제로에서 시작한다고는 하지만 수준이 낮지는 않다. 현재의 사회,경제,정치적인 이슈를 기반으로 자본론의 현대적 의의와 적용방안에 대해서 저자가 고민한 바를 풀어서 설명하고 있다. 상당히 도움이 되는 내용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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p13
한 남자가 동독에서 시베리아로 보내졌습니다. 그는 자산의 편지를 검열관이 읽는 것을 알고 있습니다. 그래서 그는 친구에게 이렇게 말했습니다. "암호를 정해 두자. 만약 내 편지가 파란 잉크로 쓰였다면, 편지의 내용은 진실이다. 하지만 만약 빨간 잉크로 쓰였다면 그것은 가짜다." 한 달 후 그의 친구가 편지를 받았을 때, 모든 것이 파란색 잉크로 쓰여 있었습니다. 거기에는 이렇게 적혀 있었습니다. "이곳에서의 생활은 매우 훌륭하다. 맛있는 음식도 많다. 영화관에서는 서양의 재미있는 영화를 상영한다. 집은 넓고 고급스럽다. 여기서 살 수 없는 것은 빨간 잉크뿐이다."
이 농담은 소련의 '사회주의'를 다뤘지만, 자본주의 생활에도 그대로 적용될 수 있을 것입니다. 지금 우리가 누리는 '자유'와 '풍요'는 바로 이 파란 잉크로 쓰인 편지의 세계입니다.
지금 우리에게 필요한 것은 빨간 잉크입니다. 그리고 우리가 한 번은 버린 <자본론>이 바로 그 빨간 잉크입니다. 왜 그럴까요? 그것은 <자본론>을 읽음으로써 우리는 이 사회의 부자유를 정황하게 표현할 수 있기 때문입니다. 또 그것은 잃어버린 자유를 회복하는 첫걸음이 될 것입니다.
p19
도시에서 열심히 일하는 사람과 남쪽 섬에 사는 어부가 나누는 이야기를 들어 본 적 있나요?
"왜 너는 매일 그렇게 게으름을 피우는 거야. 좀 열심히 일해서 돈을 벌어라."
"그렇게 열심히 일해서 모은 돈으로 뭘 할 건데?"
"돈 많이 벌어서 은퇴하면 느긋하게 낮잠 자고 낚시하며 살고 싶으니까."
"어, 나는 벌써 그렇게 하고 있어."
우리는 도대체 무엇 때문에 매일매일 힘들어하면서 그렇게 많은 일을 하고 있을까요? 맛있는 것을 먹으려고? 해변에서 휴가를 보내려고? 아니면 여유로운 노후를 보내기 위해서? 그렇다면 위 이야기의 어부는 도시에 사는 우리보다 훨씬 나은 삶을 사는 것 같습니다.
p20
인간은 다른 생물과 마찬가지로 끊임없이 자연에 작용하여 다양한 것을 만들어 내면서 이 지구상에서 삶을 영위합니다. 의식주 등을 얻기 위해 인간은 적극적으로 자연에 적용하고 그 모습을 변화시키며 자신의 욕구를 충족합니다. 이러한 자연과 인간의 상호작용을 마르크스는 생리학 용어를 사용하여 '인간과 자연의 물질대사'라고 말했습니다.
p21
이 책은 물질대사론을 바탕으로 <자본론>을 읽어 나간다고 해도 과언이 아닙니다. 필자는 마르크스를 따라 '노동'이라는 행위를 중시하기 때문입니다.
다시 말해 인간이 자연과의 물질대사를 조절하는 통제하는 행위가 바로 '노동'입니다.
마르크스는 다음과 같이 '노동'을 정의하고 있습니다.
노동은 우선 인간과 자연 사이의 한 과정, 즉 인간이 자신의 행위로 자연과의 물질대사를 매개하고 규제하고 제어하는 한 과정이다.
p24
우리의 삶과 사회, 그리고 그것을 둘러싼 자연환경의 모습은 우리가 자연에 어떻게 작용하느냐에 따라 결정됩니다. 이 작용 방식을 크게 잘못하면 사회와 자연은 황폐해집니다. 그래서 노동은 인간의 자유와 번영을 위해 매우 중요한 활동인 것입니다.
이상에서 알 수 있듯이 마르크스가 '노동'이라는 개념에 주목한 것은 노동자계급의 착취를 백일하에 드러내고 하는 정치적 의도가 있어서가 아니라, 물질대사라는 인간과 자연의 본원적 관계를 중시했기 때문입니다.
하지만 이 사실을 막연하게만 파악한다면 어느 시대든 인간은 자연과 물질대사를 해 왔다고 말할 수 있습니다. 하지만 그 구체적 모습은 시대와 지역마다 크게 다르죠. 그리고 바로 이 점이 중요합니다.
즉, 마르크스는 인간의 의식적이고 합목적적인 활동인 '노동'이 자본주의에서 어떻게 수행되는지를 고찰함으로써 인간과 자연의 관계에 결정적 변화가 있음을 밝히고, 거기서 자본주의의 특수성에 접근한 것입니다.
p28
화폐로 측정할 수는 없지만, 한 사람 한 사람이 풍요롭게 살아가는 데 필요한 것이 풍부한 상태, 그것이 바로 사회의 '부'입니다.
p33
사회의 '부'가 '상품'으로 변한다는 것은 쉽게 말해 가격표가 붙은 '매물(賣物)'이 된다는 뜻입니다.
p37
마르크스에 따르면 '상품생산이 전면화된 사회', 즉 모든 것이 상품화되는 자본주의사회에서는 물건을 만드는 목적, 즉 노동의 목적이 다른 사회와 크게 다릅니다.
p39
왜 이런 상황(부의 양극화가 점점 심해지는 상황)이 벌어지는가 하면, 자본주의 사회에서는 '인간의 욕구를 만족시키는 것'보다 '자본을 늘리는 것' 자체가 목적이 되어 버렸기 때문입니다. 그 메커니즘에 대해서는 다음 장에서 자세히 살펴보겠지만, 자본주의는 이윤추구를 멈출 수 없습니다. 설령 그것이 서점을 없애는 등 사회의 '부'에 파괴적인 결과를 가져오는 결과를 낳는다 해도 눈앞의 돈벌이를 멈출 수 없는 것이 자본주의입니다.
p40
생산 활동의 주요 목적이 '인간의 욕구 충족'에서 '자본을 늘리는 것'으로 바뀌면 당연히 생산방식도, 생산되는 물건도 달라집니다.
자본주의사회에서 생산되는 '상품'은 사람들의 삶에 정말 필요한지, 정말 중요한지보다 얼마나 비싸고, 얼마나 팔리겠는지, 다시 말해 얼마나 자본을 늘리는 데 기여하는지가 더 중요해집니다.
'돈이 되는 물건'과 '필요한 물건'이 반드시 일치하지는 않습니다. 이 점에 대해 마르크스는 '상품'에는 두 가지 얼굴이 있다고 지적합니다.
하나는 '사용가치'라는 얼굴입니다. '사용가치'란 인간에게 도움이 되는 것(유용성), 즉 인간의 다양한 욕구를 충족하는 힘입니다. 물에는 갈증을 해소하는 힘이 있고, 식료품에는 굶주린 배를 채우는 힘이 있습니다. 마스크에도 감염병의 확산을 막는 '사용가치'가 있습니다. 생활에 필요한 '사용가치'가 바로 자본주의 이전 사회에서 생산의 목적이었습니다.
하지만 자본주의에서 중요한 것은 상품의 또 다른 얼굴인 '가치'입니다.
p44
'사용가치'를 위해 물건을 만들던 시대는 말 그대로 인간이 '물건을 사용하던' 시대였지만, '가치'를 위해 물건을 만드는 자본주의에서는 입장이 역전되어 인간이 물건에 휘둘리고 지배당합니다. 이 현상을 마르크스는 '물상화(物象化)'라고 불렀습니다. 인간이 노동에서 만든 물건이 '상품'이 되는 순간, 신비한 힘으로 인간의 삶과 행동을 지배하게 된다는 것입니다.
p47
그와 동시에 광고업과 마케팅이 늘어납니다. 왜 그런가 하면, 소비자들도 바보가 아니라서 자신이 쓰레기를 샀다는 것을 금새 알아차리기 때문입니다. 그러면 상품의 마법이 풀려서 싫증이 납니다. 그래서 계속해서 제품을 바꾸고, 새로운 쓰레기를 매력적인 상품으로 만들어 판매해야 하는 것입니다.
p48
'상품'의 영역이 넓어지면 넓어질수록 물상화의 힘은 강해지고, 인간은 점점 더 물건에 휘둘리게 됩니다.
모든 것을 시장에 맡기면 경쟁 원리가 작동해 효율성이 높아진다고 생각한 이가 영국의 마거릿 대처 전 총리였습니다. 하지만 그 후 신자유주의가 '전 세계로 퍼져 나가면서 물상화의 힘을 강화한 결과, 예상하지 못한 많은 부조리와 비효율, 독점을 낳고 있습니다.
민영화라고 하면, '독재적'이고 비효율적이던 공영/국유사업이 민간의 손에 의해 '민주적'이고 효율적으로 관리/운영된다는 이미지를 가진 사람도 있을 것입니다. 하지만 이는 단어의 마술입니다. 원어인 프라이비티제이션(privatization)은 직역하면 '사유화'입니다. 프라이빗(private)의 어원은 '빼앗기다' '분리되다'라는 뜻입니다. 사람들이 공유하고 관리하던 '코먼'을 빼앗긴 상태라는 뜻이죠. 민영화의 실체는 특정 기업의 권리 독점이며, '상품'의 영역을 넓히는 현대판 '울타리 치기'입니다.
시장은 결코 '민주적'이지 않습니다. 시장에 접근할 수 있는 사람은 돈을 가진 사람뿐이기 때문입니다. 민영화가 진행되면서 공영/국유이던 시절에는 접근이 가능했던 의료나 교육 같은 공공서비스에서 많은 사람이 배제되었습니다.
또 시장에서는 '이익'이 우선하기 때문에 수익성 없는 물건이나 서비스는 가차 없이 삭감됩니다. 예산도, 인력도 삭감됩니다. 정말 쓸모없는 것은 당연히 줄여야 하지만, '사용가치'를 무시한 효율화는 꼭 필요한 물건과 서비스까지 삭감하거나 질을 떨어뜨려 사회의 '부'를 빈약하게 합니다.
p54
가치 논리의 내면화를 보여 주는 잘 알려진 예가 바로 '가성비(코스파, cost performance)'의 사고입니다. 모든 일의 수익률을 추정하고 그에 따라 효율화를 꾀하는 태도죠.
이렇게 가사나 육아는 외주화, 상품화되고 있습니다. 그리고 그것이 효율적이고 바람직하다고 생각하고 이용하는 사람이 늘어나기 때문에 서비스산업도 점점 늘고 있습니다.
하지만 가성비 사고에 더 깊이 빠져들면 돈이 되지 않는 주민 회의나 축제, 학부모/교사 모임(PTA), 노동조합 등에 참여하는 일이 모두 가성비가 나쁜 것이 되어 버립니다. 가족이나 지인을 돕는 것조차 말이죠. 결국 공동체는 점점 더 말라비틀어지고, 끝내는 붕괴됩니다.
물론 집안일을 모두 여성에게 맡기거나, 동네 모임에서 '장로'가 거드름을 피우던 옛날이 더 좋았다고 말하려는 것이 아닙니다. 다만 상품화하지 않더라도 가사나 육아에 남녀가 동등하게 참여할 수 있는 방법도 있고, 커뮤니티의 힘을 효과적으로 활용할 수 있는 선택지도 있다는 것입니다.
하지만 그런 선택을 하는 대신 우리 사회는 모든 것을 상품화하고, 남는 시간을 점점 더 돈벌이에 바치고 있습니다. 그렇다고 해서 더 풍요로워지지는 않습니다.
이 역설을 미하일 엔데가 쓴 <모모>의 세계를 떠올리게 합니다. '시간 은행'에 홀린 이발사 푸지는 시간을 절약하게 되었는데도 전혀 여유가 없습니다.
푸지 씨는 점점 더 흥분하고, 침착하지 못한 사람으로 변해 간다. 한 가지, 떨어지지 않는 것이 있기 때문이다. 절약한 시간은 사실 조금도 남아 있지 않았다. 마치 마술처럼 흔적도 없이 사라져 버리는 것이다. 푸지 씨의 하루하루는 처음에는 몰랐지만 점점 더 뚜렷하게, 그리고 조금씩 사라져 갔다.
가성비를 더 높이고 시간을 절약한다고 해서 인생이 풍요로워지는 것은 압니다. 오히려 여가가 점점 줄어들고, 가족이나 이웃과 소통할 수 있는 여유도 없어집니다. 그리고 조금의 낭비도 용납하지 못하는 짜증 나는 인간들만 가득한 사회가 되어 버리는 것입니다.
p82
노예는 단지 외부의 두려움에 의해 노동하지, 자신의 생활(자신의 것은 아니지만 보장되어 있는)을 위해 노동하는 것이 아니다. 이에 반해 자유노동자는 자신의 필요에 의해 노동한다. 자유로운 자기결정, 즉 자유에 대한 의식과 그에 따른 책임의 감정은 자유노동자를 노예보다 훨씬 더 나은 노동자로 만든다.
(마르크스, <직접적 생산과정의 결과들>)
노동자들을 움직이는 것은 '일자리를 잃으면 생계를 유지할 수 없다'는 두려움보다는 '내가 스스로 선택해서 자발적으로 일한다'는 자부심입니다. 그렇기 때문에 '직무를 제대로 수행해야 한다'는 책임감이 생깁니다. 실제로 취업 면접에서 "무슨 일이든 죽기 살기로 하겠습니다!"라며 자신의 자유를 기꺼이 포기한 경험이 있는 사람이 많을 것입니다. 최저한의 생활을 보장받으며 마지못해 일하는 노예와는 분명 차이가 있습니다.
자기책임감을 갖고 임하는 노동자는 억지로 일하는 노예보다 더 일을 잘하고, 더 좋은 일을 합니다. 그리고 실수하면 자신을 탓합니다. 불합리한 명령도 받아들이고 스스로를 몰아세웁니다. 이는 자본가가 바라지도 않았던 바입니다. '자본가에게 유리한' 사고방식을 노동자가 스스로 내면화함으로써 자본의 논리에 편입되는 것입니다. 정치학자 시라이 사토시는 이를 가리켜 '영혼의 포섭'이라고 말했습니다.
본래 끝없는 가치 증식을 추구하는 자본가의 이해관계와 인간다운 삶을 원하는 노동자의 이해관계는 양립할 수 없습니다. 그런데 자유롭고 자발적인 노동자는 자본가가 원하는 노동자의 모습을 마치 자신이 지행해야 할 모습, 인간적으로 우수한 모습인 양 착각하게 됩니다. 고도성장기의 '모레쓰 사원(猛烈社員)'이나 버블경제기에 유행한 영양 음료의 캐치프레이즈 "24시간 싸울 수 잇습니까"가 그 좋은 예일 것입니다.
자본주의사회에서는 노동자의 자발적 책임감, 향상심, 주체성이 자본의 논리에 '포섭'된다고 마르크스는 경고했습니다.
p86
노동운동이나 노사 교섭에서도 '임금인상'은 가장 큰 쟁점입니다.
하지만 흥미롭게도 마르크스는 임금인상보다 '노동일 제한(단축)'이 더 중요하다고 지적합니다. 당시 임금이 지금보다 훨씬 낮았는데도 말입니다.
노동일의 제한은, 그것 없이는 모든 해방의 시도가 실패로 끝날 수밖에 없는 선결 조건이라고 우리는 선언한다. (319/410)
임금이 인상되더라도 장시간 노동이 해소되지 않으면 으미가 없다는 말입니다.
자본가가 임금인상 요구를 받아들이면 분명 착취는 완화됩니다. 그러나 자본의 논리에 포섭된 자본주의사회의 노동자는 "그럼 우리는 열심히 일하겠습니다!"라고 말할 것입니다. 이는 오히려 기업에 유리하게 전개되는 사태입니다. 임금을 조금만 올려 주고 그 대신 노동자가 장시간 노동도 마다하지 않고 '자발적으로' 열심히 일해 준다면 잉여가치, 즉 자본가의 이윤은 오히려 늘어날 수 있기 때문입니다.
자본가의 목적은 노동력이라는 '부'를 '상품'으로 가둬 두는 것입니다. '상품'으로 가둬 두는 것은 자유 시간을 빼앗는 것입니다. 임금인상에 따른 장시간 노동이 임금노예 제도를 유지하는 것입니다.
실제로 임금이 조금 오른다 해도 시간을 빼앗긴 노동자에게는 아이와 놀거나 취미를 즐길 여유가 없습니다. 일하다 지쳐서 책을 읽거나 인생이나 사회문제에 대해 생각할 여유도 없습니다.
바빠서 직접 요리할 시간이 없게 되면 외식이라는 '상품'이 팔립니다. 빨래를 해도 건조할 시간이 아깝게 되면 세탁기와 건조기가 팔립니다. 자동 청소기도 마찬가지입니다. 최근에는 가사 대행 서비스도 유행입니다.
하지만 이런 편리한 서비스가 우리를 여유롭게 해 주는 것은 아닙니다. 그 대가를 지불하기 위해 노동시간이 점점 늘어날 뿐입니다. 이렇게 노동일을 '무제한'으로 만들면 '상품'의 영역이 점점 더 넓어지고, 자본가들의 사업 기회가 확대됩니다.
p98
자본주의는 엄청난 부를 가져다준 것처럼 보이지만, 우리의 생활은 오히려 여유가 없어지고 있습니다. 그 결과 욕구와 감성이 메마르고 빈곤해졌습니다. 180년 전, 20대 중반의 젊은 마르크스는 이 상태를 '노동의 소외'라고 불렀습니다. 소외된 삶에 대해 마르크스는 분노를 담아 다음과 같이 썼습니다.
빛, 공기 등 가장 단순한 동물적 청결도 이간에게 욕구된 것을 중지한다, 더러움, 인간의 이 퇴폐, 타락, 문명의 하수구의 오물(이것은 문자 그대로 해석해야 한다)이 인간의 생활 기반이 된다. 완전히 부자연스러운 황폐, 부패한 자연이 인간의 생활 기반으로 된 것이다.
(마르크스, <경제학 철학 초고>)
p101
상품을 값싸게 하기 위해, 그리고 상품을 값싸게 함으로써 노동자 자체를 값싸게 하기 위해 노동생산력을 증대하는 것은 자본의 내재적 충동이자 끊임없는 경향이다. (338/436)
p102
임금은 시장의 수요와 공급의 관계로만 결정되지 않습니다. 예를 들어, 지금 일본은 일손이 부족하다고 하지만 임금은 전혀 오르지 않습니다. 마르크스는 노동자가 생활하는 데 얼마가 필요한지에 따라 임금이 결정된다고 말합니다.
하루 일하고 지친 노동자는 먹고 자고 다음 날도 일할 수 있도록 자신의 '상품'인 노동력을 회복해야 합니다. 마르크스는 이를 '노동력의 재생산'이라고 표현했는데, 노동력의 재생산 비용은 일상생활에 필요한 것을 생산하려면 얼마나 일해야 하는지에 따라 결정됩니다.
'필요'의 내용은 시대와 지역에 따라 다양합니다. 음식, 집세, 의복, 여가 비용은 물론이고, 오늘날에는 스마트폰과 인터넷 요금도 포함될 것입니다. 지방에서는 자동차도 필요합니다. 장기적으로는 자녀 교육비, 노후 자금 등을 충당할 수 있을 정도여야 합니다.
한편, 지금까지는 일당 1만 엔을 받아야 살 수 있었지만, 생산력이 높아지면 패스트패션과 패스트푸드 덕분에 예를 들어 8,000엔으로도 이전과 비슷한 생활을 할 수 있게 됩니다. 그러면 자본가는 노동자에게 지급하는 일당을 8,000엔으로 낮출 수 있습니다. 구체적으로는 비저유직 등을 늘려서 비용 절감을 할 수 있습니다.
생산력이 높아져 싸게 생활할 수 있게 되었을 뿐, 이 노동자가 한 시간 노동으로 창출하는 가치는 변하지 않습니다.
한 시간에 2,000엔인 가치를 창출한다고 가정할 때, 노동시간이 이전과 같은 여덟 시간이라면 일당 감소분 2,000엔은 고스란히 자본가의 잉여가치가 됩니다.
이처럼 노동력가치의 저하로 인해 발생하는 잉여가치를 마르크스는 '상대적잉여가치'라고 했습니다.
왜 '상대적'일까요? 앞 장에서 살펴본 '절대적잉여가치' 생산에서는 노동일의 절대 길이가 연장됨으로써 하루에 생산되는 가치 자체가 증가했습니다. 반면 '상대적잉여가치' 생산에서는 노동일의 길이는 변하지 않기 때문에 하루에 생산되는 가치의 합계는 그대로입니다. 하지만 노동력의 가치가 낮아짐에 따라 이윤이 늘어나는 구조입니다.
p105
자본가들이 생산력을 높이는 기술혁신, 즉 이노베이션에 기대하는 것은 '가치'의 증식만이 아닙니다. 그들의 또 다른 목표, 그것은 노동자에 대한 '지배' 강화입니다. 오히려 이것이 자본주의가 가져오는 생산력 증대에 대해 마르크스가 가장 문제 삼은 점입니다.
자본가는 특별잉여가치를 획득하고자 상품을 최대한 싸게 만들려고 노동자가 '효율적으로' 일하게 하려고 합니다. 즉, 생산성을 높이려는 것이죠. 이때 효율성은 노동자의 '쾌적함'을 의미하지 않는다는 점이 중요합니다.
자본주의에서 요구되는 것은 노동자를 중노동이나 복잡한 일에서 해방하는 것을 목표로 하는 신기술이 아닙니다. 그들이 무단결근도 하지 않고, 불평도 하지 않고, 지시하는 대로만 일하도록 하는 혁신, 즉 노동자를 효율적으로 지배하고 관리하는 기술입니다. 이런 '일하는 방식의 개혁'이 현대까지 이어져 왔기 때문에 케인스의 예상이 빗나간 것입니다.
실제로 마르크스는 생산력이 높아질수록 노동자는 편해지는 것이 아니라 자본에 '포섭'되어 자율성을 잃고 자본의 노예로 전락한다고 지적했습니다.
도대체 왜 생산력의 상승이 자본의 지배 강화로 이어질까요? 여기서 기억해야 할 것은 1장 서두에서 소개한 '물질대사' 이야기입니다. 거기서 인간이 '의식적이고 합목적적인' 노동을 통해 자연과 물질대사를 하고 있다고 이야기했습니다.
이 의식적이고 합목적적인 노동과정은 크게 두 가지 요소로 나눌 수 있습니다. '구상'과 '실행'입니다['구상'과 '실행'이라는 정리는 마르크스 본인이 아니라 해리 브레이버맨이라는 뛰어난 마르크스 연구자가 <노동과 독점자본>이라는 책에서 <자본론>을 연구하면서 쓴 말입니다]
p110
그렇다면 '구상'과 '실행'을 어떻게 분리할 수 있을까요?
가장 간단한 방법은 생산공정을 세분화하여 노동자들에게 분업을 시키는 것입니다. 옹기 하나가 만들어지기까지 어떤 공정을 거치는지, 각 공정에서 구체적으로 어떤 작업을 어떤 두고와 방식으로 진행하는지, 몇 분이 걸리는지 등을 자본가가 관찰하고, 직인이 각자의 고유한 방식으로 하는 작업을 획일적인 단순 작업으로 분해하는 것입니다.
물론 현대사회에서도 직인만이 만들 수 있는 물건이 있습니다. 하지만 그런 상품들은 애초에 자본주의 생산에서는 요구되지 않습니다. 자본가들이 만들고 싶은 것은 수작업으로 만든 예술적인 옹기가 아니라, 싸고 나름대로 튼튼한 물건입니다. 깨지거나 부서지면 언제든 저렴한 가격으로 교체할 수 있는 대량생산품입니다. 그런 것들은 직인 한 명이 정성스럽게 만드는 것보다 여러 사람이 분업해서 흐름작업으로 만드는 것이 효율도 좋고, 싸게 많이 생산할 수 있습니다.
자본주의가 확산되면서 가격경쟁의 물결에 휩쓸려 길드는 해체되어 갔습니다. 장사가 안되는 직인들은 폐업하거나 생계를 위해 자본가들의 분업에 동참할 수밖에 없었습니다. 이리하여 길드의 힘은 약해지고, 그만큼 자본가의 힘은 강해졌습니다.
그 결과 18~19세기 영업의 자유 원칙을 내세운 각국의 입법에 의해 길드의 특권은 폐지되었습니다. 마르크스의 조국 독일에서도 1869년 길드제의 역사는 막을 내렸고, '규칙 없는 자본주의'는 이렇게 해서 형성되었습니다.
p112
애초 노동자가 자신의 노동력을 상품으로 자본가에게 팔아야 햇던 이유는 물리적 생산수단, 즉 생활에 필요한 물건을 만들 수단이 없었기 때문입니다. 그런데 분업이라는 시스템에 편입됨으로써 무언가를 만드는 생산능력마저 잃게 되었다고 마르크스는 갈파했습니다.
몇 년을 일해도 단순 작업만 할 수 있는 노동자는 분업 시스템 안에서만 일할 수 있습니다(더 이상 자기 혼자로는 완제품을 만들 능력이 없습니다!). 그래서 먹고 살기 위해서는 자본의 지휘 감독과 명령에 따를 수밖에 없습니다. 분업과 협업은 이렇게 자본주의적 방식으로 재편되어 노동자의 주체성을 빼앗아 갑니다.
게다가 누구나 할 수 있는 단순 작업이기 때문에 공장 밖에는 나를 대신할 사람이 얼마든지 있습니다. 일자리를 잃고 싶지 않다면 꿈을 포기하고 불평불만을 꾹꾹 눌러 참으며 할당량을 달성하기 위해 묵묵히 일할 수밖에 없습니다. 그렇게 되면 점점 더 자본가와의 주종 관계가 강화됩니다. - 자유로운 재량의 여지가 사라진 일터야말로 노동이 고통으로 되는 소외의 원인입니다.
p113. 인간다움을 앗아 가는 테일러주의
구상과 실행을 철저하게 분리한 사례로 20세기 초의 '테일러주의'를 소개하겠습니다. 테일러주의는 미국의 기술자이자 <과학적 관리법의 원리>의 저자 프레더릭 테일러가 주장한 관리법입니다. 테일러는 기계공장에 견습생으로 들어가 기계공, 기술 부장을 거쳐 컨설턴트가 된 인물로, 지금은 미국 경영학의 원조로 여겨집니다.
테일러는 먼저 생산공정을 세분화하여 각 공정의 동작과 절차, 소요시간을 분석해 공정별 표준 작업시간을 확정해습니다. 작업의 낭비를 철저히 없애기 위해 동작에 따라 체형과 능력 등을 고려해 재배치하고, 전용 공구를 개발하고, 공구와 부품의 위치까지 세밀하게 정했습니다. 즉, 생산의 기술적 조건이 자본가에 의해 근본적으로 바뀐 것입니다.
또 생산을 계획하고 관리하는 사람과 실제 작업하는 사람을 완전히 분리했습니다. 이는 실제 작업을 하는 사람의 의식을 '정해진 시간 내에 자신의 업무를 완수하는 것'에만 집둥하도록 하기 위해서입니다. 그리고 시간 내에 일을 끝내지 못하면 벌금을 물거나 해고하고, 일정량 이상의 일을 해낸 사람에게는 보상을 하는 차별성과급제도도 도입해 경쟁심을 부추기며 단순노동에 매진하도록 했습니다.
테일러가 이런 일을 한 이유는 그가 제철소에서 일하기 시작한 초창기, 부하인 현장 공원들이 그의 명령을 조금도 듣지 않았기 때문입니다. 한편, 테일러는 자신의 지식과 기술이 '공원들의 지식과 손재주의 총합과는 거리가 멀다'는 것을 통감했습니다. 요컨대 공원들은 그를 우습게 보고 있었습니다.
이러한 경험을 바탕으로 테일러는 공원들의 지식과 손재주, 즉 구상과 실행을 철저하게 해제하고, 모든 공원이 자신의 지시에 따라 '최대의 노력, 최고의 근면 성실'을 발휘할 수 있는 구조를 고안하고 이를 체계화했습니다.
테일러는 경영의 개념을 정립한 '과학적 관리법의 아버지'로 불리지만, 테일러주의는 생산에 관한 노동자들의 지식이라는 '코먼(공유재산)'에 울타리 치는 행위에 다름 아닙니다. 생산에 관한 지식과 노하우를 자본이 독점하고, 자본의 편의에 따라 재구성된 생산시스템에 노동자를 강제로 복종시키기 때문입니다.
그래도 일시적으로 생산성이 높아져 실적 상승의 혜택을 노동자들도 임금인상이라는 형태로 받을 수 있습니다. 그래서 노조 측도 자본에 구상을 빼앗기는 것을 용인해 왔습니다.
하지만 고도 경제성장 시대가 끝나면 자본은 더 이상 노동자에게 그런 '덤'을 주지 않습니다. 노동자의 입지는 점점 약해지고, 임금도 낮아지고, 노동시간도 쉽게 연장됩니다.
자본주의는 생산력을 높이면서 노동자의 자율성도, 인간다운 풍요로운 시간도 사정없이 빼앗아 갑니다. 그래서 생산력이 아무리 발전해도 자본주의가 지속되는 한, 케인스가 예견한 여가사회는 결코 실현될 수 없습니다.
p116
1장에서 인간이 상품의 '가치'에 휘둘린다는 이야기를 했고, 2장에서는 '자본의 운동'에 휘둘린다는 이야기를 했는데, 대공업 시대의 노동자는 더 나아가 '기계'에 휘둘립니다. 기계라는 사물과 노동자의 입장이 역적, 전복된다는 의미에서 이것은 바로 생산과정의 '물상화'라고 할 수 있습니다.
생산과정에서 생동감 있게 움직이는 것은 기계이고, 기계는 "살아 있는 노동력을 지배하고 빨아들이는 죽은 노동"(446/571)이 됩니다. 이렇게 '정신노동'과 '육체노동'의 분리에 기반한 자본의 지배가 완성됩니다.
기계 노동은 신경계를 극도로 피곤하게 하는 한편, 근육의 다면적 작용을 억압하고 심신의 모든 자유로운 활동을 봉쇄힌다. 심지어 노동의 완화조차도 고통의 원천이 된다. 왜냐하면 기계는 노동자를 노동에서 해방하는 것이 아니라 노동을 내용에서 해방하기 때문이다. (445~446/571)
흥미롭게도 이 구절에서는 기계로 인해 노동이 쉬워지는 것조차 노동자에게는 고통의 원천이 된다고 지적하고 있습니다. 왜냐하면 기계가 노동자를 '노동'에서 해방하는 것이 아니라 노동의 '내용'에서 해방하는 것, 즉 내용 없는 단순노동을 강요하기 때문입니다. 내용이 없다는 것은 자신의 손으로 무언가를 만들어 내는 기쁨도, 성취감도, 충실감도 없는, 한마디로 소외된 상태라는 뜻입니다. 그리고 내용이 없으니 언제, 누구와도 대체가 가능하고 노동자의 힘은 점점 약화되는 것입니다.
자본의 지휘/명령, 즉 경영자의 의도에 따라 노동이 실현될 수밖에 없는 상태를 마르크스는 '자본의 전제(專制)'라고 불렀습니다.
자본의 전제가 완성되면 비약적으로 향상된 생산력도 모두 자본가의 것으로 나타난다고 마르크스는 말햇습니다. 실제로는 노동자들이 '협동'하여 수행한 노동이 생산력을 높였지만, 그것은 '노동자의 생산력'으로 나타나지 않고 '자본의 생산력'으로 나타납니다. 왜냐하면 노동자들이 자신의 의지로, 자율적으로 협업한 것이 아니기 때문입니다.
노동자가 자동차를 만들 수 있는 것도, 컴퓨터를 만들 수 있는 것도 자본 아래 모여서 그것의 지시에 따라 일하기 때문입니다. 자본의 지휘와 명령 없이는 우리는 더 이상 아무것도 만들 수 없습니다. 이리하여 생산력이 증대될수록 자본의 지배는 오히려 강화된다고 마르크스는 비판한 것입니다.
p120
기계의 자본주의적 사용은 한편으로 노동일의 무제한적 연장에 새로운 강력한 동기를 제공하고, 이 경향에 대한 저항을 분쇄하는 방식으로 노동 양식 자체와 사회적노동 유기체의 성격을 변화시킨다. 다른 한편으로 노동자계급 중 이전에 자본의 손이 닿지 않던 계층을 편입시키고 또는 기계가 쫓아낸 노동자들을 하는 일 없게 만듦으로써, 자본의 명령에 복종하지 않을 수 없는 과잉 노동인구를 만들어 낸다. (430/551)
기계가 육체노동을 대신하게 되면 비숙련노동자뿐 아니라 여성과 어린이 등 '이전에 자본의 손이 닿지 않던 계층'도 일할 수 있게 됩니다. 트랙터와 경운기 등의 도입으로 농업의 공업화는 농촌에 과잉인구를 만들어 많은 젊은이가 도시로 향하게 됩니다. 이들을 노동시장에 '편입'시키면 상대적 과잉인구는 점점 더 늘어날 것입니다.
공장 밖에서 '더 낮은 임금을 받고 일하겠다' '더 열악한 노동조건에서도 일하겠다' '어쨌든 일하게 해 달라'는 사람이 늘어나면 공장 안의 노동자들은 그들에게 일자리를 빼앗기지 않기 위해 필사적으로 더 오래, 더 성실하게 일하게 됩니다.
하지만 얄궂게도 그들이 필사적으로 일할수록 생산력이 높아져 자본가들이 '그렇게 많이 일해 준다면 지금은 100명 체제로 생산하는데 80명 정도면 되겠네'라고 생각하여, 상대적과잉인구는 더 증가하고 맙니다.
노동자계급 중 취업자들의 과도 노동은 예비군 대열을 팽창시키는 반면, 예비군이 경쟁을 통해 취업자들에게 가하는 압박의 강화로 취업자는 과도 노동을 하지 않을 수 없고 자본의 명령에 복종하지 않을 수 없다. (665/866~867)
이러한 상황은 실업자와 취업자의 분열을 낳고, 단결할 수 없는 노동자는 자본 앞에서 더욱더 힘이 약화됩니다. 힘이 약해지면 저항할 수 없게 되고, 더 많은 '과도 노동'을 받아들일 수밖에 없게 됩니다. 이 끝없는 악순환의 내막과 문제점을 마르크스가 강한 어조로 비판한 것이 다음 대목입니다.
자본주의 체제 내에서 노동의 사회적 생산력을 높이는 방법은 모두 개별 노동자의 희생으로 이루어지며, 생산을 발전시키는 모든 수단은 생산자들을 지배하고 착취하는 수단으로 전환되어 노동자를 부분적 인간으로 불구화하고 기계의 부속품으로 전락시키며, 노동의 고통으로 노동 내용을 파괴한다. 그리고 과학이 자립적 역능으로 노동과정에 합체될수록 노동과저의 정신적 역능은 노동자로부터 소원해지게 된다. 또 이러한 방법과 수단은 노동조건을 왜곡학로, 노동과정에서 극히 비열하고 혐오스뤙 전제 지배에 노동자를 복종시키며, 그의 생활시간을 노동시간으로 전환시키고, 그의 처자를 자본이라는 저거너트의 수레바퀴에 던져 넣는다. (674/878~879)
p127
애초에 사회적으로 그다지 중요하지 않은 일, 당사자조차 의미 없다고 느끼는 고임금 일자리는 오히려 늘고 있습니다. 문화인류학자 데이비드 그레이버는 '불쉿 잡(bullshit job)'이 광고업과 컨설팅업을 중심으로 최근 급속히 증가하고 있다고 지적했습니다.
쓸데없는 회의, 서류 작성, 쓸데없는 캐치프레이즈 만들기, 매너 교육, 모두 '불쉿 잡'입니다. 이는 생산력이 너무 높아져 무의미한 노동을 억지로라도 만들어 내지 않으면 엘리트들이 주 40시간 이상 일하는 환경을 유지할 수 없는 상태가 되어 간다는 반증입니다. 즉, 케인스의 예측이 빗나간 이유는 자본주의가 무의미한 일자리를 대량으로 만들어 내기 때문이라는 것이 그레이버의 주장입니다.
무익한 고임금 불쉿 잡이 넘쳐 나는 반면, 사회에 꼭 필요한 필수 노동자들은 열악한 노동조건을 강요당합니다. 이것이 자본주의가 고도로 발달한 현대사회의 현실입니다. 보람 없는 무의미한 노동도, 가혹한 장시간 노동도 삶을 가난하게 만든다는 점에서 동일합니다.
p128
인간이 모든 노동에서 해방되어 일하지 않고도 살 수 있는 사회가 되면 좋다는 뜻은 아닙니다. 마르크스가 원한 것은 인간을 대신해 무엇이든 해 주는 기계나 로봇을 우리가 맥구 한잔 마시며 멍하니 바라보는 그런 미래 사회가 아닙니다.
왜냐하면, 우리가 반복해서 보았듯이, 그가 무엇보다 문제 삼은 것은 구상과 실행이 분리되어 자본의 지배 아래 사람들의 노동이 무내용화되는 것이기 때문입니다. 인간의 노동이라는 풍부한 '부'를 회복하기 위해 마르크스는 구상과 실행의 분리를 극복하고 노동의 자율성을 되찾는 것을 목표로 삼았습니다. 가혹한 노동에서 벗어나는 것뿐 아니라, 보람 있고 풍요롭고 매력적인 노동을 실현하는 것입니다. 즉, 로봇이나 AI로 '노동' 자체를 없애겠다는 발상은 마르크스의 말을 빌리자면 문제의 소재를 잘못 짚는 것입니다.
마르크스가 상상하는 미래 사회의 노동자는 '전면적으로 발달한 개인'입니다. 나사만 조이고 돈만 버는 개인이 아니라, 구상과 실행 모두에서 자신의 능력을 발휘하고, 개개인이 자신의 노동력이라는 '부'를 활용하면서 사회 전체의 '부'를 풍요롭게 만들어 가는 것입니다. 그렇게 함으로써 우리는 서로를 지지하면서 자율적으로 살아갈 능력과 감수성을 되찾을 수 있고, 그것이 바로 소외를 극복하는 길이라고 마르크스는 생각했습니다.
p142
자본주의는 진정한 의미의 인간적 부를 빈곤하게 한다고 마르크스는 말했습니다.
p144
자본주의의 끝없는 운동은 일부 국가의 일부 사람에게 유리한 독점적 형태('대토지 소유')로 전 세계를 상품화합니다. 세계화의 결과, 한 국가의 '도시와 농촌의 대립'은 국경을 넘어 확대되고 있습니다. 그런데 자본주의는 가치 증식을 '무한'하게 추구하지만, 지구는 '유한'합니다. 자본은 항상 비용을 '외부화'하는데, 지구가 유한한 이상 '외부'도 유한합니다.
소련 붕괴 이후 자본주의 세계화가 점점 가속되면서 환경 위기 또한 세계화되었고, 이 위기와 무관하게 지낼 수 있는 장소가 지구에는 더 이상 남지 않는 지경에 이르렀습니다. 실제로 일본과 같은 선진국에서도 기후 위기와 영향이 슈퍼태풍과 폭염으로 확실하게 나타나고 있습니다. '물질대사의 균열'은 돌이킬 수 없을 정도로 깊어지고 있습니다.
p147
사회의 물질적 생산력은 일정한 발전단계에 이르면, 그 과정에서 지금까지 움직여 온 기존의 생산관계, 또는 그 법칙 표현에 불과한 소유관계와 모순된다. 이러한 관계는 생산력의 발전 형태에서 그 질곡으로 전화한다. 이때 사회혁명의 시대가 시작된다. (<전집> 제13권 6쪽)
자본주의는 지구환경을 파괴하지 않고는 이미 생산력을 더 이상 발전시킬 수 없습니다. 사적소유와 이윤추구 아래 약탈을 반복하는 시스템에서는 누구의 것도 아닌 지구환경을 지속 가능한 형태로 관리할 수 없습니다. 이는 자본주의가 더 나은 사회발전에 '질곡'이 된 상태입니다.
인간과 자연의 물질대사 사이의 '회복 불가능한 균열'이 문명을 파괴하기 전에 혁명적 변화를 일으켜 다른 사회 시스템으로 이행해야만 한다고 마르크스가 생각한 것은 이 때문입니다.
p164
자유투자사회에서 우리는 모든 행위와 선택을 '투자'로 간주하게 됩ㄴ다. 그런 사회의 귀결은 궁극적인 가성비 사회입니다. 결혼의 가성비? 육아의 가성비? 문화의 가성비? 민주주의의 가성비?
당연히 인생에서 행위 대부분이 자산 형성으로 이어지지 않습니다. 따라서 가성비 사고를 철저히 하게 되면 소통, 문화, 정치 참여, 세상의 많은 활동을 쓸데없는 것으로 여기게 되고, 커뮤니티와 상호부조는 쇠퇴하고 사회의 부는 점점 더 앙상하게 됩니다.
인생의 가성비를 따지자면 "당장 관 속에 들어가는 것이 가장 좋다"라고 요로 다케시(養老孟司, 1937~)는 비꼬아 말하지만 궁극적으로 삶의 의미 따위는 사라지게 될 것입니다. 여기에서 자본주의에 의한 '영혼의 포섭'이 극에 달한 것입니다.
p174
그 사회가 자본주의인지 아닌지는 정부의 규모나 국유 비율과는 무관합니다. 중요한 것은 자본을 늘리기 위한 잉여가치의 착취가 있느냐 없느냐입니다. 따라서 정부가 작아지고 시장에 맡기면 더 자본주의적으로 된다는 '신자유주의' 발상은 일면적입니다. 실제로 시장이 잘 작동하도록 정부가 적극적으로 개입하는 중국은 신자유주의는 아니지만 세계 최고의 자본주의국가입니다.
p176
자본주의의 본질은 상품의 등가교환 이면에 숨은 노동자 착취에 의한 잉여가치 생산에 있습니다.
이 문제를 해결하려면 단순히 사유에서 국유로 소유 형태를 바꾸는 것만으로는 충분하지 않습니다. 착취를 둘러싼 문제를 생산수단을 누가 소유하느냐의 문제로만 보고 노동의 문제로 보지 않는다면, 소련과 같은 과오를 범하게 될 것입니다. 자본주의를 극복하는 데 필요한 것은 착취 없는 자유로운 노동의 존재 방식을 만들어 내는 것입니다.
p177
마르크스에게 자본주의에 저항하는 데 중요한 것은 국가권력의 탈취나 정치체제의 변혁이 아니라 경제 영역에서 이 물상화의 힘을 억제하는 것이었습니다. 이렇게 말하면 어렵게 느낄 수도 있지만, 요컨대 상품과 화폐에 의존하지 않고도 살아갈 수 있도록 일상에서 선택의 여지를 넓혀 가는 것입니다.
p178
독일은 사정이 많이 다릅니다. 대학을 4년 만에 졸업하는 사람이 적고, 6년 정도 걸리는 것이 보통입니다. 유학 초기에, 박사과정까지 포함하면 20년 정도 학생인 사람들도 있다는 사실에 충격을 받았어요.
왜 그런 일이 가능하냐면, 학비가 무료이기 때문이죠. 그뿐 아니라 한 학기 2만 엔 정도면 전철과 버스를 무제한으로 탈 수 있는 정기권이 붙은 학생증을 받을 수 있습니다. 학생증만 있으면 학식도 몇백 엔으로 먹을 수 있고, 미술관이나 콘서트 할인도 받을 수 있습니다. 그 유명한 베를린 필의 콘서트도 15유로(약 2000엔)로 즐길 수 있습니다. 물론 기숙사비는 한 달에 3만 엔 정도로 저렴하고요.
대학 등록금뿐만이 아닙니다. 독일에서는 의료도 원칙적으로 무료이고, 간병 서비스도 후합니다. 실업수당, 직업훈련 등도 충실합니다. 그래서 육아에도 돈이 들지 않고, 노후까지 2000만 엔을 모을 필요도 없습니다. 그렇게 되면 싫은 일을 하면서도 필사적으로 버텨야 한다는 압박감이 약해집니다.
이것이 바로 복지국가 연구자인 괴스타 에스핑아네르센이 '탈상품화'라 부른 상황입니다. 즉, 생활에 필요한 재화(주거, 공원)와 서비스(교육, 의료, 대중교통)를 무상으로 이용할 수 있을수록 탈상품화가 진행된다는 것입니다. 이러한 재화와 서비스는 필요한 사람에게 시장에서 화폐를 사용하지 않고 의료나 교육 등의 형태로 직접 현물급부됩니다.
현물급부의 결과, 우리는 화폐를 얻기 위해 일할 필요가 줄어들게 됩니다. 복지국가는 물론 자본주의국가입니다. 하지만 탈상품화가 물상화의 힘에 제동을 걸고 있음을 알 수 있습니다.
p179. 국유화보다 어소시에이션이 선행했다.
소련도 교육, 의료 등을 무상으로 제공했기 때문에 복지국가와 차이점을 알기 어려울 수도 있습니다. 하지만 소련에서는 국유화가 먼저 선행되었죠. 반대로 복지국가의 경우, 물상화의 힘을 억제하려는 사회운동이 선행되었습니다. 이 운동을 마르크스는 '어소시에이션'이라고 불렀습니다.
노동조합, 협동조합, 노동자 정당, 모두 다 어소시에이션입니다. 요즘으로 치면 NGO나 NPO도 해당됩니다. 마르크스가 지행한 것은 소련과 같은 관료 지배 사회가 아니라, 사람들의 자발적인 상호부조와 연대를 기초로 한 민주적 사회였습니다.
어소시에이션의 중요성은 복지국가에서 제공하는 다양한 서비스의 역사적 형성 과정을 보면 알 수 있습니다. 예를 들어, 실업보험은 노동자 스스로가 임금의 일부를 모아 만든 것입니다. 일자리를 원하는 사람이 많아, 낮은 임금을 받고 일하는 사람이 많아지면 노동운동의 대오는 흐트러집니다. 그래서 일정 수준 이하의 임금으로 일하지 않도록, 실직한 노동자들의 삶을 스스로 지탱할 수 있는 구조가 만들어진 것입니다.
그 외에도 사회보험이나 연금부터 공공도서관, 공공의료에 이르기까지 모두 그 발단으로 거슬러 올라가면 노동조합, 이웃 상호부조 조직, 협동조합 등의 실천이 있습니다. 자본의 힘 앞에서 사람들이 자신의 삶을 지키고 풍요롭게 하기 위해 상호부조 시스템을 자발적으로 만들어 냈던 것입니다.
요컨대 이 모든 것이 탈상품화를 위한 어소시에이션 운동이었으며, 그것이 20세기에 들어서면서 노동자들 자신이 아니라 국가가 세금을 사용해 보편적 형태로 국민에게 제공하게 된 것입니다. 즉, 어소시에이션 운동은 국유화를 당과 관료가 추진했던 국가자본주의와는 순서가 반대입니다. 보편적 서비스로서 국유화는 어소시에이션이 발전한 다음에 이루어졌습니다.
어소시에이션이 경제의 기초에 있기 때문에 생활보장의 모든 것을 국가의 관리나 개입에 의존할 필요가 없습니다. 예를 들어, 독일에는 최근까지 전국적이고 일률적인 법정최저임금이 없었습니다. 독일에서는 노동조합이 일본처럼 기업별이 아닌 산업별로 조직되어 있습니다(금속산업노조는 IG금속, 서비사업은 ver,di처럼). 이 산별노조가 각 기업과 산업별로 노사 협정을 맺어 일정한 최저임금을 지키도록 하기 때문에 굳이 국가가 시장에 개입할 필요가 없었습니다.
어쨌든 물상화와 탈상품화라는 관점에서 보면, 복지국가는 마르크스가 생각한 비전과 겹치는 부분이 있습니다. 어소시에이션이라는 관점에서 보면, 노동조합운동을 금지하고 국유화 아래 관료가 의사결정을 독점하는 소련이나 중국과 같은 '사회주의국가'보다 자본주의 복지국가가 마르크스의 생각에 더 가깝습니다.
p182. 기본소득이라는 '법학 환상'
'국가자본주의'와 '법학 환상에 대한 마르크스의 비판은 오늘날 그 중요성이 더욱 커지고 있습니다. 이러한 환상은 과거에 국한된 이야기가 아니기 때문입니다. 노동운동이 침체되고 어소시에이션이 약화되는 가운데, 국가의 강력한 힘을 이용한 자본주의 개혁안이 다시금 제기되고 있습니다.
예를 들어, 2000년대부터 인기를 끌고 있는 기본소득(BI, Basic Income)은 '법학 환상'의 상징입니다. 모든 사람에게 화폐를 나눠 주는 법을 만들면 된다는 BI의 발상은 언뜻 보기에 매우 대담합니다. 충분한 돈을 자동으로 받을 수 있다면 굳이 싫은 일을 하지 않아도 됩니다. 좋아하는 일을 하면서 자유 시간도 늘어나고, 풍요로운 삶을 살 수 있다는 것입니다.
정말이지, BI는 마치 기사회생의 특효약처럼 보일 수 있습니다. 하지만 월 2~3만 엔을 지급받는 대신 연금이나 사회보장비를 삭감당하면 소용이 없습니다. 한편, BI로 매월 10만 엔 정도를 전 국민에게 지급하려면 재원으로 대기업과 부유층에 상당한 부담을 지우게 됩니다.
당연히 자본은 모든 수단을 동원하여 그러한 증세에 저항할 것입니다. 글로벌기업들은 일본 정부가 BI를 위해 높은 세금을 부과하면 회사를 접고 세금 부담이 적은 해외로 도피하겠다고 협박할 가능성이 높습니다. 그렇게 되면 세수는 줄고, 주가는 떨어질 것입니다. 이것이 자본의 위협, '자본 파업'입니다.
자본은 국가를 넘어 좋아하는 곳, 좋아하는 것에 투자할 자유를 갖고 있으며, 이 자유가 이동하지 못하는 노동자와 국가에 대한 자본의 권력과 우위의 원천이 되고 있습니다. 이 자유를 방패 삼아 '자본 파업'을 발동하려는 것입니다. 그래서 BI를 도입하려면 국가가 이 자본 파업을 이겨 내야 합니다. 그러기 위해서는 상당한 힘의 사회운동이 뒷받침해 주어야 합니다.
하지만 만약 사회운동 진영에 그 정도의 강력한 힘이 있다면 국가가 화폐를 나눠 주는 것 외에 다른 사회변혁의 길을 추구할 수 있을 것입니다. 예를 들어, 의료, 고등교육, 보육, 돌봄, 대중교통 등을 모두 무상화하여 탈상품화하는 것입니다.
그런데 애초에 BI라는 제안이 나온 배경에는 노동운동이 약화되고, 불안정 고용과 저임금 노동이 증가하고 있다는 점을 들 수 있습니다. 노동운동에 의존할 수 없으니, 그 대신 국가가 화폐의 힘으로 국민의 삶을 보장해 주자는 것이 BI입니다.
물론 매달 손에 쥘 수 있는 돈이 늘어나면 노동자들의 생활에 여유가 생기고, 노동자계급의 힘이 강해질 수도 있습니다. 하지만 이런 방식은 생산의 존재 방식에는 손을 대지 않기 때문에 자본이 가진 힘을 약화시킬 수 없습니다. 그렇기 때문에 BI를 요구하는 세력이 얼마나 힘을 가지고 자본 파업에 맞설 수 있을지는 미지수입니다.
앞서 말했듯이 BI에 담긴 사고방식은 화폐가 힘을 가진 현재의 상황을 상당히 소박하게 전제하고 있습니다. 그렇다면 우리가 BI를 도입한다 할지라도 상품과 화폐의 힘에 계속 휘둘리지 않을까요? 물상화의 힘은 전혀 약화되지 않습니다.
이에 반해 물상화의 힘을 억누르려고 한 마르크스는 화폐와 상품이 힘을 갖지 않는 사회로의 변혁을 목표로 삼았습니다. 물론 이 목표는 화폐의 힘을 아무리 사용해도 달성할 수 없습니다. 화폐의 힘에서 자유로워지기 위해서는 화폐 없이 살 수 있는 사회의 영역을 어소시에이션의 힘으로 늘리는 수밖에 없습니다.
p184. 피케티와 MMT의 사각지대
BI와 비슷한 '법학 환상'은 <21세기 자본>의 저자이자 프랑스 경제학자인 토마 피케티의 세제 개혁안도 공유하고 있습니다. 사실 피케티도 최근 들어 '사회주의'를 표방하는데, 그의 방식은 소득세와 법인세, 상속세를 대폭 인상해 과감한 재분배를 실현하는 것입니다. 예를 들어, 소득세와 상속세의 최대 세율을 90퍼센트 올리고, 이를 재원으로 삼아 모든 성인에게 일천수백만 엔씩을 지급하자고 제창합니다. 물론 그런 재분배가 이루어지면 서민들의 생활이 안정되고 풍요로워질 것입니다.
하지만 이런 대규모 증세를 싫어하는 자본 측이 필사적으로 저항할 것은 불 보듯 뻔합니다. 피케티의 설명에는 BI의 경우와 마찬가지로 자본 파업에 맞서 이런 대담한 개혁을 할 수 있는 힘이 어디서 나오는지 불분명합니다.
결국 피케티와 같은 양심적인 엘리트들이 사회 전체를 위한 제도를 톱다운방식으로 설계한다는 '법학 환상'은 잘 작동하지 않습니다. 자본 파업을 이겨 낼 수 있는 어소시에이션의 힘을 키워야 하는데, 피케티가 제안하는 세제 개혁을 지지하는 운동이 애초에 어떻게 일어날지 분명하지 않습니다.
그리고 최근 '반긴축파'의 이론으로 주목받는 현대화폐이론(MMT, Modern Monetary Theory) 에도 같은 문제가 있습니다. MMT는 자국 통화를 발행할 수 있는 정부는 재정적자를 확대해도 채무불이행이 되지 않기 때문에 재정적자일지라도 국가는 과도한 인플레이션이 발생하지 않는 범위에서 지출을 해야 한다는 주장으로 주목을 받았습니다.
MMT가 주장하는 과감한 재정지출은 정부가 최저임금으로 일자리를 마련하고 원하는 모든 사람에게 일자리를 제공하는 '고용보장 프로그램'과 한 세트로 생활을 보장합니다. 이를 통해 친환경적이고 지속 가능한 사회로 전환하는 데 필요한 일자지를 적극 창출하면서 경제성장을 도모하겠다는 것입니다.
그런데 이러면 잘될까요? 적극적 재정이라 하더라도 공적 투자로 비중이 이동하여 어디에 투자할지를 정부가 결정하는 것은 자본이 여전히 싫어할 것입니다. 투자 여부의 자유로운 판단권을 완전히 장악하는 것이 자본이 가진 권력의 원천이고, 그 힘을 지키기 위해 필사적으로 저항할 것입니다.
하지만 MMT에서 공적 투자에 의한 자본 관리는 중요합니다. 만약 화폐를 마구잡이로 뿌리는 형태가 되면 사회보장이나 친환경적 일자리뿐 아니라 군비나 불필요한 공공사업에 사용되어 버릴 수도 있기 때문입니다. 혹은 화폐를 뿌리는 과정에서 이권이 생겨 대기업만 이득을 보게 될 수도 있습니다.
한편, 정부의 시장개입이 커지고 탈탄소, 인권보호 등 규제를 강화할수록 자본의 반발도 거세질 것입니다. 그렇게 되면 자본이 국내 투자에서 철수하기 시작하고, 통화가치가 하락해 인플레이션 압력이 높아질 수 있습니다. 그러면 증세나 금리인상을 통한 경기 긴축이 필요하게 됩니다. 이러한 자본 파업을 이겨낼 수 있는 힘이 MMT의 경제정책에는 없습니다.
결국 톱다운식으로 대담한 정책을 실행하려고 해도 국가가 자본 파업에 굴복하지 않기 위해서는 상당한 어소시에이션의 힘이 필요합니다. 이때 어소시에이션에 요구되는 것은 노동자들이 무엇에 투자할지, 어떻게 일할지 등을 스스로 결정할 수 있도록 생산의 실권을 쥐여 주는 것입니다.
물론 그러한 생산 영역의 개혁이 매우 어렵다는 것은 자명한 사실이지만, 그렇다고 해서 자본과 임금노동의 힘의 균형을 바꾸는 근본적인 과제에서 눈을 돌려서는 안 됩니다. 하지만 그 어소시에이션을 만드는 관점이 BI에도, 피케티에게도, MMT도 부족합니다.
그리고 그것은 우연이 아닙니다. 계급투쟁이 없는 시대에 톱다운으로 할 수 있는 정치개혁이 BI이고, 세제 개혁이고, MMT이기 때문입니다. 이들은 정책이나 법의 논의가 선행되는 '법학 환상'에 갇혀 있습니다.
이에 반해, 물상화, 어소시에이션, 계급투쟁이라는 마르크스의 독자적 관점을 이러한 정치개혁에 도입하는 것은 사고와 실천의 폭을 크게 넓혀 주며, 이러한 대담한 정책 제안을 실현하기 위해서도 필수적인 전제조건입니다.
p187. 상향식 사회변혁으로
이사의 논의에서 알 수 있듯이, 마르크스는 위로부터의 설계만으로 사회 전체가 좋은 방향으로 바뀔 수 있다는 사고방식을 버렸습니다.
이 점은 매우 중요합니다. 왜냐하면 어소시에이션을 통한 탈상품화를 전략의 중심에 두는 것은 러시아혁명 이미지가 강한 20세기형 사회변혁의 비전에 큰 변화를 요구하기 때문입니다. '톱다운' 방식에서 '상향식' 으로의 대전환이라고 할 수 있습니다.
이 변화는 마르크스 자신의 혁명관 변화에서도 드러납니다. 마르크스 역시 아직 젊었던 <공산당선언>(1848년) 단계에서는 공황을 계기로 국가권력을 탈취하고 생산수단을 국유화하는 '프롤레타리아독재'를 주장했습니다. 그러나 <자본론>에서는 논의의 초점이 크게 달라집니다. <자본론>에서 그런 공황 대망론은 찾아볼 수 없게 됩니다.
오히려 이 책의 2장과 3장에서도 보았듯이 마르크스는 <자본론>에서 노동시간 단축과 기능 훈련에 역점을 두었습니다. 혁명의 책인데도 강조한 것은 자본주의 내부에서 일어나는 어소시에이션에 의한 개량입니다.
이러한 강조점 변화의 배경에는 마르크스가 혁명의 어려움을 인식한 점이 있습니다. 마르크스의 <공산당선언>에는 노동자의 궁핌화와 공황으로 머지않아 혁명이 일어나고, 이를 통해 사회주의 체제를 수립할 수 있으리라고 낙관적으로 생각한 구절이 있습니다. 그러나 1848년 혁명에서 노동자 봉기는 실패로 돌아갔고 자본주의는 되살아났습니다. 1857년 시작된 공황 때도 마찬가지였습니다.
자본주의의 끈질긴 생명력 앞에서 마르크스는 그 힘의 원천을 탐구할 필요성을 통감했습니다. 그것이 마르크스를 경제학 비판으로 이끌었고, 그 연구 성과인 <자본론>에서 마르크스는 낙관적인 변혁 비전을 버리고 혁명을 향한 자본주의 수정에 무게를 두게 됩니다.
이때 마르크스는 임금인상보다 노동시간 단축을 중시했는데, 이 역시 물상화라는 관점에서 보면 그 이유를 알 수 있습니다. 시급을 올리는 것도 물론 의미가 있지만, 더 오래 일해 화폐를 얻고자 하는 욕망에서 노동자들은 해방되지 못합니다. 오히려 점점 더 화폐에 의존학 됩니다. 욕망은 무한하기 때문입니다.
실제로 서구 복지국가는 노동시간 단축을 체택했습니다. 예를 들어 프랑스는 노동시간이 주 35시간입니다. 이러한 노동시간 단축은 노동자에게 여가가 생기게 합니다. 하지만 여가가 생겨도 일요일에 모든 가게가 문을 연다면, 결국 자본주의에 먹히고 말 것입니다. 그래서 일요일에는 식당이나 미술관 등을 제외하고 백화점, 쇼핑몰, 슈퍼마켓 등은 원칙적으로 문을 닫는 것입니다.
가게가 문을 닫았기 때문에 자본주의적 소비활동을 아예 할 수 없게 됩니다. '윈도쇼핑'은 일본에서 흔히 오해되듯이 돈이 없어 가게 밖에서 브랜드 상품을 구경하는 일을 말하는 것이 아닙니다. 일요일에 가게가 문을 닫았기 때문에 어쩔 수 없이 밖에서 구경하는 것입니다.
가게가 문을 닫기 때문에 여가를 보내는 다른 방법이 필연적으로 생겨납니다. 카페에서 독서하고, 정치 이야기를 하는 사람도 있습니다. 스포츠 침에서 축구하는 사람도 있습니다. 정원이나 농장을 가꾸어도 좋습니다. 시위나 자원봉사를 하는 사람도 있습니다.
바로 탈상품화와 결합된 여가는 비자본주의적 활동과 능력 개발의 터전을 마련해 줍니다. 그것이 또 다른 어소시에이션의 발전과 탈상품화의 가능성을 넓혀 가는 것으로도 이어집니다. 이리하여 가성비 사고로 회수되지 않는 사회적 부의 풍요가 양성될 수 있습니다.
p201
자연과학과 공동체를 동시에 연구하던 마르크스는 자연의 '지속가능성'과 인간 사회의 '평등'의 강력한 연관성을 깨닫게 됩니다.
왜냐하면 부가 편재하면 거기에서 권력과 지배-종속 관계가 생겨나고, 이를 더욱 공고히 하기 위해 인간과 자연에서 약탈이 시작되기 때문입니다. 그 결과 자원이 고갈되면, 이번에는 서로 탈취하는 싸움이 벌어집니다. 그런 상황에서는 도저히 사회의 번영을 실현할 수 없습니다.
p237
마르크스에 따르면 변화의 담당자는 '프롤레타리아트'입니다. 프롤레타리아트라고 하면 남성 공장 노동자를 떠올리는 사람도 많겠지만, 자본주의 아래에서 부정적 영향을 받는 사람은 어떤 의미에서 모두 프롤레타리아트입니다.
장시간 노동과 저임금으로 피폐해진 필수 노동자, 일자리가 불안정해서 늘 스트레스를 받는 사람, 일에서 보람을 느끼지 못하는 사람도 마찬가지입니다. 일에서도, 일상생활에서도 우리는 시장 논리, 경쟁 원리에 휘둘리고 있습니다. 자본주의 아래에서는 우리는 모두 프롤레타리아트입니다.
자본주의는 불평등과 분단을 낳고, 약자들로부터 더 빼앗아 왔습니다. 그리고 시장은 화폐가 없는 사람들을 배제합니다. 이 때문에 상품화의 힘을 약화하고, 사람들이 참여할 수 있는 민주주주의 영역을 경제 영역에까지 확대하자고 마르크스는 말합니다. 그것이 바로 모든 것의 '상품화(commodification)'에서 모든 것의 '코먼화(commonification)'로의 대전환을 향한 코뮤니즘의 투쟁입니다.
p240
신자유주의 시대는 끝났습니다. 전염병, 전쟁, 기후 위기 등 만성적 긴급사태의 시대에는 강한 국가가 요청되기 때문입니다. 이 만성적 긴급사태를 방치한다면 국가의 힘이 점점 더 강해져 파시즘과 전체주의로 나아갈 것입니다. 스탈린이나 히틀러의 재림은 물론 허용될 수 없습니다.
그런 '야만 상태'를 피하기 위해서는 불평등과 착취, 전쟁과 폭력, 식민지지배와 노예제 등의 문제를 직시하고 국가의 폭주에 저항하면서 자유와 평등의 가능성을 필사적으로 사고했던 사상가들의 지혜와 상상력에서 배워야 합니다.
이것이 바로 우리가 지금 <자본론>을 다시 읽어야 하는 이유입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