한겨레 기자로 최순실 국정농단 사태의 취재를 통해 박근혜 탄핵을 이끌어냈던 김의겸의 인생과 정치역정에 대한 자전적 내용.
한국 현대사의 중요한 순간들에 대한 이야기들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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p52. '오송회' 선생님들
불온한 기운이 학교 안에 퍼지고 있다고 했지만, 그건 우리의 착각이었을 것이다. 세상은 아랑곳하지 않았다. 전두환이 대통령으로 취임하며 제5공화국이 시작되었고, 학력고사는 점점 다가왔다.
무력하고 순진한 반항아들에게 세상은 너무나 견고하고 높은 성벽이었다. 우리는 성벽 안에 갇힌 채 탈출구를 찾는 수인만 같았다. 내 마음이 바로 그랬다. 그런 어느 순간 우리의 눈에 몇몇 선생님들의 모습이 들어오기 시작했다.
이광웅 선생님과 박정식 선생님이었다. 두 분은 국어를 가르쳤다. 그런데 두 분의 가르침은 남달랐고, 그래서 기이하게도 보였다.
어느 날 이광웅 선생님은 수업에 빈손으로 들어와 칠판에 '葛藤(갈등)'이라는 두 한자를 큼지막하게 썼다. 특유의 정갈하면서 미려한 글씨였다. 그러더니 이렇게 말했다.
"갈등은 참 여러 가지야. 마음속의 갈등, 나와 타인의 갈등, 나와 세상의 갈등, 오늘은 각자 자신이 가진 갈등에 대해 생각해 봅시다. 노트에 그걸 써보도록."
학력고사가 코앞에 다가왔는데, 이광웅 선생님은 그렇게 한 시간을 보냈다. 선생님의 마음속 의도는 알 수 없었지만, 그것은 우리가 단순히 입시 기계가 아니라 생각하는 주체임을 깨우쳐 주려는 것처럼 보였다. 목마른 자가 만난 샘물 같은 순간이었다.
왜소한 체구에 지극히 순한 눈빛을 지녔던 이광웅 선생님은 실은 남다른 감화력을 지닌 분이기도 했다. 우리 학교는 규율이 몹시 엄격하고 체벌이 많은 곳이었다. 사소한 잘못도 그냥 넘어가는 법이 없이 지도부 선생님들의 기합과 매질이 가해졌다. 이광웅 선생님은 전혀 달랐다.
어느 날 우리 반 아이들 몇이 짤짤이를 하다 이광웅 선생님에게 들켰다. 막 국어 시간이 시작된 참이었다.
선생님은 짤짤이를 하던 친구들을 앞으로 불러냈다.
"화장실에 가서 주전자에 물을 담고, 대야와 함께 가져와."
의아한 지시였다. 아무튼 아이들이 시킨 대로 했다. 그러자 선생님은 주전자를 들고 짤짤이를 하던 아이들의 손을 씻겨주었다.
"냄새 나는 손을 씻었으니 다들 자리로 돌아가 수업을 시작하자."
박정석 선생님은 차분한 음성과 풍부한 감성을 지닌 분이었다. 교과 진도가 끝나면 교과서에 나오지 않은 글을 읽어주곤 했다. 특히 김수영과 신동엽의 시를 낭송하는 목소리를 가히 압도적인 것이었다. 낭랑한 목소리에 실린 시의 의미와 울림이 굉장했다.
이슬비 오는 날,
종로 5가 서시오판 옆에서
낯선 소년이 나를 붙들고 동대문을 물었다.
밤 열한 시 반,
통금에 쫓기어 군상 속에서 죄 없이
크고 맑기만 한 그 소년의 눈동자와
내 도시락 보자기가 비에 젖고 있었다.
국민학교를 갓 나왔을까.
새로 사 신은 운동화 벗어 품고
그 소년의 등허리선 먼 길 떠나온 고구마가
흙 묻은 얼굴들을 맞부비며 저희끼리 비에 젖고 있었다.
-신동엽, <종로5가> 중에서
그리고 김수영의 시 <어느 날 고궁을 나오면서>는 내게 깊은 공감을 불러일으켰다.
왜 나는 조그마한 일에만 분개하는가
저 왕궁 대신에 왕궁의 음탕 대신에
50원짜리 갈비가 기름 덩어리만 나왔다고 분개하고
옹졸하게 분개하고 설렁탕집 돼지 같은 주인년한테 욕을 하고
옹졸하게 욕을 하고
한 번 정정당당하게
붙잡혀간 소설가를 위해
언론의 자유를 요구하고 월남 파병에 반대하는
자유를 이행하지 못하고
20원을 받으며 세 번씩 네 번씩
찾아오는 야경꾼들만 증오하고 있는가
시인이기도 했던 이광웅 선생님이나 박정석 선생님이나 말하지 않고도 많은 말을 해준 분들이다.
그러던 어느 시험 기간이었다. 국어 시험에 '우리를 슬프게 하는 것들'을 주제로 자유롭게 글을 쓰라는 문제가 출제되었다. 그때 국어 시험이 그랬다. 서른개의 문제가 출제되는데, 마지막 문제는 늘 주제를 제시한 작문이었다.
'우리를 슬프게 하는 것들'은 당시 국어 교과서에 실려 있던 안톤 슈낙의 수필 제목이었다. 그런데 나를 비롯해 팍스 코리아나 친구들은 상의하지 않았는데도 답안에 사회와 교육에 대해 비판적인 의식을 담아냈다.
그 가운데 우리 일원인 김민수의 글이 가장 눈에 띄었나 보다. 박정식 선생님이 민수를 따로 불렀던 모양이다.
"어떻게 이런 답안을 쓴거야? 생각이 넓고 깊더라고. 기특하고 궁금해서 그런다."
선생님의 물음에 답하며 이런저런 대화를 나누는 중에 민수는 저절로 우리의 존재를 알리게 되었다. 그 뒤로 팍스 코리아나는 선생님의 관심을 받게 되었고, 어느 순간부터 우리는 이광웅 선생님이나 박정석 선생님 댁으로 놀러 다니기 시작했다.
이런저런 얘기를 나눴고, 때로는 막걸리도 한 모금씩 얻어 마셨다. 두 선생님의 격의 없고 개방적인 태도는 놀라운 것이었다. 사제 간의 사이가 친밀한 선후배 같았다. 늘 지적 갈증을 느꼈던 우리는 선생님들의 책꽂이에 있는 책들을 빌려서 돌려 읽을 수 있었다. 우리가 대학에 들어가서도 선생님과 제자의 친밀한 관계는 그대로 이어졌다.
p60. 야만의 시간
1982년, 우리가 대학 1학년 때의 여름이었다. 우리는 방학을 맞아 모처럼 고향에서 뭉쳤는데, 누군가 선생님께 빌린 책을 돌려줘야 한다고 했다. 시인 오장환의 <병든 서울>이었다. 해방 직후의 혼돈 속에서 느끼는 기쁨과 좌절과 분노, 그리고 희망의 의지를 담아낸 시집이었다.
병든 서울, 아름다운, 그리고 미칠 것 같은 나의 서울아
네 품에 아무리 춤추는 바보와 술취한 망종이 다시 끓어도
나는 또 보았다.
우리들 인민의 이름으로 씩씩한 새 나라를 세우려 힘쓰는 이들을……
그리고 나는 외친다.
우리 모든 인민의 이름으로
우리네 인민의 공통된 행복을 위하여
우리들은 얼마나 이것을 바라는 것이냐.
아, 인민의 힘으로 되는 새 나라
-오장환, <병든 서울> 中 일부.
그 시집은 1946년에 출간된 데다 시인이 월북한 이력이 있어 당시로서는 시중에서 구할 수 없는 희귀본이었다. 더구나 우리가 가진 책은 선생님이 젊었을 때 시집을 손수 옮겨쓴 필사본 노트였으니, 어쩌면 더욱 소중한 것이었다. 반드시 돌려주어야 하기에 우리는 선생님 댁으로 가는 시외버스를 탔다. 그런데 우리는 오랜만에 만나 얘기 꽃을 피우느라 엉겁결에 시집 필사본을 버스 좌석에 놓고 내렸다.
그 버스의 안내양은 신고 정신이 투철했던 모양이다. 그 시집에 나오는 '인민'이며 '새 나라' 같은 표현은 시가 발표된 1945년에는 누구가 흔히 쓰는 단어였지만, 안내양의 눈에는 지극히 불온한 북한식 어휘로 보였을 것 같다. 안내양은 경찰서로 달려갔고, 시집은 '사건'을 만들어내는 결정적 단서로 쓰였다.
경찰은 필사본에서 단서를 발견하고 추적하여 책 주인인 이광웅 선생님을 찾아냈다. 경찰은 그 뒤 몇 달 동안 미행과 도청으로 선생님들의 일거수일투족을 감시했다. 그런 줄도 모르고 선생님들은 여전히 막걸릿집에 모여 시국을 한탄하고 전두환 정권을 비판했다.
마침내 경찰은 1982년 가을에 대대적인 검거에 들어갔고, 선생님들은 '일망타진'되었다. 그것이 이른바 '오송회'사건이다. 오송회라는 조직은 세상에 있지도 않았고, 경찰의 상상력이 만들어낸 허구의 이적단체였다. 그러나 오송회는 선생님들과 우리들의 삶을 전혀 다른 것으로 만들어 버렸다.
https://ko.wikipedia.org/wiki/%EC%98%A4%EC%86%A1%ED%9A%8C_%EC%82%AC%EA%B1%B4
1982년의 쌀쌀한 늦가을, 전주의 대공 분실(지금의 전북경찰청 모래내 별관) 지하실에는 밤도 낮도 없이 신음이 이어졌다. 신음과 함게 고문경찰의 카랑카랑한 목소리가 울려 퍼졌다.
"너 간첩이지? 조직원을 다 불어. 불지 않으면 살아서 못 나갈 줄 알아. 너희 같은 빨갱이 새끼들 죽여도 우린 괜찮아. 죽ㅇ면 길가 아무데나 버리면 왜 죽었는지 아무도 몰라 임마!"
"그러면 제발 죽여주시오!"
박정석 선생님의 절규였다. 온몸이 발가벗겨진 채 통닭처럼 긴 막대에 두 손과 두 발이 묶여 거꾸로 매달린 채였다. 처음에는 고문 경찰들에게 "살려 달라"고 빌던 선생님이 나중에는 제발 죽여주기를 빈 것이다. 이 절규를 이광웅 선생님이과 다른 선생님들은 다시 자기에게 돌아올 순번을 기다리며 옆방에서 들어야만 했다.
오랜 세울이 흐른 뒤 박정석 선생님은 한 방송 인터뷰에서 이렇게 회고했다.
"그렇게 몇 시간이고 계속되는 신음을 듣고 있으면, 나는 자지러질 지경이 되는 거에요. 저러다 이광웅 형이 죽겠구나, 그런 처참한 생각이 절로 들었죠."
그런 무지막지한 폭력 앞에서는 없는 말도 지어내야 할 형편이었다. 국가보안법의 이적단체 조직과 간첩 행위로 기소된 '오송회' 사건은 그렇게 조작되었다. 문학을 논하고 시국을 한탄하던 선생님들의 술 모임은 어이없게도 자생적인 간첩 조직이 되어버린 것이다.
1982년 5월에 이광웅과 박정석 선생님들 비롯한 다섯 선생님들은 5.18을 맞아 학교 뒷산에 올랐다. 그곳 소나무 아래서 막걸리 한 병을 놓고 조촐한 위령제를 지냈다. 그렇게 다섯이 소나무 아래서 광주 희생자 위령제를 지낸 것에서 '오송회'라는 조직명이 붙여졌다.
선생님들이 잡혀가고 머잖아 우리 팍스 코리아나 친구들도 차례차례 경찰로 끌려가거나 불려갔다. 우리는 으름장과 주먹다짐과 발길질을 받으며 선생님들의 '이적행위'를 낱낱이 일러바쳐야 했다.
일러바친다는 표현은 온당하지 않다. 그것은 있지도 않은 이적행위를 만들어내는 과정이었다. 앞서 친구의 진술서에 다음 친구가 뭔가를 덧붙이고, 그다음 친구가 다시금 뭔가를 덧붙이는 것이다. 그 과정에서 심문하는 경찰이 제시하는 말이 진술로 첨가되기도 했다. 경찰이 구상한 시나리오가 그런 식으로 완성되었다.
그런데 이듬해 5월 전주지방법원에서 열린 1심 재판에서 뜻밖의 일이 벌어졌다. '오송회' 사건으로 기소된 아홉 분의 선생님 가운데 여섯 분이 선고유예로 풀려난 것이다. 그 엄혹한 5공화국 초기에도 용기 있는 부장판사 이보환이 있었던 거다. 풀려나지 못한 세 분 선생님은 2심에 기대를 걸고 항소했다.
하지만 7월에 열린 광주고등법원의 항소심 법정은 아비규환이 되고 말았다. '주범' 이광웅 7년, 박정석 5년, 전성원 3년으로 형량이 높아졌을 뿐 아니라, 선고유예를 받았던 여섯 분이 모두 법정 구속된 것이다. 가족들은 땅을 치며 통곡했고, 허공을 향해 울부짖었다.
항소심 재판관 이재화의 이름을 잊을 수 없다. 그는 판결문에서 선생님들을 향해 "잘못을 뉘우치는 기색 없이 변명만 한다"라고 했다. 그리고 1심과 2심 사이에 도대체 무슨 일이 있었던 걸까. 그 내막은 20여 년 뒤, 박철언의 회고록 <바른 역사를 위한 증언>을 통해 드러난다.
1983년 어느 날, 전두환이 청와대로 대법원장과 대법원 판사들을 불러 모아 만찬을 열었다. 그 자리에서 전두환은 사회나 정치의 불안 요소에 과감하게 대처할 것을 주문했다. 그런데 특별히 '오송회' 사건을 예로 들며 "빨갱이를 무죄로 하는 것은 안 될 일"이라고 말했다는 것이다.
전두환의 이 언급이 '오송회' 사건의 1심과 2심 결과를 완전히 다르게 만들어 버린 것이다.
그로부터 26년이 흐른 2008년 '오송회' 사건은 재심을 통해 모두 무죄를 선고받았고, 선생님들은 뒤늦은 명예를 회복했다. 재심의 주심이었던 이한주 부장판사는 판결문에서 이렇게 적었다.
법원에 가면 진실이 밝혀지겠지 하는 기대감이 무너졌을 때 여러분이 느꼈을 좌절감과 사법부에 대한 원망, 억울한 옥살이로 인한 심적 고통 등에 대해 많은 고민을 했다. 그동안의 고통에 대해 법원을 대신해 머리 숙여 사죄드린다.
하지만 육신과 영혼이 찢긴 상처가 어떻게 아물겠는가. 그리고 이날 '주범' 이광웅 선생님은 그 자리에 없었다. 사건을 겪고 징역을 사는 동안 몸과 마음이 피폐해진 선생님은 병을 얻어 1992년에 벌써 세상을 뜨신 지 오래였다.
그리고 다른 선생님들은 이미 연로해지셨다. 청춘을 돌려받을 방법은 없다. 그중 조성용 선생님은 2022년 여름에 세상을 떠났다. 또한 선생님의 자녀들은 민감한 성장기에 숱한 상처를 받아서 그 상흔이 이러저러한 형태로 여전히 남아 있다. 법조계의 유명한 말처럼, 지연된 정의는 정의가 아니다.
나는 가끔 금강 하구를 찾아간다. 그곳 둑 근처에는 이광웅 선생님의 시비가 소나무와 함께 서 있다. 선생님을 아끼고 따른던 문인들과 제자들이 중심이 되어 1998년에 세운 것이다. 바윗돌에는 이광웅 선생님의 육필로 시가 새겨져 있다.
이 땅에서
진짜 술꾼이 되려거든
목숨을 걸고 술을 마셔야 한다
이 땅에서
참된 연애를 하려거든
목숨을 걸고 연애를 해야 한다
이 땅에서
좋은 선생이 되려거든
목숨을 걸고 교단에 서야 한다
뭐든지
진짜가 되려거든
목숨을 걸고
목숨을 걸고...
- 이광웅, <목숨을 걸고>
p208. 아베의 오래된 꿈
2018년 2월 8일, 문재인 대통령과 아베 일본 총리의 정상회담이 열렸다. 평창 동계올림픽 개막식 참석을 위해 아베 총리가 방한한 것이다. 나로서는 아베를 실물로 처음 보는 자리였다. 아니, 문재인 정부에서 한일 정상회담 자체가 처음이었다.
한일 정상의 첫 회담이니만큼 한일 관계에 조금이나마 진전이 있기를 바랐다. 그러나 그런 기대는 처음부터 두 동강이 나고 말았다. 아베 총리는 회담장의 자리에 앉자 노트를 꺼내들고 일방적으로 읽어나갔다. 두 정상의 의자는 서로를 비스듬히 앉도록 배치가 됐는데, 그는 문재인 대통령에게 눈길 한 번 마주치지 않았다.
아베 총리로서는 두 가지가 불만이었다. 일본군 위안부 피해자 문제, 그리고 북한 문제였다. 문재인 대통령은 경직되고 고압적인 태도로 일관하는 아베 총리의 옆얼굴을 빤히 바라보았다. 답답하다는 건지 한심하다는 건지 모를 표정이었다.
아베의 말이 끝나고 문재인 대통령의 반격이 시작되었다. 대통령은 때로 목소리를 높이기도 하고, 때로 하소연하기도 했다. 두 사람의 주장은 끝내 평행선을 달렸다.
정상회담이 진행되는 동안 나는 내용을 빠르게 받아적으면서도 걱정이 되었다. 이 회담 내용을 그대로 공개할 수는 없었다. 그날은 평창 동계올림픽을 여는 축제의 날이다. 불과 몇 시간 뒤 밤 8시에 개막식이 열린다. 북한에서 김영남 최고인민회의 상임위원장과 김여정 부부장 등 손님이 내려온 날이다. 남북 관계가 해빙되고, 북미 대화가 시작되기를 학수고대하는 날이다.
그런데 두 정상의 대화 내용을 그대로 언론에 전달했다가는 축제에 찬물을 끼얹게 될 것 같았다. 회담을 마친 후, 나는 외교부 관계자를 찾았다. 어디까지 언론에 공개할지 상의하고 싶었다. 그러나 일본통이라는 외교부 관계자도 남감해했다.
"글쎄요."
그러나 그런 고민은 오래가지 않았다. 일본 쪽이 먼저 아베 총리의 발언을 일본 언론에 공개한 것이다. 그러면 우리 쪽은 그에 대응하여 우리 대통령의 발언을 소개하는 것으로 균형을 맞추면 될 것 같았다.
다음 날 우리 언론은 '문 대통령-아베 위안부 합의 정면 충돌'이라는 식으로 보도를 내보냈다. 북한과 관련한 두 정상의 논쟁은 위안부문제에 비해 상대적으로 적게 보도되었다. 그건 대변인인 내가 최대한 둥글둥글하게 두 정상으 대화를 소개했기 때문이다. 날카롭게 대립한 부분은 깍아버리고 브리핑을 한 결과였다.
그런데 그건 대통령의 뜻이 아니었다. 다음 날 문재인 대통령과의 티타임 때, 대통령이 말했다.
"오늘 아침 신문들을 보니, 북한 문제와 관련한 내용이 없더군요. 추가로 브리핑하세요. 일본 말만 일방적으로 보도되고, 우리는 주권 국가인데 아무런 응대도 하지 못한 것으로 비치면 안 되죠."
말은 부드러웠지만, 사실상 질책이었다. 그래서 9일의 정상회담 내용 중 중요한 부분을 하루가 지나서 다시 추가로 브리핑해야 했다.
9일 정상회담 때 아베 총리가 한 말은 이러했다.
"북한의 비핵화에는 진지한 의사와 구체적인 행동이 필요합니다. 한미 합동 군사훈련을 연기할 단계가 아닙니다. 한미 합동 군사훈련은 예정대로 진행해야 합니다. 북한이 절박한 위기를 직시할 수 있도록 최대한의 압박을 가해야 합니다. 흔들지 않도록 해야 합니다."
이에 대해 우리 대통령이 반박했다.
"한미 간 군사훈련을 연기하지 말라는 총리의 말은 북한의 비핵화가 진전될 때까지 아무것도 하지 말라는 말로도 이해하게 됩니다. 이는 주권과 내정에 관한 것으로, 이를 직접 거론하는 것은 곤란합니다."
이런 식의 대화가 오고 갈 때, 두 정상의 눈에서는 불꽃이 튀기는 듯했다.
사실 한일 정상회담 직전에 문재인 대통령과 트럼프 미국 대통령은 정상 간 통화를 하고, 평창 동계올림픽 기간에는 북한이 민감하게 반응하는 한 군사훈련을 하지 않기로 합의했다. 그런데 아베가 이를 무시하고 한미 합동 군사훈련을 계속하라고 압박을 가한 것이다.
아베의 이런 무례함은 그날 저녁에도 이어졌다. 9일 저녁에는 만찬이 준비되어 있었다. 만찬장의 헤드테이블에는 마이크 펜스 미국 부통령과 아베 일본 총리, 그리고 김영남 북한 최고인민회의 상임위원장이 같이 앉게 배치되어 있었다.
다들 일찍 만찬장에 들어와 자리에 앉았는데, 아베 총리와 펜스 부통령이 나타나지 않았다. 둘이서 별도로 회담을 한다는 것이었다. 그들을 기다리던 문재인 대통령은 할 수 없다는 듯이 만찬을 시작했다.
내 마음이 다급해졌다. 만찬장 입구에서 서성이는 중에 아베 총리와 펜스 부통령이 나타났다. 그때라도 만찬장에 들어올 줄 알았는데, 둘은 엉뚱하게도 방향을 틀어 다른 방으로 들어가는 게 아닌가.
그들을 따라가 보았다. 둘은 그 방에서 사진을 찍으며 시간을 흘려보냈다. 문재인 대통령이 그 방으로 들어와 두 사람에게 만찬장으로 가자고 권유했다. 그제야 아베 총리와 펜스 부통령은 마지못한 듯 만찬장으로 들어갔다. 이미 40여 분 정도가 흐른 뒤였다.
하지만 펜스 부통령은 헤드테이블의 지정된 자리에 앉지 않고 몇몇 다른 나라의 정상과 선 채로 악수하고는 5분여 만에 빠져나갔다. 아베 총리는 김영남 상임위원장과 잠시 헤드테이블에 앉았으나 눈길도 마주치지 않으려고 했다.
일본은 한반도 평화를 바라지 않는 것인가. 그리고 그 이유는 무엇일까. 여러가지를 생각하게 만드는 장면이었다.
그런 의문은 석 달 뒤 어느 정도 풀렸다. 2018년 5월 9일, 일본 총리 공관에서 한일 정상회담이 열렸다. 일본 쪽은 '문재인 대통령 취임 1주년을 축하드립니다'라는 카드가 꽂힌 딸기 케이크도 준비하는 등 화기애애하게 시작되었다.
하지만 여전히 두 정상의 의견 차이는 좁혀지지 않았다. 아베 총리의 말 중에서 확 귀에 들어오는 말이 있었다.
"한반도 평화 체제가 구축되면 한국에 있는 유엔군 사령부가 폐지되는 거 아닙니까? 주한 미군의 역할, 그리고 동아시아의 미군 존재에도 영향을 미칠 것입니다."
아베 총리는 일본의 재무장과 군비 증강을 일관되게 추진한 인물이다. 중국은 당연히 이를 동아시아의 군사적 긴장을 악화시키는 행동이라 비판하고 나섰다. 한국도 일본의 군국주의 망령이 부활하려는 전조 증상이라며 비판에 가세하는 중이었다.
아베 총리로서는 한반도에 부는 평화의 훈풍이 군사 대국을 향한 자신의 구상에 방해가 된다고 보았다. 그래서 기를 쓰고 남북과 북미 사이의 평화협상 진전에 찬물을 끼얹었던 것이다.
아베 총리는 퇴임 후 2022년 7월 암살당했지만, 한반도 평화 정착에 반대하는 그의 염원은 사후에 이어지고 있다. 그의 뜻은 지금 한국의 윤석열 정부를 통해 드디어 실현되려는 듯하다. 미국을 중심으로 하는 한미일 삼각동맹은 아베가 오래도록 꿈꾸던 것이다.
여담이지만, 청와대 대변인을 하면서 가장 안타까웠던 건 정상회담 동안의 식사와 만찬이었다. 그런 자리에서는 응당 그 나라의 최고 음식이 선보인다. 그러나 대변인은 잿밥에 신경 쓸 처지가 못 된다. 정상의 대화 내용을 적느라 오른손을 바쁘게 움직여야 하기 때문이다. 그래도 일부 국가의 음식은 왼손으로 포크를 사용할 수 있어서 눈치 봐가며 먹을 수 있다.
그러나 최악의 상황은 일본에서 열린 한일 정상회담이었다. 일본 음식은 젓가락을 사용하니 왼손으로는 도저히 어떻게 해볼 도리가 없다. 점잖은 자리에서 손으로 먹을 수도 없는 일 아닌가. 그래서 아베 총리의 공관에서는 점심을 먹지 못하고 쫄쫄 굶고 나왔다.
문재인 대통령도 그럴 경우가 많았다. 대통령은 받아적을 일은 없지만 온 정성을 다해 대화에 집중한다. 한마디라도 더 듣고 더 말하려고 식사를 건성으로 하는 경우가 많았다. 진수성찬에 손도 못 대고 밤 늦게 숙소로 돌아와서 컵라면을 찾고는 했다.
p215. 진심의 사람, 문재인
2018년 2월의 어느 날 아침, 문재인 대통령은 한국 GM 이 군산 공장을 폐쇄하기로 했다는 소식을 보고 받았다. 분위기가 어두웠다. 나는 군산 사람이니 마음이 무거운 게 당연했다. 그런데 대통령의 표정은 나보다 훨씬 어두운 게 아닌가.
한참 침묵이 흐른 뒤 대통령은 불쑥 이렇게 말했다.
"내일이라도 당장 군산에 내려갑시다."
"네?"
모두가 깜짝 놀랐다. 임종석 비서실장이 나섰다.
"안 됩니다. 대통령께서 직접 가시게 되면 군산 시민들은 무슨 해결책이나 선물을 들도 오는 줄 알고 기대할 터인데, 지금 아무것도 준비된 게 없습니다."
대통령은 고집을 피웠다.
"꼭 뭔가를 들고 가야 합니까? 빈손으로 가면 안 됩니까? 그냥 내려가서 군산 시민들을 뵙고 껴안아주면 안 됩니까?"
결국 그날 회의는 다른 '합리적 대안'을 찾는 걸로 마무리를 지었다. 군산 지역을 '산업위기대응특별지역'으로 지정한 것이다.
나는 그 내용을 기자들에게 브리핑하고 나오면서도 이런 의문이 들었다.
'대통령은 왜 그렇게 군산 문제에 감상적인 태도를 보였을까?'
그 뒤 대통령을 지켜보며 나름대로 찾아낸 이유는 두 가지다.
첫째로는, 후보 시절 현대중공업 군산조선소를 정상화하겠다고 약속했는데 못 지켰고, 거기에 더해 한국GM 군산공장마저 문을 닫는다고 하니 책임감이 마음을 짓누른 것이다. 둘째로는, 조선업계의 불황으로 자신의 고향 거제가 힘든 걸 누구보다 잘 아는 터라, 같은 처지인 군산이 남의 일로 여겨지지 않은 것이다.
그래서일까, 문재인 대통령은 재임 기간에 유독 군산을 많이 찾았는데, 중소 규모의 도시로는 이례적으로 네 번이나 방문했다.
문재인의 진심은 국내뿐만 아니라 해외에서도 우러나왔다.
대통령을 수행하여 아랍에미리트UAE를 방문했다가 사막을 체험한 적이 있다. 대통령은 차를 타고 20분가량 달려가 사막 한복판에 섰다.
함께 간 아랍에미리트 장관이 설명했다.
"모래가 아주 뜨겁습니다. 하지만 우리 아랍인은 여길 맨발로 걱기도 합니다. 건강에 좋다고요."
장관은 그저 지나가는 말로 툭 던진 것인데, 문재인 대통령이 눈을 반짝이며 바로 이 말을 낚아챘다.
"아, 그래요? 그렇다면 저도 한번 해보죠."
대통령은 신발과 양말을 벗고 뜨거운 모래 위를 껑충껑충 뛰어다녔다.
"앗, 뜨거워. 아, 정말 뜨겁네요."
그렇게 소리를 지르면서도 대통령은 왼발과 오른발을 바꿔가며 호들갑스럽게 모래밭을 돌아다녔다. 그걸 지켜보고 있던 김정숙 여사가 만류했다.
"아휴, 발 데어요. 그만하세요."
대통령은 아랑곳하지 않았다. 아랍에미리트 장관은 허리가 휘도록 웃으며 박수를 쳐댔다.
평소에 과묵하고 매사에 진지한 문재인 대통령이다. 그가 이토록 개구쟁이 같은 모습을 연출한 이유는 무얼까. 나는 나름대로 짐작이 갔다.
'온통 사막인 나라, 그래서 자랑할 풍경이라곤 모래밭뿐인 나라. 그런 나라가 모래에 애정과 자긍심을 느낀다면 기꺼이 호응해주리라.'
이런 심정이지 않았을까.
문재인이라는 사람을 설명하려면, 노무현을 빼놓을 수 없다. 문재인 대통령은 가끔 참모들에게 '번개'를 쳐서 점심을 함께했다. 그런 뒤에는 꼭 청와대 경내를 한 바퀴 산책했다.
산책 코스는 거의 정해져 있어서 청와대를 둘러싼 돌담 안쪽을 끼고 돌았다. 그런데 어느 날인가는 돌담 밖으로 멀리 나간 적이 있다. 북악산으로 바로 올라가는 코스였다. 대통령은 주말에 청와대 경내를 산책하다 더 땀을 흘리고 싶으면 올라가는 코스라고 설명했다. 조금 올라가 보니 쉴 수 있는 정자가 있고 주변이 잘 정돈된 공간이 나타났다.
"이 나무가 어떤 나무인지 압니까?"
대통령은 잘생긴 아름드리나무를 가리키며 물었다. 수형이 웅장하고 가지가 옆으로 쭉쭉 퍼진 게 주변을 압도하는 모양새였다. 대답이 나오지 않았고, 대통령이 설명했다.
"이건 김대중 대통령께서 심은 나무죠."
그러더니 '김대중 나무' 맞은편에 있는 나무를 가리켰다.
"그러면 이 나무는 아나요?"
그 나무는 앞의 나무와는 달리 몸통이 얄브스름하고 가지가 위쪽으로만 뻗어 올라가며 자라는 나무였다. 역시 대꾸하는 이가 없었고, 대통령의 설명이 이어졌다.
"김대중 대통령께서 심은 나무를 방해하지 않으려고 일부러 위로만 자라고 옆으로는 퍼지지 않는 나무를 골라 심은 겁니다. 노무현 대통령이요."
이 말을 하고 문재인 대통령은 한참 침묵을 지키다 이렇게 덧붙였다.
"노무현 대통령의 사람 됨됨이가 드러나는 나무죠."
문재인은 노무현 대통령의 사람 됨됨이를 말했으나, 나는 이 말이 문재인의 됨됨이를 나타내는 말로도 들렸다.
문재인 대통령 퇴임은 우리 같은 옛 수하들에게 어쩌면 큰 선물이기도 했다. 재임 중에는 만나기가 어려웠지만, 퇴임 후 평산 마을로 내려간 뒤에는 마음만 먹으면 만날 수 있기 때문이다.
문재인 대통령과 함께 통도사를 병풍처럼 감싸고 있는 영축산 한자락을 오른 적이 있다. 윤도한 전 국민소통수석비서관, 더불어민주당의 최강욱 의원과 함께했다. 우리는 헉헉대며 산을 오르다 너른 바위를 만나 겨우 숨을 고를 시간을 가졌다.
"대통령님께서는 히말라야도 다녀오셨으니 이 정도는 아무것도 아니시죠?"
우리 중 누군가의 물음에 대통령은 이렇게 답했다.
"아닙니다. 높은 산은 높은 산대로, 낮은 산은 낮은 산대로 다 힘이 듭니다. 산이 높으면 우리 몸이 미리 온 기운을 끌어올려 쓰고 산이 낮으면 우리 몸이 아예 긴장을 풀어버립니다. 그래서 높낮이와 관계없이 몸이 힘든 건 다 마찬가지입니다."
우리 인생도 그런 것 같았다. 지위가 높으나 낮으나 일이 잘 풀릴 때나 꼬일 때나, 어렵고 힘든 건 매한가지인 듯싶다. 어려우면 어려운대로, 쉬우면 쉬운 대로 흔들리지 않고 여여如如하게 살아가라는 뜻으로, 대통령의 말씀을 받아들였다. 이런 마음가짐은 지금의 시국을 헤쳐가는 우리의 자세에도 적용될 수 있을 것 같다. 올라갈 때도 내려갈 때도 있겠지만, 마음의 동요 없이 "꾸준하게 전진하는 것 말이다.
대통령 말씀을 듣다보니, 그 내용과 수염을 기른 풍모가 참 잘 어울렸다. 처음에는 이발사가 수염을 다듬어줬는데, 이제는 자신이 배워서 직접 다 한다고 한다. 이발사도 그 솜씨에 놀랐다고, 대통령을 보좌하는 오종식 비서관이 귀띔해줬다. 그리고 이발사가 이런 말도 했다고 한다.
"처음에는 대통령님 머리결이 아주 푸석푸석했습니다. 그런데 이제는 결도 고와지고 윤기가 나기 시작합니다."
대통령으로 재임하던 동안의 힘겨움이 머리카락에도 나타났던 거라고 짐작했다.
문재인 대통령의 뒤꿈치를 보며 산을 오르다 잠시 한눈을 팔면, 대통령은 저만치 바람처럼 가 있고는 했다. 대통령의 건강을 확인하고 지혜를 얻어 와서 뿌듯한 산행이었다. 앞으로도 오래오래 그렇게 문재인 대통령을 만날 수 있기를 소망한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