모든 것을 자기 중심적 견해에서 파악하는 사람의 자아가 좀더 확고한 것처럼 보일 수도 있다. 그러나 이러한 자아는 기꺼이 헌신을 하고 몰입을 하며 자신의 이익만을 위해서가 아니라 상호 작용을 위해서 주변의 상황에 관심을 갖는 사람의 자아에 비한다면 상대적으로 결핍되어 있다고 볼 수 있다.
시카고 시청 건너편의 광장에서 열렸던 피카소의 거대한 야외 조각 작품 제막식에서 나는 우연히 옆에 서게 된 개인 상해 전문 변호사와 이야기를 나누게 되었다. 기념 연설이 장황히 지속되고 있을 때, 나는 그가 무엇인가에 집중을 한 표적으로 입술을 달싹거리고 있는 것을 보았다. 무엇을 생각하고 있느냐고 묻자, 만일 아이들이 저 조각 작품에 기어오르려다 다치게 되어 소송을 건다면 시카고시가 지불해야 할 소송 비용을 추산해 보고 있는 중이라고 대답하였다.
모든 것을 자신의 기술이 해결할 수 있는 직업적 문제로 변화시켜 지속적인 플로우를 경험할 수 있는 이 변호사를 과연 운이 좋은 사람이라 해야 할까? 아니면, 자신에게 이미 익숙한 일들에만 주의를 집중하고, 그 행사의 심미적 · 시민적 · 사회적 의미를 무시함으로써 스스로 성장의 기회를 박탈하는 사람이라 해야 할 것인가? 두가지 해석 모두 일리가 있을 것이다. 그러나 장기적인 관점에서는, 세상을 전적으로 자신의 자아가 감당할 수 있는 협소한 창으로 파악하는 것은 스스로를 제한하게 된다. 명성이 높은 정신과 의사나 미술가 혹은 정치가들조차도, 유일한 관심사가 이 우주 속에서 자신이 맡은 제한적 역할에만 국한될 때는 공허한 존재가 되어 더 이상 삶을 즐길 수 없는 것이다.
4. 지금 현재의 경험 즐기는 법 배우기
자기 목적적 자아를 갖춤으로 해서 - 목표를 설정하는 법을 배우고, 기술을 개발하고, 피드백에 늘 관심을 기울이고, 집중하고 몰입하는 법을 체득함으로써 - 얻을 수 있는 결과는, 객관적 상황이 몹시 좋지 않을 때도 삶을 즐길 수 있다는 것이다. 정신을 통제할 수 있다는 것은 글자 그대로 어떤 일이 발생한다 하더라도 그 일이 즐거움의 원천이 된다는 것을 의미한다. 몹시 더운 날 시원한 산들바람을 느끼는 것, 고층 건물의 유리벽에 반사되는 구름의 모양을 관찰하는 것, 강아지와 노는 아이를 보는 것, 물 한잔을 마시는 것 등 이 모든 것들이 깊은 만족감을 주는 경험이 되어 우리의 삶을 풍부하게 해주는 것이다.
그러나 이러한 통제력을 얻기 위해서는 결의와 훈련이 전제되어야 한다. 최적 경험은 향락적이거나 안일한 삶의 자세로는 결코 얻을 수 없다. 긴장이 풀린 자유 방임적 태도로 혼란에 대한 충분한 방어가 되지 못한다. 이 책의 초반부에서부터 우리가 살펴본 바와 같이, 읨의적 사건들을 플로우로 변화시키기 위해서는 능력을 신장시키고, 한결 나은 사람이 되게 해주는 기술을 닦아야만 한다.
플로우는 각 개인이 창의적이고 뛰어난 성취를 이루도록 해준다. 즐거움을 유지하기 위해 고도의 기술을 개발해야 하는 필연성이 있었기에 문화적 진보도 가능한 것이었다. 바로 이러한 필연성으로 인해 각 개인과 문화들이 한층 더 복합적인 존재로 성장할 수 있었다. 경험의 질서를 창조해 냄으로써 얻는 보상이 진화를 촉진시키는 추진력이 되어 왔으며, 우리의 자리를 대신하게 될, 우리들보다 더 현명하고 복합적인 삶을 사는 우리의 후손들을 위한 기반을 마련해 주었다.
그러나 모든 생활을 플로우로 변화시키기 위해서는 단지 매순간의 의식 상태를 통제하는 법을 배우는 것만으로는 충분치 못하다. 일상의 삶이 의미를 가질 수 있도록 각 목표들의 전후 관계를 파악하는 일 역시 필요한 것이다. 만일 서로 연결되는 질서가 없이 이 플로우에서 저 플로우로 옮겨 다닌다면, 훗날 인생을 정리하는 시기를 맞아 과거를 돌이켜 볼 때 자신의 과거에서 큰 의미를 발견할 수 없을 것이다. 자신이 하는 일이 무엇이든지간에, 그 일에서 조화를 창조하는 것이 최적 경험을 얻고자 하는 사람들에게 플로우 이론이 제시하는 마지막 과제이다. 이는 지속적인 목적 의식을 제공해 주는 통합된 목표들을 추구해 가면서, 삶 전체를 하나의 플로우 활동으로 변화시키는 것을 의미한다.
10장. 의미 창조하기(The Making of Meaning)
p392
개인의 관점에서 보면, 일생 동안 심리 에너지의 질서를 창조하기에 충분할 만큼 강한 흥미를 돋우는 것이라면 그 궁극적 목표가 무엇이 되는가는 그리 중요하지 않다. 도전의 목표는 천차만별이다. 주위에서 가장 훌륭한 맥주병들을 수집하여 소장하는 것이 될 수도 있고, 암 치료법을 발견하려는 결의일 수도 있으며, 혹은 살아남아 훌륭히 성장할 자녀를 두는 생물학적인 의무와 관련된 단순한 것일 수도 있다. 분명한 목적과 분명한 행동 규칙 그리고 집중하여 몰입할 수 있는 길을 제공해 주는 한, 어떤 목표가 되든 한 개인의 삶에 의미를 주기에 충분한 것이다.
나는 지난 몇 년 동안 전기 기술자, 비행기 조정사, 사업가, 교사 등의 직업을 가지고 있는 사우디 아라비아와 그 외 아랍 산유국들 출신의 몇몇 회교도들과 잘 알게 되었다. 나는 그들과 이야기를 나누면서 심한 곤경에 처해 있는 상황에서도 그들 대부분이 느긋한 자세를 보일 수 있다는 사실에 놀라움을 금할 수 없었다. 어떻게 그럴 수 있느냐고 질문을 하자 그들은 한결같이 다음과 같은 요지의 답변을 했다.
"별거 아니에요. 우리는 우리의 삶이 신에게 달려 있다는 것을 믿기 때문에 그케 동요하지 않습니다. 신이 어떤 결정을 내리든 우리는 그것을 그저 받아들일 뿐이랍니다."
우리 문화에도 이와 같은 무조건적 신앙이 널리 퍼져 있던 때가 있었는데, 요즈음은 이런 신앙을 찾기가 그리 쉽지 않다. 우리는 전통적 신앙의 도움이 없이 인생에 의미를 줄 목표를 스스로 발견해야 한다.
p394
플로우를 경험하기 위해서는 시합에서 승리하는 것, 어떤 사람과 사귀는 것, 어떤 것을 특정한 방식으로 성취하는 것 등과 같은 자신의 행동 목표가 설정되어 있어야만 한다. 대체로 목표 그 자체는 그리 중요하지 않다. 중요한 것은 목표가 그 사람의 주의를 집중시키고, 성취 가능하며 즐거운 활동에 몰입하도록 해준다는 점이다.
이처럼 전 생애에 걸쳐서 자신의 심리 에너지를 뚜렷하게 집중시킬 수 있는 사람들이 있다. 각 플로우 활동의 서로 다른 목표들이 모든 것을 총망라하는 일련의 도전 목표들로 통합되어 그 사람이 하는 모든 일에서 의미를 찾을 수 있게 되는 것이다. 이 같은 목표 지향성을 달성할 수 있는 방법들은 서로 큰 차이를 보인다. 나폴레옹은 기꺼이 수십만 명의 프랑스 병사들을 죽음으로 내몰면서까지 오로지 권력 추구에 전 생애를 바쳤다. 테레사 수녀는 신앙에 바탕을 둔 무조건적인 사랑에 삶의 목적을 두고 곤공한 사람들을 돕는 일에 자신의 모든 에너지를 투자했다.
순수한 심리학적 견지에서 본다면, 나폴레옹이나 테레사 수녀 모두 같은 수준의 내적 목적 의식을 갖고 같은 수준의 최적 경험을 달성했다고 할 수 있다. 그러나 이들이 갖는 명백한 차이점은 한층 더 광범위한 윤리적 문제를 제기해 준다. 즉 당사자의 삶에 의미를 부여해 주었던 이들 두 방식으로 초래된 결과가 무엇이었나 하는 점이다. 나폴레이옹이 수많은 사람들의 삶에 혼란을 불러일으켰던 반면, 테레사 수녀는 많은 사람들의 의식 속에서 엔트로피를 감소시켰다고 결론을 내릴 수도 있다. 그러나 여기서는 행동의 객관적 가치에 대해 어떤 판단도 내리지 않기로 한다. 그 대신 통일된 목적이 개인의 의식에 가져달 줄 수 있는 주관적 질서를 설명하는 일에만 관심을 갖도록 하자. 이런 뜻에서 "삶의 의미란 무엇인가?"라는 수수께끼에 대한 해답은 놀라우리만큼 간단한 것이다. 즉 삶의 의미란 바로 의미라고 할 수 있다. 그것이 무엇이든 어디에서 오는 것이든 통합된 하나의 목적이 바로 삶에 의미를 주는 것이다.
여러 목표들을 하나로 통일시켜 주는 목적을 찾는 것만으로 부족하다. 목적을 끝까지 달성해야 하며 그에 따르는 어려움들을 극복해 내야 한다. 목적을 위해 각고의 노력을 기울여야 하며 의도한 바가 행동으로 나타나야 한다. 이러한 것을 목표를 달성하기 위한 결의(resolution)라고 해도 좋을 것이다. 그 사람이 처음 설정한 목표를 실지로 달성했는지의 여부는 그리 중요하지 않다. 중요한 것은 자신의 목표 달성을 위해 충분한 노력을 경주하면서 노력을 분산하거나 낭비하지 않는 것이다. "창백한 사고의 그늘에 가리워 결의가 가졌던 본래의 색조가 변하면, 우리의 중요한 진취적 기상은 행동이라는 이름을 잃게 된다"라고 햄릿은 말했다. 무엇을 해야 할지를 정확히 알고 있으나 그것을 하기 위해 충분한 에너지를 집중할 수 없는 사람을 만나는 것만큼 슬픈 일도 드물다. 블레이크는 예의 그 힘찬 필치로 다음과 같이 썼다.
"바라기는 하되 행동하지 않는 자는 해악을 낳는다."
p397
인간의 역사를 통해서 존재의 의미를 부여해 줄 만한 궁극적 목적을 찾기 위한 시도가 수없이 많이 이루어져 왔다. 이러한 시도의 종류도 다양했다. 예를 들어 사회철학자 한나 아렌트에 따르면, 고대 그리스 문명에서는 남자들이 영웅적인 행위를 통하여 불후의 명성을 얻으려 했다. 아렌트는 궁극적 목적이란 죽음에 관한 문제를 나름대로 해결해 줄 수 있는 것이어야 한다고 말한다. 즉, 죽음 이후에까지 연장될 수 있는 어떠한 목적의식을 사람들에게 심어줄 수 있어야 한다는 것이다. 불후의 명성이나 영생 모두 이 점을 해결해 주시만, 그 방법에는 큰 차이가 있다. 그리스 시대 영웅들은 자신의 용맹스러운 행위가 노래와 전설로 대대손손 전해질 것을 기대하며 동료들의 감탄을 자아낼 수 있는 숭고한 행위를 하였다. 그렇게 되면 후손들의 기억 속에서 영원불멸의 존재가 될 것이기 때문이다. 이와는 대조적으로, 성자들은 후일 신의 곁에서 영원히 살 수 있기를 기대하며 자신들의 생각과 행위가 신의 의지에 부합할 수 있도록 스스로 개인성(個人性)을 포기했다.
영웅이나 성자들 모두 일생에 걸쳐 일관성 있는 행동을 하도록 해준, 모든 것을 총망라하는 목표에 모든 심리 에너지를 바침으로써 자신들의 삶을 통일된 플로우 경험으로 변화시킨 사람들이라 할 수 있다. 사회의 다른 구성원들은 성자나 영웅의 예에는 미치지 못했지만, 이러한 뛰어난 모델을 본보기로 삼아 자신들의 행위를 규제함으로써 삶에 어느 정도 적절한 의미를 부여할 수 있었다.
분명 모든 인간의 문화에는 각 개인의 목표들을 정리해 줄 수 있는 망라적 목적의 역할을 하는 의미 체계가 있다. 소로킨은 서양 문명의 다양했던 시대를 세 가지 유형으로 구분하였는데, 2,500년이 넘는 기간 동안 세 유형이 번갈아서 나타났으며 각 유형이 길게는 수백 년 짧게는 불과 수십 년 정도만 지속되었다고 주장한다. 그는 이 유형들을 각각 감각주의적(sensate) · 관념주의적(ideational) · 이상주의적(idealistic) 문화의 시기라고 명명하고, 시기에 따라 서로 다른 삶의 우선 순위들이 존재의 목적을 정당화시켜 주었음을 입증하려 했다.
감각주의적 문화는 감각을 만족시키도록 고안된 세계관을 중심으로 구성된다. 이러한 문화들은 쾌락주의적 · 공리주의적인 경향을 띠고 있으며, 주로 구체적 욕구에 중점을 둔다. 이 같은 문화에서는 예술 · 종교 · 철학 그리고 일상적인 행위들이 주로 실체적인 경험 위주의 목표들을 찬미하고 정당화시켜 준다. 소로킨에 따르면, 이러한 감각주의적 문화가 기원전 약 440~200년까지 유럽에서 우세하였으며, 기원전 420~400년 사이에 그 절정을 이루었다고 한다. 또한 19세기에도 최소한 선진 산업 민주주의 국가들에서 지배적이었다고 한다. 감각주의적 문화 속에 사는 사람들이 반드시 더 유물론적이지는 않다. 그렇지만 추상적인 원칙들보다는 주로 쾌락과 실용성에 입각해서 목표를 조직하고 행동을 정당화시킨다. 이들의 도전 목표는 전적으로 인생을 더 쉽고, 안락하며, 쾌락적인 것으로 만들려는 것들이다. 이들은 쾌감을 주는 것을 선으로 여기며 이상화된 가치들은 불신한다.
관념주의적 문화들은 감각주의적 문화와는 상반되는 원칙에 입각하여 조직된다. 즉 실체적인 것들을 경멸하고, 정신적 · 초자연적인 목적들을 위해서 노력한다. 이러한 문화들은 추상적인 원칙들과 금욕주의 그리고 물질저인 관심으로부터의 초월을 강조한다. 예술 · 종교 · 철학 그리고 일상적 행위의 정당화는 이러한 정신적 질서의 구현에 종속되는 경향이 있다. 사람들은 종교나 관념에 관심을 두며 삶을 더욱 쉽게 하려는 목적보다는 내면 세계의 명료함과 확신에 도달하기 위해 도전이 목표를 설정한다. 기원전 600~500년까지 그리스와 기원전 200~서기 40년에 이르는 서유럽에서 이 같은 세계관이 절정을 이루었다고 소로킨은 말한다. 좀더 최근의 유감스러운 예로는, 자치 독일 · 공산 러시아 · 중국 그리고 이란에서의 회교 세력 부활 등을 들 수 있다.
간단한 예로 감각주의적 문화와 관념주의적 문화의 차이를 설명할 수 있다. 파시스트적 사회는 물론이고 우리의 사회에서도 신체적 건강이 중시되며 인간의 육체적 아름다움이 숭배의 대상이 된다. 그러나 그 이유에는 큰 차이가 있다. 우리의 감각주의적 문화에서는 건강과 쾌락을 위하여 육체를 가꾼다. 관념주의적 문화에서 육체가 중시되는 주된 이유는, '아리안 인종의 우월성' 혹은 '로마인의 용기'와 같은 관념과 관련된 형이상학적 완전성이라는 추상적 원칙의 상징으로 여겨지기 때문이다. 감각주의적 문화에서는 잘생긴 젊은이의 포스터가 상업적인 목적으로 성적 반응을 유발시킨다. 반면, 관념주의적 문화에서는 똑같은 포스터가 이념적인 성명서가 되어 정치적 목적을 위해 이용되는 것이다.
물론 어느 시대의 어느 민족도 다른 관점은 배제하고 위에서 소개된 경험을 정리하는 두 관점에만 입각하여 목적을 설정하지는 않았다. 다양한 하위 유형들 및 감각주의적 관점과 관념주의적 관점이 복합된 세계관이 같은 문화 안에서, 그리고 심지어는 한 사람의 의식 속에서도 공존할 수 있는 것이다. 예를 들어, 여피적 생활 양식은 주로 감각주의적 원칙에 입각한 것이며, 미국 남부의 신앙이 두터운 바이블 벨트 지역의 근본주의는 관념주의적 전제에 기초를 둔 것이다. 위의 두 형태는 서로 많은 차이점을 보임에도 불고하고 현재 미국 사회 체제 내에서 다소 거북하게나마 공존하고 있다. 그리고 목표 체계로서 기능을 하는 위의 두 방식 모두 삶을 조직화하여 하나의 일관된 플로우 활동으로 변화시키는 데 각각 기여하고 있다.
문화뿐만 아니라 각 개인들도 역시 이와 같은 의미 체계를 행동으로 구현한다. 기업가다운 확고한 도전 목표들을 중심으로 삶을 살아왔던 아이아코카나 로스 페로와 같은 유수 기업인들은 종종 감각주의적 삶의 특징들을 아주 잘 보여준다. 이보다 더 초보적인 감각주의적 세계관을 잘 보여 준 사람은 휴 헤프너로서, 그의 '플레이보이 철학'은 단순한 쾌락 추구의 극명한 예가 된다. 신의 섭리에 대한 맹목적 신앙과 같은 단순하고도 초월적인 해결책을 주창하는 공상가나 신비주의자들은 무분별한 관념주의적 접근의 대표적인 예이다. 물론 다른 변형된 형태들도 많다. 베이커 부부나 지미 스와거트와 같이 텔레비전을 통해 설교를 하던 복음 전도자들은, 시청자들에게는 공공연히 관념주의적 목표들을 중시하라고 권고하면서 실제 그들은 사치와 감각적 쾌락에 젖은 생활을 했다.
때로는 서로 완전히 상반되는 위의 두 원칙들을, 양자의 장점은 모두 유지하면서도 각각의 단점들은 최소화시켜 설득력 있는 하나의 통일체로 통합하는 문화들도 있다. 소로킨은 이 같은 문화들을 '이상주의적' 문화라 명명한다. 이러한 문화는 구체적인 감각적 경험을 수용하면서도 정신적 측면에 대한 경외도 가지고 있다. 소로킨의 분류에 따르면, 서유럽에서는 중세 말기와 르네상스 시대가 비교적 가장 이상주의적 문화를 이루었던 시기이며, 14세기 처음 20년 동안이 그 절정기였다고 한다. 말할 필요도 없이, 흔히 순수한 유물사관의 부작용인 무기력함과 많은 관념주의적 체제들의 폐해라 할 수 있는 지나친 금욕주의를 피할 수 있는 이상주의적 해결책이 가장 바람직한 것으로 보인다.
이처럼 문화를 단순히 삼분하여 해석하는 소로킨의 분류법은 논란의 여지가 있긴 하지만, 사람들이 궁극적 목적을 설정할 때 기준이 되는 일부 원칙들을 설명하는 데는 매우 유용하다. 구체적 도전 목표들에 대응해 나가며 대체로 물질적 목적을 지향하는 플로우 활동을 중심으로 삶의 형태가 이루어지는 감각주의적 삶의 양식은 언제나 인기가 높다. 이 양식이 갖는 장점의 하나는 모든 사람이 규칙을 이해할 수 있으며 피드백이 비교적 명확하다는 것이다. 누구나 건강 · 금전 · 권력 · 성적 만족을 바라는 것은 분명한 사실이다. 그러나 관념주의적 양식 또한 나름대로의 장점들을 갖고 있다. 형이상학적 목표들의 성취가 불가능할 수는 있을지언정 그렇다고 성취에 실패했다는 것도 결코 입증할 수 없다는 점이다. 진정으로 관념주의적 가치를 신봉하는 사람은 언제나 피드백을 왜곡해서 결국 자신이 옳았으며 자신이 선택받은 사람 중의 하나임을 증명하는 데 이용한다. 모든 것을 총망라하는 플로우 활동으로 삶을 통합할 수 있는 가장 만족스러운 방법은 아마도 이상주의적 양식일 것이다. 그러나 물질적 조건을 향상시키는 동시에 정신적 목적을 추구할 수 있는 도전 목표들을 설정한다는 것은 쉬운 일이 아니다. 더군다나 문화의 전반적 성격이 감각주의인 경우에는 그 어려움이 커지게 마련이다.
각 개인의 행동 양식을 어떻게 설정하는가를 설명할 수 있는 또 다른 방법은 이들이 스스로를 위해 세운 도전 목표의 내용보다는 복합성의 정도에 초점을 맞추는 것이다. 어쩌면 가장 중요한 것은 그 사람이 유물론적인가 혹은 이상주의적이가 하는 사실이 아니라 그가 그런 분야에서 추구하는 목표들이 얼마나 분화되어 있으며 또 통합되어 있는가 하는 문제일 것이다. 2장의 마지막 부분에서 논의한 바와 같이 복합성이란 어떤 체제가 나름대로의 장점과 잠재 능력을 얼마나 잘 개발하는가 그리고 이러한 장점들의 상호 연계가 얼마나 잘 되어 있는가의 여부에 따라 결정되는 것이다. 이런 점에서, 충분히 숙고한 후 결정한 감각주의적 삶의 자세, 즉 다양하고도 구체적인 인간의 경험을 충분히 고려하면서도 내적 일관성을 유지하는 자세가 무분별한 관념주의나 감각주의보다 바람직하다 할 수 있을 것이다.
p403
앞의 설명에서, 복합적인 의미 체계의 구축은 관심을 자아와 타인에게 번갈아 집중시키는 과정을 통해서 이루이즌 것 같다. 첫 번째는, 심리 에너지를 생물학적 욕구에 투자하는 단계로, 이 단계에서 정신적 질서는 곧 쾌락에 해당한다. 이러한 수준에서 잠정적으로 도달하게 되면 지역 사회의 목표들에 관심을 투자하기 시작한다. 그리하여 집단적 가치를 반영한 의미 있는 것들 - 즉 종교와 애국심 그리고 다른 사람들로부터 받는 인정과 존경 등 - 이 내적 질서의 변수가 된다. 다음의 변증법적 단계에서는 관심이 다시 자아로 이동을 한다. 더욱 광범위한 큰 인간 체제에서 소속감을 성취했으므로 이제는 개인적 잠재력의 한계를 인식하고자 하는 것이다. 이는 자아의 실현을 위한 시도들로 이어지며, 이때 각기 다른 기술과 사상 그리고 원칙들을 시험해 보게 된다. 이 단계에서는 쾌락(pleasure)보다는 즐거움(enjoyment)이 주된 보상의 원천이 된다. 그러나 이는 끊임없는 추구의 단계이므로, 한편으로는 중년의 위기, 직업의 변화 그리고 개인적 능력의 한계를 극복하려는 노력 등에 의해 점증하는 스트레스를 경험하게 될 수도 있다. 이 시점부터는 에너지의 방향을 마지막으로 재설정할 준비가 갖추어진다. 자신이 할 수 있는 일이 무엇인지를 알게 되었고, 이보다 더 중요한 사실, 즉 혼자서는 할 수 없는 일들이 무엇인지도 깨닫게 된다. 따라서 궁극적 목적이 한 개인보다는 큰 체계, 즉 명분 · 사상 · 초월적 존재 등에 통합되는 것이다.
모든 사람들이 이 같은 복합성의 상승 단계를 거치는 것은 아니다. 첫 단계를 넘어설 수 있는 기회를 전혀 얻지 못하는 사람들도 있다. 생존 요구가 집요하게 어어질 때는 그 외의 다른 어떤 것에도 충분한 관심을 기울일 수 없으며, 가족이나 나 더 넓은 지역 사회의 목표들에 투자할 만한 심리 에너지가 남아 있지 않게 된다. 자신의 권익 추구만으로도 인생의 의미를 찾을 수 있다. 아마도 대다수의 사람들은 가족 · 회사 · 지역 사회 혹은 국가의 안위가 주된 의미를 부여해 주게 되는 발달의 두 번째 단계에서 편안하게 머무르고 있을 것이다. 반성적 개인주의의 단계까지 도달하는 사람은 극히 적다. 또한 그 중에서도 한정된 소수만이 보편적인 가치와의 통합을 이룬다. 이러한 단계들은 실제로 반드시 순서적으로 진행된다는 것을 의미하는 것이 아니라, 운이 좋아서 의식을 성공적으로 통제하는 사람이 어디까지 도달할 수 있는가를 보여 준다고 할 수 있다.
지금까지 개략적으로 소개한 네 단계는 복합성을 서서히 높여감에 따라 각기 다른 의미가 생겨나게 됨을 설명하는 모델들 가운데 가장 단순한 종류에 속한다. 이 과정을 여섯 단계 혹은 심지어 여덟 단계로 나누는 모델도 있다. 몇 단계로 이루어지는가는 별로 중요하지 않다. 중요한 것은, 대부분의 이론들이 이같이 한편으로는 분화를 또 한편으로는 통합을 번갈아 이루는 변증법적인 힘의 균형 상태의 중요성을 모두 인정한다는 것이다. 이러한 관점에서 보면, 각 개인의 인생은 일련의 각기 다른 '게임'들로 이루어지는데, 이 게임들은 서로 다른 목표와 도전들로 갖추고 있으며 개인이 성숙해감에 따라 변화를 거듭하게 된다. 우리들이 이처럼 복합성을 높여 자율적이며, 자립적이고, 자신의 개성과 한계를 의식할 수 있기 위해서는 우리가 본래 가지고 있는 기술들을 더욱 연마하는 일에 에너지를 투자해야 한다. 동시에 우리는 개인적 한계를 능가하는 힘에 적응할 수 있는 방법을 인식하고, 이해하며, 찾아내는 데 에너지를 투자해야 한다. 물론, 우리가 반드시 이와 같은 계획을 따라야 할 필요는 없다. 그러나 만일 그렇게 하지 않는다면 조만간에 후회할지도 모른다.
p406
그리고 이들이 이처럼 행동했기 때문에 이들이 세웠던 목표들이 원래 가치가 있는 것들이었는가의 여부와는 관계없이 실제로 보람과 가치가 있는 일들이 되었다. 또한 이들 청교도들의 목표가 헌신을 통해 소중한 것으로 변했기 때문에 이들의 생애에 의미를 부여해 줄 수 있었다.
어떠한 목표도 진지하게 받아들이지 않는다면 큰 영향을 미치지 못한다. 각 목표에는 일련의 결과들이 수반되는 것이기 때문에 각자가 이러한 결과를 고려할 준비가 되어 있지 않다면 목표는 아무 의미도 없는 것이 되고 만다. 오르기 어려운 봉우리를 정복하려고 결심한 등반가는 자신이 등반을 하는 동안 내내 지칠 것이며 어려움에 처하게 되리라는 사실을 잘 알고 있다. 그러나 만일 그가 너무도 쉽게 포기를 해버린다면 그의 추구는 가치 없는 것이 되고 말 것이다. 모든 플로우 경험도 이와 마찬가지이다. 목표와 그 목표를 위해 기울여야 하는 노력에는 밀접한 상호 관계가 있다. 처음에는 목표들이 그 목표를 위해 기울여야 하는 노력을 정당화해 주지만, 나중에는 바로 그러한 노력들이 목표를 정당화해 준다. 사람들이 결혼을 하는 까닭은 배우자를 자신과 평생을 함께 보낼 만한 사람으로 판단했기 때문이다. 그러나 결혼 후 이 판단이 옳았던 것처럼 행동하지 않는다면, 시간이 지나면서 부부 관계는 가치를 잃게 될 것이다.
모든 것을 조합해 본다면, 인류에게 자신들의 결심을 뒷받침할 만한 용기가 부족했다고는 말할 수 없다. 모든 시대의 모든 문화에서 셀 수 없이 많은 부모들이 자녀들을 위해 희생해 왔으며, 그렇게 함으로써 그들의 인생이 한층 더 의미 깊은 것이 될 수 있었다. 또한 많은 사람들이 자신의 목초지와 가축을 보전하기 위해 모든 에너ㅓ지를 바쳐 왔을 것이다. 종교와 국가 혹은 예술을 위해 모든 것을 희생한 사람들도 헤아릴 수 없이 많다. 고통과 실패에도 불구하고 꾸준히 이렇게 할 수 있었던 사람들은 그들의 인생 전체를 하나의 연장된 플로우로 변화시킬 수 있었다. 즉 이들의 삶은 중심이 확실하고, 집중이 되고, 내적 일관성이 있으며, 논리적으로 정연한 일련의 경험들의 연속이 되었던 것이다. 따라서 이러한 경험들의 내적 질서로 인해 각자가 삶을 의미 깊고 즐겁게 느낄 수 있었던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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행동과 관조는 서로 보완하고 지지해 주어야 이상적이다. 행동 그 자체는 맹목적이며 관조는 무기력하다. 어떤 목적에 많은 에너지를 투자하기 전에 근본적인 의구심을 가져보는 것이 많은 도움이 된다. 이것이 과연 내가 진정으로 하고 싶어하는 일인가? 이 일을 하면서 나는 즐거운가? 앞으로도 이 일을 즐길 수 있을 것인가? 나와 다른 사람들의 희생을 감수하면서까지 추구할 가치가 있는 목적인가? 이 목적을 달성하고 난 후의 내 자신에게 과연 만족할 수 있을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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동물들이 인간과 같은 고통을 느끼게 되는 것은 그들에게 생물학적으로 내재되어 있는 목적들이 좌절될 때이다. 그들은 굶주림과 고통 그리고 충족되지 않은 성적 욕구가 주는 괴로움을 느낀다. 인간의 친구가 되도록 길러진 개들은 주인과 떨어져 혼자 있게 되면 불안해한다. 그러나 인간을 제외한 동물들은 자신의 고통을 스스로 야기시킬 만한 위치에 있지 않다. 그들은 모든 욕구가 충족되고 난 후에도 혼란과 절망을 느낄 수 있을 만큼 충분히 진화되어 있지 않다. 외적 요인으로 인한 갈등이 해결되면, 동물들은 자기 자신과의 조화를 이루게 되어 우리 인간들이 플로우라고 부르는 완전한 몰입의 상태를 경험한다.
인간에게만 독특하게 있는 심리의 엔트로피는 자신이 실지로 성최할 수 있는 것 이상의 일들을 바라고, 여건이 허락하는 것 이상을 성취할 수 있을 것처럼 느끼는 데서 오는 상태라 할 수 있다. 즉 인간이 한 번에 하나 이상의 목표들을 염두에 두고 있어서, 서로 상충되는 욕구들을 동시에 의식할 때만 이러한 상태가 비로소 가능해지는 것이다. 엔트로피는 우리의 정신이 현재의 상태를 아는 것뿐만 아니라 다른 대안이 있으면 어떻게 될 것인가 하는 것까지도 생각하기 때문에 생겨난다. 체계가 복합적일수록 대안의 여지가 많아져서 그만큼 체계 안에서 잘못되어지는 일도 많다. 인간 정신의 진화도 이에 해당되는 경우이다. 인간 정신의 정보 처리 능력이 증대됨에 따라 내적 갈등의 가능성도 그만큼 증가되어 왔다. 욕구와 삶의 선택 사항들과 도전들이 너무 많아지면 우리는 불안해지며, 또 너무 적어지면 지루함을 느낀다.
p417
단순한 의식이 아무리 조화로운 것이라 해도 복합적 의식보다 더 낫다고 주장하기는 어렵다. 휴식을 취하고 있는 사지의 평온함, 자신의 운명을 그대로 받아들이는 원시 종족들의 자세, 그리고 현재의 일에만 완전히 몰입할 수 있는 아이들의 단순함에 경탄을 할 수는 있겠지만, 이러한 것들이 우리의 곤경을 해결할 수 있는 모델을 제시해 주지는 못한다. 단순하고 순진함에 기초한 질서는 이미 우리의 손을 떠났다. 이미 선악과를 딴 이상 우리는 영원히 에덴 동산으로 다시 돌아갈 수 없게 된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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두 개념의 차이점을 다음과 같이 설명할 수도 있다. 즉 자신이 발견한 인생의 주제가 있는 사람은 개인적 경험과 선택에 대한 인식에 입각해 자신의 행동을 위한 대본을 직접 쓰는 사람이며, 받아들인 인생의 주제를 가지고 있는 사람은 다른 사람들이 오래전에 이미 작성해 놓았던 대본에 미리 규정되어 있는 역할을 그저 받아들이는 사람이다.
이러한 두 종류의 인생 주제들 모두 인생에 의미를 주기는 하지만 각각 그 나름대로의 단점을 가지고 있다. 사회 체계가 안정되어 있다면 수용한 인생의 주제도 그 역할을 충분히 해낼 수 있다. 그러나 여건이 그렇지 못한 경우에는 이러한 주제들이 사람을 편협한 목적 속에 가두게 되는 경우가 발생할 수 있다. 냉정하게 수만 명의 사람들을 가스실로 보냈던 나치당원 아이히만은 관료주의적 규칙을 신성시했던 사람이다. 복잡한 열차 운행표를 뒤적이면서, 수량이 부족한 열차를 필요할 때 꼭 사용할 수 있도록 조처하고, 최소한의 비용으로 많은 유태인들을 수송할 수 있는 방법을 강구하면서 그는 아마도 플로우를 경험했을 것이다. 그는 자신에게 내려진 명령이 과연 옳은 일인가 하는 의구심을 한번도 가져보지 않았던 듯하다. 명령을 따르는 동안에 그의 의식은 조화를 이루고 있었다. 그에게 인생의 의미란, 강력하고 조직화된 기관의 일원이 되는 것이었다. 그 외의 다른 어떤 것도 그에게는 중요하지 않았다. 평화롭게 질서가 잘 유지되는 시대였다면 아이히만 같은 사람은 존경받는 사회적 지주가 되었을 수도 있다. 그러나 그가 가졌던 것과 같은 인생의 주제는, 부도덕하고 정신착란 상태인 사람들이 사회의 통제권을 쥐게 될 때 그 취약성을 드러내게 된다. 그렇게 되면 그와 같은 강직한 시민이 자신의 목적을 바꿀 필요도 없이, 또 자신이 하는 행위의 비인간성을 깨닫지도 못한 채 범죄의 공범이 되는 것이다.
'발견한 인생 주제'의 취약성은 다른 곳에 있다. 이러한 인생의 주제는 인생의 목적을 찾고자 하는 개인적 투쟁의 산물이므로 사회적 정통성이 결여되는 경향이 있다. 또한 새롭고 특이한 것들이기 때문에 다른 사람들이 이를 무모하다거나 파괴적인 것이라고 간주하는 경우도 많다. 가장 강력한 인생의 주제들 중에는 오래된 인간의 목적에 기초한 것들도 있지만 개인별로 이를 다시 새롭게 발견하고 자유롭게 선택한 것들이 대부분이다. 어린 시절 말콤 엑스는 빈민가 젊은이들의 행동 양식을 고스란히 본받고 자라 싸움을 일삼고 마약 거래에도 손을 댔다. 그러나 그는 교도소에 수감되어 있는 동안 독서와 명상을 통해 존엄과 자긍심을 성취할 수 있도록 해주는 또 다른 일련의 목적들을 새롭게 발견하게 되었다. 앞 시대의 사람들이 이루어 놓은 성취의 단편들로 이루어진 것이기는 하지만, 본질적으로 그는 완전히 새로운 정체성을 찾게 되었던 것이다. 마약 업자와 포주가 걷는 길을 계속 답습하는 대신, 그는 흑백을 막론한 다른 많은 주변인들의 삶에 질서를 찾아주는 매우 복합적인 높은 목적을 창안해 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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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러한 사람들과 삶의 의미를 찾는 데 성공한 다른 많은 사람들에게서 공통적으로 찾을 수 있는 전략이 있다면, 그것은 너무나 단순한 것이어서 언급하기조차 무색한 것이라 할 수 있다. 그것은 너무나 단순한 것이어서 언급하기조차 무색한 것이라 할 수 있다. 그러나 이것은 종종 많은 사람들에게 너무 쉽게 간과되어 온 게 사실이다. 특히 요즈음은 더욱 그렇기 때문에 여기서 한 번 살펴보는 것은 큰 도움이 될 것이다. 그 전략이란, 옛 세대들이 만들어 놓은 질서 속에서 자신의 마음속의 혼란을 피할 수 있는 것들을 추출해 내는 것이다. 우리의 문화 속에는 이러한 용도로 언제든 사용할 수 있는 많은 지식, 다시 말해 잘 정돈된 정보들이 축적되어 있다. 누구나 위대한 음악 · 건축 · 미술 · 시 · 연극 · 무용 · 철학 · 종교 등을 통해서 혼돈 속에서 조화를 창조해 내는 법을 배울 수 있다. 그러나 너무나도 많은 사람들이 이것들을 간과해 버리고는, 자신들만의 기제로 살믜 의미를 창조해 내고자 한다.
혼자서 해보겠다는 것은 마치 각 세대마다 맨 처음부터 물질 문화의 구축을 다시 시작하려는 것과 마찬가지라 할 수 있다. 올바른 정신을 가진 사람이라면, 바퀴 · 불 · 전기 그리고 오늘날 우리가 인간의 환경의 일부로 당연시하는 수많은 물체와 과정들을 다시 발명라혀고 하지 않을 것이다. 그 대신 우리는 이러한 것들을 선생님이나 책 그리고 모델등을 통해 배움으로써 과거의 지식으로부터 혜택을 받고, 결국은 그것을 능가하게 된다. 조상들이 축적해 놓은 삶에 대한 지식을 버린다거나 혼자서 실행 가능한 일련의 목표들을 발견하기를 기대하는 일은 잘못된 오만이다. 이러한 일에 성공할 가능성이란, 물리학적 지식과 도구 없이 전자 현미경을 발견하려고 할 때만큼이나 희박한 것이다.
성인이 되어 일관성 있는 인생의 주제를 발견한 사람들은 흔히 자신의 어린 시절에 부모님이 이야기를 들려주거나 책을 읽어주던 일을 회상하곤 한다. 자신이 신뢰하는 애정 깊은 어른들로부터 동화나 성서 이야기, 역사적 영웅들의 무용담, 실감나는 가족사 등을 들으면서, 아이는 과거의 경험을 바탕으로 의미 있는 질서를 형성해 나가는 첫 경험을 하게 된다. 우리가 조사한 바에 따르면, 이와는 대조적으로 한번도 어떤 목표에 집중해 보지 않았거나 혹은 주변 사회의 목적을 무조건적으로 수용했던 사람은, 어린 시절 부모님이 책을 읽어주거나 이야기를 들려준 기억이 없는 사람들이 대다수였다. 토요일 아침에 텔레비전으로 방영되는 아이들 대상의 무의미한 감각주의적 쇼는 위와 같은 목적을 결코 달성할 수 없다.
각자의 성장 배경이 어떤 것이든 과거로부터 의미를 끌어낼 수 있는 기회는 인생을 살면서 얼마든지 있다. 복합성을 가진 인생의 주제를 발견한 대부분의 사람들은 자신들이 몹시 존경하여 귀감으로 삼았던 연장자나 역사적 인물을 가지고 있다. 이들은 또한 책을 통해서 새로운 행동의 기회들을 찾아냈던 일들을 기억한다. 예를 들어, 고결한 인품으로 널리 존경을 받는 당대의 한 유명한 사회과학자는 십대 시절에, 『두 도시의 이야기』를 읽으며 디킨스가 묘사한 사회적 · 정치적 혼란상 - 그의 부모가 일차대전 후 유럽에서 겪은 바와 같은 혼란상 - 에 대단히 깊은 인상을 받았다. 그리고 그 자리에서 자신의 평생을 왜 사람들이 서로의 삶을 비참하게 만드는가를 이해하는 데 바치기로 결심을 했다고 한다. 가혹한 고아원에서 자라난 다른 어떤 소년은 호레이쇼 엘저의 이야기를 우연히 읽게 되었다. 그것은 자기와 비슷한 처지의 가난하고 외로운 소년이 열심히 일도 하고, 약간의 운도 따른 덕에 인생에서 성공한다는 이야기였다. 소년은 이 이야기를 일고, "그도 할 수 있었는데, 나라고 왜 못하겠는가?"라는 생각을 했다고 한다. 오늘날 이 소년은 은퇴한 은행가가 되었는데, 자선 사업가로 널리 이름을 떨치고 있다. 플라톤의 『대화론』의 논리적 질서, 혹은 공상과학 소설에 나오는 주인공의 용감한 행위에 감명을 받아 영원히 변모하게 되었다는 사람들도 있다.
문학에는 행동, 귀감이 되는 목적 그리고 의미 깊은 목적을 푯대 삼아 성공적인 인생을 산 사람들에 관한 정보들이 정리되어 담겨 있다. 삶의 무질서함에 직면해 본 많은 사람들은 과거의 다른 사람들도 자신과 유사한 문제를 겪었으며 결국 그러한 난관들을 극복해 냈다는 사실을 알고 희망을 되찾게 되었다. 이것은 단지 문학의 예일 뿐인데, 음악 · 미술 · 철학 그리고 종교는 또 어떠하겠는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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마침내 무엇인가 색다른 것을 시도해 보아야 하겠다는 생각이 떠올랐다. 그래서 나는 단테의 『신곡』을 간략히 살펴보는 것으로 세미나를 시작하게 되었다. 내가 아는 한 6백 년도 넘은 이 단테의 운문이 중년의 위기와 그 해결책에 관해 쓰여진 가장 오래된 서술이기 때문이다. 단테는 그의 몹시 길고도 풍부한 이 시의 첫 행에서 다음과 같이 쓰고 있다.
"우리 인생의 여정 한 가운데서, 나는 어두운 숲 속에 있는 내 자신을 발견하게 되었다. 옳은 길을 완전히 잃어버렸기 때문이다."
그 다음에는 중년기에 겪게 되는 어려움들을 여러 가지 측면에서 적절히 묘사한 흥미로운 내용이 계속 이어진다.
우선, 길을 잃어 어두운 숲 속으로 접어들게 된 단테는 세 마리의 사나운 짐승들이 입맛을 다시며 자신을 몰래 뒤쫓아 오고 있음을 알게 된다. 이 짐승들은 사자 · 시라소니 · 늑대였는데, 이들은 각각 야망 · 육욕 · 탐욕을 상징한다. 1988년의 베스트셀러였던 톰 울프의 작품 『허영의 불꽃』에 주인공으로 등장하는 뉴욕의 한 중년 주식 거래인의 경우와 마찬가지로, 단테의 적들은 권력과 성 그리고 돈에 대한 갈망이었음이 드러나게 된다. 그들로부터 해를 입지 않기 위해 단체는 언덕으로 피신하려 한다. 그러나 그 짐승들은 계속 더 가까이 다가오고, 절박한 나머지 단체는 신의 도움을 요청한다. 환영을 통해 그는 기도의 응답을 받는다. 그 환영은 버질(Virgil)의 유령이었는데, 그는 단테가 태어나기 약 천 년 전에 죽은 고대 로마의 시인이었으나, 단테가 그의 현명하고 웅장한 시를 너무도 흠모한 나머지 자신의 스승으로 생각했던 사람이었다. 어두운 숲 속에서 벗어날 수 있는 길이 있다는 희소식을 전하며 버질은 단테를 안심시키려 한다. 그러나 이 길은 지옥을 통과하는 길이라는 좋지 못한 소식도 더불어 전한다. 그들은 서서히 지옥을 통과해 나가면서, 목적을 한 번도 설정하지 않았던 사람들이 겪는 고통을 본다. 또 인생의 목적이 엔트로피를 증가시키는 것이었던 소위 '죄인들'의 더욱 혹심한 운명을 목격하게 된다.
나는 시간에 쫓기는 기업의 중역들이 이처럼 해묵은 우화를 어떻게 받아들일 것인지가 다소 염려스러웠다. 그들이 자신의 소중한 시간을 낭비하는 것으로 생각할 수도 있음을 우려하였던 것이다. 그러나 이는 지나친 기우였다. 신곡에 관해 이야기를 나누고 난 후부터, 중년의 위기와 중년 이후의 삶을 풍부하게 만들 수 있는 여러 선택들에 관해 그 이전과는 비교할 수 없을 정도로 서로 마음을 열고 진지한 토론을 할 수 있었기 때문이다. 나중에 참석자들 중 몇 사람이 사석에서, 단테의 시로 세미나를 시작하는 것이 매우 좋은 생각이었다고 나에게 이야기를 했다. 단테의 시는 세미나의 주제를 너무도 명료하게 조명해 주어서 나중에 그 주제에 관해 생각하고 이야기하기가 훨씬 용이했던 것이다.
단테는 또 다른 이유에서도 하나의 중요한 본보기가 된다. 그의 시는 깊은 종교적 윤리의 영향을 받았지만, 그것을 읽는 사람 누구나 단테의 기독교 신앙이 '받아들인' 것이 아니라 '발견한' 신앙임을 분명하게 알 수 있다. 다시 말해, 그가 창조한 종교적 인생 주제는 최상의 기독교적 통찰과 최상의 그리스 철학 그리고 유럽으로 전해진 회교적 지혜의 총합이었던 것이다. 동시에 『신곡』의 지옥편에는 영원한 저주로 고통받는 교황 · 추기경 · 사제들이 매우 많이 등장한다. 그의 첫 번째 안내자인 버질조차도 기독교 성자가 아닌 이교도 시인이었다. 단테는 영적인 질서 체계가 조직화된 교회와 같은 세속적 구조에 좌우되면 엔트로피의 영향을 받기 시작한다는 사실을 인식하고 있었다. 그러므로 신앙 체계로부터 의미를 끌어내기 위해서는, 그 체계 속에 담겨 있는 정보를 자신의 구체적 경험과 비교하여 사리에 맞는 부분만을 취하고 나머지는 거부해야만 한다고 믿었던 것이다.
오늘날에도 우리는 과거로부터 만들어진 위대한 종교의 영적 통찰력에 기초한 내적 질서를 삶으로 보여 주는 사람들을 종종 만날 수 있다. 우리가 매일 신문지상에서 접하는 주식시장의 부도덕성, 군수 산업체들의 부패, 원칙이 결여된 정치계의 소식들에도 불구하고 그와 대조되는 예들도 존재하는 것이다. 또한 고통받는 사람들을 돕는 것이 의미 있는 인생에 있어서 꼭 필요한 부분이라고 믿고, 일정한 시간을 할애해 병원을 찾아가 죽어 가는 환자들과 함께 있어 주는 성공한 기업인들도 있다. 그리고 아직도 많은 사람들이 기도를 통해서 힘과 마음의 평안을 얻고 있으며, 자신만의 의미 있는 신앙 체계를 통해 강력한 플로우 경험을 위한 목적과 규칙들을 얻는 사람들도 많은 것이다.
그러나 점점 더 많은 대다수의 사람들이 전통적 종교들이나 신념 체계의 도움을 받지 못하고 있음이 분명한 것 같다. 시간이 흐르면서 왜곡되어지고 세속화된 교리 속에서 진리를 찾아내지 못하는 사람들이 많으며, 오류를 용납하지 않는 어떤 교리 덕분에 진리도 함께 거부되고 마는 것이다. 또 다른 사람들은 너무도 절박하게 어떠한 질서를 필요로 한 나머지, 결점이 있는 것일지라도 우연히 접하게 된 신념 체계에 그대로 집착하여 근본주의적 기독교인이나 회교도 혹은 공산주의자가 되기도 한다.
다음 세대에 살 우리의 자손들이 삶의 의미를 찾는 일에 도움을 줄 수 있도록 새로운 목표와 수단의 체계가 생겨날 가능성은 없는 것일까? 누군가는 기독교가 과거의 영광을 되찾으면 그렇게 할 수 있을 것이라 믿는다. 혹은 아직도 공산주의가 인간 경험의 혼란상을 해결해 줄 것이며, 그 질서가 전 세계로 확산될 것이라고 믿는 사람들도 있다. 현재로서는 이러한 것들이 실현될 가능성이 희박한 것으로 보인다.
우리가 공감할 수 있는 새로운 신념이 되려면, 우리의 지식과 감정 그리고 우리가 희망하는 것들과 두려워하는 것들을 합리적으로 설명해 주는 것이어어먄 한다. 우리의 심리 에너지를 의미 있는 목표들에게로 인도해주며, 플로우를 경험할 수 있는 삶의 방식에 필요한 규칙들을 제공해 줄 수 있는 신념 체계가 되어야만 하는 것이다.
이와 같은 신념 체계는 어느 한도까지는 인간과 우주에 관해 과학이 밝혀 놓은 사실들에 입각한 것이 될 것이다. 그러한 기초가 없다면 우리의 의식은 신념과 지식 사이에서 분열되고 말 것이다. 그러나 진정한 도움을 주려면 과학도 변화되어야 한다. 특정한 현실적 측면을 기술하고 통제하기 위한 다양한 원칙들 외에도, 지금까지 알려진 모든 지식을 총괄적으로 통합하여 그것을 인간과 인간의 운명에 연결시킬 수 있어야 하는 것이다.
진화의 개념을 통해서 이를 성취할 수 있는 길도 있다. 우리는 어디서 왔는가? 우리는 어디로 가고 있는가? 어떠한 힘이 우리의 삶을 결정 짓는가? 선은 무엇이고 악은 무엇인가? 우리는 서로 어떻게 연관되어 있으며, 우주 전체와는 어떤 관계를 갖고 있는가? 우리가 하는 행위의 결과는 무엇인가? 이러한 의문 사항들처럼 우리에게 중요한 모든 것들을 우리가 알고 있는 지식과 나아가서는 앞으로 알게 될 지식들의 관점에서 체계적으로 논의해 보는 것이다.
이러한 제안에 대해서 전반적 과학은 물론 진화의 과학은 현재의 상태를 다루는 것이지 미래의 당위를 다루는 것이 아니라는 비판을 할 수 있다. 반면에, 신앙과 신념은 옳은 것과 바람직한 것들을 다루는 것이기 때문에 현실성의 제약을 받지 않는다. 그러나 진화론적 신념을 통해 현재의 사실과 미래의 당위를 좀더 밀접하게 통합시킬 수 있다. 우리가 현재의 우리를 만든 것이 무엇인가에 관해 더 깊이 이해를 하고, 본능적 충동 · 사회적 통제 · 문화적 표현 등 우리의 의식의 형성에 기여한 모든 요소들의 기원에 대한 인식을 한층 넓혀 간다면, 우리의 에너지를 바람직하게 사용하는 일이 훨씬 용이해질 것이다.
또한 진화론적 관점은 우리의 에너지를 투자할 가치가 있는 목표를 지적해 준다. 수십억 년의 세월이 흐르는 동안 점차 복합적 생명 형태가 지구상에 출현하게 되었으며, 결국은 매우 복잡한 인간의 신경 체계까지 탄생하게 되었다는 사실에 관해서는 의문의 여지가 없는 듯하다. 대뇌 피질의 진화로 의식이 생겨나게 되었으며, 현재 이러한 인간의 의식은 마치 대기권만큼이나 지구를 철저히 감싸고 있다. 복합화라는 현실은 현재이기도 하고 미래의 당위이기도 하다. 지금까지 일어나 왔고, 지구를 지배하는 조건들을 고려해 볼 때 앞으로도 일어날 것이 분명한 것이다. 그러나 우리가 계속되기를 원하지 않는다면 지속되지 않을 수도 있다. 진화의 미래를 바로 우리에게 달려 있는 것이다.
지난 수천 년 동안 - 진화로 볼 때는 눈 깜짝할 시간에 불과하지만 - 인간의 의식의 분화에 놀라운 진보를 이룩해 왔다. 우리는 인간이 다른 생물 형태와는 구별된다는 사실을 깨닫게 되었다. 각 개인이 다른 사람들과 서로 다르다는 사실도 인식하게 되었다. 우리는 또한 추상 개념과 분석 능력도 개발해 냈다. 즉 낙하하는 물체의 속도를 그 무게와 질량으로 측정하는 능력과 같이, 물체의 각 차원과 과정들을 구분 짓는 능력도 갖게 된 것이다. 바로 이와 같은 의식의 세분화 과정 동안 과학과 과학 기술 그리고 인간의 환경을 구축도 하고 파괴도 하는 전례 없는 능력도 생겨나게 되었다.
그러나 복합성은 분화뿐만이 아니라 통합으로 구성되어 있다. 다음 세대에서의 인간의 임무는 개발되지 않은 정신적 능력을 개발하는 것이다. 우리가 다른 사람들과 환경으로부터 우리 자신을 구별할 수 있게 되었듯이, 이제 우리는 어렵게 얻은 우리의 개인성을 잃지 않으면서도 우리 주변의 존재들과 우리 자신을 재통합할 수 있는 방법을 배울 필요가 있다. 미래의 가장 유망한 신념은, 우주 전체가 불문율에 의해서 서로 연관되어 있으므로 이를 고려하지 않고 우리의 꿈과 열망을 자여에 강제하려 하는 것은 이치에 맞지 않는 일이라는 깨달음에 기초한 것이 될 것이다. 인간의 의지의 한계를 인식하고, 우주 속에서 지배적이기보다는 협조적인 역할을 받아들이게 된다면, 우리는 마침내 고향에 돌아가게 된 유랑자의 안도감을 느끼게 될 것이다. 그렇게 되면 각 개인의 목적이 우주적 플로우에 융합되면서 의미를 찾는 문제도 더불어 해결할 수 있을 것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