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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김대중 - 오부치 선언의 배경(DJ-오부치 선언) 2023.09.30
- 이재명 구속영장 기각의 의미 2023.09.29
- Imagine 2023.09.23
- 오펜하이머(Oppenheimer) 2023.09.15 1
- 사소한 추억의 힘 2023.09.12
- 콘크리트 유토피아 2023.09.08 1
- 디케의 눈물 2023.09.02
- 달짝지근해 2023.08.25
- 장하준의 경제학 레시피 2023.08.21
- 밀수 2023.08.17
- 어느 분의 정경심 교수 면회기 2023.08.07
- Electric youth _ Debbie Gibson 2023.08.06
- 은룡의 등에 올라(銀の龍の背に乗って) 2023.07.26
- 난세일기(亂世日記) 2023.07.25
- Dr. 코토의 진료소 Movie(2022) 2023.07.25
- 윤석열, 고양이 뉴스 가짜뉴스로 고발 2023.07.24
- 문과 남자의 과학 공부 2023.07.23
- 미션 임파서블 7 데드 레코닝 Part1(Mi7 Dead Reckoning Part1) 2023.07.12
- 서울-양평 고속도로 논란 간단정리. 2023.07.08
- 박민식 국가보훈부 장관 망언 2023.07.06
김대중 - 오부치 선언의 배경(DJ-오부치 선언)
이재명 구속영장 기각의 의미
<풀버전>
<핵심 요약버전>
1.
2.
(Bonus) 대장동 개발 배임혐의에 대해 영장판사가 검사에게 질문한 내용.
(배경설명) 검찰의 영장청구 사유 중 하나인 대장동 개발 배임 혐의는, 요약하자면 이런 얘기다.
대장동 개발사업은 이재명이 성남시장에 당선되기 이전 이명박 대통령 시절부터 추진된 개발사업. 원래 대장동은 LH가 공공개발로 택지개발을 하기로 예정되어 있었으나 이명박이 여기 개입하면서 LH가 손을 떼고 100% 민간개발로 하기로 변경됨.
그런데, 비리로 점철됐던 이대엽 당시 성남시장을 꺽고 이재명이 성남시장에 새로이 당선되면서 바로 대장동 민간개발 계획을 철회시키고 공공개발하겠다고 함. 이유는 당시 성남의 마지막 남은 노른자위 땅인 대장동을 택지개발하면 수천억원의 개발이익이 남을 것이 예상되는데 왜 이걸 다 민간업자가 먹어야 하느냐? 성남시민을 위해서 공익환수를 하겠다라고 한것(당시에 공익환수라는 개념을 들고 나온게 이재명이 최초임. 당시 지자체장들은 개발권을 내주고 개발업체에서 뇌물을 받는게 일반적 관행임. 시민들이 개발이익을 시에서 환수해서 시민들에게 쓰면 좋아는 하겠지만 일반시민들은 그런 상황도 잘 모르는 상황에서 민간업체의 치열한 로비에 수십억, 수백억 뇌물받고 민간에게 넘겨주는게 당시 -사실 지금도- 정치인들의 일반적 관행임).
그래서 이재명 당시 성남시장은 대장동 개발 입찰하면서 내건 조건은 공공기부를 가장 많이 써내는 업체에 낙찰해주겠다는 것.
1. 그래서 화천대유(하나은행 컨소시엄)가 5500억으로 다른 경쟁업체 비교해서 가장 많은 액수로 공공환수 금액을 써내고 낙찰 받음.
2. 그런데 나중에 개발이 끝나고 보니 그래도 땅값이 예상보다 많이 올라서 화천대유는 성남시에 5500억을 공공환수 당하고도, 4000억의 개발이익을 남김.
3. 검찰은 여기서 기가막힌 논리를 들이대는데 왜 추가 4000억은 환수하지 못했냐며 이 부분을 배임이라고 하는 것이다.
4. 그래서 판사가 물어본거다. 5500억을 환수했지만 추가이익 4000억은 환수하지 못해 성남시에 손해를 끼쳐서 배임이라는 건데, 그럼 이런 논리를 뒷받침할 수 있는 다른 지자체의 사례 즉, 다른 지자체가 공공부지를 민간개발업체에게 불하하면서 공공환수 금액을 5500억보다 많이 한 사례가 있는지 그걸 좀 알려달라고 물어본거다.
그러자, 검사는 아무런 대답도 하지 못했다. 왜냐하면 그런 사례가 없기 때문이다. 대한민국 역사를 통틀어 지자체가 5500억이 아니라 5500원도 환수한 사례가 성남시 대장동 개발 사례말고는 없다.
참고로 부산 엘시티의 경우 개발이익이 1조가 넘는데 그 1조를 다 민간업체가 가져갔고, 부산시는 공공환수는 커녕 부산시 예산을 들여서 엘시티의 편의를 위해 1000억이 넘는 돈을 들여 도로까지 만들어줬다. 이 엘시티 같은 사례가 바로 명백한 배임이다. 엘시티에는 고위 공직자, 정치인, 검사, 판사들이 많이 사는데 그들이 엘시티 분양시 특혜를 받았다는 의혹이 차고도 넘친다. 하지만 검찰은 엘시티에 대해 전혀 수사할 생각이 없다.
Imagine
존 레논 최고의 명곡. 비틀즈 시기와 솔로 시기 모두 천재적 음악성을 드러낸 불세출의 뮤지션.
이 노래는 당시 6년간 진행되어 수많은 전세계(특히 미국과 한국은 주축 참전국으로 가장 큰 인적 피해를 봤다) 젊은이들이 희생된 베트남전에 대한 반발로 일어난 반전과 히피운동의 분위기에서 탄생했으며 가사는 평화와 자유에 가득찬 이상적 세계관을 담고 있다.
난 어린 시절부터 비틀즈를 좋아했고 비틀즈 해체 이후의 솔로 활동에서는 존 레논을 가장 좋아했다.
비틀즈의 팬들이 대개 그렇듯이 존 레논의 아내인 오노 요코에 대해서는 별로 좋지 않은 감정을 갖고 있었는데, 나이 들어서 이 뮤직비디오를 비롯해서 존과 요코가 함께 나온 영상을 보면 두 사람이 얼마나 사랑했는지를 뚜렷하게 느낄 수 있다.
팬심으로서 존 레논을 빼앗겼다는 팬들의 질투심에 의한 요코에 대한 악의적 소문이나 이야기들을 많이 접하면서 나도 맹목적으로 그녀를 악마화했던 것이 아닌가 싶다.
오노 요코의 스토리를 알고 보면 그녀는 매우 불우한 어린 시절을 보냈고 성인이 되어서도 그리 행복한 시기를 보낸 적이 없다. 존 레논과 요코의 만남은 둘다 배우자가 있는 상태에서 시작된 불륜이었다. 그러나 결국 그 둘은 결혼을 했으며(존 레논은 두번째, 오노 요코는 세번째) 존 레논과의 결혼 생활은 그녀의 인생 중 가장 행복한 시기였으나, 그것도 존 레논이 암살당하면서 11년만에 파국을 맞게 되었다.
요코와의 관계가 시작되면서 비틀즈가 해체되었고, 결혼생활동안 솔로 활동을 했으며 그의 음악에는 아내인 요코의 영향이 지대하게 작용했다.
존 레논이 솔로활동 중에 낸 앨범들에도 명반이 많으며 특히 죽기 직전 발표한 앨범 <Double fantasy>의 타이틀곡인 'Starting over'는 발표후 곧바로 빌보드 차트 1위에 올랐으며, 그의 사후에 죽음을 예견한 듯한 가사로 다시 화제가 되어 1위에 재등극하기도 했다. 당시 한국에서는 'Starting over'보다는 그가 아내 오노 요코를 생각하며 쓴 노래인 'Woman'의 인기가 더 높았다(나도 개인적으론 Woman을 더 좋아한다).
'Woman'의 도입부에는 존 레논이 "For the other half of the sky(하늘의 다른 반쪽을 위하여)"라는 구절을 속삭이는데, 이 구절은 물론 여성을 의미하는 것이고 이 말은 모택동이 했던 유명한 말 중의 하나다. 참고로 모택동의 3대 어록이라고 전해지는 것이 있는데, 첫째가 권력은 총구에서 나온다. 둘째가 여성이 하늘의 절반을 받치고 있다. 세째가 인구는 국력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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IMAGINE
Imagine there's no heaven, it's easy if you try
No hell below us, above us only sky
Imagine all the people living for today...
천국이 없는 것을 상상해봐요, 당신이 노력한다면 그것은 쉬워요.
지옥도 없을 거고, 우리 위엔 단지 하늘만 있을거에요.
모든 사람들이 오늘에 충실한 세상을 꿈꿔봐요
Imagine there's no countries, it isn't hard to do
Nothing to kill or die for, and no religion too
Imagine all the people living life in peace...
국가가 없는 것을 상상해봐요, 그건 어렵지 않을거에요.
죽거나, 죽일 필요도 없고, 종교도 없을거에요.
모든 이들이 평화롭게 살아가는 것을 꿈꿔봐요.
Imagine no possessions, I wonder if you can
No need for greed or hunger - a brotherhood of man
Imagine all the people sharing all the world...
아무것도 소유하지 않는 것을 상상해봐요, 당신은 그렇게 할 수 있나요?
욕심내거나 굶주릴 필요가 없죠 - 우리는 모두 형제에요.
모든 이들이 세상을 함께 누리는 것을 꿈꿔봐요.
You may say I'm a dreamer, but I'm not the only one
I hope someday you'll join us and the world will live as one
당신은 나를 몽상가라 하지만 이런 생각은 나만 하는건 아니죠.
언젠가 당신도 우리와 함께 전세계가 더불어 살아가는 그런 세상을 만들어요.
오펜하이머(Oppenheimer)
내가 본 크리스토퍼 놀란의 작품 중에서 유일하게 실망한 작품은 '테넷'이다. 사실 실망이라기보다 도저히 이해할 수 없었기 때문에 실망이고 뭐고 언급 자체가 의미가 없는 지경이다. 이 영화 보고 재밋다는 사람도 많기 때문에 내 머리가 나쁜가보다 생각하고 있을 뿐이다.
이 작품은 덩케르크(Dunkirk)와 같은 논픽션이지만 덩케르크가 대사를 극도로 절제하고 드라이하면서도 장엄한 전쟁 액션에 중점을 둔 영화였다면 오펜하이머는 맨해튼 프로젝트의 리더로서의 오펜하이머와 전쟁 후 그의 사상검증 청문회의 내용에 촛점을 맞춘 영화다. 그래서 영화 첫장면부터 대사량도 엄청나게 많다. 그래서 어떤 의미에서는 메멘토(Memento)처럼 처음부터 대사를 제대로 쫓아가지 않으면 영화의 내용을 이해하기 어렵다(물론 원작이 되는 오펜하이머 전기 - 어메리칸 프로메테우스 - 를 읽어보고 가면 아마도 영화의 내용을 이해하기 쉬울 것으로 본다. 난 아직 그 책을 읽어보진 않았다).
오펜하이머와 개인적, 사회적, 과학적 친분을 가진 모든 이들이 등장하기 때문에 등장 배우도 엄청 많고(그 많은 배우가 대부분 네임드라는 것이 더 놀랍다. 배우 출연료만으로도 엄청난 제작비가 쓰였을 것이다), 대중적으로 알려진 인물도 많지만 그렇지 않은 인물도 상당수이기 때문에 그 관계를 제대로 파악하는 것만해도 그리 만만한 일이 아니다.
영화 예고편과 영화 제작과정에서도 바이럴을 엄청 했듯이 원자폭탄 실험 장면을 CG없이 TNT를 이용(놀란은 진짜 핵폭탄을 터뜨릴 수 있다면 그렇게 했을 사람이지만 어떤 영화사도 그리고 미국 정부도 허락을 안했을 거기 때문에)해서 실제 핵폭발처럼 보이게 했다는 이야기가 많았지만 그건 개뻥이다. 하지만 CG없이 그 정도의 폭발 장면을 찍은 건 대단하다고 까진 할 수 없지마 그럭저럭 봐줄만했다 정도일 것 같다.
이 영화는 음악과 사운드가 큰 몫을 하는 영화다. 그러므로 영상보다는 사운드가 좋은 돌비관 같은데서 보면 좋을 것 같다. 하지만 아쉽게도 현재는 돌비관에서는 다 내려간 상태라 지금은 볼 수 없다.
개인적으론 오펜하이머의 부인역으로 나온 에밀리 블런트와 애인역의 플로렌스 퓨가 기억에 남는 배역이다. 두 여인 모두 정신적으로 좀 불안한 면을 보이는데 그래도 부인인 키티 오페하이머(에밀리 블런트 분)는 평생 그의 곁을 지키면서 잘 살았던 것으로 보이고, 애인인 진 터틀록(플롤네스 퓨 분)은 오펜하이머와 결별 이후 얼마 있다가 자살을 한다.
영화에서도 진 터틀록의 자살 장면에 잠시 스쳐지나듯 나오지만 진 터틀록의 자살은 미국 정보기관이 혹은 타 세력이 개입된 타살이라는 이야기도 있다.
오펜하이머의 스토리가 재미있는건지 아니면 놀란의 솜씨인 건지 어쨌든 영화는 매우 재밋다. 돌비관에서 다시 열리면 한번 더 보고 싶다.
사소한 추억의 힘
신변잡기의 에세이. 탁현민은 책을 쓸수록 갈수록 필력이 좋아지고 있다는 것이 느껴진다.
이 책의 제목이 왜 '사소한 추억의 힘'인지는 마지막 에필로그 말미에 쓰여있는 구절을 보면 알 수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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북극을 가리키는 나침은 무엇이 두려운지 항상 여읜 바늘 끝을 "떨고 있습니다. 여읜 바늘 끝이 떨고 있는 한 우리는 그 바늘이 가리키는 방향을 믿어도 좋습니다. 그러나 그 바늘 끝이 전율을 멈추고 어느 한쪽에 고정될 때 우리는 그것을 버려야 합니다. 이미 나침반이 아니기 때문입니다.
- 신영복, <지남철>
p7
스필버그 감독은 1982년 개봉된 영화 <이티>에는 총을 든 경찰관이 어린아이들을 쫓는 장면이 포함돼 있었는데, 20주년을 기념한 재편집 작업에서 총을 든 장면을 무전기를 쥔 장면으로 교체했다고 이야기했다. 하지만 그것이 엄청난 '실수'였다는 회고였다.
"<이티>는 그 시대의 산물이다. 그 어떤 영화도 현재 시점의 렌즈를 통해 자발적으로든, 강제적으로든 수정되어서는 안 된다. 모든 영화는 영화를 만들었던 당시 우리가 어디에 있었는지, 세상은 어떠했는지, 그리고 이런 이야기들을 세상에 내보냈을 때 세계가 어떻게 받아들였는지 등을 보여주는 일종의 이정표다."
p9
절망과 위로, 그 모든 순간에 그것이 극단으로 치닫게 하지 않는 장치(裝置)가 있다라는 것이다. 바로 성찰과 웃음이었다. 실패를 복기하는 과정은 괴롭지만, 과정의 성찰은 곧 위로였다. 또한 괴롭고 심각한 상황에서도 웃음은 가장 뛰어난 탈출 버튼이었다. 모든 위로의 순간에는 반드시 성찰과 웃음 포인트가 함께 있었다.
p19
내 평생 스승은 "어떤 일에 쓰일 때 자기 능력의 70퍼센트 정도만 해도 되는 자리가 가장 적당한 자리"라는 말씀을 하셨었다. 높은 지위나 원하는 역할에 욕심을 내기보다 주어진 자리에서 적당히 해도 좋은 성과를 내며 즐겁게 일할 수 있다면 그게 자신에게도 조직에도 이상적이라는 말씀이었다.
청와대에서 처음 일하게 되었을 때 일의 고됨과 책임의 막중함을 자주 토로하기는 했지만 한참 징징거린 후에 돌아서서는 씩 웃기도 많이 웃었다. 한동안 쓰임이 없다가 모처럼 쓰이니 쓰임이 있다는 것만으로도 행복했었다. 하지만 시간이 지나면서 주어진 일에 만족하지 못하고 더 큰 쓰임을 기대하게 되었다. 그것은 나의 욕심이 나의 능력을 넘어서기 시작하면서 시작되었다.
어떤 사람의 능력치가 100이라 할 때, 그 사람이 60이나 70 정도만 하면 되는 자리에 놓이면 어느 순간부터 욕심이 생긴다. 자신의 능력만큼, 아니 그 이상을 할 수 있을 거라고 생각하게 된다. 부끄럽지만 나 역시 그러했다. 부여된 일보다 더 많은 일을 더 잘할 수 있을 거라는 생각 때문에 더 많은 결정을 할 수 있고, 더 많은 권한이 부여되는 자리와 권한에 욕심을 냈었다.
그러나 돌이켜보니 결국 그런 쓰임이 없었다는 것이 저말 다행이었다. 100퍼센트를 할 수 있는 사람이 100퍼센트를 요구받는 자리나 그 이상의 자리에 놓이면 능력치를 최대한 끌어올려야 한다. 그러다 보면 사고(思考)의 여유도 상상력도 발휘하기 힘들어진다. 매번 최선을 다해야 함은 물론이고 최선을 다해 보아도 능력의 한계만 절감하게 된다. 짊어여쟈 할 책임은 무거워져 결국에는 자기 능력의 100퍼센트를 다 채우지도 못하게 된다.
하지만 능력이 100퍼센트라고 할 때 70퍼센트 정도만 해도 되는 자리에 놓이면 자신을 끝까지 밀어붙이지 않아도 주변의 기대치를 손쉽게 채울 수 있다. 기대치를 채우는 것뿐 아니라 30퍼센틔 여유도 가지게 된다.
30퍼센트의 여유, 이것이 단지 술렁술렁 일해도 되니 다행이라는 의미가 아니다. 여기서 생긴 30퍼센트의 여유가 그렇게 간절했던 상상력이 되고, 새로운 시도와 실험을 가능하게끔 해준다. 여러 국가 행사를 기획하고 연출하면서 나름의 상상과 실험을 할 수 있었던 이유가 여기에 있지 않았나 싶다. 좀 더 많은 책임과 부여되었더라면 더 많은 일을 할 수 있지 않았을까 싶었지만, 아쉬운 쓰임이었기 대문에 오히려 여러 일을 성공적으로 무사히 치러낼 수 있었구나 싶다.
p51(신영복 글)
"높은 곳에서 일할 때의 어려움은 무엇보다 글씨가 바른지 삐뚤어졌는지 알 수 없다는 사실입니다. 낮은 곳에 있는 사람들에게 부지런히 물어보는 방법밖에는 없습니다." "물은 빈 곳을 채운 다음 나아갑니다. 결코 건너뛰는 법이 없습니다. 차곡차곡 채운 다음 나아갑니다." "나무의 나이테가 우리에게 가르치는 것은 나무는 겨울에도 자란다는 사살입니다. 그리고 겨울에 자란 부분일수록 여름에 자란 부분보다 훨씬 단단하다는 사실입니다."
p.74 마스터 요다의 가르침
두려움은 분노를, 분노는 증오를, 증오는 고통을 낳는다(Fear leads to anger, anger leads to hate, and hate leads to suffering).
-<스타워즈 에피소드 1 : 보이지 않는 위협> 중에서,
마땅찮은 세상을 이겨내기 위해서는 분노가 필요할 것 같지만 그게 꼭 그렇지는 않다. 오히려 좋았던 기억을 떠올리는 편이 분노보다 유용할 때가 많다.
현실에서는 저주로 사람이 죽지 않고 증오로 세상이 바뀌지 않는다는 것이다. 특히 타인이나 다른 정치 세력을 탓하는 것만으로는 자신이 바라는 세상은 절대 오지 않는다. 남 탓으로 잠시 웃거나 정신 승리를 할 수도 있지만 그때뿐이다. 세상은커녕 한 개인의 삶도 절대 바뀌지는 않는다. 증오는 결국 자신을 고통스럽게 할 뿐이다.
살면서 여러 사람을 만났지만, 분노와 증오의 문제에 관해서 김어준만큼 '순수'한 사람을 보지 못했다. 그와 나는 이명박-박근혜 시대를 거쳐 이제는 윤석열 시대를 함께 살고 있다. 그동안 문재인 대통령의 5년을 제외하고는 영 마땅찮은 시절이 훨씬 많았다. 그런데도 그가 이러한 태도를 유지할 수 있는 이유는 아마도 기질 탓이 클 것이다.
김어준은 어뜻 대충대충 무심해 보이지만 매우 집요한 사람이다. 하지만 무언가를 제안했을 때 상대방의 거절 의사가 분명할 때는 '그럼 할 수 없지' 하며 넘기고 더는 이야기하지 않는다. 뒷담화는 물론 군말도 없다. 믿기 어렵겠지만 생각보다 막말도 쓰지 않는다. '씨바' 정도가 그의 막말 한계선이다. 요즘 그의 방송을 보면 '바보', '멍충이'를 즐겨 쓰는 것 같다.
나와는 <나는 꼼수다> 콘서트 때부터 인연이었으니, 알고 지낸 지 십 년이 넘었다. 일이 있으면 밤낮 가리지 않고 연락을 주고받지만, 일이 없으면 몇 달씩 서로 연락하지 않는다. 나이는 나보다 네댓 살 위인데도 별로 개의치 않는다. 처음 만날 때부터 지금까지 나를 '탁'이나 '자기'라고 불렀고, 나는 그를 '김어준'이나 '총수'라고 부른다. 그러한 호칭과 관계에 대해서 단 한 번도 불편해하거나 불만을 이야기한 적도 없다. 한마디로 뒤끝이 없다. 그의 순수함은 이런 '뒤끝 없음'에서 기인한 것이 아닐까 싶다.
분노가 증오가 되기 딱 좋은 시대다. 모쪼록 그의 순수한 분노를 많이들 배웠으면 좋겠다.
p177. 모그바티스
모그바티스는 촌장이 마을의 대소사는 물론이거니와 여러 분쟁을 조정하고 크고 작은 일들을 결정한다. 촌장의 결정이 법적 효력이나 강제력을 가지는 것은 아니다. 하지만 그가 결정을 내리면 누구도 더는 불만을 갖지 않는다. 사람들은 촌장을 두고 '이편도 저편도 아닌 사람'이라 말한다. 누군가 결정을 내려야 한다면 어느 편도 아닌 사람의 말을 들어야 한다는 것이 여기 사는 이들의 생각이라고 한다.
나는 촌장에게 물었다. "그건 민주주의도 아니고 대체 뭐죠? 어느 쪽이든 자신의 주장을 펴고 그걸 다수가 받아을이는 것도 아니고, 양쪽의 주장을 듣고 촌장이 결정하는 것 그것은 일종의 독재 아닌가요? 뭔가 이상하네요."
촌장은 대답했다. "민주주의요? 다수의 의견이 언제나 옳다고 생각하나요? 글쎄요. 민주주의는 종종 엉뚱한 선택을 하곤 하죠. 안 그렇던가요?"
p178
해거름에 해변 모래사장을 헤집으며 느릿느릿 지나는 소 한 마리와 몽이꾼도 보았다. 뭘 하는 것이냐고 묻자 "백사장 아래 묻혀있는 오래된 사람들의 지혜를 찾고 있다"고 했다. 나는 도무지 이해할 수가 없었다. 지혜와 같이 소중한 것을 파도가 조금만 밀려와도 쓸려가는 해변에 묻어 놓다니... 왜 그 소중한 것을 거기에 묻어놓는 것일까 싶었다.
"당신은 지식과 지혜를 구분할 줄 모르는군요. 지식은 구하는 것이지만, 지혜는 발견하는 것입니다. 모래밭에 지식을 묻어놓으면 언제고 큰 파도에 쓸려 사라지지만, 지혜는 어떤 파도가 와도, 아무리 오랜 세월이 흘러도 그 자리에서 발견되길 기다리고 있습니다."
p241. 날짜는 잊어도 날씨는 안다
종종 날짜를 잊었다. 대체 오늘이 며칠인지, 무슨 요일인지 생각이 나지 않았다. 한갓지던 협재해수욕장이나 금능해수욕장에 차들이 들어차면 그제야 '아, 주말이구나' 싶고, 혜심언니의 게스트하우스나 추의 작은집이 썰렁하게 느껴지면 '아, 월요일쯤 됐겠군' 싶었다. 도시에서 월간, 주간, 일간에 더해 시간 단위로 끊어 살던 기억이 너무도 아득해서 괜히 불안해지기까지 했다.
그런데 나야 일 없는 여행하는 처지니 그럴 수 있다 쳐도 이곳에 사는 혜심언니나 추나 효주도 별반 차이가 없었다. 간혹 모여 이야기를 하다가 누군가 "오늘이 며칠이지? 무슨 요일이지?" 하면 다들 한참 대답을 못 하고 휴대폰이나 다이어리를 뒤적이곤 했다.
오늘이 며칠인지를 잊고 산다는 것은 어제와 별반 다르지 않은 오늘과 내일이 이어진다는 것과, 날짜보다 중요한 무엇이 있다는 것인데 날짜를 잊고 사는 사람들에게 중요한 것은 '날씨'였다.
제주의 변화무쌍한 날짜는 종일 기상청 예보를 살펴보게 했고, 아침저녀그로 꼭 몇 번씩 확인하게 했다. 사람들은 누구라도 날짜는 몰라도 날씨만큼은 분명하게 알고 있었다. 세 시간 간격으로 예보되는 날씨를 확인하는 것은 물론 자신만의 기상 예측도 열심히 했다. 구름의 흐름이나 바람의 세기, 그리고 파도의 높이까지 고려해 각자의 예보를 낼 정도로 날씨에 민감했다.
아침 바람이 습하고 무거우면 저녁엔 반드시 비가 온다거나, 중산간의 구름이 얼마쯤 지나면 이곳 한림까지 내려온다거나, 제비들이 유난히 낮게 날며 분주하면 오후에 후텁지근할 것이라든지, 매미가, 개구리가, 물색이, 파도가, 석양이, 달무리가, 어떻다는 걸로 어떻게 해서든 날씨를 알아내기 위해 다들 노력했다.
날짜를 헤아리며 사는 것과 날씨를 예측하며 사는 삶은 어떻게 다른 걸까?
도시에서의 삶이란 결국 끝없는 약속과 정해진 기한과 계획과 그것들을 점검함으로써 하루를 보낸다. 날짜와 시간을 몰라서는 이런 것들이 제대로 될 턱이 없다. 하루에도 몇 번 씩 다이어리를 살펴야 하고, 시계를 쳐다봐야 하고, 알람을 울리고 다시 그 알람을 재설정하는 일을 반복한다. 그래야만 실수가 없고, 그래야만 별 탈 없이 살 수 있다.
하지만 섬에서 날짜와 시간은 그리 중요하지 않다. 예컨대 고기를 잡는 데 특별한 약속과 기한이라는 것은 무의미하다. 그것은 오로지 바다 상태와 날씨에 따라 달라질 뿐이다. 내가 오전 11시에 참돔을 잡겠다고 결심한다고 해서 그게 나오지도 않을뿐더러, 내가 저녁 6시에 금오름에서 해지는 것을 보겠다는 것은 나만의 희망 사항일 뿐이다. 참돔도, 금오름도 그 모든 것은 날씨가 결정한다.
2박 3일간의 제주도 여행에서 도착하면 한수풀식당에 가고, 오후에는 저지오름에 갔다가, 저녁에는 신창리에서 해지는 풍경을 보고, 다시 아침에는 차귀도에서 잠수함 투어를 하겠다는 야무진 계획을 세워온 커플이 있었는데, 그들은 결국 종일 내리는 비에 어쩔 줄 몰라 하다가 결국 카페에 죽치고 앉아 있다 신경질을 내며 떠나는 모습을 목격한 적도 있다.
그러니 섬에서는 날짜와 시간보다 날씨가 먼저가 되고, 삶의 태도와 방식이 바뀌게 되는 것이다. 도시에서 웬만한 비가 오거나, 바람이 불거나, 눈이 오거나 해도 큰 걱정이 없다. 큰 태풍이 몰아쳐도 대개는 나와 상관없는 일이 된다. 심심한 재난 영화나 안타까운 뉴스 정도일 뿐이다.
나 역시 아파트에서 주차장으로, 주차장에서 다시 다른 주차장으로 이동하면서 때로는 비가 아무리 와도 우산조차 필요 없을 때가 많았다 간혹 거리를 걷게 되더라도 여차하면 들어갈 카페나 건물의 처마가 연이어 있었다. 다만 걱정은 약속 시간에 맞출 수 있느냐 없느냐일 뿐이었다. 비가 오면 차가 좀 막히니까.
섬에서는 비 오는데 나가봐야 고생이다. 우산은 뒤집히고 우비를 입어도 세찬 바람에 금세 젖는다. 그러니 비가 오면 잠시 멈추고 빗소리를 들으며서 집 앞 텃밭을 돌보다가 해가 뜨면 오후 물때에 맞춰 배 타고 나가 고기를 잡는다. 날씨가 좋고 바람이 불면 서둘러 밀린 빨래를 널고, 해 질 녘에 구름이 걷히면 오름에 올라 해지는 풍경과 마주하게 되는 것이다.
섬사람들의 약속도 대충 그렇다. '저녁이나 먹지'라고 하지 '몇 시에 저녁 먹자'고는 잘 안 한다. '내일 보자'고 하지 내일 몇 시에 보자는 건지는 잘 안 알려준다. 처음엔 그걸 잘 몰라 괜히 저녁밥 때보다 일찍 가서 일없이 빈둥거리거나 때로는 밥때보다 늦어 타박을 듣곤 했다. "대체 저녁을 먹으려면 몇 시에 가야 하느냐"고 묻자 "배고플 때 오면 되지" 했다. 맞는 말이다. 어차피 밥 먹는 게 목적인데 6시든, 7시근 그게 뭐 대수인가, 배고플 때 먹으면 되지.
시간에 갇혀 사는 것과 날씨에 갇혀 사는 것, 우리, 어떻게 사는 게 더 나은 것일까.
p.257
혼자 지내는 날이 많으니 음식 해 먹는 솜씨도 꽤 늘었다. 한림 수협 마트나 하나로 마트에서 장을 봐 유튜브 영상 레시피를 따라 만들어 먹는다. 김치찌개, 된장찌개, 카레라이스, 오므라이스, 볶음밥 같은 것은 이제 기본이고 돼지주물럭, 청경채 볶음, 두부조림, 오삼불고기, 궁중 떡볶이 최근에는 등갈비찜에까지 이르렀다. 실패도 있었고 시련도 있지만 꾸준히 나아지는 중이다. 다음에는 춘장을 사서 해물짜장을 만들어 보려 한다.
p259
제주에 머무는 동안 내가 생산적이지 않았으면 한다. 좀 더 유약했으면 한다. 매사 별 뜻 없고 의미 없었으면 한다. 온갖 사소한 것들과 함께 유유자적 지낼 수 있으면 한다. 그런 시간이 필요하다. 무언가를 위해서, 다음을 위해서 필요한 것이 아니다. 그냥 필요하다. 대단치 않은 것들, 사소한 것들이야말로 삶에 큰 위로가 되어 주니 그래서 필요하다.
콘크리트 유토피아
거대한 재난이 닥친 한국(아마도 서울?)의 어느 곳(아마도 강남을 모티브로 한 듯). 모든 것이 무너진 도심에 오직 아파트 한 동만이 남은 디스토피아적 세계관.
정말로 현실에서 있을 법한 일을 사실감 있게 그려냈다.
극의 한축인 이병헌 그리고 또 한축인 박서준, 박보영 부부. 세명의 연기는 다 좋았고 개인적으론 박서준과 박보영의 연기가 영화에 잘 녹아들었다고 본다.
극 중반부쯤에 밝혀지는 반전과 그에 따른 위기감의 해소의 방법도 괜찮았다.
극 중반부에 등장하는 혜원이라는 여고생은 극의 중요한 장치 역할을 한다. 이 역을 맡은 배우는 박지후라는 연기자로 엔딩곡으로 쓰인 아파트 커버를 부르는데 영화의 세기말적 분위기와 잘 어울리기도 하고 중반부에 이병헌이 부르는 아파트와도 잘 대비가 된다.
일반적인 블록버스터와는 결이 다르기에 큰 흥행(1000만 관객 이런)이 되기는 힘들 것으로 예상한다.
하지만 오래도록 회자되는 영화가 될 것이다.
좋은 영화다.
엄태구는 아마도 우정출연같은데 딱 두 씬 나오는데도 불구하고 상당한 존재감을 준다.
박지후가 부르는 아파트가 맘에 들어서 여기에 첨부한다.
디케의 눈물
대한민국이 다음 단계로 발전하기 위한 조국의 2가지 화두에 대한 제안.
대한민국의 사회권 확대와 경제민주화를 위해서는 독재에 까지 이른 검찰권력의 해체 그리고 재벌 해체의 이유와 그 의미에 대해서 고찰한 내용을 담고 있다.
전작인 가불선진국과 어떤 면에서는 이어지는 내용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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군사독재 시절에는 물론 '1987년 헌법체제' 아래에서도 검찰은 현재의 "살아 있는 권력"에 충성했다. 2023년 10월 18일 김의겸 민주당 의원은 국회 법사위 국정감사 질문에서 다음과 같이 말했다.
"YS(김영삼 정부) 때 검찰에 출입했는데, 그때 서울(중앙)지검의 모 차장 검사가 기자들 앞에서 '우리는 개다. 물라면 물고 물지 말라면 안 문다'고 했다.
2013년 11월 고 이용마 MBC 기자는 월간지 《참여사회》 11호에서 다음과 같이 일갈했다.
"검사라면 가장 먼저 떠오르는 생각은 '권력의 사냥개'다. 주인이 "가서 물어!"라고 시키면 물불 가리지 않고 달려가서 무는 존재, 주인이 시키기 전에는 절대 물 수도 없는 존재다. 하지만 최근엔 이런 사냥개 이미지에 한 가지 더 덧붙여졌다. 권력자에게 빌붙어 아양을 떠는 애완견 이미지다. 돈 많고 힘센 권력자들의 무법 행위 앞에서 비굴하게 꼬리를 내리고 기분에 맞추려고 보이는 형태는 빗댄 것이다."
김영삼 정부 출범 후 검찰은 전두환-노태우가 주도한 12·12 쿠데타와 5·17 군사반란에 대해 "성공한 쿠데타는 처벌할 수 없다"는 해괴한 논리로 불기소처분을 했다. 검찰의 정치적 편향을 잘 보여주는 사례인데 자신들의 '부역附逆'을 사후적으로 정당화하는 것이었다. 이 결정의 주임검사를 맡은 서울중앙지검 공안1부 장윤석 부장검사는 후일 참여정부 시절 검찰 게시판에 정부 비판 글을 올리고 사직한 후 국민의힘 전신인 한나라당 국회의원(경북 영주시)이 된다. 물론 이 '성공한 쿠데타 처벌 불가론'은 국민적 공분을 일으켰고, 그 여파는 김영삼 대통령의 특별지시와 군사반란 주모자들에 대한 공소시효를 정지시키는 '5·18 특별법' 제정으로 이어졌다.
정치적 민주화 이후 검찰은 점점 조직의 외연과 영향력을 넓혀가면서 독자적 '준準정당'으로 변화해 갔다. 개발독재 단계에서는 소수의 조직화된 군부 엘리트가 쿠데타를 일으켜 정권을 잡고 권력을 독점적으로 운영했다면, 개발독재를 벗어나는 시점부터 여러 다른 권력 엘리트 집단이 목소리를 내게 된다. 그들은 정권 초기에는 정치권력과 협력하고 정권 말기에는 미래의 권력에 줄을 대고 현재 정치권력을 공격하면서 독자적 힘을 키워나갔다. 같은 맥락에서 김누리 교수는 "'폭력의 지배Autocracy'에서 '자본의 지배Plutocracy'를 거쳐 '기술관료의 지배Technocracy'로 이행한 것"이라고 분석했다.
특히 '검사동일체'와 '상명하복'을 조직 운영 원리로 삼고 있던 검찰은 다른 엘리트 집단에 비해 우위에 섰다. 대한민국 검찰은 OECD에 속한 다른 국가의 검찰과 달리 '수사권', '경찰에 대한 수사지휘권', '기소권', '영장청구권' 등을 독점하고 있었기 때문에 다른 엘리트 집단을 손쉽게 제압할 수 있었다. 이러한 '무기'를 가진 검찰은 정치권력과도 힘겨루기를 시작했다. '권력의 사냥개'에 그치지 않고, '주인'인 정치권력이 약해진다 싶으면 '주인'을 물어뜯었다. 이즈음 "정권은 유한하고 검찰은 무한하다"라는 건배사가 검찰내에서 공유되었다.
군부의 총칼이 최고의 무력이었던 시간이 끝나가면서, 수사권·기소권·영장청구권 등 이른바 '검찰권'이 최고의 무력이 되는 시간이 다가오고 있었다. 법보다 주먹이 앞서는 시대가 끝나가면서, 법이 주먹 같은 역할을 하는 시대가 열린 것이다.
p34
2012년 이명박 정부 말기, 제18대 대통령 선거운동 기간에 국가정보원 소속 심리정보국 요원들이 댓글공작을 전개한다. 당시 야당이었던 민주통합당이 국정원 전현직 관계자로부터 제보를 받고 경찰에 신고했고, 민주통합당과 경찰은 심리정보국 요원 중의 한 명인 김하영 씨가 작업을 하던 오피스텔을 찾아가 대치하는 상황이 벌어진다. 국가정보원이 자행해 온 불법 대선 개입이 발각된 것이다.
당시 김용판 경찰청장이 권은희 수서경찰서 수사과장에게 전화를 걸어 압수수색영장 신청을 신중히 결정하라는 취지의 말을 했고, 권 과장이 이를 폭로하자 총경 승진에 탈락하고 관악경찰서 여성청소년과장으로 발령이 난다. 이후 2013년 경찰은 이 사건을 국정원의 선거 개입으로 결론을 내리고 기소 의견으로 검찰에 송치했다. 검찰은 윤석열 서울중앙지검 특수1부장(사법연수원 23기)을 팀장으로 특별수사팀을 구성해 수사를 전개했고, 원세훈 국정원장, 김용판 경찰청장 등을 기소한다. 당시 부팀장은 박형철 부장검사(사법연수원 25기)였다. 이후 윤석열은 인사상 불이익을 받았고, 박형철은 검찰을 떠났다. 그렇지만 권력기관 내 국정원의 절대 우위는 무너지게 된다. 10·26 사태 이후 중정이 보안사에 의해 타격을 받았다면 이제는 검찰에 의해 타격을 받았고, 이 검찰 수사는 대중적 지지를 받았다.
김용판 청장은 이후 2020년 국민의힘의 전신인 미래통합당의 국회의원(대구달서병)으로 당선되는데, 윤석열 검찰총장은 훗날 국민의힘 대선후보가 된 후 김 의원을 만나 "미안하다"고 사과한 뒤 막걸리를 마시며 화해했다고 보도되었다. 나는 이 대목에서 권력을 얻기 위해서는 언제든지 치고, 언제든지 손잡는 정치의 민낯을 보았다. 나는 대체 윤 후보가 김 의원에게 무엇이 미안했던 것인지 의아했다.
이 국정원 선거 개입 수사 과정에서 국정원과 맞섰던 윤석열, 권은희 두 사람은 대중적 인기를 얻었고, 범진보 진영은 이들에게 열렬한 응원을 보냈다. 나 역시 두 사람에게 박수를 보냈다. 특히 윤석열 국가정보원 댓글사건 특별수사팀장은 2013년 10월 21일 국정감사에서 조영곤 전 서울중앙지검장 등 윗선의 수사 축소 압력을 폭로했고, 이 자리에서 그가 한 말 "저는 사람에게 충성하지 않는다"는 크게 회자되었다. 그런데 이 유명한 말 앞에 이루어진 문답은 제대로 알려지지 못했다. 즉, "조직을 사랑합니까?"라는 당시 여당 새누리당 정갑윤 의원의 질문에 윤 검사는 "네, 대단히 사랑하고 있습니다"라고 답했다. 그의 답변을 종합하면, "사람에 충성하지 않고 검찰 조직에 충성한다"는 뜻이었다.
박근혜 정권에 의해 인사불이익을 받은 윤석열 검사는 2016년 '최순실 게이트'와 박근혜 정권의 국정농단을 수사하는 박영수 특별검사에 의해 수사팀장으로 발탁된다. 수사팀장으로 내정된 윤 검사가 한 말도 인기를 끈다. "검사가 수사권 가지고 보복하면 그게 깡패지, 검사입니까?"가 그것이었다. 윤석열 검사는 이러한 두 번의 특별수사 과정 속에서 국민적 스타가 되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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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17년 촛불혁명은 단지 '진보'의 전유물이 아니었따. '국정농단'이라는 희대의 사태를 맞이해 진보와 중도 보수가 연합해 이루어낸 성과였다. 박근혜 대통령 탄핵도 유승민, 김수성 등 당시 여당 새누리당 안의 '비박非朴' 인사들이 동참했기에 가능했다. 이러한 맥락에서 문재인 대통령과 문재인 정부는 국정농단에 분노하고 박근혜 탄핵에 동참했던 합리적 보수 인사를 포용하기 위해 많은 노력을 기울였다. 문재인 대통령은 취임 직후 2017년 5월 19일 윤석열 검사를 검사장으로 승진시키면서 서울중앙지검장으로 파격 발탁했다. 당시 이 발표를 들은 청와대 출입기자들의 탄성을 기억한다. 당시 범여권 내에서 "윤석열은 검찰주의자일 뿐이다"라는 우려 섞인 지적도 있었지만 대중적으로 윤석열은 검찰 내 '개혁 세력'의 상징적 인물이 되어 있었다.
문재인 정부는 검찰을 제도적으로 개혁하려 했지만, 수사와 기소에는 일절 관여하지 않았다. 과거 정부는 민정수석비서관을 검찰 고위 간부 출신으로 임명해 주요 사건의 수사와 기소를 검찰 수뇌부와 '조율'한 것으로 알려져 있다. 그러나 검찰개혁 추진을 시대적 사명으로 생각한 문재인 대통령에게 이러한 '거래'는 검찰개혁의 후퇴를 초래할 수 있기에 용납할 수 없는 것이었고, 그래서 학자 출신인 나를 민정수석비서관으로 선택했다. 검사들이 비검사 학자의 '수사지휘'를 들으려 하겠는가. 청와대가 검찰 수사를 막거나 압력을 가했다면 이후 모두 직권남용죄로 기소되었을 것이다. 검찰의 수사와 기소에 청와대가 일절 관여하지 않을 테니, 검찰도 검찰개혁에 관여하지 말라는 것이 문 대통령의 확고한 소신이었다. 나는 민정수석비서관 재직 동안 검찰개혀게도 방안 논의와 검찰 인사 협의를 위해 문무일 총장과 회동을 가진 적은 있지만, 수사와 기소 문제로는 어떠한 검사에게도 연락한 적이 없었다. 그래서 나는 청와대 안팎에서 검찰 수사에 대한 불만을 들어야만 했다. 정부 초기 검찰은 전병헌 정무수석과 김은경 환경부장관에 대한 수사와 기소를 감행했는데, 청와대는 사후 통보를 받았을 뿐이었다. 문재인 대통령 역시 이 수사와 기소에 대해서는 일언반구도 없었다.
단, 검찰의 '사법농단' 수사가 개시되었을 때 나느 이 수사가 과도하다는 생각을 갖고 있었음을 밝히고 싶다. '사법농단'과 관련 판사들에 대한 법원 내부 징계가 지연되는 상황에서 검찰이 전격적으로 강제수사에 들어간 데에는 이번 기회에 검찰에 대한 거의 유일한 사후통제기관이었던 법원을 길들이려는 검찰의 조직적 목표와 이익이 있었을 것으로 추측된다.
수사권 조정이 진행되는 과정에서 윤석열 서울중앙지검장은 공수처 신설과 검경수사권 조정합의안에 모두 동의한다는 의사를 박형철 반부패 비서관을 통해 전해왔다. 윤 지검장은 검찰총장 후보 당시 청와대의 검증 인터뷰에서도 같은 뜻을 표명했다. 검찰에 대한 검사의 수사지휘권도 폐지하거나 대폭 축소할 수 있다고 했다. 게다가 검찰총장 후보 청문회에서는 수사와 기소의 '분리'에 대해서도 장기적으로 옳은 방향이라고 답변했다.
그러나 윤석열 검사장이 검찰총장으로 임명된 후 검찰개혁에 대한 이러한 입장이 180도 바뀌었음은 확인된 사실이다. 2022년 2월 12일 노영민 전 대통령 비서실장은 오마이TV와의 인터뷰에서 "검찰총장 면접 당시엔 윤 후보가 4명의 후보 중에서 공수처의 필요성 등 검찰개혁에 가장 강력하게 찬성했는데 총장이 된 후부터 태도가 바뀌었다"면서, "그때 거짓말을 했다", "정직한 사람이 아니다"라고 비판한 바 있다. 이러한 '거짓말'과 관련해 유시민 작가는 2023년 7월 19일 '매불쇼'에 출연해, 윤석열의 행동양식을 침팬지의 행동양식에 비유해 설명했다. 집단 우두머리가 되고자 하는 수컷 침팬지는 우두머리가 되기 위해 온갖 일을 다 하고, 우두머리가 되면 서열 밑에 있는 침팬지를 괴롭히고 그 위에 군림한다. 유 작가는 윤석열은 "말의 내용이 중요하지 않은 " 사람이기에, 우두머리가 되기 위해서는 무슨 말이든 다 하고 "출제자의 의도"에 맞추어 답을 할 뿐이라고 분석했다. 이에 반해 침팬지와 달리 수평적 관계를 중시하는 다른 유인원 보노보에 가까운 문재인 대통령은 윤석열의 말을 믿었다고 보았다.
윤석열 검찰총장이 문재인 정부에 대한 공세를 펼치기 시작한 이후 누가 윤석열을 검찰총장으로 밀었느냐 등에 대한 비판적 문제 제기가 계속되었다. 윤 총장에 대해 당시 집권 세력 전체가 기만당했고 그 결과 오판을 했다. 그러나 누구를 탓하기 전에 단지 고위 공직자 검증을 최종적으로 책임지는 민정수석비서관으로서 윤 검사에 대한 내부 검증을 철저히 하지 못했던 것이 아닌가 자성한다. 민정수석실 내부에서도 윤 검사에 대한 평가가 갈리었는데, '검찰지상주의자'라는 비판을 더 심각하게 생각했어야 했던 것이 아닌지 자책한다. 요컨대, 다름 아닌 내가 최고 인사권자인 문재인 대통령을 보좌하는 역할을 충분히 하지 못했다.
p87
헌법은 '무죄추정의 원칙'을 규정하고 있으나, 기소되고 나면 일반 사회에서는 '유죄추정의 원칙'이 작동하기에 피고인은 오랫동안 사회적 편견과 낙인에서 벗어나기 힘들다. 2021년 온 사회를 떠들썩하게 했던 윤미향 의원 수사를 생각해 보자.
언론과 정치권은 '윤 의원이 위안부 할머니들을 이용해 돈을 챙겼다', '공금을 유용해 딸을 유학시켰다', '단체 자금을 유용해 개인 부동산을 구입했다', '안성힐링센터를 헐값에 팔았다', '배우자 회사에 일감을 몰아줬다' 등등 이후 허위로 판명된 수많은 혐의를 부각시키며 몰아세웠다. 그리고 검찰은 보조금관리법 위반, 지방재정법 위반, 사기, 기부금품법 위반, 준사기, 업무상 배임, 업무상 횡령, 공중위생관리법 위반 등 자그마치 8개 혐의로 기소하고 징역 5년을 구형했다. '먼지털이 수사'에 이어 '투망식 기소'를 한 것이다. '투망식 기소'는 수사를 마친 후, 최종적으로는 무죄가 나오더라도 온갖 혐의를 다 모아 일단 기소부터 하는 기법이다. 즉 '투망'을 던져 '뭐든 하나만 걸려라'라는 식의 기소를 뜻한다. 대중에게는 피고인이 수많은 범죄를 저질렀다는 인식을 심어 주고, 법원에는 모든 혐의에 무죄판결을 할 수 없게 심리적 압박을 가하는 효과가 있다.
그러나 1심 법원은 이 중 7개 혐의에 무죄를 선고하고, '10년 동안 1700만 원을 가져다 썼다'는 업무상 횡령 혐의에만 벌금형을 선고했다(유죄판결이 난 건의 경우 오랜 시간이 흘러 영수증을 확보하지 못한 탓이 컸다). 그렇지만 윤 의원에게 붙은 딱지는 좀처럼 떨어지지 않고 있다. 그는 민주당으로 복당도 하지 못하고 있다. 그에 대해 마녀 사냥을 전개했던 사람들은 전혀 사과하지 않고 있다. 오히려 여전히 회심의 미소를 짓고 있을 것이다.
p124
우리는 '법치', 즉 '법의 지배rule of law'는 '법을 이용한 지배rule by law'가 아니라는 점을 명심해야 한다. '법치'는 단지 권력자가 법을 통해서 통치 또는 지배한다거나, 국민은 그 법을 무조건 준수해야 한다는 의미가 아니다. '법을 이용한 지배'에서 법은 통치의 도구이자 수단일 뿐이다. '법을 이용한 지배'는 조선시대에도, 일제강점기에도, 권위주의 정권, 군사독재 정권하에서도 이루어졌다. 권위주의 정권, 군사독재 정권하에서 제정된 각종 '반민주악법'에 대한 예는 생략하기로 하자. 당시 '법치'는 (노동자 시인 백무산 씨의 시 구절을 빌려 말하자면) 국가권력이 "법대로 테러"하는 것에 불과했다.
게다가 윤석열 정부는 자신이 내세우는 '법치'가 '법의 지배'가 아니라 '법에 의한 통치'라고 공문서에 명기했다(법무부는 'rule by law'를 '법에 의한 통치'라고 번역했다). 법무부는 세칭 '검수완박법'이라고 불리는 검찰 직접수사권 축소 법률에 대해 헌법재판소에 권한쟁의 심판을 청구했다. 그런데 법무부는 그 청구서에서 "법치주의는 법에 의한(rule by law) 통치를 의미하는 개념"이라고 밝혔다. 이 문서를 접했을 때 나는 내 눈을 의심했다. 그러나 분명히 "rule of law"가 아니라 "rule by law"라고 적혀 있다. 이 문서는 온라인상에서 쉽게 찾을 수 있다. 과거 권위주의 또는 군사독재 정권도 자신들의 '법치'가 '법에 의한 통치' 또는 '법을 이요한 지배'라고 말하지는 않았는데, 윤석열 정부는 노골적으로 이를 표명한 것이다. '법치'가 '법을 이용한 지배'가 될 때 법은 법의 외피를 쓴 폭력이 된다.
(검수완박법에 대한 권한쟁의 심판 청구는 법무부장관인 한동훈이 제기했으며, 헌재에서 각하 - 검수완박법은 합헌이다라는 의미 - 됐다)
https://www.newspim.com/news/view/20230323000843
p131
막노동으로 생계를 꾸리던 70대 노인이 뇌경색으로 쓰러진 처의 병 수발 때문에 대한주택공사를 찾아갈 수 없어서 결혼 후 분가한 딸의 명의로 임대차계약을 체결하고 공공임대주택에 입주했다. 처가 사망한 후 노인은 홀로 임대주택에서 살았는데 대한주택공사가 집을 비워달라는 소송을 제기했다. 딸 이름으로 계약이 되어 있었기 때문에 법대로라면 노인은 집을 나가야 했다. 그래서 1심 판결에서는 주택공사가 이겼다. 그런데 제2심 판견은 노인의 손을 들어줬다. 이 사건은 이후 대법원을 거쳐 조정으로 종결됐는데, 제2심 판결문 일부를 소개한다.
"가을 들녘에는 황금물결이 일고, 집집마다 감나무에 빨간 감이 익어간다. 가을걷이에 나선 농부의 입가에선 노랫가락이 흘러나오고, 바라보는 아낙의 얼굴엔 웃음꽃이 폈다. 홀로 사는 칠십 노인을 집에서 쫓아내 달라고 요구하는 원고(대한주택공사)의 소장에서는 찬바람이 일고, 엄동설한에 길가에 나앉을 노인을 상상하는 이들의 눈가엔 물기가 맺힌다. 우리 모두는 차가운 머리만을 가진 사회보다 차가운 머리와 따뜻한 가슴을 함께 가진 사회에서 살기 원하기 때문에 법의 해석과 집행도 차가운 머리만이 아니라 따뜻한 가슴도 함께 갖고 해야 한다고 믿는다. 이 사건에서 따뜻한 가슴만이 피고들의 편에 서 있는 것이 아니라 차가운 머리도 그들의 편에 함께 서 있다는 것이 우리의 견해이다."
이 판결을 접하면서 뉴욕 시장을 세 번이나 연임했던 이탈리아계 정치인 피오렐로 라과디아Fiorello La Guardia가 떠올랐다. 그는 1930년대 초 대공황 시기에 잠시 뉴욕시 치안판사로 재판을 하게 됐다. 그는 배가 고파 빵을 훔친 어느 노파에게 10달러 벌금형을 선고했다. 이어 그는 이렇게 말했다.
"배고픈 사람이 거리를 헤매고 있는데 나는 그동안 너무 좋은 음식을 배불리 먹었습니다. 이 도시 시민 모두에게 책임이 있습니다. 그래서 나 자신에게 10달러의 벌금형을 선고하며, 방청객 모두에게 각각 50센트 벌금형을 선고합니다."
방청객들은 순순히 벌금을 냈고, 라과디아는 이렇게 걷은 57달러 50센트를 노인에게 줬으며, 노인은 10달러의 벌금을 낸 후 47달러 50센트를 갖고 법정을 떠났다.
p136
법률은 하늘에서 떨어진 것이 아니다. 사람이 만드는 것이다. 역사를 돌아보면 법은 대개 특정 사회의 계급·계층·집단의 이익과 욕망, 그리고 꿈이 충돌하고 절충되어 만들어진다. 여기서 '강자' 또는 '가진 자'가 유리한 조건에 서게 됨은 분명하다. 그래서 법학을 제대로 공부하려면 바로 이러한 현실을 직시하는 눈이 피료하다. 각 계급·계층·집단의 요구와 주장과 논변論辯이 무엇인지 꿰뚫어야 한다. 법전을 넘어 현실 세상이 돌아가는 이치를 알아야 한다. 특히 '약자'나 '갖지 못한 자'가 부당하게 대우받는 일을 막아야 한다.
법률은 정치의 자식이다. 정치를 모르고 법률을 알 수 없다. 정치의 논리와 동학動學에 무관심하면 법률의 핵심을 놓치게 된다.
정치는 투쟁의 영역인 동시에 타협의 영역이다. 각 정당은 자신들의 방향성을 담은 정강정책이나 소속된 정치인의 활동을 통해 그들의 비전과 가치를 확산시키고 이에 따라 사회를 바꾸고자 한다. 이때 치열한 논쟁과 논박論駁은 필연적이며 필수적이다. 이러한 토쟁은 종종 '선 대 악'의 방식으로 전개되지만, 궁극적으로 중간 중간 타협의 이루어질 수밖에 없다. '당동벌이黨同伐異'(옳고 그름은 따지지 않고 뜻이 같은 무리끼리 돕고 다른 무리는 배척한다)가 아니라 '구동존이求同存異'(같은 것을 추구하되 다른 것은 남겨둔다)로 가야 한다. 효율적인 정치는 이러한 타협의 영역을 많이 확보하고 이를 법률에 적극적으로 반영하는 정치다. 정당 사이에 공유하는 영역이 많아지고 이것이 신속한 법률로 마무리된다면 소모적인 정쟁은 줄어든다. '적'의 입장을 이해하고 이견이 있는 부분까지 공감대를 형성한다면 더할 나위 없을 것이다. '구동존이'를 넘어 '구동화이求同化異'(같은 것을 추구하고 이견이 있는 부분까지 공감대를 확대한다)에 이르는 길일테니 말이다.
그러나 야당을 처벌해야 할 '범죄자' 집단으로 파악하는 윤석열 정권 아래에서는 '구존동이'나 '구동화이'가 이루어질 가능성은 매우 적다. 윤석열 정권 출범 이후 대통령과 야당 대표와의 만남이 이루어지지 않고 있는데, 2022년 정진석 당시 국민의힘 비대위원장은 그 이유를 "대통령이 지금 범죄 피의자와 면담할 때는 아니라고 생각합니다"라고 밝혔다. 2021년 대선 후보 토론회에서 윤 후보는 "제가 이런 사람하고 토론을 해야 되겠습니까? 참 어이가 없습니다. 정말 같잖습니다."라고 말했는데, 이러한 인식이 집권 세력 전체에 공유되어 있는 것이다. 요컨대, 윤석열 정권의 정치 방침은 '당동벌이' 그 자체다.
p146
법률을 해석하는 입장도 시대적 흐름에 따라 달라진다. 소수의견이 다수의견이 되고, 그 반대가 되기도 한다. 시대정신과 헌법정신에 충실한 법 해석은 초기에는 소수의견에 머물지라도 궁극적으로는 다수의견의 지위를 획득한다. 이 점에서, 존재하는 판례를 그저 암기만 하는 것은 법을 제대로 공부하는 것이 아니다.
이상에서 확인되듯이 법 공부를 잘하려면, 제일 먼저 사람과 세상을 보는 눈을 정립해야 한다. 법학은 '가치지향적 학문'이지 '가치중립적 학문'이 아니다. 어떠한 가치를 중심에 놓을 것인가를 스스로 분명히 하고, 다른 가치와의 소통과 타협을 추구해야 한다. 그리고 법학을 제대로 공부하려면 철학, 정치학, 경제학, 사회학 등 다른 학문을 알아야 한다. 법학은 독자적인 학문체계와 논리를 갖고 있고 또 그래야 하지만, 다른 학문의 시각과 성과를 흡수해야 한다. 그렇지 못하면 법학은 편벽便辟하고 건조한 개념과 논리의 묶음에 머물고 말 것이다.
p152
민주주의 형법은 존재하고 있는 법률의 내용이 정당한지, 실정법률이 국미느이 법 의식이나 법 관행을 초과하는지, 그리고 위반자에게 부과되는 제재가 과도한지 등을 따지고 물어야 한다. 그리고 피치자被治者 국민데 대한 공감과 배려가 필수적이다. 요컨대, 민주주의와 인본주의를 지향하는 사회에서 법의 이념인 정의는 후자의 정의, 즉 "연민의 정의"를 추구해야 한다. "타인의 고통을 목격하면서 지성만이 아니라 몸과 마음으로 그 고통을 함께 느끼는 것", 바로 이것이 정의의 출발점이다.
p157
전통적 정의론에서 강조하는 재화의 공정한 배분 - "각자에게 각자의 것을"이라고 요약되는 '배분적 정의' - 에 집중하는 한편 "지배와 억압"을 문제 삼아야 한다. "공정으로서의 정의"를 막는 것이 바로 지배와 억압이기 때문이다. 16세기 영국에서 사상가이자 대법관으로 활약했던 토머스 모어는 1516년에 쓴 <유토피아>에서 일반 서민들에게만 적용되는 정의인 "쇠사슬에 묶인 채 바닥을 기는 정의"와 군주들의 정의인 "원하는 것은 다 하고, 원하지 않는 것은 하지 않아도 되는 정의"를 대비시켰다. 전자에 대한 후자의 지배와 억압을 해결하지 않으면, 사회적 재화의 공정한 배분은 불가능하다.
p192
나는 정치사상가 샹탈 무페Chantal Mouffe가 민주주의에 대한 경고로 남긴 글의 진짜 의미를 확실히 알게 되었다.
"민주주의는 불확실하고 일어날 법하지 않은 어떤 것이며, 당연한 것으로 받아들여서는 안 된다. 민주주의는 항상 허약한 정복이며, 심화시키는 만큼 방어도 중요하다. 일단 도달했다고 해도 그 지속성을 보증할 민주주의의 문턱 같은 것은 없다."
'검찰독재'와 '경제독재', '검찰공화국'과 '삼성왕국' 모두 무섭고 두렵다. 그러나 민주주의의 핵심 중 하나는 '일인일표제'다. 한 표를 가지 주권자 한 명이 검찰이나 재벌과 싸워 이길 수 없다. 한 표, 한 표가 모이면 달라진다. 또한 민주주의는 '대의민주주의'외 '광장민주주의'를 요구한다. 촛불 하나하나가 모이면 달라진다.
p210
어려운 시절이기에 안토니오 그람시의 유명한 말을 되새긴다. "이성으로 비관하되 의지로 낙관하라." 그는 어린 시절 사고로 꼽추라는 장애를 가진 채 성장했고, 이후 이탈리아의 대표적 공산주의자로 반파시즘 투쟁에 앞장섰다가 20년 징역형을 선고받고 약 11년을 감옥에서 보낸 후 건강 악화로 석방되었으나 얼마 지나지 않아 사망했다. "이성적 비관"과 "의지적 낙관", 이는 재벌공화국을 사는 우리에게 필요한 덕성이다.
p212. 사회주의의 진짜 의미
1987년 헌법체제 이후 여러 번의 민주정부가 들어섰지만, 1997년 'IMF 체제'가 요구한 신자유주의의 요구는 우리 사회의 근본을 바꿔놓았다. 정치적 민주화는 경제적 민주화로 이어지지 못했다. 반독재·민주화운동의 투사들도 심화되는 자본주의의 모순과 싸우는 데는 주저했다. 안착된 줄 알았던 정치적 민주주의도 흔들리고 있다. 소련 등 국가사회주의가 붕괴했지만 자본주의의 모순은 전혀 사라지지 않았다. 오히려 더욱 심화되고 첨예해지고 있다. 지그문트 바우만의 예고는 우리나라 상황에도 딱 들어맞아 공포스럽기까지 하다.
"현재 추세대로라면, 경제 성장은 우리 대부분에게 더 나은 미래를 약속하지 않는다. 오히려 이미 압도적 다수인데도 여전히 그 수가 급증하고 있는 많은 사람들이 지금보다도 더 심각하고 냉혹한 불평등과 더 불안정한 조건 및 더 많은 추락과 원통함과 모욕과 굴욕을 겪게 될 것임을 예고한다. 즉, 사회적 생존을 위한 지금보다 훨씬 더 힘든 싸움을 예고한다."
자본주의 모순을 비판하는 최고 이론은 여전히 사회주의다. 그럼에도 우리 사회는 오랫동안 사회주의에 대해 '빨갱이'라는 딱지를 붙이고 악마시하는 데 급급했다. 역사학자 토니 주트의 서술 또한 21세기 한국의 상황과 맞닿아 있다.
"사회주의라는 말에 당황스러운 침묵으로 대응하는 것은 오직 미국만의 특수한 현상이다. 미국에서 이루어지는 공공 정책에 대한 논쟁의 방향을 바꾸는 데 필요한 과제 가운데 하나는 '사회주의'의 기미가 보이거나 그 같은 성향을 지닌 것으로 판단될 수 있는 그 무엇에 대해서든 의심부터 하고 보는 미국인들의 뿌리 깊은 성향을 극복하는 것이다."
자본주의의 모순을 해결하는 데 사회주의 논리가 도움이 될 수 있는데도 '냉전의 논리'로 무작정 반대하는 것은 또 다른 폭력이다. 자본주의의 문제점을 지적하고 대안을 마련할 수 있는 사회주의를 비롯한 다양한 이론과 사상을 제대로 공부하지 않고서는 그와 같은 모순을 없애거나 줄일 수 없다. 조지 오웰은 이렇게 말했다.
"지금은 사회주의가 평등과는 아무런 관계가 없다고 말하는 것이 유행임을 나도 잘 안다. 세계 모든 나라에서 상당한 수의 어용 문사와 말주변 좋은 교수들이 사회주의가 약탈적 동기를 그대로 놓아둔 계획적 국가자본주의에 불과하다는 것을 '증명'하느라 바쁘다. 보통 사람들이 사회주의에 매력을 느끼고 사회주의를 위해 목숨을 거는 이유, 즉 사회주의의 '비결'은 평등사상에 있다.
자본주의가 온갖 모순을 드러내고 있는 대한민국 사회에서 '평등사상'은 여전히 소중하다. 이 사상을 구현하는 것이 시대적 과제다. 알랭 바디우는 "어떻게 하면 더 많은 사람에게 더 많은 평등한 기회를 부여할 수 있는가에 대한 답을 해야 하는 것이 정치의 고민이다"라고 하지 않았던가. 국가사회주의 붕괴 이후에도 리영희 선생이 공언한 다음과 같은 말씀의 무게는 묵직하다.
"소위 '신자유주의'라는 무한경재 시장경제의 비인간성, 사회적 다윈이즘의 극단 형태인 사회·경제적 약육강식과 그 무자비성, 윤리성을 상실한 과학·기술 만증주의, 자본의 과학·기술 지배구조로 말미암은 인간과 인류의 미래에 대한 공포 등 사회주의에 대해서 21세기가 거는 요구와 기대는 19세기나 20세기의 소수 국가들에서 보였던 체제로서의 사회주의에 못지않다고 나는 확신하고 있어요."
달짝지근해
웰메이드 로맨틱 코미디.
중년의 약간은 모자란 남자, 그리고 세파에 찌들어서 약간은 억척스러워졌지만 여전히 이쁘고 사랑스러운 미혼모간의 로맨스를 가볍고 유머러스한 터치로 시종일관 재밋게 엮어놨다.
주연의 유해진, 김희선 뿐 아니라 조연의 차인표, 진선규, 한선화의 호흡도 괜찮았다.
정우성을 소비하는 방식은 어이가 없을 정도다. 감독이랑 매우 친한가보다. 임시완, 고아성이 나오는 장면은 지극히 연극적 연출이다.
2시간 동안 웃고 떠들기에 정말 안성맞춤인 영화.
시기만 잘맞췄으면(추석 같은) 500만 이상 들었을 영화다.
김희선의 딸역으로 나오는 배우의 이름은 정다은. 정다은을 검색해보면 1994년생과 2001년생의 두 명이 나오는데 1994년생 정다은의 지명도가 높아서 그런지 구글의 영화소개에는 1994년생 정다은으로 잘못 나와있다.
아래 사진이 이 영화에서 김희선 딸로 나오는 배우.
달짝지근해 뒤에 붙은 7510은 도대체 무슨 뜻이지 했는데? 극중 남자 주인공의 이름 치호, 여주인공의 이름 일영을 의미한다고 한다. 굳이 안넣었어도 될 뻔 했다.
장하준의 경제학 레시피
장하준 교수의 전작인 '나쁜 사마리안'이나 '그들이 말하지 않은 23가지'는 읽다가 말았는데 이유는 재미가 없었기 때문이다. 마치 재미없는 강의를 듣는 듯한 기분 때문에 몇 번이나 시도했다가 포기하고 말았다.
이 책은 음식이라는 매개체를 이용해 작가가 말하려고 하는 주제로 넘어가는 현란한 기술에 깜빡 속아넘어가는 덕분인지 재밋게 읽었다.
이 책 덕분에 현대의 주류경제학이 미국이고 미국의 주류경제학은 신고전학파라는 사실도 리마인드하게 됐고, 저자는 이러한 획일주의적 경제학이 싫어서 다양한 경제학 담론이 살아있던 시대의 영국으로 유학을 갔다는 사실도 알게 되었다.
이 책을 통해 그간 경제학에서 알게 모르게 선입견처럼 가지고 있던 사실에 대해서 다시 생각하게 되는 기회도 갖게 되었다. 장하준 교수의 다른 책도 다시 한번 시도를 해봐야겠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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p35
많은 이론에서 필수 사회 서비스로 간주하는 의료, 교육, 상하수도, 대중교통, 전기, 주거 등을 민영화해야 한다고 주장하는 이론이 있다면, 그 이론은 '1인1표'라는 미눚 사회의 원칙을 축소하고 '1원1표'라는 시장 논리를 확장하자고 주장하는 것이다.
p75
지난 150여 년에 걸쳐 자본주의가 좀 더 인간적이 된 거은 오로지 자유 시장적 시각으로 자본주의를 옹호하는 사람들이 신성불가침으로 여겼던 자산 소유자들의 경제적 자유를 제한할 수 있었던 덕분이다. 우리는 자산 소유자들의 경제적 자유가 대중의 정치적/사회적 자유와 충돌할 때 후자를 보호하는 제도를 마련했다. 민주 헌법, 인권법, 평화로운 시위에 대한 법적 보호 등이 그 예다. 자산 소유자들의 경제적 자유를 제한하는 수많은 법 - 노예 제도와 연한 계약 노동의 금지, 노동자의 파업 권리 보호, 복지 국가 설립, 공해 물질을 배출할 자유 제한 등 - 을 도입했다.
p88. 가난의 근본적 원인
이처럼 가난한 나라 사람들이 부자 나라 사람들보다 훨씬 더 열심히 일한다면 그들의 빈곤이 근면성 부족 때문일 수가 없다. 문제는 생산성이다. 이들이 부자 나라 국민보다 인생의 훨씬 더 긴 기간, 훨씬 더 오래 일을 하는데도 불구하고 그들만큼 많이 생산해 내지 못하는 것은 생산성이 그만큼 높지 않아서다.
그리고 이렇게 생산성이 낮은 것은 교육 수준, 건강 등 노동자 개인의 능력이나 조건과 크게 상관이 없다. 노동력의 질은 전문직이나 고도의 기술이 필요한 직종에서는 생산성의 차이를 낼 수 있다. 그러나 대부분의 직종에서 가난한 나라 노동자와 부자 나라 노동자의 개인적 생산성은 큰 차이가 나지 않는다. 이 점은 가난한 나라에서 부자 나라로 이민 온 사람의 생산성이 크게 향상되는 것을 생각해 보면 이해가 될 것이다. 이민을 왔다고 갑자기 없던 기술이 생기거나 건강이 급격히 더 좋아지는 것은 아닌데 그렇다. 그들의 생산성이 가파르게 상승하는 것은 더 양질의 사회 기반 시절 infrastructure(전기, 교통, 인터넷 등)과 더 잘 기능하는 사회적 체제(경제 정책, 법률 체계 등)를 기반으로 해서 더 잘 운영되는 생산 시설(공장, 사무실, 가게, 농장 등)에서 더 나은 테크놀로지를 사용할 수 있게 되었기 때문이다. 영양실조에 걸린 당나귀를 타고 애를 쓰던 기수가 갑자기 좋은 혈통의 경주마를 타게 된 것이나 마찬가지다. 물론 기수의 기술도 중요하지만 누가 경주에서 이기는가는 만흔 부분 기수가 탄 말이 결정한다.
가난한 나라들이 왜 덜 생산적인 테크놀로지와 사회 체제를 갖게 되었고, 그 결과로 낮은 생산성밖에 달성하지 못하는가 하는 문제를 이 짧은 장에서 만족스럽게 설명하기에는 너무나 많은 요인이 복잡하게 얽혀 있다. 저부가가치 1차 상품 생산에 특화된 구조를 가지지 않을 수 없게 된 식민주의 역사의 잔재, 만성적 정치 분열, 엘리트 계층의 무능력(비생산적인 지주, 역동적이지 못한 자본가 계급, 비전 없고 부패한 정치 지도자), 부자 나라에 유리하도록 편성된 국제 경제 체제 등은 굵직한 이유들 중에 일부에 불과하다.
그러나 분명한 것은 가난한 나라의 가난한 사람들이 가난한 것은 역사적/정치적/테크놀로지적 문제 때문이고, 이는 그들이 개선할 수 있는 문제가 아니라는 사실이다. 개개인의 능력이 부족해서도 아니고 그들이 열심히 일할 마음이 없어서는 더더욱 아니다.
p99. 페루의 번영을 이끈 작은 생선
멸치는 풍부한 맛뿐 아니라 한때 풍부한 부를 가져다주는 고마운 생선이기도 했다. 이 작은 생선은 19세기 중반 페루가 누린 경제적 번영의 원인이었다. 페루가 멸치를 수출해서 돈을 번 건 아니었다. 당시 페루는 바닷새의 구아노guano(마른 새똥)을 수출해서 국가적 번영을 누렸다. 구아노는 질산염과 인이 풍부하고 냄새가 그다지 역겹지 않아서 인기 높은 비료였을 뿐 아니라 화약의 핵심 재료인 질산칼륨이 들어 있어서 화약 제조에도 사용되었다.
페루의 구아노는 태평양 연안의 섬들에 모여 사는 새들인 가마우지와 부비booby(얼가니새)의 배설물이다. 이 새들의 주된 양식은 생선, 특히 칠레 남쪽에서부터 페루 북쪽을 잇는 남아메리카 서쪽 해안의 영양소 풍부한 훔볼트 해류를 타고 이동하는 멸치들이다. 훔볼트 해류는 프로이센 왕국의 과학자이자 탐험가인 알렉산더 폰 훔볼트의 이름을 딴 것이다. 훔볼트는 1902년 에콰도르에서 가장 높은 산인 침보라소 화산(6262미터)을 올라 당시 세계 신기록을 수립했을 뿐 아니라 페루산 구아노의 장점을 최초로 유럽에 알린 사람들 중 하나다. 구아노가 페루 경제에서 너무나 중요한 자리를 차지하기 때문에 경제사를 다루는 사람들은 '구아노기'(1840년대~1880년대)라는 용어를 쓴다.
구아노가 중요한 역할을 한 나라는 페루만이 아니었다. 1856년 미국 의회는 '구아노제도법Guano Islands Act'을 통과시켜서 아무도 살지 않고 다른 나라 정부의 관할 아래 있지 않다면 전 세계 어디에서나 구아노가 있는 섬은 미국 시민이 점유할 수 있도록 했다. 이 법 덕분에 미국은 태평양과 카리브해의 100개가 넘는 섬을 점거해서 페루산 구아노 무역을 독점하고 있던 영국에 대항할 수 있게 되었다. 영국, 프랑스 등 다른 나라들도 구아노가 쌓인 섬들을 점거했다.
구아노로 인한 페루의 경제 호황은 오래가지 않았다. 호황이 시작된 지 30여 년쯤 지나자 과다 채취로 인해 구아노 수출이 사양길에 접어들기 시작했다. 그러나 1870년 대규모 칠레 초석(질산나트륨) 매장지가 발견되면서 구아노 수출의 쇠락으로 인한 영향이 한동안 상쇄되었다. 초석은 비료, 화약 제조에 사용될 뿐 아니라 육류 보전에까지 쓰이는 질산염이 풍부한 광물질이다. 그러나 페루의 번영은 초석전쟁Saltpetre War이라고도 부르는 남아메리카 태평양전쟁(1879~1883년)과 함께 끝이 났다. 이 전쟁에서 승리한 칠레는 볼리비아 해안 지역 전부(그 결과 볼리비아는 바다가 없는 내륙국이 되었다)와 페루 남부 해안 지역의 절반 가량을 점령했다. 그 지역에는 대량의 초석이 매장되어 있고 구아노도 많아서 칠레는 엄청나게 부자가 되었다.
그러나 그 또한 오래가지 않았다. 1909년 독일의 과학자 프리츠 하버가 공기 중에서 질소를 분리하는 기술을 발명했다. 고압 전류를 사용해 암모니아를 만들고 거기서 인공 비료를 만드는 기술이었다. 말하자면 하버가 글자 그대로 허공에서 인공 비료를 만들어 내는 방법을 개발한 것이다. 그 덕에 그는 1918년 노벨 화학상을 수상했다. 하지만 1차 세계대전 때 사용한 독가스를 개발한 일로 악명이 높아서 그에게 노벨상이 주어졌다는 사실은 점잖은 자리에서는 잘 언급되지 않는다.
하버가 발명한 기술은 또 다른 독일의 과학자 카를 보슈에 의해 상용화되었다. 보슈가 일하던 '바스프BASF'는 '바덴에 있는 아닐린과 소다 만드는 공장'이라는 뜻의 바디셰 아닐린 운트 소다 파브리크Badische Anilin und Soda Fabrik의 약자로, 하버가 개발한 기술을 사들인 회사다. 오늘날 '하버-보슈법'이라 부르는 이 기술은 인공 비료의 대량 생산을 가능하게 해서 구아노를 비료계의 황제 자리에서 추출하고 말았다. 구아노보다 더 중요한 질산염의 공급원인 초석 또한 가치가 없어졌다. 구아노와 초석에서 추출한 칠레의 천연 질산염 생산량은 1925년 250만 톤이었던 것이 1934년에는 불과 80만 톤으로 줄어들었다.
p107
역사를 살펴보면 높은 생활 수준을 지속적으로 유지 가능하게 하는 방법은 오직 산업화밖에 없다는 결론을 내리게 된다. 다시 말해 혁신과 기술력을 확보할 수 있는 주된 근원인 제조업 분야를 발달시켜야 한다는 의미다.
산업화를 통해 생산 능력을 더 높이면 자연이 우리에게 가하는 제약을 '마법처럼' 극복하는 것이 가능해진다. 칠흑처럼 새까만 석탄에서 선명하기 그지없는 새빨간 염료를 뽑아내고, 허공에서 비료를 만들어 내는가 하면 다른 나라를 침공하지 않고도 땅을 몇 배로 늘리는 것이 마법 아니고 무엇이겠는가. 거기에 더해 이런 능력을 갖추고 나면 긴 기간 동안 높은 생활 수준을 유지할 수 있다. 초석과 같은 재생 불가능한 광물 천연자원, 또는 멸치를 먹고 사는 새들의 분비물로 만들어진 페루의 구아노처럼 재생 가능하지만 과잉 채취로 결국 늘 '바닥이 나고야 마는' 천연자원과는 달리 한번 습득한 기술이나 능력은 고갈되지 않기 때문이다.
p116. 싱크 최대 수출국 일본은 어떻게 경제 강국으로 거듭났을까
현대에 들어서면서 최대 실크 생산국은 한때 일본이었다. 일본은 7세기에 한국에서 양잠술을 도입한 이래 매우 긴 견직물 방적 역사를 지니고 있었지만 2차 세계대전 직후 이 부문을 크게 키웠다. 1950년대 일본은 세게 최대 실크 수출국이었고, 실크 관련 상품은 일본의 최대 수출 품목이었다.
일본인들은 거기서 만족하지 않았다. 그들은 미국 및 유럽 국가들과 철강, 조선, 자동차, 화학, 전자를 비롯한 기타 '선진' 공업 부문에서도 대결하고 싶었다. 그러나 당시 기술 면에서 뒤쳐진 일본이 그런 부문에서 국제적으로 경쟁을 하기는 불가능했다. 그래서 일본 정부는 높은 관세, 다시 말해 수입품에 높은 세금을 물리는 한편, 보호 사업 부문에서는 외국 기업들이 일본 내에서 영업하는 것을 금지하는 방법으로 외국과의 경쟁으로부터 국내 제조업자를 보호했다. 이에 더해 당시 정부의 엄격한 규제 아래 있던 은행들로 하여금 수익성이 좋은 주택 담보 대출이나 소비자 금융, 또는 이보다는 수익성이 조금 떨어지지만 이미 확고하게 자리 잡은 실크 산업 부문보다 '선진' 공업 부문의 국내 기업들에 우선적으로 대출하도록 만들었다.
일본 외부뿐 아니라 내부에서도 이런 정책에 대한 비판의 목소리가 높았다. 이 정책에 반대하는 사람들은 일본은 철강이나 자동차 같은 건 수입으로 조달하고 실크를 비롯한 방직 산업처럼 이미 잘하고 있는 분야에 집중하는 편이 더 나을 거라고 지적했다. 비효율적인 부문의 기업들, 가령 토요타나 닛산 같은 자동차 제조업체를 보호하기 위해 외국산 차에 관세를 부과하면 소비자는 더 나은 외국산 차를 사기 위해 국제 시세보다 더 높은 가격을 지불하거나 품질이 낮고 미운 일본산 차를 사야 하는 손해를 봐야 한다는 것이 그들의 논리였다. 그리고 자동차 생산 기업처럼 비효율적인 산업 부문에 은행 대출을 하도록 정부가 인위적으로 개입을 하면 실크 산업처럼 더 효율적인 부문에 돈을 투자해서 같은 자본으로 훨씬 더 큰 이윤을 낼 수 있는 기회를 박탈하는 것이라는 지적도 나왔다.
이는 흠 잡을 데가 없이 맞는 주장이다. 한 나라의 생산 능력을 고정된 것이라 생각하면 말이다. 그러나 장기적으로 볼 때 어느 나라든 생산 능력은 변화할 수 있고, 현재 잘하지 못하는 것을 나중에는 잘하게 될 수도 있다.
이런 변화는 저절로 일어나지 않지만 - 더 나은 기계, 노동자의 기술 습득, 테크놀로지 연구에 투자할 필요가 있다 - 일어날 수 있는 일이다. 그리고 그 변화가 일본의 자동차, 철강, 전자 등 수많은 산업 분야에서 일어났다. 1950년대에는 국제 시장에서 경쟁할 꿈도 꾸지 못했던 산업 분야 중 많은 수가 1980년대에 들어설 무렵에는 세계 1위에 등극해 있었다. 한 나라의 생산 능력에 의미 있는 변화가 일어나는 데는 적어도 20여 년이 걸린다. 이 말은 자유 무역 환경에서는 이런 변화가 생길 수 없다는 뜻이다. 자유 무역 체제에서는 신생 산업 부문의 비효율적인 초보 기업들이 우월하고 규모가 큰 외국 경쟁 업체들에 순식간에 전멸당하고 말기 때문이다.
p120
그렇다고 해서 유치 산업 보호 정책이 반드시 성공적인 경제 발전을 보장한다는 것은 아니다. 어린이들과 마찬가지로 유치 산업 또한 잘못 키우면 '성숙'하는 데 실패할 수 있다. 1960년대와 1970년대에 수많은 개발도상국이 과도한 보호 정책을 쓰는 바람에 국내 기업들이 태만해졌고, 시간이 흐른 후에도 보호 정책을 줄이지 않아 생산성을 향상시킬 동기 부여를 하는 데 실패하고 말았다. 유치 산업 정책을 가장 기술적으로 운용한 일본과 한국 같은 나라는 시간이 흐르면서 보호 정책을 단계적으로 줄여서 그런 위험을 피했다. 자녀가 성장해 감에 따라 보호의 손길을 차차 거두고 더 많은 책임을 자녀에게 주어야 하는 것과 같은 이치다.
유치 산업을 보호하지 않았다면 한때 경제적 새우였던 나라들 - 18세기의 영국과 19세기의 미국, 독일, 스웨덴, 20세기의 일본, 핀란드, 한국 - 은 오늘날 세계 경제의 고래로 성장하지 못했을 것이다.
p230
복지 국가의 가장 중요한 점은 그 나라의 시민(그리고 장기 거주자) 모두가 동일한 보험 패키지를 대량 구매를 통해 싼값에 에 구입한다는 사실이다. 이 부분을 가장 쉽게 이해하려면 바로 부자 나라 중 보편적 공공 의료 보험 제도가 없는 유일한 나라인 미국과 다른 부자 나라들의 의료 비용을 비교해 보면 된다.
GDP에 대한 비율로 볼 때 미국인은 비슷한 경제 수준의 다른 부자 나라 시민에 비해 적어도 40퍼센트 이상, 많으면 2.5배 정도를 의료비에 더 쓴다(미국은 GDP 대비 17퍼센트인데 반해 아일랜드는 6.8퍼센트, 스위스는 12퍼센트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미국인의 건강 지표는 선진국 중 최악이어서 다른 부자 나라들에 비해 미국에서는 '건강한 상태'를 유지하는 비용이 훨씬 비싸다는 것을 알 수 있다. 이런 현상을 설명하는 다양한 시각이 있을 수 있지만, 중요한 이유 한 가지는 미국의 의료 시스템이 조각조각 분산되어 있어서 의료 제도가 더 잘 통합되어 있는 다른 나라들에 비해 공동 구매를 통해 얻는 혜택을 보지 못한다는 점일 것이다. 예를 들어 국가 전체 시스템을 통한 '대량 구입' 디스카운트를 받는 대신 모든 병원은 개별적으로 약과 의료 장비를 구입해야 하며, 의료 보험 회사들은(이윤 추구 기업이므로 더 높은 보험료를 부과하는 데 더해) '규모의 경제' 혜택을 볼 수 있는 통합된 시스템 대신 각각 시스템을 운영하는 비용을 들여야 한다.
p246
불평등에 대한 논의는 너무나 오래도록 잘못된 방향으로 진행되어 왔다. 개인의 필요와 역량은 무시한 채 결과와 기회에만 초점을 맞추어 왔기 때문이다. 좌파는 모든 사람에게 결과의 평등을 보장하는 것이 공평한 일이라 생각한다. 그래서 개인마다 다른 필요와 역량을 가지고 있다는 사실을 무시한다. 반면에 우파는 기회의 평등으로 충분하다고 생각한다. 그래서 진정으로 공정한 경쟁이 되려면 개인 간의 역량이 어느 정도는 균등해야만 한다는 사실을 간과한다. 이것은 부모 세대가 상당한 정도로 결과의 평등을 누려야 가능한데, 그렇게 되려면 소득을 (하향) 재분배하고, 모든 사람에게 양질의 기초 서비스를 제공하고, 시장을 규제해야 한다.
채식주의자에게 닭고기 기내식을 주는 것이 공평한 일이라 생각하는 항공사를 원하는 사람은 없을 것이다. 그러나 우리는 승객들의 여러 가지 취향과 필요를 모두 맞추어 주는 다양한 기내식을 제공하지만 표가 너무 비싸서 극소수만이 이용할 수 있는 항공사 또한 원치 않는다.
p255
가장 널리 쓰이는 경제 척도인 GDP는 시장에서 교환되는 것만 포함한다. 경제학에서 사용되는 모든 측정법과 마찬가지로 GDP도 여러 문제점이 있지만 가장 큰 문제는 이것이 극도의 '자본주의적' 관점을 기초로 하고 있다는 점이다. 다양한 사람들이 서로 다른 다양한 가치관을 갖고 있기 때문에 뭔가가 사회에서 어떤 가치를 지니는지를 결정할 때 시장에서 어떤 가격에 거래가 되는지를 기준으로 삼을 수 밖에 없다는 관점이다.
시장활동만을 계산하는 관행은 경제 활동의 엄청나게 큰 부분을 보지 못하는 단점이 있다. 개발도상국에서는 농업 생산물의 큰 부분이 계산되지 않는 경우가 많다. 많은 농민이 가지가 기른 작물을 팔지 않고 일정량을 소비하는데 농산물 생산량에서 이 부분은 시장에서 교환되지 않으므로 GDP 통계에 포착되지 않는다. 가정과 공동체에서 임금을 받지 않고 행해지는 돌봄 노동 역시 이런 식으로 시장에 기초해 생산량을 측정하면 부자 나라와 개발도상국 모두에서 GDP에 포함되지 않는다. 아이를 낳아서 기르고 그들의 학습을 도와주고, 노인과 장애인을 돌보며, 음식을 만들고, 청소와 빨래를 하고, 그에 더해 가정을 꾸려 나가는 일(미국의 사회학자인 앨리슨 대민저Allison Daminger가 '인지 노동cognitive labour'이라고 부르는 활동) 말이다. 이런 활동을 시장 가격으로 환산하면 GDP의 30~40퍼센트를 차지함에도 불구하고 현재는 GDP에 전혀 포함되지 않고 있다.
간단한 사고 실험으로도 시장 밖에서 벌어지는 돌봄 노동을 경제 활동으로 치지 않는 관행이 얼마나 말이 안 되는지를 실감할 수 있다. 2명의 엄마가 자녀를 교환해서 상대방의 아이를 돌봐 준 다음 베이비시터에게 지불하는 금액을 서로에게 지불한다면(같은 금액을 주고받는다면) 두사람의 재정 상태와 아이 돌보는 시간에는 아무 변화가 없지만 GDP는 올라갈 것이다. 개념적으로 생각해도 돌봄 노동 없이는 경제는 말할 것ㄱ도 없고 애초에 인간 사회 자체가 존재 불가능하다는 사실을 고려하면 이 문제가 얼마나 심각한 것인지 실감할 수 있을 것이다.
무보수 돌봄 노동을 담당하는 사람 중에는 여성이 큰 비율을 차지한다. 따라서 돌봄 노동을 경제 활동으로 계산하지 않으면 여성이 우리 경제 - 그리고 사회 - 에 하는 공헌이 과소 평가될 수밖에 없다.
p281. 시장이나 개인에 맡겨 두어서는 안 된다
그러나 이 (기후변화를 막기 위한) 모든 기술적 가능성과 모든 생활 방식 변화를 실현하더라도 지방 정부, 중앙 정부, 국제기구가 지역적/전국적인 대규모의 공공사업을 벌이는 동시에 세계적으로 국가 간 협력을 도모하지 않으면 별 소용이 없을 것이다. 시장을 통한 우대나 장려책, 개인적인 선택 등으로는 충분하지 않다.
기술 개발의 경우 정부가 적극 개입해서 그린 테크놀로지를 장려하는 정책을 시행해야 한다. 그냥 시장에 맡겨 두면 기후 변화와 싸우고 대처하는 데 필요한 수 많은 기술이 개발되지 않고 말 것이다. 이는 민간 기업들이 '사악해서'가 아니라 단기적 성과를 내야 한다는 끊임없는 압박에 시달리고 있기 때문이고, 설상가상으로 이 압박은 금융 규제 완화로 더욱 심해지고 있다. 그린 테크놀로지를 개발하고 사용해도 그 혜택이 가시화되기까지는 몇십 년이 걸리는 경우가 태반이며 심지어 그보다 더 장기전이 될 수도 있다. 그러나 민간 부문의 기업들은 몇 년은 고사하고 분기마다 가시화된 실적을 증명해야 하는 경우가 많아서 그런 기술 개발을 주저하는 것도 이해가 가는 일이다.
민간 부문이 이러헥 근시안적으로 경영하는 경향이 심하기 때문에 신기술 개발을 위한 대규모 투자나 그렇게 개발된 신기술을 채용하는 과정에서 전통적으로 항상 정부가 강력한 역할을 수행해야만 했다. 이 방면의 가장 대표적인 예는 IT와 바이오테크놀로지 개발로, 둘 다 초기에는 미국 정부가 저의 전액을 지원했다. 실패할 위험이 매우 크고 수익을 내기까지 오래 기다려야 하는 부문들이었기 때문이다. 미국을 비롯해 유럽의 다수 국가, 중국, 브라질 등에서 태양 발전, 조력 발전 같은 저탄소 에너지 기술이 상당한 규모로 개발되어 사용되어 온 것은 정부 개입 없이는 불가능했을 것이다.
가난한 나라들이 온실가스를 최소한으로 배출하고 기후 변화로 인한 부작용에 대처하면서 경제를 발전시킬 수 있는 기술을 개발하게 하는 공적 조치도 중요하다. 시장은 1인 1표가 아니라 1원 1표를 원칙으로 움직이기 때문에 내버려 두면 돈을 더 많이 가진 사람들이 원하는 쪽으로 투자가 몰리기 마련이다. 이 말은 가난한 나라들이 가장 필요로 하는 기술들 - 농산물과 공산품 생산에 효율적으로 에너지를 사용할 수 있는 기술이나 '기후 변화 적응' 기술 등 - 에는 상대적으로 적은 돈이 투자될 것이라는 뜻이다. 이런 기술의 개발과 개발도상국으로의 이전을 보조금으로 주거나 심지어 무료로 지원하기 위한 공적 조치가 필요하다. 개발도상국들은 기후 변화를 초래한 장본인이 아닌데도 기후 변화의 여파로 훨씬 더 큰 고통을 받고 있다는 사실을 고려하면 이러한 모든 조치는 '기후 정의climate justice'를 이루는 데 반드시 필요하다. 일부 개발도상국은 글자 그대로 해수면 아래로 사라질 위기에까지 처해 있지 않은가.
각 개인이 진정으로 환경을 보호하는 생활 방식을 유지 할 수 있으려면 그 선택을 가능하게 만드는 정부 정책의 뒷받침이 있어야 한다.
어떨 때는 개인적으로 행동을 바꾸고 싶어도 대부분의 사람이 감당할 수 없는 규모의 선행 투자가 없으면 불가능한 경우가 있다. 외벽 단열, 이중 창문, 열펌프 설치 등은 오랜 시간이 지나면 결국 투자 비용을 회수하고도 남겠지만 당장 그 비용을 감당할 수 없는 사람들이 많다. 이런 투자를 하는 데 정부의 보조금과 대출 정책은 큰 도움이 될 것이다.
기후 변화와 같은 시스템의 문제를 시장 환경에서 개인이 '올바른' 선택을 해야 한다고 맡겨 두는 것은 불공평할 뿐 아니라 효과적이지 못하기 때문에 때로는 공적 조치가 필요하다. '친환경 식생활greener eating' 운동이 아주 좋은 예다. 식품 판매업자에게 각 상품의 탄소 발자국을 완전히 공개하도록 요구해서 소비자가 '올바른 식료품 쇼핑'을 하도록 유도하고, 공해를 많이 발생시키는 식품을 시장에서 추출하는 것이 이론상으로는 가능하다.그러나 현실적으로 이 방법은 아무것도 하지 않는 것과 진배없다. 우선 그런 정보가 완전 공개가 된다 해도 소비자는 구매하는 식품 하나하나의 탄소 발자국 정보를 모두 이해하고 거기에 맞는 선택을 할 만한 시간이나 정신적 여유가 없다. 어찌 보면 아무것도 하지 않는 것보다 더 나쁠 수도 있다. 정부가 최소한의 환경 기준을 정립해 놓지 않으면 더 심한 오염을 유발하는 판매업자가 더 값싼 식품을 제공해서 경쟁 업체들은 시장에서 몰아내는 식의 '바닥치기 경쟁race to the bottom' 이 벌어질 수 있기 때문이다.
p295. 자본주의 발달의 정점, 유한 책임 제도
이제는 유한 책임제가 일반적 표준이 되었지만 19세기 말까지만 해도 왕 - 절대 왕정이 끝난 다음에는 정부 - 이 허락하는 특권이었고, 오직 국가적 차원에서 매우 중요한 일이지만 위험 부담이 높은 장거리 교역이나 식민지 확장 같은 사업만 이런 지위를 누릴 수 있었다.
그런 예외적인 경우에만 적용하는데도 유한 책임제에 대해 비판적인 태도를 가진 사람들이 많았다. 대표적인 비판자 중 한 사람이었던 이른바 '경제학의 아버지' 애덤 스미스는 유한 책임 회사 제도가 경영자들이 "다른 사람의 돈"을 가지고 도박을 하도록 허용한다고 비난했다. 이런 식으로 자금을 모은 기업의 경영자들은 기업을 100퍼센트 감당하지 않아도 되기 때문에 과도한 모험을 하려는 성향이 강해질 수밖에 없다는 것이 그의 논리였다.
흠잠을 데가 없이 완벽한 사실이다. 그러나 중요한 것은 유한 책임제 덕분에 무한 책임을 져야 할 때보다 훨씬 더 큰 규모의 자본을 모으는 것이 가능해졌다는 사실이다. 바로 이 점 때문에 자본주의의 패망을 예상했던 카를 마르크스가 유한 책임 회사야말로 '자본주의의 발달이 정점을 찍어서 나온 제도'라고 칭송했던 것이다. 물론 이 발언에는 자본주의가 더 빨리 발전할수록 사회주의의 도래를 앞당길 수 있으리라는 저의가 깔려 있었다(그의 이론에 따르면 자본주의가 완전히 발달한 다음에야 사회주의가 도래할 수 있다).
19세기 중반 마르크스가 이런 선언을 한 직후, 대규모 투자 없이는 성장이 불가능한 '중화학 공업' - 제철 및 철강, 기계, 화학 공업, 제약 등 - 이 출현하면서 유한 책임 횟하가 더욱 절실해졌다. 장거리 항해나 식민지 사업뿐 아니라 주요 산업의 대부분에 대규모 투자가 필요해지면서 유한 책임제를 사례별로 심사해서 허용해 주는 것은 더 이상 불가능해졌다. 그 결과 19세기 말 대부분의 나라에서는 유한 책임 회사 설립이 특혜가 아닌 권리로 인정받게 되었다. 그때 이후 유한 책임 회사는 자본주의 발달의 주요 수단으로 자리 잡았다.
p296. 성장의 원동력에서 성장의 장애물로
그러나 한대 경제 성장의 강력한 도구였던 이 제도가 최근에는 성장의 장애물로 변했다. 지난 수십 년에 걸친 금융 규제 완화로 인해 주주들은 자기네가 법적으로 소유한 기업에 장기 투자를 할 필요가 없어졌다. 다른 방식으로 투자해서 수익을 창출한 기회가 너무나 다양해졌기 때문이다. 영국을 예로 들자면 주주들의 주식 보유 기간이 1960년대에 5년이었던 것이 요즘은 1년이 채 되지 않는다. 투자한 돈을 1년도 되기 전에 거둬들이는 사람이 그 기업을 공동으로 소유한다고 할 수 있을까?
가만히 있지를 못하는 주주들의 요구에 부응하기 위해 전문 경영인들은 배당금과 주식 환매(자사주 매입)등을 통해 기업 이윤 중 극도로 높은 비율을 주주들이 가져갈 수 있도록 했다. 미국과 영국에서 주주들에게 돌아간 기업 이윤 비율은 1980년대에는 절반 이하였지만 지난 10~20년 사이 이 수치가 90~95퍼센트로 치솟았다. 기업의 유보 이윤이 기업 투자의 주된원천이라는 사실을 감안하면 이 변화는 기업의 투자 능력, 특히 장기간을 기다려야 수익을 낼 수 있는 프로젝트에 대한 투자 능력을 심각하게 약화시켰다고 할 수 있다.
이제는 유한 책임제라는 제도를 개선해서 해로운 부작용은 제한하면서 혜택을 누릴 수 있는 방법을 강구할 때가 되었다.
무엇보다 유한 책임 제도는 장기간 주식 보유를 장려하는 방향으로 개선되어야 한다. 예를 들어 투표권을 주식 보유 기간과 연동해서 장기 투자를 한 주주들이 더 큰 목소리를 낼 수 있도록 하는 방법이 있는데, 이를 '테뉴어 보팅tenure voting'이라 부른다. 프랑스, 이탈리아 같은 일부 국가에서는 이미 이 제도를 시행하고 있지만 매우 희석된 형태에 그치고 있다. 이 테뉴어 보팅 제도를 훨씬 더 강화해서 주식을 보유한 햇수마다 1표씩 더 주는 방법 등을 강구할 필요가 있다. 장기 투자를 하는 투자자들이 어떤 식으로든 혜택을 볼 수 있어야 한다.
둘째, 주주들의 권한을 제한해야 한다. 여기에는 주식 장기 보유자들까지 포함된다. 대신 기업의 운명으로부터 큰 영향을 받는 다른 '이해관계자'들이 기업 경영에 목소리를 낼 수 있는 제도적 장치를 마련해야 한다. 노동자, 부품 조달 업체, 기어비 위치한 지역의 지방 정부 등이 모두 해당한다. 주주들의 문제는 장기 투자자라 할지라도 언제든 주식을 팔고 기업을 떠날 수 있다는 데 있다. 주주들보다 움직임이 훨씬 자유롭지 못한 주주 이외에 '이해관계자'들에게 일정 부분 권한을 부여한다는 것은 이른바 기업의 '소유주'들보다 기업의 장기적 미래에 더 큰 관심과 이해관계를 가진 사람들에게 힘을 실어 준다느 의미다.
마지막이자 앞의 내용 못지않게 중요한 것은 주주들이 자기가 지분을 보유하고 있는 기업의 장기적 미래에 더 관심을 가질 수 있도록 유도하기 위해 그들에게 주어진 선택지를 제한해야 한다는 점이다. 투기 성향이 강한 일부 금융 상품에 대한 규제를 강화해서 '치고 빠지는 식의 투자' 기회를 줄이고 장기 투자를 할 동기 부여를 하는 것도 좋은 방법이다.
p308
자동화로 일자리를 위협받는 건 딸기 수확 노동자만이 아니다. 요즘은 신문, 라디오, TV 어디서든 인간이 하는 일을 로봇이 대체하고, 그 결과 대부분의 사람이 일자리를 잃을 것이라는 보도를 피할 수가 없다. 일자리를 얻을 수 없는 미래에 대한 공포는 인공 지능AI 기술의 발달로 더 고조되고 있다. 기계가 인간의 손과 근육 뿐 아니라 두뇌마저 대체할 것이라는 두려움까지 갖게 되었기 때문이다. 전 세계를 휩쓸고 있는 이 불안감을 잘 보여 주고 있는 예 중 하나가 <파이낸셜타임스>가 2017년 공개한 '로봇이 당신의 일을 할 수 있을까? Can a robot do your job?'라는 앱이다.
자동화로 일자리가 없어지는 것은 자본주의 체제에 늘, 적어도 지난 2세기 반 동안은 항상 존재해 왔던 현상이다. 그리고 <파이낸셜타임스> 같은 지면에 글을 기고하는 저널리스트, 경제학자, 경제 전문가 등은 줄곧 블루칼라 노동자들이 노동력을 절약하는 기술 도입에 저항하는 것은 경제 발전을 방해하는 짓이라 꾸짖어 왔다. 그랬던 기자들과 논평가들이 왜 이제 와서 갑자기 일자리 자동화의 영향에 대해 걱정을 늘어놓는걸까?
계급적 위선의 냄새가 진하게 풍겨 오지 않는가? 전문가 계급에 속한 이들은 자기네 일이 자동화의 물결에서 안전하다고 확신할 때는 새 기술의 도입에 거부감을 보이는 블루칼라 노동자들을 '러다이트Luddite'라 쉽게 비난할 수 있었다. 그러나 이제 자동화가 그들과 그들의 친구들 - 의사, 법조인, 회계사, 금융인, 교사, 심지어 저널리스트까지 - 이 속한 화이트칼라 일자리를 위협하기 시작하자 기술 발전으로 인한 실업, 심지어 로봇이 자기네 분야 전체를 완전히 대체해 버릴 수도 있는 미래에 대한 두려움을 뒤늦게 맛보고 있는 것이다.
p325
스위스가 탈산업 경제post-industrial economy의 모범으로 제조업보다는 금융과 고급 관광 상품 같은 서비스 산업을 통해 번영을 이룬 나라라는 것이다.
1970년대에 시작된 이 탈산업 시대 담론은 인간은 잘살게 될수록 더 세련된 것을 원할 수밖에 없다는 단순하면서도 강력한 개념에 기초한다. 일단 사람들이 배를 채우고 나면 농업이 사양길에 접어든다. 옷과 가구처럼 다른 필요가 충족된 후에는 더 높은 차원의 소비재, 예를 들면 전자 제품이나 자동차 등으로 눈을 돌린다. 대부분의 사람이 이런 물건들을 가진 후에는 소비자의 수요가 외식, 공연, 관광, 금융 서비스 등의 서비스 부문으로 향한다. 이 시점이 되면 산업 분야는 위축되기 시작하고 서비스 부문이 경제의 주인공이 되면서 인류 경제 발달 단계 중 하나인 탈산업 시대가 도래하는 것이다.
탈산업 시대에 대한 이런 식의 시각은 1990년대에 힘을 얻기 시작했다. 거의 모든 부자 나라 경제 체제에서 생산과 고용 어느 쪽으로 따져도 제조업의 중요성이 감소하고 서비스 부문의 역할이 커지는 현상이 목격되었기 때문이다. 이 과정을 '탈산업화'라고 한다. 중국이 세상에서 가장 큰 산업 국가로 부상하면서 탈산업 사회를 지지하는 사람들은 제조업은 중국과 같은 저기술, 저임금 국가가 담당하는 산업인 반면 금융, IT, 서비스, 경영 컨설팅 같은 고급 서비스에 미래가 있고, 특히 부자 나라들은 이를 지향해야 한다고 주장했다.
그리고 이런 논의에서 스위스는 가끔 함께 등장하는 싱가포르와 더불어 서비스 부문을 특화해서 높은 생활 수준을 유지하는 증거로 제시된곤 한다. 이런 논리에 설득당하고 스위스나 싱가포르에서 영감을 얻은 인도, 르완다와 같은 일부 개발도상국은 산업화 과정을 아예 건너뛰고 고부가가치 서비스에 특화해서 이를 수출하는 방법으로 경제를 개발하겠다는 시도를 해 오기까지 했다.
탈산업 사회를 옹호하는 사람들에게는 안타까운 일이지만 스위스는 사실 세계에서 가장 산업화 정도가 높은 나라로, 1인당 제조업 생산량 세계 1위를 자랑한다. '메이드 인 스위스'라고 적힌 상품이 많이 보이지 않는 건 부분적으로 스위스가 작은 나라여서이기도 하지만 경제학자들이 '생산재'라고 부르는 기계, 정밀 장비, 산업용 화학 물질 등 우리 같은 보통 소비자가 접할 수 없는 물건들을 주로 생산하기 때문이기도 하다. 이른바 탈산업 사회의 성공담으로 꼽히는 또 다른 나라인 싱가포르가 세계에서 두 번째로 산업화된 국가라는 사실은 흥미로운 일이 아닐 수 없다. 스위스와 싱가포르를 예로 들어 서비스 중심의 탈산업 경제의 장점을 선전하는 것은 뭐랄까, 해변 휴양지를 광고하면서 노르웨이와 핀란드를 모델로 사용하는 것과 비슷하다고 할 수 있겠다.
밀수
웰메이드 킬링타임 무비.
스토리가 진부한 건 아니지만 배우들의 역량이 영화의 성공을 견인했다고 보인다.
김혜수, 염정아의 더블 주연과 조인성, 박정민의 두 남자 배우의 흡인력이 돋보인다.
고민시의 마담연기는 초등학생처럼 어색했지만 어설픔에서 기인한 귀여움이 그것을 상쇄한다(감독의 의도적 연출일까?).
적당한 긴장감이 계속 유지되는 연출과 1970년대와 80년대를 아우르는 대중가요들이 영화의 시대배경과 함께 향수와 흥을 불러일으킨다.
어느 분의 정경심 교수 면회기
<정경심 교수와의 면회를 마치고…>
미국으로 돌아오기 전날 아내와 함께한 일정은 서울 구치소로 정경심 교수를 면회 가는 것이었습니다. 사실 오래전부터 해야 할 도리였는데 미국에 있고 코로나로 인한 면회제한까지 있다 보니 제 때에 도리를 못했습니다.
저와 정경심 교수는 “지방대 학생들도 좋은 지도교수 만나서 열심히 노력하면 서울의 명문대 학생 못지 않은 성공 할 수 있다”는 꿈과 희망을 동양대 학생에게 주고 꼭 이루게 해주자는 목적에 의기투합하여 많은 일들을 함께 한 소중한 인연이 있었습니다.
여러 해 동안 정경심 교수는 겨울방학 마다 약 20여명의 동양대 학생들을 이끌고 저희 대학을 방문하여 학생들과 동고동락을 하며 헌신적으로 그들을 지도하였습니다. 그리고 그 노력이 올해 드디어 결실을 맺어 그 중의 한 명이자 졸업 후에도 정경심교수의 지도를 꾸준히 받았던 한 학생은 동양대 출신으로는 최초로 미국에서 박사과정을 마치고 올 해 미국의 명문 주립대학에 정식교수로 부임하기도 했습니다.
면회 예약 시간이 되어 아내와 함께 서울 구치소에 차를 주차하고 면회 장소인 민원실로 행하는 짧은 거리를 걸으면서 만감이 교차했고 어떤 말을 해야 위로와 힘이 될 찌 몰라서 참 많이 긴장을 하였습니다. 면회시간이 되어 유리창 너머로 오른쪽 눈에 안대를 하고 휠체어를 탄 채로 들어오는 정경심 교수의 모습을 보니 가슴이 무너져 내렸습니다. 아내는 면회 내내 제 손을 꽉 잡으며 억지로 울음을 참느라 노력했고요. 이러한 저희 부부의 마음을 헤아렸는지 정경심 교수는 “다들 저를 보면 어쩔 줄 모르는 표정을 짓는데 저는 괜찮다”고 하면서 면회시간 내내 애써 밝게 웃는 모습을 보여 주어 저희 부부의 마음이 더욱 아렸습니다.
정경심 교수의 모습은 상상하지 못할 정도로 많이 야위었습니다. 무엇보다 허리와 등의 2차례의 수술 후 반드시 요구되는 물리 치료를 위한 형집행정지 신청이 불허되어 하지가 마비가 되고 다리 힘을 잃어 걷지를 못해 휠체어 신세를 지고 있었습니다. 냉방시설이 전혀 없는 구치소의 고열로 인해 얼굴은 빨갛게 상기되고 부어 있었습니다. 수건을 찬물에 적셔서 몸에 둘러 체온을 낮추고 있는데 전기가 자주 나가 그나마 있는 선풍기도 사용하지 못할 때가 있다고 합니다. 원래부터 문제가 심한 오른쪽 눈에 결막염이 생겨 두터운 안대까지 하고 있었습니다.
너무나 슬퍼하는 저희 부부의 모습을 보더니 “임교수님 내외분 면회 온다는 소식 듣고 오늘은 나름 머리도 손질하고 나왔어요” 라고 밝게 웃어 주시더니 구치소 생활 근황도 전해 주셨습니다. 지난 3년간의 수감생활 동안 하나님을 믿게 되어 카톨릭 신자가 되었다고 합니다. 성경을 읽고 묵상하며 “하나님께서 왜 나에게 이런 환경을 주셨을까?”를 생각하며 받아들이고 감사하려 노력하고 있다고 합니다. 동양대 교수로서의 역할을 더 이상 할 수 없지만 영문학자로서 사회에 기여할 수 있는 길을 생각하고 있다고 합니다. 저희 부부와의 추억을 떠 올리며 좋은 지인들과 함께 식사하며 담소를 나눌 수 있는 일상이 얼마나 행복하고 감사한 일인지도 깨달았다고 합니다. 사랑했던 제자들의 소식을 나누며 변함없는 제자 사랑의 마음을 보여 주었습니다.
특히 법정에서 사실과 다른 불리한 증언을 하고나서 이제 와서 후회하고 진술을 번복하고 싶어하는 제자를 향한 애틋한 마음을 표현 할 때는 같은 교수로서 마음이 아팠습니다. 제게 늘 입버릇처럼 “우리 **가 아름다운 인생을 만들어 가는 것을 돕는 것이 나의 기쁨이라고” 말할 정도로 무척이나 아꼈던 제자였기 때문입니다.
제가 정경심 교수에게 할 수 있는 유일한 이야기는 “언젠가는 교수님이 학생들을 얼마나 사랑하는 훌륭한 교수 였는지 사람들이 알아줄 수 있는 날이 꼭 올 테니 힘 내세요”라는 말 뿐이었습니다.
짧은 면회시간이 마치 쏜살처럼 지나가고 1분 남았다는 안내가 나오니 아내와 정경심 교수는 유리벽을 사이에 두고 서로의 손을 맞대고 눈물을 글성이며 마지막 인사를 했습니다. 시간이 되어 마이크가 끊어져 소리가 안 들리고 교도관이 문을 열고 들어오자 정경심 교수는 얼른 종이에 무언가를 써서 창에 붙여 보여 주었습니다. “고마워요”라는 작별인사 였습니다. 끝까지 웃음을 잃지 않으려 애쓰던 정경심 교수가 마지막 눈인사 까지 하고 교도관이 휠체어를 돌려세우고 떠나 시야에서 사라지자 아내는 참았던 눈물을 펑펑 쏟아내며 통곡을 하였습니다. 제가 할 수 있는 것은 하염없이 우는 아내를 안아 보듬어 주는 것 뿐이었습니다.
오늘 저희 부부가 본 정경심 교수의 모습은 가슴이 아파 어쩔 줄 모르는 저희 부부를 배려하여 면회시간 내내 힘을 내어 웃는 모습을 보였지만 육체적으로 정신적으로 너무나 약해진 모습이었습니다. 제가 법은 잘 모르지만 관련 규정과 교정 실무에 의하면 형기의 65-70%가 지나면 통상 가석방이 된다고 합니다. 하지만 4년의 형기 중 이미 3년을 채운 정경심 교수의 경우 서울구치소 차원에서는 가석방 대상자로 선정되어 법무부에 심사가 의뢰되었으나 불허가 되었다고 합니다. 지금 정경심 교수는 허리, 등, 눈, 머리 등 여러 곳이 매우 심각하게 아픈 상황이라 인도적인 차원에서라도 배려의 대상이 되어야 한다고 생각이 듭니다. 그리고 대법원의 판결을 존중하여 이미 대국민 사과의 메시지도 낸 상태입니다.
정부가 이제는 다른 어떤 고려도 없이 자연인 정경심의 관점에서 형집행 일시정지 던지, 가석방이던 사면이던 어떤 형식으로 라도 정경심 교수가 구치소에서 나오게 되어 더 늦기 전에 질병을 제대로 치료 받고 궁극적으로 건강한 모습으로 사회에 봉사할 수 있는 기회를 갖게 되었으면 좋겠습니다.
Electric youth _ Debbie Gibson
1989년 2번째 앨범 수록곡으로 전세계적인 메가히트곡.
1970년생인 데비깁슨은 1986년 첫앨범부터 작사/작곡 및 프로듀스 능력까지 갖춘 싱어송 라이터로 데뷔했다.
이 곡 역시 그녀가 작사/작곡 및 프로듀싱했다.
현재까지도 꾸준히 음반 취입과 연기활동을 병행하는 셀럽의 삶을 살고 있긴 한데 이 곡만 원히트 원더로 기억되기 때문에 현재의 국제적인 인지도는 그리 높진 않은 편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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Oh-woah
Zappin' it to you, the pressure's everywhere
Goin' right through you
The fever's in the air, oh yeah, it's there
Don't underestimate the power of a lifetime ahead
Electric youth, feel the power, you see the energy
Comin' up, coming on strong
The future only belongs to the future itself
And the future is electric youth
It's true, you can't fight it, live by it, the next generation
It's electric
We've got the most time to make the world go 'round
Oh, can you spare a dime?
Place your bet on our sound, come back to town
Don't lose sight of potential mastermind
Remember when you were young
Electric youth, feel the power, you see the energy
Comin' up, coming on strong
The future only belongs in the hands of itself
And the future is electric youth
It's true, you can't fight it, live by it, the next generation
It's electric
We do what comes naturally (naturally)
You see now, wait for the possibility
Don't you see a strong resemblance to yourself? (oh)
Don't you think what we say is important?
Whatever it may be, the fun is gonna start with me
I'm bringing it back
Electric youth, feel the power, you see the energy
Comin' up, coming on strong
The future only belongs to the future itself
And the future is electric youth
It's true, you can't fight it, live by it, the next generation
It's electrifyin'
Ooh-ooh-ooh-ooh-ooh
Ooh-ooh-ooh-ooh-ooh
Ooh-ooh-ooh-ooh, woah, woah
Woah-oh-oh-oh
Ooh-ooh-ooh-ooh-ooh
Ooh-ooh-ooh-ooh-ooh
Ooh-ooh-ooh-ooh, woah, woah
Take it, Fred!
Ooh, woah-oh-woah
Hoo!
Electric youth, feel the power, you see the energy
Comin' up, coming on strong
The future only belongs in the hands of itself
And the future is electric youth
It's true, you can't fight it, live by it, the next generation
It's electric, it's electric, it's electric
Electric youth, feel the power, you see the energy
Comin' up, coming on strong
The future only belongs to the future itself
And the future is electric youth
It's true, you can't fight it, live by it, the next generation
Inflation, flirtation, relaxation, elation
Generation of an electric youth
은룡의 등에 올라(銀の龍の背に乗って)
2003년 대히트한 드라마 '닥터 코토의 진료소'의 주제가. 나카시마 미유키(中島みゆき)의 노래이며 가수 본인의 작사/작곡이다.
드라마와 마찬가지로 노래도 대히트를 했다.
닥터 코토의 진료소는 2003년도에 히트 이후 2006년도에 시즌2가 만들어졌다. 2022년 16년만에 영화화되서 개봉됐다.
영화에서도 이 노래는 엔딩 주제곡으로 쓰여졌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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あの蒼ざめた海の彼方で 今まさに誰かが傷んでいる
まだ飛べない雛たちみたいに 僕はこの非力を嘆いている
急げ悲しみ 翼に変われ
急げ傷跡 羅針盤になれ
まだ飛べない雛たちみたいに 僕はこの非力を嘆いている
저 푸른 바다 저편에 지금 누군가 상처를 입었네
아직 날지 못하는 병아리 마냥 나는 이 무력함을 한탄하고 있어.
슬픔이여 어서 날개로 변해라
상처야 어서 나침반이 되어라
아직 날지 못하는 병아리 마냥 나는 이 무력함을 한탄하고 있어.
夢が迎えに来てくれるまで 震えて待ってるだけだった昨日
明日 僕は龍の足元へ崖を登り 呼ぶよ「さあ、行こうぜ」
銀の龍の背に乗って 届けに行こう 命の砂漠へ
銀の龍の背に乗って 運んで行こう 雨雲の渦を
꿈이 마중나와 줄때까지 떨며 기다릴뿐이었던 어제
내일 나는 용의 곁에 벼랑을 기어올라 외칠거야 「자! 가자」
은룡의 등에 올라 전하러가자 생명의 사막으로
은룡의 등에 올라 옮겨가자 비구룸의 소용돌이를
失うものさえ失ってなお 人はまだ誰かの指にすがる
柔らかな皮膚しかない理由は 人が人の傷みを聴くためだ
急げ悲しみ 翼に変われ
急げ傷跡 羅針盤になれ
まだ飛べない雛たちみたいに 僕はこの非力を嘆いている
잃을 것도 없이 다 잃고서도 사람은 또 누군가에게 매달리지
부드러운 피부밖에 없는 이유는 사람이 사람의 상처를 듣기 위함이야
슬픔이여 어서 날개로 변해라
상처야 어서 나침반이 되어라
아직 날지 못하는 병아리 마냥 나는 이 무력함을 한탄하고 있어.
わたボコリみたいな翼でも 木の芽みたいな頼りない爪でも
明日 僕は龍の足元へ崖を登り 呼ぶよ「さあ、行こうぜ」
銀の龍の背に乗って 届けに行こう 命の砂漠へ
銀の龍の背に乗って 運んで行こう 雨雲の渦を
먼지같은 날개라 해도, 새순처럼 보잘것 없는 손톱이라 해도
내일 나는 용의 곁에 벼랑을 기어올라 외칠거야 「자! 가자」
은룡의 등에 올라 전하러가자 생명의 사막으로
은룡의 등에 올라 옮겨가자 비구룸의 소용돌이를
銀の龍の背に乗って 運んで行こう 雨雲の渦を
銀の龍の背に乗って
銀の龍の背に乗って
난세일기(亂世日記)
윤석열이 집권한 현재를 난세로 정의하고, 난세에 본인의 일기를 쓴 것이다.
정치적 내용이 일부 있기는 하지만 주로 도올 선생의 평소 관심사와 얽힌 내용이 대부분이고 그것이 일기라는 형식을 빌려 쓰인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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p151 기독교의 역사는 갑질의 역사
인류문명사에서 기독교의 역사는 "갑질"의 역사이다. 어느 시공에 떨어지든지 자기만이 옳고 타자는 무조건 개종이나 구원의 대상이 되어야 한다는 명제를 폭압적으로 강요하는 십자군신학의 역사이다. 그런데 이러한 논리의 부당성을 기독교신앙을 수용한 이들은 느끼지 못한다. 은재 신석구(1875~1950) 목사는 깊은 유학자의 소양 속에서 이러한 논리의 부당성을 감지한 심오한 신앙인이었다.
기독교적 삶의 논리는 하여튼 껄끄럽다. 껄끄럽다라는 것은 비인과적이고 비상식적이고 역설적이라는 것이다. 이에 비하면 토착적인 삶은 인과적이고 상식적이고 순리적이라는 것이다.
p155 결곡 기독교의 최대 문제는 "배타"
기독교신학의 최대의 문제는 배타Exclusiveness 이다. 사랑과 용서와 관용을 입으로는 말하면서도 실내용에 들어가면 배타를 떠나지 못한다. 배타의 본질은 독선이다. 나의 생각만이 옳고 타인의 생각은 다 틀리다는 것이다. 그것은 결국 기독교교회 속에서만 구원이 존재한다고 믿는 배타적 구원론으로 골인하게 된다. 그러한 구원론이 지배한 것이 서양의 중세기역사였다. 우리나라에 들어온 것은 실상 기독교가 아니라 서양의 중세기 교리였다. 그래서 제사를 우상숭배로 보는 시각이 생겨났고 많은 유학자 기독인들이 희생되었다. 그러니까 우리나라의 기독교는 배타와 함께 들어왔고 배타로 일관되었다. 그것이 오늘날 매우 폭력적인 대형교회로 발전하였고, 또 친미 정치세력으로 발전하였다. 바이든의 정치이념은 러시아와 중국을 견제하자는 배타의 이념이다. 이러한 이념의 확장의 동반자가 키시다의 일본이고 그 동반자의 말잡이가 윤석열이고, 윤석열의 하수인들이 한국의 친미 대형교회 세력이다.
p193. 동서양 신론의 차이
(마테오 릿치, 천주실의 중)
凡物不能自成, 必須外爲者, 以成之. 樓臺房屋不能自起, 恒成於工匠之手. 知此, 則識天地不能自成, 定有所爲制作者, 卽吾所謂天主也.
대저 사물이라고 하는 것은 스스로 자기를 이루어나갈 수가 없는 것입니다. 반드시 밖으로부터 작위를 가하는 존재가 있어야만 그것은 이루어질 수 있는 것입니다. 누각 하나 가옥 하나가 스스로 세워지는 것을 본 적이 있습니까? 그것은 항상 목수의 손을 빌어서만 만들어지는 것입니다. 이 명백한 사실을 깨닫는다면 천지가 스스로 이루어질 수 없다는 것을 인식할 수 있고, 반드시 그것을 만든 제작자가 있다는 것을 아실 수 있을 것입니다. 이 제작자가 바로 저 마테오 릿치가 말씀드리는 하느님(=天主)이올시다.
(주역, 계사 중)
그러므로 하느님이라 하는 신묘한 존재는 구체적인 장소에서 고착되지 않으며, 그 변화무쌍한 운동은 실체화될 수 없는 것이다. 그것은 결국 존재자가 아니다. 끊임없이 음과 양이 번갈아 들면서 조화로운 법칙을 만들어가는 것, 그 자체가 궁극적인 하느님의 모습일 뿐이다. 그러므로 우리 인간은 하느님의 도를 나의 실존 내로 계승하여 구현해야 한다. 그것이 바로 선(the Good)이요 도덕(Morality)이다. 그 하느님이 도를 나의 존재 내에서 형성해나가는 것이 나의 본성(Human nature)이다.
故神无方而易无體. 一陰一陽之謂道. 繼之者, 善也; 成之者, 性也.
p229
수운은 아편전쟁으로 이미 중국이 몰락하고 있고, 중국이 몰락하면 조선왕조가 몰락하는 것은 뻔한 이치라고 판단했다. 다산은 끝까지 조선을 살리려 했다. 수운은 조선의 멸망은 조선민중의 구원이라고 생각했다. 왕조는 멸망해도 백성은 멸망하지 않는다. 난군亂君은 있어도 난국亂國은 없다.
왕조를 멸망시켜야 할 판에 기독교를 수용한다는 것은 왕조보다 더 지독한 억압의 수직구도를 새로 도입하는 것이다. 왕조는 권위의 억압구조를 가지고 있기 때문에 자기갱생을 할 수가 없는 것이다. 민중이 주체가 되는 새로운 평등사회를 만들 수가 없는 것이다. 그런데 기독교의 하나님은 "하늘 꼭대기 옥경대에 앉아있는 상제꼴로서 세상사람들의 삶을 다 관장한다고 말을 하니 허무지설虛無之說 아닐런가!" 또 하나의 픽션이요, 왕보다 더 무서운, 세계 전체를 파멸로 휘몰아갈 수직과 연역의 폭력이다. 이것을 수용하면 이 민족은 개화하는 것이 아니라 파멸의 길로 들어설 뿐이다. 이 세계는 소유주가 있어서는 아니 된다. 릿치가 말하는 천주는 우주의 설계자로서 소유를 주장하고 있다. 여기에 속지 말라!
다산은 세계를 몰랐다. 수운은 세계를 알았다. 다산은 주어를 도입했고 수운은 주어를 해소시켰다. 다산은 수직적이었고 수운은 수평적이었다. 다산은 기독교교리를 만났지만, 수운은 하느님(=천주天主)을 직접 만났다.
p243 수운의 문제의식 : 수직적 종교사유와 수직적 권력구조의 상응성
서양의 종교는 "초월적 절대자의 존재성"을 전제하고 그 존재에게 나의 운명을 맡기는 절대적 복속을 "신앙Belief"으로 삼는다. 그러나 동학은 "무위이화無爲而化"를 전제로 한다. 그것은 하느님 자체가 세계와의 관계에서 조작적인 개입(爲)이 없이 스스로 그러한 변화를 추구한다는 것이다. 하느님과 인간은 세계생성의 동반자일 뿐이다. 하느님은 인격적인 존재Being인 동시에 철저히 비인격적인 생성Becoming이다.
p246 동학은 인류종교사에서 케리그마가 없는 유일한 종교
그런데 동학경전은 타 종교경전과 견주어 말할 수 없는 유니크한 특징이 있다. 그거슨 "케리그마Kerygma"의 필터를 거치지 않았다는 사실이다. "케리그마"란 20세기 초 성서신학에서 생겨난 말이긴 하지만, 그것은 모든 종교영역에서 적영될 수 있는 유용한 개념이다. 케리그마는 문자 그대로 "선포Proclamation"라는 뜻인데, 초기신봉자들(초대교회)이 자기들의 교주에 대해 갈망하는 이미지를 선포하기 위하여 경전의 언어를 구성한다는 뜻이다. 예수의 경우, 그 케리그마는 "그리스도" 즉 구세주(=메시아), 혹은 "하나님의 아들"이라는 선포이다. 이 케리그마의 필터를 거치면 인간 예수, 역사적 예수Historical Jesus는 사라지고, 케리그마 즉 그리스도라는 이미지, 즉 초대교회의 갈망만 남는다. 다시 말해서 2천 년 동안의 기독교의 역사는 역사적 예수를 말한 것이 아니라, 초대교회에서 형성된 그리스도를 선포한 것이다. 사실 오늘날의 기독교라는 것은 이런 허구화된 예수를 말하고 있는 것이다. 케리그마가 경전을 지배한 결과인 것이다.
케리그마는 허구, 수운의 삶은 시종 있는 그대로
최수운은 기독교(=천주교=서학)와의 대결에서 모든 신비나 이적이나 예언, 사람을 홀리게 만드는 "조화造化"를 거부하고 "성誠, 경敬, 신信"이라는 상식적 일상도덕의 가르침을 주장했다. 그래서 그는 그의 가르침에 역행하는 신비주의자들의 "흘림"의 위태로움을 잘 알고 있었고, 이들이 초기교단을 형성하게 되면 그의 가르침은 그들의 케리그마에 의하여 왜곡되고 타락되고 신비화되리라는 것을 정확히 예견했다.(「흥비가」). 모든 대각의 종교운동은 초기집단을 노리는 사기꾼들에 의하여 왜곡되는 것이다.
최수운은 "지식의 허구성"을 잘 알고 있었다. 그의 후계자로서 지식이 출중한 인물은 사도 바울과 같이 오히려 케리그마를 조직적으로 형성하여 동학의 진로를 바꿀 우려가 있었다. 그가 한문으로만 저술을 하지 않고 동시에 한글가사를 지었다는 것도 민중에게 직접 개벽의 복음을 전파해야 한다는 사명을 가졌기 때문이다. 다산이 단 한 건의 한글서한이나 시조 한 수도 남기지 않았다는 사실, 그의 형 약전이 서민을 위한 서민생활의 『자산어보』를 집필하면서도 물고기의 한글이름 한 자도 써넣지 않았다는 것은 그들의 의식구조가 어디까지나 망해가는 조선왕조의 기력회복(목민牧民)에 머물렀다는 것을 의미한다. 수운의 문제의식과는 소양지판이었다.
Dr. 코토의 진료소 Movie(2022)
2022년 12월16일 일본 현지 개봉. 아직진 우리나라에선 상영되지 않았다. 우리나라에도 이 드라마의 팬들이 많아서 영화가 들어오지 않을까 싶긴 했는데 2023년 7월21일 DVD와 블루레이로 발매되고 OTT에도 풀린 걸 봐선 국내에선 극장에선 못볼 것 같다.
드라마와 마찬가지로 따듯한 내용이다. 드라마 종영 이후 16년만이라 만들어 준 것만 해도 고맙다.
윤석열, 고양이 뉴스 가짜뉴스로 고발
https://n.news.naver.com/mnews/article/003/0011991012?sid=100
폴란드를 방문한 윤석열은 7월13일 폴란드 교민과의 간담회를 가졌다.
이 자리에 참석한 기업가 교민 중 한명이 7월20일날 DP(Dprime)게시판에 이런 글을 올림.
https://dprime.kr/g2/bbs/board.php?bo_table=sisa&wr_id=1026941
이 내용을 본 사람들이 작성자가 걱정되어 사진등 내용을 삭제하는게 어떠냐?라는 걱정스러운 조언을 해줬고, 작성자도 걱정이 됐는지 사진과 내용을 삭제함. 하지만 게시글 자체를 삭제하진 않아서 댓글등은 그대로 남은 상태.
그런데, 이 글을 본 네티즌 중 하나가 다른 커뮤에 이 글을 퍼다 날라서 현재까지 남아있음.
인터넷에 이렇게 증거가 버젓이 남아있는데 이걸 가짜뉴스로 고발하는 여당은 과연 윤석열을 보호하려는건가 아니면 엿먹이려는건가?
문과 남자의 과학 공부
과학 교양서적을 어느 정도 봐서 그런지 그리 새로울 건 없지만 환원주의적 시각을 인문학에 적용하는 작가의 생각에서는 참고할 부분이 있었다.
재밋었다. 이 책을 보고 나니 언급된 브라이언 그린의 <엔드 오브 타임>과 몇몇 책을 봐야겠다는 생각이 든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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4. 단순한 것으로 복잡한 것을 설명할 수 있는가 (화학)
p195
과학자는 드러내 놓고 환원주의 연구 방법을 쓴다. 화학은 물리학으로, 물질은 입자로 거의 완벽하게 환원한다. 그러나 그걸 두고 물리학 패권주의라고 비난하는 사람은 없다. 양자역학 덕분에 화학의 세계는 완전해졌고 화학산업은 더 발전했다. 그러나 인문학자는 환원주의를 배격하기도 한다. 환원주의는 생물학과 인문학의 접점에서 특히 날카로운 마찰을 일으켰다. 우리나라 하계도 예외가 아니다. 2009년 7월 한국과학철학회와 서양근대철학회를 비롯한 여러 학회가 국립과학관에서 '다윈 200주년 기념 연합학술대회'를 열었다. 이 행사는 11월 서울대사회과학연구원/통섭원/한국과학기술학회가 이화여대에서 연 공동 학술 심포지엄으로 이어졌다. 주제는 '부분과 전체 : 다윈, 사회생물학, 그리고 한국'이었다. 여기서 환원주의 논쟁이 불타올랐다. 어떤 인문학자는 아래와 같이 사회생물학을 비판했다.
『인간의 역사과정을 물리적 역사과정에서 분리해야 할 근본적인 차이는 없다. 모든 것은 궁극적으로 물리법칙으로 환원할 수 있다. 인간의 문화도 인과적 설명으로 과학과 연결해야 온전한 의미를 가진다. 사회학은 인류학에, 인류학은 영장류학에, 영장류학은 사회생물학에 포섭된다. 에드워드 윌슨은 이렇게 주장했다. 그렇다면 사회생물학은 왜 물리학에 통합하지 않는가? 사회과학이 사회에서 마음과 뇌로 이어지는 인과적 설명망을 만들어내지 못해서 과학 이론의 본질을 결여하고 있다는 지적이 옳다면, 물질에서 생명으로 이어지는 인과적 설명망을 만들어내지 못하는 사회생물학도 과학 이론의 본질을 결여하고 있는 것 아닌가. 인문학이든 과학이든 학문을 이런 식으로 비판해서는 안 된다. 사회과학자더러 뇌의 전달물질을 연구해 사회 행동이나 문화와 연계하라는 것은 불가능한 일을 하라는 요구다. 사회생물학자더러 물리학을 연구해 물질 수준의 토대에서 동물 행동을 설명하라고 하는 것도 마찬가지다. 게다가 진화의 수준이 변하면 새로운 성질이 <창발(創發, emerge)>하기 때문에 하위 수준을 연구한다고 해서 반드시 상위 수준을 설명할 수 있는 것도 아니다. 인간은 다른 동물과 다른 차원의 언어를 사용하고 차원이 다른 의미를 추구한다. 유전자를 연구해서 문화를 설명할 수는 없다.』
분노의 감정을 드러낸 이 주장의 핵심은 두 문장으로 요약할 수 있다. 첫째, 인문학을 생물학으로 환원할 수 없다. 둘째, 인문학을 과학과 통합할 수 없다. 환원도 통합도 안 될 일이다. 인문학은 인문학이고 과학은 과학일 뿐이다. 그런 뜻이다.여기서 통합이라는 말이 왜 나오는지는 잠시 뒤에 말하겠다. 나는 '지금은' 이 반론이 옳다고 본다. 하지만 '영원히' 맞을 것이라고 생각하지는 않는다. 인간의 어떤 행위도 물리법칙으로 설명하지는 못한다. '아직' 설명하지 못하는지 원리적으로 불가능한지, 나는 판단하지 못하겠다. 인간의 심리와 행동을 물리법칙으로 남김없이 설명할 수 있는 날이 결코 오지 않을 것이라고 확언할 근거는 없으니까.
p199
만사가 그렇듯 환원주의도 위험 요소가 있다. 가장 중대한 위험은 복잡한 것을 설명한다는 원래 목적을 잃어버리는 것이다. 단순한 것을 연구할 가치가 없다는 말이 아니다. 가장 단순한 수소의 원자 구조를 파악하는 일이 중요하다는 걸 누가 부정하겠는가. 그러나 우주의 구조와 운동법칙을 설명할 수 있어야 수소의 원자 구조를 아는 것이 온전한 의미를 가진다는 것 또한 분명하다. 복잡한 것을 설명하는 임무를 수행하려면 연구자가 자신이 몸담은 세부 학문의 경계를 넘어 다른 분야의 연구 성과를 습득하고 다른 분야의 연구자와 소통해야 한다. 설명하려는 대상이 우주든 사회든 사람이든 마찬가지다. 그래야 환원주의가 훌륭한 연구방법론이 될 수 있다. 윌슨은 그런 노력을 가리켜 '통섭(統攝, consilience)'이라고 하면서 다음과 같이 말했다.
『과학과 인문학을 연결하는 것은 지성의 가장 위대한 과업이다. 오늘날 우리가 목겨하는 지식의 파편화와 철학의 혼란은 실제 세계의 반영이 아니라 학자들이 만든 것이다. 통섭은 통일統一(unification)의 열쇠다. 분야를 가로지르는 사실들과 사실에 기반을 둔 이론을 연결해 지식을 '통합'해야 한다. 학문의 갈래를 가로지르는 통섭의 가능성에 대한 믿음은 소수의 과학자와 철학자가 공유하는 형이상학적 세계관에 지나지 않지만 과학이 지속적으로 성공했다는 사실이 그것을 지지해 준다. 인문학에서도 힘을 발휘한다면 더 확실한 지지의 증거가 될 것이다. 통섭은 지적 모험의 전망을 열어 주고 인간의 조건을 더 정확하게 이해하도록 이끈다.』
미션 임파서블 7 데드 레코닝 Part1(Mi7 Dead Reckoning Part1)
말이 필요없는 작품. 난 영화시간표를 잘못 봐서 런닝타임이 2시간이 안되는 줄 알았다.
근데 보고 나니 3시간 가까이 지나 있어서, 잉? 했다.
중간에 아주 잠깐 지루한 부분이 있긴 했지만 3시간 가까운 런닝타임이 어떻게 지나갔는지 모를 정도로 스피디하고 박진감이 넘친다.
기존 시리즈의 히로인인 일사와 알라나에 더해 새로운 히로인인 그레이스(헤일리 앳웰, 캡틴 아메리카의 여자 파트너인 카터)와 킬러인 패리스(폼 클레멘티프, 가오갤의 맨티스)가 나오는데 둘다 모두 매력적인 캐릭터다.
2부가 너무나 기대된다.
서울-양평 고속도로 논란 간단정리.
https://m.khan.co.kr/economy/economy-general/article/202104301337001/amp
서울-양평 고속도로 예타 통과…이르면 2025년 착공
서울-양평 고속도로는 양평군민들의 숙원사업으로 2008년부터 지속적으로 요구되었으나 경제성이 없어서 계속 반려되다가, 박근혜 정부 시기인 2017년 1월(정확히는 박근혜 탄핵 이후라 황교안 대행 시절)에 국토교통부 ''고속도로 건설 5개년 계획(2016~2020)'에 반영된다.
이후 위 기사처럼 서울-양평 고속도로는하남시 감일동(오륜사거리)에서 경기도 양평군 양서면을 잇는 27Km, 4차로 도로로 총 사업비는 1조7695억으로 예비타당성 조사를 통과하여 2025년에 착공하는 것이 계획되었다.
내년인 2024년부터 예산확보등을 통해 착공계획을 세워야하는데, 알려진데로
https://www.nocutnews.co.kr/news/5971095
갑자기 고속도로 노선안을 변경해버린다.
변경된 노선은 기존보다 2Km의 길이가 추가되기 때문에 공사비가 대략 1400억쯤 더 들것으로 예상된다. 원 계획으로도 예타를 가까스로 통과했기 때문에 공사비 1400억이 더들면 당연히 예타 통과가 안될 것이다. 그리고 노선이 변경되면 예타및 환경영향평가를 다시 실시해야 한다. 즉, 국토부 맘대로 그냥 변경해도 안되는 사안이다.
알고보니 거기에 축구장 5개 크기만큼의 김건희의 땅이 있었고, 누가 봐도 김건희 땅의 지가 상승을 위해 고속도로 노선을 변경한 전형적 권력형 비리다.
그리고 실제로 저 변경된 노선으로 가게 되면
위 분석자료처럼 교량 15곳과 터널 6곳이 늘어나고 해당 교량, 터널 공사비로도 1000억 가량이 증가한다.
즉, 총 공사비가 최소 2400억 가량 증가하고 이에 대해 예타, 환경영향평가를 다시 하면 몇년의 기간과 100억이상의 비용이 다시 소요된다.
위 자료에 대한 증빙이 되는 국토교통부 자료는 아래 링크에서 찾아볼 수 있다.
이 노선 변경의 이유는 그저 김건희 땅의 지가 상승을 노리고 국책사업을 지 멋대로 변경한 배임, 직권남용으로 윤석열 대통령에 대한 명백한 탄핵 사유다. 그래서 원희룡이 어떻게든 덮으려고 백지화등 생쑈를 하고 난리를 치고 있는거다.
어떤면에선 참 서글프다. 저런 도둑넘들을 뽑아줘서 대한민국이 골병이 들고 있다.
박민식 국가보훈부 장관 망언
https://n.news.naver.com/mnews/article/079/0003787988?sid=100
박민식 장관 "백선엽 장군 친일파 아냐… 장관직 건다"
이 새끼는 최단기 장관직 보유자가 되고 싶은겐가? 백선엽이 지 입으로 지가 친일행적을 했다고 고백까지 했구만 뭔 개소린지.
https://www.hani.co.kr/arti/politics/defense/953417.html
백선엽 지가 쓴 회고록에 다음과 같은 구절이 나오면서 자신의 친일행적을 인정했다.
(간도특설대는) 소규모이면서도 군기가 잡혀 있던 부대였기에 게릴라를 상대로 커다란 전과를 올렸던 것도 당연한 일이었다. 우리들이 추격했던 게릴라 중에는 많은 조선인이 섞여 있었다. 주의주장이 다르다고 해도 한국인이 독립을 위해 싸우고 있었던 한국인을 토벌한 것이기 때문에 이이제이를 내세운 일본의 책략에 완전히 빠져든 형국이었다. 그러나 우리가 전력을 다해 토벌했기 때문에 한국의 독립이 늦어졌던 것도 아닐 것이고, 우리가 배반하고 오히려 게릴라가 되어 싸웠더라면 독립이 빨라졌다고도 할 수 없을 것이다. 그렇다 하더라도 동포에게 총을 겨눈 것은 사실이었고, (그 때문에) 비판을 받더라도 어쩔 수 없다.<대 게릴라전-미국은 왜 패배했는가>(1993년, 일본어판)
민식아 어여 물러나라. 별 미친새끼를 다 보겠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