경제전문 기자 박종훈과 애널리스트이자 경제전문가 홍춘욱의 대담집. 밀레니얼 세대가 맞이할 경제환경에 대해 교육, 취업, 재테크 - 저축, 주식, 보험, 부동산 -, 2명의 전문가의 의견을 교환하는 내용으로 이루어져 있다.

홍춘욱 씨의 책은 몇 권 읽어봤는데, 현업에서의 경험을 녹여낸 현상의 분석과 미래 예측에서는 배울 바가 많다. 이번 대담집의 파트너인 박종훈 기자도 홍춘욱 씨 못지 않은 내공이 느껴진다.

두 사람이 같은 사안에 대해 서로 다른 결의 해석을 보여주면서 균형이 잘 잡힌 분석이 이루어지고 있다는 생각이 들었다. 

경제/경영서들이 잘못하면 꽤 딱딱하고 지루해지기 쉬운데, 이 2명의 대담자는 현재 밀레니얼 세대가 처한 여러가지 경제상황의 딜레마들에 대해서, 서로의 의견을 개진하면서, 상호보완을 통해 구체적인 방향과 전략적 지침을 제시하고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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p25

 기술이 노동생산성을 압도하는 시대로의 전환

 

 홍춘욱 : 그런데 밀레니얼 세대가 사회에 진입한 최근에는 기술 혁신의 속도가 사람을 압도하기 시작햇어요. 지난 20~30년간 저희 세대가 축적해온 지식과 생산성을 현재의 세대가 따라잡기 힘들어진 거에요. 학계에서는 이런 시대를 '숙련편향적 기술 진보Skill-Biased Technical Change-SBTC' 의 시대라고 부릅니다. 이 숙련편향적 기술 진보로 인해 기존의 단순노무나 사무직 일자리는 점점 사라지고 정보통신기술ICT 분야 등의 고숙련 일자리만 증가하게 됩니다.

 정보통신혁명으로 저숙련 노동자들, 특히 일반 사무직이 실직과 임금 하락이라는 피해를 고스란히 받게 되었어요. 2006년 데이비드 오토 매사추세츠공대 경제학과 교수는 그의 유명한 논문에서 1990~2000년 숙련 수준을 기준으로 양극단의 일자리는 모두 증가하고 중간 단계의 숙련도를 보이는 사무직 일자리만 줄어들었음을 입증했습니다. 실제로 이것이 2000년대 미국 중산층의 붕괴 원인으로 작동했다고도 하죠.

 증권 업계만 봐도, 예전에는 경영학과나 경제학과 출신을 많이 뽑았지만 지금은 공과대 출신을 굉장히 선호해요. 파이썬, R 같은 통계 프로그램과 프로그래밍 언어를 사용할 줄 알면 기업에서 앞다투어 데려간다는 말이죠. 이런 분들이 가는 대기업, 금융권, IT기업들은 20년 전에 비해 생산성이 엄청나게 높아졌고, 당연히 연봉도 높겠죠. 그런데 이런 분들이 많지는 않아요. 아주 일부죠. 이런 인재가 되려면 준비하고 배워야 하는 것이 너무 많거든요.

 예전에는 웬만한 대학의 졸업장만 가지고 있어도 기업을 골라 들어갈 수 있었어요. 그리고 취업에 성공한 이후에는 빠르게 회사내에서 업무 생산성을 높여갈 수 있었고요. 그런데 이제는 그렇지 않은 시대가 되었습니다. 정보통신혁명에 이어, 4차 산업혁명이 시작되었다는데 왜 한국의 대학 졸업자들은 어려운 세상을 맞이하게 되었을까요? 그 이유는 '공급 과잉'에 있습니다. 1990년대부터 시작된 대학 정원의 확대, 더 나아가 새로운 대학의 설립으로 인해 대학 진학률이 60%까지 치솟았거든요.

 그 결과 대졸 임금 프리미엄은 계속 떨어지는 중입니다. 임금 프리미엄이란 고졸자에 비해 대졸자가 얼마나 많은 임금을 받는지를 측정한 것인데 최근에는 30% 이내로 줄어들었습니다. 결국 졸업장보다는 숙련편향적인 기술을 지니고 있는지, 더 나아가 쉽게 습득하는 능력을 가지고 있는지가 중요해진 것이죠.

 이렇게 밀레니얼 세대가 사회에 진입하는 시기에 취업의 문이 좁아졌습니다. 더불어 취업 준비가 기간과 비용도 높아졌고요. 밀레니얼 세대가 갖는 압박감과 박탈감은 여기에 기인하는 것이죠. 이런 상황에서 이들은 일부 정치인이나 재벌의 특혜 또는 채용 비리 등에 정말 민감할 수밖에 없습니다. 밀레니얼 세대가 그토록 부르짖는 '공정함'에 대한 요구는 이런 맥락에서 이해할 수 있습니다.

 밀레니얼 세대는 '58년 개띠'로 대표되는 베이비붐 세대의 자녀 세대로서 역사상 가장 풍요롭게 자라났지만 마찬가지로 가장 치열한 경쟁을 치르는 세대이기도 합니다. 사실상 그들의 부모 세대는 경험한 적이 없는 레이싱을 치르고 있죠. 그래서 이제 갓 사회에 진출한 밀레니얼 세대에게는 국가 전체가 '3배' 더 잘살게 되었다는 사실보다는 눈앞의 냉혹한 경쟁 사회가 더욱 실감나는 것입니다.

 그들이 보기에는, 지식 기반 경제로 전환되던 시기에 사회에 진입한 부모 세대, 혹은 저희 같은 2차 베이비붐 세대는 '운이 좋았다'고밖에 생각되지 않는 지점이 있습니다. 그러니 '우리 때는 정말 열심히 했어. 너희들은 그러면 안 돼'라는 소리를 하는 사람은 '꼰대'로 보일 수밖에 없는 것입니다.

 

p70

 홍춘욱 : 내년에는 전체 인구 중 외국인 노동자의 비율이 5%를 넘어설 거에요. 왜냐하면 2018년 단 한 해에만 외국인 순이동(유입-유출)이 무려 15만 6,000명에 이르렀거든요. 이들이 주 40시간씩 연 52주 연속으로 일했다고 치고, 최저 임금을 적용해보면 퇴직금까지 포함해서 약 2만 달러의 연 소득이 나와요. 최저 임금 인상의 수혜자는 역설적이게도 외국인 노동자일 가능성이 높습니다. 아시아에서 이 정도 소득이면 한국, 일본, 대만 다음 가는 수준이거든요. 결국 한국의 저숙련 노동시장이 외국인 노동자들에게는 상당히 매력적으로 부각되고 있습니다.

 

p95

 박종훈 : 이런 점을 생각하면 국내 IT 산업의 미래가 상당히 밝을 것 같죠? 그런데 안타깝게도 저는 그렇게 보지 않습니다. 

 바로 신규 산업에 대한 정부 정책에 여러 가지 문제점들이 있기 때문입니다. 특히 IT 산업과 관련해서 제가 주목하는 부분은 2007년에 제정된 '파견 근로자 보호법'입니다. 이 법의 취지는 '3D 업종'의 파견 근로자들을 보호하자는 것인데, 이 파견 근로자에 해당하는 업종(대통령령이 정하는 업종)에 희안하게도 IT 업계의 꽃이라는 '컴퓨터 관련 전문가'가 들어가 있어요. 이상해 보이죠?

 이렇게 된 원인은 간단합니다. 2007년 법이 제정될 당시 각 기업들에서 컴퓨터 관련 전문가, 특히 소프트웨어 엔지니어에 대한 수요가 폭증하고 있었거든요. 당연히 이들의 몸값이 천정부지로 치솟았습니다. 그러자 관련 업계에서 정부 측에 지속적으로 요구했어요. 파견 근로 업종에 이들을 포함시켜달라고요.

 그 결과는 어땠을까요? 이 법으로 인해 컴퓨터 프로그래밍 전문인력들의 임금 수준이 박스에 갇히게 됩니다. 저임금 3D 업종이 되어버린 거죠. 이들이 파견 근로가 가능한 업종이 되면서 기업은 낮은 임금으로 인재들을 고용할 수 있게 되었습니다. 그리고 상상을 초월하는 이들의 살인적인 업무시간에 대해선 많이들 들어보셨을 거에요. 오죽하면 엔지니어를 '갈아서' 프로그램을 개발한다고 하겠어요.

 그런데 미국 실리콘밸리의 애플이나 구글에서 일하는 소프트웨어 엔지니어들의 연봉은 평균 15만 달러에서 많게는 30만 달러를 훨씬 상회합니다. 근무시간도 그리 길지 않고요. 그러다 보니 아이러니하게도 국내에선 프로그래밍 인재를 조기에 양성하겠다며 초등학생들을 대상으로 코딩 교육 열풍이 불었는데, 정작 우수한 소프트웨어 엔지니어들은 모두 한국 기업을 떠나고 싶어하는 상황이 펼쳐졌습니다.

 

 

 국내 대기업과의 불공정 거래 관행도 문제입니다. 제가 수년간 기업 취재를 해왔잖아요. 그런데 제조 스타트업이나 중소기업은 대부분 대기업에 납품을 하거든요. 열심히 상품을 제작해서 납품을 하면 대기업이 설계도까지 내놓으라고 강요하는 상황이 적지 않습니다. 최악의 경우는 설계도를 해당 대기업의 자회사에 넘겨서 생산하게 하는 것입니다. 애써 개발한 중소기업의 독자 기술이 헐값에 대기업으로 넘어가는 거죠. 이런 불공정 거래 행위가 발각되면 미국의 경우 징벌적 배상제도를 통해 천문학적인 액수의 배상을 하게 됩니다. 하지만 우리나라는 중소기업이나 스타트업의 기술력을 보호하는 법과 제도가 상당히 부실해요. 현장에는 정말 안타까운 상황들이 많습니다.

 

p173

 박종훈 : 그리고 저는 이 지점이 이전 세대와 밀레니얼 세대를 구분 짓는 특징적인 성향이라고 봅니다. 이들에게는 소비든 취향이든 '주류'가 없어요. 그래서 국내 기업의 마케팅이 어려워지는 거죠. 뭔가가 '대세'라고 규정되는 순간, 그에 대한 열기가 가라앉죠. 대중적인 것을 선호하지 않는 '구별짓기 distinction'가 아주 활발하게 일어나거든요.

 예전에는 '골프 붐'이라고 하면 모두가 골프 연습장에 등록하고 골프채를 사서 필드로 나갔습니다. 그런데 밀레니얼 세대는 자신만이 알아보는 어떤 취향이 대중에게 번지는 걸 본 순간 오히려 그걸 그만두죠. '휘소가치揮少價値'가 사라지기 때문이에요. 그들은 희소가치가 아니라 휘소가치, 즉 휘발되어버리는 가치를 더 선호하죠. 아무리 경리단길이 '힙'해도 주변 사람들이 모두 그곳을 찾는다 싶으면 익선동으로 발길을 옮기고요. 그래서 일시적으로는 인기 있는 제품이나 분야가 생기겠지만 유행 주기가 짧기 때문에, 어느새 다른 쪽으로 인기가 넘어가요. '600만 명의 밀레니얼이 있으면 600만 개의 취향이 있다'라는 말이 나온 것도 그래서고요.

 

▶이러한 밀레니얼의 심리의 원인은 내 개인적인 생각으로는 이럴 것 같다.

1. 자신들만이 발견한 힙한 곳이란 일단 가성비와 가심비가 높은 곳이다. 아직 잘 알려지지 않은 그들만의 아지트. 하지만 대중에 노출되면서 사람들이 몰리고 가격이 올라간다. 그러면서 가성비와 가심비는 떨어진다. 그러면 밀레니얼들에게는 매력적이지 않은 곳이 된다.

2. 경리단길 등 소위 힙했던 곳도 대중이 몰리면서 대형 마케팅의 대상이 되버린다. 그러면 원래의 아기자기했던 그곳의 다양성이 사라지고, 왁자지껄한 메트로폴리탄의 화려하고 값 비싼 마케팅의 대상이 되버리면서 소위 젠트리피케이션이라는 현상이 일어난다. 즉, 본래 그 장소의 가치를 힙하게 만들었던 가게들이 밀려나게 되는 것이다. 이러한 현상에 특히 밀레니얼 들은 고개를 돌리는 것이 아닌가 싶다.

 

p175

 홍춘욱 : 개별화된 취향들이 수면 위로 올라와서 일종의 취향 공동체 같은 비즈니스가 인기를 끌기도 합니다. 대표적인 곳이 취향이 비슷한 사람들끼리 '돈을 내고' 함께 책을 읽는 커뮤니티인 트레바리죠. 이제는 동창회도, 동기 모임도 없는 시대인데, 나이, 출신 지역, 직업, 결혼 여부 등과 관계없이 오로지 취향을 중심으로 모이는 사람들, 그것을 비즈니스 모토로 삼은 것이 정확하게 먹힌 겁니다. 그래서 밀레니얼 세대에게 일종의 '살롱 문화'를 발견하는 시각들도 많거든요. 그들은 자신들만의 아지트를 찾는 세대라는 거에요. 독서 커뮤니티 스타트업인 트레바리는 창업 3년 차인데 벌써 50억 원의 투자를 유치했습니다. 앞으로도 취향 기반 비즈니스는 꾸준한 성장세를 보일 거에요.

 

p185

 박종훈 : 미국 최최의 사회보장제 수혜자로 기록된 이다 메이 풀러Ida May Fuller는 1939년 은퇴한 다음 1975년 100세로 사망할 때까지 연금으로 생활하셨다고 해요. 이분이 납입한 사회보장세는 단 24.75달러였지만, 평생 받은 혜택은 총 2만 2,889달러였다고 합니다. 본인이 낸 돈의 무려 924배에 달하는 금액이었죠. 어떻게 이런 일이 가능했을까요?

 결론적으로 예측과 설계가 부실했기 때문입니다. 당시 미국의 연금제도는 연방보험료법에 따라 세율을 정했는데 이 연방보험세율이 1930년에는 2%였습니다. 고용인과 피고용인이 1%씩 분담하는 구조였죠. 2013년에는 이 세율이 15.3%까지 인상됩니다. 안타깝게도 이처럼 대부분의 국가에서 공적연금은 첫 세대가 가장 큰 이득을 보도록 설계되어 있습니다. 국민연금연구원의 논문에 의하면, 우리나라도 1928년생 여성의 경우 수익비가 무려 72배, 즉 자신이 낸 돈의 72배를 가져간다고 합니다. 1948년생의 국민연금 기대 수익률은 27.2%로, 세계적인 투자가 워런 버핏의 연평균 수익률(24%)을 능가하는 수준입니다. 그런데 1990년생 여성으로 내려오면 수익비가 3.14배로 뚝 떨어지고, 평균 수명이 여성보다 짧은 1990년 남성은 1.62배로 다시 반토막이 납니다.

 모든 국가가 이와 같은 상황에 직면한 것은 무엇보다 처음에 연금구조 자체를 후하게 설계한 탓도 있고, 출산율과 경제성장률에 대해 지나치게 낙관적으로 예측한 탓도 있습니다. 우리나라의 국민연금 설계는 전두환 대통령 시절로 거슬러 올라갑니다. 1988년 1월 전두환 대통령은 선심성 국민연금을 내놓았습니다. 고작 소득의 3%, 직장인의 경우 1.5%만 내면 기존 소득의 무려 70%를 60세 이후 평생 보장하겠다는 것이 골자였습니다. 그러나 눈앞의 세대에게 베푼 선심성 정책의 부메랑을, 밀레니얼 세대, 더 나아가 Z세대를 포함한 미래 세대가 맞게 되었습니다.

 물론 당시에는 지금과 같은 상황을 예측하기 어려웠겠죠. 지금 우리나라는 합계 출산율이 급속히 하락하고 있고 예전과 같은 경제성장도 어려워졌지만, 당시의 정부와 국민연금은 이런 상황을 예측하기 힘들었던 거죠. 현재 국민연금 장기재정추계에 의하면, 2060년에는 소득의 29.3%를 납입해야 지금의 국민연금 체제가 유지된다고 합니다. 그런데 이 추계는 합계 출산율을 1.05로 계산한 것입니다. 2019년을 기준으로 합계 출산율은 0.977로 떨어졌습니다. 결국 소득의 30%를 납입해야 하는 시기는 2060년보다 앞당겨 질 거라는 추산이 나옵니다.

 

 그런데 소득의 30%까지 국민연금을 내야 한다는 것은 상당히 부담되는 일입니다. 더구나 세금도 내야 하고 건강보험료도 내야 하잖아요. 이렇게 되면 본인이 연금과 건강보험료를 100% 부담해야 하는 자영업자들 같은 경우, 돈을 벌어서 세금과 사회보험료를 내다가 끝난다는 소리가 나오게 되는 거죠. 게다가 고령화가 진행되면서 건강보험료도 갈수록 가파르게 오를 겁니다. 끔찍한 예측이지만 2060년대에 경제활동을 하는 국민연금 납부 대상자들은 소득의 3분의 2를 세금과 사회보험료로 내는 시대를 살게 될지도 모릅니다. 이런 예측들 때문에 밀레니얼 세대 사이에서 국민연금에 대한 불신과 냉소가 터져 나오는 겁니다.

 결국 국민연금 개혁 논의가 빠르게 진행되어야 이 상황을 조금이라도 연착륙시킬 수 있을 것입니다. 독일의 경우 현재 소득의 20% 수준으로 연금을 납입합니다. 우리가 미래 세대를 위한 사회적 타협을 통해 현재의 9%대 납입률을 독일 수준으로 끌어올리는 것이 최선이라는 의미죠. 그게 아니라면, 소득 대체율을 기준의 40% 수준에서 25% 수준으로 낮출 수밖에 없을 겁니다. 연금구조의 현실화가 빠른 시일 내에 이루어져야 합니다. 2000년대 이후 국민연금을 개혁하기 위한 수차례의 시도들이 있었지만 매번 정권들은 민심 이반이라는 값비싼 대가를 치러야 했습니다. 2007년 노후연금 지급액을 소득 대체율 60%에서 40%(2028년 기준)로 낮춘 덕분에 그나마 밀레니얼 세대의 미래 부담을 줄일 수는 있었지만, 그 대가로 노무현 정부는 당시 386 지지층에게 외면당했습니다. 결국 정부와 국민연금 개혁 당사자들이 보험료율 인상의 불가피성을 설명하고 사회적인 대타협을 이루는 일이 시대적 과제로 남았습니다.

 앞머리에 밀레닝ㄹ 세대 역시 국민연금의 수혜를 받을 수 있는가라는 질문에 대해 저는 "그렇다"라고 답했는데요, 이 대답을 좀 더 정확하게 표현하면, "이전 세대보다 보험료는 더 내고 연금은 덜 받게 되겠지만, 어쨋든 연금을 받을 수는 있다"가 제가 드릴 수 있는 대답입니다. 혹시라도 이 대답이 실망스러워서 국민연금에 가입하지 말아야겠다고 생각한 독자들에게 제가 꼭 드리고 싶은 말씀이 있어요. 국민연금은 대한민국이라는 국가가 보장하는 사회보장제도이자 가장 안전한 금융상품입니다. 장기적으로 어느 민영 금융 회사가 국가보다 안전할까요? 심지어 연금이 일부 줄어들어도, 국민연금의 수익률은 민영 연금보다 월등히 높거든요. 직장인이라면 더더욱 가입이 유리합니다. 회사가 절반을 부담해주기 때문에 납입 금액 대비 혜택의 비율이 더 높은 셈이니까요.

 다만 한 가지 유의하실 점은, 현 제도가 소득 대체율 40% 수준을 보장하지만 이마저도 국민연금 가입 기간이 40년인 분들을 기준으로 계산한 수치입니다. 요새 같은 상황에서는 대부분의 직장인들이 길어야 25년 정도 연금을 납부하거든요. 그럼 소득 대체율은 25% 정도밖에 안 된다는 말입니다. 100만 원을 벌던 사람이 25만으로 살 수 있겠습니까? 국민연금으로만 노후 자금을 계획하면 안 되는 거죠. 그러므로 밀레니얼 세대는 국민연금과 함께 개인연금과 퇴직연금이라는 삼각 포트폴리오를 꾸려갈 수밖에 없습니다.

 

 

p227

 홍춘욱 : 제가 서울의 아파트를 구매하고 싶어하는 후배들한테 종종 해주는 이야기인데요, 일단 주택시장이 하나의 단일한 시장이라는 생각을 버려야 해요. 제가 보기에 아파트 시장은 네 가지로 나뉩니다.

 첫째는 지금도 좋고 미래에도 좋을 시장이에요. 대표적인 곳이 강남입니다. 용산 일부 지역까지도 포함되죠. 왜냐하면 앞에서 박기자님이 언급했듯이 좋은 일자리가 모여 있는 곳에 고소득자들이 살거든요. 일종의 클러스터를 형성하면서 사람들을 끊임없이 끌어당기는 힘을 갖고 있습니다. 강남(반포, 압구정, 도곡 등)이 180만 명, 광화문이 60~80만 명, 용산~마포가 30~40만 명 정도의 고소득자 클러스터를 형성하고 있다고 보고요. 당연히 그 주변은 최고의 거주지가 됩니다. 시장의 원리상 가격 또한 높게 형성되어 있습니다.

 두 번째는 지금까지는 굉장히 좋았는데 미래 상황은 다소 불투명해 보이는 시장입니다. 대표적인 케이스가 일산, 평촌, 산본, 중동, 동탄 등과 같은 1,2기 신도시들입니다. 현재는 매우 살기가 좋습니다. 아파트 단지 내에 커뮤니티가 잘되어 있고, 교육 여건도 좋습니다. 그런데 밀레니얼 세대가 결혼도 적게 하고 아이도 적게 낳는다는 사실에 비추어보면, 특히 맞벌이 비중이 계속 높아지는 추세를 감안하면 비교적 도심과 멀어서 미래 가치를 높게 평가하긴 힘든 거죠. 비록 광역철도 등으로 접근성이 개선된다 하더라도 말이죠. 게다가 일산이나 분당 같은 1기 신도시는 이미 주택 노후화가 진행 중입니다. 그런데 재건축이 가능할까요? 변수가 너무 많고 상당한 시간을 필요로 하는 대규모 사업이 되겠죠. 판단은 각자의 몫입니다. 저는 밝지는 않다고 봅니다.

 세 번째는 과거에는 저평가되었지만 지금부터는 괜찮아질 수도 있는, 미래 가치가 비교적 높은 시장입니다. 대표적인 지역이 30년이 넘은 대단지 아파트들이 밀집해 있는 재건축 대상자들입니다. 목독, 상계동, 좀 더 확장하면 마포구와 금천구의 노후 아파트들이 여기 해당됩니다. 생각보다 이 지역들이 교통이 좋습니다. 신도시들과 다르죠. 게다가 재건축 사업의 조건이 준공 40년 이상의 아파트로 까다로워졌어도 상대적으로 그 기간에 임박한 지역들입니다. 그래서 미래 가치가 높아질 수 있다는 것이죠. 주거 환경이 개선되면 교통이 좋기 때문에 충분히 시장가치가 뜁니다. 비록 지금은 노후 지역이지만 주머니가 넉넉하지 않은 밀레니얼 세대가 이 유형의 아파트 단지들을 공략하면 좋겠다 싶습니다.

 마지막으로 네 번째는 과거에도 좋지 않았고 미래에도 가능성이 별로 없는 시장입니다. 이 케이스는 굳이 설명하지 않아도 되겠죠. 이 유형의 아파트만 고르지 않으면 됩니다.

 당연히 제가 밀레니얼 세대에게 주목하라고 권하고 싶은 시장은 세 번째가 되겠죠. 

 

 

p233

 박종훈 : 소위 '특공'이라고 부르는 신혼부부특별공급은 무주택 신혼부부가 일반 공급과의 청약 경쟁 없이 별도의 아파트를 분양받을 수 있는 제도입니다.

 그런데 문제가 있습니다. 항간에 신혼부부 특공을 '부잣집 막내아들 특공'이라고 부르거든요. 왜냐하면 신혼부부 특공의 신청 자격이 너무나 비합리적이기 때문입니다. 우선 혼인신고한 날로부터 만 7년 이내의 부부들 중에 전 세대원이 무주택자이면서 부부합산 소득이 전년도 기준으로 도시 근로자 월평균 소득의 100%, 맞벌이의 경우 120% 이하를 충족해야 합니다. 그래야 우선공급에 신청할 수 있습니다. 2018년 3인 이하 가구의 평균 소득은 세전 540만 1,814원(맞벌이 648만 2,177원)입니다. 연봉으로 게산할 겨우 외벌이는 약 6,500만 원, 맞벌이는 합산하여 약 7,600만 원 이상이면 신혼부부 우선공급을 신청할 수 없는 거죠. 그런데 현재 대졸 신입사원의 초임 연봉이 평균 3,200만 원 정도이고, 요새 결혼들을 늦게 하니까 결혼할 당시의 연봉은 당연히 더 올랐을 겁니다. 이런 분들이 맞벌이를 하면 소득 구간을 훌쩍 넘어버려서 청약 자격이 없습니다.

 게다가 최근 분양하는 아파트 가격이 어지간히 비싼 게 아니거든요. 7억 원짜리 아파트를 분양받는다고 가정해보죠. 그리고 결혼과 동시에 만 7년 동안 열심히 벌어서 아이도 한 명 낳고, 부부 합산 소득이 월 600만 원 수준을 유지하고 있다고 칩시다. 그중 절반만 쓰고 7년을 모은다고 해도 자산이 2억 6,000만 원 정도밖에 안 됩니다. 그럼 7억 원짜리 아파트 청약을 받으려면 대체 대출 비율이 어떻게 되는 거죠? 그리고 대출은 어떻게 갚아나가죠? 제도의 취지를 생각할 때 상식적이지 않은 설계라는 거죠. 결국 누가 혜택을 볼 수 있을까요? 부모로부터 증여받은 자산이 있는 부잣집 아들이나 혜택을 보는 특공이라는 말이 그래서 나온 겁니다.

 

 홍춘욱 : 이 청약제도의 신청 자격 조건을 설계한 정책입안자들은 정말 반성해야 합니다. 2019년 상반기를 기준으로 서울 인기 지역의 당첨 가점은 70점을 넘어섰습니다. 제가 보기에도 이건 말이 안 되는 제도에요. 과한 표현일 수도 있지만 저는 이 제도 자체가 '꼰대스럽다'고 생각합니다.

 이 제도는 최소 조건만 갖추면 모두 신청할 수 있게 해서 '추첨방식'으로 선정하는 게 낫다고 봅니다. 그리고 소득으로 조건을 만들 것이 아니라 오히려 자산 조건을 걸어야죠. 적어도 이런 특공에 '금수저'들이 당첨되는 건 사회 정의에 맞지 않잖아요.

 그리고 결혼 여부나 자녀 유무에 대한 조건도 조금 풀어줘야 합니다. 이제 우리 사회에도 동거 커플이 늘어나고 비혼을 결심한 분들도 많아졌는데, 이들을 배제할 어떤 법적 근거도 없잖아요. 다만 이렇게 당첨되어서 아파트를 구매한 경우, 전매 제한 기간을 장기로 설정하면 투기나 시세 차익 우려도 사실상 사라지게 될 겁니다.

 이렇게 되면 자격을 갖춘 분들이 엄청나게 늘어나겠죠? 그래서 실제로 '로또'처럼 지금보다 더 심한 광풍이 일 수도 있어요. 그런 문제를 해결하는 것은 오히려 간단합니다. 정부가 공공 분양 아파트를 더 많이 건설하면 되는 거죠. 그건 결국 건설 경기를 호전시키고 일자리를 제공하는 역할도 하겠지요.

 조건이 되면 청약으로 집을 구매하고 싶은 분들이 엄청나게 많은데, 이렇게 허들을 잔뜩 높여놓으면 다들 포기하고 구축 아파트 시장으로 이동하게 됩니다. 그래서 정부가 그토록 붙잡고 싶어하는 서울아파트 가격 상승세가 멉추지 않았던 겁니다. 참 답답한 제도에요.

 

p247

  홍춘욱 : 한국의 부문별 부채 흐름을 살펴보면, 한눈에 가계부채가 급격히 늘어난 것을 발견할 수 있습니다. 2008년 명목 GDP의 74%에서 2018년에는 98%까지 늘어났죠.

 이게 뭘 의미하는 걸까요? 단순히 가계부채가 증가했다는 사실 뿐만 아니라, 기업과 정부의 부채가 늘어나지 않았다는 점에도 주목할 필요가 있습니다. 한국은행이 기준 금리를 인하하며 경지 부양 신호를 보냈더니 가계 부문만 집을 사기 위해 대출을 받고 기업이나 정부는 별로 돈을 안 썼다는 거죠. 결국 2015~2018년에는 집값 상승, 그리고 가계부채 증가로 경기의 급격한 위축을 막았다고도 볼 수 있겠습니다.

 물론 경제 전체의 부채 규모가 급증하면 문제가 될 수 있습니다. 그러나 국가별 부채 규모를 살펴보면 한국은 높은 편이 아닙니다. 지금 가장 문제가 되는 나라는 중국이죠. 중국의 가계부채와 기업부채는 2008년 142%에서 2018년 254%로 급증했습니다. 이 때문에 최근 IMF는 다음번 금융위기가 발생할 때 가장 취약한 곳으로 중국의 기업 부문과 은행 부문을 지목한 바 있습니다.

 제가 말씀드리고 싶은 것은 가계부채가 사상 최대로 늘어났다는 것이 아니라 정부부채나 기업부채와의 밸런스가 좋지 않다는 점입니다. 정부가 시장의 숨통을 터줄 재정 정책을 펴는 동시에 기업의 투자 환경을 만들어야 해요. 경기 부양을 위해 경직성 예산, 즉 매년 증액되는 공무원 호봉과 같은 비용 말고 비경직성 예산, 즉 경기 여건에 따라 탄력적으로 줄이고 늘릴 수 있는 예산을 더 키워야 한다는 거에요. 최근에 국토부가 경기도 신도시에 추진하고 있는 GTX 사업이 그런 예가 되겠죠.

 

p253

 홍춘욱 : 특히 문제를 더욱 악화시킨 것은 중국 위안화의 평가절하입니다. 1달러에 대한 중국 위안화 환율이 7을 넘어서면서, 아시아 통화가 동반 약세를 보일 가능성이 높아진 것입니다. 중국이 위안화 환율을 인상(위안화 평가절하)한 이유는 '무역 분쟁' 때문입니다. 미국이 중국의 대규모 무역 흑자에 항의해 대규모 관세를 부과하자, 중국은 환율 조정으로 맞선 것이죠. 예를 들어 관세를 10% 부가했다면, 미국에서 중국산 제품의 가격은 10% 오르게 됩니다(물론 수입 업체가 제품 가격의 인상을 허용하지 않고 마진을 축소할 수도 있다). 이때 중국이 위안화 환율을 10% 인상해버리면, 중국 기업들은 관세 부과분만큼 달러로 표시된 제품 가격을 인하할 여력이 생기지 않겠습니까? 따라서 미중 무역 분쟁이 격화될수록 중국의 위안화 가치가 약세를 보일 가능성이 높고, 이는 한국 원화를 비롯한 아시아 통화의 가치를 떨어뜨리는 힘으로 작용할 수 있습니다.

 이럴 때 밀레니얼 세대에게 권하는 것은 일정 비율의 해외 투자입니다. 가장 손쉬운 방법은 달러를 사두는 거죠. 매달 일정 금액을 사둘 수도 있고, 은행에서 달러예금을 가입할 수도 있습니다. 

 

p267

 박종훈 : 그런데 기본적으로 암호화폐가 갖는 장기적인 약점은 상속이 불투명하다는 점입니다. 당연하게도 부동산은 물론, 예금이나 보험금 등 대부분의 자산은 얼마든지 상속이 가능합니다. 우리나라의 '안심 상속 원스톱 서비스'처럼 대부분의 나라가 돌아가신 분의 재산을 상속할 방법을 마련해놓았기 때문입니다. 그런데 암호화폐는 가상지갑에만 넣어둔 경우 완전히 공중에서 사라질 수도 있습니다. 실제 사례도 많고요.

 2013년 8월, 26세의 매슈 무디라는 청년이 경비행기를 타다가 추락 사고로 사망했습니다. 아버지인 마이클 무디는 아들이 생전에 비트코인 채굴에 열중했음을 알고 있었고, 수십, 수백억 원에 이르는 자산을 갖고 있을 것으로 추정했습니다. 하지만 아버지는 아들의 비트코인을 끝까지 차지 못했습니다.

 또 2018년 4월에는 저명한 암호화폐 투자자인 머튜 멜론이 사망했는데요, 그는 사망 직전 <포브스>지가 선정한 암호화폐 억만장자 순위에서 5위에 오르기도 했습니다. 당시 <포브스>지가 추정한 그의 암호화폐 자산은 10억 달러, 우리 돈으로 1조 2,000억 원 정도였습니다. 그런데 그가 암호를 누구에게도 알려주지 않고 갑작스럽게 사망하는 바람에 이 돈은 영영 찾을 수 없게 되었습니다. 암호화폐 전문 분석 회사인 체이널리시스는 이 같은 이유로 이미 비트코인의 25%가 영원히 사라졌을 거라는 추정을 내놓았죠.

 비트코인은 64자리에 이르는 복잡한 키파일이 한 번만 발급됩니다. 다른 사이트처럼 비밀번호를 기억하지 못할 때 개인정보를 입력하는 방식으로 재발급을 받는 것도 불가능합니다. 또한 생전에 가족등 타인에게 비밀번호를 알려주는 것도 쉽지 않습니다. 암호만 알려주면 암호화폐의 특성상 언제든 돈을 빼갈 수 있고, 추적이나 반환이 어렵기 때문입니다. 암호화폐는 그 이름처럼 암호가 가장 중요하기 때문에 암호를 알려주는 순간 사실상 증여를 해준 것이나 다름없거든요.

 결국 예고된 죽음이 아니면 상속이 매우 까다롭고 암호화폐 자산은 영원히 가상세계에만 남아 있을 수도 있다는 것이죠. 이에 대한 보완책을 연구하고 있다고는 하지만, 암호화폐가 세대를 넘어 영속적인 자산으로 계속 계승되어나갈 수 있을지 의구심이 생기는 대목입니다.

 

 

p299

 박종훈 : 정년제도라는 것이 청년층의 일자리 창출을 위해 독일의 명재상 오토 폰 비스마르크가 고안한 제도라는 점을 생각하면 현재의 상황이 참 아이러니하게 느껴집니다. 1880년 당시 독일은 100만 명이 넘어가던 극빈층 문제로 골머리를 앓았거든요. 그런데 가난한 고령층이 계속 일을 하면서 청년층이 노동시장에 진입하기가 힘든 상황이었어요. 그래서 비스마르크 재상이 정년을 65세로 제한하는 대신 연금을 지급하고 청년층에게 일자리를 만들어주겠다고 선언했습니다. 다만 당시 독일의 평균 수명이 65세 미만이었기 때문에 이 제도의 설계에는 약간의 정치적 술수가 담겨 있기는 합니다.

 그런데 우리나라는 반대죠. 박근혜 정부 시절 정년을 60세로 늘린 것이 치명적인 문제를 야기했습니다. 앞에서 제가 언급하기도 했습니다만, 사실 정년이 적용되는 직장은 공기업과 대기업 생산직 정도라고 합니다. 일부 경제연구소나 언론에서 이전 세대는 주로 구산업에 종사하고, 청년들은 첨단IT기업에 종사하기 때문에 정년 연장으로 청년들의 손해는 없다는 주장을 합니다. 그런데 바로 정년이 보장되는 '그 직장'들이 청년들이 원하는 직장이잖아요. 그런 직장은 정년이 연장되면 청년을 적게 뽑을 수밖에 없습니다. 그러니 정년 연장으로 청년들의 손해는 없다는 주장은 정말 무책임한 것이죠.

 사실 정년 연장이 현실화되면 2차 베이비붐 세대에 속하고 공기업에 근무하는 저는 제일 수혜를 받는 사람 중에 한 명이 되겠죠. 그런데 그 대가로 제 자녀 세대의 미래가 희생당할 것이 정말 두렵습니다. 기성세대가 정년이 보장되는 좋은 직장을 계속 독점하게 되면, 결국 청년들의 몫이 줄어들 수밖에 없습니다. 이처럼 정년 연장에는 치열한 세대 갈등의 요소가 있기 때문에 저는 정년 연장이나 연금 지급 시기 문제가 앞으로 유럽처럼 첨예한 사회 갈등 요소가 되리라고 생각합니다.

 

통통 튀는 트렌디 드라마처럼 시작했다가, 한자와 나오키 같은 비즈니스 심리 스릴러로 끝난다.

이 맥락의 변화가 너무 생경해서 같은 소설인가 싶을 정도다.

그래도 전반적으로 꽤 재밋었다.

워라벨이라는 주제는 그저 구색일 따름이고, 회사 생활에서 일어나는 관계와 심리에 촛점이 맞춰져 있고 그것이 꽤 사실적이다. 한국적 사고로는 이해하기 쉽지 않은 부분도 있지만, 한국이나 일본이나 회사 생활이라는 것은 비슷한 면이 꽤 많구나라는 것도 알 수 있다.

 

 

NHK의 히트 다큐인 "욕망의 자본주의"의 2019년도 버젼을 정리한 내용.

책보다도 다큐멘타리쪽의 내용이 좀더 이해하기도 쉽고(편집의 영향) 핵심적인 내용에 접근성도 좋다.

자본주의 경제하에서 미래의 변화를 여러 명의 전문가의 인터뷰를 통해서 구성한다.

책에는 5명의 패널들만 나오는데, 실제 다큐에서는 더 많은 인물이 나와서 이야기를 하는데 개인적으론 다큐 쪽이 더 좋다.

 

(NHK 욕망의 자본주의 2019 링크)

이 다큐의 나레이터의 목소리는 상당히 일본적이라고나 할까? 나레이터는 야쿠시마루 에츠코라는 여성으로 일본에서 꽤 유명한 싱어송라이터이자 음악가이다. 상당히 많은 음악가들과의 콜라보로도 유명하다.

https://www.dailymotion.com/video/x7010c0

 

BS1スペシャル「欲望の資本主義2019(前編)~偽りの個人主義を越えて~」20190103 - 動

後編 https://dai.ly/x7017yt 「ネット界の四天王」と呼ばれるGAFAを巡る議論が熱い。強大な力に国家の枠組み前提の市場経済が揺れている。仮想通貨をめぐる議論も沸騰、バーチャル経済時代の�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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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S1スペシャル「欲望の資本主義2019(後編)~偽りの個人主義を越えて~」(後編)20190103 - 動画 Dailymotion

前編 https://dai.ly/x7010c0 「ネット界の四天王」と呼ばれるGAFAを巡る議論が熱い。強大な力に国家の枠組み前提の市場経済が揺れている。仮想通貨をめぐる議論も沸騰、バーチャル経済時代の資本主義はどこへ行く?2017年富を生むルールの変化を捉え2018年社会構造に地殻変動が起きている現実に迫ってきた番組は次のステージへ。テクノロジーが社会を変える今、格差、分断を越え自由への道は?切迫感ある今問う、自由の形と資本主義の行く末は? 【出演】安田洋祐,スコット・ギャロウェイ,ユヴァル・ノア・ハ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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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 현대 자본주의 앞에는 어떤 미래가 기다리는가 ___ 유발 하라리 012

 

p26

 공산주의는 이용 가능한 재화와 서비스의 수급을 단일한 중앙 관리자가 결정합니다. 하지만 자본주의는 선택을 개개인의 자유에 맡깁니다. 사람들이 스스로 결정한 자유를 가진 것, 이것이 자본주의의 성공 비결입니다.

 

p31

 일이 사라지는 것 자체는 문제가 되지 않습니다. 솔직히 노동자의 입장에서 모든 일이 항상 특별한 가치를 지니는 건 아니거든요. 실제로 많은 사람들이 하고 싶지 않아도 먹고살려면 돈을 벌어야 하니까 일을 합니다. 하루에 10시간씩 슈퍼마켓 계산대 앞을 지키는 일이 꿈의 직업이라고 말하는 사람은 많지 않을 거에요.

 저는 인공지능에 맞서 인간의 일을 지켜야 한다고는 생각하지 않습니다. 로봇에게 계산대 일을 빼앗겨도 괜찮아요. 오히려 이런 시대가 오면, 우리가 지켜야 할 것은 '일'이 아니라 '인간'일 것입니다.

 생계를 위해 어쩔 수 없이 했던 일들을 더 이상 하지 않아도 된다니, 상상만 해도 멋지지 않습니까? 다음 두 문제가 해결된다면 말이죠. 하나는 직업을 잃은 사람들을 어떻게 지탱할 것인가 하는 문제입니다. 보편적 기본 소득제universal basic income 같은 대안들이 논의될 수 있겠죠.

 다른 하나는 인생의 의미와 관련된 문제입니다. 이제 당신은 매일같이 공장에 출근해 10시간씩 일하지 않아도 됩니다. 의식주에도 부족함이 없습니다. 그럼 남아도는 시간엔 대체 무엇을 해야 할까요? 저는 해결책이 있다고 생각합니다. 삶의 기쁨과 의미를 일 대신 예술, 스포츠, 종교, 명상, 인간관계, 공동체 등에서 충족시키는 모델로 생각해볼 수 있습니다.

 그러므로 인간이 구직 시장에서 밀려나는 일로 갑론을박할 필요는 없습니다. 알고리즘에 맞서 인간의 실직을 막겠다는 계획은 실제 성공하기도 어려울 테고요. 오히려 인간의 기본적인 필요를 충족시키고 사람들의 사회적 지위와 자존감을 지켜주는 방법을 고민하는 쪽이 더 현명합니다.

 일이 없는 세계를 대비하는 건 필요합니다. 보편적인 경제 안전망을 통해 최소한의 생활 수준을 지탱해주는 방안 등을 마련하지 않고 모든 것을 시장의 힘에 맡겨두면 심각한 사태가 벌어질 테니까요. 아마 부와 권력이 한 줌의 엘리트들에게 집중되고 사람들 대부분은 빈곤에 빠져 하루하루가 아주 힘들 겁니다. 위기가 본격적으로 분출하는 걸 막기 위해서라도 뭐든 해야 합니다. 그게 뭐가 되었든 지키는 대상은 일이 아니라 인간이어야 합니다.

 

p34

 기술 자체는 나쁘지 않아요. 다만 기술이 너무 큰 힘을 갖게 되어 우리가 그 노예로 봉사하게 두어서는 안 됩니다. 크게는 인간을 위해 기술을 봉사하는 방향으로 나아가야죠. 정부 차원에서는 유전자 조작 기술, 자유 무기 체계 Autonomous Weapon System AWS 같은 위험한 기술 개발을 규제해야 합니다. 개인 수준에서도 가령 스마트폰이 자신의 생활을 지배하고 있는 건 아닌지 점검하고 자신의 존재와 삶에 대한 통제권을 알고리즘에 쉽사리 넘겨주지 말아야 합니다.

 새로운 지식과 기술이 가능하게 만든 미래 사회 시나리오는 여러 가지가 있습니다. 하지만 가능하다고 해서 반드시 그래야만 하는 건 아닙니다. 우리 앞에는 다양한 선택지가 놓여 있습니다. 그리고 완전한 선택권은 아닐지 몰라도, 우리는 그중에서 고를 수 있습니다.

 

 

2. 거대 디지털 기업들은 세계를 어떻게 바꿀 것인가 ___ 스콧 갤러웨이 040

 

p49

 아마존 같은 기업은 연방 정부나 주 정부로부터 세제 우대나 보조금 지원 등의 각종 혜택을 누리고 있습니다. 하지만 그곳에서 일하는 직원들은 저임금 · 고강도 노동에 시달리면서 생계 지원을 받을 정도로 가난합니다. GAFA(Google, Apple, Facebook, Apple)의 주인들은 세계에서 가장 부유하면서도 지나치게 낮은 임금으로 노동자를 쥐어짜고, 그 와중에 보조금과 세금 감면을 받으려고 분주히 뛰어다니면서 이익을 챙기고 있습니다. 그럼에도 그들은 세계 최고의 혁신가로 칭송받고 있지요.

 하나의 기업이 거대해져서 지나치게 큰 영향력을 갖게 되면 온갖 부정이 일어나게 됩니다. 최근 이슈가 되고 있는 것이 세금 회피 문제입니다. 미국에서 2008년 금융 위기 이후 10년간 월마트가 낸 법인세는 640억 달러였지만, 아마존은 14억 달러에 불과했습니다. 아마존은 장기 비전으로 투자자들을 매료시켜 막대한 자금을 저렴하게 빌리고, 벌어들이는 수익을 다른 사업에 재투자함으로써 법인세로 빠져나가는 돈을 절약해왔습니다.

 세계에서 가장 성공한 기업들이 내야 할 세금을 내지 않으면 소방관, 군인, 공무원 들에게 어떻게 월급을 주죠? 거대 IT 기업이 세제 지원 혜택을 누리는 동안, 작은 기업들이 더 많은 세금을 내면 됩니다! 세금 제도의 역진성逆進性 문제가 발생하는 거죠. 이런 상황은 자본주의는 물론이고 미국의 정신에도 반하지만, 엄연한 현실입니다.

 

p50

 많은 사람들이 GAFA가 고용을 창출한다고 말하지만 실제로는 그렇지 않습니다. 엄밀히 말해 GAFA는 '소수의 고용'을 창출하고 '다수의 고용'을 파괴합니다. 페이스북과 구글이 230억~250억 달러 규모의 수익을 추가로 내는 데는 2만 8000명의 고용이 더 필요합니다. 고학력 · 고스펙 친구들이 탐내는, 돈벌이가 좋은 고급 일자리입니다.

 한편 전 세계적으로 광고 산업은 몇 년째 성장하지 못하고 제자리걸음을 하고 있습니다. 덴츠나 IPG, WPP 같은 업계 대기업들이 부진을 면치 못하고 있는데요, 이들이 250억 달러라는 수익을 올리기 위해서는 약 25만 명의 인원이 필요합니다.

 페이스북과 구글이 2만 8000명을 고용해서 벌어들인 250억 달러는 다른 광고 기업의 성장을 저해하고, 25만 명의 고용을 사라지게 만들었습니다. 이 상황은 마치 5만 명을 수용하는 양키스타디움 다섯 곳에 크리에이티브 디렉터Creative Director와 미디어 플래너Media Planner, 카피라이터Copywriter 등을 모이게 한 뒤, 페이스북과 구글이 "이제 당신들의 일자리는 없습니다"라는 해고 통지서를 내미는 것과 같습니다.

 이것이 '고용의 파괴'가 의미하는 바입니다. 전통적인 일자리들이 새로운 기술 직군에세 산 채로 잡아먹히고 있어요. GAFA는 고용의 창출자가 아니라 오히려 고용의 파괴자입니다

 

==> 이 주장은 사실 과거 산업혁명 당시의 러다이트 운동의 사상과도 비슷하다. GAFA가 전통적인 일자리를 파괴하는 것은 맞지만 그것이 의도된 것이라기보다는 혁신을 통해 시장의 원리가 바뀌고 있다고 봐야 한다. 기존 체제의 파괴가 꼭 나쁜 것만은 아니다.

 

 

 오늘날 기업가에게 가장 큰 어려움은 자금 조달이 매우 힘들다는 점입니다. 전자 상거래, 검색 엔진, 소셜 미디어, 컴퓨터 하드웨어 같은 분야에서 새로운 사업을 시작하려고 해도 투자자들이 'GAFA와 경쟁하기란 불가능하다'고 생각하기 때문입니다. 그렇게 자금을 조달받지 못해서 하루살이처럼 사라지는 신생 기업들이 의외로 많습니다.

 많은 사람이 혁신의 시대를 살아간다고 생각할지 모르지만, 사실 우리는 혁신이 없는 시대에 살고 있습니다. 이것은 최근 40년 동안 매일 생겨나는 새로운 비즈니스의 숫자가 절반가량 줄었다는 점만 봐도 알 수 있어요. 놀랍게도, 지금보다 1970년대에 훨씬 더 많으 새로운 비즈니스가 등장했습니다.

 독점 기업은 혁신을 저해합니다. 이들은 투자자 자본과 세계 최고의 인재들을 블랙홀처럼 빨아들입니다. 훗날 본인들을 성가시게 할 것 같은 잠재적 경쟁자는 매수해버립니다. 이런 현실에서 작은 회사가 성장하기란 거의 불가능에 가깝죠.

 

 자본주의에서 기업은 고령자의 곤궁한 삶이나 사람들의 마음속 평안에는 관심이 없습니다. 죽음을 앞둔 사람에게 도움의 손길을 내미는 것도, 화성을 탐사하는 것도 기업의 역할이 아닙니다. 모든 기업의 목적은 이윤을 창출하고 주주 가치를 높이는 것입니다.

 GAFA도 마찬가지입니다. 그런데 사람들은 GAFA가 내세우는 이미지, 즉 진보적이고 혁신적인 가치를 옹호하며 공익을 추구한다는 이미지를 곧이곧대로 믿습니다. 그들은 자기네 제품과 서비스가 세상을 더 나은 곳으로 만들고 있다고 주장합니다. 수많은 추종자들은 그들을 본보기로 삼아야 하고 그들에게 무한한 관용을 베풀어야 한다고 말합니다.

 하지만 인류 구제 등의 숭고한 비전을 내세운들 그런 이미지는 '환상'에 지나지 않습니다. GAFA의 본질은 기업입니다. 오히려 그들은 수익 창출에 방해가 되는 사회적 책임은 교묘히 피하고 있습니다. 세계 최고의 두뇌들과 세계 최대 규모의 자본이 한데 모여 인류의 미래를 고민하는 대신 시가 총액을 높이고 돈을 벌어달 줄 아이템을 궁리하는 일에 몰두하고 있어요.

 

p65

 미국은 다소 길을 잃었습니다. 미국은 일찍부터 기회의 땅이었고, 경제 정책은 여러 백만장자millionaire를 만드는 걸 목표로 했습니다. 하지만 지금은 극소수의 조만장자trillionaire를 만들어내는 쪽으로 목표가 바뀐 것 같습니다. 그렇게 되면 한 명의 승자가 꿈같은 생활을 누리고 어마어마한 권력을 휘두르는 반면, 나머지 99명은 그 풍요로움을 눈으로만 구경하면서 한 줌의 부스러기를 두고 쟁탈전을 벌이겠죠.

 그럼에도 사람들은 자기 자식이 다음 세대의 스티브 잡스라고 맹신하는 것처럼 보여요. 일종의 '대박'을 꿈꾸는 기묘한 복권 경제에 빠져 있는 거죠. 저는 그들에게 이렇게 말합니다. "이보세요, 당신의 아이는 스티브 잡스가 되지 못한다고 생각하는 편이 훨씬 현실적인 전망입니다. 대신 우리는 1퍼센트가 엄청난 혜택을 독점하는 사회가 아니라, 나머지 99퍼센트가 일정 수준 이상의 생활을 영위할 수 있는 사회를 만들어야 합니다."

 안타깝게도 우리 사회는 '아주 불편한 사회'가 되어가고 있습니다. 에이브러햄 링컨이 말했듯, 이전의 미국은 보통 인간들을 사랑했습니다. 지금의 미국은 더 이상 그들을 사랑하지 않습니다. 현실에서 우리 대부분은 평범합니다. 그런데 이 사람들에게 상황이 너무 나쁘게 돌아가고 있어요. 승자 독식 경제에서 평범한 우리는 하잘것없는 존재로 전락해버린 거에요.

 예를 들어 원래 정부는 중소기업을 우대해 그들이 대기업으로 성장할 수 있는 환경을 만들어줘야 합니다. 하지만 지금 미국에서는 정반대 일이 일어나고 있어요. 정부 지원금이 신생 기업이 아니라 GAFA에게 흘러들어가고 있습니다. 마치 복권에 당첨된 사람에게 '축하합니다. 당첨금을 배로 드리지요' 하는 식입니다. 우리는 3억 5000만 명의 농노가 300만 명의 영주에게 종속된 사회를 향해 돌진하고 있습니다.

 

p67

 도를 넘은 소득의 불평등은 바람직하지 않습니다. 좋은 소식은, 역사를 보면 극단적인 소득의 불평등은 반드시 스스로 수정되었다는 것입니다. 나쁜 소식은, 극도로 심한 소득의 불평등을 수정해온 것은 전쟁, 기아, 혁명 중 하나였다는 사실입니다. 모두 피하고 싶은 일들이죠.

 오늘날 세계 경제는 이 세 가지 메커니즘 주 하나가 작동할 수 밖에 없는 상태로 가고 있습니다. 미국에서는 실제로 '느린 혁명'이 일어나고 있다고 생각해요. 극소수가 누리는 '멋진 삶'에서 배제된 수많은 사람들이 울분을 토해내기 시작했고, 그들의 외침은 결국 위험한 선동 정치가를 대통령으로 선출하기에 이르렀죠. 유럽의 상황도 이와 비슷합니다. 우리 미래가 아주 위험한 방향으로 흘러가지 않도록 지금부터 대책을 세워야 합니다.

 

 그 외침이 당선시킨 도널드 트럼프 대통령을 교수님은 어떻게 평가하십니까?

 

 동맹국은 미국이 무엇을 하려는지 이해할 수 없는 상태에 빠졌습니다. 가장 중요한 유럽과 일본 등과의 관계에 있어서, 일관성 없는 메시지로 인해 신뢰가 약해지고 말았죠. 미국은 고립주의를 표명하면서 다른 나라의 영향을 받지 않는 '닫힌 사회'를 지향하기로 결정했습니다. 그것이 어떤 문제를 일으킬 수 있는지 수많은 사람들이 '진실'을 말해도, 그 진실은 더 이상 의미를 갖지 못하고 있어요.

 저는 이런 현실이 참으로 우려스럽습니다. 우리의 동맹 관계는 세계의 평화를 지켰고 세계의 소득을 증가시켰으며 세계의 기아를 줄여왔습니다. 미국과 유럽, 아시아가 함께 쟁취한, 훌륭한 성과입니다. 그러나 지금은 그 파트너십이 위기에 노출되어 있습니다.

 

 

p71

 적어도 미국은 거대 IT 기업의 혜택을 누리고 있습니다. 고용 파괴나 납세 회피, 반경쟁적 행위, 소셜 미디어의 정치적 이용과 가짜 뉴스 등 부정적인 측면이 있긴 하지만, 그들 기업에겐 긍정적인 면도 있거든요. 예를 들어 거대 IT 기업이 만들어내는 고급 일자리는 세계에서 가장 똑똑하고 유능한 사람들이 미국으로 이주하게 되는 이유입니다. 덕분에 미국이라는 나라의 경쟁력은 한층 올라가게 됩니다. 미국 기업이 세계 시장의 선두 자리를 차지하고 있다는 자부심 역시 무시 못하죠.

 하지만 미국 밖에 있는 나라들은 이런 혜택을 전혀 누리지 못합니다. 예를 들어 일본의 대학이나 병원 중 구글이나 페이스북의 이름으로 지어진 시설은 거의 없다고 알고 있는데요. 거대 IT 기업들이 일본에서 막대한 돈을 벌어들이는 만큼, 일본 정치인은 이들이 자국에게 이익이 되는지를 면밀히 따져볼 필요가 있습니다. 그리고 시민들은 '거대 IT 기업이 일본에게 이익이 되는 정책'을 추진할 국회의원을 선출해야 합니다.

 최근 중국의 행보는 흥미롭습니다. 중국은 거대 IT 기업을 자국에 유치해 지식과 기술을 훔친 후 유사한 회사를 설립하고 있습니다. 독자적인 검색 엔진과 독자적인 소셜 미디어 회사를 만들어서 국내에서 생기는 이익을 확보하는 방법인데요. 이 수법은 유럽에서 비판을 받았지만 저는 가까운 미래에 유럽도 중국과 같은 수법으로 데이터 유출을 방어하려 들 거라고 예상합니다.

 참고로 영국은 거대 IT 기업이 총수익(매출액)에 과세하는 일명 '디지털세Digital Tax'를 실시하기로 결정했습니다. 구글은 영국에서 매년 70억 파운드를 벌어들였다고 추정되었으나, 그 대부분을 아일랜드에 있는 구글 유럽 본사로 귀속시켜서 법인세를 회피했다는 비판을 받았습니다. 법인세는 물리적 고정 사업장이 있어야 과세가 가능하다는 점을 이용한 거죠. 이 때문에 영국은 자국 내에서 실제 발생하는 총수익에 과세한다는 결정에 이르렀습니다. 다른 나라들도 유사한 대책을 세워야 합니다.

 

 

3. 암호화폐는 어떻게 잠들어 있는 부를 깨우는가 ___ 찰스 호스킨슨 074

 

p90

 그럼 어떻게 우버와 에어비앤비를 없앨 수 있을까요? 이런 중개자는 블록체인을 이용한 '스마트 콘트랙트 smart contract' 로 간단하게 없앨 수 있어요. 스마트 콘트랙트란 '프로그래밍된 조건이 모두 충족되면 계약 내용이 자동 이행되는 시스템'으로, 제3자 없이 개인 간 직접 거래를 가능하게 해줍니다. 그렇게 되면 시장을 독점하고 운전기사를 착취하는 중앙 집권화된 기업은 소멸하고 말 거에요.

 아무리 잘 나가는 사업이어도 새로운 기술의 등장을 간과해서는 안 됩니다. 신문업계가 좋은 사례입니다. 신문은 오랫동안 미디어 시장에서 큰 지배력을 가지고 있었습니다. 하지만 1990년대 출현한 인터넷이, 신문사들이 따라온 전통적인 수익 및 유통 모델과 정면으로 충돌했지요. 처음에는 신문업계는 인터넷을 대수롭게 생각하지 않았습니다. 매달, 매년 구독률이 떨어지고 나서야 자신들이 낡은 방식을 고수하고 있었다는 걸 깨달았죠. 광고 수익과 구독 수익이 줄어든 신문사들은 현재 심각한 경영 위기를 겪고 있습니다.

 저는 '블록체인 기술이 반드시 GAFA를 무너뜨릴 것이다'라고는 생각하지 않습니다. GAFA는 영리하며 적응력이 탁월합니다. 하지만 블록체인 기술의 등장으로 인해 이들 기업은 자신들과 고객과의 관련성을 재고하지 않을 수 없을 겁니다.

 

p92

 하지만 이제 개인 정보와 사생활 보호에 관한 권리 의식이 높아지면서 '프라이버시'가 새로운 사업 모델로 부상할 것입니다. 이 지점에서 최근 주목할 만한 게 하나 있습니다. 바로 '브레이브 Brave'라는 웹브라우저인데요. 프로그램 언어인 자바스크립트의 아버지 브렌던 아이크 Brendan Eich 가 개발했습니다.

 브레이브는 보안과 프라이버시에 특화되어 있습니다. 그것은 사이트 접속 정보나 구매 이력, 검색 이력을 서버에 저장하지 않으며 광고 추적기를 차단해 사용자의 익명성을 보장합니다. 광고를 허용함으로써 자신의 데이터를 제공하는 이용자에게는 보상으로 토큰을 줍니다. 이용자의 관심을 갖는 가치를 인정하고, 웹브라우저의 광고 수익을 나누는 것이죠. 브레이브는 최근 등장했지만 엄청난 속도로 성장해 이미 수백만 명이나 이용하는 웹브라우저가 되었습니다. 조만간 구글의 크롬이나 모질라의 파이어폭스 같은 선발 주자들을 앞지를 것으로 보입니다.

 이 새로운 기술이 5년 후, 10년 후에 가져올 변화에 기업들은 주목해야 합니다. 예를 들어 브레이브가 성공적으로 안착한다면 다른 웹브라우저 회사들은 브레이브가 가진 능력과 제공하는 서비스를 받아들일 필요가 있습니다. GAFA도 살아남기 위해 자신들이 제공해온 서비스의 바람직한 면은 그대로 두면서도 사용자가 포기할 것을 적게 만드는 방법 아니면 일시적으로 포기하더라도 탈퇴 시에는 사용자 권리를 되돌려주는 방법을 고안해내야 할 겁니다.

 계정을 삭제함과 동시에 프로필을 비롯해 나의 모든 디지털 흔적이 삭제되는 세계, 즉 '잊힐 권리가 있는 세계'를 요구하는 사람들이 많아지고 있습니다. 그리고 블록체인 기술은 고객이 더 많은 권한을 갖는 새로운 세계를 만들어낼 잠재력을 갖고 있습니다.

 

 

4. 좋은 사회를 만드는 새로운 경제학이란 무엇인가 ___ 장 티롤 106

 

p131

 저는 암호화폐가 사회에 무익하다고, 아니, 무익한 정도가 아니라 유해하다고 봅니다. 이유는 세 가지를 꼽을 수 있습니다. 

 첫째, 암호화폐는 돈세탁, 탈세, 암거래 등에 악용될 수 있기 때문입니다. 하지만 현재로서는 이런 불법 행위에 대해 정부가 통제할 제도적, 법적, 기술적 기반이 부족한 상태입니다.

 둘째, 암호화폐 때문에 통화를 발행하는 중앙은행의 시뇨리지seigniorage(화폐 주조 차익)가 줄어듭니다. 각국 중앙은행은 화폐를 발행할 때 이익을 얻고, 이것이 공공 부문의 수익이 되는데요. 간단히 설명하면 중앙은행은 민간 은행으로부터 국채를 사들이고 대금을 민간 은행에 지불하는 형태로 화폐를 발행합니다. 이때 국채에는 금리가 붙지만 현금에는 금리가 붙지 않는데 그 차액이 중앙은행의 이익이 됩니다. 그런데 비트코인 등의 암호화폐가 확산되면 중앙은행에서 얻는 시뇨리지가 줄어들어서 공공 부문의 수익이 감소합니다.

 마지막은 금융 정책의 훼손 가능성입니다. 제가 가장 우려하는 점인데요, 2008년 세계 금융 위기 때는 각국 중앙은행이 시장에 통화를 대량으로 유통, 발행함으로써 유동성 위기를 극복했습니다. 하지만 민간이 발행하는 암호화폐는 그 누구도 공급을 제어할 수 없습니다. 따라서 암호화폐가 주거래 화폐인 상황에서는 이런 부양책을 쓸 수 없습니다.

 

 암호화폐는 거품이라고 하셨느데요. 현재 각국 통화도 금이나 은 등의 실물로 보증되지 않으며 고유의 내재 가치가 없는 불환 지폐입니다. 그럼 사실상 모두가 거품 아닌가요? 둘은 어떻게 다릅니까?

 

 둘 다 거품이라고 해도, 불환 지폐는 공급이 통제되며, 실제 사용에 의해 뒷받침됩니다. 다시 말해, 각국의 불환 지폐는 실물 경제에 깊이 뿌리 내리고 있습니다.

 민간이 발행하는 암호화폐는 그렇지 않습니다. 비트코인으로 상품과 서비스의 값을 치르거나 세금을 납부한다고 하면 모를까요. 개인적으로는 부디 그럴 일이 없기를 바랍니다. 가치의 등락이 너무 심해서 하루 사이 세수가 배로 늘었다가 반으로 줄어드는 일이 발생할 수도 있으니까요. 지금의 암호화폐는 실물 경제와 연동되어 있지 않고 섣부른 기대까지 더해 있어서 매우 불안정합니다. 그에 견주면 불환 지폐는 그 역사가 길고 가치도 비교적 안정적이죠. 둘은 근본적으로 달라요. 

 

p136

 그런데 많은 사람들이 자유가 경제의 전부이고, 시장 실패는 경제의 아주 작은 부분에 지나지 않는다고 오해하는 듯합니다.

 

 시장이 잘 기능하면 경제학은 필요가 없습니다. 경제학자들은 대부분의 시간을 시장 실패를 연구하는 데 씁니다. 우리는 여러분이 생각하는 것만큼 시장을 사랑하지 않습니다. 시장은 사람들의 기호를 정확하게 측정해주는 도구지만, 그렇다고 그것이 훌륭한 도구라는 말은 아닙니다.

 경제학자들이 가장 중요하게 생각하는 것은 공익입니다. 시장은 공익에 이바지하는 하나의 수단으로서 가치를 지닙니다. 따라서 공익에 해가 되는 시장에는 규제가 이뤄져야 맞습니다.

 자유방임주의와 자유주의는 같은 생각이 아닙니다. 제가 그리는 자유주의에선 자유에 책임이 수반됩니다. 우리는 자신이 한 행동의 결과를 책임져야 해요.

 예를 들어 자유주의를 지지한다고 해서, 환경 보호도 개인의 자유에 전적으로 맡겨야 할까요? 오히려 경제학자들은 그런 자유방임주의가 적절하지 않다고 주장합니다. 자유주의에서는 오염 제공자에게 책임을 물어야 합니다. 그래서 경제학자들이 탄소세를 지지하는 거죠.

 문제는 시장 실패를 교정하려는 정부의 시도가 방해를 받고 있다는 점입니다. 예를 들어 트럼프 대통령은 금융 시장에서 규제를 철폐하고 상품 시장에서 보호주의와 고립주의를 강화하는 정책을 펼치고 있는데요, 이것은 잘못된 정치 개입의 전형입니다.

 사실 미국 대통령뿐만 아니라 대부분의 정치인들이 단기적으로밖에 생각을 못 합니다. 트럼프의 경우, 길어 봐야 2년 정도 내다볼 걸요? 그들은 장기적인 시야로 정책을 보는 데 관심이 없어요. 오로지 다음 선거에 당선되는 것에만 관심이 있습니다. 

 

 

5. 탈진실의 시대에 가치의 위기를 어떻게 극복할 것인가 ___ 마르쿠스 가브리엘 144

 

p152

 잊어서는 안 될 사실은 우리가 이런 기업들에게 착취당하고 있다는 점입니다. 우리는 매일 인터넷을 통해 메일을 주고받거나 뉴스를 읽거나 검색을 하거나 쇼핑을 하거나 동영상을 보거나 음악을 듣는데, 이 모든 행위는 부가 가치를 가진 데이터를 생성한다는 점에서 사실은 '노동'에 가깝습니다. 덕분에 수십억 달러의 돈이 캘리포니아의 계좌로 들어가게 됩니다. 

 소셜 미디어는 카지노와 같습니다. 사람들은 인터넷에 글을 쓰거나 사진을 올리고 '좋아요'를 클릭함으로써 '도박'에 참여합니다. 열심히 자기 팔로워를 모으고 게시물의 클릭 수나 조회 수를 올려서 '잭팟'을 터뜨리는 사람들도 있지요. 실제로 페이스북 인플루언서, 인스타그램 스타, 유명 유튜버는 큰돈을 법니다.

 하지만 가장 많은 이익을 얻는 것은 도박 참가자가 아니라 도박판의 운영 관리자입니다. 카지노에서 가장 돈을 많이 버는 사람이 카지노 주인인 것과 똑같은 이치죠. 게다가 소셜 미디어는 전 세계 어느 카지노보다도 불공평한 카지노입니다. 어떤 더러운 카지노보다 GAFA가 훨씬 더럽습니다.

 

p155

 진정한 저널리즘이란 쉬이 보이지 않는 진실을 백일하에 밝혀내는 것인데 지금은 비판적이지 않은 저널리즘이 횡행하고 있습니다. 

 이것이 인터넷 사회가 낳은 저널리즘의 위기입니다. 트럼프나 시진핑 같은 사람들이 언론에 비판적이어서 그런 말이 나오는 게 아니에요. 그리고 저널리즘의 위기는 곧 민주주의의 위기이기도 합니다. 저널리즘의 힘을 통해 진실을 규명하려는 자세가 실종된 민주주의는 이미 민주주의로서 기능하지 않기 때문입니다.

 정리하면 인터넷에서 뉴스를 읽거나 메일을 보내는 '노동'이 배후에 숨어 보이지 않는 '누군가'에게 저널리즘을 위기에 빠뜨리는 원동력으로 이용되며, 우리는 이 모든 사실을 알아차리지 못하고 충분한 정보를 얻었다면 좋아합니다. 이러한 구조가 현대 사회를 위태롭게 하고 있어요.

 

 가짜 뉴스가 만연하여 탈진실 post truth 이 일어나고 있는 상황을 어떻게 생각합니까?

 

 우리는 사실과 진실을 알기 어렵다고 생각하는데, 그것이야말로 탈진실을 만들어내는 원인입니다. 물론 진실을 규명하는 일은 어렵습니다. 전략적으로 진실을 숨기려고 하는 사람이 있기 때문이죠. 그러나 설령 그러한 상황에 있더라도 '진실은 존재하지 않는다'고 단정 짓는 것은 잘못되었습니다.

 오늘날 정치는 탈진실로 신음하고 있습니다. 원래 민주주의 시스템은 '재화나 특권 등의 분배가 실현 가능하다고 믿으며, 그 실현 방안을 논의로 정하는 것'입니다. 하지만 현실에서 민주주의는 이렇게 작동하지 않죠. 따라서 가치의 분배에 불만을 가진 사람들이 항의하거나 봉기할 수 있는데, 그런 상황을 막기 위해 의사 결정을 '숨길' 스토리가 필요합니다. 그것이 바로 탈진실입니다. 객관적인 사실보다 주관적인 감정에 호소함으로써 본질을 흐리는 일종의 속임수죠.

 이것은 다른 의미로 '완벽한' 속임수이기도 합니다. 거짓은 진실을 전제로 하므로 '진실은 존재하지 않는다'는 말은 '속임수도 존재하지 않는다'라는 말이 되거든요. 덕분에 정치인들은 마음껏 거짓말을 하고 의도적으로 사실을 왜곡합니다.

 

p162

 트럼프 대통령과 미국에 대해서 좀 더 구체적으로 말씀해주시겠어요?

 

 지금 미국에는 두 종류의 이데올로기밖에 없어요. 바로 자연주의와 종교인데요. 트럼프는 그 둘을 완벽하게 구현한 사람이에요. 먼저, 그는 기독교 원리주의자(근본주의자)입니다. 또 진화론을 부정하고 우주는 신에 의해 창조되었다고 믿는 창조론자입니다.

 의외라고 생각할지도 모르지만, 기독교는 유물론적 자연관과 이어져 있습니다. 이것은 막스 베버Max Weber가 말한 세계의 '탈주술화Entzauberung'라는 명제를 떠올리게 합니다. 기독교를 포함한 유일신 종교에서는 오직 신만이 불가사의한 힘을 지녔다고 가르칩니다. 신이 우주를 창조했으며 그 안에서 벌어지는 모든 일들은 신이 만든 자연법칙에 따라 일어난다고요. 고전적인 자연주의는 '신'과 '세계' 사이에 큰 질적 차이가 있다고 주장하고, 현대의 자연주의는 '신은 이제 존재하지 않는다'라고 주장하지만, 둘은 근본적으로 같은 선상에 있는 이데올로기입니다. 다시 말해 전자는 신을, 후자는 세계 자체를 자연주의에 입각해 고찰하고자 했습니다.

 신이 세계를 창조했다는 말은 완전히 틀린 주장입니다. 이러한 입장 위에서 세계를 이해할 수 없어요. 미국 문화는 이렇게 틀린 자연관을 바탕으로 합니다.

 왜 그렇게 되었는지 원인은 분명합니다. 미국의 청교도 문화는 아메리카 원주민을 무자비하게 학살하면서 시작했습니다. 원주민은 완전히 다른 자연관을 갖고 있었습니다. 그들은 땅을 어머니로, 모든 동식물을 형제로 봤어요. 하지만 그들의 의미 있고 아름다운 자연관은 철저히 파괴되었고, 공허하고 어두운 유물론적 자연관만이 남았죠. 예를 들면 그랜드캐니언이 그 모델입니다.

 미국인에게 현실이란 그랜드캐니언 같은, 이른바 '의미 없는 거대한 구멍'과 같습니다. 자연주의적 자연관이 허무주의nihilism으로 이어지는 겁니다. 미국인의 행동 패턴은 이러한 '의미 없는 구멍'에 무언가 '의미'를 부여하기 위해 전력을 다하는 것입니다.

 미국 문화는 일반적인 이미지보다 훨씬 종교색이 강하고, 그 정치 형태도 기독교 원리주의의 영향을 강하게 받고 있습니다. 제가 볼 때는 미국이나 이슬람 원리주의 아래 있는 이란이나 비슷해요.

 

 

 경제와 관련해 자연주의와 가장 큰 문제점은 무엇인가요?

 

 시장에서 경쟁력이 있으려면 인건비를 줄이기 위해 새로운 기계를 만들어내야 하고 그러려면 학문상 발견, 즉 지식이 필요합니다. 이런 의미에서 학문과 기술은 이어져 있는 셈인데요. 학문상의 공적에 의해 새로운 기계가 만들어지고 이것이 경제를 위해 쓰입니다.

 경제 활동의 존속과 제조 합리화를 목적으로 지식이 연구되는 셈인데요, 이때 가격으로는 나타낼 수 없는 다른 형태의 앎이 존재한다는 사실이 간과되고 있습니다. 가격으로는 나타낼 수 없는 앎이란, 우리들의 실재 체험입니다.

 

p165

 예를 들어 텔레비전 드라마를 시청하는 것과 고전 소설을 읽는 것은 모두 만족감을 줍니다. 하지만 드라마는 보는 즉시 만족감을 주는 상품입니다. 그에 비해 고전 소설은 읽는 데 시간이 오래 걸립니다. 하지만 그만큼 자유와 우연을 향유할 수 있다는 점에서 곧바로 얻는 만족감과는 질적으로 큰 차이가 있는 만족감을 선사하죠.

 자연주의가 사회에 위험한 이유는 그 세계관이 자유나 우연의 입지를 위태롭게 하기 때문입니다. 자연주의적 세계관에서 자유는 찾아볼 수 없습니다. 우연은 양자론에서 말하는 소립자 수준에서나 존재합니다. 자연주의는 우리 인간을 이해하지 못한 사고 방식입니다.

 실생활에서 일어나는 우리의 체험을 자연주의는 고찰 대상으로 삼지 않았습니다. 그 체험을 자연과학적으로 탐구하려면, 그림을 보고 감동하거나 친구와 즐겁게 시간을 보내는 중에 우리 뇌에 전극을 꽂고 뇌파나 영상을 확인해야 합니다. 하지만 현실에서 인간의 경험이란 그렇게 시각화해서 측정한 것 이상입니다.

 예를 들어 세 살 난 딸이 "숫자 3이 뭐야?" 하고 묻는다면 저는 손가락 세 개를 펴서 보여줄 겁니다. 그럼 딸은 "아, 그렇구나. 하나, 둘, 셋. 이게 3이구나"라고 대답할 거에요. 하지만 자연주의의 관점에서 보면 제 손가락 세 개는 '3'이 아닙니다. 세포, 소립자, 에너지 같은 이야기로 흘러가죠. 그러나 '세 개의 손가락'이 제게 의미하는 내용, 예를 들어 세 살 난 딸에게 나이를 가르쳐주었을 때의 추억 등은 현상을 구성 요소로 쪼개서 분석하는 방법으로 탐구할 수 있는 대상이 아닙니다.

 어떠한 현상을 자연과학적으로 탐구한다는 건 잘게 분해한다는 말과 같습니다. 실험이란 어떤 측면에선 파괴하는 행위입니다. 대형 하드론 충돌형 가속기LHC 안에서는 항상 물체가 기본 입자 수준으로 잘게 파괴됩니다. 그러나 현실은 그렇게 분해할 수 있는 성질의 것이 아닙니다. 현실은 '상황'이라는 큰틀 안에서 성립하기 때문입니다.

 

p167

 자연주의가 경제와 밀접하게 관계를 맺는 현대에 인간은 자신을 지키기 위해 무엇을 해야 합니까?

 

 철학의 관점에서 말하면 우선 개념에 신경 쓰라고 조언하고 싶군요. 특히 자연주의에서 '사실을 가리려고 사용하는 단어'들의 진정한 의미를 제대로 파악해야 합니다. 이것은 철학의 역할이기도 합니다.

 예를 들어 '포퓰리즘populism'이라는 단어가 있습니다. 이 단어가 '뭔가 위험하다'고 생각하면서도 진짜 의미를 이해하는 사람은 거의 없습니다. 이 단어는 사실 키워드이지 개념이 아닙니다. 참고로 개념과 키워드는 달라요. 개념은 진실에 가깝고, 키워드는 무기 같은 겁니다. 정치 토론을 보면 이런 키워드들이 상대를 공격하거나 비방하는 데 쓰입니다. 하지만 토론의 궁극적인 목적은 평화를 만들어내느 거게요. 따라서 개념을 잘 이해해서 진실에 다가가려고 노력하는 게 첫걸음이 되어야 합니다.

 철학은 사고방식을 바꿈으로써 현실을 바꿉니다. 특히 우리는 같은 현상을 다른 각도에서 보고 파악하는 방법을 배워야 합니다. 눈에 보이는 대로, 귀에 들리는 대로 현실을 인식하다간 세간에 떠도는 이데올로기의 희생양이 되고 말 거에요.

 표면적인 이데올로기의 진정한 의미를 알기 위해서는 변증법이 효과적일 수 있습니다. 어떤 '예측'에 대해 우선은 반대 방향에서 살펴보세요. 처음에는 보이지 않았던 다른 측면이 보일지도 모릅니다. 그렇게 '진실이라고 굳게 믿는 것'의 숨겨진 일면을 탐색해야 합니다.

 트럼프를 예로 들어볼까요? 이 내용을 설명하는 데 트럼프만큼 완벽한 소재는 없거든요.

 글로벌 자본주의를 대표하는 존재가 백악관에 앉아 있습니다. 덕분에 미국 경제는 잘 굴러가고 있지요. 트럼프는 세계적인 스타입니다. 전 세계 미디어가 앞다퉈 연일 트럼프에 관한 뉴스들을 송출하는 가운데 우리는 트럼프라는 인물을 충분히 아는 듯한 느낌을 받습니다.

 그러나 그 뉴스 대부분이 정말인지 고개를 갸웃하게 만드는 정보들입니다. 트럼프는 제대로 일을 하고 대통령직을 수행하고 있는데, 매일 귀에 들리는 뉴스는 '트럼프는 정치를 하지 않는다', '트럼프는 골프 삼매경에 햄버거를 먹으며 텔레비전을 보고 있다' 라고 말합니다. 하지만 그건 사실이 아닙니다. 실제로 그런 일은 있을 수 없어요.

 흥미로운 사실은 대통령 자신이 이런 얼토당토않는 이야기들을 사람들이 진실이라고 믿기를 바란다는 점입니다. 미국에서는 아무도 정치를 하지 않는다고 생각하게 만드는 거죠.

 사물의 본질과 표면은 같지 않습니다. 표면에서는 '놀고먹는 트럼프'가 우리에게 보입니다. 하지만 다른 관점에서 보면 백악관이 의도적으로 그런 이미지를 심으려고 한다는 걸 할 수 있습니다. 이런 사고가 바로 변증법입니다. 그러므로 정보를 곧이곧대로 받아들여서는 안 됩니다.

 

p171

 오늘날 우리는 인간적인 삶이 완전히 파괴될 위기에 직면해 있습니다. 100년 넘게 위험한 상태가 이어지고 있어요. 현재의 소비문화를 앞으로도 계속 이어나가기란 불가능합니다. 커피와 빨대, 자동차와 휴대전화 등을 100억 명이 모두 원한다면 지구가 남아나겠습니까? 현 사회 모델이 지속 가능한 것이 아니라는 사실은 누구나 알고 있습니다.

 

p180

 뒤르켐은 '각자가 자신의 성격에 맞는 역할을 가지고 진정한 용역의 교환이 이루어지는 것'이야말로 '분업'이라고 말하다.

 

p182

 그러나 이에 대해서 재미있는 '다른 의견'이 있다. '신자유주의의 이론적 지주'이자 '시장 경제의 최대 옹호자' 하이에크가 애덤 스미스의 인간관을 어떻게 해석했는지, 다음을 보자.

 

 애덤 스미스와 그의 추종자들이 말한 개인주의에 대해 현재 퍼지고 있는 오해를 가장 잘 나타내는 예는 아마도 다음과 같은 것이다. 그것은 애덤 스미스는 '경제인'이라는 요정을 발명했다는 것이다. 그리고 그들의 결론은 엄밀히 합리적인 행동이라는 그들의 가정 혹은 일반적으로 잘못된 합리주의적 심리학으로 인해 그 가치를 해치고 있다. 물론 애덤 스미스는 이러한 종류는 가정하지 않았다. 그의 견해에서는 인간은 원래 태만하고 게으르고 경솔하며 낭비를 좋아하는 존재로, 인간으로 하여금 목적과 수단을 합치시키고 경제적으로 혹은 주의 깊게 행동하게 할 수 있는 것은 환경의 힘뿐이라고 말하는 편이 진실에 가까울 것이다. 그러나 이렇게 말한 것조차 그가 가지고 있던 매우 복잡하고 현실적인 인간관에 대해서는 적절하지 않다.

 (중략) 스미스의 주된 관심은 인간이 최선의 상태에 있을 때 우연히 달성할 수 있는 것이 아니라, 인간이 최악의 상태일 때 해를 끼칠 기회를 되도록 적게 하는 것에 있었다. 스미스와 그의 동시대 사람들이 옹호한 개인주의의 주요 장점은 그 체제 아래서는 악인이 최소의 해밖에 끼칠 수 없다는 데 있다고 말해도 과언이 아닐 것이다. 그것은 그 체제를 운용할 선인을 우리가 발견하는지 아닌지에 따라 그 기능이 좌우되는 사회 체제가 아니며, 또 모든 인간이 현재 그 이상으로 선량한 사람일 때 비로소 기능하는 사회체제도 아니다. 그렇지 않고 그것도 모든 사람을 있는 그대로의 다양하고 복잡한, 때로는 선량하고 때로는 악인인, 또 때로는 총명하면서도 더 자주 어리석은 모습을 그대로 활용하는 사회 체제다. 스미스가 목표로 하는 것은 동시대 프랑스 사람들이 바란 것처럼 '선인과 현인'에게만 자유를 한정하는 것이 아니라 모든 사람에게 자유를 인정할 수 있는 체제였다.

 - 프리드리히 하이에크, 「개인주의와 경제질서」 -

 

p185

 뒤르켐은 120년도 더 전에 위기감을 표명한 대상은 산업사회뿐만 아니라 산업사회가 만드는 그림자, 즉 이미지이기도 했다. 그는 기계화와 산업화가 진행되는 가운데 생산라인의 이미지가 사람들에게 사고의 양식마저 심어주는 것을 경고했다. 그는 이런 부정적인 현상을 극복하기 위해 본래의 도덕적인, 유기적 연대의 중요성을 설파했다.

 

 

 

 이 책은 우치다 타츠루가 한국에서 2014년부터 매년 1차씩 한국을 방문하면서 한 8개의 강연의 내용을 묶어서 출간한 것이다. 교육관련 단체인 에듀니티가 주관을 하고 주로 초중고 교사를 대상으로 한 강연이었기 때문에 교육과 관련된 우치타 타츠루의 견해를 중심으로 그 내용이 이루어져 있다.

각 강연이 유튜브로 올라와 있어서 같이 참고하면 좋다.

 

주로 한국의 교육현실에 대해 저자는 일본의 부정적 상황을 예로 들면서, 이렇게 하지 않는 것이 좋다라는 반면교사적 내용 위주의 이야기가 진행된다.

교육에 대한 의견 자체도 있지만, 일본의 현재의 사회나 정치 상황에 대해서도 참고할 만한 내용이 많다. 

 

 

(강연 Link)

2014 첫 번째 이야기.

1. 어른이 없는 사회에서 어른이 된다는 것

 

2. 교육은 실패라는 말을 허용하지 않는다

 

2015. 두 번째 이야기

 

3. 동아시아의 평화와 교육

 

4. 우치다식 공생의 필살기

 

2016/2017 세 번째 이야기

 

5. 교사단의 관점에서 교육 낯설게 보기

 

2018. 네 번째 이야기

6. 미래교육 어떻게 디자인할 것인가

 

2019. 다섯 번째 이야기

7. 교육과 계급 : 이 · 생 · 망 동지들에게

 

 

8. 어른을 찾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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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14 첫 번째 이야기.

1. 어른이 없는 사회에서 어른이 된다는 것.

p23

 일본과 한국에서 동시에 아이들의 성숙 문제가 전면에 등장한 것은, 이것이 세계적인 문제라는 것을 의미합니다. 우리는 지금 성숙 모델을 잃어버린 사회에 살고 있습니다. 특히 남성의 경우가 더욱 심각한데, 남자의 성숙에 참고할 만한 롤모델을 거의 상실했습니다. 그중에서도 가장 극적으로 변화한 것은 가정 내 아버지의 역할입니다. 전 세계 모든 나라에서 비슷한 일이 일어나고 있으리라 생각하는데, 가정에서 아버지의 지위가 극도록 낮아졌습니다. 할리우드의 유명 제작이자 뛰어난 배우인 클린트 이스트우드가 최근 20년간 딸에게 미움받는 역할을 연기한 것으로도 느껴지는 사실이지요. 바깥에서는 슈퍼 히어로인 남성들이 가정 안에서는 충분한 존경도 애정도 못 받는 것은 이미 세계적인 경향인 듯합니다. 가정에서 아버지는 점점 중요하지 않은 사람이 되어가고 있습니다.

 

p29

 아이러니하게도 부권제 사회에서는 아버지가 미성숙하거나 인간성에 대한 이해다고 낮을수록 아이가 잘 성장했습니다. 정말 잘 만들어진 시스템이죠. 아버지가 미성숙하고 아이들에 대한 이해가 부족한, 상상력이 부족한 인간일수록 아이들은 성장할 기회를 얻었던 겁니다. 그러나 가정에서 아버지의 권한이 사라짐과 동시에 아이들은 망설일 자유를 잃어버렸습니다. 

 

p31

 아이들은 갈등 속에서 성장합니다. 아이들에게는 서로 다른 성숙 프로그램을 제공하는 다양한 어른이 있어야 합니다. 서로 전혀 다른 육아 전략을 지닌 어른들과 마주해야 합니다.

 

p33

 성숙의 반대말은 미숙이 아닌 트라우마입니다. 동일한 경험을 반복적으로 체험하는 것, 아무리 새로운 일을 경험해도 과거의 기억이 변하지 않는 것이 트라우마입니다.

 성장이라는 말에 여러분 중 대다수는 앞을 향해 나아간다는 이미지를 갖고 계실 것 같은데요, 사실 그렇지 ㅇ낳습니다. 성장을 뒤를 돌아보면서 나아가는 것입니다. 한 걸음 걸을 때마다 자신이 걸어온 길의 의미가 변하는 것. 풍경이 변하고, 자신이 경험한 일의 의미가 달라지는 것, 그것이 성장입니다.

 그렇다면 어떻게 뒤를 보고 걸어갈 수 있을까요? 바로 등으로 느끼는 겁니다. 자신을 부르는 목소리를 듣는 것입니다. 영어로는 콜링Calling 또는 보케이션vocation이라고 하는데 두 단어 모두 '소명'이라고 번역할 수 있습니다. 눈에 보이지는 않아도 들을 수 있는 것이 있습니다. 소명은 그렇게 등 뒤에서 부르는 소리를 듣고 자기를 부르는 곳을 향해서 걸어가는 걸 말합니다. 성숭하는 아이란 여러 어른이 해주는 다양한 이야기 속에서 자신이 들어야 할 목소리를 가려내 그 방향으로 걸어가는 아이입니다. 목소리가 하나밖에 들리지 않는 경우, 어른이 한 명뿐이거나 다른 어른들이 모두 침묵하는 상황은 결코 아이를 성장시키지 못합니다.

 

2. 교육은 실패라는 말을 허용하지 않는다.

 

p40.  교육은 사회공통자본이다.

 세상에는 종사자들의 멘탈리티가 변하지 않는 직업이 몇 가지 있습니다. 사법과 의료는 정권의 변화나 경제 상황의 변화에 휩쓸리면 안 됩니다. 정권이 교체되었다고 사법적 판단이 바뀌면 안 됩니다. 경기가 좋아지거나 나빠짐에 따라 의료 내용이 달라지면 곤란합니다. 교육과 종교도 그렇습니다.

 인간이 살아가기 위해서, 집단이 살아남기 위해서 꼭 있어야 하는 것을 사회공통자본이라고 하지요. 첫 번째 사회공통자본은 자연환경입니다. 공기나 대지, 바다와 강, 숲 등입니다. 이게 없으면 인간은 살아갈 수 없습니다. 이런 것들을 정치 권력이나 기업에 맡길 수는 없습니다. 누구도 사유해서는 안 됩니다. 두 번째는 사회 인프라입니다. 교통망, 상하수도, 통신망 등이 여기 해당합니다. 전기나 가스 같은 라이프라인도 마찬가지입니다. 이 또한 없어서는 살아갈 수 없습니다. 인간이 살아가기 위해 필수불가결한 이런 것들은 정치나 경제에 종속되어서는 안 됩니다. 우리가 직접 관리하지 않으면 안 됩니다. 정치적 목적에 이용되어선 안 됩니다. 사회공통자본은 전문가가 전문적인 지식에 기초해서 관리해야 합니다. 세 번째는 앞서 이야기한 사법, 의료와 교육입니다. 당연히 사회공통자본인 교육은 전문적인 사람에게 맡기지 않으면 안 됩니다. 그 전문가란 교사입니다.

 학교교육은 정치나 경제, 미디어 등과 다른 시간의 흐름 속에 있습니다. 학교교육의 시간은 굉장히 느리게 흐릅니다. 정치가 한 사람의 신념이나 정치적 입장으로 인해 바뀔 수 있는 것이 아니지요. 그래서 오사카 시장에게 교육에 관여하지 말아달라고 말했던 것입니다.

 교육이라는 사회공통자본의 특징은 실패라는 말이 허용되지 않는다는 것입니다. 어떤 교육정책을 실행해보고 몇 년뒤에서야 틀렸다는 말은 용납하지 않습니다. 틀렸으니 이번엔 다른 교육정책을 실시해보자는 태도는 허용할 수 없습니다. 왜냐하면 이미 그 교육을 받은 아이들이 있기 때문입니다. '너희들은 잘못된 교육을 받은 실패작'이라고 말할 수는 없습니다. 공장이라면 그럴 수도 있습니다. 특정 제품에 대해서라면 '제작법이 잘못되었다. 불량품이다'하고 폐기할 수 있습니다. 하지만 교육에서는 그럴 수 없습니다.

 

 

2015. 두 번째 이야기

2. 동아시아의 평화와 교육

 

p72

 구체저긴 미군 기지 축소 프로그램이나 동아시아 공동체 계획의 문제가 아니라 그런 생각 자체가 금기입니다. 미국에서 그렇게 하라고 강요한 것도 아니고, 일본인 스스로 한 일입니다. 만약 미국에서 대놓고 실각을 요구하면 내정간섭이 되지만 일본의 경우는 내정간섭조차 필요없습니다. 미국 대통령의 기분이 나빠지겠다 싶은 말을 총리대신이 꺼내면 온 일본의 관료들이 들고 일어나 발목을 잡으니까요. 하토야마 씨의 발목을 잡은 건 외무성과 방위성입니다. 미국은 공문서를 금방 공개해주는데, 당시 미일공동위원회의 자료를 보면 외무성의 한 관료가 "조만간 하토야마 총리가 미군기지 축소 이야기를 꺼낼지도 모르니 절대 응하지 말아달라"라고, 일본 외무성의 관료가 미군에게 말했다는 기록이 있습니다.

 한국 언론에서는 거의 보도되지 않았을 거라고 생각합니다만, 하토야마 씨를 끌어내릴 때 일본 언론의 공격은 굉장했습니다. 요미우리, 아사히, 마이니치라는 일본 3대 신문사를 비롯해서 수많은 언론이 사설을 통해 '하토야마는 머리가 이상하다'는 식의 발언을 쏟아냈습니다. 저는 당시 하토야마 총리의 실각 과정을 보면서 일본이 상당히 이상해졌다고 생각했습니다. 종속국으로서 주권의 회복, 국토의 회복을 바라서 그랬다고 하면 그래도 이해할 수 있었겠지만, 일본인은 주권이나 국토 회복을 바라지 않습니다. 저는 이런 현상이 일본인이 안고 있는 근본적인 병이라고 생각합니다. 미국이 지시하지 않아도 미국의 이익을 위해서 발 멋고 나서는 모습이 일본 전체에 만연해 있습니다.

 

p75

 안전보장 관련법은 미국을 위해 전쟁하겠다는 법률입니다. 자위대원이 아프가니스탄이나 시리아나 수단에 가서 전쟁하면 일본에는 아무런 도움이 되지 않지만 미국의 국익은 올라갑니다. 자국 청년들 대신 일본 병사가 죽어주고 군비 부담도 해주니, 미국 사람들 입장에서는 일본이 왜 이런 제안을 하는지 이해하기 어려울 것 같습니다. 일본의 이익이 되지 않는데도 그렇게 하고 싶다는 사람이 많습니다. 그렇게 해서 자기 이익을 추구하는 건데, 아베 정권의 경우 미국을 위해 최선을 다한다는 인상을 주어 장기 집권을 약속받았죠. 이건 미국이 동아시아에서 계속 시행해온 전략입니다. 미국의 이익을 위해 힘쓴다면 어떤 정권이라도 지지해줍니다. 필리핀의 마르코스Ferdinand Emmanuel Edralin Marcos(임기:1965~1986), 인도네시아의 수하르토Haji Mohammad Soeharto(임기:1967~1998), 베트남의 응오딘지엠Ngo Dinh Diem(임기 : 1955~1963)처럼 명백하게 비민주적인 정권들은 미국은 계속 지지해왔습니다. 그들의 통치 형태는 민주제도 아니었고, 미국의 건국이념과 공유할 만한 가치관도 전혀 없었습니다. 아베 역시 이번 안전보장 관련법의 채택으로 마르코스나 수하르토, 응오딘지엠과 똑같은 정치가가 된 것입니다. 자국민을 배신하고 자국의 이익을 희생하더라도 자신의 정권을 유지하고 싶어 하는 정치가 말입니다. 일본에서는 지금 국민의 40퍼센트가 그런 정치가를 지지하고 있습니다. 아마도 많은 일본인에게 그렇게 살아도 된다는 인식이 생겼기 때문일 겁니다. 장기적인 관점에서 본 일본의 국제적 위상보다 당장 눈앞의 이익을, 국민이나 미래 세대보다도 현재 자신의 사적 이익을 우선시하는 거죠.

 

p77

 TPP라는 게 있습니다. 일본은 이를 받아들이려 하고 있는데 그게 실현되면 일본 농업은 괴멸할 겁니다. 일본의 농산물 가격이 국제 시장의 평균 가격보다 높기 때문입니다. 이대로 협정이 체결되면 일본 사람들은 일본 농산물을 사지 않고 외국산 농수산물을 구매할 것입니다. 저는 좀더 비관적으로 생각합니다만, 낙관적으로 봐도 일본 농업의 40퍼센트가 사라질 것이라고 합니다. 그런데도 언론이나 정치가, 재계인은 외국의 값싼 농수산물이 들어오면 소비자들이 이익을 얻을 거라고 떠들어댑니다. 단기적인 면에서는 그럴지 몰라도 장기적인 리스크는 어떻게 회피할 생각인지 모르겠습니다.

 여러분도 아시는 대로 멕시코는 캐나다, 미국과 FTA협약을 맺고 자유무역 체제가 되어 관세가 철폐되었습니다. 멕시코의 주식은 옥수수입니다. 그런데 미국산 옥수수가 멕시코산보다 훨씬 쌉니다. 당연히 멕시코의 소비자들은 미국산 옥수수를 선택했습니다. 계속 싼 물건이 들어오니 소비자들은 이익을 봤지만 대신 멕시코의 옥수수 농가는 괴멸했습니다. 얼마 후, 바이오매스 연료의 재료로 옥수수를 쓸 수 있다는 사실이 밝혀졌습니다. 옥수수 가격이 폭등했고, 멕시코 사람들은 옥수수를 살 수 없게 되었습니다. 국내에서 더 이상 옥수수를 생산하지 않았기 때문입니다. 주식을 먹을 수 없게 된 것이죠. 이게 2008년에 일어난 일입니다. 똑같은 일이 어디서든 일어날 수 있습니다.

 농수산물은 상품으로 보이지만 실은 상품이 아닙니다. 그것 없이 사람은 살아갈 수가 없습니다. 돈으로 살 수 있느냐 없느냐 하는 차원에서 논할 수 없는 것이 바로 '식량'입니다. 만약 이대로 일본의 농업이 괴멸하더라도 당장은 자동차 산업 등 다른 산업으로 번 돈으로 쌀이든 밀가루든 사먹을 수 있을 겁니다. 그런데 만약 사먹을 수 없게 되면 어떻게 될까요? 미래에 무슨 일이 일어날지는 아무도 모릅니다. 전쟁이 일어나질도 모릅니다. 전염병이 퍼질 수도 있고, 테러가 있을 수도 있고요. 어쩌면 일본 경제력이 완전히 떨어져서 농수산물 수입이 불가능해질 수도 있습니다. 미래에 무엇이 일어날지는 아무도 모릅니다. 다른 공업제품이라면 수입을 못하더라도 불편한 정도로 끝납니다. 전자제품이나 자동차가 들어오지 못하더라도 불편한 걸로 끝입니다. 하지만 국내 농산물 생산이 중단되 상태에서 해외로부터의 유입이 끊어진다면 사람들은 굶게 됩니다. 식량을 두고 싸움이 벌어집니다.

 TPP 논의에서 가장 화나는 부분이, 먹을거리를 상품으로 여긴다는 점입니다. 식량은 상품이 아닙니다. 식량이라는 것은 공급히 윤택할 때는 상품으로 보이지만, 공급량이 일정 이하로 떨어지는 순간 상품이 아니게 됩니다. 어느 정도 경제가 잘 돌아갈 때는 상품으로 보이지만 경제활동이 침체되는 순간 살기 위해 서로 빼앗게 되는 것이 식량입니다. 그런 것들을 상품으로 다루어서는 안 됩니다. 아무리 국제가보다 높은 비용이 들더라도 자급자족하지 않으면 안 되는 것이 식량입니다. 농수산업 같은 1차 산업은 국미이 지키지 않으면 안 됩니다. 국제 가격보다 싸다 비싸다가 문제가 아닙니다. 식량의 자급자족은 생존을 위한 보증입니다.

 식문화는 기본적으로 기아, 배고픔을 기준으로 생각해야 합니다. 나라마다 다양한 식문화가 있지만, 어느 나라든 식문화의 기본은 기아에서 벗어나는 겁니다. 식문화의 역사는 먹지 못하는 것을 먹을거리로 만들기 위한 궁리의 역사라고 할 수 있습니다. 이런 걸 어떻게 먹나 싶은 것들을 다양한 궁리를 통해 먹을 수 있게 만들어온 과정입니다. 삶거나, 굽거나, 말리거나, 찌거나, 다지거나.... , 여러 방법을 동원해 먹을 수 있게 만든 것이 인류학적인 식문화의 역사입니다. 또한 인류는 집단마다 다른 것을 주식으로 삼아왔지요. 저쪽 집단이 고구마를 먹으면 이쪽이 바나나를 먹고, 이쪽이 밀을 먹으면 조쪽은 쌀을 먹는 식이죠. 기상 조건 등 여러 이유가 있겠지만 가장 중요한 이유는 하나의 대상에 모든 욕망이 집중되지 않도록 하기 위해서입니다. 만약 모든 인류가 밀을 주식으로 하는 상황에서 밀이 흉작이면 밀을 빼앗기 위한 살육이 일어날 겁니다. 그러나 고구마가 바나나, 콩 등을 주식으로 삼는 사람들이 있으면 그것으로 대체해 굶주림을 피할 수 있습니다.

 식료품을 상품으로 취급하기 시작하면 식문화의 다양성이 파괴됩니다. 전 세계 사람들이 같은 것을 먹으면 식품을 생산하는 기업의 생산 비용이 낮아집니다. 식문화의 획일화 또한 자본주의의 영향으로 인한 현상인 겁니다. 글로벌화가 진행되면서 세계가 평평해진다고들 하는데, 평평해지는건 경제만이 아닙니다. 식생활도 평평해집니다. 일본이 TPP에 가입하면 일본 농수산업은 괴멸 상태에 빠질 텐데 그에 대한 위기감을 이야기하는 사람이 거의 없습니다. 식료품 유입이 끊어졌을 때, 기근이 일어났을 때 어떻게 리스크를 피할 지 논의하자는 사람이 아무도 없습니다. 앞서 평화보케, 70년의 평화에 젖어버린 현재 일본의 정치가나 관료에 대해 이야기했습니다만, 이 경우도 똑같습니다. 우리들이 우선적으로 지성을 활용해야 할 부분은 아무 일도 없을 때 어떻게 이익을 높이느냐가 아닙니다. 카타스트로프적인, 파국적인 상황이 찾아왔을 때 살아남을 방법입니다.

 

 

4. 우치다식 공생의 필살기.

p120 

 어른이라는 것은 결국 누가 무슨 말을 하든 '그럴 수도 있지'하며 상대의 말에 이해와 공감을 표할 수 있는 사람이라고 생각합니다. 박애주의자여서라거나 다른 사람에게 뭔가 줄 것이 있어서 타인을 받아들이는 건 아닙니다. 다른 사람과 공생하는 것, 타인을 받아들이는 것 자체가 기본이 되어야 합니다. '공생할 수 있는 능력'이라는 게 굉장한 노력을 요한다는 생각, 예외적인 소수만이 획득할 수 있다는 식의 발상은 상당히 위험합니다.

 

p122

 여러 먼에서 자신과 다른 집단이나 개인과 조우했을 때 다투지 않고 살아가는 지혜가 바로 공생의 매너라고 생각합니다. 이것이 갖추어져 있지 않으면 집단과 집단이 만났을 때 싸움이 일어나고, 개인의 경우 배제당하게 됩니다. 가치관이나 언어, 종교 등이 전혀 다른 상대와도 공생할 수 있는 능력, 이런 능력은 어렸을 적부터 반드시 개발하지 않으면 안 되는 능력입니다.

 하지만 애석하게도 현대 사회에서는, 세계 어느 나라에서든 마찬가지일 거라 생각합니다만, 공생의 매러를 가르치고 있지 않습니다. 모든 나라에서 아이들의 자기다움, 오리지널리티 등에 이상할 정도로 높은 가치를 두고 있습니다. 아이들이 어린 시절부터 공생의 매너를 배울 기회를 잃고, 어른들은 그걸 가르쳐야 한다는 문제의식조차 없다는 것이 이 시대에 일어나는 커다란 불행들의 원인입니다. 인간의 마음이 병들어갈 때 나타나는 특유의 정신 상태가 있습니다. 무언가에 집착하고, 프라이드를 내세우고, 내가 가져야 할 것을 누군가에게 빼앗기고 있다는 피해의식을 보입니다. 사회 전체가 정신병자를 만들고 있는 건데 가장 먼저 나타나는 것이 집착이죠. '이렇게 되지 않으면 안 된다'는 압박감입니다. 지금의 사회는 옷, 음식, 수집품 등에 대한 집착을 상당히 높게 평가합니다. 아마 사회적 요구 때문에 이렇게 된거라 생각합니다. 사람들이 무언가에 집착할수록 소비활동이 활발해지기 때문이겠죠.

 

p126

 사람들이 자신의 자아, '나다움'을 어떻게 설계할지 정할 때, 첫 단추를 잘못 끼우고 있다는 생각이 듭니다. 여러분처럼 어린아이들부터 중학생, 고등학생까지의 학생들을 가르치는 선생님들이 제일 먼저 가르쳐야 할 것은 역시 '자기 내면에 다양한 것이 혼재해도 괜찮다'라는 생각일 겁니다. 어느 아이에게도 품위 있는 면과 비루한 면모가 있고, 용감한 면과 비열한 면이 있으며, 향상심 있는 부분과 방종한 부분이 있고, 선량한 면과 사악한 면이 있습니다. 인간이 원래 그런 거라고, 그래도 괜찮다고 가르쳐야 합니다. 개성이란 것이 항상 수미일관적으로, 똑같은 것을 하는 게 아니라는 점을 알려줘야 합니다.

 자아의 깊이라거나 넓이, 풍부함이야말로 개성이라는 것을 먼저 가르치는 것. 나는 이런 스타일의 옷밖에 입지 않는다거나 이런 음악밖에 듣지 않는다는 사람은 스스로를 개성적이라고 생각할지도 모르지만, 실제로는 대량 생산된 상품을 그저 소비하고 있는 것에 불과합니다. 실제로 자신의 내면에 풍부한 개성의 단편을 지닌 아이들이야말로 이윽고 성숙한 시민이 되어 다양한 문화권으로부터 찾아오는, 다른 사회에서 방문하는 타자들에게 관대할 수 있는 기본적인 힘을 갖출 수 있을 거라 생각합니다.

 

 

2016 / 2017 세 번째 이야기.

5. 교사단의 관점에서 교육 낯설게 보기

 

p169

 작년 10월, 미국의 외교전문지 <Foreign Affairs>에 '일본 대학교육의 실패'라는 장문의 기사가 게재되었습니다. 이 기사에서는 지난 25년간 일본에서 시행된 교육행정의 실패 증거가 제시돼 있었습니다. 교육행정을 담당하는 일본 관료들의 특징은 자신의 실패를 인정하지 않는 것입니다. 프로젝트가 실패하면 얼른 잊고 다음으로, 그것마저 실패하면 또다음으로 넘어가며 실패한 이유의 검증 작업은 하지 않습니다. 그 결과 동아시아 최고 수준이었던 일본의 고등교육은 중국, 타이완, 한국에 모두 뒤쳐져 선진국 최하위로 전락했습니다.

 각 나라의 연구력, 학술적 발신력을 평가할 수 있는 가장 확실한 지표는 인구당 논문 수입니다. 이전 일본의 인구당 논문 수는 동아시아 최고였습니다. 그런데 2015년의 통계로는 OECD 37위, 선진국 최하위로 떨어졌습니다. 또 자주 비교되는 지표가 GDP 중 교육투자 비율, 교육계의 공적 지출 비용입니다. 여기서도 일본은 연속해서 선진국 최하위에 머물고 있습니다. 5년 연속 최하위입니다. 작년에 한 등수 올라서 최하위가 헝가리였는데 이번에 다시 일본이 최하위가 됐습니다. 나라가 고등교육에 투자할 생각을 하지 않기 때문입니다. <Foreign Affairs>의 기사에서는 이런 수치를 나열하며 일본의 학교교육, 고등교육이 이 정도로 추락한 이유로 여러 의견을 제시했습니다.

 그중 가장 큰 이유로 꼽은 것이 비평적 사고Critical Thinking의 결여였습니다. 비평적 사고란 세상을 비평적으로 보고 생각하며 주어진 명령이나 지시가 불합리하다고 생각하면 '아니'라고 말할 수 있는 능력입니다. 그런데 일본의 대학은 '예스맨'만 키워낸다는 거죠. 두 번째가 이노베이션, 혁신이 없다는 것입니다. 혁신이란 남들이 하지 않는 일을 하는 것입니다. 아무도 관심 갖지 않는 부분에 흥미를 갖는 지적 태도가 혁신을 만들어냅니다. 그런데 일본의 대학은 창의적 고안도 전통적인 기술들을 깨부술 힘도 없이 하나의 분야에서 경쟁할 것을 요구하고 있다는 거죠. 세 번째는 아이러니하게도 글로벌 마인드가 없다는 것입니다. 여기서 글로벌 마인드란 것은 전 세계 다양한 사람들과 커뮤니케이션해서 공동으로 작업하고 일할 수 있는 능력을 말합니다.

 <Foregin Affairs>는 일본의 학교교육이 이 세 가지가 결여된 채 정치 안정성, 사회 안정성을 위해서만 기능하고 있다고 지적합니다. 윗사람 말에 무조건 따르고 비판적으로 세상을 보지 않으며 아무것도 발명하지 않고 자기들끼리만 모여서 굳어지는, 그런 인간들을 만들고 있다는 겁니다. 그래서 일본 고등교육기관의 학술적 발신력, 연구력이 선진국 최하위까지 떨어졌다는 거죠. 정말 단기간에 일어난 일입니다. 앞서 말씀드린 1990년대의 대학설치기준 대강화에 의해 대학들에게 자유선택권이 주어지기는 했지만 등급을 매기지 않으면 안 된다는 이유로 모든 대학이 서로 모방하고, 비슷한 연구에, 교육내용을 체택해 정밀한 등급 매기기를 반복한 결과 일어난 일입니다.

 

p173

 저는 대학 교단에서 일본 대학의 학술적 생산력이 굉장히 높았던 시절과 완전히 사라진 시대를 모두 경험했습니다. 양쪽을 본 사람으로서 확실하게 말씀드릴 수 있는 것은, 등급 매기기에 몰두하는 일은 집단이 가진 힘을 저하시키는 최고의 방법이라는 점입니다. 등급 매기기는 객관성과 정밀도를 요구합니다. 반면에 다양성은 부정됩니다. 모든 경쟁 상대가 똑같은 조건으로 출발해야 하기 때문이죠. 결과적으로 비평적인 사고도, 혁신적인 발상도, 자신과 생각이 다른 사람들과 커뮤니케이션하는 능력도 사라지게 됩니다. 

 

p174

 교육 이외의 분야나 다른 나라, 특히 한국에서 뚜렷하게 나타날 거라 생각하는 현상이 있는데요, 젊은 사람들 쪽에서 정밀한 등급 매기기를 요구하는 겁니다. 

 일본에서는 지방에 사는 젊은 사람들이 도쿄로 몰려듭니다. 한국의 경우는 서울이겠죠. 도쿄는 공기도 안 좋고 물가도 높으며 고용환경조차 결코 좋다고 할 수 없습니다. 그런데도 젊은 사람들은 도쿄로 몰려듭니다. 모두 그렇게 하기 때문입니다. 경쟁 상대가 많으면 많을수록 평가의 정밀도가 높아지기 때문입니다.

 시골 마을에서는 '너는 센스가 탁월하다'라는 소리를 들어도 납득하지 못합니다. 뮤지션이나 배우, 패션 디자이너가 되고 싶은 수많은 사람이 격렬한 경쟁을 반복하는 환경에 스스로 뛰어듭니다. 남들이 하지 않는 일이 아닌 모두가 하는 일이 젊은이를 끌어들이는 겁니다. 보통 무슨 일을 하고 싶냐고 물으면 '모처럼 태어난 인생이니 나만이 할 수 있는 하고 싶다'라고 할 법도 한데, 실제로 그렇게 생각하는 젊은이는 드뭅니다. 다들 남들이 하는 일을 하고 싶어 합니다. 경쟁 상대가 많은 곳에 들어가고 싶어 합니다. 그러면 정밀하고 객관적인 평가를 받을 수 있으니까요. 신기하게도 등급이 낮아도 그렇습니다. 그들이 원하는 것은 '높은 평가'가 아니라 '정확한 평가'인 겁니다. 본인이 동세대에서 어느 정도 위치에 있는지, 어떤 사회적 지위를 요구할 수 있을지, 얼마의 수입을 기대할 수 있고, 어느 정도 수준의 배우자를 얻을 수 있는지 최대한 정확하게 알고 싶어 하죠.

 지금의 일본에서는 '가난한 사람은 가난한 사람답게 행동해라'라는 사회적 압력이 존재합니다. 사실 부모가 가난하고 말고는 아이의 개성과는 아무 관계가 없습니다. 어느 싱글맘에게 들은 이야기인데요, 아이가 학교에서 주변으로부터 받는 압력 때문에 늘 어두운 표정을 짓는다고 했습니다. 아이 본인의 개성은 그게 아닌데 말이죠. 가난한 집 아이는 가난뱅이답게 어두운 표정을 지으라는 사회적 압력이 굉장히 강한 겁니다. 빈곤층이 쾌활한 성격이나 오픈 마인드를 갖는 것을 주변에서 용납하지 않는 것이지요. 이처럼 오늘날의 일본인들은 사회적 지위에 대한 정밀한 등급 매기기를 요구하고, 자신의 지위에서 무엇을 요구할 수 있는지를 빨리 알고 싶어 합니다.

 저는 일본이 가난한 시기에 태어나고 자랐습니다. 당연히 지금보다 훨씬 가난한 사람을 수없이 봐왔습니다. 그런데도 아이들은 각자 개성이 있었고, 집이 가난하니까 음울하다거나 위축된다거나 하는 일은 없었습니다. 1950년대의 아이들, 청년들 중에는 자신의 정확한 사회적 위치라든지 요구할 수 있는 지위, 가져도 될 야심, 기대할 수 있는 수입에 대해 빨리 알고 싶어 하는 사람은 없었습니다.

 지금의 일본은 그때보다 훨씬 윤택합니다. 그런데도 요즘 아이들은 자신의 사회적 지위, 추구할 수 있는 삶의 방식에 대해 훨씬 좁은 가능성밖에 생각하지 못합니다. 나라가 쇠퇴하고 경제력이 약해진다고 해서 이런 일이 일어날 것이라고는 21세기가 되기 전까지만 해도 예상하지 못했습니다. 인구가 감소하거나 경제 성장이 멈춰 정체되는 상황이 반드시 오리라는 것은 예상했습니다만, 실제로 일어난 사회 변화는 제 상상을 아득히 뛰어넘는 것이었습니다. 한정된 자원을 분배하기 위해 객관적이고 정밀한 등급 매기기를 요구하고, 이를 위해 모두 똑같은 일을 하는 사회가 출현한 겁니다.

 결국 일본의 문제는 인구 감소라든지 경제 성장의 침체와 같은 역사적 과정 속에서 어떻게 국력을 다시 높일지를 고미하는 방향이 아닌 등급 매기기와 차별, 균일화의 길로 달렸다는 점에 있습니다. 지금의 일본은 인구 감소 문제에서든 성장의 정체에 있어서든 세계에서 가장 심각한 상태라고 생각합니다. 세계에서 가장 빨리 초고령화 사회에 진입했으니 말이죠. 당연히 경제 성장도 더이상은 없습니다. 몇 년 후면 한국이나 중국에서도 마찬가지로 한정된 자원을 어떻게 공평하게 분배하느냐를 놓고 '정밀한 등급 매기기를 하자'는 주장이 반드시 나올 것입니다. 그리고 가장 비용이 적게 드는 식별 지표로 영어 회화 능력에 의한 차별화를 채택할 것입니다.

 영어 회화 능력을 중시하는 것은 그게 유용한 능력이라서가 아니라 간단히 차별화할 수 있는 지표이기 때문입니다. 등급 매기기라는 것은 하나의 병폐입니다. 등급 매기기에 몰두하다 보면 사회의 활력이 점점 떨어집니다. 안 그래도 인구가 감소하고 경제가 정체되는 상황에서 한층 국력을 저하시키는 그런 해결책을 택해서는 결코 안 됩니다. 일본의 실패 사례를 통해 여러분께 전하고 싶은 게 바로 이 부분입니다. 저출산화, 고령화, 경제 침체..... 그런 상황 속에서 호흡하기 편한 사회를 유지하고 유쾌하고 살고자 한다면 가능한 다양한 삶의 방식을 허용해야 합니다. 경쟁해서는 안 됩니다.

 

2019 다섯 번째 이야기

 

교육과 계급 : 이 · 생 · 망 동지들에게

 

p243

 현재 한일관계가 지극히 악화된 원인의 99퍼센트는 일본 측에 있다고 생각합니다. 일본에 만연한 혐한 감정을 지탱하는 가장 기본적인 감정은 한마디로 질투심입니다. 현재 일본에서는 버블 경제 이후 30년에 걸쳐 계속 국력이 저하되고 있습니다. 경쟁력이 정점에 달했던 1988년에는 일본의 1인당 GDP가 세계 2위였는데 30년이 지난 2018년에는 세계 26위였습니다. 2위에서 26위까지 일직선으로 급강하한 거죠. 그 외에도 대부분의 주요 경제 지표가 일본의 국력 저하를 증명하고 있습니다. 그중에서도 특히 두드러지는 것이 교육에 대한 투자, GDP 대비 공교육 지출입니다. 이 항목에서 일본은 거의 20년간 OECD 최하위를 기록하고 있습니다. 학술적 발신력의 지표로 자주 거론되는 인구당 논문 수 또한 한국, 대만, 중국, 싱가폴에 뒤쳐졌습니다. 국제 사회에서 일본의 영향력, 문화적 발신력이나 미래 사회에 대한 리더십이 뚝 떨어진 겁니다. 한마디로 미래 비전력이 완전히 쇠퇴했습니다.

 

p245

 1980년대 말의 일본인들은 돈으로 주권을 되사고 속국 신분에서 벗너알 수 있지 않을까 꿈꾸기 시작했습니다. 물론 입 밖으로 꺼내지는 않았지만 당시 대부분의 일본인은 그런 꿈을 품고 있었습니다. 실제로 요구하지는 않았지만, 일본 측에서 괌이나 티니안 등 태평양에 있는 섬에 비행장을 비롯한 제반 시설을 마련해줄 테니 오키나와 미군기지를 철수시켜달라고 요구할 만큼 경제력이 실제로 있었으니까요. 1980년대 일본인만큼 돈의 전능성을 맹신했던 집단도 드물 겁니다. 일본인이 탐욕적이라든지 수전노라는 이야기가 아니라, 돈의 힘으로 국가주권을 되산다는 역사상 어느 나라도 이루지 못한 위업을 달성할 수 있지 않을까 하는 꿈을 품고 있었다는 뜻입니다.

 주권이나 국토를 전쟁이나 수완 좋은 외교적 교섭으로 회복한 사례는 있어도 돈으로 구입했다는 사례는 역사상 한 번도 없었습니다. 1960년대와 1970년대의 고도 경제 성장 이후 일본인들이 경제 동물이라는 말을 들을 정도로 돈벌이에 필사적이었던 것은 풍족한 삶보다는 주권 회복을 바랐기 때문일 겁니다. 일본은 '일본국 헌법 제9조 2항'에 의해 전쟁을 포기한 상태였으며, 외교적인 힘도 없었습니다만, 돈만큼은 있었습니다. 그러니 돈으로 주권을 회복한단느, 미국을 제치고 세계 최고의 경제 대국이 되어 자국의 역량을 행사한다는 선택지밖에 없었을 것이고, 이에 대해 전 국민의 암묵적 합의가 있었으리라 생각합니다. 하지만 일본의 버블 경제는 1992년에 붕괴해버렸고, 급격한 경제 성장도 거기서 멈춰버렸습니다. 그 후로도 일본은 2010년까지 20년 가까이 GDP 세계 2위를 유지했습니다만, 우리는 이 시기를 '잃어버린 20년'이라고 부릅니다. 중국에게 GDP에서 뒤쳐진 것이 2010년의 일입니다. 겉으로는 십수년에 걸쳐 세계 2위의 경제 대국이라는 자리를 유지하고 있었지만, 사실 일본은 표류 중이었습니다. 어떻게 하면 좋을지 몰랐던 거죠. 일본인들이 1960년대에서 1980년대까지 30년에 걸쳐 유지해온 '어쨋든 부자가 되자', '우선 부자가 돼서 미국으로부터 독립하자'라는 암묵적 비전을 잃어버린 겁니다. 그러던 중 일본에 고이즈미 준이치로라는 총리대신이 등장했습니다. 그의 인기는 굉장했습니다. 내각 수립 직후의 지지율이 90퍼센트를 넘었습니다. 일본 국민들은 과연 그에게 무엇을 기대한 걸까요? 고이즈미 준이치로가 제시한 것은 정치 대국이 되어서 미국과 대등한 관계even partner를 맺자는 전략이었습니다. 돈의 힘으로 국가주권을 회복하는 것이 불가능해졌으니, 이번에는 국제 사회에서의 지위를 높임으로써 세계적인 대국이 되자고 생각한 거죠. 그러나 유감스럽게도 일본에게 국제 사회를 향해 발신할 만한 메시지가 없었습니다. 세계가 어떻게 흘러가야 하는지, 이상적인 국제 사회를 어떻게 구축할 수 있는지, 일본은 이를 위해 무엇을 할 수 있는지 등에 대해 한마디도 할 수 없었던 겁니다. 결국 고이즈미 내각이 세계적인 정치 대국이 되기 위해 선택한 방법은 '미국의 모든 정책을 무조건적으로 지지한다'는 전략이었습니다.

 당시 미국의 대통령이 조지 W. 부시라는 역사적으로 손꼽히는 무능한 권력자였다는 점은 고이즈미 준이치로에게 행운이었습니다. 부시 지지율은 30퍼센트도 안 됐고, 그가 제시하는 정책에 대한 국제 사회의 평가 또한 지극히 낮았습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부시를 지지한 사람이 바로 고이즈미 준이치로였죠. 부시에게 있어서 고이즈미는 미국의 모든 정책을 지지해주는 극히 예외적이고 고마운, 보기 드문 파트너였습니다. 그리고 미국은 자신의 파트너인 일본이 정치 대국으로 우뚝 서서 국제적 지위를 획득하는 것을 바라게 되었습니다.

 2005년, 일본은 미국의 강력한 지지를 받으며 UN 안전보장이사회의 상임이사국에 입후보했습니다. 이들 상임이사국은 중국, 프랑스, 러시아, 영국, 미국의 5개국인데, 이를 확대하여 독일, 일본, 브라질을 추가시키자는 제안이 나왔고 일본이 여기에 응한 겁니다. 이 안은 결국 기각되었는데, 결정적인 이유는 일본이 상임이사국 취임을 지지하는 국가가 아시아에 거의 없었다는 점이었습니다. 한국도 중국도 일본을 지지하지 않았지요. 당시 많은 나라가 일본의 상임이사국 취임에 반대한 이유는 일본이 상임이사국이 되어봤자 미국 표가 하나 늘어날 뿐이기 때문이었습니다. 일본은 미국의 정책을 모두 수용함으로써 어떻게든 상임이사국이 되어보려 했지만, 국제 사회는 미국과 똑같은 말밖에 하지 않는 나라가 상임이사국이 되는 것이 의미가 없다고 판단했습니다. 세계 각국이 모델로 삼고자 하는 리더십이란 나름의 꿈이나 이상을 갖고 이를 실현하고자 노력하는 나라에서 나온 리더십일 겁니다. 강대국에 붙어서 아부하는 나라에서 그런 리더십을 찾을 수 있을 리가 없죠.

 이 2005년의 참패, UN 안전보장이사회 상임이사국 진입 실패라는 사건은 일본인에게 있어 또 하나의 트라우마가 되었습니다. 세계 최고의 경제 대국이 된다는 꿈과 굴지의 정치 대국이 되어 많은 나라에게 리더로 존경받는다는 꿈, 두 개의 꿈이 동시에 사라진 겁니다.

 그 후 15년 가까이 지났지만, 일본의 경제력이 회복될 기미도 국제적 위신을 확립하고 일본 고유의 리더십을 인정받을 만한 메시지도 보이지 않습니다. 돈도 없고, 미래에 대한 비전도 없습니다. 이것이 지난 15년간 일본의 국력이 급격하게 저하된 원인이라고 저는 생각합니다. 

 

p258

 미국이라는 나라는 기본적으로 동맹국에게 미눚제를 강요하지 않으며, 미국의 뜻에 따르기만 하면 통치 형태가 독재든 아니든, 얼마나 부패했든 일절 상관하지 않는다는 사실은 베트남의 괴뢰 정권이나 필리핀, 인도네시아, 칠레, 일본, 한국 등의 사례를 봐도 명백합니다. 민주적인 정치 체제는 동맹국의 조건이 아니며, 미국의 말만 잘 들으면 국내 통치를 어떤 형태로 하든 관여하지 않는 겁니다. 오히려 그 나라의 이익에 반하는 요구도 무리해가며 추진할 수 있는 강권적인 독재 체제를 선호할 수 있습니다.

 

 이런 상황을 고려해보면 지금 일본에서 이상할 정도로 만연한 혐한 감정, 특히 정부가 솔선해서 부추기고 있는 혐한 운동이 단순히 정서적인 문제가 아니라 나라의 방향성을 정하기 위한 국가 전략이라고 분석할 수 있습니다. 따라서 일본의 언론이 '한국은 민주화에 실패했다'거나 '경제가 붕괴했다', '문재인 대통령이 국민의 지지를 잃고 있다', '한국인들이 이분화되고 있다'는 등의 혐한 언설을 필사적으로 보도하는 것은 민주화와 시장 경제의 조합으로는 성공할 수 없다ㅡㄴ 메시지를 일본 국민에게 전하기 위함입니다.

 

p274

 주식회사라는 형태는 유한책임 체제입니다. 도산하면 끝이고, 경영자는 그 이상 책임을 추궁당하지 않습니다. 그런데 국가의 도산이란 있을 수 없는 일입니다. 지도자의 실수로 국부를, 국토를, 주권을 잃고 국가가 붕괴한 다음에 '죄송하다'는 말로 끝낼 수는 없으니까요. 주식회사는 경영 방침이 잘못되더라도 도산하면 끝이지만 국가 정책이 잘못되었을 경우 나라가 갑자기 사라지는 것이 아니니 국민 모두가 수십, 수백 년에 걸쳐 그 대가를 치러야 합니다. 국가는 무한책임입니다. 그러므로 주식회사를 모델로 지자체나 학교, 국가 등의 제도를 설계해서는 안 됩니다.

 

 

어른을 찾습니다.

 

 

p292

 포퓰리즘의 근본은 현재 사회가 겪고 있는 불행이 단일한 원인으로 인한 것이라는 발상입니다. 이 단일한 원인, 제악의 근원을 제거하면 다시 사회 질서를 회복하고 풍요로운 삶을 되찾을 거라 생각하는 겁니다. 이런 사고방식을 단순주의simplism나 음모사관(음모사론, Conspiracy Theory)이라고도 합니다.

 근대 음모사관은 프랑스혁명 직후에 태어났습니다. 프랑스혁명으로 특권을 빼앗긴 왕족이나 귀족들은 영국으로 도망쳤고, 이들은 매일 밤 런던의 클럽에 모여 '우리가 왜 이렇게 되었을까?', '영원할 것 같던 부르봉 왕조가 어떻게 하룻밤 만에 몰락했을까?'라는 주제로 논의를 계속했습니다. 그들에게 다양한 정치적, 경제적, 사상적 요인으로 인해 수많은 '재도적 피로'가 쌓이다가 동시에 터짐으로써 복수의 요소가 상호 작용하여 혁명적인 사건이 일어났다는 식의 해석은 불가능했습니다. 혁명이란 상황만 놓고 보면 단순한 하나의 정치적 사건에 불과하지만, 거기에 관여하는 요소는 무수히 많다는 것을 이해하지 못하기 때문이죠. 그들이 알 수 있었던 것은 '온갖 분야에서 동시에 이변이 일어났고, 그 징후를 경찰도 군대도 파악하지 못했다'는 사실뿐이었습니다. 이런 사실로부터 그들이 추론해낸 것은 정치, 경제, 언론, 학술 등 모든 분야에 영향을 미치며 혁명이 일어나기 직전까지 아무런 자취도 남기지 않고 활동을 계속할 수 있는, '하룻밤 만에 체제를 뒤집을 수 있을 만큼 거대한 비밀결사'가 존재한다는 가설이었습니다. 부르봉 왕조을 무너뜨린 비밀결사가 존재한다는 하나의 스토리가 탄생한 겁니다. 그 뒤로는 비밀결사의 정체가 무엇일까에 대한 논의가 이어졌습니다. 프리메이슨, 일루미나티, 성당기사단(템플나이츠) 그리고 유대인 등이 흑막으로 지목됐습니다. 실체가 드러나지 않은 존재라는 조건만 맞으면 뭐든 상관없었을 겁니다. 실제로 프랑스혁명 후 결과적으로 가장 많은 이익을 얻은 것은 유대인이었습니다. 프랑스혁명 이후 유대인은 차례차례 무대의 전면에 등장하기 시작했습니다. 프리메이슨이나 일루미나티, 템플나이츠는 나타나지 않았지만 유대인은 실제로 나타나서 경제, 재계, 언론으로 진출하며 두각을 드러냈습니다. 프랑스혁명으로 가장 큰 혜택을 받은 것이 프랑스에 살던 유대인이라는 사실은 틀림이 없습니다. 이를 근거로 18,19세기의 이론가들은 프랑스혁명으로 이익을 본 것이 유대인이니 프랑스혁명을 계획한 것도 유대인이라는 식의 추론을 했습니다. 어떤 정치적 변화로 혜택을 본 집단이 존재한다는 사실과 그들이 변화를 계획하고 실행했다는 주장 사이에는 아무런 논리적 근거가 없지만, 당시 사회 이론가들은 이 지극히 단순한 이론을 채택했습니다. 이것이 음모사관의 기본적인 구조입니다. 18세기 프랑스인들의 이런 망상이 훗날 홀로코스트까지 이어져 600만 명에 이르는 유대인의 학살로 귀결된 셈이니, '망상에 불과하다'라며 가볍게 볼 수 없다는 것은 명백합니다.

 이런 음모사관을 비판하기 어려운 이유는 언뜻 무작위하게 보이는 모든 사상의 배후에 하나의 단일 의지가 존재한다는 그들의 주장이 일신교의 사고 구조와 일치하기 때문입니다. 따라서 이런 반유대주의는 기본적으로 일신교 문화권에만 존재합니다. 이슬람교라든지 힌두교, 유교 등 다양한 문화권이 있습니다만, 폭력적이라고 해야 마땅할 반유대주의가 존재하는 것은 대표적인 일신교 기독교 문화권뿐입니다. 랜덤으로 보이는 사상의 배후에 단일 의지가 존재한다는 것은 인간에게, 특히 일신교적 사고관을 가진 사람에게 있어 지극히 당연한 발상입니다. 사실 정치적인 사건이든 경제적 변화든 문화적 사건이든 우리가 경험하는 것들은 무수히 많은 요소의 상호 작용으로 일어나고, 단일한 작자author가 모든 것을 컨트롤하기란 현실적으로 불가능하지만 그렇게 믿음으로써 '단일한 작자'가 존재한다고 생각하면 지적인 부하가 상당히 줄어듭니다. 따라서 현재 세계적으로 포퓰리즘이 만연하며 단순한 발상을 취하는 사람들이 늘어나고, 단일한 작자나 사악한 의지를 가진 흑막이 모든 악행을 일으킨다는 음모론이 횡행하는 이유는 원인이 너무 복잡해 알 수가 없기 때문입니다.

 인간에게는 어느 정도 지성이 있기 때문에, 변수가 늘어나면 그에 맞추어 자신의 방정식을 다원화하게 됩니다. 다차원방정식으로 다양한 변수를 풀어낼 수 있도록 진화하는 겁니다. 그러나 변수의 종류가 한계를 넘어서면 수중에 있는 방정식으로는 해석할 수가 없습니다. 그러면 자신의 방벙식을 복잡화하려는 노력을 그만두고 지적 부하를 덜어내기 위해 단일의 작자가 모든 것을 지배한다는, 사실은 본인도 믿지 않는 주장을 펼치며 가장 단순한 일차방정식으로 회귀하게 됩니다. 그러므로 일본과 한국을 포함해서 현재 전 세계적으로 포퓰리즘이 만연하며 굉장히 단순한, 예를 들어 일본이라면 '전부 한국 탓이다', 유럽의 경우 '이슬람 난민이 만악의 근원이다', 영국은 'EU가 원인이다', 미국에서는 '멕시코 난민 탓이다'라는 식의 믿을 수 없을 정도로 단순한 해답에 많은 사람들이 사실은 밎지 않으면서도 지지를 보내며 모여들고 있습니다. 세상 사람들이 유아화되면서 어른이 사라지는 것처럼 보이는 이유는 엄밀하게 보자면 사람들이 어리석어서 그런 것이 아니라 세상이 너무 복잡해지고 있기 때문입니다. 세계의 변화가 완만하게 일어나며 변수가 차근차근 늘어난다면 인간도 거기에 맞추어 스스로를 복잡화시키고 지성을 고도화함으로써 문제에 대처할 수 있지만, 변수의 증가가 일정 수준을 넘어 가속하기 시작하면 개인의 노력으로는 해결할 수 없게 됩니다.

 

p298

  현재 일본의 인구는 약 1억 2700만 명인데, 81년 후인 2100년에는 5000만으로 감소할 것이라 예상되고 있습니다. 81년 만에 7700만 명, 해마다 약 90만 명이 줄어드는 거죠. 동시에 고령화도 진행되고 있습니다. 인구 5000만 명 중 4할은 노년층일 것입니다. 그게 어떤 사회일지 예측조차 할 수 없습니다. 한국도 곧 일본을 뒤따라서 고령화와 인구 감소가 시작될 것입니다. 중국은 현재 인구가 약 14억에 달합니다만, 앞으로 수년 내에 15억을 정점으로 급격한 인구 감소가 시작되어 2050년 정도에는 7억 명으로까지 줄어들 것으로 보입니다. 지금 중국은 인구와 함께 경제력이 늘어나며 아시아에서의 군사적 지위도 점점 높아지고 있습니다만, 얼마 뒤면 고령화와 인구 감소로 내수 시장이 절반으로 줄어들 것입니다. 여기에 대해 중국 공산당이 어떻게 대처할지는 모르겠습니다만, 아마 아직 아무 계획이 없을 거라고 생각합니다.

 

p302

 어느 경제학자의 정의에 따르면, 윤택한 사회란 필요한 것이 필요한 시점에 필요한 장소에서 손에 넣을 수 있는 사회입니다. 굳이 경제가 성장하지 않더라도, 인구가 늘어나지 않더라도 필요한 것을 적절한 시기에 적합한 장소에서 손에 넣을 수만 있다면 그곳은 윤택한 사회이고, 그런 사회를 어떻게 설계하고 유지할지를 고민하면 됩니다.

 

 

p306

 대안적 사실 altenative facts 이라는 단어가 탄생하게 된 트럼프 대통령 취임식 사건을 기억하십니까? 트럼프 대통령 취임식에 참여한 청중이 오바마 대통령 때보다 적다는 여론이 일자 백악관에서 이를 부정하며 많은 청중이 참여했다는 증거로 가짜 사진과 수치를 근거로 제시했다가 발각된 사건입니다. 한 인터뷰에서 왜 금방 들통날 거짓말을 했을까 묻는 기자의 질문에 보도관이 "거짓말이 아니라 대안적 사실을 제시한 것"이라고 대답해서 조롱거리가 됐죠. 이런 대답의 배경에는 다음과 같은 사고방식이 있습니다. '세상을 보는 방식에는 여러 가지가 있는데, 당신에게 세상이 그렇게 보이는 것은 어디까지나 당신의 주관적인 관점에 불과하다. 물론 내가 보는 것도 주관적인 관점에 불과하다는 것을 나는 인정한다. 당신은 당신의 세계를, 나는 나의 세계를 각자의 방식으로 보고 있기 때문에 어느 쪽이 진실이라고 단정할 수는 없다.'

 이와 같은 사고방식에 대해 흥미로운 설명을 하고 있는 책이 있습니다. 일본계 미국인 사회학자 미치코 가쿠타니의 <진실의 끝>인데요, 현재 미국이 언론 상황을 날카롭게 비판한 이 책에서 그는 1970년대에 유행한 포스트모더니즘의 영향을 이야기합니다. 포스트모더니즘이 가져온 것은 우리가 보고 있는 세계가 각자의 성별이나 국적, 종교, 이데올로기 등에 따라 다를 수 있다는 관점입니다. 실제로 인간의 모든 인식은 계급이나 성별, 종교, 인종에 따라 치우칠 수밖에 없지요. 여기서 객관적 현실은 존재하지 않는다는 결론이 나옵니다. 모든 사람이 공유하는 객관적 사실이라는 것은 이 세상에 존재하지 않는다는 거죠. 계급이나 성별, 이데올로기나 종교에 의한 편견으로 인해 특히나 더 비틀린 세계상을 가진 사람도 있겠지만, 우리 모두가 왜곡된 세계를 보고 있으니 전부 평등하다는 겁니다. 누구나 '그건 네 주관이야. 나한테 그렇게 안 보여'라고 반박할 수 있다는 것이죠.

 이게 포스트모더니즘이 탄생시킨 무시무시한 사고방식인데, 논리적으로는 맞는 말이긴 합니다. 이런 사고방식이 퍼지면서 타인의 의견을 개인의 주관에 불과한 것으로 치부하는 것이 비판으로서 성립한다고 믿게 되었습니다. 그런데 객관적인 사실을 분명하게 알아서 주관적인 의견에 대해 틀렸다고 비판할 수 있는 사람은 없습니다. 포스트모더니즘적인 발상에 기초한 '진실은 없다'는 원리주의에 저항할 방법이라고는 '당신이 하고 싶은 말은 알겠는데... 뭔가 좀 이상하다'는 식의 반응뿐입니다. 맞는 말이기는 한데 듣다 보니 닭살이 돋았다든지, 속이 쓰리다는 비판밖에 할 수 없는 거죠. 포스트모더니즘에 의해 진실이 사라진 상황에서 우리가 기댈 수 있는 곳은 그런 지극히 신체적인 반응뿐입니다.

 

인구 감소 시대를 맞은 일본의 미래에 대해 각 분야 전문가의 의견과 대담을 모은 책.

일본의 인구감소는 이미 시작되었으며, 한국보다 20년 앞서 이런 경향이 나타나기 시작하고 이미 현실로 진행중이라는 점에서 한국의 미래를 예측할 수 있는 지침이 된다.

대부분은 공감이 가는 내용이다.

하지만, 맨 마지막인 뜨거운 근대는 끝났다에서 동아시아 평화에 대한 저자의 생각은 매우 편협하고, 일본 중심적이다.

동아시아의 평화를 위해 일본 주도의 외교전략 외에는 생각하지 못하는 일본의 근시안적 사고는 2019년부터 본격화된 남북 화해와 북미협상의 장에서 일본이 표면적으로나 물밑으로나 협상의 훼방을 놓은 부분에서도 알 수 있듯이 실제로는 동아시아의 평화에 전혀 도움이 되지 않고 있다.

즉, 일본은 진보나 보수나 북한 핵문제와 이와 관련한 외교적 해법에 있어서, 일본이 주도해야 한다는 아집에 여전히 사로잡혀 있는 듯 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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목차

p9  서론 문명사적 규모의 문제에 직면한 미래 예측 _ 우치다 타츠루

p47. 1. 인류는 어떻게 살아왔는가 - 호모사피엔스의 역사로 살펴보는 인구동태와 종의 생존 전략 _ 이케다 기요히코

p77 2. 두뇌자본주의가 온다 - 저출생보다 심각한 인공지능시대의 문제 _ 이노우에 도모히로

p107 3. 인구 감소의 실상과 미래의 희망 - 간단한 통계수치로 '공기'의 지배에서 탈출할 수 있다 _ 모타니 고스케

p135 4. 인구 감소가 초래하는 윤리 대전환의 시대 - 무연의 세계에 유연의 장소를 만들자 _ 히라카와 가쓰미

p159 5. 축소사회는 하나도 즐겁지 않다 - 유럽의 사례로 보는 미래 세대를 위한 대책 _ 브레디 미카코

p183 6. 건축이 도시와 지방을 살릴 수 있다 - 따뜻하고 번잡한 거리 만들기 프로젝트 _ 구마 겐고

p201 7. 젊은 여성에게 인기가 없는 자치단체는 사라진다 - 문화를 통한 사회포섭의 권유 _ 히라타 오리자

p225 8. 도시와 비장, 먹거리로 연결되다 - '관계인구'를 창출한 공동체 혁명 _ 다카하시 히로유키

p253 9. 인구 예측 그래프의 덫 - 저출생을 둘러싼 여론의 배경에 존재하는 '경영자 시선' _ 오다지마 다카시

p271 10. 뜨거운 근대는 끝났다 - '사양의 일본'을 위한 현명한 안전보장 전망 _ 강상중

 

 

p19

 "파국적 사태(catastrophe)가 과거 한 번도 일어나지 않았다는 것은, 파국적 사태가 미래에도 결코 일어나지 않는다는 근거가 될 수 없다"는 명제는 (데이비드 흄David Hume 이후) 분명히 영미 지성인의 내면 깊이 자리 잡고 있습니다. '지금까지 일어나지 않은 일'은 앞으로도 일어나지 않을 개연성이 높습니다. 그러나 그것은 어디까지나 개연성에 불과합니다. 개연성의 전망에 주관적인 희망을 개입시켜서는 안 된다는 것이 앵글로 · 색슨 문화권의 지성인이 생각하는 '상식'입니다. 그러나 일본에서는 상식이 아닙니다. 일본의 상황은 정반대입니다. 일어날 확률이 낮은 파국적 사태에 대해서는 '생각하지 않기로 한다'가 일본의 전통입니다.

 

p23

 극동국제군사재판에서 25명의 피고인 전원은 "나는 전쟁을 일으키는 것을 원하지 않았다"고 주장했습니다. 만주사변에 대해서도, 중국과의 전쟁에 대해서도, 태평양전쟁에 대해서도, 피고인들은 "다른 선택안이 없었다"는 말로 책임을 회피했습니다. 예를 들어 고이소 구니아키小磯國昭는 만주사변, 중국에서의 군사행동, 3국 동맹, 미국과의 전쟁에 대해서 전부 개인적으로는 반대했다고 증언했습니다. 이에 기가 막힌 검찰관은 그렇다면 어째서 당신은 본인이 반대하는 정책을 집행하는 정부기관에서 잇달아 중요한 직위로 나아갈 수 있었냐고 추궁했습니다. 그러자 고이소는 다음과 같이 대답했습니다.

 "우리 일본인의 방식은 자신의 의견은 의견, 논의는 논의입니다. 만약 국가정책이 결정되었다면, 그 국가정책에 따라 노력하는 것이 우리에게 부과된 종래의 관습이며 또한 존중받는 방식입니다."

 마루야마 마사오丸山眞男는 이 증언을 인용하면서 이렇게 말했습니다.

 "위와 같은 사례를 통해서 얻을 수 있는 결론은 '현실'이라는 대상을 진행형으로 만들어내거나 만들어가는 것이라 생각하지 않고, 이미 만들어지 것, 아니 좀더 구체적으로 표현하면 어디선가 발생해서 찾아온 것이라고 생각한다는 점이다.

 피고인들은 전쟁지도부라는 중요한 지위에 있으면서도 자신들이 전쟁이라는 현실을 만들어냈다는 사실을 완강히 거부했습니다. 그들은 전쟁을 인간의 능력을 초월한 천재지변처럼 '어디선가 발생해서 찾아온 것'으로 받아들였습니다. 그렇기 때문에 그 압도적인 현실에 적응하는 것 말고는 "선택 안이 없었다"고 변명한 것입니다.

 전쟁이 통제할 수 있는 정치적 행위라면, 어떤 이념과 계획에 의거하여 전쟁을 시작했는지에 대한 정치적 책임이 발생합니다. 그러나 '어디선가 발생해서 찾아온' 천재지변과 같은 종류의 파국이라면, 누구에게도 어떠한 정치적 책임도 발생하지 않습니다. 때문에 다소 부정적으로 해석해보면, 저는 패색이 짙어진 이후에는 전쟁지도부 사람들은 오히려 '전쟁이 제어 불능 상태에 빠지는 것'을 무의식적으로 바라고 있었다고 생각합니다.

 1942년 미드웨이 해전에서 일본 해군은 주력 부대를 잃어 이미 전쟁 수행 능력을 상실한 상태였습니다. 때문에 그 시점에서 강화교섭을 시작하는 것이 합리적인 선택지였습니다(실제로 기도 고이치木戶幸一와 요시다 시게루吉田茂 등은 평화공작을 시작했습니다). 그러나 예를 들어 강화 조건으로 일본제국의 존속을 인정해주는 대신, 만주 · 한반도 · 대만 등 식민지를 포기하라는 요구를 받았다면 어떤 일이 일어났을까요? "누가 무엇을 위해서 이런 무모한 전쟁을 시작했는가? 국익을 손상시킨 자는 누구인가?" 라는 엄중한 책임추궁이 이루어졌을 것입니다. 통치기구가 제대로 기능하고, 국민 생활이 일상적으로 이루어지고, 언론이 아직 살아 있다면 전쟁지도부에게 책임을 물었을 것입니다. 그리고 극동국제군사재판에서 피고석에 세워진 사람의 상당수는 일본인이 직접 재판했을 것입니다.

 그러나 전쟁이 제어불능 상태가 되고, 통치기구가 와해되고, 사람들이 전쟁을 피해 우왕좌왕 도망가고, 정치적 의견을 논할 기회나 대화의 기회도 사라지면 사태가 너무나 파국적이기 때문에 일본인이 직접 전쟁 책임을 추궁할 기회는 사라집니다. 사람들은 일단 파국적 현실에 적응해 살아남기 위해서 전력을 다할 수밖에 없습니다. 그리고 국가의 운명이 결정된 이상, '자신의 의견은 의견, 논의는 논의'로서 한쪽으로 치워둔 채, 살아남은 사람끼리 손을 맞잡고 국가를 재건하는 사업에 착수하는 것이 '부과된 종래의 관습이며 또한 존중받는 방식'이 됩니다. 일억총참회一億總懺悔'는 그런 의미입니다. 지금의 파국은 천재지변이니 그런 아수라장에서 "누구의 책임이다"라는 천박한 이야기는 하지 말라는 뜻입니다.

 직접 패전 처리를 할 수 있는 여력이 있을 때는(책임을 추궁당하기 때문에) 아무것도 하지 않습니다. 그저 천재지변과 같은 파국이 찾아올 때까지(또는 '가미카제神風'의 도움으로 지도부의 무위무책에도 불구하고 일본군의 승리가 찾아올 때까지) 손을 쓰지 않고 기다립니다. 이러한 병적인 심리기제는 태평양전쟁 패전 무렵에만 나타난 특징이 아닙니다. 지금도 여전합니다. 그대로 일본 사화에 남아 있습니다. 실제로 지금도 일본의 지도층은 인구 감소가 어떤 '최악의 사태'를 초해라며, 그 피해를 최소화하기 위해서 지금 어떤 일을 시작해야 하는지 아무것도 생각하고 있지 않습니다. 비관적인 미래를 생각하면 사고가 정지해버리기 때문입니다. 자신이 처한 상황은 알고 있습니다. 그보다는 근거 없는 이상행복감에 가까운 망상에 빠져 있는 편이 '오히려 낫다'고 판단할 뿐입니다.

 낙관적인 상태가 유지되는 동안에는 통계자료를 유리하게 해석하거나, 위험 가능성을 낮게 예측하거나, 거짓말을 하거나, 다른 사람에게 죄를 덮어씌우는 '지혜'가 잘 돌아가기 때문입니다. 그렇게 적당한 거짓말이나 변명이 생각나는 한, 얼마 동안 자기 자신은 지위를 보전할 수 있고 이익도 확보할 수 있습니다. 그러나 비관적인 미래를 예측하고 입에 담는 순간, 그때까지의 실패와 부작위에 대한 책임을 추궁당하고 필요한 대책을 세울 것을 강요당합니다. 그런 책임을 지고 싶지 않고 그런 일을 떠맡고 싶지도 않기 때문에 비관적인 일은 생각하지 않습니다. 빨리 실패를 인정하고 사회 전체에 피해가 미치지 않도록 노력한 인가에게 오히려 책임을 추궁합니다. 집중적으로 비난 공격을 쏟아 붓고, 사죄와 해명을 요구하고, '확실하게 책임'을 지라며 위협합니다. 이것이 일본 사회의 방식입니다. 사회 전체를 위해서는 '좋은 일'을 했지만 개인에게는 전혀 '좋은 일'이 아닙니다. 그렇다면 실패는 인정하지 말고, "모두 최상의 상태입니다"라고 계속 거짓말을 하면서 책임을 뒤로 미루는 편이 '오히려 낫다'고 생각하게 됩니다.

 이런 현상은 거품경제 시절의 은행경영에서도 볼 수 있습니다. 은행경영자는 불량채권의 위험성을 알고 있었습니다. 그러나 본인의 재임 기간에 사건화되어 책임을 추궁당하는 것을 원하지 않았습니다. 그들은 문제를 뒤로 미루고 퇴직금 전액을 받아 도망쳐 은행이 파산할 때까지 문제를 방치했습니다. 빨리 실패를 인정하고 피해를 최소화하는 것보다 실패를 인정하지 않고 피해를 파국적으로 만드는 편이 '자신의 이익을 확보하는 데 유리'하다고 판단한 것입니다.

 모든 사화에는 이렇게 이기적인 인간이 어느 정도 존재합니다. 이런 인간은 결코 사라지지 않습니다. 그러나 '그런 인간'들이 통치기구의 요직을 차지하는 체계는 분명히 병들어 있습니다. 그런 의미에서 현대 일본 사회는 심각하게 병들어 있습니다.

 

p53

 재미있는 사실은 살아남아 현대인의 선조가 된 것은 호모사피엔스 여성과 네안데르탈인 남성의 혼혈이라는 점이다. 호모사피엔스 남성과 네안데르텔인 여성의 혼혈 계열과 순수혈통을 유지한 호포사피엔스 집단(만약 실제로 존재햇다면)은 멸종되었다. 이런 사실을 알 수 있는 이유는 현대인에게 당시 네안데르탈인의 미토콘드리아 DNA 흔적이 발견되지 않기 때문이다. 미토콘드리아 DNA는 어머니에게서만 물려받는다. 현대인의 모계를 거슬러 올라가도 네안데르탈인 여성은 나오지 않는다. 모계를 거슬러 올라가면 모두 호모사피엔스 여성에게 귀착된다. 한편 핵 DNA에 네안데르탈인에서 물려받은 인자가 들어 있는 것은 우리 조상에게 네안데르탈인 남성과 호모사피엔스 여성의 혼혈이 존재하기 때문이다. 갓난아이는 어머니가 소속된 집단에서 자랐을 것이다. 호포사피엔스 남성과 네안데르탈인 여성의 혼혈로 태어난 자손은 네안데르탈인의 멸망과 운명을 함께했음에 틀림없다.

 

p68

 자본주의는 비용과 이익의 차이를 극대화하는 방향으로 움직인다. 노동자의 임금은 가장 중요한 비용이기 때문에 자본가는 가능한 이것을 싸게 억제하기 위해서 노력을 기울였다. 그렇게 얻은 이윤은 자본가의 부로 축적된다. 결과적으로 자본가와 노동자의 빈부격차가 벌어지기 때문에, 정치권력이 개입하지 않는 한 소수의 자산가와 대다수의 가난뱅이라는 사회구조가 진행되는 것은 피할 수 없다.

 대부분의 경우, 정치권력은 자본가와 결탁해 이러한 과정을 추진하는 정치제도를 정비하는 데 노력을 쏟았다. 그러나 국민국가가 성립되고 민주주의적 정치제도가 조금이라도 갖춰진 국가에서는 선거권을 가진 대다수의 국민이 노동자이기 때문에 자본가의 이윤을 극대화하는 체계는 상당한 통제를 받게 된다. 당연히 자본가는 국민국가의 속박에서 벗어나기를 원한다. 구체적인 내용을 생략하고 간단히 요약하면 그 결과 세계자본주의가 등장하게 되었다. 국가체계의 방해를 받지 않고 자유롭게 자본을 움직여 자원과 노동자를 최저 비용으로 쓰고 싶었기 때문이다. 

 그런데 세계자본주의가 성립되기 위해서는 인구와 자원이 계속 증가해야 한다. 자원 중에서도 가장 중요한 것은 에너지이다. 국경에 얽매이지 않고 노동력과 물자를 자유롭게 움직이기 위해서는 풍족한 에너지가 필요하다. 농업도 어업도 제조업도 에너지 없이는 성립될 수 없다. 그렇기 때문에 세계자본주의는 에너지 확보에 혈안이 되어 있다.

 그렇다면 인구는 어떨까? 싼 노동력을 손에 넣기 위해서는 노동인구가 많을수록 좋다. 현재 대부분의 선진국 정권은 세계자본주의의 앞잡이가 되어 세계자본주의에게 봉사하는 일만 생각하고 있다. 일본에서도 아베 정권이 "저출생이 진행되면 일본은 소멸한다. 원자력발전을 중단하면 에너지 부족으로 생활이 불가능해진다"고 국민을 협박하며 세계자본주의의 연명을 꾀하고 있다. 일본에서는 국가 또는 국민을 지킨다는 표어 아래 실은 국민과 함께 일본이라는 나라를 세계자본주의에 팔아넘기기 위한 정교한 속임수가 진행되고 있다.

 

p94 순수 기계화 경제와 제2의 대분기

 제4차 산업혁명은 벽에 부딪힌 성숙 단계 국가의 경제 성장을 해결해줄지 모른다. 범용 인공지능을 비롯해 인공지능 · 로봇 등의 기계가 인간 노동의 대부분을 대체하면 <도표 4> (인공지능과 로봇에 기술을 입력하여 기계를 운용하여 생산하고 이 생산품이 소비되는 공급 체인, 즉 인간을 인공지능과 로봇이 대체) 와 같은 생산 구조가 되기 때문이다.

 투입요소는 인공지능 · 로봇을 포함한 기계뿐이며 노동은 더 이상 필요하지 않다. 프랑스의 경제학자 토마 피케티는 이러한 경제를 '순수 로봇 경제'라고 불렀지만 여기에서는 '순수 기계화 경제'라고 부르도록 하겠다.

 순수 기계화 경제에서는 기계만 직접 생산 활동에 참여한다. 그러나 인간의 역할이 완전히 사라지는 것은 아니다. 새로운 상품과 기술의 개발, 생산 활동의 경영관리 등은 여전히 인간의 일로 남아 있다.

 

 순수 기계화 경제에 대한 수리모형(AK모형)을 만들어 분석해보면 성장률 자체가 매년 상승한다는 결과를 얻을 수 있다. 기계화 경제의 정상定常상태에서는 매년 거의 일정한 비율로 1인당 소득이 성장하지만, 순수 기계화 경제에서는 성장률 자체가 매년 성장한다.

 따라서 만약 범용인공지능을 도입한 국가와 그렇지 않은 국가가 있다면 <도표 5>(인공지능 도입국가의 경제 성장률이 그렇지 않은 국가보다 점점 높아지게 되는)에 나타난 것처럼 경제 성장률에 차이가 발생하게 된다. 

 4차 산업혁명기에 나타나는 이러한 분기를 '제2차 대분기'라고 부르겠다. 

 

p97 제4차 산업혁명에서 뒤처지는 위험성

 최초의 대분기에서 일본은 늦게나마 상승노선을 걸을 수 있었다. 덕분에 20세기를 풍요롭게 생활할 수 있었다. 미래에 일어날 수 있는 제2의 대분기에서도 상승노선을 걸어야 하지 않을까? 제4차 산업혁명이 일어났을 때, 앞서 나가는 다른 국가들에게 선두를 뺏긴다면 경제적 수탈의 대상이 될 가능성도 있다.

 제3차 산업혁명에서 일본은 열세에 몰렸다. 그래서 일본인은 현재 구글이나 MS, 애플, 아마존, 페이스북 등의 미국 기업의 서비스를 이용하고 있으며 많은 수익이 미국 기업으로 흘러들어가고 있다. 그러나 제4차 산업혁명에서는 더 많은 수익을 빼앗길 가능성이 있다. 공업과 서비스업 등의 모든 산업에서 인공지능 · 로봇이 이용될 것이기 때문이다.

 

 경제적 수탈보다 더 위험한 것은 군사력의 차이가 벌어지는 일이다. 일본의 제2의 대분기에서 정체노선을 걷고 주변 국가들은 상승노선을 걷게 될 경우, 결과적으로 군사력에서도 현격한 차이가 발생한다. 그렇게 되면 일본의 국토와 국민을 방어하는 일은 대단히 어려워질 것이다.

 

 

 제4차 산업혁명에서는 지력이 관건이다. 

 

 딥마인드Deep Mind는 원래 영국 회사였지만 2014년에 구글이 4억 달러가 넘는 가격에 사들였다. 

 

2014년 당시 딥마인드의 사원은 100명도 되지 않았다. 보유한 공장이나 자산도 없었다. 창업자 데미스 하사비스Demis Hassabis를 비롯한 사원들의 두뇌에 4억 달러 이상의 가치가 있었던 것이다.

 

p126

 첫째, ①이 ② 보다 작아진 국가는 일본만이 아니다. - ① 2010년 시점에서 살고 있던 10~14세 인구, ② 2010년 시점에서 살고 있던 60~64세 인구, 새로 태어나는 인구가 고령화 인구에 비해 적다는 것을 의미한다. - 다음에 제시하는 통계수치는 국제연합 인구부의 홈페이지에 공개된 세계 각국의 2015년 인구추계와 향후의 예측(중위 추계, 이민을 받는 사례)에 준거해 조사했다. 세계 최대의 인구를 거느린 중국도 몇 년 전부터 동일한 상태에 돌입했다. 한국과 대만도 마찬가지다. 미국, 유럽, 동남아시아도 동북아시아 정도로 급속한 전개는 아니지만 저출생 경향이 시작되고 있다. 여전히 명확하게  ①이 ② 보다 큰 국가는 인도에서 중근동, 아프리카에 걸친 지역뿐이다. 그러나 그들도 생활 수준이 향상되면 유럽이나 동북아시아처럼 변해갈 것이다.

 

 참고로 2020년 이후에는 세계적으로 다음과 같은 일들이 일어날 것이다. 일본은 세계 최초로 고령자 절대인구수의 증가가 멈춘다(수도권은 유일하게 계속 증가하지만 지방은 일제히 감소하기 시작한다). 이에 비해 구미 국가들은 여전히 증가하고 중국, 한국, 대만은 구미 국가들의 규모를 크게 상회하는 급증이 계속된다. 한편 생산연령인구의 경우 일본은 세계 다른 국가들보다 20년 이상 일찍 1995년에 정점을 맞이했지만, 중국, 한국, 대만도 2015년을 정점으로 감소로 전환되고, 구미 국가들도 증가가 거의 정지한다. 일본만 상황이 나쁘다는 말은 이제 옛날이야기가 될 것이다. 그러나 '공기'가 사실과 연동되어 개선될지는 다른 차원의 문제다.

 세상에는 "이민을 받아들이면 아이가 늘어날 것이다"라는 공기가 존재한다. 그러나 현실은 대량의 이민을 받아들이고 있는 미국과 싱가포르에서도 이미 어린이의 절대인구수가 감소하기 시작했다. 육아에 돈이 드는 출생률이 낮은 지역으로 이민을 온 이민자는 그곳의 선주자와 마찬가지로 아이를 낳지 않게 되는 것이다. 도쿄에서 저출생이 진행되는 것과 같은 이유다. 그러나 왠지 "이민자는 아무리 어려운 조건에서도 아이를 낳아 수가 늘어난다"는 공기 같은 선입견이 존재한다. 우리는 현실을 직시하고 그러한 그릇된 견해를 고치도록 주의해야 한다.

 세계는 자동적인 저출생, 그 결과로 만들어진 인류사회의 지속 가능성을 향상시키는 방향으로 돌아서고 있다. 승자는 지구환경과 그것에 뿌리를 둔 미래 세대, 패자는 인구 증가에 의존하며 불로소득을 늘려온 금융투자가가 될 것이다.

 

p129

 이번에는 2015년 국세조사의 실제 수치를 살펴보자. 먼저 일본 전체의 차세대 재생력은 68퍼센트다(각 지역에 1~2퍼센트 미만으로 존재하는 연령미회답자는 연령회답자의 비율에 따라 나누었다). 다시 말해 일본에서는 대략 신세대의 3분의 2 정도만 아이가 태어난다. 매년 출생수는 현재 약 100만 명이다. 신세대가 30퍼센트 감소하는 30년 뒤에도 이러한 출생 상황이 계속된다고 가정하면, 출생수는 70만 명 미만이 된다는 계산이다. 대단히 대략적인 계산이지만, 70만 명의 출생자의 평균수명을 80년으로 가정하면 70만 명 X 80년 = 5,600만 명. 다시 말해 출생자수 70만 명/년이라는 것은 일본의 총 인구가 6천만 명 이하로 줄어드는 수준이다. 참고로 단카이 주니어가 태어난 1970년대 전반에는 매년 200만 명의 신생아가 태어났다. 현재 상태는 딱 그 절반, 30년 이후에는 3분의 1이라는 계산이 된다.

 

 <도표 4>에는 각 행정구역의 차세대 재생력을 나타냈다. 오키나와의 93퍼센트를 필두로 명확히 서쪽지방이 높고 동쪽지방이 낮은 모습을 보인다.

 도표에는 들어가 있지 않지만 대도시 가운데 가장 상황이 나은 곳은 히로시마시(75퍼센트)로 기타큐슈시가 뒤를 잇고 있다. 그 밖의 도시는 60퍼센트 전후의 수준으로 정체되어 있다. 도쿄특별구는 52퍼센트다. 일본 전국에서 모여든 젊은 세대가 자신들의 절반 정도 다음 세대를 남기지 않는 진정한 블랙홀 상태다.

 그러나 도쿄가 망해도 일본이 망하는 것은 아니다. 차세대 재생력이 100퍼센트가 넘는 지역자치단체, 다시 말해 신세대의 인구수와 비슷하거나 또는 그 이상으로 아이들이 태어나는 지역이 일본 전국에 오키나와현을 중심으로 40곳이나 있다. 차세대 재생력이 90퍼센트라도 당장 문제는 발생하지 않는다(24세 이하와 40세 이상도 출산하기 때문에 합계특수출생률은 2에 가깝다). 90퍼센트까지 기준을 내리면 110곳의 지역이 해당된다. 그런데 그 상당수는 멀리 떨어진 외딴섬이나 산간과소지역이다. 과소지역은 아이들이 적다는 안이한 선입견이 있다. 물론 그런 과소지역도 많이 있지만, 한편으로는 아이를 소중히 여기는, 다시 말해 아이를 키우는 젊은 세대를 소중히 여기는 과소지역도 분명히 존재한다.

 똑같은 일본인이 만들어가는 현대 일본 사회 속에서 이렇게 큰 차이가 발생하고 있다. 이것이 의미하는 바는 무엇일까? 물론 일본인의 DNA에 어떤 변화가 일어나고 있다는 이야기를 하려는 것은 아니다. 중요한 것은 생활방식과 생활환경의 변화다. 생활환경만 바로잡으면 아이는 다시 늘어난다. 왜냐하면 DNA는 원래 그렇게 되어 있기 때문이다. 이 'DNA 본래의 잠재력'을 완전히 무시하고 있기 때문에 인구 감소를 불필요하게 비관적으로 생각하는 착각에 빠지는 것이다.

 생활환경의 개선이라고는 했지만, 오키나와처럼 아이들이 많이 태어나고 있는 지역도 인터넷이 보급되어 있고 24시간 영업점도 많다. 모든 변화가 나쁜 것은 아니다. 종종 오해를 받는 부분인데 "여자는 결혼해야지"라는 사회적 압박 정도의 경우, 아키타현을 필두로 전통이 강하게 남아 있다고 여겨지는 동북지방은 출생률이 낮고, 결혼에 대한 압박이 적은 오키나와는 수치가 높다. 이런 사실에서도 추론할 수 있듯이 사회적 압박은 관련이 없기는커녕 오히려 역효과를 내고 있다. 고쳐야 할 부분만 개선해나가면 자유와 인권도 완전히 지키면서 다음 세대가 성장할 환경을 부활시킬 수 있다.

 그렇다면 어떻게 해야 차세대를 재생할 수 있을까? 한마디로 말하면 해결책은 원하는 사람이 원하는 만큼 아이를 가질 수 있는 사회구조를 만드는 것이다. 아이를 낳지 않아도 상관없다. 남의 아이를 자기 아이로 키우는 부모가 늘어나도 차세대 재생력은 올라간다. "모든 여성이 아이를 두 명씩 낳는다"가 아니라 세 명이라도 네 명이라도 원하는 만큼 아이를 낳아 기르는 부모가 늘어나는 것이 평균 출생률을 끌어올린다. 그러기 위해서는 많은 아이들을 키울 때 생기는 부담을 경감시켜주는 제도가 필요하다. 남서지역 섬들을 필두로 서일본에 많이 분포되어 있는 차세대 재생력이 높은 자치단체에는 다자녀가정을 성심껏 도와주는 사회적 기풍이 남아있다. 아무래도 도시지역과 동일본은 이와 같은 서로 돕는 전통이 상대적으로 줄어들었다고 추론된다.

 도쿄의 차세대 재생력을 높이기 위한 노력은 당연히 이루어져야 한다. 그러나 앞으로 수십 년 동안 후기고령자의 절대인구수가 계속 증가할 것이라는 사실을 고려하면 대폭적인 개선은 기대하기 어렵다. 인력도 예산도 잉여토지도 전부 고령자 의료복지 쪽으로 돌리고 있는데다가, 처음부터 식비와 집세와 교육비가 너무 비싸서 아이를 한 명 더 낳는 비용이 막대하기 때문이다.

 유요한 방법은 원하는 만큼 아이를 많이 낳을 수 있는, 생활비가 저렴하고 서로 돕는 기풍이 남아 있는 지방으로 아이를 원하는 강한 의지를 가진 젊은이들을 많이 보내는 것이다. 이것만이 일본의 소멸을 가능한 뒤로 미룰 수 있으며, 언젠가는 역전의 인구 증가를 가능하게 만들 수 있는 비책이다.

 

p143

 인구 감소는 문제가 아니라 경제발전과 근대화의 귀결로 이해해야 한다.

 

p147

 결혼 연령의 상승과 태평양전쟁 이후에 전개된 가족 형태의 변화(권위주의적 대가족에서 핵가족으로) 및 시장화의 진전 사이에는 밀접한 상관관계가 있다는 것이 나의 가설이다. 구체적으로 말하면 시장화의 진전이야말로 가족 형태의 변화를 초해란 요인이었다. 시장화와 핵가족화는 결혼해서 가족을 만드는 것을 당연하게 여기던 일본인의 가족관을 바꿔놓았다. 돈만 있으면 가족에게 의지하지 않아도 자유롭게 살 수 있는 시대가 된 것이다. 가족은 사람이 살아가는 데 필요한 안전보장이었다. 그러나 시장화의 진전으로 많은 사람들은 돈이야말로 안전보장이라고 생각하게 되었다.

 반대로 말하면 시장화의 진전을 통해서 권위주의와 속박에서 벗어나 자유로워진 개인이 활약할 수 있는 공간이 확보되었다. 시장화는 일본 민주주의의 진전을 후원한 주역이었다고 할 수 있다. 그런 의미에서 만혼화는 자유와 발전의 대가라고 볼 수 있다.

 시장화는 무연화無緣化이기도 하다. 이는 유연有緣 공동체의 윤리 개념이 미치지 않는 공간이 확장된다는 뜻이다. 사람들이 결혼을 기패해서 결혼이 늦어지는 것이 아니다. 가족을 포함한 유연공동체에서 자청해서 도망가고 있는 것이가. 그 결과 유연공동체인 일본의 권위주의적 직계가족의 해체가 진행되었다.

 또 다른 이유는 소비사회의 진전으로 결혼의 득실을 계산하는 윤리가 정착했다는 점이다. 이것이 글의 주제와 관련이 있다. 이해타산만 생각하면 주부는 타산이 맞지 않는 직업이라고 생각하는 젊은 사람들이 늘고 있다. 이해타산만 따지면 결혼해서 아이를 낳아 학비와 식비 지출이 늘어나는 것은 수지가 맞지 않을지도 모른다.

 그러나 이유가 어떻든 결혼 연령의 상승은 태평양전쟁 이후에 전개된 발전(무연화 · 시장화)의 귀결이다. 나는 결혼 연령 사승에 대한 대책으로 일본의 권위주의적 직계가족으로 돌아가라고 주장할 생각은 없다. 설령 그럴 생각이 있어도 그것은 불가능한 논의다.

 하지만 결혼은 수지 타산이 맞지 않는 '주부'라는 직업을 선택하는 것이라는 이해타산적 윤리는 바꿀 수도 있다.

 

 

저출생 대책

 

 만약 만혼화에서 조혼화로 방향을 전환하기 어렵다면 가능한 저출생 대책 정책은 하나밖에 없다. 결혼하지 않아도 아이를 낳을 수 있는 환경을 만드는 것이다.

 

 저출생을 둘러싼 상황을 저출산이 개선되지 않는 일본과 한국, 어느 정도 제어에 성공한 유럽을 비교해 살펴보면 현저한 차이점을 발견하게 된다. 그것은 바로 혼외자녀의 비율이다. 프랑스와 스웨덴의 혼외자녀 비율은 50퍼센트가 넘는다. 유럽 국가들 중에서 일본과 비슷한 가족 형태를 가지고 있다는 독일의 경우도 35퍼센트다.

 이에 비해 일본의 혼외자녀 비율은 아예 자릿수가 다르다. 겨우 2.3퍼센트에 불과하다. 한국은 더 낮은 1.9퍼센트다. 다시 말해 유교적 윤리에 사로잡힌 아시아에서는 법률혼을 하지 않고 아이를 낳는 일이 거의 금기와 같은 취급을 받고 있다. 

 일본의 저출생 대책은 혼인장려와 육아지원을 중심으로 이루어진다. 프랑스와 스웨덴의 저출생 대책은 일본과 한국과는 반대 방향으로 진행되었따. 법률혼으로 태어난 아이가 아니어도 동등한 법적보호와 사회적 신용을 부여받을 수 있도록 했다. 혼인장려와 육아지원과 같은 개인생활 분야에는 정치권력이 개입해서는 안된다고 생각하기 때문이다. 저출생 문제를 해결하는 열쇠는 오히려 인권확대와 생활권 확보 쪽에 있는 것이다.

 그렇다고 유럽 선진국이 혼외자녀의 출산을 장려한다는 의미는 아니다. 유럽에서는 법률혼으로 묶이지 않은 새로운 가족공동체가 현실화되고 있다. 법률혼의 보호를 받지 못하는 가족의 권리를 법적으로 인정하고 사회에 그들의 자리를 마련하려고 하는 것이다.

 

 

 프랑스 다음으로 혼외자녀 비율이 높은 스웨덴에서는 1987년 시점에서 동거인을 보호하는 동거법Sambolagen이 성립되었다. 프랑스와 스웨덴의 경우 모두 결혼 연령이 내려가서 인구 감소가 멈춘 것이 아니다. 프랑스의 여성 초혼 연령은 30세가 넘으며 계속 떨어지지 않고 있다. 스웨덴도 마찬가지다. 다시 말해 그들은 외적인 강제 또는 촉진을 통해서 결혼 연령을 끌어내리는 일은 불가능에 가깝고, 정치권력이 할 일도 아니라고 생각한다.

 

 혼외자녀 비율이 50퍼센트가 넘어가면 출생률과 결혼의 상관관계는 지극히 희박해진다. 그러나 일본과 한국처럼 혼외자녀 비율이 대단히 낮다면 출생률은 평균 결혼 연령과 강한 상관관계를 갖게 된다.

 일본의 경우, 가족형태는 유교적 가치관이 농후한 권위주의적 대가족이 붕괴되고 핵가족화되었지만, 혼외자녀를 낳는 것을 금기시하는 가치관만은 계속 남아 있다. 이것은 근본적으로 동성애자에 대한 차별이나 부부별성夫婦別姓에 대한 뿌리 깊은 거부감과 비슷한 문제다.

 

 일본과 한국에서 인구 감소에 제동을 걸거나 또는 정상화된 사회로 연착륙하기 위해서는 무엇이 필요할까? 나는 그것이 육아지원이나 육아급부금처럼 대중요법적인 대처(이런 대처를 추진하는 자체는 두 팔 벌려 찬성하지만 그것은 다른 이유 때문이다)는 아니라고 생각한다. 사회 구조(가족구성)와 그것을 뒷받침하는 윤리의 변화가 바로 그 열쇠다.

 그렇다면 사회 구조와 윤리의 변화를 추진하는 원동력은 무엇일까? 나는 저출생이라는 현상 그 자체가 사회 구조를 바꾸고 윤리를 변화시킬 것이라고 예측하고 있다. 하지만 그렇다고 아무것도 하지 않고 그저 자연에 맡겨둬서는 안 된다. 왜냐하면 저출생과 고령화는 생산성의 저하를 가져오기 때문에 이해타산에 지배당하고 있는 사람들이 효율화를 위해서 사회를 분석해 비효율적인 부분을 잘라버림으로써 결과적으로 비관용적인 격차사회를 만들어낼 가능성을 배제할 수 없기 때문이다. 그리고 그런 움직임은 이미 시작되고 있다.

 

p154

 현대 사회의 문제는 원래 유통되는 것이 가장 중요했던 돈이라는 부富가 한 곳으로 집중되어, 국가에 의한 분배기능이 작동하지 않게 된 것이다. 전미 하위 50퍼센트의 총 자산이 최고소득자 세 명의 합계자산에 미치지 못하는 상황은 확실히 정상이라고 할 수 없다. 전계게의 하위 50퍼센트의 자산이 최고소득자 여덟 명의 자산과 거의 비슷하다는 상황 역시 화폐경제의 혹독하고 무자비한 폭력성을 나타내고 있다. 세계 화폐경제의 가장 큰 특징은 누구도 그것을 통제할 수 없다는 점이다.

 화폐경제의 윤리와 교환경제의 윤리가 부의 편재偏在(쏠림 현상)를 촉진하고, 사회를 분단시키고, 사람을 고립시키는 벡터를 갖는다면, 부를 편재遍在(널리 퍼짐)하게 만들고, 사회를 포섭하고, 사람들을 연결하는 벡터로 대치시킬 필요가 있을 것이다. 과연 어떻게 해야 할까?

 물론 이에 대한 간단한 해답은 없지만 문제를 풀 열쇠라면 있다. 열쇠는 화폐경제 이전의 윤리다.

 마르셀 모스Marcel Mauss의 <증여론Essai sur le don>에 따르면 화폐경제 이전의 경제 윤리는 현재의 등가교환의 윤리와는 전혀 달랐다. 오히려 반대라고도 할 수 있다. 예를 들어 전체적인 급부체계를 채용하고 있는 문명화 이전의 부족사회에서는 다른 사람의 물건은 자신의 것이라는 윤리, 증여를 받으면 등가물로 답례를 주어서는 안 된다는 윤리가 일반적이었다. 오늘날에도 국가가 없는 로마족(집시)은 타인의 물건은 자신의 것이기도 하다는 인식을 공유하고 있다고 한다. 이누이트족은 등가교환적인 개념보다 잡은 사냥감을 함께 나누는 것이 당연하다고 생각한다. 그들의 세계에서는 사유제와 등가교환성이 만들어내는 윤리는 통용되지 않는다.

 

 주목해야 할 것은 이러한 화폐경제 이전의 전체적인 급부의 윤리가 현대 일본 사회에도 남아 있다는 점이다. 어쩌면 이렇게 '살아남은 윤리'가 미래 세계의 희망이 될지도 모른다.

 현대 사화에서는 통용되는 등가교환의 윤리는 예를 들어 "다른 사람의 물건을 훔쳐서는 안 된다" 또는 "빌린 것은 갚아야 한다" 등이다. 그러나 부모자식 관계나 절친한 친구 사이에서는 이러한 윤리가 채용되지 않은 채 답례 없는 증여가 빈번히 이루어지고 있다. 만약 피를 나눈 가족 사이에 등가교환의 윤리를 채용한다면 부모 자식 관계는 상당히 불편해질 것이다.

 부모는 자식에게 아무렇지 않게 생전증여를 한다. 심지어 부모가 자식을 무상으로 양육하는 것은 의무다. 현대인은 이러한 무상증여의 윤리를 등가교환의 윤리와 구분해서 사용하고 있다.

 부모자식과 형제라는 혈연가족이나 강한 동료의식으로 이루어진 공동체의 내부에서는 무상증여의 윤리가 일반적이고, 외부와의 교환에는 등가교환의 윤리를 사용한다. 실은 우리는 우리가 어째서 윤리를 구분해서 사용하고 있는지 이유를 잘 모르고 있다.

 

 

 있는 그대로 말하면 그것은 '관계'다. '빚'을 진 상태는 청산이 이루어지지 않은 상태이기에 청산될 때까지는 빌려준 사람과 빌린 사람은 관계가 유지된다는 의미다. 꺼꾸로 말하면 청산이 끝났다는 것은 관계가 끝났다는 것이다. 끊임없는 관계의 청산이야말로 자본주의의 원동력이다. 관계의 청산은 상품과 화폐의 거래이며, 이 거래를 늘려나가는 것이 경제적 성장이기 때문이다. 대차관계를 그대로 유지하는 것은 거래의 정지를 의미한다.

 

 

 공동체의 운영기준은 득실이 아니라 규칙이다. 규칙을 따르지 않는 인간은 배제되어 공동체 밖으로 추방당한다. 그렇게 쫓겨난 사람들이 살아갈 수 있는 유일한 장소가 시장市場이었다. 현대사회의 문제는 도피처였던 시장의 가치관이 유연有緣의 장소를 잠식해버렸다는 것이다. 오래된 규칙을 해체하며 합리적인 판단을 우선으로 여기는 사회를 만든다는 것은 근대화의 다른 이름이기도 하다. 그러나 이때의 합리성은 바로 금전합리성이다. 자연 속에서 살아가는 것을 최적화하는 합리성이 아니다. 금전합리성을 추구하면 결국 우리가 살고 있는 '장소' 그 자체를 훼손하게 될지도 모른다. 공해와 온난화는 그 결과물 가운데 하나일 것이다.

 

 시장화는 무연화와 거의 같은 뜻이다. 공동체 내부에는 시장이 생기지 않는다. 인간사회는 원래 공동체적이고 상호부조적이었다. 공동체적이라는 것은 이해타산이 아닌 다른 가치관에 의해서 운영된다는 뜻이다.

 무연의 세계의 유연의 장소를 만드는 것이 인구 감소 사회의 유일한 사회 설계일 것이다. 우선은 민영화되면서 파괴된 사회공통자본을 재생시킨다. 도시지역에 가족을 대체할 수 있는 공생장소를 만든다. 인류사적인 상호부조의 윤리를 다시 세운다.

 이것들이 이루어진다면 인구 감소 문제는 더 이상 문제가 아닐 것이다.

 

p174

 "경제가 성장하지 않는 국가는 빚을 갚을 수 없다"는 토마 피케티의 말과도 호응한다. 그렇다면 어째서 일부 정치가들은 '투자보다는 지출 삭감'으로 나랏빚을 갚을 수 있다고 생각할까?

 폴 크루그먼은 그것이 단순한 착각 때문이라고 말한다. 크루그먼은 "가정 형편이 어려울 때는 가계 씀씀이를 줄이듯이, 국가 경제가 침체에 빠졌을 때도 재정을 줄이는 것이 왕도"라고 일반인은 물론이고 지식인까지 맹목적으로 믿고 있다고 지적한다. "경제가 어려울 때 금융완화와 재정지출을 실시하면 고용이 창출되어 수요가 확대된다"는 것은 경제학적 기본 상식이다. 그러나 "쓰는 것보다 모은 것이 경제적으로 좋은 상태"라는 가계 씀씀이 감각으로 국가 재정을 생각하는 사람이 많기 때문에, 정치가는 설사 그 생각이 잘못됐다고 알고 있어도 지지를 얻기 위해서 그런 말을 꺼내는 경향이 있다는 것이다.

 또한 "재정의 균형을 맞춰서 나랏빚을 갚는다"라는 듣기 좋은 표현은 작은 정부를 지향하는 구실이 된다. 다시 말해 신자유주의(=작은 정부)를 추진하기 위한 그럴듯한 핑계다. 대부분의 영국 경제학자가 긴축재정은 경제 성장을 방해한다고 주장하고 있음에도 대기업의 지도자들은 정반대 입장을 취한다. 가능한 정부가 작아져서 시장의 일은 시장에서 마음대로 하게 내버려두기를 바라는 것이 대기업의 본심이기 때문이다. 긴축재정을 추진하는 보수당의 전통적 지지기반이 부유층과 대기업인 것은 우연이 아니다.

 이렇게 '왠지 도덕적으로 바람직하게 보이는 빚을 갚기 위한 정치'는 사실 신자유주의를 추진하는 데 가담하고 있다. "미래 세대를 위해서 빚을 남기지 않기"는 커녕 반대로 늘리고 있다는 모순된 결과를 낳고 있는 것이다.

 

p176

 1929년 월가의 대폭락이 불러일으킨 세계대공황을 접한 두 나라는 완전히 정반대의 경제정책을 실시했다. 독일의 바이마르 정부는 불황으로 세수가 감소하므로 재정균형을 지향해야 한다고 맹신하고 계속 재정지출을 삭감했다. 따라서 불황이 멈추지 않고 많은 실업자를 만들어냈다. 그런 상황에서 대규모 정부지출로 국민의 고용을 창출할 것을 약소하는 나치스가 등장해서 국민을 열광시켰다. 어째서인지 지금도 많은 사람이 하이퍼인플레이션이 나치스를 낳았다고 믿고 있지만, 실은 바이마르 정권이 지폐를 지나치게 많이 찍어내서 발생한 하이퍼인플레이션은 1920년대 중반쯤 진정되었다. 나치를 낳은 것은 디플레이션과 긴축재정이었다.

 한편 미국은 같은 시기에 금융정책과 재정지출로 경제를 확대시키는 뉴딜정책을 실시했다. 불황이라고 재정지출을 줄이지 않고, 반대로 대규모 공공투자를 통해서 국민의 고용을 창출하는 대담한 반 긴축적 정책을 취했다. 나치스의 경제정책과 뉴딜정책의 유사성은 세계적으로 논의되어 왔다. 다시 말해 독일의 바이마르 정권이 불황에 대응하는 경제정책에 실패했기 때문에 파시스트가 대두하게 된 것이다.

 

p188 1970년대의 반전

 

 그러나 유감스럽게도 성장 확대의 시대가 영원히 계속되는 일은 역사상 한 번도 일어나지 않았다. 미국에서는 베트남 전쟁(1960~1975)이 20세기 체계의 종언을 상징했고, 일본에서는 오사카 만국박람회(1970)가 종언의 지표가 되었다. 1970년을 경계로 다양한 사회적 지표가 반전되기 시작했다. 인구 증가 곡선이 반전되고, 저출생 · 고령화의 조짐이 나타나고, 제조업을 대신해 서비스업이 대두하고, 여성의 사회 진출이 시작되었다. 현대의 저성장 · 저출생 · 고령화 사회는 이미 1970년대에 조짐이 나타났던 것이다.

 그러나 미국과 일본은 다른 전개를 맞이했다. 미국에서 중후장대산업은 일찌감치 주역의 자리에서 내려와 조연이 되었다. 그러나 일본이라는 곳은 과거 시대를 선도한 주역을 언제까지나 대접해주는 미적지근한 곳이었다. 무사를 온존하는 풍토가 그래도 20세기가 되도록 잔존하고 있었다.

 일본의 건설한업은 1970년대 이후에도 조연으로 밀려나지 않았다. 경제의 주역이었던 그들은 정치와의 결탁을 통해서 70년대 이후에도 주역의 자리를 차지하고 있었다. 무사집단의 결속력과 집단주의는 강력한 득표장치로 기능하며 1970년대 이후의 일본 정치에서 주역의 자리를 지키고 있었다. 이러한 득표장치가 장기적으로 계속 가능하려면 건축공사를 끊임없이 발주해야만 한다. 이것이 1970년대 이후로 일본 정치의 숨겨진 목표가 되었다.

 건설을 위한 명목은 시대와 함께 변했다. 1970년대 이전에는 경제 성장과 주택공급이 명목이다. 1990년대 이후에는 복지, 환경, 안전, 안심이었다. 각각의 시대에 걸맞은 듣기 좋은 명목이 선택되었다. 그러나 득표 체계의 존속 자체가 목적이기 때문에 어찌 보면 명목은 무엇이 되어도 상관없다. 그 명목으로 무엇인가를 건설하는 행위가 정당화 될 수 있다면 무사는 행복할 뿐이다. 무사는 그렇게 성장과 확대의 시대가 종언된 1970년대 이후에도 에도시대의 무사가 정치와 결탁한 것돠 마찬가지로 시대의 정치와 성공적으로 공모하면서 사회 지도자라는 자리에 매달려 있었다.

 게다가 우연까지 무사의 셩명 연장을 도와주었다. 1995년 한신 대지진, 2011년 동일본대지진이라는 두 번의 대지진이 일본을 덮쳤다. 대지진 피해의 복구와 부흥이 국가 목표가 되면서 무사는 새로운 활약의 기회를 부여받았다. 게다가 2020년 도쿄올림픽까지 겹쳤다. 우연이 몇 번이나 무사의 편을 들고 있다.

 

 

p209

 선진국의 노숙자는 태어날 때부터 노숙자인 사람은 없다. 어떤 이유 때문에 사회에서 도중에 낙오된 사람들이 대부분이다. 물론 경제적인 이유가 큰 부분을 차지하지만, 경제적 이유만으로는 노숙자가 되지 않는다. 이유가 그것뿐이라면 생활보호를 받으면 된다. 어떤 정신적 이유가 더해져 사람들은 세상을 등지고 노숙자가 된다.

 그런 사람들이 예술이나 운동을 접하고 1천 명 가운데 세 명이나 다섯 명이라도 살아갈 기력과 노동의욕을 되찾는다면, 이것은 대단히 저렴한 노숙자 대책이다. 무료급식만으로는 당장의 목숨을 구할 수는 있어도 발본적인 문제 해결은 되지 않는다. 노숙자를 만들어내는 원인의 하나가 인간 정신적인 측면에 있는 이상, 그것을 개선하지 않으면 영구적인 해결이 될 수 없다.

 노숙자 프로젝트는 내 주변의 문제로 받아들이기 어려울 수도 있지만, 예를 들어 다음과 같은 사례도 있다.

 내가 경영하는 고마바 아고라극장은 몇 년 전부터 고용보험 수급자에게 대폭적인 할인을 실시하고 있다. 실은 이것도 유럽의 모든 극장과 미술관에서 당연히 시행되고 있는 정책이다. 학생 할인과 장애인 할인이 있는 것과 마찬가지로 '실업자 할인'이 존재한다. 

 하지만 일본에서는 지금까지 이와는 반대의 정책을 실시하고 있었던 것이 아닐까? 고용보험 수급자가 평일 낮에 극장이나 영화관을 찾으면 구직활동을 게을리 하고 있다는 이유로 고용보험 지급을 중단해 버리는 정책. 또는 생활보호세대의 구성원이 극장에 가면 뒤에서 손가락질을 당하는 사회 분위기.

 

p212

 그렇기에 우리는 사고방식을 바꿔나가야 한다. 실업 중인 사람이 평일 낮에 영화관이나 극장에 찾아주면 "실업 중인데도 극장을 찾아줘서 고마워요. 사회와 관계를 맺고 있어서 고마워요. 그렇게 하는 편이 최종적으로 행정과 사회의 비용도 위험요소도 경감되니까요"라고 말이다. 또한 생활보호세대가 콘서트홀에 오면 "생활이 어려운데도 음악을 들으러 와줘서 고마워요. 집에 틀어박혀 있지 않아서 고마워요"라고 생각하는 사회를 만드는 편이 최종적으로 사회전체의 부담이 경감된다.

 이러한 사고방식을 '문화를 통한 사회포섭'이라고 부른다.

 일본은 예로부터 지연과 혈연이 강한 사회였다. 그러나 그러한 사회체계는 태평양전쟁 이후에 붕괴되었고 기업 사회가 그것을 대체했다. 사택에 살고, 사원운동회에 참가하고, 사원여행을 즐기고, 기업연금의 보장을 받으면서 사람들은 일생을 마친다고 믿었다. 그러나 1990년대 이후에 세계화가 진행되면서 기업은 이제 노동자를 지킬 필요가 없어졌다.

 기업사회 또는 그에 대한 믿음은 붕괴되었다. 뒤돌아보면 옛날의 좋았던 지연 · 혈연형 사회(라는 것도 역시 환상)도 존재하지 않았다. 이것이 한때의 유행어였던 '무연사회'의 정체다.

 게다가 일본에는 마지막 안전망인 종교도 없다. 유럽의 노숙자는 정말 힘들 때는 교회를 찾을 수 있지만 일본에는 그런 종교조차 존재하지 않는다. 한마디로 일본은 세계 선진국 중에서 가장 인간이 고립되기 쉬운 사회가 되어버렸다.

 

 

p229

 애초에 지금의 먹거리 가격이 적당하다고 할 수 있을까?

 먹거리의 생산 현장에서는 1차 산업으로는 먹고 살 수 없다는 이유로 농부와 어부가 점점 줄고 있다. 먹거리를 만드는 사람이 먹고 살 수 없다니, 정말 이상한 이야기다. 식의 세계화가 진행되면서 싼 가격을 강요당하자, 생산자가 충분한 이익을 얻지 못하는 상태가 오래 이어졌다. 먹거리 가격이 내려가면 소비자에게는 기쁜 일임에 틀림없다. 그러나 생산자가 계속 줄어든다면 결국 일부 부유층만이 일본 국내산을 아이들에게 먹일 수 있게 될 것이다.

 실제로 먹거리 가격이 지나치게 내려가면 국민의 생명과 건강도 위협받게 된다. 끊이지 않는 식품 위조 문제의 근원에는 1엔이라도 저렴한 음식을 선택하는 소비 행동이 생산과정이 보이지 않는 먹거리의 대량 제조를 초래한다는 부분도 부정할 수 없다. 2007년 식품가공회사 미트호프의 가공육 위장 사건이 세상에 알려졌을 때, 회사 사장이 기자회견에서 "반액 할인을 좋아하는 소비자에게도 문제가 있다", "싼 냉동식품을 좋다고 구매하는 소비자도 나쁘다"고 말해 세간으로부터 집중 공격을 당했다,

 확실히 위조는 나쁜 일이고 비판받아 마땅하다. 그러나 미트호프 사장의 발언은 우리가 먹거리를 선택할 때 '저렴함'을 판단기준으로 삼은 것이 생산과정의 블랙박스화를 초래했음을 여실히 보여주었다. 먹거리의 안전을 위한 비용을 소비자가 이해하지 못하면 식품 위조 문제는 반복될 것이다.

 2017년 구마모토에서 만난 여의사는 병원을 찾는 환자를 줄이기 위해서 채소 소믈리에 자격을 취득했다고 말했다. 현대인은 평소 식생활을 신경 쓰지 않고, 안전을 위한 돈도 쓰지 않는다. 그러다 어느 순간 병에 걸려 거액을 의료비로 쓰다가 결국 병상에 누워 비참한 최후를 맞이하는 사람도 많다. 이왕 같은 돈을 쓴다면 부정적 비용이 아니라 안전한 먹거리를 구매하는 긍정적 비용을 선택해 건강 수명을 늘리는 것이 좋지 않을까? 우리 자신의 소비 행동을 바꾸는 것은 백세시대에 걸맞은 저비용의 의식동원醫食同源 사회 만들기로 이어진다.

 

p238

 내가 태어나기기 얼마 전인 1970년 1,035만 명이었던 농업종사자는 2016년에 192만 명으로 줄어들었다. 

(참고 대한민국 현황 http://www.hani.co.kr/arti/economy/economy_general/741226.html)

 

192만 명 가운데 65세 이상의 고령자가 125만 명, 39세 이하는 겨우 12만 명 뿐이다. 또한 연령별로 살펴봤을 때, 이농비용이 가장 높은 연령은 39세 이하다.

 내가 현의원으로 재직하던 때부터 이러한 감소 현상은 계속되고 있다. 이런 수치가 눈앞에 제시하는 현실을 현장에서 보고 들으면서, 지금까지 먹거리의 생산에 관한 문제를 남의 일처럼 생각하던 자신을 깨달았다. 인간은 먹지 않으면 살알갈 수 없다. 다시 말해 모든 국민은 식생활 문제의 당사자이지만, 1차 생산에는 전혀 관심이 없었다.

 먹거리가 없어져 곤란한 쪽이 소비자라면, 생산자 혼자 머리를 싸매고 후계자 부족 문제를 고민하는 것이 아니라 소비자도 당사자라는 의식을 가질 필요가 있지 않을까? 가격을 판단 기준으로 삼아 소비행동을 해온 우리는 1차 산업을 쇠퇴시긴 간접적인 가해자라는 생각이 들었다.

 그렇게 낙농과 쌀농사 등의 현장을 체험하면서, 인간이 통제할 수 없는 자연의 영향력 아래서 생며을 키우는 것이 얼마나 힘든 일인지 통감했다. 생물이기 때문에 병에 걸리고 죽기도 한다. 악천후로 인해 그동안의 막대한 노력이 물거품이 되는 경우도 있다. 따지고 보면 우리는 농부 덕분에 살아가고 있다는 경외심이 저절로 생겨났다.

 농부는 자연에서 배운다. 자연과 함께 살아가는 지혜 · 기술 · 판단력을 지니고 있다. 그렇게 지역 사람들이 지금까지 축적한 지혜 · 기술 · 판단력이라는 경험치는 일종의 과학이기도 하다. 농부의 경험치를 활용한 생산활동은 자연을 인간의 먹거리로 바꾸기 위한 작은 과학small-science이다.

 그러나 태평양전쟁이 끝나고 일본인은 농촌을 떠났다. 뜻대로 되지 않는 자연과 타인, 지역사회 등의 번거로운 관계를 버리고 도시로 흘러들었다. 그러나 번거로움에서 해방되는 대신, 자연이나 지역사회와의 관계 속에서만 얻을 수 있는 지혜 · 기술 · 판단력을 포기했다. 생활의 풍요로움을 원자력발전과 유전자공학 등의 거대과학big-science에 맡기고, 행정 · 과학기술 · 경제에 모든 것을 일임한 채, 관객석 위에서 강 건너 불구경을 하기로 했다.

 그런 삶에는 공동체의 생활을 자신의 지혜와 창의적 노력으로 만들어가는 기쁨과 감동이 존재하지 않는다. 모두 함께 지혜를 모아 지역의 과제를 해결하는 마음가짐을 잃고, 사회를 만들어가는 당사자가 아니라 '손님'이 되어버렸다.

 주인 의식을 상실한 1억 총관객사회에 활력이 생겨날 리가 없다. 생산인구는 줄어들고, 수요부족으로 경제가 침체되고, 세수입도 줄어들었다. 어쩔 수 없이 행재정 자원이 축소되고, 고령자 부양이라는 부담이 핵가족을 덮치던 그때, 풍요의 기반이었던 원자력이라는 거대 과학이 폭주해서 우리를 당황하게 만들었다. 지나치게 성장을 추구한 결과, 오히려 근원적 위험요소를 구조적으로 떠안아버리는 사회는 사회학자 울리히 벡Ulrich Beck이 말하는 '위험사회'의 개미지옥 자체다.

 지역과 관계를 맺지 않고 '혼자 살아가는' 1억 총관객사회는 '고비용 사회'이기도 하다. 고립이 진행될수록 1인당 생활유지 비용이 증가한다. 이러한 문제들을 해결하기 위해서 다시 경제와 과학기술의 힘에만 의존한다면, 좀더 심각한 '위험사회'의 수렁으로 빠져들 수밖에 없다.

 그렇다면 어떻게 해야 할까? 생활과 사회에서 '관계의 힘'을 되살려야 한다.

 자연과 타인, 지역사회와의 관계를 되살리는 것은 우리가 관객석에서 무대로 내려와 각자 생활의 주인공이 되는 것을 의미한다. 자신의 힘으로 사회를 만들어나가는 쪽으로 돌아간다. 어쩔 수 없이 억지로 내려가는 것이 아니다. 무대 위에서 연기하는 편이 훨씬 즐겁기 때문에 내려가는 것이다.

 자신을 둘러싼 환경에 주체적으로 참가하며 살아가는 농부들의 모습은 직접 생활을 만들어나가는 기쁨과 감동을 깨닫게 해주었다. 그것은 우리 사회를 되찾는 일임과 동시에 재해 · 경제 위기 · 질병 등의 요소에 취약한 '위험사회'에 대비하는 일이다. 생산자와의 교류를 통해서 이런 생각을 하기 시작한 그때, 2011년 동일본 대지진이 일어났다.

 

 

p277

 19세기 중반 에도시대 말기의 인구는 약 3,000만 명, 1870년대 메이지시대 초기는 약 3,500만 명이었다. 메이지유신 이후 150년 동안, 전쟁으로 인한 감소가 있었지만 일본의 인구는 세 배 이상으로 불어났다.

 영국과 프랑스가 같은 기간에 약 1.5배 증가했음을 고려하면 일본의 인구 증가율이 얼마나 높은 수치인지 알 수 있다. 일본과 비슷한 근대화 과정을 거쳤으며 전쟁도 체험한 독일의 경우도 영국과 프랑스보다는 증가율이 높지만 일본 정도는 아니다.

 미국은 이민국이기 때문에 일본의 단순 비교 대상이 될 수 없다. 일본의 증가율을 월등히 상회하는 국가는 한국이다. 그러나 한국은 '압축 근대'라는 이름이 붙을 정도로 '뜨거운 근대'를 단기간에 편파적인 형태로 통과했다. 그러다보니 출생률은 일본보다 낮아 저출생 · 고령화 속도가 상당히 빠른 편이다.

 결국 메이지유신 이후 150년 동안, 세계적으로도 미국을 제외한 주요 선진국들은 인구 감소 경향으로 변하고 있다.

 마가 복음을 베이스로, 예수 1인칭 관점을 가정하여 쓴 예수의 공생애 일대기.

당연히 저자인 김용옥 선생이 바라보는 예수에 대한 관점이 녹아들어 있다. 

도올 선생의 과거 기독교 저작들과 영상 강의를 들어본 이들에게는 익숙한 이야기들이 있다.

예수에게서 신화적 부분을 싸악 걷어내고 인간적인 관점과 심리에서 접근했다고 보면 이해가 된다.

사람의 아들로 태어나서, 신의 자식으로 죽은 자의 이야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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p35

 20세기의 서구의 가장 위대한 성서신학자라고 말할 수 있는 루돌프 불트만은 이와같이 말했습니다: "바울의 담론을 통해서도, 어떠한 복음서의 기술을 통해서도 역사적 예수Historical Jesus에 관한 진실은 알려질 길이 없다. 그 모든 담론이 이미 초대교회의 케리그마적 담론이며, 초대교회는 종말론적인 회중이다. 이미 신화 속에 갇힌 사람들이다." 세상사람들이 불트만을 진보적 신학자로서 평가하는 이유는 그가 철저히 성서의 신화적 기술을 비신화하려 했기 때문입니다. 2천 년 전의 신화적 세계관을 오늘 과학적 세계관 속에서 사는 사람들에게 강요할 수 없다는 합리주의정신을 표방했기 때문입니다.

 

p44

 내가 세례 요한을 만난 이야기를 하기 전에 나에 관한 기본적인 정보 몇 가지를 얘기해둘 것이 있습니다. 나는 갈릴리 나자렛에서 태어났습니다. 나의 어머니 마리아는 매우 평범한 여인이며, 결코 성모聖母라고 컬트화 될 수 있는 그런 여인이 아닙니다. 여러분들이 중동 지역 길거리에서 만날 수 있는, 까만 보자기를 쓴 보통의 여인, 그 이상 아무것도 아닙니다. 나의 그리스도됨을 원한다면 그 신령성을 나의 삶 속에서 찾아야 할 것입니다. 나의 가족을 장식물로 삼아 이야기를 구성하는 것은 너무 어리석은 짓입니다. 마리아는 아람어로 마리암Mariam인데 그것을 희랍어로 적으면 마리아Mαρια가 됩니다.

 나의 엄마 마리아는 나의 아버지 요셉과 결혼하여 아들을 다섯 명, 딸을 셋 낳았습니다. 나는 8남매 중 둘째입니다. 그러니까 맏형이 있습니다. 그러니까 처녀잉태 같은 것은 애초에 말이 되지 않는 것입니다. 그것은 로마문명의 로컬 컬트와 결합되면서 다양한 이야기를 지어냈습니다. 그것은 그것대로 하나의 문화전통이니까 부정 · 긍정의 논란의 대상이 될 필요가 없겠지요. 그러나 나 예수를 정직하게 바라보고, 진지하게 이해하고 싶어하는 사람들은 그런 유치한 논의에 사로잡혀서는 안됩니다.

 

p66

 마가는 세례 요한의 사상과 나의 사상의 다른 점을 단적으로 "물의 세례"와 "성령(프뉴마 πνεμα)의 세례"라는 말로 표현하였습니다(1:8). 마태는 "성령의 세례"라는 말 대신에 "성령과 불(퓌르 πνρ)의 세례"라는 말을 썼습니다(마 3:11). 누가도 "성령과 불의 세례"라는 표현을 썼습니다(눅 3:16).

 "프뉴마"라는 것은 본시 "숨"을 의미합니다. 동양언어에도 "기氣"라는 말이 있습니다. 기는 신령한 그 무엇이면서도 우주 전체에 깔려있는 물질의 기초이기도 합니다. 그런데 기는 결국 숨breath입니다. 숨은 콧구멍을 들락거리는 공기, 바람이기도 하죠. 숨은 곧 생명의 근원, 증거이기도 합니다. 내가 쓰는 헬라문명권 언어의 이 프뉴마는 동양의 기와 매우 유사합니다. 그것은 숨이며, 바람이며, 호흡이며, 생명이며, 신적 영감 divine inspiration이며, 신의 영이며 사람의 영입니다. 물의 세례는 매우 구체적인 물질적 접촉을 통하여 이루어지는 세례를 의미하지만, 영의 세례, 즉 기의 세례는 생명의 토탈한 뒤바뀜, 전 인격의 변화를 의미합니다.

 "불"은 물질을 대변한 말이 아니라, 프뉴마의 신생新生의 뜨거움을 대변하는 말입니다. 물의 세례보다는 불의 세례 한 차원 높은 어떤 영적 트랜스포메이션spiritual transformation을 나타내고 있습니다. 즉 나의 사상과 세례 요한의 사상에 균열이 생겼다는 것을 의미하기도 하지요. 균열이 생기면 결국 이별하게 됩니다. 이별하게 된다는 것은 나 예수가 새로운 길을 개척하게 되었다는 것을 의미하지요.

 아주 쉽게 말하자면 나는 세례 요한 밑에서 공부하면서 세례 요한보다 더 상위권의 비젼을 획득하고 그와는 다른 길을 개척하였다는 것을 의미하겠지요. 그 시점이 아주 오묘했습니다. 내가 세례 요한과 결별하게 되는 시점 그 즈음에 안티파스는 세례 요한을 마캐루스성채의 감옥에 가두었습니다. 세례 요한의 세례운동은 통치자 안티파스를 위협할 정도의 사회적 셰력을 형성하였고, 그것은 그의 전성기를 의미하는 동시에 몰락을 의미하는 것이었습니다. 나는 세례 요한의 터무니없는 몰락을 목격하면서, 나의 영적 세례운동은 정치적 세력을 형성해서는 아니된다는 교훈을 얻었습니다.

 

p125

 그런데 마가는 또 이런 말을 했습니다 : "예수는 천국의 비밀을 사람들이 함부로 쉽게 알아차릴 수 없도록 비유로 말하였다."(4:11). 마가는 훌륭한 작가이지만, 이 말만은 매우 그릇된 생각의 결과물이라고 말할 수밖에 없습니다. 나는 그 호반에 앉아있던 수천 명의 사람들이 누구든지 쉽게 알아들을 수 있도록 비유로 말한 것입니다.

 

9장. 비유는 상식적 민중의 담론이다.

 

 우선 비유가 무엇일까요? 비유는 헬라말로 "파라볼레παραβολη"라고 하는 것인데, "파라"는 "나란히", "함께"라는 뜻이고, "볼레"는 "던지다"라는 동사에서 파생된 말입니다. 다시 말해서 한 가지 말을 하고 있는데 또 하나의 말이 동시에 나란히 던져지고 있다는 뜻이지요. 여태까지 나는 파라볼레의 어법을 계속 활용해왔습니다. "새 술은 새 부대에," "어찌 사탄이 사탄을 궤멸시킬 수 있겠는가," "잔치집에 온 신랑친구들이 어찌 신랑과 함께 있는 단식을 할 수 있으랴!"는 등등, 한 가지 말의 이면에 또 하나의 말이 있었다는 얘기지요.

 "씨 뿌리는 자의 이야기"를 했는데 그 이면에 "천국의 비밀"이 같이 얘기되고 있었다는 것이죠. 그런데 비유담론은 감추기 위한 것이 아니라 더 복합적으로 많은 의미를 드러내기 위한 것이죠.

 비유는 민중의 언어입니다. 조선말에 "속담"이라는 말이 있지요. "속담"이란 "세속의 이야기"라는 뜻이죠. 즉 "민중의 이야기 방식"이라는 뜻이죠. 속담은 짧은 경구警句라 할지라도 파라볼레가 아닌 것이 없습니다. 속담의 특징은 적재적소에  쓰이면 누구든지 쉽게 알아듣는다는 것이죠. 그것은 "카이로스(타이밍)의 예술"이지요.

 

p230

 먼저 성전에 오는 사람들은 제사를 지내야 했습니다. 그런데 제사를 지낸다고 하는 것은 정결한 코셔기준the kosher requirements에 맞는 동물을 희생으로 써야 합니다. 그런데 희생 동물은 순례자가 아무리 깨끗이 길러서 가지고 와도 코셔검사를 통과할 수가 없습니다. 그러니까 결국 성전회랑에서 파는 동물을 살 수밖에 없습니다. 이것이 바로 부패구조 때문이죠.

 사실 성실한 본인이 잘 키운 것이 제일 깨끗할 텐데 그러면 성전에는 우수리가 안 떨어집니다. 성전회랑에는 파는 동물은 자기가 기른 것이나 시중에서 파는 것의 보통 몇 배를 호가합니다. 터무니없이 비싸지만 그 가격을 안 낼 수가 없습니다. 제사를 지낼 수가 없기 때문입니다. 제사를 못 지내면 야훼의 축복을 못 받는다고 생각하는 것이죠. 일년 동안 집안운수가 꽝이 된다고 생각하니 안 낼 수도 없죠. 10원에 해결될 것을 100원에 내야만 하는 곳이 바로 예루살렘성전입니다. 90원을 착복한 상인의 이문의 대부분은 다시 제사장들, 사두개인, 서기관, 그리고 궁극적으로 산헤드린의 주머니 속으로 빨려 들어갑니다.

 환전상이라 하는 것도 마찬가지입니다. 성전에서 쓰는 돈은 세속적인 로마화폐를 쓸 수가 없습니다. 모든 튀리안화폐the Tyrian currency로 바꾸어야 합니다. 이 튀리안화폐가 있어야 성전세를 낼 수 있고 또 성전에서 행하는 여러가지 활동을 할 수가 있습니다. 이 환전하는 데도 상식적인 환율의 몇 배가 되는 환율이 적용되는 것이죠.

 한번 생각해보십시오! 헤롯성전이 AD 66년에 완성되었을 때, 그해 유월절에만 자그마치 25만 5천 6백 마리의 양이 희생되었다고 합니다. 예수살렘성전의 제식규모를 알 수 있을 것입니다. 그리고 그 과정에서 이루어지는 환전과 희생동물매매의 수익은 천문학적 숫자에 달합니다. 나는 이 부패의 연결고리를 방관할 수가 없었습니다. 갈릴리 민중의 고초의 근본원인이 이러한 종교조직과 율법과 그릇된 신관에 그 뿌리가 있다는 것을 깨달았기 때문이었습니다.

 내가 예루살렘을 향한 것은 바로 이러한 종교혁명, 정치혁명, 사회혁명의 한 고리라도 내 힘으로 달성해야겠다는 신념, 그 신념을 고취시키는 하나님의 소리가 있었기 때문이었습니다. 그 어는 누구도 이 나의 갈망을 이해하지 못했습니다. 세례 요한처럼 맥없이 죽을 수는 없었습니다. 민중의 마음에 확고한 씨를 뿌리지 않으면 내가 말하는 천국은 도래할 길이 없었습니다. 그 첩격이 갈릴리 촌구석에서 행하는 이적에 있는 것이 아니라, 예루살렘의 성전을 뒤엎는 사회적 행위, 상식적 행위, 사람들의 마음을 경이롭게 만드는 의로운 거사에 있다는 것을 나는 깨닫고 있었습니다. 힐링이 기적이 아니라 힐링을 가능케 하는 민중의 마음이 기적이라고 나는 말했습니다. 그 믿음의 궁극적 행태는 율법의 전승 그 자체를 단절시키는 것이었습니다.

 

 모든 종교적 하이어라키를 전복시켜야 평등한 세상이 오고 심령이 가난한 자, 애통하는 자가 복을 받습니다. 나는 갈리리 촌놈에 불과합니다. 나는 서른댓 살의 청년에 불과합니다. 나를 마술사로 그리고, 나를 수염이 덥수룩하게 난 노인처럼 그리는데 정말 나에 대한 그릇된 이미지만을 세상은 만들고 있습니다. 나는 피 끓는 청년이고, 근원적인 사회변화를 꾀하는 운동가입니다.

 나는 그 거대한 헤롯성전에 들어서자마자 닥치는 대로 사고 팔고 하는 모든 사람들을 내쫓으며 환전상들의 탁자를 다 엎어버리고, 비둘기장수들, 희생양을 파는 사람들의 의자를 둘러 엎었습니다(11:15). 그리고 제사기구들을 나르느라고 성전뜰을 왔다갔다 하는 것도 금지시켰습니다. 이것은 성전제사 자체를 금지시키는 반유대교적 행동이었습니다.

 생각해보십시오! 나는 갈릴리 촌놈입니다. 아무리 메시아 운운한다 할지라도 로마병정의 칼자루에 간단히 목이 날아갈  그런 연약한 존재입니다. 어떻게 갈릴리 촌놈인, 서른댓 살의, 아무 조직배경도 없는 청년이 이 무시무시한 대성전에서 이러한 난동을 부릴 수 있단 말입니까? 어떻게 이런 행위가 용인될 수 있었고 가능할 수 있었겠습니까? 나는 채찍까지 휘둘렀습니다. 폭력적인 힘까지 휘둘렀습니다. 그리고 이렇게 크게 소리쳤습니다.

 

 "성서에 하나님께서 '내 집은 만민이 기도하는 조용한 집이 되어야 하느니라'라고 말씀하시지 아니하였느냐? 그런데 너희는 이 집을 강도의 소굴a den of robbers로 만들었구나!"

 

 나는 이 거대한 예루살렘성전을 "강도의 소굴"이라 규정하였습니다. 어떻게 이러한 나의 언행이 용납될 수 있었을까요?

 만약 이 예루살렘성전이 로마군대가 직접 관장하는 곳이었다고 한다면 나는 초반에 바로 살해당하였을 것입니다. 그런데 로마는 다신론적 문화를 가지고 있었기 때문에 식민지 지역의 총교생활에 관해 매우 관용적 태도를 취했습니다.

 그리고 로마는 헤롯왕가를 통한 간접통치방식을 취했습니다. 팔레스타인 지역은 반자치구역이었습니다. 그러므로 내가 제기한 반종교적 행위는 로마권력자들의 입장에서는 강 건너 불이었습니다.자기들이 직접 다룰 문제가 아니었습니다. 그러나 당연히 유대교 당국의 입장에서 보면 나의 행위는 반역이었습니다. 마가는 이렇게 적고 있습니다.

 

 "제사장들과 서기관들은 예수의 언행을 듣고 어떻게 해서라도 예수를 죽여야 한다고 모의하였다."

 

 그런데 왜 목 죽였을까요? 여기에 복음서가 기록하지 않은 중요한 사실들이 있습니다. 나는 처음부터 군중에게 둘러싸여 있었습니다. 종교적 당국은 내가 민중의 마음을 얻고 있다는 것을 잘 알고 있었습니다. 마가는 이렇게 썼습니다.

 "민중이 예수의 가르침에 감탄하였다"(11:18)

 

 다시 말해서 나의 성전전복행위는 나 홀로 한 일이 아니었습니다. 민중이 마음으로 성원했고 나와 같이 행동했습니다. 생각해보세요. 내가 환전상들의 탁자를 뒤엎어 동전이 여기저기 흩어질 때 그들의 마음이 얼마나 통쾌했겠습니까? 마가는 이렇게 썼습니다.

 

 "저녁때가 되어 석양이 뉘엿뉘엿할 때야 예수와 제자들은 성밖으로 나갔다."

 

다시 말해서 나의 전복행위는 하루종일 계속된 것입니다. 그 35에이커 면적을 커버하는 회랑을 뒤엎는 작업은 하루종일 진행된 민중항쟁의 대사건이었습니다. 나느 성공했습니다. 나는 이제 진정한 패션Passion의 길을 걸을 수 있게 되었습니다. 이제 나는 죽을 수밖에 없는 운명의 사나이가 되었습니다. 그러나 나는 두렵지 않았습니다. 이 땅에 태어난 사명을 다한 것입니다. 천국이라는 새로운 약속의 임재를 위하여 구약을 말소시키는 깨끗한 청소를 단행한 것입니다. 이것이 나의 예루살렘 이틀째의 하룻일이었습니다. 나는 이날 밤도 베다니에서 잤습니다.

 

 

 

 

 

 이 책의 저자인 앤 드루얀의 남편이자 작고한 칼 세이건의 코스모의 후속편이라고 할 수 있다.

최신의 우주 탐사의 내용들부터 시작해서 현재의 기후 문제까지를 다루고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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p40

 우주의 나이에 대한 최신 정보는 유럽 우주국(ESA)의 플랑크 위성이 알아낸 것이다. 플랑크 위성은 1년 넘게 온 하늘을 훑어서 우주가 갓 태어났을 때, 그러니까 대폭발(big bang)으로부터 겨우 38만 년 흐른 시점이었을 때 처음 방출된 빛을 꼼꼼하게 측정했다. 그 데이터는 우리에게 코스모스의 나이가 138.2억 년이라는 사실을 알려주었는데, 이것은 과학자들이 기존에 생각하던 것보다 1억 년 더 많은 숫자였다.

 과학의 멋진 점 중 하나가 이것이다. 약간 더 나이가 든 우주의 증거가 발견되었을 때, 그 정보를 은폐하려고 한 과학자는 아무도 없었다. 새 데이터가 사실로 확인되자마자, 온 과학계가 수정된 지식을 받아들였다. 이처럼 언제까지나 혁명적인 태도, 변화에 대한 열린 태도가 과학의 핵심에 있기 때문에 과학이 이토록 효과적인 것이다.

 

p54

 시신을 떠멘 장례 행렬이 차탈회위크를 떠나 드넓은 아나톨리아 평원으로 나갔을 것이다. 그곳에는 높은 좌대가 기다리고 있었다. 사람들은 좌대에 시신을 올리고, 맹금과 비바람이 그것을 먹어 치우도록 내버려 두었다. 한 사람 정도는 남아서 뼈까지 다 없어지진 않도록 망보았을 것이다. 독수리들이 좌대를 맴돌았고, 비바람이 불어닥쳤다. 시간이 흘렀다. 이윽고 유골만 남았을 때, 사람들의 행렬이 돌아왔다. 이제 유골을 붉은 황토로 장식해 태아처럼 웅크린 자세로 배치한 뒤 자신들이 사는 집 거실 바닥에 묻을 차례였다. 아마도 의례적인 행동이었을 텐데, 사람들은 이따금 발밑의 무덤을 열어 사랑하는 망자의 해골을 꺼낸 뒤 자신들이 사는 공간에 보관했다. 그들이 망자와 맺었던 관계는 아마 우리들보다 더 평화롭지 않았을까.

 

▶ 절(寺)에 가보면 대웅전 앞마당에 있는 탑(塔)에는 부처님의 사리가 모셔져 있다(물론 전국의 모든 사찰에 다 진신사리가 있지는 않다. 우리나라에는 어떤 고승이 부처님의 진신사리를 100여개 들고 와서 전국 사찰에 나눴는데, 이런 진신사리가 모셔진 사찰을 특별히 적멸보궁이라 한다. 그리고 적멸보궁에는 부처님의 진신사리를 모시는 전통적인 규율에 따라 부처상이 없다. 원래 전통 불교에서는 부처님의 상을 만들 수 없게 되어 있다. 부처상을 만든것은 알렉산더 대왕이 인도를 정복 후, 헬레네 문명이 유입되면서 그리스 조각문화가 불교와 결합된 이후이다).

 즉 고대에는 가족 혹은 존경받는 사람들이 죽고 나면, 그 시신의 뼈 혹은 태우고 남은 재를 가정내에 모시는 것이 원초적인 형태였을 것이다. 지금도 일본에서는 장례후 망자의 다비의 일부를 자그마한 단지에 담아 집에 마련된 자그마한 신당에 모시고 매일 아침에 지은 밥을 올리는 의례를 하는 집이 상당히 많다. 이렇듯 우리가 지내는 제사라는 의례는 이렇게 소박한 형태로부터 시작되었을 것이다.

 그저 생각나면 거실 바닥을 파서 돌아가신 이들의 뼈를 보고 생각에 잠기는 행위는 애틋하기도 하고 로맨틱하기도 하다. 어떤 이들은 기괴하다고 여길 수도 있겠지만.

 

p61

 유태인 공동체의 불안은 이해할 수 있다. 그들은 스페인과 포르투갈에서 자신들이 살아온 세상이 악몽처럼 뒤집히는 꼴을 목격했으니, 무엇보다도 지역 사회에 받아들여져서 평온하게 살기만을 바랐을 것이다. 그래도 여기에는 얄궂은 면이 있다. 구약의 기도문은 사람들에게 매일 일상을 영위하는 모든 행동에서 주님을 떠올리라고 가르쳤다. 그런데 스피노자가 한 일이 바로 그것 아니었는가? 그는 사방에서, 만물에서 신을 보지 않았던가? 자신이 무엇을 하는 중이든 자연의 모든 곳에서 신이 있다고 보지 않았던가? 자신이 무엇을 하는 중이든 자연의 모든 곳에 신이 있다고 보지 않았던가?

 스피노자가 기적이라면 질색한 것도 그 때문이었다. 그는 1670년 출간한 『신학-정치론(Theological-Political Treatise)』의 6장을 통째 이 주제에 할애해서, 사람들이 기적에 부여하는 의미를 인정할 수 없는 이유를 꼬치꼬치 설명했다. 스피노자는 이렇게 말했다. 기적에서 신을 찾지 마라. 기적이란 자연 법칙의 위반인 셈이다. 그런데 만약 그 자연 법칙을 쓴 것이 신이라면, 신이야말로 그 법칙을 가장 잘 이해하지 않겠는가? 기적은 자연적인 사건을 인간이 오해한 것뿐이다. 지진, 홍수, 가뭄에 개인적인 의미를 부여해서는 안 된다. 신은 인간의 희망과 두려움이 투사된 존재가 아니라 우주를 존재하게끔 한 창조력일 뿐이고, 우리는 자연 법칙을 연구할 때 그 창조력을 가장 잘 접할 수 있다.

 

p62

 그가 볼 때 국가 공인 종교란 정신적 강압일 뿐이었다. 주요한 전통 종교들이 중요하게 여기는 초자연적 현상은 조직화된 미신일 뿐이었다. 그는 그런 마술적 사고가 자유로운 사회의 시민들에게 위험하다고 믿었다.

 

 

 1920년 11월, 역시 빛에 대한 열정으로 넘치는 또 다른 남자가 스피노자의 철학이 미친 영향력을 기념해 박물관으로 보존된 헤이그의 초라한 작업실을 찾았다. 새로운 자연 법칙을 발견한 업적으로 세계적으로 유명해진 그 과학자는 사람들로부터 종종 신을 믿느냐는 질문을 받았다. 그때마다 그는 이렇게 대답했다. "제가 믿는 신은 만물의 조화에서 그 모습을 드러내는 스피노자의 신입니다." 아인슈타인의 말이다.

 

p63

 식물로 산다는 것은 절대 쉽지 않다. 한자리에 뿌리 박고 있는 존재에게 섹스가 만만찮은 과제다. 데이트는 불가능하다. 그냥 가만히 앉아서 바람에 씨앗을 날릴 뿐, 말 그대로 손 놓고 앉아서, 바람이 불어오기만을 기다려야 한다. 운이 좋다면, 당신이 날려 보낸 꽃가루가 다른 식물의 암 생식기에 해당하는 암술에 가 닿을지도 모른다.

 식물은 이렇게 무턱대고 운에 맡기는 방식을 2억 년 동안 써 왔다. 그러던 중 드디어 큐피드 역할을 해 줄 곤충이 진화했다. 그 결과는 생명 역사상 가장 훌륭한 공진화(coevolution)였다. 곤충은 단백질이 풍부한 꽃가루를 먹으려고 꽃을 찾는다. 그러다 보면 자연히 곤충의 몸에 꽃가루가 좀 묻고 곤충이 다음 식사를 하려고 다른 꽃으로 옮길 때 몸에 묻은 꽃가루도 따라가기 마련이다. 그 꽃가루가 다음 꽃을 수정시켜서, 식물의 번식을 돕는다.

 이것은 꽃에게도 곤충에게도 좋은 거래였고, 여기에서부터 또 다른 진화적 발전이 이어졌다. 식물은 꽃가루 외에 달콤한 꿀도 생산하게 되었다. 이제 곤충은 꽃가루 식사뿐 아니라 디저트까지 먹을 수 있었다. 곤충은 더 통통해졌다. 몸에 복슬복슬 털이 났고, 매일 꽃을 돌아볼 때 다리에 꽃가루를 더 많이 붙일 수 있도록 작은 주머니까지 진화시켰는데, 그것이 바로 꿀벌이었다.

 이 일은 동물계의 또 다른 종에게도 횡재였다. 우리 인간 말이다. 연기 나는 단지를 들고 꿈 따는 사람을 그린 스페인 동굴 벽화를 비롯해 고대의 다른 많은 그림이 알려주듯이, 우리 선조들은 꿀을 좋아했다. 꿀 자체를 즐겼을 뿐 아니라 꿀을 발효시켜서 벌꿀 술로 만들어 취하는 방법까지 알아냈다.

 새와 박쥐도 꽃가루받이 사업에 끼고 싶어 했지만, 곤충만큼 특히 꿀벌만큼 성공하지는 못했다. 우리가 꿀벌에게 고마워해야 할 이유는 그 밖에도 많다. 아름다움도 한 이유다. 식물은 꿀벌의 번식 대행 서비스를 누리려고 경쟁하다가 꿀 이외의 다른 전략도 진화시켰고, 그것이 바로 향기와 색이었다.

 꿀벌의 눈에는 사람처럼 세 가지 광수용체가 있다. 단 기능이 좀 다르다. 우리 눈은 빨강, 파랑, 초록을 인지하는 데 비해 벌의 눈은 자외선, 파랑, 초록을 인지한다. 주황빛이나 노란빛 파장은 붉은빛으로 인지한다.

 우리는 아름다움 외에도 우리의 생존에 더 긴요한 요소를 벌에게 빚지고있다. 여러분이 어떤 음식을 먹든, 이것은 육식 애호가에게도 마찬가지인데, 셋 중 하나는 벌 덕분에 존재할 수 있었던 음식이다. 벌은 우리가 먹을 식량의 총량을 늘려 주기만 한 게 아니었다. 우리의 안정적인 식량 수급을 돕는 생물 다양성도 벌에게 빚진 바가 크다.

 그리고 우리는 이제 이 우화의 슬픈 대목으로 접어들었다. 동물계의 새 구성원이 몰지각하고 욕심 사납고 근시안적인 행동으로 그 오래된 동맹을 망가뜨리는 대목이다. 내가 더 말하지 않아도 여러분은 무슨 말인지 알 것이고, 그 범인이 누구인지도 알 것이다.

 

p71

 현재 과학자들과 공학자들은 인류가 가장 가까운 별로 처음 정찰을 떠나게 될 브레이크스루 스타샷(Breakthrough Starshot) 사업을 준비하고 있다. 자신들이 살아서 그 사업이 완료되는 모습을 볼 수 없으리라는 것을 알면서도.

 약 20년 뒤, 1,000대의 우주선 함대가 지구를 떠날 것이다. 레이저 빛을 돛에 받아서 움직일 성간 우주선은 무게가 1그램밖에 안 된다. 크기가 콩알만하지만, 그 속에는 우리의 첫 성간 우주선이었던 NASA의 보이저 호들이 갖춘 장치는 물론이고 그것보다 훨씬 더 많은 것들이 담겨 있다. 모든 나노(nano)우주선에는 다른 별에 딸린 세계들을 정찰한 뒤 시각적, 과학적 정보를 지구로 보내는 데 필요한 도구들이 다 들어 있다.

 보이저 1호는 시속 6만 킬로미터 속도로 40년 넘게 여행하고 있다. 우리에게는 인상적인 속도이고 보이저 1호가 항해 초기에 거대한 목성을 근접 비행하면서 얻었던 단 한 번의 중력 도움으로 지금껏 날고 있다는 점을 생각하면 더 대단하다. 하지만 그저 은하 하나의 규모에서라고 해도 그것은 꿈속에서 달리는 것처럼 몽롱한 속도다. 빠르기는 해도, 어딘가에 다다르기에는 턱없이 느리다.

 스타샷 나노 우주선은 보이저 호를 나흘 만에 앞지를 것이다. 놀랍지 않은가? 하지만 그 속도마저도 광속의 20퍼센트에 불과하다. 별들은 정말 멀다. 우리에게 가장 가까운 별인 센타우루스자리 프록시마까지의 거리는 4광년이다. 스타샷 우주선이 가는 데만 20년이 걸린다는 계산이다.

 우리가 알기로 센타우루스자리 프록시마의 생명 거주 가능 영역에는 행성이 있다. 어쩌면 그곳에는 물이 흐를지도 모른다. 생명이 꽃피었을지도 모른다. 우리가 미처 발견하지 못한 다른 행성들이 더 있을지도 모른다. 우리의 로봇 사절들은 그 새로운 세계(들)로부터 놀라운 이야기를 보내올 것이다. 데이터는 전파의 형태로 광속으로 날아오므로, 우리에게 도착하기까지 4년이 걸릴 것이다. 지금으로부터 40여 년 후에 그들은 고향에 어떤 이야기를 보내올까?

 

p124

 골드슈미트는 또 감락석이 코스모스에 널리 퍼져 있을지도 모른다는 생각을 떠올렸다. 이것은 우주 화학이라고 불릴 분야의 시작이었다. 하지만 당시 그에게는 좀 더 전통적이지만 훨씬 더 시급한 화학 작업이 있었다. 나치가 노르웨이를 쳐들어오기 전날, 골드슈미트는 보호복을 입고 사이안화물(청산가리) 캡슐을 몇 개 만들었다. 그리고 게슈타포가 잡으러 올 때를 대비해서 캡슐을 늘 몸에 숨겨 지니고 다녔다. 어느 동료가 그에게 자신도 하나 얻을 수 있겠느냐고 묻자, 골드슈미트는 이렇게 대답해싸. "독약은 화학 교수를 위한거라네. 자네는 물리학자니까 밧줄을 쓰게."

 

p142

 1600년 2월 19일 오후 5시, 페루 남부에서 후아이나푸티나(Huaynaputina) 화산이 폭발했다. 돌덩이, 기체, 먼지가 하늘로 치솟아 거대한 연기 기둥을 이뤘다. 역사 기록상 남아메리카 최대의 분화였다. 연기 기둥은 대기를 뚫고 솟았다. 대류권을 뚫고, 성층권을 뚫고, 검푸르다 못해 거의 캄캄한 중간권까지 도달하고서야 비로소 땅으로 떨어졌다. 황산과 화산재가 섞인 불쾌한 연기가 햇빛을 차단했다. 겨울이 왔다. 화산성 겨울(volcanic winter)이었다.

 그해 러시아 사람들은 600년 만에 최고로 가혹한 겨울 날씨를 맞았다. 이후 2년 동안 여름에도 밤에는 기온이 영하로 떨어졌다. 러시아 인구의 3분의 1이었던 200만 명이 이상 기온으로 인한 기근으로 죽었다. 누더기로 얼굴을 동여맨 사람들은 덜덜 떨면서 거대한 구덩이를 파서 시체들을 한데 묻었다. 이 기근은 황제 보리스 고두노프(Boris Godunov)의 실각으로 이어졌다. 모두 1만 3000킬로미터 떨어진 페루에서 분화한 화산 때문이었다. 지구가 하나의 유기체라는 말을 공허한 감상주의로 여기는 사람들이 많지만, 이것은 엄연한 과학적 사실이다.

 

p254

 프리슈는 표시된 벌이 벌집 입구에서 햇빛을 받으며 겉보기에는 무의미한 춤을 씰룩쌜룩 추는 것을 지켜보았다. 그러다가 그 변덕스러워 보이는 춤 동작을 태양의 위치와 함께 공책에 꼼꼼히 기록하기 시작했다.

 그는 벌이 왼쪽으로 돌았다가 오른쪽으로 돌았다가 하면서 춤추는 동작을 하나하나 기록했다. 그러자 의심할 여지가 없는 결론이 떠올랐다. 벌의 안무에는 메시지가 숨겨져 있었다. 벌은 춤 언어로 말하고 있었다. 프리슈는 이것을 독일어로 "tanzsprache"라고 불렀다. 그리고 그 언어는 수학 공식으로 표현될 수 있었다. 프리슈는 벌의 1초(second, s) 동안 씰룩거림(waggle, w)은 1킬로미터의 거리를 뜻한다는 것을 알아냈다. 즉 1sw = 1킬로미터였다. 이 정보에 태양의 위치와 씰룩거리는 방향을 결합하면, 나무로 가득한 숲에서 딱 한 나무를 가리킬 수 있는 확실한 암호가 되었다. 만약 이 공식이 우주 저편에서 날아와서 FAST 망원경에 잡힌다면, 우리는 틀림없이 그것을 외계 지적 생명체가 보낸 메시지라고 해석할 것이다.

 과거 수많은 관찰자가 멍청한 동물의 무의미하고 발작적인 몸짓에 지나지 않는다고 여겼던 것은 사실 정교한 메시지였다. 수학, 천문학, 그리고 시간을 정밀한 단위로 측정할 줄 아는 예리한 능력을 활용한 메시지였다. 벌은 그 모든 지식을 결합해서 자매들에게 알리고 싶은 횡재가 있는 위치를 표현하는 것이었다. 춤꾼은 태양의 각도록 먹이가 있는 방향을 대충 표현한다. 프리슈가 보니, 벌이 위쪽으로 움직이는 것은 "태양을 향해 날아가라."라는 뜻이었다. 반면 반대 아래쪽으로 움직이는 것은 "태양과 반대 방향으로 날아가라."라는 뜻이었다.

 왼쪽이나 오른쪽으로 도는 것은 먹이의 좌표를 좀 더 정확하게 알리는 몸짓으로, 가끔 그 좌표는 몇 킬로미터나 떨어진 곳일 때도 있었다. 춤의 지속 시간은 - 몇분의 1초 단위로 정밀하다. - 친구들이 날아가야 할 시간을 뜻했다. 벌은 심지어 풍속까지 고려해서 메시지를 미세하게 조정했다. 춤은 사시사철 한결같았으며, 어느 벌집의 벌이든 어느 대륙에서 사는 벌이든 다 같은 춤을 추었다. 사회성을 가진 벌이라면 모두 이처럼 공간과 시간을 비행할 때 쓸 방정식을 계산하고 소통할 줄 안다. 서로 다른 지역에서 사는 벌들은 서로 다른 방언을 쓸지도 모르지만, 그렇더라도 통역이 쉽게 이뤄지는 듯하다.

 나는 왜 이 이야기를 서로 다른 문명들이 처음 만난 이야기라고 말했을까? 더 다를 수 없을 듯한 두 종이 - 인간과 꿀벌이 - 수억 년 동안 서로 다른 진화의 길을 밟아 왔다. 그런데도 두 종은 - 그리고 우리가 아는 한 지구에서는 오직 꿀벌과 우리만이 - 물리 법칙에 대한 지식에 근거해서 수학으로 표현한 기호 언어, 즉 과학을 발명해 냈다. 과학자들은 우리가 외계 문명과 공유할 수 있는 언어도 이런 형태의 언어일 것이라고 여긴다.

 

 

p298

 누군가의 꿈이 그 사람과 함께 죽을 때도 있지만, 다른 시대의 과학자들이 그 꿈을 건져내어 달까지, 그리고 그보다 더 멀리까지 데려가는 때도 있다. 유리 콘드라튜크는 자칫 깡그리 잊힐 수도 있었다. 그가 정말로 우주 탐사에 이바지했는가 하는 문제를 두고 논란이 따를 수도 있었다. 하지만 다행히 그를 기억하고 그가 합당한 공을 인정받을 수 있도록 애쓴 사람이 한 명 있었다.

 닐 암스트롱은 달 여행에서 돌아온 이듬해, 우크라이나에 있는 콘드라튜크의 허름한 오도막을 찾아갔다. 그곳에서 암스트롱은 무릎을 꿇고, 떠내도 될 듯한 흙을 좀 떠냈다. 자신이 간직하기 위해서였다. 모스크바로 돌아간 뒤, 암스트롱은 당시 (구)소련이었던 그 나라의 지도자들에게 부디 자신의 신화적인 비행을 가능케 해 준 콘드라튜크를 기려 달라고 간곡히 부탁했다.

 

p343

 H.G. 웰스의 소설을 읽은 사람 중 레오 실라르드(Leo Szilard)라는 젊은 물리학자가 있었다. 1933년 9월 12일, 헝가리에서 망명한 실라르드는 런던의 스트랜드 팰리스 호텔에 묵고 있었다. 그는 막 《타임스》에 실린 어니스트 러더퍼드(Ernest Rutherford) 경의 연설물은 읽고 심기가 거슬린 참이었다. 러더퍼드는 많은 업적 중에서도 특히 한 원소가 다른 원소로 바뀔 때 방사선이 방출된다는 사실을 발견한 일로 핵물리학의 아버지로 일컫어지는 과학자였다. 실리라드가 못마땅한 점은 그 러더퍼드가 우리가 원자 구조에 대한 지식에서 에너지를 얻어낼 가능성은 없다고 단언한 점이었다. 실라르드는 생각할 일이 있을 때 즐겨 쓰는 수단이었던 산책에 나서기로 했다.

 길을 걸으면서, 실라르드는 한가운데에 양성자와 중성자가 모여 있고 그 겉에 휙휙 나는 전자들의 베일이 덮여 있는 원자의 구조를 떠올렸다. 그가 사우샘프턴 가와 러셀 광장이 교차하는 지점에서 신호등이 바뀌기를 기다릴 때, 번뜩 어떤 생각이 떠올랐다. 만약 우리가 중성자 1개를 흡수하고 대신 중성자 2개를 내놓는 원소를 찾아낼 수 있다면, 그것을 사용해 연쇄 핵반응을 일으킬 수 있으리라는 발상이었다. 중성자 2개가 중성자 4개를 낳고, 중성자 4ㄱ개가 중성자 8개를 낳고.... 그렇게 되면 결국에는 원자핵에 갇힌 엄청난 에너지가 풀려날 것이다. 이것은 화학 반응이 아니라 핵반응이었다.

 

 

 레오 실라르드는 기하급수적 증가의 힘을 잘 알았다. 우리가 만약 저 깊은 원자핵의 세계에서 연쇄 핵반응을 일으킬 수 있다면 웰스가 상상한 원자 폭탄 같은 것을 만들 수 있다는 사실도 알았다. 그는 그 파괴적 가능성에 몸서리쳤다. 그러나 그것은 아주아주 오래전에 시작되어 끊임없이 이어진 인류 폭력의 역사에서 가장 최신의 발명일 뿐이었다.

 

p354

 미국 전쟁부가 원자 폭탄 개발 프로젝트의 본부로 낙점한 곳은 뉴멕시코 주 로스앨러모스라는 외딴 장소였다. 그곳을 추천한 사람은 프로젝트 책임자인 물리학자 J. 로버트 오펜하이머였다. 그는 10대 때 요양하느라 그곳에서 지낸 적이 있었다. 그런데 에드워드 텔러에게는 그 원자 폭탄도 성에 차지 않았다. 텔러는 그것보다 더 큰 살해 범위를 가진 무기, 원자 폭탄을 한낱 원자핵으로 이어진 도화선을 당기는 성냥으로 쓰도록 설계된 무기, 나중에 열핵 무기(thermonuclear weapon)라는 이름을 얻을 무기를 꿈꿨다. 그는 애정을 담아서 그 무기를 "슈퍼"라고 불렀다.

 당시 과학계에서 텔러와 극과 극처럼 달랐던 인물을 꼽으라면 조지프 로트블랫(Joseph Rotblat)이었을 것이다. 로트블랫은 폴란드 바르샤바의 부잣집에서 태어났지만, 텔러처럼 모든 것을 잃었다. 나치가 침공해 오기 직전이었던 1939년 여름, 그는 영국 리버풀 대학교에서 연구원으로 오라는 초청을 받았다. 그런데 떠나기 직전에 사랑하는 아내 톨라(Tola)가 응급 맹장 절제술을 받게 되었고, 톨라는 몸이 여행을 견딜 만큼 회복될 때까지 뒤에 남아야 했다. 톨라는 남편에게 자신은 몇 주 뒤면 뒤따라갈 수 있다고 말하면서 그 혼자 미리 가서 살 집을 준비해 두라고 부득부득 우겼다.

 맨해튼 프로젝트에 참여한 과학자들이 풀어야 할 숙제는 실라르드가 런던 산책 중 처음 떠올렸던 연쇄 핵반응을 개시할 화학적 도화선을 찾아내는 일이었다. 과학자들과 공학자들은 자신들이 유례없는 파괴력을 지닌 폭탄을 만드는 것은 그것보다 더 위중한 위험을 피하기 위해서라는 생각으로 스스로를 설득했다. 자신들의 정부는 믿을 수 있다고 믿었다. 다른 나라 정부들과는 달리, 자신들의 정부는 그런 무기를 선제 공격에 쓰지 않으리라고 믿었다.

 그 과학자들은 핵무기를 핵전쟁의 억지 수단으로 보는 관점을 처음 채택한 이들이었다. 그들은 원자 폭탄을 가진 히틀러에 대한 공포를 자신들의 일을 정당화하는 근거로 삼았다. 하지만 독일이 항복하고 히틀러가 죽은 뒤, 폭탄 개발에 참여했던 수천 명의 연합국 과학자 중 자리에서 물러난 사람은 한 명뿐이었다.

 그 한 명이 조지프 로트블랫이었다. 이후 사람들이 그 결정에 관해서 물을 때마다, 로트블랫은 남들보다 그가 더 양심적이었기 때문에 그런 게 아니었느냐는 식의 질문에는 늘 아니라고 답했다. 그저 미소 지으면서, 결국 바르샤바를 떠나지 못하고 전쟁의 회오리 속에서 연락이 끊긴 아내가 몹시 그리웠을 뿐이라고 말했다. 유럽에서 전쟁이 끝나자, 그는 마침내 바르샤바로 돌아가서 아내를 찾아볼 수 있었다. 하지만 찾지 못했다. 찾아낸 것은 사망자 명단에 오른 이름뿐이었다. 톨라는 홀로코스트로 목숨을 잃었다. 베우제츠(벨체크) 절멸 수용소에서 처형되었다. 로트블랫은 이후 60년을 더 살았다. 재혼은 하지 않았고, 핵무기 감축 운동에 끝까지 앞장섰다.

 

 전쟁 중 원자 폭탄 개발에 나섰던 세 나라 중 종전 전에 성공한 나라는 미국뿐이었다. 역사학자들은 미국의 성공 요인 중 하나는 이민자를 많이 받아들였던 것이라고 본다. 맨해튼 프로젝트를 이끌었던 사람 가운데 미국 태생은 2명뿐이었고, 미국에서 박사 학위를 받은 사람은 1명뿐이었다.

 핵무기가 핵전쟁 억지 수단이 되어 주리라는 과학자들의 생각은 잘못 짚은 것이었다. 결국 미군 폭격기가 일본 히로시마와 나가사키에 원자 폭탄을 투하해 제2차 세계 대전을 끝냈다. 두 달 뒤, 트루먼 대통령이 오펜하이머를 치하하고자 그를 집무실로 불렀다. 트루먼의 입장에서는 실망스럽게도, 오펜하이머는 치하받을 기분이 아니었다. 그는 트루먼에게 이렇게 말했다. "대통령 각하, 저는 손이 피로 물든 기분입니다."

 트루먼은 넌더리 난다는 표정으로 오펜하이머를 보며 경멸조로 말했다. "바보처럼 굴지 마시오. 손이 피로 물든 사람이 있다면 그건 나요. 그리고 나는 그 사실이 아무렇지도 않소."

 하지만 오펜하이머는 굽히지 않고 도리어 대통령에게 되물었다. "러시아가 폭탄을 보유하는 데 얼마나 걸릴 것 같습니까?"

 트루먼은 대답했다. "절대 못 가질걸!"

 오펜하이머가 떠나자, 트루먼은 역정 난 얼굴로 보좌관에게 말했다. "저 징징거리는 과하가를 두 번 다시 내 곁에 들이지 마! 알아들었어?"

 그로부터 4년이 채 못 되어, 러시아가 원자 폭탄을 터뜨렸다. 과학자들이 세 통의 편지에서 상상했던 핵무기 경쟁은 더 무시무시한 두 번째 국면으로 접어들었다.

 

 전쟁 후, 살해 범위가 더 큰 무기를 개발하고 싶다는 텔러의 꿈이 현실이 되었다 1950년대 초 미국에서 공산주의자를 색출하는 마녀 사냥이 한창이었들 때, 텔러는 자신의 옛 상사이자 맨해튼 프로젝트를 훌륭하게 이끌었던 로버트 오펜하이머에게 불리한 증언을 기뿐 마음으로 당국에 귀띔했다. 그는 오펜하이머의 비밀 정보 취급 인가를 몰수해야 한다고 주장했고, 그리하여 결국 오펜하이머의 경력을 끝장내는 데 일조했다. 오펜하이머는 텔러가 사랑하는 '슈퍼' 폭탄 제작에 반대하는 입장이었다. 텔러는 또 "핵무기를 유지하고 개량하기 위해서"는 대기권 핵실험이 반드시 필요하다는 거짓 주장을 내세우면서 포괄적 핵실험 금지 조약이 체결되는 것을 막든 데 힘썼다.

 

 

p401

 아니면 약 1,000년쯤 전, 아시아 전역의 사람들이 처음 쌀농사를 했을 때 인류세가 시작되었을까? 그들은 써레질과 이앙법이라는 혁신적인 기술을 써서 물 댄 논에 미리 기른 모종을 옮겨 심기 시작했다. 이 근면한 농부들은 이런 벼농사 기법이 소와 마찬가지로 언젠가 수억 톤의 메테인을 배출하리라는 사실을 알 도리가 없었다. 물 댄 논은 산소를 잃는다. 그러면 눈에 안 보이는 미생물들이 식물성 물질을 소화시켜서 메테인을 내놓는다. 설상가상, 벼잎도 대기로 메테인을 더 내보낸다. 하지만 옛 농부들은 미시 세계에서 무슨 일이 벌어지는지 알 도리가 없었다. 현대 과학이 등장하기 전에는 누구도 알지 못했다. 그들 역시 그저 자신과 가족의 입에 풀칠하려 애쓴 것뿐이었다.

 

p411

 예언이란 트로이 공주의 열렬한 흡소 형태일 수도 있지만, 무미건조한 제목을 가진 과학 논문의 형태일 수도 있다. 「상대 습도의 분포에 따른 대기의 열평형(Thermal Equilibrium of the Atmosphere with a given distribution of relative Humidity)」이라는 제목은 "재앙이 임박했다! 재앙이 임박했다!" 하는 경고로는 들리지 않는다. 하지만 내용은 분명 그런 내용이었다. 마나베와 동료 리처드 웨더럴드(Richard Wetherald)는 인간이 대기로 내놓는 온실 기체가 증가함에 따라 지구 온도가 어떻게 바뀔지 예측했다. 그들이 다가오는 재앙이 어떻게 펼쳐질지 정확히 내다보았다. 우리 시대는 물론이고 그 너머까지, 멀리 볼 줄 알았다. 요즘도 일부 사람들은 기후 변화를 과학적으로 확실히 확인되지 않은 현상이라고 주장하지만, 만약 그렇다며 마나베와 웨더럴드가 어떻게 향후 50년 이상의 지구 온도 증가세를 그토록 정확히 예측할 수 있었겠는가? 그리고 만약 그 변화가 인간이 야기한 것이 아니라면, 그 많은 이산화탄소가 다 어디서 나왔겠는가?

 이후 다른 많은 기후 과학자들은 기후 변화의 영향으로 다음과 같은 일들이 벌어질 것이라고 예측했다. 해안 도시들의 잦은 범람 : 사실. 바닷물 수온 상승으로 산호의 떼죽음 : 사실. 자연 재해 수준의 폭풍이 더 거세어짐 : 사실. 치명적인 무더위와 가뭄과 걷잡을 수 없는 산불이 유례없는 수준으로 벌어짐 : 사실. 과학자들은 분명 우리에게 경고했다.

 

 코로나19가 전세계를 휩쓸고 있는 상황에서 판데믹이라는 주제에 대한 시의적절한 내용. 이낙연 전 총리께서 이 책을 들고 있는 사진을 보고서 읽게 되었다. 이미 판데믹에 대한 여러가지 대비를 전문가들은 준비하고 있었구나라는 걸 알 수 있다. 특히 이 책에 소개된 래리 브릴리언트의 TED강연은 현재의 상황과 맞물려 많은 시사점을 던져준다.

아래 동영상의 내용은 책과 어우러지는 내용이 많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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p23

 인플루엔자를 비롯한 많은 바이러스가 인간 숙주라는 환경과 타협하는 놀라운 능력을 지녔다. 바이러스들은 신속하게 돌연변이를 일으키며, 심지어 유전자 재편성reassortment이라 일컬어지는 과정을 통해 자기들끼리 유전자를 교환하기도 한다. 

 2009년, 나는 물론이고 많은 과학자들이 이런 유전자 재편성을 우려했다. H1N1 바이러스가 세계 곳곳에 폭발적으로 확산되면서, 동시에 사람이나 동물의 체내에서 H5N1을 만난다면 천지개벽을 일으킬 가능성이 적잖이 있기 때문이다. 과학자들은 조기에 이런 가능성을 알아내어 돌연변이를 일으킨 바이러스들이 확산되는 걸 신속히 차단해야 한다. 만약 어떤 사람이나 동물이 두 인플루엔자 바이러스에 동시에 감염된다면, 그는 효과적인 혼합용기mixing vessel가 되어, 바이러스들이 유전자를 교환할 최적의 기회를 제공할 수 있다.

 어떻게 그런 교환이 가능할까? 일종의 유성생식으로 H5N1과 H1N1이 생산하는 모자이크 딸-바이러스는 양쪽 모두의 유전자를 지닐 수 있다. 이런 유전자 재편성은 유사한 성격을 지닌 바이러스들에 의해 복합적으로 감염된 개체에서 얼마든지 일어날 수 있다. 이러한 경우에는 모자이크 딸-바이러스가 H1N1에서는 확산성을 물려받고, H5N1으로부터 치사율을 물려받는다면, 결국 지독한 치사율을 지닌 채 엄청난 속도로 확산되는 바이러스가 될 것이다. 우리가 가장 두려워하는 시나리오가 아닐 수 없다.

 

 판데믹에 대한 신속한 대응은 지난 100년 동안 세계보건정책의 핵심적 과제였다. 소수이지만 목소리가 큰 과학자들과 나는 백신을 확보하고 치료약을 개발하며 행동방식을 수정하는 정도로 판데믹에 대응해서는 안 되며, 그 이상의 대책을 마련해야 한다고 주장해왔다. 인간면역결핍바이러스Human Immunodeficiency Virus, HIV에서 확인되었듯이, 그런 전통적인 대응 방식은 실패작이라는 게 이미 입증되었다. HIV는 처음 발견되고 거의 30년이나 흘렀지만 여전히 확산되고 있으며, 최근의 통계에 따르면 3,300만 명 이상이 감염되었다고 하지 않는가.

 그러나 HIV가 확산되기 전에 우리가 그 바이러스의 존재를 미리 알아냈다면 어떻게 되었을까? HIV는 광범위하게 확산되기 50년 전부터 인간의 몸에 존재했었다. HIV는 확산되기 시작해서 25년이 지난 후에야 프랑스 과학자 프랑수아즈 바레 시누시Francoise Barre-Sinoussi와 뤼크 몽타니에Luc Montagnier에 의해 발견되었고, 그들은 그 공로로 노벨상을 받았다. 만약 HIV가 중앙아프리카를 떠나기 전에 우리가 발견해서 그 확산을 억제했다면, 지금 세상이 얼마나 달라졌겠는가.

 

p38

 새로운 생명체의 발견은 오늘날까지 계속 이어지고 있다. 가장 최근에 발견된 새로운 생명체는 프리온이다. 프리온을 발견한 과학자는 그 공로로 1997년에 노벨상을 받았다. 프리온은 세포도 없고, 지금까지 알려진 지상에 존재하는 모든 생명체가 자신의 청사진으로 사용하는 유전물질인 DNA나 RNA도 없는 기묘한 병원체이다. 하지만 프리온은 분명히 존속할 뿐만 아니라 끊임없이 확산되고 있다. 특히 광우병을 유발하는 병원균으로도 유명하다. 따라서 이제 지상에는 더 이상 새롭게 발견될 생명체가 남아 있지 않다고 말한다면 그보다 오만한 언행은 없을 것이다. 새롭게 발견되는 생명체가 있다면 십중팔구 보이지 않는 세계에 속한 생명체일 것이다.

 

p43

 바이러스가 언제 어떻게 행동을 개시하느냐는 여전히 오리무중이지만, 어떤 결정을 내릴 때 주변의 환경적 변수들을 주기적으로 점검하는 게 거의 확실하다. 단순 헤르페스 바이러스에 감염된 성인들 중 대다수는 스트레스가 입술 헤르페스의 원인 중 하나일 거라고 생각한다. 또 임신이 감염의 원인인 듯하다고 경험적으로 말하는 사람들도 있다. 이런 주장들은 아직 추측의 수준에 불과하지만, 바이러스가 극심한 스트레스나 임신으로 인한 환경적인 변화에 활발하게 반응한다고 해서 놀랄 것은 없다. 극심한 스트레스는 죽음의 가능성을 뜻할 수 있기 때문에 바이러스에게는 확산을 도모할 마지막 기회일 수 있다. 숙주의 죽음은 바이러스에게도 죽음을 뜻하기 때문이다. 한편 임신은 출산 과정에서, 혹은 출산 후에 필연적으로 뒤따르는 입맞춤 과정에서 아기와의 접촉을 통해 바이러스에게 확산될 기회를 제공한다.

 숙주에서 숙주로의 전파는 어떤 감염체라도 본능적으로 바라는 것이며, 일부 감염체는 한 단계 더 나아간다. 예컨대 '플라스모디움 바이박스 히베르난스'라는 말라리아 원충은 계절까지 고려하는 듯하다. 단순헤르페스 바이러스보다 훨씬 큰 말라리아 원충을 비롯한 기생충은 바이러스나 박테리아와 같은 감염체이지만, 특히 이들은 진핵동물에 속한다. 따라서 바이러스나 박테리아보다 동물에 훨씬 가깝다. 모기를 통해 전파되는 플라스모디움 바이박스 히베르난스는 극지방의 기후에서도 끈질기게 생존한다. 그런 추운 지역에서는 계절적으로, 즉 모기들이 부화하는 짧은 여름 동안에만 모기를 감염시킬 수 있다. 이 말라리아 원충은 일 년 내내 후손을 생산하려고 에너지를 낭비하지 않고, 일 년 중 대부분의 시간을 인간의 간에서 잠복한 상태로 보낸다. 그러나 여름이 되면, 생기를 되찾아 후손으로 알을 낳고, 감염된 인간의 피를 통해 확산된다. 말라리아 원충을 깨우는 것이 무엇인지 아직 정확히 밝혀지지는 않았지만, 최근의 연구에 따르면 모기에 물리는 순간이 말라리아 원충에게 확산의 계절이 시작되었다는 걸 알리는 것으로 여겨진다.

 

p64

 HIV의 역사는 상대적으로 단순한 생태학적 상호작용에서 시작된다. 즉 중앙아프리카에서 침팬지가 붉은콜로부스 원숭이를 사냥하면서부터 시작된다. 많은 사람이 HIV가 1980년대에 시작되었다고 생각하지만, 정확히 말하면 약 800만 년 전 우리 유인원 조상이 사냥을 시작한 때부터이다.

 더 정확히 말하면 HIV의 역사는 두 종의 원숭이 - 중앙아프리카에 서식하는 붉은머리 망가베이와 큰흰코원숭이-로부터 시작된다. 두 원숭이의 겉모습은 전 세계를 공포에 몰아넣은 에이즈 판데믹의 중심에 있는 악당처럼 도저히 보이지 않는다. 하지만 두 녀석이 없었더라면 에이즈 판데믹도 일어나지 않았을 것이다. 붉은머리 망가베이는 뺨은 하얗고 머리에 붉은 털이 돋은 작은 원숭이로, 10여 마리가 무리지어 살며 과일을 주식으로 삼는 사회성을 띤 종이다. 또한 개체수가 크게 줄어 멸종위기에 처한 취약종으로 분류되기도 했다. 한편 큰흰코원숭이는 무척 작아서 구세계 원숭이Old World Monkey 중 가장 작은 원숭이 중 하나이다. 수컷 한 마리가 암컷 여러 마리로 구성된 작은 집단을 이루고 살아가며, 포식자의 종류에 따라 경고음을 다른 식으로 낸다.

 두 원숭이의 공통점 중 하나는 자연 상태에서 원숭이면역결핍바이러스Simian Immunideficiency Virus, SIV에 감염된다는 점이다. 하지만 두 원숭이는 각각 이 바이러스의 고유한 변종을 지닌다. 그 원숭이와 조상들이 수백만 년 동안 품고 살았을 변종이다. 두 원숭이의 또 다른 공통점은 침팬지가 그들을 무척 맛있는 먹잇감으로 생각한다는 것이다.

 원숭이면역결핍바이러스는 레트로바이러스retrovirus이다. 달리 말하면 유전암호로 사용하는 DNA가 먼저 RNA로 바뀌고, 다시 우리의 살을 이루는 단백질 단위로 바뀌는 대부분의 생명체와 달리, SIV는 역으로 기능한다는 뜻이다. 이런 이유에서 '레트로' 바이러스라고 불린다. 레트로바이러스군群은 RNA 유전암호로 시작하며, RNA는 DNA로 바뀐 후에야 숙주의 DNA로 들어갈 수 있다. 그 후에 레트로바이러스는 생명주기를 시작해서 후손을 생산하게 된다.

 다수의 아프리카 원숭이가 SIV에 감염된 상태이다. 붉은머리 망가베이와 큰흰코원숭이도 마찬가지이다. SIV가 야생 원숭이들에 미친 영향에 대한 연구는 거의 없는 편이지만, SIV는 원숭이들에게 심각한 피해를 입히지 않는 것으로 추정된다. 하지만 SIV가 다른 숙주로 옮겨가면 그 숙주의 생명에 치명타를 입힐 수 있다.

 2003년 베이트리스 한Beatrice Hahn과 마틴 피터스Martine Peeters의 연구팀이 침팬지 SIV의 진화를 역사적으로 추적한 보고서를 발표했다. 거의 10년 동안, 한과 피터스는 침팬지 SIV의 진화를 밝히기 위해 끈질기게 연구를 거듭했고 마침내 성공을 거두었다. 2003년 그들은 침팬지 SIV가 실제로는 붉은머리 망가베이 SIV의 조각들과 큰흰코원숭이 SIV의 조각들이 뒤썩인 모자이크 바이러스라는 걸 밝혀냈다. SIV는 유전자 조각들을 재조합하거나 교환하는 잠재력을 지녔기 때문에, 침팬지 SIV는 초기 침팬지 조상으로부터 유래한 것이 아니라 침팬지에게서 생겨난 것이라는 결론이었다.

 어떤 침팬지 사냥꾼 한 마리가 사냥한 두 원숭이들로부터 즉시, 혹은 바로 그날 SIV에 감염되면서 발단 환자patient zero-새로운 바이러스가 잠복하게 된 종의 첫 개체-가 되었을 것이란 가정은 상당히 그럴듯하게 들린다. 하지만 다른 가능성도 생각해볼 수 있다. 예컨대 일찌감치 잡종으로 변한 붉은머리 망가베이 바이러스가 침팬지들 사이에서 성행위를 통해 확산되었고, 어떤 침팬지가 다른 침팬지로부터 그 바이러스에 감염된 후에, 사냥을 통해 큰흰코원숭이의 바이러스에 감염되면서 발단 환자가 되었을 가능성도 있다. 혹은 큰흰코원숭이 바이러스와 붉은머리 망가베이 바이러스, 둘 모두가 사냥을 통해 침팬지들에게 전달되고 한동안 침팬지들 사이에서 확산된 후에, 어떤 침팬지 한 마리의 체내에서 두 바이러스의 유전자들이 혼합되는 결과가 닥쳤을 수도 있다. 종을 넘나든 정확한 순서가 무엇이든 간에, 어떤 순간에 침팬지 한 마리가 두 바이러스 모두에 감염되었고, 두 바이러스가 유전물질을 재조합하고 교환하면서 망가베이 바이러스도 아니고 큰흰코원숭이 바이러스도 아닌 완전히 새로운 모자이크 변종을 만들어냈다.

 이 잡종 바이러스는 망가베이 바이러스도, 큰흰코원숭이 바이러스도 혼자서는 해낼 수 없었던 방식으로 침팬지들의 세계에서 지속적으로 확산되었다. 그리고 서쪽으로 코트디부아르부터 동쪽으로는 제인 구달이 1960년대에 연구를 시작했던 동아프리카의 서식지까지 침팬지들을 감염시켰다. 현재는 침팬지에게 별다른 해를 입히지 않는 것으로 알려진 이 잡종 바이러스는 오랫동안 침팬지들의 체내에서 잠복해 있었지만, 19세기 말이나 20세기 초 어떤 시점에 침팬지에게 서 인간에게로 전이되었다. 침팬지가 사냥하는 동물이기 때문에 이 모든 것이 시작된 것이다.

 

p89

 우리 조상이 병원균 청소를 거치는 시기 동안, 유인원 사촌들은 여전히 사냥을 계속하고 새로운 병원균을 받아들였다. 또한 인간 계통에서는 사라졌을 병원균들까지 여전히 보유했다. 인간의 관점에서 보면 유인원 계통들은 인간에게서는 사라진 병원균들의 창고였던 셈이다. 비유해서 말하면 우리 혈통에서 사라진 병원균들을 보존한 노아의 방주라고 할 수 있었다. 오랜 세기가 지난 후 인간 세계가 확대되면서 이 거대한 창고가 인간과 충동하게 된 것이다. 이는 곧 인간에게 중요한 질병을 일으키는 원인이 되었다.

 

p126

 지난 10년간의 연구에서 사람을 감염시키지만 특별한 질병을 야기하지 않는 듯한, 전에는 알려지지 않은 다수의 바이러스가 새롭게 발견되었다. TT바이러스는 감염된 첫 환자, 이름의 머리글자가 T.T인 일본인 환자의 이름을 따서 지어졌다. 지금까지 TT바이러스에 대한 연구는 거의 진행되지 않았지만, 일부 지역에서 상당히 흔한 바이러스이다. 스코틀랜드의 유능한 바이러스 학자 피터 시몬즈Peter Simmonds가 발표한 보고서에 따르면, 유병률이 스코틀랜드 헌혈자의 경우에는 1.9퍼센트에 불과하지만, 아프리카 감비아 국민의 경우는 83퍼센트로 놀라울 정도로 높다. 다행히 TT바이러스는 인체에 해롭지 않은 듯하다.

 GB바이러스도 최근에 발견된 바이러스로 많은 사람에게서 발견되지만 아직은 연구가 거의 되지 않은 상태이다. 이 바이러스는 외과의사 G.베이커의 이름을 따서 지어졌는데, 당시에는 그의 감염이 바이러스 탓이라고 잘못 진단되었다. 나는 TT바이러스와 GB바이러스를 찾아내는 무척 정교한 방법을 사용해서 두 바이러스를 빈번하게 확인했지만, 놀랍게도 우리가 진정으로 찾고자 하는 위험한 요인을 포착해낼 수는 없었다.

 TT바이러스와 GB바이러스는 둘 다 흔하지만 모든 사람을 100퍼센트까지 감염시키지는 않는다. 따라서 그리스 문자에서 유래한 '판데믹'의 정의를 충족하지는 못한다. 세계보건기구WHO는 소수만을 감염시키는 1단계 바이러스로부터 시작해서, 감염이 전 세계로 확산되는 경우인 6단계까지 판데믹을 모두 여섯 단계로 분류했다.

 세계보건기구는 2009년 H1N1을 판데믹으로 규정해서 엄청난 비난을 받았다. 하지만 H1N1은 누가 뭐라 해도 판데믹이었다. H1N1은 2009년 초 소수의 감염자에게서 시작되었지만, 같은 해 말에는 세계 전역으로 확산되었다. H1N1이 판데믹이 아니라면 무엇이란 말인가? 확산되는 병원균을 판데믹으로 규정하느냐 않느냐는 치사율과 관계가 없다. 판데믹은 확산력을 뜻할 뿐이다. 1장에서 논의했듯이 H1N1의 치사율이 50퍼센트에 이르지는 않는다고(실제로는 1퍼센트 이하) 말한 바 있지만, 그것이 100만 명을 죽이지고 못하고 중대한 위협이 되지 않는다는 뜻은 결코 아니다.

 솔직히 내 생각에는 판데믹이 세계를 휩쓸어도 우리가 인지조차 못하는 경우가 있을 수 있다. 예컨대 TT바이러스나 GB바이러스처럼 외부로 나타나는 증상이 거의 없는 바이러스가 오늘 인체에 침입해서 전 세계로 확산되더라도 우리는 전혀 인식하지 못할 것이다. 현재 질병을 탐지하는 전통적인 시스템은 뚜렷한 증상을 나타내는 병원균만을 포착해낼 뿐이다. 따라서 즉각적인 피해를 주지 않는 바이러스는 놓치고 넘어가기 십상이다.

 물론 '즉각적'이란 개념이 '결코'라는 뜻은 아니다. HIV 같은 바이러스가 오늘 인체에 침입해서 전 세계로 퍼지더라도 수년 동안은 탐지되지 않을 것이다. 중대 질병들은 감염되고 상당한 시간이 지난 후에 증세가 나타나기 때문이다. HIV는 곧바로 확산되기 시작하지만, 처음에는 상대적으로 크게 신경 쓰이지 않는 징후로만 나타난다. HIV로 인한 중대 질병인 에이즈는 수년 후에야 나타난다. 따라서 판데믹을 탐지해내기 위한 전통적인 방법들은 주로 증상에 초점을 맞추고 있다. 그러나 소리 없이 확산되는 바이러스는 우리 레이더망에서 벗어나 파괴적인 수준까지 확산된 후에야 인간의 경갃김을 비로소 얻게 된다.

 제2의 HIV를 또다시 놓친다면 공중보건정책의 참담한 실패가 될 것이다. 하지만 새로운 바이러스들이 TT바이러스나 GB바이러스처럼 완전히 무해할 가능성이 높더라도 사람들에게 신속하게 확산된다면 철저하게 감시할 필요가 있다. 1장에서 보았듯이 바이러스는 언제든 변할 수 있고, 언제든 돌연변이를 일으킬 수 있다. 다른 바이러스들과 재조합되고 유전물질을 혼합함으로써 치명적인 새로운 바이러스를 만들어낼 수 있다. 인체에 존재하는 새로운 바이러스가 전 세계로 확산된다면, 우리는 그 바이러스에 대해 속속들이 알아내야 한다. 선과 악의 경계는 백지장 한 장에 불과하기 때문이다.

 

p132

 앞에서 지적했듯이, 향후에 인간을 위협할 새로운 판데믹의 가능성을 지닌 대부분의 병원균은 동물의 체내에 존재한다. 가축화된 동물들도 분명히 위협요인이다. 그러니 가축들에게 원래 존재했던 병원균의 대부분은 이미 인간에게 전이되어 인간의 병원균 레퍼토리를 구성하는 역할을 끝냈다고 보아도 무방하다. 이제 가축으로부터의 위협은 야생동물의 병원균을 인간에게 옮기는 매개 역할을 하는 경우이다. 게다가 가축의 절대 숫자는 상당히 많지만, 우리가 동물의 세계에서 극히 일부만을 가축화했기 때문에 포유동물의 다양성에 비교하면 소수에 불과하다. 따라서 새로운 판데믹에 관한 한 야생동물이 기원일 가능성이 아주 높다.

 

p196

 1993년 6월 옴 진리교도들은 동경 동부의 가메이도 지역에 있는 8층 건물 옥상에서 탄저균Bacillus Anthracis의 현탁액을 살포했다. 세계에서 가장 크고 인구밀도도 높은 도시에 생물학적 테러를 감행한 것이었다.

 다행히 그들의 공격은 실패로 끝났다. 2004년에 쓰인 분석에 따르면, 그들이 상대적으로 양성이었던 데다 세균포자의 밀도가 낮은 탄저균 변종을 선택했고, 살포 방식도 비효율적이었기 때문에 1993년의 사건은 용두사미격인 미풍으로 끝났다. 한 사람도 탄저병에 걸리지 않았지만 일부 애완동물은 목숨을 잃은 것으로 여겨진다.

 그러나 옴 진리교가 더 치명적인 탄저균 변종을 선택해서 조금이라도 더 효과적으로 살포했더라면, 내가 위에서 언급한 시나리오에 가까운 사건이 닥쳤을 것이다. 실제로 그 종말론자들은 탄저균만을 배양하고 있었던 것이 아니다. 그들은 다수의 실험실을 차려놓은 채 보툴리누스 독소, 탄저병, 콜레라, Q열 등 다양한 병원균을 배양하고 있었다. 1993년 그들은 다수의 의사와 간호사를 데리고 콩고민주공화국으로 들어갔다. 표면적으로는 의료봉사를 위한 것이었지만, 실제로는 에볼라 바이러스를 분리한 샘플을 반입하려는 목적 때문이었다.

 

p198

 생물학적 테러의 위험을 과소평가한다면 엄청난 잘못을 저지르는 것이다. 테러집단을 연구하는 학자들의 판단에 따르면, 생물학 무기가 인간에게 사용될 가능성은 시간문제일 뿐이다. 이토록 치명적인 병원균이 합법적인 연구소에서, 혹은 무책임한 테러집단의 작업장에서 배양될 수 있다는 사실은 세계적인 판데믹의 가능성에 또 다른 위협요인이다.

 가능성은 별로 없지만 테러집단이 현재 극소수만 남아 있는 천연두 바이러스 샘플을 손에 넣는다면 그 결과는 엄청날 것이다. 천연두는 자연상태에서 박멸된 지 오래인 반면에, 천연두 바이러스는 단 두 세트만이 안전한 곳에 철저하게 보관되어 있다. 하나는 미국 애틀랜타의 질병통제예방센터에, 다른 하나는 러시아 콜초보의 국립 바이러스학 및 생물학 연구센터VECTOR에 보관되어 있다. 두 곳은 생물학적 안전성에서 최고등급인 4단계 시설을 갖추고 있다. 한때 이곳에 남아 있는 재고마저 없애려는 가능성에 대한 논란이 있었지만, 백신과 치료제의 생산에 이 살아 있는 바이러스의 잠재적인 필요성 때문에 지금까지 결정이 미뤄지는 있는 실정이다.

 흥미롭게도 2004년에 천연두로 의심되는 부스럼 딱지가 뉴멕시코 산타페에서 발견되었다. 예방접종으로 생긴 부스럼 딱지라고 쓰인 봉투에서 발견된 것이었다. 어떤 실험실의 냉동고나 다른 어떤 곳에 상당한 천연두가 존재한다는 가능성을 시사하는 증거였다. 천연두 바이러스가 의도적으로, 심지어 사고로라도 살포된다면 그 결과는 끔찍할 것이다. 천연두는 박멸되었기 때문에 천연두를 예방할 백신이 존재하지 않기 때문이다. 따라서 천연두가 어떤 형태로든 방출된다면 최악의 상황이 닥칠 것이고, 우리에게는 그야말로 재앙이다.

 또 다른 위험은 '바이어에러bioerror'이다. 생물학적 테러bioterror와 달리 바이오레어는 인간의 실수에 의해 병원균이 우연히 방출되어 널리 확산되는 경우이다. 2009년 박사후과정의 지도교수였던 돈 버크가 인플루엔자 바이러스들의 발생에 대한 논문을 발표했다. 그 논문에서 버크는 인간 세계에 확산된 다양한 인플루엔자 바이러스들을 분석했다. 특히 눈에 띄는 사례 중 하나는 1977년 11월 소련과 홍콩 및 중국의 남동부를 강타한 유행성 독감이었다. 문제의 바이러스는 20년 전에 집단 발병했던 유행성 독감의 바이러스와 거의 똑같았지만 그 이후로 바이러스가 발견된 사례가 없었다. 버크와 그의 동료들은 문제의 바이러스를 초기에 추적한 결과, 실험실에 보관되었던 바이러스가 우연히 실험실 직원의 몸에 침입하여 그로부터 확산되었을 거라고 설명할 수밖에 없다는 결론을 내렸다.

 앞으로 수십 년이 지나면 일반대중도 상세한 생물학적 정보와 기법에 접근해서 단순한 병원균들을 배양하는 것이 가능해지기 때문에 생물학적 테러와 바이오에러가 급증할 것이다. 대부분의 사람들이 생물학적 실험은 주로 안전한 연구실에서 진행될 것이라 생각하지만 실제로는 그렇지 않다. 2008년 뉴욕 시에 사는 두 명의 10대 소녀가 한 연구소에 초밥 샘플을 보내왔다. 이 연구소는 유전자 검사를 단순화하고 표준화하려는 프로젝트를 시행하는 곳인 DNA바코드 데이터베이스 프로젝트 센터였다. 두 소녀는 고가의 초밥이 실제 가치보다 비싸게 팔린다는 것을 알아냈고, 동시에 당시 과학자들에게만 허용되던 유전정보를 얻어내는 방법까지 알아냈다.

 요컨대 두 학생은 초밥 연구를 통해서 뉴욕 시의 초밥 장사꾼들이 손님에게 바가지를 씌운다는 사실만을 알아낸 것이 아니었다. 두 소녀의 초밥 연구는 비과학자가 유전정보를 읽어낸 가장 유명한 초기 사례 중 하나였다. 정보기술IT 혁명의 초창기에는 컴퓨터 프로그래머만이 HTML 같은 코드를 읽고 쓸 수 있었다. 그 후에는 프로그래머가 아닌 일반사람들도 코드를 읽고 쓰기 시작했으며, 이제는 누구나 블로그와 위키 및 게임에서 무리 없이 코드를 읽고 쓴다. 정보를 공유하는 모든 시스템이 그렇듯이, 고도로 전문화된 것으로 시작한 것이 어느새 보편적인 것이 된다.

 따라서 멀지 않은 미래에는 직접 생물학적 실험을 시도하는 소규모 집단이 보편화될지도 모른다. 그런 세계에서는 바이오에러를 관리하고 감독해야 할 필요성이 실질적으로 대두될 것이다. 영국왕실협회의 전 회장 마틴 리스Martin Rees 경은 유명한 예언에서, ".... 2020년쯤에는 바이오에러나 생물학적 테러가 현실화되어 수백만 명의 목숨을 빼앗아갈 것이다"라고 경고했다. 파이프 폭탄이나 필로폰 제조공장을 만들던 화학이 바이러스 폭탄을 제조하는 생물학으로 바뀌고 있다.

 

p212

 가축의 수도 깜짝 놀랄 정도로 많지만, 가축이 도축되어 고기로 가공되는 과정도 가축화가 시작된 이후로 행해지던 방법과는 완전히 달라졌다. 역사적으로 한 마리의 동물을 도축하면 한 가족, 많으면 마을 사람 모두가 배불리 먹을 수 있었다. 가공육이 등장하면서부터 우리가 야구경기를 보면서 먹는 핫도그는 다수의 종(돼지, 칠면조, 소)으로 이루어지며, 수백 마리의 동물에게서 얻은 고기로 만든 것일 수 있다. 따라서 그런 핫도그를 먹으면, 수십 년 전이었다면 농장 전체에서 뛰놀던 동물들을 골고루 맛본 셈이 된다.

 다수와 동물 고기를 혼합한 가공육을 만들어 사람에게 유통시키면서 부작용이 뒤따르기 마련이다. 수천 마리의 동물 고기를 수많은 사람에게 나눠준다는 것은, 오늘날 육식을 즐기는 사람이면 평생 수십억 마리의 동물에서 얻은 고기를 조금씩 먹는다는 뜻이 된다. 과거에는 한 사람의 소비자가 한 마리의 동물과 직접적으로 접촉하는 것으로 끝났지만, 이제는 동물의 고깃덩이들과 육식을 하는 사람들이 서로 긴밀하게 연결된 거대한 네트워크를 이루고 있다. 고기가 요리되는 과정에서 많은 위험이 제거되는 건 확실하지만, 무수한 숫자로 구성된 거대한 네트워크에서 못된 병원균 하나가 인체로 전이될 가능성은 상대적으로 높아진 것이다.

 양의 뇌가 광범위하게 파괴되어 스폰지처럼 구멍이 뚫리는 신경질환인 스크래피scrapie, 그리고 일반인들에게 광우병으로 주로 알려진 우해면양뇌증BSE 에서 바로 위의 현상이 일어났던 것으로 여겨진다. BSE는 1장에서 언급했던 프리온으로 알려진 감염균들 중 하나이다. 바이러스와 박테리아와 기생충 등 우리가 알고 있는 여느 생명체와 달리, 프리온에는 생물학적 유전자지도(즉 RNA와 DNA)가 없다. 지금까지 알려진 모든 생명체를 구성하는 유전물질과 단백질의 결합체가 아니라 프리온에는 단백질만이 존재한다. 따라서 어떤 유기적인 역할을 못할 듯하지만, 프리온 역시도 확산될 수 있고 더구나 중대한 질병을 야기할 수 있음은 당연하다.

 BSE는 1986년 11월 처음 확인되었을 때, 이 병에 걸린 소들의 특이한 증상 때문에 소에게 발생하는 신종질환으로 여겨졌다. 병에 걸린 소들은 제대로 서 있거나 걷지도 못하고, 수개월이 지나면 격렬한 경련을 일으키면서 죽어버린다. 아직도 광우병이 소에게 발생한 기원에 대해서는 논란이 많지만, 연구에 의하면 오히려 양이 그 기원으로 여겨진다. 1960년대와 1970년에 소의 사료 제조가 산업화되었을 때, 죽은 양들을 육분과 골분으로 만든 사료가 있었다. 양은 스크래피로 불리는 프리온 질병을 지닌 것으로 오래전부터 알려져 있었다. 따라서 죽은 양을 소의 사료로 가공했기 때문에 그 병원균이 소에게 전이되어 적응한 것으로 여겨진다.

 소에게 전이된 BSE는 다시 사료를 통해 확산된다. 죽은 양처럼 죽은 소도 소의 사료를 만드는 데 이용되기 때문이다. 따라서 프리온이 양에서 소에게로 옮겨갔기 때문에 그 감염된 소를 이용해 가공한 육분과 골분을 통해 다음 세대의 소들에게로 전이된 듯하다. 프리온의 확산은 상당히 놀라웠다. 일부 학자들의 주장에 따르면, 그 기간 동안에 100만 마리 이상의 소가 감염되어 먹이사슬에 유입되었을 것이라 추정된다. 그러나 이런 프리온들이 모두 소에게만 머물렀던 것은 아니다.

 BSE가 처음 확인되고 약 10년 후, 영국 의사들은 프리온에 감염된 쇠고리를 먹어쓸 것이라 판단되는 사람에게서 치명적인 퇴행성 신경질환neurodegenerative disease을 확인하기 시작했다. 환자들은 치매와 격심한 근육경련 및 근육협응 퇴화 등의 증세를 보였다. 환자들의 뇌가 감염된 소들의 뇌와 정확히 똑같은 식으로 구멍이 뚫린 것을 확인할 수 있었던 것이다. 또한 감염된 인간의 뇌 조직을 이식 받은 영장류들에게도 이 질병에 전염될 수 있다는 사실을 실험을 통해 밝혀냈다. 인간 환자들도 BSE에 감염된 것이지만, 똑같은 질병이 인간에게서 발견되면 변종 크로이츠펠트 야곱병vCJD이 된다.

 지금까지는 vCJD 환자가 24명밖에 확인되지 않았지만, 확정적인 진단이 어렵기 때문에 분명히 더 많은 환자가 있을 것으로 보인다. vCJD에 대해서는 아직 많은 부분이 밝혀지지 않았지만, 감염된 사람들은 감염된 소의 조직에 접촉한 것이 확실하며 치명적인 뇌장애로 이어지는 유전적 감수성을 지니는 것으로 여겨진다. 건강한 환자에서 추출한 편도선과 충수를 분석한 결과에 따르면, 영국에서 광우병이 유행하던 동안 그런 소와 접촉한 4,000명 중 한 명꼴로 질병의 징후를 전혀 보이지 않는 보균자가 나왔다. vCJD는 장기이식을 통해서도 전이되는 것으로 이미 입증되었고, 수혈을 통해서 전이될 가능성 또한 있기 때문에 위의 결과는 무척 우려스러운 결과가 아닐 수 없다. 

 

p218

 현재 피츠버그대학교 보건대학원 원장인 돈 버크는 바이러스들의 재조합으로 새로운 판데믹이 발생하는 과정을 경고하는 데 중추적인 역할을 해왔다. 버크는 그 과정을 설명하기 위해서 창발적 유전자emerging gene라는 개념을 도입했다. 역사적으로 바이러스 학자들은 새로운 유행병에 대하여 동물에서 인간에게 전이되는 병원균에서 비롯되는 것이라 생각해왔다. 그러나 HIV와 인플루엔자와 사스에서 보았듯이, 유전자 재조합과 재편성이 새로운 유행병의 근원인 경우가 더 많다. 

기존의 병원균 하나와 새로운 병원균 하나가, 즉 두 병원균은 하나의 숙주에서 일시적으로 존재할 때 서로 영향을 미치며 유전물질을 교환할 수 있다. 여기에서 비롯되는 변형된 병원균은 확산되어 완전히 새로운 판데믹, 따라서 전혀 대비되지 않은 판데믹으로 발전할 수 있다. 이런 경우에 판데믹의 원인은 새로운 병원균이 아니라, 새로이 교환된 유전정보, 즉 창발적 유전자를 지닌 병원균이다.

 앞으로 우리는 판데믹의 위협에 더욱 시달리게 될 것이다. 새로운 병원체가 확산되어 질병을 일으킬 것이다. 우리가 열대우림으로 더 깊이 들어가, 전에는 국제교통망과 단절되어 있던 병원체들과 접촉함에 따라 새로운 판데믹이 끊임없이 출현할 것이다. 높은 인구밀도, 전통음식들, 야생동물 거래 등이 복합되면 이 병원체들이 때를 만난 듯이 확산될 것이다. HIV로 인한 면역결핍으로 새로운 병원체들이 약해진 인간의 몸속에서 쉽게 적응할 위험률이 높아졌기 때문에 유행병의 충격은 더욱 클 것이다. 우리가 동물들을 신속하고도 효율적으로 세계 어느 곳으로든 운송하게 되면서 동물들은 어디에나 새로운 유행병의 씨를 뿌릴 수 있게 되었다.

 과거에는 서로 만난 적조차 없던 병원균들이 어디에서든 만나 새로운 모자이크 병원체를 형성하기도 하며, 부모 세대에서는 꿈도 꾸지 못하던 방식으로 확산될지도 모른다. 요컨대 우리는 앞으로 파도처럼 끝없이 밀려드는 새로운 유행병들을 경험할 가능성이 크다. 앞으로 닥칠 유행병들을 더 효과적으로 예측하고 통제하는 방법을 알아내지 못한다면 우리는 그 유행병들에 속수무책으로 당할지도 모른다.

 

p296

 

 대부분의 사람은 병원균에 대해 생각할 때, 인간과 세균의 전쟁이란 틀에서 벗어나지 못한다. 하지만 조금만 창의적으로 생각하면 병원균들 간의 전쟁을 어렵지 않게 떠올릴 수 있다. 게다가 현실은 그보다 훨씬 더 흥미진진하다. 우리는 무궁무진하게 다양한 병원균들이 형성한 공동체의 일부에 불과하다. 그 공동체에서 병원균들은 자기들끼리, 또 우리와 싸우고 협조하며 살아간다.

 

 우리 몸을 생각해보자. 머리부터 발끝 사이에서 10개의 세포 중 하나만이 인간이다. 나머지 9개는 우리 피부를 뒤덮거나 우리 내장에서 살아가며, 우리 입안에서는 번성하는 박테리아 덩어리들이다. 유전정보의 다양성을 이런 식으로 비교하면, 피부와 체내에 존재하는 1,000개의 유전정보 중 하나만이 인간의 것에 불과하다. 그에 비해 박테리아와 바이러스는 수천 종에 달해 어디에서나 수적으로 인간 유전자를 훌쩍 넘어선다.

 

 우리 몸에 존재하는 박테리아, 바이러스 등 모든 병원균을 합해서 미생물상microbiota이라 칭하고, 그 병원균들의 유전정보를 모두 합해서는 미생물군계microbiome라 칭한다. 5년 전부터 인간 미생물군계를 연구하는 새로운 과학이 눈부시게 발전했다. 수천 종류의 병원균을 개별적으로 배양하는 거의 불가능한 일을 건너뛰게 해주는 새로운 분자 기법들의 등장에 힘입어, 과학자들은 우리 몸 전체에서 인간 세포와 병원균 세포를 구성하는 것들이 무엇인지 신속하고 정확하게 파악하고 있다.

 

 속속 밝혀지는 결과들은 흥미진진하다. 우리 내장은 병원균들의 복잡한 군집들로 가득하고, 대다수의 병원균들이 비유해서 말하면 '장기 거주자'들이다. 그 병원균들은 무임 승객들이 아니다. 우리가 섭취하는 식물성 물질이 소화되려면 박테리아와 박테리아 효소가 필요하다. 인간 효소만으로는 식물성 물질을 소화할 수 없다. 병원균 군집이 어떻게 구조화되느냐에 따라서 결과가 엄청나게 달라진다.

 

 미국의 생물학자 제프 고든Jeff Gordon은 제자들과 박사학위를 취득한 연구자들(그들 중 다수가 지금은 똑ㄱ교수로 활동하고 있따)의 도움을 받아, 우리 내장에 존재하는 병원균 군집들이 무척 중요하다는 걸 입증해냈다. 예컨대 박테로이데테스Bacteroidetes라는 특수한 박테리아군群의 상대적으로 낮은 비율과 관계가 있다는 걸 밝혀냈다.

 

 고든 연구팀은 비만자들의 미생물상이 똑같은 음식에서 얻을 수 있는 열량을 증가시킨다는 것도 입증했따. 게다가 정상적인 생쥐의 장내 미생물상을 비만인 생쥐의 미생물상으로 교체하면, 정상적인 생쥐의 체중이 눈에 띄게 증가한다는 사실까지 밝혀냈다. 간단히 말하면, 우리 내장에 기생하는 박테리아가 비만과 중대한 관련이 있다는 뜻이다. 자궁경부암의 경우에서 보았듯이, 어떤 만성질환의 원인이 병원균이면 그 질환을 상대적으로 쉽게 해결할 수 있는 가능성이 열린 것이다. 언젠가는 우리는 활생균probiotics과 항생물질을 결합함으로써, 우리 내장의 미생물상을 신중하게 교체해서 건강한 체중을 유지할 수 있는 방법을 찾아낼 것이다.

 우리가 치명적인 병원균들에게 영향을 받는 정도에서도 우리 내장에 우글거리는 미생물 군집들이 적잖은 역할을 한다고 해서 놀랄 것은 없다. 식중독의 주된 원인 중 하나인 치명적인 박테리아, 살모넬라균에 의한 식중독의 경우, 가장 큰 위험인자는 안전하지 않은 달걀의 섭취와 항생제의 사용으로 한동안 여겨졌었다. 살모넬라균에 감염된 닭은 달갈까지 감염시킬 수 있기 때문에 달걀의 섭취가 위험할 수 있다고 고개가 끄덕여지지만, 항생제의 사용이 위험인자로 꼽힌 이유는 그야말로 미스터리였다.

 장내 미생물군계에 대한 최근 연구에서 그 미스터리가 조금이나마 풀릴 듯하다. 스탠퍼드대학교의 저스틴 소넨버그Justin Sonnenburg 교수가 그 미스터리를 풀기 위한 중요한 실험을 시작했다. 그는 실험실에서 무균 생쥐들을 키우고 있었는데, 이 무균 생쥐들은 완전히 멸균된 환경에서 살아간다. 녀석들은 압력솥에서 살균되어 병원균이 완전히 제거된 음식만을 섭취한다. 따라서 미생물들이 숙주의 장내에서 다양한 미생물상을 만들어내는 정확한 결정요인들을 찾아내기에 완벽한 표본들이다.

 항생제 사용이 이로운 병원균을 죽이며, 우리의 장내의 병원균들이 살모넬라균처럼 새로운 파괴적인 세균을 대비하는 자연방어막을 허물어뜨린다는 의심은 오래전부터 있었다. 하지만 그 과정이 어떻게 진행되는지는 아직도 명확하지 않다. 소넨버그의 실험실에서 시도되는 작업이 조만간 그 해답을 우리에게 전해주리라 믿는다.

 우리를 돕고 지켜주며, 체내에서 조용히 살면서 아무런 피해를 주지 않는 친절한 병원균들이 있다. 물론 우리 몸밖에도 선량한 병원균들이 있다. 우리 몸 안에, 혹은 자연 환경에 존재하는 어떤 병원균이 우리에게 이롭고, 어떤 병원균이 악당인지 정확히 알아낼 수 있다면 대부분이 뜻밖에 사실에 깜짝 놀랄 것이다. 해로운 병원균이 소수에 불과하다는 게 거의 확실하기 때문이다. 따라서 공중보건이 완전히 멸균된 세계를 목표로 해야 할 이유는 전혀 없다.

 해로운 병원균을 찾아내서 통제하겠다는 목표이면 충분하다. 음흉하고 해로운 병원균들을 척결하는 지름길을 이로운 병원균들을 왕성하게 키워내는 것일 수 있다. 가까운 장래에 우리는 체내에 기생하는 병원균들을 죽이려고 애쓰기보다는, 그런 병원균들을 활성화하는 방식으로 악랄한 병원균들로부터 우리 몸을 지킬지도 모른다.

 

p303

 H1N1 인플로엔자(돼지독감)가 판데믹으로 발전한 초기에는 미국 질병통제예방센터의 글로벌 질병탐지 및 응급대응팀 침장인 스콧 두웰Scott Dowell의 도움을 받아 질병통제예방센터의 상황실을 둘러보았다. 당시 팀원들은 멕시코에서 봇물처럼 밀려드는 보고들에 신속하게 대응하고 있었다. 또 세계보건기구가 판데믹을 비롯해 화급하게 대응해야 할 보건 문제가 닥쳤을 때 사용하는 상황실도 살펴보았다.

 내가 운영하는 조직 '글로벌 바이러스 예보Global Virus Forecasting, GVF'는 세계보건기구 산하에 조직된 집단발병 경보 및 대응을 위한 네트워크Global Outbreak Alert Response Network, GOARN의 일원이다. 안타깝게도 관료주의적인 절차, 불충한데다 들쑥날쑥한 지원, 먹이사슬에서 위에 있는 사람들의 변덕에 따라 걸핏하면 수정되는 목표 때문에 질병통제 예방센터와 세계보건기구는 제 기능을 발휘하지 못하는 실정이다. 이런 조직들이 더 강해져야 한다. 더 많은 지원을 받아 더 좋은 장비로 무장해야 한다. 하지만 그런 때가 오더라도 항상 더 많은 지원과 장비가 필요할 것이다.

 

p305

 생물의 역사에서 초기에 일어난 몇몇 사건들로 바이러스 폭풍을 위한 완벽한 조건이 갖추어졌다. 예컨대 사냥의 도래로 우리의 생물학적 계통에서 어떤 종이 동물들과 접촉하기 시작했고, 그로 인해 새로운 병원균들이 인류 이전의 조상에게 침입하게 되었다. 그리고 거의 멸종에 가까운 사건이 있은 후로 우리가 병원균들에 대처하기에 미흡한 상황이 닥친 듯하다.

 또한 인구가 증가하고 세상이 밀접하게 연결되면서 우리는 조금씩 폭풍의 중심을 향해 다가가고 있다고도 말했다. 동물들의 가축화, 나날이 확대되는 도시화, 경이로운 교통 시스템으로, 지상에서 생명이 탄생한 이후로 모든 개체군이 전례 없이 긴밀하게 연결된 세상이 되었다. 특히 인간은 장기이식과 주사요법을 발명하면서, 병원균이 확산되어 재앙을 불러일으킬 수 있는 완전히 새로운 통로를 열어놓았다.

 

 

 

 미생물학 전문가로서 나는 "감염의 위험을 줄이기 위해서 개인적으로 어떻게 행동하십니까?"라는 질문을 자주 받는다. 첫째로, 귀찮더라도 내 예방 상태에 허점이 없도록 유지한다. 예컨대 말라리아 지역에서 지낼 때는 말라리아 예방주사를 고박꼬박 맞는다. 처음부터 그랬던 것은 아니다. 하지만 호된 홍역을 치른 후에야 예방이 얼마나 중요한지를 깨달았다.

 겨울철에는 호흡기 질환의 전염경로를 항상 염두에 두고, 호흡기 질환에 걸리지 않으려 애쓴다. 대중교통은 많은 사람이 이용하기 때문에 무척 위험하다. 그래서 지하철이나 비행기에서 내린 후에는 손을 씻거나, 알코올을 기반으로 한 간단히 손세정제를 이용한다. 또한 많은 사람과 악수를 나누면 곧바로 손을 씻거나, 쓸데없이 코나 입을 만지지 않으려고 애써 노력한다. 언제나 깨끗한 음식을 먹고 깨끗한 물을 마시는 것이 중요하다. 안전하지 못한 섹스로 인한 위험을 줄이는 것도 중요하다. 물론 어떤 직업에 종사하고 어디에서 사느냐에 따라 대답은 달라진다. 깨끗한 물과 백신, 효과 있는 말라리아 약과 콘돔이 안타깝게도 아직 보편적이지 않다. 이 정도의 안전장치는 모두를 위해서라도 누구나 쉽게 이용할 수 있어야 한다.

 "집단 발병이 발생할 때, 뉴스 보도를 어떻게 받아들이고 위험 정도를 어떻게 판단해야 하는가?"라는 질문도 자주 받는 편이다. 유행병의 몇 가지 특징을 집중적으로 관찰하면 적절한 대답을 구할 수 있을 것이다. 예컨대 병원균이 어떤 식으로 확산되고 있는가? 얼마나 효과적으로 전파되는가? 감염된 사람들의 치사율은 얼마나 되는가? 치사율이 무척 높더라도 확산되지 않는 것처럼 보이면, 이는 반대로 일반적인 치사율이지만 꽤 빠른 속도로 확산되는 판데믹보다는 덜 걱정스러운 일이다. 에볼라 바이러스처럼 무시무시하게 느껴지는 병원균이라고 항상 전세계를 위험에 빠뜨리지는 않는다. 오히려 인간 유두종 바이러스HPV처럼 유순한 바이러스가 때로는 전 세계를 공포에 빠뜨릴 수 있다. 다행히 확산성과 치사율 같은 기본적인 사실만 파악해도 유행병의 위험을 판단하는 데 도움이 된다.

 그러나 당신이 한 곳에서 양질의 삶을 산다고 해서 판데믹의 위험에서 안전할 거라고 생각하면 착각이다. HIV가 전 세계로 확산되면서 인간을 무차별적으로 감염시킨 것은 아니지만, 가난한 사람만이 아니라 부자도 HIV를 피해가지 못했다. HIV는 건강관리를 거의 받지 못하는 사람에게도 악영향을 주었지만, 세계에서 최고의 건강관리를 받는 사람들, 특히 혈우병 환자들에게 치명타를 입혔다. 이처럼 우리 모두는 하나로 이어진 세계에서 살아가고 있다.

 

p310

 미래의 판데믹을 저지하려는 우리 노력을 방해하는 또 하나의 커다란 걸림돌은 위험에 대한 대중의 어설픈 판단이다. 판데믹 에방 분야에서 초석을 놓은 학자 중 한 명이며, 지금도 여전히 판데믹 예방의 중요성을 역설해온 래리 브릴리언트가 2010년 스콜 세계포럼에서 '위험 판단능력risk literacy'의 중요성에 대해 언급했다. '미래의 판데믹을 저지하는 데 작은 도움을 주려는 바람' 덕분에 권위 있는 TED상을 수상한 브릴리언트는, 과거 구글에서, 그리고 지금은 스콜 세계위협요인기금에서 뛰어난 리더십으로 판데믹 예방운동을 출범시키는데 중추적인 역할을 해왔다. 그리고 천연두 박멸 프로그램에서도 핵심적 팀원으로 활동했다. 따라서 '위험 판단능력'의 중요성을 강조하는 데 브릴리언트만큼 적합한 사람은 없다.

 '위험 판단능력'이란 무척 중요한 개념이다. 간단하게 설명하면, 대중이 판데믹에 대한 정보를 이해하고 적합하게 해석할 수 있게 만들자는 개념이다. 따라서 판데믹 예방을 위해서는 대중의 위험 판단 능력이 반드시 필요하다.

 다양한 수준의 위험을 구분하는 능력, 즉 위험 판단능력은 정책결정자에게만 필요한 것이 아니다. 자연재앙에 효과적으로 대응하려면, 무엇보다 대중이 침착성을 유지하며 지시를 충실하게 따라야 한다. 언론이 끝없이 쏟아내는 위협적인 소식에 대중은 만성적인 위험 불감증에 걸린 듯하다. 이런 불감증을 타개할 수 있는 방법은 하나밖에 없다. 모두가 위험을 정확히 인지하고, 여러 형태의 재앙들이 어떻게 다른지 평가할 수 있어야 하며, 각 재앙에 따라 적절히 대응할 수 있어야 한다.

 위험 판단능력이 일반화되면 판데믹을 예측하고 예방하는 데 필요한 정부의 막대한 비용을 국민에게 지원 받기에도 유리할 것이다. 또한 한정된 재원을 어떻게 사용하는 것이 최적의 방법인지 판단하는 데도 도움이 될 것이다. 예컨대 2001년 4월부터 2002년 8월까지 전세계에서 약 8,000명이 테러로 인해 목숨을 잃은 것으로 추정된다. 게다가 이 기간에는 9·11 테러까지 있었다. 2009년 4월부터 2010년 8월까지, 8년 후이지만 같은 기간 동안 H1N1 판데믹만으로 1만 8,000명 이상이 사망한 것으로 확인되었따. 그런데도 대부분이 H1N1을 시시하게 생각한다. 달리 말하면 1만 8,000명이란 숫자가 과소평가되고 있다는 뜻이다. 그렇다고 우리가 위협에 대비할 때 고려해야 할 유일한 변수가 사망자 수라고 주장하는 것은 아니다. 그러나 테러를 예방하기 위해서 투자하는 수조 달러가 실제 위험에 비하면 터무니없이 많은 돈이라는 생각을 지우긴 힘들다.

 

p314

 우리가 어떤 새로운 테크놀로지와 도구를 사용하더라도 현장 정보만큼 중요한 것은 없다.  따라서 우리 작업의 근간은 세계 각지의 현장에서 실시되는 노력들이다. 현재는 동물에게 기생하지만 인간에게 침입할 가능성이 있는 병원균을 찾아내는 것이 현장의 목표이다. 또 우리가 아직 확인하지 못한 방식으로 질병을 유발할 가능성을 지닌 병원균들, 특히 이미 인체에 침입한 병원균들을 추적하는 것도 GVF의 과제이다. 마지막으로 하나를 더 덧붙이면, 새로운 집단 발병과 유행병이 전통적인 보건기구와 미디어 조직의 레이더망에 걸리기 전에 먼저 포착해내는 것도 우리의 과제이다.

 이런 과제를 성공적으로 해내기 위해서 병원과 진료소의 상황을 정기적으로 감시해야 한다. 또한 우리 판단에 '파수꾼' - 탄광의 카나리아처럼 거주지나 고유한 행동 습관 때문에 병원균이 널리 확산되기 전에 남보다 먼저 감염되는 사람 - 이라 생각되는 사람들을 집중적으로 관찰한다. 수렵꾼들을 지속적으로 감시한 덕분에 우리는 과거에 알려지지 않은 상당수의 병원균을 발견한 성과를 거두었다. 힘들게 수집한 이런 감시 자료들을 활용해서, 우리는 인간파보 바이러스 4 human parvovirus 4 처럼 기존에 알려진 바이러스들이 과거에 생각했던 것보다 훨씬 광범위하게 확산되었다는 증거를 객관적으로 제시할 수 있었다.

 새로운 동물 병원균이 판데믹으로 발전하는 과정에 돌입하려면 반드시 거쳐야 하는 관문으로 파수꾼을 연구하는 우리 모델은 무척 성공적이었다는 게 입증되었다. 미국국제개발처의 EPT 프로그램에 함께 참여한 협력 조직들, 국방부와 다른 협력 조직들의 도움을 받아 우리는 현재 20여 개에서 '파수꾼 모델'을 진행 중이다. 하지만 더 많은 노력이 필요하다. 현재 파수꾼 모델을 진행 중인 나라들에서도 동물과 자주 접촉하기 때문에 동물로부터 새로운 병원균에 감염될 가능성이 높은 사람들을 더 폭넓게 감시해야 하고, 더 넓은 지역에서 감시 활동을 펼쳐야 한다. 또한 지금보다 더 많은 나라로 파수꾼 모델을 확대해야 한다. 판데믹의 가능성을 감시하는 작업은 더 큰 관점에서 봤을 때 이제야 첫걸음을 때었을 뿐이다.

 병원균이 동물로부터 인체로 침입하는 지점, 즉 파수꾼을 연구할 뿐 아니라, 병원균이 확산되는 네트워크에서 중추적인 위치에 있는 중요한 개체군을 광범위하게 감시하는 것도 우리의 역할이다. 예컨대 정기적으로 수혈을 받는 사람들을 면밀하게 추적한다. 그들 중 일부는 앞으로도 많은 사람들로부터 수백 번의 수혈을 받아야 하기 때문에, 새로운 질병이 나타난다면 그들이 가장 먼저 감염되어 그와 관련된 징후를 보여줄 것임이 분명하다. 이처럼 네트워크의 중심에 있어 새로운 병원균에 가장 먼저 감염될 확률이 상대적으로 높은 집단들이 많다. 의료 종사자와 항공기 승무원이 대표적인 예이다. 따라서 이런 직업군들을 하나씩 꾸준히 우리 감시 시스템 안에 끌어들이는 것이 무엇보다 중요하다.

 동물들도 무척 중요하다. 9장에서 간략하게 설명했듯이, 나는 GVF의 생태학팀 팀장 매슈 르브르통의 도움을 받아 현장에서 실험실 여과지를 이용해서 동물들로부터 혈액 표본을 다량으로 신속하게 수집하는 방법을 개발했다. 요즘에는 이 방법 이외에 동물의 급격한 사멸animal die-off 까지 면밀히 감시한다. 카메룬에서 유인원들이 탄저병에 쓰러지며 죽어갔듯이, 지상 어딘가에서 매일 일군一群의 야생동물이 죽어간다. 동물세계에서 소규모로 일어나는 집단 발병은 자연계에 어떤 병원균이 있는지 파악할 수 있는 절호의 기회이다.

 동물의 급격한 사멸은 인간에게 곧 닥칠 어떤 집단 발병의 전조일 수 있다. 남아메리카를 휩쓴 황열이 대표적인 예이다. 열대우림에서 원숭이가 죽은 후에 인간 정착민이 치명적인 바이러스에 감염되는 사건이 종종 벌어진다. 하지만 요즘에는 동물의 급격한 사멸이 거의 확인되지 않는다. 세계 전역에서, 특히 생물다양성이 풍부한 숲에서 우리와 함께 일하는 사냥꾼들의 도움으로 동물의 급격한 사멸 현상을 철저하게 감시하는 시스템을 갖추기 시작했다. 세계 어느 곳에서든 어떤 동물이 떼죽음할 때마다 우리가 빠짐없이 안다면 가장 이상적이겠지만, 현재는 그런 중요한 정보를 거의 놓치고 있는 실정이다.

 GVF의 대다수 현장에서는 새로운 병원균을 찾는 데 열중하는 반면에, 일부 현장에서는 이미 알려진 병원균 하나를 집중적으로 탐구한다. 예컨대 서아프리카 시에라리온에서는 GVF의 현장 작업과 실험실 작업을 지휘하는 바이러스 학자이자 현장 유행병학자인 조지프 페어Josepth Fair 가 라사열Lassa Fever로 알려진 치명적인 바이러스를 이해하고 통제하기 위해서 첨단 방법을 동원해 힘든 연구를 진행하고 있다. 라사 바이러스는 설치동물이 인간에게 옮기는 위험하고 흥미로운 바이러스로, 주로 오염된 음식을 통해 전이된다.

 라사 바이러스는 에볼라 바이러스나 마르부르크 바이러스 못지않게 파괴적인 증상을 야기한다. 조지프 페어가 시에라리온의 라사열 현장에서 개발한 모델은 라사 바이러스만이 아니라 에볼라 바이러스와 마르부르크 바이러스까지 파악할 수 있으며, 심지어 그런 바이러스들을 예측해서 대처하기에 최적인 모델이다. 라사열 이외에 모든 출혈열 바이러스들 - 에볼라 바이러스와 마르부르크 바이러스도 여기에 속한다 - 로 인한 전염병은 서아프리카에서 간헐적으로만 발생한다. 그러나 라사열은 서아프리카 지역에서는 일상의 한 부분이다. 간헐적으로만 발생하는 바이러스들까지 철저하게 감시한다는 것은 현실적으로 거의 불가능하기 때문에, 페어는 시에라리온의 곳곳에 설치한 현장을 적극적으로 활용해서 이런 바이러스들이 확산되기 전에 그 바이러스들을 포착하고 통제할 수 있는 최선의 방법들을 연구하며 조금씩 깨달아가고 있다.

 전염병의 집단 발병을 다룬 영화를 좋아하는 사람들에게, 시에라리온의 현장은 흥미진진한 영화처럼 보일 수 있다. 생물학적 오염도가 무척 높은 곳인데다 전문가들이 자신들의 목숨을 도외시한 채 세계인의 목숨을 구하려고 치열하게 경쟁을 벌이는 곳이기 때문이다. 하지만 시에라리온은 그런 의미에서만 중요한 곳이 아니다. 우리가 이곳의 현장에서 라사열을 예측하고 적절하게 대응하는 법을 알아낸다면, 에볼라 바이러스와 마르부르크 바이러스 같은 출혈열 바이러스들까지 통제할 수 있는 방법을 알아낼 수 있으리라 생각한다.

 

p319

 우리는 중앙아프리카에서 함께 일하는 야생동물 사냥꾼들에게 새로운 바이러스가 침입하지 못하도록 방법을 찾아ㅐ고자 한다. 중앙아프리카는 HIV가 처음 출현했던 곳이기 때문에, 사냥꾼들은 새로운 바이러스로부터 안전하게 지키는 작업이 무엇보다 중요할 수밖에 없다. 하지만 생각만큼 쉬운 일이 아니다.

 내가 중앙아프리카에 처음 들어가 연구를 시작하며, 사냥꾼들에게 야생동물의 사냥과 도살에서 비롯된 위험을 언급했을 때 그들이 보인 반응을 지금까지 생생히 기억하고 있다. "우리는 오래전부터 그렇게 살았습니다. 우리 부모와 조부모도 똑같은 식으로 살았습니다. 여기에서 우리 목숨을 호시탐탐 노리는 많은 것들만큼 사냥과 도살이 위험하지는 않을 겁니다." 우리가 연구했던 모든 곳에서 사냥꾼들은 내게 그런 식으로 반응했다. 그들의 설명은 틀린 데가 없었다. 말라리아, 비위생적인 물, 빈약한 영양공급 등으로 죽음이 일상사인 환경에서, 동물을 통해 침입하는 새로운 병원균은 사소한 위험에 불과한 듯했다. 사실 어떤 면에서는 지극히 사소한 위험이기도 하다.

 이런 문제는 가난한 사람들이 겪어야 하는 비극이다. 생계형 사냥꾼들이 사냥을 포기할 때 감수해야 할 영양 부족과 그 밖의 대가에 비하면, 새로운 치명적인 질병에 걸릴 위험은 대수롭지 않다. 그러나 지극히 다양한 병원균들로 뒤범벅인 지역에서 수많은 사람들이 야생동물을 사냥한다면, 우리는 새로운 병원균의 출현을 피할 수 없는 상황에 빠져드는 셈이다. 온 세상을 철저하게 파괴할 수 있는 병원균이 출현할지도 모른다. 따라서 위의 문제는 사냥꾼들만의 문제가 아니라, 우리 모두가 머리를 맞대고 함께 해결해야 할 문제이다.

 우리는 사냥에서 비롯되는 위험을 사람들에게 알리려고 노력하지만, 진정한 적은 가난이라는 것도 인정한다. 이 만연된 문제를 해결하기 위해서는 사냥의 위험을 설명하는 수준에 그쳐서는 안 된다. 가난한 지역 주민들이 영양 문제를 실질적으로 해결할 수 있는 방법을 찾도록 도와주는 데도 전력을 다해야 한다. 그들이 위험한 사냥을 대신할 대안을 찾도록 지원해야 한다. 그들이 자기 가족의 배를 채워주기 위해 사냥한 것을 비난할 수는 없다. 우리는 '건강한 사냥꾼 프로그램'을 더 많은 지역으로 확대하는 데 그치지 않고, 개발 및 식량지원조직들과 연대해서 그들에게 실질적인 해결책을 제공해주려고도 노력한다. 

 중앙아프리카, 동남아시아, 아마존 분지 등과 같이 바이러스가 극성인 지역에서 생존을 위한 사냥을 근절할 수 있다면, 우리는 당연히 그렇게 해야만 할 것이다. 야생동물의 사냥은 판데믹의 위험을 고조시키는 데서 그치지 않고, 지구의 생물학적 유산에도 부정적인 영향을 미쳤다. 또한 재생 불가능한 동물성 단백질원을 주식으로 삼는 가난한 집단의 식량 확보에도 부정적인 영향을 미쳤던 것으로 여겨진다.

 하지만 사냥 문제를 해결하기 위해서는 전 지구적 차원의 노력과 지원이 필요하다. 이를 위한 비용을 아깝게 생각해서는 안 된다. 판데믹을 저지하고 생물다양성을 보존하려는 부유한 사람들의 이기적인 목적도 충족시키지만, 세계에서 가장 가난한 사람들이 합리적인 삶을 꾸려갈 수 있도록 도와주는 것이 되기 때문이다. 야생동물고기 문제는 멸종 위기에 처한 종을 구하려는 사람들이 멋에 겨워 제기하는 문제가 아니다. 야생동물고기가 세계인의 건강을 위협한다. 그런데 우리가 어떻게 그 문제를 간과할 수 있겠는가?

 

p322

 에이즈로 인해 면역기능이 떨어지면 새로운 병원균들이 인체에 침입하기가 한결 쉬워진다. 따라서 사냥으로 야생동물들과 자주 접촉하는 오지의 사람들에게까지 에이즈를 억제하는 항레트로 바이러스 제제를 공급할 수 있어야 한다. 실제로 우리는 면역학 전문가인 데비 벅스Debbie Birx와 이 분야의 몇몇 선구자들과 함께 이런 작업을 해왔다. 벅스는 월터리드 육군연구소WRAIR에서 성과가 좋은 연구팀을 감독하며 성공적인 경력을 쌓아왔지만, 지금은 질병통제예방센터에서 글로벌 에이즈 프로그램을 주도하며 항레트로 바이러스 제제를 세계에서 가장 가난한 지역들에게까지 공급하는 기초적인 작업에 집중하고 있다.

 우리 각자가 이 과정을 도울 수 있는 방법은 많다. 우리 모두가 한 마음으로 정책결정자들과 정치인들에게 압력을 가하며, 판데믹 예방을 위한 장기적인 접근 방법을 지원해야 한다. 또한 특정한 위협에 단순히 집중하는 방식보다 미래의 판데믹을 통제하려는 포괄적인 접근방식에 더 많은 연구기금을 지원하라고 정부에 압력을 가해야 한다.

 지금 이 세계가 매우 이상적인 세계라면, 아마도 최근에 판데믹이 있은 직후에 몇몇 선각자들이 제안한 변화를 우리는 받아들여야 했다. 2009년 롱비치에서 열린 TED 회의에서, 엔터테인먼트 법전문가 프레드 골드링Fred Goldring은 우리에게 '안전한 악수'를 시작하자고 제안했다. 손을 맞잡는 대신에 팔꿈치를 맞대는 식으로 악수법을 바꾸자는 제안이었다. 이렇게 하면 손바닥보다 팔뚝에 대고 재채기를 하는 셈이기 때문에 감염성 질환의 확산을 막는 데 크게 도움이 될 것이다. 악수 대신에 한국이나 일본처럼 허리를 굽히는 인사법이 건강에 어떤 영향을 미치는지 연구한 학자는 한 명도 없으리라 생각된다. 분명 한국식의 인사법이 감염성 질환의 확산을 줄이는 효과가 있으리라 예상된다. 또 독감에 걸리면 수술용 마스크를 쓰는 관습도 병원균의 확산을 억제하는 데 효과가 있다. 물론 습관을 바꾸기는 무척 어렵겠지만, 현재의 습관을 유용한 방향으로 대신할 수 있는 대안은 얼마든지 존재한다.

 

 애널리스트가 쓴 근현대의 주요 경제적 사건에 대한 기록과 그 해석. 책의 목적은 주요 경제 이벤트에 대한 근본적이고 간략한 경제적 해석에 있는 것 같다. 내용이 깊진 않지만 핵심을 짚는다는 점에서 경제 인사이트를 키우는 데 도움이 된다.

 특히 외환위기 등 현대의 경제위기 상황에서 던지는 화두에 대해 핵심원인을 짚어나가는 부분은 많은 도움이 된다. 그리고 논의에 사용된 참고문헌들을 바로 그 챕터 말미에 소개하는데 이 도서들을 보면 경제적 지식을 높이는데 큰 도움이 될 것 같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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p48

 15세기에 유럽에서 산출된 금은 당시 수요에 비해 매우 부족했다. 일부 역사학자들의 추정에 따르면 1400년에 유럽 내부의 금 산출량은 4통을 넘지 않았다. 게다가 동방 무역으로 지속적으로 금이 유출되고 있기에, 이 정도 생산량으로는 경제가 제대로 돌아가기 어려웠다. 돈의 공급량이 부족하면 사람들은 상품과 서비스를 구입하는 데 쓰는 돈을 절약하려 노력하고, 그 결과 물가가 내려간다. 콜럼버스와 바스코 다 가마 등 수많은 모험가가 아프리카 희망봉을 돌아 아시아로 향하고, 인도를 찾아 대서양을 횡단했던 데에는 금을 비롯한 귀금속의 가격 상승이 그 배경으로 작용했던 셈이다.

 

p242

 특히 1979년 2월, 친미 성향의 팔레비 왕조가 무너지고 새롭게 들어선 이란의 이슬람 원리주의 정부가 반미 노선을 강화하면서 국제 유가는 폭등했고, 나아가 이라크의 후세인 정부가 1980년 9월 이란을 침공하면서, 제2차 석유파동이 일어났다. 1979년 1월까지만 해도 석유 가격은 배럴당 14.8달러 내외였지만, 1980년 4월 39.5달러까지 급등했다. 

 그런데 제2차 석유파동의 충격은 오래가지 않았다. 1983년 2월 석유 가격은 배럴당 29.0달러로 떨어졌고, 급기야 1986년 3월에는 12.6달러까지 폭락하고 말았다. 세계 2위와 4위의 매장량을 자랑하는 이란과 이라크의 석유 생산이 1988년까지 사실상 중단되었음에도 불구하고 왜 유가는 폭락했을까?

 가장 직접적인 이유는 미국의 금리, 특히 실질금리가 인상된 것이다. <도표 5-4>에 나타난 것처럼, 미국의 실질 정책금리가 1980년대 초반 8%포인트까지 상승하면서, 달러 자산을 보유할 실익이 확대되었다. 실질 정책금리란, 정책금리에서 소비자물가 상승률을 뺀 것인데 인플레를 감안하고도 수령할 수 있는 실질적인 은행 예금 이자율을 의미한다. 따라서 달러로 수출 대금을 받는 산유국 입장에서는 달러 가치가 상승하면 원유 가격의 인상을 위해 노력할 동기가 사라진다.

 나아가 달러 가치 상승에 대한 기대가 높아질 때, 상품을 비롯한 이른바 비非달러 자산에 대한 투자 매력이 약화되는 것은 당연한 일이다. 1971년 닉슨 쇼크에서 확인되듯, 금을 비롯한 전 세계 상품 가격이 폭등했던 가장 큰 이유는 기축통화로서 달러의 위치가 흔들린 데 있었다. 그러나 반대로 달러의 위상이 다시 예전처럼 굳건해지면, 원유나 금처럼 변동성이 큰 이른바 '위험자산'에 굳이 투자할 이유가 없어진다.

 그렇지만 이 대목에서 한 가지 의문이 제기된다. 1980년을 고비로 국제유가의 급등세가 진정된 것은 이해가 되지만, 실질금리가 하락하던 1983년부터 유가가 하락 흐름을 타게 된 이유는 무엇일까? 이를 이해하려면 상품시장의 특성을 파악할 필요가 있다.

 

p273

 이 대목에서 잠깐 '버블'에 대해 이야기하자면, 자산가격이 어떤 수준에 도달해야 버블인지 정확하게 판단하기 힘들다. 이때 활용하기 좋은 기준이 하나 있는데, 그것은 바로 내부자 입장에서의 판단이다. 내부자 입장에서 주식을 매수하기보다 매도할 유인이 훨씬 강해지는 때가 바로 '버블'이라는 것이다.

 예를 들어 1980년대 말 어느 기업가가 일본 주식시장에 상장을 계획하고 있다고 가정해보자. 그런데 주가수익비율(PER)이 4배에 불과하다면 주식시장에 공개하지 않으려 할 것이다. 주식시장에 상장하는 이유는 결국 자본을 조달하기 위함인데, 회사 한 주의 기대수익률(주당순이익/주가)은 25%인 반면, 당시 일본의 은행 금리는 2.5%에 불과하니 주식을 상징하는 것보다 은행에서 대출받는 게 낫기 때문이다. 이처럼 주식시장이 침체되어 상장 기업들의 PER이 낮을 때에는 기업의 증자나 상장이 크게 줄어든다. 

 반면 주가가 높아지면 이와 반대되는 현상이 나타난다. 예를 들어 1989년 일본처럼, 돈도 제대로 못 버는 별볼일없는 기업의 주식도 PER이 100배에 거래되고 채권 금리가 6%를 넘어선다고 생각해보자. 이 기업 주식의 기대수익률은 1%에 불과한데 채권 금리는 6%를 넘어서고 있다면, 최고경영자가 어떤 선택을 할지 자명하다. 부지런히 증자를 해서 조달한 돈을 채권에 투자하는 게 훨씬 남는 장사가 된다는 것을 누구나 알 것이다.

 지난 2000년 코스닥 버블 때, 많은 정보통신기업이 증자로 유입된 돈을 빌딩 매입에 투자했던 것은 매우 합리적인 행동이라고 볼 수 있다. 즉, 시장금리가 높은 수준까지 상승한 상황에서 주식의 PER이 급격히 상승하면 주식 공급은 무한히 증가하게 되고, 주식 공급이 증가하면 증가할수록, 주식시장은 점점 더 상승 탄력을 잃어버리게 되는 것이다.

 

p288. 자산가격 하락이 장기불황으로 이어진 이유는?

 

 1988년 버블이 붕괴되고 일본 중앙은행이 정책 금리만 공격적으로(200bp 이상) 내렸다면 디플레이션 악순환은 발생하지 않았을 것이다. 일본 정부가 추진했던 재정정책이 경기 하강을 억제하는 데 다소나마 도움을 주긴 했지만, 통화정책과 함께 진행되었다면 더 좋았을 것이다.

 

 예를 들어 지나친 저금리로 인플레가 발생하면 긴축으로 전환하여 해결할 수 있지만, 경기 부양이 너무 늦거나 규모가 약해 디플레이션에 진입하게 되면 경제를 다시 정상 수준으로 되돌릴 방법이 마땅찮다. 따라서 자산가격 버블이 붕괴될 때는 일단 시장 참가자들의 미래 경제에 대한 예상을 바꿔놓을 정도의 공격적인 경기부양이 필요하다.

 

 왜 디플레이션은 퇴치하기 힘들까? '통화정책이 무력화'되기 때문이라는 게 미 연준 이코노미스트들의 지적이다. 물가 상승률이 마이너스로 떨어진 상황에서는 금리를 아무리 낮춰봐야, 실질금리가 더 떨어지지 않는다. 그 단적인 예가 <도표 6-6>의 1994~1995년으로, 소비자물가 상승률이 마이너스로 떨어짐에 따라 일본 중앙은행이 정책금리를 제로 수준까지 인하한 효과가 나타나지 않는 것을 발견할 수 있다.

 

 물론 재정정책을 충분히 그리고 적극적으로 추진한다면 장기불황의 위험을 막을 수 있었을지도 모른다. 그런데 <도표 6-6>에서 1997년을 보면, 갑자기 일본 소비자물가 상승률이 마이너스에서 2%까지 뛰어오르는 것을 발견할 수 있다. 왜 이런 일이 벌어졌냐 하면, 당시 하시모토 정부가 재정적자 문제를 해결하기 위해 소비세를 기존 3%에서 5%로 인상했기 때무이다. 1937년 루스벨트 행정부가 재정 건전화를 위해 재정지출을 삭감한 후 심각한 불황을 겪었던 일을 떠올리게 하는, 이 어처구니 없는 정책 시행으로 일본 경제는 돌이키기 어려운 장기 불황의 악순환에 빠져들었다고 볼 수 있다.

 

p311. 토지개혁, 번영의 초석을 놓다!

 

 낮은 임금과 극단적으로 불평등한 토지 소유 분포, 그리고 저학력이라는 삼중고에 시달리던 우리나라는 어떻게 산업화를 달성할 수 있었을까?

 미 군정이 추진한 두 가지 핵심 정책, 강력한 통치기구 조직과 점진적인 토지개혁에 주목할 필요가 있다. 1945년 8월 말, 미군이 한반도 남쪽에 들어섰을 때, 이미 토지 소유 집중은 심각한 수준이었다. 일제 강점기 동안 일본에서 온 지주와 토착 대지주들이 대규모 토지를 소유한 반면, 토지를 잃은 농민들은 농촌을 떠나 산업 노동자로 전락했다. 문제는 일제 패망으로 원료 공급이 끊기며 제조업 생산이 중단됨에 따라, 도시의 산업 노동자들이 다시 농촌으로 복귀한 것이다. 이에 따라 대지주들은 전통적인 토지 집중적인 농업, 즉 소작 제도를 시행했고, 그로 인해 전체적으로 농업 생산량이 감소하고, 경제는 침체되었다.

 이러한 상황에서 모든 국민의 관심사는 토지 분배에 집중되었다. 미 군정은 이 부분에서 큰 공을 세웠다. 그들은 1946년 소작인이 토지 경작 대가로 지주에게 지불해야 할 소작료를 그해 생산량의 1/3 수준으로 낮추는 한편, 조선 총독부가 보유하고 있던 대규모 토지를 농민에게 팔아넘겼다. 특히 미 군정은 조선총독부뿐만 아니라 일본인 지주들이 보유하던 약 2,780제곱킬로미터의 토지를 인수했는데, 1948년 초에 이 토지를 농민에게 매각함으로써 59만 7,974가구, 즉 농업 인구의 24.1%에 해당하는 농민이 새롭게 토지를 소유하게 되었다.

 당시 미 군정이 불완전하나마 '토지개혁'을 실시했던 이유는 공산화의 위험을 퇴치하기 위함이었다. 당시 토지개혁을 주도했던 울프 라데진스키(Wolf Ladejinsky)는 다음과 같이 당시의 일을 회고한다.

 "나는 1921년 초에 러시아를 떠나기 전에 얻은 교훈 덕분에 이 일(=토지개혁)을 하게 되었습니다. 농민들에게 토지를 돌려줌으로써 단호하게 토지 문제를 해결했다면, 공산주의자들이 절대 권력을 잡지 못했을 것이라는 교훈 말입니다."

 

 1952년 아이젠하워가 대통령에 당선된 다음, 극단적인 반공주의자들이 세력을 얻으면서 울프 라데진스키를 비롯한 토지개혁론자들은 설 자리를 잃어버리게 되었지만, 우리나라는 운 좋게 한국전쟁 직전에 토지 개혁이 완료되어 공산화의 위험에서 벗어날 수 있었다. 참고로 1950년 3월 이승만 정부가 통과시킨 토지개혁법은 '소유주가 직접 경작하지 않는 모든 토지와 3만 제곱미터(약 9,180평)가 넘는 모든 토지'를 재분배 대상으로 규정했다. 이 법안에 따라 정부로부터 토지를 구입한 농민이 지불해야 할 금액은 해당 토지에서 산출된 연간 생산량의 150%로 결정되었다. 그리고 정부가 지주들로부터 토지를 이수하며서 지급한 대금의 상당 부분이 미국의 원조로 충당되었다.

 이 대목에서 잠깐, 토지개혁의 중요성을 강조하는 이유를 살펴보자.

 토지개혁이 가져온 첫 번째 변화는 바로 '경제 성장'이었다. 지주들은 '고리대금업'만으로도 충분히 소득을 얻고 있었기에, 기술 투자에 열의가 없었다. 반면 소작농들은 관개시설에 투자할 여력이 없거니와, 소작 '계약 연장'에 대한 불안감으로 비료를 구입할 수도 없는 상황이었다. 따라서 토지개혁 이전에 우리나라는 인구의 90%가 농업에 종사하는 전형적인 '농업국가'였음에도 식량 자급조차 이뤄지지 못했다. 식량 자급이 이뤄지지 못하니, 미국의 원조가 없을 때에는 대규모 무역수지 적자를 기록할 수밖에 없는 상황이었다. 그러다 토지개혁이 이뤄지며 농업생산성이 극적으로 향상된 것이다.

 <도표 7-2>는 1954년 이후의 농림어업 성장률과 경제성장률이 관계를 보여주는데, 1954~1963년 연평균 농림어업 성장률이 5.1%에 이르러 같은 기간 경제성장률(6.0%)에 근접한 것을 발견할 수 있다. 그리고 1953년 전체 국내총생산에서 농림어업이 차지하는 비중이 48%였다는 점을 감안할 때, 경제성장의 상당 부분이 농업 생산성의 향상에서 비롯되었음을 알 수 있다. 1963년부터 우리나라 경제가 수출 중심의 공업화에 힘입어 고성장한 것은 분명한 사실이지만, 농업 주도의 경제 성장이 '토대'가 되었음을 잊어서는 안 될 것이다.

 토지개혁 이후 농업생산성이 극적으로 개선된 이유는 '동기 유발'에 있다. 아무리 농사를 지어봐야 대부분의 수확물을 지주에게 빼앗기는 상황에서 수확량을 늘리려는 동기가 생기기는 어렵다. 그런데 당시 5인 혹은 6인 이상으로 이뤄진 가족들은 십수 마지기의 토지를 일구는 데 최적화되어 있었다. 노동력이 넘쳐 흐르는 개발 초기 단계의 개발도상국에게 중요한 것은 '효율'이 아니다. 어떻게든 남아도는 노동력을 활용해 최대한 생산을 짜내는 것이다. 1인당 수확량이 형편없다 하더라도, 노동력을 최대한 활용하는 게 더 낫다는 말이다.

 

 물론 우리나라만 토지개혁의 성취를 이룬 것은 아니다. 타이완도 1949년 토지개혁 이후 10년 만에 식량 생산량이 75%나 늘어났다. 그리고 이와 같은 생산성 향상은 곧 농가 소득 증가로 연결되었고, 이는 경제 전체에 무역 불균형을 시정하는 데 큰 기여를 했다. 어쨋든 우리나라는 소득 증가에 힘입어 자녀를 교육시킬 여유를 가지게 되어, 1944년 말 조선의 15세 이상 인구 중 무학력자 비중이 남자의 경우 80%, 여자의 경우 94%였던 것이 1955년에는 남성 50%, 여성 80%로 줄어들었다.

 이후 선순환이 이어졌다. 농업 생산성이 높아짐에 따라, 농촌의 여유 노동력이 도시로 이동할 수 있게 되었고, 기업들은 이들을 고용해 내수시장에서 물건을 팔 기회를 잡을 수 있게 되었다. 그러나 본격적인 경제성장을 위해서는 한 가지 조건이 더 만족되어야 했다. 그것은 제조업의 적극적인 육성이었다.

 

p321

 이상의 사례에서 보듯, 공장을 차리더라도 언제 이익을 낼 수 있을지 확신할 수 없었다. 이러다 보니 군사정변으로 권력을 잡은 박정희 정부가 제조업을 육성하겠다고 선언했지만, 제조업을 하겠다고 나서는 기업가들은 많지 않았다. 이때 우리나라 정부는 아주 효과적인 전략, 즉 '채찍과 당근'을 함께 사용했다. 먼저, 기업가들이 달려들지 않을 수 없는 매혹적인 당근으로 '저금리'를 제시했다. <도표 7-3>은 1960년대 우리 나라의 금리 수준을 보여주는데, 사채금리가 높을 때는 60%, 낮아도 40% 수준이었음을 알 수 있다. 농촌에서 잉여생산물이 생겼다고 해서, 이게 다 저축으로 연결되지는 않았기에 당시 우리나라 경제는 항상 자금 부족에 시달렸다. 이런 상황에서 은행이 수출 기업들에게 제공하는 대출금리를 1966년부터 1972년까지 6%로, 이후 인상되었어도 1976년까지 8% 수준을 유지한 것이다.

 

 이는 수출 실적을 내기만 하면, 시장금리보다 50% 포인트 이상 낮은 저금리로 자금을 장기가 대출해준다는 약속이나 다름없었다. 물론 겉으로 수출용 공장을 만들겠다고 약속하고, 저금리를 이용해 지대를 추구하는 기업인들도 있었다. 실제 1972년 8.3조치(경제 내에 존재하는 사채에 대한 원금 및 이자에 대한 지급을 동결하는 긴급재정명령) 때, 사채 전주의 30% 이상이 기업의 주주나 중역 등인 것으로 나타났다. 수출 기업이라면 은행에서 대출을 받아 이를 다시 다른 기업에 대출해주어 엄청난 차익을 거두는 일이 비일비재했던 것이다.

 그러나 당시 우리 정부는 이 기업이 수출만 제대로 한다면 문제 삼지 않았다. 반면 이들 기업이 수출 실적을 내지 못한다 싶을 때는 강력한 철퇴를 가했다. 이 대목에서 '철퇴'라는 표현을 사용한 건 공장 건설 이후 수출 실적이 나오지 않고 원하는 기준에 미달한다고 판단될 때, 성공적인 기업에 강제로 합병시키거나 국영 금융시스템을 통해 자금을 회수하는 것은 물론 심지어 파산이라는 궁극적인 제재를 가했기 때문이다. 가장 대표적인 조치가 1970년대 후반부터 시작된 '중화학공업 합리화' 조치다. 물론 이런 일은 우리 정부만 한 것은 아니다. 일본은 일찍이 1930년대 독일의 관행을 연구한 후 합병을 통해 여러  제조업 부문을 '합리화'했으며, 2차 대전 이후에는 이를 더욱 가속화했다.

 박정희 정부가 야심차게 추진했던 '수출 주도의 경제성장' 전략이 성공할 수 있었던 또 다른 요인은 운에 있다. 1960년대부터 시작된 베트남 전쟁과 물류혁명이 우리나라 등 동아시아 공업국에게 거대한 시장을 열어주었기 때문이다.

 

p342 

 외환위기 이후 기업들의 재무 상태가 건전해지고, 경제 전체의 이자율이 낮아지는 등 긍정적인 면이 크다는 이야기에 반감을 가지는 독자들이 적지 않을 것이다. 1997년 외환위기 이전에 비해 이후 우리나라 내수경기는 제대로 된 호황을 누린 적이 없기 때문이다.

 왜 경제가 성장하고 기업들의 이익이 개선되었음에도 내수경기는 좋아지지 않았을까? 그 이유는 바로 대규모 경상수지 흑자에 있다. 우리나라 경상수지 흐름을 보여주는 <도표 7-7>을 보면, 1997년 외환위기 이후 단 한 번도 경상수지가 적자를 기록한 적이 없을 뿐만 아니라 2010년 이후에는 국내총생산(GDP) 대비 거의 4~8%의 흑자가 이어지고 있음을 확인할 수 있다. 문제는 이렇듯 경상수지 흑자가 발생할 때, 내수경기가 악화되는 경우가 많다는 데 있다.

 이 문제를 이해하기 위해서는 국내총생산의 구성에 대해 알 필요가 있다.

 

GDP = 소비 + 투자 + 수출 - 수입 (1)

GDP - 소비 = 투자 + 수출 - 수입 (2), 여기서 GDP - 소비 = 저축, 우변의 수출 - 수입 = 경상수지 이므로

저축 = 투자 + 경상수지 (3)

저축 - 투자 = 경상수지 (4)

즉, 대규모 경상수지가 발생하고 있다는 뜻은 저축보다 투자가 적다는 것을 의미한다. 이런 현상이 나타난 이유는 외환위기 이후 가계와 기업 등 경제 주체들이 미래에 대해 불안감을 가져서이다. 한보, 기아, 한양 등 위세를 떨치던 대기업마저 속수무책으로 무너지고, 수많은 실업자가 양산되는 것을 본 '트라우마' 때문에 소비와 투자를 줄인 결과, 대규모 경상수지 흑자가 발생한 것이다.

 하지만 문제는 나의 소비는 다른 사람의 '매출'이라는 점이다. 결국 만성적인 경상수지 흑자가 발생한다는 것은 내수 비중이 높은 기업의 영업 환경이 악화되는 것을 의미하며, 이는 기업의 투자와 고용 위축으로 이어지게 된다. 따라서 최근 겪었던 고용 부진 사태의 원인은, 1997년 외환위기 이후 경제 주체의 적극성이 약화된 탓이라고 볼 수있다.

 그렇다면 이 문제를 어떻게 해결할 수 있을까? 사람들의 심리를 바꾸는 것은 매우 어렵고, 시간도 많이 걸리는 일이기에 확실한 처방을 제시하기는 힘들다. 다만 정부의 재정지출 확대 정책이 대안이 될 수 있을 것이다. 2018년 기준 우리 정부의 GDP 대비 재정수지는 1%대 중반의 흑자를 기록한 것으로 추정되며, GDP 대비 정부 부채도 12.2%에 불과하다. 이렇듯 건전한 재정을 활용해서 정부가 기업들의 투자를 촉진할 다양한 인센티브를 제공하고, 공공부문의 일자리를 만드는 한편 경제 전체의 생산성 향상을 유발할 것으로 기대되는 사회간접자본에 적극적으로 투자할 필요가 있다. 물론 1997년 외환위기의 트라우마 때문에 건전 재정에 대한 집착이 존재하는 것 또한 사실이다. 그러나 GDP 대비 경상수지 흑자 규모가 나날이 늘어나는 등 내수경기의 부진이 장기화되는 것을 방치하면 장기적으로 세수의 기반이 더 축소될 수 있다는 것도 고려할 필요가 있을 것으로 판단된다.

 

 데이터 분석에 관한 에피소드 집. 꽤 재미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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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p39

 사람들은 자신이 적극적으로 선택한 것과 선택하지 않은 것에서 발생하는 결과에 대해 상이한 책임감을 느끼기 때문이라고 합니다. 즉, 부모는 백식을 접종하지 않았을 때 아이가 병에 걸려 사망하게 될 경우 느끼는 책임감보다, 백신에 접종했는데 아이가 부작용으로 사망하게 되었을 경우 느끼는 책임감을 훨씬 더 크게 느낀다는 것이죠. 그래서 백신 접종을 하는 것이 더 바람직함에도 불구하고 이를 피하는 경향이 있고 이것을 '부작위 편향(omission bias)' 또는 '무편향 편향'이라고 명명하였습니다.

 최근 기업들 사이에선 이러한 부작위 편향에 대한 경계가 커지고 있는데, 아마존 최고경영자 제프 베조스의 다음 경구가 이를 잘 웅변하고 있습니다. "사람들은 행동의 오류에 지나치게 집착하고, 기업은 실패의 비용을 지나치게 강조한다. 하지만 실패는 비싼게 아니다. 알아차리기 힘들지만 기업에 있어서 가장 큰 비용은 무행동의 오류다."

 

p178

 시카고 대학과 싱가포르 국립대학의 경제학자들은 이와 관련해서 2015년 <젠더 정체성과 가족 내 상대 소득>이라는 흥미로운 분석 결과를 발표한 바 있습니다. 미국 부부를 대상으로 배우자 간 상대 소득을 조사했더니, 예상대로 남편의 소득이 높은 경우가 더 많았습니다. 하지만 그보다 더 놀라운 사실은 남편이 아내보다 약간 더 버는 경우는 매우 많았으나, 반대로 아내가 남편보다 약간 더 버는 경우는 이례적으로 적었다는 점입니다.

 연구팀은 교육,, 직업 등을 고려할 때 아내가 의도적으로 남편보다 적게 벌려는 행동을 한다는 사실을 실증했습니다. 아내는 남편보다 더 많이 벌 기회가 있더라도 아예 취업을 하지 않거나 노동시간을 줄여 대응하는 경우가 꽤 있었습니다. 남편보다 아내가 더 높은 급여를 받을 수 있다면 아내의 노동시간을 늘리고 남편은 노동시간을 줄여 가사에 더 많은 시간을 쓰는 것이 당연히 '합리적' 행동입니다. 하지만 '남편이 아내보다 더 벌어야 한다'는 고정관념이 남편과 아내 모두에게 자리 잡고 있는 탓에 아내가 소득이 높을 경우 남편은 불편해하고 아내는 미안함을 느껴 오히려 아내가 가사에 쓰는 시간이 더 늘어날 수도 있다고 합니다.

 또한 시카고대학의 경제학자 리어나도 버스틴(Leonardo Bursztyn) 교수가 프린스턴대학과 하버드대학의 경제학자들과 함께 경영대학원 MBA 과정을 다니는 여학생들을 상대로 수행한 연구도 흥미롭습니다. 이들이 2017년 발표한 <아내처럼 연기하기 : 결혼시장 인센티브와 노동시장 투자>라는 논문에 의하면, 미혼 여학생들은 시험이나 숙제성적에 있어서는 기혼 여학생과 아무런 차이가 없었으나 사례연구 경쟁 등 공개된 참여형 과제에선 기혼 여학생에 비해 성적이 낮았다고 합니다. 미혼 여학생들의 경우, 능력과 야망이 시험이나 숙제로는 주변에 잘 드러나지 않지만 공개 참여형 과제에서는 모두에게 드러나게 되므로 동료 남학생(연인 또는 배우자후보)에게 나쁜 신호를 줄 것을 우려했기 때문이라고 합니다. 기혼 여학생들은 이런 시그널 효과를 고려할 필요가 없었고, 남학생들은 시험이든 공개 참여형 과제든 모두 미혼과 기혼 간의 차이를 보이지 않았다고 합니다.

 더 나아가 연구자들은 학생들을 대상으로 학교 경력개발센터에 본인의 희망 연봉, 노동시간, 포부 등을 등록하게 하면서 절반의 학생들에게는 그들이 작성한 내용을 경력개발센터 가이드만 볼 것이라고 알려줬고, 다른 절반의 학생들에게는 가이드뿐 아니라 다른 학생들도 회람할 것이라고 했는데, 결과는 놀라웠습니다. 남학생 및 기혼 여학생들의 경우 회람 공개를 기준으로 나눈 두 그룹이 전혀 차이를 보이지 않았습니다. 그런데 미혼 여학생들의 경우, 가이드만 회람하는 그룹에 비해 다른 학생들도 함께 회람하는 그룹은 희망 연봉을 평균 1만 8,000달러 낮추었고 희망 주당 노동시간도 네 시간 줄였습니다. 이런 사실을 놓고 보면 유리천장은 우리의 일상 의식 속에도 뿌리 깊게 존재하고 있는 것 같습니다. 유리천장이란 법과 제도만으로 바꿀 수는 없는 것이고, 남성과 여성 모두가 일상에서 의식적으로 노력해야만 극복할 수 있다고 생각합니다.

 

p218. 팩트체크가 오히려 가짜뉴스를 부각시킨다?

 

 미국 마트머스대학의 브랜던 나이핸(Brendan Nyhan)과 영국 엑서터대학의 제이슨 라이플러(Jason Reifler) 교수는 팩트체크가 별 효과과 없고 심지어 역효과가 날 수도 있다는 연구 결과를 2010년 <사실 교정이 실패하는 경우>라는 논문으로 발표했습니다. 두 사람은 실험에 참가한 사람들에게 이라크의 대량살상무기 위험을 막기 위해 전쟁에 나서야 한다는 조지 W. 부시 대통령의 메시지(가짜뉴스)를 보여준 뒤, 이 중 한 그룹의 사람들에게는 당시 이라크에 대량살상무기가 존재하지 않았다는 미국 중앙정보국의 보고서 내용을 알려주지 않았습니다. 효과는 사람들의 정치적 성향에 따라 달랐습니다. 애초 이라크전쟁에 더 회의적이었던 진보 성향 사람들의 경우, 예상대로 팩트체크를 통해 가짜뉴스를 신뢰하는 비율이 낮아졌지만(18→3퍼센트), 보수 성향 사람들한테서는 반대로 가짜뉴스를 신뢰하는 비율이 오히려 높아졌습니다(32→64퍼센트). 이외에 '세율 인하가 세수를 더 늘렸다는 주장(가짜뉴스)'과 오히려 '세수를 대폭 줄였다는 사실(팩트체크)'를 놓고서도 유사한 현상이 발견됐습니다.

 

p221. 팩트체크보다 중요한 건 언론의 신뢰 회복이다.

 

 너무 당연한 얘기겠지만 가짜뉴스 확산의 가장 큰 자양분은 기존 언론에 대한 불신입니다. 장기간에 걸친 공영방송의 공정성 하락, 끊이지 않는 '기레기 논쟁'등을 고려할 때 우리는 가짜뉴스 확산에 대해 좀 더 경각심을 가져야 할 것 같습니다. 국제 비교를 조금 살펴보겠습니다. 영국 옥스퍼드대학 부설 로이터저널리즘 연구소의 '뉴스 신뢰도 국제비교'에 의하면, 한국은 조사 대상 28개국 중 그리스와 더불어 최하위였고, 글로벌 여론조사 기관인 퓨리서치센터의 미디어 만족도 조사에서도 37개 대상국 중 36위였습니다. 이뿐 아닙니다. [표 21-4]에서 보듯이 전문 언론기관(기존 언론사, 온라인 언론사 등) 신뢰도와, 내용의 질을 확인하기 어려운 플랫폼(SNS 및 각종 검색 서비스 등) 신뢰도 사이의 격차도 국제적인 기준에서 보면 한국이 낮은 편입니다.

 

p224. 국가의 정책은 부자의 선호도에 달려 있다

 

 민주주의의 가장 중요한 구성 요소는 '1인 1표'라고 하는 보통 · 평등선거입니다. 민주주의 국가에서 국민은 신분, 성별, 재산 등과 무관하게 누구나 한 표를 행사하여 자신을 대변할 정치인 선출에 참여합니다. 만약 불평등이 심해진다면 경제적으로 곤궁하게 된 다수의 유권자들은 불평등을 완화할 정책을 내놓는 정치인을 선출하기 때문에 자본주의의 불평등은 끝없이 진행되는 것이 아니라 적절한 선에서 규율되리라는 믿음이 있었습니다.

 하지만 점차 민주주의의 1인 1표 원칙에도 불구하고, 실제로 모든 사람의 이해가 균일하게 반영되지 않을 수 있다는 의심이 커지기 시작했습니다. 미국의 저명한 헌법학자 로버트 달(Robert A. Dahl)은 1961년 그의 저서 《누가 지배하는가(Who Governs?)》에서 "모든 성인이 투표할 수 있는 나라, 하지만 지식, 재산, 사회적 신분, 관료와의 관계 등 모든 자원이 불균등하게 분배되어 있는 나라, 과연 이런 나라는 누가 지배하는 것일까?"라는 질문을 던진 바 있습니다.

 이 분야 연구에서 최근 화제가 된 인물은 미국 프린스턴대하긔 마틴 길렌스(Martin Gilens)와 노스웨스턴대학의 벤저민 페이지(Benjamin I. Page) 교수였습니다. 이들은 1981~2002년 미국에서 시도된 중요 정책 1,779건 중 현실에서 구현된 것과 그렇지 못한 것을 구분하여 어떤 요인이 정책의 실현에 영향을 미쳤는지를 분석했습니다.

 

 [표 22-1 Ⓐ]를 보면 일반인(중위소득 집단)들의 정책에 대한 지지 여부는 정책의 실현에 아무런 영향을 미치지 못하였습니다. 일반인들이 거의 지지하지 않는 정책이나, 압도적으로 지지하는 정책이나 모두 30퍼센트 정도 실현되었습니다. 반면 부유층(소득 상위 10퍼센트 집단)의 지지가 높은 정책일수록 실현되는 정도가 뚜렷이 높아졌습니다. 이들이 거의 지지하지 않은 정책의 실현 비율은 5퍼센트 정도에 지나지 않았지만, 압도적으로 지지하는 정책은 실현 비율이 60퍼센트 이상으로 치솟았습니다. 이를 통해 미국의 정책은 일반인들이 아니라 부유한 사람들의 선호에 반응하여 결정된다는 것을 확인할 수 있습니다. 

 길렌스와 페이지 교수는 미국의 중요한 이익단체들이 각 정책에 대해 어떤 태도를 취했는지도 조사했습니다. [표 22-1 Ⓑ]를 보면 지지하는 이익단체가 많고 반대하는 이익단체가 적을수록 정책의 실현 가능성이 높아진다는 것을 알 수 있습니다. 더 나아가 재계의 이익단체(예를 들면 미국총기협회)와 대중 이익단체(노조 등)을 구분하여 살펴보았는데, 전자가 압도적으로 영향력이 컸습니다. 이를 통해 미국의 정책에는 이익단체의 영향이 작동하며 그 핵심에 재계 이익단체가 있다는 것도 확인되었습니다.

 

p228

 

 [표22-3]의 기부자 항목을 보시면 상원의원의 정책 성향과 해당 상원의원에게 정치자금을 제공한 기부자의 정책 성향 사이의 거리가 0에 가깝다는 것을 볼 수 있습니다. 이것은 의원과 기부자의 정책에 대한 성향이 거의 동일하다는 것, 즉 의원이 기부자의 정책 성향에 따라 의안 투표를 한다는 것을 보여줍니다. 의원들은 심지어 자신의 지역구에서 실제로 자신에게 투표한 유권자의 정책 성향보다도 기부자의 정책 성향에 더 민감하게 반응했습니다. 그리고 해당 지역의 전체 투표자(즉 다른 후보를 찍은 경우를 포함)의 정책 성향에 대해서는 반영도가 매우 낮아서(즉 거리가 멀어서), 전체 국민의 정책 성향과의 거리와 거의 차이가 없을 정도였습니다.

 이처럼 여러 정치학자들의 분석을 통해서 우리는 미국에서 부유층의 돈이 정치에 더 많이 흘러들어 가고 있고, 이를 통해 의원들이 부자들의 의견을 더 많이 따르게 되며, 그 결과 최종적으로 부유층이 원하는 대로 정책이 결정되는 경향이 매우 크다는 것을 확인할 수 있었습니다. 과연 이러한 현상이 미국만의 일일까요? 유럽의 경우 미국보다는 상대적으로 돈이 정치에 끼치는 영향이 적다고 알려졌습니다. 하지만 미국 텍사스대학의 데릭 엡(Derek A. Epp)과 포르투갈 리스본대학의 인히쿠 보르게투(Enrico Borgehtto) 교수가 진행하고 있는 <유럽의 불평등과 임법 의제>라는 연구에 의하면 유럽에서 불평등이 심화될수록 불평등에 직접적인 영향을 끼치는 경제적 이슈들에 대한 논의는 오히려 줄어든다고 합니다. 이들은 이것이 부유층의 정치적 영향 때문일 것으로 추측하고 있습니다.

 

 부자들의 정치 기부금을 제한하라

 

 한국에서는 금권정치에 대한 본격적인 연구는 거의 찾아볼 수가 없는데, 정치자금이 과거에 주로 불법적인 방식으로 모집되었기에 연구가 어려운 것이 아닐까 생각합니다. 재벌들이 저마다 수백억씩 현금을 내서 한나라당 이회창 후보 캠프에 전달한 초유의 '차떼기' 사건이 있었던 게 2002년이었고, 금액은 크게 차이가 났지만 2002년 대선에서 노무현 캠프도 불법 정치자금에서 자유롭지 못했습니다. 수십 년 동안 한국의 정치자금은 음지에서 움직였습니다.

 그 후 2003년 여야 합의로 대대적인 정치자금법 개정이 이루어졌습니다. 이것을 계기로 정치자금 모금의 한도가 대폭 축소되었고, 법인의 정치자금 기부가 원천적으로 봉쇄되었습니다. 법인의 정치자금 기부를 금지한 나라는 전 세계에서 24퍼센트에 불과합니다. 미국의 경우 공식 통계상으로는 금지된 것으로 분류되지만, 특정 후보를 지지하기 위한 민간단체인 슈퍼정치위원회(super political action committee)등을 통해 우회적으로 얼마든지 법인 자금이 정치권에 흘러들어 갈 수 있습니다. 이런 것을 보면 우리의 정치자금법은 대체로 양질이라고 생각합니다. 물론 불법적인 경로로 전달되는 정치자금에 대해서는 민감하게 감시해야 할 것입니다.

 2018년 노회찬 의원이 안타깝게 세상을 뜬 뒤 일부에서 진보 진영에 불리한 정치자금법을 개혁하자는 얘기가 커지고 있습니다. 저 역시 현재 법이 원외의 정치 신인에게는 일방적으로 불리하고, 국고보조금 배분 시 비교섭 단체를 소홀히 다루기 때문에 손을 볼 여지가 있다고 생각합니다. 다만 혹시라도 정치자금법 개혁을 빌미로 정치자금 총액 한도가 대폭 늘어나거나, 부유층과 기업이 정치 기부금으로 영향력을 행사하지 않도록 해야 할 것입니다. 그것은 재산과 소득의 기울어진 운동장이 정치에 그대로 반영되는 일이고, 아마도 고 노회찬 의원께서 가장 바라지 않는 일일 것입니다.

 

책 서문에서도 밝혔지만, 친일(친일이라기보다 일본 극우파의 논리를 그대로 베껴다 쓴) 서적인 반일종족주의의 허구적 주장을 논박하기 위해 호사카 유지 교수가 쓴 책.

이런 책을 써주신 자체가 고맙기도 하고, 한국인으로서 부끄럽기도 하다. 호사카 유지 교수의 전작인, <아베, 그는 왜 한국을 무너뜨리려 하는가>와 <호사카 유지의 일본 뒤집기>, <대한민국 독도>의 3권의 핵심적인 내용을 요약 집대성 했다고 볼 수도 있다.

강제징용, 위안부, 독도 문제에 대해 일본 극우의 허구적 논리를 논박한다는 부분에서 그 가치가 높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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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

『반일 종족주의』라는 책의 주장 중 핵심 부분은 일본 우파의 주장을 그대로 옮겨놓은 것이라고 해도 과언이 아니다. 그렇다면 우선 앞에서 쓴 세 가지 문제(위안부, 강제징용, 독도)에 관해 일본 우파가 주장하는 논리가 언제 어떤 식으로 만들어졌는지를 알아볼 필요가 있다.

(아래 부분은 호카가 유지 교수의 전작들인 『호사카 유지의 일본 뒤집기』, 『아베, 그는 왜 한국을 무너뜨리려 하는가』에도나오는내용들이다)

 그 시작은 1993년 8월 자민당의 미야자와 정권의 관방장관 고노 요헤이가 '고노 담화'를 발표한 직후였다. '고노 담화'는 '위안부'가 일본군에 의해 강제적으로 동원되었다는 사실을 인정했다. 그리고 일본군 '위안부' 피해자들에게 사과와 반성의 마음도 표했다.

 그러자 자민당 내 극우 세력이 반발하고 나섰다. 그들은 '위안부'가 자발적으로 매춘을 한 여성에 불과하다며, 일본군에 의한 강제연행이나 강제 동원은 없었다고 주장했다. 나아가 '고노 담화' 폐기를 목표로 본격적인 활동을 하기 시작했다.

 그 결과 자민당 내에 '역사검토위원회'가 결성되었고, 우파 논객들을 강사로 초빙해 모임을 지속해서 가졌다. 그러면서 자민당 내에 극우 세력이 대두하기 시작했다.

 그로부터 2년이 지난 1995년 8월15일, 일본 정부는 '종전 50주년'을 맞이해 '무라야마 담화'를 발표했다. '무라야마 담화'는 일본의 침략 전쟁과 과거 식민지 지배에 대해 당시 무라야마 도미이치 총리가 세계 앞에 사과하는 내용을 담고 있었다. 그런데 이에 대해서도 자민당 내 극우 세력이 강하게 반발했다.

 일본 우파의 최종적인 목표는 '고노 담화'와 '무라야마 담화'를 부정하는 데 있었다. 그 목표를 달성하기 위해 그들은 후지오카 노부카쓰 교수 등이 내세운 '자유주의 사관'을 도입했다.

 '자유주의 사관' 학설이란 일본이 침략 전쟁을 일으킨 것이 아니라, 아시아를 백인 지배에서 해방시킨 '해방 전쟁'을 수행한 것이라고 주장한다. 또한 난징 대학살이나 '위안부' 강제연행을 부정하며, 일본이 아시아 국가들을 식민지배하면서 근대화시켰다고 강변한다. 그뿐만 아니라 일본의 과거를 사죄하는 태도를 '자학 사관'적 태도라고 매도하면서, 일본의 사과 외교는 일본의 진보 세력에 의해 만들어진 정치적 행위라고 주장한다.

 1993년 '고노 담화'를 발표한 이후 자민당은 호소카와 내각에 정권을 넘겨주고 말았다. 창당 이래 무려 38년 동안 여당의 지위를 유지했던 자민당이 야당으로 전락한 것이다. 이와 같은 현상이 자민당 내 우파의 위기감을 자극해 우파의 논리 구축을 촉진시킨 결과 '자유주의 사관'을 도입하게 되었다.

 이는 1997년 '새역사교과서를 만드는 모임'과 극우 단체 '일본회의' 결성으로 이어졌고, 일본 내에서 역사 왜곡을 심화시키는 주체적 역할을 해나갔다. 그들은 또한 틈만 나면 '좌경화된 일본인의 의식을 바꾸어 놓아야 한다'고 목소리를 높였다.

 그런데 1998년 한국에서 김대중 정권이 성립된 이후, 한국 내에서도 일본과 비슷한 현상이 일어났다. 바로 진보 세력에 대항하는 '뉴라이드'의 등장이다. 한국의 '뉴라이트'는 2000년경에 등장했는데, 일본과의 유사점은 한국 내 보수 우욱이 1998년 정권을 상실한 것을 계기로, 정권 재창출을 위해 보수 우익의 논리를 추구한다는 데 있다.

 2005년 11월 8일에 뉴라이트 전국연합이 발족되었다. 이때 주최 측은 "역사에 대하 보복 정치로 대한민국의 가능성과 장래성이 소진되는 모습을 더 이상 좌시할 수 없다. 대한민국은 새로운 비전으로 무장하고 이를 실천시킬 수 있는 선진화 세력이 주도해야 한다. 건전한 우파의 가치를 일상적이고 전국적으로 국민에게 확산시켜야 한다"라고 천명했다.

 

 이어서 2006년 안병직 서울대 명예교수가 뉴라이트재단을 창립해 초대이사장으로 취임했다. 이런 일련의 움직임은 뉴라이트의 가치관이 한국 진보 세력의 역사관에 대항하기 위해 만들어진 것이고, 결국은 보수 정권의 재창출을 목표로 했음을 보여준다.

『반일 종족주의』의 대표 저자 이영훈 낙성대경제연구소 이사장은 안병직 명예교수 등과 함께 조선시대부터 현대에 이르는 한국 경제사를 연구해왔다고 한다. 일제강점기 조선 경제를 연구한 것으로 알려진 그는 소위 '식민지 근대화론자'인 셈이다. 특히 그는 "일제강점기 한국이 땅과 식량을 수탈당했다는 한국사 교과서의 저술은 왜곡된 것"이라고 주장하며, "한국인들이 식민지 시대를 아는 집단적 기억은 상당 부분 만들어진 것이고 교육받은 것"이라고 주장해왔다.

 본서에서는 그들의 정치적 색깔을 문제시하는 것이 아니라, 그들의 논리와 주장을 문제로 삼았다. 본서는 특히 강제징용 문제, 일본군 '위안부' 문제, 독도 문제 등에 관한 그들의 논리가 매우 잘못되었음을 입증해 나간다.

 

(5%)

 필자가 분석한 결과, 특히 이영훈과 이우연 낙성대경제연구소 연구원의 글에는 큰 결함과 왜곡과 은폐 등이 다수 발견되었다. '노예근성'으로 가득 찬 잘못된 주장을 대중을 향해 펼치는 것은 정말 위험하다.

 성병을 앓고 있는 환자가 자신이 성병 보균자라는 사실을 모른 채 성관계를 하면 그 피해는 시간이 흐를수록 점점 확산되어 많은 피해자를 양산하게 된다. 하지만 스스로 병을 인지하지 못한 상태에서 벌어진 일이기 때문에 비난할 명문이 크게 약화된다.

 그런데 자신이 성병 보균자라는 사실을 알고 있으면서도 그 사실을 숨긴 채 불특정 다수와 성관계를 가졌다면 상황은 정반대가 된다. 어떤 이유로도 용서될 수 없는 명백한 범죄일 뿐만 아니라, 재론의 여지 없는 '악마' 그 자체라고 할 수 있기 때문이다. 사람들이 생각하는 이영훈이나 이우연은 과연 어느 부류에 속해 있는지 자뭇 궁금해진다.

 

 

(28%)

 먼저 (1), 즉 국제법이나 국제관계에서 식민지배 피해에 대한 배상 같은 건 인정하지 않는다는 주장인데, 이는 가해자인 제국주의 국가들의 논리일 뿐이다. 그리고 이번 대법원 판결은 개인이 국가에 대해 제기한 소송에 대한 판결이 아닌, 개인이 기업에 제기한 소송이므로 기업의 범죄 행위가 인정되면 기업이 개인에게 배상해야 한다는 것은 당연하다.

 실제로 2012년 5월 당시 신 일본제철(현 일본제철)이 패소하면서 4명의 한국인 강제징용 피해자(원고)에게 1억 원씩의 위자료를 지급하라고 한국 대법원이 선고를 내렸을 때, 기업 측은 처음에 그렇게 깨끗이 처리하고 싶다고 밝히기도 했다. 한국 대법원 판결대로 하겠다는 의사 표현을 한 것이다. 하지만 얼마 후 일본 정부가 끼어들어 방해하면서 개인 대 기업의 재판을 마치 나라 대 나라의 재판인 것처럼 왜곡했다. 그러므로 본래의 입장, 즉 개인 대 개입의 입장에서 생각하면 일본 기업은 당연히 한국인 피해자 개인에게 배상해야 마땅하다.

 

 다음은 (2)에서 말한 샌프란시스토 조약은 일본과 연합국이 맺은 조약일 뿐, 한국은 조약의 당사자가 아니다. 그러므로 샌프란시스코 조약의 조문은 기본적으로 한국을 구속하지 못한다. 그리고 샌프란시스코 조약상 한국이 일본에서 분리된 지역으로 규정되었으니 한국이 일본에 배상을 청구할 수 없다는 주장은 참으로 이해하기 어려운 논리다.

 샌프란시스코 조약 4조는 일본국 및 그 국민에 대한 피해국 당국 및 그 주민의 청구권 처리는 일본과 피해국 당국 사이에서 특별히 결정하는 주제로 한다고 밝혔으므로, 일본은 한국의 청구권 문제를 특별히 결정해야 했다. 일본이 각 나라와 개별적으로 협상해야 한다고 연합국과 일본이 합의한 이와 같은 샌프란시스코 조약의 조문으로 한국은 일본에 보상이나 배상을 요구할 수 있다. 한국이 일본으로부터 분리된 지역이므로 배상을 요구할 수 없다는 주익종의 논리가 어디서 나오게 되었는지 이해할 수가 없다.

 

 그리고 (3)의 주장, 즉 한일회담 첫 회의에서 한국 측은 배상이 아니라 한국 측 재산의 반환을 청구한다는 입장을 일본 측에 밝혔기 때문에, 이제 한국은 일본에 배상을 요구할 수 없다는 말도 이상한 논리다. 한국이 일본에 한국 측 재산의 반환을 요구했다고 해도 국민이 그것을 청구한 것이 아니므로 국민 청구권은 남아 있기 때문이다.

 

 (4)에서는 미국이 한국 내의 일본인 재산을 몰수해서 한국으로 인도했으므로, 한국의 대일 청구권은 어느 정도 충족되었다고 주장했다. 그런데 한국 입장에서 볼 때 일본인의 한반도 진출 자체가 침략 행위이자 불법 행위였으므로 한국 내에 남은 일본인 재산은 원래 한국의 재산이고, 그 재산은 당연히 한국으로 귀속되어야 하는 성격을 띤다. 따라서 한국인들이 배상을 요구하는 문제와는 별개다. 더구나 일본은 한국을 35년간이나 불법으로 지배했으므로 몰수한 일본인의 재산으로 충족되는 한국 측 피해는 극히 일부에 불과하다고 할 수 있다. 그러므로 몰수한 일본인의 한국 내 재산으로 배상이 어느 정도 상쇄되었다는 주장은 터무니없는 주장이다.

 

 (5)에서는 일본이 일본 국민과의 형평상 살아 돌아온 생환자에 대한 보상은 불가능하다고 하는 것은 일본 측 입장에 불과하다. 일본은 가해자이기 때문에 살아서 한국으로 돌아온 한국인들에게는 당연히 보상과 배상을 해주어야만 한다. 2018년 10월 한국 대법원의 확정판결은 살아 돌아온 생환잗르이 낸 소송에 대한 선고였다. 일본이 피해당한 한국인에 대해, 특히 생환자에 대해 보상과 배상을 하는 것은 지극히 당연한 일이다. 더구나 1965년 청구권 협정에 생환자의 보상금이나 보상금이 포함되지 않았으니 개인이 기업에 배상금을 청구할 권리는 그대로 남아 있다.

 

 (6)에서는 1965년 4월 17일 이동원 - 시이나 합의로 개인 청구권이 소멸되었다는 주장이다. 하지만 그 합의는 당시 대한민국 정부의 입장일 뿐, 피해를 입은 당사자들의 입장이 아니다. 비록 국가에 의해 국민의 청구권이 소멸되었다고 해도 국민들이 동의하지 않으면 소용이 없다. 국가의 주체는 국민이기 때문이다.

 더구나 한일회담을 통한 국가 대 국가의 교섭에 있어서도 일본 정부는 한국 측에 성실한 태도를 보여주지 않았다. 일본 측은 한일회담에서 당초부터 한국 정부가 증거를 제출하지 않는다면 보상할 수 없다는 태도를 유지했다. 그래서 한국 정부는 법률관계와 사실관계를 밝히기 위해 일본 정부에 피징용자들의 피해 등에 관한 자료 제출을 요구했다.

 실제로 일본 정부는 당시 한일국교정상화를 준비하기 위해 각 기업에 명령하여 피징용자의 미불 임금 등에 대해 조사했다. 그 결과 일본 정부는 1953년 시점에서 각 기업의 피징용자에 관한 정보를 수집한 상태였다. 그 자료는 기업명, 미불금의 종류와 액수, 피징용자 인원수 등에 관한 정보였다.

 하지만 일본 정부는 그 자료를 한국 측에 넘겨주지 않았다. 주익종은 한일회담 당시 '애당초 한국 측이 청구할 게 별로 없었다'고 주장하지만, 그것은 일본 측이 자료를 은닉한 결과였다. 결국 일본 측의 불공평한 태도로 결정된 1965년 한일 청구권 협정 자체가 근본적으로 문제를 안고 있으므로, 일본 측도 1991년에는 개인 청구권이 소멸되지 않았음을 스스로 인정하게 되었다.

 

일본 정부는 개인 청구권을 인정했다.

 

 2018년 10월 한국 대법원의 판결이 확정되었을 때 당시 일본 외무상 고노 타로도 11월 14일 일본 국회 외무위원회에 참석해 개인 청구권이 남아 있음을 인정했다. 그런데 개인 청구권이 법적으로 구제받지는 못한다고 말을 바꾸었다.

 그러나 개인의 배상 문제가 1965년의 청구권 협정에 포함되지 않았음을 일본 정부는 역시 인정했다. 한국 대법원 판결에 대한 일본 정부의 견해는 일본의 국회의사록에서 다음과 같이 확인할 수 있다.

(201년 11월 14일 일본 국회 중의원 외무위원회 회의록 참고)*

 

 이상의 인용문을 보면 2018년 11월 시점에서도 일본 정부는 개인 청구권은 소멸되지 않았고, 배상 문제는 한일 청구권 협정에 포함되지 않았다고 분명히 인정했다. 그런데도 일본 측은 양국이 약속했기 때문에 재판에서 개인은 구제받지 못한다는 또 다른 주장을 내놓았다. 일본 측은 한국이 1965년에 일본과 맺은 약속을 어겼다고 강변하기 시작했다.

 일본 정부의 주장은 항상 국가 대 국가의 약속이라는 말로 마지막을 장식한다. 그러나 개인 청구권이 남아 있다는 뜻은 개인이 해당 기업에 보상이나 배상을 청구할 수 있다는 의미다. 더구나 이번 소송들은 한국인 피해자가 일본이라는 국가를 상대로 제기한 것이 아니라, 개인이 기업을 상대로 소송을 제기했다. 그리고 일제 강점기의 불법성에 의해 기업이 피해자들에게 불법 행위를 저지른 사실에 대한 배상을 대법원이 명령했기 때문에 국가는 이번 판결 문제에서 빠지고, 전범 기업들이 성실히 판결을 이행하는 것이 올바른 순서다.

 기업이 판결을 지키지 않는다면 기업의 한국 내 자산을 압류해 현금화한 뒤 피해자들에게 나눠줘야 한다. 그것만이 답이다. 한국 측의 판결 결과 집행에 대해 일본 정부가 한국에 대한 경제 보복을 다시 시작한다면, 그 결과는 일본의 국제적 고립으로 이어질 뿐이다.

 

 

(32%)

 미군의 포로 심문 보고서에는 다음과 같은 내용도 있다.

 그녀들은 '위안부'가 포로가 되었음을 보도하는 리플릿은 사용하지 말아 달라고 (미군에게) 요망했다. 그녀들이 포로가 되었다고 일본군이 알게 된다면 아마도 다른 곳의 '위안부'들의 생명이 위험해지기 때문이다.

 

 위와 같이 포로가 된 조선인 '위안부'들의 증언은, 군 위안소에 있는 조선인 '위안부'들이 언제라도 일본군에 의해 살해당할지도 모르는 상황에 놓여 있다는 것을 보여준다. 이는 일본이이 아닌 조선인을 비롯한 타민족 '위안부'들의 운명이었다.

 이 심문 보고서 내용은 그녀들이 일본군의 성 착취의 도구였고, 일본군이 적군에 밀리면 언제든지 증거 인멸을 위해 조선인을 비롯한 타민족 '위안부'들을 살해하고 도주할 수 있었다는 사실을 상기시키는 이야기다. 그런데 이영훈은 이런 부분을 인용하지 않고 철저히 외면했다. 그러면서 그는 다음과 같은 억지 주장을 했다.

 

 요컨대 미군의 심문기록은 위안소가 군에 의해 편성된 공창제로서 고노동, 고수익, 고위험의 시장이었음을 더없이 생생하게 뒷받침하고 있습니다.

 

 관련 연구자라면 모름지기 '위안부'들의 상황을 정확하게 파악해야 한다. 여성들은 취업 사기로 속아서 버마로 연행되었고, 본인이 원하지 않은 매춘을 강요당했지만, 전차금 때문에 도망갈 수 없는 상황에서 성을 착취 당했다. 계약 기간이 끝나면 귀국 허가가 나왔다 하더라도 계약 기간 중에는 폐업의 자유가 없었던 '성노예'였다는 것은 엄연한 사실이다.

 그러나 이영훈은 자신의 논리 - '위안부'들은 좋은 대우를 받았고, 돈도 많이 벌었으며, 자유롭게 지내며 폐업도 자유롭게 했으니 성노예가 아니었다 - 라는 논리에 유리해 보이는 부분만 인용했고, 자신의 논리에 맞지 않는 부분은 외면했다. 그와 같은 행위가 학자로서 올바른 태도인지 묻지 않을 수 없다.

 

(35%)

 한편 안병직은 박치근의 1943년 7월 29일 일기 일부분을 거론하며 일본군이 결혼을 위해 '위안부'를 폐업한 여성 2명에게 명령을 내려 다시 '위안부'로 삼은 실제 사례를 소개했다. 다음은 그날의 박치근 일기 전문이다.

 

 1943년 7월 29일 목요일, 흐리고 비

 인센 요마(Yoma) 거리의 무라야마 씨 댁에서 일어나 아침을 먹었다. 아라이 씨와 병참에 가서 콘돔을 배급받았다. 위안부 진료소에 가서 등록되지 않은 2, 3인의 위안부에게도 진찰을 받게 했다. 이전에 무라야마 씨 위안소에 위안부로 있다가 부부 생활하러 나간 하루요(春代)와 히로코(弘子)는 이번에 병참의 명령으로 다시 위안부로서 김천관에 있게 되었다더라. 중국인 거리에 들러 저녁에 인센으로 돌아와 저녁을 먹고 밤 1경에 자다.

 

 안병직은 '위안부'로 있다가 결혼해서 위안소를 나간 두 여성이 병참의 명령으로 다시 '위안부'가 된 사례를 거론하면서 '위안부'들이 자유롭게 폐업할 수 없었다고 인정했다.

 이처럼 '위안부'로 있다가 결혼하게 된 여성들이 병참의 명령으로 다시 '위안부'로 돌아온 경우는 어떤 경우일까. 생각하면 슬픈 일이다. 두 사람은 누구하고 결혼했을까? 다시 '위안부'로 돌아와야 한다고 명령이 내려졌을 때, 그녀들과 그녀들의 남편들은 그 명령을 어떻게 받아들였을까? 여러 생각이 교차하지만, 안병직은 다음과 같이 또 하나의 포로 심문 보고서를 인용하면서 전투지, 최전선에서의 위안소에서 폐업이 어려웠던 사실을 설명했다. 아래 인용문의 큰따옴표 안의 이야기는 미군의 포로 심문 보고서 '연합국 최고사령부 연합번역통역 조사보고'에 나오는 내용의 재인용이다.

 

 그리고 다 같은 버마라고 하더라도 전투지에서는 폐업이 더욱 어려웠던 것으로 보인다. 왜냐하면, 외국에서 일본군의 보호를 받지 못하면 위안부들에게는 위안소의 밖이 바로 지옥이기 때문이다. "어느 여자든 이자를 합하여 그녀의 가족에게 지불한 돈을 갚을 수 있을 때, 그녀는 조선까지의 무료귀환교통권을 받고 자유로운 것으로 간주되었다. 그러나 전쟁 상황 때문에 포로(미군에 체포된 포주)가 데리고 있는 그룹의 어느 누구도 지금까지 위안소를 떠나는 것이 허용되지 않았다. 1943년 6월에 제15군사령부가 빚으로부터 자유로운 그녀들을 고향으로 돌아가도록 주선했지만, 이런 조건을 충족하고 귀환하기를 원하는 여자도 머물러 있도록 쉽게 설득되었다.

 

 위의 인용문으로, 전쟁이라는 특수 상황 때문에 전차금을 다 상환하여 폐업할 수 있는 상황이 되었다 하더라도 '위안부'들은 일본군의 보호를 받지 못하게 될 조선으로의 귀환을 포기할 수밖에 없었다는 사실을 우리는 확인할 수 있다. 1944년 8월 10일 조선인 '위안부' 20명과 함께 미군 포로가 된 일본인 포주들에 대한 심문 보고서가 따로 있고, 그것이 위에서도 인용한 '연합국 최고사령부 연합번역통역 조사보고'인데, 이 보고서에는 그들이 생포되기 전에 "네 명은 여행 중에 죽고 두 명은 일본인 군인으로 오인되어 총살되었다"고 기록되어 있다. 그렇게 생명의 위협이 항상 존재하는 것이 최전선이었다. 그런 상황에 있던 최전선으로 강제연행된 조선인 여성들에 대해 이영훈처럼 단정적으로 '그녀들은 돈을 벌기 위해 갔다'고 말하는 것은 대단히 부적절하다.

 이와 같이 버마의 위안소에 끌려간 '위안부'들의 생활은 이영훈이 말하는 "어디까지나 위안부 개인의 영업"이 절대 아니었다. 이영훈은 이와 같은 내용이 담긴 『일본군 위안소 관리인의 일기』를 출판하기 위해 자신도 연구회에 참여했고, 자신의 연구소에서 출판한 이 책 내용과는 정반대의 주장을 태연하게 책 『반일 종족주의』에 서술하기까지 했다.

 이영훈은 "위안부들 역시 전쟁 특수를 이용하여 한몫의 인생을 개척한 사람들"이었다고 하면서 '위안부'들이 거금을 벌었다는 식으로 주장한다. 그러나 안병직은, 전시 하이퍼인플레이션을 생각할 때 버마에서는 매달 11~14%의 인플레이션이었으므로 가장 많이 벌었다고 일본 우파가 야유하는 버마의 '위안부' 피해자 문옥주 씨의 경우에도 1943년 4월부터 1945년 9월까지 번 돈이 약 26,000엔이었지만 그 금액은 인플레이션으로 결국 500~1,000엔의 가치밖에 없었다고 하면서, 문옥주 씨의 예금통장에 관한 고바야시 히데오 교수의 현재 금액으로의 환산을 소개했다. 안병직은 그런 화폐를 해외에서 조선으로 송금할 때와 조선에서 인출할 때는 상당한 제약이 있었을 것이므로 '위안부'들이 돈을 많이 벌었다고 할 수 없다고 덧붙였다. 그리고 군인들은 위안소를 이용할 때 군표를 사용했는데, 군표가 패전으로 휴지 조각이 되어, 결국 패전까지 '위안부업'을 한 여성들은 한 푼도 벌지 못한 것이 사실이다.

 한편, 문옥주는 그녀가 고생해서 저축해 고향으로 송금한 우체국예금을 끝내 돌려받지 못했다. 문옥주는 그녀를 돕는 모리카와 마치코와 함께 일본의 우정성에 예금 지급을 요구하는 운동을 시작했다. 그러나 우정성은 1965년 한일 청구권 협정으로 모두 끝난 일이라고 해서 예금 지급을 거부했다.

 일본의 우파는 문옥주처럼 위안부들은 돈을 벌기 위해 자발적으로 '위안부'가 된 매춘부라고 주장한다. 이영훈의 주장도 이에 가깝다. 그러나 '제4차 위안단'의 조선인 '위안부'들은 조선총독부의 계획하에 취업 사기로 모집되었고, 부상한 병사를 대상으로 간호사처럼 일한다는 말에 속아서 버마까지 갔다. 그렇게 해서 그녀들은 본인의 의사에 반해 성매매를 강요당했다.

 전차금을 받았기 때문에 그녀들은 구속된 상태였고, 계약 기간 동안 '성노예'였다. 그녀들이 돈을 벌기 위해 해외로 간 것은 사실이지만, 매춘을 하리라고는 전혀 생각하지 않았다. 최전선까지 데려간 후 이제 도망갈 수 없으니 매춘을 해야 한다고 강요하는 수법은 사람으로서 할 짓이 아니다. 일본군과, 군에 고용된 포주들은 태연하게 여성에 대한 인권유린을 저지른 것이다.

 전차금을 모두 상환해서 고향으로 귀국해도 좋다는 허가가 내려져도 그녀들은 최전선이라는 특수 상황 때문에 생명의 위험을 무릅쓰면서까지 귀국할 수는 없었다. 결국 조선인 '위안부'들은 계속 일본군에 구속된 상태가 되었다. 최전선으로 배치된 것이 조선인 '위안부'들의 특징이다. 일본인 '위안부'들은 보다 안전한 후방 지역에 있었다는 다음과 같은 조사 기록이 있다.

 

 후방지역에서는 위안소에 일본인 여자들도 있었는데, 예컨대 메이묘(Maymyo)에는 8개 위안소 중에서 일본인 위안소가 둘이 있었으나, 거기로부터 전방에는 일본인 위안소는 없었다.

 

 위에 인용한 연합군의 조사 기록에 의하면 일본인 '위안부'들은 조선인 '위안부'들보다 안전한 후방 지역에 배치되었다. 모든 지역에서 그랬다면 일본군은 조선인 '위안부'들을 최전선에 배치했다는 민족적 차별을 자행했던 것이다. 아무도 자발적으로 가지 않는 최전선에 일본군과 조선총독부가 선정한 포주들이 조선인 여성들을 취업 사기로 속여서 연행했다는 사실이 조선인 '위안부'가 자발적으로 '위안부'가 된 게 아니라는 진실을 말해주고 있다.

 그런 진실을 왜곡하는 일본 우파나 한국의 신친일파들은 하늘이 용서하지 않을 인권유린주의자들이다.

 

(49%)

 미즈시 시게루는 자신이 그린 만화책 『카란코론 표박기 게게게 선생 만히 말한다』 중에서 「종군위안부」라는 제목으로 8페이지에 걸쳐 파푸나 뉴기니 코코포에서의 경험을 상세히 소개했다.

(해당 만화를 소개한 포탈 글을 Link)

http://m.todayhumor.co.kr/view.php?table=bestofbest&no=401932

 

미즈키 시게루의 종군위안부 만화

미즈키 시게루가 그린 종군위안부 관련 에세이 만화가 있길래, 번역. 소개해 본다.코믹 에세이 종군위안부(従軍慰安婦) (카랑코롱 표박기 中)전시중, 전쟁터의 병사들 사이에서는 종군위

m.todayhumor.co.kr

 

 

(88%)

 문재인 정부는 위안부 합의를 파기하지 않았다.

  『반일 종족주의』 3부 '종족주의의 아성, 위안부'에서 이영훈은 "예컨대 박근혜 정부는 일본 정부와 이 문제를 최종적으로 완전히 청산한다는 협약을 체결하였습니다. 그렇지만 문재인 정부는 이를 파기하였습니다"라고 썼다. 그러나 이 주장은 크게 틀린 말이다. 결론부터 말하면, 문재인 정부는 일본과의 위안부 합의를 파기하지 않았다.

 2018년 1월 9일 문재인 정부는 위안부 합의에 대한 검증을 실시하여 후속 조치를 발표하면서 일본 정부에 파기라든가 재협상을 요구하지 않겠다는 입장을 분명히 했다. 2015년 12월 28일 한일 두 나라가 맺은 위안부 합의가 양국 간의 공식 합의였으므로 이를 일방적으로 파기하거나 재협상을 요구하지 않겠다는 뜻이었다. 그러나 문재인 정부는 이 합의로 위안부 문제가 다 해결되었다고는 생각하지 않는다고도 했다. 이 견해는 위안부 합의 이후 UN 인권위원회가 줄곧 견지해온 견해와 동일하다.

 그 후 2018년 11월 21일 한국의 여성가족부는 위안부 합의헤 의해 설립된 화해치유재단 해산의 법적 절차에 들어간다고 공식 발표했다. 화해치유재단은 한일 위안부 합의에 입각해 '한국 정부가 위안부 피해자들의 지원을 목적으로 하는 재단을 설립하고, 이에 일본 정부가 일본 예산으로 자금을 일괄 거출한다'는 약속에 따라 2016년 7월 서울에 설립되었다.

 일본이 출연한 기금은 10억엔(약 103억원)이었다. 재단의 임무는 위안부 피해자 및 유족에게 현금을 지급하는 것이었고, 재단은 해산 결정 시검에서 피해자 34명, 사망자 58명(유족이 대신 기금 수령)에게 총 44억 원의 '상처 치유금'을 지급했다.

 그런데 문재인 정부가 화해치유재단을 해산한 것은 위안부 합의를 파기하기 위해서가 아니었다. 재단 이사장들과 이사들이 모두 사임하여 5명의 직원만 재단을 지키는 상황에서 재단 유지비용만 들어가는 낭비를 막기 위해서였다. 그런 다음 문재인 정부는 남은 59억 원 정도의 일본 지원금을 일본 정부와 협의해 적절하게 사용하겠다고 발표했다.

 따라서 이영훈의 '문재인 정부가 (위안부 합의를 ) 파기했다'는 주장은 엄연한 거짓이다. 화해치유재단을 해산하여 한일 위안부 합의 파기를 주장해온 것은 문재인 정부가 아니라 '위안부' 피해자 여성들과 지원 단체들이다. 피해자들을 지원하는 나눔의 집은 논평을 통해 "피해자를 철저히 배제한 채 한일 정부가 정치적 야합으로 발족한 화해치유재단의 해산 소식에 나눔의 집 일본군 '성노예' 피해 할머니 모두 기뻐했지만, 일본이 보애 온 10억 엔 처리 문제는 여전히 남아 있다"며 "피해자들 요구대로 일본이 보내온 10억 엔의 조속한 반환을 바라며 이를 바탕으로 2015년 한일 위안부 합의안을 파기 또는 무효로 하는 데 정부가 힘써주기를 바란다"고 밝혔다. 이와 같은 나눔의 집 논평을 봐도 위안부 합의 파기를 원하는 것은 문재인 정부가 아니라 피해자들이었다.

 나눔의 집에 따르면 이옥선 할머니는 "일본의 돈을 받아 재단을 설립한 것은 이전 정부가 할머니들을 도로 팔아먹은 것과 같다. 이제라도 해체돼 다행"이라고 말했고, 강일출, 박옥선 할머니 등도 "일본의 사죄도 받을 수 있도록 정부에서 힘써 주었으면 좋겠다"고 하면서 "일본이 보낸 돈 10억 엔도 하루빨리 돌려주길 바란다"고 했다.

 이영훈은 사실을 왜곡하여 문재인 정부가 위안부 합의를 파기했다고 주장했다. 하나하나 왜 사실대로 정직하게 쓰지 않고 일부분만을 취해서 그럴싸하게 거짓을 만들거나 왜곡시켜 사람들을 현혹시키는 걸까?

 

(89%)

 지금부터는 필자의 일제강점기에 대한 견해를 밝히고자 한다.

 1905년 11월 일본 제국주의는 한국과 강제로 을사늑약을 체결했다. 그로 인해 한국은 일제에 외교권을 박탈당했고, 일본은 한국을 자신들의 보호국으로서 침탈해버렸다. 한국의 많은 역사학자들처럼 필자 역시 을사늑약 자체가 무효라는 입장이다. 을사늑얀에 고종 황제의 옥새가 찍혀 있지 않았기 때문이다.

 당시 대한제국은 국회가 없어서 황제의 윤허로 국가의 대사가 결정되었다. 그러므로 외국과의 조약 승인 절차에는 반드시 황제의 인가가 필요했다. 따라서 인가를 의미하는 옥새가 찍혀 있지 않았다는 것은 그 조약이 무효임을 뜻한다. 또한 을사늑약을 비롯하여 을사늑약 체결이 토대가 되어 조인된 19010년 8월의 한일병합조약도 당연히 무효이다. 원천적으로 무효인 협정이나 조약이 1945년 8월 15일 일본 패전까지 유효인 것처럼 시행되었다.

 일본 측은 독도가 1905년 2월 22일에 시마네현 오키섬에 편입되었으므로 을사늑약 체결 이전의 문제라며 독도가 일본 영토라고 주장한다. 하지만 그것은 일본 국내법으로 볼 때만의 이야기다. 독도가 일본 영토가 되었다고 일본이 한국에 알린 시점이 1906년 3월이었다. 을사늑약 체결 이후이므로 국제법상 독도 편입 자체가 무효다

 1910년 8월 22일 한일병합조약 체결, 8월 29일의 조약 시행 이후 이루어진 한국에 대한 강제 동원, 일본군 '위안부' 강제연행, 침략 전쟁을 위한 한국인 지원병 모집이나 한국인 징병제 등도 모두 원천적으로 무효다. 을사늑약이나 한일병합조약 자체가 불법이자 무효이기 때문이다.

 1965년 6월 22일 체결된 한일기본조약 제2조에는 한국과 일본 간에 "1910년 8월 22일 이전에 체결된 모든 조약 및 협정은 이미 무효"라고 기재되어 있다.

 이 조문은 1910년 8월 22일 체결된 한일병합조약을 비롯해 그 이전에 체결된 한일 간의 모든 조약과 협정이 원천적으로 무효라는 뜻이다. 그러나 일본은 이 조문을 패전한 1945년 8월 15일 이후부터 모든 조약과 협정이 무효라고 해석한다. 그것은 일제강점기를 합법으로 정의하고 싶은 일본의 입장일 뿐이다. 또한 일본 법원은 일제강점기 자체는 합법이라는 입장을 유지한 채 한국인 피해자들이 제소한 재판을 기각하거나 한국 측을 패소하게 만들었는데, 이 역시 일본 측 입장에서 선고된 판결에 불과하다.

 한국 측의 법적 입장은 일제강점기가 어디까지나 '불법'이고, 당시의 조약 및 협정이 원천적으로 무효라는 것이다. 그렇기에 한국 대법원이 일제강점기의 불법성을 거론하면서 일제강점기에 벌어진 한국인 강제 징용자에 대한 일본 기업의 불법성을 이유로 일본의 전범 기업에 유죄를 선고한 것은 당연한 귀결이다. 한국 내의 법적 입장을 반영한 판결이므로 다른 나라가 개입하는 것은 부당하다.

 그리고 일본군 '위안부', 한국인 학도병과 한국인 징병자 문제도 모두 일제강점기에 일제의 침략이 원인이 되어 생긴 문제이므로 죄다 불법이다.

 이처럼 한국의 입장이 분명한데도 신친일파들은 일본 측 입장을 옹호한다. 여기는 한국이다. 당연한 말이지만 한국의 법이나 관습이 통하는 곳이다. 예를 들면 싱가프로에서는 여성에 대한 성폭력 범죄는 태형에 처해진다. 맞다가 엉덩이가 찢어지면 상처가 회복된 후에 다시 형을 속행한다. 외국인에 대해서도 똑같이 형을 집행한다. 이렇듯 어느 나라든 자국의 법이 적용된다.

 한국에는 한국법이 있다. 그런데도 한국에서 일본법을 주장하는 사람들이 있다는 것은 아이러니하다. 자국을 침략한 나라를 옹호해주고 이상한 논리로 침략국을 참싸는 데도 그것이 옳다고 한다면, 자라나는 아이들이 무엇을 배운단 말인가.

 신친일파 청산은 국가의 존망과도 연결된다. 친일 청산은 반드시 이뤄져야 하고 신친일파의 잘못된 사상도 바로잡아야 한다.

 

 하루키의 초기 3연작의 마지막 작품.

바람의 노래를 들어라, 1973년의 핀볼과 이어지는 작품이다. 연작이긴 하지만 개별 작품마다 완결성을 가지고 있기도 하다.

 

이번이 재독인데 작품의 길이에 비해서 무언가 어정쩡하게 끝나는 느낌이 있다. 내가 읽은 작품은 개정판 이전의 단권으로 나온 책(1995년 출판)인데 2009년 개정판은 무엇이 바뀐 게 있을지 다시 읽어봐야 할 것 같다.

하루키 자신도 양을 쫓는 모험이 나중에 좀 미흡한 느낌이었다라는 이야기를 한 적이 있다고 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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p97

 "어쨌든 그는 그 돈으로 정당과 광고를 장악했고, 그 구조는 지금까지도 이어지고 있지. 그가 표면에 나서지 않는 이유는 나설 필요가 없기 때문이야. 광고업계와 집권 정당의 중추를 장악하고 있으면, 그야말로 불가능한 일이 없거든. 광고를 장악한다는 게 어떤 것인지 자네는 알겠나?"

 "아니."

 "광고를 장악한다는 건  출판과 방송의 대부분을 장악한 게 되는 거야. 광고가 없는 곳에는 출판과 방송이 존재할 수 없지. 물이 없는 수족관과 같다고나 할까. 자네가 보게 되는 정보의 95퍼센트까지가 이미 돈으로 매수되어서 선별된 것이라구."

 "아직 잘 모르겠어"라고 나는 말했다.

 "그 인물이 정보 산업을 장악하고 있다는 데까지는 이해하겠는데 어덯게 그가 생명 보험 회사의 PR지에까지 권력을 행사할 수 있는 거지? 그건 대형 대리점을 통하지 않고 직접 맺은 계약이잖아."

 내 친구는 헛기침을 하고 나서 완전히 식어 버린 보리차를 마셨다.

 "주식이야. 놈의 자금원은 주식이거든. 주식 조작, 매점매석, 탈취, 뭐 그런 거지. 그를 위한 정보를 그의 정보 기관이 수집하고, 그것을 그가 취사 선택하는 거야. 그중 매스컴에 흘러 나오는 것은 극히 일부고, 나머지는 선생꼐서 자신을 위해서 쥐고 있는 거지. 물론 직접적으로는 아니지만 협박 비슷한 짓도 하지. 협박이 통하지 않을 경우에 그 정보는 매치 펌프용으로 정치가에게 흘리는 거야."

 "어느 회사든 약점 한두 가지쯤은 있다 이거군."

 "어떤 회사든 주주 총회에서 폭탄 선언 같은 걸 듣는 건 원치 않거든. 그러니 대개는 하라는 대로 하게 돼 있지. 다시 말해서 선생께서는 정치가와 정보 산업과 주식이라는 삼위 일체 위에 군림하고 있는 셈이지. 이젠 이해하겠지만 PR지 하나쯤 뭉개버린다든지 우리를 실업자로 만드는 일쯤은 그에겐 삶은 달걀 껍질 까기보다도 간단한 일이라구."

 

p101

 우리는 우연의 대지를 정처 없이 방황할 수도 있다. 마치 어떤 식물의 날개 달린 종자가 변덕스런 봄바람에 날려오듯이.

 그러나 그와 동시에 우연성 같은 것은 애당초 존재하지 않는다고도 할 수 있다. 이미 일어나 버린 일은 명확하게 일어나 버린 일이며, 아직 일어나지 않은 일은 아직 명확하게 일어나 버린 일이며, 아직 일어나지 않은 일은 아직 명확하게 일어나지 않은 일이다. 다시 말해서 우리는 배후의 '모든 것'과 눈앞의 '제로' 사이에 끼인 순간적인 존재고, 거기에는 우연도 없고 가능성도 없다는 뜻이다.

 그러나 실제로 그 두 가지 견해 사이에는 별다른 차이가 없다. 그것은(대개의 대립되는 견해가 그렇듯이) 두 가지의 서로 다른 이름으로 불리우는 똑같은 요리 같은 것이다.

 

p157

 나는 두 잔째 위스키를 제일 좋아한다. 첫 잔째의 위스키로 한숨 돌린 기분이 되고, 두 잔째의 위스키로 머리가 정상이 된다. 석 잔째부터는 맛 따위는 없다. 그저 위(胃) 속에 들어부을 뿐이다.

 

p165

 그러나 정직하게 이야기하는 것과 진실을 이야기하는 것은 별개의 문제네. 정직과 진실의 관계는 선두(船頭)와 선미(船尾)의 관계와 비슷하지. 먼저 정직함이 나타나고, 마지막에 진실이 나타나는 거야. 그 시간적인 차이는 배의 규모에 정비례하고, 거대한 사물의 진실은 드러나기 어려운 법일세. 우리가 생애를 마친 다음에야 겨우 나타나는 경우도 있지. 그러니까 만약에 내가 당신에게 진실을 드러내지 않아다고 하더라도, 그것은 내 책임도 당신의 책임도 아니네."

 

p184

 '의지 부분'은 아무도 욕심을 내지 않아. 아무도 이해할 수 없기 때문이지. 이것이 내가 말하고 있는 분열의 의미야. 의지는 분열될 수 없네. 100퍼센트 계승되거나 100퍼센트 소멸되는 것들 중 하날세.

 

p259

 "맞아요. 나는 지금 당신과 이렇게 하고 있는 것만으로도 충분히 만족하고 있고, 만족스러울 때에는 메시지는 오지 않죠. 그러니까 우리는 스스로 양을 찾을 수밖에 없어요."

 

p284

 "근대 일본의 본질을 이루는 어리석음은, 우리가 아시아의 다른 민족과의 교류에서 무엇 하나 제대로 배우지 않았다는 거라네. 양에 대해서도 역시 마찬가지지. 일본에서의 면양 사육이 실패한 이유는 그것이 단지 양모 · 식육의 자급 자족이라는 관점에서만 파악되었기 때문이고, 생활에서의 사상이라는 것이 결여되어 있었던 거네. 시간을 따로 떼어 결론만을 효율적으로 훔쳐내려고 한 거야. 모든 일이 그래. 다시 말해서 발이 땅에 닿아 있지 않은 거지. 전쟁에 지는 것도 무리는 아니지."

 

 

 

 

 

 

 

 

 애널리스트이인 홍춘욱의 프랑스 탐방기. 당시 중학생인 아들과 프랑스 여행을 하면서 아들의 질문 내용을 모티브로 쓴 책이다. 손쉽게 읽을 수 있는 가벼운 내용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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p96

 마지막으로 유럽과 동양의 운면을 가른 요인은 '농업'이었습니다. 중세까지는 동아시아나 유럽이나 전체 인구의 90% 이상이 농민이었습니다. 그렇지만 두 지역에서 재배되는 작물은 확연히 달랐습니다.

 유럽은 밀리 주로 재배된 반면 아시아는 벼가 일반적이었죠. 벼는 밀에 비해 훨씬 수확량이 많습니다. 따라서 같은 면적에서 더 많은 인구를 부양할 수 있습니다. 또한 아시아의 벼는 몇 십년간 같은 땅에서 농사를 짓고 2모작이나 3모작이 가능하지만 유럽에서는 같은 땅에서 연이어 농사를 짓지 못합니다. 밀은 지력 고갈이 심한 작물이기 때문입니다.

 이렇게 재배 작물의 생산성에 큰 차이가 발생하다 보니 유럽과 중국의 인구 격차가 끝없이 벌어집니다. 19세기 초반 영국의 인구는 1천 2백만 명 남짓했지만 청나라 인구는 4억을 돌파합니다. 토지가 아무리 넓다 하나 인구가 워낙 많으니 1인당 소득이 낮아집니다. 당연히 저축의 여력도 떨어질 수밖에 없죠.

 물론 사회 전체의 소득은 증가할 수 있습니다. 왜냐하면 워낙 인건비가 싸니 사람을 투입함으로써 생산을 계속 늘려나갈 수 있거든요. 특히 유럽 사람들은 은을 들고 비단과 차, 면직물을 사러오니 가계 소득은 늘어납니다.

 중국이 아주 적은 생산량 증가를 위해 많은 노동력을 투입하는 동안 영국에서는 전혀 다른 변화가 나타났습니다. 원래 인구가 적고 1인당 소득도 높으니 저축 수준도 높습니다. 왜냐하면 사람 몸값이 비싸니까 대신 기계를 써서 고용을 절약하는 게 남는 장사가 되기 때문입니다.

 옥스퍼드 대학교 로버트 앨런 교수는 왜 영국에서 산업혁명이 일어났는가를 설명하려면, 영국의 발명가들이 많은 시간과 돈을 필요로 하는 기계를 만드는 데 몰두했는지 이해해야 한다고 말합니다. 증기기관을 비롯한 값비싼 기계는 노동을 절약할 수 있었죠. 워낙 영국의 인건비가 비쌌기에 기계는 충분히 값을 했습니다. 반면 베이징에서는 이익이 나지 않습니다.

 중국은 인건비가 싸고 사람도 넘치니까 웬만한 일은 그냥 사람을 쓰는 방향으로 갑니다. 반대로 영국은 사람도 적고 인건비도 비싼 편이니 인건비를 절약하는 종류의 기계를 사용하는 데 거침이 없죠. 특히 영국은 발명 특허권이 잘 발달되어 있어 발명가가 큰돈을 벌 수 있었다는 것도 한몫했습니다.

 

 김정운. 직업은 뭐라고 해야 하는지 잘 모르겠다. 원래 대학교수였는데 지금은 그저 김정운 이라는 사람으로 살아가려는 지식인이라고 해야 할까? 

 

 제목처럼 창조란 편집이다라는 주제에 대한 이야기다. 이 사람 시각은 독특한 면이 있다.  난 이 분이 주장하는 내용들이 마음에 든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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p21

 창조적 사고는 이 같은 일상의 당연한 경험들에 대한 '의심'에서 시작된다. 이를 가리켜 러시아 형식주의의 대표적 이론가 시클롭스키Shklovsky는 '낯설게 하기ostranenie' 라고 정의한다. 인간의 가장 창조적 작업인 예술의 목적은 일상의 반복과 익숙함을 낯설게 해 새로운 느낌을 느끼게 만드는 데 있다는 거다.

 우리 삶이 힘든 이유는 똑같은 일이 매번 반복되기 때문이다. 아침마다 '아, 남의 돈 따먹기 정말 힘들다!' 며 출근하고 끝없이 참고 인내해야 하는 삶에는 그 어떤 탈출구도 존재하지 않는다. 창조적이고 싶다면 무엇보다 이 따분하고 지긋지긋한 삶을 낯설게 해야 한다. 우리 삶에 예술이 필요한 이유다.

 

p22

 19세기 말 인상파로부터 20세기 초반의 피카소, 칸딘스키 등의 추상회화에 이르는 과정에서 수천 년간의 회화 표현 방식이었던 재현의 해체가 시작된다. 더 이상은 외부 대상을 모방하지 않겠다는 구상회화의 포기는 '창조적 작업으로서의 예술'을 선언하는 것이기도 했다.

 

p24

 트위터나 페이스북 같은 소셜네트워크를 통해 정보가 공유되고 지식이 구성되는 세상의 변화에 대해 애플의 스티븐 잡스는 이렇게 주장했다.

 "민주주의에는 자유롭고 건강한 언론이 중요하다. ... 뉴스를 모으고 편집하는 조직이 그 어느 때보다 중요하다. 나는 미국이 블로거들의 세상이 되는 것을 원치 않는다. 과거 어느 때보다도 편집자가 중요한 세상이 되었다."

 2010년 《월스트리트저널》 주최로 열린 제8회 'All Things Digital' 컨퍼런스에서 한 이야기다. 에디터, 즉 편집자에게로 권력이 이동하고 있음을 주장하는 거다. 스티브 잡스가 옳다. 더 이상 정보 자체가 권력이 아닌 세상이다. 정보 독점은 이제 불가능하다. 세상의 권력은 정보를 엮어내는 편집자들의 몫이다.

▶ 요즘은 미디어의 발달로 수퍼 콘텐츠 크리에이터(인플루언서를 뛰어넘는 이들, 유발 하라리, 먹방 스타인 쯔양 등)가 직접 SNS등을 통해 직접적으로 독자들과 소통을 하는 경우가 많다. 이들도 수퍼 편집자라 볼 수 있다

신문사의 젊은 기자들은 한결같이 데스크에 앉아 자신들이 작성한 기사에 연필로 밑줄 그어가며 맞춤법까지 문제 삼는 선배들을 욕한다. 편집의 권력을 일방적으로 행사하기 때문이다. 그러나 종이 신문 데스크의 그 막강한 권력도 이제는 인터넷 포털 사이트의 젊고 어설픈 편집자에게 대항하기에는 역부족이다. 포털 사이트의 헤드라인에 올라가는 기사를 선택하는 권력은 전국 종이 신문 데스크 권력을 다 합친 것보다 강하다.

 

p28

 한국 사회의 충격은 실로 엄청났다. 다들 그의 논문이 참인지 거짓인지에만 관심을 가졌다. 국가적 자존심의 훼손만 걱정했다. 그러나 황우석 사건의 본질은 따로 있었다. 지식권력이 이제 더 이상 대학에 있지 않다는 사실이다.

 지식권력인 대학의 붕괴는 이미 여러 곳에서 감지되고 있었다. 그 징조들이 황우석 사건을 통해 폭발한 것이다. 여태까지의 지식은 대학에서 만들어지는 것이었다. 지식은 대학이 정한 절차에 따라 논문이라는 형식으로 만들어졌다. 교수는 지식을 심사하고, 그 결과에 권위를 부여하는 지식권력 시스템의 최정점이었다.

 이 같은 국가 공인의 지식권력이 보장하고, 세계적 지식권력에 의해 검증된 국가적 자부심인 황우석의 논문이 정체불명의 하찮은(?) 네티즌들에 의해 처절하게 붕괴된 것이다. 지식 편집의 독점권을 가진 대학의 붕괴가 황우석 사건의 본질이라는 이야기다. 그런데 이 부분에 관해서는 지금까지 아무도 논하지 않는다.

▶ 황우석 사건이 대중에게 이슈가 되기 시작한 것은 물론 PD수첩에서 방송되고 난 이후다. 하지만 PD수첩에서 방송이 되어 전에 이미 BRIC(Biological Research Information Center), 즉 생물학연구 정보센터라는 생물학 전문가들이 이용하는 인터넷 포럼에서 황우석의 줄기세포 논문이 위조여부가 이슈가 되어서 치열한 논쟁이 벌어지고 있었다. 황우석의 논문이 정체불명의 하찮은 네티즌들이라고 하기에는 과장이 크다. 이 포럼에는 한국의 생명공학, 생물학, 생화학 등의 최고 전문가들이 여전히 활동중이다.

 

p41

 자기 텍스트를 써야 제대로 학문을 하는 거다. 오늘날 인문학 위기를 말하는 이유는 한국의 콘텍스트에 맞는 텍스트 구성의 전통이 없기 때문이다. 서양인들의 텍스트로 서양의 학문을 하니 도무지 상대가 안 되는 거다.

 텍스트는 반드시 해당 콘텍스트에서 생성된다. 하버마스의 비판이론도 프랑크푸르트학파, 실증주의 논쟁, 포스트모더니즘 논쟁이라는 20세기 유럽 지성사의 콘텍스트가 있었기에 가능한 것이다. 언젠가 하버마스가 한국에 와서 강연한 적이 있다. 하버마스를 전공한 국내 학자들이 모두 모였다. 그러나 정작 하버마스는 뜬금없는 이야기만 하다 갔다. 그 내용은 이렇게 요약된다. "한국에도 위대한 정신 · 문화적 전통이 있다. 그 콘텍스트에 근거한 이론이 구성되어야 한다."

 

p57. 검증 가능성 - 반증 가능성 - 편집 가능성

 과학과 비과학을 결정하는 기준으로 논리실증주의자들은 '검증 가능성verifiablility' 을 주장한다. 경험적으로 검증 가능한 이론만이 과학적 지식이 될 수 있다는 주장이다. 포퍼Karl R. Popper는 인간의 경험은 시공간적으로 한계가 있기에 모든 것을 다 경험할 수는 없다며 논리실증주의의 검증 가능성을 비판한다.

 

 포퍼는 과학적 지식과 비과학적 지식의 기준으로 '반증 가능성falsifiability' 을 내세운다. '백조는 희다' 는 가설을 검증하기 위해 세상의 모든 백조를 검증할 수는 없지만, 검은 백조 한 마리만 발견되어도 그 가설은 틀린 것이 된다. 모든 지식은 이렇게 반증의 사례가 발견될 때까지만 한시적으로 옳은 것이고, 과학적 지식은 이렇듯 반증할 수 있는 가능성이 열려 있어야 한다는 뜻이다.

 포퍼에 따르면 마르크스 이론이나 프로이트 이론은 비과학적이다. 반증 자체가 아예 불가능하기 때문이다. 내부의 논리 구조는 그럴듯하지만, 이론의 옳고 그름을 판단할 가능성 자체가 아예 닫혀 있다. 그러나 포퍼의 과학과 비과학을 나누는 반증 가능성에는 시간이라는 요인이 빠져 있다. 시간의 흐름에 따라 구성되고, 변화하는 '구성주의적 세계관' 과는 거리가 먼, 날근 실증주의적 세계관의 변종이다. 주체적 행위의 개입이 불가능한, 인식의 주체와 개체가 철저하게 격리된 세계관일 따름이다.

 21세기에는 지식의 옳고 그름을 따지는 것 자체가 그리 중요한 사안이 아니다. 증명해야 하고, 확인해야 할 '객관적 세계'에 대한 신념 자체가 폐기된 지 오래되었기 때문이다. 지식의 옳고 그름보다는 '좋은 지식'과 '좋지 않은 지식'으로 구분하는 것이 더 구체적이고 실용적이다. 좋은 지식의 기준은 '편집 가능성'에 있다. 현재 진행형의 세계와 상호작용하며 변화를 가능케 하는 주체적 행위가 가능한 지식이 좋은 지식이다. 편집 가능성이 있는 지식이 좋은 지식인 것이다.

 

 

p65

 몽타주 기법의 창시자로 불리는 소비에트의 쿨레쇼프Kuleshov는 소위 '쿨레쇼프 효과'라고 불리는 흥미로운 실험으로 몽타주 기법의 심리적 효과를 확인했다. 그는 소비에트의 유명한 배우인 모주힌Mozzhukhin의 무표정한 얼굴이 찍힌 화면에 각기 다른 세 가지 화면을 이어붙였다. 하나는 김이 모락모락 나는 수프, 또 하나는 관에 누워 있는 여인, 마지막으로 곰 인형을 가지고 노는 어린아이였다.

 흥미롭게도 관객들은 모주힌의 무표정한 얼굴을, 그 뒤에 이어진 화면이 어떤 것이었느냐에 따라 각기 다른 표정으로 받아들였다. 수프가 이어진 장면에서 모주힌이 배고파하며 수프를 먹고 싶어 하는 표정으로 느꼈다. 관에 누워 있는 여인이 이어진 장면에서는 모주힌이 여인의 죽음을 슬퍼하는 것으로, 곰 인형을 가지고 노는 어린아이가 이어진 장면에서는 아이를 예뻐하는 모습으로 보았다. 동일한 배우의 표정이 어떻게 편집되느냐에 따라 각기 다른 의미로 받아들여진 것이다.

 

 

 몽타주 기법의 핵심은 'A장면'과 'B장면'의 합은 'A,B'가 아니라 'C'가 된다는 데 있다. 이는 '부분의 합은 전체가 아니다!'라는 게슈탈트 심리학의 명제와 동일하다. 각각의 부분이 합쳐지면 부분의 특징은 사라지고, 전체로서의 전혀 다른 형태Gestalt가 만들어진다는 뜻이다. 이 같은 몽타주 기법이 작동할 수 있는 이유는 '완결성의 법칙law of closure'이라는 게슈탈트 심리학적 원리 때문이다.

 '폐쇄성의 법칙'으로도 불리는 이 완결성의 법칙은 불완전한 자극을 서로 연결시켜 완전한 형태로 만들려고 하는 인간의 본능적 경향을 의미한다. 예를 들어, 중간중간이 떨어져 있는 원 모양의 띠를 완벽하게 이어져 있는 원으로 인식하는 경우다.

 

p85

 르네상스 시대 원근법의 발견으로 비롯된 주체와 객체의 인식론적 통찰이 의사소통의 문제로 연결되는 이유는 '객관성이란 객관적으로 존재하는 것이 아니기' 때문이다. 객관적 관점이란 각기 다른 인식의 주체들이 '같은 방식으로 보기joint-attention' 로 서로 약속해야 가능하다. 다시 말해 객관성이란 원래 있는 것이 아니라, 상호 합의의 결과라는 것이다. 그래서 오늘날 인문학에서는 객관성이란 단어를 '상호주관성intersubjectivity' 으로 대체한다.

 상호주관성의 시대에는 각 주체들 간의 소통이 중요하다. 그래야 서로 동의할 수 있는 객관적 혹은 상호주관적 시점을 만들어낼 수 있기 때문이다. 세상을 바라보는 퍼스펙티브를, 각 주체들 간 상호 합의의 결과가 아니라 객관적 관점이라고 우기는 사람이 자주 있다. 이때는 반드시 어떤 권력이 개입되어 있다고 의심해야 한다.

 

p116

 독일의 국경은 수시로 변경되었다. 잦은 전쟁으로 승전과 패전을 반복했기 때문이다. 특히 제1차 세계대전의 패전은 뼈아팠다. 전쟁이 끝난 후 이뤄진 베르사유조약으로 인해, 독일은 해외 식민지를 모두 잃고 알자스로렌을 프랑스에 반납하는 등 영토의 13퍼센트를 잃었다. 물론 이 땅들 대부분은 이전의 전쟁에서 빼앗아 온 것이었다. 하지만 패전에 이은 경제적 어려움으로, 영토를 잃은 독일인들의 박탈감은 이루 말할 수 없었다.

 바로 이때 히틀러가 '레벤스라움Lebensraum, 생활권' 이라는 개념을 들고 나타났다. 1924년 뮌헨 반란으로 감옥에 갇혀 있는 동안 집필한 『나의 투쟁』에서, 독일 민족은 유럽 전체를 독일의 레벤스라움, 즉 독일의 생활권으로 만들어야 한다고 히틀러는 주장한다. 그가 사용한 레벤스라움이라는 개념은 19세기 말 독일의 지리학자 프리드리히 라첼Friedrich Ratzel이 'Lebens생활' 과 'Raum공간' 을 합쳐 만든 조어다. 다윈의 진화론을 국가에도 적용해, 국가도 다른 유기체와 마찬가지로 충분히 먹고, 자고, 숨 쉴 수 있는 공간이 있어야 끊임없이 진화하고 발전할 수 있다는 주장이다.

 레벤스라움이 히틀러의 용어가 되는 데는 칼 하우스호퍼Karl Haushofer 라는 인물의 역할이 결정적이었다. 제1차 세계대전 당시 뮌헨 대학의 교수였던 하우스호퍼는 어릴 때부터 부친과 친구였던 라첼로부터 깊은 영향을 받았다. 라첼과 마찬가지로 하우스호퍼도 국경은 생명체의 피부처럼 살아 있는 것으로 생각했다. 이러한 그의 생각을 히틀러에게 전달한 사람은 후에 나치 독일의 2인자가 된 루돌프 헤스Rudolf Hess 였다. 헤스는 뮌헨 대학 재학 당시, 하우스호퍼의 조교였다.

 하우스호퍼의 레벤스라움은 나치 독일에만 영향을 미친 것이 아니다. 일본 제국주의를 합리화하는 이데올로기가 된다. 하우스호퍼는 독일과 일본을 왔다 갔다 하며, 두 나라의 제국주의가 닮은 꼴이 되도록 가교 역할을 했다. 하우스호퍼는 실제 일본이 한반도를 집어삼키기 바로 이전 해인 1909년에 일본에서 1년간 살았다. 한반도를 식민지로 만들어가는 일본 제국주의의 전략을 지켜보며 자신의 레벤스라움 개념을 가다듬었다.

 독일로 돌아온 하우스호퍼는 일본을 극동아시아 레벤스라움의 지배자로 찬양한다. 가는 곳마다 일본을 레벤스라움 이데올로기의 모범적 사례로 소개했다. 그의 활동에 감동한 일본은 하우스호퍼의 레벤스라움을 일본 제국주의의 이론적 토대로 받아들였다. 그를 흉내 낸 개념도 만들었다. '대동아공영권大東亞共榮圈' 이다. 일본의 대동아공영권은 히틀러가 부르짖은 레벤스라움의 변종이라는 이야기다. 이렇듯 히틀러의 레벤스라움은 지구 정반대편에 있는 한반도와도 이토록 깊은 관련이 있다. 그 당시에도 세상은 참으로 좁았다.

 

 하우스호퍼를 통해 레벤스라움을 알게 된 히틀러는 이 개념은 자신의 나치 이데올로기에 바로 적용한다. 베르사유조약으로 영토를 빼앗긴 독일은 인구에 비해 영토가 형편없이 부족하다고 주장한다. 또한 자국민을 먹여 살릴 충분한 영토를 얻기 위해서는 폴란드, 우크라이나, 러시아에 있는 슬라브인들의 땅을 빼앗아야 한다고 선전한다. 그들은 독일의 아리아 민족에 비해 열등하기 때문에 그래도 된다는 것이다. 이때 독일 영토가 지난 수백 년간 어떻게 줄어들었는가를 보여주는 하우스호퍼의 지도는 독일의 레벤스라움이라는 생명체가 어떻게 죽어가고 있는가를 보여주는 아주 효과적인 선전 수단이었다.

 히틀러의 레벤스라움 이데올로기에 영향을 미친 또 한 사람이 있었다. 그도 '공간Raum'을 이야기했다. 소설가 한스 그림Hans Grimme이다. 아프리카를 오가며 장사하는 상인이었던 그림은 제1차 세계대전에 참전하다. 그리고 전쟁이 끝나자 독일에 눌러앉아 작가가 된다. 이때 그가 발표한 소설이 『공간 없는 민족Volk ohne Raum』이다.

 

 1926년에 출판된 그의 소설은 당시 독일의 모든 사회문제는 '공간 부족'때문이라는 내용이다. 따라서 독일이 산적한 문제를 해결하기 위해서는 공간 확장밖에는 해결책이 없다고 주장한다. 당시 독일인들에게 이처럼 인과관계가 명확한 설명은 없었다. 한스 그림의 소설을 히틀러가 사랑하고, 수시로 언급한 것은 당연했다.

 공간 상실에 대한 강박으로 시작한 나치 독일은 또 다시 엄청난 공간 상실로 끝이 났다. 전쟁 후, 동쪽 국격이 오데르-나이세Oder-Neisse 라인으로 그어졌다. 동프로이센을 포함한 독일 고유 영토로 여겨졌던 상당한 크기의 공간을 빼앗긴 것이다. 뿐만 아니다. 남은 독일 영토도 동독과 서독으로 나뉘어 승전국들의 관리를 받게 된다. 독일이 자기 국토를 다시 회복한 것은 채 30년도 되지 않는다.

 

p140

 아동이나 가족, 부부의 개념이 문화적 산물이라면, 보다 보편적인 '개인'과 같은 개념은 어떨까? 이 또한 문화적 구성물일까? 물론이다. 개인 혹은 사회, 문화라는 개념들은 모두 어느날 갑자기 만들어졌다.

 서구의 근대를 가능케 한 'culture' 'society' 'individual'에 조응하는 개념이 과거 동양에는 없었다. 이들 개념의 번역인 '문화' '사회' '개인'과 같은 단어는 일본 메이지 시대 지식인들이 만들어냈다. 이 개념들을 오늘날처럼 자연스럽게 사용하게 된 것은 고작 100여 년에 불과하다.

 

 

 

 한번 생각해보라. 오늘날 우리가 너무나 당연하게 여기는 개인과 사회라는 단어가 없었다는 것이 도대체 상상이 되는가? 개념이 없다는 것은 개인과 사회에 관한 의식 자체가 없었다는 말이다.

 

p141

 문명화civilization의 어원인 'civil'은 원래 '예절 바른'을 뜻한다. '사회적social'이라는 단어와는 거의 동의어로 쓰였다. 문명화란 말 그대로 품위 있고, 예의 바른 행동으로 발전을 뜻한다는 이야기다. 문명화 과정의 핵심 내용인 '합리화rationalization' 란 본능적 감정이 사회적으로 허용되는 세련된 표현으로 자리 잡아가는 과정이라는 것이 노베르트 엘리아스Nobert Elias의 주장이다.

 합리적인 문명사회는 각 개인이 예절 바른 교양인이 되어야 함을 전제로 한다. 서구 근대에서 아동 개념의 탄생은 이러한 교양 교육의 맥락과 깊은 관계가 있다는 것이 아리에스의 주장이다. 그저 '작은 어른'일 따름이었던 아이들이 별도의 교육을 받게 된 가장 큰 이유는 '원시적 감정'을 억제할 수 있는 합리적 성인으로 성장해야 하기 때문이다. 이렇게 합리적인 성인으로 발달하는 과정에 있는 존재를 '아동'이라고 부른 것이다.

 

p143

 아동과 마찬가지로 청소년 또한 교육을 받아야 할 대상이다. 그러나 실제 내용은 아주 다르다. 아동 개념에는 그래도 '사랑스러움'이나 '귀여움'과 같은 긍정적 정서가 동반된다. '사랑과 관심의 공동체'로서의 가족이라는 사회적 표상social representation에는 항상 아동이 부부 사이에 있다. 그러나 청소년은 달랐다.

 청소년은 처음부터 불량한 개념이었다. 청소년의 또 다른 이름 'juvenile'은 거의 청소년 범죄juvenile delinquency'의 축약어로 쓰인다. 스탠리 홀은 이 청소년기를 '질풍노도Strum und Drang'의 시기로 명명하며 그 불안정한 특징을 더 노골화했다. 이 같은 방식으로 청소년 개념을 편집할 사회구조적 필요성이 있었기 때문이다.

 무엇보다도 급격한 산업화 때문이다. 일단 대량생산과 대량 소비를 위해 훈련된 노동력이 급하게 필요했다. 그러나 기존의 소규모 도제제도와 같은 교육 방식으로는 당시 사회가 필요로 하는 대규모 노동력을 키워낼 수 없었다. '사랑의 공동체'가 되어버린 가족 또한 더 이상 교육의 기능을 수행할 수 없었다. 자연스럽게 가족에서 교육의 기능이 떨어져나갔다. 교육은 모두 학교에 맡겨졌다.

 학교는 자신들이 담당해야 할 교육의 필요성을 정당화해야 했다. 바로 이러한 맥락에서 불안하고, 위험하고, 도무지 어디로 튈지 모르는 청소년의  표상이 만들어진 것이다. 즉, '청소년은 매우 불안하고 위험한 존재이기에 반드시 학교에서 교육받아야 한다' 는 이데올로기다.

 한국에서 청소년 개념도 비슷한 경로로 자리 잡았다. 1991년 청소년기본법이 제정된 후 청소년지도사, 청소년상담사와 같은 자격증이 만들어졌다. 아울러 이를 위한 전문 교육기관이 대학에 정식으로 설립되었다. 그러나 '청소년 지도' '청소년 상담' 과 같은 개념은 '청소년은 반드시 지도와 상담이 필요한 불안한 존재'라는 근대적 표상을 전제하고 있다. 그래서 한국어의 청소년 개념 또한 항상 '비행-청소년' 아니면 '청소년-문제'로만 연결되는 것이다. (청소년 개념이 달리 연결되는 것을 보았는가?)

 

 아동과 청소년의 개념은 근대 이후 탄생한 '개인'이 어떠한 방식으로 편집되었는가를 잘 보여준다. 근대적 주체가 그 산업 사회적 존재 양식에 따라 어쩔 수 없이 '객체화'라는 '소외Entfremdung 현상' 을 동반하듯, 근대적 개인은 각 연령에 따라 아동, 청소년과 같은 각 발달단계로 귀속되어 또 다른 형태의 소외된 아이덴티티를 얻게 된 것이다.

 21세기에 들어서는 또 다른 연령대의 개인이 새롭게 편집되기 시작했다. '노인'이다. 이제까지의 발달은 성인이 되면 완성되는 것이었다. 성인이 되어 생산활동을 하다가 은퇴하면 바로 죽었기 때문이다. 평균수명이 그만큼 짧았다. 더 이상의 발달은 필요 없었다. 그러나 이제는 은퇴한 이후에도 수십 년을 더 살아야 한다. 평균수명이 100세에 가까워지고 있다. 개인의 발달이 성인 단계에서 끝나서는 안 된다는 새로운 편집의 내적 필연성이 생긴 것이다. 계속 발달하지 않으면 죄다 '성질 고약한 노인네' 가 되기 때문이다.

 성질 고약한 노인데는 비행 청소년만큼이나 위험하다. 그래서 요즘 발달심리학에서는 '전생애발달life-span-development' 를 이야기한다. 죽을 때까지 끊임없이 발달해야 한다는 거다. 근대 이후 생겨난 개인은 이와 같은 방식으로 필요에 따라 끊임없이 해체되고 재구성되는 편집의 과정을 겪고 있다.

 

 

p145

 역사적 사건은 물론 인식을 가능케 하는 정신의 도구, 즉 개념들이 역사적으로 편집되었다는 관점을 갖게 되면 주체적 행위의 가능성과 한계를 정확히 파악할 수 있다. 이 같은 구성주의 혹은 구조주의적 서술은 실증주의적 역사 서술의 근본 전제를 상대화하는 메타적 방법론이다. 개념들의 '생성'에 관한 엘리아스와 아리에스의 메타적 편집 테크닉은 미셀 푸코Michel Foucault 의 지식계보학 혹은 지식고고학에서 절정을 이룬다.

 실제로 푸코는 아리에스가 없었다면 자신의 책을 출판할 수조차 없었다. 지금도 여전히 현재진행형으로 읽히고 있는 푸코의 대표작 『광기의 역사』 는 당시 대부분의 유명 출판사로부터 퇴짜를 당했던 원고다. 마침 플롱 출판사에서 출판 기획을 맡고 있던 아리에스가 우연히 그의 원고를 읽고, 반대를 무릎쓰며 출판을 고집한다. 그 결과 푸코의 첫 저작인 『광기와 비이성 : 고전주의 시대의 광기의 역사』 가 출간될 수 있었던 것이다.  

 

p148

 현대 심리학의 '일관된 자아' 에 대한 요구는 자아 구성 과정에 관한 무지에서 나온다. 내 안의 나는 항상 많다. 당연히 그런 것이다. 그렇다고 괴로워하거나 노여워하는 것은 '오버'다. 일관된 자아에 대한 오버는 '억압'을 낳는다. 자아에 대한억압된 기억은 타인의 내러티브를 왜곡하고 부정한다.

 

p151

 빌 게이츠의 이야기는 백 번 옳다. 훌륭하다. 그리고 존경할 만하다. 그러나 문제는 하나도 안 재미있다는 거다. 별로 흥미롭지 않다. 안 들어도 다 아는 이야기 같다. 반면 기부나 노블레스 오블리주에 관해 어떠한 이야기도 한 적 없는 스티브 잡스의 이야기는 뭔가 감동이 있다. 울림이 크다. 듣고 싶어진다. 도대체 무슨 차이일까?

 '계몽'이다. 빌 게이츠는 자신의 이야기를 듣는 이들이 스스로 의미를 편집할 수 있는 기회를 빼앗는다. 일방적으로 완성된 이야기를 한다. 그래서 재미없는 거다. 상호작용이 불가능한 내러티브는 진리를 강요할 뿐, 일리一理 의 해석학이 빠져있다. 반면 스티브 잡스의 내러티브는 상호작용적이다. 편집 가능성이 있다는 이야기다.

 잡스의 정서적 · 모순적 · 자극적 내러티브는 듣는 이들의 적극적인 해석을 필요로 한다. 사람들은 그의 이야기가 갖는 의미를 주체적으로 편집해낼 수 있는 기회를 얻는다. 의미는 스스로 만들어낼 때만 의미 있다. 남이 만들어주는 의미는 전혀 의미 없다. 진리를 계몽하던 시대는 지났다. 듣는 이로 하여금 '주체적 편집의 기회'를 제공해야 상대방의 마음을 사로잡을 수 있다.

 한국 기업 CEO의 이야기에서 이런 감동을 얻고, '의미 편집'의 기회를 얻을 수 있어야 진정한 선진국이 되는 거다. 한국 정치인의 연설에서 눈물 흘리며 삶의 가치와 사회변혁의 용기를 스스로 편집해낼 수 있어야 내 나라가 자랑스러워지는 거다.

 

p164

 민족은 근대 이후에야 기능하기 시작한 가공의 이념이다. 그 이전에는 왕의 국가, 신의 국가였을 따름이다. 절대왕권이 사라진 이후, 국가를 지속하게 할 이념으로 민족이라는 '상상의 공동체'가 나타난 것이다. 한국에서도 마찬가지다. 조선왕조가 무너지기 시작했던 1900년대 이후에나 민족 개념이 나타났다. 일본 제국주의에 맞서기 위한 저항의 이념으로 우리의 '민족' 개념은 편집되었다고 보는 게 옳다. 오늘날 세계화의 과정에서 민족이라는 상상 공동체는 해체되고 있다. 민족 개념 자체가 부정적 개념으로 변하고 있다. 그 화용론적 생명이 다했기 때문이다.

 베를린 장벽이 무너졌을 때다. 당시 독일인들은 "우리는 한 민족이다! Wir sind ein Volk!" 라고 장벽 앞에서 외쳤다. 그러나 통일되지 몇 달 전만 하더라도 동독 사람들은 동독 공산당에 민주화를 요구하며 "우리가 바로 그 인민이다! Wir sind das Volk!" 라고 외쳤었다. 공산당의 주체인 바로 그 '인민Volk' 이라는 주장이다.

 정관사 das에서 부정관사 ein으로 바뀌면서, '프롤레타리아의 인민'이 '독일 민족'으로 바뀐 것이다. 당시 독일 지식인들은 독일 민족주의의 부활을 경계하기도 했다. 그러나 독일의 한 민족 즉 'ein Volk'는 세계화라는 대세에 부응해 몇 년 후 유럽연합의 유러피언european으로 변신한다.

 유독 우리나라만 여전히 '반만년 유구한 역사의 한민족'이다. 남북 분단 때문이다. 그래서 빨리 통일이 되어야 하는 거다. 한 민족이 헤어져 살아서는 안 된다는 이산가족의 당위는 더 이상 유효하지 않다. 헤어진 가족을 만났다고 울며불며 기뻐할 수 있는 사람들이 이제 그리 많이 남아있지 않다.

 '이산가족 찾기'라며 전쟁 때 헤어졌던 가족들이 수십 년 만에 다시 만나게 되어 온 나라가 감격했던 적이 있다. 우리 집안에도 그런 일이 있었다. 전쟁 때 사라졌던 아버지의 가까운 친척이 나타난 거다. 감격한 아버지는 내게 생전 처음 보는 이들을 소개하며 삼촌, 형, 동생이라 부르라고 했다. 그러나 그 이후 한동안 우리 가족은 너무 괴로웠다. 그 삼촌이라는 이가 도박 중독, 알코올 중독이었다. 매번 아버지를 찾아와 돈을 내놓으라고 행패부리고 협박했다. 그가 객사한 후에야 우리 가족의 모든 것이 원래대로 돌아왔다.

 물론 드문 예일 수 있다. 그러나 헤어졌던 가족이 다시 만난다고 바로 '그리고 행복하게 오래오래 살았습니다' 와 같은 옛날 이야기가 되는 것은 절대 아니다. 또 다른 방식의 '지지고 볶는 삶이 시작될 뿐이다. 독일의 경우도 마찬가지다. 통일 후, 다시 만난 가족이 지속적으로 왕래하며 행복하게 잘 지내는 경우는 아주 드물다.

 민족 통일의 기쁨은 아주 추상적이고, 체감하는 현실은 지극히 구체적이다. 독일의 민족 개념이 변증법적 해체의 과정을 걷는 것처럼 민족이라는 낡은 이념도 발전적으로 극복하지 못하면, 우리에게 더 이상 새로운 시대가 열리지 않는다. 그래서 빨리 통일이 되어야 하는 거다. 이 낡은 '민족' 개념의 해체를 위해서다.

 저출산 문제는 '아기를 많이 낳자'고 홍보하고, 출산 지원금을 손에 쥐어 준다고 해결될 문제가 아니다. 적극적인 이민 정책으로만 해결 가능한 문제다. 그러나 한민족의 민족주의가 해체되지 않는 한, 적극적 이민정책이 자리 잡기란 그리 쉬운 일이 아니다. 이래저래 통일이 안 되면 대한민국은 참 어려워지게 되어 있다.

 

p166

 미국의 심리학자들은 인간의 내면을 연구하는 대신 '자극input'과 '반응output'이라는 눈에 보이고 통제할 수 있는 요인만을 심리학 연구대상으로 삼는다. 왓슨J.Watson이나 스키너B.F.Skinner의 행동주의 심리학에서는 자극과 반응 사이에 무엇이 일어나는지 알 수도 없고, 알 필요도 없다. 통제할 수도 없고, 객관적으로 증명할 수도 없기 때문이다. 어떤 요인을 건드리면 어떤 행동이 나오는가만 알면 된다.

 행동주의는 러시아의 생리학자 파블로프Ivan Petrovich Pavlov의 그 유명한 '침 흘리는 개'를 획기적으로 변형시킨 이론이다. 먹이를 줄 때마다 종소리를 듣게 하면, 나중에 종소리만 들어도 침을 흘린다는 그 파블로프의 개는 지극히 수동적인 존재다. 그저 묶여서 먹이를 받아먹고, 종소리를 들을 따름이다. 침도 가끔 흘리고.

 반면 '스키너 상자'에 갇힌 쥐는 수동적인 존재가 아니다. 벽의 지렛대를 눌러야만 먹이를 얻어먹을 수 있다. 먹이를 먹으려면 반드시 주인이 원하는 행동을 해야만 한다. 이렇게 보상과 처벌이라는 '강화reinforcement' 시스템을 도입함으로써 유기체의 행동을 통제할 수 있다는 미국식 이데올로기가 확립된 것이다. 심리학에서는 스키너의 이 같은 행동주의를 '조작적 조건화Operant Conditioning' 라고 하여, 파블로프의 '고전적 조건화Classical Conditioning'와는 확실하게 구별한다.

 스키너의 행동주의는 미국식 자본주의의 암묵적 토대가 된다. 즉, 성과에 따른 보상과 처벌을 다양한 방식으로 부여함으로써, 인간의 행동을 통제할 수 있다는 자본주의적 자신감을 심어준 것이다. 느닷없이 나타난 '듣보잡' 미국식 경영학이 오늘날 대학의 최고 인기 분야가 된 것도 바로 이 스키너식 행동주의를 빼고 설명하기 어렵다. 오늘날의 경영학의 중요 영역인 인사관리 시스템이란 그 근본을 들여다보면 스키너의 행동주의에서 크게 벗어나 있지 않다.

 행동주의 심리학이 미국에서 꽃피운 가장 결정적인 이유는, 증명할 수 없는 가설들로 인간 심리를 이해하려 애쓰지 않았기 때문이다. 그저 원하는 행동을 이끌어내는 확실한 방법론을 찾아내려 했을 따름이다. 인간 행동을 수치화하고, 실험실 조작을 통해 행동을 관찰하고 예측할 수 있는 계량화된 방법론이다.

 

p169

 모든 성과를 개인의 능력으로 환원하는 미국식 심리학의 전성시대는 오늘날 '피로사회Mudigkeitgesellschaft'라는 포스트모던 사회의 모순으로 이어진다.

 

p190

 실제로 언어철학에는 객관적 현상이 먼저 존재하고 언어(혹은 개념)는 이 객관적 현상을 '표상representation'할 뿐이라는 실재론적 입장과, 각 언어나 개념에 대응하는 독립적인 실제가 반드시 존재한다고 확인할 수 있는 방법은 없다는 상대주의적 포스트모던 이론이 양극단에서 대립한다.

 

 특히 소쉬르에서 롤랑 바르트로 이어지는 후기구조주의 언어철학은 '언어 없는 실재는 없다'라는 단호한 입장을 취한다. 언어와 대상의 관계는 그 어떠한 내재적 필연 관계도 존재하지 않는, 철저하게 사회 · 문좌적인 약속일 뿐이라는 전제로부터 소쉬르의 '기호학semiology'은 출발한다.

 

p192

 대신 한국인들은 '구강기 고착'의 성격인 듯하다. 입이 거칠다는 말이다. 목소리도 크고, 담배도 많이 피운다. 욕도 정말 다양하게 잘한다.

 실제로 한국 욕의 종류를 정리해보면 세계 최고 수준이다. 일본이나 독일의 욕은 몇 개 안 된다. 미국 사람들도 가만 보면 나름 한다는 욕이 매번 'shit', 'fuck you'가 전부다. 한국처럼 다양하고 화려한 욕설은 세계사의 유례가 없다.

 한국인들에게는 왜 이런 구강기 고착의 퇴행 현상이 나타나는 것일까? 지난 세월 너무나 가난했기 때문이다. 풍요로운 세월이 거의 없었다. 한 번도 제대로 먹어보지 못했다. 오죽하면 풀뿌리, 나무껍질을 벗겨 먹고 살았을까? 당연히 아기들은 엄마의 젖을 충분히 먹을 수 없었다. 입으로 만족할 수 있는 경험이 박탈된 것이다. 빈곤에 의한 구강기 고착 현상은 지형이 거칠고 풍료롭지 못한 지역의 욕이 훨씬 더 다양하고 화려하다는 사실에서도 확인된다. 요즘 북한 사람들의 욕을 생각해보라.

 

p195

 내 이야기가 가능하려면 사용 가능한 데이터가 풍부해야 한다. 그리고 그 데이터를 자유롭게 연결할 때 얻어지는 메타언어에 익숙해져야 한다. 그것이 바로 공부다. 내가 축적한 데이터를 꼭 써야 한다는 강박을 가질 필요는 없다. 데이터를 축적하고 정리하는 과정에서 그 데이터들에 관한 메타언어를 익히게 되면 데이터베이스의 일차적 목적은 달성된 거다. 이를 나는 '커닝 페이퍼 효과'라고 부른다.

 커닝 페이퍼를 준비하다 보면, 어느새 그 내용을 다 숙지하게 된다. 정작 커닝 페이퍼를 사용할 필요는 없어진다. 이와 마찬가지다. 데이터베이스를 만들며 나름의 개념 체계를 만들다 보면, 어느새 전혀 다른 차원의 생각을 하고 있는 나를 발견할 것이다.

 

p196

 '책은 끝까지 읽어야 한다'는 '엄숙한 독서법'을 신앙처럼 교육받아온 이들이 느꼈을, 모독당한 듯한 기분을 이해하지 못하는 바 아니다. 그러나 책을 끝까지 읽는 것은 정말 바보 같은 짓이다. 내 질문이 없고 내 생각이 없으니, 모든 책을 처음부터 끝까지 다 읽고 있는 것이다.

 물론 정말 재미있는 책은 다 읽지 말라고 해도 끝까지 읽게 된다. 그러나 억지로 책을 다 읽다 보면 내 생각은 중간에 다 날아가 버린다. 읽어야 할 자료도 산처럼 쌓여 있다. 어찌 모든 책을 처음부터 끝까지 다 읽을 수 있겠는가.

 

 

 

 목차와 찾아보기는 주체적 독서를 하는 이들을 위한 것이다. '주체적 책 읽기'란 왜 이 책을 읽어야 하는가에 대한 목적이 분명함을 뜻한다. 주체적 책 읽기는 책을 선택하는 과정에서부터 시작한다. 책을 들춰 목차를 볼 때, 내 눈길을 끄는 내념들이 있다면 그 책을 선택하게 된다. 책 내용을 대충 훑어볼 때, 흥미로운 개념이 나타나면 그 부분을 잠시 읽게 된다. 그리고 저자이력이나 찾아보기, 참고문헌 목록을 보며 책의 구입 여부를 결정한다.

 내게 흥미로운 내용은 내게 이미 익숙한 개념과 책에 나타난 개념의 교차 비교 과정에서 확인된다. 독서는 내가 가진 개념과 저자의 개념이 편집되는 에디톨로지 과정이다. 그래야만 저자의 생각이 내 생각의 일부가 된다. 우리는 저자의 생각을 그대로 받아들이기 위해 책을 읽는 것이 절대 아니다.

 

 

 아주 조심스러운 조언으로 책을 끝내려 한다. 정말 꼭 전하고 싶은 이야기다. 자신의 생각을 풍요롭게 편집하려면 무엇보다도 언어가 자유로워야 한다는 것이다. 내가 오십 넘어 새롭게 일본어를 배우는 이유이기도 하다. 고작 영어 자료 하나 소화하는 것만으로는 한참 부족하다. 그 정도는 누구나 하기 때문이다.

 내가 성격적 결함에도 불구하고 한국 사회에서 이만큼이라도 성취하며 살아남을 수 있었던 것은, 영어와 함께 독일어를 할 수 있었기 때문이다. 당연히 읽는 자료의 내용이 남들과 달랐다. 축적된 데이터가 다른 까닭에 생산되는 지식의 내용도 달랐다.

 일본어 자료를 다룰 수 있게 되면서 지식 편집의 가능성은 상상할 수 없이 커졌다. 같은 개념이라도 한국어, 일본어, 독일어, 영어의 설명이 다르다. 전문 개념으로 들어가면 들어갈수록 더 그렇다. 편집에 사용될 수 있는 경우의 수가 기하급수적으로 늘어난다.

 글로벌 시대를 살아가려면 영어 이외에 꼭 한 가지 언어를 더 배워야 한다. 두 개 이상의 외국어와 데이터베이스 관리 습관을 갖추면, 뭘 하든 그리 두려울 게 없다. 아, 물론 전적으로 내 생각이다.

 

p202

 뭔가 새로운 것을 손에 쥐려면, 지금 쥐고 있는 것을 놓아야 한다. 지금 손에 쥐고 있는 것 꽉 쥔 채 새로운 것까지 손에 쥐려니, 맘이 항상 그렇게 불안한 거다.

 

 책 제목과 같이 현 세기를 살아나가는 지식인으로서 자신이 가진 문제의식을 21가지 주제를 가지고 풀어쓴 내용.

맨 뒤의 명상 챕터는 다소 사변적이긴 하지만 어느 정도 이해되기는 한다. 하지만 이것은 니체가 외치는 초인처럼 덧없는 이야기라고 느껴지긴 한다.

그리고 고통만이 실재다라는 부분에 있어서는 그 논의가 깊긴 하지만 다소 너무 간단하게 실체를 정의한 감이 없지않다.

1번만 읽어서는 평가하긴 곤란하긴 하다. 최소 3독은 해야 할 듯 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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p12

 20세기가 끝날 무렵 파시즘, 공산주의와 자유주의 간의 거대한 이념 전쟁은 자유주의의 압도적 승리로 귀결되는 듯 보였다. 민주적 정치와 인권, 그리고 시장자본주의가 전 세계를 정복하도록 예정된 것처럼 보였다. 하지만 늘 그렇듯이, 역사는 예상 밖의 선회를 했고 파시즘과 공산주의가 붕괴한 후 지금 자유주의는 곤경에 처했다. 그러면 이제 우리는 어디로 향하는가?

 이 질문이 특히 통렬하게 다가오는 것은 정보기술과 생명기술 분야의 쌍둥이 혁명이 지금껏 인류가 맞닥뜨려온 최대 과제를 던지는 이 시점에서 자유주의가 신뢰를 잃고 있기 때문이다. 정보기술과 생명기술을 합친 힘은 조만간 수십억의 사람들을 고용 시장에서 밀어내고 자유와 평등까지 위협할 수 있다. 빅데이터 알고리즘은 모든 권력이 소수 엘리트의 수중에 집중되는 디지털 독재를 만들어낼 수 있다. 그럴 경우 대다수 사람들은 착취로 고생하는 것이 아니라 그보다 훨씬 더 나쁜 지경에 빠질 수 있다. 그것은 바로 무관함 irrelevancce 이다.

 정보기술과 생명기술의 융합에 관해서는 이미 전작 《호모 데우스》에서 상세히 논했다. 하지만 그 책은 장기적인 전망 - 수 세기, 심지어는 수천 년의 관점 - 에 초점을 맞춘 반면, 이 책은 당면한 사회적, 경제적, 정치적 위기에 집중한다. 이 책에서 관심은 비유기적 생명의 창조 여부보다는 복지국가, 특히 유럽연합과 같은 제도에 닥친 위협에 있다.

 이 책에서 신기술이 야기할 모든 영향을 다룰 생각은 없다. 특히 오늘날 기술은 많은 놀라운 약속들을 제시하고 있지만, 이 책에서 나의 의도는 주로 그것이 초래할 위협과 위험을 조명하는 것이다. 기술 혁명을 주도하는 기업과 사업가 들은 자신들이 만든 것을 예찬하는 노래를 부르게 마련이다. 따라서 사회학자나 철학자 그리고 나 같은 역사학자가 할 일이란 경고음을 내고 치명적인 잘못을 유발할 모든 가능성에 대해 설명하는 것이다.

 

p15

 하지만 호모 사피엔스에게는 여유가 없다. 철학과 종교, 과학 모두 시간이 다 돼간다. 사람들은 수천 년 동안 인생의 의미를 두고 논쟁해왔다. 그러나 이 논쟁을 무한정 계속할 수는 없다. 다가오는 생태학적 위기, 커져가는 대량 살상무기의 위협, 현상 파괴적인 신기술의 부상은 그런 여유를 허락하지 않을 것이다. 아마도 가장 중요하게는, 인공지능과 생명기술이 인간에게 생명을 개조하고 설계할 힘을 건넬 것이다. 머지않아 누군가 인생의 의미에 관한 명시적이거나 묵시적인 어떤 이야기를 기반으로 이 힘을 어떻게 쓸지 결정해야 할 것이다. 하지만 공학자는 인내심이 평균보다 훨씬 낮고 투자자는 최악이다. 생명을 설계할 힘으로 무엇을 할지 당신이 모른다 해도, 답을 찾을 때까지 1,000년의 시간을 시장 권력이 기다려주지는 않을 것이다. 시장의 보이지 않는 손은 자신의 맹목적인 답을 당신에게 강요할 것이다. 인생의 미래를 분기 수익 보고서에 맡기는 것이 만족스럽지 않다면, 삶이 무엇인지에 대한 생각을 분명히 할 필요가 있다.

 

p22

 하지만 2008년 세계 금융위기가 닥친 이래 전 세계 사람들은 자유주의 이야기에 점점 환멸을 느끼게 되었다. 장벽과 방화벽이 다시 유행이다. 이민자와 자유무역협정에 대한 저항감은 높아만 간다. 겉만 민주적인 정부들은 사법 체계의 독립성을 전복하고, 언론자유를 제한하며, 어떤 반대도 반역으로 몰아간다. 터키와 러시아 같은 나라의 스트롱맨은 새로운 유형의 반자유주의적 민주주의와 노골적인 독재를 실험한다. 오늘날 중국 공산당을 두고 역사의 잘못된 편에 서 있다고 자신 있게 선언할 사람은 드물 것이다.

 영국의 브렉시트 국민투표와 미국의 도널드 트럼프 부상으로 뚜렷이 각인된 해였던 2016년은 이러한 환멸의 파도가 서유럽과 북미의 핵심 자유주의 국가들에까지 가 닿은 순간임을 의미했다. 몇 년 전만 해도 미국인과 유럽인은 이라크와 리비아를 무력으로 자유화하려 애썼지만, 이제는 켄터키와 요크셔 주님의 다수가 자유주의 청사진을 바람직하지 않거나 이룰 수 없는 것으로 보게 되었다. 어떤 이들은 옛날의 계층화된 세상을 다시 그리워하게 되었고, 이제와서 인종적, 민족적, 젠더적 특권을 포기하지 않으려고 한다. 또다른 이들은 (옳든 그르든) 자유화와 세계화라는 것이 결국에는 대중을 제물로 소수 엘리트들에게 힘을 건넨 거대 사기라고 결론 내렸다.

 

 1938년, 사람들에게 주어진 전 지구적 이야기의 선택지는 세 가지였고, 1968년에는 두 가지밖에 없었다. 그러다가 1998년에는 한 가지 이야기만 득세하는 듯 보였다. 급기야 2018년이 우리 앞에는 하나도 남아 있지 않게 되었다. 최근 수십 년 동안 세계의 상당 부분을 지배했던 자유주의 엘리트들이 충격과 혼미의 상태에 빠진 것도 당연하다. 하나의 이야기만 존재한다는 것은 가장 마음이 놓이는 상황이다. 모든 것이 완벽하게 분명하기 때문이다. 하지만 급작스럽게 아무런 이야기도 없어진 상태는 끔찍한 일이다. 아무런 의미도 파악할 수 없게 된 것이다. 흡사 1980년대 소련의 엘리트처럼 지금 자유주의자들은 어떻게 해서 역사가 예정된 경로에서 벗어났는지 이해하지 못하고 있다. 현실을 해석할 대안적인 프리즘도 가진 게 없다. 방향감을 잃은 이들은 마치 역사가 자신들이 머릿속에 그린 해피 엔딩에 이르지 못한 것이 아마겟돈을 향해 돌진하는 일이라도 되는 양 종말론적 사고에 빠져들었다. 현실을 직시하지 못하면 정신은 재앙적 시나리오에 집착하게 된다. 지독한 두통을 치명적인 뇌종양의 신호라고 상상하는 사람처럼, 많은 자유주의자들은 브렉시트와 도널드 트럼프의 부상이 인류 문명의 종언을 예고한다고 우려한다.

 

p27

 생명기술과 정보기술의 혁명ㅇ은 기술자와 기업가, 과학자 들이 만들지만, 이들은 자신들의 결정이 어떤 정치적 함의를 갖는지 거의 알지 못하고, 어느 누구도 대표하지 않는다. 의회와 정당이 알아서 행동을 취할 수 있을까? 현재로서는 그럴 것 같지 않다. 기술의 파괴적 혁신은 정치적 의제에서 우선 사안도 아니다. 그 결과, 2016년 미국 대선 기간에도 파괴적 기술과 관련해 주로 언급된 것은 힐러리 클린턴의 이메일 스캔들이었고, 실직에 관한 온갖 이야기 중에도 자동화의 잠재적 충격 문제는 어느 후보도 언급하지 않았다. 도널드 트럼프는 유권자들에게 그들의 일자리를 멕시코와 중국이 가져갈 것이며, 따라서 멕시코 국경에 장벽을 건설해야 한다고 경고했다. 하지만 알고리즘이 일자리를 가져갈 거라는 경고는 하지 않았고, 캘리포니아 접경에 방화벽을 세워야 한다는 제안도 하지 않았다. 

 

 이것은 자유주의 서방의 심장부에 있는 유권자들조차 자유주의 이야기와 민주적 절차에 대한 신뢰를 잃어가는 한 가지(유일한 것은 아니더라도) 이유가 될지 모른다. 보통 사람은 인공지능과 생명기술을 이해하지 못할 수도 있다. 하지만 자기 옆을 지나가는 미래를 감지할 수는 있다. 1938년 소련과 독일 혹은 미국에 살았던 보통 사람은 삶의 조건이 암울했을 수는 있지만 자신이 세상에서 가장 중요한 존재이며 미래라는 말을 끊임없이 들었다(물론 그가 유대인이거나 흑인이 아니라 '보통 사람'임을 전제로 했을 때 얘기다). 그는 선전 포스트를 보았고 - 여기에는 보통 석탄 캐는 광부, 철강노동자, 영웅적인 포즈를 취한 가정주부가 그려져 있었다 - 그 속에서 자신을 봤다. "저 포스터 속에 있는 건 나야! 나는 미래의 주인공이야!

 하지만 2018년의 보통 사람은 점점 자신이 사회와 무관하다고 느낀다. 수많은 신비한 단어들 - 세계화, 블록체인, 유전공학, 인공지능, 기계 학습 machine learning - 이 테드 강연과 정부 싱크탱크, 하이테크 콘퍼런스 같은 곳에서 신나게 오르내리지만, 보통 사람은 이 중에 자신에 관한 이야기는 아무것도 없다고 의심할 법하다. 자유주의 이야기는 무엇보다 보통 사람에 관한 이야기였다. 어떻게 하면 사이보그와 알고리즘 네트워크의 세계에서도 그런 적실성을 유지할 수 있을까?

 20세기에 대중은 착취에 맞서 봉기를 일으켰고, 경제에서의 핵심적 역할을 정치권력으로 환산하려 했다. 이제 대중은 자신이 사회와 무관해질까봐 두려워한다. 그래서 너무 늦기 전에 자신에게 남은 정치권력을 사용하는 데 필사적이다. 브렉시트와 트럼프의 부상은 전통적인 사회주의 혁명과는 반대되는 궤도의 사례를 보여준 것일 수 있다. 러시아, 중국, 쿠바에서 혁명을 일으킨 것은 경제에서는 핵심적이었으나 정치권력은 누리지 못한 사람들이었던 반면, 2016년 트럼프와 브렉시트를 지지한 것은 아직 정치권력은 누리고 있지만 자신의 경제 가치를 잃는 것이 두려웠던 많은 사람들이었다. 아마도 21세기 포퓰리즘 반란은 사람들을 착취하는 경제 엘리트가 아니라 더 이상 사람을 필요로 하지 않는 경제 엘리트에 맞서는 구도로 전개될 것이다. 이는 지는 싸움이 될 가능성이 높다. 착취에 반대하는 것보다 사회와 무관해지는 것에 맞서 투쟁하기가 훨씬 힘들기 때문이다.

 

p30

 특히 자유주의 이야기는 공산주의로부터 배운 결과, 공감의 반경을 넓혀 자유와 나란히 평등까지 중요한 가치로 받아들였다.

 자유주의 이야기는 초기에만 해도 주로 중산층 유럽 남성의 자유와 특권에만 관심을 가졌을 뿐 노동계급이나 여성, 소수자, 비유럽인의 고충에는 눈을 감은 듯 보였다. 1918년 승전국인 영국과 프랑스가 들떠서 자유에 대해 이야기할 때도 세계 전역에 이르는 제국의 신민들은 염두에 두지 않았다. 예를 들어, 인도가 자치권을 요구했을 때 영국은 1919년 암리차르 대학살로 응징했다. 당시 영국 육군은 비무장 시위대 수백 명을 학살했다.

 2차 세계대전을 겪고 난 후에도 서방의 자유주의자들은 자신들의 이른바 보편적 가치를 비서방 사람들에게 적용하는 데 무던히도 애를 썼다. 그리하여 1945년 네덜란드가 5년에 걸친 야만적인 나치 점령에서 해방됐을 때도, 그들이 거의 맨 처음 한 일은 옛 식민지 인도네시아를 재점령하기 위해 군대를 소집해 세계 절반을 가로질러 파병한 것이었다. 1940년 네덜란드가 나치의 침공을 받았을 때는 개전 4일 만에 독립을 포기했지만, 자신들이 인도네시아 독립을 진압하는 데는 4년이 넘는 길고 격렬한 싸움을 마다하지 않았다. 세계 곳곳에서 일어난 민족해방 운동이 자유의 수호자라고 자처한 서방보다 공산주의 모스크바와 베이징에 희망을 건 것도 놀랄 일이 아니었다

 그렇지만 자유주의 이야기는 조금씩 지평을 넓혀갔다. 적어도 이론상으로는 모든 인간의 자유와 권리를 예외 없이 존중하게 되었다. 자유의 원이 확대되면서 또한 자유주의 이야기는 공산주의식 복지 제도의 중요성에도 눈떴다. 자유도 어떤 유의 사회 안전망과 결합되지 않으면 큰 가치가 없다는 사실을 깨닫게 된 것이다. 사회 민주적 복지국가는 민주주의와 인권과 더불어 국가가 지원하는 교육과 의료를 한데 결합했다. 심지어 초자본주의 국가라 할 수 있는 미국도 자유의 보호에는 최소한 어떤 식으로든 정부의 복지 서비스가 필요하다는 사실을 깨달았다. 굶는 아이에게 자유는 없다.

 1990년대 초까지 사상가들과 정치인들은 하나같이 '역사의 종언'을 반겼다. 확신에 찬 목소리로, 과거의 정치적, 경제적 문제는 다 해결됐으며, 민주주의와 인권, 자유 시장과 정부의 복지 서비스로 재단장한 자유주의 패키지야말로 여전히 유일한 해법이라고 주장했다. 이 패키지는 전 세계로 퍼져나가 모든 장애물을 극복하고 모든 국경을 지우는 한편, 인류를 하나의 자유로운 지구 공동체로 바꿔놓을 운명인 것처럼 보였다.

 하지만 역사는 끝나지 않았다. 프란츠 페르디난트의 순간과 히틀러의 순간, 체 게바라의 순간에 이어 이제 우리는 트럼프의 순간에 처했다. 그렇지만 이번에 자유주의 이야기가 마주한 상대는 제국주의나 파시즘, 공산주의처럼 일관된 이데올로기를 가진 적수가 아니다. 트럼프의 순간은 훨씬 더 허무주의적이다.

 20세기의 주요 운동은 모두 전 인류를 위한 미래 청사진이 있었던 데 반해 도널드 트럼프는 그런 것은 제시하지 않는다. 그와는 정반대다. 그의 주된 메시지는 어떤 지구 차원의 청사진을 만들고 증진하는 것은 미국의 일이 아니라는 것이다. 마찬가지로, 영국 브렉시트 지지자들도 '분리된 영국'의 미래를 위한 별다른 계획이 없다 - 유럽과 세계의 미래는 자신들의 지평을 훨씬 넘는 것이라고 본다. 트럼프와 브렉시트에 찬성표를 던진 사람들 대부분은 자유주의 패키지를 전면 거부한 게 아니다. 주로 세계화에 대한 믿음을 잃었을 뿐이다. 그들은 여전히 민주주의와 자유 시장, 인권, 사회적 책임을 믿는다. 하지만 이런 좋은 생각들도 국경에서는 제한될 수 있다고 생각한다. 실제로 그들은 요크셔와 켄터키에서 자유와 번영을 보존하기 위해서는 국경에 장벽을 세우고 외국인에 대해서는 비자유주의적 정책을 체택하는 것이 최선이라고 믿는다. 

 떠오르는 중국의 슈퍼파워도 거의 거울처럼 닮은 이미지를 보여준다. 중국은 국내 정치 자유화는 경계하면서도, 세계 다른 나라들에 대해서는 훨씬 더 자유주의적인 접근법을 택해왔다. 사실상 자유 무역과 국제 협력에 관한 한 시진핑이야말로 오바마의 진정한 계승자처럼 보인다. 마르크스레닌주의는 잠시 뒤로 제쳐둔 채, 자유주의 국제 질서에 꽤 만족스러워하는 것 같다.

 다시 기승을 부리는 러시아는 자신을 자유주의 세계 질서의 훨씬 강력한 경쟁자로 본다. 하지만 러시아는 군사력은 재편했어도 이념적으로는 파산했다. 블라디미르 푸틴은 러시아와 세계 곳곳의 다양한 우파 운동 진영에서는 확실히 인기가 있다. 하지만 스페인 실직자난 불만에 찬 브라질 국민, 초롱초롱한 눈망울의 케임브리지 학생 들까지 사로잡을 전 지구적 세계관은 갖고 있지 않다.

 러시아는 자유민주주의에 대안적인 모델을 제시한다. 하지만 이 모델은 하나의 일관성을 가진 정치 이념이 아니다. 그보다는 몇몇 올리가르히(과두재벌)들이 국가의 부와 권력 대부분을 독점하고는, 언론 통제를 통해 자신들의 활동을 숨기고 지배를 다지는 정치 관행에 불과하다. 민주주의는 다음과 같은 에이브러험 링컨의 원칙 위에 서 있다. "모든 국민을 잠시 속일 수 있고, 일부 국민을 늘 속일 수 있어도, 모든 국민을 늘 속일 수는 없다." 정부가 부패해서 국민 생활을 개선하지 못하면, 결국 그 사실을 깨닫는 사람이 많아지면서 정부를 대체할 것이기 때문이다. 하지만 정부가 언론을 통제하는 상황에서는 링컨의 논리는 힘을 잃는다. 시민이 진실을 알지 못하도록 막기 때문이다. 집권 과두제는 언론 독점을 통해 모든 정책 실패를 반복해서 남 탓으로 전가하고 국민의 관심을 외부 위협 - 실제든 상상이든 - 으로 돌릴 수 있다.

 그런 과두제 아래 살다보면 늘 이런저런 위기가 국민 의료나 공해 같은 따분한 문제보다 우선한다. 국가가 외부 침략이나 끔찍한 전복 사고에 직면했다는데 누가 과밀 병원과 강물 오염에 대해 걱정할 시간이 있겠는가? 이런 식으로 끝없는 위기의 흐름을 만들어 냄으로써 부패한 과두제는 지배를 무한정 연장할 수 있다.

 하지만 이런 과두제 모델은 실행력에서는 지속성이 있어도 아무에게도 매력을 발휘하지는 못한다. 다른 이데올로기들은 자랑스럽게 자신들의 청사진을 설파하는 데 반해, 올리가르히들은 집권하고 있으면서도 자신들의 통치에 자부심이 없어 다른 이데올로기로 연막을 치는 경향이 있다. 그래서 러시아는 민주주의인 체하고, 지도부는 과두제보다 러시아 민족주의와 정교회의 가치에 대한 충성을 공언한다. 프랑스와 영국의 우익 극단주의자들이 러시아의 지원에 의존하고 푸틴에 대한 흠모를 표시하는 일은 있을 법도 하지만, 두 나라의 유권자들조차 실제로 러시아 모델을 빼닮은 나라 - 고질적인 부패와 각종 서비스 장애, 법치주의 부재, 엄청난 불평등의 나라 - 에서는 살고 싶지 않을 것이다. 통계에 따르면, 러시아는 국부의 87퍼센트가 상위 10퍼센트 부유층 손에 있는, 세계에서 가장 불평등한 나라 중 하나로 꼽힌다. 프랑스 '국민전선'을 지지하는 노동계급 유권자 중에서 이런 부의 분배형을 자국에도 이식하고 싶어하는 사람이 얼마나 될까?

 사람들은 자신의 발로 투표한다. 세계를 여행하는 동안 나는 미국이나 독일, 캐나다, 호주로 이민 가고 싶어 하는 사람은 많이 만나봤다. 중국이나 일본으로 이주하고 싶어 하는 사람도 어느 정도 있었다. 하지만 러시아로 이민 가는 게 꿈이라는 사람은 단 한 명도 보지 못했다.

 

p37

 자유주의의 고장으로 공백이 생기자 잠정적이나마 각 국가의 지나간 황금시절을 그리워하는 환상이 그 자리를 메우고 있다. 도널드 트럼프는 미국의 고립주의에 대한 촉구에다 '미국을 다시 위대하게 만들자'는 약속을 연결했다. 마치 1980년대나 1950년대의 미국이 21세기에도 미국인들이 어떻게든 되살려야 하는 완벽한 사회였다는 듯이. 브렉시트 지지자들 역시 영국을 독립 강국으로 만드는 꿈을 꾼다. 마치 아직도 빅토리아 여왕 시대에 살고 있다는 듯이. 그리고 지난 시절에나 통했던 '영광의 고립'이 인터넷과 지구 온난화 시대에도 실행 가능한 정책이라는 것처럼. 중국 엘리트들은 자신들의 고유한 제국과 유교의 유산에 다시 눈을 뜨면서 그것을 서방에서 수입해온 미심쩍은 마르크스 이데올로기의 보완재나 대용품으로까지 생각한다. 러시아에서 푸틴이 공식적으로 제시하는 청사진도 부패한 과두제의 건설이 아니라 옛 차르 제국의 재건이다. 볼셰비키 혁명이 일어난 지 100년이 지난 지금 푸틴은 러시아 민족주의와 정교회의 신앙심에 힘입은 전제 정부를 통해 옛 제정 시대의 영광을 되찾는 한편 발트해에서 캅카스까지 세력을 확장하겠다고 약속한다.

 이처럼 민족주의적 애착과 종교적 전통을 뒤섞은 향수 어린 꿈은 인도와 폴란드 외에도 수많은 체제의 버팀목이 되고 있다. 하지만 이런 환상의 힘이 중동만큼 극단적인 곳도 없다. 이곳 이슬람주의자들은 1,400년 전 예언자 무함마드가 메디나 시에서 세운 체제를 그대로 모방하고 싶어 한다. 이스라엘의 근본주의 유대교들도 한술 더 뜬다. 2,500년 전 성경 시대로 돌아가려는 꿈을 꾼다는 점에서 그들은 이슬람주의자들마저 능가한다. 이스라엘 집권 연립정부의 각료들은 지금 이스라엘의 국경을 성경 속의 이스라엘에 좀 더 가깝게 확장하려는 희망을 공공연히 밝힌다. 심지어 알아크사 이슬람사원 자리에 고대 예루살렘의 야훼 신전을 재건하려 든다.

 자유주의 엘리트들은 이런 상황을 공포의 눈길로 본다. 그리고 인류가 늦지 않게 자유주의의 길로 복귀해 재난을 피할 수 있기를 희망한다. 2016년 9월 오바마 대통령은 마지막 유엔 연설에서 청중을 향해 "세계가 민족과 부족, 인종, 종교와 같은 해묵은 분할선을 따라 날카롭게 나뉘고 궁극에는 갈등 속으로 퇴보하는 것"을 경계했다. 그는 대신 "자유 시장과 책임 정부, 민주주의와 인권, 국제법의 원칙이 (....) 금세기 인간 진보를 위한 확고한 기반으로 남기"를 기원했다.

 오바마가 자유주의 패키지를 두고 숱한 한계에도 불구하고 다른 어떤 대안보다도 실적이 훨씬 좋았다고 한 것은 옳았다. 대부분의 사람들은 21세기 초 자유주의 질서의 보호 아래 경험했던 것보다 더 큰 평화나 번영을 누려본 적이 없다. 인류 역사상 처음으로 전염병에 의한 사망자가 고령으로 인한 사망자보다 적었으며, 폭력에 의한 사망자가 사고로 인한 사망자보다 적었다.

 

p51

 결국, 우리가 보호해야 할 궁극의 목표는 사람이지 일자리가 아니다. 남아도는 운전사와 의사는 다른 일자리를 찾아야 할 것이다.

 

p58.  새로운 일자리라고?

 

 예술에서 의료에 이르기까지 모든 분야의 전통적인 일자리 다수가 사라지면 새로운 인간 일자리의 창출로 상쇄될 것이다. 알려진 질병을 진단하고 익숙한 치료를 관장하는 데 집중하는 일반 의사들은 AI 의사로 대체될 가능성이 높다. 하지만 바로 그 점 때문에 획기적인 연구를 수행하고 신약이나 수술 절차를 개발하기 위해서는 인간 의사와 연구소 조교에게 훨씬 더 많은 돈을 지급해야 할 것이다.

 AI는 다른 방식으로 새로운 인간 일자리 창출을 도울 수 있다. 인간은 AI와 경쟁하는 대신 AI를 정비하고 활용하는 데 집중할 수 있을 것이다. 드론이 인간 비행사를 대체하면서 일자리가 사라졌지만 정비와 원격 조정, 데이터 분석, 사이버 보안 분야에서는 새로운 기회가 많이 생겨났다. 미군의 경우 무인기 프레데터나 리퍼 드론 한 대를 시리아 상공으로 날려보내는 데 30명이 필요한데, 그렇게 수집해 온 정보를 분석하는 데는 최소 80명이 더 필요한다. 2015년 미 공군은 이 직무를 맡을 숙련자가 부족해, 무인 항공기 운용 인력 부족이라는 역설적인 위기에 직면하기도 했다.

 그렇다면 2050년 고용 시장은 인간-AI의 경쟁보다도 상호 협력이 두드러진 형태가 될 가능성이 높다. 경찰부터 은행 업무에 이르기까지 인간과 AI가 한 팀을 이루면서 인간과 컴퓨터 모두를 능가할 수 있을 것이다. 1997년 IBM의 체스 프로그램인 딥 블루가 세계 챔피온 가리 카스파로프를 꺽은 후에도 인간이 체스를 그만두는 일은 일어나지 않았다. 오히려 AI 트레이너 덕분에 인간 체스 챔피언은 실력이 유례 없이 좋아졌고, 잠시나마 '켄타우로스'로 알려진 인간-AI 팀이 체스에서 인간과 컴퓨터 모두를 능가했다. 마찬가지로 AI는 인간이 사상 최고의 형사, 은행원, 군인으로 단장하는 데도 도움을 줄 수 있을 것이다.

 하지만 문제는, 그렇게 생겨난 새로운 일자리는 모두 고도의 전문성을 필요로 할 가능성이 높고, 따라서 비숙련 노동자의 실직 문제를 해결할 수는 없을 거라는 점이다. 그런 일자리를 실제로 메울 사람을 재교육하기보다 아예 새로운 일자리를 창출하는 것이 더 쉬운 일로 판명될 수 있다. 이전에 자동화 물결이 밀려들었을 때, 사람들은 특별한 기술이 필요 없는 기계적인 작업을 또 다른 비슷한 수준의 일로 바꿀 수 있었다. 1920년 농업이 기계화다하면서 해고된 농장의 일꾼은 트랙터를 생산하는 공장에서 새 일을 찾을 수 있었다. 1980년 공장 노동자는 실직하더라도 슈퍼마켓의 현금출납원을 새 출발을 할 수 있었다. 그런 작업 변화가 가능했다. 농장에서 공장으로, 다시 공장에서 슈퍼마켓으로 옮겨가는 데는 훈련이 많이 필요하지 않았다.

 하지만 2050년에는 현금출납원이나 방직공장 노동자가 로봇에게 일자리를 잃고 나서 암 연구원이나 드론 조종사, 혹은 은행의 인간-AI 팀원으로 새 일을 시작하기란 거의 불가능할 것이다. 필요한 기술을 갖추지 못할 것이기 때문이다. 제1차 세계대전 때 징집돼 온 수백만의 신참 병사에게 기관총을 맡기고 수천 명의 전사자를 낸 것은 그래도 이해할 만하다. 개별 기술이 크게 중요하지 않았기 때문이다. 하지만 오늘날 아무리 드론 조종사와 데이터 분석가가 부족하다 해도 미 공군은 그 자리를 월마트 퇴직원으로 메울 리는 없다. 경험 없는 신병이 아프가니스탄의 결혼 축하 파티를 탈레반의 고위급 회의로 오인하는 사고를 바랄 사람은 없다.

 결과적으로, 인간 일자리가 많이 생긴다 해도 새로운 '무용' 계급의 부상은 불가피할지도 모른다. 실제로는 두 세계의 최악을 함께 겪을 수도 있다. 높은 실업률과 숙련 노동력의 부족이 동시에 닥치는 것이다. 많은 사람이 19세기의 마차 몰이꾼이 아닌 말의 운명을 맞을 수 있다. 마차 몰이꾼은 택시 기사로 전환활 수 있었지만, 말은 점점 고용 시장에서 밀려나기 시작해 결국에는 완전히 퇴출됐다.

 더욱이 남은 인간 일자리도 결코 미래 자동화 위협으로부터 안전할 수 없을 것이다. 기계 학습과 로봇은 계속 개선될 것이기 때문이다. 40세에 실직한 월마트 현금출납원이 초인적인 노력 끝에 간신히 드론 조종사가 됐다 해도 10년 후에는 그는 다시 자기 변신을 해야만 할 수 있다. 그때쯤이면 드론을 날리는 일도 자동화됐을 수 있기 때문이다. 이처럼 직업의 변동성이 커지면서 노조를 조직하거나 노동권을 확보하는 일도 더 어려워질 것이다. 이미 오늘날에도 선진국에서 생겨나는 많은 신규 일자리는 보호받지 못하는 비정규직이거나 자유계약직, 혹은 일회성 업무직이다. 버섯구름처럼 급속하게 생겨났다가 10년도 안 돼 사라지는 직업을 가지고 어떻게 노조를 결성할까?

 마찬가지로 인간-컴퓨터 켄타우로스 팀도 평생 동반자 관계로 정착하는 대신 인간과 컴퓨터 간의 끊임없는 주도권 다툼으로 얼룩질 가능성이 높다. 인간들로만 이뤄진 팀 - 가령, 셜록 홈스와 왓슨 박사 - 은 보통 서로 협력해서 수십 년을 이어갈 항구적인 위계질서와 틀을 잡는다. 하지만 IBM 왓슨 컴퓨터 시스템(2011년 미국 TV쇼 <제퍼디!>에서 우승하며 유명해진 컴퓨터)과 한 조를 이룬 인간 탐정이 겪게 될 정해진 틀이라고는 수시로 찾아드는 파괴적 혁신일테고, 항구적인 위계질서라고는 반복되는 기술 혁명뿐일 것이다. 어제의 (로봇) 조수는 내일의 감독관으로 변신할 가능성이 높은 데다 모든 상호 업무 규약과 지침서는 매년 다시 써야만 할 것이다.

 체스 세계를 꼼꼼히 들여다보면 장기적으로 상황이 어느 방향으로 전개될지 단서를 얻을 수 있다. 딥 블루가 카스파로프를 꺽고 난 후 수년 동안 체스에서 인간-컴퓨터의 협력이 빛을 발한 것은 사실이다. 하지만 최근 몇 년 사이에 컴퓨터의 체스 실력이 너무나 좋아진 나머지 이제 인간 협력자의 가치는 사라졌고, 조만간에는 완전히 있으나 마나 한 존재가 될 상황에 처했다.

 결정적인 이정표가 세워진 날은 2017년 12월 7일이었다. 체스에서 컴퓨터가 인간을 이겼을 때가 아니라, 구글의 알파제로 프로그램이 스톡피시 8 프로그램을 꺽은 순간이었다. 스톡피시 8은 2016년 세계 컴퓨터 체스 챔피언이었다. 수백 년 동안 체스에서 쌓아온 인간의 경험은 물론 수십 년간 누적된 컴퓨터의 경험에 접속할 수 있었고, 초당 7,000만 수를 계산할 수 있는 프로그램이었다. 반면 알파제로는 불과 초당 8만 수의 계산을 수행했을 뿐이었다. 인간 창조자는 알파제로에게 어떤 체스 전술도 가르쳐주지 않았다. 심지어 표준 오프닝 standard opening조차 알려주지 않았다. 그 대신 알파제로는 최신 기계 학습 원리를 자가 학습 체스에 적용해 자신을 상대로 한 시합을 반복했다. 그럼에도 신참 알파제로는 스톡피시를 상대로 모두 100회의 시합을 벌여 28승 72무를 기록했다. 패한 적은 한 번도 없었다. 알파제로는 인간으로부터 배운 것이 없었기 때문에, 시합에서 승리했을 때 알파제로가 구사한 수와 전술의 상당수가 인간의 눈에는 파격적이었다. 완전히 천재적이진 않아도 충분히 독창적이라고 할만했다.

 알파제로가 백지 상태에서 체스를 학습하고 스톡피시를 상대로 한 시합을 준비하며 자신의 천재적 개능을 개발하는 데 걸린 시간이 얼마인지 상상할 수 있겠는가? 네 시간이었다. 오자가 아니다. 수 세기 동안 체스는 인간 지능의 더 없는 자랑거리로 여겨졌다. 하지만 알파제로는 완전 무지 상태에서 네 시간 만에 창의적 완숙의 경지에 도달했다. 그 과정에서 인간이 지도하며 준 도움도 전혀 없었다.

 알파제로 말고는 상상력을 발휘하는 소프트웨어는 더 있다. 이제는 체스 프로그램의 다수가 단순한 수의 계산뿐 아니라 '창의성'에서도 인간 선수를 능가한다. 인간만 출전하는 체스 토너먼트 시합에서 심판은 선수들이 몰래 컴퓨터의 도움을 얻는 속임수를 적발하느라 여념이 없다. 속임수를 적발하는 한 가지 방법은 선수가 구사하는 독창성의 수준을 모니터하는 것이다. 만약 선수가 이례적으로 창의적인 수를 구사하면 심판은 사람의 수일 리가 없다고 의심할 때가 많다. 컴퓨터의 소행으로 추정하는 것이다. 적어도 체스에서는 창의성은 이미 인간보다 컴퓨터의 트레이드마크가 됐다! 따라서 체스가 탄광의 카나리아라면, 우리는 이것을 카나리아가 죽어가고 있다는 경고로 이해해야 한다. 지금 인간-AI 체스팀에 일어나고 있는 일은 앞으로 경찰, 의료, 은행 업무에서 활동할 인간-AI 팀으로도 이어질 수 있다.

 결국, 새로운 일자리를 창출하고 그 자리를 채우기 위해 인간을 재교육하는 일은 단 한번의 노력으로 되지는 않을 것이다. AI 혁명은 일대 분수령을 이룬 뒤에 고용 시장이 새로운 평형 상태에서 안정을 찾는 식의 일회성 사건은 아닐 것이다. 그보다는 점점 커지는 (혁신적) 파괴의 폭포가 될 것이다. 이미 지금도 자신이 평생 같은 일을 할 거라고 보는 사람은 극소수다. 2050년이면 '평생 직장'이 라는 생각뿐 아니라 '평생 직업'이라는 생각까지 원시적이라고 간주될 것이다.

 앞으로 우리가 끊임없이 새로운 일자리를 만들어내고 노동자들을 재훈련할 수 있다 하더라도, 평균적인 인간이 그런 끝없는 격변의 인생을 살아가는 데 필요한 감정의 근력을 유지할 수 있을지 의아해할 수도 있다. 변화는 늘 스트레스로 가득하다. 21세기 초 세계는 미친 듯 바빠지면서 온 지구는 스트레스라는 유행병을 앓고 있다. 고용 시장과 개인 직업의 변동성이 커지는 상황에서 사람들은 현실에 잘 대처해나갈 수 있을까? 아마도 사피엔스의 정신이 나가는 것을 막으려면 지금보다 훨씬 효과가 큰 스트레스 경감기술 - 약물로부터 뉴로피드 백neuro-feedback, 명상에 이르기까지 - 이 필요할 것이다. 2050년 '무용' 계급이 출현하는 원인에는 일자리의 절대 부족이나 관련 교육의 결여뿐 아니라 정신 근력의 부족도 포함될 것이다.

 확실히 지금까지의 이야기는 대부분이 추측이다. 이 글을 쓰는 지금 - 2018년 초 - 도 자동화로 많은 산업이 파괴됐지만 대규모 실업은 발생하지 않았다. 사실 많은 나라에서 미국과 같이, 실업률은 사상 최저를 기록 중이다. 기계 학습과 자동화가 미래에는 달라질 직업들에 어떤 유의 충격을 줄지 아무도 확실히 알 수는 없으며, 시간의 흐름에 따라 관련된 상황이 어떻게 전개될지 구체적으로 추정하기란 극도로 어렵다. 그 이유는 특히 정치적 결정과 문화적 전통이 순전히 기술적인 돌파 못지않게 상황 전개에 영향을 주기 때문이다. 따라서 자율주행 차량이 인간 운전자보다 안전하고 저렴한 것으로 판명난 후에라도 정치권과 소비자들이 수년 동안, 아마 수십 년까지도 변화를 막을 수 있을 것이다.

 하지만 그렇다고 현실에 안주할 수는 없다. 새 일자리가 사라진 일자리를 충분히 메워줄 거라고 가정하는 것은 위험하다. 이전의 자동화 물결 기간에 그런 일이 일어났다고 해서 21세기의 아주 다른 조건 아래서도 같은 일이 반복될 거라는 보장은 없다. 그것이 초래할 수 있는 사회적, 정치적 혼란은 너무나 두려운 것이어서, 시스템 전반에 걸친 대량 실업의 개연성이 낮다 하더라도 우리는 그 문제를 아주 심각하게 생각해야 한다. 

 19세기에 산업혁명은 기존의 사회적, 경제적, 정치적 모델로는 대처할 수 없는 새로운 조건들과 문제들을 야기했다. 봉건주의와 군주제, 전통 종교는 산업화된 대도시와 수백만의 뿌리 뽑힌 노동자, 본성상 끊임없이 변하게 마련인 근대 경제를 경영하는 데 적합하지 않았다. 그 결과 인류는 완전히 새로운 모델 - 자유민주주의와 공산주의 독재, 파시즘 체제 - 을 개발해야 했고, 이 모델들을 실험하여 쭉정이에서 알곡을 가려내고 최선의 해법을 실행하기까지 1세기에 걸쳐 끔찍한 전쟁과 혁명을 겪어야 했다. 디킨스 소설에서 묘사된 탄광의 아동 노동, 제1차 세계대전과 1932~1933년의 우크라이나 대기근은 인류가 치른 수업료의 일부에 불과했다.

 21세기 정보기술과 생명기술이 인류에게 제기한 과제들은 이전 시대에 증기기관과 철도, 전기가 제기한 것들보다 훨씬 더 크다. 우리 문명의 막대한 파괴력을 감안하면 더 이상 실패한 모델이나 세계대전, 유혈 혁명을 용인할 여유가 없다. 이번에는 실패하면 핵전쟁이나 유전공학에 의한 괴물, 생태계의 완전한 붕괴를 초래할 수도 있다. 따라서 우리는 산업혁명에 직면했을 때보다 더 잘해야 한다.

 

p68

 예를 들어 공산주의를 보자. 자동화가 자본주의 시스템을 기반까지 흔들려고 위협함에 따라 혹자는 공산주의가 부활할 거라고 추측할 수 있다. 하지만 공산주의는 그런 종류의 위기를 활용하기 위해 만들어진 이념이 아니다. 20세기 공산주의 사상가들이 프롤레타리아에게 가르친 것은 이들의 막대한 경제적 힘을 정치적 영향력으로 전환하는 방법이었다. 공산주의 정파는 노동 계급에 의한 혁명을 촉구했다. 하지만 대중이 자신들의 경제적 가치를 잃는다면, 그래서 착취가 아닌 자신의 무관함에 맞서 투쟁해야 한다면 그런 교의가 얼마나 의미 있을까? 노동 계급이 없는 상황에서 어떻게 노동 계급 혁명을 시작할까?

 혹자는 인간이 작업장에서 AI와 경쟁할 수 없더라도 소비자로서는 늘 필요할 것이기 때문에 앞으로도 경제적으로 사회와 무관한 존재가 되지는 않을 거라고 주장할 수도 있다. 하지만 미래 경제가 우리를 소비자로서조차 필요한 존재로 여길지는 결코 확실하지 않다. 그 역할도 기계와 컴퓨터가 할 수 있을 것이기 때문이다. 이론적으로는 이런 경제도 충분히 가능하다. 광산 기업이 철을 생산해서 로봇 기업에 팔고. 로봇 기업은 로봇을 만들어 광산 기업에 팔고, 다시 광산 기업은 더 많은 철을 생산하고, 이렇게 생산된 철은 다시 더 많은 로봇을 만드는 데 쓰이고, 이런 식으로 계속된다. 이런 기업들은 은하계 멀리까지 성장하고 확장해갈 수 있다. 이 과정에서 그들에게 필요한 것이라고는 로봇과 컴퓨터뿐이다. 자신들의 생산물을 인간이 사주는 일조차도 필요하지 않다.

 

p78

 보편 기본 지원이 2050년 평균인의 객관적 조건을 개선하는 것을 목표로 한다면 성공할 가능성은 꽤 높다. 하지만 사람들이 자신의 운명에 대해 주관적으로 더 만족하는 것과 사회적 불만을 막는 것을 목표로 한다면 실패할 가능성이 높다.

 그 목표를 진정으로 달성하려면 보편 기본 지원은 스포츠에서 종교에 이르기까지 다른 의미 있는 추구에 의해 보완해야 할 것이다. 아마도 이스라엘에서 행해진 실험이 일 - 이후 세계에서 만족스런 삶을 사는 방법으로는 지금까지 가장 성공적이었을 것이다. 이곳에서는 초정통파 유대교 남성의 약 50퍼센트가 일을 하지 않는다. 이들은 성경을 공부하고 종교 의식을 수행하는 데 삶을 바친다. 그들과 가족들이 굶어 죽지 않는 비결은 흔히 부인들이 일을 하기 때문이기도 하고, 생활에 필요한 기본적인 것들에 부족함이 없도록 정부가 보조금과 무료 서비스를 제공하기 때문이기도 하다. 이것이야말로 '그런 말이 생기기도 전'의 보편 기본 지원이다.

 이 초정통파 유대교 남성들은 가난하고 직업도 없다. 하지만 설문조사를 해보면 삶의 만족도가 이스라엘 사회의 다른 어떤 분파보다 높게 나온다. 이는 공동체의 유대감이 주는 결속력과 더불어, 성경 공부와 의례 수행에서 찾을 수 있는 깊은 의미 때문이다. 열악한 환경 속에서 땀 흘려 일하는 노동자들로 가득한 대형 직물공장보다, 남성들이 함께 모여 탈무드를 공부하는 작은 방에서 더 큰 즐거움과 참여감과 통찰이 생기는 것은 당연하다. 전 세계를 대상으로 삶의 만족도를 묻는 조사에서 이스라엘이 상위권에 오르는 이유도 부분적으로는 이런 무직의 가난한 사람들이 점수를 올려주기 때문이다. 

 비유대교 이스라엘인은 초정통파 유대교인들이 사회 기여도가 낮고 다른 사람의 근로에 기생한다고 극심하게 비판할 때가 많다. 특히 초정통파 유대교인 가족은 자녀가 평균 일곱 명이라는 점을 들어, 그런 삶의 방식은 가능하지 않다고 주장하는 경향이 있다. 아마도 조만간 국가가 그 많은 실업자들을 계속해서 지원할 수는 없을 것이다. 그러면 그들도 일을 해야 할 것이다. 하지만 그 반대가 될 수도 있다. 로봇과 AI가 인간을 구직 시장에서 밀어내면, 오히려 초정통파 유대교인들이 과거의 화석이 아니라 미래의 모델로 보일지도 모른다. 물론 모든 사람이 초정통파 유대교인이 되어 예시바에 가서 탈무드를 공부할 거라는 말은 아니다. 하지만 모든 사람의 삶에서 의미와 공동체의 추구가 구직열을 압도할지도 모른다.

 만약 보편적인 경제 안전망과 더불어 강력한 공동체와 의미 있는 삶의 추구를 결합할 수만 있다면, 우리가 알고리즘에 일자리를 빼앗기는 것이 실제로 축복일 수 있다. 하지만 우리 삶에 대한 통제력을 잃는 것은 훨씬 무서운 시나리오다. 대량 실업의 위험과는 별도로, 우리가 훨씬 더 걱정해야 할 일은 인간의 권위가 알고리즘으로 옮겨가는 것이다. 알고리즘은 자유주의 이야기에 대한 우리의 믿음을 파괴하고 디지털 독재의 부상으로 이어지는 길을 열지도 모름다.

 

p83

 국민투표와 선거는 언제나 인간의 느김에 관한 것이지 이성적 판단에 관한 것이 아니다. 만약 민주주의가 이성적인 의사 결정의 문제라면 모든 사람에게 동등한 투표권을, 혹은 그 어떤 투표권도 줘야 할 이유가 전혀 없다. 어떤 사람들은 다른 사람들보다 훨씬 더 박식하고 이성적이라는 증거는 충분하다. 경제나 정치에 관한 구체적인 질문에 관한 한 확실히 그렇다. 브렉시트 투표가 있고 난 후에 저명한 생물학자 리처드 도킨스는 자신을 포함한 영국 대중의 대다수는 (이 문제를 두고) 국민트표에서 투표하도록 요구받는 일이 없어야 했다면서, 그들에게는 경제학과 정치학의 필요한 배경 지식이 없기 때문이라고 항변했다. "차라리 아인슈타인이 대수학을 맞게 풀었는지 결정하기 위해 국민투표를 실시하거나, 조종사가 어느 활주로에 착륙해야 할지를 두고 승객에게 투표하게 하는 것이 낫겠다."

 

p84

 느낌에 이끌리는 것은 유권자뿐 아니라 지도자도 해당된다. 2016년 브렉시트 국민트표에서 탈퇴 캠페인을 이끈 지도자는 보리스 존슨과 마이클 고브였다. 데이비드 캐머런이 사임한 후 고브는 처음에 존슨을 총리로 지지했다. 하지만 마지막 순간에 고브는 존슨이 부적격자라고 선언하고 자신이 직접 출마하겠다는 의사를 발표했다. 존슨이 기회를 날려버린 고브의 행동을 두고 사람들은 마키아벨리적인 정치적 암살이라고 불렀다. 하지만 고브는 자신의 행동을 변호하는 과정에서 자신의 느낌에 호소하며 이렇게 설명했다. "정치 인생에서 걸음을 옮길 때마다 나 자신에게 한 가지 질문을 해왔다. '무엇이 옳은 일인가? 너의 마음은 네게 뭐라고 하는가?" 고브에 따르면, 그가 브렉시트를 위해 그토록 열심히 싸운 이유도, 그때까지 동지였던 보리스 존슨의 등에 칼을 꽂을 수밖에 없었던 이유도, 자신이 우두머리 자리에 나선 것도 그 때문이었다. 즉, 그의 마음이 그렇게 하라고 했다는 것이다.

 마음에 대한 이런 의존은 자유민주주의의 아킬레스건으로 드러날지도 모른다. 왜냐하면 (베이징이나 샌프란시스코의) 누군가가 인간의 마음을 해킹해서 조작하는 기술력을 얻게 되면, 민주 정치는 감정의 인형극으로 돌변할 것이기 때문이다.

 

p86

 따라서 감정은 합리성의 반대가 아니다. 감정이 체화한 것이 진화적 합리성이다.

 

p96

 2012년 3월 일본 관광객 세 명이 호주 연안의 작은 섬으로 당일 치기 여행을 가기로 했다. 그들은 차를 몰고 가다가 그대로 태평양에 뛰어들었다. 운전을 했던 21세 유주 노다 씨는 나중에 자신은 GPS를 따랐을 뿐이라고 했다. "GPS가 우리한테 그쪽으로 곧장 갈 수 있다고 했엉. 길로 안내해줄 거라고 계속 말하더군요. 그러다 꼼짝없이 빠졌지요." 그와 비슷하게 사람들이 GPS 지시만 믿고 차를 몰고 가다가 호수에 빠지거나 철거된 다리에서 떨어지는 사고가 여러 차례 일어났다. 길 찾기 능력은 근육과 같다. 사용하지 않으면 잃는다. 배우자나 직업을 고르는 능력도 마찬가지다.

 

p106

 우리는 인공지능의 부상이 대다수의 인간을 고용 시장에서 몰아 낼 수도 있다는 사실을 앞에서 봤다. 여기에는 운전자와 교통경찰까지 포함된다(소동을 빚는 인간을 순종적인 알고리즘으로 대체하면 교통경찰은 있으나 마나 한 존재가 된다). 하지만 그때가 되면 철학자에게는 새로운 출구가 생길 수도 있다. 지금까지는 시장 가치가 크지 않았던 철학자의 기량에 대한 수요가 갑자기 치솟을 수 있기 때문이다. 그러니 만일 미래에 좋은 일자리가 보장되는 무언가를 공부하고 싶다면 철학에 운을 걸어보는 것도 나쁘지 않을 것이다.

 

 p113

 20세기 후반 민주주이가 독재를 능가했던 것은 데이터 처리에서 우월했기 때문이다. 민주주의는 정보를 처리하고 결정하는 권한을 사람과 기관에 분산하는 반면 독재는 한곳에 집중했다. 20세기 기술로 보면 너무 많은 정보와 힘을 한곳에 모으는 방식이 비효율적이었다. 그 누구도 모든 정보를 충분히 빠르게 처리하면서 옳은 결정을 내릴 수는 없었기 때문이다. 소련이 미국보다 훨씬 나쁜 결정을 내리고 경제도 훨씬 뒤처진 데에는 이런 점도 작용했다.

 하지만 AI가 등장하면서 조만간 시계추는 반대 방향으로 움직일 수 있다. AI 덕분에 막대한 양의 정보를 중앙에서 모두 처리할 수 있게 됐다. 실제로 AI는 중앙 집중 체계의 효율을 분산 체계보다 훨씬 높일 수 있는데, 기계 학습은 분석할 수 있는 정보가 많을수록  성능이 좋아지기 때문이다. 알고리즘 훈련에 관한 한, 프라이버시 침해 우려는 무시한 채 10억 인구에 관련된 모든 정보를 데이터베이스 한곳에 모으는 편이, 개인 프라이버시를 존중해 100만 명에 관한 부분적인 정보만 데이터베이스에 두는 것보다 훨씬 낫다. 가령, 어떤 권위주의 정부가 모든 시민에게 DNA 스캔을 받게 하고 모든 의료 데이터를 중앙 정부 기관과 공유하도록 명령한다면, 의료 데이터를 엄격하게 사적으로 보호하는 사회보다 유전학과 의학연구에서 엄청나게 유리할 것이다. 20세기 권위주의 정권의 주요 장애 - 모든 정보를 한곳에 집중하려는 시도 - 가 21세기에는 결정적인 이점이 될 수 있다.

 

p124

 재산은 장기 불평등을 낳는 전제 조건이다.

 

 

 하지만 근대 후반에 이르러 평등은 거의 모든 인간 사회에서 이상이 되었다. 여기에는 공산주의와 자유주의라는 새로운 이데올로기의 부상이 일부 작용했지만, 산업혁명이 일어나면서 대중이 전례 없이 중요해진 요인도 있었다. 산업 경제는 평민 노동자 대중에게 의존했고, 산업화된 군대 역시 평민 병사 대중에게 의존했다. 민주주의와 독재 정부 모두가 대중의 건강과 교육, 복지에 대거 투자했다. 생산 라인을 가동할 건강한 수백만 노동자들과 참호에서 싸울 충성스런 수백만 병사들이 필요했기 때문이다.

 그 결과 20세기 역사는 상당 부분 계급과 인종, 성별 간 불평등 감소를 둘러싸고 전개됐다.. 세계가 2000년을 맞았을 때 그때까지도 여전히 계급제의 잔재는 남아 있었지만 1900년의 세계에 비하면 훨씬 평등했다. 21세기에 들어와서도 처음 몇 년 동안 사람들은 평등화의 과정이 계속 이어지고 속도도 더욱 빨라질 것으로 내다봤다. 특히 세계화가 세계 전역에 걸쳐 경제적 번영을 확산시키고, 그 결과 인도와 이집트의 국민들도 핀란드와 캐나다 국민 같은 기회와 권리를 누리게 되기를 바랐다. 모든 세대가 이런 가능성 위에서 자라났다.

 하지만 이제 이 약속은 지켜지지 못할 것 같다. 세계화가 인류의 다수에게 혜택을 준 것은 분명하지만 사회 내부는 물론 사회들 간에도 불평등이 커지는 신호가 뚜렷해지고 있다. 세계화의 과실을 일부 집단이 점점 독점해가는 반면 나머지 수십억은 뒤쳐져 있다. 이미 지금도 최고 부유층 1퍼센트가 세계 부의 절반을 차지하고 있다. 더욱더 놀라운 것은 최고 부유층 100명이 최저 빈곤층 40억명보다 더 많은 부를 가졌다는 사실이다.

 이런 추세는 훨씬 더 심해질 수 있다. 앞 장에서 설명했듯이, AI가 부상하면서 인간 대다수의 경제적 가치와 정치적 힘이 소멸될 수 있다. 이와 함께 생명기술이 발전하면서 경제 불평등을 생물학적 불평등으로 전환하는 일이 가능해질 수도 있다. 슈퍼리치는 마침내 자신들의 엄청난 부에 상응하는 것을 가질 수 있을 것이다. 지금까지는 자신들의 지위를 상징하는 것을 살 수 있었던 반면, 머지않아 생명 자체를 돈으로 살 수 있을 것이다. 수명을 늘리고 육체적, 인지적 능력을 증강하는 새로운 치료를 받는 데 많은 돈이 든다면 인류는 여러 생물학적 계층으로 쪼개질 수도 있다.

 역사적으로 부자들과 귀족들은 언제나 자신들이 다른 모든 사람들보다 우월한 기량을 갖고 있으며 그렇기 때문에 자신드링 지배력을 행사해야 한다고 생각했다. 하지만 우리가 아는 한 사실은 그렇지 않았다. 평균적인 공작의 재능이 평균적인 농민보다 낫지 않았고, 그의 우월함이란 단지 불공정한 법적, 경제적 차별에 힘입은 것이었다. 하지만 2100년에는 부유층이 정말로 빈민촌 거주자들보다 더 재능 있고 창의적이고 똑똑할 수 있다. 일단 부유층과 빈곤층 사이에 실제로 능력 격차가 벌어지기 시작하면 그것을 좁히기란 거의 불가능해질 것이다. 만약 부유층이 우월한 능력으로 자신들의 부를 더 늘리고, 더 많은 돈으로 육체와 두뇌까지 증강할 수 있게 되면, 시간이 갈수록 빈부 격차는 더 커질 수밖에 없을 것이다. 2100년까지 최상의 부유층 1퍼센트는 세계 부의 대부분을 차지하는 데 그치지 않고, 세계의 미美와 창의력, 건강까지 대부분 차지할 수 있을 것이다.

 두 과정이 합쳐지면, 즉 Ai의 부상과 생명공학이 결합되면 인류는 소규모의 슈퍼휴먼 계층과 쓸모없는 호모 사피엔스 대중의 하위 계층으로 양분될 수 있다. 설상가상으로, 대중이 경제적 중요성과 정치적 힘을 잃으면서 국가는 이들의 건강과 교육, 복지에 투자할 동기를 적어도 일부는 잃을 수 있다. 쓸모없어지는 것은 아주 위험하다. 그럴 경우 대중의 미래는 소수 엘리트의 선의에 좌우될 것이다. 그 선의는 수십 년 동안은 유지될 수도 있다. 하지만 위태로운 시기가 닥치면 - 가령 기후 재앙 - 잉여 인간들은 배 밖으로 던져버리고 싶은 유혹이 커질 테고, 그것은 어려운 일도 아닐 것이다.

 프랑스와 뉴질랜드처럼 자유주의 신념과 복지국가 관행이 오랜 전통인 나라에서는 엘리트가 대중을, 그들이 필요없을 때조차 계속해서 돌봐줄지 모른다. 하지만 보다 자본주의적인 미국에서는 미국식 복지국가의 잔여분마저 해체해버릴 첫 기회로 삼을지도 모른다. 훨씬 심각한 문제는 인도와 중국, 남아프리카, 브라질과 같이 인구가 많은 개발도상국들이 겪게 될 것이다. 보통 사람이 경제 가치를 잃고 나면 불평등이 급격히 치솟을 수 있다.

 그 결과 세계화는 세계의 통일로 가기보다 실제로는 '종의 분화'로 귀결될 수도 있다. 인류가 다양한 생물학적 계층 혹은 심지어 다양한 종으로 분화할 수도 있다는 뜻이다. 세계화는 수평적으로는 세계를 통일하고 국경을 없애지만, 동시에 수직적으로는 인류를 분할할 것이다. 미국과 러시아 같은 다양한 나라에서는 과두 지배계층이 뭉쳐 평범한 사피엔스 대중에 맞서 공동 목적을 추구할 수도 있다. 이런 관점에서 보면 현재 포퓰리즘이 '엘리트'에 분개하는 데에는 충분한 이유가 있다. 앞으로 조심하지 않으면 실리콘밸리 재벌과 모스크바 억만장자의 손주들이 애팔래치아 시골뜨기와 시베리아 촌사람의 손주들보다 우월한 종이 될 수도 있다.

 장기적으로 봤을 때, 그런 시나리오가 세계를 탈세계화할 수도 있다. 상위 계층은 자칭 '문명' 내부로 모여들면서 그 둘레에는 성벽과 해자를 만들어 '야만인들' 무리와 격리된 삶을 사는 것이다. 20세기 산업 문명은 값싼 노동력과 원자재와 시장을 얻기 위해 '야만인들'에게 의존해야 했다. 그래서 그들은 정복하고 흡수했다. 반면, 21세기 후기 산업 문명은 AI와 생명공학과 나노 기술에 의존하면서 훨씬 더 자족적이고 자생적이 된다. 그럴 경우 계급 차원을 넘어 나라와 대륙이 통째로 관심 밖의 대상으로 전락할 수도 있다. 드론과 로봇이 지키는 요새 안의 자칭 문명 구역에서는 사이보그들이 논리폭탄으로 경쟁을 벌이는가 하면, 그와 격리된 야만인의 땅에서는 야생의 인간들이 칼과 칼라슈니코프 자동소총으로 싸운다.

 이 책에서 나는 인류의 미래에 관해 이야기하며 1인칭 복수형을 자주 사용했다. '우리의' 문제에 관해 '우리'가 무엇을 해야 하는지에 대해 이야기했다. 하지만 아마도 앞으로 '우리'는 존재하지 않을 것이다. 짐자건대 '우리의' 가장 큰 문제는 다양한 인가 집단이 서로 완전히 다른 미래를 맞게 될 거라는 사실이다. 세계 어떤 지역에서는 자녀에게 컴퓨터 코딩을 가르쳐야 하는 반면, 다른 지역에서는 재빨리 총을 뽑아 명중시키는 법을 가르치는 게 나을지도 모른다.

 

p129

 데이터를 손에 넣기 위한 경주는 이미 시작됐다. 선두 주자는 구글과 페이스북, 바이두, 텐센트 같은 데이터 거인들이다. 지금까지 이 거인들의 다수가 채택해온 사업 모델은 '주의 장사꾼'처럼 보인다. 무료 정보와 서비스, 오락물을 제공해 우리의 주의를 끈 다음 그것을 광고주들에게 되판다. 하지만 데이터 거인들이 추구하는 목표는 이전의 그 어떤 주의 장사꾼들보다 훨씬 높다. 이들의 진짜 사업은 결코 광고를 파는 것이 아니다. 오히려 우리의 주의를 사로잡아 우리에 관한 막대한 양의 데이터를 모으는 것이다. 이것이야말로 그 어떤 광고 수익보다 훨씬 가치가 크다. 그러니까 우리는 고객이 아니라 그들의 생산품인 것이다.

 중기적으로 볼 때 이런 식으로 데이터가 비축되면 근본적으로 다른 사업 모델이 열리는데, 그 첫 희생자는 광고 산업 전체가 될 것이다. 새로운 모델의 기반은 인간의 권위가 알고리즘으로 옮겨가는 것이다. 여기에는 어떤 것을 골라서 구매하는 권위까지 포함된다. 알고리즘이 위를 위해서 뭔가를 고르고 구매하기 시작하면 전통적인 광고 산업은 파산할 것이다. 구글을 보자. 구글이 추구하는 최종 목표는 우리가 구글에 무엇이든 질문할 수 있고, 그게 대한 세계 최선의 해답을 얻는 것이다. 우리가 구글에 '안녕 구글, 네가 차에 대해 아는 모든 것과 나에 대해 아는 모든 것(나의 욕구와 습관, 기후변화를 보는 관점, 중동 정치에 대한 나의 견해까지 포함)을 감안했을 때, 내게 가장 좋은 차는 뭐라고 생각하니?" 라는 질문까지 할 수 있게 되면 어떤 일이 일어날까? 만약 구글이 그 질문에 좋은 답을 제시할 수 있다면, 그리고 우리가 경험은 통해 우리의 쉽게 조종당하는 감정보다 구글의 지혜를 더 신뢰하게 된다면 차량 광고가 무슨 소용이 있을까?

 장기적으로는 충분한 규모의 데이터와 더불어 컴퓨팅 능력이 충분히 커지면 데이터 거인들은 생명의 가장 깊은 비밀까지 해킹할 수 있을 것이다. 그런 다음 그 지식을 사용해 우리 대신 선택을 하고 우리를 조종할 뿐만 아니라, 유기적 생명을 재설계하고 비유기적 생명체를 만들 수도 있을 것이다. 광고 판매는 단기적으로 거인 기업을 유지하는 데 필요할 수 있다. 하지만 이들은 앱과 상품과 기업을 평가할 때도 매출액보다도 그것을 통해 모을 수 있는 데이터를 기준으로 삼는다. 인기 많은 앱이 사업 모델로는 부적격이고 단기적으로는 손실을 초해할 수도 있지만, 데이터를 빨아들이는 것으로 보자면 그 가치는 수십억 달러에 이를 수 있다. 지금 당장은 데이터를 기반으로 어떻게 돈을 벌어야 할지 모른다 해도 가지고 있는 것만으로도 가치는 충분하다. 데이터야말로 미래에 생활을 통제하고 형성하는 데 열쇠가 될 수 있기 때문이다. 나는 데이터 거인들이 얼마나 명확하게 그런 측면에서 이 문제를 생각하고 있는지는 확신할 수 없다. 하지만 그들의 행동을 보면 그들이 단순히 돈보다는 데이터를 모으는 데 가치를 두고 있음을 알 수 있다.

 

p152

 사람들은 이런 변화를 외면할 때가 많다. 자신들의 핵심적인 정치적, 종교적 가치에 관해서라면 특히 더 그렇다. 우리는 우리의 가치가 옛 조상에게서 물려받은 귀중한 유산이라고 고집한다. 하지만 그렇게 말할 수 있는 유일한 근거는 우리의 조상이 오래전에 죽었으며 이제는 스스로 말할 수 없다는 사실이다. 예를 들어 유대인이 여성을 대하는 태도를 보자. 오늘날 초정통파 유대교인들은 공공장소에서 여성 사진을 금지한다. 이들을 겨냥한 게시판과 광고에는 남자와 소년만 묘사돼 있을 뿐 여성과 소녀는 결코 등장하지 않는다.

 2011년 그로 인한 사건이 터졌다. 뉴욕 브루클린의 초정통파 유대교 신문인 디 차이퉁Di Tzeitung이 미국 관리들이 오사마 빈 라덴의 은신처 공습을 지켜보는 사진을 실으면서 디지털 기술로 힐러리 클린터 국무장관을 포함한 모든 여성을 삭제한 것이다. 이 신문은 유대교의 '겸손법'에 따른 불가피한 조치였다고 해명했다. 비슷한 사건은 또 있었다. 이스라엘의 하메바세르HaMevaser 신문이 샤를리 에브도 학살에 항의하는 시위 사진에서 앙겔라 메르켈을 지운 것이다. 애독자들의 마음속에 음탕한 생각이 일어나는 것을 막기 위해서였다. 또 다른 초정통파 유대교 신문인 하모디아Hamodia의 발행인은 이런 정책을 변호하면서 '우리는 수천 년 유대교 전통의 지지를 받고 있다"고 했다.

 유대교 회당만큼 여성의 노출을 엄격하게 제한하는 곳도 없다. 정통파 유대교 회당에서 여성은 남성으로부터 철저히 격리되어 커튼 뒤 제한 구역에 있어야 한다. 남성들이 기도하거나 경전을 읽을 때 우연하게라도 여성의 모습이 눈에 띄지 않게 하기 위해서다. 하지만 이 모든 것이 수천 년 유대교 전통과 변치 않는 신법의 지지를 받고 있다면, 고고학자들이 이스라엘에서 출토한 미쉬나와 탈무드 시대의 예배당 유적에 남녀가 격리된 흔적은 조금도 없었고, 오히려 아름다운 바닥 모자이크 그림과 천정 그림에 여성이 묘사돼 있었으며, 심지어 어떤 여성은 몸을 다 드러내다시피 한 사실은 어떻게 설명해야 할까? 미쉬나와 탈무드를 저술한 랍비들조차 이런 예배당에서 규칙적으로 기도하고 공부했건만, 오늘날 정통파 유대교인들은 그들이 불경스럽게도 옛 전통을 모독했다고 할 것이다.

 옛 전통을 왜곡하는 일은 모든 종교의 공통적인 특징이다. IS는 자신들이 이슬람교의 순수 원형으로 돌아갔다고 하지만 사실은 그들의 해석이야말로 완전히 새로운 것이다. 물론 그들은 유서 깊은 문헌을 많이 인용한다. 하지만 이 과정에서 어떤 것을 취사선택할지, 그것을 어떻게 해석할지를 두고 심혈을 기울인다. 실제로 성스러운 문헌을 해석할 때 이들이 보이는 'DIY Do It Yourself'식 태도야말로 대단히 현대적인 것이다. 전통적으로 경전 해석은 박식한 울라마(카이로의 알아자르 같은 저명한 기관에서 이슬람법과 신학을 공부한 학자)의 독점 영역이었다. IS 지도자들 중에 그런 자격을 갖춘 사람은 거의 없었고, 존경받는 울라마들도 대부분 최고 지도자인 아부 바르크 알바그다디와 그 일당을 무지한 범죄자로 일축해왔다.

 그렇다고 해서 어떤 사람들이 주장하는 것처럼 IS가 '비이슬람적'이거나 '반이슬람적'이라는 것은 아니다. 특히 버락 오바마 같은 기독교인 지도자가 무모하게도 아부 바르크 알바그다디 같은 자칭 무슬림에게 무슬림이 무엇을 뜻하는지 이야기한 것은 역설적이다. 이슬람의 진정한 핵심이 무엇인지를 두고 벌어진 열띤 논쟁은 한마디로 무의미하다. 이슬람교에서는 고정된 DNA가 없기 때문이다. 이슬람교는 무슬림들이 만들어내는 것이다.

 

p173

 사람들이 민족이라는 공동체를 구축하는 수고를 마다하지 않았던 이유는 단일 부족 차원에서는 해결할 수 없는 도전에 직면했기 때문이었다. 

 

p179

 불행히도 우리는 이런 성취에 너무나 익숙해진 나머지 그것을 당연하게 여긴다. 그러다 보니 사람들은 불장난을 방치하기도 한다. 러시아와 미국은 최근에 새로운 핵 군비 경쟁에 착수했다....

 그 와중에 대중은 핵폭탄을 걱정하기는 커녕 오히려 좋아하게 되었다. 혹은 핵폭탄이 존재한다는 사실 자체를 아예 망각했다. 

그러다 보니 주요 핵 강국인 영국의 브렉시트 논쟁에서도 주로 거론된 것은 경제와 이민 문제였을 뿐, 유럽연합이 유럽과 지구적 평화에 어떤 공헌을 하는지는 대체로 무시됐다. 수 세기 동안 끔찍한 유혈 사태를 겪은 후에야 마침내 프랑스와 독일, 이탈리아, 영국이 유럽 대륙의 조화를 보장해줄 장치를 구축했음에도, 이제 와서 영국 대중은 기적적으로 탄생한 이 기계 안에다 공구를 던져 넣어버린 것이다.

 

 

19세기 국가들이 민족주의 게임을 벌이면서도 인류 문명을 파괴하지 않은 것은 사실이다. 하지만 이는 히로시마 시대에나 있던 일이었다. 그 후 핵무기의 등장으로 상황은 더 엄중해졌고 전쟁과 정치의 근본 성격이 바뀌었다. 인류가 우라늄과 플루토늄을 농축하는 법을 알게 된 이상, 어느 특정 국가의 이익보다 핵전쟁 예방을 우선시하는 것에 모두의 생존이 달렸다. "우리 나라 최우선!"이라고 외치는 열혈 민족주의자들은 과연 튼튼한 국제 협력 체제 없이 혼자서 자국은 물론 세계의 핵 파괴를 막을 수 있을지 자문해봐야 한다.

 

p180

 핵전쟁 외에도, 인류는 앞으로 수십 년 안에 1964년 정치 레이더망에는 거의 포착되지 않았던 새로운 실존적 위협에 직면할 것이다. 바로 생태학적 붕괴다. 인간은 여러 면에서 지구 생물권을 불안정하게 만들고 있다. 우리는 자연환경에서 점점 더 많은 자원을 가져오면서도, 자연에는 엄청난 양의 쓰레기와 독성 물질을 쏟아내 흙과 물과 대기의 성분까지 바꿔놓고 있다.

 

 이러한 가공할 실험은 이미 진행되기 시작했다. 핵전쟁이 미래의 잠재적인 위협인 것과 달리, 기후변화는 현재 닥친 실제 상황이다. 인간 활동, 특히 이산화탄소 같은 온실가스 배출 때문에 지구의 기후가 무서운 속도로 변하고 있다는 데는 과학적 합의가 이뤄진 상태다. 회복 불가능한 대재앙을 촉발하지 않는 선에서 이산화탄소를 정확히 어느 정도까지만 대기 중에 쏟아낼 수 있는지 아는 사람은 아무도 없다. 하지만 최선의 과학적 추산으로는 앞으로 20년 안에 온실가스 배출량을 극적으로 줄이지 않으면 지구의 평균 온도는 산업혁명 이전보다 섭씨 2도 이상 올라가는가 하면, 사막의 확장과 만년설의 소멸, 해수면의 상승, 허리케인과 태풍 같은 극단적인 날씨 증가에 직면할 것이다. 이런 변화는 역으로 농업 생산에 지장을 주고, 도시를 침수시키고, 세계의 많은 지역을 살기 어려운 곳으로 만들어 수억 명의 난민이 새로운 보금자리를 찾아 나설 것이다.

 더욱이 지금 우리는 수많은 임계점에 빠른 속도로 접근하고 있다. 이 점을 넘어가면 설사 온실가스 배출을 극적으로 감축한다 해도 지금의 추세를 되돌려 전 세계의 비극을 막기에는 역부족일 것이다. 예를 들어 지구온난화로 극지방의 얼음층이 녹으면서 지구에서 우주 공간으로 반사되는 태양빛의 양이 줄었다. 이 말은 지구가 흡수하는 열의 양이 많아지고, 따라서 기온은 훨씬 더 오르고 얼음이 녹는 속도는 훨씬 빨라진다는 뜻이다. 이런 악순환의 고리가 결정적인 문턱을 넘어가면 불가항력의 탄력이 붙으면서 극지의 모든 얼음이 녹게 된다. 그때 까서는 인간이 석탄과 석유, 가스의 연소를 전면 중단해도 소용없을 것이다. 따라서 지금 우리가 직면한 위험을 인정하는 것만으로는 불충분하다. 바로 지금 그것에 대한 뭔가를 실행하는 일이 다급하다.

 

 이토록 걱정스러운 그림에 민족주이가 들어설 자리가 있겠는가? 생태학적 위협에 민족주의가 나름의 답을 제시할 수 있을까? 아무리 강대국이라 해도 지구온난화를 혼자서 중단시킬 수 있을까? 개별 국가들은 확실히 다양한 녹색 정책들을 채택할 수 있다. 이 중 다수는 환경에는 물론 경제에도 좋다.

 

 민족주의적 고립은 십중팔구 핵전쟁보다 기후변화의 맥락에서 훨씬 더 위험하다. 전면적인 핵전쟁은 모든 국가를 무차별 파괴할 위험이 있기 때문에 그것을 막는 일에서는 모든 국가가 동등한 지분을 갖는다. 반면에 지구온난화가 초래할 충격은 국가마다 다를 가능성이 크다. 어떤 나라는, 특히 러시아는 실제로 혜택을 누릴 수도 있다. 러시아는 해안 지대가 상대적으로 적다. 따라서 해수면 상승에 대한 걱정도 중국이나 키리바시보다 덜하다.

 

p199

  하지만 종교 지도자가 과학자와의 경쟁에서 불리한 상황에 처하게 된 것도 바로 그 해석의 천재성 때문이다. 과학자도 지름길을 찾아내고 증거를 비트는 법을 안다. 하지만 궁극에 가서 과학이 보여주는 특징은, 언젠든지 잘못을 인정하고 다른 방법을 시도하는 것이다. 그래서 과학자는 점점 더 농작물을 잘 키우고 더 나은 의약품을 개발하는 법을 알게 되는 데 반해, 사제와 구루는 더 나은 변명거리를 내놓는 법만 익히게 된다. 수 세기에 걸쳐 참된 신앙인들조차 그런 차이에 주목해왔는데, 바로 그 점 때문에 종교는 기술적인 영역에서 갈수록 권위를 잃어왔다.

 

p205

 이들이 타고 다니는 차도 다를 것이다. 복음주의자는 기름을 많이 먹는 대형 SUV 차량을 몰고 다닐 테지만, 독실한 카톨릭 신도는 미끈한 전기차에 "지구를 태워라, 그리하면 지옥에서 타 죽으리!"라고 적힌 범퍼 스티커를 붙이고 다닐 것이다. 하지만 이들이 아무리 자기 입장을 변호하는 데 다양한 성경 구절을 인용하더라도, 견해 차이의 진정한 원천은 근대 과학 이론과 정치 운동에 있지, 성경에 있지 않다. 이런 관점에서 종교는 우리 시대의 거대한 정책 논쟁에 기여하는 바가 사실상 별로 없다. 카를 마르크스가 주장했듯 종교는 겉치장일 뿐이다.

 

p206

 인간의 힘을 대규모 협동에서 발휘되는데, 대규모 협동을 끌어내려면 그만큼 큰 정체성을 구축해야 한다. 거대한 정체성이 기반으로 삼는 모든 것은 허구의 이야기지, 과학적 사실이나 경제적 필요가 아니다. 21세기에 와서도 인간이 유대인과 무슬림, 러시아인과 폴란드인으로 나뉘어 있는 것은 여전히 종교적 신화에 의거하고 있다. 나치와 공산주의자들은 인간의 정체성을 과학적으로 인종과 계급으로 결정하려 했지만 그것은 위험한 사이비 과학으로 판명되었다. 그 후로 과학자들은 인간의 '자연적인' 정체성이 무엇인지 규정하는 데 도움을 주는 것을 극도로 꺼렸다.

 

p208

 근대 세계에서 전통적 종교가 힘과 중요성을 유지하고 있는 대표적 사례를 들자면 아마도 일본일 것이다. 1853년 미국 함대가 일본을 향해 근대 세계로 문을 열라고 강요했을 때, 일본은 극단적인 근대화를 급속히 추진했고 성공했다. 몇 십 년 걸리지 않아 과학과 자본주의, 최신 군사 기술로 무장한 강력한 관료 국가로 발돋움한 일본은 중국과 러시아를 꺽고 타이완과 한국을 점령한 데 이어, 진주만에서 미군 함대를 격침시키고 극도에서 유럽 제국까지 격파했다. 하지만 일본은 서구의 청사진을 맹목적으로 따르지 않았다. 그들은 자신들의 독특한 정체성을 보호하고, 과학이나 근대성, 그리고 어떤 모호한 지구 공동체가 아닌 일본에 충성을 바치는 나라가 되기 위해 결사적으로 싸웠다.

 그 목적을 위해 일본은 고유 종교인 신도神道를 일본 정체성의 초석으로 고수했다. 사실 신도를 재발명했다. 전통 신도는 다양한 정령과 신령, 귀신에 대한 믿음이 뒤섞인 애니미즘 신앙이었다. 모든 마을과 신사가 자기만의 정령과 지역 관습을 갖고 있었다. 19세기 후반에서 20세기 초에 일본은 국가 공인 신도를 만들면서 수많은 지역 전통들을 억압했다. 이렇게 만들어진 '국가 신도'에는 민족성과 인종이라는 대단히 근대적인 사상이 주입됐다. 일본 엘리트들이 유럽 제국주의에서 따온 요소였다. 불교와 유교, 사무라이 봉건 윤리 등에서도 국가 충성에 도움이 되는 것이라면 모두 가져다 뒤섞었다. 그 위에다 일본의 황제 숭배를 최고 원리로 신성시했다. 이들은 일본 황제를 태양의 여신 아마테라스의 직계 후손이자 살아 있는 신으로 간주했다.

 얼핏 이 이상한 신구의 조합은 급속한 근대화 과정에 착수한 국가로서는 부적절한 선택처럼 보인다. 살아 있는 신? 애니미즘 정령? 봉건 윤리? 근대 산업 강국이 아니라 신석기 족장 이야기처럼 들린다.

 하지만 그것은 마술처럼 통했다. 일본은 숨가쁘게 근대화했고, 동시에 국가에 대한 광신적인 충성을 이끌어냈다. 국가 신도가 성공했음을 보여주는 대표적인 상징은 정밀유도미사일을 개발해 처음 사용한 강대국이 일본이었다는 사실이다. 미국이 스마트 폭탄을 실전 배치하기 수십 년도 전에, 나치 독일이 V-2 로켓 발진을 시작하려던 무렵에 이미 일본은 연합국 군함 10여 대를 정밀유도미사일로 격침했다. 이 미사일은 바로 우리가 아는 가미카제다. 오늘날 정밀유도 무기에서 방향을 인도하는 일은 컴퓨터가 하지만, 카미카제는 일반 항공기에 폭탄을 싣고 인간 조종사가 편도 비행의 임무를 수행하는 식이었다. 이런 결의는 죽음을 각오한 희생정신의 산물이었는데, 바로 국가 신도에서 비롯한 것이었다. 이처럼 가미카제는 첨단 기술과 첨단 종교적 교리 주입의 결합에 의존했다.

 부지불식간에 수많은 정부들이 오늘날 일본의 사례를 따른다. 이들은 근대화의 보편적 도구와 구조를 채택하는 동시에 독특한 국가 정체성을 보존하기 위해 전통 종교에 의존한다. 일본에서 국가 신도가 했던 역할을 러시아에서는 정교회 기독교가, 폴란드에서는 가톨릭이, 이란에서는 시아파 이슬람이, 사우디아라비아에서는 와하비즘이, 이스라엘에서는 유대교가 한다. 종교가 아무리 고리타분해 보여도 약간의 상상력과 재해석을 거치면 최신의 기술 도구와 가장 정교한 근대 제도와도 거의 언제든지 결합할 수 있다.

 어떤 경우에는 국가가 독특한 정체성을 위해 완전히 새로운 종교를 만들 수도 있다. 가장 극단적인 사례가 일본의 식민지였던 북한이다. 북한 정권은 광란적인 국가 종교인 주체사상을 신민들에게 주입한다. 주체사상은 마르크스레닌주의와 고대 한국의 전통, 한국인의 고유한 순수성에 대한 인종주의적 믿음, 김일성 일가의 신격화가 결합된 것이다. 김씨 가문이 태양신의 후손이라고 주장하는 사람은 아무도 없다. 하지만 김씨 일가는 역사 속의 그 어떤 신보다 더 열렬히 숭배된다. 마치 일본 제국이 결국에는 패한 것을 염두에 둔 듯, 북한의 주체사상은 핵 개발을 최고의 희생도 감수할 만한 신성한 의무로 언명하면서, 오랫동안 줄기차게 자신들의 조합물에 핵무기를 추가하려고 애써왔다.

 

p294

 모든 형태의 겸손 중에서도 가장 중요한 것은 아마도 신 앞에서의 겸손일 것이다. 사람들은 신에 관해 이야기할 때는 언제나 자신을 극도록 낮춘다. 하지만 그런 다음에는 신의 이름을 활용해 신도들 위에 군림한다.

 

p317

 물론 모든 도그마가 똑같이 해로운 것은 아니다. 어던 종교적 믿음은 인류를 이롭게 했듯이 마찬가지로 세속주의 도그마들 중에서도 어떤 것들은 이로웠다. 특히 인권의 신조가 그렇다. 우리가 중시하는 권리가 존재하는 유일한 장소는, 이간이 발명하고 서로 주고 받는 이야기 속이다. 이런 이야기들은 종교적 광신과 전제 정부에 맞서 투쟁을 벌여오는 동안 자명한 교리로 신성시하게 된 것들이다. 인간은 태어날 때부터 생명이나 자유의 권리를 갖는다는 것은 진실이 아니어도, 이 이야기에 대한 믿음 덕분에 권위주의 정권의 권력을 억제했고, 소수자들의 피해를 막았으며, 수십억 인구를 빈곤과 폭력의 최악의 결과로부터 보호했다. 역사상 이보다 더 인류의 행복과 복지에 기여한 신조도 없을 것이다.

 하지만 그렇다고 해도 이 역시 도그마일 뿐이다. 그렇기 때문에 유엔 인권 선언은 19조에서 "누구의 의견과 표현의 자유를 누릴 권리가 있다"고 명시했다. 이것을 우리가 정치적 요구 사항("누구나 의견의 자유권을 가져야 한다")으로 이해하는 한에서 이는 전적으로 타당한 말이다. 하지만 모든 사피엔스에게는 태어날 때부터 '의견의 자유권이 주어졌으며, 따라서 어떠한 검열도 자연법에 반하는 것이라고 믿는다면, 우리는 인류에 관한 진실을 놓치게 된다. 자신을 '양도할 수 없는 자연권을 지닌 개인'으로 규정하는 한, 자신이 진정으로 어떤 존재인지 알 수 없을뿐더러, 자신이 속한 사회와 자신의 정신('자연권'에 대한 믿음까지 포함해서)을 규정하는 역사적 힘들을 이해하지 못할 것이다.

 그런 무지는 20세이게는 별로 문제되지 않았을 수 있다. 사람들은 히틀러, 스탈린과 싸우느라 바빴다. 하지만 21세기에는 치명적인 문제가 될 수 있다. 생명기술과 인공지능이 이제 인간성 자체의 의미를 바꾸려 하고 있기 때문이다. 만약 생명권을 신봉한다면, 그 말은 죽음을 극복하기 위해 생명기술을 이용해햐 한다는 뜻까지 함축할까? 만약 자유권을 신봉한다면, 우리의 숨은 욕망을 찾아 읽어내고 그것을 충족시키기 위해 알고리즘에 힘을 부여해야 할까? 만약 모든 인간이 동등한 인간적 권리를 누린다면 초인간은 초인권을 누려도 될까? '인권'이라는 도그마의 믿음을 고수하는 한, 세속주의를 따르는 사람들로서는 그런 질문에 답하기 어려울 것이다.

 인권의 도그마는 이전 세기 동안 종교재판관과 '앙시앵 레짐', 나치, KKK에 맞서 싸우기 위한 무기로 만들어진 것이다. 앞으로 초인간, 사이보그, 초지능 컴퓨터를 다루기에는 맞지 않다. 인권 운동은 종교적 편견과 인간 폭군을 상대로는 아주 인상적인 주장과 방어의 병기들을 개발해왔지만, 이 병기들이 앞으로 닥칠 소비자주의의 범람과 기술 유토피아로부터 우리를 지켜줄 것 같지는 않다.

 

p324

 지난 몇 세기 동안 자유주의 사상은 합리적 개인에 대한 엄청난 믿음을 키워왔다. 개개인을 독립적인 이성적 주체로 그리고는 이런 신화적인 창조물을 근대 사회의 기초로 삼아왔다. 민주주의는 유권자가 가장 잘 안다는 생각 위에 서 있고, 자유시장 자본주의는 고객은 언제나 옳다고 믿으며, 자유주의 교육은 학생들이 스스로 사고하도록 가르친다.

 하지만 합리적 개인을 과신하는 것은 실수다. 탈식민주의 사상가들과 페미니즘 사상가들은 이 '합리적 개인'이야말로 상류층 백인 남성의 자율성과 권력을 찬양하는 서구의 국수주의적 환상일 뿐이라고 지적해왔다. 앞에서 지적했듯이, 행동경제학자들과 진화심리학자들은 인간의 결정은 대부분 이성적 분석보다는 감정적 반응과 어리짐작식의 손쉬운 방법에 기초하고 있다는 사실을 증명해왔다. 우리의 감정과 어림짐작은 석기시대를 살아가는 데는 적합했을지 모른다. 하지만 실리콘 시대에는 한심할 정도로 부적합하다.

 합리성뿐 아니라 개인성 또한 신화이다. 인간은 스스로 생각하는 경우가 드물다. 그보다는 집단 속에서 사고한다. 아이 한 명을 키우는 데 마을이 협력해야 하는 것처럼, 도구를 발명하고 갈등을 풀고 질병을 치료하는 데도 부족이 힘을 모아야 한다. 교회를 짓든 원자폭탄을 만들든 비행기를 띄우든, 어느 한 개인이 그 과정의 모든 것을 알지는 못한다. 호모 사피엔스가 다른 모든 동물들보다 경쟁에서 우위를 보이고 마침내 지구의 주인이 될 수 있었던 것은, 인간 개인의 합리성이 아니라 대규모로 함께 사고할 수 있는 전례 없는 능력 덕분이었다.

 인간 개인이 세상에 관해 아는 것은 창피할 정도로 적다. 더욱이 역사가 진행되가면서 개인이 아는 것은 점점 더 줄어들게 되었다. 석기시대의 수렵 · 채집인은 자기 옷을 만들고 불을 붙이고 토끼를 사냥하고 사자를 피하는 법을 알았다. 오늘날 우리는 그보다 훨씬 더 많이 안다고 생각한다. 하지만 개개인의 차원에서 보면 실제로 우리가 아는 것은 훨씬 적다. 우리는 우리에게 필요한 것 거의 전부를 다른 사람의 전문성에 의존해서 얻는다. 우리를 겸손하게 만드는 한 실험에서 연구진은 먼저 사람들에게 지퍼의 작동 원리를 얼마나 잘 이해하는지 물어봤다. 응답자 대다수는 아주 잘 안다고 자신 있게 답했다. 그도 그럴 것이 지퍼야 우리가 늘 사용하는 것 아닌가. 그런 다음 실험자는 응답자들에게 지퍼가 작동하는 과정을 가능한 한 자세히 묘사해보라고 주문했다. 이번엔 대부분의 응답자들이 답하지 못했다. 이를 두고 스티븐 슬로먼과 필립 페른백은 '지식의 착각'이라고 불렀다. 우리는 우리가 꽤 많이 안다고 생각한다. 사실 개인적으로는 아는 게 미미한데도 다른 사람의 머릿속에 든 지식을 마치 자신의 것이라고 여기기 때문이다.

 이것을 두고 반드시 나쁘다고만은 할 수 없다. 이런 집단사고에 의존한 덕분에 우리는 세계의 주인이 될 수 있었고, 지식의 착각 덕분에 스스로 모든 것을 이해하려는 불가능한 노력에 사로잡히지 않은 채 삶을 헤쳐 나갈 수 있었다. 진화의 관점에서 보면, 남들의 지식을 신뢰한 것이야말로 호모 사피엔스에게 대단히 유리하게 작용했던 것이다.

 하지만 지난 시대에는 통했지만 근대에 와서는 곤란을 초래하는 다른 인간의 특성과 마찬가지로 지식의 착각 역시 부정적인 면이 있다. 세계는 나날이 복잡해지고 있는 반면, 사람들은 세상이 돌아가는 상황에 자신이 얼마나 무지한지 깨닫지 못하고 있다. 그러다보니 기상학과 생물학에 관해서는 아는 것이 거의 없는 사람들이 기후변화와 유전자변형농작물에 관한 정책을 제안하고, 이라크나 우크라이나가 지도 어디에 있는 나라인지도 모르는 사람들이 그 지역의 정책을 두고 극도로 강한 견해를 고집한다. 사람들이 자신의 무지를 헤아리는 경우가 드문 이유는, 자신과 같은 생각을 가진 친구들로 가득한 반향실反響室과 자기 의견을 강화해주는 뉴스피드 안에만 갇혀 있기 때문이다. 이들의 믿음은 계속해서 공고해질 뿐 도전받는 일이 거의 없다.

 

 

 대부분의 우리 견해는 개인의 합리성보다 공동체의 집단사고에 의해 형성된다. 우리가 이런 견해를 고수하는 것도 집단을 향한 충성심 때문이다. 사람들에게 사실을 쏟아 놓고 그들 개인의 무지를 들춰낼 경우에는 오히려 역풍을 맞기 쉽다. 대다수의 사람들은 너무 많은 사실을 싫어한다. 게다가 자신이 멍청하게 느껴지는 것은 더더욱 싫어한다. 티파티Tea Party 운동 지지자들에게 지구온난화에 관한 통계 자료를 보여주고 진실을 믿게 할 수 있다고 생각한다면 오산이다.

 집단사고의 위력은 너무나 만연해서 얼핏 자의적인 것처럼 보이는 믿음도 좀처럼 깨지지 않는다. 가령, 미국에서는 한경오염과 멸종위기종 같은 문제에 관한 한 우파 보수주의자들이 좌파 진보주의자들에 비해 관심이 훨씬 낮다. 보수 지역인 루이지애나 주의 환경 규제가 진보 성향의 매사추세츠 주보다 훨씬 약한 것도 그 때문이다. 이런 상황이 우리에게는 너무나 익숙해서 당연하게 여겨진다. 하지만 이는 실제로 대단히 놀라운 일이다. 말 그대로 보수주의자라면 오랜 생태계의 질서를 보존하고 선조들의 땅과 숲과 강을 보호하는 데 훨씬 많은 관심을 쏟을 거라고 짐작할 것이다. 반면에 진보주의자는 지방을 급진적으로 바꾸는 일에, 특히 그 목표가 사회진보를 앞당기고 인간의 생활수준을 끌어올리는 것이라면 그런 문제에 훨씬 개방적일 거라고 예상할지 모른다. 하지만 실제로는 다양한 역사적 변수에 의해 정당의 노선이 한 번 결정되고 난 결과, 보수주의자들은 으레 하천 오염이나 조류 멸종 같은 문제는 거들떠 보지도 않게 된 반면, 좌파 진보주의자들은 오랜 생태계 질서를 교란하는 것이라면 무엇이든 두려워하는 경향을 보인다.

 심지어 과학자들도 집단사고의 영향력에서 자유롭지 않다. 그래서 사실이 여론을 바꿀 수 있다고 믿는 과학자들 자신도 과학자 집단사고의 희생자가 되기도 한다. 과학 공동체는 사실의 효력을 믿는 집단이다 보니, 이런 공동체에 충직한 학자들은 올바른 사실만 열거해도 공적인 토론에서 이길 수 있다고 줄기차게 믿지만, 경험상 정반대의 경우가 다반사다.

 마찬가지로 개인의 합리성에 대한 자유주의자의 믿음 자체가 자유주의자들이 집단사고의 산물일 수 있다. 몬티 파이튼이 <브라이언의 삶>에 나오는 절정의 장면 중 하나에서 홀딱 반한 신도 무리가 브라이언을 메시아로 착각한다. 브라이언은 제자들에게 "나를 따를 필요가 없다. 어느 누구든 따를 필요가 없다! 너희는 스스로 생각해야 한다! 너희는 모두가 개인이다! 너희는 다 다르단 말이다!"라고 하자 열광하는 무리는 한목소리로 제창한다. "그렇다! 우리는 모두가 개인이다! 그렇다, 우리는 다 다르다!"

 몬티 파이튼의 이 장면은 1960대를 휩쓴 반反문화의 교조주의를 풍자한 것이었지만, 여기서 전하려는 요지는 합리적 개인주의에 대한 믿음 전반에도 적용될 수 있다. 근대 민주 사회를 가득 메운 군중 역시 한목소리로 이렇게 외친다. "그렇다, 유권자가 제일 잘 안다! 그렇다, 고객은 언제나 옳다!"

 

p331

 거대 권력은 블랙홀처럼 주변 공간 자체를 왜곡한다. 그 곁에 가까이 갈수록 모든 것이 더 심하게 뒤틀린다.

 

 

 몇 년 전 나는 베냐민 네타냐후 이스라엘 총리와의 만찬에 초대받은 적이 있다. 내 친구들은 가지 말라고 했지만 나는 유혹을 뿌리칠 수 없었다. 그런 비공개 행사장 안에서 중요한 인사들 사이에서만 새 나오는 어떤 큰 비밀들을 들을 수 있지는 않을까 생각했다. 하지만 실망이 이만저만이 아니었다. 그날 참석자는 한 서른 명쯤 됐는데, 모두가 권력자의 관심을 끌고, 재치 있는 말로 그를 감명시키고, 비위를 맞추고, 그로부터 뭔가를 얻어내려 애를 썼다. 만약 그 중 어느 누구라도 어떤 큰 비밀을 알고 있었다면, 그는 비밀이 누설되지 않도록 하는 데에는 더없는 수완을 발휘한 셈이었다. 이것은 네타냐후의 잘못이라고 보기는 어려웠다. 사실 어느 누구의 잘못도 아니었다. 권력이 갖고 있는 중력 탓이었다.

 진심으로 진실을 바란다면 권력의 블랙홀을 피하고, 중심에서 떨어진 주변부에서 이리저리 방황하며 오랜 시간을 허비할 수 있어야 한다. 혁명적인 지식은 권력의 중심에서 출현하는 경우가 드물다. 왜냐하면 중심은 언제나 존재하는 지식을 토대로 구축되기 때문이다. 구질서의 수호자가 권력의 중심에 다가올 수 있는 자를 결정하는데, 이때 전통에서 벗어난 파괴적 사상을 가진 자는 걸러내는 경향이 있다. 물론 이 과정에서 엄청난 양의 쓸데없는 지식도 걸러낸다. 다보스 세계경제포럼에 초대받았다는 사실이 그 사람의 지혜를 담보해주지는 않는다. 주변부에서 많은 시간을 보낼 필요가 있다는 것도 그런 이유에서다. 다보스 포럼에서 오가는 논의 중에는 어떤 눈부신 혁명적 통찰이 담겨 있을 수도 있다. 하지만 대부분은 정확한 정보에 기초하지 않는 추측과 한물간 모델, 신화적인 도그마, 터무니없는 음모 이론 등으로 가득하다.

 따라서 지도자들은 진퇴양난에 처해 있다. 만약 권력의 중심에만 머물러 있으면 세계를 보는 눈이 극도로 왜곡될 것이다. 그렇다고 주변부로 모험을 감행하면 귀중한 시간을 너무 많이 허비할 것이다. 게다가 문제는 갈수록 악화될 것이다. 앞으로 수십 년 안에 세계가 지금보다 훨씬 더 복잡해짐에 따라, 결과적으로 인간 개개인은 - 장기판의 왕이 됐든 졸이 됐든 - 세계를 구성하는 기술 도구와 경제 흐름, 정치 동학에 훨씬 더 무지해질 것이다. 2,000년도 더 전에 소크라테스가 관찰했듯이, 그런 조건하에서 우리가 할 수 있는 최선은 우리 개개인의 무지를 인정하는 것이다.

 하지만 그럴 경우 도덕과 정의의 문제는 어떻게 해야 할까? 세계를 이해할 수 없다면 어떻게 우리가 옳고 그름과, 정의와 불의의 차이를 분별하길 기대할 수 있을까?

 

p337

 세상이 짜인 방식이라는 게, 알려고 노력하지 않는 사람은 행복한 무지 속에 남아 있을 수 있고, 정작 알려고 애쓰는 사람은 진실을 알기가 대단히 어렵다는 것을 알게 돼 있다. 

 

p338

 근대 역사에서 최대 범죄는 증오나 탐욕이 아니라 무지와 무관심에서 더 많이 나왔다.

 

p340

 지금 세계에서 불의의 대부분은 개인의 선입견보다는 대규모의 구조적 편향에서 나온다. 하지만 우리 수렵 · 채집인의 뇌는 그런 구조적 편향을 감지하도록 진화하지는 않았다. 그런 편향의 적어도 일부에는 우리 모두가 함께 연루돼 있다. 하지만 우리는 그것을 발견할 시간과 에너지가 없다. 이 책을 쓰는 동안 나 자신이 그 교훈을 절실하게 깨달았다. 글로벌 이슈를 논할 때 나는 늘 다양한 소외 집단들보다 글로벌 엘리트들의 관점을 우선시하는 위험에 빠진다. 글로벌 엘리트들은 대화를 주도한다. 그러다 보니 그들의 관점은 놓칠 수가 없다. 반면에 소외된 집단들은 대개 말이 없다. 그러다 보면 그들의 존재마저 잊기 쉽다. 이 모든 게 고의적인 악의가 아니라 순전한 무지에서 생기는 일이다.

 

p348

 어느 편을 지지하든, 우리는 실제로 무서운 탈진실의 시대에 살고 있는 듯 보인다. 비단 특정한 군사적 사건뿐 아니라 전 역사와 민족마저 가짜로 조작될 수 있는 시대다. 하지만 만약 지금이 탈진실의 시대라면 진실의 태평성대는 정확히 언제였나? 1980년대였나 아니면 1950년대? 1930년대? 탈진실의 시대로 넘어가게 만든 것은 무엇이었나? 인터넷인가? 소셜미디어인가? 푸틴과 트럼프의 부상인가?

 역사를 대충 훑어보기만 해도 정치 선전과 거짓 정보는 새로운게 아님을 알 수 있다. 심지어 민족을 통째로 부인하고 가짜 국가를 만드는 습관조차 유서가 깊다. 1931년 일본 육군은 중국 침략을 정당화하려고 자작 모의공격을 벌였고, 그런 다음 괴뢰국가인 만주국을 세워 정복을 정당화했다. 그런 중국 자신은 티베트가 독립국가로 존재했다는 사실을 오랫동안 부인해왔다. 영국은 호주 점령을 '무주지terra mullius 선점'의 법리로 정당화해 사실상 5만 년 원주민의 역사를 지워버렸다.

 20세기 초 시온주의자들은 가장 좋아하는 슬로건으로 '땅 없는 사람(유대인)의 사람(팔레스타인인) 없는 땅으로의' 귀환을 내세웠다. 그 지역에 있던 아랍 사람들의 존재는 자신들의 편의에 따라 무시됐다. 1969년 이스라엘의 골다 메이어 총리가 팔레스타인 사람은 존재하지도 않고 존재한 적도 없다고 한 말은 유명하다. 그런 견해는 지금도 이스라엘 내부에서 아주 흔하다. 존재하지 않는다는 상대와 수십 년째 무력 분쟁을 해왔으면서도 말이다. 가령, 2016년 2월 이스라엘의 국회의원 아나트 베르코는 의회에서 연설하던 중에 팔레스타인 사람들의 실체와 역사를 의문에 붙였다. 그녀가 제시한 증거가 무엇이었는지 아는가? 팔레스타인이라는 단어의 머리글자일 'p'조차 아랍어 철자에는 없다는 것이었다. 그러니 어떻게 팔레스타인 사람이 존재할 수 있겠느냐는 주장이었다. (아랍어에서는 f가 p에 해당한다. 따라서 팔레스타인Palestine을 아랍어로 표기하면 Falastin이 된다.)

 

p350

 사실 인간은 늘 탈진실의 시대를 살아왔다. 호모 사피엔스야말로 탈진실의 종이다. 호모 사피엔스 특유의 힘은 허구를 만들고 믿는 데서 나온다. 석기시대 이래 줄곧 자기 강화형 신화는 인간 집단을 하나로 묶는 데 기여해왔다. 실로 호모 사피엔스가 이 행성을 정복한 것도 무엇보다 허구를 만들고 퍼뜨리는 독특한 능력 덕분이었다. 우리는 수많은 이방인들과도 협력할 수 있는 유일한 포유동물이다. 그것이 가능했던 것도 허구의 이야기를 발명하고 사방으로 전파해서 수백만 명의 다른 사람들까지 그 이야기를 믿도록 납득시킬 수 있었기 때문이다. 모두가 같은 허구를 믿는 한, 우리는 다 같이 동일한 법을 지키게 되고, 그럼으로써 효과적으로 협력도 할 수 있다.

 그러니 무서운 탈진실의 새 시대가 도래한 것을 두고 페이스북이나 트럼프, 푸틴을 탓한다면, 수 세기 전 수백만 기독교인이 자기 강화형 신화의 버블 속에 자신을 가둬둔 사실을 떠올리기 바란다. 그때도 성경의 진위 여부는 조금도 의심하려 들지 않았다. 수백만 무슬림 역시 쿠란을 추호의 의심도 없이 신앙의 대상으로 받아들였다. 옛 1,000년 동안 사람들의 당시 소셜 네트워크에서 '뉴스'와 '사실'로 통했던 것들의 상당수는 기적과 천사, 귀신과 마녀에 관한 이야기들이었다. 그 시대의 대담한 리포터들은 지하세계의 가장 깊은 수렁에서 일어난 일도 생중계하듯 전했다. 하지만 이브가 사탄의 유혹에 빠졌다는 과학적인 증거는 전혀 없다. 모든 불신자는 죽은 후 영혼이 지옥에서 불탄다거나, 브라만 계급과 불가촉천민 계급의 결혼은 우주의 창조주가 싫어한다는 말도 마찬가지다. 그럼에도 수십억 사람들은 수천 년 동안 이런 이야기들을 믿어왔다. 어떤 가짜 뉴스들은 영원히 남는다.

 

p359

 사실, 사람들을 단결시키는 데 거짓 이야기는 진실보다 본질적인 이점이 있다. 만약 자신이 속한 집단의 충성심이 얼마나 강한지 알아보고 싶다면, 시험 삼아 사람들에게 분명히 참인 사실보다 어떤 불합리한 것을 믿어보라고 요구하는 편이 훨씬 낫다. 조직의 보스가 "태양은 동쪽에서 떠서 서쪽으로 진다"라고 말할 때는 굳이 그에 대한 충성심이 없더라도 박수를 칠 수 있다. 하지만 보스가 "태양은 서쪽에서 떠서 동쪽으로 진다"라고 할 때는 진정한 충성파들만 박수를 보낼 것이다. 마찬가지로 당신 주변 사람들 모두가 그런 터무니없는 이야기를 듣고 믿어준다면, 당신이 위기에 처한 순간에도 그들은 당신 편을 들어주리라 신뢰할 수 있다. 공인된 사실만 믿겠다는 사람이라면 그의 충성심을 어떻게 알 수 있겠는가?

 

p361

 대부분의 경우 사람들이 성경이나 베다, 모르몬교 경전을 신성시하기 시작하는 것은 그것을 신성시하는 다른 사람들을 오랫동안 반복해서 접하고 난 다음의 일이다. 우리가 신성한 책을 존중하게 되는 과정이나 지폐를 존중하게 되는 과정이나 알고 보면 정확히 동일하다.

 

p363

 진실과 권력의 동반 여행은 어느 정도까지만 가능하다. 머지않아 각자의 길을 가게 돼 있다. 권력을 바란다면 어느 지점부터는 허구를 퍼뜨리기 시작해야 할 것이다. 반면, 세상에 관한 모든 허구는 배제한 채 진실만을 알고 싶다면, 어느 지점부터는 권력을 단념해야 할 것이다. 그런 경우에는 자신의 동조자를 얻고 추종자를 격려하기 어렵게 만드는 사실들마저 인정해야만 할 것이기 때문이다. 훨씬 더 결정적인 것은, 자신과 지금 자신이 가지고 있는 권력의 원천, 그리고 자신이 더 많은 권력을 바라는 이유에 관한 어떤 불편한 사실들마저 인정해야만 할 것이라는 점이다. 진실과 권력 사이에 이런 간극이 존재한다는 사실은 하등 신비로울 게 없다. 직접 목격하고 싶다면, 전형적인 미국 와스프 WASP를 찾아가 인종 문제를 제기하거나, 주류 이스라엘인을 찾아가 팔레스타인 점령 문제를 화제에 올리거나, 영국의 전형적인 남성bloke 에게 가부장적 문제로 말을 걸어보라.

 호모 사피엔스 종으로서 인간은 진실보다는 힘을 선호한다. 세계를 이해하려고 애쓰기보다 통제하려는 데 훨씬 많은 시간과 노력을 기울인다. 세계를 이해하려고 애쓰는 것도, 그러면 통제하기가 쉬워질 거라는 기대 때문이다. 따라서 진실이 지배하고 신화는 무시되는 사회를 꿈꾼다면 '호모 사피엔스'에게서 기대할 것은 거의 없다. 차라리 침팬지에게 운을 시험해보는 게 낫다.

 

p365

 우리의 편견을 드러내고 정보원을 검증하는 데 시간과 노력을 들이는 것은 우리 모두의 책무다. 앞 장에서 이야기했듯이 우리는 모든 것을 직접 조사할 수는 없다. 하지만 바로 그런 사실 때문에 우리는 적어도 우리가 선호하는 정보원을 세밀하게 따져볼 필요가 있다. 그것이 신문이든, 웹사이트든, 티브이 방송이든, 어떤 개인이든 마찬가지다. 어떻게 하면 세뇌를 피하고, 현실과 허구를 구분할지에 대해서는 20장에서 훨씬 깊이 있게 살펴볼 것이다. 다만 여기서는 개략적인 요령 두 가지만 제시하겠다.

 첫째, 믿을 만한 정보를 얻고 싶다면 그에 합당한 만큼의 돈을 지불해야 한다. 만약 뉴스를 공짜로 얻는다면 당신이 상품이기 쉽다. 어떤 수상한 억만장자가 당신에게 이런 거래를 제시했다고 가정해보자. "당신에게 매월 30달러를 주겠다. 그 대신 당신은 내가 바라는 정치적, 상업적 편견을 당신 머릿속에 심을 수 있도록, 매일 한 시간 당신을 세뇌할 수 있게 해달라." 이런 거래를 받아들이겠는가? 제 정신이라면 그럴 가능성은 희박하다. 그러자 수상한 억만장자는 조금 다른 거래를 제안한다. "매일 한 시간 내가 당신을 세뇌할 수 있도록 허락해달라. 그 대신 이 서비스의 비용을 당신에게 물리지 않겠다." 그러자 갑자기 수억 명의 사람들이 솔깃해 한다. 부디 그런 사례를 따라가지 않기를 바란다.

 두 번째 요령은, 만약 어떤 이슈가 특별히 중요해 보인다면 그것에 관련된 과학 문헌을 찾아 읽으려고 노력하는 것이다. 내가 말하는 과학 문헌이란 동료 평가를 거치는 논문, 저명한 학술 출판사가 낸 책, 명망 있는 기관의 교수가 쓴 저술이다. 과학 역시 나름의 한계가 분명히 있다. 과거에도 많은 오류가 있었다. 그럼에도 과학 공동체는 수 세기 동안 우리가 가장 신뢰할 수 있는 지식의 원천이었다. 만약 당신이 과학 공동체가 어떤 문제에 관해 틀렸다고 생각한다면, 그 또한 충분히 있을 수 있는 일이다. 다만 적어도 당신이 거부하는 과학 이론을 알아야 하고, 당신의 주장을 뒷받침할 경험적 증거를 제공할 수 있어야 한다.

 과학자들은 지금보다 훨씬 자극적으로 공적 토론에 개입할 필요가 있다. 특히 토론 내용이 자신의 전문 영역으로 넘어왔을 때에는 주저하지 말고 자기 목소리를 내야 한다. 분야가 의학이 됐든, 역사 됐든 마찬가지다. 침묵은 중립이 아니다. 그것은 현상 유지를 편드는 것이다. 물론 학문적 연구를 계속 해나가고 그 결과물을 소수의 전문가들만 읽는 대중 과학서를 통해 일반 대중에게 최신 과학 이론을 전파하고 그들과 소통하는 것도 중요하다. 예술과 허구를 능숙하게 활용하는 일도 마다할 이유가 없다.

 과학자가 공상과학 소설SF도 쓰기 시작해야 한다는 말인가? 그것도 사실 나쁘지 않은 생각이다. 예술은 사람들의 세계관 형성에 핵심적인 역할을 한다. 특히 21세기에 와서는 공상과학 소설이야말로 가장 중요한 장르라는 주장도 있다. AI라든가 생명공학, 기후변화 같은 문제에 관한 대다수의 사람들의 이해를 좌우하기 때문이다.

 우리에게 좋은 과학이 필요하다는 것은 분명하다. 하지만 정치적 관점에서 보자면, 좋은 SF 영화 한 편이 <사이언스>나 <네이처>에 실린 논문 한 편보다 훨씨 가치가 크다

  p369

 인간이 세계를 지배하는 것은 다른 어떤 동물보다 협력을 잘할 수 있기 때문이고, 협력을 그토록 잘할 수 있는 비결은 허구를 믿기 때문이다. 그런 점에서 시인과 화가, 극작가는 최소한 군인과 기술자 만큼이나 중요하다. 

 

p370

 사실 우리는 알고리즘으로 증강된 소수의 슈퍼휴먼 엘리트와 무력해진 다수 하위 계층의 호모 사피엔스 간의 갈등을 두려워해야 한다.

 

p373

 오늘날 과학 기술 혁명의 결과가 함축하고 있는 의미는, 진정한 개인과 진짜 현실이 알고리즘과 티브이 카메라에 의해 조종될 수 있다는 것이 아니라 진정성 자체가 신화라는 것이다. 사람들은 상자 안에 갇히는 것을 두려워하면서도 이미 자신들이 상자 - 자신의 뇌 - 안에 갇혀 있으며, 그 상자는 다시 더 큰 상자 - 무수히 많은 기능을 갖춘 인간 사회 - 안에 갇혀 있다는 사실은 깨닫지 못한다. 매트릭슬르 탈출했을 때 발견하게 되는 것은 더 큰 매트릭스일 뿐이다. 1917년 러시아 농부들과 노동자들은 차르에 맞서 반란을 일으켰지만 결국에는 스탈린 체제로 귀결됐다. 세계가 당신을 조종하는 여러 가지 방식을 탐구하기 시작하더라도, 결국 자신의 핵심적 정체성은 뇌신경망이 만들어내는 복잡한 환상이라는 사실을 알게 될 뿐이다.

 사람들은 상자 안에 갇히는 것을 두려워하면서 정작 세상의 모든 경이로움은 놓치고 만다. 네오가 매트릭스 안에 갇혀 있는 한, 그리고 트루먼이 티브이 스튜디오 안에 묶여 있는 한, 그들은 피지 섬도, 파리도, 마추픽추도 갈 수 없을 것이다. 하지만 사실, 우리가 인생에서 경험하는 모든 것은 우리 자신의 몸과 마음에 있다. 매트릭스 밖으로 탈출하든, 피지 섬으로 여행을 가든 그 점에서는 아무런 차이가 없을 것이다. 당신 마음속 어딘가에 '피지 섬에서만 개봉할 것!'이라는 커다란 붉은색 경고문이 적힌 강철 심장이 있어, 남태평양으로 여행을 가서 그 심장을 열었을 때에야 비로소 피지 섬에서만 누릴 수 있는 온갖 특별한 감정과 느낌이 발산되는 것이 아니다. 피지 섬에 가보지 못하면 이런 특별한 느낌을 영원히 누리지 못하게 되는 것도 아니다. 결코 그렇지 않다. 피지 섬에서 느낄 수 있는 것은 무엇이든 세계 어디에서나 느낄 수 있다. 심지어 매트릭스 안에서도 가능하다.

 어쩌면 우리 모두가 '매트릭스' 스타일의 거대한 컴퓨터 시뮬레이션 속에서 살고 있는지도 모른다. 그것은 우리가 믿는 모든 민족적, 종교적, 이데올로기적 이야기와 상출될 것이다. 하지만 그렇다 하더라도 우리의 정신적 체험은 실재하는 것이다. 만약 인류의 역사가 지르콘 행성에서 온 쥐 과학자들에 의해 슈퍼컴퓨터로 운영되는 정교한 시뮬레이션으로 밝혀지면 카를 마르크스와 IS로서는 꽤 당혹스러울 것이다. 하지만 이 쥐 과학자들도 아르메니아 집단 학살과 아우슈비츠 문제에는 책임을 져야 할 것이다. 어떻게 그런 일이 지르콘 대학의 윤리위원회를 통과할 수 있었단 말인가? 비록 가스실이 실리콘칩 찬의 전기 신호에 불과했다해도, 그때 희생자들이 체험한 고통과 공포, 좌절감의 극심함은 조금도 덜하지 않을 것이다. 

 고통은 고통, 공포는 공포, 사랑은 사랑이다. 매트릭스 안에서도 마찬가지다. 우리가 느끼는 두려움이 바깥 세계의 원자가 모여서 일어나는 것이든, 컴퓨터가 조종하는 전기 신호에서 생겨나는 것이든 상관없다. 어떻든 두려움은 실재한다. 따라서 우리 정신의 실체를 탐구하고 싶다면 매트릭스 안에서든 바깥에서든 어디서나 가능하다.

 지금까지 나온 최선의 과학적 이론과 최신의 기술 장비에 따르면 정신은 어떤 경우에도 조작에서 자유롭지 않다. 조작용 껍질 안에서 해방되기를 기다리는 진정한 자아는 없다. 그런데도 대다수 SF 영화는 여전히 케케묵은 이야기를 하고 있다. 이른바 물질에 대한 정신의 승리다.

 

p390

 오늘날 아이들이 배우는 것의 대부분은 2050년이면 별 소용이 없어질 가능성이 크다.

 

p391

 이런 세상에서 교사가 학생들에게 전수해야 할 교육 내용과 가장 거리가 먼 것이 바로 '더 많은 정보'다. 정보는 이미 학생들에게 차고 넘친다. 그보다 더 필요한 것은 정보를 이해하는 능력이고, 중요한 것과 중요하지 않은 것의 차이를 식별하는 능력이며, 무엇보다 수많은 정보 조각들을 조합해서 세상에 관한 큰 그림을 그릴 수 있는 능력이다.

 사실, 이런 능력은 수 세기 동안 서구의 자유주의 교육이 추구해 온 이상이기도 했다. 하지만 지금까지는 서양의 많은 학교들조차 그런 이상을 추구하는 데 오히려 태만했다. 학생들에게는 '스스로 생각하라'고 권장하면서 정작 교사 자신들은 아무렇지도 않게 데이터를 밀어넣는 데만 집중했다. 자유주의 학교들은 권위주의를 너무나 두려워한 나머지 특히 거대 서사에는 질색이었다. 그들은 우리가 학생들에게 많은 데이터와 약간의 자유만 주면 학생들이 자기 나름의 세계상을 만들어낼 것으로 여겼다. 지금 세대는 설명 모든 데이터를 종합해서 세계에 관한 하나의 일관되고 의미 있는 이야기를 만들어내지 못하더라도, 장래에는 훌륭한 종합을 이뤄낼 수 있는 충분한 시간이 있을 것이다. 하지만 지금 우리는 시간이 없다. 다음 수십 년 사이에 우리가 내릴 결정들이 생명 자체의 미래를 결정할 것이다. 또한 우리는 지금 우리가 갖고 있는 세계관을 기초로 해서만 그 결정들을 내릴 수 있다. 지금 세대에 우주에 관한 포괄적인 견해가 없다면 생명의 미래는 무작위로 결정될 것이다.

 

p393

 그렇다면 우리는 학생들에게 뭘 가르쳐야 할까? 많은 교육 전문가들은 학교의 교육 내용을 '4C', 즉 비판적 사고critical thinking, 의사 소통 communication, 협력 collaboration, 창의성 creativity으로 전환해야 한다고 주장한다. 보다 포괄적으로 말하면, 학교는 기술적 기량의 교육 비중을 낮추고 종합적인 목적의 삶의 기술을 강조해야 한다. 무엇보다 중요한 것은 변화에 대처하고, 새로운 것을 학습하며, 낯선 상황에서 정신적 균형을 유지하는 능력일 것이다. 2050년의 세계에 발맞춰 살아가려면 새로운 생각과 상품을 발명하는 데 그쳐서는 안된다. 무엇보다 자기 자신을 반복해서 재발명해야만 할 것이다.

 

p424

 대부분의 이야기는 기초가 튼튼해서라기보다는 지붕의 무게 덕분에 탈 없이 유지된다. 기독교 이야기를 보자. 기초는 엉성하기 짝이 없다. 온 우주의 창조자의 아들이 2,000년 전쯤 은하수 어딘가에서 탄소 기반 생명으로 태어났다는 증거가 어디에 있나? 그런 일이 로마 속주였던 팔레스타인에서 일어났고 그의 어머니는 처녀였다는 증거는 어디에 있나? 그럼에도 전 지구에 걸쳐 막대한 기관들이 그 이야기 위에 세워졌고, 그 무게가 너무도 압도적인 힘으로 내려 누르는 덕분에 그 이야기는 자리를 지키고 있다. 그 이야기에서 단어 하나를 바꾸려는 것을 두고도 전면전이 벌어졌다. 서유럽 기독교도와 동방적교회 기독교도 간에 1,000년 동안 계속된 균열은 최근에는 세르비아인과 크로아티아인 간의 상호 살육전으로 표출되기도 했는데, 애초에 '필리오케filioque'(라틴어로 '또한 성자에게서'라는 뜻)라는 한 단어가 발단이었다. 서유럽 기독교도는 기독교인의 신앙고백 안에 이 단어를 넣고 싶어 한 반면, 동방적교회 기독교도는 격렬히 반대했다.(이 단어를 추가하는 것이 갖는 신학적인 함의는 너무나 불가사의해서 여기서 이해가 되도록 설명하는 것은 불가능한 일이 될 것이다. 궁금하면 구글에게 물어보라.)

 일단 이야기 위에 개인의 정체성과 사회의 전 체계가 구축되고 나면, 이야기를 의심하는 것은 생각할 수 없게 된다. 그것을 뒷받침 하는 증거 때문이 아니다. 그것이 무너지면 개인적, 사회적 대격변이 일어날 것이기 때문이다. 역사를 돌아봤을 때, 때로는 지반보다 지붕이 더 중요하다.

 

p426

 어떻게 하면 그리스도를 신봉자에게 실재하는 것으로 만들 수 있을까? 천주교 사제는 미사를 집전하면서 빵 한 조각과 포도주 한 잔을 들고서는 빵은 그리스도의 살이며 포도주는 그리스도의 피라고 선포한다. 신도는 그것을 먹고 마심으로써 그리스도와의 교감을 얻는다. 그리스도를 실제로 입안에 넣고 맛보는 것보다 무엇이 더 생생할 수 있을까? 전통적으로 사제는 성찬식 때 이런 과감한 선포를 라틴어로 했다. 라틴어는 고대 종교와 법률 그리고 생명의 비밀을 이야기할 때 쓰는 언어였다. 모여 있던 농민들이 놀란 눈으로 바라보는 앞에서 사제는 빵 한 조각을 높이 들고 이렇게 선포했다. "호크 에스트 코르푸스!(Hoc est corpus!. 이것은 몸이다!)" 그러면 아마도 그 방은 그리스도의 살이 되었을 것이다. 하지만 "호크 에스트 코르푸스"라는 라틴어를 몰랐던 까막눈의 농민들 머릿속에서는 그 말이 "호쿠스 포쿠스Hocus pocus!"로 와전됐고, 그 뒤 이것은 개구리를 왕자로 변하게 하고 호박을 마차로 바꿔놓는 강력한 주문으로 거듭났다.

 

p429

 근대 서구에서는 유교가 의식에 집착한 것을 두고 흔히 인간에 대한 얕은 이해와 의고擬古주의를 보여주는 것으로 여겼다. 하지만 사실은 오히려 공자야말로 시대를 뛰어넘어 변하지 않는 인간 본성을 깊이 꿰뚫어 본 것이라고 할 수 있다. 유교 문화 - 중국을 필두로 이웃 나라인 한국과 베트남, 일본 - 에서 극도록 수명이 긴 사회적, 정치적 구조를 만들어냈다는 사실은 아마 우연이 아닐 것이다. 인생의 궁극적인 진실을 알고 싶은 사람에게는 의례와 의식이 거대한 장애물이다. 하지만 공자와 같이 사회의 안정과 조화에 관심이 있는 사람이라면 진실은 골칫거리일 때가 많다. 그런 사람에게는 의례와 의식이야말로 최선의 동맹이다.

 

p431

 모든 의식 중에서도 가장 잠재력이 큰 것은 희생이다. 세상 모든 것 중에 고통이야말로 가장 실감나는 현실이기 때문이다. 이것만은 결코 누구도 무시하거나 의심할 수 없다. 사람들에게 어떤 허구를 정말로 믿게 만들고 싶다면, 그것을 대신해서 희생하는 쪽으로 그들을 유도하라. 누구라도 이야기를 위해 고통을 체험하고 나면 대부분 그 이야기가 실제라고 확신하게 돼 있다.

 

 p437

 이스라엘에서는 공교적인 유대인들이 세속화된 유대인들과 심지어 완전한 무신론자들한테까지 이런 금기를 강요하려 들 때가 많다. 이스라엘 정치에서 정통파 유대교 정당들이 대체로 힘의 결정권을 행사하게 된 뒤로, 안식일에 모든 종류의 활동을 금지하는 법을 대거 통과시켰다. 안식일에 개인 차량을 사용하는 것을 불법화하는 데는 실패했지만, 대중교통 운행을 금지하는 데는 성공했다. 전국에 걸쳐 종교적 희생을 강제한 이 조치는 주로 사회에서 가장 취약한 계층에 타격을 준다. 특히 토요일은 노동계급 사람들이 자유롭게 먼 친척이나 친구를 방문하거나 관광 명소로 여행할 수 있는 유일한 날이기 때문이다. 돈이 많은 할머니야 신형 자가용을 몰고 다른 도시에 사는 손주를 찾아가는 데 아무런 문제가 없지만, 가난한 할머니는 버스와 기차가 모두 운행을 하지 않으니 어디에도 오갈 수가 없다.

 

p443

 악의 문제는 악이 실제 삶 속에서는 반드시 추악하지는 않다는 데 있다. 악은 사실 대단히 아름답게 보일 수 있다. 이 점에 관한 한 기독교는 할리우드보다 현명했다. 전통적 기독교 미술에서는 사탄을 대단히 매력적인 정부情婦로 묘사하는 경향이 있었다. 사탄의 유혹에 저항하기가 그토록 어려운 것도 그 때문이다. 파시즘에 대처하기가 어려운 것도 같은 이유에서다. 파시즘의 거울로 자신을 들여다보면 추악한 것이라고는 조금도 눈에 띄지 않는다. 1930년대에 독일인들이 파시즘의 거울로 자신들을 봤을 때는 독일이 세상에서 가장 아름다운 민족으로 보였다. 지금 러시아인들이 파시즘의 거울을 보면 러시아가 세상에서 가장 아름답게 보일 것이다. 이스라엘인들이 파시즘의 거울을 보면 이스라엘이 세상에서 가장 아름답게 보일 것이다. 그러면 그들 모두 그 아름다운 집합체 속에 자신도 빠져들고 싶다고 생각할 것이다. 

 '파시즘'이라는 단어는 라틴어 'fascis'에서 나왔다. '막대 다발'이라는 뜻이다. 세계사에서 가장 흉포하고 살인적인 이데올로기치고는 별 매력 없는 상징처럼 들린다. 하지만 여기에는 깊고 사악한 의미가 있다. 막대 하나는 대단히 약하다. 누구나 쉽게 부러뜨릴 수 있다. 그렇지만 여러 개를 다발로 묶으면 부러뜨리기가 거의 불가능해진다. 이는 각 개인은 보잘것없는 존재이지만 집단으로 한데 뭉치면 대단히 강력하다는 사실을 함축하고 있다. 그래서 파시스트들은 어떤 개인보다도 집단의 이익이 특권을 갖는다고 믿으며, 어떤 하나의 막대도 다발의 결속을 깨려 들어서는 안 된다고 요구한다.

 

p448

 근대 문화가 부상하면서 상황은 뒤집혔다. 신앙은 점점 정신적 노예처럼 보였고, 의심은 자유의 전제 조건으로 비치게 되었다.

 1599년에서 1602년 사이 어느 시기에 윌리엄 셰익스피어는 《햄릿》이라는 제목으로 더 유명한 자기 나름의 <라이온 킹>을 썼다. 하지만 심바와 달리 햄릿은 생명의 원을 완성하지 않는다. 그는 마지막 순간까지 회의적이고 양면적인 상태로 남아, 인생의 의미가 무엇인지 찾지도 못하고, '사느냐 죽느냐' 둘 중에서 어느 쪽이 나은지 결정도 못 내린다. 이 점에서 햄릿은 전형적인 근대의 영웅이다. 근대는 과거로부터 물려받은 과다한 이야기들을 거부하지는 않아다. 대신 그것들을 파는 슈퍼마켓을 차렸다. 근대 인간은 그 모두를 자유롭게 시식해볼 수 있는데, 자기 입맛에 맞는 것이면 무엇이든 고르거나 조합할 수 있다. 

 어떤 사람들은 그토록 많은 자유와 불확실성을 견디지 못한다. 파시즘 같은 근대 전체주의 운동은 의심에 찬 사상들의 슈퍼마켓에 격렬히 반발했고, 오직 하나의 이야기에 대한 절대적 믿음만 요구하는 데에서는 전통 종교들까지 능가했다. 하지만 대부분의 근대 사람들은 믿음의 슈퍼마켓이 마음에 들었다. 인생의 의미가 무엇인지, 어떤 이야기를 믿어야 할지 모를 때 사람들은 어떻게 할까? 선택의 가능성 자체를 신성시한다. 영원토록 슈퍼마켓 통로에 서서, 원하는 것은 무엇이든 선택할 능력과 자유가 있는 한, 자기 앞에 진열된 상품을 살펴보기만 한다. (...) 그러다 어느 순간 화면 정지, 컷, 끝. 그리고 엔딩 크레디트가 올라간다.

 

p455

 이제는 페이스북과 인스타그램 시대가 되어 이런 개인의 신화 제조 과정을 이전 어느 때보다 더 분명하게 관찰할 수 있다. 왜냐하면 그 과정의 일부야말로 우리 정신이 하던 일을 컴퓨터에 아웃소싱한 것이기 때문이다. 사람들이 온라인에서 완벽한 자아를 구축하고 장식하는 데 무수한 시간을 쏟는 가운데, 점점 자신의 창작물에 고착돼가고, 자신의 실체와 그것을 착각하는 것을 보면 무척 흥미로우면서도 두렵다. 그 덕분에 실상은 교통 체증과 사소한 말다툼, 긴장된 침묵으로 가득할 뿐인 가족 휴가는 아름다운 풍경의 파노라마와 완벽한 저녁식사, 웃음 가득한 얼굴들의 모음으로 둔갑한다. 우리가 실제로 경험하는 것의 99퍼센트는 자아의 이야기에서 누락된다. 

 우리의 실제 경험은 신체적인 데 반해, 우리의 환상 속에서 빚어지는 자아는 아주 시각적이기 쉽다는 사실은 특히 주목할 만하다.

 

 

 그러므로 진정으로 자신을 이해하고 싶다면 페이스북 계정이나 자기 내면에서 하는 이야기와 자신을 동일시해서는 안 된다. 그 대신 몸과 마음의 실제 흐름을 관찰해야 한다. 그러면 이성의 많은 개입 없이도, 그리고 자신의 아무런 지시 없이도 우리의 생각과 감정과 욕망이 스스로 나타났다가 사라지는 것을 보게 된다. 마치 이런 저런 바람이 이곳에서 저곳으로 바뀌어 불면서 머리칼을 헝클어뜨리는 것과 같다. 당신은 바람이 아닌 것처럼, 당신이 체험하는 생각과 감정과 욕망의 혼합체도 아니다. 또한 그것들을 지나오고 난 눈으로 보고 들려주는 세탁된 이야기도 분명히 아니다. 당신은 그 모든 것을 체험했지만 스스로 통제할 수는 없다. 가질 수도 없다. 그 체험들의 합도 아니다. 사람들은 묻는다. "나는 누구인가?" 그런 다음 어떤 이야기를 들으리라 기대한다. 하지만 자신에 대해서 알아야 할 첫 번째 사실은, 당신은 이야기가 아니라는 것이다.

 

p485

 오늘날 모든 나라는 세 가지 주요 과제에 직면했습니다. 이것들은 전 지구적 차원에서만 해결될 수 있습니다. 세 가지 과제란 핵전쟁, 기후변화, 기술 혁신에 따른 파괴입니다.

 

p492

 당신은 어떤 것 - 고통이든 쾌락이든 - 을 경험하면서 그 밖의 것을 바랍니다. 고통을 경험할 때에는 그 고통이 사라지기를 바랍니다. 쾌락을 경험할 때는 쾌락이 강해지고 영원히 지속되기를 바랍니다. 이런 실체의 부정이 모든 괴로움의 뿌리입니다. 우리는 실체를 있는 그대로 받아들이도록 스스로 훈련해야 합니다. 계속해서 고통에서 달아나고 더 많은 쾌락을 쫓아 달려가는 대신, 보다 균형 잡힌 정신을 유지하는 법을 배워야 합니다. 고통과 쾌락에 대해 불필요한 괴로움을 일으지키 않고 둘 다 있는 그대로 경험하는 법을 배워야 합니다.

 

 이 책은 초반을 읽다가 상당히 오랜기간 그냥 냅뒀다. 그 이유는 재미가 없기도 하고, 이 뻔한 얘기를 계속 읽어야 하나? 라는 생각 때문이었다. 너무 피상적이기도 하고 알맹이가 없는 얘기를 군더더기처럼 반복하는 탓에 집중을 유지하기 힘들다.

 다행히 6장에서 8장까지는 내용이 괜찮다.

 이 책을 읽는데는 한 3시간쯤이면 될 듯 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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p50. 국민 평균 독서량 166위라는 성적표

 학제 공표가 있고 나서 약 14년 뒤인 1886년 3월, 일본은 '제국대학령'을 반포했다. 한 달 뒤에는 '소학교령'도 반포했다. 이로써 일본은 1차 산업혁명 시대에 살아남을 수 있는 힘을 기를 수 있었다. 이쯤에서 묻고 싶다.

 혹시 당신은 일본에서 누가 서양식 교육혁명을 본격적으로 시작하고 또 완성시켰는지 알고 있는가?

 이토 히로부미다.

 이쯤에서 또 묻고 싶다. 혹시 당신은 누가 21세기 일본 교육혁명을 시작하고 또 완성시키고 있는지 알고 있는가?

 아베 신조다.

 아베 신조가 가장 존경하는 인물은 '정한론征韓論'을 주장한 요시다 쇼인이다. 참고로 요시다 쇼인은 을사늑약과 경술국치를 주도한 이토 히로부미, 야마가타 아리모토, 가쓰라 다로 등을 길러냈다.

 아베 신조가 정치 롤모델로 삼고 있다는 외할아버지 기시 노부스케는 '평화헌법' 개정을 통해 일본을 군사 대국으로 만들어서 '대동아 공영권'을 다시 실현하자는 주장을 펼친, A급 전범이다. 아베 신조는 외할아버지의 유지를 받들어 '평화헌법'을 개정, 일본을 전쟁을 할 수 있는 국가로 만들고자 한다. 그리고 대동아 공영권을 회복하고자 한다. 혹시 당신은 대동아 공영권의 시작이 무엇인지 아는가? 한반도 재식민지화다.

 아베의 대표적 망언은 다음과 같다.

 "아베 내각은 일본의 식민 지배를 사죄한 무라야마 담화를 계승하지 않는다."

 "침략의 정의는 국가 간 관게에 따라 다르다."

 "도쿄 전범 재판은 일본법에 의한 것이 아니다. 연합군이 승자의 판단에 따라 단죄한 것이다."

 "(A급 전법이 합사된 야스쿠니 신사를 참배하면서) 나라를 위해 싸우고 고귀한 생명을 바친 영령들에게 존숭의 뜻을 표하는 것은 당연한 일이다."

 물론 아베 신조가 제2의 이토 히로부미가 될 수는 없을 것이다. 무엇보다 우리가 과거와 다르기 때문이다. 하지만 과연 앞으로도 그럴까?

 지금으로부터 약 165년 전, 일본은 서양의 흑선을 만나고 교육 혁명을 일으켜서 1차 산업혁명이 만든 새로운 시대의 흐름에 올라탔다. 그러고는 이내 군사 대국으로 변신, 대한제국을 멸망시키고 강제 지배를 시작했다.

 이쿠코 츠보야 뉴우에루 일본 국제 바칼로레아 대사는 일본 문부과학성 교육 재건 자문위원회 위원을 맡고 있고, 국제 바칼로레아를 일본 공교육에 도입하는 전반적 계획을 입안 추진하는 역할을 담당하고 있다. 그녀는 <좋은교사>와의 인터뷰에서 이렇게 말했다.

 "4차 산업혁명 시대에는 기존의 주입식 · 획일식 교육으로는 경쟁력을 가질 수 없습니다. (...) 일본에서는 국제 바칼로레아를 19세기에 개항할 수밖에 없도록 만들었던 미국 페리 제독의 흑선黑船이라고 봅니다. 1853년 미국 페리 제독이 흑선을 끌고 도쿄만에 나타나서 개항을 요구했고 이를 계기로 일본은 메이지 유신을 하게 되었습니다. 흑선은 일본에서 외부 충격을 기회로 삼아 내부 혁신을 성공시킨 상징으로 인식됩니다. 흑선이 오지 않았다면 일본은 어떻게 바뀌어야 하는지 상상해본 적이 없기 때문에 그렇게 단시간 내에 개혁을 할 수 없었을 것입니다. 국제 바칼로레아는 현 일본 교육의 대개혁을 성공시킬 수 있는 흑선입니다.

 이쿠코 츠보야 뉴우에루 일본 국제 바칼로레아 대사는 21세기 일본 교육혁명을 가리켜서 일본이 다시 한번 서양의 '흑선'을 만난 것이라고 밝혔다. 아마도 그녀의 말은 사실일 것이다.

 "역사는 반복된다"는 말이 있다. "역사를 잊은 민족에세 미래는 없다"는 말도 있다.

 앞으로 인류는 두 계급으로 나뉜다고 한다. 인공지능에게 지시를 내리는 계급과 인공지능에게 지시를 받는 계급.

 일본은 전자에 속하는 국민을 최대한 많이 배출해서 지금은 비교도 할 수 없는 강대국이 되고자 한다. 그리고 대동아 공영권을 회복하고자 한다. 아베 신조가 이토 히로부미를 본받아 2013년 교육혁명을 일으킨 이유다.

 일본의 국민 평균 독서량은 1년 기준 약 60권으로 미국, 유럽 다음으로 세계 최고 수준을 자랑한다. 이 세계 최고 수준의 독서 국가가 서양의 바칼로레아를 받아들여서 국민 독서의 질을 싱귤래리티대, 하버드 의대, 애드 아스트라 수준으로 올리려고 하고 있다.

 UN이 발표한 바에 따르면 우리나라는 국민 평균 독서량이 세계 166위다(2015년 기준). 16위가 아니다. 166위다. 게다가 우리의 독서 문화는 '단순히 눈으로 읽는' 정도다. 아니 이조차도 제대로 하지 않고 있다. 우리는 도대체 어떤 미래를 맞이하고 싶기에 이렇게 살고 있는가.

 

(개인 감상) 물론 독서량도 중요하지만, 현재 일본의 정책 기조는 역사적으로 부담되는 것은 모두 묻고 가자는 주의다. 후쿠시마도 그렇고, 이번에 코로나19 사태도 그렇고. 제 아무리 바칼로레아라는 교육 시스템이 훌륭하다고 해도 진실을 숨기는 부도덕함이 정당함을 이길 도리는 없다. 공부를 잘하기 전에 인간이 되라는 말이 있듯이, 아무리 우수한 교육 시스템을 들여와도 철학과 비전이 글러먹은 낡아빠진 메이지의 망령에 사로잡힌 아베 신조와 그 정치세력이 존재하는 한 일본의 미래는 매우 어둡다.

 

p69

 다시 알파고 이야기로 돌아가자. 도대체 서양은 왜 한국에서 알파고 쇼를 벌었던 걸까? 눈치 빠른 독자들은 이미 답을 얻었을 것이다. 중국과 일본에 이어 한국에도 인공지능 지식과 기술을 파고 싶어서다. 한국이 국가의 부를 인공지능에 쏟기 시작하면 철도 · 전기 · 자동차 · 선박 · 비행기 · 컴퓨터 · 스마트폰 때 그랬던 것처럼 동남아시아 · 중앙아시아 · 중동 · 아프리카 등도 국가의 부를 인공지능에 쏟게 된다는 사실을 잘 알고 있기 때문이다.

 어떤 독자들은 기분이 상할지도 모르겠다. 나도 이 내용을 쓰면서 기분이 좋지 않다. 아니 피눈물을 흐르는 기분을 느끼고 있다. 하지만 어쩌겠는가. 설령 욕을 먹더라도 작가가 사실을 써야 하지 않겠는가. 그렇게 독자들로 하여금 냉정하게 현실인식을 할 수 있게 도와야 하지 않겠는가. 그래야 독자들이, 아니 우리나라가 잠에서 깰 수 있지 않겠는가.

 만일 우리나라가 잠에서 깨어난다면, 인공지능 시대의 거인이 될 것이다. 자동차 · 선박 · 반도체 등에서 그랬던 것처럼 말이다. 나는 이런 심정으로 앞의 내용을 썼다. 나의 이 마음이 부디 잘 전달되었으면 한다.

 

(개인감상) 알파고 쇼를 한국에서 벌인 이유는 바로 "이세돌"때문이다. 당시 세계 1위는 중국의 "커제"였으며, 세계 랭킹 2위이자 당시 한국 랭킹 1위는 박정환이었다. 당시 이세돌의 한국 랭킹은 3위였으며, 세계 랭킹은 5위에 불과했다(이세돌이 바둑을 그들보다 못둔다는 의미는 아니다. 바둑도 일종의 스포츠라 나이가 들면서 체력이 떨어지면 성적이 떨어진다. 랭킹은 못했어도 당시 이세돌이 세계바둑팬들에게 가장 큰 인기를 얻었던 기사라고 생각한다).

만일 작가의 논리대로 알파고의 개발사인 딥마인드(모기업은 구글이다)가 보유한 인공지능 기술의 판매라는 시장성을 생각했다면 시장이 작은 한국보다는, 당시 바둑 기사 세계 랭킹 1위인 커제를 파트너로 선정하는게 중국이라는 시장을 감안한 훨씬 합리적 선택이었을 것이다.

하지만, 이세돌을 선택한 이유는 그가 가진 바둑 스타일 때문이다. 이세돌이 인기가 있는 이유는 아무리 중요한 기전이라도 자기류를 고집했기 때문이고 그런 자기류로 계속 승리했기 때문이다. 또한 그의 자기류는 다른 기사들이 쉽게 생각하지 못하는 신수,묘수가 많이 나온다. 

딥마인드가 내부적으로 테스트를 완료하고 이제 인간을 넘어섰다고 판단한 시점에서 이세돌을 선택한 이유는 기존의 선입견에 얽매이지 않고 자유로운 사고방식을 가진 그의 천재성에서 알파고의 약점을 발견할 수 있지 않을까 하는 기대감때문이다. 그리고 이세돌의 그러한 천재성이 4국에서 신의 한수라 불리는 78수를 통해 발휘된다(여담이지만 78수도 나중에 프로기사들의 집중적 검토를 통해서 안된다는 것이 밝혀진다. 하지만 대국 당시에는 알파고도 그 대처법을 발견하지 못했으니 당시 전세계 어떤 인간 프로기사들도 발견하지 못했을 것이다. 그 사실 자체로 이세돌의 천재성이 다시 한 번 더 증명된 셈이다)

그러니 대한민국 사람들은 이세돌이 한국의 기사라는 점을 자랑스러워하면 되고, 알파고의 상대로 이세돌이 선정된 것이 당연하다는 것을 알면 된다. 전혀 기분이 상할 필요가 없다.

 

p228

 인공지능 기술이 발달할수록 윤리 · 도덕적 판단이 중요해지는 이유는 인공지능 기술 발달에 따른 윤리 · 도덕적 문제를 해결하지 못하면 인공지능 산업을 크게 일으키기가 어려워지기 때문이다. 구글이 기술 개발을 주도하고 있는 인공지능 자율주행차를 보자. 사실 자율주행차 기술은 거의 완성되었다고 해도 과언이 아닐 정도다. 안정성 등에 있어서도 인간보다 낫다는 평가를 받고 있다. 그런데 우리는 왜 도로에서 자율주행차를 찾아볼 수 없는 것일까? 윤리 · 도덕적 문제가 아직 해결되지 않았기 때문이다.

(첨언) 윤리/도덕적 문제도 물론 심각하지만 자율주행은 자동차만 인공지능이 된다고 되는게 아니다. 더 큰 문제는 자율주행 시스템을 지원할 도로 인프라를 모두 새로 깔아야 할 수 있다는 것이다. 도로의 유도 시스템, 고층 빌딩 사이에 있는 도로들에서 GPS신호가 방해받는 것을 보정해 줘야 할 중계기 등. 이런 인프라 건설에는 돈만 드는게 아니다. 기존 도로 시스템 전체를 갈아엎고 건물에 중계기를 설치하는데는 기존에 거기 살고 있는 주민들과 건물주의 이해 관계가 걸려있다(그래서 북한같은 1인 독재체제인 북한의 평양같은 도시가 자율주행이 가장 먼저 될 수 있는 가능성이 높은 도시로 꼽히는 것이다).

어찌 보면 윤리/도덕적 문제는 보험사가 내어줄 (사망)보험금을 어느 정도로 책정하면 되는가라는 경제적 관점의 대중적 합의로 해결될 가능성도 있다.

 실리콘밸리를 뜨겁게 달궜던 논문, "인공지능 자율주행차가 누군지를 살해하도록 설계되어야 하는 이유"에 나오는 문제를 보자. 이 논문은 영국의 윤리 · 도덕 철학자 필리파 풋이 제안한 '트롤리 딜레마 Trolley dilemma'를 자율주행차에 적용했는데, 다음 세 가지 상황을 가정하고 있다.

 

1. 직진하면 열 명을 치고, 급히 방향을 틀면 한 명을 친다.

2. 직진하면 한 명을 치고, 급히 방향을 틀면 운전자가 중상을 입거나 사망한다.

3. 직진하면 여러 명을 치고, 급히 방향을 틀면 운전자가 중상을 입거나 사망한다.

 

(첨언) 물론 딜레마지만, 지금 이탈리아에서 60세 이상의 노인들은 코로나19의 치료에서 암묵적으로 제외되어 있다. 인간은 위기가 닥치면 결국 생명의 경중을 어떤 기준을 가진(보통 역사적으로 합의되어온) 관례에 따라 결정하게 된다. 자율주행의 시대에 우리는 어쩌면 차에 탑승할 때, 우리의 성별, 나이등이 차량 관제시스템에 입력되게 될 것이다. 그래서 그 탄 사람의 생명의 중요도가 나뉘게 될지도 모른다.

 

 이 상황 앞에서 인공지능은 각각 어떤 판단을 내려야 할까? 여기에 대해 많은 석학들이 의견을 제시했다. 하지만 그 누구도 세 가지 상황이 마주한 윤리 · 도덕적 문제를 완벽하게 해결하지 못했다. 앞으로도 이 문제가 완벽하게 해결되는 일은 없을 것이다. 물론 인공지능 자율 주행차는 이 문제의 해결 여부와 상관없이 도로를 주행하기 시작할 것이다. 하지만 인공지능 자율주행차 제조사들이 여기에 대해 완벽한 답까지는 아니더라도 지금 수준의 답들을 훌쩍 뛰어넘는 어떤 훌륭한 답을 내놓지 못한다면, 인공지능 자율주행차가 전 세계의 도로를 뒤덮는 일은 일어나기 힘들 가능성이 높다. 한마디로 실리콘밸리는 인공지능의 윤리 · 도덕적 문제를 철저히 산업적 관점에서 접근하고 있다. 실리콘밸리에서 철학(윤리 · 도덕적)이 전성기를 맞이하고 있는 것에는 이런 이유도 있다.

 한편으로 이는 무엇을 의미하는가? 미래에는 인공지능이 마주할 윤리 · 도덕적 문제를 미리 헤아려 짐작하고, 이를 해결하는 능력을 가진 기업과 인재가 인공지능 산업의 리더가 되는 것이다. 그래서 구글 · 마이크로소프트 · 애플 등 세계적인 인공지능 윤리연구소등을 세우고 인공지능의 윤리 · 도덕적 문제 해결에 주력하고 있다. 그리고 선진국의 미래형 학교들이 윤리 · 도덕 철학을 교육 과정의 핵심 중 하나로 삼고 있다. 특히 인공지능 산업의 1인자를 키워내고자 하는 목표를 가진 일론 머스크의 애드 아스트라는 아예 교육 과정 전체를 인공지능 중심의 미래 사회에 필요한 윤리 · 도덕적 문제를 미리 예측하고 이에 대한 판단 능력을 기르는 내용으로 도배하다시피 하고 있다.

 실리콘밸리에서 문학은 윤리 · 도덕적 문제를 미리 예측하고 이에 대한 판단 능력을 기르는 도구로 사용되고 있다. 대표적으로 스탠퍼드대 D스쿨의 공동창립자 버나드 로스 스탠퍼드대 교수가, 스탠퍼드대 D스쿨에서 진행하고 있는 존 스타인벡의 《분노의 포도》문학 수업을 보자. 버나드 로스의 《성취습관 The Achievement Habit》에 따르면, 그는 수강생들에게 미국 대공황기에 평범한 미국 가정들이 빈민으로 몰락하는 과정을 사실적으로 그린 소설 《분노의 포도》에서 발췌한 '트랙터 경작'을 읽게 한다.

 내용은 이렇다. 주인공이 감옥에서 나와 집에 돌아와보니 가족들은 물론이고 마을 사람들이 다들 떠날 준비를 하고 있다. 지주地主인 은행이 대리인들을 보내서 앞으로는 기계로 농사를 지으면 되기 때문에 소작농이 필요 없으니 떠나라고 통보했기 때문이다. 실제로 은행은 트랙터 한 대를 보내서 농사를 짓게 하는데, 이 트랙터가 소작농 100명이 하는 일을 해낸다. 한마디로 마을 사람들은 새롭게 발명된 기계 한 대 때문에 졸지에 실업자가 되고, 정든 고향을 떠나야 하는 것이다. 그런데 씁쓸하게도 트랙터의 운전수는 같은 마을 사람이다. 이에 분노한 마을 사람들 중 한 명이 트랙터 운전수에게 왜 이런 일을 하느냐고 따지자, 그는 이렇게 변명한다.

 "하루에 3달러를 주거든요. 나도 처자식이 있는 몸입니다. 식구들이랑 먹고 살아야지요."

 마을 사람이 기막혀 하면서 "자네가 하루 3달러를 버는 통에 스무 집 식구들이 굶고 있고, 100명이 넘는 사람들이 마을을 떠나서 길거리를 헤매는 처지로 전락했다"고 하니까, 트랙터 운전수는 냉정하게 대꾸한다.

 "그런 어쩔 수 없는 일이에요. 시대가 바뀌었다고요. 이제 트랙터가 없으면 농사를 지을 수 없는 시대라고요."

 그러고는 트랙터를 몰고 가서 "당신 집을 무너뜨리고 농지로 만들겠다. 그러면 일당을 더 받을 수 있다"고 협박한다. 마을 사람이 "그러면 난 널 총으로 쏘겠어!"라고 하자 트랙터 운전수는 "그래봤자 소용없다"며 "당신만 살인죄로 교수형을 받을 것이고 은행은 다른 트랙터 운전수를 보내어 당신 집을 무너뜨릴 것이다"라고 대답한다.

(그래서 마르크스는 "전 세계의 노동자들이여 연대하라!"고 외친 것이다) 

아무튼 마을은 이렇게 트랙터 한 대로 초토화되고, 사람들은 입에 풀칠이라도 하고자 타지로 간다. 주인공도 가족과 함께 일자리가 넘친다는 캘리포니아로 떠난다. 하지만 막상 캘리포니아에 도착해보니 또 다른 생존 지옥이 펼쳐진다.

 버나드 로스 교수는 D스쿨 학생들에게 '트랙터 경작'을 읽게 한 뒤 이렇게 질문한다.

 "만일 당신이 소설 속의 트랙터 운전수 같은 상황에 처해 있다면, 그러니까 트랙터를 운전하는 것 말고는 가족을 부양할 더 나은 방법이 없다면 어떻게 하겠습니까? 기꺼이 트랙터를 운전하겠습니까? 아니면 트랙터를 운전하지 않겠습니까? 물론 어떤 선택을 해야 좋을지 몰라 그저 갈팡질팡하고만 있을 수도 있겠지요. 어떻습니까? 당신은 이 세 경우 중 어디에 해당될 것 같습니까?"

 그리고 이렇게 덧붙인다.

 "이 이야기는 전형적인 윤리 · 도덕적 문제를 대변하고 있습니다. 트랙터 운전수는 자신이 하는 일이 마을 사람들의 삶을 파괴하고 있다는 사실을 잘 알고 있지요. 하지만 그도 가족을 부양하기 위해서는 트랙터를 모는 것 말고는 달리 방법이 없습니다. 결국 그는 자기 합리화와 자기 정당화를 선택합니다. 자신이 트랙터를 몰지 않더라도 토지의 소유자인 은행은 다른 누군가를 보내서 트랙터를 운전시킬 거라는 것이지요. 사실 이런 식의 자기 합리화와 정당화는 우리 일상에서 흔히 일어나고 있습니다."

 다음으로 이어지는 것은 인간의 자기 합리화와 자기 정당화를 윤리 · 도덕적으로 어떻게 판단할 것인가에 대한 토론이다. 여기서부터는 우리가 흔히 떠올릴 수 있는 미국 명문 대학의 토론식 수업이 이루어진다고 보면 되겠다.

 

 과거의 데이타와 선입견에 사로잡힌 우리의 잘못된 상식을 교정할 수 있는 책.

최신의 통계를 바탕으로 이 세상은 점점 좋아지고 있다고 내용을 이야기한다.

 저자는 스웨덴 태생의 의사 겸 통계학자로서 20년 이상 아시아와 아프리카에서 근무한 경험을 바탕으로 서양인이 아시아와 아프리카에 가지는 선입견에 의한 왜곡과 그로 인해 발생한 오해와 무지가 얼마나 부정적인 결과를 초래하는지에 대해 이야기한다.

 또한 과거에 유럽이 산업발전을 거치면서 이미 지구에 끼쳐왔던 환경파괴와 같은 해악들을 이유로 중국, 인도와 같은 개발국들에게 하는 무리한 요구의 뻔뻔스러움에 대해서도 이야기한다.

 그리고 그 선입견과 뻔뻔함을 밝히는 수단으로서 데이터의 수집과 정합성 있는 통계적 해석에 힘써왔다.

 2017년 2월에 사망한 저자의 처음이자 마지막 책으로 평생의 역작이라 할만하다. 아마도 더 사셨으면 좋은 책을 더 많이 썼을텐데라는 점에서 아쉬움이 남는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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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장. 간극본능(Gap Instinct)

 

2장. 부정본능(Negativity Instinct)

 

p95. 부정본능

 그런 식의 생각은 대개 부정 본능 때문이다. 좋은 것보다 나쁜 것에 더 주목하는 본능이다. 여기에는 세 가지 원인이 작용한다. 하나는 과거를 잘못 기억하기 때문이고, 또 하나는 언론인과 활동가들이 사건을 선별적으로 보도하기 때문이다. 마지막으로 상황이 나쁜데 세상이 더 좋아진다고 말하면 냉정해 보이기 때문이다.

 

p102. 나쁘지만 나아진다

 부정적 뉴스를 볼 때 더 긍정적 뉴스로 균형을 맞추는 것은 해법이 아니다. 그것은 자신을 기만하고, 안심시키며, 반대 방향으로 호도하는 편향일 뿐이다. 마치 설탕이 너무 많이 들어갔을 때 소금을 잔뜩 넣어 균형을 맞추는 것과 비슷하다. 좀 더 강렬한 맛을 내겠지만 건강에는 좋지 못하다.

 내게 효과 있는 해법은 머릿속에서 두 가지 생각을 동시에 유지하도록 스스로를 설득하는 것이다.

 우리는 상황이 점점 좋아진다는 말을 들으면 '걱정 마, 안심해'라거나 '신경 안 써도 돼'라는 뜻으로 생각하는 경향이 있다. 하지만 내가 상황이 점점 좋아진다고 말할 때는 결코 그런 뜻이 아니다. 세상에서 일어나는 심각한 문제를 외면하자는 뜻이 아니라, 상황이 나쁠 수도 있고 동시에 좋을 수도 있다는 뜻이다.

 세상을 인큐베이터 안에 있는 미숙아라고 가정해보자. 아기의 건강 상태가 극도로 안 좋아 호흡, 심장박동 같은 중요한 신호를 꾸준히 관찰하며 아기를 보살핀다. 일주일이 지나자 상태가 훨씬 좋아진다. 모든 지표에서 나아지고 있지만, 여전히 위험한 상태라 계속 인큐베이터에 있어야 한다. 이런 상황에서 아기가 좋지 않다고도 말할 수 있을까? 물론이다. "상황이 나아지고 있다"고 말할 경우, 만사 오케이니 마음 푹 놓고 걱정하지 말라는 뜻일까? 전혀 아니다. 상황이 나쁜 것과 나아지는 것 중 선택을 해야만 할까? 절대 그렇지 않다. 둘 다 옳다. 상황은 나쁘면서 동시에 나아지고 있기도 하고, 나이지고 있지만 동시에 나쁘기도 하다. 

 세계의 현 상황도 그렇게 생각해야 한다.

 

3. 직선 본능(Straight line instinct)

4. 공포 본능(Fear Instinct)

p163

 2011년 3월 11일, 일본 해안 근처 태평양의 약 29km 해저에서 '지진 단층 파열 현상'이 일어났다. 이로 인해 일본 본토가 약 2.5m 동쪽으로 이동했고, 이때 발생한 쓰나미가 1시간 뒤 일본 해안을 덮쳐 약 1만 8,000명이 목숨을 잃었다. 쓰나미는 후쿠시마 핵발전소를 보호하기 위해 세워놓은 장벽을 넘었다. 후쿠시마는 온통 물로 넘쳤고, 전 세계 뉴스는 신체 손상과 방사능 오염의 공포로 넘쳐났다.

 사람들은 최대한 빨리 후쿠시마를 탈출했지만 이후 1,600명이 더 목숨을 잃었다. 이들을 죽음으로 내몬 것은 방사능이 아니었다. 사람들은 방사능을 피해 도망쳤지만, 방사능 때문에 사망했다고 보고된 사람은 아직 한 명도 없다. 1,600명은 탈출 과정 또는 탈출 후에 사망했다. 이들은 대개 노인이었고, 피난 그 자체나 대피소의 삶에서 오는 정신적 · 신체적 스트레스가 사망 원인이었다. 한마디로 이들을 죽음으로 내몬 것은 방사능이 아니라 방사능 공포였다.(1986년 체르노빌에서 사상 최악의 원전 사고가 일어난 뒤에도 사람들은 사망률이 크게 증가하리라 예상했다. 하지만 세계보건기구의 조사에 따르면, 그 지역에 살고 있는 사람들 사이에서도 그러한 예상을 확신할 근거는 없었다).

 

5. 크기 본능(Size Instinct)

 

p177. 내 눈에 보이지 않는 죽음

 

 1980년대 초, 젊은 의사로 모잠비크에서 일하던 나는 매우 힘든 셈을 해야 했다. 죽은 아이를 세는 일인데, 특히 나칼라Nacala에 있는 우리 병원에 입원했다가 죽은 아이들을 우리 활동 지역 내 가정에서 죽은 아이들 수와 비교해야 했다.

 당시 모잠비크는 세계에서 가장 가난한 나라였다. 내가 나칼라 지방에서 활동한 첫해에 30만 명이 사는 그곳에 의사는 나밖에 없었다. 그리고 다음 해에 두 번째 의사가 합류했다. 스웨덴 같으면 의사 100명이 맡았을 환자를 우리 둘이 돌봤고, 나는 매일 아침 출근길에 나 자신에게 말했다. "오늘 나는 의사 50명 몫을 해야 한다."

 우리는 해마다 상태가 심각한 아이들 약 1,000명을 이 지방의 작은 병원 한 곳에 입원시켰다. 하루에 약 3명꼴이다. 나는 이 아이들의 목숨을 살리려 애썼던 일을 절대 잊지 못할 것이다. 모두 설사, 폐렴, 말라리아 같은 심각한 질병에 시달렸는데, 빈혈과 영양실조도 함께 나타나는 경우가 많았다. 최선을 다했지만, 20명 중 1명꼴로 목숨을 잃었다. 매주 1명씩 죽는 셈인데, 자원과 인력이 더 많았다면 거의 다 치료할 수 있는 아이들이었다.

 우리가 할 수 있는 치료는 가장 기초적 수준인 물과 소금을 이용한 방법과 근육주사였다. 정맥주사는 놓지 않았다. 정맥주사를 놓을 간호사도 없고, 의사가 주사를 놓고 감독하기에는 시가이 너무 많이 걸렸다. 산소통도 거의 없고, 수혈 능력도 제한적이었다. 극도로 빈곤한 나라의 의료 수준은 원래 그랬다.

 한번은 주말레 친구가 우리 집에 묵으러 왔다. 300km 넘게 떨어진 더 큰 도시에 있는, 우리보다 약간 더 나은 병원에서 소아과 의사로 일하는 스웨덴 친구였다. 토요일인 그날 오후 나는 응급실 호출을 받았고, 그 친구도 동행했다. 우리가 도착했을 때 한 엄마가 겁에 질린 눈빛을 하고 있었다. 엄마 품에 안긴 아기는 설사를 심하게 했는데, 힘이 너무 없어 젖을 빨지도 못했다. 나는 아기를 입원시켰고 아기에게 튜브를 끼운 뒤 경구 수액을 투입하라고 지시했다. 그러자 소아과 친구가 내 팔을 붙잡고 나를 복도로 끌고 나갔다. 그는 수준 이하의 내 처치법에 크게 화를 내며, 집에 가서 저녁 먹을 생각에 치료를 건성으로 한다고 나무랐다. 그러면서 정맥주사를 놓으라고 했다.

 나는 그의 이해 부족에 화가 났다. "여기서는 이게 우리 표준 치료법이야. 아이한테 정맥주사를 놓으면 30분은 걸릴 텐데, 그러면 간호가 일을 엉망으로 만들 확률이 높다고. 그리고 맞아. 나도 더러는 집에 가서 저녁을 먹어야 해. 그러지 않으면 나도, 우리 가족도 여기서 한 달 이상은 못 버틸 테니까."

 친구는 여전히 수긍하지 못했다. 그는 혼자 병원에 남아 아기 정맥에 바늘을 꽂느라 여러 시간을 보냈다.

 마침내 그가 집에 돌아오자 토론이 이어졌다. 친구가 주장했다. "병원에 오는 모든 환자한테 할 수 있는 건 다 해야 해."

 내가 대꾸했다. "그렇지 않아. 내 시간과 자원을 이곳에 찾아온 사람을 살리는 데 모두 소진하는 건 비윤리적이야. 내가 병원 밖 서비스를 개선하면 더 많은 아이를 살릴 수 있으니까. 이 지방 '모든' 아이의 죽음이 다 내 책임이라고. 보이지 않는 곳에서 죽어가는 아이들도 내 눈앞에서 죽어가는 아이들과 똑같이."

 대부분의 의사와 마찬가지로, 그리고 어쩌면 대부분의 일반 사람과 마찬가지로 그 친구는 동의하지 않았다. "네 의무는 네가 돌보는 환자한테 모든 수단을 동원하는 거야. 다른 곳에 있는 아이들을 더 많이 살릴 수 있다는 주장은 냉정한 이론상의 추측일 뿐이라고." 나는 몹시 피곤해 언쟁을 그만두고 잠자리에 들었다. 그리고 다음 날 다시 수를 세기 시작했다.

 나는 분만 병동을 관리하는 아내 앙네타 Agneta 와 함께 셈을 했다. 그해 병원에 입원한 아이는 총 946명이고, 대부분이 다섯 살 미만이며, 그중 52명(5%)이 죽었다는 사실을 알고 있었다. 우리는 그 수를 나칼라 지방 전체에서 사망한 아이들의 수와 비교해야 했다.

 모잠비크의 아동 사망율은 당시 26%였다. 나칼라 지방이라고 해서 크게 다를 바 없어 우리는 그 수치를 이용했다. 아동 사망율은 한 해에 사망한 아이 수를 그해 태어난 아이 수로 나누어 구한다.

 따라서 그해 나칼라 지방의 신생아 수를 알면 아동 사망률 26%를 이용해 사망한 아이가 몇 명인지 추정할 수 있었다. 당시 최신 인구조사에 따르면, 나칼라시의 신생아 수는 연간 약 3,000명이었다. 나칼라 지방의 인구는 시 인구의 5배이므로 신생아 수도 약 5배인 1만 5,000명으로 추산했다. 따라서 나는 해마다 26%인 3,900명의 죽음을 막아야 할 책임이 있었고, 그중 52명이 병원에서 죽었다. 내가 맡은 아이들 중 고작 1.3%의 죽음을 직접 지켜보는 셈이다.

 이는 내 육감을 뒷받침하는 수치였다. 설사, 폐렴, 말라리아를 초기에 치료해 생명을 위협하는 수준으로 발전하지 않도록 공동체 기반의 기초 의료를 조직, 지원, 감독한다면 죽음에 임박해 병원을 찾아온 아이에게 정맥주사를 놓을 때보다 더 많은 목숨을 살릴 수 있을 것이다. 나는 인구 다수가 기본 의료 혜택을 받지 못하는 상황에서, 그리고 죽어가는 아이의 98.7%가 병원에 와보지도 못하는 상황에서 병원에 더 많은 자원을 쏟는 건 정말로 비윤리적이라고 생각했다.

 그래서 우리는 마을 의료 인력을 훈련해 최대한 많은 아이에게 예방접종을 하고, (아이들의 목숨을 위협하는 것을) 엄마가 걸어서도 쉽게 갈 수 있는 소규모 의료 시설에서 가급적 초기에 처리하도록 했다.

 눈앞에서 죽어가는 아이들을 외면한 채 보이지 않는 곳에서 죽어가는 익명의 아이들 수백 명에게 주목한다면 언뜻 비인간적으로 느낄 수 있다. 하지만 그것이 극빈층 국가에서의 냉정한 계산법이다.

 콩고와 탄자니아에서 선교하며 간호사로 일하다 내 멘토가 된 잉에게르드 로트Ingegerd Rooth의 말이 생각난다. 로트는 내게 항상 이렇게 말했다. "찢어지게 가난한 상황에서 무엇이든 완벽하게 하려 하면 안 돼요. 그러면 더 좋은 곳에 쓸 자원을 훔치는 꼴이니까요."

 수치보다 눈에 보이는 피해자 개개인에게 지나치게 주목하면 우리 자원을 문제의 일부에만 모두 쏟아부을 수 있고, 따라서 훨씬 적은 목숨을 구할 뿐이다. 이런 원칙은 부족한 자원을 어디에 쓸지 우선순위를 정해야 하는 경우에 모두 해당한다. 목숨을 구하는 문제나 삶을 연장 또는 개선하는 문제를 이야기할 때는 자원을 두고 이러쿵저러쿵하기가 쉽지 않다. 그러면 매정한 사람처럼 보이기 십상이다. 하지만 자원이 무한하지 않은 한(자원은 절대 무한하지 않다) 머리를 써서 지금 있는 것으로 가장 좋은 일을 하는 게 오히려 가장 인간적이다.

 5장은 죽은 아이들과 관련한 데이터로 가득하다. 아이들 목숨을 살리는 것이 이 세상에서 내가 가장 관심을 갖는 일이기 때문이다. 죽은 아이의 수를 세고, 아이의 죽음과 비용 효과를 한 문장에서 동시에 언급하는 것이 매정하고 잔인해 보인다는 것은 나도 안다. 하지만 가만히 생각해보면 최대한 많은 아이의 목숨을 살릴, 비용 효과가 가장 뛰어난 방법을 찾는 것이 가장 덜 매정한 행위다.

 내가 앞에서 통계 이면에 있는 개별 이야기를 보라고 다그쳤듯, 이번에는 개별 이야기 이면에 있는 통계를 보라고 다그쳐야 겠다. 수치 없이는 세계를 이해할 수 없으며, 수치만으로 세계를 이해할 수도 없다.

 

p184

 1, 2단계(1일 소득수준으로 나눈 단계, 1단계 1달러 이하, 2단계 4달러, 3단계 16달러, 4단계 32달러 이상) 나라에서 아이들의 목숨을 살리는 것은 의사나 병실 침대가 아니다. 병실 침대와 의사의 수를 세기 쉽고 정치인은 병원 개원식을 부척 좋아하지만, 아이들의 생존율을 높이는 거의 유일한 방법은 병원 밖에서 해당 지역 간호사, 산파 교육받은 부모 등이 예방 조치를 취하는 것이다. 특히 엄마의 역할이 중요하다. 데이터를 보면 세계적으로 아동 생존율 증가의 절반은 엄마들의 탈문맹에서 나왔다. 지금은 아동 생존율이 더 높아졌다. 처음부터 아에 병에 걸리지 않기 때문이다. 훈련받은 산파가 여성의 임신과 출산을 돕고, 간호사는 아기에게 면역력을 심어준다. 아기는 잘 먹고, 부모는 아기를 늘 따뜻하고 청결하게 관리한다. 그리고 아기 주변 사람들은 손을 씻고, 엄마는 약통에 붙은 지시사항을 읽을 줄 알게 되었다. 따라서 1,2단계에서 보건 의료 발전에 돈을 투자한다면 초등학교, 간호 교육, 예방접종에 투자해야 한다. 휘황찬란한 대형 병원은 조금 미뤄도 상관없다.

 

p187. 큰 전쟁

 베트남전쟁은 내 세대로 치면 시리아 내전 정도에 해당한다.

 1972년 크리스마스 이틀 전, 베트남 하노이에 있는 박마이BachMai 병원에 폭탄 7개가 떨어져 환자와 의료진 27명이 목숨을 잃었다. 당시 나는 스웨덴 웁살라에서 의학을 공부하고 있었다. 스웨덴에는 의료 장비와 노란 담요 등이 풍족했다. 그래서 나와 아내는 이런 것들을 수집해 상자에 담아 박마이 병원으로 보내주었다.

 15년 뒤, 나는 스웨덴 원조 프로젝트를 평가하기 위해 베트남에 갔다. 하루는 점심시간에 베트남 동료 의사인 니엠Niem과 밥을 먹으며 그의 과거를 물었다. 그는 폭탄이 떨어질 때 박마이 병원에 있었고, 그 후 세계 각지에서 온 보급품 상자를 뜯는 일을 했다고 한다. 나는 혹시 노란 담요를 기억하느냐고 물었고, 그가 노란 담요의 무늬를 말하자 소름이 돋았다. 순간 우리 둘이 마치 평생의 친구였던 것 같은 느낌까지 들었다.

 그 주말에 나는 니엠한테 베트남전쟁비를 보여달라고 했다. 그가 물었다. "'대미항전' 말하는 거죠?" 나는 그가 '베트남전쟁'이라는 용어를 쓰지 않는다는 걸 알았어야 했다. 니엠은 나를 태우고 도시 중앙에 있는 공원으로 갔다. 거기에 황동 판이 붙은 1m 정도 높이의 돌이 있었다. 나는 농담이겠지 싶었다. 서양에서는 베트남전쟁 반대 시위가 활동가 세대를 하나로 통합하는 역할을 할 정도였다. 내가 담요와 의료 기구를 보낸 것도 거기에 자극 받았기 때문이었다. 이 전쟁에서 150만 명 넘는 베트남인과 5만 8,000명 넘는 미국인이 목숨을 잃었다. 도시가 그런 대재앙을 기억하는 방식이 고작 이런 식이라니! 내가 실망하는 기색을 보이자, 니엠은 나를 차에 태우고 더 큰 비가 있는 곳으로 향했다. 3.5m가 넘는 대리석 비로, 프랑스 식민 통치에서 독립한 것을 기념하는 것이었다. 나는 여전히 시큰둥했다.

 니엠은 내게 비다운 비를 볼 준비가 되었느냐고 물었다. 그리고 나를 태우고 조금 더 가더니 창밖을 가리켰다. 나무 꼭대기 너머로 금색으로 덮인 거대한 돌탑이 보였다. 100m 가까이 되어 보였다. "여기가 전쟁 영웅을 추모하는 곳이에요. 멋지죠?" 베트남이 중국을 상대로 싸운 전쟁을 기리는 비였다.

 중국과의 전쟁은 싸움과 휴전을 반복하며 2,000년 동안 지속되었다. 프랑스가 점령한 기간은 200년이었다. 대미항전은 고작 20년 지속되었다. 비의 크기는 그런 기간을 완벽하게 반영했다. 나는 여러 개의 비를 비교한 뒤에야 비로소 지금 베트남 사람들에게 베트남전쟁은 상대적으로 의미가 작다는 걸 이해할 수 있었다.

 

p190. 결핵과 신종플루

 뉴스가 비율을 왜곡하는 경우는 곰과 도끼만이 아니다.

 1918년 스페인 독감이 발생해 전 세계 인구의 2.7%가 목숨을 잃었다. 백신이 나오지 않은 독감이 발생할 가능성은 지금도 여전히 위협적이어서 모두가 이를 대단히 심각하게 받아들여야 한다. 2009년에는 처음 몇 달 동안 신종플루로 수천 명이 사망했다. 2주일에 걸쳐 그 소식이 뉴스를 도배했다. 그러나 2014년의 에볼라와 달리 신종플루 사망자는 2배로 증가하지 않았다. 심지어 직선으로 진행되지도 않았다. 나를 비롯한 많은 사람이 신종플루는 처음 경고가 나왔을 때만큼 공격적이진 않다고 결론 내렸다. 하지만 언론은 여러 주 동안 공포심을 계속 자극했다.

 마침내 나는 이런 언론의 히스테리에 신물이 나서 뉴스 보도와 실제 사망자 비율을 계산해보았다. 2주일 동안 신종플루로 사망한 사람은 31명, 구글에서 검색한 관련 기사는 25만 3,442건이었다. 사망자 1명당 기사가 8,176건인 셈이다. 같은 2주일 동안 결핵 사망자는 대략 6만 3,066명이었다. 거의 대부분이 1, 2단계에 사는 사람들이었다. 지금은 얼마든지 치료 가능한 이 병이 1,2단계 나라에서는 여전히 주요한 사망 원인이다. 하지만 결핵은 전염성이 있고 결핵 균주는 약제에 내성이 생길 수 있어, 4단계 사람도 많이 죽을 수 있다. 그런 결핵을 다룬 뉴스는 사망자 1인당 0.1건이었다. 신종플루 사망자가 결핵으로 똑같이 비극적 죽음을 맞은 사람보다 8만 2,000배나 많은 주목을 받은 셈이다.

 

6장. 일반화 본능(Generalization Instinct)

 

p211

 임신하면 대략 2년 정도는 생리를 하지 않는다. 생리대 제조업자에게는 우울한 뉴스다. 따라서 이들은 세계적으로 여성 1인당 출생아 수가 떨어지고 있다는 사실을 알고, 기뻐해야 한다. 집 밖에서 일하는, 교육받은 여성이 늘고 있다는 소식도 마찬가지다. 이런 발전은 현재 2,3단계에 살면서 생리를 하는 여성 수십억 인구 사이에서 지난 여러 해 동안 생리대 시장이 폭발적으로 늘어나는 계기가 되었다.

 그런데 세계적 생리대 제조업체에서 개최한 국제회의에 참석한 나는 서양 제조업체 대부분이 이런 점을 완전히 놓치고 있다는 걸 알았다. 이들은 4단계에서 생리를 하는 여성 3억 명에만 매몰된 채 거기서 새로운 욕구와 새로운 고객을 찾으려 했다. "비키니를 입을 때 사용하는 더 얇은 패드를 내놓으면 어떨가? 라이크라 스판을 입을 때 사용하는 보이지 않는 패드는? 복장마다, 상황마다, 스포츠마다 각각의 경우에 맞는 패드를 만들면 어떨까? 등산용 특수 패드도 좋지!" 모두 패드가 워낙 작아서 하루에도 몇번씩 갈아야 한다면 제조업체에는 이상적일 것이다. 그러나 부유한 소비자 시장이 대부분 그렇듯 기본 욕구는 진작 충족되었고, 생산자는 가뜩이나 작은 분야에서 새로운 수요를 만드느라 헛된 싸움을 할 뿐이다.

 반면 2,3단계에서는 생리를 하는 약 20억의 여성이 생리대를 선택할 여지가 거의 없다. 이들은 라이크라 스판을 입지 않으며, 울트라 슬림 패드에 돈을 쓰지도 않는다. 이들은 밖에서 일할 때 하루 종일 갈지 않고 쓸 수 있는, 믿을 만하고 값싼 패드를 원한다. 그런 제품을 찾을 수 있다면 아마도 평생 한 가지 상표만 고집하면서 딸에게도 같은 상품을 추천할 것이다.

 이런 논리는 다른 많은 소비재에 두루 적용할 수 있다. 나는 업계 지도자를 상대로 수백 회 강연을 하면서 이러한 점을 누차 강조했다. 세계 인구 다수에서 삶의 단계가 천천히 올라가고 있다. 3단계에 사는 사람은 현재 20억에서 2040년에는 40억까지 늘것이다. 세계 거의 모든 사람이 소비자가 되고 있다. 세계 인구 대다수가 물건을 전혀 살 수 없을 정도로 여전히 가난하다고 오해하는 사람은 세계 역사상 가장 큰 경제적 기회를 놓친 채 유럽 대도시에 사는 부유한 힙스터에게 특수 '요가' 생리대를 파는 데 마케팅 비용을 쓸 것이다. 사업 계획을 전략적으로 세우는 사람이라면 사실에 근거한 세계관을 바탕으로 미래의 고객을 찾아야 한다.

 

p215

 한번은 한 여학생이 2단계 삶을 제대로 이해하지 못해 큰 대가를 치를 뻔한 적이 있다. 인도 케랄라주에 있는 8층짜리 멋진 현대식 사립 병원을 찾아갔을 때의 일이다. 우리는 복도에서 아직 오지 않은 학생을 기다렸다. 15분이 지나도 오지 않아 우리끼리 움직이기로 하고 복도를 따라 내려가 대형 승강기를 탔다. 병원 침대가 여러 개 들어갈 정도로 매우 큰 승강기였다. 이번 행사를 주최한 집중치료실 실장이 6층 버튼을 눌렀다. 문히 닫히는 순간, 금발의 젊은 스웨덴 학생이 병원 복도로 뛰어오는 모습이 보였다. "뛰어, 뛰어!" 그 모습을 본 학생의 친구가 소리치며 발을 내밀어 승강기 문을 멈추려 했다. 순식간에 일어난 일이었다. 승강기 문은 여학생의 발을 조이며 계속 닫혔다. 학생은 고통과 공포에 비명을 질렀다. 승강기는 천천히 올라가기 시작했다. 학생은 더 크게 비명을 질렀다. 이러다가는 다리가 부러지겠다 싶을 때, 우리를 안내하던 실장이 뒤쪽에서 튀어나와 빨간색 비상 정지 버튼을 눌렀다. 그러고는 내게 화난 말투로 도와달라고 했다. 우리는 문을 강제로 열어 피가 흐르는 학생의 다리를 빼냈다.

 나중에 그 실장이 내게 말했다. "살다 살다 이런 일은 처음 봐요. 어떻게 그런 바보 같은 학생이 의과대학에 있을 수 있죠?" 나는 스웨덴 승강기에는 자동 감지 장치가 있어 문 사이에 무언가가 끼면 닫히던 문이 저절로 다시 열린다고 설명했다. 인도 의사는 의심스러운 눈으로 말했다. "그런 고도의 기술이 매 순간 작동할 거라고 어떻게 확신하죠?" "그냥 늘 작동해요. 엄격한 안전 규칙이 있고, 정기적으로 점검하니까 잘 작동하겠죠." 좀 어리석은 대답 같았다. 실장은 확신하지 못하는 눈치였다. "흠, 그렇다면 스웨덴이 워낙 안전해서 해외로 나가면 위험하겠군요."

 나는 그 여학생이 그렇게 바보는 아니라고 장담할 수 있다. 어리석게도 4단계 나라에서 승강기를 타던 자신의 경험을 다른 모든 나라 승강기에 일반화했을 뿐이다.

 

7. 운명 본능(Destiny Instinct)

 

p248

 여성 1인당 출생아 수가 역사상 가장 빠르게 감소한 현상은 자유로운 서양 언론에서는 전혀 보도되지 않았다. 이란은 1990년대에 세계 최대 규모의 콘돔 공장이 들어섰고, 신부와 신랑 모두에게 혼전 성교육을 의무화한 나라다. 국민의 교육 수준도 높고, 발전한 공공 의료 시설도 쉽게 이용할 수 있다. 부부는 피임으로 자녀 수를 적게 유지하고, 임신이 어려우면 불임 치료 전문 병원을 찾는다. 적어도 내가 1990년에 테헤란의 한 병원에 가봤을 때는 그랬다. 그때 우리를 안내한 사람은 이란의 가족계획 기적을 설계한 열정적인 호세인 말레크아프잘리 Hossein Malek-Afzali 교수였다.

 오늘날 이란 여성은 미국이나 스웨덴 여성보다 아이를 더 적게 낳으려 한다고 생각하는 서양인이 과연 얼마나 될까? 서양인의 언론의 자유를 너무나 사랑한 나머지, 언론의 자유를 보장하지 않는 정권이 들어선 나라의 발전에는 눈길을 주지 않는 걸까? 적어도 자유로운 언론이라고 해서 세계에서 가장 빠른 문화적 변화를 보도하리라는 보장은 없다는 것만큼은 분명하다.

 거의 모든 종교가 전통적으로 성생활에 관한 규범이 있다. 그러다 보니 많은 사람이 특정 종교를 믿는 여성은 아이를 더 많이 출산하다고 생각하는 것도 쉽게 이해는 간다. 그러나 종교와 여성 1인당 출생아 수의 관계는 곧잘 과장된다. 사실은 소득과 여성 1인당 출생아 수가 훨씬 관계가 깊다.

 

p250

 그렇다면 오늘날은 어떨까? 다음의 물방울 도표는 종교에 따라 세계를 기독교, 이슬람교, 그 밖의 종교로 나눈 것이다. 그런 다음 각 종교에 따라 여성 1인당 출생아 수와 소득을 표시했다. 이번에도 물방울 크기는 인구를 나타낸다. 기독교 인구가 모든 소득수준에 얼마나 고루 퍼져 있는지 보라. 또 1단계 기독교 인구가 아이를 얼마나 많이 낳는지 보라. 그리고 나머지 도표2개를 보라. 유형이 매우 비슷하다. 한마디로 종교에 관계없이 1단계 극빈층 여성이 아이를 많이 낳는다.

 

소득수준 및 종교에 따른 출생아 수

(설명)이 그림은 책의 도표가 종교별로 3개의 그래프로 나뉜 것을 gapminder에 들어가서 한개의 그래프로 통합한 그래프로 대체했다. 물방울이 파란색이 기독교, 녹색이 무슬림, 빨간색이 기타(인도, 중국, 일본등이 포함된 eastern religion, 불교, 유교, 도교등의 동양적 종교 모두를 의미) 종교이다. 

위 그래프는 하기 주소에서 볼 수 있다.

https://www.gapminder.org/tools/#$state$marker$axis_x$domainMin:null&domainMax:null&zoomedMin:null&zoomedMax:null&scaleType=genericLog&spaceRef:null;&axis_y$which=children_per_woman_total_fertility&domainMin:null&domainMax:null&zoomedMin:null&zoomedMax:null&spaceRef:null;&color$data=data_fasttrack&which=main_religion_2008&spaceRef=entities;;;&chart-type=bubbles

 

Gapminder Tools

Animated global statistics that everyone can understand

www.gapminder.org

 

오늘날 이슬람 사회 여성은 아이를 평균 3.1명 낳고, 기독교 사회는 2.7명 낳는다. 세계의 주요 종교별 출생률 차이는 그리 크지 않다.

 

p252

 오늘날 스웨덴 사람은 거의 다 여성의 낙태 권리를 지지한다. 일반적으로 여성의 권리를 적극 옹호하는 것이 이제 우리 문화가 됐다. 내가 지금과는 확연히 다른 1960년대의 학창 시절을 이야기하면 학생들은 입을 딱 벌린다. 그때까지도 낙태는 아주 예외적인 상황 말고는 여전히 불법이었다. 그래서 대학에서는 비밀자금을 모아 임신한 여학생들을 외국으로 보내 무사히 낙태 수술을 받도록 했다. 내가 그 여학생들이 찾아간 곳은 다른 아닌 폴란드라고 말하면 학생들의 입은 더 크게 벌어진다. 폴란드라니? 폴란드는 기독교 국가 아닌가. 그리고 5년이 지나 폴란드는 낙태를 금지하고, 스웨덴은 낙태를 합법화했다. 그러자 젊은 여성들이 정반대로 이도했다. 요컨대 지금 상황이 늘 그랬던 것은 아니라는 이야기다. 문화는 변한다.

 나는 아시아를 여행할 때면 늘 구스타브 할아버지 같은 완고한 노인의 가치와 마주한다. 한 예로, 한국과 일본에서는 많은 여성이 자녀 돌보는 일을 전적으로 책임질 뿐 아니라 시부모도 부양한다. 이런 상황을 자랑스러워하는 남자도 많이 만났다. 그들은 이것을 '아시아의 가치'라고 했다. 하지만 달리 생각하는 많은 여성과도 대화를 나누었다. 그들은 이런 문화를 참을 수 없어 하고, 그런 가치 때문에 결혼에 대한 관심이 줄었다고 말한다.

 

남편 상상하기.

 홍콩에서 열린 금융 콘퍼런스에 참석했을 때 일이다. 저녁 만찬 때 젊고 똑똑한 전문 금융인 옆자리에 않게 되었다. 37세의 꽤 성공한 여성으로, 식사를 하면서 아시아의 현재 이슈와 추세에 관해 내게 많은 것을 얘기해주었다. 얼마 후 우리는 사적인 삶에 대해서도 이야기를 나누기 시작했다. "가족을 꾸릴 계획이신가요?" 내가 물었다. 무례하게 행동할 뜻은 없었다. 우리 스웨덴 사람은 (요즘) 그런 주제를 즐겨 이야기한다. 그리고 이 여성도 내 솔직한 질문을 문제 삼지 않았다. 여성은 웃음 띤 채 내 어깨 너머로 바닷가의 지는 해를 바라보며 말했다. "아이가 있으면 어떨까 날마다 생각해요." 그리고 내 눈을 똑바로 보더니 말을 이었다. "그런데 남편을 상상하면 참을 수가 없어요."

 

나는 그런 여성들을 위로하면서 앞으로 달라질 거라는 확신을 주려고 애쓴다. 최근에는 방글라데시 아시아 여성대학 Asian University for Women에서 젊은 여성 400명에게 강연을 한 적이 있다. 당시 나는 문화가 어떻게 그리고 왜 항상 탈바꿈하는지, 극빈층 탈출과 여성 교육 그리고 피임이 어떻게 잠자리 대화는 늘리고 자녀 수는 줄였는지 이야기했다. 매우 가슴 벅찬 강의였다. 색색의 히잡을 쓴 젊은 여성들이 얼굴에 환한 미소를 지었다.

 강의가 끝나자 아프가니스탄 학생들은 내게 자기 나라 이야기를 들려주고 싶어 했다. 그들은 그런 변화가 아프가니스탄에도 이미 천천히 나타나기 시작했다면서 이렇게 말했다. "전쟁도 문제고 빈곤도 문제지만, 우리 같은 많은 젊은이가 현대적 삶을 계획하고 있어요. 우리는 아프가니스탄 사람이고, 이슬람 여성이에요. 그리고 교수님이 말씀하신 그런 남자를 만나고 싶어요. 우리 말에 귀 기울이고 함께 계획을 세우는 남자 말이에요. 아이는 둘만 낳아서 모두 학교에 보내고 싶고요."

 오늘날 아시아와 아프리카의 많은 나라에서 나타나는 마초적 가치는 아시아의 가치도, 아프리카의 가치도 아니며 이슬람의 가치도 아니고, 동양의 가치도 아니다. 스웨덴에서 60년 전에나 볼 수 있었던 가부장적 가치이며, 스웨덴에서 그랬듯 사회와 경제가 발전하면서 사라질 가치다. 불변의 가치가 결코 아니다.

 

 p255

 사회와 문화는 끊임없이 움직인다. 사소하고 더뎌 보이는 변화라도 시간이 지나면서 계속 축적된다. 연간 1% 성장은 더뎌 보이지만 70년간 축적되면 2배 성장이 되고, 연간 2% 성장은 35년 뒤 2배 성장이 되며, 연간 3% 성장은 24년 뒤 2배 성장이 된다.

 기원전 3세기에 스리랑카의 데바남피야 티샤 Devanampiya Tissa 왕은 세계 최초로 자연보호구역을 공식적으로 지정했다. 그리고 2,000년이 지난 후 웨스트요크셔의 유럽인이 이와 비슷한 생각을 떠올렸고, 그로부터 다시 50년이 지난 후에 미국에 옐로스톤 국립공원이 생겼다. 그리고 1900년에는 지표면의 0.03%가 보호구역이 되었고, 1930년에는 그 수요가 0.2%로 늘었다. 천천히, 천천히 10년이 지나고 또 10년이 지나면서 한 번에 숲 한 곳씩 보호구역이 늘었다. 연간 증가율은 너무 작아서 거의 감지하지 못할 정도다. 하지만 오늘날에는 지표면의 무려 15%가 보호구역이고, 그 수치는 꾸준히 늘고 있다. 

운명 본능을 억제하려면 더딘 변화를 불변과 혼동해서는 안된다. 연간 변화가 1%에 그쳐도, 너무 적고 느리다는 이유로 무시해서는 절대 안된다.

 

p258. 내게는 어떤 비전도 없다

 앞에서 잘 차려입은 무지한 남성 이야기로 7장을 시작했다. 아프리카의 가능성을 내다보는 비전이 부족했던 남성이다. 이제 비슷한 이야기로 7장을 마무리하려 한다. 

 2013년 5월 12일, 나는 '2063년의 아프리카 르네상스와 어젠다'라는 제목의 아프리카연합African Union 학술회의 때 아프리카 대륙 곳곳에서 모인 여성 지도자 500명 앞에서 강연하는 특권을 누렸다. 대단한 영광이었고, 굉장한 설렘이었으며, 내 인생 최고의 강연이었다. 아디스아바바 Addis Ababa에 있는 아프리카연합 본부의 플리너리 홀Plenary Hall에서 나는 30분 동안 소규모 여성 농업인에 관해 수십 년간 진행한 연구를 요약해 말했으며, 아프리카에서 어떻게 20년 안에 극빈층이 사라질 수 있는지를 이 막강한 의사 결정자들에게 설명했다.

 아프리카연합의 사무국장 은코사자나 들라미니주마Nkosazana Dlamini-Zuma가 강단 바로 앞자리에 앉아 있었는데, 내 말을 꽤나 경청하는 듯싶었다. 강연이 끝나자 그는 내게 다가와 감사를 표시했다. 나는 강연이 어땠냐고 물었는데, 그의 대답은 가히 충격이었다.

 "글쎄요, 도표도 훌륭하고 말씀도 잘하시는데, 아무런 비전이 없네요." 자상한 목소리로 그렇게 말하는 게 나한테는 더욱 충격이었다.

 "네? 비전이 부족해요? 아프리카 극빈층이 앞으로 20년 안에 역사 속으로 사라질 거라고 말했는데요?" 나는 기분이 상해 되물었다.

 은코사자나는 어떤 감정이나 동작도 섞지 않은 채 낮은 목소리로 말했다. "맞아요, 극빈층이 사라질 거라고 말했어요. 그게 시작이었고, 거기서 끝났죠. 아프리카 사람들이 극빈층이 사라지는 걸로 만족하면서 적당히 가난하게 사는 정도로 행복해할 거라고 생각하세요?" 그러곤 내 팔을 힘주어 잡고 나를 바라보았다. 화를 내지도 않고, 웃음기도 없었다. 내 단점을 깨닫게 해주겠다는 강한 의지가 엿보였다. 은코사자나는 내 눈을 똑바로 보며 말을 이었다. "강연을 마무리하면서, 교수님 손주들이 우리가 건설할 새로운 고속열차를 타고 아프리카를 여행했으면 좋겠다고 말씀하셨어요. 그게 어떤 비전인가요? 유럽의 낡은 비전과 뭐가 다르죠? '우리' 손주들도 '교수님' 대륙에 가서 '교수님 나라의' 고속열차를 타고 여행하며, 스웨덴 북쪽에 있다는 이국적인 얼음 호텔에 갈겁니다. 물론 오래 걸리겠죠, 아시다시피. 현명한 결단도, 대규모 투자로 많이 필요할 거고요. 하지만 내 50년 비전으로는 아프리카 사람들이 유럽에서, 원치 않는 난민이 아니라 관광객으로 환영받을 겁니다." 은코사자나는 그제야 활짝 웃었다.

 "그래도 도표는 정말 멋졌어요. 자, 가서 커피나 한잔합시다."

 나는 커피를 마시면서 내 실수를 가만히 되새겨보았다. 33년 전 내 첫 아프리카 친구인 모잠비크의 광산 기술자 니헤레와 마셀리나 Niherewa Maselina 와 나눈 대화가 기억났다. 그도 은코사자나와 똑같은 표정으로 나를 쳐다봤다. 그때 나는 모잠비크 나칼라에서 의사로 일했는데, 하루는 니헤레와 함께 해변으로 가족 나들이를 갔었다. 모잠비크 해안은 믿기 어려울 만큼 아름다웠고, 아직 개발되지 않아 주말에 가면 거의 우리밖에 없었다. 그러다가 한번은 1.5km 모래 해변에 15~20가족이 있는 것을 보고 내가 말했다. "오늘은 웬 사람이 이렇게 많아." 그때 니헤레와가 은코사자나처럼 내 팔을 꽉 잡으며 말했다. "한스, 난 정반대 느낌이 들어. 나는 이 해변을 보면 정말 괴롭고 서글퍼. 저기 멀리 있는 도시를 봐. 저곳에 80만 명이 살아. 아이가 4만 명이라는 얘기지. 오늘은 주말이야. 그런데 겨우 40명이 이곳에 왔잖아. 1,000분의 1이야. 내가 동독에서 채굴 교육을 받을 때 주말이면 로스토크Rostock 해변에 가곤 했는데, 사람들로 가득 찼었어. 아이들 수천 명이 재미있게 놀더라고. 나칼라도 로스토크 같으면 좋겠어. 일요일에는 아이들이 들판에서 부모를 도와 일하거나, 슬럼에 앉아 있지 말고 모두 해변으로 나왔으면 좋겠어. 그러려면 오랜 세월이 걸리겠지만, 그게 내 소원이야." 그러고는 내 팔을 놓고 자동차에서 우리 아이들의 수영 장비를 내려주었다.

 그리고 33년이 지난 지금, 아프리카의 학자 및 단체와 일생일대의 공동 연구를 마친 뒤 아프리카 연합에서 강연을 하면서, 내가 그들의 위대한 비전을 공유한다고 철석같이 믿었다. 아프리카의 가능성을 알아본 몇 안 되는 유럽인이라고도 생각했다. 그런데 내 일생에서 가장 소중한 강연을 한 후, 내가 여전히 낡고 정적인 식민지적 사고방식에 갇혀 있다는 걸 깨달았다. 아프리카 친구와 동료들이 여러 해 동안 가르쳐줬는데도 나는 여전히 '그들'이 '우리'를 언젠가는 따라잡으리라고 상상하지 못했다. 나는 여전히 모든 사람, 모든 가족, 모든 아이가 그 목표를 성취하려고 안간힘을 쓰다 보면 언젠가는 해변 나들이를 갈 수 있으리라는 것을 여전히 확신하지 못했다.

 

 

8장. 단일 관점 본능(Single Perspective Instinct)

 

p285. 민주주의도 단일한 해결책이 못된다

 조금 위험하더라도 이 말은 꼭 해야겠다. 나는 자유민주주의가 국가를 운영하는 최선의 길이라고 굳게 믿는다. 나를 비롯해 그렇게 믿는 사람은 민주주의에서 평화, 사회 발전, 보건 의료 발전, 경제성장 같은 좋은 것이 나오고, 심지어 그런 것이 존재하기 위한 필요조건이라고 주장하고 싶은 마음이 굴뚝같다. 하지만 인정하기 어려운 분명한 사실 한 가지가 있다. 증거를 보면 꼭 그렇지만도 않다는 것이다.

 경제와 사회가 크게 발전한 나라라고 해서 다 민주국가는 아니다. (산유국도 아닌) 한국은 어느 나라보다 빨리 1단게에서 3단계로 넘어갔고, 그 시기는 줄곧 군부 독재가 이어졌다. 2012~2016년에 빠른 경제성장을 이룬 나라 열 곳 중 아홉 곳은 민주주의 수준이 낮았따.

 경제성장과 보건 의료 발전에 민주주의가 반드시 필요하다고 주장한다면, 그와 모순되는 현실에 부딛히기 쉽다. 따라서 우리가 좋아하는 다른 어떤 목적을 달성하는 데 민주주의가 우월한 수단이라고 주장하기보다 민주주의 자체를 목적으로 지지하는 편이 더 바람직하다.

 다른 모든 발전을 가늠하는 단 하나의 척도는 없다. 1인당 GDP도, (쿠바에서처럼) 아동 사망률도, (미국에서처럼) 개인의 자유도, 심지어 민주주의도 단일한 척도가 될 수 없다. 한 국가의 발전을 측정하는 단일한 척도는 없다. 현실은 그렇게 단순하지 않다.

 세계는 수치 없이 이해할 수도, 수치만으로 이해할 수도 없다. 국가는 정부 없이 제 기능을 수행할 수 없지만, 정부가 모든 문제를 해결할 수도 없다. 공공 부문도, 민간 부문도 늘 정답일 수는 없다. 좋은 사회에서 나온 척도라도 단일 척도가 모든 사회 발전을 이끌 수는 없다. 이것 또는 저것을 아주 택할 게 아니라, 사안에 따라 이것과 저것을 두루 택해야 한다.

 

9장. 비난 본능(Blame Instinct)

 

p295

 세계의 중요한 문제를 이해하려면 개인에게 죄를 추궁하기보다 시스템에 주목해야 할 때가 많다.

 비난 본능은 일이 잘 풀릴 때도 발동되어 칭찬 역시 비난만큼이나 쉽게 나온다. 일이 잘 풀릴 때 우리는 아주 쉽게 그 공을 개인이나 단순한 원인으로 돌리는데, 이때도 대개는 문제가 훨씬 복잡하다.

 세계를 정말로 바꾸고 싶다면, 세계를 이해해야지 비난 본능에 좌우돼서는 안된다.

 

p298. 언론인

 지식인과 정치인 사이에서는 언론을 손가락질하며 진실을 보도하지 않는다고 비난하는 게 유행이다. 어쩌면 나도 이 책 앞부분에서 그랬을지 모른다.

 우리는 언론인을 손가락질하기보다 이런 질문을 던져야 한다. 언론은 세상을 왜 그렇게 왜곡해 보여주는 걸까? 의도적일까, 아니면 다른 이유가 있는 걸까?

 (의도적으로 만들어낸 가짜 뉴스는 논의하지 않겠다. 그것은 전혀 다른 문제이며, 저널리즘과도 아무런 관계가 없다. 그리고 나는 가짜 뉴스가 우리 세계관을 왜곡하는 주범이라고는 생각하지 않는다. 우리는 세계를 단지 오해하기 시작한 게 아니라 항상 오해하고 있었다는 게 내 생각이다.)

 우리는 2013년 갭마인더 무지 프로젝트 Gapminder's Ignorance Project의 결과를 인터넷에 올렸다. 두 방송사는 우리가 제시한 문제를 자사 사이트에 올려 사람들이 직접 풀어보게 했는데, 살마들의 정답률이 눈 감고 찍은 것보다도 못한 이유를 분석한 수천 개의 짧은 글이 올라왔다.

 그중 우리 주의를 사로잡은 글 하나는 이랬다. "언론 종사자 중 이 테스트를 통과한 사람은 한 명도 없을 거라고 장담한다."

 우리는 이 생각이 퍽 흥미로워 정말 그런지 알아보려 했지만, 여론조사 회사들은 언론인을 집단적으로 접촉하는 게 불가능하다고 했다. 언론사 경영주들이 허락하지 않았다. 물론 이해는 간다. 자신의 권위를 의심받는 게 달가울 사람은 없다. 진지한 뉴스 방송사가 침팬지보다 지식수준이 나을 게 없는 언론인을 고용했다고 알려지면 몹시 당혹스럽지 않겠는가.

 나는 어떤 일이 불가능하다는 말을 들으면 그걸 해보고 싶은 충동이 샘솟는다. 그해 일정에 언론 학술회의가 두 번 잡혀 있었는데, 그때 설문 조사 장비를 챙겨 갔다. 20분이라는 강연 시간은 준비한 질문을 다 던지기에 턱없이 짧았지만, 몇 가지는 물을 수 있었다. 여기에 그 결과를 소개한다. BBC, PBS, 내셔널지오그래픽, 디즈니 등 주요 다큐멘타리 제작자들이 참석한 학술회의에서도 같은 질문을 던졌는데, 그 결과 역시 함께 소개한다.

  

 이들 언론인과 다큐멘터리 제작자는 지식수준이 일반인보다 나을 게 없고, 침팬지보다 못한 것 같았다.

 만약 언론인과 다큐멘터리 제작자가 전반적으로 이런 수준이라면(다른 기자들은 이들보다 지식수준이 높다거나, 이들에게 다른 문제를 냈더라면 더 나은 결과가 나왔으리라고 믿을 만한 이유가 없다) 이들에겐 죄가 없다. 언론인과 다큐멘터리 제작자가 세계를 극적으로 가르거나 '자연의 역습 또는 '인구 위기'라는 식으로 극적인 보도를 하면서 안타까운 피아노 음악을 배경 삼아 심각한 목소리로 이야기할 때, 그들이 거짓말을 하며 우리를 의도적으로 호도하는 것은 아니다. 나쁜 의도가 아니라면 그들을 비난하는 것은 무의미하다. 세계에 관한 정보를 전달하는 대부분의 언론인과 다큐멘터리 제작자도 사실은 세계를 오해하고 있기 때문이다. 언론인을 악마화하지 마라. 그들도 다른 사람들처럼 세계를 크게 오해하고 있을 뿐이다.

 우리 언론은 자유롭고 전문적이며 진실을 추구하겠지만, 언론의 독립성과 그들이 보도하는 사건의 대표성은 다르다. 모든 보도가 그 자체로는 전적으로 진실이라도 기자가 세상에 알리기로 선택한 진실 이야기를 여럿 모으면 오해할 만한 그림이 나올 수 있다. 언론은 중립적이지도 않고, 중립적일 수 없으며, 그걸 기대해서도 안 된다.

 언론인을 대상으로 한 설문 조사 결과는 심각한 재앙이다. 항공기 추락 사고에 견줄 만한 지식수준이다. 하지만 언론인을 비난하는 것은 졸았던 기장을 탓하는 것만큼이나 도움이 안 된다. 그보다는 언론인이 세계를 왜곡된 시각으로 바라보는 이유(답  그들도 극적 본능을 지닌 인간이라서)와 언론 시스템의 어떤 요소가 그들로 하여금 왜곡되고 과도하게 극적인 뉴스를 내보내게 하는지(부분적인 답  소비자의 주의를 사로잡는 경쟁을 해야 하고, 직장을 잃지 말아야 해서) 이해하려고 노력해야 한다.

 이런 것들을 이해한다면 언론을 향해 현실을 제대로 반영한 정보를 제공하도록 이런저런 식으로 변하라고 요구하는 게 대단히 비현실적이고 불공정하다는 걸 알 수 있다. 현실 반영은 언론에 기대할 만한 것이 못 된다. 언론이 사실에 근거해 세계를 보여주길 기대하지 말고, 차라리 베를린의 휴일을 찍은 사진 여러 장을 GPS 삼아 그 도시를 둘러보는 편이 합리적이라고 생각하는게 좋다.

 

p302. 난민

 2015년 난민 4,000명이 고무보트를 타고 유럽으로 가려다 지중해에서 익사했다. 휴양지 해변에 떠밀려온 죽은 아이들 모습은 공포와 연민을 불러일으켰다. 이런 비극이 또 어디 있겠는가. 유럽 등지에서 4단계의 안락한 삶을 즐기던 우리는 생각에 잠겼다. 어떻게 저런 일이 벌어질 수 있는가? 누굴 비난해야 하나?

 우리는 곧 비난 대상을 찾아냈다. 절박한 가족을 속여 1인당 1,000유로를 받고 사람들을 죽음의 고무보트에 태운 잔인하고 탐욕스루언 밀입국 알선자들이 죽일 놈이다. 우리는 여기서 생각을 멈추고, 거친 물살에서 사람들을 구해내는 유럽 구조선의 모습을 보며 안도한다.

 그런데 난민은 편안한 비행기나 여객선을 타지 않고 왜 육지로 리비아나 터키로 가서 다시 저런 부실한 고무보트에 목숨을 맡기는 걸까? 유럽연합 회원국은 모두 제네바 협약에 서명한 터라 전쟁으로 피폐해진 시리아 난민에게 망명 자격을 부여할 의무가 있다. 나는 언론인과 지인에게 그리고 난민 신청 접수와 관련한 일을 하는 사람에게 이에 대해 물었지만, 가장 현명하고 자상한 사람조차 매우 이상한 해명을 내놓았다.

 비행기표를 살 돈이 없어서? 다들 알다시피 난민은 소형 고무보트의 한 자리를 얻으려고 1,000유로를 지불했다. 인터넷을 검색해보니 터키에서 스웨덴, 리비아에서 런던으로 가는 항공권은 50유로 미만으로 나온 게 많았다.

 그렇다면 공항까지 갈 수 없어서? 그렇지 않다. 그중 다수가 이미 터키나 레바논까지 왔으니 그곳 공항을 가기는 쉬웠다. 항공권을 살 형평도 되고, 자리가 없는 것도 아니다. 하지만 탑승 수속 카운터에서 항공사 직원에게 제지당해 비행기를 타지 못한다. 왜 그럴까? 유럽연합 회원국이 불법 이민에 대처하는 규정을 정해놓은 2001년 유럽 이사회 지침 European Council Directive 때문이다. 이 지침에 따르면, 적절한 서류를 갖추지 않은 사람을 유럽으로 들여보내는 모든 항공사와 선박 회사는 그 사람을 본국으로 송환하는 비용을 모두 지불해야 한다. 물론 제네바 협약에 따라 망명 자격을 갖추고 유럽으로 들어오려는 난민에게는 그 조항을 적용하지 않는다. 오직 불법 이민자에게만 적용한다고 명시되어 있다. 하지만 이는 큰 의미가 없다. 탑승 수속 카운터에서 항공사 직원이 45초 만에 제네바 협약에서 인정하는 난민인지 아닌지를 어떻게 가려낼 수 있겠는가? 대사관에서 최소 8개월이 걸리는 일이 아닌가? 그렇다면 불가능하다. 따라서 그 지침은 언뜻 합리적으로 들리지만, 현실에서는 비자 없는 사람은 절대 탑승시키지 않는다. 그리고 이들이 비자를 얻는 것은 거의 불가능하다. 터키와 리비아에 있는 유럽 대사관은 비자 신청을 처리할 자료나 근거가 없기 때문이다. 사정이 이렇다 보니 시리아 난민은 제네바 협약에 따라 이론적으로는 유럽으로 들어갈 권리가 있지만, 현실적으로는 비행기를 탈 수 없다. 결국 바다를 건널 수밖에 없다.

 그렇다면 왜 그렇게 위험한 배를 타야 할까? 사실 이 역시 유럽연합의 정책과 관련이 있다. 유럽연합에 도착하는 난민의 배는 무조건 압수하게 되어 있다. 따라서 배는 한 번밖에 쓸 수 없다. 결국 밀입국 알선자들은 1943년 유대인 난민 7,220명을 며칠 사이 덴마크에서 스웨덴으로 이동시킨 데 동원한 어선처럼 안전한 배에 난민을 태우고 싶어도 그럴 형편이 못 된다.

 유럽의 여러 정부는 전쟁에 짓밟힌 나라의 난민에게 망명 자격을 신청 및 획득할 자격을 주도록 한 제네바 협약을 존중한다고 주장한다. 그러나 그들의 이민 정책은 그런 주장을 웃음거리로 만들고, 밀입국 알선자가 활동하는 운송 시장을 만들어낸다. 이는 공공연한 비밀이어서 생각이 아주 없지 않는 한 이를 모를리 없다.

 우리는 비난할 사람을 찾는 본능이 있지만, 거울을 들여다보려고는 하지 않는다. 똑똑하고 자상한 사람도 난민 익사 사고는 우리의 이민 정책에 책임이 있다는 죄책감을 유발하는 끔찍한 결론을 내놓지 못하는 일이 흔하다.

 

p305. 외국인

 5장에서 인도와 중국이 기후변화의 주범으로 비난받아야 한다는 주장을 설득력 있게 반박한 인도 관리를 기억하는가? 나는 1인당 수치의 중요성을 강조하려고 그 이야기를 꺼냈지만, 비난 대상을 찾다 보면 전체 시스템에 주목하지 못하는 경우를 보여주는 사례이기도 하다.

 인도와 중국을 비롯해 소득수준이 올라간 국가들은 기후변화에 책임이 있으며, 그 나라 사람들은 기후변화 문제를 해결하기 위해 더 빈곤한 삶을 살 수밖에는 없다는 주장이 서양에서는 놀랍게도 기정사실로 받아들여진다. 내가 밴쿠버에 있는 테크대학 Tech University 에서 세계 추세에 관한 강연을 하던 중 한 학생이 절망적인 목소리로 당돌하게 말했다. "그 사람들은 우리처럼 살 수 없어요. 그런 식으로 계속 발전하도록 놔두면 안 돼요. 그렇게 배출하다가는 지구가 죽고 말 거에요." 서양인이 마치 자기 손에 리모컨이 있어 버튼만 누르면 다른 수십 억 인구의 삶을 결정할 수 있다는 식으로 말하는 경우가 얼마나 많은지 정말 기겁할 일이다. 가만히 둘러보니 그 여학생 주변의 학생들은 그 말에 아무런 반응도 보이지 않았다. 다들 같은 생각이었다.

 오늘날 대기에 축적된 이산화탄소 대부분은 현재 4단계 삶을 사는 나라들이 지난 50년간 배출한 것이다. 캐나다의 1인당 이산화탄소 배출량은 중국보다 여전히 2배 많고, 인도보다는 8배 많다. 전 세계 연간 화석연료 사용량 중 가장 부유한 10억 인구가 차지하는 비율이 얼마나 되는지 아는가? 절반이 넘는다. 그리고 두 번째로 부유한 10억 인구가 그 나머지의 절반을 차지한다. 그리고 또 절반, 또 절반으로 이어지면 가장 가난한 10억 인구는 겨우 1%를 차지할 뿐이다.

https://www.gapminder.org/tools/#$state$marker$axis_x$domainMin:null&domainMax:null&zoomedMin:null&zoomedMax:null&spaceRef:null;&axis_y$which=co2_emissions_tonnes_per_person&domainMin:null&domainMax:null&zoomedMin:null&zoomedMax:null&scaleType=genericLog&spaceRef:null;;;&chart-type=bubbles

 

Gapminder Tools

Animated global statistics that everyone can understand

www.gapminder.org

 

위 그래프는 책에 나온것과는 좀 틀린데 이야기하는 바는 동일하다. 연두색의 아메리카 대륙과 노란색의 유럽대륙이 소득수준이 높으며, 소득수준이 높을수록 CO2 배출량이 많다. 즉 선진국일수록 CO2배출로 인한 환경파괴의 책임이 크다.

 

가장 가난한 10억 인구가 1단계에서 2단계로 올라가기까지는 최소 20년이 걸릴 테고, 그동안 전 세계 이산화탄소 배출량에서 이들이 차지하는 비율은 약 2% 증가한다. 그리고 이들이 다시 3단계, 4단계로 올라가는 데는 수십 년이 걸릴 것이다. 

 이런 상황에서 서양인이 자신의 책임을 아주 쉽게 다른 사람에게 떠넘기는 현상은 비난 본능을 보여주는 생생한 증거다. 우리는 '그 사람들'은 우리처럼 살 수 없다고 말한다. 정확히 말하면 "우리는 우리처럼 살 수 없다"가 맞다.

 

외국질병

신체의 가장 큰 기관은 피부다. 현대 의학이 발달하기 전, 상상할 수 있는 최악의 피부병은 매독이었다. 가려운 부스럼으로 시작해 뼈가 드러날 정도로 피부가 썩어 들어가다가 결국 골격이 훤히 드러난다. 이처럼 혐오스러운 모습과 참을 수 없는 고통을 유발하는 질병은 장소에 따라 다른 이름으로 불렸다. 러시아에서는 폴란드 질병, 폴란드에서는 독일 질병, 독일에서는 프랑스 질병, 프랑스에서는 이탈리아 질병이라고 불렀다. 그리고 이탈리아 사람은 비난의 화살을 돌려 프랑스 질병이라고 불렀다.

희생양을 찾으려는 본능은 인간 본성의 핵심이어서, 그 피부병을 스웨덴 사람이 스웨덴 질병이라 부른다거나, 러시아 사람이 러시아 질병이라 부르리라고는 상상하기 쉽지 않다. 인간이 원래 그렇다. 우리에겐 비난할 사람이 필요하고 어떤 외국인 한 명이 그 병을 옮겼다면, 그 외국인이 속한 나라를 주저없이 통째로 비난하곤 한다. 자세한 조사 따위는 필요하지 않다.

 

p311. 사회 기반.

 사회 발전과 경제 발전이 제자리걸음인 국가는 지도자가 대단히 파괴적이고 무력 충돌이 잦은 몇몇 나라뿐이다. 그 밖의 나라에서는 대통령이 아무리 무능해도 사회와 경제가 발전한다. 그렇다면 지도자가 정말 그렇게 중요한지 물어야 한다. 그리고 그 답은 아마도 '아니다'일 것이다. 사회를 꾸려나가는 것은 그 나라 국민인 다수의 사람들이다.

 나는 아침에 세수하려고 수도꼭지를 틀었을 때 마술처럼 따뜻한 물이 나오면, 이런 상황을 가능하게 한 배관공을 소리 없이 칭송할 때가 있다. 그런 기분이 들 때면, 감사해야 할 수많은 사람이 떠올라 종종 가슴이 벅차오른다. 공무원, 간호사, 교사, 변호사, 경찰, 소방관, 전기 기사, 회계사, 안내 데스크에 있는 사람 등등. 모두 사회 기반을 구성하는, 그물처럼 얽힌 서비스를 수행하는 보이지 않는 사람들이며, 일이 잘될 대 우리가 찬양해야 할 사람들이다.

 2014년 에볼라 퇴치를 돕기 위해 라이베리아에 갔었다. 서둘러 손쓰지 않으면 전 세계에 빠르게 퍼져 10억 인구의 목숨을 앗아가고, 이제까지 알려진 그 어떤 유행병보다 심각한 해를 끼칠것으로 우려했기 때문이다. 그런데 치명적인 에볼라 바이러스와의 싸움을 승리로 이끈 주인공은 영웅적 지도자도, 국경 없는 의사회나 유니세프 같은 영웅적 조직도 아니었다. 공무원과 지역보건 의료 종사자들이 나서서 묵묵히 공중 보건 캠페인을 벌여 오랫동안 내려오던 장례 관습을 단 며칠 만에 바꿔놓고 죽어가는 환자를 목숨 걸고 치료하고, 환자와 접촉한 사람들을 모두 찾아내 격리하는 성가시고 위험하고 복잡한 작업을 해냈다. 인내심을 갖고 사회를 움직이는 용감한 사람들, 좀처럼 언급되지 않지만 이 세계의 진정한 구세주들이다.

 

p314. 누구를 비난해야 할까?

 가장 가난한 사람들이 고통받는 질병을 제대로 연구하지 않는 현실과 관련해 비난받아야 할 사람은 사장도, 이사도, 우주도 아니다. 그들을 손가락질해봐야 무슨 이익이 있겠는가?

 마찬가지로 언론이 내게 거짓말을 한다거나(대개는 사실이 아니다), 삐딱한 세계관을 심어준다며(맞는 이야기지만, 대개 고의성은 없다) 매체를 비난할 생각은 버려라. 전문가가 자기들만의 관심과 해당 분야에만 과도하게 초점을 맞춘다거나 상황을 악화시킨다며(그럴 때도 있지만, 대개는 나쁜 의도는 아니다) 그들을 비난할 생각도 버려야 한다. 한마디로, 개인이나 집단을 문제의 원인으로 지목해 비난할 생각을 버려야 한다. 나쁜 사람을 찾아내면 더 이상 고민하지 않는다. 그러나 문제는 거의 항상 그보다 훨씬 복잡하다. 여러 원인이 얽힌 시스템이 문제일 때가 대부분이다. 세계를 정말로 바꾸고 싶다면 누군가의 면상을 갈기겠다는 생각을 버리고, 세계가 어떻게 돌아가는지부터 이해해야 한다.

 

10장. 다급함 본능(Urgency Instinct)

 

p336

 멀리뛰기 선수더러 자신이 뛴 거리를 직접 측정하라고 해서는 안 되듯이, 문제 해결 기관더러 어떤 데이터를 발표할지 직접 결정하라고 해서는 안 된다. 현장에서 문제를 해결하려 노력하는 사람들은 늘 더 많은 돈을 원하기 마련이라 그들이 개선 정도를 측정해서는 안 된다. 그들은 잘못된 수치를 내놓을 수 있다.

 내게 에볼라 위기의 심각성을 알려준 것은 데이터였다. 의심 사례가 3주마다 2배로 늘고 있다는 사실을 보여준 데이터다. 내게 에볼라와 싸우기 위한 조치들이 효과를 내고 있다는 사실을 보여준 것도 데이터였다. 확정 사례가 줄고 있음을 알려준 데이터. 데이터는 절대적인 열쇠였다. 그리고 앞으로도 어떤 일이 터졌을 때 중요한 열쇠가 될 것이어서 데이터의 신뢰성과 그 데이터 생산자의 신뢰성을 보호하는 일은 대단히 중요하다. 데이터는 진실을 말하는 데 사용해야지, 아무리 의도가 좋아도 행동을 촉구하는 데 사용해서는 안 된다.

 

p338. 우리가 '정말로' 걱정해야 할 세계적 위험 다섯 가지

 우리가 대처해야 할 절박한 세계적 위험이 있다는 걸 나도 부인하지 않는다. 나는 세계를 핑크빛으로 보는 낙천주의자가 아니다. 문제에서 눈을 뗀다고 해서 마음이 안정되지는 않는다. 내가 가장 우려하는 다섯 가지는 전 세계를 휩쓰는 유행병, 금융 위기, 제3차 세계대전, 기후변화, 극도의 빈곤이다.

 이 문제들이 왜 가장 걱정되는 것일까? 일어날 가능성이 높기 때문이다. 앞의 세 가지는 예전에 일어났고, 나머지 두 가지는 지금 일어나고 있다. 그리고 다섯 가지 모두 직간접적으로 수많은 사람이 고통받고 인간의 발전을 여러 해 또는 수십 년간 멈출 것이기 때문이다. 이 문제를 막지 못하면 그 어떤 것도 작동하지 않을 것이다. 이 다섯 가지는 거대한 살인마여서 가능하다면 모든 힘을 모아 한 단계씩 차근차근 행동하는 식으로 반드시 문제를 해결해가야 한다. (이 목록에 오를 여섯 번째 후보가 있다. 바로 미지의 위험이다. 우리가 생각해본 적도 없는 일이 발생해 심각한 고통과 황폐화를 초래할 가능성이다. 생각만 해도 정신이 번쩍 든다. 우리가 손쓸 수 없는 미지의 존재를 걱정한다는 게 사실은 무의미하지만, 새로운 위험에도 늘 호기심과 경각심을 유지해 현명하게 대처할 수 있어야 한다)

 

세계적 유행병

 제1차 세계대전의 여파로 전 세계에 퍼진 스페인 독감은 5000만 명의 목숨을 앗아갔다. 4년 동안의 전쟁으로 몸이 쇠약해졌다고는 해도, 독감이 전쟁보다 더 많은 피해자를 내다니! 그 결과 세계 기대 수명이 10년이나 줄어들어 33세에서 23세가 되었다. 이는 2장(83쪽) 도표에서 확인할 수 있다.

 

전염병을 심각하게 바라보는 전문가들은 새로운 지독한 독감이 여전히 전 세계인의 건강에 가장 심각한 위협이 될 수 있다는 데 동의한다. 그 이유는 독감의 전염 경로 탓이다. 독감은 아주 미세한 물방울에 섞여 공기중에 날아다닌다. 감염자 한 사람이 지하철을 탔을 때 그 안에 있는 사람과 전혀 접촉하지 않고도, 심지어 같은 곳을 만지지 않고도 모두에게 전염시킬 수 있다. 독감처럼 매우 빠른 전파력을 갖고 공기 중에 떠다니는 질병은 에볼라나 HIV/에이즈 같은 질병보다 인류에 더 큰 위협이 된다. 전염성이 대단히 강하고 그 어떤 방어막도 간단히 무시해버리는 바이러스로부터 가능한 수단을 모두 동원해 우리를 보호하려는 노력은 쉽게 말해 그만한 가치가 있다.

 세계는 독감에 대처할 준비가 과거보다는 잘되어 있지만, 1단계 사람들은 무섭게 퍼지는 질병에 재빨리 대처하기 어려운 사회에 여전히 살고 있다. 누구나 어디서든 기초적인 의료를 받도록 해서 질병이 발병하면 빠르게 발견할 수 있어야 한다. 그리고 세계보건기구를 건강하고 강한 조직으로 유지해 전 세계의 대응을 조율하도록 해야 한다.

 

금융 위기

 지구촌 시대에 금융 거품의 영향은 치명적이다. 나라 전체의 경제를 망가뜨리고 대량 실업 사태를 일으켜 불만을 품은 시민들이 과격한 해결책을 찾게 만든다. 대형 은행이 무너지면 2008년 미국의 주택 담보대출 사태가 촉발한 세계적 참사보다 더 심각한 사태를 초래해 세계경제 전체가 붕괴할 수 있다.

 경제 시스템은 정확하게 예측하기 어려울 정도로 워낙 복잡해, 세계 최고의 경제학자들도 지난 금융 위기와 이후의 회복 가능성을 예측하지 못했다. 따라서 붕괴를 예측하는 사람이 없다는 이유로 경제가 무너지지 않겠거니 생각해서는 안 된다. 시스템이 더 단순하다면, 시스템을 이해하고 금융 붕괴를 피할 방법을 찾을 수도 있으련만 현실은 그렇지가 못하다.

 

제3차 세계대전

 나는 평생 국적과 문화가 다른 사람들과 친분을 맺기 위해 모든 노력을 다했다. 재미도 재미지만 폭력적 보복을 원하는 인간의 끔찍한 본능에 맞서, 그리고 모든 악 중에 가장 사악한 악인 전쟁에 맞서 세계 안전망을 강화하는 데 필요한 일이다.

 우리는 올림픽, 국제무역, 교육 교류 프로그램, 자유로운 인터넷 등 모든 수단을 동원해 인종과 국경을 뛰어넘어 소통해야 한다. 그리고 세계 평화를 위한 안전망을 강화하고 소중히 여겨야 한다. 세계 평화 없이는 우리의 지속 가능성 목표 중 어느 것도 달성할 수 없다. 과거 폭력 전력이 있는 나라가 현재의 세계 시장에서 영향력을 잃었을 때 자만심과 향수에 빠져 다른 나라를 공격하는 상황을 막는 데는 엄청난 외교적 노력이 필요하다. 우리는 구시대적 서양이 새로운 세계에 평화롭게 통합될 새로운 길을 찾도록 도와야 한다.

 

기후변화

 기후변화의 거대한 위협을 알아본다고 해서 최악의 시나리오만 살펴볼 필요는 없다. 공기처럼 지구가 공유하는 자원을 관리하려면 세계가 존중하는 권위가 있어야 하고, 국제적 기준을 준수하는 평화로운 세계라야 한다.

 얼마든지 가능한 일이다. 전 세계는 이미 오존 파괴 물질과 휘발유에 첨가하는 납을 관리해 지난 20년 동안 그 둘을 거의 제로 수준으로 낮췄다. 여기에는 제기능을 다하는 강력한 국제 공동체(구체적으로 말하면 유엔)가 필요하다. 그리고 소득수준이 다른 사람들의 여러 요구와 필요를 인정하는 국제적 연대 의식도 필요하다. 그러나 국제 공동체가 이산화탄소 배출 총량에는 거의 영향을 주지 않는 1단계 10억 인구의 전기 사용을 막는다면 그런 연대를 바랄 수 없다. 지금까지는 가장 부유한 나라들이 이산화탄소 배출의 주범이니 다른 나라를 압박하느라 시간을 허비하지 말고 자신부터 개선하려고 노력해야 한다.

 

극도의 빈곤

 이제까지 언급한 위험은 미래에 어느 정도는 알 수 없지만 고통을 초해할 가능성이 매우 높은 시나리오다. 그러나 극도의 빈곤은 가능성의 이야기가 아니다. 현실이며, 지금 당장 날마다 일어나는 고통이다. 에볼라가 발생한 지역도 그런 곳이어서, 초기 단계의 의료 서비스도 받기 힘들다. 내전이 일어나는 곳도 마찬가지다. 먹을거리와 일자리가 절실하고 잃을 것도 없는 젊은이들은 잔인한 게릴라 조직에 적극 가담하곤 한다. 악순환이다. 가난이 내전을 불러오고, 내전은 다시 가난으로 이어진다. 아프가니스탄과 중앙아프리카에서 일어난 내전으로 그 지역의 다른 지속 가능성 프로젝트들이 모두 중단된 상태다. 테러리스트들은 몇 군데 남 극도로 빈곤한 지역에 숨어 있다. 멸종위기에 처한 코뿔소가 내전이 일어난 지역의 한가운데에 갇혔다면, 코뿔소를 구하기는 더욱 어려워진다.

 오늘날 비교적 평화로운 시기가 어느 정도 지속되면서 세계는 좀 더 번영할 수 있었다. 극빈층은 그 어느 때보다 줄었다. 그래도 여전히 8억 인구가 극빈층이다. 기후변화와 달리 이 문제에서는 예측이나 시나리오가 필요치 않다. 지금 당장 8억 인구가 빈곤에 시달린다는 사실을 우리는 알고 있으며, 해결책도 알고 있다. 평화, 학교 교육, 보편적 기초 의료 서비스, 전기, 깨끗한 물, 화장실, 피임, 시장의 힘을 가동할 소액 대출 등이 필요하다. 가난을 끝내는 데 혁신 따위는 필요 없다. 다른 모든 곳에서 효과를 본 방법을 쓰면 그만이다. 그리고 빨리 행동할수록 해결할 문제는 더 작다는 사실도 알고 있다. 극빈층에 머무는 한 대가족에서 벗어나기 힘들고, 식구 수는 점점 늘어나기 때문이다. 마지막 남은 약 10억 인구에게 삶다운 삶에 필요한 기본 요건을 빨리 충족해주는 것은 사실에 근거한 우선순위로 볼 때 시급한 과제가 분명하다.

 도움을 주기 가장 어려운 사람들은 정부의 힘이 약한 나라에서 폭력적이고 무질서한 무장 범죄 조직에 시달리며 사는 사람들이다. 이들이 가난에서 탈출하려면 안전된 군대가 필요하다. 무장한 경찰관은 죄 없는 시민을 폭력에서 보호해야 하고, 정부 당국은 교사들이 평화롭게 다음 세대를 교육할 수 있도록 해야 한다. 

 나는 여전히 가능성 옹호론자다. 다음 세대는 매우 긴 계주 경기의 마지막 주자와 같다. 극도의 빈곤을 끝내는 경기는 1800년에 출발 총성이 울린 긴 마라톤이다. 다음 세대에게는 이 일을 마무리할 둘도 없는 기회가 주어졌다. 바통을 건네받고 결승선을 통과한 뒤 두 팔을 치켜들 기회다. 이 프로젝트는 반드시 완수해야 한다. 완수한 뒤에는 성대한 파티를 열어도 좋다.

 무언가가 대단히 중요하다는 사실을 아는 것이 내게는 위안을 준다. 이제까지 말한 다섯 가지 위험은 우리가 힘을 집중해야 할 분야다. 냉철한 머리와 확실하고 객관적 데이터로 접근해야 하며, 국제적 협력과 재원 조달이 필요하다. 극적 조치가 아니라 아기 걸음마 같은 조치와 꾸준한 평가로 접근해야 한다. 그리고 어떤 명분이든 모든 활동가는 이 위험을 존중해야 한다. 너무나 막중한 위험이라 양치기 소년의 실수가 끼어들어서는 절대 안 된다.

 걱정하지 말라는 뜻이 아니다. 걱정할 대상을 제대로 알자는 뜻이다. 뉴스를 외면하라거나 행동을 촉구하는 활동가의 말을 무시하라는 뜻도 아니다. 소음을 무시하고 중요한 세계적 위험에 주목하자는 뜻이다. 두려워하지 말라는 뜻도 아니다. 냉철함을 잃지 말고, 그런 위험을 줄이기 위한 국제적 협력을 지지하자는 뜻이다. 다릅한 본능과 모든 극적 본능을 억제하라. 세계를 과도하게 극적으로 바라보고 상상 속에서 문제를 만들어 스트레스받기보다 진짜 문제와 해결책에 좀 더 집중하다. 

 

11장. 사실충실성 실천하기(Factfulness in Practice)

 

p360

 영업 또는 마케팅과 관련해 유럽이나 미국에서 대기업을 운영하는 사람과 그 직원은 미래에 시장이 성장할 곳은 그들 나라가 아니라, 주로 아시아와 아프리카라는 사실을 이해해야 한다.

 채용과 관련해서는 세계 여러 나라의 직원을 고용할 때 유럽 기업이나 미국 기업이 우위를 누렸던 시대는 지나갔다는 것을 알아야 한다. 예를 들어 구글과 마이크로소프트는 전 세계에서 사업을 하며 '미국다움'을 거의 눈에 띄지 않게 만들었다. 그들이 채용한 아이사와 아프리카 직원들은 진정한 국제기업의 일원이길 바라고, 실제로도 그러하다. 구글의 최고 경영자 순다르 피차이Sundar Pichai와 마이크로소프트의 최고 경영자 사티아 나델라Satya Nadella는 모두 인도에서 태어나고 인도에서 교육받았다.

 나는 유럽 기업에서 강연할 때면 유럽 브랜드라는 이미지를 희석시키고("로고에서 알프스를 빼세요"), 본사를 다른 곳으로 옮기라는 말을 잊지 않는다.

 생산과 관련해서는 세계화가 끝나지 않았다는 것을 알아야 한다. 수십 년 전, 서양 기업은 제조업을 2단계 국가, 이른바 신흥 시장에 아웃소싱해야 한다고 생각했다. 같은 품질의 상품을 절반의 인건비로 생산할 수 있기 때문이다. 그러나 세계화는 일회성 이벤트가 아닌 꾸준한 과정이다. 여러 해 전, 방글라데시와 캄보디아가 2단계로 진입할 때 유럽의 직물업계가 그곳으로 이전했는데, 두 나라가 한 단께 더 부유해지면서 3단계로 진입하자 조만간 다른 지역으로 이전할 가능성이 높아졌다. 만약 아프리카로 이전한다면, 방글라데시와 캄보디아는 사업을 다각화하지 않을 경우 타격을 받을 것이다.

 투자 결정과 관련해서는 과거 식민지 시대에 형성된(그리고 언론 탓에 오늘날까지도 이어진) 아프리카를 바라보는 순진한 시각을 버리고, 오늘날 최고의 투자 기회는 가나, 나이지리아, 케냐에 있다는 것을 알아야 한다.

 업계는 조만간 철자 실수보다는 사실 오해를 바로 잡는 데 신경을 쓰고, 직원과 고객이 세계관을 반드시 정기적으로 업데이트하길 바라지 않을까 싶다.

 

p362

 궁극적으로 세계를 있는 그대로 보여주는 것은 언론인의 역할도, 활동가나 정치인의 목표도 아니다. 이들은 항상 흥미진진한 이야기와 극적인 서사로 우리의 주의를 끌려고 경쟁하게 마련이다. 그러면서 항상 흔한 것보다는 색다른 것에, 느린 변화보다는 새롭고 일시적인 것에 집중한다.

 양질의 뉴스 매체조차 통계 기관처럼 세계를 중립적으로, 그리고 극적이지 않은 모습으로 묘사하는 경우는 보기 힘들다. 그렇게 보도해야 맞겠지만, 그러면 너무 지루할 것이다. 언론에 그 수준까지 바라는 것은 옳지 않다. 그보다는 소비자인 우리가 뉴스를 좀 더 사실에 근거해 소비하고, 뉴스가 세계를 이해하는 매우 유용한 도구는 아니라는 사실을 알아야 한다.

 

 유시민의 여행 에세이. 

유럽 관광의 머스트비인 4개의 도시에 대한 역사적 배경을 주로 다루고 있다.

일반적인 신변 잡기식의 여행기와는 좀 차별화되긴 하는데 그래도 역시 여행 에세이이니만큼 캐쥬얼하다.

가볍고 재밋게 읽을만한 내용.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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p284

 베르사유 궁전 안내서는 건축 과정의 진실을 말하지 않는다. 궁전과 정원을 만든 과정과 방법을 알면 그곳에서 미학적 쾌감을 느끼는 것이 불가능해지기 때문이리라. 베르사유 궁전은 모든 면에서 전제군주제의 폭력적 본성을 증언한다. 루이 14세는 개신교 신자들에 대한 차별을 없앤 앙리 4세의 칙령을 폐지했다. 그러자 부당한 차별에 대한 분노와 두려움 때문에 개신교도 수십만 명이 종교적 관용이 있는 주변 국가로 떠나버렸다. 그런데 그들 중에는 상공업에 종사하던 이가 많아서 프랑스의 산업은 큰 타격을 받았다. 파리를 비롯한 도시의 거리에는 굶어 죽거나 전염병에 걸려 죽은 시신이 즐비했지만, 잦은 전쟁 때문에 국가의 재정이 바닥을 보인 탓에 정부는 적극적인 빈민 구제 사업을 할 수 없었다.

 루이 14세는 이런 상황에서 백성을 강제 동원해 공사를 벌였다. 사고가 나서 사람이 죽으면 아무 보상도 하지 않고 묻어버리게 했다. 그렇게 해서 지은 호화 궁전에 귀족들을 불러 모아 사냥과 승마, 당구와 춤을 즐겼다.

 '태양왕'이라는 별명은 어릴 때부터 발레를 했던 그가 태양신 아폴로 역으로 공연에 출연한 일과 관련이 있다. 그는 1715년 세상을 떠나기 직전 어린 증손자에게 후회가 담긴 유언을 남겼다. "전쟁을 피하고 국민의 고통을 덜어주는 정치를 해라." 루이 14세의 자녀와 손자들이 대부분 천연두와 홍역을 비롯한 전염병으로 일찍 죽었기 때문에 왕위가 증손자에게 바로 내려간 것이다. 프랑스 국민들은 70년 넘게 재위했던 왕의 죽음을 슬퍼하지 않았다.

 

p287

 전염병은 지금도 '공정'하다. 권력자 자신의 생명을 위협하는 공포에서 벗어나려면 만인을 전염병에서 해방해야 한다. 19세 후반 이후 문명국가들은 생물학, 병리학, 공공보건학, 도시계획학, 건축학 등 여러 분야에서 새로운 지식과 정보를 생산하는 전문가들의 능력을 모아 악성 전염병을 퇴치하는 데 성공했다. 그러나 지구촌에는 전염병이 창궐하는 지역이 여전히 많다. 어디선가 전염병이 창궐한다는 뉴스가 들리면 그 지역의 국가조직 자체가 붕괴했거나, 아니면 지극히 무능하거나, 사악하거나 또는 둘 모두인 자들이 권력을 행사하고 있지 않은가 의심해볼 충분한 이유가 된다.

==> 코로나19 정국에 굉장히 시의적절하다.

 

 

 

 강남에 30년간 거주중인 50대 주부의 재테크와 인생 경험이 담긴 책. 책 제목은 원색적이라 할 수도 있지만, 저자가 강남에 집을 사고 싶었던 이유들을 이야기하면서, 현재 강남에 집을 사고 싶은 이들에게 해주고 싶은 이야기를 담고 있다. 

저자가 강남과 신도시를 오가며 살아왔던 인생의 경험 - 주로 집 장만과  관련되는 - 이 주된 내용이다.

웬만한 부동산 투자 입문서보다 생생하다. 저자가 살아온 삶과 연결지어서 집을 투자라는 목적만이 아닌, 주거와 생활이라는 실질적인 공간으로서의 가치를 접목한 부분이 다른 부동산 관련 도서와의 차이점이다.

그리고 중간중간 보이는 번득이는 비유에서 저자가 쌓아온 내공이 만만치 않음을 느낄 수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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p49. 다음 사람 먹을 것도 남겨둬야 한다

 '안 팔리는 집은 없다.' 제가 늘 하는 말입니다. 주변에서 집이 안 팔린다고 울상인 분들 보면, 자신이 세운 기준에서 꼼짝도 안 하고, 상대가 와주길 기다리며, 버티느라 못 파는 경우가 많습니다.

 상급지로 갈아타려고 할 때, 내 집은 비싸게 팔고 상급지는 싸게 사고 싶어합니다. 그렇게 하려면 상승기에 팔아서 돈을 들고 있다가 하락기에 다시 사면 좋은데, 그건 현실적으로 불가능합니다. 미래의 일은 그 누구도 알 수 없어서 집을 팔아서 돈을 들고 있을 수 없기 때문입니다. 

 결국 갈아타려고 하면, 상승기에 비싸게 팔고 비싸게 사거나, 하락기에 싸게 팔고 싸게 살 수밖에는 없습니다. 그러나 가능하다면  하락기에 싸고 팔고 싸게 사는 게 좋습니다. 상승기에는 매물을 거두어들이는 사람들이 많아서 돈을 들고 있어도 좋은 매물을 잡기가 어렵고, 상급지는 상승폭이 더 크기 때문입니다.

 그런데, 집값 하락기에는 집이 팔리지 않아서 갈아타지 못하는 경우가 많습니다. 매수자의 요구에 맞추기보다는, 내가 원하는 집값을 받고 싶은 마음이 더 크기 때문입니다.

 그러나, 종양이 3센티면, 수술 부위는 더 넓게 4~5센티 이상 잘라야 안전하듯이, 집 파는 것도 이와 비슷합니다. 하락기에는 더 떨어질 것을 기대하고 관망하는 매수자가 대부분이라 그들의 기대 수준에 맞춰서 적당히 타협을 해야 합니다.

 부부싸움에서도, 아쉬운 사람이 먼저 다가서서 머리를 조아리며 비위 맞출 수밖에 없듯이, 집을 팔 때도 마찬가지입니다. 버티다 보면 하락이 가속화되어 5000만원 싸게 팔면 될 것을, 1억을 낮춰도 안 팔리는 시기가 오게 됩니다. 결국 상승기까지 버텨야 원하는 가격에 근접해서 팔게 되지만, 이미 그때는 상급지가 더 빨리 더 많이 올라서 갈아타기 힘든 경우가 많습니다.

 집을 사는 시기는 내가 정할 수 있지만, 파는 시기는 마음대로 되지 않습니다. 그래서 집은 사는 것보다 파는 게 더 어렵습니다. 그래서, '집을 사는 건 기술, 파는 건 예술'이라는 말이 생겨난 겁니다.

 집을 팔 때는 인도주의(?) 정신이 필요합니다. 악착같이 내가 다 먹고, 다음 사람에게는 빈 껍데기만 넘겨주려 하지 말고, '난 이만큼이면 됐다'는 마음으로 다음 사람에게도 먹을 걸 남겨줘야 합니다. 팔고 난 뒤에 자꾸 돌아보면, 이미 판 집 오르는 걸 아까워하면, 나에게 들어오던 복도 도로 나간답니다.

 '무릎에서 사서 어깨에서 팔아라.'

 '다음 사람 먹을 것도 남겨두어야 한다.'

 

 부동산 고수였던 첫 직장의 선배 동료로부터 들은 말인데, 부동산 초보 시절 머릿속에 강하게 새겨넣었던 말이라, 나의 투자 마인드의 일부로 굳어진 말입니다.

 그래서 그런지, 집을 잘못 사서 고생한 적은 있지만, 집을 못 팔아서 고민한 적은 없습니다. 심지어 부동산 매매가 전혀 되지 않던 IMF 때, 인기 없는 수도권 임대주택용 아파트 3채도 원할 때 팔았습니다. 물론 손절매였습니다. 그것도 분양가의 -10%에 복비를 2배 주고 팔았습니다. 그러나 결코 손해가 아니었습니다. 손절매로 생긴 돈으로 몇 배 더 수익이 나는 곳에 투자했기 때문입니다.

 내가 정해 놓은 가격에 상대가 맞추길 바라는 대신, 상대가 원하는 가격으로 내 기준을 낮춰서 파는 것도 방법입니다. 이렇게 함으로써 마음 고생에서 벗어나고, '시간'과 '기회비용'을 얻을 수 있기 때문입니다.

 집을 사다 보면, 판단을 잘못해서 실수할 때가 있습니다. 부동산 초보뿐만 아니라, 투자 이력이 많은 부동산 고수들도 마찬가지입니다. 이럴 때 중요한 건, 솔루션입니다.

 내 기준만 고집하며 같은 자리를 뱅뱅 맴돌아봤자, 달라지는 건 아무것도 없습니다. 힘든 상황일수록 눈을 크게 뜨고, '세상은 넓고 사야 할 부동산은 많다'는 마인드가 필요합니다. 여기서 잃었어도 다른 곳에서 만회하면 된다는 생각으로 싸게 팔고, 다음 라운드로 넘어가야 합니다. 집을 팔 때도, 최선보다는 차선이 최선이라는 원칙이 적용된다고 할 수 있습니다. 

 

p62

 영화 <기생충>에서 주인공은, '무계획이 계획'이라고 말합니다. 어차피 계획대로 안 될 거니까, 그리고 괜히 계획 세웠다가 또 다른 실망을 낳을까봐, 무계획으로 살아가는 게 최선이라고 말하는 겁니다.

 그러나 영화 마지막 장면, 희망이 없어 보이는 밀폐된 지하 공간에서 주인공은 끊임없이 밖을 향해 신호를 보냅니다. '나는 아직 살아 있다'고, '희망을 버리지 않고 있다'고 타전합니다.

 

p92

 "사람들이 공포감에 빠져 있을 때 욕심을 부려라. 꺼꾸로 사람들이 탐욕을 부릴 때에는 공포를 느껴라. 그러나 자신이 시장보다 더 똑똑해 보인다는 오만함은 버려라." 워렌 버핏의 유명한 명언입니다.

 

p179.  세금 공부가 선행되어야 하는 이유

 최근에 재건축 아파트 이주를 앞두고, 아파트를 매도하신 분이 양도세 폭탄을 맞았다고 합니다. 이유는, 새로운 주택의 매수 시점이 양도세 중과에 걸리는 시기였기 때문입니다. 매도한 아파트가 대형 평형이어서 1+1을 받는 거였는데, 이사 갈 집을 1년 전에 미리 사두고 이주 시점에 맞춰서 매도했다고 합니다. 그런데 1+1은 관리처분 이후 2주택으로 봐서, 일시적 2주택의 비과세 혜택을 보지 못하고 중과세가 적용된 경우입니다.

 최근에 세금 정책이 많이 바뀌었습니다. 그래서 자칫 잘못해서 기존에 알고 있는 기준으로 집을 사고팔았다가는, 위와 같은 상황이 될 수 있습니다.

 우리가 세금에 대해 관심 갖게 되는 건, 어떤 상황이 닥쳤을 때인데, 사실은 다주택자가 되기 전에 미리 공부가 되어 있어야 합니다. 집을 사는 순서나 시기 및 지역에 따라 세금이 많이 차이나기 때문입니다.

 다주택자 중에는 보유세 부담 때문에 팔고 싶지만, 중과세 때문에 팔지 못하고 진퇴양난인 사람들이 많습니다. 그러나 다주택자인데도 세금 때문에 큰 걱정을 하지 않는 사람들도 있습니다. 세금 공부가 선행되어 그에 맞춰서 매매가 이루어졌기 때문입니다.

 당장 집을 소유하거나 팔지 않더라도, 부동산에 관심 있는 분들은, 세금에 관련된 책을 쉬운 거로 두 권 정도 사서 읽으시길 권합니다. 반복해서 읽다 보면, 자신에게 적용되는 부분을 발견하게 되고, 그러면서 서서히 세금에 밝아지게 됩니다. 이것이 다주택자가 되기 위한 선행 과정입니다.

 

p258

 학군 지역 대치동의 분위기를 잘 알려주는 곳이 있습니다. 바로 은마상가 2층에 있는 서점입니다. 거기에서 요즘 학생들이 가장 많이 찾는 교재가 뭐냐고 물어보면, 그 시기에 가장 핫한 교재를 알 수 있습니다. 비슷하게 생긴 주인 몇 분이 목장갑을 낀 채 바쁘게 오가며, 손님들과 눈도 마주치지 않으면서 무심히 원하는 책을 쓱쓱 빼주는 데 단 10초도 안 걸리는 곳, 그곳이 바로 교육의 1번지 대치동입니다.

 

p348. 슈퍼 상승 사이클의 중심에 있는 강남 아파트

 작은 규제, 내성이 생겨버렸다.

 

 이번 정부 들어와서 집값 안정을 목표로, 특히 강남 집값을 잡기 위해 수많은 규제책을 쏟아냈습니다. 그리고 올 4월만 해도 부동산 전문가들은 여러 가지 정부 규제책을 이유로, 집값 하락을 점치는 분들이 많았습니다. 그러나 강남 집값은 수년째 상승과 조정을 반복하며 '슈퍼 상승 사이클'을 지속하고 있습니다.

 원래 뭐든 할 만큼 하면 싫증내거나 지치는 게 순리입니다. 집값 상승도 그렇습니다. 산이 높으면 계곡도 깊은 법입니다. 그러나 이번 상승기는 좀 다릅니다. 한창 정점을 향해 달려갈 만하면 정부 규제가 나와서, 아직 덜 오른 상태에서 집값이 조정되고, 그 집값에 적응하게 합니다.

 그러다 시간이 지나면, 다시 오르기 시작해서 전고점을 가볍게 찍고, 거기서부터 다시 신고가를 찍습니다. 이렇게 정부의 부동산 규제와 수요자(투자자) 사이의 쫓고 쫓기는 게임이 수년째 되풀이되며 상승을 이어가고 있습니다

 부동산 그래프는 크게 보면 계단식으로 상승합니다. 즉, '상승'하다가 어느 시점이 되면 '하락과 조정'이라는 '휴식기'를 갖고, 다시 '상승'하는 양상을 보입니다. 그러나 최근 몇 년간 집값의 추이는 급상승해서 마치 직상승한 것처럼 보입니다. 그래서 추락을 전망하는 사람들도 있습니다.

 하지만 좀 더 자세히 들여다보면, 최근 몇 년간도 계단식 그래프를 그리고 있음을 알 수 있습니다. 다만, 텀이 다른 시기보다 빠르다는 특징이 있습니다. 급상승하다가 중간에 정부의 규제가 쉬어가는 타임을 만들어주었기 때문입니다.

 다시 말하면, 이번 상승기는 급격하게 부풀어올랐다가 한순간 꺼지는 거품이 아니라, 규제를 받아가며 내성을 키운 단단한 상승기라는 겁니다. 그리고 이렇게 길게 상승기를 이어가게 만드는 데에 정부의 규제가 한몫했다고 봅니다.

 이렇게 해서 최근 몇 년간, 강남 아파트값은 거의 두 배 가까이 올랐습니다. 예전처럼 2~3억에서 4~6억으로 오르던 것과는 달리, 18억짜리 아파트가 32억이 되고, 14억짜리 아파트가 28억이 되는 상황은 누구도 예측하기 힘들고 납득하기가 힘듭니다. 이런 와중에 힘들고, 상실감과 허탈감과 상대적 박탈감을 느끼는 사람들이 있습니다. 그들은 바로, 이번 상승장에 올라타지 못한 사람들입니다.

 요즘 유행하는 단어 중에 '영끌'이라는 말이 있습니다. '영혼을 끌어모아 집을 산다'라는 뜻으로, 돈을 모아서 사는 데는 한계가 있어서 자신의 능력 범위 내에서 최대한 융자를 받아서 집을 사는 것을 뜻합니다.

 주택 수요자에게 '실수요자'와 '투자자', 두 부류가 있습니다. 그러나 사실은 이 둘을 명확하게 구분할 수 없습니다. 실수요자라 할지라도, 영끌해서 산 집이 다른 집보다 더 오르기를 바라는 투자자의 성격도 지니고 있기 때문입니다.

 그러나 정부는 이 둘을 명확하게 나누고, 규제의 칼날을 투자자에게 겨누고 있습니다. 이 와중에 영끌해서 집을 사야 할 실수요자도 각종 금융규제로 집 사는 데 제약이 많아서 집 사기가 힘들어졌습니다. 부모가 돈을 보태주거나 빌려줄 수도 없는 흙수저들은 은행이 든든한 백이었는데, 이제는 그 사다리조차 걷어차인 상황입니다. 그래서 수많은 젊은 분들이 비조정지역 재개발이나 분양권 등의 소액투자를 하기 위해 수도권 지도를 열심히 들여다보고 있는 겁니다.

 

p351. 왜 강남 집값만 오를까

 이번 슈퍼 상승기의 가장 큰 특징은 양극화입니다. 예전의 대세상승기에는, 서울 및 수도권 지역의 집값이 적절한 폭의 차이를 두고 함께 상승하는 양상을 보였습니다. 그러나 이번 상승기는 집값 상승의 폭에서 차이가 큽니다.

 서울 내에서도 강남과 비강남의 차이가 크고, 서울과 수도권의 차이가 크며, 신축과 구축의 차이가 큽니다. 올해만 해도, 강남 핵심지 아파트는 신축 구축 가릴 것 없이 대체로 3~5억 정도 올랐는데, 전혀 온기가 전달되지 않는 수도권 지역도 많습니다. 

 이렇게 지역적으로 상승폭의 차이가 나게 한 것도 정부의 규제가 또 한몫했습니다. 보통 상승 초기에는 강남 핵심지 아파트부터 오르기 시작하는 경우가 많고, 그 온기가 차차 외곽으로 퍼져나가면서 식어가는 모습을 보입니다.

 그런데 이번 정부는 강남 아파트에만 칼날의 포커스를 맞추다 보니, 강남 아파트값이 오르는 순간 규제를 쏟아냅니다. 그러면 퍼져나가려던 온기가 차단되어 외곽 지역은 집값이 오르지 않은 채로 정체되게 됩니다.

 이런 상태에서 강남 아파트값은 10이 오르고 2가 내리는 상태로 조정되고, 그 사이 외곽의 아파트는 오히려 떨어지는 경우도 있었습니다. 즉, 온기는 전달되지 않아도 냉기는 그대로 전달되는 겁니다. 그러나 정부는 소폭 조정된 강남 아파트값을 두고 부동산 규제책 성공을 운운합니다.

 그리고 시간이 좀 지나서 사람들이 규제에 익숙해질 즈음이면, 다시 덜 오른 지역부터 상승이 시작되고, 그에 맞춰 강남은 더 빨리 전고점을 찍으며 신고가를 경신하게 됩니다. 남이 차려놓은 밥상에, 강남 아파트가 주인 노릇하는 격입니다.

 그러면 또다시 강남 아파트값을 잡기 위한 정부의 규제가 시작되고 그러면 수도권 외곽으로 아직 온기가 퍼져나가지도 않았는데 상승은 멈추고 다시 조정이 시작됩니다. 이런 과정에서 온기가 전달되지 않은 곳은 늘 발병 인자처럼 호시탐탐 상승 시기를 노리고 있고, 그것이 봉화처럼 상승 사인을 보내면, 강남은 더 빨리 뛰어가는 사이클을 반복합니다.

 쉽게 말해, 강남 아파트는 동물의 왕국에서 빨리 뛰는 사나운 동물입니다. 먹잇감이 나타났다 하면 남보다 빨리 뛰어가서 재빨리 낚아채 사라지고, 뒤늦게 나타난 녀석들이 사냥꾼의 총에 맞는 형상입니다.

 이런 상황이 되풀이되면서, 정부의 부동산 정책은 강남 집값은 잡지 못하고, 집값의 양극화만 부추겼습니다. 예를 들자면, 강남 고가주택 소유주들을 잡기 위해 주택수에 따라 종부세 요율을 조정했는데, 이게 오히려 외곽의 집값만 잡는 효과를 낳았습니다. 2주택 이상인 경우, 하급지 주택을 포기하는 사람이 많기 때문입니다. 그리고 양도세 요건이 강화되면서 장기보유의 형태로 방향을 잡는 다주택자들이 많아서 강남 아파트는 매물이 귀해져 더욱 아파트값이 오르는 현상을 낳았습니다. 

 

p354. 제2라운드 시작

 이 같은 슈퍼 상승 사이클이 오래 지속되면서 더 큰 문제는, '심리적인 제2라운드'로 옮아갔다는 점입니다. 즉, 영끌해서라도 핵심지 가까운 곳으로 이동해야만 온기를 받을 수 있다는 생각에, 무슨 수를 써서라도 상급지로 갈아타려고 하는 겁니다.

 이처럼, 사람들의 '불안한 심리'와 '정부의 규제'가 묘하게 박자를 맞추며, 상승곡선을 길게 이어가고 있습니다. 즉, 한 타임 놓친 사람들의 '좌절감과 불안감'이 '매수 에너지'로 바뀐 상태에서, 정부의 규제로 인한 '조정기'는 그들에게 시장참여자가 되게 하는 기회를 줍니다.

 그래서 좀 늦게 참여해도 얻을 게 있다는 '학습효과'를 낳게 되었고, 여전히 망설이던 사람들도 다음 조정기에는 수요자로 바뀌게 됩니다. 이런 새로운 시장참여자들로 인해, 시장은 도미노처럼 연쇄반응을 일으켜서, 상급지로 갈아타려는 대이동이 일어나고, 그 정점에 강남 아파트가 있는 겁니다.

 게다가 시중에 유동자금이 많은 것도 아파트값이 오르는 중요한 원인입니다. 경기가 나쁘다 보니 정부가 경기부양을 위해 계속 돈을 풀고 있고, 앞으로 제3기 신도시 토지보상금도 풀리면 시중에 통화량이 증가해서, 그 돈들은 주식 아니면 부동산으로 갈 것으로 예상됩니다.

 그런데 지금은 주식시장이 좋지 않아서 안전자산인 부동산으로 돈이 몰리는 상황이고, 특히 강남 아파트로 돈이 몰릴 가능성이 높습니다. 쉽게 말해, 돈의 가치가 계속 떨어지기 때문에 실물 가치를 반영하는 아파트값이 계속 오를 가능성이 높다는 말입니다.

 요즘 주변의 주택 수요자들의 특징을 보면, 크게 세 가지 경우로 파악됩니다.

 첫째는, 무주택자 중에 돈의 가치가 떨어지는 것을 보고 두려움을 느껴서, 집값이 떨어지면 사겠다는 생각을 버리고 영끌해서 집을 구입하려는 분들이 많은 것 같습니다.

 또 하나는, 최근 몇 년간의 경험을 통해 집값 상승폭이 지역마다 현저하게 차이가 나는 것을 확인하고, 기회가 되면 상급지로 갈아타려는 사람들이 많다는 것입니다.

 나머지 하나는, 세금을 낼 때 내더라도 집은 결코 배신하지 않는다는 생각에 다주택으로 입장을 전환해서 기회만 되면 집을 사려는 분들입니다.

 그러나 금융규제 등으로 인해 소액 여유자금밖에 없다 보니 소액 투자 쪽에 너무 많은 투자자가 몰려 있고 과열 현상을 보여서, 상승분을 미리 당겨오는 듯한 느낌을 받게 됩니다.

 이런 이유로 인해, 이번 상승장 초기에는 투자자들이 많이 움직였던 반면, 뒤로 갈수록 금융규제에서 비교적 자유로운 무주택 실수요자나 갈아타는 사람들의 움직임이 커져서, 금융규제에도 불구하고 도니모처럼 집값 상승이 들불처럼 번지는 모습을 보이고 있는 것 같습니다.

 

p356. '이명래 고약'이 필요한 시기

 어릴 때, '이명래 고약'이란 게 있었습니다. '이고약'은 까맣고 진득한 고무찰흙같이 생긴 건데, 몸에 종기가 나면 붙이는 연고였습니다. 적당한 크기로 떼어내서, 성냥불로 살짝 달군 후, 넓게 펴서 종기 환부에 붙이고 기름 종이 같은 것으로 덮는 겁니다.

 

 이 연고의 역할은, 요즘 항생제와 치료 방법이 정반대입니다. 요즘 항생제는 강력한 힘으로 세균을 억제하는 역할을 한다면, '이고약'은 종기를 더욱 빨리 곪게 해서 터지게 만드는 역할을 합니다. 쉽게 말해서 '곪아 터지게' 만드는 거지요.

 '이고약'과 항생제는, 과정은 정반대인데 결과는 같습니다. 그러나 이 둘은 큰 차이점이 있습니다. 항생제는 복용하는 동안 종기를 생기게 하는 포도상균 외에 몸에 유익한 균도 한꺼번에 박멸해서 무균 상태를 만들고, 몸의 면역 환경을 바꿔버립니다. 그리고 위에도 부담을 줘서, 위염을 동반할 수도 있습니다.

 그리고 가장 큰 문제는, '내성'입니다. 잘 치료해서 나으면 되는데, 어설프게 치료해서 덧나면 강도를 높여서 처방해야 합니다. 그럴수록 몸의 세균도 더욱 강한 슈퍼 세균으로 변해 버리고요. 쉽게 말해, 자기면역체계를 망가뜨리는 거죠.

 이에 비해 '이고약'은 좀 지저분하고, 곪아 터지는 과정이 고통스럽기는 해도, 종기 외에는 몸의 다른 부분에 미치는 영향은 없습니다.

 제가 종교인은 아니지만, 우리의 몸을 보면 신이 존재하는 것 같다는 생각을 하게 됩니다. 우리의 몸은 신비합니다. 어느 것 하나 불필요한 부분이 없고, 스스로를 지키는 힘도 지니고 있습니다.

 그러나 자꾸 외부적인 힘에 의지하다 보면, 몸은 역기능이 나는 것 같습니다. 자기면역 능력을 더 이상 쓰지 않고, 외부적인 힘에만 의지하려다 보니 나약해지는 겁니다. 반면 세균은, 강하지만 단순한 항생제의 종류를 감별해서 그에 대응할 준비를 갖춥니다. 사실, 우리 몸이 어떤 세균과 바이러스에 어떻게 대응할 수 있는지 아무도 알지 못합니다.

 어린 시절, 넘어져서 상처가 난 아이 무릎에 처마 밑의 보드라운 흑을 약으로 뿌려주는 엄마도 있었습니다. 그렇게 눈물 그렁그렁한 채 잠든 아이 무릎은, 며칠 후면 까맣게 딱지가 앉고 시간이 지나면 깨끗하게 낫곤 했습니다.

 우리 몸이 이러하듯, 부동산시장도 자가며녁체계를 지니고 있는데, 어설픈 국가의 통제가 걷잡을 수 없다는 상황까지 이르게 만들었고, 이런 상태에서도 정부는 하루가 멀다 하고 또 다른 부동산 규제책들을 준비하고 있는 상황입니다.

 최근 몇 년간 수없이 쏟아져나온 많은 부동산 대책들은 마치 약구에 즐비한 항생제 같다는 생각이 듭니다. 항생제를 쓰려면 정확한 처방으로 후유증까지 고려해서 깨끗하게 치료해야 하는데, 지금의 부동산 시장은 계속 덧나고, 약에도 내성이 생겨서 더 이상 듣지 않는 상황이 된 것 같습니다.

 어설픈 규제가 환경을 교란시켜서 변종이 발생한 건 아닌가 우려가 됩니다. 고스톱 칠 때도 내 패만 보고 이기겠다고 하면 절대 이기지 못하듯이, 정부 정책도 역시, 가끔은 내 걸 버려야 이길 수 있다는 철학이 필요한 시기인 것 같습니다.

 

p363

 얼마 전 만난 한 분은, '은마아파트를 지금 팔아야 하는가' 고민하고 계셨습니다. 그분은, 2006년 최고점에 은마 34평을 최고가를 경신하며 샀다고 합니다. 당시는 대치동 광풍으로, 매물 잡기가 힘든 상황이었습니다. 그래서 계약을 파기하려는 주인 때문에 힘들게 계약을 성사시켰답니다. 그래서 계약을 파기하려는 주인 때문에 힘들게 계약을 성사시켰답니다. 그런데 산 직후부터 가격이 주춤하더니 2010년 이후 긴 하락기를 겪다가 이제 겨우 전고점을 돌파하고 상승하고 있어서 고민이 된다는 겁니다.

 저도 비슷한 경험이 있습니다. 계약 파기를 원하는 매도인과 티격태격하며 무리수를 써서 계약을 강행했는데, 결론은 후회스러운 기억으로 남아 있습니다. 그러면서 얻은 교훈은, '순리가 진리다'입니다.

 집착은 허탈감을 동반합니다. 결과까지 나쁠 경우엔 좌절감마저 듭니다. 그러나 이상하게 안 된다고 하면 더 하고 싶어지고, 지금 놓치면 영원히 기회가 없을 것 같은 느낌이 듭니다. 그러나 지나고 나서 돌아보면, 싸늘하게 식은 욕망덩어리만 부끄럽게 남아 있을 뿐입니다. 

 쇼핑하러 가기 전에, 반드시 밥을 먹고 가라고 합니다. 배고픈 상태에서 쇼핑을 하면 과소비를 하기 때문입니다. 집을 살 때도 마찬가지입니다. 집을 사기 전에 마음의 관성을 제어하는 훈련부터 해야 합니다.

 원할수록 원하지 않는 것처럼, 자기 자신과 밀당을 시작해야 합니다. 집과 나 사이에 적당한 간격을 유지하면서, 순리대로 상황을 받아들일 여유를 지녀야 합니다.

 일본의 대표적 지식인인 우치다 타츠루의 무라카미 하루키의 작품론. 무엇보다도 굉장히 재밋다.

무라카미 하루키의 작품은 무언가 아싸리하게 끝나는 맛이 없다는 점이 있다. 사진으로 말하자면 약간은 흐릿하게 핀트가 엇나간 사진을 보는 것 같은 느낌이랄까?

우치다 타츠루의 무라카미 하루키에 대한 작품론과 해석을 보면서 내 그런 느낌이 나만의 것은 아니었구나라는 것과, 그것이 왜 그런지에 대해서 어느 정도 수긍할 수 있었다.

조각에는 양각과 음각이 있다. 양각은 보여주려는 바를 직접적으로 드러나게 하는 것이고, 음각은 그와는 반대로 보여지지 않는 것을 보여주기 위한 기법이다. 

이 책을 통해 나는 하루키는 음각을 통해 이 세상을 보여주려 했다는 것을 알게 되었다.

책머리에는 팬의 입장으로 편애한다고 써놨지만, 내가 보기엔 하루키를 편견없이 바라본 객관적인 글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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p34

 무라카미 하루키의 경우 <바람의 노래를 들어라>, <1973년의 핀볼>, <양을 쫓는 모험> 이라는 초기 3부작은 비슷한 테마를 담고 있습니다. 실제로 그런 사건이 있었는지는 별도로, 이 작품들은 무라카미 하루키의 개인사에 깃든 트라우마적 경험을 써낸 것입니다. 꼭 현실에서 벌어진 사건이 아니더라도 현실 이상으로 실감나는 사건입니다. 심지적인 원풍경이라고 해도 좋고, 심층구조라고 해도 좋습니다. 무언가를 생각하거나 느낄 때 틀 자체를 형성하는 사건이 존재하는데, 그것을 글로 쓰지 않으면 앞으로 나아갈 수 없습니다. 이것이 바로 '트라우마적 경험'입니다.

 트라우마가 문제가 되는 이유는 상처가 아프다는 점보다는 외상적 경험에 대해 '이야기할 수 없다'는 불가능함 자체가 인격의 골격을 이루고 있다는 점 때문입니다. 기묘하게도 우리가 타인을 판단하는 요소는 그 사람이 시시콜콜 이야기하는 주제가 아니라 그 사람이 무엇에 대해 이야기하지 않는가, 어떤 화제를 신경증적으로 기피하는가 하는 점입니다(영화나 드라마에서 자주 나오잖아요. '아이는 있나요?' 하고 누가 물으면 갑자기 부르르 떨며 사람 목을 조르는 놈!).

 

 '트라우마적 경험'이란 그런 것입니다. 그 사람에게 살아갈 의미(와 무의미)가 모조리 '차마 이야기할 수 없는 화제'로 편성됩니다. 그래서 어떤 새로운 사건과 마주치더라도, 어떤 미지의 사항을 입력하더라도, '옛 상처'가 빚어내는 정형화된 반응으로 귀착하고 말지요. 어떤 인간과 만나더라도, 어떤 말을 듣더라도, 어떤 것을 만지더라도, 미지의 것, 이해할 수 없는 것은 아무것도 없습니다. 단지 '모든 것을 이미 알고 있는 세계' 안에 갇힌 채 시간이 멈추는 것, 이것이 트라우마적 증상입니다.

 따라서 '트라우마적 문학' 또는 '문학적 트라우마'가 존재합니다. 그것은 어떤 이야기를 쓰더라도 동일한 틀로 돌아가 자신의 발언에 스스로 동의하는 '혼자만의 끄덕거림'을 되풀이합니다. 독자에게는 '설명'하지 않고 뜻 모를 고유명사를 의미가 있는 것처럼 늘어놓으면서 '너 따위가 내 기분을 어떻게 알겠어?' 하고 소리 지르며 주먹을 휘두릅니다.

 물론 그렇게 해도 작가로서 먹고살 수는 있습니다(아니, 그런 작가는 꽤 많지요. 실명을 거론하면 난처해질 테니까 참겠습니다만). 그렇지만 특정한 독자층만이 사랑하는 작가이기를 포기하고 넓은 '세계'로 나아가기 위해서는 언젠가 트라우마에서 벗어나야 합니다. 자신을 반복적으로 '그곳'으로 돌려보낸는 트라우마적 경험과 단절해야 합니다. 그러려면 어떻게 해야 할까요? 트라우마는 '공허'한 것입니다. '나는 그것을 제대로 언어화할 수 없다'는 불가능의 양태로만 존립하니까요. 술술 언어화할 수 있다면 '트라우마'라고 할 수 없습니다. 

 '트라우마에 대해 남김없이 이야기하는 일'이란 '사실 난 이런 경험을 억압하고 있었다'는 식의 커밍아웃은 아닙니다. 우리가 할 수 있는 일은 어떤 종류의 결락이나 결여에 대해, 다시 말해 돌이킬 수 없는 방법으로 무언가를 상실하고 깊이 훼손당한 나에 대해 이야기하는 것뿐입니다. 그것은 '도넛 구멍'에 대해 이야기하는  것과 비슷합니다. 도넛 구멍 자체를 직접 '이것'이라고 지명할 수는 없습니다. 도넛을 만들어 먹어보지 않으면 도넛 구멍의 맛이나 기능을 이해할 수 없지요. 트라우마적인 경험에 대해 이야기한다는 것은 '도넛 구멍을 포함하고 있는 도넛을 만드는' 작업과 닮았습니다.

 <노르웨이의 숲>에서 무라카미 하루키는 20대까지 자신에게 들러붙어 있던 트라우마적 경험에 대해 이야기하려는 자기 절개切開를 시도했습니다. 마취도 하지 않고 수술하는 것이나 마찬가지니까 상당히 쓰라린 일이었을 것입니다. 그러나 자신을 트라우마로부터 해방시키기 위해서는 어쩔 수 없이 꼭 필요한 작업이었습니다.

 

p64

 무라카미 하루키의 아버지는 매일 아침 전사자들을 향해 기도를 올렸습니다. 그분은 중국 대륙에서 차마 말로 표현할 수 없는 경험을 겪었습니다. 수많은 사람이 아무 의미도 없이 불필요할 정도로 잔혹하게 죽어가는 것을 가만히 보고 있을 수밖에 없는 경험이었습니다. 거의 선친은 자신의 경험을 언어화할 수 없었고, 구태여 언어화하는 것을 자제했습니다. 아마도 언어로 치환해버리면 자신의 경험이 지닌 본래의 '절박함'이 희박해질 것이라고 여겼기 때문일 것입니다. 그래서 그는 빈 동굴처럼 자기 몸에 드리운 '죽음의 그림자'를 순수한 상태로 보존하는 길을 선택하고, 평생 그런 마음을 품은 채 죽었습니다. 무라카미 하루키는 '언어화할 수 없는 것'이야말로 아버지의 'soul'이자 유일무이성을 지켜준 것이 아닐까 생각합니다.

 '언어화할 수 있다'는 것은 타자에게 이해받고 타자와 공유한다는 뜻입니다. 그것은 그 자신이 '그 무엇과도 바꿀 수 없음', '대체 불가능성'이라고 정의한 생명의 정의와 어긋납니다. 우리 한 사람 한 사람의 생명을 형성하는 것은 '언어화할 수 없는 것'이기 때문입니다. 적어도 '언어화하기 지극히 곤란한 것'이기 때문입니다.

 따라서 작가의 일은 생명을 남김없이 기술하는 것이 아닙니다. 생명에 살며시 '다가붙는' 것입니다. 무라카미 하루키 자신의 말을 빌리면 '생명과 생명을 잇는joining souls together' 일입니다.

 무라카미 하루키는 '아버지'를 주제로 글을 쓴 적이 없습니다. 아버지가 왜 '아버지 같은 사람'이 되어버렸는지, 그 과정을 주제로 삼아 묘사한 적이 없습니다. 그만큼 그가 다가붙으려고 하는 알이 취약하다는 말이겠지요.

 무라카미 하루키는 중화요리를 일절 먹지 않습니다. 먹을 수 없습니다. 그는 중국과 관련된 강박관념일지도 모른다고 어느 글에선가 썼습니다. '목구멍으로 삼킬 수 없다'는 것은 두드러지게 상징적인 행동입니다. 그는 중국에 관한 어떤 경험(그것은 자신의 경험도 아닙니다)이 이름 붙여지고, 타인의 이해를 받고, 분류당하고 잊히는 것을 거부하고 있습니다.

 초기의 명작인 <중국행 슬로 보트>는 화자인 '내'가 해를 끼칠 생인인 우치다 타츠루의 무라카미 하루키의 작품론. 무엇보다도 굉장히 재밋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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p34

 

 무라카미 하루키의 경우 <바람의 노래를 들어라>, <1973년의 핀볼>, <양을 쫓는 모험> 이라는 초기 3부작은 비슷한 테마를 담고 있습니다. 실제로 그런 사건이 있었는지는 별도로, 이 작품들은 무라카미 하루키의 개인사에 깃든 트라우마적 경험을 써낸 것입니다. 꼭 현실에서 벌어진 사건이 아니더라도 현실 이상으로 실감나는 사건입니다. 심지적인 원풍경이라고 해도 좋고, 심층구조라고 해도 좋습니다. 무언가를 생각하거나 느낄 때 틀 자체를 형성하는 사건이 존재하는데, 그것을 글로 쓰지 않으면 앞으로 나아갈 수 없습니다. 이것이 바로 '트라우마적 경험'입니다.

 

 트라우마가 문제가 되는 이유는 상처가 아프다는 점보다는 외상적 경험에 대해 '이야기할 수 없다'는 불가능함 자체가 인격의 골격을 이루고 있다는 점 때문입니다. 기묘하게도 우리가 타인을 판단하는 요소는 그 사람이 시시콜콜 이야기하는 주제가 아니라 그 사람이 무엇에 대해 이야기하지 않는가, 어떤 화제를 신경증적으로 기피하는가 하는 점입니다(영화나 드라마에서 자주 나오잖아요. '아이는 있나요?' 하고 누가 물으면 갑자기 부르르 떨며 사람 목을 조르는 놈!).

 

 

 

 '트라우마적 경험'이란 그런 것입니다. 그 사람에게 살아갈 의미(와 무의미)가 모조리 '차마 이야기할 수 없는 화제'로 편성됩니다. 그래서 어떤 새로운 사건과 마주치더라도, 어떤 미지의 사항을 입력하더라도, '옛 상처'가 빚어내는 정형화된 반응으로 귀착하고 말지요. 어떤 인간과 만나더라도, 어떤 말을 듣더라도, 어떤 것을 만지더라도, 미지의 것, 이해할 수 없는 것은 아무것도 없습니다. 단지 '모든 것을 이미 알고 있는 세계' 안에 갇힌 채 시간이 멈추는 것, 이것이 트라우마적 증상입니다.

 

 따라서 '트라우마적 문학' 또는 '문학적 트라우마'가 존재합니다. 그것은 어떤 이야기를 쓰더라도 동일한 틀로 돌아가 자신의 발언에 스스로 동의하는 '혼자만의 끄덕거림'을 되풀이합니다. 독자에게는 '설명'하지 않고 뜻 모를 고유명사를 의미가 있는 것처럼 늘어놓으면서 '너 따위가 내 기분을 어떻게 알겠어?' 하고 소리 지르며 주먹을 휘두릅니다.

 

 물론 그렇게 해도 작가로서 먹고살 수는 있습니다(아니, 그런 작가는 꽤 많지요. 실명을 거론하면 난처해질 테니까 참겠습니다만). 그렇지만 특정한 독자층만이 사랑하는 작가이기를 포기하고 넓은 '세계'로 나아가기 위해서는 언젠가 트라우마에서 벗어나야 합니다. 자신을 반복적으로 '그곳'으로 돌려보낸는 트라우마적 경험과 단절해야 합니다. 그러려면 어떻게 해야 할까요? 트라우마는 '공허'한 것입니다. '나는 그것을 제대로 언어화할 수 없다'는 불가능의 양태로만 존립하니까요. 술술 언어화할 수 있다면 '트라우마'라고 할 수 없습니다. 

 

 '트라우마에 대해 남김없이 이야기하는 일'이란 '사실 난 이런 경험을 억압하고 있었다'는 식의 커밍아웃은 아닙니다. 우리가 할 수 있는 일은 어떤 종류의 결락이나 결여에 대해, 다시 말해 돌이킬 수 없는 방법으로 무언가를 상실하고 깊이 훼손당한 나에 대해 이야기하는 것뿐입니다. 그것은 '도넛 구멍'에 대해 이야기하는 것과 비슷합니다. 도넛 구멍 자체를 직접 '이것'이라고 지명할 수는 없습니다. 도넛을 만들어 먹어보지 않으면 도넛 구멍의 맛이나 기능을 이해할 수 없지요. 트라우마적인 경험에 대해 이야기한다는 것은 '도넛 구멍을 포함하고 있는 도넛을 만드는' 작업과 닮았습니다.

 

 <노르웨이의 숲>에서 무라카미 하루키는 20대까지 자신에게 들러붙어 있던 트라우마적 경험에 대해 이야기하려는 자기 절개切開를 시도했습니다. 마취도 하지 않고 수술하는 것이나 마찬가지니까 상당히 쓰라린 일이었을 것입니다. 그러나 자신을 트라우마로부터 해방시키기 위해서는 어쩔 수 없이 꼭 필요한 작업이었습니다.

 

 

 

p64

 

 무라카미 하루키의 아버지는 매일 아침 전사자들을 향해 기도를 올렸습니다. 그분은 중국 대륙에서 차마 말로 표현할 수 없는 경험을 겪었습니다. 수많은 사람이 아무 의미도 없이 불필요할 정도로 잔혹하게 죽어가는 것을 가만히 보고 있을 수밖에 없는 경험이었습니다. 거의 선친은 자신의 경험을 언어화할 수 없었고, 구태여 언어화하는 것을 자제했습니다. 아마도 언어로 치환해버리면 자신의 경험이 지닌 본래의 '절박함'이 희박해질 것이라고 여겼기 때문일 것입니다. 그래서 그는 빈 동굴처럼 자기 몸에 드리운 '죽음의 그림자'를 순수한 상태로 보존하는 길을 선택하고, 평생 그런 마음을 품은 채 죽었습니다. 무라카미 하루키는 '언어화할 수 없는 것'이야말로 아버지의 'soul'이자 유일무이성을 지켜준 것이 아닐까 생각합니다.

 

 '언어화할 수 있다'는 것은 타자에게 이해받고 타자와 공유한다는 뜻입니다. 그것은 그 자신이 '그 무엇과도 바꿀 수 없음', '대체 불가능성'이라고 정의한 생명의 정의와 어긋납니다. 우리 한 사람 한 사람의 생명을 형성하는 것은 '언어화할 수 없는 것'이기 때문입니다. 적어도 '언어화하기 지극히 곤란한 것'이기 때문입니다.

 

 따라서 작가의 일은 생명을 남김없이 기술하는 것이 아닙니다. 생명에 살며시 '다가붙는' 것입니다. 무라카미 하루키 자신의 말을 빌리면 '생명과 생명을 잇는joining souls together' 일입니다.

 

 무라카미 하루키는 '아버지'를 주제로 글을 쓴 적이 없습니다. 아버지가 왜 '아버지 같은 사람'이 되어버렸는지, 그 과정을 주제로 삼아 묘사한 적이 없습니다. 그만큼 그가 다가붙으려고 하는 알이 취약하다는 말이겠지요.

 

 무라카미 하루키는 중화요리를 일절 먹지 않습니다. 먹을 수 없습니다. 그는 중국과 관련된 강박관념일지도 모른다고 어느 글에선가 썼습니다. '목구멍으로 삼킬 수 없다'는 것은 두드러지게 상징적인 행동입니다. 그는 중국에 관한 어떤 경험(그것은 자신의 경험도 아닙니다)이 이름 붙여지고, 타인의 이해를 받고, 분류당하고 잊히는 것을 거부하고 있습니다.

 

 걱초기의 명작인 <중국행 슬로 보트>는 화자인 '내'가 해를 끼칠 생각도 없는데도 계속하여 무의식적으로 중국인에게 상처를 입히는 몇몇 짧은 스토리로 구성되어 있습니다. 이 작품에는 무라카미 하루키 문학의 '핵'을 이루는 무엇인가가 있습니다. '이름 붙여지고, 타인의 이해를 받고, 분류당하고 잊히는 것을 거부하는 일'이 아버지의 생명 중 일부분을 형성하고 있다는 것, 그리고 '아들'이 그것을 무언중 물려받았다는 것, 적어도 무라카미 하루키는 그렇게 느꼈습니다.

 

p73

 트라무아는 기억이 '바꾸어 쓰기를 거부하는' 증상을 가리킵니다. 어떤 기억의 단편이 어떤 이유에 의해 동일한 형태와 의미(라기보다는 무의미)를 계속 유지하면서 일체의 수정이나 교체도 거부할 때, 우리의 정신은 기능부전機能不全에 빠집니다. 트라우마를 해제시키려면 '강력한 서사의 힘'이 필요합니다. '동일한 형태와 (무)의미를 사수하려고 하는 기억의 단편을 다른 형태, 다른 의미로 '바꾸어 읽는' 힘을 우리에게 주는 것은 바로 '강력한 서사'입니다.

 

p76

 어느 사회집단이든 각자에게 고유한 '그곳의local 아버지'를 갖고 있습니다. '신'이나 '하늘'이라는 이름의 존재이기도 하고, '절대정신'이나 '역사를 관통하는 철의 법칙성'으로 불리기도 하며, '왕'이나 '예언자' 같은 인격적인 모습을 취하기도 합니다. 그 세계에서 일어나는 일(선한 것이든 악한 것이든)을 무언가가 전일적專一的으로 '솜씨 좋게 처리하고manipulate' 있다는 믿음을 가진 사회집단은 그 사실로 인해 '부권제사회'라고 볼 수 있습니다.

 아무리 선의를 품었다 해도 약자나 박해받는 자에게 동정적이라 해도, '이 세상의 악은 조종자manipulator가 조작하고 있다'는 전제를 채용하는 모든 사회이론은 '부권제 이데올로기'입니다. '부권제 이데올로기야말로 모든 악의 근원'이라고 이야기하는 사람은 그렇게 말함으로써 '세계에는 악의 근원이 존재한다'고 '아버지에 대한 믿음'을 선포하는 자가 되어버립니다.

 왜 우리는 '아버지'라는 존재를 요청할까요? 그것은 우리가 '세게에는 질서를 제정한 자가 없다는 '진실'을 여간해서는 견딜 수 없기 때문입니다. 현실에서 우리는 아무런 의미도 없이 불행에 처하고, 이유도 없이 학대당하며, 어떤 교화의 의도도 없이 벌을 받고, 농담처럼 살해당합니다. 천재지변은 선인만 살려주고, 악인의 머리 위에는 벼락이나 화산 바위를 떨어뜨리지 않습니다. 가장 아까운 사람은 요절하고, 살아 있는 것 자체가 재앙처럼 보이는 인간은 남보다 훨씬 건강합니다. 그런 사례를 우리는 질릴 만큼 보아왔습니다.

 자, 그러면 세계는 완전하게 무질서하고, 모든 것은 무원칙하게 일어나고 있을까요? 아니, 그렇지 않습니다. 거기에는 부분적으로 '질서 같은 것'이 있습니다. 세계를 두루 포섭하는 질서를 창조할 수 있는 사람은 아무 데도 없습니다. 하지만 우선 손이 닿는 범위 안에 '질서 같은 것'을 정립할 수는 있습니다.

 사고가 과학적이고, 판단이 공정하고, 신체 감수성이 높고, 상상력의 발동을 아끼지 않는 사람들이 모여 사는 곳이 있다면, 그 작은 집단에서는 상대적으로 '어떤 질서 같은 것'이 '무질서'를 제어할 것입니다.

 물론 그것은 어디까지나 일시적이고 상대적인 승리에 지나지 않습니다. '어떤 질서 같은 것'을 일정 이상의 범위로 확장하는 일은 불가능하니까요. '질서 같은 것'은 그곳에만 있다는 조건을 받아들일 때만 질서답게 기능합니다. 보편성을 요구하는 순간, 무질서 속으로 곤두박질치기 때문입니다. 레비나스가 서술한 것처럼, 정의를 한꺼번에 사회 전체적으로 실현시키려는 운동은 반드시 숙청이나 강제수용소 중 하나를 채용하기 마련입니다. 역사는 오늘날 이 교훈에 예외가 없다는 것을 가르쳐주고 있습니다.

 우리는 '아버지'를 요청해서는 안 됩니다. 그곳의 질서를 확대하고자 할 때, 우리는 한 사람 한 사람의 '손이 닿는 범위'를 산술적으로 더하는 것 이상을 해서는 안됩니다. 무라카미 하루키의 예루살렘 연설을 빌려 표현하자면, '생명과 생명을 잇는' 것 이상을 해서는 안 됩니다.

 나는 '부권제 이데올로기'에 대항하는 축으로서 '그곳의 공생 조직'을 넘어서는 것을 원해서는 안 된다고 생각합니다. 딱히 사변적으로 그렇게 생각하는 것이 아닙니다. 경험이 그렇게 가르쳐주고 있습니다.

 

p92

 레비나스는 《전체성과 무한 Totalite et Infini》(마르티누스, 1961)의 끝부분에서 '아이 갖기'와 '여성화하기'라는 수수께끼 같은 주제를 제시했습니다. 이에 대해 일찍이 나는 다음과 같은 글을 쓴 적이 있습니다.

 

 우리는 에로스의 관계에 놓여 있으며, 죽음이 삶의 꼬리를 물고 있는 우로보로스 뱀과 비슷한 불가사의한 순환구조에 얽혀들어 있다. 왜냐하면 서로 사랑하는 사람들이 관능적으로 지향하는 바는 각 상대방의 관능이며, 상대방의 관능에 생기를 불어넣는 것은 자기 자신의 관능이기 때문이다.

 관능적인 주체의 근거는 사랑하는 사람 안에도 없고, 사랑받는 사람 안에도 없다. 사랑에 관해 에로스의 주체는 '난 ... 할 수 있다'는 기능의 용어로 관능을 이야기할 수 없다. 왜냐하면 사랑을 둘러싸고 내 주체성에 근거를 부여해주는 것은 내가 '사랑받고 있다'는 수동적 상황이기 때문이다.

 

 주체는 자신의 기능을 스스로 행사함으로써가 아니라 사랑받고 있다는 수동성을 통해 자기 동일성을 이끌어낸다.

《전체성과 무한》

 

 이때 주체의 주체성을 구성하는 것은 능동성이 아니라 수동성이며, 자신의 확실함이 아니라 불확실함입니다. 그리고 레비나스는 관능을 둘러싸고 벌어지는 결정적인 주체의 변용을 '여성화'라고 불렀습니다.

 

 주체의 불확실함은 주체의 자기 통제력에 의해서 받아들여질 수 없다. 그것은 주체의 유연화attendrissement, 주체의 여성화effemination 인 것이다. 《전체성과 무한》

 레비나스가 '여성'이라고 이름을 붙인 것은 경험적인 여성이 아니라 존재론적 범주라는 말은 이제껏 몇 번이나 반복해왔다. 이제 그것이 어떤 것인지, 겨우 그 윤곽이 뚜렷해졌다. '여성'이란 수동성을 양식으로 삼는 주체성 - 모든 주체성에 선행하는 주체성 - 의 다른 이름이다.

 우치다 타츠루, 《레비나스와 사랑의 현상학 レヴィナスと愛の現象学》, 세리카쇼보 2001

 

p115

 범속적인 '선악'의 기준이 없는 세계에서 '선'을 행하는 것, '옳고 그름'의 절대적 기준이 없는 세계에서 '정의'를 행하는 것.... 이것이 절망적일 만큼 이루어내기 힘든 일이라는 것은 누구나 알고 있습니다. 그렇지만 세계의 수많은 사람들은 지금 자신이 절망적일 만큼 이루어내기 힘든 일에 직면해 있다는 감각을 공유하고 있다고 믿습니다.

 

p119. 한국 드라마 <겨울 연가>와 《양을 쫓는 모험》의 설화론적 구조

 

 BSJ(배용준 서포터즈 인 재팬)의 주재主宰로 제1회 일본 욘욘 학회가 교토 캠퍼스 플라자에서 개최되었습니다. 그런 으리으리한 자리에 제1회 특별강연자로 나서는 영광을 입었지요. 열기에 휩싸인 회의장은 남성 2명(나와 스태프 한 사람)을 제외하고는 전원 다 여성이었습니다. 우선 개회 인사로 모두들 입을 모아 '안녕하십니까?'를 제창했습니다. 멀리 도쿄에서 참석한 두 사람에게는 '욘욘 순례자'라는 칭호를 주었고, 가장 연장자인 참가자에게는 '오늘의 최고 상궁님'이라는 칭호를 수여했습니다.

 곧바로 학회 발표가 시작되었습니다. 발표 의제는 '용준 가족의 아홉 유형 분석', '<겨울 연가> 1개생의 사랑과 눈물의 나날', '<겨울 연가> 사이드 스토리의 세계적 전개' 이렇게 세 가지였습니다. 나는 벌써 일본 프랑스어 프랑스문학회, 일불日佛 척학회, 일본 영상학회에 등을 돌린 몸입니다(지금 회원 명부에 이름이 남아 있는 학회는 일본유대학회뿐입니다). 어느 학회를 가더라도 나를 듣는 이로 상정해주는 발표를 들을 수 없었기 때문입니다. 내가 아무 흥미도 못 느끼는 주제를 가지고 전혀 이해할 수 없는 방언jargo으로 이야기하는 발표를 듣고 앉아 있는 것은 순전히 소모적일 뿐입니다. 그런 식밖에 안 되는 학회 참여는 그만두어버렸습니다. 따라서 학회 발표를 듣고 무릎을 치며 배꼽을 잡고 웃기는 참으로 오래간만이었습니다. 이토록 비평성과 유머 감각이 넘치는 발표를 듣기는 가뭄에 콩 나듯 아주 드문 일이었지요.

 지적 위신을 내세운다든가, 남의 학설을 폄하한다든가, 박식을 자랑한다는가 하는 '꼴불견'의 동기는 손톱만큼도 없었습니다. 모든 사람이 '각자 배용준에 대한 경험을 통해 어떻게 최대한의 쾌락을 이끌어냈는가' 하는 데 지성과 정서를 힘껏 쏟아붓고 있을 따름이었습니다. 순수한 동기 ... 가히 학술이란 이런 것이어야 할 것입니다.

 발표가 끝나자 내 순서가 돌아와 한 시간쯤 강연을 했습니다. '죽은 자를 어떻게 죽게 할 것인가', 다시 말해 '죽은 자와의 커뮤니케이션'이라는 관점으로 <겨울 연가>를 해석하는 내용이었습니다. 별로 알려지지 않았지만 (내가 어제 막 생각해낸 것이라 당연하지만) <겨울 연가>는 복신 몽환 노能와 동일한 극적 구성을 띠고 있습니다. 어딘가 있을 법한 곳에서 '그림자의 나라에서 온' 인물과 만나는 구조는 이런 키워드로 이야기의 막을 엽니다.

 "왜 당신은 다른 사람처럼 사라지지 않고 여기에 머무르는 것입니까?" 바꾸어 말하면 "왜 당신은 죽은 나라에서 돌아온 것입니까?" 하고 묻는 것이지요. 이 물음에 대하여 주인공은 "그러면 진실을 말씀드리지요" 하는 예고와 동시에 다리에서 모습을 감춥니다(여기에서 막간).

 그다음 막간 노래가 나오고 모습을 바꾼 주인공이 무대에 등장합니다. 다시 몸을 꾸미고 가면을 쓰고 '다른 사람'이 된 주인공이 질문을 던진 사람을 청자로 삼아 트라우마적 경험을 남김없이 털어놓으며 그 경험을 재구성해갑니다. 그리고 그의 '죽음'을 둘러싼 모든 이야기를 마쳤을 때, '그럼 뒷일을 부탁하네' 하며 망령은 황천으로 사라집니다.

 <겨울 연가>에서 이승의 주인공은 민형이고, 저승의 주인공은 준상입니다. 그리고 청자는 유진입니다. 유진이 첫눈이 내리는 서울 거리에서 민형과 만나면서 몽환 노는 시작합니다. 중간의 막간은 민형이 당하는 두 번째 교통사고입니다. 기억을 회복한 준상이 침대에서 갈라진 목소리로 '유진아' 하고 부르는 것이 막간 노래에 해당합니다. 이 한마디 말을 전환점으로 삼아 이야기는 극적인 전개를 이룩합니다. 유진을 청자로 삼은 저승의 주인공은 '자기가 누구인지' 찾아 헤매며 '트라우마적 서사(준상은 왜, 그리고 어떻게 죽었을까?)'를 재구성하는 분석적인 여행을 떠납니다. 저승의 주인공은 자신을 죽인 것이 '어머니'라는 것, 자신을 버린 것이 '아버지'라는 것, 그리고 유진 이외의 모든 친구와 지인이 준상의 죽음(그리고 민형으로 다시 태어남)을 바란다는 것을 알게 되지요. 준상이 죽지 않기를 바란 것은 이 세상에 유진밖에 없었습니다. 오로지 그녀만이 단 한 사람, 세계에 남은 유일한 '올바른 상제喪制'였습니다. 왜냐하면 유진은 준상에 관한 모든 것을 기억하고 있을 뿐 아니라 준상이 죽은 뒤에도 '준상에게 물어보고 싶은 것'이 있었기 때문입니다.

"12월 31일 밤, 넌 내게 무슨 말을 하려고 했던 거야?"

 춘천의 크리스마스트리 앞에서 커피를 들고 돌아온 유진에게 등을 돌린 채 준상이 "하고 싶었던 말이 생각났어...." 하고 말하는 장면에서 나는 계속 엉엉 울었습니다. 그런데 왜 울었는지 이제야 알았습니다. 그 순간에 상제와 죽은 자 사이에 통신 라인이 연결되었기 때문입니다.

 죽은 자의 목소리가 상제에게 닿아 '장례'가 대단원을 맞이하는 장면을 지켜보며 내 몸과 마음의 고층古層에 가로놓여 있던, '인간이 비로소 인간이 되는 순간'의 감동이 되살아나면서 눈물이 흘러넘쳤던 것입니다. 장례를 올바르게 치르면 우리는 죽은 자의 메시지를 똑바로 들을 수 있습니다. 그렇게 믿음으로써 인류의 조상은 다른 영장류와 구별되었습니다. 이 장면에서 우리는 '인간성의 기점을 알리는 표식이 세워진' 그때의 감동을 추체험하고 있는 것입니다. 올바른 장례란 죽은 자와 이야기를 나눌 수 있다고 믿는 것입니다. 그때 죽은 자들은 그들만의 세계로 사라집니다. 죽은 자는 더 이상 이야기를 나눌 수 없다고 생각하면 이 세상에 머물러 갖가지 앙화를 일으킵니다. 그러므로 올바른 상제는 죽은 자를 향해 이렇게 물어야 합니다.

 "당신은 무엇을 하고 싶었던 것입니다?"

 이 물음에는 원리적으로 답이 없습니다. 따라서 이 물은 반드시 영구적입니다. 그것으로 족합니다.

 우리가 죽은 자에게 계속 물음을 던지고 죽은 자의 응답을 기다릴 때, 불현듯 정신을 차려보니 죽은 자는 사라지고 없는 것입니다. 죽은 자에게 묻기를 그치고, 죽은 자는 더 이상 아무 이야기도 할 수 없다고 선언하면(왜냐하면 죽은 자가 무슨 이야기를 할지 우리는 알고 있기 때문에), 죽은 자는 '죽은 자의 나라'에서 돌아옵니다.

 준상이 '그림자의 나라'에서 돌아온 것은 유진 이외의 모든 이가 장례를 잘못 치른 탓입니다. '그의 장례식은 끝났어. 이제는 그를 잊어버리자' 하고 모두들 굳게 결의했기 때문입니다. 따라서 준상=민형은 '유령'으로 돌아왔습니다.

 <겨울 연가>는 '유령'이 유진의 도움으로 '성불'하는 이야기입니다. 노에서는 청자인 인물이 "당신은 무엇을 하고 싶었던 것입니까?" 하고 물으면 "나는 왜 여기로 돌아온 것입니까?" 하며 저승의 주인공이 스스로에게 되묻습니다. 죽은 자 스스로가 "나는 죽었지만 올바른 장례를 경험하지 못한 탓에 아직 제대로 죽지 못하고 있다"는 대답을 찾아낼 때까지 이 문답은 이어집니다. "나는 '내가 이미 죽었다'는 말을 당신에게 전하기 위해 돌아왔다"는 말을 죽은 자 자신이 발견했을 때, 장례는 끝납니다.

 죽은 자 자신이 스스로의 죽음을 인정하지 않으면 이야기는 끝나지 않습니다.

 준산이 겨울 바다에서 모든 추억을 바다에 버리는 대목에서 '트라우마적 기억의 재구성'이라는 분석적 여정이 완료됩니다. 따라서 그 이후의 에피소드는 서사적 구조로 볼 때 불필요하지요. 더 이상 어떤 인위적인 시도도 준상을 산 자의 세계로 데리고 올 수 없습니다.

 드라마의 마지막 편에서 두 사람이 만나는 해변에 지은 집의 풍경은 '그림자의 나라=죽은 자의 나라'에서 준상이 꾸는 '꿈'입니다. 여기에 이르는 기나긴 이야기가 없었다면 준상은 그 '꿈'을 꿀 수 없었을 것입니다. '죽은 준상=민형'은 유진의 올바른 장례를 통해 겨우 죽은 자의 나라에서 그 꿈을 볼 권리를 손에 넣었던 것입니다.

 나는 강연에서 이런 이야기를 했습니다.

 그 자리에 함께 한 '배용준 가족' 여러분은 '준상은 죽은 자'라는 대담한 가설에 어깨를 축 늘어뜨리며 가슴 아파했습니다. 냉정한 분석을 발표하여 송구스러웠습니다. 그러나 서사론의 측면에서는 '이것 말고는 해석의 가능성이 있을 수 없다'고 말씀드리고 싶을 정도로 내 분석은 정합적입니다. 올바른 장례를 치러주지 않은 죽은 자는 상제가 짊어져야 할 산 자의 삶으로 계속 찾아온다는 서사적 유형은 인류의 발생만큼 오래된 것이니까요. 그래서 온갖 문학작품에는 그런 유형이 되풀이하여 나타납니다

 자, 여기까지 읽으면 예감이 스치는 사람도 꽤 많지 않을까요. <겨울 연가>와 아주 닮은 설화구조를 지닌 작품으로 《양을 쫓는 모험》을 떠올릴 수 있다는 것을 말입니다. '쥐'는 '내'가 올바르게 추도하는 데 실패한 죽은 자입니다. 쥐는 제대로 죽을 수 없었습니다. 그 때문에 '나'를 향해 알 수 없는 여러 신호를 보냅니다. '나'는 그 신호를 받아들여 "쥐는 도대체 내게 무슨 말을 하고 싶었을까?" 라는 물음을 스스로에게 던집니다. 최선의 노력을 다해 '쥐'의 메시지를 들으려고 애쓸 대 '올바른 장례'의 집행이 이루어집니다.

그러나 그 메시지가 무슨 의미인지, 물론 '나'는 끝까지 이해할 수 없습니다. 알 수 있는 것은 '그것이 무엇을 의미하는 메시지인지는 이해할 수 없지만, 그것이 메시지라는 것만은 이해할 수 있는 메시지'를 보내는 것은 죽은 자뿐이라는 점입니다.

 '나'는 쥐에게 몇 가지 '심부름'을 명령받습니다. 또는 심부름을 명령받았다는 해석을 채용합니다. 양의 사진을 공개하는 것, 쥐가 맡긴 편지를 그녀에게 전달하는 것, 마지막에 시계의 태엽을 감는 것... 이 모든 심부름에 대해 '나'는 그 의미를 알지 못합니다. '나'는 그저 심부름을 충실하고 성실하게 이행할 뿐입니다. 이를테면 두 사람의 고향인 항구까지 편지를 전달할 때 '나'와 그녀는 이런 대화를 나눕니다.

 "고작 이것 때문에 도쿄에서 일부러 온 거에요?"

 "뭐, 그렇지요."

 "친절하군요."

 "그런 생각은 해본 적이 없는데... 습관적일 뿐이에요. 만약 입장이 바뀌었다면 그 사람도 그렇게 했을 거라고 생각하고요."

 "그 사람이 그렇게 해준 적이 있어요?"

 나는 고개를 저었다. "하지만 우리는 오랫동안 언제나 서로 비현실적인 폐를 깨쳐왔어요. 그것을 현실적으로 처리할지 안 할지는 또 다른 문제지요."

 "그런 식으로 생각하는 사람은 없지 않을까..."

《양을 쫓는 모험》

 

 그녀의 말대로 '그런 식으로 생각하는 사람은 없습니다.' 그것이 '내'가 쥐의 상제로 뽑힌 바로 그 이유입니다. 왜냐하면 '나'는 별달리 편지를 그녀에게 전해달라고 쥐에게 부탁받은 것은 아니기 때문입이다. 누구한테 부탁받지도 않은 일을 해주는 것이 자신의 의무인 것처럼 생각하는 인간만이 장례를 치를 수 있는 법입니다.

 "편지를 갖고 왔어요." 나는 말했다.

 "나한테요?" 그녀가 말했다.

 전화 소리는 너무 먼데다가 혼선까지 일으켜 필요 이상으로 큰 못소리로 이야기해야 했고, 그 때문에 서로가 하는 말은 미묘한 뉘앙스를 잃어버렸다. 비바람 부는 언덕 위에서 코트 깃을 세우면서 이야기하는 듯했다.

 "사실은 내 앞으로 온 편지인데, 어쩐지 당신 앞으로 보낸 것이 아닐까 하는 생각이 들어서요."

 "그런 생각이 들었군요."

 "네, 그래요." 나는 말했다. 그렇게 말해버리고 나니 자신이 아주 멍청한 짓을 하는 것 같았다.

 

 별장에서 '나'와 최후의 이별을 할 때, 쥐는 비로소 그가 보낸 신호와 그 의미에 대해 밝힙니다(그 설명은 사태를 절반쯤밖에 설명하지 못했지만).

 "나는 제대로 된 나 자신으로 너하고 만나고 싶었어. 나 자신의 기억과 나 자신의 연약함을 지닌 나 자신으로서 말이야. 너한테 암호 같은 사진을 보낸 것도 그 때문이었어. 만약 우연이 너를 이곳으로 데려와준다면 나는 마지막으로 구원받을 수 있다고 말이지."

 "그래서 구원은 받았어?"

 "구원받았어." 쥐는 조용히 말했다.

 

 나는 이 대화와 <겨울 연가>의 마지막 장면을 겹쳐놓고 싶다는 욕구를 억누를 수 없습니다. 바다에 잠기는 석양을 바라보면서 서로 껴안을 때, 두 사람이 발화하는 드라마 최후의 언어로서 익것보다 더 어울리는 것은 없을 것입니다.

 "난 계속 그렇게 생각했어. 만약 우연이 너를 이곳으로 데려와준다면 난 마지막으로 구원받을 수 있다고 말이지."

 "그래서 구원은 받았어?"

"구원받았어."

 

p129

 무라카미 하루키는 《해변의 카프카》의 서평에 대해 이런 이야기를 했습니다.

 

 줄거리를 대강 늘어놓은 서평은 좀 곤란하지요. 특히 결말까지 밝혀 버리는 것은 문제가 있습니다. ... 일반론적으로 말해 서평은 사람들의 식욕을 돋우는 것이어야 한다고 생각합니다. 비록 그것이 부정적이라고 해도 '이렇게까지 심한 말을 듣다니, 어떤 작품인지 좀 읽어보고 싶어지는군' 하는 마음이 들도록 해주었으면 합니다. 그것이 서평가의 솜씨가 아닐는지요.

 

 

 반대로 '식욕을 돋우지 않는 비평'이 어떤 것인지를 생각해보면 알 수 있을 것입니다. '줄거리를 줄줄 늘어놓거나 결말까지 밝혀버리는' 비평이 바로 몹쓸 비평입니다. 한마디로 이야기의 표층을 시간 배열 그대로 베끼며 결말까지 더듬어가면 '작가가 하고 싶은 말'이나 '주제'를 알 수 있다고 굳게 믿는 인간이 쓴 글, 그것이 쓸데 없는 비평이지요.

 '식욕을 돋우는 비평'은 그런 것이 아닙니다. 그것은 '수수께끼'를 중심으로 펼쳐 보이는 안내presentaion를 말합니다. 어떤 책 전체를 '수수께끼'로 가득 찬 텍스트로 여기는 독해를 가리킵니다.

 그렇게 책을 읽어내는 사람은 표지를 보면서부터 '오호, 이 표지 색깔에는 무언가 숨은 뜻이 있겠군...' 하며 고개를 갸웃하고 목차를 훑어보고는 설레는 마음으로 "낮 1시에 시작한 면접은 부인 5명을 끝내고 났을 때 저녁 6시가 되었다"는 첫 페이지의 첫 줄에 벌써 감탄의 숨을 몰아쉬며 '흠잡을 곳이 없는 첫머리로군. 이래야 문학이지' 하며 감동합니다. 그리고 서둘러 책을 읽습니다.

 모든 대목에서 툭하면 문학적 감흥의 실마리를 찾아낼 수 있는 독자야말로 '식욕을 돋우는 비평'을 쓸 수 있는 글쓴이일 것입니다. 그런 비평이 좋은 비평입니다.

 지금은 문학에 관한 이야기를 했지만, 다른 분야의 비평에 대해서도 똑같이 말할 수 있습니다. 비평에는 '미지未知'에 초점을 맞춘 비평과 '기지旣知'에 무게중심을 두는 비평, 두 가지가 있습니다. 대상이 문학작품이든 살아 있는 사람이든 별반 다를 바 없지요. 비평하는 인간은 '거기에 있는 미지의 요소'에 마음이 끌리는 동시에 '거기에 있는 기지의 요소'에도 감응합니다. 

 후지산을 보고 '오오, 보자기에 그려진 그림처럼 예쁘구나'하는 비평은 '기지로 환원하는' 비평입니다. 이런 방식을 웃기다고 생각하는 사람도 있는데 '감축減縮하는 비평법'은 때로 필요하며 유용하기도 합니다. '뭐, 그렇지. 세상은 그런거야'하는 뒷방 늙은이 같은 태도도 대체로 감축형 또는 환원형 비평에 속합니다.

 이러한 비평의 대표자로 아가사 크리스티가 형상화해낸 미스 마블을 꼽을 수 있습니다. 이 노파는 태어나 자란 마을에서 한 발자국도 외부에 나간 적이 없는 세상 물정 모르는 여자인데, 경탄할 만한 기억력으로 '옛날 이 마을에서 일어났던 아주 비슷한 사건'과 결부지어 온갖 사건의 진상을 밝혀냅니다.

 인간의 욕망이나 환상의 구조가 대단히 단순한 도식의 조합으로 이루어졌다는 것은 틀리없는 사실입니다. '모든 사건을 기지로 환원하는 비평'은 사실 '인간의 정신은 숙명적으로 빈곤하다'는 통렬한 진리에 입각해 있습니다. 이런 식으로만 인간 세계의 현상을 이야기하는 것은 아무래도 부족합니다.

 '아무리 맛있는 요리도 단지 짐승의 고기와 식물과 기름의 혼합에 지나지 않는다'고 하면 어떻겠습니까? '결국은 ... 에 지나지 않는다'로 끝내는 비평적 어법은 어떤 측면에서는 속이 시원합니다. 그러나 그것으로는 한정된 식재료를 조합하여 훌륭한 요리사만 낼 수 있는 기적의 '맛'에 대해서는 논할 수 없습니다.

 

 p133

 무라카미 하루키는 '문단'에서는 고립되어 있는 작가입니다. 등장할 때부터 순문학의 비평가들은 그를 낮게 평가했지요. '이상할 정도로' 낮게 평가했습니다. 무라카미 하루키를 긍정적으로 받아들이는 층은 《브루투스BRUTUS》나 《보물섬》을 읽는 사람, '대중적이고 가벼운 도시 지향의 경박한 놈들'이라는 고정관념이 나왔고, 그것이 결국 정설이 되어버렸습니다.

 분명 1980년대 고도소비사회라는 분위기 속에서 무라카미 하루키가 등장한 것은 사실입니다. '대중적이고 가벼운' 젊은이들이 열광적으로 지지한 것도 사실일 것입니다. 그렇지만 누구의 지지를 받았느냐에 의해 그 작품의 사회적 성격이 결정된다는 추론은 합리적이지 않습니다. 김정일이 할리우드 영화를 열렬히 좋아한다고 해서 할리우드 영화가 북한 취향이라고 추론하는 사람은 없잖아요.

 그런데도 무라카미 하루키가 어떤 부류의 도시생활자들로부터 '마치 내 이야기를 쓴 것 같다'는 공감(상당할 정도의 착각이라고 해도 좋을)을 얻고 있다고 해서 적지 않은 문예비평가들은 대기업 광고회사인 덴쓰와 최대 대중잡기 출판사인 매거진하우스의 미디어 컨트롤에 의해 선동당하는 어리벙벙하고 머리 나쁜 독자들을 위한 문학이라고 그의 문학을 규정해버립니다. 그러한 판정은 데뷔 이후 사반세기가 지났는데도 무라카미 하루키에게 '저주'처럼 들러붙어 있습니다.

 

 오늘날 무라카미 하루키의 작품은 세계 각국ㄱ의 언어로 번역되어(영어, 불어, 독어는 말할 것도 없고 한국어, 중국어, 러시아어, 폴란드어, 인도네시아어, 아이슬란드어, 터키어에 이르기까지) 해외의 숱한 문학 연구자가 그의 작품에 담긴 매력을 해명하고자 애를 쓰며 무라카미 하루키의 스타일을 모범으로 삼습니다. 이미 영어권을 중심으로 '무라카미 하루키 추종자'까지 출현하기 시작했지요. 《해변의 카프카》는 2005년 뉴욕타임스의 '올해의 베스트 10'에 뽑혔고, 2006년에 그는 '프란츠 카프카상'을 수상했습니다. 그가 현재 노벨문학상에 가장 가까운 일본 작가라는 점에 세간의 의견은 일치하지요. 그럼에도 일본의 비평가들 가운데 무라카미 하루키가 세계적인 대중성을 획득한 이유를 냉정하게 해명하고자 노력하는 사람은 놀랄 만큼 적습니다. 아무리 생각해도 이상한 노릇입니다.

 비평적 지성이란 본성적으로 '잘 설명할 수 없는 것'에 강하게 끌리는 법입니다. 간단하게 설명할 수 있는 것만 골라내어 정형적인 틀에 끼워 맞춘 다음 좋으니 나쁘니 평가를 내리는 것으로 비평이 끝나버린다면, 이 세상에 비평 같은 것이 없어도 아쉬울 사람은 없습니다(적어도 난 아쉬울 것 없어요)

 '무라카미 하루키 문제'는 비평가들에게 이중으로 곤란한 질문을 들이밀고 있다고 생각합니다. 하나는 '어떤 이유로 하루키는 세계적 대중성을 획득할 수 있었는가?'라는 물음이고, 또 하나는 '왜 그것을 일본의 비평가들은 설명할 수 없는가(또는 전혀 설명하려고 하지 않는가)?'라는 물음입니다. 일본의 비평가 중에 내가 납득할 만한 대답을 해주는 사람이 있다면, 그것은 《무라카미 하루키 옐로 페이지》의 필자 가토 노리히로뿐일 것입니다.

 그는 《양을 쫓는 모험》 발표 직후부터 현재에 이르기까지 무라카미 하루키에 대해 무려 수백 페이지에 달하는 비평을 써냈고, 이 책을 포함하여 연구서를 네 권이나 출판했습니다. 가토 노리히로가 작가 한 사람에 대해 연구서를 네 권이나 낸 일은 없지요. 무라카미 하루키는 사반세기에 걸쳐 그에게 매혹적인 '수수께끼'였던 셈입니다.

 가토 노리히로의 《무라카미 하루키 논집》 앞머리에 수록된 <자폐와 쇄국 : 무라카미 하루키의 《양을 쫓는 모험》>은 1982년 《양을 쫓는 모험》이 출간된 직후에 쓰였습니다. 그가 쓴 최초의 무라카미 하루키론이지요. 이 글에서 그는 《양을 쫓는 모험》의 구성적인 하자에 주목하여 꽤 신랄하게 비판했습니다. 그러나 그것은 '그러니까 별 볼일 없다'는 결론을 내리기 위한 비판이 아니었습니다. 만약 무라카미 하루키의 소설이 성립하기 위해 이 결점을 피할 수 없다면, 그것은 어떤 상황적 요청에 의한 것일까라는 물음을 통해 한 단계 더 높은 단계로 나아가기 위한 비판이었습니다.

 나는 이러한 비평적 태도를 높이 삽니다. 작품의 좋고 나쁨을 평가하는 데 급급하지 않을 뿐 아니라 문학의 근본적인 물음을 제기하고 있기 때문입니다. 다시 말해 한쪽에 작품을 쓰지 않고서는 배기지 못하는 저자가 있고, 다른 한쪽에는 그것에 깊이 공감하는 독자가 있을 때, '작가와 독자에게 이런 일이 왜 벌어졌을까?'를 묻는 것입니다.

 작품의 좋고 나쁨에 대한 문학의 판정에는 다양한 기준이 있는 것이 당연합니다. 일찍이 '계급적 관점이 있느냐 없느냐'가 문학작품을 평가하는 기준이었던 시대가 있었지요. 그 후에도 '젠더 의식이 있느냐 없느냐', '피억압자에 대한 양심의 가책이 있으냐 없느냐', '타자와의 소통을 시도하고 있느냐 아니냐' 등등, 문학작품에 여러가지 잣대를 들이댔습니다. 어떤 잣대가 올바른지 나는 알지 못합니다. 각각의 잣대로 문학작품의 좋고 나쁨을 말하는 것은 비평가의 자유에 속하고요. 그러나 어떤 '잣대'를 사용하더라도 어느 작가의 작품이 동시대의 독자에게 우선적으로 선택받는 이유를 해명하는 일은 비평가의 임무입니다.

 

 일본의 비평가들이 무라카미 하루키의 세계성이 어디에서 유래하는지 살피려고 하지 않는 것은 아마도 그러한 물음을 제기하는 것 자체가 비평가들의 '잣대'를 무효화해버리기 때문일 것입니다. '이쪽이 성립하면 저쪽이 성립하지 않는' 상대적인 관계가 양자 사이에 존재한다고 보아야 합니다. 그렇게 생각하지 않으면 무라카미 하루키에 대한 비평가들의 조직적인 '무시'를 설명하기 어렵습니다.

 

p139

 진실로 '예민한 작가'는 그의 시대에 과잉으로 존재하는 것에 대해서는 별로 쓰지 않습니다. 그런 것을 글로 쓴다 해도 소용없기 때문입니다. 배금주의적인 샐러리맨을 실감나게 묘사한다 해도, 정서적 발달이 뒤떨어진 비상식적인 청년들의 일상을 세밀하게 그려낸다 해도, 독자들이 그런 작품에 깊이 감동을 받을 리 없습니다(감동을 보이는 것은 문학상의 심사위원 정도겠지요).

 실로 뛰어난 작가는 그 시대가 심하게 결여하고 있는 대상에 대해, 그것을 결여하고 있다는 것 자체를 의식하지 못하는 대상에 대해, 그것이 결여되어 있다는 것을 알아채지 못한다는 사실로 인해 그 시대의 성격이 규정되는 것에 대해, 글을 씁니다. 예컨대 그 사회의 '그림자'에 대해...

 

p141

 언제나 그렇지요. '지금 실로 혁명적 변동이 엄숙하게 진행되고 있다'고 큰소리로 이야기하고, 거기에 숱한 사람들이 만족스럽게 화답할 때 혁명적 변동이 일어난 일은 역사상 한 번도 없습니다. 지적 의미에서 근본적인 변동이 일어날 때 만약 그것이 진정 근본적인 사건이라면, '무엇인가 일어나고 있지만 그것을 이야기할 언어가 아직 없는' 사태가 벌어집니다. 그리고 '그것을 말로 나타낼 언어가 아직 없다'는 결성적 상황 자체가 주제로 떠오를 것입니다.

 

p144

 우리가 세계의 모든 사람들과 '공유'하고 있는 것은 공유하고 있는 것이 아니라 실은 함께 '결여'하고 있는 것입니다. 비평가들은 이러한 역설을 깨달았습니다. '내가 알고 경험할 수 있는 것은 다른 사람도 알고 경험할 수 있다'는 것을 설명했기 때문에 무라카미 하루키가 세계성을 획득한 것이 아닙니다. '내가 알지 못하고 경험할 수 없는 것은 다른 사람도 알지 못하고 경험할 수 없다'는 것, 오로지 그것만을 이야기했기 대문에 세계성을 획득했습니다.

 우리가 '함께 결여하고 있는 것'이란 무엇일까요? 그것은 '존재하지 않는 것'임에도 우리 산 자의 행동이나 판단 하나하나에 심오하고 강렬하게 관계를 맺는 것, 단적으로 말하면 '죽은 자들의 절박함이라는 결성적 리얼리티입니다.'

 산 자와 산 자가 관계를 맺는 방식은 세계 각지마다 다 다릅니다. 그렇지만 죽은 자가 '존재와는 다른 방식으로autrement qu'etre' 산 자와 관계를 맺는 방식은 세계 어디에서나 똑같습니다. '존재하지 않는 것'은 '존재의 어법'에 의해, 다시 말해 각각의 '맥락'이나 '국어'에 의해 결코 침범당하지 않기 때문입니다.

 무라카미 하루키는 소설의 처음부터 끝까지 죽은 자가 결성적 방식으로 오로지 산 자의 삶을 지배한다는 것만 계속 써왔습니다. 그 이외의 주제를 선택한 적이 없을 만큼 과잉된 절도(이런 것이 있답니다!)야말로 무라카미 하루키 문학의 순도를 높이고, 그의 문학적 세계성을 담보하고 있습니다.

 따라서 가토 노리히로는 최초의 무라카미 하루키론을 통해(아마도 가토 노리히로 자신도 깨닫지 못하는 사이에) 무라카미 하루키 문학의 본질을 꿰뚫는 결정적인 언어를 기술했다고 봅니다. 그는 올바르게도 이곳에는 '인간이 살지 않는다'고 적었던 것입니다.

 

p202

 무라카미 : 걸핏하면서 일본에서도 '무라카미 하루키가 일본 문학을 엉망으로 만들었다'는 이야기를 듣습니다. 솔직히 말하면 나 같은 게 엉망으로 만들 수 있는 문학이라면 처음부터 엉망이 아니었겠느냐고 생각했습니다. 뻔뻔하게 말하자면요.

 

p267

 

《호밀밭의 파수꾼》이라는 소설이 무라카미 하루키에서 미친 가장 큰 영향은 '호밀밭의 파수꾼'이 어떤 인간에게 '천직'으로 느껴진다는 경험이었다고 생각합니다. 무라카미 하루키는 아마도 청년기의 어느 단계에 자기가 하는 일이 '보초', '파수꾼' 또는 '야경꾼night watchman'이라는 것을 어렴풋하게 감지했을 것입니다.

《애프터 다크》는 두 사람의 '보초(다카하시 군과 가오루 씨)'가 '야경'을 돌다가 경계선의 끝까지 와버린 젊은 여자들 중 한 명을 '끝 모를 어둠'에서 데려오는 이야기입니다. 그들의 자그마한 노력 덕분에 몇몇 파탄이 치명적이 되기 전에 봉합되어 세계는 한때의 균형을 회복합니다. 그렇지만 이 불안정한 세계에는 한쪽 진영의 '최종적인 승리'도 없을뿐더러, 천상적인 것의 기적적 개입deus ex machina에 의한 해결도 기대할 수 없습니다. 보초들의 일은 지극히 단순합니다. 그것은 《댄스 댄스 댄스》에서 '문화적 눈 치우기'라고 일컬어진 일과 비슷합니다.

 누구나 하고 싶어 하지 않지만 누군가 하지 않으면 나중에 누군가가 곤란해지는 일을 특별한 대가나 칭찬을 기대하지 않고 혼자서 묵묵히 해두는 것... 이러한 보잘것없는 '눈 치우기'를 말없이 해나가는 것밖에 '사악한 것'의 침입을 저지할 방법은 없습니다.

 정치적 격정이나 시적 법열法悅이나 성적 황홀감은 '사악한 것'의 대립항이 아니라 종종 공범자입니다. 세계에 간신히 균형을 유지시켜준 것은 '보초'들의 '적절한' 행동인 것입니다. 그러니 일은 야무지고 성실하게 합시다.

 의식주는 생활의 기본입니다! 가족은 소중하게 여기고, 고운 말을 씁시다!

 이것이 무라카미 하루키 문학의 '교훈'입니다. 물론 이것만으로는 문학이 되지 못하지요. 하지만 그것이 '초월적으로 사악한 것'에 대항하여 인간이 제시할 수 있는 최후의 '인간적인 것'이라는 지점에 다다르면, 서사는 급작스레 신화적 오라aura를 띠게 됩니다.

 그러면 노동자적 에토스ethos에 바탕을 둔 일상과 우주론은 어떻게 접합하느냐고요? 물론 그것은 '장어'가 나오기 때문이지요(어이쿠, 장어를 모르신다고요? 그러면 곤란한데...)

 어찌 되었든 우리의 평범한 일상 자체가 우주론적 드라마의 '현장'이라는 것을 실감하게 해주기 때문에 사람들은 무라카미 하루키를 읽으면 조금 기운이 나서 청소하거나 다림질하거나 친구에게 전화를 겁니다. 그것은 하늘만큼 땅만큼 중요한 일이라고 생각합니다.

 

p297

 여자들이 '떠난 이유를 짐작하기 어려움'에 대해 가장 잘 와 닿도록 설명한 대목이 <독립기관>에 나옵니다.

 

 모든 여성에게는 거짓말을 하기 위한 특별한 독립기관 같은 것이 선천적으로 갖추어져 있다는 것이 도카이의 개인적 견해였다. 어떤 거짓말을 어디에서 어떻게 할까. 그것은 사람에 따라 조금씩 다르다. 그러나 모든 여성은 어느 시점에 반드시 거짓말을 하며, 그것도 중요한 일에 거짓말을 한다. 중요하지 않는 일에도 물론 거짓말을 하지만 그야 그렇다 치고, 가장 중요한 때 거짓말을 하는 데 주저하지 않는다. 그리고 그때 대부분의 여성은 안색 하나, 목소리 하나 변하지 않는다. 왜냐하면 그것은 그녀가 아니라 그녀에게 갖추어진 독립기관이 멋대로 하는 일이기 때문이다. 그렇기 때문에 거짓말을 함으로써 그녀들의 아름다운 양심이 고통을 받거나 그녀들의 곤한 잠이 방해를 받는 일은 - 특수한 예외를 별도로 친다면  일어나지 않는다.   <여자 없는 남자들>

 

 화자는 "나도 도카이 씨의 의견에 기본적으로 찬성할 수밖에 없다"고 커밍아웃을 합니다. "아마 나와 그는 각기 다른 개별적인 등반 규칙을 더듬어 그리 즐겁지도 않은 똑같은 산꼭대기에 올라갔다는 말이 될 것이다"라고.... 나 역시 도카이 씨와 화자에게 '찬성할 수밖에 없습니다. 그리고 이는 작가 자신을 포함한 모든 남자들이 어느 날 도착하게 될 '산꼭대기'일 것입니다.

 내가 여기에 덧붙이고 싶은 점은 이렇습니다. 그녀들이 그러한 방식으로 거짓말을 하는 까닭은 그것이 어떤 유형의 거짓말보다 남자들이 깊이 상처 입히기 때문이라는 것입니다. 의미 있는 거짓말이라면 이해가 갑니다. 누군가를 함정에 빠뜨리려는 거짓말이라면 그것도 이해할 수 있습니다. 그런 합리적인 거짓말이라면 남자들은 상처를 입더라도 그렇게 심각한 상처를 입지는 않습니다. 여자가 왜 거짓말을 하는지, 그 의미만은 알기 때문이지요. 그녀가 자기가 가진 무엇을 훼손시킬 작정이었는지, 자기로부터 무엇을 빼앗아갈 의도였는지, 자신의 어디를 미워했는지 알기 때문입니다.

 '타깃'만 확인할 수 있다면 거기에 약을 바르든지, 부목을 대든지, 경우에 따라서는 그 부분을 절단함으로써 남자들은 살아남을 수 있습니다. 하지만 '독립기관'이 하는 거짓말에는 합리성이 없습니다. 아무런 의미도 없습니다. 그것은 순수하게 남자를 상처 입히는 효과만 있을 뿐, 거짓말을 하는 여자에게는 어떠한 이익도 가져다주지 않습니다. 아무런 의미도 없고, 아무도 행복하게 하지 않고, 누구도 그 의미를 이해할 수 없는 순수한 악의입니다.

 그런 것이 이 세상에는 있습니다. 확실히 그것은 알아두는 편이 좋습니다. 사실 이제까지 무라카미 하루키는 다양한 작품에서 '순수한 악의'를 그려왔습니다.('어둠'이나 '리틀 피플'이나 '지렁이'나 '와타나베 노보루' 같은 표상을 통해). 그렇지만 이 단편집에 나오는 순수한 악의는 그러한 연극적이고 다채로운 형상을 띠지 않습니다. 여기에서는 대개 그것이 '단순한 여자의 부재'에 지나지 않습니다. 그녀들의 부재는 결정적인 타이밍에, 결정적인 장소에서, 결정적인 방식으로 남자를 한 방에 넘어뜨립니다. 그런 일도 일어날 수 있습니다. 그것도 알아두는 편이 좋습니다.

 그리고 작가는 또 하나 중요한 경험지經驗知를 덧붙이고 있습니다. 상처를 입을 때에는 제대로 상처를 입는 것이 좋다는 것입니다. 울부짖는다든가, 매달린다든가, 원망에 찬 말을 한다든가, 얼굴을 똑바로 쳐다보며 욕을 한다든가, 누군가 '책임자'를 찾아내어 처벌하려고 한다든가... 어쨋든 무엇이든 좋으니 자존심을 잃는 행동을 자제하지 않는 편이 좋습니다. 그런 행동을 끝까지 자제한 남자는 그 사실에 의해 더욱 깊이 상처 입습니다.

 자지가 얼마나 깊이 그 여자오 맺어져 있고, 여자가 떠난 탓에 자신이 얼마나 갈가리 찢겨버렸는지 커밍아웃을 하는 편이 더 낫습니다. 자기가 무너지는 모습이 아무리 꼴 보기 싫어도 몸으로 표현하는 편이 차라리 낫습니다. 자기가 그 여자에게(정확히 말하면 그 여자의 '독립기관'에게) 얼마나 무의미하고 무가치한 존재였는가를 받아들이는 편이 낫습니다. 그런 뜻에서 <독립기관>의 도카이 의사가 상처 입는 방식은 '정통적'입니다('이상적'이라고는 도저히 말할 수 없지만요).

 '여자에게 버림받은 남자들' 중에서는 어떤 의미로 도카이 의사가 가장 올바르게 상처를 받아들였다고 생각합니다. 실제로 그는 그렇게까지 고통스럽지 않게 죽었을 것입니다. 거꾸로 가장 괴로운 경험의 당사자는 <기노>의 주인공 기노입니다. 그는 어디에서 잘못되었을까요?

 

 헤어진 아내나 그녀와 잠을 잔 옛날 동료에 대해 분노나 원망의 마음은 어쩐지 생기지 않았다. 물론 처음에는 강한 충격을 받았고 제대로 생각을 할 수 없는 상태가 얼마 동안 계속되었지만, 나중에는 '이것도 어쩔 수 없는 일이겠지' 하는 식이 되었다. 결국 그런 일을 당하도록 되어 있었던 것이다. <여자 없는 남자들>

 

 '이것도 어쩔 수 없는 일이겠지' 하고 받아들이는 방식은 '순수한 악의'에 대해 너무나도 무방비 상태입니다. 그것은 자제심과 자존심이 강한 남자가 절망에 빠지는 최악의 함정입니다. 그것에 의해 '악의'는 갈 곳을 잃습니다. 받아줄 곳을 잃어버립니다. 그리고 받아줄 곳을 잃은 악의는 증상으로서 계속 돌아옵니다. 영원토록....

 경험적으로 말하면 악의가 몸에 끼칠 때 할 수 있는 '가장 괜찮은' 대응책은 그것을 '잘게 나누어' 치사량이 한 사람에게 작용하지 않도록 주변으로 분산하는 것입니다. '팔방으로 화풀이를 한다'는 것은 이른바 '악의를 여덟으로 쪼개어 하나하나가 치사량에 이르지 않도록 안배한다'는 뜻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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