I am honored to be with you today at your commencement from one of the finest universities in the world. I never graduated from college. Truth be told, this is the closest I’ve ever gotten to a college graduation. Today I want to tell you three stories from my life. That’s it. No big deal. Just three stories.
오늘 세계에서 손꼽히는 대학의 졸업식에 여러분과 함께 할 수 있게 되어 영광입니다. 전 대학을 졸업한 적이 없으며, 솔직히 말해 이것이 대학 졸업식에 가장 가까이 참가한 것입니다. 오늘 전 제 인생의 3가지 이야기를 할 것입니다. 단지 그것뿐. 별일도 아닙니다. 단지 3가지의 이야기일뿐이죠.
I dropped out of Reed College after the first 6 months, but then stayed around as a drop-in for another 18 months or so before I really quit. So why did I drop out?The first story is about connecting the dots.
전 리드칼리지를 6개월 다니고 중퇴를 했지만, 이후 완전히 그만둘때까지 18개월동안 더 청강을 하며 대학에 머물렀습니다. 근데 제가 왜 중퇴를 했을까요? 첫번째는 점들을 연결하는 것에 관한 이야기입니다.
It started before I was born. My biological mother was a young, unwed college graduate student, and she decided to put me up for adoption. She felt very strongly that I should be adopted by college graduates, so everything was all set for me to be adopted at birth by a lawyer and his wife. Except that when I popped out they decided at the last minute that they really wanted a girl. So my parents, who were on a waiting list, got a call in the middle of the night asking: “We have an unexpected baby boy; do you want him?” They said: “Of course.” My biological mother later found out that my mother had never graduated from college and that my father had never graduated from high school. She refused to sign the final adoption papers. She only relented a few months later when my parents promised that I would someday go to college.
그 이야기는 제가 태어나기 전부터 시작합니다. 젊은 시절 미혼의 대학졸업생이었던 제 생물학적 어머니는 저를 입양시키기로 결정했습니다. 그녀는 저를 대학졸업자에게 입양시켜야겠다고 아주 강하게 느꼈고, 그래서 제가 태어날때 변호사와 그의 아내에 의해 입양되도록 모든것이 준비되어있었습니다. 단지 제가 세상에 나왔을때 그들이 마지막 순간에 딸을 원했다는 것을 제외하면 말이죠. 그래서 대기자명단에 있던 우리 부모님은 한밤중에 "우린 기대했던것과 달리 아들을 낳았어요, 그래도 괜찮으세요?"라는 전화를 받았었죠. 그들은 "물론이죠"라고 답했습니다. 저의 생물학적 어머니는 나중에야 저의 어머니가 대학을 졸업하지 않았다는 것을 알았고 아버지는 고등학교를 졸업하지 않았다는 것을 알았습니다. 그녀는 입양 서류에 서명하는 것을 거절했죠. 그녀는 몇 달 후에, 저의 부모님들이 제가 대학에 갈 수 있도록 하겠다는 약속을 듣고서야 누그러졌습니다.
And 17 years later I did go to college. But I naively chose a college that was almost as expensive as Stanford, and all of my working-class parents’ savings were being spent on my college tuition. After six months, I couldn’t see the value in it. I had no idea what I wanted to do with my life and no idea how college was going to help me figure it out. And here I was spending all of the money my parents had saved their entire life. So I decided to drop out and trust that it would all work out OK. It was pretty scary at the time, but looking back it was one of the best decisions I ever made. The minute I dropped out I could stop taking the required classes that didn’t interest me, and begin dropping in on the ones that looked interesting.
17년 후 전 대학에 갔습니다. 하지만 전 순진하게 스탠포드만큼이나 비싼 대학을 선택했고, 노동자계급이었던 부모님의 모든 저축은 제 대학등록금으로 들어갔습니다. 6개월 후, 전 대학에서 가치를 찾을 수가 없었습니다. 저는 제 인생에서 무엇을 하고싶은지 몰랐고, 대학이 어떻게 그것을 구체화하는데 도움을 줄건지 알지 못했습니다. 그리고 바로 그 대학에 저의 부모님이 평생을 모은 돈을 사용하고 있었던 겁니다. 그래서 전 중퇴를 결심하고, 그것으로 모든 것이 잘 될 것이라 믿었습니다. 당시엔 꽤 무서웠지만, 돌이켜보면 그것은 제가 한 최고의 결정중 하나였습니다. 중퇴하자마자 저는 흥미가 전혀없는 필수과목 수강을 관둘 수 있었고, 제가 보기에 흥미로운 수업들만 청강을 했습니다.
It wasn’t all romantic. I didn’t have a dorm room, so I slept on the floor in friends’ rooms, I returned Coke bottles for the 5¢ deposits to buy food with, and I would walk the 7 miles across town every Sunday night to get one good meal a week at the Hare Krishna temple. I loved it. And much of what I stumbled into by following my curiosity and intuition turned out to be priceless later on. Let me give you one example:
그것은 전혀 낭만적이지 않았습니다. 전 기숙사방도 없어서, 친구집 마루바닦에서 자고, 콜라병을 반환하고 받은 5센트 동전을 모아 음식을 사먹었으며, 매주 일요일 저녁마다 하레 크리쉬나 사원에서 주는 근사한 식사를 먹기 위해 마을을 가로질러 7마일을 걷곤 했습니다. 전 그 식사를 정말 좋아했습니다. 호기심과 직관을 따라 우연히 만났던 많은 것들이 나중에 값어치를 따질 수 없을 정도로 귀한 것이라는 것을 나중에 알았습니다. 여러분에게 하나의 예를 들려드리겠습니다.
Reed College at that time offered perhaps the best calligraphy instruction in the country. Throughout the campus every poster, every label on every drawer, was beautifully hand calligraphed. Because I had dropped out and didn’t have to take the normal classes, I decided to take a calligraphy class to learn how to do this. I learned about serif and sans serif typefaces, about varying the amount of space between different letter combinations, about what makes great typography great. It was beautiful, historical, artistically subtle in a way that science can’t capture, and I found it fascinating.
리드대학은 당시 미국에서 가장 훌륭한 서예 수업을 제공했던 것 같습니다. 캠퍼스 곳곳에 있는 포스터들과 서랍에 붙어있는 라벨들은 아름다운 손글씨로 쓰여져있었습니다. 저는 중퇴했고, 정규과정을 들을 필요가 없었습니다. 저는 어떻게 이렇게 쓸 수 있는지 배우기 위해 서예수업을 들었습니다. 전 세리프와 산스 세리프활자체를 배웠고, 빈공간과 활자들의 배치에 따라 공간미가 어떻게 변하는지, 그리고 위대한 조판들이 어떻게 위대해지는지에 대해 배웠습니다. 그것은 과학으로 설명할 수 없는 아름답고, 역사적이며 , 예술적으로 미묘한 방식이었으며, 전 그것에 매혹되었습니다.
None of this had even a hope of any practical application in my life. But 10 years later, when we were designing the first Macintosh computer, it all came back to me. And we designed it all into the Mac. It was the first computer with beautiful typography. If I had never dropped in on that single course in college, the Mac would have never had multiple typefaces or proportionally spaced fonts. And since Windows just copied the Mac, it’s likely that no personal computer would have them. If I had never dropped out, I would have never dropped in on this calligraphy class, and personal computers might not have the wonderful typography that they do. Of course it was impossible to connect the dots looking forward when I was in college. But it was very, very clear looking backward 10 years later.
이것이 제 인생에서 어떤 실제적인 쓰임이 될 것이라고는 생각치 못했습니다. 하지만 10년후, 우리가 첫번째 매킨도시 컴퓨터를 디지안했을 때, 그것이 저에게 떠올랐습니다. 그래서 우리는 맥에 서예를 접목했습니다. 맥은 아름다운 서체를 가진 첫번째 컴퓨터였습니다. 만약 제가 대학에서 그 한개의 과목을 청강하지 않았다면 맥은 절대로 다양한 서체들과 공간에 비례하는 활자체들을 가질 수 없었을 것입니다. 윈도우(마이크로소프트)는 맥을 카피한 겄이기 때문에, 개인용 컴퓨터도 그런 아름다운 활자체를 가질 수 없었을 것입니다. 제가 중퇴하지 않았다면, 서예 수업을 청강하지 않았을 것이고, 어떠한 개인용 컴퓨터들도 환상적인 활자체를 가지지 못했을 것입니다. 확실히 제가 대학때 앞을 바라보며 그 사건들(dots)을 연결하진 못했을 겁니다. 하지만 10년후 되돌아보면 그것은 아주아주 명백한 것이었죠.
Again, you can’t connect the dots looking forward; you can only connect them looking backward. So you have to trust that the dots will somehow connect in your future. You have to trust in something — your gut, destiny, life, karma, whatever. This approach has never let me down, and it has made all the difference in my life.
다시 말하자면, 앞을 내다보고 점들을 연결할 순 없습니다. 오직 우리가 지나온 과거를 돌아보며 점들을 연결하는 것이 가능할 뿐이죠. 그러니까 여러분은 미래에 그 점들이 어떻게든 연결될거라 믿어야만 합니다. 여러분은 - 당신의 근성, 운명, 인생, 업 - 무엇이 됐든 믿음을 가져야 합니다. 이러한 사고방식이야말로 저를 실망시키지 않았고, 이것이 제 인생의 차이를 만들었습니다.
My second story is about love and loss.
제 2번째 이야기는 사랑과 잃어버림에 관한 것입니다.
I was lucky — I found what I loved to do early in life. Woz and I started Apple in my parents’ garage when I was 20. We worked hard, and in 10 years Apple had grown from just the two of us in a garage into a $2 billion company with over 4,000 employees. We had just released our finest creation — the Macintosh — a year earlier, and I had just turned 30. And then I got fired. How can you get fired from a company you started? Well, as Apple grew we hired someone who I thought was very talented to run the company with me, and for the first year or so things went well. But then our visions of the future began to diverge and eventually we had a falling out. When we did, our Board of Directors sided with him. So at 30 I was out. And very publicly out. What had been the focus of my entire adult life was gone, and it was devastating.
전 행운아였죠. 제 삶의 이른 시기에 전 사랑하는 일을 발견했습니다. 워즈(니악)와 전 20살때 부모님의 차고에서 애플을 설립했습니다. 우린 열심히 했고, 10년만에 차고에서 우리 둘이 시작한 애플은 4천명 이상의 종업원을 가진 20억불의 회사로 성장했습니다. 우리는 막 우리의 최고의 작품 매킨토시를 1년전에 발표했었고, 전 30이 되었습니다. 그리고 전 회사에서 짤렸습니다. 어떻게 당신이 만든 회사에서 짤릴수가 있죠? 그게, 애플이 성장함에 따라 우리는 제가 생각하기에 나와 함께 회사를 잘 경영할 수 있는 재능을 가졌다고 생각한 사람을 고용했고, 첫 일년동안은 일이 잘 되어갔습니다. 하지만 미래에 대한 우리의 비젼들에 차이가 생기기 시작하면서 마침내 우리는 사이가 틀어졌고, 이사회는 그의 편을 들어주었습니다. 그래서 30살때 전 쫓겨났습니다. 그것은 매우 공개적인 축출이었습니다. 내가 집중해왔던 성인으로서의 모든 삶이 사라져버렸고, 그것은 엄청난 충격이었습니다.
I really didn’t know what to do for a few months. I felt that I had let the previous generation of entrepreneurs down — that I had dropped the baton as it was being passed to me. I met with David Packard and Bob Noyce and tried to apologize for screwing up so badly. I was a very public failure, and I even thought about running away from the valley. But something slowly began to dawn on me — I still loved what I did. The turn of events at Apple had not changed that one bit. I had been rejected, but I was still in love. And so I decided to start over.
몇 달간 전 도대체 무엇을해야 할지 몰랐습니다. 전 지난 세대의 사업가정신이 사라져가는 것처럼 느꼈고, 그건 저를 지나쳐갔던 바톤을 놓친 것만 같았습니다. 전 데이비드 패커드와 밥 노이스를 만나서, 그렇게 형편없이 일을 망친것에 대해 사과하려고 했습니다. 전 아주 공개적으로 망했고, 심지어는 밸리(실리콘밸리)에서 도망쳐야겠다고까지 생각했습니다. 하지만 무언가 - 내가 했던 일을 여여전히 사랑했다는 사실 - 천천히 저를 깨우기 시작했습니다. 애플에서의 사태가 그 사실을 조금도 바꾸지 않았죠. 전 쫓겨났지만, 여전히 사랑에 빠져있었습니다. 그래서 전 다시 시작하기로 했습니다.
I didn’t see it then, but it turned out that getting fired from Apple was the best thing that could have ever happened to me. The heaviness of being successful was replaced by the lightness of being a beginner again, less sure about everything. It freed me to enter one of the most creative periods of my life.
당시 전 알지못햇지만, 애플에서 해고당한 것은 저에게 일어난 일 중 최고의 사건 중 하나였다는 것입니다. 성공의 무거움이 다시 초심자가 되는 가벼움으로 바뀌었고, 모든 일에 덜 확신을 갖게 되었습니다. 그 사건으로 전 제 인생의 가장 창의적인 시기를 보낼 수 있었습니다.
During the next five years, I started a company named NeXT, another company named Pixar, and fell in love with an amazing woman who would become my wife. Pixar went on to create the world’s first computer animated feature film, Toy Story, and is now the most successful animation studio in the world. In a remarkable turn of events, Apple bought NeXT, I returned to Apple, and the technology we developed at NeXT is at the heart of Apple’s current renaissance. And Laurene and I have a wonderful family together.
그 다음 5년간, 전 NeXT라는 회사와, 또 다른 Pixar라는 회사를 설립했습니다. 그리고 저의 아내가 되는 굉장한 여인과 사랑에 빠졌습니다. 픽사는 세계 최초의 컴퓨터 애니메이션 영화를 제작했습니다. 토이 스토리는 현재 스튜디오에서 제작된 세계에서 가장 성공한 만화영화입니다. 이 놀라운 사태의 전환에서, 애플은 넥스트를 매입했고, 전 애플로 복귀했으며, 넥스트에서 개발된 기술은 애플의 부흥을 이끈 핵심이 되었습니다. 그리고 로렌과 전 함께 훌륭한 가족을 가지게 됐죠.
I’m pretty sure none of this would have happened if I hadn’t been fired from Apple. It was awful tasting medicine, but I guess the patient needed it. Sometimes life hits you in the head with a brick. Don’t lose faith. I’m convinced that the only thing that kept me going was that I loved what I did. You’ve got to find what you love. And that is as true for your work as it is for your lovers. Your work is going to fill a large part of your life, and the only way to be truly satisfied is to do what you believe is great work. And the only way to do great work is to love what you do. If you haven’t found it yet, keep looking. Don’t settle. As with all matters of the heart, you’ll know when you find it. And, like any great relationship, it just gets better and better as the years roll on. So keep looking until you find it. Don’t settle.
전 애플에서 해고되지 않았다면 이 모든 것들이 절대 일어나지 않았을 것이라고 확신합니다.약을 먹는 것은 무섭지만, 환자에게는 필요한 것이기도 하죠. 때로는 인생에서 벽돌이 당신의 머리를 때리기도 합니다. 신념을 잃지 마세요. 전 제가 사랑하는 것만이 저를 계속 전진하게 하는 유일한 것이라 확신합니다. 당신이 당신이 사랑하는 것을 발견해야 합니다. 그리고 이것은 당신의 연인뿐만 아니라 일에서도 마찬가지입니다. 일은 당신의 인생의 큰 부분을 채워주게 될 것이고, 진정으로 만족하는 유일한 길을 당신이 진정 위대한 일이라 믿는 것을 하는 것뿐입니다. 그리고 진정으로 위대한 일을 하는 유일한 방법은 당신이 하는 일을 사랑하는 것입니다. 만일 당신이 아직 그것을 찾지 못했다면, 꾸준히 살펴보십시요. 정착하지 마십시요. 모든 것이 마음의 문제이듯이, 당신이 그것을 찾았을때 당신은 알게 될 것입니다. 그리고 모든 위대한 관계가 그렇듯, 그것은 해가 가면 갈수록 더욱 나아지게 될 것입니다. 고로 당신은 그것을 찾을때까지 꾸준히 살펴보고, 정착하지 마십시요.
My third story is about death.
제 세 번째 이야기는 죽음에 관한 것입니다.
When I was 17, I read a quote that went something like: “If you live each day as if it was your last, someday you’ll most certainly be right.” It made an impression on me, and since then, for the past 33 years, I have looked in the mirror every morning and asked myself: “If today were the last day of my life, would I want to do what I am about to do today?” And whenever the answer has been “No” for too many days in a row, I know I need to change something.
제가 17살때, 전 다음과 같은 인용문을 읽었습니다. "만일 당신의 매일매일을 인생의 마지막 날처럼 살아간다면, 언젠가는 당신이 걷던 그 길이 옳았음이 드러날 것이다." 그것은 저에게 감동을 주었고, 그 이후로 전 33년간 매일 아침 거울을 보며 저 자신에게 물었습니다. "만약 오늘이 내 마지막 날이라면, 오늘 내가 하려는 일을 하고 싶은가?". 그리고 그 대답이 "아니오"라고 몇날 몇일을 계속되면, 전 무엇인가 바뀌어야 할때라는 걸 깨닫습니다.
Remembering that I’ll be dead soon is the most important tool I’ve ever encountered to help me make the big choices in life. Because almost everything — all external expectations, all pride, all fear of embarrassment or failure — these things just fall away in the face of death, leaving only what is truly important. Remembering that you are going to die is the best way I know to avoid the trap of thinking you have something to lose. You are already naked. There is no reason not to follow your heart.
난 곧 죽게 될거야라는 사실은 인생의 중요한 결정을 하는 순간에 나를 도와주는 가장 중요한 도구라는 것을 명심하십시요. 거의 모든것 - 모든 외적인 기대, 모든 긍지, 모든 실패나 당혹감에 대한 공포-이 죽음앞에서는 사라지기 때문입니다. 단지 무엇이 진정으로 중요한 것이가만 남습니다. 당신이 죽는다는 사실만이 당신이 무엇인가를 잃을 수 있다는 생각의 덫을 피할 수 있게 하는 최선의 방법임을 기억하십시요. 당신은 이미 발가벗겨 있습니다. 당신의 마음을 따르지 않을 이유가 없습니다.
About a year ago I was diagnosed with cancer. I had a scan at 7:30 in the morning, and it clearly showed a tumor on my pancreas. I didn’t even know what a pancreas was. The doctors told me this was almost certainly a type of cancer that is incurable, and that I should expect to live no longer than three to six months. My doctor advised me to go home and get my affairs in order, which is doctor’s code for prepare to die. It means to try to tell your kids everything you thought you’d have the next 10 years to tell them in just a few months. It means to make sure everything is buttoned up so that it will be as easy as possible for your family. It means to say your goodbyes.
1년 전, 전 암진단을 받았습니다. 아침 7시30분에 스캔을 했고(CT를 찍었고), 저의 췌장에 종양이 확실하게 보였습니다. 전 췌장이 무언지도 몰랐습니다. 의사는 그것은 거의 확실하게 치료불가능한 암의 형태라고 했으며, 길어야 3개월에서 6개월 정도를 더 살 수 있을거라고 했습니다. 의사는 죽어가는 환자에게 의례 하는 규정에 따라 집으로 돌아가 주변을 정리하라고 조언을 했습니다. 그것은 앞으로 10년간 당신이 할 것을 당신의 아이들에게 몇 달동안 전달해주라는 것을 의미했습니다. 신변의 모든 것을 잘 정리해두어, 당신의 가족을 가능한 편하게 해주라는 것을 의미했죠. 그것은 작별인사를 하라는 이야기였습니다.
I lived with that diagnosis all day. Later that evening I had a biopsy, where they stuck an endoscope down my throat, through my stomach and into my intestines, put a needle into my pancreas and got a few cells from the tumor. I was sedated, but my wife, who was there, told me that when they viewed the cells under a microscope the doctors started crying because it turned out to be a very rare form of pancreatic cancer that is curable with surgery. I had the surgery and I’m fine now.
전 하루종일 진단을 받았습니다. 늦은 밤 전 생검을 받았고, 내시경을 목으로 집어넣고 위를 통해 장으로 들어간 후, 바늘로 췌장의 암덩어리로터 세포들을 체취했습니다. 전 차분했지만, 같이 있던 아내는 의사들이 현미경으로 검사를 했던 의사들이 울기 시작했다고 말해줬습니다. 왜냐하면 제 췌장암이 수술로 치료가 가능한 매우 희귀한 종류였기 때문이었습니다. 전 수술을 받았고 아직까지 멀쩡합니다.
This was the closest I’ve been to facing death, and I hope it’s the closest I get for a few more decades. Having lived through it, I can now say this to you with a bit more certainty than when death was a useful but purely intellectual concept:
이것이 제가 죽음과 가장 가까이 대면한 순간이었으며, 앞으로도 몇 십년간 동안 가장 가까운 것이길 바랍니다. 그것을 경험했기에, 전 죽음이 유용하다는 것을 단순한 지적개념으로만 알았을때보다 좀 더 확실히 여러분께 말씀드릴 수 있습니다.
No one wants to die. Even people who want to go to heaven don’t want to die to get there. And yet death is the destination we all share. No one has ever escaped it. And that is as it should be, because Death is very likely the single best invention of Life. It is Life’s change agent. It clears out the old to make way for the new. Right now the new is you, but someday not too long from now, you will gradually become the old and be cleared away. Sorry to be so dramatic, but it is quite true.
아무도 죽음을 바라지 않습니다. 심지어 천국을 가기 원하는 이들조차 그곳에 가기 위해 죽기를 원하지는 않습니다. 그리고 여전히 죽음은 우리 모두가 겪어야 하는 운명입니다. 아무도 그것을 피해갈 수 없습니다. 그리고 죽음은 그래야만 합니다, 왜냐하면 죽음은 인생의 유일한 최고의 발명이기 때문입니다. 죽음은 인생의 변화의 대리인입니다. 젊은이를 위하여 노인은 사라집니다. 지금 당장의 젊은이는 여러분이지만, 언젠가 멀지 않은때에 여러분들도 점차로 늙어가고 사라져갑니다. 너무 극적이라 미안하지만, 그것이 사실입니다.
Your time is limited, so don’t waste it living someone else’s life. Don’t be trapped by dogma — which is living with the results of other people’s thinking. Don’t let the noise of others’ opinions drown out your own inner voice. And most important, have the courage to follow your heart and intuition. They somehow already know what you truly want to become. Everything else is secondary.
당신의 시간은 한정되어 있으니, 다른 이들의 삶을 사느라 허비하지 마십시요. 타인의 생각에 빠져 사는 교조주의에 빠지지 마십시요. 다른 이들의 의견이 당신 자신의 내면의 소리를 묵살하도록 하지 마십시요. 그리고 가장 중요한, 당신의 마음과 직관을 따르는 용기를 가지세요. 그것들은 어떻게든 당신이 진정 되고자 원하는 것이 무언지 알고 있습니다. 그외의 것은 부수적인 것입니다.
When I was young, there was an amazing publication called The Whole Earth Catalog, which was one of the bibles of my generation. It was created by a fellow named Stewart Brand not far from here in Menlo Park, and he brought it to life with his poetic touch. This was in the late 1960s, before personal computers and desktop publishing, so it was all made with typewriters, scissors and Polaroid cameras. It was sort of like Google in paperback form, 35 years before Google came along: It was idealistic, and overflowing with neat tools and great notions.
제가 어렸을때, 또래들에겐 성경과도 같은 지구 전체의 카탈로그라는 끝내주는 책이 있었습니다. 그 책은 여기서 멀지 않은 멘로파크에 사는 스튜어트 브랜드라는 사람이 만들었는데, 그의 시적 감성으로 책에 생기를 불어넣었습니다. 1960년대 말, 개인컴퓨터와 전자출판 이전이라, 이 책은 타자기와 가위 그리고 폴라로이드 카메라로 제작되었습니다. 그건 마치 종이로 만든 구글과 같은 것이었습니다. 구글이 나오기 35년전이죠. 그것은 이상적이었고, 깔끔한 도구와 위대한 개념들로 가득차 있었습니다.
Stewart and his team put out several issues of The Whole Earth Catalog, and then when it had run its course, they put out a final issue. It was the mid-1970s, and I was your age. On the back cover of their final issue was a photograph of an early morning country road, the kind you might find yourself hitchhiking on if you were so adventurous. Beneath it were the words: “Stay Hungry. Stay Foolish.” It was their farewell message as they signed off. Stay Hungry. Stay Foolish. And I have always wished that for myself. And now, as you graduate to begin anew, I wish that for you.
Stay Hungry. Stay Foolish.
스튜어트와 그의 팀은 지구 전체의 카타로그를 몇 판인가 만들었고, 책의 운명이 다할 때쯤 마지막 판을 발행했습니다. 그것이 1970년대 중반이었고, 전 여러분 정도의 나이였죠. 최종판의 뒷 표지는 이른아침의 시골길의 사진이었고, 모험심이 가득한 날 히치하이킹을 하다가 만날 곳 같은 그런 곳이었습니다. 그 아래에는 "언제나 갈망하고, 우직하라."라고 씌어져 있었습니다. 그것이 그들이 전한 마지막 인사말이었습니다. 언제나 갈망하고, 우직하라. 전 제 자신이 항상 그러기를 원했습니다. 그리고 이제, 사회에 첫발을 내딛는 졸업생 여러분께, 제가 여러분을 위해 바랍니다.
언제나 갈망하고, 우직하라.
Thank you all very much.