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부. 차이나 엑소더스

 

 

 

2부. 재팬 엑소더스

 

 

 

 

 

 

 

 

 

I want you to stay
'Til I'm in the grave
'Til I rot away, dead and buried
'Til I'm in the casket you carry

네가 내 곁에 머물러 주길
내가 무덤에 들어갈 때까지
내가 죽어서 묻혀, 내 몸이 썩어 사라질 때까지
내가 들어간 관을 너가 옮길 때까지


If you go, I'm going too, uh
'Cause it was always you, alright
And if I'm turning blue, please don't save me
Nothing left to lose without my baby

너가 가면, 나도 갈거야
내겐 오직 너뿐이었으니까 말이야
내 숨이 멎어도, 제발 날 구하진 마
내 사랑이 없이는 난 잃을 게 없어


Birds of a feather, we should stick together, I know
I said I'd never think I wasn't better alone
Can't change the weather, might not be forever
But if it's forever, it's even better

끼리끼리 모이듯, 우린 같이 붙어있어야 해, 그래
난 혼자가 더 좋다고 생각해 본 적 없어
날씨가 지 맘대로 듯, 우리도 영원하진 않겠지.
하지만 이 사랑이 영원하다면, 정말 좋겠어.


And I don't know what I'm crying for
I don't think I could love you more
It might not be long, but baby, I
I'll love you 'til the day that I die
'Til the day that I die
'Til the light leaves my eyes
'Til the day that I die

내가 왜 우는지 나도 몰라
지금보다 더 널 사랑할 순 없을 것 같아
그것마저 오래가진 않을지 모르지만, 난
내가 죽는 날까지 널 사랑할 거야
내가 죽는 날까지
내 눈에서 빛이 사라지는 날까지
내가 죽는 날까지.


I want you to see, hm
How you look to me, hm
You wouldn't believe if I told ya
You would keep the compliments I throw ya

네가 봤으면 해.
네가 나에게 어떻게 보이는지.
내가 말해도 넌 믿지 못할거야.
내가 던진 찬사들에도 넌 반응이 없지.

 

But you're so full of shit, uh
Tell me it's a bit, oh
Say you don't see it, your mind's polluted
Say you wanna quit, don't be stupid

하지만 넌 항상 헛소리만 해대지
그저 별거 아니라고만 해.
넌 모르겠다고 해, 너의 마음이 더럽혀져서.
넌 끝내고 싶다고 해, 바보같이 굴지마.


And I don't know what I'm crying for
I don't think I could love you more
Might not be long, but baby, I
Don't wanna say goodbye

내가 왜 우는지 나도 몰라
지금보다 더 널 사랑할 순 없을 것 같아
그것마저 오래가진 않을지 모르지만, 난
작별을 말하고 싶진 않아.


Birds of a feather, we should stick together, I know ('til the day that I die)
I said I'd never think I wasn't better alone ('til the light leaves my eyes)
Can't change the weather, might not be forever ('til the day that I die)
But if it's forever, it's even better


I knew you in another life
You had that same look in your eyes
I love you, don't act so surprised

난 전생에서도 널 았았어
너의 눈은 지금과 똑같았지.
난 널 사랑해, 그렇게 놀란척 하지는 마.

 

1979년 더 낵(The Knack)의 데뷔 싱글로 발표된 곡. 

발표하자마자 곧바로 빌보드 핫100 차트에 진입했고, 1위에 6주간 머물렀으며, 그 해 빌보드 연말집계에서도 1위를 차지했다.

이 곡은 더 낵의 리드보칼인 더그 피거와 기타를 맡은 버튼 아베레의 공동작곡이다.

곡의 제목인 샤로나(Sharona)는 더그 피거의 애인인 샤로나 알페린(Sharona Alperine)에서 모티브를 따온 것으로, 더그가 25살에 17살의 샤로나를 만나서 첫눈에 반해 사랑에 빠지면서 사귀기 시작했다고 한다.

더그는 나중에 회고하기를 이 노래의 주요 모티브는 15분만에 쓰여졌으며, 동료인 아베레와 그것을 토대로 곡의 구성과 멜로디를 30분만에 끝냈다고 한다.

더그는 샤로나와 약혼을 했지만 결혼에는 이르지 못했고, 둘 모두 다른 사람이랑 결혼을 했다.

결별 이후에는 둘은 좋은 친구 사이로 남았으며, 더그가 암이 걸린 2006년 이후로도 간혹 만났으며, 2010년 폐암으로 사망하기 전 몇달 간은 알페린이 더그를 자주 방문했다고 한다.

노래의 가사는 젊음의 열정적 사랑을 직관적으로 느끼게 해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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Ooh, my little pretty one, pretty one
When you gonna give me some time, Sharona?
Ooh, you make my motor run, my motor run
Gun it coming off of the line, Sharona
Never gonna stop, give it up, such a dirty mind
I always get it up for the touch of the younger kind
My, my, my, I, yi, woo!
M-m-m-my Sharona

 


Come a little closer, huh, ah, will ya, huh?
Close enough to look in my eyes, Sharona
Keeping it a mystery gets to me
Running down the length of my thighs, Sharona
Never gonna stop, give it up, such a dirty mind
I always get it up for the touch of the younger kind
My, my, my, I, yi, woo!
M-m-m-my Sharona
M-m-m-my Sharona

 


When you gonna give to me, g-give to me?
Is it just a matter of time, Sharona?
Is it j-just destiny, d-destiny
Or is it just a game in my mind, Sharona?
Never gonna stop, give it up, such a dirty mind
I always get it up for the touch of the younger kind
My, my, my, I, yi, woo!
M-m-m-my, my, my, I, yi, woo!
M-m-m-my Sharona
M-m-m-my Sharona
M-m-m-my Sharona
M-m-m-my Sharona

 

Mmh, ohh, my Sharona
Mmh, ohh, my Sharona
Mmh, ohh, my Sharona

 5.18의 희생자들의 피와 살, 그리고 뼈와 고통, 슬픔의 흔적들. 그 흔적들 속에 숨겨진 소리 없는 절규를 작가는 애끓는 마음을 통해 읽어내어, 그들의 절규에 피와 살을 붙여, 그들의 얼굴과 목소리를 되살려낸다.  이 소설은 광주민주화항쟁에 스러져간 우리의 평범한 이웃들에 건내는 애달픈 진혼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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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장. 어린 새

p17

 그 과정에서 네가 이해할 수 없었던 한가지 일은, 입관을 마친 뒤 약식으로 치르는 짧은 추도식에서 유족들이 애국가를 부른다는 것이었다. 관 위에 태극기를 반듯이 펴고 친친 끈으로 묶어놓는 것도 이상했다. 군인들이 죽인 사람들에게 왜 애국가를 불러주는 걸까. 왜 태극기로 관을 감싸는 걸까. 마치 나라가 그들을 죽인게 아니라는 듯이.

 조심스럽게 내가 물었을 때, 은숙 누나는 동그란 눈을 더 크게 뜨며 대답했다.

 군인들이 반란을 일으킨 거잖아. 권력을 잡으려고. 너도 봤을 거 아냐. 한낮에 사람들을 때리고 찌르고, 그래도 안되니까 총을 쐈잖아. 그렇게 하라고 그들이 명령한 거야. 그 사람들을 어떻게 나라라고 부를 수 있어.

 전혀 다른 질문에 대한 대답을 들은 것처럼 너는 혼란스러웠다. 그날 오후엔 유난히 신원 확인이 많이 돼, 복도 여기저기서 동시에 입관이 치러졌다. 흐느낌 사이로 돌림노래처럼 애국가가 불러지는 동안, 악절과 악절들이 부딪치며 생기는 미묘한 불협화음에 너는 숨죽여 귀를 기울였다. 그렇게 하면 나라란 게 무엇인지 이해해낼 수 있을 것처럼.

 

p20

 저녁이면 계엄군과 대치한 외곽 지역에서 총을 맞은 사람들이 실려왔다. 군의 총격에 즉사하거나 응급실로 운반되던 중 숨이 끊어진 이들이었다. 죽은 지 얼마 되지 않은 사람들의 형상이 너무 생생해, 끝없이 쏟아져나오는 반투명한 창자들을 뱃속에 집어넣다 말고 은숙 누나는 강당 밖으로 뛰어나가 토하곤 했다.

 

p21

 저들이 시키는 대로 무조건 무기를 돌려주고 항복할 순 없습니다. 저들이 먼저 우리 시민들의 시신을 돌려줘야 합니다. 끌고 간 시민 수백명도 풀어줘야 합니다. 무엇보다 여기서 일어난 일들의 진상을 전국에 밝혀서, 우리 명예를 회복시킨다는 약속을 받아내야 합니다. 그런 다음 총기를 반납하는 게 옳지 않겠습니까 여러분.

 와아아, 외치며 박수 치는 사람들의 소리가 부쩍 작아졌다고 너는 느낀다. 군인들이 철수한 다음 날 열린 집회를 너는 기억한다. 도청 옥상과 시계탑 위까지 빽빽하게 사람들이 올라가 있었다. 차량이 다니지 않는 바둑판식 거리에, 건물 자리만 남겨놓고 수십만의 사람들이 어마어마한 물결처럼 출렁거렸다. 수십만층의 탑을 아스라하게 쌓아올리며 애국가를 불렀다. 수십만개의 폭죽을 연달아 터뜨리는 것처럼 손뼉을 쳤다. 어제 아침 진수 형이 선주 누나와 나누던 대화를 너는 들었다. 군인들이 다시 들어오면 시민들을 모두 죽일 거란 소문이 돌고 있다고, 공포 때문에 집회의 규모가 빠르게 줄고 있다고 그는 진지한 얼굴로 말했다. 그럴수록 우리들의 수가 만하야 함부로 못 들어올 텐데... 느낌이 안 좋아요. 관들은 점점 많아지는데, 사람들은 점점 집 밖으로 나오지 않아요.

 너무 많은 피를 흘리지 않았습니까. 어떻게 그 피를 그냥 덮으란 말입ㄴ까. 먼저 가신 혼들이 눈을 뜨고 우릴 지켜보고 있습니다.

 

p24

 학교 앞 서점에서 문제집을 사려고 혼자 집을 나선 지난 일요일이었다. 갑자기 거리에 들어찬 무장 군인들이 어쩐지 무서워서 너는 천변길로 내려가 걸었다. 신혼부부로 보이는, 성경과 찬송가 책을 손에 든 양복 입은 남자와 감색 원피스 차림의 여자가 맞은편에서 걸어오고 있었다. 날카로운 고함 소리가 몇차례 위쪽 도로에서 들리더니, 총을 메고 곤봉을 쥔 군인 셋이 언덕배기를 타고 내려어 그 젊은 부부를 둘러쌌다. 누군가를 뒤쫓다 잘못 내려온 것 같았다.

 무슨 일입니까? 지금 저흰 교회에...

 양복 입은 남자의 말이 채 끝나기 전에, 사람의 팔이 어떤 것인지 너는 보았다. 사람의 손, 사람의 허리, 사람의 다리가 어떤 일을 할 수 있는지 보았다. 살려주시오. 헐떡이며 남자가 외쳤다. 경련하던 남자의 발이 잠잠해질 때까지 그들은 멈추지 않고 곤봉을 내리쳤다. 곁에서 쉬지 않고 비명을 지르다 머리채를 잡힌 여자가 어떻게 되었는지 너는 모른다. 덜덜 턱을 떨며 천변 언덕을 기어올라 거리로, 더 낯선 광경이 펼쳐지고 있는 거리로 들어섰기 때문이다.

 

p31

 처음 누나들을 만났을 때 네가 한 말 중 사실이 아닌 게 있었다.

 역전에서 총을 맞은 두 남자의 시신이 리어카에 실려 시위대의 맨 앞에서 행진했던 날, 중절모를 쓴 노인부터 열두어살의 아이들, 색색의 양산을 쓴 여자들까지 인산인해를 이뤘던 저 광장에서, 마지막으로 정대를 본 건 동네 사람이 아니라 바로 너였다. 모습만 본 게 아니라, 옆구리에 총을 맞는 것까지 봤다. 아니, 정대와 너는 처음부터 손을 맞잡고 선두로, 선두의 열기 쪽으로 나아가고 있었다. 귀를 찢는 총소리에 모두 뒤돌아 뛰기 시작했다. 공포다! 괜찮다! 누군가 외치는 소리에 한 무리의 사람들이 앞 대열로 돌아가려는 아수라장 속에서 정대의 손을 놓쳤다. 다시 총소리가 귀를 찢었을 때, 모로 넘어진 정대를 뒤로 하고 너는 달렸다. 셔터가 내려진 전자제품점 옆 담벼락에 아저씨 셋과 함께 붙어섰다. 그들의 일행인 듯한 남자가 합류하려고 달려오다가 어깨에서 피를 뿜으며 엎어졌다.

 시상에, 옥상이여.

 네 옆에 서 있던, 머리가 반쯤 벗겨진 아저씨가 숨차게 중얼거렸다.

 ... 옥상에서 영규를 쐈어.

 옆 빌딩 옥상에서 다시 총성이 울렸다. 비트적비트적 일어나려던 남자의 등이 튀어올랐다. 배에서부터 번진 피가 삽시간에 상반신을 감쌌다. 옆에 선 아저씨들의 얼굴을 너는 올려다봤다. 아무도 말하지 않았다. 머리가 벗어진 아저씨가 입을 막으며 소리 없이 떨었다.

 너는 눈을 가늘게 뜨고 거리 가운데 쓰러진 수십명의 사람들을 봤다. 네가 입은 것과 똑같은 하늘색 체육복 바지가 얼핏 보인 것 같았다. 운동화가 벗겨진 맨발이 꿈틀거린 것 같았다. 네가 뛰쳐나가려는 순간, 입을 막고 떨고 있던 아저씨가 네 어깨를 붙들었다. 동시에 옆 골목에서 청년들 셋이 달려나갔다. 쓰러진 사람들의 겨드랑이에 손을 끼워 막 일으키려 했을 때, 광장 중앙과 군인들 쪽에서 연발 총성이 터졌다. 맥없이 청년들이 쓰러졌다. 너는 거리 맞은편의 넓은 골목을 건너다봤다. 삼십여명의 남자와 여자들이 양쪽 담벼락에 붙어서서 얼어붙은 듯 그 광경을 지켜보고 있었다.

 총성이 멎은 뒤 삼분쯤 지나, 맞은편 골목에서 유난히 키가 작은 아저씨가 한달음에 뛰쳐나왔다. 쓰러진 사람들 가운데 한사람을 향해 온 힘을 다해 달렸다. 다시 연발 총성이 울리고 그가 쓰러지가, 여태 너를 붙들고 있던 아저씨가 두꺼운 손바닥으로 네 눈을 가리며 말했다.

 지금 나가면 개죽음이여.

 아저씨가 네 눈에서 손을 뗀 순간, 마치 거대한 자석에 이끌린 것처럼 맞으면 골목의 남자 둘이 쓰러진 젊은 여자를 향해 달려가 팔을잡고 일으키는 것을 너는 봤다. 이번엔 옥상에서 총성이 울렸다. 남자들이 나동그라졌다.

 더이상 아무도 쓰러진 사람들을 향해 달려가지 않았다.

 정적 속에 십여분의 시간이 흘렀을 때, 군인들의 대열에서 2인 1조로 이십여명이 걸어나왔다. 앞쪽의 쓰러진 사람들을 신속하게 끌고 가기 시작했다. 그때를 기다린 듯, 옆 골목과 맞은편 골목에서도 여남은명이 달려나가 뒤쪽에 쓰러진 사람들을 들쳐업었다. 이번엔 옥상에서 총을 쏘지 않았다. 하지만 너는 정대를 향해 그들처럼 달려가지 않았다. 네 곁에 있던 아저씨들은 숨이 끊어진 일행을 업고 서둘러 골목 사이로 사라졌다. 갑자기 혼자 남은 너는 겁에 질려, 저격수의 눈에 띄지 않을 곳이 어디일까만을 생각하며 벽에 바싹 몸을 붙인 채 광장을 등지고 빠르게 걸었다.

 

p42

 동호야아, 부르는 소리에 너는 고개를 든다.

 엄마가 트럭들 사이로 걸어오고 있다. 이번엔 작은형 없이 혼자다. 가게에 나갈 때 교복처럼 입는 회색 블라우스에 헐렁한 검은 바지를 입었다. 늘 단정히 빗는 커트 머리가 비에 젖어 부세부세 헝클어졌다는 것만 평소와 다르다.

 너도 모르게 반갑게 일어서서 계단을 뛰어내려가다 멈춘다. 엄마가 허겁지겁 계단을 뛰어올라와 네 손을 잡는다.

 집에 가자.

 물에 빠진 사람처럼 무섭게 손을 끌어당기는 엄마를 떨쳐내려고 너는 손목을 뒤튼다. 남은 손으로 엄마의 손가락들을 하나씩 떼어낸다.

 군대가 들어온단다. 지금 집에 가자이.

 억센 엄마의 손가락을 마침내 다 떼어냈다. 너는 날쌔게 강당 안으로 도망친다. 뒤따라 들어오려는 엄마를, 집으로 관을 옮겨가려는 유족들의 행렬이 가로막는다.

 여섯시에 여기 문 닫는대요. 엄마.

 행렬 사이로 너와 눈을 맞추려고 엄마가 깨금발을 디딘다. 우는 아이처럼 힘껏 찡그린 그녀의 이마를 향해 너는 목소리를 높인다.

 문 닫으면 나도 들어갈라고요.

 엄마의 얼굴이 그제야 펴진다.

 꼭 그래라이. 그녀가 말한다.

 해 지기 전에 와라이. 다 같이 저녁밥 묵게.

 

p45

 체머리 떠는 노인의 얼굴을 너는 돌아본다. 손녀따님인가요, 묻지 않고 참을성 있게 그의 말을 기다린다. 용서하지 않을거다. 이승에서 가장 끔찍한 것을 본 사람처럼 꿈쩍거리는 노인의 두 눈을 너는 마주 본다. 아무것도 용서하지 않을 거다. 나 자신까지도.

ㅇㅇㅇ

 

2장. 검은 숨

p46

 우리들의 몸은 열십자로 겹겹이 포개져 있었어.

 내 배 위에 모르는 아저씨의 몸이 구십도로 가로질러 놓였고, 아저씨의 배 위에는 모르는 형의 몸이 다시 구십도로 가로질러 놓였어. 내 얼굴에 그 형의 머리카락이 닿았어. 그 형의 오금이 내 맨발에 걸쳐졌어. 그 모든 걸 내가 볼 수 있었던 건, 내 몸 곁에 바싹 붙어 어른거리고 있었기 때문이야. 

 그들이 다가왔어. 얼룩덜룩한 군복에 철모를 쓰고, 팔엔 적십자 완장을 차고서 빠르게. 그들은 2인 1조로 우리들의 몸을 들어올려 군용 트럭에 던져넣기 시작했어. 곡물 자루들을 운반하는 것같이 기계적인 동작으로 난 내 몸을 놓치지 않으려고 뺨에, 목덜미에 어른어른 매달려 트럭에 올라탔어. 이상하게도 나는 혼자였어. 그러니까 혼들은 만날 수 없는 거였어. 지척에 혼들이 아무리 많아도, 우린 서로를 볼 수도 느낄 수도 없었어. 저세상에서 만나자는 말따윈 의미없는 거였어.

 내 몸은 다른 몸들과 함께 묵묵히 흔들리며 트럭에 실려갔어. 피를 너무 쏟아내 심장이 멈췄고, 심장이 멈춘 뒤로 계속 피를 쏟아낸 내 얼굴은 습자지같이 얇고 투명했어. 눈을 감은 내 얼굴을 본 건 처음이라 더 낯설게 보였어.

 시시각각 저녁이 오고 있었어. 시가지를 벗어난 트럭은 어둑한 벌판 가운데로 난 텅 빈 길을 달렸어. 참나무들이 우거진 낮은 언덕길을 오르자 철문이 나타났어. 트럭이 잠시 멈추자 보초병 둘이 경례를 붙였어. 보초병들이 철문을 열 때 한번, 닫을 때 다시 한번 길고 날카로운 쇳소리가 울렸어. 트럭은 거기서부터 좀더 언덕길을 올라가, 단층 콘크리트 건물과 참나무 숲 사이 공터에서 멈췄어. 

 그들이 운전석에서 걸어나왔어. 트럭 후미의 잠금쇠를 푼 뒤, 다시 2인 1조로 우리들의 팔다리를 잡고 나르기 시작했어. 턱으로, 뺨으로 미끄러지며 매달려 내 몸을 따라가면서 나는 불 켜진 단층 건물을 올려다봤어. 무슨 건물인지 알고 싶었어. 여기가 어디인지, 지금 내 몸이 어디로 가고 있는지.

 공터 뒤의 덤불숲 사이로 그들은 들어갔어. 상관으로 보이는 사람이 지시하는 대로 다시 열십자로 차곡차곡 몸들을 쌓아올렸어. 내 몸은 아래에서 두번째에 끼여 납작하게 짓눌렸어. 그렇게 짓눌려도 더이상 흘러나올 피는 없었어. 고개가 뒤로 꺽인 채 눈을 감고 반쯤 입을 벌린 내 얼굴은 숲 그늘에 가려 더 창백해 보였어. 맴 위에 놓인 남자의 몸에다 그들이 가마니를 덮자, 이제 몸들의 탑은 수십개의 다리를 지닌 거대한 짐슴의 사체 같은 것이 되었어.

 

p49

 너를 문득 떠올린 건 그 낯설고 생생한 밤이 끝나갈 무렵, 먹색 하늘에 마침내 파르스름한 새벽빛이 배어들기 시작하던 무렵이었어. 그렇지, 네가 나와 함께 있었는데. 차가운 몽둥이 같은 게 갑자기 내 옆구리를 내려치기 전까지. 내가 헝겊 인형처럼 고꾸라지기 전까지, 아스팔트가 산산이 부서질 것 같던 발소리를, 고막을 찢는 총소리들 속에서 내가 팔을 뻗어올릴 때까지. 옆구리에서 솟구친 피가 따뜻하게 어깨로, 목덜미로 번지는 걸 느낄 때까지. 그때까지 네가 함께 있었는데.

 

p50

 그렇게 정오가 가까워졌을 때 불현듯 깨달았어.

 이곳에 너는 없었어.

 넌 여기 없을 뿐 아니라, 아직 살아 있었어. 그러니까 혼이란 건 가까이 있는 혼들이 누구인지는 알지 못하면서, 누군가가 죽었는지 죽지 않았는지만은 온 힘으로 생각하면 알 수 있는 거였어. 이 낯선 덤불숲 아래에서, 썩어가는 수많은 몸들 사이에서 아무도 아는 사람이 없다고 생각하자 나는 무서워졌어.

 더 무서워진 건 다음 순간이었어.

 두려움을 견디며 나는 누나를 생각했어. 이글거리는 태양이 남쪽으로, 더 남쪽으로 팽팽히 기우는 걸 보면서, 뚫어지게 내 얼굴을, 감긴 눈꺼풀들을 들여다보면서 누나를, 누나만을 생각했어. 견디기 어려운 고통이 느껴졌어. 누나는 죽었어. 나보다 먼저 죽었어. 혀도 목소리도 없이 신음하려고 하자, 눈물 대신 피와 진물이 새어나오는 통증이 느껴졌어. 눈이 없는데 어디서 피가 흐르는 걸까, 어디서 통증이 느껴지는 걸까. 아무것도 흐르지 않는 내 창백한 얼굴을 나는 들여다봤어. 더러운 내 손들은 움직이지 않았어. 핏물이 산화돼 진한 벽돌색이 된 손톱들 위로 소리 없이 불개미들이 기어나디고 있었어.

 

p57

 썩어가는 옆구리를 생각해.
 거길 관통한 총알을 생각해.
 처음엔 차디찬 몽둥이 같았던 그것.
 순식간에 뱃속을 휘젓는 불덩어리가 된 그것.
 그게 반대편 옆구리에 만들어놓은, 내 모든 따뜻한 피를 흘러나가게 한 구멍을 생각해.
 그걸 쏘아보낸 총구를 생각해.
 차디찬 방아쇠를 생각해.
 그걸 당긴 따뜻한 손가락을 생각해.
 나를 조준한 눈을 생각해.
 쏘라고 명령한 사람의 눈을 생각해.

 

 그들의 얼굴을 보고 싶다. 잠든 그들의 눈꺼풀 위로 어른거리고 싶다. 꿈속으로 불쑥 들어가고 싶다. 그 이마, 그 눈꺼풀들을 밤새 건너다니며 어른거리고 싶다. 그들이 악몽 속에서 피 흐르는 내 눈을 볼 때까지, 내 목소리를 들을 때까지. 왜 나를 쐈지, 왜 나를 죽였지.

 

p59

 가장 먼저 탑을 이뤘던 몸들이 가장 먼저 썩어, 빈 데 없이 흰 구더기가 들끓었어. 내 얼굴이 거뭇거뭇 썩어가 이목구비가 문드러지는 걸, 윤곽선이 무너져 누구도 더이상 알아볼 수 없게 되어가는 걸 나는 묵묵히 지켜봤어.

 

p61

 그들 중 하나가 트럭으로 돌아가, 두 손에 커다란 석유통을 들고 천천히 걸어왔어. 허리와 어깨와 팔로 플라스틱 통들의 무게를 버티며, 비틀거리며 우리들의 몸을 향해 다가왔어.

 이제 끝이구나, 나는 생각했어. 수많은 그림자들이 갸날프고 부드러운 움직임으로 파닥이며 내 그림자에, 서로의 그림자들에 스며들었어. 떨며 허공에서 만났다가 이내 흩어지고, 다시 언저리로 겹쳐지며 소리 없이 파닥였어.

 기다리고 있던 군인들 중 두사람이 걸어나가 석유통을 받아들었어. 침착하게 뚜껑을 열고 몸들의 탑 위에 기름을 붓기 시작했어. 우리들의 몸 모두에게 고르게, 공평하게. 통에 남은 마지막 한방울의 기름까지 털어 뿌린 다음 그들은 뒤로 물러섰어. 마른 덤불에 불을 붙여 힘껏 던졌어.

 

p64

 그때 너는 죽었어.

 그게 어디인지 모르면서, 네가 죽은 순간만을 나는 느꼈어.

 빛이 없는 허공으로 번지며 나는 위로, 더 위로 올라갔어. 캄캄했어. 도시의 어느 방향으로도, 어느 구역, 어느 집에도 불이 켜져 있지 않았어. 눈부신 불꽃들이 뿜어져나오는 곳은 멀리 있는 한 지점뿐이었어. 연달아 쏘아올려지는 조명탄 불빛들을, 번쩍이며 홑튀는 총신들의 불꽃을 나는 봤어.

 그때 그곳으로 가야 했을까. 그곳으로 힘차게 날아갔다면 너를, 방금 네 몸에서 뛰쳐나온 놀란 너를 만날 수 있었을까. 여전히 눈에서 피가 흐르는 채, 서서히 조여오는 거대한 얼음 같은 새벽빛 속에서 나는 어디로도 움직일 수 없었어.

 

 

3장. 일곱개의 뺨

 

 p69

 그 순간 왜 분수대가 떠올랐는지 모른다. 짧게 감은 눈꺼풀 속에서 유월의 분수대가 눈부신 물줄기를 뿜었다. 버스를 타고 그 앞을 지나가던 열아홉살의 그녀는 눈을 질끈 감았었다. 하나하나의 물방울들이 내쏘는 햇빛의 예리한 파편들이, 달궈진 눈꺼풀 안쪽까지 파고들어 눈동자를 찔렀다. 집 앞 정류장에서 내리자마자 그녀는 공중전화 부스로 들어갔다. 책가방을 바닥에 내려놓고, 이마에 흐르는 땀을 주먹으로 훔치며 전화기에 동전을 넣었다. 114버튼을 누르고 기다렸다. 도청 민원실 부탁합니다. 안내받은 전화번호를 누르고 다시 기다렸다. 분수대에서 물이 나오고 있는 걸 봤는데요, 그래서는 안된다고 생각합니다. 떨리던 그녀의 목소리가 점점 또렷해졌다. 어떻게 벌써 분수대에서 물이 나옵니까. 무슨 축제라고 물이 나옵니까. 얼마나 됐다고, 어떻게 벌써 그럴 수 있습니까.

 

p76

 그날 학생식당에서 그녀는 늦은 점심을 먹고 있었다. 큰 소리로 유리문이 열리며 학생들이 뛰어들어왔다. 고함 소리와 함께 사복 형사들이 뒤따라 들어왔다. 식당 곳곳으로 흩어지는 학생들을 쫓아가 곤봉을 휘두르는 사내들의 모습을, 그녀는 숟가락을 쥔 채 멍하게 지켜보았다. 한 형사가 특별히 흥분해 있었다. 기둥 옆에 혼자 앉아 카레라이스를 먹던 퉁퉁한 남자애 앞에 멈추더니, 맞은편에 놓여 있던 접이식 의자를 집어들고 휘둘렀다. 남자애의 이마에서 터진 피가 얼굴을 덮었다. 그녀의 손에서 숟가락이 떨어졌다. 그걸 주우려고 무심코 허리를 수그렸다가 바닥에 떨어진 유인물을 주웠다. 굵은 글씨가 눈에 들어왔다. 학살자 전두환을 타도하라. 그 순간 억센 손이 그녀의 머리채를 움켜쥐었다. 유인물을 뺏고 그녀를 의자에서 끌어냈다.

 

p88

 진수 오빠가 노크를 하고 그 방에 들어온 것은 열한시경이었다. 무전기를 들고 다니는 모습은 늘 봤지만, 총까지 멘 모습은 처음이라 낯설어 보였다. 세명만 남아주시겠습니까,라고 그는 말했다. 아침까지 가두방송을 해주실 세분만 있으면 됩니다. 나머지는 집으로 돌아가세요.

 

p89

 남기로 한 세 여자들 중에서는 선주 언니가 호신용으로 카빈 소총을 받았다. 선주 언니는 작동법에 대해 간단한 설명을 들은 뒤 어설프게 총을 어깨에 걸쳐메고, 따로 뒤돌아 인사하지 않은 채 여대생 둘을 따라 일층으로 내려갔다.그녀들에게 진수 오빠는 말했다. 

 사람들이 나오게 해주세요. 날이 새자마자 도청 앞에 시민들이 꽉 차게, 우린 아침까지만 어떻게든 버텨볼 겁니다.

 남은 여자들은 새벽 한시경에 도청을 나왔다. 진수 오빠가 다른 대학생과 함께 남동성당 골목까지 동행해줬다. 침침한 가로등이 밝혀진 골목 입구에서 그들은 멈춰 섰다.

 여기서 흩어지세요. 아무 집에라도 들어가 숨으세요.

 그녀에게 영혼이 있었다면 그때 부서졌다. 땀에 젖은 셔츠에 카빈 소총을 멘 진수 오빠가 여자들에게 인사하기 위해 웃어 보였을 때. 어두운 길을 되밟아 도청으로 돌아가는 그들의 뒷모습을 얼어 붙은 듯 지켜보았을 때. 아니 도청을 나오기 전 너를 봤을 때 이미 부서졌다. 하늘색 체육복 위에 교련 점퍼를 걸친, 아직 어린애 같은 좁은 어깨에 총을 메고서 고개를 끄덕이고 있는 너를 발견하고 그녀는 놀라며 불렀다. 동호야, 왜 집에 안 갔어? 장전하는 법을 설명하고 있던 청년 앞으로 그녀는 끼어들었다. 이 애는 중학생이에요. 집에 보내야 돼요. 청년은 놀라는 기색이었다. 고등학교 2학년이라고 해서 그런 줄 알았는데... 아까 고등학교 1학년까지 내보낼 때 이 애는 안 갔어요. 그녀는 목소리를 낮춰 항의했다. 말이 안돼요. 어딜 봐서 이 얼굴이 고등학생이에요.

 진수 오빠의 뒷모습이 어둠속으로 완전히 사라지자 여자들이 흩어지기 시작했다. 취사조의 여대생이 그녀에게 물었다. 이 근처에 아는 집 있어? 그녀가 고개를 젓자 여대생이 제안했다. 나하고 전대병원으로 가자. 거기 외사촌이 입원해 있어.

 전대 부속병원 로비는 어두웠고 출입문은 잠겨져 있었다. 한참 문을 두드리자 경비가 손전등을 들고 나왔다. 수간호사도 뒤따라 나왔다. 모두 긴장한 얼굴이었다. 군인이 온 거라고 생각했던 것이다.

 복도와 비상계단도 소등되어 있었다. 손전등을 든 경비의 안내로 여대생의 사촌이 입원한 6인실로 들어섰다. 솜이불을 창에 걸어 놓은 실내는 칠흑같이 어두웠다. 환자들과 보호자들은 어둠속에서 깨어 있었다. 여대생의 이모가 조카의 손을 잡으며 속삭이듯 물었다. 어쩌까나 군인들이 들어온담서. 부상자들은 전부 총살해버린담서.

 그녀가 창 아래 벽에 기대앉자, 옆 침대 환자의 보호자인 듯한 아저씨가 말했다.

 창 앞에 안지 마소, 위험하다마시.

 어둠 때문에 그의 얼굴은 보이지 않았다.

 군인들 퇴각하던 날에도 총알이 날아와서, 여그 창가에 걸어논 옷에 구멍이 뚫렸다마시. 사람이 서 있었으면 어떻게 됐겄는가.

 그녀는 창으로부터 두걸음 옆으로 옮겨앉았다.

 호흡이 고르지 않은 위중한 환자가 있어, 이십분 간격으로 간호사가 손전등을 들고 들어왔다. 서치라이트 같은 불빛이 병실을 훑을 때마다 공포에 굳은 환자들과 보호자들의 얼굴이 드러났다. 어쩌까나. 군인들이 참말로 이 병원까지 쳐들어온다냐. 죄다 총살해 버릴 것 같으면, 해뜨자마자 얼른 퇴원해야 안 쓰겄냐. 니 언니는 의식 차린 지 하루밖에 안됐는디, 꿰맨 자리가 터져블면 어쩌까나. 아주머니가 속삭여 물을 때마다 여대생은 더 작은 소리로 속삭여 대답했다. 저도 모르겠어요, 숙모.

 얼마나 시간이 흘렀을까. 머리서 들려오는 가냘픈 목소리에 그녀는 창 쪽으로 고개를 돌렸다. 메가폰을 쥔 여자의 목소리가 차츰 가까워졌다. 선주 언니는 아니었다.

 시민 여러분, 도청으로 나와주십시오. 지금 계엄군이 시내로 들어오고 있습니다.

 거대한 풍선 같은 침묵이 병실의 모서리들을 향해 부풀어오르는 것을 그녀는 느꼈다. 트럭이 병원 앞길을 지나가며 목소리가 크고 선명해졌다.

 우리는 끝까지 싸울 것입니다. 함께 나와서 싸워주십시오.

 그 목소리가 멀어진 지 십분이 채 되지 않아 군인들의 소리가 들렸다. 그런 소리를 그녀는 처음 들었다. 수천사람의 단호한, 박자를 맞춘 군화발 소리. 보도가 갈라지고 벽이 무너질 것 같은 장갑차 소리. 그녀는 무릎 사이에 얼굴을 묻었다. 어느 침대에선가 어린 환자가 애원했다. 엄마, 창문 닫아줘. 닫았어. 더 꽉 닫어. 꽉 닫았나니까. 마침내 그 소리들이 지나가자 다시 가두방송이 들렸다. 도심의 침묵을 가로질러, 여러 블로 너머에서 아득히 들려오는 소리였다.

 여러분 지금 나와 주십시오. 계엄군이 들어오고 있습니다.

 마침내 도청 쪽에서 총소리가 들렸을 때 그녀는 잠들어 있지 않았다. 귀를 틀어막지도, 눈을 감지도 않았다. 고개를 젓지도, 신음하지도 않았다. 다만 너를 기억했다. 너를 데리고 가려 하자 너는 계단으로 날쌔게 달아났다. 겁에 질린 얼굴로, 마치 달아나는 것만이 살길인 것처럼. 같이 가자, 동호야. 지금 가이 나가야 돼. 위태하게 이층 난간을 붙들고 서서 너는 떨었다. 마지막으로 눈이 마주쳤을 때, 살고 싶어서, 무서워서 네 눈꺼풀은 떨렸다.

 

p96

 그 오전 분수대에서 물줄기가 뿜어져나오지 않았다. 도청 담장 앞에 던져진 주검들 옆으로, 총을 멘 군인들이 새로운 주검들의 다리를 끌고 왔다. 주검들의 등과 뒤통수가 함부로 바닥에 쓸리고 튀어올랐다. 몇몇 군인들은 커다란 방수 모포를 펴서 네 귀를 나눠 잡고, 도청 안마당에서 여남은사람의 주검을 한번에 쓸어담아 나왔다. 어릿어릿 먼 곁눈질로 그 광경을 보며 걷고 있을 때, 빠르게 다가온 군인 셋이 그녀의 가슴에 총을 겨눴다. 어디서 오는 겁니까. 이모 병문안하고 집에 가는 길이에요. 태연스럽게 대답하는 그녀의 인중이 떨렸다.

 그들이 명령한 대로 광장을 등지고 걸어 대인시장 어귀에 이르렀을 때, 거대한 장갑차들이 굉음을 내며 대로를 행진해 지나갔다. 다 끝났다는 걸 모두에게 보여주려는 거야, 얼핏 그녀는 생각했다. 다 죽였다는 걸.

 대학가와 가까운 그녀의 동네는 전염병이 지나간 것처럼 인적없이 괴괴했다. 그녀가 초인종을 누르가 아버지는 기다렸던 듯 달려나와 그녀를 들이고는 대문을 잠갔다. 다락에 그녀를 감춘 뒤, 다락문이 눈에 띄지 않도록 비키니 옷장을 옮겨놓았다. 오후부터 군인들의 발소리가 들렸다. 미닫이문을 열고 누군가를 끌어내는 소리, 무엇인가 부서지는 소리, 애원하는 소리 들이 들려왔다. 아니라우, 우리 아들은 데모 안했어라우, 총 같은 건 만져본 적도 없어라. 그들은 그녀의 집 초인종도 눌렀다. 마당이 쩌렁쩌렁 울리게 아버지가 대답했다. 우리 집은 딸이 고3이오. 아들들은 인자 중학생 초등학생인디, 누가 데모를 했겄소.

 다음 날 저녁 그녀가 다락에서 내려왔을 때, 어머니는 시청 청소차들이 주검들을 싣고 공동묘지로 갔다고 말했다. 분수대 앞에 던져진 주검들뿐 아니라, 상무관에 있떤 관들과 미화긴 시신들까지 모두 싣고 갔다고 했다.

 관공서와 학교가 문을 열었다. 셔터를 내렸던 상점들도 영업을 시작했다. 계엄은 계속되었으므로, 저녁 일곱시 이후에는 통행이 금지되었다. 통금 전이라 해도 수시로 군인들의 검문검색이 이뤄져, 신분증을 가지고 나오지 않은 사람들은 연행되었다.

 수업 결손을 메우기 위해 대부분의 학교가 팔월 초순까지 수업을 했다. 방학하는 날까지 그녀는 날마다 정류장 옆 공중전화 부스에서 도청 민원실에 전화를 걸었다. 분수대에서 물이 나와서는 안된다고 생각합니다. 제발 물을 잠가주세요. 손바닥에서 배어나온 땀으로 수화기가 끈적끈적했다. 예예, 의논해보겠습니다. 민원실 직원들은 인내심 있게 그녀를 응대했따. 꼭 한번 나이 든 여사무원이 말했다. 그만 전화해요, 학생. 학생 같은데 맞지요. 물이 나오는 분수대를 우리가 어떻게 하겠어요. 다 잊고 이젠 공부를 해요.

 

p99

 꿈속처럼 느린 걸음으로 남자들의 모습이 사라졌을 때 여자가 말하기 시작한다. 아니, 말하기 시작한 것 같다. 아니, 여자는 아무것도 말하지 않는다. 소리 없이 입술을 달짝이고 있을 뿐이다. 그 입술의 모양을 그녀는 또렷하게 읽을 수 있다. 서 선생이 원고지에 펜으로 쓴 희곡을 그녀가 직접 입력해 삼교까지 봤기 때문이다.

 

 당신이 죽은 뒤 장례식을 치르지 못해,
 내 삶이 장례식이 되었습니다.

 

 여자가 등을 보이며 뒤돌아선다. 동시에 객선 가운데의 긴 통로로 조명이 덜어진다 누덕누덕 기운 삼베옷을 걸친 건장한 체격의 남자가 통로 끝에 서 있다. 거칠게 숨을 몰아쉬며 그가 무대를 향해 걸어온다. 표정과 동작이 초연했던 좀 전의 남자들과 달리 그의 얼굴은 일그러져 있다. 두 팔이 힘껏 허공으로 뻗어올라온다. 목마른 물고기처럼 그의 입술이 달싹인다. 음성이 높아져야 할 부분에서 신음처럼 끼익, 끽 소리가 난다. 그 입술 모양도 그녀는 읽는다.

 

 어이, 돌아오소.
 어어이, 내가 이름을 부르니 지금 돌아오소.
 더 늦으면 안되오. 지금 돌아오소.

 

 최초의 당혹한 웅성거림이 객석을 쓸고 지나간 뒤, 이제 관객들은 무서운 침묵과 집중력으로 배우들의 입술을 응시하고 있다. 통로를 밝히던 조명이 어두워진다. 무대 중앙의 여자가 객석을 향해 몸을 돌린다. 여전히 소리 없이 초혼(招魂)하며 걸어오는 남자를 침착하게 응시한다. 입술을 열어 달싹인다.

 

 당신이 죽은 뒤 장례를 치르지 못해,
 당신을 보았던 내 눈이 사원이 되었습니다.
 당신의 목소리를 들었던 내 귀가 사원이 되었습니다.
 당신의 숲을 들이마신 허파가 사원이 되었습니다.

 

 마치 눈을 뜬 채 꿈을 꾸는 듯 허공을 향해 끼익, 끽 소리를 내며 여자가 입술을 움직이는 사이, 삼베옷의 남자가 무대에 올라선다. 두 팔을 허공에 휘저으며 여자의 어깨를 스쳐지나간다.

 

 봄에 피는 꽃들, 버드나무들, 빗방울과 눈송이들이 사원이 되었습니다.
 날마다 찾아오는 아침, 날마다 찾아오는 저녁들이 사원이 되었습니다.

 

 눈부신 조명이 다시 객석 사이로 쏘아져내려온다. 앞쪽 좌석에서 그녀가 고개를 돌리자, 열두한살로 보이는 어린 소년이 어느새 통로 가운데 서 있다. 하얀 반소매 체육복 상하의에 흰 운동화를 신고, 조그마한 해골의 머리를 추운 듯 가슴에 끌어안고 있다. 소년이 무대를 향해 걷기 시작하자, 네발짐승들처럼 허리를 구십도로 구부린 배우들의 무리가 어두운 통로 뒤편에 나타나 뒤를 따른다. 남녀가 섞인 여남은명의 그 무리는 검은 머리칼을 괴기스럽게 아래로 늘어뜨린 채 행진한다. 쉴 새 없이 입술을 달싹러리며, 끼이익, 끄으윽, 신음을 내며 체머리를 떤다. 소리가 커질 때마다 자꾸 뒤돌아보며 멈칫거리는 소년을 앞질러, 그들이 먼저 무대 앞 계단에 다다른다. 

 고개를 뒤로 꺽은 채 그 모습을 지켜보던 그녀의 입술이 자신도 모르게 달싹인다. 배우들을 흉내 내듯 목구멍을 쓰지 않고 부른다. 동호야.

행렬 끝에 있던 젊은 남자가 수그린 몸을 돌려 소년에게서 해골의 머리를 빼앗아 든다. 늘어뜨려진 손에서 손으로 옮겨간 해골이, 행렬의 맨 앞에 기역 자로 허리를 구분린 노파에게서 멈춘다. 반백의 긴 머리를 풀어내린 노파는 해골을 보듬고 무대 위로 올라간다. 무대 중앙에 있던 흰옷 입은 여자의 삼베옷이 남자가 순순히 길을 터준다.

 이제 움직이고 있는 사람은 노파뿐이다.

 그 걸음이 너무나 느리고 고요해, 한 관객의 기침 소리가 아득한 바깥 세계의 것처럼 들린다. 소년이 움직이기 시작한 것은 그 순간이다. 순식간에 소년은 무대로 뛰어올라가 노파의 굽은 등허리에 바싹 몸을 붙인다. 업힌 어린아이처럼, 혼령처럼 살금살금 뒤를 따른다. 

 

 .....동호야.

 

 그녀는 아랫입술 안쪽을 악문다. 색색의 만장들이 일제히 무대 천장에서 내려오는 것을 본다. 무대 아래 네발짐승처럼 모여 있던 배우들이 별안간 꼿꼿이 허리를 편다. 노파가 걸음을 멈춘다. 업힌 아이처럼 바싹 붙어 걷던 소년이 객석을 향해 몸을 돌린다. 그 얼굴을 바로 보지 않기 위해 그녀는 눈을 감는다.

 

 네가 죽은 뒤 장례식을 치르지 못해, 내 삶이 장례식이 되었다.
 네가 방수 모포에 싸여 청소차에 실려간 뒤에.
 용서할 수 없는 물줄기가 번쩍이며 분수대에서 뿜어져나온 뒤에.
 어디서나 사원의 불빛이 타고 있었다.
 봄에 피는 꽃들 속에, 눈송이들 속에, 날마다 찾아오는 저녁들 속에. 다 쓴 음료 병에 네가 꽂은 양초 불꽃들이.

 

 뜨거운 고름 같은 눈물을 닦지 않은 채 그녀는 눈을 부릅뜬다. 소리 없이 입술을 움직이는 소년의 얼굴을 뚫어지게 응시한다.

 

 

4장. 쇠와 피

p104

 평범한 볼펜이었습니다. 모나미 검정 볼펜. 그걸 손가락 사이에 교차시켜 끼우게 했습니다.

 그야 왼손이죠. 오른손으론 조서를 써야 하니까.

 예, 그렇게 비틀었습니다. 이 방향으로도 이렇게.

 처음엔 견딜 만했습니다. 하지만 날마다 같은 곳에 그렇게 하니까 상처가 깊어졌어요. 피와 진물이 섞여 흘렀습니다. 나중엔 이 자리에 하얀 뼈가 들여다보였습니다. 뼈가 드러나니까 알코올에 적신 약솜을 끼어주더군요.

 제가 수감된 방에는 남자들만 약 아흔명이 있었는데, 절반 이상이 같은 자리에 약솜을 끼우고 있었습니다. 대화는 금지돼 있었어요. 손가락 사이에 끼운 약솜을 눈으로 확인하면, 잠깐 서로 마주보다가 시선을 피했습니다.

 저도 그렇게 생각했습니다. 뼈가 드러났으니 그 자리는 이제 그만할 거라고. 그렇지 않았습니다. 더 고통스러울 걸 알고, 약솜을 뺀 다음 더 깊게 볼펜을 끼우고 짓이겼습니다.

 

p107

 그곳의 한끼 식사는 식판에 담긴 밥 한줌과 국 반그릇, 김치가 전부였습니다. 그것을 우리들은 2인 1조로 나눠 먹었습니다. 김진수와 한조가 되었을 때, 서서히 혼이 빨려나간 짐승과 같은 상태였던 나는 안도했습니다. 그는 많이 먹을 것 같은 사람이 아니었으니까요. 얼굴이 창백하고 눈언저리는 병자처럼 어두웠으니까요. 두 눈은 생기도 표정도 없이 공허하게 번쩍였으니까요.

 한달 전 그의 부고를 들었을 때 가장 먼저 떠오른 것이 바로 그 눈이었습니다. 멀건 콩나물국에서 콩나물을 골라 먹다 말고 멈칫 나를 보던 눈. 그가 콩나물을 다 먹어버릴까봐 긴장하고 있던 나를, 우물거리는 그의 입술을 혐오하며 쏘아보고 있던 나를 묵묵히 마주 바라보던, 나와 똑같은 짐승이었던 그의 차갑고 공허한 두 눈.

 

p109

 김진수는 우리 중에서도 특별히 변칙적인 고문을 더 당한 것으로 알고 있습니다. 아마 외모가 여성적이어어서 그랬던 것 같습니다. 

 아니요, 당시에는 말하지 않았습니다. 십년쯤 지난 뒤에 들은 이야깁니다.

 성기를 꺼내 탁자에 올려놓게 하고, 나무 자로 내려치겠다며 위협했다고 했습니다. 하체를 발가벗기고 영창 앞 잔디밭으로 데려가, 팔을 뒤로 묶고 엎드려 있게 했다고 했습니다. 굵은 개미들이 세시간 동안 김진수의 사타구니를 물었다고 했습니다. 석방된 뒤 거의 매일 밤 벌레와 관련된 악몽을 꾸었다고 들었습니다.

 

 

 그전에는 모르는 사이였습니다. 오며 가며 상황실에서 얼굴만 봤지요.

 김진수는 그해에 대학 신입생이었으니, 아직 뺨에 솜털이 나 있었습니다. 얼굴이 희고 속눈썹이 유난히 짙어서 눈에 띄었습니다. 볼 때마다 무척 빠르게 걸어다닌다는 느낌이었는데, 팔다리와 허리가 가늘고 길어서 더 그렇게 보였던 것 같습니다.

 희생자 파악하고, 시신 관리를 총괄하고, 관이며 태극기를 구해와서 장례 준비하고... 주로 그런 일을 했던 걸로 압니다.

 사실 그 친구가 마지막 밤에 남을 거라곤 생각 못했습니다. 총기를 모두 회수한 뒤 계엄군이 들어오기 전에 도청을 깨끗이 비워놓자고, 단 한사람도 희생되어선 안된다고 말하는 학생들 중 하나일 거라고 생각했습니다. 저녁에 남은 걸 보고도 의심했습니다. 저 친구는 자정이 되기 전에 빠져나갈 거라고.

 김진수와 나를 포함해 열두명이 한조가 되어 이층 소회의실에 모였습니다. 처음이자 마지막이라고 생각하고 통성명을 했습니다. 각자 간단한 유서를 써서 이름과 주소를 적고는 찾기 쉽도록 셔츠 앞주머니에 넣었습니다. 당장 닥쳐올 일들이 실감나지 않았던 것도 사실입니다. 하지만 계엄군이 시내로 진입했다는 무전이 들어오기 시작하자 그제야 긴장이 되었습니다.

 상황실장이 복도로 김진수를 불러낸 건 자정 무렵이었습니다. 여자들을 호위해 도청 밖으로 데려다주라는 상황실장의 우렁우렁한 목소리가 회의실 안까지 들렸습니다. 상황실장이 김진수를 지목해 그 일을 맡긴 건, 유난히 갸날프게 생긴 그 친구가 돌아오지 않아도 좋다는 생각에서였을 거라고 나는 짐작했습니다. 김진수가 자신의 총을 챙겨 굳은 얼굴로 나가는 모습을 보며 생각했던 기억이 납니다. 그래, 너는 돌아오지 말아라.

 그러나 짐작과 달리 그는 삼십분이 채 지나지 않아 돌아왔습니다. 나갈 때와는 달리 긴장이 완전히 풀린 얼굴이었습니다. 밀려오는 졸음을 견딜 수 없는 듯 가늘게 뜬 눈으로 총을 벽에 세워놓더니, 창 아래 놓인 인조가죽 소파에 모로 누워 잠들어버렸습니다. 내가 흔들어 깨우자 신음하듯 말했습니다. 죄송합니다. 조금만 잘게요. 

 이상한 일은, 그 모습을 지켜보던 다른 사람들도 별안간 기운이 빠진 듯 벽에 기대앉았다는 것입니다. 하나둘 꾸벅꾸벅 졸기 시작했습니다. 나도 막막한 마음이 되어 김진수가 누운 소파 옆에 웅크려앉았습니다. 어떻게 설명할 수 있을까요. 졸음이 오기는커녕 신경이 가장 날카롭게 곤두서야 할 시간, 냉정한 정신력에 의지해야 할 그 시간에, 우리들은 눈도 귀도 입도 없는 뭉클뭉클한 잠 속으로 정신없이 빠져들고 있었습니다.

 조심스럽게 문이 열렸다가 소리 없이 닫히는 기척에 나는 눈을 떴습니다. 조그맣고 말간 얼굴에 알밤처럼 머리를 깍은 중학생이 어느 사이 소파에 기대앉아 있었습니다.

 누구냐, 나는 잠긴 목소리로 물었습니다.

 너 누구냐, 어디서 왔어.

 눈을 질끈 감으며 소년이 대답했ㅅ브니다.

 너무 졸려요, 조금만 잘게요, 여기서 형들이랑.

 그 목소리를 듣자마자, 죽은 듯 잠들어 있던 김진수가 소스라치며 눈을 떴습니다.

 어떻게 된 거야.

 소년의 팔을 붙들며 그가 숨죽여 물었습니다.

 내가 아까 가라고 하지 않았어. 너도 간다고 하지 않았어.

 김진수의 목소리가 점점 높아졌습니다.

 네가 대체 여기서 뭘 하겠다는 거야. 총 쏠 줄은 알어.

 머뭇머뭇 소년이 말했습니다.

 .... 화내지 마요, 형.

 두사람의 실랑이에 사람들이 부스럭부스럭 깨어났습니다. 소년의 팔을 놓지 않은 채 김진수는 반복해서 말했ㅅ브니다.

 적당한 때 너는 항복해라. 알겠지, 항복하라고. 손들고 나가. 손들고 나가는 애를 죽이진 않을 거야.

 

p117

 아니요, 쏘지 않았습니다.

 누구도 죽이지 않았습니다.

 계단을 올라온 군인들이 어둠속에서 다가오는 것을 보면서도, 우리 조의 누구도 방아쇠를 당기지 않았습니다. 방아쇠를 당기면 사람이 죽는다는 걸 알면서 그렇게 할 수가 없었습니다. 우린 쏠 수 없는 총을 나눠 가진 아이들이었던 겁니다.

 

 

 나중에 알았습니다. 그날 군인들이 지급받은 탄환이 모두 팔십만발이었다는 것을. 그때 그 도시의 인구가 사십만이었습니다. 그 도시의 모든 사람들의 몸에 두발씩 죽음을 박아넣을 수 있는 탄환이 지급되었던 겁니다. 문제가 생기면 그렇게 하라는 명령이 있었을 거라고 나는 믿고 있습니다. 학생 대표의 말대로 우리가 총기를 도청 로비에 쌓아놓고 깨끗이 철수했다면, 그들은 시민들에게 총구를 겨눴을지도 모릅니다. 그 새벽 캄캄한 도청 계단을 따라 글자 그대로 콸콸 소리를 내며 흐르던 피가 떠오를 때마다 생각합니다. 그건 그들만의 죽음이 아니라, 누군가의 죽음을 대신한 거였다고. 수천곱절의 죽음, 수천곱절의 피였다고.

 방금 전까지 눈을 마주치며 대화했던 사람들에게서 흘러나오는 피를 곁눈질로 보며, 누가 죽고 누가 남았는지도 파악하지 못한 채 나는 복도에 머리를 박고 엎드렸습니다. 그들이 매직으로 내 등에 무엇인가 글씨를 쓰는 것을 느꼈습니다. 극렬분자, 총기 소지. 그렇게 썼다는 것을 상무대 유치장에서 다른 사람이 알려주었습니다.

 

p118

 김진수와 나는 여전히 식판 하나를 받아 한줌의 식사를 나눠 먹었습니다. 몇시간 전에 조사실에서 겪은 것들을 뒤로하고, 밥알 하나, 김치 한쪽을 두고 짐승처럼 싸우지 않기 위해 인내하며 묵묵히 숟가락질을 했습니다. 실제로 어떤 사람들은 식판을 내려놓고 소리쳤습니다. 참을 만큼 참았어. 그렇게 네가 다 쳐먹으면 난 어쩌란 말이야. 으르렁거리는 그들 사이로 몸을 밀어넣으며 한 남자애가 더듬더듬 말했습니다. 그, 그러지 마요. 좀처럼 입을 떼지 않는, 늘 주눅 든 듯 조용한 아이였기에 나는 놀랐습니다.

 우, 우리는... 주, 죽을 가, 각오를 했었잖아요.

 김진수의 공허한 눈이 내 눈과 마주친 것은 그때였습니다.

 순간 깨달았습니다. 그들이 원한 게 무었이었는지. 우리를 굶기고 고문하면서 그들이 하고 싶었던 말이 무엇이었는지. 너희들이 태극기를 흔들고 애국가를 부른 게 얼마나 웃기는 일이었는지, 우리가 깨닫게 해주겠다. 냄새를 풍기를 더러운 몸, 상처가 문드러지는 몸, 굶주린 짐승 같은 몸뚱어리들이 너희들이라는 걸, 우리가 증명해주겠다.

 

 

p123

 재판장님이 입장하십니다.

 서기의 말이 떨어지자 앞문이 열리며 법무장교 셋이 차례로 들어왔습니다. 깊이 고개를 숙이고 있던 내 귀에 이상한 소리가 들린 건 그때였습니다. 앞에서 두번째 줄 정도였습니다. 반쯤 고개를 들고 나는 앞쪽을 살폈습니다. 누군가가 소리 죽여 흐느끼듯 애국가 첫 소절을 부르기 시작하고 있었습니다. 그가 어린 영재라는 걸 깨달았을 때, 누가 먼저랄 것 없이 이미 합창이 시작돼 있었습니다. 자력에 이끌린 것처럼 나도 따라 불렀습니다. 죽은 듯이 고개를 숙이고 있던 우리들이, 땀과 피와 고름이었던 우리들이 조용히 노래 하는 동안, 어째서였는지 그들은 제지하지 않았습니다. 소리치지도, 개머리판으로 머리를 내리치지도, 위협했던 대로 벽으로 몰아 넣어 총살하지도 않았습니다. 우리가 노래를 끝마칠 때까지, 소절과 소절 사이마다 위태한 침묵이 풀벌레 소리와 함께, 간이재판소의 서늘한 공기 속에서 도사리고 있었습니다.

 

 

p132

 군인들의 명령대로 이층 복도에 머리를 박고 있던 우리들이 도청 마당으로 끌려내려간 건 동틀 무렵이었습니다. 뒤로 손이 묶인 채 마당 가장자리에 일렬로 무릎 꿇고 앉은 우리들에게 한 장교가 다가왔습니다. 그는 흥분해 있었습니다. 한사람씩 군화로 등을 밟아 흙바닥에 머리를 박게 하며 욕설을 퍼부었습니다. 씨팔, 내가 월남 갔다 온 사람이야. 내 손으로 죽인 베트콩 새끼들이 서른명도 넘는다, 더러운 빨갱이 새끼들. 그때 김진수는 내 옆에 있었습니다. 장교가 김진수의 등을 밟자, 하필 자갈에 찧은 이마에서 피가 흘렀습니다.

 다섯명의 어린 학생들이 이층에서 두 손을 들고 내려온 것은 그때였습니다. 계엄군이 대낮같이 조명탄을 밝히며 기관총을 난사하기 시작했을 때 내가 소회의실 캐비닛에 숨으라고 명령했던 네명의 고등학생과, 소파에서 김진수와 짦은 실랑이를 벌였던 중학생이었습니다. 더이상 총소리가 들리지 않자 그들은 김진수의 말대로 무기를 버리고 항복하러 내려온 것이었습니다.

 저 새끼들 봐라, 김진수의 등을 밟고 있던 장교가 여전히 흥분한 채 소리쳤습니다. 씨팔 빨갱이들, 항복이다 이거냐? 목숨은 아깝다 이거냐? 한발을 여전히 김진수의 등에 올린 채 그는 M16을 들어 조준했습니다. 망설이지 않고 학생들에게 총을 갈겼습니다. 나도 모르게 고개를 들어 그의 얼굴을 봤습니다. 씨팔, 존나 영화 같지 않냐. 치열이 고른 이를 드러내며 그가 부하를 향해 말했습니다.

 아시겠습니까. 그러니까이 사진에서 이 아이들이 나란히 누워있는 건, 이렇게 가지런히 옮겨놓은 게 아닙니다. 한줄로 아이들이 걸어오고 있었던 겁니다. 우리가 시킨 대로 두 팔을 들고, 줄을 맞춰 걸어오고 있었던 겁니다.

 

p154

 그러나 스무살이 되기 전까지 당신이 했던 일은 달랐다.

 당신은 하루에 열다섯시간 일했고 한달에 이틀 쉬었다. 봉급은 남자 공원의 절반이었다. 잔업수당은 없었다. 하루 두알씩 타이밍을 먹어도 잠이 쏟아졌다. 선 채로 잠들면 작업반장이 욕을 하거나 뺨을 쳤다. 오후부터 묵직하게 붓던 종아리와 발등, 물품을 빼돌릴지 모른다는 이유로 퇴근하는 여공들을 몸 수색하던 경비들. 브래지어 언저리를 더듬을 때 느려지던 그들의 손. 치욕. 기침. 잦은 코피. 두통. 가래를 뱉으면 뭉쳐나오던 거무스레한 실밥 덩어리들.

 우리는 고귀해.

 성희 언니는 자주 그렇게 말했다. 쉬는 일요일마다 청계피복노조 사무실에서 노동법 강의를 듣던 그녀는, 자신이 배운 것을 빼곡히 노트에 정리해와 소모임에서 강의했다. 한자 공부를 할 거란 성희 언니의 말에 당신은 별다른 두려움 없이 그 모임에 들어갔었다. 실제로 언니들은 모이자마자 한자부터 공부했다. 1800자는 알아야 해, 신문은 읽을 수 있어야지. 각자 펜글씨 공책에 서른자씩 쓰고 암기하는 일이 끝나면 성희 언니의 어색한 노동법 강의가 시작되었다. 그러니까.... 우리는 고귀해. 말문이 막히거나 기억이 얼른 안 날 때마다 성희 언니는 추임새처럼 그 말을 넣었다. 헌법에 따르면, 우리는 모든 사람들과 똑같이 고귀해. 그리고 노동법에 따르면 우리에겐 정당한 권리가 있어. 그녀의 목소리는 초등학교 여선생님처럼 상냥하고 낭랑했다. 이 법을 위해 죽은 사람이 있어.

 어용노조를 큰 표 차로 꺽고 뽑힌 노조 간부들을 구사대와 경찰들이 끌고 가던 날, 2교대를 하려고 기숙사를 나와 출근하던 여공들 수백명이 사람의 벽을 만들었다. 많아야 스물한두살, 대부분이 십대인 여자애들이었다. 제대로 된 구호도 노래도 없었다. 잡아가지 마요. 잡아가면 안돼요. 소리치는 그녀들을 향해 각목을 든 구사대가 달려들었다. 헬멧과 방패로 중무장한 경찰 백여명을, 차창마다 철망이 쳐진 전경차들을 당신은 보았다. 무엇 때문에 저렇게 무장했을까, 얼핏 생각했다. 우린 싸움을 못하고 무기도 없는데.

 성희 언니가 큰 소리로 외친 것은 그때였다. 옷을 벗어. 우리 다 같이 옷을 벗자. 누가 먼저랄 것 없이 그녀들은 옷을 벗었다. 잡아가지 마요. 소리치며 블라우스와 치마를 벗어 흔들었다. 그녀들이 지닌 가장 은밀한 것, 모든 사람들이 귀중하다고 말하는 것, 처녀들의 벗은 몸을 그들이 만질 수 없을 거라고 믿었기 대문이다. 그러나 그들은 브래지어 차림의 여자애들을 흙바닥에 끌고 갔다. 등허리의 맨살이 모래에 긁혀 피가 흘렀다. 머리가 헝클어지고 속옷이 찢겼다. 안돼, 잡아가면 안돼, 고막이 터질 듯 쨍쨍한 울부짖음 사이로, 그들은 수십명의 노조원들을 곤봉과 각목으로 때려 닭장차에 집어넣었다.

 열여덟살인 당신은 마지막에 끌려가다 모랫바닥에 미끄러져 넘어졌다. 서두르던 사복형사가 당신의 배를 밟고 옆구리를 걷어 찬 뒤 가버렸다. 흙바닥에 엎드린 당신의 의식이 아득하게 흐려졌다 돌아왔다. 여자애들의 쨍쨍한 고함 소리가 멀어졌다 가까워졌다.

 응급실로 업혀간 당신은 장파열 진단을 받았고, 입원해 있는 동안 해고 통보를 들었다. 퇴원한 후 언니들과 함께 복직투쟁을 하는 대신 당신은 고향 집으로 내려갔다. 몸을 추스린 뒤 인천으로 돌아와 다른 방직공장에 취직했지만 일주일을 못 채우고 해고됐다. 당신의 이름이 블랙리스트에 올라 있었던 것이다. 결국 당신은 이년 남짓한 방직공 경력을 포기하고, 친척의 주선으로 광주 충장로의 양장점에 미싱사 시다로 취직했다. 급료는 여공 시절보다 더 형편 없었지만, 그만두고 싶을 때마다 막연히 성희 언니의 목소리가 떠올랐다... 그러니까, 우리는 고귀하니까. 그럴 때면 그녀에게 편지를 썼다. 나는 잘 지내고 있어요, 언니. 쉽게 미싱사가 될 수 있을 것 같지는 않지만요. 기술이 어렵다기보다는 잘 안 가르쳐주는 게 문제에요. 그래도 인내심 있게 배워봐야죠. 기술, 인내심 같은 단어들은 소모임에서 배웠던 한자로 반듯하게 획을 살려 썼다. 성희 언니가 자주 걸음하는 산업선교회 주소로 편지를 부치면 답장은 아주 가끔씩 짧게 왔다. 그래야지, 너는 어디서 뭘 해도 잘할 거야. 그렇게 한해 두해 시간이 흐르며 서로 연락이 끊어졌다.

 어렵게 배운 기술로 삼년 만에 미싱사가 됐을 때 당신은 스물한 살이었다. 그해 가을, 당신보다 어린 여공이 야당 당사에서 농성을 하다 죽었다. 사이다 병 조각으로 스스로 손목을 긋고 삼층에서 뛰어내렸다는 정부의 발표를 당신은 믿지 않았다. 퍼즐 맞추기를 하듯 신문에 실린 사진들을, 검열되어 텅 빈 공란들을, 격앙된 사설의 어둑한 반대편을 들여다봐야 했다.

 당신의 배를 밟고 옆구리를 찼던 사복형사의 얼굴을 당신은 잊지 않았다. 중앙정보부가 구사대들을 직접 교육하고 지원하고 있다는 것을, 그 폭력의 정점에 군인 대통령이 있다는 것을 잊지 않았다. 당신은 긴급조치 9호의 의미를 이해했고, 대학 정문에서 스크럼을 짠 학생들이 외치는 구호를 이해했다. 이어서 부산과 마산에서 일어난 일들을 이해하기 위해 신문 속 퍼즐을 맞췄다. 부서진 전화 부스들과 불타는 파출소, 투석적은 벌이는 성난 군중. 오직 상상으로 유추해야 하는 공란 속의 문장들.

 대통령이 돌연히 죽은 시월 당신은 자문했다. 이제 폭력의 정점 이 사라졌으니, 더이상 그들은 옷을 벗어들고 울부짖는 여공들을 끌고 가지 못하는가? 넘어진 여자애의 배를 밟아 창자를 터뜨리지 못하는가? 박 대통령의 신임을 받았다는 젊은 소장이 장갑차를 이끌고 서울에 입성하는 것을, 곧이어 중앙정보부장을 겸직하는 것을 당신은 신문을 통해 지켜보았다. 조용히 소름이 끼쳤다. 무서운 일이 생길 것 같아. 임 양은 신문이 그렇게 좋아? 중년의 재단사는 당신을 놀리곤 했다. 젊어 좋겄어. 그렇게 잔글씨가 안경도 없이 뵈고. 

 그리고 그 버스를 당신은 보았다. 

양장점 주인이 대학생 아들을 데리고 영암의 동생네돌 내려가러빈 화창한 봄날이었다. 낮에 갑자기 할 일이 없어져 서름서름 거리를 걷던 당신의 눈에 그 시내버스가 들어왔다. 계엄 해제, 노동삼권 보장, 차창 아래 길게 걸어놓은 흰 현수막에 파란 매직으로 쓴 글씨가 보였다. 작업복 차림의 전남방직 여공 수십명이 버스를 가득 채우고 있었다. 햇빛을 못 봐 데친 버섯같이 얼굴이 창백한 여자애들이 나무 막대들을 들고, 차창 밖으로 팔을 내밀어 차체를 치며 노래를 불렀다. 당신이 기억하는 쨍쨍한 목소리, 무슨 새나 어린 짐승들이 한꺼번에 내는 것 같은 목소리였다.

 우리들은 정의파다 좋다 좋다
 같이 죽고 같이 산다 좋다 좋다
 무릎 꿇고 살기보다 서서 죽길 원한단다
 우리들은 정의파다

 똑똑히 기억하는 그 노래를 따라, 당신은 홀린 듯 그 버스가 사라진 방향으로 걸었다. 수십만의 군중이 거리 곳곳에서 몰려들어 광장으로 향하고 있었다. 이른 봄부터 스크럼을 짜고 몰려다니던 대학생들은 보이지 않았다. 노인들, 초등학생 아이들, 작업복 차림의 남녀 공원들, 넥타이를 맨 젊은 남자들, 투피스에 힐은 신은 젊은 여자들, 그것도 무기라고 장우산을 들고 나온 새마을 점퍼 차람의 아저씨들. 그 모든 사람들의 행렬 앞에, 신역에서 총을 맞은 청년들의 시신 두구가 수레에 실려 광장으로 나아고 있었다.

 

p161

 거대한 빙하가 당신의 몸을 내리누른다. 고체인 당신은 으스러진다. 빙하 아래로 흐르고 싶다고 당신은 생각한다. 바닷물이든 석유든 용암이든, 어떤 액체가 되어서 이 무게로부터 벗어나야 한다. 그 길밖에 없다.

 

p162

 입원 병동이 있는 본관 로비에는 조명이 완전히 꺼져 있다. 별관 측면의 응급실 입구에만 환하게 불이 밝혀져 있다. 방금 위급한 환자를 수송한 듯, 지방 병원의 구급차 한대가 비상 깜박이를 켜고 뒷문을 열어놓은 채 정차하고 있다.

 활짝 열려 있는 현관을 통과해 당신은 응급실 복도에 들어선다. 신음과 다급한 목소리, 무엇인가를 세차게 흡입해내는 의료기구의 기계음, 환자용 침상을 옮기는 소란한 바퀴 소리를 듣는다. 수납창구 앞에 여러줄로 놓인 등받이 없는 의자에 걸터앉는 당신에게 창구의 중년 여자가 묻는다.

 어떻게 오셨습니까?

 .....누구를 만나려고요.

 사실이 아니다. 당신은 여기서 아무도 만나기로 하지 않았다. 면회가 허락되는 아침이 된다 해도, 성희 언니가 당신을 만나기를 원할 것인지도 알지 못한다.

 등산복 차림의 중년 남자가 동료의 부축을 받으며 걸어들어온다. 거친 솜씨로 팔에 부목을 한 것으로 미루어 야간산행 중 부상당한 것 같다. 괜찮아, 이제 다 왔어. 배낭 두개를 겹쳐 어깨에 둘러 멘 동료가 다친 남자를 달랜다. 두사람의 얼굴이 비슷한 표정으로 일그러져 있는 것을 당신은 본다. 다시 보니 동료가 아니라 형제인 듯 이목구비가 닮아 있다. 조금만 참아. 곧 의사가 올거야.

 곧 의사가 올거야.

 주문처럼 그가 되풀이하는 말을 들으며 당신은 의자 끝에 꼼짝 않고 앉아 있다. 오래전 당신에게 의사가 되고 싶다고 말했던 여자애를 생각한다.

 성희 언니가 소모임에 신입 회원을 받자고 해서 당신이 말을 꺼내봤던 아이였다. 당신처럼 중학교를 마치기 전에 나이를 속이고 공장에 들어온, 키가 자그마하고 웃음이 송글송글하던 그애는 거절했다. 저는 조합 활동 적극적으로 못해요. 해괴되면 안되거든요. 동생 학비도 보내야 하고, 언젠가 저도 공부를 할 거니까요. 의사가 되고 싶어요.

 장파열로 당신이 입원해 있었을 때였다. 명동성당에서 농성하다 잠깐 문명 온 동료가 말했다.

 .....사방에 흩어진 우리 신발을, 정미가 전무 모아서 노조 사무실에 갖다놨대. 쪼그만 게 그렇게 서럽게 울더란다.

 연행되지 않으려고 몸부림치다 벗겨진 신들이 사방에 널려 있었을 것이다. 열여섯살 난 그애는 무엇이 자신을 울게 하는지도 모르면서 그 신들을 가슴에 안고 이층 노조 사무실로, 아무도 남아 있지 않은 빈방으로 걸어올라갔을 것이다.

 그날 오후 회진을 온 말쑥한 얼굴의 의사와 레지던트와 인턴들을 당신은 유심히 올려다봤다. 그애는 그들 같은 의사가 될 수 없다고 그때 생각했다. 동생을 대학 졸업시키면 이십대 중반이 될 것이고, 그때부터 중학교 검정고시를 준비한다 해도.... 아니, 그애는 그때까지 공장에서 버티지도 못할 것이다. 그애는 자주 코피를 쏟았고 깊은 기침을 했다. 발육이 덜 돼 열무처럼 가는 종아리로 방직기 사이를 뛰어다니다가, 기둥에 기대서서 의식을 잃듯 깜박 졸았다. 어떻게 이렇게 시끄러워요? 아무 말도 안 들려요. 처음 일을 배우던 날엔 방직기 소음에 놀라, 겁에 질린 듯 동그랗게 뜬 눈으로 당신에게 외쳤다.

 

p166

  기억해달라고 윤은 말했다. 직면하고 증언해달라고 말했다.

 그러나 그것이 어떻게 가능한가.

 삼십 센티 나무 자가 자궁 끝까지 수십번 후벼들었다고 증언할 수 있는가? 소총 개머리판이 자궁 입구를 찢고 짓이겼다고 증언할 수 있는가? 하혈이 멈추지 않아 쇼크를 일으킨 당신을 그들이 통합병원에 데려가 수혈받게 했다고 증언할 수 있는가? 이년 동안 그 하혈이 계속되었다고, 혈전이 나팔관을 막아 영구히 아이를 가질 수 없게 되었다고 증언할 수 있는가? 타인과, 특히 남자와 접촉하는 일을 견딜 수 없게 됐다고 증언할 수 있는가? 짧은 입맞춤, 뺨을 어루만지는 손길, 여름에 팔과 종아리를 내놓아 누군가의 시선이 머무는 일조차 고통스러웠다고 증언할 수 있는가? 몸을 증오하게 되었다고, 모든 따뜻함과 지극한 사랑을 스스로 부숴뜨리며 도망쳤다고 증언할 수 있는가? 더 추운 곳, 더 안전한 곳으로 오직 살아남기 위하여.

 

p169

 모든 셔터가 내려져 있었다.

 모든 창문이 걸어잠겨 있었다.

 그 어두운 거리 위로, 얼음의 눈동자 같은 열이레 달이 당신이 탄 소형 트럭을 내려다보고 있었다. 

 대부분의 방송은 여대생들이 했다. 그녀들이 완전히 지쳤을 때, 목이 갈라져 더이상 소리를 낼 수 없다고 말했을 때 당싱는 사십여분 분 동안 메가폰을 잡았다. 불을 켜주세요, 여러분. 당신은 그렇게 말했다. 캄캄한 창문들을 향해, 누구의 기척도 느껴지지 않는 골목을 향해 말했다. 제발 불이라도 켜주세요, 여러분.

 군이 그 트럭을 새벽까지 버려둔 것은 병력의 이동 경로를 노출하지 않기 위해서였다는 것을 당신은 나중에 알았다. 동트기 직전에 체포된 여자들은 광산경찰서 유치장으로, 운전을 맡았던 청년은 상무대로 끌려갔다. 총기를 소지하고 있었으므로 당신은 여대생들과 따로 수감되었고 보안부대로 이송되었다.

 그곳에서 당신은 이름 대신 빨갱이년으로 불렸다. 과거 여공이었고 노조 활동을 했기 때문이었다. 사년 동안 지방 도시의 양장점에서 숨어지내며 간첩 지령을 받아왔다는 각본을 완성하기 위해 그들은 날마다 당신을 조사실 탁자에 눕혔다. 더러운 빨갱이년. 아무리 소리 질러봐라. 누가 달려오나. 조사실의 조명은 가늘게 떨리는 형광등이었다. 일상적인 그 환한 조명 아래, 당신이 하혈 끝에 의식을 잃을 때까지 그들은 멈추지 않았다.

 성희 언니를 다시 만난 것은 교도소에서 석방된 이듬해였다. 산업선교회와 크리스찬 아카데미에 그녀의 행방을 수소문해 구로동의 국숫집에서 만났다. 당신의 이야기를 들은 그녀는 놀란 듯 고개를 저었다.

 네가 감옥에 있었던 줄은 꿈에도 몰랐어. 조용히 잘 살고 있을 줄 알았는데.

 수년 동안 도피와 수감을 반복해온 성희 언니의 얼굴은 볼이 움푹 패어 다른 사람처럼 보였다. 이제 스물일곱인데, 나이보다 열살은 더 들어 보였다. 흰 김을 피워올리며 식어가는 국수 앞에서 그녀는 잠시 침묵했다.

 정미가 그 봅에 실종됐다데, 알고 있었니?

 이번에는 당신이 고개를 저었다.

 그애가 잠깐 노조 일을 거들었더랬어. 그런데 우리가 블랙리스트 때문에 고생하는 걸 보고 걱정이 됐던지, 해고되기 전에 먼저 공장을 그만뒀어. 그러곤 소식이 끊겼다가... 그 얘긴 나도 최근에 들었어. 일산방직에서 같이 야학엘 다녔다는 동료한테서.

 모국어를 이해할 수 없게 된 것처럼 당신은 가만히 성희 언니의 입 모양을 지켜보았다.

 너, 거기 사년 살았다면서, 큰 도시도 아닌데, 오며 가며 한번도 못 만났니.

 당신은 얼른 대답할 수 없었다. 그애의 얼굴을 제대로 기억할 수도 없었다. 무엇인가를 애써 기억해내기에 당신은 지쳐 있었다. 몇 조각의 희끗한 파편들이 떠올랐다 사라졌다. 흰 피부, 오종종한 앞니. 의사가 되고 싶어요. 노조 사무실까지 그애가 끌어안고 올라갔다던, 이제는 이름을 잊은 동료가 병원에 가져다준 당신의 운동화.

 그게 다였다.

 

 4:00

 죽기 위해 그 도시에 다시 갔어.

 

 석방된 뒤 얼마간은 오빠 집에 신세를 졌지만, 일주일에 두번씩 경찰이 찾아오는 걸 더 견딜 수 없었어.

 이월 초순 새벽이었어. 내가 가진 가장 깨끗한 옷을 꺼내 입고, 간단히 가방을 사서 시외버스를 탔어.

 언뜻 그 도시는 변한 게 없어 보였어. 하지만 모든 게 변했다는 걸 곧 느낄 수 있었어. 도청 별관 외벽엔 총탄 자국들이 패어 있었어. 어두운색 옷을 껴입은 행인들의 얼굴은 투명한 흉터가 새겨진 것처럼 일그러져 있었어. 그들과 어깨를 부딪치며 나는 걸었어. 배가 고프지 않았어. 목이 마르지도, 발이 시리지도 않았어. 날이 저물 때까지, 다음 날 새벽이 올 때까지도 계속 걸을 수 있을 것 같았어.

 그러다 너를 본 건 금남로에서였어.

 카톨린센터 외벽에 방금 학생들이 붙여놓고 간 사진을 들여다 봤을 때였어.

 언제든 경찰들이 나타날 수 있었어. 그 순간도 어디서 날 지켜보고 있는지도 몰랐어. 나는 재빨리 사진 한장을 뜯었어. 둘둘 말아서 쥐고 걸었어. 큰길을 건너 골목으로 깊이 들어갔어. 못 보던 음악감상실 간판이 보였어. 오층 계단을 숨차게 걸어올라가, 동굴 같은 안쪽 방에 자리를 잡고 커피를 시켰어. 종업원이 커피를 가져다줄 때까지 꼼짝 않고 기다렸어. 분명 음악 소리가 큰 곳이었을 텐데. 깊은 물속에 잠긴 것처럼 아무것도 들리지 않았어. 마침내 완전히 혼자가 됐을 때 사진을 펼쳤어.

 너는 도청 안마당에 모로 누워 있었어. 총격의 반동으로 팔다리가 엇갈려 길게 뻗어가 있었어. 얼굴과 가슴은 하늘을, 두 다리는 벌어진 채 땅을 향하고 있었어. 옆구리가 뒤틀린 그 자세가 마지막 순간의 고통을 증거하고 있었어.

 숨을 쉴 수 없었어.

 어떤 소리도 낼 수 없었어.

 그러니까 그 여름에 넌 죽어 있었어. 내 몸이 끝없이 피를 쏟아낼 때, 네 몸은 땅속에서 맹렬하게 썩어가고 있었어.

 그 순간 네가 날 살렸어. 삽시간에 내 피를 끓게 해 펄펄 되사레했어. 심장이 터질 것 같은 고통의 힘, 분노의 힘으로.

 

p173

 오래전 동호와 은숙이 조그만 소리로 나누던 대화를 당신은 기억한다. 왜 태극기로 시신을 감싸느냐고, 애국가는 왜 부르는 거냐고 동호는 물었다. 은숙이 어떻게 대답했는지는 기억나지 않는다. 

 지금이라면 당신은 어떻게 대답할까. 태극기로, 고작 그걸로 감싸보려던 거야. 우린 도륙된 고깃덩어리들이 아니어야 하니까, 필사적으로 묵념을 하고 애국가를 부른 거야.

 그 여름으로부터 이십여년이 흘렀다. 씨를 말려야 할 빨갱이 연놈들. 그들이 욕설을 뱉으며 당신의 몸에 물을 끼얹던 순간을 등지고 여기까지 왔다. 그 여름 이전으로 돌아갈 길은 끊어졌다. 학살 이전, 고문 이전의 세계로 돌아갈 방법은 없다.

 

p176

 내 책임이 있는 거야, 그렇지?

 입술을 악문 채, 눈앞에서 일렁이는 파르스름한 어둠을 향해 당신은 묻는다.

 내가 집으로 가라고 했다면, 김밥을 나눠 먹고 일어서면서 그렇게 당부했다면 너는 남지 않았을 거야, 그렇지?

 그래서 나에게 오곤 하는 거야?

 왜 아직 내가 살아 있는지 물으려고.

 

p177

 아니

 언니를 만나 할 말은 하나뿐이야.

 허락된다면.

 부디 허락된다면.

 장례식장과 응급실로, 병동과 병원 정문으로 갈라지는 도로를 밝히던 외등들이 일제히 꺼진다. 도로 가운데 그어진 흰색의 직선을 따라 당신은 얼굴을 들고 걷는다. 선득한 빗방울이 당신의 정수리에, 당신의 운동화가 내딛는 아스팔트에 떨어져 번진다.

 죽지 마.

 죽지 말아요.

 

6장. 꽃 핀 쪽으로

p178

 그 머시매를 따라갔다이.

 어시매 걸음은 빠르고 나는 늙었는디, 아무리 걸어도, 따라잡을 수 있어야제. 조금만 옆으로 고개를 돌려주면 옆얼굴이 보일 것인디. 아무 데도 안 둘러보고 앞으로, 앞으로만 가야.

 요새 어느 중학생이 그리 짧게 머리를 깍겄냐이. 동그스름한 네 두상을 내가 아는디, 분명히 너였다이. 느이 작은형이 물려준 교복이 너한테는 너무 컸다가 3학년 올라감스로야 겨우 몸에 맞았제. 아침에 네가 책가방 들고 대문을 나서먼, 한없이 뒷모습을 보고 섰고잪게 옷 태가 났제. 그란디 그 머시매는 책가방은 어디다 놓고 빈손으로 훌훌 걸어가더라이. 하얀 하복 반소매 아래 호리호리한 팔뚝이 영락없이 너였단게. 좁은 어깨하고 길쭉한 허리하고 걸음걸이가, 고라니같이 앞으로 수그러진 목이 꼭 너였단게.

 네가 나한테 한번 와준 것인디, 지나가는 모습이라도 한번 보여줄라고 온 것인디, 늙은 내가 너를 놓쳐버렸어야. 시장통 좌판 사이로, 골목골목으로 한시간을 뒤지고 댕겨도 없어야. 무릎 속이 쑤시고 어찔어찔 골이 흔들려 바닥에 주저앉았다이. 하지만 동네 사람이라도 만나면 큰일인게, 아직 어지러워도 땅을 짚고 일어섰다이.

 시장통까지 널 따라갈 적엔 먼 길인 줄도 몰랐는디, 돌아오는 길엔 바짝바짝 목이 타드라이. 동전 하나 주머니에 안 담고 나와서, 아무 가게라도 들어가 찬물 한잔 얻어묵고 자팠다이. 그래도 누가 비렁뱅이 노인네라고 욕할까 무서운게, 벽이 나올 때마다 손으로 짚음스로 싸묵싸묵 걸어왔다이. 어지럽게 먼지 날리는 공사판 옆을, 입을 꽉 막고 기침함스로 지나왔다이. 갈 적에는 어째서 몰랐으까이. 그렇게 시끄러운 공사판이 있었던 것을. 그렇게 무참하게 길바닥을 뚫어쌓고 있었던 것을.

 

p180

 알 수 없다이, 그날은 왜 내가 이름 한자리 못 불러봤는지. 입술이 달라붙은 사람맨이로, 쌕쌕 숨만 몰아쉼스로 뒤를 밟았는지, 이번에 내가 이름을 부르면 얼른 돌아봐라이. 대답 한자리 안해도 좋은게, 가만히 돌아봐라이.

 

 

 아니제.

 그럴 수 없는 것을 내가 알제.

 내 손으로 너를 묻었은게. 하늘책 체육복에다 교련복 윗도리를 입고 있던 너를, 하얀 하복 샤쓰에다 아래위 까만 동복으로 갈아입혔은게. 혁대도 단정하게 매주고 깨끗한 회색 양말을 신겼은게. 베니어판으로 짠 관에다 너를 넣고 청소차에 식도 갈 적에, 너를 지킬라고 내가 앞자리에 탔은게. 청소차가 어디로 가는 줄도 모르고, 네가 있는 뒤쪽만 뚫어져라고 지켜보고 있었은게.

 환한 모래언덕에 까만 옷 입은 사람 수백명이 개미같은 관을 들고 걸어가던 것이 생각난다이. 느이 형들이 입술을 꽉 물고서 울고 섰던 것도 아슴아슴 떠오른다이. 느이 아부지 생전에 나한테 하던 말이, 그때 내가 울지도 않고 뗏장 옆에 풀을 한움큼 끊어서 삼켰다든지. 삼키고는 쪼그려앉아서 토하고, 다 토하면 또 풀을 한움큼 끊어다 씹었다든디. 근디 나는 하나도 기억이 안 나야. 묘지로 가기 전 일들만 또렷해야. 관 뚜껑 닫기 전 마지막으로 봤던 네 얼굴이 얼마나 핼쑥했던지. 네 살이 그렇게 희었던 줄 그때 처음 알았다이.

 나중에 느이 작은형이 그러드마는 총을 맞고 피를 너무 흘려서 네 얼굴이 그리 희었다고. 그래서 관이 가벼웠다고. 네가 아무리 덜 컸다고 해도, 그렇게 관이 가벼울 수는 없었다고. 그람스로 두 눈에 핏발이 서드라이. 이 원수는 내가 갚을랍니다. 그것이 뭔 소리다냐. 깜짝 놀라서 내가 그랬다이. 나라에서 죽인 동생 원수를 무슨 수로 갚는다냐. 너까장 잘못되면 나도 따라 죽을 거이다.

 그라고 삼십년이 흘러가도록, 너하고 느이 아부지 기일에 그 자석이 가만히 서서 입 다물고 있는 것을 보면 마음이 이상해ㅑ. 네가 죽은 것이 지 때문이 아닌디, 왜 친구들 중에 제일 먼저 어깨가 굽고 머리가 하얗게 세었을까이. 저것이 아직도 원수 갚을 생각을 하고 있단가. 생각하면 가슴이 내려앉아야.

 

 그래도 느이 큰형은 흔적 없이 밝게 지낸다이. 한달에 두번 각시하고 같이 내려오고, 혼자도 몰래 당일로 내려와서 밥도 사주고 용돈도 주고, 가까이 사는 네 작은형보다 다정하다이.

 느이 아부지나 큰형이나 너나, 허리가 길고 어깨가 수긋한 내력이지야. 기름한 눈매하고 앞니 살짝 벌어진 것은 너하고 큰형이 똑같았지야. 요새도 느이 큰형이 웃음스로 토끼같이 넓적한 앞니가 드러나먼, 눈가에 주름은 깊이 패었어도 청년같이 순진해 보인다이.

 느이 큰형이 열한살 묵었을 때 네가 태어났는디, 그 자석은 그때부터 가이내 같은 머시매라서, 애기가 보고 잪다고 학교만 끝나면 달려왔는디, 네가 웃는 것이 이쁘다고, 조심조심 목을 받쳐안고는 까르르 웃을 때까지 흔들었는디, 돌 지난 너를 포대기로 등에 업혀주먼, 겅중겅중 마당을 돎스로 박자도 안 맞는 노래를 불렀는디.

 그렇게 가이내 같은 자석이 느이 작은형하고 싸울 줄을 누가 알았겄냐이. 이십년도 넘게 지금까장도 서로 서먹서먹해갖고 긴 이야기를 안 나누게 될 줄을.

 느이 아부지 상 치르고 돌아와 삼우제 준비할 적이었다이. 갑자기 뭣이 깨지는 소리가 나서 달려가봤더니, 스물일곱살, 서른두살 먹은 다 큰 머시매들이 씨근거림스로 서로 멱살을 쥐고 있어야.

 그 쪼그만 것 손 잡아서 끌고 오면 되지, 몇날 며칠 거기 있도록 너는 뭘 하고 있었냐고! 마지막 날엔 왜 어머니만 갔냐고! 말해봤자 안 들을 것 같았다니, 거기 있으면 죽을 걸 알았담서, 다 알고 있었담서 네가 어떻게!

 그란게 느이 작은형이 으어어어, 마로 아니고 뭣도 아닌 소리를 지름스로 지 형한테 달라들더니 방바닥에 넘어뜨렸다이. 짐승맨이로 울부짖음서 말을 한게, 무슨 이야긴지 뜨문뜨문하게밖에 안 들렸다이.

 형이 뭘 안다고... 서울에 있었음스로.... 형이 뭘 안다고...

 그때 상황을 뭘 안다고오.

 둘이 그 꼴로 엎치락뒤치락하는 것을 말릴 생각도 못하고 나는 부엌으로 돌아왔다이. 아무 생각도 하고 싶지 않은게, 아무 소리도 안 들리는 것맨이로 전을 부치고 산적을 꿰고 탕을 끓였다이.

 인자는 암것도 모르겄어야.

 마지막 날에 내가 너를 찾아갔을 적에, 넥 그리 순하게 저녁에 들어갈라요, 말하지 않았더라면 어땠으까이. 나는 안심을 하고 집에 가서 느이 아부지한테 그랬어야.

 여섯시에 문 잠그고 집에 온다요. 다 같이 저녁 묵자고 약속했소.

 그란디 일곱시가 되도록 네가 안 들어온게, 느이 작은형하고 나하고 둘이서 집을 나섰다이. 계엄이라 일곱시가 통금인디, 그날 저녁 군대가 들어온다 한게 귀신 그림자도 안 보이더라이. 꼬박 사십분을 걸어서 가본게 상무관에는 불이 꺼지고 아무도 없어야. 도청앞으로 간게 총 든 시민군들이 지키고 섰드라마는. 우리 막내아들을 만나봐야겄다고 사정한게, 어리디어린 그 시민군들은 파랗게 얼굴이 굳어갖고 안된다고, 아무도 들여보내년 안된다고 딱 잘라 말하더라이. 금방 계엄군이 탱크를 몰고 들어온다고, 위험하게 얼른 집으로만 가라고만 하더라이.

 제발 들어가게 해주소, 하고 나는 빌었어야.

 우리 막내 불러라도 주소, 하고 나는 빌었어야.

 보다 못한 느이 작은형이 직접 들어가서 동생을 찾겄다고 한게 시민군 하나가 그러더라이.

 지금 들어가면 못 나옵니다. 저 안에는 죽을 각오가 된 사람들만 남았습니다. 

 느이 작은형이 알겄다고, 일단 들어가게만 해달라고 언성을 높일 적에 내가 말을 막았다이.

 그 아그가 기회를 봐서 제 발로 나올라는 것이여... 분명히 나한테 약속을 했단게.

 사방이 너무 캄캄해서 내가 그렇게 말을 했다이. 금방이라도 어둠속에서 군인들이 나타날 것 같아서 그렇게 말을 했다이. 이라다가 남은 아들까장 잃어버릴 것 같아서 그렇게 말을 했다이.

 그렇게 너를 영영 잃어버렸다이.

 내 손으로 느이 작은형 팔을 끌고, 내 발로 돌아서서 집으로 갔다이. 모두 다 죽어버린 것맨이로 캄캄한 사거리를, 사십분을 둘이 울면서 걸어 돌아갔다이.

 인자 나는 암것도 알 수 없어야. 겁이 나서 얼굴이 파랗게 굳어있던 시민군들, 어리디어리던 그 자서들도 죽었으까이. 그리 허망하게 죽을 것을, 왜 끝까장 나를 안 들여보내줬으까이.

1991년 후지TV의 동명의 드라마의 주제가로 사용된 곡. 이 드라마에서 주연도 나가부치 쯔요시가 맡았다.

당시 오리콘 차트 1위에 올랐고, 싱글로 110만장 이상이 판매됐다. 나가부찌 쯔요시 본인 작사/작곡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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ひりひりと 傷口にしみて 眠れなかったよ
泣きっ面にしょんべん ひっかけられた夜
薄情 な男だと 夜を一枚ひんめくりゃ
ぐずぐずしてちゃいけねぇと 照れずに思えた

아픈 상처에 잠을 잘 수가 없었어
우는 얼굴에 찬물이 끼얹어졌던 날 밤
박정한 남자라며 하룻밤을 보내고는
우물쭈물해선 안되라며 뻔뻔하게 생각했어


つまらぬこだわりは 身を縮めるだけだった
ほんの一瞬でも お前を愛せてよかった
枯れ果ててしまっても 温もりだけは残ったよ
妙に悲しくて いさぎよくて 本当に気持ちよかったよ

변변치 않은 걸 신경쓰는 건 방해만 될 뿐이야.
그저 한순간이라도 너를 사랑할 수 있어 다행이었어
시들어 버릴지라도 이 온기만은 남아있어
이상하게도 슬프지만 미련없이 기분이 좋았어

淋々と泣きながら はじけて とんだけど
もっと俺は俺でありますように
いったい俺たちは ノッペリとした都会の空に
いくつのしゃぼん玉を 打ち上げるのだろう?

슬피 울며 튕겨져 날라가도
좀 더 나는 나답게 남아있기를
도대체 우리들은 삭막한 도시의 하늘에
얼마나 많은 비누방울을 불어 날리는 걸까


きしりきしりと 横っ腹が 痛かった
馬鹿っ面ぶら下げて 上等だとひらきなおった
人生が少しだけ うるさくなってきたけど
逃げ場所のない覚悟が 夢に変わった

옆구리가 삐걱대며 아팠었다
멍청한 얼굴을 하곤 뻔뻔스럽게 (내가) 최고라며 억지를 부렸지
인생이 조금은 시끄러워졌지만
도망칠 곳 없는 각오가 꿈으로 바뀌었지

帰りたいけど帰れない
戻れたいけど戻れない
そう考えたら俺も 涙が出てきたよ
くじけないで なげかないで
うらまないで とばそうよ
あの時笑って作った しゃぼん玉のように

돌아가고 싶어도 돌아갈 수 없네
되돌리고 싶어도 되돌릴 수 없네
그리 생각하면 나도 눈물이 난다네
좌절하지 말고, 슬퍼하지 말고,
원망하지 말고 다 날려버리자
그 시절 웃으면 불었던 비누방울처럼


淋々と泣きながら はじけて とんだけど
もっと俺は俺でありますように
いったい俺たちは ノッペリとした都会の空に
いくつのしゃぼん玉を 打ち上げるのだろう?


淋々と泣きながら はじけて とんだけど
もっと君は君でありますように
いったい俺たちは ノッペリとした都会の空に
いくつのしゃぼん玉を 打ち上げるのだろう?

슬피 울며 튕겨져 날라가도
좀 더 너는 너답게 남아있기를
도대체 우리들은 삭막한 도시의 하늘에
얼마나 많은 비누방울을 불어 날리는 걸까

시기만 잘 맞췄어도 200만 정도는 들만한 영화였다.

난 매우 재밋게 봤다. 사실 이 영화가 비슷한 시기에 걸린 파일럿보다 훨씬 짜임새도 있고 좋았다.

영화 흥행이라는 건 진짜 쉽지 않기도 하고 운이라는 게 많이 작용한다.

상큼하고 좋은 영화다.

 

 

한ᄯᅢ는 만흔날을 당신 생각에
밤ᄭᅡ지 새운 일도 업지 안지만
지금도 ᄯᅢ마다는 당신 생각에
축업는 베개ᄭᅡ의 ᄭᅮᆷ은 잇지만

낫모를 ᄯᅡᆫ세상의 네길거리에
애달피 날 저무는 갓 스물이요
캄캄한 어둡은 밤들에 헤매도
당신은 니저바린 서름이외다

당신을 생각하면 지금이라도
비오는 모새 밧테오는 눈물의
축업는 베개ᄭᅡ의 ᄭᅮᆷ은 잇지만
당신은 니저바린 서름이외다

 

김소월, <조선문단 10호, 1925.7, pp.85>

 

자본주의의 구조적 모순, 그리고 신자유주의로 인해 더욱 그러한 모순들이 강화되면서 성장의 패러다임 속에서 양극화는 극단으로 치닫고 전세계에서 왜 점점 더 빈곤이 증가하는지에 대한 통찰을 담고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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p34

 월드비젼은 내게 스와질란드에서 진행한 개발 활동이 왜 기대대로 성과를 내지 못하는지 분석하는 일을 맡겼고, 나는 월드비전의 개입이 정작 중요한 핵심을 놓치고 있었기 때문이라는 사실을 발견했다. 세상을 설명하는 그들의 이야기에 기반해서, 그들은 스와질란드 사람들에게 필요한 것은 빈곤에서 벗어나도록 도와줄 약간의 자선이라고 가정했다. 월드비전은 죽어가는 에이즈 환자들을 돌보고, 실업자를 위해 소득 창출 프로그램을 실시하고, 농민들에게 새로운 농사법을 교육하고, 아이들의 교육을 위해 자금을 지원했다. 물론 이런 프로젝트가 도움이 안된 것은 아니지만, 문제의 진짜 원인을 다루고 있지는 않았다. 애초에 에이즈 환자들은 왜 죽어가고 있었는가?

 

p46

 글로벌 남부 전역에서 신생 독립국들은 미국의 조언을 무시하고 자신의 발전 어젠다를 추구했으며 무역 장벽, 보조금, 의료 및 교육에 대한 사회적 지출 등 보호주의와 재분배 정책을 통해 자국 경제를 일구고 있었다. 그리고 이 방식은 아주 효과가 있었다. 1950년대부터 1970년대까지 이들 국가에서 소득이 증가하고 빈곤율이 떨어졌으며, 역사상 처음으로 부유한 국가와 가난한 국가 사이의 간극이 좁혀지기 시작했다. 여기에 놀라지 말아야 한다. 이 시기에 글로벌 남부 국가들이 사용한 정책은 서구 국가들이 그들의 경제를 강화하던 시기에 썼던 것과 정확히 같은 정책이었으니 말이다.

 미국, 영국, 프랑스 등 서구 열강은 글로벌 남부 국가들이 발전해 나가는 게 못마땅했다. 글로벌 나뭅에서 펼쳐지고 있는 정책들은 서구 기업의 이윤을 갉아먹었고, 서구가 값싼 노동력과 값싼 자원에 접근하던 것을 어렵게 만들었으며, 서구의 지정학적 이해관계를 손상시켰다. 이에 대한 대응으로, 서구는 글로벌 남부 전역에서 민주적으로 선출된 지도자 수십 명을 축출하고 서구의 경제적 이득에 친화적인 독재자를 세우기 위해 은밀히 개입했다. 그리고 나면 그 독재자들의 권력은 서구의 원조로 지탱되었다. 관심을 갖고 지켜본 사람이라면 누구나 알 수 있었듯이, 이러한 쿠데타는 트루먼이나 로스토 같은 사람들의 이야기가 거짓이었으며 글로벌 남부의 지도자들이 내내 주장했던 바가 옳았음을 말해주고 있었다. 서구가 지원한 쿠데타는 이르게는 로스토가 한창 <경제 성장의 단계>를 집필하던 1950년대에도 자행되었다. 이란과 과테말라가 그런 사례다. 로스토는 이러한 초창기 쿠데타들을 자행한 아이젠하워 행정부와 가까웠고, 따라서 무슨 일이 벌어지고 있는지 잘 알고 있었을 것이다. 1960년대에 미국이 지원한 브라질의 쿠데타는 그가 국무부에서 일하던 시기에 일어난 일이었으므로 그가 관여했을 수도 있다.

 

p54

 하지만 빠져나가는 돈의 가장 큰 부분은 자본 이탈이다. 국제금융 청렴기구의 계산에 따르면 1980년대 이래 기도국이 자본 이탈로 잃은 돈은 총 23.6조 달러에 달한다. 가장 비중이 큰 것은 국제수지상의 '누출'인데 연간 9730억 달러로 추산된다. 또 다른 경로는 '교역 송장 조작trade misinvoicing'이라고 불리는 불법 행위를 통한 것이다. 기업들이 개도국에서 조세 피난처, 공식 용어로는 '비밀성 관할구역secrecy jurisdiction'으로 돈을 옮겨 은닉하기 위해 송장 가격으 가짜로 보고하는 것을 말한다. 개도국이 매년 교역 송장 조작으로 잃는 돈은 약 8750억 달러다. 또한 매년 그와 비슷한 만큼의 유출이 '이전가격 조작transfer mispricing'에 의해 발생한다. 이것은 다국적 기업이 서로 다른 나라에 있는 자회사들 사이에서 불법적인 방식으로 이윤을 이전하는 것을 말한다. 대개는 세금을 회피하는 것이 목적이지만 돈 세탁이나 자본 통제 회피를 위해 자행되기도 한다.

 개도국에서 빠져나가는 연간 순유출액 3조 달러는 선진국들이 개도국에 주는 원조 예산의 24배가 넘는다. 개도국이 받는 원조 1달러 당 24달러의 순유출이 일어난다는 말이다. 물론 이는 개도국을 전체적으로 본 것이므로 그중 어떤 나라는 더 심각하고 어떤 나라는 덜 심각할 것이다. 하지만 어느 경우든 자금의 순유출은 개도국의 개발과 발전에 쓰일 수도 있었을 중요한 소득원과 자금원이 빠져나갔다는 의미다. 또한 국제금융청렴기구에 따르면, 이러한 자금의 순유출은 증가하고 있고(2009년 이래 연간 약 20%의 속도로 증가하고 있는 것으로 나타났다) 이것이 개도국의 경제 성장률과 생활 수준 하락에 직접적인 원인이 되고 있다.

 

p59

 마르티니크 출신의 유명한 철학자이자 알제리 반식민주의 운동의 주요 사상가였던 프란츠 파농이 이를 더없이 유려하게 표현한 바 있다.

 식민주의와 제국주의가 우리의 영토에서 철수했을 때, 그들은 그들이 진 빚을 청산하고 가지 않았다. 제국주의 국가들의 부는 우리의 부다. 유럽은 말 그대로 제3세계의 창조물이다. 제3세계의 목을 조르고 있는 부유한 자들은 저개발국 국민을 약탈한 자들이다. 따라서 우리는 저개발국을 위한 원조가 '자선'으로서 제공되는 것을 거부한다. 원조는 이중 의식dual consciousness의 마지막 단계로 여겨져야 마땅하다. 이중 의식이란, 식민 지배를 받았던 저개발국 입장에서 그 돈이 원래 자신의 것이라는 의식과 자본주의 열강 입장에서 그것이 마땅히 그들이 갚아야 하는 돈이라는 의식을 말한다.

 

p60

 몇 년 전에 팔레스타인 서안을 방문할 기회가 있었다. 유난히 더운 어느 오후, 나를 초청해준 사람들이 차로 요르단 계곡에 데려다주었다. 우리는 물 문제에 대해 그곳 농민들을 인터뷰하러 가는 참이었따. 비포장도로를 울퉁불퉁 달리다 보니 사막의 바위에 흰색 표지판이 생뚱맞게 서 있는 것이 보였다. 미 국제개발처USAID가 새 우물을 지어 이 일대에서 "반복적으로 발생하는 물 부족 문제를 완화하기 위해" 노력하고 있다는 메시지였다. 펄럭이는 성조기 아래로 바위에는 자랑스럽게 이렇게 쓰여 있었다. "이 프로젝트는 미국인들이 팔레스타인 사람들에게 주는 선물입니다."

 무심코 지나가는 사람은 감동했을지도 모른다. 미국 납세자의 돈이 척박한 사막에서 생존을 위해 고투하는 가난한 팔레스타인 사람들을 돕기 위해 인도주의적 정신에서 너그럽게 제공되었다니 말이다. 하지만 1967년에 미국의 지원을 받아 서안을 점령한 이스라엘은 이 영토의 대수층에 대해 완전한 통제권을 주장했다. 그리고 이곳 물의 상당 부분, 사실 90% 가까이를 이스라엘 정착지의 대규모 산업용 농장에 관계용수를 대는 데 사용했다. 지하수가 낮아지면서 팔레스타인 지역의 우물들이 말라갔다. 팔레스타인 사람들은 이스라엘의 허가 없이는 우물을 더 깊이 파거나 새 우물을 지을 수 없었는데, 허가는 거의 내려진 적이 없었다. 그래서 다들 그러듯이 허가 없이 우물을 지으면, 다음 날 이스라엘쪽이 와서 밀어버렸다. 팔레스타인 사람들은 자신들의 물을 자의적으로 정해진 비싼 값을 주고 이스라엘보부터 다시 사와야만 한다.

 이것은 비밀이 아니다. 공개적으로 일어나고 있는 일이고, 내가 이야기를 나눠본 농민들 모두가 잘 알고 있었다. 그들에게 USAID의 표지판은 상처에 모욕을 더하는 격이다. USAID의 메시지가 암시하는 것과 달리 팔레스타인 사람들은 물이 부족한 것이 아니다. 문제는 이스라엘이 그들에게 물을 훔쳐가고 있는 것이다. 그것도 미국의 지원을 받아서 말이다. 2012년, 내가 방문하기 겨우 2개월 전에 유엔총회는 팔레스타인 사람들이 그들 자신의 물에 대한 권리를 회복해야 한다고 촉구하는 '결의안 66/225'를 체택했다. 투표에서 167개국이 찬성했고, 미국과 이스라엘은 반대했다.

 이 에피소드를 이야기한 이유는 원조가 종종 얼마나 핵심을 놓치고 있는지뿐 아니라 더 큰 진실을 드러내기 위해서다. 가난한 나라들은 우리의 원조를 필요로 하지 않는다는 진실 말이다. 그들이 필요로 하는 것은 우리가 그들을 궁핍화하는 과정을 멈추는 것이다. 글로벌 빈곤을 추동하는 구조적인 요인을 조준하지 않는다면, 즉 부를 추출하고 축적하는 기저의 구조를 조준하지 않는다면, 몇십 년을 하더라도 개발 노력은 계속 실패할 것이다. 빈곤과 관련된 통계 숫자들은 계속 커질 것이고 부유한 나라와 가난한 나라의 격차는 계속 벌어질 것이다. 선한 의도로 개발 이야기를 설파해온 수백만 명에게는 받아들이기 어려운 진실일 것이다. 핵심 신화의 붕괴에 직면하는 것은 두려운 일일 수 있다. 적어도 나는 그랬다. 하지만 핵심 신화의 붕괴는 흥미로운 가능성들의 세계를 열어주고 새로운 미래를 위한 길을 내어주기도 한다.

 

p93

 1990년 이래 글로벌 1인단 GDP는 45% 성장했지만 하루 5달러 이하로 살아가는 사람의 수는 3억 7000만 명 이상 늘었다. 성장이 왜 빈곤 감소에 도움을 주지 못할까? 성장의 산출이 매우 불균등하게 분배되기 때문이다. 경제 성장을 통해 새로운 창출된 전 세계 소득 중 세계의 가장 가난한 60%가 가져가는 몫은 5%에 불과하고 가장 부유한 40%에게 소득의 95%가 돌아간다. 그나마 이조차도 가장 좋은 시나리오일 때의 이야기다. 

 

p134

 오늘날 영ㅇ국의 식민주의를 옹호하는 사람들은 영국의 인도 식민화와 중국에 대한 무력 개입이 인도와 중국의 '발전'을 가져왔다는 논리를 댄다. 하지만 우리가 살펴본 실증 근거들은 그와 정반대의 이야기를 들려준다. 영국과 아시아 사이에 '발전 격차'가 생긴 시기가 바로 강요된 시장 통합이 이러우졌던 식민주의 시기였다. 18세 중반에 유럽의 평균적인 생활 수준은 아시아보다 약간 낮았다. 늦게는 1800년까지도 중국의 1인당 소득이 서구 유럽을 앞섰고, 아시아 전체적으로도 1인당 소득이 유럽 전체보다 나았다. 중국의 문해율은 유럽 국가들보다 높았고, 여성들 사이에서도 그랬다. 출생률은 더 낮았다. 18세기에 인도 남부에서 노동자들은 영국보다 높은 소득을 올렸고 더 안정적으로 생활했다. 인도의 장인들은 유럽 평균보다 식생활이 좋았고 유럽보다 더 탄탄한 권리를 가지고 있었기 때문에 실업률도 더 낮았다.

 인도의 1인당 소득은 1757년에 동인도회사가 들어왔을 때부터 1947년 독립까지의 식민 시기 동안 증가하지 않았다. 오히려 영국의 개입이 정점이었던 19세기 후반부에 인도의 소득은 50% 이상 줄었다. 소득만 낮아진 것이 아니었다. 1872년부터 1921년 사이에 인도인의 평균 기대수명도 20%나 떨어졌다. 아대륙은 탈발전되었다. 

 인도와 중국이 글로벌 GDP에서 차지하는 비중이 줄고 있던 식민주의 시기 동안 유럽이 차지하는 비중은 20%에서 60%로 증가했다. 유럽이 식민지를 발전시킨 것이 아니라 식민지가 유럽을 발전시킨 것이다.

 

p161

 서구 열강의 정부와 기업들은 이런 일(식민지였던 나라들에서 발전주의적 혁명과 민족주의 정치권력이 확대되는 일)이 계속되는 것을 보고만 있을 생각이 없었다. 전에 누리던 시장과 자원에 대한 접근을 다시 획득하기 위해 이들은 모종의 반혁명이 필요했다. 하지만 케인스주의가 풀아낸 개념들에 대해 대중의 저항이 일지도 않았고, 글로벌 남부에서 경제적 독립의 열마이 높아지는 것을 억압할 길도 없었다. 

 1953년에 미국 대통령이 된 드와이트 아이젠하워는 발전주의에 맞서는 결정적인 조치를 취했다. 그는 발전주의가 미국이 다국적 기업들의 상업적 이해관계를 위협한다고 보았고 자신의 견해에 동조하는 두 사람을 행정부에 고용했다. 존 포스터 덜레스 국무장관과 그의 동생인 앨런 덜레스 CIA 국장이었다. 덜레스 형제는 '설리번 앤 프롬웰'이라는 로펌에서 일한 적이 있는데, 글로벌 남부의 발전주의 때문에 잃고 있는 것이 많다고 느끼고 있는 JP모건, 쿠바 사탕수수 코퍼레이션, 유나이티드 프루트 컴퍼니 같은 거대 기업들이 이 로펌의 고객사였다. 하지만 아이젠하워 행정부는 평등, 정의, 독립의 원칙에 깊이 뿌리를 두고 있는 운동을 공격한다면 정당화되기 어려우리라는 것을 잘 알고 있었다. 그는 매국 대중의 눈에 합당해 보일 만한 방법을 찾아야 했고, 냉전 레토릭에 강하게 의존함으로써 이 문제를 해결했다. 

 발전주의가 공산주의로 가는 첫 단계라는 프레임을 씌우면서 발전주의 국가들을 소련과 연결지었고, 미국인들의 인식에서 발전주의의 이미지를 훼손할 수 있었다.

 아이젠하우어의 백래시의 첫 대상은 이란이었다. 민주적으로 선출된 이란의 지도자 모하메드 모사데크는 발전주의의 견고한 버팀목이었다. 큰 키에 위엄 있는 풍체를 지녔으며 파리에서 교육받은 모사데크는 진보적인 정치인으로 이란에서 인기가 많았다. 총리 시절에 실업 보상과 아프거나 다친 노동자에 대한 복지 급여를 도입했고 농촌의 강제 노동을 철폐했으며 부자들의 세금을 올려 농촌 개발 프로젝트의 재원을 마련했다. 또한 가장 유명하게, 영국의 '앵글로 이란 오일 컴퍼니'(현재의 BP)가 소유하고 있던 이란의 유정에 대한 소유권 재협상을 시도했다. 그리고 앵글로 이란 오일 컴퍼니가 회계 감사에 협조하기를 거부하자 이란 의회는 투표를 통해 만장일치로 이 회사의 자산을 국유화했다.

 이 일로 이란에서 모사데크의 인기는 한층 더 높아졌지만 영국 정부는 분노했고 미국에 도움을 청했다. 군사 개입이라는 선택지가 테이블에 올라왔다. 하지만 소련이 이란 쪽에서 개입해 대리전 양상으로 비화할지 모른다는 점이 우려되었고, 결국 '아작스 작전Operation Ajax'이라고 불리는 비밀 프로젝트가 진행되었다. 이 작전은 CIA가 이끌었고 커밋 루스벨트(시어도어 루스벨트의 손자로, 할아버지 루즈벨트는 먼로 독트린을 확대한 '루즈벨트 계론'으로 미국의 해외 개입주의에 길을 닦은 바 있다)가 담당했다. 계획은 치밀했다. 우선 [이란] 정치인들에게 뇌물을 주어 이들 사이에 반정부 정서를 불러일으켰다. 그리고 모사데크가 사람들에게 인기가 없다는 가짜 이미지를 불러일으키키 위해 바람잡이를 매수해 거리 시위를 하게 했다. 이어서 이란 군대를 지원해서 모사데크를 내말고 왕가인 모하마드 레자 팔라비가 권력을 잡게 했다. 계획은 성공했다. 1953년 8월, 쿠데타가 일어나 모사데크가 밀려났고 샤(왕조)가 군부 정권이자 절대 왕정으로서 권력을 잡았다. 이후 팔라비는 26년간 이란을 통치했다. 그는통치 시기 대부분에 걸쳐 미국의 지원을 받았고 이란의 정책은 이 지역에서 서구의 또 다른 주요 위성국인 사우디에서와 마찬가지로 서구의 석유 기업들에 유리한 방향으로 수립되었다. 모사데크는 이후 평생을 가택 연금 상태로 지냈다.

 아작스 작전은 미국이 외국 정부를 전복한 초창기 작전 중 하나였고, 분명 마지막 작전은 아니었다. 곧이어 1954년에 덜레스 형제는 본격적으로 실력 발휘에 나섰다.

 1931년부터 과테말라를 통치하고 있던 군부 독재자 호르헤 우비코는 미국이 소유한 유나이티드 프루트 컴퍼니에 비옥한 토지를 방대하게 넘기는 대가로 미국의 지원을 받았다. 그 땅의 대부분은 마야 원주민 농민들에게서 탈취한 땅이었다. 우비코의 잔혹한 통치를 오랫동안 견디다 못한 민중이 혁명을 일으켜 그를 몰아냈고, 처음으로 과테말라에서 민주적인 선거가 치러질 수 있게 되었다. 이 선서로 1945년에 집권한 철학 교수 출신 후안 호세 아레발로는 전임자와 정반대였다. 우비코가 지배층의 이해관계에 따라 과테말라를 통치한 반면 아레발로는 가난한 사람들을 정책의 더 높은 우선순위로 삼았다. 그는 최저 임금법을 포함해 가난한 사람들을 위한 정책을 도입했다. 우비코 정권하에서 자행되었던 토지 강탈로 대대적인 궁핍화가 벌어진 것을 되돌리기 위해서였다. 그의 임기 6년 동안 과테말라는 전례 없는 정치적 자유와 안정을 구가했고, 임기가 끝난 그는 선고로 다음 주자에게 정권을 넘기기 위해 물러났다. 그리고 그의 행정부 장관이었던 하코보 아르벤스가 당선되었다.

 스위스계 인물로 '빅 블론드Big Blonde'라는 별명을 가지고 있었던 아르벤스는 아레발로의 진보적인 정책을 이어갔다. 그는 '농협개혁법'으로 토지 개혁을 실시했다. 당시에 과테말라에서는 3%도 안 되는 사람들이 토지의 70%를 소유하고 있었다. 아르벤스의 토지 개혁은 사용되지 않고 있던 많은 민간 토지를 국유화해 토지가 없는 농민에게 분배한다는 계획이었다. 토지가 없는 농민들 대부분은 우비코 시절에 생긴 빚 때문에 노예화된 피해자들이었고, 농업개혁법은 이들이 농사를 지어 안정적으로 기아를 면할 수 있게 하려는 목적을 가지고 있었다. 그런데 우연히도 45만 에이커의 땅이 유나이티드 프루트 컴퍼니 소유였다. 몰수 토지에 대해서는 완전한 보상을 하겠다고 했는데도 회사는 협조를 거부했다. 협조는커녕 미국 정부에 아르벤스를 축출해달라고 로비를 하고 냉전 레토릭을 이용해 아르벤스 축출에 대한 미국 대중의 지지를 불러일으켰다. 아르벤스를 러시아의 꼭두각시로, 과테말라를 소련의 위성 국가로 보이게 한 것이다.[형과 함께 회사를 대리하는 변호사로 일하며] 유나이티드 프루트에서 38년간 보수를 받았던 앨런 덜레스의 지휘하에 CIA가 기꺼이 이 일에 나섰다. 코드면 'PBSUCCESS'라ㅗ 불린 이 작전에서, 이들은 과테말라의 수도를 폭격하고 아르벤스를 몰아낸 뒤 카를로스 카스티요 아르마스를 군부 독재자로 세웠다. 과테말라에서 10년간의 희망적이던 민주주의 시기는 이렇게 끝났다. 새 정부는 빠르게 외국인 투자 규제를 완화했고 아르벤스 시절의 정책을 되돌렸으며, 그에 비판하는 사람들 수천 명을 감옥에 보냈다. 과테말라는 1996년까지 미국의 지원을 받은 일련의 군부 독재자들이 통치했다. 이 시기 내내 정권은 마야 원주민에게서 토지를 빼앗았고, 과테말라는 서반구에서 가장 빈곤율이 높은 나라 중 하나가 되었다. 정부를 반대하는 목소리가 커지면 가혹하게 진압했다. 20만 명가랴의 마야인이 토지 강탈에 저항하다 살해되었다.

 과테말라 침공은 프랭클린 루스벨트 시절의 라틴아메리가 불개입주의였던 '선린 외교 정책'이 겨우 20년간의 평화 이후에 종말을 고했음을 의미했다. 과테말라 침공으로 아이젠하워는 먼로 독트린을 사실상 부활시켰고, 미국이 라틴아메리카에 폭력적으로 개입해 권력을 투사하던 오랜 버릇도 되살렸다.

 브라질에서도 미국이 지원한 쿠데타가 일어났다. 1961년에 대통령이 된 전직 축구 선수이자 국민 영웅이었던 주앙 굴라르는 그의 대표 업적이라 할 수 있는 '기본 개혁'을 시작했다. 문맹자에게도 투표권을 확대하고 가난한 사람들에게 성인 교육을 제공했으며 다국적 기업이 국외로 가지고 나가려고 하는 모든 수익에 과세했고 생산적으로 쓰이지 않는 토지를 600헥타르 이상 소유하고 있는 경우 회수해 재부배했다. 이러한 개혁은 가난한 사람들에게 득이 되었지만 브라질 지배층은 달가워하지 않았다. 미국의 다국적 기업도 달가워하지 않았다. 1962년에 브라질 정부는 사업이 난항을 겪던 미국 전화 서비스업체 ITT 코퍼레이션을 국유화했다. 그런데 이 회사의 CEO 헤럴드 제닌은 CIA의 국장과 친한 사이였다. 제닌은 브라질의 정책에 대해 불만을 제기했는데, ITT의 브라질 지사가 걱정이어서라기보다는 라틴 아메리카의 다른 국가들에서도 민주적으로 선출된 지도자들이 굴라르의 정책을 따라 할 경우 ITT의 이익이 크게 훼손될지 모른다고 우려해서였다. 케네디 대통령은 개입에 반대했지만, 린든 존슨이 대통령으로 당선되고 얼마 뒤 CIA는 영국의 협조를 받아 행동에 나섰다. 1964년에 '브라더 샘Brother Sam' 작전에서 미국은 굴라를 축출하기 위한 군사 쿠데타를 지원했고, 이렇게 해서 권력을 잡은 독재자가 21년 동안 브라질을 통치했다. 새 정권은 노골적으로 서구 기업 친화적이었고 외국인 투자에 대한 규제를 대폭 완화했다. 시장 자유화가 빠르게 이뤄지면서 굴라르가 빈곤 타파 전선에서 달성했던 성과가 예전으로 되돌아갔고 미국과 유럽 기업들의 이윤 수준도 옛날로 돌아갔다. 사람들의 불만이 높아지자 독재자는 민주적 자유를 억압하고 정치적 반대자들을 공객적으로 고문하고 암살했다.

 서구가 은밀하게 라틴아메리카에 개입한 사례는 한참 더 이야기할 수도 있다. 1953년에 영국은 가이아나에서 세계 최초로 민주적으로 선출된 마르크스주의자 대통령을 축출했다. 1961년에는 미국이 쿠바의 혁명 정부 전복을 시도했다. 이것이 그 유명한 '피그만 침공Bay of Pigs Invasion'인데, 성공하지는 못했다. 1965년에는 도미니카 공화국에서 군부 독재에 맞서 민중 반란이 일어나자 미국의 존슨 대통령이 이를 진압하기 위해 도미니카 공화국 침공을 명령했다. 엘살바도르에서도 미국은 폭압적인 군사 정부에 1980년대까지도 무기 등 여러 지원을 계속했도, 민중 혁명을 억누르기 위한 '죽음의 부대' 활동과 민간인에 대한 고문 및 대규모 강제 이주를 암묵적으로 승인했다. 니카라과에서도 민주적으로 선출된 다니엘 오르테가 정부를 전복시키기 위해 친미 우익 민병대('콘트라'라고 불린다)에 1980년대 내내 불법적인 재정 지원과 군사 지원을 했다. 오르테가가 발전주의와 사회민주주의에 헌신하는 사람으로 잘 알려져 있었기 때문이다. 또한 미국은 볼리비아, 에콰도르, 아이티, 파라과이, 온두라스, 베네수엘라, 파나마에서도 우익 독재자를 이런저런 시기에 각각 지원했다. 이러한 작전의 기술적, 전술적 지원은 상당 부분 '아메리카 스쿨School of the Americas'에서 이루어졌는데, 조지아주와 미군 기지에 위치한 이곳은 오랫동안 암살자와 독재자를 훈련시키는 역할을 했고 여기에서 훈련받은 사람들은 미국의 이해관계를 위해 라틴아메리카 전역으로 파견되었다. 이곳은 오늘날에도 '안보 협력을 위한 서반구 연구소WHINSEC'라는 이름으로 운영되괴 있다.

 

 미국이 발전주의를 짓밟으려고 한 곳은 라틴아메리카만이 아니었다. 브라질에서 미국의 지원으로 쿠데타가 일어난 이듬해에 이와 비슷한, 아니 더 파괴적인 일이 인도네시아에서 벌어졌다. 초등학교 교사의 아들로 태어나 네덜란드 식민 통치기에 독립 운동을 이끌었던 지도자 수카르노가 독립 후에 대통령이 되어 표준적인 발전주의 정책등을 펼쳤다. 인도네시아 경제를 값싼 외국 수입품으로부터 보호했고 가난한 사라들에게 부를 재분배했으며 국제통화기금과 세계은행을 몰아냈다. 서구 열강은 수카르노의 정책에도, 그리고 그가 비동맹 운동 조직화에 앞장서는 데도 분노했다. 그런던 중 수카르노가 석유, 고무 등에서 미국과 유럽인이 통제하던 자산을 국유화하기 시작했고, 서구 열강은 이를 개입의 빌미로 삼았다.

 군부의 권력을 약화시키려는 수카르노의 정책에 분노해 있던 수하르토 장군은 CIA가 쿠데타를 지원할 의사를 분명히 하자 자신이 쿠데타를 일으키겠다고 제안했다. 1965년에 수하르토 장군은 미국에서 정보와 무기를 지원받아 50만~100만 명에 육박하는 수카르노 대통령 지지자를 살해했다. 20세기 최악의 대량 학살이라 할 만했다. 1967년이면 수카르노 대통령의 기반은 사라졌거나 위협에 눌려 항복했고 수하르토 장군이 국가를 장악했다. 그의 군부 통치는 1998년까지 계속되었고 서구 기업들의 이해관계에 활짝 문을 열었다. 《타임》이 1960년대에 인도네시아에서 벌어진 정치적 변화를 두고 "서구 입장에서는 지난 몇 년 사이 아시아에서 들려온 가장 좋은 소식"이라고 표현한 것은 유명하다. 수하르토 정권은 포드 재단의 지원으로 캘리포니아 대학 버클리 캠퍼스에서 유학한 인도네시아 경제학자들에게 경제 정책 수립을 맡겼다. '버클리 마피아'라고 불리는 이들은 수하르토와 긴밀히 협력하면서 시장을 자유화하고 발전주의의 잔재를 마지막까지 남김없이 제거했다.

 아프리카에서는 가나가 서구 열강의 요주의 국가였다. 1957년에 가나는 아프리카 최초릐 독립국 중 하나가 되었고 해방 운동 지도자 파메 은크루마가 초대 대통령으로 선출되었다. 아프리카의 선도적인 발전주의 사상가이던 은크루마는 가나의 제조업 발달을 촉진했고 유럽산 수입품 의존도를 상당히 줄였다. 또한 광산을 국유화했고 외국 기업을 규제했으며 무상 의료와 무상 교육을 실시했고 농촌 인프라 건설에 사람들을 고용했다. 은크루마는 여타 아프리카 지역의 해방을 위해서도 목소리를 냈다. 그는 아프리카가 경제적, 정치적으로 협력해야 한다고 주장하며 범아프리카 비전을 구상했다. 또한 식민주의 시기에 식민주의자들이 그들의 이익을 위해 강요하고 조장한 모든 인위적은 분열을 철폐해야 한다고 주장했다. 그의 비전은 아프리카로만 한정되지 않았다. 인도네시아의 수카르노 대통령처럼 은크루마도 비동맹운동의 창립 멤버였다. 그는 1950년대와 1960년대 초에 글로벌 남부 각지에서 서구의 지원을 등에 업은 쿠데타가 벌어지는 것을 보면서 서구가 글로벌 남부에 지속적으로 개입하는 것에 대해 맹렬한 비판자가 되었다. 그가 1965년에 펴낸 《신식민주의: 제국주의의 마지막 단계Neo-Colonialism: The last stage of Imperialism》는 이러한 비판을 유려하고 힘 있게 담고 있는 명저로, 글로벌 남부 사람들이 느끼고 있던 좌절에 강력한 목소리를 실어주었다.

 이 모든 것이 은크루마를 즉각적인 공격 대상이 되게 만들었다. 이르게는 1961년부터 영국과 미국은 그의 제거를 계획하기 시작했다. 그리고 1966년에 실행되었다. 은크루마가 국빈 방문으로 해외에 갔을 때 CIA가 지원한 쿠데타가 일어나 그의 정부를 무너뜨리고 군부 독재 정권을 세웠다. 독재자는 국제통화기금과 세계은행을 불러와 경제를 관리하게 했고 국가 자산을 민영화했으며 외국 기업에 대한 장벽을 없앴고 가나를 예전처럼 천연자원 수출국 역할로만 한정시켰다. 은크루마는 남은 생을 기니의 코나크리에서 망명자로 살았고 다시는 고향으로 돌아가지 못했다. 

 아프리카의 다른 많은 국가들도 발전주의 실험을 했고, 사하라 이북 국가들에서 특히 두드러졌다. 하지만 서구의 개입이 너무나 빨라서 전혀 기회를 갖지 못한 곳도 많았다. 콩고에서 1960년에 독립 후 첫 지도자로 선출된 젊은 범아프리카주의자 파트리스 루뭄바는 2개월밖에 자리를 지키지 못하고 벨기에와 미국이 기획한 폭력적인 쿠데타로 살해되었다. 아이젠하워 대통령이 직접 지시한 일이었다. 미국은 루뭄바가 콩고의 광대한 광물 자원, 특히 핵 프로그램에 필요한 우라늄과 제트 엔진에 필요한 코발트 등에 대한 미국의 통제력을 훼손할지 모른다고 우려했다. 루뭄바는 살행당했고 시신은 토막 나 통에서 불태워졌다. 그의 자리에 서구 정부들은 장교 출신의 모부투 세세 세코를 앉혔다. 세코는 세계에서 가장 악명 높은 독재자로, 미국, 프랑스, 벨기에의 지원을 받아 거의 40년이나 콩고를 통치했다. 그는 서구의 지원 대부분을 해외에 있는 자신의 금고로 빼돌렸다. 모부투의 긴 통치 시기 동안 콩고(자이르로 이름이 바뀌었다)의 1인당 소득은 연 2.2%씩 감소했다. 이는 실로 어마어마한 붕괴여서, 콩고의 빈곤은 벨기에의 식민지이던 시절보다도 심해졌다.

...

이러한 기록들을 보면 아프리카 정치에 대해 흔히들 떠올리는 통념에 의구심을 갖게 된다. 서구인의 상상에서 아프리카의 전형적인 이미지는 부패한 독재자에 의해 고통받는 대륙이다. 여기에는 아프리카 사람들은 서구 스타일의 민주주의 가치를 알기에는 너무 '원시적'이라는 가정이 깔려 있다. 하지만 식민주의 시기가 끝난 이래 아프리카 사람들이 민주주의를 일구기 위해 내내 노력했지만 서구에 의해 적극적으로 가로막혔다는 것이 더 정확한 진실이다. 아프리카에서 독재가 지속된 것은 대체로 서구의 개입 때문이었다. 아프리카 사람들이 민주주의의 가치를 몰라서가 아니었다. 서구 열강은 진정한 독립을 이루려는 아프리카 사람들의 시도를 수없이 좌절시켰다. 이러한 사실은 서구가 민주주의와 대중 주권의 횃불이라는 일반적인 이미지에 의구심을 갖게 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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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서구의 지배층이 케인스주의의 부상으로 자신들의 이익이 훼손되고 있다는 느낀 것은 해외에서만이 아니었다. 서구 안에서도 케인스주의적 정책이 확산되면서 성장률이 높아지고 빈곤이 줄었으며 사회적 후생이 증가하는 등의 성과를 내고 있었지만, 그에 적대적인 사람들이 있었다. 도금 시대Gilded Age와 '광란의 20년대'에 너무나 크게 이득을 얻었던 지배층은 케인스주의적 정책이 도입되면서 상당한 금전적 타격을 입었다. 미국 국민소득 중 상위 1%가 가져가는 몫이 절반으로 줄어 8%가 되었다. 상위 0.1%가 가져가는 몫은 더 극적으로 줄어서, 1960년대와 1970년대에 역사적으로 낮은 수준에 도달했다.

 한 가지 이유는 상류층에게 부과된 조세가 높아졌기 때문이었다. 1940년대와 1950년대에 미국의 최고한계세율은 90%에 달했다(오늘날 흔히 정치인들은 높은 조세가 경제를 둔화시킨다고 하지만 과거 데이터를 보면 미국에서 성장률이 가장 높았던 시기는 최고한계세율이 90%인 시기였다). 또한 노동자들의 권력이 강화되어 (노조를 통해) 이윤을 더 공정하게 나누자고 협상할 수 있게 되면서 노동자들이 더 높은 임금을 받게 된 것도 국민소득 중 상류층이 가져가는 몫이 감소하는 데 일조했다. 1940년대와 1950년대에 미국의 노조 가입률은 약 35%로, 이전 어느 때보다 높았다.

 세금이 오르고 노동자들의 임금이 높아져서 부가 잠식된 지배층은 절박하게 해법을 구하고 있었고 프리드리히 하이에크와 밀턴 프리드먼에게서 해법을 발견했다. 미국 경제학자인 프리드먼은 동유럽계 이주민 출신 부모에게서 태어났다. 그의 부모는 뉴저지주에서 저임금 노동력을 사용하는 직물 공장을 운영했는데, 그의 아버지는 노조 규제 등 수익을 갉아먹는 것이라면 무엇이든 맹렬하게 반대하는 사람이었다. 프리드먼도 자라면서 비슷한 견해를 갖게 되었고, 1930년대 이래로 내내 뉴딜 철폐를 공개적으로 주장했다. 특히 그는 가격 고정과 임금 고정 조치를 비판했다. 그에게 주된 영감을 준 사람은 오스트리아 출신 경제학자로 런던정경대학에 있던 하이에크였다. 1944년 저서 <노예의 길>에서 하이에크는 경제에 대한 개입은 그게 무엇이든 간에 반드시 전체주의로 귀결된다고 주장했다. 파시스트 국가 독일이나 공산주의 국가 러시아처럼 말이다. 하지만 당시에는 이런 견해에 호응하는 사람이 별로 없었다. 그 시절에는 모두가 케인스주의자였고, 대공황의 기억이 여전히 생생했던 사람들은 자유방임 자본주의의 위험한 시절로 돌아간다는 아이디어에 손사래를 쳤다. 그럼에도, 프리드먼과 하이에크는 언젠가는 세를 얻으리라 기대하면서 자신의 견해를 계속 설파했다. 1947년에는 같은 이데올로기를 공유하는 자유시장 경제학자들을 모아 몽페를랭 소사이어티를 결성했다. 이는 모임이 처음 열린 스위스의 휴양 도시 이름을 딴 것으로, 최대한 빠르고 긴급하게 대중 담론에 자유시장주의적 개념들을 밀어 넣는 것을 목적으로 삼았다.

 1950년에는 하이에크와 프리드먼 둘 다 시카고 대학 경제학과에 있었으며, 시카고 대학은 곧 경제학에서 자유주의를 부흥시키는 허브가 된다. 학과자으로서 프리드먼은 자신의 사상을 운동가적 열정으로 밀어붙였다. 그는 순수한 시장이라는 비전을 전적으로 믿었고 경제가(그가 생각하기에) 인간의 개입으로 왜곡되기 전의 '자연적인' 상태로 돌아가야 한다고 생각했다. 그는 인위적인 왜곡이 없어지면 시장이 자체의 작동 원리에 따라 부드럽고 완벽하게 기능해서 부와 재화를 가장 효율적인 방식으로 분배할 것이라고 주장했다. 프리드먼이 유토피아적 완벽성을 추구했다고도 말할 수 있을 것이다. 단순하고 논리적인 경제 모델에 따라 돌아가는 우주, 모두가 자신의 이기심에 따라 행동할 때 모두를 위한 최대의 이익이 달성되는 우주 말이다. 프리드먼이 볼 때 높은 인플레나 실업 같으경제적 문제는 시장이 전적으로 자유롭지 않아서 생기는 문제였고 따라서 인공적인 개입은 모두 제거되야 했다.

 프리드먼의 아이디어가 그렇게 강력할 수 있었던 이유는, 자유시장이 경제의 자연법칙을 따를 뿐 아니라 자유와 민주주의의 가치에도 부합한다고 주장했기 때문이었다. 그는 대중의 상상 속에서 시장의 자유와 개인의 자유를 강하게 연동시키고자 했다. 그에 따르면, 우리는 모두 시장에서 우리의 욕망을 자유롭게 풀어놓아야 했고 이것이 바로 민주적 참여의 본질이었다. 이 견해는 그의 1962년 저서 <자본주의와 자유>의 기초가 되었다. 프리드먼 버전의 자유는 케인스주의적 개념에서의 자유와 충돌했다. 후자의 의미에서 보면 진정한 자유는 결핍으로부터의 자유였고 이를 달성하려면 지배층의 축적을 제한해야 했다. 하지만 프리드먼과 하이에크가 보기에 이런 제한은 [자유롭게 풀려 있을 때 더욱] 아름다웠을 시스템을 훼손하고 자유의 가능성을 침식하는 악이나 다름없었다. 이 이론은 너무나 우아하고 유려해서 호소력이 있었다.

 프리드먼과 그의 추종자들에게는 미국의 케인스주의만이 아니라 유럽의 사회민주주의와 글로벌 남부의 발전주의도 적이었다. 프리드먼은 이 모두가 자본주의의 오염된 형태라고 보았고 정화되어야 한다고 생각했다. 가격 통제는 기본적인 재화의 가격을 더 많은 사람들이 구매할 수 있는 수준으로 낮추었다. 최저 임금제는 노동자를 착취로부터 보호했다. 교육과 의료 같은 공공 서비스는 모든 이의 접근을 보장하기 위해 시장에서 완전히 벗어나 있었다. 이러한 정책들은 사람들의 삶을 향상시키고 있었다. 하지만 프리드먼은 이러한 정책이 시장 균형을 교란해 숨겨진 피해를 일으키고 있다고 주장했다. 그에 따르면 가격 통제, 보조금, 최저 임금제는 철폐되어야 했다. 교육, 의료, 연금, 국립공원 등 모든 정부 서비스와 공기업은 이윤 논리에 따라 운영되도록 민간에 매각되어야 했다. 노동 시장을 교란하지 않기 위해 정부는 사회적 지출을 줄여야 했다. 세율은 누진적이면 안 되었다. 기업은 자신들의 제품을 세계 어디에서든 팔 수 있어야 했다. 프리드먼은 이런 정책들이 적용되면 전례 없는 성장과 번영이 올 것이라고 주장했다. 

 이와 같은 경제 이데올로기는 곧 '신자유주의'라고 불리게 된다. '신新'이 붙은 이유는 대공황 이후 사라졌던 고전 시장 자유주의를 되살렸다는 의미에서였지만, 정말로 새로운 요소들도 있었다. 우선 시장 자유의 개염이 개인의 자유와 같은 의미로 등치되었다. 이것은 전에 없었던 새로운 면이었고 신자유주의 이데올로기의 독특한 특징이었으며 서구에서 신자유주의 이데올로기가 정치적으로 성공을 거두는 데 핵심적인 역할을 했다. 또한 신자유주의는 정치적 의제를 추구할 때 중립성을 표방하지 않았다. 신자유주의는 보조금, 노동자 보호, 노조를 지원하는 규제에는 명시적으로 반대했고, 그와 동시에 부유한 사람들을 위한 보조금과 보호, 그리고 거대 기업을 지원하는 규제는 전혀 문제 삼지 않았다.

 1970년대에 신자유주의 개념들은 기업 세계와 상류층에서 지지를 얻었다. 이들은 프리드먼을 비롯해 '시카고학파'의 형태로 나타난 나팔수 학자들의 등장에 환호했다. 자신들의 경제 어젠다에 정당성의 휘광을 둘러주었기 때문이다. 오래지 않아 시카고학파에 기업의 후원이 쇄도했다. 유일한 문제는, 일반 시민들이 이 이데올로기를 지지하게 만들 방법이 없다는 점이었다. 케인스주의가 평범한 사람들에게 큰 이득을 주었기 때문이다. 미국이나 유럽에서는 신자유주의로 근본적인 변화를 일으키는 데 필요한 정치적 자본을 획득하는 것이 여의치 않았다.

 하지만 그 사이에 이 이론을 해외에서 먼저 실험해보는 것은 가능했다.

 

 

p179

 1950년대와 1960년대에 미국은 칠레를 특히 우려했다. 칠레는 유엔의 '중남미 및 카리브해 연안 경제위원회'와 라울 프레비시 같은 학자들이 활동하는 곳으로, 라틴아메리카 발전주의 사상의 중심지였다. 미국은 발전주의 사상이 칠레를 넘어 중남미 대륙의 다른 지역에까지 퍼질 것을 걱정했다.

 그러한 경향을 막기 위해 미국 정부는 1956년에 칠레 프로젝트를 시작했다. 목적은 칠레 경제학자들(약 100명)을 신자유주의 사상으로 훈련시켜 발전주의에 맞서게 하는 것이었다. 10년 뒤 이 프로그램은 라틴아메리가 전체로 확대되었고 시카고 대학에는 '중남미 및 카리브해 연안 경제 연구센터'가 설립되었다. 이것은 이데올로기 전쟁이었다. 사회 안전망, 무역 장벽, 유치산업 보호, 가격 통제, 공공 서비스 등 당시에 진보적인 라틴아메리카 경제학자들이 촉진하고 있던 정책들을 일축할 새로운 경제학자들을 훈련시키려는 것이었기 때문이다. 1990년대에 칠레의 장관이던 후안 가브리엘 발데스는 이 작전을 "미국이 그들의 직접적인 영향권에 있는 나라들에 이데올로기를 체계적으로 이식하기 위해 진행한 놀라운 사례"라고 묘사했다. 흥미롭게도 이 프로젝트는 예전에 트루먼이 시작한 '포인트 포'의 기치하에 고안되었고 미 국제협력국(나중에 미 국제개발처가 된다)이 수행했으며 자금은 포드 재단에서 나왔다. 말하자면, 이것은 미국이 공식적으로 진행한 첫 '국제개발' 프로그램이었다.

 하지만 미 국제개발처나 포드 재단 같은 기관이 수백만 달러를 부었음에도 이 기획은 영 성공적이지 못했다. 발전주의는 계속해서 라틴아메리카에서 속도를 얻고 있었고 많은 유권자들이 더 많은 국가주의, 토지 개혁, 그리고 글로벌 남부 국가들 사이의 협업을 요구하고 있었다.

 칠레보다 이것을 더 분명하게 보여주는 사례는 없을 것이다. 칠레에서 발전주의는 유권자들이 살바도르 아옌데를 선출하면서 추동력을 얻었다. 굵은 테 안경에 사려 깊고 겸손한 의사 출신인 아옌데는 진보적인 견해로 인기가 많았다. 당시 칠레는 인구 중 다수가 여전히 극빈곤 상태인 반면 소수의 지배층은 방대한 토지와 부의 대부분을 소유하고 있었다. 아옌데는 더 나은 임금, 더 나은 공립 학교와 의료와 주거, 더 정당한 임대료 등 더 공정한 사회를 약속하며 권력을 얻었다. CIA와 미국 기업들이 아옌데의 우파 쪽 경쟁자 호르헤 알레산드리에게 유리하도록 선거를 조작하려 했음을 생각하면, 아옌데의 승리는 실로 놀라운 성취였다.

 아옌데 정부는 약속을 이행했다. 최저 임금제를 도입했고, 빵 가격을 낮추었으며, 학교에서 무상 급식을 실시했고, 저소득층 주거를 확대했고, 노동자 계급 동네에 대중교통을 확대했다. 또한 구리 광산을 국유화했고 토지 소유에 80헥타르의 상한을 두었다(그 이상 소유하고 있었던 모든 민간 소유자에게 완전하게 보상했다). 그리고 식민지 시대의 대장원을 없애고 토지를 소농민에게 재분배했다.

 이 조치들은 효과가 있었다. 임금이 올랐고 빈곤율이 떨어졌고 취학률은 기록적인 수준에 도달했다. 하지만 미국은 이것이 마뜩하지 않았다. 아옌데의 국유화와 토지 개혁은 미국의 경제적 이익에 위협으로 보였다. 미국 기업들은 칠레에 9억 6400만 달러를 투자한 상태였고 평균적으로 17.4%의 수익을 올리고 있었다. 아옌데는 투자 자산을 잃은 사람 모두에게 완전한 보상을 약속했지만, 이것으로는 미국을 달랠 수 없었다. 미국은 아옌데의 인기가 높아지면 라틴아메리카의 다른 나라들에까지 좌파적 전환이 확산될 것을 우려했다. 당시 라틴아메리카는 미국 해외 투자의 20%를 차지하고 있었고 미국 기업은 라틴아메리카에서 5436개의 자회사를 두고 있었다. 한마디로, 미국은 여기에 걸려 있는 것이 아주 많았고, 칠레의 이웃 국가들 중에서 아옌데 스타일의 정부가 더 생겨나는 것을 원하지 않았다.

 처음에는 비군사적 압력을 써서, 즉 칠레 경제의 목을 조를 수 있는 모든 수단을 동원해서 아옌데가 국가주의적 프로그램을 철회하게 만들려고 했다. 미국의 리처드 닉슨 대통령이 CIA 국장 리처드 헬름스에게 "경제가 비명을 지르게 하라"고 지시한 것은 유명하다. 미국은 칠레로 가는 정부 대출을 막았고 민간 은행들도 칠레에 대출을 중단하도록 독려했다. 또한 칠레산 구리에 대해 6개월간 수입 중지를 선언해 칠레의 외환 보유고를 고갈시켰다. CIA는 미국의 다국적 기업 ITT가 소유한 신문인 <엘 메르쿠리오>를 활용해 반反아옌데 프로파간다도 퍼트렸다. 하지만 이 모든 노력도 소용이 없었다. 1973년에도 아옌데는 여전히 권력을 잡고 있었고, 오히려 이전 3년 사이에 아옌데의 정당은 지지율이 더 높아져 있었다. 미국은 더 공격적인 방식으로 전환하는 것 외에 방법이 없다고 판단했다. 과테말라와 인도네시아에서 사용했던 전술, 즉 오랜 옛 친구인 쿠데타를 사용하기로 한 것이다. 1972년 9월 11일에 아우구스토 피노체트 장군이 CIA가 주도한 '퓨벨트 작전Operation FUBELT'의 지원을 받아 쿠데타를 일으켰다.

 CIA가 주문한 영국제 폭격기가 산티아고의 상공을 낮게 날더니 대통령궁에 미사일과 포를 퍼부었다. 지붕과 벽이 날아가고 기둥에서 먼지와 연기가 피어올랐다. 살바도르 아옌데와 칠레 국민들의 희망은 이렇게 끝났다. 숨지기 몇 분 전에 아옌데는 전국에 방송된 마지막 연설을 했다 "제 이야기에 억울함은 없겠지만 실망스러움은 있을 것입니다." 그의 연설을 이렇게 시작했다. "저는 제 생명으로 국민에게 충성을 바칠 것입니다. 저는 수많은 칠레인들이 선한 양심으로 심은 씨앗이 영원히 마르지 않을 것이라고 확신합니다. 이 나라의 노동자 여러분. 정의를 향한 커다란 열망에 대해 통역자에 불과했던 한 사람에게 보여주신 신뢰에 깊이 감사드립니다. 저는 칠레와 칠레의 운명을 믿습니다. 배신자가 승리하는 쓰디쓴 순간에도 또 다른 사람들이 이 어둠과 고통의 순간을 극복해낼 것입니다."

 그가 쏟은 모든 노력의 결과, 아옌데는 머리에 크게 손상을 입은 채 집무실의 붉은 소파에 쓰러져 사망하는 것으로 생을 마감했다. 그의 안경은 부서진 채로 바닥에 떨어져 있었다. 리처드 닉슨은 5000마일 떨어진 곳의 비슷하게 생긴 집무실에서 승인의 의미를 담아 고개를 끄덕였다.

 피노체트의 권력 장악은 신속하고 잔혹하게 이루어졌다. 기밀 해제된 CIA 문서에 따르면 대통령궁 폭발이 있고서 피노체느는 아옌데의 사상을 지지하던 8~10만 명을 체포해 수감했다. 대부분은 소농민이거나 노동자였다. 3200명이 실종되거나 처형되었다. 정권 초기에 많은 이들이 죽음의 수용소로 바뀐 스포츠 경기장에서 처형되었고 20만 명이 국외로 도피해 정치적 망명자가 되었다.

 칠레에서의 쿠데타는 그보다 이른 시기에 미국의 지원으로 자행된 쿠데타들과 스타일이 비슷했지만 매우 중요한 새로운 요소가 있었다. 단순히 미국 기업에 친화적인 지도자를 심는 것이 아니라 경제 정책을 자유시장 원칙에 따라 완전히 개조하려 한 것이다. 이러한 경제 기조는 모든 반대 세력이 분쇄되었기 때문에 가능했고, 오로지 그랬기 대문에 가능했다. 1975년에 미국 상원의 한 위원회가 실시한 조사에 따르면 "CIA의 협력자들이 초창기에 전반적인 경제 계획에 관여했고, 이것이 칠레 독재자[피노체트]의 핵심적인 경제적 의사결정에 기초가 되었다." CIA가 자금을 댄 칠레 경제학자 집단(시카고 대학에서 학위를 받아서 '시카고 보이즈'라고 불린다)은 <자본주의와 자유>에서 프리드먼이 개진한 처방을 실행하기 위해 피노체트 정권에 경제 자문을 제공했다. 프리드먼 본인도 피노체트 정권의 핵심 자문이었다.

 프리드먼이 칠레에서 한 실험은 파괴적인 결과를 낳았다. 쿠데타 직후부터 하이퍼인플레이션이 시작되어 높게는 인플레율이 341%에 달했다. 시카고 보이즈가 인플레를 꺽기 위해 통화 공급을 줄이자 불황이 왔고 실업율이 9% 가까이로 올라갔다(아옌데 시절 3%). 이후 몇 년 동안 칠레에서 거의 500개의 국영 기업이 민영화 대상에 올랐다. 여기에는 은행도 있었고, 공립 학교도 있었으며, 심지어는 사회보장 시스템도 민영화되었다. 또 시카고 보이즈가 관세 장벽을 없애면서, 쿠데타를 지원했던 제조업마저 값싼 수입품이 낮은 가격으로 치고 들어온다고 불만을 토로했다. 보조금과 가격 통제가 없어지자 생활비가 급등했고 사회 서비스 지출은 반으로 줄었다. 그러는 동안 군에 들어가는 지출은 증가했다. <이코노미스트>마저 이것을 "자해의 잔치"라고 불렀을 정도다.

 1978년 이후에 경제가 약간 회복되긴 했지만 이는 해외에서 투기적 금융 자본이 들어와서 떠받친 회복이었고 1982년이 되자 경제는 또다시 심각하게 붕괴했다. 하이퍼인플레가 다시 시작되었고 실업률은 35%에 달했다. 점차 상황은 피노체트가 시카고 보이즈 상당수를 해고하고, 민영화되었던 기업과 은행 다수를 다시 국유화하지 않을 수 없을 정도로 나빠졌다. 경제가 완전한 붕괴로 치닫지 않게 해준 유일한 버팀목은 민영화되지 않은 국영 구리 광산 기업 코델코가 국가 수입의 85%를 대어준 것이었다. 1988년에 경제가 회복되고서야 프리드먼과 시카고 보이즈는 실험의 성공을 선포할 수 있겠다고 느낄 수 있었다. 그런데 누구를 위한 성공이었는가? 빈곤율은 41%였다. 평균 임금은 14% 낮아졌다. 최저 임금의 실질 가치는 42%나 낮아졌다. 기아가 만연했고 가장 가난한 40%의 식품 섭취는 하루 2000칼로리에서 1600칼로리 떨어졌다. 심지어는 1993년까지도 1인당 GDP가 쿠데타 이전 수준보다 12%나 낮았다. 피노체트 시절의 새 경제 체제에서 이득을 본 사람은 지배층뿐이었다. 은행과 외국인 투자자 들은 규제로부터 '해방'되어 호시절을 맞았다. 가장 부유한 10%가 국민 소득 중에 차지하는 비중은 28%나 증가했다. 칠레는 세상에서 가장 불평등한 사회 중 하나가 되었다.

                                                                                                  

p208

 원래 국제통화기금(IMF)은 국제수지 불균형 문제를 겪고 있는 국가들에 국제통화기금 자체가 가진 자금으로 대출해주기 위해 세워진 기구였다. 그 나라들이 정부 지출을 지속할 수 있게 해서 또다시 대공황으로 치닫는 것을 막기 위한 것이었다. 이것은 산업화된 국가들이 어려운 시기에 가라앉지 않도록 부양해야 한다는 존 메이너드 케인스의 개념에 입각한 계획이었다. 하지만 이제 G7 ㄱㄱ가들은 국제통화기금을 완전히 다른 목적으로 사용하고자 했다. 글로벌 남부 국가들이 국내 프로그램에 정부 지출을 멈추고 그 돈을 서구 은행에 부채를 상환하는 데 사용하게 한다는 것이었다. 다른 말로, 이제 국제통화기금은 빚 갚으로 독촉하는 글로벌 빚쟁이 역할을 할 예정이었다. 

 국제통화기금 임무의 근본적인 전환은 이 시기에 자크 드 라로지에르 총재를 비롯한 국제통화기금 고위층이 케인스주의적 철학을 지지하던 사람들을 체계적으로 몰아내고 그 자리를 신자유주의 이데올로기에 더 친화적인 사람들로 채운 덕분에 이루어질 수 있었다.

 이 계획의 작동원리는 다음과 같았다. 국제통화기금은 개도국들이 일련의 구조조정 계획에 동의할 경우 그들이 부채를 더 조달해 자금을 얻을 수 있게 돕는다. 그 구조조정 계획은 기본적으로 두 가지의 부채 상환 매커니즘을 포함해야 한다. 첫째, 해당 개도국은 기존의 모든 현금 흐름과 자산을 부채 상환으로 돌려야 한다. 즉 의료, 교육, 농업, 식품 등에 들어가는 보조금과 유치산업 보조금 등을 줄여야 하고 통신이나 철도와 같은 공기업을 매각해 공공 자산을 민영화해야 한다. 한마디로, '발전'을 위해 진행하던 개혁을 되돌려야 한다. 이렇게 지출을 마련한 돈과 민영화로 들어온 자금은 월가에 돈을 갚는 데 써야 한다. 공공 자산과 사회적 지출이 사후적으로 대외 부채의 담보물이 된 것이다. 물론 원래 대출을 받았을 당시에는 이런 조건이 없었다. 글로벌 남부 국가들이 미국 은행들이 저지른 고위험 행위에 대한 손실을 자국민의 돈 수백억, 수천억, 심지어 수조 달러를 끌어다 메꿔주는 셈이었다. 즉 가난한 글로벌 남부 국가들이 금고를 탈탈 털어서 서구의 가장 부유한 은행들로 부를 이전하는 격이었다.

 두 번째 메커니즘은 이보다는 약간 덜 직접적이었다. 구조조정 프로그램이 부과된 국가들은 급진적으로 규제를 완화하도록 압력을 받았다. 무역 장벽을 없애고 시장을 외국 경쟁자들에게 개방하고 자본 통제를 철폐하고 가격 통제를 없애고 노동 규제와 환경 규제를 없애서 경제가 '외국인 직접 투자에 매력적'이고 더 '효율적'이게 해야 했다. 이와 같은 자유시장적 개혁이 해당 국가의 경제 성장율을 높여서 빠르게 부채를 상환할 수 있게 해줄 것이라는 논리였다. 즉 이들 은행가들이 말하듯이 그 국가에서 "부채에서 벗어나 성장"할 수 있으리라는 것이었다. 또한 구조조정 프로그램에 따르면 채무국은 부채 상환에 쓸 현금을 더 많이 확보하기 위해 경제를 수출 쪽으로 재구성해야 했다. 이는 발전주의 시기에 매우 효과를 보았던 수입 대체 프로그램을 포기해야 한다는 말이었다. 이에 더해 구조조정 프로그램은 채무국이 인플레를 낮게 유지하도록 강요했다. 일종의 화폐 긴축을 강요한 것인데, 이는 채무국이 인플레를 통해 부채의 가치를 절하할 수 있다는 미국 은행들의 우려 때문이었다. 이것은 글로벌 남부 국가들에 큰 타격이었다. 부채를 인플레로 줄이지 못하게 되었을 뿐 아니라 통화 팽창 정책으로 고용과 성장을 촉진하지도 못하게 되었기 때문이다.

 

p230. 민영화의 수혜자와 피해자

 민영화(Privatization)는 투자자들에게 굉장한 기회를 창출해주지만 가난한 사람들에게는 너무나 자주 재앙적인 결과를 초래한다. 공공 유틸리티가 공적으로 소유되어 있을 때는 대개 전체 인구에게 서비스를 제공하는 것을 책무로 삼는다. 그런데 민간이 소유한 공공 유틸리티는 이윤을 올리는 것을 책무로 삼으므로 돈을 낼 여력이 없는 사람들에게는 서비스를 제공할 이유가 없게 된다. 바로 이것이 1980년대와 1990년대에 세계은행이 부과한 민영화 기간 동안 벌어진 일이었다. 가장 잘 알려진 사례는 볼리비아다. 1990년대 중반에 세계은행은 볼리비아 정부가 코차밤바의 물 공급을 민영화하도록 압력을 넣었다. 이 계약은 미국 기업 벡텔이 따냈고 벡텔은 물값을 35%나 올렸다. 너무나 기본적인 자원인 물을 구매할 돈이 없어서 2000년에 코차밤바 사람들은 저항에 나섰고 이것은 민영화에 맞서는 저항의 세계적인 상징이 되었다. 하지만 세계은행은 이 정책을 계속 고수했다. 2008년 말에도 세계은행의 한 고위 당국자는 수도 민영화가 가난한 사람들에게 피해를 준다는 증거가 쌓여가고 있는데도 왜 세계은행이 민영화를 지지하느냐는 질문에 이렇게 대답했다. "우리는 깨끗한 물과 위생 서비스를 제공하는 것이 진짜 비즈니스 기회라고 생각합니다."

 세계은행과 국제통화기금이 G7 국가들에게 얼마나 중요한지는 과장해서 말하는 것이 불가능할 것이다. 발전주의와 싸우는 데 가장 강력한 도구일 뿐 아니라 서구 자본주의의 위기를 '공간적 해법'으로 해소할 수 있는 길을 제공하기 때문이다. 서구 자본주의는 1970년대 말에 자신의 한계에 부닥쳐 위기를 맞았지만 가난한 나라들을 투자, 추출, 축적의 새로운 변경으로 삼으면서 자신의 한계를 넘고 자신의 내적 모순을 피해가며 지속될 수 있었다. 적어도 단기적으로는 말이다. 물론 이것은 위기를 타개하는 진정한 해법이 아니라 위기의 위치를 지리적으로 옮기는 데 불과했다. 하지만 이렇게 하지 않았다면 미국과 유럽의 자본주의는 시장 포화, 생태적 고갈, 계급 갈등의 한계에 부닥쳐 진즉에 부서졌을 것이다. 이것이 세계은행과 국제통화기금이 미국 정부와 월가에 그토록 소중한 이유이다. 이 기구들은 서구 자본주의 시스템을 유지하는 데 꼭 필요하다.

 이는 세계은행과 국제통화기금이 왜 계속해서 그들의 정책을 고수하는지 이해하는 데 도움을 준다. 빈곤 감소를 위해서가 아니다. 그들의 공식적인 슬로건과 마케팅 문건들이 우리로 하여금 그렇게 믿도록 만들려  하지만 말이다. 사실 '빈곤'이라는 단어는 세계은행의 설립 협정분에 한 번도 등장하지 않는다. 제1항에서 천명한 목적은 "민간 투자"와 "국제 교역의 성장을 촉진"하는 것이라고 되어 있다. 이러한 기준에 따르면 세계은행은 실패가 아니라  굉장한 성공을 거두었다고 말할 수 있다. 그리고 여기에 놀라지 말아야 한다. 월가와 미국 정부의 통제를 받으며 수십억, 수백억 달러를 쓰는 기관을 '실패'하게 놔뒀을 리가 없지 않은가?

 이러한 렌즈로 보면 역대 세계은행 총재가 모두 국제개발 전문가가 아니었다는 사실도 이해가 된다. 빈곤 감소와 개발에 헌신하는 조직이라면 국제개발 전문가여야 할 것 같은데, 미국의 군 출신이나 월가 경영인 출신이 이곳의 총재를 맡았다. 글로벌 경제 시스템에서 미국의 역할에 전략적인 이해관계가 있는 사람들이었던 것이다. 여기 역임 순서대로 역대 세계은행 총재 명단이 있다.

 존 맥클로이, 미 전쟁부 차관
 유진 블랙, 체이스 은행 경영자
 조지 우즈, 퍼스트 보스톤 코퍼레이션 은행 경영자
 로버트 맥나마라, 미 국방 장관, 포드 자동차 경영자
 올던 클로센, 뱅크 오브 아메리카 경영자
 바버 코너블, 미국 의원
 루이스 프레스턴, JP모건 은행 경영자
 제임스 울펀슨, 기업 변호사이자 은행가
 폴 울포위츠, 미 국방부 차관
 로버트 졸릭, 미 국무부 차관 및 미 무역 대표부 대표

 

 미국 정부가 세계은행 최고위직으로 누구를 선택했는지는 세계은행의 진정한 목적이 무엇인지에 대해 명백한 실마리를 준다. 2012년이 되어서야 국제개발 전문가인 김용이 임명되었는데, 이는 버락 오바마 대통령이 세계은행의 평판을 되살리기 위한 시도로서 한 일이었다.

 

p250. 비교 우위론의 헛점과 자유무역의 기만성

  자유주의는 가난한 나라들이 발전하는 데 필요한 것과 상충한다면, 왜 대부분의 주류 경제학자는 계속해서 자유무역을 주창하는 것일까? 

 한 가지 이유는 자유무역 이론이 상당히 설득력 있게 들린다는 점일 것이다. 현대 자유무역 이론의 주춧돌을 놓은 사람은 19세기 초의 영국 경제학자 데이비드 리카도다. 리카도는 각국의 기술적 조건이 주어져 있을 때 모든 국가가 타국 대비 비교 우위가 있는 영역에 특화하면 글로벌 경제의 생산성과 효율성이 최고 수준으로 달성된다고 주장했다.  포르투갈이 상대적으로 와인을 잘 생산하고 잉글랜드가 상대적으로 의복을 잘 생산한다면 잉글랜드가 와인 생산에 시간을 낭비하는것은 합리적이지 않다. 의복 생산에 집중하고 와인은 포르투갈에서 수입하는 것이 더 낫다. 

 이 모델은 너무나 합리적으로 보인다. 아니, 자명하게 옳은 논리로 보인다. 하지만 이 이론은 글로벌 불평등을 자연스러운 것으로 만들어버림으로써 해로운 영향을 미친다. 이 모델은 각 국가가 생산 요소의 특정한 부존량을 자연적으로 가지고 있다고 가정한다. 우리가 부유한 나라들은 자연적으로 자본이 비교적 풍부하고 가난한 나라들은 자연적으로 싼 노동력이 풍부하다고, 마치 신이 별자리에 새겨놓은 운명처럼 원래부터 그렇게 되어 있었다고 생각하게 만드는 것이다.

 우리는 다음과 같은 질문을 해봐야 한다. 애초에 왜 가난한 나라에서는 노동력이 그렇게 싸고 애초에 왜 부유한 나라에서는 자본이 그렇게 풍부한가?

 독일의 한 경제학자가 1848년의 유명한 연설에서 자유무역 이론과 유럽의 제국주의에 대해 다음과 같이 날카로운 비판을 했다.

 '우리는 자유무역이 국제 분업을 발생시키고 그에 따라 각 국가가 자신의 자연적 우위와 가장 잘 조화되는 것을 생산하게 되리라는 설명을 자주 듣습니다. 여러분은 커피와 사탕수수 생산이 서인도제도의 자연적인 운명이라고 믿으실지 모르겠습니다. 하지만 상업에 관심이 없는 자연은 두 세기 전에 사탕수수도, 커피나무도 그곳에 심어놓지 않았습니다.'

 

 칼 마르크스가 여기서 지적한 것은 자본과 노동의 상대적 부존량은 역사적, 정치적 과정의 산물이라는 점이다. 인간이 만든 것이지 자연적으로 주어진 것이 아니라는 뜻이다. 부유한 국가에서 노동력이 비싼 이유는 오랜 역사를 거치면서 강한 노조와 노동법이 형성되었기 때문이다. 부유한 국가에서 자본이 풍부한 이유는 오랫동안 관세로 보호해서 자국 산업을 발달시킬 수 있었기 때문이다. 가난한 나라에서 노동력이 싸고 자본이 부족한 이유는 식민주의 시기 동안의 박탈, 불평등 조약, 그리고 구조조정의 오랜 역사를 지녀왔기 때문이다. 비교 우위는 주어진 것이 아니라 만들어진 것이다. 

 

 글로벌 남부 국가들은 관세와 보조금을 전략적으로 사용해 국내 산업을 일굼으로써 부존 자본량을 늘릴 수도 있었다. 실제로, 독립을 하고 나서 구조조정이 강요되기 전이던 1950년대와 1960년대에 글로벌 남부 국가들은 바로 그러한 일을 시작했다. 하지만 이런 종류의 산업 전략에는 신중한 계획과 정부 개입이 필요한데, 계획과 개입은 자유무역주의자들이 '자연적인' 질서를 교란한다며 맹렬하게 반대하는 것이다.

 

p322

 과학자들이 알려주는 바로, 재앙적인 기후 변화를 피하려면 지구 기온이 기준점보다 1.5도 이상 높아지면 안 된다. 2015년에 각국 정부가 제21차 유엔 기후변화협약 당사국총회COP21를 위해 파리에 모였을 때 합의한 목표치도 1.5도 이내 상승이었다. 하지만 협정문의 내용을 보면 실천 의지는 그에 훨씬 못 미쳐서, 목표치가 립 서비스에 불과했음을 보여준다. 파리 협정은 전적으로 각국의 자발적인 참여에 달려 있다. 이제까지 제출된 것이 다 이행된다 해도(이것도 있을 법하지 않은 일이다. 이 감축 목표에는 구속력이 없기 때문이다) 1.5도 이내라는 목표치에 한참 못 미친다. 아마 우리는 2.7도나 3.7도 정도의 상승을 향해 가게 될 것이다.

 66%의 확률로 상승폭을 1.5도 이내가 되게 하려면 2015년부터 금세기 말까지 지구 대기에 205기가톤 이상의 이산화탄소를 배출하지 말아야 한다. 이것을 '탄소 예산'이라고 부른다. 현재 매년 40기가톤을 배출하고 있으므로 1.5도 기준 탄소 예산은 2020년이면 바닥나게 된다. 205기가톤 배출 이내로 우리의 활동을 제약하는 데는 막대한 노력이 들 것이다. 세계의 화석 연료 매장량이 이산화탄소 2600기가톤을 배출할 수 있는 양에 해당하기 때문이다. 이것은 오늘날의 기술과 경제 조건에서 추출 가능한 양으로 알려진 것이다. 다른 말로, 현재 우리는 우리 지구의 한계를 13배나 넘겨서 화석 연료를 사용하겠다는 계획을 세우고 있다(축산, 산업적 농경, 시멘트 생산, 삼림 파괴 등 탄소 배출의 다른 주요 요인들 이야기는 아직 하지도 않았다). 1.5도 이내로 상승폭을 묶으려면 우리는 추출 가능한 화석 연료의 93%를 매장된 채로 그냥 두어야 한다.

 그런데 파리 협정은 이 빨간 선에 대해서는 언급하지 않는다. 사실, 파리 협정은 화석 연료 사용에 대해서는 어떤 한계도 부과하고 있지 않다. 게다가 파리 협정은 2020년까지 실행되지 않는다. 즉 협정 체결 이후 5년간 각국은 계속해서 탄소를 배출할 수 있다. 그리고 그 시점이면 1.5도 상승폭은 달성할 수 없게 된다. 탄소 예산이 아무리 빠듯하다고 해도 5년의 이행 기간은 필요하지 않느냐고 생각할 수도 있을 것이다. 하지만 우리는 인류세의 기후 위기를 적어도 1960년대부터 알고 있었고, 국제 협상으로 탄소 배출을 줄이기로 한 것도 적어도 1990년부터다. 그런데도 지난 20년 사이에 연간 탄소 배출은 줄기는커녕 61% 증가했다. 국제통화기금의 가장 최근 추산에 따르면 정부들은 여전히 화석 연료 산업에 연 5.3조 달러에 달하는 보조금을 준다. 그와 동시에, 어처구니없게도 세계무역기구의 법정을 이용해 태양광 패널 같은 대안적인 기술에 보조금을 주는 것을 막고 있다.

 현재 경로대로 갈 경우에 예측되는 대로 상승폭이 3.7도나 4도 정도가 되면 지구는 어떤 모습일까? 보수적으로 추산치를 잡아도 지구에서 500만 년간 본 적 없는 폭염이 닥칠 것이다. 이탈리아, 스페인, 그리스 등의 남유럽 국가들은 사막이 될 것이다. 2100년이면 해수면이 1.24미터 올라가서 암스테르담부터 뉴욕까지 많은 도시가 물에 잠길 것이다. 40%의 생물종이 멸종 위기에 처할 것이고 삼림의 상당 부분이 시들어 없어질 것이다. 작물 산출은 35% 정도 떨어질 것이고 핵심 식량 작물인 인도 밀이나 미국 옥수수 생산은 60%나 급감할 것이다. 이는 특히 글로벌 남부 지역에서 광범위한 기근으로 이어질 것이다. 상승폭이 4도가 되면 그린란드의 빙하와 서남극 빙상이 완전히 녹는데, 이는 해수면을 6미터 더 상승시킬 것이고 전 세계에서 수억명의 사람들이 터전을 잃고 피신해야 할 것이다. 

 기후 과학자들은 상승폭 4도의 공포를 경고하고 있다. 2012년에 세계은행이 펴낸 보고서에 따르면 상승폭 4도는 "극단적인 폭염, 글로벌 식량 재고의 감소, 생태계와 생물종 다양성의 파괴, 생명을 위협할 정도의 해수면 상승"을 일으킬 수 있다. 매우 보수적인 주장이 아니면 잘 하지 않는 '기후 변화에 관한 정부 간 협의체IPCC'도 가까운 미래에 대한 예측치조차 암울하다고 언급했다. 이에 따르면 라틴 아메리카는 '아마존 동부가 열대 우림에서 사바나로 바뀔 것이고 인간 소비와 농경, 에너지 생산을 위한 수자원 가용량이 현저하게 바뀔 것'으로 예측된다. 아프리카에서는 "2020년까지 7500만 명에서 2억 5000만 명의 사람들이 물 부족 심화를 겪을 것으로 보이며 빗물 농경 산출이 몇몇 지역에서는 50%까지도 줄어들 수 있고 식품 생산과 접근성이 심각하게 훼손될 것"으로 보인다. 아시아에서는 "중앙아시아, 남아시아, 동아시아, 동남아 아시아에서 2050년까지 가용담수량이 줄어들고 몇몇 지역에서는 가물과 홍수와 관련된 질병으로 사망율이 증가할 것으로 보인다."

 요컨대 상승폭이 4도가 되면 우리가 알고 있는 인간 문명이 존재할 수 없다. 물리적으로 폭염을 견디고 연안 도시들에서 도망치는 것은 어떻게 할 수 있다 쳐도, 농업이 붕괴할 것이므로 먹을 것을 충분히 확보할 방법이 없어진다.

 그리고 우리가 아직 완전히는 예측하지 못하고 있는 되먹임 고리가 있다. 몇 년 이내에 북극에서는 여름 동안 빙하가 없어질 것이다. 이미 북극 빙하의 소실은 막대한 메탄 배출을 야기하는 길로 가고 있다. 수백만 제곱마일에 걸쳐 과학자들이 예측한 것의 2배나 되는 메탄이  바다 표면 아래에서 부글거리고 있는 것이다. 국제에너지기구는 아직 우리가 완전히 알지 못하는 이러한 문제들까지 포함하면 기온 상승폭이 6도가 넘을지도 모른다고 추산한다. 이 시나리오에서 다른 것은 몰라도 이것만큼은 확실하다. 이 저도로 급격한 기후 변화는 빈곤 타파에 쓰여야 할 모든 곡물을 쓸어 없애고 지난 반세기간 발전을 통해 이룩한 기대 수명의 증가를 다 무위로 되돌리고도 남을 것이다. 미래의 학자들은 오늘을 돌아보면서 발전이라는 개념을 기후가 충분히 안정적이어서 인류가 더 나은 미래를 상상하는 것이 말이 되던 마지막 시기인 홀레세의 진기한 몽상이었다고 말하게 될 것이다.

 

p326

 자본주의 자체가 지구의 위기를 막아야 할 절박할 필요와 모순을 빚고 있는 것은 아니다. 문제는 특정한 종류의 자본주의다. 정부 예산을 가차 없이 잘라내고 국가가 경제를 규제할 수 있는 권한을 갉아먹는 종류의 자본주의가 문제인 것이다. 긴축과 민영화를 해야 하는데 어떻게 국가가 탄소 제로를 위한 인프라를 구출할 수 있겠는가? 조세와 규제라는 개념 자체가 사회주의적이라거나 전체주의적이라는 오명을 쓰고 심지어는 몇몇 국제 협정에 의해 불법이라고 규정되는 마당에 어떻게 국가가 화석 연료 회사들을 규제할 수 있겠는가? (물론 미국의 농업 기업과 화석 연료에 대한 보조금은 예외적으로 허용하면서) 보조금을 '자유무역'의 원칙에 위배된다는 이유로 금지하는데 어떻게 재생 에너지 혁신에 투자할 수 있겠는가? 국가의 예산이 깍이고 공공 서비스가 줄었는데 어떻게 국가가 임박한 인도적 위기에 대응하기를 기대할 수 있겠는가?

 우리가 지난 몇십 년간 일궈온 경제 시스템은 21세기의 가장 심각한 도전에 맞서는 것을 불가능하게 만들었는지도 모른다.

 

p331

 악의 뿌리를 공격하는 사람이 한 명 있다면, 가지만 잘라내는 사람은 천 명쯤 있다. 또한 가난한 사람들에게 가장 많은 돈을 주는 사람은 자신의 삶의 방식으로 인해 자신이 헛되이 완화하려는 바로 그 비참함을 산출하는 데 가장 큰 기여를 하고 있는지도 모른다.

- 헨리 데이비드 소로

 

p333

 오스카 와일드가 언급했듯이, 감정은 지성보다 더 빠르게 자극된다. '고통에 공감하는 것이 사상에 공감하는 것보다 쉽다'는 것이다. 그리고 빈곤에 대해 생각할 때, 우리는 이 위기가 우리에게 요구하는 바가 무엇인지를 더 진지하게 생각해볼 필요가 있다.

 사람들은 주위에서 끔찍한 가난과 흉측한 추악함과 무시무시한 기아가 펼쳐지고 있는 것을 본다. 이 모든 것에 크게 마음이 움직이지 않기는 어려울 것이다. 그래서 존경할 만한 의도를 가지고 매우 진지하고 감상적으로 자신이 보고 있는 악을 고치기 위한 일에 나선다. 하지만 그들의 시도는 질병을 치료하지 못하며, 질병을 연장할 뿐이다. 사실, 그들의 치료는 질병의 일부라고 할 수 있다. 예를 들면, 그들은 빈곤 문제를 가난한 사람이 그저 생존해 있을 수 있게 도움으로써 해결하려 하지만, 이것은 해법이 아니고 오히려 어려움을 악화시킨다. 적합한 목표는 빈곤을 발생할 수 없도록 사회에 기반을 재조정하는 것이다. 그런데 이타적인 미덕은 이 목적의 수행을 가로막는다. 최악의 노예 소유주는 자신의 노예에게 친절한 소유주듯이, 그래서 그 제도의 끔찍한 면을 그것 때문에 고통받는 사람들이 깨닫지 못하게 하고 그 제도에 대해 고찰하는 사람들도 그것을 파악하지 못하게 하듯이, 선한 일을 하려고 가장 열심히 노력하는 사람이 가장 크게 해를 끼치는 사람이다. 자선은 타락을 가져오고 의욕을 떨어뜨린다.

 

 와일드의 언급은 많은 통찰을 준다. 우선, 자선은 가난한 사람들의 삶을 즉각적이고 일시적인 의미에서 향상시킬 수는 있지만 애초에 그들을 가난하게 만든 환경으로 곧바로 그들을 되돌려보낸다. 결국, 아무것도 변하지 않는 것이다. 그리고 돕고자 하는 박애주의자로서의 충동이 일단 충족되고 나면 사람들은 그 문제를 고찰하거나 실제 원인과 씨름하는 데 더 이상의 노력을 쏟지 않을 것이다. 즉 자선은 변화에 대한 의욕을 떨어뜨린다.

 하지만 와일드는 한 걸음 더 나아간다. 그는 자신이 빈곤의 궁극적인 원인, 즉 시스템의 중심에 있는 부패에서 우리의 관심을 돌려놀을 뿐 아니라 고통받는 당사자들마저 문제의 본질을 잘 알지 못하게 만든다고 주장한다. 자선은 그들이 자기 자신을 비하하고 그들의 정치적 주체성을 박탈하는 세력에 직접적으로 도전할 수 있는 능력을 떨어뜨릴 수 있다. 심각한 결함이 있는 시스템의 모순을 약간만 완화함으로써 시스템이 더 오래 지속되게 하는 것이다. 물론 대부분의 경우 박애주의자들이 그런 의도를 가지고 있는 것은 아니다. 하지만 때로는 명시적으로 그런 의도에서 자선이 이루어지기도 한다. 일례로, 몇몇 연구자들은 서구가 제공하는 식량 원조가 최악의 기근을 막고 사람들이 딱 생존할 만큼의 칼로리를 얻게 하는 정도까지만으로 신중하게 계산되고 있다고 지적했다. 이 정도에도 미달해 기근이 발생하면 세계 경제 체제의 불공정함이 너무나 명백해져서 정당성이 무너지고 정치적 격변이 뒤따를 것이기 때문이다. 그러한 결과를 피하기 위해, 부자들 중 정치적으로 명민한 사람들은 딱 그만큼의 자선에 자신이 가진 잉여 재산의 일부를 기꺼이 투자한다.

 

p335

 조지 소로스나 록펠러 가문 같은 저명한 자선가들이 취하는 접근 방식이 낮에는 무지막지하게 돈을 벌고 저녁에는 가난한 사람들의 삶을 개선하기 위해 돈을 기부하는 것이다. 하지만 우리는 어려운 질문을 던져야 한다. 애초에 그들의 부는 어디에서 왔는가? 소로스의 재산 대부분은 1997년 아시아 금융위기에 직접적인 원인이 된 통화 투기에서 나왔고, 이 위기는 수백만 명을 빈곤으로 몰아넣었다. 록펠러 재단은 화석 연료 산업을 독점함으로써 부를 일궜다. 거의 모든 경우에서 우리는 그들의 기부를 가능하게 한 부의 축적이 기부로 해결하고자 하는 바로 그 문제를 야기한 과정을 통해 이루어진 것임을 발견할 수 있다.

 스타벅스는 에티오피아 커피 재배 지역 빈민들의 건강을 개선하기 위해 기부를 했지만 에티오피아 커피 재배자들에게 지극히 낮은 임금을 지불해 비난을 받았다. 코카콜라는 과테말라의 가난한 지역을 돕기 위해 약간의 기부를 하고 있지만 과테말라 사탕수수 농장의 임금이 오르는 것을 막기 위해 노조 운동가들에 대한 폭력을 사주했다는 혐의를 받고 있다. 공정이 자선보다 낫다. 공정이 없으면 자선은 사기가 된다. 똑같은 주장을 서구의 공식적인 원조 활동에 대해서도 할 수 있다. 세계의 빈곤을 줄이려면 미국 정부는 원조를 제공할 게 아니라 애초에 빈곤을 초래한 주 요인인 구조조정, 탈세, 불공정한 무역 규정 등을 없애야 한다.

 

p357

 이상하게도 파리 협정은 화석 연료와 화석 연료 회사들에 대해서는 언급하지 않았는데, 이것은 치명적인 빈틈이다. 가장 강력한 기후 변화 저감 조치 중 하나가 화석 연료 회사에 대한 보조금을 없애는 것이기 때문이다. 현재 연간 5.3조 달러에 달하는 지원을 없애면 화석 연료가 재생 에너지에 비해 경쟁력을 잃게 만들 수 있을 것이다. 나아가 그 5.3조 달러를 조류, 풍력, 태양열 등 재생 에너지에 투자해야 한다. 하지만 바이오 연료는 피해야 한다. 바이오 연료 생산에는 토지가 필요한데, 이것이 토지 탈취를 일으키기 때문이다. 또한 토지가 식량 생산에서 에너지 생산으로 용도 전환되면 식량 안보에도 문제가 생긴다. 기후 변화와 관련해 진정한 진전을 이루려면 전 지구적으로 정책 결정에 막대한 영향력을 행사하는 홧헉 연료 산업을 타격하는 것이 꼭 필요하다. 보조금을 줄이는 것에 더해, 대학, 재단, 도시 등이 화석 연료에 기금을 투자하지 말아야 하는데, 이러한 운동은 이미 상당히 세를 얻고 있다.

 

 

p361

 어느 정도 미치지 않고서는 근본적인 변화를 수행할 수 없습니다. 그러한 광기는 순응하지 않을 용기, 옛 공식에 등을 돌릴 용기, 미래를 발명할 용기에서 나옵니다. 

 - 토마 상카라

 

p362

 발전주의의 표준 모델은 가난한 나라들이 부유한 나라를 따라잡을 수 있을 만큼 산업 경제를 (그리고 소득을) 성장시킬 수 있다고 전제한다. 이렇게 성장하려면 자원 소비를 늘려야 하고, 그에 따라 폐기물, 오염, 탄소 배출도 증가하게 된다. 이것은 정상적이고 어느 정도는 불가피한 과정이기도 하다. 하지만 불행히도 우리의 지구는 자원 측면에서도, 온실 가스를 흡수할 수 있는 역량 측면에서도, 그러기에 충분한 생태적 역량을 가지고 있지 않다. 과학자들의 추산에 따르면 현재의 전 세계 소비 수준에서도 이미 우리는 지구의 생태 역량을 매년 60% 가량씩 초과하고 있다.

 이는 전적으로 부유한 국가의 과다 소비 때문이다. 오클랜드에 있는 '글로벌 생태 발자국 네트워크'의 데이터에 따르면 지구는 우리 각자가 연간 1.8글로벌헥타르를 소비할 수 있는 생태 용량을 가지고 있다. 글로벌헥타르는 인간의 자원 사용, 폐기물 배출, 오염, 탄소 배출 등을 모두 고려한 생태 발자국의 표준 단위다. 우리의 소비가 1.8글로벌헥타르 수준을 넘어서면 자원 소비분이 다시 채워질 수 없거나 폐기물이 흡수될 수 없다. 즉 생태가 점점 더 악화되는 경로에 고착된다. 1.8글로벌헥타르는 가나와 과테말라의 평균 소비 수준과 비슷하다. 대조적으로 유럽은 1인당 4.7글로벌헥타르, 미국과 캐나다는 평균 8글로벌헥타르를 소비한다. 공정한 정도보다 몇 배나 많이 소비하고 있는 것이다. 전 세계 인구 모두가 고소득 국가의 평균 시민처럼 살 경우 지구 3.4개만큼의 생태 용량이 필요하다는 점을 생각해보면, 선진국의 과다 소비가 얼마나 극단적인지 감이 잡힐 것이다.

 과학자들은 인간이 지구 생태계를 너무나 과도하게 착취한 결과 매년 14만 종의 동식물이 사라지고 있다고 추산하는데, 이 정도의 멸종 속도는 산업혁명 이전에 비해 100~1000배가량 빠른 것이다. 멸종 속도가 오죽 빠르면, 과학자들은 현재를 지구 역사상의 '여섯 번째 대멸종'이라고 부른다. 직전의 대멸종인 '다섯 번째 대멸종'은 6600만년 전에 있었다.

 그나마 이 숫자들은 모두 현재 수준의 경제 활동, 즉 부유한 나라와 가난한 나라의 소비 수준이 현재와 같은 경우를 상정한 것인데, 가난한 나라들이 빈곤을 타파할 수 있을 정도로 솝를 늘리면 재앙으로 가는 속도는 더 빨라질 것이다. 그러니까, 부유한 나라들이 소비를 줄이지 않는다면 말이다.

 

p364

 부유한 나라들이 소비를 줄이게 하는 것이 간단한 일처럼 보일 수도 있다. 또한 그것은 공정하고 합리적인 일이기도 하다. 하지만 현재의 경제 구조에서는 상상할 수 없는 일이다. 거의 모든 경제 전문가와 거의 모든 정치인이 정확히 그와 정반대, 즉 GDP의 더 많은 성장을 추구한다. GDP 성장률을 높인다는 말은 생산과 소비를 매년 더 증가시킨다는 말이다. 아마도 이것은 오늘날 모든 경제학 개념을 통틀어 가장 강력한 개념일 것이다. 너무나 일반적으로 받아들여지고 있어서 아무도 여기에 의문을 제기할 생각조차 하지 않을 정도다.

 우리는 GDP라는 지표를 마치 늘 존재했던 것처럼 당연히 여기는 경향이 있다. 대부분의 사람들은 GDP가 실은 매우 최근에야 발명된 것인 줄 모른다. GDP 지표는 태고부터 존재한 것이 아니라 역사를 가진 산물이다. 1930년대에 경제학자 사이먼 쿠즈네츠와 존 메이너드 케인스가 정책 결정자들이 대공황에서 벗어날 방법을 알아내는 데 도움이 되도록 경제적 총계를 내는 방식을 고안하는 일에 착수했다. 그 목적은, 한 국가에서 생산되는 재화와 서비스 전체의 금전 가치를 계산해서 어디에서 무엇이 잘못되고 있고 무엇을 고쳐야 할지를 더 구체적으로 파악할 수 있게 하는 것이었다. 쿠즈네츠는 사회가 후생 극대화를 추구하는 데 지침으로 삼을 수 있고 인간 후생의 개선을 시간에 따라 추적할 수 있게 해줄 지표가 되려면 GDP 계산에서 광고, 긴 통근 시간, 치안 운영과 같은 부정적인 것들을 제외해야 한다고 보았다. 그런 것들이 증가하면 정부가 실제로는 그렇지 않은데도 국민의 삶이 나아지고 있다고 말할 수 있을 것이기 때문이다. 하지만 2차 세계 대전이 닥치고서 케인스는 쿠즈네츠의 의견 대신 부정적인 것까지 포함해 화폐 기반의 모든 활동을 측정하자고 주장했다. 그래야 전쟁 수행 노력에 동원될 수 있는 생산력을 모두 포함할 수 있을 것이기 때문이다. 케인스가 이겼고, 그가 제시한 버전의 GDP 지표가 쓰이게 되었다.

 GDP는 전쟁 시의 지표로서 개발되었다. 그래서 너무나 이랑적이고 심지어는 폭력적이다. GDP는 인간에게 유용한 것인지 파괴적인 것인지를 구별하지 않고 화폐 기반의 모든 활동을 계산에 넣는다. 삼림을 베어 목재를 팔면 GDP가 올라간다. 탄광을 열기 위해 산을 뚫으면 GDP가 올라간다. 노동 시간을 늘리고 은퇴 연령을 늦춰도 GDP가 올라간다. 그런데 비용은 차감하지 않는다. 이산화탄소를 포집하는 숲을 잃는 비용도, 멸종 위기 종의 보금자리인 산맥을 잃는 비용도, 과도한 업무가 사람들의 신체와 정신과 인간관계에 미치는 악영향의 비용도 잡지 않는다. 나쁜 것을 계산에 넣지 않는 것도 문제지만, 유용하고 좋은 활동을 금전화되지 않는다는 이유로 감안하지 않는 것도 문제다. 먹을 것을 직접 만들고 집을 직접 청소하고 노인을 직접 돌보는 활동에 대해 GDP는 아무것도 말하지 않는다. 화폐 거래가 개입되지 않았기 때문이다. 돈을 주고 구매할 때만 이러한 활동들이 GDP에 들어간다.

 물론 어떤 것은 측정에 넣고 어떤 것은 빼는 것 자체가 잘못된 것은 아니다. GDP 지표 자체는 실물 경제에 영향을 주지 않는다. 하지만 GDP 성장 지표는 영향을 준다. GDP 성장에 초점을 맞추기 시작하는 순간, 우리는 GDP가 계산 넣는 것들을 촉진하게 될 뿐 아니라 그러한 것들을 무한히 증가시키려 하게 된다. 바로 이것이 1960년대 이래로 우리가 내내 해온 일이다. GDP는 냉전 시기 서구와 소련 사이에 경합이 벌어지던 와중에 널리 사용되기 시작했고, 양 진영 모두의 정치인들이 GDP 성정을 촉진하는 데 맹렬히 나섰다. 쿠즈네츠는 너무나 많은 파괴에 경제적 인센티브를 일으킬 수 있으므로 GDP를 경제적 성공을 재는 일반적 지표로 사용하면 안 된다고 경고한 바 있다. 하지만 우리는 정확히 그가 우려한 대로 했고, 그 다음에는 이것이 세계은행과 국제통화기금에 의해 세계의 다른 지역에도 빠르게 강요되었다. 오늘날에는 부유한든 가난하든 거의 모든 나라가 GDP 성장이라는 하나의 목표에만 강박적으로 초점을 맞추고 있다.

 

 

p368

 [동물학자] 데이비트 애튼버러의 말을 빌리면, "유한한 지구에서 무한하게 성장할 수 있다고 생각하는 사람은 미친 사람이거나 경제학자일 것"이다.

 현재의 소비가 지구의 생태 용량을 크게 초과하고 있다는 사실에 기하급수적 성장이라는 요소를 더해보면 어떻게 될까? 가까운 미래조차 전망이 암울하다. 과학자들은 2050년이면 성숙한 열대 삼림이 사라질 것이라고 말한다. 생물종 다양성은 10%가 추가로 감소할 것이다. 현재 우리가 채취하고 있는 해산물은 1950년 수준에 비해 평균 90% 이상 급감할 것이다. 금, 구리, 은, 아연 등 주요 금속 대부분도 매장량이 고갈될 것이다. 납, 인듐, 안티몬 등 재생 에너지 기술에 사용되는 핵심 금속들도 그렇가. 일론 머스크 같은 실리콘밸리 기업가들은 달이나 또 다른 행성에서 이러한 금속들을 찾을 수 있으리라고 말하지만, 우주에서 자원을 추출한다 해도 우리의 삼림이나 어류 위기에 대응하는 데 그리 도움이 되지는 않을 것이다. 토양 위기도 마찬가지다. 현재의 표토 고갈 속도대로라면 전 세계 농경지의 포툐는 2050년이면 거의 사용할 수 없게 될 것이고 2075년이면 아예 사라질 것이다.

 이러한 명백한 문제에도 불구하고 어떤 이유에선지 우리는 GDP 성장을 인간의 진보와 동일한 것으로 등치시키곤 한다. GDP가 올라가면 우리의 삶이 나아질 것이라고 가정한다. GDP가 올라가면 소득을 올려줄 일자리가 창출되고 학교와 병원이 더 좋아질 것이라고 생각한다. 전 세계 인구가 비교적 적었고 지구의 풍성함에 비해 인간의 생태 발자국도 비교적 작았던 과거에는 그랬을지 모르지만 불행히도 더 이상은 그렇지 않다. 지난 반세기 동안 미국에서 GDP는 꾸준히 증가했지만, 소득 중앙값은 정체 상태였고 빈곤율은 높아졌으며 불평등도 증가했다. 전 세계적으로도 마찬가지다. 1980년대 이래 전 세계 실질 GDP는 3배 가까이 늘었지만 하루 5달러 이하로 살아가는 사람은 11억 명이 늘었다. 왜 그럴까? 어느 정도 지점을 넘어서면 GDP 성장은 부보다 '병폐'를 더 많이 만들기 때문이다. 긍정적인 것보다 부정적인 것을 더 많이 생성하기 시작하는 것이다. 토지에 울타리를 치고 토양을 고갈시키고 물을 오염시키고 인간을 착취하고 기후를 변화시켜서 다른 이들에게 피해를 입히지 않고서도 자본을 축적할 수 있는 변경이 더 이상 존재하지 않기 때문이다. 우리는 GDP 성장이 빈곤을 없애기는커녕 만들어내고 있는 지점에 도달했다.

 전 세계의 주요 정치 주체들이 GDP 성장이라는 목적에 경도되어 있으면 인간과 자연의 시스템은 막대한 압력을 받게 된다. 이 압력이 인도에서는 가령 토지 탈취의 형태로 나타나고, 영국에서는 공공 서비스의 민영화라는 형태로 나타나며, 브라질에서는 아마존의 삼림 파괴로 나타나고, 미국과 캐나다에서는 타르샌드와 수압 파쇄 공법(오일샌드와 그로 인한 수자원 감소 및 환경파괴를 의미함)으로 나타날 것이다. 세계 곳곳에서 이것은 더 긴 노동 시간, 더 비싼 주거 비용, 고갈되는 토양, 오염되는 도시, 버려지는 대양, 그리고 무엇보다 기후 변화를 의미한다. 이것이 다 GDP 성장을 위해 벌어지는 일이다. 이러한 파괴적인 경로를 밀어붙이는 것에 반대하는 사람들은 정부의 무관심에 무력감을 느낀다. 정부가 무관심한 이유는, 그들이 가장 중요시하는 진보의 척도에 따르면 파괴가 좋은 것으로 계산되기 때문이다. 따라서 그들은 그 모든 비용에도 불구하고 파괴적인 경로를 지속해야 한다. 이것은 인간이 내재적으로 파괴적인 속성을 가지고 있어서가 아니다. 우리가 파괴적인 방식으로 행동하도록 촉진하는 규칙을 만들었기 대문이다. 조지프 스티글리츠가 언급했듯이 "우리가 무엇을 측정하는가는 우리가 어떻게 행동할 것인가에 지침을 준다. 엉뚱한 것을 측정한다면 우리는 엉뚱한 행동을 하게 될 것이다."

 

p381

 GDP 성장은 가장 중요한 공적 명령일 수 있지만, 기업의 주주 수익 극대화라는 사적 명령도 있다. GDP와 마찬가지로 주주 수익 극대화도 늘 존재했던 것은 아니다. 시초를 따지자면 미국 대법원이 '닷지 대 포드 자동차' 사건에서 결정적인 판결을 내린 1919년으로 거슬러 올라갈 수 있다. 당시에 포드 자동차는 상당한 잉여 자본이 있었고 헨리 포드는 그중 일부를 노동자의 임금을 올리는 데 쓰기로 했다. 이미 포드의 임금은 상당히 높은 수준으로 알려져 있었는데 여기에서 더 올리기로 한 것이다. 이에 회사의 최대 주주였던 닷지 형제가 포드의 임금 인상 결정에 반대해 소송을 걸면서 포드의 자본은 주주들에게 속하며 포드가 불필요하게 임금을 올림으로써 주주의 돈을 훔친 것이나 다름없다고 주장했다. 법원은 그들의 손을 들어주었고 판례가 성립되었다. 이제 기업의 의사결정은 주주의 수익을 최우선으로 고려해서 내려져야 했다. CEO들이 주주에게 돌아가는 몫을 줄이고 임금을 올리거나 환경을 보호하는 데 지출을 늘리고 싶어도 이제 그것은 가능하지 않다. 그렇게 하는 것이 사실상 불법이기 때문이다. 오늘날 기업들은 대체로 이 지상 명령에 지배되며, 따라서 이러한 지상 명령이 없었을 경우보다 더 탐욕스러워져야 한다. 기업들이 다른 우선순위들을 고려할 여지를 갖게 하려면 주주 가치 극대화 원칙을 버리는 것은 꼭 필요한 일일 것이다.

 

p387

 애초에 왜 우리의 정치인들은 그렇게 열렬리 성장을 추구하게 되었을까? 하나의 이유는 분배라는 어려운 문제를 피해 갈 수 있게 해주었기 때문일 것이다. 파이가 커지기만 한다면 기존의 조각들을 어떻게 분배할지 정해야 하는 압력은 덜 받을 수 있으니 말이다. 전 연준 위원 헨리 윌리치는 이렇게 언급한 바 있다. "성장은 소득 평등의 대체재다." 맞는 말이다. 대부분의 정치인들은 부유한 사람들의 세금을 올려서 소득을 재분배하기 보다는 GDP를 올린 다음 어찌어찌 그 혜택이 아래로 내려가기를 바랄 것이다. 하지만 우리는 윌리치의 논리를 뒤집어서 말할 수도 있다. 성장이 평등의 대체재라면, 평등이 성장의 대체재일 수도 있는 것이다.

 우리는 풍요로운 행성에 살고 있고 우리의 경제는 모두를 위해 충분한 것보다 더 많이 생산한다. 우리는 우리가 이미 가지고 있는 것들을 더 공정하게 나눌 방법을 찾아야 한다. 그렇게 한다면 지구를 더 약탈할 필요가 없어질 것이다. 즉 평등은 더욱 생태적인 경제를 일구기 위한 핵심 열쇠다.

 이를 달성하는 빠른 방법 하나는 노동이 아니라 자본 및 축적된 부, 그리고 토지나 자원과 같은 공공재 사용에 과세해서 마련한 재원으로 보편 기본소득을 운영하는 것이다. 대개 기본소득은 자동화로 인한 기술적 실업으로부터 사람들의 생계를 보호하고 빈곤을 줄이는 전략의 하나로 이해하는 경향이 있지만, 불평등을 줄여 성장 압력을 완화하는 데도 핵심적인 전략이 될 수 있다. 이에 더해, 단순히 생계를 유지하기 위해 사회적으로 의미 없는 일을 매주 40시간, 60시간씩 해야 할 필요에서 벗어나게 해줌으로써 우리가 불필요한 것들을 덜 생산하고 지구 자원에 가해지는 압력을 줄일 수 있게 해줄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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