물( water)이 대부분의 물질에 대해 수용액으로 작용하는 이유를 파고들어가보면 분자구조상의 이유때문이다. 수소원자와 산소원자는 고등학교 화학시간에 배웠던 기억을 더듬어보면 공유결합(covalent bonding)이라는 것을 한다. 화학식으로 나타내자면 H-O-H의 결함을 이루는데 글에서 보이는 것과는 달리 실제의 결합구조를 보면 수소와 수소원자 104.5도(그림 참고)를 이루도록 되어 있다. 원자의 최외각을 도는 전자로 인해서 생기는 차이 때문이다.(양자역학적 표현으로는 전자는 확률분포로 이루어진다. 더 이상의 자세한 설명은 생략한다. ㅋㅋㅋ -_-;;). CO2와 같이 카본계 공유결합은 구조상으로도 직선(linear)하기 때문에 전체적인 전하의 balance가 공간적으로도 중성을 가지게 되지만, H2O는 굽은(bent)된 구조(+전자의 운동)에 의해 물분자 전체적으로 봤을때 (+)전하와 (-)전하가 국지화(localized)되어 쌍극자(dipole)을 형성하게 된다. 이러한 쌍극자에 의해 대부분의 (친수성)물질에 대해 O원자가 가지는 (-)전하는 물질의 (+)전하에, H원자가 가지는 (+)전하는 물질의 (-)전하를 끌어당김으로 인해서 소금(NaCl, 이온결합)과 같은 물질을 녹이게 된다.
우리가 알고 있는 대부분의 상식적이면서도 생명을 유지시키는 가장 근본적인 메카니즘에는 이렇듯 가장 초미세한 세계에서 이루어지는 근본원리가 담겨져 있는 것이 대부분이다. 아인쉬타인은 그간 물리학에서 밝혀진 4개의 힘(강력,약력,전자기력,중력)에 대한 대통합 이론(GUT)를 위해 말년의 20여년간을 힘써왔으나 결국 성공하지 못했다. 그 이후 여러학자들의 노력으로 강력,약력,전자기력까지의 통합은 이루어졌지만 아직까지는 중력의 통합을 증명해내지 못한 상태이다.
아인쉬타인이 GUT에 매달린 이유중 하나는, 코펜하겐학회로부터 물리학계에서 인정된 미세세계의 양자역학적 해석(통계가 불가분 들어갈 수 밖에 없다)에 대해, "신은 주사위 놀이를 하지 않는다."라는 자신의 신념에 대한 학자적 양심을 지키기 위해서였다.
그는 우주상수를 도입하는 등 기존의 물리학적 체계(아이러니하게도 그 체계의 아주 중요한 일부를 그가 세웠는데도 불구하고)에 대한 사고를 넓히기 위해 씨름해왔지만 결국은 이에 실패하고는 말년을 꽤 우울하게 보냈던 것 같다.
노자에, 천지불인(天地不仁)이라는 말이 있다. 하늘과 땅은 인자하지 않다. 그 뒤에 이어지는 글이 이만물위추구(以萬物爲芻狗)라 하여 만물을 대하는데 있어 똥강아지풀을 대하듯이 한다로 합쳐 풀어보면, 천지(신)는 (인간의 관점에서 보면) 인자한 구석이 없다. 모든 만물을 대하기를 다 풀강아지처럼 업신(혹은 꺼꾸로 다 공경한다고 해석할 수도 있는데, 개울가에 핀 똥강아지풀을 귀하게 여기는 것은 문맥상 어색하니까 업신여긴다고 보는게 이해하기 편하다)여긴다는 것으로, 모든 만물의 귀천을 두지 않는다는 의미이다.
최근에 종영된 '찬란하고 쓸쓸하神 도깨비'라는 드라마에서 도깨비가 되기 전 고려의 상장군인 김신(공유가 맡은 역)에게 이미 죽은 선왕(先王)이 자신의 병세가 깊어 살날이 얼마 남지 않았음을 알고 유언을 남긴다. 유언의 내용은, 자신의 이복동생이자 앞으로 왕위를 잊게 될 왕여(이동욱이 맡은 역)를 자신이 항상 홀대하였는데 그 뜻은 "내가 돌보지 않음으로 돌보았다 전하라"였다. 이 말은 그가 나의 이복동생이지만 내가 그를 마음으로는 사랑하였으나 권모와 술수가 난무하는 궁궐에서(왕인 본인도 결국은 오랜 시간동안 서서히 독살당해왔다.) 그 사랑하는 마음을 표했다가는 어떤 변을 당할지 염려스러워 부러 거리를 둔 것이다.
(도깨비의 상왕의 유언장면, 이 분 여기 한컷 나오신다. 묵념)
신이 만약 있다면, 이 세상을 움직이는 단 하나(혹은 몇개 정도의) 근본적인 원칙만을 세워두고 이 세상을 스스로 움직이게 놔뒀을 것이라는 것이 노자의 천지불인에 담겨진 사상이다. 서양은 하나님이라는 신의 존재를 인격신으로 주로 묘사하는 것에 익숙한 문화이다. 이런 배경속에서 자연스럽게 하나님이 인간의 모습으로 등장하는 인격신의 개념의 이야기들이 많다.
2003년 개봉한 짐캐리 주연의 '브루수 올마이티<Bruce Almighty>' 같은 영화에서 보면, 하나님(모건 프리먼)이 잠시 휴가를 간 사이 그의 업무를 대신 맡은 짐 캐리가 세상 모든 사람의 기도를 다 들어주는 에피소드가 등장한다. 그로 인해 복권 1등 당첨된 사람이 부지기수로 등장해서 결국 복권1등 당첨이라는 것이 아무 소용없는 것이 되어버리게 된다.
(브루스 올마이티의 명장면, 커피로 모세가 홍해를 가르는 장면을 패러디)
이미 니체가 근대에 와서 이야기했듯이 "신"은 너무나도 복잡해지고 다양해졌으며 발전한 세계에 관여하기에는 너무나 낡고 유약한 개념이 되어버린 것이다.
인간(혹은 만물)이 주인이 되는 세상에서 신이란 그 인간(혹은 만물)이 살아갈 세상이 존재할 단초만을 제공하는 어떤 씨앗으로만 존재하는 것이 가장 신다운 행위라고 생각한다.
신은 있다, 없다의 문제에서 다툴 쟁점이 아니라, 이제는 그가 던진 단초로부터 파생된 문제들에 대해 만물이 수십억년간 이룩해온 결과와 업적만으로도 이 세상엔 너무나도 알아야하고, 해야할 일들이 많다.
유명한 매슬로의 인간의 욕구 5단계설에서 상위의 욕구인 4단계가 존경욕구, 5단계가 자아실현욕구라고 한다.
4단계의 존경욕구는 사회적 관계에 의해서 충족되는 욕구이다. 일반적으로 40대 이상이 되면 자기가 속한 집단내에서 어느 정도 위치에 오르고 선임자로서의 존경과 가족에게도서 가장으로의 권위등을 갖게 되어 자연스럽게 이러한 욕구가 충족되어진다.
더욱이 선출직인 국회의원, 시장, 도지사등을 통해 정치에 길에 나서게 된 이들은 아주 강력한 자부심을 갖게 될것이다. 그러한 선출 자체를 통해 얻는 자부심과 기쁨은 4단계의 존경욕구와 5단계의 자아실현욕구에 대한 충족감은 일반적인 회사에서 승진하는 것과는 비교과 안되는 말 그대로 하늘을 찌를 듯할 기쁨일 것이다.
이러한 정신적 충족감은 삶의 엄청난 모티베이션이 된다. 실로 이 정도의 강력한 정신적 충일감은 마약을 복용하는 순간과도 비교될 것이다.
마라토너들이 나이가 들어가며 격한 운동이 주는 육체적 손상(무릎연골 파손, 부정맥, 심근 손상, 폐손상)의 위험으로 의사가 더 이상 마라톤을 하지 않는게 좋겠다는 권유를 한다. 그래도 이를 무시하고 진통약을 먹어가면서까지 마라톤을 계속하는 이들이 많다.
그 이유는 마라토너들이 말하는 런너스 하이라는 현상때문이라고 한다.
고통스러운 뜀뛰기의 고통이 지속적으로 축적되어 몸이 생존을 위해 고통의 극한치를 높여나가게 된다. 그런데 이 누적된 고통이 후반에 이르러 어떠한 사점(dead point)를 지나게 되면 이때는 도리어 몸은 비상사태를 감지하고 뇌에서 고통을 이겨내는 천연 호르몬인 엔돌핀을 분비하기 시작한다. 이 시점이 되면 고통은 기쁨으로 바뀌며, 천근만근이던 몸은 달리기를 처음 할때보다 훨씬 가벼운 상태로 변하는 런너스 하이(runner's high)를 경험하게 된다.
마라톤은 말 그대로 자기와의 싸움이기 때문에 해당하는 거리를 자신의 힘으로 완주하는 것만으로도 런너스 하이에 이르게 된다. 그런데 갑자기 이 마라톤 선수가 이번 대회가 내 생애 마지막이라는 생각으로 내가 1등을 해야겠다는 말도 안되는 비정상적인 목표를 잡게 되면 어떤 일이 벌어질까.
평소 마라콘 풀코스를 4시간 정도 되야 들어오는 선수가 세계기록인 2시간대를 목표로 말 그대로 전력질주를 하다가 런너스 하이는 커녕 초반 몇 킬로를 뛰다가 심장이 터져서 죽고 말 것이다.
보통 이걸 무협적인 용어로는 주화입마라고 한다.
남들에게 존경받고, 자아를 실현하려는 욕구는 지극히 정상적인 것이다. 하나 그 욕구에 앞서 하나의 단서가 있는데 그것은 자신이 누구인지 그리고 내 능력이 어디까지인지를 명확히 아는 것이다.
진인사 대천명이라는 말은 내 모든 에너지를 다 쏟아붓는데 있지만 그 에너지를 넘어서 쏟아부으면 대천명을 하기 전에 자기의 수명 자체가 없어지고 마는 것이다.
박근혜의 탄핵이 임박해진 지금, 2017년 대선이 기정 사실화 되가고 있는 시점에서, 여기 저기서 내가 이번 레이스에서 1등을 하겠다고 이미 주화입마에 빠져있는 정치인들이 보인다.
그 사람들의 평소에 행보를 보면서 저 사람만은 망가지지 않을거라 생각했던 이들마저도 대통령이 된다는 생각만으로도 저렇게 휘청거리는 걸 보면 대한민국 대통령이라는 자리가 가진 마성이 엄청나구나 하는 걸 느끼게 된다.
나는 정상적인 마라톤 경기를 보고 싶을 뿐이다. 그 누구도 아스팔트 위에서 피를 토하며 죽어 나가는 모습을 보고 싶진 않다. 아마 대부분의 국민들이 그런 마음이지 않을까?
진인사 대천명의 마음으로 레이스에 나가기 전에 시장통에 가서 민심도 좀 읽고, 내가 냉정하게 몇 등 정도 할 수 있는지, 그리고 그 등수라도 유지하려면 내가 어떻게 뛰어야 할지를 사우나 냉탕에 들어가서 머리를 푹 식히며 차분하게 생각들 하는 기회를 가졌으면 한다.
문득 창문밖으로 드는 햇살이 싱그럽다는 생각이 든다. 비가 온 다음날, 그간 겨울의 찌든때에 간만에 몸을 불린 유리창에 걸린 물방울속에 맺힌 햇빛 한올한올이 다정하다. 숨쉬는 공기의 여전한 매캐함 속에서 그래도 봄의 예감이 드는지 나이든 이들의 무표정 속에서도 어린 처자들의 볼에는 자그마한 홍조가 피어오르고 그 새빨간 입술에서는 경쾌한 조잘거림이 노란 빛으로 묻어나온다.
이 찬란한 순간이 아름다운건 이 모든 것이 곧 쉬이 갈 줄을 아는 중년의 지혜때문인가? 우리는 덧없는 영원을 추구할 뿐, 순간순간 영원히 지속되어지는 찰나의 아름다움은 보는 이들에겐 그 미세한 지속됨의 안타까움으로, 보지 못하는 이들에겐 알 수 없는 그리움으로 남을 뿐이다.
어릴 적 시장통을 같이 걷던 엄마의 젊을 적 미스코리아같은 모습은 빛바랜 액자속에서만 그 빛을 발하고, 꽃미남이던 아버지는 결혼식 사진에서만 볼 수 있는 과거의 아름다움들은 이제 본인의 기억속에선 흩어진 파편들로만 남아있다.
어느 시인이 말했던 슬픈 공룡의 발자욱을 어느 바닷가에서 처음 보던 젊은 날, 괜시리 센치해져서 떨어뜨린 눈물의 부끄러움이 어느새 추억이라는 이름이 되버린 걸 알기도 전에, 남들에게 보이는 깊은 주름외엔 더 남길게 없기에 이젠 슬프지도 않다.
만주로, 간도로, 연해주로 가고픈 발길은 보이지 않는 끈에 묶인체 나는 오늘도 제자리에서 과거와, 현재 그리고 미래를 꿈꾼다.
Thank you, President Hennessy, and to the trustees and the faculty, to all of the parents and grandparents, to you, the Stanford graduates. Thank you for letting me share this amazing day with you.
I need to begin be letting everyone in on a little secret. The secret is that Kirby Bumpus, Stanford Class of '08, is my god-daughter. So I was thrilled when President Hennessy asked me to be your Commencement speaker, because this is the first time I've been allowed on campus since Kirby's been here.
감사합니다, 헤네시 총장님, 대학 이사진과 교직원, 부모님과 조부모님들, 그리고 졸업생 여러분. 이렇게 멋진날에 제가 함께 할 수 있게 해주셔서 감사합니다.
우선 모든 분께 작은 비밀 한 가지로 시작하려 합니다. 그 비밀은 이번 졸업생 중의 한명인 커비 범퍼스가 바로 제 대녀라는 것입니다. 그래서 헤네시 총장님이 제게 졸업 축사를 부탁하셨을 때 전 몹시 감격했습니다. 커비가 대학에 입학한 이후 처음으로 이 교정에 올 수 있었으니까요.
You see, Kirby's a very smart girl. She wants people to get to know her on her own terms, she says- not is terms of who she knows. So, she never wants anyone who's first meeting her to know that I know her and she knows me. So, when she first came to Stanford for new student orientation with her mom. I hear that they arrived and everybody was so welcoming, and somebody came up to Kirby and they said, "Oh my god, that's Gayle King!" Because a lot of people know Gayle King as my BFF.
아시는 것처럼 커비는 매우 똑똑한 여학생입니다. 그녀는 자신의 인맥으로서가 아니라 본인의 참모습으로 사람들에게 알려지기를 원합니다. 그래서 처음 만나는 사람에게 저와 친분이 있다는 사실을 밝히는 법이 없죠. 신입생 오리엔테이션에 참석하기 위해 커비가 그녀의 어머니와 함께 스탠포드에 왔을 때, 전 모든 이들이 모든 사람들이 반가워했고 그 중에 누군가 커비에게 다가와 "세상에, 저 사람 게일 킹이잖아!"라고 했답니다. 제 절친인 게일을 아는 사람이 많기 때문이죠.
And so somebody comes up to Kirby, and they say, "Oh my god, is that Gayle King?" And Kirby's like, "Uh-huh, She's my mom." And so the person says, "Oh my god, does it mean, like, you know Oprah Winfrey?" And Kirby says, "Sort of."
I said, "Sort of? You sort of know me?" Well, I have photographic proof. I have pictures which I can e-mail to you all of Kirby riding horsey with me on all fours. So, I more than sort of know Kirby Bumpus. And I'm so happy to be here, just happy that I finally, after four years, get to see her room. There's really nowhere else I'd rather be, because I'm so proud of Kirby, who grauates today with two degrees, one in human bio and the other in psychology. Love you, Kirby Cakes! That's how well I know her. I can call her Cakes.
누군가 커비에게 "오, 저 사람 게일 킹 아냐?"라고 하면 커비는 이런 식으로 말합니다. "응 우리 어머니야." 그러면 그 사람은 또 이렇게 말하죠. "세상에, 그럼 너 오프라 윈프리도 알겠네?" 그러면 커비는 "그렇다고 할 수 있지."라고 대답합니다.
저는 "그렇다고 할 수 있다고? 우리가 고작 그 정도니?"라고 커비에 이야기했죠. 저와 커비가 가깝다는 명확한 증거가 있습니다. 전 이 자리에 계신 모든 분께 제가 팔을 짚고 엎드려서 커비를 등에 태운 사진을 보내드릴 수 있습니다. 저와 커비 범퍼스는 아는 정도는 넘는 사이라는 것입니다. 그래서 전 여기에 온 것이 행복합니다. 4년 만에 커비의 방을 구경하게 되어 행복할 따름입니다. 커비를 정말 자랑스럽게 생각하는 제가 정말로 가보고 싶었던 곳이거든요. 커비는 오늘 인간생물학과 심리학에서 2개의 학위를 받습니다. "사랑한다 커비 케이크(멋진 여자를 지칭하는 애칭). 저는 커비를 케이크라 부를 수 있을 정도로 친합니다.
And so proud of her mother and father, who helped her get through this time, and her brother, Will. I really had nothing to do with her graduating from Stanford, but every time anybody's asked me in the past couple of weeks what I was doing. I would say, "I'm getting ready to go to Stanford."
I just love saying "Stanford." Because the truth is, I know I would have never gotten my degree at all, cause I didn't go to Stanford.
그리고 지금껏 커비를 도와준 그녀의 어머니와 아버지 그리고 남동생 윌이 자랑스럽습니다. 저는 사실 그녀가 스탠퍼드 대학교를 졸업하기까지 아무런 도움을 주지 못했지만 지난 몇 주 동안 누군가 제게 뭐하며 지내내고 물을 때마다 "스탠퍼드에 갈 준비를 하고 있어요."라고 답하곤 했습니다.
저는 그냥 '스탠퍼드'를 입에 올린다는게 좋습니다. 스탠퍼드에 다니지 않았으니 평생 스탠퍼드 학위를 따지는 못하겠지만요.
I went to Tennessee State University. But I never would have gotten my diploma at all, because I was supposed to graduate back in 1975, but I was short one credit. And I figured, I'm just going to forget it, cause, you know, I'm not going to march with my class. Because by that point, I was already on television. I'd been in television since I was 19 and a sophomore. Granted, I was the only television anchor person that had an 11 o'clock curfew doing the 10 o'clock news. Seriously, my dad was like, "Well, that news is over at 10:30. Be home by 11."
저는 테네시 주립대학교에 다녔습니다. 1975년에 졸업할 예정이었지만 한 학점이 모자라 학위를 받지 못햇습니다. 그때 저는 학위 따위는 그냥 잊자고 생각했습니다. 왜냐하면 교수가 될 생각도 없었고 사실 그 무렵에 이미 텔레비젼에 출연하고 있었으니까요. 대학 2학년이던 19살때부터 텔레비젼에 출연했습니다. 저는 10시 뉴스를 진행하고 11까지 집에 돌아가야 하는 유일한 텔레비젼 앵커였습니다. 아버지는 정말로 이렇게 말씀하셨죠. "뉴스가 10시30분에 끝나니까 11까지는 집에 오도록 해라."
But that didn't matter to me, because I was earning a living. I was on my way. So, I thought, I'm going to let this college thing go and I only had one credit short. But, my father, from that time on and four years after, was always on my case, because I did not graduate.
He'd say, "Oprah Gail" - that's my middle name - "I don't know what you're gonna do without the degree." And I'd say, "But, Dad, I have my own television show." And he'd say, "Well, I still don't know what you're going to do without that degree." And I'd say, "But, Dad, now I'm a talk show host." He'd say, "I don't know how you're going to get another job without that degree."
학점은 제가 별 문제가 아니었습니다. 왜냐하면 전 이미 돈벌이를 하고 있었고, 내 진로를 찾은거였지요. 그래서 대학문제는 신경 쓰지 않기로 했습니다. 고작 한 학점이 모라잔 것 뿐이었으니까요. 하지만 아버지는 제가 졸업을 하지 않았기에 이후 몇 년 동안 항상 대학문제를 이야기했습니다.
아버기는 이렇게 말하곤 하셨죠. "오프라 게일"-제 중간이름입니다.-"대학 학위 없이 무슨 일을 할 수 있을지 걱정스럽구나." 그러면 전 이렇게 대답합니다. "하지만 아버지, 전 지금 제 텔레비젼 쇼를 진행하고 있어요." 그러면 아버지는 또 이렇게 말씀을 하시죠. "음 그래도 대학 학위도 없이 무슨 일을 할 수 있을지 모르겠구나." 그럼 전 이렇게 대답합니다. "하지만, 아버지 전 지금 토크쇼의 진행자에요." 그러면 아버지는 이렇게 말씀하셨죠. "학위도 없이 다른 일자리를 어떻게 구할지 난 정말 모르겠구나."라고요.
So, in 1987, Tennessee State University invited me back to speak at their commencement. By then, I had my own show, was nationally syndicated. I'd made a movie, had been nominated for an Oscar and founded my company, Harpo. But I told them, I cannot come and give a speech unless I can earn one more credit, because my dad's still saying I'm not going to get anywhere without that degree.
So, I finished my course work, I turned in my final paper and I got the degree. And my dad was very proud. And I know that, if anything happens, that one credit will be my salvation.
그런 와중에, 1987년, 테네시 주립대학교에서 졸업식 축사에 저를 초청해주었습니다. 당시 제 토크쇼(오프라 윈프리 쇼)는 전국적으로 방송되고 있었고, 제가 만든 영화는 오스카상 후보에 올라있었으며, 전 저의 회사인 하포(오프라의 철자를 반대로 함)를 설립했습니다. 하지만 저는 한 학점을 더 따기 전까지는 갈수 없다고 이야기했습니다. 왜냐하면 아버지는 여전히 제가 학위 없이는 어디도 갈 수 없을 거라고 말씀하셨기 때문입니다.
그래서, 전 제 학사과정을 마치고, 논문을 제출했으며, 학위를 취득했습니다. 그리고 아버지는 매우 자랑스러워하셨죠. 저는 앞으로 어떤 일이 일어나든, 그 한 학점이 제게 큰 도움이 될 거라는 것을 믿습니다.
But I also know why my dad was insisting on that diploma, because, as B.B.King put it, "The beautiful thing about learning is that nobody can take that away from you." And learning is really in the broadest sense what I want to talk about today, because your education, of course, isn't ending here. In many ways, it's only just begun.
아버지가 학위를 그렇게나 고집하셨던 것은, 비비킹이 말했듯이, "배움의 가장 아름다운 점은, 아무도 그것을 당신에게 빼앗지 못한다는 것"입니다. 그리고 배움이야말로 넓은 의미에서 오늘 제가 여러분에게 이야기하고 싶은 것이기도 합니다. 왜냐하면 당신의 배움이란 것은, 당연하게도, 여기서 끝나는 것이 아니기 때문입니다. 여러가지 의미에서 여러분의 배움은 이제 막 시작인 것입니다.
The world has so many lessons to teach you. I consider the world, this Earth, to be like a school and our life the classrooms. And sometimes here in this Planet Earth school the lessons often come dressed up as detours or roadblocks. And sometimes as fullblown crises. And the secret I've learned to getting ahead is being open to the lessons, lessons from the grandest university of all, that is, the universe itself.
세상엔 여러분을 가츠칠 수많은 교훈들이 있습니다. 이 세상, 즉 지구는 학교와 같은 곳으로 우리의 인생은 교실과 같습니다. 때로는 여기 이 지구라는 교실에서 가르침은 종종 우회로나 장애물로서 나타나곤 합니다. 그리고 때로는 파괴적인 위기로 나타나기도 합니다. 그리고 제가 이 교훈을 헤쳐나가면서 얻은 비밀은 이 위대한 대학, 즉 이 세상의 가르침에 언제나 따라야 한다는 것입니다.
It's being able to walk through life eager and open to self-improvement and that which is going to best help you evolve, cause that's really why we're here, to evolve as human beings. To grow into more of ourselves, always moving to the next level of understanding, the next level of compassion and growth.
I think about one of the greatest compliment I've ever received. I interviewed with a reporter when I was first starting out in Chicago. And then many years later, I saw the same reporter. And she said to me, "You know what? You really haven't changed. You've just become more of yourself."
자기개발의 기회를 가지고, 여러분이 발전할 수 있도록 하는 최선의 도움이 되는 일을 하도록 간절히 소망하고 그것을 실현하며 살아갈 수 있는 인간으로서 성장하기 위해 우리는 여기에 왔습니다.(정확히 해석하지 않으면 이 문장은 의미를 파악하기 매우 힘들다. (현재의)우리 자신보다 더 나은 사람이 되기 위해서는 항상 다음 단계의 이해와 다음 단계의 정열 그리고 성장으로 옮겨가야 합니다.
전 이제껏 제가 받아본 최선의 찬사에 대해 생각합니다. 시카고에서 처음 일을 시작할 때 한 리포터와 인터뷰를 했습니다. 그리고 몇 년후에 전 그 리포터를 다시 만났습니다. 거기서 그녀는 저에게, "알아요? 당신은 진짜 변하지 않았어요. 더 훌륭해졌을 뿐이에요."
And that is really what we're all trying to do, become more of ourselves. And I believe that there's a lesson in almost everything that you do and every experience. and getting the lesson is how you move forward. It's how you enrich your spirit. And trust me. I know that inner wisdom is more precious than wealth. The more you spend it, the more you gain.
그것이 바로 우리 모두의 목표입니다. 더 훌륭해지는 일 말입니다. 저는 여러분이 하는 모든 일과 경험에 교훈이 있으며 그 교훈을 얻으면서 여러분이 앞으로 나아갈거라는 걸 믿습니다. 그것이 여러분의 영혼을 풍요롭게 할겁니다. 그리고 절 믿으세요. 전 내면의 지혜가 돈보다도 더 소중하다는 것을 압니다. 지혜는 쓰면 쓸수록 더 많은 지혜를 여러분에게 얻게 해줄 겁니다.
So, today, I just want to share a few lessons?meaning three?that I've learned in my journey so far. And aren't you glad? Don't you hate it when somebody says, "I'm going to share a few," and it's 10 lessons later? And, you're like, "Listen, this is my graduation. This is not about you." So, it's only going to be three.
자, 오늘 저는 여러분들과 몇 가지 교훈을 나누고자 합니다. 제가 인생의 여정에서 배웠던 세 가지 교훈입니다. 기쁘죠? 누군가 몇 가지 말한다고 해놓고 10가지를 말하면 싫죠? 여러분들은 이럴 겁니다. “이거보세요, 제가 졸업하는 거라고요. 당신이 아니고요.” 그래서 세 가지만 말하려고 합니다.
The three lessons that have had the greatest impact on my life have to do with feelings, with failure and with finding happiness.
제 인생에 큰 영향을 미친 세 가지 교훈은 직감과 실패 그리고 행복을 찾는 것에 관한 이야기입니다.
A year after I left college, I was given the opportunity to co-anchor the 6 o'clock news in Baltimore, because the whole goal in the media at the time I was coming up was you try to move to larger markets. And Baltimore was a much larger market than Nashville. So, getting the 6 o'clock news co-anchor job at 22 was such a big deal. It felt like the biggest deal in the world at the time.
전 대학을 떠난 지 일 년 뒤 발티모어에서 6시 뉴스 공동 앵커를 할 기회를 얻었습니다. 왜냐하면 제가 출연할 당시 방송계의 궁극적인 목표는 더 큰 시장으로 진출하는 것이었기 때문이죠. 발티모어는 나쉬빌보다 훨씬 규모가 컸습니다. 그렇기 때문에 22살에 그곳에서 6시 공동앵커를 맡는다는 것은 엄청난 일이었죠. 당시에는 세계에서 가장 큰 일처럼 느껴졌습니다.
And I was so proud, because I was finally going to have my chance to be like Barbara Walters, which is who I had been trying to emulate since the start of my TV career. So, I was 22 years old, making $22,000 a year. And it's where I met my best friend, Gayle, who was an intern at the same TV station. And once we became friends, we'd say, "Ohmigod, I can't believe it! You're making $22,000 and you're only 22. Imagine when you're 40 and you're making $40,000!"
전 너무나 자랑스러웠습니다. 마침내 바바라 월터스 앵커처럼 될 수 있는 기회를 얻었기 때문입니다. 저는 TV에 나오기 시작할 때부터 그녀를 따라하려고 애썼습니다. 전 22살에 연봉 2만 2천 달러를 받게 되었습니다. 그리고 저는 거기서 인턴사원이었던 지금 저의 가장 친한 친구 게일을 만났습니다. 우리는 “맙소사, 믿을 수가 없어! 22살 밖에 안됐는데 2만 2천달러를 벌다니! 마흔 살이 되면 4만 달러를 번다고 상상해봐!”라고 하곤 했습니다.
When I turned 40, I was so glad that didn't happen.
제가 40살이 됐을 때 그렇게 되지 않아서 매우 기뻤습니다.
So, here I am, 22, making $22,000 a year and, yet, it didn't feel right. It didn't feel right. The first sign, as President Hennessy was saying, was when they tried to change my name. The news director said to me at the time, "Nobody's going to remember Oprah. So, we want to change your name. We've come up with a name we think that people will remember and people will like. It's a friendly name: Suzie."
22살이었던 제가 그곳에서 한 해에 2만 2천 달러를 벌면서도 무언가 불편함을 느꼈습니다. 이것이 맞다고 느끼지 못했습니다. 헤네시 총장님이 말씀하셨듯이 첫 번째 이유는 방송국에서 제 이름을 바꾸려고 했기 때문입니다. 당시 뉴스 감독님이 제게 “아무도 오프라를 기억하지 못할거야. 그러니까 이름을 바꿨으면 좋겠어요. 우리가 사람들이 기억하고 좋아할 만한 이름을 생각했는데 친근하게 수지 어때요?”라고 하셨습니다.
Hi, Suzie. Very friendly. You can't be angry with Suzie. Remember Suzie. But my name wasn't Suzie. And, you know, I'd grown up not really loving my name, because when you're looking for your little name on the lunch boxes and the license plate tags, you're never going to find Oprah.
안녕 수지. 매우 친근하죠. 수지에겐 아무도 화를 낼 수 없을 것 같습니다. 수지를 기억할 겁니다. 하지만 제 이름은 수지가 아니었습니다. 전 자라면서 제 이름을 좋아하지 않았습니다. 다른 사람들의 이름이 새겨진 도시락 통이나 열쇠고리를 찾을 수는 있어도 오프라라고 쓰여 있는 것은 찾을 수가 없었거든요.
So, I grew up not loving the name, but once I was asked to change it, I thought, well, it is my name and do I look like a Suzie to you? So, I thought, no, it doesn't feel right. I'm not going to change my name. And if people remember it or not, that's OK.
그래서 전 제 이름을 별로 좋아하지 않았습니다. 하지만 이름을 바꾸라고 하니 글쎄, 이건 내 이름인데 그리고 수지가 나한테 어울릴까? 라는 생각을 했습니다. 그리고 또 생각했습니다. 이건 내게 맞지 않다고 말이죠. 전 이름을 바꾸지 않을 것이고 사람들이 기억하지 못한다 해도 괜찮았습니다.
And then they said they didn't like the way I looked. This was in 1976, when your boss could call you in and say, "I don't like the way you look." Now that would be called a lawsuit, but back then they could just say, "I don't like the way you look." Which, in case some of you in the back, if you can't tell, is nothing like Barbara Walters. So, they sent me to a salon where they gave me a perm, and after a few days all my hair fell out and I had to shave my head. And then they really didn't like the way I looked.
그리고 방송국에서는 제 외모에 대해서도 맘에 들어 하지 않았습니다. 이것은 1976년에 여러분의 상사가 여러분을 불러서는 “외모가 맘에 안 드는군.”이라고 말하는 것과 같았습니다. 지금이라면 소송감이지만 그 당시에는 외모가 맘에 안 든다고 그냥 내뱉을 수 있었던 시기였습니다. 여러분들 중 몇몇이 당시로 돌아간다면 바바라 월터스와 비슷하지 않기 때문에 한마디도 할 수 없었을 겁니다. 그래서 방송국에서는 저에게 미용실로 가서 파마를 하라고 했습니다. 몇일이 지나고 저는 머리가 빠지기 시작했고 머리를 아예 밀어야 했습니다. 그러자 방송국에서는 제 외모가 정말 맘에 들지 않는다고 했습니다.
Because now I am black and bald and sitting on TV. Not a pretty picture.
제가 흑인인데다가 삭발을 하고서는 TV에 앉아있으니 썩 보기 좋진 않았겠죠.
But even worse than being bald, I really hated, hated, hated being sent to report on other people's tragedies as a part of my daily duty, knowing that I was just expected to observe, when everything in my instinct told me that I should be doing something, I should be lending a hand.
제가 삭발을 한 것보다 더욱 싫었던 것은 제가 매일 다른 사람들의 비극적인 소식을 전달해야한다는 것이었습니다. 제가 바라만 봐야한다는 것은 알고 있었지만 저의 모든 본능은 제가 무언가를 해야 한다고 말하고 있었습니다. 도움의 손을 내밀어야한다고요.
So, as President Hennessy said, I'd cover a fire and then I'd go back and I'd try to give the victims blankets. And I wouldn't be able to sleep at night because of all the things I was covering during the day.
헤네시 총장님께서 말하셨듯이 저는 화재 사건을 보도하고 나서 희생자들에게 돌아가 담요를 제공하려고 했습니다. 제가 날마다 보도하는 모든 사건들 때문에 밤에 잠을 이룰 수도 없었습니다.
And, meanwhile, I was trying to sit gracefully like Barbara and make myself talk like Barbara. And I thought, well, I could make a pretty goofy Barbara. And if I could figure out how to be myself, I could be a pretty good Oprah. I was trying to sound elegant like Barbara. And sometimes I didn't read my copy, because something inside me said, this should be spontaneous. So, I wanted to get the news as I was giving it to the people. So, sometimes, I wouldn't read my copy and it would be, like, six people on a pileup on I-40. Oh, my goodness.
반면 저는 바바라 월터스 앵커처럼 우아하게 앉아서 말하려고 스스로 노력했습니다. 하지만 그것은 바바라를 따라하는 것에 지나지 않았습니다. 내 자신이 누구인지 발견한다면 훌륭한 오프라가 될 수 있을 것이라 생각했습니다. 저는 바바라처럼 우아하게 발음하려고 노력했고 가끔 대본을 따라서 읽지 않았습니다. 왜냐하면 제 내면에서 즉흥적으로 해야 한다고 소리쳤기 때문이죠. 그래서 저는 뉴스를 사람들에게 보도하면서 저도 그 뉴스를 접하고 싶었습니다. 그러다 가끔은 마치 머릿속 고속도로에서 6중 추돌사고가 난 듯해서 대본을 읽을 수가 없었습니다. 맙소사.
And sometimes I wouldn't read the copy?because I wanted to be spontaneous?and I'd come across a list of words I didn't know and I'd mispronounce. And one day I was reading copy and I called Canada "ca nada." And I decided, this Barbara thing's not going too well. I should try being myself.
간혹 저는 즉흥적으로 하려고 대본대로 읽지 않고 목록에 있는 단어들을 조합해서 잘못 발음한 경우도 있었습니다. 한번은 대본을 읽는 데 캐나다를 ‘카 나다’로 발음한 적도 있었습니다. 전 바바라를 무작정 따라하는 것이 옳지 않다는 것을 깨달았습니다. 자신다워지기 위해 노력해야 했습니다.
But at the same time, my dad was saying, "Oprah Gail, this is an opportunity of a lifetime. You better keep that job." And my boss was saying, "This is the nightly news. You're an anchor, not a social worker. Just do your job."
당시 아버지는 제게 “오프라 게일, 이건 일생의 기회야. 이 일을 계속해.”라고 하셨습니다. 그리고 저의 상사는 “이건 메인 뉴스야. 당신은 사회 복지사가 아니라 앵커라고. 당신이 일을 전념하세요.”라고 했습니다.
So, I was juggling these messages of expectation and obligation and feeling really miserable with myself. I'd go home at night and fill up my journals, 'cause I've kept a journal since I was 15?so I now have volumes of journals. So, I'd go home at night and fill up my journals about how miserable I was and frustrated. Then I'd eat my anxiety. That's where I learned that habit.
저는 이런 기대와 의무 사이에서 어쩔 줄 몰라 했고 정말 제 스스로 처참한 기분을 느꼈습니다. 전 집에 가서 일기를 쓰곤 했습니다. 전 15살 때부터 일기를 써왔기 때문에 지금은 일기장이 몇 권 됩니다. 전 집에서 제가 얼마나 비참하고 좌절하고 있는지를 일기장에 기록했습니다. 그리고선 제 갈망을 집어삼켰습니다. 그런 습관을 이 때 배우게 된 것이죠.
And after eight months, I lost that job. They said I was too emotional. I was too much. But since they didn't want to pay out the contract, they put me on a talk show in Baltimore. And the moment I sat down on that show, the moment I did, I felt like I'd come home. I realized that TV could be more than just a playground, but a platform for service, for helping other people lift their lives. And the moment I sat down, doing that talk show, it felt like breathing. It felt right. And that's where everything that followed for me began.
8개월 뒤 저는 앵커에서 물러나야 했습니다. 방송국 측에서는 제가 과도하게 감정적이라고 했습니다. 하지만 그쪽에서는 위약금을 물고 싶지 않았기 때문에 저를 토크쇼로 배정했습니다. 그 때 그 쇼에 앉아서 저는 마치 집에 온 것 같은 느낌을 받았습니다. TV가 단순한 놀이터일 뿐만 아니라 서비스를 제공하고 사람들을 돕고 삶의 질을 높여주는 기반이 될 수 있다는 것을 깨달았습니다.
그리고 제가 앉아서 토크쇼를 진행할 때 비로소 숨을 쉬는 듯한 느낌을 받았습니다. 이것이 옳다고 느껴졌습니다. 이것이 저에게 왔던 모든 것이 시작된 계기입니다.
And I got that lesson. When you're doing the work you're meant to do, it feels right and every day is a bonus, regardless of what you're getting paid.
그리고 저는 교훈을 얻었습니다. 자신이 하고자 하는 일을 할 때 이것이 옳다고 느껴질 것이고 얼마를 버는지에 상관없이 하루하루가 보너스라는 것이죠.
It's true. And how do you know when you're doing something right? How do you know that? It feels so. What I know now is that feelings are really your GPS system for life. When you're supposed to do something or not supposed to do something, your emotional guidance system lets you know. The trick is to learn to check your ego at the door and start checking your gut instead. Every right decision I've made?every right decision I've ever made?has come from my gut. And every wrong decision I've ever made was a result of me not listening to the greater voice of myself.
이건 사실이었습니다. 자신이 옳은 일을 하고 있다고 어떻게 알 수 있냐고요? 이걸 어떻게 아냐고요? 이건 느껴지는 것입니다. 지금 제가 알고 있는 것은 직감이 여러분들의 삶에 위치 추적 장치가 된다는 것입니다. 여러분이 무언가를 하려고 하거나 하지 않으려고 할 때 여러분의 감정적 안내 시스템이 판단을 하게 해줍니다. 이 방법은 시작하기 전에 자아를 확인하는 것을 배우고, 시작하고 나서는 대신에 여러분의 배짱을 확인하는 것입니다. 제가 내렸던 옳은 결정들은 저의 배짱으로부터 온 것입니다. 제가 했던 옳지 않은 결정들은 모두 제가 스스로 내면의 목소리를 듣지 않았을 때 내린 것이었습니다.
If it doesn't feel right, don't do it. That's the lesson. And that lesson alone will save you, my friends, a lot of grief. Even doubt means don't. This is what I've learned. There are many times when you don't know what to do. When you don't know what to do, get still, get very still, until you do know what to do.
옳지 않다고 느껴진다면 하지 마십시오. 그것이 교훈입니다. 그리고 이 교훈 하나가 여러분, 저의 친구들을 많은 슬픔으로부터 지켜줄 것입니다. 의심이 간다면 하지 말라는 것입니다. 이것이 제가 배운 교훈입니다. 무엇을 해야 할지 모를 때가 많습니다. 무엇을 해야 할지 모른다면 그냥 가만히, 아주 가만히 계십시오. 여러분이 뭘 할지 알기 전까지는 말이죠.
And when you do get still and let your internal motivation be the driver, not only will your personal life improve, but you will gain a competitive edge in the working world as well. Because, as Daniel Pink writes in his best-seller, A Whole New Mind, we're entering a whole new age. And he calls it the Conceptual Age, where traits that set people apart today are going to come from our hearts?right brain?as well as our heads. It's no longer just the logical, linear, rules-based thinking that matters, he says. It's also empathy and joyfulness and purpose, inner traits that have transcendent worth.
여러분이 가만히 기다리면서 내면의 동기가 이끌어주기를 기다린다면 여러분 개인의 삶이 발전될 뿐만 아니라 직장에서도 경쟁력을 갖게 될 것입니다. 다니엘 핑크의 베스트셀러 ‘새로운 세계가 온다’에 쓰여 있는 것처럼 우리는 완전히 새로운 시대로 접어들고 있기 때문입니다. 그는 이것을 ‘관념적 시대’라고 하면서 사람들을 서로 분류하는 특징은 우리의 마음, 우뇌와 머리로부터 오게 될 거라고 했습니다. 그에 말에 따르면 그것은 더 이상 논리적이지 않고 1차적이지 않으며 규칙에 지배되지 않은 시대입니다. 감정적이고 즐거우며 훌륭한 가치를 지닌 내면적 특성을 가지고 있습니다.
These qualities bloom when we're doing what we love, when we're involving the wholeness of ourselves in our work, both our expertise and our emotion.
이러한 성향은 우리가 좋아하는 일을 할 때, 자신의 일에 완전히 몰두할 때 우리의 전문성과 감정을 자라나게 합니다.
So, I say to you, forget about the fast lane. If you really want to fly, just harness your power to your passion. Honor your calling. Everybody has one. Trust your heart and success will come to you.
지름길을 생각하지 마십시오. 정말 날고 싶다면 여러분의 열정의 힘을 기르세요. 스스로의 외침에 귀 기울이세요. 모든 사람들은 하나를 갖고 있습니다. 자신의 마음을 믿는다면 성공을 이룰 수 있을 겁니다.
So, how do I define success? Let me tell you, money's pretty nice. I'm not going to stand up here and tell you that it's not about money, 'cause money is very nice. I like money. It's good for buying things.
그럼, 전 성공을 무엇이라 정의할까요? 분명히, 돈은 멋진것입니다. 난 여기에 서서 돈은 별거 아냐라도 고상한 척은 하지 않을겁니다. 왜냐하면 돈은 정말 좋은거거든요. 전 돈을 좋아합니다. 물건을 살때 그것은 꼭 필요한 겁니다.
But having a lot of money does not automatically make you a successful person. What you want is money and meaning. You want your work to be meaningful. Because meaning is what brings the real richness to your life. What you really want is to be surrounded by people you trust and treasure and by people who cherish you. That's when you're really rich.
하지만 돈을 많이 갖고 있다고 해서 자동으로 여러분이 성공한 사람이 되는 것은 아닙니다.여러분이 원하는 것은 돈과 의미입니다. 여러분은 자신이 하는 일이 의미 있는 것이길 원합니다. 의미라는 것이 여러분의 삶에 진정으로 풍요를 가져다주기 때문이죠. 여러분이 진정으로 원하는 것은 여러분이 신뢰하고 소중히 여기는 사람들과 여러분을 소중히 여기는 사람들을 주변해 두는 것입니다. 이것이 진정한 의미의 부자입니다.
So, lesson one, follow your feelings. If it feels right, move forward. If it doesn't feel right, don't do it.
첫 번째 교훈은, 항상 마음을 따르라는 것입니다. ‘맞다’라는 느낌이 들면 밀어붙이고 그렇지 않다면 하지 마세요.
Now I want to talk a little bit about failings, because nobody's journey is seamless or smooth. We all stumble. We all have setbacks. If things go wrong, you hit a dead end?as you will?it's just life's way of saying time to change course. So, ask every failure?this is what I do with every failure, every crisis, every difficult time?I say, what is this here to teach me? And as soon as you get the lesson, you get to move on. If you really get the lesson, you pass and you don't have to repeat the class. If you don't get the lesson, it shows up wearing another pair of pants?or skirt?to give you some remedial work.
자, 이제 실패에 대해 조금 말씀을 드릴게요. 그 누구의 삶도 흠집 없이 순탄할 수만은 없으니까요. 우리는 모두 비틀거리며 고난을 맞기도 하죠. 일이 잘못되면 막다른 골목에 다다를 겁니다. 그,. 그건 바로 삶의 방향을 바꿀 때가 되었다고 인생이 말해주는 겁니다. 그러니 실패할 때마다 자신에게 물어보세요. 저는 그렇게 합니다. 모든 어려움, 고난, 힘든 시기에 저는 '나에게 무엇을 가르쳐주려고 왔을까?' 라고 물어요. 그리고 교훈을 얻자마자 여러분은 발전하게 됩니다. 만약 진정한 교훈을 얻는다면 여러분은 그 고난을 이수했으며 재수강할 필요가 없어요. 만약 교훈을 얻지 못하면 다른 곳에서 나타날 거예요. 여러분에게 보충할 수 있는 숙제를 주기위해서 말이죠.
And what I've found is that difficulties come when you don't pay attention to life's whisper, because life always whispers to you first. And if you ignore the whisper, sooner or later you'll get a scream. Whatever you resist persists. But, if you ask the right question?not why is this happening, but what is this here to teach me??it puts you in the place and space to get the lesson you need.
또 제가 알게 된 것은, 어려움은 여러분이 관심을 기울이지 않을 때 오며 그때 인생이 속삭입니다. 네, 인생은 당신에게 먼저 속삭입니다. 그때 여러분이 그 속삭임을 무시하면 언젠가는 그것이 외침으로 변하죠. 여러분이 저항하는 것은 지속될 것입니다 하지만 옳은 질문을 하세요. '왜 나한테 이런 일이' 가 아닌 '이것이 나에게 무엇을 가르쳐 주는가'를요. 이것은 지금 나에게 무엇을 가르쳐주고 있는가? 그래야 당신에게 필요한 교훈을 얻을 수가 있습니다.
My friend Eckhart Tolle, who's written this wonderful book called A New Earth that's all about letting the awareness of who you are stimulate everything that you do, he puts it like this: He says, don't react against a bad situation; merge with that situation instead. And the solution will arise from the challenge. Because surrendering yourself doesn't mean giving up; it means acting with responsibility.
여러분이 하는 모든 것의 도익에 대한 자각을 이야기하는 ‘새로운 지구’라는 아주 훌륭한 책을 쓴 저의 지인인 에크호트 톨은 그의 저서에서 다음과 같이 말했습니다. 좋지 않은 상황에 반응하지 말고 그 상황과 함께하라고 말이죠. 그리고 그 해결책은 도전에서 올 것입니다. 왜냐하면 순순히 따르는 것은 포기하는 것이 아니라 책임감을 갖고 행동하는 것이기 때문이죠.
Many of you know that, as President Hennessy said, I started this school in Africa. And I founded the school, where I'm trying to give South African girls a shot at a future like yours?Stanford. And I spent five years making sure that school would be as beautiful as the students. I wanted every girl to feel her worth reflected in her surroundings. So, I checked every blueprint, I picked every pillow. I was looking at the grout in between the bricks. I knew every thread count of the sheets. I chose every girl from the villages, from nine provinces. And yet, last fall, I was faced with a crisis I had never anticipated. I was told that one of the dorm matrons was suspected of sexual abuse.
헤네시 총장님이 말씀하시고 또 많은 분들이 알고 계시는 것처럼 저는 아프리카에 학교를 설립했습니다. 저는 남아공 소녀들에게도 스탠포드와 같은 멋진 미래를 주고 싶었습니다. 학교가 학생들만큼 아름다울 수 있도록 5년이란 시간을 투자했습니다. 좋은 환경을 통해 학생들이 스스로의 가치를 느낄 수 있도록 해주고 싶었죠. 그래서 제가 직접 모든 청사진을 점검하고 베개도 직접 골랐습니다. 벽돌사이에 들어가는 메지도 살펴보았죠. 심지어 침대보가 몇 수 인지까지도 알고 있었습니다. 저는 9개의 지방에서 소녀들을 뽑았습니다. 그런데 지난 가을, 저는 예상치 못한 위기와 직면했습니다. 기숙사 사감 중 한 명이 성추행 용의자라는 것이었죠.
That was, as you can imagine, devastating news. First, I cried?actually, I sobbed?for about half an hour. And then I said, let's get to it; that's all you get, a half an hour. You need to focus on the now, what you need to do now. So, I contacted a child trauma specialist. I put together a team of investigators. I made sure the girls had counseling and support. And Gayle and I got on a plane and flew to South Africa.
그것은 정말 악몽같은 소식이었습니다. 전 그 소식을 듣자마자 30분간 흐느꼈습니다. 그리고 그만큼 울었으면 충분하다고 생각하고 다른 30분 동안은 문제를 해결해야 한다고 다짐했습니다. 저는 당시 무엇을 해야 하는 지에 집중했습니다. 그래서 저는 아동 전문 심리 치유 상담사에게 연락을 했습니다. 그리고 그들과 함께 조사팀을 꾸려 여학생들이 확실하게 상담과 지원을 받을 수 있게 모든 조치를 취했습니다. 그리고 저는 게일과 함께 남아프리카로 가는 비행기에 몸을 실었습니다.
And the whole time I kept asking that question: What is this here to teach me? And, as difficult as that experience has been, I got a lot of lessons. I understand now the mistakes I made, because I had been paying attention to all of the wrong things. I'd built that school from the outside in, when what really mattered was the inside out.
비행기 안에서 저는 계속 제 자신에게 질문했습니다. 이 상황이 나에게 가르치려 하는 것이 무엇일까? 그런 경험은 정말 가슴 아팠지만 저는 많은 교훈을 얻을 수 있었습니다. 저는 중요하지 않은 것에만 관심을 기울였기 때문에 이러한 실수를 저질렀다는 것을 깨달을 수 있었습니다. 그 학교의 외부적인 것에만 신경을 썼었죠. 그러나 정말 중요한 것은 내실을 다지는 것이었습니다.
So, it's a lesson that applies to all of our lives as a whole. What matters most is what's inside. What matters most is the sense of integrity, of quality and beauty. I got that lesson. And what I know is that the girls came away with something, too. They have emerged from this more resilient and knowing that their voices have power.
가장 중요한 것은 내면이라는 이 교훈은 우리들 모든 삶에 적용될 수 있습니다. 삶에서 가장 중요한 것은 됨됨이, 삶의 질, 아름다움과 같은 가치인 것입니다. 그리고 여학생들도 여기로부터 무언가를 배웠다는 것을 알았습니다. 그들은 어려운 일에 대처하는 힘이 생겼고 자신의 목소리가 힘이 있음을 확인할 수 있었습니다.
And their resilience and spirit have given me more than I could ever give to them, which leads me to my final lesson?the one about finding happiness?which we could talk about all day, but I know you have other wacky things to do.
그 아이들이 보여준 회복력과 정신력은 제가 그들에게 줄 수 있는 것보다 더 큰 것이었고 이것이 제가 말하려고 하는 마지막 교훈을 주었습니다. 그것은 바로 ‘행복 찾기’입니다. 이것에 관해 하루 종일 이야기할 수 있지만 여러분들에게도 다른 할 일이 많은 걸 알고 있기 때문에 그렇게 하지는 않을 것입니다.
Not a small topic this is, finding happiness. But in some ways I think it's the simplest of all. Gwendolyn Brooks wrote a poem for her children. It's called "Speech to the Young : Speech to the Progress-Toward." And she says at the end, "Live not for battles won. / Live not for the-end-of-the-song. / Live in the along." She's saying, like Eckhart Tolle, that you have to live for the present. You have to be in the moment. Whatever has happened to you in your past has no power over this present moment, because life is now.
행복을 찾는다는 것은 결코 작은 주제가 아닙니다. 하지만 어떤 면에서는 가장 간단한 주제라고 생각합니다. 그웬도린 브룩스가 자신의 아이들을 위해 쓴 시 ‘젊은이에게 고함 - 전진할 이에게 고함’의 마지막에는 전쟁에서 이기기 위해 살지 말아라, 결과를 위해 살지 말라, 과정을 위해 살아라. 라는 구절이 있습니다. 그녀는 앞서 말한 에크호트 톨처럼 현재에 충실한 삶을 살라고 했습니다. 여러분은 순간에 있어야합니다. 인생은 현재형이기 때문에 과거에 무슨 일이 있었든 현재에서 그것은 아무런 힘을 발휘하지 못합니다.
But I think she's also saying, be a part of something. Don't live for yourself alone. This is what I know for sure: In order to be truly happy, you must live along with and you have to stand for something larger than yourself. Because life is a reciprocal exchange. To move forward you have to give back. And to me, that is the greatest lesson of life. To be happy, you have to give something back.
그녀는 무언가의 일부가 되라는 말도 했습니다. 자기 자신만을 위해 살지 말라는 것이죠. 이것은 어려분이 더 행복해지기 위해 자신보다 더 큰 것을 지키며 다른 사람들과 함께 어울려 살아야 한다는 것입니다. 왜냐하면 인생은 상호 교환관계이기 때문입니다. 앞으로 나아가기 위해서는 베풀어야 합니다. 저에게 이것은 인생에서 가장 큰 교훈입니다. 행복해지기 위해서는 무언가 베풀어야합니다.
I know you know that, because that's a lesson that's woven into the very fabric of this university. It's a lesson that Jane and Leland Stanford got and one they've bequeathed to you. Because all of you know the story of how this great school came to be, how the Stanfords lost their only child to typhoid at the age of 15. They had every right and they had every reason to turn their backs against the world at that time, but instead, they channeled their grief and their pain into an act of grace. Within a year of their son's death, they had made the founding grant for this great school, pledging to do for other people's children what they were not able to do for their own boy.
이런 정신은 이미 이 대학에 뿌리 깊게 내려있기 때문에 이미 여러분들은 잘 알고 있다고 생각합니다. 그 교훈은 이 대학을 설립한 스탠포드 부부가 깨달았던 것이고 또한 여러분에게 전달한 것입니다. 여러분은 이 학교가 어떻게 설립 되었는지, 스탠포드 부부가 어떻게 해서 15살 난 외동아들을 장티푸스로 잃게 되었는지를 알고 있을 것입니다. 그당시 이들 부부는 세상에 등을 돌릴 충분한 권리와 이유가 있었지만 대신 그 슬픔과 고통을 선행으로 승화시켰습니다. 아들을 떠나보낸 그 해에 이들 부부가 아들을 위해 해줄 수 없는 일을 다른 사람들의 자녀에게 베풀기 위해 학교를 설립했습니다.
The lesson here is clear, and that is, if you're hurting, you need to help somebody ease their hurt. If you're in pain, help somebody else's pain. And when you're in a mess, you get yourself out of the mess helping somebody out of theirs. And in the process, you get to become a member of what I call the greatest fellowship of all, the sorority of compassion and the fraternity of service.
여기서 교훈은 명확해집니다. 상처를 받았을 때 다른 사람의 상처를 치유해주세요. 고통 받고 있을 때 다른 사람의 고통을 덜어주세요. 혼란스러운 상황에 처해있다면 다른 사람도 그곳에서 빠져나올 수 있게 도와주면서 여러분 스스로도 빠져나와야 합니다. 그런 과정에서 여러분은 이러한 과정 속에서 여러분은 제가 말하는 ‘위대한 동반자’의 일원이 되는 것입니다. 따뜻한 마음과 봉사정신을 가진 모임이죠.
The Stanfords had suffered the worst thing any mom and dad can ever endure, yet they understood that helping others is the way we help ourselves. And this wisdom is increasingly supported by scientific and sociological research. It's no longer just woo-woo soft-skills talk. There's actually a helper's high, a spiritual surge you gain from serving others. So, if you want to feel good, you have to go out and do some good.
스탠포드 부부는 다른 부모들이 견뎌왔던 것 중 가장 끔찍한 고통을 겪었습니다. 하지만 그들은 다른 사람을 도움으로써 자신들을 도울 수 있다는 것을 깨달았습니다. 그리고 이러한 지혜는 점점 과학적, 사회적 연구가 뒷받침해주고 있습니다. 이제 이것은 더 이상 단순히 듣기 좋은 말이 아닙니다. 다른 사람에게 봉사하는 사람이 느낄 수 있는 희열이 있습니다. 그러니 좋은 느낌을 얻고 싶다면 밖으로 나가 좋은 일을 하세요.
But when you do good, I hope you strive for more than just the good feeling that service provides, because I know this for sure, that doing good actually makes you better. So, whatever field you choose, if you operate from the paradigm of service, I know your life will have more value and you will be happy.
그런데 여러분이 좋은 일을 한다면 봉사를 함으로써 그것이 주는 좋은 느낌 그 이상의 것을 위해 노력하길 바랍니다. 선행은 확실히 여러분을 변화시켜주니까요. 어떤 분야를 선택하든 봉사 정신으로 임한다면 여러분의 삶은 분명 더 가치 있어질 겁니다. 그리고 여러분은 행복해질 겁니다.
I was always happy doing my talk show, but that happiness reached a depth of fulfillment, of joy, that I really can't describe to you or measure when I stopped just being on TV and looking at TV as a job and decided to use television, to use it and not have it use me, to use it as a platform to serve my viewers. That alone changed the trajectory of my success.
전 토크쇼를 진행할 수 있다는 것이 너무나 행복합니다. 제가 단순히 TV에 출연하고 TV를 일로써 이용한다는 생각을 버리고 시청자들에게 봉사하는 곳이라고 생각하자 그 행복은 성취와 기쁨의 깊이에 다다르고 이것은 여러분에게 설명하거나 측정할 수 없을 정도입니다. 그것만으로도 제 성공의 궤도가 바뀐 것이지요.
So, I know this?that whether you're an actor, you offer your talent in the way that most inspires art. If you're an anatomist, you look at your gift as knowledge and service to healing. Whether you've been called, as so many of you here today getting doctorates and other degrees, to the professions of business, law, engineering, humanities, science, medicine, if you choose to offer your skills and talent in service, when you choose the paradigm of service, looking at life through that paradigm, it turns everything you do from a job into a gift. And I know you haven't spent all this time at Stanford just to go out and get a job.
여러분이 만약 배우라면 예술에 가장 큰 영감을 줄 수 있는 배우일 것입니다. 여러분이 해부학자라면 자신이 가진 재능을 다른 사람을 치료하기 위한 지식과 봉사의 수단이라 여길 것입니다. 오늘 이 자리에서 많은 사람들이 박사 학위를 받는데 경영학, 법학, 공학, 인문학, 과학, 약학 등 그 어느 분야에 있다고 해도 봉사 정신으로 인생을 바라보고 여러분의 기술과 재능으로 이를 행한다면, 여러분의 직업은 선물로 바뀔 것입니다. 여러분이 단지 직장을 구하기 위해 스탠포드에서 이런 시간들을 보낸 것이 아니라는 것을 잘 알고 있기 때문입니다.
You've been enriched in countless ways. There's no better way to make your mark on the world and to share that abundance with others. My constant prayer for myself is to be used in service for the greater good.
여러분이야말로 정말 복을 많이 받은 사람들입니다. 세상에 이름을 남기고 그 풍요를 다른 이들과 나누는 것처럼 좋은 일은 없을 것입니다. 저는 제가 더 좋은 일에 봉사할 수 있도록 끊임없이 기도합니다.
So, let me end with one of my favorite quotes from Martin Luther King. Dr. King said, "Not everybody can be famous." And I don't know, but everybody today seems to want to be famous.
이제 마지막으로 마틴 루터킹 목사의 명언 중 제가 가장 좋아하는 구절을 인용하면서 이야기의 끝을 맺고자 합니다. 그는 모든 사람이 유명해질 수는 없다고 말했습니다. 하지만 잘은 몰라도 오늘날 사람들은 모두 유명해지기를 원합니다.
But fame is a trip. People follow you to the bathroom, listen to you pee. It's just?try to pee quietly. It doesn't matter, they come out and say, "Ohmigod, it's you. You peed."
That's the fame trip, so I don't know if you want that.
하지만 유명세는 짧은 여행에 지나지 않습니다. 여러분이 유명해지면 사람들은 화장실까지 쫓아와 여러분이 아무리 조용히 소변을 보려 해도 그 소리를 듣고 ‘어머나 소변 본 사람이 당신이었군요.’라는 말을 할 것입니다. 이것이 유명이라는 짧은 여행입니다. 이래도 여러분이 유명해지길 바랄지는 모르겠습니다.
So, Dr. King said, "Not everybody can be famous. But everybody can be great, because greatness is determined by service." Those of you who are history scholars may know the rest of that passage. He said, "You don't have to have a college degree to serve. You don't have to make your subject and verb agree to serve. You don't have to know about Plato or Aristotle to serve. You don't have to know Einstein's theory of relativity to serve. You don't have to know the second theory of thermodynamics in physics to serve. You only need a heart full of grace and a soul generated by love."
마틴 루터킹 목사는 말했습니다. ‘모든 사람이 유명해질 수는 없다. 그러나 모두 위대해 질 수는 있다. 왜냐하면 위대함은 봉사로 만들어지기 때문이다.“라고 말입니다. 역사를 공부한 사람이라면 이것의 나머지 구절도 알 것입니다. 그는 ’봉사하기 위해 대학 학위를 가질 필요는 없다. 봉사하기 위해 표준어를 구사할 필요도 없고 봉사하기 위해 플라톤이나 아리스토텔레스를 알 필요가 없다. 또한 봉사하기 위해 아인슈테인의 상대성이론이나 열역학 제 2법칙을 알 필요가 없다. 은혜에 충반한 가슴과 사랑으로 가득찬 영혼만이 필요할 뿐이다.”라고 했습니다.
In a few moments, you'll all be officially Stanford's '08.
잠시 후 여러분은 공식적으로 2008년도 스탠포드 졸업생이 됩니다.
You have the heart and the smarts to go with it. And it's up to you to decide, really, where will you now use those gifts? You've got the diploma, so go out and get the lessons, 'cause I know great things are sure to come.
여러분은 그에 걸 맞는 마음과 명석함을 갖고 있습니다. 이제 결정은 여러분에게 달려 있습니다. 이러한 재능을 어디다 사용하시겠습니까? 학위를 받았으니 바깥세상으로 나가 교훈을 얻으십시오. 왜냐하면 반드시 좋은 일들이 올 테니까요.
You know, I've always believed that everything is better when you share it, so before I go, I wanted to share a graduation gift with you. Underneath your seats you'll find two of my favorite books. Eckhart Tolle's A New Earth is my current book club selection. Our New Earth webcast has been downloaded 30 million times with that book. And Daniel Pink's A Whole New Mind: Why Right-Brainers Will Rule the Future has reassured me I'm in the right direction.
여러분도 아시다시피 함께 나눌 때 좋은 일이 생깁니다. 그래서 제가 가기 전 여러분과 작은 졸업 선물을 나누고자 합니다. 여러분의 의자 밑에 제가 좋아하는 책 2권이 놓여 있습니다. 에크홀트 톨의 새로운 지구라는 책은 현재 저의 북클럽에서 선정된 책입니다. 이 책의 웹캐스트는 3000만 건이나 다운로드 되었습니다. 또 하나의 책 다니엘 핑크의 ‘새로운 미래가 온다. - 왜 우뇌를 가진 자가 미래를 지배하는가’는 제가 올바른 길을 가고 있는 지 확인시켜준 책이었습니다.
I really wanted to give you cars but I just couldn't pull that off! Congratulations, '08!
Thank you. Thank you.
여러분에게 차를 주면 좋았겠지만 그건 제 능력 밖입니다. 축하합니다. 08년도 졸업생 여러분!
I am honored to be with you today at your commencement from one of the finest universities in the world. I never graduated from college. Truth be told, this is the closest I’ve ever gotten to a college graduation. Today I want to tell you three stories from my life. That’s it. No big deal. Just three stories.
오늘 세계에서 손꼽히는 대학의 졸업식에 여러분과 함께 할 수 있게 되어 영광입니다. 전 대학을 졸업한 적이 없으며, 솔직히 말해 이것이 대학 졸업식에 가장 가까이 참가한 것입니다. 오늘 전 제 인생의 3가지 이야기를 할 것입니다. 단지 그것뿐. 별일도 아닙니다. 단지 3가지의 이야기일뿐이죠.
I dropped out of Reed College after the first 6 months, but then stayed around as a drop-in for another 18 months or so before I really quit. So why did I drop out?The first story is about connecting the dots.
전 리드칼리지를 6개월 다니고 중퇴를 했지만, 이후 완전히 그만둘때까지 18개월동안 더 청강을 하며 대학에 머물렀습니다. 근데 제가 왜 중퇴를 했을까요? 첫번째는 점들을 연결하는 것에 관한 이야기입니다.
It started before I was born. My biological mother was a young, unwed college graduate student, and she decided to put me up for adoption. She felt very strongly that I should be adopted by college graduates, so everything was all set for me to be adopted at birth by a lawyer and his wife. Except that when I popped out they decided at the last minute that they really wanted a girl. So my parents, who were on a waiting list, got a call in the middle of the night asking: “We have an unexpected baby boy; do you want him?” They said: “Of course.” My biological mother later found out that my mother had never graduated from college and that my father had never graduated from high school. She refused to sign the final adoption papers. She only relented a few months later when my parents promised that I would someday go to college.
그 이야기는 제가 태어나기 전부터 시작합니다. 젊은 시절 미혼의 대학졸업생이었던 제 생물학적 어머니는 저를 입양시키기로 결정했습니다. 그녀는 저를 대학졸업자에게 입양시켜야겠다고 아주 강하게 느꼈고, 그래서 제가 태어날때 변호사와 그의 아내에 의해 입양되도록 모든것이 준비되어있었습니다. 단지 제가 세상에 나왔을때 그들이 마지막 순간에 딸을 원했다는 것을 제외하면 말이죠. 그래서 대기자명단에 있던 우리 부모님은 한밤중에 "우린 기대했던것과 달리 아들을 낳았어요, 그래도 괜찮으세요?"라는 전화를 받았었죠. 그들은 "물론이죠"라고 답했습니다. 저의 생물학적 어머니는 나중에야 저의 어머니가 대학을 졸업하지 않았다는 것을 알았고 아버지는 고등학교를 졸업하지 않았다는 것을 알았습니다. 그녀는 입양 서류에 서명하는 것을 거절했죠. 그녀는 몇 달 후에, 저의 부모님들이 제가 대학에 갈 수 있도록 하겠다는 약속을 듣고서야 누그러졌습니다.
And 17 years later I did go to college. But I naively chose a college that was almost as expensive as Stanford, and all of my working-class parents’ savings were being spent on my college tuition. After six months, I couldn’t see the value in it. I had no idea what I wanted to do with my life and no idea how college was going to help me figure it out. And here I was spending all of the money my parents had saved their entire life. So I decided to drop out and trust that it would all work out OK. It was pretty scary at the time, but looking back it was one of the best decisions I ever made. The minute I dropped out I could stop taking the required classes that didn’t interest me, and begin dropping in on the ones that looked interesting.
17년 후 전 대학에 갔습니다. 하지만 전 순진하게 스탠포드만큼이나 비싼 대학을 선택했고, 노동자계급이었던 부모님의 모든 저축은 제 대학등록금으로 들어갔습니다. 6개월 후, 전 대학에서 가치를 찾을 수가 없었습니다. 저는 제 인생에서 무엇을 하고싶은지 몰랐고, 대학이 어떻게 그것을 구체화하는데 도움을 줄건지 알지 못했습니다. 그리고 바로 그 대학에 저의 부모님이 평생을 모은 돈을 사용하고 있었던 겁니다. 그래서 전 중퇴를 결심하고, 그것으로 모든 것이 잘 될 것이라 믿었습니다. 당시엔 꽤 무서웠지만, 돌이켜보면 그것은 제가 한 최고의 결정중 하나였습니다. 중퇴하자마자 저는 흥미가 전혀없는 필수과목 수강을 관둘 수 있었고, 제가 보기에 흥미로운 수업들만 청강을 했습니다.
It wasn’t all romantic. I didn’t have a dorm room, so I slept on the floor in friends’ rooms, I returned Coke bottles for the 5¢ deposits to buy food with, and I would walk the 7 miles across town every Sunday night to get one good meal a week at the Hare Krishna temple. I loved it. And much of what I stumbled into by following my curiosity and intuition turned out to be priceless later on. Let me give you one example:
그것은 전혀 낭만적이지 않았습니다. 전 기숙사방도 없어서, 친구집 마루바닦에서 자고, 콜라병을 반환하고 받은 5센트 동전을 모아 음식을 사먹었으며, 매주 일요일 저녁마다 하레 크리쉬나 사원에서 주는 근사한 식사를 먹기 위해 마을을 가로질러 7마일을 걷곤 했습니다. 전 그 식사를 정말 좋아했습니다. 호기심과 직관을 따라 우연히 만났던 많은 것들이 나중에 값어치를 따질 수 없을 정도로 귀한 것이라는 것을 나중에 알았습니다. 여러분에게 하나의 예를 들려드리겠습니다.
Reed College at that time offered perhaps the best calligraphy instruction in the country. Throughout the campus every poster, every label on every drawer, was beautifully hand calligraphed. Because I had dropped out and didn’t have to take the normal classes, I decided to take a calligraphy class to learn how to do this. I learned about serif and sans serif typefaces, about varying the amount of space between different letter combinations, about what makes great typography great. It was beautiful, historical, artistically subtle in a way that science can’t capture, and I found it fascinating.
리드대학은 당시 미국에서 가장 훌륭한 서예 수업을 제공했던 것 같습니다. 캠퍼스 곳곳에 있는 포스터들과 서랍에 붙어있는 라벨들은 아름다운 손글씨로 쓰여져있었습니다. 저는 중퇴했고, 정규과정을 들을 필요가 없었습니다. 저는 어떻게 이렇게 쓸 수 있는지 배우기 위해 서예수업을 들었습니다. 전 세리프와 산스 세리프활자체를 배웠고, 빈공간과 활자들의 배치에 따라 공간미가 어떻게 변하는지, 그리고 위대한 조판들이 어떻게 위대해지는지에 대해 배웠습니다. 그것은 과학으로 설명할 수 없는 아름답고, 역사적이며 , 예술적으로 미묘한 방식이었으며, 전 그것에 매혹되었습니다.
None of this had even a hope of any practical application in my life. But 10 years later, when we were designing the first Macintosh computer, it all came back to me. And we designed it all into the Mac. It was the first computer with beautiful typography. If I had never dropped in on that single course in college, the Mac would have never had multiple typefaces or proportionally spaced fonts. And since Windows just copied the Mac, it’s likely that no personal computer would have them. If I had never dropped out, I would have never dropped in on this calligraphy class, and personal computers might not have the wonderful typography that they do. Of course it was impossible to connect the dots looking forward when I was in college. But it was very, very clear looking backward 10 years later.
이것이 제 인생에서 어떤 실제적인 쓰임이 될 것이라고는 생각치 못했습니다. 하지만 10년후, 우리가 첫번째 매킨도시 컴퓨터를 디지안했을 때, 그것이 저에게 떠올랐습니다. 그래서 우리는 맥에 서예를 접목했습니다. 맥은 아름다운 서체를 가진 첫번째 컴퓨터였습니다. 만약 제가 대학에서 그 한개의 과목을 청강하지 않았다면 맥은 절대로 다양한 서체들과 공간에 비례하는 활자체들을 가질 수 없었을 것입니다. 윈도우(마이크로소프트)는 맥을 카피한 겄이기 때문에, 개인용 컴퓨터도 그런 아름다운 활자체를 가질 수 없었을 것입니다. 제가 중퇴하지 않았다면, 서예 수업을 청강하지 않았을 것이고, 어떠한 개인용 컴퓨터들도 환상적인 활자체를 가지지 못했을 것입니다. 확실히 제가 대학때 앞을 바라보며 그 사건들(dots)을 연결하진 못했을 겁니다. 하지만 10년후 되돌아보면 그것은 아주아주 명백한 것이었죠.
Again, you can’t connect the dots looking forward; you can only connect them looking backward. So you have to trust that the dots will somehow connect in your future. You have to trust in something — your gut, destiny, life, karma, whatever. This approach has never let me down, and it has made all the difference in my life.
다시 말하자면, 앞을 내다보고 점들을 연결할 순 없습니다. 오직 우리가 지나온 과거를 돌아보며 점들을 연결하는 것이 가능할 뿐이죠. 그러니까 여러분은 미래에 그 점들이 어떻게든 연결될거라 믿어야만 합니다. 여러분은 - 당신의 근성, 운명, 인생, 업 - 무엇이 됐든 믿음을 가져야 합니다. 이러한 사고방식이야말로 저를 실망시키지 않았고, 이것이 제 인생의 차이를 만들었습니다.
My second story is about love and loss.
제 2번째 이야기는 사랑과 잃어버림에 관한 것입니다.
I was lucky — I found what I loved to do early in life. Woz and I started Apple in my parents’ garage when I was 20. We worked hard, and in 10 years Apple had grown from just the two of us in a garage into a $2 billion company with over 4,000 employees. We had just released our finest creation — the Macintosh — a year earlier, and I had just turned 30. And then I got fired. How can you get fired from a company you started? Well, as Apple grew we hired someone who I thought was very talented to run the company with me, and for the first year or so things went well. But then our visions of the future began to diverge and eventually we had a falling out. When we did, our Board of Directors sided with him. So at 30 I was out. And very publicly out. What had been the focus of my entire adult life was gone, and it was devastating.
전 행운아였죠. 제 삶의 이른 시기에 전 사랑하는 일을 발견했습니다. 워즈(니악)와 전 20살때 부모님의 차고에서 애플을 설립했습니다. 우린 열심히 했고, 10년만에 차고에서 우리 둘이 시작한 애플은 4천명 이상의 종업원을 가진 20억불의 회사로 성장했습니다. 우리는 막 우리의 최고의 작품 매킨토시를 1년전에 발표했었고, 전 30이 되었습니다. 그리고 전 회사에서 짤렸습니다. 어떻게 당신이 만든 회사에서 짤릴수가 있죠? 그게, 애플이 성장함에 따라 우리는 제가 생각하기에 나와 함께 회사를 잘 경영할 수 있는 재능을 가졌다고 생각한 사람을 고용했고, 첫 일년동안은 일이 잘 되어갔습니다. 하지만 미래에 대한 우리의 비젼들에 차이가 생기기 시작하면서 마침내 우리는 사이가 틀어졌고, 이사회는 그의 편을 들어주었습니다. 그래서 30살때 전 쫓겨났습니다. 그것은 매우 공개적인 축출이었습니다. 내가 집중해왔던 성인으로서의 모든 삶이 사라져버렸고, 그것은 엄청난 충격이었습니다.
I really didn’t know what to do for a few months. I felt that I had let the previous generation of entrepreneurs down — that I had dropped the baton as it was being passed to me. I met with David Packard and Bob Noyce and tried to apologize for screwing up so badly. I was a very public failure, and I even thought about running away from the valley. But something slowly began to dawn on me — I still loved what I did. The turn of events at Apple had not changed that one bit. I had been rejected, but I was still in love. And so I decided to start over.
몇 달간 전 도대체 무엇을해야 할지 몰랐습니다. 전 지난 세대의 사업가정신이 사라져가는 것처럼 느꼈고, 그건 저를 지나쳐갔던 바톤을 놓친 것만 같았습니다. 전 데이비드 패커드와 밥 노이스를 만나서, 그렇게 형편없이 일을 망친것에 대해 사과하려고 했습니다. 전 아주 공개적으로 망했고, 심지어는 밸리(실리콘밸리)에서 도망쳐야겠다고까지 생각했습니다. 하지만 무언가 - 내가 했던 일을 여여전히 사랑했다는 사실 - 천천히 저를 깨우기 시작했습니다. 애플에서의 사태가 그 사실을 조금도 바꾸지 않았죠. 전 쫓겨났지만, 여전히 사랑에 빠져있었습니다. 그래서 전 다시 시작하기로 했습니다.
I didn’t see it then, but it turned out that getting fired from Apple was the best thing that could have ever happened to me. The heaviness of being successful was replaced by the lightness of being a beginner again, less sure about everything. It freed me to enter one of the most creative periods of my life.
당시 전 알지못햇지만, 애플에서 해고당한 것은 저에게 일어난 일 중 최고의 사건 중 하나였다는 것입니다. 성공의 무거움이 다시 초심자가 되는 가벼움으로 바뀌었고, 모든 일에 덜 확신을 갖게 되었습니다. 그 사건으로 전 제 인생의 가장 창의적인 시기를 보낼 수 있었습니다.
During the next five years, I started a company named NeXT, another company named Pixar, and fell in love with an amazing woman who would become my wife. Pixar went on to create the world’s first computer animated feature film,Toy Story, and is now the most successful animation studio in the world. In a remarkable turn of events, Apple bought NeXT, I returned to Apple, and the technology we developed at NeXT is at the heart of Apple’s current renaissance. And Laurene and I have a wonderful family together.
그 다음 5년간, 전 NeXT라는 회사와, 또 다른 Pixar라는 회사를 설립했습니다. 그리고 저의 아내가 되는 굉장한 여인과 사랑에 빠졌습니다. 픽사는 세계 최초의 컴퓨터 애니메이션 영화를 제작했습니다. 토이 스토리는 현재 스튜디오에서 제작된 세계에서 가장 성공한 만화영화입니다. 이 놀라운 사태의 전환에서, 애플은 넥스트를 매입했고, 전 애플로 복귀했으며, 넥스트에서 개발된 기술은 애플의 부흥을 이끈 핵심이 되었습니다. 그리고 로렌과 전 함께 훌륭한 가족을 가지게 됐죠.
I’m pretty sure none of this would have happened if I hadn’t been fired from Apple. It was awful tasting medicine, but I guess the patient needed it. Sometimes life hits you in the head with a brick. Don’t lose faith. I’m convinced that the only thing that kept me going was that I loved what I did. You’ve got to find what you love. And that is as true for your work as it is for your lovers. Your work is going to fill a large part of your life, and the only way to be truly satisfied is to do what you believe is great work. And the only way to do great work is to love what you do. If you haven’t found it yet, keep looking. Don’t settle. As with all matters of the heart, you’ll know when you find it. And, like any great relationship, it just gets better and better as the years roll on. So keep looking until you find it. Don’t settle.
전 애플에서 해고되지 않았다면 이 모든 것들이 절대 일어나지 않았을 것이라고 확신합니다.약을 먹는 것은 무섭지만, 환자에게는 필요한 것이기도 하죠. 때로는 인생에서 벽돌이 당신의 머리를 때리기도 합니다. 신념을 잃지 마세요. 전 제가 사랑하는 것만이 저를 계속 전진하게 하는 유일한 것이라 확신합니다. 당신이 당신이 사랑하는 것을 발견해야 합니다. 그리고 이것은 당신의 연인뿐만 아니라 일에서도 마찬가지입니다. 일은 당신의 인생의 큰 부분을 채워주게 될 것이고, 진정으로 만족하는 유일한 길을 당신이 진정 위대한 일이라 믿는 것을 하는 것뿐입니다. 그리고 진정으로 위대한 일을 하는 유일한 방법은 당신이 하는 일을 사랑하는 것입니다. 만일 당신이 아직 그것을 찾지 못했다면, 꾸준히 살펴보십시요. 정착하지 마십시요. 모든 것이 마음의 문제이듯이, 당신이 그것을 찾았을때 당신은 알게 될 것입니다. 그리고 모든 위대한 관계가 그렇듯, 그것은 해가 가면 갈수록 더욱 나아지게 될 것입니다. 고로 당신은 그것을 찾을때까지 꾸준히 살펴보고, 정착하지 마십시요.
My third story is about death.
제 세 번째 이야기는 죽음에 관한 것입니다.
When I was 17, I read a quote that went something like: “If you live each day as if it was your last, someday you’ll most certainly be right.” It made an impression on me, and since then, for the past 33 years, I have looked in the mirror every morning and asked myself: “If today were the last day of my life, would I want to do what I am about to do today?” And whenever the answer has been “No” for too many days in a row, I know I need to change something.
제가 17살때, 전 다음과 같은 인용문을 읽었습니다. "만일 당신의 매일매일을 인생의 마지막 날처럼 살아간다면, 언젠가는 당신이 걷던 그 길이 옳았음이 드러날 것이다." 그것은 저에게 감동을 주었고, 그 이후로 전 33년간 매일 아침 거울을 보며 저 자신에게 물었습니다. "만약 오늘이 내 마지막 날이라면, 오늘 내가 하려는 일을 하고 싶은가?". 그리고 그 대답이 "아니오"라고 몇날 몇일을 계속되면, 전 무엇인가 바뀌어야 할때라는 걸 깨닫습니다.
Remembering that I’ll be dead soon is the most important tool I’ve ever encountered to help me make the big choices in life. Because almost everything — all external expectations, all pride, all fear of embarrassment or failure — these things just fall away in the face of death, leaving only what is truly important. Remembering that you are going to die is the best way I know to avoid the trap of thinking you have something to lose. You are already naked. There is no reason not to follow your heart.
난 곧 죽게 될거야라는 사실은 인생의 중요한 결정을 하는 순간에 나를 도와주는 가장 중요한 도구라는 것을 명심하십시요. 거의 모든것 - 모든 외적인 기대, 모든 긍지, 모든 실패나 당혹감에 대한 공포-이 죽음앞에서는 사라지기 때문입니다. 단지 무엇이 진정으로 중요한 것이가만 남습니다. 당신이 죽는다는 사실만이 당신이 무엇인가를 잃을 수 있다는 생각의 덫을 피할 수 있게 하는 최선의 방법임을 기억하십시요. 당신은 이미 발가벗겨 있습니다. 당신의 마음을 따르지 않을 이유가 없습니다.
About a year ago I was diagnosed with cancer. I had a scan at 7:30 in the morning, and it clearly showed a tumor on my pancreas. I didn’t even know what a pancreas was. The doctors told me this was almost certainly a type of cancer that is incurable, and that I should expect to live no longer than three to six months. My doctor advised me to go home and get my affairs in order, which is doctor’s code for prepare to die. It means to try to tell your kids everything you thought you’d have the next 10 years to tell them in just a few months. It means to make sure everything is buttoned up so that it will be as easy as possible for your family. It means to say your goodbyes.
1년 전, 전 암진단을 받았습니다. 아침 7시30분에 스캔을 했고(CT를 찍었고), 저의 췌장에 종양이 확실하게 보였습니다. 전 췌장이 무언지도 몰랐습니다. 의사는 그것은 거의 확실하게 치료불가능한 암의 형태라고 했으며, 길어야 3개월에서 6개월 정도를 더 살 수 있을거라고 했습니다. 의사는 죽어가는 환자에게 의례 하는 규정에 따라 집으로 돌아가 주변을 정리하라고 조언을 했습니다. 그것은 앞으로 10년간 당신이 할 것을 당신의 아이들에게 몇 달동안 전달해주라는 것을 의미했습니다. 신변의 모든 것을 잘 정리해두어, 당신의 가족을 가능한 편하게 해주라는 것을 의미했죠. 그것은 작별인사를 하라는 이야기였습니다.
I lived with that diagnosis all day. Later that evening I had a biopsy, where they stuck an endoscope down my throat, through my stomach and into my intestines, put a needle into my pancreas and got a few cells from the tumor. I was sedated, but my wife, who was there, told me that when they viewed the cells under a microscope the doctors started crying because it turned out to be a very rare form of pancreatic cancer that is curable with surgery. I had the surgery and I’m fine now.
전 하루종일 진단을 받았습니다. 늦은 밤 전 생검을 받았고, 내시경을 목으로 집어넣고 위를 통해 장으로 들어간 후, 바늘로 췌장의 암덩어리로터 세포들을 체취했습니다. 전 차분했지만, 같이 있던 아내는 의사들이 현미경으로 검사를 했던 의사들이 울기 시작했다고 말해줬습니다. 왜냐하면 제 췌장암이 수술로 치료가 가능한 매우 희귀한 종류였기 때문이었습니다. 전 수술을 받았고 아직까지 멀쩡합니다.
This was the closest I’ve been to facing death, and I hope it’s the closest I get for a few more decades. Having lived through it, I can now say this to you with a bit more certainty than when death was a useful but purely intellectual concept:
이것이 제가 죽음과 가장 가까이 대면한 순간이었으며, 앞으로도 몇 십년간 동안 가장 가까운 것이길 바랍니다. 그것을 경험했기에, 전 죽음이 유용하다는 것을 단순한 지적개념으로만 알았을때보다 좀 더 확실히 여러분께 말씀드릴 수 있습니다.
No one wants to die. Even people who want to go to heaven don’t want to die to get there. And yet death is the destination we all share. No one has ever escaped it. And that is as it should be, because Death is very likely the single best invention of Life. It is Life’s change agent. It clears out the old to make way for the new. Right now the new is you, but someday not too long from now, you will gradually become the old and be cleared away. Sorry to be so dramatic, but it is quite true.
아무도 죽음을 바라지 않습니다. 심지어 천국을 가기 원하는 이들조차 그곳에 가기 위해 죽기를 원하지는 않습니다. 그리고 여전히 죽음은 우리 모두가 겪어야 하는 운명입니다. 아무도 그것을 피해갈 수 없습니다. 그리고 죽음은 그래야만 합니다, 왜냐하면 죽음은 인생의 유일한 최고의 발명이기 때문입니다. 죽음은 인생의 변화의 대리인입니다. 젊은이를 위하여 노인은 사라집니다. 지금 당장의 젊은이는 여러분이지만, 언젠가 멀지 않은때에 여러분들도 점차로 늙어가고 사라져갑니다. 너무 극적이라 미안하지만, 그것이 사실입니다.
Your time is limited, so don’t waste it living someone else’s life. Don’t be trapped by dogma — which is living with the results of other people’s thinking. Don’t let the noise of others’ opinions drown out your own inner voice. And most important, have the courage to follow your heart and intuition. They somehow already know what you truly want to become. Everything else is secondary.
당신의 시간은 한정되어 있으니, 다른 이들의 삶을 사느라 허비하지 마십시요. 타인의 생각에 빠져 사는 교조주의에 빠지지 마십시요. 다른 이들의 의견이 당신 자신의 내면의 소리를 묵살하도록 하지 마십시요. 그리고 가장 중요한, 당신의 마음과 직관을 따르는 용기를 가지세요. 그것들은 어떻게든 당신이 진정 되고자 원하는 것이 무언지 알고 있습니다. 그외의 것은 부수적인 것입니다.
When I was young, there was an amazing publication calledThe Whole Earth Catalog, which was one of the bibles of my generation. It was created by a fellow named Stewart Brand not far from here in Menlo Park, and he brought it to life with his poetic touch. This was in the late 1960s, before personal computers and desktop publishing, so it was all made with typewriters, scissors and Polaroid cameras. It was sort of like Google in paperback form, 35 years before Google came along: It was idealistic, and overflowing with neat tools and great notions.
제가 어렸을때, 또래들에겐 성경과도 같은 지구 전체의 카탈로그라는 끝내주는 책이 있었습니다. 그 책은 여기서 멀지 않은 멘로파크에 사는 스튜어트 브랜드라는 사람이 만들었는데, 그의 시적 감성으로 책에 생기를 불어넣었습니다. 1960년대 말, 개인컴퓨터와 전자출판 이전이라, 이 책은 타자기와 가위 그리고 폴라로이드 카메라로 제작되었습니다. 그건 마치 종이로 만든 구글과 같은 것이었습니다. 구글이 나오기 35년전이죠. 그것은 이상적이었고, 깔끔한 도구와 위대한 개념들로 가득차 있었습니다.
Stewart and his team put out several issues ofThe Whole Earth Catalog, and then when it had run its course, they put out a final issue. It was the mid-1970s, and I was your age. On the back cover of their final issue was a photograph of an early morning country road, the kind you might find yourself hitchhiking on if you were so adventurous. Beneath it were the words: “Stay Hungry. Stay Foolish.” It was their farewell message as they signed off. Stay Hungry. Stay Foolish. And I have always wished that for myself. And now, as you graduate to begin anew, I wish that for you.
Stay Hungry. Stay Foolish.
스튜어트와 그의 팀은 지구 전체의 카타로그를 몇 판인가 만들었고, 책의 운명이 다할 때쯤 마지막 판을 발행했습니다. 그것이 1970년대 중반이었고, 전 여러분 정도의 나이였죠. 최종판의 뒷 표지는 이른아침의 시골길의 사진이었고, 모험심이 가득한 날 히치하이킹을 하다가 만날 곳 같은 그런 곳이었습니다. 그 아래에는 "언제나 갈망하고, 우직하라."라고 씌어져 있었습니다. 그것이 그들이 전한 마지막 인사말이었습니다. 언제나 갈망하고, 우직하라. 전 제 자신이 항상 그러기를 원했습니다. 그리고 이제, 사회에 첫발을 내딛는 졸업생 여러분께, 제가 여러분을 위해 바랍니다.
So you have to trust that the dots will somehow connect in your future.
스티브 잡스의 유명한 스탠포드 졸업식의 연설문의 내용중 하나이다. 행동들 혹은 사건들(dots)은 당시에는 혹은 미래에 어떤 의미를 가지게 될지에 대해서 우리는 제대로 알 수가 없다(cannot know how to connect these dots). 단지 미래가 되었을때 과거를 회상하며 그 점들이 어떻게 연결되어 있는가를 알 수가 있을뿐이다.
여기서 중요한 것은 미래가 되는 시점에서 현재의 중첩들에 의해 의미를 갖게 되는 점들의 집합체에 대해 우리가 connecting을 하여 그 의미를 부여하는가에 있다.
우리가 그 꽃을 불러주었을때 비로서 꽃이 의미를 가지듯이, 우리 자신들만의 인생의 의미도 역시 기억의 편린들과 사건의 모음들로서 흩어진 무수히 많은 우리 인생의 점들(dots)을 연결함으로써만이 인생의 의미가 구체화되는 것이다.
하루하루가 바쁘다는 핑계로 나의 소중한 의미들을 그저 기억의 저편으로 쓸어담기에 바쁜 나날이 계속되는 한 인생의 의미란 것은 그저 헛될뿐이다.
이주전쯤부터 2차례 정도 눈이 내려 한창 쌓인 후에 조카와 차위에 쌓인 눈으로 자그마한 눈사람 만들기를 한 후에 여기저기 푹 패인 모습이 보기 안좋아서 계속 세차해줘야지 하면서도 춥다는 핑계로 그대로 방치해두었다. 중간에 한차례 눈속에 파묻힌 와이퍼만 세워둔채 추위와 눈속에 차는 그대로 잠들어 있었다.
일요일 늦은 아침 어머니가 끓이는 시금치 국 냄새를 맡으며, 우리 아파트의 정기적인 쓰레기 분리수거차 내려가면서 차키를 챙겼다.
적절한 날씨에 보슬 내리는 비에 몸을 적신 차는 적당히 때가 불은 상태로 내 손길을 기다리고 있었다. 슥슥삭삭, 차 운전석 옆 보조박스에 처박아두었던 걸레는 이미 바싹 말라있었고 그 바싹 마른 털들은 차체에 머금은 빗물들을 새까만 먼지들과 함께 허겁지겁 빨아들이며 까맣게 자기 몸을 물들여가고 있었다.
이 연설을 듣고 있노라면 눈시울이 붉어지며, 목이 매인다. 이런 위대한 인물이 줄줄이 나오던 미국도 50여년이 지나서 트럼프라는 희대의 쓰레기가 대통령이 되니 나라꼴이 골때려진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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I am happy / to join with you today / in what will go down / in history / as the greatest demonstration / for freedom in the history / of our nation.
우리나라 역사에 자유를 향한 가장 위대한 시위로 기록될 오늘, 여러분과 함께 되어 행복합니다.
Five / score / years ago, / a great American, in whose symbolic shadow we stand today, / signed the Emancipation Proclamation.
100년 전 한 위대한 미국인이 우리가 오늘 서있는 그의 상징적 기념관(링컨 기념관)에서 노예해방 선언에 서명했습니다.
This momentous decree[법령,판결] came / as a great beacon[횃불,신호] light of hope / to millions of Negro slaves / who had been seared[태우다,무감각하게 하다] in the flames / of withering[생기를 잃어가는, 말라죽어가는] injustice.
이 중대한 법령은 불의의 불길 속에서 타들어가던 수백만 흑인 노예들에게 희망의 횃불이 되었습니다.
It came as a joyous daybreak / to end the long night / of their captivity.
이로서 구속의 긴긴 밤은 끝나고 기쁨의 새날을 맞았습니다.
But one hundred years later, / the Negro still / is not free.
그러나 100년이 지난 지금 흑인은 여전히 자유롭지 않습니다.
One hundred years later, /the life of the Negro is still / sadly crippled by the manacles[수갑,구속,속박] of segregation / and the chains of discrimination.
100년이 지났지만 지금 흑인의 삶은 인종차별의 속박과 차별에 의해 여전히 슬프게도 절름거리고 있습니다.
One hundred years later, / the Negro lives on a lonely island / of poverty / in the midst of a vast ocean / of material prosperity.
100년이 지났지만 흑인의 삶은 물질적 풍요의 광대한 바다 한가운데에 가난이라는 외로운 섬속에만 있습니다.
One hundred years later, / the Negro is still languished / in[~에서 고달픈 생활을 하다] the corners of American society / and finds himself an exile / in his own land.
100년이 지났지만 흑인은 여전히 미국 사회의 귀퉁이에서 힘겹게 살아가고 있으며 자신의 나라에서 마치 망명자처럼 살고 있습니다.
And so we've come here today / to dramatizea shameful conditon.
그리고 우리는 이 부끄러운 현실을 제대로 알리기 위해 여기에 왔습니다.
In a sense / we've come to / our nation's capital / to cash
a check.
어떤 의미에서 우리는 이 나라의 수도에 수표를 바꾸기 위해 왔습니다.
When the architects / of our Republic / wrote the
magnificent words / of the Constitution and the Declaration
of Independence, / they were signing· / a promissory note / to which every American was to fall heir.
우리 공화국의 설립자들이 장엄한 글고 헌법과 독립선언문을 썼을때, 그들은 모든 미국인이 상속인이 되는 약속어음에 서명을 한 것입니다.
This note was a promise / that all men-yes, black men / as well as white men-would be guaranteed / the unalienable rights of life, liberty and the pursuit of happiness.
이 어음은 모든 사람 - 맞습니다. 흑인과 백인 모두 삶, 자유 그리고 행복을 추구할 수 있는 양도할 수 없는 권리를 보장받을 것이라는 약속입니다.
It is obvious today / that America has defaulted on / this promissory note / insofar as her citizens of color are concerned.
오늘날 미국은 시민들의 피부색과 관련되는 한 이 약속어음의 지급을 이행하고 있지 않다는 것은 명백합니다.
Instead of honoring this sacred obligation, / America has given the Negro people / a bad check, / a check which has come back marked "insufficient funds."
이 신성한 의무의 지급을 승락하는 대신에, 미국은 흑인들에게 자금부족이라고 표시된 부도 수표를 지급해 왔습니다.
But we refuse to believe / that the bank of justice is bankrupt. / We refuse to believe that / there are insufficient funds / in the great vaults/ of opportunitiy of this nation.
그러나 우리는 정의의 은행이 파산했다는 사실을 믿기를 거부합니다. 우리는 이 국가의 위대한 기회의 금고에 자금이 부족하다는 것을 믿기를 거부합니다.
So we've come to cash this check, / a check that will give us upon / demand the riches of freedom and the security of justice.
그래서 우리는 여기에 풍성한 자유와 정의의 증권을 달라는 우리의 요구에 응하여 이 수표를 바꿔달라고 왔습니다.
We have also come to this hallowed spot / to remind America of the fierce urgeny / of Now.
또한 미국인들에게 지금 이 순간의 엄중함을 상기시키 위해 이 신성한 자리에 모인 것입니다.
This is no time / to engage in the luxury of cooling off / or to take the tranquilizing drug of gradualism.
지금은 땀을 식힐 사치를 부리거나, 점진주의라는 진정제를 복용할 때가 아닙니다.
Now is the time / to make real the promises of democracy.
지금은 민주주의의 약속들을 실현할 때입니다.
Now is the time / to rise from the dark and desolate valley / of segregation / to the sunlit pathe of racial justice.
지금은 인종차별이라는 어둡고 버려진 계곡에서 일어나 인종간의 정의가 실현되는 밝은 길로 나서야 할때입니다.
Now is the time / to lift our nation from the quicksands / of racial injustice / to the solid rock of brotherhood.
지금은 인종차별이라는 유사(流沙, 흐르는 모래)로부터 형제애라는 반석위에 우리의 국가를 올려 놓을 때입니다.
Now is the time / to make justice a reality / for all of God's children.
지금이야말로 모든 신의 자식들을 위하여 정의를 실현할 때입니다.
It would be fatal for the nation / to overlook the urgency of the moment.
지금 이 순간의 긴박함을 간과하는 것이야말로 이 나라의 앞날을 풍전등화와 같이 위협에 빠뜨리게 될 것입니다.
The sweltering summer of the Negro's legitimate discontent / will not pass / until there is an invigorating autumn of freedom and equality.
흑인들의 정당한 불만을 알리는 이 무더운 여름은 자유와 평등의 상쾌한 가을이 올때까지 계속 될 것입니다.
Nineteen sixty-three is not an end, / but a beginning.
1963년은 끝이 아니고 시작입니다.
And those who hope / that the Negro needed to blow off steam / and will now be content / will have a rude awakening / if the nation returns to business / as usual.
흑인들이 한창 열을 냈으니, 이제 곧 만족하겠지 하며 이 나라가 다시 평상시처럼 돌아가기를 바라는 이들은 정신이 번쩍 나게 될 것입니다.
And there will be neither rest nor tranquility in America / until the Negro is granted his citizenship rights.
흑인들이 그들의 시민으로서의 정당한 권리를 인정받기 전까지는 휴식도 평화도 없을 것입니다.
The whirlwinds of revolt will continue to shake the foundations / of our nation / until the bright day / of justice emerges.
정의가 실현되어 밝은 날이 올때까지, 저항의 바람은 계속되어 이 나라의 근간을 뒤흔들 것입니다.
But there is something that I must say to my people / who stand on the warm threshold / which leads into the palace of justice:
그러나 여기에 서서 정의의 궁전으로 향하는 따뜻한 입구에 서계신 저의 국민들께 드려야 할 말씀이 있습니다.
In the process of gaining our rightful place, / we must not be / guilty of wrongful deeds.
정당한 위치를 찾는 과정에서 우리는 잘못된 행동으로 죄를 짓지 않아야 합니다.
Let us not seek to satisfy / our thirst for freedom / by drinking from the cup of bitterness and hatred.
고통과 증오의 잔을 들이키는 것으로 자유의 목마름을 풀려 하지 맙시다.
We must forever conduct our struggle on the high plane / of dignity and discipline.
우리는 높은 수준의 존엄과 규율위에서 우리의 투쟁을 계속해나가야 합니다.
We must not allow our creative protest / to degenerate into physical violence.
우리는 이 뜻깊은 투쟁을 폭력사태로 변질시키지 말아야 합니다.
Again and again, / we must rise to the majestic heights / of meeting physical force / with soul force.
우리는 언제라도 몸과 마음의 힘 모두를 숭고한 수준에 이르도록 해야 합니다.
The marvelous / new militancy[투쟁,투지] / which has engulfed the Negro community / must not lead us to a distrust of all white people, / for many of our white brothers, / as evidenced by their presence here today, / have come to realize / that their destiny is tied up with our destiny.
흑인사회를 사로잡은 이 놀랍고도 새로운 투쟁이 모든 백인을 불신하는 계기가 되어서는 안됩니다. 왜냐하면 그들 백인들의 운명이 우리 흑인들의 운명과 결속되어 있다는 것을 아는 수 많은 백인들이 그 사실을 증거하기 위해 여기 와있기 때문입니다.
And they have come to realize / that their freedom is inextricably[불가분하게, 떼려야 뗄 수 없는] bound / to our freedom.
그리고 그들은 백인들의 자유가 흑인들의 자유와 떼려야 뗄 수 없는 것이라는 것을 알았기 때문입니다.
We cannot / walk aone. / And as we walk, / we must make the pledge / that we shall always / march ahead. / We cannot / turn back.
우리는 홀로 걸을 수 없습니다. 우리는 나아가며, 맹세해야 합니다. 항상 앞으로만 가겠다고. 우리는 되돌아 갈 수 없습니다.
There are those who are asking / the devotees of civil rights, / "When will you be satisfied!" / We can never be satisfied / as long as / the Negro is the victim of the unspeakable horrors of police brutality.
시민의 권리를 추종하는 이들중 이렇게 묻는 이들이 있습니다. "너희는 언제 만족할거냐고." 우리는 절대 만족할 수 없습니다. 흑인들이 이루 말로 할 수 없는 경찰들의 잔혹함에 의한 공포의 희생자가 되는 한 말입니다.
We can never be satisfied / as long as / our bodies, heavy with the fatigue of travel, / cannot gain lodging in the motels of the highways / and the hotels of the cities.
우리는 절대로 만족할 수 없습니다. 오랜 여행에 지쳐 무거워진 우리의 몸을 뉘일 고속도로의 모텔들과 도시의 호텔들을 구할 수 없는 한 말입니다.
We cannot be satisfied / as long as / the Negro's basic mobility is from a smaller ghetto to a larger one.
우리는 절대 만족할 수 없습니다. 흑인들의 기본적인 거주 이전의 자유가 조그만 빈민가에서 좀 더 큰 빈민가로 제한되어 있는 한 말입니다.
We can never be satisfied / as long as / our children are stripped of their adulthood / and robbed of their dignity / by signs stating "For Whites Only."
우리는 절대로 만족할 수 없습니다. 우리의 아이들이 성인이 될 권리를 뺏기고 "백인들만"이라고 쓰여진 표식에 의해 그들의 존엄을 강탈당하는 한 말입니다.
We cannot be satisfied / as long as / the Negro in Mississipi cannot vote / and the Negro in New York believes he has nothing for which to vote.
우리는 절대로 만족할 수 없습니다. 미시시피의 흑인들이 투표를 할 수 없고, 뉴욕의 흑인들이 투표할 수 있는 것이 없다고 믿는 한 말입니다.
No, no, we are not satisfied, / and we will not be satisfied / until justice rolls down like waters / and righteousness like a mighty stream.
아니, 아니 우리는 만족하지 않습니다. 만족하지 않을겁니다. 정의가 물과 같이 흐르고 올바름이 강력한 물줄기가 될때까지 말입니다.
I am not unmindful / that some of you have come here / out of great trials and tribulation[고난,시련]
나는 여기에 온 누구라도 위대한 시련과 고난을 겪은 분들에게 무심하지 않습니다..
Some of you have come / fresh from narrow jail cells.
여기에 있는 누군가는 막 좁은 감옥방에서 나온 사람입니다.
Some of you have come from areas / where your quest for freedom / left you battered by the storms of persecution / and staggered by the winds of police brutality.
여기 있는 누군가는 자유를 구했다는 이유로 심한 박해를 당하고, 경찰의 잔혹함에 비틀거렸던 이들입니다.
You have been the veterans of creative suffering.
당신들은 이 뜻깊은 고난의 베테랑들이었습니다.
Continue to work with the faith that unearned suffering in redemptive
부당한 고통은 구원될 것이라는 믿음속에서 같이 나아갑시다.
Go back to Mississippi, / go back to Alabama, / go back to South Carolina, / go back to Georigia, / go back to Louisiana, / go back to the slums of ghettos of our Nothern cities, / knowing that somehow this situation can and will be changed.
미시시피로 돌아갑시다, 알라바마로 돌아갑시다, 사우스 캐롤라이나로 돌아갑시다, 조지아로 돌아갑시다, 루이지애나로 돌아갑시다, 우리의 북부 도시들의 빈민가로 돌아갑시다, 어떻게든 이 상황이 바뀔 수 있고, 바뀔 것이라는 것을 알기에 돌아갑시다.
Let us not wallow in the valley of despair.
절망에 계속에서 우리를 뒹글게 하지 맙시다.
And so even though / we face the difficulties / of today and tomorrow, / I still have a dream.
그리고 우리가 현재와 미래의 어려움에 직면해있지만, 저에겐 여전히 꿈이 있습니다.
It is a dream deeply rooted / in the American dream.
그 꿈은 미국의 꿈에 깊이 뿌리내린 꿈입니다.
I have a dream / that one day / this nation will rise up / and live out the true meaning of its creed : / "We hold these truths to be selfevident, / that all men are created equal." /
그것은 언젠가 이 나라가 일어나서 "모든 인간은 평등하게 태어났음을 당연한 진실로 받아들인다."라는 신념의 진정한 의미를 실현하는 것입니다.
I have a dream / that one day on the red hills / of Georgia, / the sons of former slaves and the sons of former slave owners / will be able to sit down together at the table of brotherhood.
나에겐 꿈이 있습니다. 언젠가 조지아의 붉은 언덕에서 노예의 아이들과 그 노예 소유주의 아이들이 형제애의 식탁에 함께 앉게될 수 있는 것입니다.
I have a dream / that one day / even the state of Mississippi, / a state / sweltering with the heat of / injustice, / sweltering with the heat of oppression, / will be transformed into an oasis / of freedom and justice.
나에겐 꿈이 있습니다. 언젠가 불의와 억압의 열기로 이글거리는 이 미시시피주도 자유와 정의의 오아시스로 변모될 것이라는 꿈입니다.
I have a dream / that my four little children / will one day live in a nation / where they will not be judged by the color of their skin / but by the content of their character.
나에겐 꿈이 있습니다. 나의 어린 4명의 자식들이 언젠가는 그들의 피부색이 아닌 그들의 인격으로 평가받게 되는 그런 나라에서 살게 될 것이라는 꿈입니다.
I have a dream today! / I have a dream / that one day, / down in Alabama, / with its vicious racists, / with its governor / having his lips dripping with the words of "interposition"[미국의 개별주의 주권주의] and "nullification"[주의 연방법령 실시거부] - / one day right there in Alabama little black boys and black girls / will be able to join hands with litte white boys and white girls / as sisters and brothers.
저에겐 오늘 꿈이 있습니다. 저에겐 사악한 인종차별주의자들이 득실대고, 주지사가 개별주의 주권주의와 연방법 실시거부등을 들먹이는 바로 이 앨라바마에서 언젠가 흑인 소년과 소년들이 백인 소년과 소녀들과 형제자매로서 서로의 손을 잡을 수 있는 날이 올 수 있다는 꿈이 있습니다.
I have a dream today! / I have a dream that one day every valley / shall be exalted,[드높이다], / and every hill and mountain shall be made low, / the rough places will be made plain, / and the crooked places will be made straight; / "and the glory of the Lord shall be revealed and all flesh / shall see it together."
저에겐 오늘 꿈이 있습니다. 저에겐 언젠가는 모든 계곡은 솟고, 모든 언덕과 산은 낮아지며, 울퉁불퉁한 곳은 평평해지고 굽은 곳은 곧게 펴져, "주님의 영광이 드러나고 모든 피조물이 그것을 함께 지켜보리라"라는 말씀처럼 되는 꿈이 있습니다.
(* 마틴 루터 킹이 목사 출신이기 때문에 성경의 구절이 인용된 것은 지금 이 시점에 와선 조금 아쉬운 점이 있다. 굳이 이런 초자연적인 비유가 아니더라도 이 연설의 맥락이 좋았는데 뒤로 갈수록 소위 기독교의 방언처럼 되어가는 점이 있다. 감정이 고조되었을때는 이런 부분이 그럭저럭 먹히지만 연설도 역시나 상식적인 기반위에 적절한 비유가 있는 것이 두고두고 볼때는 훨씬 감동이 더하고, 되씹을 맛이 난다.)
This is our hope, / and this is the faith that I go back to the South with.
이것이 우리의 희망이며, 이것이 제가 남부로 가지고 돌아갈 신념입니다.
With this faith, / we will be able to hew out[잘라내다,도려내다] of the mountain of despair / a stone of hope.
이 신념으로 절망의 산에서 희망의 돌을 캐어낼 수 있을 것입니다.
With this faith, / we will be able to transform the jangling discords of our nation / into a beautiful symphony of brotherhood.
이 신념으로 우리는 이 나라의 시끄러운 불협화음을 아름다운 형제애의 합주로 변화시킬 수 있을 것입니다.
With this faith, / we will be able to work together, / to pray together, / to struggle together, / to go to jail together, / to stand up for freedom together, / knowing that / we will be free one day.
이 신념으로 우리는 같이 일하고, 기도하고, 투쟁하며, 감옥에 가고, 우리가 언젠가 자유롭게 될 것이라는 것을 알기에 함께 자유를 위해 일어설 것입니다.
And this will be the day - / this will be the day / when all of God's children / will be able to sing with new meaning: / My country' tis of thee, / sweet land of liberty, / of thee I sing. / Land where my fathers died, / land of the Pilgrim's pride, / From every mountainside, / let freedom ring!
그리고 그날은 바로, 하나님의 모든 자식들이 이 노래를 새로운 의미로 부르게 될 것입니다. "나의 조국은 주님의 것, 자유로 달콤한 땅, 내가 찬양하는 주님의 땅. 나의 조상이 살다 죽은 땅, 개척자의 긍지가 살아 있는 땅. 모든 산기슭마다 자유가 울려 퍼지게 하라!"
And if America if to be a great nation, / this must become true.
미국이 진정 위대한 국가가 되려면 반드시 실현되어야 할 일입니다.
And so let freedom ring / from the prodigious[거대한,수많은] hilltops of New Hampshire.
그래서 뉴햄프셔의 거대한 언덕 꼭대기에서 자유가 울려퍼지게 합시다.
Let the freedom ring / from the mighty mountains of New York.
뉴욕의 거대한 산에서도 자유가 울려 퍼지게 합시다.
Let freedom ring / from the heightening Allegehenies of Pennsylvania.
높디 높은 펜실베니아의 알레게니 산맥에서도 자유가 울려 퍼지게 합시다.
Let freedom ring / from the snow-capped Rockies of Colorado.
콜로라도의 로키산맥의 눈 덮인 정상에서도 자유가 울려 퍼지게 합시다.
Let freedom ring / from the curvaceous slopes of California.
캘리포니아의 굽이진 경사에서도 자유가 울려퍼지게 합시다.
But not only that : / Let freedom ring / from Stone Mountain of Georgia. / Let freedom ring / from Lookout Mountain of Tennessee. / Let freedom ring / from every hill / and molehill[흙을 쌓아놓은 두둑] of Mississippi. / From every mountainside, let freedom ring.
그뿐만 아니라, 조지아의 스톤산에서도, 테네시의 룻아웃산에서도, 미시시피의 모든 언덕들에서도 자유가 울려퍼지게 합시다. 이 모든 산기슭에서도 자유가 울려 퍼지게 합시다.
And when this happens, / when we allow freedom ring, / when we let it ring / from every village and every hamlet, / from every state / and every city, / we will be able to speed up that day / when all of God's children, / black men and white men, Jews and Gentiles[이방인,비유대인], / Protestants and Catholics, / will be able to join hands / and sing in the words of the old Negro spiritual : / Free at last! /Free at last! / Thank God Almighty, / we are fee at last!
이렇게 되면, 우리가 자유를 울려퍼지게 하고, 모든 주와 모든 도시의 모든 크고 작은 마을에서 자유가 울러퍼지게 하면 우리가 원하는 그 자유의 날을 더 앞당길 수 있을 것입니다. 그 날에는 하나님의 자식들인 우리 흑인과 백인, 유대인과 이방인, 개신교와 카톨릭이 모두 손을 잡고 오랜 흑인영가를 소리높여 부를 것입니다. "마침내 자유! 마침내 자유!, 신이여 감사합니다. 우리가 마침내 자유로워졌습니다."라고.
난 개인적으로 진보적 철학을 가지고 있다. 그게 뭐 그리 거창하진 않고 단순하게 2가지다.
첫째, 국가라는 공동체의 최선의 운영을 위해서는 소위 노블리스 오블리제 - 정치/경제/사회적 상류층이 자신의 명예를 소중히 여기는 마음이 발로가 되어 공적으로 어렵고 힘든일에 솔선수범해야 한다는 정신이라고 개인적으론 정의한다 - 가 바탕이 되어야 하며,
둘째, 북유럽의 복지정책과 같이 어렵고 힘든 이들이 최소한 이땅에서 밥은 굶지 않고 미래에 대한 기회를 박탈당하지 않을 정도의 의/식/주와 교육에 대한 혜택을 제공해야 한다는 생각을 가지고 있다.
80년대의 젊은 시절부터 권력에 아부하고, 실제로 옳은 말을 해야하는 때에는 침묵했던 비겁한 언론들을 난 별로 좋아하지 않으며, 그런 이유에서 조중동(조선,중앙,동아일보)과 매일경제같은 기회주의 적 매체들을 그렇게 달가와 하진 않는다.(요즘은 그들과 대척점에 서있는 한겨레같은 진보에서 좌파적으로 변질된 언론도 별로 좋아하지 않는다.)
그렇다고 내가 중도보수는 아니고 위에 써놓은 관점도 그렇고 사회의 건전성을 유지하기 위해서 지속적으로 사회는 변화해 나가야 한다는 입장이다.
오늘자 매일경제의 1면 탑 기사를 보니 군대의 보직에 대한 금수저 논란에 대해 다루고 있었다. 기사의 내용은 현실의 세태를 그대로 반영하고 있고 그리 논란거리가 될 것이 없는 것도 같다. 그런데 잠시 생각을 해보면 이런 일을 과연 뉴스로 해야 할 만큼 새로운 일인가?라는 부분에 대해 의문이 들었다.
과연 언론의 역할은 무엇일까? 그저 사실만을 전달하는 것일까?
여기서 뉴스가 되기 위한 기본적 요건을 찾아보면
1. 이상성(異常性) : 정상적이지 않은 것
2. 사회성 : 사회적 영향을 미치는 것
3. 새로운 것인가 : 이미 알려져 있지 않은 것.
그럼 현재 군대에 가는 젊은이중 가족/친지중에서 소위 끗발이 좋은 이들은 군대를 면제받거나 좋은 보직에 가고, 그렇지 않은 이들은 힘든 보직을 받아 군 생활 내내 뺑이를 친다는 것은 과연 1면 탑 뉴스로 합당할까?
1. 이상성 : 이상한건 맞다. 그런데 웬지...
2. 사회성 : 사회에 영향을 미치는가? 그렇다 많이 미친다. 소위 있는 집 자제들은 군대도 빠지고 군대를 가도 아주 꿀보직에 가서 탱자탱자하면서 군대에서 쉬었다 오는데 그렇지 않은 흑수저들은 있는 뺑이 없는 뺑이 다치고 오니 그런 불만들은 사회적으로 큰 갈등의 요인이 된다. 그래서 유승준이 15년이 지난 지금까지 대한민국에 입국이 금지되고, 발치몽은 10년이 다되가도록 티비는 커녕 음반도 제대로 못 내고 있는 것이 아닌가?
3. 새로운것인가? 새로울게 전혀 없다. 아마도 최소 20년전부터 대한민국 국민들은 모두가 알고 있던 사실이다. 이것에 의해서 1. 이상성 측면에서도 이상한 건 맞지만 이미 온 국민이 대한민국은 그렇게 흘러가고 있는 세상이란 걸 알고 있는 이상하지만, 현실적으론 안 이상한 정상적 사건이다.
즉, 뉴스의 요소로 봐서 별로 뉴스거리가 되지 못하는 쓰레기라는 이야기다.
근데 왜 이런 쓰레기 기사를 우리나라의 유력 일간지, 그것도 경제뉴스를 전문으로 하는 매일경제가가 일면으로 실었을까?
내가 어린시절에 썬데이 서울이라는 성인잡지가 있었다. 그 잡지는 표지에 야한 언니들이 그 당시의 기준으론 야한 옷을 입고, 눈을 치켜뜨고, 입술은 반쯤 벌린 고혹적인 모습으로 지나가는 사람들을 유혹하고 있는 모습으로 신문가판대에 꽂혀있었다. 난 중학시절 어쩌다 아버지나 집에 찾아오는 손님들이 보다가 놓고 간 썬데이 서울을 보면 내 방에다 숨겨놓고 몰래 보곤 한 기억이 있다.
그 잡지에는 표지의 언니가 표지보다 훨 헐벗은 옷을 입고 찍은 대형브로마이드 사진이 한 장 있고 그 나머지 수백페이지는 말 그대로 가십기사로 채워져있었다. 어떤 유부남 연예인이 어떤 처녀 연예인이랑 바람이 났다는 둥, 강남의 제비는 어떻게 사모님들을 캬바레에서 꼬신다던지, 재벌의 총수가 요즘 가장 인기 있는 연예인에게 몸이 달아 수 많은 보석을 갖다 바치고, 집도 사줬다는 등, 그리고 재벌만을 터는 대도와의 인터뷰등 공중파나 일간지에서 다루지 않는 별의 별 흥미로운 뒷골목 이야기들이 그득해서, 그 이야기에 빠져들다 보면 시간이 어떻게 가는지도 모를 지경이었다. 그 잡지에는 일단 이것이 사실(fact)인가는 별 문제가 아니었다. 누구도 그 잡지의 기사를 심각하게 생각하지 않았고 별로 심각한 내용도 아니었으며 그저 그렇게 소모되는 소위 선정성만을 가진 내용이었기 때문이다.
지금 매일신문이 1면 탑기사로 실은 군대의 비리 문제가 바로 이런 것과 같은 맥락이다. 이미 온국민이 알고 있는 이상한 사회성 있는 기사를 선정적으로 실어본 것이다. 언론, 저널리즘의 주요 목적은 사회적으로 영향력이 있는 새로운 비정상적 상황을 보도하여 그것이 가진 사회적 리스크를 줄여주는데 있다. 지금 이 군대의 문제에 대한 기사에서 사회적 리스크를 줄이는 방향은 이론적으론 3가지가 있다.
1. 이상성 을 해결한다. => 이상하지 않게 만든다
2. 사회성 을 해결한다. => 영향력이 없게 한다.
3. 새로운 것을 해결한다. => 새롭지 않게 만든다.
정상적인 사회라면 현실적으로 가능한 방법은 1번뿐이다. 금수저든 흑수저든 똑같이 군대 가면 뺑이치게 만들어야 하며 복불복으로 좋은 보직과 나쁜 보직에 공평하게 뽑히고, 군대에서 공평하게 같은 확률로 다치고 병신되고 하면 된다.
근데 대한민국 사회의 시스템이 워낙 거지같고 기득권이 가진 힘이 워낙 막강하여 1번이 해결되지 않았다. 그래서 기득권은 불문율처럼 이런 특권을 계속하여 누려왔으며 언론을 통제하여 이러한 치부가 국민들에게 전달되지 않도록 하여 2. 사회성을 제거/축소시켜 왔으며, 이런 부정은 기득권이 가진 또 하나의 특권이 되어왔고 수십년의 세월이 흘러 이 이상한 군대비리가 이상한건 맞는데 대한민국에선 누구나 다 "세상이 뭐 그렇지"라고 받아들이는 정상인 일이 되어버렸다.
그러면 지금 이 시점에서 1면 헤드에 이런 기사를 실은 매일의 프런트는 왜 이 기사를 실은걸까? 더 이상은 군대비리를 놔두면 안된다는 정의감이 생긴걸까?
난 예전 썬데이 서울에서 봤던 그 이쁜 언니들 생각만 난다.
조선일보를 보자.
매티스 미 국방장관은 황교안 국무총리 -현재에는 탄핵으로 업무중지중인 박근혜를 대신하여 대통령 대행을 하고 있는 - 와 만난 자리에서 누구도 한.미 관계를 이간할 수 없다라고 했다는 이 뉴스는 지금의 상황에서 얼마나 시의적절한가를 따져 보자.
1. 이상성 : 한국과 미국을 누구도 이간 할 수 없다라는 말 뒤에는 한국과 미국을 누군가 이간하고 있다라는 뉘앙스가 느껴진다. 누가? 중국,러시아,일본,북한... 최근에 누가 미국 대통령이라도 만나서 한국은 나쁜 나라이니 우리랑 친하게 지내자라고 했다는 말은 들은바가 없다. 정 따지자면 트럼프가 취임전 대통령 선거전에서 한국의 주한미군 주둔에 대해 언급한 것이 2가지다. 하나는 주한미군의 주둔에 따른 미국의 비용을 전액 한국에 부담시키겠다라는 것과, 단계적으로 주한미군을 한국에서 철수시키겠다라는 것이다. 즉, 현재 기존 한.미 관계의 가장 큰 위협은 바로 새로 취임한 트럼프 미국 대통령이다. 그러니 혹시 미국에선 한국이 불안해할까봐 미국방장관이 날라와서 립서비스를 날리고 있는 것이다. 즉 별로 이상한 것 없다.
2. 사회성 : 영향력이 없진 않겠으나 뭐 현재까지와 같은 상황인데 뭔 사회성이 있겠나.
3. 새로움 : 별로.. 6.25 이후 미국은 우리의 변함없는(?) 우방이었다.
차라리 커피숍서 자녀의 고교선생을 살해한 엄마가 1면 헤드로 오는게 맞겠다라는 생각이 든다.
그 외에 주요 일간지의 1면도 같이 함 실어봤다. 나로선 어느 일간지나 1면 탑으로 그 무게감이나 사회적 영향력같은 건 느껴지지 않는다. 그냥 이럴바엔 이쁜 언니들 사진이나 실어줬으면 하는 바램이다.
신문은 뉴스를 전달하는 매체이기도 하지만 각 신문마다의 논조라는 것도 있고 그 논조라는 것에 의해 같은 뉴스의 중요도 역시 다르게 평가될 수 있는 부분이 있다.
하지만 논조라는 것이 뉴스의 색깔이나 성격 자체를 바꿀 수 있는 것이 아니다. 논조에 의해 파란 것을 빨갛다라고 하고 빨간 것을 파랗다라고 하면 그것은 이미 논조라기보다는 왜곡이며 날조인 것이다. 일단 빨간건 빨갛다 하고 파란건 파랗다 하는 사실을 전달하고 그 사실 위에서 이것이 얼마나 사회적으로 영향을 미치는 것이며, 정상에서 벗어난 것인가 그리고 새로운 것인가를 판단하여야 하고, 그 뉴스가 미치는 사회적 리스크는 무엇인가와 가능하다면 그러한 리스크를 제거하거나 줄일 수 있는 올바른 방법까지를 제시하는 것이 바로 언론이 해야 하는 기본적인 역할일 것이다.
언론은 사회를 살피는 X-ray, CT, 혹은 MRI와 같은 것이다. 어딘가 이상한 부분이 있으면 그 부분을 제대로 조명하고 밝히며 알려주어 국민들이 그것을 알고 고치려는 행동을 할 수 있게 해주어야 한다.
이탈리아의 설치 미술가 피에로 포르나세티 탄생 100주년을 기념하여 2013년 밀라노에서 열린 전시회의 히트에 힘입어 월드 투어중이다. 밀라노, 파리 전시에 이어 한국으로 무대를 옮겼다.
이 사람의 전시회를 보고 든 감상은, 무언가를 좋아하면 취미라 하고 그 취미가 심해지면 벽(癖)-요즘 말로는 오덕, 혹은 오타쿠-이 되고 벽이 더해지면 그것이 업(業)-자신의 소명, 직업-이 된다는 것이다.
DDP를 몇 번 가봤는데 이런 조각품은 처음 본 듯. 최근에 설치됐든가 아니면 내가 이 입구로 첨 가든가. 최근에 뭔가 설치되었나보다.
포르나세티 전 입구에 들어가면 바로 보이는 장식장. 약간 그로테스크한 느낌도 든다. 전시회 전체를 본 느낌은 이 사람의 작품이 현대의 영상미술에 꽤 영향을 끼친 부분이 있을 것 같다는 생각이 든다. 기묘한 느낌도 들지만 영화등에서 본 듯한 느낌이 드는 그런 미쟝센이나 오브제들이 눈에 많이 띈다.
최근에 본 전시회중 제일 좋았다. 미술의 거의 모든 분야에 걸쳐서 전시품이 있지만 그 수준이 가볍지도 않다. 관람객중 특히 젊은 여자들이 압도적으로 많았는데 여자들이 좋아할만한 아기자기함과 설치미술이라는 측면이 많이 작용한 것 같다.
도록이 85,000원, 오브제중 우산꽂이가 290만원이고 위에 보이는 얼굴이 그려진 자기가 150만원 수준이다. 자기는 좀 비싸긴 한데 미니멀한 거실이나 현대적 감각의 매장에선 꽤 괜챃은 오브제가 될 듯.
-Fin-
(p.s)최근의 연예프로그램에서 개그우먼 박나래의 집에 포르나세티에서 자주 보이는 여자 얼굴의 액자가 있는 것을 봤다. 상당히 아무데나 잘 어울리는 소품이다.
해물탕 4인분, 119,000원. 사실상 가격에 비해서 엄청 푸짐하다거나 그런 느낌은 없다. 강남의 임대료등 물가수준을 고려할때 그저 받아들일 수 있는 정도라고나 할까.
소주가 1병 4,500원, 맥주가 500미리 1병에 7,500원. 가격은 착하다고는 할 수 없다.
오랜만에 만난 친구들이랑 즐거운 마음에 좋은 자리에서 떠들면서 즐겁게 먹어서 그렇지 만약 먹는거 자체로만 보면 만족도는 중하정도밖에는 되지 않을 것 같다.
마음에 들었던 밑반찬이 2가지가 있는데 이 옛날 소시지 무침하고 묵물회(?)-시원하다-였다.
리필을 한번 하려고 했는데 토요일 주말 저녁이라 사람이 너무 많아서 그런지 종업원은 아무리 불러도 오지 않고 겨우 와서 부탁을 했는데 갖다주질 않는다. 그냥 포기하고 말았다.
비쥬얼은 그럭저럭 봐줄만은 하다. 맛도 그럭저럭 없다고는 할 수 없으나 해물탕은 신선하면 맛이 없을 순 없으니. 해물탕 4인분에 들어간 저 순재료비는 잘 쳐줄때 노량진에서 후하게 쳐줘서 5만원 이내로 구매 가능할 것으로 예상.
돌문어 숙회. 39,000원. 문어는 5백그램 정도 될듯. 식감은 쫄깃하고 맛있었다.
다 끓고나면 직원이 와서 먹기 좋게 다 손질을 해준다. 꽤 먹을게 풍성해서 4인의 술안주로는 모자라지 않다. 이야기만 하다가 술을 많이 먹어서 나중에 밥을 볶아 먹는것도 그냥 메뉴가격에 포함되어 있는데 밥을 먹질 않았다. 아까워라.
14인분의 해물탕, 랍스터 사시미 1개, 문어숙회 2, 맥주 12병, 소주 5병(술을 많이 안먹는 사람이 많아서 술은 별로 마시질 않았다.)에 67만원으로 1인당 5만원이 약간 안들었다. 아마 술을 많이 마시는 멤버로 구성되면 인당 7~8만원의 예산이 되어야 풍족하게 먹을 수 있는 수준이다.
총평. 그냥 분위기를 원하고 술은 적당히 먹는 모임에는 그럭저럭 적당한 수준이나, 술주당들이 모이는 자리로는 가성비가 그리 좋은 곳은 아니다. 연인간의 데이트 모임이나 가족모임 정도로 좋을 것 같다. 주말은 너무 번잡해서 추천하지 않는다.
최순실 게이트가 터지기 직전에 박근혜가 개헌에 관하여 언급을 한 적이 있고, 새누리가 현재 여당이 궤멸당하기 일보직전의 위기상황을 타계하기 위하여 대통령 탄핵->국민의당과의 연대->내각제 개헌등의 계획을 세우고 있다는 것이 언론에 알려진 상황이다.
도올 김용옥의 최근 도서 '시진핑을 말한다'의 내용중,
"우리나라의 경우 어리석게도 조금 뭘 안다고 하는 사람이면 흔히 '개헌' 운운하면서, 5년제 대통령 임기가 너무 짧기 때문에 미국식으로 4년 중임제로 바꾸어야 한다고 떠든다. 우리가 5년제 단임에 합의를 본 것은 종신제라 말할 수 있는 '유신헌법'의 악폐를 너무도 뼈저리게 체험했기 때문에, 우리나라의 거개의 집권세력이 '1인독재'의 제도화를 갈망하는 그런 성향을 보여왔기 때문에, 그에 대한 쐐기를 박기 위해 '5년단임'에 합의한 것이다.(중략)
그러나, 한번 생각해보라! 5년 단임이라는 제도조차 국민이 가치있다고 느낄 만한 모범을 보인 자가 단 한 명이라도 있는가? 노태우,김영삼,김대중,노무현,이명박,박근헤 이들 모두가 5년의 집정이 지겹게 길다는 느낌이 들 만큼, 정치의 비전이나 위인의 역량이 빈곤했으며, 실정을 계속했고, 국민에게 희망을 안겨주는 혁신적 정강정책이 부재했다. 우리나라 정치지도자에게는 5년이 짧은 것이 아니라 너무도 긴 것이다. 이런 수준의 지도자라고 한다면, 4년 중임이 아니라, '2년 단임'정도로 되면 더 합리적일지도 모른다."
현재 우리나라의 정치에 나타나는 가장 큰 문제는 대통령이 가진 권력이 너무 막강하다는데 있다. 일단 한 번 대통령을 뽑아놓으면 5년동안은 그가 무슨짓을 해도(전 국토를 파헤치고, 멀쩡한 강물에 녹조를 둥둥뚜게 만들고, 청와대에서 뽕을 맞으며 굿을 하고, 섹스파티를 벌여도.. 정도 되면 진짜 무슨짓을 해도라는 말도 부족하다) 그것을 막을 수 있는 실제적인 방법이 없다.
이것을 실질적으로 견제할 수 있는 방법은 대통령의 임기를 2년으로 제한하여 2년마다 국민의 선거를 통해 제한하는 방법이 현실적으로도 국민의 주권을 강화하고 너무나 강력한 정치권력을 막는 효과적인 방법이 될 것이다.
이 캄보디아가 공산화된후 크메르르주 치하에서의 처참한 현실을 다룬 영화 킬링필드를 개봉 당시 대한극장에서 봤을 때, 어린 마음에도 엔딩에 흐르던 imagine을 들으며 이 음악의 아름다움에 넋이 빠졌던 기억이 든다.(실제로 이 곡과 영화가 더 기억에 남던 이유는 당시 반에서 부반장이었던 성실한 놈이랑 같이 이 영화를 봤는데, 엔딩곡에 흐르는 이매진을 들으며 이곡 제목이 뭐냐라고 물어보는 그 놈을 놀라서-이렇게 유명한 곡도 몰라?- 쳐다본 적이 있었다. 지금 생각해보면 그만큼 음악도 안듣고 공부만 하던 성실한 놈이었다는 것이다. 지금쯤 무엇을 하고 있을지? 얘기 듣기론 서울대 의대를 갔다가 졸업하고 다시 법대를 가서 법의학인가를 했다는데 그 시기에 그런거 하는 넘이 그리 많진 않았을텐데 어디선가 잘 살고 있겠지)
Imagine there's no heaven It's easy if you try No hell below us Above us only sky Imagine all the people Living for today... Aha-ah...
천국이 없는 것을 상상해봐요.
당신이 노력한다면 그것은 쉬운 일이죠.
땅 아래로는 지옥이 없고, 우리 위로는 오직 하늘뿐이죠.
모든 사람들이 오늘은 위해 사는 것을 상상해봐요.
Imagine there's no countries It isn't hard to do Nothing to kill or die for And no religion, too Imagine all the people Living life in peace... You...
세상에 국가가 없다고 상상해봐요.
그것은 어렵지 않아요.
죽이거나 죽일 일도 없어요
그리고 종교도 없죠
모든 사람들이 평화롭게 사는 삶을 상상해봐요, 당신.
You may say I'm a dreamer But I'm not the only one I hope someday you'll join us And the world will be as one
당신은 나를 몽상가라 부르죠.
그러나 나는 하나가 아니죠.
난 언젠가 당신이 우리와 함께하리라 희망하죠.
그리고 세상은 하나가 될거에요.
Imagine no possessions I wonder if you can No need for greed or hunger A brotherhood of man Imagine all the people Sharing all the world... You...
아무것도 소유하지 않는 것을 상상해봐요
당신이 그것을 해낸다면 나는 감탄할거에요.
탐식할 필요도 배고플 필요도 없죠.
인간은 모두 형제에요.
모든 사람들이 세상을 공유하는 것을 상상해봐요, 당신.
You may say I'm a dreamer But I'm not the only one I hope someday you'll join us And the world will live as one
당신은 나를 몽상가라 부르죠.
히자만 나는 혼자가 아니에요.
난 당신이 언젠가 우리와 함께하리라 희망해요.
그리고 세상은 모두 함께 살아가겠죠.
존 레논의 사상은 2차 대전이후 피폐해진 유럽의 지식인들로부터 나온 반성과 후회의 철학으로부터 시작된다. 진정한 평화와 공존을 위해서는 우리는 기존의 틀에서 성공하지 못했다는 자각하에, 인간이라는 종이 서로 상생할 수 있는 길을 모색해야만 했다.
그로부터 다다른 결론은 용서,화해의 길은 다름을 인정하며 어떤 주의나 주장이 아닌 사랑의 길뿐이라는 것은 역사적으로 수 천년전부터 인류의 예지자들로부터 내려오는 결론과 같다.
그것을 실천하기 위해서는 기존의 국가, 종교, 소유에 대한 철학이 변화되어야 하며 그것을 존레논은 노랫말로 인류에게 전하고 있는 것이다.
하지만 아쉽게도 인류의 역사는 여전히 사랑과 평화의 역사이기보다는 미움과 투쟁 그리고 반목과 질시로 피로 얼룩진 역사라는 것이 엄연한 현실이다.
우리는 오늘을 살기보다 어제를 후회하며, 내일을 걱정하고, 국가와 민족간에 반목하며, 자신이 가진 믿음을 위해 신이라는 이름하에 서로의 가슴에 칼을 꽂고, 하나라도 더 갖기 위해 남들을 헤치며, 평화롭고 정의로운 세상을 외치는 이들을 몽상가라 비웃는다.
우리는 피와 땀으로 열심히 오늘도 이 땅위에 천국이 아닌 지옥을 건설하고, 신에게 돌리는 영광이라는 미명하에 하늘을 불태우며, 국가와 민중을 위한다는 핑계로 일부의 권력자들이 어리석고 힘없는 자들을 착취하고 짓밟는다. 제대로 된 철학과 비젼을 대중(multitude)이 공유하고 이를 연대하여 권력의 평등한 분배(Isonomia)를 이루어내는 것만이 인류사에 뿌리깊은 치우침의 폐해를 막고 인류가 공생으로 갈 수 있는 길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