호모 사피엔스의 발생부터 최근의 과학혁명에 이르기까지 인류의 역사의 주요한 분기점들의 주요한 내용을 통사적으로 다루고 있다. 

 그 뼈대는 새로울 것이 없어 보이지만, 실제로 다루는 내용은 상당히 새로운 시각으로 가득하다.

 읽는 즐거움이 있는 책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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p25

 사람들이 흔히 범하는 오류 중 하나는 이들 종을 단일 계보라고 생각하는 것이다. 예컨대 에르가스터가 에렉투스를 낳고 에렉투스가 네안데르탈을 낳고 네안데르탈인이 진화해 오리 종이 되었다는 식이다. 이런 직선 모델은 오해를 일으킨다. 어느 시기를 보든 당시 지구에 살고 있던 인류는 한 종밖에 없었으며, 모든 오래된 종들은 우리의 오래된 선조들이라는 오해 말이다. 

 

 사실은 이렇다 2백만 년 전부터 약 1만 년 전까지 지구에는 다양한 인간 종이 살았다. 왜 안 그랬겠는가? 오늘날에도 여우, 곰, 돼지 등 수많은 종이 동시대를 살고 있지 않은가. 몇만 년 전의 지구에는 적어도 여섯 종의 인간이 살고 있었다. 여기에서 이상한 점은 옛날에 여러 종이 살았다는 사실이 아니라 오히려 지금 딱 한 종만 있다는 사실이다. 더구나 이 사실은 우리 종의 범죄를 암시하는 것일지 모른다. 곧 살펴보겠지만, 우리 사피엔스 종에게는 사촌들에 관한 기억을 억압할 이유가 있다.

 

(개인생각)

인간이 무리 생활을 시작하게 된 결정적 동기는 외부의 위협(공룡, 사자 등과 같은 인간보다 힘이 세고 인간들을 사냥하는 짐승과 같은)으로부터 좀 더 살아남기 용이하게 하기 위해서였을 것이다.(마치 현재의 미어캣처럼)

(주요 호모 속 연표) 인류와 침팬지의 공통 조상이 6백만 년 전, 250만년 전 아프리카에서 호모 속이 진화하고 석기를 사용. 2백만 년 전 인류가 아프리카에서 유라시아로 퍼지고, 다양한 인간 종의 진화, 50만 년 전 유럽과 중동에서 네안데르탈인 진화, 30만년 전 불의 사용, 20만년 전 동아프리카에서 호모 사피엔스 진화, 7만년 전 인지혁명, 언어를 사용하기 시작, 역사의 시작.

 

p32

 일부 학자는 익혀 먹는 화식火食의 등장, 인간의 창자가 짧아진 것, 뇌가 커진 것 사이에 직접적인 연관이 있다고 생각한다. 기다란 창자와 커다란 뇌를 함께 유지하기는 어렵다. 둘 다 에너지를 무척 많이 소모하기 때문이다. 화식은 창자를 짧게 만들어서 에너지 소비를 줄일 수 있게 해주었고, 의도치 않은 이런 변화 덕분에 네안데르탈인과 사피엔스는 커다란 뇌를 가질 수 있었다. 

 

p36

 

 이 논쟁에는 많은 것이 걸려 있다. 진화의 관점에서 볼 때 7만 년 이란 상대적으로 짧은 기간이다. 만일 '교체이론'이 맞다면, 현재 살아 있는 모든 인간은 대체로 같은 유전자들을 지니고 있으며 이들 사이의 유전적 차이는 무시해도 좋은 정도다. 하지만 '교배이론''이 맞다면, 아프리카인, 유럽인, 아시아인 사이에는 수십만 년의 연원을 둔 유전적 차이가 있을 수도 있다. 이 문제는 정치적 화약고로서, 폭발력을 지닌 인종이론의 재료가 될 수 있다.

 최근 몇십 년은 교체이론이 이 분야의 상식이었다. 이에 대한 고고학적 증거가 상대적으로 더 확고하며 정치적으로도 더 올바른 것이었다(현대 인구집단들에게 유의미한 유전적 다양성이 있다고 말하면 인종주의라는 판도라의 상자가 열릴 수 있다. 과학자들은 이를 원하지 않았다). 하지만 이런 상황은 2010년에 끝이 났다. 4년간의 연구 끝에 네안데르탈인의 게놈 지도가 발표된 것이다. 유전학자들은 화석에서 충분한 양의 온전한 네안데르탈인 DNA를 얻어서 그것과 현대인의 DNA를 폭넓게 대조해볼 수 있었다.

 그 결과는 과학자 사회를 경악하게 만들었다. 오늘날 중동과 유럽에 거주하는 인구집단이 지닌 인간 고유의 DNA 중 1~4퍼센트가 네안데르탈인 DNA로 밝혀졌던 것이다. 이것은 비록 많은 양은 아니지만 중대한 의미가 있다. 그로부터 몇 개월 뒤 두 번째 충격적인 사건이 있었다. 과학자들이 2008년 시베리아 알타이 산맥의 데니소바 동굴에서 발견한 손가락뼈에서 추출한 DNA로 유전자 지도를 만들었는데, 그 결과 현대 멜라네시아인과 호주 원주민의 인간 고유 DNA 중 최대 6퍼센트가 데니소바인의 DNA인 것으로 나타났다.

 

 이런 결과가 유효하다면 - 이런 결론을 강화하거나 수정할 가능성이 있는 추가 연구과 진행 중이라는 사실을 염두에 두는 것이 중요하다 - 최소한 교배이론에 뭔가 근거가 있다는 뜻이 된다. 하지만 그렇다고 교체이론이 완전히 들린 것은 아니다. 네안데르탈인과 데니소바인은 오늘날 우리의 게놈에 아주 작은 양만 기여했기 때문에, 사피엔스와 다른 인간 종의 합병을 이야기하기는 불가능하다. 이들 간의 차이가 번식 가능한 성관계를 완전히 차단할 정도로 크지는 않았다고 해도, 그런 접촉을 매우 드물게 만들 정도이기는 했다.

 그러면 우리는 사피엔스, 네안데르탈인, 데니소바인의 생물학적 연관성을 어떻게 이해해야 할까? 이들이 말과 당나귀처럼 완전히 다른 종이 아닌 것은 분명하다. 하지만 불도그와 스패니얼처럼 동일 종의 각기 다른 집단에 불과한 것은 아니다. 생물학적 실체는 흑과 백이 아니다. 회색 지대들도 중요하다. 예컨대 말과 당나귀처럼 하나의 공통 조상에서 진화한 두 종이라면 다들 어느 시기에는 불도그와 스패니얼처럼 같은 종의 두 집단이었다. 그러다가 두 집단이 이미 확연히 달라진 시점, 그러면서도 드물게 서로 성관계를 해서 번식 가능한 후손을 낳을 수 있는 시점이 있었을 것이다. 그후 또 다른 돌연변이가 일어나서 최후의 연결선은 끊어졌고, 집단들은 각기 다른 진화적 경로를 밟게 되었다.

 

 사피엔스와 네안데르탈인, 데니소바인은 약 5만 년 전 이런 경계선에 섰던 것 같다. 그들은 완전히 다른 종은 아니지만 대체로 별개의 종이었다. 다음 장에서 살펴보듯 사피엔스와 네안데르탈인, 데니소바인은 유전부호나 신체 특징만 달랐던 것이 아니라 인지능력, 사회적 능력에서도 차이가 났다. 하지만 사피엔스와 네안데르탈인이 번식 가능한 후손을 낳는 일이 드물게나마 여전히 가능했던 것으로 보인다. 따라서 이들 집단이 합병한 것은 아니고 일부 운 좋은 네안데르탈인의 유전자가 사피엔스 특급에 편승한 것이었다. 우리 사피엔스가 과거 언젠가 다른 종의 동물과 성관게를 하고 아이를 낳을 수 있었다는 생각은 심란하다. 그러나 한편 짜릿하기도 하다.

 네안데르탈인과 데니소바인이 사피엔스에 합병된 것이 아니라면 이들이 사라진 이유는 무엇일까? 하나의 가능성은 사피엔스가 이들을 멸종으로 이끌었다는 것이다. 상상해보자, 사피엔스의 한 무리가 발칸 반도의 어느 계곡에 도착했는데, 네안데르탈인이 이곳에서 수십만 년 전부터 살고 있었다. 새로 도착한 사피엔스들은 사슴을 사냥하고 견과류와 장과류를 채취하기 시작했는데, 이것은 네안데르탈인의 주식이기도 했다.

 사피엔스는 기술과 사회적 기능이 우수한 덕분에 사냥과 채취에 더 능숙했다. 이들은 번식하고 퍼져나갔다. 이들보다 재주가 떨어지는 네안데르탈인은 먹고 살기가 점점 힘들어졌다. 집단의 크기는 줄어들과 서서히 모두 죽어갔다. 이웃의 사피엔스 집단에 합류한 한두 명의 예외를 제외하면 말이다.

 

 또 다른 가능서도 있다. 자원을 둘러싼 경쟁이 폭력과 대량학살을 유발했다는 것이다. 관용은 사피엔스의 특징이 아니다. 현대의 경우를 보아도 사피엔스 집단은 피부색이나 언어, 종교의 작은 차이만으로도 곧잘 다른 집단을 몰살하지 않는가.

 

 원시의 사피엔스라고 해서 자신들과 전혀 다른 인간 종에게 이보다 더 관용적이었을까? 사피엔스가 네안데르탈인과 마주친 결과는 틀림없이 역사상 최초이자 가장 심각한 인종청소였을 것이다.

==> 최근의 해석은 아프리카에서 발원한 사피엔스가 10만 년 전 최초로 유럽대륙으로 진출을 하려다가 이미 자리를 잡고 있는 월등한 신체적능력을 가진 네안데르탈인에 의해 좌절된다. 3만 년 후, 인지 혁명을 통해 언어를 습득하고 집단의 전투전략을 발전시킨 사피엔스가 다시 유럽대륙 진출을 도모하고 이때, 네안데르탈인 등 다른 호모 속을 제거하면서 다른 대륙으로의 진출을 가속화시킨다라는 연구 결과가 있다.

 

p41

 사피엔스의 성공비결은 무엇이었을까? 우리는 어떻게 생태적으로 전혀 다른 오지의 서식지에 그처럼 빠르게 정착할 수 있었을까? 우리는 어떤 방법으로 다른 인간 종들을 망각 속으로 밀어넣었을까? 튼튼하고 머리가 좋으며 추위에 잘 견뎠던 네안데르탈인은 어째서 우리의 맹공격을 버텨내지 못했을까? 논쟁은 뜨겁게 계속되고 있다. 그리고 가장 그럴싸한 해답은 바로 이런 논쟁을 가능하게 하는 것, 즉 언어다. 호모 사피엔스가 세상을 정복한 것은 다른 무엇보다도 우리에게만 있는 고유한 언어 덕분이었다.

 

p46

 인간의 언어가 진화한 것은 소문을 이야기하고 수다를 떨기 위해서라는 것이다. 이 이론에 따르면, 호모 사피엔스는 무엇보다 사회적 동물이다. 사회적 협력은 우리의 생존과 번식에 핵심적 역할을 한다. 개별 남성이나 여성이 사자와 들소의 위치를 아는 것만으로는 충분치 않다. 그보다는 무리 내의 누가 누구를 미워하는지, 누가 누구와 잠자리를 같이하는지, 누가 정직하고 누가 속이는지를 아는 것이 훨씬 더 중요하다.

 

 40~50명 정도의 사람들 사이에서 수시로 변해가는 관계를 저장하고 추적하는 데 필요한 정보의 양은 어마어마하다(50명으로 구성된 무리에는 1,225개의 일대일 관계가 있으며 이보다 복잡한 사회적 조합이 무수히 많이 존재한다). 모든 유인원은 이런 사회적 정보에 예리한 관심을 나타내지만, 이들에게 효율적으로 소문을 공유할 수단이 부족하다. 네안데르탈인과 원시 호모 사피엔스 역시 소문을 공유하는 데 어려움을 겪었을 것이다.

 뒷담화는 악의적인 능력이지만, 많은 숫자가 모여 협동을 하려면 사실상 반드시 필요하다. 현대 샆피엔스가 약 7만 년 전 획득한 능력은 이들로 하여금 몇 시간이고 계속해서 수다를 떨 수 있게 해주었다. 누가 신뢰할 만한 사람인지에 대한 믿을 만한 정보가 있으면 작은 무리는 더 큰 무리로 확대될 수 있다. 이는 사피엔스가 더욱 긴밀하고 복잡한 협력 관계를 발달시킬 수 있다는 뜻이기도 하다.

 뒷담화이론은 농담처럼 들릴지 모르지만, 이를 뒷받침하는 연구 결과가 무수히 많다. 심지어 오늘날에도 의사소통의 대다수가 남 얘기다. 이메일이든 전화든 신문 칼럼이든 마찬가지다. 이것은 매우 자연스러운 현상이다. 우리의 언어가 이런 목적으로 진화한 것처럼 보일 지경이다.

 

p48

 우리 언어의 진정한 특이성은 사람이나 사자에 대한 정보를 전달하는 능력에 있는 것이 아니다. 그보다는 전혀 존재하지 않는 것에 대한 정보를 전달하는 능력에 있다. 지금까지 우리가 아는 한, 직접 보거나 만지거나 냄새 맡지 못한 것에 대해 마음껏 이야기할 수 있는 존재는 사피엔스뿐이다.

 전설, 신화, 신, 종교는 인지혁명과 함께 처음 등장했다. 이전의 많은 동물과 인간 종이 "조심해! 사자야!"라고 말할 수 있었다면, 인지혁명 덕분에 호모 사피엔스는 이렇게 말할 수 있게 되었다. "사자는 우리 종족의 수호령이다." 허구를 말할 수 있는 능력이야말로 사피엔스가 사용하는 언어의 가장 독특한 측면이다.

 오직 호모 사피엔스만이 실제로 존재하지 않는 것에 대해 말할 수 있고, 아침을 먹기도 전에 불가능한 일을 여섯 가지나 믿어버릴 수 있다는 데는 누구나 쉽게 동의할 것이다. 원숭이를 설득하여 지금 우리에게 바나나 한 개를 준다면 죽은 뒤 원숭이 천국에서 무한히 많은 바나나를 갖게 될 거라고 믿게끔 만드는 일은 불가능하다.

 

p60

 인지혁명 이후, 사피엔스는 이중의 실재 속에서 살게 되었다. 한쪽에는 강, 나무, 사자라는 객관적 실재가 있다. 다른 한쪽에는 신, 국가, 법인이라는 가상의 실재가 존재한다. 시간이 흐르면서 가상의 실재는 점점 더 강력해졌고, 오늘날에 이르러서는 강과 나무와 사자의 생존이 미국이나 구글 같은 가상의 실재들의 자비에 좌우될 지경이다.

 

p68

 인지혁명 이후 생물학과 역사의 관계를 요약하면 다음과 같다.

 

1. 생물학은 호모 사피엔스의 행동과 능력의 기본 한계를 결정한다. 모든 역사는 이런 생물학적 영역의 구속 내에서 일어난다.

2. 하지만 이 영역은 극도로 넓기 때문에, 사피엔스는 엄청나게 다양한 종류의 게임을 할 수 있다. 사피엔스는 픽션을 창조하는 능력 덕분에 점점 더 복잡한 게임을 만들었고, 이 게임은 세대를 거듭하면서 더더욱 발전하고 정교해진다.

3. 결과적으로, 사피엔스의 행동을 이해하려면 우리는 이들의 행동이 역사적으로 진화해온 경로를 서술해야 한다. 우리가 생물학적 속박만을 이야기한다면, 그것은 월드컵 경기를 중계하면서 선수들이 무엇을 하고 있는지를 설명하기보다는 운동장의 상태를 자세히 설명하는 라디오 아나운서와 다를 바 없다. 

 

 우리 석기시대 조상들은 역사의 무대에서 어떤 게임을 했을까? 우리가 아는 한, 3만 년 전쯤 슈타델의 사자-남자를 조각한 사람들은 오늘날 우리와 동일한 육체적, 감정적, 지적 능력을 가지고 있었다. 그들은 아침에 일어나면 무엇을 했을까? 아침으로는 무얼 먹었을까? 점심으로는? 그들의 사회는 어떤 모습이었을까? 일부일처제를 맺고 핵가족을 유지했을까? 전쟁은 치렀을까?

 

p81

 가끔은 자기 세력권을 벗어나 새로운 땅을 헤매는 무리들이 있었다. 원인은 자연재해, 폭력적 분쟁, 인구 증가에 의한 압박, 카리스마 있는 지도자의 결단 등이었다. 이런 방랑은 인간이 외부 세계로 팽창한 결정적인 요인이었다. 수렵채집인 한 무리가 40년마다 한 번씩 둘로 나뉘며, 갈라져 나온 집단이 원래 있던 곳보다 1백 킬로미터 동쪽에 있는 새로운 영토로 이주한다고 가정하자. 그러면 동부 아프리카에서 중국까지 1만 년이면 갈 수 있었을 것이다.

 

p85

 모든 시기 대부분의 장소에서 수렵채집은 가장 이상적인 영양소를 제공했다. 놀라운 일이 아니다. 인간은 이런 식단을 수십만 년 동안 먹어왔고, 신체 역시 여기에 잘 적응했다. 고대 수렵채집인은 후손인 농부들보다 굶어 죽거나 영양실조에 걸리는 일이 적었으며, 화석 뼈에 나타난 증거가 시사하는 바에 따르면 키가 더 크고 신체도 건강했을 가능성이 많다. 다만 평균 기대수명은 30~40년에 불과했다. 그러나 그것은 주로 어린이 사망률이 높은 탓이었다. 출생 1년 이내의 영아 사망률이 가장 높았으며, 이 시기를 지난 아이는 60세까지 살 가능성이 높았고 일부는 80세까지 살았다. 현대 수렵 채집인의 경우 45세인 여성은 향후 20년 더 살 것으로 기대되며 구성원의 5~8퍼센트는 60세 이상이다.

 

 수렵채집인은 굶어 죽거나 영양실조에 걸리지 않았다. 이들의 성공비결은 다양한 식단에 있었다. 농부는 매우 제한된 종류의 식품을 먹으며 불균형인 식사를 한다. 특히 현대 이전에 농업인구를 먹여 살린 칼로리의 대부분은 밀이나 감자, 쌀 등 단일작물에서 왔다. 여기에는 일부 비타민, 미네랄을 비롯해 인간이 필요로 하는 여타 영양소가 부족하다. 중국 전통사회의 전형적 농부는 아침, 점심, 저녁에 쌀밥을 먹었다. 운이 좋으면 다음 날도 그렇게 먹을 수 있었다. 이에 비해 고대의 수렵채집인은 수십 가지의 다양한 식품을 규칙적으로 먹었다. 농부의 조상인 수렵채집인은 아침에 각종 베리와 버섯, 점심에 과일 및 달팽이와 거북, 저녁에는 토끼 스테이크에 야생 양파를 곁들여 먹었을 것이다. 다음 날에는 전혀 다른 음식을 먹었을지 모른다. 이처럼 다양한 식품은 고대 수렵채집인이 필요로 하는 영양소를 확실히 섭취하게 해주었다. 

 게다가 단 한 가지 식량에만 의존하지 않았기 때문에 해당 식량의 공급이 끊어져도 문제가 덜했다. 농경사회는 가뭄이나 화재, 지진 때문에 쌀이나 감자 농사를 망치면 기근에 휩싸인다. 수렵채집 사회도 자연재해를 당하고 결핍과 굶주림의 시기를 겪었지만 대체로 이런 재앙을 좀 더 쉽게 극복할 수 있었다. 주식이 되는 일부 먹을거리를 구하지 못하면 다른 것을 사냥하거나 채집할 수 있었고, 영향을 덜 받은 다른 지역으로 이동할 수도 있었다.

 고대 수렵채집인은 전염병의 영향도 덜 받았다. 농경 및 산업사회를 휩쓴 대부분의 전염병(천연두, 홍역, 결핵)은 가축이 된 동물에 기원을 두고 있으며, 이것이 사람에게 전파된 것은 농업혁명 이후부터다. 고대 수렵채집인이 기르는 가축은 개밖에 없었으므로 그들에게는 이런 괴로움이 없었다. 게다가 농업 및 산업 사회 사람들은 인구가 밀집한 비위생적인 거주지에 영구적으로 살았는데, 이는 질병이 퍼지기 이상적인 온상이었다. 수렵채집인들은 떠돌며 생활했는데, 무리도 소규모여서 전염병이 널리 퍼질 수 없었다.

 

 건강에 유익한 음식을 다양하게 먹고, 주당 일하는 시간도 상대적으로 짤브며, 전염병도 드물었으니, 이를 두고 많은 전문가는 농경 이전 수렵채집 사회를 '최초의 풍요사회'라고 불렀다. 하지만 그렇다고 고대인의 삶을 이상적인 것으로 그리면 실수일 수도 있다. 이들이 농업 및 산업 사회 사람 대다수보다 더 나은 삶을 영위하기는 했지만, 그럼에도 삶은 거칠고 힘든 것이었다. 고난과 결핍의 시기가 종종 닥쳤고, 어린이 사망률이 높았으며, 오늘날 같으면 사소했을 사고가 쉽게 사망선고로 이어질 수 있었다. 아마도 대부분의 사람들은 떠돌이 무리 내에서 두터운 교분을 향유했겠지만, 무리 내에서 적개심이나 비웃을 받는 사람들은 끔찍한 고통을 겪었을 것이다.

 

p111

 보온복과 사냥기술이 개선되자 사피엔스는 얼어붙은 지역에 더욱 깊숙이 들어가는 모험을 감행했다. 그리고 이들이 북쪽으로 이동함에 따라 의복, 사냥기술을 비롯한 생존기술은 계속해서 발전했다.

 그런데 왜 이런 수고를 무릅썼을까? 도대체 왜 스스로 시베리아로 유배를 갔을까? 일부 무리는 전쟁, 인구 증가의 압박, 자연재해 때문에 북쪽으로 내몰렸을 수도 있다. 그런가 하면 예컨대 동물성 단백질 같은 긍정적인 이유로 북쪽으로 이끌린 집단도 있었을지 모른다. 북극 땅은 순록이나 매머드처럼 군침이 도는 대형동물이 풍부했다. 매머드는 한 마리만 잡아도 엄청난 양의 고기(기온이 낮기 때문에 얼렸다 나중에 먹을 수도 있었다)와 맛있는 지방, 따뜻한 모피, 귀중한 상아를 제공하였다. 숭기르의 유적이 증언하듯, 매머드 사냥꾼들은 북쪽 동토에서 단지 살아남은 것이 아니라 번성했다. 시간이 흐르면서 이들 무리는 매머드와 마스토돈, 코뿔소, 순록을 쫓아 더 멀리 퍼져나갔다.

 

 기원전 14,000년쯤 이 중 일부가 사냥감을 쫓아 시베리아 북동부에서 알래스카까지 가게 되었다. 물론 이들은 자신들이 신세계를 발견했다는 사실을 몰랐다. 매머드에게나 인류에게나 알래스카는 시베리아의 연장에 지나지 않았다. 처음에는 빙하 때문에 알래스카에서 아메리카의 다른 지역으로 가는 길이 막혀 있었다. 더 남쪽을 탐사할 수 있었던 것은 소수의 고립된 개척자들뿐이었을 것이다. 그러던 중 기원전 12,000년쯤 지구 온난화로 얼음이 녹고 좀 더 쉬운 통로가 열렸다. 새로운 통로를 이용해서 인류는 떼를 지어 남쪽으로 이동했고, 대륙 전체로 퍼져나갔다. 원래는 대형동물을 사냥하는 데 적응했던 기업터 터였지만 이들은 곧 극히 다양한 기후와 생태계에 적응했다.

 

 시베리아인의 후예들은 미국 동부의 울창한 숲, 미시시피 삼각주의 늪지대, 멕시코의 사막, 중미의 찌는 듯한 밀림에 정착했다. 아마존 강 유역의 세계에 둥지를 틀었는가 하면 안데스 산맥의 골짜기나 아르헨티나의 대초원에 뿌리를 내리기도 했다. 이 모든 일이 단 1천 년이나 2천 년 만에 일어났다. 기원전 10,000년이 되자 인류는 미 대륙 최남단의 티에라델푸에고 제도에까지 정착했다.

 인류의 이런 진격전은 호모 사피엔스의 뛰어난 창의력과 적응력을 증언한다. 다른 동물은 이토록 극단적으로 다양한 서식지들에 사실상 똑같은 유전자를 가진 상태로 그토록 빨리 이주한 예가 전여 없다.

 

p121

 

 인류가 농업으로 이행한 것은 기원전 9500~8500년경 터키 남부, 서부 이란, 에게 해 동부 지방에서였다. 시작은 느렸고 지리적으로 제한된 지역만을 대상으로 했다. 밀을 재배하고 염소를 가축화한 것은 기원전 9000년경이었다. 완두콩과 렌즈콩은 기원전 8000년경, 올리브나무는 기원전 5000년, 포도는 기원전 3500년 재배가 시작되었고, 말은 기원전 4000년부터 기르기 시작했다. 낙타와 캐슈넛 같은 일부 동식물은 더 나중에 가축과 재배작물이 되었다. 하지만 기원전 3500년이 되자 가축화와 재배작물화의 주된 파도는 지나갔다. 온갖 기술이 발달한 오늘날에도 인류를 먹여 살리는 칼로리의 90퍼센트 이상이 밀, 쌀, 옥수수, 감자, 수수, 보리처럼 우리 선조들이 기원전 9500년에서 3500년 사이에 작물화했던 한줌의 식물들에서 온다. 지난 2천 년 동안 주목할 만한 식물을 작물화하거나 동물을 가축화한 사례가 없었다. 오늘날 우리의 마음이 수렵채집인 시대의 것이라면, 우리의 부엌은 고대 농부의 그것과 다르지 않다.

 

 한때 학자들은 중동의 어느 특정 지점에서 농업이 시작되어 사방으로 퍼져나갔다고 믿었다. 그러나 오늘날 학자들은 중동 농부들이 자신들의 혁명을 수출한 게 아니라 농업은 세계 여러 지역에서 완전히 독자적으로 생겨났다는 생각에 합의하고 있다. 중미 사람들은 중동에서 밀과 완두콩을 재배한다는 사실을 전혀 모른 채 옥수수와 콩을 작물화했다. 남미 사람들은 멕시코나 지중해 지방에서 어떤 일이 일어나는지 모르는 채 감자를 재배하고 라마를 키우는 법을 익혔다. 중국의 초기 혁명가들은 쌀과 수수를 작물화하고 돼지를 가축화했다. 북미의 첫 정원사는 먹을 수 있는 호리병박을 찾아 땅속을 샅샅이 뒤지는 데 진력이 나서 호박을 재배하기로 결심하였다. 뉴기니 사람들은 사탕수수와 바나나를 길렀고, 그동안 서부 아프리카 최초의 농부들은 아프리카 수수, 아프리카 쌀, 수수와 밀을 자신들의 필요에 맞도록 작물화했다. 이들 지역에서 농업은 널리 퍼져나갔다. 기원후 1세기쯤이 되자 세계 대부분의 지역 사람들 대다수가 농민이 되었다.

 

 중동, 중국, 중미에서 일어난 농업혁명이 호주, 알래스카, 남아프리카에서 일어나지 않은 이유는 무엇일까? 이유는 단순하다. 대부분의 식물과 동물 종은 작물화나 가축화에 맞지 않기 때문이다. 사피엔스는 맛 좋은 송로버섯을 캐거나 털이 부숭부숭한 매머드를 사냥할 수는 있었지만, 이를 재배하거나 가축화한다는 것은 불가능한 일이었다. 버섯의 곰팡이는 형체가 너무 불분명했고 야수는 너무 사나웠다. 우리 조상들이 잡거나 채취했던 수천 종의 동물과 식물 중에 농업과 목축업에 맞는 후보는 몇 되지 않았다. 이들 종은 특정 장소에 살았고 그 장소들이 바로 농업혁명이 일어난 지역이다.

 

p124

 

 진화는 점점 더 지능이 뛰어난 사람들을 만들어냈고, 결국 사람들은 너무나 똑똑해져서 자연의 비밀을 파악하고 양을 길들이며 밀을 재배할 수 있게 되었으며, 그게 가능해지자마자 지겹고 위험하고 종종 스파르타처럼 가혹했던 수렵채집인의 삶을 기꺼이 포기하고 농부의 즐겁고 만족스러운 삶을 즐기기 위해 정착했다는 것이다.

 이 이야기는 환상이다. 시간이 흘러 사람들이 더욱 총명해졌다는 증거는 없다. 수렵채집인들은 농업혁명 훨씬 이전부터 자연의 비밀을 알고 있었다. 사냥하는 동물과 채집하는 식물을 잘 알고 있어야 생존할 수 있었기 때문이다. 농업혁명은 안락한 새 시대를 열지 못했다. 그러기는커녕, 농부들은 대체로 수렵채집인들보다 더욱 힘들고 불만스럽게 살았다. 수렵채집인들은 그보다 더 활기차고 다양한 방식으로 시간을 보냈고 기아와 질병의 위험이 적었다. 농업혁명 덕분에 인류가 사용할 수 있는 식량의 총량이 확대된 것은 분명한 사실이지만, 여분의 식량이 곧 더 나은 식사나 더 많은 여유시간을 의미하지는 않았다. 오히려 인구폭발과 방자한 엘리트를 낳았다. 평균적인 농부는 평균적인 수렵채집인보다 더 열심히 일했으며 그 대가로 더 열악한 식사를 했다. 농업혁명은 역사상 최대의 사기였다.

 

 그것은 누구의 책임이었을까? 왕이나 사제, 상인은 아니었다. 범인은 한 줌의 식물 종, 밀과 쌀과 감자였다. 이들 식물이 호모 사피엔스를 길들였지, 호모 사피엔스가 이들을 길들인 게 아니었다.

 잠시 농업혁명을 밀의 관점에서 생각해보자. 1만 년 전 밀은 수 많은 잡초 중 하나일 뿐으로서 중동의 일부 지역에만 살고 있었다. 그러다가 갑자기, 불과 몇천 년 지나지 않아 세계 모든 곳에서 자라게 되었다. 생존과 번식이라는 진화의 기본적 기준에 따르면 밀은 지구 역사상 가장 성공한 식물이 되었다. 북미의 대초원 지역 같은 곳에는 1만 년 전 밀이 한 포기도 없었지만 지금은 수백 킬로미터를 걷고 또 걸어도 밀 이외의 다른 식물을 볼 수가 없다. 세계적으로 밀이 경작되는 지역은 225만 제곱킬로미터쯤 되는데 이는 브리튼 섬(잉글랜드, 스코틀랜드, 웨일스 포함)의 열 배에 이른다,

 어떻게 이 잡초는 그러그런 식물에서 출발해 어디서나 자라는 존재가 되었을까? 밀은 호모 사피엔스를 자신의 이익에 맞게 조작함으로써 그렇게 해낼 수 있었다. 약 1만 년 전까지 이 유인원은 사냥과 채집을 하면서 상당히 편안하게 살고 있었으나, 이후 밀을 재배하는 데 점점 더 많은 시간을 투자하기 시작했다. 2천 년도 채 지나지 않아 전 세계 많은 지역의 인간은 통이 틀 때부터 해가 질 때까지 밀을 돌보는 것 외에는 거의 아무 일도 하지 않게 되었다.

 밀을 키우는 일은 쉽지 않았다. 많은 노동력을 요구하기 때문이다. 밀은 바위와 자갈을 좋아하지 않기 때문에, 사피엔스는 밭을 고르느라 등골이 휘었다. 밀은 다른 식물과 공간, 물, 영양분을 나누는 것을 좋아하지 않기 때문에, 인간은 타는 듯한 태양 아래 온종일 잡초를 뽑는 노동을 했다. 밀은 병이 들기 때문에, 사피엔스는 해충과 마름병을 조심해야 했다. 밀은 자신을 즐겨 먹는 토끼와 메뚜기 떼에 대한 방어책이 없었기 때문에, 농부들이 이를 막아야 했다. 밀은 목이 말랐기 때문에, 인간들은 샘과 개울에서 물을 끌어다 댔다. 밀은 배가 고팠기 때문에, 사피엔스는 밀이 자라는 땅에 영양을 공급하기 위해 동물의 변을 모아야 했다.

 사피엔스의 신체는 이런 과업에 맞게 진화하지 않았다. 사과나무에 기어오르고 가젤을 뛰어서 뒤쫓는 데 적응했지, 바위를 제거하고 물이 든 양동이를 운반하는 데 적합한 몸이 아니었다. 인간의 척추와 무릎, 목과 발바닥의 장심이 대가를 치렀다. 고대 유골을 조사한 바에 따르면, 농업으로 이행하면서 디스크 탈출증 관절염, 탈장 등 수많은 병이 생겨났다. 새로운 농업노동은 너무나 많은 시간을 필요로 했다. 사람들은 밀밭 옆에 영구히 정착해야만 했다. 이로써 이들의 삶은 영구히 바뀌었다. 우리가 밀을 길들인 것이 아니다. 밀이 우리를 길들였다. '길들이다, 가축화하다'라는 뜻의 단어 'domesticate'는 '집'이라는 뜻의 라틴어 'domus'가 어원이다. 집에서 사는 존재는 누구인가? 밀이 아니다. 호모 사피엔스다.

 

 밀은 어떻게 호모 사피엔스로 하여금 어느 정도 만족할 만한 삶을 더 비참한 생활과 교환하도록 설득했을까? 무엇을 보상으로 제시했을까? 더 나은 식사를 제공한 것은 아니었다. 명심하자, 인류는 아주 다양한 음식을 먹고사는 잡식성 유인원이다. 농업혁명 이전 식사에서 곡물이 차지하는 비중은 아주 적었다. 곡률르 중심으로 하는 식단은 미네랄과 비타민이 부족하고 소화시키기 어려우며 치주조직에 해롭다. 밀은 사람들에게 경제적 안정을 제공하지도 않았다. 농부의 삶은 수렵채집인의 삶보다 불안정했다. 수렵채집인은 수십 종의 먹을거리에 의지해 생존했기 때문에 설령 저장해둔 식량이 없더라도 어려운 시절을 몇 해라도 견뎌나갈 수 있었다. 특정한 종을 손에 넣기가 힘들어지면 다른 종들을 사냥하고 채집할 수 있었으니까.

 농경사회는 극히 최근까지도 대부분의 칼로리를 극소수의 작물을 통해 섭취했다. 오랜 세월 이들 사회는 밀이나 감자, 쌀 등 단 하나의 주식에 의존했다. 비가 내리지 않거나, 메뚜기 떼가 덮치거나, 곰팡이가 주식인 작물을 감염시키면, 농부들은 수천 수백만 명씩 죽어나갔다. 밀은 인간 사이의 폭력에 대한 안정망을 제공하지도 않았다. 초기 농부들은 수렵채집인 조상보다 더하진 않았을지언정 그 못지않게 폭력적이었다. 농부들은 재산이 더 많았으며 경작할 토지를 필요로 했다. 이웃의 습격으로 목초지를 잃는 것은 생사가 걸린 문제였기에, 타협의 여지가 매우 적었다. 수렵채집인 무리는 강력한 라이벌에게 몰리면 보통 다른 장소로 옮길 수 있었다. 힘들고 위험하지만 실행할 수는 있었다.

 농촌 마을이 강력한 적의 위협을 당할 경우, 후퇴는 곧 목초지와 집, 곡물창고를 포기해야 한다는 뜻이었다. 많은 경우 이런 피난민들은 굶어 죽었다. 그러므로 농부들은 그 자리에서 버티면서 최후까지 싸우는 경향이 있었다. 많은 인류학적, 고고학적 연구는 부락이나 종족을 넘어서는 정치적 틀이 없는 단순 농경사회에서 사망의 15퍼센트가 인간의 폭력 탓임을 시사한다. 남성의 경우에는 폭력적 사망이 25퍼센트에 이른다. 오늘날 뉴기니를 보면, 농경 부족사회의 다니족에서 남성 사망의 30퍼센트가 폭력 때문이고, 엥가족에서는 35퍼센트가 폭력 때문이다. 에콰도르의 경우 와오란족 성인의 약 50퍼센트가 다른 인간의 폭력으로 죽는다.

 

 시간이 흐르고 도시, 왕국, 국가 등 보다 큰 사회적 틀이 발전하면서 인간의 폭력은 통제받게 되었다. 하지만 이렇게 크고 효율적인 정치체제를 구축하는 데는 수천 년이 걸렸다. 최초의 농부들은 마을에 사는 생활양식 덕분에 야생동물이나 비, 추위로부터 보호받는 등 어느 정도 직접적인 혜택을 누렸다. 하지만 평범한 개인의 입장에서 보면 이익보다 손해가 더 컸을 것이다. 오늘날 번영사회에 사는 사람들로서는 이해하기 어려운 이야기이다. 요즘 우리는 풍요와 안전을 누리고 있고 그 풍요와 안전은 농업혁명이 좋은 기초 위에 세워진 것이기 때문에 우리는 농업혁명이 놀라운 개선이라고 가정한다. 하지만 수천 년의 역사를 오늘날의 관점에서 판단하는 것은 잘못이다.

 이보다 훨씬 더 대표성이 있는 관점은 1세기 무렵 중국에서 아버지가 농사에 실패해 영양실조로 죽어가는 세 살짜리 딸의 관점이다. 아이는 과연 "나는 영양실조로 죽어가지만, 앞으로 2천 년 내에 사람들은 먹을거리가 풍부한 세상에서 에어컨이 딸린 큰 집에서 살게 될 테니 나의 고통은 가치 있는 희생이다"라고 말할까?

 그렇다면 밀은 영양실조에 걸린 중국 소녀를 비롯한 농업종사자들에게 무엇을 주었을까? 사람들 개개인에게 준 것은 아무것도 없다. 하지만 호모 사피엔스 종에게는 무언가를 주었다. 밀 경작은 단위 토지당 식량생산을 크게 늘렸고, 그 덕분에 호모 사피엔스는 기하급수적으로 늘어날 수 있었다.

 기원전 13000년경, 사람들이 야생식물을 채취하고 야생동물을 사냥하면서 먹고살던 시기에 팔레스타인의 여리고(Jericho) 오아시스 주변 지역이 지탱할 수 있는 인구는 기껏해야 1백 명 정도의 건강하고 영양상태가 비교적 좋은 방랑자들이었을 것이다. 기원전 8500년 야생식물이 밀에게 자리를 내어준 뒤, 이 오아시스에는 1천 명이 사는 마을이 생겼다. 마을은 크지만 집은 다닥다닥 붙어 있었고 과거보다 많은 사람이 질병과 영양실조로 허덕였다.

 어느 종이 성공적으로 진화했느냐의 여부는 굶주림이나 고통의 정도가 아니라 DNA 이중나선 복사본의 개수로 결정된다. 한 회사의 경제적 성공은 직원들의 행복이 아니라 오직 은행잔고의 액수로만 측정된다. 마찬가지로 한 종의 진화적 성공은 그 DNA의 복사본 개수로 측정된다. 만일 더 이상의 DNA 복사본이 남아 있지 않다면 그 종은 멸종한 것이다. 돈이 없는 회사가 파산한 것과 마찬가지다. 만일 한 종이 많은 DNA 복사본을 뽐낸다면 그것은 성공이며 그 종은 번성하고 있는 것이다. 이런 관점에서 볼 때 1천 벌의 복사본은 언제나 1백 벌보다 좋다.

 

 농업혁명의 핵심은 이것이다. 더욱 많은 사람들을 더욱 열악한 환경에서 살아 있게 만드는 능력, 하지만 이런 진화적 계산법에 왜 개인이 신경을 써야 하는가? 제정신인 사람이라면 호모 사피엔스 DNA 복사본의 개수를 늘리기 위해 삶의 질을 포기할 사람이 있겠는가? 그런 거래에 동의한 사람은 아무도 없었다. 농업혁명은 덫이었다.

 

p130

 호모 사피엔스는 약 7만 년 전 중동에 도착했다. 그후 5만 년 동안 우리 조상들은 농업 없이 번성했다. 그 지역의 자연자원은 인구를 지탱하기에 충분했다. 사람들은 풍요로운 시절에는 아이를 좀 더 많이 낳았고 궁핍한 시절에는 약간 덜 낳았다. 인간은 다른 많은 포유동물과 마찬가지로 번식을 조절하는 호르몬과 유전자 메커니즘을 지니고 있다. 풍족한 시절에 여자아이는 사춘기가 일찍 오고 임신 가능성이 조금 높아진다. 어려운 시절에는 사춘기가 늦게 오고 번식력이 떨어진다. 

 이런 자연적 인구조절에 문화적 메커니즘이 추가된다. 아기와 어린이는 동작이 굼뜨고 손이 많이 가기 때문에 방랑하는 수렵채집인들에게 부담이었다. 사람들은 3~4년 터울로 애를 가지려고 노력했다. 여성들은 24시간 내내, 늦은 나이까지 아이에게 젖을 먹임으로써 터울을 두었다. 다른 방법으로는 완전하거나 부분적인 금욕, 낙태, 때로는 유아 살해 등이 있었다.

 

p133

 

 사람들은 왜 이렇게 치명적인 계산오류를 범했을까? 역사를 통틀어 사람들이 오류를 범하는 이유와 동일한 이유에서였다. 사람들은 자신의 결정이 가져올 결과를 전체적으로 파악하는 능력을 갖고 있지 않았다.

 

p134

 그렇다면 왜 계획이 빗나갔을 때 농경을 포기하지 않았을까? 작은 변화가 축적되어 사회를 바꾸는 데는 여러 세대가 걸리고 그때쯤이면 자신들이 과거에 다른 방식으로 살았다는 것을 아무도 기억하지 못하기 때문이다. 인구 증가 때문에 돌아갈 다리가 불타버렸다는 것도 한 이유였다. 쟁기질을 도입함으로써 마을의 인구가 1백명에서 110명으로 늘었다고 가정해보자. 이중 자신들이 자발적으로 굶어 죽는 것을 선택함으로써 나머지 사람들이 과거의 좋았던 시절로 돌아갈 수 있도록 할 열 명이 있었겠는가? 돌아갈 길은 없었다. 덫에 딱 걸리고 말았다.

 좀 더 쉬운 삶을 추구한 결과 더 어렵게 되어버린 셈이었고, 이것이 마지막도 아니었다. 오늘날 우리에게도 똑같은 일이 벌어지고 있다. 대학을 졸업한 젊은이 중 상당수는 돈을 많이 벌어 35세에 은퇴해서 진짜 자신이 원하는 것을 하겠다고 다짐하면서 유수 회사들에 들어가 힘들게 일한다. 하지만 막상 그 나이가 되면 거액의 주택 융자, 학교에 다니는 자녀, 적어도 두 대의 차가 있어야 하는 교외의 집, 정말 좋은 와인과 멋진 해외 휴가가 없다면 삶은 살 만한 가치가 없다는 느낌을 갖게 된다. 이들이 뭘 어떻게 할까? 뿌리채소나 캐는 삶으로 돌아갈까? 이들은 노력을 배가해서 노예 같은 노동을 계속한다.

 역사의 몇 안 되는 철칙 가운데 하나는 사치품은 필수품이 되고 새로운 의무를 낳는 경향이 있다는 것이다. 일단 사치에 길들여진 사람들은 이를 당연한 것으로 받아들인다. 그다음에는 의존하기 시작한다. 마침낸느 그것 없이 살 수 없는 지경이 된다. 우리 시대의 친숙한 예를 또 하나 들어보자. 지난 몇십 년간 우리는 시간을 절약하는 기계를 무수히 발명했다. 세탁기, 진공청소기, 식기세척기, 전화, 휴대전화, 컴퓨터, 이메일.... 이들 기계는 삶을 더 여유 있게 만들어줄 것이라고 예상되었다. 과거엔 편지를 쓰고 주소를 적고 봉투에 우표를 붙이고 우편함에 가져가는 데 몇 날 몇 주가 걸렸다. 답장을 받는 데는 며칠, 몇 주, 심지어 몇 개월이 걸렸다. 요즘 나는 이메일을 휘갈겨 쓰고 지구 반대편으로 전송한 다음 몇 분 후에 답장을 받을 수 있다. 과거의 모든 수고와 시간을 절약했다. 하지만 내가 좀 더 느긋한 삶을 살고 있는가?

 슬프게도 그렇지 못하다. 종이 우편물 시대에 편지를 쓸 때는 대개 뭔가 중요한 일이 있을 때뿐이었다. 머릿속에 처음 생각나는 것을 그대로 적는 것이 아니라 하고 싶은 말이 무엇인지, 어떻게 표현해야 하는지에 대해서 심사숙고했다. 그리고 역시 그렇게 심사숙고 한 답장을 받을 것으로 기대했다. 대부분의 사람은 주고받는 편지가 한 달에 몇 통 되지 않았으며 당장 답장을 해야 한다는 강요를 받지도 않았다. 오늘날 나는 매일 열 통이 넘는 메일을 받고, 상대방은 모두 즉각적인 답을 기대하고 있다. 우리는 시간을 절약한다고 생각했지만, 실은 인생이 돌아가는 속도를 과거보다 열 배 빠르게 만들었다. 그래서 우리의 일상에는 불안과 걱정이 넘쳐난다.

 이메일 계정 만들기를 거부하는 신기술 반대론자도 드문드문 있기는 하다. 마친 수천 년 전 농경을 받아들이기를 거부하고 사치품 함정을 비켜갔던 일부 인간들처럼 말이다. 하지만 농업혁명은 해당 지역의 모든 무리의 동참을 필요로 하지 않는다. 중동이나 중미 어느 지역에서든 일단 한 무리가 정착해서 경작을 시작하면 농업은 저항할 수 없는 것이 된다. 농경이 급속한 인구성장의 조건을 만들어준 덕분에, 농부들은 순수한 머릿수의 힘만으로 언제나 수렵채집인들을 압도할 수 있었다. 수렵채집인은 자신들의 사냥터를 들판과 목초지로 내주고 도망치거나 스스로 쟁기를 잡거나 둘 중 하나를 택할 수 있을 따름이었다. 어느 쪽이든 과거의 삶의 방식은 끝난 것이었다.

 사치품의 함정 이야기에는 중요한 교훈이 들어 있다. 인류가 좀 더 편한 생활을 추구한 결과 막강한 변화의 힘이 생겼고 이것이 아무도 예상하거나 희망하지 않았던 방향으로 세상을 변화시켰다는 점이다. 일부러 농업혁명을 구상하거나 인간을 곡물 재배에 의존하게 만들려던 사람은 아무도 없었다. 그저 배를 좀 채우고 약간의 안전을 얻는 것을 주된 목표로 삼은 일련의 사소한 결정이 거듭해서 쌓여, 고대 수렵채집인들이 타는 듯한 태양 아래 물이 든 양동이를 운반하는 삶을 살도록 하는 결과를 가져왔다.

 

p137

 

 그러나 드문 진상을 보여주는 단서를 찾아내는 행운을 누리기도 한다. 1995년 고고학자들은 터키 남동부의 괴베클리 테페 지역 유적지를 파내기 시작했다. 가장 오래된 지층에서 정착지, 주거, 일상 활동의 징후가 발견되지 않았다. 하지만 멋진 조각이 새겨진 기둥을 갖춘 기념물이 발견되었다. 개별 돌기둥의 무게는 최대 7톤이었고 높이는 5미터에 달했다. 그 인근의 채석장에서 학자들은 끌로 반쯤 깍다가 만 50톤의 기둥을 발견했다. 모두 합쳐서 열개 이상의 기념비 구조물이 드러났는데, 가장 큰 것의 폭은 30미터에 육박했다.

 고고학자들은 세계 도처에 있는 이런 기념비적 구조물과 친숙하다. 대표적인 것이 영국의 스톤헨지다. 하지만 이들은 괴베클리 테페를 조사하면서 놀라운 사실을 발견했다. 스톤헨지는 기원전 2500년의 발달된 농경사회 사람들이 건설한 것이다. 이에 비해 괴베클리 테페의 구조물들은 연대가 기원전 9500년으로 거슬러 올라간다. 그리고 모든 증거가 가리키는 바, 이 구조물은 수렵채집인들이 세운 것이었다. 고고학자들은 처음에 이 발견을 신뢰하지 못했지만, 조사를 거듭할수록 이 구조물의 오랜 연대와 이를 세운 시기가 농경사회 이전이었다는 사실을 거듭 확인했다. 고대 수렵채집인의 능력과 문화적 복합성은 우리가 이전에 추측했던 것보다 훨씬 더 뛰어났던 것 같다.

 수렵채집 사회 사람들은 왜 이런 구조물을 세웠을까? 뚜렷한 실용적 목적은 전혀 보이지 않았다. 그곳에는 매머드 도살장도 아니고 비를 긋거나 사자를 피해서 숨는 장소도 아니었다. 뭔가 미스터리한 문화적 이유에서 세워졌다고 볼 수밖에 없다. 고고학자들은 그게 무엇인지 파악하느라 골머리를 앓고 있다. 그러나 이유가 무엇이었든 간에, 수렵채집인들은 거기에 막대한 노력과 시간을 투입할 가치가 있다고 생각했다. 괴베클리 테페를 건설하는 유일한 방법은 여러 무리와 부족에 속한 수천 명의 수렵채집인을 오랫동안 협력하게 만드는 것뿐이었다. 그런 노력을 유지할 수 있는 것은 세련된 종교나 이데올로기 시스템밖에 없다.

 괴베클리 테페는 또 하나의 놀라운 비밀을 지니고 있다. 유전학자들은 작물화된 밀의 기원을 오랫동안 추적하고 있었는데, 최근의 발견이 시사하는 바에 따르면, 작물화된 밀의 변종 중 하나인 외알밀은 괴베클리 테페에서 30킬로미터 떨어진 카라사다그 언덕이 발상지다.

 이것은 우연이 아닐 것이다. 괴베클리 테페라는 문화적 중심지는 인류에 의한 밀의 작물화, 밀에 의한 인간 길들이기와 어떻게든 연관되어 있었을 가능성이 높다. 이 기념물을 건설하고 이용한 사람들을 먹여 살리기 위해서는 많은 식량이 필요했다. 어쩌면 수렵채집인들이 야생 밀 채취에서 집약적인 밀 경작으로 전환한 목적은 정상적인 식량공급을 늘리기 위해서가 아니라 사원의 건설과 운영에 필요한 식량을 공급하기 위해서였는지도 모른다. 기존에 우리는 개처자들이 처음에 마을을 세우고 이것이 번영하면 그 중앙에 사원을 건설했을 것이라고 보았지만, 괴베클리 테페가 시사하는 바는 그 반대다. 먼저 사원이 세워지고 나중에 그 주위에 마을이 형성되었다.

 

p163

 

 우리는 사람을 '귀족'과 '평민'으로 구분하는 것이 상상의 산물이라는 말을 쉽게 받아들일 수 있다. 하지만 모든 사람이 평등하다는 사상 또한 신화다. 어떤 의미에서 모든 인간이 서로 평등하다는 것인가? 인간의 상상력을 벗어난 어딘가에 우리가 진정으로 평등한 객관적으로 실재하는 세계가 있단 말인가?

 

p176

 역사를 움직이는 중요한 동인 중 다수가 상호 주관적이다. 법, 돈, 신, 국가가 모두 그런 예다.

 

 상상의 질서를 빠져 나갈 방법은 없다. 우리가 감옥 벽을 부수고 자유를 향해 달려간다 해도, 실상은 더 큰 감옥의 더 넓은 운동장을 향해 달려나가는 것일 뿐이다.

 

p183

 

 쓰기는 유형이 기호를 통해 정보를 저장하는 방법이다. 수메르의 쓰기 체계는 점토판에 눌러 쓴 두 종류의 기호를 이용했다. 기호의 한 유형은 숫자를 나타냈다. 각각 1, 10, 60, 600, 3,600, 36,000을 나타내는 기호가 있었다(수메르 사람들은 6진법과 10진법을 섞어서 썼다. 6진법은 오늘날 우리에게 중요한 유산을 남겼다. 하루를 24시간으로 나눈다거나 원을 360도로 분할하는 것이 그런 예다). 또 다른 유형의 기호는 사람, 동물, 사유품, 토지, 날짜 등을 나타냈다. 두 유형의 기호를 결합함으로써 수메르인들은 많은 데이터를 보존할 수 있었다. 어떤 한 인간의 뇌가 기억할 수 있는 것보다, 어떤 한 DNA 사슬이 부호화할 수 있는 것보다 훨씬 더 많은 양이었다.

 

p195

 쓰기는 인간의 의식을 돕는 하인으로 탄생했지만, 점점 더 우리의 주인이 되어가고 있다. 컴퓨터는 호모 사피엔스가 어떻게 말하고 느끼고 꿈꾸는지를 이해하는 데 어려움을 겪는다. 그래서 우리는 호모 사피엔스에게 컴퓨터가 이해할 수 있는 숫자 언어로 말하고 느끼고 꿈꾸라고 가르치고 있다. 게다가 이야기는 여기에서 끝나지 않는다. 인공지능 분야는 오로지 컴퓨터의 이진부호에 기반을 둔 새로운 종류의 지능을 만들어내려고 하고 있다. <매트릭스>나 <터미네이터> 같은 SF 영화는 이런 이진부호가 인간이 씌운 굴레를 벗어던지는 날을 이야기하고 있다. 인간이 반항적인 문자체계를 다시 통제하려고 하자, 그 체계들은 그 반응으로 인류를 쓸어버리려고 한다.

 

p217

 하지만 진화에는 목적이 없다. 장기는 어떤 목적을 가지고 진화한 것이 아니며, 그 사용방식은 끊임없이 변화한다. 인체의 장기 중에 그것이 원형 상태로 수억 년 전 처음 등장했을 때 했던 일만을 하고 있는 것은 단 하나도 없다. 장기는 특정기능을 수행하기 위해 진화하지만, 일단 존재하게 되면 다른 용도로 사용되는 방향으로도 적응할 수 있다. 가령 입이 등장한 것은 가장 초기의 다세포 생명체가 영양소를 몸 안으로 섭취할 필요가 있었기 때문이고, 우리는 지금도 그런 용도로 입을 사용하지만, 동시에 키스하고 말하는 데도 사용한다. 람보라면 수류탄 핀을 뽑을 때도 써먹는다. 이런 용도 중 어느 하나라도 부자연스러운 것이 있을까? 벌레 비슷하게 생겼던 6억 년 전의 우리 선조가 입으로 하지 않던 일이라는 이유만으로?

 

p235

 모순이 없는 물리법칙과 달리, 인간이 가진 모든 질서는 내적 모순을 지닌다. 문화는 이런 모순을 중재하려고 끊임없이 노력하며, 이런 과정이 변화에 불을 지핀다.

 

p237

 프랑스 혁명 이래 세계 모든 곳의 사람들은 점차 평등과 개인의 자유를 근본적 가치라고 생각하게 되었다. 하지만 두 가치는 서로 모순된다. 평등을 보장하는 방법은 형편이 더 나은 사람의 자유를 제한하는 것 이외에 없다. 모든 개인이 자신이 원하는 바를 할 수 있도록 보장한다면 필연적으로 평등에 금이 간다. 1789년 이래 세계 정치사는 이 모순을 화해시키려는 일련의 시도로 볼 수 있다.

 

p245

 

 이데올로기의 관점에서 보자면 이보다 더욱 중요한 발전이 기원전 첫 밀레니엄(기원전 1000년~기원전 1년) 동안 이루어졌는데, 바로 보편적 질서라는 개념이 뿌리를 내린 시점이었다.

 

p246

 

 기원전 첫 밀레니엄 동안, 보편적 질서가 될 잠재력이 있는 후보 세 가지가 출현했다. 세 후보 중 하나를 믿는 사람들은 처음으로 세계 전체와 인류 전체를 하나의 법 체계로 통치되는 하나의 단위로 상상할 수 있었다. 적어도 잠재적으로는 모두가 '우리'였다. '그들'은 더 이상 존재하지 않았다. 최초로 등장한 보편적 질서는 경제적인 것, 즉 화폐 질서였다. 두 번째 보편적 질서는 정치적인 것, 즉 제국의 질서였다. 세 번째 보편적 질서는 종교적인 것, 즉 불교, 기독교, 이슬람교 같은 보편적 종교의 질서였다.

 

p249

 

 점차 우세를 차지한 기독교인들은 승리를 축하하기 위해 모스크를 부수고 교회를 지었을 뿐 아니라, 새로운 금화와 은화를 발행하여 십자가와 함께 이교도들과의 싸움을 하느님이 도와주셔서 감사한다는 내용을 새겼다. 하지만 승리자들은 새로운 화폐와 함께 또 다른 종류의 주화도 찍어냈는데, 밀라레스라는 이 주화에는 좀 다른 메시지가 담겨 있었다. 기독교인 정복자들이 찍어낸 사각형 주화에는 유려한 아라비아 문자로 다음과 같은 선언이 새겨져 있었다. "알라 외에 다른 신은 없으며 무함마드는 알라의 사자다." 카톨릭의 멜구에일 주교와 아그데 주교조차도 인기 있는 이 무슬림 주화를 충실히 복제해 발행했고, 신을 두려워하는 기독교인들은 이를 기쁘게 사용했다.

 

 관용은 언덕 너머에서도 넘쳐흘렀다. 북아프리카의 무슬림 상인들은 피렌체의 플로린 금화, 베네치아의 두카트 금화, 나폴리의 기글리아토 은화 같은 기독교 주화를 이용해 사업을 했다. 이교도인 기독교인들을 상대로 성전을 벌였던 무슬림 통치자들조차 경배의 표시로 예수와 성모 마리아를 새겨 넣은 주화로 세금을 받았다.

 

p274

 

 제국은 인류의 다양성을 급격히 축소시킨 주된 이유의 하나였다. 제국이라는 증기롤러는 수많은 민족의 독특한 특징을 지워버리고(예컨대 누만시아), 그로부터 훨씬 더 크고 새로운 집단들을 만들어냈다.

 

 실제 제국은 지난 2,500년간 세계에서 가장 일반적인 형태의 정치조직이었다. 이 시기에 살던 인류의 대부분은 제국에 속해 있었다. 제국은 매우 안정된 형태의 정부다. 대부분의 제국은 반란을 너무나 쉽게 진압했다. 제국을 무너뜨린 것은 대개 외부의 침공이나 내분에 따른 지배 엘리트의 분열밖에 없었다. 그래서 정복당한 민족이 제국의 지배자로부터 스스로를 해방시킨 기록은 그리 눈에 띄지 않는다. 대부분은 수백 년에 걸쳐 복속 상태로 남아 있었다. 이들은 제국에 서서히 소화되어 고유의 문화가 흐지부지되는 게 보통이었다.

 

p299

 

 종교는 광범위한 사회정치적 질서를 정당화할 능력이 있지만, 모든 종교가 그 잠재력을 작동시킨 것은 아니었다. 서로 다른 인간 집단들이 사는 광대한 영역을 자신의 가호 아래 묶어두려면, 종교에는 두 가지 추가적인 속성이 필요하다. 첫째, 언제 어디서나 진리인 보편적이고 초인적인 질서를 설파해야 한다. 둘째, 이 믿음을 모든 사람에게 전파하라고 강력히 요구해야 한다. 달리 말해, 종교는 보편적이면서 선교적이어야 한다.

 

 이슬람교나 불교처럼 역사상 가장 잘 알려진 종교는 보편적이고 선교적이다. 그래서 사람들은 모든 종교가 그렇다고 믿는 경향이 있다. 실상 대부분의 고대 종교는 지역적이고 배타적이었다. 신자들은 국지적 신과 영혼을 믿었으며, 인류 전체를 개종시키는 데 아무런 관심이 없었다. 우리가 아는 한 보편적이고 선교적인 종교는 기원전 1000년에 와서야 비로서 등장하기 시작했다. 이들의 출현은 역사상 가장 중요한 혁명의 하나였고, 보편적 제국과 보편적 화폐의 등장과 매우 비슷하게 인류의 통일에 크게 기여했다.

 

 애니미즘이 지배적인 신념체계일 때, 인간의 규범과 가치는 동물, 식물, 요정, 유령 등 다양한 존재들의 관점과 이익을 고려해야 했다. 예컨대 갠지스강 유역의 수렵채집인 무리는 유달리 큰 무화과나무 한 그루를 베지 못하게 하는 규칙을 세웠을지도 모른다. 나무의 정령이 노해서 복수하지 않게 하기 위한 조치다. 인더스강 유역에 살았던 또 다른 수렵채집인 무리는 흰꼬리여우의 사냥을 금지했을지 모른다. 언젠가 흰꼬리여우가 부족의 현명한 노파에게 귀중한 흑요석이 어디에 있는지를 가르쳐주었기 때문이다.

 이런 종교는 세계관이 매우 국지적이었고, 특정 장소나 기후현상이 지닌 독특한 측면을 강조하는 경향이 있었다. 대부분의 수렵채집인은 면적 1천 제곱킬로미터도 안 되는 지역에서 평생을 보냈다 살아남기 위해서, 특정 계곡에 사는 사람들은 그 계곡을 지배하는 초인적 질서를 이해하고 그에 맞춰 행동할 필요가 있었다. 먼 곳의 다른 계곡에 사는 사람들에게 똑같은 규칙을 따르라고 설득하는 것은 무의미한 일이었다. 인더스강 유역에 사는 사람들이 갠지스강 유역에 선교단을 보내 흰꼬리여우를 사냥하지 말라고 설득하는 수고를 하진 않았을 것이다.

 농업혁명은 종교혁명을 동반한 것으로 보인다. 수렵채집인들이 채집한 식물과 사냥한 동물은 호모 사피엔스와 동등한 지위를 지닌 것으로 볼 수 있었다. 호랑이가 인간을 사냥한다고 해서 인간이 호랑이보다 열등하다고 볼 수 없듯이, 인간이 양을 사냥한다고 해서 양이 인간보다 열등하다고 볼 수는 없었다. 세상에 존재하는 것을은 서로 직접 의사소통을 했고, 자신들이 더불어 사는 거주지를 다스리를 질서에 대해 협의했다. 농부들은 달랐다. 이들은 동식물을 소유하고 조작했다. 자신의 소유물과 협의함으로써 스스로를 격하시킬 수는 없었다. 그러므로 농업혁명이 미친 최초의 종교적 효과는 동식물을 영혼의 원탁에 앉은 동등한 존재에서 소유물로 끌어내릴 것이다.

 

p327

 

 모든 인본주의자는 인간성을 숭배하지만 그에 대한 정의는 각기 다르다. 기독교의 경쟁 분파들이 신의 정확한 정의를 두고 다투는 것처럼, 인본주의는 '인간성 humanity'의 정확한 정의를 두고 다투는 세 개의 경쟁 분파로 나뉘었다. 오늘날 가장 중요한 인본주의 분파는 자유주의적 인본주의다. 이 사상은 '인간성'은 개별 인간의 속성이며 개인의 자유는 더할 나위 없이 신성하다고 믿는다. 자유주의자에 따르면, 인간성의 신성한 성질은 모든 개별 사피인스의 내면에 갖춰져 있다. 개개인의 내면은 세상에 의미를 부여하며, 모든 윤리적, 정치적 권위의 원천이 된다. 만일 우리가 윤리적, 정치적 딜레마와 마주친다면, 우리는 자신의 내면을 돌아보고 내면에서 울리는 목소리-인간성의 목소리-를 들어야 한다. 자유주의적 인본주의의 주된 계명들은 이런 내면의 목소리가 지닌 자유를 침입이나 손상으로부터 보호하기 위한 것이다. 이런 계명들을 통칭하여 '인권'이라고 부른다.

 

 또 다른 중요한 분파는 사회주의적 인본주의다. 사회주의자들은 '인간성'이 개인주의적인 것이 아니라 집단적인 것이라고 믿는다. 이들이 신성하게 보는 것은 개별 인간의 내면의 목소리가 아니라 전체 호모 사피엔스 종이다. 자유주의적 인본주의가 개개인의 최대한의 자유를 추구하는 데 반해, 사회주의적 인본주의는 모든 인간의 평등을 추구한다. 사회주의자에 따르면 불평등은 인간의 존엄성에 대한 최악의 모독이다. 인간의 보편적 본질이 아니라 주변적 속성에 특권을 부여하는 일이기 때문이다. 가령 부자가 가난한 자에 비해 특권을 누린다는 것은 우리가 부자에게나 가난한 자에게나 똑같이 적용되는 모든 인간의 보편적 본질보다 돈을 더 중시한다는 의미가 된다. 사회주의적 인본주의는 자유주의적 인본주의와 마찬가지로 일신론의 토대 위에 건설되었다. 모든 인간이 평등하다는 사상은 모든 영혼이 하느님 앞에 평등하다는 일신론적 확신의 개정판이다.

 

 전통적 일신론의 속박에서 벗어난 유일한 인본주의는 진화론적 인본주의로, 가장 유명한 예는 국가사회주의, 즉 나치다. 나치가 다른 인본주의 분파와 구별되는 점은 '인간성'에 대해 진화론에 깊이 감화된 좀 색다른 정의를 갖고 있었다는 점이다. 나치는 다른 인본주의자들과 달리 인류를 보편적이고 영원한 무엇이 아니라 진화하거나 퇴화할 수 있는, 변하기 쉬운 종으로 보았다. 인간은 초인으로 진화할 수도, 인간 이하로 퇴화할 수도 있었다. 

 나치의 주된 야망은 인류의 퇴화를 막고 진보적 진화를 부추기는 것이었다. 나치가 인류의 가장 발전된 형태인 아리아인을 보호육성해야 하고 유대인, 집시, 동성애자, 정신병자 같은 호모 사피엔스의 퇴화된 종류를 격리하거나 심지어 근절해야 한다고 말한 이유가 바로 여기에 있었다. 

 

p338

 사실 그 시대를 가장 잘 아는 사람들, 다시 말해 그 시대에 살았던 사람들이야말로 그 시대를 가장 모르는 사람들이다. 사후의 깨달음에 의해 필연적인 것처럼 보이는 것이 정작 그 시대에는 전혀 명백하지 않은 일이었다. 이 역사의 철칙은 오늘날에도 그대로 적용된다.  우리는 글로벌 경제위기에서 벗어난 것인가, 아니면 최악의 위기가 곧 닥쳐올 예정인가? 중국이 성장을 계속해서 선도적 초강대국이 될까? 미국은 헤게모니를 잃을까? 일신론적 근본주의가 급증하는 것은 미래의 파도일까 아니면 장기적 중요성은 별로 없는 국지적 소용돌이일까? 우리는 환경적 재앙으로 향하고 있는가, 아니면 기술적 파라다이스로 향하고 있는가? 어느 쪽이든 이를 뒷받침하는 훌륭한 주장이 존재하지만, 확실히 알 방법은 없다. 그러나 부로가 몇십 년 지나지 않아 사람들은 과거를 돌아보면서 이 모든 질문에 대한 해답은 명백하다고 생각할 것이다.

 

 특히 동시대 사람들에게는 아주 희박해 보였던 가능성이 종종 실현되곤 한다는 사실을 강조할 필요가 있다. 306년 콘스탄티누스 대제가 제위에 올랐을 때, 기독교는 비밀스러운 동방의 분파에 지나지 않았다. 당시에 이 종교가 곧 로마의 국교가 될 참이라고 누가 말했다면, 사람들은 웃다 못해 방 밖으로 뛰쳐나갔을 것이다. 오늘날 당신이 2050년이 되면 힌드교의 하레 크리슈나 교단이 미국의 국교가 될 것이라고 말할 경우 당할 일과 마찬가지로 말이다. 1913년 10월 볼셰비키는 러시아의 작은 급진주의 파벌에 지나지 않았다. 이성이 있는 사람이라면 이 파벌이 불과 4년 내에 이 나라를 접수하리라고는 예측하지 않았을 것이다. 기원후 600년에는 사막에 살던 한 무리의 아랍인이 머지않아 대서양에서 인도에 이르는 광대한 지역을 정복할 것이라는 생각이 더더욱 터무니없었을 것이다. 실제로 만일 비잔틴 제국의 군대가 이슬람의 첫 맹공을 격퇴할 수 있었다면, 이슬람교는 오늘날 한 줌의 전문가들만이 아는 무명의 종교로 남아 있었을 것이다. 만일 그랬다면 학자들은 메카의 중년 상인에게서 내려진 계시를 기반으로 한 신앙이 어째서 널리 퍼질 수 없었는지를 매우 쉽게 설명할 수 있었을 것이다.

 

 이런 결론은 역사가 결정론적이기를 바라는 많은 사람들을 실망시킨다. 결정론은 호소력이 있다. 우리가 사는 세상과 우리의 믿음은, 우리가 국민국가에 살며 자본주의 원리에 따라 경제를 조직하고 인권을 열렬하게 신봉하는 것은 역사의 자연스럽고 필연적인 결과라는 것을 시사하기 때문이다. 역사가 결정론적이지 않다고 인정하는 것은 오늘날 대부분의 사람들이 믿는 민족주의, 자본주의, 인권이 우연에 불과하다고 인정하는 것이나 마찬가지다.

 역사는 결정론으로 설명될 수도 예측될 수도 없다. 역사는 카오스적이기 때문이다. 너무나 많은 힘이 작용ㅎ하고 있으며, 이들 간의 상호작용은 너무 복잡하므로, 힘의 크기나 상호작용 방식이 극히 조금만 달라져도 결과에는 막대한 차이가 생긴다. 그뿐만이 아니다. 역사는 이른바 '2단계' 카오스계다. 카오스계에는 두 종류가 있다. 1단계 카오스는 자신에 대한 예언에 반응을 하지 않는 카오스다. 가령 날씨는 1단계 카오스계다. 날씨는 무수히 많은 요인의 영향을 받지만, 우리는 점점 더 많은 요인을 고려하는 컴퓨터 모델을 만들어 점점 더 정확하게 에보할 수 있다.

 2단계 카오스는 스스로에 대한 예측에 반응하는 카오스다. 그러므로 정확한 예측이 불가능하다. 시장이 그런 예다. 만일 우리가 내일의 석유 가격을 1백 퍼센트 정호학히 예측하는 컴퓨터 프로그램을 개발하면 어떤 일이 일어날까? 석유 가격은 예측에 즉각 반응할 것이고, 해당 예측은 실현되지 않을 것이다. 현재 가격이 배럴당 90달러인데 내일은 1 백 달러가 될 것이라고 절대적으로 옳은 컴퓨터 프로그램이 예측한다면 어떻게 될까? 겨래인들은 그 예측에 따른 이익을 보기 위해 급히 매입 주문을 낼 것이고, 그 결과 가격은 내일이 아니라 오늘 배럴당 1 백 달러로 치솟을 것이다. 그러면 내일은 어떤 일이 일어날까? 아무도 모른다.

 

 정치도 2단계 카오스계다. 소련 연구가들은 1989년 혁명을 예측하지 못했고, 중동 전문가들도 2011년 '아랍의 봄' 혁명을 예측하지 못했다. 이를 두고 비난하고 혹평하는 사람이 많지만, 이런 비난은 공정하지 못하다. 혁명은 그 정의상 예측이 불가능하다. 예상 가능한 혁명은 결코 발생하지 않는다.

 왜일까? 지금이 201년이라고 가정하고 다음과 같은 일을 상상해보자. 천재적인 일부 정치학자들이 컴퓨터 천재들과 손잡고 결코 틀릴 수 없는 컴퓨터 알고리즘을 개발한다. 이 알고리즘을 매력적인 인터페이스와 결합하면 혁명 에측장치로 시장에 내놓을 수 있다. 이들은 많은 선금을 받고 이집트의 호스니 무바라크 대통령에게 이 서비스를 제공한다. 그리고 자신들의 예측에 의하면 이듬해에 틀림없이 이집트에서 혁명이 일어날 것이라고 말해준다. 그러면 무바라크는 어떻게 반응할까? 가장 가능성이 큰 행동은 즉시 세금을 낮추고, 시민들에게 수십억 달러의 지원금을 풀고, 만일에 대비해 비밀경찰을 보강하는 것이다.

 

 이런 선제 조치는 효과를 낸다. 해가 바뀌고 시간이 흘렀지만, 놀랍게도 혁명은 일어나지 않았다. 무바라크는 환불을 요구한다. "당신네 알고리즘은 쓸모가 없어!"그는 정치학자들에게 소리친다. "그 돈을 뿌리지 않았다면 궁을 하나 더 지을 수 있어어!" 정치학자는 반론을 편다. "하지만 혁명이 일어나지 않은 이유는 우리가 그것을 예측했기 때무잉니다." 무바라크는 경호에들에게 그들을 체포하라고 손짓하면서 말한다. "일어나지 않는 일을 예언가라고? 그런 놈이라면 카이로 시장에 가서 거의 공짜나 가까운 값에 열몇 명이나 고용할 수 있겠어지."

 

 그러면 왜 역사를 연구하는가? 물리학이나 경제학과 달리, 역사는 정확한 예측을 하는 수단이 아니다. 역사를 연구하는 것은 미래를 알기 위해서가 아니라 우리의 지평을 넓히기 위해서다. 우리의 현재상황이 자연스러운 것도 필연적인 것도 아니라는 사실을 이해하기 위해서다. 그 결과 우리 앞에는 우리가 상상하는 것보다 더 많은 가능성이 있다는 것을 이해하기 위해서다. 가령 유럽인이 어떻게 아프리카인을 지배하게 되었을까를 연구하면, 인종의 게층은 자연스러운 것도 필연적인 것도 아니며 세계는 달리 배열될 수도 있었다는 사실을 깨달을 수 있다.

 

p343

 

 점점 더 많은 학자들이 문화를 일종의 정신적 감염이나 기생충처럼 보고 있다. 인간은 자신도 모르는 새 숙주 역할을 하고 있다는 말이다. 바이러스 같은 기생체는 숙주의 몸속에서 산다. 이들은 스스로를 복제하며 숙주에서 숙주로 퍼져나가고, 숙주를 먹고 살면서 약하게 만들고 심지어 죽게 할 때도 있다. 숙주가 기생체를 퍼뜨릴 만큼 오래 살기만 하면, 기생체는 숙주의 상태에 거의 신경을 쓰지 않는다. 바로 이와 같은 방식으로 문화적 아이디어는 인간의 마음 속에 산다. 증식해서 숙주에서 숙주로 퍼져나가며, 가끔 숙주를 약하게 하고 심지어 죽이기도 한다. 기독교의 천상의 천국이나 공산주의자의 지상낙원에 대한 믿음 같은 문화적 아이디어는 인간으로 하여금 그것의 전파를 위해서라면 목숨까지 걸고서 헌신하게 만든다. 해당 인간은 죽지만, 아이디어는 퍼져나간다.

 

 이런 접근법에 따르면, 문화는 다른 사람을 이용하기 위해 일부 사람들이 꾸며낸 음모(마르크스주의자들이 이렇게 생각하는 경향이 있다)가 아니다. 그렇다기보다는 우연히 출현해서 자신이 감염시킨 모든 사람을 이용하는 정신의 기생충에 더 가깝다. 이런 접근법은 때로 문화 구성요소학, 혹은 밈 연구라고 불린다. 유기체의 진화가 '유전자gene'라 불리는 유기체 정보 단위의 복제에 기반을 둔 것과 마찬가지로, 문화적 진화는 '밈meme'이라 불리는 문화적 정보 단위의 복제에 기반을 두고 있다. 성공적인 문화란 그 숙주가 되는 인간의 희생이나 혜택에 무관하게 스스로의 밈을 증식시키는 데 뛰어난 문화다.

 대부분의 인문학자들은 밈 연구를 멸시한다. 문화적 과정을 조악한 생물학적 유추를 통해 설명하려는 아마추어적 시도로 보는 것이다. 하지만 그런 학자 중 많은 이가 밈 연구의 쌍둥이 자매 격인 포스트모더니즘을 고수하다. 포스트모더니즘 사상가는 문화를 건축하는 벽돌로서 밈이 아니라 '담론discourse'을 들먹이지만 이들 역시 문화는 인간의 이익과 무관하게 스스로 퍼져나가는 존재라고 생각한다. 이들은 가령 민족주의를 19세기와 20세기에 퍼져서 전쟁, 압제, 증오, 인종청소를 일으킨 치명적 전염병으로 묘사한다. 한 나라의 사람들이 거기 감염되는 순간, 이웃 나라의 사람들도 그 바이러스에 감염될 가능성이 컸다. 민족주의 바이러스는 스스로가 인간에게 혜택이 된다고 포장했지만, 실제로는 주로 자기 자신에게만 이익이 되었다.

 

 사회과학에서 게임이론의 비호 아래 비슷한 주장이 흔히 이야기된다. 게임이론은 다수가 참여하는 게임에서 어덯게 모두에게 해가 되는 시각과 행동 패턴이 뿌리를 내리고 퍼져나가는지를 설명해준다. 유명한 예가 군비 경쟁이다. 군비 경쟁은 참여하는 모든 당사국들을 파산시키는 경우가 많다. 그렇다고 군사력의 균형을 실제로 바꾸지도 못하면서 말이다. 파키스탄이 첨단 항공기를 구입하면, 인도가 동일한 조치로 대응한다. 인도가 핵폭탄을 개발하면, 파키스탄도 그대로 따라한다. 파키스탄이 해군력을 확장하면, 인도가 그에 대응한다. 이 과정의 끝에 다다르면, 힘의 균형은 과거와 크게 달라지지 않는다. 그동안 교육과 의료에 투자할 수 있었을 수십억 달러가 무기의 구입과 개발에 사용되었을 뿐이다.

 하지만 군비 경쟁의 역학은 저항하기 힘들다. '군비 경쟁'은 하나의 행동 패턴으로서, 이 나라에서 저 나라로 바이러스처럼 퍼져나가며 모두에게 해를 끼친다. 하지만 스스로에게는 이롭다. 생존과 번식이라는 진화적 기준에서 보면 그렇다(군비 경쟁은 유전자와 마찬가지로 자각이 없다는 점을 기억해두라. 그것이 의식적으로 생존과 번식을 추구하는 것은 아니다. 강력한 역학의 의도치 않은 결과로 그것이 전파되는 것뿐이다).

 그것을 무엇이라고 이름 붙이든 - 게임이론, 포스트모더니즘, 밈 연구 - 역사의 역학은 인간의 복지를 향상시키는 방향을 향하고 있는 것은 아니다. 역사상 가장 성공한 문화가 반드시 호모 사피엔스에게 가장 좋은 문화라는 생각은 근거가 없다. 진화와 마찬가지로 역사는 개별 유기체의 행복에 무관심하다. 그리고 개별 인간은 너무나 무지하고 약해서, 대개는 역사가 자신에게 유리한 방향으로 전개되도록 영향을 미치지 못한다.

 

p376

 

 역사를 통틀어 사회를 고통스럽게 했던 가난은 두 종류였다. 남들은 이용할 수 있는 기회를 나는 이용하지 못하도록 만드는 사회적 가난 그리고 식량과 집이 없어서 개인의 삶을 위험에 빠뜨리는 생물학적 가난이었다. 사회적 가난은 아마도 결코 근절되지 못할 것이다. 하지만 세계의 많은 국가에서 생물학적 가난은 옛말이 되었다. 최근까지만 해도 대부분의 사람들은 생물학적 빈곤선 부근을 떠돌았다. 그 선 이하로 내려가면 목숨을 오래 부지하는 데 필요한 영양이 부족하다는 뜻이다. 약간의 계산 착오나 불운만 생겨도 사람들은 쉽게 그 선 이하, 즉 아사 상태로 빠질 수 있었다. 자연재해와 인간이 만든 재난은 가끔 국민 전체를 나락으로 떨어뜨려 수백만 명의 죽음을 불렀다. 오늘날 세계 대부분의 사람들 발밑에는 안전망이 쳐져 있다. 보험, 국가가 후원하는 사회보장, 아주 많은 지역적, 국제적 NGO들이 사람들을 개인적 불행으로부터 보호하고 있다. 한 지역 전체에 재난이 닥치면 범세계적인 구호 노력이 이어지고, 덕부에 최악의 사태를 피하게 되었다. 사람들은 여전히 수모와 모욕, 가난으로 인한 질병에 시달리지만, 대부분의 국가에선 굶어 죽지는 않는다.

 

p394

 

 태즈메이니아 원주민은 이보다 더 나쁜 운명을 맞았다. 아주 훌륭한 고립 속에서 1만 년을 살아남았던 이들은 쿡이 도착한 지 1세기도 지나지 않아 마지막 남자, 여자, 어린이에 이르기까지 완전히 제거되었다. 유럽 정착민들은 처음에 이들을 섬의 가장 비옥한 영영에서 몰아냈고, 이어 남아 있는 황무지까지 탐낸 나머지 이들을 체계적으로 사냥하고 살해했다. 몇 되지 않은 생존자들은 기독교 복음주의교파의 강제수용소에 수용되었는데, 이곳에서는 선의를 지녔지만 그다지 열린 마음을 갖지 못한 선교사들이 서구 세계의 방식으로 이들을 가르치려 했다. 태즈메이니아인들은 읽기와 쓰기를 배웠다. 기독교를 배웠으면, 천을 바느질하고 농사를 짓는 등 다양한 '생산적 기술'을 교육받았다. 하지만 이들은 학습을 거부했다. 이들은 계속해서 더욱더 우울해했으며, 아기를 갖지 않게 되고 삶에 대한 관심을 잃었다. 마지막에는 과학과 진보의 세계로부터 탈출하는 유일한 길, 죽음을 선택했다. 아, 과학과 진보는 이들의 사후세계에까지 좇아갔다. 인류학자들과 큐레이터들은 과학의 이름으로 마지막 태즈메이니아인들의 사체를 강탈했다. 그들은 사체를 해부하고, 무게를 재고, 측정하여, 그 분석 결과를 학술지에 실었다. 태즈메이니아 박물관은 1976년에 이르러서야 1백 년 전에 죽은 최후의 태즈메이니아 원주민 트루가니니의 시신을 매장할 수 있도록 내놓았다. 영국 왕립외과대학은 그녀의 피부와 머리카락 표본을 2002년까지 보유했다.

 

p399

 

 중국인과 페르시아인에게 부족했던 것은 증기기관 같은 기술적 발명이 아니었다(그거라면 공짜로 베끼거나 사들일 수도 있었다). 이들에게 부족한 것은 서구에서 여러 세기에 걸쳐 형성되고 성숙한 가치, 신화, 사법기구, 사회정치적 구조였다. 이런 것들은 빠르게 복사하거나 내면화할 수 없었다. 프랑스와 미국이 재빨리 영국의 발자국을 뒤따랐던 것은 가장 중요한 신화와 사회구조를 이미 영국과 공유하고 있었기 때문이었다. 중국인과 페르시아인은 사회에 대한 생각과 사회의 조직 방식이 달랐던 탓에 그렇게 빨리 따라잡을 수 없었다.

 

 이런 설명은 1500년에서 1850년 사이 시기를 새롭게 조명하게 한다. 이 시기 유럽은 아시아 열강보다 기술, 정치, 군사, 경제의 우위를 누리지 못했다. 그럼에도 독창적 잠재력을 구축했고, 1850년 경이 되자 그 중요성은 갑자기 뚜렷해졌다. 1750년에 유럽과 중국, 이슬람 세계가 외관상 동등해 보였던 것은 신기루일 뿐이었다. 매우 높은 탑을 세우고 있는 두 건축가를 상상해보자. 한 사람은 나무와 진흙 벽돌을, 다른 사람은 강철과 콘크리트를 재료로 쓴다. 처음에는 두 방법 사이에 별로 차이가 없어 보인다. 두 탑이 모두 비슷한 속도로 비슷한 높이에 도달하기 때문이다. 하지만 일단 결정적 문턱을 지나면, 나무와 진흙은 하중을 버티지 못하고 무너진다. 이에 비해 강철과 콘크리트는 시야가 미치는 한 층층이 계속 올라간다.

 근대 초기에 유럽은 어떤 잠재력을 개발했기에 근대 후반 세계를 지배할 수 있었을까? 이 질문에는 서로 보완적인 두 가지 답이 존재하는데, 바로 현대 과학과 자본주의다. 유럽인은 기술적 우위를 누리기 전부터도 과학적이고 자본주의적인 방식으로 생각하고 행동하는 습관이 있었다. 그러다가 기술의 노다지가 쏟아지기 시작하자, 유럽인들은 다른 누구보다 그것을 잘 부릴 수 있었다. 따라서 과학과 자본주의가 유럽 제국주의가 21세기 유럽 이후 세상에 남긴 가장 중대한 유산이라는 사실은 결코 우연이 아니다. 유럽과 유럽인은 더 이상 세상을 지배하지 않지만, 과학과 자본의 힘은 나날이 강력해지고 있다.

 

p403

 1969년 7월20일 닐 암스트롱과 버즈 올드린은 달 표면에 착륙했다. 탐험에 앞서 아폴로 11호 우주비행사들은 몇 개월간 달과 환경이 비슷한 미국 서부 사막에서 훈련을 받았다. 이 지역은 여러 아메리카 원주민 공통체의 고향인데, 우주비행사들과 한 원주민과의 만남을 담은 전설 같은 이야기가 전해진다.

 어느날 훈련 중이던 우주비행사는 늙은 아메리카 원주민과 우연히 마주쳤다. 남자는 우주비행사들에게 이곳에서 무엇을 하고 있느냐고 물었다. 그들은 달을 탐사하기 위해 곧 떠날 원정대의 대원들이라고 대답했다. 이 말은 들은 노인은 잠깐 침묵했다가 입을 열었다. 자신을 위해 부탁을 하나 들어달라는 것이었다.

 "무엇을 원하세요?" 그들은 물었다.

 "우리 부족 사람들은 달에 신성한 정령들이 산다고 믿는다오. 그들에게 우리 부족에게 보내는 중요한 메시지를 당신들이 전해줄 수 있을까 해서."

 "그 메시지가 뭔데요?" 우주비행사들이 물었다.

 남자는 자기 부족의 언어로 뭐라고 말했고, 우주비행사들에게 그 말을 정확히 외울 때까지 계속 되풀이해서 말하게 시켰다.

 "그게 무슨 뜻이지요?" 우주비행사들은 물었다.

 "그건 말할 수 없어요. 이 말의 뜻은 우리 부족과 달의 정령들에게만 허락된 비밀이랍니다."

 기지로 돌아온 우주비행사들은 그 부족어를 말할 수 있는 사람을 수소문한 끝에 마침내 통역할 사람을 찾아내어, 비밀 메시지를 해석해달라고 부탁했다. 이들이 암기한 내용을 되뇌자 통역자는 껄껄 웃기 시작했다. 웃음이 잦아들자 우주비행사들은 무슨 뜻인지 물었다. 통역자는 비행사들이 조심스럽게 암기한 문장을 이렇게 번역했다. "이 사람들이 하는 말은 한 마디도 믿지 마세요. 이들은 당신들의 땅을 훔치러 왔어요."

 

p407

 최초의 근대인은 아메리고 베스푸치였다. 그는 1499년~1504년 사이에 여러 차례 아메리카 탐험대에 참가했던 이탈리아 선원이었다. 1502년부터 1504년 사이, 그 탐험의 내용을 담은 두 건의 문서가 유럽에서 출간되었다. 저자는 베스푸치로 되어 있었다. 이들 문서의 주장에 따르면 콜럼버스가 새로 발견한 섬들은 동아시아 연안의 섬들이 아니라 완전히 새로운 대륙이었다. 성경이나 고전 지리학자나 동시대 유럽인에게 전혀 알려지지 않은 곳이라고 했다. 1507년, 이런 주장을 확고하게 믿은 존경받는 지도 제작자 마르틴 발트제뮐러는 최신판 세계지도를 출간했는데, 그것은 유럽에서 서쪽으로 항해한 선단이 착륙했던 곳을 별개의 대륙으로 표시한 최초의 지도였다. 대륙을 그려 넣은 발트제뮐러는 이름을 부여해야 했다. 그는 그것을 발견한 사람이 아메리고 베스푸치라고 잘못 알고 있던 터라, 이 대륙에 아메리고를 기리는 이름을 붙였다. 아메리카라고. 발트제뮐러의 지도는 인기를 끌었고, 수많은 다른 지도 제작자들에 의해 복제되었다. 그가 새 땅에 부여한 이름도 함께 퍼져나갔다. 세계의 4분의 1에, 즉 일곱 대륙 중 두 곳에 거의 무명이던 이탈리아인의 이름이 붙은 것이다. 그가 유명할 이유라고는 "우리는 모른다"라고 말할 용기가 있었던 점 외에 아무것도 없다. 이 사실에는 어떤 시적 정의가 있다.

 아메리카 대륙의 발견은 과학혁명의 기초가 되는 사건이었다. 그것은 유럽인에게 과거의 전통보다 지금의 관찰 결과를 더 선호하라고 가르쳐주었다. 그뿐 아니라 아메리카를 정복하겠다는 욕망은 유럽인들로 하여금 새로운 지식을 맹렬한 속도로 찾아 나서게 만들었다. 방대한 새 영토를 통제하기를 원한다면 신대륙의 지리, 기후, 식물상, 동물상, 언어, 문화, 역사에 대해서 막대한 양의 새로운 정보를 수집해야 했다. 기독교 성경이나 옛 지리서, 고대 구비 전통은 거의 도움이 되지 않았다. 이제 유럽의 지리학자뿐 아니라 거의 모든 학문 분야에서 일하는 학자들은 채워 넣을 공백이 있는 지도를 그리기 시작했다. 그들은 자신의 이론이 완전하지 않으며, 중요한 것들 가운데 아직도 모르는 것이 있다고 인정하기 시작하였다.

 

p436

 

 만일 신용이 그토록 놀라운 것이라면, 어째서 아무도 좀 더 일찍 그것을 생각해내지 못했을까? 물론 과거에도 생각한 사람이 있었다. 이런저런 종류의 신용 거래는 인류의 모든 문화권에 존재했으며, 그 기원은 최소한 고대 수메르까지 거슬러 올라간다. 옛 시대의 문제점은 아무도 그런 아이디어를 떠올리지 못했다거나 활용할 방법을 알지 못했다는 것이 아니었다. 사람들이 신용을 크게 확장하려는 경우가 드물었다는 점이다. 그것은 미래가 현재보다 나을 것이라고 믿지 않았기 때문이다. 사람들은 보통 자기 시대보다 과거가 더 좋았으며 미래는 현재보다 더 나쁘거나 기껏해야 지금과 같을 것이라고 믿었다.

 경제용어로 말하자면, 사람들은 부의 총량이 더 줄지는 않더라도 한정되어 있다고 믿었다. 따라서 사람들은 자기 개인이든, 자신들의 왕국이든, 세계 전체든 앞으로 10년간 과거보다 더 많은 부를 생산하리라고 가정하는 것은 위험한 행태라고 생각했다. 사업은 제로섬 게임처럼 보였다.. 물론 특정 빵집의 이익이 증가할 수는 있지만, 그것은 그 옆 빵집의 희생을 통해서만 가능했다. 베네치아가 번영할 수는 있지만, 이는 오직 제노바를 가난하게 만듦으로써만 가능했다. 영국 왕이 자신을 부유하게 만드는 방법은 프랑스 왕의 것을 훔치는 것밖에는 없었다. 파이를 자르는 방법은 수없이 많지만, 어느 방법도 파이를 더 크게 만들지는 못한다. 수많은 문화권에서 돈을 많이 버는 것을 죄악이라고 결론 내린 이유가 여기에 있었다. 예수가 말했듯 "부자가 천국에 들어가기는 낙타가 바늘구멍을 통과하기보다 어려우니라"였다.

 만일 파이의 크기가 정해져 있는데 내가 그중 많은 부분을 가졌다면, 누군가 다른 사람의 몫을 빼앗은 게 분명하다. 부자는 자신의 잉여 재산을 자선에 기부함으로써 악행을 속죄해야 했다. 만일 지구 전체의 파이가 똑같은 크기로 남아 있다면, 신용이 파고들 여지가 없다. 신용은 오늘의 파이와 내일의 파이 간의 차이다. 만일 파이 크기가 늘 같다면 왜 외상을 주겠는가? 당신에게 돈을 빌려달라고 손을 벌리는 제빵사나 왕이 다른 경쟁자의 파이 조각을 훔칠 능력이 있다고 믿지 않는 한, 그런 위험은 감수할 수 없을 것이다.

 따라서 근대 이전 세계에서 대출을 받기는 힘들었고, 만일 빌리더라도 소액으로 단기간에 높은 이자를 무는 것이 보통이었다. 새로 시작하는 기업가는 새 빵집을 열기 어려웠고, 왕궁을 짓거나 전쟁을 일으키려는 위대한 왕들은 세금과 관세를 무겁게 매겨서 자금을 조달하는 방법밖에 없었다. 왕은 그래도 상관없었다. 하지만 빵 굽기에 대한 뛰어난 아이디어로 신분상승을 바라는 하녀는 왕궁의 부엌 바닥을 박박 닦으면서 부를 꿈꾸는 것 외에 보통 다른 방법이 없었다.

 이것은 모두에게 부정적인 결과였다. 신용이 제한되어 있기 때문에 사람들은 신규 사업의 자금을 조달하는 데 어려움을 겪었고, 신규 사업이 힘들었기 때문에 경제는 성장하지 못했다. 지금까지 성장이 없었으니 사람들은 앞으로도 없을 것이라고 제멋대로 판단했고, 자본을 가진 사람들은 외상 주는 것을 경계했다. 불황에 대한 기대는 자기 실현적이었다.

 

p456

 

 17세기가 끝나가면서 네덜란드는 뉴욕을 잃었고, 금융 및 제국의 심장이라는 유럽 내에서의 지위도 내놓았다. 여기에는 현상에 안주한 자세도 한몫했고, 대륙전쟁을 치르느라 경비를 너무 많이 지출한 탓도 있었다. 네덜란드가 빠져나간 공백을 놓고 치열한 경쟁을 벌인 것은 프랑스와 영국이었다. 처음에는 프랑스가 훨씬 유리해 보였다. 프랑스는 덩치가 더 크고 자금과 인구도 더 많았으며 경험 많은 군대를 더 많이 보유하고 있었다. 하지만 영국인들은 어떻게 해서든 금융제도의 신뢰를 얻는 데 성공한 데 비해, 프랑스는 스스로 신용할 수 없는 대상임을 드러냈다. 프랑스 왕의 행태는 18세기 유럽 최대의 금융 버블이라 불리는 미시시피 버블 과정에서 특히 악명을 떨쳤다.

 이 이야기도 제국을 세운 주식회사와 함께 시작된다. 1717년 프랑스에서 사업승인을 받은 미시시피 사는 미시시피 하류의 연안 지역을 식민지로 만들고 뉴올리언스 시를 건설했다. 야심찬 계획을 실현할 자금을 모으고자, 프랑스 루이 15세의 궁정과 좋은 관계를 맺고 있던 회사는 파리 주식시장에서 주식을 팔았다. 회사 사장이던 존 로는 프랑스 중앙은행 총재이기도 했다. 게다가 왕은 그를 오늘날의 재정부장관과 비슷한 정부 금융 총책 자리에 임명했었다.

 1717년 미시시피 하류의 연안 지대는 늪지와 악어를 제외하면 그다지 매력이 없는 곳이었다. 하지만 미시시피 사는 여기에 엄청난 부와 무한한 기회가 있다고 떠벌렸다. 프랑스의 귀족, 사업가, 도시 부르주아 중 둔한 사람들이 이런 환상에 속았고, 회사 주식의 가격은 천정부지로 치솟았다. 애초에 주식은 한 주에 50리브르(프랑스의 옛 화폐단위-옮긴이)에 발행되었다. 1719년 8월 1일에는 2,750리브르에 거래되었다. 8월 30일에는 4,10리브르, 9월 4일에는 5천 리브르가 되었다.

 12월 2일이 되자 주식은 한 주당 1만 리브르를 돌파했다. 황홀감이 파리의 거리를 휩쓸었다. 사람들은 가진 것을 모두 팔고 대규모 대출을 받아 미시시피 사의 주식을 샀다. 부자가 되는 손쉬운 방법을 발견했다는 것이 모든 사람의 생각이었다. 며칠 지나지 않아, 공황이 시작되었다. 일부 투자자들은 주식 가격이 완전히 비현실적이며 지속 가능하지 않다는 사실을 깨달았다. 이들은 가격이 정점을 찍을 때 파는 게 좋겠다고 판단했다. 매도 물량이 늘어나자 가격이 내려가기 시작했다. 투자자들은 가격이 떨어지는 것을 보자 빨리 손을 털고 싶었고, 가격은 더욱더 떨어져서 눈사태처럼 무너져버렸다. 

 프랑스 중앙은행은 가격을 안정시키기 위해 총재인 존 로의 지시에 따라 미시시피 주식을 구매했지만, 영원히 매수를 계속할 수는 없었다. 결국에는 자금이 떨어졌다. 일이 이렇게 되자 정부 재정 총 책임자이기도 했던 존 로는 돈을 더 찍어내도록 인가했다. 중앙은행이 주식을 더 살 수 있게 하기 위해서였다. 이로써 프랑스의 재정시스템 전체가 거품 속으로 들어갔다. 더군다나 그런 금융상의 마법으로도 곤경을 면할 수 없었다. 미시시피 사의 주식값은 1만 리브르에서 1천 리브르로 떨어졌고, 그 다음엔 완전히 붕괴하여 한 푼어치의 가치도 없게 되었다. 이즈음 프랑스 중앙은행과 왕국 재무성은 돈은 한 푼도 없으면서 무가치한 주식만 엄청나게 가지고 있는 상황이었다. 큰손 투기꾼들은 제때 주식을 판 덕분에 대체로 큰 손실 없이 벗어났지만, 개미들은 모든 것을 잃었다. 자살하는 사람이 속출했다.

 미시시피 버블은 역사상 가장 극적인 금융붕괴 사태였고, 프랑스의 금융 시스템은 결코 완전히 회복되지 못했다. 미시시피 사가 어떤 식으로 정치적 연줄을 이용해 주가를 조작하고 매수 광풍에 불을 질렀는지 백일하에 드러났기 때문에, 대중은 프랑스 은행 시스템과 프랑스 왕의 현명함에 대해 불신했다. 루이 15세는 신용대출을 받기가 점점 더 힘들어졌다. 이것이 해외의 프랑스 제국이 영국의 손에 떨어진 주요한 이유 중 하나였다.

 영국인들은 자금을 저리로 쉽게 빌릴 수 있었던 데 비해, 프랑스인들은 융자를 받기도 어려웠고 높은 이자를 지불해야 했다. 프랑스 왕은 점점 불어나는 빚을 갚기 위해서 점점 더 많은 돈을 더욱더 높은 이자율로 빌려야 했다. 그가 죽자 왕위에 오른(1774년) 손자 루이 16세는 1780년대에 이르러 자신이 파산을 향해 달려가고 있다는 사실을 깨달았다. 연간 예산의 절반이 대출금에 대한 이자 지불금으로 묶여 있었던 것이다. 1789년 그는 마지못해 삼부회(사제,귀족, 제3신분으로 이뤄진 신분제 의회)를 소집한다. 위기의 해법을 찾기 위해 150년 동안 열린 적이 없던 의회를 소집한 것이다. 그리하여 프랑스 혁명이 시작되었다.

 

p460. 자본의 이름으로.

 

 네덜란드의 인도네시아 국유화(1800년), 영국의 인도 국유화(1858년)가 이루어졌지만, 이로 인해 자본주의와 제국의 포옹이 끝났다고는 볼 수 없다. 오히려 양자의 관계는 19세기에 더 끈끈해졌다. 주식회사는 더 이상 민간 식민지를 개척하고 지배할 필요가 없었고, 이제 사장과 대주주들은 런던, 암스테르담, 파리에서 권력의 끈을 조종했다. 이들은 국가가 자신들의 이익을 지키고 뒷배를 봐주리라고 믿고 있었다. 마르크스를 비롯한 사회 비평가들이 빈정댔듯이, ,서구 정부는 자본주의자들의 노동조합이 되어가고 있었다.

 정부가 큰돈을 벌려고 나선 가장 악명 높은 사례가 영국과 중국이 벌인 제1차 아편전쟁(1840~1842)이다. 19세기 전반 영국 동인도회사와 잡다한 영국 사업가들은 마약 수출로 돈을 벌었는데, 특히 중국에 아편을 수출하는 것이 주종이었다. 수백만 명의 중국인이 중독자가 되었고, 나라는 경제적으로나 사회적으로 쇠약해졌다. 1830년대 말 중국 정부는 마약 거래를 금지하고 포고령을 내렸으나 영국 마약 상인들은 법을 완전히 무시했고, 중국 당국은 배에 실려 있던 마약을 압류해 파괴하기 시작했다. 마약 카르텔들은 웨스트민스터와 다우닝 가와 긴밀한 관계를 유지하고 있었다. 실제로 많은 의원과 각료들이 마약 회사의 주식을 보유하고 있었다. 그래서 이들은 정부에게 행동에 나서라는 압력을 넣었다.

 1840년대 영국은 '자유무역'이라는 명목으로 중국에 정식으로 전쟁을 선포했다. 전쟁은 식은 죽 먹기였다. 자신감 과잉이던 중국은 증기선, 대구경 대표, 로켓, 신속발사 소총 같은 영국의 신무기에 상대가 되지 않았다. 이어진 평화조약에서,, 중국은 영국 마약 상인의 활동을 제약하지 않겠다고 약속했고 중국 경찰이 마약 상인에게 끼친 피해도 보상하기로 했다. 더구나 영국은 홍콩의 조차租借를 요구해 통치함으로써 그곳을 안전하게 마약 거래 기지로 계속 사용했다(홍콩은 1997년까지 영국의 통치를 받았다). 19세기 말 중국 인구의 10분의 1에 이르는 약 4천만 명이 마약 중독자였다.

 이집트 역시 영국 자본주의의 힘을 벗어날 수 없었다. 19세기 프랑스와 영국의 투자자들은 이집트의 지배자들에게 거액을 빌려주었는데, 처음에는 수에즈 운하 프로젝트에 자금을 대기 위해서였고 나중에는 이보다 훨씬 성공적이지 않은 다른 사업들에 자금을 대기 위해서였다. 이집트의 빚은 점점 더 많아졌고, 유럽인 채권자들은 이집트 내정에 점점 더 많이 관여했다. 1881년 이집트 민족주의자들은 더 이상 참지 못하고 반란을 일으켰다. 이들은 모든 외국 채무를 갚지 않겠다고 일방적으로 선언했다. 이것이 불쾌했던 빅토리아 여왕은 1년 후 나일강에 육군과 해군을 파견했고, 이집트는 제2차 세계대전 이후까지 영국의 보호령으로 있었다(보호령으로 유지된 기간은 명목상 1914~1922년이었다. 하지만 영국은 수에즈 운하에 계속 군대를 주둔시키며 제2차 세계대전 내내 이집트를 핵심 전략 기지로 삼았다).

 

 투자자의 이익을 위해 치러진 전쟁이 이것들뿐만은 아니었다. 사실 전쟁 자체가 아편처럼 재화가 될 수 있었다. 1821년 그리스인들은 오토만 제국에 반란을 일으켰다. 이 반란은 영국의 자유주의자 및 낭만주의자 무리에게 큰 공감을 불렀다. 시인 바이런 경은 반란군과 함께 싸우기 위해 그리스에 가기까지 했다. 하지만 런던의 금융인들은 여기서 돈벌이 기회를 보앗다. 이들은 반군 지도자들에게 런던 주식거래소에서 그리스 반군 공채를 발행할 것을 제안했다. 그리스는 전쟁에서 승리해 독립을 쟁취하면 이자를 포함해 채권을 갚기로 했다.

 민간인 투자자들은 이윤을 얻기 위해, 혹은 그리스의 명분에 공감해서, 혹은 두가지 이유 모두로 채권을 구매했다. 그리스 반군 채권 가격은 주로 헬라스에서 벌어지는 전투의 승패에 발맞춰 등락을 거듭했다. 점차 터키인들이 우위를 점했다. 반란군의 패배가 눈앞에 다가오자 채권 소유자들은 돈을 잃을 위험헤 직면하게 되었다. 채권 소유자의 이해는 나라의 이해였기에 영국은 국제 함대를 조직했고, 1827년 이 함대는 나바리노 전투에서 오토만 제국의 주력인 소함대를 침몰시켰다. 여러 세기에 걸친 복종을 딛고 그리스는 마침내 자유를 얻었지만, 자유는 엄청난 빚과 함께 왔고 독립 그리스는 이를 갚을 방법이 없었다. 그리스 경제는 향후 수십 년간 영국 채권자들에게 저당 잡힌 신세였다.

 자본과 정치의 힘찬 포옹은 신용시장에서 크나큰 의미가 있었다. 어떤 경제가 지닌 신용의 양은 새로운 유전의 발견이나 새 기계의 발명 같은 순수한 경제적 요인뿐만 아니라 체제 변화나 좀 더 대담한 해외정책 같은 정치적 사건들에 따라서도 달라진다. 나바리노 전투 이후 영국 자본주의자들은 해외의 위험한 거래에 돈을 투자할 용의를 더 많이 나타냈다. 외국의 채무자가 변제를 거부한다면 여왕의 군대가 돈을 받아내주는 것을 보았던 것이다.

 오늘날 한 나라의 신용등급이 천연자원보다 경제적 복지에 미치는 영향이 훨씬 더 큰 이유가 여기에 있다. 신용등급은 그 나라가 부채를 갚을 가능성을 가리킨다. 순수한 경제적 데이터 외에도 정치, 사회, 심지어 문화적 요인을 고려해서 매겨진다. 석유가 풍부한 나라라도 독재 정부에 전쟁이 만연하고 사법 제도가 부패해 있다면 등급이 낮은 것이 보통이다. 그 결과 이 나라는 상대적 빈곤국으로 남아 있을 가능성이 크다. 석유자원을 최대한 활용하는 데 필요한 자본을 모을 수 없기 때문이다. 거꾸로 천연자원이 없더라도 평화를 유지하며, 사법제도가 공정하고, 자유정부를 가진 나라는 신용등급을 높게 받을 가능성이 크다. 그래서 이 나라는 싼 대가로 많은 자본을 모아 좋은 교육제도를 지원하고 하이테크 산업을 육성하는 데 사용할 수 있다.

 

p468

 

 기독교나 나치즘 같은 종교는 불타는 증오심 때문에 수백만 명을 살해했다. 자본주의는 차가운 무관심과 탐욕 때문에 수백만 명을 살해했다. 대서양 노예무역은 아프리카인에 대한 인종적 증오에서 생긴 것이 아니다. 주식을 구매한 개인이나 그것을 판매한 중개인, 노예무역 회사의 경영자는 아프리카인에 대해 거의 생각해본 적이 없었다. 사탕수수 농장 소유자들도 마찬가지였다. 많은 농장주들이 농장에서 멀리 떨어진 곳에 살았고, 그들이 원한 유일한 정보는 손익을 담은 깔끔한 장부였다.

 대서양 노예무역이 그것만 아니라면 흠이 없었을 기록에 새겨진 유일한 오점이 아니었다는 점도 기억해야 한다. 앞장에서 이야기했던 벵골 대기근 역시 이와 비슷한 역학에 의해 유발되었다. 영국 동인도회사는 벵골인 1천만 명의 삶보다 자기 이익에 더 신경을 썼다. 인도네시아에서 네덜란드 동인도회사가 벌인 군사작전에 돈을 댄 것은 자기 자녀를 사랑하고, 자선사업에 돈을 내고, 좋은 음악과 미술을 즐기는 네덜란드의 정직한 시민들이었다. 하지만 이들은 자바, 수마트라, 말라카 주민들이 겪는 고통은 중히 여기지 않았다. 지구의 한켠에서 현대 경제가 성장하는 데는 수없이 많은 범죄아 악행이 뒤따랐다.

 

 19세기에도 자본주의 윤리를 조금도 나아지지 않았다. 유럽을 휩쓴 산업혁명은 은행가와 자본 소유잘르 더욱 부유하게 만들었지만, 수백만 명의 노동자에게는 비참하고 가난한 삶을 선고했다. 유럽 식민지에서는 사태가 더욱 나빴다. 1876년 벨기에의 왕 레오폴드 2세는 중부 아프리카를 탐사하고 콩고 강 유역의 노예무역과 싸우는 것을 사명으로 내건 비정부 인도주의 기구를 설립했다. 기구에는 도로와 학교와 병원을 건설해 해당 지역 주민의 삶의 질을 개선한다는 책임도 주어졌다. 1885년 유럽 열강들은 이 기구에 콩고강 유역 230만 제곱킬로미터의 통제권을 부여하기로 합의했다. 벨기에 국토의 75배에 이르는 그 땅은 이후 콩고 자유국으로 알려지게 되었다. 그곳에 사는 주민 2천만~3천만 명의 의사를 물어본 사람은 아무도 없었다. 인도주의 기구는 눈 깜빡할 사이에 성장과 이윤이 진정한 목적인 기업으로 변했다. 학교와 병원은 잊혔고, 콩고강 유역은 광산과 농원으로 채워졌다. 그 운영은 대부분 벨기에 관리들이 맡았으며, 이들은 현지인을 무자비하게 착취했다.

 고무 산업은 특히 악명 높았다. 고무는 빠른 속도로 중요한 산업 필수품이 되었고, 고무 수출은 벨기에의 가장 중요한 수입원이었다. 고무를 수집하는 아프리카 촌마을 사람들에게는 점점 더 많은 할당량이 주어졌다. 할당량을 채우지 못한 사람에게는 '게으름'을 이유로 잔인한 벌이 주어졌다. 팔을 절단해버리는가 하면 어떤 때는 한 마을 전체를 학살하기도 했다. 가장 보수적으로 추정해도 1885~1908년 성장과 이윤을 추구하는 과정에서 희생된 사람은 6백만 명(콩고 인구의 20퍼센트 이상)에 이르렀다. 일부에선 1천만 명에 육박한다고 추정한다.

 1908년 이후, 특히 1945년 이후 자본주의의 탐욕에는 어느 정도 고삐가 죄어졌는데, 여기에는 공산주의에 대한 두려움이 가장 큰 이유였다. 하지만 불평등은 여전히 만연했다. 2014년의 경제적 파이는 1500년보다 크지만, 분배는 너무나 불공평해서 하루 종일 힘들게 일한 아프리카의 농부와 인도네시아의 노동자가 집에 가져오는 식량은 5백 년 전보다 더 적다. 농업혁명과 마찬가지로, 현대 경제의 성장은 거대한 사기로 드러날지도 모른다. 인류와 세계 경제는 성장을 거듭했을지라도 기아와 궁핍 속에서 살아가는 개인은 더욱 많아졌는지도 모른다. 

 자본주의는 이 같은 비판에 두 가지 대답을 가지고 있다. 첫째, 자본주의는 오직 자본주의자만이 운영할 수 있는 세계를 창조했다. 세상을 다른 방식으로 운영하려 했던 유일하게 진지한 시도는 공산주의였으나, 그것은 거의 모든 면에서 자본주의보다 훨씬 더 나빴기 때문에 다시 시도해볼 배짱이 있는 사람은 아무도 없다. 기원전 8500년의 사람은 농업혁명에 통한의 눈물을 흘렸을 수도 있지만 농업을 포기하기에는 너무 늦어버렸다. 이와 비슷하게 우리는 자본주의를 좋아하지 않을 수도 있지만 그것 없이는 살 수 없다.

 두 번째 대답은 우리가 인내심을 더 많이 가져야 한다는 것이다. 자본주의자들은 천국이 눈앞에 와 있다고 약속한다. 인정하건대, 대서양 노예무역이나 유럽 노동계층 착취 같은 실수가 있었던 것은 사실이다. 하지만 우리는 거기서 교훈을 얻었다. 이제 조금만 더 기다리면, 파이가 좀 더 커지도록 놔두면, 모두에게 좀 더 두꺼운 조각이 돌아갈 것이다. 성과가 평등하게 분배되는 일은 영영 없겠지만, 모든 남자와 여자, 어린이를 만족시킬 만큼 충분히 도아갈 것이다. 심지어 콩고에서도.

 실제로 긍정적인 신호가 조금 보인다. 최소한 순수한 물질적 기준에서는 - 기새수명, 어린이 사망률, 칼로리 섭취 - 2014년 평균적 인간의 생활수준은 1914년에 비해 상당히 나아졌다. 인구가 지수적으로 늘어났음에도 불구하고 그렇다. 하지만 경제적 파이가 무한히 커질 수 있을까? 모든 파이에는 원자재와 에너지가 필요하다. 어두운 결말을 예언하는 사람들은 호모 사피엔스가 조만간 우리 지구의 원자재와 에너지를 고갈시킬 것이라고 경고한다. 그러면 어떻게 될까?

 

p481

 화학자들이 알루미늄을 발견한 것은 1820년대였지만, 광석에서 이것을 분리해내기는 극도록 힘들었고 비용이 많이 들었다. 수십년간 알루미늄은 금보다 더 비쌌다. 1860년대 프랑스의 나폴레옹 3세 황제는 가장 신분이 높은 손님들 앞에는 알루미늄 식기를 놓으라고 지시했다. 그보다 신분이 떨어지는 사람들 앞에는 금으로 된 나이프와 포크가 놓였다. 하지만 19세기 말 화학자들이 막대한 양의 알루미늄을 값싸게 추출하는 방법을 알아냈고, 오늘날 연간 총 생산량은 3천만 톤에 이른다. 만일 나폴레옹 3세가 자기 백성의 후손들이 샌드위치를 싸거나 남은 음식을 가져갈 때 값싼 알루미늄 호일을 사용한다는 이야기를 듣는다면 정말 놀랄 것이다.

 

 제1차 세계대전 중 독일은 봉쇄를 당해 심각한 원자재 난을 겪었다. 특히 화약을 비롯한 폭발물의 원료가 되는 초석이 부족했다. 가장 중요한 초석 산지는 칠레와 인도에 있었고, 독일 내에서는 전혀 생산되지 않았다. 사실 초석은 암모니아로 대체할 수 있지만 생산 단가가 비싸기는 마찬가지였다. 독일에게는 다행스럽게도, 독일 시민이었던 유대인 화학자 프리츠 하버가 1908년 말 그대로 공기에서 암모니아를 생산해내는 공정을 발견했다. 전쟁이 발발했을 때 독일은 하버의 발견을 이용해 화약을 산업적으로 생산하기 시작했다. 이때의 원자재는 공기였다. 하버의 발견이 없었더라면 독일은 1918년 11월 이전에 항복했을 것이라고 일부 학자들은 주장한다. 하버는 이 발견으로 1918년 노벨상을 수상했다. 화학상이었지만 평화상은 아니다(하버는 전쟁터에서 독가스를 사용하는 분야의 개척자기이도 하다).

 

p509

 현대사회에서도 핵가족은 완전히 사라지지 않았다. 국가와 시장은 경제적, 정치적 역할의 대부분을 가족에게서 빼앗으면서도 일부 중요한 감정적 기능은 남겨두었따. 현대 가족은 국가와 시장이(아직은) 제공할 수 없는 사적인 욕구를 제공하기로 되어 있다. 하지만 가족은 심지어 이 영역에서도 점점 더 많은 개입을 겪고 있다. 시장이 사람들의 연애 및 성생활 방식에 미치는 영향이 점점 더 커지고 있는 것이다. 전통적으로는 가족이 중매쟁이 역할을 맡았지만, 오늘날 연애와 성적 신호를 조종하고 그것을 얻도록 도와주는 것은 시장이다.

 다만 그 비용이 비싸다. 옛날에는 신랑과 신부는 집 안의 거실에서 만났고, 한쪽 아버지에게서 다른 쪽 아버지로 돈이 건네졌다. 오늘날 연애는 술집과 카페에서 이루어지고, 돈은 연인의 손에서 웨이트리스에게 건네진다. 이보다 더 많은 돈이 패션 디자이너, 헬스 클럽 매니저, 다이어트 전문가, 미용사, 성형외과 의사의 은행계좌로 건너간다. 이들 모두는 우리가 시장이 제시하는 미의 이상에 가급적 가장 가까운 모습을 하고서 카페ㅔ 도착하다록 도와준다. 

 국가 역시 가족관계를 예전보다 더 예리하게 주시하고 있는데, 특히 부모와 자식 간의 관계에 주목한다. 부모에게는 아이들을 정부의 학교에 보내 교육받게 할 의무가 있다. 특별히 아이를 학대하거나 폭력을 행사하는 부모는 국가의 저지를 당할 수 있다. 필요한 경우 국가는 심지어 부모를 감옥에 보내고 아이들을 다른 가정에 위탁할 수도 있다.

 불과 얼마 전까지만 해도 부모가 자녀를 때리거나 모욕하지 못하도록 국가가 나서야 한다고 누가 주장했다면 말도 안 되고 실행 불가능하다는 이유에서 무시당했을 것이다. 대부분의 사회에서 부모의 권위는 신성한 것으로 간주되었다. 부모에 대한 존경과 복종은 가장 신성한 가치에 속했고, 부모는 거의 모든 행위를 원하는 대로 할 수 있었다. 신생아를 살해하거나, 아기를 노예로 팔거나, 딸을 나이가 두 배가 넘는 남자와 결혼시키는 것이 모두 가능했다. 오늘날 부모의 권위는 완전히 후퇴했다. 젊은이들은 연장자의 말을 따를 의무가 점점 줄고 있고, 이에 비해 부모들은 자녀의 삶에서 무엇이든 잘못된 것이 있으면 비난을 받는다. 엄마와 아빠는 스탈린 치하의 여론조작용 재판에 출석한 피고인처럼, 프로이트의 법정에서 비난을 받는 곤경에 처하게 되었다.

 

p515

 지난 2세기에 걸쳐 일어난 혁명들은 워낙 빠르고 과격한 나머지 사회질서의 가장 근본적인 특성 대부분을 변화시켰다. 전통적으로 사회질서는 단단하고 고정된 무엇이었다. '질서'는 안정성과 연속성을 의미했다. 급격한 사회혁명은 예외였고, 대부분의 사회 변화는 수많은 작은 단계가 축적된 결과였다. 사람들은 사회구조란 확고하고 영원하다고 가정하는 경향이 있었다. 가족과 공동체가 그 질서 내에서 자신이 차지하는 위치를 변화시키려 분투할 수는 있었지만, 스스로 질서의 근본구조를 바꿀 수 있다는 발상은 낯선 것이었다. 사람들은 "이것은 과거에도 늘 그랬고 앞으로도 늘 이렇게 이어질 거야"라고 선언하면서 현재 상태를 어쩔 수 없는 것으로 받아들이는 경향이 있었다.

 지난 2세기 동안 변화의 속도는 너무나 빨랐고, 그런 나머지 사회질서는 동적이고 가변적이라는 속성을 지니게 되었다. 이제 그것은 끊임없이 변화하는 상태로 존재한다. 현대의 혁명이라고 하면 우리는 1789년(프랑스 혁명), 1848년(유럽의 연쇄적 민주화 혁명), 혹은 1917년(러시아 혁명)을 생각하는 경향이 있지만, 정확히 말하자면 오늘날은 모든 해가 혁명적이다. 요즘은 심지어 30세밖에 되지 않은 사람도 십대를 향해 "내가 어렸을 때는 세상이 지금과 완전히 달랐어"라고 말할 수 있다. 십대는 그 말을 믿지 않겠지만, 그 말은 사실이다. 예컨대 인터넷이 널리 쓰이게 된 것은 1990년 초반에 이르러서였다. 불과 20년밖에 되지 않은 일이다. 오늘날 우리는 인터넷 없는 세상은 상상할 수가 없다.

 그러므로 현대사회의 속성을 규정하려는 모든 시도는 카멜레온의 색을 규정하려는 것과 비슷하다. 우리가 확신할 수 있는 유일한 속성은 끊임없는 변화다. 우리는 여기에 익숙해져, 대부분의 사람들은 사회질서를 바뀔 수 있는 무엇, 우리가 마음대로 가공하고 개선할 수 있는 무엇이라고 생각한다. 현대 이전 지배자들의 주된 약속은 전통적 질서를 수호하겠다거나 심지어 잃어버린 모종의 황금시대로 돌아가겠다는 것이었지만, 지난 2세기 동안 정치에서는 구세계를 파괴하고 그 자리에 더 나은 것을 건설하겠다고 약속하는 것이 기본이었다. 가장 보수적인 정당조차 현상을 그대로 유지하겠다고만 약속하지는 않는다. 모든 사람이 사회 개혁, 교육 개혁, 경제 개혁을 약속하고, 어떤 때는 공약을 실천하기도 한다.

 

p518. 우리 시대의 평화.

 

 대부분의 사람들은 우리가 얼마나 평화로운 시대에 살고 있는지에 대해 정당하게 평가하지 않는다. 우리 중에 천 년 동안 살아온 사람은 아무도 없으니, 과거 세상이 얼마나 폭력적이었는지를 쉽게 망각한다. 그리고 전쟁이 점점 드물어질수록 한 번 발발하면 더욱 많은 관심을 끈다. 브라질 사람과 인도 사람이 누리는 평화를 떠올리는 사람보다 오늘날 아프가니스탄과 이라크에서 벌어지고 있는 전쟁을 생각하는 사람이 더 많다.

 이보다 더욱 중요한 사실이 있다. 우리는 집단 전체보다 개인의 고통에 더욱 쉽게 공감할 수 있다는 점이다. 하지만 거시적 역사 과정을 이해하려면, 개인의 이야기보다 대중의 통계를 검토할 필요가 있다. 2000년에 전쟁으로 인한 사망자는 31만 명, 폭력 범죄로 인한 사망자는 이와 별도로 52만 명이었다. 개별 희생자는 한 명 한 명이 하나의 파괴된 세계이고, 파탄 난 가정이며, 친구와 친척이 평생 안고 살아야 할 상처다. 하지만 거시적 시각에서 보면, 이 83만 명은 2000년의 총 사망자 5,600만 명에서 1.5퍼센트를 차지할 뿐이다. 그해에 자동차 사고로 인한 사망자는 126만 명(총 사망자의 2.25퍼센트), 자살로 인한 사망자는 81만 5천 명(1.45퍼센트)이었다. 2002년의 수치는 더욱 놀랍다. 총 사망자 5,700만 명 중에서 전쟁으로 인한 사망자는 17만 2천 명, 폭력 범죄로 인한 사망자는 56만 9천 명에 불과했다(인간의 폭력에 의한 전체 사망자는 74만 1천 명이었다). 이와 대조적으로 자살자는 87만 3천 명에 이르렀다. 9.11 테러가 일어난 다음 해라 테러와 전쟁에 대한 이야기가 많았음에도 불구하고 한 개인을 죽이는 것은 테러리스트나 군인, 마약상이 아니라 본인 스스로일 가능성이 컸던 것이다.

 오늘날 세계 대부분의 지역에서 사람들은 잠자리에 들면서 한밤중에 이웃 부족이 자기 마을을 둘러싸고 모두를 학살할지 모른다는 두려움을 품지 않는다. 부유한 영국 시민은 녹색 옷을 입은 명랑한 강도들이 자신을 습격해 돈을 빼앗아 가난한 자들에게 나눠줄지도 모른다는 두려움 없이 노팅엄에서 셔우드 숲을 지나 런던으로 매일 여행한다. 학생들은 선생의 채찍질을 견디지 않으며, 아이들은 부모가 청구서의 돈을 내지 못해 노예로 팔릴 것을 두려워할 필요가 없다. 여성들은 남편이 자신을 때리거나 외출을 막는 것을 법이 금지한다는 사실을 알고 있다.

 세계 도처에서 이런 기대는 점점 더 많이 현실이 되어가고 있다. 폭력이 감소한 것은 대체로 국가의 등장 덕분이다. 역사를 통틀어 대부분의 폭력은 가족과 공동체가 서로 일으키는 국지적 반목의 원인이었다. 앞서 살펴보았듯이 지역 공동체보다 큰 정치 조직을 알지 못했던 초기 농부들은 만연하는 폭력으로 고통받았다.

 왕국과 제국이 강력해지면서 공동체의 고삐를 죄자, 폭력은 줄어들었다. 중세 유럽의 지방분권형 왕국의 경우 해마다 인구 10만 명당 20~40명이 살해되었으나, 최근 몇십 년간 국가와 시장이 무소불위의 힘을 얻고 공동체가 소멸하자 폭력의 발생률은 아주 낮아졌다. 오늘날 세계 평균을 보면 연간 10만 명당 피살자는 아홉 명에 지나지 않는다. 그리고 대부분의 살인은 소말리아나 콜롬비아 같은 취약한 국가에서 발생한다. 유럽의 중앙집권적 국가에서는 평균 살인사건 발생률이 연간 10만 명당 한 명에 불과하다.

 국가가 권력을 이용해서 자국민을 살해하는 경우가 있다는 것은 분명하며, 이런 사례가 우리의 기억과 두려움에 크게 다가올 때도 종종 있다. 20세기에 자국의 보안 병력에 의해 살해된 국민은 수억 명은 아니지만 수천만 명에 이른다. 그럼에도, 거시적으로 볼 때 국가가 운영하는 법원과 경찰 덕분에 세계 전체의 안전 수준은 아마 높아졌을 것이다. 심지어 가혹한 독재정권 아래일지라도, 어떤 사람이 다른 사람의 손에 목숨을 잃을 가능성은 현대 이전에 비해 훨씬 낮아졌다.

 1964년 브라질에서 군사 독재정권이 수립되었다. 그 통치는 1985년까지 계속되었다. 그 20년 동안 수천 명의 브라질인이 정권에 의해 살해되었고, 또 다른 수천 명이 투옥되고 고문을 당했다. 하지만 이 정권 최악의 시기에도 평균적인 리우데자네이루 시민이 다른 사람의 손에 죽을 확률은 와오라니, 아라웨테, 야노마뫼 족의 평균보다 훨씬 더 낮았다. 아마존 밀림 깊은 곳에 사는 이들 토착민에게는 군대도 경찰도 감옥도 없다. 인류학적 연구에 따르면 이 종족 남성의 4분의 1에서 2분의 1가량은 이르든 늦든 재산이나, 여성, 특권을 두고 벌어진 폭력적 충돌로 인해 사망한다. 

 

p526

 이처럼 행복한 진전을 설명하기 위해서, 학자들은 우리가 결코 읽어볼 엄두가 나지 않을 정도로 많은 책과 논문을 써서 이 현상에 기여하는 요인을 몇 가지 확인했다.

 첫 번째이자 다른 무엇보다, 전쟁의 대가가 극적으로 커졌다. 모든 평화상을 종식시킬 노벨 평화상은 원자폭탄을 개발한 로버트 오펜하이머와 그의 동료들에게 주어졌어야 할 것이다. 핵무기는 초강대국 사이의 전쟁을 집단 자살로 바꾸어놓았으며, 군대의 힘으로 세계를 지배하려는 시도를 불가능하게 만들었다.

 둘째, 전쟁의 비용이 치솟은 반면 그 이익은 작아졌다. 역사상 대부분의 기간 동안 정치조직체들은 적의 영토를 약탈하거나 병합함으로써 부를 획득할 수 있었다. 대부분의 부는 들판과 가축, 노예와 금 같은 물질적인 것이었기 때문에 약탈이나 점령이 쉬웠다. 오늘날 부는 주로 인적 자본과 조직의 노하우로 구성된다. 그 결과 이것을 가져가거나 무력으로 정복하기가 어려워졌다. 캘리포니아를 생각해보자. 처음에 그 부의 원천은 금광이었지만, 오늘날은 실리콘과 셀룰로이드를 기반으로 하고 있다. 실리콘밸리와 할리우드의 영화 산업 말이다. 만일 중국이 캘리포니아를 침공해 샌프란시스코 해변에 1백만 명의 병사를 상륙시키고 내륙으로 돌격한다면 어떤 일이 일어날까? 이들이 얻을 것은 별로 없다. 실리콘밸리에는 실리콘 광산이 없다. 부는 구글의 엔지니어들과 할리우드의 대본가, 감독, 특수효과 전문가의 마음속에 있다. 이들은 중국의 탱크가 선셋대로에 진입하기 전에 인도의 방갈로르나 뭄바이로 향하는 첫 비행기에 몸을 싣고 있을 것이다.

 가령 이라크의 쿠웨이트 침공처럼 아직도 세상에서 벌어지는 몇 안 되는 국제적 전면전이 구식의 물질적 재화가 부의 척도인 지역에서 벌어진다는 사실은 우연이 아니다. 쿠웨이트의 왕족들은 해외로 달아날 수 있지만, 유전은 그대로 남아 점령되었다. 전쟁의 이익이 전만 못해진 데 비해, 평화는 과거 어느 때보다도 수익성이 좋아졌다. 전통 농업 경제체제에서 장거리 교역과 해외 투자는 부차적인 일이었다. 따라서 전쟁 비용을 피하는 것을 차치하면, 평화는 그다지 수익을 낳지 못했다. 만일 1400년 프랑스와 영국이 평화 관계였다면, 프랑스인들은 무거운 세금을 내지 않아도 되었을 것이고 영국 침략군의 파괴에 고통받지도 않았을 것이다. 하지만 이것을 제외하면 평화가 딱히 프랑스인들의 지갑을 불려주지는 못했을 것이다.

 현대 자본주의 경제체제에서 대외 교역과 투자는 매우 중요해졌다. 그러므로 평화는 훌륭한 배당이익을 낳는다. 중국과 미국이 평화를 유지하는 한, 중국인들은 미국에 제품을 파고 월스트리트에서 거래하며 미국의 투자를 받아서 번영할 수 있다.

 마지막 요인은 세계 정치 문화에 지각변동이 일어났다는 점이다. 역사상 많은 엘리트들은 - 예컨대 훈 족장, 바이킹 귀족, 아즈텍 사제 - 전쟁을 긍정적인 선으로 보았다. 한편 다른 사람들은 악으로 보기는 했지만 필요악으로 여겼으므로, 자신에게 유리하도록 바꾸는 편이 낫다고 생각했다. 우리 시대는 평화를 사랑하는 엘리트가 세계를 지배하는 역사상 최최의 시대다. 정치인, 사업가, 지식인, 예술가 등은 진심으로 전쟁을 막을 수 있는 악이라고 본다(과거에도 초기 기독교도와 같은 평화주의자가 있기는 했지만, 이들도 드물게 권력을 잡은 경우 "너의 왼뺨을 내밀어라"는 주문을 잊어버리는 경향이 있었다).

 

 세 요인 사이에는 양의 되먹임 고리가 존재한다. 핵무기에 의한 대량학살 위협은 평화주의를 육성한다. 평화주의가 퍼지면 전쟁이 물러가고 무역이 번창한다. 무역은 평화의 수익과 전쟁의 비용을 모두 늘린다. 세월이 흐르면서 이 되먹임 고리는 전쟁에 또 다른 장애물을 만들어내는데, 궁극적으로는 이것이 모든 장애 중 가장 중요한 것으로 판명될지도 모른다. 점점 치밀해지는 국제적 연결망은 국가들의 독립성을 서서히 약화시켜, 어느 한 나라가 일방적으로 전쟁을 일으킬 가능성을 줄인다. 대부분의 국가들이 더 이상 전면전을 벌이지 않는 이유는 단지 그들이 이제 독립적이지 못하기 때문이다. 비록 이스라엘, 이탈리아, 멕시코, 타이 국민들이 독립성이라는 환상을 품고 있을지라도, 사실 그들의 정부는 독립적인 경제, 외교 정책을 수행할 수 없으며 혼자 힘으로는 전면전을 수행할 능력이 없는 것도 확실하다. 3장 <제국의 비전>에서 설명했듯, 우리는 지구 제국의 형성을 목격하고 있는 중이다. 이전의 제국들과 마찬가지로 이번 제국 역시 그 국경 내에서 평화를 강제한다. 그리고 그 국경이 지구 전체를 아우르기 때문에, 세계 제국은 세계 평화를 효과적으로 강제한다.

 

 자, 그렇다면 현대는 제1차 세계대전의 참호와 히로시마의 버섯 구름과 히틀러와 스탈린이라는 잔악한 광인들로 대표되는 무분별한 대량학살, 전쟁, 압제의 시대인가? 아니면 남미에서 파인 적 없는 참호, 모스크바와 뉴욕에서 피어오르지 않은 버섯구름, 마하트마 간디와 마틴 루서 킹의 평화로운 얼굴로 대표되는 평화의 시대인가? 여기에 대한 답은 시기 선택의 문제다. 과거에 대한 우리의 시각이 최근 몇 년간의 사건에 의해 얼마나 크게 왜곡되는지를 깨닫는 것은 정신이 번쩍 드는 일이다. 만일 이 장이 1945년이나 1962년에 쓰였다면, 지금보다 훨씬 더 분위기가 어두웠을 것이다. 이 책은 2014년에 쓰였기에 현대사에 대해 상대적으로 밝은 접근법을 취하고 있는 것이다.

 낙관주의자와 비관주의자 모두를 만족시키기 위해서는 다음과 같이 결론 내릴 수도 있겠다. 우리는 천국과 지옥으로 나뉘는 갈림길에 서 있다. 한쪽으로 난 문과 다른 쪽으로 열린 입구 사이에서 초조하게 오락가락하고 있다. 역사는 우리의 종말에 대해 아직 결정 내리지 않았으며, 일련의 우연들은 우리를 어느 쪽으로도 굴러가게 만들 수 있다.

 

p532

 

 행복의 장기적 역사를 연구한 사람은 드물지만, 거의 모든 학자와 보통 사람이 여기에 대해 막연한 선입견을 가지고 있다. 흔히들 역사가 지속되는 기간 동안 인간의 능력은 계속 커졌다고 생각한다. 인간은 불행을 줄이고 자신의 소망을 충족하는 일에 능력을 사용하는 것이 일반적이므로, 그렇다면 우리는 중세 시대의 선조에 비해 틀림없이 행복할 것이다. 또한 중세 사람은 석기시대 수렵채집인보다 틀림없이 행복했을 것이다. 하지만 이런 진보적 설명은 설득력이 없다. 익히 아는 바대로 새로운 재능, 행태, 기술이 반드시 더 나은 삶을 만들어주는 것은 아니다. 인류가 농업혁명에서 농경을 배웠을 때, 집단으로서 이들이 환경을 바꾸는 힘은 커졌을지 모르지만 수많은 개인의 삶은 더 팍팍해졌다.

 농부들은 수렵채집인보다 열심히 일해야 했지만, 먹는 음식은 영양가도 더 적었고 근근이 버틸 양밖에 되지 않았다. 그리고 질병과 착취에 훨씬 더 많이 노출되었다. 이와 비슷한 예로, 유럽 제국의 확대는 아이디어와 기술과 농작물을 이동, 순환시키고 새로운 상업로를 개척한 덕분에 인류의 집단적 힘을 크게 늘렸다. 하지만 수백만 명의 아프리카인, 아메리카 원주민, 호주 원주민에게는 좋은 소식이 아니었다.

 인간이 권력을 남용하는 경향이 있다는 사실은 이미 증명되어 있다. 이를 감안하면 사람들이 더 많은 영향력을 누리면 더 행복해질 것이라고 생각하는 것은 순진한 태도로 보인다. 이 견해에 반대하는 사람 중 일부는 정반대 입장을 취하여, 인간의 능력과 행복 사이에는 역관계가 존재한다고 말한다. 권력은 부패하게 마련이며, 인류가 점점 더 많은 힘을 갖게 될수록 우리의 진정한 욕구와는 동떨어진 차가운 기계적 세상이 만들어졌다는 것이다.

 그들에 따르면, 진화의 결과 우리의 마음과 신체는 수렵채집인의 삶에 맞도록 주조되었다. 그러나 우리가 처음에 농업으로, 그다음에 산업으로 이행한 탓에, 우리는 부자연스러운 삶을 살 수밖에 없다는 선고를 받았다. 타고난 성향과 본능을 모두 표현할 수 없으므로 가장 깊은 욕구를 만족시킬 수 없는 삶이라는 것이다. 도시 중산층의 안락한 삶을 이루는 어떤 것도 매머드 사냥에 성공한 수렵채집인 무리가 경험한 흥분의 도가니와 형언할 수 없는 기쁨에 근접할 수 없다. 새로운 발명이 하나씩 이루어질 때마다 우리는 에덴의 낙원으로부터 몇 킬로미터씩 떨어질 뿐이다.

 하지만 이처럼 모든 발명의 뒤에서 어두운 그림자만을 보려는 낭만적 고집은 진보가 필연이라는 믿음에 못지않게 교조적이다. 우리는 우리 내면의 수렵채집인과 접촉이 끊겼을지도 모르지만, 그게 꼭 나쁘기만 한 것은 아니다. 예컨대 지난 2세기 동안 발전한 현대 의학 덕분에 어린이 사망률은 33퍼센트에서 5퍼센트 이하로 떨어졌다. 이 사실이 의학이 발달하지 않았더라면 사망했을 어린이 본인뿐 아니라 그 가족과 친구들의 행복에 엄청나게 기여했다는 것을 의심할 사람이 과연 있을까?

 이보다 좀 더 미묘한 것은 중도를 취하는 입장이다. 과학혁명이 일어나기 전에는 권력과 행복 간에 분명한 상관관계가 없었다. 중세 농부는 실제로 그들의 수렵채집인 조상보다 더욱 비참하게 살았을지 모른다. 하지만 지난 몇 세기 동안 인류는 스스로의 능력을 더욱 현명하게 사용하는 법을 배웠다. 현대 의학의 승리는 한 예에 불과하고, 이외에도 전대미문의 성취가 많다. 폭력은 급격히 줄었고, 국제전은 사실상 사라졌으며, 대규모 기근은 거의 자취를 감추었다.

 하지만 이 또한 과도한 단순화다. 첫째, 낙관적 평가의 표본으로 삼은 기간이 너무 짧다. 인류 대다수가 현대 의학의 결실을 누리기 시작한 것은 1850년 이후의 일이고, 어린이 사망률이 급격하게 떨어진 것은 20세기에 일어난 현상이다. 대규모 기근은 20세기 중반까지도 상당 지역에 큰 피해를 입혔다. 1958~1961년 중국 공산당의 대약진운동 당시 1천만~5천만 명이 굶어 죽었다. 국제전이 드물어진 것은 1945년 이후에 와서였는데 대체로 핵무기로 인해 인류가 절멸할 위협이 새로 등장한 덕분이었다. 따라서 판단하기에는 아직 이르다. 최근 몇십 년이 인류에게 전대미문의 황금시대였지만, 이것이 역사의 흐름이 근본적으로 바뀐 것을 대변하는 현상인지 아니면 단명할 행운의 회오리바람에 불과한지 말하기는 이르다. 우리는 현대성을 판단할 때 21세기 서구 중산층의 시각을 취하려는 유혹을 크게 느끼지만, 우리는 19세기 웨일스의 광산 노동자, 중국의 아편 중독자, 태즈메이니아 원주민의 시각을 잊어서는 안 된다. 원주민 트루가니니는 호머 심슨보다 그 중요성이 덜하지 않다.

 둘째, 지난 반세기는 짤막한 황금시대였는데 이것조차 미래에 파국을 일으킬 씨를 뿌린 시기였다는 사실이 나중에 확인될지도 모른다. 지난 몇십 년간 우리는 지구의 생태적 균형을 수없이 많은 새로운 방법으로 교란해왔으며, 이것이 끔찍한 결과를 빚고 있는 중인 듯하다. 우리가 무모한 소비의 잔치를 벌이면서 인류 번영의 기초를 파괴하는 중이라는 사실을 가리키는 증거는 많다.

 결론적으로, 우리는 다른 모든 동물의 운명을 깡그리 무시할 때만 현대 사피엔스가 이룩한 전례 없는 성취를 자축할 수 있다. 우리는 스스로를 질병과 기근으로부터 보호해주는 물질적 부를 자랑하지만, 그중 많은 부분은 실험실의 원숭이, 젖소, 컨베이어 벨트의 병아리의 희생 덕분에 축적된 것이다. 지난 2세기에 걸쳐 수백억 마리의 동물들이 산업적 착취체제에 희생되었으며, 그 잔인성은 지구라는 행성의 연대기에서 전대미문이었다. 만일 우리가 동물권리 운동가들의 주장을 10분의 1만이라도 받아들인다면, 현대의 기업농은 역사상 가장 큰 범죄를 저지르는 중이라고 말해도 지나치지 않다. 지구 전체의 행복을 평가할 때 오로지 상류층이나 유럽인이나 남자만을 대상으로 하는 것은 잘못이다. 인류만의 행복을 고려하는 것도 마찬가지로 잘못일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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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현실이 그와 같다면, 심지어 영원한 생명도 불만으로 이어질 수 있다. 한번 상상해보자. 모든 질병을 고치는 치료법, 노화를 효과적으로 막아주는 요법, 젊음을 영원히 유지하는 회춘요법 등을 찾아냈다고 하자. 그 직접적인 결과는 분노와 불안이 사상 유례없이 광범위하게 일어나는 현상일 것이다. 새로운 기적의 요법을 받을 돈이 없는 사람 - 대다수의 사람 - 들은 격렬한 분노에 휩싸일 것이다. 역사를 통틀어 가난하고 압박받는 사람들이 스스로를 위안해온 것은 적어도 죽음만은 누구에게나 공평하게 찾아온다는 믿음이었다. 부자나 권력자도 죽을 수밖에 없다는 사실이었다. 가난한 사람들은 자신들은 죽어야 하는데 부자는 영원히 젊고 아름답게 살 수 있다는 생각에 마음이 편치 않을 것이다.

 하지만 새로운 요법을 받을 경제적 여유가 있는 극소수의 사람들도 그렇게 희열을 느끼지는 않을 것이다. 걱정해야 할 일이 많이 생길 것이기 때문이다. 새로운 요법이 생명과 젊음을 연장해줄 수는 있지만, 시체를 되살리지는 못한다. 나와 내 사랑하는 이가 영원히 살 수는 있지만 트럭에 치이거나 테러리스트에 의해 산산조각이 나지 않는다는 조건하에서만 그렇다고 생각해보라. 얼마나 끔찍하겠는가. 영원히 살 수 있는 잠재력이 있는 사람들은 심지어 아주 조그만 위험을 무릅쓰는 것도 몹시 싫어하게 될 것이며, 배우자나 자녀, 친한 친구를 잃는 데 따르는 고통을 견딜 수 없게 될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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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그 결과, 대부분의 종교와 철학은 행복에 대해 자유주의와는 매우 다른 접근법을 취했다. 불교의 입장은 특히 흥미롭다. 불교는 행복의 문제를 다른 어떤 종교나 이념보다도 중요하게 취급했다. 불교도들은 지난 2,500년에 걸쳐 행복의 본질은 무엇인가, 무엇이 행복을 가져다주는가를 체계적으로 연구했다. 과학자들 사이에서 불교 철학과 명상법에 대한 관심이 점점 커져가는 이유가 여기에 있다. 행복에 대한 불교의 접근방식은 생물학적 접근방식과 기본적 통찰의 측면에서 일치한다. 즉, 행복은 외부 세계의 사건에서 오는 것이 아니라 신체 내부에서 일어나는 과정의 결과라는 것이다. 하지만 동일 한 통찰에서 시작했음에도, 불교는 생물학과는 매우 다른 결론에 도달한다.

 불교에 따르면, 대부분의 사람들은 행복을 즐거운 감정과, 고통을 불쾌한 감정과 동일시한다. 그래서 자신의 느낌을 매우 중요히사며, 점점 더 많은 즐거움을 추구하는 한편 고통을 피하려고 한다. 우리가 살아가면서 하는 모든 일은 다리를 긁든 의자에서 꼼지락 거리든, 세계대전을 치르든 모두 그저 즐거운 감정을 느끼기 위한 시도에 지나지 않는다.

 문제는 우리의 감정이 바다의 파도처럼 매 순간 변화하는 순간적 요동에 지나지 않는다는 데 있다. 5분 전에 나는 즐겁고 결의에 차 있었지만, 지금 나는 슬프고 낙담해 있다. 그러므로 만일 내가 즐거운 감정을 경험하고 싶다면, 불쾌한 감정을 몰아내면서 즐거운 감정을 끊임없이 추구해야 한다. 설령 한 번 그러는 데 성공했다 해도 곧바로 모든 것을 다시 시작해야 한다. 그간의 노고에 대한 보상은 전혀 없다.

 그토록 덧없는 보상을 받는 것이 뭐가 그리 중요한가? 나타나자마자 곧바로 사라지는 무언가를 달성하기 위해서 그토록 힘들게 분투할 필요가 무엇인가? 불교에서 번뇌의 근원은 고통이나 슬픔에 있지 않다. 심지어 덧없음에 있는 것도 아니다. 번뇌의 진정한 근원은 이처럼 순간적인 감정을 무의미하게 끝없이 추구하는 데 있다. 이 때문에 우리는 항상 긴장하고, 동요하고, 불만족스러운 상태에 놓인다. 이런 것을 추구하기 때문에 우리 마음은 결코 만족하지 못하고, 기븜을 느낄 때조차 만족스럽지 않다. 기쁜 감정이 금방 사라져버릴 것이 두렵고, 이 감정이 이어져 더 강해지기를 갈망하기 때문이다.

사람들이 번뇌에서 벗어나는 길은 이런저런 덧없는 즐거움을 느끼는 것이 아니라 이 모든 감정이 영원하지 않다는 속성을 이해하고 이에 대한 갈망을 멈추는 데 있다. 이것이 불교 명상의 목표이다. 명상을 할 때는 자신의 몸과 마음을 깊이 관찰하여 모든 감정이 끊임없이 일어나고 사라지는 것을 목격하며, 그런 감정을 추구하는 것의 덧없음을 깨달아야 한다. 그런 추구를 중단하면 마음은 느긋하고, 밝고, 만족스러워진다. 즐거움, 분노, 권태, 정욕 등 모든 종류의 감정은 계속해서 일어나고 사라지지만, 일단 당신이 특정한 감정에 대하 추구를 멈추면 어떤 감정이든 있는 그대로 받아들일 수 있게 된다. 어쩌면 일어났을지도 모르는 무언가를 공상하는 대신에 지금 이 순간을 사는 것이다. 그 결과 완전한 평정을 얻게 된다.


 평생 미친 듯이 쾌락을 찾아 헤매던 사람들은 상상조차 할 수 없는 수준의 평정이다. 그런 사람은 바닷가에 수십 년간 서 있으면서 모종의 '좋은' 파도를 받아들여 그것이 흩어져버리지 못하도록 애쓰는 동시에 모종의 '나쁜' 파도는 밀어내어 자신에게 가까이 오지 못하게 만들려고 애쓰는 사람과 마찬가지다. 이 사람은 날이면 날마다 해변에 서서 무익한 노력을 거듭하면서 스스로의 마음을 괴롭힌다. 그러다 마침내 그는 모래에 주저앉아, 파도가 마음대로 오고 가게 놔둔다. 얼마나 평화로운가!

 현대의 자유주의적 문화의 입장에서 이런 사랑은 너무나 낯설었다. 그래서 서구의 뉴에이지 운동은 불교의 통찰을 처음 대했을 때 이를 자유주의적 용어로 바꿔버렸다. 완전히 꺼꾸로 받아들인 것이다.   

 뉴에이지 문화는 주로 이렇게 주장했다. "행복은 외적인 조건에 좌우되는 것이 아니다. 오로지 우리 내면의 느낌에 좌우되는 것이다. 부나 지위와 같은 외적 성취에 더 이상 매달리지 말고 내면의 느낌에 귀를 기울여야 한다." 혹은 보다 간결하게 이렇게 주장했다. "행복은 내부에서 시작된다." 이것은 생물학자들의 주장과 정확히 일치하는 슬로건이다. 하지만 부처의 가르침과는 거의 반대라고 할 수 있다. 행복이 외적 조건에 달려 있지 않다고 하는 점에서 부처의 생각은 현대 생물학이나 뉴에이지 운동과 궤를 같이하지만, 부처의 가장 심원하고 중요한 통찰은 따로 있다. 진정한 행복은 주관적 느낌이나 감정과도 무관하다는 점이다. 사실 우리가 스스로의 주관적 느낌을 중요하게 여기면 여길수록 우리는 더 많이 집착하게 되고, 괴로움도 더욱 심해진다. 부처가 권하는 것은 우리가 외적 성취의 추구뿐 아니라 내 내면의 느낌에 대한 추구 역시 중단하는 것이다.

 

 요약하자면, 주관적 안녕을 묻는 설문은 우리의 안녕을 주관적 느낌과 동일시하고, 행복의 추구를 특정한 감정 상태의 추구와 동일시한다. 많은 전통철학과 불교를 비롯한 종교는 이와 반대되는 입장을 취한다. 행복을 얻는 비결은 자신의 진실한 모습을 - 자신이 정말로 어떤 사람인지를 - 파악하는 데 있다는 것이다. 대부분의 사람들은 스스로의 감정, 호불호를 자신과 동일시하는데, 이는 잘못이다. 이들은 분노를 느끼면 '나는 화가 났다. 이것은 나의 분노다'라고 생각한다. 그래서 그들은 어떤 감정을 피하고 또 다른 감정을 추구하느라 일생을 보낸다. 그들은 자신과 자신의 감정은 다르다는 것을 알지 못한다. 특정한 감정을 끈질기게 추구하는 행위는 자신을 고통스럽게 만드는 함정이라는 사실도 모른다.

 만일 이것이 사실이라면, 행복의 역사에 대한 우리의 이해 전체는 오도된 것일 수 있다. 사람들의 기대가 충족되었느냐의 여부, 쾌락적 감정을 즐기는가의 여부는 그리 중요하지 않을지도 모른다. 주된 질문은 사람들이 스스로에 대한 진실을 알고 있느냐 하는 것이다. 오늘날의 사람들이 고대의 수렵 채집인이나 중세의 농부보다 이런 진실을 조금이라도 더 잘 이해하고 있다는 증거가 있을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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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하지만 21세기에 이것은 더 이상 사실이 아니다. 호모 사피엔스는 스스로의 한계를 초월하는 중이다. 이제 호모 사피엔스는 자연선택의 법칙을 깨기 시작하면서, 그것을 지적설계의 법칙으로 대체하고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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