마츠다 세이코가 1996년 4월 40번째로 발표한 싱글. 1988년 '旅立ちはフリージア(여행은 프리지아)'로 오리콘 싱글 차트 1위에 오른 이후 8년만에 오리콘 차트 싱글 1위에 재입성한 곡이다. 또한 1989년 소속사 계약만료 이후 독립한 이후에 처음으로 차트 1위에 오른 곡이기도 하며, 최초의 밀리언셀러 곡이기도 하다. 현재까지 그녀의 최대 히트곡이다. 가사는 본인의 경험을 반영하여 직접 작사했고, 작곡도 공동으로 참여했다. 여러모로 그녀에게 큰 의미가 있는 곡이다.
과거의 곡과는 달리 애절한 발라드가 성숙해진 그녀의 분위기와 잘 어울어진다.
이 영상은 이 곡의 대히트에 힘입어 1996년에 열린 일본 전국 콘서트 투어 'Vanity Fair'의 장면이다.
식민지의 역사는 외세에 의한 분단과 동족상잔의 전쟁으로 이어졌고, 그 아픔이 지금까지도 우리 삶을 규정짓고 있습니다.
우리 정치는 여전히 역사에 대한 반성과 절치부심이 부족합니다. 친일청산을 제대로 못했고, 분단을 극복하지 못했으며, 평화를 이루지도 못했습니다. 그리고 여전히 사대외교에서 벗어나지 못하고 있습니다. 역사의 실패를 되풀이하지 않겠다는 절치부심이 부족하기 때문입니다. 이것이 내가 가진 문제의식입니다.
문재인 정부의 외교와 안보 분야의 성과를 자랑하려고 이 책을 쓴 것은 아닙니다. 그런 목적이라면 문재인 정부의 국정백서에 잘 정리되어 있습니다. 이 책에서 나는 문재인 정부가 어떤 구상으로 한반도 평화프로세스를 추진했으며, 어떤 마음자세로 외교·국방·보훈·방산 정책을 다루었는지 말하고 싶었습니다.
미중 간의 경쟁과 갈등이 격화되면서 우리 외교의 여건이 더욱 힘들어졌습니다. 거기에 더해 전략적 모호성을 버린 현 정부의 과도하게 이념적인 태도가 우리 외교의 어려움을 더 키우고 있습니다. 남북관계의 위기는 사상 최악으로 치닫고 있습니다. 북한의 도발이 걱정이지만, 우리 정부의 과한 대응도 함께 걱정됩니다. 무엇보다 큰 걱정은, 위기가 고조되고 있는데도 대화를 통해 위기를 낮추려는 노력이 전혀 보이지 않는다는 사실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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미국 첫 순방 관련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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p26.
최종건 : 취임한 지 불과 50일도 안 된 6월 28일에 3박5일 일정으로 미국을 가십니다. 돌아오자마 7월 5일에 독일로 가서 G20 정상회의에 참가하시고요. 정상외교를 하는 데 국내 민주주의의 발전(촛불혁명으로 인한 무혈혁명에 의한 박근혜 탄핵과 선거에 의한 합법적이 정권 교체를 의미)이 이떤 도움을 줬습니까?
문재인 : 처음 외교무대에 나가면 낯설죠. 서먹함이 있고요. 나는 그런 어려움이 거의 없었다 할 정도로 해외 정상들이 친근하게 다가왔어요. 그들이 느낀 한국 국민의 저력과 성숙함, 기적 같은 민주주의의 회복, 그런 것이 세계 민주주의의 희망이 되고 있다는 인식이 한국과 나에 대한 큰 호의로 나타났던 거죠. 그래서 처음 외교무대에 나가면서 별로 어색하지 않게 다른 정상들과 쉽게 교류할 수 있었어요. 결국 우리 국민의 힘이죠. 피플파워, 내가 그것을 대표하고 있었기에 그만큼 더 당당할 수 있었고, 대접받을 수 있었습니다. 외교를 하는 동안 그 나라의 민주주의 수준과 도덕성, 문화 같은 소프트파워가 국제무대에서 큰 호감으로 작용하고, 그것이 외교의 힘이 된다는 사실을 늘 느꼈습니다.
최종건 : 대통령이 되신 후에 '아, 왜 하필 트럼프야?'하는 생각은 안하셨습니까? 트럼프가 가지고 있는 대외적인 명성(?)이 있지 않습니까? 좀 거칠고 기존의 정치인들과 다르고요.
문재인 : 우리만이 아니라 트럼프 대통령은 모든 나라에 특별했어요. 공화당이지만 공화당의 주류와도 다르고요. 그래서 다들 트럼프 대통령이 어떤 사람인지, 어떻게 접근해야 하는지 어려움을 겪었어요. 게다가 괴팍한 성격이라고 알려져 있었지요. 아베 총리와 시진핑 주석이 트럼프 대통령을 방문했을 때 많은 선물 보따리를 가져갔는데도 대접받지 못했다는 이야기도 있었고요. 우리도 첫 대면 때 트럼프 대통령에게 어떻게 다가가야 할지 긴장했죠.
접근할 수 있는 인맥이 없었어요. 민주당이든 공화당이든 다리가 될 만한 인맥이 있기 마련인데, 트럼프 대통령은 새로운 얼굴이어서 전혀 없었던 거죠. 그래서 트럼프란 사람을 알기 위해 <거래의 기술> 등 그의 저서를 대충 다 읽어봤어요. 그런데 막상 만나보니 매우 잘 대해주었어요. 첫 통화도 정중했고요. 처음에는 공격적인 질문을 몇 가지 하더니 내 대답이 괜찮았는지 굉장히 친근하게 대했어요. 트럼프 대통령 스스로가 "문 대통령과 케미스트리가 정말 잘 맞는다. 최상의 '케미'다"라고 여러 번 이야기할 정도였죠.
그에 대한 부정적인 평가도 있지만, 내게는 동맹외교의 파트너로서 아주 잘 맞는 편이었습니다. 무례하고 거칠다는 평가도 있지만, 나는 그가 솔직해서 좋았습니다. 웃는 얼굴을 하지만 행동은 달라서 속을 알 수 없는 사람이 오히려 상대하기 힘들죠. 트럼프 대통령은 자신의 요구를 솔직히 말했고, 그러면서도 자신의 공약을 지키기 위해 노력하듯이 내가 한국의 대통령으로서 국민에게 한 공약을 지키기 위해 노력해야 한다는 점을 인정하고 존중해주었습니다.
p32
문재인 : 처음 미국을 방문할 때 우리는 일본이나 중국처럼 거창한 선물 보따리를 가져갈 수 있는 형편이 안 되니, 말하자면 진정성을 가지고 미국을 대하기로 했던 거죠. 우리가 준비한 것은 미국 도착 첫 일정으로 장진호 전투 기념비를 참배하고, 거기서 메시지를 내는 거였어요. 그것이 미국에 준 최고의 마음의 선물이 됐죠.
장진호 전투는 위대한 승리라고 이야기하지만 사실 미국으로서는 굉장히 아픈 전투였습니다. 미군이 6·25 전쟁 동안 3만 5000명 정도 전사했는데 10분의 1 정도가 장진호 전투에서 발생했거든요. 두만강 유역까지 전진했다가 중공군의 갑작스러운 개입으로 대규모 후퇴 작전이 벌어졌고, 이어서 완전히 포위된 상황에서 흥남에 집결한 많은 병력과 피난민을 해상으로 철숫기키는 작전을 성공적으로 치러내 위대한 승리라고 평가받지만, 그 과정에서 미군들이 영하 30~40도의 혹한과 큰 어려움을 겪은 참혹한 전투였어요.
그래서 미국에서 '잊힌 전투'라고 부르고 있었는데, 한국의 신임 대통령이 장진호 전투 기념비 앞에서 그 전투의 위대함을 말해주고, 그 전투를 겪은 분들에게 최대한의 경의를 표하면서 한미가 혈맹관계라는 사실에 대한 공감을 다시 일깨운 것이지죠. 내 가족의 이야기와 결부시켜 호소력 있게 이야기하고자 했던 건데, 큰 효과를 거뒀습니다.
최종건 : 나중에 들어보니 매티스 당시 국방장관과, 아버지가 6·25 전쟁 참전 용사였던 펜스 부통령은 대통령님이 백악관에 도착하시기 전에 연설문을 다 읽어봤다고 합니다. 그게 상당히 중요한 기획이었던 것 같아요.
문재인 : 그 연설문을 당시 정의용 국가안보실장이 사전에 맥매스터 안보보좌관을 통해서 트럼프 대통령 책상 위에 올려 놓았다는 겁니다. 트럼프 대통령은 내게 대단히 훌륭하고 감동적인 연설이었다고 인사를 했습니다.
그날 행사와 연설은 장진호 전투를 치른 미 해병 1사단에서 라이브로 중계됐어요. 그것이 미국의 군 쪽에 매우 긍정적인 효과를 미쳤고, 좀 어려울 수도 있었던 트럼프 대통령과의 첫 만남을 좋은 분위기로 만드는 데 큰 역할을 했죠. 대선을 치르면서 외교 로드맵을 마련할 때 방미 첫 일정으로 구상해두었던 건데, 의도했던 대로 효과를 거뒀다고 생각합니다.
p49
최종건 : 당시 제가 평화기획비서관으로서 제재 담당이었는데요. 대통령님의 생각을 시민사회나 학계와 소통했는데, 시민사회는 국제제재나 미국의 제재를 앞세우다 보면 남과 북 사이에 할 수 있는 일들이 너무 적은 것 아니냐고 반론했습니다.
문재인 : 그렇죠, 맞는 말이에요. 그래서 답답한 것이 사실이죠. 앞에서도 말했지만, 노무현 정부의 2007년 10·4 남북정상회담 때는 그런 제재의 틀이라는 게 없었기 때문에 남북 간에 마음껏 합의할 수 있었지만, 우리는 2018년 판문점과 평양 두 번의 남북정상회담을 통해서 아주 풍성하고 실용적인 합의를 이루어냈어도 제대로 이행되지 않았어요. 결국은 제재의 벽을 넘지 못한 것이죠. 답답하고 아쉽습니다. 화도 나고요. 그렇지만 남북 간에 저지르듯이 할 수는 없는 거에요. 미국이나 국제사회를 설득하고, 우리가 북한을 견인하듯이 미국도 우리가 견인해나가는 노력이 필요한 거죠. 실제로 2019년 하노이 북미정상회담이 노딜로 끝나지 않았다면 거의 가능했던 거 아닌가요? 우리가 정상에 오르지는 못했지만, 정상을 봤죠. 정상을 봤고... 언젠가 다시 노력이 재개된다면 그때는 정상에 오를 거라고 믿습니다.
진보 진영의 비판은 다분히 결과론적인 비판이죠. 그러나 평화라는 것은 끊임없는 과정이에요. 이루지 못한 부분을 갖고 평가할 것이 아니라 이루어낸 부분을 평가해야죠. 진보 진영은 민주정부가 이룬 개혁의 성과를 당연한 일로 치부해버리는 경향이 있어요. 그러나 수십 년간 지속되어온 기득권 질서를 바꾼다는 것은 한 걸음 한 걸음이 무척 힘든 일입니다. 그 과정과 성과가 온당하게 평가 되어야죠. 많은 개혁과 성과를 거두고 남북관계에서도 새로운 장을 연 김대중 정부와 노무현 정부에 대해서도 당시 진보 진영은 실패한 정부로 규정하는 평가의 오류를 범한 바가 있습니다.
p55. 하노이 북미회담 노딜에 대한 문재인 대통령의 뒷얘기
문재인 : 트럼프 대통령 본인도 나중에 내게 후회하는 말을 하며 미안해했어요. 자신은 수용할 생각이 있었는데 볼턴 국가안보보좌관이 아주 강하게 반대했고, 그래서 폼페이오 국무장관에게 당신 생각은 어떻소 물어보니 폼페이오도 볼턴에게 동조해서 어쩔 수 없었다는 거에요. 아마 트럼프 대통령으로서는 다음에 다시 기회가 있을 거라고 생각했을지 모르죠. 말하자면 다음에 더 유리한 거래를 하고자 했을 수도 있는데, 안타깝게도 그 후 미국이 대선 국면에 들어서고 또 코로나 상황이 되고 하면서 다시 기회가 오지 않았던 거죠. 트럼프 대통령이 트윗으로 제안한 판문점 삼자회동으로 한번 흐름을 바꿔보려고 노력을 했지만, 그것으로 끝나고 말았고요.
그거 참... 두고두고 통탄스러운 일이죠. 북한도 북미회담이 시작된 이후로는, 북미회담을 통해서 제재를 해결하고 그 속에서 개성공단이나 금강산관광이 함께 해결되는 프로세스를 바랐던 것인데, 지금 지나고 보니 그거라도 해두었으면 하는 아쉬움이 아주 크죠.
p60
문재인 : 박근혜 정부 때 주한미국대사였던 리퍼트 Mark Lippert가 그런 말을 한 적이 있어요. "아무런 이견이 없는 동맹이 건강한 동맹이 아니라 이견을 마하고 서로 토의하는 것이 건강한 동맹이다." 내가 경험해봐도 우리가 합리적인 제안을 하면 미국이 수용할 뿐만 아니라, 미국이 뭔가 요구할 때도 그것이 합리적이지 않다고 생각되면 그렇지 않다고 반대 의견을 분명히 이야기하면 미국에서 수긍을 합니다. 면전에서 아무 소리 하지 않고 그냥 넘어가는 것을 꼭 좋아하는 건 아니라는 걸 많이 느꼈습니다.
첫 번째 정상회담 때 미사일 지침 해제에 합의한 후에 트럼프 대통령이 한미 FTA 개정 문제를 제기햇어요. 당신들 너무 협상도 잘하고 장사도 잘한다. FTA 하고 나니까 한국만 덕을 많이 보고 미국은 적자를 본다고요. 예상됐던 일이어서 내가 공부를 미리 하고 갔어요. 그래서 한미 FTA 이후에 오히려 한미 간 적자폭이 줄어들었다. 또 근래 적자가 개선되고 있다. 그래서 이게 우리만 혜택 보는 것이 아니라 미국도 혜택을 봐서 서로에게 이익이 되고 있다고 이야기했죠. 그래도 어쨋든 한국이 계속 흑자를 보고 있는 건 사실이니까, 그렇다면 양국 간에 워킹그룹을 만들어서 한미 FTA의 성과에 대해 함께 검증을 해보자. 그러고서 논의하자고요. 이렇게 내가 제안했는데 트럼프 대통령이 수긍하는 겁니다. 더 이상 무리한 주장을 하지 않았어요. 그런 검증 과정을 거쳤기 때문에 우리가 수용할 수 있는 개정으로 그칠 수 있었지요.
사드 문제 같은 경우도, 그냥 기존에 들어온 사드는 우리가 전 정부의 합의를 존중해서 그대로 받아들이되 환경영향평가 등 우리가 국내법 절차를 거쳐야 하고, 추가 배치는 우리와 합의 없이는 받아들이기 어렵다는 입장을 분명히 했고, 미국도 우리 의견을 수용했죠.
최종건 : 네, 결국은 그때 우리 대내외적인 토킹 포인트가 민주주의적 절차를 지킨다는 거였고, 미국도 우리의 국내법 절차를 당연히 존중한다는 것이었어요. 미국도 이런저런 협의를 하거나 협상을 할 때 자기네가 좀 궁해지면 미국 국내법을 이야기하거든요. 우리가 그렇게 얘기할 수 있는 것도 국내법을 어긴 대통령을 우리가 탄핵시킨 법치주의와 민주주의 역사가 있었기 때문입니다.
2015년 한일위안부합의도 마찬가지죠. 이 두 사안은 어쨌든 전 정부가 했기 때문에 우리가 좀 불편했어요. 내용도 마음에 안 들었고, 여러 가지 실질적인 피해도 있었고요. 그럼에도 대통령님은 외교의 연속성을 받아들이신 것 같아요. 대통령으로서 어려운 결단이었어요. 사드 배치에 비판적이었던 진영, 그리고 2015년 한일위안부합의에 매우 비판적이었던 진영에서는 몹시 실망했던 걸로 기억합니다. 왜 그렇게 연속성을 중요하게 여기신 겁니까?
문재인 : 나도 반대했던 입장이니 비판을 이해하지만, 정부 입장에서는 그래야 하는 것 아닌가요? 정부 간에 합의했으면, 개인적으로 반대되는 생각을 갖고 있다 하더라도 다음 정부에서 합의를 그냥 깨뜨릴 수는 없는 것이지요. 그래서 사드에 대해서는 이미 대선 때 공약을 수정했어요. 내가 야당 대표일 때는 사드 배치를 반대하고 철회해야 한다고 주장했지만, 대선 때는 사드의 효용성과 관련 국내법 절차에 대해서 다시 검토하겠다고 한발 물러섰죠. 대통령이 됐을 때 입장이 같을 수가 없기 때문이었어요.
진보 진영에서는 왜 야당 때 주장했던 것처럼 선명하게 철회하지 않냐 이야기할 수 있고, 반대로 미국 측에서는 사드 배치를 철회하는 쪽으로 가는 거 아니냐고 의구심을 가질 수 있었겠죠. 그때 사드 배치 결정을 철회하고 다시 가져가라고 할 수 는 있었겠지만, 만약 그렇게 했다면 한미동맹에 큰 균열이 생기는 거죠. 그것을 국민들이 동의할 리가 없고요. 그렇게 되면 평화프로세스를 힘 있게 추진하기는 불가능해지죠. 그러면 대한민국의 국제적이 신뢰도 무너지게 되는 것이죠.
p69
최종건 : 저는 기억나는 게, 트럼프 대통령이 "문 대통령님! 내가 사는 트럼프타워에 LG TV만 있어요. 한국은 우리가 지켜주는 사이에 LG TV 같은 거 만들어서 우리나라에 파는데 우리는 무역적자가 많잖아요!"라고 하니까, 그때 대통령님이 "그 LG TV 다 텍사스에서 만드는 겁니다. 메이드 인 텍사스! 그러니까 그거 자랑하고 다니셔도 됩니다!"라고 하셨어요. 그러자 트럼프 대통령이 반론하지 못하더라고요. 트럼프 대통려이 자기 식대로 계속 방위비 분담금의 대폭 인상을 요구할 때는 대통령님이 "우리는 한국전쟁 이후에 미국이 한 전쟁에 다 나갔어요. 그래서 우리가 피로 맺은 혈맹입니다. 미국의 동맹국 가운데 우리가 유일하죠!" 하면서 대응하셨어요.
우리 정부 출범 당시에, 트럼프-문재인 조합이 2018년에 보여준 것처럼 그렇게 많은 일을 함께 할 수 있을 거라고 상상도 못했습니다. 트럼프 대통령하고 케미가 맞는다, 말이 통할 것 같다고 느꼈던 포인트나 시기가 언제쯤이었나요?
문재인 : 첫 번째 정상회담 때 뜻밖에 잘 통했어요. 트럼프 대통령 측근 참모들이 신기하다고 이야기했어요. 트럼프 대통령이 나와 스타일이 전혀 다른데, 어떻게 그렇게 케미가 잘 맞냐고... 트럼프 주변 사람들이 이야기했죠.
최종건 : 2017년 2월에 맬컴 턴불 호주 총리가 트럼프 대통령 당선을 축하하려고 전화했는데... 트럼프가, 그들은 통역 없이 영어로 얘기했을 거 아닙니까, 전화를 확 끊어버린 일이 있었습니다.
문재인 : 화가 나서 그랬다는 거죠. 그런 게 알려져서 독일 메르켈 총리도 나한테 "어휴! 트럼프, 김정은 그 두 터프가이를 어떻게 서로 마주 앉혔어요? 비법이 뭡니까?"라고 묻기도 했어요.
p78
문재인 : 이명박·박근혜 정부의 외교의 협소함, 그걸 우리가 넘어서야겠다는 비판적인 목표의식이 있었고요. 미국뿐 아니라 EU 및 ASEAN과의 관계, 중국 및 러시아와의 관계를 고루 발전시키는 균형외교를 해야겠다는 외교 철학을 가지고 있었죠. 그래서 대선을 준비할 때부터 대통령 취임 즉시 그쪽 지역에도 특사를 보내겠다는 구상을 하고 있었어요. 그 구상대로 미국, 일본, 중국, 러시아뿐 아니라 ASEAN과 EU에도 특사를 보냈습니다. 마침 당시 김희중 대주교님이 바티칸 가는 길에 자청해주셔서 바티칸에도 김희중 대주교님을 특사로 보냈고요. 그 특사 외교가 바티칸과의 외교관계를 크게 발전시킨 것은 물론 한반도 평화프로세스에 교황님과 바티칸의 지원을 받는 데 큰 도움이 됐죠.
최종건 : 균형외교가 왜 중요한가요? 균형외교가 한미동맹을 약화시키는 것처럼 왜곡하는 사람들도 있지 않습니까?
문재인 : 균형외교는 세계 모든 나라가 추구하는 것이에요. 특히 우리나라는 지정학적인 조건 때문에 균형외교가 중요합니다. 미·중·일·러 4대 강국에 둘러싸인 나라는 세계에서 우리나라밖에 없습니다. 그런 지정학적 조건 때문에 우리는 역사상 많은 외침을 겪었죠. 지금의 남북분단도 외세에 의해 초래된 것이고요. 그래서 우리에게 균형외교는 안보를 위해서나 경제를 위해서나 반드시 하지 않으면 안 되는 가장 중요한 국가 생존전략입니다. 그런데 과거 역사에서, 또한 근래에 와서도 편향된 이념에 사로잡힌 편중외교 또는 사대외교로 국난을 초래하곤 한 것은 참으로 통탄할 일이죠.
균형외교는 외교를 다변화해야 한다는 것뿐만 아니라, 경제 면에서도 중국 편중을 벗어나 포스트 중국을 찾아야 한다는 현실적인 필요 "때문에 매우 중요하 국정과제였습니다. 한편으로 매우 엄중했던 안보위기 또는 전쟁위기 상황을 평화 국면으로 전환시키는 평화프로세스를 성공시키기 위해서도 주변국들의 지지와 협조가 반드시 필요했죠.
균형외교라고 하면 보통 미국과 중국을 놓고 생각하는데, 더 확장할 필요가 있습니다. ASEAN 국가 가운데는 북한과 오랫동안 수교해온 나라가 여럿 있어서 그들의 적극적인 지지는 한반도 평화프로세스 추진에 큰 힘이 됩니다. 실제로 싱가포르와 베트남은 두 차례 북미정상회담의 장소를 제공해 큰 기여를 했죠. ARF(아세안지역안보포럼)는 남북한 유일하게 함께 참여하는 다자안보협의체이기도 합니다. 신북방국가들도 북한과 전통 우방국들입니다. 러시아는 6자회담 참가국이지요. 몽골도 비록 성사되지는 않았지만, 남북대화의 중재 역할을 자임하기도 했고, 북미정상회담 장소 제공을 제안하기도 하면서 적극적인 지지를 보내주었습니다. EU의 중요성은 말할 것도 없죠. 우리 정부의 균형외교는 중국과 러시아뿐 아니라 신남방국가, 신북방국가, EU를 포괄하는 것이라고 말할 수 있습니다.
우리가 최근에 엑스포 유치 경쟁에서 고배를 마셨죠. 국제기구의 수장이나 이사국이 되기 위해서 또는 UN 안보리 비상임이사국이 되거나 세계대회를 유치하려면 경쟁해야 하고 투표로 결정하게 되는데, 그때 든든한 지지 세력이 있다는 것이 굉장히 중요하거든요. 예를 들어 프랑스 같은 경우, 유럽 국가들뿐 아니라 아프리카 지역 국가들의 지지를 받기 때문에 늘 든든한 배경을 가지고 경쟁우위에 서게 되죠. 그런 것이 우리에게도 필요합니다. 친구 국가를 많이 확보하는 것, 그것이 국가의 경쟁력이 되니까요.
한편으로 우리가 남북관계 발전, 화해협력, 평화공존 정책에서 구상했던 것이 한반도가 갖는 특수한 지정학적 위치를 살려서 대륙과 해양을 잇는 교량국가가 되자는 것이었습니다. 우리가 말한 교량국가에는 또 하나의 의미가 있습니다. 개도국에서 선진국으로 발전한 경험을 살려 개도국들과 선진국들을 잇는 가교국가가 되자는 의미입니다.
그래서 북쪽으로는 북한을 거쳐 대륙으로 나아가기 위해서 북방국가들과 신북방정책을, 남쪽으로는 해양을 통해 ASEAN 및 인도와 신남방정책을 펼쳣어요. 그런 외교적인 큰 그림을 가지고 신남방정책과 신북방정책을 추진했다고 말씀드릴 수 있습니다. 이 같은 외교적인 상상력의 확대는 노태우 정부의 북방정책에서 영감을 받은 것이기도 해요.
p86
문재인 : 남북 간의 대화를 위해 필요 때문에 한미연합훈련을 연기하거나 유예하거나 한 것이 처음은 아니었습니다. 과거 노태우 정부 때 팀 스피릿 훈련을 중단한 것이 있었지요. 그 같은 적극적인 노력 덕분에 이후 남북합의의 출발점이 된 1991년 남북기본 합의서가 만들어질 수 있었죠.
그런 선례가 있었기 때문에 평창동계올림픽을 평화 올림픽으로 전환시키고 또 거기에 북한이 참가하게끔 유도하기 위해서는 적어도 그 기간만이라도 한미연합훈련을 유예해야 한다는 현실적인 필요가 대두됐죠. 그러나 다른 한편으로는 정례적이고 방어적인 성격의 훈련이기 때문에 정세 변동과 무관하게 중단 없이 계속돼야 한다는 인식이 한미 양국의 군 쪽에서 강했습니다.
청와대 참모들도 의견이 갈렸기 때문에 내가 결단을 해야 했어요. 정례적인 군사훈련을 함으로써 얻는 안보상의 이익도 중요하지만, 그보다는 평창올림픽을 평화 올림픽으로 대전환시키고 거기에 북한이 참가하게 해서, 2017년 1년간 지속됐던 전쟁위기를 불식하고 평화 국면으로 전환해내는 것이 안보 면에서 보더라도 훨씬 가치가 크다고 최종적으로 판단했던 거죠.
결국 한미연합훈련 유예 방침이 2018년 1월 1일 김정은 위원장의 유화적인 신년사부터 북한의 평창올림픽 참가까지 국면의 대전환을 이끌어내는 데 결정적인 역할을 했지요.
최종건 : 저는 당시 군비통제비서관이어서 훈련을 유예하자는 청와대 목소리의 한 부분이었는데요, 브룩스 당시 한미연합사 사령관도 모든 옵션을 다 검토하고 있었는데, 북한이 평창에 온 것은 연합훈련 유예가 결정적인 역할을 한 것으로 분석한다는 거예요. 그리고 그것이 한미연합사 사령관으로서 한반도 안보를 관리하는 데 매우 도움이 됐다고 평가했습니다. 군의 관점에서도 긴장관계가 고조되는 것보다 아무래도 평화프로세스가 진행되면 부담이 줄어드는 거죠. 그렇다고 해서 미국 사람들이 브룩스 사령관을 두고 온건파라고 얘기하진 않거든요. 오히려 더 강경한 군인인데 그런 군인들도 평화 혹은 평화적인 환경을 더 선호한다는 데 큰 의미가 있는 것 같아요.
문재인 : 그렇게 하기 위해서, 취임 직후부터 길게 내다보면서 안보와 국방을 중시하는 여러 행보를 계속해왔습니다. 취임 직후 한미연합사를 방문한다거나 우리 합동참모본부와 국방부를 방문하기도 하고, 트럼프 대통령 방한 때는 평택미군기지를 방문해 거기서 트럼프 대통령을 맞이하고 장병들과 함께 식사를 하기도 했죠. 현무미사일 발사시험을 참관하고 북한의 미사일 도발에 맞서 우리 역시 상응하는 미사일을 발사하고 공중폭격 훈련을 실시하는 등 강력하게 맞대응하기도 했습니다. 그러헤 안보를 중시함녀서 강한 국방, 강한 한미동맹, 강력한 연합방위 대세를 강조하는 행보를 축적해놓았기 때문에 연합훈련을 유예한다는 결단을 크게 저항받지 않고 할 수 있었다고 생각합니다.
최종건 ; 저도 자료를 찾아봤는데요, 대통령님의 당시 언어가 어느 보수 대통령보다 강했습니다. 이를테면 2017년 9월 3일 북한이 핵실험을 했습니다. 수소탄 시험에 완전 성공했다고 하고요. 그때 대통령님이 NSC 전체회의를 주관하셨는데, "심대하고 엄중한 도전이다. 무모하고 무책임하다. 선택은 북의 몫이다. 이런 식으로 가면 자멸이다"라고 강력하게 규탄하는 말씀을 하셨어요.
9월 15일 북한이 미사일 화성-12형을 발사합니다. 그때도 대통령님은 NSC 전체회의를 주관하면서 "북한이 핵과 미사일을 포기하는 것이 안보와 경제발전을 보장받는 진정한 길이다"라고 강조하시고, 다음 날 트럼프 대통령과 통화하셨습니다.
9월 17일 트럼프 대통령과의 통화에서 두 분 정상은 그간 미국이 취한 대북한 압박과 제재 정책 그리고 한미가 8월 7일 강원도 마차진에서 공동으로 미사일을 대응 발사한 것을 높이 평가했습니다. 동시에 북한은 곧 대화로 나와야 할 것이라는 강력한 메시지를 보도자료로 냈습니다.
이렇게 한미 간의 신뢰 구축과 연합훈련 유예 발표가 합쳐져서 북한이 나올 수 있는 길을 열어줬다고 저는 생각합니다. 돌이켜 보면, 한반도 평화프로세스를 사람들은 2018년에 시작한 것으로 보지만, 전쟁의 기운이 가장 높았던 시기에 시작된 거라는 생각이 듭니다.
p99. 혼밥 논란과 공공외교
최종건 : 한미 신뢰와 한중관계의 중요성에 대해서 말씀 나누고 있는데요, 이 표현을 아십니까? '문재인 대통령 아침세트' 베이징의 식당에 가면 문재인 대통령 아침세트가 있습니다. 그러니까 대통령님이 방중하셨을 때 일종의 공공외교 차원으로 베이징 시민이 일상적으로 가는 아침 식당에서 조찬을 하셨습니다. 그게 어이없게도 혼밥 논란으로 퍼집니다. 그런데 한 번도 거기에 대해서 말씀을 안 하셨거든요.
문재인 대통령이 베이징의 서민식당을 방문한 것은 친서민 이미지를 위한 계획적인 행보인데 조선이 이걸 비틀어서 혼밥으로 중국정부에게 홀대받았다며 매도하는 프레임을 잡았으며 이게 꼴통보수들을 통해서 널리 퍼지게 됨.
문재인 : 우리 스스로 수준을 떨어뜨리는 이야기지요. 예를 들면, 오바마 대통령이 베트남에 가서 쌀국숫집을 방문해 서민적인 음식을 먹고 하는 것은 베트남 국민에게 다가가 마음을 얻으려는 큰 성의 아닙니까? 외교는 상대 국가와 그 국민들의 마음을 얻는 것이거든요. 그런 면에서 보자면, 무슨 관광 명소를 방문하는 것보다 대중적인 시장을 찾아간다든지 또는 서민들의 식당을 방문해서 그들과 같은 음식을 먹는다든지 하는 행보만큼 효과적인 것이 없는거죠.
더구나 해외순방 때 오찬이나 만찬은 외교 일정 속에 들어갈 때가 많지만 아침은 원래 숙소에서 따로 먹는 건데, 그 시간에 서민 식당을 이용하는 비공식 외교를 한 것이지요. 서민식당 이용은 중국에서만 한 것이 아니라 이탈리아와 베트남 등에서도 여러 번 시도했어요. 그것이 현지에서 매우 좋은 평가를 받아서 지금도 중국 식당에서는 그때 내가 먹은 음식이 '문재인 대통령 아침세트'라는 메뉴로 만들어져 많이 팔리고 있고, 내가 앉았던 좌석도 표시해놓았다고 들었습니다. 최근에 중국 여행을 다녀온 분이 사진을 찍어 왔는데, 그 식당은 그 때문에 장사가 잘돼서 크게 확장했다고 하고, 4면 벽에 우리 일행이 식사하는 장면을 찍은 사진과 동영상을 게시했더군요. 그런데 그것을 혼밥 논란으로 만들어버리니까, 우리 외교를 굉장히 후지게 전락시키는 거죠. 기본적으로 공부가 부족하고 상상력이 부족한 것이라고 봅니다.
문재인 : 미국 중심 외교를 하다가 냉전이 무너지는 시기를 맞아 공산권과 수교하고 1991년에 남북한 UN 동시 가입을 한 노태우 정부의 북방정책은, 외교정책에서 그야말로 대전환을 한 겁니다. 북방정책을 통해서 우리 외교가 다변화된 것은 물론이고, 경제적인 면에서도 우리가 개방통상국가로 나아가면서 중진국으로 성장하는 계기가 됐죠. 당시 진보 진영에서는 남북한 UN 동시 가입이 분단을 고착화한다는 비판을 했는데, 그런 인식 때문에 국제법적으로 두 국가가 된 남북한의 관게에 대한 담론이 발전하지 못한 측면이 있었어요.
1991년 남북기본합의서 체결로 남북관계에 획기적 전환도 있었고요. 결국은 남북기본합의서가 2000년 6·15 남북공동선언, 2007년 10·4 남북정상선언, 2018년 판문점과 평양에서의 남북정상선언으로 계속 이어졌습니다. 아쉬운 것은, 북방정책을 통해서 남북한이 동시에 UN에 가입할 당시 우리는 소련, 중국, 동구권과 수교를 했지만, 북한은 미국이나 일본과 관계 정상화를 못한 것이죠. 당시 한국 정부가 견제를 많이 했다고 하는데, 그것이 사실이라면 멀리 보지 못했다는 아쉬움이 남습니다.
결국 그런 과정을 거쳐서 남북 간에 한국의 비교우위가 더 커지게 됐죠. 우리로서는 좋은 점이었지만, 한국의 비교우위가 커질수록 북한이 비대칭 전력인 핵과 미사일 개발로 나가게 된 측면이 있는 것이죠. 그렇게 보면 당시 북한도 미국, 일본과 수교해 관계를 정상화하도록 용인하고 이끌어주는 더 통 큰 정책을 펼쳤다면, 남북 관계가 크게 달라지지 않았을까 하는 아쉬움이 있습니다.
어쨋든 우리가 북한과 새로운 관계를 맺어서 경제협력을 할 수 있게 된다면, 그것이 한반도에 국한되지 않고 북한을 거쳐서 북방으로 이어질 수 있어요. 예를 들면 철도가 러시아나 중국의 철도와 이어져서 유럽까지 갈 수 있는 철도협력이나, 러시아의 천연가스가 배관을 통해서 북한을 거쳐 남쪽으로 내려오게 하는 에너지협력 등 우리의 경제영역이 북한을 지나 대륙으로, 북방으로 뻗어가는 그런 시대가 우리가 꿈꾸는 미래라고 생각합니다. EU의 역사처럼 동북아 철도공동체와 에너지공동체가 다자안보체제로 발전해가는 큰 구상을 할 수 있다면 얼마나 좋겠습니까?
역사적으로 볼 때, 우리가 고구려시대처럼 영토상으로는 아니더라도 우리의 경제력이나 문화가 대륙까지 미치는 시대를 다시 복원한다는 면에서도 가슴 뛰는 일이지요. 신북방정책의 대상 국가들, 특히 중앙아시아 국가들은 우리와 인종적으로 근친성이 있습니다. 500만 고려인이 살고 있기도 하고요. 무엇보다 한국과의 경제협력을 절실히 바라고 있어서, 우리의 경제성장 경험이나 모델을 공유할 수 나라들이죠.
1968년 비틀즈의 9번째 앨범인 '화이트 앨범White Album'(정식 명칭은 The Beatles 인데, 보통 팬들 사이에서는 화이트 앨범이라는 애칭으로 불리운다)의 수록곡이다.
화이트 앨범이라 불리우는 이유는 아래 그림처럼 앨범 커버가 아무런 장식이 없이 앨범의 제목 'The Beatles'만 자그맣게 써있는 하얀색의 커버로 나온데서 비롯된다.
속지도 멤버의 얼굴사진과 곡목 List만 적혀있는 미니멀리즘(1968년이니 그런 용어조차 있었는지 잘 모를 시대이다)이라 할만하다.
화이트앨범 이전 발표된 8번째 앨범이 '페퍼 상사의 고독한 클럽밴드(Sgt. Pepper's Lonely Hearts Club Band)'인데 이 앨범이 비틀즈의 발표 앨범 중 가장 화려한 표지였다. 아마도 그에 대한 반작용으로 그 다음 앨범은 이러한 형태로 나온것일 듯싶다.
화이트앨범의 주요 수록곡들은 8번째 앨범 이후 비틀즈 멤버가 인도로 여행을 갔던 시기에 만들어졌다. 그래서 그런지 앨범 자체의 완성도도 높고 장르의 폭이 넓어졌으며(포크, 록, 메탈, 발라드 등등 거의 모든 장르를 망라한다) 이전과는 좀 다른 분위기의 곡들로 채워졌다.
'I will'은 매카트니의 작사/작곡/노래이며, 조지 해리슨이 참여하지 않은 상태로 존 레논과 링고 스타만이 세션에 참여하여 3명으로 녹음되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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Who knows how long I've loved you You know I love you still Will I wait a lonely lifetime If you want me to, I will
당신을 얼마나 오랜동안 사랑했는지를 누가 알까요 내가 여전히 당신을 사랑한다는 걸 당신은 알아요 평생동안 외롭게 당신을 기다려야 할까요 당신이 원한다면, 난 그리 할 거에요.
For if I ever saw you I didn't catch your name But it never really mattered I will always feel the same
당신을 언젠가 다시 봤을 때 나는 당신의 이름을 기억하지 못했어요 하지만 그런건 전혀 문제가 되지 않았어요 나의 (설레는) 마음은 언제나 같을 테니까요
Love you forever and forever Love you with all my heart Love you whenever we're together Love you when we're apart
당신을 언제나 영원토록 사랑할거에요 나의 온 마음을 바쳐서 말이에요 당신을 언제나 사랑할거에요 우리가 함께 있을 때에도, 함께 있지 않을 때에도.
And when at last I find you Your song will fill the air Sing it loud so I can hear you Make it easy to be near you For the things you do endear you to me You know I will I will
결국에는 당신을 찾았죠 이 세상은 당신의 노래로 가득해요 더 크게 노래를 불러줘요, 내가 들을 수 있도록 그래서 내가 당신 곁에 쉬이 가까이 할 수 있게 당신이 하는 행동들에 나는 당신을 사랑해요 내가 사랑하리라는 걸 당신은 알죠 나는 항상 당신을 사랑할거에요.
터키는 식량자원이 풍부한 나라이며, 식량자급율은 95%로 거의 100%에 가깝다(한국은 45% 정도). 거의 모든 식량자원이 풍부하기 때문에 식품물가가 엄청나게 싸다.
위 사진에도 보이지만 토마토 가장 좋은게 킬로당 35리라로 우리돈으로 1,500원 정도이다. 요즘(2024년 5월) 한국 시장에서 괜찮은 토마토는 1kg에 5~6천 원 정도로 거래되니까 한국이 3~4배 비싸다.
터키의 식품물가에서 가장 중요한 것인 빵가격이다. 우리가 쌀이 주식인 것처럼 터키의 주식은 빵인데, 그 중에 바게트처럼 생긴 에크멕(ekmek)이라는 빵을 많이 먹는다. 이 빵은 터키 어디서나 파는데(빵가게에서도 팔지만 동네 구멍가게에서도 이 빵은 판다) 이 빵의 가격은 정부가 통제한다(정확히는 정부가 보조금을 주어 이 빵의 가격을 일정 수준 아래로 유지한다).
2009년 터키여행시 아른 주먹 2개만한 에크멕(무게표준은 250g 정도 된다고 한다)이 당시 우리돈으로 300원이었다. 현재는 이 빵도 많이 올라서 600원쯤 한다(우리 나라에서 이 정도 바게뜨는 4~5천 원쯤 한다. 가격은 대한민국이 훨씬 비싸지만 빵의 맛은 터키가 비교 불가 수준으로 맛있다). 빵, 요거트나 치즈와 같은 발효음식 그리고 과일 좋아하는 사람에겐 터키는 천국이나 마찬가지다.
터키 대통령 에르도안은 금리가 인플레를 유발한다고 생각했다고 함. 윤석열같은 과라고 보임.
그래서 미국이 열심히 금리를 올릴 때 튀르키예는 금리를 열심히 내렸고, 그 댓가는 높은 인플레이션에 의한 경제 폭망.
씨앗을 심으면 곡식을 맺고, 가축을 키우면 새끼를 낳는데서 이자의 개념이 나옴. 그래서 이자를 뜻하는 단어는 새끼, 출산등에서 나오게 됨.
이자(利子) 역시 자(子)가 새끼의 개념.
코란의 내용 중 돈놀이를 하지 말라는 구절이 있다. 구약에는 이자를 받지 말라는 정도는 아니지만 이자를 적게 받아라는 내용이 있어 돈놀이는 부정적으로 묘사하였다. 그래서 튀르키예 같은 이슬람 국가들은 전통적으로 금리를 올리는 것에 저항이 많다.
튀르키예는 미국등 주요국과 달리 금리를 내리는 결정을 통해 고인플레가 발생했고, 이로 인해 경제가 파탄나자 뒤늦게 기준금리를 45%까지 올렸지만 여전히 물가는 안정되지 않음.
그런 저물가, 저성장(디플레이션)의 시기가 팬더믹이 끝나면서 갑자기 고물가 상황으로 급변하게 됨.
그런 고물가 상황을 버티지 못해 이미 은퇴했던 노령세대마저 다시 일자리를 구하기 시작.
세상의 돈이 '물'이라면 금리는 물의 양을 조절하는 '밸브'입니다. 국가에 돈이 필요하면 금리를 낮춥니다. 시중에 많은 돈이 풀리죠.
경기가 과열되면 금리를 올려 시중의 돈을 걷어 들입니다.
3년여 전부터 피해자가 속출하기 시작하는 전세사기.
간단히 설명하면 사기꾼이 남의 명의(서울역 등에 있는 부랑아 등의 명의를 돈 몇푼 주고 빌리거나 혹은 사정이 어려운 사람에게 돈을 주고 바지 사장 역할을 맡긴 후)로 다주택등 임대주택 목적의 건물을 신축하거나 매입한 후 이 건물을 전세로 분양. 이와 동시에 세입자들이 확정일자를 받기 전에 은행등에 건물을 담보로 대출을 받아서 그 대출금으로 다시 다른 곳에 건물을 신축하거나 매입하고 또 같은 짓을 계속해서 반복.
나중에 세입자들은 등기부를 띄어보거나 1,2년 후 다른 곳으로 이사를 가려고 할 때 자신이 사는 전세가 깡통이라는 것을 알게되지만 바지 사장은 상환능력이 없고 배후의 사기꾼은 잠적한 상태라 피해를 구제받기가 매우 힘듬.
게다가 웬일인지 검찰은 이 조직적인 사기사건에 대해서 수사할 의지가 별로 없음. 그래서 피해자들의 자살이 속출하며 커다란 사회문제가 되고 있는데도 이 문제가 해결되지 않고 있음.
한겨레 기자로 최순실 국정농단 사태의 취재를 통해 박근혜 탄핵을 이끌어냈던 김의겸의 인생과 정치역정에 대한 자전적 내용.
한국 현대사의 중요한 순간들에 대한 이야기들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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p52. '오송회' 선생님들
불온한 기운이 학교 안에 퍼지고 있다고 했지만, 그건 우리의 착각이었을 것이다. 세상은 아랑곳하지 않았다. 전두환이 대통령으로 취임하며 제5공화국이 시작되었고, 학력고사는 점점 다가왔다.
무력하고 순진한 반항아들에게 세상은 너무나 견고하고 높은 성벽이었다. 우리는 성벽 안에 갇힌 채 탈출구를 찾는 수인만 같았다. 내 마음이 바로 그랬다. 그런 어느 순간 우리의 눈에 몇몇 선생님들의 모습이 들어오기 시작했다.
이광웅 선생님과 박정식 선생님이었다. 두 분은 국어를 가르쳤다. 그런데 두 분의 가르침은 남달랐고, 그래서 기이하게도 보였다.
어느 날 이광웅 선생님은 수업에 빈손으로 들어와 칠판에 '葛藤(갈등)'이라는 두 한자를 큼지막하게 썼다. 특유의 정갈하면서 미려한 글씨였다. 그러더니 이렇게 말했다.
"갈등은 참 여러 가지야. 마음속의 갈등, 나와 타인의 갈등, 나와 세상의 갈등, 오늘은 각자 자신이 가진 갈등에 대해 생각해 봅시다. 노트에 그걸 써보도록."
학력고사가 코앞에 다가왔는데, 이광웅 선생님은 그렇게 한 시간을 보냈다. 선생님의 마음속 의도는 알 수 없었지만, 그것은 우리가 단순히 입시 기계가 아니라 생각하는 주체임을 깨우쳐 주려는 것처럼 보였다. 목마른 자가 만난 샘물 같은 순간이었다.
왜소한 체구에 지극히 순한 눈빛을 지녔던 이광웅 선생님은 실은 남다른 감화력을 지닌 분이기도 했다. 우리 학교는 규율이 몹시 엄격하고 체벌이 많은 곳이었다. 사소한 잘못도 그냥 넘어가는 법이 없이 지도부 선생님들의 기합과 매질이 가해졌다. 이광웅 선생님은 전혀 달랐다.
어느 날 우리 반 아이들 몇이 짤짤이를 하다 이광웅 선생님에게 들켰다. 막 국어 시간이 시작된 참이었다.
선생님은 짤짤이를 하던 친구들을 앞으로 불러냈다.
"화장실에 가서 주전자에 물을 담고, 대야와 함께 가져와."
의아한 지시였다. 아무튼 아이들이 시킨 대로 했다. 그러자 선생님은 주전자를 들고 짤짤이를 하던 아이들의 손을 씻겨주었다.
"냄새 나는 손을 씻었으니 다들 자리로 돌아가 수업을 시작하자."
박정석 선생님은 차분한 음성과 풍부한 감성을 지닌 분이었다. 교과 진도가 끝나면 교과서에 나오지 않은 글을 읽어주곤 했다. 특히 김수영과 신동엽의 시를 낭송하는 목소리를 가히 압도적인 것이었다. 낭랑한 목소리에 실린 시의 의미와 울림이 굉장했다.
이슬비 오는 날, 종로 5가 서시오판 옆에서 낯선 소년이 나를 붙들고 동대문을 물었다.
밤 열한 시 반, 통금에 쫓기어 군상 속에서 죄 없이 크고 맑기만 한 그 소년의 눈동자와 내 도시락 보자기가 비에 젖고 있었다.
국민학교를 갓 나왔을까. 새로 사 신은 운동화 벗어 품고 그 소년의 등허리선 먼 길 떠나온 고구마가 흙 묻은 얼굴들을 맞부비며 저희끼리 비에 젖고 있었다. -신동엽, <종로5가> 중에서
그리고 김수영의 시 <어느 날 고궁을 나오면서>는 내게 깊은 공감을 불러일으켰다.
왜 나는 조그마한 일에만 분개하는가 저 왕궁 대신에 왕궁의 음탕 대신에 50원짜리 갈비가 기름 덩어리만 나왔다고 분개하고 옹졸하게 분개하고 설렁탕집 돼지 같은 주인년한테 욕을 하고 옹졸하게 욕을 하고
한 번 정정당당하게 붙잡혀간 소설가를 위해 언론의 자유를 요구하고 월남 파병에 반대하는 자유를 이행하지 못하고 20원을 받으며 세 번씩 네 번씩 찾아오는 야경꾼들만 증오하고 있는가
시인이기도 했던 이광웅 선생님이나 박정석 선생님이나 말하지 않고도 많은 말을 해준 분들이다.
그러던 어느 시험 기간이었다. 국어 시험에 '우리를 슬프게 하는 것들'을 주제로 자유롭게 글을 쓰라는 문제가 출제되었다. 그때 국어 시험이 그랬다. 서른개의 문제가 출제되는데, 마지막 문제는 늘 주제를 제시한 작문이었다.
'우리를 슬프게 하는 것들'은 당시 국어 교과서에 실려 있던 안톤 슈낙의 수필 제목이었다. 그런데 나를 비롯해 팍스 코리아나 친구들은 상의하지 않았는데도 답안에 사회와 교육에 대해 비판적인 의식을 담아냈다.
그 가운데 우리 일원인 김민수의 글이 가장 눈에 띄었나 보다. 박정식 선생님이 민수를 따로 불렀던 모양이다.
"어떻게 이런 답안을 쓴거야? 생각이 넓고 깊더라고. 기특하고 궁금해서 그런다."
선생님의 물음에 답하며 이런저런 대화를 나누는 중에 민수는 저절로 우리의 존재를 알리게 되었다. 그 뒤로 팍스 코리아나는 선생님의 관심을 받게 되었고, 어느 순간부터 우리는 이광웅 선생님이나 박정석 선생님 댁으로 놀러 다니기 시작했다.
이런저런 얘기를 나눴고, 때로는 막걸리도 한 모금씩 얻어 마셨다. 두 선생님의 격의 없고 개방적인 태도는 놀라운 것이었다. 사제 간의 사이가 친밀한 선후배 같았다. 늘 지적 갈증을 느꼈던 우리는 선생님들의 책꽂이에 있는 책들을 빌려서 돌려 읽을 수 있었다. 우리가 대학에 들어가서도 선생님과 제자의 친밀한 관계는 그대로 이어졌다.
p60. 야만의 시간
1982년, 우리가 대학 1학년 때의 여름이었다. 우리는 방학을 맞아 모처럼 고향에서 뭉쳤는데, 누군가 선생님께 빌린 책을 돌려줘야 한다고 했다. 시인 오장환의 <병든 서울>이었다. 해방 직후의 혼돈 속에서 느끼는 기쁨과 좌절과 분노, 그리고 희망의 의지를 담아낸 시집이었다.
병든 서울, 아름다운, 그리고 미칠 것 같은 나의 서울아 네 품에 아무리 춤추는 바보와 술취한 망종이 다시 끓어도 나는 또 보았다. 우리들 인민의 이름으로 씩씩한 새 나라를 세우려 힘쓰는 이들을…… 그리고 나는 외친다. 우리 모든 인민의 이름으로 우리네 인민의 공통된 행복을 위하여 우리들은 얼마나 이것을 바라는 것이냐. 아, 인민의 힘으로 되는 새 나라
-오장환, <병든 서울> 中 일부.
그 시집은 1946년에 출간된 데다 시인이 월북한 이력이 있어 당시로서는 시중에서 구할 수 없는 희귀본이었다. 더구나 우리가 가진 책은 선생님이 젊었을 때 시집을 손수 옮겨쓴 필사본 노트였으니, 어쩌면 더욱 소중한 것이었다. 반드시 돌려주어야 하기에 우리는 선생님 댁으로 가는 시외버스를 탔다. 그런데 우리는 오랜만에 만나 얘기 꽃을 피우느라 엉겁결에 시집 필사본을 버스 좌석에 놓고 내렸다.
그 버스의 안내양은 신고 정신이 투철했던 모양이다. 그 시집에 나오는 '인민'이며 '새 나라' 같은 표현은 시가 발표된 1945년에는 누구가 흔히 쓰는 단어였지만, 안내양의 눈에는 지극히 불온한 북한식 어휘로 보였을 것 같다. 안내양은 경찰서로 달려갔고, 시집은 '사건'을 만들어내는 결정적 단서로 쓰였다.
경찰은 필사본에서 단서를 발견하고 추적하여 책 주인인 이광웅 선생님을 찾아냈다. 경찰은 그 뒤 몇 달 동안 미행과 도청으로 선생님들의 일거수일투족을 감시했다. 그런 줄도 모르고 선생님들은 여전히 막걸릿집에 모여 시국을 한탄하고 전두환 정권을 비판했다.
마침내 경찰은 1982년 가을에 대대적인 검거에 들어갔고, 선생님들은 '일망타진'되었다. 그것이 이른바 '오송회'사건이다. 오송회라는 조직은 세상에 있지도 않았고, 경찰의 상상력이 만들어낸 허구의 이적단체였다. 그러나 오송회는 선생님들과 우리들의 삶을 전혀 다른 것으로 만들어 버렸다.
1982년의 쌀쌀한 늦가을, 전주의 대공 분실(지금의 전북경찰청 모래내 별관) 지하실에는 밤도 낮도 없이 신음이 이어졌다. 신음과 함게 고문경찰의 카랑카랑한 목소리가 울려 퍼졌다.
"너 간첩이지? 조직원을 다 불어. 불지 않으면 살아서 못 나갈 줄 알아. 너희 같은 빨갱이 새끼들 죽여도 우린 괜찮아. 죽ㅇ면 길가 아무데나 버리면 왜 죽었는지 아무도 몰라 임마!"
"그러면 제발 죽여주시오!"
박정석 선생님의 절규였다. 온몸이 발가벗겨진 채 통닭처럼 긴 막대에 두 손과 두 발이 묶여 거꾸로 매달린 채였다. 처음에는 고문 경찰들에게 "살려 달라"고 빌던 선생님이 나중에는 제발 죽여주기를 빈 것이다. 이 절규를 이광웅 선생님이과 다른 선생님들은 다시 자기에게 돌아올 순번을 기다리며 옆방에서 들어야만 했다.
오랜 세울이 흐른 뒤 박정석 선생님은 한 방송 인터뷰에서 이렇게 회고했다.
"그렇게 몇 시간이고 계속되는 신음을 듣고 있으면, 나는 자지러질 지경이 되는 거에요. 저러다 이광웅 형이 죽겠구나, 그런 처참한 생각이 절로 들었죠."
그런 무지막지한 폭력 앞에서는 없는 말도 지어내야 할 형편이었다. 국가보안법의 이적단체 조직과 간첩 행위로 기소된 '오송회' 사건은 그렇게 조작되었다. 문학을 논하고 시국을 한탄하던 선생님들의 술 모임은 어이없게도 자생적인 간첩 조직이 되어버린 것이다.
1982년 5월에 이광웅과 박정석 선생님들 비롯한 다섯 선생님들은 5.18을 맞아 학교 뒷산에 올랐다. 그곳 소나무 아래서 막걸리 한 병을 놓고 조촐한 위령제를 지냈다. 그렇게 다섯이 소나무 아래서 광주 희생자 위령제를 지낸 것에서 '오송회'라는 조직명이 붙여졌다.
선생님들이 잡혀가고 머잖아 우리 팍스 코리아나 친구들도 차례차례 경찰로 끌려가거나 불려갔다. 우리는 으름장과 주먹다짐과 발길질을 받으며 선생님들의 '이적행위'를 낱낱이 일러바쳐야 했다.
일러바친다는 표현은 온당하지 않다. 그것은 있지도 않은 이적행위를 만들어내는 과정이었다. 앞서 친구의 진술서에 다음 친구가 뭔가를 덧붙이고, 그다음 친구가 다시금 뭔가를 덧붙이는 것이다. 그 과정에서 심문하는 경찰이 제시하는 말이 진술로 첨가되기도 했다. 경찰이 구상한 시나리오가 그런 식으로 완성되었다.
그런데 이듬해 5월 전주지방법원에서 열린 1심 재판에서 뜻밖의 일이 벌어졌다. '오송회' 사건으로 기소된 아홉 분의 선생님 가운데 여섯 분이 선고유예로 풀려난 것이다. 그 엄혹한 5공화국 초기에도 용기 있는 부장판사 이보환이 있었던 거다. 풀려나지 못한 세 분 선생님은 2심에 기대를 걸고 항소했다.
하지만 7월에 열린 광주고등법원의 항소심 법정은 아비규환이 되고 말았다. '주범' 이광웅 7년, 박정석 5년, 전성원 3년으로 형량이 높아졌을 뿐 아니라, 선고유예를 받았던 여섯 분이 모두 법정 구속된 것이다. 가족들은 땅을 치며 통곡했고, 허공을 향해 울부짖었다.
항소심 재판관 이재화의 이름을 잊을 수 없다. 그는 판결문에서 선생님들을 향해 "잘못을 뉘우치는 기색 없이 변명만 한다"라고 했다. 그리고 1심과 2심 사이에 도대체 무슨 일이 있었던 걸까. 그 내막은 20여 년 뒤, 박철언의 회고록 <바른 역사를 위한 증언>을 통해 드러난다.
1983년 어느 날, 전두환이 청와대로 대법원장과 대법원 판사들을 불러 모아 만찬을 열었다. 그 자리에서 전두환은 사회나 정치의 불안 요소에 과감하게 대처할 것을 주문했다. 그런데 특별히 '오송회' 사건을 예로 들며 "빨갱이를 무죄로 하는 것은 안 될 일"이라고 말했다는 것이다.
전두환의 이 언급이 '오송회' 사건의 1심과 2심 결과를 완전히 다르게 만들어 버린 것이다.
그로부터 26년이 흐른 2008년 '오송회' 사건은 재심을 통해 모두 무죄를 선고받았고, 선생님들은 뒤늦은 명예를 회복했다. 재심의 주심이었던 이한주 부장판사는 판결문에서 이렇게 적었다.
법원에 가면 진실이 밝혀지겠지 하는 기대감이 무너졌을 때 여러분이 느꼈을 좌절감과 사법부에 대한 원망, 억울한 옥살이로 인한 심적 고통 등에 대해 많은 고민을 했다. 그동안의 고통에 대해 법원을 대신해 머리 숙여 사죄드린다.
하지만 육신과 영혼이 찢긴 상처가 어떻게 아물겠는가. 그리고 이날 '주범' 이광웅 선생님은 그 자리에 없었다. 사건을 겪고 징역을 사는 동안 몸과 마음이 피폐해진 선생님은 병을 얻어 1992년에 벌써 세상을 뜨신 지 오래였다.
그리고 다른 선생님들은 이미 연로해지셨다. 청춘을 돌려받을 방법은 없다. 그중 조성용 선생님은 2022년 여름에 세상을 떠났다. 또한 선생님의 자녀들은 민감한 성장기에 숱한 상처를 받아서 그 상흔이 이러저러한 형태로 여전히 남아 있다. 법조계의 유명한 말처럼, 지연된 정의는 정의가 아니다.
나는 가끔 금강 하구를 찾아간다. 그곳 둑 근처에는 이광웅 선생님의 시비가 소나무와 함께 서 있다. 선생님을 아끼고 따른던 문인들과 제자들이 중심이 되어 1998년에 세운 것이다. 바윗돌에는 이광웅 선생님의 육필로 시가 새겨져 있다.
이 땅에서 진짜 술꾼이 되려거든 목숨을 걸고 술을 마셔야 한다
이 땅에서 참된 연애를 하려거든 목숨을 걸고 연애를 해야 한다
이 땅에서 좋은 선생이 되려거든 목숨을 걸고 교단에 서야 한다
뭐든지 진짜가 되려거든 목숨을 걸고 목숨을 걸고... - 이광웅, <목숨을 걸고>
p208. 아베의 오래된 꿈
2018년 2월 8일, 문재인 대통령과 아베 일본 총리의 정상회담이 열렸다. 평창 동계올림픽 개막식 참석을 위해 아베 총리가 방한한 것이다. 나로서는 아베를 실물로 처음 보는 자리였다. 아니, 문재인 정부에서 한일 정상회담 자체가 처음이었다.
한일 정상의 첫 회담이니만큼 한일 관계에 조금이나마 진전이 있기를 바랐다. 그러나 그런 기대는 처음부터 두 동강이 나고 말았다. 아베 총리는 회담장의 자리에 앉자 노트를 꺼내들고 일방적으로 읽어나갔다. 두 정상의 의자는 서로를 비스듬히 앉도록 배치가 됐는데, 그는 문재인 대통령에게 눈길 한 번 마주치지 않았다.
아베 총리로서는 두 가지가 불만이었다. 일본군 위안부 피해자 문제, 그리고 북한 문제였다. 문재인 대통령은 경직되고 고압적인 태도로 일관하는 아베 총리의 옆얼굴을 빤히 바라보았다. 답답하다는 건지 한심하다는 건지 모를 표정이었다.
아베의 말이 끝나고 문재인 대통령의 반격이 시작되었다. 대통령은 때로 목소리를 높이기도 하고, 때로 하소연하기도 했다. 두 사람의 주장은 끝내 평행선을 달렸다.
정상회담이 진행되는 동안 나는 내용을 빠르게 받아적으면서도 걱정이 되었다. 이 회담 내용을 그대로 공개할 수는 없었다. 그날은 평창 동계올림픽을 여는 축제의 날이다. 불과 몇 시간 뒤 밤 8시에 개막식이 열린다. 북한에서 김영남 최고인민회의 상임위원장과 김여정 부부장 등 손님이 내려온 날이다. 남북 관계가 해빙되고, 북미 대화가 시작되기를 학수고대하는 날이다.
그런데 두 정상의 대화 내용을 그대로 언론에 전달했다가는 축제에 찬물을 끼얹게 될 것 같았다. 회담을 마친 후, 나는 외교부 관계자를 찾았다. 어디까지 언론에 공개할지 상의하고 싶었다. 그러나 일본통이라는 외교부 관계자도 남감해했다.
"글쎄요."
그러나 그런 고민은 오래가지 않았다. 일본 쪽이 먼저 아베 총리의 발언을 일본 언론에 공개한 것이다. 그러면 우리 쪽은 그에 대응하여 우리 대통령의 발언을 소개하는 것으로 균형을 맞추면 될 것 같았다.
다음 날 우리 언론은 '문 대통령-아베 위안부 합의 정면 충돌'이라는 식으로 보도를 내보냈다. 북한과 관련한 두 정상의 논쟁은 위안부문제에 비해 상대적으로 적게 보도되었다. 그건 대변인인 내가 최대한 둥글둥글하게 두 정상으 대화를 소개했기 때문이다. 날카롭게 대립한 부분은 깍아버리고 브리핑을 한 결과였다.
그런데 그건 대통령의 뜻이 아니었다. 다음 날 문재인 대통령과의 티타임 때, 대통령이 말했다.
"오늘 아침 신문들을 보니, 북한 문제와 관련한 내용이 없더군요. 추가로 브리핑하세요. 일본 말만 일방적으로 보도되고, 우리는 주권 국가인데 아무런 응대도 하지 못한 것으로 비치면 안 되죠."
말은 부드러웠지만, 사실상 질책이었다. 그래서 9일의 정상회담 내용 중 중요한 부분을 하루가 지나서 다시 추가로 브리핑해야 했다.
9일 정상회담 때 아베 총리가 한 말은 이러했다.
"북한의 비핵화에는 진지한 의사와 구체적인 행동이 필요합니다. 한미 합동 군사훈련을 연기할 단계가 아닙니다. 한미 합동 군사훈련은 예정대로 진행해야 합니다. 북한이 절박한 위기를 직시할 수 있도록 최대한의 압박을 가해야 합니다. 흔들지 않도록 해야 합니다."
이에 대해 우리 대통령이 반박했다.
"한미 간 군사훈련을 연기하지 말라는 총리의 말은 북한의 비핵화가 진전될 때까지 아무것도 하지 말라는 말로도 이해하게 됩니다. 이는 주권과 내정에 관한 것으로, 이를 직접 거론하는 것은 곤란합니다."
이런 식의 대화가 오고 갈 때, 두 정상의 눈에서는 불꽃이 튀기는 듯했다.
사실 한일 정상회담 직전에 문재인 대통령과 트럼프 미국 대통령은 정상 간 통화를 하고, 평창 동계올림픽 기간에는 북한이 민감하게 반응하는 한 군사훈련을 하지 않기로 합의했다. 그런데 아베가 이를 무시하고 한미 합동 군사훈련을 계속하라고 압박을 가한 것이다.
아베의 이런 무례함은 그날 저녁에도 이어졌다. 9일 저녁에는 만찬이 준비되어 있었다. 만찬장의 헤드테이블에는 마이크 펜스 미국 부통령과 아베 일본 총리, 그리고 김영남 북한 최고인민회의 상임위원장이 같이 앉게 배치되어 있었다.
다들 일찍 만찬장에 들어와 자리에 앉았는데, 아베 총리와 펜스 부통령이 나타나지 않았다. 둘이서 별도로 회담을 한다는 것이었다. 그들을 기다리던 문재인 대통령은 할 수 없다는 듯이 만찬을 시작했다.
내 마음이 다급해졌다. 만찬장 입구에서 서성이는 중에 아베 총리와 펜스 부통령이 나타났다. 그때라도 만찬장에 들어올 줄 알았는데, 둘은 엉뚱하게도 방향을 틀어 다른 방으로 들어가는 게 아닌가.
그들을 따라가 보았다. 둘은 그 방에서 사진을 찍으며 시간을 흘려보냈다. 문재인 대통령이 그 방으로 들어와 두 사람에게 만찬장으로 가자고 권유했다. 그제야 아베 총리와 펜스 부통령은 마지못한 듯 만찬장으로 들어갔다. 이미 40여 분 정도가 흐른 뒤였다.
하지만 펜스 부통령은 헤드테이블의 지정된 자리에 앉지 않고 몇몇 다른 나라의 정상과 선 채로 악수하고는 5분여 만에 빠져나갔다. 아베 총리는 김영남 상임위원장과 잠시 헤드테이블에 앉았으나 눈길도 마주치지 않으려고 했다.
일본은 한반도 평화를 바라지 않는 것인가. 그리고 그 이유는 무엇일까. 여러가지를 생각하게 만드는 장면이었다.
그런 의문은 석 달 뒤 어느 정도 풀렸다. 2018년 5월 9일, 일본 총리 공관에서 한일 정상회담이 열렸다. 일본 쪽은 '문재인 대통령 취임 1주년을 축하드립니다'라는 카드가 꽂힌 딸기 케이크도 준비하는 등 화기애애하게 시작되었다.
하지만 여전히 두 정상의 의견 차이는 좁혀지지 않았다. 아베 총리의 말 중에서 확 귀에 들어오는 말이 있었다.
"한반도 평화 체제가 구축되면 한국에 있는 유엔군 사령부가 폐지되는 거 아닙니까? 주한 미군의 역할, 그리고 동아시아의 미군 존재에도 영향을 미칠 것입니다."
아베 총리는 일본의 재무장과 군비 증강을 일관되게 추진한 인물이다. 중국은 당연히 이를 동아시아의 군사적 긴장을 악화시키는 행동이라 비판하고 나섰다. 한국도 일본의 군국주의 망령이 부활하려는 전조 증상이라며 비판에 가세하는 중이었다.
아베 총리로서는 한반도에 부는 평화의 훈풍이 군사 대국을 향한 자신의 구상에 방해가 된다고 보았다. 그래서 기를 쓰고 남북과 북미 사이의 평화협상 진전에 찬물을 끼얹었던 것이다.
아베 총리는 퇴임 후 2022년 7월 암살당했지만, 한반도 평화 정착에 반대하는 그의 염원은 사후에 이어지고 있다. 그의 뜻은 지금 한국의 윤석열 정부를 통해 드디어 실현되려는 듯하다. 미국을 중심으로 하는 한미일 삼각동맹은 아베가 오래도록 꿈꾸던 것이다.
여담이지만, 청와대 대변인을 하면서 가장 안타까웠던 건 정상회담 동안의 식사와 만찬이었다. 그런 자리에서는 응당 그 나라의 최고 음식이 선보인다. 그러나 대변인은 잿밥에 신경 쓸 처지가 못 된다. 정상의 대화 내용을 적느라 오른손을 바쁘게 움직여야 하기 때문이다. 그래도 일부 국가의 음식은 왼손으로 포크를 사용할 수 있어서 눈치 봐가며 먹을 수 있다.
그러나 최악의 상황은 일본에서 열린 한일 정상회담이었다. 일본 음식은 젓가락을 사용하니 왼손으로는 도저히 어떻게 해볼 도리가 없다. 점잖은 자리에서 손으로 먹을 수도 없는 일 아닌가. 그래서 아베 총리의 공관에서는 점심을 먹지 못하고 쫄쫄 굶고 나왔다.
문재인 대통령도 그럴 경우가 많았다. 대통령은 받아적을 일은 없지만 온 정성을 다해 대화에 집중한다. 한마디라도 더 듣고 더 말하려고 식사를 건성으로 하는 경우가 많았다. 진수성찬에 손도 못 대고 밤 늦게 숙소로 돌아와서 컵라면을 찾고는 했다.
p215. 진심의 사람, 문재인
2018년 2월의 어느 날 아침, 문재인 대통령은 한국 GM 이 군산 공장을 폐쇄하기로 했다는 소식을 보고 받았다. 분위기가 어두웠다. 나는 군산 사람이니 마음이 무거운 게 당연했다. 그런데 대통령의 표정은 나보다 훨씬 어두운 게 아닌가.
한참 침묵이 흐른 뒤 대통령은 불쑥 이렇게 말했다.
"내일이라도 당장 군산에 내려갑시다." "네?"
모두가 깜짝 놀랐다. 임종석 비서실장이 나섰다.
"안 됩니다. 대통령께서 직접 가시게 되면 군산 시민들은 무슨 해결책이나 선물을 들도 오는 줄 알고 기대할 터인데, 지금 아무것도 준비된 게 없습니다."
대통령은 고집을 피웠다.
"꼭 뭔가를 들고 가야 합니까? 빈손으로 가면 안 됩니까? 그냥 내려가서 군산 시민들을 뵙고 껴안아주면 안 됩니까?"
결국 그날 회의는 다른 '합리적 대안'을 찾는 걸로 마무리를 지었다. 군산 지역을 '산업위기대응특별지역'으로 지정한 것이다.
나는 그 내용을 기자들에게 브리핑하고 나오면서도 이런 의문이 들었다.
'대통령은 왜 그렇게 군산 문제에 감상적인 태도를 보였을까?'
그 뒤 대통령을 지켜보며 나름대로 찾아낸 이유는 두 가지다.
첫째로는, 후보 시절 현대중공업 군산조선소를 정상화하겠다고 약속했는데 못 지켰고, 거기에 더해 한국GM 군산공장마저 문을 닫는다고 하니 책임감이 마음을 짓누른 것이다. 둘째로는, 조선업계의 불황으로 자신의 고향 거제가 힘든 걸 누구보다 잘 아는 터라, 같은 처지인 군산이 남의 일로 여겨지지 않은 것이다.
그래서일까, 문재인 대통령은 재임 기간에 유독 군산을 많이 찾았는데, 중소 규모의 도시로는 이례적으로 네 번이나 방문했다.
문재인의 진심은 국내뿐만 아니라 해외에서도 우러나왔다.
대통령을 수행하여 아랍에미리트UAE를 방문했다가 사막을 체험한 적이 있다. 대통령은 차를 타고 20분가량 달려가 사막 한복판에 섰다.
함께 간 아랍에미리트 장관이 설명했다.
"모래가 아주 뜨겁습니다. 하지만 우리 아랍인은 여길 맨발로 걱기도 합니다. 건강에 좋다고요."
장관은 그저 지나가는 말로 툭 던진 것인데, 문재인 대통령이 눈을 반짝이며 바로 이 말을 낚아챘다.
"아, 그래요? 그렇다면 저도 한번 해보죠."
대통령은 신발과 양말을 벗고 뜨거운 모래 위를 껑충껑충 뛰어다녔다.
"앗, 뜨거워. 아, 정말 뜨겁네요."
그렇게 소리를 지르면서도 대통령은 왼발과 오른발을 바꿔가며 호들갑스럽게 모래밭을 돌아다녔다. 그걸 지켜보고 있던 김정숙 여사가 만류했다.
"아휴, 발 데어요. 그만하세요."
대통령은 아랑곳하지 않았다. 아랍에미리트 장관은 허리가 휘도록 웃으며 박수를 쳐댔다.
평소에 과묵하고 매사에 진지한 문재인 대통령이다. 그가 이토록 개구쟁이 같은 모습을 연출한 이유는 무얼까. 나는 나름대로 짐작이 갔다.
'온통 사막인 나라, 그래서 자랑할 풍경이라곤 모래밭뿐인 나라. 그런 나라가 모래에 애정과 자긍심을 느낀다면 기꺼이 호응해주리라.'
이런 심정이지 않았을까.
문재인이라는 사람을 설명하려면, 노무현을 빼놓을 수 없다. 문재인 대통령은 가끔 참모들에게 '번개'를 쳐서 점심을 함께했다. 그런 뒤에는 꼭 청와대 경내를 한 바퀴 산책했다.
산책 코스는 거의 정해져 있어서 청와대를 둘러싼 돌담 안쪽을 끼고 돌았다. 그런데 어느 날인가는 돌담 밖으로 멀리 나간 적이 있다. 북악산으로 바로 올라가는 코스였다. 대통령은 주말에 청와대 경내를 산책하다 더 땀을 흘리고 싶으면 올라가는 코스라고 설명했다. 조금 올라가 보니 쉴 수 있는 정자가 있고 주변이 잘 정돈된 공간이 나타났다.
"이 나무가 어떤 나무인지 압니까?"
대통령은 잘생긴 아름드리나무를 가리키며 물었다. 수형이 웅장하고 가지가 옆으로 쭉쭉 퍼진 게 주변을 압도하는 모양새였다. 대답이 나오지 않았고, 대통령이 설명했다.
"이건 김대중 대통령께서 심은 나무죠."
그러더니 '김대중 나무' 맞은편에 있는 나무를 가리켰다.
"그러면 이 나무는 아나요?"
그 나무는 앞의 나무와는 달리 몸통이 얄브스름하고 가지가 위쪽으로만 뻗어 올라가며 자라는 나무였다. 역시 대꾸하는 이가 없었고, 대통령의 설명이 이어졌다.
"김대중 대통령께서 심은 나무를 방해하지 않으려고 일부러 위로만 자라고 옆으로는 퍼지지 않는 나무를 골라 심은 겁니다. 노무현 대통령이요."
이 말을 하고 문재인 대통령은 한참 침묵을 지키다 이렇게 덧붙였다.
"노무현 대통령의 사람 됨됨이가 드러나는 나무죠."
문재인은 노무현 대통령의 사람 됨됨이를 말했으나, 나는 이 말이 문재인의 됨됨이를 나타내는 말로도 들렸다.
문재인 대통령 퇴임은 우리 같은 옛 수하들에게 어쩌면 큰 선물이기도 했다. 재임 중에는 만나기가 어려웠지만, 퇴임 후 평산 마을로 내려간 뒤에는 마음만 먹으면 만날 수 있기 때문이다.
문재인 대통령과 함께 통도사를 병풍처럼 감싸고 있는 영축산 한자락을 오른 적이 있다. 윤도한 전 국민소통수석비서관, 더불어민주당의 최강욱 의원과 함께했다. 우리는 헉헉대며 산을 오르다 너른 바위를 만나 겨우 숨을 고를 시간을 가졌다.
"대통령님께서는 히말라야도 다녀오셨으니 이 정도는 아무것도 아니시죠?"
우리 중 누군가의 물음에 대통령은 이렇게 답했다.
"아닙니다. 높은 산은 높은 산대로, 낮은 산은 낮은 산대로 다 힘이 듭니다. 산이 높으면 우리 몸이 미리 온 기운을 끌어올려 쓰고 산이 낮으면 우리 몸이 아예 긴장을 풀어버립니다. 그래서 높낮이와 관계없이 몸이 힘든 건 다 마찬가지입니다."
우리 인생도 그런 것 같았다. 지위가 높으나 낮으나 일이 잘 풀릴 때나 꼬일 때나, 어렵고 힘든 건 매한가지인 듯싶다. 어려우면 어려운대로, 쉬우면 쉬운 대로 흔들리지 않고 여여如如하게 살아가라는 뜻으로, 대통령의 말씀을 받아들였다. 이런 마음가짐은 지금의 시국을 헤쳐가는 우리의 자세에도 적용될 수 있을 것 같다. 올라갈 때도 내려갈 때도 있겠지만, 마음의 동요 없이 "꾸준하게 전진하는 것 말이다.
대통령 말씀을 듣다보니, 그 내용과 수염을 기른 풍모가 참 잘 어울렸다. 처음에는 이발사가 수염을 다듬어줬는데, 이제는 자신이 배워서 직접 다 한다고 한다. 이발사도 그 솜씨에 놀랐다고, 대통령을 보좌하는 오종식 비서관이 귀띔해줬다. 그리고 이발사가 이런 말도 했다고 한다.
"처음에는 대통령님 머리결이 아주 푸석푸석했습니다. 그런데 이제는 결도 고와지고 윤기가 나기 시작합니다."
대통령으로 재임하던 동안의 힘겨움이 머리카락에도 나타났던 거라고 짐작했다.
문재인 대통령의 뒤꿈치를 보며 산을 오르다 잠시 한눈을 팔면, 대통령은 저만치 바람처럼 가 있고는 했다. 대통령의 건강을 확인하고 지혜를 얻어 와서 뿌듯한 산행이었다. 앞으로도 오래오래 그렇게 문재인 대통령을 만날 수 있기를 소망한다.
기후변화를 막기 위한 노력과 그 장애물. 궁극적으로 이로 인해 야기될 식량위기에 대처하는 우리의 현재, 그리고 앞으로 나가야 할 방향.
이미 정해진 미래인 기후위기와 식량위기에 준비하기 위해 우리가 알아야 할 것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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p20
1914년 8월 2일 독일이 러시아에 전쟁을 선포한 바로 다음 날, 프란츠 카프카는 체코 프라하에서 일기장에 다음과 같이 적었다.
독일이 러시아에 전쟁을 선포했다. 오후 수영 강습소.
후세의 역사가들이 역사적인 사건으로 평가하는 일도 동시개 최고의 지성인에게는 그저 그런 일상으로 인식된다. 수백만 명이 죽게 될 전쟁과 오후의 수영 강습은 같은 비중으로 취급된다.
역사가 일어나는 순간에도 인간은 현재를 체험한다. 그 당시의 사람들도 역사적 사건을 중대하게 인식했을 것이라는 우리의 생각과는 달리 시대의 비극조차 사후에나 이해된다.
p22
아직도 기후가 변했느냐고 묻는 사람들이 가끔 있다. 물론 그렇게 용기 있는 사람이 많지는 않다는 데 그나마 위안을 느끼낟. 그리고 기후가 정말 변할 것인지를 묻는다. 하지만 논점이 틀렸다. 지금의 기후는 30년 전 부모들이 젊었던 시절의 기후와는 전혀 다르다. 앞으로 30년은 지금까지 인류가 살아보지 못한 전혀 다른 지구를 경험할 것이다. 우리의 문제는 그 변화를 언제 깨달을 것인가이다. 이미 강원도 철원에서 사과가 재배되고 제주도의 한라봉은 남해안까지 올랐왔다.
이미 변해버린 것을 부여잡고 변화가 언제 올지를 묻는 사람에게 변했다는 것을 이해시키기는 쉽지 않다. <기후전쟁>의 저자 하랄트 벨처는 이를 '지시 프레임reference frame'의 관점에서 설명한다.
미디어나 주변을 통해 더 자주 특정 정보를 접하게 되면 사람들은 비정상적인 상황을 정상적인 것처럼 여기게 되는 '바탕 교체baseline shift'현상을 겪게 된다. '바탕 교체'는 나란히 달리는 기차를 바라보면서 마치 정지해 있다고 느끼는 것처럼, 무엇이 옳고 그른지 방향을 안내하는 '지시 프레임'을 변화시킨다.
기후변화만 그런 것도 아니다. 가습기 살균제에서도 똑같은 일이 있었다. 가습기 살균제가 위해하다는 정부 발표는 몇몇 학자들의 불완전한 연구 결과로 희석되었다. 언론은 기계적 중립을 지킨다. 사실과 거짓 앞에서 진실의 편에 서기보다는 기계적 중립을 선택한다. 논란은 커져가고 결국 지루한 법적 공방을 거쳐 사실이 인정될 때까지 피해는 확산된다. 미국의 담배 소송에서 벌어졌던 일이고 우리나라의 가습기 살균제 사건에서 벌어졌던 일이다.
p25
나는 IPCC 제4차 보고서AR4를 체택하는 회의에 참석한 적이 있다. 처음에는 과학적인 결과를 놓고 치열하게 토론하는 장면을 상상했다. 그런데 실제 회의장 분위기는 예상과는 너무 달랐다. 회의에서는 과학자들이 제출한 요약 보고서를 회의장 앞 스크린에 띄우고 단어 하나, 문장 하나하나를 분해하면서 과학적인 증거가 있는지를 따져 물었다. 어떤 날은 조동사 하나를 선택하는 데 하루를 보내기도 했다. 예를 들면, 과학자들이 쓴 "기후 변화가 영향을 미쳤다"라는 표현은 협상가들의 지루한 다툼을 거치면서 '기후변화가 영향을 미쳤을 가능성이 약간 있다"라는 정도로 완화되었다. "화석연료가 원인이다"라는 문장은 "온실가스 증가가 영향을 미쳤을 수도 있다"라는 정도로 바뀌었다. 가능하면 화석연료가 직접적으로 언급되는 것을 필사적으로 막았다. 주로 러시아, 중국 그리고 미국의 대표들이 기후변화가 영향은 있지만 아직은 불확실하다는 입장을 고수했다. 유럽 대표단는 과학자들의 표현을 그대로 남기기 위해 노력했지만 성공적이지는 못했다 . 이런 논쟁이 일주일 내내 아침부터 새벽까지 이어졌다. 그렇게 IPCC는 과학자의 모임이지만 정부 간 협의체로 불리고, 요약본 한 문장 한 문장은 국가간 협약만큼의 힘을 갖는다.
p26
IPCC는 우리가 어떤 노력을 하고 어떤 탄소중립 시나리오를 적용하더라도, 늦어도 2040년에는 1.5도까지 올라갈 것이라고 결론을 내렸다. 이는 3년 전의 'IPCC 특별보고서'에 비해 그 시기가 10 년 앞당겨졌다. 어쩌면 2030년에 FIFA 월드컵이 개최디ㅗ기 전에 이미 1.5도의 미래를 맞이할 수도 있다. 그리고 전 인류가 열심히 노력하면 2100년 정도에는 다시 사람이 살 만한 지구가 될 수 있다는 평가 결과를 제시했다.
이 뉴스를 훑어보면서 어쩌면 올해가 내가 살아갈 시간 중 가장 시원하 해였을 수도 있겠구나 하는 생각이 스쳐 지나갔다.
며칠 후 요약본의 원문을 구해 읽었다. 첫 느낌은 "봐, 우리 과학자들이 하는 말이 맞지!"라고 말하는 듯했다. 제6차 보고서에서는 이전 보고서의 기후 모델에서 예측한 그대로 지구 평균기온이 올라갔다는 것을 여러 번 강조했다. 그리고 이전 보고서서 했던 처럼 다시 한번 경고했다.
"인간의 영향이 대기, 바다, 육지를 온난화시켰다는 것은 명백하다. 대기,해양, 빙권 그리고 생물권에 광범위하고 급격한 변화가 생겼다. 기후 시스템의 여러 측면을 고려하더라도최근에 벌어진 기후 시스템 전반에서 일어난 변화의 규모는 수 세기에서 수천 년에 걸쳐 전례가 없는 수준이다.
p31
육지와 해양은 인간이 배출한 온실가스의 56%만 흡수했고, 이 비율은 거의 변하지 않았다. 인간은 자연이 흡수할 수 있는 이산화탄소의 거의 2배를 배출하고 있다.
이렇게 배출된 온실가스는 지구의 평균기온을 1.4도까지 올렸다. 그렇지만 화석연료의 연소 중에 배출된 미세먼지와 매연 등 에어로졸이 햇볕을 차단해 0.3도만큼 지구의 온도를 떨어뜨려 결과적으로 1.1도만큼 상승했다.
p32
기후 과학자들은 가장 이상적으로 온실가스를 줄이는 경우부터 재생에너지 중심으로 에너지를 바꾸고 친환경적인 경제 발전 경로를 택하는 경우 등 여러 가지 기후변화 대응 노력을 가정해 미래 기후를 예측한다. 우리는 이것을 '기후변화 시나리오'라고 부른다. 기후변화 시나리오는 이상적인 경로부터 현재처럼 화석연료를 사용하는 경로까지 다섯 개의 시나리오로 미래를 예측한다. 그중 현실적으로 달성하기 불가능한 가장 이상적인 경제 발전 경로(SSPI-1.9)를 전세계가 택한 경우에도 100년 전(1850~1900)과 비교해 100년 후(2081~2100)에는 1~1.8도(최적 추정 1.4도)가 증가할 것으로 추정했다. 다섯 개 시나리오 중 가장 현실적인 목표로 생각되는 중간 경로(SSP2-4.5)를 택했을 때, 2.1~3.5도(최적 추정 2.7도)가 상승한다. 이미 1.5도의 목표를 넘어설 뿐만 아니라 파리협약에서 합의한 파국을 막기 위한 2도도 가뿐히 넘는다. 가장 높은 시나리오 SSP5-8.5의 경우에는 3.3~5.7도(최적 추정 4.4도)까지 높아질 것으로 예상된다. 지구에서 있었던 다섯 차례의 대멸종이 일어났던 수준이다.
그럼 현재로서는 가장 가능성이 높은 시나리오인 2.5도 상승은 무엇을 의미할까? 이렇게 설명하면 느낌이 바로 올지도 모르겠다. 최근 300만 년의 지구 역사 중 가장 높은 평균 기온을 금세기 말에 경험하는 것이다. 그러면 우리가 원하는 1.5도의 상승에서 멈추려면 어떤 경로를 따라야 할까? 안타깝게도 가장 이상적이라고 평가했던 SSPI-1.9의 경로이다.
1.1도가 상승한 세계는 폭염과 집중호우, 가뭄과 산불의 증가, 열대성 저기압의 강도와 빈도의 증가, 북극의 해빙, 빙하와 영구 동토층의 감소를 나타내며 인간 사회의 가장 취약한 곳부터 무너뜨리고 있다. 1.5도의 세상은 우리가 결코 견딜 만하다고 느끼기는 어렵지만 그래도 우리가 택할 수 있는 이상적인 미래이다.
p195
가끔 탄소중립에 대한 강의를 마치고 나면 빠지지 않고 나오는 질문이 있다.
"혹시 탄소중립 약속을 이행하지 않으면 무슨 제재가 있나요?"
그런 질문을 받을 때면 이렇게 대답한다.
"파리협약에서는 약속을 이행하지 않는 것에 대해 어떤 제재도 포함하지 않습니다."
그러면 안도하는 표정이 스쳐가는 것이 느껴진다. 그럴 때마다 더 한마디 덧붙이고 싶어진다.
"신뢰를 잃으면 모든 것을 잃는 것입니다. 지금은 어떻게 가능한 방법을 찾을 것인가 머리를 맞대야 할 때입니다. 우리가 설사 탄소중립 약속을 이행하지 못할 수도 있습니다. 그래도 최대한 노력해서 목표치와 비슷하게 맞춰야 변명이라도 할 수 있지 않을까요?"
p230
도시 국가인 싱가포르는 자국에서 생산되는 농축수산물이 자국 소비량의 10퍼센트 정도에 불과하다. 식량 공급만의 안저성은 매우 취약한 것이다. 농경지가 별로 없는 싱가포르는 식량자급율을 2030년까지 30퍼센트까지 높이는 '30 바이by 30' 정책을 추진하고 있다. 주로 어류 양식이 큰 부분을 차지한다. 특이한 것은 무려 170개국에서 식품을 수입한다는 사실이다. 전략적 수입선 다변화의 결과이다. 싱가포르가 이런 다변화 정책을 펴는 데는 이유가 있다. 싱가포르는 말레이시아와 물 공급 협정에 따라 전체 물 소비량의 절반 이상을 공급받는다. 그런데 말레이시아는 여러 번 물 공급 협정을 갱신하지 않겠다고 위협해 싱가포르를 긴장하게 만들었다. 식량 역시 일부 국가에 대한 의존도가 커질 경우 같은 위협에 노출될 수 있다. 현재 코로나19로 인해 어려운 경제 상황을 겪고 있지만, 곧 다가올 기후 위기에 비하면 대수롭지 않은 피해일 수 있다. 식량을 전적으로 해외에 의존할 수밖에 없는 싱가포르는 나름대로 최선의 선택을 하는 것이다.
p247
우리나라 농업은 경제 수준에 비해 낙후되어 있다. 경제는 선진국인데 농업은 개발도상국 수준이라고 평하기도 한다. 이 책의 목적이 우리나라 농업의 문제를 다루는 것은 아니기 때문에 왜 그런지 간략히만 설명하고 넘어가고자 한다.
선진국의 농업 발전 과정을 보면 농장 규모는 커지고 농업 인구는 줄어드는 과정이었다. 농기계가 도입되면서 한 명의 농부가 경작할 수 있는 면적이 늘어나면서 나타나는 현상이었다. 아프리카의 농업 현장을 방문했을 때 의아했던 적이 있었다. 넓은 땅을 가진 국가임에도 불구하고 가족이 경영하는 농경지 면적은 1~2헥타르에 불과했다. 이유는 단순했다. 작물이나 영농 방식에 따라 차이가 있지만 농기계를 사용하지 않고 농사를 지을 수 있는 규모의 한계이기 때문이다. 우리나라 농가당 경지면적은 1.08헥타르이다. 전형적인 개발도상국형 농업이다. 반면에 네덜란드와 독일의 농장 규모는 대체로 30헥타르를 넘어간다. 물론 농가 수로는 5헥타르 미만의 소농이 절반 이상을 넘어가지만, 실제 농업 생산에서 담당하는 비중은 5퍼센트 내외에 불과하다. 반면에 50헥타르 이상을 경작하는 대농은 5퍼센트 정도에 불과하지만 농업 생산 비중은 50퍼센트를 크게 상회한다. 일본은 불과 20년 전만 하더라도 우리나라와 비슷한 농업 구조였지만 지금은 유럽과 비슷한 구조로 빠르게 전환하고 있다.
농가의 규모가 문제가 되는 것은 생산성을 높이고 농업 환경을 개선할 수 있는 정밀 농업기술을 적용하려 해도 투자 대비 효율성을 얻는 것이 어렵기 때문이다. 농촌의 공동화와 고령화로 농기계 역할이 더 중요해졌지만 투자 대비 효율성의 문제로 농기계에 대한 투자 역시 지체되면서 농촌의 일손 부족 문제도 심각해졌다. 영농 규모를 확대하기 위해 들녘 단위 농업경영체 육성처럼 다양한 방법이 시도되었지만 성공적이지는 못했다. 이러한 문제에 대한 근본적인 원인을 찾아가다 보면 우리나라 국민이 지니는 농업에 대한 인식의 한계에 다다른다. 농사를 하나의 사업으로 보기보다는 삶의 방식으로 대하는 것이다.
p313
유럽이 처한 상황과 자연환경 조건 역시 우리와는 너무 다르다. 우리는 힘들게 해야 겨우 비슷하게라도 할 수 있다. 유럽은 멈추면 쉬어가는 환경이지만, 우리 농업은 멈추면 넘어진다. 이것이 우리나라를 이렇게 빠르고 혁신적인 국가로 만들어온 배경이기도 하겠지만 끊임없이 인재를 갈아넣어야 지속되는 시스템이기도 하다. 여기까지 온 것이 대견하게 느껴지지만 언제까지 가능할까라는 우려도 든다.
p315
재생에너지 전환에 가장 열심인 독일은 에너지 전환 프로젝트를 코페르니쿠스라고 명명했다. 그리고 그 코페르니쿠스의 추진 전략 수립을 위한 프로젝트에 아리아드네의 이름을 붙였다. 에너지 전환이라는 미궁을 헤쳐나가 지구온난화라는 괴물을 잡기 위해서는 길을 안내할 아리아드네의 실이 다시 필요했기 때문이다
독일은 이 프로젝트의 추진을 위해 26개 파트너가 참여하는 컨소시옴을 구성하고 과학, 정치, 비즈니스 등 다방면에 대한 연구와 시민 사회단체 간 공동 학습 과정을 통해 에너지 전환의 방향을 설정한다. 그런데 내가 놀랐던 것은 다른 데 있었다. 독일은 에너지 전환 프로젝트에서 두뇌 역할을 하는 아리아드네 프로젝트, 즉 기후 위기 대응 에너지 전환 정책과 전략을 수립하는 연구에 3년간 400억 원을 지원한다는 것을 봤을 때이다. 우리나라는 걸핏하면 2000만 원, 삼 개월에서 육 개월짜리 정책 분석 또는 대안 개발 과제를 발주한다. 수의계약 범위를 넘지 않기 위해서이다. 많아도 1억 원 정도의 정책 과제만 보다가 3000만 유로라는 수치는 보고도 믿기지 않았다.
p327
물리학자 막스 플랑크는 "새로운 과학은 당대의 반대론자들을 설득해 승리하는 것이 아니라, 반대자들이 모두 죽은 후 새로운 세대에게 수용되면서 승리를 거두는 법"이라는 명언을 남겼다. 기후변화에 대한 대응 역시 마찬가지일지 모른다. 기후변화를 초래한 것은 우리 세대이지만 우리는 결코 이 문제를 해결할 수 없을지도 모른다. 다음 세대가 정치적 의사 결정의 전면에 등장하면서 기후 위기도 해결 국면에 접어들 것이다.
p331
농장주의 평균 연령은 67세를 넘어가고 40세 이하는 1퍼센트에 불과하다. 이대로 가면 이미 낮은 식량자급률마저 지키는 것이 요원하다.
이곡은 처음에 1970년 리타 쿨리지(Rita Coolidge)에 의해 발표된 곡이다. 원곡은 상당히 늘어지는 재즈풍의 발라드였다.
카렌은 이 노래가 수록된 앨범을 자주 들어서 이미 이곡을 알고 있었다. 리차드가 투나잇쇼(Tonight show)에서 베트 미들러(Bet Midler)가 이곡을 커버하는 것을 듣고는 이 곡의 포텐셜을 감지하고 바로 편곡을 하여 1971년에 발표하여 빌보드 차트 2위까지 올라간다.
세가지 버전을 모두 들어봐도 카펜터스의 수퍼스타의 완성도가 가장 높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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Long ago, and, oh, so far away I fell in love with you before the second show Your guitar, it sounds so sweet and clear But you're not really here, it's just the radio
오랜 전, 그리고 저 멀리에서 난 그에게 첫눈에 반했어요 당신의 기타소리, 너무나 달콤하고 깨끗해요 하지만 실제로 당신은 여기에 없죠, 그저 라디오일 뿐이에요
Don't you remember, you told me you loved me, baby? You said you'd be coming back this way again, baby Baby, baby, baby, baby, oh baby I love you, I really do
기억나지 않아요? 당신은 나에게 사랑한다 말했죠. 당신은 다시 이 길로 돌아온다 했어요. 내 사랑... 난 당신을 정말로 사랑해요.
Loneliness is such a sad affair And I can hardly wait to be with you again What to say to make you come again? (Baby) Come back to me again (baby) And play your sad guitar
외로움은 너무나 슬픈 일이에요 난 당신과 함께하고 싶어 견딜 수가 없어요 어떻게 해야 당신이 돌아올 수 있을까요? 다시 내게로 돌아와줘요. 그리고 그 슬픈 기타 소리를 들려줘요.
Don't you remember, you told me you loved me, baby? You said you'd be coming back this way again, baby Baby, baby, baby, baby, oh baby I love you, I really do
Don't you remember, you told me you loved me, baby? You said you'd be coming back this way again, baby Baby, baby, baby, baby, oh baby I love you, I really do
불환화폐(신용화페)라는 (중앙)은행권은 금 대신 정부가 가치를 보장하는 화폐(채권)이다. 왕이나 오늘날의 대통령 등이 아닌 정부의 경제력이 보증하는 것이다. 국가가 없어지지 않는 한 정부는 마르지 않는 샘에 해당하는 조세권이라는 경제력을 갖고 있기 때문이다. 즉 금 대신 사회 전체 생산물 중 사회몫에 해당하는 생산물이 금의 역할을 대체한 것이다. 국민이 함께 만든 생산물로 불환화폐의 가치를 보증하여 (보유금의 양에 의해 제한되었던) 은행에게 돈놀이의 장애물을 제거해주었기에 (영란등 중앙)은행의 설립 목표를 '공공선과 인민의 이익The public Good and benefit of our People 촉진'으로 설정한 것이다.
이처럼 불환화폐의 가치가 사회 구성원 모두가 함께 만들어낸 생산 중 사회몫으로 뒷받침된다는 점에서 사회 구성원 모두는(생계에 필요한 최소소득을 사회소득으로 배분받을 권리가 있듯이) 최소한의 신용 이용에 대한 기본권리를 갖는다. 이재명 대표가 주장하는 '기본금융' 개념은 여기서 비롯한 것이다. 모든 국민은 세금을 납부하기 때문이다. 국민이 모두 함께 불환화폐 가치를 보증했기에 불환화폐의 혜택인 이른바 '사회금융' 혹은 '공공금융'을 누릴 권리를 갖는 것이다.
<정부 부채는 이자만 갚아나가도 괜찮은 이유 - 근거, 사례 및 설명?
p41.
한국은행법을 보면 제1장 총칙이 시작되기 전에 해당 기관을 관할하는 상위 정부조직이 표기된다. 한국은행법에는 '기획재정부(거시정책과)'가 표기되어 있고 해당 기관의 전화번호(044-215-2831)도 옆에 기재되어 있다. 이것은 정부 조직법 가운데 행정각부의 역할을 규정한 제4장의 (기획재정부 역할을 규정한) 27조 ①항에서 화폐에 관한 사무를 기획재정부가 갖고 있음을 규정하고 있기 때문이다. ("① 기획재정부장관은 중장기 국가발전 전략수립, 경제/재정정책의 수립/총괄/조정. 예산/기금의 편성/집행/성과관리/화폐/외환/국고/정부회계/내국세제/관세/국제금융, 공공기관 관리, 경제협력/국유재산/민간투자 및 국가채무에 관한 사무를 관장한다.") 즉 화폐 발행의 원천적 권한은 중앙은행이 아니라 정부라는 이야기이다.
한국은행법 제5절은 정부 및 정부대행기관과의 업무를 설정하고 있는데 정부와의 업무를 72조부터 75조까지 규정하고 있다. 그런데 정부에 대해 돈을 빌려주는 업무를 규정한 제75조(대정부 여신 등)의 ①항에서 "한국은행은 정부에 대하여 당좌대출 또는 그 밖의 형식의 여신을 할 수 있으며, 정부로부터 국채를 직접 인수할 수 있다"고 규정하고 있고, ③항에서 "제1항에 따른 여신에 대한 이율이나 그 밖의 조건은 금융통화위원회가 정한다"고 되어 있다. 즉 한국은행은 정부가 원하는 어떠한 방식으로든 돈을 빌려 줄 수 있게 되어 있다.
이러한 규정은 세계 모든 중앙은행의 공통 요소이다.
p43
중앙은행의 독립성은 국민이 부여한 임무(예:물가안정)를 정치적 잣대에 휘둘리지 말고 수행하라는 정도의 의미이다.
p44
세계에서 정부 부채가 가장 많은 일본의 경우 <그림1>에 따르면 1990회계년도의 일본 정부가 상환해야 할 국채 규모는 166조 엔이고 이자부담액은 10.8조 엔이었다.
2010회계년도에는 각각 636조 엔과 7.9조 엔이었다. 그리고 2022회계년도에는 각각 1,043조 엔과 7.3조 엔으로 정부 부채는 급증했는데 이자 부담액은 오히려 줄어들었다. 1990년과 2022년 사시에 정부가 상환해야 할 국채 규모는 877조 엔이나 증가했는데 이자 부담액은 오히려 3.5조 엔이 줄어든 것이다. 국채 평균 조달 금리가 6.1%에서 0.8%로 하락했기 때문이다. (IMF <글로벌 부채 보고서Global Debt Monitor>에 따르면) 2022년 기준 일본의 중앙정부 부채가 214.27%로 전 세계에서 가장 높은 규모임에도 불구하고 견디는 이유 중 하나는, 일부 사람들이 생각하듯이 엔화가 준기축통화라서가 아니라 국채에 대한 이자 부담이 오히려 줄어들어 재정 부담이 줄었기 때문이다. 다른 한편, 이는 일본이 인플레이션과 엔저 속에서도 금리를 인상하지 못하는, 즉 통화정책의 정상화를 하지 못하는 이유이기도 하다.
한국은 어떨까? <그림2>에서 보듯이, 2011~2021년의 10년간 국고채 발행 잔액은 340.1조 원에서 843.7조 원으로 약 2.5배 증가했다. 그런데 그에 대한 이자 부담액은 13.5조 원에서 15.1조 원으로 12%도 증가하지 않았다.
일본처럼 초저금리는 아니지만 한국도 조달금리가 낮아진 것은 마찬가지이다. 세계적 인플레와 금리 인상에 따라 조달금리가 다시 3%대로 올라간 2022년의 경우 국고채에 대한 이자 부담액이 약 30조 원으로 2021년에 비해 약 2배로 증가했다. 이처럼 정부 재정의 지속 가능성은 정부 채무의 절대 규모보다 이자율에 의해 영향을 크게 받는다.
물론 미국을 제외한 나머지 나라들은 외국자본의 갑작스러운 유출에 따른 충격도 고려해야만 한다. 국고채를 매각하고 철수할 때 환율 급등을 포함한 외환시장이 충격을 받을 수 있기 때문이다. 2023년 12월 기준 외국인은 219.5조 원 규모의 국고체를 보유하고 있다. '1달러=1,300원'을 기준으로 할 때 약 1,688억 달러 규모에 해당한다. 참고로 일본은 2022년 12월 말 기준 외국인이 약 165.3조 엔 규모의 일본 국채를 보유하고 있다. 이는 '1달러=140엔'을 기준으로 할 때 약 1조 1,800억 달러 규모에 해당한다.
2023년 12월 기준 한국의 외환보유액은 약 4,201억 달러, 일본의 외환보유액은 1조 2,950억 달러 정도이니 한국이 상대적으로 더 여유가 있다고 할 수 있다. 일본이 엔화 하락을 막으려면 달러를 매각하여 엔화를 사들여야 한느데 외환보유액 사정으로 달러를 적극적으로 시장에 풀기 어렵다. 금리도 인상하기 어려운 상황에서 달러 투입도 어렵다 보니 엔화 가치를 방어하기 어려운 것이다.
이처럼 정부 채무는 기본적으로 이자를 상환할 수 있으면 지속 가능하다. 이자 지급액은 세금 등 정부 수입에 달려 있고, 정부 수입은 조세율이 변하지 않을 경우 경제성장률에 크게 의존하기에 정부 채무의 지속 가능성을 따질 때 정부의 자금조달 금리(국채 발행 이자율)와 성장률을 비교하는 이유이다. 물론, 외국인의 갑작스러운 자금 유출을 대비해 외국인 보유 규모를 고려한 외환 방어벽이 필요하다. 이런 점에서 크루그먼이나 아베 등이 정부 채무의 원금을 상환하지 않아도 된다고 한 이유는 맞는 말이다. 이는 영란은행 설립 과정에서 보듯이 중앙은행의 설립 이유가 정부 재정 공급을 위한 것이기 때문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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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Insight]
1. 국가채무는 원금의 상환능력은 중요하지 않다. 이자상환능력을 통해 국채를 지속적으로 운용할 수 있는가가 관건이다.
2. 국가채무가 자국통화로 이루어져 있다고 해도, 외국인이 투자한 금액은 외국인이 투자를 외수할 경우 언제든지 외환(보통 달러)으로 유출될 수 있으므로 국가채무 중 외국인 투자분에 해당하는 최소한의 외환보유고 방어벽이 필요하다.
3. 민간채무가 과도하여 소비위축등 경제적 패닉이 발생할 때는 국가가 재정확대를 통해 민간채무를 흡수하여 국가채무를 증가시키면서 민간경제 활성화가 필요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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p51
민주주의가 작동하지 않으면 1원 1표 원리, 즉 돈의 힘이 지배하는 시장만 남고, 사회는 극단적 불평등을 향해 치닫고 결국 붕괴한다. 역설적으로 들리겠지만, 최소한 민주주의가 제대로 작동해야만 자본주의가 생명을 유지할 수 있는 것이다. 1930년대 대공황이나 2008년 글로벌 금융위기 등은 기본적으로 불평등 심화의 결과라는 것이 학계의 정설이다.
p55
'돈의 흐름'을 의미하는 금융을 시장에만 맡겨놓으면 사회는 순식간에 야만화되고 그런 사회는 지속이 불가능하다. 불환화폐를 사용하기 시작한 이른바 화폐경제 시대의 경제 문제는 '돈의 배분' 문제로 귀착한다. 함게 생산한 생산물은 대부분 화폐로 표현되고, 그 생산물의 배분은 결국 돈의 배분이기 때문이다. 그런데 함께 생산한 사회적 생산의 화폐적 배분을 어떻게 시장에만 맡길 수 있다는 말인가.
공공금융의 복원은 좌파적이거나 진보적 사회를 의미하지 않는다. 민주주의와 시장이라는 두 개의 축으로 출발했고, 양축이 균형을 맞추었기에 번영을 만들어냈다는 점에서 근대 사회의 본래 정신으로 돌아가자는 것이다. 공공영역에서 금융을 분리하여 시장(민간)금융 중심으로 바꾼 것이 (사회 전체를 금융 자본의 논리로 재구성한) 이른바 금융화였고, 그 결과는 필연적으로 공공영역의 축소로 이어졌다. 재정 지출 최소주의, 감세, 작은 정부, 그리고 그 연장선에서 불평등의 심화 및 가계 부채와 정부 채무의 급증 등이 그 산물들이다.
p59
은행은 불환화폐를 도입 및 사용할 때부터 엄청난 특혜를 입었다. 게다가 가장 낮은 금리(비용)의 불환화폐를 이용한다. 그런데 그 불환화폐가 통용될 수 있도록 실질적 가치를 공동 보증한 일반 납세자 국민은, 특히 사회경제적 약자층은 중앙은행의 혜택을 전혀 보지 못하고 있다. "공공선과 모든 인민의 이익을 촉진시킨다"는 중앙은행의 설립 목적이 사문화되었기 때문이다. 정치와 민주주의가 실종된 결과이다.
p60
'사방 백리 안에 굶어 죽는 사람이 없게 하라'는 가훈으로 유명하여 한국 부유층의 롤모델로 불리는 경주 최부잣집 이야기는 역설적으로 시스템이 무너진 상황에서 개인의 선의가 해결책이 될 수 없음을 보여준다. 국토가 황폐해지고 백성이 도탄에 빠진 양란 후 삼남(三南 : 충청,경사,전라도의 총칭)에 큰 흉년이 들었을 때인 1671년, 경주 최부자 최국선은 곳간을 헐어 모든 굶는 이들에게 죽을 끓여 먹이도록 하고, 헛벗은 이에게는 옷을 지어 입히도록 했다. 경주 부자 최국선은 한 걸음 더 나아가 아들에게 서궤 서랍에 있는 담보서약 문서를 모두 가지고 오게 한 후 "돈을 갚을 사람이면 이러한 담보가 없더라도 갚을 것이요, 못 갚을 사람이면 이러한 담보가 있어도 여전히 못 갚을 것이다. 이런 담보로 얼마나 많은 사람이 고통을 당하겠느냐. 땅이나 집문서들은 모두 주인에게 돌려주고 나머지는 모두 불태우라"고 했다. 오늘날 은행금융 자본이라면 죽음과 절망에 놓여 있는 없는 사람을 상대로 부를 엄청나게 증식할 기회로 삼았을 것이다.
경주 최부자 집이 10여 대 300년 동안 만석군의 부를 현명하게 지켜내며 어려운 많은 이들에게 도움을 주었지만, 게다가 조선 말기 다산 정약용 등 많은 토지개혁 사상가들이 그렇게 노력을 기울였ㅈ만 조선은 폭동과 민란과 농민전쟁 등을 피할 수 없었고, 끝내 망국의 길을 가지 않았는가.
p71
공공금융의 해체로 재벌 자본에 더해 '월가 자본의 아바타인 금융 자본'이 시장 권력을 더욱 공공화했다. 돈의 힘은 사람들을 욕망의 포로로 만들고, 민주주의가 고개를 들 때마다 무참히 짓밟았다. 돈의 힘이 통제되지 않는 한, 정치는 돈의 힘에 좌우되고, 민주주의의 자리는 금권 과두정이 차지할 수밖에 없기 때문이다. 공공금융은 민주주의 그 자체이기에 사회를 구성하는 민주주의와 시장 중 민주주의가 죽으면 시장만 남게 되고, 시장만 남은 사회는 죽어갈 수밖에 없다.
p73
공공금융의 사망은 대한민국을 부동산 카르텔 공화국으로 변화시켰다. 재벌 자본의 건설회사와 금융 자본의 부동산 금융이 결합한 산물이었다. 공공선과 국민 이익의 촉진은 뒤로 밀려났다. 그 결과가 세습성이 강한 부동산자산 중심 경제 구조의 등장이었다. 2000년대 20년(2001~2021년)간 국내 GDP는 약 1,373조 원 증가한 반면 국내 부동산자산은 이보다 약 9배 많은 1경 1,845조 원 증가했다. 가계로 국한해도 마찬가지이다. 가계의 처분가능 소득이 706조 원 증가하는 동안 가계 부동산 자산은 약 10배 많은 6,969조 원 증가했다.
이러한 변화를 스스로를 보수라 지칭하는 보수정권에서나 진짜(?) 보수정권인 민주당 정권에서나 별 차이가 없었다. 오히려 노무현 정부나 문재인 정부 시절 글로벌 유동성의 폭발과 맞물려 부동산자산 중심의 경제 구조는 더욱 고착화됐다. 참고로 국제결제은행BIS에 따르면 한국은 중국, 멕시코, 튀르키예, 이란 다음으로 외화 신용이 많은 나라이다. 경제 성장률은 2001~2007년간(김대중/노무현 정부 기간) 연평균 7.5%에서 2008~2016년간(이명박/박근혜 정부 기간) 연평균 5.3%, 그리고 다시 2017~2021년간(문재인 정부 기간) 연평균 3.6%로 하락하는 동안 부동산자산의 연평균 증가율은 각각 14.0%, 5.0%, 8.3%로 민주당 정권에서 부동산자산 증가율이 소득 증가율을 크게 앞질렀다. 가계 소득과 부동산자산을 비교해도 차이가 없다. 소득 증가율은 연평균 6.1% → 4.9% → 3.7%로 하락했지만 부동산자산 증가율은 연평균 14.4% → 4.5% → 8.7%로 소득 증가율을 2배 이상 앞질렀다.
노무현 정권 때는 일본은행의 제로금리와 양적완화(2001.3~2006.3) 그리고 미국 연준의 1% 초저금리(2003.7~2004.6)가 맞물려 글로벌 유동성이 폭발하며 글러벌 주택시장에 붐이 있었고, 문재인 정권 때는 코로나 팬데믹에 대한 대응으로 주요국이 초금융완화로 천문학적인 돈을 쏟아내면서 부동산을 포함한 글로벌 자산시장에 붐이 일었던 기간이다.
p75
글로벌 유동성의 폭발이 부동산 가격의 폭등을 모두 정당화하지는 못한다. 이는 국내 가계 신용의 영향도 있었음을 보여준다. 예를 들어, 한국의 가계 신용은 팬데믹 직전 2년간 연 평균 6.5% 증가한 반면, 팬데믹 기간 2년간은 8.3% 증가했다. 국내 신용증가율이 글로벌 신용증가율보다 높았다. 반면 노무현 정권 때는 상대적으로 글로벌 신용증가율(연 16.4%)보다 국내 신용증가율(연 10.4%)이 낮았다. 문재인 정권에서의 부동산 자산가치 급등은 국내 신용에 대한 통제 실패도 한 요인으로 작용했음을 보여주는 것이다.
실제로 세계 주요국 모두가 가격 폭등을 경험하지는 않았다. 예를 들어, IMF가 발표하는 58개 국가의 전체 주택의 실질가치 변화율을 보면 2021년에 12개 국가는 변화율이 마이너스를 기록한 반면, 한국은 11.7%로 8번째로 높았다. 폭등을 겪었던 미국의 10.6%, 캐나다의 9.8% 등보다 높았을 뿐 아니라 독일, 싱가포르, 일본 등의 6%대 상승률이나 프랑스의 3%대보다 크게 높았다.
이는 (앞에서 일부 언급한) 부동산 투기에 적합한 사회경제적 구조를 갖추고 있기 때문이다. 이 구조를 혁파하지 못한 대가는 고스란히 무주택자나 정부를 믿고 부동산 투기에 뛰어들지 않은 사람들에게로 돌아갔다. 예를 들어, 문재인 대통령은 2020년 신년사에서 "부동산 시장의 안정, 실수요자 보호, 투기 억제에 대한 정부의 의지는 확고합니다. 부동산 투기와의 전쟁에서 결코 지지 않을 것입니다"라며 부동산 투기에 뛰어들면 손해를 볼 것처럼 계속 강조했지만, 대통령 말을 믿고 무리하게 빚을 내 집을 사지 않은 사람들에게 돌아온 것은 이른바 '벼락 거지'였다.
코로나 팬데믹 상황인 2020년과 2021년 2년간 그 피해는 상상 이상이었다. 2년간 시중 통화량은 700조 780억 원이나 풀렸다. 그리고 정부 채무도 2478조 5,000억 원이 증가할 정도로 정부가 푼 돈 역시 사상 최대였다. 그런데 시중에 풀린 돈 중 실물경제로 들어간 돈은 시중 통화량의 22%에 불과한 155조 7,000억 원밖에 되지 않았다. 나머지는 자산시장으로 흘러 들어갔고 그 결과 국내 부동산자산은 2년간 GDP의 약 12배에 해당하는 1,845조 9,000억 원 증가했다. 가계의 경우는 더 끔찍했다. 소득은 80조 원 증가한 반면 부동산자산은 소득의 20배가 넘는 1,658조 원 이상이 증가했다. 생존 위기로 내몰리는 팬데믹 상황에서도 부동산 투기를 외면하고 열심히 땀 흘리며 살던 무주택자들에게는 날벼락이 되어 돌아온 것이다.
부동산 카르텔 공화국을 해체하지 않은 산물이다. 외환위기 이후 대한민국에서 돈이 가장 집중되는 곳은 부동산이 되었고, 따라서 대한민국의 가장 강한 힘들은 부동산(돈)을 매개로 자연스럽게 네트워크가 형성되었다. 부동산자산 중심의 경제 구조는 고인물 사회를 만든다.
p77
부동산자산 중심의 경제 구조는 대한민국을 전 세계 주요국 중 최악의 자산 불평등 국가로 만들었다. 자산 불평등이 가장 심한 선진국 중 하나인 미국의 경우 팬데믹 기간에 주식 자산가치 증가가 부동산 자산가치 증가보다 약 3배 컸던 반면, 한국은 정반대였다. 부동산자산은 주식자산보다 불로소득 성격이 강하다. 한국에서 부동산은 모든 것을 빨아들이는 블랙홀이었고, 그 결과 정부와 기업과 가계 모두가 부동산의 인질이 되었다.
1995~2022년간 기업이 만들어낸 부가가치에 해당하는 기업 영업잉여(=영업이익+감가상각비-금융비용)는 208조 원 증가한 반면 기업의 부동산자산 가치는 15배가 넘는 3,020조 원이나 증가했다. 가계 부채가 세계 최고 수준이 되었어도 계속 증가하는 이유나 건설회사의 부실을 정부가 나서서 막아주는 이유가 그것이다. 정부가 부동산 시장 부양을 중단하지 않을 것이란 믿음이 '부동산 불패'라는 잘못된 인식을 심어주었다. 건설경기에 대한 높은 의존과 부동산 자산가치 하락이 가져올 가계 부채 충격 등으로 인해 부동산 자산가치를 떠받쳐야만 사회와 경제가 생존할 수 있는 지경이 된 것이다.
문제는 저금리 시절에는 높은 가계 부채의 이자 부담이 은폐됐지만, 고금리의 장기화는 모르핀으로 연명한 부채 모래성의 실체를 드러낸다는 점이다. 현재 부동산 카르텔 공화국이 진퇴양난 상황에 놓여 있듯이 내부적으로 개혁하지 못한 부동산 카르텔 공화국의 운명은 자명하다. 경제성장(소득 증가)과 인구 증가등이 떠받치는 부동산 가치 증가는 정당성을 확보하지만 유동성이나 가계 부채 증가 등으로 밀어 올린 부동산 가치 증가는 가계의 소득(과 일자리) 증가 등이 뒷받침되지 않는 한 기본적으로 지속 가능하지 않다. 가계 부채 증가가 가계의 소득과 소비를 억압하여 성장의 둔화 및 정체, 가계 소득(일자리)의 정체로 이어지면서 시한폭탄 같은 가계 부채의 위험성이 현실화되고 있기 때문이다.
p85
김대중 정부와 노무현 정부에서 예산 부문을 재정경제부에서 분리했지만 (모피아 사고에 젖어 있는) 경제관료가 장악하는 한 공공금융에 대한 사고를 처음부터 기대할 수 없었다. 노무현 대통령이 '균형재정' 신화에 갇혀 있는 '(경제)관료에 포획'되어 예산을 장악하지 못한 후회를 퇴임 후 토로한 배경이다.("이거 하나는 내가 좀 잘못했어요. 내가 잘못했던 거는 오히려 예산을 가져오면 색연필을 들고 '사회정책 지출 끌어올려' 하고 위로 쫙 그어버리고, '여기에서 숫자 맞춰서 갖고 와' 이 정도로 나갔어야 하는데, (...) 지금 생각해보면 그래요. 그래 무식하게 했어야 되는데 바보같이 해서..." 노무현 <진보의 미래> 중에서)
그 결과가 오늘의 공룡 기재부이고, '사실상 기재부의 나라'가 된 것이다.
오늘날 기재부는 사실상 정부 전체를 장악하고 있다고 말해도 결코 과언이 아니다.
중장기 국가발전전력 수립이 바로 정부 주도 개발을 추진한 군부 권력의 경제기획원 권한이고, 예산 편성권은 김대중·노무현 정권의 기획예산처 권한이다. 또한 내국세제 권한으로 부동산 관련 세제를 매개로 국토교통부의 부동산 정책에 개입하고, 화폐 업무로 한국은행을 관리하고, 외환 업무 포함 국제금융 사무와 (사실상 국무조정실장의 코치를 받는 국무총리의 통제를 받고 기재부 차관이 당연직 금융위원회 의원인) 금융위를 사실상 관리한다. 한국은행이 모피아의 '남대문 출장소'로, 금융위-금감원이 '여의도 출장소'로 불리는 배경이다. 그리고 산하에 국세청, 관세청, 조달청, 통계청 등 4개나 되는 청을 갖고 있는 부서이다.
막대한 권한으로 경제 관련 부서의 장도 쉽게 차지한다.
심지어 예산 배분 권한으로 정부 조직의 숱한 기관장 자리까지 차지하곤 한다.
기재부의 권한은 일반 국민의 상상을 초월한다. 예산 심의를 하는 국회의원들도 지역구 예산 배정을 결정하는 기재부 권한에서 자유롭지 못하다. 대통령실 경제비서관이나 정책실도 기재부 사정권에 놓여 있다. 문재인 정권에서 '어공'인 홍장표 경제수석이 2018년 6월 사실상 경질된 후 윤종원/이호승/안일환 등 경제관료(늘공)가 경제수석을 장악했듯이 경제관료 조직은 사실상 선출 권력조차 좌지우지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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모피아는 퇴직 후에도 금융계와 정치계 등을 넘나든다. 특정 정당 및 정권과도 관계없다. 김진표는 그 상징이다. 그는 김대중 정권에서 재정경제부 차관, 청와대 정책기획수석, 국무조정실장을 거쳐 노무현 정권의 인수위 부위원장, 초대 재정경제부 장관, 교육부 장관을 지냈다. 이후 국회 진출을 위해 열린우리당 정책위 위장을 거쳐 18대부터 국회에 진출한 그는 문재인 정권에서 국정기획자문위원히 위원장과 더불어민주당 부동산특별위원회 위원장을 거치고 21대 국회 후반기 의장까지 차지하고 있다. 노무현과 문재인 정권에서 부동산정책이 성공할 수 없었던 이유를 극명하게 보여준다. 현재 윤석열 정권의 국무총리인 한덕수는 김대중 정권의 경제수석과 노무현 정부의 재정경제부 장관을 지냈다. 초대 기재부 장관을 역임한 추경호는 김대중 정권의 대통령직 인수위원회 인수위원을 한 후 김대중 정권 초기부터 대통령비서실 경제수석 비서관실과 정책기획수석 비서관실에서 근무했다.
이처럼 "정권은 유한하지만, 모피아는 영원하다"
물리력으로 통치하던 군부독재 시대에는 시장(자본)이 전근대적 방식인 물리력으로 통제되었다. 그런데 군부독재의 종식과 더불어 시장(자본)에 대한 통제 자체가 해체되었다. 물리력에 기초한 통제 방식을 (공공금융 성격이 더 강화되는) 사회적(민주적) 통제 방식으로 바꾸어야만 했다. 김영삼 정권의 역사적 과오였다. 김영삼 대통령은 본인 입으로 시인했듯이 경제에 문외한이었을 뿐 아니라 금융에는 문맹 수준이었다. 오히려 노태우 정권에서도 최대한 늦추려 했던 금융 자유화와 자본시장 개방을 적극 추진하면서 재벌 자본의 운신의 폭을 넓혀주고, 자청해서 대한민국을 월가 자본의 먹잇감으로 바쳤다.
외환위기 이후 김대중 대통령은 전통 산업들에 대한 이해는 어느 정도 있었으나, 역시 금융에는 문외한이었다. 대한민국에서 첫 번째 가계 부채 사태인 '카드 사태'가 김대중 정권의 작품인 배경이다.
김대중 정부의 경제팀이 선택한 (신용)카드는 '내수 부양책'으로 포장됐지만, 그 내용은 가계가 빚을 내서 소비하고 집을 사게 하는 '부채주도성장' 방안이었다.
당시 길거리에서 카드 모집인이 상환능력이 거의 없는 대학생들을 상대로 카드를 발급하는 모습도 볼 수 있을 지경이었다.
당시(2000년) 김대중 정권의 재정경제부 장관이었던 '이헌재표 내수부양책'이었다.
내수부양책으로 카드활성화 정책과 더불어 부동산 규제 완화가 2000년에도 확장되었고, 심지어 1가구 다통장 보유 기능과 각종 세제 혜택 등이 추가되었다. 그 결과는 380만 명의 신용불량자 양산과 부동산 가격의 급등이었다. 특히 2002년 한 해 동안 아파트값은 서울 45%, 신도시 25.1%, 수도권 23% 등 전국적으로도 22.5%의 상승률을 기록했다. 1999년 말 GDP 대비 45.1%(267조 원)였던 가계 부채는 2002년 말에는 64%(502조 원)까지 급증했다. 반면 같은 기간 정부 채무는 GDP 대비 9.3%에서 9.7%로 거의 증가하지 않았다. 공공금융의 역할 없이 가계 희생으로 재벌 건설 자본과 금융 자본의 배를 불려려준 것이다.
2003년 카드 사태는 노무현 정권에 커다란 부담이 되었다. 2003년 1분기 성장률은 직전에 비해 반토막이 나고 3분기까지 자유낙하 하듯이 하락했다. 노무현 정권을 탄생시키는 데 1등 공신 역할을 했던 유명 인사(?)는 당시 카드 사태는 김대중 정부에서 반든 것인데 노무현 정부가 뒤집어썼다며 억울함(?)을 토로했다. 그런데 카드 사태는 노무현 정권에게는 양날의 검이었다. 2000년 9.1%에서 2001년 4.9%로 급갑했던 성장률은 가계 부채 기반의 부양책 덕분에 (대통령 선거가 있었던) 2002년 7.7%로 반등하며 노무현 후보 당선에 도움이 된 측면이 있었고, 부양책 후유증(카드 사태)으로 임기 첫해 3.1%로 성장률이 급감했기 때문이다.
카드 활성화 대책이나 부동산/건설 경기 부양 모두 금융 및 재벌 자본의 이익과 직결되는 것이었다. 이처럼 김대중 정부 때부터 가계 부채는 부동산 카르텔의 숙주 역할을 하기 시작했다.
p93
모피아의 뿌리에 해당하는 이헌재와 강만수 등이 김대중-노무현-이명박 정부에서 주요 정책을 좌우했듯이 권력의 성격과 모피아는 관계없다. 윤석열 정부의 초대 기재부장관인 추경호가 김대중 정부 출범 인수위원회 인수위원이자 김대중 대통령 경제비서관을 지냈고, 이명박 정부의 윤증현은 노무현 정부의 금융감독위원장을 지낸 후 김앤장에 있다가 이명박 정부에서 기재부 장관을 역임했고, 이명박 정부와 박근혜 정부의 핵심 경제전략을 만들었던 김동연과 홍남기가 문재인 정부의 전후반 기재부 장관을 지냈고, 한덕수가 김대중 정부에서 경제수석, 노무현 정부에서 재정부 장관을 지내고 김앤장에 머물다가 윤석열 정권에서 다시 돌아왔다. 민주당 정권이나 국민의힘 정권이나 핵심 경제정책에서 큰 차이를 보이지 않는 이유이다.
모피아는 심지어 공적 자원의 사유화에도 거리낌이 없다. 다음은 2022년 8월15일자 <MBC 뉴스데스크>의 보도 내용이다.
새 정부 들어서 공기업들에 대한 압박이 거세지고 있습니다. 기획 재정부가 나서서 공공 기관들의 경영이 방만하니까, 가지고 있는 사옥 건물이나 땅을 팔라고 압박하고 있는데요. 그런데 이런 일이 처음이 아닙니다.
박근혜 정부 때도 기획 재정부가 공공 기관들에게 자산을 팔라고 했고, 실제로 한국석유공사가 사옥을 팔았습니다. 그런데 이 건물을 누가 샀는지, 이 거래로 누가 이익을 얻었는지, 저희가 취재를 해 봤더니, 기획 재정부 관료 출신들이 만든 부동산 투자 회사였습니다.
노태우 정부에서 재무부 장관을 지냈던 이규성은 김대중 정부의 초대 재정경제부 장관으로 등용된다. 공직에서 물러난 후 2001년 일종의 사모펀드인 코람코(KORAMCO, 한국부동산자산관리회사) 설립을 주도한다. 코람코의 회장을 장기간 역임하는 중에도 이규성은 2004년 노무현 정부의 국민경제자문회의 부의장(의장은 대통령)도 역임한다. 2010년에는 코람코자산운용사도 설립한다. '작은 정부를 내세운 박근혜 정부 들어 공공기관 민영화가 추진되며 박근혜 정부의 기재부는 이명박 정부의 자원외교 실패로 부채가 급증한 석유공사 매각을 추진한다. 석유공사 매각은 자본의 하수인 역할을 넘어 스스로 공적 자원을 사유화하는 모피아의 탐욕을 보여준다.
석유공사는 본사 건물을 2,000억 원에 매각하고, 매각 대금을 부채 상환에 사용하지도 않고 사업비와 정기예금 등으로 운용했다. 건물 매각 후 임대하며 지불한 임대료율은 4.87%였다. 그런데 석유공사가 자금이 필요해 조달할 때의 조달비용, 이른바 석유공사 채권 이자율은 2.67%에 불과했다.
p100
불환화폐(신용화폐)의 가치는 정부가 보증하는 것이다. 정부 보증의 힘은 정부 경제력에서 나오는 것이고, 정부 경제력은 세금 수입에서 나온다는 점에서 국민 전체가 불환화폐의 가치를 함께 보증한 것이다. 즉 오늘날 사용하는 법정화폐는 그 사회의 국민 전체가 함께 보증한 신용이다. 출범 때부터 영란은행을 공공선과 인민 이익의 촉진을 위한 정부 은행으로 성격을 못 박은 이유가 여기에 있다. 정부의 재정 자원은 물론이고 모든 국민이 은행시스템의 기본 혜택을 누릴 권리가 있는 이유이다. 소득과 금융에 대한 국민의 기본권이 존재하는 것이다.
이런 점에서 공공금융은 생산과 금융에서 사회몫을 의미한다. 사실 근대 화폐경제에서 생산과 금융은 분리 자체가 불가능하다. 공공금융을 '재정'으로 번역한 것은 생산측면으로 좁혀 잘못 부르는 것이다. 금융을 민간금융만으로 축소한 금융 자본의 이해를 반영한 개념이다.
IMF 기준을 따르는 기재부의 'e-나라지표'에 소개되어 있듯이, 정부 채무는 중앙정부와 지방정부의 순채무 합으로 구성된다. 기재부는 정부 채무를 적자성 채무와 금융성 채무로 나누고 있다. 2022년 말 기준 정부 채무액 약 1,069조 원은 적자성 채무 678조 원과 금융성 채무 391조 원으로 구성되어 있다.
이 두 채무의 성격을 기재부가 해당 사이트에 소개하고 있는 내용 그대로 소개해보자. '적자성 채무'는 "조세 등 국민 부담으로 상환해야 하는 채무"인 반면, '금융성 채무'는 "정부가 상환할 수 있는 자산을 가진 채무"로 국민 부담이 없는 채무이다. 예를 들어, 외평채(외국환평형기금채권)나 국민주택채권 발행에 의한 금융성 채무는 정부가 확보한 외환 자산 매각이나 융자금 회수 등으로 상환할 수 있기 때문이다.
그래서 2022년 말 기준 국민이 부담할 '진짜' 채무액은 1,069조 원이 아니라 678조 원에 불과한 것이다. 대통령과 언론, 여당 등이 미래 세대를 겁박한 1,000조 원은 391조 원이나 과장한 수치인 것이다.
p115
이처럼 여러 문제를 갖고 있는 재정 운용 기준은 한 나라의 정부가 도입하는 것은 (국민이 이러한 문제점을 파악하지 못하는 점을 악용하여) 막대한 공공자금에 대한 통제권을 독점하겠다는 것이다. 법제화 조치는 바로 대통령 등 선출 권력조차 건드리지 못하게 하겠다는 의도가 담긴 것이다. 수사권과 기소권을 독점하여 막강한 권력을 행세하는 '제2의 검찰'이 되고 싶은 것이다. 막강한 공적 권한의 사유화는 지금보다 더한 부정부패로 이어질 수밖에 없고, 그 피해는 고스란히 경제적 약자층에 집중된다.
p118
재정관리를 관리수지로 변경한다고 하여 정부 채무 증가 속도가 멈추거나 줄어든다는 보장이 없다는 것이다. <표6>에서 보듯이 2002년보듯이 2000년 이후 코로나 팬데믹이 발발했던 2020년 이전까지 관리수지의 적자 규모가 GDP 대비 -3%를 초과한 경우는 금융위기 때밖에 없었다. 즉 관리수지가 -3% 이내에서 관리가 되었어도 정부 채무가 지속해서 증가해왔다는 것이다. 그리고 코로나 팬데믹 2년간의 대규모 재정 적자는 대부분 주요국이 겪었던 것으로 불가피했다. 그런 점에서 윤석열 정부가 관리수지를 기준으로 재정을 관리한다고 해서 정부 채무 증가가 멈춘다는 보장도 없고, GDP 대비 정부 채무 60% 이내 관리도 어렵다. 무엇보다 관리수지 적자를 -3% 이내로 해서 정부 채무를 60% 이내에서 관리하겠다는 '재정준칙 법제화'를 추진하는 윤석열 정권 18개월 동안의 관리수지는 131.3조 원으로 이는 GDP 대비 3.9%의 규모이다. 그 결과 문재인 정권이 사실상 종료됐던 2022년 4월 중앙정부 채무 비중(GDP 대비 %) 47.5%도 2023년 10월 50.1%로 증가했다.
문제는 자신들이 공언한 관리수지 목표를 지키려다 보니 지출을 무리하게 줄이고 있다는 점이다. 자신들이 써야 할 돈이라며 국회로부터 승인까지 얻어낸 예산조차 쓰지 못하고 있다. 예를 들어, 2023년 10개월 동안 지난해보다 77.8조 원 규모의 지출을 축소했고, 이는 GDP의 3.5%가 넘는 규모이다. 최근 1년간(2022년 4분기~2023년 3분기) 연간 성장률이 1.1%로 추락한 배경이다. 모피아의 욕망(재정준칙 법제화)이 재정수지 관리도 망치고, 성장률은 후퇴시키고, 다시 재정수지와 정부 채무를 악화시키는 악순환을 만들어내고 있다.
p120
이제 재정건전성 논리가 기초하는 '재정 지출 최소주의'를 살펴보자. 결론부터 말하면 재정 지출 최소주의는 '과학'이 아닌 '이데올로기'이다. 앞에서 인간 사회의 구성과 운영 원리를 말했다. 사회가 지속하려면 민주주의와 시장, 즉 정치와 경제의 상호견제와 균형이 필요하지만, 자본의 탐욕은 끊임없이 정치와 민주주의를 약화하려 하고, 심지어 제거하고 싶어 한다. 역으로 자본의 탐욕을 원천적으로 제거하고 싶어 하는 욕망도 작동한다. (셜실 사회주의 체제에서 경험했듯이) 시장을 통제하고, 정부가 직접 자원을 배분하는 '정치의 과잉'이 그것이다. 정치의 과잉은 시장이 만들어내는 경제 활력을 약화하고 심지어 (인민독재로 위장한) "또다른 독재'로 이어지곤 한다. 자본 탐욕은 극단적인 불평등으로 이어지고, 필연적으로 경제위기를 낳는다. 사회 붕괴와 경제위기가 동전의 앞뒷면인 이유이다.
p122
앞에서 보았듯이 재정준칙이 설정한 재정 적자 관리로는 한국의 정부 채무 증가를 막을 수 없다. 재정준칙을 동원해도 정부 채무 증가를 막을 수 없다면 두 가지 선택밖에 없다. 하나는 경제성장률을 현재보다 높게 만들거나, 아니면 정부 수입을 늘리는 길이다. 그리고 정부 수입을 늘리려면 증세가 불가피하다. 윤석열 정부의 재정 지출 최소주의가 재정 파탄을 가져온 이유도 증세는커녕 감세를 추진했기 때문이다. 게다가 무리한 재정 지출 축소로 국가의 미래 성장 동력을 만들어내는 연구개발R&D 예산까지 줄이면서 성장률 둔화와 재정 파탄의 악순환을 만들고 있다. 이런 점에서 윤석열 정부가 재정건전성을 핑계로 재정준칙의 법제화를 추진하는 것은 기만적이다. 재정건전성에는 애당초 관심이 없는 것이다.
그렇다면 모피아가 재정준칙을 도입하려는 목적은 무엇인가? 모피아가 대변하는 금융 자본의 이해를 생각하면 의도가 선명하게 드러난다. 모피아는 미래 세대에게 부담을 주는 정부 채무 증가를 막겠다는 것을 명분으로 포장해 재정건전성 논리를, 정부의 재정 운용 및 서비스 등에 대한 국민의 불만 정서를 이용하여 재정 지출 최소화 논리를, 그리고 재정 지출을 줄일 것이기에 감세 논리를 내세우고 있다. 이에 대해 우리가 알아야 할 것은 첫째, 재정 지출 최소화는 모든 부분에 균등하게 영향을 미치지 않는다는 것이다. 공무원 보수 등 경직성 비용은 줄이기 어렵다. 그리고 일반적으로 힘이 있는(?) 부서보다 사회경제적 약자층 지원과 관련된 부서의 예산이 일차적인 조정 대상이 된다. 둘째, 공공자금의 지원이 축소되면 그에 비례해 민간금융에 대한 의존이 증가할 수밖에 없다. 국민을 (높은 이자 놀이를 하는) 금융 자본의 먹잇감으로 던지는 것이다. 셋째, 감세는 고소득층일수록 혜택이 크고, 특히 금융 고소득층에게 가장 많은 혜택이 돌아간다. 게다가 재정 지출 최소화에 따른 재정 적자를 정부 차입(국채 발행)으로 해결하고, 그로 인해 정부 채무를 증가시킨다. 역설적으로 재정 건전성이 재정 악화를 낳는 것이다.
p125
2021년 최저임금이 시간당 8.720원이었다. 이를 연소득으로 환산하면 2,187만 원이다. 그런데 2021년 소득활동자 중 상위 60% 선이 최저임금 수준의 연소득보다 낮은 2,180만 원이었다. 하위 41%의 규모는 약 1,040만 명에 해당한다. 이들의 평균 소득은 980만 원에 불과했다. 약 2만 5천명에 해당하는 상위 0.1%의 평균 소득은 18.5억 원이니 하위 41%의 평균 소득에 비해 188.8배나 되는 규모이다. 상위 0.1%의 총소득 46.9조 원은 29%에 속하는 745만 4천명의 총소득 46.7조 원보다 많은 규모이다. 약 2만 5천명의 소득이 745만 4천명의 소득보다 많은 사회인 것이다.
자산 불평등은 더 극심하다. 지난 거의 한 세대(1995~2022년) 간의 대한민국 전체 소득(GDP)은 437조 원에서 2,205조 원으로 1,768조 원이 증가했는데 부동산자산은 2,205조 원에서 1경 2,506조 원으로 1경 301조 원이나 증가했다. 많은 사람이 새로운 가치를 창출하는 경제활동보다 부동산 재테크에 관심을 갖는 이유이다. 그 결과 부동산자산의 핵심인 토지 소유의 불평등은 정말 끔찍하다. (약 2,371만 세대로 구성된 대한민국의) 2022년 개인의 토지 소유를 보면, 전체의 38%가 넘는 901만 세대는 땅을 한 조각도 갖고 있지 못하는데 약 1.2%에 해당하는 29만 세대는 약 1,258조 원 가치의 토지를 소유하고 있다. 이들의 토지소유액은 땅이 있는 나머지 62%에서 상위 10%를 제외한 나머지 약 52%인 1,220만 세대의 토지 소유액(1,263조 원)과 비슷한 규모이다. 앞에서도 언급했듯이, 지니계수가 0.8이 넘으니 토지 소유가 집중되었던 조선왕조 말기보다 그 정도가 더 심한 것이다.
이런 점에서 대한민국의 사회는 사실상 해체되었다. 사회란 무엇인가? 사회는 우리가 함께 살아가는 '집'이다. 먹을 것을 나눠 먹고, 비바람을 함께 피하고, 아프면 서로 돌봐주고, 그리고 혼자라는 외로움을 갖지 않게 해주는, 더불어 사는 공간이기 때문이다. 그런데 우리 사회는, 찬바람이 부는 집 밖 허허벌판에 버려진 사람이 있고, 홀로 고립되어 죽어가는 이른바 고독사가 청년층에까지 확산하고 있고, 집 안에서조차 소수만이 아랫목을 차지하는 그런 '가짜 집'이다. 모두가 참여해서 사회적 생산액(GDP)을 만들었는데 생존에 필요한 최소한의 소득이 보장되지 않는다면, 그 집은 함게 사는 집이 아니다. 그리고 아파도 돌봄을 받지 못한다면 그것 또한 함께 사는 집이 아니다. 사회 속에 살면서 혼자라는 느낌을 준다면 사회라 할 수 없지 않은가. 대한민국은 사회가 실종된 나라이고, 사회가 붕괴한 나라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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최소 소득은 시혜가 아니고 누구나 법적으로 보장받을 권리이고, 이는 (사회 전체 생산액의 배분 방식의 하나인) 세금으로 해결해야만 하고, 특히 출발선의 차이를 만드는 유산에 대해서는 최대한 세금으로 환수해야만 한다는 생각은, 자본주의가 하나의 사회 체제로 출발할 때부터 정상적인 사고를 하는 사람들에게는 지적 상식이었다.
그런데 대한민국은 이런 상식조차 작동하지 않는 사회이다. 이렇게 불평등이 극심한 상황에서는 상속세 완화나 폐지를, 그것도 저출산 대책으로 거론하고 있다. 경제학에서 저출산은 낮은 결혼율에서 찾고, (경제이론과 한국은행의 실증 분석에 따르면) 한국의 낮은 결혼율은 임금 불평등과 주거비, 그리고 자녀 교육비 등의 순서로 영향을 받는 것으로 확인된다. 정규직과 비정규직 사이의 결혼율 차이는 그동안 여러 연구에서 확인되었다.
이런 현실에서 대다수 국민의 사회소득을 늘리는 것은 매우 중요하다. 실제로 증세와 (전통적인 취약계층 중심의) 소득 이전 정책은 많은 중산층이 거부감을 갖는다. 소득이 극소수에게 집중되어 있다 보니 (기계적으로 구분된) 중산층조차 많은 사람이 자신을 중산층이라 여기지 않기 때문이다. 실제로 가장 편하게 중산층을 설정하는 하위 30%에서 상위 30% 사이의 소득 규모를 보면 (2021년 국세청 소득활동자 자료를 기준) 세전 평균 소득은 1,500만 원에서 4,192만 원 사이의 소득계층이다. 개인 소득이라도 중산층이라기에는 너무 적은 소득 수준이다. 자신도 지원받아야 할 소득계층에게 더 어려운 극빈층 지원을 위해 세금을 더 납부하라 하면 거부할 가능성이 크기 때문이다.
가장 좋은 방식은 사회소득을 모두에게 지급하는 방식이다. 예를 들어 모든 소득활동자에게 사회소득 100만 원을 지급하기 위해 필요한 추가 재원은 약 25.4조 원이다. 이를 현재의 소득세율을 기초로 25.4조 원을 배분할 때 추가 세금 부담은 상위 16%에 국한된다. 2021년 모든 소득활동자 기준 세전 소득이 18.5억 원(세후 소득 11.94억 원)인 상위 0.1%는 추가로 약 2억 원의 세금을 더 부담한다. 그리고 상위 16%선에 있는 소득활동자의 경우 2021년 세후 소득이 6,052만 원인데, 추가로 2만 원만 더 부담하면 된다. 이 정도의 추가 세금으 객관적으로 볼 때 큰 부담이 되지 않는다.
반면, 하위 50%는 최소한 91만 원에서 100만 원을 지급받을 수 있다. 앞에서 하위 41%까지는 연소득이 최저임금 수준보다 작다고 말했다. 2023년 기준으로 최저임금을 1만 원으로 인상하기 위해서는 시간당 380원을 인상해야 하고, 1년간 95만 1,000원이 더 필요하다. 그런데 사회소득 100만 원을 지급하면 최저임금 대상자의 시간당 1만 원 소득은 쉽게 달성된다.
여기에 (2022년 기준 약 98만 2,500개의) 법인을 대상으로 소득활동자 모두에게 100만 원을 지급할 25.4조 원을 배분하면, 세후수입이 3조 1,367억 원인 0.1%의 법인은 추가로 154.5억 원을 부담하고, 세후 수입이 543억 원인 10% 선의 법인은 추가로 2억 3,541만 원을 부담한다. 세후 수입이 34억 원인 상위 20% 선에 있는 법인이 추가로 부담할 세금은 808만 원, 세후 수입이 4.7억 원인 50% 선의 법인은 추가로 171만 원만 부담하면 된다. 모두 감당할 수 있는 수준이다.
이것으로 모든 소득활동자에게 사회소득 100만 원을 추가로 지급할 수 있다. 개인소득보다 법인소득, 그리고 소득보다 토지 등 자산 집중이 더 심한 상황이기에 자산에 대한 사회소득 재원 확보는 소득보다 저항이 더욱 적고, 추가 부담을 해야 하는 계층의 경제적 부담도 적다.
이렇게 사회 생산이나 사회 자산에 대한 사회몫에 해당하는 사회소득을 사회 구성원에게 배분하게 되면 국민의 80% 이상이 현재보다 최소 수백만 원 이상의 추가 소득을 확보할 수 있다. 전통적인 재분배와의 차이라면 사회소득세를 거두어서 바로 현금 혹은 (일부는) 지역화폐로 배분한다는 점이다. 관료가 배분을 (결정) 하는 것이 아니라 바로 돌려주는 방식이다. 저소득층일수록 배분받는 사회소득이 크고 초고소득층에게 세금 부담이 집중되기에 소득재분배 효과가 클 뿐 아니라 (대다수가 혜택을 받기에) 조세 저항도 크지 않고, 무엇보다 정권이 바뀌더라도 이전으로 돌려 놓기가 쉽지 않다. 정기적으로 들어오던 수입이 줄어들게 된 국민 80% 이상의 저항이 만만치 않을 것이기 때문이다.
p145
싱가포르는 경상수지 흑자와 더불어 유입된 외국자본을 외환보유액Official Foreign Reserves, OFR으로 축적하여 이를 싱가포르통화청MAS, 싱가포르 국부펀드를 운용하는 싱가포르투자청Government of Singapore Investment Corportation, GIC, 싱가포르 국책투자 사업을 수행하는 테마색Temasek Holdings이 활용해 재정에도 지원하고 있다. 사실, 한국도 외환위기 이후 경상수지 흑자액이 1조 달러에 달하는데 현재 외환보유액은 4,201억 달러(2023년 12월 기준)에 불과하다는 점에서 적극적으로 외환보유액 축적을 하지 않은 것이다. 일부에서 과도한 외환보유액 축적은 (외화보유 확충에 따라 풀리는 국내 여신을 흡수하기 위한 통화안정증권 발행 등에 따른 제반 비용인) 불태환 개입비용 부담을 증가시킨다고 지적하지만, 싱가포르의 경우 축적한 외환으로 더 높은 투자 수익을 만들고 있고, 또한 높은 신용등급으로 기업들은 해외자금 조달 비용을 낮출 수 있다. 무엇보다 (외환위기 때처럼) 외국인 자금의 갑작스러운 유출 상황에서 금융 및 외환시장의 방어벽 역할을 한다.
2023년 12월 기준 한국의 국고채에 대한 외국인 보유액은 약 219.5조 원(약 1,688억 달러, 1달러 = 1,300원 기준)에 달한다. 외국인 보유 국고채가 모두 일시에 처분될 가능성은 매우 낮지만, 주식시장 유입액(약 5,085억 달러, 2023년 12월 8일 기준)이나 단기 외화차입액(1,416억 달러, 2023년 3분기 기준), 3개월 수입액(2,438억 달러, 2022년 수입액 기준) 등을 고려하면 한국의 외환보유액이 결코 충분하다고 말할 수 있는 전문가는 없다. IMF가 제시하는 적정외환보유액 기준에 미달하는 배경이다. 국제금융시장이 불안정해질 때마다 원화가 가장 취약한 통화로 전락하는 이유이다. 해외자금 조달 비용이 올라가는 이유도 국제금융시장 환경에 취약할 수밖에 없는 외환 불안정석에 있다.
예를 들어, (인도 중앙은행 총재 시절) 라구람 라진이 기축통화국 중앙은행이 세계 나머지 국가들의 입장을 고려하지 않을 때 신흥국 경제는 산업경쟁력에 필요한, (과도한 통화가치 절상 방지 등) 자국의 화폐가치 안정을 위해 외환시장에 개입하는 '대외적 양적완화(Quantitative External Easing. QEE)'를 선택할 수밖에 없다고 주장한 배경이다. (자신이 주장을 정당화하기 위해 버냉키 화법을 사용해) 라잔 역시 신흥국의 외환시장 개입은 신흥국의 경제성장에 기여할 것이고, 신흥국의 경제성장은 선진국 경제에도 기여한다는 점에서 외환시장 개입이 '근린궁핍화' 정책이 아니고, '근린부유화' 정책이라고 받아쳤다.
이처럼 해외 지식인들이 화폐 주권을 당연시하는 풍토와 달리 (미국인보다 더 미국적으로 사고하는) 한국의 많은 지식인은 미국의 요구를 수용하는 것을 당연시한다. 이들에게 대한민국의 이익 추구는 '사치'에 불과하다.
p148
<그림7>은 대한민국 경제의 현실을 상징적으로 보여준다.
기간은 지난 30년(1992~2023년 2분기)이다. 지난 30년은 일본의 '잃어버린 30년'과 일치하는 기간이다. 그림의 곡선은 현재의 시장 가치와 자국 화폐 단위로 평가한 세 나라의 GDP(명목 GDP 혹은 경상 GDP)를 해당국의 시중 유통 전체 통화량으로 나눈, 이른바 '화폐유통속도'이다. 사전적으로 화폐유통속도는 화폐 한 단위가 일정 기간 동안 경제 구성원들의 상품 거래 혹은 소득을 창출하는 거래에 평균적으로 몇 회 사용되었는가를 나타내는 지표를 말한다.
예를 들어, 2023년 3분기(9월말) 기준 대한민국의 명목 GDP는 약 2,205조 원이고, 총통화량은 약 3,818조 원이다. 이는 3,818조 원 중 2,205조 원만이 소득창출과 관련 있는 상품 거래에 연결되었음을 말한다. 나머지는 수익을 좇아 자산시장으로 대부분 흘러 들어간다.
그런데 한국은 외환위기 충격 이후 1값 밑으로 떨어져 계속 하락해, 자산시장 거품 붕괴 충격 이후 1값 밑으로 떨어진 일본을 빠르게 따라잡고(?) 있는 중이다.
경제 내용상으로 사실상 한국 경제 역시 '잃어버린 30년'을 향해 질주하고 있는 셈이다. 실제로 지난 2023년 3분기 기준 연간 성장률은 1.1%였는데 이는 일본의 1990년대 이른바 잃어버린 10년(1992~2001년)의 연평균 성장률 수준이다. 이 값이 내려가면 돈을 풀어도 새로운 가치 창출보다는 자산 불평등의 심화라는 부작용으로 이어질 가능성이 크다.
지난 30년(1992~2001년) 사이에 한국의 명목 GDP는 약 1,725조 원 증가했는데, 국내 부동산자산은 약 9배에 달하는 1경 4,710조 원이나 증가했다. 가계로 국한해도 마찬가지 모습이 확인된다.
가계의 처분가능소득은 약 928조 원 증가했는데, 가계의 부동산 자산은 약 8배에 달하는 7,077조 원 증가했다. 비금융법인이 만든 부가가치, 이른바 영업잉여는 약 208조 원 증가했는데 비금융 기업이 보유한 부동산자산은 약 15배에 해당하는 3,020조 원 이상 증가했다. 다른 기준으로 비교하면, 유가증권 이른바 코스피 상장기업 매출액은 2004~2022년 사이에 약 2,075조 원 증가했는데 비금융기업의 부동산자산은 2,311조 원 이상이 증가했다. 지난 30년의 가계와 기업, 국가 경제 모두에서 부동산은 돈을 빨아들이는 '블랙홀'이었다. 선진국 중 가장 자산 불평등이 심한 나라가 미국인데 미국보다 불평등이 더 심하면서 내용이 좋지 않은 나라가 대한민국이다. 무엇보다 미국은 주식자산이 부동산자산 증가를 압도한다. 한국은 그 반대이다.
게다가 돈을 빨아들이는 부동산자산의 핵심 원천인 토지자산 소유 상태를 보면 정말 끔찍하다. (2,370만 5,814세대로 구성된) 2022년 대한민국에서 상위 0.62%에 해당하는 14만 6,952세대가 보유한 토지가액 943.4조 원은 전체 세대의 (38%의 땅이 한 평도 없는 901만 세대를 포함) 85%(약 2,018만 세대)의 토지보유액 949.7조 원과 맞먹는 규모이다. 오죽하면 필자가 전정田政 문란과 토지개혁 등으로 채색된 조선왕조 말기보다 오늘날의 토지 소유가 더 집중되었다고 하겠는가.
두 번째 주목할 점은, 이러한 경향이 지난 30년간 정권의 성격과 무관하게 진행되었다는 사실이다. 부동산에 돈이 몰리는 구조는 대한민국의 힘의 역학 구조와 깊은 관련성을 갖고 있다. 돈을 중심으로 세력의 이해관계가 형성되기 때문이다. 사회 일각에서 대한민국을 '부동산 공화국'이라 부르는 배경이다. 또한 오래전부터 시중에 회자하는 말이 "권력은 유한한데 자본(모피아)은 영원하다"이다.
p152
흥미로운 점은 김대중 정권에서 (GDP대비) 가계 소비 비중이나 성장률의 하락폭이 가장 컸다는 사실이다.
이는 외환위기 충격도 원인으로 작용했지만, 2000~2002년 3년간 기준으로 가계 부채가 역대 최고로 증가한 사실에서 비롯한다. 김대중 정권에서 3년 간 18.9%p의 가계 부채 증가는 문재인 정권에서의 2018년 3분기~2021년 3분기까지의 3년간 14.5%p보다 높았고, 1년 기준으로도 (가계 부채 증가 속도가 가장 빨랐던 시기를 기준으로) 김대중 정권의 2001년 3분기 이후 2002년 3분기까지의 10%p 증가가 문재인 정권의 2020년 1분기 이후 2021년 1분기까지의 8.8%p 증가보다 높았다. 이는 '평화적 정권 교체' 및 최초의 남북 정상회담(6.15 공동선언)등 민주주의와 남북 관계에 이정표를 세운 업적에도 불구하고 민주주의의 알맹이인 공공금융의 '사실상' 해체의 산물이었다.
김대중 정부 이래 가계 부채의 증가는 가계 소비를 억압하는 요인으로 작용했다. GDP 대비 가계 부채가 10%p 상승할 때마다 GDP 대비 가계소비는 2.4%p 감소했다. 그리고 가계 소비 감소는 성장률 하락으로 이어졌다. 김영삼 정권에서의 연평균 8% 성장률은 문재인 정권에서의 연평균 2.4%까지 하락했다. 약 60%에 달했던 GDP 대비 가계 소비 비중이 46%까지 하락한 결과였다. 가계 소비 비중이 1%p 하락할 때마다 성장률은 0.87%p씩 하락한 것이다. 내수의 핵심인 가계 소비의 둔화는 수출 의존도를 높이고, 이는 다시 국민총소득에서 가계 소득의 비중을 낮추었다.
결과적으로 GDP 대비 가계 부채 10%p 증가는 (국민총소득에서) 가계 처분가능소득 비중을 2.3%p 감소시켰다. 특히, 내수 의존도가 절대적인 자영업자에 타격을 입혔다. 임금노동자 1인당 평균 소득 대비 자영업자 1인당 평균 소득의 비중은 (가계 소비와 가계 소득을 감소시킨) 가계 부채 증가에 따라 하락했다. 가계 소득과 가계 소비가 1%p 하락할 때마다 (임금노동자 소득 대비) 자영업자의 상태 소득에 각각 -4.1%p(가계 소득)와 -3.6%p(가계 소비)의 영향을 미쳤다.
한국은 오래전에 격차 사회가 되었다. 대기업과 중소기업 종사자의 소득 격차, 정규직과 비정규직 노동자 간 소득 격차, 그리고 임금노동자와 자영업자 간 소득 격차가 그것들이다. 이 중에서 가장 큰 소득 격차가 임금노동자와 자영업자 간 소득 격차인 데 이 격차는 한국 사회의 특성이기도 하다. 1인당 자영업자 평균 실질소득이 2001년 정점을 찍고 최근까지 계속 하락하고 있고, 물가 변화를 반영하지 않은 명목소득도 2011년 이후 계속 하락하는 배경이다.
그 결과 1990년대 초까지만 해도 격차가 거의 존재하지 않았던 임금노동자와 자영업자 간 소득 격차는 문재인 정부 출범 전후에 40%가 무너졌다. 작은 충격만 받아도 자영업자가 폐업에 내몰리는 배경이다. 절대적인 소득 취약성으로 가계 부채 못지 않게 자영업 부채가 급증하는 배경이다. <표9>에서 보듯이 자영업자 1인당 명목소득은 지난 10년간 연평균 0.7%씩 줄어들어왔다. 실질소득 기준으로 보면 지난 20년 넘게 연평균 2.3%씩 하락해왔다.
p166. 사회 소득을 위한 세율 조정 방안.
p170
지금까지 간단히 소개한 사회소득만 강화해도 대부분 가계는 최소 연 300~400만 원의 사회소득을 확보할 수 있다. 그리고 그 효과는 엄청나다. 첫째, 가계의 소비 여력을 강화함으로써 국민 경제의 성장뿐 아니라 가계의 소득과 일자리 증가 등에도 기여한다. 둘째, 소득 불평등의 개선, 특히 불평등 발생의 최대 용인인 토지 부동산자산에 대해 과세와 소득이 낮을수록 많은 배당을 받는 소득 이전으로 불평등을 크게 개선하게 된다. 셋째, 부동산 투기에 따른 기대 불로소득이 낮아짐으로써 투기를 완화한다. 넷째, 세금을 거둔 후 그 세금을 바로 국민에게 배당해줌으로써 재경 관료의 개입을 원천적으로 차단한다. 국민 주권 강화의 효과가 있다. 다섯째, 사회소득이나 토지배당 등의 일부를 지역화폐로 나누어 주면 지역경제 활성화와 자영업자 소득 개선에도 기여한다. 여섯째, 저소득층이 가장 큰 혜택을 입음으로써 저소득층의 최저임금에 대한 의존도를 낮출 수 있고, 그 결과 사회 경제적 약자들인 을과 을 사이의 갈등을 해소할 수 있다. 일곱째, 설사 보수정권으로 바뀌어 사회소득세 및 토지배당세를 이전으로 환원시키게 되면 대다수 국민의 소득 감소로 이어져 정치적 저항에 직면하기 때문에 감세가 불가능한 불가역적 증세 방식이다. 여덟째, 노동소득 이외의 추가 소득이 발생하면 많은 국민이 자신이 하고 싶었던 일을 시도할 수 있어, 개인적으로 삶의 질 향상과 사회적으로는 혁신 활동화 등을 기대할 수 있다. 특히 사회금융까지 결합할 경우 창업 활성화 효과도 기대할 수 있다. 현재 주저앉는 대한민국 경제를 살리려면 가계 소득 강화와 혁신 활성화가 무엇보다 필요하다는 점에서 사회소득 강화와 사회금융 복원이 가장 현실성 있는 대안이다.
p173
2023년 (금리인상으로 가처분소득의 감소로 이자를 감당못해 자산가치 붕괴 조짐이 생기는) '민스키 모멘트'가 도래하자 정부가 정책주택금융 지원으로 붕괴를 일시적으로 막았다. 실제로 2008년 이후 2022년까지 정책주택금융의 분기당 증가율은 3.2%였으나 2023년 3분기 동안 증가율은 4.2%로 증가했다.
그러나 문제는 정책주택금융으로 주택 거래의 일시적 회복을 자극했으나 가계의 소득 감소와 식비 축소까지 진행될 정도로 가계 부채가 임계점에 도달한 상황에서 정책주택금융으로는 방어가 쉽지 않다는 점이다. 그 결과가 태영건설 워크아웃이다.
본질적으로 태영건설 워크아웃은 수십 년간 진행해온 부동산 부채 모래성 쌓기의 결과로 인한 건설업의 과잉에서 비롯된 것이다.
그동안 경제관료들은 해외사례 베끼기, 그것도 실패한 일본 사례 베끼기를 하고 있다. 금융지원으로 부실기업 연명시키기, 정부의 대규모 토목건설 사업으로 건설사 수입 만들어주기, 금리 인하로 주택시장 부양하기 등이 그것이다.
일본은 이와같은 잘못된 정책으로 1990년대 10년 동안 '잃어버린 10년'이라는 비싼 비용을 지불하고 나서 1999년부터 산업 구조조정을 시작한다.
일본의 구조조정이 성공했더라면 '잃어버린 20년' 혹은 '잃어버린 30년'은 없었을 것이다. 통·폐합에서는 성과를 거둔 반면 창조산업 육성은 처참하게 실패했기 때문이다.
창조산업 육성이 처참히 실패한 이유는 제조업과 전혀 다른 창조산업을 제조업 육성 방식으로 접근했기 때문이다.
지금 윤석열 정부가 태영건설을 처리하는 방식을 보면 2015년 대우조선해양(현 한화오션)을 처리할 때가 연상된다. 당시 2,000억 원이라는 천문학적인 자금 수혈이 산업은행 주도로 추진됐다. 박근혜 정부가 2016년에 도입한 것이 '기업 활력 제고를 위한 특별법'(일명 원샷법)이었다. 그런데 이 법은 일본의 1999년 '산업활력재생특별법'을 베낀 것이었다. 그리고 박근혜 정부의 상징인 '창조경제' 육성도 일본의 '창조산업' 육성의 베끼기였다. 그리고 지금 윤석열 정부가 부동산과 건선 부문의 부실 문제에 접근하는 방식도 자산시장 거품이 꺼지자 일본 정부가 내놓은 대책과 정확히 일치한다.
가게 소빙, 기업 설비 투자, 그리고 수출 등 성장 에너지가 악화한 상황에서 부동산 시장의 침체는 자산가치의 하락을 의미하고, 이로 인해 소비의 추가 침체의 악순환으로 이어질 수밖에 없다. 이미 일본의 잃어버린 10년 수준으로 성장률이 하락한 상태에서 부동산 시장 침체가 더해지면 향후 한국 경제의 성장률은 일본의 1990년 잃어버린 10년보다 더 낮아질 가능성이 크다.
이를 막으려면 가계 구제에 초점을 맞춘 '한국적 양적완화'가 불가피하다. 주택금융공사가 금융권의 주택담보대출을 인수한 후 주택금융공사가 매입한 주택을 장기공공임대로 전환하는 것이다. 주거 불안을 겪는 많은 세입자의 주거 문제를 아넝화하는 계기로 만들 수 있다. 모든 국민이 기본적인 주거시설을 확보할 권리를 실현하는 것이다. 게다가 주택 매물 압력은 완화할 것이고 주택 소유를 포기한 가계도 여유 자금을 확보할 수 있을 것이다. 그리하여 부채 상환 부담에서 해방되고 소비 여력도 확보하게 될 것이다. 이는 차기 정권의 과제이다.
p184
대개 산업화 혹은 공업화로는 1인당 소득 1만 달러까지 도달한다. 한국의 경제성장을 흔히 압축성장이라 부르듯이 한국은 '압축적 공업화'를 이루어냈다. 1만 달러 이후 한국은 탈공업화가 일본에 비해 2배나 빠를 정도로 압축적으로 진행됐고, 그 결과 많은 노동력이 저부가가치 서비스 부문으로 이동했다. 대표적인 분야가 자영업이고, 오늘날 플랫폼 노동자가 21세기형 저부가가치 서비스 부문 종사자들이다.
그런데 AI와 로봇 기술의 발달은 이러한 저부가가치 서비스 부문의 노동력조차 소멸시키고 있다. 한국 사회의 일자리 문제가 심각한 배경이다. 이로 인해 의사나 변호사처럼 일부 고부가가치 서비스 부문의 진입장벽이 높은 일자리를 들어가기 위한 교육 경쟁이 극심해지고 있다.
문제는 디지털 생태계에 필요한 인간상과 갈수록 멀어지고 있다는 점이다. 스스로 문제를 찾아내고 다른 사람과의 협력을 통해 문제를 해결하는 역량이 필요한데, 한국 사회에서 교육받은 학생은 대개가 스스로 문제를 찾아낼 줄도 모르고, 다른 사람과 협력을 만들어내는 데도 익숙지 못하기 때문이다.
제조업 생태계와 디지털 생태계가 전혀 다른 인간상을 요구한다는 것을 이해해야만 산업혁신이 가능하다. 교육 혁명과 더불어 국민의 경제 기본권들을 구현할 때 새로운 집을 위한 최소조건을 갖추었다고 말할 수 있다.
p191
1980년대 이후 금융화가 새롭게 부상한 금융 자본의 지배력을 상징하듯이 화폐 권력에 변화가 발생했다. 금융혁신이라 불리는 '증권화'는 금융사에서 하나의 분기점이었다. '증권화'란 유동성이 낮은 자산을 현금화하는 기법을 말한다. 대표적인 것이 주택저당증권(Mortgage-Backed Securities, MBS)이다. 주택은 대부분 대출이 포함되어 있다. 전통적으로 대출을 해준 금융회사는 원리금을 회수할 때까지 대출금을 채권 형태로 보유했다. 이 대출 채권은 대출 만기까지 온전히 현금화할 수 없다는 점에서 유동성이 낮은 자산이다. 또 다른 대출을 하려면 추가 예금을 확보하거나 자금을 조달해야 한다. 그리고 추가로 조달할 수 있는 자금은 기본적으로 중앙은행이 공급하는 본원 통화량의 크기에 의존한다. 그러나 주택을 담보래 대출해 준 채권 자산을 담보로 증권을 만들어 매각하면 현금이 확보되고 이 현금으로 또 다른 대출을 만들 수 있다. 이 증권이 바로 주택저당증권MBS 이다.
여기서 힌트를 얻어 자동차 대출금, 신용카드 사용 채권, 학자금 대출금, 공장 대출금 등에서부터 심지어 엔터테인먼트 로열티까지 다양한 비현금성 자산을 증권화하게 되었고, 이를 통용해서 자산담보증권Asset-Backed Securities ABS이라 부른다. 유동성이 낮은 자산을 모아 현금 흐름을 만들고, 이를 통해 유동성 낮은 자산의 가치를 높이고 동시에 소비자에게는 더 낮은 차입비용을 제공하고, 투자가에게는 고품질 고정수입이라는 매력적인 수익률을 보장해준다는 점에서 금융시장은 이를 최대 혁신으로 평가했다. - *2008년 금융위기가 바로 이 MBS가 부도처리 되면서 발생한 것임.
자산담보증권은 출현하자마자 폭발적으로 성장했고, 2021년에 자산담보증권의 시장 규모는 2조 1,371억 달러에 달했다. 자산담보증권의 출현은 금융회사가 자금을 시장에서 직접 조달하게 되었음을 의미한다. 전통적으로 시중의 통화량 공급은 중앙은행에 의해 결정되었다. 이른바 중앙은행의 통화공급 독점력이다. 그런데 금융 자본이 중앙은행의 자금 지원 없이도 상당한 자금을 조달할 길이 열린 것이다. 전문가들은 이를 금융의 외생성外生性에서 내생성內生性으로의 진화라 부른다. 중앙은행의 화폐공급 독점력에 금이 가기 시작한 것이다. 시장 상황에 따라 화폐공급이 달라지면서 전통적인 통화정책이 통화량 중심에서 이자율 중심으로 변경한 배경이다.
p202
'제재'는 2022년 우크라이나 전쟁에 대해 미국이 러시아를 해외 금융거래를 위한 달러화 결제시스템, 이른바 스위프트SWIFT, Society for Worldwide Interbank Financial Telecommunication 에서 퇴출시킨 조치를 말하고, 러시아-우크라이나 전쟁은 탈달러의 중요한 분기점으로 작용했다. 즉 스위프트는 금융기관을 연결하는 국제금융결제망으로 '글로벌 공공재'에 해당한다. 러시아 경제의 파산을 의도했지만, 기대한 목적은 달성되지 못하고 오히려 탈달러의 모멘텀으로 작용했다. 미국으로서는 자기 발등을 찍은 겨이 되었다.
게다가 뒤이은 러시아와 거래하는 제3국 단체/개인에 대한 제재인 세컨더리 보이콧 등과 더불어 인플레 불을 붙이면서 탈달러와 미국채 파동은 시작되었다. 2024년 새해가 시작하며 브릭스BRICs에 사우디아라비아가 공식 가입함으로써 탈달러는 가속 페달을 밟게 될 것이다. 이란과 아랍에미리트 등이 브릭스에 합류하는 것이 기정사실화 되면 이들의 석유공급은 전 세계의 약 42%를 차지하게 되기 때문이다.
p209
많은 전문가는 금융위기 이후부터 코로나 팬데믹 이전까지 경험했던 저물가와 그에 기초한 초저금리 시대는 다시 경험하지 못할 것이라는 점에 동의한다.
이는 금융위기 이후의 '이지 머니' 공급에 의한 자산시장 부양은 어렵다는 사실을 말한다. 사실 이는 저임금 중국 경제의 세계 시장 편입으로 상징되는 세계화와 기술진보 등이 가져다준 저물가로 가능했다.
p210
이러한 대응 방식은 기본적으로 시간 벌기에 불과하다는 한계를 갖는다. 미국채 공급 과잉 우려는 구조적 문제이기 때문이다. 시장에 공급되는 미국채 규모는 금융위기 이전(2001~2008년)에는 연 6,795억 달러(GDP 증가분의 120%)씩 증가하다가 금융위기 이후부터 코로나 팬데믹 이전(2009~2019년)까지는 연 1조 1,365억 달러(GDP 증가분의 171%)씩 증가해왔다. 그리고 코로나 팬데믹 이후(2020~2022년)에는 연 3조 1,485억 달러(GDP 증가분의 210%)씩 증가하고 있다.
이는 미국채 가격의 안정성 악화가 '상수'가 되는 시대의 도래를 의미한다. 그리고 이는 달러 힘의 약화를 의미한다. 앨런이 "준비금의 자연스러운 다변화 욕구"를 미국이 준비해야 한다고 말한 배경이다.
p214
현재 블록체인 기술에 기반한 암호화폐(비트코인, 이더리움 등)가 분산과 공유와 개방 등을 속성으로 갖고 있는 분산형 네트워크 화폐임에도, 즉 국가와 금융 자본이 독점하던 화폐 권력을 해체하는 화폐시스템의 혁명임에도, 실질 가치를 만들어내는 플랫폼 사업모델이 뒷받침되지 않아 새로운 화폐시스템으로 발전하지 못하고 있다.
그러나 분산형 네트워크 화폐는 절대 없어지지 않는다. 일부 논자들은 암호화폐는 실질 가치가 없고 버블에 불과하다고 말하나, 비트코인이나 이더리움 등 분산과 개방과 공유의 특성을 실현한 블록체인형 암호화폐는 디지털 생태계의 특성에 부합하는 분산형 네트워크 화폐라는 가치를 갖는다. 단지, 디지털 생태계에서의 신용 역시 실질가치가 뒷받침되지 않는다면 불완전할 수밖에 없다. 이것이 화폐로서보다 자산으로서 자리매김되는 배경이다.
p216
미국은 금융위기의 대외적 원인으로 '글로벌 불균형=글로벌 과잉 저축'에 돌리며 미국 이익을 위해 '나머지 세계'에 희생을 강요했다. 경제 주권의 충돌이다. 경상수지 흑자 축소를 둘러싼 미국과 주요 교역국들 간의 갈등, 더 나아가 미·중 간 경제패권을 둘러싼 갈등 등이 화폐 권력을 둘러싼 갈등인 이유이다. '통화정책 독립성의 약화'라는 미국 화폐 주권의 손상은 기본적으로 중심통화가 달러와 경제력 다원화의 미스매치에서 비롯한 것이다. 그런데 미국은 자신의 화폐 주권을 위해 나머지 세계에 경제력 신장을 포기하라고 요구하는 것이다. 하지만 현실적으로 외환위기에 대한 자기 보험 차원이든, 경제 주권의 차원이든 간에 나머지 세계의 달러 축적을 막을 권리가 미국에는 없지 않은가.
결국 준비금의 다원화가 하나의 대세라면 국제금융시스템의 안정성을 위한 국제 협력은 선택을 넘어 필수 사항이다. 문제는 패권주의 사고에 젖어 있는 미국이 준비금의 다원화를 현실로 받아들일 수밖에 없는 순간이 도래할 때까지는, 먼저 모두의 경제 주권을 인정하기 어려울 것이라는 점이다. 경제 블록화나 독자적 공급망 구축 등으로 나타나는 세계 경제의 지정학적 파편화Geo-economic fragmentation는 그 산물에 불과하다. 분산형 네트워크 화폐처럼 준비금의 다원화 역시 시대적 대세임에도 준비금 권력을 독점하려는 달러의 힘으로 인해 국제통화시스템 및 국제금융 시스템 모두 이행기적 혼란을 피할 수 없다.
이처럼 적어도 21세기 전반부는 불확실성과 혼란 등이 극대화될 수밖에 없다. 새로운 시대에 필요한 사회혁신들을 만들어내는 길밖에는 다른 선택의 여지가 없고, 그것은 바로 정치의 역할이다. 인간 사회가 직면한 공동 과제를 푸는 일이 정치이고, 이를 통해 미래에 대한 희망을 만드는 것이 바로 정치이기 때문이다.
p219
불평등과 경제적 양극화가 심해지며 또한 양극화된다. 정치인들이 자신의 지지 세력의 목소리만을 대변하면서 정치가 극단의 길로 가게 되는 것이다. 사실 경제적 양극화가 정치적 양극화로 이어지는 것은 많은 연구로 밝혀졌는데, 사실 이는 연구 이전에 상식의 문제이다. 정치적 양극화가 심해지면 상대방에 대한 혐오와 증오, 심지어 폭력 등으로 이어진다. 관용과 사랑 등은 점점 설 자리를 잃어간다. 이는 사람의 정신과 마음이 병들어 가는 것을 의미한다.
한국이 이렇게 망가지 이유는 한국 사회와 경제가 '부동산 카르텔'이 만들어낸 사실상의 세습사회가 되었기 때문이다. 모든 것을 빨아들이는 블랙홀인 부동산으로 인해 경제 활력도 잃어버렸고, 인구도 축소되고, 급기야 사회가 사실상 붕괴되었다. 그리고 이제 부동산 모래성이 무너질 위기를 맞이하고 있다. 소비, 투자, 수출, 소득 등이 모두 마이너스 행진을 하며 지난 2023년의 스테그플레이션은 조만간 디플레이션으로 전활될 가능이 크다. 낡은 집(사회질서)이 무너진 후 새로운 집을 지어야 할 순간이 다가오고 있다.
제로에서 시작한다고는 하지만 수준이 낮지는 않다. 현재의 사회,경제,정치적인 이슈를 기반으로 자본론의 현대적 의의와 적용방안에 대해서 저자가 고민한 바를 풀어서 설명하고 있다. 상당히 도움이 되는 내용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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p13
한 남자가 동독에서 시베리아로 보내졌습니다. 그는 자산의 편지를 검열관이 읽는 것을 알고 있습니다. 그래서 그는 친구에게 이렇게 말했습니다. "암호를 정해 두자. 만약 내 편지가 파란 잉크로 쓰였다면, 편지의 내용은 진실이다. 하지만 만약 빨간 잉크로 쓰였다면 그것은 가짜다." 한 달 후 그의 친구가 편지를 받았을 때, 모든 것이 파란색 잉크로 쓰여 있었습니다. 거기에는 이렇게 적혀 있었습니다. "이곳에서의 생활은 매우 훌륭하다. 맛있는 음식도 많다. 영화관에서는 서양의 재미있는 영화를 상영한다. 집은 넓고 고급스럽다. 여기서 살 수 없는 것은 빨간 잉크뿐이다."
이 농담은 소련의 '사회주의'를 다뤘지만, 자본주의 생활에도 그대로 적용될 수 있을 것입니다. 지금 우리가 누리는 '자유'와 '풍요'는 바로 이 파란 잉크로 쓰인 편지의 세계입니다.
지금 우리에게 필요한 것은 빨간 잉크입니다. 그리고 우리가 한 번은 버린 <자본론>이 바로 그 빨간 잉크입니다. 왜 그럴까요? 그것은 <자본론>을 읽음으로써 우리는 이 사회의 부자유를 정황하게 표현할 수 있기 때문입니다. 또 그것은 잃어버린 자유를 회복하는 첫걸음이 될 것입니다.
p19
도시에서 열심히 일하는 사람과 남쪽 섬에 사는 어부가 나누는 이야기를 들어 본 적 있나요?
"왜 너는 매일 그렇게 게으름을 피우는 거야. 좀 열심히 일해서 돈을 벌어라." "그렇게 열심히 일해서 모은 돈으로 뭘 할 건데?" "돈 많이 벌어서 은퇴하면 느긋하게 낮잠 자고 낚시하며 살고 싶으니까." "어, 나는 벌써 그렇게 하고 있어."
우리는 도대체 무엇 때문에 매일매일 힘들어하면서 그렇게 많은 일을 하고 있을까요? 맛있는 것을 먹으려고? 해변에서 휴가를 보내려고? 아니면 여유로운 노후를 보내기 위해서? 그렇다면 위 이야기의 어부는 도시에 사는 우리보다 훨씬 나은 삶을 사는 것 같습니다.
p20
인간은 다른 생물과 마찬가지로 끊임없이 자연에 작용하여 다양한 것을 만들어 내면서 이 지구상에서 삶을 영위합니다. 의식주 등을 얻기 위해 인간은 적극적으로 자연에 적용하고 그 모습을 변화시키며 자신의 욕구를 충족합니다. 이러한 자연과 인간의 상호작용을 마르크스는 생리학 용어를 사용하여 '인간과 자연의 물질대사'라고 말했습니다.
p21
이 책은 물질대사론을 바탕으로 <자본론>을 읽어 나간다고 해도 과언이 아닙니다. 필자는 마르크스를 따라 '노동'이라는 행위를 중시하기 때문입니다.
다시 말해 인간이 자연과의 물질대사를 조절하는 통제하는 행위가 바로 '노동'입니다.
마르크스는 다음과 같이 '노동'을 정의하고 있습니다.
노동은 우선 인간과 자연 사이의 한 과정, 즉 인간이 자신의 행위로 자연과의 물질대사를 매개하고 규제하고 제어하는 한 과정이다.
p24
우리의 삶과 사회, 그리고 그것을 둘러싼 자연환경의 모습은 우리가 자연에 어떻게 작용하느냐에 따라 결정됩니다. 이 작용 방식을 크게 잘못하면 사회와 자연은 황폐해집니다. 그래서 노동은 인간의 자유와 번영을 위해 매우 중요한 활동인 것입니다.
이상에서 알 수 있듯이 마르크스가 '노동'이라는 개념에 주목한 것은 노동자계급의 착취를 백일하에 드러내고 하는 정치적 의도가 있어서가 아니라, 물질대사라는 인간과 자연의 본원적 관계를 중시했기 때문입니다.
하지만 이 사실을 막연하게만 파악한다면 어느 시대든 인간은 자연과 물질대사를 해 왔다고 말할 수 있습니다. 하지만 그 구체적 모습은 시대와 지역마다 크게 다르죠. 그리고 바로 이 점이 중요합니다.
즉, 마르크스는 인간의 의식적이고 합목적적인 활동인 '노동'이 자본주의에서 어떻게 수행되는지를 고찰함으로써 인간과 자연의 관계에 결정적 변화가 있음을 밝히고, 거기서 자본주의의 특수성에 접근한 것입니다.
p28
화폐로 측정할 수는 없지만, 한 사람 한 사람이 풍요롭게 살아가는 데 필요한 것이 풍부한 상태, 그것이 바로 사회의 '부'입니다.
p33
사회의 '부'가 '상품'으로 변한다는 것은 쉽게 말해 가격표가 붙은 '매물(賣物)'이 된다는 뜻입니다.
p37
마르크스에 따르면 '상품생산이 전면화된 사회', 즉 모든 것이 상품화되는 자본주의사회에서는 물건을 만드는 목적, 즉 노동의 목적이 다른 사회와 크게 다릅니다.
p39
왜 이런 상황(부의 양극화가 점점 심해지는 상황)이 벌어지는가 하면, 자본주의 사회에서는 '인간의 욕구를 만족시키는 것'보다 '자본을 늘리는 것' 자체가 목적이 되어 버렸기 때문입니다. 그 메커니즘에 대해서는 다음 장에서 자세히 살펴보겠지만, 자본주의는 이윤추구를 멈출 수 없습니다. 설령 그것이 서점을 없애는 등 사회의 '부'에 파괴적인 결과를 가져오는 결과를 낳는다 해도 눈앞의 돈벌이를 멈출 수 없는 것이 자본주의입니다.
p40
생산 활동의 주요 목적이 '인간의 욕구 충족'에서 '자본을 늘리는 것'으로 바뀌면 당연히 생산방식도, 생산되는 물건도 달라집니다.
자본주의사회에서 생산되는 '상품'은 사람들의 삶에 정말 필요한지, 정말 중요한지보다 얼마나 비싸고, 얼마나 팔리겠는지, 다시 말해 얼마나 자본을 늘리는 데 기여하는지가 더 중요해집니다.
'돈이 되는 물건'과 '필요한 물건'이 반드시 일치하지는 않습니다. 이 점에 대해 마르크스는 '상품'에는 두 가지 얼굴이 있다고 지적합니다.
하나는 '사용가치'라는 얼굴입니다. '사용가치'란 인간에게 도움이 되는 것(유용성), 즉 인간의 다양한 욕구를 충족하는 힘입니다. 물에는 갈증을 해소하는 힘이 있고, 식료품에는 굶주린 배를 채우는 힘이 있습니다. 마스크에도 감염병의 확산을 막는 '사용가치'가 있습니다. 생활에 필요한 '사용가치'가 바로 자본주의 이전 사회에서 생산의 목적이었습니다.
하지만 자본주의에서 중요한 것은 상품의 또 다른 얼굴인 '가치'입니다.
p44
'사용가치'를 위해 물건을 만들던 시대는 말 그대로 인간이 '물건을 사용하던' 시대였지만, '가치'를 위해 물건을 만드는 자본주의에서는 입장이 역전되어 인간이 물건에 휘둘리고 지배당합니다. 이 현상을 마르크스는 '물상화(物象化)'라고 불렀습니다. 인간이 노동에서 만든 물건이 '상품'이 되는 순간, 신비한 힘으로 인간의 삶과 행동을 지배하게 된다는 것입니다.
p47
그와 동시에 광고업과 마케팅이 늘어납니다. 왜 그런가 하면, 소비자들도 바보가 아니라서 자신이 쓰레기를 샀다는 것을 금새 알아차리기 때문입니다. 그러면 상품의 마법이 풀려서 싫증이 납니다. 그래서 계속해서 제품을 바꾸고, 새로운 쓰레기를 매력적인 상품으로 만들어 판매해야 하는 것입니다.
p48
'상품'의 영역이 넓어지면 넓어질수록 물상화의 힘은 강해지고, 인간은 점점 더 물건에 휘둘리게 됩니다.
모든 것을 시장에 맡기면 경쟁 원리가 작동해 효율성이 높아진다고 생각한 이가 영국의 마거릿 대처 전 총리였습니다. 하지만 그 후 신자유주의가 '전 세계로 퍼져 나가면서 물상화의 힘을 강화한 결과, 예상하지 못한 많은 부조리와 비효율, 독점을 낳고 있습니다.
민영화라고 하면, '독재적'이고 비효율적이던 공영/국유사업이 민간의 손에 의해 '민주적'이고 효율적으로 관리/운영된다는 이미지를 가진 사람도 있을 것입니다. 하지만 이는 단어의 마술입니다. 원어인 프라이비티제이션(privatization)은 직역하면 '사유화'입니다. 프라이빗(private)의 어원은 '빼앗기다' '분리되다'라는 뜻입니다. 사람들이 공유하고 관리하던 '코먼'을 빼앗긴 상태라는 뜻이죠. 민영화의 실체는 특정 기업의 권리 독점이며, '상품'의 영역을 넓히는 현대판 '울타리 치기'입니다.
시장은 결코 '민주적'이지 않습니다. 시장에 접근할 수 있는 사람은 돈을 가진 사람뿐이기 때문입니다. 민영화가 진행되면서 공영/국유이던 시절에는 접근이 가능했던 의료나 교육 같은 공공서비스에서 많은 사람이 배제되었습니다.
또 시장에서는 '이익'이 우선하기 때문에 수익성 없는 물건이나 서비스는 가차 없이 삭감됩니다. 예산도, 인력도 삭감됩니다. 정말 쓸모없는 것은 당연히 줄여야 하지만, '사용가치'를 무시한 효율화는 꼭 필요한 물건과 서비스까지 삭감하거나 질을 떨어뜨려 사회의 '부'를 빈약하게 합니다.
p54
가치 논리의 내면화를 보여 주는 잘 알려진 예가 바로 '가성비(코스파, cost performance)'의 사고입니다. 모든 일의 수익률을 추정하고 그에 따라 효율화를 꾀하는 태도죠.
이렇게 가사나 육아는 외주화, 상품화되고 있습니다. 그리고 그것이 효율적이고 바람직하다고 생각하고 이용하는 사람이 늘어나기 때문에 서비스산업도 점점 늘고 있습니다.
하지만 가성비 사고에 더 깊이 빠져들면 돈이 되지 않는 주민 회의나 축제, 학부모/교사 모임(PTA), 노동조합 등에 참여하는 일이 모두 가성비가 나쁜 것이 되어 버립니다. 가족이나 지인을 돕는 것조차 말이죠. 결국 공동체는 점점 더 말라비틀어지고, 끝내는 붕괴됩니다.
물론 집안일을 모두 여성에게 맡기거나, 동네 모임에서 '장로'가 거드름을 피우던 옛날이 더 좋았다고 말하려는 것이 아닙니다. 다만 상품화하지 않더라도 가사나 육아에 남녀가 동등하게 참여할 수 있는 방법도 있고, 커뮤니티의 힘을 효과적으로 활용할 수 있는 선택지도 있다는 것입니다.
하지만 그런 선택을 하는 대신 우리 사회는 모든 것을 상품화하고, 남는 시간을 점점 더 돈벌이에 바치고 있습니다. 그렇다고 해서 더 풍요로워지지는 않습니다.
이 역설을 미하일 엔데가 쓴 <모모>의 세계를 떠올리게 합니다. '시간 은행'에 홀린 이발사 푸지는 시간을 절약하게 되었는데도 전혀 여유가 없습니다.
푸지 씨는 점점 더 흥분하고, 침착하지 못한 사람으로 변해 간다. 한 가지, 떨어지지 않는 것이 있기 때문이다. 절약한 시간은 사실 조금도 남아 있지 않았다. 마치 마술처럼 흔적도 없이 사라져 버리는 것이다. 푸지 씨의 하루하루는 처음에는 몰랐지만 점점 더 뚜렷하게, 그리고 조금씩 사라져 갔다.
가성비를 더 높이고 시간을 절약한다고 해서 인생이 풍요로워지는 것은 압니다. 오히려 여가가 점점 줄어들고, 가족이나 이웃과 소통할 수 있는 여유도 없어집니다. 그리고 조금의 낭비도 용납하지 못하는 짜증 나는 인간들만 가득한 사회가 되어 버리는 것입니다.
p82
노예는 단지 외부의 두려움에 의해 노동하지, 자신의 생활(자신의 것은 아니지만 보장되어 있는)을 위해 노동하는 것이 아니다. 이에 반해 자유노동자는 자신의 필요에 의해 노동한다. 자유로운 자기결정, 즉 자유에 대한 의식과 그에 따른 책임의 감정은 자유노동자를 노예보다 훨씬 더 나은 노동자로 만든다.
(마르크스, <직접적 생산과정의 결과들>)
노동자들을 움직이는 것은 '일자리를 잃으면 생계를 유지할 수 없다'는 두려움보다는 '내가 스스로 선택해서 자발적으로 일한다'는 자부심입니다. 그렇기 때문에 '직무를 제대로 수행해야 한다'는 책임감이 생깁니다. 실제로 취업 면접에서 "무슨 일이든 죽기 살기로 하겠습니다!"라며 자신의 자유를 기꺼이 포기한 경험이 있는 사람이 많을 것입니다. 최저한의 생활을 보장받으며 마지못해 일하는 노예와는 분명 차이가 있습니다.
자기책임감을 갖고 임하는 노동자는 억지로 일하는 노예보다 더 일을 잘하고, 더 좋은 일을 합니다. 그리고 실수하면 자신을 탓합니다. 불합리한 명령도 받아들이고 스스로를 몰아세웁니다. 이는 자본가가 바라지도 않았던 바입니다. '자본가에게 유리한' 사고방식을 노동자가 스스로 내면화함으로써 자본의 논리에 편입되는 것입니다. 정치학자 시라이 사토시는 이를 가리켜 '영혼의 포섭'이라고 말했습니다.
본래 끝없는 가치 증식을 추구하는 자본가의 이해관계와 인간다운 삶을 원하는 노동자의 이해관계는 양립할 수 없습니다. 그런데 자유롭고 자발적인 노동자는 자본가가 원하는 노동자의 모습을 마치 자신이 지행해야 할 모습, 인간적으로 우수한 모습인 양 착각하게 됩니다. 고도성장기의 '모레쓰 사원(猛烈社員)'이나 버블경제기에 유행한 영양 음료의 캐치프레이즈 "24시간 싸울 수 잇습니까"가 그 좋은 예일 것입니다.
자본주의사회에서는 노동자의 자발적 책임감, 향상심, 주체성이 자본의 논리에 '포섭'된다고 마르크스는 경고했습니다.
p86
노동운동이나 노사 교섭에서도 '임금인상'은 가장 큰 쟁점입니다.
하지만 흥미롭게도 마르크스는 임금인상보다 '노동일 제한(단축)'이 더 중요하다고 지적합니다. 당시 임금이 지금보다 훨씬 낮았는데도 말입니다.
노동일의 제한은, 그것 없이는 모든 해방의 시도가 실패로 끝날 수밖에 없는 선결 조건이라고 우리는 선언한다. (319/410)
임금이 인상되더라도 장시간 노동이 해소되지 않으면 으미가 없다는 말입니다.
자본가가 임금인상 요구를 받아들이면 분명 착취는 완화됩니다. 그러나 자본의 논리에 포섭된 자본주의사회의 노동자는 "그럼 우리는 열심히 일하겠습니다!"라고 말할 것입니다. 이는 오히려 기업에 유리하게 전개되는 사태입니다. 임금을 조금만 올려 주고 그 대신 노동자가 장시간 노동도 마다하지 않고 '자발적으로' 열심히 일해 준다면 잉여가치, 즉 자본가의 이윤은 오히려 늘어날 수 있기 때문입니다.
자본가의 목적은 노동력이라는 '부'를 '상품'으로 가둬 두는 것입니다. '상품'으로 가둬 두는 것은 자유 시간을 빼앗는 것입니다. 임금인상에 따른 장시간 노동이 임금노예 제도를 유지하는 것입니다.
실제로 임금이 조금 오른다 해도 시간을 빼앗긴 노동자에게는 아이와 놀거나 취미를 즐길 여유가 없습니다. 일하다 지쳐서 책을 읽거나 인생이나 사회문제에 대해 생각할 여유도 없습니다.
바빠서 직접 요리할 시간이 없게 되면 외식이라는 '상품'이 팔립니다. 빨래를 해도 건조할 시간이 아깝게 되면 세탁기와 건조기가 팔립니다. 자동 청소기도 마찬가지입니다. 최근에는 가사 대행 서비스도 유행입니다.
하지만 이런 편리한 서비스가 우리를 여유롭게 해 주는 것은 아닙니다. 그 대가를 지불하기 위해 노동시간이 점점 늘어날 뿐입니다. 이렇게 노동일을 '무제한'으로 만들면 '상품'의 영역이 점점 더 넓어지고, 자본가들의 사업 기회가 확대됩니다.
p98
자본주의는 엄청난 부를 가져다준 것처럼 보이지만, 우리의 생활은 오히려 여유가 없어지고 있습니다. 그 결과 욕구와 감성이 메마르고 빈곤해졌습니다. 180년 전, 20대 중반의 젊은 마르크스는 이 상태를 '노동의 소외'라고 불렀습니다. 소외된 삶에 대해 마르크스는 분노를 담아 다음과 같이 썼습니다.
빛, 공기 등 가장 단순한 동물적 청결도 이간에게 욕구된 것을 중지한다, 더러움, 인간의 이 퇴폐, 타락, 문명의 하수구의 오물(이것은 문자 그대로 해석해야 한다)이 인간의 생활 기반이 된다. 완전히 부자연스러운 황폐, 부패한 자연이 인간의 생활 기반으로 된 것이다.
(마르크스, <경제학 철학 초고>)
p101
상품을 값싸게 하기 위해, 그리고 상품을 값싸게 함으로써 노동자 자체를 값싸게 하기 위해 노동생산력을 증대하는 것은 자본의 내재적 충동이자 끊임없는 경향이다. (338/436)
p102
임금은 시장의 수요와 공급의 관계로만 결정되지 않습니다. 예를 들어, 지금 일본은 일손이 부족하다고 하지만 임금은 전혀 오르지 않습니다. 마르크스는 노동자가 생활하는 데 얼마가 필요한지에 따라 임금이 결정된다고 말합니다.
하루 일하고 지친 노동자는 먹고 자고 다음 날도 일할 수 있도록 자신의 '상품'인 노동력을 회복해야 합니다. 마르크스는 이를 '노동력의 재생산'이라고 표현했는데, 노동력의 재생산 비용은 일상생활에 필요한 것을 생산하려면 얼마나 일해야 하는지에 따라 결정됩니다.
'필요'의 내용은 시대와 지역에 따라 다양합니다. 음식, 집세, 의복, 여가 비용은 물론이고, 오늘날에는 스마트폰과 인터넷 요금도 포함될 것입니다. 지방에서는 자동차도 필요합니다. 장기적으로는 자녀 교육비, 노후 자금 등을 충당할 수 있을 정도여야 합니다.
한편, 지금까지는 일당 1만 엔을 받아야 살 수 있었지만, 생산력이 높아지면 패스트패션과 패스트푸드 덕분에 예를 들어 8,000엔으로도 이전과 비슷한 생활을 할 수 있게 됩니다. 그러면 자본가는 노동자에게 지급하는 일당을 8,000엔으로 낮출 수 있습니다. 구체적으로는 비저유직 등을 늘려서 비용 절감을 할 수 있습니다.
생산력이 높아져 싸게 생활할 수 있게 되었을 뿐, 이 노동자가 한 시간 노동으로 창출하는 가치는 변하지 않습니다.
한 시간에 2,000엔인 가치를 창출한다고 가정할 때, 노동시간이 이전과 같은 여덟 시간이라면 일당 감소분 2,000엔은 고스란히 자본가의 잉여가치가 됩니다.
이처럼 노동력가치의 저하로 인해 발생하는 잉여가치를 마르크스는 '상대적잉여가치'라고 했습니다.
왜 '상대적'일까요? 앞 장에서 살펴본 '절대적잉여가치' 생산에서는 노동일의 절대 길이가 연장됨으로써 하루에 생산되는 가치 자체가 증가했습니다. 반면 '상대적잉여가치' 생산에서는 노동일의 길이는 변하지 않기 때문에 하루에 생산되는 가치의 합계는 그대로입니다. 하지만 노동력의 가치가 낮아짐에 따라 이윤이 늘어나는 구조입니다.
p105
자본가들이 생산력을 높이는 기술혁신, 즉 이노베이션에 기대하는 것은 '가치'의 증식만이 아닙니다. 그들의 또 다른 목표, 그것은 노동자에 대한 '지배' 강화입니다. 오히려 이것이 자본주의가 가져오는 생산력 증대에 대해 마르크스가 가장 문제 삼은 점입니다.
자본가는 특별잉여가치를 획득하고자 상품을 최대한 싸게 만들려고 노동자가 '효율적으로' 일하게 하려고 합니다. 즉, 생산성을 높이려는 것이죠. 이때 효율성은 노동자의 '쾌적함'을 의미하지 않는다는 점이 중요합니다.
자본주의에서 요구되는 것은 노동자를 중노동이나 복잡한 일에서 해방하는 것을 목표로 하는 신기술이 아닙니다. 그들이 무단결근도 하지 않고, 불평도 하지 않고, 지시하는 대로만 일하도록 하는 혁신, 즉 노동자를 효율적으로 지배하고 관리하는 기술입니다. 이런 '일하는 방식의 개혁'이 현대까지 이어져 왔기 때문에 케인스의 예상이 빗나간 것입니다.
실제로 마르크스는 생산력이 높아질수록 노동자는 편해지는 것이 아니라 자본에 '포섭'되어 자율성을 잃고 자본의 노예로 전락한다고 지적했습니다.
도대체 왜 생산력의 상승이 자본의 지배 강화로 이어질까요? 여기서 기억해야 할 것은 1장 서두에서 소개한 '물질대사' 이야기입니다. 거기서 인간이 '의식적이고 합목적적인' 노동을 통해 자연과 물질대사를 하고 있다고 이야기했습니다.
이 의식적이고 합목적적인 노동과정은 크게 두 가지 요소로 나눌 수 있습니다. '구상'과 '실행'입니다['구상'과 '실행'이라는 정리는 마르크스 본인이 아니라 해리 브레이버맨이라는 뛰어난 마르크스 연구자가 <노동과 독점자본>이라는 책에서 <자본론>을 연구하면서 쓴 말입니다]
p110
그렇다면 '구상'과 '실행'을 어떻게 분리할 수 있을까요?
가장 간단한 방법은 생산공정을 세분화하여 노동자들에게 분업을 시키는 것입니다. 옹기 하나가 만들어지기까지 어떤 공정을 거치는지, 각 공정에서 구체적으로 어떤 작업을 어떤 두고와 방식으로 진행하는지, 몇 분이 걸리는지 등을 자본가가 관찰하고, 직인이 각자의 고유한 방식으로 하는 작업을 획일적인 단순 작업으로 분해하는 것입니다.
물론 현대사회에서도 직인만이 만들 수 있는 물건이 있습니다. 하지만 그런 상품들은 애초에 자본주의 생산에서는 요구되지 않습니다. 자본가들이 만들고 싶은 것은 수작업으로 만든 예술적인 옹기가 아니라, 싸고 나름대로 튼튼한 물건입니다. 깨지거나 부서지면 언제든 저렴한 가격으로 교체할 수 있는 대량생산품입니다. 그런 것들은 직인 한 명이 정성스럽게 만드는 것보다 여러 사람이 분업해서 흐름작업으로 만드는 것이 효율도 좋고, 싸게 많이 생산할 수 있습니다.
자본주의가 확산되면서 가격경쟁의 물결에 휩쓸려 길드는 해체되어 갔습니다. 장사가 안되는 직인들은 폐업하거나 생계를 위해 자본가들의 분업에 동참할 수밖에 없었습니다. 이리하여 길드의 힘은 약해지고, 그만큼 자본가의 힘은 강해졌습니다.
그 결과 18~19세기 영업의 자유 원칙을 내세운 각국의 입법에 의해 길드의 특권은 폐지되었습니다. 마르크스의 조국 독일에서도 1869년 길드제의 역사는 막을 내렸고, '규칙 없는 자본주의'는 이렇게 해서 형성되었습니다.
p112
애초 노동자가 자신의 노동력을 상품으로 자본가에게 팔아야 햇던 이유는 물리적 생산수단, 즉 생활에 필요한 물건을 만들 수단이 없었기 때문입니다. 그런데 분업이라는 시스템에 편입됨으로써 무언가를 만드는 생산능력마저 잃게 되었다고 마르크스는 갈파했습니다.
몇 년을 일해도 단순 작업만 할 수 있는 노동자는 분업 시스템 안에서만 일할 수 있습니다(더 이상 자기 혼자로는 완제품을 만들 능력이 없습니다!). 그래서 먹고 살기 위해서는 자본의 지휘 감독과 명령에 따를 수밖에 없습니다. 분업과 협업은 이렇게 자본주의적 방식으로 재편되어 노동자의 주체성을 빼앗아 갑니다.
게다가 누구나 할 수 있는 단순 작업이기 때문에 공장 밖에는 나를 대신할 사람이 얼마든지 있습니다. 일자리를 잃고 싶지 않다면 꿈을 포기하고 불평불만을 꾹꾹 눌러 참으며 할당량을 달성하기 위해 묵묵히 일할 수밖에 없습니다. 그렇게 되면 점점 더 자본가와의 주종 관계가 강화됩니다. - 자유로운 재량의 여지가 사라진 일터야말로 노동이 고통으로 되는 소외의 원인입니다.
p113. 인간다움을 앗아 가는 테일러주의
구상과 실행을 철저하게 분리한 사례로 20세기 초의 '테일러주의'를 소개하겠습니다. 테일러주의는 미국의 기술자이자 <과학적 관리법의 원리>의 저자 프레더릭 테일러가 주장한 관리법입니다. 테일러는 기계공장에 견습생으로 들어가 기계공, 기술 부장을 거쳐 컨설턴트가 된 인물로, 지금은 미국 경영학의 원조로 여겨집니다.
테일러는 먼저 생산공정을 세분화하여 각 공정의 동작과 절차, 소요시간을 분석해 공정별 표준 작업시간을 확정해습니다. 작업의 낭비를 철저히 없애기 위해 동작에 따라 체형과 능력 등을 고려해 재배치하고, 전용 공구를 개발하고, 공구와 부품의 위치까지 세밀하게 정했습니다. 즉, 생산의 기술적 조건이 자본가에 의해 근본적으로 바뀐 것입니다.
또 생산을 계획하고 관리하는 사람과 실제 작업하는 사람을 완전히 분리했습니다. 이는 실제 작업을 하는 사람의 의식을 '정해진 시간 내에 자신의 업무를 완수하는 것'에만 집둥하도록 하기 위해서입니다. 그리고 시간 내에 일을 끝내지 못하면 벌금을 물거나 해고하고, 일정량 이상의 일을 해낸 사람에게는 보상을 하는 차별성과급제도도 도입해 경쟁심을 부추기며 단순노동에 매진하도록 했습니다.
테일러가 이런 일을 한 이유는 그가 제철소에서 일하기 시작한 초창기, 부하인 현장 공원들이 그의 명령을 조금도 듣지 않았기 때문입니다. 한편, 테일러는 자신의 지식과 기술이 '공원들의 지식과 손재주의 총합과는 거리가 멀다'는 것을 통감했습니다. 요컨대 공원들은 그를 우습게 보고 있었습니다.
이러한 경험을 바탕으로 테일러는 공원들의 지식과 손재주, 즉 구상과 실행을 철저하게 해제하고, 모든 공원이 자신의 지시에 따라 '최대의 노력, 최고의 근면 성실'을 발휘할 수 있는 구조를 고안하고 이를 체계화했습니다.
테일러는 경영의 개념을 정립한 '과학적 관리법의 아버지'로 불리지만, 테일러주의는 생산에 관한 노동자들의 지식이라는 '코먼(공유재산)'에 울타리 치는 행위에 다름 아닙니다. 생산에 관한 지식과 노하우를 자본이 독점하고, 자본의 편의에 따라 재구성된 생산시스템에 노동자를 강제로 복종시키기 때문입니다.
그래도 일시적으로 생산성이 높아져 실적 상승의 혜택을 노동자들도 임금인상이라는 형태로 받을 수 있습니다. 그래서 노조 측도 자본에 구상을 빼앗기는 것을 용인해 왔습니다.
하지만 고도 경제성장 시대가 끝나면 자본은 더 이상 노동자에게 그런 '덤'을 주지 않습니다. 노동자의 입지는 점점 약해지고, 임금도 낮아지고, 노동시간도 쉽게 연장됩니다.
자본주의는 생산력을 높이면서 노동자의 자율성도, 인간다운 풍요로운 시간도 사정없이 빼앗아 갑니다. 그래서 생산력이 아무리 발전해도 자본주의가 지속되는 한, 케인스가 예견한 여가사회는 결코 실현될 수 없습니다.
p116
1장에서 인간이 상품의 '가치'에 휘둘린다는 이야기를 했고, 2장에서는 '자본의 운동'에 휘둘린다는 이야기를 했는데, 대공업 시대의 노동자는 더 나아가 '기계'에 휘둘립니다. 기계라는 사물과 노동자의 입장이 역적, 전복된다는 의미에서 이것은 바로 생산과정의 '물상화'라고 할 수 있습니다.
생산과정에서 생동감 있게 움직이는 것은 기계이고, 기계는 "살아 있는 노동력을 지배하고 빨아들이는 죽은 노동"(446/571)이 됩니다. 이렇게 '정신노동'과 '육체노동'의 분리에 기반한 자본의 지배가 완성됩니다.
기계 노동은 신경계를 극도로 피곤하게 하는 한편, 근육의 다면적 작용을 억압하고 심신의 모든 자유로운 활동을 봉쇄힌다. 심지어 노동의 완화조차도 고통의 원천이 된다. 왜냐하면 기계는 노동자를 노동에서 해방하는 것이 아니라 노동을 내용에서 해방하기 때문이다. (445~446/571)
흥미롭게도 이 구절에서는 기계로 인해 노동이 쉬워지는 것조차 노동자에게는 고통의 원천이 된다고 지적하고 있습니다. 왜냐하면 기계가 노동자를 '노동'에서 해방하는 것이 아니라 노동의 '내용'에서 해방하는 것, 즉 내용 없는 단순노동을 강요하기 때문입니다. 내용이 없다는 것은 자신의 손으로 무언가를 만들어 내는 기쁨도, 성취감도, 충실감도 없는, 한마디로 소외된 상태라는 뜻입니다. 그리고 내용이 없으니 언제, 누구와도 대체가 가능하고 노동자의 힘은 점점 약화되는 것입니다.
자본의 지휘/명령, 즉 경영자의 의도에 따라 노동이 실현될 수밖에 없는 상태를 마르크스는 '자본의 전제(專制)'라고 불렀습니다.
자본의 전제가 완성되면 비약적으로 향상된 생산력도 모두 자본가의 것으로 나타난다고 마르크스는 말햇습니다. 실제로는 노동자들이 '협동'하여 수행한 노동이 생산력을 높였지만, 그것은 '노동자의 생산력'으로 나타나지 않고 '자본의 생산력'으로 나타납니다. 왜냐하면 노동자들이 자신의 의지로, 자율적으로 협업한 것이 아니기 때문입니다.
노동자가 자동차를 만들 수 있는 것도, 컴퓨터를 만들 수 있는 것도 자본 아래 모여서 그것의 지시에 따라 일하기 때문입니다. 자본의 지휘와 명령 없이는 우리는 더 이상 아무것도 만들 수 없습니다. 이리하여 생산력이 증대될수록 자본의 지배는 오히려 강화된다고 마르크스는 비판한 것입니다.
p120
기계의 자본주의적 사용은 한편으로 노동일의 무제한적 연장에 새로운 강력한 동기를 제공하고, 이 경향에 대한 저항을 분쇄하는 방식으로 노동 양식 자체와 사회적노동 유기체의 성격을 변화시킨다. 다른 한편으로 노동자계급 중 이전에 자본의 손이 닿지 않던 계층을 편입시키고 또는 기계가 쫓아낸 노동자들을 하는 일 없게 만듦으로써, 자본의 명령에 복종하지 않을 수 없는 과잉 노동인구를 만들어 낸다. (430/551)
기계가 육체노동을 대신하게 되면 비숙련노동자뿐 아니라 여성과 어린이 등 '이전에 자본의 손이 닿지 않던 계층'도 일할 수 있게 됩니다. 트랙터와 경운기 등의 도입으로 농업의 공업화는 농촌에 과잉인구를 만들어 많은 젊은이가 도시로 향하게 됩니다. 이들을 노동시장에 '편입'시키면 상대적 과잉인구는 점점 더 늘어날 것입니다.
공장 밖에서 '더 낮은 임금을 받고 일하겠다' '더 열악한 노동조건에서도 일하겠다' '어쨌든 일하게 해 달라'는 사람이 늘어나면 공장 안의 노동자들은 그들에게 일자리를 빼앗기지 않기 위해 필사적으로 더 오래, 더 성실하게 일하게 됩니다.
하지만 얄궂게도 그들이 필사적으로 일할수록 생산력이 높아져 자본가들이 '그렇게 많이 일해 준다면 지금은 100명 체제로 생산하는데 80명 정도면 되겠네'라고 생각하여, 상대적과잉인구는 더 증가하고 맙니다.
노동자계급 중 취업자들의 과도 노동은 예비군 대열을 팽창시키는 반면, 예비군이 경쟁을 통해 취업자들에게 가하는 압박의 강화로 취업자는 과도 노동을 하지 않을 수 없고 자본의 명령에 복종하지 않을 수 없다. (665/866~867)
이러한 상황은 실업자와 취업자의 분열을 낳고, 단결할 수 없는 노동자는 자본 앞에서 더욱더 힘이 약화됩니다. 힘이 약해지면 저항할 수 없게 되고, 더 많은 '과도 노동'을 받아들일 수밖에 없게 됩니다. 이 끝없는 악순환의 내막과 문제점을 마르크스가 강한 어조로 비판한 것이 다음 대목입니다.
자본주의 체제 내에서 노동의 사회적 생산력을 높이는 방법은 모두 개별 노동자의 희생으로 이루어지며, 생산을 발전시키는 모든 수단은 생산자들을 지배하고 착취하는 수단으로 전환되어 노동자를 부분적 인간으로 불구화하고 기계의 부속품으로 전락시키며, 노동의 고통으로 노동 내용을 파괴한다. 그리고 과학이 자립적 역능으로 노동과정에 합체될수록 노동과저의 정신적 역능은 노동자로부터 소원해지게 된다. 또 이러한 방법과 수단은 노동조건을 왜곡학로, 노동과정에서 극히 비열하고 혐오스뤙 전제 지배에 노동자를 복종시키며, 그의 생활시간을 노동시간으로 전환시키고, 그의 처자를 자본이라는 저거너트의 수레바퀴에 던져 넣는다. (674/878~879)
p127
애초에 사회적으로 그다지 중요하지 않은 일, 당사자조차 의미 없다고 느끼는 고임금 일자리는 오히려 늘고 있습니다. 문화인류학자 데이비드 그레이버는 '불쉿 잡(bullshit job)'이 광고업과 컨설팅업을 중심으로 최근 급속히 증가하고 있다고 지적했습니다.
쓸데없는 회의, 서류 작성, 쓸데없는 캐치프레이즈 만들기, 매너 교육, 모두 '불쉿 잡'입니다. 이는 생산력이 너무 높아져 무의미한 노동을 억지로라도 만들어 내지 않으면 엘리트들이 주 40시간 이상 일하는 환경을 유지할 수 없는 상태가 되어 간다는 반증입니다. 즉, 케인스의 예측이 빗나간 이유는 자본주의가 무의미한 일자리를 대량으로 만들어 내기 때문이라는 것이 그레이버의 주장입니다.
무익한 고임금 불쉿 잡이 넘쳐 나는 반면, 사회에 꼭 필요한 필수 노동자들은 열악한 노동조건을 강요당합니다. 이것이 자본주의가 고도로 발달한 현대사회의 현실입니다. 보람 없는 무의미한 노동도, 가혹한 장시간 노동도 삶을 가난하게 만든다는 점에서 동일합니다.
p128
인간이 모든 노동에서 해방되어 일하지 않고도 살 수 있는 사회가 되면 좋다는 뜻은 아닙니다. 마르크스가 원한 것은 인간을 대신해 무엇이든 해 주는 기계나 로봇을 우리가 맥구 한잔 마시며 멍하니 바라보는 그런 미래 사회가 아닙니다.
왜냐하면, 우리가 반복해서 보았듯이, 그가 무엇보다 문제 삼은 것은 구상과 실행이 분리되어 자본의 지배 아래 사람들의 노동이 무내용화되는 것이기 때문입니다. 인간의 노동이라는 풍부한 '부'를 회복하기 위해 마르크스는 구상과 실행의 분리를 극복하고 노동의 자율성을 되찾는 것을 목표로 삼았습니다. 가혹한 노동에서 벗어나는 것뿐 아니라, 보람 있고 풍요롭고 매력적인 노동을 실현하는 것입니다. 즉, 로봇이나 AI로 '노동' 자체를 없애겠다는 발상은 마르크스의 말을 빌리자면 문제의 소재를 잘못 짚는 것입니다.
마르크스가 상상하는 미래 사회의 노동자는 '전면적으로 발달한 개인'입니다. 나사만 조이고 돈만 버는 개인이 아니라, 구상과 실행 모두에서 자신의 능력을 발휘하고, 개개인이 자신의 노동력이라는 '부'를 활용하면서 사회 전체의 '부'를 풍요롭게 만들어 가는 것입니다. 그렇게 함으로써 우리는 서로를 지지하면서 자율적으로 살아갈 능력과 감수성을 되찾을 수 있고, 그것이 바로 소외를 극복하는 길이라고 마르크스는 생각했습니다.
p142
자본주의는 진정한 의미의 인간적 부를 빈곤하게 한다고 마르크스는 말했습니다.
p144
자본주의의 끝없는 운동은 일부 국가의 일부 사람에게 유리한 독점적 형태('대토지 소유')로 전 세계를 상품화합니다. 세계화의 결과, 한 국가의 '도시와 농촌의 대립'은 국경을 넘어 확대되고 있습니다. 그런데 자본주의는 가치 증식을 '무한'하게 추구하지만, 지구는 '유한'합니다. 자본은 항상 비용을 '외부화'하는데, 지구가 유한한 이상 '외부'도 유한합니다.
소련 붕괴 이후 자본주의 세계화가 점점 가속되면서 환경 위기 또한 세계화되었고, 이 위기와 무관하게 지낼 수 있는 장소가 지구에는 더 이상 남지 않는 지경에 이르렀습니다. 실제로 일본과 같은 선진국에서도 기후 위기와 영향이 슈퍼태풍과 폭염으로 확실하게 나타나고 있습니다. '물질대사의 균열'은 돌이킬 수 없을 정도로 깊어지고 있습니다.
p147
사회의 물질적 생산력은 일정한 발전단계에 이르면, 그 과정에서 지금까지 움직여 온 기존의 생산관계, 또는 그 법칙 표현에 불과한 소유관계와 모순된다. 이러한 관계는 생산력의 발전 형태에서 그 질곡으로 전화한다. 이때 사회혁명의 시대가 시작된다. (<전집> 제13권 6쪽)
자본주의는 지구환경을 파괴하지 않고는 이미 생산력을 더 이상 발전시킬 수 없습니다. 사적소유와 이윤추구 아래 약탈을 반복하는 시스템에서는 누구의 것도 아닌 지구환경을 지속 가능한 형태로 관리할 수 없습니다. 이는 자본주의가 더 나은 사회발전에 '질곡'이 된 상태입니다.
인간과 자연의 물질대사 사이의 '회복 불가능한 균열'이 문명을 파괴하기 전에 혁명적 변화를 일으켜 다른 사회 시스템으로 이행해야만 한다고 마르크스가 생각한 것은 이 때문입니다.
p164
자유투자사회에서 우리는 모든 행위와 선택을 '투자'로 간주하게 됩ㄴ다. 그런 사회의 귀결은 궁극적인 가성비 사회입니다. 결혼의 가성비? 육아의 가성비? 문화의 가성비? 민주주의의 가성비?
당연히 인생에서 행위 대부분이 자산 형성으로 이어지지 않습니다. 따라서 가성비 사고를 철저히 하게 되면 소통, 문화, 정치 참여, 세상의 많은 활동을 쓸데없는 것으로 여기게 되고, 커뮤니티와 상호부조는 쇠퇴하고 사회의 부는 점점 더 앙상하게 됩니다.
인생의 가성비를 따지자면 "당장 관 속에 들어가는 것이 가장 좋다"라고 요로 다케시(養老孟司, 1937~)는 비꼬아 말하지만 궁극적으로 삶의 의미 따위는 사라지게 될 것입니다. 여기에서 자본주의에 의한 '영혼의 포섭'이 극에 달한 것입니다.
p174
그 사회가 자본주의인지 아닌지는 정부의 규모나 국유 비율과는 무관합니다. 중요한 것은 자본을 늘리기 위한 잉여가치의 착취가 있느냐 없느냐입니다. 따라서 정부가 작아지고 시장에 맡기면 더 자본주의적으로 된다는 '신자유주의' 발상은 일면적입니다. 실제로 시장이 잘 작동하도록 정부가 적극적으로 개입하는 중국은 신자유주의는 아니지만 세계 최고의 자본주의국가입니다.
p176
자본주의의 본질은 상품의 등가교환 이면에 숨은 노동자 착취에 의한 잉여가치 생산에 있습니다.
이 문제를 해결하려면 단순히 사유에서 국유로 소유 형태를 바꾸는 것만으로는 충분하지 않습니다. 착취를 둘러싼 문제를 생산수단을 누가 소유하느냐의 문제로만 보고 노동의 문제로 보지 않는다면, 소련과 같은 과오를 범하게 될 것입니다. 자본주의를 극복하는 데 필요한 것은 착취 없는 자유로운 노동의 존재 방식을 만들어 내는 것입니다.
p177
마르크스에게 자본주의에 저항하는 데 중요한 것은 국가권력의 탈취나 정치체제의 변혁이 아니라 경제 영역에서 이 물상화의 힘을 억제하는 것이었습니다. 이렇게 말하면 어렵게 느낄 수도 있지만, 요컨대 상품과 화폐에 의존하지 않고도 살아갈 수 있도록 일상에서 선택의 여지를 넓혀 가는 것입니다.
p178
독일은 사정이 많이 다릅니다. 대학을 4년 만에 졸업하는 사람이 적고, 6년 정도 걸리는 것이 보통입니다. 유학 초기에, 박사과정까지 포함하면 20년 정도 학생인 사람들도 있다는 사실에 충격을 받았어요.
왜 그런 일이 가능하냐면, 학비가 무료이기 때문이죠. 그뿐 아니라 한 학기 2만 엔 정도면 전철과 버스를 무제한으로 탈 수 있는 정기권이 붙은 학생증을 받을 수 있습니다. 학생증만 있으면 학식도 몇백 엔으로 먹을 수 있고, 미술관이나 콘서트 할인도 받을 수 있습니다. 그 유명한 베를린 필의 콘서트도 15유로(약 2000엔)로 즐길 수 있습니다. 물론 기숙사비는 한 달에 3만 엔 정도로 저렴하고요.
대학 등록금뿐만이 아닙니다. 독일에서는 의료도 원칙적으로 무료이고, 간병 서비스도 후합니다. 실업수당, 직업훈련 등도 충실합니다. 그래서 육아에도 돈이 들지 않고, 노후까지 2000만 엔을 모을 필요도 없습니다. 그렇게 되면 싫은 일을 하면서도 필사적으로 버텨야 한다는 압박감이 약해집니다.
이것이 바로 복지국가 연구자인 괴스타 에스핑아네르센이 '탈상품화'라 부른 상황입니다. 즉, 생활에 필요한 재화(주거, 공원)와 서비스(교육, 의료, 대중교통)를 무상으로 이용할 수 있을수록 탈상품화가 진행된다는 것입니다. 이러한 재화와 서비스는 필요한 사람에게 시장에서 화폐를 사용하지 않고 의료나 교육 등의 형태로 직접 현물급부됩니다.
현물급부의 결과, 우리는 화폐를 얻기 위해 일할 필요가 줄어들게 됩니다. 복지국가는 물론 자본주의국가입니다. 하지만 탈상품화가 물상화의 힘에 제동을 걸고 있음을 알 수 있습니다.
p179. 국유화보다 어소시에이션이 선행했다.
소련도 교육, 의료 등을 무상으로 제공했기 때문에 복지국가와 차이점을 알기 어려울 수도 있습니다. 하지만 소련에서는 국유화가 먼저 선행되었죠. 반대로 복지국가의 경우, 물상화의 힘을 억제하려는 사회운동이 선행되었습니다. 이 운동을 마르크스는 '어소시에이션'이라고 불렀습니다.
노동조합, 협동조합, 노동자 정당, 모두 다 어소시에이션입니다. 요즘으로 치면 NGO나 NPO도 해당됩니다. 마르크스가 지행한 것은 소련과 같은 관료 지배 사회가 아니라, 사람들의 자발적인 상호부조와 연대를 기초로 한 민주적 사회였습니다.
어소시에이션의 중요성은 복지국가에서 제공하는 다양한 서비스의 역사적 형성 과정을 보면 알 수 있습니다. 예를 들어, 실업보험은 노동자 스스로가 임금의 일부를 모아 만든 것입니다. 일자리를 원하는 사람이 많아, 낮은 임금을 받고 일하는 사람이 많아지면 노동운동의 대오는 흐트러집니다. 그래서 일정 수준 이하의 임금으로 일하지 않도록, 실직한 노동자들의 삶을 스스로 지탱할 수 있는 구조가 만들어진 것입니다.
그 외에도 사회보험이나 연금부터 공공도서관, 공공의료에 이르기까지 모두 그 발단으로 거슬러 올라가면 노동조합, 이웃 상호부조 조직, 협동조합 등의 실천이 있습니다. 자본의 힘 앞에서 사람들이 자신의 삶을 지키고 풍요롭게 하기 위해 상호부조 시스템을 자발적으로 만들어 냈던 것입니다.
요컨대 이 모든 것이 탈상품화를 위한 어소시에이션 운동이었으며, 그것이 20세기에 들어서면서 노동자들 자신이 아니라 국가가 세금을 사용해 보편적 형태로 국민에게 제공하게 된 것입니다. 즉, 어소시에이션 운동은 국유화를 당과 관료가 추진했던 국가자본주의와는 순서가 반대입니다. 보편적 서비스로서 국유화는 어소시에이션이 발전한 다음에 이루어졌습니다.
어소시에이션이 경제의 기초에 있기 때문에 생활보장의 모든 것을 국가의 관리나 개입에 의존할 필요가 없습니다. 예를 들어, 독일에는 최근까지 전국적이고 일률적인 법정최저임금이 없었습니다. 독일에서는 노동조합이 일본처럼 기업별이 아닌 산업별로 조직되어 있습니다(금속산업노조는 IG금속, 서비사업은 ver,di처럼). 이 산별노조가 각 기업과 산업별로 노사 협정을 맺어 일정한 최저임금을 지키도록 하기 때문에 굳이 국가가 시장에 개입할 필요가 없었습니다.
어쨌든 물상화와 탈상품화라는 관점에서 보면, 복지국가는 마르크스가 생각한 비전과 겹치는 부분이 있습니다. 어소시에이션이라는 관점에서 보면, 노동조합운동을 금지하고 국유화 아래 관료가 의사결정을 독점하는 소련이나 중국과 같은 '사회주의국가'보다 자본주의 복지국가가 마르크스의 생각에 더 가깝습니다.
p182. 기본소득이라는 '법학 환상'
'국가자본주의'와 '법학 환상에 대한 마르크스의 비판은 오늘날 그 중요성이 더욱 커지고 있습니다. 이러한 환상은 과거에 국한된 이야기가 아니기 때문입니다. 노동운동이 침체되고 어소시에이션이 약화되는 가운데, 국가의 강력한 힘을 이용한 자본주의 개혁안이 다시금 제기되고 있습니다.
예를 들어, 2000년대부터 인기를 끌고 있는 기본소득(BI, Basic Income)은 '법학 환상'의 상징입니다. 모든 사람에게 화폐를 나눠 주는 법을 만들면 된다는 BI의 발상은 언뜻 보기에 매우 대담합니다. 충분한 돈을 자동으로 받을 수 있다면 굳이 싫은 일을 하지 않아도 됩니다. 좋아하는 일을 하면서 자유 시간도 늘어나고, 풍요로운 삶을 살 수 있다는 것입니다.
정말이지, BI는 마치 기사회생의 특효약처럼 보일 수 있습니다. 하지만 월 2~3만 엔을 지급받는 대신 연금이나 사회보장비를 삭감당하면 소용이 없습니다. 한편, BI로 매월 10만 엔 정도를 전 국민에게 지급하려면 재원으로 대기업과 부유층에 상당한 부담을 지우게 됩니다.
당연히 자본은 모든 수단을 동원하여 그러한 증세에 저항할 것입니다. 글로벌기업들은 일본 정부가 BI를 위해 높은 세금을 부과하면 회사를 접고 세금 부담이 적은 해외로 도피하겠다고 협박할 가능성이 높습니다. 그렇게 되면 세수는 줄고, 주가는 떨어질 것입니다. 이것이 자본의 위협, '자본 파업'입니다.
자본은 국가를 넘어 좋아하는 곳, 좋아하는 것에 투자할 자유를 갖고 있으며, 이 자유가 이동하지 못하는 노동자와 국가에 대한 자본의 권력과 우위의 원천이 되고 있습니다. 이 자유를 방패 삼아 '자본 파업'을 발동하려는 것입니다. 그래서 BI를 도입하려면 국가가 이 자본 파업을 이겨 내야 합니다. 그러기 위해서는 상당한 힘의 사회운동이 뒷받침해 주어야 합니다.
하지만 만약 사회운동 진영에 그 정도의 강력한 힘이 있다면 국가가 화폐를 나눠 주는 것 외에 다른 사회변혁의 길을 추구할 수 있을 것입니다. 예를 들어, 의료, 고등교육, 보육, 돌봄, 대중교통 등을 모두 무상화하여 탈상품화하는 것입니다.
그런데 애초에 BI라는 제안이 나온 배경에는 노동운동이 약화되고, 불안정 고용과 저임금 노동이 증가하고 있다는 점을 들 수 있습니다. 노동운동에 의존할 수 없으니, 그 대신 국가가 화폐의 힘으로 국민의 삶을 보장해 주자는 것이 BI입니다.
물론 매달 손에 쥘 수 있는 돈이 늘어나면 노동자들의 생활에 여유가 생기고, 노동자계급의 힘이 강해질 수도 있습니다. 하지만 이런 방식은 생산의 존재 방식에는 손을 대지 않기 때문에 자본이 가진 힘을 약화시킬 수 없습니다. 그렇기 때문에 BI를 요구하는 세력이 얼마나 힘을 가지고 자본 파업에 맞설 수 있을지는 미지수입니다.
앞서 말했듯이 BI에 담긴 사고방식은 화폐가 힘을 가진 현재의 상황을 상당히 소박하게 전제하고 있습니다. 그렇다면 우리가 BI를 도입한다 할지라도 상품과 화폐의 힘에 계속 휘둘리지 않을까요? 물상화의 힘은 전혀 약화되지 않습니다.
이에 반해 물상화의 힘을 억누르려고 한 마르크스는 화폐와 상품이 힘을 갖지 않는 사회로의 변혁을 목표로 삼았습니다. 물론 이 목표는 화폐의 힘을 아무리 사용해도 달성할 수 없습니다. 화폐의 힘에서 자유로워지기 위해서는 화폐 없이 살 수 있는 사회의 영역을 어소시에이션의 힘으로 늘리는 수밖에 없습니다.
p184. 피케티와 MMT의 사각지대
BI와 비슷한 '법학 환상'은 <21세기 자본>의 저자이자 프랑스 경제학자인 토마 피케티의 세제 개혁안도 공유하고 있습니다. 사실 피케티도 최근 들어 '사회주의'를 표방하는데, 그의 방식은 소득세와 법인세, 상속세를 대폭 인상해 과감한 재분배를 실현하는 것입니다. 예를 들어, 소득세와 상속세의 최대 세율을 90퍼센트 올리고, 이를 재원으로 삼아 모든 성인에게 일천수백만 엔씩을 지급하자고 제창합니다. 물론 그런 재분배가 이루어지면 서민들의 생활이 안정되고 풍요로워질 것입니다.
하지만 이런 대규모 증세를 싫어하는 자본 측이 필사적으로 저항할 것은 불 보듯 뻔합니다. 피케티의 설명에는 BI의 경우와 마찬가지로 자본 파업에 맞서 이런 대담한 개혁을 할 수 있는 힘이 어디서 나오는지 불분명합니다.
결국 피케티와 같은 양심적인 엘리트들이 사회 전체를 위한 제도를 톱다운방식으로 설계한다는 '법학 환상'은 잘 작동하지 않습니다. 자본 파업을 이겨 낼 수 있는 어소시에이션의 힘을 키워야 하는데, 피케티가 제안하는 세제 개혁을 지지하는 운동이 애초에 어떻게 일어날지 분명하지 않습니다.
그리고 최근 '반긴축파'의 이론으로 주목받는 현대화폐이론(MMT, Modern Monetary Theory) 에도 같은 문제가 있습니다. MMT는 자국 통화를 발행할 수 있는 정부는 재정적자를 확대해도 채무불이행이 되지 않기 때문에 재정적자일지라도 국가는 과도한 인플레이션이 발생하지 않는 범위에서 지출을 해야 한다는 주장으로 주목을 받았습니다.
MMT가 주장하는 과감한 재정지출은 정부가 최저임금으로 일자리를 마련하고 원하는 모든 사람에게 일자리를 제공하는 '고용보장 프로그램'과 한 세트로 생활을 보장합니다. 이를 통해 친환경적이고 지속 가능한 사회로 전환하는 데 필요한 일자지를 적극 창출하면서 경제성장을 도모하겠다는 것입니다.
그런데 이러면 잘될까요? 적극적 재정이라 하더라도 공적 투자로 비중이 이동하여 어디에 투자할지를 정부가 결정하는 것은 자본이 여전히 싫어할 것입니다. 투자 여부의 자유로운 판단권을 완전히 장악하는 것이 자본이 가진 권력의 원천이고, 그 힘을 지키기 위해 필사적으로 저항할 것입니다.
하지만 MMT에서 공적 투자에 의한 자본 관리는 중요합니다. 만약 화폐를 마구잡이로 뿌리는 형태가 되면 사회보장이나 친환경적 일자리뿐 아니라 군비나 불필요한 공공사업에 사용되어 버릴 수도 있기 때문입니다. 혹은 화폐를 뿌리는 과정에서 이권이 생겨 대기업만 이득을 보게 될 수도 있습니다.
한편, 정부의 시장개입이 커지고 탈탄소, 인권보호 등 규제를 강화할수록 자본의 반발도 거세질 것입니다. 그렇게 되면 자본이 국내 투자에서 철수하기 시작하고, 통화가치가 하락해 인플레이션 압력이 높아질 수 있습니다. 그러면 증세나 금리인상을 통한 경기 긴축이 필요하게 됩니다. 이러한 자본 파업을 이겨낼 수 있는 힘이 MMT의 경제정책에는 없습니다.
결국 톱다운식으로 대담한 정책을 실행하려고 해도 국가가 자본 파업에 굴복하지 않기 위해서는 상당한 어소시에이션의 힘이 필요합니다. 이때 어소시에이션에 요구되는 것은 노동자들이 무엇에 투자할지, 어떻게 일할지 등을 스스로 결정할 수 있도록 생산의 실권을 쥐여 주는 것입니다.
물론 그러한 생산 영역의 개혁이 매우 어렵다는 것은 자명한 사실이지만, 그렇다고 해서 자본과 임금노동의 힘의 균형을 바꾸는 근본적인 과제에서 눈을 돌려서는 안 됩니다. 하지만 그 어소시에이션을 만드는 관점이 BI에도, 피케티에게도, MMT도 부족합니다.
그리고 그것은 우연이 아닙니다. 계급투쟁이 없는 시대에 톱다운으로 할 수 있는 정치개혁이 BI이고, 세제 개혁이고, MMT이기 때문입니다. 이들은 정책이나 법의 논의가 선행되는 '법학 환상'에 갇혀 있습니다.
이에 반해, 물상화, 어소시에이션, 계급투쟁이라는 마르크스의 독자적 관점을 이러한 정치개혁에 도입하는 것은 사고와 실천의 폭을 크게 넓혀 주며, 이러한 대담한 정책 제안을 실현하기 위해서도 필수적인 전제조건입니다.
p187. 상향식 사회변혁으로
이사의 논의에서 알 수 있듯이, 마르크스는 위로부터의 설계만으로 사회 전체가 좋은 방향으로 바뀔 수 있다는 사고방식을 버렸습니다.
이 점은 매우 중요합니다. 왜냐하면 어소시에이션을 통한 탈상품화를 전략의 중심에 두는 것은 러시아혁명 이미지가 강한 20세기형 사회변혁의 비전에 큰 변화를 요구하기 때문입니다. '톱다운' 방식에서 '상향식' 으로의 대전환이라고 할 수 있습니다.
이 변화는 마르크스 자신의 혁명관 변화에서도 드러납니다. 마르크스 역시 아직 젊었던 <공산당선언>(1848년) 단계에서는 공황을 계기로 국가권력을 탈취하고 생산수단을 국유화하는 '프롤레타리아독재'를 주장했습니다. 그러나 <자본론>에서는 논의의 초점이 크게 달라집니다. <자본론>에서 그런 공황 대망론은 찾아볼 수 없게 됩니다.
오히려 이 책의 2장과 3장에서도 보았듯이 마르크스는 <자본론>에서 노동시간 단축과 기능 훈련에 역점을 두었습니다. 혁명의 책인데도 강조한 것은 자본주의 내부에서 일어나는 어소시에이션에 의한 개량입니다.
이러한 강조점 변화의 배경에는 마르크스가 혁명의 어려움을 인식한 점이 있습니다. 마르크스의 <공산당선언>에는 노동자의 궁핌화와 공황으로 머지않아 혁명이 일어나고, 이를 통해 사회주의 체제를 수립할 수 있으리라고 낙관적으로 생각한 구절이 있습니다. 그러나 1848년 혁명에서 노동자 봉기는 실패로 돌아갔고 자본주의는 되살아났습니다. 1857년 시작된 공황 때도 마찬가지였습니다.
자본주의의 끈질긴 생명력 앞에서 마르크스는 그 힘의 원천을 탐구할 필요성을 통감했습니다. 그것이 마르크스를 경제학 비판으로 이끌었고, 그 연구 성과인 <자본론>에서 마르크스는 낙관적인 변혁 비전을 버리고 혁명을 향한 자본주의 수정에 무게를 두게 됩니다.
이때 마르크스는 임금인상보다 노동시간 단축을 중시했는데, 이 역시 물상화라는 관점에서 보면 그 이유를 알 수 있습니다. 시급을 올리는 것도 물론 의미가 있지만, 더 오래 일해 화폐를 얻고자 하는 욕망에서 노동자들은 해방되지 못합니다. 오히려 점점 더 화폐에 의존학 됩니다. 욕망은 무한하기 때문입니다.
실제로 서구 복지국가는 노동시간 단축을 체택했습니다. 예를 들어 프랑스는 노동시간이 주 35시간입니다. 이러한 노동시간 단축은 노동자에게 여가가 생기게 합니다. 하지만 여가가 생겨도 일요일에 모든 가게가 문을 연다면, 결국 자본주의에 먹히고 말 것입니다. 그래서 일요일에는 식당이나 미술관 등을 제외하고 백화점, 쇼핑몰, 슈퍼마켓 등은 원칙적으로 문을 닫는 것입니다.
가게가 문을 닫았기 때문에 자본주의적 소비활동을 아예 할 수 없게 됩니다. '윈도쇼핑'은 일본에서 흔히 오해되듯이 돈이 없어 가게 밖에서 브랜드 상품을 구경하는 일을 말하는 것이 아닙니다. 일요일에 가게가 문을 닫았기 때문에 어쩔 수 없이 밖에서 구경하는 것입니다.
가게가 문을 닫기 때문에 여가를 보내는 다른 방법이 필연적으로 생겨납니다. 카페에서 독서하고, 정치 이야기를 하는 사람도 있습니다. 스포츠 침에서 축구하는 사람도 있습니다. 정원이나 농장을 가꾸어도 좋습니다. 시위나 자원봉사를 하는 사람도 있습니다.
바로 탈상품화와 결합된 여가는 비자본주의적 활동과 능력 개발의 터전을 마련해 줍니다. 그것이 또 다른 어소시에이션의 발전과 탈상품화의 가능성을 넓혀 가는 것으로도 이어집니다. 이리하여 가성비 사고로 회수되지 않는 사회적 부의 풍요가 양성될 수 있습니다.
p201
자연과학과 공동체를 동시에 연구하던 마르크스는 자연의 '지속가능성'과 인간 사회의 '평등'의 강력한 연관성을 깨닫게 됩니다.
왜냐하면 부가 편재하면 거기에서 권력과 지배-종속 관계가 생겨나고, 이를 더욱 공고히 하기 위해 인간과 자연에서 약탈이 시작되기 때문입니다. 그 결과 자원이 고갈되면, 이번에는 서로 탈취하는 싸움이 벌어집니다. 그런 상황에서는 도저히 사회의 번영을 실현할 수 없습니다.
p237
마르크스에 따르면 변화의 담당자는 '프롤레타리아트'입니다. 프롤레타리아트라고 하면 남성 공장 노동자를 떠올리는 사람도 많겠지만, 자본주의 아래에서 부정적 영향을 받는 사람은 어떤 의미에서 모두 프롤레타리아트입니다.
장시간 노동과 저임금으로 피폐해진 필수 노동자, 일자리가 불안정해서 늘 스트레스를 받는 사람, 일에서 보람을 느끼지 못하는 사람도 마찬가지입니다. 일에서도, 일상생활에서도 우리는 시장 논리, 경쟁 원리에 휘둘리고 있습니다. 자본주의 아래에서는 우리는 모두 프롤레타리아트입니다.
자본주의는 불평등과 분단을 낳고, 약자들로부터 더 빼앗아 왔습니다. 그리고 시장은 화폐가 없는 사람들을 배제합니다. 이 때문에 상품화의 힘을 약화하고, 사람들이 참여할 수 있는 민주주주의 영역을 경제 영역에까지 확대하자고 마르크스는 말합니다. 그것이 바로 모든 것의 '상품화(commodification)'에서 모든 것의 '코먼화(commonification)'로의 대전환을 향한 코뮤니즘의 투쟁입니다.
p240
신자유주의 시대는 끝났습니다. 전염병, 전쟁, 기후 위기 등 만성적 긴급사태의 시대에는 강한 국가가 요청되기 때문입니다. 이 만성적 긴급사태를 방치한다면 국가의 힘이 점점 더 강해져 파시즘과 전체주의로 나아갈 것입니다. 스탈린이나 히틀러의 재림은 물론 허용될 수 없습니다.
그런 '야만 상태'를 피하기 위해서는 불평등과 착취, 전쟁과 폭력, 식민지지배와 노예제 등의 문제를 직시하고 국가의 폭주에 저항하면서 자유와 평등의 가능성을 필사적으로 사고했던 사상가들의 지혜와 상상력에서 배워야 합니다.
이 책을 읽어보면 옛날 우리의 아이들은 정말로 건강한 환경에서 자라났구나라는 생각이 든다. 청소년 시기에는 친구들과 희로애락을 다 충분히 느낄 수 있는 환경에서 자라나야 한다. 그리고 자연이야말로 가장 위대한 스승이다.
어떤 에피소드에서는 너무 울컥하고 가슴이 먹먹하여 더는 책장을 넘기기가 힘들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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p31. 빨간 알사탕 하나
장에 다녀오신 할머니가 모시 손수건에 싸 꼬옥 품고 온 빨간 알사탕 한 알을 입에 넣어주셨다.
"와아 달다 할무니, 겁나게 다요. 세상에서 젤 달고 맛있다아."
볼이 불룩한 알사탕을 빨며 나는 황홀감에 소리쳤다.
처음 먹어 본 알사탕의 단맛은 며칠이 지나도록 내 입 속과 몸 안을 굴러다녔다. 할머니가 잘 익은 대추알을 줘도, 붉은 홍시랑 몰캉한 다래알을 입에 넣어줘도 "아 거시기 알사탕 참 달고 맛있었는디라" 온통 알사탕 생각뿐이었다.
신식 알사탕의 강렬한 단맛은 나를 완전히 사로잡았고, 혓바닥을 물들인 빨간 색소만큼이나 진득하니 나를 끌어당겼다.
흰 눈이 내리고 문풍지 바람이 차운 밤, 처마 아래 매달은 대바구니에서 인절미를 꺼내 화롯불에 구워 호호 불어 조청에 찍어 입에 넣어주던 할머니가 그랬다.
"아가 맛있냐. 수수조청 맛이 어떠냐."
"달고 맛나요, 근디요 알사탕이 더 달고 맛나요. 최고랑께요."
문득 할머니가 침묵하는 걸 느끼며 뭔가 잘못됐음을 알아챈 순간, 알사탕 맛을 본 이래의 내 말과 일련의 일들이 스쳐갔다.
그랬다. 할머니는 곶감이든 떡이든 엿이든 어디선가 선물 받은 그 달고 맛난 것들을 자기 입에 넣지 않고 품고 와 내 입에 넣어주셨는데, "근디 알사탕이 더 달고 맛난디라. 그 빨간 알사탕이..." 흘린 듯이 말해왔던 나는 그만, 구수한 인절미와 달근한 수수조청을 씹으며 울먹였다.
다른 때 같으면 "아가 울지 마라" 품에 안아주실 텐데, 울먹이는 나를 기냥 두고 구부정히 마주 앉아 아무 말도 없는 할머니가 낯설고 멀어지고, 할머니와 나 사이의 어떤 끈이 끊어져 버린 듯 아득했다.
이윽고 할머니가 "아가, 이리 오니라" 울먹이는 내 등을 쓰다듬으며 물그릇을 들어 마시게 했다.
"평아, 알사탕이 달고 맛나지야? 그란디 말이다. 산과 들과 바다와 꽃과 나무가 길러준 것들도 다 제맛이 있지야. 알사탕이 아무리 달고 맛나다 해도 말이다. 그것은 독한 것이제. 유순하고 담백하고 부드러운 맛을 무감하게 가려버리제. 다른 맛들과 나름의 단맛을 가리고 밀어내 부는 건 좋은 것이 아니제. 알사탕같이 최고로 달고 맛난 것만 입에 달고 살면은 세상의 소소하고 귀한 것들이 다 멀어져 불고, 네 몸이 상하고 무디어져 분단다. 그리하믄 사는 맛과 얼이 흐려져 사람 베리게 되는 것이제.
"야아, 할머니, 알겠어라."
"우리 평이는 겨울이면 동백꽃을 쪼옥 쪼옥 빰시롱 '달고 향나고 시원하게 맛나다' 했는디, 올해 동백꽃 맛은 어쩌드냐아. 나는 말이다, 아가. 네 입에 넣어줄 벼꽃도 깨꽃도 감자꽃도 아욱꽃도 녹두꽃도 오이꽃도 가지꽃도 다 이쁘고 장하고 고맙기만 하니라. 이 할무니한텐 세상에서 우리 평이가 젤 이쁘고 귀한 꽃이다만 다른 아그들도 다 나름으로 어여쁜 꽃으로 보인단다. 아가, 최고로 단 것에 홀리고 눈멀고 그 하나에만 쓸려가지 말그라."
나는 고개를 끄덕이며 할머니 품에 꼬옥 안겼다.
다음 해 문풍지 우는 화롯불 곁에 할무니, 우리 할무니는 아니 계셨다. 나는 돌아가신 할무니가 그리워 마당으로 걸어 나갔다. 하얀 눈 위에 작은 내 발자국이 총총히 따라왔다.
동백나무 아래 붉고 선연한 동백꽃이 떨어져 있었다. 나는 으스스 떨면서 언 손으로 동백꽃을 한 줌 가득 주워 쪼옥 쪼옥 빨아먹으며 눈길을 걸었다.
"아가, 맛이 어떠하냐?"
"순하고 맑고 시려요. 달고 향그럽고 맛나요, 할무니."
p54
성서는 복음서라는데, 나에게 성서는 울음의 책이었다. 호세 신부님과 함께 더듬더듬 성서를 읽어나갈 때 내 가슴에 박히는 건 눈물과 탄식과 수난과 죽음이었다. 그랬다. 세상의 큰 울음을 통하지 않고는 복음을 들을 수가 없는 것이었다. 울음이야말로 복음이었다. 눈물이야말로 은총이었다.
가난하고 불운하고 슬픈 눈을 가진 예수. 그는 고난받으면서도 사랑이 제일이라고, 사랑이 처음이자 전부라고, 사랑이 없다면 아무것도 아니라고 하는 것이었다. 애통하고 분노하고 울면서도, 죽음보다 강한 사랑으로 '다 이루었다' 기꺼이 죽어간 예수가 좋았고, 눈물의 사제인 호세 신부님이 좋았다.
p57. 빗속의 등불들
가을비를 앞두고 다들 벼 수확에 쫓겨서 부지깽이도 나설 만큼 분주한 때였다.
일손을 구하지 못한 어머니는 혼자 겨우 벼를 베어 논바닥에 뉘어놓고는 묶지도 못하고 돌아왔다. 급히 저녁을 지어 먹고 다시 논으로 나가 볏단을 묶어 세우는데, 꾸물거리는 하늘에 천둥번개가 치고 비가 쏟아져 내리기 시작했다. 애써 베어 둔 벼가 빗물에 잠겨 들고 있었다. 탈진한 어머니는 벼를 묶어 세우느라 안간힘이었다.
들녘은 어둡고 빗줄기는 거세고 발은 푹푹 빠지고 나락은 젖어 무겁기만 했다. 애가 탄 나는 어찌해 볼라고 볏단을 붙들고 힘을 써 봤으나 이렇게 작고 약한 내가 원망스럽고 아부지 없는 서러움이 차갑게 파고들었다.
그때 멀리서 희미한 불빛이 일렁였다. 불빛들이 나를 향해 다가오자 나는 도깨비불인가, 더럭 겁이 났다. 어둠 속에 점점 커지는 불빛 사이로 "가스파르!" 부르는 소리가 들려왔다. 쏟아지는 빗발을 뚫고 등불과 낫을 든 흰옷의 행렬이 보였다. 동강공소에 다니는 저 건너 마을 형 누나들과 어른들이었다.
동네 사람들도 친척들도 이런저런 나름의 일들로 도울 여력이 없었는데, 우리 집 사정을 아는 신자들이 비가 쏟아지자 서로 소식을 들리고 의견을 모아 여기 먼 마을까지 나선 것이다. 남편을 잃고 홀로 된 젊은 엄니가 이 작은 논 세마지기에 다섯 아이 생계를 걸고 사는 걸 알기에, 자기들 수확을 뒤로 한 채 십리 밤길을 달려온 것이다.
어머니와 신자들이 서로 부둥켜 안고 인사를 나누고 일렁이는 횃불 아래 비에 젖은 얼굴들이 빛나고 있었다.
"하이고 장해라. 엄니랑 벼를 다 베어놓았구나이."
그러더니 논바닥의 나락을 세워 짚으로 묶고, 볏단을 지고 논두렁에다 옮겨 둥글게 쌓고, 함께 성가를 부르며 날랜 손길로 일을 해나가는 것이었다.
차가운 빗속에 몸에 돋는 소름과 하얀 입김, 가슴을 데우는 뜨거운 온기, 어둠 속에 일렁이는 등불과 노동의 춤사위 같은 긴 그림자, 빗소리를 타고 울리는 성가 소리...
일을 마치고 어두운 밤길로 점점이 멀어져 가는 등불을 바라보며 어머니와 나는 빗줄기 속에서 성호를 그었다.
p75. 나의 첫 요리
나의 첫 번째 요리는 여덟 살 때, 그러니까 그날 정오에, 느닷없이 해버렸다.
모내기를 앞두고서 동네 일손을 구해 우리 논에 써레질을 하는 날이었다.
"일손은 잘 멕여아지야. 작은아들, 오늘 나 좀 도와주시제."
엄니가 뜨끈한 가마솥에 쌀밥을 안쳐두고 매콤새콤한 서대회 감을 손질해 살강(선반)에 올려두는 사이, 나는 동강양조장에서 막걸리를 받아다 찬물에 담가두고, 갯벌 바다가 어부네에 가서 갓 잡은 커다란 갯장어 두 마리를 대바구니에 담아 끙끙 이고 왔다.
"애썻다. 인자 아궁이에 불을 지피그라. 불티 안 날리게 은근히 때야 쓴다이."
"걱정 마시씨요. 싸릿가지랑 솔잎으로만 곱다시 불 땔께라."
엄니는 부뚜막 위에 된장 한 그릇, 조선파 한 다발, 어슷이 썬 무우, 여린 호박잎이랑 들깨 순이랑 토란 줄기, 절구에 굵게 빻은 고춧가루랑 마늘이랑 생강, 부엌 시루에서 기른 숙주 한 바구니를 가지런히 준비해 두고선 큰 도마를 꺼내 내 다리만큼이나 굵은 갯장어를 다듬고 토막 치기 시작했다.
그러다 갯장어가 꿀틀, 한순간에 무서운 일이 벌어졌다. 엄니의 손에서 붉은 피가 뿜어져 나왔다. 몸서리가 치고 난 얼어붙어 버렸다.
으음, 엄니가 신음을 토하더니 한참이나 감은 눈을 번쩍 뜨고 작으나 단호한 목소리로 나를 보며 말했다.
"평아, 정신 차리자. 바가지에 물을 떠라. 여기 손에 부어라. 잘혔다. 방에 가 횟대에 걸어둔 옷 내오니라. 이 치마랑 저고리 벗기고 입혀라. 되었다."
"엄니.... 얼굴에 피..."
나는 엄니가 쓴 머릿수건을 풀어 후다닥 물에 적셔 이마와 볼에 튄 피를 닦았다. 엄니 얼굴빛이 창백해지고 입술이 파랗게 떨려 더럭 겁이 났다. 엄니는 피 흐르는 손을 감싸 위로 치켜든 채 우뚝 서너디 말했다.
"평아, 내 말 잘 들어라. 물이 끓으면 이 장어를 넣어라. 솥뚜껑이 들썩이고 김이 오르면 여그 된장과 파를 넣고 호박잎과 야채를 넣어라. 마지막에 고춧가루랑 양념을 넣어라. 간을 잘 잡아야 쓴다. 서대회는 고루 잘 무치고 막걸리 식초는 논에 가져가서 마지막에 넣어라. 알겄냐. 다들 일 나갔을 테니 논밭에 가서 작은 엄니나 아랫집 순덕이 누나를 찾아라. 엄니가 급한 일로 출타했다 허고 늦지 않게 일손들 밥 내가그라. 알았지야, 평아, 해낼 수 있겄지야?"
나는 아직 부들부들 떰시롱 애써 씩씩하게 대답했다.
"알았어라, 다 해낼께라. 근디 엄니 혼자 가실라고라..."
엄니는 팔꿈치 아래로 피가 뚝뚝 떨어지는 손을 움켜쥔 채 날랜 걸음으로 마당을 질러 멀리 떨어진 면 소재 의원으로 가는 것이었다.
혼자 남겨진 나는 겁에 질려 아무 생각도 나지 않고 귓속에서 잉잉잉 벌이 날고 가슴에 우두두 말이 달리고 엄니의 피 묻은 얼굴만 아른거렸다. 나는 물을 한 바가지 떠서 마시고 찬물로 얼굴을 씻었다. 그리고 타닥타닥 가마솥이 끓을 때, 엄니가 불러준 순서대로 기억을 불러내며 장어 요리를 시작했다.
"하이고 하느님, 울 엄니 살려주씨요. 울 엄니가 안 불쌍하요. 아부지 델꼬 가 불더니 울 엄니까지 뭔 죄다요. 좀 살려주시씨요."
울며 기도하며 엄니가 맡긴 요리를 마쳤다. 그러고는 숨이 차도록 달려나가 아랫집 순덕이 누나를 찾았다.
"누나 얼러 씼으씨요. 바쁘요이."
나는 논흙투성이인 누나에게 두레박 물을 막 부어주며 재촉했다. 부엌으로 와서 국 맛을 본 누나가 둥그래진 눈으로 나를 바라봤다.
"옴마야, 간이 딱 맞네. 맛나게 끓였네잉. 엄니가 한 거보다 평이가 더 맛있게 해부렸네이."
누나는 속도 모르고 내 머리를 쓰다듬어주었다.
"밥 늦겄소. 싸게싸게 챙기잔께라."
누나와 나는 고봉밥을 담고 김치를 썰고 국통과 그릇을 날래게 챙겨 논가 키 큰 버드나무 아래 밥을 차리고 일손들을 불렀다.
"엄니는 으디 가고 평이랑 순덕이냐?" "아 공소에 신부님이... 그 눈 파란 신부님이 급하게 불러서라."
나는 애써 둘러댔다.
"하야, 귀헌 장어국이네. 나가 오늘 뭔 복이다냐아." "하이고야 맛나네. 간도 딱 맞고 입에 착착 감기네잉." "흐미, 요 새콤매콤 달근한 서대회 맛 좀 보소. 씨원한 동강 막걸리랑. 이 맛에 나가 여그 살제잉. 아 행복지다." "하여튼 니 엄니 음식 솜씨는 천하제일이여."
나는 엄니가 빈 자리에 마치 내가 우리 집안의 가장이나 되는 양 뒷짐을 지고 힘을 담아 말을 했다.
"맛나게들 많이 많이 드시씨요. 우리 논에 정성 좀 많이 들여 주씨요잉."
어른들이 하하하 웃으면서 나를 놀리고 순덕이 누나도 "아따아따, 쫌 있으면 장가 보내달라겄다야" 호호호 웃음을 날렸다.
나는 집에 돌아와 설거지를 마치고 엄니를 기다렸다. 해가 저물녘에야 엄니가 핼쓱한 얼굴로 작아져서 돌아왔다. 기름 떨어진 호롱불처럼 힘이 하나도 없는 목소리였다.
"평아, 이른 대로 했느냐?" "예, 걱정 마씨요. 다 잘 되었써라."
나는 잽싸게 방으로 달려가 요를 펴고 베개를 놓았다. 그리고 핏자국이 말라붙은 옷저고리를 벗겨주었다. 자리에 누운 엄니가 눈을 감고 신음하더니 하얗게 마른 입술로 더듬거렸다.
"손은 붙였다. 스무 바늘쯤 꿰맸다. 피를 많이 흘려 도중에 어질했으나 다 잘되었다. 감사하다. 오 하느님, 성모님..." 그러고는 스르르 잠에 들었다.
나는 살금살금 들락거리며 내가 아파 누웠을 때 엄니가 해준 것들을 떠올리며 수건을 적셔 이마의 땀을 닦고 따끈한 물로 발을 닦고 팔 자루를 데워 배 위에 얹었다. 그리고 엄니의 낡은 기도문을 펼쳐 읽으며 울먹였다.
엄니가 깨어났을 때 솥 안 더운 물 위에 놓아둔 장어국과 밥을 내왔다. 벽에 기대앉아 상을 받은 엄니가 나를 한참 쳐다보더니 "많이 컸네..."하셨다. 나는 머쓱한 데다 시린 마음이 들킬세라 "아따 얼른 수저나 뜨씨요" 해버렸다.
엄니는 따끈한 장어국을 맛보더니, 밥을 말더니, 점점 빠르게 드시는 거였다.
"맛나네, 잘했네. 아들 밥상을 다 받아보네... 속없이 맛있네."
밥을 다 드신 엄니는 또 잠이 들었다.
울 엄니가 크게 베인 손을 움켜쥐고 핏방울 떨구며 홀로 먼 황톳길을 걸어가던 꿈같이 어질하고 절박했던 그날 이후, 나에게 요리쯤은 아무것도 아니었다.
예기치 않은 어느 날, 준비도 연습도 없이 맞닥뜨려야 하는 사건이 벌어지면, 울며 기도하며 내가 할 수밖에 없는 일이 주어지면, 그렇게 간절한 마음으로 꼭 해내야만 하는, 내 인생의 모든 것이 그날 정오에 시작되었다.
생각할 때마다 아뜩하고 목이 메이는 나의 첫 요리, 내 인생의 첫 요리.
p98
나는 홀로된 울 엄니의 젊음을 먹고 눈물을 먹고 기도를 먹고 어서어서 자라났는데, 엄니의 가르침대로 엄미가 바쳐준 사랑의 힘으로 이렇게 자라났는데, 엄니한테 정말 잘하고 싶었는데, 한 번은 자랑이고 싶었는데, 한 번도 그러지 못해서... 이제는 그럴 수도 없어서... 엄니 미안해.
p100
다음 날부터 산과 들과 바닷가를 누비며 꽃씨를 받으러 다녔다. 고이고이 받은 꽃씨들을 종류별로 한지 봉투에 넣고 꽃 그림을 그리고 꽃 이름을 쓰고, 지끈으로 묶어 서랍에 넣어두었다.
어머니는 아침이면 살아생전의 아버지가 신던 흰 고무신을 깨끗이 닦아 댓돌 위에 가지런히 올려놓고 논으로 밭으로 품앗이를 나가셨다.
학교에 다녀오면 맨 먼저 날 반기는 건 아버지의 흰 고무신이었다. 나는 등에 비껴 맨 책보를 풀어놓고 마루에 걸터 앉아 흰 고무신에 작은 발을 가만히 넣어보곤 했다. 고무신은 내 두발을 포개 넣어도 남을 만큼 컸다.
그 해는 가뭄이 심해 다들 보릿고개 넘기가 힘들었다. 나는 속없이 먹어도 먹어도 허기지고 어지러웠다. 해당화가 붉게 피어 향기를 날리던 날이었다. 어머니는 아버지의 흰 고무신을 씻어 댓돌 위에 놓아두고 멀리로 돈을 벌러 떠나셨다.
학교에 다녀오면 엄마가 없었다. 텅 빈 집안이 처음으로 무서웠다. 밤이면 뒷산에서 여우 울음소리가 들리고 막내 여동생은 대숲 바람 소리에도 내 작은 품을 파고들며 엄마 엄마 부르다 잠이 들곤 했다.
댓돌 위에 늘 희게 빛나던 고무신은 하루하루 흙먼지에 빛바래 갔다.
가을 운동회를 마치고 공책 세 권을 상으로 받아 들고 풀 죽은 걸음으로 집으로 왔다. 마당에 들어서니 댓돌 위 고무신이 하얗게 빛나고 있었다. 엄마다!
엄니이~ 소리치며 달려가 방문을 열었다. 엄니가 목화꽃처럼 웃고 계셨다. 깨끗이 씻긴 막내는 엄니 품에서 카스텔라 빵을 볼이 미어지게 물고 있었다. 엄니는 긴 머리를 말아 비녀를 꽂던 쪽 찐 머리를 짧게 잘라 파마를 했고 볼위 야위어선지 더 쓸쓸해 보였다.
어머니는 매일 아버지의 고무신을 닦아 댓돌 위에 놓았다.
"아부지가 집에 돌아오면 양복이랑 구두를 벗고 말이다, 이 흰 고무신을 신고 흙마당을 거닐 때가 젤 좋다고 웃곤 했지야. 집안에 어른의 흰 고무신 한 켤레가 놓여있어야 든든 안 하냐아."
사흘 뒤 엄니는 서둘러 가을걷이를 마치고 다시 떠나야 했다. 엄니를 배웅하러 나간 우물가 정자나무 아래에서 동생은 엄니에게 안 떨어지려고 울며 몸부림을 쳤다. 나는 동구 밖 넘어 신작로를 걸어가는 엄니의 뒷모습이 안 보일 때까지 막내의 손을 꽉 쥐고 울지 않았다.
눈물 젖은 동생을 데리고 걸어오는 골목길이 이렇게 길고 먼지 처음 알앗다. 집에 오자마자 동생 얼굴을 씻기고 방에 데려가 뉘었다. 학교 간 누나는 아직 오지 않았고 어두워 오는 집안에 나 혼자였다.
나는 마루에 걸터앉아 엄니가 깨끗이 닦아놓고 간 흰 고무신에 가만히 발을 넣었다. 발등에 물방울이 툭툭 떨어졌다.
계절이 흐르고 첫눈이 내리고 학교를 마치고 집으로 돌아왔다. 흙먼지에 뿌옇던 고무신이 댓돌 위에 하얗게 빛나고 있었다. 엄마다! 나는 한달음에 뛰어가 문고리를 당기며 울음 섞인 목소리로 엄니이~ 불렀다. 없었다. 방안이 썰렁했다. 막내만 혼자 집을 보다 아기 노루처럼 잠들어 있었다.
나는 슬픔과 배반감에 입술을 깨문 채 한참을 서 있었다. 어린 막내 동생도 엄니가 그리웠던 것이다. 그래서 고무신을 하얗게 닦아 놓았던 것이다.
나는 밖으로 뛰쳐나갔다. 골목을 지나 들길을 지나 방죽길을 숨이 터져라 내달렸다. 눈물이 차가웠다. 돌멩이를 집어 들고 들판으로 하늘로 바다로 내던졌다. 새 떼가 날아오르며 갈대밭이 몸을 떨었다. 나는 못 견디게 쓸쓸하고 슬퍼져서 황톳길을 따라 걷고 또 걸었다.
다음 날 아침 나는 흙마당을 쓸고 얼굴을 씻고 아버지의 흰 고무신을 깨끗이 닦아 댓돌 위에 놓아두었다. 그러고는 아무도 없을 때면 마루에 앉아 살며시 내 작을 발을 고무신에 넣어보곤 했다. 어서어서 내 발이 커져서 아부지 고무신에 맞기를, 흰 고무신을 신고 웃으며 걷는 듬직한 아들이 되고 오빠가 되기를 소망하며.
… The road is long With many a winding turn That leads us to who knows where, who knows where
길고 긴 여정 앞에, 많은 굴곡들이 있을테지만, 그 길이 우리를 어디로 이끌지 아무도 모르죠.
But I'm strong Strong enough to carry him He ain't heavy, he's my brother
하지만 나는 강해요. 그와 함께 갈만큼 강하죠. 그는 (나에게) 버겁지 않아요, 그는 나의 형제니까요.
… So on we go His welfare is of my concern No burden is he to bear We'll get there
그렇게 우리는 함께 가죠. 나는 그의 행복을 바란답니다. 그는 (내가) 참아내야 할 짐이 아니에요. 우리는 (함께) 그곳에 다다를 거에요
… For I know He would not encumber me He ain't heavy, he's my brother
나는 알아요. 그가 내게 거추장스러운 짐이 되지 않으리란 걸. 그는 (나에게) 버겁지 않아요, 그는 나의 형제니까요.
… If I'm laden at all I'm laden with sadness That everyone's heart Isn't filled with the gladness Of love for one another
내 마음을 무겁게 하는 단 하나는, 내 마음이 슬픔으로 가득차는 것 뿐이에요. 모든 사람들의 가슴이, 서로에 대한 사랑의 기쁨으로 가득차지 않아서요.
… It's a long, long road From which there is no return While we're on the way to there Why not share?
다시는 돌아갈 수 없는 멀고 먼 길 위에서, 우리는 왜 서로 함께 나누지 않을까요?
… And the load Doesn't weigh me down at all He ain't heavy, he's my brother … He's my brother He ain't heavy, he's my brother He ain't heavy, he's my brother
그 길은 조금도 나에게 짐이 되지 앟아요. 그는 나에게 조금도 버겁지 않아요, 그는 나의 형제니까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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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969년에 발표된 이 곡은 처음에 Kelly Gordon에 의해 불려졌고, 이후에 The Hollies에 의해 불려져 전세계적인 히트를 기록한다. 가사도 그렇고 가수의 이름에서도 가스펠적인 느낌이 물씬 묻어난다.
이 곡의 제목인 'He ain't heavy, He's my brother'의 유례는 1884년에 스코틀랜드에서 출간된 '예수 우화(The Parables of Jesus)'라는 책에 나온 이야기이다.
이야기의 내용은 어떤 어린 소녀가 덩치가 큰 아기를 업고 가는 모습을 본 누군가, "아이야 힘들지 않니?"라고 물어보자, 놀랍게도 그 소녀는 "아니에요, 얘는 무겁지 않아요, 얘는 내 동생인걸요." 라고 대답했다고 한다.
이런 이야기는 이후 유럽을 거쳐 미국에까지 계속 전승, 변형되어 왔다. 특히 유럽과 미국에서 대공황과 2차 대전 이후에 부모를 잃고 고아가 된 아이들이 늘어나면서 이런 류의 도시 우화들이 이어져왔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