한 십년 전쯤인가? 이 분이 확 떴던 적이 있었다. 당시에는 별 관심이 없었는데 최근에 2012년도에 방송한 SBS의 아이러브인이라는 교양프로그램에서 김정운 씨가 강연했던 프로그램을 봤다. 엄청 재밋어서 이 분 책을 구해서 읽기 시작했다. 

 이 분은 몇년 전에 대학교수직을 관두고 갑자기 일본으로 유학을 가면서 대중에게 잊혀져 갔는데, 최근에 돌아와서 여수에 작업실을 만들어 정착(가족들과는 따로)을 한 모양이다. 

 외딴 섬에서 여러가지 단상들을 정리해서 책으로 내놨다.

 일반적인 에세이랑은 좀 다른게, 심리학 박사이기 때문인지 어떤 주제나 현상에 대한 심리학적 분석이 독특하다. 그리고 간혹 날카로울 때가 있다.

 이 책의 주된 주제는 공간, 저자가 50대 이후 새로운 그의 인생의 의미를 찾기 시작해서 궁극적으로 도달한 자신의 공간에 대한, 그리고 그 공간을 마련하기 위한 이야기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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p34

 

 시선은 곧 마음이다. 내 시선이 내 생각과 관심을 보여준다는 이야기다. 다른 동물들에 비해 인간 눈의 흰자위가 그토록 큰 이유는 시선의 방향을 드러내기 위해서다. 흰자위와 대비되어 시선의 방향이 명확해지는 검은 눈동자를 통해 인간은 타인과 대상을 공유할 수 있는 능력이 생겼다. '함께 보기 joint-attention' 다. 인간의 의사소통은 바로 이 '함께 보기'에 기초한다. 다른 동물들은 시선의 방향이 명확히 드러나지 않는다. 눈 전체가 거의 같은 색이거나 흰자위가 아주 작다. 소통이 아니라 사냥하기 위해서 진화했기 때문이다. 시선의 방향이 드러나지 않아야 사냥에 더 유리하다.(이제까지 살면서 '눈 적은 사람'이 만만했던 적은 없다. 흰자위가 다 드러나는 '눈 큰 사람'은 대개 참 편안했다. 뭐 내 개인적 편견이다.)

 

p41

 '물때'다 여수에는 전혀 다른 시간이 흐른다. 밀물과 썰물이 하루 두 번씩 반복되는 건 알았지만, 만조와 간조 시각이 매일 정확히 49분씩 늦어진다는 것은 몰랐다. 달이 지구를 공전하는 시간이 24시간 49분이기 때문이다. 매일 물이 들락거리는 속도도 달라지고, 물의 양도 달라진다. 물이 가장 많이 들고 빠지는 때가 '사리'다 물이 가장 조금 들고 빠지는 때는 '조금'이다. 사리 때를 특히 조심해야 한다. 물이 빠지면 수백 미터 앞까지 바닥이 드러나기 때문이다. 아무 생각 없이 배를 끌고 나갔다가는 바다에서 몇 시간을 그냥 떠 있어야 한다.

 

p44

 시간은 기울어져 흐른다. 봄, 여름, 가을, 겨울을 바꿔가며 시간이 흐르는 이유도 지구가 23.5도 기울어져 있기 때문이다. 기울어져 흐르는 시간이 못마땅하다고 지금 당장 기둥을 수직으로 곧추세우면 시간은 흐르지 않는다. 흐르지 않으면 썩는다. 권력도 마찬가지다. 시간의 흐름을 배제한 평등은 가짜다. 50대 50의 공간적 평등은 없다는 이야기다. 흐르는 시간에 따라 권력의 주체가 기울고 바뀌어야 평등하고 공정한 사회다. 이내 또 기울 것을 알아야 겸허해진다.

==> 지구의 자전축은, 지구의 공전궤도의 중심축에 대해 23.5도 기울어져 있다. 때문에 태양을 공전하면서 태양과의 상대적 위치에 따라, 태양에너지를 받는 면적과 시간의 차이가 생기게 된다. 이 차이로 인해서 봄,여름,가을,겨울과 같은 기후변화가 생겨나며, 북반구가 여름일 때(태양에너지를 받는 면적 및 시간이 최대일때) 남반구는 겨울이 된다.(태양에너지를 받는 면적과 시간이 최소). 

 만일 지구의 자전축이 공전궤도의 중심축과 평행했다면 지구의 적도는 지금보다 훨씬 뜨거웠을 것이고, 남극과 북극은 지금보다 훨씬 차가울 것이다. 이런 차이가 사실 현재보다 더 나쁠지 좋을지는 알 수 없지만 지금과 같은 전지구적인 기후 다양성은 줄어들 가능성이 높다. 기후 다양성이 줄어든다면 아마도 생물의 다양성도 줄어들게 될 것이고, 지구의 모습은 지금과는 아주 많이 다를 것이다.

 

p57

 모든 우려에도 불구하고 섬의 내 작업실 공사는 그해 여름부터 시작되었다. 내 고독한 결정의 기준은 분명했다. '교환가치 Tauschwert'가 아니라 '사용가치 Gebrauchswert'다 카를 마르크스Karl Marx의 사회주의 이데올로기는 망했지만, '사용가치'와 '교환가치'를 구분한 경제학자 마르크스의 가치론은 여전히 유효하고 탁월하다. 각 개인의 구체적 필요에 의해 생산된 물건이 '화폐'라는 '교환가치'에 의해 평가되면서 자본주의의 문제가 시작되었다고 마르크스는 진단한다. 이른바 '사용가치'라는 '질적가치'와 '교환가치'라는 '양적 가치' 사이의 모순이다.

 '교환가치'는 내 구체적 필요와는 상관없는, 지극히 추상적 기준일 뿐이다. 한국 사회의 온갖 모순은 무엇보다도 주택이 '사는 곳(사용가치)'이 아니라 '사는 것(교환가치)'이 되면서부터라고 나는 생각한다. 오십 대 후반이 나이가 되도록 난 한 번도 내 구체적 '사용가치'로 결정한 공간을 갖지 못했다. 이 나이에도 내 '사용가치'가 판단기준이 되지 못하고, 추상적 '교환가치'에 여전히 마음이 흔들린다면 인생을 아주 잘못 산 거다. 추구하는 삶의 내용이 없다는 뜻이기 때문이다. 섬 작업실 공사의 경제학적 근거는 이렇게 간단히 정리했다.

 '정말 후회하지 않겠느냐'는 걱정에 대해서는 심리학적으로 더욱 간단히 정리했다. 후회는 '한 일에 대한 후회regret of action'와 '하지 않은 일에 대한 후회 regret of inaction'로 구분해야 한다고 미국 노스웨스턴 대학교 심리학과의 닐 로스Neal J. Roese 교수는 주장한다. '한 일에 대한 후회'는 오래가지 않는다. 이미 일어난 일이기 때문에 그 결과가 잘못되었더라도 '그만한 가치가 있었다'고 얼마든지 정당화할 수 있기 때문이다. 그러나 '하지 않은 일에 대한 후회'는 쉽게 정당화되지 않는다. '한 일에 대한 후회'는 내가 한 행동, 그 단 한가지 변인만 생각하면 되지만, '하지 않은 일'에 대한 후회는 '그 일을 했다면' 일어날 수 있는 변인이 너무 많기 때문이다. 심리적 에너지가 너무 많이 소비된다. 죽을 때까지 후회한다는 이야기다. 이루지 못한 첫사랑의 기억이 그토록 오래가는 이유도 바로 그 때문이다.

 지금 이 섬의 미역창고에 작업실을 짓지 않는다면 죽을 때까지 '잎새에 이는 바람에도 나는 괴로워'할 것임이 분명하다. 반대로 섬에 작업실이 완공되어 습기와 파도, 바람 때문에 아무리 괴롭고 문제가 많이 생겨도 난 내가 한 행동에 대해 합당한 이유를 얼마든지 찾아낼 것이다. 그리고 내가 이 섬에서 왜 행복한가의 이유를 끊임없이 찾아낼 것이다.

 

p78

 이어폰으로 듣는 음악이 진짜다. 다른 사람의 귀를 의식하는 허세가 사라지는 까닭이다. 스피커로 음악을 들을 때 나는 프란츠 슈베르트Franz Schubert의 <리트Lied>나 요한 제바스티안 바흐Johan Sebastian Bach의 <평균율 Das wohltemperierte Klavier>를 가능한 한 심각한 표정으로 듣는다. 폼 난다. 그러나 '아재용 넥밴드' 이어폰으로 듣는 음악은 죄다 '7080 가요'다 우연은 아니다. 평생 좋아하며 듣게 되는 음악은 청소년기가 끝나고 청년기가 시작되는 20세 전후에 들었던 것이 대부분이라는 심리학 연구 결과가 여럿 있다. 정서적으로 가장 예민한 시절에 듣는 음악인 까닭이다.

 

p83

 

 '공연한 불안'의 개념화가 어느 정도 진행되면 그 개념들을 '가나다순'으로 다시 한 번 정리해보는 것도 좋다. '가나다순'으로 정리하는 것은 '개념의 개념화', 즉 '메타 개념화'라 할 수 있다. 자신의 '생각에 대한 생각'인 '자기 성찰' 또한 이런 메타 기념화'의 한 형태다. 개념화된 불안을 다시 한 번 상대화하면 불안의 실체가 더욱 분명해진다. 더 이상은 정서적 위협이 되지 않는다. 정리되지 않은 불안은 기하급수적으로 부풀어 오른다. 어느 순간부터는 혼자 힘으로 도무지 감당하기 힘들어진다.

 

 불안과 걱정이 습관처럼 되어버린 이가 주위에 참 많다. 잘나가는 사람일수록 그렇다. 그러나 아무리 돈이 많고 사회적 지위가 높다한들 밤마다 불안해서 잠을 이루지 못한다면 그게 무슨 성공인가. '96퍼센트의 쓸데없는 걱정'에서 자유로워야 성공한 삶이다.

 

 자주 웃고, 잠 푹 자는 게 진짜 성공이다!

 

p85

 

 수시로 자신의 삶을 규정하고 있는 전제들을 성찰하며 상대화해야 명함이 사라져도 당황하지 않는다. '탈맥락화Dekontextualisierung'해야 한다는 이야기다. '탈맥락화'는 본질에 대한 질문이다. 철학에서는 '자기 성찰'이라 하고, 심리학에서는 '메타 인지meta-cognition'라 한다. 미술에서는 '추상Abstraktion'이라고 한다.

 

p95

 

 흥미롭게도 프로이트나 아들러 모두 '유대인'이라는 열등감에 시달렸다. 내 일상의 유치한 열등감과는 비교할 수 없는 고통이다. 매일같이 경험하는 인종차별로 인한 뿌리 깊은 열등감의 상처를 유대인들은 저마다의 방식으로 해결했다. 우선 독일인보다 더 철저한 '독일인'이 되는 방식이다. 제1차 세계대전 당시에 독가스를 개발한 유대계 독일인 프리츠 하버Fritz Haber 같은 이다. 암모니아 합성 비료를 발명한 그는 자신의 발명품이 독가스로 사용되는 것에 적극 동조했다. 그의 아내는 이를 반대하며 자살까지 했지만 막을 수 없었다. 그의 독가스는 결국 히틀러에 의해 자신의 유대인 친척까지 살해하는 데 사용되었다.

 

 두 번째는 시오니즘이다. 유럽에서 그토록 멸시받느니 스스로를 격리하여 '유대 국가'를 세우자고 오스트리아 빈의 유대계 작가 테오도어 헤르츨Theodor Herzl은 부르짖었다. 그러나 그의 주장은 오늘날까지 여전히 해결될 기미가 보이지 않는 팔레스타인 문제의 기원이 된다. 시오니즘은 주로 '동유대인Ostjuden'이라 불렸던 동유럽 출신 유대인들에 의해 지지되었다. 그러나 시오니즘이라는 인종 갈등 뒤에는 가난한 '동유대인'과 부유한 '서유대인Westjuden' 사이의 계급 갈등이 숨겨져 있었다. 1980년대 한국 사회의 '계급 모순'과 '민족 모순'을 둘러싼 논쟁처럼 20세기 초반의 유대인 문제는 하나의 차원으로 환원될 수 없는 아주 복잡한 문제였다.

 

 독일인이 되기도 거부하고, 히틀러식 인종주의의 또 다른 극단인 시오니즘도 거부하며 '평화로운 유럽인'이 되고자 했던 유대인들도 있었다. 프로이트와 아들러는 물론 카를 크라우스Karl Kraus, 발터 벤야민Walter Benjamin, 프란츠 카프카Franz Kafka, 슈테판 츠바이크Stefan Zweig와 같은 이들이다. 오늘날까지 영향을 미치는 이들의 깊은 인문학적 사유의 원천은 이들이 끝까지 부둥켜안고 씨름해야 했던 '유대인 열등감'이다. 유대인이 위대한 이유는 노벨상을 많이 받아서가 아니다. 인종적 열등감을 풍요로운 상상력의 원천으로 발전시켰기 때문이다.

 

 열등감에서 벗어나기 위해 '적'을 만드는 것은 가장 게으른 방식이다. 내면을 향한 칼끝을 바깥으로 향하는 것이다. 어떤 사회 이슈든 양극단에 치우친 이들의 이해하기 힘든 공격성과 적개심에는 이같은 '투사Projektion'의 메커니즘이 숨어 있다. 부와 권력을 한 손에 쥐고도 여전히 적을 만들어야 마음이 편해지는 이들이다. 그러다 죄다 한 방에 훅 간다. 열등감은 외부로 투사하여 적을 만드는 방식으로는 결코 극복되지 않는다. '적'은 또 다른 '적'을 부르기 때문이다. 타인들과 공동체를 이뤄 살아가는 한 열등감은 사라지지 않는다. '마음속에 깊이 박힌 대못'처럼 그저 성찰의 계기로 품어야 한다.

 

p110

 

 '좋은 삶'을 사는 방법은 아주 간단하다. 좋아하는 것을 많이 하고, 싫어하는 것을 줄이면 된다. 제발 '좋은 것'과 '비싼 것'을 혼동하지 말자! 자신의 '좋은 것'이 명확지 않으니 '비싼 것'만 찾는 거다.

 

p114

 

 나와 아주 비슷한 생각을 하는 저자의 책을 읽었다. 『불행 피하기 기술』의 저자 스위스의 롤프 도벨리Rof Dobelli다. 원어 제목은 '좋은 삶의 비결DSie Kunst des guten Lebens'이다 지구 반대편에 나와 똑같은 생각을 하는 사람이 있다는 것을 발견하면 참 즐겁다. 저자의 주장은 아주 간단명료하다. '좋은 삶guten Leben'이 어떤 것인지 이야기하기는 힘들어도, '나쁜 삶'이 어떤 것인지는 누구에게나 분명하다는거다. '신이 어떻다'고 말할 수는 없지만, '신이 그렇지는 않다'고는 분명하게 말할 수 있다는 중세 '부정의 신학negative theology'의 방법론처럼 우리도 '나쁜 삶'의 요인들을 하나씩 제거하면 행복해지지 않겠냐는 거다.

 

 '좋은 것'을 추상적으로 정의하고, 각론의 부재에 괴로워하기보다는 '나쁜 것', '불편한 것'을 제거하자는 생각은 독일의 오래된 실용주의 전통이다. 1920년대 '바우하우스'에서는 '형태는 기능을 따른다'는 'FFF Form folgt Funktion '의 디자인 원칙이 강조되었다. 삶을 불편하게 하는 불필요한 장식을 죄다 제거하자는 이야기다. 오스트리아의 건축가 아돌프 로스Adolf Loos는 아예 "장식은 죄악이다"라고 했다. 현대 미니멀리즘의 선구자인 디자이너 디터 람스Deter Rams도 자신이 추구하는 디자인을 한마디로 '좋은 디자인gutes Design'이라고 정의했다. "적지만, 더 좋은 Weniger, aber Besser"이라는 그의 디자인 철학은 오늘날 애플의 모든 스마트 기기 디자인에 적용되었다. 여기서 미니멀리즘이란 무조건 줄이는 게 아니다. '나쁜 것'을 줄이는거다!

 

p130

 개별적 사건과 경험들에 대한 기억은 주체적 관심에 따라 서로 연결되며 의식의 차원으로 올라온다. 인간의 의식 또한 '입자'가 아니라 '파동'이다 '입자'와 같은 개별 사건들을 연결하는 그 행위가 바로 '의미 부여'다 개별 사건 자체는 그리 중요하지 않다. 단순한 '팩트'에 불과한 사건들을 연결하는 그 '의미 부여'가 의식의 본질이다.

 

p139

 

 습관적으로 '나쁜 이야기'만 소셜 미디어로 보내는 이들이 있다. 그들과 '친구'를 맺으면 아주 고통스럽다. 밤새 '나쁜 이야기'만 쌓여 있기 때문이다. 죄다 남 조롱하고 비아냥대는 이야기뿐이다. 희한하게 '사회정의'로 정당화하며 즐거워한다. '나쁜 이야기'에 서로 '좋아요'를 죽어라 눌러댄다. 각자의 소셜 미디어에 쌓이는 '나쁜 이야기'는 기하급수적으로 늘어난다. 모여 앉아도 남 욕하는 이야기가 대부분이다. 도대체 우리는 왜 이러고 사는 걸까?

 

 타인의 관심을 얻기에 '나쁜 이야기'가 훨씬 유리하기 때문이다. 원시시대를 한번 생각해보자. '저기 바나나가 있다'는 정보와 '저기 호랑이가 나타났다'는 정보 중에 내가 지금 살아남는 것과 관련해 어느 이야기가 더 중요할까? 당연히 '저기 호랑이가 있다'는 '나쁜 이야기'다. 바나나는 내일 먹어도 된다. 그러나 호랑이가 나타났다는 이야기를 무시하면 바로 잡아먹힌다. '나쁜 이야기'가 좋은 이야기'보다 생존에 훨씬 더 중욯했다.

 

 우리가 '나쁜 이야기'에 끌리는 이유는 바로 이 원시적 본능이 여전히 작동하기 때문이다. 그러나 이는 잠시만 한눈팔아도 못굼이 날아가던 원시시대 이야기다. 문명화된 사회란 날것의 위험들을 제어할 수 있는 안전장치가 갖춰진 상태를 뜻한다. 그런데도 사방에 '나쁜 이야기'들뿐이다.

 

 '나쁜 이야기'에 끌릴 수밖에 없는 타인의 반응을 통해 자신의 존재를 확인하려는 불안한 인간이 너무 많은 까닭이다. 불안한 이들이 불안을 유포해 혼자만 불안하지 않으려는 아주 웃기는 현상이다.

 

p144

 

 공연히 불안하면 미술관, 박물관을 찾아야 한다. 그곳은 불안을 극복한 인류의 '이야기'로 가득하기 때문이다. '지금 내가 제대로 살고 있는가'하는 느닷없는 질문으로 조급해진다면 음악회를 찾는 게 좋다. 몸으로 느껴지는 음악은 삶의 시간을 여유롭게 만들어준다.

 

p171

 

 지난주에는 독일 공영방송인 체데에프ZDF에서 하는 북한 관련 다큐멘터리를 봤다. 최근 북한을 다녀온 사람들이 직접 찍은 영상을 모아 보여주고, 그들의 느낌을 이야기하는 내용이다. 평양의 그로테스크한 풍경은 예상했던 대로였다. 그러나 독일 내레이터의 마지막 코멘트는 충격이었다. 남과 북 모두 '같은 민족'이라며 통일하겠다고 하는데, 도무지 이해할 수 없다고 했다. 저토록 다른데, 도대체 무슨 근거로 '같은 민족'이냐는 거다. 아차 싶었다.

 

 '민족'은 원래 없었다. 단어 자체가 아예 없었다. '민족'은 메이지 시대에 이와쿠라 사절단 일원으로 구미 각국을 여행한 구메 구니타케久米邦武가 1878년 펴낸 『미구회람실기米歐回覽實記』에 처음 나타난 표현이다. 그 후 독일제국의 국가론이 일본에 소개되면서 '민족'은 '국가Nation'와 '종족Volk'이 결합한 뜻으로 본격 사용되기 시작한다. '국민', '민족', '종족'의 의미론은 이때부터 마구 헷갈리기 시작한 것이다.

 

 '가족 메타포'는 아주 기막혔다. 특히 일본에서 고안된 '민족' 개념과 무척 잘 어울렸다. '민족'에 내재한 '가족 메타포'는 동양에선 아주 쉽게 이해되고 실천되었다. 분단의 한반도에서 '민족=가족' 이데올로기의 파워는 더욱 강력해졌다. 서구가 수백 년 걸린 근대화 과정을 수십 년 만에 해치울 수 있었던 그 엄청난 저력도 '흩어진 가족'과 같은 민족의 '한恨'이었다. 어떻게든 돈 많이 벌어 흩어진 가족이 다시 모여야 했다. 그래서 '반만년의 유구한 역사'를 가진 한민족의 분단은 항상 '이산가족'의 슬픔으로 설명되었다. 그러나 이쯤에서 우리 스스로 한번 확인해봐야 한다.

 

 정말 우리가 분단을 이산가족의 슬픔처럼 느끼고 있느냐는 거다. 통일이 되면 북한 사람들을 내 가족처럼 느낄 수 있느냐는 질문이기도 하다. 독일 통일 현장을 경험한 나로서는 지극히 비판적이다. 심리적 통일까지 이루려면 분단만큼의 시간이 흘러야 한다. 과연 우리는 북한 사람들을 위해 칠팔십 년 넘는 세울을 인내할 수 있을까?

 

 더 구체적으로, 김정은이 나타나면 감격해서 발을 동동 구르며 박수 치고 눈물까지 흘리는 저 북한 사람들을 위해 우리 각자는 그 엄청난 '통일세'를 수십 년 동안 기꺼이 낼 수 있을까? 통일 후, 북한 사람들이 남한 사람들의 오만함에 분노하여 '김정은 시절이 더 좋았다'며 '조선노동당'을 다시 창당하면 도대체 무슨 느낌이 들까? 그 '조선노동당'이 북한 지역에서 몰표를 얻어 대한민국 국회의 한구석을 당당히 차지하는 모습을 '가족처럼' 편안하게 지켜볼 수 있을까?(이는 독일에서 실제로 일어났던 일이다.)

 

 이제 남북한 '단일민족'의 이념과 '통일'이라는 '무의식적 전제'들을 '숭고한 멜랑콜리'로 바라볼 때가 되었다. '민족'이라는 '당연한 젼제'를 해체하면 북핵 문제를 둘러싼 한반도 정세는 아주 달라진다. 우리가 취할 수 있는 행동의 옵션도 확연히 넓어진다.

 

p184

 

 '사회주의적 계몽'은 '자본주의적 욕망'을 결코 이길 수 없다.

 

p195

 

 은퇴하면 바로 죽었던 시절이 있었다. 그래서 아무 생각 없이 은퇴했다. 지금 우리 사회의 모든 기준이 바로 그 시절의 가치에 맞춰져 있다. 삼십여 년을 더 살아야 하는데 우리 모두가 지금 아무 생각 없다. 바로 앞선 세대의 '노욕老慾'을 보면서, 도대체 왜 저럴까 싶었던 것이 '짤리고 보니' 다 이해된다고도 했다. 특히 정치, 경제권에서 '저렇게까지 하고 싶을까' 했던 선배들에게 주어진 그 '기회'가 부럽다고도 했다. 이렇게 오래 살 줄 아무도 몰랐기 때문이다.

 

 오늘날 한국 사회의 첨예한 갈등 배후에는 죄다 '느닷없는 생명 연장'이 숨겨져 있다. 단순한 이념적 갈등이 아니라는 이야기다. 평균 수명 50세도 채 안 되던 지난 세기의 낡은 사회 설명 모데로 한국 사회를 설명할 수는 없다(이건 정말 중요한 포인트다!). 인류가 한 번도 겪어본 적 없는 이 엄청난 '혁명의 시대'를 살아가기 위해서는 '새로운 시작'에 대한 용기가 필요하다. 어떻게 살아야 하는가에 대한 '롤 모델'도 전혀 없다. 각자 '용감하게' 찾아야 한다. '손'으로 하는 일을 새롭게 시작하는 것도 나쁘지 않다.

 

 프로이트의 '콤플렉스'와 더불어 현대인의 삶을 가장 잘 설명하는 개념이 있다면 마르크스의 '소외Entfremdung'다. 자신이 만든 생산물과는 아무 관계없이, 그저 노동의 대가로 받는 임금으로 살아야 하는 자본주의 시스템은 어떤 방식으로든 인간 심리에 영향을 미치게 되어 있다. 노동의 결과가 전혀 확인되지 않는 삶을 마르크스는 '소외된 삶'이라 했다. 정신이 자연에 변화를 가져와 자아실현이 가능해진다는 헤겔의 낭만적 '외화Entäußerung' 개념을 자본주의라는 역사적 맥락에 맞춰 비판한 것이다. 마르크스의 개념들은 대부분 공허한 것이 되어버렸지만, 심리학적으로 그의 '소외론'은 여전히 통찰력 있고 의미 있다.

 

 사무직에서 일했던 사람일수록 손으로 직접 하는 일을 배우는 것이 좋다. 두 번째 인생에는 노동의 결과를 눈으로 직접 판단하고, 손으로 만질 수 있는 구체적인 일을 해야 심리적으로 소외감을 느끼지 않는다는 이야기다. 교수, 기자, 선생과 같이 말과 글로 먹고 산 사람일수록 손으로 직접 하는 일을 해야 한다. 그래야 말년의 성품이 무난해지며 '꼰대'를 면할 수 있다. 아니면 컴컴한 방에서 혼자 인터넷에 악플이나 달며 삼십여 년을 더 살아야 한다. 달리 할 일이 있는가? 그래서 아직 체력 좋은 범재에게는 '용접 일'이 만장 일치로 추천되었다.(진지하게 나눈 이야기다. 우리 모두 대학 사 년 그렇게 대충 다니고 삼십 년 가까이 잘 먹고 잘살았으면 감사해야 한다. 앞으로 삼십여 년을 더 살려면 뭔가를 처음부터 새롭게 배우는 게 당연하다.)

 

p201

 

 대도시에 사는 사람들은 자신들이 얼마나 끔찍한 환경에 놓여 있는지 모른다. 내가 서울에서 운전하며 가장 괴로울 때는 차선을 바꿀 때다. 다들 '차선 바꾸겠다는 신호'를 '빨리 달려오라는 신호'로 받아들인다. 잽싸게 달려들어 차선을 바꿀 여유를 절대 안 준다. 어어, 하다 보면 뒤에서 빵빵거리며 난리 난다. 정신이 혼미해지며 그냥 울고 싶어진다. 주로 남자들이 그렇다. 한국 남자들은 자기 자동차 앞을 양보하면 인생 끝나는 줄 안다. 도대체 왜들 이러는 걸까?

 

 자동차 안이 유일한 자기 공간이라 여기기 때문이다. 집의 안방은 아내 차지가 된 지 오래다. 아이들도 이제 안방을 '엄마 방'이라고 한다. 거실은 TV와 뜬금없이 커다란 소파가 차지하고 있다. 아이들은 각자의 방에 틀어박혀 나오지 않는다. 코를 심하게 골아 같이 잠을 못 자겠다는 아내의 불평에 거실 소파에서 잠을 청한 지 이미 수년째다. 수면 무호흡으로 이러다 죽겠다 싶어 새벽에 잠을 깨면 거실 바닥에 널브러져 있다.

 

 그래서 자동차 안이 그렇게 행복한 거다. 한 평도 채 안 되지만 그 누구도 눈치 볼 필요 없는 나만의 공간이다. 밟는 대로 나가고, 서라면 선다. 살면서 이토록 명확한 '권력의 공간'을 누려본 적 있는가? 그러니 도로에서 누가 내 앞길을 막아서면 그토록 분노하는 거다.

 

p211

 

 더 중요한 자유가 있다. '시선의 자유'다. 이건 한국 사내들에게 매우 절박한 자유다. 평생 '타자의 시선'을 의식하며 살기 때문이다. '타자의 시선을 내면화'하는 것처럼 치명적인 것은 없다. 지켜보는 사람이 없는데도 누군가 지켜본다고 생각하며 평생 두려움 속에 살고 있다.

 

p214

 

 '관찰당하는 것'이 아니라 내 맘대로 '볼 수 있는 자유'가 행복의 핷미이다.

 

p218

 

 '하염없음'은 시간이 정지되고, 유체 이탈처럼 '또 다른 나'가 공중 부양하며 세상을 내려다보는 것 같은 경험이다. 철학적 '자기 성찰'이란 심리학적으로는 '경외감'과 '하염없음'으로 야기되는 '인지적 전환cognitive shift'이다. 도무지 감당할 수 없는 엄청난 대자연 앞에서 내가 갖고 있는 현재의 인지 체계로는 그 어떠한 설명과 해석도 불가능하다. 남은 방법은 오직 한 가지뿐이다. 내 인지 체계를 통째로 바꾸는 일이다. 인간의 모든 미학적 경험은 이 같은 '인지적 전환'과 깊이 관계되어 있다.

 

p221

 

 지금 내 삶이 지루하고 형편없이 느껴진다면, 지금의 내 관점을 기준으로 하는 인지 체계가 그 시효를 다했다는 뜻이다. 내 삶에 어떤 감탄도 없이, 그저 한탄만 나온다면 내 관점을 아주 긴급하게 상대화시킬 때가 되었다는 이야기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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