혐오의 프레임으로 적과 나를 가르는 전략은 우리 보수우파의 정치적 스탠스를 강화하는 방법으로 대한민국 건국 이후 줄곧 쓰이던 방법론이다.

 

대표적인 것이 빨갱이 프레임이며 이를 통해 친일보수우파는 매국노의 이미지를 상쇄시켜나갔다.

 

이 혐오의 프레임에 의해 대한민국의 모든 정치,사회,경제의 문제가 생겨났다고 해도 과언이 아니다.

 

특별히 이 책은 한국 보수개신교가 중심이 된 혐오의 프레임에 대해 진정한 예수그리스도의 사랑의 정신에 위배되는 한국개신교의 도그마적 위선에 대해 이야기하고 있다.

 

대한민국의 미래를 위해서는 모든 혐오의 프레임을 벗어야 할 필요가 있는 때에 하나의 제시로서 이 책의 가치가 있다.

 

----------------------

 

p95.

 제자들이 예수 십자가처형 사건을 전후로 배반자가 됐음은 주지의 사실이다. 그러나 인생 말년의 행보는 이와는 완전히 결이 달랐다. 기록된 전승에 따르면 그들은 대부분 '순교'했다. 첫 번째 순교자 세배대의 아들 야고보는 칼로 목이 베여 죽었고(사도행전 12:1-2), 마태는 칼에 맞은 후 시름시름 앓다 죽었으며, 알패오의 아들 작은 야고보는 돌 맞아 중상을 입은 가운데 끝내 참수당해 죽었고, 유다와 시몬은 예수처럼 십자가형을 당해 죽었고, 도마는 칼에 찔려 죽었다. 예수님의 동생 야고보는 30m 높이에서 던저졌고 그래도 살아 있자 곤봉에 맞아 죽었다. 이야기 들어보니 안드레는 십자가에서 죽을 때 "이 순간을 기다렸다"라며 행복해했다고 한다. 베드로는 예수님보다 더 고통스럽게 죽겠다며 거꾸로 십자가에 달려 죽었다고 알려져 있다. 물론 사도들이 예수를 끝까지 따랐다는 점을 강조하기 위해 지어낸 이야기 또는 설화로 보는 관점도 있다.

 

p101.

 열두 명의 남성 제자처럼 예수를 뒤따른 여성 제자가 적지 않아보인다. <누가복음> 8장 2-3절에 나온 막달라 마리아, 요안나, 수산나라는 여성이 그렇다. 그들은 특정시기에 동네에 나타나신 예수를 한 차례 잘 대접한 정도가 아니다. 그를 수행하며 가사일까지 도운 것으로 추정된다. 식사, 빨래를 도맡아 한 정황이 있다는 것이다. 이중 요안나는 (세례자 요한을 처형했던 헤롯 영주 밑에서 일하던) 공직자를 남편으로 둔 고관의 아내였다.

 그렇다면 성서는 왜 이 여성들의 존재를 잘 드러내지 않았을까? 하나님은 온전한 존재이지만, 성서의 기자는 온전하지 못하다고 보면 된다. 고대 히브리어나 아람어는 여성을 일컫는 여성명사가 없다고 한다. 오병이어 사건만 보더라도 복음서를 기록한 사람은 '장정인 남성'만 셈했다. 무엇을 의미하나. 여성은 투명인간이었다.

 하지만 김근수 해방신학연구소장은 <가난한 예수>(동녁, 2017)에서 "예수에게 여성 제자가 실제로 있었다. 그런데 여성제자를 가리키는 단어가 네 복음서에 없으므로 예수에게 여성 제자가 없었다고 우기는 사람들이 있다. 존재에서 출발하여 단어를 추적해야 옳은데, 단어에서 출발하여 존재를 추정하는 잘못된 방법을 그들은 택하고 있다"라고 지적한다.

 

p107.

 함석헌 선생이 고난에 대해 풀이했던 말이다.

 

 고난이란 무엇인가. 영이 물질에 대하여, 양심이 욕(망)에 대하여, 생명이 사망에 대하여 항쟁하는 일이다. 생명이 그 반대물을 완전히 극복하는 때까지 고난은 없을 수 없다. 고난이란 살았다는 말이요, 생명이 자란다는 말이다. 도덕적으로 진리적으로 자란다는 말이다. 고난 없이 혼의 완성은 있을 수 없다.

 

 고난은 인생을 위대하게 만든다. 고난을 견디고 남으로 생명은 일단의 진화를 한다. 핍박을 받음으로 대적을 포용하는 관대가 생기고, 궁핍과 형벌을 참음으로 자유와 고귀를 얻을 수 있다. 고난이 닥쳐올 때 사람은 사탄의 적수가 되든지 그렇지 않으면 하나님의 친구가 되든지 둘 중의 하나가 되지 않으면 안 된다. 고난은 육에서는 뜯어 가지만 영에서는 점점 더 닦아낸다. 고난이 주는 손해와 아픔은 한때이나, 보람과 뜻은 영원한 것이다. 개인에 있어서나 민족에 있어서나 위대한 성격은 고난의 선물이다.

 

p120.

 나는 성서에 기록된 역사를 진리로 믿는다. 그것은 사실로 규명돼서가 아니다. 신념이기 때문이다. 그렇다, 신념의 영역으로 넘어간 사안이다.

 

p125.

 함석헌 선생은 <뜻으로 본 한국역사>(한길사, 2003)에서 외세에 기댔다가 단단히 낭패 본 비운의 한반도 역사를 적나라하게 짚었다. 요컨대 이러하다. 고구려를 제압하려고 외세 당나라를 끌어들인 통일신라, 끝내 우리 삶의 기반인 만주를 포기하고 말았다. 만주 잃은 '이빨 빠진 호랑이' 한민족은 거란족, 여진족 등 북방 민족 공세에 숱하게 시달렸다. 고려 윤관, 최영 장군이 꾸준히 북벌을 모색했지만, 반대세력 즉 사대주의 세력의 벽을 넘지 못한 채 좌절했다. 이로써 조선을 창건한 이성계는 '우물 안 개구리 신세'에 머물고 말았다. 사대주의자들은 해방공간에서 분단세력으로 세력을 재편해 한반도의 허리를 70년 동안 끊어 그 틈을 점점 벌리고 있다. 기시감의 결정체가 역사라고 했던가.

 "남북 간 군사적 적대관계가 계속되는 한 먹을거리가 생기는 소위 방위산업체, 이렇게 냉전구조 하에서 번성했던 기득권 세력이 분단체제를 계속 연장하려 한다." 정세현 전 통일부 장관의 진단이다.

 그런데 북한이 핵을 포기하겠다고 했다. 또 민족의 번영을 위해 함께 새 출발하자고 손을 내밀었다. 이런 북한에 대한 의심의 눈길, 쉽게 지울 수 없음도 이해한다. 그러나 북한이 비핵화 약속을 번번히 깬 데에는 미국 책임이 크다. 1994년 제네바 합의, 2005년 9.19 공동성명 등에서 맺은 약속을 미국은 일방적으로 엎었다. 그래서 북한은 각각 협상파기, 핵실험으로 엇나갔다. 북한의 약속 불이행을 정당화할 수 없다. 하지만 북한과의 신뢰 관계를 유지하면서 비핵화의 길을 가려는 미국의 의지는 단 한 번도 그 진정성을 입증받지 못했다.

 

p134.

 이승만이 독립운동과 담쌓은 점은 김상웅의 저서 <독부 이승만 평전>(책보세, 2012)을 요약한 블로거 '그노마' 님의 글로 정리된다. 다음은 윤문한 것이다.

 

 하와이에서 한인 소년병학교와 대한인국민회를 조직한 무장독립운동가 박용만 선생, 끝내 이승만에게 쫓겨났다. 샌프란시스코에서 장인환, 전명운 의사가 친일파 미국인 스티븐스를 처단하고 재판에 넘겨졌을 때 통역을 요청받았던 이승만은 그들을 살인자라고 규정하더니 예수 믿는 사람으로서 변호할 수 없다며 거절했다. 이후에도 이승만은 안중근, 이봉창, 윤봉길 의사의 의거를 테러라고 매도하며 임시정부에 대일 무장투쟁 중단을 요구했다. 하는 행보 하나하나가 어쩌면 그렇게 일본의 이익에 빈틈없이 부합되는지 싶었다. 이뿐 아니다. 이승만은 상하이 임시정부라도 'president'라는 직함을 달라고 생떼를 뜨더니 스스로 대통령 명함을 파고 다녔다. 끝내 대통령 직함을 얻었음에도 임시수도 상하이를 떠나 있었다. 한술 더 떠 미국에 눌러앉아 위임통치론 같은 임시정부의 방침에 반하게 주장했다. 그래서 단재 신채호 선생은 "이완용은 있는 나라를 팔았지만 이승만은 있지도 않은 나라를 팔았다"라고 탄식했다. 어쩌면 이 정도는 약과일 수 있다. 외교활동에 쓴다며 임시정부 독립운동 자금의 약 75%를 횡령해 관광 유람을 즐겼다고 하니 이승만 행각에 열불나지 않으면 성자라 할 것이다.

 

 때마침 일본이 패망했다. 독립국 한국의 최고지도자가 되고자 하는 이승만의 노욕이 불붙기 시작한다. 그러나 이승만에게는 국내 권력 기반이 없었다. 끝까지 임시정부를 지킨 민족지사 앞에서 초라하기만 했다. 그러나 임시정부가 일본을 몰아낸 게 아닌 터, 이승만은 승전한 미군의 수장, 맥아더에게 마음을 사는 것으로써 돌파구를 마련하려 한다. "내가 남한 지도자가 되도록 도와주면 충성을 다하겠다"며 이승만이 맥아더에게 다짐했으리라는 추정은 어렵지 않다. 맥아더는 한국을 지배하던 미군 사령관 하지 준장을 불러 이승만에게 예우할 것을 명한다.

 이승만을 잘 알지 못했던 하지는 시간이 지날수록, 만난 횟수가 더해갈수록 그에 대한 실망감을 노골화했다. 그러다보니 1947년 한국을 떠날 시점에는 이승만과 원수보다 못한 사이가 됐다. 하지는 송별사에서 "자기 이익만 추구하는 기회주의적 정치가들이 있다"고 했다. 여기서 언급된 '기회주이적 정치가들'에 이승만이 포함됐다고 보는 게 합리적이다. 정용욱 서울대 교수는 하지가 1947년 누군가에게 보낸 편지에 담긴 내용을 소개했다.

 

 그 노인네가 작년에 한 배신행위는 내게는 힘들고 쓰라린 경험이었습니다. 그가 대부분의 시간 동안 이곳에서 미국의 노력에 대해 입에 발린 말을 하고 다녔지만 나는 지난 몇 달씩 그가 뭔가 의심스러운 일을 크게 꾸미고 있다는 것을 알았습니다.

 

 '배신행위'라는 표현이 특정하는 어떤 사실은 중요하지 않다. 배신의 행위자 즉 이승만만 주목하면 된다. 배신은 이승만에게 일상이었다. 미군에게도 예외가 아니었다. 흥미로운 것은, 이 편지에는 이승만을 겨냥한 'son of a bitch'라는 욕도 담겨 있었다는 점이다. 그러나 하지는 미국으로 돌아가고 이승만은 단독정부 대통령이 됐으니 승자는 이승만인 셈이다. 이승만의 '필살기'는 독립운동가와 미 군정의 틈을 최대한 벌린 것이다. 미국이 치 떨어야 하는 소련을 독립운동가들이 대변한다고 흑색선전을 편 적이다. 이승만의 간계는 통했다.

 그런 이승만은 집권하자마자 여수 순천 시민들을 학살했다. 함포사격도 했다고 했다. 남해에서 함선으로 여수 순천을 겨냥해 포격한 것이다. 여수 순천 사람은 다 죽어도 된다고 판단한 것이다. 그래서 여수순천사건은 토벌 즉 학살로 봐야 마땅하다.

 여수 순천 민중이 거역한 것은 대한민국 국체가 아니라 제주 토벌 명령이었다. 4.3 사건이 진행 중인 제주도에 가서 '민간인을 죽이라'는 지시 말이다. 여수 순천의 군인은 향토방위 체제에서 군사의 한 축이었던 민중의 뜻, 제주 진압을 받아들일 수 없다는 그 뜻을 따르지 않을 수 없었다. 4.3 사건은 그래서 여수순천학살의 연장전이다. 이승만은 당시엔 법에도 없던 계엄령을 선포한다. 그리고 수많은 제주도민을 학살했다. 무기를 손에 쥐지 않았던 제주 민간인을 군대가 제압하는 건 전혀 어려운 일이 아니었다.

p172.

 나는 우리에게로 온 하나님의 아들을 과학이나 이성의 틀 위에서 사유하지 않는다. 그래서 그의 생애와 부활이 사실인지 아닌지 검증할 필요를 느끼지 못한다. 그래서 나는 성서가 말하는 예수의 역사를 신앙으로써 믿으면서도, 그 믿음을 나의 고유한 신념체계 안에 묶어둔다.

 

p175. 인간의 육식

 이런 전제로 <창세기> 1장을 보자.

 

 하나님이 말씀하시기를 "내가 온 땅 위에 있는 씨 맺는 모든 채소와 씨 있는 열매를 맺는 모든 나무를 너희에게 준다. 이것들이 너희의 먹거리가 될 것이다. 또 땅의 모든 짐승과 공중의 모든 새와 땅 위에 사는 모든 것, 곧 생명을 지닌 모든 것에게도 모든 푸른 풀을 먹거리로 준다." 하시니, 그대로 되었다.

-창세기 1:29-30-

 

 29절과 30절을 쉬 지나쳐서는 안 된다. 여기서 하나님은 "모든 푸른 풀을 먹을거리로 준다"(30절)라고 했다. 인간이나 동물 모두에게 초식을 명령한 것이다.

 그러다가 노아 홍수 사태 이후 조건부 육식을 허용했다. 조건은 기름과 피를 먹지 않는 것이었다. 독일성서공회의 관주성서는 이를 두고 "굶주린 인간이 행여 야만적으로 짐승을 살육할까봐 염려해 제한적으로 허용한 것"이라고 해석했다. 그런 의미에서 동물권도 창조 원리임을 잊지 말아야 한다.

 

 독일은 이미 세계 최초로 헌법에 동물권을 명시한 바 있다. 인간이 타인으로부터 고통받지 않고 자유로운 삶을 추구 할 수 있듯 동물에게도 비슷한 권리가 보장돼 있다는 것이다. 이런 가운데 우리 사회 도처에서 벌어지는 동물 축제가 눈에 밟힌다.

 '성공한 지역 축제'로 꼽히는 화천 산천어축제는 외지의 산천어를 부화시킨 뒤 화천 내 좁은 호수로 들여와 그 안에 가둬놓고 사냥감이 되게 하는 축제다. 축제가 끝나면 살아남은 상당수 산천어조차 극심한 스트레스를 이기지 못하고 죽어간다. 이와 관련, 2018년 6월 '동물 축제 반대 축제 기획단'은 동물을 이용한 축제의 84%가 심각한 위해를 가하는 것으로 나타났다고 밝힌 바 있다.

 

 제레미 리프킨이 쓴 <육식의 종말>(시공사, 2002)에서 본 것이다. 소를 뜻하는 영어 'cattle'은 자본은 뜻하는 'capital'과 어원이 같다고 한다. 중세까지 소는 신성한 동물이었고 그 고기가 밥상에 올라간다는 것은 상상조차 힘들었지만 이는 시장이 형성되기 전 이야기. 어마어마한 수요가 이어졌고 공급도 이에 발맞추면서 양상이 전혀 달라졌다고 한다. 미국 축산업자들은 끝내 대규모 축산 단지 건설을 행했고 이에 상응해서 인디언은 생활터전을 상실해갔다.

 브라질 환경운동가 치코 멘데스는 축산업자들의 남미 열대우림 파괴를 반대하다가 1988년 흉탄에 살해당했다. 그렇게 열심히 소의 고기를 공장에서 물건 찍어내듯 생산하다가 인류는 광우병이라는 역풍을 맞았다. 광우병만인가, 닭에게서는 조류 인플루엔자, 돼지는 구제역으로 우리는 절기 행사처럼 역병을 치러야만 한다. 성서의 말씀을 존중한다면 과도한 육식은 삼가는 것이 옳다.

 

p177. 하려면 뚝심 있게

 <레위기>를 보면 굽 있는 짐승을 먹지 말라고 못 박았다. 굽 있는 짐승은 멀리서 찾을 것 없다. '고기의 대명사' 소와 돼지다. 20여 년 전 대학생 때 에피소드. 성서 통독 모임에서 강사 목사님은 "성서(레위기)에 나와 있는 대로 돼지고기 먹지 말라"고 해설했다. 굽 있는 짐승만인가, 비늘 없는 생선도 안된다는 성서의 엄명이 있다. 때마침 점심 공동식사가 이어졌다. 돼지고기 김치찌개와 오징어 볶음이 식탁 위에 올랐다. 당시 그 목사님의 묘한 표정은 지금도 잊지 못한다. 식단에는 그다지 간섭 안 하신 듯 보였다. 

 성서가 동성애를 가증하게 여긴다며 맥락도 배경도 안 따지고 절대 율법시했던 신학교, 그 신학교의 구내식당 메뉴를 인터넷에서 찾아봤다. 돼지고기볶음, 참치 김치찌개가 보였다. 굽 있는 돼지의 고기와 비늘 없는 생선 참치로 구성된 식단이었다. 지행합일, 언행일치도 볶아먹고 끓여 먹은 모양이다.

 

 왜 성서에서 지킬 것, 안 지킬 것을 자의적으로 구분하나. 무식하고 미련해도 지조 있고 용렬하게 '성서대로' 실천한다면 인정받기라도 한다. 성경에서 굽 있는 고기, 비늘 없는 생선 먹지 말라고 하면 뚝심 있게 소, 말, 양, 염소, 돼지, 꽁치, 가물치, 갈치, 넙치, 멸치, 참치, 오징어, 상어, 숭어, 홍어, 고등어 먹지 않아야 한다.

 <로마서> 13장 "모든 권력에 순종하라"해서 박정희 전두환 정부에 순종했다면 뚝심 있게 김대중 노무현 정부에도 순종해야 한다. 성경에서 "사랑하라"하면 저 좋아하는 사람만이 아니라 뚝심 있게 동성애자뿐 아니라 빨갱이, 난민, 타종교인도 사랑해야 한다. 보수 신앙을 신주단지처럼 여기는 교인들, 어떤 건 맥락 무시하고 "옳다"가며 믿고, 어떤 건 이런저런 이유 붙여가며 "시대에 맞지 않는다" 하며 일축한다. 안 된다. (여담이다. 언제부터 기독교는 육식에 대해 아무 꺼리낌이 없어졌을까. 토마스 아퀴나스가 활동했던 중세였던 것 같다.)

 

p184.

 분명히 짚고 넘어가자. 하나님은 성서에서 자살한 사람을 죄인으로 정죄하지 않았다. 자살에 대한 하나님의 최종적이고도 정확한 의중은 '간곡한 만류'이다. <에스겔> 16장6절에 "핏덩이로 누워 있는 너에게, 제발 살아만 달라고 했다"는 말씀이 있다. 이 메시지의 맥락은 극단적으로 소외되거나 절망감에 싸여도 '살라'고 당부하는 것이다. 갓난아기가 탯줄을 절단받지 않았고 누구로부터도 씻김받지 않았으며 강보에 싸이지도 않은 채 들에 버려진 상태. 또 맹수가 물어가거나 요행히 그런 일이 없어 굶어 죽어도 관심조차 받지 못할 사정. 이 생각만 해도 참혹한 상황에서도 살라는 당부다. 요컨대 노회찬 형제가 스스로 몸을 던졌다고 하나님께 죄를 범하는 것이 아니다.

 그렇다면 스스로 목숨 끊은 이들은 어디로 갈 것인가. 천국 아닌 다른 곳에 가게 되는 것일까. 목사였던 아버지는 40년 목회를 회고하며 가장 힘든 사역으로 자살자 추도예배를 꼽았다. 그래서 영정 앞에서 고인의 구원 여부 언급은 삼가고 유가족을 위로하는 내용으로 설교한다고 했다. 아버지도 자살자의 '천국행'에 확신이 없었던 것이다. 하지만 나는 구원할지 말지는 하나님이 결정한다. 그리고 하나님이 우리의 좁은 헤아림에 갇혀 판단하지 않으신다고 생각하고 말한다. 그런 의미에서 유사하게라도 '자살한 사람은 지옥 간다'는 말을 해서는 안된다. 세상 떠난 이의 운명을 하나님에게 맡기고, 우리는 아픈 마음에 파르르 떠는 유가족을 돌보면 된다.

 

 현대 사회에서 자살은 사회적 타살이다. 한국 사회에서 자살률이 급증한 계기는 1997년 외환위기였다고 한다. <경향신문> 안호기 경제부장의 2014년 1월6일 자 칼럼 중 일부다. 

 "외환위기 이후 자본은 노동에 대한 통제를 강화하면서 구조조정 허울을 씌워 수많은 노동자를 거리로 내몰았다. 양질의 일자리는 갈수록 줄어들고 있다. 양극화가 심해지면서 상대적 박탈감에 빠진 '신빈곤층'이 크게 늘었다. 탈출구를 찾지 못한 일부가 자살이라는 극단적 방법을 택하고 있다. 최근 한국에서의 자살은 사회 공동체 구성원 모두에게 책임이 있는 '사회적 타살'이다.

 사실 외환위기는 한국 사회 공동체성이 해체되면서 자본이 모든 물적 정신적 주도권을 제패하는 계기가 됐다. '비정규직' '정리해고'가 당연시되면서 '무능한 자' '가난한 자'는 거침없이 잔인하게 솎아졌다. 힘없는 일개인은 그저 '쫄리면 뒈지시던가?'하는 대접을 받았다. 자살자를 탓하려면 이 비정한 사회 구조를 개선하는 것이 우선이다. 삶의 활로가 다 막혀 스스로 목숨을 끊었던 송파구 세 모녀를 누가 정죄할 수 있단 말인가.

 

p186. 어떤 이타적 죽음.

 

 노회찬 형제 죽음은 그렇다면 전태일 열사의 자결과 같은가, 이렇게 물어볼 사람이 있을지 모르겠다. 그렇다면 노회찬 형제가 정치자금법 위반 건에 대한 수사와 처벌이 두려워 극단적 선택을 했다고 보는 것이다. 과연 그럴까? 정치자금법 위반으로 감옥에 가는 것, 의원직을 잃는 것이, 그보다 더한 험한 길을 걸어온 노회찬에게 죽음과 맞바꿀 고난일까? 김동호 목사가 한 말이 있다. "정의를 말하는 사람은 역경에 강하다."

 노회찬이 받은 돈의 액수는 매우 적은 것이었다. 대가성 따위도 없었으니 뇌물 수수로 보기 어렵다. 굳이 과실을 물으려 한다면 정치자금법 위반 정도다. 일의 전모가 이렇다면 극단적 선택의 이유를 다른 배경에서 찾음이 온당할 것이다. 혹시 가뜩이나 취약한 지지기반 위에 서 있는 정의당의 앞날 곧 진보정치의 미래가 혹시 자기 일로 인해 타격받지 않을까 염려함은 아니었을지. 노회찬 형제는 자신이 진보정치의 아이콘으로 주목받은 현실에 무거운 책임감을 느꼈을 것이다. 자신의 허물이 곧 진보정치의 허물이 될까봐, 말하자면 '즈엉이당' 운운하는 자들로부터 진보정치가 통째로 부정당하게 될까봐 노심초사했을 것이다. 그 상황이 현실로 나타나기 전, 창문 밖으로 몸을 던져 손절매하려 했을 것이다. 그랬을 것이다.

 죽음을 결행하기에 앞서 노회찬 형제는 노무현 전 대통령을 생각하지 않았을까? 포괄적 뇌물죄 혐의를 받언 노 전 대통령, 자신의 허물로 비롯된 문제라면 그는 살아서 모든 책임을 졌을 것이다. 그에게는 감옥이 낯설지 않은 공간이다. 노동운동 때문에 수감된 이력이 있었으니까. 또한 자신이 변호사인지라 스스로 버리적 구제의 길을 모르지 않아을 것이다. 당시에도 '서초동' 주변에서는 노 전 대통령에게 유죄 판결을 내리긴 쉽지 않으리라 생각했다. 당시 대통령 이명박 씨도 노 전 대통령 명성과 정치적 영향력을 최소화하는 게 목적이었지 그의 처벌 여부에 대해서는 별무관심이었던 것으로 알려졌다. 

 

 노무현 전 대통령을 견디지 못하게 한 것은 '자신의 뇌물 수수 의혹 수사가 민주진보진영 전체를 폐족으로 만드는 도화선이 되지 않을까' 하는 부분이 아니었을까? 죄가 없다면 그런 걱정을 왜 하느냐, 모든 시시비비는 법정에서 가려지지 않겠느냐고 말할지도 모르겠다. 그러나 이는 사법 영역에서나 해당하는 이야기다. 여론재판은 별개다. 법전에 있는 '무죄 추정 원칙'은 허울일 뿐이고, 짧으면 1년, 길게는 2-3년 동안 일국의 전직 대통령이 재판정에 끌려다니며 자신의 무죄를 호소하는 굴욕을 감내해야 하며, 설령 최종적으로 무죄가 난들 잃어버린 시간 또 사건 이전의 삶을 보장받지 못한다. 여론재판이 이렇다. '심판받지 않는 권력' 검찰은 이렇게 다방면으로 그리고 치명적으로 한 인격에게 씻을 수 없는 상처를 가할 수 있다. 절대자다.

 실제 '노무현 수자'의 불똥이 튈까봐, 민주당 일각에서까지 노무현 전 대통령에게 '굿바이'를 외치고, 심지어 진보언론에서는 '마지막 승부수'라는 표현을 써가며 극단적 선택을 압박하기도 했다. 노 전 대통령은 죽기 전 "자신은 더 이상 개혁의 전범이 될 수 없으므로 노무현을 버리고 가라"고 했다. 노회찬 형제도 "나는 멈추지만, 정의당은 앞으로 나아가라"고 했다. 노 전 대통령은, 또 노회찬 형제는 자기가 중요하지 않았다. 우리는 왜, 노무현을 잃고 땅을 쳤으면서도, 노회찬에게 제2의 길이 있음을 보여주지 못했을까. 통탄하고 또 통탄한다.

 노회찬은 이타적인 사람이었다. 그는 생을 포기하는 순간까지 자기 명예에 집착함이 없었다. 예수가 그러하지 않았는가. 예수는 죽음을 운명으로 알았다. 강만원 종교칼럼니스트는 "예수님이 '깨어 기도하'라고 하시고, 그가 또한 핏방울 떨어듯이 땀을 흘리시며 밤이 새도록 처절하게 기도하신 것은 결코 도피가 아니라 몸으 던져 행동하기 위한, 다시 말해 생명을 바쳐 순종하기 위한 '몸부림'이라고 말했다. 병자 또 망자를 고치고, 수천 명을 먹이며, 미친 사람 머리에 침투한 악마를 몸 밖으로 끌어내는 초능력을 지닌 그가 피할 능력이 없어 소수의 로마병정에게 잡혀가 채찍질 등 모욕을 당하며 십자가에 달렸겠는가. 그는 스스로 죽음의 길을 택했으니 그것은 의롭고 선한 동기에 의해 스스로 목숨을 끊은 이들의 결심과 다르지 않았을 것이다. 그런데 예수의 죽음이 어떤 결과를 불러왔는가. 기독교인은 이를 통해 인류가 죄와 율법, 사망의 그늘에서 벗어나 광명을 찾았다고 찬송한다. 그가 죽지 않았다면 가능하지 않을 일이라고 고백한다.

 

p233.

 세월호 마지막 두 실종자 중 한 사람의 어머니가 어느 성탄절엔가 팽목항에 모여 예배하는 사람들에게 이렇게 이야기했다고 한다. "하나님은 지금 여기 팽목항에 계시는 것이 아니라 우리 아이와 함께 계세요. 저 깊고 냄새나는 캄캄한 배에서 하나님은 우리 아이를 안고 계셔요. 우리는 그렇게 믿어요." 

+ Recent posts