행복에 대한 물음으로 시작해서 의식의 질서를 유지하는 상태가 궁극적인 행복에 이르는 길이라는 발견을 한 저자가, 그렇다면 의식의 질서를 유지하는 상태는 어떻게 우리에게 다가오는가에 대한 고민에 대한 30년간의 연구 결과를 정리한 책. 긍정 심리학이라는 분야를 창시한 위대한 저서일 듯 하다.

이번이 3번째 완독인데 읽을 때마다 새로운 깨달음을 주는 책이다.

 이 책을 한마디로 표현하자면, 진지한 인생을 살고자 할 때 어떻게 해야 하는가에 대한 총체적 방법론이라 할 수 있다.

 이 책은 고전으로 남을 것 같다. 사실 이미 고전의 반열에 올랐다고 할 수 있을 듯 싶다.

핵심적인 내용은, 몰입이란 자의식을 가진 상태에서 의식의 질서가 유지된 상태이다(예를 들어 저자의 표현에 의하면 마약을 해도 의식의 질서가 유지되는데, 이것은 자의식을 가진 상태에서 이루어지는 것이 아니다).

의식의 질서(쉽게 말해서 평정심을 가지고 무언가에 집중된 상태를 의미한다)는 외부적 요인(사람, 상황,...)에 의해서 도전을 받게 되면 유지 상태가 깨지면서 혼란,불안과 같은 부정적 감정을 경험한다. 이런 부정적 감정을 극복해 나가면서 자신의 정신적(육체적인 면도 중요하지만 주로 이 책은 정신적인 면을 다룬다)인 평형상태를 유지하면서 자기 목적적인 인생을 구축해나가는 방법론을 다루고 있다.

이 책에서 다루는 몰입의 과정과 그로 인해 얻은 긍정적 효과는 인생의 전 과정에서 반복되는데, 주로 이런 과정을 통해서 몰입의 과정을 통과한 사람은 복합성의 단계를 높여나간다. 복합성은 쉽게 말하자면 RPG게임에서 레벨(업)과 같은 개념으로 보면 된다. 게임 초반에는 게이머의 레벨도 낮지만 해결해야 할 미션 또한 쉽다. 레벨업이 되면서 그에 걸맞게 난이도가 높여진 미션이 나오게 되는 것처럼, 인생의 난관을 극복해나가면서 복합성이 높아진다는 개념이다.

몰입은 자신의 능력에 걸맞는 적절한 난이도의 도전과제가 주어질 때 얻어진다는 측면은 게임의 난이도가 적절해야 게임이 재밋는 것과 비슷하다.

좋은 책에도 여러가지 효용들이 있다. 지식을 효율적으로 전달하는 책, 노하우를 전달하는 책, 인생관을 바꾸는 책 등등.

이 책은 좋은 책의 거의 모든 효용들을 체감할 수 있는 매우 훌륭한 책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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서문 중.

 

 이 책은 행복하게 살 수 있는 단순한 요령 따위를 제시하는 책이 아니다. 사실 그렇게 한다는 것은 불가능하다. 왜냐하면 즐거운 인생이란 어떤 요령을 따라서라기보다는 개개인이 창조적으로 만들어 가야 하는 것이기 때문이다. 이 책은 요령을 제시하기보다는 사람들이 따분하고 무의미한 삶을 기쁨이 충만한 삶으로 바꾸기 위한 일반적인 원리들과 이러한 원리들을 자신의 삶에 접목시킨 구체적인 예들을 제시할 것이다.

 이러한 삶을 만들어 가는 데 지름길은 없다. 그러나 이 주제에 깊은 관심을 가지고 있는 독자라면 틀림없이 이 책에 담겨 있는 이론들을 끄집어 내서 자신의 삶을 변화시키기 위한 정보로 충분히 활용할 수 있을 것이다.

 

1장. 행복, 다시 생각해 보기(Happiness Revisited)

 

p25

 "행복이란 것은 우연히 찾아오는 것이 아니다."

 바로 이것이 나의 '발견'이다. 행복은 운이 좋아서라든지 어쩌다 생긴 기회의 산물이 아니다. 돈이나 권력으로 얻을 수 있는 것도 아니다. 행복은 외부에 있는 사물에 의해서 좌우되는 것이 아니라 오히려 우리들이 이것들을 어떻게 해석하는가에 달려 있다. 실제로 행복은 우리가 준비해야 하고, 마음속에서 키워가야 하며, 사라지거나 빼앗기지 않도록 스스로 지켜내기도 해야 하는 특별한 것이다. 자기 내면의 경험들을 조절할 수 있는 사람들은 삶의 질을 결정할 능력이 있는 것이다.

 그러나 행복은 의식적으로 찾는다고 해서 얻어지는 것은 아니다. "네 스스로에게 지금 행복하냐고 물어보는 순간, 행복은 달아난다"고 철학자 밀은 말했다. 행복을 직접적으로 찾을 때가 아니라 좋든 싫든 간에 우리 인생의 순간 순간에 충분히 몰입하고 있을 때만이 행복은 오는 것이다. 오스트리아의 심리학자 빅터 프랭클은 『삶의 의미를 찾아서』라는 책에서 다음과 같이 말하고 있다.

 "성공에 집착하지 마라. 성공에 집착할수록 성공하지 못할 가능성이 높아진다. 행복과 마찬가지로 성공이란 것도 의식적으로 얻으려 한다고 해서 구해지는 것이 아니다. 성공은 자기 자신의 이해보다 더 큰 목표에 헌신할 때에 얻어지는 부산물일 뿐이다."

 

p28

 자기의 인생을 통제할 수 있는 힘을 갖는다는 것은 절대 쉬운 일이 아닐 뿐더러, 매우 고통스러운 일이 될 수도 있다. 그러나 이러한 최적 경험들을 하나둘씩 축적하다 보면 어느덧 자기가 인생의 내용을 차곡차곡 채워나가는 과정에서 소외되지 않고 주인의 역할을 하고 있다는 느낌을 갖게 될 것이다. 내 인생의 주인공은 나라는 강렬한 자각, 바로 이러한 느낌이 우리가 염원하는 행복에 가장 가까운 상태가 아닐까?

 

p32

 모든 가치 있는 모험이 쉬운 것이 아니듯 지적인 노력 없이, 또 자신의 경험에 대해서 깊이 반성하고 숙고해 보려는 각오 없이는 이 책을 통해서 많은 것을 얻지 못할 것이다.

▶ 책의 내용을 음미하고 곱씹어보고, 내가 겪었던 인생의 경험에 비추어 반추해보고 그것으로부터 얻는 교훈들을 체화하면서 이를 개선하고자 하는 의지를 굳건히 하고 뚜렷한 목표를 세우고 이를 실천하고 피드백, 반성, 개선해나가는 노력이 없이 책만 읽는 것처럼 헛된 것은 없다.

 

p33

 내적 경험의 최적 상태는 의식이 질서를 가지고 움직일 때이다. 이 최적 상태에서는 우리의 심리적 에너지의 주의가 구체적인 목표에 집중적으로 투자되며, 우리가 갖고 있는 기술(능력)이 최적의 상태로 활용된다. 목표를 추구할 때 우리는 주의를 기울이게 되고 목표 외의 다른 것들은 잠시 잊어버리게 된다. 따라서 의식에 질서가 생기게 된다. 이런 까닭에 우리에게 주어진 도전적인 과제들을 완수해 보려고 애썼던 시간들을 우리가 나중에 돌이켜 보면 가장 즐거운 시간이었음을 발견하게 된다(3장). 자기의 심리적 에너지를 통제할 수 있는 능력이 생기고 그 결과 이 에너지를 의식적으로 원하는 목표에 쏟아 넣는 사람들은 성숙한 인간으로 변화해 나갈 것이다. 또한 그가 가지고 있는 기술 수준을 향상시키고 좀더 어려운 과제에 도전함으로써 점차 특별한 인간이 될 수 있다.

 

p35

 어떻게 하면 최적의 플로우 상태를 경험할 수 있는가를 설명하기에 앞서 이를 방해하는 인간의 조건들을 살펴보는 것이 필요하다. 옛날 이야기 속의 주인공들은 '그 이후로는 아주 행복하게 살았다...' 라는 행복한 결말에 이르기 전까지 항상 험난한 고비들을 넘겨야 하는데, 이는 인간의 정신에게도 해당된다. 내가 보기에 인간이 행복을 얻기가 어려운 첫 번째 이유는, 인간이 스스로를 위로하기 위해 창조한 여러 신화들과는 달리, 우주는 우리의 욕구를 만족시켜 주는 방향으로 움직이지 않고 있다는 데에 있다. 좌절은 인생에 깊숙이 관여하고 있다. 또한 우리의 기본적 욕구들이 채워지는 순간 또다시 우리는 다른 것을 원하게 된다. 이런 만성적인 불만족이 우리의 삶을 불행하게 하는 두 번째 이유이다.

 

p41

 인간은 진화 과정을 거치면서 대자연의 변덕스러움과 가공할 만한 위협에 대처하기 위해서 부단히 노력해 왔다. 그것의 한 방법으로 인간은 신화와 종교적 믿음을 발전시켜 왔다. 문화는 어떤 형태로든지 간에 자연의 모습을 이해할 수 있는 논리적 힘과 심리적 위안의 구실을 제공해 주었기 때문이다.

 문화의 핵심적 역할은 그 문화구언에 속한 사람들을 정신적 카오스 상태로부터 보호하고, 자신들이 얼마나 소중한 존재인가를 확신시켜 주는 데 있다. 에스키모 · 아마존 유역의 수렵 인종 · 중국인들 · 나바호 족 · 호주 원주민 할 것 없이 모두들 자신들이 세계의 중심에 있다고 믿었으며, 자신들이 신의 섭리에 따라 미래에는 온 세상의 주인이 될 것이라고 믿었다. 이러한 선민 의식이 없었다면 자연의 시련을 견디기가 힘들었을 것이다.

 신화대로 세상이 움직일 때는 별 문제가 없지만, 때때로 호의적으로 보였던 자연으로부터 얻은 안정감이 위태로워지는 순간들이 있다. 자신이 속한 문화가 신화나 믿음을 통해서 만들어 냈던 사실적이지 못한 방패들이 그 기능을 잃어버리는 순간 믿었던 만큼의 불안감이 엄습해 오는 것이다.

 이런 순간은 대부분 하필이면 그 문화의 운세가 좋아서 마치 자연의 무서운 힘을 통제하기 시작했다고 착각하는 순간에 온다. 문화의 절정기에 그 문화권에 속한 사람들은 선택받았다고 여길 것이며, 어떤 어려움도 두려워할 필요가 없다는 믿음을 갖게 되는 것은 당연할 수 있다. 몇 세기 동안 지중해를 장악해 온 로마 제국도 이런 믿음에 도달했을 것이고, 몽고 제국의 침입을 당하기 전의 중국이 그랬을 것이며, 스페인 사람들이 도착하기 전의 아즈텍 문명 또한 그랬을 것이다.

 원래 인간의 욕망에는 무관심한 것이 우주 자연일진데, 자연이 우리만을 지켜 줄 것이라는 문화적 교만이 문제가 되리라는 것은 명약관화한 사실이다. 결국 보장할 수 없었던 안정감은 뼈아픈 각성을 초래한다. 이제 더 이상 그 변화를 막을 수 없다는 사실을 인정하는 순간, 사람들은 사소한 어려움에도 용기와 결단력을 잃고 만다. 한때 자신들이 그렇게 믿었던 것들이 완전히 허상임을 깨달았을 때 그들이 배워 왔던 그 모든 것들에 대한 믿음은 내팽개쳐지고 만다. 이제 자기들을 지켜 주었었던 전통 문화적 가치들이 사라졌다는 것을 깨닫고는 불안과 무관심 상태에서 허우적거리게 된다.

 

p48

 도대체 왜 이럴까? 우리의 선조들이 꿈꾸지도 못했던 물질적 번영을 누리고 있음에도 불구하고 우리들은 왜 자꾸만 더 무기력해지는 것일까? 답은 간단하다. 그것은 우리 경험의 내용을 증진시키는 방법들에 관해서는 예나 지금이나 별 발전이 없기 때문이다.

 

p49

 "자, 과거의 경험들이 어떠했던 간에 지금 나의 모습을 있는 그대로 인정한다면, 미래를 위해서 내가 해야 할 일은 무엇인가?"

 현대의 삶에서 느끼는 불안과 우울함을 벗어나기 위해서 우리는 사회가 제공하는 당근과 채찍의 달콤한 매력으로부터 독립적인 자세를 취해야 한다. 이러한 자율성을 갖기 위해서는 자기 행동에 대해서 스스로 상도 주고 벌도 내릴 수 있어야 한다. 외적 여건이 어떻든지 간에 스스로 즐거움과 삶의 목적을 발견해 나가는 능력을 개발해야 하는 것이다. 이러한 과제는 쉽다고 할 수도 있고 어렵다고 할 수도 있다. 쉽다는 것은 이렇게 하는 것은 오로지 자기 마음먹기에 달려 있다는 점이고, 어렵다는 것은 어느 시대에서도 쉽지 않을 자기 단련과 인내를 필요로 한다는 점이다. 그러나 무엇보다도 우리가 경험을 통제하기 위해서는 무엇이 인생에서 가장 중요한 것인가에 관하여 자기 삶의 태도를 근본적으로 개혁해야 한다.

 우리는 앞으로 다가올 미래가 지금보다 더 중요하다는 당연한 가르침을 받으며 자랐다. 부모들은 자녀들에게 좋은 습관을 어려서부터 익히면 어른이 되어서 잘 살 수 있을 것이라고 가르친다. 학교 선생도 공부가 지금은 재미없게 느껴질지라도 좋은 직장을 얻기 위해서는 꼭 해야만 하는 것이라고 설득한다. 회사의 간부들도 신입 사원에게 열심히 하면 남보다 빠르게 진급할 수 있다고 부추긴다. 그러나 미래를 위한 현재의 이런 분투를 마칠 때쯤이면, 은퇴의 황혼이 일찌감치 우리에게 손짓하고 있다. 에머슨이 말한 것처럼, "살아가려고 바동대기는 하지만, 정말 삶을 살고 있는 것일까?"

 물론 훗날의 영광을 위해 고진감래하는 것은 어느 정도 필요한 덕목이다. 프로이트를 비롯한 많은 사람들이 말했다시피, 문명이란 것은 사람들의 욕망을 억압한 토대 위에서 만들어진 것이다. 사회 구성원이 좋아하든 싫어하든 간에 사회가 필요로 하는 기술이나 규범을 습득하지 않는다면 사회의 질서나 노동의 분화 등을 유지하기는 불가능할 것이다. 사회화 과정, 즉 인간을 사회의 유용한 구성원으로 변화시키는 것은 피할 수 없는 과정이기는 하다. 사회화의 목적은 그 구성원을 잘 통제할 수 있고, 사회에서 주는 당근과 채찍에 따라서 예측 가능한 반응을 하도록 만드는 데 있다. 가장 잘 된 사회화의 형태는 구성원들이 사회의 질서를 완전히 내면화한 나머지 이를 어기고는 한 순간도 살 수 없게 되는 것이라고 할 수 있다.

 우리를 사회화하는 과정을 적극적으로 도와주는 강력한 연합군들이 있다. 바로 우리의 생존적인 욕구 및 유전자의 희망 사항이다. 사회적 통제라는 것은 궁극적으로는 우리의 생존을 위협해서 이루어진다. 예를 들면 독재 국가에서 독재자에게 복종해야 하는 이유는 말 그대로 '살기 위해서'이다. 그리 멀지 않은 과거에 가장 문명화가 되었다는 영국에서조차도 준법을 강조하기 위해서 사용했던 방법은 태형 · 채찍질 · 능지처참 따위의 야만적인 폭력이었다.

 사회가 처벌만으로 잘 통제되지 않을 때 사용하는 또 하나의 방법은 쾌락이다. 아주 오래전부터 인간의 본성(성적인 욕구 · 공격 본능 · 안정에 대한 요구 · 변화에 적응하고 싶은 마음 등)은 정치인들 · 종교 단체 · 기업 · 광고주들이 선호하는 공략의 대상이었다. 16세기 투르크 제국은 용병을 모집할 때, 정복한 땅의 여성들을 겁탈할 수 있다는 유인책을 제시한 적도 있다. 오늘날에도 미군을 뽑는 광고에는 육군이 되면  '온 세상을 경험할 수 있다'는 문구가 버젓이 적혀 있지 않은가.

 우리가 쾌락을 추구하는 것은 개인의 편익을 위해서라기보다 종족 보전을 위한 유전자의 반사적 반응 때문이라는 것을 깨달아야 한다. 식도락이라는 말도 결국에는 신체에 필요한 자양분을 보충하는 것의 현학적 표현이 아니던다. 이와 마찬가지로 성행위도 우리의 유전자가 자기의 영속성을 위해서 우리 몸에 집어넣은 프로그램의 일종이다. 남자가 여자에게 성적 욕망을 느낄 때, 그는 이것이 본인 스스로가 느낀 관심의 표현이라고 생각할 것이다. 그러나 실상 그의 성적 관심은 보이지 않은 유전적 부호에 의해서 조절되고 있을 뿐이다. 성적 매력을 느끼는 것이 순전히 생물학적 반사라고 한다면, 인간의 의식의 역할은 최소한에 그치고 말 것이다. 물론 이런 유전적 프로그램을 따르고 그 결과를 즐기는 것 자체가 문제가 될 것은 없다. 단지 이제 우리가 쾌락이라는 것의 실체를 파악하고, 쾌락보다 더 중요하다고 여겨 높은 순위를 매긴 자신의 일을 위해서는 쾌락 경험을 통제할 수 있다는 전제하에 말이다.

 

 문제는, '필(feel)'을 느끼는 것만이 본질적인 것이라는 최근의 시대적 흐름이다. 오늘날 많은 사람이 가장 신뢰하는 것이 '본능'이다. 좋은 느낌이 오면, 그리고 그 느낌이 자연스럽고 자발적으로 생겨났다면, 그것은 옳다는 것이다. 그러나 지금껏 우리를 통제해 왔던 사회적이고 유전적인 힘들을 아무 의심 없이 무조건 받아들인다면 어떻게 될까? 그것은 곧 자기의 의식에 대한 통제권을 스스로 포기하는 것이나 마찬가지다. 술과 음식의 유혹을 거절하지 못하거나 섹스에만 온갖 관심이 쏠려 있는 사람은 그의 심리적 에너지를 자유롭게 활용할 수가 없다.

 인간 본성에 관한 이런 '해방된' 입장, 다시 말하면 우리가 자연스럽게 느끼는 본성이나 욕망을 있는 그대로 받아들이고 인정하는 이런 입장은 자칫하면 반동적인 결과를 낳을 수 있다. 현대의 '실재론'은 과거 시절 '운명론'의 변화된 형태라고까지 말할 수 있다. 다시 말하면, 자연스러운 본능을 따라야 하는 운명을 지니고 있다는 모순적 표현이 가능하다는 말인가? 우리는 자연적으로 무지 상태에서 태어난다. 따라서 자연 상태로 있어야만 한다면, 무언가를 배우고 알아서는 안 되는 것일까? 어떤 사람들은 태어날 때부터 남들보다 많은 남성 호르몬을 몸 안에 갖고 있고, 그 결과로 좀더 공격적인 성향을 갖게 된다. 자연스럽게 행동해야 한다면 이 사람들이 폭력을 행사해도 무방하단 말인가? 자연적 현상들을 부정할 수는 없지만, 우리에게 주어진 조건을 넘어서 행동해야 하는 것 아닐까?

 

 유전적 프로그램에 복종하는 것은 매우 위험한 일이다. 이렇게 되면 우리 스스로 무기력해지고 만다. 필요한 상황에서 유전적 지시를 무시할 수 없는 사람은 매우 허약해진다. 개인적 목표에 따라서 어떻게 행동할 것인지를 결정하는 대신에, 자신의 신체에 적용된 프로그램을 따라야 하기 때문이다. 인간은 사회적으로 건강하고 독립된 존재가 되기 위해서는 본능적 욕구를 조절할 수 있는 능력을 가지고 있어야 한다. 그렇지 못하면 이 욕구를 조작하는 남들에게 당하기 쉽다.

 

완전히 사회화가 된 사람은, 다른 사람들에 의해서 결정된 보상을 받고 만족하는 사람이다. 물론 그 보상은 본인이 원했던 게 아니다. 그리고 이런 보상은 종종 그의 유전적 프로그램을 착실히 수행하기 위해서 생긴 본능을 충족시켜 주는 것과 밀접한 관련이 있다. 그는 본인의 마음을 행복하게 충족시켜 줄 수 있는 많은 경험들을 이미 하고 있음에도 불구하고 이것들이 그가 바라는 것이 아니기 때문에 간과하는 것이다. 그는 오직 다른 사람들에 의해 마련된 목록들을 얻는 것에만 관심이 있다.

 복잡다다한 사회에서 여러 가지의 강력한 집단들이 서로 다른 목표들을 우리에게 주입시키려고 노력하고 있다. 한편에서는 학교 · 교회 · 은행등의 집단들이 우리들을 열심히 일하고 절약하는 사람들도 만들기 위해서 노력하고, 다른 한편에선 상인 · 제조업자 · 광고주들이 우리들의 소비를 부추기기 위해서 꼬드긴다. 심지어는 전문 도박꾼 · 포주 · 마약 밀매업자등에 의해서 움직이는 어둠의 세계조차도 우리가 돈만 내면 원하는 것을 다 해주겠다는 똑같은 메시지를 전하지 않던가. 각 집단마다 전하는 메시지의 내요은 약간씩 다르지만, 그 메시지에 복종한 결과는 동일하다. 그것은 우리를 목적 달성을 이루기 위한 도구로 만들어 결국에는 우리들이 그 사회의 시스템에 의존할 수밖에 없게 되는 것이다.

물론 현대와 같이 복잡한 사회에서 생존하기 위해서 외적인 목표를 달성하고 즉각적인 만족을 뒤로 미루는 것은 중요하다. 이것은 사회의 통제에 따라 좌지우지되는 꼭두각시가 되라는 말이 아니다. 정말로 중요한 것은 사회가 제공하는 보상으로부터 자유로워지고, 이를 위해서 어떻게 사회적 보상들을 우리가 통제할 수 있는 보상으로 대체하는가를 배우는 것이다. 사회에서 원하는 일들을 포기하라는 뜻이 아니다. 오히려 이 일들 이외에 우리 스스로의 목표를 만들라는 것이다.

 자신을 사회적 통제로부터 해방시키는 가장 중요한 방법은 무엇일까? 바로 순간 순간에 주어지는 보상을 발견하는 능력을 갖는 것이다. 만약 사람이 경험의 흐름에서 주어지는 의미를 발견하고 즐길 수 있다면, 그의 어깨를 무겁게 누르고 있는 사회적 통제로부터 벗어날 수 있을 것이다. 보상을 자기의 내면에서 찾을 수 있다면, 그 동안 사회에 맡겨 두었던 본인의 힘을 다시 찾을 수 있다. 이젠 더 이상 미래라는 허울 속에 숨어 버리는 목표를 달성하기 위해서 아옹다옹할 이유가 없다. 또한 언젠가는 좋은 일이 일어나겠지 위안하며 매일 따분한 하루를 보낼 필요도 없다. 손에 닿을 듯 말 듯한 목표를 위해서 영원히 노력하는 대신 삶이 주는 참 보상을 수확하기 시작한다.

 

 이런 상태는 우리 스스로를 원초적 욕망에 탐닉하게 함으로써, 그래서 사회의 통제로부터 벗어남으로써 얻어지는 것이 아니다. 우리는 몸이 원하는 것으로부터 독립적이 되어야 하며, 우리 마음속의 조인이 되어야 한다. 고통과 쾌락은 우리 마음에서 일어나며 그 안에서만 존재하는 것이다. 우리의 생물학적 욕구를 이용해 우리를 조절하는 이 사회의 자극-반응 양식에 순종하는 한, 우리는 외부의 힘에 의해서 통제될 뿐이다. 현란한 광고에 침을 흘리고, 직장 상사의 찡그린 얼굴이 우리의 하루를 망치도록 방치하는 한 우리는 스스로의 경험을 결정할 수 없다.

 우리가 경험하는 것이 현실을 만드는 것이다. 따라서 우리의 의식을 통제하고, 외부의 꼬임과 협박으로부터 우리를 자유롭게 함을로써 우리는 이 현실을 변화시킬 수 있다.

 

 로마 제국의 철학자 에픽테토스는 오래전에, "사물 자체가 무서운 것은 아니다. 우리가 어떻게 사물을 지각하는가, 단지 이것이 무서울 뿐이다"라고 했다.

 또한 아우렐리우스 황제도 다음과 같이 말하지 않았던가.

 "네가 외적인 일들로 인해서 마음 고생을 하고 있다면, 그것은 그 일들때문이 아니라 네가 그것들을 어떻게 평가하고 있는가에 의해서다. 그 평가와 판단을 한꺼번에 지워버릴 수 있는 것도 너의 손안에 달려 있다."

 

p55

 프로이트는 우리의 마음을 지배하기 위해서 날뛰는 두 개의 폭군이 있다고 지적했다. 그 하나는 유전자의 지배를 받는, 개인의 본능적 욕구인 이드(id)요, 다른 하나는 사회적 압력의 종인 초자아(superego)이다. 그리고 이들과 맞서는 것이 자신의 본질적 요구를 대변하는 자아(ego)이다.

 

p56

 우리의 의식에 해방을 가져다주는 현명함이라는 지식은 본질적으로 누적되는 것이 아니라는 데 그 첫 번째 이유가 있다. 이것은 공식화되지 못하며, 암기해서 단순하게 적용할 수 있는 것도 아니다. 현명한 정치적 판단, 세련된 미적 감각과 같은 전문적 영역처럼 의식을 해방시키는 방법도 숱한 시행착오를 거쳐서 값지게 얻어야만 하는 것이기 때문이다.

 의식을 통제한다는 것은 단순한 인지적 기술이 아니다. 지능과 비슷하다고 할까. 이것은 감정의 몰입과 의지를 필요로 한다. 이것은 앎이 아니라 행동을 통해서 얻어지는 것이다. 작곡가가 이론적으로 알고 있다고 해도 수많은 연습을 거쳐야 좋은 곳을 쓸 수 있는 것처럼 말이다. 물리학이나 유전공학처럼 가시적인 세계에서의 학문적 진보는 상대적으로 빠를 수 있다. 그러나 우리의 습관과 욕망을 변화시키기 위해서 지식이 활용되어야 하는 이 분야에서의 진보는 고통스러울 정도로 더디기만 하다.

 두 번째 원인은, 우리의 의식을 어떻게 통제할 것인가에 관한 지식은 문화와 시간에 따라서 달라진다는 것이다. 신비주의자, 요가나 선 수행자들의 지혜는 그 시대의 문제를 해결하는 데 최고의 방법이었기 때문에 형성되었을 것이다. 그러나 이들을 현대의 캘리포니아에 그대로 옮겨 놓는다면 그 신비한 힘은 효력을 제대로 발휘할 수 없을 것이다. 이 지혜들은 원래의 환경들과 어울리는 요인들을 반영했을 것이다. 그런데 이런 지엽적인 요인들을 본질적 요인들과 분리하여 받아들이지 못하고 제식적 요소만 빌려 온다면 옛 지혜들은 빈 껍데기에 불과할 것이다.

 의식을 통제하는 것은 제도화될 수 없다. 이것이 사회적 규범이나 제도의 한 부분이 되는 순간 더 이상 그 효력을 발휘할 수 없다. 그러나 불행하게도 이런 기계적인 관례화나 순서화는 곳곳에서 일어나고 있다. 자아(ego)를 억압하는 힘들로부터 해방하자는 프로이트의 노력은 이미 그가 살아 있을 때부터 하나의 고착된 이데올로기로 변화했다. 마르크스의 경우는 더 심하다. 경제적 착취로부터 우리의 의식을 해방하자는 그의 주장은 마르크스 자신도 섬뜩할 정도의 억압적인 사회 제도로 변질되지 않았던가. 또한 토스토예프스키를 비롯한 많은 사람들이 말했듯이, 만약 중세 시대에 예수가 자신이 설파했던 해방의 메시지를 전하기 위해서 다시 돌아왔다고 해도, 예수의 이름을 빌려 권력을 가지고 있던 세속적 종교 지도자는 다시 예수를 십자가로 못 박았을 것이다.

 

2장. 의식에 관해서 알아보기(The Anatomy of Consciousness)

 

p65

 외부의 사물은 우리가 인식하지 않으면 존재하지 않는다. 따라서 의식은 어찌 보면 주관적으로 경험한 현실을 말하는지도 모른다. 우리가 느끼고, 냄새 맡고, 듣고, 기억하는 모든 것들이 의식의 내용을 구성하는 후보들이 될 수는 있다. 그러나 이들 가운데 극히 일부분만이 우리의 의식을 구성한다. 따라서 의식은 - 우리의 신체 안팎에서 무엇이 일어났는가 하는 것을 말해 주는 감각 정보를 반영하는 거울과 같지만 - 선별적으로 반영하고 능동적으로 사건들을 구성하며 이들을 새로운 현실 세계로 인도하는 것이다. 의식을 통해서 반영되는 것이 우리의 삶인 것이다.

 

p67

 우리가 유전적으로 물려받거나 습득한 의도들은 위계를 가지고 있고, 이 위계에 따라서 우선 순위가 정해진다. 저항 운동을 하는 사람에게 정치적 변혁은 생명을 포함한 다른 어떤 것보다도 더욱 소중한 것이고, 이 목표는 다른 어떤 것들보다 우선인 것이다. 일반인들은 이에 비해서 좀더 현실적인 목표들을 가지고 있다. 그것들은 신체적인 욕구 충족을 위한 것(건강하게 장수하는 것, 섹스를 하는 것, 잘 먹고 평한하게 지내는 것 등)과 사회에 의해서 조건화된 것(모범생이 되는것, 열심히 일하는 것, 가능한 한 소비 생활을 많이 하는 것, 타인의 기대에 맞추어 사는 것 등)에 근거하고 있다. 그러나 세계 여러 문화권에서 이런 목표들을 추종하지 않는 예외적인 사례들은 얼마든지 찾아볼 수 있다. 사회적 규범을 초월하거나 일탈한 사람들(영웅 · 성자 · 현자 · 예술가 · 시인 · 광인 · 범죄자 등)은 일반인들과는 다른 삶의 목표를 갖는다. 이런 사람들의 존재는, 우리의 의식이 서로 상인한 목표와 의도들로 순서화될 수 있다는 증거로 볼 수 있다. 우리 모두는 우리 내면의 주관적 세계를 통제할 자유를 가지고 있다.

 

p76

 지금까지의 논의를 참을성 있게 따라와 준 독자라면, 이 시점에서 나의 얘기가 약간 순환론적이지 않는가 하는 생각이 들 수도 있다. 자아라는 것이 의식의 내용물과 목표들의 총합을 나타낸다고 정의하자. 그런데 의식의 내용물과 목표들은 주의에 의해 선택된 결과물이고, 이런 주의는 자아에 의해 통제된다고 한다면, 우리는 인과가 명확하지 않은 체 계속 순환하는 논리 체계를 갖게 된다. 한편으로는 자아는 주의를 통제한다고 말하고, 또 한편으로는 주의가 자아를 결정한다고 하니까 말이다. 그러나 사실상은 두 관점이 다 맞다. 의식은 직선적으로 움직이는 것이 아니고, 순환적 인과 관계가 성립하는 체계인 것이다. 주의는 자아를 형성해 가고, 자아는 주의에 의해 영향을 받는다.

 

p79

 물론 삶은 외적인 일들 - 예를 들어, 복권으로 대박을 터뜨리든지, 자기와 잘 어울리는 배우자를 얻는다든지, 사회 부조리를 개혁하는 데 동참한다든지 - 을 통해서 향상될 수 있다. 그러나 이러한 대단한 일들조차도 삶의 질에 영향을 주기 위해서는 우리의 의식 속에 그 자리를 마련해야 할 것이고, 우리의 자아와도 긍정적으로 관련을 맺고 있어야만 한다.

 

p87

 우리가 가능한 한 자주 플로우를 경험할 수 있도록 의식을 조절하면 삶의 질은 저절로 향상되게 마련이다. 리코나 팸의 경우처럼 직장의 따분한 일상도 목적이 있는 즐거운 경험으로 변화되기 때문이다. 플로우 상태에서 우리는 심리적 에너지를 통제할 수 있다. 그때에는 우리가 하는 어떤 일도 의식의 질서를 더하게 만든다.

 

p88

 플로우 경험을 하고 나면, 이전과 비교해서 우리는 더욱 복합적인 자아로 발전한다. 복합적인 자아가 됨으로써만이 성장할 수 있는 것이다. 복합성(complexity)이라는 것은 두 가지 심리적 과정을 거친 결과인데, 이 두 가지 과정은 각각 분화(differentiation)와 통합(integration)을 말한다. 분화라는 것은 자신의 유일하고 고유한 존재라는 생각으로 나아가려는 움직임이고, 또한 본인을 다른 사람으로부터 분리하는 방향으로 나아려는 경향을 말한다. 한편 통합이라는 것은 그 반대의 경우이다. 즉 다른 사람들이나 다른 아이디어들과 합하려는 경향을 말한다. 복합적 자아란 이러한 두 가지 경향을 성공적으로 결합시킨 자아를 일컫는다.

 

p90

 분화만 되고 통합이 이루어지지 못한 사람은 큰 개인적 성취를 이룰 수는 있을 것이다. 그렇지만 지나친 이기주의가 되기 쉽다. 반대로 통합만 이루어지고 분화가 되지 못한 자아는 다른 사람과의 관계 속에서 소속감과 안전감을 느낄 수는 있을 것이지만, 자율적인 개성은 갖지 못할 것이다. 오직 한 개인이 그의 심리적 에너지를 이 두 가지 과정을 위해서 균등하게 배분할 때에, 그 결과 지나치게 이기적이거나 순응적이지 않을 때 그의 자아는 복합성을 갖추게 된다.

 우리는 플로우를 경험함으로써 복합적인 자아를 갖게 된다. 역설적이게도, 다른 외적 목표를 위해서가 아니라 행위 자체를 즐길 때 우리의 삶이 향상될 가능성이 높아진다는 것이다. 하나의 목표를 수립하고 이를 위해서 최고의 집중력을 보일 때 우리가 무엇을 하든지 즐거움을 느낄 수 있다. 이런 즐거움을 맞보기 시작하면 다시 이를 경험하기 위해서 더 많은 노력을 할 것이고, 이런 과정의 순환을 통해서 우리의 자아는 성장한다.

 

3장. 즐거움을 통해 삶의 질 향상하기(Enjoyment and the Quality of Life)

 

p100

 쾌락은 주는 경험은 즐거움을 줄 수가 있다. 그러나 쾌락과 즐거움이라는 두 가지 정서는 같지 않다. 예를 들어서 맛있는 음식을 먹고 쾌락을 느낄 수 있다. 그러나 음식을 즐기는 것은 좀 다른 문제이다. 식도락가가 음식을 즐기기 위해서는 상당한 관심과 주의를 기울여야 한다. 이 말은 정신적 노력 없이도 쾌락을 느낄 수는 있지만, 즐거움이라는 것은 비범한 주의를 기울여야 느낄 수 있다는 것이다. 즉 사람들은 아무 노력 없이도 - 뇌의 특정 부위가 전기 자극을 받거나, 약물에 의한 화학적 작용을 통해서도 - 쾌락을 느낄 수가 있다는 것이다. 그러나 주의 집중을 하지 않으면 테니스나 독서 그리고 대화를 즐기기란 불가능한 일이다.

 쾌락이 매우 덧없으며 자아가 쾌락 경험에 의해 성장되지 않는 이유가 바로 이 때문이다. 복합성은, 새롭고 또한 상대적으로 도전적인 목표에 심리 에너지를 쏟는 것을 필요로 한다. 이러한 과정은 어린아이들에게서 쉽게 볼 수 있다. 태어난 후로 몇 년 동안 모든 아이들은 새로운 동작과 새로운 말을 매일 시도하는 작은 '학습 기계'가 된다. 아이들이 새로운 능력을 학습할 때 보여 주는 황홀한 표정은 즐거움이란 무엇인지를 우리에게 잘 말해 준다. 이런 즐거운 경험 하나하나가 더해져서 아이들의 자아를 복합적으로 발달시키는 것이다.

 불행하게도, 성장은 곧 즐거움이라는 연관성은 시간이 지나면서 사라지는 것 같다. 아마도 학교 교육을 받기 시작함과 동시에 '학습'이 외부의 요구에 대한 반응이 되어가면서 새로운 능력을 습득한다는 짜릿한 희열이 사라지기 때문일 것이다. 사춘기에는 자신만의 좁은 자아 속에서 안주하는 경향이 있다. 그러나 새로운 곳에 심리 에너지를 투자해 보았자 외적 보상이 주어지지 않는다면 쓸데없는 짓일 뿐이라고 생각하는 순간부터 우리는 더 이상 인생을 즐기지 못하게 될 것이다. 단지 쾌락만이 우리의 기분을 즐겁게 해주는 경험이 될 뿐이다.

 

p103

 즐거움이라는 현상은 여덟 가지의 주요 구성 요소를 갖고 있음을 발견하였다. 사람들이 가장 긍정적인 경험을 할 때 어떠한 느낌을 가졌는지에 대해 반추해 보면 그들은 다음 여덟 가지 요소들 가운데 적어도 한 가지는 언급을 한다물론, 여덟 가지 모두를 말하는 사람도 있다).

 첫째, 그 경험은 일반적으로 본인이 완성시킬 가능성이 있는 과제에 직면했을 때 일어난다.

 둘째, 본인이 하고 있는 행위에 집중할 수 있어야 한다.

 셋째와 넷째, 수행하는 과제에 대한 명확한 목표가 있어야 하고 즉각적인 피드백을 받을 수 있어야 한다.

 다섯째, 일상에 대한 걱정이나 좌절을 의식하지 않고 자연스럽고도 깊은 몰입 상태로 행동할 때이다.

 여섯째, 즐거운 경험은 사람들에게 본인의 행동에 대한 통제감을 느끼도록 해준다.

 일곱째, 자아에 대한 의식이 사라진다. 그러나 역설적으로 플로우 경험이 끝나면 자아감이 더욱 강해진다.

 마지막 여덟째, 시간의 개념이 왜곡된다. 즉 몇 시간이 몇 분인 것처럼 느껴지고, 몇 분이 몇 시간처럼 느껴지기도 한다. 이러한 모든 요소들의 결합이 즐거움을 불러일으키는데, 이것은 너무나 충만한 느낌이기 때문에 사람들은 이를 위해 많은 정력을 쏟을 가치가 있다고 생각한다.

 

 최적 경험의 훨씬 많은 경우가 목표 지향적이고 규칙에 의해 제약을 받는 활동에서 발생한다고 보고되었는데, 그 활동들은 심리 에너지를 요구하며 적절한 기술이 없이는 할 수 없는 것들이었다.

 

p106

 여러 면에서 경쟁은 복합성을 발달시켜 주는 지름길이다. 에드먼드 버크는 "우리와 대적하는 자는 우리의 정신을 강화시켜 주고 우리의 능력을 다듬어 준다. 적은 결국에는 나에게 큰 도움을 주는 자이다"라고 말했다. 경쟁할 때 생기는 도전 의식은 자극적이며 즐겁다. 그러나 상대를 이기려는 마음이 너무 앞서게 될 때 즐거움은 사라지는 경향이 있다. 경쟁은 그것이 자신의 기술을 완성하는 수단이 될 때에만 즐거운 것이다. 경쟁 자체가 목적이 된다면 그것은 더 이상 흥미로운 도전이 아니다.

 

p115

 목표가 명확하게 설정되어 있지 못하는 창의적 활동을 할 때, 사람들은 본인이 의도하는 바가 무엇인지에 대한 강한 개인적 감각을 발달시켜야 한다. 화가는 그림을 그리면서 어떻게 보일지에 대한 시각적 영상을 갖고 있지 않을 수도 있다. 그러나 그림을 어떤 시점에까지 그리게 되면 자기가 원했던 것인지 아닌지를 알아야 한다. 그리고 자기 일을 즐기는 화가는 '좋고, 나쁨'에 대하여 내면화된 기준을 가지고 있어야 한다. 그래서 붓이 가고 난 후 "그래, 바로 이거야. 아니, 이건 아니야"라고 말할 수 있어야 한다. 그러한 내적인 지침이 없다면 플로우를 경험하는 것은 불가능하다.

 

p117

 어떤 종류의 피드백일지라도 만일 그것이 심리 에너지를 쏟았던 목표와 논리적으로 연관이 된다면 즐거운 것이 될 수 있다. 만일 내가 콧등 위에 막대를 세우고자 하는 것이 목적이라면 고개를 뒤로 젖히고는 흔들거리는 막대를 보는 것도 잠시 동안은 즐거움이 될 수 있다. 그러나 우리 모두는 서로 다른 가치를 갖도록 학습되기 때문에 자기에게 중요한 가치를 주는 정보를 더 소중히 생각한다.

 

p118

 생활 속에서 날마다 우리는 의식에서 원하지 않는 강요된 사고와 근심의 포로가 된다. 일반적으로 대부분의 직업과 가정 생활은 잡념이나 불안이 자동적으로 배제될 만큼 집중력을 요구하지 않는다. 결과적으로 일상적인 마음의 상태는 원활한 심리 에너지를 간섭하는 엔트로피의 요소를 포함한다. 바로 이 점이 플로우가 경험의 질을 변환시키고 향상시키는 한 가지 이유이다. 행동에 대한 명확한 요구가 우리의 의식에 질서는 부여하고 무질서의 간섭은 배제하기 때문이다.

 

 p123

 위의 예들이 설명하는 바와 같이 사람들이 즐기는 것은 통제되는 상황속에 존재한다는 느낌이 아니라 어려운 상황에서 스스로 통제력을 발휘하고 있다는 느낌이다. 타성에 박힌 일과의 안전함을 포기하지 않고는 진정한 통제감을 경험할 수 없다. 결과의 성공 여부가 불확실하고 자시이 그러한 결과에 영향을 줄 수 있을 때만 진정 본인이 통제력을 발휘하고 있는지의 여부를 알 수 있는 것이다.

 

 p127

 자의식의 소멸은, 플로우 상에 있는 개인이 심리 에너지에 대한 통제를 포기한다거나 몸이나 마으메서 무엇이 발생하는가에 대한 인식하지 못하는 것을 의미하지 않는다. 사실 그 반대가 성립한다. 사람들이 처음에 플로우 경험을 배울 때 자의식의 결여는 편하게 흘러가는 것, 즉 그냥 자기를 망각해 버리는 것이라고 생각한다. 그러나 사실 최적 경험은 자아의 매우 적극적인 역할을 포함한다. 바이올린 연주자는 악보마다 분석적으로 그리고 전체적인 구상의 측면에서 전체적으로 연주하고 있는 작품의 모든 형식 및 귀에 들리는 음과 함께 손가락의 모든 움직임을 잘 인식해야만 한다. 훌륭한 육상 선수는 전체적인 경기의 전략에서 경쟁 선수의 성적뿐만 아니라 자신의 호흡 리듬, 신체의 모든 관련 근육을 알고 있다. 체스 선수가 그의 기억에서 이전의 위치, 과거의 조합을 마음대로 생각해 낼 수 없다면 경기를 즐길 수 없다.

 

p130

 플로우를 경험할 때 처음에는 자아감을 잃어버리지만 경험한 후에는 자아감이 더욱 충만해지는 것이 모순된 관계처럼 보이기도 한다. 자의식을 버리면 더 강력한 자아 개념을 구축하게 된다. 그 이유는 매우 명확하다. 플로우 상태에서는 최선을 다하도록 도전 받으며 끊임없이 자신의 능력을 향상시켜야 한다. 이런 상황에서 우리는 이러한 노력이 자아와 무슨 관계가 있는지를 성찰할 기회를 갖지 못한다. 자아에 대한 생각을 하는 순간 깊은 몰입에 들어갈 수 없기 때문이다. 그러나 플로우 경험이 끝다고 자의식이 생겨나면서부터 바라보는 자기 자신은 이미 과거의 자기가 아니다. 새로운 능력과 성취에 의해서 풍요로워진 자기를 느끼게 된다.

 

p133

 우리의 의지와 상관없이, 처음에 강요로 인해 시작된 것들 중에서 시간이 지남에 따라 내적인 보상을 받는 결과를 낳는 것도 있다. 몇 년 ㅈㄴ에 사무실에서 함께 일하던 내 친구는 대단한 재능을 가지고 있었다. 일이 지겨워지면 그는 반쯤 감은 눈으로 고개를 살짝 들고서는 음악 작품(바흐 합창곡, 모짜르트의 협주곡, 베토벤의 교향곡 등) 하나를 콧노래로 부르기 시작했다. 그러나 그것은 단순한 콧노래가 아니었다. 그는 특정 소절에 관여하는 주요 악기를 목소리로 흉내를 내며 전체 작품을 노래하였다. 그는 바이올린과 같이 애절한 소리를 내고, 바순처럼 저음을 내며, 바로크 트럼펫 소리까지 낼 수 있었다. 사무실의 동료들은 이 소리를 듣고 무아지경이 되어 생기를 얻고는 하였다. 궁금한 것은 그 친구가 이러한 재능을 개발한 방법이다. 세 살 때부터 그의 아버지는 그를 클래식 음악 콘서트에 데리고 다녔는데, 이것은 말할 수 없을 정도로 지겨웠다고 한다. 그는 자라면서 콘서트와 클래식 음악은 물론이고 아버지마저 싫어하게 되었다. 하지만 그는 이러한 고통스러운 경험을 계속해서 강요받았다. 그러던 일곱 살의 어느 날 모차르트의 오페라의 서곡이 시작되는 동안 그는 놀라운 통찰을 경험하였다. 그때까지 구별이 되지 않던 멜로디들이 선명히 구별되기 시작한 것이다. 그는 갑자기 자신 앞에 열려진 새로운 음악적 세계를 발견했다. 무의식적이든 아니든지 간에 모차르트 음악이 주는 도전을 이해하는 능력이 발견되기까지는 3년의 고통스러운 청취의 세월이 있었던 것이다.

 물론 그는 운이 좋았다. 많은 아이들은 그들이 강요된 활동을 꽃 피우기 전에 영원히 그 활동을 싫어하게 되기도 한다. 부모들이 악기를 연습하도록 강요하여 얼마나 많은 아이들이 클래식 음악을 싫어하게 되었는가? 아이들뿐만 아니라 어른들도 많은 주의가 필요한 활동에 첫 발을 딛기 위해서는 외부적인 동기가 필요하다. 대부분의 즐거운 활동은 자연스러운 것이 아니다. 이러한 활동은 처음에는 내키지 않는 노력을 요구한다. 그러나 일단 상호 작용이 개인의 능력에 대해 피드백을 제공하기 시작하면, 대개 이러한 활동은 냊거으로 보상을 주기 시작한다.

 

p135

 그러나 이미 통제감과 관련된 부분에서 살펴본 바와 같이 플로우와 잠재적인 중독성을 인식해야 한다. 우리는 이 세상의 어떠한 것도 완전히 긍정적인 것은 없다는 사실을 알아야 한다. 모든 힘은 오용될 수 있다. 사랑은 증오로 바뀔 수 있으며 과학을 파괴를 낳고 검증되지 않은 기술은 오염을 낳는다. 최적 경험은 한 형태의 에너지이며 에너지는 도움이 되거나 파괴를 낳을 수 있다. 불은 따뜻하게 만들 수도 있으며 집을 태워버릴 수도 있다. 원자 에너지는 전기를 발생할 수도 있지만 세계를 완전히 날려 버릴 수도 있다. 에너지는 힘이지만 단순한 수단에 불과하다. 에너지가 적용되는 목표는 삶을 풍부하게 할 수도 있으며 고통스럽게 할 수도 있다.

 

 베느탐이나 여러 전쟁터의 참전 용사들은 전선에서 활동을 플로우 경험으로 설명하며, 그에 대한 향수를 가지고 있다. 로켓 발사대 옆의 참호에 앉아 있으면 삶은 매우 명확하게 집중된다. 목적은 적이 나를 죽이기 전에 적을 내가 먹저 죽이는 것이다. 선악은 자명하다. 통제의 수단은 손 안에 있다. 혼란은 없어진다. 전쟁을 싫어한다 해도 전투 경험은 보통의 생활 속에서 접하는 어떠한 것보다도 즐거운 일일 수 있다.

 범죄자들은 종종 다음과 같이 말한다.

 "한밤중에 남의 집에 들어가서 주인을 깨우지 않고 보석을 들고 나오는 것보다 더 재미있는 것을 보여 주기만 한다면 당장 그것을 하겠다."

 청소년 비행이라고 일컫는 대부분의 것(자동차 절도 · 파괴 행위 · 일상의 난폭한 행동)은 일상 생활에서 얻을 수 없는 플로우 경험을 하고자 하는 필요성에 의해 동기화된다. 사회에서 의미 있는 도전에 대면할 수 있는 기회를 제공하지 못하고 또 그러한 도전을 즐길 수 있는 능력을 개발할 기회를 제공하지 못하는 한, 우리는 폭력과 범죄가 사람들을 유혹한다는 사실을 예상해야 한다.

 

p137

 "자유의 대가는 영원한 경계심이다"라는 제퍼슨의 격언은 정치 이외의 분야에도 적용된다. 이는 우리의 습관과 과거의 지식들이 새로운 가능성을 간과하지 않도록 우리가 하고 있는 일을 재평가해야 한다는 것을 의미한다.

 

4장. 플로우의 조건들 알아보기(The Conditions of Flow)

 

p148

 플로우 활동이 성장과 발견을 이끌어 내는 이유는 바로 이 역동적인 특성에 있다. 어느 누구도 같은 수준에서 같은 일을 장기간 할 때 즐거움을 느끼지 않는다. 싫증을 느끼거나 좌절하게 되고, 이후 다시 즐거움을 찾고 싶은 바람에서 자기 기술을 향상시키거나 혹은 그 기술을 사용할 새로운 기회를 발견하려는 행위를 취하려 하기 때문이다.

 

p150

 이른바 '종교'라 불리는 것들은 의식의 질서를 이루려는 가장 오래된 야심찬 시도이기 때문이다. 이러한 면에서 종교 의식은 심오한 즐거움의 원천이라고까지 말할 수 있다.

 오늘날의 미술 · 연국 그리고 일반적인 삶에서 초자연적인 의미는 퇴색되어 버렸다. 과거 인류 역사에서 세상을 이해하고 의미 있게 해주었던 우주 질서는 서로 무관한 단편들로 부서지고 말았다. 대신 인간의 행동 방식을 설명하기 위한 수많은 이데올로기가 등장하고 서로 경쟁을 하고 있다. 공급 · 수용의 법칙과 '보이지 않는 손'의 논리는 우리의 이성적 경제 선택에 대해 설명하고자 한다. 역사적 유물론의 바탕이 되는 '계급 갈등의 법칙'은 인간의 비이성적 정치 행동을 설명하였고, 사회생물학의 기초가 되는 유전적 경쟁 이론은 왜 인간이 어떤 사람들은 도와주고 어떤 사람들은 배척하려는지에 대해 설명해 준다. 심리학의 행동주의 이론은 우리가 인식하지 못한 상태에서도 쾌락 행동을 반복하게 되는 이유를 설명해 준다. 이러한 이론들은 사회과학에 근간을 둔 현대판 '종교'라고 할 수 있다. 그러나 이것들 가운데 어느 하나라도 우주의 질서를 설명했던 과거의 모델만큼 미적인 비전이나 또는 양질의 즐거움을 제공하지는 못하고 있다. 

 

p157

 문화란 우연적이고 임의적인 요인들이 우리 경험에 미칠 영향을 최소화하기 위해 설계된 방어 기제이다. 

 

 문화가 일련의 목표와 규칙을 발전시키는 데 성공하여 사람들이 갖고 있는 기술과 조화를 잘 이루고 그 결과로 구성원들이 보통 이상의 빈도와 강도로 플로우 경험을 하게 되면, 게임과 문화의 유사점은 한층 더 커진다. 이러한 경우에, 전체적으로 문화가 '굉장한 게임'이 된다고 말할 수 있다. 아마도 몇몇 고전 문명은 이러한 상태에서 성공적으로 도달했을 것이다. 아테네 시민들 · 강인함(virtus)을 통해서 행동을 표현했던 로마인들 · 중국의 지식인들 · 인도의(사제,승려 계급이자 최고 계급인) 브라만은, 춤을 통해서 얻는 희열과 같은 즐거움을 다양한 도전을 극복해 가며 경험했을 것이다. 아테네의 폴리스 · 로마의 법률 · 신권(神權)에 토대를 둔 중국의 관료주의 그리고 모든 것을 감싸 안는 인도의 영적 질서는 어떻게 문화가 플로우 경험을 촉진시키는지에 대해서 보여주는 성공적인 사례라고 할 수 있다. 물론 그 사회의 주류를 형성하고 있었던 운 좋은 사람들에게 해당되는 것이지만 말이다.

 

 플로우를 높이는 문화가 도덕적 의미에서 반드시 선한 것은 아니다. 스파르타의 규칙은, 그 당시의 사회 구성원을 동기화시키는 데는 누가 보아도 성공적이었지만, 20세기 관점에서 볼 때는 잔인한 것이다. 유목민인 타타르 족이나 터키의 친위 보병이 전투와 학살을 통해서 쾌락을 얻었다는 것은 전설적인 예다. 1920년대의 혼란스러운 경제와 문화 충격에 당황했던 많은 유럽인들에게 나치 정권과 파시즘 이데올로기는 매력적인 게임의 계획을 제시해 주었다. 즉 단순한 목표들을 제시하였고, 그에 대한 피드백을 명료하게 주었다. 사람들이 다시 새롭게 삷에 몰두하도록 한 것이다. 결국 많은 사람들은 이전의 불안과 절망으로부터 벗어났다고 생각했다.

 

p163

 '과도한 자의식' 역시 플로우 경험을 방해하는 또 하나의 장애 요인이다. 다른 사람이 자신을 어떻게 인식하는지에 대해 끊임없이 걱정하며, 나쁜 인상을 주지는 않을까 혹은 남이 못마땅해 할 일을 하지나 않을까 두려워하는 사람은 진정한 즐거움을 영원히 경험하지 못한다. 지나치게 자기 중심적인 사람들도 마찬가지다. 자기 중심적인 사람은 보통 자기 의식적이지는 않지만, 대신에 무엇이든 사소한 것조차도 그것이 자신의 바람과 얼마나 일치되는가를 따져서 평가한다. 그러한 사람에게는 뭐든지 그 자체로는 가치도 없다고 본다. 자신의 흥미를 끌지 않는 여자나 남자에게는 더 관심을 가질 필요도 없다고 생각한다. 완전히 자신의 목적에 맞추어 자의식이 구조화되어 있으며, 그러한 목적에 부합하지 않는 어떠한 것도 의식 안에 담아두지 않는 것이다.

 자의식적인 사람들은 많은 점에서 자기 중심적인 사람들과는 다르다. 그렇지만 심리적 에너지를 충분히 통제하지 못하여 결국에는 쉽게 플로우 경험을 하지 못하는 점은 똑같다. 두 유형의 사람들 모두에게는 활동 자체를 위하여 요구되는 주의의 융통성이 부족하다. 너무 많은 심리적 에너지를 자기를 위해서 쏟고, 주의를 두는 것 역시도 자아의 욕구에 의해 엄격하게 제한된다. 이러한 조건에 있는 사람들이 상호 작용 그 자체 말고는 어떤 보상도 따르지 않는 자기 목적적 활동에 몰입한다는 것은 어려운 일이다.

 

p165

 사회 병리 상태를 기술하는 두 가지 용어, 즉 '사회적 무질서(anomie)'와 '소외'는 플로우 경험을 어렵게 하는 조건이기도 하다. 먼저 사회적 무질서란 말 그대로 '규칙의 결여'를 의미하는 것으로, 프랑스의 사회학자 뒤르켐이 행동의 규준이 혼란했던 사회 상태를 지칭했던 용어이다. 무엇이 허용되며 허용되지 않는지 더 이상 분명하지 않을 때, 대중의 의견 중 어떤 것이 가치로운지 불확실할 때, 행동은 엉뚱해지고 무의미해진다. 의식의 질서를 유지하기 위해서 사회의 질서에 의존하는 사람들은 불안해지기 시작한다. 무질서 상태는 경제가 붕괴되거나 혹은 한 문화가 다른 문화에 의해서 파괴될 때 일어날 수 있다. 또한 경제나 너무 급속하게 발전할 때나 절약과 근면이라는 가치가 더 이상 예전만큼 의미가 없을 때에도 일어날 수 있다.

 소외는 여러 가지 면에서 무질서 상태와 반대로 해석된다. 즉 소외란, 사람들이 사회 체계에 의해 제한을 받기 때문에 자신의 목표와 부합하지 않는 방식으로 행동하는 상태를 일컫는다. 식구들을 먹여 살리기 위해서 작업장의 조립 라인에서 무의미하고 똑같은 과제를 수백 번씩 반복해야 하는 노동자는 소외를 겪을 수 있다. 사회주의 국가에서 소외를 일으키는 가장 짜증나는 일은, 불가피하게도 여가 시간의 상당 부분을 음식과 옷을 사기 위해서, 공연을 보기 위해서 또는 끝없이 복잡한 허가 절차를 밟기 위해서 줄을 서는 데 써야 한다는 것이다. 사회가 무질서 상태에 있을 때에는, 어떤 것에 심리적 에너지를 쏟는 것이 가치로운지 명료하지 않기 때문에 플로우 경험이 힘들다. 반면에 이와 같은 사회에서 소외가 일어날 때의 문제는, 분명히 바람직한 것이 있는 줄 알면서도 심리적 에너지를 투입할 수 없다는 것이다.

 지금까지 플로우를 방해하는 두 가지 사회적 요인(사회적 무질서와 소외)을 살펴보았다. 그런데 이 두 가지의 사회적 방해 요인은 두 가지의 개인적 병리(주의력 결핍과 자기 중심성)와 기능적으로 동질적인 것이다. 개인과 집단이라는 두 수준에서 플로우 경험을 방해하는 것은, 사회적 무질서와 주의력 장애에서처럼 주의 과정의 분열로 인해서, 또 소외와 자기 중심성에서 볼 수 있는 거서럼 지나친 경직으로 인해서 문제가 된다. 개인적 수준에서 볼 때 무질서는 불안과 일치하는 것이며, 소외는 지루함에 대응되는 것이다.

 

p167

 의식에서 실제에 대한 표상을 하기 위해 많은 외부의 정보를 필요로 하는 사람들은 자신의 정신을 사용하기 위해서 외적인 환경에 더 의존한다. 그들은 자신의 사고에 대한 통제력이 적어지고 결국 이는 그들의 경험을 즐기는 것을 더 어렵게 만든다. 대조적으로, 의식에서 사건들을 표상하기 위해서 단지 소수의 외적 단서를 필요로 하는 사람들은 환경의 영향으로부터 좀더 자유로울 수 있다. 자신의 주의력을 융통성 있게 활용할 수 있기 때문에 외적 경험을 머릿속에 표현하는 것이 쉽고, 그 결과 더욱 자주 최적 경험에 도달하게 된다.

 

p169

많은 연구에 따르면, 부모와 자식의 상호 작용 형태는 아이가 성장해서 어떤 유형의 사람이 되는가에 지속적인 영향을 미친다. 시카고 대학에서 라순디 박사가 실시한 연구를 예로 들어보자. 이 연구에 따르면, 자기 부모와 특정한 유형의 관계를 형성한 10대들이 그렇지 못한 또래보다 대부분의 일상에서 더 행복해하고, 만족하고, 의지가 강한 경향이 있다고 한다. 

 최적 경험을 유발하는 특정 가정 환경 유형의 특징을 다음 다섯 가지로 정리해 볼 수 있다.

 첫 번째는 명료성이다. 아이들은 부모가 자신들로부터 무엇을 기대하는지를 명료하게 알고 있다고 생각한다. 또한 가족의 상호 작용에서 목표와 피드백이 명확하다.

 두 번째는 중심성이다. 즉 이것은 부모가 자녀들이 좋은 대학이나 좋은 직장에 들어가는 것에 관심을 갖기보다는, 지금 현재 자녀들이 하고 있는 일의 구체적인 경험과 감정에 관심을 갖고 있다고 믿는 자녀의 지각이다.

 세 번째로는 선택성이다. 아이들은 무엇을 선택해야 할지에 대해서 그 선택의 결과를 책임질 수 있다면 부모가 세운 규칙도 깰 수도 있다고 생각하며, 다양한 가능성을 갖고 있다고 생각한다.

 네 번째의 특징은 자녀가 부모의 보호 아래 충분히 편안함을 느껴 자기가 관심 있는 어떤 것이든 간에 참여할 수 있도록 하는 부모의 신뢰성이다.

 그리고 마지막은 도전성인데, 이는 자녀들에게 점차 복합적인 행동의 기회를 제공하는 부모의 헌신을 말한다.

 이러한 다섯 가지의 조건은 삶을 즐길 수 있는 이상적인 연습의 기회를 주기 때문에 '자기 목적적 가정 환경'으로 일컬어진다. 분명히 다섯 가지 특징은 플로우 경험의 차원과도 매우 비슷하다. 목표와 피드백의 명료한 제시, 통제감, 당면한 과제에 대한 집중, 내적 동기화 및 도전 의식을 독려하는 가정 환경에서 성장한 아이들은 일반적으로 그렇지 않은 환경의 아이들과 비교해 볼 때, 플로우를 경험할 수 있는 더 나은 기회를 갖는다.

 

 자기 목적적이 아닌 가정의 아이들은 많은 에너지를 끊임없는 협상과 다툼에 소진한다. 아이들은 자기가 아닌 다른 사람들의 목표에 의해서 압도되지 않기 위해, 또한 자신의 연약한 자아를 보호하기 위해 이러한 심리적 에너지를 써 버리는 것이다.

 

 연구에 따르면, 자기 목적적 환경의 아이들은 그렇지 않은 아이보다 더 행복하고, 강하고, 명랑하고, 만족스러워했다. 이 차이는 아이가 혼자서 공부할 때나, 학교에서 공부할 때도 나타났다. 여기서도 중요한 것은, 자기 목적적 가정에서 성장한 아이들이 한층 더 쉽게 플로우 경험을 한다는 사실이다. 하지만 더 중요한 사실이 있다. 아이들이 친구와 함께 있을 때, 자기 목적적 환경의 청소년과 그렇지 않은 아이들 사이에 차이는 없다는 것이다. 즉 가정이 자기 목적적인지의 여부에 상관없이 아이들은 친구와 함께 있을 때 긍정적인 정서를 경험한다.

 

p177

 세상에 대한 관심, 즉 적극적으로 세상과 관계를 맺으려는 욕망이 없다면 사람은 스스로 고립된다. 20세기 가장 위대한 철학자 중 한 명인 버트란트 러셀은 개인적 행복을 성취하는 방법을 다음과 같이 말했다.

 "점점 나는 내 자신과 나의 결점들에 대해 무관심해지는 법을 배웠다. 점차 내 주의의 중심은 외부의 대상, 즉 만물의 상태, 다양한 지식의 영역, 내가 애정을 느끼는 개인들에게 맞추어졌다."

 그는 이처럼, 자기 목적적인 성격을 어떻게 형성할 수 있는지를 짧지만 적절하게 설명해 주었다.

 부분적으로 그러한 성격은 생물학적 유전과 초기의 양육을 통해 얻어진 것이다. 즉 어떤 사람은 신경학적으로 좀더 집중을 잘하고 융통성 있는 능력을 타고났거나, 또 어떤 사람은 운이 좋게도 비자의식적 개인주의를 함양시켜 준 부모가 있었을 것이다. 그러나 이러한 성격은 훈련과 훈육을 통하여 완전하게 숙달할 수 있는 기술, 즉 계발 가능성이 있는 능력이다.

 

p188

 연구 결과, 사람들이 값비싼 물질적 자원이 필요한 여가 활동(값비싼 장비가 있어야 하거나, 자동차 운전 또는 TV 시청처럼 석유나 전기 등의 에너지를 필요로 하는 활동)을 할 때 비용이 많이 들지 않는 여가 활동 때보다 그 즐거움이 훨씬 감소한다는 결론을 얻었다. 사람들이 가장 행복하게 느낄 때는 그저 서로 담소를 나눌 때, 정원을 손질할 때, 뜨개질을 할 때 혹은 여타의 취미 생활을 즐길 때였다. 이와 같은 활동들은 외적 자원이 거의 들지 않지만 상대적으로 고도의 심리적 에너지를 집중해야 하는 일들이다. 반면, 외적 자원을 필요로 하는 여가 활동에는 상대적으로 주의를 덜 집중하기 때문에 기억할 만한 추억이 줄어드는 것이다.

 

p196

 인도 사람들은 고도의 자기 통제 기술에 지나치게 매료된 나머지 자연 환경의 물리적 도전에 대처하는 법을 배우지 못하였다. 그리하여 대다수 국민들 사이에 무력감과 무관심이 팽배해졌고, 결국은 자원의 빈약과 인구 과잉으로 인한 좌절을 맛보아야 했다. 반면에, 물질적 에너지 사용의 극대화를 꾀한 서양은 가능한 모든 자원을 개발하고 급속도로 소모해 왔기 때문에 환경의 고갈을 초래하였다. 정신 세계와 물질 세계의 저화로운 균형을 이루는 사회야말로 완벽한 사회라 할 것이다.

 

 산스크리트어로 요가는 '함께 있게 함'을 의미하는데, 이는 사람과 신을 일체가 되도록 하는 요가의 목적을 나타내는 것이다. 즉, 먼저 신체의 각 부분이 서로 하나가 되도록 하고, 그렇게 하나가 된 육체와 의식이 함께 질서를 찾아나가는 것이다. 약 1,500년 전에 파탄잘리에 의해 집대성 된 요가의 교본에는 이러한 목표에 이르는 여덟 단계가 제시되어 있는데, 각 단계로 올라갈수록 난이도는 점차 증가한다. 윤리적 준비를 하는 처음 두 단계는 각 개인의 태도를 변화시키고자 하는 것이다. 이 단계는 의식을 정리하는 단계라고 말할 수 있다. 즉 정신을 직접적으로 통제하려는 노력을 시도하기 전에 우선 심리적 엔트로피를 최대한 줄이고자 하는 것이다.

 이를 실천하기 위한, 첫 단계인 야마(yama)에서는 거짓말 · 도벽 · 욕망 · 탐욕 등 타인에게 해를 끼칠지도 모르는 생각과 행동을 자제하라고 한다.

 두 번째 단계는 순종을 의미하는 니야마(niyama)이다. 이는 곧 청결과 수련 그리고 신에 대한 순종을 질서 정연한 일과를 따름으로써 예측 가능한 형태로 만들고, 이 과정을 통해서 주의를 통제하기 쉽게 만드는 것이다. 

 그 다음의 두 단계는 육체적 준비를 하는 단계로, 요기라고 불리는 수행자들이 감각의 유혹을 이겨내고, 지치거나 사념에 얽매이지 않고 집중할 수 있게 해주는 습관을 기르는 단계이다.

 세 번째 단계에서는 아사나(asana)라고 하는 다양한 '좌자세'나, 동일한 자세를 오랜 시간 동안 긴장이나 피로에 굴하지 않고 유지하는 것이다. 우리는 천을 두르고 머리를 땅에 대면서 발은 목뒤로 접은 채 꺼꾸로 서 있는 사람을 본 적이 있을 것이다. 바로 이것이 서양에 알려진 익숙한 요가 형태, 즉 아사나이다.

 네 번째는 프라나야마(pranayama), 즉 호흡법으로서 신체의 긴장을 완화하고 호흡의 리듬을 안정시키는 것이 목적이다.

 다섯 번째 단계는 지금까지의 준비 운동과 본격적 요가 수행의 연결 단계로 프라트야하라(pratyahara)라고 한다. 이것은 감각 정보 입력을 통제함으로써 외부 물체로부터 주의를 끊고 궁극적으로는 본인이 의식으로 받아들이고 싶은 것만 보고, 듣고, 느낄 수 있도록 하는 단계를 말한다. 지금까지 살펴본 단계들을 보면, 이번 장에서 설명하는 플로우 활동의 목적, 즉 의식 세계의 통제와 요가의 목적이 얼마나 유사한지를 알 수 있다.

 나머지 세 단게는 지금 우리의 주제와 일치하지는 않지만 - 왜냐하면 나머지 단계에서는 육체적 기술보다는 순수한 정신 작용을 통한 의식의 통제를 다루고 있기 때문이다 - 여기서 맥락을 유지하기 위해, 또 결국에는 이런 정신적 수행이 이에 앞서 행해지는 육체적 수행에 전적으로 바탕을 두고 있기 때문에 계속 설명하기로 한다. 다라나(dharana)는 오랜 기간 동안 단일한 자극 하나에만 집중하는 것으로, 앞 단계인 프라트야하라와 일맥 상통한다고 볼 수 있다. 즉 우선 사물을 의식 밖으로 내보내는 것을 배우고, 그 다음 그것을 의식에 다시 넣는 법을 배우게 되는 것이다. 고도의 명상을 수행하는 드야나(dhyana)가 일곱 번째 단계이다. 이 단계에서는 어떤 것으로부터도 방해 받지 않고, 앞 단계에서와 같은 단일 자극도 필요치 않은 집중 상태에서 자신을 잊는 법을 배우게 된다. 최종적으로 수행자는, 명상하는 사람과 명상의 대상이 하나가 되는 상태인 사마디(samadhi)를 성취하게 된다. 사마디를 성취한 사람들은 이를 그들 생애에서 최고로 행복한 경험으로 묘사한다.

 

p199

 요가와 플로우의 유사성을 뒷받침해 주는 또 다른 점은 해방에 이르는 마지막 단계까지도 수행자가 계속해서 의식을 통제해야 한다는 것이다. 의식의 통제 없이는 자아를 버릴 수 없으며, 자아를 버리는 그 순간조차 의식의 완전한 통제가 있어야 가능하기 때문이다. 본능과 습관 그리고 욕망이 있는 자아를 포기한다는 것은 자연스럽게 이루어지는 일이 아니다. 고도로 자신을 통제하는 사람만이 해낼 수 있는 일이다. 그러므로 요가야말로 가장 오래되고 가장 체계저그로 플로우 경험을 낳는 방법 중의 하나라고 해도 과언이 아니다.

 

p205

  음악은 조직화된 청각적 정보라고 할 수 있다. 음악은 듣는 사람의 마음을 정리해 줌으로써, 심리적 엔트로피 - 즉 관련 없는 정보들이 우리가 목표에 집중하는 것을 방해할 때 경험하게 되는 무질서 - 를 감소시켜 준다. 음악을 들으면 지루함이나 근심 걱정을 떨쳐 버릴 수 있고, 진지하게 감상할 때는 플로우를 경험할 수 있게 된다.

 어떤 이는 기술의 발달로 음악을 언제 어디서나 손쉽게 접할 수 있게 됨으로써 삶의 질이 상당히 향상됐다고 주장할는지도 모른다. 라디오 · 테이프 · CD · 레이저 디스크 등을 통해 선명하게 녹음된 최신 곡들을 하루 종일 들을 수 있게 되었기 때문이다. 이처럼 계속해서 음악을 들을 수 있다는 사실이 우리 삶을 더욱 풍족하게 만들어 주어야 이론에 들어맞는다. 그러나 이런 주장은 흔히 행동과 경험을 혼동하는 데서 나오는 것이다. 녹음된 곡을 며칠이고 계속해서 듣는 것이 몇 주일 동안 고대하던 콘서트에서 단 한 시간 음악을 듣는 것보다 더 즐거울 수도 있고, 그렇지 못할 수도 있다. 삶의 질을 향상시켜 주는 것은 음악이 귀에 항상 가깝게 있다는 사실이 아니고, 우리가 주의를 집중해서 귀를 열고 들을 때만이다. 예컨대 식당이나 가게에서 나오는 배경 음악을 들을 때 그것을 귀기울여 듣는 사람은 거의 없으며, 따라서 그로 인해 플로우를 경험하기는 극히 어려운 것이다.

 다른 것과 마찬가지로 음악도 즐기기 위해서는 주의를 기울여야 한다. 현대인들은 녹음 기술의 발달로 음악을 듣기가 너무 편리해진 나머지 그것을 당연한 것으로 여기게 되었다. 그러나 음악을 통해 즐거움을 얻을 수 있는 우리의 능력도 그만큼 감소될 수 있는 것이다. 녹음 기술이 발명되기 이전에는, 종교 의식에 완전히 통합되어 있던 시절의 음악이 자아내는 것과 같은 경외감을 라이브 음악 공연을 통해 얻을 수 있었다. 교향악단은 물론이요, 마을의 무도회 반주 그룹까지도 이와 같은 조화로운 소리를 만들어 내는 신비한 기술을 잘 보여 주는 좋은 예가 되었다. 당시에는, 한 번의 공연이 유일무이한 것이며 다시 되풀이될 수 없다는 것을 잘 알았기에 사람들이 이런 행사에 거는 기대가 매우 높았던 것이다.

 오늘날 록 콘서트와 같은 라이브 공연의 관객들도 어느 정도는 이와 같은 의식적 행위에 참가하는 것이라고 볼 수 있다. 이러한 경우 말고는 이처럼 많은 사람들이 모여 같은 행사를 보고, 같은 것을 생각하고 느끼며, 동일한 정보를 처리하게 되는 예가 극히 드물기 때문이다. 이와 같이 집단으로 행사에 함께 참여하는 관중들은 뒤르켐이 명명한 '집단적 흥분'을 경험하게 되는데, 이는 어떤 집단에 확고히 소속되어 있다는 존재 의식을 느끼게 되는 것을 말한다. 뒤르켐은 이러한 느낌이야말로 근원적인 종교적 경험이라고 생각했다. 이처럼 라이브 공연은 듣는 이로 하여금 음악에 집중할 수 있는 여건을 만들어 주기 때문에 재생된 음악을 들을 때보다 공연장에서 플로우를 경험할 가능성이 더 높아지는 것이다.

 라이브 연주가 녹음된 음악보다도 원래 더 즐거운 것이라고 주장하는 것은 그와 반대의 경우를 주장하는 것과 마찬가지로 타당성이 희박하다. 듣는 이가 진지한 자세만 갖춘다면 어떤 음악도 즐거움을 줄 수 있다. 사실상, 야쿠이 족의 마술사가 인류학자 카를로스 카스타네다에게 가르쳐 준 바와 같이, 음과 음 사이의 정적까지도 면밀히 들으면 즐거운 것이 될 수 있다.

 많은 사람들이 희귀 음반까지 탐내면서 많은 음악을 수집해 두고 있지만, 그것을 실지로 즐기지는 않는다. 몇 번 음악을 들으면서 음향 시설이 내는 선명한 음에 감탄하고서는, 더 좋은 음향 기기가 나와 그것을 새로 구입할 때까지 잊어버리고 다시는 음악을 듣지 않는다. 이와는 반대로, 음악에 내재한 기쁨의 잠재성을 최대로 살리는 사람들은 그들의 경험을 플로우로 변화시킬 수 있는 나름대로의 방법을 알고 있다. 그들은 우선 일정한 시간을 음악 감상에 할애한다. 그 시간이 되면 불을 끄거나,  제일 좋아하는 의자에 앉거나, 혹은 주의를 집중할 수 있는 자신들만의 어떤 방법을 통해 집중도를 높인다. 그들은 감상할 음악을 미리 신중히 선곡하며, 감상 시간에 맞는 구체적 목표를 설정해 둔다.

 음악 감상은 처음에는 감각적 경험 단계에서 출발한다. 이 단계에서는, 우리 신경계에 유전적으로 내재되어 있는 유쾌한 육체적 반응을 유발시키는 음색에 반응을 보인다. 우리는 전 세계적으로 사랑받는 그런 특정 가락이나, 플루트의 애조를 띤 호소, 또는 활달한 트럼펫의 곡조에 반응을 나타낸다. 우리는 특히 드럼이나 베이스의 리듬에 민감하게 반응을 하는데, 이런 리듬이 록 음악의 기초가 되는 것이며, 누군가는 이와 같은 리듬이 어머니의 자궁 속에서 처음으로 듣게 되는 어머니의 심장 소리를 상기시켜 준다고 하기도 한다.

 다음 단계는 유추적 감상 단게이다. 이 단계에서는 음의 양식에 따라 감정과 이미지를 떠올리는 기술을 갖추게 된다. 음울한 색소폰의 악절은 대평원 상공에서 먹구름이 몰려드는 것을 바라볼 때 느꼈던 경외감을 상기시켜 준다. 또 차이코프스키의 곡은 눈이 가득 덮인 숲 속에서 종을 딸랑거리며 썰매를 달리는 광경을 눈으로 보는 듯하게 해주기도 한다. 대중 가요도 물론 그 노래가 어떤 분위기와 어떤 이야기를 나타내는 곡인가를 가사로 명확히 알게 해줌으로써, 이와 같은 유추적 감상법을 최대로 활용한다고 하겠다.

 음악 감상의 가장 복합적인 단계는 분석적 감상 단계이다. 이 단계에서는 음의 감각적 혹은 서사적 측면보다는 음악의 구조적인 요소에 관심을 기울이게 된다. 감상 기술이 이와 같은 수준이 되면, 그 작품 저변의 양식 및 그와 같은 화성을 이루어 낸 방법을 인식하는 능력을 갖게 된다. 이러한 수준의 감상 기술을 익히게 되면, 각 공연마다 상이한 음향의 질을 비교 평가할 수 있으며, 공연 작품을 그 작곡가의 초기 및 후기 작품과 비교하기도 하고, 동시대의 다른 작가가 만든 작품과도 비교할 수 있다. 또한 같은 관현악단, 지휘자, 악단의 초기 공연과 후기 공연을 비교해 보거나, 다른 악단과 지휘자는 같은 작품을 어떻게 해석했는지를 비교해 볼 수도 있다.

 이처럼 분석적 감상 능력을 가진 사람들은 같은 블루스 곡을 다양하게 변화시킨 편곡 작품들을 서로 비교하기도 하고, "카라얀이 1975년에 지휘한 제7번 교향곡 제2악장이 1963년 공연 당시와 어떻게 다른가 한번 볼까?"라든지, "시카고 교향악단의 금관악기부가 베를린 교향악단보다 정말 더 나은가?"라는 생각들을 염두에 두고 감상을 하기도 한다. 그와 같은 목표를 설정해 놓았기 때문에 듣는다는 직업은 하나의 적극적인 경험이 되는 것이다. 그리고 이러한 경험을 통해, "카라얀이 빠르기를좀 늦추었네"라든지, "베를린 교향악단의 관현악부의 소리는 더 선명하지만 부드러운 맛이 좀 적군"등과 같은 계속적인 피드백을 얻는다. 이와 같은 분석적인 감상 기술을 익혀나가게 되면 음악을 즐길 수 있는 기회가 기하급수적으로 증가한다.

 

p215

 반드시 억제한다고 해서 덕이 되는 것은 아니다. 두려움 때문에 스스로를 억제하는 삶은 필연적으로 위축되게 마련이다. 그러한 사람들은 방어적이고 완고해지고, 자아가 더 이상 성장하지 않는다. 오직 자율적으로 선택한 규율을 통해서만, 인생을 즐기면서도 이성의 한도를 벗어나지 않을 수 있다. 만일 어쩔 수 없어서가 아니라 스스로 원하기 때문에 자신의 본능적 욕망을 조절할 수 있다면, 중독되지 않고도 즐거움을 누릴 수 있다. 음식에 광적으로 집착하는 사람은 맛있는 음식을 거부하는 금욕주의자처럼 스스로에게나 다른 이에게 권태감을 준다. 이러한 양극단 사이에서 삶의 질을 향상시킬 수 있는 여지는 얼마든지 있다.

 

6장. 지적 활동을 통해 플로우 찾기(The Flow of Thought)

p221

 운동 선수들은 어느 한계 이상으로 그들의 성적을 향상시키려면, 먼저 정신을 가다듬는 법부터 익혀야 한다는 사실을 너무도 잘 알고 있다. 그렇게 함으로써 그들이 얻게 되는 내적 보상은 좋은 컨디션뿐만이 아니라 개인적 성취감과 자긍심의 강화까지도 경험하게 되는 것이다. 역으로, 모든 정신적 활동을 위해서 신체적 상태가 중요하다. 예를 들어 체스는 가장 두뇌를 많이 쓰는 게임 중의 하나이지만, 체스의 고수들은 달리기나 수영을 하면서 늘 체력을 다져야 한다. 그들이 육체적으로 건강하지 못하면, 체스 대회에서 장시간 동안 고도로 정신을 집중한 상태에서 오래 버티지 못한다는 것을 잘 알기 때문이다.

 

p223

 우리는 정신을 통제할 수 있는 우리의 능력이 얼마나 미약한지를 잘 깨닫지 못한다. 왜냐하면 습관에 의해 심리 에너지가 너무도 잘 배분되는 까닭에 거침없이 계속 이어지는 것처럼 보이기 때문이다. 아침에 자명종 시계가 울리면 우리는 잠에서 깨어 의식을 찾은 후 목욕탕으로 가서 이를 닦는다. 그러고 나면 문화가 규정해 주는 사회적 역할이 우리의 생각을 정리해 주며, 하루가 저물 때까지 일정한 양식에 따라 자동적으로 행동하다가 밤이 되면 잠을 자면서 의식을 잃어버린다. 그러나 특별하게 할 일이 없는 상태로 혼자 남겨졌을 때는 본능적인 무질서가 드디어 모습을 드러낸다. 별로 할 일이 없으니 이것저것 생각해 보다가 대개는 뭔가 고통스럽고 신경 쓰이는 일에 생각이 멈춘다. 생각을 정리하는 법을 알지 못하는 한, 현재 가장 문제가 되는 일로 관심이 모아진다. 실제 혹은 가상의 고통이나, 최근에 유감스러웠던 일, 또는 오래된 갈등 등에 관심이 쏠린다. 이런 쓸모도 없고 즐겁지도 않은 엔트로피가 바로 정상적인 의식의 상태이다.

 이런 상태를 피하기 위해 현재 손쉽게 얻을 수 있는 정보로 - 그것이 어떤 것이든 간에  머릿속을 채움으로써, 더 이상 부정적인 생각을 하지 않으려고 하는 것은 어쩌면 당연한 일이다. 바로 이러한 이유가, 즐기는 것도 아니면서 사람들이 왜 그렇게 막대한 시간을 텔레비전 보는 일에 소모하는가 하는 의문을 풀어준다. 독서나 다른 사람과의 대화 혹은 취미 활동과 비교해 볼 때, 텔레비전은 심리 에너지를 최소한으로 투자하고도 쉽고 지속적으로 시청자들의 주의를 끌게 해준다. 텔레비전을 보고 있는 동안은 골치 아픈 개인적 문제를 떠올리게 될까봐 염려할 필요가 없다. 일단 사람들이 정신적 혼돈 상태를 극복하기 위해 이런 미봉책을 쓰기 시작하면, 그 습관을 버리기란 거의 불가능하다.

 물론 TV 시청처럼 어떤 외적 자극에 정신을 내맡기기보다는, 습관을 통해서 정신을 통제하는 것이 의식의 혼돈 상태를 피하는 바람직한 방법이다. 그러나 그와 같은 습관을 들이기 위해서는 연습이 필요하며, 플로우 활동에 의레 따르는 목표와 규칙이 있어야 한다. 예를 들어 정신을 이용하는 가장 단순한 방법 가운데 하나로 공상을 들 수 있다. 이는 마음속에서 가상으로 어떤 일련의 사건들을 그려보는 것이다. 그러나 생각을 정리하는 일에 이처럼 쉬워 보이는 방법조차 사용하지 못하는 사람도 많다. 공상 및 정신적 심상에 대해 다른 어떤 학자보다 많은 연구를 한 예일 대학의 싱어 교수에 따르면, 전혀 공상을 할 줄 모르는 아이들도 많다고 한다.

 공상은 유익한 점이 많다. 먼저, 공상 속에서나마 불쾌한 현실을 보상함으로써 - 자신에게 해를 끼친 사람이 벌받는 상황을 상상해 보면서 좌절감이나 적개심을 어느 정도 해소시키는 것처럼 - 감정의 질서를 수립하는 데 도움을 준다. 또한 공상은 의식의 복합성을 높이는 일에도 큰 도움을 줄 수 있다. 예컨대 아이들이 - 어른들도 마찬가지로 - 상상을 통해서 당시 상황을 반복적으로 재현해 봄으로써 지금껏 문제 해결에 최선이라고 생각해 왔던 방법을 수정할 수도 있고, 다른 대안도 생각해 보며, 예상치 않은 결과도 발견할 수 있는 것이다. 기술을 닦는다면 공상도 매우 즐거운 것이 될 수 있다. 

 

p236

 "행복이란 것은 힘이나 돈에 있는 것이 아니다. 행복은 진실과 다양함 속에 존재하는 것이다."

 "유쾌함과 자신감은 최고의 선이다."

 칸트가 끓는 물 속에다 자신의 시계를 집어넣고 손에다는 계란을 들고 계란이 익는 시간을 재려했을 때는, 그의 모든 심리 에너지가 추상적 사고를 조화롭게 정리하는 데 투자되었기 때문으로 볼 수 있다.

 

p237

 내적 상징 체계가 없는 사람은 너무도 쉽게 대중 매체의 포로가 된다. 이들은 선동 정치가들에게 쉽게 현혹되며, 연예인들을 보고 쉽게 기분이 풀리고, 장사꾼들에게 이용당하기 쉬운 사람들이다. 우리가 텔레비전이나 마약 그리고 유창한 정치적 구호나 종교적 구원에 의존하게 되는 것은 의지할 것이 너무 없어서, 즉 모든 해답을 가지고 있다고 주장하는 사람들에게 우리 마음을 빼앗기는 것을 방지해 주는 내적 규칙을 갖고 있지 못하기 때문이다. 스스로 정보를 제공할 능력이 없을 때 우리의 생각은 무질서로 흘러 들어가게 된다. 의식의 질서를 찾기 위해서 자신이 아무런 통제도 할 수 없는 외부로부터의 방법을 사용할 것인가, 아니면 우리의 기술과 지식으로부터 자생적으로 성장하는 내적 방법을 따를 것인가의 여부는 각자의 선택에 달려 있다.

 

p240

 단어를 사용해 우리 삶의 질을 고양시킬 수 있는 훨씬 더 실재적인 방법은, 오늘날에는 거의 잊혀진 '대화의 기술'이다. 지난 200여 년 동안 공리주의 관념에 따라 우리는 대화의 주된 목적이 유용한 정보를 전달하기 위한 것이라고 믿어 왔다. 그래서 오늘날 우리는 실용적 지식을 전달해 주는 간결한 의사 소통을 중시하며, 그밖의 것들은 하찮은 시간 낭비라고 여긴다. 그 결과, 사람들은 직접적으로 관심이나 지식을 갖고 있는 협소한 화젯거리를 벗어나서는 서로 대화를 나눌 수 없게 되었다. 우리들 중에서 "미묘한 대화, 그것이야말로 에덴 동산이다"라고 서술한 알리의 열정을 이해할 수 있는 사람은 거의 없다. 이것은 유감스러운 일이다. 왜냐하면 대화의 주된 기능은 무엇을 성취하는 것이 아니라 경험의 질을 향상시키는 것이기 때문이다.

 

p243

 오늘날에는 다른 많은 의사 소통의 매체가 글을 대신하기 때문에 우리는 글쓰는 습관을 경시하게 되었다. 전화 · 녹음기 · 컴퓨터 · 팩스 등을 통해서 뉴스를 더욱 효율적으로 전할 수 있다. 만일 글을 쓰는 유일한 목적이 정보를 전달하기 위한 것이라면 글쓰는 습관이 쇠퇴하게 되는 것도 당연하다. 그러나 글은 단지 정보를 전달하기 위해서가 아니라 정보를 창조하기 위해 쓰는 것이다. 

 

p255

 수세대를 거치면서 그 제도 자체가 일으킨 문제들이 원래의 목적보다 우선하게 되는 경우를 흔히 볼 수 있다. 예컨대 현대 국가들은 적에 대한 방어 수단으로서 군대를 창설했다. 그러나 곧 군대 자체의 목적과 정치가 생겨났고, 이제는 가장 성공적인 군인이 국가를 가장 잘 수호하는 사람이 아니라 군대를 위해 돈을 가장 많이 얻어오는 사람이 되어 버렸다.

 

p257

 다른 분야에서와 마찬가지로 철학에서도 연구자가 수동적인 소비자의 지위를 뛰어넘어 능동적인 생산자로 발돋움할 수 있는 시점이 온다. 자신이 통찰한 내용을 언젠가 후대에서 경외김을 가지고 있을 것을 기대하며 기록으로 남긴다는 것은 대부분의 경우 지나친 오만이다. 더군다나 그와 같은 '외람됨'이 인간사에 많은 악영향을 미쳐 왔다. 그러나 자신이 당면했던 주된 의문점들을 명료하게 표현하려는 내적 동기로 인해 생각을 기록하고, 자신의 경험을 의미를 이해하는 데 도움이 되는 해결책을 진술하고자 한다면, 그 아마추어 철학자는 가장 어렵지만 보람도 큰 영역에서 기쁨을 얻을 수 있는 법을 이미 배운 것이다.

p260

 

 많은 사람들이 학교를 졸업함과 동시에 배움을 포기하는 이유는, 13~20년에 걸친 교육이 외적 동기에 의해 주어진 것이었기 때문이다. 즉 배운다는 것이 불유쾌한 기억으로 자리잡고 있는 것이다. 학생들의 주의력이 오랜 기간 동안 외부에 의해, 즉 교과서와 교사들에 의해 조종되어 왔기 때문에 그들은 졸업을 첫 자유의 날로 간주해 왔던 것이다.

 그러나 자신의 상징적 기술의 사용을 포기하는 사람은 결코 자유로워질 수가 없다. 그의 사고는 이웃의 의겨니나 신문의 사설 그리고 텔레비전에 의해 좌우될 것이다. '전문가'의 조종을 받게 되는 것이다. 외적 동기에 의한 교육이 종결되는 시점을 내적인 동기로 교육을 받게 되는 출발점으로 만드는 것이 가장 이상적이다. 그 시점에서 공부의 목적은 더 이상 학점을 받거나 졸업장을 타는 것 그리고 좋은 직장을 구하는 것이 아니다. 그보다는, 주변에서 일어나는 일들에 대한 이해를 높이는 것 그리고 자기 경험의 의미를 이해하고 그 질을 높이기 위한 것이 목적이 되는 것이다. 바로 여기서 사상가는 심오한 기쁨을 느끼는 되는 것이다.

 

7장. 일 속에서 플로우 경험하기

 

p277

 다시 말해 유(流)의 신비한 경지에 도달하려면 어떤 초인간적인 대도약이 필요한 것이 아니라 단지 주변에 있는 행동의 기회에 점차로 주의를 집중시켜 나가면 되는 것이다. 그리고 이에 따라 연마되는 기술이 시간이 흘러가면서 너무나 완벽한 수준에 이르러 겉보기에는 자동적이고 초월적인 것처럼 보일 정도가 되는 것이다. 위대한 바이올린 연주가나 훌륭한 수학자들의 성취는 공히 난관 극복과 점진적 기술 연마의 결과임이 확실하지만, 마치 초인적인 것처럼 보인다.

 

p287

 일을 통해 삶의 질을 향상시키기 위해서는 두 가지의 상호 보완적인 전략이 필요하다. 그 하나는 사냥 · 가내 직조 수공업 · 수술 등과 같은 플로우 활동과 최대로 비슷해질 수 있도록 일을 재설계해야 한다는 것이다. 다른 하나는 행동의 기회를 파악하고 기술을 연마하고 합당한 목표를 설정할 수 있도록 하는 훈련을 통해서 사람들이 세라피나와 조 그리고 포정의 경우처럼 자기 목적적 성격을 개발할 수 있도록 돕는 일이다. 위의 두 전략 중 어느 하나만으로는 일을 더 만족스러운 것으로 만들 수 없다. 두 가지가 상호 보완이 되어야만 최적 경험의 창출에 지대한 공헌을 하게 되는 것이다.

 

p292

 이것이 바로 역설적인 상황인 것이다. 직장에서 사람들은 훨씬 많은 기술을 사용하고 직면하는 도전들도 많다고 느끼기 때문에, 스스로 더 행복하고 강하고 창의적이라 느끼며 더욱 큰 만족감을 갖는다. 여가 시간에는 대체로 별로 할 일도 없고 자신의 기술도 많이 쓰이지 않는다는 생각이 들기 때문에 스스로 우울하고 약하고 지루하고 불만족스럽게 느끼는 경향이 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사람들은 일보다는 여가 시간을 더 많이 갖고 싶어하는 것이다.

 이처럼 모순되는 양상이 의미하는 것은 무엇일까? 이에 대한 여러 가지 설명이 있을 수 있겠지만, 부정할 수 없는 분명한 결론이 하나 있다. 일이라고 하면 사람들은 자신의 감각이 내리는 판단을 따르지 않는다는 것이다. 이들은 직접 경험의 질은 무시해 버리고, 일에 대한 깊은 문화적 고정 관념에 의거해 자신의 동기를 결정 짓는다. 일이란 부담이고 구속이며 자신의 자유에 대한 침해이기 때문에 가능한 한 피해야 하는 것으로 여기는 것이다.

 

p294

 연구를 통해서 우리는 미국인들이 자신의 직업에 만족하지 못하는 주된 이유 세 가지를 발견했는데, 세 가지 모두 직장에서 겪는 전형적인 경험과 관련이 있는 것들이었다. 우리가 지금껏 살펴본 바와 같이, 직장에서의 경험이 집에서의 경험보다 더 나은 경우가 많음에도 직업에 대한 불만을 갖게 되는 것이다(일반적인 생각과는 다르게, 봉급이나 다른 물질적 문제는 대체로 이들의 가장 절박한 관심사에 들지 않았다).

 가장 많이 지적되고 어쩌면 가장 중요한 것일 수도 있는 불만족의 첫 번째 원인은 다양성과 도전감의 결여이다. 이것은 모든 사람에게 문제가 될 수 있으나, 특별히 단조로운 작업을 하는 하급 직책을 가진 사람들의 경우에는 더 심각한 문제가 되었다.

 두 번째 불만은 직장에서 겪는 다른 사람과의 갈등, 특히 상관과의 갈등이다.

 세 번째로는 심신의 소모가 지적되었다. 압력과 스트레스를 많이 받고, 자신을 위한 시간이 너무 없다는 것, 그리고 가족과 함께 보내는 시간이 부족하다는 것이었다. 이것은 특히 고위 직급에 있는 사람들, 즉 경영직이나 관리직에 있는 사람일수록 심각하게 느끼는 문제였다.

 이러한 불만들은 객관적인 것들도 있지만, 각자의 의식의 주관적 변화에 따라 좌우되는 것들도 많다. 예를 들어, 다양성이나 도전은 직업이 본연적으로 갖고 있는 특징이기도 하지만, 각자가 기회를 어떻게 파악하는가에 따라 차이가 나는 것들이다. 포정과 세라피나 그리고 조는 대부분의 사람들이 단조롭고 의미가 없다고 생각하는 일에서 도전을 찾아냈다. 어떤 직업이 다양성을 갖추고 있는가는 궁극적으로 볼 때 실질적 노동 조건보다는 그 직업에 대한 각자의 접근 방식에 좌우되는 것이다.

 다른 불만의 원인들도 이와 마찬가지이다. 직장 동료들이나 상사와 잘 지내는 것이 어렵기는 하겠지만, 일반적으로 이ㅘ 같은 일은 노력만 한다면 어느 정도 원만히 해결할 수 있는 문제들이다. 직장에서의 갈등이란 종종 체면이 손상될 것을 우려하여 방어적 심리를 갖게 될 때 발생한다. 자신의 특정 목표에 따라 다른 사람들이 자신을 어떻게 대해 주어야 한다는 기준을 설정해 놓고, 다른 사람들이 그 기준을 따라주기를 기대한다. 그러나 이처럼 계획된 대로 이루어지는 경우는 극히 드물다. 다른 사람들도 나름대로 설정해 놓은 기준과 목표가 있기 때문이다. 이 같은 교착 상태를 피해갈 수 있는 최선의 방법은 상사나 동료들이 그들의 목표를 달성할 수 있도록 도와주면서 자신의 목표를 성취하고자 노력하는 것이다. 단기적인 관점에서는 이 방법이 주변의 상황에는 신경도 쓰지 않고 자신의 이해만을 추구해 나가는 것보다 덜 직접적이고 시간도 많이 들지만, 장기적으로 볼 때 실패하는 확률이 거의 없다.

 최종적으로 스트레스와 압력은 직업에 따르는 가장 주관적인 측면이므로 그만큼 의식의 통제를 받기 쉽다는 점을 생각해 볼 수 있다. 스트레스는 우리가 그것을 느껴야 비로소 존재하게 되는 것이다. 같은 스트레스를 받더라도 완전히 지쳐버리는 사람이 있고, 그것을 도전으로 받아들이는 사람이 있다. 스트레스를 완화하는 방법은 수없이 많다. 조직의 개선, 책임의 위임, 동료나 상사와의 좀더 원활한 의사 소통 등에 의해 해결되는 것들도 있고, 가정 생활의 개선, 여가 활동의 변화와 같이 직업 외적인 요인들이나 초월적 명상과 같은 내적 훈련 등으로 해소할 수 있는 것도 있다.

 이와 같은 단편적인 해결책들도 도움이 되기는 할 것이다. 그러나 직업에서 오는 스트레스에 대처할 수 있는 유일하고도 진정한 대책은 그러한 스트레스를 전반적 경험의 질로 향상시키기 위한 도구의 하나로 보는 것이다. 물론 이것을 말로 하기는 쉽다. 이렇게 하기 위해서는 정신 에너지를 사용해야 하며, 어쩔 수 없이 정신이 산만해지는 상황에서도 자신이 설정해 놓은 목표에만 에너지를 집중해야 한다. 외적 스트레스에 대처하는 다양한 방법은 9장에서 다루기로 하고, 지금은 여가 시간의 활용을 통해 전반적 삶의 질을 어떻게 향상시킬 수 있는가를 살펴보기로 하겠다.

 

p297

 단지 수동적으로, 그리고 자기 지위를 과시하려는 것과 같은 외적인 이유로만 주의를 기울게 된다면, 대중적 여가, 대중 문화, 심지어는 고급 문화까지도 모두 우리 정신을 좀먹는 기생충이 될 수 있다. 그것들은 심리적 에너지만을 흡수할 뿐이며, 그 대가로 어떤 실재적인 힘도 제공해 주지 않는다. 결국 우리들을 이전보다 더욱 지치고 의기소침하게 만들어 줄 뿐이다.

 일이나 여가 시간 모두 우리가 통제하지 못한다면 실망스럽게 마련이다. 대부분의 일과 많은 여가 활동, 특히 대중 매체의 수동적 소비와 관련된 것들은 우리들을 행복하고 강하게 만들어 주지 못한다. 이를 통해 금전적 이득을 보는 사람들은 따로 있다. 우리가 이 상태를 그대로 방치한다면 이러한 것들은 우리 삶의 정수를 모두 고갈시켜 빈 껍데기만 남게 할 것이다. 그러나 다른 것들과 마찬가지로, 일과 여가도 우리 필요에 맞게 조정할 수 있다. 일을 즐길 수 있고, 여가 시간을 낭비하지 않는 사람은 결국 자신의 삶이 전반으로 훨씨 더 가치 있게 되었다고 느끼게 될 것이다. 브라이트빌은 "미래는 교육을 많이 받은 사람의 것일 뿐 아니라, 여가 시간을 현명하게 활용하도록 교육받은 사람의 것이 될 것이다"라고 말하지 않았던가.

 

 

8장. 혼자 있음과 함께 있음을 즐기기(Enjoying Solitude and Other People)

 

p304

 겉으로는 서로 상충되는 것처럼 보이는 이 문제를 해결하는 것은 사실 그리 어려운 일이 아니다. 중요한 다른 어떤 것과도 마찬가지로, 관계도 좋을 때는 우리를 더할 나위 없이 행복하게 해주기도 하고, 나쁠 때는 매우 우울하게 만들어 주기도 한다. 우리가 다루어야 하는 환경 중에서 사람들이 가장 융통성이 많고 가장 변화하기 쉬운 측면을 지니고 있다. 동일한 한 사람이 아침에 기분을 좋게 만들어 주었다가도 저녁에는 비참한 기분으로 만들어 줄 수도 있는 것이다. 우리는 다른 사람들의 애정과 승인에 너무도 많이 의존을 하고 있기 때문에, 다른 사람들이 우리를 어떻게 대해 주는가에 따라 극심한 영향을 받는다.

 그러므로 다른 사람들과 원만히 지내는 법을 배우는 사람은 삶의 질 전반을 크게 향상시킬 수 있다. 이러한 사실은 '친구를 얻고 사람들에게 영향을 주는 방법'과 같은 제목의 책들을 쓰고 또 읽는 사람들에게 잘 알려져 있다. 기업의 경영인들은 더욱 효과적인 경영을 위하여 의사 소통을 좀 더 원활하게 하고자 애쓰며, 사교계에 처음 나서는 사람들은 에티켓에 관한 책을 읽어 그 세계의 사람들로부터 인정을 받으려고 한다. 이러한 관심사들은 다른 사람들의 마음을 움직여 보려는 외적인 욕구를 잘 반영해 주고 있다. 그러나 단지 사람들이 우리 자신의 목표를 달성하는 데 도움을 주기 때문에 중요한 것만은 아니다. 그 자체로서 하나의 소중한 대상으로 대우를 한다면, 사람들은 가장 풍부한 행복의 원천이 된다.

 관계가 갖는 바로 이 같은 융통성으로 인해 불유쾌한 상호 작용이 참을만한 것으로도, 심지어는 흥미로운 것으로도 변화될 수 있다. 우리가 사회적 상황을 어떻게 규정하고 해석하는지에 따라 서로를 어떻게 대하고, 그렇게 하면서 어떤 기분을 느끼는지가 크게 달라질 수 있다.

 

p308

 외롭다는 것은 어째서 그렇게 부정적인 경험이 되는 것일까? 가장 기본적인 대답은 내적인 정신의 질서를 유지하기가 매우 어렵기 때문이라는 것이다. 우리에게는 계속 주의를 집중시킬 수 있는 외적이 목표와 외적 자극 그리고 외적 피드백이 필요하다. 외적 입력이 부족할 때는 주의가 산만해지고 사고의 혼란이 초래되어, 우리가 2장에서 살펴본 '심리적 엔트로피' 상태에 빠지게 된다.

 청소년들이 혼자 있을 때 하는 대표적인 생각은 다음과 같은 것들이다.

 "내 여자친구는 지금 무엇을 하고 있을까? 내 얼굴에 나는 것이 혹시 여드름인가? 수학 숙제를 제시간에 끝낼 수 있을까? 어제 나랑 싸웠던 녀석들이 나를 때릴까?

 다시 말해, 할 일이 없으니, 부정적인 생각들이 머릿속을 차지하는 것을 저지하지 못하게 되는 것이다. 어른들도 의식을 통제하는 법을 배우지 못하면 이와 똑같은 상황을 겪게 된다. 자신의 애정 생활에 대한 염려와 건강 · 투자 · 집 · 직장의 문제들이, 눈앞에 급히 해야 할 일이 없어진 순간부터 머릿속에 떠오르기 시작한다.

 바로 이런 이유 때문에 텔레비전이 그다지도 많은 사람들에게 큰 도움을 줄 수 있는 것이다. 텔레비전 시청이 결코 긍정적 경험이 되지는 못할지라도  일반적으로 사람들은 텔레비전을 보고 있을 때 수동적이고, 힘이 없고, 신경이 예민해지고, 슬픈 기분을 느낀하고 한다 - 최소한 눈앞의 깜박이는 화면이 의식에 어느 정도의 질서를 회복시켜 주는 것이다. 뻔히 예상할 수 있는 줄거리, 눈에 익은 주인공들, 심지어는 반복되는 광고까지도 일종의 안심을 주는 자극이 되는 것이다. 텔레비전 화면은 다루기 쉽고, 제한된 환경의 한 측면으로서 우리의 주의를 끈다. 텔레비전과 상호 작용을 하고 있는 동안은 우리의 머릿속에 개인의 걱정거리가 떠오루지 않는다. 화면을 통해서 전달되는 정보는 불쾌한 걱정들을 우리의 마음속으로부터 차단시켜 준다. 물론 이런 식으로 우울함을 떨쳐버리려 하는 것은 주의의 낭비이다. 크게 얻는 것도 없이 많은 양의 주의력을 소모해 버리기 때문이다.

 습관적 마약의 사용으로부터 끊임없이 집안 청소, 충동적 성해위에 이르는 다양한 강박적 행위들에 의존해 고독의 두려움을 벗어나 보려는 극단적 방법도 있다. 약의 영향을 받게 되면 자아가 심리 에너지를 지휘해야 하는 책임으로부터 해방된다. 그저 느긋하게 앉아서 약이 제공해 주는 생각에 빠져들면 되는 것이고, 무슨 일이 벌어지든 내 알 바가 아니다. 텔레비전과 마찬가지로 마약도 우리가 우울한 생각에 직면하지 않도록 해준다.

 술이나 향정신성 의약들도 최적 경험을 제공해 줄 수는 있다. 그러나 이러한 방법을 통해서는 복합성이 매우 낮은 수준의 경험만을 얻을 수 있을 뿐이다. 많은 전통 사회에서 행해지는 것처럼 고도로 기술적인 제식을 통해 마약을 취하지 않는 한, 실제로 마약은 우리의 판단(성취 가능한 일들은 무엇인가 그리고 우리가 한 개인으로서 무엇을 성취할 수 있는가)을 혼미하게 하는 결과를 초래할 뿐이다. 이것은 기분 좋은 상태이기는 하지만, 행동의 기회와 행동할 수 있는 능력을 '증가' 시킴으로 인해 맛보는 즐거움을 그릇되게 모방한 것에 불과하다.

 마약이 정신에 미치는 영향을 이처럼 설명한 것에 대해 강력히 반론을 제기하는 이들도 있을 것이다. 왜냐하면 우리는 지난 25년 동안 마약이 '의식을 확장시켜 주며' 마약을 사용하면 창의성이 증가한다고 줄곧 들어왔기 때문이다. 그러나 약의 화학 성분이 의식의 내용과 조직을 바꾸어 주기는 하지만, 자아의 통제력을 신장시키거나 증대시켜 주지 못한다는 사실이 입증된 바 있다. 중요한 것은 무언가 창의적인 것을 성취하기 위해서는 바로 그런 통제력이 필요하다는 사실이다. 그러므로 향정신성 의약들은 정상적 감각 조건에서보다는 다양한 정신적 경험을 하게 해주는 것은 사실이지만, 그러한 경험을 효과적으로 통제할 수 있는 능력은 제공해주지 못하는 것이다.

 많은 현대의 예술가들은 콜러리지가 마약에 취해서 집필한 것으로 알려진 <쿠빌라이 칸>과 같이 신비롭고 잊혀지지 않는 작품을 창작하고자 환각제를 사용해 보기도 한다. 그러나 이들은 결국 어떤 종류의 예술 작품이든 그것을 창작하기 위해서는 맑은 정신이 필요하다는 것을 깨닫게 된다. 약의 영향을 받은 상태에서 만들어진 작품은 좋은 예술 작품이 마땅히 갖추어야 할 복합성이 떨어져서 너무나 명백하고 자아 도취적인 경향을 띠게 된다. 화학 물질에 힘입어 예민해진 의식은, 나중에 작가가 명료한 정신으로 돌아와 사용할 수 있는 색다른 이미지나 생각, 감정 등을 낳기도 한다. 그러나 이렇게 되면, 정신을 점차 화학 물질에 의존하게 되어 결국은 스스로 정신을 통제할 수 있는 능력을 상실할 위험이 따르게 된다.

 

p312

 집중이 필요하고 기술을 증진시켜 주며 더 나아가 자아를 성장시켜 주는 활동을 하면서 자유 시간을 보내는 것과 텔레비전을 보거나 마약을 하면서 남는 시간을 때우는 것에는 큰 차이가 있다. 위의 두 전략이 혼돈의 위협에 대처하는 서로 다른 방법으로 보일 수도 있고, 존재론적 불안에 대해 각기 다른 방어 기제로 보일 수도 있다. 하지만 결국, 전자는 성장으로 이끌어 주고, 후자는 정신이 이상해지는 것을 방지하는 역할을 할뿐이라는 점에 그 차이가 있다. 좀처럼 지루함을 느끼지 않고, 외부 환경의 지속적 도움 없이도 순간 순간을 즐길 수 있는 사람은 창의적인 삶의 성취 여부를 판가름하는 시험에 합격했다고 할 수 있다.

 혼자 있는 시간으로부터 도피하지 않고, 그 시간을 활용하는 법을 배우는 것은 특히 젊은 시절에 더욱 중요하다. 혼자 있는 것을 견디지 못하는 청소년들은 나중에 성인이 되었을 때 진지한 정신적 각오를 해야 하는 과업을 수행하지 못한다. 방과 후 집에 돌아와서 가방을 자기 방에 던져 놓고, 냉장고에서 간식을 꺼내 먹은 후, 즉시 전화기를 들고 친구들과 통화를 시작하는 것이 많은 부모들에게 너무도 익숙한 전형적인 십대의 행동이다. 통화가 별 볼일 없어지면 전축이나 텔레비전을 켠다. 혹시라도 책을 펴는 경우가 있더라도 그 결심은 그리 오래가지 못한다. 공부를 한다는 것은 복잡한 형태의 정보에 집중을 하는 것이므로, 아무리 정신력이 강한 사람일지라도 얼마 안 지나 어려운 책의 내용을 떠나 좀더 즐거운 생각을 하려 한다. 그러나 마음대로 즐거운 생각을 떠올리는 것도 결코 쉬운 일이 아니다. 오히려 조직되지 않은 마음에 늘상 떠오르는 그런 생각들이 머리를 채우게 된다. 외모나 인기 그리고 인생의 성공 가능성 등에 관해 염려하기 시작하는 것이다. 이러한 생각을 떨쳐버리기 위해서는 자신의 의식을 점유할 다른 어떤 것이 필요하다. 공부는 너무 어렵기 때문에 별 도움이 안 된다. 이런 잡념을 떨쳐버리기 위해 십대들은 너무 많은 정신 에너지가 소모되는 것만 아니라면 그 어떤 것이라도 하려 든다. 다시 익숙한 음악이나 텔레비전 그리고 함께 시간을 때울 친구를 찾는 것이 이들 청소년들이 대체로 찾는 해결책이다.

 

p314

 의식을 통제하는 법을 배우지 못한 청소년들은 '단련'이 되지 못한 성인으로 성장한다. 이들에게는 경쟁적이고 정보 집중적인 환경에서 살아남기 위해 필요한 복합적인 기술이 결핍되어 있다. 이보다 더 중요한 것은 이들이 삶을 즐기는 법을 전혀 배우지 못했다는 점이다. 숨겨진 성장의 잠재성을 개발하도록 이끌어 주는 도전을 찾아내는 습관을 익히지 못한 것이다.

 그러나 십대의 청소년 시절만이 고독이 주는 기회를 활용하는 법을 배울 수 있는 결정적인 시기는 아니다. 불행하게도 너무나 많은 성인들이 20대나 30대에 이르면 그리고 40대가 되면 예외 없이 이미 자신의 몸에 밴 습관 속에 안주해도 좋다고 생각한다. 이미 경험을 충분히 쌓았으며, 생존에 필요한 책략들을 익혔으니 지금부터는 느긋하게 살아가면 된다고 느끼는 것이다. 결국, 극히 최소한의 내적 단련이 되었을 뿐인 이들에게는 해가 갈수록 엔트로피가 축적된다. 직장에서 느끼는 실망, 신체적 건강의 약화 그리고 일상적인 걱정거리들이 점차로 마음의 평정을 위협하는 거대한 부정적 정보로 쌓이게 된다. 이러한 문제들에 과연 어떻게 대처해 나가야 하는 것일까? 만일 혼자 있을 때 주의력을 통제하지 못하는 사람이라면, 결국 마약, 오락, 재미 등과 같이 정신을 둔화시키거나 주의를 돌려줄 수 있는 손쉬운 외적 해결책에 의존하게 될 것이다. 

 그러나 이 같은 대응 방법은 퇴보적인 것이어서 발전을 가져다주지 못한다. 인생을 즐기면서도 발전할 수 있는 길은, 불가피한 삶의 조건인 엔트로피부터 한층 더 고차원적인 형태의 질서를 창조해 내는 것이다. 즉 살아가면서 어려움에 직면할 때마다 그것을 억압하거나 회피해야 하는 것으로 받아들이지 말고, 배움의 기회로 그리고 기술을 향상시킬 수 있는 기회로 삼는 것이다.

 나이가 들면서 체력이 약해지기 시작했다고 치자. 그러면 그 상황을 피하려고 하지 말고, 에너지를 외부 세계의 정복으로부터 심오한 내적 세계의 탐구로 전환시킬 시기가 되었다는 의미로 받아들이는 것이다. 즉 이제는 스스로 추구해 볼 만한 가치가 있다고 생각되는 것들, 예를 들면 프루스트의 작품을 읽거나 체스를 두기도 하고, 과수를 돌보거나 신에 대한 생각 등을 마침내 해 볼 때가 되었다는 의미이다. 그러나 젊은 시절에 고독한 시간을 활용하는 법을 배우지 못한 사람이 위와 같은 것들 중 하나라도 성취한다는 것은 매우 어려운 일이다.

 

p316

 신까지 되지는 않더라도, 혼자 살려면 다른 사람들이나 직업 · 텔레비전 · 극장 · 레스토랑 · 도서관 등 문명 생활의 도움 없이도 플로우를 성취할 수 있도록 자신만의 정신적 일과를 설정해야 한다.

 

 공간을 조직화하는 것보다 더 중요한 것은 아마도 시간을 조직화하는 일일 것이다.

 

 사람은 고독 속에서도 살아남을 수 있다. 하지만 그러기 위해서는 엔트로피가 정신을 와해시키는 것을 방지하기 위해 주의력을 조직하는 일이 전제되어야만 한다.

 

p319

 쾌락에 의존하는 생활 방식은, 고된 노동과 그러한 노동에서 얻는 즐거움을 기초로 형성된 복합적인 문화와 공생의 형식으로만 가능할 뿐이다. 그러나 이러한 복합적인 문화가 비생산적인 쾌락주의자들, 즉 쾌락에 중독되고 기술과 수양이 부족하여 자활 능력이 결여된 사람들을 더 이상 지원해 줄 수 없거나, 지원할 의사가 없어질 때 그들은 방향을 잃고 무력해지고 마는 것이다.

 

p320

 고독을 즐기는 법을 배우지 않는 한, 생의 많은 부분이 그 부작용을 회피하려는 필사적인 노력으로 점철되고 말 것이다.

 

p322

 각 공국이 두 방법 중 어느 재산상속제를 채택하였는가는 전적으로 우연의 소산이었던 것으로 보이나, 그 선택의 결과는 그들의 경제에 지대한 영향을 끼쳤다(장자상속제를 채택했던 공국들은 자본의 집중이 이루어져 결국 산업화를 이룰 수 있었던 반면, 분할상속제를 채택했던 나라들은 자본의 분산으로 산업화가 저조할 수밖에 없었다).

 

p324

 몇 십 년 전까지만 하더라도 부모와 자녀들이 외적 이유로 인해 관계를 지속할 수밖에 없기 때문에 한집안에서 모여 사는 경향이 있었다. 과거에 이혼율이 극히 낮았던 이유는 부부간의 애정이 오늘날보다 깊었기 때문이 아니다. 남편들은 요리를 하며 살림을 해줄 사람이 필요했고, 아내들은 돈을 벌어다 줄 사람이 필요했으며, 자녀들은 먹고, 자고, 세상살이를 시작하기 위해 부모를 필요로 했기 때문이었다. 어른들이 그렇게도 많은 노력을 기울여 젊은 사람들에게 주입했던 '가족을 중시하는 가치관'은 종교적, 도덕적 명분이 앞세워졌을 때조차도, 결국은 이 같이 단순한 필요성의 반영이었던 것이다. 물론 한때는 가족을 소중히 여기는 가치관이 득세하여 사람들이 그러한 가치관을 배우게 되고, 그것이 가족의 붕괴를 막는 데 큰 몫을 담당했던 것도 사실이다. 그러나 도덕적 규칙은 외부로부터 강제되는 것으로, 그리고 남편, 아내, 자식들을 옭아매는 외적 구속으로 여겨지는 경우가 더욱 흔했다. 그러게 되면 그 가족이 겉으로는 온전한 것처럼 보일 수도 있지만, 사실 내부적으로는 갈등과 증오로 분열되어 있는 것이다. 오늘날 만연하는 가정의 '와해' 현상은 결혼 생활을 지속해야 할 외적 요인들이 서서히 사라지게 된 결과이다. 이혼율이 증가하는 것은 사랑이나 도덕적 힘이 약화되서라기보다는, 여성 인련의 채용 기회 증대로 대표되는 노동 시장의 변화와 노동을 절감해 주는 가사 용품의 보급의 영향을 크게 받았기 때문으로 볼 수 있다.

 그러나 단지 외적인 이유들만으로 결혼 생활을 지속하고 가족의 범주 안에서 함께 살게 되는 것은 아니다. 가정 생활은 가정을 통해서만 경험할 수 있는 기쁨과 성장의 좋은 기회들을 제공해 주며, 이러한 내적 보상들은 과거와 마찬가지로 현재에도 얻을 수 있는 것이다. 실상, 이러한 경험을 하기에는 과거의 어느 때보다도 오늘날이 더 유리하다고 볼 수 있다. 단지 편의만을 위해 함께 사는 전통적 가족 형태가 쇠퇴하는 경향이 있다 하더라도 서로를 사랑하기 때문에 함께 견디는 가정의 수는 점차 증가 추세에 있다. 물론 아직도 외적 요인들이 내적인 보상보다는 훨씬 강력한 영향을 미치는 것이 사실이다. 때문에 앞으로도 한동안은 가정 생활의 분열이 심화될 것처럼 보인다. 그러나 바람직한 가족의 형태를 유지하는 가정들은, 자신의 의사에 반해 어쩔 수 없이 함께 사는 가정들에 비해 각 구성원들의 자아 개발에 훨씬 많은 도움을 줄 수 있다.

 

p327

 키레로는 인간이 완전히 자유로워지기 위해서는 일련의 법규의 노예가 되어야만 한다고 저술한 바 있다. 다시 말해, 제약을 받아들이는 일이 곧 자신을 자유롭게 하는 일이라는 것이다. 예를 들면, 심리 에너지를 일부일처적 혼인에 집중적으로 투자하기로 결심함으로써, 어떠한 문제와 장애가 발생해도 혹은 나중에 다음이 더 끌리는 선택의 여지가 생겨나더라도 심리적으로 흔들리지 않을 수 있다. 전통적 혼인이 요구하는 책임들을 성실히 수행함으로써, 그리고 관례에 따라서 어쩔 수 없어서가 아니라 기꺼이 그렇게 함으로써, 자신이 올바른 결정을 내린 것인가 혹은 다른 사람들은 더 나은 방법을 택한 것이 아닌가 따위를 더 이상 걱정하지 않아도 된다. 그 결과 어떻게 살아야 할 것인가에 관한 고민으로부터 자유로워진 많은 에너지를 삶을 위해서 쓸 수 있는 것이다.

 

p337

 프랜시스 베이컨은, "최악의 고독이란 진실한 친구가 없다는 것이다"라고 하였다. 친구 관계는 가족 관계에 비해서 한결 즐거운 것이 되기 쉽다. 우리가 공통의 관심사와 상호 보완적 목표에 입각해서 친구를 선택할 수 있기 때문이다. 친구와 함께 있기 위해 자신을 변화시켜야 할 필요는 없다. 친구는 우리의 자아 의식을 바꾸려고 하지 않고 오히려 강화해 준다. 쓰레기를 내다버린다거나 마당의 낙엽을 쓰는 일과 같이 집에서는 우리가 받아들여야만 하는 지루한 일들이 많다 그러나 친구와 함께 있을 때는 '재미있는' 일들에만 집중할 수 있다. 일상적 경험의 질에 관해 수차례에 걸쳐 이루어졌던 우리의 연구에서, 친구오 함께 있을 때 가장 긍정적인 기분을 느끼게 된다는 응답이 반복적으로 나왔다. 이는 반드시 십대 청소년들에게만 국한된 사실이 아니다. 젊은 성인들도 역시, 배우자를 포함한 다른 어떤 사람들보다 친구들과 함께 있을 때가 가장 즐겁다고 응답했다. 은퇴한 노인들도 배우자나 가족과 함께 있을 때보다 친구들과 함께 있는 것이 더욱 즐겁다고 했다.

 

p338

 이런 종류의 사교는 친구 사이의 교제를 모방한 것이기는 하지만, 진정한 친구 관계에서 누릴 수 있는 혜택을 거의 제공하지 못한다. 누구나 때로는 잡담을 하면서 시간 보내기를 좋아한다. 그런데 마치 매일 마약 주사를 맞아야 하는 것처럼 이러한 피상적 교제에 극심하게 의존하는 사람들이 많다. 특히 고독을 참지 못하는 사람들이나, 집에서 정서적 지지를 받지 못하는 사람들의 경우 이러한 의존도가 더욱 높아진다. 

 강한 가정적 결속이 결핍된 십대 청소년들은 친구들 그룹에 지나치게 의존하는 나머지 그 그룹 속에 받아들여지기 위해서는 어떤 일이라도 불사하려 든다. 다음은 약 20년 전 애리조나 주의 투산에서 있었던 일이다. 규모가 큰 어느 고등학교 3학년 학생들 모두가, 그 학교를 그만두었으나 자기보다 나이가 어린 학생들과 계속 '우정'을 유지하던 한 나이 많은 퇴학생이 급우들을 죽여서는 시체를 사막에 매장해 왔다는 사실을 알고 있었다. 그러나 그들 중 누구도 이 사실을 경찰에 신고하지 않았다. 그러다가 이 사건은 경찰의 우연한 수사에 의해 밝혀지게 되었다. 모두 유복한 중류 가정의 자녀들이었던 이 학생들은, 친구들로부터 소외당할 것이 두려워 살인을 신고하지 못했다고 한다. 만일 투산의 십대 청소년들에게 강한 가족적 결속이 있었더라면 혹은 이들이 그 지역 사회의 다른 어른들과 강한 유대 관계를 맺고 있었더라면, 친구들로부터 고립되는 것이 그렇게 견디기 힘든 일이 되지는 않았을 것이다. 그러나 그들을 고독으로부터 보호해 주는 것이 또래 친구들밖에는 없었던 것이 분명하다. 불행하게도 이것이 굉장히 희귀한 사건은 아니다. 이따금씩 이와 매우 유사한 사건들이 언론에 보도되곤 한다.

 

p344

 사람들은, 마치 가족의 관계처럼 친구 관계도 저절로 이루어지는 것으로 믿고, 관계에 금이 가더라도 그것은 어쩔 수 없는 일인 것으로 여기며 그저 상심만 하고 만다. 다른 사람들과 함께 나눌 수 있는 관심사가 많고, 관계에 투자할 만한 자유 시간도 많은 청소년기에는 친구를 사귀는 것이 아주 자연스러운 과정처럼 보일 수도 있다. 그러나 그 시기가 지나면 친구 관계는 결코 우연히 이루어지지 않는다. 친구 관계도 직장이나 가정 생활을 꾸려나가는 것처럼 열심히 가꾸어 나가야만 하는 것이다.

 

p345

 불행하게도 공적인 분야에 종사하는 많은 사람들이 높은 복합성을 가진 행위를 하지 못하고 있다. 정치가들은 권력을 좇으며, 박애가들은 명예를 추구하고, 성자가 되려는 사람들은 자신들이 얼마나 정의로운가를 증명하려 한다. 이러한 목표들은 충분한 에너지만 투자한다면 성취하기가 그리 어려운 것들이 아니다. 한층 더 위대한 도전은 자기 자신에게 득이 될 뿐 아니라, 그 과정에서 다른 사람들에게도 도움이 되는 것들이다. 정치가들이 실제로 사회 상황을 변화시키고, 박애가들은 곤궁한 사람들을 도우며, 성자들이 다른 사람들에게도 적용될 수 있는 삶의 전형을 제시하기란 매우 어렵겠지만 그만큼 보람도 큰 일이 될 것이다.

 우리가 단지 물질적인 결과만을 고려한다면, 자신만을 위해 부와 권력을 얻으려 하는 이기적 정치가들을 똑똑한 사람들이라고 생각할 수 있다. 그러나 최적 경험이 인생에 진정한 가치를 부여한다는 사실을 알게 되면, 공동의 선을 실현하기 위해 애쓰는 정치가들이야말로 보다 높은 노력의 목표에 도전함으로써 스스로 진정한 즐거움을 경험할 수 있는 기회를 그만큼 더 많이 가지게 된다는 점 때문에 말이다.

p346

 지난 수세기 동안 경제적 합리주의가 너무도 만연해 왔기 때문에, 우리는 어떠한 인간의 노력이든 그 '결과'를 금전적 가치로 측정해야 한다는 생각을 당연하게 받아들였다. 그러나 인생을 경제적인 관점으로만 접근하는 것은 오히려 합리적이지 못하다. 진정한 가치는 경험의 질과 복합성에 있는 것이기 때문이다.

 좋은 지역 사회의 척도는 기술적 진보나 물질적 풍요가 아니다. 사람들이 자신의 삶을 최대한 여러 측면으로 즐길 수 있는 기회를 제공해 주면서, 이들이 더 높은 도전을 추구하며 자신의 잠재 능력을 개발할 수 있도록 해주는 지역 사회야말로 이상적인 사회라 할 수 있다. 이와 마찬가지로 학교의 가치도 그 명성이나, 삶의 필요에 대처해 나갈 수 있도록 학생들을 훈련시키는 능력에 있는 것이 아니라, 얼마마늠 학생들이 배움을 평생의 즐거움으로 여길 수 있도록 가르치는가에 있는 것이다. 또 반드시 이익을 최대로 올리는 공장이 아니라, 직원들과 소비자들의 삶의 질적 향상에 큰 기여를 하는 공장이야말로 좋은 공장인 것이다. 그리고 정치의 참된 기능도 사람들을 더욱 풍요롭고 안전하게 혹은 강하게 만드는 것이 아니라, 최대한 많은 사람들이 복합성을 증가시켜 가는 삶을 즐길 수 있도록 하는 데 있는 것이다.

 

 그러나 개인이 의식 변화가 선행되지 않고서는 어떠한 사회적 변화도 실현될 수 없다. 한 젊은이가 칼라일에게 어떻게 하면 세상을 개혁할 수 있겠냐는 질문을 했다. 칼라일은 "당신 자신을 먼저 개혁하시오. 그리 되면 세상에서 악당이 한 명 더 줄어들게 되는 것이니까"라고 대답했다. 이 충고는 오늘날에도 여전히 유효하다. 자신의 삶을 통제하는 법을 먼저 배우지도 못했으면서 다른 사람들의 삶을 개선시키려고 노력하는 사람은 결국 사태를 악화시킬 뿐이다.

 

9장. 혼란에서 벗어나기(Cheating Chaos)

 

p350

 물론 구체적인 물질적 조건이 개선되고 나서야 비로소 플로우가 그들 삶의 질적 향상에 도움이 될 수 있을 것이다. 다시 말해, 최적 경험은 건강이나 부와 같이 기본적인 재료로 만들어진 케이크 위의 크림과도 같은 것이어서, 그 자체만으로는 보잘것없는 하나의 장식에 불과할 뿐이다. 더욱 현실적이고 구체적인 현실적 요건 위에서만 플로우가 삶의 주관적 양상을 만족스럽게 변화시켜 줄 수 있는 것 아닌가.

 두말할 필요도 없이 이 책에서 제시하는 이론은 위와 같은 결론을 반박하는 것이다. 주관적 경험은 단지 삶의 한 측면에 불과한 것이 아니라 삶 그 자체이다. 물질적 조건들은 부착적인 것으로 우리에게 간접적인 영향을 미칠 뿐이다. 반면에 플로우는 우리 삶의 질에 직접적인 이익을 준다. 건강, 금전 그리고 다른 물질적인 편의들은 삶을 개선시킬 수도 있고, 그렇지 못할 수도 있다. 심리 에너지를 통제하는 법을 배우지 못한 사람에게는 그러한 물질적 편의도 쓸모 없는 것이 될 가능성이 많다.

 이에 반해, 모진 고난을 겪고서도 그 곤경을 이겨 냈을 뿐 아니라 결국은 자신의 삶을 진정으로 즐길 수 있게 된 사람도 많다.

 

p365

 그러나 혼란을 벗어날 수 있는 능력을 '변형적 대처'라 하고, 이러한 능력을 가진 사람들을 '용기 있는 사람'이라고 일컫는 것만으로는 이 놀라운 재능을 충분히 설명할 수 없다. 수면을 '잠자는 힘'에 의해 야기되는 현상이라고 한 몰리에르 작품 속 인물의 말처럼, 효과적인 대처가 용기라는 미덕에 의해 야기된다는 말 역시 충분한 설명이 되지 못한다. 우리에게 필요한 것은 이름과 설명뿐만이 아니라 그 과정에 대한 이해인 것이다. 불행하게도 이 문제에 대해 우리는 아직도 상당히 무지하다 할 수 있다.

 

p367

 

 사람의 일생을 통해서 좋은 일들만 일어날 가능성은 극히 희박하다. 우리가 바라는 대로 모든 일이 다 이루어질 가능성도 거의 없는 것이나 마찬가지이다. 누구나 언젠가는 실망감, 극심한 질병, 재정적 위기 그리고 결국은 피할 수 없는 죽음 등 자신의 목표와 상충되는 사건들을 겪게 마련이다. 이런 종류의 사건들은 우리의 정신에 무질서를 불러오는 부정적인 피드백들이다. 이 같은 사건들은 모두 자아를 위협하고 그 기능을 저해한다. 그 충격이 몹시 크면 그 사람은 꼭 필요한 목표에 집중할 능력을 상실할 수도 있다. 이러한 상황에 처하면 자아는 이미 그 통제력을 상실하게 되는 것이다. 극심한 타격을 받게 되면 의식이 통제를 벗어나 그 사람의 '정신이 나가게' 되며, 이에 따라 다양한 정신 질환의 증상이 나타난다. 위협을 받던 자아가 살아남기는 하지만 더 이상 성장을 못하게 되는 경우도 있다. 공격을 피하려고 움츠린 채로 대량의 방어 기제를 동원하여 후퇴를 하게 되며, 계속 의심을 벗어나지 못하는 상태에서 무기력하게 지낼 수밖에 없다.

 바로 이 같은 이유 때문에 정신의 소산 구조들이라 할 수 있는 용기, 회복력, 인내, 성숙한 방어 혹은 변형적 대처 등이 절대저그로 필요하다. 이런 것들이 없다면, 우리의 심리는 통제할 수 없는 상태가 되어 끊임없이 혼란을 겪게 될 것이다. 반면에, 우리가 이와 같은 긍정적 전략을 배운다면, 대부분의 부정적 사건들이 최소한 중립적인 것이 될 수 있으며, 더 나아가 자아를 강화시키고 복잡성을 높여 주는 도전으로 활용될 수도 있다.

 

p374

 예전 동료였던 G는 그가 공군에 복무하던 시절에 겪었던 일을 들려준 적이 있다. 그것은 안전에 대한 지나친 염려 때문에 모든 신경을 그 문제에만 집중하여 현실을 망각하게 되는 것이 얼마나 위험할 수 있는가를 잘 보여주는 섬뜩한 사건이었다. 한국전쟁 때 G의 부대가 정규 낙하산 훈련을 하게 되었다. 어느 날 부대원들이 낙하훈련 준비를 하다가 정규 낙하산의 개수가 부족하다는 사실을 발견했다. 그래서 오른손잡이였던 한 병사가 어쩔 수 없이 왼손잡이용 낙하산을 착용할 수밖에 없었다. 병기 담당 하사관이 다음과 같이 말하며 그를 안심시켰다.

 "왼손잡이용 낙하산도 다른 낙하산들과 다를 바 없다. 다만 펼치는 줄이 멜빵의 왼쪽에 달렸을 뿐이다. 어느 손을 사용해도 낙학산을 펼칠 수 있으나, 오른손보다는 왼손을 사용하는 편이 더 쉬울 것이다."

 그 팀이 비행기에 탑승을 하고, 목표 지점 위의 2천 5백 미터 상공에 도달하여 한 명씩 차례로 뛰어내리기 시작했다. 단 한 사람을 제외한 병사 전원이 성공적으로 훈련을 마쳤다. 너무나 안타깝게도 한 명의 낙하산이 펴지질 않았던 것이다.

 G는 조사 팀의 일원이 되어서 그 병사의 낙하산이 펴지지 않은 원인을 조사하도록 파견되었다. 사망한 병사는 왼손잡이용 낙하산을 받은 바로 그 병사였다. 그의 군복에서 정규 낙하산의 줄이 일반적으로 위치하게 되는 가슴 우측 부분은 완전히 찢겨 나가고 없었다. 심지어는 그의 가슴 부위 살점마저도 그의 피묻은 오른손에 의해 뜯겨져 있었다. 왼쪽으로 불과 몇 인치 옆에 바로 낙하산을 펼치는 줄이 있었건만, 그 줄에는 손을 댄 흔적이 없었다. 낙하산 자체에는 아무런 이상도 없었다. 문제는 이 병사가 그 까마득한 높이에서 떨어져 내리는 동안, 낙하산을 펼치려면 자신이 늘 잡아당기던 바로 그 위치에서 낙하산 줄을 찾아야 한다는 생각에 고착이 되어 버렸던 것이다. 그는 극심한 공포를 느낀 나머지 손을 조금만 움직이면 안전하게 낙하할 수 있다는 사실을 그만 잊었던 것이다.

 위협을 느끼는 상황에 처하게 되면, 심리 에너지를 내부로 동원해 위협에 대한 방어로 사용하는 것은 자연스러운 일이다. 그러나 이러한 타고난 대응이 오히려 대처 능력을 손상시키는 경우가 흔히 있다. 즉 본능적 반응이 내적 혼란을 더 악화시키고, 대응의 융통성을 감소시키며, 최악의 경우 그 사람을 외부 세계로부터 고립시켜 홀로 좌절감을 맛보게 할 수도 있다. 반면, 주변에서 벌어지는 상황을 계속 파악하고 있다면, 새로운 가능성들이 생겨나고 새로운 대처 방안을 강구할 수 있다. 그리하여 삶의 흐름에서 완전히 차단될 가능성이 그만큼 줄어드는 것이다.

 

p376

 우리가 살면서 겪는 거의 모든 상황이 성장의 가능성을 제시해 준다. 우리가 살펴본 바와 같이, 실명이나 신체 마비와 같은 절망적 재난들도 즐거움과 복합성을 증대시킬 수 있는 조건으로 변화될 수 있다. 심지어는 다가오는 죽음마저도 절망을 주기보다는 의식 속의 조화를 창조하는 역할을 하기도 한다.

 그러나 이처럼 되기 위해서는 예기치 않은 기회를 파악할 수 있는 준비가 되어 있어야만 한다. 우리들 대부분은 유전적 소인과 사회적 조건화에 의해 형성된 관습적 상례에 너무도 젖어 있어서, 어떠한 다른 진로를 선택할 수 있는 대안을 무시해 버리는 경우가 많다. 모든 것이 순조로울 때는 전적으로 유전적 소인과 사회적 통념만을 따르며 사는 것도 괜찮다. 그러나 생물학적 · 사회적 목표들에 차질이 생기게 되면 - 이것은 장기적으로 볼 때 피할 수 없는 일이기도 하다 - 새로운 목표를 설정하여 자신을 위한 새로운 플로우 활동을 개발해야 한다. 그렇지 않으면 내적 갈등을 겪느라 모든 에너지가 낭비되고 말 것이다. 그렇지만 어떻게 해야 이러한 대체적 전략을 발견할 수 있는 것일까? 그 답은 기본적으로 간단하다. 자의식 없는 자신감을 갖고 주변 환경에 대해 언제나 깨어 있으면서 그 안에서 융통성 있게 대처하면 해결책이 나올 가능성이 큰 것이다.

 인생의 새로운 목표를 찾는 과정은, 예술가가 독창적인 작품을 창장하려 애쓰는 과정과 여러 면에서 유사하다. 독창성이 결여된 화가는 무엇을 그릴 것인지 마음을 미리 정한 후 끝까지 본래의 의도대로 작품을 완성시킨다. 반면, 창의성이 풍부한 화가는 같은 기술적 수준을 지니고 있다 하더라도 마음속 깊이 느낌은 있지만 아직 확정되지 않은 목표를 가지고 작업을 시작한다. 그리고 캔버스에 나타나는 예기치 않은 색과 형태에 따라 그림을 계속 수정해 나가 결국 애초의 의도와는 전혀 다른 창작품을 탄생 시키는 것이다. 만일 화가가 자신의 내적 감정을 잘 살리고, 자신이 원하는 바가 무엇인지를 알며, 캔버스 위의 변화에 관심을 기울인다면, 좋은 작품이 나오기 마련이다. 반면, 완성된 그림이 어떠해야 한다고 미리 생각해 둔 고정 관념에만 집착하고, 자신의 눈앞에 펼쳐지는 형태가 제시하는 여러 가능성들을 무시해 버리는 화가의 그림은 진부한 작품이 되고 만다.

 우리 모두는 인생에서 무엇을 원하는가에 관한 선입견을 가지고 시작한다. 여기에는 생존을 위해 우리의 유전자 속에 내재된 욕구들(음식과 안락함, 성에 대한 욕구 및 다른 동물들보다 우위를 점하려는 욕구들)이 포함되어 있다. 또한 우리의 특정한 문화가 우리에게 주입한 욕구들(날씬하고, 부자이며, 교육을 많이 받고, 다른 사람들이 좋아하는 그런 사람이 되고 싶어하는 욕구들)도 있다. 우리가 이러한 목표들을 채택하고 또 운이 좋다면, 우리가 사는 시대와 장소에서 이상적이라 여겨지는 육체적 · 사회적 이미지를 복제해 낼 수 있을 것이다.

 그러나 과연 이런 것이 우리의 심리 에너지를 최대한 활용하는 길인가? 그리고 만일 우리가 이러한 목표들은 달성하지 못하면 어떻게 되는가? 캔버스에 나타나는 상황에 언제나 주의를 기울이고 살피는 화가처럼, 우리 주변에 일어나는 사건들에 언제나 관심을 기울이며, 그러한 사건들을 선입견에 좌우되지 않고 감정이 느끼는 대로 판단하지 않으면, 우리는 결코 다른 가능성들을 인식하지 못하고 말 것이다. 우리가 자아 성장의 새로운 가능성을 깨닫게 되면 우리에게 이제까지 주입되어 온 생각들은 크게 달라진다. 이를테며, 어떤 사람을 때려주는 것보다는 그 사람을 돕는 것이 더 만족을 주며, 회사 사장과 골프를 치는 것보다 두살박이 꼬마와 이야기를 나누는 것이 훨씬 더 즐거운 일이 될 수도 있다는 사실을 알게 될 것이다.

 

p379

 '자기 목적적 자아'의 소유자는 위협의 소지가 되는 요인들을 즐거운 도전으로 쉽게 변화시킬 수 있다. 이러한 사람들은 쉽사리 권태를 느끼지 않고 좀처럼 근심 걱정에 얽매이지 않는다. 또 주변의 상황에 늘 깨어 있으면서 대부분의 시간 동안 플로우를 경험한다. '자기 목적적 자아'라는 용어는 글자 그대로 '스스로 만들어 낸 목적을 가지고 있는 자아'를 의미한다. 그리고 이런 사람들은 자아에서 만들어지지 않은 목표들을 상대적으로 덜 갖고 있다. 대부분의 사람들은 생물학적 욕구와 사회적 통념에 의해 형성되어지므로, 자기 자아에서 발현된 목표들이 아닌 것이다.

 자기 목적적 자아를 가진 사람은 엔트로피를 유발할 가능성이 있는 경험을 플로우로 변화시킨다. 자기 목적적 자아를 개발할 수 있는 규칙들은 비교적 간단하다. 이 규칙들은 플로우 모델에서 직접 도출된 것들로 다음과 같이 간략하게 요약할 수 있다.

 

1. 목표를 설정하기

 플로우를 경험할 수 있으려면 노력의 대상이 될 분명하고 혁신적인 목표들을 가지고 있어야만 한다. 자기 목적적 자아를 가진 사람은, 결혼을 하거나 작업을 정하는 등 일생 동안의 책임을 수반하는 선택에서부터, 주말 계획을 세운다거나 치과에서 진료 차례를 기다리는 동안 어떻게 시간을 보낼 것인지와 같은 사소한 결정에 이르기까지, 안달하거나 당황함이 없이 선택을 하는 법을 배우게 된다.

 목표의 설정은 어떤 것을 도전으로 인식하는가와 관련이 있다. 만일 내가 테니스를 배우기로 결정을 한다면, 서브하는 법과 백핸드 및 포어핸드 사용법을 배워야 하며 지구력과 반사 능력을 키워야 한다. 혹은 그 반대로, 공을 쳐서 넘기는 것 자체가 좋아서 테니스를 배워야겠다는 목표를 세울 수도 있다. 어떤 경우든 목표와 도전은 서로 불가분의 관계를 가지고 있다.

 목표와 도전을 달성하기 위한 일련의 행동 체계가 규정되면, 그 체계안에서 필요한 기술을 개발해야 한다. 내가 만일 현재의 직업을 그만두고 휴양지의 경영자가 되기로 결정한다면, 호텔 경영 · 재정 관리 · 상업적 위치 선정 등 여러 가지를 배워야 한다. 물론 역순으로 일이 시작될 수도 있다. 자신이 어떠한 기술을 가지고 있는가에 따라 그러한 기술을 활용할 수 있는 특정한 목표를 세울 수도 있다. 즉 본인 스스로 적합한 자격을 갖추고 있다고 생각하여 휴양지 경영인이 되기로 결심할 수도 있는 것이다.

기술을 개발하기 위해서는 자신의 행동의 결과에 주의를 기울여야 한다. 즉 피드백을 관찰해야 하는 것이다. 유능한 휴양지 경영인이 되기 위해서는 사업 자금을 대여해 줄 가능성이 있는 금융인들이 내가 제출한 사업 계획서를 어떻게 생각하는지를 정확히 판단할 수 있어야 한다. 또한 고객이 좋아하는 것들은 무엇이며, 또 그들이 싫어하는 것들은 무엇인지도 알아야만 한다. 피드백에 지속적 관심을 기울이지 않는 사람은 곧 행동 체계로부터 이탈되어 더 이상 기술의 발전을 이루지 못하기 때문에 유능한 경영인이 되기 어렵다.

 자기 목적적 자아를 가진 사람은 자신이 어떤 목표를 추구하고 있든 그 목표를 선택한 사람이 바로 자기 자신이라는 점을 잘 알고 있다. 이는 바로 자기 목적적 자아를 가진 사람과 그렇지 못한 사람에게 나타나는 기본적인 차이점 가운데 하나이다. 이 같은 사실은 서로 상반되는 듯이 보이는 두 가지 결과를 초래한다. 그 하나는, 스스로 내린 결정이라는 점을 주지하고 있기 '때문에 자신의 목표에 더욱 충실해진다는 것이다. 따라서 이 사람의 행동은 믿을 수 있으며, 스스로 통제된다. 또 다른 하나는, 결국 자신의 결정이기 때문에 그 결정 사항을 지켜나가는 것이 더 이상 이치에 만지 않을 때는 언제고 자신의 목표를 수정할 수 있게 되는 것이다. 이런 점에서 자기 목적적인 사람의 행동은 더욱 꾸준하기도 한 동시에 더욱 많은 융통성도 가질 수 있다.

 

2. 활동에 몰입하기

 일련의 행동 양식을 선택하고 나면 자기 목적적 성격을 가진 사람은 자신이 하는 일에 깊이 몰입한다. 전 세계를 무착륙으로 비행하든, 아니면 저녁식사 후 설거지를 하든지 간에 현재 하고 있는 눈앞의 일에 관심을 집중하는 것이다.

 이렇게 되기 위해서는 행동의 기회들과 자신이 보유하고 있는 기술간의 균형을 잘 맞추는 법을 배워야 한다. 어떤 사람들은 세계를 구한다든지, 혹은 스무 살이 되기 전에 백만장자가 된다는 것과 같은 현실적이지 못한 기대를 갖고 시작을 한다. 이러한 희망이 이루어지지 않을 때 대부분의 사람들은 낙담을 하고, 헛된 시도로 인한 심리 에너지의 손실 때문에 그들의 자아는 위축된다. 또 다른 극단으로, 자신에게 잠재된 능력을 스스로 믿지 않아서 침체되는 사람도 많다. 그들은 안전은 하지만 사소한 목적을 선택하여, 최대한 가장 낮은 수준에서 복합성의 성장을 중지시키고 만다. 행도에 몰입할 수 있으려면 환경의 요구와 자신의 활동 능력간의 적절한 균형점을 찾아야 한다.

 예를 들면, 어떤 사람이 사람들로 가득 찬 방으로 걸어 들어가면서 가능한 한 많은 사람들과 사귀며 즐거운 시간을 보내기로 결심을 했다고 치자. 만일 자기 목적적 자아가 결여되어 있다면, 그는 혼자서 사람들과의 상호 작용을 시작할 능력을 갖추고 있지 못하여, 구석으로 가서는 누군가가 자신을 주목해 주기만을 바라고 있을 것이다. 또는 떠들썩하게 행동하거나 지나치게 말솜씨가 좋은 척하여, 결국 이 같은 부적절하고 피상적인 친근감으로 인해 오히려 다른 사람들이 기피하는 존재가 될 수도 있다. 이런 두 전략을 가지고는 성공을 한다거나 즐거운 시간을 보낼 수 있는 가능성이 극히 희박하다.

 반면에 자기 목적적 자아를 가진 사람은 그 방에 들어서자마자 주의를 자신으로부터 파티, 즉 자신이 가담하고 싶은 '행동 체계'로 돌릴 것이다. 그는 파티에 참석한 사람들을 관찰하여 그들 중 자기와 공통적인 관심사를 갖고 있으며 성격 또한 비슷한 사람이 누구인가를 가려내고, 자신이 생각하기에 쌍방 모두가 관심이 있을 듯한 주제로 그 사람과 대화를 시작할 것이다. 만약 피드백이 부정적이라면, 즉 대화가 지루해지거나 어느 한 사람에게 너무 어려워 이해가 되지 않는 주제라면 다른 주제를 택하거나 새로운 대상과 이야기를 나누게 될 것이다. 자신의 행동이 행동 체계의 기회와 걸맞을 때만이 진정한 몰입이 가능하다.

 몰입은 집중력에 의해 크게 촉진된다. 주의력 결핍 증세가 있는 사람이나, 끊임없이 주의가 산만한 사람은 인생의 플로우에서 언제나 제외된 느낌을 받게 된다. 이들은 매순간의 일과성 자극에 큰 영향을 받는다. 자신의 의지와 상관없이 주의가 다른 곳으로 돌려지는 것은 통제력을 갖고 있지 않다는 가장 확실한 증거이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대부분의 사람들이 자신의 주의력을 향상시키려는 노력을 소홀히 한다는 것은 참으로 놀라운 사실이다. 만일 책을 읽는 것이 너무 어렵게 느껴지면, 우리는 집중력을 높이려 하는 대신 습관적으로 텔레비젼을 틀게 마련이다. 그러나 텔레비전 시청에는 최소한의 주의력만 있으면 된다. 더군다나 사실상 그 얄팍한 주의력조차 광고와 알맹이 없는 내용에 의해 분산되고 만다.

 

 3. 주변 상황에 관심을 기울이기

 집중을 하면 몰입을 하게 되며, 이와 같은 몰입은 지속적인 주의력 투입이 있어야만 유지될 수 있다. 육상 선수들은 경기 도중 잠시만 한눈을 팔아도 시합에 진다는 사실을 잘 알고 있다. 중량급 권투 선수가 상대방의 어퍼컷이 들어오는 것을 보지 못한다면 녹아웃되고 말 것이다. 또한 농구선수가 관중들의 함성에 정신이 팔린다면 정확히 슛을 하지 못할 것이다. 복합성의 체계에 참여하고 있는 사람 누구에게나 이와 똑같은 함정이 도사리고 있다. 그 체계 속에 계속 남아 있으려면 심리 에너지를 투자해야만 한다. 자녀의 말을 집중해서 들어주지 않는 부모는 부모와 자식간의 상호 작용을 저해시킬 수 있고, 주의가 산만한 변호사는 소송에서 패소할 수 있으며, 한눈을 파는 외과 의사는 환자를 죽음으로 몰 수도 있는 것이다.

 

 자기 목적적 자아를 지니고 있다는 것은 몰입을 지속할 능력도 갖고 있음을 의미한다. 가장 흔하게 주의를 산만하게 하는 자의식도 자기 목적적 자아를 가진 사람에게는 문제가 되지 않는다. 이러한 사람은 자신이 얼마나 잘하고 있는지, 또한 다른 사람들에게 자신이 어떻게 보이는지에 관해 걱정을 하는 대신 온 마음으로 자신의 목표에 전념할 수 있다. 너무 깊이 몰입을 한 나머니 자의식을 느끼지 못하는 경우도 있고, 이와는 반대로 자의식이 별로 없기에 깊은 몰입이 가능한 경우도 있다. 자기 목적적 성격의 구성 요소는 상호 인과 관계의 고리에 의해 서로 연결되어 있다. 목표 선정, 기술 개발, 집중력의 향상 혹은 자의식을 없애는 일 가운데 어떤 것을 먼저 선택해 시작을 하는가는 그리 중요하지 않다. 플로우 경험이 일단 시작되면 다른 요소들도 취득하기가 훨씬 용이해지므로 어느 것을 먼저 시작해도 상관이 없는 것이다.

 자신에 대해 염려하지 않고 상호 작용에 주의를 집중하는 사람은 역설적인 결과를 얻는다. 더 이상 자신을 독립된 개체로 느끼지 않지만, 동시에 그 사람의 자아가 한층 강화되는 것이다. 자기 목적적인 사람은 심리 에너지를 자신이 포함된 체계에 투자함으로써 개인의 한계를 벗어난 성장을 이룰 수 있다. 이와 같은 개인과 체계간의 결합으로 인해 자아가 복합적인 성장을 이루게 된다. 바로 이런 이유 때문에 사랑을 하고 그 사랑을 잃는 편이 한 번도 사랑을 해보지 않는 것보다 낫다고 할 수 있는 것이다.

 

 모든 것을 자기 중심적 견해에서 파악하는 사람의 자아가 좀더 확고한 것처럼 보일 수도 있다. 그러나 이러한 자아는 기꺼이 헌신을 하고 몰입을 하며 자신의 이익만을 위해서가 아니라 상호 작용을 위해서 주변의 상황에 관심을 갖는 사람의 자아에 비한다면 상대적으로 결핍되어 있다고 볼 수 있다.

 시카고 시청 건너편의 광장에서 열렸던 피카소의 거대한 야외 조각 작품 제막식에서 나는 우연히 옆에 서게 된 개인 상해 전문 변호사와 이야기를 나누게 되었다. 기념 연설이 장황히 지속되고 있을 때, 나는 그가 무엇인가에 집중을 한 표적으로 입술을 달싹거리고 있는 것을 보았다. 무엇을 생각하고 있느냐고 묻자, 만일 아이들이 저 조각 작품에 기어오르려다 다치게 되어 소송을 건다면 시카고시가 지불해야 할 소송 비용을 추산해 보고 있는 중이라고 대답하였다.

 모든 것을 자신의 기술이 해결할 수 있는 직업적 문제로 변화시켜 지속적인 플로우를 경험할 수 있는 이 변호사를 과연 운이 좋은 사람이라 해야 할까? 아니면, 자신에게 이미 익숙한 일들에만 주의를 집중하고, 그 행사의 심미적 · 시민적 · 사회적 의미를 무시함으로써 스스로 성장의 기회를 박탈하는 사람이라 해야 할 것인가? 두가지 해석 모두 일리가 있을 것이다. 그러나 장기적인 관점에서는, 세상을 전적으로 자신의 자아가 감당할 수 있는 협소한 창으로 파악하는 것은 스스로를 제한하게 된다. 명성이 높은 정신과 의사나 미술가 혹은 정치가들조차도, 유일한 관심사가 이 우주 속에서 자신이 맡은 제한적 역할에만 국한될 때는 공허한 존재가 되어 더 이상 삶을 즐길 수 없는 것이다.

 

4. 지금 현재의 경험 즐기는 법 배우기

 자기 목적적 자아를 갖춤으로 해서 - 목표를 설정하는 법을 배우고, 기술을 개발하고, 피드백에 늘 관심을 기울이고, 집중하고 몰입하는 법을 체득함으로써 - 얻을 수 있는 결과는, 객관적 상황이 몹시 좋지 않을 때도 삶을 즐길 수 있다는 것이다. 정신을 통제할 수 있다는 것은 글자 그대로 어떤 일이 발생한다 하더라도 그 일이 즐거움의 원천이 된다는 것을 의미한다. 몹시 더운 날 시원한 산들바람을 느끼는 것, 고층 건물의 유리벽에 반사되는 구름의 모양을 관찰하는 것, 강아지와 노는 아이를 보는 것, 물 한잔을 마시는 것 등 이 모든 것들이 깊은 만족감을 주는 경험이 되어 우리의 삶을 풍부하게 해주는 것이다.

 그러나 이러한 통제력을 얻기 위해서는 결의와 훈련이 전제되어야 한다. 최적 경험은 향락적이거나 안일한 삶의 자세로는 결코 얻을 수 없다. 긴장이 풀린 자유 방임적 태도로 혼란에 대한 충분한 방어가 되지 못한다. 이 책의 초반부에서부터 우리가 살펴본 바와 같이, 읨의적 사건들을 플로우로 변화시키기 위해서는 능력을 신장시키고, 한결 나은 사람이 되게 해주는 기술을 닦아야만 한다.

 플로우는 각 개인이 창의적이고 뛰어난 성취를 이루도록 해준다. 즐거움을 유지하기 위해 고도의 기술을 개발해야 하는 필연성이 있었기에 문화적 진보도 가능한 것이었다. 바로 이러한 필연성으로 인해 각 개인과 문화들이 한층 더 복합적인 존재로 성장할 수 있었다. 경험의 질서를 창조해 냄으로써 얻는 보상이 진화를 촉진시키는 추진력이 되어 왔으며, 우리의 자리를 대신하게 될, 우리들보다 더 현명하고 복합적인 삶을 사는 우리의 후손들을 위한 기반을 마련해 주었다.

 그러나 모든 생활을 플로우로 변화시키기 위해서는 단지 매순간의 의식 상태를 통제하는 법을 배우는 것만으로는 충분치 못하다. 일상의 삶이 의미를 가질 수 있도록 각 목표들의 전후 관계를 파악하는 일 역시 필요한 것이다. 만일 서로 연결되는 질서가 없이 이 플로우에서 저 플로우로 옮겨 다닌다면, 훗날 인생을 정리하는 시기를 맞아 과거를 돌이켜 볼 때 자신의 과거에서 큰 의미를 발견할 수 없을 것이다. 자신이 하는 일이 무엇이든지간에, 그 일에서 조화를 창조하는 것이 최적 경험을 얻고자 하는 사람들에게 플로우 이론이 제시하는 마지막 과제이다. 이는 지속적인 목적 의식을 제공해 주는 통합된 목표들을 추구해 가면서, 삶 전체를 하나의 플로우 활동으로 변화시키는 것을 의미한다.

 

 

10장. 의미 창조하기(The Making of Meaning)

 

p392 

 개인의 관점에서 보면, 일생 동안 심리 에너지의 질서를 창조하기에 충분할 만큼 강한 흥미를 돋우는 것이라면 그 궁극적 목표가 무엇이 되는가는 그리 중요하지 않다. 도전의 목표는 천차만별이다. 주위에서 가장 훌륭한 맥주병들을 수집하여 소장하는 것이 될 수도 있고, 암 치료법을 발견하려는 결의일 수도 있으며, 혹은 살아남아 훌륭히 성장할 자녀를 두는 생물학적인 의무와 관련된 단순한 것일 수도 있다. 분명한 목적과 분명한 행동 규칙 그리고 집중하여 몰입할 수 있는 길을 제공해 주는 한, 어떤 목표가 되든 한 개인의 삶에 의미를 주기에 충분한 것이다.

 나는 지난 몇 년 동안 전기 기술자, 비행기 조정사, 사업가, 교사 등의 직업을 가지고 있는 사우디 아라비아와 그 외 아랍 산유국들 출신의 몇몇 회교도들과 잘 알게 되었다. 나는 그들과 이야기를 나누면서 심한 곤경에 처해 있는 상황에서도 그들 대부분이 느긋한 자세를 보일 수 있다는 사실에 놀라움을 금할 수 없었다. 어떻게 그럴 수 있느냐고 질문을 하자 그들은 한결같이 다음과 같은 요지의 답변을 했다.

 "별거 아니에요. 우리는 우리의 삶이 신에게 달려 있다는 것을 믿기 때문에 그케 동요하지 않습니다. 신이 어떤 결정을 내리든 우리는 그것을 그저 받아들일 뿐이랍니다."

 우리 문화에도 이와 같은 무조건적 신앙이 널리 퍼져 있던 때가 있었는데, 요즈음은 이런 신앙을 찾기가 그리 쉽지 않다. 우리는 전통적 신앙의 도움이 없이 인생에 의미를 줄 목표를 스스로 발견해야 한다.

 

p394

 플로우를 경험하기 위해서는 시합에서 승리하는 것, 어떤 사람과 사귀는 것, 어떤 것을 특정한 방식으로 성취하는 것 등과 같은 자신의 행동 목표가 설정되어 있어야만 한다. 대체로 목표 그 자체는 그리 중요하지 않다. 중요한 것은 목표가 그 사람의 주의를 집중시키고, 성취 가능하며 즐거운 활동에 몰입하도록 해준다는 점이다.

 이처럼 전 생애에 걸쳐서 자신의 심리 에너지를 뚜렷하게 집중시킬 수 있는 사람들이 있다. 각 플로우 활동의 서로 다른 목표들이 모든 것을 총망라하는 일련의 도전 목표들로 통합되어 그 사람이 하는 모든 일에서 의미를 찾을 수 있게 되는 것이다. 이 같은 목표 지향성을 달성할 수 있는 방법들은 서로 큰 차이를 보인다. 나폴레옹은 기꺼이 수십만 명의 프랑스 병사들을 죽음으로 내몰면서까지 오로지 권력 추구에 전 생애를 바쳤다. 테레사 수녀는 신앙에 바탕을 둔 무조건적인 사랑에 삶의 목적을 두고 곤공한 사람들을 돕는 일에 자신의 모든 에너지를 투자했다.

 순수한 심리학적 견지에서 본다면, 나폴레옹이나 테레사 수녀 모두 같은 수준의 내적 목적 의식을 갖고 같은 수준의 최적 경험을 달성했다고 할 수 있다. 그러나 이들이 갖는 명백한 차이점은 한층 더 광범위한 윤리적 문제를 제기해 준다. 즉 당사자의 삶에 의미를 부여해 주었던 이들 두 방식으로 초래된 결과가 무엇이었나 하는 점이다. 나폴레이옹이 수많은 사람들의 삶에 혼란을 불러일으켰던 반면, 테레사 수녀는 많은 사람들의 의식 속에서 엔트로피를 감소시켰다고 결론을 내릴 수도 있다. 그러나 여기서는 행동의 객관적 가치에 대해 어떤 판단도 내리지 않기로 한다. 그 대신 통일된 목적이 개인의 의식에 가져달 줄 수 있는 주관적 질서를 설명하는 일에만 관심을 갖도록 하자. 이런 뜻에서 "삶의 의미란 무엇인가?"라는 수수께끼에 대한 해답은 놀라우리만큼 간단한 것이다. 즉 삶의 의미란 바로 의미라고 할 수 있다. 그것이 무엇이든 어디에서 오는 것이든 통합된 하나의 목적이 바로 삶에 의미를 주는 것이다.

 

 

 

 여러 목표들을 하나로 통일시켜 주는 목적을 찾는 것만으로 부족하다. 목적을 끝까지 달성해야 하며 그에 따르는 어려움들을 극복해 내야 한다. 목적을 위해 각고의 노력을 기울여야 하며 의도한 바가 행동으로 나타나야 한다. 이러한 것을 목표를 달성하기 위한 결의(resolution)라고 해도 좋을 것이다. 그 사람이 처음 설정한 목표를 실지로 달성했는지의 여부는 그리 중요하지 않다. 중요한 것은 자신의 목표 달성을 위해 충분한 노력을 경주하면서 노력을 분산하거나 낭비하지 않는 것이다. "창백한 사고의 그늘에 가리워 결의가 가졌던 본래의 색조가 변하면, 우리의 중요한 진취적 기상은 행동이라는 이름을 잃게 된다"라고 햄릿은 말했다. 무엇을 해야 할지를 정확히 알고 있으나 그것을 하기 위해 충분한 에너지를 집중할 수 없는 사람을 만나는 것만큼 슬픈 일도 드물다. 블레이크는 예의 그 힘찬 필치로 다음과 같이 썼다.

 "바라기는 하되 행동하지 않는 자는 해악을 낳는다."

 

p397

 인간의 역사를 통해서 존재의 의미를 부여해 줄 만한 궁극적 목적을 찾기 위한 시도가 수없이 많이 이루어져 왔다. 이러한 시도의 종류도 다양했다. 예를 들어 사회철학자 한나 아렌트에 따르면, 고대 그리스 문명에서는 남자들이 영웅적인 행위를 통하여 불후의 명성을 얻으려 했다. 아렌트는 궁극적 목적이란 죽음에 관한 문제를 나름대로 해결해 줄 수 있는 것이어야 한다고 말한다. 즉, 죽음 이후에까지 연장될 수 있는 어떠한 목적의식을 사람들에게 심어줄 수 있어야 한다는 것이다. 불후의 명성이나 영생 모두 이 점을 해결해 주시만, 그 방법에는 큰 차이가 있다. 그리스 시대 영웅들은 자신의 용맹스러운 행위가 노래와 전설로 대대손손 전해질 것을 기대하며 동료들의 감탄을 자아낼 수 있는 숭고한 행위를 하였다. 그렇게 되면 후손들의 기억 속에서 영원불멸의 존재가 될 것이기 때문이다. 이와는 대조적으로, 성자들은 후일 신의 곁에서 영원히 살 수 있기를 기대하며 자신들의 생각과 행위가 신의 의지에 부합할 수 있도록 스스로 개인성(個人性)을 포기했다.

 영웅이나 성자들 모두 일생에 걸쳐 일관성 있는 행동을 하도록 해준, 모든 것을 총망라하는 목표에 모든 심리 에너지를 바침으로써 자신들의 삶을 통일된 플로우 경험으로 변화시킨 사람들이라 할 수 있다. 사회의 다른 구성원들은 성자나 영웅의 예에는 미치지 못했지만, 이러한 뛰어난 모델을 본보기로 삼아 자신들의 행위를 규제함으로써 삶에 어느 정도 적절한 의미를 부여할 수 있었다.

 분명 모든 인간의 문화에는 각 개인의 목표들을 정리해 줄 수 있는 망라적 목적의 역할을 하는 의미 체계가 있다. 소로킨은 서양 문명의 다양했던 시대를 세 가지 유형으로 구분하였는데, 2,500년이 넘는 기간 동안 세 유형이 번갈아서 나타났으며 각 유형이 길게는 수백 년 짧게는 불과 수십 년 정도만 지속되었다고 주장한다. 그는 이 유형들을 각각 감각주의적(sensate) · 관념주의적(ideational) · 이상주의적(idealistic) 문화의 시기라고 명명하고, 시기에 따라 서로 다른 삶의 우선 순위들이 존재의 목적을 정당화시켜 주었음을 입증하려 했다.

 감각주의적 문화는 감각을 만족시키도록 고안된 세계관을 중심으로 구성된다. 이러한 문화들은 쾌락주의적 · 공리주의적인 경향을 띠고 있으며, 주로 구체적 욕구에 중점을 둔다. 이 같은 문화에서는 예술 · 종교 · 철학 그리고 일상적인 행위들이 주로 실체적인 경험 위주의 목표들을 찬미하고 정당화시켜 준다. 소로킨에 따르면, 이러한 감각주의적 문화가 기원전 약 440~200년까지 유럽에서 우세하였으며, 기원전 420~400년 사이에 그 절정을 이루었다고 한다. 또한 19세기에도 최소한 선진 산업 민주주의 국가들에서 지배적이었다고 한다. 감각주의적 문화 속에 사는 사람들이 반드시 더 유물론적이지는 않다. 그렇지만 추상적인 원칙들보다는 주로 쾌락과 실용성에 입각해서 목표를 조직하고 행동을 정당화시킨다. 이들의 도전 목표는 전적으로 인생을 더 쉽고, 안락하며, 쾌락적인 것으로 만들려는 것들이다. 이들은 쾌감을 주는 것을 선으로 여기며 이상화된 가치들은 불신한다.

 관념주의적 문화들은 감각주의적 문화와는 상반되는 원칙에 입각하여 조직된다. 즉 실체적인 것들을 경멸하고, 정신적 · 초자연적인 목적들을 위해서 노력한다. 이러한 문화들은 추상적인 원칙들과 금욕주의 그리고 물질저인 관심으로부터의 초월을 강조한다. 예술 · 종교 · 철학 그리고 일상적 행위의 정당화는 이러한 정신적 질서의 구현에 종속되는 경향이 있다. 사람들은 종교나 관념에 관심을 두며 삶을 더욱 쉽게 하려는 목적보다는 내면 세계의 명료함과 확신에 도달하기 위해 도전이 목표를 설정한다. 기원전 600~500년까지 그리스와 기원전 200~서기 40년에 이르는 서유럽에서 이 같은 세계관이 절정을 이루었다고 소로킨은 말한다. 좀더 최근의 유감스러운 예로는, 자치 독일 · 공산 러시아 · 중국 그리고 이란에서의 회교 세력 부활 등을 들 수 있다.

 간단한 예로 감각주의적 문화와 관념주의적 문화의 차이를 설명할 수 있다. 파시스트적 사회는 물론이고 우리의 사회에서도 신체적 건강이 중시되며 인간의 육체적 아름다움이 숭배의 대상이 된다. 그러나 그 이유에는 큰 차이가 있다. 우리의 감각주의적 문화에서는 건강과 쾌락을 위하여 육체를 가꾼다. 관념주의적 문화에서 육체가 중시되는 주된 이유는, '아리안 인종의 우월성' 혹은 '로마인의 용기'와 같은 관념과 관련된 형이상학적 완전성이라는 추상적 원칙의 상징으로 여겨지기 때문이다. 감각주의적 문화에서는 잘생긴 젊은이의 포스터가 상업적인 목적으로 성적 반응을 유발시킨다. 반면, 관념주의적 문화에서는 똑같은 포스터가 이념적인 성명서가 되어 정치적 목적을 위해 이용되는 것이다.

 물론 어느 시대의 어느 민족도 다른 관점은 배제하고 위에서 소개된 경험을 정리하는 두 관점에만 입각하여 목적을 설정하지는 않았다. 다양한 하위 유형들 및 감각주의적 관점과 관념주의적 관점이 복합된 세계관이 같은 문화 안에서, 그리고 심지어는 한 사람의 의식 속에서도 공존할 수 있는 것이다. 예를 들어, 여피적 생활 양식은 주로 감각주의적 원칙에 입각한 것이며, 미국 남부의 신앙이 두터운 바이블 벨트 지역의 근본주의는 관념주의적 전제에 기초를 둔 것이다. 위의 두 형태는 서로 많은 차이점을 보임에도 불고하고 현재 미국 사회 체제 내에서 다소 거북하게나마 공존하고 있다. 그리고 목표 체계로서 기능을 하는 위의 두 방식 모두 삶을 조직화하여 하나의 일관된 플로우 활동으로 변화시키는 데 각각 기여하고 있다.

 문화뿐만 아니라 각 개인들도 역시 이와 같은 의미 체계를 행동으로 구현한다. 기업가다운 확고한 도전 목표들을 중심으로 삶을 살아왔던 아이아코카나 로스 페로와 같은 유수 기업인들은 종종 감각주의적 삶의 특징들을 아주 잘 보여준다. 이보다 더 초보적인 감각주의적 세계관을 잘 보여 준 사람은 휴 헤프너로서, 그의 '플레이보이 철학'은 단순한 쾌락 추구의 극명한 예가 된다. 신의 섭리에 대한 맹목적 신앙과 같은 단순하고도 초월적인 해결책을 주창하는 공상가나 신비주의자들은 무분별한 관념주의적 접근의 대표적인 예이다. 물론 다른 변형된 형태들도 많다. 베이커 부부나 지미 스와거트와 같이 텔레비전을 통해 설교를 하던 복음 전도자들은, 시청자들에게는 공공연히 관념주의적 목표들을 중시하라고 권고하면서 실제 그들은 사치와 감각적 쾌락에 젖은 생활을 했다.

 때로는 서로 완전히 상반되는 위의 두 원칙들을, 양자의 장점은 모두 유지하면서도 각각의 단점들은 최소화시켜 설득력 있는 하나의 통일체로 통합하는 문화들도 있다. 소로킨은 이 같은 문화들을 '이상주의적' 문화라 명명한다. 이러한 문화는 구체적인 감각적 경험을 수용하면서도 정신적 측면에 대한 경외도 가지고 있다. 소로킨의 분류에 따르면, 서유럽에서는 중세 말기와 르네상스 시대가 비교적 가장 이상주의적 문화를 이루었던 시기이며, 14세기 처음 20년 동안이 그 절정기였다고 한다. 말할 필요도 없이, 흔히 순수한 유물사관의 부작용인 무기력함과 많은 관념주의적 체제들의 폐해라 할 수 있는 지나친 금욕주의를 피할 수 있는 이상주의적 해결책이 가장 바람직한 것으로 보인다.

 이처럼 문화를 단순히 삼분하여 해석하는 소로킨의 분류법은 논란의 여지가 있긴 하지만, 사람들이 궁극적 목적을 설정할 때 기준이 되는 일부 원칙들을 설명하는 데는 매우 유용하다. 구체적 도전 목표들에 대응해 나가며 대체로 물질적 목적을 지향하는 플로우 활동을 중심으로 삶의 형태가 이루어지는 감각주의적 삶의 양식은 언제나 인기가 높다. 이 양식이 갖는 장점의 하나는 모든 사람이 규칙을 이해할 수 있으며 피드백이 비교적 명확하다는 것이다. 누구나 건강 · 금전 · 권력 · 성적 만족을 바라는 것은 분명한 사실이다. 그러나 관념주의적 양식 또한 나름대로의 장점들을 갖고 있다. 형이상학적 목표들의 성취가 불가능할 수는 있을지언정 그렇다고 성취에 실패했다는 것도 결코 입증할 수 없다는 점이다. 진정으로 관념주의적 가치를 신봉하는 사람은 언제나 피드백을 왜곡해서 결국 자신이 옳았으며 자신이 선택받은 사람 중의 하나임을 증명하는 데 이용한다. 모든 것을 총망라하는 플로우 활동으로 삶을 통합할 수 있는 가장 만족스러운 방법은 아마도 이상주의적 양식일 것이다. 그러나 물질적 조건을 향상시키는 동시에 정신적 목적을 추구할 수 있는 도전 목표들을 설정한다는 것은 쉬운 일이 아니다. 더군다나 문화의 전반적 성격이 감각주의인 경우에는 그 어려움이 커지게 마련이다.

 각 개인의 행동 양식을 어떻게 설정하는가를 설명할 수 있는 또 다른 방법은 이들이 스스로를 위해 세운 도전 목표의 내용보다는 복합성의 정도에 초점을 맞추는 것이다. 어쩌면 가장 중요한 것은 그 사람이 유물론적인가 혹은 이상주의적이가 하는 사실이 아니라 그가 그런 분야에서 추구하는 목표들이 얼마나 분화되어 있으며 또 통합되어 있는가 하는 문제일 것이다. 2장의 마지막 부분에서 논의한 바와 같이 복합성이란 어떤 체제가 나름대로의 장점과 잠재 능력을 얼마나 잘 개발하는가 그리고 이러한 장점들의 상호 연계가 얼마나 잘 되어 있는가의 여부에 따라 결정되는 것이다. 이런 점에서, 충분히 숙고한 후 결정한 감각주의적 삶의 자세, 즉 다양하고도 구체적인 인간의 경험을 충분히 고려하면서도 내적 일관성을 유지하는 자세가 무분별한 관념주의나 감각주의보다 바람직하다 할 수 있을 것이다.

 

p403

 앞의 설명에서, 복합적인 의미 체계의 구축은 관심을 자아와 타인에게 번갈아 집중시키는 과정을 통해서 이루이즌 것 같다. 첫 번째는, 심리 에너지를 생물학적 욕구에 투자하는 단계로, 이 단계에서 정신적 질서는 곧 쾌락에 해당한다. 이러한 수준에서 잠정적으로 도달하게 되면 지역 사회의 목표들에 관심을 투자하기 시작한다. 그리하여 집단적 가치를 반영한 의미 있는 것들 - 즉 종교와 애국심 그리고 다른 사람들로부터 받는 인정과 존경 등 - 이 내적 질서의 변수가 된다. 다음의 변증법적 단계에서는 관심이 다시 자아로 이동을 한다. 더욱 광범위한 큰 인간 체제에서 소속감을 성취했으므로 이제는 개인적 잠재력의 한계를 인식하고자 하는 것이다. 이는 자아의 실현을 위한 시도들로 이어지며, 이때 각기 다른 기술과 사상 그리고 원칙들을 시험해 보게 된다. 이 단계에서는 쾌락(pleasure)보다는 즐거움(enjoyment)이 주된 보상의 원천이 된다. 그러나 이는 끊임없는 추구의 단계이므로, 한편으로는 중년의 위기, 직업의 변화 그리고 개인적 능력의 한계를 극복하려는 노력 등에 의해 점증하는 스트레스를 경험하게 될 수도 있다. 이 시점부터는 에너지의 방향을 마지막으로 재설정할 준비가 갖추어진다. 자신이 할 수 있는 일이 무엇인지를 알게 되었고, 이보다 더 중요한 사실, 즉 혼자서는 할 수 없는 일들이 무엇인지도 깨닫게 된다. 따라서 궁극적 목적이 한 개인보다는 큰 체계, 즉 명분 · 사상 · 초월적 존재 등에 통합되는 것이다.

 모든 사람들이 이 같은 복합성의 상승 단계를 거치는 것은 아니다. 첫 단계를 넘어설 수 있는 기회를 전혀 얻지 못하는 사람들도 있다. 생존 요구가 집요하게 어어질 때는 그 외의 다른 어떤 것에도 충분한 관심을 기울일 수 없으며, 가족이나 나 더 넓은 지역 사회의 목표들에 투자할 만한 심리 에너지가 남아 있지 않게 된다. 자신의 권익 추구만으로도 인생의 의미를 찾을 수 있다. 아마도 대다수의 사람들은 가족 · 회사 · 지역 사회 혹은 국가의 안위가 주된 의미를 부여해 주게 되는 발달의 두 번째 단계에서 편안하게 머무르고 있을 것이다. 반성적 개인주의의 단계까지 도달하는 사람은 극히 적다. 또한 그 중에서도 한정된 소수만이 보편적인 가치와의 통합을 이룬다. 이러한 단계들은 실제로 반드시 순서적으로 진행된다는 것을 의미하는 것이 아니라, 운이 좋아서 의식을 성공적으로 통제하는 사람이 어디까지 도달할 수 있는가를 보여 준다고 할 수 있다.

 지금까지 개략적으로 소개한 네 단계는 복합성을 서서히 높여감에 따라 각기 다른 의미가 생겨나게 됨을 설명하는 모델들 가운데 가장 단순한 종류에 속한다. 이 과정을 여섯 단계 혹은 심지어 여덟 단계로 나누는 모델도 있다. 몇 단계로 이루어지는가는 별로 중요하지 않다. 중요한 것은, 대부분의 이론들이 이같이 한편으로는 분화를 또 한편으로는 통합을 번갈아 이루는 변증법적인 힘의 균형 상태의 중요성을 모두 인정한다는 것이다. 이러한 관점에서 보면, 각 개인의 인생은 일련의 각기 다른 '게임'들로 이루어지는데, 이 게임들은 서로 다른 목표와 도전들로 갖추고 있으며 개인이 성숙해감에 따라 변화를 거듭하게 된다. 우리들이 이처럼 복합성을 높여 자율적이며, 자립적이고, 자신의 개성과 한계를 의식할 수 있기 위해서는 우리가 본래 가지고 있는 기술들을 더욱 연마하는 일에 에너지를 투자해야 한다. 동시에 우리는 개인적 한계를 능가하는 힘에 적응할 수 있는 방법을 인식하고, 이해하며, 찾아내는 데 에너지를 투자해야 한다. 물론, 우리가 반드시 이와 같은 계획을 따라야 할 필요는 없다. 그러나 만일 그렇게 하지 않는다면 조만간에 후회할지도 모른다.

 

p406

 그리고 이들이 이처럼 행동했기 때문에 이들이 세웠던 목표들이 원래 가치가 있는 것들이었는가의 여부와는 관계없이 실제로 보람과 가치가 있는 일들이 되었다. 또한 이들 청교도들의 목표가 헌신을 통해 소중한 것으로 변했기 때문에 이들의 생애에 의미를 부여해 줄 수 있었다.

 어떠한 목표도 진지하게 받아들이지 않는다면 큰 영향을 미치지 못한다. 각 목표에는 일련의 결과들이 수반되는 것이기 때문에 각자가 이러한 결과를 고려할 준비가 되어 있지 않다면 목표는 아무 의미도 없는 것이 되고 만다. 오르기 어려운 봉우리를 정복하려고 결심한 등반가는 자신이 등반을 하는 동안 내내 지칠 것이며 어려움에 처하게 되리라는 사실을 잘 알고 있다. 그러나 만일 그가 너무도 쉽게 포기를 해버린다면 그의 추구는 가치 없는 것이 되고 말 것이다. 모든 플로우 경험도 이와 마찬가지이다. 목표와 그 목표를 위해 기울여야 하는 노력에는 밀접한 상호 관계가 있다. 처음에는 목표들이 그 목표를 위해 기울여야 하는 노력을 정당화해 주지만, 나중에는 바로 그러한 노력들이 목표를 정당화해 준다. 사람들이 결혼을 하는 까닭은 배우자를 자신과 평생을 함께 보낼 만한 사람으로 판단했기 때문이다. 그러나 결혼 후 이 판단이 옳았던 것처럼 행동하지 않는다면, 시간이 지나면서 부부 관계는 가치를 잃게 될 것이다.

 

 모든 것을 조합해 본다면, 인류에게 자신들의 결심을 뒷받침할 만한 용기가 부족했다고는 말할 수 없다. 모든 시대의 모든 문화에서 셀 수 없이 많은 부모들이 자녀들을 위해 희생해 왔으며, 그렇게 함으로써 그들의 인생이 한층 더 의미 깊은 것이 될 수 있었다. 또한 많은 사람들이 자신의 목초지와 가축을 보전하기 위해 모든 에너ㅓ지를 바쳐 왔을 것이다. 종교와 국가 혹은 예술을 위해 모든 것을 희생한 사람들도 헤아릴 수 없이 많다. 고통과 실패에도 불구하고 꾸준히 이렇게 할 수 있었던 사람들은 그들의 인생 전체를 하나의 연장된 플로우로 변화시킬 수 있었다. 즉 이들의 삶은 중심이 확실하고, 집중이 되고, 내적 일관성이 있으며, 논리적으로 정연한 일련의 경험들의 연속이 되었던 것이다. 따라서 이러한 경험들의 내적 질서로 인해 각자가 삶을 의미 깊고 즐겁게 느낄 수 있었던 것이다.

 

 

p411

 행동과 관조는 서로 보완하고 지지해 주어야 이상적이다. 행동 그 자체는 맹목적이며 관조는 무기력하다. 어떤 목적에 많은 에너지를 투자하기 전에 근본적인 의구심을 가져보는 것이 많은 도움이 된다. 이것이 과연 내가 진정으로 하고 싶어하는 일인가? 이 일을 하면서 나는 즐거운가? 앞으로도 이 일을 즐길 수 있을 것인가? 나와 다른 사람들의 희생을 감수하면서까지 추구할 가치가 있는 목적인가? 이 목적을 달성하고 난 후의 내 자신에게 과연 만족할 수 있을까?

 

p414

 동물들이 인간과 같은 고통을 느끼게 되는 것은 그들에게 생물학적으로 내재되어 있는 목적들이 좌절될 때이다. 그들은 굶주림과 고통 그리고 충족되지 않은 성적 욕구가 주는 괴로움을 느낀다. 인간의 친구가 되도록 길러진 개들은 주인과 떨어져 혼자 있게 되면 불안해한다. 그러나 인간을 제외한 동물들은 자신의 고통을 스스로 야기시킬 만한 위치에 있지 않다. 그들은 모든 욕구가 충족되고 난 후에도 혼란과 절망을 느낄 수 있을 만큼 충분히 진화되어 있지 않다. 외적 요인으로 인한 갈등이 해결되면, 동물들은 자기 자신과의 조화를 이루게 되어 우리 인간들이 플로우라고 부르는 완전한 몰입의 상태를 경험한다.

 인간에게만 독특하게 있는 심리의 엔트로피는 자신이 실지로 성최할 수 있는 것 이상의 일들을 바라고, 여건이 허락하는 것 이상을 성취할 수 있을 것처럼 느끼는 데서 오는 상태라 할 수 있다. 즉 인간이 한 번에 하나 이상의 목표들을 염두에 두고 있어서, 서로 상충되는 욕구들을 동시에 의식할 때만 이러한 상태가 비로소 가능해지는 것이다. 엔트로피는 우리의 정신이 현재의 상태를 아는 것뿐만 아니라 다른 대안이 있으면 어떻게 될 것인가 하는 것까지도 생각하기 때문에 생겨난다. 체계가 복합적일수록 대안의 여지가 많아져서 그만큼 체계 안에서 잘못되어지는 일도 많다. 인간 정신의 진화도 이에 해당되는 경우이다. 인간 정신의 정보 처리 능력이 증대됨에 따라 내적 갈등의 가능성도 그만큼 증가되어 왔다. 욕구와 삶의 선택 사항들과 도전들이 너무 많아지면 우리는 불안해지며, 또 너무 적어지면 지루함을 느낀다.

 

p417

 

 단순한 의식이 아무리 조화로운 것이라 해도 복합적 의식보다 더 낫다고 주장하기는 어렵다. 휴식을 취하고 있는 사지의 평온함, 자신의 운명을 그대로 받아들이는 원시 종족들의 자세, 그리고 현재의 일에만 완전히 몰입할 수 있는 아이들의 단순함에 경탄을 할 수는 있겠지만, 이러한 것들이 우리의 곤경을 해결할 수 있는 모델을 제시해 주지는 못한다. 단순하고 순진함에 기초한 질서는 이미 우리의 손을 떠났다. 이미 선악과를 딴 이상 우리는 영원히 에덴 동산으로 다시 돌아갈 수 없게 된 것이다.

 

 

p419

 두 개념의 차이점을 다음과 같이 설명할 수도 있다. 즉 자신이 발견한 인생의 주제가 있는 사람은 개인적 경험과 선택에 대한 인식에 입각해 자신의 행동을 위한 대본을 직접 쓰는 사람이며, 받아들인 인생의 주제를 가지고 있는 사람은 다른 사람들이 오래전에 이미 작성해 놓았던 대본에 미리 규정되어 있는 역할을 그저 받아들이는 사람이다.

 이러한 두 종류의 인생 주제들 모두 인생에 의미를 주기는 하지만 각각 그 나름대로의 단점을 가지고 있다. 사회 체계가 안정되어 있다면 수용한 인생의 주제도 그 역할을 충분히 해낼 수 있다. 그러나 여건이 그렇지 못한 경우에는 이러한 주제들이 사람을 편협한 목적 속에 가두게 되는 경우가 발생할 수 있다. 냉정하게 수만 명의 사람들을 가스실로 보냈던 나치당원 아이히만은 관료주의적 규칙을 신성시했던 사람이다. 복잡한 열차 운행표를 뒤적이면서, 수량이 부족한 열차를 필요할 때 꼭 사용할 수 있도록 조처하고, 최소한의 비용으로 많은 유태인들을 수송할 수 있는 방법을 강구하면서 그는 아마도 플로우를 경험했을 것이다. 그는 자신에게 내려진 명령이 과연 옳은 일인가 하는 의구심을 한번도 가져보지 않았던 듯하다. 명령을 따르는 동안에 그의 의식은 조화를 이루고 있었다. 그에게 인생의 의미란, 강력하고 조직화된 기관의 일원이 되는 것이었다. 그 외의 다른 어떤 것도 그에게는 중요하지 않았다. 평화롭게 질서가 잘 유지되는 시대였다면 아이히만 같은 사람은 존경받는 사회적 지주가 되었을 수도 있다. 그러나 그가 가졌던 것과 같은 인생의 주제는, 부도덕하고 정신착란 상태인 사람들이 사회의 통제권을 쥐게 될 때 그 취약성을 드러내게 된다. 그렇게 되면 그와 같은 강직한 시민이 자신의 목적을 바꿀 필요도 없이, 또 자신이 하는 행위의 비인간성을 깨닫지도 못한 채 범죄의 공범이 되는 것이다.

 '발견한 인생 주제'의 취약성은 다른 곳에 있다. 이러한 인생의 주제는 인생의 목적을 찾고자 하는 개인적 투쟁의 산물이므로 사회적 정통성이 결여되는 경향이 있다. 또한 새롭고 특이한 것들이기 때문에 다른 사람들이 이를 무모하다거나 파괴적인 것이라고 간주하는 경우도 많다. 가장 강력한 인생의 주제들 중에는 오래된 인간의 목적에 기초한 것들도 있지만 개인별로 이를 다시 새롭게 발견하고 자유롭게 선택한 것들이 대부분이다. 어린 시절 말콤 엑스는 빈민가 젊은이들의 행동 양식을 고스란히 본받고 자라 싸움을 일삼고 마약 거래에도 손을 댔다. 그러나 그는 교도소에 수감되어 있는 동안 독서와 명상을 통해 존엄과 자긍심을 성취할 수 있도록 해주는 또 다른 일련의 목적들을 새롭게 발견하게 되었다. 앞 시대의 사람들이 이루어 놓은 성취의 단편들로 이루어진 것이기는 하지만, 본질적으로 그는 완전히 새로운 정체성을 찾게 되었던 것이다. 마약 업자와 포주가 걷는 길을 계속 답습하는 대신, 그는 흑백을 막론한 다른 많은 주변인들의 삶에 질서를 찾아주는 매우 복합적인 높은 목적을 창안해 냈다.

 

p427

이러한 사람들과 삶의 의미를 찾는 데 성공한 다른 많은 사람들에게서 공통적으로 찾을 수 있는 전략이 있다면, 그것은 너무나 단순한 것이어서 언급하기조차 무색한 것이라 할 수 있다. 그것은 너무나 단순한 것이어서 언급하기조차 무색한 것이라 할 수 있다. 그러나 이것은 종종 많은 사람들에게 너무 쉽게 간과되어 온 게 사실이다. 특히 요즈음은 더욱 그렇기 때문에 여기서 한 번 살펴보는 것은 큰 도움이 될 것이다. 그 전략이란, 옛 세대들이 만들어 놓은 질서 속에서 자신의 마음속의 혼란을 피할 수 있는 것들을 추출해 내는 것이다. 우리의 문화 속에는 이러한 용도로 언제든 사용할 수 있는 많은 지식, 다시 말해 잘 정돈된 정보들이 축적되어 있다. 누구나 위대한 음악 · 건축 · 미술 · 시 · 연극 · 무용 · 철학 · 종교 등을 통해서 혼돈 속에서 조화를 창조해 내는 법을 배울 수 있다. 그러나 너무나도 많은 사람들이 이것들을 간과해 버리고는, 자신들만의 기제로 살믜 의미를 창조해 내고자 한다.

 혼자서 해보겠다는 것은 마치 각 세대마다 맨 처음부터 물질 문화의 구축을 다시 시작하려는 것과 마찬가지라 할 수 있다. 올바른 정신을 가진 사람이라면, 바퀴 · 불 · 전기 그리고 오늘날 우리가 인간의 환경의 일부로 당연시하는 수많은 물체와 과정들을 다시 발명라혀고 하지 않을 것이다. 그 대신 우리는 이러한 것들을 선생님이나 책 그리고 모델등을 통해 배움으로써 과거의 지식으로부터 혜택을 받고, 결국은 그것을 능가하게 된다. 조상들이 축적해 놓은 삶에 대한 지식을 버린다거나 혼자서 실행 가능한 일련의 목표들을 발견하기를 기대하는 일은 잘못된 오만이다. 이러한 일에 성공할 가능성이란, 물리학적 지식과 도구 없이 전자 현미경을 발견하려고 할 때만큼이나 희박한 것이다.

 성인이 되어 일관성 있는 인생의 주제를 발견한 사람들은 흔히 자신의 어린 시절에 부모님이 이야기를 들려주거나 책을 읽어주던 일을 회상하곤 한다. 자신이 신뢰하는 애정 깊은 어른들로부터 동화나 성서 이야기, 역사적 영웅들의 무용담, 실감나는 가족사 등을 들으면서, 아이는 과거의 경험을 바탕으로 의미 있는 질서를 형성해 나가는 첫 경험을 하게 된다. 우리가 조사한 바에 따르면, 이와는 대조적으로 한번도 어떤 목표에 집중해 보지 않았거나 혹은 주변 사회의 목적을 무조건적으로 수용했던 사람은, 어린 시절 부모님이 책을 읽어주거나 이야기를 들려준 기억이 없는 사람들이 대다수였다. 토요일 아침에 텔레비전으로 방영되는 아이들 대상의 무의미한 감각주의적 쇼는 위와 같은 목적을 결코 달성할 수 없다.

 각자의 성장 배경이 어떤 것이든 과거로부터 의미를 끌어낼 수 있는 기회는 인생을 살면서 얼마든지 있다. 복합성을 가진 인생의 주제를 발견한 대부분의 사람들은 자신들이 몹시 존경하여 귀감으로 삼았던 연장자나 역사적 인물을 가지고 있다. 이들은 또한 책을 통해서 새로운 행동의 기회들을 찾아냈던 일들을 기억한다. 예를 들어, 고결한 인품으로 널리 존경을 받는 당대의 한 유명한 사회과학자는 십대 시절에, 『두 도시의 이야기』를 읽으며 디킨스가 묘사한 사회적 · 정치적 혼란상 - 그의 부모가 일차대전 후 유럽에서 겪은 바와 같은 혼란상 - 에 대단히 깊은 인상을 받았다. 그리고 그 자리에서 자신의 평생을 왜 사람들이 서로의 삶을 비참하게 만드는가를 이해하는 데 바치기로 결심을 했다고 한다. 가혹한 고아원에서 자라난 다른 어떤 소년은 호레이쇼 엘저의 이야기를 우연히 읽게 되었다. 그것은 자기와 비슷한 처지의 가난하고 외로운 소년이 열심히 일도 하고, 약간의 운도 따른 덕에 인생에서 성공한다는 이야기였다. 소년은 이 이야기를 일고, "그도 할 수 있었는데, 나라고 왜 못하겠는가?"라는 생각을 했다고 한다. 오늘날 이 소년은 은퇴한 은행가가 되었는데, 자선 사업가로 널리 이름을 떨치고 있다. 플라톤의 『대화론』의 논리적 질서, 혹은 공상과학 소설에 나오는 주인공의 용감한 행위에 감명을 받아 영원히 변모하게 되었다는 사람들도 있다.

 문학에는 행동, 귀감이 되는 목적 그리고 의미 깊은 목적을 푯대 삼아 성공적인 인생을 산 사람들에 관한 정보들이 정리되어 담겨 있다. 삶의 무질서함에 직면해 본 많은 사람들은 과거의 다른 사람들도 자신과 유사한 문제를 겪었으며 결국 그러한 난관들을 극복해 냈다는 사실을 알고 희망을 되찾게 되었다. 이것은 단지 문학의 예일 뿐인데, 음악 · 미술 · 철학 그리고 종교는 또 어떠하겠는가?

 

p430

 마침내 무엇인가 색다른 것을 시도해 보아야 하겠다는 생각이 떠올랐다. 그래서 나는 단테의 『신곡』을 간략히 살펴보는 것으로 세미나를 시작하게 되었다. 내가 아는 한 6백 년도 넘은 이 단테의 운문이 중년의 위기와 그 해결책에 관해 쓰여진 가장 오래된 서술이기 때문이다. 단테는 그의 몹시 길고도 풍부한 이 시의 첫 행에서 다음과 같이 쓰고 있다.

 "우리 인생의 여정 한 가운데서, 나는 어두운 숲 속에 있는 내 자신을 발견하게 되었다. 옳은 길을 완전히 잃어버렸기 때문이다."

 그 다음에는 중년기에 겪게 되는 어려움들을 여러 가지 측면에서 적절히 묘사한 흥미로운 내용이 계속 이어진다.

 우선, 길을 잃어 어두운 숲 속으로 접어들게 된 단테는 세 마리의 사나운 짐승들이 입맛을 다시며 자신을 몰래 뒤쫓아 오고 있음을 알게 된다. 이 짐승들은 사자 · 시라소니 · 늑대였는데, 이들은 각각 야망 · 육욕 · 탐욕을 상징한다. 1988년의 베스트셀러였던 톰 울프의 작품 『허영의 불꽃』에 주인공으로 등장하는 뉴욕의 한 중년 주식 거래인의 경우와 마찬가지로, 단테의 적들은 권력과 성 그리고 돈에 대한 갈망이었음이 드러나게 된다. 그들로부터 해를 입지 않기 위해 단체는 언덕으로 피신하려 한다. 그러나 그 짐승들은 계속 더 가까이 다가오고, 절박한 나머지 단체는 신의 도움을 요청한다. 환영을 통해 그는 기도의 응답을 받는다. 그 환영은 버질(Virgil)의 유령이었는데, 그는 단테가 태어나기 약 천 년 전에 죽은 고대 로마의 시인이었으나, 단테가 그의 현명하고 웅장한 시를 너무도 흠모한 나머지 자신의 스승으로 생각했던 사람이었다. 어두운 숲 속에서 벗어날 수 있는 길이 있다는 희소식을 전하며 버질은 단테를 안심시키려 한다. 그러나 이 길은 지옥을 통과하는 길이라는 좋지 못한 소식도 더불어 전한다. 그들은 서서히 지옥을 통과해 나가면서, 목적을 한 번도 설정하지 않았던 사람들이 겪는 고통을 본다. 또 인생의 목적이 엔트로피를 증가시키는 것이었던 소위 '죄인들'의 더욱 혹심한 운명을 목격하게 된다.

 나는 시간에 쫓기는 기업의 중역들이 이처럼 해묵은 우화를 어떻게 받아들일 것인지가 다소 염려스러웠다. 그들이 자신의 소중한 시간을 낭비하는 것으로 생각할 수도 있음을 우려하였던 것이다. 그러나 이는 지나친 기우였다. 신곡에 관해 이야기를 나누고 난 후부터, 중년의 위기와 중년 이후의 삶을 풍부하게 만들 수 있는 여러 선택들에 관해 그 이전과는 비교할 수 없을 정도로 서로 마음을 열고 진지한 토론을 할 수 있었기 때문이다. 나중에 참석자들 중 몇 사람이 사석에서, 단테의 시로 세미나를 시작하는 것이 매우 좋은 생각이었다고 나에게 이야기를 했다. 단테의 시는 세미나의 주제를 너무도 명료하게 조명해 주어서 나중에 그 주제에 관해 생각하고 이야기하기가 훨씬 용이했던 것이다.

 단테는 또 다른 이유에서도 하나의 중요한 본보기가 된다. 그의 시는 깊은 종교적 윤리의 영향을 받았지만, 그것을 읽는 사람 누구나 단테의 기독교 신앙이 '받아들인' 것이 아니라 '발견한' 신앙임을 분명하게 알 수 있다. 다시 말해, 그가 창조한 종교적 인생 주제는 최상의 기독교적 통찰과 최상의 그리스 철학 그리고 유럽으로 전해진 회교적 지혜의 총합이었던 것이다. 동시에 『신곡』의 지옥편에는 영원한 저주로 고통받는 교황 · 추기경 · 사제들이 매우 많이 등장한다. 그의 첫 번째 안내자인 버질조차도 기독교 성자가 아닌 이교도 시인이었다. 단테는 영적인 질서 체계가 조직화된 교회와 같은 세속적 구조에 좌우되면 엔트로피의 영향을 받기 시작한다는 사실을 인식하고 있었다. 그러므로 신앙 체계로부터 의미를 끌어내기 위해서는, 그 체계 속에 담겨 있는 정보를 자신의 구체적 경험과 비교하여 사리에 맞는 부분만을 취하고 나머지는 거부해야만 한다고 믿었던 것이다.

 

 오늘날에도 우리는 과거로부터 만들어진 위대한 종교의 영적 통찰력에 기초한 내적 질서를 삶으로 보여 주는 사람들을 종종 만날 수 있다. 우리가 매일 신문지상에서 접하는 주식시장의 부도덕성, 군수 산업체들의 부패, 원칙이 결여된 정치계의 소식들에도 불구하고 그와 대조되는 예들도 존재하는 것이다. 또한 고통받는 사람들을 돕는 것이 의미 있는 인생에 있어서 꼭 필요한 부분이라고 믿고, 일정한 시간을 할애해 병원을 찾아가 죽어 가는 환자들과 함께 있어 주는 성공한 기업인들도 있다. 그리고 아직도 많은 사람들이 기도를 통해서 힘과 마음의 평안을 얻고 있으며, 자신만의 의미 있는 신앙 체계를 통해 강력한 플로우 경험을 위한 목적과 규칙들을 얻는 사람들도 많은 것이다.

 그러나 점점 더 많은 대다수의 사람들이 전통적 종교들이나 신념 체계의 도움을 받지 못하고 있음이 분명한 것 같다. 시간이 흐르면서 왜곡되어지고 세속화된 교리 속에서 진리를 찾아내지 못하는 사람들이 많으며, 오류를 용납하지 않는 어떤 교리 덕분에 진리도 함께 거부되고 마는 것이다. 또 다른 사람들은 너무도 절박하게 어떠한 질서를 필요로 한 나머지, 결점이 있는 것일지라도 우연히 접하게 된 신념 체계에 그대로 집착하여 근본주의적 기독교인이나 회교도 혹은 공산주의자가 되기도 한다.

 다음 세대에 살 우리의 자손들이 삶의 의미를 찾는 일에 도움을 줄 수 있도록 새로운 목표와 수단의 체계가 생겨날 가능성은 없는 것일까? 누군가는 기독교가 과거의 영광을 되찾으면 그렇게 할 수 있을 것이라 믿는다. 혹은 아직도 공산주의가 인간 경험의 혼란상을 해결해 줄 것이며, 그 질서가 전 세계로 확산될 것이라고 믿는 사람들도 있다. 현재로서는 이러한 것들이 실현될 가능성이 희박한 것으로 보인다.

 우리가 공감할 수 있는 새로운 신념이 되려면, 우리의 지식과 감정 그리고 우리가 희망하는 것들과 두려워하는 것들을 합리적으로 설명해 주는 것이어어먄 한다. 우리의 심리 에너지를 의미 있는 목표들에게로 인도해주며, 플로우를 경험할 수 있는 삶의 방식에 필요한 규칙들을 제공해 줄 수 있는 신념 체계가 되어야만 하는 것이다.

 이와 같은 신념 체계는 어느 한도까지는 인간과 우주에 관해 과학이 밝혀 놓은 사실들에 입각한 것이 될 것이다. 그러한 기초가 없다면 우리의 의식은 신념과 지식 사이에서 분열되고 말 것이다. 그러나 진정한 도움을 주려면 과학도 변화되어야 한다. 특정한 현실적 측면을 기술하고 통제하기 위한 다양한 원칙들 외에도, 지금까지 알려진 모든 지식을 총괄적으로 통합하여 그것을 인간과 인간의 운명에 연결시킬 수 있어야 하는 것이다.

 진화의 개념을 통해서 이를 성취할 수 있는 길도 있다. 우리는 어디서 왔는가? 우리는 어디로 가고 있는가? 어떠한 힘이 우리의 삶을 결정 짓는가? 선은 무엇이고 악은 무엇인가? 우리는 서로 어떻게 연관되어 있으며, 우주 전체와는 어떤 관계를 갖고 있는가? 우리가 하는 행위의 결과는 무엇인가? 이러한 의문 사항들처럼 우리에게 중요한 모든 것들을 우리가 알고 있는 지식과 나아가서는 앞으로 알게 될 지식들의 관점에서 체계적으로 논의해 보는 것이다.

 이러한 제안에 대해서 전반적 과학은 물론 진화의 과학은 현재의 상태를 다루는 것이지 미래의 당위를 다루는 것이 아니라는 비판을 할 수 있다. 반면에, 신앙과 신념은 옳은 것과 바람직한 것들을 다루는 것이기 때문에 현실성의 제약을 받지 않는다. 그러나 진화론적 신념을 통해 현재의 사실과 미래의 당위를 좀더 밀접하게 통합시킬 수 있다. 우리가 현재의 우리를 만든 것이 무엇인가에 관해 더 깊이 이해를 하고, 본능적 충동 · 사회적 통제 · 문화적 표현 등 우리의 의식의 형성에 기여한 모든 요소들의 기원에 대한 인식을 한층 넓혀 간다면, 우리의 에너지를 바람직하게 사용하는 일이 훨씬 용이해질 것이다.

 또한 진화론적 관점은 우리의 에너지를 투자할 가치가 있는 목표를 지적해 준다. 수십억 년의 세월이 흐르는 동안 점차 복합적 생명 형태가 지구상에 출현하게 되었으며, 결국은 매우 복잡한 인간의 신경 체계까지 탄생하게 되었다는 사실에 관해서는 의문의 여지가 없는 듯하다. 대뇌 피질의 진화로 의식이 생겨나게 되었으며, 현재 이러한 인간의 의식은 마치 대기권만큼이나 지구를 철저히 감싸고 있다. 복합화라는 현실은 현재이기도 하고 미래의 당위이기도 하다. 지금까지 일어나 왔고, 지구를 지배하는 조건들을 고려해 볼 때 앞으로도 일어날 것이 분명한 것이다. 그러나 우리가 계속되기를 원하지 않는다면 지속되지 않을 수도 있다. 진화의 미래를 바로 우리에게 달려 있는 것이다.

 지난 수천 년 동안 - 진화로 볼 때는 눈 깜짝할 시간에 불과하지만 - 인간의 의식의 분화에 놀라운 진보를 이룩해 왔다. 우리는 인간이 다른 생물 형태와는 구별된다는 사실을 깨닫게 되었다. 각 개인이 다른 사람들과 서로 다르다는 사실도 인식하게 되었다. 우리는 또한 추상 개념과 분석 능력도 개발해 냈다. 즉 낙하하는 물체의 속도를 그 무게와 질량으로 측정하는 능력과 같이, 물체의 각 차원과 과정들을 구분 짓는 능력도 갖게 된 것이다. 바로 이와 같은 의식의 세분화 과정 동안 과학과 과학 기술 그리고 인간의 환경을 구축도 하고 파괴도 하는 전례 없는 능력도 생겨나게 되었다.

 그러나 복합성은 분화뿐만이 아니라 통합으로 구성되어 있다. 다음 세대에서의 인간의 임무는 개발되지 않은 정신적 능력을 개발하는 것이다. 우리가 다른 사람들과 환경으로부터 우리 자신을 구별할 수 있게 되었듯이, 이제 우리는 어렵게 얻은 우리의 개인성을 잃지 않으면서도 우리 주변의 존재들과 우리 자신을 재통합할 수 있는 방법을 배울 필요가 있다. 미래의 가장 유망한 신념은, 우주 전체가 불문율에 의해서 서로 연관되어 있으므로 이를 고려하지 않고 우리의 꿈과 열망을 자여에 강제하려 하는 것은 이치에 맞지 않는 일이라는 깨달음에 기초한 것이 될 것이다. 인간의 의지의 한계를 인식하고, 우주 속에서 지배적이기보다는 협조적인 역할을 받아들이게 된다면, 우리는 마침내 고향에 돌아가게 된 유랑자의 안도감을 느끼게 될 것이다. 그렇게 되면 각 개인의 목적이 우주적 플로우에 융합되면서 의미를 찾는 문제도 더불어 해결할 수 있을 것이다.

 

 마돈나의 첫번째 싱글 히트곡 Like a virgin의 MTV  VMA의 공연에 대한 이야기로 서두를 연다.

 

 이 책의 주된 주제는 평균에 매몰되어 모든 이에게 잠재되어 있지만 사장되는 능력의 발현에 관한 이야기다.

 주요한 줄거리는, 평균치라는 대표 데이터(집단)를 자세히 파고 들어 개별의 데이터(개인)에 집중해보니, 고난과 역경을 이기고 성공하는 이들에게 보이는 몇 가지 중요한 지점을 발견하게 되었다는 것이다.

 보면 고개가 끄덕여지는 설득력이 강한 사례들을 통해 저자의 주장에 힘을 실어주고 있고 바로 그러한 지점에서 이 책의 가치가 있다.

 마돈나, 키신저, 카라얀의 사례가 특히 인상적이며 인종, 태생등으로 부터 비롯되는 온갖 사회적 차별로부터 성공을 한 이들을 통해 부정적 신호들을 차단하고 긍정적인 계기를 통해 잠재력을 드러낼 수 있는 계기를 어떻게 하면 가질 수 있을 것인가에 대한 실질적인 지침이 될 만한 내용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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p35

 

 요즘 야구선수들은 이렇게 정신 산만하게 만드는 수많은 요인에 둘러싸여 있다. 그래서 스스로에 대해 잘 알기보다 주변의 반복되는 평가로 자신의 모습을 형성한다.

 반면에 윌리엄스가 선수 생활을 하던 1940년대에는 비행기도 없었기 때문에 10시간 넘게 기차를 타는 일이 다반사였다. 기차 속에서 스마트폰도 없이 서로의 얼굴을 마주보던 선수들은 그 시간의 대부분 타격에 관한 이야기를 진지하게 나눴는데, 그 열차 속에서 야구계의 전설적인 마지막 4할대 타자와 통산 타율 역대 2위 타자, 타격왕들이 쏟아져나왔다. 그중에서도 조 크로닌은 타자들에게서 최고의 감독으로 손꼽혔는데 그는 늘 선수들과 함께 타격에 대해 토론하며 깊은 생각을 유도해 타수로서의 자신을 정비하도록 했다.

 "당시에는 텔레비전도 없었고, 따로 굴리거나 즐길 만큼의 큰돈을 벌지도 못했다. 오직 완벽히 야구에만 전념하게 만드는 환경이었던 것이다." 페드로이아는 윌리엄스의 교훈을 그대로 따랐다. 그는 보스턴 레드삭스 선수들 중 경기장에 가장 먼저 나타나는 선수였으며, 금주는 물론 야구 외의 취미 생활은 아무것도 가지고 있지 않았다. 그는 주변의 자신을 향한 잡음들을 놀라울 만큼 차단했다. 제임스는 말한다.

 "다행스럽게도 페드로이아는 정말 대단한 자신감의 소유자입니다. 다른 사람에게 주눅이 들고 또 다른 사람이 하는 말을 쉽게 듣는 성격이었다면, 그는 아마 스스로를 망치고 말았을 겁니다. 이 친구는 다른 사람 말을 듣지 않았습니다. 고집스럽게 한 우물을 파며 크고 강한 스윙을 계속한 거죠. 그러다 보니 마침내 새로운 일이 일어나기 시작한 겁니다.

 평균적인 운동선수로 일관되게 평가될 때 그는 제임스의 성공 곡선을 그려보며 자신의 은퇴 나이와 합리적인 예상 통장 잔고를 정하느라 분주하지 않았고, 평균적인 야구선수라면 누구나 고민할 시즌 우승 하나당 얼마를 더 벌게 된 것인가도 깊게 고민하지 않았다.

 오히려 페드로이아는 업계에 있던 모든 사람들을 당황시키는 행동을 보였는데  MVP  수상 직후 4,050만 달러 계약서에 대충 사인을 하고는 연습을 마저 하러 경기장으로 돌아가버린 것이다. 훗날 테오엡스타인 단장은 이 계약에 대해 '너무 적은 돈' 때문에 양심의 가책을 느꼈다고 털어놓았다. 그러나 일반인들은 상상도 할 수 없을 수천만 달러를 두고 장기간의 밀고 당기는 연봉 협상은 오히려 그의 정신을 산만하게 만들 뿐이었다.

 한번은 그의 동료인 데이비드 오티스가 새벽 동틀 때 훈련을 나갔는데 경기장에는 페드로이아가 먼저 도착해 방망이를 휘두르고 있었다. 오티스는 결국 인정했다.

 "페드로이아만큼 야구에 완전히 빠져 있는 선수는 제 선수 경력을 통틀어서 본 적이 없습니다."

 잡음을 차단하면 완전하게 전념할 수 있다. 그리고 그 전념은 모두가 '재능 없다'고 단정 지은 것에도 돌을 던질 수 있다. 이것이 윌리엄스의 교훈이다. 페드로이아가 MVP에 오른 뒤 기자들이 뒤늦게 슈퍼스타 탄생의 비결이 뭐냐고 물었을 때 페드로이아는 말했다.

 "당신이 뭘 압니까? 나는 숫자니 통계니 하는 것 따위는 거들떠보지도 않습니다. 내가 신경 쓰는 건 승리의 'W'와 패배의 'L' 뿐입니다. 이것 말고는 나한테 중요한 건 아무것도 없습니다." 페드로이아의 어조는 상당히 직설적이고 공격적이다. 그럼에도 우리는 그의 상처가 엿보이는 인터뷰를 이해할 수가 있다. 페드로이아가 모두의 예상을 꺾고 혜성처럼 등장했을 때 그가 제일 먼저 한 것은 자신의 재능을 별 것 아닌 것으로 분류했던 그의 고향 캘리포니아의 우드랜드를 '쓰레기장'으로 표현해버린 사건이었다.

 "내 말은 내가 책임집니다. 나는 정말 신경 안 써요."

 한편 우드랜드로부터 페드로이아의 재능을 놓쳤던 한 스카우터는 익명을 요구하면서 자신이 놓친 1억 달러의 아쉬움을 털어놓았다.

 "내가 내렸던 평가는 이거다. 페드로이아는 분명 체인지업 기술도 제대로 구사하지 못했고, 그의 경기 능력은 잘 봐주면 평균, 제대로 말하자면 평균 이하인 것들이 많았다. 그런데도 내가 페드로이아를 1회전으로 선발해서 내세운다면, 사람들이 누가 나를 스카우터로서 제정신이라고 생각하겠는가? 내가 페드로이아를 놓친 것은 정말 아쉽지만 페드로이아는 평균 이하였다."

 과연 그럴까? 스카우터는 솔직하게 인정해야 했다. "그래, 이것이 내가 내린 평가였고 그 친구는 해냈단 말이지. 젠장, 그는 해냈다고."

 중요한 지점은 페드로이아가 전문가들의 가혹했던 평가에 신경조차 쓰지 않았다는 사실이다. 그의 이러한 차단은 새로운 성공 곡선을 만들었다. 페드로이아는 MVP로 당당하게 성공했고 스카우터들의 당황한 표정에도 신경 쓰지 않았다. 그에게는 야구공과 배트만이 보였고 그 단순한 집중이 모든 그래프를 뛰어넘어 새로운 그를 만들었다.

 그리고 1억 달러를 거머쥔 다음 날에는 그는 아무 일 없었다는 듯이 모두가 잠든 새벽 다섯 시에 혼자서 연습용 방망이를 휘두르고 있었다.

 

p44

 성공하는 사람들은 연구할수록 노력하려는 개인의 소박한 의지보다는 그들을 둘러싼 긍정적 환경의 신호들이 그들을 순환적으로 더 노력하게 만들었다는 점에 있다.

 

p45

 만약 이 부정적인 신호들을 차단하고 다시 공부를 시작한다면 어떨까? 스틸과 그의 동료들은 학교로 가서 성적이 중간 정도 되는 학생들을 데리고 나왔다. 그리고 학생들을 세 분류로 나눠서 아주 간단한 '환경의 신호'를 던졌다.

 첫 번째 그룹엔 '상위권 학생과 경쟁해야 한다'는 신호를 보냈고, 두 번째 그룹의 경우 상위권과 비교당하던 부정적인 환경 신호들을 차단시켰다. 마지막으로 세 번째 그룹엔 부정적인 환경 신호를 차단하면서 공부는 '자신의 힘을 키우는 의미 있는 경험'이라는 긍정적인 신호를 보냈다. 과연 이 간단한 신호들이 무엇을 바꿀 수 있을까? 스틸의 주장대로 눈으로 바뀐 것은 없다. 학교 선생님은 여전히 같았고, 교과서도 바뀌지 않았으며, 시험지 또한 언제나처럼 객관적이다. 게다가 우리는 공부 못하는 학생들이 열등감을 이야기하는 것을 핑계라고 여긴다.

 그러나 스틸은 누구도 예상하지 못한 결과를 얻었다. 공부를 못하는 학생들로부터 '공부를 못한다'는 주변 신호를 차단하자 전 세계 심리학자들의 눈길을 집중시켰는데, 그들의 성적이 두 배가량 확연하게 뛰어오른 것이다. 특히 마지막 세 번째 그룹의 학생들에게 이러한 반전의 효과가 시간이 지날수록 강해졌다. 변변찮은 주립대학이나 갔을 학생들에게 아이비리그이 입학장이 보였던 것이다. 이 놀라운 연구에서 외형적으로 바뀐 것은 아무것도 없었다. 이 모든 변화는 온전히 학생의 내면에서 일어났다.

 스틸이 최초로 발견한 이 현상에서 더 인상적인 지점은 이러한 변화를 위해 당신의 유전자와 부모님이 어떤 사람인지, 또는 얼마나 공부를 열심히 해왔는지 따위를 꼬치꼬치 캐묻지 않아도 된다는 사실이다. 바로 지금 환경의 신호를 차단하고 목표에 온전히 집중한다면 변화가 일어난다.

 "환경의 신호를 차단하는 것은 가난이나 유전자 등을 바꾸는 것보다 더 현실적이라는 점에서 분명한 이점을 가진다."

 스틸의 이 연구 결론대로,, 부정적인 신호를 차단하는 것은 개인의 내면적 힘에 다가가게 한다. 그리고 하버드대학 심리학자인 헤더 그레이 교수는 스틸의 연구에 이어 긍정적인 환경 신호에도 의문을 품었다.

 열등생들이 부정적 신호 때문에 성적이 떨어진다면 '1등급 학생', '상위 1%'와 같이 긍정적인 환경 신호를 계속 받는 상위권 학생들에게서 이 신호를 차단하면 어떻게 될까?

 하버드대학의 마가렛 쉬 교수는 실험을 통해 상위권 학생들을 향한 성적에 대한 긍정적 신호를 꺼버렸다. 그러자 자신의 우월함을 더는 확인할 수 없는 상황이 된 상위권 학생들이 고난이도 문제를 풀때의 성적이 현저하게 떨어졌다. 그러나 다시 중위권 학생들과 경쟁을 치르게 하자 상위권 학생들의 성적은 눈에 띄게 올라갔다.

 쉬의 연구에서 우리가 놀라게 되는 부분은 중위권 학생들이 가지는 열등감이 상위권 학생에게는 우월감을 느낄 수 있는 연료로 쓰여진다는 점이다. 특히 그 우월감에 대한 신호가 노골적일 때보다 은근하게 배여 있을 때 상위권 학생들의 성적은 눈에 띄게 높아졌다. 마치 자신의 특권을 즐기는 듯이 성적이 올라갔지만 정작 그 연료가 사라지면 상위권 학생들의 성적은 다시 뚝 떨어졌다.

 이 효과는 너무 분명해서 심리학자들의 여러 분야 실험을 통해서도 반복해 증명이 되었다. 누군가의 낮은 위치와 무너진 열등감은 반대의 사람에게는 조용한 우월감과 성취감이 된다. 심리학자들이 관찰하면 할수록 이 환경의 신호가 누군가에게는 선순환이, 또 다른 누군가에게는 악순환으로 이어지는 것이 목격되었다.

 그렇다면 이렇게 거대한 차이는 어디서부터 시작되었던 걸까? 예일대학 심리학 교수인 리처스 니스벳은 우리가 어렸을 때의 아주 사소했지만 결정적이었던 '인지 문화' 에서부터 답을 찾고 있다.

 심리학자들의 관찰 결과 전문직 부모는 시간당 2,000개의 단어를 아이들에게 구사하지만 노동 계층의 부모는 고작 1,300개의 단어를 사용한다. 이것이 세 살만 되어도 전문직 가정의 아이는 3,000만 개의 단어를 듣게 되지만, 노동 계층에서는 2,000만 개 이상은 듣지 못한다. 아이들은 여기서부터 이미 학습량의 상당한 차이를 겪게 된다.

 그리고 이 아이들이 처음으로 부모님의 품을 떠나 교실 문을 밟을 때 교사의 눈에는 3,000만 개의 단어를 접한 미래의 명문대생과 2,000만 개 이하의 단어를 접한 공장에 있을 아이들이 구분된다. 그리고 파리 우에스트낭테르대학의 패트릭 고슬링은 교사들이 제자들의 성적을 어떤 식으로 해명하는지 연구했다. 연구 결과 교사들은 성적 부진의 이유를 주로 가정 환경에서 찾은 반면 우수한 아이의 성적은 하나같이 교육진의 뛰어난 능력 때문이라고 여겼다.

 결국 이 과정에서 아이들의 재능은 상당 부분 무시되고 긍정적 환경의 신호가 사라진다. 그리고 대부분이 중위권 성적의 학생으로 눌러앉게 된다. 그러나 한 번 상위권에 진입한 아이들의 성적은 로즌솔의 손가락으로 '누적'되고 '강화'된다.

 스틸이 바꾼 것은 이렇게 파괴적인 신호들에 대한 차단이었다. 사회심리학자 로랑 베그의 지적처럼 "자기 자신에 대한 생각은 상당 부분 타인의 판단"에서 온다. 스틸은 그 잘못된 판단을 차단시키는 중요성을 처음으로 밝혀냈다.

 이들의 연구 결과는 우리의 의지보다 의지를 만드는 긍정적인 신호들이 훨씬 강력하다는 것을 알려준다. 학생들이 똑같이 연필을 잡아도 왜 어떤 학생들은 끝까지 버티는 반면에 어떤 학생들은 포기해버릴까? 이 질문에 대한 답은 이제 풀렸다. 그것은 각자의 신호가 다르기 때문이다. 당신이 1등이라면 1등처럼 행동할 것이다. 그러나 꼴찌라면 결코 1등처럼 행동하지 않을 것이다. 예일대학 교수인 윌리엄 데레저위츠는 이 부분을 한 하버드대 학생의 논문을 통해 지적한다.

 "하버드대학에 대해 논문을 쓴 4학년 여학생이 있었다. 그 여학생은 논문에서, 모교인 하버드대학이 학생들에게 자기 효능감을 주입하는 데 아주 뛰어나다고 기술했다. '세상 속으로 들어가 자신이 하고 싶은 일은 무엇이든 할 수 있다'는 식으로 말하는 것이다. 또한 학생들 중에는 시험에서 A학점을 받고 '문제가 너무 쉬워서'라고 말하는 아이가 있는가 하면, '내가 똑똑하니까'라고 말하는 아이도 있다고 했다. 잘난 척하는 것처럼 들릴 수도 있지만, 그 여학생이 말하고자 한 바는 하버드대학이 이 중에서 후자처럼 말하는 유형의 학생들을 길러내는 능력이 뛰어나다는 것이었다."

 그러나 이들과 반대로 대부분의 평범한 학생들은 평범해지는 신호를 받는다. 평범한 신호를 받는 학생들은 아무도 "내가 똑똑하니까"라고 말하지 않는다. 반대로 "나는 평범하니까"라고 말하는 데 익숙해진다. 주변의 신호가 1등의 신호가 아니라면 이제 우리는 그 신호부터 차단해야 한다.

 심리학자인 앤크리스틴 포스텐은 환경의 신호는 우리가 그것을 신뢰해야 영향력이 생긴다는 사실을 연구 결과로 밝혀냈다.

 "모든 환경적 신호는 받아들이는 대상이 자기 신호라고 생각해야만 영향을 줄 수 있다. 만약 자신을 향한 부정적인 환경의 신호를 인정하지 않으면, 그 신호의 효과는 적어도 개인에게는 분명하게 차단되는 현상이 발견되었다. 그 어떤 사람이라도 자신을 만드는 환경적 신호를 인정하거나 거부할 수 있고, 그 영향력은 대단하는 것이 연구 결과로 밝혀지고 있다. 인간은 기본적으로 사회 체계를 신뢰하도록 성장해왔기에 개인을 향한 부정적인 환경의 신호도 신뢰하도록 진화해왔다. 그러나 이제 그것을 거절해야 할 이유가 분명하게 밝혀졌다."

 내가 만약 교실에 가서 "너는 외계인" 이라고 학생들에게 말한다면 아무도 나의 말에 반응하지 않을 것이다. 하지만 몇몇 중위권 학생들을 불러내어 "너의 인지 사고력은 다른 학생들에 비해 떨어지는 편"이라고 말한다면 그 학생들의 성적은 현저하게 더 떨어진다. 이것이 바로 사회심리학자들이 발견한 사실이다. 학생들이 내가 던지는 신호를 자신의 것으로 흡수해버리는 것이다. 하지만 그 신호를 차단하는 것도 자신의 선택이라는 것을 알게 된다면 학생들의 성적은 떨어지지 않는다.

 결론적으로 현재의 위치가 자신의 전부가 아니라고 믿는 것은 스틸이 선물한 차단의 막과 같다. 열등감을 가진 학생들이 감정을 끊고 객관적으로 공부의 의미를 다시 새기며 온전히 자신에게 집중하는 것은, 교실 뒷자리에 앉아 있었던 키신저가 하버드에 오로라를 풍겼던 것과 같다. 다시 그에게로 돌아가 똑같은 차단의 법칙이 적용되었는지를 확인해보자.

 

p54

 심리학자 게리 맥퍼슨은 한 악기를 배우던 아이들에게 "여러분이 새 악기를 얼마나 오래 연주할 거라고 생각합니까?" 라고 물어봤다. 그리고 관찰 결과 장기적인 결의를 가지고 있는 아이들이 단기간만 악기를 다루겠다고 한 아이들보다 무려 네 배나 우수한 연주 실력을 가지는 것이 발견되었다. 여기서 아이들의 재능 차이도 고려해야 되지 않을까? 아니, 전혀 고려할 필요가 없었다. 재능이 낮아도 장기간의 결의를 가진 아이들이, 재능이 훨씬 많지만 단기간을 예측한 아이들보다도 비교할 수 없을 만큼의 높은 연주 실력을 얻게 된 것이다. 맥퍼슨은 자신의 연구 결과를 "아주 이른 어떤 시점에 아이들은 자신이 음악가라는 생각을 내면화하는 결정적인 경험""을 하고 있는 것이라고 정리했다. 최근의 신경과학 연구 또한 '결의를 가지고 하는 연습'이 생리적인 효과가 있음을 보여준다. 뇌는 유연하고 그 결의는 연습으로 바뀌는 것이다.

 

p118

 "엘리트 학생들의 평온함, 뛰어난 달성이라는 그 허울 뒤에 숨겨진 것은 분명 두려움이다. 지나치게 까다로운 입학 과정과 살벌하기 그지없는 경쟁 속에서 명문대에 들어간 아이들은 말 그대로 성곡 이외에는 경험한 것이 없다. 성공하지 못할 거라는 예감은 이 아이들을 두려움에 떨게 하고 방향을 잃게 만들며, 좌절시킨다."

 데레저위츠는 말을 이어나간다.

 "설령 일시적인 경험이라 할지라도 기대에 부응하지 못했을 때의 좌절은 단순히 현실적인 문제가 아닌 존재론적인 문제가 되어버린다."

 

p121

 첼시가 소식지 일을 맡았을 때를 경영자 입장에서 판단한다면 더 그러하다. 완벽한 소시지를 만들기 위해 첼시는 모든 글자 하나하나를 꼼꼼히 검토하는 열정을 쏟아부었고 고객들과 동료들 그리고 상사조차도 처음으로 마음에 들게 했다. 하지만 첼시는 중요한 실수를 저질렀다. 극비 사항인 회사 내부용 지방채 평가기준 자료 하나를 실수로 소식지에 실어버린 것이다. 이에 대해 첼시가 방어하는 대화를 살펴보자.

 "그건 회사 기밀이야. 이런 내부 기밀은 어떤 경우에도 고객 상대로 내보내면 안 돼. 외부 유출 자체가 큰 골칫거리라고!"

 "전 그런 줄 몰랐어요. 소식지에 같이 포함시켜야 된다고 생각했거든요."

 "뭐가 어쨌건 간에 포함시켜선 안 되는 거였어!"

 최고 책임자의 호통 앞에서 첼시는 상사가 자신을 옹호해주길 바랐다. 어쨌거나 상사가 자신이 만든 소식지를 최종 확인해야 할 책임이 있었기 때문이다. 첼시에게 상사는 자신을 책임져야 할 선생과 같은 존재였다. 그런데 그 선생이 입을 다물었다. 사회는 실전이었다. 자신의 실수 앞에서 아무도 그녀를 변호해주지 않았다.

 "이 사람들은 내가 뭔 짓거리를 하고 있다고 생각한 거야? 난 아무런 실권이 없다고! 난 그저 다른 사람들이 시키는 것만 하고 있을 뿐이야!"

  첼시가 방금 경험한 것은 회사에서 흔하게 일어날 수 있는 실패다. 누구나 회사에서 이 정도 치욕은 쉽게 경험한다. 하지만 설령 일시적인 경험이라 할지라도 기대에 부응하지 못했을 때 존재론적인 문제가 되어버릴 정도로 성공의 신호만 받았던 엘리트들에게는 큰 실패로 인실될 수 있는 것이다. 그 뒤로 첼시는 평균적인 사람들로서는 이해하기 어려운 모습을 보였다.

 그 일을 겪은 지 며칠 뒤 첼시는 일에서 완전히 거리를 뒀다. 점심 시간을 길게 가졌고 낮 시간에도 미드타운 근처를 오래 걸었다. 비는 시간이면 공책을 꺼내 창업 구상을 하면서 회사 로고를 그려보기도 했다.

 보통 사람이라면 술 한잔ㅇ로 털어버릴 일에, 회사 자체를 그만두려는 모습은 한편으로 지질해 보이기도 한다. 하지만 첼시에게는 존재론적인 문제를 흔드는 일이기에 충분했다. 고개를 들어보니, 처음으로 집단에서 평균 이하의 취급을 당하고 있지 않은가? 그리고 첼시는 근본적으로 집단에서 자신이 별 것 아니라는 감정을 처음으로 느낄 수 있었다. 그레그 스미스는 월스트리트의 날카로움을 이렇게 기록했다.

 "SAT 1,600점을 맞고 하버드대학을 1등으로 졸업한 세상에서 제일 똑똑한 사람도 골드만삭스에서는 완전한 재앙이 되어 입사한 지 1년 안에 해고되었다. 이런 일은 번번하게 일어났다. 판단력은 배울 수 있는 것이 아니기 때문이다. 그리고 그 여름에 최고의 대학을 나온 학생들이 차례대로 쫓겨나기 시작했다."

 하버드대학을 1등으로 졸업하는 것보다 더 중요한 것은 과연 자신의 분야를 향한 '차단된 열정'을 가지고 있는가였다. 그리고 첼시가 확인한 이 분야에서 가장 밝게 빛나던 빛은 블랙 다이아몬드였다. 자신의 빛은 없었다.

 첼시는 결국 자신의 패배를 인정했다.

 "뭐 대단한 반역자처럼 굴려는 건 아니지만, 난 여기 남고 싶지 않아."

 

p160

 그리고 편지를 다시 읽어보자. 편지에는 익숙한 이름이 등장했었다. 자신의 경력을 박살내려 한 푸르트벵글러의 연주회를 관람했다고? 더 인상적인 지점은 카라얀이 베를린 국립가극장의 지휘자가 되고 푸르트벵글러가 본격적으로 경계를 하기 시작할 때도 푸르트벵글러의 음악회에 변장을 하고 찾아가 들었다는 사실이다. 상식적으로 이해가 되지 않는 대목이다. 그는 카라얀의 인새을 망치려 들었다. 이 의문에 카라얀은 보통 사람들의 감정과는 동떨어진 답을 한다.

 "토스카니니와 푸르트벵글러는 지휘에서 최고의 경지에 도달했고, 그 둘의 장점을 하나로 융합하는 것이 저의 최종 목표였으니까요."

 푸르트벵글러는 즉흥적으로 주관적인 영감을 자유로이 해석했다면, 토스카니니는 '지휘자는 작곡가가 창조한 음악의 단순 전달자'라는 생각에 악보에 충실한 음악을 선사했다. 그 두 거장의 뒤를 조용히 밟았던 카라얀은 이들의 중간 접점을 유지하면서 독자적인 음악 세계를 구축하는 것을 최종 목표로 잡았다.

 카라얀이 이 음악적 세계관을 생각했을 때 무언가 무릎이 탁 쳐지는 것이 없는가? 1954년 푸르트벵글러가 죽고, 1955년 그의 뒤를 카라얀이 이은 것은 우연이 아니다. 푸르트벵글러의 다음 차세대 지휘자를 찾던 스카우터들에게 유일한 답안지는 카라얀이었다. 카라얀의 오두막에는 푸르트벵글러라는 들소가 있었던 것이다. 그 들소가 성난 표정으로 자신을 위협하려 들어도 가장 소중한 들소를 바라보던 카라얀의 표정에는 깊은 기다림이 있었다. 성공은 개인의 노력만으로 이뤄지지 않는다. 개인의 재능에 맞는 때가 도래해야 한다. 그 들소가 더는 힘을 쓰지 못하자 카라얀은 조용히 오두막을 나왔다. 결국 그는 때를 자신의 편으로 만들 수 있었다.

 그것은 어느 정도의 경지였는가? 카라얀이 지휘를 하던 도중에 한 오케스트라 단원이 음이 틀려 카라얀에게 사과를 한 적이 있었다.

 "미안해요, 카라얀. 파리 한 마리가 제 악보 위를 돌아다니는군요. 그것 때문에 신경 쓰여서 음이 틀려버렸지 뭐예요."

 그때 카라얀은 모두가 놀랄 한마디를 남겼다.

 "신경 쓰지 말아요. 그 파리도 함께 연주하게 하세요."

 완벽한 환경 신호의 차단과 분명한 집중, 그 속에서 만들어지는 오두막의 힘은 강려가다. 누구나 모든 환경 신호를 차단할 수 있는 오두막을 지을 수 있다. 그리고 남들이 권하는 '장미' 대신에 자신만의 가장 소중한 '들소'를 떠올리는 것, 그것에는 이전과 다른 특별한 힘이 있다. 

 

p207

 혁신은 하버드나 세계적인 기업의 연구소에서만 탄생하는 것이 아니다. 오히려 하버드와 세계적인 명문 대학들은 산업혁명의 거대한 혁신을 유지하기 위한 평범한 엘리트들을 대량 양산하기 위해 만들어졌다는 것이 학자들의 일관된 지적이다. 가장 영향력 있는 교육학자 켄 로빈슨의 지적을 들어보자.

 "19세기 이전에는 세계 어디에도 공교육 제도가 존재하지 않았어요. 산업사회의 수요에 의해서 생긴 것들이지요. 그리고 이 숫자는 폭발적으로 증가하고 있습니다. 유네스코에 의하면, 역대 대학 졸업생 숫자보다 앞으로 30년 동안의 졸업생 숫자가 더 많을 거라고 합니다. 전에는 학사를 필요로 한 직업이 이제는 석사학위를 필요로 하게 되었고, 석사학위를 요구했던 직업들은 이제 박사학위를 요구합니다. 학위 인플레이션이라고 보면 됩니다. 그걸 보면 교육 제도의 전체적인 구조가 변화되고 있다는 것을 알 수 있죠. 저희는 지성을 보는 관점을 많이 바꿔야 됩니다.

 

p222

 세계적인 심리학 권위자인 해리 바릭은 십여 년간의 장기 추적 연구를 통해 <단어 학습의 지속과 간격 효과>를 발표했다. 바릭은 두 그룹으로 학생을 나눴다. 첫 번째 그룹은 사회가 흔히 학생들을 테스트하는 방식대로 1년 정도의 시험 기간을 잡고, 2주마다 26회에 걸쳐서 학습한 것을 암기하게 시켰다. 그리고 두 번째 그룹에서 바릭은 모험을 시도했는데, 무려 4년 동안 두 달에 한 번씩 첫 번째 그룹과 똑같이 26회에 걸쳐 암기하게 시켰다.

 바릭이 이 장시간의 연구에서 풀고자 한 질문은 이것이다.

 "한 분야에 대한 오랜 기간의 학습이 집중 학습을 이겨낼 수 있을까?"

 우리가 바릭의 십 년 연구의 결과를 보기 전에, 첫 번째와 두 번째 그룹이 학습한 총 시간은 완전히 똑같다는 것을 잊어서는 안 된다. 다만 두 번째 그룹이 더 길게 한 분야를 잡고 있었을 뿐이다. 게다가 첫 번째 그룹이 2주에 한 번 적절한 시기에 학습했다는 것을 다시 상기해보자면, 겨우 두 달에 한 번씩 학습을 이어나가는 집단에 대한 연구는 무모해 보인다. 그렇지 않은가?

 그러나 바릭이 발견한 것은 보통 사람들의 예상과는 정반대였다. 2주 간격으로 26회, 딱 평균적인 시험공부에 익숙했던 첫 번째 그룹의 학생들은 5년의 시간이 지났을 때 그들이 학습한 것에 겨우 절반 수준인 56%만 기억했고, 두 달에 한 번씩 그러나 학습 기간을 늘린 학생들은 무려 76%를 기억하고 있었다. 모두의 허를 찌른 연구 결과에 가장 당황한 것을 정작 바릭 본인이었다.

 "누가 예상했겠는가? 정작 이 연구에 십 년을 쏟아부은 나도 전혀 예상하지 못했다. 두 달이 지나면 다 까먹을 줄 알았다."

 바릭의 연구 결과에서 주목할 수밖에 없는 것은 얼마나 한 분야를 오랫동안 포기하지 않는가가 노력의 총 시간보다 더 중요하다는 사실이다. 초반에 최고의 성적을 거둔 학생들이 사회가 만들어주는 배지에 취해 있을 때, 적당한 곳에 흘러들어간 학생이 끝까지 시동을 끄지 않는다면 누가 더 최고의 자리에 오를지를 쉽게 단정할 수가 없다는 것이다. 하버드의 가장 빛나는 지식들도 졸업하고 뒤돌아보지 않으면 절반은 사라져버리는 현상이 발견되기도 했다.

 

 

 

 호모 사피엔스의 발생부터 최근의 과학혁명에 이르기까지 인류의 역사의 주요한 분기점들의 주요한 내용을 통사적으로 다루고 있다. 

 그 뼈대는 새로울 것이 없어 보이지만, 실제로 다루는 내용은 상당히 새로운 시각으로 가득하다.

 읽는 즐거움이 있는 책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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p25

 사람들이 흔히 범하는 오류 중 하나는 이들 종을 단일 계보라고 생각하는 것이다. 예컨대 에르가스터가 에렉투스를 낳고 에렉투스가 네안데르탈을 낳고 네안데르탈인이 진화해 오리 종이 되었다는 식이다. 이런 직선 모델은 오해를 일으킨다. 어느 시기를 보든 당시 지구에 살고 있던 인류는 한 종밖에 없었으며, 모든 오래된 종들은 우리의 오래된 선조들이라는 오해 말이다. 

 

 사실은 이렇다 2백만 년 전부터 약 1만 년 전까지 지구에는 다양한 인간 종이 살았다. 왜 안 그랬겠는가? 오늘날에도 여우, 곰, 돼지 등 수많은 종이 동시대를 살고 있지 않은가. 몇만 년 전의 지구에는 적어도 여섯 종의 인간이 살고 있었다. 여기에서 이상한 점은 옛날에 여러 종이 살았다는 사실이 아니라 오히려 지금 딱 한 종만 있다는 사실이다. 더구나 이 사실은 우리 종의 범죄를 암시하는 것일지 모른다. 곧 살펴보겠지만, 우리 사피엔스 종에게는 사촌들에 관한 기억을 억압할 이유가 있다.

 

(개인생각)

인간이 무리 생활을 시작하게 된 결정적 동기는 외부의 위협(공룡, 사자 등과 같은 인간보다 힘이 세고 인간들을 사냥하는 짐승과 같은)으로부터 좀 더 살아남기 용이하게 하기 위해서였을 것이다.(마치 현재의 미어캣처럼)

(주요 호모 속 연표) 인류와 침팬지의 공통 조상이 6백만 년 전, 250만년 전 아프리카에서 호모 속이 진화하고 석기를 사용. 2백만 년 전 인류가 아프리카에서 유라시아로 퍼지고, 다양한 인간 종의 진화, 50만 년 전 유럽과 중동에서 네안데르탈인 진화, 30만년 전 불의 사용, 20만년 전 동아프리카에서 호모 사피엔스 진화, 7만년 전 인지혁명, 언어를 사용하기 시작, 역사의 시작.

 

p32

 일부 학자는 익혀 먹는 화식火食의 등장, 인간의 창자가 짧아진 것, 뇌가 커진 것 사이에 직접적인 연관이 있다고 생각한다. 기다란 창자와 커다란 뇌를 함께 유지하기는 어렵다. 둘 다 에너지를 무척 많이 소모하기 때문이다. 화식은 창자를 짧게 만들어서 에너지 소비를 줄일 수 있게 해주었고, 의도치 않은 이런 변화 덕분에 네안데르탈인과 사피엔스는 커다란 뇌를 가질 수 있었다. 

 

p36

 

 이 논쟁에는 많은 것이 걸려 있다. 진화의 관점에서 볼 때 7만 년 이란 상대적으로 짧은 기간이다. 만일 '교체이론'이 맞다면, 현재 살아 있는 모든 인간은 대체로 같은 유전자들을 지니고 있으며 이들 사이의 유전적 차이는 무시해도 좋은 정도다. 하지만 '교배이론''이 맞다면, 아프리카인, 유럽인, 아시아인 사이에는 수십만 년의 연원을 둔 유전적 차이가 있을 수도 있다. 이 문제는 정치적 화약고로서, 폭발력을 지닌 인종이론의 재료가 될 수 있다.

 최근 몇십 년은 교체이론이 이 분야의 상식이었다. 이에 대한 고고학적 증거가 상대적으로 더 확고하며 정치적으로도 더 올바른 것이었다(현대 인구집단들에게 유의미한 유전적 다양성이 있다고 말하면 인종주의라는 판도라의 상자가 열릴 수 있다. 과학자들은 이를 원하지 않았다). 하지만 이런 상황은 2010년에 끝이 났다. 4년간의 연구 끝에 네안데르탈인의 게놈 지도가 발표된 것이다. 유전학자들은 화석에서 충분한 양의 온전한 네안데르탈인 DNA를 얻어서 그것과 현대인의 DNA를 폭넓게 대조해볼 수 있었다.

 그 결과는 과학자 사회를 경악하게 만들었다. 오늘날 중동과 유럽에 거주하는 인구집단이 지닌 인간 고유의 DNA 중 1~4퍼센트가 네안데르탈인 DNA로 밝혀졌던 것이다. 이것은 비록 많은 양은 아니지만 중대한 의미가 있다. 그로부터 몇 개월 뒤 두 번째 충격적인 사건이 있었다. 과학자들이 2008년 시베리아 알타이 산맥의 데니소바 동굴에서 발견한 손가락뼈에서 추출한 DNA로 유전자 지도를 만들었는데, 그 결과 현대 멜라네시아인과 호주 원주민의 인간 고유 DNA 중 최대 6퍼센트가 데니소바인의 DNA인 것으로 나타났다.

 

 이런 결과가 유효하다면 - 이런 결론을 강화하거나 수정할 가능성이 있는 추가 연구과 진행 중이라는 사실을 염두에 두는 것이 중요하다 - 최소한 교배이론에 뭔가 근거가 있다는 뜻이 된다. 하지만 그렇다고 교체이론이 완전히 들린 것은 아니다. 네안데르탈인과 데니소바인은 오늘날 우리의 게놈에 아주 작은 양만 기여했기 때문에, 사피엔스와 다른 인간 종의 합병을 이야기하기는 불가능하다. 이들 간의 차이가 번식 가능한 성관계를 완전히 차단할 정도로 크지는 않았다고 해도, 그런 접촉을 매우 드물게 만들 정도이기는 했다.

 그러면 우리는 사피엔스, 네안데르탈인, 데니소바인의 생물학적 연관성을 어떻게 이해해야 할까? 이들이 말과 당나귀처럼 완전히 다른 종이 아닌 것은 분명하다. 하지만 불도그와 스패니얼처럼 동일 종의 각기 다른 집단에 불과한 것은 아니다. 생물학적 실체는 흑과 백이 아니다. 회색 지대들도 중요하다. 예컨대 말과 당나귀처럼 하나의 공통 조상에서 진화한 두 종이라면 다들 어느 시기에는 불도그와 스패니얼처럼 같은 종의 두 집단이었다. 그러다가 두 집단이 이미 확연히 달라진 시점, 그러면서도 드물게 서로 성관계를 해서 번식 가능한 후손을 낳을 수 있는 시점이 있었을 것이다. 그후 또 다른 돌연변이가 일어나서 최후의 연결선은 끊어졌고, 집단들은 각기 다른 진화적 경로를 밟게 되었다.

 

 사피엔스와 네안데르탈인, 데니소바인은 약 5만 년 전 이런 경계선에 섰던 것 같다. 그들은 완전히 다른 종은 아니지만 대체로 별개의 종이었다. 다음 장에서 살펴보듯 사피엔스와 네안데르탈인, 데니소바인은 유전부호나 신체 특징만 달랐던 것이 아니라 인지능력, 사회적 능력에서도 차이가 났다. 하지만 사피엔스와 네안데르탈인이 번식 가능한 후손을 낳는 일이 드물게나마 여전히 가능했던 것으로 보인다. 따라서 이들 집단이 합병한 것은 아니고 일부 운 좋은 네안데르탈인의 유전자가 사피엔스 특급에 편승한 것이었다. 우리 사피엔스가 과거 언젠가 다른 종의 동물과 성관게를 하고 아이를 낳을 수 있었다는 생각은 심란하다. 그러나 한편 짜릿하기도 하다.

 네안데르탈인과 데니소바인이 사피엔스에 합병된 것이 아니라면 이들이 사라진 이유는 무엇일까? 하나의 가능성은 사피엔스가 이들을 멸종으로 이끌었다는 것이다. 상상해보자, 사피엔스의 한 무리가 발칸 반도의 어느 계곡에 도착했는데, 네안데르탈인이 이곳에서 수십만 년 전부터 살고 있었다. 새로 도착한 사피엔스들은 사슴을 사냥하고 견과류와 장과류를 채취하기 시작했는데, 이것은 네안데르탈인의 주식이기도 했다.

 사피엔스는 기술과 사회적 기능이 우수한 덕분에 사냥과 채취에 더 능숙했다. 이들은 번식하고 퍼져나갔다. 이들보다 재주가 떨어지는 네안데르탈인은 먹고 살기가 점점 힘들어졌다. 집단의 크기는 줄어들과 서서히 모두 죽어갔다. 이웃의 사피엔스 집단에 합류한 한두 명의 예외를 제외하면 말이다.

 

 또 다른 가능서도 있다. 자원을 둘러싼 경쟁이 폭력과 대량학살을 유발했다는 것이다. 관용은 사피엔스의 특징이 아니다. 현대의 경우를 보아도 사피엔스 집단은 피부색이나 언어, 종교의 작은 차이만으로도 곧잘 다른 집단을 몰살하지 않는가.

 

 원시의 사피엔스라고 해서 자신들과 전혀 다른 인간 종에게 이보다 더 관용적이었을까? 사피엔스가 네안데르탈인과 마주친 결과는 틀림없이 역사상 최초이자 가장 심각한 인종청소였을 것이다.

==> 최근의 해석은 아프리카에서 발원한 사피엔스가 10만 년 전 최초로 유럽대륙으로 진출을 하려다가 이미 자리를 잡고 있는 월등한 신체적능력을 가진 네안데르탈인에 의해 좌절된다. 3만 년 후, 인지 혁명을 통해 언어를 습득하고 집단의 전투전략을 발전시킨 사피엔스가 다시 유럽대륙 진출을 도모하고 이때, 네안데르탈인 등 다른 호모 속을 제거하면서 다른 대륙으로의 진출을 가속화시킨다라는 연구 결과가 있다.

 

p41

 사피엔스의 성공비결은 무엇이었을까? 우리는 어떻게 생태적으로 전혀 다른 오지의 서식지에 그처럼 빠르게 정착할 수 있었을까? 우리는 어떤 방법으로 다른 인간 종들을 망각 속으로 밀어넣었을까? 튼튼하고 머리가 좋으며 추위에 잘 견뎠던 네안데르탈인은 어째서 우리의 맹공격을 버텨내지 못했을까? 논쟁은 뜨겁게 계속되고 있다. 그리고 가장 그럴싸한 해답은 바로 이런 논쟁을 가능하게 하는 것, 즉 언어다. 호모 사피엔스가 세상을 정복한 것은 다른 무엇보다도 우리에게만 있는 고유한 언어 덕분이었다.

 

p46

 인간의 언어가 진화한 것은 소문을 이야기하고 수다를 떨기 위해서라는 것이다. 이 이론에 따르면, 호모 사피엔스는 무엇보다 사회적 동물이다. 사회적 협력은 우리의 생존과 번식에 핵심적 역할을 한다. 개별 남성이나 여성이 사자와 들소의 위치를 아는 것만으로는 충분치 않다. 그보다는 무리 내의 누가 누구를 미워하는지, 누가 누구와 잠자리를 같이하는지, 누가 정직하고 누가 속이는지를 아는 것이 훨씬 더 중요하다.

 

 40~50명 정도의 사람들 사이에서 수시로 변해가는 관계를 저장하고 추적하는 데 필요한 정보의 양은 어마어마하다(50명으로 구성된 무리에는 1,225개의 일대일 관계가 있으며 이보다 복잡한 사회적 조합이 무수히 많이 존재한다). 모든 유인원은 이런 사회적 정보에 예리한 관심을 나타내지만, 이들에게 효율적으로 소문을 공유할 수단이 부족하다. 네안데르탈인과 원시 호모 사피엔스 역시 소문을 공유하는 데 어려움을 겪었을 것이다.

 뒷담화는 악의적인 능력이지만, 많은 숫자가 모여 협동을 하려면 사실상 반드시 필요하다. 현대 샆피엔스가 약 7만 년 전 획득한 능력은 이들로 하여금 몇 시간이고 계속해서 수다를 떨 수 있게 해주었다. 누가 신뢰할 만한 사람인지에 대한 믿을 만한 정보가 있으면 작은 무리는 더 큰 무리로 확대될 수 있다. 이는 사피엔스가 더욱 긴밀하고 복잡한 협력 관계를 발달시킬 수 있다는 뜻이기도 하다.

 뒷담화이론은 농담처럼 들릴지 모르지만, 이를 뒷받침하는 연구 결과가 무수히 많다. 심지어 오늘날에도 의사소통의 대다수가 남 얘기다. 이메일이든 전화든 신문 칼럼이든 마찬가지다. 이것은 매우 자연스러운 현상이다. 우리의 언어가 이런 목적으로 진화한 것처럼 보일 지경이다.

 

p48

 우리 언어의 진정한 특이성은 사람이나 사자에 대한 정보를 전달하는 능력에 있는 것이 아니다. 그보다는 전혀 존재하지 않는 것에 대한 정보를 전달하는 능력에 있다. 지금까지 우리가 아는 한, 직접 보거나 만지거나 냄새 맡지 못한 것에 대해 마음껏 이야기할 수 있는 존재는 사피엔스뿐이다.

 전설, 신화, 신, 종교는 인지혁명과 함께 처음 등장했다. 이전의 많은 동물과 인간 종이 "조심해! 사자야!"라고 말할 수 있었다면, 인지혁명 덕분에 호모 사피엔스는 이렇게 말할 수 있게 되었다. "사자는 우리 종족의 수호령이다." 허구를 말할 수 있는 능력이야말로 사피엔스가 사용하는 언어의 가장 독특한 측면이다.

 오직 호모 사피엔스만이 실제로 존재하지 않는 것에 대해 말할 수 있고, 아침을 먹기도 전에 불가능한 일을 여섯 가지나 믿어버릴 수 있다는 데는 누구나 쉽게 동의할 것이다. 원숭이를 설득하여 지금 우리에게 바나나 한 개를 준다면 죽은 뒤 원숭이 천국에서 무한히 많은 바나나를 갖게 될 거라고 믿게끔 만드는 일은 불가능하다.

 

p60

 인지혁명 이후, 사피엔스는 이중의 실재 속에서 살게 되었다. 한쪽에는 강, 나무, 사자라는 객관적 실재가 있다. 다른 한쪽에는 신, 국가, 법인이라는 가상의 실재가 존재한다. 시간이 흐르면서 가상의 실재는 점점 더 강력해졌고, 오늘날에 이르러서는 강과 나무와 사자의 생존이 미국이나 구글 같은 가상의 실재들의 자비에 좌우될 지경이다.

 

p68

 인지혁명 이후 생물학과 역사의 관계를 요약하면 다음과 같다.

 

1. 생물학은 호모 사피엔스의 행동과 능력의 기본 한계를 결정한다. 모든 역사는 이런 생물학적 영역의 구속 내에서 일어난다.

2. 하지만 이 영역은 극도로 넓기 때문에, 사피엔스는 엄청나게 다양한 종류의 게임을 할 수 있다. 사피엔스는 픽션을 창조하는 능력 덕분에 점점 더 복잡한 게임을 만들었고, 이 게임은 세대를 거듭하면서 더더욱 발전하고 정교해진다.

3. 결과적으로, 사피엔스의 행동을 이해하려면 우리는 이들의 행동이 역사적으로 진화해온 경로를 서술해야 한다. 우리가 생물학적 속박만을 이야기한다면, 그것은 월드컵 경기를 중계하면서 선수들이 무엇을 하고 있는지를 설명하기보다는 운동장의 상태를 자세히 설명하는 라디오 아나운서와 다를 바 없다. 

 

 우리 석기시대 조상들은 역사의 무대에서 어떤 게임을 했을까? 우리가 아는 한, 3만 년 전쯤 슈타델의 사자-남자를 조각한 사람들은 오늘날 우리와 동일한 육체적, 감정적, 지적 능력을 가지고 있었다. 그들은 아침에 일어나면 무엇을 했을까? 아침으로는 무얼 먹었을까? 점심으로는? 그들의 사회는 어떤 모습이었을까? 일부일처제를 맺고 핵가족을 유지했을까? 전쟁은 치렀을까?

 

p81

 가끔은 자기 세력권을 벗어나 새로운 땅을 헤매는 무리들이 있었다. 원인은 자연재해, 폭력적 분쟁, 인구 증가에 의한 압박, 카리스마 있는 지도자의 결단 등이었다. 이런 방랑은 인간이 외부 세계로 팽창한 결정적인 요인이었다. 수렵채집인 한 무리가 40년마다 한 번씩 둘로 나뉘며, 갈라져 나온 집단이 원래 있던 곳보다 1백 킬로미터 동쪽에 있는 새로운 영토로 이주한다고 가정하자. 그러면 동부 아프리카에서 중국까지 1만 년이면 갈 수 있었을 것이다.

 

p85

 모든 시기 대부분의 장소에서 수렵채집은 가장 이상적인 영양소를 제공했다. 놀라운 일이 아니다. 인간은 이런 식단을 수십만 년 동안 먹어왔고, 신체 역시 여기에 잘 적응했다. 고대 수렵채집인은 후손인 농부들보다 굶어 죽거나 영양실조에 걸리는 일이 적었으며, 화석 뼈에 나타난 증거가 시사하는 바에 따르면 키가 더 크고 신체도 건강했을 가능성이 많다. 다만 평균 기대수명은 30~40년에 불과했다. 그러나 그것은 주로 어린이 사망률이 높은 탓이었다. 출생 1년 이내의 영아 사망률이 가장 높았으며, 이 시기를 지난 아이는 60세까지 살 가능성이 높았고 일부는 80세까지 살았다. 현대 수렵 채집인의 경우 45세인 여성은 향후 20년 더 살 것으로 기대되며 구성원의 5~8퍼센트는 60세 이상이다.

 

 수렵채집인은 굶어 죽거나 영양실조에 걸리지 않았다. 이들의 성공비결은 다양한 식단에 있었다. 농부는 매우 제한된 종류의 식품을 먹으며 불균형인 식사를 한다. 특히 현대 이전에 농업인구를 먹여 살린 칼로리의 대부분은 밀이나 감자, 쌀 등 단일작물에서 왔다. 여기에는 일부 비타민, 미네랄을 비롯해 인간이 필요로 하는 여타 영양소가 부족하다. 중국 전통사회의 전형적 농부는 아침, 점심, 저녁에 쌀밥을 먹었다. 운이 좋으면 다음 날도 그렇게 먹을 수 있었다. 이에 비해 고대의 수렵채집인은 수십 가지의 다양한 식품을 규칙적으로 먹었다. 농부의 조상인 수렵채집인은 아침에 각종 베리와 버섯, 점심에 과일 및 달팽이와 거북, 저녁에는 토끼 스테이크에 야생 양파를 곁들여 먹었을 것이다. 다음 날에는 전혀 다른 음식을 먹었을지 모른다. 이처럼 다양한 식품은 고대 수렵채집인이 필요로 하는 영양소를 확실히 섭취하게 해주었다. 

 게다가 단 한 가지 식량에만 의존하지 않았기 때문에 해당 식량의 공급이 끊어져도 문제가 덜했다. 농경사회는 가뭄이나 화재, 지진 때문에 쌀이나 감자 농사를 망치면 기근에 휩싸인다. 수렵채집 사회도 자연재해를 당하고 결핍과 굶주림의 시기를 겪었지만 대체로 이런 재앙을 좀 더 쉽게 극복할 수 있었다. 주식이 되는 일부 먹을거리를 구하지 못하면 다른 것을 사냥하거나 채집할 수 있었고, 영향을 덜 받은 다른 지역으로 이동할 수도 있었다.

 고대 수렵채집인은 전염병의 영향도 덜 받았다. 농경 및 산업사회를 휩쓴 대부분의 전염병(천연두, 홍역, 결핵)은 가축이 된 동물에 기원을 두고 있으며, 이것이 사람에게 전파된 것은 농업혁명 이후부터다. 고대 수렵채집인이 기르는 가축은 개밖에 없었으므로 그들에게는 이런 괴로움이 없었다. 게다가 농업 및 산업 사회 사람들은 인구가 밀집한 비위생적인 거주지에 영구적으로 살았는데, 이는 질병이 퍼지기 이상적인 온상이었다. 수렵채집인들은 떠돌며 생활했는데, 무리도 소규모여서 전염병이 널리 퍼질 수 없었다.

 

 건강에 유익한 음식을 다양하게 먹고, 주당 일하는 시간도 상대적으로 짤브며, 전염병도 드물었으니, 이를 두고 많은 전문가는 농경 이전 수렵채집 사회를 '최초의 풍요사회'라고 불렀다. 하지만 그렇다고 고대인의 삶을 이상적인 것으로 그리면 실수일 수도 있다. 이들이 농업 및 산업 사회 사람 대다수보다 더 나은 삶을 영위하기는 했지만, 그럼에도 삶은 거칠고 힘든 것이었다. 고난과 결핍의 시기가 종종 닥쳤고, 어린이 사망률이 높았으며, 오늘날 같으면 사소했을 사고가 쉽게 사망선고로 이어질 수 있었다. 아마도 대부분의 사람들은 떠돌이 무리 내에서 두터운 교분을 향유했겠지만, 무리 내에서 적개심이나 비웃을 받는 사람들은 끔찍한 고통을 겪었을 것이다.

 

p111

 보온복과 사냥기술이 개선되자 사피엔스는 얼어붙은 지역에 더욱 깊숙이 들어가는 모험을 감행했다. 그리고 이들이 북쪽으로 이동함에 따라 의복, 사냥기술을 비롯한 생존기술은 계속해서 발전했다.

 그런데 왜 이런 수고를 무릅썼을까? 도대체 왜 스스로 시베리아로 유배를 갔을까? 일부 무리는 전쟁, 인구 증가의 압박, 자연재해 때문에 북쪽으로 내몰렸을 수도 있다. 그런가 하면 예컨대 동물성 단백질 같은 긍정적인 이유로 북쪽으로 이끌린 집단도 있었을지 모른다. 북극 땅은 순록이나 매머드처럼 군침이 도는 대형동물이 풍부했다. 매머드는 한 마리만 잡아도 엄청난 양의 고기(기온이 낮기 때문에 얼렸다 나중에 먹을 수도 있었다)와 맛있는 지방, 따뜻한 모피, 귀중한 상아를 제공하였다. 숭기르의 유적이 증언하듯, 매머드 사냥꾼들은 북쪽 동토에서 단지 살아남은 것이 아니라 번성했다. 시간이 흐르면서 이들 무리는 매머드와 마스토돈, 코뿔소, 순록을 쫓아 더 멀리 퍼져나갔다.

 

 기원전 14,000년쯤 이 중 일부가 사냥감을 쫓아 시베리아 북동부에서 알래스카까지 가게 되었다. 물론 이들은 자신들이 신세계를 발견했다는 사실을 몰랐다. 매머드에게나 인류에게나 알래스카는 시베리아의 연장에 지나지 않았다. 처음에는 빙하 때문에 알래스카에서 아메리카의 다른 지역으로 가는 길이 막혀 있었다. 더 남쪽을 탐사할 수 있었던 것은 소수의 고립된 개척자들뿐이었을 것이다. 그러던 중 기원전 12,000년쯤 지구 온난화로 얼음이 녹고 좀 더 쉬운 통로가 열렸다. 새로운 통로를 이용해서 인류는 떼를 지어 남쪽으로 이동했고, 대륙 전체로 퍼져나갔다. 원래는 대형동물을 사냥하는 데 적응했던 기업터 터였지만 이들은 곧 극히 다양한 기후와 생태계에 적응했다.

 

 시베리아인의 후예들은 미국 동부의 울창한 숲, 미시시피 삼각주의 늪지대, 멕시코의 사막, 중미의 찌는 듯한 밀림에 정착했다. 아마존 강 유역의 세계에 둥지를 틀었는가 하면 안데스 산맥의 골짜기나 아르헨티나의 대초원에 뿌리를 내리기도 했다. 이 모든 일이 단 1천 년이나 2천 년 만에 일어났다. 기원전 10,000년이 되자 인류는 미 대륙 최남단의 티에라델푸에고 제도에까지 정착했다.

 인류의 이런 진격전은 호모 사피엔스의 뛰어난 창의력과 적응력을 증언한다. 다른 동물은 이토록 극단적으로 다양한 서식지들에 사실상 똑같은 유전자를 가진 상태로 그토록 빨리 이주한 예가 전여 없다.

 

p121

 

 인류가 농업으로 이행한 것은 기원전 9500~8500년경 터키 남부, 서부 이란, 에게 해 동부 지방에서였다. 시작은 느렸고 지리적으로 제한된 지역만을 대상으로 했다. 밀을 재배하고 염소를 가축화한 것은 기원전 9000년경이었다. 완두콩과 렌즈콩은 기원전 8000년경, 올리브나무는 기원전 5000년, 포도는 기원전 3500년 재배가 시작되었고, 말은 기원전 4000년부터 기르기 시작했다. 낙타와 캐슈넛 같은 일부 동식물은 더 나중에 가축과 재배작물이 되었다. 하지만 기원전 3500년이 되자 가축화와 재배작물화의 주된 파도는 지나갔다. 온갖 기술이 발달한 오늘날에도 인류를 먹여 살리는 칼로리의 90퍼센트 이상이 밀, 쌀, 옥수수, 감자, 수수, 보리처럼 우리 선조들이 기원전 9500년에서 3500년 사이에 작물화했던 한줌의 식물들에서 온다. 지난 2천 년 동안 주목할 만한 식물을 작물화하거나 동물을 가축화한 사례가 없었다. 오늘날 우리의 마음이 수렵채집인 시대의 것이라면, 우리의 부엌은 고대 농부의 그것과 다르지 않다.

 

 한때 학자들은 중동의 어느 특정 지점에서 농업이 시작되어 사방으로 퍼져나갔다고 믿었다. 그러나 오늘날 학자들은 중동 농부들이 자신들의 혁명을 수출한 게 아니라 농업은 세계 여러 지역에서 완전히 독자적으로 생겨났다는 생각에 합의하고 있다. 중미 사람들은 중동에서 밀과 완두콩을 재배한다는 사실을 전혀 모른 채 옥수수와 콩을 작물화했다. 남미 사람들은 멕시코나 지중해 지방에서 어떤 일이 일어나는지 모르는 채 감자를 재배하고 라마를 키우는 법을 익혔다. 중국의 초기 혁명가들은 쌀과 수수를 작물화하고 돼지를 가축화했다. 북미의 첫 정원사는 먹을 수 있는 호리병박을 찾아 땅속을 샅샅이 뒤지는 데 진력이 나서 호박을 재배하기로 결심하였다. 뉴기니 사람들은 사탕수수와 바나나를 길렀고, 그동안 서부 아프리카 최초의 농부들은 아프리카 수수, 아프리카 쌀, 수수와 밀을 자신들의 필요에 맞도록 작물화했다. 이들 지역에서 농업은 널리 퍼져나갔다. 기원후 1세기쯤이 되자 세계 대부분의 지역 사람들 대다수가 농민이 되었다.

 

 중동, 중국, 중미에서 일어난 농업혁명이 호주, 알래스카, 남아프리카에서 일어나지 않은 이유는 무엇일까? 이유는 단순하다. 대부분의 식물과 동물 종은 작물화나 가축화에 맞지 않기 때문이다. 사피엔스는 맛 좋은 송로버섯을 캐거나 털이 부숭부숭한 매머드를 사냥할 수는 있었지만, 이를 재배하거나 가축화한다는 것은 불가능한 일이었다. 버섯의 곰팡이는 형체가 너무 불분명했고 야수는 너무 사나웠다. 우리 조상들이 잡거나 채취했던 수천 종의 동물과 식물 중에 농업과 목축업에 맞는 후보는 몇 되지 않았다. 이들 종은 특정 장소에 살았고 그 장소들이 바로 농업혁명이 일어난 지역이다.

 

p124

 

 진화는 점점 더 지능이 뛰어난 사람들을 만들어냈고, 결국 사람들은 너무나 똑똑해져서 자연의 비밀을 파악하고 양을 길들이며 밀을 재배할 수 있게 되었으며, 그게 가능해지자마자 지겹고 위험하고 종종 스파르타처럼 가혹했던 수렵채집인의 삶을 기꺼이 포기하고 농부의 즐겁고 만족스러운 삶을 즐기기 위해 정착했다는 것이다.

 이 이야기는 환상이다. 시간이 흘러 사람들이 더욱 총명해졌다는 증거는 없다. 수렵채집인들은 농업혁명 훨씬 이전부터 자연의 비밀을 알고 있었다. 사냥하는 동물과 채집하는 식물을 잘 알고 있어야 생존할 수 있었기 때문이다. 농업혁명은 안락한 새 시대를 열지 못했다. 그러기는커녕, 농부들은 대체로 수렵채집인들보다 더욱 힘들고 불만스럽게 살았다. 수렵채집인들은 그보다 더 활기차고 다양한 방식으로 시간을 보냈고 기아와 질병의 위험이 적었다. 농업혁명 덕분에 인류가 사용할 수 있는 식량의 총량이 확대된 것은 분명한 사실이지만, 여분의 식량이 곧 더 나은 식사나 더 많은 여유시간을 의미하지는 않았다. 오히려 인구폭발과 방자한 엘리트를 낳았다. 평균적인 농부는 평균적인 수렵채집인보다 더 열심히 일했으며 그 대가로 더 열악한 식사를 했다. 농업혁명은 역사상 최대의 사기였다.

 

 그것은 누구의 책임이었을까? 왕이나 사제, 상인은 아니었다. 범인은 한 줌의 식물 종, 밀과 쌀과 감자였다. 이들 식물이 호모 사피엔스를 길들였지, 호모 사피엔스가 이들을 길들인 게 아니었다.

 잠시 농업혁명을 밀의 관점에서 생각해보자. 1만 년 전 밀은 수 많은 잡초 중 하나일 뿐으로서 중동의 일부 지역에만 살고 있었다. 그러다가 갑자기, 불과 몇천 년 지나지 않아 세계 모든 곳에서 자라게 되었다. 생존과 번식이라는 진화의 기본적 기준에 따르면 밀은 지구 역사상 가장 성공한 식물이 되었다. 북미의 대초원 지역 같은 곳에는 1만 년 전 밀이 한 포기도 없었지만 지금은 수백 킬로미터를 걷고 또 걸어도 밀 이외의 다른 식물을 볼 수가 없다. 세계적으로 밀이 경작되는 지역은 225만 제곱킬로미터쯤 되는데 이는 브리튼 섬(잉글랜드, 스코틀랜드, 웨일스 포함)의 열 배에 이른다,

 어떻게 이 잡초는 그러그런 식물에서 출발해 어디서나 자라는 존재가 되었을까? 밀은 호모 사피엔스를 자신의 이익에 맞게 조작함으로써 그렇게 해낼 수 있었다. 약 1만 년 전까지 이 유인원은 사냥과 채집을 하면서 상당히 편안하게 살고 있었으나, 이후 밀을 재배하는 데 점점 더 많은 시간을 투자하기 시작했다. 2천 년도 채 지나지 않아 전 세계 많은 지역의 인간은 통이 틀 때부터 해가 질 때까지 밀을 돌보는 것 외에는 거의 아무 일도 하지 않게 되었다.

 밀을 키우는 일은 쉽지 않았다. 많은 노동력을 요구하기 때문이다. 밀은 바위와 자갈을 좋아하지 않기 때문에, 사피엔스는 밭을 고르느라 등골이 휘었다. 밀은 다른 식물과 공간, 물, 영양분을 나누는 것을 좋아하지 않기 때문에, 인간은 타는 듯한 태양 아래 온종일 잡초를 뽑는 노동을 했다. 밀은 병이 들기 때문에, 사피엔스는 해충과 마름병을 조심해야 했다. 밀은 자신을 즐겨 먹는 토끼와 메뚜기 떼에 대한 방어책이 없었기 때문에, 농부들이 이를 막아야 했다. 밀은 목이 말랐기 때문에, 인간들은 샘과 개울에서 물을 끌어다 댔다. 밀은 배가 고팠기 때문에, 사피엔스는 밀이 자라는 땅에 영양을 공급하기 위해 동물의 변을 모아야 했다.

 사피엔스의 신체는 이런 과업에 맞게 진화하지 않았다. 사과나무에 기어오르고 가젤을 뛰어서 뒤쫓는 데 적응했지, 바위를 제거하고 물이 든 양동이를 운반하는 데 적합한 몸이 아니었다. 인간의 척추와 무릎, 목과 발바닥의 장심이 대가를 치렀다. 고대 유골을 조사한 바에 따르면, 농업으로 이행하면서 디스크 탈출증 관절염, 탈장 등 수많은 병이 생겨났다. 새로운 농업노동은 너무나 많은 시간을 필요로 했다. 사람들은 밀밭 옆에 영구히 정착해야만 했다. 이로써 이들의 삶은 영구히 바뀌었다. 우리가 밀을 길들인 것이 아니다. 밀이 우리를 길들였다. '길들이다, 가축화하다'라는 뜻의 단어 'domesticate'는 '집'이라는 뜻의 라틴어 'domus'가 어원이다. 집에서 사는 존재는 누구인가? 밀이 아니다. 호모 사피엔스다.

 

 밀은 어떻게 호모 사피엔스로 하여금 어느 정도 만족할 만한 삶을 더 비참한 생활과 교환하도록 설득했을까? 무엇을 보상으로 제시했을까? 더 나은 식사를 제공한 것은 아니었다. 명심하자, 인류는 아주 다양한 음식을 먹고사는 잡식성 유인원이다. 농업혁명 이전 식사에서 곡물이 차지하는 비중은 아주 적었다. 곡률르 중심으로 하는 식단은 미네랄과 비타민이 부족하고 소화시키기 어려우며 치주조직에 해롭다. 밀은 사람들에게 경제적 안정을 제공하지도 않았다. 농부의 삶은 수렵채집인의 삶보다 불안정했다. 수렵채집인은 수십 종의 먹을거리에 의지해 생존했기 때문에 설령 저장해둔 식량이 없더라도 어려운 시절을 몇 해라도 견뎌나갈 수 있었다. 특정한 종을 손에 넣기가 힘들어지면 다른 종들을 사냥하고 채집할 수 있었으니까.

 농경사회는 극히 최근까지도 대부분의 칼로리를 극소수의 작물을 통해 섭취했다. 오랜 세월 이들 사회는 밀이나 감자, 쌀 등 단 하나의 주식에 의존했다. 비가 내리지 않거나, 메뚜기 떼가 덮치거나, 곰팡이가 주식인 작물을 감염시키면, 농부들은 수천 수백만 명씩 죽어나갔다. 밀은 인간 사이의 폭력에 대한 안정망을 제공하지도 않았다. 초기 농부들은 수렵채집인 조상보다 더하진 않았을지언정 그 못지않게 폭력적이었다. 농부들은 재산이 더 많았으며 경작할 토지를 필요로 했다. 이웃의 습격으로 목초지를 잃는 것은 생사가 걸린 문제였기에, 타협의 여지가 매우 적었다. 수렵채집인 무리는 강력한 라이벌에게 몰리면 보통 다른 장소로 옮길 수 있었다. 힘들고 위험하지만 실행할 수는 있었다.

 농촌 마을이 강력한 적의 위협을 당할 경우, 후퇴는 곧 목초지와 집, 곡물창고를 포기해야 한다는 뜻이었다. 많은 경우 이런 피난민들은 굶어 죽었다. 그러므로 농부들은 그 자리에서 버티면서 최후까지 싸우는 경향이 있었다. 많은 인류학적, 고고학적 연구는 부락이나 종족을 넘어서는 정치적 틀이 없는 단순 농경사회에서 사망의 15퍼센트가 인간의 폭력 탓임을 시사한다. 남성의 경우에는 폭력적 사망이 25퍼센트에 이른다. 오늘날 뉴기니를 보면, 농경 부족사회의 다니족에서 남성 사망의 30퍼센트가 폭력 때문이고, 엥가족에서는 35퍼센트가 폭력 때문이다. 에콰도르의 경우 와오란족 성인의 약 50퍼센트가 다른 인간의 폭력으로 죽는다.

 

 시간이 흐르고 도시, 왕국, 국가 등 보다 큰 사회적 틀이 발전하면서 인간의 폭력은 통제받게 되었다. 하지만 이렇게 크고 효율적인 정치체제를 구축하는 데는 수천 년이 걸렸다. 최초의 농부들은 마을에 사는 생활양식 덕분에 야생동물이나 비, 추위로부터 보호받는 등 어느 정도 직접적인 혜택을 누렸다. 하지만 평범한 개인의 입장에서 보면 이익보다 손해가 더 컸을 것이다. 오늘날 번영사회에 사는 사람들로서는 이해하기 어려운 이야기이다. 요즘 우리는 풍요와 안전을 누리고 있고 그 풍요와 안전은 농업혁명이 좋은 기초 위에 세워진 것이기 때문에 우리는 농업혁명이 놀라운 개선이라고 가정한다. 하지만 수천 년의 역사를 오늘날의 관점에서 판단하는 것은 잘못이다.

 이보다 훨씬 더 대표성이 있는 관점은 1세기 무렵 중국에서 아버지가 농사에 실패해 영양실조로 죽어가는 세 살짜리 딸의 관점이다. 아이는 과연 "나는 영양실조로 죽어가지만, 앞으로 2천 년 내에 사람들은 먹을거리가 풍부한 세상에서 에어컨이 딸린 큰 집에서 살게 될 테니 나의 고통은 가치 있는 희생이다"라고 말할까?

 그렇다면 밀은 영양실조에 걸린 중국 소녀를 비롯한 농업종사자들에게 무엇을 주었을까? 사람들 개개인에게 준 것은 아무것도 없다. 하지만 호모 사피엔스 종에게는 무언가를 주었다. 밀 경작은 단위 토지당 식량생산을 크게 늘렸고, 그 덕분에 호모 사피엔스는 기하급수적으로 늘어날 수 있었다.

 기원전 13000년경, 사람들이 야생식물을 채취하고 야생동물을 사냥하면서 먹고살던 시기에 팔레스타인의 여리고(Jericho) 오아시스 주변 지역이 지탱할 수 있는 인구는 기껏해야 1백 명 정도의 건강하고 영양상태가 비교적 좋은 방랑자들이었을 것이다. 기원전 8500년 야생식물이 밀에게 자리를 내어준 뒤, 이 오아시스에는 1천 명이 사는 마을이 생겼다. 마을은 크지만 집은 다닥다닥 붙어 있었고 과거보다 많은 사람이 질병과 영양실조로 허덕였다.

 어느 종이 성공적으로 진화했느냐의 여부는 굶주림이나 고통의 정도가 아니라 DNA 이중나선 복사본의 개수로 결정된다. 한 회사의 경제적 성공은 직원들의 행복이 아니라 오직 은행잔고의 액수로만 측정된다. 마찬가지로 한 종의 진화적 성공은 그 DNA의 복사본 개수로 측정된다. 만일 더 이상의 DNA 복사본이 남아 있지 않다면 그 종은 멸종한 것이다. 돈이 없는 회사가 파산한 것과 마찬가지다. 만일 한 종이 많은 DNA 복사본을 뽐낸다면 그것은 성공이며 그 종은 번성하고 있는 것이다. 이런 관점에서 볼 때 1천 벌의 복사본은 언제나 1백 벌보다 좋다.

 

 농업혁명의 핵심은 이것이다. 더욱 많은 사람들을 더욱 열악한 환경에서 살아 있게 만드는 능력, 하지만 이런 진화적 계산법에 왜 개인이 신경을 써야 하는가? 제정신인 사람이라면 호모 사피엔스 DNA 복사본의 개수를 늘리기 위해 삶의 질을 포기할 사람이 있겠는가? 그런 거래에 동의한 사람은 아무도 없었다. 농업혁명은 덫이었다.

 

p130

 호모 사피엔스는 약 7만 년 전 중동에 도착했다. 그후 5만 년 동안 우리 조상들은 농업 없이 번성했다. 그 지역의 자연자원은 인구를 지탱하기에 충분했다. 사람들은 풍요로운 시절에는 아이를 좀 더 많이 낳았고 궁핍한 시절에는 약간 덜 낳았다. 인간은 다른 많은 포유동물과 마찬가지로 번식을 조절하는 호르몬과 유전자 메커니즘을 지니고 있다. 풍족한 시절에 여자아이는 사춘기가 일찍 오고 임신 가능성이 조금 높아진다. 어려운 시절에는 사춘기가 늦게 오고 번식력이 떨어진다. 

 이런 자연적 인구조절에 문화적 메커니즘이 추가된다. 아기와 어린이는 동작이 굼뜨고 손이 많이 가기 때문에 방랑하는 수렵채집인들에게 부담이었다. 사람들은 3~4년 터울로 애를 가지려고 노력했다. 여성들은 24시간 내내, 늦은 나이까지 아이에게 젖을 먹임으로써 터울을 두었다. 다른 방법으로는 완전하거나 부분적인 금욕, 낙태, 때로는 유아 살해 등이 있었다.

 

p133

 

 사람들은 왜 이렇게 치명적인 계산오류를 범했을까? 역사를 통틀어 사람들이 오류를 범하는 이유와 동일한 이유에서였다. 사람들은 자신의 결정이 가져올 결과를 전체적으로 파악하는 능력을 갖고 있지 않았다.

 

p134

 그렇다면 왜 계획이 빗나갔을 때 농경을 포기하지 않았을까? 작은 변화가 축적되어 사회를 바꾸는 데는 여러 세대가 걸리고 그때쯤이면 자신들이 과거에 다른 방식으로 살았다는 것을 아무도 기억하지 못하기 때문이다. 인구 증가 때문에 돌아갈 다리가 불타버렸다는 것도 한 이유였다. 쟁기질을 도입함으로써 마을의 인구가 1백명에서 110명으로 늘었다고 가정해보자. 이중 자신들이 자발적으로 굶어 죽는 것을 선택함으로써 나머지 사람들이 과거의 좋았던 시절로 돌아갈 수 있도록 할 열 명이 있었겠는가? 돌아갈 길은 없었다. 덫에 딱 걸리고 말았다.

 좀 더 쉬운 삶을 추구한 결과 더 어렵게 되어버린 셈이었고, 이것이 마지막도 아니었다. 오늘날 우리에게도 똑같은 일이 벌어지고 있다. 대학을 졸업한 젊은이 중 상당수는 돈을 많이 벌어 35세에 은퇴해서 진짜 자신이 원하는 것을 하겠다고 다짐하면서 유수 회사들에 들어가 힘들게 일한다. 하지만 막상 그 나이가 되면 거액의 주택 융자, 학교에 다니는 자녀, 적어도 두 대의 차가 있어야 하는 교외의 집, 정말 좋은 와인과 멋진 해외 휴가가 없다면 삶은 살 만한 가치가 없다는 느낌을 갖게 된다. 이들이 뭘 어떻게 할까? 뿌리채소나 캐는 삶으로 돌아갈까? 이들은 노력을 배가해서 노예 같은 노동을 계속한다.

 역사의 몇 안 되는 철칙 가운데 하나는 사치품은 필수품이 되고 새로운 의무를 낳는 경향이 있다는 것이다. 일단 사치에 길들여진 사람들은 이를 당연한 것으로 받아들인다. 그다음에는 의존하기 시작한다. 마침낸느 그것 없이 살 수 없는 지경이 된다. 우리 시대의 친숙한 예를 또 하나 들어보자. 지난 몇십 년간 우리는 시간을 절약하는 기계를 무수히 발명했다. 세탁기, 진공청소기, 식기세척기, 전화, 휴대전화, 컴퓨터, 이메일.... 이들 기계는 삶을 더 여유 있게 만들어줄 것이라고 예상되었다. 과거엔 편지를 쓰고 주소를 적고 봉투에 우표를 붙이고 우편함에 가져가는 데 몇 날 몇 주가 걸렸다. 답장을 받는 데는 며칠, 몇 주, 심지어 몇 개월이 걸렸다. 요즘 나는 이메일을 휘갈겨 쓰고 지구 반대편으로 전송한 다음 몇 분 후에 답장을 받을 수 있다. 과거의 모든 수고와 시간을 절약했다. 하지만 내가 좀 더 느긋한 삶을 살고 있는가?

 슬프게도 그렇지 못하다. 종이 우편물 시대에 편지를 쓸 때는 대개 뭔가 중요한 일이 있을 때뿐이었다. 머릿속에 처음 생각나는 것을 그대로 적는 것이 아니라 하고 싶은 말이 무엇인지, 어떻게 표현해야 하는지에 대해서 심사숙고했다. 그리고 역시 그렇게 심사숙고 한 답장을 받을 것으로 기대했다. 대부분의 사람은 주고받는 편지가 한 달에 몇 통 되지 않았으며 당장 답장을 해야 한다는 강요를 받지도 않았다. 오늘날 나는 매일 열 통이 넘는 메일을 받고, 상대방은 모두 즉각적인 답을 기대하고 있다. 우리는 시간을 절약한다고 생각했지만, 실은 인생이 돌아가는 속도를 과거보다 열 배 빠르게 만들었다. 그래서 우리의 일상에는 불안과 걱정이 넘쳐난다.

 이메일 계정 만들기를 거부하는 신기술 반대론자도 드문드문 있기는 하다. 마친 수천 년 전 농경을 받아들이기를 거부하고 사치품 함정을 비켜갔던 일부 인간들처럼 말이다. 하지만 농업혁명은 해당 지역의 모든 무리의 동참을 필요로 하지 않는다. 중동이나 중미 어느 지역에서든 일단 한 무리가 정착해서 경작을 시작하면 농업은 저항할 수 없는 것이 된다. 농경이 급속한 인구성장의 조건을 만들어준 덕분에, 농부들은 순수한 머릿수의 힘만으로 언제나 수렵채집인들을 압도할 수 있었다. 수렵채집인은 자신들의 사냥터를 들판과 목초지로 내주고 도망치거나 스스로 쟁기를 잡거나 둘 중 하나를 택할 수 있을 따름이었다. 어느 쪽이든 과거의 삶의 방식은 끝난 것이었다.

 사치품의 함정 이야기에는 중요한 교훈이 들어 있다. 인류가 좀 더 편한 생활을 추구한 결과 막강한 변화의 힘이 생겼고 이것이 아무도 예상하거나 희망하지 않았던 방향으로 세상을 변화시켰다는 점이다. 일부러 농업혁명을 구상하거나 인간을 곡물 재배에 의존하게 만들려던 사람은 아무도 없었다. 그저 배를 좀 채우고 약간의 안전을 얻는 것을 주된 목표로 삼은 일련의 사소한 결정이 거듭해서 쌓여, 고대 수렵채집인들이 타는 듯한 태양 아래 물이 든 양동이를 운반하는 삶을 살도록 하는 결과를 가져왔다.

 

p137

 

 그러나 드문 진상을 보여주는 단서를 찾아내는 행운을 누리기도 한다. 1995년 고고학자들은 터키 남동부의 괴베클리 테페 지역 유적지를 파내기 시작했다. 가장 오래된 지층에서 정착지, 주거, 일상 활동의 징후가 발견되지 않았다. 하지만 멋진 조각이 새겨진 기둥을 갖춘 기념물이 발견되었다. 개별 돌기둥의 무게는 최대 7톤이었고 높이는 5미터에 달했다. 그 인근의 채석장에서 학자들은 끌로 반쯤 깍다가 만 50톤의 기둥을 발견했다. 모두 합쳐서 열개 이상의 기념비 구조물이 드러났는데, 가장 큰 것의 폭은 30미터에 육박했다.

 고고학자들은 세계 도처에 있는 이런 기념비적 구조물과 친숙하다. 대표적인 것이 영국의 스톤헨지다. 하지만 이들은 괴베클리 테페를 조사하면서 놀라운 사실을 발견했다. 스톤헨지는 기원전 2500년의 발달된 농경사회 사람들이 건설한 것이다. 이에 비해 괴베클리 테페의 구조물들은 연대가 기원전 9500년으로 거슬러 올라간다. 그리고 모든 증거가 가리키는 바, 이 구조물은 수렵채집인들이 세운 것이었다. 고고학자들은 처음에 이 발견을 신뢰하지 못했지만, 조사를 거듭할수록 이 구조물의 오랜 연대와 이를 세운 시기가 농경사회 이전이었다는 사실을 거듭 확인했다. 고대 수렵채집인의 능력과 문화적 복합성은 우리가 이전에 추측했던 것보다 훨씬 더 뛰어났던 것 같다.

 수렵채집 사회 사람들은 왜 이런 구조물을 세웠을까? 뚜렷한 실용적 목적은 전혀 보이지 않았다. 그곳에는 매머드 도살장도 아니고 비를 긋거나 사자를 피해서 숨는 장소도 아니었다. 뭔가 미스터리한 문화적 이유에서 세워졌다고 볼 수밖에 없다. 고고학자들은 그게 무엇인지 파악하느라 골머리를 앓고 있다. 그러나 이유가 무엇이었든 간에, 수렵채집인들은 거기에 막대한 노력과 시간을 투입할 가치가 있다고 생각했다. 괴베클리 테페를 건설하는 유일한 방법은 여러 무리와 부족에 속한 수천 명의 수렵채집인을 오랫동안 협력하게 만드는 것뿐이었다. 그런 노력을 유지할 수 있는 것은 세련된 종교나 이데올로기 시스템밖에 없다.

 괴베클리 테페는 또 하나의 놀라운 비밀을 지니고 있다. 유전학자들은 작물화된 밀의 기원을 오랫동안 추적하고 있었는데, 최근의 발견이 시사하는 바에 따르면, 작물화된 밀의 변종 중 하나인 외알밀은 괴베클리 테페에서 30킬로미터 떨어진 카라사다그 언덕이 발상지다.

 이것은 우연이 아닐 것이다. 괴베클리 테페라는 문화적 중심지는 인류에 의한 밀의 작물화, 밀에 의한 인간 길들이기와 어떻게든 연관되어 있었을 가능성이 높다. 이 기념물을 건설하고 이용한 사람들을 먹여 살리기 위해서는 많은 식량이 필요했다. 어쩌면 수렵채집인들이 야생 밀 채취에서 집약적인 밀 경작으로 전환한 목적은 정상적인 식량공급을 늘리기 위해서가 아니라 사원의 건설과 운영에 필요한 식량을 공급하기 위해서였는지도 모른다. 기존에 우리는 개처자들이 처음에 마을을 세우고 이것이 번영하면 그 중앙에 사원을 건설했을 것이라고 보았지만, 괴베클리 테페가 시사하는 바는 그 반대다. 먼저 사원이 세워지고 나중에 그 주위에 마을이 형성되었다.

 

p163

 

 우리는 사람을 '귀족'과 '평민'으로 구분하는 것이 상상의 산물이라는 말을 쉽게 받아들일 수 있다. 하지만 모든 사람이 평등하다는 사상 또한 신화다. 어떤 의미에서 모든 인간이 서로 평등하다는 것인가? 인간의 상상력을 벗어난 어딘가에 우리가 진정으로 평등한 객관적으로 실재하는 세계가 있단 말인가?

 

p176

 역사를 움직이는 중요한 동인 중 다수가 상호 주관적이다. 법, 돈, 신, 국가가 모두 그런 예다.

 

 상상의 질서를 빠져 나갈 방법은 없다. 우리가 감옥 벽을 부수고 자유를 향해 달려간다 해도, 실상은 더 큰 감옥의 더 넓은 운동장을 향해 달려나가는 것일 뿐이다.

 

p183

 

 쓰기는 유형이 기호를 통해 정보를 저장하는 방법이다. 수메르의 쓰기 체계는 점토판에 눌러 쓴 두 종류의 기호를 이용했다. 기호의 한 유형은 숫자를 나타냈다. 각각 1, 10, 60, 600, 3,600, 36,000을 나타내는 기호가 있었다(수메르 사람들은 6진법과 10진법을 섞어서 썼다. 6진법은 오늘날 우리에게 중요한 유산을 남겼다. 하루를 24시간으로 나눈다거나 원을 360도로 분할하는 것이 그런 예다). 또 다른 유형의 기호는 사람, 동물, 사유품, 토지, 날짜 등을 나타냈다. 두 유형의 기호를 결합함으로써 수메르인들은 많은 데이터를 보존할 수 있었다. 어떤 한 인간의 뇌가 기억할 수 있는 것보다, 어떤 한 DNA 사슬이 부호화할 수 있는 것보다 훨씬 더 많은 양이었다.

 

p195

 쓰기는 인간의 의식을 돕는 하인으로 탄생했지만, 점점 더 우리의 주인이 되어가고 있다. 컴퓨터는 호모 사피엔스가 어떻게 말하고 느끼고 꿈꾸는지를 이해하는 데 어려움을 겪는다. 그래서 우리는 호모 사피엔스에게 컴퓨터가 이해할 수 있는 숫자 언어로 말하고 느끼고 꿈꾸라고 가르치고 있다. 게다가 이야기는 여기에서 끝나지 않는다. 인공지능 분야는 오로지 컴퓨터의 이진부호에 기반을 둔 새로운 종류의 지능을 만들어내려고 하고 있다. <매트릭스>나 <터미네이터> 같은 SF 영화는 이런 이진부호가 인간이 씌운 굴레를 벗어던지는 날을 이야기하고 있다. 인간이 반항적인 문자체계를 다시 통제하려고 하자, 그 체계들은 그 반응으로 인류를 쓸어버리려고 한다.

 

p217

 하지만 진화에는 목적이 없다. 장기는 어떤 목적을 가지고 진화한 것이 아니며, 그 사용방식은 끊임없이 변화한다. 인체의 장기 중에 그것이 원형 상태로 수억 년 전 처음 등장했을 때 했던 일만을 하고 있는 것은 단 하나도 없다. 장기는 특정기능을 수행하기 위해 진화하지만, 일단 존재하게 되면 다른 용도로 사용되는 방향으로도 적응할 수 있다. 가령 입이 등장한 것은 가장 초기의 다세포 생명체가 영양소를 몸 안으로 섭취할 필요가 있었기 때문이고, 우리는 지금도 그런 용도로 입을 사용하지만, 동시에 키스하고 말하는 데도 사용한다. 람보라면 수류탄 핀을 뽑을 때도 써먹는다. 이런 용도 중 어느 하나라도 부자연스러운 것이 있을까? 벌레 비슷하게 생겼던 6억 년 전의 우리 선조가 입으로 하지 않던 일이라는 이유만으로?

 

p235

 모순이 없는 물리법칙과 달리, 인간이 가진 모든 질서는 내적 모순을 지닌다. 문화는 이런 모순을 중재하려고 끊임없이 노력하며, 이런 과정이 변화에 불을 지핀다.

 

p237

 프랑스 혁명 이래 세계 모든 곳의 사람들은 점차 평등과 개인의 자유를 근본적 가치라고 생각하게 되었다. 하지만 두 가치는 서로 모순된다. 평등을 보장하는 방법은 형편이 더 나은 사람의 자유를 제한하는 것 이외에 없다. 모든 개인이 자신이 원하는 바를 할 수 있도록 보장한다면 필연적으로 평등에 금이 간다. 1789년 이래 세계 정치사는 이 모순을 화해시키려는 일련의 시도로 볼 수 있다.

 

p245

 

 이데올로기의 관점에서 보자면 이보다 더욱 중요한 발전이 기원전 첫 밀레니엄(기원전 1000년~기원전 1년) 동안 이루어졌는데, 바로 보편적 질서라는 개념이 뿌리를 내린 시점이었다.

 

p246

 

 기원전 첫 밀레니엄 동안, 보편적 질서가 될 잠재력이 있는 후보 세 가지가 출현했다. 세 후보 중 하나를 믿는 사람들은 처음으로 세계 전체와 인류 전체를 하나의 법 체계로 통치되는 하나의 단위로 상상할 수 있었다. 적어도 잠재적으로는 모두가 '우리'였다. '그들'은 더 이상 존재하지 않았다. 최초로 등장한 보편적 질서는 경제적인 것, 즉 화폐 질서였다. 두 번째 보편적 질서는 정치적인 것, 즉 제국의 질서였다. 세 번째 보편적 질서는 종교적인 것, 즉 불교, 기독교, 이슬람교 같은 보편적 종교의 질서였다.

 

p249

 

 점차 우세를 차지한 기독교인들은 승리를 축하하기 위해 모스크를 부수고 교회를 지었을 뿐 아니라, 새로운 금화와 은화를 발행하여 십자가와 함께 이교도들과의 싸움을 하느님이 도와주셔서 감사한다는 내용을 새겼다. 하지만 승리자들은 새로운 화폐와 함께 또 다른 종류의 주화도 찍어냈는데, 밀라레스라는 이 주화에는 좀 다른 메시지가 담겨 있었다. 기독교인 정복자들이 찍어낸 사각형 주화에는 유려한 아라비아 문자로 다음과 같은 선언이 새겨져 있었다. "알라 외에 다른 신은 없으며 무함마드는 알라의 사자다." 카톨릭의 멜구에일 주교와 아그데 주교조차도 인기 있는 이 무슬림 주화를 충실히 복제해 발행했고, 신을 두려워하는 기독교인들은 이를 기쁘게 사용했다.

 

 관용은 언덕 너머에서도 넘쳐흘렀다. 북아프리카의 무슬림 상인들은 피렌체의 플로린 금화, 베네치아의 두카트 금화, 나폴리의 기글리아토 은화 같은 기독교 주화를 이용해 사업을 했다. 이교도인 기독교인들을 상대로 성전을 벌였던 무슬림 통치자들조차 경배의 표시로 예수와 성모 마리아를 새겨 넣은 주화로 세금을 받았다.

 

p274

 

 제국은 인류의 다양성을 급격히 축소시킨 주된 이유의 하나였다. 제국이라는 증기롤러는 수많은 민족의 독특한 특징을 지워버리고(예컨대 누만시아), 그로부터 훨씬 더 크고 새로운 집단들을 만들어냈다.

 

 실제 제국은 지난 2,500년간 세계에서 가장 일반적인 형태의 정치조직이었다. 이 시기에 살던 인류의 대부분은 제국에 속해 있었다. 제국은 매우 안정된 형태의 정부다. 대부분의 제국은 반란을 너무나 쉽게 진압했다. 제국을 무너뜨린 것은 대개 외부의 침공이나 내분에 따른 지배 엘리트의 분열밖에 없었다. 그래서 정복당한 민족이 제국의 지배자로부터 스스로를 해방시킨 기록은 그리 눈에 띄지 않는다. 대부분은 수백 년에 걸쳐 복속 상태로 남아 있었다. 이들은 제국에 서서히 소화되어 고유의 문화가 흐지부지되는 게 보통이었다.

 

p299

 

 종교는 광범위한 사회정치적 질서를 정당화할 능력이 있지만, 모든 종교가 그 잠재력을 작동시킨 것은 아니었다. 서로 다른 인간 집단들이 사는 광대한 영역을 자신의 가호 아래 묶어두려면, 종교에는 두 가지 추가적인 속성이 필요하다. 첫째, 언제 어디서나 진리인 보편적이고 초인적인 질서를 설파해야 한다. 둘째, 이 믿음을 모든 사람에게 전파하라고 강력히 요구해야 한다. 달리 말해, 종교는 보편적이면서 선교적이어야 한다.

 

 이슬람교나 불교처럼 역사상 가장 잘 알려진 종교는 보편적이고 선교적이다. 그래서 사람들은 모든 종교가 그렇다고 믿는 경향이 있다. 실상 대부분의 고대 종교는 지역적이고 배타적이었다. 신자들은 국지적 신과 영혼을 믿었으며, 인류 전체를 개종시키는 데 아무런 관심이 없었다. 우리가 아는 한 보편적이고 선교적인 종교는 기원전 1000년에 와서야 비로서 등장하기 시작했다. 이들의 출현은 역사상 가장 중요한 혁명의 하나였고, 보편적 제국과 보편적 화폐의 등장과 매우 비슷하게 인류의 통일에 크게 기여했다.

 

 애니미즘이 지배적인 신념체계일 때, 인간의 규범과 가치는 동물, 식물, 요정, 유령 등 다양한 존재들의 관점과 이익을 고려해야 했다. 예컨대 갠지스강 유역의 수렵채집인 무리는 유달리 큰 무화과나무 한 그루를 베지 못하게 하는 규칙을 세웠을지도 모른다. 나무의 정령이 노해서 복수하지 않게 하기 위한 조치다. 인더스강 유역에 살았던 또 다른 수렵채집인 무리는 흰꼬리여우의 사냥을 금지했을지 모른다. 언젠가 흰꼬리여우가 부족의 현명한 노파에게 귀중한 흑요석이 어디에 있는지를 가르쳐주었기 때문이다.

 이런 종교는 세계관이 매우 국지적이었고, 특정 장소나 기후현상이 지닌 독특한 측면을 강조하는 경향이 있었다. 대부분의 수렵채집인은 면적 1천 제곱킬로미터도 안 되는 지역에서 평생을 보냈다 살아남기 위해서, 특정 계곡에 사는 사람들은 그 계곡을 지배하는 초인적 질서를 이해하고 그에 맞춰 행동할 필요가 있었다. 먼 곳의 다른 계곡에 사는 사람들에게 똑같은 규칙을 따르라고 설득하는 것은 무의미한 일이었다. 인더스강 유역에 사는 사람들이 갠지스강 유역에 선교단을 보내 흰꼬리여우를 사냥하지 말라고 설득하는 수고를 하진 않았을 것이다.

 농업혁명은 종교혁명을 동반한 것으로 보인다. 수렵채집인들이 채집한 식물과 사냥한 동물은 호모 사피엔스와 동등한 지위를 지닌 것으로 볼 수 있었다. 호랑이가 인간을 사냥한다고 해서 인간이 호랑이보다 열등하다고 볼 수 없듯이, 인간이 양을 사냥한다고 해서 양이 인간보다 열등하다고 볼 수는 없었다. 세상에 존재하는 것을은 서로 직접 의사소통을 했고, 자신들이 더불어 사는 거주지를 다스리를 질서에 대해 협의했다. 농부들은 달랐다. 이들은 동식물을 소유하고 조작했다. 자신의 소유물과 협의함으로써 스스로를 격하시킬 수는 없었다. 그러므로 농업혁명이 미친 최초의 종교적 효과는 동식물을 영혼의 원탁에 앉은 동등한 존재에서 소유물로 끌어내릴 것이다.

 

p327

 

 모든 인본주의자는 인간성을 숭배하지만 그에 대한 정의는 각기 다르다. 기독교의 경쟁 분파들이 신의 정확한 정의를 두고 다투는 것처럼, 인본주의는 '인간성 humanity'의 정확한 정의를 두고 다투는 세 개의 경쟁 분파로 나뉘었다. 오늘날 가장 중요한 인본주의 분파는 자유주의적 인본주의다. 이 사상은 '인간성'은 개별 인간의 속성이며 개인의 자유는 더할 나위 없이 신성하다고 믿는다. 자유주의자에 따르면, 인간성의 신성한 성질은 모든 개별 사피인스의 내면에 갖춰져 있다. 개개인의 내면은 세상에 의미를 부여하며, 모든 윤리적, 정치적 권위의 원천이 된다. 만일 우리가 윤리적, 정치적 딜레마와 마주친다면, 우리는 자신의 내면을 돌아보고 내면에서 울리는 목소리-인간성의 목소리-를 들어야 한다. 자유주의적 인본주의의 주된 계명들은 이런 내면의 목소리가 지닌 자유를 침입이나 손상으로부터 보호하기 위한 것이다. 이런 계명들을 통칭하여 '인권'이라고 부른다.

 

 또 다른 중요한 분파는 사회주의적 인본주의다. 사회주의자들은 '인간성'이 개인주의적인 것이 아니라 집단적인 것이라고 믿는다. 이들이 신성하게 보는 것은 개별 인간의 내면의 목소리가 아니라 전체 호모 사피엔스 종이다. 자유주의적 인본주의가 개개인의 최대한의 자유를 추구하는 데 반해, 사회주의적 인본주의는 모든 인간의 평등을 추구한다. 사회주의자에 따르면 불평등은 인간의 존엄성에 대한 최악의 모독이다. 인간의 보편적 본질이 아니라 주변적 속성에 특권을 부여하는 일이기 때문이다. 가령 부자가 가난한 자에 비해 특권을 누린다는 것은 우리가 부자에게나 가난한 자에게나 똑같이 적용되는 모든 인간의 보편적 본질보다 돈을 더 중시한다는 의미가 된다. 사회주의적 인본주의는 자유주의적 인본주의와 마찬가지로 일신론의 토대 위에 건설되었다. 모든 인간이 평등하다는 사상은 모든 영혼이 하느님 앞에 평등하다는 일신론적 확신의 개정판이다.

 

 전통적 일신론의 속박에서 벗어난 유일한 인본주의는 진화론적 인본주의로, 가장 유명한 예는 국가사회주의, 즉 나치다. 나치가 다른 인본주의 분파와 구별되는 점은 '인간성'에 대해 진화론에 깊이 감화된 좀 색다른 정의를 갖고 있었다는 점이다. 나치는 다른 인본주의자들과 달리 인류를 보편적이고 영원한 무엇이 아니라 진화하거나 퇴화할 수 있는, 변하기 쉬운 종으로 보았다. 인간은 초인으로 진화할 수도, 인간 이하로 퇴화할 수도 있었다. 

 나치의 주된 야망은 인류의 퇴화를 막고 진보적 진화를 부추기는 것이었다. 나치가 인류의 가장 발전된 형태인 아리아인을 보호육성해야 하고 유대인, 집시, 동성애자, 정신병자 같은 호모 사피엔스의 퇴화된 종류를 격리하거나 심지어 근절해야 한다고 말한 이유가 바로 여기에 있었다. 

 

p338

 사실 그 시대를 가장 잘 아는 사람들, 다시 말해 그 시대에 살았던 사람들이야말로 그 시대를 가장 모르는 사람들이다. 사후의 깨달음에 의해 필연적인 것처럼 보이는 것이 정작 그 시대에는 전혀 명백하지 않은 일이었다. 이 역사의 철칙은 오늘날에도 그대로 적용된다.  우리는 글로벌 경제위기에서 벗어난 것인가, 아니면 최악의 위기가 곧 닥쳐올 예정인가? 중국이 성장을 계속해서 선도적 초강대국이 될까? 미국은 헤게모니를 잃을까? 일신론적 근본주의가 급증하는 것은 미래의 파도일까 아니면 장기적 중요성은 별로 없는 국지적 소용돌이일까? 우리는 환경적 재앙으로 향하고 있는가, 아니면 기술적 파라다이스로 향하고 있는가? 어느 쪽이든 이를 뒷받침하는 훌륭한 주장이 존재하지만, 확실히 알 방법은 없다. 그러나 부로가 몇십 년 지나지 않아 사람들은 과거를 돌아보면서 이 모든 질문에 대한 해답은 명백하다고 생각할 것이다.

 

 특히 동시대 사람들에게는 아주 희박해 보였던 가능성이 종종 실현되곤 한다는 사실을 강조할 필요가 있다. 306년 콘스탄티누스 대제가 제위에 올랐을 때, 기독교는 비밀스러운 동방의 분파에 지나지 않았다. 당시에 이 종교가 곧 로마의 국교가 될 참이라고 누가 말했다면, 사람들은 웃다 못해 방 밖으로 뛰쳐나갔을 것이다. 오늘날 당신이 2050년이 되면 힌드교의 하레 크리슈나 교단이 미국의 국교가 될 것이라고 말할 경우 당할 일과 마찬가지로 말이다. 1913년 10월 볼셰비키는 러시아의 작은 급진주의 파벌에 지나지 않았다. 이성이 있는 사람이라면 이 파벌이 불과 4년 내에 이 나라를 접수하리라고는 예측하지 않았을 것이다. 기원후 600년에는 사막에 살던 한 무리의 아랍인이 머지않아 대서양에서 인도에 이르는 광대한 지역을 정복할 것이라는 생각이 더더욱 터무니없었을 것이다. 실제로 만일 비잔틴 제국의 군대가 이슬람의 첫 맹공을 격퇴할 수 있었다면, 이슬람교는 오늘날 한 줌의 전문가들만이 아는 무명의 종교로 남아 있었을 것이다. 만일 그랬다면 학자들은 메카의 중년 상인에게서 내려진 계시를 기반으로 한 신앙이 어째서 널리 퍼질 수 없었는지를 매우 쉽게 설명할 수 있었을 것이다.

 

 이런 결론은 역사가 결정론적이기를 바라는 많은 사람들을 실망시킨다. 결정론은 호소력이 있다. 우리가 사는 세상과 우리의 믿음은, 우리가 국민국가에 살며 자본주의 원리에 따라 경제를 조직하고 인권을 열렬하게 신봉하는 것은 역사의 자연스럽고 필연적인 결과라는 것을 시사하기 때문이다. 역사가 결정론적이지 않다고 인정하는 것은 오늘날 대부분의 사람들이 믿는 민족주의, 자본주의, 인권이 우연에 불과하다고 인정하는 것이나 마찬가지다.

 역사는 결정론으로 설명될 수도 예측될 수도 없다. 역사는 카오스적이기 때문이다. 너무나 많은 힘이 작용ㅎ하고 있으며, 이들 간의 상호작용은 너무 복잡하므로, 힘의 크기나 상호작용 방식이 극히 조금만 달라져도 결과에는 막대한 차이가 생긴다. 그뿐만이 아니다. 역사는 이른바 '2단계' 카오스계다. 카오스계에는 두 종류가 있다. 1단계 카오스는 자신에 대한 예언에 반응을 하지 않는 카오스다. 가령 날씨는 1단계 카오스계다. 날씨는 무수히 많은 요인의 영향을 받지만, 우리는 점점 더 많은 요인을 고려하는 컴퓨터 모델을 만들어 점점 더 정확하게 에보할 수 있다.

 2단계 카오스는 스스로에 대한 예측에 반응하는 카오스다. 그러므로 정확한 예측이 불가능하다. 시장이 그런 예다. 만일 우리가 내일의 석유 가격을 1백 퍼센트 정호학히 예측하는 컴퓨터 프로그램을 개발하면 어떤 일이 일어날까? 석유 가격은 예측에 즉각 반응할 것이고, 해당 예측은 실현되지 않을 것이다. 현재 가격이 배럴당 90달러인데 내일은 1 백 달러가 될 것이라고 절대적으로 옳은 컴퓨터 프로그램이 예측한다면 어떻게 될까? 겨래인들은 그 예측에 따른 이익을 보기 위해 급히 매입 주문을 낼 것이고, 그 결과 가격은 내일이 아니라 오늘 배럴당 1 백 달러로 치솟을 것이다. 그러면 내일은 어떤 일이 일어날까? 아무도 모른다.

 

 정치도 2단계 카오스계다. 소련 연구가들은 1989년 혁명을 예측하지 못했고, 중동 전문가들도 2011년 '아랍의 봄' 혁명을 예측하지 못했다. 이를 두고 비난하고 혹평하는 사람이 많지만, 이런 비난은 공정하지 못하다. 혁명은 그 정의상 예측이 불가능하다. 예상 가능한 혁명은 결코 발생하지 않는다.

 왜일까? 지금이 201년이라고 가정하고 다음과 같은 일을 상상해보자. 천재적인 일부 정치학자들이 컴퓨터 천재들과 손잡고 결코 틀릴 수 없는 컴퓨터 알고리즘을 개발한다. 이 알고리즘을 매력적인 인터페이스와 결합하면 혁명 에측장치로 시장에 내놓을 수 있다. 이들은 많은 선금을 받고 이집트의 호스니 무바라크 대통령에게 이 서비스를 제공한다. 그리고 자신들의 예측에 의하면 이듬해에 틀림없이 이집트에서 혁명이 일어날 것이라고 말해준다. 그러면 무바라크는 어떻게 반응할까? 가장 가능성이 큰 행동은 즉시 세금을 낮추고, 시민들에게 수십억 달러의 지원금을 풀고, 만일에 대비해 비밀경찰을 보강하는 것이다.

 

 이런 선제 조치는 효과를 낸다. 해가 바뀌고 시간이 흘렀지만, 놀랍게도 혁명은 일어나지 않았다. 무바라크는 환불을 요구한다. "당신네 알고리즘은 쓸모가 없어!"그는 정치학자들에게 소리친다. "그 돈을 뿌리지 않았다면 궁을 하나 더 지을 수 있어어!" 정치학자는 반론을 편다. "하지만 혁명이 일어나지 않은 이유는 우리가 그것을 예측했기 때무잉니다." 무바라크는 경호에들에게 그들을 체포하라고 손짓하면서 말한다. "일어나지 않는 일을 예언가라고? 그런 놈이라면 카이로 시장에 가서 거의 공짜나 가까운 값에 열몇 명이나 고용할 수 있겠어지."

 

 그러면 왜 역사를 연구하는가? 물리학이나 경제학과 달리, 역사는 정확한 예측을 하는 수단이 아니다. 역사를 연구하는 것은 미래를 알기 위해서가 아니라 우리의 지평을 넓히기 위해서다. 우리의 현재상황이 자연스러운 것도 필연적인 것도 아니라는 사실을 이해하기 위해서다. 그 결과 우리 앞에는 우리가 상상하는 것보다 더 많은 가능성이 있다는 것을 이해하기 위해서다. 가령 유럽인이 어떻게 아프리카인을 지배하게 되었을까를 연구하면, 인종의 게층은 자연스러운 것도 필연적인 것도 아니며 세계는 달리 배열될 수도 있었다는 사실을 깨달을 수 있다.

 

p343

 

 점점 더 많은 학자들이 문화를 일종의 정신적 감염이나 기생충처럼 보고 있다. 인간은 자신도 모르는 새 숙주 역할을 하고 있다는 말이다. 바이러스 같은 기생체는 숙주의 몸속에서 산다. 이들은 스스로를 복제하며 숙주에서 숙주로 퍼져나가고, 숙주를 먹고 살면서 약하게 만들고 심지어 죽게 할 때도 있다. 숙주가 기생체를 퍼뜨릴 만큼 오래 살기만 하면, 기생체는 숙주의 상태에 거의 신경을 쓰지 않는다. 바로 이와 같은 방식으로 문화적 아이디어는 인간의 마음 속에 산다. 증식해서 숙주에서 숙주로 퍼져나가며, 가끔 숙주를 약하게 하고 심지어 죽이기도 한다. 기독교의 천상의 천국이나 공산주의자의 지상낙원에 대한 믿음 같은 문화적 아이디어는 인간으로 하여금 그것의 전파를 위해서라면 목숨까지 걸고서 헌신하게 만든다. 해당 인간은 죽지만, 아이디어는 퍼져나간다.

 

 이런 접근법에 따르면, 문화는 다른 사람을 이용하기 위해 일부 사람들이 꾸며낸 음모(마르크스주의자들이 이렇게 생각하는 경향이 있다)가 아니다. 그렇다기보다는 우연히 출현해서 자신이 감염시킨 모든 사람을 이용하는 정신의 기생충에 더 가깝다. 이런 접근법은 때로 문화 구성요소학, 혹은 밈 연구라고 불린다. 유기체의 진화가 '유전자gene'라 불리는 유기체 정보 단위의 복제에 기반을 둔 것과 마찬가지로, 문화적 진화는 '밈meme'이라 불리는 문화적 정보 단위의 복제에 기반을 두고 있다. 성공적인 문화란 그 숙주가 되는 인간의 희생이나 혜택에 무관하게 스스로의 밈을 증식시키는 데 뛰어난 문화다.

 대부분의 인문학자들은 밈 연구를 멸시한다. 문화적 과정을 조악한 생물학적 유추를 통해 설명하려는 아마추어적 시도로 보는 것이다. 하지만 그런 학자 중 많은 이가 밈 연구의 쌍둥이 자매 격인 포스트모더니즘을 고수하다. 포스트모더니즘 사상가는 문화를 건축하는 벽돌로서 밈이 아니라 '담론discourse'을 들먹이지만 이들 역시 문화는 인간의 이익과 무관하게 스스로 퍼져나가는 존재라고 생각한다. 이들은 가령 민족주의를 19세기와 20세기에 퍼져서 전쟁, 압제, 증오, 인종청소를 일으킨 치명적 전염병으로 묘사한다. 한 나라의 사람들이 거기 감염되는 순간, 이웃 나라의 사람들도 그 바이러스에 감염될 가능성이 컸다. 민족주의 바이러스는 스스로가 인간에게 혜택이 된다고 포장했지만, 실제로는 주로 자기 자신에게만 이익이 되었다.

 

 사회과학에서 게임이론의 비호 아래 비슷한 주장이 흔히 이야기된다. 게임이론은 다수가 참여하는 게임에서 어덯게 모두에게 해가 되는 시각과 행동 패턴이 뿌리를 내리고 퍼져나가는지를 설명해준다. 유명한 예가 군비 경쟁이다. 군비 경쟁은 참여하는 모든 당사국들을 파산시키는 경우가 많다. 그렇다고 군사력의 균형을 실제로 바꾸지도 못하면서 말이다. 파키스탄이 첨단 항공기를 구입하면, 인도가 동일한 조치로 대응한다. 인도가 핵폭탄을 개발하면, 파키스탄도 그대로 따라한다. 파키스탄이 해군력을 확장하면, 인도가 그에 대응한다. 이 과정의 끝에 다다르면, 힘의 균형은 과거와 크게 달라지지 않는다. 그동안 교육과 의료에 투자할 수 있었을 수십억 달러가 무기의 구입과 개발에 사용되었을 뿐이다.

 하지만 군비 경쟁의 역학은 저항하기 힘들다. '군비 경쟁'은 하나의 행동 패턴으로서, 이 나라에서 저 나라로 바이러스처럼 퍼져나가며 모두에게 해를 끼친다. 하지만 스스로에게는 이롭다. 생존과 번식이라는 진화적 기준에서 보면 그렇다(군비 경쟁은 유전자와 마찬가지로 자각이 없다는 점을 기억해두라. 그것이 의식적으로 생존과 번식을 추구하는 것은 아니다. 강력한 역학의 의도치 않은 결과로 그것이 전파되는 것뿐이다).

 그것을 무엇이라고 이름 붙이든 - 게임이론, 포스트모더니즘, 밈 연구 - 역사의 역학은 인간의 복지를 향상시키는 방향을 향하고 있는 것은 아니다. 역사상 가장 성공한 문화가 반드시 호모 사피엔스에게 가장 좋은 문화라는 생각은 근거가 없다. 진화와 마찬가지로 역사는 개별 유기체의 행복에 무관심하다. 그리고 개별 인간은 너무나 무지하고 약해서, 대개는 역사가 자신에게 유리한 방향으로 전개되도록 영향을 미치지 못한다.

 

p376

 

 역사를 통틀어 사회를 고통스럽게 했던 가난은 두 종류였다. 남들은 이용할 수 있는 기회를 나는 이용하지 못하도록 만드는 사회적 가난 그리고 식량과 집이 없어서 개인의 삶을 위험에 빠뜨리는 생물학적 가난이었다. 사회적 가난은 아마도 결코 근절되지 못할 것이다. 하지만 세계의 많은 국가에서 생물학적 가난은 옛말이 되었다. 최근까지만 해도 대부분의 사람들은 생물학적 빈곤선 부근을 떠돌았다. 그 선 이하로 내려가면 목숨을 오래 부지하는 데 필요한 영양이 부족하다는 뜻이다. 약간의 계산 착오나 불운만 생겨도 사람들은 쉽게 그 선 이하, 즉 아사 상태로 빠질 수 있었다. 자연재해와 인간이 만든 재난은 가끔 국민 전체를 나락으로 떨어뜨려 수백만 명의 죽음을 불렀다. 오늘날 세계 대부분의 사람들 발밑에는 안전망이 쳐져 있다. 보험, 국가가 후원하는 사회보장, 아주 많은 지역적, 국제적 NGO들이 사람들을 개인적 불행으로부터 보호하고 있다. 한 지역 전체에 재난이 닥치면 범세계적인 구호 노력이 이어지고, 덕부에 최악의 사태를 피하게 되었다. 사람들은 여전히 수모와 모욕, 가난으로 인한 질병에 시달리지만, 대부분의 국가에선 굶어 죽지는 않는다.

 

p394

 

 태즈메이니아 원주민은 이보다 더 나쁜 운명을 맞았다. 아주 훌륭한 고립 속에서 1만 년을 살아남았던 이들은 쿡이 도착한 지 1세기도 지나지 않아 마지막 남자, 여자, 어린이에 이르기까지 완전히 제거되었다. 유럽 정착민들은 처음에 이들을 섬의 가장 비옥한 영영에서 몰아냈고, 이어 남아 있는 황무지까지 탐낸 나머지 이들을 체계적으로 사냥하고 살해했다. 몇 되지 않은 생존자들은 기독교 복음주의교파의 강제수용소에 수용되었는데, 이곳에서는 선의를 지녔지만 그다지 열린 마음을 갖지 못한 선교사들이 서구 세계의 방식으로 이들을 가르치려 했다. 태즈메이니아인들은 읽기와 쓰기를 배웠다. 기독교를 배웠으면, 천을 바느질하고 농사를 짓는 등 다양한 '생산적 기술'을 교육받았다. 하지만 이들은 학습을 거부했다. 이들은 계속해서 더욱더 우울해했으며, 아기를 갖지 않게 되고 삶에 대한 관심을 잃었다. 마지막에는 과학과 진보의 세계로부터 탈출하는 유일한 길, 죽음을 선택했다. 아, 과학과 진보는 이들의 사후세계에까지 좇아갔다. 인류학자들과 큐레이터들은 과학의 이름으로 마지막 태즈메이니아인들의 사체를 강탈했다. 그들은 사체를 해부하고, 무게를 재고, 측정하여, 그 분석 결과를 학술지에 실었다. 태즈메이니아 박물관은 1976년에 이르러서야 1백 년 전에 죽은 최후의 태즈메이니아 원주민 트루가니니의 시신을 매장할 수 있도록 내놓았다. 영국 왕립외과대학은 그녀의 피부와 머리카락 표본을 2002년까지 보유했다.

 

p399

 

 중국인과 페르시아인에게 부족했던 것은 증기기관 같은 기술적 발명이 아니었다(그거라면 공짜로 베끼거나 사들일 수도 있었다). 이들에게 부족한 것은 서구에서 여러 세기에 걸쳐 형성되고 성숙한 가치, 신화, 사법기구, 사회정치적 구조였다. 이런 것들은 빠르게 복사하거나 내면화할 수 없었다. 프랑스와 미국이 재빨리 영국의 발자국을 뒤따랐던 것은 가장 중요한 신화와 사회구조를 이미 영국과 공유하고 있었기 때문이었다. 중국인과 페르시아인은 사회에 대한 생각과 사회의 조직 방식이 달랐던 탓에 그렇게 빨리 따라잡을 수 없었다.

 

 이런 설명은 1500년에서 1850년 사이 시기를 새롭게 조명하게 한다. 이 시기 유럽은 아시아 열강보다 기술, 정치, 군사, 경제의 우위를 누리지 못했다. 그럼에도 독창적 잠재력을 구축했고, 1850년 경이 되자 그 중요성은 갑자기 뚜렷해졌다. 1750년에 유럽과 중국, 이슬람 세계가 외관상 동등해 보였던 것은 신기루일 뿐이었다. 매우 높은 탑을 세우고 있는 두 건축가를 상상해보자. 한 사람은 나무와 진흙 벽돌을, 다른 사람은 강철과 콘크리트를 재료로 쓴다. 처음에는 두 방법 사이에 별로 차이가 없어 보인다. 두 탑이 모두 비슷한 속도로 비슷한 높이에 도달하기 때문이다. 하지만 일단 결정적 문턱을 지나면, 나무와 진흙은 하중을 버티지 못하고 무너진다. 이에 비해 강철과 콘크리트는 시야가 미치는 한 층층이 계속 올라간다.

 근대 초기에 유럽은 어떤 잠재력을 개발했기에 근대 후반 세계를 지배할 수 있었을까? 이 질문에는 서로 보완적인 두 가지 답이 존재하는데, 바로 현대 과학과 자본주의다. 유럽인은 기술적 우위를 누리기 전부터도 과학적이고 자본주의적인 방식으로 생각하고 행동하는 습관이 있었다. 그러다가 기술의 노다지가 쏟아지기 시작하자, 유럽인들은 다른 누구보다 그것을 잘 부릴 수 있었다. 따라서 과학과 자본주의가 유럽 제국주의가 21세기 유럽 이후 세상에 남긴 가장 중대한 유산이라는 사실은 결코 우연이 아니다. 유럽과 유럽인은 더 이상 세상을 지배하지 않지만, 과학과 자본의 힘은 나날이 강력해지고 있다.

 

p403

 1969년 7월20일 닐 암스트롱과 버즈 올드린은 달 표면에 착륙했다. 탐험에 앞서 아폴로 11호 우주비행사들은 몇 개월간 달과 환경이 비슷한 미국 서부 사막에서 훈련을 받았다. 이 지역은 여러 아메리카 원주민 공통체의 고향인데, 우주비행사들과 한 원주민과의 만남을 담은 전설 같은 이야기가 전해진다.

 어느날 훈련 중이던 우주비행사는 늙은 아메리카 원주민과 우연히 마주쳤다. 남자는 우주비행사들에게 이곳에서 무엇을 하고 있느냐고 물었다. 그들은 달을 탐사하기 위해 곧 떠날 원정대의 대원들이라고 대답했다. 이 말은 들은 노인은 잠깐 침묵했다가 입을 열었다. 자신을 위해 부탁을 하나 들어달라는 것이었다.

 "무엇을 원하세요?" 그들은 물었다.

 "우리 부족 사람들은 달에 신성한 정령들이 산다고 믿는다오. 그들에게 우리 부족에게 보내는 중요한 메시지를 당신들이 전해줄 수 있을까 해서."

 "그 메시지가 뭔데요?" 우주비행사들이 물었다.

 남자는 자기 부족의 언어로 뭐라고 말했고, 우주비행사들에게 그 말을 정확히 외울 때까지 계속 되풀이해서 말하게 시켰다.

 "그게 무슨 뜻이지요?" 우주비행사들은 물었다.

 "그건 말할 수 없어요. 이 말의 뜻은 우리 부족과 달의 정령들에게만 허락된 비밀이랍니다."

 기지로 돌아온 우주비행사들은 그 부족어를 말할 수 있는 사람을 수소문한 끝에 마침내 통역할 사람을 찾아내어, 비밀 메시지를 해석해달라고 부탁했다. 이들이 암기한 내용을 되뇌자 통역자는 껄껄 웃기 시작했다. 웃음이 잦아들자 우주비행사들은 무슨 뜻인지 물었다. 통역자는 비행사들이 조심스럽게 암기한 문장을 이렇게 번역했다. "이 사람들이 하는 말은 한 마디도 믿지 마세요. 이들은 당신들의 땅을 훔치러 왔어요."

 

p407

 최초의 근대인은 아메리고 베스푸치였다. 그는 1499년~1504년 사이에 여러 차례 아메리카 탐험대에 참가했던 이탈리아 선원이었다. 1502년부터 1504년 사이, 그 탐험의 내용을 담은 두 건의 문서가 유럽에서 출간되었다. 저자는 베스푸치로 되어 있었다. 이들 문서의 주장에 따르면 콜럼버스가 새로 발견한 섬들은 동아시아 연안의 섬들이 아니라 완전히 새로운 대륙이었다. 성경이나 고전 지리학자나 동시대 유럽인에게 전혀 알려지지 않은 곳이라고 했다. 1507년, 이런 주장을 확고하게 믿은 존경받는 지도 제작자 마르틴 발트제뮐러는 최신판 세계지도를 출간했는데, 그것은 유럽에서 서쪽으로 항해한 선단이 착륙했던 곳을 별개의 대륙으로 표시한 최초의 지도였다. 대륙을 그려 넣은 발트제뮐러는 이름을 부여해야 했다. 그는 그것을 발견한 사람이 아메리고 베스푸치라고 잘못 알고 있던 터라, 이 대륙에 아메리고를 기리는 이름을 붙였다. 아메리카라고. 발트제뮐러의 지도는 인기를 끌었고, 수많은 다른 지도 제작자들에 의해 복제되었다. 그가 새 땅에 부여한 이름도 함께 퍼져나갔다. 세계의 4분의 1에, 즉 일곱 대륙 중 두 곳에 거의 무명이던 이탈리아인의 이름이 붙은 것이다. 그가 유명할 이유라고는 "우리는 모른다"라고 말할 용기가 있었던 점 외에 아무것도 없다. 이 사실에는 어떤 시적 정의가 있다.

 아메리카 대륙의 발견은 과학혁명의 기초가 되는 사건이었다. 그것은 유럽인에게 과거의 전통보다 지금의 관찰 결과를 더 선호하라고 가르쳐주었다. 그뿐 아니라 아메리카를 정복하겠다는 욕망은 유럽인들로 하여금 새로운 지식을 맹렬한 속도로 찾아 나서게 만들었다. 방대한 새 영토를 통제하기를 원한다면 신대륙의 지리, 기후, 식물상, 동물상, 언어, 문화, 역사에 대해서 막대한 양의 새로운 정보를 수집해야 했다. 기독교 성경이나 옛 지리서, 고대 구비 전통은 거의 도움이 되지 않았다. 이제 유럽의 지리학자뿐 아니라 거의 모든 학문 분야에서 일하는 학자들은 채워 넣을 공백이 있는 지도를 그리기 시작했다. 그들은 자신의 이론이 완전하지 않으며, 중요한 것들 가운데 아직도 모르는 것이 있다고 인정하기 시작하였다.

 

p436

 

 만일 신용이 그토록 놀라운 것이라면, 어째서 아무도 좀 더 일찍 그것을 생각해내지 못했을까? 물론 과거에도 생각한 사람이 있었다. 이런저런 종류의 신용 거래는 인류의 모든 문화권에 존재했으며, 그 기원은 최소한 고대 수메르까지 거슬러 올라간다. 옛 시대의 문제점은 아무도 그런 아이디어를 떠올리지 못했다거나 활용할 방법을 알지 못했다는 것이 아니었다. 사람들이 신용을 크게 확장하려는 경우가 드물었다는 점이다. 그것은 미래가 현재보다 나을 것이라고 믿지 않았기 때문이다. 사람들은 보통 자기 시대보다 과거가 더 좋았으며 미래는 현재보다 더 나쁘거나 기껏해야 지금과 같을 것이라고 믿었다.

 경제용어로 말하자면, 사람들은 부의 총량이 더 줄지는 않더라도 한정되어 있다고 믿었다. 따라서 사람들은 자기 개인이든, 자신들의 왕국이든, 세계 전체든 앞으로 10년간 과거보다 더 많은 부를 생산하리라고 가정하는 것은 위험한 행태라고 생각했다. 사업은 제로섬 게임처럼 보였다.. 물론 특정 빵집의 이익이 증가할 수는 있지만, 그것은 그 옆 빵집의 희생을 통해서만 가능했다. 베네치아가 번영할 수는 있지만, 이는 오직 제노바를 가난하게 만듦으로써만 가능했다. 영국 왕이 자신을 부유하게 만드는 방법은 프랑스 왕의 것을 훔치는 것밖에는 없었다. 파이를 자르는 방법은 수없이 많지만, 어느 방법도 파이를 더 크게 만들지는 못한다. 수많은 문화권에서 돈을 많이 버는 것을 죄악이라고 결론 내린 이유가 여기에 있었다. 예수가 말했듯 "부자가 천국에 들어가기는 낙타가 바늘구멍을 통과하기보다 어려우니라"였다.

 만일 파이의 크기가 정해져 있는데 내가 그중 많은 부분을 가졌다면, 누군가 다른 사람의 몫을 빼앗은 게 분명하다. 부자는 자신의 잉여 재산을 자선에 기부함으로써 악행을 속죄해야 했다. 만일 지구 전체의 파이가 똑같은 크기로 남아 있다면, 신용이 파고들 여지가 없다. 신용은 오늘의 파이와 내일의 파이 간의 차이다. 만일 파이 크기가 늘 같다면 왜 외상을 주겠는가? 당신에게 돈을 빌려달라고 손을 벌리는 제빵사나 왕이 다른 경쟁자의 파이 조각을 훔칠 능력이 있다고 믿지 않는 한, 그런 위험은 감수할 수 없을 것이다.

 따라서 근대 이전 세계에서 대출을 받기는 힘들었고, 만일 빌리더라도 소액으로 단기간에 높은 이자를 무는 것이 보통이었다. 새로 시작하는 기업가는 새 빵집을 열기 어려웠고, 왕궁을 짓거나 전쟁을 일으키려는 위대한 왕들은 세금과 관세를 무겁게 매겨서 자금을 조달하는 방법밖에 없었다. 왕은 그래도 상관없었다. 하지만 빵 굽기에 대한 뛰어난 아이디어로 신분상승을 바라는 하녀는 왕궁의 부엌 바닥을 박박 닦으면서 부를 꿈꾸는 것 외에 보통 다른 방법이 없었다.

 이것은 모두에게 부정적인 결과였다. 신용이 제한되어 있기 때문에 사람들은 신규 사업의 자금을 조달하는 데 어려움을 겪었고, 신규 사업이 힘들었기 때문에 경제는 성장하지 못했다. 지금까지 성장이 없었으니 사람들은 앞으로도 없을 것이라고 제멋대로 판단했고, 자본을 가진 사람들은 외상 주는 것을 경계했다. 불황에 대한 기대는 자기 실현적이었다.

 

p456

 

 17세기가 끝나가면서 네덜란드는 뉴욕을 잃었고, 금융 및 제국의 심장이라는 유럽 내에서의 지위도 내놓았다. 여기에는 현상에 안주한 자세도 한몫했고, 대륙전쟁을 치르느라 경비를 너무 많이 지출한 탓도 있었다. 네덜란드가 빠져나간 공백을 놓고 치열한 경쟁을 벌인 것은 프랑스와 영국이었다. 처음에는 프랑스가 훨씬 유리해 보였다. 프랑스는 덩치가 더 크고 자금과 인구도 더 많았으며 경험 많은 군대를 더 많이 보유하고 있었다. 하지만 영국인들은 어떻게 해서든 금융제도의 신뢰를 얻는 데 성공한 데 비해, 프랑스는 스스로 신용할 수 없는 대상임을 드러냈다. 프랑스 왕의 행태는 18세기 유럽 최대의 금융 버블이라 불리는 미시시피 버블 과정에서 특히 악명을 떨쳤다.

 이 이야기도 제국을 세운 주식회사와 함께 시작된다. 1717년 프랑스에서 사업승인을 받은 미시시피 사는 미시시피 하류의 연안 지역을 식민지로 만들고 뉴올리언스 시를 건설했다. 야심찬 계획을 실현할 자금을 모으고자, 프랑스 루이 15세의 궁정과 좋은 관계를 맺고 있던 회사는 파리 주식시장에서 주식을 팔았다. 회사 사장이던 존 로는 프랑스 중앙은행 총재이기도 했다. 게다가 왕은 그를 오늘날의 재정부장관과 비슷한 정부 금융 총책 자리에 임명했었다.

 1717년 미시시피 하류의 연안 지대는 늪지와 악어를 제외하면 그다지 매력이 없는 곳이었다. 하지만 미시시피 사는 여기에 엄청난 부와 무한한 기회가 있다고 떠벌렸다. 프랑스의 귀족, 사업가, 도시 부르주아 중 둔한 사람들이 이런 환상에 속았고, 회사 주식의 가격은 천정부지로 치솟았다. 애초에 주식은 한 주에 50리브르(프랑스의 옛 화폐단위-옮긴이)에 발행되었다. 1719년 8월 1일에는 2,750리브르에 거래되었다. 8월 30일에는 4,10리브르, 9월 4일에는 5천 리브르가 되었다.

 12월 2일이 되자 주식은 한 주당 1만 리브르를 돌파했다. 황홀감이 파리의 거리를 휩쓸었다. 사람들은 가진 것을 모두 팔고 대규모 대출을 받아 미시시피 사의 주식을 샀다. 부자가 되는 손쉬운 방법을 발견했다는 것이 모든 사람의 생각이었다. 며칠 지나지 않아, 공황이 시작되었다. 일부 투자자들은 주식 가격이 완전히 비현실적이며 지속 가능하지 않다는 사실을 깨달았다. 이들은 가격이 정점을 찍을 때 파는 게 좋겠다고 판단했다. 매도 물량이 늘어나자 가격이 내려가기 시작했다. 투자자들은 가격이 떨어지는 것을 보자 빨리 손을 털고 싶었고, 가격은 더욱더 떨어져서 눈사태처럼 무너져버렸다. 

 프랑스 중앙은행은 가격을 안정시키기 위해 총재인 존 로의 지시에 따라 미시시피 주식을 구매했지만, 영원히 매수를 계속할 수는 없었다. 결국에는 자금이 떨어졌다. 일이 이렇게 되자 정부 재정 총 책임자이기도 했던 존 로는 돈을 더 찍어내도록 인가했다. 중앙은행이 주식을 더 살 수 있게 하기 위해서였다. 이로써 프랑스의 재정시스템 전체가 거품 속으로 들어갔다. 더군다나 그런 금융상의 마법으로도 곤경을 면할 수 없었다. 미시시피 사의 주식값은 1만 리브르에서 1천 리브르로 떨어졌고, 그 다음엔 완전히 붕괴하여 한 푼어치의 가치도 없게 되었다. 이즈음 프랑스 중앙은행과 왕국 재무성은 돈은 한 푼도 없으면서 무가치한 주식만 엄청나게 가지고 있는 상황이었다. 큰손 투기꾼들은 제때 주식을 판 덕분에 대체로 큰 손실 없이 벗어났지만, 개미들은 모든 것을 잃었다. 자살하는 사람이 속출했다.

 미시시피 버블은 역사상 가장 극적인 금융붕괴 사태였고, 프랑스의 금융 시스템은 결코 완전히 회복되지 못했다. 미시시피 사가 어떤 식으로 정치적 연줄을 이용해 주가를 조작하고 매수 광풍에 불을 질렀는지 백일하에 드러났기 때문에, 대중은 프랑스 은행 시스템과 프랑스 왕의 현명함에 대해 불신했다. 루이 15세는 신용대출을 받기가 점점 더 힘들어졌다. 이것이 해외의 프랑스 제국이 영국의 손에 떨어진 주요한 이유 중 하나였다.

 영국인들은 자금을 저리로 쉽게 빌릴 수 있었던 데 비해, 프랑스인들은 융자를 받기도 어려웠고 높은 이자를 지불해야 했다. 프랑스 왕은 점점 불어나는 빚을 갚기 위해서 점점 더 많은 돈을 더욱더 높은 이자율로 빌려야 했다. 그가 죽자 왕위에 오른(1774년) 손자 루이 16세는 1780년대에 이르러 자신이 파산을 향해 달려가고 있다는 사실을 깨달았다. 연간 예산의 절반이 대출금에 대한 이자 지불금으로 묶여 있었던 것이다. 1789년 그는 마지못해 삼부회(사제,귀족, 제3신분으로 이뤄진 신분제 의회)를 소집한다. 위기의 해법을 찾기 위해 150년 동안 열린 적이 없던 의회를 소집한 것이다. 그리하여 프랑스 혁명이 시작되었다.

 

p460. 자본의 이름으로.

 

 네덜란드의 인도네시아 국유화(1800년), 영국의 인도 국유화(1858년)가 이루어졌지만, 이로 인해 자본주의와 제국의 포옹이 끝났다고는 볼 수 없다. 오히려 양자의 관계는 19세기에 더 끈끈해졌다. 주식회사는 더 이상 민간 식민지를 개척하고 지배할 필요가 없었고, 이제 사장과 대주주들은 런던, 암스테르담, 파리에서 권력의 끈을 조종했다. 이들은 국가가 자신들의 이익을 지키고 뒷배를 봐주리라고 믿고 있었다. 마르크스를 비롯한 사회 비평가들이 빈정댔듯이, ,서구 정부는 자본주의자들의 노동조합이 되어가고 있었다.

 정부가 큰돈을 벌려고 나선 가장 악명 높은 사례가 영국과 중국이 벌인 제1차 아편전쟁(1840~1842)이다. 19세기 전반 영국 동인도회사와 잡다한 영국 사업가들은 마약 수출로 돈을 벌었는데, 특히 중국에 아편을 수출하는 것이 주종이었다. 수백만 명의 중국인이 중독자가 되었고, 나라는 경제적으로나 사회적으로 쇠약해졌다. 1830년대 말 중국 정부는 마약 거래를 금지하고 포고령을 내렸으나 영국 마약 상인들은 법을 완전히 무시했고, 중국 당국은 배에 실려 있던 마약을 압류해 파괴하기 시작했다. 마약 카르텔들은 웨스트민스터와 다우닝 가와 긴밀한 관계를 유지하고 있었다. 실제로 많은 의원과 각료들이 마약 회사의 주식을 보유하고 있었다. 그래서 이들은 정부에게 행동에 나서라는 압력을 넣었다.

 1840년대 영국은 '자유무역'이라는 명목으로 중국에 정식으로 전쟁을 선포했다. 전쟁은 식은 죽 먹기였다. 자신감 과잉이던 중국은 증기선, 대구경 대표, 로켓, 신속발사 소총 같은 영국의 신무기에 상대가 되지 않았다. 이어진 평화조약에서,, 중국은 영국 마약 상인의 활동을 제약하지 않겠다고 약속했고 중국 경찰이 마약 상인에게 끼친 피해도 보상하기로 했다. 더구나 영국은 홍콩의 조차租借를 요구해 통치함으로써 그곳을 안전하게 마약 거래 기지로 계속 사용했다(홍콩은 1997년까지 영국의 통치를 받았다). 19세기 말 중국 인구의 10분의 1에 이르는 약 4천만 명이 마약 중독자였다.

 이집트 역시 영국 자본주의의 힘을 벗어날 수 없었다. 19세기 프랑스와 영국의 투자자들은 이집트의 지배자들에게 거액을 빌려주었는데, 처음에는 수에즈 운하 프로젝트에 자금을 대기 위해서였고 나중에는 이보다 훨씬 성공적이지 않은 다른 사업들에 자금을 대기 위해서였다. 이집트의 빚은 점점 더 많아졌고, 유럽인 채권자들은 이집트 내정에 점점 더 많이 관여했다. 1881년 이집트 민족주의자들은 더 이상 참지 못하고 반란을 일으켰다. 이들은 모든 외국 채무를 갚지 않겠다고 일방적으로 선언했다. 이것이 불쾌했던 빅토리아 여왕은 1년 후 나일강에 육군과 해군을 파견했고, 이집트는 제2차 세계대전 이후까지 영국의 보호령으로 있었다(보호령으로 유지된 기간은 명목상 1914~1922년이었다. 하지만 영국은 수에즈 운하에 계속 군대를 주둔시키며 제2차 세계대전 내내 이집트를 핵심 전략 기지로 삼았다).

 

 투자자의 이익을 위해 치러진 전쟁이 이것들뿐만은 아니었다. 사실 전쟁 자체가 아편처럼 재화가 될 수 있었다. 1821년 그리스인들은 오토만 제국에 반란을 일으켰다. 이 반란은 영국의 자유주의자 및 낭만주의자 무리에게 큰 공감을 불렀다. 시인 바이런 경은 반란군과 함께 싸우기 위해 그리스에 가기까지 했다. 하지만 런던의 금융인들은 여기서 돈벌이 기회를 보앗다. 이들은 반군 지도자들에게 런던 주식거래소에서 그리스 반군 공채를 발행할 것을 제안했다. 그리스는 전쟁에서 승리해 독립을 쟁취하면 이자를 포함해 채권을 갚기로 했다.

 민간인 투자자들은 이윤을 얻기 위해, 혹은 그리스의 명분에 공감해서, 혹은 두가지 이유 모두로 채권을 구매했다. 그리스 반군 채권 가격은 주로 헬라스에서 벌어지는 전투의 승패에 발맞춰 등락을 거듭했다. 점차 터키인들이 우위를 점했다. 반란군의 패배가 눈앞에 다가오자 채권 소유자들은 돈을 잃을 위험헤 직면하게 되었다. 채권 소유자의 이해는 나라의 이해였기에 영국은 국제 함대를 조직했고, 1827년 이 함대는 나바리노 전투에서 오토만 제국의 주력인 소함대를 침몰시켰다. 여러 세기에 걸친 복종을 딛고 그리스는 마침내 자유를 얻었지만, 자유는 엄청난 빚과 함께 왔고 독립 그리스는 이를 갚을 방법이 없었다. 그리스 경제는 향후 수십 년간 영국 채권자들에게 저당 잡힌 신세였다.

 자본과 정치의 힘찬 포옹은 신용시장에서 크나큰 의미가 있었다. 어떤 경제가 지닌 신용의 양은 새로운 유전의 발견이나 새 기계의 발명 같은 순수한 경제적 요인뿐만 아니라 체제 변화나 좀 더 대담한 해외정책 같은 정치적 사건들에 따라서도 달라진다. 나바리노 전투 이후 영국 자본주의자들은 해외의 위험한 거래에 돈을 투자할 용의를 더 많이 나타냈다. 외국의 채무자가 변제를 거부한다면 여왕의 군대가 돈을 받아내주는 것을 보았던 것이다.

 오늘날 한 나라의 신용등급이 천연자원보다 경제적 복지에 미치는 영향이 훨씬 더 큰 이유가 여기에 있다. 신용등급은 그 나라가 부채를 갚을 가능성을 가리킨다. 순수한 경제적 데이터 외에도 정치, 사회, 심지어 문화적 요인을 고려해서 매겨진다. 석유가 풍부한 나라라도 독재 정부에 전쟁이 만연하고 사법 제도가 부패해 있다면 등급이 낮은 것이 보통이다. 그 결과 이 나라는 상대적 빈곤국으로 남아 있을 가능성이 크다. 석유자원을 최대한 활용하는 데 필요한 자본을 모을 수 없기 때문이다. 거꾸로 천연자원이 없더라도 평화를 유지하며, 사법제도가 공정하고, 자유정부를 가진 나라는 신용등급을 높게 받을 가능성이 크다. 그래서 이 나라는 싼 대가로 많은 자본을 모아 좋은 교육제도를 지원하고 하이테크 산업을 육성하는 데 사용할 수 있다.

 

p468

 

 기독교나 나치즘 같은 종교는 불타는 증오심 때문에 수백만 명을 살해했다. 자본주의는 차가운 무관심과 탐욕 때문에 수백만 명을 살해했다. 대서양 노예무역은 아프리카인에 대한 인종적 증오에서 생긴 것이 아니다. 주식을 구매한 개인이나 그것을 판매한 중개인, 노예무역 회사의 경영자는 아프리카인에 대해 거의 생각해본 적이 없었다. 사탕수수 농장 소유자들도 마찬가지였다. 많은 농장주들이 농장에서 멀리 떨어진 곳에 살았고, 그들이 원한 유일한 정보는 손익을 담은 깔끔한 장부였다.

 대서양 노예무역이 그것만 아니라면 흠이 없었을 기록에 새겨진 유일한 오점이 아니었다는 점도 기억해야 한다. 앞장에서 이야기했던 벵골 대기근 역시 이와 비슷한 역학에 의해 유발되었다. 영국 동인도회사는 벵골인 1천만 명의 삶보다 자기 이익에 더 신경을 썼다. 인도네시아에서 네덜란드 동인도회사가 벌인 군사작전에 돈을 댄 것은 자기 자녀를 사랑하고, 자선사업에 돈을 내고, 좋은 음악과 미술을 즐기는 네덜란드의 정직한 시민들이었다. 하지만 이들은 자바, 수마트라, 말라카 주민들이 겪는 고통은 중히 여기지 않았다. 지구의 한켠에서 현대 경제가 성장하는 데는 수없이 많은 범죄아 악행이 뒤따랐다.

 

 19세기에도 자본주의 윤리를 조금도 나아지지 않았다. 유럽을 휩쓴 산업혁명은 은행가와 자본 소유잘르 더욱 부유하게 만들었지만, 수백만 명의 노동자에게는 비참하고 가난한 삶을 선고했다. 유럽 식민지에서는 사태가 더욱 나빴다. 1876년 벨기에의 왕 레오폴드 2세는 중부 아프리카를 탐사하고 콩고 강 유역의 노예무역과 싸우는 것을 사명으로 내건 비정부 인도주의 기구를 설립했다. 기구에는 도로와 학교와 병원을 건설해 해당 지역 주민의 삶의 질을 개선한다는 책임도 주어졌다. 1885년 유럽 열강들은 이 기구에 콩고강 유역 230만 제곱킬로미터의 통제권을 부여하기로 합의했다. 벨기에 국토의 75배에 이르는 그 땅은 이후 콩고 자유국으로 알려지게 되었다. 그곳에 사는 주민 2천만~3천만 명의 의사를 물어본 사람은 아무도 없었다. 인도주의 기구는 눈 깜빡할 사이에 성장과 이윤이 진정한 목적인 기업으로 변했다. 학교와 병원은 잊혔고, 콩고강 유역은 광산과 농원으로 채워졌다. 그 운영은 대부분 벨기에 관리들이 맡았으며, 이들은 현지인을 무자비하게 착취했다.

 고무 산업은 특히 악명 높았다. 고무는 빠른 속도로 중요한 산업 필수품이 되었고, 고무 수출은 벨기에의 가장 중요한 수입원이었다. 고무를 수집하는 아프리카 촌마을 사람들에게는 점점 더 많은 할당량이 주어졌다. 할당량을 채우지 못한 사람에게는 '게으름'을 이유로 잔인한 벌이 주어졌다. 팔을 절단해버리는가 하면 어떤 때는 한 마을 전체를 학살하기도 했다. 가장 보수적으로 추정해도 1885~1908년 성장과 이윤을 추구하는 과정에서 희생된 사람은 6백만 명(콩고 인구의 20퍼센트 이상)에 이르렀다. 일부에선 1천만 명에 육박한다고 추정한다.

 1908년 이후, 특히 1945년 이후 자본주의의 탐욕에는 어느 정도 고삐가 죄어졌는데, 여기에는 공산주의에 대한 두려움이 가장 큰 이유였다. 하지만 불평등은 여전히 만연했다. 2014년의 경제적 파이는 1500년보다 크지만, 분배는 너무나 불공평해서 하루 종일 힘들게 일한 아프리카의 농부와 인도네시아의 노동자가 집에 가져오는 식량은 5백 년 전보다 더 적다. 농업혁명과 마찬가지로, 현대 경제의 성장은 거대한 사기로 드러날지도 모른다. 인류와 세계 경제는 성장을 거듭했을지라도 기아와 궁핍 속에서 살아가는 개인은 더욱 많아졌는지도 모른다. 

 자본주의는 이 같은 비판에 두 가지 대답을 가지고 있다. 첫째, 자본주의는 오직 자본주의자만이 운영할 수 있는 세계를 창조했다. 세상을 다른 방식으로 운영하려 했던 유일하게 진지한 시도는 공산주의였으나, 그것은 거의 모든 면에서 자본주의보다 훨씬 더 나빴기 때문에 다시 시도해볼 배짱이 있는 사람은 아무도 없다. 기원전 8500년의 사람은 농업혁명에 통한의 눈물을 흘렸을 수도 있지만 농업을 포기하기에는 너무 늦어버렸다. 이와 비슷하게 우리는 자본주의를 좋아하지 않을 수도 있지만 그것 없이는 살 수 없다.

 두 번째 대답은 우리가 인내심을 더 많이 가져야 한다는 것이다. 자본주의자들은 천국이 눈앞에 와 있다고 약속한다. 인정하건대, 대서양 노예무역이나 유럽 노동계층 착취 같은 실수가 있었던 것은 사실이다. 하지만 우리는 거기서 교훈을 얻었다. 이제 조금만 더 기다리면, 파이가 좀 더 커지도록 놔두면, 모두에게 좀 더 두꺼운 조각이 돌아갈 것이다. 성과가 평등하게 분배되는 일은 영영 없겠지만, 모든 남자와 여자, 어린이를 만족시킬 만큼 충분히 도아갈 것이다. 심지어 콩고에서도.

 실제로 긍정적인 신호가 조금 보인다. 최소한 순수한 물질적 기준에서는 - 기새수명, 어린이 사망률, 칼로리 섭취 - 2014년 평균적 인간의 생활수준은 1914년에 비해 상당히 나아졌다. 인구가 지수적으로 늘어났음에도 불구하고 그렇다. 하지만 경제적 파이가 무한히 커질 수 있을까? 모든 파이에는 원자재와 에너지가 필요하다. 어두운 결말을 예언하는 사람들은 호모 사피엔스가 조만간 우리 지구의 원자재와 에너지를 고갈시킬 것이라고 경고한다. 그러면 어떻게 될까?

 

p481

 화학자들이 알루미늄을 발견한 것은 1820년대였지만, 광석에서 이것을 분리해내기는 극도록 힘들었고 비용이 많이 들었다. 수십년간 알루미늄은 금보다 더 비쌌다. 1860년대 프랑스의 나폴레옹 3세 황제는 가장 신분이 높은 손님들 앞에는 알루미늄 식기를 놓으라고 지시했다. 그보다 신분이 떨어지는 사람들 앞에는 금으로 된 나이프와 포크가 놓였다. 하지만 19세기 말 화학자들이 막대한 양의 알루미늄을 값싸게 추출하는 방법을 알아냈고, 오늘날 연간 총 생산량은 3천만 톤에 이른다. 만일 나폴레옹 3세가 자기 백성의 후손들이 샌드위치를 싸거나 남은 음식을 가져갈 때 값싼 알루미늄 호일을 사용한다는 이야기를 듣는다면 정말 놀랄 것이다.

 

 제1차 세계대전 중 독일은 봉쇄를 당해 심각한 원자재 난을 겪었다. 특히 화약을 비롯한 폭발물의 원료가 되는 초석이 부족했다. 가장 중요한 초석 산지는 칠레와 인도에 있었고, 독일 내에서는 전혀 생산되지 않았다. 사실 초석은 암모니아로 대체할 수 있지만 생산 단가가 비싸기는 마찬가지였다. 독일에게는 다행스럽게도, 독일 시민이었던 유대인 화학자 프리츠 하버가 1908년 말 그대로 공기에서 암모니아를 생산해내는 공정을 발견했다. 전쟁이 발발했을 때 독일은 하버의 발견을 이용해 화약을 산업적으로 생산하기 시작했다. 이때의 원자재는 공기였다. 하버의 발견이 없었더라면 독일은 1918년 11월 이전에 항복했을 것이라고 일부 학자들은 주장한다. 하버는 이 발견으로 1918년 노벨상을 수상했다. 화학상이었지만 평화상은 아니다(하버는 전쟁터에서 독가스를 사용하는 분야의 개척자기이도 하다).

 

p509

 현대사회에서도 핵가족은 완전히 사라지지 않았다. 국가와 시장은 경제적, 정치적 역할의 대부분을 가족에게서 빼앗으면서도 일부 중요한 감정적 기능은 남겨두었따. 현대 가족은 국가와 시장이(아직은) 제공할 수 없는 사적인 욕구를 제공하기로 되어 있다. 하지만 가족은 심지어 이 영역에서도 점점 더 많은 개입을 겪고 있다. 시장이 사람들의 연애 및 성생활 방식에 미치는 영향이 점점 더 커지고 있는 것이다. 전통적으로는 가족이 중매쟁이 역할을 맡았지만, 오늘날 연애와 성적 신호를 조종하고 그것을 얻도록 도와주는 것은 시장이다.

 다만 그 비용이 비싸다. 옛날에는 신랑과 신부는 집 안의 거실에서 만났고, 한쪽 아버지에게서 다른 쪽 아버지로 돈이 건네졌다. 오늘날 연애는 술집과 카페에서 이루어지고, 돈은 연인의 손에서 웨이트리스에게 건네진다. 이보다 더 많은 돈이 패션 디자이너, 헬스 클럽 매니저, 다이어트 전문가, 미용사, 성형외과 의사의 은행계좌로 건너간다. 이들 모두는 우리가 시장이 제시하는 미의 이상에 가급적 가장 가까운 모습을 하고서 카페ㅔ 도착하다록 도와준다. 

 국가 역시 가족관계를 예전보다 더 예리하게 주시하고 있는데, 특히 부모와 자식 간의 관계에 주목한다. 부모에게는 아이들을 정부의 학교에 보내 교육받게 할 의무가 있다. 특별히 아이를 학대하거나 폭력을 행사하는 부모는 국가의 저지를 당할 수 있다. 필요한 경우 국가는 심지어 부모를 감옥에 보내고 아이들을 다른 가정에 위탁할 수도 있다.

 불과 얼마 전까지만 해도 부모가 자녀를 때리거나 모욕하지 못하도록 국가가 나서야 한다고 누가 주장했다면 말도 안 되고 실행 불가능하다는 이유에서 무시당했을 것이다. 대부분의 사회에서 부모의 권위는 신성한 것으로 간주되었다. 부모에 대한 존경과 복종은 가장 신성한 가치에 속했고, 부모는 거의 모든 행위를 원하는 대로 할 수 있었다. 신생아를 살해하거나, 아기를 노예로 팔거나, 딸을 나이가 두 배가 넘는 남자와 결혼시키는 것이 모두 가능했다. 오늘날 부모의 권위는 완전히 후퇴했다. 젊은이들은 연장자의 말을 따를 의무가 점점 줄고 있고, 이에 비해 부모들은 자녀의 삶에서 무엇이든 잘못된 것이 있으면 비난을 받는다. 엄마와 아빠는 스탈린 치하의 여론조작용 재판에 출석한 피고인처럼, 프로이트의 법정에서 비난을 받는 곤경에 처하게 되었다.

 

p515

 지난 2세기에 걸쳐 일어난 혁명들은 워낙 빠르고 과격한 나머지 사회질서의 가장 근본적인 특성 대부분을 변화시켰다. 전통적으로 사회질서는 단단하고 고정된 무엇이었다. '질서'는 안정성과 연속성을 의미했다. 급격한 사회혁명은 예외였고, 대부분의 사회 변화는 수많은 작은 단계가 축적된 결과였다. 사람들은 사회구조란 확고하고 영원하다고 가정하는 경향이 있었다. 가족과 공동체가 그 질서 내에서 자신이 차지하는 위치를 변화시키려 분투할 수는 있었지만, 스스로 질서의 근본구조를 바꿀 수 있다는 발상은 낯선 것이었다. 사람들은 "이것은 과거에도 늘 그랬고 앞으로도 늘 이렇게 이어질 거야"라고 선언하면서 현재 상태를 어쩔 수 없는 것으로 받아들이는 경향이 있었다.

 지난 2세기 동안 변화의 속도는 너무나 빨랐고, 그런 나머지 사회질서는 동적이고 가변적이라는 속성을 지니게 되었다. 이제 그것은 끊임없이 변화하는 상태로 존재한다. 현대의 혁명이라고 하면 우리는 1789년(프랑스 혁명), 1848년(유럽의 연쇄적 민주화 혁명), 혹은 1917년(러시아 혁명)을 생각하는 경향이 있지만, 정확히 말하자면 오늘날은 모든 해가 혁명적이다. 요즘은 심지어 30세밖에 되지 않은 사람도 십대를 향해 "내가 어렸을 때는 세상이 지금과 완전히 달랐어"라고 말할 수 있다. 십대는 그 말을 믿지 않겠지만, 그 말은 사실이다. 예컨대 인터넷이 널리 쓰이게 된 것은 1990년 초반에 이르러서였다. 불과 20년밖에 되지 않은 일이다. 오늘날 우리는 인터넷 없는 세상은 상상할 수가 없다.

 그러므로 현대사회의 속성을 규정하려는 모든 시도는 카멜레온의 색을 규정하려는 것과 비슷하다. 우리가 확신할 수 있는 유일한 속성은 끊임없는 변화다. 우리는 여기에 익숙해져, 대부분의 사람들은 사회질서를 바뀔 수 있는 무엇, 우리가 마음대로 가공하고 개선할 수 있는 무엇이라고 생각한다. 현대 이전 지배자들의 주된 약속은 전통적 질서를 수호하겠다거나 심지어 잃어버린 모종의 황금시대로 돌아가겠다는 것이었지만, 지난 2세기 동안 정치에서는 구세계를 파괴하고 그 자리에 더 나은 것을 건설하겠다고 약속하는 것이 기본이었다. 가장 보수적인 정당조차 현상을 그대로 유지하겠다고만 약속하지는 않는다. 모든 사람이 사회 개혁, 교육 개혁, 경제 개혁을 약속하고, 어떤 때는 공약을 실천하기도 한다.

 

p518. 우리 시대의 평화.

 

 대부분의 사람들은 우리가 얼마나 평화로운 시대에 살고 있는지에 대해 정당하게 평가하지 않는다. 우리 중에 천 년 동안 살아온 사람은 아무도 없으니, 과거 세상이 얼마나 폭력적이었는지를 쉽게 망각한다. 그리고 전쟁이 점점 드물어질수록 한 번 발발하면 더욱 많은 관심을 끈다. 브라질 사람과 인도 사람이 누리는 평화를 떠올리는 사람보다 오늘날 아프가니스탄과 이라크에서 벌어지고 있는 전쟁을 생각하는 사람이 더 많다.

 이보다 더욱 중요한 사실이 있다. 우리는 집단 전체보다 개인의 고통에 더욱 쉽게 공감할 수 있다는 점이다. 하지만 거시적 역사 과정을 이해하려면, 개인의 이야기보다 대중의 통계를 검토할 필요가 있다. 2000년에 전쟁으로 인한 사망자는 31만 명, 폭력 범죄로 인한 사망자는 이와 별도로 52만 명이었다. 개별 희생자는 한 명 한 명이 하나의 파괴된 세계이고, 파탄 난 가정이며, 친구와 친척이 평생 안고 살아야 할 상처다. 하지만 거시적 시각에서 보면, 이 83만 명은 2000년의 총 사망자 5,600만 명에서 1.5퍼센트를 차지할 뿐이다. 그해에 자동차 사고로 인한 사망자는 126만 명(총 사망자의 2.25퍼센트), 자살로 인한 사망자는 81만 5천 명(1.45퍼센트)이었다. 2002년의 수치는 더욱 놀랍다. 총 사망자 5,700만 명 중에서 전쟁으로 인한 사망자는 17만 2천 명, 폭력 범죄로 인한 사망자는 56만 9천 명에 불과했다(인간의 폭력에 의한 전체 사망자는 74만 1천 명이었다). 이와 대조적으로 자살자는 87만 3천 명에 이르렀다. 9.11 테러가 일어난 다음 해라 테러와 전쟁에 대한 이야기가 많았음에도 불구하고 한 개인을 죽이는 것은 테러리스트나 군인, 마약상이 아니라 본인 스스로일 가능성이 컸던 것이다.

 오늘날 세계 대부분의 지역에서 사람들은 잠자리에 들면서 한밤중에 이웃 부족이 자기 마을을 둘러싸고 모두를 학살할지 모른다는 두려움을 품지 않는다. 부유한 영국 시민은 녹색 옷을 입은 명랑한 강도들이 자신을 습격해 돈을 빼앗아 가난한 자들에게 나눠줄지도 모른다는 두려움 없이 노팅엄에서 셔우드 숲을 지나 런던으로 매일 여행한다. 학생들은 선생의 채찍질을 견디지 않으며, 아이들은 부모가 청구서의 돈을 내지 못해 노예로 팔릴 것을 두려워할 필요가 없다. 여성들은 남편이 자신을 때리거나 외출을 막는 것을 법이 금지한다는 사실을 알고 있다.

 세계 도처에서 이런 기대는 점점 더 많이 현실이 되어가고 있다. 폭력이 감소한 것은 대체로 국가의 등장 덕분이다. 역사를 통틀어 대부분의 폭력은 가족과 공동체가 서로 일으키는 국지적 반목의 원인이었다. 앞서 살펴보았듯이 지역 공동체보다 큰 정치 조직을 알지 못했던 초기 농부들은 만연하는 폭력으로 고통받았다.

 왕국과 제국이 강력해지면서 공동체의 고삐를 죄자, 폭력은 줄어들었다. 중세 유럽의 지방분권형 왕국의 경우 해마다 인구 10만 명당 20~40명이 살해되었으나, 최근 몇십 년간 국가와 시장이 무소불위의 힘을 얻고 공동체가 소멸하자 폭력의 발생률은 아주 낮아졌다. 오늘날 세계 평균을 보면 연간 10만 명당 피살자는 아홉 명에 지나지 않는다. 그리고 대부분의 살인은 소말리아나 콜롬비아 같은 취약한 국가에서 발생한다. 유럽의 중앙집권적 국가에서는 평균 살인사건 발생률이 연간 10만 명당 한 명에 불과하다.

 국가가 권력을 이용해서 자국민을 살해하는 경우가 있다는 것은 분명하며, 이런 사례가 우리의 기억과 두려움에 크게 다가올 때도 종종 있다. 20세기에 자국의 보안 병력에 의해 살해된 국민은 수억 명은 아니지만 수천만 명에 이른다. 그럼에도, 거시적으로 볼 때 국가가 운영하는 법원과 경찰 덕분에 세계 전체의 안전 수준은 아마 높아졌을 것이다. 심지어 가혹한 독재정권 아래일지라도, 어떤 사람이 다른 사람의 손에 목숨을 잃을 가능성은 현대 이전에 비해 훨씬 낮아졌다.

 1964년 브라질에서 군사 독재정권이 수립되었다. 그 통치는 1985년까지 계속되었다. 그 20년 동안 수천 명의 브라질인이 정권에 의해 살해되었고, 또 다른 수천 명이 투옥되고 고문을 당했다. 하지만 이 정권 최악의 시기에도 평균적인 리우데자네이루 시민이 다른 사람의 손에 죽을 확률은 와오라니, 아라웨테, 야노마뫼 족의 평균보다 훨씬 더 낮았다. 아마존 밀림 깊은 곳에 사는 이들 토착민에게는 군대도 경찰도 감옥도 없다. 인류학적 연구에 따르면 이 종족 남성의 4분의 1에서 2분의 1가량은 이르든 늦든 재산이나, 여성, 특권을 두고 벌어진 폭력적 충돌로 인해 사망한다. 

 

p526

 이처럼 행복한 진전을 설명하기 위해서, 학자들은 우리가 결코 읽어볼 엄두가 나지 않을 정도로 많은 책과 논문을 써서 이 현상에 기여하는 요인을 몇 가지 확인했다.

 첫 번째이자 다른 무엇보다, 전쟁의 대가가 극적으로 커졌다. 모든 평화상을 종식시킬 노벨 평화상은 원자폭탄을 개발한 로버트 오펜하이머와 그의 동료들에게 주어졌어야 할 것이다. 핵무기는 초강대국 사이의 전쟁을 집단 자살로 바꾸어놓았으며, 군대의 힘으로 세계를 지배하려는 시도를 불가능하게 만들었다.

 둘째, 전쟁의 비용이 치솟은 반면 그 이익은 작아졌다. 역사상 대부분의 기간 동안 정치조직체들은 적의 영토를 약탈하거나 병합함으로써 부를 획득할 수 있었다. 대부분의 부는 들판과 가축, 노예와 금 같은 물질적인 것이었기 때문에 약탈이나 점령이 쉬웠다. 오늘날 부는 주로 인적 자본과 조직의 노하우로 구성된다. 그 결과 이것을 가져가거나 무력으로 정복하기가 어려워졌다. 캘리포니아를 생각해보자. 처음에 그 부의 원천은 금광이었지만, 오늘날은 실리콘과 셀룰로이드를 기반으로 하고 있다. 실리콘밸리와 할리우드의 영화 산업 말이다. 만일 중국이 캘리포니아를 침공해 샌프란시스코 해변에 1백만 명의 병사를 상륙시키고 내륙으로 돌격한다면 어떤 일이 일어날까? 이들이 얻을 것은 별로 없다. 실리콘밸리에는 실리콘 광산이 없다. 부는 구글의 엔지니어들과 할리우드의 대본가, 감독, 특수효과 전문가의 마음속에 있다. 이들은 중국의 탱크가 선셋대로에 진입하기 전에 인도의 방갈로르나 뭄바이로 향하는 첫 비행기에 몸을 싣고 있을 것이다.

 가령 이라크의 쿠웨이트 침공처럼 아직도 세상에서 벌어지는 몇 안 되는 국제적 전면전이 구식의 물질적 재화가 부의 척도인 지역에서 벌어진다는 사실은 우연이 아니다. 쿠웨이트의 왕족들은 해외로 달아날 수 있지만, 유전은 그대로 남아 점령되었다. 전쟁의 이익이 전만 못해진 데 비해, 평화는 과거 어느 때보다도 수익성이 좋아졌다. 전통 농업 경제체제에서 장거리 교역과 해외 투자는 부차적인 일이었다. 따라서 전쟁 비용을 피하는 것을 차치하면, 평화는 그다지 수익을 낳지 못했다. 만일 1400년 프랑스와 영국이 평화 관계였다면, 프랑스인들은 무거운 세금을 내지 않아도 되었을 것이고 영국 침략군의 파괴에 고통받지도 않았을 것이다. 하지만 이것을 제외하면 평화가 딱히 프랑스인들의 지갑을 불려주지는 못했을 것이다.

 현대 자본주의 경제체제에서 대외 교역과 투자는 매우 중요해졌다. 그러므로 평화는 훌륭한 배당이익을 낳는다. 중국과 미국이 평화를 유지하는 한, 중국인들은 미국에 제품을 파고 월스트리트에서 거래하며 미국의 투자를 받아서 번영할 수 있다.

 마지막 요인은 세계 정치 문화에 지각변동이 일어났다는 점이다. 역사상 많은 엘리트들은 - 예컨대 훈 족장, 바이킹 귀족, 아즈텍 사제 - 전쟁을 긍정적인 선으로 보았다. 한편 다른 사람들은 악으로 보기는 했지만 필요악으로 여겼으므로, 자신에게 유리하도록 바꾸는 편이 낫다고 생각했다. 우리 시대는 평화를 사랑하는 엘리트가 세계를 지배하는 역사상 최최의 시대다. 정치인, 사업가, 지식인, 예술가 등은 진심으로 전쟁을 막을 수 있는 악이라고 본다(과거에도 초기 기독교도와 같은 평화주의자가 있기는 했지만, 이들도 드물게 권력을 잡은 경우 "너의 왼뺨을 내밀어라"는 주문을 잊어버리는 경향이 있었다).

 

 세 요인 사이에는 양의 되먹임 고리가 존재한다. 핵무기에 의한 대량학살 위협은 평화주의를 육성한다. 평화주의가 퍼지면 전쟁이 물러가고 무역이 번창한다. 무역은 평화의 수익과 전쟁의 비용을 모두 늘린다. 세월이 흐르면서 이 되먹임 고리는 전쟁에 또 다른 장애물을 만들어내는데, 궁극적으로는 이것이 모든 장애 중 가장 중요한 것으로 판명될지도 모른다. 점점 치밀해지는 국제적 연결망은 국가들의 독립성을 서서히 약화시켜, 어느 한 나라가 일방적으로 전쟁을 일으킬 가능성을 줄인다. 대부분의 국가들이 더 이상 전면전을 벌이지 않는 이유는 단지 그들이 이제 독립적이지 못하기 때문이다. 비록 이스라엘, 이탈리아, 멕시코, 타이 국민들이 독립성이라는 환상을 품고 있을지라도, 사실 그들의 정부는 독립적인 경제, 외교 정책을 수행할 수 없으며 혼자 힘으로는 전면전을 수행할 능력이 없는 것도 확실하다. 3장 <제국의 비전>에서 설명했듯, 우리는 지구 제국의 형성을 목격하고 있는 중이다. 이전의 제국들과 마찬가지로 이번 제국 역시 그 국경 내에서 평화를 강제한다. 그리고 그 국경이 지구 전체를 아우르기 때문에, 세계 제국은 세계 평화를 효과적으로 강제한다.

 

 자, 그렇다면 현대는 제1차 세계대전의 참호와 히로시마의 버섯 구름과 히틀러와 스탈린이라는 잔악한 광인들로 대표되는 무분별한 대량학살, 전쟁, 압제의 시대인가? 아니면 남미에서 파인 적 없는 참호, 모스크바와 뉴욕에서 피어오르지 않은 버섯구름, 마하트마 간디와 마틴 루서 킹의 평화로운 얼굴로 대표되는 평화의 시대인가? 여기에 대한 답은 시기 선택의 문제다. 과거에 대한 우리의 시각이 최근 몇 년간의 사건에 의해 얼마나 크게 왜곡되는지를 깨닫는 것은 정신이 번쩍 드는 일이다. 만일 이 장이 1945년이나 1962년에 쓰였다면, 지금보다 훨씬 더 분위기가 어두웠을 것이다. 이 책은 2014년에 쓰였기에 현대사에 대해 상대적으로 밝은 접근법을 취하고 있는 것이다.

 낙관주의자와 비관주의자 모두를 만족시키기 위해서는 다음과 같이 결론 내릴 수도 있겠다. 우리는 천국과 지옥으로 나뉘는 갈림길에 서 있다. 한쪽으로 난 문과 다른 쪽으로 열린 입구 사이에서 초조하게 오락가락하고 있다. 역사는 우리의 종말에 대해 아직 결정 내리지 않았으며, 일련의 우연들은 우리를 어느 쪽으로도 굴러가게 만들 수 있다.

 

p532

 

 행복의 장기적 역사를 연구한 사람은 드물지만, 거의 모든 학자와 보통 사람이 여기에 대해 막연한 선입견을 가지고 있다. 흔히들 역사가 지속되는 기간 동안 인간의 능력은 계속 커졌다고 생각한다. 인간은 불행을 줄이고 자신의 소망을 충족하는 일에 능력을 사용하는 것이 일반적이므로, 그렇다면 우리는 중세 시대의 선조에 비해 틀림없이 행복할 것이다. 또한 중세 사람은 석기시대 수렵채집인보다 틀림없이 행복했을 것이다. 하지만 이런 진보적 설명은 설득력이 없다. 익히 아는 바대로 새로운 재능, 행태, 기술이 반드시 더 나은 삶을 만들어주는 것은 아니다. 인류가 농업혁명에서 농경을 배웠을 때, 집단으로서 이들이 환경을 바꾸는 힘은 커졌을지 모르지만 수많은 개인의 삶은 더 팍팍해졌다.

 농부들은 수렵채집인보다 열심히 일해야 했지만, 먹는 음식은 영양가도 더 적었고 근근이 버틸 양밖에 되지 않았다. 그리고 질병과 착취에 훨씬 더 많이 노출되었다. 이와 비슷한 예로, 유럽 제국의 확대는 아이디어와 기술과 농작물을 이동, 순환시키고 새로운 상업로를 개척한 덕분에 인류의 집단적 힘을 크게 늘렸다. 하지만 수백만 명의 아프리카인, 아메리카 원주민, 호주 원주민에게는 좋은 소식이 아니었다.

 인간이 권력을 남용하는 경향이 있다는 사실은 이미 증명되어 있다. 이를 감안하면 사람들이 더 많은 영향력을 누리면 더 행복해질 것이라고 생각하는 것은 순진한 태도로 보인다. 이 견해에 반대하는 사람 중 일부는 정반대 입장을 취하여, 인간의 능력과 행복 사이에는 역관계가 존재한다고 말한다. 권력은 부패하게 마련이며, 인류가 점점 더 많은 힘을 갖게 될수록 우리의 진정한 욕구와는 동떨어진 차가운 기계적 세상이 만들어졌다는 것이다.

 그들에 따르면, 진화의 결과 우리의 마음과 신체는 수렵채집인의 삶에 맞도록 주조되었다. 그러나 우리가 처음에 농업으로, 그다음에 산업으로 이행한 탓에, 우리는 부자연스러운 삶을 살 수밖에 없다는 선고를 받았다. 타고난 성향과 본능을 모두 표현할 수 없으므로 가장 깊은 욕구를 만족시킬 수 없는 삶이라는 것이다. 도시 중산층의 안락한 삶을 이루는 어떤 것도 매머드 사냥에 성공한 수렵채집인 무리가 경험한 흥분의 도가니와 형언할 수 없는 기쁨에 근접할 수 없다. 새로운 발명이 하나씩 이루어질 때마다 우리는 에덴의 낙원으로부터 몇 킬로미터씩 떨어질 뿐이다.

 하지만 이처럼 모든 발명의 뒤에서 어두운 그림자만을 보려는 낭만적 고집은 진보가 필연이라는 믿음에 못지않게 교조적이다. 우리는 우리 내면의 수렵채집인과 접촉이 끊겼을지도 모르지만, 그게 꼭 나쁘기만 한 것은 아니다. 예컨대 지난 2세기 동안 발전한 현대 의학 덕분에 어린이 사망률은 33퍼센트에서 5퍼센트 이하로 떨어졌다. 이 사실이 의학이 발달하지 않았더라면 사망했을 어린이 본인뿐 아니라 그 가족과 친구들의 행복에 엄청나게 기여했다는 것을 의심할 사람이 과연 있을까?

 이보다 좀 더 미묘한 것은 중도를 취하는 입장이다. 과학혁명이 일어나기 전에는 권력과 행복 간에 분명한 상관관계가 없었다. 중세 농부는 실제로 그들의 수렵채집인 조상보다 더욱 비참하게 살았을지 모른다. 하지만 지난 몇 세기 동안 인류는 스스로의 능력을 더욱 현명하게 사용하는 법을 배웠다. 현대 의학의 승리는 한 예에 불과하고, 이외에도 전대미문의 성취가 많다. 폭력은 급격히 줄었고, 국제전은 사실상 사라졌으며, 대규모 기근은 거의 자취를 감추었다.

 하지만 이 또한 과도한 단순화다. 첫째, 낙관적 평가의 표본으로 삼은 기간이 너무 짧다. 인류 대다수가 현대 의학의 결실을 누리기 시작한 것은 1850년 이후의 일이고, 어린이 사망률이 급격하게 떨어진 것은 20세기에 일어난 현상이다. 대규모 기근은 20세기 중반까지도 상당 지역에 큰 피해를 입혔다. 1958~1961년 중국 공산당의 대약진운동 당시 1천만~5천만 명이 굶어 죽었다. 국제전이 드물어진 것은 1945년 이후에 와서였는데 대체로 핵무기로 인해 인류가 절멸할 위협이 새로 등장한 덕분이었다. 따라서 판단하기에는 아직 이르다. 최근 몇십 년이 인류에게 전대미문의 황금시대였지만, 이것이 역사의 흐름이 근본적으로 바뀐 것을 대변하는 현상인지 아니면 단명할 행운의 회오리바람에 불과한지 말하기는 이르다. 우리는 현대성을 판단할 때 21세기 서구 중산층의 시각을 취하려는 유혹을 크게 느끼지만, 우리는 19세기 웨일스의 광산 노동자, 중국의 아편 중독자, 태즈메이니아 원주민의 시각을 잊어서는 안 된다. 원주민 트루가니니는 호머 심슨보다 그 중요성이 덜하지 않다.

 둘째, 지난 반세기는 짤막한 황금시대였는데 이것조차 미래에 파국을 일으킬 씨를 뿌린 시기였다는 사실이 나중에 확인될지도 모른다. 지난 몇십 년간 우리는 지구의 생태적 균형을 수없이 많은 새로운 방법으로 교란해왔으며, 이것이 끔찍한 결과를 빚고 있는 중인 듯하다. 우리가 무모한 소비의 잔치를 벌이면서 인류 번영의 기초를 파괴하는 중이라는 사실을 가리키는 증거는 많다.

 결론적으로, 우리는 다른 모든 동물의 운명을 깡그리 무시할 때만 현대 사피엔스가 이룩한 전례 없는 성취를 자축할 수 있다. 우리는 스스로를 질병과 기근으로부터 보호해주는 물질적 부를 자랑하지만, 그중 많은 부분은 실험실의 원숭이, 젖소, 컨베이어 벨트의 병아리의 희생 덕분에 축적된 것이다. 지난 2세기에 걸쳐 수백억 마리의 동물들이 산업적 착취체제에 희생되었으며, 그 잔인성은 지구라는 행성의 연대기에서 전대미문이었다. 만일 우리가 동물권리 운동가들의 주장을 10분의 1만이라도 받아들인다면, 현대의 기업농은 역사상 가장 큰 범죄를 저지르는 중이라고 말해도 지나치지 않다. 지구 전체의 행복을 평가할 때 오로지 상류층이나 유럽인이나 남자만을 대상으로 하는 것은 잘못이다. 인류만의 행복을 고려하는 것도 마찬가지로 잘못일 것이다.

 

p543

 현실이 그와 같다면, 심지어 영원한 생명도 불만으로 이어질 수 있다. 한번 상상해보자. 모든 질병을 고치는 치료법, 노화를 효과적으로 막아주는 요법, 젊음을 영원히 유지하는 회춘요법 등을 찾아냈다고 하자. 그 직접적인 결과는 분노와 불안이 사상 유례없이 광범위하게 일어나는 현상일 것이다. 새로운 기적의 요법을 받을 돈이 없는 사람 - 대다수의 사람 - 들은 격렬한 분노에 휩싸일 것이다. 역사를 통틀어 가난하고 압박받는 사람들이 스스로를 위안해온 것은 적어도 죽음만은 누구에게나 공평하게 찾아온다는 믿음이었다. 부자나 권력자도 죽을 수밖에 없다는 사실이었다. 가난한 사람들은 자신들은 죽어야 하는데 부자는 영원히 젊고 아름답게 살 수 있다는 생각에 마음이 편치 않을 것이다.

 하지만 새로운 요법을 받을 경제적 여유가 있는 극소수의 사람들도 그렇게 희열을 느끼지는 않을 것이다. 걱정해야 할 일이 많이 생길 것이기 때문이다. 새로운 요법이 생명과 젊음을 연장해줄 수는 있지만, 시체를 되살리지는 못한다. 나와 내 사랑하는 이가 영원히 살 수는 있지만 트럭에 치이거나 테러리스트에 의해 산산조각이 나지 않는다는 조건하에서만 그렇다고 생각해보라. 얼마나 끔찍하겠는가. 영원히 살 수 있는 잠재력이 있는 사람들은 심지어 아주 조그만 위험을 무릅쓰는 것도 몹시 싫어하게 될 것이며, 배우자나 자녀, 친한 친구를 잃는 데 따르는 고통을 견딜 수 없게 될 것이다.

 

p556

 

 그 결과, 대부분의 종교와 철학은 행복에 대해 자유주의와는 매우 다른 접근법을 취했다. 불교의 입장은 특히 흥미롭다. 불교는 행복의 문제를 다른 어떤 종교나 이념보다도 중요하게 취급했다. 불교도들은 지난 2,500년에 걸쳐 행복의 본질은 무엇인가, 무엇이 행복을 가져다주는가를 체계적으로 연구했다. 과학자들 사이에서 불교 철학과 명상법에 대한 관심이 점점 커져가는 이유가 여기에 있다. 행복에 대한 불교의 접근방식은 생물학적 접근방식과 기본적 통찰의 측면에서 일치한다. 즉, 행복은 외부 세계의 사건에서 오는 것이 아니라 신체 내부에서 일어나는 과정의 결과라는 것이다. 하지만 동일 한 통찰에서 시작했음에도, 불교는 생물학과는 매우 다른 결론에 도달한다.

 불교에 따르면, 대부분의 사람들은 행복을 즐거운 감정과, 고통을 불쾌한 감정과 동일시한다. 그래서 자신의 느낌을 매우 중요히사며, 점점 더 많은 즐거움을 추구하는 한편 고통을 피하려고 한다. 우리가 살아가면서 하는 모든 일은 다리를 긁든 의자에서 꼼지락 거리든, 세계대전을 치르든 모두 그저 즐거운 감정을 느끼기 위한 시도에 지나지 않는다.

 문제는 우리의 감정이 바다의 파도처럼 매 순간 변화하는 순간적 요동에 지나지 않는다는 데 있다. 5분 전에 나는 즐겁고 결의에 차 있었지만, 지금 나는 슬프고 낙담해 있다. 그러므로 만일 내가 즐거운 감정을 경험하고 싶다면, 불쾌한 감정을 몰아내면서 즐거운 감정을 끊임없이 추구해야 한다. 설령 한 번 그러는 데 성공했다 해도 곧바로 모든 것을 다시 시작해야 한다. 그간의 노고에 대한 보상은 전혀 없다.

 그토록 덧없는 보상을 받는 것이 뭐가 그리 중요한가? 나타나자마자 곧바로 사라지는 무언가를 달성하기 위해서 그토록 힘들게 분투할 필요가 무엇인가? 불교에서 번뇌의 근원은 고통이나 슬픔에 있지 않다. 심지어 덧없음에 있는 것도 아니다. 번뇌의 진정한 근원은 이처럼 순간적인 감정을 무의미하게 끝없이 추구하는 데 있다. 이 때문에 우리는 항상 긴장하고, 동요하고, 불만족스러운 상태에 놓인다. 이런 것을 추구하기 때문에 우리 마음은 결코 만족하지 못하고, 기븜을 느낄 때조차 만족스럽지 않다. 기쁜 감정이 금방 사라져버릴 것이 두렵고, 이 감정이 이어져 더 강해지기를 갈망하기 때문이다.

사람들이 번뇌에서 벗어나는 길은 이런저런 덧없는 즐거움을 느끼는 것이 아니라 이 모든 감정이 영원하지 않다는 속성을 이해하고 이에 대한 갈망을 멈추는 데 있다. 이것이 불교 명상의 목표이다. 명상을 할 때는 자신의 몸과 마음을 깊이 관찰하여 모든 감정이 끊임없이 일어나고 사라지는 것을 목격하며, 그런 감정을 추구하는 것의 덧없음을 깨달아야 한다. 그런 추구를 중단하면 마음은 느긋하고, 밝고, 만족스러워진다. 즐거움, 분노, 권태, 정욕 등 모든 종류의 감정은 계속해서 일어나고 사라지지만, 일단 당신이 특정한 감정에 대하 추구를 멈추면 어떤 감정이든 있는 그대로 받아들일 수 있게 된다. 어쩌면 일어났을지도 모르는 무언가를 공상하는 대신에 지금 이 순간을 사는 것이다. 그 결과 완전한 평정을 얻게 된다.


 평생 미친 듯이 쾌락을 찾아 헤매던 사람들은 상상조차 할 수 없는 수준의 평정이다. 그런 사람은 바닷가에 수십 년간 서 있으면서 모종의 '좋은' 파도를 받아들여 그것이 흩어져버리지 못하도록 애쓰는 동시에 모종의 '나쁜' 파도는 밀어내어 자신에게 가까이 오지 못하게 만들려고 애쓰는 사람과 마찬가지다. 이 사람은 날이면 날마다 해변에 서서 무익한 노력을 거듭하면서 스스로의 마음을 괴롭힌다. 그러다 마침내 그는 모래에 주저앉아, 파도가 마음대로 오고 가게 놔둔다. 얼마나 평화로운가!

 현대의 자유주의적 문화의 입장에서 이런 사랑은 너무나 낯설었다. 그래서 서구의 뉴에이지 운동은 불교의 통찰을 처음 대했을 때 이를 자유주의적 용어로 바꿔버렸다. 완전히 꺼꾸로 받아들인 것이다.   

 뉴에이지 문화는 주로 이렇게 주장했다. "행복은 외적인 조건에 좌우되는 것이 아니다. 오로지 우리 내면의 느낌에 좌우되는 것이다. 부나 지위와 같은 외적 성취에 더 이상 매달리지 말고 내면의 느낌에 귀를 기울여야 한다." 혹은 보다 간결하게 이렇게 주장했다. "행복은 내부에서 시작된다." 이것은 생물학자들의 주장과 정확히 일치하는 슬로건이다. 하지만 부처의 가르침과는 거의 반대라고 할 수 있다. 행복이 외적 조건에 달려 있지 않다고 하는 점에서 부처의 생각은 현대 생물학이나 뉴에이지 운동과 궤를 같이하지만, 부처의 가장 심원하고 중요한 통찰은 따로 있다. 진정한 행복은 주관적 느낌이나 감정과도 무관하다는 점이다. 사실 우리가 스스로의 주관적 느낌을 중요하게 여기면 여길수록 우리는 더 많이 집착하게 되고, 괴로움도 더욱 심해진다. 부처가 권하는 것은 우리가 외적 성취의 추구뿐 아니라 내 내면의 느낌에 대한 추구 역시 중단하는 것이다.

 

 요약하자면, 주관적 안녕을 묻는 설문은 우리의 안녕을 주관적 느낌과 동일시하고, 행복의 추구를 특정한 감정 상태의 추구와 동일시한다. 많은 전통철학과 불교를 비롯한 종교는 이와 반대되는 입장을 취한다. 행복을 얻는 비결은 자신의 진실한 모습을 - 자신이 정말로 어떤 사람인지를 - 파악하는 데 있다는 것이다. 대부분의 사람들은 스스로의 감정, 호불호를 자신과 동일시하는데, 이는 잘못이다. 이들은 분노를 느끼면 '나는 화가 났다. 이것은 나의 분노다'라고 생각한다. 그래서 그들은 어떤 감정을 피하고 또 다른 감정을 추구하느라 일생을 보낸다. 그들은 자신과 자신의 감정은 다르다는 것을 알지 못한다. 특정한 감정을 끈질기게 추구하는 행위는 자신을 고통스럽게 만드는 함정이라는 사실도 모른다.

 만일 이것이 사실이라면, 행복의 역사에 대한 우리의 이해 전체는 오도된 것일 수 있다. 사람들의 기대가 충족되었느냐의 여부, 쾌락적 감정을 즐기는가의 여부는 그리 중요하지 않을지도 모른다. 주된 질문은 사람들이 스스로에 대한 진실을 알고 있느냐 하는 것이다. 오늘날의 사람들이 고대의 수렵 채집인이나 중세의 농부보다 이런 진실을 조금이라도 더 잘 이해하고 있다는 증거가 있을까?

 

p561

 하지만 21세기에 이것은 더 이상 사실이 아니다. 호모 사피엔스는 스스로의 한계를 초월하는 중이다. 이제 호모 사피엔스는 자연선택의 법칙을 깨기 시작하면서, 그것을 지적설계의 법칙으로 대체하고 있다.

 

 자동차의 구매(신차,중고차), 정비에 대한 기본 상식 및 카센터 선택에 대한 요령, 보험 상식 등 자동차 전반에 대한 입문서 정도라고 할 수 있을 듯.

자동차를 몰기 시작한 사람들이 읽으면 좋겠다.

(교보문고에서는 정치/사회로 분류되어 있던데, 이 책은 아무리 봐도 경제/경영 분야가 더 어울린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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p21

 소비자의 입장에서 가장 좋은 (신차) 구매 방법은 현찰 박치기다. 현찰로 지불하고 차를 사는 것. 가장 고전적이고 깔끔한 방법이다. 추가로 이자를 내야 할 필요가 없으니, 별도의 부담이 없는 것이다. 가게에서 물건 사듯 물건값 지불하고 가져오는 것. 소비자에게 유리한 가장 단순하고 명쾌한 방법이다.

 물론 이 경우 영업사원에게서 추가 할인을 받기는 불가능에 가깝다. 할부로 팔아야 금융회사에서 수당을 받고 그 수당 한도 내에서 할인을 기대할 수 있는데 현금으로 차를 사는 고객에게는 할인을 해줄 수 있는 여지가 그만큼 줄어들기 때문이다.

 여기서 '신의 한 수'가 있다. 이재에 밝아 땡전 한 푼을 허투루 쓰지 않는 세무사 출신인 후배가 있다. 자린고비까지는 아니지만 알뜰하기가 이루 말할 수 없다. 그런 친구가 차를 샀다. 어떻게 샀을까. 현금으로 차를 사는 것과 같지만 영업사원에게서 기대할 수 없었던 추가 할인 효과를 내는 방법. 바로 카드 일시불이다.

 통장에 찻값을 지불할 만큼의 잔고를 채워넣은 뒤 카드로 가볍게 긁어준 것. 사전에 카드사에 연락해 자동차 구매 건으로 카드 사용한도를 풀어달라고 하는 것도 잊지 않았다. 카드 일시불 결제가 현금 결제보다 더 유리한 이유는 바로 카드 포인트에 있다. 그냥 현찰로 가져다줬으면 생기지 않았을 포인트였는데 카드로 결제해 그만큼 이익을 본 것이다. 영업사원이 가격 할인을 해주지 않아도 할인받은 것과 같은 셈이다.

 차를 판매하는 입장에서 카드 일시불 고객은 최악의 경우다. 제값 받고 팔아도 카드 수수료만큼 카드 회사에 돈을 줘야 해 그만큼 손해이기 때문이다.

 돈을 가졌으면 이렇게 손해를 보지 않고, 추가 부담 없이 차를 살 수 있다. 하지만 돈이 없으면 돈을 가진 금융회사에 손을 벌려 찻값과 돈값을 함께 지불해야 한다. 돈 없는 사람이 더 많은 돈을 써야 하는 세상이다.

 

p42. 새 차 길들이는 방법

1. 사용설명서 정독

2. 고속주행은 하지 말자 : 2,000km 까지는 최대한 부드럽게, RPM은 2000전후로(최대 3000 이하)

3. 장거리주행시 변속기를 골고루 사용 : 수동은 1~5단을 골고루, 오토도 저,중,고속등을 골고루. 

4. 엔진오일 교환은 1000km 전후에 한번 : 초기에 엔진에 미세 쇳가루가 생김. 

5. 도장작업은 3개월 후에 하자.

새 차는 출고 후 3개월가량이 지나야 보디 페인트가 완전히 건조되고, 차의 도장이 안정된다. 이 기간에 광택작업(도장 표면을 얇게 박피해서 빤짝거리게 하는 것) 및 자동세차를 피해야 한다. 요즘은 광택작업으로 표면 박피가 아닌 코팅을 하기도 하는데 이 경우도 3개월이 지나서 하는 것이 좋다.

 

p221

1. 휠베이스(축거)

차의 성능에 실질적으로 영향을 미치는 것은 길이보다 휠베이스다. 휠베이스는 앞바귀 중심과 뒷바퀴 중심 간의 거리다. 길이가 같아도 휠베이스가 길면 차의 움직임이 훨씬 안정적이고, 실내 공간도 더 넓어진다.

2. 트레드(윤거)

트레드와 휠베이스는 승차감에 영향을 준다. 트레드는 좌우측 바퀴 간의 거리로, 뒷바퀴굴림 방식의 스포츠카는 뒤트레드가 넓고, 앞바퀴굴림인 대다수의 차는 앞트레드가 더 넓다. 트레드와 휠베이스가 짧은 엑센트는 좁은 공간에서도 여유있게 움직일 수 있지만, 안정감은 떨어진다. 반면 트레드와 휠베이스가 긴 그랜저는 공간이 넓고 승차감도 우수하다. 다만 회전반경이 길어져 민첩하게 움직일 수 있는 능력은 떨어진다.

3. 압축비

압축비는 실린더 안에서 피스톤이 공기를 압축하는 비율이다. 많이 압축되면 폭발력도 세다. 가솔린 엔진에서 압축비가 너무 높아지면 금속을 망치로 두드리는 것과 같은 소리가 나는 현상(Knocking)이 발생하는 문제가 있다. 그래서 휘발유 엔진 압축비는 대개 11:1을 넘기지 않는다. 디젤엔진은 압축비가 훨씬 높다. 점화플러그가 없고 압축열에 의해 자연폭발시켜야 하는 구조이기 때문이다. 디젤 엔진의 압축비는 15~22:1 정도가 된다.

 

 영화배우 하정우의 두번째 에세이집. 이번 에세이는 몇년 전 영화제에서 수상공약으로 내걸었던 국토종단 공약을 이행하면서 걷기에 빠지게 된 내용을 위주로 주로 걷기와 관련된 에피소드로 이루어져 있다.

 가볍게 읽기에 좋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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p26

 시간이 지날수록 나는 길 끝에서 느낀 거대한 허무가 아니라 길 위의 나를 곱씹어보게 되었다. 그때 내가 왜 하루하루 더 즐겁게 걷지 못했을까. 다시 오지 않을 그 소중한 시간에 나는 왜 사람들과 더 웃고 떠들고 농담하며 신나게 즐기지 못했을까. 어차피 끝에 가서는 결국 아무것도 없을 텐데.

 내 삶도 국토대장정처럼 길 끝에는 결국 아무 것도 없을 것이다. 인생의 끝이 '죽음'이라 이름 붙여진 누구도 피해갈 수 없는 '무無’라면, 우리가 할 수 있는 일은 하루하루 좋은 사람들과 웃고 떠들며 즐겁게 보내려고 노력하는 것뿐일 테다.

 

 많은 사람들이 길 끝에 이르면 뭔가 대단한 것이 있을 거라 기대한다. 나 역시 그랬다. 그러나 농담처럼 시작된 국토대장정은 걷기에 대한 나의 생각을 완전히 바꿔놓았다. 우리가 길 끝에서 발견하게 되는 것은 그리 대단한 것들이 아니었다. 내 몸의 땀냄새, 가까이 있는 사람들의 꿉꿉한 체취, 왁자한 소리들, 먼지와 피로, 상처와 통증.... 오히려 조금은 피곤하고 지루하고 아픈 것들이지 모른다. 그러나 이 별건 아닌 순간과 기억들이 결국 우리를 만든다.

 

p181. 꼰대가 되지 않는 법

 

 영화감독이란 자리를 비워주는 것이로구나. 각 파트에서 알아서 하게끔, 자연스럽게 굴러가게끔 조율하고 가이드하면 족한 것이구나. 굳이 제일 앞에 나서서 모니터 가려가면서 목청 높이고 스태프들에게 지시할 필요가 없는 거로구나. 새삼스레 감독의 일에 대해 깨달은 것이다.

 

 한 걸음 더 나아가 제작자는 촬영 현장에 놓인 자신의 의자마저 슬쩍 뒤로 빼는 사람이 아닐까 한다. 좋은 제작자는 촬영 현장이나 모니터가 가장 잘 보이는 곳에 자리잡고서 스태프나 배우들을 감시하고 관리하는 사람이 아니다. 좋은 제작자는 자신의 자리를 비우고 뒤로 물러나서 감독, 프로듀서, 배우들에게 스스로 최선의 결과물을 만들어낼 것을 독려하고 그럴 수 있는 분위기를 조성해준다.

 그러나 이것은 이상일 뿐, 사실 제작자가 이렇게 뒤로 물러나기는 쉽지 않다. 왜냐하면 자칫 현장에서 본인이 할 일이 없는 것처럼 보이기 때문이다. 배우는 연기를 하고 감독은 연출을 하고 스태프들은 각 파트의 일을 한다. 그런데 제작자는 현장에서 마땅히 할 일이 없다. 이때 인간이라면 누구나 이런 생각이 든다.

 

 '어? 이 영화를 총괄하는 사람은 난데, 왜 내가 할 일이 없지?' '저 사람들이 나를 잊어먹은 거 아냐?'

 이때 많은 제작자가 자격지심 때문에 '참견'을 하기 시작한다. 나도 이 현장에서 역할이 있는 중요한 사람이라는 것을 드러내고 싶어서 괜한 잔소리를 툭툭 던지는 것이다.

 이렇게 제작자가 불필요한 참견을 하게 될 때, 현장에 있는 사람들은 어떻게 반응할까? 연기에 대해 지적받은 배우는 당연히 마음이 불편해지고, 감독은 "제가 알아서 할게요" 퉁명스럽게 대꾸한다. 이런 순간들이 자꾸 쌓이다보면 제작자는 현장에 있는 스태프들에게 불편한 존재가 된다. 그럼 그 제작자가 이런 분위기를 눈치채고 다음부터 그러지 않으려고 주의할까?

 절대 아니다. 사람들의 반응이 냉랭할수록 어떻게든 더 영향력을 행사하려고 목소리를 높인다. 우리는 이런 사람을 '꼰대'라고 부른다.

 제작자는 처음부터 자신이 어떻게 포지셔닝해야 할지 잘 알아야 한다. 아무리 영화의 허점과 결점이 눈에 띄더라도 입을 열 타이밍이 따로 있다. 그 타이밍이 오기 전에는 절대 입을 떼면 안 된다. 자신의 이름을 걸고 영화에 뛰어든 각 파트의 스태프와 배우들이 각자의 꽃을 만개할 때까지 기다려주어야 한다. 억지로 꽃봉오리를 벌리고 꿀벌을 밀어 넣어서 될 일이 아니다. 제작자의 사명은 사람들이 스스로 움직일 수 있는 자리를 잘 마련해주고 그 영역을 지켜주는 것이다.

 

 

 

2명의 일본인 치과 의사가 쓴 책으로 2명 모두 40년이 넘는 치과의사 경력을 갖고 있다..

최근에 치과에 갔다가 임플란트 권유를 받고, 무작정 치료 받아도 되나라는 의심에서부터 치과 관련 2권을 읽기 시작했다. 공교롭게도 2권의 주제가 거의 비슷하다. 일단 자연치아는 되도록 아끼고 잘 쓰자는 얘기다.

원제는 100세까지 자신의 이를 보존하는 4가지 방법(100歲まで自分の齒を殘す4つの方法/木野孔司) 이다.

나이가 들수록 이의 건강이 정말 중요하다는 걸 알게 된다. 아이들 어릴 때부터 이런 책을 읽게 해야 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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p10

 그리고 치과의사로서 공공연히 말하기는 그렇지만 치아 건강을 위협하는 가장 큰 위험인자는 다름 아닌 치과의사입니다. 치아를 한번 뽑아버리면 주위의 치아에도 나쁜 영향을 주어 도미노처럼 여쇄적으로 치아를 상실하게 된다는 사실, 알고 계셨나요? 치아 건강을 위해 찾은 치과에서 생각지도 않게 치아를 뽑게 되는 일이 적지 않습니다. 나이가 든 후에도 인공치아가 아닌 내 치아로 씹고 싶다면, 애초에 이런 도미노 현상이 일어나지 않게끔 되도록 발치를 하지 않아야 합니다. 요즘 조금만 문제가 있어도 치아를 뽑는 치과의사들이 적지 않은데, 다소 문제가 있는 치아라도 치료 시기를 놓치지 않고 적절히 치료하면 충분히 살릴 수 있습니다. 

 

p37

 치수(Pulp)는 상아질 내부에 혈관과 신경 등이 분포해 있는 부드러운 조직입니다. 치수는 치아뿌리 끝의 좁은 구멍(치근단공)을 통해 치아 뿌리를 둘러싸고 있는 치조골 속의 혈관과 신경에 연결되어 치아에 영양을 공급해주는 역할을 합니다. 그러나 완전히 다 자란 치아의 치수는 감각기능만을 담당하므로 치수가 없더라도 상관은 없습니다. 그래서 충치가 치수까지 도달하면 치수를 제거하는 처치를 하는데, 이것이 흔히 말하는 '신경치료'입니다. 신경을 제거하면 혈액을 통한 영양분의 공급이 중단되므로 치아가 약해지지만, 치료만 적절히 한다면 신경이 남아 있는 치아와 동일하게 사용할 수 있습니다.

 

p69

 

 수많은 턱관절증 환자에게 공통적으로 나타난 최대 기여 인자는 무의식중에 위아래 치아를 접촉시키는 버릇인 TCH(Tooth Contacting Habit)였습니다. 

 위아래 치아는 원래 항상 접촉하고 있다고 생각하는 사람이 많은데, 입을 다물고 있을 때 위아래의 치아가 서로 닿지 않는 것이 정상입니다. 치아는 대화를 하거나 음식물을 씹고 삼킬 때만 접촉합니다. 그것도 순간적이어서 위아래 치아가 접촉하는 시간은 다 합해도 하루에 20분 이내입니다. 그런데 대화나 식사를 하지 않을 때도 위아래의 치아가 계속 닿아 있는 사람이 있습니다. 직접 확인해보면 알겠지만 치아가 서로 닿기만 해도 입을 닫는 근육이 활동을 시작합니다. 이 상태가 오래 지속되면 근육이 피로해지고 턱관절도 눌려 턱관절증이 생기기 쉽지요.

 

p107

 사람의 입 안에는 수백 종류의 세균이 살고 있습니다. 이런 세균을 정상세균총(正常細菌叢) 혹은 상재균(常在菌)이라고 하는데, 충치는 이 중 몇몇 정상세균총과 관련이 있습니다.

 하지만 수백 종류의 세균을 모두 알아야 할 필요는 없습니다. 충치 예방이라는 관점에서는 딱 2가지의 충치균만 알면 충분합니다. 충치가 생기는 데 중심적인 역할을 하는 원인균은 뮤탄스균과 유산균입니다. 이들 충치균이 어떻게 충치의 발생에 관여하는지, 제가 30년 전에 환자들을 대상으로 썼던 글을 인용해 설명하겠습니다.

 "압 안에는 설탕을 먹는 뮤탄스균이라는 세균이 삽니다. 뮤탄스균은 설탕만 먹고 살며, 텍스트란(dextran)이라는 끈적이는 물질이 치아 표면에 형성합니다. 텍스트란은 침에 녹지 않으며 입을 물로 헹구어도 제거되지 않습니다. 끈적이는 덱스트란 위에 마치 파리 끈끈이에 파리가 들러붙듯이 입 속의 수많은 세균이 들러붙습니다. 이 상태를 치태, 혹은 플라크라고 하지요. 치태는 매우 부드러워서 칫솔로 세게 문지르지 않아도 제거할 수 있습니다.

 충치가 시작되는 원인 물질은 치태에 들러붙은 뮤탄스균과 유산균이 음식물 찌꺼기를 먹고 소화해서 만들어내는 젖산(lactic acid)입니다. 치아 표면의 법랑질은 산성에 취약한데, 젖산이 생성되면 pH 7 정도의 약알칼리성이던 입 안의 pH 농도가 pH 5 이하의 산성이 되고 법랑질이 녹고 구멍이 나면서 균이 침투해 충치가 시작됩니다."

 

 원고를 쓴지 30년이 지났지만 충치 발생 메커니즘에 관한 설명은 거의 달라지지 않았을 것입니다. 한 가지 덧붙이자면 뮤탄슈균은 법랑질이 침식되는 충치 초기에, 유산균은 충치가 진행되어 상아질이 침식될 때 활약합니다.

 뮤탄스균은 모든 사람의 입 안에 서식하지만 그 균 자체로는 충치가 되지 않습니다. 충치가 진행되려면 뮤탄스균의 먹이인 설탕(자당)이 꼭 필요합니다. 설탕을 전혀 섭취하지 않는다면 이론적으로는 충치에 걸릴 일이 없다고 하겠습니다.

 

p121

 

 치과 의사에게서 '치아에 병소가 있다'는 말을 들으면 암처럼 전이될까 봐 걱정하는 사람도 있지만, 치아뿌리 끝의 병소는 전이되지 않으니 안심하세요. 그리고 뿌리 끝에 병소가 있다면서 바로 발치를 권하는 치과에는 발길을 끊고 다른 치과를 찾아야 합니다.

 치수 부위 신경치료가 잘되면 병소가 제거된 후 주위의 벼가 재생될 수 있으므로 자신의 치아를 계속 사용할 수 있습니다.

 

p140

 

 A: 치아와 잇몸 경계, 치주낭 안쪽 닦는 법

 잇몸고랑을 잘 닦으려면 요령이 필요합니다. 칫솔은 치아 면에 직각이 되게 갖다 대면 고랑에 칫솔모가 잘 닿지 않으므로 칫솔을 조금 기울여서 칫솔질을 시작해야 합니다. 이때 치주낭 속까지 닦이도록 살짝 눌러주듯이 닦으세요 칫솔을 크게 움직이면 치주낭 안에 들어간 칫솔모 끝이 빠져버립니다. 그러므로 칫솔모를 고랑에 끼우듯이 한 상태에서 세밀하게 움직입니다. 한 위치에서 10회 정도 움직이세요.

 덜 닦인 부분이 남지 않도록 순서대로 닦는 것이 좋습니다. 

 

p179. 음식물이 자주 끼면 치료를

 

 치주질환의 예방과 관련해 여러분이 꼭 알아야 할 것이 있습니다. 바로 식사를 할 때 치아와 치아 사이에 음식물의 찌꺼기나 섬유질이 끼는 문제입니다. 이것을 내버려 두면 상당히 골치 아픈 일이 벌어집니다.

 이웃하는 치아는 서로 접촉점에서 접하고 있습니다.

 

 이 접촉점의 접촉 압력이 낮으면 식사를 할 때 음식물이 접촉점을 넘어서 잇몸에 닿습니다. 이 음식물 찌꺼기가 치태와 결합하여 염증을 일으키고, 그 상태를 방치하면 치조골이 단기간에 소실되고 치주낭도 빠른 속도로 깊어집니다.

 접촉점의 강도는 치실이 겨우 통과하는 정도가 좋습니다. 치실이 치아 사이를 아무 저항도 없이 통과한다면 음식물이 낄 가능성이 상당히 높습니다. 이 상태에서 서로 이웃하는 치아가 흔들리지 않는다면 한쪽의 치아를 치료해 음식물이 끼지 않도록 개선해야 합니다. 치조골이 이미 줄어들어서 흔들리는 경우에는 음식물이 더이상 끼지 않도록 두 개의 치아를 연결해야 합니다. 어쨋든 음식물이 치아 사이에 끼면 그 부위에 치주질환이 급속히 진행되고 치아의 수명도 짧아집니다. 이 문제 역시 정기적으로 치과에서 구강검사를 하면 심해지기 전에 발견할 수 있으니 음식물이 낄 때는 반드시 치과치료를 받기를 권합니다.

 

p195

 진정한 명의가 있는 치과에는 입소문과 주위의 소개를 통해 많은 환자가 찾아옵니다. 굳이 선전을 할 필요가 없으니 번듯한 홈페이지가 없는 치과도 많고, 있다고 해도 주소나 전화번호 같은 필수사항과 진료 특징을 간단히 설명한 정도입니다. 이런 병원은 단골 환자가 많고, 마케팅에 신경 쓸 시간에 환자 한 사람의 치료에 더 관심을 가집ㄴ니다. 결국 선전 문구가 요란한 홈페이지나 크고 화려한 간판을 내건 치과, 라디오나 텔레비젼에서 광고를 많이 하는 치과에는 명의가 없을 가능성이 크다고 생각하는 편이 좋겠습니다.

 

좋은 치과의사를 찾는 7가지 비결

1. 사회적으로 인정을 받고 근거가 확실한 특수 치료를 할 수 있는 치과의사라면 대개 연구 성과를 정리해 논문으로 발표합니다. 최신 치료기술과 진단기술을 습득하는 데 노력을 아끼지 않는 치과의사는 감각에 의존한 아류의 치료법을 싫어하기 때문입니다. 논문을 꾸준히 발표하거나 전문 분야 세미나 참석을 꾸준히 하는 의사인지 확인해보시기 바랍니다.

2. 전문의 자격증이나 졸업대학 수료증을 많이 걸어놓는 치과도 있는데, 사실 이런 정보들은 거의 도움이 안 됩니다. 서양에 비해 일본은 각종 전문의 자격 기준이 엄격하지 않기 때문에, 자격증을 갖고 있다고 해서 높은 수준의 치료를 한다는 보장은 없습니다.

 대학 수료증은 그 대학을 졸업했다는 것 이상의 의미는 없습니다. 진정한 명의는 눈에 보이는 허세를 요란하게 부리지 않습니다.

3. 첫 진찰을 받을 때 치과의사의 말이나 행동이 만족스럽지 못하다면 상담 단계에서 끝내고, 되도록 치아를 뽑거나 깍는 치료는 하지 않는 것이 좋습니다. 일단 깍고 뽑아버린 치아는 원래대로 되돌릴 수 없기 때문입니다.

 자신의 치아는 스스로 지켜야 합니다. 치아에 있어서만큼은 소위 말하는 '시범 치료'란 없으니 나중에 후회하지 말고, 일단 생각해보겠다고 한 뒤 스스로 정보를 더 알아보기 바랍니다.

4. 애매한 설명화 함께 다짜고짜 치료를 시작하는 치과의사는 말할 필요도 없고, 환자를 의자에 눕힌 채로 일방적으로 설명하는 것 역시 바람직하지는 않습니다. 제대로라면 환자와 마주 앉아 눈을 보고 이야기해야 합니다.

 물론 환자도 치과치료에 대한 최소한의 지식은 갖추어야 하고 의문점이 있을 땐 즉각 질문을 해야 합니다. 이 책에 실린 '이것만은 알아두자' 정도의 예비 지식은 치과에 가기 전에 꼭 기억해두세요. 적절한 질문을 하는 환자를 대충 치료하는 간 큰 의사는 없을 것입니다.

5. 화려한 외관, 세련된 인테리어 등 치료와 직접적인 관계가 없는 부분에 많은 돈을 투자한 치과도 잘 살펴봐야 합니다. 진정으로 환자 중심의 치료를 하는지, 돈이 되는 치료로 유도하는 것은 아닌지 말이지요. 물론 진료실이 지저분하거나 정돈되지 않은 곳에서도 양질의 치료를 기대하기는 어렵겠지요.

6. 치과의사가 충치와 치주질환의 예방에 소극적인 것 같다면 이런 치과는 주의해야 합니다. 치과의사는 치료 외에도 공공의 치과의료복지를 위해 공헌해야 하는 사람입니다. 그러니 예방 활동을 열심히 하지 않는다면 좋은 의사라고 할 수 없습니다.

 또한 올바른 칫솔질 방법을 지도하거나 치주질환을 관리하는 데 무성의하고, 임플란트 치료의 장점만을 강조하는 치과를 조심하세요. 임플란트는 치아의 모든 문제를 다 해결해주는 꿈의 치료법이 아닙니다.

7. 치과위생사가 너무 자주 바뀌는 치과는 생각해볼 일입니다. 치과위생사는 대학에서 치위생학을 전공한 후 국가시험에 합격하여 면허를 취득한 치과 전문인력입니다. 치과의사를 도와 진료의 전반적인 업무를 할 뿐 아니라, 구강질환 예방을 위한 치석 제거(스케일링), 불소 도포 등을 하고 환자의 구강 관리 습관을 변화시키기 위한 검진과 예방 교육을 담당합니다. 이런 치과위생사가 치과에 갈 때마다 바뀐다면 결코 만족스러운 치료를 받을 수 없을 것입니다.

 치과 치료는 치과 전문의와 치과위생사가 함께 하는 팀 치료입니다. 팀워크가 좋지 않은 곳에서 환자 중심의 좋은 치료를 기대할 수는 없겠지요?

 

p203

 현행 건강보험제도는 병명이 붙은 질환에 대해 검사나 처치를 한 경우만 의료비를 지불하는 시스템입니다. 다시 말해 충치나 치주질환처럼 '병명을 가진 질환'에 대해 치료를 했을 때에만 보험에서 의료비가 지불됩니다. 결국 자연치아를 오래 유지하는 데 필요한 예방이나 관리는 질환에 대한 처치가 아니므로 원칙적으로는 보험이 적용되지 않습니다. 

 진료보수는 행위별 수가제(Free for Service, 의료의 종류와 기술의 난이도에 따라 의료비가 결정되는 형태로, 제공된 의료서비스의 단위당 가격에 서비스의 양을 곱한 만큼 의사에게 보상하는 방식)를 기본 방침으로 하고 있습니다 이제 막 치과의사가 된 신인이든 수십 년 경력의 베테랑 의사든 같은 병명의 질환을 같은 방법으로 치료하면 치료의 질이 아무리 차이가 나더라도 보수는 동일하게 책정됩니ㅏ.

 그런데 의사가 처치한 내용에 따라서 보험에서 지급되는 의료비가 달라집니다. 가령 치과의사가 '아직 몇 년은 더 쓸 수 있는 치아니까 남겨둬야겠다'고 진단하고 경과를 관찰하면 검사비만 지불됩니다. 하지만 햇병아리 치과의사가 '내 기술로는 치료하기 어려우니 뽑는 것이 낫겠다'고 판단해 발치하고 브리지나 틀니를 장착하면 보험에서는 검사비뿐만 아니라 발치나 틀니와 브리지의 의료비도 지불됩니다.

 즉 건강보험제도의 진료보수체계에는 치과의사의 경험과 기술력이 전혀 반영되지 않습니다. 충치나 치주질환으로 인해 타격을 받은 치아를 뽑지 않고 오래 사용하도록 하려면 치과의사의 임상 경험과 기술이 필요한데도 현행의 보험제도에는 이것을 평가하는 시스템이 존재하지 않습니다.

 그 결과, 아이러니하게도 기술력이 없는 치과의사가 의료비를 더 많이 받을 수도 있게 된 것이지요. 치료 횟수나 치료 항목이 늘어날수록 주머니에 들어오는 보수가 그만큼 많아지기 때문입니다. 오해는 없기를 바라지만, 현재의 시스템에서는 치아를 많이 깍고 뽑을수록 더 많은 진료비를 청구할 수 있으니까요. 치과의사가 양심적으로 치료하는 겨우, 즉 치아를 깍거나 뽑지 않는 치료를 하면 할수록 건강보험제도 때문에 경제적으로 불이익을 보게 됩니다.

 

p207. 발치를 꼭 해야 할 때

 

 현재의 건강보험제도에 따른 보험진료를 받고 있는 분은 치아의 상태가 조금이라도 나빠지면 치아를 깍거나 뽑는 치료를 받을 위험에 노출되어 있다고 해도 과장이 아닐 것입니다. 이것은 일본뿐 아니라 한국도 마찬가지입니다.

 따라서 치료를 받으러 간 치과에서 "이 치아는 더는 못 쓰니까 뽑읍시다"라며 결단을 요구할 때는 "지금 당장 결정할 수는 없으니 생각할 시간을 주세요"라고 말하며 치료를 중단하는 것이 좋습니다.

 물론 어떤 치과의사가 보더라도 당장 뽑아야 할 치아도 있습니다. 특히 치주낭의 깊이가 10밀리미터가 넘고 치주낭이 치아뿌리 끝까지 도달한 치아는 치료하더라도 씹는 기능을 제대로 하지 못합니다. 물론 이런 치야여도 굳이 서둘러 뽑을 필요는 없다는 것이 제 의견입니다만, 만약 씹을 때 통증이 심하고 씹는 데 방해가 된다면 일찍 발치하는 것이 낫습니다. 씹지 못하는 치아 때문에 제대로 식사를 즐기지 못하고 이런 상태가 지속되면 치아 교합이 어긋나게 될 수도 있으니 말입니다. 게다가 다른 치아에도 문제를 일으키거나 턱관절증이 발생할 가능성도 있습니다.

 다만 저는 치아의 상태가 심각하지 않다면 치과의사와 환자가 함께 노력해 몇 년 정도는 더 쓸 수도 있다고 말씀드리고 싶습니다. 결국에는 뽑아야 하더라도 발치한 치아 때문에 발생할 수 있는 도미노 현상을 막고 시간을 벌 수 있을 테니까요.

 

좋은 치과의사의 특징

 '평생 내 치아를 쓰고 싶다'는 환자의 바람에 귀 기울이고 도와주는 치과의사는 다음의 특징을 가지고 있습니다.

1. 언제나 치아를 뽑지 않는 것을 대전제로 하고 진료합니다.

2. 치아를 오래 유지할 수 있도록 정기적인 전문 관리 시스템을 구축해두었으며, 환자에게 적절한 셀프케어 방법을 지도하고 실행하도록 권합니다.

3. 무엇보다도 이런 의료를 십 년, 이십 년씩 지속할 수 있는 치과를 운영합니다.

 

 일반적으로 발치란 그것 말고는 아무 방법이 없을 때 쓰는 최후의 수단입니다. "서둘러 발치하지 않으면 임플란트조차 할 수 없게 된다"라고 치과의사가 말해도 흔들리지 마세요. 며칠 더 생각한다고 해서 급속히 악화되지는 않지만 치아를 한번 뽑으면 결코 돌이킬 수 없으니까요.

 

 한 십년 전쯤인가? 이 분이 확 떴던 적이 있었다. 당시에는 별 관심이 없었는데 최근에 2012년도에 방송한 SBS의 아이러브인이라는 교양프로그램에서 김정운 씨가 강연했던 프로그램을 봤다. 엄청 재밋어서 이 분 책을 구해서 읽기 시작했다. 

 이 분은 몇년 전에 대학교수직을 관두고 갑자기 일본으로 유학을 가면서 대중에게 잊혀져 갔는데, 최근에 돌아와서 여수에 작업실을 만들어 정착(가족들과는 따로)을 한 모양이다. 

 외딴 섬에서 여러가지 단상들을 정리해서 책으로 내놨다.

 일반적인 에세이랑은 좀 다른게, 심리학 박사이기 때문인지 어떤 주제나 현상에 대한 심리학적 분석이 독특하다. 그리고 간혹 날카로울 때가 있다.

 이 책의 주된 주제는 공간, 저자가 50대 이후 새로운 그의 인생의 의미를 찾기 시작해서 궁극적으로 도달한 자신의 공간에 대한, 그리고 그 공간을 마련하기 위한 이야기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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p34

 

 시선은 곧 마음이다. 내 시선이 내 생각과 관심을 보여준다는 이야기다. 다른 동물들에 비해 인간 눈의 흰자위가 그토록 큰 이유는 시선의 방향을 드러내기 위해서다. 흰자위와 대비되어 시선의 방향이 명확해지는 검은 눈동자를 통해 인간은 타인과 대상을 공유할 수 있는 능력이 생겼다. '함께 보기 joint-attention' 다. 인간의 의사소통은 바로 이 '함께 보기'에 기초한다. 다른 동물들은 시선의 방향이 명확히 드러나지 않는다. 눈 전체가 거의 같은 색이거나 흰자위가 아주 작다. 소통이 아니라 사냥하기 위해서 진화했기 때문이다. 시선의 방향이 드러나지 않아야 사냥에 더 유리하다.(이제까지 살면서 '눈 적은 사람'이 만만했던 적은 없다. 흰자위가 다 드러나는 '눈 큰 사람'은 대개 참 편안했다. 뭐 내 개인적 편견이다.)

 

p41

 '물때'다 여수에는 전혀 다른 시간이 흐른다. 밀물과 썰물이 하루 두 번씩 반복되는 건 알았지만, 만조와 간조 시각이 매일 정확히 49분씩 늦어진다는 것은 몰랐다. 달이 지구를 공전하는 시간이 24시간 49분이기 때문이다. 매일 물이 들락거리는 속도도 달라지고, 물의 양도 달라진다. 물이 가장 많이 들고 빠지는 때가 '사리'다 물이 가장 조금 들고 빠지는 때는 '조금'이다. 사리 때를 특히 조심해야 한다. 물이 빠지면 수백 미터 앞까지 바닥이 드러나기 때문이다. 아무 생각 없이 배를 끌고 나갔다가는 바다에서 몇 시간을 그냥 떠 있어야 한다.

 

p44

 시간은 기울어져 흐른다. 봄, 여름, 가을, 겨울을 바꿔가며 시간이 흐르는 이유도 지구가 23.5도 기울어져 있기 때문이다. 기울어져 흐르는 시간이 못마땅하다고 지금 당장 기둥을 수직으로 곧추세우면 시간은 흐르지 않는다. 흐르지 않으면 썩는다. 권력도 마찬가지다. 시간의 흐름을 배제한 평등은 가짜다. 50대 50의 공간적 평등은 없다는 이야기다. 흐르는 시간에 따라 권력의 주체가 기울고 바뀌어야 평등하고 공정한 사회다. 이내 또 기울 것을 알아야 겸허해진다.

==> 지구의 자전축은, 지구의 공전궤도의 중심축에 대해 23.5도 기울어져 있다. 때문에 태양을 공전하면서 태양과의 상대적 위치에 따라, 태양에너지를 받는 면적과 시간의 차이가 생기게 된다. 이 차이로 인해서 봄,여름,가을,겨울과 같은 기후변화가 생겨나며, 북반구가 여름일 때(태양에너지를 받는 면적 및 시간이 최대일때) 남반구는 겨울이 된다.(태양에너지를 받는 면적과 시간이 최소). 

 만일 지구의 자전축이 공전궤도의 중심축과 평행했다면 지구의 적도는 지금보다 훨씬 뜨거웠을 것이고, 남극과 북극은 지금보다 훨씬 차가울 것이다. 이런 차이가 사실 현재보다 더 나쁠지 좋을지는 알 수 없지만 지금과 같은 전지구적인 기후 다양성은 줄어들 가능성이 높다. 기후 다양성이 줄어든다면 아마도 생물의 다양성도 줄어들게 될 것이고, 지구의 모습은 지금과는 아주 많이 다를 것이다.

 

p57

 모든 우려에도 불구하고 섬의 내 작업실 공사는 그해 여름부터 시작되었다. 내 고독한 결정의 기준은 분명했다. '교환가치 Tauschwert'가 아니라 '사용가치 Gebrauchswert'다 카를 마르크스Karl Marx의 사회주의 이데올로기는 망했지만, '사용가치'와 '교환가치'를 구분한 경제학자 마르크스의 가치론은 여전히 유효하고 탁월하다. 각 개인의 구체적 필요에 의해 생산된 물건이 '화폐'라는 '교환가치'에 의해 평가되면서 자본주의의 문제가 시작되었다고 마르크스는 진단한다. 이른바 '사용가치'라는 '질적가치'와 '교환가치'라는 '양적 가치' 사이의 모순이다.

 '교환가치'는 내 구체적 필요와는 상관없는, 지극히 추상적 기준일 뿐이다. 한국 사회의 온갖 모순은 무엇보다도 주택이 '사는 곳(사용가치)'이 아니라 '사는 것(교환가치)'이 되면서부터라고 나는 생각한다. 오십 대 후반이 나이가 되도록 난 한 번도 내 구체적 '사용가치'로 결정한 공간을 갖지 못했다. 이 나이에도 내 '사용가치'가 판단기준이 되지 못하고, 추상적 '교환가치'에 여전히 마음이 흔들린다면 인생을 아주 잘못 산 거다. 추구하는 삶의 내용이 없다는 뜻이기 때문이다. 섬 작업실 공사의 경제학적 근거는 이렇게 간단히 정리했다.

 '정말 후회하지 않겠느냐'는 걱정에 대해서는 심리학적으로 더욱 간단히 정리했다. 후회는 '한 일에 대한 후회regret of action'와 '하지 않은 일에 대한 후회 regret of inaction'로 구분해야 한다고 미국 노스웨스턴 대학교 심리학과의 닐 로스Neal J. Roese 교수는 주장한다. '한 일에 대한 후회'는 오래가지 않는다. 이미 일어난 일이기 때문에 그 결과가 잘못되었더라도 '그만한 가치가 있었다'고 얼마든지 정당화할 수 있기 때문이다. 그러나 '하지 않은 일에 대한 후회'는 쉽게 정당화되지 않는다. '한 일에 대한 후회'는 내가 한 행동, 그 단 한가지 변인만 생각하면 되지만, '하지 않은 일'에 대한 후회는 '그 일을 했다면' 일어날 수 있는 변인이 너무 많기 때문이다. 심리적 에너지가 너무 많이 소비된다. 죽을 때까지 후회한다는 이야기다. 이루지 못한 첫사랑의 기억이 그토록 오래가는 이유도 바로 그 때문이다.

 지금 이 섬의 미역창고에 작업실을 짓지 않는다면 죽을 때까지 '잎새에 이는 바람에도 나는 괴로워'할 것임이 분명하다. 반대로 섬에 작업실이 완공되어 습기와 파도, 바람 때문에 아무리 괴롭고 문제가 많이 생겨도 난 내가 한 행동에 대해 합당한 이유를 얼마든지 찾아낼 것이다. 그리고 내가 이 섬에서 왜 행복한가의 이유를 끊임없이 찾아낼 것이다.

 

p78

 이어폰으로 듣는 음악이 진짜다. 다른 사람의 귀를 의식하는 허세가 사라지는 까닭이다. 스피커로 음악을 들을 때 나는 프란츠 슈베르트Franz Schubert의 <리트Lied>나 요한 제바스티안 바흐Johan Sebastian Bach의 <평균율 Das wohltemperierte Klavier>를 가능한 한 심각한 표정으로 듣는다. 폼 난다. 그러나 '아재용 넥밴드' 이어폰으로 듣는 음악은 죄다 '7080 가요'다 우연은 아니다. 평생 좋아하며 듣게 되는 음악은 청소년기가 끝나고 청년기가 시작되는 20세 전후에 들었던 것이 대부분이라는 심리학 연구 결과가 여럿 있다. 정서적으로 가장 예민한 시절에 듣는 음악인 까닭이다.

 

p83

 

 '공연한 불안'의 개념화가 어느 정도 진행되면 그 개념들을 '가나다순'으로 다시 한 번 정리해보는 것도 좋다. '가나다순'으로 정리하는 것은 '개념의 개념화', 즉 '메타 개념화'라 할 수 있다. 자신의 '생각에 대한 생각'인 '자기 성찰' 또한 이런 메타 기념화'의 한 형태다. 개념화된 불안을 다시 한 번 상대화하면 불안의 실체가 더욱 분명해진다. 더 이상은 정서적 위협이 되지 않는다. 정리되지 않은 불안은 기하급수적으로 부풀어 오른다. 어느 순간부터는 혼자 힘으로 도무지 감당하기 힘들어진다.

 

 불안과 걱정이 습관처럼 되어버린 이가 주위에 참 많다. 잘나가는 사람일수록 그렇다. 그러나 아무리 돈이 많고 사회적 지위가 높다한들 밤마다 불안해서 잠을 이루지 못한다면 그게 무슨 성공인가. '96퍼센트의 쓸데없는 걱정'에서 자유로워야 성공한 삶이다.

 

 자주 웃고, 잠 푹 자는 게 진짜 성공이다!

 

p85

 

 수시로 자신의 삶을 규정하고 있는 전제들을 성찰하며 상대화해야 명함이 사라져도 당황하지 않는다. '탈맥락화Dekontextualisierung'해야 한다는 이야기다. '탈맥락화'는 본질에 대한 질문이다. 철학에서는 '자기 성찰'이라 하고, 심리학에서는 '메타 인지meta-cognition'라 한다. 미술에서는 '추상Abstraktion'이라고 한다.

 

p95

 

 흥미롭게도 프로이트나 아들러 모두 '유대인'이라는 열등감에 시달렸다. 내 일상의 유치한 열등감과는 비교할 수 없는 고통이다. 매일같이 경험하는 인종차별로 인한 뿌리 깊은 열등감의 상처를 유대인들은 저마다의 방식으로 해결했다. 우선 독일인보다 더 철저한 '독일인'이 되는 방식이다. 제1차 세계대전 당시에 독가스를 개발한 유대계 독일인 프리츠 하버Fritz Haber 같은 이다. 암모니아 합성 비료를 발명한 그는 자신의 발명품이 독가스로 사용되는 것에 적극 동조했다. 그의 아내는 이를 반대하며 자살까지 했지만 막을 수 없었다. 그의 독가스는 결국 히틀러에 의해 자신의 유대인 친척까지 살해하는 데 사용되었다.

 

 두 번째는 시오니즘이다. 유럽에서 그토록 멸시받느니 스스로를 격리하여 '유대 국가'를 세우자고 오스트리아 빈의 유대계 작가 테오도어 헤르츨Theodor Herzl은 부르짖었다. 그러나 그의 주장은 오늘날까지 여전히 해결될 기미가 보이지 않는 팔레스타인 문제의 기원이 된다. 시오니즘은 주로 '동유대인Ostjuden'이라 불렸던 동유럽 출신 유대인들에 의해 지지되었다. 그러나 시오니즘이라는 인종 갈등 뒤에는 가난한 '동유대인'과 부유한 '서유대인Westjuden' 사이의 계급 갈등이 숨겨져 있었다. 1980년대 한국 사회의 '계급 모순'과 '민족 모순'을 둘러싼 논쟁처럼 20세기 초반의 유대인 문제는 하나의 차원으로 환원될 수 없는 아주 복잡한 문제였다.

 

 독일인이 되기도 거부하고, 히틀러식 인종주의의 또 다른 극단인 시오니즘도 거부하며 '평화로운 유럽인'이 되고자 했던 유대인들도 있었다. 프로이트와 아들러는 물론 카를 크라우스Karl Kraus, 발터 벤야민Walter Benjamin, 프란츠 카프카Franz Kafka, 슈테판 츠바이크Stefan Zweig와 같은 이들이다. 오늘날까지 영향을 미치는 이들의 깊은 인문학적 사유의 원천은 이들이 끝까지 부둥켜안고 씨름해야 했던 '유대인 열등감'이다. 유대인이 위대한 이유는 노벨상을 많이 받아서가 아니다. 인종적 열등감을 풍요로운 상상력의 원천으로 발전시켰기 때문이다.

 

 열등감에서 벗어나기 위해 '적'을 만드는 것은 가장 게으른 방식이다. 내면을 향한 칼끝을 바깥으로 향하는 것이다. 어떤 사회 이슈든 양극단에 치우친 이들의 이해하기 힘든 공격성과 적개심에는 이같은 '투사Projektion'의 메커니즘이 숨어 있다. 부와 권력을 한 손에 쥐고도 여전히 적을 만들어야 마음이 편해지는 이들이다. 그러다 죄다 한 방에 훅 간다. 열등감은 외부로 투사하여 적을 만드는 방식으로는 결코 극복되지 않는다. '적'은 또 다른 '적'을 부르기 때문이다. 타인들과 공동체를 이뤄 살아가는 한 열등감은 사라지지 않는다. '마음속에 깊이 박힌 대못'처럼 그저 성찰의 계기로 품어야 한다.

 

p110

 

 '좋은 삶'을 사는 방법은 아주 간단하다. 좋아하는 것을 많이 하고, 싫어하는 것을 줄이면 된다. 제발 '좋은 것'과 '비싼 것'을 혼동하지 말자! 자신의 '좋은 것'이 명확지 않으니 '비싼 것'만 찾는 거다.

 

p114

 

 나와 아주 비슷한 생각을 하는 저자의 책을 읽었다. 『불행 피하기 기술』의 저자 스위스의 롤프 도벨리Rof Dobelli다. 원어 제목은 '좋은 삶의 비결DSie Kunst des guten Lebens'이다 지구 반대편에 나와 똑같은 생각을 하는 사람이 있다는 것을 발견하면 참 즐겁다. 저자의 주장은 아주 간단명료하다. '좋은 삶guten Leben'이 어떤 것인지 이야기하기는 힘들어도, '나쁜 삶'이 어떤 것인지는 누구에게나 분명하다는거다. '신이 어떻다'고 말할 수는 없지만, '신이 그렇지는 않다'고는 분명하게 말할 수 있다는 중세 '부정의 신학negative theology'의 방법론처럼 우리도 '나쁜 삶'의 요인들을 하나씩 제거하면 행복해지지 않겠냐는 거다.

 

 '좋은 것'을 추상적으로 정의하고, 각론의 부재에 괴로워하기보다는 '나쁜 것', '불편한 것'을 제거하자는 생각은 독일의 오래된 실용주의 전통이다. 1920년대 '바우하우스'에서는 '형태는 기능을 따른다'는 'FFF Form folgt Funktion '의 디자인 원칙이 강조되었다. 삶을 불편하게 하는 불필요한 장식을 죄다 제거하자는 이야기다. 오스트리아의 건축가 아돌프 로스Adolf Loos는 아예 "장식은 죄악이다"라고 했다. 현대 미니멀리즘의 선구자인 디자이너 디터 람스Deter Rams도 자신이 추구하는 디자인을 한마디로 '좋은 디자인gutes Design'이라고 정의했다. "적지만, 더 좋은 Weniger, aber Besser"이라는 그의 디자인 철학은 오늘날 애플의 모든 스마트 기기 디자인에 적용되었다. 여기서 미니멀리즘이란 무조건 줄이는 게 아니다. '나쁜 것'을 줄이는거다!

 

p130

 개별적 사건과 경험들에 대한 기억은 주체적 관심에 따라 서로 연결되며 의식의 차원으로 올라온다. 인간의 의식 또한 '입자'가 아니라 '파동'이다 '입자'와 같은 개별 사건들을 연결하는 그 행위가 바로 '의미 부여'다 개별 사건 자체는 그리 중요하지 않다. 단순한 '팩트'에 불과한 사건들을 연결하는 그 '의미 부여'가 의식의 본질이다.

 

p139

 

 습관적으로 '나쁜 이야기'만 소셜 미디어로 보내는 이들이 있다. 그들과 '친구'를 맺으면 아주 고통스럽다. 밤새 '나쁜 이야기'만 쌓여 있기 때문이다. 죄다 남 조롱하고 비아냥대는 이야기뿐이다. 희한하게 '사회정의'로 정당화하며 즐거워한다. '나쁜 이야기'에 서로 '좋아요'를 죽어라 눌러댄다. 각자의 소셜 미디어에 쌓이는 '나쁜 이야기'는 기하급수적으로 늘어난다. 모여 앉아도 남 욕하는 이야기가 대부분이다. 도대체 우리는 왜 이러고 사는 걸까?

 

 타인의 관심을 얻기에 '나쁜 이야기'가 훨씬 유리하기 때문이다. 원시시대를 한번 생각해보자. '저기 바나나가 있다'는 정보와 '저기 호랑이가 나타났다'는 정보 중에 내가 지금 살아남는 것과 관련해 어느 이야기가 더 중요할까? 당연히 '저기 호랑이가 있다'는 '나쁜 이야기'다. 바나나는 내일 먹어도 된다. 그러나 호랑이가 나타났다는 이야기를 무시하면 바로 잡아먹힌다. '나쁜 이야기'가 좋은 이야기'보다 생존에 훨씬 더 중욯했다.

 

 우리가 '나쁜 이야기'에 끌리는 이유는 바로 이 원시적 본능이 여전히 작동하기 때문이다. 그러나 이는 잠시만 한눈팔아도 못굼이 날아가던 원시시대 이야기다. 문명화된 사회란 날것의 위험들을 제어할 수 있는 안전장치가 갖춰진 상태를 뜻한다. 그런데도 사방에 '나쁜 이야기'들뿐이다.

 

 '나쁜 이야기'에 끌릴 수밖에 없는 타인의 반응을 통해 자신의 존재를 확인하려는 불안한 인간이 너무 많은 까닭이다. 불안한 이들이 불안을 유포해 혼자만 불안하지 않으려는 아주 웃기는 현상이다.

 

p144

 

 공연히 불안하면 미술관, 박물관을 찾아야 한다. 그곳은 불안을 극복한 인류의 '이야기'로 가득하기 때문이다. '지금 내가 제대로 살고 있는가'하는 느닷없는 질문으로 조급해진다면 음악회를 찾는 게 좋다. 몸으로 느껴지는 음악은 삶의 시간을 여유롭게 만들어준다.

 

p171

 

 지난주에는 독일 공영방송인 체데에프ZDF에서 하는 북한 관련 다큐멘터리를 봤다. 최근 북한을 다녀온 사람들이 직접 찍은 영상을 모아 보여주고, 그들의 느낌을 이야기하는 내용이다. 평양의 그로테스크한 풍경은 예상했던 대로였다. 그러나 독일 내레이터의 마지막 코멘트는 충격이었다. 남과 북 모두 '같은 민족'이라며 통일하겠다고 하는데, 도무지 이해할 수 없다고 했다. 저토록 다른데, 도대체 무슨 근거로 '같은 민족'이냐는 거다. 아차 싶었다.

 

 '민족'은 원래 없었다. 단어 자체가 아예 없었다. '민족'은 메이지 시대에 이와쿠라 사절단 일원으로 구미 각국을 여행한 구메 구니타케久米邦武가 1878년 펴낸 『미구회람실기米歐回覽實記』에 처음 나타난 표현이다. 그 후 독일제국의 국가론이 일본에 소개되면서 '민족'은 '국가Nation'와 '종족Volk'이 결합한 뜻으로 본격 사용되기 시작한다. '국민', '민족', '종족'의 의미론은 이때부터 마구 헷갈리기 시작한 것이다.

 

 '가족 메타포'는 아주 기막혔다. 특히 일본에서 고안된 '민족' 개념과 무척 잘 어울렸다. '민족'에 내재한 '가족 메타포'는 동양에선 아주 쉽게 이해되고 실천되었다. 분단의 한반도에서 '민족=가족' 이데올로기의 파워는 더욱 강력해졌다. 서구가 수백 년 걸린 근대화 과정을 수십 년 만에 해치울 수 있었던 그 엄청난 저력도 '흩어진 가족'과 같은 민족의 '한恨'이었다. 어떻게든 돈 많이 벌어 흩어진 가족이 다시 모여야 했다. 그래서 '반만년의 유구한 역사'를 가진 한민족의 분단은 항상 '이산가족'의 슬픔으로 설명되었다. 그러나 이쯤에서 우리 스스로 한번 확인해봐야 한다.

 

 정말 우리가 분단을 이산가족의 슬픔처럼 느끼고 있느냐는 거다. 통일이 되면 북한 사람들을 내 가족처럼 느낄 수 있느냐는 질문이기도 하다. 독일 통일 현장을 경험한 나로서는 지극히 비판적이다. 심리적 통일까지 이루려면 분단만큼의 시간이 흘러야 한다. 과연 우리는 북한 사람들을 위해 칠팔십 년 넘는 세울을 인내할 수 있을까?

 

 더 구체적으로, 김정은이 나타나면 감격해서 발을 동동 구르며 박수 치고 눈물까지 흘리는 저 북한 사람들을 위해 우리 각자는 그 엄청난 '통일세'를 수십 년 동안 기꺼이 낼 수 있을까? 통일 후, 북한 사람들이 남한 사람들의 오만함에 분노하여 '김정은 시절이 더 좋았다'며 '조선노동당'을 다시 창당하면 도대체 무슨 느낌이 들까? 그 '조선노동당'이 북한 지역에서 몰표를 얻어 대한민국 국회의 한구석을 당당히 차지하는 모습을 '가족처럼' 편안하게 지켜볼 수 있을까?(이는 독일에서 실제로 일어났던 일이다.)

 

 이제 남북한 '단일민족'의 이념과 '통일'이라는 '무의식적 전제'들을 '숭고한 멜랑콜리'로 바라볼 때가 되었다. '민족'이라는 '당연한 젼제'를 해체하면 북핵 문제를 둘러싼 한반도 정세는 아주 달라진다. 우리가 취할 수 있는 행동의 옵션도 확연히 넓어진다.

 

p184

 

 '사회주의적 계몽'은 '자본주의적 욕망'을 결코 이길 수 없다.

 

p195

 

 은퇴하면 바로 죽었던 시절이 있었다. 그래서 아무 생각 없이 은퇴했다. 지금 우리 사회의 모든 기준이 바로 그 시절의 가치에 맞춰져 있다. 삼십여 년을 더 살아야 하는데 우리 모두가 지금 아무 생각 없다. 바로 앞선 세대의 '노욕老慾'을 보면서, 도대체 왜 저럴까 싶었던 것이 '짤리고 보니' 다 이해된다고도 했다. 특히 정치, 경제권에서 '저렇게까지 하고 싶을까' 했던 선배들에게 주어진 그 '기회'가 부럽다고도 했다. 이렇게 오래 살 줄 아무도 몰랐기 때문이다.

 

 오늘날 한국 사회의 첨예한 갈등 배후에는 죄다 '느닷없는 생명 연장'이 숨겨져 있다. 단순한 이념적 갈등이 아니라는 이야기다. 평균 수명 50세도 채 안 되던 지난 세기의 낡은 사회 설명 모데로 한국 사회를 설명할 수는 없다(이건 정말 중요한 포인트다!). 인류가 한 번도 겪어본 적 없는 이 엄청난 '혁명의 시대'를 살아가기 위해서는 '새로운 시작'에 대한 용기가 필요하다. 어떻게 살아야 하는가에 대한 '롤 모델'도 전혀 없다. 각자 '용감하게' 찾아야 한다. '손'으로 하는 일을 새롭게 시작하는 것도 나쁘지 않다.

 

 프로이트의 '콤플렉스'와 더불어 현대인의 삶을 가장 잘 설명하는 개념이 있다면 마르크스의 '소외Entfremdung'다. 자신이 만든 생산물과는 아무 관계없이, 그저 노동의 대가로 받는 임금으로 살아야 하는 자본주의 시스템은 어떤 방식으로든 인간 심리에 영향을 미치게 되어 있다. 노동의 결과가 전혀 확인되지 않는 삶을 마르크스는 '소외된 삶'이라 했다. 정신이 자연에 변화를 가져와 자아실현이 가능해진다는 헤겔의 낭만적 '외화Entäußerung' 개념을 자본주의라는 역사적 맥락에 맞춰 비판한 것이다. 마르크스의 개념들은 대부분 공허한 것이 되어버렸지만, 심리학적으로 그의 '소외론'은 여전히 통찰력 있고 의미 있다.

 

 사무직에서 일했던 사람일수록 손으로 직접 하는 일을 배우는 것이 좋다. 두 번째 인생에는 노동의 결과를 눈으로 직접 판단하고, 손으로 만질 수 있는 구체적인 일을 해야 심리적으로 소외감을 느끼지 않는다는 이야기다. 교수, 기자, 선생과 같이 말과 글로 먹고 산 사람일수록 손으로 직접 하는 일을 해야 한다. 그래야 말년의 성품이 무난해지며 '꼰대'를 면할 수 있다. 아니면 컴컴한 방에서 혼자 인터넷에 악플이나 달며 삼십여 년을 더 살아야 한다. 달리 할 일이 있는가? 그래서 아직 체력 좋은 범재에게는 '용접 일'이 만장 일치로 추천되었다.(진지하게 나눈 이야기다. 우리 모두 대학 사 년 그렇게 대충 다니고 삼십 년 가까이 잘 먹고 잘살았으면 감사해야 한다. 앞으로 삼십여 년을 더 살려면 뭔가를 처음부터 새롭게 배우는 게 당연하다.)

 

p201

 

 대도시에 사는 사람들은 자신들이 얼마나 끔찍한 환경에 놓여 있는지 모른다. 내가 서울에서 운전하며 가장 괴로울 때는 차선을 바꿀 때다. 다들 '차선 바꾸겠다는 신호'를 '빨리 달려오라는 신호'로 받아들인다. 잽싸게 달려들어 차선을 바꿀 여유를 절대 안 준다. 어어, 하다 보면 뒤에서 빵빵거리며 난리 난다. 정신이 혼미해지며 그냥 울고 싶어진다. 주로 남자들이 그렇다. 한국 남자들은 자기 자동차 앞을 양보하면 인생 끝나는 줄 안다. 도대체 왜들 이러는 걸까?

 

 자동차 안이 유일한 자기 공간이라 여기기 때문이다. 집의 안방은 아내 차지가 된 지 오래다. 아이들도 이제 안방을 '엄마 방'이라고 한다. 거실은 TV와 뜬금없이 커다란 소파가 차지하고 있다. 아이들은 각자의 방에 틀어박혀 나오지 않는다. 코를 심하게 골아 같이 잠을 못 자겠다는 아내의 불평에 거실 소파에서 잠을 청한 지 이미 수년째다. 수면 무호흡으로 이러다 죽겠다 싶어 새벽에 잠을 깨면 거실 바닥에 널브러져 있다.

 

 그래서 자동차 안이 그렇게 행복한 거다. 한 평도 채 안 되지만 그 누구도 눈치 볼 필요 없는 나만의 공간이다. 밟는 대로 나가고, 서라면 선다. 살면서 이토록 명확한 '권력의 공간'을 누려본 적 있는가? 그러니 도로에서 누가 내 앞길을 막아서면 그토록 분노하는 거다.

 

p211

 

 더 중요한 자유가 있다. '시선의 자유'다. 이건 한국 사내들에게 매우 절박한 자유다. 평생 '타자의 시선'을 의식하며 살기 때문이다. '타자의 시선을 내면화'하는 것처럼 치명적인 것은 없다. 지켜보는 사람이 없는데도 누군가 지켜본다고 생각하며 평생 두려움 속에 살고 있다.

 

p214

 

 '관찰당하는 것'이 아니라 내 맘대로 '볼 수 있는 자유'가 행복의 핷미이다.

 

p218

 

 '하염없음'은 시간이 정지되고, 유체 이탈처럼 '또 다른 나'가 공중 부양하며 세상을 내려다보는 것 같은 경험이다. 철학적 '자기 성찰'이란 심리학적으로는 '경외감'과 '하염없음'으로 야기되는 '인지적 전환cognitive shift'이다. 도무지 감당할 수 없는 엄청난 대자연 앞에서 내가 갖고 있는 현재의 인지 체계로는 그 어떠한 설명과 해석도 불가능하다. 남은 방법은 오직 한 가지뿐이다. 내 인지 체계를 통째로 바꾸는 일이다. 인간의 모든 미학적 경험은 이 같은 '인지적 전환'과 깊이 관계되어 있다.

 

p221

 

 지금 내 삶이 지루하고 형편없이 느껴진다면, 지금의 내 관점을 기준으로 하는 인지 체계가 그 시효를 다했다는 뜻이다. 내 삶에 어떤 감탄도 없이, 그저 한탄만 나온다면 내 관점을 아주 긴급하게 상대화시킬 때가 되었다는 이야기다.

  

 

조승연의 뉴요커에 대한 그리고 뉴욕 스타일에 대한 이야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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p21

 뉴요커는 이민 이후의 생존 경험을 통해, 주변 사람의 부러운 시선이나 허울 좋은 체면치레 같은 것은 생존에 도움이 전혀 안 된다는 것을 안다. 진정한 자유와 존재감은 경제적 자립에서만 온다. 이것이 뉴요커의 행복 공식이다.

 우리가 부모 세대의 기대치, 사회의 이목에서 자유로워지는 가장 빠른 방법은, 부모를 포함해서 모든 타인에게 돈 때문에 손 벌리지 않아도 되는 겨엦적 자립이다. 그렇다면 행복의 첫 단추는 질긴 생존력일 것이다. 그렇기 때문에 생존에 도움이 되지 않는 것은 내 행복에도 도움이 되지 않는다는 것. 이것이 뉴요커가 우리에게 주는 첫 번째 인생학 레슨이다.

 

p27

 

 겉치레가 쌓이면서 인생에 피로라는 때가 끼게 된다.

 

p30

 "하나씩만, 그리고 제대로 하라."

 

p48

 세상에는 머리가 좋아 뛰어난 논문을 발표하는 사람도 있고, 뛰어난 안목으로 인스타그램에 아름다운 사진을 올려 인정받는 사람도 있으며, 개인 방송으로 인기를 끄는 사람도 있다. 돈을 버는데만 재능이 있는 사람이 있는가 하면, 무언가를 만드는 데만 재능이 있는 사람도 있다. 그런 재능도 한눈 팔지 않고 갈고 닦아야 빛이 나고, 그래서 한 가지만 제대로 이루어 내기도 힘들다. 뉴요커는 바로 이러한 점을 인정해주는 것이다.

 반면에 학창시절부터 전 과목 점수를 평균 내는 교육 제도에서 수행평가까지 받으며 학교를 다니는 우리 한국인은 잘하는 것보다 못하는 것에 더 집착하는 경우가 많다. 10과목에서 만점이 나와도 한과목의 점수가 낮으면 원하는 대학에 가지 못했기 때문일까? 사람은 원래 잘하는 것보다 못하는 것이 많기 마련인데, 우리 사회는 모두가 성격이 좋고, 외모도 준수하고, 공부도 잘하고, 손재주도 좋고, 노래도 잘하고, 춤도 잘 추는 사람이 되기를 원한다. 그리고 10가지를 잘해도 하나가 부족한 타인을 평가할 때도 잔혹한 잣대를 들이댄다. 타인의 장점보다 단점을 보고 자신도 모든 것을 다 잘하려고 하다 보니 인생이 힘들어질 수밖에 없는 것은 아닐까? 그리고 한 사람이 모든 것을 혼자 다 해낼 수 있는 능력자만 모여 사는 사회가 과연 좋은 사회일까?

 세상에 사람은 많다. 그리고 제각각 다른 분야에 남다른 재주가 있다. 그런데 왜 우리는 한 명의 역할이 아닌 10명의 역할을 혼자서 해내야 한다며 불필요한 고생을 사서 하는 걸까? 많은 장점을 가진 타인이 가진 단 하나의 단점만을 보려고 할까? 뉴요커들처럼 인간은 원래 완벽해질 수 없는 존재임을 인정한다면, 하나의 장점에 집중해서 나만의 고집과 집념을 가지고 실행 가능하도록 밀어붙이는 배짱이 생길 것이고 타인의 여러 장점에 집중해 나와 어떻게 서로 보완하며 살 수 있을지 생각하게 되어 다른 사람에게서 더 많은 것을 배우게 될 것이다.

 

p77

 파리와 뉴욕의 예술가들이 추구하는 작품의 성격은 확연히 다르다. 뉴욕과 파리 예술의 차이를 한마디로 대변하는 일화가 있다. 뉴욕 브로드웨이의 유명 작곡가 조지 거슈윈George Gershwin이 파리에서 프랑스 클래식 음악 대가 드뷔시의 공연을 보러 간 적이 있다고 한다. 드뷔시의 절제미와 부드러운 선율에 깊이 감동한 거슈윈은 관계자에게 드뷔시를 만나게 해달라고 청했다. 거슈윈은 드뷔시를 만나자 자기가 지금까지 작곡한 것은 제대로 된 작품이 아니라는 것을 이 공연을 보며 깨달았다며, 견습생으로 들어가 드뷔시 밑에서 레슨을 받고 싶다고 말했다. 잠시 침묵하던 드뷔시는 이런 질문을 던졌다.

 

 "브로드웨이에서 작곡을 하면 얼마나 벌어요?"

 거슈윈이 솔직히 대답하자, 드뷔시는 잠시 할 말을 잊었다. 그러고는 이렇게 말했다.

 "선생님이 저를 뮤지컬 작곡 제자로 받아주시죠."

 

 물론 이것은 줄리어드 음대생과 교수들 사이에 도는 우스갯소리다. 하지만 이 일화는 세계 예술의 중심지로서 파리와 뉴욕의 차이점을 단순 명쾌하게 말해준다. 뉴욕을 포함한 미국의 예술가들은 수백 년 동안 이어져 내려온 프랑스 예술의 깊이에 무한한 동경심을 가지고 있다. 마돈나와 존 말코비치 같은 할리우드의 예술인도 파리에 자택을 두고 자주 기거하는 경우가 많고, 유럽 안에서도 가장 고전적인 동네에 살아보려고 한다. 그에 비해 프랑스 예술가들은 고지식한 전통에서 벗어나 파격적으로 새로운 것을 추구할 수 있는 뉴욕의 자유로움과, 시장 경쟁에서 이기기만 하면 이런저런 평론가의 잔소리를 듣는 대신 엄청난 보상이 주어지는 뉴욕의 예술시장 시스템에 대한 매력과 판타지를 가지고 있다.

 

p93

 뉴요커의 민간 영웅담은 무법자를 경외의 눈으로 보는 경우가 많다. 그렇다 보니 뉴욕의 명소에는 마피아, 마약 거래, 성매매로 유명해진 장소가 포함되어 있고 DUMBO(Down under the Manhattan Bridge Overpass, 맨해튼 다리의 고가도로 밑)도 그중 하나다. 1989년 마피아 보스인 존 고티John Gotti는 체포되어 수갑을 차고 끌려가면서도 번듯한 새 양복 차림에 여유로운 웃음으로 당시 뉴욕에서 최고의 인기를 모으기도 했다. 또한 150여 년 전에 뉴욕시 전체를 타락시킨 보스 정치의 대명사 윌리엄 트위드William M. Tweed는 지금도 많은 영화에서 카메오로 등장하는 인물로서, 그 역할이 꼭 부정적이지만은 않다. 뉴요커는 이런 사람을 '색채가 강한 인물Colorful Character'로 여겨 그들과 관련된 책이 베스트셀러가 되고 영화는 매진 행렬을 이루기도 한다.

 그렇다면 뉴요커의 윤리 나침반이 고장이라도 난 걸까? 그들은 왜 이런 무법자를 좋은 쪽으로 기억하려는 걸까?

 그 이유는 뉴요커 중 많은 사람이 법의 보호를 받지 못하던 소수자 출신이라는 점도 있을 것이다. 뉴요커는 낯선 나라에 이민을 와서 어려운 일을 많이 겪은 사연 많은 사람들이다. '절박함 앞에서 인간이 어떤 선택을 하는가?'라는 메시지를 담은 스토리가 뉴욕에서 가장 사랑받는 예술가, 극작가, 영화 감독이 주목하는 스토리 라인이다.

 1970년대 브루클린 남부에서 발생한 한 강도 사건은 뉴요커 사이에서 '들어볼 가치가 있다'고 생각되는 사연이 어느 정도나 되는지 보여준다.

 1972년, 세 명의 괴한이 브루클린 남쪽에 위치한 체이스맨해튼 은행 지점에 총을 들고 습격해 돈을 요구했다. 이들의 이름은 존 보이토비츠John Woitowicz, 살바토레 나투랄레Salvatore Naturale 그리고 로버트 웨스텐베르그Robert Westenberg다. 웨스텐베르그는 경찰이 출동하자 홀로 도주했다. 나머지 두 명은 14시간 동안 은행 직원들을 인질로 잡고 경찰의 회유와 위협에 저항햇다. 결국 나투랄레는 FBI의 총에 사살되고, 보이토비츠는 체포되어 20년 형을 선고받았다.

 이들의 사연은 정말로 기구했다. 보이토비츠는 폴란드계 아버지와 이탈리아계 어머니 사이에서 태어났다. 아마도 보수적인 천주교 가정교육을 받았을 것이다. 청년기에는 베트남전에 참전해 나라를 위해 싸웠고, 은행 지점 창구에서 일한 적도 있다. 22살이 되던 해에 카멘 비풀코라는 여성을 만나 결혼해서 두 명의 아이까지 낳았다. 그렇게 평범하게 살아왔다.

 그런데 결혼 4년째가 되던 어느 날, 보이토비츠는 이탈리아계 이민자에게 1년 중 가장 중요한 행사인 산 제나로San Gennaro 축제에 참석했다가 엘리자베스 이든이라는 여성을 만나 사랑에 빠졌다. 그녀와 사귀는 동안 보이토비츠는 점차 자기의 성 정체성에 혼란을 느끼다가 자신이 동성애자임을 자각하게 되었다. 그러나 두 사람의 사랑이 너무나 깊었는지 헤어지지 않으려고 엘리자베스가 성전환 수술을 하기로 결정한다. 하지만 수술비가 없어서 보이토비츠는 수술비를 구하려고 친구들과 모의해 은행을 털기로 한 것이다.

 이런 사건이 뉴욕 이외의 지역에서 발생했다면 어땠을까? 반인륜적이고 엽기적인 범죄를 다루는 미디어의 가십면에나 올랐을 것이다. 상식을 가진 사람과는 무관한 엽기적인 사건이라며 무시당하지 않았을까? 보이토비츠의 어리석은 선택을 손가락질하거나 인간 말종이라고 혀를 끌끌 찼을 것이다. "이것 봐, 이민자들은 범죄 가능성이 높다니까" 하면서 이탈리아나 폴라드인의 민족성 또는 종교를 문제 삼는 사람도 많았을 것이다.

 하지만 뉴욕의 예술인들은 이 스토리를 세계인의 칭송을 받는 걸작 영화로 만들었다. 뉴욕의 <라이프>지는 존 보이토비츠의 기구한 사연을 상세히 실었다. 그리고 뉴욕에서 활동하던 영화감독 시드니 루멧Sidney A. Lumet은 그 이야기를 <개 같은 날의 오후Dog day afternoon>라는 제목의 영화로 만들었다. 대본을 쓴 프랭크 피어슨은 아카데미 극본상까지 받았다. 물론 할리우드는 보이토비츠에게 그의 인생사를 영화로 만들 권리를 돈으로 샀다. 비극적이게도 보이토비츠의 애인 엘리자베스 이든은 그 돈으로 성전환 수술을 받자 그를 떠나서 다른 사람과 결혼했다고 한다. 그러나 그녀가 에이즈로 사망하자, 보이토비츠가 추도 연설을 했을 만큼 두 사람의 사랑은 특별했다.

 

p96

 참을 수 없이 고통스럽고, 통제 불가능한 상황에서 인간이 어떤 선택을 하는지는 인간의 본질적 모습을 벌거숭이처럼 드러낸다. 이것이 <위대한 개츠비>(살인을 저지른 부자), <렌트Rent>(에이즈로 죽어가는 예술가) 등 뉴욕의 걸작이 가진 공통적 테마다.

 

p98

 이처럼 뉴요커는 기구한 인생을 사랑한다. 그래서 새로운 콘텐츠가 끊이지 않는다. 내가 파리에서 만난 사람들은 파리 외곽에 사는 알제리, 모로코 이민자 출신들을 무시하는 경우가 많았다. 그곳의 높은 범죄율과 문맹률을 보고 "역시 프랑스 사람과 알제리 사람은 달라"라는 식으로 말하는 것을 한두 번 들어본 게 아니다. 프랑스의 주류층은 자기가 비주류와 근본적으로 다르다고 생각하는 것 같았다.

 하지만 뉴요커는 인간의 공통점을 믿는다. 극단적인 상황에 많이 처해본 도시에서 뉴요커는 인간이 압박을 받으면 이상한 선택을 한다는 것을 안다. 이것은 사회가 손가락질하는 사람들은 나와 근본적으로 다른 것이 아니라, 그와 내가 처한 상황이 달라서일 뿐이라는 믿음이다. 그렇기 때문에 그들이 극단적인 상황에서 한 선택은 내게도 얼마든지 일어날 수 있다는 시사점을 던져준다.

 '역지사지'라는 우리의 옛말처럼, 미국에도 '남의 신발을 신고 1마일을 걸어보기 전에는 남을 판단하지 말라'라는 말이 있다. 하지만 대부분의 사람은 자신과 비슷한 교육수준, 사회계층, 문화권의 사람과는 역지사지 할 수 있지만, 존 보이토비츠와 같은 사람은 사연을 들어볼 가치조차 없다며 무시한다.

 만약 내가 알고 있는 스토리가 획일적이이서 창의적인 콘텐츠를 찾기가 어렵고 내 사고가 좁다고 느낀다면 그처럼 비참하고 엽기적인 사연에 귀를 기울이지 못했기 때문일 수 있다. 그 발성되지 않는 목소리들이 바로 우리 사회가 그렇게 갈구하던 '새로운 콘텐츠'인 것이다. 새로운 콘텐츠는 남의 스토리가 나에게 중요할 때 가장 잘 발견된다. 선입견을 내세우지 않고 일단 귀를 여는 것, 이것이 바로 뉴욕 문화 파워의 근원 중 가장 중요한 요소일 것이다.

 

p123

 뉴욕의 사교육 경쟁은 엄마의 임신 때부터 시작된다. 얼마 전에 뉴욕에 사는 내 친척이 아기를 낳았다. 그 엄마는 아기를 임신하는 순간부터 비상이었다. 일단 미국에서는 유급 육아휴직이라는 개념이 없다. 육아휴직 기간에는 급료가 나오지 않는다. 또 회사 지원 의료보험도 정지된다. 그래서 의료보험료로 한 달에 우리나라 돈으로 수백만 원씩 내야 한다. 휴가 기간은 자율적으로 정할 수 있지만, 이런 문제때문에 출산 후에는 가급적 빨리 직장에 복귀한다. 따라서 아기를 보육시설에 맡기기 전까지 아기를 돌봐줄 사람이 필요하다.

 그 친척은 양가 부모님이 아직 일을 하고 계셔서 아기를 장기간 대신 맡아줄 형편이 못되었다. 그런데 뉴욕에는 육아를 위탁할 수 있는 시설이 턱없이 부족하다. 뉴욕에서 아기를 괜찮은 보육시설에 보내려면 임신 초기부터 신청하고 대기를 하더라도 엄마의 출산휴가 일정에 맞추어서 입학 허가를 받는다는 보장이 없다. 그래서 중산층 이상은 임신 후 적절한 시기를 보아서 괜찮은 어린이집 여러 군데에 신청을 해둔다. 내 친척은 대기명단에 이름을 올려놓은 어린이집 중 하나에서 입학을 취소한 아이가 생겨 빨리 들어갈 수 있게 되었다고 마치 복권에 당첨이라도 된 듯 좋아했다. 그런데도 입학할 때까지 출산 후 6개월은 기다려야 한다.

 게다가 비용도 문제다, 안전하고 교육 프로그램이 좋은 곳에서는 보통 한 달 보육료로 400~700만 원을 받는다. 그 비용에도 아기를 오전 9시부터 오후 6시까지만 돌봐준다. 부모 중 한 명은 칼퇴근을 해야 맡길 수 있는 것이다. 보육료는 수요 공급에 맞추어 변동되기 때문에 이달에는 400만 원이던 것이 다음 달부터는 갑자기 500만 원으로 뛰기도 한다.

 이런 열악한 자녀 교육 환경 때문에 많은 사람이 아이를 낳으면 뉴욕에서 나간다. 뉴욕의 좁은 아파트보다 낮은 가격으로 인근 외곽지역의 정원 딸린 집을 사서, 아이들에게 맑은 공기를 마시며 마음껏 뛰어 놀도록 하고 부모는 지하철로 출퇴근을 한다. 하지만 일부 뉴요커는 굳이 아기를 뉴욕에서 키운다. 좁은 집 안에 칸막이를 설치해 아기방을 만들고, 어린이집과 유치원, 초등학교까지 내내 을이 되어 산다.

 왜 굳이 그런 선택을 하는 것일까? 나는 궁금했다.

 게다가 뉴욕에서는 아이가 10대가 된 후에도 경제적인 고통이 계속된다. 대부분의 뉴욕 부모는 충분한 돈을 벌어 자식을 트리니티나 레지스, 호라스만, 리버데일 가은 검증된 사립 고등학교에 보내고 싶어 한다. 그러기 위해서는 상당한 경제적인 능력이 뒤따라야 한다. 뉴욕에서 가장 좋은 사립학교 중 하나인 트리니티는 졸업반의 1년 학비가 2017년 기준으로 5만 달러(6천만 원)에 이른다. 아마 지금은 더 올랐을 것이다. 뉴욕 상류층 가정 자녀들의 방탕한 삶을 그려 화제가 된 미국 드마라 <가십 걸>은 나이팅게일-밤포드 고등학교에서 일어났던 몇몇 스캔들에서 아이디어를 얻었다고 하는데, 이 학교의 1년 학비는 약 10년 전에 4만 6,500달러였다. 아이비리그 대학교의 학비와 비슷하다. 아이가 학교에 다니면 학비만 내는 것이 아니다. 부수적인 비용도 만만치 않다. 그래서 이 정도 학비라면, 일반 중산층 가정의 맞벌이 부부 수입으로는 엄두를 내기 어렵다.

 

p136

 

 사회심리학자 리처드 니스벳Richard Nisbett은 아시아인이 서양인에 비해 '인 그룹(나와 잘 아는 사람들의 그룹)'과의 소통에 훨씬 적극적인 반면, '아웃 그룹(나와 사회적으로 관계가 먼 사람들의 그룹)'과의 소통은 서양인에 비해 소극적이라고 <생각의 지도>라는 책에서 쓴 적이 있다.

 

 

 

 

90년대생들이 젊은 세대로 소비의 주체 및 사회로 진출하기 시작하면서, 그 이전 60~80년대생들과 본질적으로 무언가 다른 점이 있다는 것을 느낀 필자가 몇년 여에 걸쳐서 이 주제를 파고 들면서 준비한 책.

현재 진행형의 변화이기 때문에 정확히 이렇다고 정의할 순 없지만 어느 정도는  90년대생 이후 세대에 대한 정보를 제공해준다.

이 책을 출간 당시에 한 번 봤는데, 문재인 대통령이 직원들에게 권장도서로 추천하면서 다시 유명해졌기에 함 다시 봤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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p29

 기간제 일자리는 물론 노동법의 규율에서 벗어난 각종 특수 고용 형태 일자리가 넘쳐나는 세상이 된 지 오래다. 전체 노동자의 46퍼센트가 비정규직인 기형적 고용 구조는 일상이 됐다. 지금 산업계를 지배하는 이데올로기는 일은 시키되 고용 책임은 지지 않으려는 '유노동 무책임'이다. 그러니 1990년대 출생 취업 준비생들이 직업을 고를 때 안정성을 가장 큰 가치로 꼽지 않는다면 되레 이상한 일이다. 그래서 이들에게 가장 합리적인 선택은 직업 안정성이 높은 공무원이나 공기업 같은 국가기관이다.

 

 게다가 최근 조사에 따르면, 공무원은 정년이 보장된 덕에 생애소득이 높아서, 기존의 인식과는 다르게 오히려 대기업보다 많은 소득을 기대할 수 있는 것으로 나타났다. 한국경제연구원에 따르면 재학 중 공무원 시험에 합격한 사람은 퇴직할 때까지 사기업 취업자보다 최소 3억 3,605만 원에서 최대 7억 8,058만 원까지 더 많은 누계 소득을 기대할 수 있는 것으로 조사됐다. 조사에 따르면 공무원의 임금인상율은 연평균 7퍼센트대 수준으로 대기업의 6.2퍼센트보다 높고, 공무원 퇴임 연령 역시 평균 56~59세로 대기업 평균인 52세보다 높다. 이제 공무원은 '가늘고 길게'가 아니라 '굵고 길게'가 된 것이다.

 무엇보다도 공무원은 구조조정의 공포가 없다. 한국 정부가 수립된 1953년 이래로 단 한 번도 공무원 구조조정을 진행한 적은 없다. 정부가 가장 모범적인 고용주인 셈이다. 공무원으로서 특별한 결격 사유가 생기지 않는 한 직장을 잃을 걱정은 없는 것이다. 그 공포에서의 해방은 현대 사횡에서 최소한 '먹고살 걱정'은 하지 않아도 됨을 의미한다.

 

p32.

 

 2008년 두산그룹을 새로운 재단으로 맞이하게 된 중앙대학교의 경우, 구조조정과 함께 교양 필수 과목으로 '회계와 사회'라는 회계학 수업을 개설했다. 학생들이 전공과 상관없이 졸업을 위해서 회계학을 필수적으로 이수해야 하는 상황에서 장덕진 서울대학교 교수는 "기업에서 필요로 하는 학문을 왜 학생들이 자기 돈 내고 배워야 하는가"라고 맹비난했다. 대학이 "학문적 가치가 아닌, 기업에 맞춰진 인재만을 양성하려 한다"는 것이다. 

 이에 당시 박용성 이사장은 "인문계든 자연계든 대학 졸업후 직장을 얻게 되면 처음 부닥치는 것이 현금 흐름에 대한 이해"라며 "회계학을 필수 교양 과목으로 한 것은 학생들의 장래를 위한 하나의 변화"라고 강조했다. 학생들의 사회 진출이 대부분 기업과 연계되지만, 모든 학생의 진로가 똑같다고 여긴다는 점에서 기업가의 성향과 입김이 학교 운영에까지 적용된 사례다. 하지만 여러 학내의 비판에도 대졸 실업자들의 지속적인 증가는 대학의 직업교육기관화를 부추기고 있다. '2015년 청소년통계'에 따르면 2014년 청소년(9~24세)의 48.6퍼센트가 대학 이상 교육의 주목적이 '좋은 직업을 갖는 것'이라고 답했다. '자신의 능력과 소질개발'은 36퍼센트, '인격이나 교양을 쌓는 것'은 1.8퍼센트에 그쳤다.

 

p43.

 

 90년대생들은 자신들을 사회 발전의 원동력으로 여기지 않고 특정 이상을 실현할 필요성도 느끼지 못한다. 단지 그들은 현 시대에서 적응하고 살아남기 위해 노력할 뿐이다. 

 

p53.

 

 국내에서는 현재까지도 1980년대생과 1990년대생을 하나로 묶어서 분석하는 경우가 많다. 물론 대한민국의 1980년대생과 1990년대생은 하나의 공통점이 있다. 그것은 바로 기존 세대에 비해서 출생률이 떨어졌다는 것이다. 기존 세대에 비해서 출생률이 떨어졌다는 것은 미국의 밀레니얼 세대와 비교해 굉장히 큰 차이다. 미국의 밀레니얼 세대가 그 숫자를 바탕으로 강력한 소비층으로 성장한 것에 반해 한국은 그렇지 못했기 때문이다. 통상적으로 세대가 이전 세대에서 새로운 세대로 교체될 수 있을 것인지 명확하게 보여주는 지표는 바로 합계 출산율이다. 세대가 교체되는 데에 필요한 대체출산율은 선진국의 경우 2.1명이다. 하지만 미국이 2000년대 후반까지 2.05명 수준을 유지한 것에 반해, 한국은 1983년 2.06명을 나타낸 이후 지금까지 단 한 번도 2.0명을 넘어선 적이 없다.

 이러한 현상이 벌어진 이유는 출산 제한 정책 때문이다. 한국은 6.25전쟁 전후인 1955년 합계 출산율이 6.33명을 기록하기도 했다. 1970년 합계 출산율이 4.53명을 기록하는 등 지속적으로 한 가정에서 평균 4명 이상의 아이를 낳기도 했다. 이에 정부는 강력한 출산 억제 정책을 폈다. 정책의 캐치프레이즈는 '둘만 낳아 잘 기르자'에서 '아들 딸 구별 말고 하나만 낳아 잘 기르자'로, 이마저도 다시 '하나씩만 낳아도 삼천리는 초만원'으로 바뀌었다. 1981년에는 인구증가억제 종합시책이 체택되었고, 1985년도에도 자녀 수에 따른 주민세, 의료보험료 등이 차등으로 부과됐다. 이런 정부 정책의 결과였을까? 지금은 현실은 OECD국가중 가장 낮은 출산율을 기록하고 있고, 이에 따라 정부는 출산장려 정책을 적극 추진하고 있는 판국이다. 1970년 이후 한국의 출산율은 지속적으로 하락하여 1984년 최초로 합계 출산율이 2명 이하(1.74명)로 줄어들었다. 그나마 1980년대생들은 둘 이상의 형제자매를 가진 것이 보통이었다. 하지만 1990년대생들은 더 이상 그렇지 않다. 강력한 소비층이 될 밀레니얼 세대의 기본적인 조건을 충족시키지 못한 것이다.

 

p67.

 미국의 인류학자 마거릿 미드Margaret Mead는 반세기 전, 청년이 미래를 선도하는 사회를 전망했다. 기성세대가 청년에게 배워야만 하는 상황이 도래하리라는 것이었다. 증거는 당시 미국의 경험이었다. 미국으로 이주해온 사람들은 세대별로 상이한 적응력을 보였다. 다른 문화권에서 성장하여 이주해온 기성세대(이주 1세대)들은 새로운 환경에 적응하는 데 어려움이 컸지만, 미국에서 성장한 자녀(이주 2세대)들은 부모보다 더 빨리 적응했다. 이런 사실에 착안하여 미드는 과거의 경험에 집착하는 기성세대보다 그로부터 자유로운 청년이 더 빠른 적응력을 보이고, 따라서 젊은 세대에게 삶의 방식을 배워야 할 때가 올 것이라 전망하였다. 살아본 적 없는 미래의 세계에서 우리는 모두 '시간 속의 이주민'인 셈이다. 이제 청년이 스승이 될 수 있다.

 <한겨례> 인터뷰에서 "노인들이 저 모양이란 걸 잘 봐두어라"라는 촌철살인으로 화제가 된 채현국 효암학원 이사장은 오늘날이 '먼저 안 게 오류가 되는 시대'라고 말했다. 그는 "농경 사회에서는 나이 먹을수록 지혜로워지는데, 자본주의 사회에서는 지혜보다는 노욕의 덩어리가 될 염려가 더 크다는 겁니다"라며, "지금은 경험이 다 고정관념이고 경험이 다 틀린 시대입니다. 먼저 안 건 전부 오류가 되는 시대입니다. 정보도 지식도 먼저 것은 다 틀리게 되죠"라고 말했다. 그의 말처럼 과거 경험이 이젠 판단의 기초 혹은 가르침의 근거가 되지 못하는 시대가 되었는지도 모른다.

 

p95.

 하지만 미래에도 책이 디지털 미디어 혁명에서 비켜나 있지는 않을 것이다. 출판사와 유통업자들도 디지털 생산과 유통에 따른 경제적 이득을 다른 미디어 회사들이 그랬던 것만큼이나 거부할 수 없을 것이다. 그 이득이란 잉크와 종이를 대량으로 구매하지 않아도 되고, 인쇄 비용이 들거나 트럭에 무거운 책들을 실어 보낼 필요도 없으며, 재고 문제도 없다는 것이다.

 비용 절감은 곧 가격 하락으로 이어진다. 전자책이 인쇄된 책의 절반 가격에 판매되는 상황이 드문 일은 아닌데, 이는 일정 부분 전자책 리더기 생산 업체들에 주어지는 보조금 때문이기도 하다. 이 엄청난 할인 혜택은 사람들이 종이에서 픽셀로 옮겨 가도록 하는 강력한 유인책으로 작용했다.

 구텐베르크의 발명으로 대중화된 깊이 읽기의 관행은 점차 사라지고 소수의 엘리트만의 영역이 될 가능성이 크다. 다시 말해 우리는 역사적인 표준으로 되돌아가게 될 것이다. 노스웨스턴대학교 교수 그룹은 2005년 <Annual Review of Sociology>에서 우리의 독서 습관에 있어 최근의 변화들은 '대중적인 독서의 시대'가 우리 지적 역사에 있어 짦은 '예외'였음을 암시한다고 했다. 대중적인 독서는 예전의 사회적 기반, 즉 독서 계층이라 부를 수 있는 소수의 것으로 돌아가고 있다는 것이다. 장대익 서울대 교수가 2017년 국회에서 발표한 <독서와 시민의 품격>에서도 이와 비슷하게 사람의 뇌는 본래 독서에 적합하게 진화하지 않았다고 하였다. 독서는 비교적 최근에 생겨났기 때문이다. 진화론적으로 반드시 필요하지 않은 독서를 사람들이 계속하는 이유는 독서가 가져다주는 이득 때문일 뿐이라는 것이다.

 아마존의 최고 경영자인 제프 베조스Jeff Bezos는 킨들을 소개할 당시 스스로를 찬향하는 듯이 말했다. "책과 같이 매우 진화한 물건을 택해 개선하는 것은 참으로 진취적인 일이다. 이것은 사람들이 읽는 방식까지 바꿀 것이다." 이는 거의 확실하다. 사람들이 읽고 쓰는 방식은 이미 인터넷을 통해 바뀌었다. 그리고 이 변화는 글이 인쇄된 종이에서 빠져나와 기술의 생태계 속에 정착됨에 따라 계속될 것이다.

 

p107.

 하지만 대부분의 사람들은 매슬로가 말년에 이러한 자신의 주장을 바꿨다는 사실을 모른다. 욕구단계설에서 자아실현의 욕구를 가장 꼭대기에 올려놓았던 매슬로는 말년에 인생 최고 경험을 '자기초월', 즉 자아보다 더 높은 목적을 위한 삶에서 찾았으며, 본인이 종전에 최고 수준의 욕구로 꼽았던 자아실현이 사실은 가장 기본적인 욕구라고 이야기했다.

 

p154.

 기존 세대에게 신입 사원들은 자기들만 생각하는 이기주의자이고, 새로운 세대에게 기존 세대들은 이미 회사에 믿음을 상실했으면서도 어떻게든 살아남기 위해 미련을 버리지 못하고 충성하는 꼰대들로만 보일 뿐이다. 사실 이렇게 회사에 대한 충성심과 관련한 갈등은 어제오늘의 일이 아니고 90년대생들만의 일도 아니다.

 미국의 경우 이러한 갈등은 훨씬 이전부터 일어났다. 1965년 이후 출생한 X세대는 1990년대부터 회사에 진출하면서, 이전의 베이비붐 세대와 갈등을 보였다. 이들은 직장에서의 성공과 돈버는 것을 최대의 목표로 삼았던 젊은(Young) 도시의(Urban) 전문직(Professional) 즉 여피 Yuppies과는 다르게 젊고(young), 개인주의적이며(Individualistic), 자유분방하고(Free-minded), 베이비붐 세대에 비해 수도 적은(Few), 즉 이피족 Yiffie으로 불렸다.

 이들은 일을 좋아하고 즐기지만 결코 자신을 희생하면서까지 회사에 충성하려 하지 않아, 회사에 대한 충성을 높게 사는 기존 세대나 관리자들이 이를 관리하는 데 어려움을 겪었다고 한다. 이에 따라 미국의 기업들은 이때부터 기존의 전통적인 HR정책에 변화를 두고 새로운 세대에 맞는 인재 관리 방법을 재정립하기 시작하였다.

 국내에서도 2000년대 중반부터 1980년대생들이 기업에 유입됨에 따라, 야근과 주말 근무를 요구하는 기존 베이비붐 세대들과 새로운 세대와의 갈등이 일어나곤 했다. 젊은 세대가 새로운 아이디어는 많지만 애사심과 팀워크가 없다는 것이 주된 이유였다. 이에 성과급 제도를 투명하게 운영하고, 신세대의 의견을 경청하고 원대한 기업 철학을 내세움으로써 이들의 관심을 최사로 돌리는 방안들이 제시되었다. 그러나 여기에도 문제가 있었으니, 결국 회사에 충성을 하면 그 대가가 승진과 몸값 상승으로 자연스레 이어질 것이라는 결론을 가정했다는 것이었다.

 90년대생들은 회사에 대한 충성이 곧 나의 성장이라는 공식을 배격한다. 새로운 세대는 '회사에 헌신하면 헌신짝이 된다'는 인터넷상의 '직장 계명'에 동의하고, 이를 넘어서 충성의 대상이 '회사'여야 할 이유가 있냐고 반문한다. 찰스 핸디는 <코끼리와 벼룩>에서 오늘날의 충성심이란 것은 "첫째가 자기 자신과 미래에 대한 것, 둘째가 자기 팀과 프로젝트에 대한 것, 마지막이 회사에 대한 것"이라고 말했다.

 

 p157.

  믈론 끼니도 제대로 때우지 못하던 가난한 나라를 지금과 같이 일으킨 건 성실한 노동자의 헌신 때문이었다. 그리고 그 바탕에는 회사가 열심히 일한 나를 버리지 않을 것이라는 믿음이 있었다. 하지만 1997년 IMF 이후로 열심히 일해온 많은 이들이 거리로 내팽겨쳐졌고, 2008년 금융위기 이후 상시적으로 구조조정이 일어난다. 그러니 90년대생들에게 근명, 성실을 강조하는 것은 앞뒤가 맞지 않는다.

 

p169.

 2012년에 회사에 신입 사원으로 입사한 배모 씨(1990년생)는 2012년부터 2년간 본인에게 주어진 모든 휴가를 빠지지 않고 모조리 사용했다. 그에게 중요한 가치는 연차 수당과 같은 돈이 아니라 인생의 여유였다.

 

 "본인에게 주어진 휴가를 다 쓰지 않고 휴가를 다녀오지 않은 것이 마치 더 일을 열심히 한 듯이 으스대는 선배들을 볼 때면 얼간이같이 느껴져요. 내 휴가를 내가 사용하는데 누가 뭐라고 하는 것도 이해가 안 되고요. 얼마 전에 팀장님이 지나가는 말로 '휴가가 너무 잦은 거 아닌가?'라고 하는데 기분이 안 좋았죠. 지적하려면 업무적으로 이야기해야 하는 거 아닌가요?"

 

 페이스북에 '젊은 사원의 휴가 사유'라는 이름의 짤이 떠돌았다. 사원이 적은 휴가 사유는 다음과 같았다. "다음 날이 쉬는 날이어서." 이처럼 이들은 본인에게 주어진 휴가 기간을 어떻게 하면 효과적으로 사용할지에 대한 관심이 많다. 만약 황금연휴가 아닐지라도, 징검다리 휴일이 있다면 그들은 휴가를 붙여서 자체적으로 황금연휴를 만들기도 한다. 물론 이에 맞춰서 최근 기업들은 징검다리 연휴가 있는 주는 조직 전체 사원에게 연차나 월차 사용을 권장하고 있다.

 

p176.

 조직학의 대가 아미타이 에치오니 Amitai Etzioni가 지적했듯 사람들은 불확실성에 대한 두려움 때문에 의사결정을 방어적으로 회피하거나 필요 이상의 정보를 수집하며 시간을 끄는 경향이 있다. 그리고 이런 상황에서 의도적인 비효율이 발생할 수 있다. 책임 회피를 위해 꼭 필요한 의사결정을 미루는 경우가 종종 발생하는 것이다. 그러니 대안을 검토하는 하급자는 보고서를 만들고 회의를 거듭하며 불확실성이 사라지길 기다린다. 필요 이상의 복잡한 결재 단계에서 시간을 끌기도 한다. 이는 의사결정을 내려야 하는 상급자도 마찬가지다. 결단이 필요한 순간 보고서의 사소한 오류나 정보 부족을 탓하며 재작업을 지시해 시간을 끈다. '돌다리도 두드려보고 건너라'라는 격언이 '의사결정을 하지 않는 것보다 더 나쁜 의사결정은 없다'라는 격언을 압도하는 것이다.

 의사결정을 기다리고 있다고 해서 쉬는 것은 아니다. 모두 정보를 수집하며 바쁘게 뛰고 있다. 보고서 버전은 끝없이 올라간다. 그렇게 돌다리를 두드리던 순간 경쟁사는 이미 그 돌다리를 건너 신제품을 내놓는다. 남은 것은 완벽한, 그러나 이미 쓸모 없는 보고서와 판단이 틀리지 않았다는 씁쓸한 자위뿐이다.

 

 p180.

 지금은 종용한 MBC 예능 프로그램 <무한도전>의 2013년 '무도를 부탁해' 에피소드에서 개그맨 박명수는 이렇게 말한다. "꿈은 없고요. 그냥 놀고 싶습니다." 이는 기성세대, 즉 꼰대들에게 귀에 못이 박히도록 들었던 '사람은 꿈이 있어야 한다', '모름지기 꿈은 크게 꿔야 된다'는 말에 대한 반발과 같았다. 90년대생들은 이제 당당하게 이야기한다. '꼭 꿈이 있어야 되나?'

 

 영화 <신과 함께>의 원작자로 유명한 웹툰 작가 주호민 씨는 본인의 2008년작 <무한동력>의 명대사로 꼽혔던 "죽기 직전에 못 먹은 밥이 생각나겠는가, 아니면 못 이룬 꿈이 생각나겠는가?"가 이제는 부끄럽다고 말하기도 했다. "꿈이 꼭 없어도 되는데 너무 꿈을 강요한 건 아니었을까?"라고 말이다. 새로운 세대는 꿈을 좇으라는 기성세대의 충고가 더 이상 효과적이지 않음을 경험을 통해 깨닫고 있다.

 

p215

 

 스탠퍼드대학교의 심리학자 월터 미셸Walter Mischel은 마시멜로 실험으로 유명하다. 취학 전 어린이들을 상대로 작은 책상에 마시멜로 두 개와 종 하나를 올려놓고 인내심과 순간의 욕구, 성공과의 관계를 알아본 실험 말이다. 그로부터 10년 후 실시된 2차 연구에서, 마시멜로의 유혹을 이겨낸 어린이는 그렇지 않은 어린이들보다 몸매가 날씬하고 사회 적응을 잘하게 됐을 뿐 아니라, SAT에서 210점이나 더 많은 점수를 받았다.

 이렇다 보니 마시멜로 이야기는 회사 생활에서 가장 흔한 조언인 '참고 견디라'의 가장 대표적인 근거로 쓰인다. 그런데 정말 마시멜로 이야기가 '참을성이 강하면 성공한다'라는 교훈을 주는 이야기일까? 마시멜로 이야기가 잘 알려진 건 어떠졈 사람들이 재밌어하면서도 가장 궁금해하는 문제, 즉 '성공하는 사람들의 특성은 무엇인가?'라는 문제를 단순한 공식으로 환원했기 때문일 수 있따. 여기서 단순한 공식이란 '성격은 타고난 것'이며 '인내는 미덕'이라는 것이다.

 하지만 2013년 로체스터대학교의 홀리 팔메리Holly Palmeri와 리처든 애슬린 Richard Aslin 은 잡지 <코그니션Cognition>에 <합리적 간식 먹기Rational Snacking>라는 논문을 발표했다. 그들에 의하면 "첫 번째 마시멜로를 빨리 먹은 아이들 중 일부는 참을성이 부족했던 것이 아니라 '나중에 돌아오면 하나를 더 주겠다'는 연구원의 말을 의심했기 때문"이다. 그들은 "불안정한 환경에서 자란 아이들은 '먹는 것이 남는 것'이라는 생각을 갖게 된다"며, 안정적인 환경에서 자란 아이들일수록 약속이 지켜질 것이라고 기대하며 좀 더 오래 기다리는 경향이 있다고 주장했다.

 이뿐만이 아니라 많은 연구자가 미셸의 실험 결과를 비판하는 논문을 발표했다. 그러나 상당수의 사람들은 복잡한 이야기를 읽으려 하지 않고, 동기부여 강사들이 하는 단순한 이야기를 듣는다. 많은 동기부여 강사들은 마시멜로 실험을 들먹이며 여전히 '네 살짜리도 인생의 성공에 필요한 것이 무엇인지 이해하고 있다. 그것은 참을성이다'라고 소리 높여 외친다.

 하지만 오랫동안 참은 대가로 두 번째 마시멜로를 먹은 어린이들이 인생에서 성공했다고 해서 그들이 선천적으로 유혹에 넘어가지 않는 자질을 갖고 있었다고 말할 수는 없다. 로체스터대학교의 연구진이 말한 바와 같이 어떤 어린이는 단지 연구자의 말을 믿지 못해서 오래 기다리지 않았을 수도 있다. 또는 그날따라 배가 고팠을 수도 있다. 복잡한 세상 속에서 단순한 참을성이 인생의 성공 비결일 수는 없다. 세상의 수천 가지 요인들이 우리의 일상에 영향을 미친다.

 

p220

 

 80년대와 그 이전 출생 세대들은 인생의 목표가 무엇인지 설정하는, 소위 삶의 목적을 추구했다. 그러나 90년대생들은 지금의 인생이 어떤지를 더 중요하게 여기고, 삶의 유희를 추구한다. 이와 함께 이들을 움직일 수 있는 힘도 오로지 '흥미'에서 나온다. 그렇다면 흥미가 중요한 90년대생들에게 회사는 어떠한 의미일까?

 

 "회사에서도 재미가 있었으면 좋겠어요. 이런 잉기를 회식 시간에 팀원들에게 한 적이 있는데, 그때 한 대리님이 '즐거움은 돈을 내고 찾아. 회사는 엄연히 돈을 받고 일을 하러 오는 곳잉. 그런 곳에서 즐거움을 찾는 게 말이 되니?'라고 답하더군요. 회사에서 일을 안 하고 높고 싶다는 뜻이 아니에요. 단지 어차피 할 일이면, 즐겁게 하고 싶다는 말이죠. '열심히 하는 사람도 즐기는 사람을 이길 수 없다'는 말은 잘도 하면서 왜 회사를 즐겁게 만들려는 생각은 안 하는 거죠?"

 

 얼마 전까지 회시에서 즐겁게 지내고 싶다는 말은 임금을 받고 근무하는 회사원의 입장에서 일종의 반동과 같은 것이었다. 즐거움은 돈을 내고 사는 것이고, 이와 반대로 돈을 받은 곳은 절대 즐거움의 장소가 될 수는 없다는 논리였다. 물론 90년대생들에게도 회사란 노동을 하러 오는 곳이다. 다만 그들은 어디에서라도 '유희'를 즐기고 싶을 뿐이다. 유희가 충족되지 않는다면 회사는 일터로서의 매력을 잃게 된다.

 

p236

 

 글로벌 전자상거래가 점차 발달하면서 2000년대 초에 다나와, 에누리 같은 최저가 비교 사이트들이 등장했다. 가격 비교의 맹점이 해소되기 시작했다. 하지만 이러한 최저가 사이트가 소비자의 생산자 간 정보의 비대칭을 어느 정도 해소해주긴 했으나, 그렇다고 해서 당시 소비자 모두가 최저가로 합리적인 구매를 한 것은 아니었다. 왜냐하면 기업들은 온라인에서조차 소비자의 가격 비교를 방해하는 장치를 마련했기 대문이다. 예를 들어 온라인 사이트에 일부러 제품을 혼란스럽게 설명하고, 비슷해 보이지만 서로 다른 여러 가지 버전의 모델을 등록하여 가격 비교를 더욱 곤란하게 만드는가 하면, 저가형 미끼 상품을 검색 상위에 올리거나 광고 창에 게시하여 소비자를 자기 웹 사이트로 유인한 다음 결국 더 비싼 제품을 사게 만들었다.

 

p241

 

 보드리야르는 1970년에 발간한 <소비의 사회 La societe de consommation>를 통해 현대 소비사회의 구조와 특징에 대해 설명했다. 그에 따르면 현대 자본주의는 산업 자본주의를 지나며 생산수단과 생산기술의 비약적 발전을 이룬다. 그 결과 자본주의는 과잉생산이라는 구조적 문제를 갖게 된다. 끊임없이 소비하지 않으면 생산은 멈추게 되고 자본주의 역시 멈추게 될 운명을 맞는 것이다. 이러한 '끊임없는 소비'가 필요하게 된 소비 자본주의는 '고객의 니즈를 창출해야 한다'는 구호를 만들어냈다. 이는 달리 말하자면 '없는 소비도 만들어야 한다'는 것이다. 따라서 오늘날 마케터는 소비를 꿈꾸게 하는 것이 지상 과제가 되었다.

 

p246

 

 하지만 이러한 고객만족도가 곧바로 고객충성도로 이어지지 않는 것으로 보고되었다. 75,0000명을 대상으로 진행한 매튜 딕슨Matthew Dixon, 캐런 프리먼Karen Freeman, 니컬러스 토먼Nicholas Toman의 2010년 연구 결과에 따르면, 고객만족과 브랜드 로열티는 상관관계가 적은 것으로 나타났다. 고객의 기대를 넘어서기 위한 각종 서비스는 충성도 제고에 기여하지 못할 뿐만 아니라 과할 경우 오히려 고객의 기대수준을 높여 충성도를 약화할 수 있다. 나아가 고객의 충성도를 높일 수 있는 것은 제품의 질이나 가치와 같은 핵심 편익이지 부가적인 서비스가 아니며, 고객들이 지닌 핵심 문제를 신속하게 해결해줄 때 고객충성도가 강화된다고 하였다.

 

 연구자들은 2010년 <하버드비즈니스리뷰>에 기고한 글 "고객을 기쁘게 하기 위한 노력을 그만두라 Stop trying to delight your customers"에서 고객충성도 제고를 위한 새로운 측정 지표로 '고객노력지수Customer Effort Score, CES'를 제안했다. 기존 기업들이 관리하고 있는 '고객만족도 지표Customer Satisfaction, CSAT'는 고객의 재구매 및 지출 증가에 대한 예측력이 떨어지는 것으로 나타났다. 그 밖에 2000년대 중반 제너럴일렉트릭 등의 기업들이 체택하면서 인기를 끌고 기존의 고객만족도를 대체할 것으로 기대되었던 '순추천지수Net Promote Score, NPS'는 보통 수준의 예측력을 보여주었다. 

 CES는 '당신이 처한 문제 해결을 위해 얼마나 많은 노력을 들었느냐?'라는 질문의 답을 5점 척도로 측정해서 관리한다. '거의 노력이 들지 않았다'면 1점을, '매우 많은 노력이 필요했다'면 5점을 체크한다. 점수가 낮으면 낮을수록 고객이 브랜드와 관련하여 불필요하게 소모하는 노력이 적은 것이다. 이는 고객충성도 제고에 이바지하게 된다. 연구 결과에 따르면 노력을 적게 들인 사람들의 94퍼센트가 재구매 의향을 드러냈다고 하니, 고객 충성도에 대한 예측력이 꽤 높은 지표라 할 수 있겠다. 물론 이와 같은 개념이 반드시 90년대생에게만 해당하는 조사 결과는 아니지만, 이와 같은 번거로움의 제거와 최소화는 누구보다 90년대생 소비자들에게 중요한 요소다.

 

p248

 

 HMR 시장의 급속한 성장과는 반대로, 시장이 겹치게 된 패스트푸드와 패밀리 레스토랑은 점차 HMR 제품과의 경계가 사라짐과 동시에 존폐의 위기를 맞게 되었다. 특히 2000년대 초중반 80년대생들의 마음을 사로잡으며 전성시대를 열었던 패밀리 레스토랑의 경우, 2000년대 중반 이후 경기침체 장기화로 인한 청년 실업 증가와 혼인율, 출산율 저하 등으로 인구구조가 급속히 변화하면서 내리막길을 걷기 시작했다. 특히 90년대생들의 소비 패턴 양극화는 몰락의 결정타가 되었다. 연인이나 가족과의 기념일을 패밀리 레스토랑에서 즐기던 80년대생들과 달리, 90년대생들은 평소에 간단히 끼니를 때우고 특별한 날에는 호텔처럼 더 화려하고 고습스러운 곳을 찾게 된 것이다. 패밀리 레스토랑은 90년대생들에게 더 이상 특별한 장소도 아니고, 간편하게 식사를 해결할 수 있는 장소도 아니게 된 것이다.

 

p300

 

 그런데 이렇게 배달앱 시장이 성장하게 된 것은 단순히 간편성 때문만은 아니다. 1996생 김모 씨는 이렇게 말했다.

 

 "배달앱은 분명 간편성도 있긴 하지만, 단순히 그것 때문에 배달앱을 사용하는 것은 아닙니다. 배달앱의 가장 큰 특징은 후기를 남길 수 있다는 것입니다. 전화로 주문을 하면 서비스가 엉망인 경우가 많았죠. 쿠폰을 빼먹는 경우도 많고요. 그래서 이제는 꼭 후기를 남깁니다. 소비자인 우리의 피드백이 솔직히 반영된다는 것이 앱을 통한 주문의 이유입니다."

 

 반대의 사례도 있다.. 바로 '인형뽑기방'이다. 2015년부터 본격적으로 생기기 시작한 인형뽑기방은 삽시간에 전국으로 퍼져 2017년에는 전국에 2만 개가 넘을 정도로 높은 성장세를 보였다. 인형뽑기방이 창업 아이템으로 인기를 끈 데에는 적은 비용으로도 개업이 가능하다는 게 한몫을 했다. 공간을 크게 차지하지 않는 데다 대당 200~300만 원대인 경품 기계 몇 대면 손쉽게 창업이 가능했다. 1,000~2,000원이면 연령 제한 없이 누구나 이용할 수 있어 어린이들과 청소년들도 즐겨 찾으며 전국적인 열풍으로 이어졌다.

 하지만 불야성을 이루던 인형뽑기방은 이제 파리만 날리는 곳이 많아졌다. 빠른 성장세만큼 폐업도 빨라졌다. 이유는 바로 인형뽑기방에서 '확률을 조작'한다는 것이 밝혀졌기 때문이다. 모든 인형뽑기방이 확률을 조작하지는 않았지만 인기는 급격히 식어버렸다. 게임물관리위원회가 2016년 9월부터 11월까지 전국 144개 뽑기방을 대상으로 한 실태조사에 따르면 101개소(70퍼센트)가 관련 규정 위반 업소로 적발됐다. 이 중 12개소(8.4퍼센트)가 기계 개,변조를 통해 뽑기 확률을 조작했다. 인형뽑기방의 주요 타깃 고객이었던 90년대생들은 이러한 확률 조작 사실을 알고 그 이후로 발길을 끊었다고 한다. 1992년생 김모 씨는 "인형뽑기방이 기계로 장난치는 것을 안 이후에 절대 가지 않습니다. 더 이상 그런 호구가 되기는 싫거든요"라고 말했다.

 이와 같이 90년대생들은 직원으로 일하든 소비자로서 제품과 서비스를 구매하든, 가장 중요한 요소로 '신뢰'를 꼽곤 한다. 배달앱의 후기처럼 신뢰를 강제할 수 있는 제도의 개선이 있으면 하나의 큰 성공 요인이 되기도 하지만, 신뢰를 잃어버리면 그 많던 인기도 신기루처럼 사라지기도 한다.

 

그들은 광고를 차단하기 바쁘다.

스타벅스는 국내에서 가장 매출이 높은 커피 프랜차이즈다. 그렇다면 스타벅스의 매출은 어느 정도일까? 스타벅스의 2017년 매출은 1조 2,634억 원이다. 국내 2위에서 6위까지의 5개 회사(투썸플레이스, 이디야커피, 커피빈, 엔제리너스, 할리스커피)의 매출을 모두 합해도 스타벅스 한 곳에 턱없이 못 미친다. 2~6위 다섯 회사 매출은 모두 합해도 8,200억 원에 불과했다.

 이렇게 국내 1위의 커피전문점으로 성장했지만 스타벅스의 광고를 본 사람은 없다. 광고를 하지 않기 때문이다. 국내 기업은 마케팅 예산의 대부분을 제품 광고와 프로모션에 쓴다. 지금까지 마케팅의 목표인 브랜드 인지도와 선호도를 높이거나 시장 점유율과 매출을 늘리는 데에 실제로 광고와 프로모션은 효과가 있었다. 하지만 지금의 90년대생 소비자들은 다양한 방법으로 광고를 차단하기 바쁘다. 어쩌다 노출된 광고 또한 믿을 수 없다고 말한다.

 스타벅스의 인사팀에 근무한 경험이 있는 한 담당자는 스타벅스의 성공을 광고와 프로모션이 아닌 브랜딩에 대한 투자와 내부 직원을 첫 번째 고객으로 두고 아끼는 기업문화 때문이라고 말했다. 광고를 하지 않는 대신 브랜딩과 조직 관리에 힘쓴다는 것이다.

 

 

 

 

차범근 에세이집 2번째.  1권인 슈팅 메시지가 분데스리가 시절의 선수생활 시절의 에피소드 위주였다면, 이번 2권인 그라운드 산책은 귀국 후와 귀국 후 프로팀 감독과 대표팀 감독 시절의 에피소드로 이루어져 있다.

글은 투박하지만, 오랜 축구 생활의 경험과 그 비하인드를 통해 좀 더 축구라는 세계를 깊게 이해할 수 있는 내용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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p29.

 스위스에는 생 모리츠와 함께 세계적인 고급 휴양지로 꼽히는 제어마트(Zermatt)라는 스키 휴양지가 있다.

 1년 내내 스키를 탈 수 있는 곳이고 마테 호른을 볼 수 있어서 일본이나 미국으로부터 몰려오는 관광객도 꽤 많은 곳인데 겨울이면 스키 손님으로 가장 많이 붐비는 곳이다.

 저녁이면 기차역 구내며 골목 등에 벗어서 팽개쳐 놓은 듯한 스키와 부츠 등으로 어지러운데 아무도 집어가는 사람이 없다는 것이다. 처음에 나는 아무래도 미심쩍어서 그곳 경찰관에게 괜찮으냐고 묻기까지 했다.

 그러나 며칠이 지나고부터는 우리 식구들도 어느 한 귀퉁이에다가 스키를 벗어놓고 그 다음날 찾아 신을 만큼 곧 익숙해졌는데, 의심하지 않고 서로를 믿을 수 있다는 것은 상당히 기분 좋은 일이었고 바로 그 속에 나도 포함되어 있다는 게 더욱 그랬던 것 같다.

 믿을 수 있다는 것은 사람들의 관계를 단순하게 만들어 준다. 그것은 물질에만 국한되어 있는 것이 아니고 말, 생각, 그리고 행동에 이르기까지 내가 상대방을 믿을 수 있을 때 편안한 관계가 유지되고 스트레스도 훨씬 덜 받게 되는 것이다.

 이런 면에서 우리 사회는 아직도 불필요한 스트레스를 너무 많이 주고받으면서 살고 있다. 마찬가지다. 우리가 선진국이 되려면 서로가 좀더 믿을 수 있어야 한다.

 

 

 p72. 콜 독일 수상에 관한 추억

 

 1990년 봄.

 동서독이 아직 완전한 통일은 되지 않고 화해의 분위기가 한창 뜨거울 때 드레스덴 시에서는 유적지 보수 기금 마련 자선 축구 대회가 있었다.

 나는 그 때 세계 선발로 그 대회에 참가했었는데 드레스덴의 운동장은 초라하다는 생각이 들 정도로 엉성하고 형편없는 수준이었다. 본부석의 자리 역시 널빤지였는데 초대 손님들의 이름이 적힌 종이를 스카치테이프로 붙여 놓으면 그것이 곧 지정석이 되는 것이었다.

 내가 앉았던 자리 바로 앞에는 'Dr. Kohl'이라고 이름표가 붙어 있었는데 경기가 시작하기 조금 전에 남녀 수행원 한 명씩과 함께 아무렇지도 않다는 듯이 그 널빤지에 안증ㄴ 사람은 바로 거인처럼 몸집이 큰 독일 수상 콜이었다.

 그 후 몇 차례 가까이에서 뵐 기회가 있었지만 그 때는 처음이라서 사실 흥분이 되기도 하고 또 한편으로는 널빤지에 앉은 수상이 이상하게 생각되기도 했다. 우리 식으로 생각한다면 본부석 전체도 고칠 판이지만 다만 널빤지 몇 줄을 걷어내고 안락한 의자 몇 개쯤 갖도 놓는 게 뭐 그리 어려웠을까. 하프타임이 되었을 때 동독의 축구 팬들은 콜 수상에게 사인을 받기 위해서 몰려왔고 그것을 말리는 사람은 아무도 없었다. 거짓말 같은 모습이었다.

 윗저고리에서 읷훅하게 사인펜을 꺼내서 옆에 앉은 드레스덴 시장과 함께 담소를 하면서 사인을 해주던 모습이 아줌마 수행원이 조심성이라고는 조금도 없이 떠나갈 듯한 목소리로 응원을 하던 모습과 함께 지금도 믿을 수 없을 만큼 부러운 일로 가끔씩 떠오르곤 한다

 언젠가 수상 관저에 초대받은 꼬마 중 하나가 '콜 아저씨'라고 부르는 바람에 그 다음날 신문과 독자들을 상당히 즐겁게 해주었는데 아마도 앞에서 얘기한 콜 수상의 그런 분위기가 그 꼬마에게는 이웃집 아저씨처럼 느껴지게 한 모양이었다.

 그 뿐 아니다. 지금은 치매로 독일 국민들을 가슴아프게 하는 전 수상 슈미트 씨의 경우에는 의전 상의 시효가 지나 부인이 1등석을 탈 수 없게 되자 아무렇지도 않다는 듯 남편과 떨어져 비좁은 자리에 앉아 여행하는 당당함.

 바로 그런 모습이 초라해 보이기는커녕 지금도 수십 명씩을 끌고 골프장에 행사하는 우리네 힘깨나 쓰는 사람들보다 훨씬 더 강하고 근사해 보이는 것은 내가 외국 생활을 오래했기 때문만은 아닐 것이다.

 

p73. 축구 열기에 부는 이혼 바람

 

 독일 대사관의 야닉시 부부와 식사를 하는데 로타 마테우스가 두 번째 부인과 또다시 헤어졌다는 얘기를 했다.

 남의 얘기니까 서로 부담 없이 낄낄거리며 화제에 올리기는 하지만 사실 급작스럽게 불어닥친 독일 스타플레이어들의 이혼 바람은 우리들 세대에서는 상상하기가 쉽지 않을 정도로 심각한 상태다.

 1990년 월드컵 우승 멤버 중 베켄바워 감독을 위시해서 로타 마테우스, 뮐러, 리트바르스키 같은 꽤 많은 인기 선수들이 이혼을 했다고 한다. '1990년 월드컵 챔피언 팀은 이혼도 챔피언이다'는 우스갯소리를 할 정도다.

 그런데 문제는 가끔씩 독일을 방문하는 나에게도 발생한다. 운동장에서 마주치면 가족들의 안부를 묻는 게 보통인데도 이제는 "부인과 얘들은 잘 있느냐?"는 인사를 할 수가 없다는 얘기다. 1980년대 내가 선수 생활을 하던 때와 비교하면 분데스리가 선수들의 평균 급여가 3배쯤 늘었다.

 거기다 90년 월드컵 우승을 전후해서 이탈리아로 팀을 옮겨간 국가 대표급 선수들은 천문학적인 숫자라고 해도 과언이 아닐 만큼 많은 수입을 올렸다. 물론 내가 선수 생활을 할 때에도 휠첸바인이나 그라보브스키 같은 노장 선수들은 우리 젊은 선수들이 자신들의 시대에 비해 너무 많이 받는다고 노골적으로 불평을 하기도 했지만 최근 5년 동안 불어닥친 연봉의 급등 현상은 가족 관계에까지 이상 현상을 나타낼 만큼 변화가 심했다.

 우리는 돈이 아주 많은 사람들이 비정상적인 가족 관계를 유지하는 것을 자주 보게 된다. 생활의 여유가 가정을 파괴하는 원인이 될 수도 있는 모양이다.

 우리 젊은 선수들, 앞으로 우리 축구 시장도 분명히 더 좋아지리라고 생각할 때 이런 선례를 알고 자신을 추스르는 것도 해롭지는 않을 것이다.

 

 p84. 삼풍 참사와 코리아 컵 교훈

 

 성수대교가 무너졌을 때 나는 이런 생각을 한 적이 있다. 만약에 어느 건설업자가 다리공사를 1억 원에 입찰 받았다고 하자. 좀더 튼튼한 다리를 놓고 싶은 욕심(?)에 한푼 흘리지 않고 받은 돈을 고스란히 다리 건설에만 사용했다고 할 때 오늘 우리 나라의 현실에서 과연 그 양심적인 업자에게 다시 또 다리를 건설할 기회가 돌아갈까 하는 것이었다.

 다리가 무너지기 전까지는 원칙이, 양심이 무시되고 오히려 배척 당하다가 막상 다리가 무너지고 말자 왜 원칙을 지키지 않았느냐고 따진다. 삼풍백화점도 마찬가지다. 자재난에 허덕이던 시점에서 만약에 누군가가 온전한 골재를 사용하지 않으면 위험하다고 버티고 나섰다면 그 융통성 없는 잘난(?) 기술자는 분명히 무시당하거나 멀찌감치 떨려나갔을 것이다.

 그러나 백화점이 무너지고 나자 손가락처럼 가는 철근을 억지로 지탱하던 흙 콘크리트를 부서뜨리면서 사람들은 그들이 원칙을 지키지 않았다고 분노하고 나무라는 것이다.

 과연 우리가 불편을 감수하면서도 꼭 지켜야만 하는 이 원칙은 사고가 난 후에 책임을 물을 때만 필요한 것인지 이 시점에서 우리는 한 번쯤 깊이 생각해 볼 필요가 있을 것 같다.

 ...

 말하자면 우리의 현실은 옳고 그른 것을 가리는 기준이 원칙에 있는 것이 아니라 그 결과에 따라 달라진다는 것이다. 융통성을 사랑하고 원칙을 배척하는 우리들.

 결과만 좋으면 과정이 비도덕적이고 무원칙해도 고쳐져야 할 부분들이 잘한 일로 평가되는 우리 사회. 이제부터라도 우리들이 가장 거추장스럽게 여기는 도덕과 원칙이 이 사회를 지배하지 않는다면 '최고급 백화점이 무너져 내린 한국'이라는 세계인의 비웃음 속에서 우리의 세계화는 정말 요원할 것이다.

==> 2019년 현재의 시점에서 볼 때, 우리 사회의 기조가 결과 지향에서 과정 지향으로 변해간다는 징조들이 사회 곳곳에서 점점 늘어나고 있다. 과정 지향만을 통해 원리와 원칙에 함몰되는 것도 효율이라는 측면에서는 무조건적으로 받아들이는데 리스크가 있다고 생각한다. 70년대부터 2000년대 까지 30여년 간 초압축 성장의 과정 상에서 결과가 옳으면 모든 것이 옳다는 목적 지향의 사회기조는 눈부신 경제발전이라는 큰 성과를 거둔 것이 사실이다.

 하지만 그 큰 성과의 뒤안길에서는 소수의 승자를 위해 고통받는 다수의 대중의 알려지지 않은 희생이 있었다. 1998년 IMF와 2008년의 세계 금융위기를 통해 발생한 경제하락의 과정에서는 그간 희생해왔던 다수의 희생이 강요되며, 혜택받던 소수는 이 희생을 피해나가게 되었다. 대중은 경제위기가 표면화되면서, 이러한 비대칭의 경제혜택의 부조리를 목도하게 되었다. 이는 소수의 혜택받은 이들의 모럴 해저드에 대한 대중의 분노를 불러일으키게 되었고, 이는 그간 경시되었던 과정의 윤리와 도덕을 요구하게 되었으며, 결과보다는 과정의 투명성에 대중이 관심을 갖게 된 계기가 되었다.

 지난 촛불혁명과, 올해 조국 사태로 촉발된 우리 사회의 교육,경제에 대한 양극화에 국민 전체가 관심을 갖게 된 것도 과정의 투명성이 지켜지지 않는다는 데 대한 대중의 분노가 그 모티브였다. 또한 조국 개인과 그 가족에 대한 검찰의 과도한 월권은 과도한 국가 권력을 민주주의의 원칙에 맞게 제한해야 한다는 국민적인 공감대를 불러일으키고 있다.

p97. 비자금 파문, 공짜 밝히지 말자

 

 처음 서독에 갔을 때 나는 프로 선수들의 쩨쩨함에 놀란 적이 있다. 원정 경기를 멀리 가게 되면 보통 새벽 두세 시경에 집으로 돌아오게 되는데 이때 버스 기사 아저씨에게 수고비를 거둬주는 돈이 1인당 3~5마르크(1500~2500원)였던 것이다.

 이 액수는 그곳에서 콜라 한잔 값에 해당되는데 이것도 이긴 날이나 거두지 늘 그렇게 하지는 않았다. 그러나 몇 년이 지나면서 나는 몇 푼 안돼 보이는 그 돈 역시 결코 작은 것은 아니라는 걸 깨달았다. 누구를 막론하고 월급 외에는 단 한푼도 만져볼 수 없는 그곳 사회에서 비록 작은 돈이지만 스물 댓 명이 거두는 그 돈은 그나마 프로 선수들을 상대하기 때문에 만져볼 수 있는 꽤 짭짤한 액수였다.

 여기에 비한다면 우리는 그 액수나 범위가 너무 크고 넓다. 어디를 가도 봉투는 가장 보편적인 인사 방법이다. 지금 노태우 전대통령의 4천억, 5천억 비자금 때문에 기를 박박쓰는 사람들도 촌지의 액수가 작으면 쩨쩨하다. 많으면 역시 통이 크고 멋있다고 상대방을 평가해 본적이 없지는 않을 것이다.

 그 사람의 월급이나 수입과 비례해서 봉투를 의심하거나 옳지 않다고 생각하지 않는다는 것이다. 통치자금, 정치자금, 비자금, 품위유지비... 이런 돈이 이 땅에서는 꼭 필요하다는 걸 부인할 수 있는 사람은 없다.

 나처럼 철저하게 원칙과 도덕을 따지는 사람도 소위 품위 유지비라고 할 수 있는 비자금이 꼭 필요한 사회이기 때문이다. 언제부터인지 나 역시 따로 주머니를 차고 있다. 물론 자금의 출처가 정확한 것이기는 하지만 집안의 생활과 내가 써야하는 돈의 비율이 비등해지는 현실에서 매번 마누라에게 달라고 할 수는 없기 때문이다. 

 고향에 찾아가 동네사람들이 모여 공을 차는데 한번 들러도 맨손(?)으로는 곤란하고 그 액수 역시 만만치 않은 경우가 허다하다. 바로 이것이 우리의 문화이고 관습이다. 나는 노태우 전 대통령과 비자금으로 야기된 사태를 지켜보면서 좀더 근본적으로 우리가 변하지 않는다면 사람들의 인심과 환심을 사야 하는 정치인들로서는 비자금의 필요성과 유혹을 뿌리치기 어려울 것이라 생각한다. 받는 쪽이 먼저 변해야 이 잘못된 문화는 없어질 수 있고 그 위에 도덕정치가 터를 잡을 수 있을 것이다.

 

p111. 악습 교정과 선수 기 살리기

 

 지난 올림픽 아시아지역 최종 예선전에서 한국 최고의 골게터인 최용수가 퇴장을 당하는 바람에 온 국민들이 바짝 긴장했던 적이 있다.

 일반 팬들의 입장에서는 워낙 중요한 선수가 빠지게 되니까 가슴이 덜컹 내려앉았고 축구를 잘 아는 전문가나 열성팬들의 경우는 중요한 고비에서 팀을 어렵게 만드니 화가 났던 것 같다.

 그날 밤도 방송을 하러 MBC에 갔더니 스포츠 보도국의 정국장님이 큼지막하게 써놓고 퇴근한 대본에는 도저히 방송으로 내보낼 수 없는 흥분한 문구로 꽉 차 있었다.

 그런데 개인적으로 최용수를 만나면 너무 순진하고 귀여워서 도무지 과격한 행동이 이해가 안 갈 때가 있다. 본인의 변명으로는 투지가 넘치다보니 그게 잘 안된다고 하는데 나는 최용수를 볼 때면 또 생각나는 선수가 있다.

 현대 송주석 선수인데 그는 스피드와 기량으로 볼 때 한국 무대에서는 최고의 제목인데도 불구하고 기량만큼 크지 못하는 선수였다.

 내가 그만 두고 고재욱 감독이 팀을 맡으면서 주석이의 플레이가 좋아지기는 했는데 마침내 지난 시즌 끝날 무렵에 상대 팀의 라커룸으로 쳐들어가서까지 한바탕하는 사건이 터지고 말았다.

 주석이를 데리고 있으면서 여러 명의 상대 선수가 다리가 부러지고 부상을 당해서 나는 아주 강경하게 나와 함께 일하는 동안 주석이는 어딘지 모르게 위축돼 있는 것 같았다.

=> 이런 애매한 문장을 보면 스포츠 신문에 연재할 때 편집자가 없었던 것 같기도 하다. 아마 이런 문맥일 것 같다. 

 주석이를 데리고 있으면서 그의 거친 플레이로 여러 명의 상대 선수가 다리가 부러지는 등의 부상을 자주 당했다. 나는 이런 사고가 발생할 때마다 강경하게 그를 꾸짖었다. 그때문인지 나와 함께 일하는 동안 주석이는 심적으로 위축돼 있던 것 같다.

 내가 주석이의 이런 부분 때문에 고민을 하자 아내는 "만희 씨(현 전북코치) 보고 욕을 빼고 말을 하라고 하니까 당신 앞에서는 말이 잘 안되고 더듬거리잖아요. 똑같은 거지요 뭐!" 하면서 참견을 했는데 그 옆에 있던 최만희 코치의 부인이 "고것이 정답이네요" 하면서 즉각 거들고 나서는 것이었다.

 몸에 익힌 습관. 이것은 나이가 들어서 고치기는 힘든 모양이다. 바로 이렇게 힘든 남들의 습관을 꼭 모범 답안으로 고쳐두어야 직성이 풀리는 나의 습관도 상대방 입장에서는 고약하기는 똑깥을 것이다.

 

p113. 고교 감독은 로비스트(?)

 

 KBS-TV에서 우리 나라 운동선수들의 문제점들을 취재 보도한 적이 있다. 이날 얘기들은 진학에 얽힌 비리에 초점을 맞추면서도 비교적 완곡한 수준에서 취급했다고 할 수 있다.

 물론 어느 학생의 증언처럼 "부모님들이 나를 대학 보내는 데까지 그랜저 수십 대 값이 들었다"고 하는 식의 자극적인 증언도 있었지만 왜곡돼 있는 현실과 비교해 본다면 대체적으로 누구나 다 알고 있는 수준이었다고 할 수 있을 것이다.

 감독 중 가장 힘든 건 고등학교 감독들이다. 이들 중 상당수는 지도자라기 보다는 차라리 로비스트라고 해야 옳을 만큼 아이들을 가르치는 일보다 어떻게 해서든 대학 감독들과 끈을 맺어서 한 명이라도 더 대학에 보내는 게 중요한 임무가 돼버렸다.

 가장 많이 배워야 하는 연령의 아이들을 지도해야 할 감도들의 임무를 생각한다면 한국 축구로서는 이만저만 손실이 아니다. 그러나 대학 진학이 지상 목표가 돼버린 현실에서 부모들 역시도 당연히 이 작업에 적극 동참할 수밖에 없는 일이고 보면 진학 과정이 비리의 온상이 될 수밖에 없는 조건이 이미 완벽하게 갖추어 졌다고 봐야할 것이다.

 지금 고등학교 지도자들의 봉급 수준은 몇몇 케이스를 제외하고는 형편없는 평균이하의 수준이다. 1백만 원이 채 안되는 감독들도 부지기수다. 그러나 이들에게 자가용에 핸드폰은 기본일 뿐더러 거의 매일 이어지는 사람 만나기(접대) 비용 역시 이들의 수준을 이미 벗어난 지 오래인 것이다.

 물론 이것은 학부모들의 몫이고 어찌 보면 아이를 대학으로 보내기 위한 지원금인지도 모른다. 물론 더러는 이런 현실을 이용해 아주 악질의 지도자가 없지는 않지만 바로 이런 행위를 힘들고 괴로워하면서도 어쩔 수 없이 해야 하는 안쓰러운 감독들도 적지 않다.

 내 밑에서 공을 차자 지도자로 나선 선수들도 꽤 있는데 바로 이런 짓(?)이 적성에 맞아 신바람내는 경우도 있는 하면 너무 힘들다고 하소연하는 경우도 있다. 어떤 지도자의 부인은 "우리 아기 아빠는 고스톱을 못하고 술을 못해서 걱정"이라며 걱정 아닌 걱정을 늘어놓기도 한다.

 언젠가 운동하는 아들의 뒷바라지를 제대로 못한다는 부담감으로 자살을 했던 아버지도 있었다. 외국에서 볼을 차다가 귀국한 선수들의 부모는 한 달에 수십만 원씩 들어가는 비용에 혀를 내두르기도 한다. 아마도 우리 나라처럼 많은 돈이 들어간다면 축구 선진국이라고 할 수 있는 독일에서는 축구를 시킬 수 있는 부자가 거의 없을 것이다. 그곳에서는 한푼의 돈도 필요 없기 때문이다.

 나는 지금 무엇부터 얘기해야 할지조차 모르겠다. "지금 우리 나라의 어느 부문에 손을 대도 썩은 고름이 나지 않는 곳이 없다"는 것이 검찰의 탄식. 그러나 그들에게 벌을 주기 이전에 그렇게 하지 않고는 살아남을 수 없는 '도덕불감증'을 강요당하며 괴로움을 겪고 있는 많은 사람들에게 용기를 주는 깨끗한 사회로의 변화가 더 급하고 바람직하지 않느냐는 생각이다.

 

p122.

 여름, 겨울 휴가를 마친 뒤 한 차례씩은 반드시 열흘 정도의 합숙을 아주 조용한 곳으로 떠났었다. 이 기간은 그야말로 먹고 훈련하고 곯아떨어지는, 더 이상의 아무 생각도 없이 지내야하는 힘든 기간이지만 이 훈련을 마치고 나면 다시 경기를 할 수 있는 몸이 만들어지는 게 처음에는 신기하기도 했었다. 일단 몸이 만들어지면 그 다음부터는 가벼운 반복 훈련만으로도 기능이 유지되는데 그게 바로 매일 운동을 조금씩이라도 하는 사람은 별로 힘들이지 않고 할 수 있는 것과 똑같은 이치다. 이런 훈련이 뒷받침되지 않아서 체력이 불충분하면 근육 사이 이외에 또 하나의 체내 에어지 공급처인 뇌와 간에 축적된 에너지를 우리 몸이 사용하게 되기 때문에 뇌는 상황을 정확하게 인지하고 지시할 수 없고 간은 구토를 일으키기도 하는 것이다.

 그런 상태서 기술이나 전술훈련은 아무 의미가 없고 잦은 패스미스 역시도 정신 집중 이외에 바로 이런 부분에서 기인한 것이기도 하다.

 

p134. 문화 따라 코치 역할도 다르다.

 

 이랜드의 이영무 감독이 올림픽 대표팀의 코치직을 사퇴했다.

 개인적으로 나는 비쇼베츠에게도 비교적 호감을 갖고 있을 뿐 아니라 이영무 감독과도 각별한 사이기 때문에 두 사람 모두에게 상처가 돌아가는 이번 일을 지켜보면서 마음이 별로 편하지 않았다.

 더구나 문제의 근원이 어느 한 사람에게 있는 것이 아니고 동서양의 문화 차이에서 오는 것이라서 더욱 그랬다. 우리 나라에서는 감독이 자신의 의견보다는 모든 사람과 의견을 나누고 주위의 의견을 잘 받아들일 때 겸손한 감독, 좋은 사람이라는 칭찬을 받는다.

 그러나 서양에서의 감독은 자신의 생각이 뚜렷하고 그것을 흔들림 없이 밀고 나갈 때 훌륭한 지도력을 가진 감독으로 꼽는다. 그렇기 때문에 우리 나라에서는 코치의 비중이 높고 그 역할 또한 유럽에 비해 중요한 편이다. 그러나 유럽에서의 코치는 단순한 어시스턴트에 불과할 뿐 어떠한 권한이나 영향력도 갖지 못한다. 바로 여기에서 이영무 감독과 비쇼베츠의 문제가 시작되었다.

 감독은 바깥 정치(?)를 주로 하고 코치는 가르치는 일을 해왔던 지금까지의 역할에 익숙한 이영무 감독으로서는 감독이 휘슬을 직접 물고 지도하는 비쇼베츠 감독의 단순한 보조자로서는 자존심이 상할 수밖에 없었을 것이다. 또 혼자서도 능히 올림픽 대표 팀을 끌고 갈 수 있는 이영무 감독의 능력 역시 유럽식 코치의 단순한 임무를 맡기에는 어울리지 않는 것이다.

 그러나 비쇼베츠로서는 너무나 당연한 역할 분담이다. 감독의 개성과 지도력, 그리고 자신만의 축구가 없이는 능력 있는 감독으로 평가받을 수 없는 유럽에서 모든 스태프는 감독을 돕기 위해서 존재할 뿐인데 그들의 의견을 꼭 들어야만 한다고는 생각하지 않기 때문이다. 전통적인 우리들의 감독 역할이 유럽 사람들 눈에는 매우 우유부단하고 책임감 없는, 무능한 지도자로 보일 뿐이다.

  "잘모르겠는데요."

 "한번 의논해 보지요."

 바로 이런 말들이 겸손으로 받아들여지는 동양과 무능으로 취급되는 서양의 차이가 이영무 감독의 올림픽 코치직 사퇴를 낳게 한 것이다.

 

 p138. 스포츠 세계화 - 폭력 추방부터

 

 우리는 지금 세계화를 부르짖고 있다.

 그 의미가 세계적인 수준과 실력을 겨룰 수 있는 각 분야의 질적 향상도 되겠지만 그 보다는 세계인과 섞여 사는데 무리가 없는 한국이 되는 게 더 먼저인성 싶다.

 예의범절, 도덕성, 정직성 그리고 순화된 인성도 세계인이 되는데는 큰 몫을 차지하게 될 것이다. 얼마 전 TV로 보도되는 외국인 근로자들의 호소를 접하면서 일반적인 많은 사람들이 '우리 국민이 저토록 잔인한가?'하는 괴로운 마음을 가진 적이 있었다.

 보고 듣기가 민망할 정도의 사건들이 일어나고 있었다. 실제로 나는 우리 나라 국민들이 비교적 성격이 급하고 폭력과 가깝다는 생각을 자주 한다. 특히 세계 스포츠 무대에서 남북한이 번갈아 가며 보여 온 폭력과 비신사적인 행위는 말할 것도 없고 이런 사건들을 별 무게 없이 취급하는 언론 역시도 이 부분에 놀라울 정도로 관대(?)한 편인 것 같다.

 83년 본선 진출권을 얻은 북한이 FIFA로부터 징계를 받음으로써 한국의 세계 4강 신화를 이룰 수 있었던 기회를 제공해준 당시 북한 팀의 경기장 난동 장면을 나는 독일에서 신문의 4분의 1을 차지하는 대형 사진을 통해 보았었다. 그러나 귀국 후 보니 우리들 주변에서 너무나 자주 일어나는 그라운드의 폭력이 별 문제시되지 않고 있다.

 지난 겨울 일화의 이종화 선수가 월드컵 대표 팀의 전지 훈련에 합류했다가 연습 경기 중 비신사적인 행위를 했다고 해서 FIFA로부터 징계를 받고 국내 리그에도 참여하지 못한 적이 있다. 이것 역시도 우리들의 자체 징계가 아니고 FIFA의 징계였던 것이다.

 스포츠가 세계를 움직이는 힘을 갖는 것은 그 바탕이 '페어 플레이'로 정치에서 기대할 수 없는 친선과 교육 효과를 가지고 있기 때문이다. 

 나는 이런 의미에서 앞으로 세계 무대에 태극기를 달고 나간 우리 선수들 중 어떤 이유에서라도 비신사적인 행위나 폭력을 사용했을 때는 귀국 후 아주 엄한 징계를 주어야 한다고 생각한다. 국제 무대에서의 그런 모습들은 우리가 생각하는 것 이상으로 우리를 깍아 내리고 세계화와는 정반대의 행위이기 때문이다.

 

p146. 윤정환, 고정수와의 전쟁이 시작되다.

 

 윤정환, 고정수.

 지금도 이들 둘만 생각하면 어려운 숙제를 끌어안은 듯 답답함을 느낀다. 앞으로 반 년여 동안 이들 두 녀석을 길들이고 '차범근화'하기 위해 해야 할 기력 소모를 생각하면 올 겨울에는 보약 한 재 정도는 넉넉히 먹어 둬야 하지 않을까 하는 생각도 없지 않다.

 이들 둘은 게으르고 꾀가 많은, 사이좋은 선후배 관계다. 그러나 고종수는 좀 나은 편이다. 야단도 맘껏 칠 수 있고 여차하면 볼기짝도 패줄 수 있는, 소위 성격상 다루기가 쉬운 유형에 속하기 때문이다. 그러나 윤정환은 많이 다르다.

 말 수도 별로 없는 데다가 붙임성이 좋은 그런 성격이 아니라서 서로 간의 마음을 열 수 있는 통로가 썩 원활하지 못한 케이스다.

 선수들 중에는 여러 가지 부류가 있다. 우선 늘 열심이면서 자기 일을 틀림없이 해내는 완전한 프로는 성격의 색깔이 별로 중요하지 않다. 내가 원하는 게 바로 이런 선수들인데 대표팀 선수들이 대부분 여기에 속하고 나 역시 이런 선수들을 중심으로 팀을 만들려고 애쓰는 편이다.

 그러나 수 십 명의 선수 중 모두가 다 그럴 수는 없다. 고종수나 김병치처럼 꼭 튀는 선수가 있다. 그나마 이들은 맘껏 야단치고 요리할 수 있어서 목이 아프고 힘은 들지언정 스트레스를 받지 않는다. 그러나 가장 힘들고 신경이 많이 쓰이는 선수는 무엇을 생각하는지 알 수가 없이 늘 얼굴을 찌푸리고 다니는 부류다. 직장이고 어디고 반드시 있을 것이다. 힘든 훈련과 치열한 경쟁으로 주전, 비주전을 가리는 대표팀의 예민한 분위기 속에서 바로 이런 선수들은 감독을 엄청나게 피곤하게 하는 것이다.

 그리고 팀 분위기를 망쳐 놓는다. 더구나 고참 급에 속하는 노장 선수가 그렇다면 그것은 대책 없이 피곤해지는 것이다. 이제 윤정환, 고종수와의 전쟁은 시작된 것이나 다름 없다. 지금 이들의 상태로는 내가 쓸 수 없기 때문이다. 앞으로는 한국보다 더 높은 기량을 가진 팀들과의 경기 뿐인데 11로 전원이 자기 몫을 해줘도 기량 면에서 부족한 게 우리들의 현실인데, 자신의 몫을 다른 사람이 대신 해준다는 것은 있을 수가 없는 일이기 때문이다.

 이제 둘은 변신에 성공하면 살아남을 것이다. 그러나 그게 아니면 수비가 우선적으로 안정되야 공격력이 살아난다는 축구관을 가진 나로서는 과감하게 도태시킬 수밖에 없다. 이들은 우선 세계적인 팀들의 미드필더들이 얼마나 많이 뛰는지를 TV나 경기 비디오 테이프로 계속 보아야 한다.

 그들의 기량이 자신들보다 훨씬 높음에도 불구, 더 나은 자신이 역할을 위해 얼마나 미친 듯이 뛰어다니며 악착을 부리는 지를 진심으로 깨달아야 한다는 것이다. 그게 충분히 인식되고 공감할 수 있으면 그 다음은 훈련장에서 행동으로 옮겨야 한다.

 나에게도 그들에게도 힘든 싸움이 될 것이다. 그러나 그들의 인내와 노력으로 이것이 성공한다면 이건 틀림없이 한국 축구와 팬들에게 가장 큰 선물이 될 것이다. 인내하고 참는 것이라면 항상 자신이 있다. 그래서 이미 그들에게 도전장을 던져 놓았다. 성공 여부는 그들의 몫이다. 단단히 마음의 준비를 해야 할 것이다.

 

p151. 오버래핑을 차단하다.

 

 내가 선수 생활을 하던 때였다.

 81독일 선수권 대회의 결승전이 있던 날이었다. 전통적으로 맨투맨 수비를 쓰는 독일에서 최전방 공격수와 전담 마크맨의 1대1 싸움은 경기의 승패를 좌우한다고 할만큼 중요한 전술 부분이다. 이때 상대방의 간판 수비수인 브리겔은 올림픽 10종 경기 국가 대표 출신답게 모든 면에서 뛰어난 선수였는데 거기다 그는 남아도는 힘과 스피드로 공격에 가담해 스스로 득점을 하는 아주 위협적인 존재였다.

 경기 전 부흐만 감독은 나에게 특별 지시를 내렸다. 90분 내내 절대 한 자리에만 머무르지 말아라. 공을 차지 않아도 좋으니 국가 대표 수비수인 브리겔을 몰고 전후좌우로 다니면서 브리겔의 공격력을 무력화시키라는 것이었다. 나는 쉬지 않고 움직였고 브리겔은 씩씩거리며 따라다녔다.

 결국 이 틈바구니에서 공격수 출신 풀 백인 노이어베르거가 선취 득점을 했고 우리는 2대 0으로 리드할 수 있었다. 그리고 후반 종반 쯤 원래 움직이는 사람보다 따라다니는 게 더 힘든 법이이서 지쳐 있는 브리겔을 따돌리고 내가 점프 헤딩 슛으로 3대 0을 만드는 것까지 성공했다.

 이날 경기를 본 사람이라면 치고 달리며 공을 다루는 시간이 적은 내 경기에서 불만이 많았을 것이다. 그러나 감독은 대만족이었다. 물론 브리겔의 체력 저하로 내가 득점까지 얻어내자 작전의 성공에 마침표를 찍을 수 있어서 더욱 통쾌했겠지만 바로 이런 경우 운동장 밖에서 별볼일 없는 선수가 감독에게는 아주 중요한 무기가 되어 주는 것이다.

 내가 대표팀을 맡고 노르웨이와 첫 경기를 치르던 날, 독일의 친구들은 노르웨이 풀 백의 오버래핑과 득점은 가공할만하다면서 거푸거푸 주의를 주었다. 덴마크 프로팀 소속으로 독일에 와서 유럽 선수권 대회를 치르는데 슈팅 그 자체가 대표 같았다는 것이었다.

 나는 하석주에게 단단히 일렀다. 물론 당시 상황으로는 먹지 않는 게 무엇보다 필요했기 때문이었다. 공격에 가담하지 않아도 좋으니 상대방이 오버래핑하지 못하도록 미리 차단하고 절대로 슈팅 기회를 주어서는 안된다. 석주는 완벽하게 해냈다. 다만 TV에서는 그의 모습을 볼 수 없었을 뿐이었다. 바로 이런 경우 감독에게는 성공하고 선수에게는 실패처럼 보이는 경기가 되고 마는 것이다.

 도쿄에서 한일전이 끝나고 나는 고정운에게 많은 칭찬을 해줬다. "너 개인적으로는 만족스럽지 못한 경기였지만 전술적으로는 대단히 만족스럽다. 결과적으로 너는 온르 나에게는 성공한 선수다." 이날 정운이에게는 줄기차게 많이 뛰어서 공격 가담을 늘리는 상대방을 철저히 무디게 하라는 임무를 주었다. 더구나 그곳은 적지였기 때문에 상대방의 기를 살려 놓는다는 것은 기름을 부어 주는 것이었다.

 서울에서 보았듯이 같은 팀이지만 정운이가 대퇴부 근육 이상으로 도쿄서만큼 움직여 주지 못하고 서정원이가 반대쪽 공격을 저지해주지 못하자 실점을 한 것이다. 바로 이런 것을 통해 공격수들의 수비 능력이 얼마나 중요하다는 것을 느껴야 한다. 팬들은 치고 들어가서 슈팅을 하고 문전에서 움직이는 그런 모습을 기억해 낸다.

 그러나 감독은 바로 저 순간 도와주지 않고 그냥 있는 선수들의 수비 나태가 더욱 불만스러운 것이다. 상대가 강팀일 수록 더욱 그렇다. 그래서 이전의 우리 선생님 한분은 그런 선수를 가리켜 "팬들을 기만하는 선수"라고 혹독하게 야단친 것을 본적이 있다.

 팬들을 기만하는 선수는 팀 전력에 실질적인 보탬이 안되기 때문이다. 그럼에도 팬들은 그를 기억하는 게 감독을 고민케 하는 또 하나의 짐이다.

 

p169.

 선수의 부상은 정신력이 흐트러지거나 최고의 컨디션이 아닐 때 자주 나타난다. 나 자신이 아픈 선수나 컨디션이 안 좋은 선수보다는 기량이 좀 떨어지더라도 완전한 몸을 가진 선수를 내보내려고 하는 이유 중 하나도 부상을 염려하기 때문이다. 

 그래서 지난 우즈베키스탄 전을 마치고 본선 진출이 확정되자 "가능한 이번 경기는 그 동안 뛰지 못했던 선수들에게 기회를 주고 싶다"고 했던 것인데 그것은 "한 번쯤 뛰고 싶다"는 정신력이 지금 상황에서는 어떤 것보다 우위일 것이라는 판단이 되었기 때문이었다.

 그러나 그것 역시 쉽지가 않았다. 지난 한 주 내내 훈련 결과가 좋지 않았던 최용수였다. 그러나 홈에서의 마지막 경기에서 그동안 가장 공을 많이 세운 용수에게 주중 훈련이 부실했다고 스타팅에서 제외하고 싶지는 않았다. 물론 목숨을 걸고 이겨야 하는 경우였으면 나 역시 좀 더 냉정했을 것이다.

 지금도 경기에 졌기 때문에 용수의 출장이 아쉬운 게 아니라 바로 그런 훈련 상태서 부상 위험이 높다는 사실을 누구보다도 잘 알면서 내보 낸 나의 냉정치 못한 결정이 용수의 코뼈가 부러지는 큰 부상으로 이어지자 바로 그것이 아쉬운 것이다. 고정운의 경우도 마찬가지다. 허리가 아프고 시합 전날도 근육이 한번 뜨끔했다는 얘기를 팀 닥터로부터 전해 들었다. 예전 같으면 어림도 없는 일일텐데 본인이 괜찮다며 기어이 출전하고 싶어하는 것을 보자 "우즈베키스탄 전에서 모처럼 골을 넣었으니 그 뒤풀이도 하고 싶을텐데 한 번 들어가서 소원 풀어봐라"하는 냉정치 못한 판단으로 출장을 허락했다. 근육 이상은 날씨가 추우면 더욱 위험률이 높아진다. 결국 한번 제대로 뛰어보지도 못하고 근육 부상만 악화되는 결과를 얻고 말았다.

 

p180. 너무나 길고 힘들었던 3년 간

 89년 독일에서 선수 생활을 마치고 지도자 교육 과정을 공부하면서 가장 존경하는 스승인 네덜란드의 리누스 미셸 선생님에게 "지도자도 열심히 하면 성공할 수 있는 직업이냐?"고 물은 적이 있다.

 당시 나는 지도자 과정을 공부하면서도 한국적 지도자 모습에는 스스로 자신이 없던 터라 귀국 후 꼭 팀을 맡아야겠다는 확신이 서지 않았기 때문이었다. 그 때 선생님은 수 십년 간의 경험에서 오는 확신으로 단호히 얘기해 주셨다. "열심히 일하는 감독만이 성공할 수 있다. 감독이 얼마나 열심히 일하는지는 선수들이 가장 잘 알기 때문이다."

 그리고 선생님은 덧붙여 "선수 기용은 절대로 소신대로 정당하게 해야 하며 이것이 무너지면 결국 자살골을 넣게 되고 만다"면서 "특히 너처럼 사람들로부터 많은 사랑을 받는 사람은 책임도 그만큼 크기 때문에 팀을 맡을 때는 주변 정리를 완벽하게 하고 반드시 소신껏 일할 분위기가 되었을 때만 팀을 맡으라"는 충고도 거급거듭 해주셨다.

 그리고 1년 후.

 내가 현대팀을 맡아 바닥에 있는 팀을 준우승시키면서 감독 취임 첫 해부터 스포츠 서울과 일간 스포츠에서 주는 '올해의 감독' 상을 받을 때만 해도 정말 나는 지금처럼 재미있게 일했다. 큰돈을 들여서 선수들을 사들이는 데는 별 흥미가 없는 나는 어린 선수들이 쑥쑥 크는 재미로 힘든 줄 몰랐고, 당시 단장이셨던 윤국진 현 울산시 축구협회장님은 나의 명예를 걸고 하는 그 일에 신뢰와 지지를 아낌없이 보내주었던 정말 신명나는 한 해였다. 그러나 그해 겨울, '왕회장'님께서 대통령 선거에 출마하시면서 윤국진 단장님이 선거관리 본부책임자로 불려나가시자 나는 한쪽 날개가 완전히 떨어져나가 버린 꼴이 되었고, 그 후 3년은 그야말로 매순간 그만두고 싶었던 너무나도 힘든 그런 시간의 연속이었다.

 내가 처음 현대에 발을 들여 놓았을 때 당시 고려대학교 동문회 회장이신 정세영 회장님은 "우리 동문중 가장 자랑스러운 인물인 차범근과 이명박을 현대가 갖게 돼서 너무 영광이다"면서 단장님에게 "잘 도와서 감독으로서도 훌륭히 키워줘야 한다"며 나에 대한 각별한 애정을 보여주었다. 그래서 회사에서도 보통의 감독 대우 이상으로 예우를 해주었던 것은 사실이다.

 하지만 단장님이 선거 때문에 떠나자 서울에 볼 일이 있어 올라 갈 때마다 공항으로 내보내주던 회사 차도 "택시 타라고 그래"하면서 끊어버렸고 합숙 중 술담배를 하지 않는 우리 코칭스태프들이 디저트로 먹는 호텔의 2천원짜리 아이스크림마저 "왜 300원짜리를 사다주지 비싼 걸 먹게 하느냐"며 구단 직원들을 윽박지르는 간접 인신 공격과 자존심을 뭉개는 비하는 지금 생각해도 가슴이 아프며 당시의 3년은 너무나 길고 힘들었다는 생각이 든다.

 그리고 바로 이런 것들을 해결하지 못하고 이겨내지 못하는 것은 나의 결정적인 약점이기도 하다. 그래서 대표팀 감독을 맡을 때 나는 선생님의 말씀을 기억하면서 주위를 찬찬히 살폈다. 그리고 이상없음을 확인했다. 그리고 너무나 열심히 신명나게 일만했다.

 그래서 더욱 행복했다. 카자흐스탄, 우즈베키스탄 원정 경기서 UAE 감독관이 거푸 배정되자 사실 별 것이 아닌데도 "말도 안된다"면서 바꿔달라고 신경질을 부렸다. 협회는 부랴부랴 FIFA에 편지를 보내서 해결해주었다. 왠지 마음이 편했다.

 경기가 끝나자 오완건 부회장님, 김원동 부장, 가삼현 부장에게 슬그머니 미안해졌다. 바로 이런 축구협회의 분위기가 우리 선수들과 나에게는 안심하고 최선을 다할 수 있는 가장 큰 힘이 돼주었다.

p212.

 '샤덴 프로이데'라는 심리학 용어가 말해주듯이 인간은 남의 불행을 보면 본능적으로 쾌감을 느끼게 되어 있다.

 

p241.

 얼마 전 아들 녀석이 학교에서 선배들과 모여 앉아 잡담을 하면서 "다시 태어나면 무엇을 할까"를 서로 얘기했던 모양인데 녀석은 "다시 태어나도 축구 선수를 하겠다"고 했더니 모두들 "돌았다"고 하더란다.

 말하자면 이미 이 연령(고등학생)이 되면 축구를 정말 하고 싶다는 즐거움이 없어져 버린다는 얘긴데 얼마 전 조사된 초등학교 축구 선수들의 경우도 비슷하다는 결론이 나온 모양이다. 초등학교 축구 선수들이 축구를 하기 싫은 첫 번째 이유는 이미 많이 알려진 사실처럼 구타가 무서워서였다고 한다.

 두 번째가 훈련이 너무 많아서, 그리고 세 번째는 돈이 너무 많이 들어서였다고 한다. 

 

p254. 운동장도 없는 축구 교실

 

 언젠가도 소외된 자들의 대변인으로서 바른 사회 만들기에 앞장서는 일을 대표적으로 나서서 하던 사람이 불법으로 집을 짓고 마당을 넓히는 등 정작은 옳지 않은 일을 마다하지 않았던 게 문제가 돼 시장이 된지 며칠만에 그만 둔 적이 있었다.

 그때도 나는 참담한 기분이었는데 어린이 심장재단에 관여했던 L씨(부연 설명 : 뽀빠이 이상용 씨를 말함. 이 사건은 누명으로 밝혀져서 이상용씨는 법적으로 무죄를 입증했다. 자세한 것은 검색해보면 많이 나온다.)의 경우는 개인적으로도 친분이 있을 뿐 아니라 15~16년 전만 해도 그나 나나 꼬마들의 사랑을 듬뿍 받던 때라 "나중에 너랑 나랑 대통령 선거에 나가서 누가 더 인기가 있는지 알아보자"는 농담을 자주 했을 만큼 어린이들을 사랑하는 사람으로 믿어왔기 때문에 허탈감이 더했다.

 그러는 중에도 "단체를 운영하려면 비자금이 반드시 필요하다"는 그 분의 인터뷰 내용은 나도 모르게 쓴웃음이 나올 만큼 공감이 가는 부분이기도 했다.

 축구교실 운영을 좀더 체계 있게 하기 위해서 7년쯤 저 사단법인 허가를 신청했을 때의 일이다. 법인 신청을 하기 위해 우리 사무실에서 열심히 준비해서 갖다 준 서류가 특별한 이유도 없이 퇴짜를 맞는 것이었다. 그때 나는 독일에서 귀국한 직후였고 운영 자체가 내 개인의 광고 모델료나 방송 출연료 같은 것으로 되고 있었기에 내가 그들에게 상을 받았으면 받았지 사정(?)을 해야할 이유가 없다는 게 내 생각이었다.

 거의 1년여를 '차범근이 직접 오라'면서 끌던 것을 우연히 파티에서 만난 당시 박철언 체육부장관이 '팬'이라면서 반가워하는 바람에 체육부에서 퇴짜를 맞고 있는 서류 이야기를 하고 난 후 일이 일사천리로 끝났던 적이 있다.

 그 뿐이 아니다. 아이들이 연습할 운동장을 빌려쓰는 데서부터 어느 한 곳 그냥 지나가는 일이 없는 것이 우리 나라의 현실이다.

 얼청난 정부 예산으로 유명 선수 축구교실을 지원하는 경우에도 지도자들의 보수를 지불해서 더 어려운 곳을 개설해 달라는 요청은 무시하고 지난 해에는 현실적으로 별로 도움이 되지도 않는 물품으로 반드시 지불해야 한다면서 운동자도 없는 축구교실에다 기가 막히게도 골대를 지원하겠다고 품목을 적어보냈다.

 우리 축구교실에서는 연구 끝에 그 골대를 운동장에 있는 곳에 보내주고 우리는 그 운동장을 빌려 써야겠다고 아이디어를 짜보았지만 1년이 넘는 지금까지 수 차례 독촉에도 골대는 나타나지 않고 올해는 그나마도 1천여 명이 넘는 우리 축구교실에는 그 엄청난 예산 중 공 100개만 지원하겠다는 것이었다. (차범근 감독이 글을 좀 더 조리있게 쓰셨다면 해결될 일이 많았을 지도 모르겠다. 좀 억울한 사연에는 할말은 많은데 마음이 앞서는지 글을 이렇듯 맥락 파악하기가 어렵게 쓰시는 경우가 있다.)

 또 몇 달 전 집사람에게 사정사정해서 얻어낸 돈 몇 천만 원으로 여의도에 만들어 놓은 미니 축구장도 납득할 만한 이유도 없이 몇 달째 사용허가가 나지 않고 있다.

 바로 이럴 때 원칙만 따지는 사람은 열만 받거나 포기해 버리는 것이고 능력 있는 사람은 비자금을 동원, 매끄럽고 쉽게 처리하는 것이다.

 이렇듯 서로가 서로를 못 믿고 손가락질하는 세상에서도 사람들은 자기를 희생하면서 사는 산소 같은 누군가가 존재하기를 바라고 그런 이들을 사랑하고자 한다. 그래서 그들의 생활도 더욱 밝고 투명해야 할 책임이 있다고 나는 믿는다.

 바로 이런 대상이 주는 실망. 이것은 세상을 냉소주의에 빠뜨리게 하는 가장 큰 독성을 지닌 혐오스러운 일이 아닐 수 없다.

 

 

20년 간 현업에서 치과 의사로서 경험했던 임상경험을 바탕으로,  그간 치대에서 배워왔던 지식들의 오류와 우리가 상식적이라고 생각해왔던 고정관념들의 잘못들에 대해서 이야기하고 있다. 

우리는 그간 건강에 대한 상식들이 넓어지면서 일반 병원 치료에 대해서는 많은 논의와 생각들이 있었지만, 비교적 치과에 대해서는 그러한 논의와 생각들이 적었던 것 같다. 이 책은 그러한 우리에게 하나의 시사점을 던져준다.

이 책은 특히 유치에서 영구치로 이갈이를 시작한 연령대의 아이를 둔 부모들과, 교정이나 양악을 생각하는 사람들이 치료를 받기 전에 읽으면 큰 도움이 될 내용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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p22.

 

 이렇게 치아의 배열이 불규칙하거나 위턱과 아래턱의 맞물림이 바르지 않은 상태를 '부정교합'이라고 합니다. 초등학생의 60%가 부정교합이라는 통계자료도 있지만 더 엄격한 기준으로 판단하면 대부분의 아이들이 부정교합을 갖고 있습니다. 유치를 적절한 시기에 빼지 않아서 부정교합이 되었을까요? 그렇지 않습니다. 치아가 바르게 배열될 사람과 불규칙하게 배열될 사람은 이미 정해져 있습니다. 그걸 어떻게 알 수 있을까요?

 그림 1-A처럼 앞니 사이가 벌어진 상태가 정상적인 유치의 배열이고, 이는 턱의 크기가 적절함을 의미합니다. 유치보다 영구치가 더 크기 때문에 영구치가 바르게 나오려면 앞니 사이가 어느 정도 벌어진 상태여야 합니다. 그런데 요즘 아이들 가운데 앞니 사이의 공간이 있는 아이는 거의 없고 그림 1-B처럼 유치 앞니가 촘촘하게 배열된 경우가 대부분입니다. 유치 사이에 공간이 없으면 영구치의 배열이 불규칙해질 가능성이 높고, 미리 유치를 빼주어도 영구치가 바르게 배열될 가능성은 높지 않습니다. 

 물론 유치 앞니들이 촘촘히 배열되어도 영구치가 바르게 배열될 수 있으며, 또 영구치 배열이 불규칙해도 너무 걱정하지는 마시기 바랍니다. 어떻게든 치아는 배열되고 아이는 잘 살아갈 것이기 때문입니다. 그걸 어떻게 알까요? 영구치 배열이 불규칙한 우리도 지금까지 잘 살아왔기 때문입니다. 여러분 중에서 어릴 때부터 치과에 다니며 유치를 뽑은 사람은 그리 많지 않을 것입니다. 현재 30~40대 이상의 사람들은 대부분 집에서 부모님이 빼주셨거나 자신이 직접 뺐을 것입니다.

 그럼 치아가 불규칙한 사람들은 유치를 제때 뽑지 않아서 그런 것일까요? 만약 그렇다면 유년 시절에 치과를 많이 다닌 현재의 20대 이하 젊은이들의 치아 배열이 가장 좋아야 합니다. 하지만 현실은 그렇지 않고 오히려 정반대입니다. 저렴해진 교정 비용, 외모 지상주의 등의 이유도 있지만 치아 교정을 가장 많이 받는 세대가 현재의 젊은 세대입니다. 치과에 오는 사람들을 관찰해보면 1960년 이전 출생자 중 배열이 불규칙한 사람은 많지 않습니다. 그 당시에는 치과에 가서 유치를 빼는 경우가 없었는데도 대부분 가지런한 치아를 갖고 있습니다. 그야말로 아이러니한 일입니다.

 

p30.

 

 그림 1-A는 '씹는면 충치', 그림 1-B는 '사이 충치'를 보여줍니다.

 식생활, 구강위생 등의 조건에 따라 차이가 있지만, 씹는면 충치는 그냥 방치해도 괜찮은 경우가 많습니다. 굳이 치료를 한다면 보험 적용이 되는 저렴한 재료로 때워도 무리가 없습니다. 그러나 유치 사이에 충치가 생기면 음식물이 끼어서 아이가 아파하기 때문에 치료를 하게 됩니다. 씹는면 충치와 달리 사이 충치는 레진, GI 등의 치과 재료로 때워도 재료가 잘 탈락되거나 주변이 다시 썩는 경우가 많습니다. 그래서 유치 어금니에 사이 충치가 생기면 그림 1-C처럼 '스테인리스 스틸'로 된 SS크라운으로 씌웁니다. 치과의사의 성향, 아이의 생활 습관, 충치의 정도에 따라 씹는면 충치도 크라운으로 씌우기도 합니다. 

 이렇게 치아 사이가 썩어서 SS크라운으로 씌울 때는 충치의 진행 정도에 따라 신경 치료를 하기도 합니다. 아이의 반응을 살펴 부분 마취나 수면 마취를 합니다. 이처럼 유치의 사이 충치는 때워도 잘 떨어지기 때문에 힘들어도 처음부터 씌우는 것이 교과서적인 방법이 되었습니다.

 

 그러나 필자는 SS크라운을 하지 않고도 유년기를 잘 보낼 수 있다고 생각합니다. 이 주장을 뒷받침하는 사례를 보겠습니다. 

 

 그림2의 어린이는 초등학교 1학년 이후 유치 사이가 썩기 시작했습니다. 처음에는 다른 치과에서 '레진'이라는 재료로 때웠습니다. 3학년 때는 유치 어금니 사이가 썩어 필자의 치과에서 GI라는 재료로 때웠습니다. 4학년 때 유치 어금니에 있던 레진이 떨어져 GI로 때웠고, 다른 유치 어금니는 사이 충치가 심해져서 신경 치료를 한 뒤 SS크라운을 씌우는 대신 GI로 때우고 치료를 마무리했습니다. 6학년이 되면서 검진차 내원했는데 유치 어금니에 이어 영구치 작은 어금니들이 잘 나왔고, 신경 치료를 하고 때우기만 했던 유구치는 곧 빠질 상황이었습니다. 영구치가 나올 때까지 잘 버텨주어 영구치를 위한 공간 유지 기능이라는 유치의 업무를 성공적으로 해냈습니다.

 앞의 예처럼 유치 사이가 썩었을 때 GI라는 재료로 때운 뒤에 떨어지면 다시 때우기를 반복하거나, 더 썩어서 신경 치료를 한 뒤 SS크라운으로 씌우지 않고 GI로 때우기만 해도 영구치가 나올 때까지 유치는 잘 버티다 때가 되면 빠지는 경우가 많습니다.

 그러나 SS크라운을 하지 않고 GI 등의 재료로 때우기만 하는 방식은 일부 아이들에게만 가능합니다. 미취학 어린이 중에 유치 어금니가 여러 개 썩었고, 아이의 치료 협조도가 좋지 않으며 가정에서 음식물 관리가 안 된다면 SS크라운으로 씌우는 것이 좋습니다. 반면 초등학교 1학년 이상의 아이 중 한두 개의 유구치에만 사이 충치가 있는 경우라면 SS크라운 없이 때우는 것만으로도 충분합니다. 사이 충치를 때울 때 레진이 좀 더 좋은 재료지만 비용 등의 이유로 GI를 사용하는데 짧게는 1개월, 길게는 1년 정도 버티다가 떨어집니다. 이런 단점에도 불구하고 사이 충치를 때우기만 하고 SS크라운을 하지 않는 이유는 비용을 줄일 수 있는 데다 마취를 피할 수 있고 치아를 삭제하지 않으며 치과에 대한 공포감을 줄이는 장점이 있기 때문입니다.

 

 많은 치과의사들이 유치 사이가 썩으면 유치의 통증 여부와 상관없이 신경 치료를 해서 씌우는 경우가 많은데, 이때 마취를 하게 되고 아이는 아파합니다. 하지만 GI로 때우고 다시 떨어지기를 반복하는 과정에서 유치가 깊이 썩고 잇몸이 부었다면 오히려 신경 치료가 쉽습니다. 이미 신경이 많이 죽어 있으므로 마취를 하지 않거나, 하더라도 덜 아프게 할 수 있기 때문입니다. 이처럼 충치를 방치하는 것도 아이가 고통 없이 치료받는 또 다른 방법이 됩니다.

 사이 충치가 생긴 유치를 SS크라운으로 씌우지 않고 GI같은 재료로 때웠을 경우, 재료가 떨어지면 유치의 크기가 줄어들 수 있습니다. 이렇게 작아진 유치에 비해 이어서 나오는 영구치는 크기 때문에 삐뚤게 나올 수 있습니다. 이런 이유로 치과의사들은 유치의 크기를 유지하기 위해 SS크라운을 권합니다. 그러나 요즘 아이들의 90% 이상은 이전 세대보다 턱의 크기가 작아 처음부터 치아가 제대로 배열되기 어렵고 위턱과 아래턱의 맞물림도 정상적이지 못합니다. 그래서 SS크라운으로 치료를 받았어도 영구치가 나올 공간이 부족해 영구치가 바르게 나오지 못한 경우가 매우 많습니다. 따라서 '열심히 SS크라운을 해서 영구치 배열을 완벽하게 하겠다'거나 '유치 사이 충치를 때우기만 하다 재료가 떨어진 것을 방치하면 유치 크기가 줄어들어 큰일 난다'는 생각은 맞지 않을 수 있습니다. 이렇게 대세가 정해진 상황에선 너무 열심히 치료할 필요가 없다고 생각합니다. 진짜 열심히 해야 할 일들은 따로 있습니다. 그것은 바로 턱의 크기를 키우는 교정 치료나 식생활을 개선하는 근본적인 치료입니다. 치과의사와 보호자는 모든 충치를 완벽히 제거하고 확실하게 씌워야만 제대로 된 치료를 했다고 생각하는데, 완벽한 제거는 오히여 아이들을 힘들게 할 뿐 장기적으로 보면 방치하거나 대강 치료한 것과 별 차이가 없는 것이 현실입니다.

 

p35. 실란트의 상식

 

 아이들이 구강 검진을 받을 때, 어금니에 실란트라는 재료가 발려 있지 않으면 부모들은 실란트 예방 치료를 권유받습니다. 실란트sealant는 밀폐제, 밀봉제, 방수제 등을 뜻하며 치과에서 사용하는 '치과용 실란트'를 이용한 예방 치료를 '치아 홈 메우기'라고 합니다. 치아를 관찰하면 어금니의 씹는 면에 주름을 볼 수 있습니다. 연령과 사람에 따라 주름의 깊이와 양은 다르지만 아이들의 입안에 새로 올라온 영구치는 주름이 많고 깊이가 깊습니다. 이 주름에는 음식물 찌꺼기가 잘 끼는데, 요즘 아이들의 경우 단 음식, 가공식품, 부드러운 음식을 자주 먹고 치아의 질도 낮은 경우가 많아서 충치가 잘 생깁니다. 따라서 충치가 생기지 않도록 하기 위해 이 주름을 실란트로 막는 '치아 홈 메우기'를 권합니다

 과거에는 실란트가 비보험 진료였으나, 현재는 만 18세 이하에게 영구치 1번큰어금니(제1대구치)와 2번큰어금니(제2대구치)에 한하여 건강보험 적용을 받기 때문에 큰 부담이 되지 않습니다. 1번큰어금니는 만 6세쯤 나오고, 2번큰어금니는 만 12세쯤 나오기 때문에, 이때쯤 실란트를 발라주는 것이 좋다고 권합니다. 치아의 상태에 따라 '유치 어금니'나 '영구치 작은어금니'에 바르기도 하는데 이 경우에는 보험 적용이 되지 않습니다. 실란트를 바를 때 중요한 점은 '아직 썩지 않은 깨끗한' 영구치에 바르는 것입니다. 이미 썩은 치아라면 충치를 제거하고 레진, 아말감, GI등으로 때우는 것이 일반적입니다.

 

p37.

 실란트는 크게 두 가지 제품군으로 나뉩니다. GI(글라스 아이오노머)가 주성분인 실란트와 비스페놀 A가 주성분인 실란트입니다. 주로 쓰이는 실란트는 비스페놀 A가 주성분입니다. 비스페놀 A는 식품이나 음료 캔의 보호용 코팅재, 장난감, 물병, 젖병, 컵 등 다양한 용도로 쓰입니다. 비스페놀 A로 만들어진 플라스틱은 저렴해서 폭넓게 사용되는데 비스페놀 A가 흘러나와 체내에 흡수되면 에스트로겐 수용체와 결합하여 호르몬처럼 작용합니다. 즉 비스페놀 A는 환경호르몬(내분비계 교란 물질)중 하나입니다. 일반적으로 비스페놀 A가 들어간 포장재로 싼 식품을 섭취하여 인체로 유입되지만 유아나 어린이의 경우 비스페놀 A가 함유된 제품을 손, 입, 코 등으로 접촉하면서 유입됩니다. 소아에게는 아주 적은 양이라도 해로우므로 성인보다 세심한 주의가 요구됩니다. BPA free가 표기된 영수증이나 반찬통 등이 있는데, 이는 비스페놀 A를 함유하지 않으니 안심하라는 뜻입니다. 인터넷을 검색하면 비스페놀 A의 유해성에 대한 수많은 기사와 자료들을 찾을 수 있습니다. 그중에는 비스페놀 A를 함유한 치과용 실란트에 대한 연구들도 있습니다.

 

 서울치대 예방치의학 연구팀은 치아에 실란트와 레진을 네 개 이상 갖고 있는 어린이 62명을 대상으로 구강 내 타액 중 비스페놀 A 함량을 조사했습니다.(2012년 9월) 그 결과, 평균 0.92㎍/L로 치아에 충전재를 한 개도 넣지 않은 어린이의 0.40㎍/L보다 2배 이상 높았습니다. 현재 폴리카보네이트의 비스페놀 A 용출 기준치는 600㎍/L입니다. 용출 기준치로만 보면 이 실험의 검출량은 극히 적습니다. 그러나 비스페놀 A 함량이 많은 상위 10% 그룹만 놓고 봤을 대 입안에 실란트와 레진을 네 개 이상 보유한 비율은 비스페놀 A 함량이 가장 적은 하위 10% 그룹에 비해 4.6배나 높았습니다. 이 결과는 실란트와 레진이 체내에서의 비스페놀 A 수치 상승과 관련이 있음을 보여줍니다. 

 

 이외에도 비스페놀 A를 함유한 실란트나 레진이 치아 에나멜 형성을 저해하거나 어린이 행동, 정서 장애, 유발 가능성을 높일 수 있다는 연구들도 있습니다.

 한편 이러한 결과를 반박하는 자료들도 있습니다. 미국치과의사협회ADA는 실란트 안전 홍보 자료를 통해 치과용 실란트에는 0.09ng(나노그램)의 비스페놀 A가 포함되어 있는 반면, 공기 8ng, 화장품 22ng, 먼지 58ng, 영수증 138ng, 음식물에 5800ng의 비스페놀 A가 포함되어 있으므로 치과용 실란트에서 나오는 비스페놀 A는 유해한 수준이 아니라고 설명합니다.

 

p39. 실란트가 필요한 아이들은?

 필자는 실란트를 권하지 않습니다. 그 이유는 위에서 설명한 비스페놀 A의 유해성 때문이 아닙니다. 보험 적용이 되므로 큰 부담이 없는 공인된 충치 예방 방법을 권하지 않는 이유가 무엇일까요? 충치에 대한 생각과 관점이 다르기 때문입니다. 결론부터 말하면 치아의 씹는면에 생긴 충치들은 심각한 문제가 아니어서 '중상위권' 어린이에게는 방치해도 되고, 중요한 문제인 사이 충치는 실란트로 예방할 수 없기 때문입니다.

 여기서 '중상위권'은 어떤 수준인지 설명하겠습니다. 이것이야말로 이 책의 주장이 설득력을 얻는 전제 조건이기도 합니다. 이 책의 집필 의도는 치과에 덜 가고, 가더라도 치아를 덜 건드리고, 치료를 받는다면 제대로 받되 그에 대한 적절한 비용을 지불하는 문화를 만들어가기 위함입니다. 그렇데 되려면 우리 스스로 노력할 필요가 있습니다. 하루에 한 번이라도 양치를 제대로 하고, 가공식품을 습관적으로 먹지 않는 아이라면 실란트를 받지 않아도 큰 문제가 없습니다. 이런 아이가 '중상위권'입니다. 반면 설탕이나 화학물질이 주성분인 음료수, 과자, 사탕 같은 가공식품을 매일 먹으면서 양치질을 제대로 하지 않는 '하위권' 어린이라면 그냥 치과에 다니면서 실란트를 비롯한 여러 치료를 받는 편이 낫습니다.

 

p45.

 수돗물 불소화 반대에 대해서는 인터넷 검색만으로도 많은 정보를 얻을 수 있으며, 유명 해외 저널에 실린 논문들도 많습니다. 국내에서는 www.no-fluoride.net에 에 잘 정리되어 있고, 이 사이트에 있는 글 몇 개만 읽어도 수돗물 불소화를 찬성하기는 어려울 것입니다. 불소의 충치 예방 효과에 대한 의문 외에도 불소로 인한 문제점 몇 가지를 제시하면 치아 불소증(치아 표면에 갈색이나 흰색의 반점 또는 줄무늬가 생기는 현상), 뼈의 부서짐, 갑상선 저하증, IQ 감소, 행동 장애 등 뇌에 미치는 악영향과 발암 관련성 등이 있습니다.

 

 사실 치과의사들도 대부분 수돗물 불소화를 반대합니다. 불소 때문에 치료할 충치가 사라져 수입이 줄어들까 걱정되어서가 아닙니다. 기본적으로 '내가 마시는 물조차 내 마음대로 선택 할 수 없다'는 개인의 자유를 침해당하는 것에 대한 반발이 그 바탕입니다. 다양한 분야의 전문가들이 수돗물 내 불소 투입으로 인한 부작용을 지적해도 불소화를 찬성하는 사람들은 받아들이지 않습니다. 만약 찬성자들의 치아가 건강하다면 불소 수돗물을 마셔서가 아니라 불소와 상관없이 치아가 좋거나 관리를 잘했기 때문입니다. 이 책에 담긴 주장들 중 하나가 '충치에 아무리 신경써도 결국 잇몸병으로 고생한다. 충치는 생각만큰 심각한게 아니다. 충치가 문제 되는 이유는 오히려 과도한 충치 치료와 기본을 무시한 생활 습관 때문이다'입니다. 이런 관점에서 수돗물 불소화는 잇몸병을 예방하는 것도 아니고 충치 예방의 본질적인 방법도 아닙니다. 이 시대의 질병은 과잉에서 비롯되는 것이지 결핍으로 인해 생기는 것이 아닙니다.

 

p48.

 3~5세 아이들은 평균 15%, 성인은 12.7% 정도의 불소 성분이 칫솔질을 마친 뒤에도 입안에 남아 있는 것으로 확인되었습니다. 시판되고 있는 성인 치약 속의 불소 함량은 1000ppm(유아용은 500~700ppm) 이상입니다. 1000ppm이라는 것은 치약 1g 중에 1mg의 불소가 함유되어 있다는 뜻입니다. 사용하는 치약의 양에 따라 달라지지만, 가령 1000ppm의 불소가 함유되어 있다고 하면, 1회당 입안에 남는 것은 유아가 0.05mg 성인은 0.06mg입니다. 하루 3회 불소가 들어간 치약을 사용하면 성인은 0.18mg이 되는데, 이것은 녹차 190ml에 함유되어 잇는 불소의 양과 거의 비슷합니다. 불소는 공기, 토양, 물, 바닷물 등 자연계에 널리 분포하고 있습니다. 해산물, 특히 조개류, 뼈까지 먹는 새우와 말린 정어리에는 30~50ppm, 건조한 녹차 잎에는 200~500ppm 정도 함유되어 있습니다. 따라서 치약에 들어 있는 양 정도로는 건강에 피해를 줄 걱정은 없습니다. (가야마 시게루, 『이만 잘 닦아도 비만, 치매 막는다』)

 

 불소치약이 안전하다고 주장하면서 불소 사용을 권하는 위 글을 인용한 이유는 자연이 우리에게 준 불소 식품을 소개하기 위해서입니다. 불소에 대한 불안감 속에 주의를 기울이며 불소 도포를 받거나 불소치약을 사용할까 말까 고민하기보다는 위에 언급된 식품들을 통해 자연스럽게 불소를 섭취하면서 치아와 뼈를 튼튼하게 하는 것이 훨씬 더 효과적이고 본질적인 충치 예방법입니다. 자연은 이미 우리에게 좋은 것을 마련해주었습니다.

p51. 검진을 자주 받을수록 충치 개수가 오히려 증가

 

 요즘 아이들 중에서 치과에 가보지 않은 아이는 없습니다. 치아가 아파서 가기도 하지만, 대부분 아프지 않아도 주기적으로 방문하여 유치 발치도 하고, 실란트 및 충치 치료도 받고, 불소 도포도 받습니다. 이렇게 열심히 관리를 했는데도 치과에 가면 치료받아야 할 치아가 여전히 많다고 합니다. 

 초등학생 K는 4학년 때 '학생 치과 주치의 사업'을 통해 학교 구강 검진을 담당하는 A치과에서 구강 검진, 실란트 처치, 불소 도포, 양치질 교육 등을 받았습니다. 5학년이 되면서 다시 A치과에 가서 매년 실시하는 학교 구강 검진을 받았는데, 충치가 많다는 이야기를 듣고 의심이 생겨 필자의 치과에 왔습니다. 검진 결과, 치아들이 깨끗했기 때문에 상담만 하고 보냈습니다. 이후 6학년이 되어 A치과에서 또 구강 검진을 받고 여전히 충치가 많다는 이야기를 들은 뒤, 다시 필자의 치과에 왔지만 여전히 치료할 부분이 보이지 않았습니다. 치과의사마다 충치를 판단하는 기준이 다르지만, 4학년 때 전체적으로 예방 처치를 받았고, 눈에 띄는 검은 부위가 없어도 치교할 치아가 많다면 환자나 보호자 입장에서는 치과를 불신할 수밖에 없습니다.

 초등학생 L은 어렸을 때부터 정기적으로 B치과에 다녔습니다. 치과에서 하라는 치료는 다 받았습니다. 유치를 포함한 대부분의 치아에 실란트와 레진이 있었습니다. 잘 다니던 치과를 놔두고 필자의 치과에 온 이유는 레진 치료가 되어 있는 어금니 한 개에 아주 작은 충치가 생겨 치료받아야 한다는 진단을 듣고 확인하기 위해서였습니다. 필자는 치료할 필요가 없는 미세한 점으로 진단했습니다. 그러나 보호자 입장에서 볼 때는 지금까지 열심히 치료받았고 해당 어금니는 치료받은 지 얼마 되지도 않은데다 아주 작아 보이는 점인데, 이걸 치료하는 게 맞는지 의심할 수밖에 없습니다. 게다가 치료 후 1년도 안 지나 다시 충치 치료를 해야 한다면 치료했던 치과의사가 오히려 미안해해야 하지 않을까요? 이러한 사례들은 넘쳐납니다.

 충치를 제거한 후 치과 재료로 때워도 치과 재료와 치아 사이에는 미세한 틈이 존재하고, 시간이 흐르면서 그 틈은 커지고 검게 변합니다. 이것이 실제 충치일 수도 있고 착색으로 볼 수도 있는데, 검진을 자주 받을수록 충치 발견을 자신의 임무로 여기는 충치 탐색 전문가의 검색대를 무사히 통과하기란 쉽지 않습니다. 이처럼 반복되는 검진과 충치 치료가 의미 있는 행위인지 의심스러울 때가 많습니다. 왜냐하면 해마다 구강 검진을 받으면서 충치 개수는 달라지고, 20대가 되면 치료받았던 치아가 아파서 다시 치과를 찾기 때문입니다.

 

 p65. 금으로 때워도 사이 충치는 막지 못해요

 

 우선 가장 비싸지만 가장 많이 하고 내구성이 가장 좋은 것으로 인정받는 '금인레이'부터 살펴보겠습니다. 어금니 충치를 제거하고 본을 떠서 모형을 만든 후 금을 주조해 만든 충전물을 금인레이gold inlay라고 합니다. 환자의 사례를 보면서 금인레이의 한계에 대해 알아보겠습니다. 

 

 그림 1의 20대 환자는 어렸을 때 어금니 네 개를 아말감으로 때웠고, 1년 전 어느 치과에 갔다가 충치가 있다고 해서 어금니 전부를 금으로 때우기로 결정하고, 우선 오른쪽 위, 아래 어금니 네 개만 금으로 때웠습니다. 반대쪽 어금니들도 치료받기로 했다가 차일피일 미루고 있던 중 필자의 치과에 방문했습니다.

 그림 1을 보면 오른쪽 어금니 두 개에는 씹는면과 옆면에 금인레이가 있습니다. 반면 왼쪽 어금니의 씹는면은 과거에 때웠던 아말감이 떨어진 상태이고, 맨 뒤 어금니의 씹는면은 충치가 방치된 상태입니다. 환자는 아말감이 언제 떨어졌는지도 모르고 아무런 불편함을 느끼지 않았습니다. 맨 뒤 어금니의 충치도 별다른 증상이 없습니다.

 환자가 필자의 치과에 온 것은 1년 전에 금인레이로 때운 어금니 사이가 썩은 것을 발견했기 때문이었습니다. 이런 상황에서 치과의사들은 아말감이 떨어진 어금니와 그 뒤 충치가 있는 어금니의 충치를 제거한 후 금으로 때우라고 할 것입니다. 왜냐하면 금은 튼튼하면서도 물리적인 성질이 치아와 유사해서 힘을 많이 받는 어금니 부위에 가장 좋은 충전물이라고 배웠기 때문입니다.(레진이나 세라믹 같은 재료를 권하기도 합니다). 1년 전에 금으로 때웠지만 사이가 썩은 어금니는 금인레이를 뜯어내고, 사이 충치도 말끔히 제거한 후 다시 금인레이로 하라고 권유할 가능성이 높습니다. 결국 아래 어금니 네 개 모두에 금인레이가 부착될 것입니다.

 이제 정리해보겠습니다. 이 환자가 치과에 온 것은 1년 전에 치료받은 어금니, 그것도 가장 비싼 금인레이를 장착한 치아에 생긴 사이 충치 때문입니다. 씹는면 충치를 방치한 어금니들은 아무 증상이 없는 반면, 금으로 때운 어금니에는 사이 충치가 생겼습니다. 실란트가 사이 충치의 발생을 막지 못한 것처럼 비싼 금인레이도 사이 충치를 막지 못합니다. 따라서 씹는면 충치를 굳이 비싼 금인레이로 할 필요가 없고, 오히려 방치하는 것도 좋은 방법이 될 수 있습니다.

 

 금인레이의 가장 큰 문제점은 치아를 금 가게 하거나 부러뜨리는 것입니다. 가장 비싼 충치 치료가 치아를 금 가게 해서 신경 치료를 받아야 하거나 결국 치아까지 뽑게 되는 경우는 아주 많습니다. 

 

p72.

  

 씹는면의 깊이가 얕거나 크기가 작은 충치는 그냥 두어도 되고, 굳이 치료를 받겠다면 금이 아닌 레진과 같은 직접 채워 넣는 재료로도 충분합니다. 작은 충치를 금으로 때우는 것은 비경제적일뿐더러, 큰 충치를 금으로 때우면 치아 균열이나 금인레이의 탈락이 일어납니다.

 

 그림 5는 다른 치과에서 어금니의 씹는면과 옆면 충치를 제거하고 금인레이를 했지만 몇 년이 지나 탈락된 후 즉시 필자의 치과에 온 환자의 사진입니다. 금인레이로 때울 때 분명히 충치를 깨끗이 제거했을 텐데 속은 여전히 검게 변해 있습니다. 아무리 완벽하게 충치를 때운 것 같아도 시간이 흐르면서 재료와 치아 사이에는 미세한 틈이 생길 수밖에 없습니다. 충치를 완벽하게 제거하다 보면 치아의 구멍(와동cavity)이 커지고, 충전물의 크기도 커집니다. 그에 따라 치아와 재료 사이의 경계 부위도 커지고, 충전물이 받는 저작력도 커지기 때문에 충전물이 변형되기 쉽고 틈은 점점 커집니다. 그래서 충치가 다시 생길 가능성이 오히려 더 높아집니다. 그래서 충치가 다시 생길 가능성이 오히려 더 높아집니다. 금인레이가 떨어진 상황에서 검은 부분을 갈고 다시 금으로 때우는 것은 치아를 약화시키는 행위를 반복하는 것입니다. 검은 부분을 꼼꼼히 제거하다 보면 신경이 노출되면서 아프지 않았던 어금니까지 신경 치료를 하게 되는 경우도 많습니다. 

꼼꼼하고 과도하게 충치를 제거한 후 커다란 금인레이를 어금에 장착하면 금인레이를 둘러싼 치아의 두께가 얇아지면서 어금니에 금이 가거나 치아가 부러질 수 있다는 점은 앞에서 살펴보았습니다. 따라서 치아가 부러지기 전에 금인레이가 탈락되는 것이 치아에는 다행스러운 일입니다. 그래서 탈락된 금인에리를 다시 부착하기보다는 오히려 금보다 약한 재료(레진, 세라믹, GI)로 때우는 방법이 더 안전합니다. 충치의 크기가 너무 크면 때우지 못하고 크라운을 해야 할 수도 있습니다.

 

p74. 금인레이가 필요한 경우

 

 어금니의 씹는면에 충치가 생겼을 때 튼튼한 것이 좋다고 해서 금인레이로 때워도 정작 중요한 사이 충치는 막지 못합니다. 오히려 튼튼한 금인레이가 치아를 금 가게 하고 부러뜨립니다. 금인레이는 탈락하기 쉬운데, 탈락 후 충치가 있다고 자꾸 갈고 때우는 과정에서 치아는 점점 약해집니다. 금인레이 후 치아가 약간 썩거나 부러져도 그 부분만 수리할 수 없고, 전부 뜯어낸 뒤 새로 해야 하는 경우가 대부분입니다.

 환자가 입을 벌린 상태에서 '씹는면 충치'에 레진 등의 재료를 채워 넣는 작업은 비교적 쉽습니다. 그러나 어금니 '사이 충치'를 직접 때우는 작업은 난이도가 매우 높습니다. 그 때문에 사이 충치는 본을 떠서 모형을 만든 뒤 충전물을 만드는 인레이 방식을 많이 사용합니다. 오래전부터 금인레이가 사용되었으며 요즘에는 레진 인레이, 세라믹 인레이 등으로 바뀌고 있습니다. 이런 재료는 치아 색과 유사하고 금속이 아니어서 생물학적으로도 유익하지만 금인레이에 비해 치과의사가 다루기 까다롭고 재료가 부러질 가능성도 있습니다. 하지만 레진이나 세라믹 등의 재료가 부러지는 것은 어쩌면 좋은 현상입니다. 재료가 부러졌다는 것은 치아가 힘을 많이 받는다는 뜻인데 앞서 설명했듯이 금인레이를 했을 경우, 과도한 힘이 금인레이를 통해 치아에 전달되면 치아가 부러지거나 금이 가기 때문입니다. 단단한 금은 치아를 희생시키지만, 레진이나 세라믹 같은 다소 약한 재료는 치아를 보호하면서 자신을 희생시킵니다. 따라서 어금이늬 사이 충치 치료 때 금인레이도 좋지만 치아 보호 측면에서 레진 인레이나 세라믹 인레이가 더 좋은 선택이 될 수 있습니다. 그러나 이런 재료들을 사용할 대도 충치 제거 과정에서 치아가 지나치게 많이 삭제된다면 금인레이가 유발하는 부작용을 그대로 경험할 수 있습니다. 

 

p77.

 

 사실 오래전부터 대다수 치과의 주 수입원은 금인레이였습니다. 모든 사람들이 교정, 임플란트, 치아 성형등에 관심을 갖지는 않습니다. 그러나 충치에는 관심이 많고, 늘 걱정합니다. 이 때문에 정기적으로 구강 검진을 받고, 충치로 아픈 치아뿐만 아니라 아프지 않은 충치들도 치료합니다. 그리고 환자나 치과의사 모두 금이 좋다고 생각하기 때문에 아무 거부감 없이 치아에 금을 끼워 넣습니다. 레진 등으로 직접 때우는 과정은 치과의사가 환자 옆에서 10분 이상 직접 힘들게 작업해야 하지만, 금인레이는 치과의사가 치과용 드릴로 잠깐 동안 치아를 갈기만 하고 그다음 과정은 직원들이 하는 경우가 많기 때문에 치료 속도도 빠릅니다. 그리고 치료 후 조금이라도 맞지 않으면 불편함이 바로 나타나는 레진이나 세라막에 비해 금인레이는 불편함을 잘 느끼지 못합니다. 앞에서 설명한 금인레이의 문제점들은 몇 년이 지나서야 나타납니다. 시간이 한참 흐른 뒤에 문제가 생기고 환자들은 어느 치과에서 어떤 치아를 치료받았는지 기억하지 못하기 때문에 문제가 생겨도 치료한 치과에 가서 아무 말도 하지 못하거나 다른 치과를 찾아갑니다. 임플란트, 교정, 치아 성형과 달리 사후 책임 소재가 불분명하기 때문에 치과의사 입장에서는 편한 치료입니다. 다시 말해 가장 편하게 돈을 벌 수 있는 치료가 금인레이이고, 인레이를 많이 하는 치과가 돈을 잘 버는 치과가 됩니다. 사람들은 환자가 많으면 치료를 잘한다고 생각하기 때문에 예약이 힘들어도 그런 치과를 찾아가 금인레이로 충치 치료를 받습니다.

 

p99.

  잘 씹는 것은 혈액의 흐름을 원활하게 하고, 유체역학적 에너지를 발생시켜 머리와 얼굴의 뼈 전체로 골수 조혈을 촉진시킨다. 다시 말하면 살아 있는 동안에 호흡과 저작에 의해 두개골 전체가 골수 조혈을 한다. 그래서 나이가 들어 잘 씹을 수 없게 되면, 뇌의 세포호흡이 제대로 이루어지지 않게 되어 치매에 걸릴 수가 있는 것이다.

 - 니시하라 가츠나리, 『면역력을 높이는 생활』

p159. 17장. 사랑니는 쓸모없는 치아가 아니다.

 

 사랑니는 최후의 기둥

 

 치과의사를 포함한 대부분의 사람들이 사랑니를 빼는 것을 '정상'이라고 생각합니다. 정말 사랑니를 빼는 것이 정상일까요? 치과대학에서는 사랑니의 효용과 가치에 대해 가르치지 않습니다. 그저 사랑니를 '범죄자', '퇴화의 산물'로 취급하며 제거해야 할 대상으로 가르칠 뿐입니다. 사랑니가 도대체 무슨 사고를 치기에 이런 대우를 받는 걸까요?

어금니의 옆구리를 파고든 위,아래 사랑니

 그림1은 매복된 사랑니가 일으키는 문제를 보여줍니다.

 아주 드물게 사랑니 주변에 물혹이나 종양이 생기기도 하지만, 사랑니 앞에 있는 2번어금니의 옆구리가 썩는 경우가 대부분입니다. 이런 문제가 흔하다 보니 치과의사들은 미리미리 사랑니를 뽑으라고 권합니다.

 여기서 다시 한번 생각해봅시다. 왜 옆 치아에 충치가 생겼을까요? 기본적으로 사랑니가 똑바로 나오지 못했기 때문입니다. 그럼 왜 똑바로 나오지 못했을까요? 위턱과 아래턱이 작아졌기 때문입니다. 1960년대 이전 출생자는 사랑니가 바르게 나온 빈도가 높지만, 1970년대 이후 출생자들부터 그 빈도가 빠르게 감소하고 있습니다. 현대는 사랑니로 인한 문제가 흔하고, 사랑니 자체가 없ㄷ는 경우도 많다 보니 사랑니는 없는 것이 정상이고, 사랑니가 나오면 뽑는 것을 정상으로 여깁니다. 심지어 선천적으로 사랑니가 없는 것을 좋아하기까지 합니다. 사랑니가 매복되어 있거나 불필요하다고 생각하여 한쪽 사랑니를 뽑으면서 균형을 맞춰야 한다며 반대쪽 사랑니를 함께 뽑기도 합니다. 이번 장에서는 사랑니의 소중함에 대해 알아보면서 우리의 턱이 얼마나 축소되었는지 다시 한번 확인해보겠습니다.

 

 

  그림 2의 74세 환자는 어금니 씹는면의 마모 문제로 필자의 치과에 왔습니다. 마모된 부분은 GI로 때웠습니다. 몇 년 전 앞니가 빠져 브릿지로 씌운 것 외에 치과 치료를 받은 적이 없으며 사랑니 네 개를 포함해 31개의 자연치아를 갖고 있습니다. 이런 상태가 정상입니다. 텐탈아이큐라는 것이 있다면 이분은 치아 천재라고 할 만합니다. 만약 이분이 젊었을 때 치과에 갔다면 사랑니를 뽑혔을 것입니다. 아니라고요?

 

 그림 3의 환자는 10대 시절에 금으로 씌운 아래 왼쪽 큰어금니가 불편해서 어느 치과에 갔는데, 치료해야 할 충치가 많고 사랑니 네 개를 모두 뽑아야 한다는 얘기를 듣고 필자의 치과에 왔습니다. 어렸을 때 레진으로 어금니들은 모두 때웠고 약간의 착색만 있는 정도인데 다시 해야 할까요? 이렇게 많이 때웠는데 다시 때우는 것은 정상이 아닙니다. 사랑니는 모두 바르게 나온 상태입니다. 바르게 나온 사랑니를 왜 빼야 할까요? 치과에 가면 빼는 것이 당연한 수순일 뿐 합리적인 이유는 없습니다. 사랑니에 있는 씹는면 총치가 사랑니를 아프게 할까요? 씹는면 총치는 중요하지 않다고(치아 건상상 꼭 치료를 해야 할 정도로 치명적이 아니다는 의미) 여러 차례 설명했습니다. 이 환자에게 필요한 것은 사랑니 부위를 청결하게 해서 최대한 오래 보존하는 일입니다. 바르게 난 32개의 치아를 가진 이 청년은 현대인 중에서 천연 기념물 같은 존재입니다.

 

 

 그림 4의 환자는 교정 전문 치과에서 발치 교정을 받은 후 사랑니 네 개를 뽑으러 필자의 치과에 왔습니다. 20대인데도 모든 어금니가 레진과 금으로 때워져 있습니다. 32개의 치아 중 이미 작은어금니 네 개를 뽑았고 사랑니 네 개까지 뽑으면 24개만 남습니다. 필자는 크게 불편하지 않으면 사랑니를 뽑지 않기 때문에 이 환자의 경우 누워 있는 아래 사랑니 두 개만 뽑았습니다. 그러나 아래만 뽑아도 위 사랑니는 저작 기능을 하지 못하기 때문에 24개만 있는 것과 같습니다. 발치 교정 후 20대부터 24개의 치아로 살아가는 환자들이 의외로 아주 많습니다. 아무리 질기고 거친 음식을 먹지 않는 세대라곤 하지만 과연 앞으로 잘 지낼 수 있을까요?

 발치 교정을 받은 환자들은 갸름한 턱, 오목한 입, 가지런한 앞니 등에 만족하지만 어금니들의 맞물림은 좋지 않은 경우가 많습니다. 또 교정 치료를 받으면서 충치 치료까지 꼼꼼히 받기 때문에 20~30대의 젊은 나이에도 불구하고 어금에는 금, 레진, 크라운 등이 있는 경우가 많습니다. 작은어금니 2~4개를 뽑았기 때문에 어금니 갯수는 12~14개입니다. 교합도 좋지 않고 충전물도 많고 어금니 개수도 적은 까닭에 치아들이 받는 스트레스가 가중되면서 내부 충치나 잇몸병으로 인해 뒤쪽 어금니들이 하나씩 아프게 됩니다. 이런 와중에 가까스로 사랑니 네 개가 나와서 엉성하게라도 서로 만나 저작력의 일부를 감당한다면 치아 건강에 큰 도움이 됩니다. 하지만 이런 사랑니를 필요 없다고 빼면 사랑니 앞에 있는 어금니들이 받는 저작력이 커져서 좀 더 빨리 망가집니다. 이와 반대로 남아 있는 사랑니들이 자기 주인을 위해 고군분투하는 모습을 보겠습니다.

 

 그림 5의 80세 환자는 위 오른쪽 큰어금니가 불편해서 필자의 치과에 왔습니다. 치료를 해도 상태가 호전될 것 같지 않아서 사용할 수 있을 때까지 쓰다가 많이 아프면 빼라고 말씀드렸습니다. 80세임에도 불구하고 브릿지를 포함하여 28개의 치아가 있습니다. 왼쪽 위,아래 큰어금니들(동그라미)은 20년 전에 뽑았다고 합니다. 이런 상황에서 왼쪽 위,아래 사랑니들(화살표)이 저작력을 버텨내면서 다른 치아들이 받는 힘을 줄여주고 있습니다.

 어금니가 많을수록 개별 어금니가 받는 저작력은 줄어들어 치아 건강에 도움이 됩니다. 16개 어금니보다 사랑니를 포함한 20개의 어금니가 더 유리합니다. 기둥이 16개일 때보다 20개일 때 건물이 더 튼튼하고, 톱니바퀴가 28개일 때보다 32개일 대 분쇄 효율이 좋습니다. 발치 교정을 받았거나, 개방교합, 과개교합, 비대칭 등의 부정교합이 있는 상태에도 불구하고 사랑니가 바르게 나왔다면 양치질을 잘해서 최대한 보존하려고 노력하시기 바랍니다.

 사랑니 발치는 질병이 시작되었음을 알려준다.

 

 사랑니가 바르게 나오고 나머지 치아들의 배열도 어느 정도 바르다면 치아 문제로 고생할 가능성이 낮습니다. 그러나 좋은 치아를 가지고 있지만 건강에 대한 자만으로 구강위생은 소홀히 하고 술, 담배 등을 즐기면서 받은 복을 차버리는 사람들이 있는가 하면 사랑니 없이 28개의 치아만으로 60대까지 치아 건강을 유지하는 사람들도 있습니다. 이처럼 혼재된 상황 때문에 사랑니의 가치를 제대로 인식하지 못합니다.

 최근의 치아 교정은 턱을 작게 하고 입을 뒤로 넣기 위해 치아들을 뒤로 보내는 데 주력하기 때문에 사랑니를 걸림돌 혹은 장애물로 여깁니다. 또 사랑니가 나오면서 앞에 있는 치아들을 밀어 가지런한 배열을 망칠 수 있다고 생각해 사랑니를 반드시 뽑으라고 합니다. 필자 역시 치과대학에서 이런 교육을 받은터라 과거에는 사랑니를 열심히 뽑았습니다. 지금은 크게 후회하고 있습니다.

 치의학은 충치를 가만두지 않기 때문에 사랑니에 작은 점이라도 있으면 뽑으라고 합니다. 그러나 바르게 나온 사랑니의 씹는면 충치는 문제를 일으키지 않으며 구강위생을 소홀히 해서 아주 많이 썩은 경우에나 약간의 통증을 일으킬 뿐입니다. 그러면 그때 가서 뽑으면 되고 상황에 따라 신경 치료를 해서 살릴 수도 있습니다.

 사랑니 주변의 잇몸이 부으면 사랑니를 범죄자 취급하며 뽑아버리지만 범인은 작아진 턱일 뿐 사랑니는 아무 최가 없습니다. 사람들은 사랑니를 잘 뽑는 치과의사를 명의라고 칭찬합니다. 필자 역시 한때 사랑니를 뽑으면서 자만하던 때가 있었습니다. 깊숙히 매복된 사랑니를 빠르고 아프지 않게 뽑는 치과의사가 명의인 것은 분명합니다. 특히 위험한 사랑니 발치를 전 세계에서 가장 저렴한 비용을 받고 최고로 빠르게 빼는 한국의 실력있는 치과의사들에게 감사해야 합니다.

 하지만 사랑니가 없거나 사랑니가 삐뚤게 있는 입안은 완벽한 치아 건강과는 거리가 있습니다. 사랑니는 보통 20대 전후에 나옵니다. 그 이유가 무엇일까요? 근골격이 굳어진 성인이 되어 단단하고 질긴 것을 먹을 때 뒤에 있는 사랑니로부터 도움을 받으라는 자연의 섭리입니다. 사랑니는 치과 용어로 제3대구치(3번 큰어금니)라고 부릅니다. 즉, 정식적인 어금니라는 뜻입니다. 또 다른 이름은 '막니'입니다. 생김새도 엉성하고 나온 모양도 이상해서 그런 이름이 붙었을 수도 있고, 막일이나 거친 노동을 하는 데 적합하다는 의미일 수도 있습니다. 바르게 나온 사랑니를 쉽게 뽑았다는 이야기를 들을 때 필자는 무척 안타깝습니다. 왜냐하면 그것이야말로 치아 건강을 악화시키는 행위이기 때문입니다. 사랑니를 뽑고 치과 문을 나서는 순간부터 치아의 병은 시작됩니다.

 사랑니 때문에 잇몸이 안 좋아졌다고 생각하는 사람들도 많습니다. 20~30대 중 사랑니 주변의 잇몸이 붓고 아프다면 사랑니가 삐뚤게 나와서 그런 경우가 대부분이고, 이미 전체적인 치아 배열이 이상적이지 않다는 의미입니다. 이런 상황에서는 사랑니를 뽑아도 사랑니 앞에 있는 어금니들은 시간이 지나면 잇몸병으로 고생합니다. 40~50대 환자 중 사랑니가 바르게 나온 경우가 종종 있는데 잇몸 문제로 치과에 가면 사랑니 때문에 음식물이 끼고 잇몸이 좋지 않으니 빼라고 합니다. 물론 빼야 할 상황이면 빼야 합니다. 그러나 사랑니가 바르게 나와서 제 기능을 하고 있다면 사랑니 덕분에 나머지 치아들이 이제까지 건강할 수 있었다는 사실을 알아야 합니다. 사랑니를 빨리 빼서 치아가 건강해진다면 사랑니를 모두 뽑은 사람들의 잇몸이 좋아야 하는데 40대 이후에도 여전히 사랑니 팡에 있는 어금니들은 뽑히고 임플란트로 대체됩니다. 그것은 유치 발치를 빨리 해야 영구치가 바르게 난다고 생각하지만 여전히 치와 교정 환자들이 넘쳐나는 것과 같습니다.

 교합과 관련해서도 사랑니는 교합 간섭을 일으키기 때문에 무조건 빼야 한다고 주장하는 치과의사들도 있는데 절대적인 것은 아닙니다. 복잡한 교정 치료나 보철 치료를 할 때 사랑니가 있으면 치료할 때 도움을 주기도 합니다. 브릿지나 틀니를 만들 때 맨 뒤에 있는 사랑니를 이용하는 경우가 많고, 어금니가 많이 없을 때 사랑니를 통해 보철물의 크기나 높이를 결정할 수 있어 치과 치료가 편해지기도 합니다.

 사랑니가 바르게 나와 있고 이를 최대한 보존하려고 노력한다면 사랑니가 없을 때보다 치아 수명이 10년은 늘어날 수 있다는 사실을 명심하시기 바랍니다. 인체에는 필요 없는 것이 하나도 없습니다. 사랑니는 사랑입니다.

 

p170.

 잇몸병은 잇몸뼈(치조골)가 줄어드는 현상입니다. 2014년 국민건강영양조사는 건강한 성인의 경우 평균 46세(남 43세, 여 49세)에 잇몸병이 악화되고, 이후 나이가 들면서 계속 악화된다고 발표했습니다. 보험공단의 통계에 따르면, 사람들이 병원을 찾는 이유 중 첫 번째가 감기이고 두 번째는 잇몸병입니다. 감기는 병원에 가지 않아도 푹 쉬면 낫습니다. 약을 먹든 그냥 쉬는 시간이 지나면 감기는 사라지고 몸은 회복됩니다. 그럼 잇몸병은 어떨까요? 30대 이하라면 잇몸 치료, 약물 복용 여부와 상관없이 어느 정도 회복될 수 있으나, 그 이후의 연령대는 사람마다 속도는 다를 뿐 계속 진행됩니다. 사람의 뼈는 평균 25세부터 소실되기 시작하고 잇몸뼈 역시 이때부터 줄어듭니다. 잇몸병은 기본적으로 노화 현상입니다. 나이 드는 것을 약으로 막을 수 있을까요? 잇몸약은 노화 현상을 막을 수 없습니다. 그리고 현재의 잇몸약이 치료제가 아니라 영양제라는 사실은 이미 밝혀졌습니다.

 

p173.

 잇몸약 광고는 늘 접하지만 충치약 광고는 본 적이 없습니다. 왜냐하면 충치는 해결하기가 쉽기 때문입니다. 식생활을 개선하면 충분히 예방되고, 씹는면 충치는 방치해도 큰 문제가 생기지 않습니다. 사이 충치를 비롯해 심한 충치들이 여러 개 있어도 갈고 때우고 씌우면 해결됩니다. 이처럼 충치는 쉽게 치료되기 때문에 충치약은 판매되지 않습니다. 반면 잇몸병은 그 원인을 치석이라 생각하여 치석을 제거해도 구조적 결함은 남아 있기 때문에 잇몸은 나아지지 않습니다. 그래서 치과를 다녀도 치아를 빼야 할 상황에 처한 환자는 어떻게든 발치를 피하고 싶어 약국에 갑니다. 이런 이유로 잇몸약이 팔리는 것입니다. 하지만 잇몸약도 구조적 결함을 고칠 수 없기 때문에 환자는 결국 치과에 와서 치아를 뽑게 됩니다.

 

p175

 치과의 과잉 진료는 주로 치아를 갈고 때우는 충치 치료에서 일어납니다. 많이 받으면 비용도 올라갑니다. 반면 잇몸 치료는 보험 적용을 받기 때문에 여러 번 받아도 큰 부담이 되지 않고 치아 삭제 등의 되돌릴 수 없는 상태를 만들지도 않습니다. 그래서 필자 역시 다른 치과의사들과 마찬가지로 치석을 제거하는 스케일링이나 치근활택술 등의 잇몸 치료는 권합니다.

 정신적, 육체적 스트레스도 잇몸 건강에 큰 영향을 미칩니다. 많은 사람들이 잠을 못 자거나 심한 육체적 피로 또는 정신적 괴로움을 겪으면서 잇몸뼈가 무너지고 치아들이 빠지는 경험을 합니다. 이 역시 노화와 마찬가지로 치과의사가 조절할 수 있는 부분이 아닙니다.

 

p208

 

 그림 3의 환자는 어렸을 때 어금니 여러 개를 아말감으로 때웠습니다. 30대 초에 구강 검진을 위해 치과에 갔다가 아말감을 금으로 교체할 것을 권유받고 아래 큰어금니에 금인레이를 부착했습니다. 그로부터 1년 뒤쯤 스케일링을 하러 또 다른 치과에 갔다가 위 큰어금니에도 금인레이와 레진을 부착했고, 사랑니도 레진으로 때웠습니다. 이후 입안의 어색함과 불편함을 느끼기 시작했고, 작은어금니들이 아파서 다시 치과에 갔습니다. 치과의사는 때운 부분을 조정(삭제)했습니다. 이후 얼굴의 좌우 모양이 바뀌고, 치아들이 불규칙해지면서 귀의 통증과 이명 증상까지 생겼습니다. 여러 치과를 다니면서 교정을 고민하다가 필자의 치과에 왔습니다.

 교합 접촉점을 확인해보니 그림 3처럼 큰어금니 부위에 교합점이 보이지 않았습니다. 즉 꽉 씹을 때 위,아래 앞니만 닿고, 위,아래 큰어금니들은 살짝 떠 있는 상태였습니다. 사랑니를 포함해 12개의 큰어금니를 금인레이와 레진으로 때우면서 큰어금니의 높이가 원래보다 그림 1처럼 '서서히'가 아니라 '갑자기' 낮아진 것입니다. 이런 상태를 '교합 지지의 상실'이라고 합니다. 건물의 기둥들이 전체적으로 갑자기 낮아진 것과 같습니다. 이처럼 어금니들의 높이가 줄어들면서 위,아래 앞니가 서로 닿게 되었습니다. 어금니의 높이가 낮아지면 앞니가 많이 닿기도 하지만, 꽉 씹다 보면 아래턱은 뒤로 밀리고 저작근이 긴장되면서 턱관절이 압박을 받습니다. 이렇게 되면 턱관절을 비롯한 얼굴 부위 등에 통증이 생깁니다.

 

 그럼 4-A처럼 정상적으로 교합 접촉점이 형성되어야 하지만, 어금니를 때우다 보면 그림 4-B처럼 교합 접촉점이 상실되기 쉽습니다. 이 환자의 경우 단 한 개의 큰어금니라도 충치 치료를 하지 않았거나, 위,아래 중 한쪽만 때웠다면 교합 접촉점이 살아있었을 텐데, 사랑니를 포함하여 모든 큰어금니를 때우면서 교합접촉점을 제대로 회복시켜주지 못했기 때문에 작은어금니, 앞니, 턱관절이 부담을 받으면서 통증을 느낀 것입니다.

 이 환자는 가지런히 배열된 32개의 치아를 가지고 있습니다. 치아도 깨끗한 편이어서 충치가 아닌 잇몸 질환만 신경 쓰면 되는 상황이었습니다. 그러나 어렸을 때 씹는면을 아말감으로 때우고 20~30대에 금과 레진으로 바꾸면서 전혀 예상치 못한 상태를 경험하게 된 것입니다. 어렸을 때 아말감으로 때우지 않았거나 아말감을 금으로 교체하지 않았다면 이런 고생은 하지 않았을 것입니다.

 필자는 이 환자의 큰어금니 두 개에 있던 금인레이를 제거한 후 GI로 때우면서 교합 접촉점을 다시 만들어주었고 환자의 증상은 좋아졌습니다. 기존의 낮아진 금인레이와 레진을 모두 제거하고 새로 레진으로 때우면서 교합 접촉점을 살려주는 것이 좋으나, 환자가 만족해서 이 정도로 마무리했고 정기 검진차 3년 후 다시 만났을 때도 잘 지내고 있었습니다.

 이 사례처럼 충치 치료 후 교합 접촉점이 변해서 턱관절 문제를 호소하는 환자들을 보면 많은 충치 치료를 시간 간격을 두고 받았거나 한꺼번에 많이 받았다는 공통점을 갖고 있습니다. 단순히 치아의 외형을 복구해주고 교합 접촉점을 회복해주면 좋아지기도 하지만 애초에 치아 배열이 좋지 않고, 턱의 비대칭 등이 심한 경우 교정 치료가 필요합니다. 그나마 다행인 것은 복잡한 교정 치료를 하지 않더라도 인체의 자가치유력 덕분에 교합 접촉점을 회복해주면 환자의 증상이 어느 정도 개선된다는 점입니다. 그러나 이런 희망마저도 저 멀리 날려버리는 행위가 있는데 바로 '교합 조정'입니다.

 

p212

 40대 중반의 환자는 몇 년 전 스케일링을 받으러 치과에 갔습니다. 스케일링을 받으면서 아래 양쪽 큰어금니의 아말감 상태가 안 좋으니 금인레이로 교체하라고 권유받았습니다. 조언대로 아말감을 제거하고 금인레이로 교체했습니다. 그 후 치아가 시리고 불편해서 다시 치과에 갔습니다. 치과의사는 교합이 잘 맞이 않아서 치아가 시린 것이라면 교합 조정을 해주겠다고 한 뒤, 몇 개의 어금니를 약간씩 갈았습니다. 이후 환자는 훨씬 더 심한 고통을 느끼기 시작했습니다. 하지만 교합 조정을 해주었던 치과의사는 환자의 고통을 이해하지 못했고, 환자는 교합을 잘안다는 다른 치과의사를 찾아갔습니다. 그 치과의사가 스플린트를 제작해주었지만 통증은 여전했고, 그러자 제대로 교합 조정을 해야 한다고 말했습니다. 환자는 그 말을 믿고 다시 교합 조정을 받았습니다. 치과의사는 어금니들을 또 갈았고, 송곳니 유도(제 12장에서 설명함)를 인위적으로 만들기 위해 위 송곳니에 레진을 부착했습니다. 그러나 환자의 증상은 더 악화되어, 결국 필자의 치과까지 오게 되었습니다.

 이 환자는 약간 불규칙하고 안으로 경사진 위앞니, 말할 때 잇몸이 보이는 거미 스마일, 아래턱이 왼쪽으로 틀어지고 후퇴한 무턱의 얼굴을 가졌습니다. 이런 모습은 환자의 위턱과 아래턱이 퇴행한 상태로 처음부터 치아 교합과 턱관절이 불안정했음을 의미합니다. 환자의 입안과 치아는 깨끗하고 충치가 생기지 않는 체질로 보이기 때문에 어렸을 때 씹는면을 아말감으로 때우지 않았거나 40대에 아말감을 금으로 교체하지 않았다면 더 좋았을 것입니다. 하지만 금으로 바꾸면서 씹는면의 형태가 바뀌고, 어금니의 높이가 '갑자기' 변하면서 잠재해 있던 불안정이 드러났습니다. 시간을 두고 기다리거나 금인레이를 제거하고 다시 잘 때웠다면 회복될 수 있었지만, 수복물이 아닌 자연치아를 갈아버리면서 돌이킬 수 없는 상황에 이르고 말았습니다.

 교합지로 검사해보니 위,아래 맨 뒤에 있는 큰어금니끼리만 닿고 있었습니다.(그림 5 화살표) 여기저기 갈아내는 과정에서 교합 접촉점이 사라진 것입니다. 필자는 갈아낸 교두 부분들과 미세한 부분들을 여러 차례 레진으로 때우고 수정했습니다. 이후 저작근의 불편과 통증, 불면증 등 환자의 증상이 개선되었습니다.

 

  교합 조정 이후에 고통을 호소하는 환자들이 많습니다. 이 환자의 경우, 레진으로 때워서 증상이 개선된 것은 운이 좋았다고 할 수 있습니다. 대부분의 환자들이 치아가 불규칙하고, 입안에 수복물도 많으며, 교합 조정을 받은 치아의 수가 많아서 원래 형태로 복원하기가 어렵습니다. 이런 환자들은 레진으로 때우고 크라운을 교체하는 등의 작업으로 해결되지 않고, 교정 치료가 필요한 경우도 많습니다. 또 그런 치료로도 증상이 사라지지 않을 때도 있습니다. 따라서 충치 치료와 교합 조정을 받을 때 자연치아를 갈아내는 행위에 극도로 신중해야 합니다. 특히 턱관절 문제로 고생하는 환자들은 더더욱 조심해야 합니다. 오랫동안 턱 문제로 고생하는 환자들 중 많은 분이 교합 조정을 하면서 질병이 시작되었다고 말합니다. 턱관절 환자들은 턱 비대칭 등 위턱과 아래턱의 부조화가 심해서 자연치아를 갈면 구조적 불안정성이 폭발합니다.

 

p232

 사람들은 기도의 축소와 자세의 변화가 무슨 문제냐고 반문합니다. 알레르기, 부비동염, 입 호흡, 수면 무호흡, 심혈관 질환, 비만, ADHD, 만성 피로, 이갈이, 상기도 저항 증후군 등 과거에는 드물었지만 현대에는 흔한 질병들이 편안하지 못한 호흡과 그에 따른 자세 변화와 관련 있는 것으로 밝혀지고 있습니다. 그러나 여전히 대다수의 치과의사들은 입을 넣어 예쁜 얼굴을 만들어주겠다며 발치 교정을 하고 있으며, 환자들도 입이 들어가고 턱이 작은 것을 예쁜 얼굴로 착각하고 있습니다. 극소수의 치과 의사들만 호흡이나 자세 등에 관심을 갖고 있는 상황입니다. 한국은 세계적으로 발치 교정 강국으로 유명합니다. 유명한 치과의사인 미국의 행 Hang과 겔브 Gelb가 쓴 호흡 치의학에 관한 논문에서 발치 교정을 가장 많이 하는 나라로 한국을 지목했을 정도입니다. 한국인의 건강이 걱정스러울 뿐입니다.

 

 p233

 요즘 여성들 사이에서 턱을 깍는 수술이 유행이다. 턱이 갸름하면서 여성스럽기는 하지만 지구력이나 추진력이 약해진다. 당장은 예뻐 보여도 인상학적으로는 50세가 넘어서면 좋지 않다고 본다. 피부에 탄력이 있을 때야 괜찮지만 탄력이 떨어지는 중년 이후가 되면 살이 빠지면서 자신이 원했던 얼굴형이 아닌 초라한 모습이 되기 쉽다. 

- 주선희, 『얼굴 경영』 -

 

p235

 (교정용)헤드기어의 유해성과 부작용에 대한 연구들은 www.righttogrow.org에 잘 정리되어 있습니다. 이 사이트의 내용 중 일부를 요약하면 "헤드기어는 얼굴의 전방 성장을 억제하여 호흡과 자세에 악영향을 끼친다. 머리 전방 자세 Forward Head Posture 및 거북목을 유발한다.  위턱뼈와 나비뼈(접형골)를 비롯한 두개골을 변형시킨다. 헤드기어로 밀린 위턱과 아래턱은 폐쇄성 수면 무호흡을 야기한다" 등으로 정리할 수 있습니다.

 최신 의학은 폐쇄성 수면 무호흡이 뇌졸중, 암, 사망의 위험률을 증가시키는 것으로 보고하고 있으며 각종 전신 질환의 주요 원인으로 봅니다. 수면 무호흡 환자의 얼굴 특징은 위턱과 아래턱이 작고, 혀는 뒤로 위치하여 기도가 좁아진 상태입니다. 발치 교정과 헤드기어는 위턱과 아래턱을 뒤로 밀어 기도를 좁게 하고 그에 따라 자세가 변화되면서 수면 무홉이 생깁니다. 위 내용에 비추볼 때 위턱을 좁게 하거나 뒤로 미는 치과 치료 행위들이 전신 질환을 일으키는 것으로 추측할 수 있습니다. 혹시 여러분이 자녀가 이런 치료를 받기 전이거나 받고 있는 중이라면 중단하시기 바랍니다.

 

p243

 구강위생, 불소화, 치아 관리가 개선되면 예방과 치료에 유익한 것은 분명하지만, 과거의 건강한 구강 환경에 이르려면 아직 멀었다. 턱과 이빨 크기가 맞지 않아 생기는 덧니가 좋은 예다. 과거 사람들은 연구하면 우리의 이빨이 턱에 비해 너무 큰 게 아니라 턱이 이빨에 비해 너무 작은 것임을 알 수 있다. 그렇다면 치아 교정의는 발치 교정으로 이빨의 부피를 줄이기보다는 턱뼈를 늘이는 데 중점을 두는 게 타당하지 않을까? 

- 피터 S. 엉거, 『이빨』 -

 

p255

 충치는 여전히 기승을 떨치고 있는데 그 이유는 우리가 충치의 근본 원인을 해소하지 않고 있기 때문이다.

 - 대니얼 리버먼, 『우리 몸 연대기』 -

 

p256

 농경이 도입되면서 인류의 입안에는 뮤탄스균이 크게 증가했습니다. 뮤탄스균은 치아 표면에 남은 당류, 탄수화물을 분해해 젖산을 생성하고 젖산은 치아의 딱딱한 부분을 부식시켜 충치를 유발합니다. 인류가 보리, 밀 등 탄수화물이 풍부한 무른 곡식을 먹게 되면서 충치균이 구강 생태계의 '터줏대감'이 된 것입니다. 이후 수천 년간 뚜렷한 변화가 없던 입안 생태계는 산업혁명 때 또 한 번의 큰 변화를 겼습니다. 제분,제당 산업 등이 발달하고 가공 곡물과 당류의 섭취가 급증하면서 그나마 남아 있던 유익한 세균들은 거의 사라졌고 그 빈자리를 충치 및 잇몸병과 관련된 세균들이 차지했습니다.

 결과적으로 농업과 산업화를 통해 식량은 이전보다 많아졌지만 영양소의 질과 다양성이 사라졌습니다. 오늘 우리가 섭취한 열량의 대부분은 쌀, 옥수수, 감자 등에서 온 것입니다. 대량 생산된 작물과 가공식품은 열량이 풍부하고 오래 저장하기에 용이하지만 고대인이 먹었던 음식에 비해 비타민과 미네랄이 적습니다. 이러한 변화로 전염병이나 영양실조 등은 감소했으나 심장병, 뇌졸증, 2형 당뇨병, 골다공증, 알레르기, 특정 종류의 암, 비만 등의 새로운 비감염성 만성 질환이 증가하고 있습니다. 그리고 충치, 잇몸 질환, 턱관절 장애는 이런 비감염성 만성 질환의 한 종류입니다. 할머니가 아기에게 뽀뽀를 해서 충치균에 감염되어 충치가 생기는 것이 아니라 우리의 식생활로 인해 이미 우리 몸의 세균종이 바뀐 상태이며 과량으로 섭취된 탄수화물을 대사하기 위해 뼈와 치아에서 미네랄이 빠져나가면서 뼈와 치아가 부질해진 것입니다.

 

p257

 가공식품으로 병드는 몸

 

 산업의 발달과 수입품의 증가 등으로 한국에서도 1960년대부터 식생활의 급격한 볂화가 일어났습니다. 생활 수준 향상과 충분한 음식 섭취는 우리를 건강하게 해주었지만 생활이 편해지면서 움직임은 줄어들고 가공식품들이 넘쳐나면서 많이는 먹는데 영양은 오히려 부족해지고 이전에는 없었던 새로운 질병들로 고생하기 시작했습니다. 음식들은 화학적으로 처리되고 정제되었으며, 방부제가 첨가되고, X선으로 살균 처리되고 , 인공 영양분이 첨가되어 생명력을 잃어버렸습니다.

 병이 생기지 않고 하루하루 사는 것이 기적일 정도로 우리 몸은 가공식품으로 채워지고 있습니다. 식품첨가물이 수많은 질병을 일으킨다는 것을 알고 있지만, 가공되지 않은 음식을 찾기 어렵고, 바쁜 삶 속에 빠르고 간편한 식품을 선호할 수밖에 없기 때문에 오늘도 가공식품을 먹고 있습니다. 그리고 우리의 몸은 조금씩 병약해지고 있습니다. 

 

 미국의 치과의사 웨스턴 프라이스 Weston A. Price sms 1939년에 쓴 책 『영양과 신체의 퇴행』에서 가공식품의 문제점을 시각적으로 보여주었습니다. 프라이스는 1930년대 초에 건강한 치아를 보장하는 요인이 무엇인지 밝히기 위해 특별한 연구를 시작했습니다. 그는 지구상의 고립된 지역을 10년 이상 여행하면서 서구 문명의 영향을 받지 않은 건강한 사람들을 만났습니다. 그리고 치아의 불규칙한 배열을 야기하는 치열궁의 변화(구조적 결함)과 충치 등의 질환이 선조로부터 물려받은 유전적 결함이 아닌 영양 결핍으로 생긴다는 사실을 밝혀냈습니다.

 

 박사는 오지들을 탐험하면서 전통적인 음식을 먹고 사는 원주민들은 치아 및 전신 건강이 좋았고, 현대적인 음식을 먹기 시작한 원주민들은 건강이 악화되었다는 사실을 발견했습니다. 서구의 현대 음식을 먹는 원주민들의 경우 구강 질환은 물론 관절염, 결핵 같은 퇴행성 질환과 감염성 질환이 나타났습니다. 태평양의 같은 섬 거주민이라 해도, 외부와의 교류가 없는 내륙 지방에 사는 원주민들의 건강과 현대적인 음식을 쉽게 구할 수 있는 항구 근처에 사는 원주민들의 건강 사이에 큰 차이를 보였습니다. 현대 문명의 손길이 닿지 않아 현지의 토속 음식만 먹는 내륙 지방의 원주민들은 넓은 치열궁, 고른 치열, 잘 발달된 턱, 잘 생긴 얼굴, 건강한 몸을 갖고 있었으나, 서구의 가공식품을 먹는 항구 근처에 사는 원주민들은 좁은 치열궁, 불규칙한 치아, 작은 턱, 길고 좁은 얼굴, 병에 쉽게 걸리는 몸을 갖고 있었습니다.

 퇴행성 질환이 늘어나기 시작하는 데는 식단의 완전한 변화도 필요하지 않았습니다. 몇몇 상업 제품들이 영양가 높은 전통 음식들을 내몰고 식단에 추가된 것만으로도 퇴행성 질환이 늘기 시작했습니다. 가장 흔한 수입 식품은 흰 밀가루, 도정된 쌀, 설탕, 식물성 오일, 통조림 제품들이었고, 프라이스는 수입 식품들을 퇴행성 질환의 주범으로 판단했습니다.

 원주민들의 전통적인 식단은 지역에 따라 많이 달랐지만 모두 가공식품이 아닌 자연 식품이라는 공통점이 있었습니다. 오지의 사람들은 공통적으로 설탕, 정제된 탄수화물, 가공된 식물성 오일 등을 전혀 먹지 않았습니다. 상업적으로 판매되는 즉석 식품은 입에 대지도 않았습니다. 모든 음식은 집에서 만든 것으로 비타민과 미네랄이 풍부했습니다.

 프라이스는 원시 종족들의 음식을 분석하여 이와 동일한 음식이나 영양소가 유사한 음식을 심한 충치를 가진 자신의 환자들에게 먹이고 이를 통해 치아 조직을 재생하는 치료를 했습니다. 치열궁이 좁고 치아가 불규칙한 환자들은 치열궁 확대 장치를 이용해 교정 치료를 했습니다. 이렇게 시대를 앞선 치료법을 제시한 것 외에도 프라이스가 뛰어난 이유 중 하나는 중안모 발달의 중요성과 중안모 퇴행의 문제점을 알고 있었다는 점입니다. 가공식품을 먹기 시작하면서 충치가 생기고, 잇몸병으로 치아가 빠지며, 각종 퇴행성 질환으로 고생하는 원시 종족들을 조사하는 과정에서 얼굴과 치열의 변화(부정교합)를 관찰하고, 주원인을 중안모의 전방 성장 부족으로 파악했습니다.

 당시뿐 아니라 현대의 치과의사들은 중안모의 퇴행이 얼마나 중요한가를 모르고 있습니다. 위턱을 포함한 중안모의 발달은 치아 배열, 호흡, 자세, 전신 건강을 결정짓는 중요한 요인입니다. 현대인들은 나쁜 식생활로 인해 중안모와 아래턱이 퇴행된 상태로 태어나고, 나쁜 식생활이 지속되면서 더욱 나빠지는 악순환ㄴ에 빠져 있습니다.

 서양과 한국이라는 지역적 차이, 20세기 초와 21세기 초라는 시간적 차이가 있어서 프라이스가 말하는 식생활과 몸의 퇴행 문제와 그에 대한 해결책 등을 지금의 한국에 그대로 적용하는 데에는 한계가 있습니다. 하지만 우리가 먹는 음식들이 얼마나 생명력을 잃었는지, 그에 따라 우리의 얼굴과 치아가 얼마나 퇴행되었는지를 보여주는 좋은 자료여서 소개했습니다.

 

p263

 충치, 잇몸병, 턱관절 장애는 세 가지를 경고하는 신호입니다. 우리의 얼굴이 구조적 결함이 있는 퇴행된 상태라는 것, 식생활이 나쁘다는 것 그리고 구강위생 등 생활 습관이 좋지 않다는 것입니다. 치아, 턱, 얼굴의 구조적 결함은 전신의 구조적 불균형을 뜻하고, 나쁜 식생활로 치아가 약해진 것은 몸의 다른 부분도 손상되고 있음을 의미합니다. 그러므로 치과에 가서 치료받는 것도 중요하지만 식생활을 개선하고, 규칙적인 운동과 함께 무절제한 생활 습관에서 벗어나는 것이 근본적인 치료입니다.

 

p265

 전문가가 말할 때면 우리는 마치 스스로 생각하기를 멈추는 듯하다. 이는 정말이지 무서운 일이다. 그럼에도 문제가 있다는 의심조차 하지 않는다. 

- 노리나 허츠, 『누가 내 생각을 움직이는가』 -

 

p266

 술을 마시면 입안에 있던 락토바실러스와 같은 유익균이 감소하고 잇몸병을 악화시키는 유해균이 증가합니다.

 흡연을 하면 담배의 니코틴과 일산화탄소 등 수많은 유해 성분이 입안의 말초혈관을 수축하고 혈류 속도를 늦춰 잇몸 질환이 잇어도 겉으론 피가 나지 않아 잇몸병이 악화되는 것을 못 느낍니다. 그러나 잇몸 속은 염증 때문에 계속 곪고 잇몸뼈는 줄어들어 40대가 되면 치아를 뽑게 됩니다. 담배는 염증 치유 속도를 늦추고 잇몸뼈의 재생도 방해합니다. 그래서 금연하지 않으면 잇몸 치료나 임플란트 등의 치과 치료가 실패하게 됩니다. 차이에 국한된 질병 외에도 술과 담배를 하면 구강암이나 인두암의 발병 확률이 4~15배 이상 높아지는 것으로 알려져 있습니다.

 3-3-3 법칙에 따른 양치질이 어렵다면 하루 2번, 2분 동안 이라도 세삼하게 양치질을 잘하기 바랍니다.(치약은 세제와 같은 것이므로 아주 조금만 사용하고, 대신 많이 헹구는 것이 좋습니다.) 잇몸이 좋지 않다면 치실, 치간 칫솔, 구강 세정기 등을 사용해 치아 사이를 더 깨끗이 해야 합니다. 술, 담배, 가공식품을 인생의 낙이라 생각하고 포기할 수 없다면 치과 치료비가 비싸다고 불평하거나 치료에 실패해서 치과의사를 비난하는 일은 삼가기 발바니다. 구조적 결함을 가진 얼굴로 태어났음에도 생활 습관의 변화 없이 많은 치료를 받으면서 치과 치료비가 비싸다고, 양심적인 치과가 없다고 불평한다면 그것이야말로 비양심적인 행동입니다. 치과의사는 여러분의 치아를 책임지지 않습니다. 당신의 치아는 당신의 것입니다.

  

p270

 신경 치료는 보험 치료이기 때문에 치과마다 비용 차이가 크지 않습니다(MTA 등의 신재료를 이용하는 치과의 경우 더 비싼 비용을 제시하기도 합니다). 반면 신경 치료 실력은 치과마다 차이가 있습니다. 차이를 유발하는 원인 중 하나는 낮은 보험 수가입니다. 해외의 신경 치료비는 국내의 2~15배에 이릅니다. 또한 국민건강보험공단이 운영하는 일산병원의 2017년 자료에 따르면, 치과의 보험 치료비는 원가의 56%에 불과한 것으로 나타났습니다. 이 말은 신경 치료 등의 보험 치료는 하면 할수록 적자가 난다는 뜻입니다. 이런 상황에서 신경 치료를 직원에게 시키면서 대충대충 하는 치과의사가 있는가 하면 최신의 지식,기술,장비로 세계 최고 수준의 신경 치료를 하는 치과의사도 있기 때문에 치료의 질적 차이가 생깁니다. 치과의사가 매일 하면서도 늘 어렵게 느끼는 치료가 바로 신경 치료입니다. 기본적으로 이런 신경 치료가 잘되어야 크라운을 오래 사용하는데 우리는 그저 크라운 가격으로 치과를 판단하고 선택합니다.

 2차대전에 아우슈비츠 수용소를 경험한 유태인 정신의학자라는 특별한 이가 쓴 회고록이자 로고테라피라는 정신 분석/치료법의 핵심을 요약한 내용. 전 세계적으로 250만 부 정도가 판매된 스테디 셀러이다.

 

 내용은 당연히 너무 좋다. 수용소의 회고록이라는 부분은 여태 내가 본 책들은(솔제니친의 이반데니소비치의 하루, 수용소 군도 모두 재미었다.) 다 재밋었다. 이 책은 수용소의 에피소드를 정신의학적 관점에서 연결하는 것이 더 큰 목적이었던 듯 싶다. 

 

 어려운 개념들은 바로 비유적인 에피소드와 연결해서 이해하기도 쉽다.

 

 삶이 지치고 힘들 때 읽으면 좋을 것 같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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p10.

 

 "성공을 목표로 삼지 말라. 성공을 목표로 삼고, 그것을 표적으로 하면 할수록 그것으로부터 더욱 더 멀어질 뿐이다. 성공은 행복과 마찬가지로 찾을 수 있는 것이 아니라 찾아오는 것이다. 행복은 반드시 찾아오게 되어 있으며, 성공도 마찬가지이다. 그것에 무관심함으로써 저절로 찾아오도록 해야 한다. 나는 여러분이 양심의 소리에 귀를 기울이고, 그것이 원하는 대로 확실하게 행동할 것을 권한다. 그러면 언젠가는-얘기하건대 언젠가는!-정말로 성공이 찾아온 것을 보게 될 날이 올것이다. 왜냐하면 여러분이 성공에 대해 생각하는 것을 잊어버리고 있었기 때문이다."

 

p19.

 

 니체. "왜 살아야 하는지를 아는 사람은 그 어떤 상황도 견뎌낼 수 있다."

 

p57. 죽음보다 더한 모멸감

 

 인간이 더 이상 어느 것에도 관심을 갖지 않는 정서와 감정의 둔화를 의미하는 무감각은 수용자들이 보이는 정서적 반응의 두번째 단계에서 나타나는 징후이다. 수감자들은 마침내 매일같이 반복되는 구타에 대해서도 무감각해진다. 이런 무감각을 수단으로 사람들은 곧 자기 주위에 꼭 필요한 보호막을 쌓기에 이른다.

 구타는 아주 사소한 이유로 일어났으며, 어떤 때는 전혀 이유가 없는 경우도 있었다. 한 가지 예를 들겠다. 빵이 작업장까지 배달되면 배급을 받기 위해 줄을 서야 했다. 그런데 한번은 내 뒤에 섰던 사람이 그 줄에서 약간 밖으로 빠져 나갔던 모양이다. 그런데 이렇게 줄이 삐뚤어졌다는 사실이 감시병의 비위를 상하게 했다. 나는 내 뒤에서 무슨 일이 있었는지 몰랐고, 감시병에 대해서도 전혀 관심이 없었다. 그런데 갑자기 무엇인가가 내 머리통을 두 번이나 강타하는 것이 아닌가. 그제야 나는 몽둥이를 휘두른 감시병이 내 옆에 와 있다는 것을 알았다. 이런 경우 대부분의 사람들에게 - 이것은 어른들이나 벌을 받는 아이들 모두에게 해당되는 것인데 - 정작 참기 힘든 것은 육체의 고통이 아니다. 부당하고 비합리적인 일을 당했다는 생각에서 오는 정신적 고통이다.

 정말로 이상한 것은 흔적도 남지 않은 단 한 방의 구타가 어떤 상황에서는 그보다 심한 흔적을 남긴 구타보다 더 상처를 준다는 사실이다. 어느 날 나는 눈보라를 맞으며 철로 위에 서 있었다. 험악한 날씨에도 불구하고 우리 반에 있는 사람들은 일을 계속해야 했다. 나는 자갈을 가지고 철로를 고치기 위해 정말로 열심히 일했다. 왜냐하면 그것이 추위를 이길 수 있는 유일한 방법이었기 때문이다. 그러다가 딱 한순간 숨을 돌리기 위해 일하던 손을 멈추고 삽에 몸을 기댄 적이 있었다.

 그런데 바로 그때 운 나쁘게도 감시병이 내 쪽으로 고개를 돌렸다. 그는 내가 게으름을 피우고 있다고 생각한 모양이다. 그런데 그때 그가 나에게 준 고통은 무례한 행동이나 주먹질이 아니었다. 넝마 같은 옷에 초라한 몰골을 하고 서 있는 나를 인간의 형체를 한 물건쯤으로 여겼는지 말은 물론 욕지거리도 할 가치가 없다고 생각했던 모양이다. 욕을 하는 대신 그는 장난하듯이 돌맹이 한 개를 집어 나에게 던졌다. 그 행동이 나에게는 맹수의 주의를 딴 데로 돌리고, 가축들을 제자리로 돌아가게 하고, 자기와는 닮은 점이 전혀 없어서 벌을 줄 가치조차 없다고 생각하는 짐승을 향해 하는 행동같이 느껴졌다.

 구타를 당할 때 가장 괴로운 것은 그들이 주는 모멸감이었다. 한번은 얼어 붙은 철로 위로 길고 무거운 도리를 옮겨야 할 때가 있었다. 만약 한 사람이 미끄러지면 그 자신은 물론 함께 도리를 옮기던 모든 사람들이 위험한 상황에 처하게 된다. 내 오랜 친구 중에 엉덩이가 선천적으로 기형인 장애인이 있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그는 일할 수 있게 되었다는 것을 아주 기쁘게 생각했다. 왜냐하면 선별 과정에서 그와 같은 장애인은 대부분 살아남지 못했기 때문이다.

 그는 유난히 무거운 도리를 들고 철로 위에서 절뚝거렸다. 자기가 넘어지는 것은 물론이고 그러면서 다른 사람들까지 함께 넘어뜨릴 것 같았다. 마침 그때 나는 도리를 옮기고 있지 않았다. 그래서 곧바로 그를 도와 주기 위해 달려갔다. 그런데 바로 그때 등으로 한 방이 날라왔다. 감시병이 나에게 심하게 욕을 하면서 내 자리로 돌아갈 것을 명령했다. 나를 때린 그 감시병은 불과 몇 분 전에 우리를 향해 멸시하는 투로 너희 같은 '돼지들'에게는 동지애가 전혀 없다고 욕했던 바로 그 사람이었다.

 

p75. 인간에 대한 구원은 사랑 안에서, 그리고 사랑을 통해 실현된다.

 

 수용소에서는 신체적으로나 지적으로는 원시적인 생활을 할 수 밖에 없지만 영적인 생활을 더욱 심오하게 하는 것은 가능했다. 밖에 있을 때 지적인 활동을 했던 감수성 예민한 사람들은 육체적으로는 더 많은 고통(그런 사람들은 흔히 예민한 체질을 가지고 있으니까)을 겪었지만 정신적인 측면에서 내면의 자아는 다른 사람들에 비해 비교적 적게 손상 받았을 것이라고 생각한다. 그들은 정신적으로 자신을 둘러싸고 있는 가혹한 현실로부터 빠져나와 내적인 풍요로움과 영적인 자유가 넘치는 세계로 도피할 수 있는 능력을 가지고 있었다. 별로 건강해 보이지 않는 사람이 체력이 강한 사람보다 수용소에서 더 잘 견딘다는 지극히 역설적인 현상도 이것으로 설명될 수 있을 것이다.

 

 이것을 확실하게 알 수 있게 해주는 일화 하나를 소개하겠다.

 

 어느 날 아침 일찍 우리는 작업장을 향해 가고 있었다. 구령 소리가 들렸다.

 "차렷! 앞으로 갓! 왼발 둘, 셋, 넷. 왼발 둘, 셋, 넷. 첫째 줄 주의! 왼발 그리고 왼발 그리고 오른발, 왼발, 모자 벗어!"

 지금도 귀에 생생하게 들려오는 소리다.

 '모자 벗어!'라는 구령이 떨어질 때, 우리는 마침 수용소 문을 통과하고 있었다. 탐조등이 우리를 환하게 비추었다. 민첩하게 행진을 못하는 사람에게는 누구에게나 가차 없이 발길질이 가해졌다. 춥다고 허락 없이 모자를 귀까지 눌러 쓴 사람은 더 큰 벌을 받았다.

 우리는 어둠 속에서 큰 돌멩이를 넘고 커다란 웅덩이에 빠지면서 수용소 밖으로 난 길을 따라 비틀거리며 걸었다. 호송하던 감시병들은 계속 고함을 지르면서 총의 개머리판으로 우리를 위협했다. 다리가 아픈 사람은 옆 사람의 팔에 의지해서 걸었다. 한 마디도 말을 하기가 힘들었다. 얼음같이 차가운 바람 때문에 누구든 입을 열 엄두를 내지 못했기 때문이다. 그런데 높이 세운 옷깃으로 입을 감싸고 있던 옆의 남자가 이렇게 속삭였다.

 "만약 마누라들이 우리가 지금 이러고 있는 꼴을 본다면 어떨까요? 제발이지 마누라들이 수용소에 잘 있으면서 지금 우리가 당하고 있는 일을 몰랐으면 좋겠고."

 그 말을 듣자 아내 생각이 났다. 빙판에 미끄러져 넘어지고, 수없이 서로를 부축하고, 한 사람이 또 한 사람을 일으켜 세우면서 몇 마일을 비틀거리며 걷는 동안 우리는 한마디도 하지 않았다. 그러나 우리는 알고 있었다. 모두가 지금 아내 생각을 하고 있다는 것을.

 때때로 나는 하늘을 바라보았다. 별들이 하나둘씩 빛을 잃어가고, 아침을 알리는 연분홍빛이 짙은 먹구름 뒤에서 서서히 퍼져가고 있었다. 하지만 내 머리 속은 온통 아내 모습뿐이었다. 나는 그녀의 모습을 아주 정확하게 머리 속으로 그렸다. 그녀가 대답하는 소리를 들었고, 그녀가 웃는 것을 보았다. 그녀의 진솔하면서도 용기를 주는 듯한 시선을 느꼈다. 실제든 아니든 그때 그녀의 모습은 이제 막 떠오르기 시작한 태양보다도 더 밝게 빛났다.

 그때 한 가지 생각이 내 머리를 관통했다. 내 생애 처음으로 나는 그렇게 많은 시인들이 자기 시를 통해서 노래하고, 그렇게 많은 사상가들이 최고의 지혜라고 외쳤던 하나의 진리를 깨닫게 되었다. 그 진리란 바로 사랑이야말로 인간이 추구해야 할 궁극적이고 가장 숭고한 목표라는 것이었다. 나는 인간의 시와 사상과 믿음과 설파하는 숭고한 비미의 의미를 간파했다.

 '인간에 대한 구원은 사랑을 통해서, 그리고 사랑 안에서 실현된다.'

 그때 나는 이 세상에 남길 것이 하나도 없는 사람이라도 사랑하는 사람을 생각하며(그것이 비록 아주 짧은 순간이라고 해도) 여전히 더 말할 나위없는 행복을 느낄 수 있다는 것을 알게 되었다. 극단적으로 소외된 상황에서 자기 자신을 적극적으로 표현할 수 없을 때, 주어진 고통을 올바르게 명예롭게 견디는 것만이 자기가 할 수 있는 일의 전부일 때, 사람은 그가 간직하고 있던 사랑하는 사람의 모습을 생각하는 것으로 충족감을 느낄 수 있다. 내 생애 처음으로 나는 다음과 같은 말의 의미를 이해하게 되었다.

 '천사들은 한없는 영광 속에서 영원한 묵상에 잠겨 있나니.'

 

p78. 나를 그대 가슴에 새겨 주오.

 

 앞에 있던 남자가 비틀거리자 뒤에 오던 사람들이 그 위에 넘어졌다. 감시병이 달려와서 가지고 있던 채찍을 휘둘렀다. 그래서 내 생각이 잠시 중단되었다. 하지만 그 후 곧 내 영혼은 수감자 신세에서 또 다른 세계로 가는 길을 찾아 되돌아갔다. 나는 내 사랑하는 사람과 다시 대화를 시작했다. 내가 물으면 그녀가 대답했다. 다음에는 반대로 그녀가 묻고 내가 대답했다.

 "정지."

 드디어 작업장에 도착했다. 모두들 더 좋은 연장을 차지하기 위해 캄캄한 광 속으로 뛰어 들어갔다. 그리고 곡괭이와 삽을 들고 나왔다.

 "이 새끼들. 빨리 빨리 움직이지 못해?"

 곧 우리는 전날 일했던 배수구로 위치를 찾아서 갔다. 얼어붙은 땅이 곡괭이 끝에서 깨지는 소리를 냈다. 그러자 불꽃이 일어났다. 모두들 말이 없었고, 머리는 마비되어 있었다.

 그때도 내 마음은 여전히 아내의 영상에 매달려 있었다. 한 가지 생각이 머리 속을 스쳤다. 나는 아내가 아직 살았는지 죽었는지조차 몰랐다. 그러나 한 가지만은 알고 있었다. 그것은 그때서야 내가 깨달은 것이었는데, 사랑은 사랑하는 사람의 육신을 초월해서 더 먼 곳까지 간다는 것이었다. 사랑은 영적인 존재, 내적인 자아 안에서 더욱 깊은 의미를 갖게 된다. 사랑하는 사람이 실제로 존재하든 존재하지 않았든, 아직 살았든 죽었든 그런 것은 하나도 중요하지 않다.

 나는 아내가 살았는지 죽었는지 몰랐다. 알 수 있는 방법도 없었다.(수용소에는 오는 편지도 가는 편지도 없었다). 하지만 그 순간부터 그것은 더 이상 문제가 되지 않았다. 알아야 할 필요도 없었다. 이 세상 그 어느 것도 내 사랑의 굳건함, 내 생각, 사랑하는 사람의 영상을 방해할 수는 없었다. 사실 그때 아내가 죽었다는 것을 알았더라도 나는 전혀 개의치 않고 아내의 모습을 떠올리는 일에 내 자신을 바쳤을 것이다. 나와 그녀가 나누는 정신적 대화 역시 아주 생생하고 만족스러웠을 것이다.

 "나를 그대 가슴에 새겨 주오. 사랑은 죽음만큼이나 강한 것이라오."

 

p82.

 

 그날도 우리는 참호 속에서 일하고 있었다. 잿빛 새벽이 우리를 둘러싸고 있었다. 우리 위에 있는 하늘도 잿빛이었고, 창백한 새벽빛에 반사되는 눈도 잿빛이었다. 동료가 걸치고 있는 넝마 같은 옷도 잿빛이었고, 얼굴도 잿빛이었다. 나는 또 다시 아내와 침묵의 대화를 나누고 있었다. 아니 어쩌면 당시 나는 내 고통에 대한, 그리고 내가 서서히 죽어가야 하는 상황에 대한 정당한 '이유'를 찾으려고 애쓰고 있었는지도 모른다. 곧 닥쳐올 절망적인 죽음에 대해 마지막으로 격렬하게 항의하고 있는 동안, 나는 내 영혼이 사방을 뒤덮고 있는 음울한 빛을 뚫고 나오는 것을 느꼈다. 나는 그것이 절망적이고 의미 없는 세계를 뛰어넘는 것을 느꼈으며, 삶에 궁극적인 목적이 있는가라는 나의 질문에 어디선가 "그렇다"라고 하는 활기찬 대답 소리를 들었다.

 바로 그 순간 수평선 저 멀리에 그림처럼 서 있던 농가에 불이 들어왔다. 바바리아의 동트는 새벽의 초라한 잿빛을 뚫고 불이 켜진 것이다. '어둠 속에서도 빛은 있나니.' Et lux in tenebris lucet  빛은 어둠 속에서 빛났다. 나는 몇 시간 동안 얼어 붙은 땅을 파면서 서 있었다. 감시병이 지나가면서 욕을 했고, 나는 또 다시 사랑하는 사람과 대화를 나누었다. 그러자 점점 더 그녀가 곁에 있는 것 같이 느껴졌으며, 그녀는 정말 내 곁에 있었다. 그녀를 만질 수 있을 것 같았고, 손을 뻗쳐서 그녀의 손을 잡을 수 있을 것 같은 느낌이 들었다. 그 느낌이 너무나 생생했다. 그녀가 정말로 '거기에' 있었던 것이다. 바로 그 순간 새 한 마리가 날아와 내가 파놓은 흙더미 위에 앉았다. 그리고는 천천히 나를 바라보았다.

 

p88.

 

 인간의 고통은 기체의 이동과 비슷한 면이 있다. 일정한 양의 기체를 빈 방에 들여보내면 그 방이 아무리 큰 방이라도 기체가 아주 고르게 방 전체를 완전히 채울 것이다. 이와 마찬가지로 인간의 고통도 그 고통이 크든 작든 상관없이 인간의 영혼과 의식을 완전하게 채운다. 따라서 고통의 '크기'는 완전히 상대적인 것이라 말할 수 있다.

 

(개인 감상  : 이는 행복, 사랑의 기쁨같은 유쾌한 감정에도 마찬가지로 적용된다. 하지만 긍정적 감정은 오래 지속되지 않는 것과 달리 부정적 감정은 마음에 달라 붙어 오랜동안 괴롭히는 경우가 많다. 그렇기에 기쁨보다는 고통이라는 감정이 인간의 정신에 끼치는 영향은 질적으로도 양적으로도 더 크다고 할 수 있다.)

 

p102. 

 

 수용소에 살아남은 사람들, 여전히 일할 능력을 갖고 있는 사람들은 살아남을 수 있는 가능성을 높이기 위해 온갖 수단을 다 사용해야만 했다. 그들은 절대로 감상에 빠지는 일이 없었다. 그들은 자신의 목숨이 전적으로 감시병들의 기분 - 운명의 노리개라고나 할까? - 에 달려 있다는 것을 알고 있었으며, 이것이 그들 자신을 환경이 강요하는 것보다 훨씬 더 비인간적으로 만들었다.

 

p104.

 

 다시 두번째로 환자 호송 계획이 세워졌다. 하지만 이때는 이 계획이 환자들의 남은 노동력 - 비록 14일 동안이지만 - 을 쥐어짜려는 것인지 아니면 가스실로 데려가는 것인지 아니면 정말로 요양소로 가는 것인지 아무도 아는 사람이 없었다. 그날 저녁 10시 15분 전에 평소 나에게 호감을 갖고 있던 주치의가 다가오더니 넌지시 이렇게 말했다. "내가 당직실에 얘기를 잘 해두었고. 당신을 리스트에서 빼도록 했으니 10시까지 당직실로 가보시오."

 나는 그에게 이것이 내 길이 아니라고, 나는 운명이 정해 놓은 길로 가야 한다는 것을 배웠다고 말했다.

 "나는 내 친구들 곁에 있는 것이 더 좋습니다."

 나는 이렇게 말했다. 그러자 그의 눈이 연민의 빛을 띠었다. 마치 내 운명을 알고 있기나 하는 것처럼. 그는 말없이 나에게 악수를 청했다. 그것은 삶을 위한 악수가 아니라, 삶과 작별하는 악수였다. 나는 천천히 걸어서 막사로 돌아왔다. 막사에는 친한 친구가 나를 기다리고 있었다.

 "자네 정말로 그 사람들과 함께 가기를 원하나?"

 그가 슬픈 표정으로 물었다.

 "그렇다네. 나는 갈 거야."

 그러자 그의 눈에서 눈물이 흘러나왔다. 나는 그를 진정시키려고 애썼다. 그런 다음 할 일이 있었다. 유언을 하는 것이었다.

 "잘 듣게. 오토. 만약 내가 집에 있는 아내에게 다시 돌아가지 못한다면, 그리고 자네가 아내를 다시 만나게 된다면 그녀에게 이렇게 전해 주게. 내가 매일같이 매시간마다 그녀와 대화를 나누었다는 것을. 잘 기억하게. 두번째로 내가 어느 누구보다 그녀를 사랑했따는 것. 세번째로 내가 그녀와 함께 했던 그 짧은 결혼생활이 이 세상의 모든 것, 심지어는 여기서 겪었던 그 모든 일보다 나에게 소중한 의미를 갖는다는 것을 전해 주게."

 

 오토. 자네는 지금 어디에 있나? 아직 살아있나? 우리가 마지막 시간을 함께 보낸 후 자네에게 무슨 일이 일어났나? 자네 아내를 다시 만났나? 그리고 기억하나? 자네가 어린 아이처럼 눈물을 흘리고 있는 동안에도 내가 자네에게 내 유언을 한마디 한마디 외우게 했던 것을.

 

(개인 감상 : 아아.. 너무 슬프다..)

 

p126.

 

 수용소에 있었던 사람들은 자신의 경험을 글로 쓰거나 이야기할 때, 당시 모든 것 중에서 가장 절망적이었던 것은 자기가 얼마나 오랫동안 수용소 생활을 해야 하는지를 알지 못하는 것이었다고 이구동성으로 얘기한다. 우리는 언제 석방되는지를 몰랐다(내가 있던 수용소에서는 그것에 대해 이야기하는 것조차 무의미한 짓이라고 생각했다). 실제로 수형 기간은 불확실했으며, 끝이 있는 것도 아니었다. 한 저명한 연구전문 심리학자는 강제수용소의 이런 삶을 '일시적인 삶' provisional existence이라고 부를 수 있다고 지적했다. 여기에 한마디 더 붙이자면 '끝을 알 수 없는 일시적인 삶'이라고 할 수 있을 것이다.

 새로 수용소에 들어온 사람들은 수용소 환경에 대해서 아무 것도 몰랐다. 다른 수용소로 갔다가 다시 돌아온 사람들은 입을 다물고 있어야 했고, 어떤 수용소로 간 사람들은 한 사람도 다시 돌아오지 못했다. 수용소로 들어가면서 사람들의 마음에 변화가 일어난다. 하나의 불확실성은 결말이 났지만, 이번에는 결말에 대한 불확실성이 뒤를 잇는다. 이런 형태의 삶이 끝날 것인지 말 것인지, 끝난다면 과연 언제 끝날 것인지 미리 예견하는 것이 불가능했다.

 

 'finis'라는 라틴어에는 두 가지 의미가 있다. 하나는 끝이나 완성을 의미하고, 하나는 이루어야 할 목표를 의미한다. 자신의 '일시적인 삶'이 언제 끝날지 알 수 없는 사람은 인생의 궁극적인 목표를 세울 수가 없다. 그는 정상적인 삶을 누리는 사람과는 정반대로 미래를 대비한 삶을 포기한다. 따라서 내적인 삶의 구조 전체가 변하게 된다. 우리가 알고 있는 삶의 다른 영역에서도 이와 비슷한 퇴행현상을 볼 수 있다.

 예를 들자면 실직자가 이와 비슷한 처지라고 할 수 있다. 그의 삶 자체가 '일시적인 것'이기 때문에 어떤 의미에서는 미래를 대비할 수도 없고, 목표를 세울 수도 없다. 실직한 광부를 대상으로 한 연구보고서를 보면 그들이 아주 기이한 형태의 변형된 시간 감각 - 내면의 시간 - 때문에 고통 받고 있는 것으로 나와 있다. 이것은 실직이라는 특별한 상황에서 비롯된 것이다.

 수감자들 역시 기인한 '시간 감각'을 경험했다. 시시때때로 자행되는 폭력과 배고픔이 하루를 꽉 채우고 있는 수용소에서는 하루라는 작은 단위의 시간은 영원한 것처럼 느껴진다. 하지만 그보다 긴 단위의 시간, 예를 들자면 일주일은 아주 빠르게 지나간다. 수용소에서 내가 한번은 동료에게 하루가 일주일보다 더 길게 느껴진다고 얘기하자 그 친구도 내 말에 동의한다고 한 적이 있다. 우리의 시간 감각이 얼마나 역설적이었던가!

 이와 관련해서는 예리한 심리학적 관찰이 돋보이는 것으로 정평이 나 있는 토마스 만의 소설 <마의 산>을 떠올릴 수 있을 것이다. 이 작품에서 토마스 만은 서로 비슷한 심리 상태에 놓여 있는 사람들, 즉 폐결핵에 걸려 요양소에서 언제 나가게 될지 모르는 환자들을 등장시켜 인간의 영적인 발달단계를 얘기하고 있다. 그들도 똑같은 상태, 미래도 없고 삶의 목표도 없는 생존의 상태를 경험한 것이다.

 

 수용소 동료 중에 나에게 이런 말을 한 사람이 있었다. 처음 이곳에 도착했을 때 역에서부터 수용소까지 길게 줄을 서서 행진해 들어왔는데, 그 행진이 마치 자기의 장례식 행렬같이 느껴졌다는 것이다. 그에게 있어 자신의 삶은 전혀 미래가 없는 것이었다. 그는 마치 자기가 이미 죽기라도 한 것처럼 그것으로 모든 것이 끝났다고 생각했다.

 삶이 날아간 것 같은 이런 느낌은 다른 요인에 의해 더욱 심화된다. 갇혀 있어야 하는 기간이 정해져 있지 않다는 것(사실 수감자들이 가장 뼈저리게 느끼는 부분이다)과, 갇혀 있는 공간이 너무 협소하다는 것이 그 요인이다. 철조망 밖에 있는 것은 무엇이든 아주 멀리 떨어져 있는 것, 손이 닿을 수 없는 것 그래서 비현실적인 것처럼 보인다. 밖에서 일어나는 일과 그곳에 살고 있는 사람들과 그곳에 이루어지는 모든 정상적인 삶은 수감자들에게는 유령과 같은 것이었다. 만약 그가 바깥 세계를 볼 수 있다면 그에게는 그것이 마치 저 세상에서 온 사람이 바라보는 이승과 같이 비쳐졌을 것이다.

 미래의 목표를 찾을 수 없어서 스스로 퇴행하고 있는 사람들은 과거를 회상하는 일에 몰두한다. 앞에서 우리는 이와는 다른 의미에서 수감자들이 공포로 가득 찬 현재를 덜 사실적인 것으로 만들기 위해 과거를 회상하려는 경향이 있다는 얘기를 했었다. 그러나 실제 존재하는 현실에서 현재를 박탈하는 행위에는 어떤 일정한 위험이 도사리고 있다. 사실 수용소에서도 긍정적인 그 무엇인가를 얻을 수 있는 기회는 분명히 있다. 하지만 대부분은 그것이 기회인 줄 모르고 그냥 지나쳐버린다. 자신의 '일시적인 삶'을 비현실적인 것으로 간주하는 것이 삶의 의지를 잃게 하는 중요한 요인이 된다. 그 앞에 닥치는 모든 일들이 무의미한 것으로 여겨진다.

 

 그런 종류의 사람들은 이것이 단지 예외적으로 어려운 외형적 상황일 뿐이며, 이런 어려운 상황이 인간에게 정신적으로 자기 자신을 초월할 수 있는 기회를 준다는 사실을 종종 잊어버린다. 수용소의 어려운 생황을 자신의 정신력을 시험하기 이한 도구로 이용하는 대신 자신의 삶을 진지하게 생각하지 않고 그것을 아무런 성과도 없는 그 어떤 것으로 경멸한다. 그들은 눈을 감고 과거 속에서 사는 것을 좋아한다. 그런 사람들에게 인생은 의미 없는 것이 된다.

 

 물론 아주 극소수의 사람만이 이렇게 위대한 영적인 고지에 오를 수 있다. 하지만 몇몇 사람들은 세상일에서의 실패와 죽음을 통해서도 이런 위대함을 성취할 수 있는 기회를 갖는다. 그들은 평범한 환경에서는 절대로 도달할 수 없는 그런 위대한 성취를 이루어낸다.

 

 평범하고 의욕 없는 사람들에게는 비스마르크의 이 말을 들려 주는 것이 좋을 것이다.

 

 "인생이란 치과의사 앞에 있는 것과 같다. 그 앞에 앉을 때마다 최악의 통증이 곧 찾아올 것이라고 생각하지만 그러다 보면 어느새 통증이 끝나 있는 것이다."

 

 강제수용소에 있던 대부분의 사람들은 무언가를 성취할 수 있는 인생의 진정한 기회는 자기들에게 다시 오지 않을 것이라고 믿었다. 그러나 실제는 그렇지 않았다. 그곳에도 기회가 있고, 도전이 있었다. 삶의 지침을 돌려 놓았던 그런 경험의 승리를 정신적인 승리로 만들 수도 있었고, 그와는 반대로 그런 도전을 무시하고, 다른 대부분의 수감자들처럼 무의미하게 보낼 수도 있었다.

 

p131. 미래에 대한 기대가 삶의 의지를 불러 일으킨다.

 

 수용소에서 수감자가 입은 정신병리적 상처를 정신요법이나 정신 위생학적 방법을 이용해 치료하려면 그가 기대할 수 있는 미래의 목표를 정해줌으로써 내면의 힘을 강화시켜 주어야 한다. 수감자들 중에 몇 사람은 본능적으로 자기 스스로가 그런 목표를 찾아내기도 한다. 이것이 바로 인간의 특성으로 이렇게 사람은 미래에 대한 기대가 있어야만 sub specie aeternitatis 세상을 살아갈 수 있다. 기대를 갖기 위해 때때로 자기 마음을 밀어붙여야 할 때가 있음에도 불구하고 인간의 존재가 가장 어려운 순간에 있을 때, 그를 구원해 주는 것이 바로 미래에 대한 기대이다.

 

 내가 실제로 경험했던 일이 생각난다. 그날 나는 거의 눈물을 흘릴 정도의 극심한 통증(찢어진 신발 때문에 발에 심한 종기가 생겼다)을 겪으며 긴 행렬에 끼여서 수용소에서 작업장까지 몇 킬로미터를 절뚝거리며 걸어가고 있었다. 날은 추웠고, 살을 에는 듯한 바람이 우리를 사정없이 내리쳤다. 나는 우리의 누추한 생활과 연관된 끊임없이 자질구레한 문제들을 계속 생각하고 있었다. 오늘 저녁에는 무엇을 먹게 될까? 만약 특별배급으로 소시지가 나온다면 그것을 빵을 바꾸어 먹을까? 2주일 전에 상으로 받았던 담배 한 개비를 수프 한 그릇과 바꾸어 먹을까? 한쪽 신발끈이 끊어졌는데 끈을 대신할 철사를 어디서 구하지? 시간 안에 작업장에 가서 평소에 내가 일하던 작업반에 낄 수 있을까? 그렇지 않고 다른 작업반에 들어갔다가 거기서 고약한 감독을 만나면 어떻게 하지? 이렇게 매일 긴 행렬에 끼어서 작업장에 가지 않고 대신 수용소 안에서 일할 수 있도록 나를 도와 주는 카포는 없을까? 그 카포와 잘 사귀려면 어떻게 해야 하지?

 그러다가 매일같이 시시각각 그런 하찮은 일만 생각하도록 몰아가는 상황이 너무 역겹게 느껴졌다. 나는 생각을 다른 주제로 돌리기로 했다. 갑자기 나는 불이 환히 켜진 따뜻하고 쾌적한 강의실의 강단에 서 있었다. 내 앞에는 청중들이 푹신한 의자에 앉아서 내 강의를 경청하고 있었다. 나는 강제수용소에서의 심리상태에 대한 강의를 하고 있었던 것이다! 그 순간 나를 짓누르던 모든 것들이 객관적으로 변하고, 일정한 거리를 둔 과학적인 관점에서 그것을 보고 설명할 수 있게 되었다. 이런 방법을 통해 나는 어느 정도 내가 처한 상황과 순간의 고통을 이기는 데 성공햇고, 그것을 마치 과거에 이미 일어난 일처럼 관찰할 수 있었다. 나 자신과 문제는 내가 주도하는 흥미진진한 정신과학의 연구대상이 되었다. 스피노자가 그의 <윤리학>에서 무엇이라고 했던가?

 

 "감정, 고통스러운 감정은 우리가 그것을 명확하고 확실하게 묘사하는 바로 순간에 고통이기를 멈춘다."

 

 미래 - 그 자신의 미래 - 에 대한 믿음을 잃어버린 수감자는 불운한 사람이다. 미래에 대한 믿음을 잃어버리는 것과 더불어 그는 정신력도 상실하게 된다. 그는 자기 자신을 퇴화시키고, 정신적으로나 육체적으로 퇴락의 길을 걷는다. 일반적으로 이런 현상은 아주 갑자기, 위기라는 행태를 띠고 일어난다.

 수용소 생활을 해본 사람들은 이런 징후에 아주 익숙해져 있다. 우리 자신 때문이 아니라(별 의미가 없기는 하지만) 우리 친구때문에 우리는 모두 이 순간을 두려워했다. 대체로 이런 현상은 아침에 수감자가 옷 입고 세수하는 것을 거부하거나 아니면 연병장으로 나가는 것을 거부하는 것으로 시작된다. 간청과 주먹질, 위협도 효과가 없다. 그냥 누워서 거의 움직이지 않는다. 만약 이런 위기가 병 때문에 생긴 것일 경우 그는 병실로 옮겨지는 것을 거부하고, 그밖에 도움이 되는 그 어떤 것도 거부한다. 그냥 포기해버리는 것이다. 자기가 싼 배설물 위에 그냥 그렇게 누워 있으려고만 한다. 세상 어떤 것으로부터도 더 이상 간섭 받지 않고.

 

p134. 미래에 대한 믿음의 상실은 죽음을 부른다.

 

 언젠가 나는 미래에 대한 믿음의 상실과 이런 위험한 자포자기가 서로 밀접한 연관을 가지고 있다는 사실을 보여 주는 아주 극적인 사례를 보았다.

 F. 우리 구역의 고참 관리인인 그는 그 전에는 꽤 유명한 작곡가이자 작사가였다. 그가 어느 날 나에게 고백했다.

 "의사 선생. 선생님께 드릴 말씀이 있습니다. 이상한 꿈을 꾸었어요. 꿈에서 어떤 목소리가 소원을 말하라는 거예요. 내가 알고 싶은 것을 말하래요. 그러면 질문에 모두 대답을 해줄 거라고 하더군요. 그래서 제가 무얼 물어보았는지 아십니까? 나를 위해서 이 전쟁이 언제 끝날 것이냐고 물어보았지요. 무슨 말인지 아시겠소. 의사 양반? 나를 위해서 말이요. 저는 언제 우리가, 우리 수용소가 해방될 것인기, 우리의 고통이 언제 끝날 것인지 알고 싶었어요."

 

 "언제 그런 꿈을 꾸었소?"

 내가 물었다.

 "1945년 2월에요."

 그가 대답했다. 그때는 3월이 막 시작되었을 때였다.

 "그래, 꿈 속의 목소리가 뭐라고 대답합디까?"

 그가 내 귀에다 나직하게 속삭였다.

 "3월 30일래요."

 F는 희망에 차 잇었고 꿈 속의 목소리가 하는 말이 맞다고 확신하고 있었다.

 하지만 약속의 날이 임박했을 때 우리 수용소로 들어온 전쟁 뉴스를 들어 보면 그 약속한 날에 우리가 자유의 몸이 될 가능성이 거의 없어 보였다. 3월 29일. F는 갑자기 아프기 시작했고 열이 아주 높게 올랐다. 3월 30일, 그의 예언자가 그에게 말해 주었던 것처럼 그에게서 전쟁과 고통이 떠나갔다. 헛소리를 하다가 그만 의식을 잃은 것이다. 3월 31일에 그는 죽었다. 사망의 직접적인 요인은 발진티푸스였다.

 

 인간의 정신상태 - 용기와 희망 혹은 그것의 상실 - 와 육체의 면역력이 얼마나 밀접한 연관을 가지고 있는지 아는 사람은 희망과 용기의 갑작스런 상실이 얼마나 치명적인 결과를 초래하는지 이해할 것이다. 내 친구의 죽음을 초래했던 결정적인 요인은 기대햇던 해방의 날이 오지 않았다는 데에 있었다. 그래서 그는 몹시 절망했으며, 잠재해 있던 발진티푸스 균에 대항하던 그의 저항력이 갑자기 떨어진 것이다. 미래에 대한 거의 믿음과 살고자 하는 의지는 마비되었고, 그의 몸은 병마의 희생양이 되었다. 결과적으로 꿈 속의 목소리가 했던 말이 맞기는 맞았던 것이다.

 내가 이 경우를 통해 관찰하고 도출해낸 결론은 후에 수용소 주치의로부터 들었던 말과도 일치했다. 그의 말에 의하면 1944년 성탄절부터 1945년 새해에 이르기까지 일주일간의 사망률이 일찍이 볼 수 없었던 추세로 급격히 증가했다는 것이다. 주치의는 이 기간 동안 사망률이 증가한 원인은 보다 가혹해진 노동조건이나 식량사정의 악화, 기후의 변화, 새로운 전염병 때문이 아니라고 했다. 그것은 대부분의 수감자들이 성탄절에는 집에 갈 수 있을 것이라는 막연한 희망을 품고 있었기 때문이라는 것이다. 그 시간이 다가오는데도 희망적인 뉴스가 들리지 않자 용기를 잃었으며, 절망감이 그들을 덮쳤다. 이것이 그들의 저항력에 위험한 영향을 끼쳤고, 그 중 많은 사람들이 사망하기에 이른 것이다.

 

p137. 살아야 할 이유

 

 앞에서도 얘기했지만 수용소에서 사람이 정신력을 회복하기 위해서는 그에게 먼저 미래에 대한 희망을 보여 주는 데 성공해야 한다. 니체가 말했다.

 

 " '왜' 살아야 하는지 아는 사람은 그 '어떤' 상황도 견딜 수 있다."

 

 이 말은 수감자들을 대상으로 심리치료와 정신위생학적 치료를 하려는 사람에게 귀감이 되는 말이다. 수감자들을 치료할 기회가 있을 때마다 그들이 처한 끔찍한 현실을 어떻게든 견딜 수 있는 힘을 주기 위해 그들에게 살아야 할 이유 - 목표 - 를 얘기해 주어야 한다. 슬프도다! 자신의 삶에 더 이상의 느낌이 없는 사람, 이루어야 할 아무런 목적도, 목표도 그리고 의미도 없는 사람이여! 그런 사람은 곧 파멸했다. 모든 충고와 격려를 거부하는 그런 사람들이 하는 전형적인 대답은 이런 것이었다.

 "나는 내 인생에서 더 이상 기대할 것이 없어요."

 이런 사람에게 어떤 대답을 해주어야 할까? 가장 필요한 것은 삶에 대한 태도를 근본적으로 변화시키는 것이다. 우리는 우리 자신에 대해 공부해야 했고, 더 나아가 좌절에 빠져 있는 사람에게 다음과 같은 이야기를 들려 주어야 했다.

 정말 중요한 것은 우리가 삶으로부터 무엇을 기대하는가가 아니라 삶이 우리로부터 무엇을 기대하는가 하는 것이라는 사실을. 삶의 의미에 대해 질문을 던지는 것을 중단하고, 대신 삶으로부터 질문을 받고 있는 우리 자신에 대해 매일 매시간마다 생각해야 할 필요가 있었다. 그리고 그에 대한 대답은 말이나 명상이 아니라 올바른 행동과 올바른 태도에서 찾아야 했따. 인생이란 궁극적으로 이런 질문에 대한 올바른 해답을 찾고, 개개인 앞에 놓여진 과제를 수행해 나가기 위한 책임을 떠맡는 것을 의미한다.

 이런 과제들, 즉 살의 의미는 사람마다 다르고, 때에 따라 다르다. 따라서 일반적인 방식으로 삶의 의미를 정의하는 것은 불가능하다. 삶의 의미가 무엇인가에 대한 대답은 포괄적으로 할 수 있는 것이 아니다. '삶'이란 막연한 것이 아니라 현실적이고 구체적인 것이기 때문이다. 삶이 우리에게 던져준 과제가 현실적이고 구체적인 것과 마찬가지로. 바로 이것이 개개인마다 다른 인간의 운명을 결정한다. 어떤 사람도, 그와는 다른 사람, 그와는 다른 운명과 비교할 수 없다. 똑같은 상황이 되풀이되는 경우는 하나도 없으며, 각각의 상황은 서로 다른 반응을 불러 일으킨다. 때로는 그가 처해 있는 상황이 그에게 자신의 운명을 개척하기 위해 행동에 들어갈 것을 요구할 수도 있다. 반면에 어떤 때에는 더 생각할 시간을 갖고, 그렇게 하는 것이 자신에게 이롭다고 생각하게 할 수도 있다. 때로는 주어진 운명을 그대로 받아들이고, 자기 십자가를 지고 나가야할 때도 있다. 각각의 상황들은 각각 그 나름대로의 독자성을 갖는다. 그리고 어떤 상황에서 비롯된 어떤 문제에 대한 해결책은 언제나 가까운 곳에 단 하나만 있는 법이다.

 

 만약 어떤 사람이 시련을 겪는 것이 자기 운명이라는 것을 알았다면, 그는 그 시련을 자신의 과제, 다른 것과 구별되는 자신만의 유일한 과제로 받아들여야 한다. 시련을 당하는 중에도 자신이 이 세상에서 유일한 단 한 사람이라는 사실에 감사해야 한다. 어느 누구도 그를 시련으로부터 구해낼 수 없고, 대신 고통을 짊어 질 수도 없다. 그가 자신의 짐을 짊어지는 방식을 결정하는 것은 그에게만 주어진 독자적인 기회이다.

 

p139. 완수해야 할 시련이 그 얼마인고!

 

 우리 같은 수감자들에게 이런 생각들은 현실과 아주 동떨어진 사색적인 이론이 아니었다. 그것은 우리가 자신을 도울 수 있는 유일한 생각이었다. 이 생각들은 우리가 살아서 그곳을 나올 가능성이 없어 보이는 때에도 절망으로부터 우리를 지켜주었다. 오래전에 우리는 삶의 의미가 무엇이냐고 묻는 단계를 통과했었다. 그 순수한 물음은 가치 있는 어떤 것을 창조하기 위한 적극적인 행동을 통해 어떤 목표를 성취하는 것으로 삶을 이해한다. 우리에게 있어서 삶의 의미는 삶과 죽음, 고통 받는 것과 죽어가는 것까지를 폭넓게 감싸 안는 포괄적인 것이었다.

 시련이 우리에게 무엇을 의미하는지가 명백하게 밝혀지면서 우리는 수용소 안에서 자행되는 폭력을 무시하거나 거짓 상상을 하거나 억지로 만들어낸 낙관적인 생각을 즐기는 것으로 그것이 주는 고통을 감소시키려는 시도를 하지 않게 되었다. 우리는 시련으로부터 등을 돌리기를 더 이상 원하지 않았다. 시련 속에 무엇인가 성취할 수 있는 기회가 숨어 있다는 것을 깨달았다.

 릴케가 <우리가 완수해야 할 시련이 그 얼마인고!>라는 시를 쓴 것도 아마 시련 속에 이런 기회가 숨어 있기 때문일 것이다. 릴케는 마치 '작업을 완수한다'고 말하는 것과 똑같이 '시련을 완수한다'고 했다. 우리에게는 완수해야 할 시련이 너무 많았다. 따라서 우리는 될 수 있는 대로 나약해지지 않고, 남몰래 눈물 흘리는 일을 최대한 자제하면서 있는 그대로의 고통과 대면해야 할 필요가 있었다.

 그렇다고 눈물 흘리는 것을 부끄러워할 필요는 없었다. 왜냐하면 눈믈은 그 사람이 엄청난 용기, 즉 시련을 받아들일 용기를 가지고 있다는 것을 의미하기 때문이다. 아주 극소수의 사람만이 그것을 깨달았다. 어떤 사람들은 부끄러워하면서 자기가 운 적이 있다고 고백하기도 했다. 한번은 부종 때문에 고생하던 동료에게 어떻게 나았냐고 물어보았다. 그랬더니 그가 이렇게 대답했다.

 "실컷 울어서 조직 밖으로 몰아냈지."

 

p142. 집단 치료의 경험

 

 당연한 일이지만 수용소 안에서는 집단을 대상으로 정신치료를 할 기회는 제한되어 있엇다. 말로 하는 치료보다는 오히려 올바른 모범을 보여 주는 편이 더 효과적이었다. 공정하고 용기 있는 행동으로 보아 수용소 편이 아닌 것이 분명한 한 고참 관리인은 자기 담당구역 사람들에게 지대한 도덕적 영향을 줄 수 있는 기회를 무수히 많이 가지고 있엇다.

 행동을 통해 즉각적인 영향을 주는 것이 대개는 말보다 훨씬 효과적인 법이다. 하지만 어떤 때는 말이 더 효과적인 경우도 있다. 어떤 외부적인 조건에 의해 사람들의 마음에 무언가를 받아들일 수 있는 수용이 폭이 넓어졌을 경우이다. 나는 어떤 외부적인 조건으로 이런 정신적 수용력이 넓어졌을 때, 우연히 막사에 있던 모든 수감자들을 대상으로 정신요법을 시도했던 일을 기억하고 있다.

 그날은 재수가 없는 날이었다. 아침 점호 시간에 반란행위로 간주될 수 있는 행동이 무엇인지가 수없이 나열되었다. 만약 지금부터 이런 행동을 하면 그 자리에서 교수형에 처하겠다고 했다. 그 범죄행위 중에는 우리가 갖고 있는 낡은 담요에서 조각(무릎을 보호하기 위해)을 잘라내는 행위와 '좀도둑질' 같은 것이 포함되어 있었다.

 그로부터 며칠 전에 반쯤 굶어 죽게 된 한 수감자가 감자 창고를 부수고 들어가 거기에서 감자 몇 파운드를 훔친 적이 있었다. 절도가 잇었다는 사실이 곧 밝혀졌고, 수감자 중 몇 명은 그 '도둑'이 누구인지 알고 있었다. 수용소 당국자들이 이 사실을 알고 죄를 진 사람이 누군지 불지 않으면 수용소에 있는 모든 사람들을 하루 동안 굶기겠다고 했다. 2,500명의 사람들은 물론 굶는 쪽을 선택했다.

 

 하루 종일 꼬박 굶어야 했던 그날 저녁, 우리는 막사에 누워 있었다. 분위기가 착 가라앉은 상태였다. 몇 마디 말이 오갔을 뿐 이고 한마디 말조차도 신경에 거슬렷다. 그런데 설상가상으로 불이 나가버렸다. 기분이 완전히 바닥까지 떨어지고 말았다. 하지만 우리 고참 관리인은 현명한 사람이었다. 그는 그 자리에서 즉흥적으로 그 순간 모든 사람들이 머리 속으로 생각하고 있던 이야기를 입밖에 냈다. 그는 지난 며칠 동안 병이나 자살로 죽어간 수많은 동료들에 대해 이야기했다. 그와 동시에 그는 그 죽음의 진짜 원인이 무엇이었는지에 대해서도 이야기했다. 그것은 바로 희망을 버렸기 때문이라는 것이다. 그는 앞으로 생길지도 모를 희생자들이 이런 최악의 상태에 이르지 않도록 어떤 방법이 강구되어야 한다고 말했다. 그러면서 이런 조언을 해줄 수 있는 사람이 바로 나라고 했다.

 

 신은 알고 있을 것이다. 당시 나는 정신의학에 대해 설명하거나 설교를 하고 싶은 기분이 전혀 아니었다는 것을. 동료들을 상대로 정신과적 치료를 하고 싶은 기분이 아니었다. 나는 춥고, 배고프고, 짜증스럽고, 피곤했다. 하지만 나는 노력해야 했다. 좀처럼 생기지 않는 이런 기회를 활용해야만 했다. 그 어느 때보다 용기를 북돋아 주는 것이 절실한 때였기 때문이다.

 

 나는 단순의 위로의 말부터 시작했다. 제2차 세계대전이 시작되고 여섯번째 겨울을 맞지만 지금 유럽의 정세를 살펴보면 우리 처지가 그렇게 최악은 아니라고 말했다. 그리고 지금까지 시련을 겪어오면서 다른 무엇으로도 대신할 수 없는 것을 잃은 적이 있다면 그것이 무엇인지 한번 스스로에게 물어보라고 했다. 나는 의외로 그들이 대체할 수 없는 것을 잃어버린 경우는 거의 없다는 사실을 알게 되었다. 아직도 살아있는 사람들은 희망의 이유를 갖고 있었다. 건강, 가족, 행복, 전문적인 능력, 재산, 사회적 지위 - 이것은 모두 나중에 다시 가질 수 있는 것들이었다. 그때 나는 니체의 말을 인용했다.

 

 "나를 죽이지 못하는 것은 나를 더욱 강하게 만들 것이다."

 

 그리고 나는 미래에 대해 얘기했다. 공정하게 얘기해서 미래가 가망 없어 보일 것이라고 했다. 그리고 우리가 앞으로 살아남을 가능성이 얼마나 적은지에 대해서도 모두 생각을 같이 했다. 우리 수용소에는 아직 발진티푸스가 발생하지 않았다고 말했다. 나는 내가 살아남을 확률을 20명 중의 한 명으로 점쳤다. 하지만 그럼에도 불구하고 나는 희망을 잃거나 포기할 의사가 없다는 얘기를 그들에게 들려 주었다. 왜냐하면 어느 누구도 미래를 예측할 수 없기 때문에, 심지어 바로 한 시간 후도 내다볼 수 없기 때문에, 며칠 안에 전쟁 상황에 엄청난 반전이 일어날 것을 기대할 수는 없지만 수용소에서의 경험을 통해서 우리는 적어도 각 개인에게는 얼마나 엄청난 기회가, 그것도 아주 갑자기 찾아오는지를 누구보다도 잘 알고 있었다. 

 

 하지만 나는 미래에 대해서만 말한 것이 아니었다. 그 미래에 드리워져 있는 장막에 대해서도 얘기했다. 또한 나는 과거에 대해서도 얘기했다. 과거에 있었던 그 모든 즐거운 일들과, 그 빛이 현재의 어둠 속에서도 얼마나 밝게 빛나고 있는지를. 이때 나는 또 시를 인용했다. 내 스스로 설교를 하고 있다는 느낌을 피하기 위해서였다.

 

 "그대의 경험, 이 세상 어떤 권력자도 빼앗지 못하리!"

 

 경험뿐이 아니다. 우리가 그 동안 했던 모든 일, 우리가 했을지도 모르는 훌륭한 생각들, 그리고 우리가 겪었던 고통, 이 모든 것들은 비록 과거로 흘러갔지만 결코 잃어버린 것이 아니다. 우리는 그것을 우리 존재 안으로 가지고 들어왔다. 간직해 왔다는 것도 하나의 존재방식일 수 있다. 그리고 어쩌면 이것이 가장 확실한 존재방식인지도 모른다. 그런 다음 나는 삶에 의미를 부여할 수 있는 다양한 기회에 대해 얘기했다. 나는 내 동료(꼼짝도 않고 누워 있다가 가끔 한숨을 쉬던)를 향해 어떤 상황에서도 인간의 삶은 의미를 갖는 일을 절대로 멈추지 않는다는 것, 그리고 삶의 무한한 의미에는 고통과, 임종, 궁핍과 죽음이 모두 포함되어 있다는 말을 했다. 어둠 속에서 내 말에 열심히 귀를 기울이고 있는 불쌍한 신의 피조물들에게 우리가 처한 가혹한 현실을 과감하게 직면하자고 했다. 희망을 잃어서는 안 되고, 우리들의 가망 없는 싸움이 삶의 존엄성과 의미를 손상시키지 않는다는 확신 속에서 용기를 가져야 한다고 말했다. 나는 누군가 - 친구나 아내, 산 사람, 혹은 죽은 사람, 혹은 하느님 - 각각 다른 시간에 우리 한 사람 한 사람을 내려다보고 있다고 했다. 우리를 지켜보고 있는 그 사람은 우리가 자기를 실망시키지 않기를 바라고 있다고 했다. 우리가 의연하고 비굴하지 않게 시련을 이겨내고, 어떤 태도로 죽어야 하는지를 알기를 바란다고.

 

 마지막으로 나는 우리의 희생에 대해서 얘기했다. 희생은 어떤 경우에나 다 의미를 가지고 있다. 우리의 희생은 그 특성상 정상적인 생활 속에서는, 물질적인 성공이 중요한 세계에서는 틀림없이 의미 없는 것으로 여겨질 희생이었다. 그러나 실제로 우리의 희생에는 의미가 있었다. 나는 진솔한 말투로 말했다. 우리 중에 종교를 가지고 있는 사람들은 이 말을 쉽게 이해할 것이다. 수용소에 처음 들어온 한 동료가 하늘에 이런 기도를 하는 것을 들었다. 자신의 고난과 죽음으로 자기가 사랑하는 사람이 고통스런 종말로부터 구원받도록 해달라는 기도였다. 이런 사람에게 고난과 죽음은 의미 있는 것이다. 그의 희생은 아주 심오한 의미를 지닌 희생이다. 그는 헛되게 죽고 싶지 않았던 것이다. 그리고 우리 중 어느 누구도 그렇게 되기를 원하지 않았다.

 나는 그때 바로 그곳, 그 막사에서, 실제로 가망이 없는 그런 상황에 놓여 있는 우리들의 삶이 갖고 있는 충만한 의미를 찾아보기 위해 이 말을 했다. 내 말은 효과가 있었다. 불이 다시 들어와 주위가 밝아지자 누추한 몰골을 한 동료들이 두 눈에 눈물을 가득 머금고 나에게 다가와서 감사하다고 했다.

 

 하지만 이제 와서 고백하건대 당시 나는 고통 받고 있는 내 동료들의 마음 속에 그렇게 대단한 정신력을 심어 주지 못했던 것 같다. 분명히 나에게 그런 일을 할 수 있는 기회가 많았을 텐데 내가 그것을 그냥 놓쳐버리고 만 것이 틀림없다.

 

p148. 수용소의 여러 가지 인간 군상.

 

 세상에는 두 가지 부류의 사람이 있으며, 고매한 인격을 가진 '부류'와 미천한 인격을 가진 '부류'로 나누어진다는 사실을 배울 수 있었다. 두 부류의 사람들은 어디에서나 볼 수 있다. 그들은 사회의 모든 집단에 들어가 있다. 착한 사람들로만 이루어진 집단, 혹은 악한 사람들만으로 이루어진 집단은 존재하지 않는다. 말하자면 '순전히 한 부류'의 사람들로만 구성되어 있는 집단은 이 세상에 없다는 것이다. 수용소 감시병 중에도 가끔씩은 좋은 사람이 끼어 있을 수도 있다.

 

 강제수용소에서의 생활은 인간의 영혼을 파헤치고, 그 영혼의 깊이를 적나라하게 드러나도록 만들었다. 그런데 놀라운 것은 이렇게 적나라하게 드러난 인간성에서도 선과 악의 혼합이라는 인간 본연의 특성이 발견되다는 점이다. 모든 인간을 관통하는 선과 악을 구별하는 단층은 아주 심오한 곳까지 이르러 인간성의 바닥이 적나라하게 노출된 강제수용소라는 곳에서 더욱 분명하게 드러나게 된다.

 

p156.

 

 자유를 찾은 지 며칠이 지난 어느 날, 나는 수용소 근처에 있는 시장으로 가기 위해 꽃들이 만발한 들판을 지나 시골길을 걸었다. 종달새가 하늘로 날아올랐고, 새들의 노랫소리가 들렸다. 주변 몇 마일 안에 사람 하나 보이지 않았다. 드넓은 대지와 하늘, 종달새의 환호 그리고 자유로운 공간만이 그곳에 있었다.

 나는 멈춰 서서 주변을 돌아보고, 하늘을 올려다보았다. - 그런 다음 무릎을 꿇었다. 그 순간 나는 내 자신은 물론 이 세상에 대해서 아무것도 생각하지 않았다. 항상 그랬던 것처럼 단 한 가지만 마음 속에 품고 있었다.

 "저는 제 비좁은 감방에서 주님을 불렀나이다. 그런데 주님은 이렇게 자유로운 공간에서 저에게 응답하셨나이다."

 그때 얼마나 오랫동안 무릎을 꿇고 앉아서 이 말을 되풀이했는지 더 이상 기억나지 않는다. 그러나 나는 알고 잇었다. 바로 그 날, 바로 그 순간부터 새 삶이 시작되었다는 것을. 나는 다시 인간이 되기 위해 한 걸음 한 걸음 앞으로 걸어나갔다.

 

 

p156. 해방 이후 나타난 현상들.

 

 수용소에서의 마지막 며칠 동안 견뎌야 했던 극도의 정신적 긴장(예를 들어 게슈타포의 혹독한 심문 같은 것)으로부터 빠져나오는 길이 아무런 장애 없이 순탄했던 것은 절대로 아니었다. 감옥에서 풀려난 사람에게는 더 이상 정신적 치료를 할 필요가 없다고 생각하는 것은 정말로 잘못된 생각이다. 그렇게 심한 정신적 압박을,, 그렇게 오랜 시간 동안 받았던 사람에게는 자유를 얻은 후에도 그 전과 똑같은 위험요소가 도사리고 있다는 사실을 반드시 알아야 한다. 특히 그런 정신적 억압상태에서 갑자기 벗어난 경우에는 더욱 그렇다.

 

 이런 위험은 정신위생학적인 의미에서 일종의 잠수병과 같은 것이라 할 수 있다. 물 속의 잠함에서 일하던 잠수부가 엄청난 압력을 받고 있다가 갑자기 밖으로 나올 때 가장 위험한 것처럼 엄청난 정신적 압박을 받다가 갑자기 풀려난 사람은 도덕적, 정신적 건강에 손상을 입을 위험이 크다.

 

 이런 심리적 단계에서 원색적인 기질을 지닌 사람들이 수용소에서 자신을 둘러싸고 있던 야만성의 영향에서 쉽게 빠져 나오지 못하는 것을 관찰할 수 있다. 그들은 이제 자유의 몸이 되었으니 이 자유를 마치 특허를 받은 것처럼 잔인하게 사용할 수 있다고 생각한다. 변한 것이 있다면 그것은 그들이 이제는 억압을 받는 쪽이 아니라 억압을 하는 쪽이 되었다는 것뿐이다. 그들은 이제 폭력과 불의의 대상이 아니라 그것을 자행하는 가해자가 된다. 그들은 자기들이 겪었던 끔찍한 경험으로 자신들의 행위를 정당화시킨다. 이런 일은 별로 대수롭지 않은 일에서 자주 발생한다.

 

 어느 날 나는 다른 친구와 함께 들을 가로질러 수용소로 돌아가고 있었다. 그런데 갑자기 우리 앞에 농작물이 자라고 있는 밭이 나타났다. 나는 무의식적으로 그것을 피하려고 했다. 하지만 친구가 내 팔을 잡고 나를 밭으로 끌고 들어갔다. 나는 더듬거리면서 어린 농작물을 짓밟지 말자는 취지의 말을 했다. 그러자 그는 짜증을 냈다. 화난 얼굴로 나를 바라보면서 이렇게 소리쳤다.

 

 "그런 말 하지 말게. 그만큼 빼앗았으면 충분한 거 아니야? 내 아내와 아이는 가스실에서 죽었어. 그것으로 더 이상 할 말 없는 거 아니야? 그런데도 자네는 내가 귀리 몇 포기 밟는다고 뭐라고 하다니!"

 

 이런 사람들은 아주 천천히 평범한 진리로 돌아올 수 있도록 지도해 주어야 한다. 다른 사람이 자신에게 옳지 못한 짓을 했다 하더라도 자기가 그들에게 옳지 못한 짓을 할 권리는 어느 누구에도 없다는 평범한 진리를 일깨워 주어야 한다. 우리는 그들이 이런 진리로 다시 돌아올 수 있도록 이끌어 주는 노력을 게을리 해서는 안 된다. 그렇지 않으면 귀리 수천 포기를 잃는 것보다 더 나쁜 결과를 초래할 수도 있기 때문이다.

 

 나는 아직도 한 친구가 소매를 걷어붙이고 오른손 주먹을 내 코 밑에 갖다대며 이렇게 소리치던 것을 기억하고 있다.

 

 "집으로 돌아가는 날, 내가 이 손에 피를 묻히지 않는다면 내 손을 잘라버리고 말테다."

 

 여기서 내가 강조하고 싶은 것은 이 말을 한 친구가 절대로 나쁜 사람이 아니었다는 것이다. 그는 수용소에서나, 그 후에도 나의 가장 친한 동료였다.

 

p174. 정신의 역동성

 

 의미를 찾으려는 인간의 노력이 마음의 평온을 가져오기보다는 긴장을 불러 일으키는 것은 틀림없는 사실이다. 하지만 내면의 긴장은 정신건강에 절대적으로 필요한 것이다. 삶에 어떤 의미가 있다는 것을 깨닫는 것보다 최악의 상황에서 효과적으로 살아남을 수 있는 방법은 없다. '왜 살아야 하는지 아는 사람은 어떤 어려움도 참고 견딘다'라는 니체의 말에는 이런 예지가 담겨져 있다. 이 말에서 정신치료에도 유용한 어떤 좌우명을 찾을 수 있다.

 나치의 강제수용소에 있었던 사람들은 수감자 중에서 자기가 해야 할 일이 있다는 것을 알고 있는 사람들이 더 잘 살아남았다는 사실을 눈으로 확인할 수 있었다. 강제수용소에서의 경험을 쓴 또 다른 사람들도, 그리고 일본과 북한, 북 베트남의 포로수용소에서 실시한 정신치료 연구조사도 똑같은 결론을 내리고 있다.

 나의 경우를 예로 들어 보자. 아우슈비츠에 처음 잡혀 갔을 때 나는 출판을 위해 집필 중이었던 원고를 압수당했다.

 이 이야기에서도 알 수 이는 것처럼 사람은 어느 정도 긴장 상태에 있을 때 정신적으로 건강하다. 그 긴장이란 이미 성취해 놓은 것과 앞으로 성취해야 할 것 사이의 긴장 현재의 나와 앞으로 되어야 할 나 사이에 놓여 있는 간극 사이의 긴장이다. 이런 긴장은 인간에게 본래부터 있는 것이고, 정신적으로 잘 존재하기well-being 위해서 필수불가결한 것이다.

 

 따라서 우리는 인간의 내면에 잠재되어 있는 의미를 찾을 수 있도록 그에게 도전장을 던지는 일을 주저해서는 안 된다. 그렇게 해야만 그 동안 숨어 있던 의미를 찾고자 하는 그의 의지를 일깨울 수 있다. 사람에게 우선적으로 필요한 것은 마음의 안정 혹은 생물학에서 말하는 '항상성 homeostasis', 즉 긴장이 없는 상태라는 말을 흔히 하는데, 나는 정신건강에 대해 이것처럼 위험천만한 오해는 없다고 생각한다.

 인간에게 실제로 필요한 것은 긴장이 없는 상태가 아니라 가치 있는 목표, 자유의지로 선택한 그 목표를 위해 노력하고 투쟁하는 것이다. 인간에게 필요한 것은 어떻게 해서든지 긴장에서 벗어나는 것이 아니라 앞으로 자신이 성취해야 할 삶의 잠재적인 의미를 밖으로 불러내는 것이다. 인간에게 필요한 것은 항상성이 아니라 정신적인 역동성이다. 말하자면 한쪽 극에는 실현되어야 할 의미가, 그리고 다른 극에는 그 의미를 실현시켜야 할 인간이 있는 자기장 안의 실존적 역동성이다.

 

 이것이 정상적인 상황에서만 유효하다고 생각해서는 안 된다. 오히려 신경질환을 앓고 있는 환자에게 더 효력이 있다. 낡은 아치를 튼튼하게 할 때, 건축가는 오히려 아치에 얹히는 하중을 늘린다. 그래야만 아치를 구성하고 있는 각 부분들이 서로 잘 밀착되기 때문이다. 이와 마찬가지로 환자의 정신건강을 증진시키려는 심리요법가는 삶의 의미를 갖도록 지도하는 과정에서 환자의 마음에 어느 정도 긴장을 유도하는 것을 주저해서는 안 된다.

 지금까지 삶의 의미를 찾도록 하는 것이 환자에게 유익한 영향을 끼친다는 것을 얘기했다. 따라서 지금부터는 요즘 수많은 환자들이 고통스러워하고 있는 생각, 즉 자신의 삶 전체가 완전히 무의미하다는 생각이 가져다 조는 악영향에 대해 얘기해 보겠다. 환자들은 살아볼 만한 가치가 있는 삶의 의미가 무엇인지 잘 모르고 있다. 그들은 내적인 공허, 자신 안의 허무가 늘 따라다니는 것을 느낀다. 앞에서 내가 '실존적 공허'라고 얘기했던 바로 그런 상황에 갇혀 고통 받고 있는 것이다.

 

p177. 실존적 공허

 

 실존적 공허는 20세기에 광범위하게 퍼져 있는 현상 중의 하나이다. 이것은 충분히 납득할 수 있는 현상으로 인간이 진정한 의미의 인간이 된 후에 겪어야 했던 두 가지 손실에서 비롯된 것이다.

 인류의 엯하가 시작될 때, 인간은 동물적인 본능의 일면을 잃게 되었다. 본능에 따라 행동하고, 그럼으로써 자기 자신을 안전하게 지킬 수 있는 그런 동물적 본능을 잃어버린 것이다. 낙원에서나 얻을 수 있는 그런 안전함은 이제 영원히 인간에게 것이 되었으며, 인간은 선택을 해야 하는 상황에 놓이게 되었다.

 여기에 덧붙여서 근래에 들어 인간은 또 다른 상실감을 맛보게 되었는데, 그것은 그 동안 자기 행동을 지탱해 주던 전통이 빠른 속도로 와해되고 있다는 사실이었다. 그에게는 이렇게 해야 한다고 말해 주는 본능도 없고, 이렇게 해야 한다고 가르쳐 주는 전통도 없다. 어떤 때는 그 자신조차도 자기가 정말로 무엇을 원하는지 모를 정도가 되어버렸다. 그 결과 남이 하는 대로 따라 하거나(동조주의) 아니면 남이 시키는 대로(전체주의) 하는 사람이 되어 버렸다.

 

 최근에 조사를 해보았더니 내가 가르치고 있는 유럽 학생들 중 25퍼센트가 크든 작든 실존적 공허감을 느끼고 있는 것으로 나타났다. 미국 학생들은 25퍼센트가 아니라 무려 60퍼센트가 이런 공허감을 느끼고 있었다.

 실존적 공허는 대개 권태를 느끼는 상태에서 나타난다. 인간은 고민과 권태의 양 극단 사이를 끊임없이 오가도록 운명지어진 존재라는 쇼펜하우어의 말이 이해가 갈 것이다. 실제로 요즘은 고민보다는 권태가 해결해야 할 문제를 더 많이 가지고 있으며, 이 문제 때문에 정신과 의사를 찾는 경우가 더 많은 것이 확실하다. 그리고 이 문제는 앞으로 점점 더 증가할 것으로 보인다. 왜냐하면 자동화 과정으로 일하는 사람들의 여가 시간이 엄청나게 늘어날 것이기 때문이다. 애석한 것은 그 중에서 많은 사람들이 새로 얻게 된 여가 시간을 어떻게 보내야 할지 모른다는 데에 있다.

 

 '일요병'을 한번 예로 들어 보자. 일요병은 눈코 뜰 새 없이 바빴던 한 주일을 보내고 내면의 공허감이 밀려올 때, 자신의 삶에 아무런 의미가 없다는 것을 깨닫게 된 사람이 겪는 일종의 우울증이다. 자살의 상당수가 바로 이런 실존적 공허 때문에 일어난다. 현대 사회에 만연해 있는 우울증과 공격성, 중독증의 원인이 무엇인지 알려면 그 저변에 깔려 있는 실존적 공허에 대해 먼저 이해해야 한다. 연금생활자나 나이든 노인들이 느끼는 위기감 역시 이와 같은 종류의 것이다.

 

 게다가 이런 실존적 공허는 가면을 쓰거나 위장을 한 형태로 나타나기도 한다. 의미를 찾고자 하는 의지가 좌절되면 사람들은 권력욕으로 그 좌절을 대신 보상받으려고 하는데, 여기에는 아주 원시적인 형태의 권력욕인 돈에 대한 욕구도 포함되어 있다. 한편 의미를 찾으려는 의지가 좌절된 곳에 쾌락을 추구하는 의지가 대신 자리를 잡는 경우도 있다. 실존적 과절을 겪은 사람들이 종종 성적 탐민ㄱ에서 그 보상을 찾으려고 하는 것도 바로 이 때문이다.

 정신과 환자에게서도 이와 비슷한 현상이 일어난다. 나중에 다시 얘기하겠지만 특정한 유형의 피드백 기재feedback mechanism와 악순환의 고리vicious circle formation가 형성되는 것이다. 이런 징후들이 공허한 상태에 있는 실존에 침입해 들어와서는 계속 번성해나가는 것을 수없이 볼 수 있다. 이런 환자의 경우, 이것은 누제닉 노이로제로 취급해서는 안 된다. 하지만 환자에 대한 심리요법에 로고테라피를 보완하지 않으면 환자가 자기 상황을 극복하도록 만들 수 없다. 왜냐하면 이런 실존적 공허에 무언가를 채워 넣으면, 더 이상 병이 악화되는 것을 막을 수 있기 때문이다. 따라서 로코테라피는 앞에서 얘기한 노이로제noogenic뿐만 아니라 심인성 노이로제psychogenic은 물론 신체성somatogenic(의사pseudo) 신경질환에도 두루 적용할 수 있다. 이런 견지에서 볼 때 "모든 치료법은 비록 제한적이기는 하지만 어느 정도 로고테라피적인 요소를 갖고 있다"는 매그더 B. 아들러의 말이 일리가 있다고 하겠다.

 

p181.

 

 궁극적으로 인간은 자기 삶의 의미가 무엇이냐를 물어서는 안 된다. 그보다는 이런 질문을 던지고 있는 사람이 바로 '자기'라는 것을 인식해야만 한다. 다시 말해 인간은 삶으로부터 질문을 받고 있으며, 그 자신의 삶에 대해 '책임을 짊으로써'만 삶의 질문에 대답할 수 있다는 말이다. 오로지 책임감을 갖는 것을 통해서만 삶에 응답할 수 있다. 따라서 로고테라피에서는 책임감을 인간존재의 본질로 보고 있다.

 

p183.

 

 인간은 책임감을 가져야 하며, 잠재되어 있는 삶의 의미를 실현해야 한다는 주장을 통해 내가 강조하고 싶은 것은 진정한 삶의 의미는 인간의 내면이나 그의 정신psyche에서 찾을 것이 아니라 이 세상에서 찾아야 한다는 것이다. 이런 구조적 특성을 나는 '인간 존재의 자기 초월'이라고 이름지었다. 이 말은 인간은 항상 자기 자신이 아닌 어떤 것, 혹은 그 어떤 사람을 지향하거나 그쪽으로 주의를 돌린다는 것을 의미한다. 그것이 성취해야 할 의미일 수도 있고, 혹은 그가 대면해야 할 사람일 수도 있다. 사람이 자기 자신을 잊으면 잊을수록 - 스스로 봉사할 이유를 찾거나 누군가에게 사랑을 주는 것을 통해 - 그는 더 인간다워지며, 자기 자신을 더 잘 실현시킬 수 있게 된다. 소위 자아실현이라는 목표는 실현시킬 수 있는 것이 절대로 아니다. 자아실현을 갈구하면 할수록 더욱 더 그 목표에 이르지 못하게 된다는 단순한 이유 때문이다. 다른 말로 하자면 자아실현은 자아초월의 부수적인 결과로서만 얻어진다는 말이다.

 

 이제 우리의 삶의 의미란 끊임없이 변하지만 절대로 없어지지 않는다는 것을 알았다. 로고테라피에 의하면 우리는 삶의 의미를 세 가지 방식으로 찾을 수 있다. 1) 무엇인가를 창조하거나 어떤 일을 함으로써 2) 어떤 일을 경험하거나 어떤 사람을 만남으로써 그리고 3) 피할 수 없는 시련에 대해 어떤 태도를 취하기로 결정함으로써 삶의 의미에 다가갈 수 있다.

 

 첫번째를 완수하고 달성하는 방법은 아주 분명하다. 하지만 두번째와 세번째에는 약간의 부연설명이 필요할 것 같다.

 사람의 의미를 찾아내는 두번째 방법은 어떤 것 - 선이나 진리, 아름다움 - 을 체험하는 것, 자연과 문화를 체험하거나(마지막이지만 무엇보다도 중요한 것은) 다른 사람을 유일한 존재로 체험하는 것, 즉 그 사람을 사랑하는 것을 말한다.

 

p184. 사랑의 의미.

 

 사랑은 다른 사람의 인간성 가장 깊은 곳까지 파악할 수 있는 유일한 방법이다. 사랑하지 않고서는 어느 누구도 그 사람의 본질을 완전히 파악할 수 없다. 사랑으로 인해 사람은 사랑하는 사람이 지니고 있는 본질적인 특성과 개성을 볼 수 있으며, 더 나아가 그 사람이 잠재적으로 가지고 있는 것, 그리고 아직 실현되지 않았지만 앞으로 실현되어야 할 것이 무엇인지도 볼 수 있게 된다. 뿐만 아니라 인간은 사랑의 힘으로 자기가 사랑하는 사람이 이런 잠재력을 발휘할 수 있도록 도와줄 수 있다. 사랑하는 사람으로 하여금 자신이 할 수 있는 일이 무엇인지 그리고 자신이 어떻게 되어야 하는지를 깨닫도록 함으로써 이런 잠재능력을 실현시킬 수 있도록 하는 것이다.

 로고테라피에서는 사랑을 소위 승화라는 의미에서의 성적 충동이나 본능의 단순한 부수현상(일차적 현상의 결과로 발생하는 현상)으로 해석하지 않는다. 사랑은 섹스와 마찬가지로 지극히 근원적인 하나의 현상이다. 섹스는 사랑을 표현하는 하나의 방식이다. 섹스는 그 안에 사랑이 담기는 순간, 아니 사랑이 담겨 있을 때에만 정당화될 수 있을 뿐만 아니라 심지어 신성화될 수도 있다. 따라서 사랑을 섹스의 부산물 정도로만 이해해서는 안 된다. 그보다는 오히려 섹스를 사랑이라 불리는 궁극적인 합일의 경험을 표현하는 수단으로 보아야 할 것이다. 

 

 세번째로 삶의 의미를 찾는 방법은 시련을 통해서이다.

 

p186. 시련의 의미.

 

 아무리 절망스러운 상황에서도, 도저히 피할 수 없는 운명과 마주쳤을 때에도 삶의 의미를 찾을 수 있다는 사실을 잊어서는 안 된다. 왜냐하면 그것을 통해 유일한 인간의 잠재력이 최고조에 달하는 것을 볼 수 있기 때문이다. 그 잠재력은 한 개인의 비극을 승리로 만들고, 곤경을 인간적 성취로 바꾸어 놓는다. 상황을 더 이상 바꿀 수 없을 때에 - 수술이 불가능한 암 같은 불치병에 걸렸다고 생각해 보자 - 우리는 우리 자신을 변화시켜야 한다.

 

 명백한 사례를 하나 들어 보겠다. 한번은 나이 지긋한 개업의 한 사람이 우울증 때문에 상담을 받으러 왔다. 그는 2년 전에 세상을 떠난 아내에 대한 상실감을 극복하지 못하고 있었다. 그는 아내를 이 세상 누구보다 사랑했다. 내가 그를 어떻게 도울 수 있을까? 그에게 어떤 말을 해주어야 할까?

 나는 그에게 다음과 같은 질문을 던진 것을 제와하고는 말을 될 수 있는 대로 자제했다.

 

 "선생님. 만약 선생께서 먼저 죽고 아내가 살아남았다면 어떻게 되었을까요?"

 그가 말했다.

 "오 세상에! 아내에게는 아주 끔찍한 일이었을 겁니다. 그걸 어떻게 견디겠어요?"

 내가 말했다.

 "그것 보세요. 선생님. 부인께서는 그런 고통을 면하신 겁니다. 부인에게 그런 고통을 면하게 해주신 분이 바로 선생님이십니다. 그 대가로 지금 선생께서 살아남아 부인을 애도하는 것이 틀림없습니다."

 

 그는 조용히 일어서서 내게 악수를 청한 후 진료실을 나갔다. 어떤 의미에서 시련은 그것의 의미 - 희생의 의미 같은 - 를 알게 되는 순간 시련이기를 멈춘다고 할 수 있다.

 물론 이것은 정상적인 의미의 치료는 아니었다. 왜냐하면 첫째 그의 절망은 병이 아니었으며, 둘째 내가 그의 운명을 바꿀 수 없었고, 그의 아내를 살릴 수도 없었기 때문이다. 그러나 바로 그 순간 나는 바뀔 수 없는 운명에 대한 그의 태도를 바꾸는 데 성공했다. 그래서 이제 그는 최소한 자기가 겪고 있는 시련의 의미를 찾을 수 있게 되었다.

 

p199.

 

 광장공포증과 같은 신경성 노이로제는 철학적 해법으로 치유될 수 있는 것이 아니다. 하지만 로고테라피에서는 이런 경우도 함께 치료할 수 있는 특수한 기법을 개발했다. 이 기법이 사용될 때 어떤 일이 일어나는지 알기 위해서 신경질환 환자에게서 자주 나타나는 증상인 소위 예기 불안anticipatory anxiety에서부터 시작해 보자.

 

 이 증상의 특징은 환자가 두려움을 느끼고 있으면 바로 그 증상이 정말로 나타난다는 데에 있다. 예를 들어 만약 커다란 방에 들어가 많은 사람들과 마주치면 얼굴이 빨개지지 않을까 두려워하는 사람은 실제로 같은 상황에 처했을 때 훨씬 더 얼굴이 빨개지는 경향을 보인다. 이런 상황에서는 '소원은 생각의 아버지'라는 말을 '공포는 사건의 어머니'라는 말로 바꿀 수 있을 것이다.

 정말 아이러니컬하게도 공포 때문에 진짜로 두려워하던 일이 일어나는 것과 같은 방식으로 꼭 하고 싶다는 강한 의욕이 그 일을 불가능하게 만드는 경우도 있다. 이런 과도한 의도, 즉 과잉욕구hyper-intention는 성적인 문제로 고생하는 환자에게서 자주 발견된다. 남자가 거의 정력을 과시하려고 하면 할수록, 여자가 오르가즘에 이르는 능력을 보여 주려고 하면 할수록 점점 더 성공할 수 있는 확률이 떨어지게 된다. 쾌락은 어떤 행위의 부산물로, 파생물로서 얻어지는 것이고, 또 그렇게 얻어져야만 한다. 그것 자체가 목적이 되는 정도가 되면 그것은 파괴되고, 망가진다.

 

 앞에서 얘기한 과잉욕구 외에 지나친 주의집중, 즉 로고테라피에서 말하는 과잉투사hyper-reflection가 발병의 원인이 될 수도 있다. 말하자면 병을 일으키게 할 수 있다는 말이다. 다음과 같은 임상보고를 보면 내가 하는 말을 이해할 수 있을 것이다.

 

 어느 날 한 젊은 여성이 나를 찾아와 불감증을 호소했다. 병력을 살펴보니 그녀는 어린 시절 아버지로부터 성적인 학대를 받은 것으로 나왔다. 하지만 그녀가 불감증을 느끼는 것은 충격적인 경험 그 자체 때문은 아니었다. 왜냐하면 환자가 그 동안 정신분석에 관한 책을 읽고 자신의 충격적인 경험이 언젠가는 대가를 치르게 될 것이라는 끊임없는 두려움 속에 살아왔다는 사실이 밝혀졌기 때문이다. 이런 예기불안은 자신의 여성다움을 확인하고 싶다는 과도한 의욕과 함께 상대편보다는 자기 자신에게 과도하게 주의를 집중하는 결과를 낳는다. 이것은 그녀가 성적인 쾌락의 절정에 오를 수 없었던 충분한 이유가 된다. 왜냐하면 상대편에게 대가없이 헌신하고 자기 몸을 맡김으로써 의도하지 않은 결과로 오르가즘을 느껴야 하는데, 오르가즘 자체가 의욕과 주의집중의 대상이 되었기 때문이다. 짧은 기간 동안 로고테라피 치료를 받은 후, 오르가즘을 체험하는 능력에 집중되었던 환자의 과잉의도와 주의집중은 로고테라피에서 말하는 '역투사'dereflected의 상태가 되었다. 그녀의 주의가 적절한 대상, 즉 그녀의 파트너에게 맞추어지면서 그녀는 자연스럽게 오르가즘을 느끼데 되었다.

 

p210. 

 

 인간이 유일한 존재이고, 인간의 자유 또한 제한되어 있는 것은 분명하다. 하지만 여기서 말하는 자유란 조건으로부터의 자유를 말하는 것이 아니다. 그 조건에 대해 자기 입장을 취할 수 있는 자유를 말하는 것이다. 언젠가 나는 이런 말을 한 적이 있다.

 "신경학과 정신의학 두 분야를 전공한 교수로서 나는 인간이 생물적, 심리적, 사회적 환경에 어느 정도까지 굴복할 수 있는지 잘 알고 있습니다. 하지만 더 나아가 강제수용소를 네 곳이나 전전하다 살아 돌아온 사람으로서 상상을 초월하는 최악의 상황에서 인간이 믿을 수 없을 정도로 용감하게 저항하고 맞서 싸울 수 있다는 것을 직접 목격한 것도 사실입니다.

 

p213.

 

 자유는 이야기의 부분이고, 절반의 진실에 지나지 않는다. 책임이라는 적극적인 측면의 일부분을 차지하고 있는 소극적인 측면에 지나지 않는다. 사실 책임이 전제되지 않는 자유는 방종으로 전락할 위험을 안고 있다. 내가 동부 해안에 있는 자유의 여신상에 보완이 되도록 서부 해안에 책임의 여신상을 세워야 한다고 주장하는 이유가 바로 여기에 있다.

 

p214. 인간의 얼굴을 한 정신의학

 

 아주 오랜 기간 동안 - 실제로 반세기 동안 - 정신의학에서는 인간의 마음을 그저 하나의 수단으로만 보았고, 그 결과 정신질환 치룔르 하나의 테크닉으로만 간주해 왔다. 하지만 나는 이제 이런 종류의 꿈은 충분히 꾸었다고 생각한다. 지금 수평선 너머로 어렴풋이 나타나기 시작한 것은 심리학의 얼굴을 한 의술이 아니라 인간의 얼굴을 한 정신의학이다.

 그러나 아직도 자신의 역할을 그저 하나의 기능인으로 생각하는 의사가 있다면 그는 환자를 병 너머에 존재하는 하나의 인간으로 보는 것이 아니라 그저 하나의 기계로 보고 있다는 사실을 고백해야 할 것이다.

 인간은 여러 개의 사물 속에 섞여 있는 또 다른 사물이 아니다. 사물들은 각자가 서로를 규정하는 관계에 있지만 인간은 궁극적으로 자기 자신을 규정한다. 타고난 자질과 환경이라는 제한된 조건 안에서 인간이 어떤 사람이 될 것인가 하는 것은 전적으로 그의 판단에 달려 있다.

 나는 살아있는 인간 실험실이자 시험장이었던 강제수용소에서 어떤 사람들이 성자처럼 행동할 때, 또 다른 사람들은 돼지처럼 행동하는 것을 보았다. 사람은 내면에 두 개의 잠재력을 모두 가지고 있는데, 그 중 어떤 것을 취하느냐 하는 문제는 전적으로 그 사람의 의지에 달려 있다.

 우리 세대는 실체를 경험한 세대이다. 왜냐하면 인간이 정말로 어떤 존재인지를 알게 되었기 때문이다. 인간은 아우슈비츠의 가스실을 만든 존재이자 또한 의연하게 가스실로 들어가면서 입으로 주기도문이나 셰마 이스라엘을 외울 수 있는 존재이기도 한 것이다.

 

p221.

 

 사람이 행복하려면 '행복해야 할 이유'를 가지고 있어야 한다.

 

p226.

 

 집단 신경 증후군의 두번째 요소인 공격성과 관련해서는 캐롤린 우드 셰리프가 주관했던 한 실험에 대해 얘기해 보려고 한다. 그녀는 인위적인 방법을 써서 보이스카우트 그룹들이 서로 공격성을 갖도록 만들었다. 그런 다음 관찰해 보니 소년들이 모두 같은 목표를 가지고 행동할 때에만 공격성이 누그러진다는 사실이 확인되었다. 공동의 목표란 자기들이 먹을 음식이 실려 있는 차를 진흙구덩이에서 꺼내는 일 같은 것을 말한다. 공동의 목표가 생기자마자 그들은 자신들이 달성해야 할 목표의 도전을 받았고, 그래서 서로 협동하게 되었다.

 

p229.

 

 그렇다면 인간은 어떤 방법을 통해 의미를 찾을 수 있을까? 샬롯 뷜러가 말했듯이 "우리가 할 수 있는 일이란 인간의 삶이 궁극적으로 무엇인가라는 질문에 대한 해답을 찾은 사람들의 삶을 그렇지 못한 사람들의 삶과 비교하며 공부하는 것뿐이다."

 

p233.

 

 하지만 만약 피할 수 있는 시련이라면 그 원인을 제거하는 것이 더 의미있는 행동이다. 왜냐하면 불필요한 시련을 견디는 것은 영웅적인 행동이 아니라 자학에 불과하기 때문이다.

 

p236.

 

 한번은 한 미국 여자로부터 이런 비난을 들은 적이 있다.

 "당신은 어떻게 아직도 책을 독일어로 쓸 수가 있지요? 그건 아돌프 히틀러가 쓰던 말 아닙니까?

 이 말에 응수하면서 나는 그녀에게 자기 집 부엌에 칼이 있는지를 물었다. 그녀가 있다고 대답했다. 나는 당황스럽고 놀랍다는 제스처를 쓰면서 이렇게 소리쳤다.

 "살인자들이 칼을 가지고 그렇게 많은 사람들은 찌르고 죽였는데 어떻게 아직도 칼을 사용할 수가 있지요?"

 그 말을 듣고 그녀는 더 이상 내가 독일어로 책을 쓰는 것은 비난하지 않았다.

 

p237.

 

 삶의 순간들을 구성하고 있는 각각의 시간들이 끊임없이 죽어가고 있으며, 지나간 순간은 다시는 돌아오지 않기 때문이다. 이런 삶의 일회성이야말로 우리에게 삶의 각 순간들을 최대한 활용해서 살아야 한다는 사실을 일깨워 주는 것이 아닐까? 그것은 분명 그렇다. 따라서 나는 이렇게 권한다.

 

 "두번째 인생을 사는 것처럼 살아라. 그리고 당신이 지금 막 하려고 하는 행동이 첫번째 인생에서 그릇되게 했던 바로 그 행동이라고 생각하라"

 

p238.

 

 좀 더 자세하게 말하자면 이런 유용성은 그 사람이 사회에 이로운 존재인가 아닌가 아는 기능적인 측면에 초점을 맞추어 정의되는 경우가 대부분이다. 그 사람이 이루어낸 성과를 무엇보다 중요한 것으로 여기고, 그래서 사회적으로 성공하고 행복한 사람, 특히 젊은 사람을 숭배하는 것이 요즘 사회의 특징이다.

 실제로 이 사회는 그렇지 않은 사람들의 가치는 무시하고, 그렇게 함으로써 인간의 존엄성이라는 측면에서 가치 있다고 하는 것과, 인간의 유용성이라는 측면에서  가치 있다고 하는 것 사이에 놓여 있는 엄청난 차이를 애매모호한 것으로 만든다.

 만약에 이런 차이를 인식하지 못하고, 인간의 가치가 오로지 현재 그 사람이 가지고 있는 유용성에서 나온다는 생각을 가지고 있는 사람이 있다면 그 사람은 히틀러의 계획에 따라 자행된 안락사, 즉 나이가 들어서, 불치의 병에 걸려서, 정신적으로 온전치 못해서, 혹은 고통스러운 어떤 장애 때문에 사회적으로 더 이상 쓸모없게 된 사람들을 죽였던 '자비로운' 행위에 대해 변명하려고 하지 않을 것이다. 그것을 오로지 개인적인 모순의 탓으로 돌려 버린다.

 

p241.

 

 지그문트 프로이트가 이렇게 주장한 적이 있다.

 

 "다양한 종류의 사람들을 모두 똑같이 굶주림에 시달리도록 해보자. 배고픔이라는 절박한 압박이 점점 커짐에 따라 각 개인의 차이는 모호해지고, 그 대신 채워지지 않은 욕구를 표현하는 단 하나의 목소리만 나타나게 된다."

 

 감사하게도 지그문트 프로이트는 강제수용소 안에서 일어난 일을 몰랐다. 그의 환자는 빅토리아 풍으로 호화롭게 디자인된 침상에 누워 있었지 아우슈비츠의 오물더미 위에 누우 있는 것이 아니었다. 하지만 프로이트의 말과는 달리 강제수용소에서 '개인적인 차이'가 모호해지지 않았다. 오히려 그 반대로 그 차이점이 더욱 분명하게 드러났다. 사람들은 가면을 벗고, 돼지와 성자의 두 부류로 나뉘어졌다. 그런 것을 경험한 후, 우리는 더 이상 '성자'라는 말을 사용하는 것을 주저하지 않게 되었다. 나는 맥시밀리언 콜베 신부를 생각한다. 그는 아우슈비츠에서 굶주림에 시달리다가 결국 석탄산 주사를 맞고 살해되었다. 그리고 1983년에 성자로 추대되었다.

 여러분은 원칙에 어긋나는 예외적인 경우만 들었다고 나를 비난할지도 모른다. "Sed omnia praeclara tam difficilia quam rara sunt(그러나 모든 위대한 것은 그것을 발견하는 것만큼이나 실현시키는 것도 힘들다)" 스피노자 <윤리학>의 마지막 문장이다.

 

 여러분은 우리가 굳이 '성자'에 대해 얘기할 필요가 있을까라는 의문을 가질 것이다. 그저 '훌륭한' 사람에 대해 얘기하는 것만으로 충분하지 않을까. 이렇게 생각할 수도 있다. 물론 그런 사람들이 소수인 것은 사실이다.

 그리고 아마 앞으로도 그런 사람들은 언제나 소수일 것이다. 그러나 바로 그 때문에 나는 소수의 반열에 합류하려는 도전의지를 본다. 왜냐하면 이 세상은 아주 좋지 않은 상태에 있고, 우리 각자가 최선을 다 하지 않으면 모든 것이 더욱 더 나빠질 것이기 때문이다.

 

 그러니 이제 경계심을 갖자 두 가지 측면에서 경계심을.

 아우슈비츠 이후로 우리는 인간이 무엇을 할 수 있는지 알게 되었다.

 그리고 히로미사 이후로 우리는 무엇이 위험한지를 알게 되었다.

 

이책이 나오기 시작한 것이 2009년부터다. 10년이 지난 지금은 해가 바뀌면 항상 연초에 읽어야 할 필독서처럼 되어버렸다. 지난 한 해를 돌아보고 새해를 맞이하며 지나간 트렌드와 새로운 트렌드의 대비를 통해 현재를 되돌아보고, 미래의 인사이트를 키우려는 이들에게 하나의 표준으로 자리 잡은 듯 하다.

이 책 자체가 하나의 트렌드라고나 할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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p32. 배송 서비스

 국내 새벽 배송 시장의 규모는 2015년 100억 원에서 2018년 4천억 원으로 3년 새 40배나 성장했다. 2019년은 2018년 대비 2배 증가한 8천억 원에 육박할 것으로 예상된다. 마켓컬리가 '샛별배송'으로 포문을 연 새벽 배송의 판은 더욱 커져가는 중이다. 헬로네이처, 쿠팡 등 온라인 기반 커머스 업체뿐만 아니라 대형마트, 백화점, 홈쇼핑 등 전통적인 유통 업체들도 적극적으로 새벽 배송 경쟁에 뛰어들고 있다. 새벽 배송을 넘어 당일에 배송을 해주거나 시나 분 단위의 총알 배송까지 배송 서비스의 영역이 확장되는 모양새다. 이마트는 물류 스타트업 '나우픽'과 손잡고 30분 배송을 시작했다. 자체 간편식 브랜드인 피코크 상품을 나우픽의 도심물류센터에 보관했다가 고객의 주문이 떨어지면 문 앞까지 30분 내에 배송을 완료하는 것이다. 티몬은 1시간 배송을 내세웠고, 롯데마트는 오후 8시 전에 주문하면 당일 자정까지 배달해주는 야간 배송으로 차별화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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p34. 에어프라이어와 삼신가전.

 2019년 가전 시장에서는 에어프라이어와 삼신가전(식기세척기, 로봇청소기, 의류건조기)이 단연 인기였다. ~~~

 

p38.

 하이트진로에서 병 모양과 색깔, 라벨 사이즈까지 과거 디자인을 복원해 내놓은 '진로소주'는 2019년 4월 출시된 지 두 달 만에 누적 판매량 1천만 병을 넘겼다.~~~

 

p59. 유머로 승부하는 펀셉팅의 향연

 2019년 한국 소비 시장에서 발견된 컨셉팅의 마지막 현상은 바로 유머와 재미를 강조한 '펀셉팅funcepting'이다. ~~~

p100.

 이와 같은 비건 사회로의 진입은 자연스럽게 동물복지에 대한 각별한 관심으로 이어지고 있다. 동물복지 개념이 반려동물이나 야생동물의 범주를 넘어 가축과 물고기로 그 범위가 확대되고 있는 것이다. 때로는 우리가 전혀 예상하지 못했던 영역으로까지 논란이 번져 나가기도 한다. 대표적인 예가 정읍시의 소싸움 대회다. 23회째를 맞이한 정읍민속 소싸움 대회에서 정읍시가 추경예산 1억1,360만 원을 편성하려다 무산된 것이다. 정읍시의회가 "소싸움은 동물 학대로 즐거움을 얻는 비윤리적 행위"라는 동물단체의 주장을 받아들여 예산을 전액 삭감했다. 사단법인 한국민속소싸움협회는 "우리 조상의 혼과 숨결이 살아 있는 전통 유산을 왜 훼방 놓느냐"는 입장이고 동물보호단체는 "초식동물인 소에게 억지로 뱀탐과 개소주를 먹이고 훈련을 시키는 게 학대가 아니고 뭐냐"는 의견을 내며 팽팽하게 맞섰다.

 강원도 산천어 축제도 비슷한 상황을 겪고 있다. 동물보호단체 회원들이 축제장을 찾아와 "산천어 집단 살상 현장"이라며 반대 집회를 연 것이다. 이들 보호단체는 강릉 주문진 오징어 축제, 양양 연어 축제, 영덕 대게 축제 등 수산물을 테마로 한 모든 축제에서 '맨손 잡기 체험'을 퇴출시키겠다며 목소리를 높이고 있다. 찬반 논란이 있지만 환경과 동물에 대한 관심은 이전과는 확실하게 다른 양상의 논란과 변화를 예고하고 있다는 사실만은 분명하다.

p109.

 자신의 감정을 대신 표현해주는 것은 캐릭터뿐만이 아니다. 불편한 감정을 대해애주는 서비스도 속속 등장하고 있다. 연인과 이별하려 할 때 당사자 대신 이별을 통보해주는 '이별 대행 서비스'가 그 대표적인 예다. 이때 필요한 비용은 보통 5만 원에서 10만 원 선이다. 이름, 나이, 사귄 기간 등 기본적인 정보를 알려주면 '이별'이라는 곤란하고 복잡한 상황을 정리해준다. 국내의 한 이별 대행 서비스 관계자는 "6년 넘게 서비스를 운영하고 있는데 최근 고객이 늘고 있는 추세"라며, "보통 젊은 사람들이 많이 의뢰하고 대다수의 고객들은 이 서비스에 만족했따"고 밝혔다.

 상사의 눈치를 보느라 사직서를 내는 것조차 두려운 직장인들을 위해 퇴사 과정을 처리해주는 '퇴사 대행 서비스'도 등장했다. 직장 생활 중 가장 불편하고 어려운 순간인 퇴사를 대신해주는 서비스로, 사직서만 대신 내주는 것이 아니라 퇴사를 준비하는 순간부터 퇴사 이후의 생활에 이르는 모든 과정을 관리해준다. 우선 고객과의 상담을 통해 희망하는 퇴사일을 정하고 퇴사 과정 중의 위험 요소를 미리 확인한다. 이후 회사의 인사 담당자에게 사직 의사를 전달하고 관련 서류를 제출해준다. 회사 측이 사직서를 수리하면 사무실에 남아 있는 짐까지 집으로 배송해주며 전 과정에 걸쳐 고객의 퇴사를 세심하게 돕는다. 퇴사 대행 서비스 업체에 따르면 이 서비스의 주된 고객은 퇴사 과정 중에 회사 측과 마찰이 일어날 것을 우려하는 직장인들이다. 퇴사 의사를 밝혔지만 회사가 이를 거부하거나, 타 회사에서 이직 제의를 받았으나 현 직장으로부터 진행 중인 프로젝트를 끝내고 퇴사하라고 종용받는 경우 등이 있다. 평생직장의 개념이 사라지고 이직과 퇴직이 잦아지면서 상사와 대면해서 퇴사 절차를 밟는 것 자체에 스트레스를 받는 사람들이 많아졌음을 알 수 있는 대목이다. 따라서 20~30대 직장인들의 니즈를 반영한 비대면 대행 서비스 시장은 더 다양한 생활밀착형 콘텐츠로 무장해 확장될 것으로 보인다.

p148.

 밀레니얼 가족은 가족공동체를 지향하면서도, 동시에 부부 개인의 니즈를 존중한다. 잡코리아와 알바몬이 2019년 8월 한국의 성인 남녀 4,834명을 대상으로 진행한 조사 결과에서도 개인을 중시하는 밀레니얼의 특징이 잘 나타난다. 1980년대 초반부터 2000년대 초반생의 밀레니얼 세대는 성공적인 인생의 모습을 '수입은 적지만 좋아하는 일, 취미 활동을 즐기면서 사는 삶'을 1순위로 꼽았다.(27.5%) 반면, 1970년대생인 X세대인 경우 '큰 걱정 없이 안정된 수입으로 가족과 화목한 삶'이 1위를 차지했다.(66.2%) 가족을 1순위로 두는 기성 세대와 달리, 가족 안에서도 개인이 존중받길 원하는 밀레니얼의 특성이 반영된 결과다.

p150.

 우선 이들은 외부 기기의 도움을 적극적으로 활용해 가사 노동의 의무를 충실히 수행한다. 본인이 직접 처리하기 위해 애쓰기보다는 집안일을 도와주는 기계를 적극적으로 활용하는 편이 더 현명하다고 생각하기 때문이다. 덕분에 과거 필수가전으로 꼽혔던 TV나 대형 냉장고는 이제 선택가전이 된 반면, 집안일을 도와주는 의류건조기, 식기세척지, 로봇청소기는 신이 내려주신 가전이란 의미로 '삼신神가전'이라 불리며 인기 가도를 달리고 있다. 실제로 이들 세 가전은 온라인 쇼핑 사이트 G마켓, 옥션에서 높은 매출 신장률을 보였는데 2018년 의류건조기의 G마켓 매출은 3년 전인 2016년 대비 934% 성장했고, 옥션의 경우 974%라는 놀라운 신장률을 기록했다.

 

p165.

 

 "손님은 왕이다!" 이 말은 어디서 왔을까? 처음 이 말을 한 사람은 세계적인 호텔 체인인 리츠칼턴의 창업자 세자르 리츠라고 한다. 1898년 그는 파리의 베르사유궁전을 모방해 만든 리츠호텔을 오픈했는데, 당시 이 호텔의 주요 고객은 진짜 왕족이나 귀족이었다. 그야말로 왕이 손님이었던 것이다. 그런데 리츠는 "평민이라도 우리 호텔에 투숙하고 돈을 쓰는 고객이라면 그야말로 왕처럼 모신다"라는, 당시로는 파격적인 서비스 정신을 담은 이 문구를 만들었다. 이후 이 표현을 많은 기업들이 고객만족 경영의 모토로 삼으며 현재까지 두루 활용되고 있다.

 시간이 흐르면서 고객을 평등하게 대하겠다는 이 좋은 의미가 부작용을 낳기 시작했다. 손님이라는 이유로 무조건 왕처럼 대우받기를 요구하는 사람들이 늘어난 것이다. 서비스 종사자들을 향한 일부 고객들의 비매너 행동이 점점 심해지면서 현대사회의 또 다른 갑질 문제로 부상하고 있다.

 

p171.

 

 일보에서도 노쇼는 좀처럼 풀리지 않는 숙제다. 일본 경제산업성의 보고서에 의하면 무단 예약 취소로 인한 일본 음식 업계의 피해액이 연간 약 2천억 엔(약 2조2,600억 원)에 이른다고 추정했다. 이에 무단 예약 취소에 따른 손해를 보증하는 회사가 등장할 정도다. 대표적으로 일본의 '가르시아'는 지난 2017년부터 식당과 미용실 등을 대상으로 무단 취소 피해 보증 서비스를 시작했다. 고객의 무단 취소가 발생했을 때 예약대금 전액을 가게에 보장한다. 2019년 기준으로 이 서비스에 가입한 음식점만 3만여 곳에 이른다. 현지 언론의 보도에 따르면, 월 1만 엔 미만의 비용을 내면 1건당 평균 5만~10만 엔 정도의 노쇼 피해 배상액을 받는다고 한다. 심지어 한 변호사는 무단 취소로 발생한 피해분을 직접 회수하는 서비스도 개시했다. 노쇼가 발생했을 때 변호사가 고객에게 직접 연락해 피해분을 받아내는 것이다. 시험 단계에서만 회수 성공률이 80%에 달했으며, 변호사 수수료는 30% 정도다. 이제 우리나라도 고객 노쇼를 막을 수 있는 실제적인 방법들을 다양하게 검토할 필요가 있겠지만, 무엇보다 고객 스스로 노쇼가 음식점 업주뿐만 아니라 선의의 소비자에게도 피해가 가는 비매너 행동임을 인지해야 할 것이다.

 

p182. 2020 나라 살림

 

 2019년 8월, 기획재정부는 2020년 정부 예산안을 발표하며 '국민중심, 경제강국'이라는 목표를 내걸었다. 대내외 경제 여건의 어려움을 타개하고 우리 경제에 활력을 불어넣으면서도 국민의 생활과 복지를 증진하고 사회안전망을 보강하겠다는 의지로 보인다. 이를 위한 총지출은 513.5조 원(작년 대비 9.3% 증가)으로, 2년 연속 9% 대 증가율을 유지하며 최대한의 확장적인 재정 운용을 계속 이어나갈 전망이다. 2020년 예산안의 세부 목표는 ①핵심 소재, 부품, 장비산업의 조기 공급 안정에 총력 지원, ② AI 사회로의 전환을 이끌 DNA+BIG3에 집중 투자, ③ 수출, 투자, 내수 보강 등 경제 활력 제고, ④ 사회, 고용, 교육 안전망 보강 및 취약계층 맞춤형 지원, ⑤ 국민 생활의 편의, 안전, 건강 증진 투자 확대다. 이는 일본 수출 규제 등 경기 하락의 위험에 적극적으로 대응하여 경제 활력을 제고하고, 핵심 소재, 부품, 장비의 수입 의존도를 낮춰 경제 제칠을 개선함과 동시에 미래 성장 동력을 확충하여 혁신 성장을 가속화하는 데 중점을 둔 목표라 할 수 있다. 분야별로 살펴보면 일자리 예산이 포함된 보건, 복지, 노동 분야의 예산이 가장 크게 증액되어 181.6조 원으로, 총지출 중 35.4%를 차지한다. 증감률로 보면 산업, 중소기업, 에너지 분야 예산이 작년 대비 27.5%로 가장 크게 증가하여 23.9조 원이 책정되었다.

 

 특히 2020년은 미래의 혁신 성장을 가속화하면서도 현재의 어려운 경제 상황에 활력을 불어넣기 위해 많은 예산을 투입할 전망이다. 일자리 창출에는 기존의 예산을 더욱 늘려 최대 규모인 25.8조 원이 투입되었다. 이는 전년 대비 21.3% 증가한 수치다. 소비자들의 편의와 안전을 증진하기 위한 예산을 살펴보면, 신기술을 위한 '스마트 인프라' 확충, 노후 시설을 보수하여 재난에 대비하는 '안전 투자' 강화, 그리고 미세먼지 저감 및 건강 증진을 위한 투자를 확대해나갈 전망이다. 나아가 정부는 '포용국가'의 기반을 공고화하기 위해 보건, 복지 분야의 예산을 확대 편성했다. 이를 통해 사회, 고용, 교육 안전망을 보강하고 취약계층을 위한 맞춤형 지원을 아끼지 않을 전망이다.

 

p196.

 

 그 해답으로서 현대인들이 다양하게 분리되는 정체성을 갖게 되었다는 사실을 지적하지 않을 수 없다. 직장에서의 정체성과 퇴근 후의 정체성이 다르고, 평소의 정체성과 덕질할 때의 정체성이 다르며, 일상에서의 정체성과 SNS를 할 때의 정체성이 다르다. SNS도 그것이 카카오톡이냐, 트위터냐, 유튜브냐, 인스타그램이냐에 따라 모두 다른 정체성으로 메시지를 올린다. 문제는 사람들이 이런 정체성의 분리를 전혀 어색하지 않게 느낀다는 것이다. 이것은 큰 변화다. 과거에는 '지킬과 하이드'처럼 정체성이 분리되는 것을 해리성 '인격 장애'라고 불렀다. 일종의 정신 질환으로 취급된 것이다. 하지만 현대 사회에서 정체성의 분리는 아주 자연스럽고 필연적인 현상이 됐다. 마치 중국의 변검배우가 가면을 순간순간 바꿔 쓰듯이 말이다. 이 가면을 학술적으로 '페르소나persona'라고 한다.

 

 "인간은 천 개의 페르소나를 갖고 있고, 상황에 맞게 꺼내 쓴다." - 칼 구스타프 융 -

 

 페르소나는 심리학에서 타인에게 비치는 외적 성격을 지칭하는 용어다. 원래 페르소나는 고대 그리스에서 배우들이 쓰던 가면을 일컫는 말이었는데, 구스타프 융이 이것을 심리학에 차용해 인간은 1천 개의 페르소나를 가지고 있어서 상황에 따라 적절한 페르소나를 바꿔가며 산다고 설명했다.

 페르소나는 오래된 용어지만, 현대사회처럼 복잡하고 개인화된 다매체 사회에서 중요한 개념으로 새삼 떠오르고 있다. 다시 말해서 최근 몇 년간 나타나고 있는 많은 트렌드를 관통하는 동인은, "사람들이 자기 상황에 맞는 여러 개의 가면을 그때그때 바꿔 쓰고 있기 때문"이라고 설명할 수 있다는 것이다. 이 복수複數의 가면을 『트렌드 코리아 2020』에서는 '멀티 페르소나multi-persona' 즉, '여러 개의 가면'이라고 부르고자 한다. 멀티 페르소나는 말하자면 본서의 여러 트렌드는 물론이고 최근의 사회 변화를 이해하는 '만능키'라고 할 수 있다. 지금부터 개념과 배경, 그리고 시사점에 대해 알아보자.

 

p208. 멀티 페르소나의 여러 모습

 양면적 소비의 증가

 

 "앞으로는 초저가와 프리미엄만 살아남을 것이다."

 초저가의 '노브랜드 버거'와 프리미엄 가격대의 '자니로켓 버거'를 동시에 취급하는 신세계그룹의 정용진 부회장이 이렇게 강조했다고 한다. 사실 이러한 소비의 양극화는 꽤 오래전부터 진행돼왔다. 중요한 점은 "왜 그런가?"다. 예전에는 부유한 소비자는 비싼 프리미엄 상품을, 가난한 소비자는 초저가 상품을 구매한다고 생각했다. 하지만 요즘에는 한 사람의 소비자가 저가와 프리미엄 버거를 모두 소비한다. 간단하게 한 끼를 때워야 할 때는 가성비 버거를, 근사한 데이트를 할 때에는 프리미엄 버거를 구매하는 식이다. 이제 소비의 양극화보다는 양면화라는 표현이 더 적확해 보인다. 이들 두 얼굴을 가진 로마신화의 신, 야누스Janus의 빗대 '야누스 소비'라고도 한다.

 

 야누스 소비는 이름을 바꾸며 다양한 형태로 시장에 나타난다. 한 가지 명품에 집중하는 '일품명품주의' 혹은 '일점호화소비'도 자신이 좋아하는 한두 품목에서 럭셔리를 추구하고 나머지는 극도로 절약한다는 측면에서 양면적 소비의 한 예다. '가성비' 트렌드와 '프리미엄' 트렌드가 동일한 선상에서 이해될 수 있다는 것도 양면성의 반영이다. 이런 양면적 소비를 '멀티 페르소나' 개념을 사용하면 쉽게 이해할 수 있다. 소비자가 상황에 따라 가면을 바꿔 쓰고, 그 페르소나의 성격에 따라 가성비냐 프리미엄이냐가 결정된다는 것이다.

 

 

p215.

 

 젊은 사람들이 혼자 여행을 갈 때 자주 이용하는 게스트하우스에서는 저녁마다 술과 노래가 있는 조촐한 파티가 열린다. 제각각 다른 곳에서 온 생전 처음 보는 사람들이 놀랍도록 솔직하고 내밀한 자기 얘기를 털어놓는 경우가 많은데, 이것은 "어차피 나중에 다시 만나지 않을 사람"이라고 생각하기 때문이다. 이것을 '게스트하우스 파티효과'라고 부를 수도 있다. 익명이 보장되거나 느슨한 연대라고 느낄 때, 사람들은 훨씬 더 솔직해질 수 있다는 것이다. 최근 밀레니얼 세대가 런닝 크루, 살롱, 소셜다이닝 등 오프라인의 '느슨한 취향 모임'에 빠지는 현상도 이런 맥락에서 설명할 수 있다. 온라인과 SNS 관계가 상대적으로 강화되면서 생겨나는 역설적인 현상이다.

 

p221.

 

 라스트핏 이코노미의 도래는 기존의 가격비교 중심의 의사결정이 바뀌고 있음을 예고한다. 소비자들은 이제 복잡한 의사결정 과정을 꺼려한다. 제품에 대한 필요성을 인식하면 그 이후의 행동은 '즉시 구매'로 이어진다. 가격이 조금이라도 더 싼 채널을 탐색하기 위해 투입하는 노력보다, 유료 멤버십에 가입한 뒤 버튼 하나만 누르면 바로 다음 날 새벽 대문 앞에 물건이 도착해 있는 편리성이 더 매력적이라고 판단한다. 소비자의 의사결정 기준이 가격 대비 효용에서 노력 대비 효용으로 변화하고 있는 것이다.(2020 전망편, '편리미엄' 키워드 참조). 그래서인지 장기 불황에도 불구하고 이른바 가성비 원리가 적용되는 영역이 차츰 줄어들고 있다. 그 주된 이유는 소비자의 구매 의사결정 기준이 상품의 효용에서 서비스의 질로 변화하기 때문이다. 마지막 순간, 고객의 최적화된 만족이 더 중요해졌다는 얘기다.

 

p223.

 

 마켓컬리의 경우 상품 카테고리는 많지 않지만 백화점 식품관을 연상케 할 정도로 일반 마트에서는 구입하기 힘든 상품들을 보유하고 있다. 예컨대 돈코츠 라멘은 있어도 오뚜기 진라면은 없는 것이 마켓컬리가 내세우는 전략이다. 마켓컬리의 김슬아 대표는 신선식품을 배송하는 데 꼭 필요한 냉장차량의 수요가 가장 낮은 시간대가 새벽이라는 사실과 30대 직장 여성들이 배송을 받기에 집을 비우는 낮 시간보다는 새벽이 더 좋다는 사실에 착안하여 '새벽 배송' 서비스를 내놓았다. 새벽이라는 시간대의 상업적 수요와 고객의 니즈에서 접점을 찾은 것이다.

 

p232.

 

 최근에서는 언박싱에서 진화해 '하울haul'이라는 용어도 등장했다. 하울은 주로 특정 제품을 구매한 후 제작자 나름의 방식에 따라 소개하며 솔직한 사용 후기를 많은 사람들과 공유하는 것을 말한다. 특정 브랜드나 물건명, 하울의 대상이 되는 카테고리 뒤에 '하울'을 붙여 '여행 기념품 하울', '스킨로션 하울', '명품 하울'등과 같이 사용되고 있다. 하울은 영상 제작자가 하나의 제품이 아니라 다양한 제품을 구매한 뒤 박스 개봉 과정을 분석해 보여준다는 점에서 기존의 언박싱 영상과는 차이가 있지만, 포장을 풀고 제품을 처음 만지는 순간, 즉 라스트 터치를 간접 경험하게 한다는 측면에서는 유사하다.

 

p244.

 

 "뒷문으로 승차해도 괜찮습니다!"

 아침 등교 시간 서울대입구역에서 서울대 내부로 진입하는 셔틀 버스의 줄은 언제나 길다. 버스기사가 승차 시간을 줄이고자 학생들에게 일부는 뒷문으로 타도 괜찮다고 외치지만, 어느 누구도 열린 뒷문으로 오르지 않는다고 한다. 똑같이 줄을 섰는데 누군가가 뒷문으로 승차해 좋은 자리에 앉는 것은 '극협(극도로 혐오한다는 의미)'이기 때문이다. 줄 중간에 아는 친구를 만나 뒷사람의 양해를 구하고 그 친구와 함께 중간에 서는 일도 학생들에게는 있을 수 없는 일이다. 요즘 젊은이들은 '새치기'에 극도록 민감하다.

 

 이런 현상은 단지 위 인터뷰의 젊은 직원이나 줄 서는 대학생에게만 국한된 일이 아니다. 유명 오디션 프로그램의 순위 조작 논란, 모여고의 시험지 유출 논란, 교수 자녀의 논문 특혜 논란, 평창 동계올림픽 여자 아이스하키 남북 탄일팀 논란 등의 사례에서 보듯 요즘 젊은 세대가 분노하는 경우는 모두 '공정성'이 훼손됐다고 여길 때다.

 

p259.

 

 한국 사회 내의 불평등성이 과거에 비해 점차적으로 개선되어왔다는 주장도 있기 때문이다. 실제로 정인관, 박현준은 2019년 발표한 논문에서 한국 사회에서 교육에 대한 투자와 기회 증가로 부모의 계급이 자녀의 계급에 미치는 상관관계가 점차 감소해왔음을 밝히기도 했다. 1950~1984년 코호트를 거치며 부모 계급과 자녀 계급 사이의 사회적 지위 이동이 훨씬 활발하게 이루어졌다는 것이다. 

 

 문제는 객관적인 격차가 아니다. 객관적인 부의 격차가 점차 개선됨에도 불구하고, 사람들이 '체감하는' 공정성 결핍은 왜 점점 더 강해지는가에 좀 더 집중할 필요가 있다. 이에 대해 우리 사회의 불평등성이 낮아졌기 때문에 공정성에 대한 사람들의 열망이 오히려 증가한 것이라는 역설적인 주장도 있다. 19세기 전반에 활약한 프랑스의 정치사상가 토크빌에 따르면 사회적 신분 차이가 정해져 있던 봉건시대에는 서로의 처지를 비교조차 하지 않기 때문에 차별에 대한 고민이 없었다. 반면 사회제도의 발달로 신분 차별이 없어지면 표면상으로는 누구나 상위층에 속할 기회를 갖게 되면서 공정성 문제가 발생하기 시작한다는 것이다.

 토크빌의 지적은 우리가 공정한 사회를 추구할 때 직면할 수밖에 없는 본질적인 모순을 들춘다. 만약 우리 사회가 완전하게 공정하다면, 빈민이나 실패자 등 하위계급에 놓인 사람들이 자신의 처지를 사회 탓으로 돌릴 명분이 없어진다. 사회 시스템이 불공정해서가 아니라, 나 자신의 재능과 노력이 남들보다 열등하기 때문으로밖에 해석되지 않기 때문이다. 이때 "우리 사회에서는 공정한 평가 기준이 있지만, 그것을 적용하는 과정이 공평하지 않다."라고 믿는다면 우리는 자신의 열등성을 부정할 수 있다. 평등을 추구할수록 공정성에 대한 욕구가 더욱더 커지는 이유는 바로 이 때문이다.

 

p265.

 

 한편 공정함 뒤에 숨어 있는 부정적 측면도 간과해선 안 된다. 예를 들어, 전통적인 위계 조직과 달리 수평적 네트워크 조직은 사고가 발생했을 때 이를 책임질 사람이 부재하다는 필연적인 문제를 갖고 있다. 실제로 요즘 직장인들을 두고 소통은 수평적이길 원하지만 책임은 수직적이길 원하고, 업무에 대한 욕심은 많은데 정작 수행하는 방식은 잘 모른다는 비판적인 목소리도 높다. 전문성과 책임감을 보강할 수 있는 조직적 방안을 찾아야 한다.

 

p278.

 

 미국 스타트업 '후치Hooch'는 매달 9.99달러를 내면 수백 개의 맨해튼 술집에서 매일 칵테일 한 잔을 마실 수 있다. 비슷한 서비스로 국내에는 '데일리샷'이 있다. 한 달에 9,900원의 비용으로 제휴 술집에서 매일 술 한 잔을 무료로 마실 수 있는 이 서비스는 출시된 지 1년 만에 누적 회원 수 5천 명을 돌파했다. 집으로 배달되는 술 추천 스트리밍 업체도 증가하는 추세다. 2018년 6월 설립된 '퍼플독'은 소믈리에 등 와인 전문가들이 고객 취향에 맞춰 선별한 와인을 매달 한 차례 배송한다. 와인 라벨과 원산지, 음용 방법, 관련 스토리 등을 담은 콘텐츠도 함께 보내준다. '술담화'는 전통주를 경험해볼 수 있는 서비스다. 월 3만9천 원에 한 달에 한 번씩 전통주 두 병을 골라 보내주는데, 론칭 7개월 만에 구독자 수가 1천 명이 넘었다. 술담화는 단순히 술을 파는 것에서 더 나아가 온라인으로 유통 가능한 900여 종의 전통주 중에서 소비자의 취향과 계절에 어울리는 술을 추천해주고 이와 함께 술에 대한 정보, 어울리는 음식, 술에 얽힌 역사 등 다채로운 정보도 제공한다.

 

p285. 삶을 유영하는 노마드 가치관

 

 스트리밍 라이프의 배경에는 정주하지 않고 유동하는 노마드nomad, 즉 유목민의 가치관이 자리한다. 프랑스 철학자 들뢰즈와 정신분석학자 가타리는 1980년에 출간한 『천 개의 고원』에서 홈 파인 공간과 매끈한 공간의 개념을 제시한 바 있다. 홈 파인 공간이 정주의 공간이라면 매끈한 공간은 경계가 없는 유목의 공간이다. 들뢰즈와 가타리는 유목의 개념이 적용되는 공간을 노모스라고 칭했는데, 자유롭게 경계를 허무는 현대인의 삶은 노모스에 더 가깝다. 어디서나 서비스에 접속할 수 있되 언제든 다른 스트리밍으로 갈아탈 수 있어야 한다. 시공간의 경계를 허무는 자유로운 라이프스타일은 스트리밍 라이프로의 전환을 더 가속화한다.

 

 유목적 삶의 관점에서 일하는 방식이나 형태가 바뀌고 있다는 점도 주목해야 한다. 인터넷 환경이 빠르게 개선되면서 시공간의 제약 없이 일할 수 있는 시대가 되었다. 한 공간에 모여 있지 않아도 된다는 뜻이다. 프리랜서 직군이 증가하면서 다양한 거점으로 이동하는 주거 스트리밍이 성장하는 측면도 있다. 디지털 유목민이라는 Z세대는 평생 17개의 직장과 5개의 직업, 15번의 주거지를 갖는다는 조사 결과도 있다. 노마드적 가치관이 일부의 특이한 취향이 아니라 현대인을 정의하는 중요한 키워드가 되고 있는 것이다.

 

p295. 초개인화 기술의 3단계

 

 초개인화 기술이 실현되기 위해서는 일반적으로 세 가지 단계를 거쳐야 한다. ① 고객 접점에서 발생하는 모든 상황을 분석 가능한 형태로 데이터화하고, ② 해당 데이터를 AI의 알고리즘을 통해 분석하며, ③ 다양한 미디어를 통해 서로 커뮤니케이션하는 것이다.

 

p311. 

 실상 전 세계적으로 데이터 수집과 인공지능의 활용은 플랫폼 시장을 장악한 GAFA ; Google-Amazon-Facebook-Apple, BATH ; Baidu-Alibaba-Tencent-Hwawei 같은 미국과 중국의 극소수 파워 유저 기업들이 주도하고 있다.

 

p354.

 국내 아웃도어 인구가 증가하면서 아웃도어 의류 시장이 커다란 변화를 보이고 있는 가운데, 전통적인 유통의 두 강자, 서울의 남대문 시장과 동대문 시장의 엇갈린 실적이 눈길을 끈다. 남대문 시장에는 아웃도어 의류와 캠핑 용품을 취급하는 가게들이 늘어났고, 반면 동대문 시장은 클라이밍 전문 장비에 주력했다. 결과는 어떻게 되었을까? 일반 손님들로 장사를 이어가던 남대문에는 현재 관련 매장 3곳 만이 명맥을 유지하고 있는 반면, 객단가가 높은 마니아와 단골손님을 확보한 동대문에는 30여 곳이 성업 중이다. 크고 넓은 시장을 겨냥했던 남대문 시장보다, 전문 장비에 특화한 동대문 시장이 더 성장하고 있다는 사실은 특화의 중요성을 여실히 보여준다.

 

p357.

 

 "한 우물을 파라. 샘물이 나올 때까지."

 

 슈바이처 박사의 유명한 이 좌우명은 특화에 몰입하는 것이 진정 가치 있는 일임을 시사하고 있다. 사람은 축적해놓은 것이 있으면 자신감이 붙는다. 한 우물을 집요하게 파는 일은 시간과 노력을 담보로 자신감을 키우는 일이다. 특화에 필요한 것은 다름 아닌 자신감일지도 모른다.

 

p372.

 

 오팔세대의 일상적 시간을 공략하면 산업의 지형도까지 바꿀 수 있다. 일례로 가성비 좋은 시간 활용법을 찾는 신중년층 남성들이 죽어가던 당구 시장을 일으켰다. 회식 문화가 변화하면서 저녁시간 활용을 고민하는 중장년 직장인과 퇴직 후 여가 활동 거리를 찾는 남성들이 젊은 시절 자주 찾았던 당구장에 모인 것이다. 자욱한 담배연기 속에서 시간을 때우는 곳이 아니라 동문 간 교류와 일상에 활기를 불어넣는 게임을 즐기는 곳으로 거듭나면서 당구장마다 고교별, 대학별 동문친선대회가 열릴 정도다. 2016년부터는 매년 한 방송사 주도로 '고교 동창 3쿠션 최강전'도 개최되고 있다. 국민생활체육참여 실태 조사에 따르면 '최근 1년간 참여 활동이 있는 상위 10종목'에서 당구는 2016년 10위에서 2018년 7위로 세 계단 뛰어올랐다. 신중년이 만들어낸 새로운 풍속도라고 할 수 있다.

 

p380.

 

 코글린 교수는 연구를 통해 남성은 노후를 바라볼 때 '독립,휴가,충족' 등을 떠올리며 결과지향적인 반면, 여성은 '계획,저축,보험' 등을 떠올리며 과정지향적이라는 점을 발견했다. 이를 한국적인 사례로 생각해본다면 오팔 남성들이 언젠가 한적한 시골에 내려가 노후를 보내고 싶다는 말을 자주 하는 반면, 여성들은 베란다에 상추를 키울지언정 그러한 표현을 하지 않는다는 차이가 있다. 따라서 오팔세대가 '바로 지금' 필요한 서비스나 개선점을 알고자 한다면 여성에게, 미래의 '로망'에 대한 정보를 얻고 싶다면 남성에게 물어야 한다는 것이다.

 

p383.

 

 편리성이 프리미엄의 요소로 편입되는 배경은 시대적이다. 시간 빈곤에 시달리는 현대의 젊은 소비자들은 다른 한편으로 그 시간을 다양한 경험과 자기성장에 투자하고 싶어 한다. 더구나 옆집이나 친지에게 사소한 부탁도 할 수 없게 된 '약한 연대의 사회'에서는 작은 문제조차 스스로 해결하지 않으면 안 된다. 이런 여러 이유로 소비자들은 자신의 시간과 노력을 줄여줄 수 있다면 얼마든지 그 대가를 지불할 수 있다고 받아들인다. 일자리는 부족해지는 가운데 구직 청년은 물론이고 은퇴 후의 '가교노동'을 원하는 노동자들이 늘어난 것도 한 요인이다. 이들이 플랫폼화하는 노동시장으로 별 제약 없이 유입되고 있는 것이다.

 

p385.

 

 최근 변화 양상을 보면 소비자들이 시간 부족에 허덕이면서 생활의 효율을 극도록 중시하게 되었고, 인간관계의 유대가 약화되면서 삶의 문제를 모두 개인이 직접 해결해야 하는 원자화된 사회로 진입하고 있다. 이에 더해 스마트폰 애플리케이션을 기반으로 한 앱 경제는 그 확산 속도가 무척 빠르다. 이러한 점을 종합적으로 고려할 때 2020년의 프리미엄은 소비자의 '편리'에 집중될 것이라고 예상할 수 있다. 다시 말해서 소비자가 원하는 '편리'를 잘 발굴해 이에 기반한 상품,서비스 전략을 기획한다면, 가격 상승에 대한 소비자의 지불 의향을 이끌어내는 '프리미엄' 전략이 충분히 가능하다는 의미다. 이에 『트렌드 코리아 2020』에서는 편리가 프리미엄의 핵심 요소가 된다는 측면을 강조해 '편리미엄'으로 명명하는 트렌드를 제안한다.

 

p387.

 

 편리미엄의 첫 번째 전략은 소비자가 투자해야 하는 시간을 줄여 편의성을 높이는 것이다. 대표적인 예가 동영상 재생 전에 나오는 프리롤pre-roll 광고 영상을 5초 후에 스킵할 수 있도록 만든 유튜브의 '건너뛰기' 광고 전략이다. 최근에는 연속으로 광고 2개를 시청해야 하거나 건너뛰기를 할 수 없는 15초 광고도 늘었다. 이러한 시간조차 아끼고 싶은 사람들은 '유튜브 프리미엄'을 찾는다. 월 7,900원을 지불하면 광고 없이 바로 영상을 볼 수 있는 유료 서비스다. 동영상 다운로드 등 다른 서비스도 이용이 가능하지만 이 서비스의 핵심은 광고 제거다. 건너뛰는 시간마저 아까운 이들에게는 불필요한 광고 시청보다 별도의 비용을 지불해 시간을 절약하는 것이 더 합리적인 선택이 된 것이다.

 

p392.

 

 아파트 분양 시장에서도 고객의 노력을 덜어주는 신개념 서비스들이 프리미엄 셀링 포인트가 되고 있다. 대표적인 예가 아파트 조식 서비스다. 국내 최초로 커뮤니티 시설에 조식 제공 서비스를 도입한 곳은 서울 성수동 트리마제로 알려져 있다. 2017년 서비스 업체를 선정해 조식과 중식을 제공해왔다가 최근에는 저녁까지 제공하는 올데이 All day 다이닝 서비스로 확대했다. 조식 서비스 외에도 고급차 카셰어링이나 하우스 키핑 서비스, 비즈니스 라운지, 북카페, 사우나 등의 편의시설을 입주민에게 제공하는 서비스도 있다. 또한 서울 반도퐁 반포리체, 서울 대치동 래미안대치팰리스, 서울 서초동 반포래미안퍼스티지, 수원 광교 더샵 레이크파크, 성남 위례신도시 자연앤래미안e편한세상, 대구 수성구 SK리더스뷰 등도 식사 서비스를 잇따라 도입했다고 한다. 특히 서울 평창동 롯데캐슬로잔은 입주민에게 주 1회 세차 서비스와 월 1회 침대,소파,카펫의 살균 및 건식 청소 등 호텔식 룸 메이드 서비스를 제공하고 있다.

 

 일의 종류에 따라 특수 서비스를 제공하는 업체들도 각양각색이다. 개인이 직접 할 수 있는 일이지만, 수고를 덜기 위해 비용을 지불하고 대신 해줄 사람을 찾는 것들이다. 대표적으로 강아지를 돌봐주는 펫시터를 연결하는 플랫폼을 들 수 있다. 반려견 돌봄 플랫폼인 '도그메이트'나 '와요'를 이용하면 '도그워커(전문 반려견 산책인)'를 1시간에 2만 원 내외의 비용으로 고용할 수 있다. 나물을 먹고 싶지만 은근히 손이 많이 가는 번거로움 때문에 꺼렸다면 이제 나물을 데쳐주는 나물 큐레이팅 서비스를 이용하면 된다. 세차와 같은 서비스는 말할 것도 없다. '인스타워시' 앱을 이용해 세차 서비스를 예약하면 원하는 시간에, 원하는 장소에서 세차를 받을 수 있다.

 현대에 인간에게 노출되어 있는 독소적 성분이 뇌에 미치는 영향에 대해 다루고 있다.

독소가 몸에 미치는 영향, 그리고 이를 해독하는 방법에 그 초점이 맞혀져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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p32. 면역계의 기초

 

 면역계는 우리 몸을 지키는 군대와 같다. 서로 다른 5개 부문이 협력하여 면역계를 이루는데, 군대에 비유하자면 육군, 해군, 공군, 해병대, 연안경비대라 할 수 있다.(의사들은 이를 자가면역반응 또는 항체 IgA, IgG, IgE, IgM, IgD라고 부른다.) 각각 역할이 다르다. 또 체내에는 4가지 다른 면역계가 있다. 각각은 별개로 작동하지만, 같은 매뉴얼에 따르면서 서로 소통한다. 가장 큰 면역계는 소화관(장)으로 전체 면역력의 70~85%를 좌우한다 또 다른 면역계는 간의 쿠퍼 세포(Kupffer cell)이고, 세 번째 면역계는 혈액에 들어 있는 백혈구 세포이다.

 마지막으로 체내의 가장 강한 면역계는 뇌 안에 있는 교세포다. 교세포는 뇌 안으로 들어가는 물질을 여과하는 혈액뇌장벽(Blood Brain Barrier) 바로 안쪽에서 고성능 라이플총을 들고 어떤 외부 물질도 침투하지 못하게 감시한다. 교세포는 체내에서 가장 강력한 면역 반응을 일으키는데, 6연발 권총 정도가 아니라 바주카포를 들고 돌아다니는 셈이다.

 생각하는 능력 덕분에 인간이 지구상에서 '지배종'이 되었다는 관점에서 보더라도, 사고 영역을 관장하는 대뇌 피질은 인간의 생존에 매우 중요하다. 이는 대뇌 피질을 보호하는 교세포가 무려 608억 4천만 개에 달한다는 사실만 봐도 알 수 있다. 대뇌 피질을 구성하는 뉴런 개수는 163억 4천만 개다. 그러니까 이 넓은 피질에서 교세포와 뉴런의 비율은 거의 4대 1로 유지된다.(정확히는 3.72 대 1이다). 즉, 사고 세포들을 무슨 일이 있어도 보호해야 한다는 의미다. 그런데 근육 및 명령중추인 소뇌로 가면 상황이 역전된다. 교세포보다 뉴런 수가 더 많다. 파킨슨병, 다발성경화증 등 뇌에 영향을 미치는 많은 자가면역질환이 운동 기능에도 영향을 미치는 이유는 이 때문일 것이다.

 4가지 면역계는 적어도 두 종류씩 무기를 가지고 있다. 세포성/선천성 면역계와 체액성/적응성 면역계다. 세포성 면역계는 모든 생명체에서 발견되는 아주 오래된 면역계로, 위협을 제거하기 위해 생화학 총탄을 발사하고 염증을 형성하는 보호용 권총 역할을 한다. 반면 체액성 면역계는 백업용 지원 시스템으로, 더 강한 염증을 만들 필요가 있을 때 소환되는 대포에 해당한다.

 박테리아, 바이러스, 기생충, 바람직하지 않은 식이단백질과 펩티드, 심지어 화학물이나 약물 등 어떤 환경적 독소에 노출되든 간에 세포성/선천성 무기는 최초로 반응하는 생화학 총탄이라 할 수 있는 사이토카인(cytokines)을 형성한다. 사이토카인은 위협이 될 만한 요소는 무엇이든 찾아내서 파괴하는데, 종류가 매우 다양하다. 면역계는 위협 요인에 따라 어떤 사이토카인을 분비할지 결정한다.

 만일 세포성 무기의 방어 전략이 임무를 완수하지 못하면, 면역계는 대포를 소환한다. 이때 체액성/적응성 면역계가 발동하고 군사들이 '항체'라는 표적 미사일을 대령한다. 항체는 노련하게 특정 표적을 뒤쫓다가 어디에서든 침입자를 발견하면 미사일을 발사한다. 혹시 혈액 검사 결과에 '항체 수치 상승'이나 항체 표시 옆에 'H'라고 적혀있다면, 기본 면역계가 이미 제압당해 대포가 나섰다는 의미다. 항체는 혈류를 순환하며 훈련받은 대로 환경적 독소를 찾아 공격한다. 그런데 항체는 불결한 병원균이나 음식물, 손상된 세포를 찾아 파괴한 후에도 2~6개월 동안 계속 혈류에 머문다. 아무 증상이 없는데도 항체 수치가 높다면 면역계가 위협 요인을 발견하고 병으로 발전하기 전에 처리하려고 최후의 수단을 동원하고 있다는 신호다.

 또 선천성 면역계(최초 반응자)가 피로해져서 제 역할을 못하는 경우에도 항체가 증가한다. 면역계는 우리의 잡다한 식습관과 생활습관에 대응하는 역할만으로도 지칠 수 있다. 생화학적 요인(음식 과민성, 환경적 독소 등)이든, 구조적 요인(안 좋은 자세와 장 투과성)이든, 정서적 스트레스든, 전자기장이든 간에 지속적으로 항원이 밀려들면, 우리의 최초 반응자(선천성 면역계)는 녹초가 되어 더 이상 효과적으로 작동하지 못한다. 우리는 얼마나 오랫동안 담배를 피우거나 탄산음료를 마시거나 달콤한 음식을 먹어왔던가? 이런 습관 때문에 몸이 손상되어 툭하면 감기에 걸리거나 건망증을 보이거나 오후 세 시만 돼도 기력이 급격히 저하되는 것이다. 이런 경미하지만 성가신 건강 문제는 선천성 면역계가 지쳐서 약해졌음을 시사한다.

 

p38.

 우울증은 뇌의 전두엽에서 흔히 발생하는 염증의 한 예다.

 

p39.

 미국 알츠하이머병 연구센터의 노화연구소를 운영하는 데일 브레드슨 박사는 현재 알츠하이머병을 호전시키는 치료를 진행 중이다. 그는 2014년 11월 의학저널 <에이징 Aging>에 발표한 최초 논문에서 10명의 알츠하이머병 환자 중 9명을 5년 만에 완전히 회복시킨 연구 결과를 소개했다. 그의 환자들은 다시 일터로 돌아가거나 연구소에서 나와 가족들과 함께 집으로 돌아갔다. 그들은 완전히 원래 상태를 회복했는데, 이는 거의 기적에 가까운 일이었다.

 

p46.

 피로감, 에너지 부족, 기억력 감퇴, 감정 기복 등의 증상이 반복되는 것은 면역계에서 우리에게 어딘가 균형이 깨졌다고 신호를 보내는 것이다. 우리가 독속에 노출되어 점차 죽어가고 있고, 우리 몸의 군대가 몸을 보호하려고 애쓰고 있다는 신호다. 이런 뇌 증상들도 스펙트럼상에서 발생한다. 가벼운 피로감을 느낀다는 것은 아침에 일어나기 위해 힘을 쥐어짜내야 한다는 의미이고, 언젠가는 완전히 기능이 상실되어 침대에서 꼼짝도 못하는 상태로 발전할 수 있다는 얘기다.'

 

p51. 뇌의 해부학

 

 뇌는 대뇌, 소뇌, 뇌간의 세 부분으로 이루어져있다. 대뇌는 뇌에서 가장 큰 부위로, 대뇌 피질이라고도 불린다. 인간의 가장 고차원적인 뇌기능인 '생각'이 바로 대뇌에서 이루어진다. 우리가 뇌를 떠올릴 때,, 그려지는 것이 대뇌다. 대뇌는 불룩하게 접힌 회백질이 모여있는 부위로, 대장처럼 주름져 좁은 공간 안에 매우 넓은 표면적이 들어있다. 대뇌는 기억, 주의, 인식, 사고, 언어, 의식에 핵심적인 역할을 한다.

 소뇌는 대뇌의 아래쪽과 뒤쪽에 위치한 공 모양의 조직이다. 소뇌는 감각 정보(촉각과 균형 감각 등)를 해독하고 근육과 결합하여 움직임을 조절한다. 소뇌에서 보내는 메시지 덕분에 인간은 다른 종과 다른 방식으로 몸을 구부리거나 비틀 수 있다. 내가 오래전에 삼림 감시원에게 들었는데, 인간은 언덕의 비탈을 가로질러 곧장 달릴 수도 있지만, 곰은 언덕을 위아래로만 달릴 수 있다고 한다. 끝으로 뇌간은 뇌와 척수를 연결한다. 뇌간은 심박동수, 혈압, 호흡 같은 신체 기능을 제어한다.

 

 

 대뇌 아래에는 변연계를 구성하는 몇 가지의 작은 구조가 있다. 변연계는 뇌에서 가장 원초적인 부위로, 공포, 분노, 쾌락 등의 정서와 동기를 해독하는 데 관여한다. 또 변연계의 특정 구조들은 기억을 생성하고 유지하는 데도 관여한다. 그중 하나인 편도체는 기억을 뇌의 어디에 어떻게 저장할지를 결정한다. 해마는 단기 기억이 저장되는 장소로, 알츠하이머에 영향을 받는 뇌의 주요 영역 중 하나다.

 시상하부는 감정, 섭식, 수면을 조절한다. 시상은 척수에서 뇌로 메시지를 전달한다. 이런 뇌 부위들은 다음 장을 읽을 때 기억해야 할 중요한 부분이다. 다음 장에서는 장내의 박테리아가 뇌의 다양한 영역에 어떻게 영향을 미치는지를 설명할 것이다. 예를 들어, 장내 박테리아의 불균형은 혼란스러운 감정, 수면 부족, 단기 기억 상실 등을 초래한다. 이 내용은 뒤에서 더 자세히 이야기하겠다.

 각각의 뇌 영역은 신경들로 이루어진다. 신경은 뉴런으로 구성된다. 뉴런은 뇌 작업의 기본 단위로, 다른 신경세포나 근육, 샘세포(gland cell)로 정보를 전달하도록 설계된 특수한 세포다. 뇌에는 1천억 개의 개별 뉴런이 있으며, 우리 몸은 끊임없이 오래되고 손상된 뉴런을 제거하고 새로운 뉴런을 생성한다. 뉴런은 뇌 호르몬인 신경전달물질을 통해 서로 정보를 전달하고 처리한다. 이런 일련의 시스템에서 어느 한 부분이라도 손상되면 뉴런의 메시지가 한 세포에서 다른 세포로 제대로 이동하지 못한다. 이 내용을 기억해두어야 다음 장에서 신경전달물질 정보의 흐름을 향상시키는 음식에 대해 이야기할 때 이해가 될 것이다.

 신경은 미엘린 수초(myelin sheath)라는 일종의 비닐랩 같은 물질로 보호된다. 미엘린 수초는 전선을 감싸는 소재와 매우 유사한 절연체로, 신경이 화학성 메시지를 다음 신경에 전달할 때까지 이를 보존할 수 있게 도와준다. 자동차 배터리에서 헤드라이트까지 연결된 전선을 생각해보라. 전선 일분의 절연체를 벗겨내면 전선이 외부에 노출된다. 그렇게 노출된 전선이 자동차 프레임에 닿으면 라이트가 켜졌다 꺼지며 깜빡거리기 시작한다. 전선에는 아무 문제가 없고 라이트에도 아무 문제가 없지만, 절연체가 손상되어도 라이트가 깜빡이는 문제가 발생하는 것이다. 이 같은 일이 뇌에서 벌어질 때 우리는 다발성경화증(MS)으로 향하는 스펙트럼상에 놓이게 된다. 그렇기 때문에 수초염기성단백질(MBP)과 미엘린 희소돌기아교세포 당단백질(MOG)에 대한 항체의 생체지표 검사는 매우 중요하다. 이 검사는 신경의 절연체가 파괴되는 메커니즘을 가장 먼저 확인할 수 있는 방법으로, 검사 결과 수치가 상승하면 다발성경화증으로 향하는 자기면역 스펙트럼상에 놓여있다고 볼 수 있다.

 뇌는 지속적으로 영양을 공급하는 뇌척수액과 혈액, 혈관으로 둘러싸여있고, 모세혈관이라 불리는 혈관들은 각 뉴런에 연결되어있다. 모세혈관의 길이를 끝에서 끝까지 재보면 400마일(약 644km)에 달한다. 일부 모세혈관은 너무 가늘어서 한 번에 단 하나의 적혈구만 통과할 수 있다. 혈액은 매일 24시간 쉬지 않고 돌고, 온몸 구석구석을 순환하는데, 20~25%는 언제 어느 때든 머리 쪽에 몰려있다. 많은 혈액이 뇌에 집중되는 것은 뇌가 매 초당 수만 개의 메시지를 처리하기 위해 필요한 연료를 혈액에서 계속 공급받아야 하기 때문이다.

 

p54. B4 : 혈액뇌장벽 손상

 

 이번 주제인 혈액뇌장벽(뇌척수액과 혈액을 분리하는 장벽) 손상(B4)은 이 책에서 가장 중요한 시사점 중 하나다. 우리는 뇌에 대해 이야기하고 있는데, 이 이야기는 장에서 시작된다. 혈액의 성분은 우리가 호흡하는 공기를 통해 받아들이는 것, 피부와 눈, 귀를 통해 흡수하는 것 그리고 섭취한 음식에 의해 결정된다. 입을 통해 몸속으로 들어온 물질들은 우선 소화관을 통과하며 분해, 소화, 흡수되고, 그 결과 생명을 유지하는 유익한 영양분이 되어 혈액 속으로 들어가 몸 전체를 순환한다. 이 과정에서 소화계는 불완전하게 소화된 음식은 물론, 독소와 자극물이 혈액에 흡수되는 것을 막는데, 1차 방어벽 역할을 하는 것이 바로 소장 상피이다. 이것이 일종의 거름망 기능을 하여 아주 작은 분자만 혈류로 들어갈 수 있다.

 뇌 안에도 이와 유사한 기능을 하는 자체 보호 거름망이 있다. 구성 물질로 거의 동일하다. 혈액뇌장벽(BBB)이라는 이 방어벽의 주된 역할은 큰 분자들이 혈액을 통해 뇌로 들어가지 못하게 막는 것이다. 뇌의 거름망은 소장의 거름망에 비해 훨씬 미세하다. 그런데 장 내벽이 찢어지면 창자가 새어나올 수 있듯, 뇌의 거름망이 찢어지면 뇌가 새어나올 수 있다. 학자들은 이렇게 찢어진 상태를 혈액뇌장벽 손상(Breach of the Blood-Brain Barrier)이라 하고, 나는 'B4'라 부른다.

 뇌 누수(leaky brain)는 다양한 이유로 발생한다. 특히 머리가 외상을 입는 경우에 그렇다. 뇌진탕을 입으면 뇌의 거름망이 약간 찢어진다. 더 작은 외상을 반복적으로 입어도 거름망이 찢어질 수 있다. 외상으로만 혈액뇌장벽이 찢어지는 것은 아니다. 흔들린 아이 증후군(shaken baby syndrome)이나 과격한 운동도 뇌에 손상을 입힐 수 있다. 그래서 나는 마라톤, 트라이애슬론 같은 지구력 운동의 장기적 효과에 대해 의문이 든다. 물론 나도 젊어서는 마라톤을 했고, 이 책을 쓰는 지금도 왜 주자들이 달릴 때의 기분을 쿵쾅거리며 거리를 누빈다고 표현하는지 잘 안다. 적당량의 운동은 뇌기능에도 도움이 되고 혈액뇌장벽을 강화하며 혈류에 있을지 모를 종양 세포가 뇌 안으로 침투하는 것을 막는다. 결국 균형의 문제이다. 혈류로 들어간 식품 거대 분자로부터 우리를 보호하기 위해 면역계가 만든 항체로 인한 염증도 혈액뇌장벽을 손상시킬 수 있다. 가장 악명 높은 식품은 밀과 유제품이다. 기생세균, 바이러스성 기생충, 자가면역질환 등 다양한 원인으로 생겨난 염증 역시 혈액뇌장벽을 손상시킬 수 있다. 심지어 설탕을 입혀 바삭하게 만든 빵 껍질이나 크램 브륄레 표면도 최종당산화물(AGEs)이란 새로운 분자를 생성하는데, 이것 역시 장과 뇌의 거름망을 손상시켜 B4를 유발한다. 새까맣게 탄 고기를 물론 바비큐 껍데기도 우리 뇌에 작은 구멍을 낼 수 있다는 사실은 두말할 여지가 없다.

 보통 혈액뇌장벽은 4시간 이내에 빠르게 치료된다. 그러나 외상이 반복되면 B4 상태가 유지되어 거대 분자가 민감한 뇌에 침툭하게 된다. 그 결과 평소에는 조용한 뇌 면역계의 교세포들이 우리 몸을 보호하기 위해 과민반응하며 바주카포를 계속 발사해대어 많은 부수적 손상을 입히고 만다. 부수적 손상이 발생하면 면역계는 일단 혈액뇌장벽을 통과하는 거대 분자에 대한 항체뿐 아니라 손상된 세포를 제거하기 위한 항체도 생성하는데, 이 항체는 혈액뇌장벽에 대한 항체가 증가하면 문제가 발생하고, 뇌 안에서 염증성 연쇄 반응을 부추기게 된다.

 간단한 혈액 검사를 통해 당신이 B4 척도에서 어디쯤에 위치하는지를 확인할 수 있다. 응급실에서 혈액뇌장벽의 심한 외상을 치료할 때 사용하는 두 가지 생체지표는 S100B과 뉴런특이적 에놀라아제(NSE)이다. 두 지표의 수치가 높으면 S100B와 NSE가 혈류로 새어나오고 있다는 뜻이다. 혈류 속에 S100B와 NSE가 오랫동안 높은 수준으로 유지되면, 몸은 그 초과분을 제거하기 위해 S100B와 NSE에 대한 항체를 만든다. 따라서 S100B와 NSE에 대한 항체 수치가 높으면 혈액뇌장벽이 계속 찢어져있는 상태일 가능성이 높다. 두 가지 수치는 신체적인 외상뿐 아니라 어떤 원인으로든 혈액뇌장벽이 손상되었음을 알려주는 매우 정확한 생체지표다. 이런 지표들은 혈액뇌장벽이 뚫려서 거대 분자가 뇌 안으로 침투할 수 있고 그 결과 면역 반응이 활성화되어 염증이 생겨 뇌 안개, 건망증, 주의력결핍 과잉행동장애(ADHD), 발작, 불안, 우울, 조현병, 양극성 장애와 종국에는 치매, 파킨슨병, 다발성경화증, 알츠하이머병 등이 발현될 수 있음을 시사한다.

 일단 B4를 겪게 되면 뇌 안의 모든 조직이 영향을 받을 수 있다. 당신이 지금껏 어떻게 살아왔고 어떤 독소에 노출되었으며 그 독소가 어디에 축적되었는지, 그리고 어떤 유전적 특성을 물려받았는지가 당신의 약한 고리를 결정한다. 결국 그것이 당신이 걸리기 쉬운 가장 취약한 질병이 된다. 유일한 차이는 분자 모방이 어느 부위에서 발생하느냐는 것뿐이다. 만약 밀의 A-A-B-C-D가 소뇌와 유사하게 보이면, 소뇌에 대한 항체가 증가하여 소뇌 조직이 파괴되고, 소뇌 변성이 징후가 나타날 것이다. 만약 유제품의 A-A-B-C-D가 미엘린 수초와 유사하게 보이면, 수초에 대한 항체가 증가하여 수초 조직이 파괴되면서 수초 변성의 징후가 나타나고 운동 기능이 상실되어 다발성경화증으로 번질 것이다. 독성 화학물질인 비스페놀 A에 대해 분자 모방이 일어난다면, 뇌의 여러 부위에 대한 항체가 증가할 것이다. 옥수수, 토마토, 시금치, 콩, 담배에 대해 분자 모방이 일어난다면, 뇌신경과 시신경에 있는 아쿠아포린-4 세포에 대한 항체가 증가하여 뇌기능장애와 함께 시력에도 문제가 생길 것이다.

 메커니즘은 대부분의 만성 뇌기능장애에서 매우 유사하게 나타난다. 먼저 혈액뇌장벽 손상이 발생한다. 그러면 우리가 노출된 독소가 우리 몸을 보호하는 면역계의 반응을 자극하여 해당 독소에 대한 항체가 증가하는데, 그런 독소는 우리 몸의 조직과 매우 유사하여 항체들이 자신의 조직을 공격하게 된다. 이런 메커니즘이 오랫동안 지속되면, 공격받은 조직이 더 이상 정상적으로 기능하지 못하고 증상이 나타나며, 미미하던 증상이 점차 악화되는 것이다.

 자녀의 주의력 결핍 장애, 부모님의 기억력 상실, 본인의 만성적인 뇌피로 등 어떤 문제로 고민하든 간에, 이 메커니즘을 해결해야 치유, 재생, 뇌기능 개선이 가능해진다. 애당초 우리가 물에 빠져 하류로 흘러가다 폭포를 타고 떨어져 증상의 소용돌이에 빠지게 된 원인을 파악하는 것이 첫 번째 단계다. A-A-B-C-D는 무엇이었을까? 수은, 밀, 유제품, 유독한 공기였을까? 무엇이 체내에 축적되어 뇌 안에 염증을 일으키는 것일까?

 구명조끼가 익사를 막아주겠거니 기대하며 무작정 증상에 대한 약만 복용하는 실수를 막기 위해, 우리는 먼저 B4가 발생했는지를 확인한 다음에, 혈액뇌장벽을 복원하고 노폐물이 뇌 속으로 침투하는 것을 막고 염증성 연쇄반응을 진정시키기 위한 환경을 조성해야 한다. 이것이 알츠하이머병과 그 밖의 뇌기능 악화를 역전시키는 근본적인 지침이다. 유발 인자를 파악하여 제거하고, 최상의 신경을 재생하기 위한 적절한 환경을 조성하는 것이 바로 뇌 건강을 회복하는 길이다.

 

 

-----(여기서부터는 일단 앞글만.. 뒤에 다시 보충)

 

 

p60. 관류 저하는 혈액 순환이 감소된다는 의미다.

 

 심장 기능이 뇌에 미치는 영향은 엄청나다. ~ 

 

p63. 네오에피토프 : 자가면역 스펙트럼이라는 최초 인식

 

 면역계가 뇌에서 자가면역 연쇄반응을 일으키게 하는 아주 흔한 유발인자는 네오에피토프(neo-epitope)이다.

 

p66. LPS에 대한 몇 마디

 

 동맥경화증은 심장을 오가는 혈류를 감소시키는 메커니즘 중 하나로, 면역계에서 우리 몸을 보호하려는 또 다른 시도다.

 

p71. 알츠하이머병의 재정의

 

 알츠하이머병은 자가면역과 뇌의 관계를 보여주는 좋은 예로, 워낙 이용할 만한 연구 자료가 많아 이 책 전반에서 언급될 것이다.

 

p79.

 

 복통은 제산제를 복용해 어느 정도 해결할 수 있을지도 모른다. 그렇더라도 중요한 건 거름망은 여전히 찢어져 있는 상태라는 것이다. 더욱이 제산제는 오늘날 네 번째로 흔하게 처방되는 약물임에도 소화기관에 큰 혼란을 일으킨다. 제산제는 염산의 생성량을 극적으로 줄이는데, 사실 HCL은 우리에게 유익하고 필요하다. 지나치게 양이 많아질 때 문제가 되는 것뿐이다. 그런데 PPI로 HCL을 대폭 감소시키면, 바람직하지 않은 박테리아가 번성할 수 있는 환경이 조성된다. 이처럼 바람직하지 않은 박테리아가 장을 압도하는 상황을 장내세균 불균형이라고 부른다.

 

p82.

 

 마이크로바이옴 구성물은 우리가 섭취하는 음식물에 따라 건강한 면역 반응을 형성할 수도, 몸을 질병에 취약한 상태로 만들 수도 있다. 불균형한 마이크로바이옴은 장 투과성 또는 장 누수를 유발하는 염증성 환경을 조성한다. 장 누수는 뇌와 관련해서도 나쁜 염증을 일으키고 뇌 호르몬 생성에 영향을 미칠 수 있어, 우울증, 불안, 인지 기능장애, 사회적 기능장애로 이어질 수 있다. 그러면 뇌와 신체 전반에서 염증이 증가하여 알츠하이머병, 불안, 기억력 상실, 뇌 안개, 감정 기복 등이 나타날 위험이 높아진다. 또 분자 모방이 발생하는 환경을 만들어, 해로운 음식과 분자 구조가 비슷한 자신의 뇌 영역들이 공격하게 만든다.

 우울증을 해소하기 위해 항우울제를 복용하면 뇌 호르몬의 불균형을 화학적으로 무효화하여 일시적으로 기분이 나아질 수 있다. 이런 약물은 훌륭한 구명조끼다. 약이 필요하다면 복용하라. 그렇더라도 당신은 여전히 내면의 격렬한 폭포에 맞서 허우적댈 것이다. 애초에 호르몬 불균형의 근본 원인을 해결하지 않았기 때문이다.

 

p84.

  

 뇌 호르몬은 두뇌 속도부터 감정 기복과 신진대사까지 뇌의 각종 작동 방식을 제어한다. 만약 현재 우울증을 앓거나 불안감을 느낀다면, 장에서 시작된 신경전달물질의 불균형을 겪고 있는 것이다. 우리 몸에서 분비되는 모든 세로토닌의 90%가 뇌가 아니라 장에서 분비되고 저장된다.

 

p88.

 

 연령 스펙트럼에서 노인의 반대편에 있는 자폐 아동에게서 글루텐에 대한 항체가 발견되었다. 우리는 앞서 2장에서 자폐증에 대해 이야기하며 자폐증이 관류 저하와 어떻게 연관되는지를 알아보았다. 자폐증은 워낙 복잡한 병이라 이제 막 여러 가지 원인들이 밝혀지기 시작했다. 자폐증은 뇌에 영향을 미치는 식품 과민성 측면에서 분자 모방이 어떤 역할을 하는지를 보여주는 한 예다. 나는 <영양 신경과학> 저널에 발표한 한 연구 논문에서 자폐 아동의 87%가 글루텐, 달걀, 유제품에 대한 항체를 보유하고 있음을 발견했다. 이에 비해 자폐가 아닌 아동은 1%만이 그런 항체를 보유하고 있었다. 항체 및 그와 관련된 염증이 초래하는 손상이 아마도 자폐 아동이 보이는 몇 가지 신경 증상의 원인일 것이다.

 

p89. 해로운 빵.

 

 곡물은 세계에서 가장 풍부한 식량 자원으로 인간의 행동과 정신 건강에 영향을 미칠 수 있다.~~~~

 

p92. 켈리를 만나보자.

 

 켈리는 내 환자는 아니었지만, 나는 켈리의 이야기를 잘 알고 있다. ~~~~

 

p94. 소젖에는 문제가 너무 많다.

 

 장 누수와 뇌 누수를 일으킬 수 있는 식품은 밀뿐만이 아니다. ~~~~~

 

p106.

 

 유엔 정부 간 기후변화협의체의 최신보고서는 식량과 담수 부족 확대, 극단적인 기상 현상, 해수면 상승, 생물 다양성 감소, 지구 곳곳의 인간 거주 가능 지역 축소에 따른 인류의 집단 이동, 분쟁, 유혈 사태등을 기후 변화와 연결 짓는다. 예를 들어 지구상에 식량이 부족해지면, 특히 신선한 과일과 채소가 부족해지면 우리 식단에서 항산화물질이 결핍될 것이다. 항산화물질과 폴리페놀은 염증의 불을 끄는 소화기 역할을 하는 만큼, 두 가지가 결핍되면 염증이 걷잡을 수 없이 번져 진화하기가 매우 힘들어질 것이며 궁극적으로 혈액뇌장벽 손상(B4)이 발생하고 뇌기능이 저하될 것이다.

 

p109.

 

 독소가 뇌에 도달하면 그 결과는 정말 치명적일 수 있다. 미국 질병통제예방센터의 자폐증 및 발달장애 모니터링 네트워크는 2014년 미국 어린이의 68명 중 1명꼴로 자폐스펙트럼장애를 앓고 있다고 보고했다. 내가 1980년에 치료를 시작하던 때 자폐증 유병률은 대략 1만 명중 1명꼴이었다. 매사추세츠 공과 대학의 스테파니 세네프 교수는 살충제의 광범위한 사용에 따른 글리포세이트 노출과 자폐증의 연관성을 연구하면서, '현재의 속도대로면 2025년에는 2명 중 1명의 어린이가 자폐증을 앓게 될 것'이라고 공언했다. 몸의 해독 시스템을 혹사시키는 유독성 식품과 화학적 독소 때문에 오늘날 자폐증 발병률이 그토록 높은 것일까? 아마 그럴 것이다.

 

p124. 염소 필터 샤워기 --> 알아보자.

 

p125.

 

 독소 노출을 줄이기 위해 우리가 선택할 수 있는 작은 변화는 많다. 예를 들어 동네 카페에서 주문한 커피를 받을 때 컵 뚜껑이 덮여있으면 즉시 뚜껑을 버리거나 처음부터 뚜껑 없이 달라고 요청하자. 왜 그럴까? 뜨거운 커피에서 나온 김이 BPA로 제조된 컵 뚜껑 아랫면까지 올라갔다가 응결되어 비스페놀 A가 가득한 채로 다시 커피에 떨어지기 때문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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p131.

 

 인체에서 가장 보호받는 조직은 엄마 뱃속에서 있는 태아다. 엄마 몸에서 해독 및 여과 과정을 거치지 않고 아기에게 전해지는 물질은 없으니 말이다. 그런데도 요즘 태아들이 엄마의 혈액에서 수은을 흡수하고 특히 뇌의 수은 농도는 엄마보다 40%나 높아서 신경계 발달에 치명적이라니, 이 문제가 얼마나 심각한지 감이 올 것이다. 아기 몸의 수은은 대부분 엄마의 치아 충전재에서 나온 것이다. 내가 가임기 여성들이 임신 전에 수은 충전재를 제거하고 반드시 해독을 해야 한다고 주장하는 이유도 바로 여기에 있다.

 

p161.

 

 ApoE4 변종은 다양한 인종 집단에서 만발성 알츠하이머병의 가장 큰 유전적 위험인자로 알려져있다. ~~~~

 

p165.

 

 장 투과성이 완전히 치유되지 않으면 가장 약한 고리에서 계속 손상이 발생하고, 그 부위는 주로 뇌인 경우가 많다. 유감스럽게도 장 투과성이 완치된 경우에도 우리 몸은 한 번 임게점을 넘었고 밀이 문제가 되었던 사실을 기억한다. 그래서 밀에 대한 기억B 세포를 생성하여 밀 과민성을 평생 유지한다. 우리는 항상 조심해야 하고 글루텐을 피해야 한다. 조금만 임신할 수 없듯, 조금만 밀을 먹을 수도 없는 것이다.

 

p185.

 그의 결론은 항상 동일했다. 환자가 "왜" 현재의 증상을 가지고 있는지 끝없이 질문해야 한다는 것이다.

 

p188. 뇌건강을 위한 실천 항목

1. 운동량 늘리기(구조)

2. '3대 유해식품'인 밀, 유제품, 설탕을 배제하고 채소, 과일, 자연산 어류를 늘린 식단으로 변화(생화학)

3. 다음과 같은 해독용 영양소 보충(생화학)

1) 엽산(비타민 B9) : 엽산(Folate)이란 이름은 나뭇잎을 의미하는 라틴어 '폴리움(folium)'에서 유래했다. 실제로 잎이 많은 채소들이 엽산의 최고 공급원이다. 활성 상태의 엽산은 약칭으로 5-MTHF이다.

2) 코발라민(비타민 B12) : 여러 형태의 비타민 B12 가운데 메틸코발라민은 해독 과정에 조금 더 도움이 된다.

3) 비타민 D3 : 충분한 양의 비타민 D3를 섭취하면 혈액 검사에서 비타민 D3 농도는 50~75ng/ml(나노그램/ml)이 나온다. 내 생각에는 적절한 수준의 비타민 D3를 유지하는 것이 건강의 가장 중요한 지표이므로 정기 검진으로 매년 점검해야 한다.

4) 생선기름(물고기에서 짜낸 기름) : 생선기름의 좋은 지방은 몸에 유익하다. 뇌세포를 생성하여 뇌기능을 향상시키고, 콜레스테롤 수치를 안정시키며, 장 투과성을 치유하는 유전가를 활성화시킨다. 또 자가면역질환을 줄이거나 때로는 호전시키기도 한다.

4. 체중 감량과 해독을 위해 간헐적 단식 도입하기(생화학)

5. 밤에 잠자는 동안 집에서 무선 라우터 꺼두기(전자기장)

6. 잠자는 동안 알람이 필요하더라도 휴대전화를 비행기 모드로 전환하기(전자기장)

7. 수면 개선 : 필요하면 멜라토닌 보충제 복용하기(하룻밤에 2~5밀리그램)(마음가짐)

8. 명상을 통해 적극적으로 스트레스 줄이기(마음가짐)

 

p194.

 금단증상을 줄이려면,

1. 수분을 충분히 공급하자. 밀, 유제품, 설탕 섭취를 중단하면 이뇨 효과가 나타난다. 섭취 중단 첫 주에 체중이 줄어든다면, 아마도 과도한 염증으로 인한 수분이 감소한 탓일 것이다.

2. 음식에 평소보다 약간 많은 양의 소금을 추가하자(바다소금을 권장한다). 어떤 사람들은 자주 다리에 쥐가 나는데, 소량의 바다소금으로 이를 막을 수 있다. 별것 아니다. 그냥 매일 소금만 조금씩 더 먹으면 상태가 좋아진다(의사가 달리 지시하지 않는 한). 소금을 혀에 직접 넣어보라. 만약 우리가 나트륨이 부족하고 '소금은 무조건 몸에 나쁘다'는 믿음(사실과는 전혀 거리가 멀다)을 버릴 수 있다면, 소금이 정말 맛있어서 조금 더 먹고 싶어질 것이다. 약간의 소금으로 즐거운 만족감을 얻는다면 우리 몸이 '감사하다'고 말할 것이다.

3. 침착성을 유지하자. 스트레스가 극에 달한 시기에는 이 프로그램을 시작하지 말자. 편안하다고 느낄 때 시작해야 바디버든을 줄이고 금단 증상도 줄일 수 있다.

4. 계속 움직이자. 운동은 증상에 대한 잡념을 떨져버리고 훨씬 건강한 방법으로 우리가 추구하는 엔도르핀을 생성한다.

 

p199. 애나를 만나보자.

 

 이 이야기는 내 환자의 사례는 아니지만, 내가 진심으로 관심 있게 지켜본 연구다. 나는 1990년에 이 연구가 발표된 이래로 내 모든 진료실에 이 연구 보고서의 사본을 보관해왔다. 왜냐하면 이 연구는 근골격계 치료가 왜 그토록 많은 다른 건강 문제에 도움이 되는지에 대한 전체 플랫폼을 제시하기 때문이다. 나는 이 연구 보고서를 수백 명의 환자들에게 보여주었다.

 이 이야기에는 만성적인 골반 통증과 소변 문제를 호소하며 의사를 찾아온 39세 여성이 등장한다. 그녀를 애나(Anna)라고 부르자.  애나의 골반 통증은 오래전 근가 18세일 때 계단에서 굴러 떨어진 직후에 시작되었다. 통증은 몸의 오른쪽에서 시작되어 점차 왼쪽에서도 나타났다. 애나의 첫 번째 의사는 그녀가 맹장염에 걸렸다고 추측했기 때문에 애나는 맹장 수술을 받았다. 그러나 추후 병리학 보고서에 따르면 그녀의 맹장은 정상이었고, 골반의 통증은 여전했다.

 몇 달 후 애나는 생리 주기가 심하게 고통스러워졌고, 골반 통증이 계속되었으며, 자꾸 설사를 하기 시작했다. 결국 애나는 검사와 치료를 받기 위해 입원했고, '스트레스에 따른 과민성 대장증후군'이라는 진단을 받았다. 자, 이것은 어떤 종류의 진단인가? '스트레스에 따른'이라는 증상이 본질적으로 정신질환임을 의미한다. 하지만 애나의 머리에는 아무런 이상이 없었다. 문제는 그녀의 과민한 대장이었다. 애나가 병원에서 퇴원할 때도 대장 기능에는 차도가 없었고, 애나는 평생 이 병과 함께 살아야 할지도 모른다며, 그러지 않으려면 스트레스를 줄일 방법을 찾으라는 말을 들었다.

 2~3년이 지나자 애나는 질 분비물을 경험했고 방광과 질 감염이 반복되었다. 여러 가지 항생제를 사용한 치료를 받았지만, 일시적으로 증상이 완화될 뿐이었다. 애나는 음순과 음핵 양측에서 생식기 통증이 나타났다. 성관계는 극도로 불편해졌고 오르가즘은 불가능했다. 극심하게 고통스럽던 생리는 과도한 출혈로 더욱 심해지고 불규칙해졌다. 애나는 생리 주기를 조절하기 위해 에스트로겐 요법을 처방받았지만 별다른 효과는 없었다.

 애나는 26세가 되었을 때 임신을 했다. 그녀는 요통과 양쪽 허벅지의 간헐적인 통증을 겪었고, 감각 마비와 따끔거림을 경험하기 시작했다. 애나는 오랜 진통 끝에 정상적인 건강한 아들을 출산했다. 2년 후 애나는 다시 임신했지만 5개월 반 만에 자연 유산을 겪었다. 몇 달 후 애나는 다시 임신했지만 똑같은 증상을 보였다. 이번에는 임신 7개월까지 임신 상태를 유지하다가 딸아이를 조산했다. 

 이 출산 후 애나의 골반과 음부 통증이 지속되었기 때문에, 세 차례나 탐색적 복부 수술을 받았다. 의사는 첫 번째 수술에서 만성 설사와 비교적 새로운 증상인 지속적인 완전 요폐, 즉 소변을 전혀 볼 수 없는 증상을 일으키는 원인이 무엇인지 찾아보았다. 하지만 그녀의 증상을 설명해줄 만한 어떤 비정상적인 점도 발견하지 못했고, 결국 애나는 일부 증상이라도 줄어들기를 바라며 부분 자궁 절제술에 동의했다. 하지만 자궁 절제술 후에도 방광 기능이나 질 주변의 감각 상실에 아무런 변화가 없는 상태로 퇴원했다.

 그 후 10년 동안 이 모든 증상은 지속되고 악화되었다. 하지만 전통 의학에서 더 이상 시도해볼 방법이 없자, 한 친구가 애나에게 척추지압사를 만나보라고 권했다. 맨 첫 번째 검사에서 척추지압사는 그녀에게 다양한 운동을 시켰고 그녀는 약간의 통증을 느끼기 시작했다. 검사가 끝나자 척추지압사는 애나가 자각 증상은 없지만 확연한 L5 디스크 돌출이 있다고 결론지었다. 만약 어떤 의사든 애나의 등을 엑스레이로 찍는다면, 디스크 문제를 발견했을 터였다.

 애나는 성실히 치료법에 따르면서 나아지기 위해 최선을 다했다. 거의 25년간의 고통이 4주 만에 사라졌다. 반복되던 방광염이 끝났고, 소변 기능이 정상으로 돌아왔다. 만성 설사는 사라졌고, 고통 없이 완전한 기능으로 남편과 성관계를 즐길 수 있게 되었다.

 척추지압사가 무슨 치료를 한 것일까? 허리 아래쪽의 척추를 조절하고 아주 부드럽게 견인했을 뿐이다. 애나가 겪은 문제의 원인은 무엇이었을까? 애나의 모든 증상은 18세 때 계단에서 떨어진 시점에서 시작됐다. 애나는 그때 등에 불균형이 생겼던 것이다. 이 상태가 뇌에서 신경을 통해 골반 부위까지 보내는 메시지에 영향을 미쳤다.

 이 여성이 수십 년간 얼마나 심하게 고통 받았는지를 생각해보라. 그녀는 유산을 했다. 20년도 넘는 인생을 고통과 기능장애 속에서 보냈다. 계단에서 떨어져 등이 균형을 잃었는데도 그녀가 만난 어떤 의사도 그녀의 척추를 들여다볼 생각조차 하지 않았다.

 몸의 세포는 신경에 의해 조절된다. 뇌는 모든 세포에 방향을 제시하고, 무엇을 해야 할지를 알려준다. 어떤 이유로든 뇌의 메시지 전달이 중단되면, 그 세포는 메시지를 명확히 수신하지 못할 것이고, 그러면 애나가 경험했던 모든 증상과 같은 결과를 초래할 위험이 있다. 애나의 경우, 척추 불균형이 해소되자 신경이 관절의 빈 구멍을 통해 척추 아래로 전달하는 뇌의 메시지를 다시 전달할 수 있게 되었다. 조광 스위치를 최고의 조도로 올려놓자 뇌에서 흘러나오는 '원기'가 최대한의 출력으로 전달된 것이다.

 척추지압요법으로 모든 병을 고칠 수 있다고 말하는 건 어리석다. 하지만 척추지압요법으로 어떤 병이든 고쳐볼 수 있다고 말하는 건 지극히 합리적이고 과학적이다. 대니얼 파머(Daniel Palmer) 박사는 1895년에 척추지압요법이 왜 실질적으로 치료 효과를 내는지 과학적으로 설명할 길이 거의 전무하던 시절에 척추지압사라는 직업을 만들었다. 파머 박사는 척추 불균형이 척추로부터 멀리 떨어진 다른 신체 부위의 기능에까지 영향을 미칠 수 있음을 최초로 입증한 사람이다. 그 후 수천만 명의 환자가 척추지압요법으로 치료를 받았고, 요통, 두통, 뇌기능장애, 근육통부터 장기 기능장애까지 다양한 질병이 호전되고 개선되었다. 다시 한번 말하지만, 우리의 건강 피라미드에서 구조의 불균형이 문제라면, 어느 부위에서 증상을 경험하든지 간에 구조를 바로잡아야 한다.

 

p204

 만일 목에 염증이 생기면, 그 염증은 눈, 귀, 혀, 미뢰, 심지어 심장으로 가는 메시지에 영향을 미칠 수 있다. 때로는 척추에서 오는 메시지를 처리하면 소화 문제와 속 쓰림 증상이 해결된다. 

 염증은 때때로 전선 중 하나에 손상을 입힐 수 있다. 그러면 맨 뒤쪽 오른쪽에 있는 집들은 괜찮다. 만약 구획으로 들어오는 중계회선인 메인 케이블(뇌)이 손상된다면, 맨 오른쪽에 있는 집(신장)에 문제가 생길 수도 있고, 맨 왼쪽에 있는 집(쓸개)에 문제가 생길 수도 있다. 이것이 나이 들수록 중추신경계와 말초신경계를 포함하여 최적의 뇌 건강을 유지하는 것이 중요한 이유다. 

 

p210

 가장 좋은 수면 자세는 반듯이 누워 자는 것이다. 머리에 베고 자던 베개를 빼서 무릎 밑에 집어넣자. 그리고 수건을 돌돌 말아서 고무줄로 고정시킨 다음에 목 밑에 넣어라. 수건이 베개가 된다. 그렇게 무릎 아래에는 베개를, 목 아래에는 수건을 넣고 10분간 있어보자. 만약 10분 내에 잠들지 않으면 수건을 바닥에 내던지고 예전 자세로 돌아가 다시 잠을 자자. 매일 밤 10분씩 똑같은 자세로 잠을 청해보자. 결국에는 그런 자세로 잠들게 될 것이다.

 이 방법은 척추와 목의 근육, 인대, 힘줄의 이완을 유도하여 원래 설계된 방향으로 움직이도록 한다. 점차 작은 수건에서 큰 수건으로 옮겨가면 척추 전만이 깊어진다. 그러면 전만 방향으로 곡선 형태를 띄는 정형 외과 베개로 바꿀 수 있다. 이 베개는 돌돌 말은 수건과 같은 위치가 곡선 형태로 불룩하다. 이제 좀 더 유연해진 목은 정상적인 방향으로 계속 움직이려고 한다. 6개월 후에는 목 아래에 정형외과 베개, 무릎 아래에 일반 베개를 베고 잠들게 되는데, 이제는 목이 똑바로 정렬되어 전보다 훨씬 푹 자게 된다. 이것은 목 요가와 같은 효과가 있다.

 

p213. 신발 뒤축을 살펴보자.

 너무 흔한 일이지만 만약 신발 뒤축의 바깥쪽이 닳아있다면, 발 구조가 균형을 잃어 척추가 더 빨리 마모되고 염증을 일으키며 훨씬 이른 나이에 관절염에 걸릴 것이다. 발을 디딜 때마다 갑자기 관절에 무리를 가하며 균형을 잃는 상태가 계속되어, 그 충격이 목뼈랑 연결된 머리까지 ㅣ올라올 것이다. 

해결책 : 척추지압사를 찾아가자. 단기적으로는 신발 굽을 갈거나 새 신발을 신자.

 

p214. 운동시 적정 심박수.

 먼저 1분당 180회에서 본인 나이를 빼고 5회를 더하거나 뺀 수치를 심박 모니터의 목표 범위로 설정한다. 만약 평소 맥박이 72회 이하라면 72와의 차이만큼 180에서 빼고 계산하고, 혹시 진단받은 질환이 있다면 5회만큼 더 차감하자. 예를 들어, 나는 65세이고 건강하므로 나의 목표 범위는 180-65±5일 것이다. 그러니까 내 유산소 범위는 분당 110~120회 정도인데, 내 목표는 운동하는 30분 동안 계속 이 범위를 유지하는 것이다. 하지만 잠깐, 내 평송의 맥박은 분당 58회다. 그러면 나는 먼저 180에서 14를 빼고 시작해야 한다. 일단 180-14=166이고 여기에서 내 나이 65를 빼고 5를 더하거나 빼면 96~106이 나의 목표 범위가 된다. 이것이 내가 매일 30분씩 도달하고 싶은 범위다.

 

 목표 맥박 범위 내에서 운동하면 다음과 같이 뇌기능을 보호하고 향상시키게 된다.

1) 학습 능력과 신경 가소성을 향상시킨다. 신경 가소성은 나이 들어서도 계속 적응하고 배울 수 있게 하는 핵심 메커니즘이다.

2) 치매 등 여러 신경퇴행성 질환의 발병과 악화를 지연시킨다.

3) 신경이 퇴화되기 시작한 후에도 기능 저하 속도가 느려진다.

4) ApoE4 유전자(알츠하이머병 유전자)를 보유한 사람을 보호한다.

5) 새로운 뉴런의 수를 증가시키고, 새로운 세포의 생존을 촉진한다.

 

 마지막으로 운동하기 전에, 운동 중에, 그리고 운동이 끝나고 나서 수분을 보충하는 것을 잊지 말자. 깨끗하고 여과된 물을 마시는 것은 염증을 예방하는 생활방식을 유지하는 데 매우 중요하다. 체중 450g당 최소 1/2온드(1kg 당 약 30ml)의 물을 마셔야 한다. 계속 체내에 수분을 공급하여 독소를 씻어버리자. 독소를 몸 밖으로 배출해야 한다.

 

p220

 건강 문제가 발생하는 한 가지 이유는 우리 몸이 항상 교감신경계가 지배하는 상태에 머물러 있도록 설계되지 않았다는 데 있다. 얇은 교감신경이 적절한 절연재 없이 과도하게 사용되면, 말 그대로 지치기 시작하여 염증이 발생한다. 이렇게 되면 뇌, 신경계, 그 밖의 어디에서든 유전 사슬의 약한 고리에 대한 항체가 증가할 가능성이 훨씬 더 높아진다. 우리의 신경계는 부교감신경 지배 상태(태어날 때)에서 교감신경 지배 상태로 변하게 된다. 이런 상태가 충분히 오래 지속되면, 얇은 교감신경계가 원래의 용도보다 훨씬 더 자주 사용되어 마모되기 시작하면서 교감신경계 지배 상태에서 교감신경계 피로 상태로 변하여, 우리는 깨어 있는 대부분의 시간에 피곤함을 느끼게 된다. 그런데도 스트레스가 계속된다면 교감신경계 피로 상태에서 교감신경계 탈진 상태로 바뀔 것이고, 여전히 '투쟁(fight), 겁에 질림(fright), 도피(flight)' 반응이 계속된다면 결국에는 교감신경계 소진 상태로 이어지게 된다.

 퇴행성 질환은 교감신경계 소진 상태에서 발생한다. 부교감신경계 지배 상태로 되돌아가지 않으면, 우리는 유전 사슬의 약한 고리에서 생기는 어떤 질병에든 극도록 취약해질 수밖에 없다. 이 시점에 스트레스는 우리에게 더 많이, 더 자주 영향을 미친다. 온몸이 녹초가 된 기분이라면, 실제로 그런 상태인 것이다. 뇌의 회복력도 형편없이 떨어져, 우리는 인생의 어떤 상황에 처하든 적응하기가 힘들어진다.

 

p223

 심지어 2015년에도 <뉴잉글랜드 의학 저널>은 위약 효과의 정당성을 인정하기 위한 노력에서 다음과 같이 보고했다. "위약 효과는 신경전달 물질과 관련된 복잡한 신경생물학적 메커니즘과... 측정 가능한 뇌의 특정 관련 부위들(예를 들어 위약 통각상실증의 경우 전두엽 피질, 전측 뇌섬엽, 입쪽전방대상피질, 편도체 등)의 활성화에 의존한다." 이는 우리가 뇌에 미치는 위약 효과를 측정할 수 있을 뿐만 아니라 약물에 영향을 받는 동일한 경로를 활성화시킬 수 있다는 의미다. 위약 효과에 대한 '나쁜 소문'은 대부분 자사의 약품을 복용하는 편이 약을 먹지 않는 편보다 더 효과적이라는 사실을 입증하려 애쓰는 제약업계에서 나온다. 여기서 진실을 밝히자면, 우리가 생각하는 대상, 그것을 생각하는 방식, 그리고 우리의 전반적인 인생관이 몸에서 분비되는 호르몬에 '가장 강력한' 영향을 미치고, 그런 호르몬에 따라 모든 약효나 부작용이 결정된다. 스트레스 호르몬이 분비되면 스트레스를 많이 받아 온몸이 탈진하게 된다. 반면 긴장을 완화하는 부교감신경 호르몬이 분비되면 심장박동이 진정되고 호흡이 깊어지며 평화로운 뇌파가 우세해진다. 이것이 수천 년 동안 이어져온 명상에서 얻는 기본적인 효과이다. 

 

 그렇다면 왜 그런지가 궁금해진다. 어떻게 결과를 상상하는 것으로 실제 몸이나 뇌가 돌아가는 방식을 바꿀 수 있는 걸까? 우리의 유전자가 곧 우리의 운면을 결정하지는 않는다고 말할 수 있는 또 다른 이유가 바로 여기에 있다. 우리가 정말 좋아질 수 있다는 믿음은 실제로 건강에 영향을 줄 수 있다. 이런 믿음에 따라 달라지는 건강 결과를 조사한 과학적 연구들도 있다. 2007년의 한 연구에서는 청소 업무를 담당하는 호텔 직원 84명을 두 집단으로 나눴다. 한 집단은 그들의 청소 업무가 의사들이 권장하는 운동의 조건에 부합하여 건강한 생활방식의 일환이라는 말을 들었다. 다른 집단은 아무 말도 듣지 못했다. 일정 기간이 지나자 첫번째 집단은 체중, 혈압, 체지방, 허리 - 엉덩이 비율, 체질량 지수가 모두 감소하여 운동이 부분적으로나 전적으로 위약 효과를 통해 건강에 영향을 미친다는 연구진의 가설을 뒷받침했다. 단지 청소가 운동이라는 생각의 전환만으로도 청소를 그저 일로만 생각했던 집단과 달리 실질적이고 확실한 건강상의 개선을 보인 것이다.

 

 뇌 건강의 경우에도 우리의 태도가 그에 못지않게 중요하다. 1998년에 항우울제의 효능을 테스트하는 데 사용된 19건의 실험에 대한 메타분석이 실시되었다. 측정된 치료 효과의 25%만이 약물의 작용에 기인한 반면, 연구 전반에서 75%의 의 위약 효과가 확인되었다. 이에 대한 후속 연구로 2008년에 다시 검토가 진행되었는데, 이때에는 미발표된 연구에 접근할 수 있도록 미국정보공개법(Freedom of Information Act)에 호소해야 했다. 제약업계에서는 그런 연구 결과를 감추려 들었기 때문이다. 2008년의 검토에서는 이런 누락된 연구들을 데이터에 포함시켰을 때 항우울제가 위약 효과를 능가하는 경우는 46건의 실험 중에 20건뿐이었다. 연구자들은 다음과 같이 요약했다. "(위약에 비해 항우울제의)  우월한 효과가 임상적 유의성에 대한 허용 기준보다 낮다. 이 검토는 항우울제를 권장하는 것이 바람직하다 할 만큼 그 효능이 입증되지 않는다는 사실을 보여주었다. 심지어 많은 사람이 경험하는 항우울제의 부작용인 체중 증가, 성욕 상실, 혈전 감소, 위 출혈과 자궁 출혈의 위험 증가 등을 고려하지 않았는데도 그러했다. 그렇지만 우리는 개인의 이익보다 기업의 이익을 우선시하는 탐욕스럽고 이기적인 정책이 판을 치는 세상에 살고 있다.

 

 우리의 믿음이 어떻게 우리의 인생 경험을 직접적으로 형성하는지를 보여주는 연구는 대단히 많다. 세계적으로 유명한 암 치료의 선구자 니콜라스 곤잘레스(Nicholas Gonzalez) 박사는 공포야말로 가장 효과적인 치료 프로토콜도 파괴할 수 있는 전염성 질병이며, 믿음은 아무런 프로토콜 없이도 질병을 치유하는 힘이 있다고 믿었다. 자신의 치료 과정에 대한 긍정적인 태도와 몸의 자생력에 대한 믿음이 질병을 호전시키는 결정적인 요소란 얘기다. 임상전신과의사이자 기능의학자인 켈리 브로건(Kelly Brogan)은 저서 <당신 자신의 마음(A mind of Your Own)>에서 만약 우리가 건강 여행을 호기심, 자아성찰, 그리고 불균형 상태에 대처하라는 초대의 수락으로 바라본다면, 우리의 에너지를 질병 상태가 아니라 더 새롭고 건강한 자신이 되는 데 집중할 수 있다고 말한다. 그녀도 나처럼 건강을 변화시키는 힘은 우리가 그렇게 믿는 한 우리 안에 내재한다고 믿는다. 

 

 한 번에 한 걸음씩, 꾸준히 안타만 쳐도 야구 경기에서 이긴다. 우리는 홈런에 대한 기대를 버려야 한다. 우리 몸과 삶은 그런 식으로 돌아가지 않는다.

 

p227

 모든 행동을 변화시키는 핵심은 자각이다. 감사하는 마음으로 살며 더욱 평온해질수록, 현재의 건강 상태를 자각하고 미래의 건강 목표를 세우기가 더욱 쉬워진다. 우리는 비판단적인 태도로 현실에 대한 자각에 이르러야 한다. 예를 들어 글루텐 프리 식품을 먹는다는 자각은 검사 결과 우리 면역계에서 가급적 피하려고 애쓰는 작은 독소를 우리 몸속에 집어넣는 대신, 새로운 선택이 몸에 이롭다는 것을 깨닫는다는 의미다. 자각은 글루텐 프리 식품을 먹는 습관을 단지 처벌이나 의무로 보지 않고 우리 몸속에 건강한 연료를 제공하는 습관의 가치를 인정하는 것이다. 자각이란 심장 박동에 대한 이해부터 글루텐 프리 식품을 먹을 때 얻게 되는 이점까지 우리 몸이 어떻게 작동하는지를 이해하는 것이다. 이는 단지 우리가 내리는 결정을 더 잘 안다는 의미가 아니다. 몸의 물리적 상태를 자각하고 공감과 친절로 그 자각을 수용하는 것이다.

 

p231

 마음 챙김(mindfulness)에 기초한 평온한 마음가짐으로 건강 문제를 해결할 수도 있다. 마음 챙김이란 경험에 반응하거나 매몰되지 않고 현재 순간에 일어나고 있는 모든 일을 개방적이고 수용적으로 자각하고자 하는 정신적 연습이다. 마음 챙김 수련의 목적은 명시적으로 경험의 내용을 바꾸는 것이 아니라 경험과 맺는 관계를 바꾸는 것이다. 우리 삶에 스트레스를 야기하는 방아쇠를 바꿀 수는 없어도 그런 방아쇠에 반응하는 방법은 바꿀 수 있고, 그러면 그 방아쇠가 우리 몸과 마음에 미치는 영향도 변하게 된다. 마음 챙김은 다양한 만성 질환과 정신 건강 문제에 개입하는 데 유용한 방법이다. 일례로 한 연구에서는 마음 챙김이 만성 우울증의 재발률을 감소시키고 불안과 우울증의 초기 치료 효과를 향상시킬 수 있다고 밝혔다.

 미국 해병대의 회복탄력성 훈련 프로그램(Reflection Training Program)은 마음 챙김 기법이 개인에게 마음을 재정비할 시간을 주어 스트레스 받는 사건에 대한 신체적, 정신적 반응을 감소시킨다는 사실을 입증했다. 2012년의 한 중요한 연구에서는 마음 챙김을 다른 건강 증진 프로그램(다이어트, 운동, 약물 등)과 비교한 결과 마음 챙김 훈련이 염증성 반응을 현저히 감소시키고, 설령 외부의 방아쇠에 반응하여 스트레스 호르몬이 계속 분비되더라도 염증성 반응이 줄어드는 결과를 보여주었다.

 

p237

 이들은 공저인 <자기혁신 프로그램(Changing for Good)>에 심리치료 없이도 자신의 삶을 긍정적으로 바꿀 수 있었던 1,000명 이상의 사삶을 연구한 끝에 얻은 결론을 소개하고 있다. 이들은 변화가 행운이나 의지력에 의존하지 않는다는 것을 발견했다. 이들은 변화가 행운이나 의지력에 의존하지 않는다는 것을 발견했다. 이들은 변화가 행운이나 의지력에 의존하지 않는다는 것을 발견했다. 변화는 그것의 작동 기제를 이해하는 사람이면 누구든 성공적으로 관리할 수 있는 과정이다. 일단 우리가 변화의 5단계 중 현재 어디에 있는지를 파악하면, 우리가 있어야 한다고 생각하는 곳이 아니라 실제 서 있는 바로 그곳에서 긍정적인 변화가 일어날 수 있는 환경을 조성할 수 있다.

 

 변화의 5단계는 다음과 같다.

1. 무관심  :이 단계의 사람들은 자신의 행동을 변화시키려는 생각조차 하지 않는다. 이들은 자신의 생활방식이 건강과 행복에 영향을 미치는 문제라는 사실을 모른다.

2. 심사숙고 : 이 단계의 사람들은 건강상 문제가 있을 가능성을 기꺼이 인정하며, 그 가능성 때문에 변하고 싶다는 희망을 갖는다. 그러나 이들은 보통 매우 양면적이어서, 애매한 태도를 취하며 지켜만 본다. 이 단계에 있는 사람이 변화에 성공할지를 가늠하는 기준은 냉소주의적("나는 이것을 믿지 않는다. 이것은 사실이 아니다") 태도보다는 회의주의적("나는 이것을 믿지 않지만 더 많은 정보를 살펴볼 용의가 있다") 태도의 유무다. 심사숙고는 변화를 향해 올바른 방향으로 나아가고는 있지만, 적극적으로 노력하지 않는 태도다.

3. 준비 : 이 단계의 사람들은 가까운 미래에 자신의 생활방식을 개선하고자 진지하게 시도할 것이다. 이들은 (예컨대 이 책을 읽음으로써) 충분한 정보를 얻은 후에 행동을 변화해 건강을 증진할 수 있다고 확신하므로 행동할 준비가 되어있고 기꺼이 노력한다.

4. 실행 : 이 단계의 사람들은 계획을 실행에 옮기고 몇 주 후에 결과를 확인하기 시작한다. 이전의 성공만큼 새로운 성공을 보장하는 것도 없다. 계획을 실행한 사람은 그 효과를 맛보고 건강상의 긍정적인 변화를 경험하기 시작한다.

5. 유지 : 나는 항상 환자들에게 지구상에서 효과가 있는 방법을 찾아내고도 그것을 그만두는 유일한 종은 인간뿐이라고 말한다. 영구적인 변화를 원한다면 오랜 세월에 걸쳐 새로운 행동 패턴을 만들고 계속 유지해야 한다. 몇 달 동안 글루텐 섭취를 끊어서 상태가 좋아지고 나면 다시 글루텐이 들어있는 생일 케이크나 블루베리 머핀 한 조각을 먹고 싶은 유혹에 빠지는 것이 일반적이다.

 

그러나 일단 그것을 먹고 나면, 장담하건대 다시 상태가 나빠졌음을 느끼게 되고 좋은 상태를 유지하는 노력의 가치를 실감하게 될 것이다. 나쁜 습관이나 오래된 즐거움으로 돌아가는 얼빠진 짓을 하는 게 인간의 본성이다. 그러고 나면 스스로 엉망이라고 느끼고, 다시 정상 궤도로 돌아가서, 상태가 좋아진다. 이처럼 쓰러졌다가 다시 벌떡 일어서기를 몇 번이고 반복한 후에야 생일 케이크의 유혹("딱 한 입만 먹어야지")이 사라질 것이다. 새로 선택한 생활방식을 6개월 동안만 유지하고 나면, 유혹에 안전할 수 있다.

 

p253. 케토시스를 향상시켜 인지력 상실을 예방하고 상황을 역전시키자.

 

 만약 이미 인지력 상실이나 기억력 장애 증상이 나타나기 시작했다면(예를 들어 자동차 키를 어디에 두었는지 자주 궁금해한다면), 단기간(1~3개월) 동안 케톤 생성 식단(ketogenic diet)를 택할 것을 추천한다. 케톤은 음식물 공급이 부족하여 에너지를 얻기 위해 몸에서 지방을 분해할 때 생성되는 부산물인데, 뇌와 신체에 에너지를 공급하는 효율적인 백업 시스템이 된다. 저장된 지방세포를 연소시켜 케톤을 생성하는 것은 우리 조상들이 며칠이나 몇 주씩 먹이를 구하지 못하고도 살아남을 수 있었던 비결이다. 우리는 '케토시스'라는 과정을 통해 케톤에 접근할 수 있는데, 케토시스는 특히 이미 혈당이 제대로 기능하지 않는 사람들에게 뇌세포에 연료를 공급하는 쉽고 대안적인 방법으로 알려졌다.

 만약 뇌기능 증상이 나타난다면, 당신의 뇌가 염증 유발 인자에 반응하면서 이미 포도당을 연료로 사용하는 능력을 일부, 많으면 24%까지 상실했을 가능성이 높다. 당신의 뇌는 말 그대로 굶주리고 있고, 그 결과 더 많은 염증이 생기고 더 많은 뇌기능이 손상된다. 이로써 악순환이 이어진다. 그러나 몸을 케톤 생성 상태로 유지하면 뇌세포에 연료를 더 잘 공급할 뿐만 아니라 전반적인 뇌기능과 건강을 향상시킬 수 있다는 연구 결과가 있다. 특히 케톤 생성 상태를 유지하면 알츠하이머병 환자의 기억력과 인지력이 모두 향상된다고 알려졌다. 케톤 생성 상태가 관류 저하를 줄이고 뇌로 가는 혈류를 증가시키기 때문이다.

 진정한 케톤 생성 식단은 당신에게 모든 탄수화물을 피하도록 시킬 것이다. 그러나 인체는 영원히 탄수화물 없이 살 수 없다. 나는 당신이 이 식단을 1~3개월 동안 시도해보고, 얼마나 믿기 힘들 정도로 기분이 좋아지는지를 확인하고 나서, 서서히 덜 제한적인 식단으로 돌아갈 것을 제안한다. 그때쯤에는 그동안 케톤 생성 식단을 통해 경험한 뇌기능 향상과 체중 감량 효과를 유지하기 위해 더 건강한 탄수화물 식품을 추가하되 글루텐, 유제품, 설탕은 반드시 피하면서 간헐적 단식을 도입하기에 좋은 시점이 될 것이다. 식단에 소량의 탄수화물을 다시 첨가하면 어떤 반응이 나타나는지 주의 깊게 살펴라. 탄수화물을 다시 먹기 시작한 후에 증상이 재발하거나 향상된 뇌기능이 흐려지기 시작한다면, 그 정도의 탄수화물 양을 다시 섭취할 준비가 아직 안 된 것이다. 다시 1주나 2주 정도 식단에서 탄수화물을 제외시킨 다음, 더 적은 양의 탄수화물을 추가하여 반응을 살펴보자.

 케톤 생성 식단은 좋은 결과를 낳지만 전체 프로그램의 일환일 뿐이다. 일반적인 구명조끼보다는 낫지만 그래도 무엇보다 하루 빨리 소용돌이에서 빠져나와야 한다. 영원히 탄수화물을 피할 수는 없다. 우리 몸은 탄수화물을 일차 에너지원으로 사용하도록 설계되어 있다. 그리고 체중 감량 프로그램의(요요현상이 계속 반복되는) 롤러코스터 타기와 달리, 뇌 건강 프로그램을 영구히 유지하는 방법은 상류로 거슬러 올라가 근본 원인, 유발 요인, 메커니즘을 밝혀내는 것이다.

 케톤 생성 식단을 성공키시고 뇌 건강에 영구적인 성과를 얻을 가능성이 가장 높은 방법은 이 식단을 지금부터 이번 장에서 소개할 나의 다면적 영양 접근법과 결합하는 것이다. 그러면 식품 과민성, 환경 독소 노출, 이미 진행 중인 누적된 손상도 해결할 수 있다. 거기에 단헐적 단식을 실천하고 중쇄지방산(MCT) 오일과 그 밖의 중요한 영양분을 보충하여 적절한 음식을 꾸준히 섭취한다면 최고의 결과를 얻게 될 것이다. 일례로 코코넛 오일과 야자 오일에서 발견되는 중쇄지방산에 대해서는 많은 연구가 이루어졌다. 하지만 야자 오일은 건강에 좋지 않다.(야자 오일은 팜유를 의미하며, 현재 우리나라 라면-아마 외국도-의 대부분이 이 팜유로 튀겨낸다) 절대 사용하지 말라.(그러니 라면을 먹을때 라면을 한번 끓여서 기름성분을 우려낸 후 먹는 것이 좋다. 귀찮긴 하지만 건강을 위한다면 특히 그렇다. 특히 라면 먹으면 몸에 이상 증상이 생기는 사람들은 대부분 이 팜유로 인한 것이다.) 중쇄지방산은 미토콘드리아라는 모든 뇌세포의 강력한 에너지 발전소에 쉽게 접근하 수 있는 연료를 공급한다.

 

GMO에 대한 몇 마디

 

 식품 건강 문제와 관련하여 나의 주요 관심사 중 하나는 유전바 변형 식품 및 생물체, 일명 GMO의 보급이다. 유전자 변형 식품은 1994년부터 대대적으로 상용화되었다. 미국 식품의약국(FDA)과 미국 농무부(USDA)에 따르면, 오늘날 40가지가 넘는 유전자 변형 식물종이 있는데 쌀, 콩, 옥수수 등의 세 가지 곡물이 가장 널리 분포 되어있다. 2012년에는 미국에서 생산된 옥수수, 콩, 면화의 90% 가까이가 GMO 품종이었다.

 현재 시판 중인 유전자 변형 식용작물은 콩, 옥수수, 면화(오일), 카놀라(오일), 사탕무에서 얻은 설탕, 주키니 호박, 노란 호박, 하와이 파파야, 알팔파 등 9종이다. 유전자 변형 곡물은 주로 가축들에게 먹이는데, 유제품, 달걀, 소고기, 닭고기, 돼지고기, 기타 동물성 식품에 영향을 미친다. 원료의 일부는 토마토소스, 아이스크림, 땅콩버터 같은 다양한 '천연' 가공 식품에도 추가된다. 유전자 변형 옥수수나 콩은 청량음료뿐 아니라 일부 향신료와 조미료 혼합물에도 첨가된다. 실제로 식물성 오일이나 아침용 시리얼 등 모든 가공식품의 80% 이상에 유전자 변형 성분이 포함된다.

 GMO 밀도 곧 우리의 주방으로 들어올 것이다. 그동안 밀은 수년에 걸쳐 자연 번식 기술을 통해 교잡되어 더욱더 많은 글루텐과 FODMAP이란 발효성 탄수화물 등의 기타 유해 성분이 함유되었다. 대부분의 GMO 작물처럼 밀에도 라운드업(Roundup)이라는 제초제가 뿌려지는데, 라운드업의 활성 성분인 글리포세이트는 이제 명실상부하게 인체의 잠재적 발암물질로 분류된다.

 미국에서는 밀을 수확하기 몇 주 전에 라운드업을 살포한다. 여기에는 두 가지 이유가 있다. 첫째, 제초제를 뿌리면 죽은 밀밭이 콤바인을 가로막지 않기 때문에 수확 작업이 더 용이하다. 둘째, 독성 화학물질 때문에 스트레스를 받은 식물은 생존하기 위해 토양으로부터 더 많은 영양분을 빨아들인다. 이런 영양분이 밀 씨앗으로 흡수되어 더 많은 글루텐을 함유한 밀이 탄생한다. 따라서 미국에서 생산되는 대부분의 밀 제품에는 더 많은 글루텐이 함유되는 것은 물론, 암을 유발하는 글리포세이트의 자취가 있다.

 

 각종 동물 연구를 통해 과학자들은 GMO가 면역계, 간, 신장에 손상을 초래할 수 있다고 주장해왔다. 특히 라운드업은 장내 미생물군을 변화시키고 장 투과성을 증가시키는 환경을 조성하는 것으로 밝혀졌다. 과학자들은 라운드업과 간 해독 능력의 상호작용을 연구하면서, 이 화학물질이 항상성을 파괴하고 뇌의 기억 중추인 해마에 과도한 염증을 일으키는 것을 비롯해 각종 자가면역반응을 유도한다며, 환경 유발 요인의 '교과서적 사례'라고 입을 모았다. GMO는 또 위장질환, 비만, 우울증, 자폐증, 불임, 암, 알츠하이머병과도 관계가 있다. 글리포세이트가 식품 생산에 도입된 후로 뇌졸증으로 인한 사망자가 증가했다는 통계가 있다.

 

 이런 이야기가 충격적이고 언짢다는 것을 알지만 이런 정보는 지난 30년 동안 수많은 질병이 급격히 증가한 이유를 설명하는 데 도움이 된다. 

 

p259. 좋아하는 신선 식품을 즐기자

 

 당신은 모든 종류의 과일, 채소, 향신료, 견과류를 먹을 수 있다. 신선한 제철 식품이라면 더욱 그렇다. 나는 항상 신선한 과일과 채소를 먹으라고 추천하지만, 사실 이를 구하기가 쉽지 않다. 냉동 과일과 채소는 잘 익은 과일과 채소를 수확한 뒤 냉동한 것으로, 산화방지제와 폴리페놀의 완전한 성분이 함유되었을 가능성이 높아 허용된다. 가능하면 유기농 농산물을 선택하고 현지에서 재배하는 품종을 고르자. 설탕이나 소금을 이용해 보존되었을지 모르는 통조림 과일과 채소는 피한다. 볶은 땅콩에는 생땅콩보다 더 많은 레스베라트롤이 함유되어 있는데, 레스베라트롤은 뇌와 심혈관 계통을 보호한다고 알려진 적포도주에서도 발견되는 유익한 성분이다. 단 땅콩 외의 모든 견과류는 날것으로 먹어야 한다. 

 

 많은 신선 식품이 위장을 치유하는 기능이 있다고 알려져있다. 이 식품들은 천연적으로 항염증성이기 때문에 건강에 좋은 선택지다. 매일매일 다음의 목록에서 한 가지라도 먹도록 하자.

 

1) 계피

2) 십자화과채소(브로콜리, 방울양배추, 콜리플라워, 양배추, 청경채) : 대장의 염증을 낮추는데 특히 유용한 강력한 폴리페놀인 글루코시놀레이츠라는 필수 영양소군이 함유되어 있다.

3) 베리, 체리, 적포도 등 폴리페놀 함량이 높은 짙은 색 과일

4) 녹차 : 프리바이오틱이다.

5) 오메가3 지방산 : 인체에서 합성되지 않으므로 식이요법을 통해 얻어야 한다. 우리 몸에 여러 가지 좋은 기능을 하는데, 특히 위장의 염증을 낮추는 유전자를 활성화시킨다. 오메가3가 많이 함유된 식품은 풀을 먹인 소고기, 냉수성 어류, 해산물, 흑호두, 피칸, 잣, 치아씨, 아마씨, 바질, 오레가노, 정향, 마조람, 타라곤 등이다.

6) 파슬리

7) 토마토 쥬스

 

p263

 혈당지수가 높은 식품으로는 아이스크림, 빵, 그 외 모든 밀가루 제품, 감자, 건포도, 감자칩, 알코올음료, 백미 등이 있다. 실제로 <밀가루 똥배>의 저자인 윌리엄 데이비스 박사에 따르면 밀 제품의 혈당지수는 모든 식품 중에서 가장 높다. 반면 혈당지수가 낮은 식품이 더 영양가가 있는 것으로 여겨지는데, 대부분의 다른 과일, 채소, 콩류가 이에 해당한다.

 

 혈당지수는 확실히 더 나은 식품을 선택하는 데 도움을 주며, 소위 건강한 식품의 몇 가지 문제도 지적한다. 예를 들어 건강에 좋다고 알려진 통밀빵은 한 쪽만 먹어도 혈당지수가 69로 높은 편이다. 땅콩 덕분에 혈당지수가 42에 불과한 스니커즈보다 훨씬 높다.

 

 저혈당으로 알려진 과일(살구, 자두, 사과, 복숭아, 배, 체리, 베리)은 탁월한 선택이다. 베리 같은 일부 과일은 몸에 좋지만, 우리가 당분을 너무 많이 먹는데 죄책감을 느끼다 보니 우리의 혈당 조절 체계는 필요 이상으로 과민하다. 

 

p264. 견과류와 씨앗

 

 견과류와 씨앗은 훌륭한 단백질 공급원이다. 게다가 요즘에는 밀가루 대신 사용할 수 있는 견과류와 씨앗의 가루와 버터도 있다. 특별한 알레르기나 과민성이 없는 한, 생견과류나 씨앗 중에 먹어선 안될 것은 없다. 땅콩과 코코넛도 좋은데, 둘 다 엄밀히 따지면 견과류나 씨앗은 아니다. 땅콩은 콩류에 속하고 코코넛은 과일이다.

 

 그렇다고 삼절 진열대의 아무 견과류바나 먹어도 좋다는 의미는 아니다. 항상 재료와 성분표시 라벨을 주의 깊게 읽고, 설탕이나 유제품으로 만든 바와 글루텐 프리 표시가 없는 바는 피해야 한다. 유기농 가공식품과 글루텐 프리 가공식품도 건강에 좋지 않은 재료로 만들어진 경우가 많다.

 

 좋은 씨앗과 견과류의 선택지는 다음과 같다.

아몬드, 호주너트, 너도밤나무 열매, 흑호두, 브라질너트, 버터너트, 캐슈, 밤, 치아씨, 중국 아몬드, 중국 밤, 개암, 아마씨, 헤이즐넛, 대마씨, 호두, 콜라 너트, 타이거 너트, 마카다미아, 피칸, 잣, 피스타치오, 양귀비씨, 호박씨, 홍화씨, 참깨씨, 해바라기씨, 인도 너도밤나무 열매

 

p265. 채소

 채소는 적용할 수 있는 요리가 아주 많다. 채소는 날것으로 먹거나 살짝 데치거나 구워 먹거나, 볶아서 간식, 반찬, 메인 요리로 즐길 수 있다. 수프, 칠리소스, 스튜, 구이, 샐러드, 볶음, 캐서롤에도 넣을 수 있다. 가능하면 구할 수 있는 최고 품질의 채소를 구입하는 것을 목표로 삼자. 이 말은 기회가 있을 때마다 유기농, 로컬, 산지 직송 제품을 구하라는 의미다.

 

p277. 건강한 지방

 

 코코넛과 코코넛 제품은 건강한 지방이 가득한 식품으로 상온에서도 오랫동안 상하지 않는다. 코코넛의 크림 같은 질감은 유제품 프리 음식을 만들기에 좋다. 코코넛 밀크는 지방 함량이 높아서 어떤 레시피에도 유제품을 대체할 수 있다. 코코넛을 이용한 식품은 뇌 건강에 도움이 된다. 코코넛 오일에는 중쇄지방산(MCT)이 함유되어 신경보호 효과가 있다고 알려져있다. 중쇄지방산은 몸에 쉽게 흡수되어 에너지로 사용되고, 또 간에서 쉽게 신진대사가 되어 뇌의 대체 연료인 케톤으로 전환되므로, 혈당에 대한 의존도도 줄일 수 있다. 또한 코코넛에 들어있는 페놀 화합물은 알츠하이머병의 진행에서 핵심 과정인 베타아밀로이드 반점의 축적을 막는다.

 

 가장 적게 가공한 요리용 오일에는 '엑스트라버진'이나 '콜드프레스'같은 라벨이 붙어있다. 자외선 차단되는 병에 담아 판매하는 오일을 찾아보자. 그런 오일이 빨리 상하지 않는다. 오일을 사용해 요리할 때 가장 주의해야 할 점은 연기가 날 때까지 가열하지 않도록 주의하는 것이다. 오일에서 연기가 나기 시작하면, 오일이 산화되면서 다량의 유리기가 생성된다. 그래서 가열점이 높아 연기가 쉽게 나지 않는, 건강에 좋은 오일을 찾아야 한다.

 건강에 좋은 오일로 추천할 만한 선택지는 다음과 같다.

 

  아보카도 오일, 코코넛 오일, 기(ghee) 버터, 마카다미아 오일, 올리브 오일

 

p289. 유제품을 먹지 않는 방법

 

 소젖의 단백질 구조는 인간 모유에서 발견되는 단백질 크기의 8배에 달하기 때문에, 많은 사람이 소젖을 소화하는 데 어려움을 겪는다. 염소젖의 단밸질 구조는 인간의 모유보다 6배 크기다. 소젖보다는 낫지만 역시 소화하기가 쉽지 않다. 그러나 구할 수만 있다면 몇몇 종류의 동물 유제품은 잘 소화시킬 수 있다. 2007년 <알레르기 및 임상 면역학 저널>에 실린 연구에 따르면, 동물 젖이 인간 모유 단백질과 62% 이상 비슷한 단백질 구조를 가지고 있으면, 오히려 그 젖이 알레르기 반응을 일으키지 않을 가능성이 더 높다고 한다.

 

 이런 동물성 유제품이 실제로 존재한다. 일부 민속 특산품 가게에서는 낙타유, 순록유, 당나귀유 등 소젖의 좋은 대용품을 판매한다. 나는 얼마 전에 낙타유를 먹어봤는데, 소젖을 먹을 때 생기는 전형적인 점액 생성 부작용이 없었다. 나는 동물성 유제품을 부어 시리얼 한 그릇을 먹은 지가 오래되었는데, 낙타유는 그 갈망을 충분히 채워주었다. 

 

 그 외에도 우유를 대체할 수 있는 많은 동물성 유제품이 있다. 나는 유기농 제품이라도 두유를 좋아하지 않는다. 콩의 장단점을 보여주는 여러 연구가 있는데, 식물성 에스트로겐의 영향에는 의문의 여지가 없다. 콩에서 나오는 식물성 에스트로겐 분자들은 체내의 수용체 부위에 결합하여 약한 에스트로겐 호르몬처럼 작용한다. 에스트로겐이 결핍된 상태라면 콩을 추가로 섭취해도 좋을 것이다. 그러나 에스트로겐이 적절하거나 과도한 상태라면, 콩은 남녀 모두에게 나쁠 수 있다. 더욱이 콩의 장점을 보여주는 연구는 아시아 연구 기관들에서 주로 나오는데, 그곳에서는 실험 참여자들이 전지 대두로 만든 음식을 먹는다.

 

 내가 가장 좋아하는 우유 대용품은 코코넛 밀크로, 여기에는 HDL콜레스테롤을 향상시키는, 심장 건강에 좋은 포화 지방인 라우르산이 풍부하다. 견과류나 쌀로 만든 유제품도 있다. 어쨌든 원칙적으로 항상 무가당 제품을 선택하라. '플레인' 우유 대용품에는 실제로 1컵당 6g의 설탕이 첨가되어 있다. 맛이 가미된 제품은 1컵에 12g에서 20g까지 첨가될 수 있다. 성분표시 라벨에서 '무가당' 표시를 찾으면 설탕이 첨가되지 않은 바닐라 맛을 찾을 수 있다.

 

p296

 

 알코올 노출은 장에서 그람 음성 박테리아의 성장을 촉진하여 내독소가 축적되게 할 수 있다. 더욱이 그람 음성 박테리아와 장내 상피세포에 의한 알코올 대사 작용으로 아세트알데히드가 축적될 수 있는데, 이는 다시 치밀 결합 및 부착 결합 단백질의 타이로신 인산화를 증대시켜 내독소의 장 투과성을 높일 수 있다. 또 알코올로 인해 생성된 산화질소는 튜불린과 반응하여 내독소의 투과성 향상에 일조할 수 있고, 그 결과 미세관 세포골격에 손상을 입히고 장 방어벽 기능을 붕귀시킬 수 있다.

 

 내가 왜 이 대목을 인용했을까? 알코올 섭취는 튜불린(tubulin, 모든 신경 세포 내의 비계)을 손상시켜 튜불린에 대한 많은 항체를 생성하므로, 튜불린 항체 수치는 뇌염의 생체지표 중 하나가 된다. 이는 장 질환이 뇌염과 혈액뇌장벽 손상의 원인이 되는 예이다.

 

 알코올은 아무리 좋은 와인이라도 장을 손상시켜 장 투과성을 초래하고, 장내 세균을 좋지 않은 방향으로 변화시킨다. 혹시 장 누수를 치료하는 중이라면, 장 내벽이 치유되는 동안 알코올을 완전히 피해야 한다.

 

p305

 또 장 누수의 자연적인 치료법으로 초유를 추천한다. 초유는 출산 후 처음 3~5일 동안 나오는 젖으로 모유와는 전혀 다르다. 초유는 출산 과정에서 모든 포유류의 젖샘에서 분비된다. 초유에는 신생아를 질병으로부터 보호하는 데 필요한 항체가 포함된다. 초유는 지구상의 어떤 물질과도 다른 방식으로 유전자를 조절한다. 이제는 이것이 모든 면에서 장 건강을 위한 최고의 치료법이란 사실이 밝혀졌다. 초유에는(자궁 내에서 완전히 투과되었던) 미성숙한 장벽의 치밀결합을 강하게 하는 데 필요한 성장 인자와 호르몬이 포함된다. 성인의 경우 역시, 초유는 같은 유전자를 활성화시켜 장 내벽 손상을 복구하고 장을 온전하게 회복하며, 느슨해진 치밀결합을 단단하게 조여 장내 염증성 유전자의 1차 조절자 역할을 하는데 도움이 된다. 또 유익한 박테리아로 장의 재생성을 촉진한다.

 

 초유는 전체 고형물 중 대략 4분의 1이 항체로, 신생아는 이 항체들을 마이크로바이옴에 착생시켜야 한다. 초유에 포함된 IgG는 아기를 벌레, 박테리아, 바이러스, 곰팡이, 균류, 기생충으로부터 즉각 보호해준다. 성인의 경우도 이런 침략자들로부터 몸을 보호해줄 것이다. 또 초유는 미세 융모를 복원하는 유전자를 활성화시켜 셀리악병에 걸리면 닳아 없어지는 털을 다시 자라게 한다. 세계적으로 유명한 초유 권위자인 앤드류 키치 박사는 글루텐 서밋에서 이렇게 말했다. "건강보조식품 판매점에는 손상된 장을 치유하는 데 도움을 주는 악기 연주자들이 많이 있지만, 오직 초유만이 전체 교향곡을 연주할 수 있다."

 

p388

 

 패러다임을 전환하는 획기적인 연구가 일상적인 병원 치료에 적용되기까지 평균 17년씩 걸리는 이유는 다름 아닌 새로운 생각에 대한 저항이다. 실제 학자들이 콜레스테롤을 동맥경화증의 원인으로 처음 지목한 때부터 일반 의사들이 환자의 콜레스테롤 수치를 처음 확인한 때까지 평균 17년이 걸렸다. 

 그러나 다음과 같은 사실은 자명하다. 

 

1) 1950년대에 미국 서부와 남서부 일대의 신문들은 원자폭탄의 여파가 '안전하다'고 강조하는 정부 과학자들의 말을 1면에 보도했다. '걱정할 것 없다'는 것이 그들의 요지였다.

2) 1960년대에 담배가 '안전하다'고 설파했다. 실제로 카멜은 '의사들이 가장 추천하는' 담배 브랜드였다.

3) 1970년대에 젖소에 인간 성장 호르몬을 투입하는 것이 '안전하다'고 했다.

4) 1980년대에 마가린이 '건강에 좋다'고 했다. => 나 어릴 때 빵에 마가린 발라서 많이 먹었다. T_T;;

5) 1990년대에 휴대전화가 '안전하다'고 했다. 그냥 상식적으로 생각해도 머리 옆에 배터리를 놔두어서 좋을 리가 없는데도 말이다.

6) 2000년대에 정부는 GMO 식품이 '안전하고' 농작물에 뿌리는 극심한 독성 화학물질도 인간에게 '안전하다'고 했다.

 

 1979년에 나는 고압선에서 0.25마일(약 402m) 이내에 거주할 경우 소아 백혈병이 증가한다고 밝힌 연구 논문을 우연히 접했다. 이때가 내가 전자기장의 건강 위험에 대해 처음 알게 된 시점이었다. 그리고 1982년에 고압선과 성인 암의 상관관계를 밝힌 또 다른 논문을 읽었다. 1991년에는 밤새 전기담요를 덮고 자면 유방암 위험이 31% 증가하는 것으로 밝혀졌다. 그 이후 세상에 점점 더 많은 전선이 연결되었고, 우리가 노출되는 전자기 오염은 극도로 심해졌다. 각종 질병이 증가하고 지구상의 생명이 사라져져가는 최근의 무시무시한 수치를 보고 있자면, 과도한 독소 노출을 줄이기 위해 당장 우리가 할 수 있는 간단한 일을 더 이상 미룰 시간이 없음을 깨닫는다. 그런데 작은 가전제품의 미약한 독소에 노출되는 일이 어째서 그토록 큰 문제를 일으키는 것일까?

 

 전자기방사선은 늘 같은 속도로 이동하며, 빛처럼 파동으로 에너지를 전달한다. 이 에너지는 전기와 자기를 동시에 띠는데, 파동은 전기적으로 양극에서 음극으로, 자기적으로는 북극에서 남극으로 빠르게 번갈아 나타난다.

 모든 전원에서 방출되는 전자기방사선은 주변 지역을 투과하며 전자기장을 형성한다. 전자기장은 전원 근처에서 가장 강하고 멀리 떨어질수록 약해지다가 점차 측정이 불가능해진다. 강한 전자기장은 멀리 있는 강한 방사선 발생원 때문일 수도 있고, 가까이 있는 약한 방사선 발생원 때문일 수도 있다. 머리맡에 놔둔 스마트폰의 전자기장이 0.25마일 떨어진 휴대전화 기지국의 전자기장보다 훨씬 강한 영향을 미칠 수 있는 것이다. 물론 두 가지 다 암 발병과 관련이 있다.

 투과는 전자기방사선이 건강에 미치는 영향과 관련된 주요 이슈다. 일부 형태의 전자기방사선은 다른 형태보다 더 투과력이 강하다. 예를 들어 전등 불빛은 공기, 물, 유리는 투과할 수 있어도 벽돌이나 금속판은 투과할 수 없고 인간의 살 속으로 깊이 투과하지 못한다. 손전등으로 손을 비추는 실험을 해본 적이 있다면, 빛이 피부를 투과하지 못한다는 것을 알 것이다. 그러나 X선은 쉽게 인체를 투과한다.

 

 우리 가정에서 흔히 발견되는 일부 전자기 방사선은 투과력이 매우 강하다. 초저주파는 콘크리트 기둥과 금속판은 물론, 인간의 살과 뼈도 투과한다. 그런데도 이 방사선은 비교적 약한 편이라 짧은 거리에만 전자기장이 측정된다.

 전기와 방사선에 다량으로 노출되면 큰 문제가 발생한다. 이를테면 원자 폭탄을 생각해보자. 전기는 많은 다른 파장과 주파수를 가로질러 이동한다. 건강 문제와 관련되어 우리가 가장 친숙한 전자기파는 X선이다. 우리는 너무 많은 X선에 노출되면 암에 걸릴 위험이 있다는 것을 안다. 의사들이 엑스레이 촬영 준비를 마치면 얼마나 빨리 그 방에서 나가는지 보았는가? 의사들은 아무리 약하더라도 자주 노출되면 대단히 위험하다는 사실을 알고 있다.

 

 태양 플레어는 건강에 영향을 미치는 또 다른 방사선의 예다. 태양 표면에서 일어나는 이 거대한 폭발은 전자기장을 형성하고, 이 전자기장은 지구에 태양 방사선을 대량으로 퍼붓는다. 플레어는 태양 흑점 주기와 발생 빈도가 일치한다. 11년 주기로 정점에 달한다. 태양 방사선은 대기층에서 여과되므로현대에 인간에게 노출되어 있는 독소적 성분이 뇌에 미치는 영향에 대해 다루고 있다.

 

독소가 몸에 미치는 영향, 그리고 이를 해독하는 방법에 그 초점이 맞혀져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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p32. 면역계의 기초

 

 

 

 면역계는 우리 몸을 지키는 군대와 같다. 서로 다른 5개 부문이 협력하여 면역계를 이루는데, 군대에 비유하자면 육군, 해군, 공군, 해병대, 연안경비대라 할 수 있다.(의사들은 이를 자가면역반응 또는 항체 IgA, IgG, IgE, IgM, IgD라고 부른다.) 각각 역할이 다르다. 또 체내에는 4가지 다른 면역계가 있다. 각각은 별개로 작동하지만, 같은 매뉴얼에 따르면서 서로 소통한다. 가장 큰 면역계는 소화관(장)으로 전체 면역력의 70~85%를 좌우한다 또 다른 면역계는 간의 쿠퍼 세포(Kupffer cell)이고, 세 번째 면역계는 혈액에 들어 있는 백혈구 세포이다.

 

 마지막으로 체내의 가장 강한 면역계는 뇌 안에 있는 교세포다. 교세포는 뇌 안으로 들어가는 물질을 여과하는 혈액뇌장벽(Blood Brain Barrier) 바로 안쪽에서 고성능 라이플총을 들고 어떤 외부 물질도 침투하지 못하게 감시한다. 교세포는 체내에서 가장 강력한 면역 반응을 일으키는데, 6연발 권총 정도가 아니라 바주카포를 들고 돌아다니는 셈이다.

 

 생각하는 능력 덕분에 인간이 지구상에서 '지배종'이 되었다는 관점에서 보더라도, 사고 영역을 관장하는 대뇌 피질은 인간의 생존에 매우 중요하다. 이는 대뇌 피질을 보호하는 교세포가 무려 608억 4천만 개에 달한다는 사실만 봐도 알 수 있다. 대뇌 피질을 구성하는 뉴런 개수는 163억 4천만 개다. 그러니까 이 넓은 피질에서 교세포와 뉴런의 비율은 거의 4대 1로 유지된다.(정확히는 3.72 대 1이다). 즉, 사고 세포들을 무슨 일이 있어도 보호해야 한다는 의미다. 그런데 근육 및 명령중추인 소뇌로 가면 상황이 역전된다. 교세포보다 뉴런 수가 더 많다. 파킨슨병, 다발성경화증 등 뇌에 영향을 미치는 많은 자가면역질환이 운동 기능에도 영향을 미치는 이유는 이 때문일 것이다.

 

 4가지 면역계는 적어도 두 종류씩 무기를 가지고 있다. 세포성/선천성 면역계와 체액성/적응성 면역계다. 세포성 면역계는 모든 생명체에서 발견되는 아주 오래된 면역계로, 위협을 제거하기 위해 생화학 총탄을 발사하고 염증을 형성하는 보호용 권총 역할을 한다. 반면 체액성 면역계는 백업용 지원 시스템으로, 더 강한 염증을 만들 필요가 있을 때 소환되는 대포에 해당한다.

 

 박테리아, 바이러스, 기생충, 바람직하지 않은 식이단백질과 펩티드, 심지어 화학물이나 약물 등 어떤 환경적 독소에 노출되든 간에 세포성/선천성 무기는 최초로 반응하는 생화학 총탄이라 할 수 있는 사이토카인(cytokines)을 형성한다. 사이토카인은 위협이 될 만한 요소는 무엇이든 찾아내서 파괴하는데, 종류가 매우 다양하다. 면역계는 위협 요인에 따라 어떤 사이토카인을 분비할지 결정한다.

 

 만일 세포성 무기의 방어 전략이 임무를 완수하지 못하면, 면역계는 대포를 소환한다. 이때 체액성/적응성 면역계가 발동하고 군사들이 '항체'라는 표적 미사일을 대령한다. 항체는 노련하게 특정 표적을 뒤쫓다가 어디에서든 침입자를 발견하면 미사일을 발사한다. 혹시 혈액 검사 결과에 '항체 수치 상승'이나 항체 표시 옆에 'H'라고 적혀있다면, 기본 면역계가 이미 제압당해 대포가 나섰다는 의미다. 항체는 혈류를 순환하며 훈련받은 대로 환경적 독소를 찾아 공격한다. 그런데 항체는 불결한 병원균이나 음식물, 손상된 세포를 찾아 파괴한 후에도 2~6개월 동안 계속 혈류에 머문다. 아무 증상이 없는데도 항체 수치가 높다면 면역계가 위협 요인을 발견하고 병으로 발전하기 전에 처리하려고 최후의 수단을 동원하고 있다는 신호다.

 

 또 선천성 면역계(최초 반응자)가 피로해져서 제 역할을 못하는 경우에도 항체가 증가한다. 면역계는 우리의 잡다한 식습관과 생활습관에 대응하는 역할만으로도 지칠 수 있다. 생화학적 요인(음식 과민성, 환경적 독소 등)이든, 구조적 요인(안 좋은 자세와 장 투과성)이든, 정서적 스트레스든, 전자기장이든 간에 지속적으로 항원이 밀려들면, 우리의 최초 반응자(선천성 면역계)는 녹초가 되어 더 이상 효과적으로 작동하지 못한다. 우리는 얼마나 오랫동안 담배를 피우거나 탄산음료를 마시거나 달콤한 음식을 먹어왔던가? 이런 습관 때문에 몸이 손상되어 툭하면 감기에 걸리거나 건망증을 보이거나 오후 세 시만 돼도 기력이 급격히 저하되는 것이다. 이런 경미하지만 성가신 건강 문제는 선천성 면역계가 지쳐서 약해졌음을 시사한다.

 

 

 

p38.

 

 우울증은 뇌의 전두엽에서 흔히 발생하는 염증의 한 예다.

 

 

 

p39.

 

 미국 알츠하이머병 연구센터의 노화연구소를 운영하는 데일 브레드슨 박사는 현재 알츠하이머병을 호전시키는 치료를 진행 중이다. 그는 2014년 11월 의학저널 <에이징 Aging>에 발표한 최초 논문에서 10명의 알츠하이머병 환자 중 9명을 5년 만에 완전히 회복시킨 연구 결과를 소개했다. 그의 환자들은 다시 일터로 돌아가거나 연구소에서 나와 가족들과 함께 집으로 돌아갔다. 그들은 완전히 원래 상태를 회복했는데, 이는 거의 기적에 가까운 일이었다.

 

 

 

p46.

 

 피로감, 에너지 부족, 기억력 감퇴, 감정 기복 등의 증상이 반복되는 것은 면역계에서 우리에게 어딘가 균형이 깨졌다고 신호를 보내는 것이다. 우리가 독속에 노출되어 점차 죽어가고 있고, 우리 몸의 군대가 몸을 보호하려고 애쓰고 있다는 신호다. 이런 뇌 증상들도 스펙트럼상에서 발생한다. 가벼운 피로감을 느낀다는 것은 아침에 일어나기 위해 힘을 쥐어짜내야 한다는 의미이고, 언젠가는 완전히 기능이 상실되어 침대에서 꼼짝도 못하는 상태로 발전할 수 있다는 얘기다.'

 

 

 

p51. 뇌의 해부학

 

 

 

 뇌는 대뇌, 소뇌, 뇌간의 세 부분으로 이루어져있다. 대뇌는 뇌에서 가장 큰 부위로, 대뇌 피질이라고도 불린다. 인간의 가장 고차원적인 뇌기능인 '생각'이 바로 대뇌에서 이루어진다. 우리가 뇌를 떠올릴 때,, 그려지는 것이 대뇌다. 대뇌는 불룩하게 접힌 회백질이 모여있는 부위로, 대장처럼 주름져 좁은 공간 안에 매우 넓은 표면적이 들어있다. 대뇌는 기억, 주의, 인식, 사고, 언어, 의식에 핵심적인 역할을 한다.

 

 소뇌는 대뇌의 아래쪽과 뒤쪽에 위치한 공 모양의 조직이다. 소뇌는 감각 정보(촉각과 균형 감각 등)를 해독하고 근육과 결합하여 움직임을 조절한다. 소뇌에서 보내는 메시지 덕분에 인간은 다른 종과 다른 방식으로 몸을 구부리거나 비틀 수 있다. 내가 오래전에 삼림 감시원에게 들었는데, 인간은 언덕의 비탈을 가로질러 곧장 달릴 수도 있지만, 곰은 언덕을 위아래로만 달릴 수 있다고 한다. 끝으로 뇌간은 뇌와 척수를 연결한다. 뇌간은 심박동수, 혈압, 호흡 같은 신체 기능을 제어한다.

 

 

 

 

 

 대뇌 아래에는 변연계를 구성하는 몇 가지의 작은 구조가 있다. 변연계는 뇌에서 가장 원초적인 부위로, 공포, 분노, 쾌락 등의 정서와 동기를 해독하는 데 관여한다. 또 변연계의 특정 구조들은 기억을 생성하고 유지하는 데도 관여한다. 그중 하나인 편도체는 기억을 뇌의 어디에 어떻게 저장할지를 결정한다. 해마는 단기 기억이 저장되는 장소로, 알츠하이머에 영향을 받는 뇌의 주요 영역 중 하나다.

 

 시상하부는 감정, 섭식, 수면을 조절한다. 시상은 척수에서 뇌로 메시지를 전달한다. 이런 뇌 부위들은 다음 장을 읽을 때 기억해야 할 중요한 부분이다. 다음 장에서는 장내의 박테리아가 뇌의 다양한 영역에 어떻게 영향을 미치는지를 설명할 것이다. 예를 들어, 장내 박테리아의 불균형은 혼란스러운 감정, 수면 부족, 단기 기억 상실 등을 초래한다. 이 내용은 뒤에서 더 자세히 이야기하겠다.

 

 각각의 뇌 영역은 신경들로 이루어진다. 신경은 뉴런으로 구성된다. 뉴런은 뇌 작업의 기본 단위로, 다른 신경세포나 근육, 샘세포(gland cell)로 정보를 전달하도록 설계된 특수한 세포다. 뇌에는 1천억 개의 개별 뉴런이 있으며, 우리 몸은 끊임없이 오래되고 손상된 뉴런을 제거하고 새로운 뉴런을 생성한다. 뉴런은 뇌 호르몬인 신경전달물질을 통해 서로 정보를 전달하고 처리한다. 이런 일련의 시스템에서 어느 한 부분이라도 손상되면 뉴런의 메시지가 한 세포에서 다른 세포로 제대로 이동하지 못한다. 이 내용을 기억해두어야 다음 장에서 신경전달물질 정보의 흐름을 향상시키는 음식에 대해 이야기할 때 이해가 될 것이다.

 

 신경은 미엘린 수초(myelin sheath)라는 일종의 비닐랩 같은 물질로 보호된다. 미엘린 수초는 전선을 감싸는 소재와 매우 유사한 절연체로, 신경이 화학성 메시지를 다음 신경에 전달할 때까지 이를 보존할 수 있게 도와준다. 자동차 배터리에서 헤드라이트까지 연결된 전선을 생각해보라. 전선 일분의 절연체를 벗겨내면 전선이 외부에 노출된다. 그렇게 노출된 전선이 자동차 프레임에 닿으면 라이트가 켜졌다 꺼지며 깜빡거리기 시작한다. 전선에는 아무 문제가 없고 라이트에도 아무 문제가 없지만, 절연체가 손상되어도 라이트가 깜빡이는 문제가 발생하는 것이다. 이 같은 일이 뇌에서 벌어질 때 우리는 다발성경화증(MS)으로 향하는 스펙트럼상에 놓이게 된다. 그렇기 때문에 수초염기성단백질(MBP)과 미엘린 희소돌기아교세포 당단백질(MOG)에 대한 항체의 생체지표 검사는 매우 중요하다. 이 검사는 신경의 절연체가 파괴되는 메커니즘을 가장 먼저 확인할 수 있는 방법으로, 검사 결과 수치가 상승하면 다발성경화증으로 향하는 자기면역 스펙트럼상에 놓여있다고 볼 수 있다.

 

 뇌는 지속적으로 영양을 공급하는 뇌척수액과 혈액, 혈관으로 둘러싸여있고, 모세혈관이라 불리는 혈관들은 각 뉴런에 연결되어있다. 모세혈관의 길이를 끝에서 끝까지 재보면 400마일(약 644km)에 달한다. 일부 모세혈관은 너무 가늘어서 한 번에 단 하나의 적혈구만 통과할 수 있다. 혈액은 매일 24시간 쉬지 않고 돌고, 온몸 구석구석을 순환하는데, 20~25%는 언제 어느 때든 머리 쪽에 몰려있다. 많은 혈액이 뇌에 집중되는 것은 뇌가 매 초당 수만 개의 메시지를 처리하기 위해 필요한 연료를 혈액에서 계속 공급받아야 하기 때문이다.

 

 

 

p54. B4 : 혈액뇌장벽 손상

 

 

 

 이번 주제인 혈액뇌장벽(뇌척수액과 혈액을 분리하는 장벽) 손상(B4)은 이 책에서 가장 중요한 시사점 중 하나다. 우리는 뇌에 대해 이야기하고 있는데, 이 이야기는 장에서 시작된다. 혈액의 성분은 우리가 호흡하는 공기를 통해 받아들이는 것, 피부와 눈, 귀를 통해 흡수하는 것 그리고 섭취한 음식에 의해 결정된다. 입을 통해 몸속으로 들어온 물질들은 우선 소화관을 통과하며 분해, 소화, 흡수되고, 그 결과 생명을 유지하는 유익한 영양분이 되어 혈액 속으로 들어가 몸 전체를 순환한다. 이 과정에서 소화계는 불완전하게 소화된 음식은 물론, 독소와 자극물이 혈액에 흡수되는 것을 막는데, 1차 방어벽 역할을 하는 것이 바로 소장 상피이다. 이것이 일종의 거름망 기능을 하여 아주 작은 분자만 혈류로 들어갈 수 있다.

 

 뇌 안에도 이와 유사한 기능을 하는 자체 보호 거름망이 있다. 구성 물질로 거의 동일하다. 혈액뇌장벽(BBB)이라는 이 방어벽의 주된 역할은 큰 분자들이 혈액을 통해 뇌로 들어가지 못하게 막는 것이다. 뇌의 거름망은 소장의 거름망에 비해 훨씬 미세하다. 그런데 장 내벽이 찢어지면 창자가 새어나올 수 있듯, 뇌의 거름망이 찢어지면 뇌가 새어나올 수 있다. 학자들은 이렇게 찢어진 상태를 혈액뇌장벽 손상(Breach of the Blood-Brain Barrier)이라 하고, 나는 'B4'라 부른다.

 

 뇌 누수(leaky brain)는 다양한 이유로 발생한다. 특히 머리가 외상을 입는 경우에 그렇다. 뇌진탕을 입으면 뇌의 거름망이 약간 찢어진다. 더 작은 외상을 반복적으로 입어도 거름망이 찢어질 수 있다. 외상으로만 혈액뇌장벽이 찢어지는 것은 아니다. 흔들린 아이 증후군(shaken baby syndrome)이나 과격한 운동도 뇌에 손상을 입힐 수 있다. 그래서 나는 마라톤, 트라이애슬론 같은 지구력 운동의 장기적 효과에 대해 의문이 든다. 물론 나도 젊어서는 마라톤을 했고, 이 책을 쓰는 지금도 왜 주자들이 달릴 때의 기분을 쿵쾅거리며 거리를 누빈다고 표현하는지 잘 안다. 적당량의 운동은 뇌기능에도 도움이 되고 혈액뇌장벽을 강화하며 혈류에 있을지 모를 종양 세포가 뇌 안으로 침투하는 것을 막는다. 결국 균형의 문제이다. 혈류로 들어간 식품 거대 분자로부터 우리를 보호하기 위해 면역계가 만든 항체로 인한 염증도 혈액뇌장벽을 손상시킬 수 있다. 가장 악명 높은 식품은 밀과 유제품이다. 기생세균, 바이러스성 기생충, 자가면역질환 등 다양한 원인으로 생겨난 염증 역시 혈액뇌장벽을 손상시킬 수 있다. 심지어 설탕을 입혀 바삭하게 만든 빵 껍질이나 크램 브륄레 표면도 최종당산화물(AGEs)이란 새로운 분자를 생성하는데, 이것 역시 장과 뇌의 거름망을 손상시켜 B4를 유발한다. 새까맣게 탄 고기를 물론 바비큐 껍데기도 우리 뇌에 작은 구멍을 낼 수 있다는 사실은 두말할 여지가 없다.

 

 보통 혈액뇌장벽은 4시간 이내에 빠르게 치료된다. 그러나 외상이 반복되면 B4 상태가 유지되어 거대 분자가 민감한 뇌에 침툭하게 된다. 그 결과 평소에는 조용한 뇌 면역계의 교세포들이 우리 몸을 보호하기 위해 과민반응하며 바주카포를 계속 발사해대어 많은 부수적 손상을 입히고 만다. 부수적 손상이 발생하면 면역계는 일단 혈액뇌장벽을 통과하는 거대 분자에 대한 항체뿐 아니라 손상된 세포를 제거하기 위한 항체도 생성하는데, 이 항체는 혈액뇌장벽에 대한 항체가 증가하면 문제가 발생하고, 뇌 안에서 염증성 연쇄 반응을 부추기게 된다.

 

 간단한 혈액 검사를 통해 당신이 B4 척도에서 어디쯤에 위치하는지를 확인할 수 있다. 응급실에서 혈액뇌장벽의 심한 외상을 치료할 때 사용하는 두 가지 생체지표는 S100B과 뉴런특이적 에놀라아제(NSE)이다. 두 지표의 수치가 높으면 S100B와 NSE가 혈류로 새어나오고 있다는 뜻이다. 혈류 속에 S100B와 NSE가 오랫동안 높은 수준으로 유지되면, 몸은 그 초과분을 제거하기 위해 S100B와 NSE에 대한 항체를 만든다. 따라서 S100B와 NSE에 대한 항체 수치가 높으면 혈액뇌장벽이 계속 찢어져있는 상태일 가능성이 높다. 두 가지 수치는 신체적인 외상뿐 아니라 어떤 원인으로든 혈액뇌장벽이 손상되었음을 알려주는 매우 정확한 생체지표다. 이런 지표들은 혈액뇌장벽이 뚫려서 거대 분자가 뇌 안으로 침투할 수 있고 그 결과 면역 반응이 활성화되어 염증이 생겨 뇌 안개, 건망증, 주의력결핍 과잉행동장애(ADHD), 발작, 불안, 우울, 조현병, 양극성 장애와 종국에는 치매, 파킨슨병, 다발성경화증, 알츠하이머병 등이 발현될 수 있음을 시사한다.

 

 일단 B4를 겪게 되면 뇌 안의 모든 조직이 영향을 받을 수 있다. 당신이 지금껏 어떻게 살아왔고 어떤 독소에 노출되었으며 그 독소가 어디에 축적되었는지, 그리고 어떤 유전적 특성을 물려받았는지가 당신의 약한 고리를 결정한다. 결국 그것이 당신이 걸리기 쉬운 가장 취약한 질병이 된다. 유일한 차이는 분자 모방이 어느 부위에서 발생하느냐는 것뿐이다. 만약 밀의 A-A-B-C-D가 소뇌와 유사하게 보이면, 소뇌에 대한 항체가 증가하여 소뇌 조직이 파괴되고, 소뇌 변성이 징후가 나타날 것이다. 만약 유제품의 A-A-B-C-D가 미엘린 수초와 유사하게 보이면, 수초에 대한 항체가 증가하여 수초 조직이 파괴되면서 수초 변성의 징후가 나타나고 운동 기능이 상실되어 다발성경화증으로 번질 것이다. 독성 화학물질인 비스페놀 A에 대해 분자 모방이 일어난다면, 뇌의 여러 부위에 대한 항체가 증가할 것이다. 옥수수, 토마토, 시금치, 콩, 담배에 대해 분자 모방이 일어난다면, 뇌신경과 시신경에 있는 아쿠아포린-4 세포에 대한 항체가 증가하여 뇌기능장애와 함께 시력에도 문제가 생길 것이다.

 

 메커니즘은 대부분의 만성 뇌기능장애에서 매우 유사하게 나타난다. 먼저 혈액뇌장벽 손상이 발생한다. 그러면 우리가 노출된 독소가 우리 몸을 보호하는 면역계의 반응을 자극하여 해당 독소에 대한 항체가 증가하는데, 그런 독소는 우리 몸의 조직과 매우 유사하여 항체들이 자신의 조직을 공격하게 된다. 이런 메커니즘이 오랫동안 지속되면, 공격받은 조직이 더 이상 정상적으로 기능하지 못하고 증상이 나타나며, 미미하던 증상이 점차 악화되는 것이다.

 

 자녀의 주의력 결핍 장애, 부모님의 기억력 상실, 본인의 만성적인 뇌피로 등 어떤 문제로 고민하든 간에, 이 메커니즘을 해결해야 치유, 재생, 뇌기능 개선이 가능해진다. 애당초 우리가 물에 빠져 하류로 흘러가다 폭포를 타고 떨어져 증상의 소용돌이에 빠지게 된 원인을 파악하는 것이 첫 번째 단계다. A-A-B-C-D는 무엇이었을까? 수은, 밀, 유제품, 유독한 공기였을까? 무엇이 체내에 축적되어 뇌 안에 염증을 일으키는 것일까?

 

 구명조끼가 익사를 막아주겠거니 기대하며 무작정 증상에 대한 약만 복용하는 실수를 막기 위해, 우리는 먼저 B4가 발생했는지를 확인한 다음에, 혈액뇌장벽을 복원하고 노폐물이 뇌 속으로 침투하는 것을 막고 염증성 연쇄반응을 진정시키기 위한 환경을 조성해야 한다. 이것이 알츠하이머병과 그 밖의 뇌기능 악화를 역전시키는 근본적인 지침이다. 유발 인자를 파악하여 제거하고, 최상의 신경을 재생하기 위한 적절한 환경을 조성하는 것이 바로 뇌 건강을 회복하는 길이다.

 

 

 

 

 

-----(여기서부터는 일단 앞글만.. 뒤에 다시 보충)

 

 

 

 

 

p60. 관류 저하는 혈액 순환이 감소된다는 의미다.

 

 

 

 심장 기능이 뇌에 미치는 영향은 엄청나다. ~ 

 

 

 

p63. 네오에피토프 : 자가면역 스펙트럼이라는 최초 인식

 

 

 

 면역계가 뇌에서 자가면역 연쇄반응을 일으키게 하는 아주 흔한 유발인자는 네오에피토프(neo-epitope)이다.

 

 

 

p66. LPS에 대한 몇 마디

 

 

 

 동맥경화증은 심장을 오가는 혈류를 감소시키는 메커니즘 중 하나로, 면역계에서 우리 몸을 보호하려는 또 다른 시도다.

 

 

 

p71. 알츠하이머병의 재정의

 

 

 

 알츠하이머병은 자가면역과 뇌의 관계를 보여주는 좋은 예로, 워낙 이용할 만한 연구 자료가 많아 이 책 전반에서 언급될 것이다.

 

 

 

p79.

 

 

 

 복통은 제산제를 복용해 어느 정도 해결할 수 있을지도 모른다. 그렇더라도 중요한 건 거름망은 여전히 찢어져 있는 상태라는 것이다. 더욱이 제산제는 오늘날 네 번째로 흔하게 처방되는 약물임에도 소화기관에 큰 혼란을 일으킨다. 제산제는 염산의 생성량을 극적으로 줄이는데, 사실 HCL은 우리에게 유익하고 필요하다. 지나치게 양이 많아질 때 문제가 되는 것뿐이다. 그런데 PPI로 HCL을 대폭 감소시키면, 바람직하지 않은 박테리아가 번성할 수 있는 환경이 조성된다. 이처럼 바람직하지 않은 박테리아가 장을 압도하는 상황을 장내세균 불균형이라고 부른다.

 

 

 

p82.

 

 

 

 마이크로바이옴 구성물은 우리가 섭취하는 음식물에 따라 건강한 면역 반응을 형성할 수도, 몸을 질병에 취약한 상태로 만들 수도 있다. 불균형한 마이크로바이옴은 장 투과성 또는 장 누수를 유발하는 염증성 환경을 조성한다. 장 누수는 뇌와 관련해서도 나쁜 염증을 일으키고 뇌 호르몬 생성에 영향을 미칠 수 있어, 우울증, 불안, 인지 기능장애, 사회적 기능장애로 이어질 수 있다. 그러면 뇌와 신체 전반에서 염증이 증가하여 알츠하이머병, 불안, 기억력 상실, 뇌 안개, 감정 기복 등이 나타날 위험이 높아진다. 또 분자 모방이 발생하는 환경을 만들어, 해로운 음식과 분자 구조가 비슷한 자신의 뇌 영역들이 공격하게 만든다.

 

 우울증을 해소하기 위해 항우울제를 복용하면 뇌 호르몬의 불균형을 화학적으로 무효화하여 일시적으로 기분이 나아질 수 있다. 이런 약물은 훌륭한 구명조끼다. 약이 필요하다면 복용하라. 그렇더라도 당신은 여전히 내면의 격렬한 폭포에 맞서 허우적댈 것이다. 애초에 호르몬 불균형의 근본 원인을 해결하지 않았기 때문이다.

 

 

 

p84.

 

  

 

 뇌 호르몬은 두뇌 속도부터 감정 기복과 신진대사까지 뇌의 각종 작동 방식을 제어한다. 만약 현재 우울증을 앓거나 불안감을 느낀다면, 장에서 시작된 신경전달물질의 불균형을 겪고 있는 것이다. 우리 몸에서 분비되는 모든 세로토닌의 90%가 뇌가 아니라 장에서 분비되고 저장된다.

 

 

 

p88.

 

 

 

 연령 스펙트럼에서 노인의 반대편에 있는 자폐 아동에게서 글루텐에 대한 항체가 발견되었다. 우리는 앞서 2장에서 자폐증에 대해 이야기하며 자폐증이 관류 저하와 어떻게 연관되는지를 알아보았다. 자폐증은 워낙 복잡한 병이라 이제 막 여러 가지 원인들이 밝혀지기 시작했다. 자폐증은 뇌에 영향을 미치는 식품 과민성 측면에서 분자 모방이 어떤 역할을 하는지를 보여주는 한 예다. 나는 <영양 신경과학> 저널에 발표한 한 연구 논문에서 자폐 아동의 87%가 글루텐, 달걀, 유제품에 대한 항체를 보유하고 있음을 발견했다. 이에 비해 자폐가 아닌 아동은 1%만이 그런 항체를 보유하고 있었다. 항체 및 그와 관련된 염증이 초래하는 손상이 아마도 자폐 아동이 보이는 몇 가지 신경 증상의 원인일 것이다.

 

 

 

p89. 해로운 빵.

 

 

 

 곡물은 세계에서 가장 풍부한 식량 자원으로 인간의 행동과 정신 건강에 영향을 미칠 수 있다.~~~~

 

 

 

p92. 켈리를 만나보자.

 

 

 

 켈리는 내 환자는 아니었지만, 나는 켈리의 이야기를 잘 알고 있다. ~~~~

 

 

 

p94. 소젖에는 문제가 너무 많다.

 

 

 

 장 누수와 뇌 누수를 일으킬 수 있는 식품은 밀뿐만이 아니다. ~~~~~

 

 

 

p106.

 

 

 

 유엔 정부 간 기후변화협의체의 최신보고서는 식량과 담수 부족 확대, 극단적인 기상 현상, 해수면 상승, 생물 다양성 감소, 지구 곳곳의 인간 거주 가능 지역 축소에 따른 인류의 집단 이동, 분쟁, 유혈 사태등을 기후 변화와 연결 짓는다. 예를 들어 지구상에 식량이 부족해지면, 특히 신선한 과일과 채소가 부족해지면 우리 식단에서 항산화물질이 결핍될 것이다. 항산화물질과 폴리페놀은 염증의 불을 끄는 소화기 역할을 하는 만큼, 두 가지가 결핍되면 염증이 걷잡을 수 없이 번져 진화하기가 매우 힘들어질 것이며 궁극적으로 혈액뇌장벽 손상(B4)이 발생하고 뇌기능이 저하될 것이다.

 

 

 

p109.

 

 

 

 독소가 뇌에 도달하면 그 결과는 정말 치명적일 수 있다. 미국 질병통제예방센터의 자폐증 및 발달장애 모니터링 네트워크는 2014년 미국 어린이의 68명 중 1명꼴로 자폐스펙트럼장애를 앓고 있다고 보고했다. 내가 1980년에 치료를 시작하던 때 자폐증 유병률은 대략 1만 명중 1명꼴이었다. 매사추세츠 공과 대학의 스테파니 세네프 교수는 살충제의 광범위한 사용에 따른 글리포세이트 노출과 자폐증의 연관성을 연구하면서, '현재의 속도대로면 2025년에는 2명 중 1명의 어린이가 자폐증을 앓게 될 것'이라고 공언했다. 몸의 해독 시스템을 혹사시키는 유독성 식품과 화학적 독소 때문에 오늘날 자폐증 발병률이 그토록 높은 것일까? 아마 그럴 것이다.

 

 

 

p124. 염소 필터 샤워기 --> 알아보자.

 

 

 

p125.

 

 

 

 독소 노출을 줄이기 위해 우리가 선택할 수 있는 작은 변화는 많다. 예를 들어 동네 카페에서 주문한 커피를 받을 때 컵 뚜껑이 덮여있으면 즉시 뚜껑을 버리거나 처음부터 뚜껑 없이 달라고 요청하자. 왜 그럴까? 뜨거운 커피에서 나온 김이 BPA로 제조된 컵 뚜껑 아랫면까지 올라갔다가 응결되어 비스페놀 A가 가득한 채로 다시 커피에 떨어지기 때문이다.

 

~~~~~

 

 

 

p131.

 

 

 

 인체에서 가장 보호받는 조직은 엄마 뱃속에서 있는 태아다. 엄마 몸에서 해독 및 여과 과정을 거치지 않고 아기에게 전해지는 물질은 없으니 말이다. 그런데도 요즘 태아들이 엄마의 혈액에서 수은을 흡수하고 특히 뇌의 수은 농도는 엄마보다 40%나 높아서 신경계 발달에 치명적이라니, 이 문제가 얼마나 심각한지 감이 올 것이다. 아기 몸의 수은은 대부분 엄마의 치아 충전재에서 나온 것이다. 내가 가임기 여성들이 임신 전에 수은 충전재를 제거하고 반드시 해독을 해야 한다고 주장하는 이유도 바로 여기에 있다.

 

 

 

p161.

 

 

 

 ApoE4 변종은 다양한 인종 집단에서 만발성 알츠하이머병의 가장 큰 유전적 위험인자로 알려져있다. ~~~~

 

 

 

p165.

 

 

 

 장 투과성이 완전히 치유되지 않으면 가장 약한 고리에서 계속 손상이 발생하고, 그 부위는 주로 뇌인 경우가 많다. 유감스럽게도 장 투과성이 완치된 경우에도 우리 몸은 한 번 임게점을 넘었고 밀이 문제가 되었던 사실을 기억한다. 그래서 밀에 대한 기억B 세포를 생성하여 밀 과민성을 평생 유지한다. 우리는 항상 조심해야 하고 글루텐을 피해야 한다. 조금만 임신할 수 없듯, 조금만 밀을 먹을 수도 없는 것이다.

 

 

 

p185.

 

 그의 결론은 항상 동일했다. 환자가 "왜" 현재의 증상을 가지고 있는지 끝없이 질문해야 한다는 것이다.

 

 

 

p188. 뇌건강을 위한 실천 항목

 

1. 운동량 늘리기(구조)

 

2. '3대 유해식품'인 밀, 유제품, 설탕을 배제하고 채소, 과일, 자연산 어류를 늘린 식단으로 변화(생화학)

 

3. 다음과 같은 해독용 영양소 보충(생화학)

 

1) 엽산(비타민 B9) : 엽산(Folate)이란 이름은 나뭇잎을 의미하는 라틴어 '폴리움(folium)'에서 유래했다. 실제로 잎이 많은 채소들이 엽산의 최고 공급원이다. 활성 상태의 엽산은 약칭으로 5-MTHF이다.

 

2) 코발라민(비타민 B12) : 여러 형태의 비타민 B12 가운데 메틸코발라민은 해독 과정에 조금 더 도움이 된다.

 

3) 비타민 D3 : 충분한 양의 비타민 D3를 섭취하면 혈액 검사에서 비타민 D3 농도는 50~75ng/ml(나노그램/ml)이 나온다. 내 생각에는 적절한 수준의 비타민 D3를 유지하는 것이 건강의 가장 중요한 지표이므로 정기 검진으로 매년 점검해야 한다.

 

4) 생선기름(물고기에서 짜낸 기름) : 생선기름의 좋은 지방은 몸에 유익하다. 뇌세포를 생성하여 뇌기능을 향상시키고, 콜레스테롤 수치를 안정시키며, 장 투과성을 치유하는 유전가를 활성화시킨다. 또 자가면역질환을 줄이거나 때로는 호전시키기도 한다.

 

4. 체중 감량과 해독을 위해 간헐적 단식 도입하기(생화학)

 

5. 밤에 잠자는 동안 집에서 무선 라우터 꺼두기(전자기장)

 

6. 잠자는 동안 알람이 필요하더라도 휴대전화를 비행기 모드로 전환하기(전자기장)

 

7. 수면 개선 : 필요하면 멜라토닌 보충제 복용하기(하룻밤에 2~5밀리그램)(마음가짐)

 

8. 명상을 통해 적극적으로 스트레스 줄이기(마음가짐)

 

 

 

p194.

 

 금단증상을 줄이려면,

 

1. 수분을 충분히 공급하자. 밀, 유제품, 설탕 섭취를 중단하면 이뇨 효과가 나타난다. 섭취 중단 첫 주에 체중이 줄어든다면, 아마도 과도한 염증으로 인한 수분이 감소한 탓일 것이다.

 

2. 음식에 평소보다 약간 많은 양의 소금을 추가하자(바다소금을 권장한다). 어떤 사람들은 자주 다리에 쥐가 나는데, 소량의 바다소금으로 이를 막을 수 있다. 별것 아니다. 그냥 매일 소금만 조금씩 더 먹으면 상태가 좋아진다(의사가 달리 지시하지 않는 한). 소금을 혀에 직접 넣어보라. 만약 우리가 나트륨이 부족하고 '소금은 무조건 몸에 나쁘다'는 믿음(사실과는 전혀 거리가 멀다)을 버릴 수 있다면, 소금이 정말 맛있어서 조금 더 먹고 싶어질 것이다. 약간의 소금으로 즐거운 만족감을 얻는다면 우리 몸이 '감사하다'고 말할 것이다.

 

3. 침착성을 유지하자. 스트레스가 극에 달한 시기에는 이 프로그램을 시작하지 말자. 편안하다고 느낄 때 시작해야 바디버든을 줄이고 금단 증상도 줄일 수 있다.

 

4. 계속 움직이자. 운동은 증상에 대한 잡념을 떨져버리고 훨씬 건강한 방법으로 우리가 추구하는 엔도르핀을 생성한다.

 

 

 

p199. 애나를 만나보자.

 

 

 

 이 이야기는 내 환자의 사례는 아니지만, 내가 진심으로 관심 있게 지켜본 연구다. 나는 1990년에 이 연구가 발표된 이래로 내 모든 진료실에 이 연구 보고서의 사본을 보관해왔다. 왜냐하면 이 연구는 근골격계 치료가 왜 그토록 많은 다른 건강 문제에 도움이 되는지에 대한 전체 플랫폼을 제시하기 때문이다. 나는 이 연구 보고서를 수백 명의 환자들에게 보여주었다.

 

 이 이야기에는 만성적인 골반 통증과 소변 문제를 호소하며 의사를 찾아온 39세 여성이 등장한다. 그녀를 애나(Anna)라고 부르자. 애나의 골반 통증은 오래전 근가 18세일 때 계단에서 굴러 떨어진 직후에 시작되었다. 통증은 몸의 오른쪽에서 시작되어 점차 왼쪽에서도 나타났다. 애나의 첫 번째 의사는 그녀가 맹장염에 걸렸다고 추측했기 때문에 애나는 맹장 수술을 받았다. 그러나 추후 병리학 보고서에 따르면 그녀의 맹장은 정상이었고, 골반의 통증은 여전했다.

 

 몇 달 후 애나는 생리 주기가 심하게 고통스러워졌고, 골반 통증이 계속되었으며, 자꾸 설사를 하기 시작했다. 결국 애나는 검사와 치료를 받기 위해 입원했고, '스트레스에 따른 과민성 대장증후군'이라는 진단을 받았다. 자, 이것은 어떤 종류의 진단인가? '스트레스에 따른'이라는 증상이 본질적으로 정신질환임을 의미한다. 하지만 애나의 머리에는 아무런 이상이 없었다. 문제는 그녀의 과민한 대장이었다. 애나가 병원에서 퇴원할 때도 대장 기능에는 차도가 없었고, 애나는 평생 이 병과 함께 살아야 할지도 모른다며, 그러지 않으려면 스트레스를 줄일 방법을 찾으라는 말을 들었다.

 

 2~3년이 지나자 애나는 질 분비물을 경험했고 방광과 질 감염이 반복되었다. 여러 가지 항생제를 사용한 치료를 받았지만, 일시적으로 증상이 완화될 뿐이었다. 애나는 음순과 음핵 양측에서 생식기 통증이 나타났다. 성관계는 극도로 불편해졌고 오르가즘은 불가능했다. 극심하게 고통스럽던 생리는 과도한 출혈로 더욱 심해지고 불규칙해졌다. 애나는 생리 주기를 조절하기 위해 에스트로겐 요법을 처방받았지만 별다른 효과는 없었다.

 

 애나는 26세가 되었을 때 임신을 했다. 그녀는 요통과 양쪽 허벅지의 간헐적인 통증을 겪었고, 감각 마비와 따끔거림을 경험하기 시작했다. 애나는 오랜 진통 끝에 정상적인 건강한 아들을 출산했다. 2년 후 애나는 다시 임신했지만 5개월 반 만에 자연 유산을 겪었다. 몇 달 후 애나는 다시 임신했지만 똑같은 증상을 보였다. 이번에는 임신 7개월까지 임신 상태를 유지하다가 딸아이를 조산했다. 

 

 이 출산 후 애나의 골반과 음부 통증이 지속되었기 때문에, 세 차례나 탐색적 복부 수술을 받았다. 의사는 첫 번째 수술에서 만성 설사와 비교적 새로운 증상인 지속적인 완전 요폐, 즉 소변을 전혀 볼 수 없는 증상을 일으키는 원인이 무엇인지 찾아보았다. 하지만 그녀의 증상을 설명해줄 만한 어떤 비정상적인 점도 발견하지 못했고, 결국 애나는 일부 증상이라도 줄어들기를 바라며 부분 자궁 절제술에 동의했다. 하지만 자궁 절제술 후에도 방광 기능이나 질 주변의 감각 상실에 아무런 변화가 없는 상태로 퇴원했다.

 

 그 후 10년 동안 이 모든 증상은 지속되고 악화되었다. 하지만 전통 의학에서 더 이상 시도해볼 방법이 없자, 한 친구가 애나에게 척추지압사를 만나보라고 권했다. 맨 첫 번째 검사에서 척추지압사는 그녀에게 다양한 운동을 시켰고 그녀는 약간의 통증을 느끼기 시작했다. 검사가 끝나자 척추지압사는 애나가 자각 증상은 없지만 확연한 L5 디스크 돌출이 있다고 결론지었다. 만약 어떤 의사든 애나의 등을 엑스레이로 찍는다면, 디스크 문제를 발견했을 터였다.

 

 애나는 성실히 치료법에 따르면서 나아지기 위해 최선을 다했다. 거의 25년간의 고통이 4주 만에 사라졌다. 반복되던 방광염이 끝났고, 소변 기능이 정상으로 돌아왔다. 만성 설사는 사라졌고, 고통 없이 완전한 기능으로 남편과 성관계를 즐길 수 있게 되었다.

 

 척추지압사가 무슨 치료를 한 것일까? 허리 아래쪽의 척추를 조절하고 아주 부드럽게 견인했을 뿐이다. 애나가 겪은 문제의 원인은 무엇이었을까? 애나의 모든 증상은 18세 때 계단에서 떨어진 시점에서 시작됐다. 애나는 그때 등에 불균형이 생겼던 것이다. 이 상태가 뇌에서 신경을 통해 골반 부위까지 보내는 메시지에 영향을 미쳤다.

 

 이 여성이 수십 년간 얼마나 심하게 고통 받았는지를 생각해보라. 그녀는 유산을 했다. 20년도 넘는 인생을 고통과 기능장애 속에서 보냈다. 계단에서 떨어져 등이 균형을 잃었는데도 그녀가 만난 어떤 의사도 그녀의 척추를 들여다볼 생각조차 하지 않았다.

 

 몸의 세포는 신경에 의해 조절된다. 뇌는 모든 세포에 방향을 제시하고, 무엇을 해야 할지를 알려준다. 어떤 이유로든 뇌의 메시지 전달이 중단되면, 그 세포는 메시지를 명확히 수신하지 못할 것이고, 그러면 애나가 경험했던 모든 증상과 같은 결과를 초래할 위험이 있다. 애나의 경우, 척추 불균형이 해소되자 신경이 관절의 빈 구멍을 통해 척추 아래로 전달하는 뇌의 메시지를 다시 전달할 수 있게 되었다. 조광 스위치를 최고의 조도로 올려놓자 뇌에서 흘러나오는 '원기'가 최대한의 출력으로 전달된 것이다.

 

 척추지압요법으로 모든 병을 고칠 수 있다고 말하는 건 어리석다. 하지만 척추지압요법으로 어떤 병이든 고쳐볼 수 있다고 말하는 건 지극히 합리적이고 과학적이다. 대니얼 파머(Daniel Palmer) 박사는 1895년에 척추지압요법이 왜 실질적으로 치료 효과를 내는지 과학적으로 설명할 길이 거의 전무하던 시절에 척추지압사라는 직업을 만들었다. 파머 박사는 척추 불균형이 척추로부터 멀리 떨어진 다른 신체 부위의 기능에까지 영향을 미칠 수 있음을 최초로 입증한 사람이다. 그 후 수천만 명의 환자가 척추지압요법으로 치료를 받았고, 요통, 두통, 뇌기능장애, 근육통부터 장기 기능장애까지 다양한 질병이 호전되고 개선되었다. 다시 한번 말하지만, 우리의 건강 피라미드에서 구조의 불균형이 문제라면, 어느 부위에서 증상을 경험하든지 간에 구조를 바로잡아야 한다.

 

 

 

p204

 

 만일 목에 염증이 생기면, 그 염증은 눈, 귀, 혀, 미뢰, 심지어 심장으로 가는 메시지에 영향을 미칠 수 있다. 때로는 척추에서 오는 메시지를 처리하면 소화 문제와 속 쓰림 증상이 해결된다. 

 

 염증은 때때로 전선 중 하나에 손상을 입힐 수 있다. 그러면 맨 뒤쪽 오른쪽에 있는 집들은 괜찮다. 만약 구획으로 들어오는 중계회선인 메인 케이블(뇌)이 손상된다면, 맨 오른쪽에 있는 집(신장)에 문제가 생길 수도 있고, 맨 왼쪽에 있는 집(쓸개)에 문제가 생길 수도 있다. 이것이 나이 들수록 중추신경계와 말초신경계를 포함하여 최적의 뇌 건강을 유지하는 것이 중요한 이유다. 

 

 

 

p210

 

 가장 좋은 수면 자세는 반듯이 누워 자는 것이다. 머리에 베고 자던 베개를 빼서 무릎 밑에 집어넣자. 그리고 수건을 돌돌 말아서 고무줄로 고정시킨 다음에 목 밑에 넣어라. 수건이 베개가 된다. 그렇게 무릎 아래에는 베개를, 목 아래에는 수건을 넣고 10분간 있어보자. 만약 10분 내에 잠들지 않으면 수건을 바닥에 내던지고 예전 자세로 돌아가 다시 잠을 자자. 매일 밤 10분씩 똑같은 자세로 잠을 청해보자. 결국에는 그런 자세로 잠들게 될 것이다.

 

 이 방법은 척추와 목의 근육, 인대, 힘줄의 이완을 유도하여 원래 설계된 방향으로 움직이도록 한다. 점차 작은 수건에서 큰 수건으로 옮겨가면 척추 전만이 깊어진다. 그러면 전만 방향으로 곡선 형태를 띄는 정형 외과 베개로 바꿀 수 있다. 이 베개는 돌돌 말은 수건과 같은 위치가 곡선 형태로 불룩하다. 이제 좀 더 유연해진 목은 정상적인 방향으로 계속 움직이려고 한다. 6개월 후에는 목 아래에 정형외과 베개, 무릎 아래에 일반 베개를 베고 잠들게 되는데, 이제는 목이 똑바로 정렬되어 전보다 훨씬 푹 자게 된다. 이것은 목 요가와 같은 효과가 있다.

 

 

 

p213. 신발 뒤축을 살펴보자.

 

 너무 흔한 일이지만 만약 신발 뒤축의 바깥쪽이 닳아있다면, 발 구조가 균형을 잃어 척추가 더 빨리 마모되고 염증을 일으키며 훨씬 이른 나이에 관절염에 걸릴 것이다. 발을 디딜 때마다 갑자기 관절에 무리를 가하며 균형을 잃는 상태가 계속되어, 그 충격이 목뼈랑 연결된 머리까지 ㅣ올라올 것이다. 

 

해결책 : 척추지압사를 찾아가자. 단기적으로는 신발 굽을 갈거나 새 신발을 신자.

 

 

 

p214. 운동시 적정 심박수.

 

 먼저 1분당 180회에서 본인 나이를 빼고 5회를 더하거나 뺀 수치를 심박 모니터의 목표 범위로 설정한다. 만약 평소 맥박이 72회 이하라면 72와의 차이만큼 180에서 빼고 계산하고, 혹시 진단받은 질환이 있다면 5회만큼 더 차감하자. 예를 들어, 나는 65세이고 건강하므로 나의 목표 범위는 180-65±5일 것이다. 그러니까 내 유산소 범위는 분당 110~120회 정도인데, 내 목표는 운동하는 30분 동안 계속 이 범위를 유지하는 것이다. 하지만 잠깐, 내 평송의 맥박은 분당 58회다. 그러면 나는 먼저 180에서 14를 빼고 시작해야 한다. 일단 180-14=166이고 여기에서 내 나이 65를 빼고 5를 더하거나 빼면 96~106이 나의 목표 범위가 된다. 이것이 내가 매일 30분씩 도달하고 싶은 범위다.

 

 

 

 목표 맥박 범위 내에서 운동하면 다음과 같이 뇌기능을 보호하고 향상시키게 된다.

 

1) 학습 능력과 신경 가소성을 향상시킨다. 신경 가소성은 나이 들어서도 계속 적응하고 배울 수 있게 하는 핵심 메커니즘이다.

 

2) 치매 등 여러 신경퇴행성 질환의 발병과 악화를 지연시킨다.

 

3) 신경이 퇴화되기 시작한 후에도 기능 저하 속도가 느려진다.

 

4) ApoE4 유전자(알츠하이머병 유전자)를 보유한 사람을 보호한다.

 

5) 새로운 뉴런의 수를 증가시키고, 새로운 세포의 생존을 촉진한다.

 

 

 

 마지막으로 운동하기 전에, 운동 중에, 그리고 운동이 끝나고 나서 수분을 보충하는 것을 잊지 말자. 깨끗하고 여과된 물을 마시는 것은 염증을 예방하는 생활방식을 유지하는 데 매우 중요하다. 체중 450g당 최소 1/2온드(1kg 당 약 30ml)의 물을 마셔야 한다. 계속 체내에 수분을 공급하여 독소를 씻어버리자. 독소를 몸 밖으로 배출해야 한다.

 

 

 

p220

 

 건강 문제가 발생하는 한 가지 이유는 우리 몸이 항상 교감신경계가 지배하는 상태에 머물러 있도록 설계되지 않았다는 데 있다. 얇은 교감신경이 적절한 절연재 없이 과도하게 사용되면, 말 그대로 지치기 시작하여 염증이 발생한다. 이렇게 되면 뇌, 신경계, 그 밖의 어디에서든 유전 사슬의 약한 고리에 대한 항체가 증가할 가능성이 훨씬 더 높아진다. 우리의 신경계는 부교감신경 지배 상태(태어날 때)에서 교감신경 지배 상태로 변하게 된다. 이런 상태가 충분히 오래 지속되면, 얇은 교감신경계가 원래의 용도보다 훨씬 더 자주 사용되어 마모되기 시작하면서 교감신경계 지배 상태에서 교감신경계 피로 상태로 변하여, 우리는 깨어 있는 대부분의 시간에 피곤함을 느끼게 된다. 그런데도 스트레스가 계속된다면 교감신경계 피로 상태에서 교감신경계 탈진 상태로 바뀔 것이고, 여전히 '투쟁(fight), 겁에 질림(fright), 도피(flight)' 반응이 계속된다면 결국에는 교감신경계 소진 상태로 이어지게 된다.

 

 퇴행성 질환은 교감신경계 소진 상태에서 발생한다. 부교감신경계 지배 상태로 되돌아가지 않으면, 우리는 유전 사슬의 약한 고리에서 생기는 어떤 질병에든 극도록 취약해질 수밖에 없다. 이 시점에 스트레스는 우리에게 더 많이, 더 자주 영향을 미친다. 온몸이 녹초가 된 기분이라면, 실제로 그런 상태인 것이다. 뇌의 회복력도 형편없이 떨어져, 우리는 인생의 어떤 상황에 처하든 적응하기가 힘들어진다.

 

 

 

p223

 

 심지어 2015년에도 <뉴잉글랜드 의학 저널>은 위약 효과의 정당성을 인정하기 위한 노력에서 다음과 같이 보고했다. "위약 효과는 신경전달 물질과 관련된 복잡한 신경생물학적 메커니즘과... 측정 가능한 뇌의 특정 관련 부위들(예를 들어 위약 통각상실증의 경우 전두엽 피질, 전측 뇌섬엽, 입쪽전방대상피질, 편도체 등)의 활성화에 의존한다." 이는 우리가 뇌에 미치는 위약 효과를 측정할 수 있을 뿐만 아니라 약물에 영향을 받는 동일한 경로를 활성화시킬 수 있다는 의미다. 위약 효과에 대한 '나쁜 소문'은 대부분 자사의 약품을 복용하는 편이 약을 먹지 않는 편보다 더 효과적이라는 사실을 입증하려 애쓰는 제약업계에서 나온다. 여기서 진실을 밝히자면, 우리가 생각하는 대상, 그것을 생각하는 방식, 그리고 우리의 전반적인 인생관이 몸에서 분비되는 호르몬에 '가장 강력한' 영향을 미치고, 그런 호르몬에 따라 모든 약효나 부작용이 결정된다. 스트레스 호르몬이 분비되면 스트레스를 많이 받아 온몸이 탈진하게 된다. 반면 긴장을 완화하는 부교감신경 호르몬이 분비되면 심장박동이 진정되고 호흡이 깊어지며 평화로운 뇌파가 우세해진다. 이것이 수천 년 동안 이어져온 명상에서 얻는 기본적인 효과이다. 

 

 

 

 그렇다면 왜 그런지가 궁금해진다. 어떻게 결과를 상상하는 것으로 실제 몸이나 뇌가 돌아가는 방식을 바꿀 수 있는 걸까? 우리의 유전자가 곧 우리의 운면을 결정하지는 않는다고 말할 수 있는 또 다른 이유가 바로 여기에 있다. 우리가 정말 좋아질 수 있다는 믿음은 실제로 건강에 영향을 줄 수 있다. 이런 믿음에 따라 달라지는 건강 결과를 조사한 과학적 연구들도 있다. 2007년의 한 연구에서는 청소 업무를 담당하는 호텔 직원 84명을 두 집단으로 나눴다. 한 집단은 그들의 청소 업무가 의사들이 권장하는 운동의 조건에 부합하여 건강한 생활방식의 일환이라는 말을 들었다. 다른 집단은 아무 말도 듣지 못했다. 일정 기간이 지나자 첫번째 집단은 체중, 혈압, 체지방, 허리 - 엉덩이 비율, 체질량 지수가 모두 감소하여 운동이 부분적으로나 전적으로 위약 효과를 통해 건강에 영향을 미친다는 연구진의 가설을 뒷받침했다. 단지 청소가 운동이라는 생각의 전환만으로도 청소를 그저 일로만 생각했던 집단과 달리 실질적이고 확실한 건강상의 개선을 보인 것이다.

 

 

 

 뇌 건강의 경우에도 우리의 태도가 그에 못지않게 중요하다. 1998년에 항우울제의 효능을 테스트하는 데 사용된 19건의 실험에 대한 메타분석이 실시되었다. 측정된 치료 효과의 25%만이 약물의 작용에 기인한 반면, 연구 전반에서 75%의 의 위약 효과가 확인되었다. 이에 대한 후속 연구로 2008년에 다시 검토가 진행되었는데, 이때에는 미발표된 연구에 접근할 수 있도록 미국정보공개법(Freedom of Information Act)에 호소해야 했다. 제약업계에서는 그런 연구 결과를 감추려 들었기 때문이다. 2008년의 검토에서는 이런 누락된 연구들을 데이터에 포함시켰을 때 항우울제가 위약 효과를 능가하는 경우는 46건의 실험 중에 20건뿐이었다. 연구자들은 다음과 같이 요약했다. "(위약에 비해 항우울제의) 우월한 효과가 임상적 유의성에 대한 허용 기준보다 낮다. 이 검토는 항우울제를 권장하는 것이 바람직하다 할 만큼 그 효능이 입증되지 않는다는 사실을 보여주었다. 심지어 많은 사람이 경험하는 항우울제의 부작용인 체중 증가, 성욕 상실, 혈전 감소, 위 출혈과 자궁 출혈의 위험 증가 등을 고려하지 않았는데도 그러했다. 그렇지만 우리는 개인의 이익보다 기업의 이익을 우선시하는 탐욕스럽고 이기적인 정책이 판을 치는 세상에 살고 있다.

 

 

 

 우리의 믿음이 어떻게 우리의 인생 경험을 직접적으로 형성하는지를 보여주는 연구는 대단히 많다. 세계적으로 유명한 암 치료의 선구자 니콜라스 곤잘레스(Nicholas Gonzalez) 박사는 공포야말로 가장 효과적인 치료 프로토콜도 파괴할 수 있는 전염성 질병이며, 믿음은 아무런 프로토콜 없이도 질병을 치유하는 힘이 있다고 믿었다. 자신의 치료 과정에 대한 긍정적인 태도와 몸의 자생력에 대한 믿음이 질병을 호전시키는 결정적인 요소란 얘기다. 임상전신과의사이자 기능의학자인 켈리 브로건(Kelly Brogan)은 저서 <당신 자신의 마음(A mind of Your Own)>에서 만약 우리가 건강 여행을 호기심, 자아성찰, 그리고 불균형 상태에 대처하라는 초대의 수락으로 바라본다면, 우리의 에너지를 질병 상태가 아니라 더 새롭고 건강한 자신이 되는 데 집중할 수 있다고 말한다. 그녀도 나처럼 건강을 변화시키는 힘은 우리가 그렇게 믿는 한 우리 안에 내재한다고 믿는다. 

 

 

 

 한 번에 한 걸음씩, 꾸준히 안타만 쳐도 야구 경기에서 이긴다. 우리는 홈런에 대한 기대를 버려야 한다. 우리 몸과 삶은 그런 식으로 돌아가지 않는다.

 

 

 

p227

 

 모든 행동을 변화시키는 핵심은 자각이다. 감사하는 마음으로 살며 더욱 평온해질수록, 현재의 건강 상태를 자각하고 미래의 건강 목표를 세우기가 더욱 쉬워진다. 우리는 비판단적인 태도로 현실에 대한 자각에 이르러야 한다. 예를 들어 글루텐 프리 식품을 먹는다는 자각은 검사 결과 우리 면역계에서 가급적 피하려고 애쓰는 작은 독소를 우리 몸속에 집어넣는 대신, 새로운 선택이 몸에 이롭다는 것을 깨닫는다는 의미다. 자각은 글루텐 프리 식품을 먹는 습관을 단지 처벌이나 의무로 보지 않고 우리 몸속에 건강한 연료를 제공하는 습관의 가치를 인정하는 것이다. 자각이란 심장 박동에 대한 이해부터 글루텐 프리 식품을 먹을 때 얻게 되는 이점까지 우리 몸이 어떻게 작동하는지를 이해하는 것이다. 이는 단지 우리가 내리는 결정을 더 잘 안다는 의미가 아니다. 몸의 물리적 상태를 자각하고 공감과 친절로 그 자각을 수용하는 것이다.

 

 

 

p231

 

 마음 챙김(mindfulness)에 기초한 평온한 마음가짐으로 건강 문제를 해결할 수도 있다. 마음 챙김이란 경험에 반응하거나 매몰되지 않고 현재 순간에 일어나고 있는 모든 일을 개방적이고 수용적으로 자각하고자 하는 정신적 연습이다. 마음 챙김 수련의 목적은 명시적으로 경험의 내용을 바꾸는 것이 아니라 경험과 맺는 관계를 바꾸는 것이다. 우리 삶에 스트레스를 야기하는 방아쇠를 바꿀 수는 없어도 그런 방아쇠에 반응하는 방법은 바꿀 수 있고, 그러면 그 방아쇠가 우리 몸과 마음에 미치는 영향도 변하게 된다. 마음 챙김은 다양한 만성 질환과 정신 건강 문제에 개입하는 데 유용한 방법이다. 일례로 한 연구에서는 마음 챙김이 만성 우울증의 재발률을 감소시키고 불안과 우울증의 초기 치료 효과를 향상시킬 수 있다고 밝혔다.

 

 미국 해병대의 회복탄력성 훈련 프로그램(Reflection Training Program)은 마음 챙김 기법이 개인에게 마음을 재정비할 시간을 주어 스트레스 받는 사건에 대한 신체적, 정신적 반응을 감소시킨다는 사실을 입증했다. 2012년의 한 중요한 연구에서는 마음 챙김을 다른 건강 증진 프로그램(다이어트, 운동, 약물 등)과 비교한 결과 마음 챙김 훈련이 염증성 반응을 현저히 감소시키고, 설령 외부의 방아쇠에 반응하여 스트레스 호르몬이 계속 분비되더라도 염증성 반응이 줄어드는 결과를 보여주었다.

 

 

 

p237

 

 이들은 공저인 <자기혁신 프로그램(Changing for Good)>에 심리치료 없이도 자신의 삶을 긍정적으로 바꿀 수 있었던 1,000명 이상의 사삶을 연구한 끝에 얻은 결론을 소개하고 있다. 이들은 변화가 행운이나 의지력에 의존하지 않는다는 것을 발견했다. 이들은 변화가 행운이나 의지력에 의존하지 않는다는 것을 발견했다. 이들은 변화가 행운이나 의지력에 의존하지 않는다는 것을 발견했다. 변화는 그것의 작동 기제를 이해하는 사람이면 누구든 성공적으로 관리할 수 있는 과정이다. 일단 우리가 변화의 5단계 중 현재 어디에 있는지를 파악하면, 우리가 있어야 한다고 생각하는 곳이 아니라 실제 서 있는 바로 그곳에서 긍정적인 변화가 일어날 수 있는 환경을 조성할 수 있다.

 

 

 

 변화의 5단계는 다음과 같다.

 

1. 무관심 :이 단계의 사람들은 자신의 행동을 변화시키려는 생각조차 하지 않는다. 이들은 자신의 생활방식이 건강과 행복에 영향을 미치는 문제라는 사실을 모른다.

 

2. 심사숙고 : 이 단계의 사람들은 건강상 문제가 있을 가능성을 기꺼이 인정하며, 그 가능성 때문에 변하고 싶다는 희망을 갖는다. 그러나 이들은 보통 매우 양면적이어서, 애매한 태도를 취하며 지켜만 본다. 이 단계에 있는 사람이 변화에 성공할지를 가늠하는 기준은 냉소주의적("나는 이것을 믿지 않는다. 이것은 사실이 아니다") 태도보다는 회의주의적("나는 이것을 믿지 않지만 더 많은 정보를 살펴볼 용의가 있다") 태도의 유무다. 심사숙고는 변화를 향해 올바른 방향으로 나아가고는 있지만, 적극적으로 노력하지 않는 태도다.

 

3. 준비 : 이 단계의 사람들은 가까운 미래에 자신의 생활방식을 개선하고자 진지하게 시도할 것이다. 이들은 (예컨대 이 책을 읽음으로써) 충분한 정보를 얻은 후에 행동을 변화해 건강을 증진할 수 있다고 확신하므로 행동할 준비가 되어있고 기꺼이 노력한다.

 

4. 실행 : 이 단계의 사람들은 계획을 실행에 옮기고 몇 주 후에 결과를 확인하기 시작한다. 이전의 성공만큼 새로운 성공을 보장하는 것도 없다. 계획을 실행한 사람은 그 효과를 맛보고 건강상의 긍정적인 변화를 경험하기 시작한다.

 

5. 유지 : 나는 항상 환자들에게 지구상에서 효과가 있는 방법을 찾아내고도 그것을 그만두는 유일한 종은 인간뿐이라고 말한다. 영구적인 변화를 원한다면 오랜 세월에 걸쳐 새로운 행동 패턴을 만들고 계속 유지해야 한다. 몇 달 동안 글루텐 섭취를 끊어서 상태가 좋아지고 나면 다시 글루텐이 들어있는 생일 케이크나 블루베리 머핀 한 조각을 먹고 싶은 유혹에 빠지는 것이 일반적이다.

 

 

 

그러나 일단 그것을 먹고 나면, 장담하건대 다시 상태가 나빠졌음을 느끼게 되고 좋은 상태를 유지하는 노력의 가치를 실감하게 될 것이다. 나쁜 습관이나 오래된 즐거움으로 돌아가는 얼빠진 짓을 하는 게 인간의 본성이다. 그러고 나면 스스로 엉망이라고 느끼고, 다시 정상 궤도로 돌아가서, 상태가 좋아진다. 이처럼 쓰러졌다가 다시 벌떡 일어서기를 몇 번이고 반복한 후에야 생일 케이크의 유혹("딱 한 입만 먹어야지")이 사라질 것이다. 새로 선택한 생활방식을 6개월 동안만 유지하고 나면, 유혹에 안전할 수 있다.

 

 

 

p253. 케토시스를 향상시켜 인지력 상실을 예방하고 상황을 역전시키자.

 

 

 

 만약 이미 인지력 상실이나 기억력 장애 증상이 나타나기 시작했다면(예를 들어 자동차 키를 어디에 두었는지 자주 궁금해한다면), 단기간(1~3개월) 동안 케톤 생성 식단(ketogenic diet)를 택할 것을 추천한다. 케톤은 음식물 공급이 부족하여 에너지를 얻기 위해 몸에서 지방을 분해할 때 생성되는 부산물인데, 뇌와 신체에 에너지를 공급하는 효율적인 백업 시스템이 된다. 저장된 지방세포를 연소시켜 케톤을 생성하는 것은 우리 조상들이 며칠이나 몇 주씩 먹이를 구하지 못하고도 살아남을 수 있었던 비결이다. 우리는 '케토시스'라는 과정을 통해 케톤에 접근할 수 있는데, 케토시스는 특히 이미 혈당이 제대로 기능하지 않는 사람들에게 뇌세포에 연료를 공급하는 쉽고 대안적인 방법으로 알려졌다.

 

 만약 뇌기능 증상이 나타난다면, 당신의 뇌가 염증 유발 인자에 반응하면서 이미 포도당을 연료로 사용하는 능력을 일부, 많으면 24%까지 상실했을 가능성이 높다. 당신의 뇌는 말 그대로 굶주리고 있고, 그 결과 더 많은 염증이 생기고 더 많은 뇌기능이 손상된다. 이로써 악순환이 이어진다. 그러나 몸을 케톤 생성 상태로 유지하면 뇌세포에 연료를 더 잘 공급할 뿐만 아니라 전반적인 뇌기능과 건강을 향상시킬 수 있다는 연구 결과가 있다. 특히 케톤 생성 상태를 유지하면 알츠하이머병 환자의 기억력과 인지력이 모두 향상된다고 알려졌다. 케톤 생성 상태가 관류 저하를 줄이고 뇌로 가는 혈류를 증가시키기 때문이다.

 

 진정한 케톤 생성 식단은 당신에게 모든 탄수화물을 피하도록 시킬 것이다. 그러나 인체는 영원히 탄수화물 없이 살 수 없다. 나는 당신이 이 식단을 1~3개월 동안 시도해보고, 얼마나 믿기 힘들 정도로 기분이 좋아지는지를 확인하고 나서, 서서히 덜 제한적인 식단으로 돌아갈 것을 제안한다. 그때쯤에는 그동안 케톤 생성 식단을 통해 경험한 뇌기능 향상과 체중 감량 효과를 유지하기 위해 더 건강한 탄수화물 식품을 추가하되 글루텐, 유제품, 설탕은 반드시 피하면서 간헐적 단식을 도입하기에 좋은 시점이 될 것이다. 식단에 소량의 탄수화물을 다시 첨가하면 어떤 반응이 나타나는지 주의 깊게 살펴라. 탄수화물을 다시 먹기 시작한 후에 증상이 재발하거나 향상된 뇌기능이 흐려지기 시작한다면, 그 정도의 탄수화물 양을 다시 섭취할 준비가 아직 안 된 것이다. 다시 1주나 2주 정도 식단에서 탄수화물을 제외시킨 다음, 더 적은 양의 탄수화물을 추가하여 반응을 살펴보자.

 

 케톤 생성 식단은 좋은 결과를 낳지만 전체 프로그램의 일환일 뿐이다. 일반적인 구명조끼보다는 낫지만 그래도 무엇보다 하루 빨리 소용돌이에서 빠져나와야 한다. 영원히 탄수화물을 피할 수는 없다. 우리 몸은 탄수화물을 일차 에너지원으로 사용하도록 설계되어 있다. 그리고 체중 감량 프로그램의(요요현상이 계속 반복되는) 롤러코스터 타기와 달리, 뇌 건강 프로그램을 영구히 유지하는 방법은 상류로 거슬러 올라가 근본 원인, 유발 요인, 메커니즘을 밝혀내는 것이다.

 

 케톤 생성 식단을 성공키시고 뇌 건강에 영구적인 성과를 얻을 가능성이 가장 높은 방법은 이 식단을 지금부터 이번 장에서 소개할 나의 다면적 영양 접근법과 결합하는 것이다. 그러면 식품 과민성, 환경 독소 노출, 이미 진행 중인 누적된 손상도 해결할 수 있다. 거기에 단헐적 단식을 실천하고 중쇄지방산(MCT) 오일과 그 밖의 중요한 영양분을 보충하여 적절한 음식을 꾸준히 섭취한다면 최고의 결과를 얻게 될 것이다. 일례로 코코넛 오일과 야자 오일에서 발견되는 중쇄지방산에 대해서는 많은 연구가 이루어졌다. 하지만 야자 오일은 건강에 좋지 않다.(야자 오일은 팜유를 의미하며, 현재 우리나라 라면-아마 외국도-의 대부분이 이 팜유로 튀겨낸다) 절대 사용하지 말라.(그러니 라면을 먹을때 라면을 한번 끓여서 기름성분을 우려낸 후 먹는 것이 좋다. 귀찮긴 하지만 건강을 위한다면 특히 그렇다. 특히 라면 먹으면 몸에 이상 증상이 생기는 사람들은 대부분 이 팜유로 인한 것이다.) 중쇄지방산은 미토콘드리아라는 모든 뇌세포의 강력한 에너지 발전소에 쉽게 접근하 수 있는 연료를 공급한다.

 

 

 

GMO에 대한 몇 마디

 

 

 

 식품 건강 문제와 관련하여 나의 주요 관심사 중 하나는 유전바 변형 식품 및 생물체, 일명 GMO의 보급이다. 유전자 변형 식품은 1994년부터 대대적으로 상용화되었다. 미국 식품의약국(FDA)과 미국 농무부(USDA)에 따르면, 오늘날 40가지가 넘는 유전자 변형 식물종이 있는데 쌀, 콩, 옥수수 등의 세 가지 곡물이 가장 널리 분포 되어있다. 2012년에는 미국에서 생산된 옥수수, 콩, 면화의 90% 가까이가 GMO 품종이었다.

 

 현재 시판 중인 유전자 변형 식용작물은 콩, 옥수수, 면화(오일), 카놀라(오일), 사탕무에서 얻은 설탕, 주키니 호박, 노란 호박, 하와이 파파야, 알팔파 등 9종이다. 유전자 변형 곡물은 주로 가축들에게 먹이는데, 유제품, 달걀, 소고기, 닭고기, 돼지고기, 기타 동물성 식품에 영향을 미친다. 원료의 일부는 토마토소스, 아이스크림, 땅콩버터 같은 다양한 '천연' 가공 식품에도 추가된다. 유전자 변형 옥수수나 콩은 청량음료뿐 아니라 일부 향신료와 조미료 혼합물에도 첨가된다. 실제로 식물성 오일이나 아침용 시리얼 등 모든 가공식품의 80% 이상에 유전자 변형 성분이 포함된다.

 

 GMO 밀도 곧 우리의 주방으로 들어올 것이다. 그동안 밀은 수년에 걸쳐 자연 번식 기술을 통해 교잡되어 더욱더 많은 글루텐과 FODMAP이란 발효성 탄수화물 등의 기타 유해 성분이 함유되었다. 대부분의 GMO 작물처럼 밀에도 라운드업(Roundup)이라는 제초제가 뿌려지는데, 라운드업의 활성 성분인 글리포세이트는 이제 명실상부하게 인체의 잠재적 발암물질로 분류된다.

 

 미국에서는 밀을 수확하기 몇 주 전에 라운드업을 살포한다. 여기에는 두 가지 이유가 있다. 첫째, 제초제를 뿌리면 죽은 밀밭이 콤바인을 가로막지 않기 때문에 수확 작업이 더 용이하다. 둘째, 독성 화학물질 때문에 스트레스를 받은 식물은 생존하기 위해 토양으로부터 더 많은 영양분을 빨아들인다. 이런 영양분이 밀 씨앗으로 흡수되어 더 많은 글루텐을 함유한 밀이 탄생한다. 따라서 미국에서 생산되는 대부분의 밀 제품에는 더 많은 글루텐이 함유되는 것은 물론, 암을 유발하는 글리포세이트의 자취가 있다.

 

 

 

 각종 동물 연구를 통해 과학자들은 GMO가 면역계, 간, 신장에 손상을 초래할 수 있다고 주장해왔다. 특히 라운드업은 장내 미생물군을 변화시키고 장 투과성을 증가시키는 환경을 조성하는 것으로 밝혀졌다. 과학자들은 라운드업과 간 해독 능력의 상호작용을 연구하면서, 이 화학물질이 항상성을 파괴하고 뇌의 기억 중추인 해마에 과도한 염증을 일으키는 것을 비롯해 각종 자가면역반응을 유도한다며, 환경 유발 요인의 '교과서적 사례'라고 입을 모았다. GMO는 또 위장질환, 비만, 우울증, 자폐증, 불임, 암, 알츠하이머병과도 관계가 있다. 글리포세이트가 식품 생산에 도입된 후로 뇌졸증으로 인한 사망자가 증가했다는 통계가 있다.

 

 

 

 이런 이야기가 충격적이고 언짢다는 것을 알지만 이런 정보는 지난 30년 동안 수많은 질병이 급격히 증가한 이유를 설명하는 데 도움이 된다. 

 

 

 

p259. 좋아하는 신선 식품을 즐기자

 

 

 

 당신은 모든 종류의 과일, 채소, 향신료, 견과류를 먹을 수 있다. 신선한 제철 식품이라면 더욱 그렇다. 나는 항상 신선한 과일과 채소를 먹으라고 추천하지만, 사실 이를 구하기가 쉽지 않다. 냉동 과일과 채소는 잘 익은 과일과 채소를 수확한 뒤 냉동한 것으로, 산화방지제와 폴리페놀의 완전한 성분이 함유되었을 가능성이 높아 허용된다. 가능하면 유기농 농산물을 선택하고 현지에서 재배하는 품종을 고르자. 설탕이나 소금을 이용해 보존되었을지 모르는 통조림 과일과 채소는 피한다. 볶은 땅콩에는 생땅콩보다 더 많은 레스베라트롤이 함유되어 있는데, 레스베라트롤은 뇌와 심혈관 계통을 보호한다고 알려진 적포도주에서도 발견되는 유익한 성분이다. 단 땅콩 외의 모든 견과류는 날것으로 먹어야 한다. 

 

 

 

 많은 신선 식품이 위장을 치유하는 기능이 있다고 알려져있다. 이 식품들은 천연적으로 항염증성이기 때문에 건강에 좋은 선택지다. 매일매일 다음의 목록에서 한 가지라도 먹도록 하자.

 

 

 

1) 계피

 

2) 십자화과채소(브로콜리, 방울양배추, 콜리플라워, 양배추, 청경채) : 대장의 염증을 낮추는데 특히 유용한 강력한 폴리페놀인 글루코시놀레이츠라는 필수 영양소군이 함유되어 있다.

 

3) 베리, 체리, 적포도 등 폴리페놀 함량이 높은 짙은 색 과일

 

4) 녹차 : 프리바이오틱이다.

 

5) 오메가3 지방산 : 인체에서 합성되지 않으므로 식이요법을 통해 얻어야 한다. 우리 몸에 여러 가지 좋은 기능을 하는데, 특히 위장의 염증을 낮추는 유전자를 활성화시킨다. 오메가3가 많이 함유된 식품은 풀을 먹인 소고기, 냉수성 어류, 해산물, 흑호두, 피칸, 잣, 치아씨, 아마씨, 바질, 오레가노, 정향, 마조람, 타라곤 등이다.

 

6) 파슬리

 

7) 토마토 쥬스

 

 

 

p263

 

 혈당지수가 높은 식품으로는 아이스크림, 빵, 그 외 모든 밀가루 제품, 감자, 건포도, 감자칩, 알코올음료, 백미 등이 있다. 실제로 <밀가루 똥배>의 저자인 윌리엄 데이비스 박사에 따르면 밀 제품의 혈당지수는 모든 식품 중에서 가장 높다. 반면 혈당지수가 낮은 식품이 더 영양가가 있는 것으로 여겨지는데, 대부분의 다른 과일, 채소, 콩류가 이에 해당한다.

 

 

 

 혈당지수는 확실히 더 나은 식품을 선택하는 데 도움을 주며, 소위 건강한 식품의 몇 가지 문제도 지적한다. 예를 들어 건강에 좋다고 알려진 통밀빵은 한 쪽만 먹어도 혈당지수가 69로 높은 편이다. 땅콩 덕분에 혈당지수가 42에 불과한 스니커즈보다 훨씬 높다.

 

 

 

 저혈당으로 알려진 과일(살구, 자두, 사과, 복숭아, 배, 체리, 베리)은 탁월한 선택이다. 베리 같은 일부 과일은 몸에 좋지만, 우리가 당분을 너무 많이 먹는데 죄책감을 느끼다 보니 우리의 혈당 조절 체계는 필요 이상으로 과민하다. 

 

 

 

p264. 견과류와 씨앗

 

 

 

 견과류와 씨앗은 훌륭한 단백질 공급원이다. 게다가 요즘에는 밀가루 대신 사용할 수 있는 견과류와 씨앗의 가루와 버터도 있다. 특별한 알레르기나 과민성이 없는 한, 생견과류나 씨앗 중에 먹어선 안될 것은 없다. 땅콩과 코코넛도 좋은데, 둘 다 엄밀히 따지면 견과류나 씨앗은 아니다. 땅콩은 콩류에 속하고 코코넛은 과일이다.

 

 

 

 그렇다고 삼절 진열대의 아무 견과류바나 먹어도 좋다는 의미는 아니다. 항상 재료와 성분표시 라벨을 주의 깊게 읽고, 설탕이나 유제품으로 만든 바와 글루텐 프리 표시가 없는 바는 피해야 한다. 유기농 가공식품과 글루텐 프리 가공식품도 건강에 좋지 않은 재료로 만들어진 경우가 많다.

 

 

 

 좋은 씨앗과 견과류의 선택지는 다음과 같다.

 

아몬드, 호주너트, 너도밤나무 열매, 흑호두, 브라질너트, 버터너트, 캐슈, 밤, 치아씨, 중국 아몬드, 중국 밤, 개암, 아마씨, 헤이즐넛, 대마씨, 호두, 콜라 너트, 타이거 너트, 마카다미아, 피칸, 잣, 피스타치오, 양귀비씨, 호박씨, 홍화씨, 참깨씨, 해바라기씨, 인도 너도밤나무 열매

 

 

 

p265. 채소

 

 채소는 적용할 수 있는 요리가 아주 많다. 채소는 날것으로 먹거나 살짝 데치거나 구워 먹거나, 볶아서 간식, 반찬, 메인 요리로 즐길 수 있다. 수프, 칠리소스, 스튜, 구이, 샐러드, 볶음, 캐서롤에도 넣을 수 있다. 가능하면 구할 수 있는 최고 품질의 채소를 구입하는 것을 목표로 삼자. 이 말은 기회가 있을 때마다 유기농, 로컬, 산지 직송 제품을 구하라는 의미다.

 

 

 

p277. 건강한 지방

 

 

 

 코코넛과 코코넛 제품은 건강한 지방이 가득한 식품으로 상온에서도 오랫동안 상하지 않는다. 코코넛의 크림 같은 질감은 유제품 프리 음식을 만들기에 좋다. 코코넛 밀크는 지방 함량이 높아서 어떤 레시피에도 유제품을 대체할 수 있다. 코코넛을 이용한 식품은 뇌 건강에 도움이 된다. 코코넛 오일에는 중쇄지방산(MCT)이 함유되어 신경보호 효과가 있다고 알려져있다. 중쇄지방산은 몸에 쉽게 흡수되어 에너지로 사용되고, 또 간에서 쉽게 신진대사가 되어 뇌의 대체 연료인 케톤으로 전환되므로, 혈당에 대한 의존도도 줄일 수 있다. 또한 코코넛에 들어있는 페놀 화합물은 알츠하이머병의 진행에서 핵심 과정인 베타아밀로이드 반점의 축적을 막는다.

 

 

 

 가장 적게 가공한 요리용 오일에는 '엑스트라버진'이나 '콜드프레스'같은 라벨이 붙어있다. 자외선 차단되는 병에 담아 판매하는 오일을 찾아보자. 그런 오일이 빨리 상하지 않는다. 오일을 사용해 요리할 때 가장 주의해야 할 점은 연기가 날 때까지 가열하지 않도록 주의하는 것이다. 오일에서 연기가 나기 시작하면, 오일이 산화되면서 다량의 유리기가 생성된다. 그래서 가열점이 높아 연기가 쉽게 나지 않는, 건강에 좋은 오일을 찾아야 한다.

 

 건강에 좋은 오일로 추천할 만한 선택지는 다음과 같다.

 

 

 

  아보카도 오일, 코코넛 오일, 기(ghee) 버터, 마카다미아 오일, 올리브 오일

 

 

 

p289. 유제품을 먹지 않는 방법

 

 

 

 소젖의 단백질 구조는 인간 모유에서 발견되는 단백질 크기의 8배에 달하기 때문에, 많은 사람이 소젖을 소화하는 데 어려움을 겪는다. 염소젖의 단밸질 구조는 인간의 모유보다 6배 크기다. 소젖보다는 낫지만 역시 소화하기가 쉽지 않다. 그러나 구할 수만 있다면 몇몇 종류의 동물 유제품은 잘 소화시킬 수 있다. 2007년 <알레르기 및 임상 면역학 저널>에 실린 연구에 따르면, 동물 젖이 인간 모유 단백질과 62% 이상 비슷한 단백질 구조를 가지고 있으면, 오히려 그 젖이 알레르기 반응을 일으키지 않을 가능성이 더 높다고 한다.

 

 

 

 이런 동물성 유제품이 실제로 존재한다. 일부 민속 특산품 가게에서는 낙타유, 순록유, 당나귀유 등 소젖의 좋은 대용품을 판매한다. 나는 얼마 전에 낙타유를 먹어봤는데, 소젖을 먹을 때 생기는 전형적인 점액 생성 부작용이 없었다. 나는 동물성 유제품을 부어 시리얼 한 그릇을 먹은 지가 오래되었는데, 낙타유는 그 갈망을 충분히 채워주었다. 

 

 

 

 그 외에도 우유를 대체할 수 있는 많은 동물성 유제품이 있다. 나는 유기농 제품이라도 두유를 좋아하지 않는다. 콩의 장단점을 보여주는 여러 연구가 있는데, 식물성 에스트로겐의 영향에는 의문의 여지가 없다. 콩에서 나오는 식물성 에스트로겐 분자들은 체내의 수용체 부위에 결합하여 약한 에스트로겐 호르몬처럼 작용한다. 에스트로겐이 결핍된 상태라면 콩을 추가로 섭취해도 좋을 것이다. 그러나 에스트로겐이 적절하거나 과도한 상태라면, 콩은 남녀 모두에게 나쁠 수 있다. 더욱이 콩의 장점을 보여주는 연구는 아시아 연구 기관들에서 주로 나오는데, 그곳에서는 실험 참여자들이 전지 대두로 만든 음식을 먹는다.

 

 

 

 내가 가장 좋아하는 우유 대용품은 코코넛 밀크로, 여기에는 HDL콜레스테롤을 향상시키는, 심장 건강에 좋은 포화 지방인 라우르산이 풍부하다. 견과류나 쌀로 만든 유제품도 있다. 어쨌든 원칙적으로 항상 무가당 제품을 선택하라. '플레인' 우유 대용품에는 실제로 1컵당 6g의 설탕이 첨가되어 있다. 맛이 가미된 제품은 1컵에 12g에서 20g까지 첨가될 수 있다. 성분표시 라벨에서 '무가당' 표시를 찾으면 설탕이 첨가되지 않은 바닐라 맛을 찾을 수 있다.

 

 

 

p296

 

 

 

 알코올 노출은 장에서 그람 음성 박테리아의 성장을 촉진하여 내독소가 축적되게 할 수 있다. 더욱이 그람 음성 박테리아와 장내 상피세포에 의한 알코올 대사 작용으로 아세트알데히드가 축적될 수 있는데, 이는 다시 치밀 결합 및 부착 결합 단백질의 타이로신 인산화를 증대시켜 내독소의 장 투과성을 높일 수 있다. 또 알코올로 인해 생성된 산화질소는 튜불린과 반응하여 내독소의 투과성 향상에 일조할 수 있고, 그 결과 미세관 세포골격에 손상을 입히고 장 방어벽 기능을 붕귀시킬 수 있다.

 

 

 

 내가 왜 이 대목을 인용했을까? 알코올 섭취는 튜불린(tubulin, 모든 신경 세포 내의 비계)을 손상시켜 튜불린에 대한 많은 항체를 생성하므로, 튜불린 항체 수치는 뇌염의 생체지표 중 하나가 된다. 이는 장 질환이 뇌염과 혈액뇌장벽 손상의 원인이 되는 예이다.

 

 

 

 알코올은 아무리 좋은 와인이라도 장을 손상시켜 장 투과성을 초래하고, 장내 세균을 좋지 않은 방향으로 변화시킨다. 혹시 장 누수를 치료하는 중이라면, 장 내벽이 치유되는 동안 알코올을 완전히 피해야 한다.

 

 

 

p305

 

 또 장 누수의 자연적인 치료법으로 초유를 추천한다. 초유는 출산 후 처음 3~5일 동안 나오는 젖으로 모유와는 전혀 다르다. 초유는 출산 과정에서 모든 포유류의 젖샘에서 분비된다. 초유에는 신생아를 질병으로부터 보호하는 데 필요한 항체가 포함된다. 초유는 지구상의 어떤 물질과도 다른 방식으로 유전자를 조절한다. 이제는 이것이 모든 면에서 장 건강을 위한 최고의 치료법이란 사실이 밝혀졌다. 초유에는(자궁 내에서 완전히 투과되었던) 미성숙한 장벽의 치밀결합을 강하게 하는 데 필요한 성장 인자와 호르몬이 포함된다. 성인의 경우 역시, 초유는 같은 유전자를 활성화시켜 장 내벽 손상을 복구하고 장을 온전하게 회복하며, 느슨해진 치밀결합을 단단하게 조여 장내 염증성 유전자의 1차 조절자 역할을 하는데 도움이 된다. 또 유익한 박테리아로 장의 재생성을 촉진한다.

 

 

 

 초유는 전체 고형물 중 대략 4분의 1이 항체로, 신생아는 이 항체들을 마이크로바이옴에 착생시켜야 한다. 초유에 포함된 IgG는 아기를 벌레, 박테리아, 바이러스, 곰팡이, 균류, 기생충으로부터 즉각 보호해준다. 성인의 경우도 이런 침략자들로부터 몸을 보호해줄 것이다. 또 초유는 미세 융모를 복원하는 유전자를 활성화시켜 셀리악병에 걸리면 닳아 없어지는 털을 다시 자라게 한다. 세계적으로 유명한 초유 권위자인 앤드류 키치 박사는 글루텐 서밋에서 이렇게 말했다. "건강보조식품 판매점에는 손상된 장을 치유하는 데 도움을 주는 악기 연주자들이 많이 있지만, 오직 초유만이 전체 교향곡을 연주할 수 있다."

 

 

 

p388

 

 

 

 패러다임을 전환하는 획기적인 연구가 일상적인 병원 치료에 적용되기까지 평균 17년씩 걸리는 이유는 다름 아닌 새로운 생각에 대한 저항이다. 실제 학자들이 콜레스테롤을 동맥경화증의 원인으로 처음 지목한 때부터 일반 의사들이 환자의 콜레스테롤 수치를 처음 확인한 때까지 평균 17년이 걸렸다. 

 

 그러나 다음과 같은 사실은 자명하다. 

 

 

 

1) 1950년대에 미국 서부와 남서부 일대의 신문들은 원자폭탄의 여파가 '안전하다'고 강조하는 정부 과학자들의 말을 1면에 보도했다. '걱정할 것 없다'는 것이 그들의 요지였다.

 

2) 1960년대에 담배가 '안전하다'고 설파했다. 실제로 카멜은 '의사들이 가장 추천하는' 담배 브랜드였다.

 

3) 1970년대에 젖소에 인간 성장 호르몬을 투입하는 것이 '안전하다'고 했다.

 

4) 1980년대에 마가린이 '건강에 좋다'고 했다. => 나 어릴 때 빵에 마가린 발라서 많이 먹었다. T_T;;

 

5) 1990년대에 휴대전화가 '안전하다'고 했다. 그냥 상식적으로 생각해도 머리 옆에 배터리를 놔두어서 좋을 리가 없는데도 말이다.

 

6) 2000년대에 정부는 GMO 식품이 '안전하고' 농작물에 뿌리는 극심한 독성 화학물질도 인간에게 '안전하다'고 했다.

 

 

 

 1979년에 나는 고압선에서 0.25마일(약 402m) 이내에 거주할 경우 소아 백혈병이 증가한다고 밝힌 연구 논문을 우연히 접했다. 이때가 내가 전자기장의 건강 위험에 대해 처음 알게 된 시점이었다. 그리고 1982년에 고압선과 성인 암의 상관관계를 밝힌 또 다른 논문을 읽었다. 1991년에는 밤새 전기담요를 덮고 자면 유방암 위험이 31% 증가하는 것으로 밝혀졌다. 그 이후 세상에 점점 더 많은 전선이 연결되었고, 우리가 노출되는 전자기 오염은 극도로 심해졌다. 각종 질병이 증가하고 지구상의 생명이 사라져져가는 최근의 무시무시한 수치를 보고 있자면, 과도한 독소 노출을 줄이기 위해 당장 우리가 할 수 있는 간단한 일을 더 이상 미룰 시간이 없음을 깨닫는다. 그런데 작은 가전제품의 미약한 독소에 노출되는 일이 어째서 그토록 큰 문제를 일으키는 것일까?

 

 

 

 전자기방사선은 늘 같은 속도로 이동하며, 빛처럼 파동으로 에너지를 전달한다. 이 에너지는 전기와 자기를 동시에 띠는데, 파동은 전기적으로 양극에서 음극으로, 자기적으로는 북극에서 남극으로 빠르게 번갈아 나타난다.

 

 모든 전원에서 방출되는 전자기방사선은 주변 지역을 투과하며 전자기장을 형성한다. 전자기장은 전원 근처에서 가장 강하고 멀리 떨어질수록 약해지다가 점차 측정이 불가능해진다. 강한 전자기장은 멀리 있는 강한 방사선 발생원 때문일 수도 있고, 가까이 있는 약한 방사선 발생원 때문일 수도 있다. 머리맡에 놔둔 스마트폰의 전자기장이 0.25마일 떨어진 휴대전화 기지국의 전자기장보다 훨씬 강한 영향을 미칠 수 있는 것이다. 물론 두 가지 다 암 발병과 관련이 있다.

 

 투과는 전자기방사선이 건강에 미치는 영향과 관련된 주요 이슈다. 일부 형태의 전자기방사선은 다른 형태보다 더 투과력이 강하다. 예를 들어 전등 불빛은 공기, 물, 유리는 투과할 수 있어도 벽돌이나 금속판은 투과할 수 없고 인간우리의 살 속으로 깊이 투과하지 못한다. 손전등으로 손을 비추는 실험을 해본 적이 있다면, 빛이 피부를 투과하지 못한다는 것을 알 것이다. 그러나 X선은 쉽게 인체를 투과한다.

 

 

 

 우리 가정에서 흔히 발견되는 일부 전자기 방사선은 투과력이 매우 강하다. 초저주파는 콘크리트 기둥과 금속판은 물론, 인간의 살과 뼈도 투과한다. 그런데도 이 방사선은 비교적 약한 편이라 짧은 거리에만 전자기장이 측정된다.

 

 전기와 방사선에 다량으로 노출되면 큰 문제가 발생한다. 이를테면 원자 폭탄을 생각해보자. 전기는 많은 다른 파장과 주파수를 가로질러 이동한다. 건강 문제와 관련되어 우리가 가장 친숙한 전자기파는 X선이다. 우리는 너무 많은 X선에 노출되면 암에 걸릴 위험이 있다는 것을 안다. 의사들이 엑스레이 촬영 준비를 마치면 얼마나 빨리 그 방에서 나가는지 보았는가? 의사들은 아무리 약하더라도 자주 노출되면 대단히 위험하다는 사실을 알고 있다.

 

 태양 플레어는 건강에 영향을 미치는 또 다른 방사선의 예다. 태양 표면에서 일어나는 이 거대한 폭발은 전자기장을 형성하고, 이 전자기장은 지구에 태양 방사선을 대량으로 퍼붓는다. 플레어는 태양 흑점 주기와 발생 빈도가 일치한다. 11년 주기로 정점에 달한다. 태양 방사선은 대기층에서 여과되므로 우리에게 별 문제가 되지 않는다. 혹시 산 정상에서 하이킹을 하거나 스키를 타면 지상에 있을 때보다 훨씬 더 금방 햇볕에 탄다는 것을 알아챘는가? 높은 고도에서는 보호 대기층이 얇아 방사능에 더 노출되고 쉽게 햇볕에 그을리게 되는 것이다.

 마찬가지로 3만 5,000피트 상공을 비행할 때도, 보호 대기층이 매우 희박하고 비행기의 주재료인  알루미늄이 납처럼 방사선을 여과시키지 못해 우리는 상당량의 방사선에 노출된다. 플레어의 11년 주기 중에 어느 시점인지에 따라 방사선 노출 수준이 달라질 것이다. 11년 주기 중에 방사선량이 낮은 시점에 비행한다면, 뉴욕에서 로스앤젤레스로 가는 동안 흉부 엑스레이 1회 촬영하는 것보다 적은 방사선에 노출되지만, 태양 활동 극대기에 비행한다면, 흉부 엑스레이 회에 맞먹는 방사선량에 노출된다. 한 번 비행할 때마다 말이다. 그러니 조종사들이 모든 직종 가운데 림프종 발병율이 가장 높고, 승무원들이 모든 직종 가운데 호르몬 불균형과 임신 합병증 발생률이 가장 높은 것도 놀라운 일이 아니다. 30년 동안 비행한 조종사나 승무원 중에서 피부가 좋은 사람은 찾아보기 힘들다. 그들은 온갖 전자기장 오염으로 일찍 늙는다. 이는 직업 전문가들도 어떻게 보상해야 할지 모르는 환경적 위험요인으로, 그 결과 이들은 매일 근무하면서 염증이 증가하고 세포가 조기에 노화된다.

 전자기장이 우리를 비출 때 방사선은 우리에게 빛을 발한다. 그중 일부는 몇 인치 정도 우리 몸속으로 침투되고, 그중 일부는 우리 몸을 통과한다. 그러므로 전자기장이 신체의 모든 장기와 세포 수준에서 우리에게 피해를 준다. 모든 세포 안에는 미토콘드리아라고 불리는 작은 에너지 발전소가 있다. 산소가 체내로 흡수되면, 미토콘드리아는 산소를 이용하여 몸의 기능을 유지하는 데 필요한 에너지를 만든다. 이 과정에서 '배기가스'의 일부가 활성산소라 불리는 여분의 산소 분자를 만들어내는데, 이 활성산소는 우리 세포의 외벽을 손상시키고, 조직과 장기의 기능에 영향을 미친다. 보통 활성산소는 항산화 비타민과 활성산소를 흡수하는 폴리페놀에 의해 중화된다. 항산화 비타민은 다채로운 색깔의 과일과 채소를 먹어 얻을 수 있다. 그래서 나는 매일 다른 색깔의 채소를 먹으라고 권한다. 각 색깔의 채소는 몸에 좋은 다양한 비타민, 폴리페놀, 항산화제를 함유하고 있다.

 

 그러나 우리의 식단에 항산화물질과 폴리페놀이 부족하거나 우리가 항원에 과다 노출되면, 활성산소가 축적되어 염증의 1차 메커니즘인 산화 스트레스가 초래되고, 그 결과 세포 손상이 발생하고 축적되어 조직 손상으로 이어진다. 조직 손상이 심각한 수준에 이르면 장기 기능장애가 시작되고 결국 장기 질환으로 발전한다. 보통 이 시점에 진단을 받게 된다.

 

 방사선과 전자기장은 통제되지 않는 산화 스트레스의 주요 원인이다. 우리가 계속 불난 데 휘발유를 뿌리거나 민감한 음식을 먹어서 염증을 일으키거나 다른 환경 오염물질의 독소 축적량을 증가시키면, 산화 스트레스가 더 많은 염증을 부채질하여 결국 조직 손상, 기능장애, 마침내 질병으로 이어질 것이다. 우리가 전자기장에 노출될 대마다 산화 스트레스가 증가한다. 비행기 여행으로 한 번 손상을 입더라도 3주 동안 비행을 하지 않으면, 몸이 저절로 치유되거나 손상의 충격 인자가 줄어들 것이다. 하지만 주기적으로 비행을 한다면, 그 손상 결과가 축적된다. 그래서 주기적으로 비행을 해야 하는 나로서는 비행 전 3일과 비행 후 3일 동안 항산화 비타민 권장량의 2~3배를 복용한다. 이는 내가 조종사와 승무원들에게 해주는 방사선 방호 권고이기도 하다.

 

p392. 전자기장과 우리의 몸과 뇌.

 

 전자기장 노출에 따른 증상은 시간이 지날수록 악화된다. 오랜 기간 뒤에 명백한 질환이 생긴다. 전자기장은 대부분의 국가에서 그리고 국제적으로 허용된 안전 한계치보다 훨씬 낮은 노출 수준에서 피해를 입히는 것으로 알려졌다. 이는 정책 수립 과정에서 근시안적인 기업, 로비스트, 과학자들이 한계치를 올리려고 기를 쓴 결과다.

 

 전자기파는 우리 몸을 투과할 때 체내에 전류를 유도한다. 우리 몸은 원래 다양한 목적으로 전기 자극을 사용한다. 우리가 흔히 전기적이라고 생각하지 않는 세포, 혈액, 신체 조직, 장기에서 일어나는 화학 작용조차 모두 적절히 기능하려면 몸속 전하에 의존해야 한다. 따라서 체내에 전류를 일으키는 외부 전자기장은 체내의 많은 생물학적 과정을 방해할 수 있고, 실제로 방해한다. 다음은 과도한 전자기장 노출로 나타나는 일반적인 증상이다.

 

 "불안, 집중 곤란, 우울증, 피로, 두통, 기억력 손상, 메스꺼움, 가슴 두근거림, 수면 장애 "

 

 물론 이런 증상은 전자기장 노출뿐 아니라 다른 요인으로도 발생할 수 있다. 그래도 만약 당신이 이런 증상에 시달리는데 의사가 그 이유를 찾지 못한다면, 당신의 전자기장 노출을 검사해보고 가능하면 줄이는 것이 현명하지 않을까 한다.

 

 전자기장 때문에 발생하는 가장 일반적인 건강 문제는 전자기파 과민성으로, 이미 인구의 3%에 영향을 미치고 있어 보건당국과 장애 관리자, 사례 담당자, 정치가, 법정 등이 문제로 인정했다. 전자기장은 다양한 알레르기성 및 염증성 반응을 자극하고 신체의 조직 복구 과정에 지장을 주어 면역 기능을 방해한다.

 

 당뇨병에 걸린 51세 남자가 컴퓨터 앞에서 혈당을 검사한 것이 있는데 검사 결과 혈당이 높게 나왔다. 혈당이 그의 유전 사슬의 약한 고리였다. 그런데 그가 컴퓨터에서 멀리 떨어지다 10분 만에 혈당이 10% 이상 떨어졌다. 컴퓨터 전자기장의 유독한 영향이 그의 혈당 조절체계에 반영된 것이다. 이 사례가 매우 흥미로웠던 것은 혈당 수치가 유독 빠르게 변화했기 때문이다.

 또 다른 예도 있다. 새집증후군이 있는 학교에 전자기장을 차단하는 필터를 설치하면, 학교 직원과 학생들 모두 건강과 기력이 좋아지는 것으로 보고됐다. 한 연구에 따르면, 한 학교에서는 천식으로 흡입기가 필요한 학생 수가 감소했고, 다른 학교에서는 학생들의 ADD/ADHD 관련 행동이 좋아졌다. 앞서 당뇨병에 걸린 남자의 예처럼, 일부 당뇨병 환자의 혈당 수치는 주변 환경의 오염된 전자기 수준에 반응한다. 전자기적으로 깨끗한 환경에서 제1형 당뇨병을 앓는 사람은 보다 적은 인슐린을 필요로 하고, 제2형 당뇨병을 앓는 사람은 혈당 수치가 낮아진다. 다발성경화증 진단을 받은 사람도 몸의 균형이 나아지고 떨림이 줄어든다. 지팡이를 짚어야 걷던 사람들도 집에 전자기장 차단 필터를 설치하고 며칠에서 몇 주 뒤 지팡이 없이 걷게 되었다.

 

 

혐오의 프레임으로 적과 나를 가르는 전략은 우리 보수우파의 정치적 스탠스를 강화하는 방법으로 대한민국 건국 이후 줄곧 쓰이던 방법론이다.

 

대표적인 것이 빨갱이 프레임이며 이를 통해 친일보수우파는 매국노의 이미지를 상쇄시켜나갔다.

 

이 혐오의 프레임에 의해 대한민국의 모든 정치,사회,경제의 문제가 생겨났다고 해도 과언이 아니다.

 

특별히 이 책은 한국 보수개신교가 중심이 된 혐오의 프레임에 대해 진정한 예수그리스도의 사랑의 정신에 위배되는 한국개신교의 도그마적 위선에 대해 이야기하고 있다.

 

대한민국의 미래를 위해서는 모든 혐오의 프레임을 벗어야 할 필요가 있는 때에 하나의 제시로서 이 책의 가치가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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p95.

 제자들이 예수 십자가처형 사건을 전후로 배반자가 됐음은 주지의 사실이다. 그러나 인생 말년의 행보는 이와는 완전히 결이 달랐다. 기록된 전승에 따르면 그들은 대부분 '순교'했다. 첫 번째 순교자 세배대의 아들 야고보는 칼로 목이 베여 죽었고(사도행전 12:1-2), 마태는 칼에 맞은 후 시름시름 앓다 죽었으며, 알패오의 아들 작은 야고보는 돌 맞아 중상을 입은 가운데 끝내 참수당해 죽었고, 유다와 시몬은 예수처럼 십자가형을 당해 죽었고, 도마는 칼에 찔려 죽었다. 예수님의 동생 야고보는 30m 높이에서 던저졌고 그래도 살아 있자 곤봉에 맞아 죽었다. 이야기 들어보니 안드레는 십자가에서 죽을 때 "이 순간을 기다렸다"라며 행복해했다고 한다. 베드로는 예수님보다 더 고통스럽게 죽겠다며 거꾸로 십자가에 달려 죽었다고 알려져 있다. 물론 사도들이 예수를 끝까지 따랐다는 점을 강조하기 위해 지어낸 이야기 또는 설화로 보는 관점도 있다.

 

p101.

 열두 명의 남성 제자처럼 예수를 뒤따른 여성 제자가 적지 않아보인다. <누가복음> 8장 2-3절에 나온 막달라 마리아, 요안나, 수산나라는 여성이 그렇다. 그들은 특정시기에 동네에 나타나신 예수를 한 차례 잘 대접한 정도가 아니다. 그를 수행하며 가사일까지 도운 것으로 추정된다. 식사, 빨래를 도맡아 한 정황이 있다는 것이다. 이중 요안나는 (세례자 요한을 처형했던 헤롯 영주 밑에서 일하던) 공직자를 남편으로 둔 고관의 아내였다.

 그렇다면 성서는 왜 이 여성들의 존재를 잘 드러내지 않았을까? 하나님은 온전한 존재이지만, 성서의 기자는 온전하지 못하다고 보면 된다. 고대 히브리어나 아람어는 여성을 일컫는 여성명사가 없다고 한다. 오병이어 사건만 보더라도 복음서를 기록한 사람은 '장정인 남성'만 셈했다. 무엇을 의미하나. 여성은 투명인간이었다.

 하지만 김근수 해방신학연구소장은 <가난한 예수>(동녁, 2017)에서 "예수에게 여성 제자가 실제로 있었다. 그런데 여성제자를 가리키는 단어가 네 복음서에 없으므로 예수에게 여성 제자가 없었다고 우기는 사람들이 있다. 존재에서 출발하여 단어를 추적해야 옳은데, 단어에서 출발하여 존재를 추정하는 잘못된 방법을 그들은 택하고 있다"라고 지적한다.

 

p107.

 함석헌 선생이 고난에 대해 풀이했던 말이다.

 

 고난이란 무엇인가. 영이 물질에 대하여, 양심이 욕(망)에 대하여, 생명이 사망에 대하여 항쟁하는 일이다. 생명이 그 반대물을 완전히 극복하는 때까지 고난은 없을 수 없다. 고난이란 살았다는 말이요, 생명이 자란다는 말이다. 도덕적으로 진리적으로 자란다는 말이다. 고난 없이 혼의 완성은 있을 수 없다.

 

 고난은 인생을 위대하게 만든다. 고난을 견디고 남으로 생명은 일단의 진화를 한다. 핍박을 받음으로 대적을 포용하는 관대가 생기고, 궁핍과 형벌을 참음으로 자유와 고귀를 얻을 수 있다. 고난이 닥쳐올 때 사람은 사탄의 적수가 되든지 그렇지 않으면 하나님의 친구가 되든지 둘 중의 하나가 되지 않으면 안 된다. 고난은 육에서는 뜯어 가지만 영에서는 점점 더 닦아낸다. 고난이 주는 손해와 아픔은 한때이나, 보람과 뜻은 영원한 것이다. 개인에 있어서나 민족에 있어서나 위대한 성격은 고난의 선물이다.

 

p120.

 나는 성서에 기록된 역사를 진리로 믿는다. 그것은 사실로 규명돼서가 아니다. 신념이기 때문이다. 그렇다, 신념의 영역으로 넘어간 사안이다.

 

p125.

 함석헌 선생은 <뜻으로 본 한국역사>(한길사, 2003)에서 외세에 기댔다가 단단히 낭패 본 비운의 한반도 역사를 적나라하게 짚었다. 요컨대 이러하다. 고구려를 제압하려고 외세 당나라를 끌어들인 통일신라, 끝내 우리 삶의 기반인 만주를 포기하고 말았다. 만주 잃은 '이빨 빠진 호랑이' 한민족은 거란족, 여진족 등 북방 민족 공세에 숱하게 시달렸다. 고려 윤관, 최영 장군이 꾸준히 북벌을 모색했지만, 반대세력 즉 사대주의 세력의 벽을 넘지 못한 채 좌절했다. 이로써 조선을 창건한 이성계는 '우물 안 개구리 신세'에 머물고 말았다. 사대주의자들은 해방공간에서 분단세력으로 세력을 재편해 한반도의 허리를 70년 동안 끊어 그 틈을 점점 벌리고 있다. 기시감의 결정체가 역사라고 했던가.

 "남북 간 군사적 적대관계가 계속되는 한 먹을거리가 생기는 소위 방위산업체, 이렇게 냉전구조 하에서 번성했던 기득권 세력이 분단체제를 계속 연장하려 한다." 정세현 전 통일부 장관의 진단이다.

 그런데 북한이 핵을 포기하겠다고 했다. 또 민족의 번영을 위해 함께 새 출발하자고 손을 내밀었다. 이런 북한에 대한 의심의 눈길, 쉽게 지울 수 없음도 이해한다. 그러나 북한이 비핵화 약속을 번번히 깬 데에는 미국 책임이 크다. 1994년 제네바 합의, 2005년 9.19 공동성명 등에서 맺은 약속을 미국은 일방적으로 엎었다. 그래서 북한은 각각 협상파기, 핵실험으로 엇나갔다. 북한의 약속 불이행을 정당화할 수 없다. 하지만 북한과의 신뢰 관계를 유지하면서 비핵화의 길을 가려는 미국의 의지는 단 한 번도 그 진정성을 입증받지 못했다.

 

p134.

 이승만이 독립운동과 담쌓은 점은 김상웅의 저서 <독부 이승만 평전>(책보세, 2012)을 요약한 블로거 '그노마' 님의 글로 정리된다. 다음은 윤문한 것이다.

 

 하와이에서 한인 소년병학교와 대한인국민회를 조직한 무장독립운동가 박용만 선생, 끝내 이승만에게 쫓겨났다. 샌프란시스코에서 장인환, 전명운 의사가 친일파 미국인 스티븐스를 처단하고 재판에 넘겨졌을 때 통역을 요청받았던 이승만은 그들을 살인자라고 규정하더니 예수 믿는 사람으로서 변호할 수 없다며 거절했다. 이후에도 이승만은 안중근, 이봉창, 윤봉길 의사의 의거를 테러라고 매도하며 임시정부에 대일 무장투쟁 중단을 요구했다. 하는 행보 하나하나가 어쩌면 그렇게 일본의 이익에 빈틈없이 부합되는지 싶었다. 이뿐 아니다. 이승만은 상하이 임시정부라도 'president'라는 직함을 달라고 생떼를 뜨더니 스스로 대통령 명함을 파고 다녔다. 끝내 대통령 직함을 얻었음에도 임시수도 상하이를 떠나 있었다. 한술 더 떠 미국에 눌러앉아 위임통치론 같은 임시정부의 방침에 반하게 주장했다. 그래서 단재 신채호 선생은 "이완용은 있는 나라를 팔았지만 이승만은 있지도 않은 나라를 팔았다"라고 탄식했다. 어쩌면 이 정도는 약과일 수 있다. 외교활동에 쓴다며 임시정부 독립운동 자금의 약 75%를 횡령해 관광 유람을 즐겼다고 하니 이승만 행각에 열불나지 않으면 성자라 할 것이다.

 

 때마침 일본이 패망했다. 독립국 한국의 최고지도자가 되고자 하는 이승만의 노욕이 불붙기 시작한다. 그러나 이승만에게는 국내 권력 기반이 없었다. 끝까지 임시정부를 지킨 민족지사 앞에서 초라하기만 했다. 그러나 임시정부가 일본을 몰아낸 게 아닌 터, 이승만은 승전한 미군의 수장, 맥아더에게 마음을 사는 것으로써 돌파구를 마련하려 한다. "내가 남한 지도자가 되도록 도와주면 충성을 다하겠다"며 이승만이 맥아더에게 다짐했으리라는 추정은 어렵지 않다. 맥아더는 한국을 지배하던 미군 사령관 하지 준장을 불러 이승만에게 예우할 것을 명한다.

 이승만을 잘 알지 못했던 하지는 시간이 지날수록, 만난 횟수가 더해갈수록 그에 대한 실망감을 노골화했다. 그러다보니 1947년 한국을 떠날 시점에는 이승만과 원수보다 못한 사이가 됐다. 하지는 송별사에서 "자기 이익만 추구하는 기회주의적 정치가들이 있다"고 했다. 여기서 언급된 '기회주이적 정치가들'에 이승만이 포함됐다고 보는 게 합리적이다. 정용욱 서울대 교수는 하지가 1947년 누군가에게 보낸 편지에 담긴 내용을 소개했다.

 

 그 노인네가 작년에 한 배신행위는 내게는 힘들고 쓰라린 경험이었습니다. 그가 대부분의 시간 동안 이곳에서 미국의 노력에 대해 입에 발린 말을 하고 다녔지만 나는 지난 몇 달씩 그가 뭔가 의심스러운 일을 크게 꾸미고 있다는 것을 알았습니다.

 

 '배신행위'라는 표현이 특정하는 어떤 사실은 중요하지 않다. 배신의 행위자 즉 이승만만 주목하면 된다. 배신은 이승만에게 일상이었다. 미군에게도 예외가 아니었다. 흥미로운 것은, 이 편지에는 이승만을 겨냥한 'son of a bitch'라는 욕도 담겨 있었다는 점이다. 그러나 하지는 미국으로 돌아가고 이승만은 단독정부 대통령이 됐으니 승자는 이승만인 셈이다. 이승만의 '필살기'는 독립운동가와 미 군정의 틈을 최대한 벌린 것이다. 미국이 치 떨어야 하는 소련을 독립운동가들이 대변한다고 흑색선전을 편 적이다. 이승만의 간계는 통했다.

 그런 이승만은 집권하자마자 여수 순천 시민들을 학살했다. 함포사격도 했다고 했다. 남해에서 함선으로 여수 순천을 겨냥해 포격한 것이다. 여수 순천 사람은 다 죽어도 된다고 판단한 것이다. 그래서 여수순천사건은 토벌 즉 학살로 봐야 마땅하다.

 여수 순천 민중이 거역한 것은 대한민국 국체가 아니라 제주 토벌 명령이었다. 4.3 사건이 진행 중인 제주도에 가서 '민간인을 죽이라'는 지시 말이다. 여수 순천의 군인은 향토방위 체제에서 군사의 한 축이었던 민중의 뜻, 제주 진압을 받아들일 수 없다는 그 뜻을 따르지 않을 수 없었다. 4.3 사건은 그래서 여수순천학살의 연장전이다. 이승만은 당시엔 법에도 없던 계엄령을 선포한다. 그리고 수많은 제주도민을 학살했다. 무기를 손에 쥐지 않았던 제주 민간인을 군대가 제압하는 건 전혀 어려운 일이 아니었다.

p172.

 나는 우리에게로 온 하나님의 아들을 과학이나 이성의 틀 위에서 사유하지 않는다. 그래서 그의 생애와 부활이 사실인지 아닌지 검증할 필요를 느끼지 못한다. 그래서 나는 성서가 말하는 예수의 역사를 신앙으로써 믿으면서도, 그 믿음을 나의 고유한 신념체계 안에 묶어둔다.

 

p175. 인간의 육식

 이런 전제로 <창세기> 1장을 보자.

 

 하나님이 말씀하시기를 "내가 온 땅 위에 있는 씨 맺는 모든 채소와 씨 있는 열매를 맺는 모든 나무를 너희에게 준다. 이것들이 너희의 먹거리가 될 것이다. 또 땅의 모든 짐승과 공중의 모든 새와 땅 위에 사는 모든 것, 곧 생명을 지닌 모든 것에게도 모든 푸른 풀을 먹거리로 준다." 하시니, 그대로 되었다.

-창세기 1:29-30-

 

 29절과 30절을 쉬 지나쳐서는 안 된다. 여기서 하나님은 "모든 푸른 풀을 먹을거리로 준다"(30절)라고 했다. 인간이나 동물 모두에게 초식을 명령한 것이다.

 그러다가 노아 홍수 사태 이후 조건부 육식을 허용했다. 조건은 기름과 피를 먹지 않는 것이었다. 독일성서공회의 관주성서는 이를 두고 "굶주린 인간이 행여 야만적으로 짐승을 살육할까봐 염려해 제한적으로 허용한 것"이라고 해석했다. 그런 의미에서 동물권도 창조 원리임을 잊지 말아야 한다.

 

 독일은 이미 세계 최초로 헌법에 동물권을 명시한 바 있다. 인간이 타인으로부터 고통받지 않고 자유로운 삶을 추구 할 수 있듯 동물에게도 비슷한 권리가 보장돼 있다는 것이다. 이런 가운데 우리 사회 도처에서 벌어지는 동물 축제가 눈에 밟힌다.

 '성공한 지역 축제'로 꼽히는 화천 산천어축제는 외지의 산천어를 부화시킨 뒤 화천 내 좁은 호수로 들여와 그 안에 가둬놓고 사냥감이 되게 하는 축제다. 축제가 끝나면 살아남은 상당수 산천어조차 극심한 스트레스를 이기지 못하고 죽어간다. 이와 관련, 2018년 6월 '동물 축제 반대 축제 기획단'은 동물을 이용한 축제의 84%가 심각한 위해를 가하는 것으로 나타났다고 밝힌 바 있다.

 

 제레미 리프킨이 쓴 <육식의 종말>(시공사, 2002)에서 본 것이다. 소를 뜻하는 영어 'cattle'은 자본은 뜻하는 'capital'과 어원이 같다고 한다. 중세까지 소는 신성한 동물이었고 그 고기가 밥상에 올라간다는 것은 상상조차 힘들었지만 이는 시장이 형성되기 전 이야기. 어마어마한 수요가 이어졌고 공급도 이에 발맞추면서 양상이 전혀 달라졌다고 한다. 미국 축산업자들은 끝내 대규모 축산 단지 건설을 행했고 이에 상응해서 인디언은 생활터전을 상실해갔다.

 브라질 환경운동가 치코 멘데스는 축산업자들의 남미 열대우림 파괴를 반대하다가 1988년 흉탄에 살해당했다. 그렇게 열심히 소의 고기를 공장에서 물건 찍어내듯 생산하다가 인류는 광우병이라는 역풍을 맞았다. 광우병만인가, 닭에게서는 조류 인플루엔자, 돼지는 구제역으로 우리는 절기 행사처럼 역병을 치러야만 한다. 성서의 말씀을 존중한다면 과도한 육식은 삼가는 것이 옳다.

 

p177. 하려면 뚝심 있게

 <레위기>를 보면 굽 있는 짐승을 먹지 말라고 못 박았다. 굽 있는 짐승은 멀리서 찾을 것 없다. '고기의 대명사' 소와 돼지다. 20여 년 전 대학생 때 에피소드. 성서 통독 모임에서 강사 목사님은 "성서(레위기)에 나와 있는 대로 돼지고기 먹지 말라"고 해설했다. 굽 있는 짐승만인가, 비늘 없는 생선도 안된다는 성서의 엄명이 있다. 때마침 점심 공동식사가 이어졌다. 돼지고기 김치찌개와 오징어 볶음이 식탁 위에 올랐다. 당시 그 목사님의 묘한 표정은 지금도 잊지 못한다. 식단에는 그다지 간섭 안 하신 듯 보였다. 

 성서가 동성애를 가증하게 여긴다며 맥락도 배경도 안 따지고 절대 율법시했던 신학교, 그 신학교의 구내식당 메뉴를 인터넷에서 찾아봤다. 돼지고기볶음, 참치 김치찌개가 보였다. 굽 있는 돼지의 고기와 비늘 없는 생선 참치로 구성된 식단이었다. 지행합일, 언행일치도 볶아먹고 끓여 먹은 모양이다.

 

 왜 성서에서 지킬 것, 안 지킬 것을 자의적으로 구분하나. 무식하고 미련해도 지조 있고 용렬하게 '성서대로' 실천한다면 인정받기라도 한다. 성경에서 굽 있는 고기, 비늘 없는 생선 먹지 말라고 하면 뚝심 있게 소, 말, 양, 염소, 돼지, 꽁치, 가물치, 갈치, 넙치, 멸치, 참치, 오징어, 상어, 숭어, 홍어, 고등어 먹지 않아야 한다.

 <로마서> 13장 "모든 권력에 순종하라"해서 박정희 전두환 정부에 순종했다면 뚝심 있게 김대중 노무현 정부에도 순종해야 한다. 성경에서 "사랑하라"하면 저 좋아하는 사람만이 아니라 뚝심 있게 동성애자뿐 아니라 빨갱이, 난민, 타종교인도 사랑해야 한다. 보수 신앙을 신주단지처럼 여기는 교인들, 어떤 건 맥락 무시하고 "옳다"가며 믿고, 어떤 건 이런저런 이유 붙여가며 "시대에 맞지 않는다" 하며 일축한다. 안 된다. (여담이다. 언제부터 기독교는 육식에 대해 아무 꺼리낌이 없어졌을까. 토마스 아퀴나스가 활동했던 중세였던 것 같다.)

 

p184.

 분명히 짚고 넘어가자. 하나님은 성서에서 자살한 사람을 죄인으로 정죄하지 않았다. 자살에 대한 하나님의 최종적이고도 정확한 의중은 '간곡한 만류'이다. <에스겔> 16장6절에 "핏덩이로 누워 있는 너에게, 제발 살아만 달라고 했다"는 말씀이 있다. 이 메시지의 맥락은 극단적으로 소외되거나 절망감에 싸여도 '살라'고 당부하는 것이다. 갓난아기가 탯줄을 절단받지 않았고 누구로부터도 씻김받지 않았으며 강보에 싸이지도 않은 채 들에 버려진 상태. 또 맹수가 물어가거나 요행히 그런 일이 없어 굶어 죽어도 관심조차 받지 못할 사정. 이 생각만 해도 참혹한 상황에서도 살라는 당부다. 요컨대 노회찬 형제가 스스로 몸을 던졌다고 하나님께 죄를 범하는 것이 아니다.

 그렇다면 스스로 목숨 끊은 이들은 어디로 갈 것인가. 천국 아닌 다른 곳에 가게 되는 것일까. 목사였던 아버지는 40년 목회를 회고하며 가장 힘든 사역으로 자살자 추도예배를 꼽았다. 그래서 영정 앞에서 고인의 구원 여부 언급은 삼가고 유가족을 위로하는 내용으로 설교한다고 했다. 아버지도 자살자의 '천국행'에 확신이 없었던 것이다. 하지만 나는 구원할지 말지는 하나님이 결정한다. 그리고 하나님이 우리의 좁은 헤아림에 갇혀 판단하지 않으신다고 생각하고 말한다. 그런 의미에서 유사하게라도 '자살한 사람은 지옥 간다'는 말을 해서는 안된다. 세상 떠난 이의 운명을 하나님에게 맡기고, 우리는 아픈 마음에 파르르 떠는 유가족을 돌보면 된다.

 

 현대 사회에서 자살은 사회적 타살이다. 한국 사회에서 자살률이 급증한 계기는 1997년 외환위기였다고 한다. <경향신문> 안호기 경제부장의 2014년 1월6일 자 칼럼 중 일부다. 

 "외환위기 이후 자본은 노동에 대한 통제를 강화하면서 구조조정 허울을 씌워 수많은 노동자를 거리로 내몰았다. 양질의 일자리는 갈수록 줄어들고 있다. 양극화가 심해지면서 상대적 박탈감에 빠진 '신빈곤층'이 크게 늘었다. 탈출구를 찾지 못한 일부가 자살이라는 극단적 방법을 택하고 있다. 최근 한국에서의 자살은 사회 공동체 구성원 모두에게 책임이 있는 '사회적 타살'이다.

 사실 외환위기는 한국 사회 공동체성이 해체되면서 자본이 모든 물적 정신적 주도권을 제패하는 계기가 됐다. '비정규직' '정리해고'가 당연시되면서 '무능한 자' '가난한 자'는 거침없이 잔인하게 솎아졌다. 힘없는 일개인은 그저 '쫄리면 뒈지시던가?'하는 대접을 받았다. 자살자를 탓하려면 이 비정한 사회 구조를 개선하는 것이 우선이다. 삶의 활로가 다 막혀 스스로 목숨을 끊었던 송파구 세 모녀를 누가 정죄할 수 있단 말인가.

 

p186. 어떤 이타적 죽음.

 

 노회찬 형제 죽음은 그렇다면 전태일 열사의 자결과 같은가, 이렇게 물어볼 사람이 있을지 모르겠다. 그렇다면 노회찬 형제가 정치자금법 위반 건에 대한 수사와 처벌이 두려워 극단적 선택을 했다고 보는 것이다. 과연 그럴까? 정치자금법 위반으로 감옥에 가는 것, 의원직을 잃는 것이, 그보다 더한 험한 길을 걸어온 노회찬에게 죽음과 맞바꿀 고난일까? 김동호 목사가 한 말이 있다. "정의를 말하는 사람은 역경에 강하다."

 노회찬이 받은 돈의 액수는 매우 적은 것이었다. 대가성 따위도 없었으니 뇌물 수수로 보기 어렵다. 굳이 과실을 물으려 한다면 정치자금법 위반 정도다. 일의 전모가 이렇다면 극단적 선택의 이유를 다른 배경에서 찾음이 온당할 것이다. 혹시 가뜩이나 취약한 지지기반 위에 서 있는 정의당의 앞날 곧 진보정치의 미래가 혹시 자기 일로 인해 타격받지 않을까 염려함은 아니었을지. 노회찬 형제는 자신이 진보정치의 아이콘으로 주목받은 현실에 무거운 책임감을 느꼈을 것이다. 자신의 허물이 곧 진보정치의 허물이 될까봐, 말하자면 '즈엉이당' 운운하는 자들로부터 진보정치가 통째로 부정당하게 될까봐 노심초사했을 것이다. 그 상황이 현실로 나타나기 전, 창문 밖으로 몸을 던져 손절매하려 했을 것이다. 그랬을 것이다.

 죽음을 결행하기에 앞서 노회찬 형제는 노무현 전 대통령을 생각하지 않았을까? 포괄적 뇌물죄 혐의를 받언 노 전 대통령, 자신의 허물로 비롯된 문제라면 그는 살아서 모든 책임을 졌을 것이다. 그에게는 감옥이 낯설지 않은 공간이다. 노동운동 때문에 수감된 이력이 있었으니까. 또한 자신이 변호사인지라 스스로 버리적 구제의 길을 모르지 않아을 것이다. 당시에도 '서초동' 주변에서는 노 전 대통령에게 유죄 판결을 내리긴 쉽지 않으리라 생각했다. 당시 대통령 이명박 씨도 노 전 대통령 명성과 정치적 영향력을 최소화하는 게 목적이었지 그의 처벌 여부에 대해서는 별무관심이었던 것으로 알려졌다. 

 

 노무현 전 대통령을 견디지 못하게 한 것은 '자신의 뇌물 수수 의혹 수사가 민주진보진영 전체를 폐족으로 만드는 도화선이 되지 않을까' 하는 부분이 아니었을까? 죄가 없다면 그런 걱정을 왜 하느냐, 모든 시시비비는 법정에서 가려지지 않겠느냐고 말할지도 모르겠다. 그러나 이는 사법 영역에서나 해당하는 이야기다. 여론재판은 별개다. 법전에 있는 '무죄 추정 원칙'은 허울일 뿐이고, 짧으면 1년, 길게는 2-3년 동안 일국의 전직 대통령이 재판정에 끌려다니며 자신의 무죄를 호소하는 굴욕을 감내해야 하며, 설령 최종적으로 무죄가 난들 잃어버린 시간 또 사건 이전의 삶을 보장받지 못한다. 여론재판이 이렇다. '심판받지 않는 권력' 검찰은 이렇게 다방면으로 그리고 치명적으로 한 인격에게 씻을 수 없는 상처를 가할 수 있다. 절대자다.

 실제 '노무현 수자'의 불똥이 튈까봐, 민주당 일각에서까지 노무현 전 대통령에게 '굿바이'를 외치고, 심지어 진보언론에서는 '마지막 승부수'라는 표현을 써가며 극단적 선택을 압박하기도 했다. 노 전 대통령은 죽기 전 "자신은 더 이상 개혁의 전범이 될 수 없으므로 노무현을 버리고 가라"고 했다. 노회찬 형제도 "나는 멈추지만, 정의당은 앞으로 나아가라"고 했다. 노 전 대통령은, 또 노회찬 형제는 자기가 중요하지 않았다. 우리는 왜, 노무현을 잃고 땅을 쳤으면서도, 노회찬에게 제2의 길이 있음을 보여주지 못했을까. 통탄하고 또 통탄한다.

 노회찬은 이타적인 사람이었다. 그는 생을 포기하는 순간까지 자기 명예에 집착함이 없었다. 예수가 그러하지 않았는가. 예수는 죽음을 운명으로 알았다. 강만원 종교칼럼니스트는 "예수님이 '깨어 기도하'라고 하시고, 그가 또한 핏방울 떨어듯이 땀을 흘리시며 밤이 새도록 처절하게 기도하신 것은 결코 도피가 아니라 몸으 던져 행동하기 위한, 다시 말해 생명을 바쳐 순종하기 위한 '몸부림'이라고 말했다. 병자 또 망자를 고치고, 수천 명을 먹이며, 미친 사람 머리에 침투한 악마를 몸 밖으로 끌어내는 초능력을 지닌 그가 피할 능력이 없어 소수의 로마병정에게 잡혀가 채찍질 등 모욕을 당하며 십자가에 달렸겠는가. 그는 스스로 죽음의 길을 택했으니 그것은 의롭고 선한 동기에 의해 스스로 목숨을 끊은 이들의 결심과 다르지 않았을 것이다. 그런데 예수의 죽음이 어떤 결과를 불러왔는가. 기독교인은 이를 통해 인류가 죄와 율법, 사망의 그늘에서 벗어나 광명을 찾았다고 찬송한다. 그가 죽지 않았다면 가능하지 않을 일이라고 고백한다.

 

p233.

 세월호 마지막 두 실종자 중 한 사람의 어머니가 어느 성탄절엔가 팽목항에 모여 예배하는 사람들에게 이렇게 이야기했다고 한다. "하나님은 지금 여기 팽목항에 계시는 것이 아니라 우리 아이와 함께 계세요. 저 깊고 냄새나는 캄캄한 배에서 하나님은 우리 아이를 안고 계셔요. 우리는 그렇게 믿어요." 

 

川上未映子

가와카미 미에코(사진은 아마도 30대 정도의 모습일 듯. 꽤나 미인이다. 1976년생, 일본의 가수, 배우, 작가, 가수로 활동을 시작, 노래로는 지명도가 거의 없었지만 2008년 발표한 단편소설 젖과 알로 아쿠타가와 상을  수상하면서 이름이 알려진다.)가 무라카미 하루키를 인터뷰한 대담집.

 

직업으로서의 소설가의 출간과 함께한 인터뷰와, 기사단장 죽이기의 출간과 함께한 인터뷰 로 이루어져 있다.

 

하루키의 작법이랄까? 그런 것에 대한 하루키 자신의 입장과 생각을 알 수 있는 기록이다.

 

마지막에 인터뷰 후에 소감으로서 에필로그로 무라카미 하루키 자신이 직접 써놓은 글을 봐서도 알 수 있지만, 하루키에게 상당한 깊이에 이르기까지 충실한 대답을 하도록 유도한 인터뷰어로서의 가와카미 에미코 작가의 능력도 대단하다는 걸 느끼게 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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p20. 캐비닛의 존재(직업으로서의 소설가에 나오는 이야기로 하루키는 자기의 머릿속에는 캐비닛과 같이 소설을 쓸 때 꺼내 쓰는 저장소 같은게 있다는 이야기를 한 적이 있다.)

 

-그리고 그 책에서도 언급한 캐비닛 이야기가 이미지로도 멋집니다. 무라카미 씨 안에는 많은 캐비닛이 있다고요.

 무라카미 : 그렇죠. 제 안에는 커다란 캐비닛이 있고 서랍이 잔뜩 달려 있어요.

-그와 관련해 인용한 조이스의 '상상력이란 기억이다'라는 말도 흥미롭습니다. 의식한 것과 의식하지 않은 것 모두 한 덩어리씩 차곡차곡 캐비닛에 들어간다. 여기서 중요한 건 글을 쓰는 사람이건 쓰지 않는 사람이건 알고 보면 모두 캐비닛을 가지고 있다는 사실이죠.

 무라카미 : 다들 가지고 있죠, 제법 많이.

-누구나가 각자의 캐비닛을 가지고 있고, 그 안을 채워간다. 중요한 건 그것들이 필요할 때 어디 들었는지 즉각 알아내고 입체적으로 조립하는 일이다... 그건 결국 캐비닛 주인의 역량에 달렸을까요?

 무라카미 : 그렇죠. 소설을 쓰면서 필요한 때 필요한 기억의 서랍이 알아서 탁 열려줘야 합니다. 그게 안 되면 서랍이 아무리 많아도... 소설을 쓰다 말고 일일이 열어보며 어디에 뭐가 있는지 찾아다닐 수는 없는 노릇이니까요. 아, 저기 있다, 하고 그때 그때 서랍들이 자동으로 속속 열려주지 않으면 실제로는 쓸모가 없어요.

-자동으로 열린다고 하셨는데, 그건 훈련이나 노력으로 어떻게 되지 않는 부분일까요?

 무라카미 : 그렇다기보다 쓰는 중에 점점 요령을 터득해가는 거죠. 전업작가로 살다보면 항상 그런 것을 자연히 의식하고, 어디에 뭐가 들었는지 감으로 알게 됩니다. 이게 중요해요, 경험을 쌓고, 여러 기억을 효과적으로, 거의 자동으로 즉각 끄집어낼 수 있어야 하죠.

-뒤집어 말하면, 조립하고 입체화하는 요령이 패턴화될 위험성은 없을까요?

 무라카미 : 어디 있는지 대강 알게 되는 것과 함께, 생각지 못한 순간 생각지 못한 서랍이 탁 열리는 것도 중요해요. 그런 의외성이 없으면 좋은 소설이 되지 못하죠. 소설 쓰기란 이른바 '액시던트'의 연속이니까요. 소설 속에서는 많은 일이 자연발생적으로 일어나야 합니다. 여기서는 이런 에피소드를 써두자 하는 식으로 가다보면 당연히 이야기가 패턴화되겠죠. 예상치 못하게 튀어나오는 것에 대응해서 재빨리 움직이지 않으면 이야기가 생명을 잃어버려요.

-자질이 잇는 사람이라면 어느 정도 자기 내부에서 필요한 것을 찾아낼 수 있겠지만, 캐비닛 앞에 서서도 아무 느낌이 없는 사람이라면 소설 쓰기는 좀...

 무라카미 : 특별한 조각 하나를 던져넣는 것만으로 이야기의 흐름이 크고 활발하게 움직이기 시작할 때도 있죠. 때에 맞춰 그런 조각을 찾아나가는 것이 매우 중요한 작업입니다. 그것만은 특별한 기술이랄까, 타고나는 자질일지도 모르겠어요.

 

-무라카미 씨 작품의 특징 중 하나가 정교한 비유라고 생각하는데, 이 역시 자연스럽게 나오는 건가요?

 무라카미 : 그렇죠. 예전에 한 평론가가 하루키는 아마 노트에다 온갖 비유를 써서 모아뒀을 거라고 했는데, 그렇진 않아요(웃음).

-저절로 튀어나오나요? 그때그때 필요한 것이.

 무라카미 : 나와요, 필요할 때, 제 발로 찾아오듯이. 저절로 나오지 않을 때는 비유를 쓰지 않아요. 억지로 만들려면 말에서 힘이 빠져버리니까.

-비유 역시 말의 조립이고, 서로 다른 것들끼리의 거리니까요. 곡예와도 같죠. 놀라움을 불러오지 않으면 비유가 되지 않고, 딱 들어맞아야 하고.

 무라카미 : 네. 뭐니뭐니해도 거리감이 중요하죠. 너무 붙어도 안되고 너무 떨어져도 안 되고. 그렇게 논리적으로 생각하기 시작하면 어려워져요. 비논리적인 게 제일이죠.

-하나하나의 표현을 끄집어내기도 어려운데, 저절로 나온다는 건... 그런 조합도 캐비닛에 들어 있다는 거죠?

 무라마키 : 들어 있을 겁니다. 전 비교적 간단하게 비논리적이 되거든요.

비유에 관한 건 대개 레이먼드 챈들러에게 배웠어요. 챈들러는 그야말로 비유의 천재니까요. 가끔 아니다 싶을 때도 있지만, 좋은 건 말도 안 되게 좋죠.

-챈들러에게 배운 게 비유의 구조라는 말씀인가요?

 무라카미 : 비유란 의미성을 부각하기 위한 낙차라는 거죠. 그러니까 그 낙차의 폭을 혼자 어느 정도 감각적으로 설정하고 나면, 여기에 이게 있으니 여기서부터 낙차를 역산하면 대략 이쯤이다하는 걸 눈대중으로 알 수 있어요. 역산하는 게 요령입니다. 여기서 쿵하고 적절한 낙차를 두면 독자는 눈이 확 뜨이겠지, 하는 식으로요. 독자를 졸게 만들 수는 없잖아요. 슬슬 깨워야겠다 싶을 때 적당한 비유를 가져오는 거죠. 문장에는 그런 서프라이즈가 필요해요.

 

... 아까 나온 비유 얘기처람, 가장 적당한 것이 자연스레 나와주지 않으면 어쩔 도리가 없죠. 그러니 여러 가지를 불러들여야 해요. 글쓰기는 뭐가 됐든 그것을 이쪽으로 불러들이는 일이니까요. 무녀 같은 사람처럼, 집중하다보면 여러 가지가 제 몸에 와서 찰싹 달라붙습니다. 자석이 철가루를 모으듯이, 그 자력=집중력을 얼마나 지속하느냐가 관건이죠.

(이 얘기에서 떠오르는 장면은 1Q84에서 아오마메가 교주를 암살하러 신주쿠(아사쿠사?인가)의 호텔로 가서 교주를 만나서 이야기를 하던 내용이 떠오른다. 이 부분에서 약간 주술적인 요소도 보인다고 할까? 그리고 이와 연관해서 하루키가 이런 집중력을 유지하기 위해서 혹은 유지하는 것이 달리기와 같은 운동을 통해서 이겠군이라고 생각하게 된다.)

 

p33.

 무라카미 : 리얼리티는 특징적인 게 아니라 종합적인 겁니다. 그리고 속속 변해가죠. '이건 이러하다'라고 단순하게 고정해서 단언할 수 없어요.

(바람의 노래를 들어라의 서문-이라고 기억되는데-에 보면 하루키는 이런 얘기를 한 적이 있다. "빵가게의 리얼리티는 밀가루 반죽에 있는 것이 아니라, 빵에 있다." 이와 일맥상통하는 이야기다.)

 

p41.

 무라카미 : 네, 자아 레벨, 지상 의식 레벨에서는 대개 보이스의 호응이 얕아요. 하지만 일단 지하로 내려갔다가 다시 나오면 언뜻 똑같아 보여도 배음의 깊이가 다르죠. 한번 무의식층에 내려갔다 올라온 재료는 전과는 다른 것이 됩니다. 담갔다 건지지 않고 처음 상태 그대로 문장을 만들면 울림이 얕아요. 그러니 제가 이야기, 이야기, 하는 건 요컨대 재료를 담갔다가 건지는 작업입니다. 깊이 담글수록 나중에 밖으로 나오는 것이 달라지죠.

 

p47.문장의 리듬, 고쳐 쓰기

-무라카미 씨의 단편에는 기술적인 부분, 길이나 줄거리 같은 것 말고도 읽고 난 후 짙게 남는 것이 있고, 많은 작가가 그것을 재현하고 싶다는 욕구를 느낍니다. 개인적으로 <코끼리의 소멸>이라는 단편을 읽었을 때 '나도 이런 걸 쓰고 싶다'고 생각했는데, 여기서는 막연하게 말하는 '이런 것'(웃음)은 역시 무라카미 씨 문장의 리듬에서 오는 것 같아요. 뭐라고 이름 붙이거나 설명할 수 없고, '이런 것'이라고 감각적으로만 느끼는 무엇.

 무라카미 : 말하자면 소설의 보이스와 독자의 보이스가 호응하는거죠. 그러면 물론 리듬이 생기고, 울림이 생기고, 호응이 생깁니다. 그런데 그 보이스를 어떻게 만들어내느냐, 그건 결국 '고쳐 쓰기'에요. 처음에 일단 완성해놓고, 몇 번이고 몇 번이고 고치고, 갈고닦고, 이대로 영원히 끝나지 않는 게 아닐까 걱정될 정도로 손대는 과정에서 점점 나 자신의 리듬, 잘 울리는 보이스를 찾아가죠. 눈보다는 주로 귀를 사용하여 고칩니다.

-<직업으로서의 소설가>에서도 고쳐 쓰기에 대해 열정적으로 말씀하셨는데요.

 무라카미 : 저의 고쳐 쓰기는, 제 입으로 말하기 뭣하지만, 꽤 대단하다고 봐요. 전 별로 자랑하는 편은 아닌데 이것만은 자랑해도 좋을 것 같군요.

-일단은 어찌됐건 끝까지 쓰는 편이죠? 돌아보지 않고, 어제 쓴 부분 정도는 다시 보지만 일단은 계속 써나간다. 거기가 어땠더라 하면서 거슬러 돌아가는 일도 별로 없고요.

 무라카미 : 나중에 고치면 되니까, 초고를 쓸 때는 다소 거칠더라도 어쨌건 앞으로 쭉쭉 나아가는 것만 생각합니다. 시간의 흐름에 순조롭게 올라타서 계속 전진하는 거죠. 눈앞에 나타난 것을 가장자리부터 붙들고 써나가요. 물론 그러기만 해서는 이야기 여기저기 모순이 생기지만 신경쓰지 않습니다. 나중에 조정하면 되니까. 중요한 건 자발성. 자발성만은 기술로 보충할 수 없어요.

-완성까지의 과정을 생각하면 엄청난 작업인데요.

 무라카미 : 네, 엄청난 작업이죠. 그래서 저는 장편소설을 전작으로만 씁니다. 잡지 연재는 절대 불가능해요. 혹시 한다면 이미 다 쓴 완성 원고를 나눠서 싣는 거죠. 그러다보니 다 쓸 때까지 몇 년씩 걸리기도 하고, 고독한 작업이니 말 그대로 기진맥진해요. 일단 잡지에 실어놓고 나중에 고치면 되지 않느냐는 사람도 있는데, 저는 그게 안 돼요. 한번 활자화되어 다른 이의 눈에 닿았던 글은 더이상 순수하게 자신만의 것이라 할 수 없습니다. 어둠 속에서 작업하기가 불가능해져요. 그러니 어쨌거나 마음에 들 때까지 시간을 들여 고쳐 쓰고, 그다음에 비로소 활자화합니다. <양을 쫓는 모험> 이후로 오랫동안 그렇게 해와서 다른 식으로는 쓸 수 없어요.

 

... 아무튼 어릴 때부터 음악을 열심히 들었고 재즈카페를 칠 년쯤 운영했으니, 악기 연주는 못해도 리듬이나 보이스, 즉흥연주 감각은 제법 몸속 깊숙이 배어 있습니다. 그러니 음악을 연주하는 감각으로 문장을 쓰는 면이 확실히 있는 것 같아요. 귀로 확인해가며 문장을 쓴다고 할까요. 그리고 '벽 뚫고 나가기'와는 좀 다르지만, 정말 훌륭한 연주는 어느 대목에선가 홀연히 저편으로 '뚫고 나가'곤 하죠. 재즈의 긴 애드리브든 클래식이든 어느 시점에서 일종의 천국의 영역에 발을 들이는, 번쩍하는 순간이 있어요.

 그렇게 훌쩍 '저편으로 가버리는' 감각 없이는 진정으로 감동적인 음악이 되지 못해요. 소설도 완전히 똑같습니다. 그러나 이건 어디까지나 '감각'이고 '체감'이지 논리적으로 계측할 수는 없죠. 음악의 경우도, 소설의 경우도.

 

p57. 

 무라카미 : 데뷔 당시 문단에서 제일 싫었던 게 일종의 테마주의 였어요. 이런 주제를 다뤘으니 이건 순문학이다, 깊이가 있다, 그런 말이 제일 싫었죠. 그래서 소재나 주제를 전부 걷어내고, 그럼에도 깊이 있고 무게 있는 글을 쓰고 싶었습니다. 지금은 저뿐 아니라 다들 점점 그쪽으로 옮겨가고 있다고 생각해요. 옮겨가는 것 자체는 좋은 일이지만, 그래서 그 대신 뭐가 나왔느냐하면 아직 명확하지 않죠.

 

p60.

 무라카미 : 열차가 멈추고, 한숨 돌리고, 머리를 식히고, 그뒤에 다시 원고를 읽어보면 '아, 여기가 틀렸군' '이쪽이 모자라군' 하는 부분이 차츰 눈에 들어옵니다. 그러니까 열차가 완전히 멈추기 전에 편집자에게 원고를 내주면 안되요.

-재워둬야 하는군요. 멈추기 전에 넘기면 안 되고요?

 무라카미 : 안 되죠(웃음). 머리가 뜨거운 상태에서는 나쁜 부분이 안 보여요. 좋은 부분만 보이지.

-뭐든지 제정신이 돌아온 뒤에.

 무라카미 : 그런데 현실적인 마감일이 있다면 어렵겠죠.

-제정신이 돌아올 때까지 기다려주지 않으니까요. 작가 입장에서는 말씀하신 방식이 가장 이상적이지만... 그리고 그런 환경은 어느 정도 스스로 만드는 것일 테고요.

 무라카미 : 그렇죠. 레이먼드 카버를 만났을 때 여러 이야기를 하면서 특히 그의 집필방식에 역시 그렇구나 하고 공감했습니다. 그 사람도 무척 면밀하게 고쳐 쓰는 편이니까요.

 

p64.

 무라카미 : 거품경제가 붕괴되고, 고베 지진이 일어나고, 동일본 대지진이 일어나고, 원전 문제가 생겼죠. 전 그런 시련을 통해 일본이 좀더 세련된 국가로 나아갈 줄 알았습니다. 그런데 지금은 명백하게 정반대 방향으로 가고 있어요. 그게 제가 위기감을 느낀 이유이고, 어떻게든 바꿔야 한다고 생각합니다. 

 1960년대 후반에 우리가 싸웠던 건 결국 그 바탕에 이상주의가 있었기 때문이죠. 세상은 기본적으로 더 좋은 곳이 되어갈 것이고 그러기 위해 싸워야 한다. 대부분 그렇게 믿었어요. 뭐, 어찌 보면 너무 안이한 생각이었지만 아무튼 그런 이상주의가 있었고 그것이 기능했죠. 그러다 그것이 통째로 무너져버리자 강한 환멸을 느꼈고. 하지만 이제는 거기서 한 바퀴 돌아오지 않았나 하는 생각이 최근에 들더군요. 언제까지고 똑같은 일만 할 수는 없고, 어떤 새로운 움직임에 들어서야 한다고. 그래서 뭘 어쩌겠다는 건 아니지만, 원칙적으로는 자신이 있어야 할 장소에서 담담하게, 성실하게 할 수 있는 일을 해나가는 수밖에 없어요.

 

p92.

 사람은 싸우지 않고는 살아갈 수 없죠. 안 그러면 누군가에게 이용당할 뿐이니까요.

 

p102.

-가와이 하야오 씨는 <그림자의 현상학>에서 그 예를 들며 집합적 무의식이라고 표현하셨죠. 나치 독일의 소행은 집단에 발생한 그런 그림자를 외부에 떠넘긴 결과라고 하셨던 게 생각납니다.

 무라카미 : 2차대전 이후 일본도 그랬는데, 많은 독일인은 전쟁이 끝난 뒤 자신들을 피해자 입장에 놓으려고 했어요. 우리도 히틀러에게 속았고, 마음의 그림자를 빼앗겼고, 그 탓에 혹독하게 고생했다는 막연한 피해자 의식만 남죠. 일본에서도 그와 똑같은 일이 일어나고 있어요. 일본인은 전쟁의 피해자라는 의식이 강해서 자신들이 가해자라는 인식은 자꾸 뒷전이 되어버립니다. 그리고 세부적인 사실이 이렇다저렇다 하는 문제로 도피하죠. 그런 것도 '나쁜 이야기'가 낳은 일조의 , 뭐랄까. 후유증이 아닐까 저는 생각합니다. 결국 자신들도 속은 거라는 말로 이야기가 끝나버리는 면이 있죠. 천황도 나쁘지 않다. 국민도 나쁘지 않다. 나쁜 건 군부다. 하는 식으로. 그게 집합적 무의식의 무서운 면입니다.

 

p106.

 무라카미 : 링컨이 말했듯이, 아주 많은 사람을 일시적으로 속일 수도 있고 얼마 안 되는 사람을 오랫동안 속일 수도 있어요. 그러나 많은 사람을 오랫동안 속이기는 불가능해요. 그것이 이야기의 기본 원칙이라고 저는 믿습니다. 히틀러도 결국은 십 년 남짓밖에 권력을 유지하지 못했죠. 아사히라는 십 년도 가지 못했고. 대부분의 경우 '좋은 이야기'와 '나쁜 이야기'를 준별하는 것은 시간의 역할입니다. 긴 시간이 흘러야 비로소 준별 가능한 것도 있고요.

-하긴 개별적으로, 별로 오래가지 않을 듯한 '악'은 언제나 있으니까요. 사라지지는 않고 언제나 존재하는.

 무라카미 : 네, 인간은 기본적으로 마음속 어딘가에서 그런 것을 원하니까요. 좋은 일은 이해하거나 설명하는 데 시간이 걸리거니와 귀찮고 따분한 경우가 많아요. 반면 '나쁜 이야기'는 대체로 단순하고 인간 심리의 표층에 직접적으로 호소하죠. 논리가 생략되었으니 이야기가 쉽게 받아들여져요. 거친 말을 쓴 헤이트스피치가 논리적이고 훌륭한 연설보다 귀에 잘 들어오는 법이고.

 

 얼마 전 집에 잇는 바흐의 <골드베르그 변주곡>을 여러 연주자 버전으로 비교하며 들어봤어요. 총 열다섯 장 정도를요. 그랬더니 글렌 굴드의 연주가 다른 연주자들과 압도적으로 다르더군요. 그야말로 독보적인 경지랄까요. 어딘가 다른지 한참 생각하다가 겨우 깨달은 게, 보통 피아니스트는 오른손과 왼손의 콤비네이션을 생각하며 연주하잖아요. 피아노를 치는 사람은 다들 그럴 거에요. 당연한 일입니다. 그런데 글렌 굴드는 달라요. 오른손과 왼손이 전혀 다른 일을 하는 겁니다. 오른손 왼손이 각자 자기 뜻에 따라 움직여요. 그런데 그 둘이 하나가 되면 누가 봐도 훌륭한 음악세계가 확립되거든요. 하지만 아무리 봐도 왼손은 왼손이 할 일만, 오른손은 오른속이 할 일만 생각한단 말이죠. 다른 피아니스트는 반드시, 직그히 자연스럽게 오른손과 왼손을 조화시켜 생각합니다. 그런데 그에게는 그런 의식이 없는 것처럼 느껴져요. 굴드의 연주들을 비교해봐도 1955년 버전이 그 오른손과 왼손의 분리감이 훨씬 강하고요.

-그렇군요. 1981년 버전에서는 별로 느껴지지 않나요?

 무라카미 : 물론 죽기 전에 한 연주도 분리감이 엄청나지만, 예전 것은 각기 완전히 자기 하고 싶은 대로 하면서도 합해보면 정확히 프로그래밍되어 있어요. 굴드가 프로그램하는 게 아니라 자연히 프로그래밍된 느낌이죠. 자연체라고 할까, 천연이라고 할까. 그 사람의 그런 분리감은 저도 감각적으로 잘 압니다.

 

p117.

 무라카미 : 음 있죠, 다시 한번 확인해두자면 제 문장은 기본적으로 리얼리즘입니다. 하지만 이야기는 기본적으로 비리얼리즘이죠. 그런 분리가 처음부터 떡하니 전제되어 있어요. 리얼리즘 문제를 철저하게 구사하며 비리얼리즘 이야기를 펼치는 게 제 목적이니까요. 전부터 자주 한 얘기인데, <노르웨이의 숲>에서 처음부터 끝까지 리얼리즘 문체로 리얼리즘 이야기를 쓰는 실험을 개인적으로 했어요. 그리고 '음, 됐다, 이제 쓸 수 있어'라는 확신이 들면서 그뒤의 작업들이 무척 수월해졌죠. 리얼리즘 문체로 리얼리즘 장편소설 한 편을 완성했다면, 게다가 베스트셀러가 됐다면 무서울 게 없어요(웃음). 그뒤에는 원하는 대로 하면 됩니다.

 그래서 이제 뭐든 마음대로 쓸 수 있겠다 생각하고 얼마 후 <태엽 감는 새>를 쓰기 시작했는데, 어느 정도의 정밀함을 지닌 리얼리즘 문체 위에 이른바 '상식을 깨는' 이야기를 얹으면 무척 재미있는 효과가 생긴다는 것을 그때 새삼 깨달았죠.

 

p126.

 아까 가와카미 씨가 말한, 플랜 없이 쓰다가 어디에도 도착하지 못한 사람은 분명 '바로 지금'인 그때를 잡지 못한 거겠죠. 하나 더 들자면, 아마 문체가 완성되지 않은 것 아닐까요. 문체는 매우 중요하니까. 자신의 문체 없이 지하 깊숙이 내려가기는 불가능합니다. 굉장히 위험해요. 문체는 생명줄이나 마찬가지거든요.

-개인적으로는 플랜 없이 쓰기 시작해서 작가 본인도 마지막까지 무얼 썼는지 모르겠다고 하는 작품은 보통 좀 혼잣말처럼 보이거든요.

 무라카미 : 당연합니다. 하고 싶은 말을 직접 내뱉지 않는 것이 소설의 기본이니까요.

-그러니 설사, 말이 좀 이상하지만(웃음), 지하 2층까지 내려갔다 해도 그곳에서 본 걸 독자와 공유하려면 문체가 필효하다는 거죠?

 무라카미 : 물론입니다. 저는 이래저래 벌써 사십 년 가까이 프로로 소설을 써왔는데, 그래서 그동안 무얼 했는가 하면 문체를 만드는 것, 그게 거의 다예요. 어쨋거나 조금이라도 좋은 문장을 쓰는 것, 나의 문체를 보다 탄탄하게 만드는 것, 보통은 그것만 생각합니다. 그때그때 떠오르는 스토리에 맞춰 글을 써가지만, 그때는 다른 쪽에서 날아오는 것을 리시브할 뿐이에요. 그러나 문체는 다른 쪽에서 와주지 않아요. 자기 손으로 준비해야죠. 그리고 날마다 진화해야 합니다.

-진화. 그러면 문체는 완성되는 것이 아니란 말인가요?

 무라카미 : 완성되는 것이 아니죠.

-변화해가는 것이다?

 무라카미 : 네. 문체는 점점 변화합니다. 작가가 살아 있으면 문체도 그에 맞춰 살아 숨쉬죠. 그러니 매일 변화를 수행할 테고요. 세포가 교체되는 것처럼. 그 변화를 끊임없이 업데이트하는게 중요해요. 그러지 않으면 자기 손에서 떠나갑니다.

-어떤 부분을 써야 할 때가 오면 자유롭게 구사할 수 있어야 하고요.

 무라카미 : 바로 그거죠. 문장은 어디까지나 도구일 뿐, 그 자체가 목적은 아닙니다. 도구로 쓸모가 있으면 그만이죠. 그러니 완성형 같은 건 있을 수 없어요. 저도 예전에는 쓰지 못했던 것을 비교적 자유롭게 쓸 수 있게 됐습니다. 이제는 거의 쓰고 싶은대로 쓸 수 있는 것 같아요.

-쓰지 못하는 건 없나요?

 무라카미 : 쓰고 싶은데 못 쓰는 건 없을걸요. 우회할 필요도 별로 없고. 다만 지금 당장 역사소설을 쓰라고 한다면 그건 좀 곤란하겠죠(웃음). 준비도 많이 필요하고.

-역사 고증이라든가(웃음).

 무라카미 : 네, 전문용어도 필요하고요. 하지만 현대 배경, 말하자면 제가 써온 이야기의 세계 안에서 기술적으로 쓰지 못하는 상황이 있는가라면, 아마 웬만한 건 어찌어찌 가능하지 않을까 싶어요. 뭐, 꽤 오랫동안 글을 써왔으니까요.

 

 p128.

-이번 주인공은 그림 관련 일을 하는데요. 그 직업은 먼저 정해두셨나요? 화가 주인공은 처음이죠?

 무라카미 : 잇마년 전 미국 터프츠대학에서 명예 문학박사 학위를 받고, 수전 네이피언이라는 일본어과 교수님을 만나 그분 남편과 파티에서 대화할 기회가 있어어요. 초상화가로 일하는 미국인이었죠. 그때 이런저런 이야기를 나누면서 초상화가가 제법 흥미로운 직업이구나 생각했던 것이 어려풋이 머릿속에 남았어요. 그리고 이번에 주인공 직업을 뭘로 할까 하다가 초상화가도 나쁘지 않을 것 같아서 쓰기 시작했는데, 그 다음에야 '아 참, 그러고 보니 수전 씨 남편이 초상화가였지' 하고 생각났습니다. 제 기억이란 게 대개 그런 식이에요.

 

 p133.

 무라카미 : 캐비닛이 작은 사람, 혹은 일에 쫓겨 서랍을 채울 시간이 없는 사람은 점점 고갈되어갑니다. 그래서 저는 아무것도 쓰지 않는 시기에는 열심히 서랍을 채우려고 해요. 장편소설을 쓰기 시작하면 그때부턴 총력전이니 쓸 만한 건 뭐든 갖다 써야 하거든요. 서랍이 하나라도 많은 편이 좋아요.

 

p144.

 무라카미 : 그 신용거래가 성립하려면 이쪽에서도 최대한 시간과 수고를 들여 정성껏 작품을 만들어야 합니다. 독자들은 집합적으로는 정확히 간파해요. 이건 착실하게 공들여 썼거나. 이건 꼭 그렇지도 않구나. 대충 게으름 부리면서 쓴 건 긴 시간 속에서 반드시 지워집니다. 우리는 시간을 내 편으로 만들어야 하고, 그러려면 시간을 존중하고 소중히 다뤄야 해요.

 

p156.

 무라카미 : 그렇죠, 멘시키 씨는 '원하는 것은 거의 전부 손에 넣었지만, 알고 보면 원하면 손에 넣을 수 있는 것밖에 원하지 못한' 사람이니까.

 

p167.

 무라카미 : 전혀 의식하지 않앗어요. 그래도, 의식이란 것에 대해서는 꽤 자주 생각하는 편입니다. 인간의 의식이 등장한 건 인류 역사에서 훨씬 뒤의 일이에요. 그전에는 거의 무의식밖에 없었고, 그 무의식 중심의 세계에서 사람들은 개인이 아니라 집합적으로 판단을 내리며 살았죠. 그리고 도시가 생기고 보다 고도의 조직과 시스템이 완성됨에 따라 '무의식'으로 행하던 일들이 점차 '의식'의 영역으로 격상됩니다. 보다 논리적이 되고요. 그렇지 않으면 시스템을 효율적으로 유지할 수 없으니까요. 

 그것과 같은 얘기라고 봅니다. 옛날에는 대개 무의식 속에서 처리하던 일들을 의식을 기반으로 처리해야 한다. 그와 더불어 언어체계가 정비된다. 무의식의 세계에서 사람들이 무엇에 기대어 살아왔느냐 하면, 바로 예언이죠. 고대사회에는 무녀, 혹은 주술사 역할을 하는 왕이 있었어요. 그들은 무의식의 사회에서 더더욱 무의식을 갈고닦아, 벼락을 맞는 피뢰침처럼 여러 메시지를 받아서 사람들에게 전했습니다. 보통 사람들은 스스로의 의식을 가질 필요가 없었고 가진다 한들 쓸데도 없었으니 그저 예언에 따라 무의식의 세계에서 살아가면 그만이었죠. 그것이 편하기도 했고요. 더이상 메시지를 받을 수 없게 된 왕은 죽임을 당하고, 새로운 왕이 탄생했습니다. 그런데 사회가 '의식'화하면서 그런 무녀적인 존재는 점차 힘을 잃어가죠. 공기가 바뀌고 벼락을 잘 맞을 수 없게 됐어요. 이데아도 그와 비슷한지 모르겠군요. 정말로 순수한 것은 오로지 무의식에 존재하지만 우리는 이제 그것을 보지 못하고, 대신 의식에 투영된 것을 보는 수밖에 없다. 방금 플라톤 이야기를 듣다보니 떠오른 생각입니다.

 

p194. 문장만 계속 변화하면 무서울 것이 없다.

-<기사단장 죽이기>는 목적 없이 써둔 문장에서 시작되었습니다. 이번에 1인칭 '나(와타시)'를 사용한 데는 당시 번역하던 챈들러 작품의 영향이 있었는지도 모르겠다는 말씀을 듣고 그도 그렇겠다. 무슨 분위기인지 알겠다고 생각했는데, 그래도 제일 먼저 떠오르는 건 <위대한 개츠비>입니다.

 오늘은 우선 <위대한 개츠비>와의 관계부터 얘기할까 합니다. 지형과 집의 묘사, 멘시키라는 인물의 조형, 그리고 '나'와의 거리, 관계성... 등은 닉 캐러웨이와 제이 개츠비의 관계를 떠올리게 합니다. 그건 당연히 의식하셨죠?

 무라카미 : 물론, 처음부터 의식했습니다. 골짜기 너머 건너편을 바라보는 구도는 두말할 것 없이 <위대한 개츠비>에서 거의 그대로 차용한 것이고, 멘시키 씨 조형에도 제이 개츠비의 캐릭터가 얼마간 들어갔습니다. 유복하고 비밀스러운 이웃 개츠비는 매일 밤 후미 건너편의 초록 불빛을 바라봅니다. 누구나 아는 유명한 장면이죠. 멘시키 씨 역시 밤마다 골짜기 건너편 집의 불빛을 바라봅니다. 홀로 고독하게. 이 부분은 말하자면 혼카도리(本歌取り : 와카和歌 작법, 현대 대중가요의 샘플링 기법과 유사)처럼, 피츠제럴드에 대한 개인적인 트리뷰트 같은 거에요. 그러니 '나'라는 1인칭 화자가 어느 정도 <위대한 개츠비>의 화자인 닉 캐러웨이와 비슷한 포지션이 되리라는 점은 당연히 의식했습니다.

-처음부터 그런 이미지가 있었나요?

 무라카미 : 집필을 시작하고 골짜기 건너편에 사는 인물을 설정했을 때 '아, 이건 개츠비구나'라고 생각했습니다. 처음부터 그럴 생각이었던 건 아니지만요.

-나중에 깨달은 거군요.

 무라카미 : 네, 집의 위치를 만들고 골짜기를 만들고 그 건너편에 커다란 저택이 있다는 설정까지 나온 뒤 '아, 그런가. 이건 개츠비구나'라고 문득 깨달았어요.

-무라카미 씨의 문화적 캐비닛 속에는 워낙 다양한 요소가 들어 있으니 지금까지 작품을 쓰면서도 생각지 못한 것이 나오곤 했을 테지만, 이번에는 그중에서도 <위대한 개츠비>였군요. 무라카미 씨에게 무척 특별한 소설인데요.

 무라카미 : 제가 <위대한 개츠비>를 번역한 건 예순이 되기 조금전이고, 챈들러의 <기나긴 이별>도 비슷한 시기였는데, 더 나중이었던가?

-챈들러가 나중이었어요.

 무라카미 : 그랬죠? <위대한 개츠비>를 제 손으로 직접 한 줄 한 줄 공들여 일본어로 옮기는 작업은 그냥 읽는 일과 전혀 달랐어요. 몸속에 쌓이는 과정이 달라요. 소설의 세부가 앙금처럼 단단히 제 안에 쌓여가고, 그 침전이 구체적인 영감을 주었습니다. 자연스럽게 자극해서 앞으로 나아가게 하죠. <위대한 개츠비>와 <기나긴 이별>을 번역한 건 제가 생각했던 것 이상으로 의미 있는 일이 아니었나 싶습니다.

-자신에게 특별한 작품을 그런 형태로 다시 한번 만나는 건 작가로서 기쁜 일이죠.

 무라카미 : 네, <위대한 개츠비>라는 소설은 그야말로 제 골격의 일부나 다름없습니다. 그것을 나름대로 환골탈태할 수 있나느 건 무척 익사이팅한 일이죠. 꺼꾸로 말해, '재사용'이라는 표현은 좀 그렇지만, 작품의 구조와 장치의 이행, 전용이 가능하다는 것도 문학 명작의 중요한 조건 중 하나 같습니다. 그것이 가능하기 때문에 클래식이라 부를 수 있는 거죠.

-지난 주말에 <위대한 개츠비>를 다시 읽어봤는데, '데이지를 오후에 집으로 초청하고 자기도 불러줄 수 있겠느냐'는 대목이 상당히 겹치더군요.

 무라카미 : 그렇죠, 그 부분은 물론 저도 의식했습니다. 속으로 슬쩍 웃으면서 썼죠(웃음).

-좋은데요. 이전 작품에서도 본인에게 특별한 작품을, 아는 사람만 알아볼 수 있게 등장시키곤 했죠.

 무라카미 : 몇몇 작품에서도 그런 적이 있어요. 유희이기도하고. 말하자면 트리뷰트처럼, 제 생각에, 한 사람이 인생에서 정말 진심으로 신뢰할 수 있는, 혹은 감명받을 수 있는 소설은 몇 편 되지 않습니다. 많은 사람은 그걸 몇 번이고 읽으며 찬찬히 곱씹죠. 소설을 쓰는 사람이건 쓰지 않는 사람이건, 자신에게 정말로 중요한 의미를 지니는 소설은 평생 대여섯 권 정도 만나지 않을까요. 많아야 열 권 남짓일까. 그리고 결국 그 몇 안 되는 ㅊ책이 우리 정신의 대들보가 되어줍니다. 소설가의 경우는 그 스트럭처를 몇 번이고 반복하고, 바꿔 말하고 풀어 말하면서, 의식적 혹은 무의식적으로 자기 소설에 편입해갑니다. 우리 소설가들이 하는 일이란 결국 그런 게 아닐까요.

 호르헤 보르헤스라고 있죠. 그가 어느 날 시를 써서 친구 앞에서 읽어줬더니 "자네, 오 년 전에도 완전히 똑같은 시를 썼어"라는 지적을 받습니다. 보르헤스는 전에 그런 시를 썼다는 사실을 까맣게 잊어버린 거죠. 이에 대해 보르헤스는 말합니다. "시인이 쓰고 싶어하는 이야기는 평생 대여섯 가지밖에 없어. 우린 그걸 다른 형태로 반복할 뿐이지." 듣고 보면 정말 그렇다 싶어요. 결국 우리는 대여섯 가지 패턴을 죽을 때까지 반복하는 것뿐일지 모른다고. 다만 몇 년 단위로 반복하는 사이 형태나 질은 점점 변해가죠. 넓이와 깊이도 달라지고요.

-그때 작가가 두려워하는 건 아마 자기모방의 가능성이겠죠. 후퇴하지는 않았나. 똑같은 말을 되풀이하고 있지는 않나 하는 걱정. 같은 대여섯 가지의 패턴을 되풀이하면서도 발전을 느낄 수 있다면 그건 어떤 부분일까요?

 무라카미 : 문장입니다.

-문장?

 무라카미 : 네. 문장. 제게는 문장이 전부입니다. 물론 소설에는 이야기적 장치, 등장인물, 구조 등 여러 요소가 있지만 결국에는 모두 문장으로 귀결합니다. 문장이 바뀌면, 새로워지면, 혹은 진화하면 설령 똑같은 내용을 몇 번씩 되풀이해도 새로운 이야기가 됩니다. 문장만 계속 변화하면 작가는 아무것도 두려울 게 없습니다.

-문장만 계속 변화하면 무서울 것이 없다.

 무라카미 : 네. 전혀 무서울 게 없어요. 문장이 정체하면 그저 똑같은 돌림노래겠지만, 문장이 업데이트된다면, 피와 살을 지니고 계속 움직일 수 있다면 모든 것이 달라집니다.

-무라카미 씨는 문장에서 가장 중요한 부분이 리듬이라고 하셨느네, 문장을 변화시키는 것이란 즉 리듬을 연마하는 일이기도 하겠군요.

 무라카미 : 그렇죠. 울림, 리듬, 그런 것들이 전과 달라졌다는 확신이 없다면 역시 스스로 무서워지지 않을까요. 문장이 달라지면 같은 이야기여도 나아가는 방향성이 달라집니다. 작가는 그렇게 전진하는 수밖에 없어요.

-<스푸트니크의 연인>이 나왔을 당시 <광고비평> 인터뷰에서 이 작품은 의식적으로 비유를 많이 사용했다고 하셨죠. 그때까지 선호하던 문체를 총결산하고 '이런 문체의 소설은 이제 그만 쓰자'는 생각으로 임했다고요.

 무라카미 : 네. 그때는 문장 스타일을 한번 완전히 바꿔보고 싶은 마음이 있었어요.

-그전까지의, 이른바 무라카미 씨다운 문체를 모조리 써버리는 극단까지 갔다는 말이군요. <스푸트니크의 연인> 전까지는 문장이 전진하는 과도기였다고도 볼 수 있을까요?

 무라카미 : 네, 그렇죠. 아무튼 나다운 문장, 혹은 그전까지 '무라카미 하루키다운 문장'이라 여겨졌던 것. 즉 비유를 많이 사용한 경쾌한 문장을 쓸 수 있는 만큼 써버리고, '이건 이제 됐다'하고 그뒤로 다른 문체가 나올 수 있으면 좋겠다고 생각했어요. 그리고 <해변의 카프카>로 갔죠. 이 <해변의 카프카>라는 소설은 그전까지의 문장으로는 쓸 수 없는 이야기였습니다. 다른 문체를 끌어와야 했어요. 그래서 조금 색다른 문체를 쓰다보니 호시노군이나 나카타 노인 같은, 지금까지 그려본 적 없던 캐릭터가 자연히 등장한 겁니다. 그래도 그 단계까지 가려면 일단 일종의 총결산 같은 것을 해둬야 하죠.

 

p200. <노르웨이 숲>의 사라진 시나리오

-데뷔작과 그 다음 작품 때는 아직 소설을 잘 몰라서 자신의 스타일을 익히는 데 시간이 걸렸다고 했습니다. 그뒤로 <스푸트니크의 연인>에 이르기까지 긴 시간을 들여, 좀전에 무라카미 씨가 말씀하신 '나다운 문제'를 만들어갔고요. 그것을 일단 총결산하고 다음 문체로 넘어갈 때 작가가 할 수 있는 일에는 구체적으로는 어떤 것이 있을까요?

 무라카미 : 물론 문체를 총결산하고 새로 만들어낸다는 게 그리 간단한 일이 아닙니다. 지금까지 써보지 않은 근육을 갑자기 쓸수는 없으니까요. 그저 새로운 방향으로 문체를 전환하자는 마음가짐인 거죠. 새로운 문체가 새로운 이야기를 낳고, 새로운 이야기가 또 새로운 문체를 보강해갑니다. 그런 순환이 이뤄지면 제일 좋아요.

-작가에 따라 다르겠지만, 자신의 문체가 무엇인지 아는것, 자신만의 시그니처가 들어간 문체를 획득하는 것은 역시 쉽지 않은 일입니다. 그것이 좋은 문체인지 치밀하게 관찰할 필요도 있고요. 누가 봐도 무라카미 씨의 것임을 알 수 있는 문장을 쓰면서 그다음 단계로 나아가는 것, 나아가 그것을 독자와 공유하기란 녹록지 않을 텐데요.

 무라카미 : 어쨌거나, 저는 문장을 쓰는 게 좋습니다. 늘 문장을 생각하고, 늘 어떤 문장을 쓰고 있고, 늘 여러 가지를 조금씩 시험해봐요. 문장이라는 도구가 제 손에 있는 것만으로 무척 행복하고, 그 도구의 여러 가능성을 시험해보고 싶어요. 애써 손에 넣은 것이니까.

-무라카미 씨는 절대 발을 멈추지 않죠. 정체하기 않고 계속 움직이니까 가까이서도 그 변화를 알 수 있지만, 조금 물러서서 보면, 몇 년쯤 지나서 보면 유기적으로 뚜렷한 그러데이션이 드러나 있어요.

 무라카미 : 지난번에도 말했듯이 <노르웨이의 숲>에서 끝까지 리얼리즘으로 소설을 쓰는 실험을 했습니다. <스푸트니크의 연인>은 그전까지의 문체를 총결산할 생각으로 쓰기 시작했고요. 그뒤에 <애프터 다크>는 거의 영상 시나리오와 비슷한 방식으로 써봤죠. 그렇듯이 '조금 짧은 장편'에서는 늘 저 나름의 실험을 합니다. 이번에는 이런 걸 해보자 하고 도전하죠. <색채가 없는 다자키 쓰쿠루와 그가 순례를 떠난 해>도 제게는 다소 실험적인, 그룹을 묘사한 소설입니다. 그전에는 그렇게 써본 적이 없었어요. 쓰는 입장에서는 그 정도 길이의 소설이 제일 실험하기 좋죠.

 단편이라면 어느 정도 통합성이 필요하고, 긴 장편에서도 섣불리 시도할 수 없어요. 어설프게 실험적인 요소를 넣으면 수습이 힘들어지니까. 그래도 <스푸트니크의 연인>과 <국경의 남쪽, 태양의 서쪽>, 또 <애프터 다크> <색채가 없는 다자키 쓰쿠루와 그가 순례를 떠난 해> 정도의 경장편에서는 비교적 깊이 있는 실험을 할 수 있습니다. 마음껏 감각을 해방하고 새로운 설정을 시도해볼 수 있어요. 제게는 아주 중요한 그릇이라 할 수 있죠. 그런데 그 정도 사이즈의 소설은 대개 독자 평판이 좋지 않단 말이죠.

-뭐 짚이는 게 있으세요?(웃음)

 무라카미 : 모르겠군요. 무엇 때문일까(웃음). 단편은 단편대로 어느 정도 인정받고 긴 장편도 장편으로 인정받지만, 그 사이주의 소설을 적어도 출간 당시에는 왠지 혹평이 많은 느낌이에요. 대충 썼다. 지금까지와 똑같다. 아니면 반대로 새로운 시도에 실패했다 등등.

-아무래도 단편과 장편의 중간에 속하다보니, 좀더 스케일이 큰 이야기를 기대하던 독자들이 어중간하다는 느낌을 받는 걸까요.

 무라카미 : 모르겠어요. 저 개인적으로는 그런 작품 하나하나에 애착이 있고, 외국에서는 신기할 정도로 평판이 좋은데 말이죠.

-단편소설을 읽은 뒤의 날카롭고 상쾌한 느낌과 긴 장편소설의 다이너미즘에 흠뻑 취하는 독서체험. 무라카미 씨의 독자는 그 양쪽을 다 알지만 다소 짧은 장편의 경우에는 어떤 식으로 대해야 할지 좀 망설여지는지도 모르겠네요.

 무라카미 : 독자 카드에 너무 비판적인 의견만 나와서 담당 편집자가 무척 침울해했어요. 보기 딱할 정도로(웃음). 그래도 저는 별로 신경쓰지 않았아요. 어느 정도 시간이 흐르면 희안하게 재평가의 목소리가 나오거든요. "사실은 좋았습니다" 커밍아웃하는 사람도 있어요. 나중이 될수록 점점 평가가 좋아져요.

-"사실은 좋았습니다"라니, 왜 눈치를 보는 걸까요(웃음). 처음부터 말하면 될 걸.

 무라카미 : 아니면 읽는 이의 마음을 불편하게 자극하는 부분이 있는지도 모르죠. 그래서 반발을 사는 걸까요? 그래도 그런 분량의 장편소설에서만 가능한 것이 분명히 있고, 제게도 나름의 성과가 확실히 남기 때문에, 평판이 좋지 않아도 딱히 걱정하진 않습니다. 머릿속에는 '자, 다음으로 가자'는 생각뿐이죠.

-그래도 무라카미 하루키라는 작가는 어떤 부분을 포착할 때는 미들클래스, 400자 원고지 사오백 매 내외의 작품 속에 커다란 실마리, 중요한 것이 있다고 할 수 있죠.

 무라카미 : 네, 그럴 거에요. 그 정도 분량이 소설이 고비가 되어, 다음 장편으로 그 성과가 이어지는 면이 확실히 있습니다. 저는 곧잘 함대에 비유하는데, 거대한 전함이 있고, 그다음에 순양함이 있고, 구축함이 있고, 뒤이어 더 작은 배나 잠수함이 함대를 이루죠. 제일 큰 전함이 제게는 긴 장편에 해당하는데, 대신 그만큼 움직임은 부자유스러워요. 작은 배가 단편이고, 좁은 데서도 꽤 자유롭게 움직이지만 화력이 아무래도 모자라죠. 그런 때 마침 중간 사이즈의 배가 있으면 굉장히 고마워져요.

-그런데 단편도 점점 분량이 늘어나는 추세에요. 2014년의 <여자 없는 남자들>의 수록작도 각각 팔십 매 전후잖아요. 물론 단편의 범주에 들긴 하지만 조금 긴 편이랄까요. 아주 짧은 작품은 요즘 들어 잘 없어요. 예전에는 많았는데.

 무라카미 : 그렇네요. 점점 길어지는지도 모르겠어요. 언젠가 또 짧은 것도 쓰겠죠.

-<여자 없는 남자들> 때는 어땠나요?

 무라카미 : 음, 그때는 좀 긴 걸 쓰고 싶은 시기였어요. 쓰다보니 점점 이미지가 부풀어서, 쓰고 싶은 게 많았고, 그동안 길고 촘촘하게 쓸 수 있는 능력이 생기기도 했죠. 그런 게 재미있었어요.

-<세 가지의 독일 환상>처럼 짧고 시적인 세 개의 이야기로 구성된 것도 있었죠. 무라카미 씨 작품 중에서도 실험적인 단편이었어요.

 무라카미 : 옛날 작품이죠. 그렇게 감각적인 글을 쓰는 것을 좋아하던 시기도 있었습니다. 잡지에서 짧은 글을 원한 이유도 있지만. 지금은 잡지 청탁을 받아서 쓰는 일이 없으니까 보통 쓰고 싶은 만큼 쓰죠. 그래서 자꾸 길어지는지도 모르겠어요. 그래도 때가 되면 또 짧은 이야기를 쓰리라 생각합니다.

-이번 <기사단장 죽이기>는 분량도 많지만 디테일 면에서도, 특히 1부는 매우 치밀하게 쓰였습니다. 패러프레이즈가 자유자재이고 마치 '문장으로 묘사할 수 없는 것은 없다'는 의지까지 느껴지는 밀도에요. 하나의 대상을 아주 끈질기게 묘사하고요. 지금까지도 그랬지만 이번에는 그 시점이 또 조금 변한 인상이었습니다.

 무라카미 : 저는 원래 풍경 묘소 같은 데 서툰 편이었어요.

-초기에요?

 무라카미 : 아주 초기에. 대화나 행동 묘사는 그럭저럭 매끄럽게 나오는데, 움직임을 억제하고 구석구석 세세하게 묘사하기로 마음먹으면 아무래도 잘 안 되더군요. 그러다가 차츰 써지니까 좋아서 자꾸 써넣은 편이 있을지도 모르겠네요(웃음).

-하긴 초기에는 그런 묘사보다 미니멀한 날카로움, 아포리즘의 이미지가 강했죠. 서툴렀다고 하셨는데, 그래도 세번째 작품인 <양을 쫓는 모험>에서는 근사한 풍경 묘사가 나오잖아요.

 무라카미 : 그런가요. 특별히 생각하지 않았는데요.

-산속 오두막으로 가면서 드넓은 초원을 걷는 장면이라든지. 꼭 자작나무 같은 걸 눈앞에 보는 기분이었는데요. 풍경이나 정경 묘사는 언제부터 만족스럽게 쓸 수 있게 됐다고 느끼세요?

 무라카미 : 언제일까요. 아주 최근처럼 느껴지는데, 풍경 묘사는 정말 옛날부터 잘 못했어요. 심리묘사는 더 못해지만(웃음).

-그런 때는 '여기 풍경 묘사를 좀 더 넣는 편이 좋겠는데 쓰기 싫다'는 느낌인가요?

 무라카미 : 그렇죠. 소설에는 본래 밸런스라는 것이 있으니까 '쓰기 싫지만, 귀찮지만, 여기서는 써야 한다' 싶죠.

<애프터 다크>를 쓸 때 가장 뚜렷하게 느꼈는데, 처음에는 대화만 슥슥 쓰고, 사이사이 간단한 지문을 메모해뒀어요. 그리고 마지막까지 다 쓴 뒤 지문 부분을 '영차, 영차'하면서 정교한 문장을 만들어 써넣었죠. 그런 식으로 써보는 것도 제게는 좋은 공부가 됐어요.

 

p213.

 무라카미 : 그에 앞서, 리얼하게 쓰지 않으면 미스터리해지지 않습니다. 미스터리하게 쓰려 한다고 미스터리해지는게 아니니까. 최대한 리얼하게 써야지 하는데도 미스터리해진다면 결과적으로 미스터리한 인물이 만들어지는 것이죠.

 

p227.

 무라카미 : 말이죠. 문장을 어떻게 쓰는가 하는 규범은 제 생각에 기본적으로 두 가지뿐이에요. 하나는 고리키의 <밑바닥에서>에서 거지와 순례자의 대화. "내 말 듣고 있는거야?"하고 한 사람이 말하니까, 다른 사람이 "나 귀머거리 아니야"라고 답해요. 지금은 거지니 귀머거리니 하는 차별용어를 쓰면 안 되지만 그 시절에는 아니었어요. 전 이 책을 학창시절에 읽었는데, 보통 같으면 "내 말 듣고 있는 거야?" "듣고 있어"로 끝날 대화죠. 그런데 그러면 드라마가 안 되는 겁니다. "귀머거리 아니야"라고 대답하니까 주고받는 말 속에 역동감이 생겨요. 단순하지만 아주 중요한 기본입니다. 그런데 이것을 못하는 작가가 세상에는 많거든요. 저는 항상 그 사실을 의식합니다.

 

 또하나는 비유. 챈들러가 쓴 비유 중에 "내가 잠 못 이루는 밤은 뚱뚱한 우편배달부만큼 드물다"라는 게 있어요. 에전에도 몇 번 예롤 든 문장인데, 만약 "내가 잠 못 이루는 밤은 드물다"라고만 하면 독자는 아무것도 느끼지 못하죠. 예사롭게 획 읽고 지나갑니다. 그런데 "내가 잠 못 이루는 밤은 뚱뚱한 우편배달부만큼 드물다"하면 '호오!' 싶잖아요. 그러고 보니 뚱뚱한 우편배달부는 본 적 없는데, 하고. 그게 살아 있는 문장입니다. 이렇게 반응이 생겨나고, 움직임이 생겨나죠. "귀머거리 아니야"와 "뚱뚱한 우편배달부". 이 두 가지가 제 글쓰기 모델입니다. 그 요령만 알면 제법 좋은 문장을 쓸 수 있을 거예요. 아마도.

 아무튼 독자가 간단히 읽고 넘어갈 문장을 쓰면 안 된다는 거죠. 정신이 번쩍 들게 만드는 문장으로만 채울 필요는 없지만, 몇 페이지에 하나쯤은 넣어줘야 해요. 아니면 독자가 좀처럼 따라와주지 않아요.

 

...

 

 오손 웰즈의 영화 <시민 케인>에서 이탈리아에서 온 음악 선생이 가수 지망생인 케인의 부인을 가르치다 말고 이런 말을 해요. "세상에는 노래를 할 줄 아는 인간과 못하는 인간이 있습니다." 유명한 대사인데, 어쩌면 글쓰기에도 적용할 수 있는 말 같아요.

 저도 처음에는 거의 글다운 글을 쓰지 못했어요. 그때부터 노력하며 조금씩 이런저런 것들을 쓸 수 있게 돘죠. 단계적으로 발전해온 거죠.

 

p231.

-무라카미 씨는 곧잘 '처음에는 잘 쓰지 못했다'고 하시는데요. 아까 했던 노래 이야기처럼 내가 쓰고 싶은 건 이런 거다. 하는 확고한 이미지는 있었는데 본인이 보기에 멀다고 느꼈다는 뜻인가요?

 무라카미 : 한참 멀었죠. 당시 편집자에게 "제가 아직 문장력이 부족해서요" 했더니 "괜찮아요, 무라카미 씨. 다들 원고료 받아가면서 차차 좋아집니다" 하더군요. 하긴 맞는 말이었어요(웃음).

-자꾸 처음에는 나도 잘 못 썼다, 못 썼다 하시는데, 저는 개인적으로 잘 모르겠습니다. 잘만 썼잖아 싶은데요(웃음).

 무라카미 : 잘 쓸 수 있는 것만 썼고, 그것이 그것대로 잘 기능했다고 봐요. 그래도 제가 정말로 쓰고 싶었던 것과는 조금 달랐죠. 쓰고 싶은 이야기를 어느 정도 만족스럽게 쓸 수 있게 된 건 훨씬 나중이에요. 그럼에도 불구하고, 라고 해야 하나... 저는 데뷔 무렵부터 꽤 주목받았던 모양이에요.

 

p234.

-2015년 후쿠시마에서 열린 문학 워크숍에서 무라카미 씨가 제 창작 클래스에 잠깐 참석해주셨죠. 그때 수강자들에게 딱 한 가지 지적하셨는데. 귀로 들어서 알 수 없는 말은 쓸 때도 신중해야 한다는 것이었어요. 그런데 신인상 응모작 원고를 읽다 보면 다들 비교적 어려운 말을 자각 없이 쓰는 경향이 아직 엿보이거든요. 문자로나 소리로나 아무것도 남지 않는 말을요.

 무라카미 : 네, 말의 울림은 중요합니다. 구체적이고 피짘컬한 울림. 설령 소리내지 않고 눈으로만 보더라도 울림이 잇어야 해요.

-주제나 내용은 어찌됐건 일단 문장 단위에서 리듬이 좋고 술술 읽히는 글도 생각해보면 거의 없는 것 같아요. 그것도 일종의 궁합일 테지만요.

 무라카미 : 작가는 눈으로 울림을 들어야 합니다. 글을 쓰고, 다시 읽어보고, 소리내는 대신 눈으로 울림을 느낀다. 이게 굉장히 중요해요. 저는 항상 '음악에서 글쓰는 법을 배운다'고 하는데, 정말 그렇습니다. 눈으로 보고, 울림을 느끼고, 그 울림이 더 아름답게 울리게끔 바로잡아가는 작업을 중요시해요. 마침표, 쉽표도 리듬이잖아요. 그런 게 무척 중요해요.

 

p236.

 사는 법을 가르칠 수 없는 것처럼, 글쓰는 법을 가르치기도 어려워요.

 

p238.

 무라카미 : 전에도 말했듯이 소설 쓰는 일은 일종의 신용거래고, 한번 잃어버린 신용을 되찾기는 매우 어려워요. 시간을 들여 '이 사람이 쓴 거니 돈 내고 사서 읽어보자'라는 신용을 쌓아나가고 유지해야 합니다. 그러려면 문장을 정성껏 갈고닦는 일이 중요해요. 구두를 닦거나, 셔츠 다림질을 하거나, 칼날을 가는 것처럼.

 저는 문체가 거의 제일 중요하다고 생각하는데 일본의 이른바 '순문학'계에서는 문체는 3순위나 4순위쯤 되는 듯합니다. 대개는 테마 제일주의로, 일단 테마 운운을 주목한 뒤야에 다른 여러 가지, 이를테면 심리묘사나 인물 설정 같은 관념적인 부분을 평가하고, 문체는 한참 뒷전이죠. 그러나 그게 아니다. 문체가 마음껏 활동하지 않으면 아무것도 나오지 않는다는 것이 제 생각입니다.

 

p245.

 무라카미 : 스트록처는, 글을 쓰기 시작할 때는 거의 의식하지 않아요. 그럴 필요도 없이 당연하고 자연스럽게, 자기 안에 이미 갖춰져 있어야 하니까요. 인간 한 사람 한 사람에게 고유의 골격이 있는 것과 마찬가지죠.

-스트럭처 역시 일부러 만들어내는 것이 아니다?

 무라카미 : 그 형태가 어디서 생겨나느냐 하면, 주로 지금껏 자신이 읽어온 소설, 그리고 써온 소설에 의해 만들어집니다. 이미 자기 안에 자명하게 존재하는 것이죠. 그러니까 새삼 생각할 일이 없어요. 대신 문체를 생각해야죠. 그리고 문체가 이끌어내는 이야기를.

 

..

 

 화가가 캔버스에 그림을 그리는 것과 똑같아요. 캔버스에는 끝이 있죠 다들 그 안에 그림을 그립니다. 테두리 바깥에는 그릴 수 없어요. 그래도 화가는 별다른 불편을 느끼지 않죠. 끝없이 이어지는 광대한 캔버스 없이는 자유롭지 못하다는 생각은 하지 않아요. 어떤 사이즈의 캔버스를 머릿속에 설정하면 그 안에서 세계가 완성되어갑니다. 소설에서도 마찬가지로, 이쯤이 끝이겠다 싶은 부분이 대략적으로 보여요. 아니면 오천육백 매씩 쓰고도 아직 모자란다고 하겠죠. 즉 어느 정도 쓰는 사이 구조가 보이기 마련이에요. 위쪽 끝은 이쯤이고, 아래쪽 끝은 이쯤, 좌웅 양쪽은 여기까지. 그러니 구조나 골격을 두고 그렇게까지 고민할 필요는 없어요. 자연히 결정되니까요.

-지금까지 독서를 통해 쌓아온 것들에 구조의 재료가 모여있고, 그게 자연히 나오면서 작품에 따라 확실한 형태를 잡아간다는 말이군요. 무라카미 씨가 꾸준히 번역작업을 하는 것과도 적잖이 관계되는 것 같습니다. 번역이란 전체 구조뿐 아니라 문장구조 그 자체에 줄기차게 부딪히는 작업이니까요.

 

 

p323

 무라카미 : 필요 없죠. 저는 소설 쓰는 게 좋고 밖에 나가 노는 일이 잘 없어요. 일찍 자고 일찍 일어나고, 나이트라이프라고는 전혀 없어요. 어떻게 그런 생활이 가능한가 하면, 소설을 쓰는 능력이 있어서죠. 저는 소설을 어느 정도 잘 쓸 수 있고, 저보다 잘 쓰는 사람은 객관적으로 봐서 뭐, 그렇게 많지는 않은 셈이잖아요. 이 세상에.

-좋은 말씀이 나왔습니다. "나보다 잘 쓰는 녀석은 적다!"

 무라카미 : 자랑이 아니라, 그리 많다고 할 수는 없지 않나요. 어쨌거나 글쓰기에는 프로니까요. 사십 년 가까이 일선에서 프로로 글을 써왔고, 책도 어느 정도 팔리고, 실력이 그리 나쁜 편은 아니라고 봅니다. 그래서 글쓰기가 즐겁고요. 이 일을 나보다 잘하는 사람이 그리 많지 않다고 생각하면 일하기가 즐거워요. 예를 들어 섹스도 나쁘지 않지만, 나보다 섹스를 잘하는 사람이야 아마 세상에 굉장히 많겠죠(웃음). 직접 본 일은 없지만.

-그, 그렇군요...(웃음) 그러나 소설은 다르다.

 무라카미 : 소섥은 다르다. 이런 건 아마 나밖에 하지 못할 거라고 실감합니다. '어때, 손해는 안 본댔지' 하는 거. 이 실감은 무엇과도 바꿀 수 없어요(웃음).

-철학자 등이 현저히 그렇죠. 의문을 제기하는 단계도 그렇고, 어떤 명제에 대해 여기까지 생각할 수 있는 사람은 나뿐이라는 자부심이 있어요. 기존의 학설을 넘어서서 새로운 생각을 내놓았다는. 일종의 '성취감'과 '과시욕'이 없으면 지적인 작업을 할 수 없죠. 그런 것이 중요한 엔진이라고 생각합니다.

 무라카미 : 그렇기에 쓸데없는 생각을 할 여유가 없어요. 아무튼 지금 좋아서 소설가를 하고 있으니 계속 해보자. 그러다가 판매량이 떨어지면 떨어지는 대로, 소설을 못 쓰게 되면 못 쓰는 대로, 곧바로 가게문 닫고 아오야마 근처에 재즈클럽을 내면되지. 그것 역시 하고 싶은 일이기도 하고요.

 

p343.

 무라카미 : 저는 아직 순수한 의미의 '악'을 쓴 적 없고 쓰려고 한 적도 아마 없을 테니 악이란 어떤 것인지 심각하게 생각해본 적은 없습니다. 그래도 지금 제가 가장 큰 '악'이라고 보는 건 역시 시스템입니다.

-무라카미 씨가 생각하는 '악'의 이미지는 시스템이다.

 무라카미 : 좀더 분명히 말하면 국가나 사회나 제도 그 솔리드한 시스템이 불가피하게 양성하고 추출해가는 '악'이죠. 물론 모든 시스템이 '악'이라거나 시스템이 추출하는 것이 모조리 '악'이라는 말은 아닙니다. 선한 부분도 당연히 많아요. 하지만 만물에 그림자가 있듯이 어떤 국가나 사회든 '악'이 따라다니기 마련입니다. 교육 시스템도 그렇고, 종교 시스템에도 도사리고 있죠. 그런 '악'은 실제로 많은 사람을 다치게 하고 죽음으로 내몰기까지 합니다. 저는 지극히 개인주의적인 인간이라 그런 시스템의 '악' 같은 것에 매우 민감한 편입니다. 그 실상을 좀더 그려나가고 싶지만 그러면 아무래도 정치적 메시지가 되기 쉽죠. 그것만은 되도록 피하고 싶어요. 제가 바라는 형태의 발신이 아니니까요.

 

p351

 무라카미 : 사악한 이야기의 한 전형이, 아사하라 쇼코(참고 : 옴진리교의 교주)가 펼쳐 보인 이야기죠.

 완전히 폐쇄된 장소로 사람을 끌어들여 철저하게 세뇌하고, 나아가 불특정 다수의 사람을 죽이게 만들었다. 그곳에서 기능한 건 최악의 형태를 취한 사악한 이야기입니다. 그렇게 회로가 폐쇄된 악의의 이야기가 아니라, 보다 넓고 개방적인 이야기를 작가는 만들어나가야 한다. 무언가를 둘러싸고 쥐어짜는게 아니라 서로를 받아들이고 주고받을 수 있는 상황을 세상에 제시하고 제안해나가야 한다. 저는 <언더그라운드> 취재를 통해 그렇게 절감했습니다. 피부로 느꼈어요. 이건 해도 너무한 일이라고.

 

p356. 인터뷰를 마치고(무라카미 하루키 에필로그)

 "따분하고 재미없는 대답만 해서 미안합니다. 따분하고 재미없는 질문에는 그런 대답밖에 나오지 않는 법이죠." 어니스트 헤밍웨이는 어느 인터뷰에서 말했다. 나 역시 지금까지 작가생활을 해오면서 적지 않은 인터뷰를 했는데, 자기도 모르게 그렇게 말하고 싶어지는 상황을 몇 번인가 경험했다.(물론 예의바른 나는 입 밖으로 꺼내지 않았지만).

 그러나 이번에 가와카미 에미코 씨와 총 네 번에 걸쳐 인터뷰를 하면서 그런 생각이 든 적은, 정말이지 솔직하게, 단 한 번도 없었다. 오히려 신선하고 날카로운(때로는 묘하게 절실한) 질문이 속속 날아오는 통에 무심결에 식은땀을 흘릴 때가 잦았다. 아마 독자 여러분도 이 책을 읽으며 그런 '끊임없는 공세'를 피부로 느끼셨으리라 생각한다.

 나는 원래 작가끼리의 대담을 썩 좋아하지 않는다. 데뷔 초기에는 몇 번 했지만 곧 그만두었다. 그러나 인터뷰 형태로 다른 작가와 이야기를 나누는 일은 제법 나쁘지 않다고 생각한다. 질문하는 쪽이든 대답하는 쪽이든, 상대를 잘 만나면 상당히 흥미로워지기 마련이다. 인터뷰라는 포맷에서는 인터뷰어의 책임과 인터뷰이의 책임이 뚜렷이 나뉘기 때문이다. 그런 깔끔함이 마음에 든다.

 2015년 7월 잡지 <MONKEY>의 청탁으로 <직업으로서의 소설가>를 중심으로 가와카미 씨와 롱 인터뷰를 했는데 그때 ' 이 사람과는 좀더 오래 이야기해보고 싶다'는 강한 여운이 남았다. 그녀는 지금까지 만난 어떤 인터뷰어와도 다른 종류의 질문을 정면에서 던져왔기 때문이다. 그리고 스스로 납득할 때까지, 망설임 없이 여러 각도에서 그 질문을 반복했다. 그런 질문에 하나하나 대답하는 사이 지금까지 나 자신도 생각하지 못했던 의미와 풍경을 내 안에서 발견하게 되었다.

 그랬던 터라 그 연장선상에서 다시 그녀와 인터뷰를 하면 어떨까, 나아가 가능하면 한 권의 책으로 만들면 어떨까 하는 이야기가 나왔을 때 이거 재미있겠다는 생각이 들었다. 그러나 한창 <기사단장 죽이기>를 쓰고 있던 시기라 일단 대답을 미뤄두고 집필을 끝냈을 때 "혹시 아직 괜찮다면 하고 싶다"는 답을 보냈다. 이 작품을 놓고 본격적으로 이야기를 나누면 과연 어떤 인터뷰가 될지, 나로서도 꽤 흥미로웠기 때문이다.

 결과는 어땠을까?

 따분할 틈이 없었다, 라고 한숨을 섞어 말할 수밖에 없다. 아니, 정말이지 따분해할 여유라고는 없었답니다. 헤밍웨이 씨.

 

차범근 감독(현재는 감독, 해설가 등의 활동이 없으나 요즘 부르기 제일 무난한 호칭이라고 생각함)이 주로 독일에서 선수로 뛰던 시절에 대한 에피소드 위주로 이루어져 있다.

당시 스포츠 서울에 연재되던 칼럼을 모은 것이다. 칼럼의 연재연도는 1980년대 중후반으로 예상되는데, 실제 책은 1997년도에 출간했다.  거진 30년이 넘은 내용으로 당시의 축구계와 한국의 상황들을 되돌아보는 기회가 된다.

개인적으론 이런 책이 있다는 것도 몰랐다. 손흥민의 에세이를 보고 나서 당연히 차범근 감독도 이런 책이 있지 않을까 하는 생각에서 찾아봤다.

차범근 감독의 축구에 대한 생각, 그리고 세상에 대한 생각을 알 수 있다. 아마 당시는 전문편집자가 없었나하고 생각되는 부분이 있다. 글의 내용은 괜찮은데 가끔가다 문맥이 이해가 안되게 튀는 부분이 있다.

차범근 감독이 뛰는 모습을 기억하는 세대(나도 사실 차범근 감독의 선수시절 모습은 86년 월드컵에서 뛰던 모습 정도나 기억한다. 당시 분데스리가에서 활약을 하는 것은 신문으론 봤지만 TV에서 경기모습을 볼 수는 없었던 시절이다.)

이 책은 지금 절판에다가 중고서점에서도 구하기 힘들다.(그래서 어렵게 도서관에서 찾아서 읽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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p19. 나의 자랑스러운 둘째 형님

 처제들은 시골에 계시는 둘째 형님을 '일용씨'라고 부른다. 그 연속극을 나는 한번도 본 적이 없는데 처제들의 얘기인즉 [전원일기]에 나오는 '일용씨'의 모습이 둘째 형님의 모습하고 똑같다는 것이다. 형님은 지금 어머님을 모시고 고향에서 버섯 농사를 짓고 있다. 가끔 고향집에 전화를 하면 밤 열한시가 넘었는데도 어머님과 함께 버섯을 다듬고 있다고 할 만큼 일이 많은 작업이다.

 그러나, 어머님, 형수님, 그리고 형님이 하루종일 매달려야 하는 엄청난 일의 양에 비해 일년에 떨어지는 돈이 칠백만원 정도라고 해서 나는 참 심란한 기분이 들었는데 정작 형님은 그만한 수입을 올린다는 것에 보통 자부심을 갖고 계시는 게 아니었다. 그런 천성 때문인지 형님은 한번도 도시 생활을 꿈꾸거나 계획한 적이 없는 분이다. 작은 운동구점 하나라도 동생 이름 걸고 하겠다고 할 법한데 여지껏 그런 생각은 꿈에서조다도 갖고 계시지 않은 것이다. 농사 이외에는 할 수 있는 것도, 아는 것도 아무 것도 없다고 스스로 생각하시는 형님이 지난번 만났을 때 "나는 말이여, 버섯을 하면서도 뭣을 조금씩 치면 일이 훨씬 수월한데 유명한 아우 생각을 하면 절대로 그렇게 못하겠어. 내 버섯은 정말로 아우 덕에 아무 것도 치지 않고 키우는거여"하며 느릿느릿 말씀하시는 것을 보며 말할 수 없는 고마움과 형의 인격에 대한 존경심이 우러나 얼마나 자랑스럽게 느껴졌는지 모른다.

 형님은 자신의 인감도장조차도 마을일을 돌봐주는 '이장'에게 맡겨놓고 그 이장이 형님 몰래 오백만 원을 대출받아 썼는데도 몇 년씩 그 사실을 모르고 지낼 만큼 순진하신 분이다. 그런 형님이 얼마 전 축구교실을 할 만한 아주 좋은 땅이 있다는 얘기를 듣고도 머뭇거리는 나를 보자 내가 돈이 모자라서 그러는 줄 알고 몹시 딱하게 느껴졌던 모양이다. 며칠 전 전화를 했더니 "범근아! 학교 뒷산에 있는 우리 밭을 팔면 한 사천만 원 된다는 데 내가 그걸 팔아서 보태주면 그 땅을 살 수 있겠냐?"고 물었다.

 나는 정말로 할 말이 없었다. 아무리 형이라고 해도 그런 생각을 할 수 있는 사람이 이 세상에 우리 둘째 형님 말고 또 있을 수 있을까. 더구나 요즘 같은 세상에....

 고등학교 교육도 제대로 받지 못하신 형님.

 하루종일 일에서 헤어나지 못하는 초라한 모습의 농군 형님. 그러나 형님은 동생에게 폐를 끼치지 않고 살 수 있다는 것이 기쁠 뿐이고 나는 그런 형님이 박사보다도 장관보다도 더 자랑스러울 뿐이다.

 

p21. 

 그 해 6월에는 사기꾼이 처가에 사기를 치려고 했던 적이 있다. 어떤 남자가 장모님께 전화를 걸어 "내가 축구감독 김호인데 이번에 독일에 갔다 오면서 차범근이가 장모님 갖다 드리라고 주는 선물을 갖고 왔다. 그런데 세관에서 통관세 21만원을 물으라고 하니까 내 온라인 구좌로 돈을 좀 보내달라"면서 구좌번호까지 불러주더란 것이다. 평소 나나 아내는 "괜히 세관 검사대에서 떳떳하지 못하고 피곤해 할 필요가 어디 있느냐"는 생각을 갖고 있어 귀국할 때 변변한 선물은 말할 것도 없고 그 흔한 양주 한 병도 안 가지고 간다. 그래서 내 손아래 동서는 "형님! 비행기 안에서 파는 양주 한 병은 예의예요."하고 항상 불평을 하는 판이다.

 그런데 10년 동안 선물이라고는 한번도 받아 본 적이 없는 장모님 생각에 "천지개벽이 아니고선 세금까지 물어야 할 변난 것을 사서 보내겠느냐"고 생각했다는 것이다.

 장모님은 궁금하지도 않으셨는지 전화 한 통화 안한 걸 보면 평소 교육(?)의 효과가 대단했던 것 같다.

 

 p23.

 남을 위해서 참는 것, 일을 위해서 인내하는 것, 그것은 일의 종류가 어떤 것이라고 해도 매우 귀중한 것만은 틀림이 없으리라.

 

 p29.

 유럽컵과 같은 공식 유럽축구연맹 주최 경기에는 팀에서 입는 일반 유니폼을 입지 못하게 되어 있다. 같은 모양에 광고를 없앤 유니폼을 사용해야 하는데 유럽에서 열리는 3대 유럽컵 결승전은 전 유럽에 중계가 된다.

 10년 전 내가 속해 있던 프랑크푸르트 팀은 UEFA(유럽축구연맹)컵 결승전에 올랐었다.

 물론 경기장에서는 흰색 상의에 까만 팬티를 입었는데 프랑크푸르트의 마크가 왼쪽 가슴에 조그많게 달린, 규정에 조금도 어긋나지 않는 복장이었다.

 6만이 꽉찬 운동장에서 결승전을 벌인 끝에 '샤웁'이란 선수가 한 골을 넣어 1대 0으로 승리, 우승컵을 차지할 수 있었다.

 시상 준비를 하는 짧은 시간에 우리는 라커룸으로 들어갔다.

 거기에는 "옷이 적어 감기에 걸릴까봐서"라며 우리가 평소에 입던 미놀타라는 글자가 새겨진 유니폼이 가지런히 놓여 있었는데 적은 옷과 갈아 입으라는 것이었다.

 옷을 갈아입고 운동장의 환호소리에 끌려 다시 나왔을 때 수백명의 카메라맨들이 우승팀을 찍으려고 우리를 향해 몰려들었다.

 중계되는 가운데 시상식도 근사하게 끝마쳤다.

 컵을 앞에 놓고 찍은 '우승 팀 사진은 각국으로 보내져 스포츠 신문과 잡지를 장식했다.

 유럽축구협회에서 가만히 있을 리가 없었다.

 그러나 광고주는 원하는 목적을 달성했으니 느긋하게 유럽축구협회에서 프랑크푸르트로 요청한 벌금만 대납해주면 되는 것이다. 

 200만원.

 생각보다 적은 액수다.

 해볼 만한 일이라고 했을지도 모른다.

 프랑크푸르트가 이 일을 해주고 얼마나 받았을까?

 나도 모른다.

 신문에도 없다.

 다만 효과가 있기에 그런 법석을 떨었을 것이란 점만은 쉽게 이해 할 수 있을 것 같다.

 

 p37. 별난 아들 이름 '세찌'

 "야! 차붐! 넌 드디어 진짜 축구 선수가 된거야! 위대한 축구 선수는 다 얘들이 셋이거든. 펠레가 그렇고 베켄바워, 루메니게, 브라이트너, 슈스너, 그리고 나 니켈...."

 셋째를 낳았다는 신문보도가 나자 프랑크푸르트의 옛 동료 니켈이 부리나케 집으로 전화를 걸어 한 말이다.

 세찌. 이곳 독일 친구들은 저마다 들어보지도 못한 이름을 지어 이제 겨우 두리란 이름이 익숙해질 만하니까 "또 세찌를 외워야 하게 됐다고 투덜거리는데 이름 가지고 말이 많기는 서울도 마찬가지다.

 전화를 통해 "축하합니다"하고 점잖게 운을 떼고 난 [스포츠서울]의 방석순 기자는 두리 다음에 난 아기의 이름이 세찌라고 하자 "세상에 '찌'가 들어가는 이름이 어디 있어요. 그래 그 이름 호적에 올릴 참이요?"라면서 어이없어했다.

 그렇다고 이미 지어 놓은 이름, 게다가 신문에 나고 이곳 TV해설자까지 축구해설 도중 자세히 소개해 놓은 우리집 아이의 이름을 이제 와서 바꿀 수 없는 것 아닌가?

 거기다 우리 세찌 녀석은 이름만 요란한 게 아니다.

 언젠가 신문지상을 통해 1986년 10월쯤 세찌가 태어날 것이라고 밝혔더니 어느 팬이 신문사로 전화를 걸어 "차 선수와 통화할 기회가 있거든 요즈음은 하나만 낳기 운동이 한창임을 꼭 일러주라"고 했더라는 것이다.

 맞는 말이다.

 이제는 '모두가 하나'도 아니고 '한집 걸러 하나'의 추세라고 하니 우리 같은 경우는 아파트 한층의 애들을 몽땅 갖고 있는 셈이다.

 우리 한국 축구 선수들도 나이가 젊을수록 '하나만 낳고 끝'이라고 하는데 소위 선진국이라는 곳에서 수년을 산 가장 모법적이어야 할 영증(조영증)과 나만 애가 셋이니 사실 할 말이 없다.

 거기다 어찌된 영문인지 이곳 [익스프레지]지는 내가 한국 가족계획협회의 '둘만 낳기 운동'에 모델로 앞장섰다는 사실까지 알아내서 내가 얼마나 엉터리인가를 유감없이 폭로하기까지 했다.

 

p64.

 그러기 때문에 더 배운 사람, 더 높은 사람, 더 많이 가진 사람들은 항상 남들이 흉내내고자 하는 대상이 된다.

 지금 생각해보니 한국에 있을 때, 많은 어른들을 뵙고 가까이에서 그분들의 생활을 보면서 배우지 말아야 할 것도 흉내낸 적이 있고, 또 옳지 않은 것도 높은 분이 하는 것은 근사해보였던 기억이 난다.

 남편의 권력을 등에 업고 열심히 땅장사하시던 어느 사모님, 바로 그분이 내가 독일로 온 뒤 장관 사모님이 되었다는 얘기를 들었을 때의 기분은 요즘 신문을 잃고 난 뒤의 씁쓰레한 뒷맛과 별로 다를 게 없었다.

 한번은 우연히 만난 어느 재벌 총수님께 좋은 말씀 있으시면 한마디 해주십사 하고 부탁드린 적이 있다. 한국에서 열 손가락 안에 꼽히는 이 대재벌 총수님은 거짓말 같게도 갑자기 내 귀에 입을 슬며시 대시더니 "돈 있으면 금 사!" 하시는 것이었다.

 하기야 내가 낮에 묻었던 축구화 바닥의 흙이 생각나서 자다가도 뛰쳐나와 손질을 해놔야 속이 시원한 것만큼이나 그분도 자나깨나 돈버는 궁리를 해서 대기업을 이룰 수 있었는지는 모르지만 당시 나이 어린 나에게 하는 충고치고는 분명히 야(?)했었다.

 

p68. 레버쿠젠시가 온통 차붐 축제

 8년만에 UEFA컵이 서독으로 다시 돌아왔다. 그것도 내 품으로.

(참고 : 1987-88 UEFA 우승은 레버쿠젠이 차지. 당시 상대팀인 RCD에스파뇰은 바르셀로나에서 열린 1차전 홈경기에서 3:0으로 승리. 레버쿠젠의 홈경기에서 4점차 이상으로 승리해야만 하는 절대적으로 불리한 상황이었다. 바로 이 절대절명의 2차전에서 차붐이 후반 81분 극적인 3번째 골을 넣으면서 3:0으로 레버쿠젠이 승리. 이후 1,2차전 동점/동률이 된 상황에서 연장전을 진행하지만 결국 양팀 모두 골을 넣지 못하고 승부차기로 간다. 승부차기에서 레버쿠젠이 3:2로 짜릿한 우승을 차지하며 일약 차붐은 레버쿠젠의 영웅이 된다.)

 뜨거워서 터질 것 같은 팬들의 열광과 환호는 8년 전의 그것과는 비교조차 할 수 없는 감격이었다.

 하늘에서는 [원더풀, 이렇게 아름다운 날]이라는 왕츠가 높은 테너 가수의 음성으로 쏟아지고 관중들은 함성과 흥분으로 운동장을 덮고 있었는데 간간이 보이는 노란 바탕에 까만 붓글씨의 응원 플래카드는 나에게 또 다른 흥분을 더해 주었었다.

 '범근아, 너 알지 끝내줘라."

 나의 세 번째 골이 터졌을 때부터 UEFA컵은 내게 돌아오고 있었다.

 그 당시 내 나이 34세, 바로 그 감격스러웠던 순간에 나의 축구 인생에 종지부를 찍고 싶었던 충동은 너무 감상적인 것이기만 했을까.

 더 이상 바랄 것도, 바라고 싶은 것도 없었다.

 왁자지껄 집으로 몰려들었던 한국 손님들이 프랑크푸르트를 향해 떠난 것은 새벽 2시였다.

 도무지 잠자리에 들 수 없는 흥분 때문에 슬리퍼를 신은 채로 파티장에 다시 돌아갔을 때는 레버쿠젠 시도, 파티장도 온통 취해 있었다.

 깊은 밤에 빵빵거리면서 돌아 다니는 자동차, 어깨에 어깨를 걸고 훈훈한 초여름 밤을 맥주로 식히면서 춤추고 노래하는 무리들이 레버쿠젠을 온통 메우고 있었다.

 취한 경찰이 팬들과 어울려 [오! 미스터 나이스]를 신나게 부를 때 푸른 제복이 어떤 일을 하기 위해 입는 것인지를 그들은 잊은 지 이미 오래된 듯해 보였다.

 "부미!"(감독이 부르는 나의 애칭)하고 집에서 입는 옷차림으로 파티장에 들어선 나를 끌어안은 감독과 부인의 벌겋게 젖은 눈은 지난 세월 동안 그와 우리가 나눈 고통의 밀담을 소리없이 생각나게 하고 있었다.

 눈물과 웃음이 결국은 같듯이 고통과 영광은 같은 무게로 우리의 인생에 매달려 있는 모양이다.

 손수건을 링 위로 던졌다는 신문들의 빈정거림 속에 팀을 떠나겠다고 선언했던 바로 그 감독이 떠나기 1주일 전에는 레버쿠젠의 영웅이었다. "이 컵은 나의 이별의 왕관이다"라고 반쯤 취해서, 아니 하나도 안 취해 있던 감독은 소리쳤다.

 나는 그때 뭐라고 소리쳤을까.

 그 밤의 모든 일들이 꿈같이 느껴진다.

 그러나 오픈카를 타고 시민들 사이를 누비며 8년만에 안아본 UEFA컵은 어느새 살찐 아들 녀석처럼 훨씬 무거워져 있었다.

 

p87. 마라도나는 진짜 작은 거인

 1987년 크리스마스 전에 서독 축구 국가대표 팀이 남미원정 중 브라질 및 아르헨티나 국가대표 팀과 친선경기를 가졌었다. 독일에서는 한밤중에 중계가 되었는데 경기 내용이 신통치 않았다.

 그러나 그 경기의 해설자는 연방 디에고 마라도나의 화려한 모습을 보는 것만으로도 자지 않고 TV를 시청한 대가는 받은 셈이라고 말했다. 사실 그날 저녁 마라도나가 보여준 플레이는 기술이나 묘기라기보다 차라지 천진한 어린아이의 재롱 같아 보였다.

 수만 관중이 디에고를 외치면서 발을 동동 구르며 미칠 듯이 환호하는 것을 작은 키의 마라도나는 마치 우리 집 세찌가 도리도리 짝짜궁을 하면서 나를 즐겁게 해주는 것처럼 대수롭지 않게 즐거워하고 있었다. 마치 긴장이 무엇인지 아직 경험해보지 않은 아이 같았다.

 그런데 1988년 초에 마라도나가 속해 있는 이탈리아의 나폴리팀과 언젠가 내가 가려고 했던 AC밀란과의 경기에서 나는 또하나의 작고 귀여운 '마스코트'를 보고는 나에게 결정적으로 부족한, 그래서 내가 지금 서 있는 이 단계를 벗어날 수 없는 가장 큰 이유를 알 수 있을 것 같았다.

 1987년 유럽의 최우수 선수였던 네덜란드 출신의 머리를 갈래갈래 땋은 그 흑인 소년은 돌아가는 템포가 질러가는 상대 선수보다 빠를 만큼 스피드가 대단했다.

 그러나 그보다 개구쟁이 흑인 꼬마를 뻥튀기 기계에 올려놓고 튀겨놓은 것 같은 어른 개구장이의 천성이 내 눈엔 더욱 돋보이는 무기로 보였다.

 더욱이 요즘은 10년, 20년 전처럼 펠레는 영원히 브라질에, 베켄바워는 언제까지나 독일에 머무를 수 없는 세계 축구의 현실로 볼 때 이들의 낙천성이야말로 어느 곳에서든지 뿌리를 내릴 수 있는 가장 큰 비결인 듯했다.

 레버쿠젠 클럽에서 발간한 책에 실린 나에 관한 소개란에서 리벡 감독은 "그는 뛰어난 운동(육상)선수다. 그리고 그는 팀의 어느 곳에나 세울 수 있는 탁월한 재능을 가진 유일한 선수"라고 얘기했다. 이와 비슷한 얘기는 나를 가르쳤던 감독 중 특히 부흐만과 크라마가 자주 했던 것 같다. 기초가 가장 완벽하다느니 가장 뛰어난 기술을 습득한 선수라느니 하는 식으로.

 그러나 나는 분데스리가 10년 넘은 경험을 통해 볼 때 내가 서 있는 이 위치에서 마지막 단게로 올라서기엔 성격적으로 담대하지 못하다는 크나큰 약점이 있는 것을 알고 있다. 나는 내가 하는 경기에 대단한 손임이 오게 되면 마라도나처럼 즐겁고 신나는 게 아니라 부담스럽고 불편할 뿐이다. 그래서 나는 지금도 "내가 응원 많이 할 테니 잘하라"라든지 "한 골 넣어라"는 얘기는 일부러 안 들은 걸로 한다. 솔직히 말해 전혀 고맙거나 도움이 안되는 심리적인 부담만 쌓이기 때문이다.

노력으로 깰 수 없는 담, 늘 경기에 신중하게 임하는 나의 성격은 감독들 눈엔 만점일지 모르지만 사실 따지고 보면 내가 펠레나 마라도나처럼 한 단계 높은 더 뛰어난 플레이를 보여주지 못하는 걸림돌이기도 하다.

 

p106.

 고등학교 시절 허리가 아파 쩔쩔매고 있을 때 지금은 현직에서 물러나 계신 장운수 선생님은 거액의 자비를 들여 나로 하여금 한의원에서 금침을 맞게 했다.

 머리카락보다도 더 가는 금침을 척추 부위에 집어넣었는데 신기하게도 나는 그 이후 통증 없이 경기를 하게 되었다. 

 그 당시 담당 한의사의 말에 따르면 75년이 지나면 침 자체가 없어지고 효과도 사라진다는데 요즘은 이 금침이 온몸을 돌아 당시를 회상하게 만든다.

 금침은 종아리, 허벅지, 무릎, 어깨 등 이곳 저곳으로 옮겨다니는데 처음에는 무릎이나 종아리 같은 데서 전기가 오는 것처럼 당기고 아팠다. 그러나 이제는 통증이 있을 때마다 '아! 지금은 이 녀석이 이리로 왔구나!'하고 침이 있는 곳을 알게 된다.

 독일에 온 지 얼마 안돼서 허리를 다쳐 병원에 입원해 있을때 의사인 룬츠하이머가 하루는 기겁을 하고 엑스레이 사진을 들고 달려왔다.

 척추 속에 쇠가 들어 있고 신장도 '쌍둥이 신장'인 때문이었다.

동양 침술에 대해 전혀 알지 못하는 그로서는 척추에 왜 쇠가 들어가 있으며 또 어떻게 집어넣었는지 도무지 이해가 되지 않는 모양이었다.

 자기네 방식으로는 등을 째고 집어넣는 방법밖에 없을 것 같은데 내 등에는 수술한 흔적도 없으니 금침의 효과는 접어두고서라도 침을 어떻게 넣었을까 하는 점부터가 궁금했던 것이다.

 나는 신장이 양쪽에 두 개가 있다. 고무풍선에 바람을 잔뜩 집어넣으면 얇아지듯이 두 개인 경우는 그 벽이 무척 얇기 때문에 작은 충격에도 쉬 상하게 된다고 한다. 당시 나의 부상은 상당히 심해서 소변에 피가 계속 섞여 나오고 있었다.

 정상적인 신장을 가진 사람도 그 위험도가 상당히 높은데 나처럼 유난히 얇고 큰 신장을 가진 경우는 한층 더 위험하다는 의사들의 충고가 있었다.

 

p119. 배고픔.

 1985년 독일에 들른 고등학교 코치 두 분이 우리 집을 방문했다.

 모처럼 뵙는 한국 분들이라 반갑기도 했고 청소년 축구에 관심이 많았기 때문에 시간 가는 줄 모르고 서로 얘기를 하는데 갑자기 까마득하게 잊어버렸던 시골 아저씨 이름이 생각나는 것처럼 나를 깨우는 얘기가 있었다.

 고등학교 축구 선수들에게 일기를 쓰게 해서 거두어 읽어봤더니 실컷 한 번 먹어봤으면 하는 얘기가 가장 많더라는 것이다.

 '배고픔'

 지금은 나 역시도 잊고 산다.

 그렇지만 고등학교 시절 나에게 있어서도 가장 절실한 문제는 먹는 것이었다.

 언젠가 라도 한번 실컷 먹고 싶었던 라면. 운동을 마친 뒤 혜화동(참고 : 차범근이 나온 경신고등학교가 혜화동에 있음)에서 목욕하고 학교까지 올라가려면 골목골목에서 나는 찐빵, 만두 찌는 냄새, 단순한 군것질의 욕구가 아니라 성장기 청소년의 육체 바닥에서부터 나는 허기가 그것을 찾는 것이었다.

 기름기라고는 하나도 없는 반찬에 밥. 그것도 상급생이 아닌 다음에는 먹고 싶어도 숟가락을 들고 있을 수가 없었으니 나에게도 그 당시 머리에 꽉 차 있는 욕구는 "먹고싶다. 실컷 한번 먹어봤으면"하는 것이었다.

 남자의 신체는 고등학교 과정을 지나는 동안 완성된다.

 자녀를 키우는 부모님들은 성장기의 자녀들에게 옷 사대기 신발 사대기가 힘들다고 투정하시겠지만 우리의 신체가 그만한 발달을 하려면 물만 먹고는 어림도 없는 일이다.

 특별히 단백질이 가장 많이 요구되는 시기가 나는 이때라고 생각하다. 하루가 다르게 만들어지고 성장해 가는 신체의 세포들, 이 세포들의 양적 팽창과 지적(질적의 오타인듯) 향상을 도우려면 단백질, 쉽게 말해서 고기가 꼭 필요하다.

 작은 동양 사람과 큰 서양 사람, 작은 옛날 사람들과 큰 요즘 아이들만 봐도 알 수 있다.

 물론 나처럼 영양실조다 뭐다 하면서도 179cm까지 자란 사람도 있지만 어쩌면 나도 그 당시 잘만 먹었으면 김재한 형만큼이나 컸을지도 모른다.(참고: 김재한은 1947년생으로 72년부터 79년까지 국가대표로 활약했으며 키는 190cm이다)

 거짓말 같은 얘기지만 내가 26세에 독일에 왔는데 독일에서 생활하는 동안 거의 2cm가 자랐다. 이론적으로는 불가능한 일이지만 정말이다. 나는 180cm에 가깝다. 독일에 와서 처음에는 하루 저녁에 1kg의 쇠고기도 먹어치울 수 있었다. 남들은 놀랐지만 나는 먹을 수가 있어다.

 내 몸의 세포들은 피고 싶은 의지가 더 강했던지 청소년기에 다 피지 못한 것들이 늦게라도 화분에 물준 것마냥 핀 모양이다. 

 2cm. 키의 2cm는 작은 숫자가 아니다. 지금 우리의 후배들 고등학교 선수들은 잘 먹고 잘 크고 그리고 축구에 기술 향상뿐만 아니라 일반적인 두뇌 발달에 힘을 기울여야 한다고 생각한다.

 숲의 나무를 잘 기르는 것과 같은 식이다. 낙엽을 긁지 않고 놔둬서 거름이 되게 하고 적당한 비가 수분이 되었으면 한다

 대전상고 선수들은 그 학교 출신 선배들이 한 명씩 선수를 맡아서 먹이고 한 달에 한 번씩 돌아가면서 배불리 먹게 한다는 얘기를 들었는데 나는 그 얘기를 듣고 축구인의 한사람으로서 참으로 감사하다는 마음이 들었다.

 지금 이지면을 통해서도 그 도와주는 분들께 감사드린다. 그리고 이런 일이 다른 ㅎㄱ교에서도 더 많이 있었으면 하는 것이 내 개인적인 생각이다.

 도시락을 두 개씩 사와서 맛있는 반찬을 먹게 해줬던 고등학교 때의 내 짝 경일이한테도 고마운 마음을 전한다.

 

p131. 훈련량과 위장병

 한국의 9월은 더위가 한풀 꺾이기 시작하는 때다.

 7,8월 뒤통수가 띵할 정도로 더운 날 하루 세 번 훈련을 하고 나면 밥 먹기가 귀찮아 물에 말아 훌훌 마시는 것으로 한끼를 때우곤 했던 기억이 난다.

 그래서인지 우리 나라 축구 선수 중에는 위장병 환자가 유난히 많다.

 한때 독일에서 배구 선수로 활약했던 이희완 씨는 독일로 건너온 뒤 위장병이 없어지고 밥맛이 좋아졌다고 말한다. 나는 그 원인이 독일에서 훈련을 무리없이 할 수 있기 때문인 것으로 믿는다.

 사실 나는 한국의 선배들을 뵐 때마다 우리나라 축구는 훈련량이 너무 많다고 말하지만 그럴 때마다 도리어 "한국의 사정을 너무 모르는 이상론"이라는 면박과 함께 다른 데 가서는 그런 소리 하지도 말라는 충고를 듣게 된다.

 자동차의 경우 적재적량이 있어 너무 많이 실으면 고장이 나고 수명도 단축된다.

 나는 인체도 마찬가지라고 생각한다.

 단순노동도 적정 노동시간을 초과하면 능률이 줄고 사고의 위험이 높아지는데 하물며 고도의 기술과 정신집중을 요하는 운동에서 이미 지쳐 있는 몸과 마음으로 훈련을 계속할 때 부상이 속출하리라는 것은 전문가가 아니라도 쉽게 알 수 있을 것이다.

 한국의 웬만한 운동 선수치고 해마다 몇백만원씩 들여 보약을 복용하지 않는 선수가 거의 없다.

 세계적으로 가장 많은 보약 값을 들이고 또 많은 양의 훈련을 하면서도 우리나라 선수들이 국제 대회만 나가면 왜 뒤떨어지는지 한 번쯤 생각해 볼 일이다.

 우리는 곧잘 "선천적으로 타고난"이라고 말한다. 그러나 체력이야 말로 적당한 운동과 휴식, 그리고 좋은 식사로 얼마든지 향상시킬 수 있다. 이제는 옛날같지 않아서 수없이 쏟아져 나오는 연구 결과들이 우리로 하여금 효과적으로 체력을 보강하고 컨디션을 끌어올릴 수 있도록 돕고 있다.

 우리 선수들에게 도움되는 일이라면 무엇이라도 해야 할 지금 적당한 훈련량, 효과적인 훈련방법에 대해 진지하게 한번 생각해 보아야 한다고 나는 생각한다. 병난 위장에 몇백만원어치 보약을 쏟아넣는 것보다 건강한 위장에 사과 한 알이 우리 몸에는 더 유익하지 않겠는가.

 

 p153.

 내가 잘 아는 이탈리아의 한 친구는 "정신나간 듯해 보이는 포르노 배우를 국회의원으로 뽑는 너희도 참 한심한 나라다"라는 나의 공박에 천만의 말씀이라며 펄쩍 뛴다.

 이유는 '마피아가 판을 치는' 이탈리아에서 그것은 전체 정치인에 대한 일종의 침묵 시위라는 것이다. 마피아와 손잡는 정치인, 부정하고 부패한 정치인들에게 "우리는 도둑이나 강도보다는 차라리 미친 사람을 선택하겠다"는 뜻을 전하려는 의도라는 얘기다. (꿈보다 해몽이라고..)

 

p155. 독일에서 지켜본 대통령 선거.

 

 1987년 독일에서 고국의 대통령 선거를 TV로 지켜보았다.

 과정이나 결과에 무심할 수 없는 나로서는 고국에서 들려오는 소식이 무척 궁금했다. 그러나 선거가 끝나기가 무섭게 최루탄이 터지는 등의 광경을 TV로 보고 더욱 착잡해지는 심정을 떨쳐 버릴 수 없었다.

 정치에 무식하고 무관한 나 같은 사람도, 아니 어쩌면 초등학생 정도의 사고력만 가진 사람이라면 누구든 두 사람에 한 사람 꼴로만 나가 싸웠으면 멋진 승부가 되리라 생각했었다.

 그런데 "대세가 나에게로 기울어졌다"며 저마다 자기 도취에 빠진 얘기를 들은 뒤 이들이 한결같이 참패를 당하고 난 후 생각해보면 한심한 생각이 들 뿐이다. 선거를 한다는 그 자체가 자못 신기하면서도 기특하고 또 한편으로는 선거가 있기까지 최루탄 속에서 잘 참아준 시민들이나 일부 열성 학생들을 위해서라도 멋진 플레이를 발휘했어야 했다는 생각이 들었다. 물론 축구에서 해트트릭을 기록하는 것만큼이나 어려운 줄 알지만. 그래서 독일에서 1주일에 두 번씩 몰아서 오는 신문을 보기 위해서 10만 원이 넘는 돈을 지불하면서까지 구독을 했던 것이다.

 이제도 다 지나간 얘기다. '부정선거다' '관권 개입이다'하는 소리도 이제는 듣기 싫다. 솔직히 말해서 이제라도 듣고 싶고 보고 싶은 모습이 있다면 두 분이 다 많은 사람들에게 솔직하게 잘못되었던 당시의 판단을 시인하는 것이다.

 어떤 친구는 당시의 상황을 생각하면 귀신이 씌었나 보다고 한탄을 한다. 누가 돈을 먹었다는 식의 얘기보다는 훨씬 마음이 가는 한마디다. 많은 사람들의 말뜻조차도 애매하게 "그럴 줄 알았다"고 하지만 실제로 두 후보의 득표는 큰 것이었다. 

 '집안싸움'에 진력이 나서 떨어져 나간 숫자까지 합친다면 더 많을지도 모른다.

 그러나 국민들을 외면한 것은 그분들이었다.

 이제 모든 것이 일단락 된 지금 나는 두 분에게 부탁드리고 싶다. 순수하고 젊은 우리 학생들이 더 이상 데모로 희생되도록 부추기거나 방치하지 말아 달라는 것이다.

 부정선거를 따지기 전에 자신들의 판단 착오였음을 설명하고 그들이 원하는 바를 정치가답게 새로운 정부에 강력히 반영시킬 것을 약속해야 한다. 이제는 하나와 두리도 TV를 볼 때마다 자꾸 묻는다. "어떤 사람이 나쁜 사람이냐"고. 아이들이 커갈수록 대답이 자꾸 궁해지는 아빠들의 체면도 좀 생각해줬으면 한다.

 

p157. 참으성 심어주는 부모의 용기

 

 해발 3천400m에 있는 스키장까지 스위스의 전동식 톱니 기차로 올라가려면 30분은 족히 걸린다.

 그러니 플랫폼에 꽉 찬 스키꾼들 사이에서 애들이 자리라도 잡고 앉아서 가려면 여간 동작이 빨라야 되는 것이 아니다.

 그래서 미리부터 "하나야 두리야, 아빠가 너희들 스키 들고 갈테니까 너희들은 먼저 가서 앉아라"하고는 남들이 못 알아듣는 우리나라 말로 무진장 열심히 교육을 시켰다.

 그러고도 모자라 기차가 도착하자 괜히 마음이 조급해서 또 한 번 "하나야 두리번거리지 말고 앞으로 가"하고는 남들이 못알아듣는 소리지만 그래도 느낄까 봐 되도록 부드러운 멜로디로 다그쳤는데 내 뒤에 있던 꼬마 녀석도 마음이 급했던지 나를 헤집고 앞으로 갔다.

 그때 그 애의 아버지가 남부 사투리가 잔뜩 섞인 독일 말로 "천천히 타도되는데 뭘 그래"하면서 애를 끄집어 도로 내 뒤에 세우고는 "미안해요"하면서 자기 아들의 한쪽 팔을 꽉 붙드는 것이었다.

 지금까지 나는 세상 살다가 그때만큼 스스로 무안해 해본 적이 없는 것 같다.

 더구나 내 나름대로는 애들 교육을 제법 진지하게 시키고 있다고 자부하고 있었을 뿐 아니라 우리 집에서 지내던 많은 한국분들도 애들 교육이 잘돼 있다고 칭찬을 해왔던 터라 그 충격은 훨씬 더 컸던 것 같다.

 우리 나라 사람들의 가장 큰 고질병이라고 하는 조그함과 이기심을 나 자신은 얼마만큼 고쳤다고 믿어왔는데 자식에게까지 대물림을 하고 있으니 한심하기도 했다.

 언젠가 우리 두리가 학교 학예회에서 시 낭송을 하게 돼 있었는데 그만 며칠 전에 감기를 앓는 바람에 선생님이 다른 아이를 대신 시키기로 한 적이 있었다.

 며칠만에 학교에 간 아들 녀석이 너무 실망하는 것 같아서 제 엄마가 선생님께 반반 나눠서 시키자고 부탁을 했었는데 그 얘기를 들은 친한 이웃집 아줌마가 하나 엄마의 생각에 자기는 반대라고 하더라는 것이다.

 두리가 예기치 않는 사건에 부딪쳐서 참을 수 있고 받아들일 수 있는 것을 배우기에는 그보다 더 좋은 기회가 없다는 얘기였다.

 "자기애가 그랬다면 가만있겠어?"하고는 꿍얼꿍얼거리던 하나 엄마가 두 손을 들고 만 일이 나중에 또 있었다.

 그 집 애하고 두리가 같이 축구를 하러 다니는데 시합이 있다고 해서 그 집 식구가 온통 몰려갔던 모양이다.

 갔다 와서는 코치가 토마스를 경기장에 내보내지 않아서 줄곧 벤치에서 울고 있었다는 엄마의 얘기를 듣고 왜 애들 축군데 좀 얘기해서 잠깐이라도 뛰도록 해주지 그랬느냐고 했더니 물론 뛰는 것도 즐겁겠지만 참는 것도 그에 못지 않게 좋은 경험이니까 배우도록 가만 놔뒀다는 것이다.

 정말 부모로서 대단하다고 할 만한 용기다.

 예기치 않은 불이익, 손해를 비켜나가도록 도와주지 않고 받아들이도록 가르치는 교육이란 게 부모가 돼 보니 참 쉽지가 않았다.

 정작 교육을 받아야 할 사람은 바로 나인 것 같다.

 

p162

 

 "어느 한 나라의 축구가 흥하고 안하고는 골목 축구에 달려있다"는 말에 나는 전적으로 동의한다. 베켄바워가 그랬었고 마라도나, 펠레가 모두 골목 축구로 시작했다. 가난한 집에서 변변한 장난감도 없이, 또 자기가 몸담고 꿈을 키울만한 방 하나도 없이 살다보니 길거리가 곧 자기 방이 되었고 아무 것도 필요없이 맨발로도 할 수 있는 것이 축구다 보니 닥치는 대로 발로 걷어찼을 것이다.

 

p193. 골프 대중화에 입맛 씁쓸

 

 '대중화'라는 말을 좀 더 자세히 알고 싶어서 '대중'이라는 말을 사전에서 찾았더니 '수가 많은 여러 사람, 민중, 많은 사람들' 그리고는 부연해서 '특히 노동자, 농민들의 일반 근로 계급'이라고 풀이되어 있었다.

 물론 꼭 사전을 찾지 않더라도 대중이라는 말이 "대부분의 사람들을 별 무리 없이 포함시킬 수 있는 비슷한 삶의 수준을 누리는 평범한 사람들'을 뜻한다는 정도는 모두가 알고 있는 사실이다.

 그런데 요즘 신문을 통해 '골프의 대중화를 저해하는....' 이라는 기사를 대할 때면 솔직히 말해서 입 맛이 쓰다.

 엄청난게 비싼 장비에 물리는 세금과 골프장 입장료, 회원권, 캐디 팁 같은 것이 대중화를 저해 한다고 목청을 높이니까 대중화와 가장 거리가 먼 이 부분은 얘기하지 않기로 하더라도 한번 필드에 나가면 최소한으로 잡아도 18홀을 도는 데 필요한 네 시간에다 왔다갔다 하면서 소요되는 시간까지 합친다면 일반 대중에게는 월요일부터 일요일까지 어느 날을 잡아도 쉽게 낼 수 있는 시간이 아니다.

 거기다 멀찌감치 떨어져 위치한 골프장까지 한 짐이나 되는 골프채를 챙겨서 가려면 자가용이 없는 사람은 당연히 그들이 얘기하는 대중의 수준에 낄 수가 없게 된다.

 그뿐 아니라 우리 나라처럼 좁은 땅에 시립 공원 하나도 제대로 없는 판에 아무리 작은 골프장이라도 십만 평은 넘어야 하는 그 면적을 생각한다면 과연 그 넓은 그림 같은 잔디밭에서 몇 사람이나 동시에 즐길 수 있겠는가?

 염치 없는 비교가 되겠지만 가장 작은 십만 평짜리 골프장도 국제 규격의 축구장 33개에 해당되는 면적이다.

 33개의 잔디 축구장에서 700여 명이 동시에 땀을 뻘뻘 흘려가면서 뛰는 모습을 생각한다면 땅의 효용성에서도 골프는 대중화라는 말과는 거리가 멀다.

 거기다 골프를 치는 나의 입장에서 얘기해 본다면, 들이는 시간과 돈과 그 밖의 것들을 비교해 볼 때 실제적인 운동량에 있어서는 테니스나 탁구 또는 축구 같은 것들에 비해 형편 없이 못 미친다는 것이다.

 그러나 골프는 분명히 재미있는 운동이다. 넓은 필드를 가로지르는 장타가 제대로 맞았을 때에 '딱'하는 소리는 통쾌하기 그지 없다.

 그래서 나도 가끔씩 필드에 나가곤 한다. 그러나 내가 하고 싶은 얘기는 바로 이것 자체가 특권이며 고마워해야 할 일인 줄 모르고 더 많은 기득권을 얻기 위해 대중화를 앞세우는 몰염치는 삼가 주었으면 좋겠다는 생각이다.

 골프장의 사람들을 대중이라고 부르면 오늘도 점심시간에 한강 다리 및 고수 부지에서 하루종일 구부렸던 다리를 모처럼 피고 땀을 뻘뻘 흘리며 즐겁게 볼을 차는 택시 운전기사 아저씨들에게는 붙여 줄 이름이 없지 않겠는가.

 

p198. '아침의 나라'의 인정을 아시나요

 

 1988년 어느 날 독일 여성지에 실린 슈미트 전 서독 수상 부부의 사진은 무척 보기가 좋았다.

 그렇게 봐서 그런지 얼굴 색도 좋아진 것 같고 표정도 밝고 아름다웠다.

 슈미트 씨는 인터뷰를 통해 자신이 생전 처음 몇 백만 마르크를 모았노라는 자랑도 서슴지 않았다. 관직에만 있던 그로서는 돈을 벌 기회도 없었는데 이제는 책도 쓰고 강연회도 참석하면서 상당히 많은 인세와 사례비를 받는다고 했다.

 1회 강연 사례비가 2만 마르크. 한국 돈으로 8백만원이라고 하니 월급쟁이 생활에 길들여진 그분으로서는 엄청난 돈임에 틀림없다.

 그분이 수상직을 그만두고 첫 해외 여행할 때의 신문 기사를 나는 지금도 잊을 수가 없다.

 모처럼 공식 여행이 아닌 해외 나들이를 하면서 이 부부는 비행기의 서로 다른 칸에 떨어져 앉게 되었다.

 전직 수상에 대한 예우로 비행기의 1등석을 탈 수 있는 특전이 부인에게까지 허용되지 않았기 때문이었다.

 1등석은 엄청나게 비싸다. 나도 가끔 공짜로 태워 줘서 타 보면 돈 있는 사람들의 돈에 대한 존경심을 심어 주기에 충분했다.

 물론 슈미트 씨의 부인도 수상 시절에는 1등석이나 전용기를 탔을 것이다. 또 그 자신이 원하기만 했다면 아무리 월급쟁이 관료 노릇만 했다고 해도 설마 남편과 나란히 1등석에 앉을 만한 방법쯤이야 없어겠는가.

 나는 참 용기 있는 분이라고 느꼈다. 가식이나 허영보다는 정직과 진실을 더욱 자랑스럽게 여길 줄 아는 용감한 여성이었다. 

 싹둑 잘랐다고 밖에 표현할 수 없는 그분의 헤어스타일은 용기나 정직과 상당히 어울려 보였다. 결코 아름답게 치장하지도 다듬지도 않은 그분의 모습이 어느 날 유난히 눈 앞에 어른거렸다. 그것은 그 전날 뉴스에서 백담에서 은둔 중인 전두환 전 대통령 내외의 모습을 보았기 때문이다.

 한숨과 함께 눈가에 뜨뜻함을 느낀 것은 나뿐이었을까.

 5공화국이라면 눈을 길게 뜨고 째려보던 나였지만 그날 만큼은 그럴 수가 없는 것 같았다.

 개털 모자 같은 것을 쓴 전두환 전 대통령이 산사 같은 데서 누군가와 얘기하고 있는 모습을 보면서 아무리 많은 역사가들이 우리 민족이 우유부단하기만 한 바보 같은 정 때문에 역사가 걸러지는 과정을 거치지 못했다고 목소리를 높인다고 하더라도 바보 같은 정을 담은 그 우유부단한 피가 바로 내 속에서도 흐르고 있는 것을 부인할 수가 없었다.

 

p217. 나눠진 땅 갈라진 이념

 

 외국에 거주하는 한국인들의 이북 방문을 허용하는 대통령의 발표가 있었을 때, 그 발표를 듣고 전혀 생각지도 않았던 호기심이 발동했었다. (참고 : 1988년 7월7일 당시 노태우 대통령이 발표한 7.7선언을 의미한다. 이 선언의 6개항중 해외동포의 방북허용이 포함되어 있다.)

 이북에 연고가 있는 것도 아니지만 막상 법으로 이북 방문을 허용한다는 얘기를 들으니까 은근히 이북 사람들 축구하는 것도 한번 보고 싶고 절경 중에 절경이라는 금강산도 보고 싶어졌다.

 그래서 대사관, 한국 관광 공사에 전화를 걸어 물어보고 기대에 부풀기도 했었는데 불과 몇 달이 지난 후 그런 생각을 했다는 게 두려울 만큼 분위기는 완전히 바뀐 것 같았다.

 동과 서로 갈린 나라의 서쪽 한편에서 한 10년 살아본 나는 "이 사람들은 남의 탓에 갈라져 살뿐이지 자기들끼리는 통일된 것이나 다름 없다"고 나름대로 믿어왔었다.

 우선 자유롭게 서로 왕래할 수 있을 뿐만 아니라 올림픽이나 유럽의 각종 대회 때면 동독의 메달도 마치 통일된 독일의 것마냥 좋아하는 것을 볼 때 더욱 그랬다.

 얼음판의 여왕인 동독의 카타리나 비트가 두 번째 동계 올림픽 피겨 스케이팅을 제패했을 때 '우리의 카타리나'라는 표현으로 신문 1면 전체를 장식했었다.

 실제로 그녀는 서독 매스컴의 비중으로 친다면 테니스의 보리스 베커나 슈테피그라프에 못지 않았다. 그런 그녀가 1988년 겨울 뮌헨에서 시상하는 밤비상의 스포츠 부문 수상자로 결정되어 뮌헨에 도착했을 때 어떤 호텔에 묵으며 무엇을 하고 시상식에서는 어떤 옷을 입을 것인가 하는 것까지 온통 사랑 어린 관심의 대상이 되었다.

 그러나 그날 저녁 TV앞에서 수상 소감을 말하는 그녀는 '우리의 카타리나'라는 사랑이 듬뿍 담긴 얘기가 무색하도록 "당신네 나라 사람들에게 감사한다"고 말했었다.

 나는 상당히 놀랐다. 그리고 곧 "내가 이쪽에서만 보았기 때문이었지 동독은 아직도 냉랭한 모양이구나"라고 짐작했다.

 그러나 계속되는 나의 질문을 받은 꽤 많은 서독의 친구들은 자신들의 동독을 이웃나라 중 하나 이상으로 생각지 않는 것 처럼 카타리나도 그렇게 믿기 때문에 '당신네 사람'이라는 말은 당연하지 않겠느냐고 했다.

 그렇다면 나야말로 한 부분만 보고서는 내가 산 10년이란 숫자로 독일을 다 아는 것처럼 지레 믿은 셈이 되는 것이다.

 그런데 내가 이북에 가보고 싶었던 것은 무엇 때문이었을까?

 친구들이 생각하는 것처럼 단순히 한번 가보고 싶은 이웃 나라였을까 아니면 누구처럼 내가 가서 통일의 물꼬를 터야만 한다는 어마어마한 책임감 때문이었을까.

 그것도 저것도 아닌 나 같은 사람까지 뭐가 문지 모르고 구경하겠다고 날뛰니...

 

p221. 빛바랜 축구 명문 도시

 

 프랑크푸르트와 뒤셀도르프의 전력이 최근 몇 년 사이 크게 약화되면서 관중이 줄어 팀 운영에 많은 어려움을 겪고 있다고 한다. 

 프로 축구는 단순한 관람객이 아닌 고정 팬을 많이 확보해야 원만한 팀 운영을 기대할 수가 있다.

 그런데 이 두 도시는 수년 전부터 국제 도시로 탈바꿈, 깔끔하고 단정한 국제기업인들이 자리를 차지해 버리면서 축구팬을 잃게 됐다. 외국인들이 자꾸 늘어나는 현상 때문에 특유의 옷 색깔도 없어졌을 뿐 아니라 향토팬은 줄어들고 대신 뜨내기 구경꾼들이 운동장을 찾는 것이다.

 그러면서도 이 두 도시는 돈이 많아서인지 엄청난 돈을 들여 유치하는 이반 렌들이나 보리스 베커의 프로 테니스 시범 경기가 벌어질 때면 그 비싼 입장권이 몇달 전부터 매진되곤 한다.

 축구는 서민운동이다. 테니스와 달리 단순히 보는 것으로 즐기기보다는 '네편 내편'이 훨씬 중요한 비중을 차지한다.

 어쩌면 이 편가름이 프로축구의 바탕인지도 모른다. 

 향토색이 짙은 지역일수록 좋은 팬을 확보할 수 있게 되는데 바이에른 뮌헨 같은 경우가 좋은 예다. 독일의 가장 남부에 있는 이 바이에른은 스위스, 오스트리아와 인접한 알프스 지역이다.

 날씨가 좋고 지역이 방대한 데 비해 뮌헨 팀만이 이 지역을 독점하고 있어 늘 많은 팬을 확보할 수 있는데 여기에는 특유의 사투리를 쓰는 그들의 커다란 생맥주 조끼가 말해 주듯 그곳 사람들의 낙천적인 농심이 많이 작용하고 있따.

 이와 달리 중부의 루르 지방에는 반경 150km가 채 안되는 좁은 지역 안에 분데스리가 팀(18개)이 반 수 이상 속해 있다.

 물론 뮌헨과는 비교도 안될 만큼 규모가 작지만 이런 지역은 또 나름대로 팬을 모을 수 있는 요인을 갖고 있다.

 광산, 철광산업 등 늘 어두운 데서 노동하는 이 곳 주민들에게 토요일 늦게 벌어지는 축구 경기는 모처럼 소리도 지르면서 스트레스를 해소할 수 있는 좋은 기회인 것이다. 

노무자들이 대부분인 이 지역 특성대로 옆동네를, 혹은 이웃 광산을 이기고 싶은 심리가 발동, 거의 군 단위마다 팀을 만들어 놓고 있다는 것으로도 증명이 된다.

 도르트문트, 살케, 보쿰... 이런 팀들이 바로 이곳에 속해 있다. 아무튼 스포츠, 특히 축구는 양쪽 골대 뒤에서 편 갈라 싸우는 팬들이 있어야 신이 나고 구단으로서도 존재 가치가 있다.

동독에 갇혀 있는 서베를린이 수많은 세제 혜택을 주고 있음에도 불구하고 독일 인들이 그 곳에서 살기를 피하자 이제는 외국인들의 도시처럼 되어 버렸다.

 그리고 뒤따라 나타난 자연적 현상은 그 막강하던 베를린의 팀들이 모두 2부 리그, 혹은 아마추어로의 전락이었다.

 이런 것과 비교하여 우리 나라를 보면 서울은 프로 축구가 뿌리를 내리기에 가장 부적합한 곳이며 영호남 지역이야말로 팬들과 호흡하는 축구를 기대할 수 있는 곳이 아닌가 싶다.

 그런데 가장 이상적이라 할 수 있는 호남을 연고지로 하는 팀이 없어 다른 지역의 다섯 개 팀만으로 올 시즌 프로 축구 대회를 치르고 있으니 안타깝기만 하다.

 보다 근본적인 지역 연고제의 정착, 나아가 진정한 팬 확보를 위해서는 무엇보다 호남지역의 프로 팀 창잔이 선행되어져야 할 것이다.

 

p236. 한국 축구 활로 새 모델 창안뿐

 

 1990년 로마 월드컵이 끝난 후 우리나라는 물론이고 거기에 참가했던 상당히 많은 나라의 사람들이, 부러워할 것이라고는 전혀 없어 보이는데도 불구하고 '카메룬'이라는 검은 대륙의 가난한 나라를 상당히 부러워하고 있다. 나 역시도 카메론의 검은 돌풍이 지나간 후 나름대로 호기심을 가지고 이책 저책 혹은 보도 자료를 뒤적이면서 그 이유나 비결(?)이 어디에 있는 관심을 가졌었는데 솔직히 말해서 카메룬을 흉내낸다는 것은 우리의 현실로는 불가능하다는 결론에 도달했다. 그것은 그 사람들의 오늘이 엄청난 투자, 과학적인 훈련, 정부 지원, 해외 연수 같은 데 있는 게 아니었기 때문이다. 이제 우리도 돈으로 해결할 수 있는 묘책이 있다면 어느 정도는 흉내낼 수 있는 수준이 되었다고 할 수 있다. 그러나 적어도 내가 파악한 카메룬 혹은 아프리카 축구의 비결은 그들이 못살고 덜 깬 덕분에 그 곳 아이들이 널려 있는 빈터에서 짚이나 잔디를 묶어서 맨발로 공을 찰 수 있는 여유(?)에 있다고 할 수 있었다. 그것은 아르헨티나 브라질의 경우도 마찬가지였다. 로마 월드컵의 스타 한지 뮐러는 "우리는 브라질보다 훨씬 더 많은 인재들을 갖고 있다. 그 아이들은 공도 유니폼도 운동화도 없이 맨발로 공터에서 짚더미를 차고 있지만 고금만 도와준다면 우리는 세계적인 축구 강국이 될 수 있다"고 자신 있게 얘기했다. 이렇게 해서 키워진 선수들이 해외로 나가 더욱 다듬어지는 것은 그 다음 과정이다.

 나 역시도 중학교 3학년 때부터 축구를 시작했으니가 굉장히 늦게서야 제대로 된 훈련을 받아 본 셈이다. 그러나 어렸을 적에 동네 앞마당에서 애들과 어울려 고무신 신고 짚이나 돼지오줌통으로 만든 공을 공부 걱정 안하고 맘껏 차던 어린 시절이 있었고, 그때의 경험이 같은 시기에 엄격한 훈련을 받은 다름 동료들에 비해 결코 뒤지지 않는 효과를 가져다주었다고 믿고 있다.

 그러나 요즘은 아이들은 축구뿐만 아니라 어떤 것을 하더라도 뛰어 놀 만한 '시간'과 '공간'이 없으니 그 시절에 키울 수 있는 무한한 상상력과 응용력을 키워 낼 수가 없고 그저 정해 주는 생각과 방법에서 벗어나지 못하는 것이다.

 그래서 팬들은 우리 축구가 답답하다고 한다. 또 지도자들은 "독일 선수들은 위치 선정이 뛰어나다"면서 훈련 방법이나 지도비결이 있는가를 묻기도 한다.

 'ㅋ'으로 시작하는 카메룬과 콜롬비아가 1990년 월드컵 대회 첫 경기에 성공했다고 '코리아'도 벨기에를 이길 것이라는 엉뚱한 발상이 여지없이 웃음거리가 되어 버린 것처럼 세상의 모든 일을 천편일률적인 '감'이나 '방법'으로 해결할 수는 없다.

 우리에게 맞는 이상적인 제도와 훈련 방법을 연구해야 할 것이다.

 카메론의 방법은 우리에게 맞지 않는다.

 

p298. 비오는 날의 축구화

 

 비가 내리는 저녁 경기였다.

 레버쿠젠 팀에서 축구화 손질이며 유니폼 정리 같은 잡일을 하는 하랄드가 축구화의 양 사이드에 붙은 아디다스 3선에 열심히 흰색을 칠하고 있었다.

 쓸데없는 짓 같아 보여서 내 신발은 그냥 달라고 했더니 고개를 설레설레 흔드는 것이었다. 흰줄이 잘 안보이면 아디다스에서 자기에게 화를 낸다는 것이다. 한편으로는 어이가 없었지만 그들의 지독스러운 상혼에 고개가 숙여지는 면도 없잖았다.

 진땅에서 45분을 뛰고나면 흰 선은 커녕 축구화인지 발목인지조차 구분이 안되는데 TV앞에 앉아 자기네 상표가 화면에 몇 분이나 나오는지 스톱워치로 재고 있는 그들이고 보면 그냥 지나칠 일이 아닌게 분명하다.

 아디다스에서는 스타들에게 입힐 옷을 '프로모션'이라고 해서 따로 만드는데 공짜로 얻어 입는 그 옷에는 정말 염치 없으리만큼 그들의 상표를 붙일 만한 데는 다 붙인다. 심지어는 어깨 위에까지 붙어 있는데 TV카메라가 얼굴을 클로즈업 하더라도 가슴에 있는 것처럼 잘리지 않고 나올 수 있도록 한 아이디어다.

 그러나 나도 그렇지만 대부분의 선수들은 TV쇼나 가족사진을 찍을 때는 공짜로 얻은 그 옷을 잘 입지 않는다.  그래서 아디다스는 선수 개인과 계약을 해서 TV나 신문에 꼭 아디다스를 입고 출연하는 조건으로 상당한 대가를 지불한다.

 내가 독일에 처음 왔을때에도 아디다스는 이같은 계약을 제시했다.

 광고를 위한 사진 테스트도 한 적이 있는, 당시 한국에서 아디다스의 판매가 저조했기 때문에 광고가 아닌 평상시 옷을 입고 다닌다는 계약만 하자고 해서 하지 않았다. 그런데 몇 달 후 테스트용으로 찍은 사진이 내 허락 없이 한국에서 광고,판촉용 포스터로 사용되었다. 물론 아디다스 같은 대기업이 장난을 치진 않았을 것이다. 중간에 누군가의 농간이라 생각하지만 불쾌한 건 어쩔 수 없었다. 그 일이 있은 후 여지껏 아디다스에서 보내주는 애들 옷이랑 신발 등을 입히지만 탐탁치는 않다.

 얼마전 나는 눈이와서 길이 안좋은 때 400km 떨어진 뉘른베르크의 아디다스 공장을 다녀왔다. 그 동안은 클럽으로 공급되는 표준형 축구화를 문제없이 신었다. 그런데 신형 축구화가 나오고서는 내 발에 맞지 않아 불편을 겪었다. 그래서 구형을 요구하자, 어렵게 두 켤레를 갖다주었다. 하지만 구형 재고도 떨어졌는지 공장으로 와서 발 본을 떠서 전용 축구화를 공급해주겠다는 오퍼가 왔다. 내 발에 맞는 축구화를 신고 싶은 욕심에 못 이기는 체하고 멀리 떨어진 공장까지 가서 발모양을 떴다. 그런 다음 신발 속에 붙이는 보조 스펀지를 내가 원하는 대로 설명하고 요청했다. 신발 전문장인인 슈버거 씨가 "볼 잘 차는 선수들은 다 까다롭더라"면서 웃었다.

 축구화를 전용으로 만들게 되면 한 켤레에 340마르크, 한화 14만원 정도가 든다. 그러니 앞으로는 시합 전에 하랄드가 3선에 흰칠을 하고 있어도 아무말도 안해야겠다.

 아베의 경제보복 조치로 촉발된 반일의 분위기에 어느 정도 편승한 책이라는 감이 있다.

저자의 일본 생활(어느 정도 살았는지에 대한 정보는 책에서 찾을 수는 없다.)에서 경험한 일본의 표리부동한 면과 아베 정권 이후 극우로 흐르는 일본의 분위기를 전하는 점에서 의의가 있을 듯 싶다.

뒤로 갈수록 계속 하던 말을 반복적으로 하며 내용은 빈약해지는 감이 있다. 아마도 물들어 올 때 노젓는다는 심정으로 쓴게 아닐까 싶게 뒤로 갈수록 마무리가 아쉽다.

요즘 한일 갈등 국면에서는 그래도 일독의 가치가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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p22. 일본에게 대한민국은 철저한 을이다.

 일본이 다른 나라에게 절대 사과하지 않는 두 번째 이유, 이른바 '갑을 문화' 때문이다. 일본은 갑과 을로 관계를 명확히 가르는 성향이 있다. 말 그대로 갑은 을에게 어떤 행위를 해도 용납이 되는 이른바 '갑질'의 주체라고 할 수 있다. 반대로 을은 갑의 의사에 반하는 어떤 행동도 해서는 안된다. 설사 갑의 의견 혹은 요구가 틀린 것이라고 해도 말이다. 이처럼 일본에는 을에게 불합리한 선택과 행동을 강요하는 특유의 갑을 문화가 존재한다. 이는 세계에서 오직 일본인만이 갖고 있는 '종특', 다시 말해 종족 특성이다.

 일상에서 흔히 접할 수 있는 예를 들어보자. 일본인은 식당에서 나이에 상관없이 종업원에게 무조건 반말을 한다. 아주 어린 청년이 흰머리가 성성한 어르신에게 손가락으로 메뉴를 가리키며 거만한 태도로 "고레초다이(이거 저)"라고 외친다.

 우리로서는 전혀 이해하지 못할 상황이지만 일본에서는 흔히 볼 수 있는 모습이다. 아이러니한 사실은 종업원도 그것에 대해서 전혀 불편해하지 않고 당연하게 생각한다는 점이다. 손님과 식당 종업원이라는 '갑을 관계'가 확실히 성립이 됐기 때문이다.

 손님, 즉 '갑'으로서 식당을 방문한 이들도 자신들의 일터에서는 '을'로 취급받는 걸 당연하게 생각한다. 식당에서 어르신에게 "초다이"를 외치던 청년들은 자신들이 일하는 식당에서 똑같이 대우를 받는 걸 거리낌 없이 받아들인다. 손님의 언사를 아니꼬워하거나 자신보다 어린 학생에게 '왜 반말을 하느냐'고 따져 묻지 않는다. 한국, 아니 전 세계 어디에서도 볼 수 없는 일본만의 문화다.

 한 가지 더, 일본 남성은 부인 혹은 여자친구를 '오마에お前‘라고 부른다. '오마에'는 '너'라는 뜻으로 상대방을 하대할때 사용하는 단어다. 조금 더 자세히 설명하면 '앞 전 前'자를 써서 한국말로 하면 "어이, 거기 앞에 있는 놈"이라는 의미를 갖고 있다. 그런데 일본 남성은 부정적인 의미를 가진 '오마에'를 부인이나 여자친구를 부를 때 일반적으로 사용하는 것이다.

 이는 전통적으로 남자가 갑이고, 여자를 을로 취급한 일본 역사에서 그 이유를 찾을 수 있다. 일본 남성과 여성은 오래 전부터 갑을 관계가 확실히 정해져 있었다. 그래서 남성이 여성을 하대하는 걸 당연하게 생각한다. '잃어버린 10년'이라고 부르는 '버블시대' 당시 잠시 페미니즘이 득세했지만 그건 말 그대로 잠깐일 뿐이었다. 여자들 역시 자신이 '오마에'라고 불린다고 해서 그것을 전혀 불편하게 생각하지 않는다. 여자들도 자신이 을의 입장에 있다는 걸 인정하는 것이다.

 일본은 사장이 직원에게 함부로 대하는 것에 대해서도 당연하게 생각한다. 직원들은 별다른 불만을 얘기하지 않는다. 정치인들이 시행하는 정책에 대해서 크게 반대하지 않는 이유 역시 같은 맥락이다. 사장이든 정치인과 같은 '높으신 분'이든 그들 문화에서는 철저한 갑의 위치에 있는 사람이기 때문이다.

 제2차 세계대전에서 일본이 패망했을 때 한 미군 병사가 쓴 편지를 인터넷에서 읽은 적이 있다. 당시 일본은 가미가제 특공대를 필두로 끝까지 저항했기 때문에 미군 병사는 점령군으로서 일본에 상륙하면서도 굉장한 두려움을 갖고 있었다. 혹시 누군가 폭탄을 품에 안고 미군 주둔지에 오지는 않을까 밤에 잠을 자지 못했다고 한다.

 그런데 막상 일본에서 만난 일본인들은 너무나 예의 바르고 깍듯했다. 품 속 폭탄은커녕 자신들이 숨겨두 꿀단지까지 내놓을 만큼 납작 엎드린 태도를 보인 것이다. 전쟁에서 승리한 미군과 패망한 일본 사이에 '갑을 관계'가 형성된 까닭이다.

 만약 같은 상황에서 우리나라가 패했다면 미국은 우리의 철천지원수가 됐을 것이다. 우리나라 도시에 핵폭탄 두 방을 쏘는 바람에 죄 없는 수많은 시민들이 죽었다고 가정한다면 미국과는 평생 한 하늘을 이고 살지 못할 터다. 하지만 일본은 '찍소리'조차 하지 않는다. 전쟁에 이긴 미국은 갑이고 패배한 일본은 을이기 때문에 아무 말 없이 매우 친절하게 미군을 '받들어 모신 것'이다.

 이렇게 갑을 관계를 확실히 하는 일본인의 특성을 봤을 때, 일본이 우리에게 진정한 사죄를 하지 않는 서글픈 이유를 짐작할 수 있다. 과거 제국주의를 표방한 일본은 강력한 나라, 즉 갑이었다. 일본이 식민지로 삼았던 우리나라를 비롯한 아시아의 많은 국가들은 약한 나라, 즉 을이었다. 일본인이 생각하는 갑을 관계에서 한국은 철저한 을이기 때문에 강력한 갑이었던 일본에게 불만을 얘기할 수 없다고 생각하는 것이다.

 물론 일본인이 다른 나라에 사죄를 하지 않는 것은 '섬'과 '갑을 문화' 외에도 여러 가지 이유가 있을 것이다. 하지만 나는 이 두 가지야말로 근본적인 이유라고 확신한다. 일본인 기저에 깔린 가장 강한 본성이 바로 거기에서 비롯되는 것이라고 생각한다.

p31. 반려동물 살처분 세계 1위

 최근 우리나라에서는 모 동물권 단체 대표가 유기견을 무분별하게 안락사한 사실이 밝혀져 큰 충격을 안긴 사건이 발생했다. 반려동물 1000만, 관련 시장 5조 원 이상의 규모를 자랑하는 우리나라는 물론 반려문화가 완벽하게 정착된 미국과 해외 여러 나라에서도 한 생명의 삶을 인위적으로 끝내는 안락사에 대한 논란은 여전히 뜨겁다.

 그런데 일본은 안락사도 아닌 '살처분'을 세계에서 가장 많이 하는 나라로 악명이 높다. 일본에서는 한 해에 개 10만 마리, 고양이 20만 마리가 살처분된다. 매년 30만에 이르는 무고한 생명이 강제로 자신의 삶을 강탈당하는 것이다. 전 세계 어느 나라와도 비교할 수 없을 만큼 압도적인 수치다.

 참고로 우리나라는 모든 동물을 합쳐 약 2만 마리, 영국은 7000여 마리, 독일은 놀랍게도 0마리라고 한다. 여담이지만 독일에 비교하면 아직 우리나라의 반려동물 문화도 갈 길이 멀다고 생각한다. 

p36. 농약사용량 세계 1위

 전 세계에서 농약을 가장 많이 사용하는 나라는 어디일까? 언뜻 중국이나 미국을 떠올리기 쉽지만 일본이 농약을 가장 많이 사용한다. 좁은 땅덩어리에서 미국의 20배에 달하는 농약을 살포한다. '농약범벅'이라는 표현이 어울릴 정도다.

 아이러니하지만 우리나라 사람들은 이렇듯 농약으로 키워 가공한 일본 식품의 안전성을 강하게 신뢰하려는 경향이 있다. 쉽게 말해 '일본산 제품은 품질이 좋은 것'이란 막무가내식 편견에 사로잡혀 있는 것이다.

 물론 농약을 사용하는 것이 무조건 나쁘다고 할 수는 없지만, 무분별하게 사용하는 것은 많은 위험성을 내포하고 있는 것이 사실이다. 잠재적 위험에 대해 무관심으로 일관하는 일본의 또다른 이중성을 엿볼 수 있는 대목이다.

 p61.

 일본에서는 '탕 목욕 문화'가 일반적이다. 매일 탕에 따뜻한 물을 가득 채워 목욕을 하는 문화가 발달한 것이다.

 나는 시간이 오래 걸리고 과정이 복잡한 일본 탕 목욕 문화의 배경이 '청결함'에 있다고 생각했다. 하지만 일본인은 생각보다 청결하지 않다. 지금까지 점심시간에 양치를 하는 일본인을 본 적이 없다. 한국인은 점심식사 후 너도나도 양치를 하는 데 반해 일본인은 곧바로 업무에 들어간다. 여름철 대중교통을 이용할 때면 땀으로 범벅이 돼 매캐한 체취를 풍기는 사람들 때문에 눈물이 날 정도다.

 일본에서 탕 목욕 문화가 발달한 이유는 바로 비효율적인 난방 시스템 때문이다. 전기세가 높고 난방 시설이 미흡해서 따뜻한 물은 채운 욕조에 몸을 담그는 문화가 일반적으로 자리 잡은 것이다. 비싼 난방 비용을 감당하지 못해 선택한 궁여지책이다. 누군가 목욕을 마치고 나오면 "이제 몸이 따뜻해졌어?"라고 묻는 것도 같은 맥락이다.

 일본은 세계적으로도 손꼽히는 고물가 나라 중 하나다. 물론 아주 저렴한 프랜차이즈 덮밥집 같은 곳도 있지만 괜찮은 일본 레스토랑에서 한 끼 식사를 하는 비용을 원화로 계산해보면 깜짝 놀랄 정도로 비싼 경우가 많다. 2019년 현재는 한국의 일본 불매운동으로 인해 순위가 '떡락'했지만 지난해까지 '한국인이 선호하는 연휴 광광지 1위'에 선정된 오사카에서는 150그램도 안 되는 스테이크 한 덩이를 무려 4천 엔(약 4만 원)에 팔고 있을 정도다. "시간만 있으면 유럽을 가겠다"는 볼멘소리가 나오는 이유다. 

 경제주의를 체택하고 있는 나라는 모두 마찬가지겠지만, 일본은 특히 돈이 없으면 최소한의 인간적인 삶을 유지하기 힘든 곳이다. 돈으로 생활의 질이 결정되는 일본인들이 새삼 안타까워지는 순간이다.

 p69.

 나는 일본 도박의 현재가 '제2차 세계대전'과 맞닿아있다고 나름대로 결론을 내렸다. 일본이 전쟁에서 패배하고 미국 맥아더 장군이 일본에 상륙하는 동시에 GHQ(General Headquarter)라는 이름의 연합군 최고 사령부가 설치되었다. 이후 GHQ에서는 일본의 우민화 정책으로 여러 가지 방안을 내놓는데 그 중 '3S 정책'이 일본에 도박이 만연해진 역사와 관련이 있다.

 3S는 'Sex, Sports, Screen'을 의미하는데, 스크린에는 영화나 드라마뿐만 아니라 그 외 모든 오락도 포함된다. 즉, 도박 역시 3S 정책의 핵심 중 하나였던  것이다.

 미국의 3S 정책이 본격적으로 시행되자 일본인은 한층 더 국가에 순응하게 됐다. 도박을 유연하게 받아들인 것 역시 같은 맥락이다. 패전 후 어떤 방식으로든 경제를 살려야 했기에 국가 차원에서도 도박을 장려할 수밖에 없었다. 이래저래 도박 산업이 발전할 수밖에 없는 상황이었다.

 한 가지 놀라운 점은 200조 원에 이르는 일본 파친코 시장의 90% 이상을 점유하고 있는 게 바로 재일교포들이라는 사실이다. 일제강점기 시대에 일본으로 건너간 사람들로부터 역사가 시작된 재일교포는 직업을 선택할 때 제한을 받았다. 공무원은 물론이고 대기업은커녕 작은 기업에 취직하는 것도 낙타에게 바늘구멍처럼 극도로 힘들었다. 생존을 고심하던 재일교포들은 선택의 여지없이 파친코 업계에 뛰어들었다. 소프트뱅ㅋ크 창업자인 손정의 집안도 파친코를 경영했다. 당시 대다수 재일교포들은 주로 직업 선택의 제한 때문에 파친코를 비롯해 대부업, 연예계, 스포츠 등 일반적이지 않은 직업을 울며 겨자 먹기로 선택 할 수밖에 없었다.

 그런데 당시 재일교포들의 불가항력적인 파친코 업종 선택은 현재 아이러니한 상황으로 이어졌다. 파친코 사업으로 막강한 재력을 거머쥔 일본 재일교포들은 새로운 종교단체인 창가학회를 만들었고, 이를 기반으로 이후 공명당 창당에까지 이른 것이다. 현재 공명당은 일본 보수정당인 자민당과 연립정권을 세워 막강한 권력을 자랑하고 있다.

 일본 우익이 한국과 재일교포를 싫어함에도 불구하고 결코 무시할 수 없는 이유가 바로 여기에 있다. 미군의 우민화 정책과 재일교포의 불가피한 파친고 산업 투신이 비정상적인 현재로 이어진 모양이다.

 일본에서 도박 산업은 결코 사라지지 않을 것이다. 중독과 같은 위험성 여부를 떠나 일본 경제 자체를 지탱하는 기둥 중 하나인 까닭이다. 분명한 것은 일본의 도박 산업에서 우리나라가 배울 점은 단 하나도 없다는 사실이다.

 p94.  여성이라는 이유로 야유받은 정치인의 눈물

 일본 도쿄도 의원인 시오무라 아야카는 위원회에서 여성의 임신과 출산에 대한 의견을 말하는 도중 남성 의원들에게 집중적인 야유 세례를 받았다. 다른 남성 도의원들이 "그렇게 남자가 좋으면 너나 결혼해라", "그 나이에 임신은 가능하냐?"와 같이 선을 넘은 야유를 퍼부은 것이다. 결국 시오무라 아야카는 자신이 준비한 것을 모두 풀어내지도 못하고 눈물을 흘리며 단상에서 내려올 수밖에 없었다.

*(보충)2014년 6월14일 일본 지방의회에서 야당 소속의 시오무라 아야카 의원의 발언 도중 자민당 측에서 나온 야유성 발언으로 이슈가 됨(하기 해당 동영상), 이후 자민당에서 공식 사과를 했음. 

시오무라 아야카(塩村 文夏), 1978년 7월6일생, 그라비아 아이돌 출신으로 탤런트, 방송작가를 거쳐 정치에 입문. 이 사건으로 아이러니하게 지명도를 얻었으며 올해(2019년) 참의원선거에서 입헌민주당 소속으로 당선됨.

  이후 시오무라 아야카는 자신의 트위터에 "여성으로서 안타까운 야유를 들었습니다."라는 내용의 글을 올렸다. 하지만 이 게시물에도 남성들의 무차별적인 비아냥이 이어졌다. 국민이 뽑은 도의원이지만 남성과 여성이라는 성별 차이가 사회적 위치의 상하 가름으로 이어진 어처구니없는 사건이다.

 일본인의 이런 인권유린 사태는 비단 여성에게만 국한되지 않는다. 일본에서 장애인과 같은 사회적 약자에 대한 처우는 '인권 최빈국'이라는 평가조차 아깝게 느껴진다. 일본에는 구 우생보호법旧 優生保護法(1948년 제정, 1996년 모체보호법이라는 명칭으로 바뀜.) 이라는 말도 안 되는 법률이 20여 년 전까지 존재했다. 구 우생보호법은 제2차 세계대전 패전 후 베이비 붐으로 인구가 급격하게 늘어나며 식량 및 각종 물자가 부족해짐에 따라 유전병과 지적장애를 가진 아이를 출산할 가능성이 높은 사람을 대상으로 강제로 불임이나 낙태를 시킬 수 있는 근거로 사용했다. 쉽게 말해 '장애인 출산 가능성이 있는 사람에 대해 강제적으로 불임 및 낙태 수술을 시행할 수 있다'는 국가의 인식이 반영된 최악의 인권유린 법안인 셈이다.

 이로 인해 1945년부터 1996년까지 약 2만 5000명이 불임수술이나 중절수술, 정관수술을 받아야만 했다. 특히 이 중 1만 6500명 이상은 본인 동의 없이 국가가 강제적으로 각종 수술을 시행했으며 여기에는 9살 어린이도 포함되었다.

 일본이 아닌 다른 나라에서 이런 말도 안 되는 법률이 시행됐다면 진즉 폭동 수준의 강렬한 시위가 전국적으로 일어났을 것이다. 하다못해 소송을 통한 거액의 피해보상이라도 받을 수 있었을 터다.

 하지만 일본에서는 지난해 여성 피해자 2명의 소송으로 불거진 구 우생보호법 관련 재판의 판결이 엉뚱하게 나왔다. 한 사람당 7천만 엔(약 7억 원)을 배상해달라는 소송에 대해 일본 법정은 "구 우생보호헙은 행복을 추구하는 권리 등을 정해놓은 헌법 13조를 위반한 위헌이지만 국가의 배상 책임은 인정하지 않는다."는 판결을 내렸다. (일본의 사법체계를 그대로 따라온 대한민국의 사법부가 개판인 이유)

P100

 현재 일본 취업시장이 호황인 건 사실이다. 하지만 결코 아베노믹스 효과 때문은 아니다.

 일본에서는 '단카이 세대'라고 부르는 1945년 전후 출생자의 은퇴가 수년 전부터 이어지고 있다. 이들은 이른바 '베이비부머 세대'에 해당하며 매년 200만 명가량 은퇴를 하고 있다. 일할 사람이 물리적으로 부족해진 것이다.

 반면 매년 취업시장에 유입되는 젊은 층의 수는 100만 명 정도에 불과하다. 은퇴하는 단카이 세대의 절반 수준이다. 기업에서는 당장 2명의 직원이 필요한데 뽑을 수 있는 후보자가 1명뿐이니 능력이나 인성과는 상관없이 일단 채용하고 보는 것이다. '구직 희망자'가 품귀현상을 보이는 현재 일본에서는 누구나 쉽게 취업할 수 있다. 통계의 허점을 아베 정부가 교묘하게 자신들에게 유리한 방향으로 이용한 것이다.

 이 같은 현상은 앞으로 더욱 심화될 전망이다. 일본의 인구는 날이 갈수록 줄고 있다. 출생자보다 사망자가 월등히 많을 정도다. 인구 감소는 곧 국가 경쟁력 하락으로 이어질 가능성이 높기 때문에 많은 전문가는 일본의 경제력 또한 점차 악화될 것이라는 예측을 내놓고 있다.

 수년 사이에 일본으로 입국하는 해외 노동자가 급격히 늘어난 것도 같은 맥락이다. 별다른 스펙이 필요하지도, 뛰어난 능력을 요구하지도 않는 현재 일본은 취업에 힘겨워하는 해외 젊은층이 훌륭한 차선책으로 여기고 있다. 내가 교수로 재직했던 사이타마현의 모 대학교에는 수년째 취업률 99% 이상을 기록하고 있다. 한국, 중국, 베트남 등 국적을 가리지 않고 내가 직접 가르친 유학생들 모두 예외 없이 취업에 성공했다. 성적표를 C로 도배해도 취직에는 아무 문제가 없다. 과장을 조금 보태면, 정신적으로 문제만 없으면 무조건 취직이 된다고 표현해도 될 정도다.

 한국에서는 목숨처럼 여기는 스펙도 필요치 않다. 내가 담당한 학생들은 토익시험을 본 적도 없다. 유학생은 JPT, JLPT 2급만 따도 취업이 되고, 1급을 따면 좋은 조건으로 회사가 '모셔가는' 수준으로 채용이 된다.

 일본의 취업 기준은 한국에 비해 굉장히 낮다. 일본 대학 중 수준이 낮은 곳의 토익 평균은 겨우 400점대다. 600점만 되면 대기업 취직이 가능하다. 한국에서는 800점은 넘어야 겨우 명함을 내민다고 하는데, 일본에서는 800점을 넘으면 거의 미국인과 동급으로 대우받을 수 있다. 

 컴퓨터를 다루는 능력도 턱없이 부족하다. 집에 컴퓨터가 없는 대학생도 흔할 정도다. 스마트폰으로 타이핑한 후 학교 컴퓨터로 프린트를 해서 과제를 제출하는 학생들도 많이 봤다.

 한국에서는 평균 스펙을 가진 대학생도 일본에 오면 엘리트로 인정받는다. 그만큼 대부분의 분야에서 수준이 매우 낮다.

 게다가 일본 청년들은 성공에 대한 의욕도 없고, 돈을 벌고 싶은 마음도 없다. 설사 대기업에 취직을 해도 해외 주재원이 되는걸 꺼린다. 적은 급여로 힘겨워도 자신만의 루틴으로 이뤄진 일상을 유지하면 된다는 '적당주의'가 팽배해 있는 까닭이다.

 물론 모든 직장이 대기업처럼 복지나 급여가 만족스러운 것은 아니다. 일부 열악한 조건의 직장에 취업하는 경우도 꽤 많다. 하지만 우리나라처럼 취업 자체가 힘든 것은 아니다.

 문제는 취업 후에 직면한다. 일본 평균 초봉은 약 20만 엔 선, 우리나라 돈으로 200만 원 정도다. 세금을 제외하면 17만 엔 정도가 신입사원 손에 쥐어진다.

 만약 부자 부모 덕분에 자가로 사회생활을 시작한 경우가 아니라면, 매달 일정 금액의 월세를 감당해야 하는 팍팍한 삶이 기다리고 있다. 도쿄 시내에서는 정말 코딱지만 한 원룸도 월세가 최소 5~6만 엔이다. 세금과 월세를 빼면 12만 엔(약 120만 원) 정도가 통장에 남는 셈이다.

p152.

 그런데 왜 일본은 우리나라 영토를 대상으로 자꾸 분쟁을 일으키는 것일까? 꽤나 많은 부분을 정치적 이유가 차지하겠지만, 일본인 중에는 독도가 실제로 자기네 영토라고 생각하는 사람이 많다. 우리나라가 완벽하게 실효지배하고 있는 독도가 국내법적으로는 전혀 문제가 없는데, 왜 일본은 존재하지도 않는 문제를 애써 만들어내는 것일까?

 숨겨진 속내는 국내 법적으로 한국이 실효지배하고 있는 독도를 분쟁지역화해서 국제적 문제로 키우고자 하는 것이다. 국제적 분쟁을 담당하는 국제사법재판소ICJ(International Court of Justice)에 소속된 전/현직 일본인 재판관은 이와사다 유지, 오다 시게루, 다나카 코타로, 오와다 히사시 등 무려 4명이다. 특히 마지막으로 언급한 오와다 히사시란 사람은 현재 일본 왕비인 마사코의 친아버지로, 2012년까지 국제사법재판소 소장을 역임했고 이후 2018년까지 재판관으로 재임했다. 이처럼 국제사법재판소에서 일본의 영향력은 굉장히 크다. 일본이 국제사법재판소에 많은 자금을 지원하고 있기도 하다. 이에 비해 한국은 아직까지 국제사법재판소의 재판관을 배출하지 못했다.

 바로 이것이 일본이 국제사법재판소로 독도영유권 문제를 끌고 가려는 의도다. 일본은 장기적인 관점에서 한국의 독도를 분쟁지역화라혀는 다향한 프로젝트를 꾸준히 추진하고 있다.

 국내 법적으로 실효지배를 하고 있다면 아무 문제가 없지만, 영토분쟁의 상대 국가가 계속 이의를 제기하면 해당 지역이 '점유지'가 된다는 사실을 파고든 것이다. 일본이 지금처럼 끊임없이 독도에 관한 논란을 일으키면 '실효지배'가 아니라 '점유지'로 인식되기 때문에 국제사법재판속의 판단을 받아야 할 경우가 생길 수도 있다.

 국제사법재판소에서 강력한 영향력을 행사하는 일본이 독도를 자꾸 국제적 문제로 키우려고 하는 수작인데, 우리가 이에 반응하면 일본의 의도대로 되는 것이다. 나는 이러한 일본의 독도 분쟁지역화 시도에 대해 '무반응'으로 일관하는 게 좋다고 생각한다.

p175.

 경제보족 조치는 종교적으로도 악영향을 끼쳤다. 앞서 '도박 천국 일본'에서 다룬, 아베 총리와 자민당과 함께 연립여당을 구성한 '공명당'의 모체는 창가학회(Soka Gakkai International)라는 종교단체다. 창가학회는 세계 평화를 기본 철학으로 삼는다. 특히 한일관계와 평화를 중시하는 창가학회는 '일한관계', '일한평화'와 같이 일본을 단어 앞에 놓는 다른 일본인들과 달리 '한일관계', '한일평화'처럼 한국을 우선한다. 한국을 존경해야 하는 형님과 같은 존재라고 생각하는 것이다. 이처럼 한국에 우호적인 이유는 창가학회의 기둥이 재일교포에 있기 때문이다. 창가학회는 재일교포의 재력과 노력으로 유지되고 있는 종교단체라고 할 수 있다.

 우리나라 불매운동의 시작점인 '유니클로'의 야나이 회장은 대표적인 창가학회 신자다. 야나이 회장은 한국에 굉장한 호감을 가진 인물로 유명하다. 실제로 일본 본사에서 한국인 직원을 많이 뽑고 있으며 야나이 회장은 아베 정권에 대해 비판적인 의견을 내고 있는 사람이다. 다이소 역시 창가학회 계열의 기업이다.

 물론 "유니클로나 다이소의 회장은 한국을 사랑하는 창가협회와 공명당의 회원이니까 불매운동을 하지 마라"라는 말을 하겠다는 게 절대 아니다. 개인적으로는 현재 한국이 불매운동을 적극적으로 지지하고 있다는 걸 분명히 밝힌다.

 다만 이들 기업이 한국에서 입는 경제적인 피해를 연립여당인 공명당이 대변할 가능성이 있다는 점을 설명하고자 한다. 공명당은 원래부터 자민당이 헌법을 개헌해 전쟁이 가능한 나라를 만드려는 시도를 극렬하게 반대한 정당이다. 공명당과의 연정 덕북에 자민당이 현재의 힘을 가졌지만, 반대로 공명당이란 존재 덕분에 자민당의 폭거를 막을 수 있었던 것이다. 

만약 한국의 불매운동이 이들 기업에게 더 큰 피해를 입힌다면, 공명당에서는 어떤 방식으로든 자민당을 압박할 가능성이 높다. 부가적으로 창가학회 회원들의 지지도 떨어져 나갈 게 뻔하다. 다시 말해 우리의 불매운동은 계속돼야 한다는 의미다.

 일본에서는 재일교포의 힘이 매우 강하다. ABC 마트의 창업자 미키 마사히로도 재일교포로 본명이 강정호로 밝혀졌다. 이외에도 재일교포 자본의 일본계 회사는 다 열거하기 힘들 정도다. 소비자 금융(대부업), 도박산업, 서비스산업 등 일본에서 재일교포들의 경제력은 엄청나다. 일본의 돈줄을 쥐고 있다는 표현이 그리 틀리지 않다.

 이번 경제보복 조치로 인해 발동한 불매운동 탓에 재일교포들이 피해를 입게 됐고, 이들이 한목소리로 아베 정권에 불만을 내뱉을 가능성이 높아지고 있다. 아베의 현재 상황은 그야말로 사면초가다.

 현재 대한민국 축구 최고의 스타.

손흥민의 첫 에세이집. 유럽리그 진출의 10년간에 대한 그의 주요 기억들을 다루고 있다.

에피소드 자체가 잘 알려져 있어서 친숙하고 술술 읽힌다. (아마도 편집자가 잘 다듬어 준 것일 듯 하다)

축구를 어느 정도 아는 사람이면 상당히 재밋을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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p94.

 몸은 무겁고 경기도 풀리지 않는 상태로 2010-11 시즌이 막을 내렸다. 개인 기록은 시즌 15경기(선발 8회) 3골이었다. 만족할 만한 기록은 아니어도, 프로 데뷔전에서 골을 넣었고 국가대표팀에 뽑혀 아시안컵에도 다녀왔다. 타지에서 2년 넘게 버틴 고생을 생각하면 나름 의미를 부여할 수 있는 내용이라고 생각했다. 하루라도 빨리 한국으로 돌아가고 싶었다. 가족도 그리웠고 집밥도 실컷 먹고 싶었다. 아시안컵에서 친해진 형들과 만나서 놀고도 싶었다.

 

 하지만 어떻게든 아버지를 설득해야 했다. 시즌이 거의 끝나갈 즈음에 아버지가 "나는 자존심 상해서 못 돌아간다"라고 선언했기 때문이다. 아시안컵 직후 무너진 밸런스와 (SNS의 재미를 알아버린?) 나의 태도가 아버지의 분노를 샀다. 아버지가 무서워서 나는 한국에 돌아가고 싶다는 말은 꺼내지도 못하고 속으로 끙끙 앓았다.

 

 고민 끝에 아버지를 붙잡고 사정사정했다. 한국에 돌아가서 시키는 건 뭐든지 다 할테니 제발 돌아가자고, 무슨 훈련을 하라고 하든, 힘들어서 죽든 말든, 무슨 말이든 다 들을 테니까 제발 아버지... 나는 한국에 너무 돌아가고 싶었고, 무너진  내 밸런스도 되찾고 싶었다. 아버지는 기나긴 충고와 훈계를 주시면서 겨우 귀국에 동의했다. 드디어 한국으로 돌아갈 수 있게 되었다. 한국만 가면 숨을 쉴 수 있을 것 같았다.

 

 귀국하자마자 춘천으로 갔다. 대표팀에서 알게 된 선후배, 친구들에게 일단 나중에 보자고 메시지를 남겼다. 아버지의 훈련이 영원히 이어지진 않을 테니까. 독일로 돌아가기 전에 휴가를 즐길 수 있을 거라고 생각했다.

 

 엄청난 착각이었다. 다음날부터 나는 죽었다. 아침 8시에 밥을 먹고 체력 단련장에 가서 아버지와 함께 근력 운동을 했다. 그리고 뒷산의 높다란 계단을 오르락내리락했다. 웨이트가 끝나면 운동장으로 향했다. 아버지는 축구공 20개를 들고 내 앞에 나타났다. 나는 위치를 옮겨 가면서 슛을 때리기 시작했다. 매일 1천 개씩. 그렇다. 1천 개다. 같은 골문을 향해서 오른발 500번, 왼발 500번 슛을 때렸다. 내가 슛 능력을 타고났다고 말하는 사람들이 있다. 전혀 사실이 아니다. 나의 슈팅은 2011년 여름 지옥훈련이 만들어 낸 결과물이다.

 

 성미 급한 초여름 햇살이 내 정수리를 열정적으로 찔러 댔다. 죽을 것 같았다. 정말 죽을 수도 있겠다는 생각이 들었다. 슈퍼마켓에서 사온 초콜릿과 바나나를 입안에 욱여넣어 떨어진 당을 채웠다. 서 있기만 해도 다리가 후들거렸다.

 하지만 매일 아버지의 성에 찰 때까지 슛 훈련은 계속되었다. 입에서 신맛이 났다. 페널티박스 지점마다 오른발로 감아 차고 왼발로 감아 찼다. 적당히 하는 것 같다 싶으면 불호령이 떨어졌다. 아버지에게 나는 분데스리가 유망주가 아니라 그냥 철부지 축구선수일 뿐이었다. 옛날에 봤던 <공포의 외인구단>의 장면들이 떠올랐다. 척박하기 짝이 없는 독일 클럽하우스 숙소로 돌아가는 게 낫겠다는 생각까지 들었다.

 

 훈련을 끝내고 집에 돌아오면 저녁을 먹자마자 쓰러져 자기 바빴다. 스마트폰을 들어 올릴 힘조차도 남아 있지 않았다. SNS는 끊긴 지 오래였다. 대표팀 형들의 각종 경조사도 모두 스킵했다. 혹시나 사람들이 내가 건방 떤다고 생각하지 않을까 걱정도 들었다. 누워서 그런 걱정을 하다가 이내 잠에 곯아떨어졌다. 다음 날 일어나면 지옥훈련이 다시 시작되었다. 그렇게 5주를 보냈다. 하루도 쉬지 않았다.

 

 함부르크의 여름 프리시즌 훈련 일정에 맞춰 독일로 향했다. 아버지는 다른 일이 있었던 탓에 나 혼자 비행기에 올랐다. 5주 훈련은 지옥 같았지만 그 과정을 버틴 몸은 천국의 날개 달린 천사처럼 가벼웠다. 살면서 이런 컨디션은 처음이었다. 함부르크 국제공항에 내리자 익숙한 독일의 공기 내음이 몸 안으로 들어왔다. 분데스리가로 돌아왔다는 실감이 확실했다. 힘든 기억밖에 없어도 익숙한 감정은 어쩔 수 없는 것 같다.

 공항으로 티스(손흥민 에이전트)가 마중 나오기로 했다. 게이트를 빠져 나오자 티스가 보였다. 손을 들어 인사를 했는데 반응이 없었다. 시즌 막판에 몸 관리에 실패했다고(이전 내용 보충 : 귀국 전 아시안컵 국가대표로 차출되었을 때 오랜만에 접한 한식에 정신이 빼앗겨, 시합기간 동안 몸무게가 4kg 증가. 이후 복귀한 리그에서도 불어난 체중으로 컨디션이 저하되어서 활약이 저조했음) 티스도 화가 많이 나 있었는데 아직 풀리지 않았나? 다시 손짓을 했다. 티스와 눈이 마주쳤다. 그러더니 티스는 좀비라도 본 것처럼 "Oh man! 한국에서 도대체 무슨 일이 있었던 거야?"라며 넋을 일었다. 살이 빠져 얼굴이 반쪽이 된 데다 땡볕에 새카맣게 탄 바람에 티스가 나를 알아보지 못한 것이다.

(이후 내용 보충 : 복귀한 분데스리가에서 맹활약을 하게 된다.)

 

p105.

 시간이 흐른 뒤에 들은 이야기가 있다. 첫 시즌을 마치고 한국으로 돌아갈 때 구단에서는 나를 거의 포기했다고 한다. 내부적으로 '손흥민은 이제 끝났다. 저렇게 불어난 체중에 휴가까지 다녀오면 절대 원래 모습으로 돌아오지 못한다'라고 진단했다. '반짝 유망주'로 끝날 것이라는 자체 판단이었다. 에이전트인 티스는 이런 분위기에 관해서 우리 가족에게 입도 벙긋하지 않았다. 다행히 나는 완전히 달라진 모습으로 돌아왔다. 구단에서는 나의 격변이 큰 화제였다. 아버지의 지옥훈련 내용을 살짝 알려주자 다들 혀를 내둘렀다. 구단에서는 "아버지가 너를 살렸다"라고 말했다.

 

p113.

 세상 어디에나 편견이 있다. 유럽에 온 한국인 선수는 '축구 못하는 동네에서 온 녀석'이라는 편견을 극복해야 한다. 유럽 기준으로 동양 선수들은 의사 표현이 소극적인 편이이서 만만하게 보기도 한다. 인종 차별과는 약간 다르다. 유럽의 '축구 부심'이 샛길로 빠졌다고 해야 할까.

 

 나도 독일에 처음 왔을 때 그런 편견과 싸워야 했다. 팀 동료들은 내게 패스를 주지 않았다. 말도 잘 걸지 않았다. 내가 먼저 가서 볼을 빼앗아 와야 했고, 내가 먼저 다가가 독일어로 말을 걸어야 했다. 마음의 담을 무너트리려면 경기장 안에서 실력을 입증해야 하고, 밖에서는 '내가 너희 문화를 배우려고 노력 중이다'라는 모습을 보여야 한다. 

 

 가끔 세게 나가야 할 때도 있다. 예를 들어 소위 '썩은 사과'와 맞닥뜨릴 때다. 한국이든 독일이든 '썩은 사과'가 있기 마련이다. 그런 상황에서는 강하게 나가야 한다. 내가 행동하려는 의지가 있다는 사실을 상대에게 분명히 알려야 한다.

 

 2012-13 시즌 프리시즌 훈련 중 팀 동료와 한판 붙은 적이 있다. 그날따라 훈련을 시작하기 전부터 라이코비치(세르비아 선수로 2019년 현재 세리에 리그의 팔레르모에서 뛰고 있다.)가 약을 올렸다. 당연히 이유는 몰랐다. 처음에는 농담으로 받아 줬는데 훈련이 진행되면서 그 친구의 실언이 계속되었다. 안에서 서서히 열이 오르기 시작했다. 그러다가 임계점에 도달했다. 라이코비치가 먼저 내게 달려들자 나도 펑 하고 터졌다. 나는 그를 피하면서 킥(격투기로 따지면 미들킥 정도?)을 날렸다. 둘이 마구 엉키자 주위에 있던 동료들이 달라붙어 둘을 말렸다. 그 와중에 라이코비치의 주먹이 나를 말리던 동료의 이마를 스쳤다. 정신을 차리고 보니 내 단짝 톨가이 아슬란이 피를 흘리고 있었다. 눈이 뒤집혔지만 동료들에게 온몸이 포박(?)당한 탓에 분을 삼켜야 했다

.

 현장에 있던 모든 사람이 원인 제공자가 누구인지 잘 알고 있었다. 그날 이후 라이코비치는 리저브팀으로 쫓겨났다. 나는 벌금을 내야 했다. 정당방위든 뭐든 일단 주먹다짐에 연루되었기 때문이다. 장기영 대표는 "잘했다"라고 하면서도 "그래도 두 번은 안 된다."라고 충고했다. 특히 유럽에서 미들킥은 절대 안 된다고!

 

p155.

 

 프리시즌의 마무리는 레버쿠젠의 한국 방문이었다.  LG전자가 주선해서 성사된 투어에서 우리는 FC서울과 친선경기를 갖게 되었다. 긴 인연은 아니지만 FC서울 산하 유스인 동북고가 나의 마지막 한국 축구와의 연결고리였기 때문에 내심 반가웠다. 팀 동료들에게 한국을 보여 줄 수 있어서 기분이 좋았다.

 그런데 한국 방문 직전에 아버지가 한 언론사로부터 전화를 받았다. 내 사생활을 찍은 사진의 공개 여부를 놓고 모종의 제안을 해왔다고 했다. 아버지는 "내 아들이 범죄라도 저질렀는가?"라면서 모두 거절했다. 레버쿠젠이 한국에 도착하던 날에 맞춰 파파라치 사진들이 공개되었다. 악마적 타이밍이었다. 상상할 수 없을 만큼 많은 기사가 쏟아졌다.(부연 설명 : 당시 걸그룹 멤버와 터진 열애설을 의미한다.) 멀리 한국까지 온 동료들에게 폐를 끼치는 것 같아서 레버쿠젠 투어 3박4일 내내 가시방석에서 지냈다. 동료들에게 맛있는 한국 음식을 먹여 가면서 재미있게 시간을 보내려던 계획은 산산이 조각났다. 마음 같아선 호텔 방에 콕 박혀 있고 싶었지만 한국 투어 중 잡힌 각종 행사에서 나는 항상 주인공 역할을 해야 했다. 속으로 울면서 겉으로 관객을 웃겨야 하는 코미디언이라도 된 듯한 기분이었다.

 독일로 돌아가서도 축구선수인 나는 축구와 무관한 기사들의 주인공으로 끊임없이 소환되었다. 생전 본 적도 없는 언론사들까지 인터넷에서 돌아다니는 정보를 짜맞춰서 기사를 쏟아냈다. 새 시즌 준비에 집중해도 모자랄 판에 이런 일에 신경 써야 하는 상황이 너무 화가 났다. 이 일은 우리 가족에게 언론의 어두운 면을 일깨워 주는 계기가 되었다. 공식 기자회견을 제외한 인터뷰 횟수가 급격히 줄어든 출발점이었다.

 

p209.

 지금 감사하며 즐겨야 한다. 나의 행복 철학이다. 그라운드에서 서서 축구공과 함께 있는 순간을 최대한 즐기는 것이 행복이다. 어제를 떨치지 못하거나 내일을 걱정하는 삶은 오늘의 행복을 방해한다. 영국에서 나는 '스마일 보이'라는 소리를 자주 듣는다. 동료들도 "어떻게 너는 매일 아침 웃으면서 돌아다닐 수 있는 거냐?"라면서 신기해한다. 간단하다. 웃어서 행복한 거다. 매일 아침 일어나서 '오늘 하루도 행복하게'라고 다짐한다.

 

 

 

일본의 베스트셀러 작가인 소노 아야코의 최근 수필집. 어려서부터 독실한 카톨릭 신자이며, 정치성향은 우리 입장에서 보자면 극우파에 해당한다. 1931년 생으로 젊은 시기에 일본의 패망을 맞은 노인세대라 그런 영향이 없진 않을 것이다. 

인종차별과  독재옹호, 그리고 후쿠시마 사태에 대한 꼴통발언으로 이슈가 되었으나 일본내에서의 입지는 확고한 듯 하다. 소위 일본에서 잘 나가는 극우파 작가이다. 

학력이나 쓴 글을 보면 무식해서 극우파가 된 건 아닌 듯 하고 자라난 환경 자체가 그런듯하다.

이 작가의 수필은 이것까지 포함해서 2편(누구를 위해 사랑하는가는 작가의 최고의 베스트셀러)을 봤는데 글 자체는 상당한 관록과 경지를 보여주며 그리고 엄격한 가운데 얼마간의 따뜻함도 느껴진다. 이런 글을 쓰는 사람이 사회정치적으로 상당한 꼴통 발언을 한다는 자체를 보면 인간이 얼마나 아이러니한 존재인지를 보여주는 사례라고나 할까?

현재 나이는 88세로 이번 작품은 필력이 떨어지는 가운데 요점만 짧게 1,2페이지로 정리해서 읽기는 매우 쉽다.

그러나 결국 언행의 일치와 도덕성이라는 관점에서 볼 때 글이 아무리 뻔지르해도 작가의 마음에 문제가 있다면 그 가시가 언젠가는 드러나는 법이며, 곳곳에서 그런 것이 느껴진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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