I am a poor wayfaring stranger
While traveling thru this world of woe
Yet there's no sickness, toil nor danger
In that bright world to which I go

나는 가난한 이방인 여행자

풍진 세상을 여행하는 중이죠

이제는 아프지도, 고생스럽지도, 위험하지도 않은,

그 밝은 세상으로 가고 있어요.

 

I'm going there to see my father
I'm going there no more to roam
I'm only going over Jordan
I'm only going over home

나는 아버지를 보러 가는 중이죠.

나는 더 이상 방황하지 않아도 될 그곳에 가는 중이에요.

나는 요단강 너머에 집으로 가는 중입니다.


I know dark clouds will gather around me
I know my way is rough and steep
Yet beauteous fields lie just before me
Where God's redeemed their vigils keep

어두운 구름이 나를 둘러싸겠죠.

가는 길은 거칠고 가파를거에요.

하지만 이젠 내 앞엔 신의 가호가 나를 지켜주시는 어여쁜 길이 놓여있어요.

 

I'm going there to see my mother
She said she'd meet me when I come
I'm only going over Jordan
I'm only going over home

 

나는 어머니를 보러 가는 중입니다.

내가 오면, 어머니는 나와 만날거라고 하셨어요.

나는 요단강 너머에 집으로 가는 중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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요단강 너머라는 표현은 친숙한 클리셰인데, 우리말 표현으로는 황천길 같은게 있다.

이 곡은 미국의 전통가요로, 미국 남북전쟁 이후부터 대중에 알려지기 시작했다고 알려져 있다. 몇 가지 커버가 있는데, 개인적으론 미국의 정통 포크 및 컨트리의 싱어송 라이터인 에밀루 해리스의 곡이 가장 맘에 든다.

https://news.v.daum.net/v/20200703190600149

 

검사장들, 9시간 난상토론 종료..윤석열, 선택만 남았다

[서울=뉴시스] 김재환 이창환 기자 = 추미애 법무부장관의 '검·언 유착'과 관련된 수사지휘를 수용 여부를 논의하는 검사장회의가 약 9시간 만에 종료됐다. 전국 검사장회의는 3일 오전 10시부터

news.v.daum.net

 

오늘 열린 검사장 회의의 목적은 누가 봐도 명확하다.

 한동훈 검사 - 이동재 기자가 유시민 이사장을 신라젠 주가조작으로 엮으려 했던 검언유착 사건이 이철 씨에 의해 폭로되고, 이 사태가 커져서 중앙지검 감찰부에 이 사건이 배당되어, 한동훈 검사와 이동재 기자를 수사하려 한다(이 사건과 관련되어 한동훈 검사장은 직위해제되어 연수원 대기중이며, 이동재 기자는 채널A에서 해고되었다. 곧 피의자가 될 한동훈은 당연한 조치이고, 채널A는 꼬리 자르기를 한 것으로 보인다).

 그러자 이에 (이 사건과 연루 가능성이 높은) 윤석열 검찰총장이 처음에는 이 사건을 인권부로 배당을 옮기려 시도하다가, 추미애 법무부 장관에게 1차 제지를 당한다. 그러자 윤석열은 2차로 이 사건에 대해 수사자문단이라는 우회로를 통해 이 사건을 다시 물타기 하려 한다.

 결국 추미애 법무부장관은 지휘권을 발동하여, 윤석열에게 더 이상 이 사건에 관여하지 말고 중앙지검이 계속 이 수사를 계속하라고 지시한다.

 이에 윤석열은 전국의 모든 검사장(검사장은 관행상 차관급으로 취급한다. 그런데 이상하지 않은가? 법무부 장관 아래에 검찰총장이 있으니, 검찰총장이 차관급인데, 그 밑에 검사장이 차관급으로 취급된다. 그러니 검찰총장이란 직위 자체가 관행상 장관급으로 간주되었다는 의미가 된다. 정해진 직급 체계를 무시한 불합리한 관행이 이미 검찰이라는 조직에 있다는 의미다)을 불러 오늘 회의를 9시간 동안 진행했다.

 회의의 목적은 추미애 법무장관이 발동한 지휘권에 대해 윤석열이 반발한 것으로, 자기 휘하의 검사장 전부를 불러서 세를 과시함과 동시에 조직적 항명을 하겠다는 의도인 것이 명확하다.

 확실한 의도에도 불구하고, 9시간이나 회의를 끌었다는 점에서 검찰 내부의 상당한 갈등이 있었음을 쉽게 예상할 수 있다.

 검찰의 세를 과시하기 위해선, 검사장들이 윤석열의 명을 받을어서 추미애 장관의 지휘권 발동에 대해 (비난)성명을 발표하고, 더 나아가서 전국 일선 검사들도 이에 동의하는 성명 혹은 행동을 보여주어야 한다.

 보통 조직에서 하극상이 용인될 수 있는 상황은, 상급자가 하급자에게 불합리한 지시나 상급자의 이해관계가 걸린 부당한 지시를 내릴 때이다.  하지만, 이번 한동훈-이동재 검언유착에 대해 윤석열이 나서서 봐주기를 시도하는 것은 분명히 윤석열이 부당한 행동을 하는 것이 명확한 상황이다.

 조직에서 상급자가 하급자가 누가 봐도 불합리한 행동을 할 때, 하급자에게 주의를 주고 그렇게 하지마라는 지시를 하는 것은 너무나 당연한 것이다. 

 그러니 회의를 9시간이 아니라 900시간을 해봤자 추미애 장관의 지휘권 발동에 대해 반발할 명분도 논리도 없으니 회의는 지지부진하고 윤석열은 탁자를 내리치면서 짜증을 내고 검사장들은 눈치만 보며 (아 씨바 이 젓같은 회의는 언제 끝나나 하며) 한숨만 내쉬는 상황이 연출되었음은 회사 생활 몇 년 해본 사람들이라면 다들 눈에 선한 상황일 것이다.

 기레기들은 이런 뻔한 상황을 다 알면서도 혹시나 하며 설레는 마음으로 회의 결과를 기다렸을 것이다(우리 석열이 엉아가 뭔가 보여줄거야 하면서).

 검사들이 이 사태에 반발하는 방법은 조직적인 행동 뿐인데, 일단 명문이 전혀 없고 반항은 정당하지도 않고 잘못하면 여론의 역풍을 맞을 것이 뻔하다. 그리고 조직적인 행동이 발전하다 보면 사보타지에 이어서 총사퇴로 이어질 수 있을텐데, 지금 문재인 정권의 사법개혁 의지로 볼 때, 전국의 검사들이 사표를 쓰면 전부 수리하고 다 새로 뽑을 가능성이 100%가 넘는다고 본다(안 그래도 취업하기 어려운 시기인데, 전국의 검사들을 새로 뽑으면 로스쿨 등 법조계 지망생들은 환호성을 올릴 것이다).

 검사들 대다수는 아마도 합리적이고 사태 파악이 빠른 명석한 사람들이라고 본다. 이미 대세는 90% 이상 기울었다.

 한동훈과 이동재는 제대로 수사받고 재판받으면 콩밥을 면할 길은 없을 것이다. 그리고 윤석열도 이 사건에 연루된 정황들이 보이는데 수사가 진척되면서 공수처로 가기 전에 검찰총장 최초로 기소되서 감옥가는 일도 기대해 볼 만하다.

 대한민국은 지금 70년(사실 일제시대까지 합치면 100년이 넘는다) 이상 묵은 사법적폐가 개혁되는 역사를 실시간으로 목격 중이다.

http://news.kmib.co.kr/article/view.asp?arcid=0014739719&code=61121311&cp=nv

 

2심도 집행유예 받은 홍정욱 딸에게 재판부가 한 당부

외국에서 마약을 투약하고 밀반입한 혐의로 재판에 넘겨진 홍정욱(50) 전 한나라당(미래통합당 전신) 의원 딸 홍모(20)씨가 1심에 이어 항소심에서도 징역형 집

news.kmib.co.kr

 

 이 사건은 대한민국의 정치, 사회의 2가지 면에서 많은 시사점을 가진다.

 

첫째, 정치적인 부분에서는 우리나라 최상층 기득권력이 대한민국에서 얼마만한 힘을 가지고 있는가를 가늠할 수 있다.

작년 초부터 대한민국의 적폐청산의 중심에 섰던 조국 이슈와 비교해 보면, 이 사건을 대하는 언론의 조심스러움의 정도를 체감할 수 있다.

심지어 실형이 선고된 홍정욱 딸의 이름조차 기사에는 나오지 않는다.

홍정욱 씨의 집안의 가계도(인터넷에도 나올 정도로 명문가이다)를 보면 대한민국의 정치,경제의 성골의 가문이란 것을 한눈에 알 수 있다.

대한민국은 현재 귀족사회로 진입중이다. 자본주의가 성숙되면서 부의 집중(현대 자본주의 사회에서 돈은 곧 권력이다)이 강화되면서 자연스럽게 권력의 집중 현상이 생긴다.

독재 정권에서는 정치권력 자체가 무소불위의 권력을 휘두르며 돈 자체를 주무르는 힘을 가지기 때문에 재벌과 같은 초상류층 부를 소유한 가문도 최상층 권력(정치,사법,행정과 같은 공권력)에게는 거역할 수 없었다.

그러나, 민도가 높아지면서 민주주의가 정착되면 정부시스템에 기반한 권력은 분산되고 상호견제가 이루어진다. 그러면 이러한 권력에 비해 수명이 긴 '돈'을 쥔 권력의 힘이 강해질 수 밖에 없다(최근 삼성 등 재벌의 영향력이 점점 강해지는 것도 이런 맥락이다).

이 사건 외에도, 나경원 아들의 예일대 부정입학 의혹은 수사조차 되지 않고 언론은 아예 다루고 있지 않으며, 장제원 의원의 아들의 음주운전 사건에 대해서도 그 사건의 크기에 비해 언론의 노출도가 적고 처벌 자체도 굉장히 약한 것도 다 이런 맥락선상에 있다.

 

둘째, 사회적인 면을 생각해보자.

이번 마약 사건을 일으킨 홍정욱 씨의 딸은 고등학교 시절부터 미국 유학을 간 것으로 보인다. 그리고 그 고등학교는 아버지가 나온 학교이기도 하다. 이 고등학교는 존.F.케네디가 나온 고등학교로 꽤 유명하다. 홍정욱 씨는 이미 어릴때부터 일찍 철이 든 경우인듯 한데, 이 고등학교를 자기가 원해서 어머니에게 부탁해서 간 것으로 알려져 있다. 후에 스탠퍼드 법대를 나온 후, 국내에서 젊은 나이에 국회의원까지 된 경력이 있다.

사실 딸의 마약 사건이 일어나기 전에, 홍정욱 씨는 보수진영에서 10년 내로 대통령 후보로의 가능성까지 거론되는 한마디로 때를 기다리는 잠룡의 위상을 가지고 있던 인물이다(개인적으론 딸의 마약 사건만 아니었다면 가능성이 컸으리라 생각한다).

장녀도 고등학교를 자기가 원해서 갔으리라고 생각하는 건 무리다. 아마도 아버지인 홍정욱 씨의 의중이 많이 반영되었을 것이라 보인다. 이후 대학은 뉴욕에 있는 여자 대학을 갔고, 이번 마약 사건으로 봐선 자신의 뜻과 능력에 맞지 않는 학업을 지속하느라 꽤 스트레스를 받았고, 그래서 마약에 빠져들지 않았나 싶다.

사실 지금은 재벌들이 외국 유학중에 마약 등으로 구설수에 오르는 일이 거의 없지만(진짜 없어서 없는건지 아니면 단속을 잘해서 그런건진 알 수 없다), 1980년대부터 2000년대까진 재벌 3세,4세들의 미국유학 중의 일탈 사건은 매년 신문의 가십란을 오르내리는 단골 레퍼토리였던 때가 있다.

재벌 등 소위 명문가의 자식들이 자신의 뜻에도 맞지 않고 능력에도 맞지 않는 유학생활의 스트레스를 견디지 못하고 술과 마약, 섹스로 일탈하는 경우가 꽤 많았다.

이런 배경을 추측해보면 홍정욱 씨의 딸도 그리 행복한 시절은 보내지 않았으리라고 추측할 수가 있다.

 

대한민국은 민도가 높아지면서 학벌, 가문과 같은 사회적 배경에 대한 가치가 해체되어가고 있지만, 상류층 계급에서는 이런 배경에 대한 견고함이 점점 높아지고 있지 않은가하는 생각이 든다. 특히 일반인들의 재력으로는 쉽게 접근하지 못하는 외국의 유명 보딩 스쿨, 그리고 일부에게만 알려져 있는 해외 대도시 소재의 사립 대학들에 한국인의 비중이 꽤 높다는 것은 그러한 경향을 방증하는 것이 아닐까 싶다.

이러한 권위주의적 사고에 사로잡힌 이들이 대한민국의 리더 pool이 되고, 실제로 이 pool에서 리더들이 나오기 시작하면 대한민국의 계급화와 사회적 경직성이 고착화 될 수 있는 위험성이 높아진다.

인물을 배경과 간판으로 판단하는 것은 그래서 굉장히 위험하다. 특히 선출직을 그런 기준으로 판단하는 것은 그에게 공인된 권력을 부여하기 때문에 더더욱 위험하다.

 

박정희의 딸이라는 이유만으로 박근혜를 뽑았던 대한민국 국민들은 이러한 점에 정말 유념해야 한다.

 

Goodbye Yesterday 生まれ変わった
私が現在ここにいる
ほらね今までより
笑顔が似合うでしょ

어제여 안녕, 새로이 태어난 나는 지금 여기에 있어요

봐요, 지금의 미소가 가장 멋져보여요

思いきり笑って泣いて
自分らしさに出逢えた
やっと辿りついた
永遠の優しさに続く路

마음껏 웃고 울며, 진정한 나와 만나며,

이제야 영원히 따사로운 이 길을 겨우 찾아냈어요.


涙の数だけ人はきっと
幸せに近づいているはず
さよならから明日が始まる
Goodbye Yesterday
And Hello tomorrow

눈물을 흘린만큼, 행복은 가까워지죠.

헤어짐으로부터 내일이 시작되죠.

어제여 안녕, 내일과 만나요.


たとえば誰かを愛して
傷つくことがあっても
それは愛しい傷明日への道しるべ
すべてを受け入れた時に
光は近づいてくる空に抱かれた時
永遠はこの胸に刻まれる

누군가를 사랑하고, 상처 받아도

사랑의 상처는 내일을 밝혀주어요

모든 것을 받아들일 때에, 빛은 우리를 비추고, 

모든 것을 내려놓을 때에, 영원은 나의 가슴에 새겨져요.

 

季節が風のように巡って
私は髪を短切って…

계절이 바람처럼 나를 감싸고,

나는 머리를 짧게 깍아요.

 

世界は今日も朝を迎える
Goodbye Yesterday…
Goodbye Yesterday…

세상은 오늘도 아침을 반기며,

어제여 안녕, 어제여 안녕.



歓びと哀しみに抱かれて
私は優しく微笑んでる

기쁨과 슬픔에 안겨서,

나는 따뜻한 미소를 짓네요.


さよならこそ昨日への感謝
Goodbye Yesterday
and Hello tomorrow…

헤어짐이야말로 어제에 대한 감사

어제여 안녕, 그리고 내일을 만나요.

인간은 본성적으로는 반동反動적이다.

역사는 문명에로의 진보와 본능에로의 퇴보 사이에서 일진일퇴를 거듭하면서, 현재까지는 앞으로 나아간듯 보인다.

그러나, 이러한 진보의 궤적의 경향성이 앞으로도 계속되리라는 보장은 어디에도 없다.

아무리 많은 수의 하얀 백조가 있어왔다 하더라도, 검은 백조 한마리의 존재만으로도 시스템은 변하기 때문이다.

우리는 이성에 의해 원시적 본능을 뛰어넘어오며, 사랑, 평화, 박애, 연대와 같은 우리 안의 선한 본성이 결국 승리하리라고 하는 희망을 이야기하지만, 우리의 능력을 넘어서는 파멸의 공포앞에서 과연 의연함을 견지할 수 있을지에 대해서는 장담할 수 없다.

그러므로 역사는 진보한다는 명제는, 전제가 있어야 한다.

그것은 어떤 희생을 치루고라도 과연 결연히 앞으로 나아갈 수 있을 것이라는 의지가 과연 인류라는 집단내에서 발현될 수 있을 것인가 하는 상황에 닥쳤을 때만이 증명 가능한 것으로, 오직 그 순간에만 알 수 있는 것이다.

 

朝が来るまで
泣き続けた夜も
歩きだせる力にきっと出来る
太陽は昇り
心をつつむでしょう
やがて闇はかならず明けてゆくから

아침까지 울기만 했던 이 밤도, 다시 걸을 수 있는 힘이 되겠지. 

태양은  떠서 마음을 따스히 감싸주겠죠

어둠이 지나면 언젠간 밝은 날이 오니까요.



どうしてもっと自分に素直に生きれないの
そんな思い問いかけながら
あきらめないですべてが崩れそうになっても
信じていてあなたのことを

어째서 좀더 솔직한 자신이 되지 못하는걸까

그런 의문을 품으면서, 모든 것이 무너져내려도 포기하지마요.

당신을 믿고 있어요.



本当は誰もが
願いを叶えたいの
だけどうまくゆかない時もあるわ
希望のかけらを
手のひらにあつめて
大きな喜びへと変えてゆこう

사실은 누구라도, 소망을 이루고 싶어하지

하지만 원하는대로 되지 않는 적이 있지

희망의 끈을 놓지 않고 노력해서 큰 기쁨으로 바꿔나가요.


愛する人や友達が勇気づけてくれるよ
そんな言葉抱きしめながら
だけど最後の答えは一人で見つけるのね
めぐり続く明日のために

사랑하는 사람과 친구들이 응원을 해줄거야

그런 마음들을 간직해요

하지만 마지막 대답은 자신만이 찾을 수 있어

계속 찾아나가요, 내일을 위해서


雨に負けない気持ちを炎もくぐりぬける
そんな強さ持ち続けたい
それでもいつかすべてが崩れそうになっても
信じていてあなたのことを
信じていて欲しいあなたのことを

비 따위에 지지 않는 각오로, 어떤 어려움도 헤쳐 나가요

이런 강인함을 계속 간직할 수 있기를

그래도 언젠가 모든것이 무너져내리는 것 같을때

믿을게요 당신을.

믿고 싶어요, 당신의 마음을.

 


作詞 岩里祐穂
作曲 上田知華

 

 1독 : 내용은 대강 파악. 제대로 논리적 구조를 파악하려면 1번 더 읽어야 하겠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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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자유로부터의 도피》는 중세 사회의 붕괴로 생겨난 인간의 불안이라는 현상을 분석한 책이다. 중세 사회에는 많은 위험이 존재했지만, 인간은 그 안에서 보호를 받으며 안전하다고 느꼈다. 수백 년 동안 열심히 노력한 끝에 인간은 꿈도 꾸어보지 못했던 물질적 부를 쌓아올리는 데 성공했다. 인간은 세계 곳곳에 민주주의 사회를 건설했고, 최근에는 전체주의의 새로운 책동에 맞서 자신을 지키는 데 성공했다. 하지만 《자유로부터의 도피》에서 내가 분석하여 보여주려는 것은 근대인이 아직도 불안하다는 것이다. 불안한 인간은 온갖 부류의 독재자드레게 자신의 자유를 넘겨주거나, 스스로 기계의 작은 톱니가 되어 호의호식하지만, 자유로운 인간이 아니라 자동인형 같은 인간이 되고 싶은 유혹에 사로잡힌다.

 

 

 

p12

 우리가 직면한 중대한 어려움은 인간의 지적 능력 발달이 감정 발달을 훨씬 앞지른다는 사실에 있다는 것이 인간과 현 상황에 관심이 많은 사람들에게 점점 분명해지고 있다. 인간의 두뇌는 20세기에 살고 있지만, 대다수 사람들의 심장은 아직도 석기시대에 살고 있다. 대다수 사람들은 아직 독립적이고 합리적이고 객관적일 수 있을 만큼 성숙하지 못했다. 인간은 혼자이고 ,인간 자신을 빼고는 삶에 의미를 부여하는 권위 따위는 존재하지 않는다는 사실을 견뎌내려면 그들에게는 신화와 우상이 필요하다. 인간은 파괴성과 증오, 시샘과 복수심같은 무분별한 열정을 억누르고 힘과 돈, 독립 국가와 민족을 숭배한다. 인간은 인류의 위대한 정신적 지도자들 - 부처, 구약의 예언자들, 소크라테스, 예수, 무함마드 - 의 가르침에 말로만 경의를 표하면서, 그 가르침을 미신과 우상 숭배의 정글로 바꾸어버렸다. 지적 · 기술적 조숙과 감정적 퇴보 사이의 괴리로 말미암아 자신을 파괴할 위기에 놓인 인류는 그 위기에서 어떻게 자신을 구할 수 있을까?

 

 내가 보기에 해결책은 하나뿐이다. 우리의 사회생활에서 가장 본질적인 사실들에 대한 인식을 강화하는 것이다. 그 인식은 우리가 돌이킬 수 없는 어리석은 짓을 저지르는 것을 막아주고, 객관성과 이성을 유지할 수 있는 능력을 조금이나마 높여준다. 가슴이 저지르는 대부분의 어리석은 짓과 그것이 우리의 상상력과 사고에 미치는 악영향을 겨우 한 세대 만에 극복하기를 바랄 수는 없다. 인간이 수십만 년에 걸친 인류 출현 이전의 역사에서 벗어나려면 아마 천 년은 걸릴 것이다. 하지만 이 중대한 순간, 조금만 통찰력 - 객관성 - 을 강화하려면 인류의 생사에 중요한 영향을 미칠 수 있다. 이런 이유 때문에 과학적이고 역동적인 사회심리학의 발달이 매우 중요하다. 물리학과 의학의 진보에서 생겨나는 위험에 대응하기 위해서는 사회심리학의 진보가 반드시 필요하다.

 

자유로부터 도피하려는 전체주의적 경향의 이유를 이해하는 것이 전체주의 세력을 극복하려는 모든 행위의 전제이기 때문이다.

 

p21

 처음에는 권위주의 체제의 승리가 소수의 광기 때문이고, 그 광기 때문에 그들은 조만간 몰락할 것이라고 생각하면서 위안을 얻는 사람이 만핬다. 이탈리아인과 독일인은 민주주의를 충분히 오랫동안 훈련하지 못했고, 따라서 그들이 서구 민주주의 국가들만큼 정치적으로 성숙해지는 것을 흐뭇하게 지켜보면서 기다리면 된다고 우쭐대는 사람들도 있었다. 히틀러 같은 자들은 오로지 권모술수만으로 거대한 조직체인 국가를 지배하는 권력을 얻었고, 그들과 그들의 추종자들은 순전히 힘으로만 나라를 통치하고 있으며, 국민은 의지라고는 전혀 업는 배신과 테러의 대상일 뿐이라는 생각도 당시 널리 퍼져 있던 환상, 어쩌면 모든 환상 중에서 가장 위험한 환상이었다.

 그 후 세월이 흐르면서 이런 주장의 오류가 분면해졌다. 수백만의 독일인은 그들의 선조가 자유를 위해 싸운 것만큼 열정적으로 자유를 포기했다는 것, 그들은 자유를 원하기는커녕 자유로부터 벗어날 길을 찾았다는 것, 나머지 수백만의 독일인은 거기에 무관심했으며 자유를 지키는 일이 싸우다 죽을 만한 가치가 있다고는 생각지 않았다는 것을 우리는 인정할 수밖에 없었다. 민주주의의 위기는 이탈리아나 독일에만 특유의 문제가 아니라 모든 근대국가가 직면한 문제라는 것도 우리는 인정한다. 인간의 자유를 위협하는 적들이 어떤 상징을 택하는지도 중요하지 않다. 노골적인 파시즘의 이름이 아니라 반파시즘의 이름으로 자유를 공격한다고 해서 자유가 덜 위태로운 것은 아니다.

 존 듀이는 이렇게 말하고 있다. "우리의 민주주의를 심각하게 위협하는 것은 해외에 있는 전체주의 국가가 아니다. 우리 자신의 개인적 태도와 우리 자신의 제도 속에는 외적인 권위와 규율, 획일성, 외국의 지도자에 대한 의존이 승리를 거둘 수 있게 해준 조건들이 존재하고, 바로 그것이 우리의 민주주의를 심각하게 위협한다. 따라서 싸움터는 이곳, 우리 자신과 우리 제도의 내부에도 존재한다.

 

p25

 파시즘이 권력을 잡았을 때, 대다수의 사람들은 이론적으로나 실제적으로나 준비가 되어 있지 않았다. 그들은 인간이 악에 대한 성향과 힘에 대한 욕망을 그렇게 노골적으로 드러낼 수 있다는 것을 믿을 수가 없었다. 인간이 약자의 권리를 그렇게 무시하고 복종을 갈망할 수 있다는 것도 믿을 수 없었다. 화산이 분출하기 전에 땅이 울리는 것을 알아차린 사람은 극소수뿐이었다. 니체는 19세기의 자기만족적인 낙관주의를 흔들어놓았고, 마르크스도 다른 방식으로 낙관주의를 뒤흔들었다. 또 다른 경고는 조금 나중에 프로이트한테서 나왔다. 확실히 프로이트와 그의 제자들 대다수는 사회에서 일어나는 일에 대해 지극히 소박한 생각밖에 갖고 있지 않았고, 그가 사회 문제에 심리학을 적용한 경우에는 대부분 그 해석이 오해를 불러일으킬 소지를 가지고 있었다. 하지만 프로이트는 개인의 정서적 장애와 정신적 불안이라는 현상에 관심을 기울여, 우리를 화산 꼭대기로 데려가 부글부글 끓고 있는 분화구를 들여다보게 해주었다.

 프로이트는 인간 행동의 여러 부분을 결정하는 비합리적이고 무의식적인 힘을 관찰하고 분석하는 일에서 그 전의 누구보다도 앞서 있었다. 근대 합리주의는 인간성을 이루는 비합리적이고 무의식적인 부분의 존재를 도외시했지만, 근대 심리학에서 프로이트와 그의 후계자들은 그 비합리적이고 무의식적인 부분을 드러냈을 뿐만 아니라, 그 비합리적인 현상이 일정한 법칙을 따르기 때문에 합리적으로 이해할 수 있다는 것도 보여주었다. 프로이트는 인간 행동의 비합리성만이 아니라 꿈의 언어와 신체적 증상을 이해하는 법도 우리에게 가르쳐주었다. 프로이트는 개인의 성격 구조 전체만이 아니라 이런 비합리적인 행동들도 개인이 외부 세계에서 받은 영향, 특히 어린 시절에 받은 영향에 대한 반응이라는 사실을 발견했다.

 하지만 프로이트는 그가 속해 있던 문화의 정신으로 가득 차 있어서, 그것이 정해놓은 어떤 한계를 넘어서지 못했다. 이 한계는 환자에 대한 그의 이해까지도 제한하게 되었고, 그가 정상적인 개인을 이해하고 사회생활에서 일어나는 비합리적인 현상을 이해하는 데도 걸림돌이 되었다.

 이 책은 사회 과정 전반에서 심리적 요소들이 맡고 있는 역할을 강조하고, 이 분석은 프로이트의 기본적인 발견 - 특히 인간의 성격에서 무의식적인 힘들이 어떻게 작용하는지, 그 힘들이 외부의 영향에 얼마나 의존하는지에 관한 발견 - 에 바탕을 두고 있기 때문에, 우리의 접근방식의 일반적인 원칙은 무엇이고, 이 원칙과 프로이트의 고전적인 개념은 어떻게 다른지를 처음부터 알려주는 편이 독자들에게 도움이 될 것 같다.

 

 프로이트는 인간의 본성이 약하다는 전통적인 학설만이 아니라 인간과 사회를 기본적으로 양분하는 전통적인 믿음도 받아들였다. 인간은 근본적으로 반사회적이라고 그는 생각했다. 사회는 인간을 길들여야 하고, 인간이 생물학적 - 따라서 근절할 수 없는 - 충동을 직접 만족시키는 것을 어느 정도는 허락해야 한다. 하지만 대체로 사회는 인간의 기본적인 충동을 정화시키고 노련하게 억제해야 한다. 타고난 충동을 사회가 이렇게 억압하면, 그 결과 기적적인 일이 일어난다. 즉 억압당한 충동이 문화적으로 가치 있는 노력으로 바뀌고, 그리하여 문화의 인간적 토대가 되는 것이다. 프로이트는 억압이 문화적 행동으로 바뀌는 이 이상한 변화를 승화(昇華)라고 불렀다. 억압의 정도가 개인이 승화시킬 수 있는 한계를 넘으면 개인은 신경증에 걸리고, 억압을 줄이는 것을 허락할 필요가 있다. 하지만 일반적으로, 개인의 충동을 만족시키는 것과 문화 사이에서 반비례 관계가 존재한다. 그러니까 억압이 강할수록 문화가 발달한다(그리고 신경 장애에 걸릴 위험도 더 높아진다). 프로이트의 이론에서 개인과 사회의 관계는 본질적으로 고정적이다. 개인은 사실상 변하지 않는 상태로 남아 있고, 사회가 개인의 자연스러운 충동에 더 강한 압력을 행사하거나(그래서 더 많은 승화를 강요하거나) 더 많은 만족을 허용하거나(그래서 문화를 희생시키거나) 할 때에만 개인도 변한다.

 이전의 심리학자들이 인정한 이른바 인간의 기본적 본능과 마찬가지로, 인간 본성에 대한 프로이트의 개념은 본질적으로 근대인에게서 볼 수 있는 가장 중요한 충동들을 반영한 것이었다. 프로이트에게는 그의 문화권에 속하는 개인이 인간을 대표했고, 근대 사회에 사는 인간 특유의 열정과 불안은 인간의 생물학적 구조에 뿌리를 내린 영원한 힘으로 여겨졌다.

 우리는 이 점을 실증하는 예를 많이 들 수 있지만(예를 들어 오늘날 현대인에게 널리 퍼져 있는 적개심의 사회적 토대, 오이디푸스 콤플렉스, 여성들의 이른바 거세 콤플렉스 등), 인간을 사회적 존재로 보는 개념 전반과 관련되어 있기 때문에 특히 중요한 실례를 한 가지만 더 제시하고 싶다. 프로이트는 언제나 개인을 타인들과 관련지어 생각한다. 하지만 프로이트가 생각하는 이 관계는 자본주의 사회에 사는 타인들과 맺고 있는 독특한 경제적 관계와 비슷하다. 각자는 자기가 책임지고 개인주의적으로 자신을 위해 일하지 기본적으로 타인과 협력하여 일하지는 않는다. 하지만 그는 로빈슨 크루소가 아니다. 그는 고객이나 고용주나 고용인이 될 타인을 필요로 한다. 그는 물건을 사고팔아야 하고, 남들과 주고받아야 한다. 상품 시장이든 노동 시장이든, 시장이 이 관계를 규제한다. 따라서 주로 혼자이고 자급자족할 수 있는 개인은 한 가지 목적 - 물건을 팔거나 사는 것 - 을 위한 수단으로 타인들과 경제저 관계를 맺는다. 인간관계에 대한 프로이트의 개념도 본질적으로는 이와 같다. 개인은 반드시 충족시킬 필요가 있는 생물학적 충동들은 충분히 갖추고 있는 듯하다. 그 충동들은 만족시키기 위해 개인은 다른 '객체'와 관계를 맺고, 따라서 다른 개인들은 언제나 자신의 목적을 이루기 위한 수단일 뿐이다. 그 목적은 개인이 타인들과 접촉하기 전에 원래 자신에게서 비롯된 욕구를 충족시키는 것이다. 프로이트가 말하는 의미에서의 인간관계가 이루어지는 현장은 시장과 비슷하다. 이것은 생물학적으로 주어진 욕구를 서로 충족시켜주는 것이고, 여기서 타인과의 관계는 언제나 목적을 이루기 위한 수단일 뿐, 결코 그 자체가 목적은 아니다.

 

 이 책에서 제시된 분석은 프로이트의 관점과는 대조적이다. 심리학의 주요 문제는 이런저런 본능적 욕구 자체를 충족시키거나 좌절시키는 문제가 아니라 세계에 대한 개인의 관계가 구체적으로 어떤 종류의 것이냐의 문제라는 가정, 그리고 인간과 사회의 관계는 고정적인 게 아니라는 가정이 이 책에 제시된 분석의 기본 바탕이다. 한쪽에는 어떤 충동을 타고난 개인이 있고, 또 한쪽에는 개인과는 별도로 개인의 타고난 성향을 충족시키거나 좌절시키는 사회가 존재하는 것은 아니다. 식욕 · 갈증 · 성욕처럼 모든 인간에게 공통된 욕구는 존재하지만, 사랑과 미움, 권력욕과 복종심, 관능적 쾌락에 대한 욕망 또는 두려움처럼 사람들의 성격에 차이를 가져오는 충동들은 모두 사회 과정의 산물이다. 인간의 가장 추악한 성향만이 아니라 가장 훌륭한 성향도 생물학적으로 고정된 인간 본성이 아니라 인간을 만들어내는 사회 과정의 결과다. 다시 말하자면 사회는 개인을 억압하는 기능만이 아니라 - 물론 그 기능도 갖고 있기는 하지만 - 창조적인 기능도 갖고 있다. 인간의 본성, 열정과 불안은 문화적 산물이다. 사실 인간 자체가 인류의 부단한 노력이 낳은 가장 중요한 창조물이자 성취이고, 그 기록을 우리는 역사라고 부른다.

 역사에서 일어나는 이러한 인간의 창조 과정을 이해하는 것이 바로 사회심리학의 과제다. 하나의 역사 시대에서 다음 역사 시대로 넘어갈 때 인간의 성격에 어떤 뚜렸한 변화가 일어나는 까닭은 무엇인가? 르네상스 정신은 왜 중세 정신과 다른가? 독점자본주의 시대 인간의 성격 구조는 왜 19세기 인간의 성격 구조와 다른가? 사회심리학은 좋든 나쁘든 새로운 능력과 새로운 열정이 생겨나는 이유를 설명해야 한다. 그리하여 예를 들면 르네상스 시대부터 오늘날까지 인간은 명성을 얻으려는 불타는 야망으로 가득 찼지만, 오늘날에는 지극히 자연스러워 보이는 이 욕망이 중세 사회의 인간에게는 거의 존재하지 않았다는 사실을 우리는 알게 된다. 또한 전에는 인간이 가지고 있지 않았던 자연의 아름다움에 대한 감각도 같은 시대에 발달했다. 북유럽 국가에서는 16세기부터 인간이 일하고 싶은 욕망에 거의 강박적으로 사로잡혔다. 그 전에는 노예가 아닌 자유민은 일을 하고 싶어 하지 않았다.

 하지만 인간은 역사에 의해 만들어질 뿐만 아니라 역사를 만들기도 한다. 얼핏 모순되어 보이는 이 문제를 해결하는 것이 사회심리학의 영역이다. 열정과 욕망과 불안이 사회 과정의 '결과'로 어떻게 변화하고 발전하는지를 보여주는 것만이 아니라, 그렇게 구체적인 형태를 이루게 된 인간의 에너지가 어떻게 '사회 과정을 형성하는 생산력'이 되는지를 보여주는 것도 사회심리학의 과제다. 따라서, 예컨대 명성과 성공을 얻고자 하는 갈망과 일하고 싶은 욕구는 근대 자본주의를 발달시킨 원동력이다. 이것이 없었다면 근대 자본주의는 발달할 수 없었을 것이며, 이 원동력과 그 밖에 인간이 가지고 있는 수많은 힘이 없었다면 인간은 근대 상공업 체제의 사회적 · 경제적 요구에 따라 행동할 있는 추진력이 부족했을 것이다.

 

p38

 인간의 본성이란 생물학적으로 고정되어 있는 타고난 충동들의 총화도 아니고, 또한 순조롭게 적응해가는 문화 유형의 생명 없는 그림자도 아니다. 인간의 본성은 인간 진화의 산물이지만, 어떤 고유한 메커니즘과 법칙도 갖고 있다. 인간의 본성에는 고정 불변의 요소들이 있는데, 생리적 요구를 충족시켜야 할 필요성, 고립과 정신적 고독을 피해야 할 필요성이 그것이다. 개인은 어떤 사회 특유의 생산과 분배 체제에 뿌리를 둔 생활양식을 받아들여야 한다는 것을 우리는 알았다. 문화에 역동적으로 적응하는 과정에서 개인의 행동과 검정을 유발하는 강력한 충동들이 수없이 생겨난다. 개인은 이 충동들을 의식할 수도 있고 의식하지 못할 수도 있지만, 어쨌든 그 욕구들은 강력하고 일단 생겨나면 충족시켜줄 것을 요구한다. 그것들은 강력한 영향력이 되어, 이번에는 반대로 사회 과정을 형성하는 데 영향을 미친다. 경제적 · 심리적 · 이념적 요인들이 어떻게 상호작용을 하고 이 상호작용에 관하여 어떤 일반적 결론을 내릴 수 있을지는 나중에 종교개혁과 파시즘을 분석하는 과정에서 논할 것이다. 이 논의는 언제나 이 책의 주요 주제를 중심으로 전개될 터인데, 이 책의 ㅈ요 주제는 인간이 타인이나 자연과의 원초적 일체감에서 벗어난다는 의미에서 자유를 얻으면 얻을수록, 인간이 '개인' 되면 될수록, 자발적인 사랑과 생산적인 일을 통해 자신과 세계를 결합시키거나 아니면 자신의 자유와 개체적 자아의 본래 모습을 파괴하는 끈으로 세계와 자신을 묶어서 일종의 안전보장을 추구할 수밖에 없다는 것이다.

 

p40

 개인이 원시적 유대관계에서 차츰 벗어나는 과정, 즉 '개체화(individuation)'라고 부를 수 있는 과정은 종교개혁부터 현재에 이르는 수세기 동안의 근대사에서 절정에 달한 듯하다.

 

p44

 개체화 과정의 다른 측면은 '고독의 증대'다. 원초적 유대는 외부 세계와의 기본적인 통합과 안도감을 준다. 아이가 그 세계에서 벗어날수록 자기가 혼자라는 것, 다른 모든 존재와 분리된 별개의 존재라는 것을 의식하게 된다. 개인의 존재에 비하면 압도적으로 강하고 힘센 세계, 때로는 위협적이고 위험하기도 한 세계와 이렇게 분리되는 것은 무력감과 불안감을 낳는다. 개별 행동의 가능성과 책임을 모른 채 세계의 일부로 남아 있는 동안은 세계를 두려워할 필요도 없었다. 그런데 개인이 되면 혼자 서서, 세계가 지니고 있는 위험하고 압도적인 측면과 맞서야 한다.

 자신의 개성을 포기하고 외부 세계에 완전히 잠겨서 고독감과 무력감을 극복하고 싶은 충동이 일어난다. 하지만 이 총동과 거기에서 생겨나는 새로운 유대는 성장 과정 자체에서 끊어진 원초적 유대와는 다르다. 아이가 육체적으로는 결코 어머니 자궁으로 돌아갈 수 없듯이, 심리적으로는 절대로 개체화 과정을 뒤집을 수 없다. 그렇게 하려는 시도는 필연적으로 복종의 성격을 띠고, 권위와 거기에 복종하는 아이 사이의 기본적인 모순은 결코 제거되지 않는다. 아이는 의식적으로는 안도감과 만족감을 느낄지 모르지만, 무의식적으로는 자아의 본래 모습과 힘을 포기하는 값비싼 대가를 치르고 있다는 것을 깨닫는다. 따라서 복종의 결과는 과거와는 정반대다. 복종은 아이의 불안을 늘리는 동시에 적개심과 반항심을 불러일으킨다. 아이가 적개심과 반항심을 품는 대상은 아이가 계속 의존하는, 또는 새로 의존하게 된 바로 그 사람이기 때문에 더욱 놀랍다.

 하지만 복종은 고독과 불안을 피하는 유일한 방법이 아니다. 또 다른 방법, 생산적일 뿐만 아니라 해소할 수 없는 갈등으로 끝나지 않는 유일한 방법은 '인간 및 자연과 자발적인 관계'를 맺는 것이다. 이 관계는 개성을 없애지 않으면서 개인을 세계와 이어준다. 이런 종류의 관계 -  이 관계의 가장 중요한 표현은 사랑과 생산적인 이리다 - 는 인격 전체의 통합과 그 힘에 뿌리는 두고 있다. 따라서 자아 성장의 한계가 이 관계를 지배한다.

 

p46

 분리와 개체의 방향으로 한 걸음 나아갈 때마다 자아도 그만큼 성장한다면, 아이는 조화롭게 성장할 것이다. 하지만 실제로 이런 일은 일어나지 않는다. 개체화 과정은 자동적으로 일어나는 반면, 자아의 성장은 수많은 개인적 · 사회적 이유로 방해를 받는다. 이 두 경향의 차이는 참을 수 없는 고립감과 무력감을 낳고, 이것은 나중에 '도피의 메커니즘'으로 논할 심리적 메커니즘으로 이어진다.

 

p47

 인간은 태어났을 때는 모든 동물 가운데 가장 무력하다. 자연에 대한 인간의 적응은 본능의 결정이 아니라 본질적으로 학습 과정에 바탕을 두고 있다. "본능은 .... 고등동물, 특히 인간에게는 사라지는 범주는 아니라 해도 약해지는 범주다."

 

p53

 다른 측면 - 인간 본성의 악함을 강조하고, 개인의 무의미함과 무력함, 개인이 외적인 힘에 종속되어야 할 필요성 - 은 무시된다. 개인은 무가치하고 기본적으로 자신에게 의존할 수 없고 외적인 힘에 복종할 필요가 있다는 이 생각은 히틀러 이데올로기의 주제이기도 하다. 하지만 이 히틀러의 이념은 개신교에 내재하는 고유의 자유와 도덕 원리를 강조하지는 않는다.

 

p65

 이 사실은 중세 사회에서 개인의 위치를 이해하는 데 가장 필수적인 요점으로 우리를 데려간다. 카톨릭교회의 교리만이 아니라 세속의 법률에도 표현되어 있던 '경제 활동'에 관한 '윤리적 견해'가 그것이다. 이 점에 대해 우리는 토니의 견해를 따르고자 한다. 그의 견해는 중세를 이상화하거나 낭만화하려 든다고 의심받을 여지가 없기 때문이다. 경제생활에 대한 기본적인 가정은 두 가지였다. "경제적 이익은 인생의 진정한 사업인 구원에 종속된다는 것. 경제활동은 인간 행위의 한 측면이며 인간 행위의 다른 부분들과 마찬가지로 도덕률에 묶여 있다는 것"이다.

 

p69

 루터는 1524ㄴ녀에 <상거래와 고리대금업>이라는 팸플릿에서 독점 기업에 대한 중소 상인의 울분과 분노를 생생하게 표현했다. "그들은 모든 상품을 장악하고 앞에서 언급한 모든 수법을 노골적으로 행사한다. 그들은 상품 가격을 마음대로 올리거나 내리고, 마치 자기들이 신의 창조물 위에 군림하고 믿음과 사랑의 법칙에서 자유롭기라도 한 것처럼, 강꼬치고기가 물속의 작은 물고기들을 괴롭히듯이 모든 중소 상인을 억압하고 파멸시킨다." 루터의 이 말은 오늘날에도 적용될 수 있을 것이다. 15세기와 16세기에 중산층이 부유한 독점가들에게 느꼈던 공포와 분노는 우리 시대에 중산층이 독점 기업과 강력한 자본가들에게 보이는 태도를 특징짓는 감정과 비슷한 점이 많다.

 

p88

 루터에게서 찾아볼 수 있듯이, '확실성을 강박적으로 추구하는 것은 진정한 믿음의 표현이 아니라 참을 수 없는 회의를 극복하려는 욕구에 뿌리박고 있는 행동이다.' 루터의 해결책은 오늘날 수많은 개인에게서 찾아볼 수 있지만, 그들은 루터와는 달리 신학적으로 생각하지 않을 뿐이다. 즉 그들은 고립된 개별적 자아를 제거하고, 개인 밖에 있는 압도적으로 강한 힘의 손에 쥐어진 도구가 됨으로써 확실성을 찾으려 한다. 루터에게 이 힘은 선이었고, 그는 절대적인 복종으로 확실성을 추구했다. 그는 이런 방법으로 자신의 회의를 어느 정도 침묵시키는 데 성공햇지만, 그 회의가 정말로 사라진 것은 아니었다. 그는 죽는 날까지 회의의 공격을 받았고, 복종하려는 노력을 거듭하여 그 회의를 극복해야만 했다. 심리학적으로 믿음은 전혀 다른 두 가지 의미를 갖고 있다. 믿음은 인류와의 내적 관계와 삶에 대한 긍정의 표현일 수도 있고, 개인의 고독과 삶에 대한 부정적 태도에 뿌리를 둔 근본적인 회의감을 억제하려는 반작용의 형성일 수도 있다. 루터의 믿음은 그런 보상적 성질을 갖고 있었다.

 

p107

 '양심'이란 인간이 스스로 자기 마음속에 앉혀놓은 노예 감독에 불과하다. 양심은 인간이 자신의 것이라 믿는 소망이나 폭표에 따라 행동하도록 몰아세우지만, 사실 그 소망이나 목표는 외부의 사회적 요구가 내면화한 것이다. 양심은 가혹하고 잔인하게 인간을 몰아붙이고, 쾌락과 행복을 금지하고, 이해할 수 없는 죄를 속죄하는 데 평생을 바치게 한다. 

 

 

 봉건사회라는 중세적 제체의 붕괴는 모든 사회 계급에서 한 가지 중요한 의미를 지니고 있었다. 그것은 개인이 홀로 남겨지고 고립되었다는 것이다. 개인은 이제 자유로워졌다. 이 자유는 두 가지 결과를 낳았다. 인간은 그때까지 누렸던 안전성과 의심할 여지없는 소속감을 박탈당했고, 경제적으로나 정신적으로 안전을 추구하는 그를 만족시켰던 세계로부터 강제로 떨어져나왔다. 그는 고독과 불안을 느꼈다. 하지만 그는 자유롭게 행동할 수도 있었고 독립적으로 생각할 수도 있었다. 스스로 자신의 주인이 되어, 남이 시키는 대로 하지 않고 자기가 원하는 대로 자신의 삶을 꾸려나갈 수도 있었다.

 하지만 이 두 종류의 자유는 여러 사회 계급의 실제 생활 형편에 따라 서로 다른 무게를 가졌다. 사회에서 가장 성공한 부류만이 대두하는 자본주의의 혜택을 받아, 진정한 부와 권력을 얻을 수 있었다. 그들은 자신의 활동과 합리적인 계산의 결과로 사업을 확장하고 정복하고 지배하고 재산을 축적할 수 있었다. 이 신흥 유산 귀족은 기존의 문벌 귀족과 함께 새로운 자유의 열매를 누릴 수 있는 위치에 있었고, 개인이 주도권을 잡고 세상을 지배하는 새로운 느낌을 얻을 수도 있었다. 따라서 그들의 입장도 근본적인 불안전과 불안에서 결코 자유롭지 못했다. 하지만 이 신흥 자본가에게는 대체로 자유의 소극적인 의미보다 적극적인 의미가 더 지배적이었다. 그것은 새로운 귀족 사회의 토양에서 번영한 르네상스 문화에 잘 표현되어 있다. 르네상스 예술과 철학에는 물론 절망과 회의주의도 자주 표현되었지만, 인간의 존업성과 의지와 지배력이라는 새로운 정신이 표현되었다. 이처럼 개인의 활동과 의지의 힘을 강조한 것은 중세 말기에 카톨릭교회의 신학적 가르침에서도 찾아볼 수 있다. 당시의 스콜라 철학자들은 권위에 저항하지 않고 그 지도를 받아들였다. 하지만 그들은 자유의 적극적인 의미를 강조했고, 인간이 자신의 운명을 결정하는 데 참여할 권리, 인간의 힘과 존엄성 그리고 의지의 자유를 강조했다.

 한편 하층계급인 도시 빈민과 특히 농민들은 자유에 대한 새로운 추구, 점점 심해지는 경제적 · 인간적 압박에서 벗어나고 싶은 열렬한 소망에 사로잡혔다. 그들은 잃을 것이 거의 없었지만 얻을 것은 많았다. 그들은 교리상의 시시콜콜한 면에는 관심이 없었고, 그보다는 성서의 기본 원칙인 우애와 정의에 관심이 많았다. 그들의 소망은 초기 기독교 특유의 비타협적 정신을 특징으로 하는 종교 운동과 수많은 정치적 반항에 적극적으로 표현되었다.

 하지만 우리의 주요 관심사는 중산층의 반응이었다. 자본주의의 발흥은 그들의 독립성과 자주성을 강화하는 데에도 도움이 되었지만, 사실 그들에게는 큰 위협이었다. 중산층에 속하는 개개인은 16세기 초에는 아직 새로운 자유에서 힘과 안전을 많이 얻지 못했다. 자유는 힘과 자신감보다는 오히려 개인이 보잘것없는 존재라는 느낌과 고독감을 가져왔다. 게다가 중산층은 로마 교회의 성직자를 비롯한 유산계급의 사치와 권력에 대한 불타는 분노로 가득 차 있었다. 프로테스탄티즘은 개인의 무의미함과 부유층에 대한 분개를 표현했으며, 신의 무조건적인 사랑에 대한 믿음을 파괴했으며, 자신과 타인을 경멸하고 불신하도록 가르쳤으며, 인간을 목적이 아닌 수단으로 만들었다. 프로테스탄티즘은 세속 권력 앞에 굴복했으며, 세속 권력이 도덕적 원칙에 어긋나면 단지 존재한다는 이유만으로 정당화되지는 않는다는 원칙을 포기했다. 그렇게 함으로써 프로테스탄티즘은 유대-기독교 전통의 기초가 되었던 요소들을 버리고 만 것이다. 프로테스탄티즘의 교리가 제시한 개인과 신과 세계의 모습에서는, 개인이 느끼는 무의미함과 무력감은 인간이 본래 지니고 있는 성질에서 유래한 것이므로 '마땅히' 그렇게 느껴야 한다는 믿음으로 그 느낌을 정당화했다.

 이렇게 새로운 종교적 교리는 평균적인 중산층의 느낌을 표현했을 뿐만 아니라, 이 태로를 합리화하고 체계화하여 그 느낌을 더욱 확대하고 강화했다. 하지만 이 새로운 교리는 그 이상의 일을 했다. 즉 불안에 대처하는 방법도 개인에게 알려주었다. 자신의 무력함과 본성의 사악함을 인정하고, 자신의 생애를 그 죗값으로 여기고, 극도로 자신을 비하하고 끊임없이 노력하면 회의와 불안을 극복할 수 있다고 가르친 것이다. 또한 신에게 완전 복종하면 신의 사랑을 받을 수 있고, 적어도 신이 구원하기로 결정한 사람들 가운데 자기도 속해 있을 거라는 희망은 가질 수 있다고 가르쳤다. 프로테스탄티즘은 겁먹고 뿌리째 뽑혀 고립된 개인, 새로운 세계와 관계를 맺고 거기에 적응해야 하는 개인의 인간적 욕구에 대한 해답이었다. 경제적 · 사회적 변화로 생겨났고 종교적 신조로 더욱 강화된 새로운 성격 구조가 이번에는 꺼꾸로 사회적 · 경제적 발전을 촉진하는 중요한 요인이 되었다. 이 성격 구조에 뿌리를 두고 있던 바로 그 자질들 - 일하려는 충동, 절약하려는 열정, 가외의 개인적 힘을 얻기 위해 자신의 삶을 기꺼이 도구로 삼으려는 태도, 금욕주의, 강박적 의무감 - 은 자본주의 사회에서 생산력이 된 성격 특성들이었다. 그것이 없었다면 근대의 경제 발전과 사회 발전은 생각할 수도 없는 일이었다. 인간의 에너지가 구체적인 형태로 형성된 것이 바로 그 특징들이었다. 그 특정한 형태를 취함으로써 인간의 에너지는 사회 과정에서 생산력의 하나가 되었다. 새로 형성된 성격 특성에 따라 행동하는 것은 경제적 필요라는 관점에서 보면 유리했다. 그런 행동은 이 새로운 성격 유형의 요구와 불안에 대응했기 때문에 심리적으로도 만족스러웠다. 이 원칙을 좀 더 일반적인 말로 표현하면 다음과 같아질 것이다. 사회 과정은 개인의 생활양시, 즉 타인 및 일과의 관게를 결정함으로써 그의 성격 구조를 형성한다. 종교적이든 철학적이든 정치적읻든, 새로운 이념은 성격 구조의 이런 변화를 낳은 결과이고, 이렇게 바뀐 성격 구조에 호소하여 그것을 강화하고 충족하고 안정시킨다. 새로 형성된 성격 특성은 다시 경제 발전을 촉진하는 중요한 요인이 되고, 사회 과정에 영향을 미친다. 원래 그 성격 특성들은 새로운 경제력의 위협에 대한 반응으로 생겨난 것이지만, 서서히 새로운 경제 발전을 촉진하고 강화하는 생산력이 되는 것이다.

 

p115

 예를 들면 우리는 신앙의 자유가 자유의 최후 승리라고 믿는다. 신앙의 자유는 자신의 양심에 따라 신을 숭배하는 것을 허락하지 않은 교회와 국가 권력에 대한 승리지만, 근대인은 자연과학의 방법으로 개연성이 입증되지 않은 것을 믿는 내적 능력을 대부분 잃어버렸다는 사실을 우리는 충분히 인식하지 못하고 있다.

 

p120

 중세의 사회 체제에서 자본은 인간의 하인이었지만, 근대의 사회 체제에서는 인간의 주인이 되었다. 중세의 세계에서 경제 활동은 목적을 이루기 위한 수단이었다. 목적은 삶 자체, 또는 카톨릭교회가 이해한 바와 같이 인간의 영적 구원이었다. 경제 활동은 필요한 것이고, 재물도 신의 목적에 이바지할 수 있지만, 모든 외적 활동은 삶의 목적을 촉진하는 경우에만 의미와 존엄성을 갖는다. 그 자체를 위한 경제 활동과 소유욕은 중세 사상가에게는 비합리적인 것으로 여겨졌지만, 근대 사상가에게는 오히려 그런 활동과 욕망이 없는 것이 비합리적인 것으로 생각되었다.

 자본주의에서 경제 활동과 성공과 물질적 획득은 그 자체가 목적이 된다. 자신의 행복이나 구원을 위해서가 아니라 경제 체제의 발전에 기여하고 자본을 축적하는 것 자체를 목적으로 삼는 것이 인간의 운명이 된다. 인간은 경제라는 거대한 기계의 톱니 - 그가 자본을 많이 갖고 있다면 중요한 톱니가 되고, 자본을 갖고 있지 않다면 하찮은 톱니가 된다 - 가 되었지만, 항상 외부의 목적에 이바지하는 톱니다. 인간을 초월한 목적에 자신을 이토록 기꺼이 바치도록 마음의 준비를 시킨 것은 사실 프로테스탄티즘이었다. 물론 경제 활동의 이 같은 우월성을 인정하는 것만큼 루터나 칼뱅의 정신과 동떨어진 것은 없었지만, 그들은 신학적 가르침 속에서 인간의 정신적 척추인 존엄감과 자존심을 꺽어버리고 활동의 목적은 자기 자신 외에는 존재하지 않는다고 가르침으로써, 상황이 이런 식으로 발전할 토대를 마련해주었다.

 앞 장에서 살펴보았듯이, 루터의 가르침에서 주된 요점의 하나는 그가 인간성의 사악함을 강조하고, 인간의 의지와 노력이 아무 쓸모도 없다는 것을 강조한 것이었다. 칼뱅도 인간의 사악함을 강조했고, 인간은 최대의 자신의 자존심을 굴복시켜야 한다는 생각을 그의 사상 체계의 중심에 놓았다. 더 나아가 인간 생활의 목적은 신의 영광을 위한 것이지 자기 자신을 위한 것은 아니라고 설파했다. 그렇게 루터와 칼뱅은 심리적으로 인간이 근대 사회에서 맡아야 할 역할 - 자신이 무의히하다고 느끼고, 자신의 목적이 아닌 목적을 위해서만 자신의 삶을 종속시킬 각오를 하는 것 - 을 준비시켰다. 인간은 일단 정의도 사랑도 상징하지 않는 신의 영광을 위한 수단에 불과한 존재가 되면, 경제적 기계 - 그리고 결국에는 '총통' - 의 하인 역할도 충분히 받아들일 수 있게 된다.

 경제적 목적을 위한 수단으로 개인을 경시하는 것은 자본 축적을 경제 활동의 목적으로 삼는 자본주의적 생산 방식의 특성에 바탕을 두고 있다. 사람은 이익을 위해 일하지만, 그가 얻은 이익은 소비되지 않고 새 자본으로 투자된다. 이렇게 늘어난 자본은 새로운 이익을 가져오고, 이 이익은 다시 투자된다. 이익과 투자는 이렇게 다람쥐 쳇바튀 돌 듯 계속된다. 물론 사치를 위해 돈을 쓰거나 '과시적인 낭비'로 돈을 쓰는 자본가들은 언제나 존재했다. 하지만 자본주의의 전형적인 대표자들은 소비가 아니라 일을 즐겼다. 자본을 소비하는 대신 축적하는 이 원칙은 우리의 근대 산업 체제가 이룩한 위대한 업적의 전제다. 사람이 일에 대해 금욕적인 태도를 갖고 있지 않았다면, 또한 경제 체제의 생산력을 발달시키기 위해 자신의 성과를 투자하려는 욕망을 갖고 있지 않았다면, 우리는 자연을 통제하는 일에서 이렇게 많은 진보를 이룩하지 지 못했을 것이다. 우리가 물질적 욕구를 충족시키기 위한 끊임없는 투쟁이 마침내 막을 내리게 될 미래를 역사상 처음으로 마음속에 그릴 수 있게 된 것도 사회의 생산력이 이렇게 증대했기 때문이다. 하지만 자본 축적 자체를 위해 일한다는 원칙이 객관적으로는 인류의 진보에 엄청난 가치를 갖고 있다 해도, 주관적으로는 인간으로 하여금 초개인적인 목적을 위해 일하게 만들었고, 인간을 자기가 만든 기계의 하인으로 전락시켰으며, 그리하여 자기가 보잘것없고 무력하다는 느낌을 인간에게 안겨주었다.

 

p127

 근대인은 자아를 최대한 주장하는 것이 특징인 것 같지만, 실제로 그의 자아는 약해져서 전체 인격의 다른 부분은 모두 제외하고 전체 자아의 일부인 지성과 의지력으로 축소되었다.

 

 

 자연에 대한 인간의 지배력은 놀랄 만큼 강해졌지만, 사회는 자기가 창조한 그 힘을 통제하지 못하고 있다. 우리의 생산 체계는 기술적 측면에서는 합리적이지만 사회적 측면에서는 비합리적이다. 경제 위기, 실업, 전쟁이 인간의 운명을 지배한다. 인간은 자신의 세계를 건설했다. 공장과 집을 세우고, 자동차와 옷을 생산하고, 곡식과 과일을 지배한다. 하지만 인간은 자신의 손으로 만든 생산품에서 멀어졌다. 인간은 이제 더 이상 자기가 만든 세계의 주인이 아니다. 반대로 인간이 만든 시계가 그의 주인이 되었고, 그 주인 앞에 인간은 고개를 숙이고, 될 수 있는 한 아양을 떨며 속이려 애쓴다. 인간의 손으로 만든 것이 인간의 신이 되었다. 그는 자기 이익에 휘둘리는 것 같지만, 실제로는 모든 구체적 능력을 가진 그의 전체적인 자아는 그의 손으로 만들어진 그 기계의 목적을 달성하기 위한 하나의 도구가 되었다. 인간은 여전히 자기가 세상의 중심이라는 환상을 품지만, 일찍이 선조들이 신에 대해 의식적으로 느꼈던 무력감을 온몸으로 느끼고 있다.

 

 

p129

 경제적 관계만이 아니라 인간적 관계도 이런 소외의 성격을 띤다. 그 관계는 인간 사이의 관계가 아니라 사물 사이의 관계와 같은 성격을 띤다. 하지만 서로 상대를 수단으로 이용하고 소외시키는 것은 이런 정신을 보여주는 실례 가운데 가장 중요하고 가장 파괴적인 것은 아마 개인과 그 자신 사이의 관계일 것이다. 사람은 상품을 팔 뿐만 아니라 자신까지 팔고, 자신이 상품이라고 느낀다. 육체노동자는 자신의 육체적 에너지를 팔고, 상인과 의사와 사무원은 '인격'을 판다. 그들이 생산품이나 용역을 팔기 위해서는 '인격'을 갖고 있어야 한다. 이 인격은 남의 마음에 드는 것이어야 하지만, 그 밖에도 소유자는 수많은 요구를 충족시켜야 한다. 그는 에너지와 창의성, 그 밖에 자신의 특별한 지위가 요구하는 이런저런 것들을 갖추어야 한다. 다른 상품과 마찬가지로 이런 인간적 자질들의 가치, 나아가 그 존재 자체까지 결정하는 것은 시장이다. 어떤 사람이 제공하는 자질들이 아무 쓸모도 없으면 그는 쓸모없는 사람이다. 설령 사용 가치를 지니고 있더라도 시장에서 팔리지 않는 상품은 무가치한 것과 마찬가지다. 따라서 자신감이나 '자아의식'은 남들이 그 사람을 어떻게 생각하는지를 알려주는 표시일 뿐이다. 시장에서의 인기나 성공과는 관계없이 그의 가치를 확신하는 것은 '그'가 아니다. 남들이 그를 원하면 그는 쓸모 있는 인간이고, 인기가 없으면 쓸모없는 인간이다. 자기 평가가 이처럼 '인격'의 성공에 달려 있는 것이야말로 인기가 근대인에게 그토록 엄청난 중요성을 갖는 이유다. 어던 실제적인 문제에서 남보다 앞서가느냐 아니냐뿐만 아니라, 자존심을 유지할 수 있느냐 없느냐 또는 열등감의 구렁텅이에 빠지느냐 아니냐도 인기에 달려 있다.

 

p147

 이 점을 좀 더 분명히 하기 위해 '신경증적(neurotic)'이라는 용어와 '정상적인(normal)' 또는 '건강한(healthy)'이라는 용어를 잠깐 검토하는 것이 유용할 듯싶다.

 

 '정상적인' 또는 '건강한'이라는 용어는 두 가지로 정의할 수 있다. 첫째, 기능을 제대로 발휘하는 사회의 관점에서 보면 그 사회에서 맡아야 할 사회적 역할을 수행할 수 있는 사람은 정상적인 또는 건강한 사람이라고 부를 수 있다. 좀 더 구체적으로 말하면, 이것은 그가 그 특정한 사회에서 요구되는 방식으로 일할 수 있다는 것을 의미하고, 한 걸음 더 나아가 사회의 재생에 참여할 수 있다는 것, 즉 가정을 꾸릴 수 있다는 것을 의미한다.  둘째, 개인의 관점에서 보면 우리는 건강 또는 정상적인 상태를 개인의 성장과 행복의 최고 단계로 생각한다.

 주어진 사회의 구조가 개인이 행복해질 수 있는 최고의 가능성을 제공했다면, 두 관점이 일치할 것이다. 하지만 우리 사회를 포함하여 우리가 아는 대부분의 사회는 그렇지 않다. 개인의 성장이라는 목표 달성을 어느 정도나 촉진시키는지는 사회마다 다르지만, 사회의 원활한 기능과 개인의 완전한 발전이라는 두 가지 목표는 일치하지 않는다. 이런 사실 때문에 건강에 대한 두 개념을 뚜렷이 구별할 필요가 있다. 하나는 사회적 필요의 지배를 받고, 또 하나는 개인 생활의 목표에 관한 규범과 가치관의 지배를 받는다.

 불행하게도 이 차이는 종종 무시된다. 정신과 의사들은 대부분 그들의 사회 구조를 너무나 당연하게 받아들이기 때문에, 사회에 적응하지 못하는 사람을 가치가 떨어지는 존재로 생각한다. 반면에 잘 적응하는 사람은 인간적 가치 척도의 관점에서 더 쓸모 있는 사람으로 여긴다. 우리가 정상적이라는 개념과 신경증적이라는 개념을 구별해서 보면 다음과 같은 결론에 도달할 것이다. 즉 잘 적응한다는 점에서 정상적인 사람이 인간적 가치라는 면에서는 신경증적인 사람보다 덜 건강한 경우가 많다. 그는 사회에 잘 적응한다 하더라도 어떻게 해서든 남들의 기대에 부응하는 사람이 되기 위해 자아를 포기하는 대가를 치르고 있는 것이다. 진정한 개성과 자연스러움은 모두 사라졌을 것이다. 반면에 신경증적인 사람은 자아를 지키기 위한 싸움에서 완전히 굴복할 준비가 되어 있지 않은 사람으로 그 특징을 묘사할 수 있다. 물론 자신의 개체적 자아를 구하려는 그의 시도는 성공하지 못했고, 그는 자신의 자아를 생산적으로 표현하는 대신 신경증적 증상을 통해, 그리고 환상적인 생활로 물러가 그 속에서 구원을 추구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그는 인간적 가치라는 관점에서 보면 개성을 완전히 잃어버린 정상적인 사람보다는 덜 불구자다. 말할 나위도 없는 일이지만, 신경증 환자가 아니면서도 적응 과정에서 개성을 잃지 않은 사람도 있다. 하지만 신경증적인 사람에게 찍혀 있는 낙인은 아무 근거도 없는 것 같고, 신경증 환자를 사회적 효율성이라는 관점에서 생각할 때만 그 낙인이 정당회되는 듯하다. 사회 전체에 관해서 말하면, '신경증적'이라는 용어는 이 후자의 의미로는 쓰일 수 없다. 사회 구성원들이 사회적으로 기능을 발휘하지 않으면 그 사회는 존재할 수 없기 때문이다. 하지만 인간적 가치라는 관점에서 보면, 그 구성원들이 인격의 성장 과정에서 심각한 손상을 입고 기능을 제대로 발휘하지 못하는 사회는 그런 의미에서 신경증적이라고 부를 수 있다. '신경증적'이라는 용어는 사회적 기능의 결핍을 나타낼 때 자주 쓰이기 때문에, 사회가 신경증적이라고 말하기보다는 인간의 행복과 자기실현에 불리한 사회라고 말하는 편이 낫다.

 

p159

 프로이트는 오랫동안 이성적 공격이라는 현상에 거의 관심을 두지 않았지만, 알프레드 아들러는 우리가 여기서 논하는 경향을 그의 사상 체계의 중심에 놓았다. 하지만 그것을 가학-피학증으로 다루지 않고 '열등감'과 '권력욕'으로 다루었다. 아들러는 이런 현상의 합리적인 측면만 보고 있다. 우리는 자신을 비하하고 하찮게 만드는 비합리적인 경향에 대해 말하지만, 그는 열등감을 어린아이의 일반적인 무력함과 신체적 열등감 같은 실제적 열등성에 대한 적절한 반작용으로 생각한다. 그리고 우리는 권력욕을 타인을 지배하려는 비합리적인 충동의 표출이라고 생각하는 데 대해 아들러는 그것을 완전히 합리적인 결정 너머에 있는 것을 못 보고 있다. 그는 동기 부여의 복잡성에 대한 귀중한 통찰에 이바지했지만 항상 표면에만 남아 있을 뿐, 프로이트가 했던 것처럼 비합리적 충동의 심연 속으로 결코 내려가지 않았다.

 

p170

 확실히 사람들을 지배할 수 있는 힘은 순전히 물질적인 의미에서 우월한 힘의 표현이다. 내가 다른 사람을 죽일 수 있는 힘을 갖고 있다면, 나는 그보다 '강한'것이다. 하지만 심리적 의미에서 보면 '권력욕은 강함이 아니라 오히려 약함에 뿌리를 박고 있다.' 그것은 개체적 자아가 홀로 서서 살아갈 수 없다는 표현이다. 그것은 진정한 힘이 부족할 때 2차적인 힘을 얻으려는 필사적인 노력이다.

 

p178

 하지만 권위주의적 성격자가 권위에 맞서 싸우는 것은 본질적으로 반항이다. 그것은 권위와 싸움으로써 자신을 주장하고 자신의 무력감을 극복하려는 노력이다. 하지만 복종에 대한 갈망은 의식적으로든 무의식적으로든 여전히 존재한다. 권위주의적 성격자는 결코 '혁명가'가 아니다. 나는 그를 '반역자'라고 부르고 싶다. '급진주의'에서 극단적인 권위주의로 뭐라고 설명할 수 없게 표변하여 피상적인 관찰자를 당혹하게 만드는 개인과 정치 운동이 많다. 심리학적으로 보면 이들은 전역적인 '반역자'다.

 

p202

 가짜 생각이 완벽하게 논리적이고 합리적일 수도 있다. 그것의 허위성이 반드시 비논리적인 요소로 나타나는 것은 아니다. 어떤 행동이나 감정을 실제로 결정하는 것은 비합리적이고 주관적인 요소들이지만, 그것을 합리적이고 현실적인 근거에서 설명하려는 합리화에서 이것을 고찰할 수 있다. 합리화는 사실이나 논리적 사고의 법칙과 모순될 수도 있다. 하지만 합리화 그 자체는 논리적이고 합리적인 경우가 많을 것이다. 그렇다면 그것의 비합리성은 어떤 행동을 유발한 것처럼 위장한 동기가 실은 진짜 동기가 아니라는 사실에 있을 뿐이다.

 

 

 

 따라서 어떤 사람의 진술의 논리성을 판단하는 것만으로는 그것이 합리화인지 아닌지 알 수 없고, 그 사람의 내면에서 작동하는 심리적 동기도 고려해야 한다. 결정적으로 중요한 점은 '무엇'을 생각하느냐가 아니라 '어떻게 생각하느냐 하는 것이다. 적극적 생각의 결과인 사고는 항상 새롭고 독창적이다. 독창적이라는 말은 다른 사람이 이제껏 생각해본 적이 없다는 의미에서가 아니라, 생각하는 사람이 자신의 외부 세계에서나 내부 세계에서 뭔가 새로운 것을 발견하는 수단으로 사고를 이용했다는 의미에서 독창적인 것이다. 합리화에는 본질적으로 이같은 발견과 폭로의 자질이 결여되어 있다. 합리화는 단지 자신 속에 존재하는 감정적 편견을 확인해줄 뿐이다. 합리화는 현실을 통찰하는 수단이 아니라, 자신의 소망을 기존의 현실과 조화시키려는 사후의 시도다.

 

p224

 1918년에 전승국들이 독일을 너무 가혹하게 대한 것이 나치즘이 대두한 주요 원인의 하나라고 말하는 사람들이 많았다. 그러나 이 주장에는 단서가 필요하다. 독일인 대다수가 강화조약이 부당하다고 느껴지만, 중산층은 몹시 분통하다는 반응을 보인 반면에 노동자 계급은 별로 억울해하지 않았다. 그들은 구체제에 반대해왔으며, 그런 그들에게 패전은 구체제의 패배를 뜻했다. 그들은 전쟁 때 용감하게 싸웠던 만큼 부끄러워할 이유는 전혀 없다고 느꼈다. 한편 군구제의 패배 덕분에 가능했던 혁명의 승리는 그들에게 경제적 · 정치적 · 인간적 이익을 가져다 주었다. 베르사유 조약에 대한 분노는 하류 중산층에 토대를 두고 있었는데, 그 국가주의적 분노는 사회적 열등감을 국가적 열등감에 투영한 하나의 합리화였다.

 이런 투영은 히틀러 개인의 성장 과정에도 분명하게 드러나 있다. 그는 전형적인 하류 중산층의 대표자였고, 성공할 기회나 미래가 전혀 없는 보잘것없는 존재였다. 그는 낙오자의 신세를 아주 뼈저리게 느끼고 있었다. 《나의 투쟁》에서 그는 젊은 시절 자기가 '보잘것없는 인간', '이름도 없는 인간'이었다고 자주 말하고 있다. 이것은 본질적으로 그 자신의 사회적 지위 때문이었지만, 그는 그것을 국가의 상징 속에서 합리화시킬 수 있었다.

 

p239

 강자에 대한 사랑과 무력한 약자에 대한 증오는 가학-피학적 성격의 전형적인 특징이고, 이것은 히틀러와 그 추종자들의 정치적 행동을 대부분 설명해준다.

 

p249

 교육의 진정한 목적이 아이들의 내적 독립성과 개성, 성장과 본래 모습을 발전시키는 것이라면, 훈련이 반드시 자발성을 억압하는 결과로 이어지지는 않는다. 이런 교육이 성장기 아이들에게 부과할 수밖에 없는 제약은 일시적인 조치일 뿐이고, 사실은 그것도 성장과 발전 과정을 뒷받침하는 조치다.

 

p251

 우리 사회에서 감정은 전반적으로 억압되어 있다. 창의적 사고가 - 다른 어떤 창조적 활동도 마찬가지지만 - 감정과 불가분의 관계를 갖는 것은 의심할 여지가 없지만, 감정 없이 생각하고 감정 없이 생활하는 것이 하나의 이상적인 태도가 되어버렸다. '감정적'인 것이 불안정하거나 정신적으로 불균형한 것과 같은 뜻이 되어버렸다. 이 기준을 받아들였기 때문에 개인은 매우 약해졌다. 그의 생각은 빈곤해지고 단조로워졌다. 한편 감정은 완전히 죽일 수 없기 때문에 인격의 지적인 측면과는 완전히 동떨어진 곳에 존재해야 한다. 그 결과는 값싸고 가식적인 감상성인데, 이 김상성을 가지고 영화와 대중가요는 감정에 굶주진 수백만 명의 소비자를 만족시키는 것이다.

 

 

우리 시대는 죽음을 부인하고, 그렇게 함으로써 삶의 근본적인 측면 한 가지를 부인하고 있다. 우리 시대는 죽음과 고통에 대한 인식을 가장 강력한 삶의 자극제이자 인류가 서로 단결하는 토대로 삼고, 기쁨과 열정이 강렬함과 깊이를 갖기 위해서는 반드시 겪어야 할 경험으로 삼기는커녕 개인에게 그 인식을 억압하도록 강요하고 있다. 하지만 억압이 항상 그렇듯이, 억압된 요소는 시야에서 사라져도 존재하기를 그만두는 것이 아니다. 따라서 죽음의 공포는 우리 사이에 불법으로 존재한다. 죽음의 공포는 아무리 그것을 부인하려고 애써도 여전히 살아 있지만, 억압되어 있기 때문에 불모 상태로 남아 있다. 그것은 다른 경험들이 단조로워지는 원인이고, 삶에 널리 퍼져 있는 불안감의 원인이기도 하다. 감히 말하건대, 그것은 미국 국민이 장례식에 터무니없이 많은 돈을 쓰는 이유를 설명해준다.

 

p255

 오늘날 쓰이는 교육 방법 가운데 독창적인 생각을 실제로 방해하는 몇 가지를 잠깐 언급하고 싶다. 하나는 사실에 대한 지식, 아니 그보다는 정보를 강조하는 것이다. 사실을 많이 알수록 현실도 잘 알 수 있다는 한심한 미신이 널리 퍼져 있다. 아무 상관도 없는 산발적인 사실 수백 개를 학생들의 머릿속에 주입한다. 학생들은 점점 더 많은 사실을 배우는 데 시간과 정력을 빼앗기기 때문에 생각할 짬이 거의 없어진다. 물론 사실에 대한 지식이 없는 생각은 공허하고 허구적이다. 하지만 '정보'만으로는 정보가 없는 것만큼이나 생각을 방해할 수 있다.

 독창적인 생각을 방해하는 또 하나의 방법은 모든 진실을 상대적인 것으로 보는 것이다. 진실은 형이상학적 개념으로 이해되고 누군가가 진실을 발견하고 싶다고 말하면 오늘날의 '진보적인' 사상가들은 그를 시대에 뒤떨어졌다고 생각한다. 진실은 전반적으로 주관적인 문제, 거의 취향에 따른 문제라고 주장된다. 과학적인 노력은 주관적인 요소에서 분리되어야 하고, 그 노력의 목적은 열정이나 관심을 배제하고 세계를 바라보는 것이다. 과학자는 마치 의사가 환자에게 접근할 때처럼 손을 소독하고 사실에 접근해야 한다. 상대주의는 경험주의나 실증주의라는 이름으로 나타나는 경우가 많고, 단어의 정확한 용법에 관심이 많다고 스스로 자랑하기도 하지만, 이 상대주의의 결과는 생각이 그 본질적인 자극 - 생각하는 사람의 소망과 관심 - 을 상실하는 것이다. 그 대신 생각은 '사실'을 기록하는 기계가 된다. 실제로 생각이 일반적으로 물질생활을 지배해야 할 필요성에서 발달해온 것처럼, 진실의 탐구도 개인과 사회 집단의 이해관계와 욕구에 뿌리를 두고 있다. 이런 이해관계가 없다면 진실을 찾기 위한 자극제가 없어질 것이다. 진실에서 더 많은 이익을 얻는 집단은 항상 존재하는데, 그들의 대표는 인류 사상의 선구자였다. 반대로 진실을 감추어야만 더 많은 이익을 얻는 집단도 존재하는데, 이 경우에만 이해관계가 진실을 잡는 데 해가 된다. 따라서 문제는 이해관계가 걸려 있다는 것 자체가 아니라, '어떤 종류'의 이해관계가 걸려 있느냐 하는 것이다. 진실에 대한 갈망이 모든 인간에게 어느 정도 존재하는 것은 모든 인간이 진실에 대한 욕구를 가지고 있기 때문이라고 말할 수 있다.

 

 

자신의 대한 환상은 혼자 걸을 수 없는 사람에게는 유익한 지팡이가 될 수 있다. 하지만 지팡이는 사람을 더욱 약하게 만들 뿐이다. 개인의 가장 큰 힘은 자신의 인격을 최대한 완성시키는 데 바탕을 둔다. 그것은 자신에게최대한 투명성을 유지하는 것을 의미하기도 한다. "너 자신을 알라"는 말은 이간의 힘과 행복을 겨냥한 근본적인 명령의 하나다.

 

p263

 지도자가 흥분을 약속하고 개인의 삶에 의미와 질서를 준다는 정치적 기구와 상징을 제시하기만 하면, 어떤 이념이나 지도자도 기꺼이 받아들이는 것, 그것이 바로 우리 문화를 토대부터 위협하는 위험이다. 자동인형 같은 인간의 절망은 파시즘과 정치적 목적을 키우기 좋은 비옥한 토양이다.

 

p265

 우리의 분석은 자유에서 새로운 의존으로 이어지는 불가피한 순환이 존재한다는 결론을 내릴 것인가? 모든 원초적 유대로부터의 자유는 개인을 너무 고독하고 고립된 존재로 만들기 때문에, 어쩔 수 없이 그는 새로운 유대 속으로 도피해야 할 것인가? '독립'은 '고립'과 같고 자유는 두려움과 같은 것일까? 혹은 개인이 독립된 자아로 존재하지만 고립되지는 않고 세상이나 타인이나 자연과 결합한 상태로 남아 있는 적극적인 자유라는 상태가 존재할까?

 우리는 긍정적인 대답이 있다고 믿는다. 자유가 성장하는 과정은 악순환을 이루지 않고, 인간은 자유로우면서도 외롭지 않을 수 있고, 비판적이지만 의심으로 가득 차지 않을 수도 있고, 독립적이지만 인류를 구성하는, 없어서는 안 될 일부일 수도 있다고 믿는다. 인간은 자신의 자아를 실현하고 자기 자신이 됨으로써 이 적극적인 자유를 얻을 수 있다. 그러면 자아의 실현이란 무엇인가? 관념론 철학자들은 지적인 통찰을 통해서만 자아를 실현할 수 있다고 믿었다. 그들은 인간의 본성을 이성이 억누르고 감시할 수 있도록 인격을 분할해야 한다고 주장했다. 하지만 이렇게 분할한 결과 인간의 감정생활만이 아니라 지적 능력까지도 제대로 기능을 발휘하지 못하게 되었다. 이성은 자신의 죄수인 본성을 감시하는 간수가 됨으로써 그 자신도 죄수가 되어버렸다. 그리하여 인격의 두 측면인 이성과 감정은 둘 다 절름발이가 되었다. 자아의 실현은 사고 작용만이 아니라 인격 전체의 실현을 통해, 즉 감정적 잠재력과 지적 잠재력을 적극적으로 표현함으로써 이루어진다고 우리는 믿는다. 이 잠재력은 모든 사람에게 존재하지만, 겉으로 표현되는 만큼만 현실이 된다. 다시 말하면 '적극적인 자유는 통합된 인격의 자발적인 활동에 있는 것이다.'

 

p268

 자발적인 활동이 어째서 자유라는 문제의 해답이 될 수 있는가? 앞에서 우리는 소극적인 자유가 개인을 고독한 존재로 만들고, 그래서 개인과 세계의 관계는 멀어지고 불신으로 가득 차며, 개인의 자아는 약해지고 끊임없이 위협받는다고 말햇다. 자발적인 활동은 인간이 본래 모습을 희생하지 않고 고독의 공포를 극복할 수 있는 한 가지 방법이다. 자아를 자발적으로 실현함으로써 인간은 자신을 다시 세계와 - 인간과 자연 및 자신과 - 통합하기 때문이다. 사랑은 그런 자발성을 이루는 가장 중요한 요소다. 이 사랑은 자신을 다른 사람 속에 용해시키는 것으로서의 사랑도 아니고, 다른 사람을 소유하는 것으로서의 사랑도 아니다. 다른 사람을 자발적으로 긍정하는 것으로서의 사랑, 개체적 자아를 보존하는 것을 토대로 하여 그 개인을 다른 사람과 결합시키는 것으로서의 사랑이다. 사랑의 동적인 성질은 바로 이 양극성에 있다. 사랑은 분리를 극복하고 싶은 욕구에서 생겨나 완전한 일체로 이어진다. 하지만 개인이 제거되지는 않는다. 일은 자발성을 이루는 또 하나의 구성요소다. 이 일은 고독에서 벗어나기 위한 강방적 활동으로서의 일도 아니고, 부분적으로는 자연을 지배하고 부분적으로는 인간의 손으로 만든 생산품을 숭배하고 그 생산품으로 자연을 노예화하는 관계로서의 일도 아니고, 인간이 창조 행위를 통해 자연과 하나가 되는 창조로서의 일이다. 사랑과 일에 적용되는 것은 모든 자발적 행동에도 적용된다. 감각적 쾌락을 자각하는 것이든 공동체의 정치 활동에 참여하는 것이든 자발적 행동에는 모두 적용된다. 그것은 자아의 개별성을 확인하는 동시에 인간과 자연을 자아와 결합시킨다. 자유에 내재하는 기본적인 양분성, 즉 개성의 탄생과 고독의 고통은 인간의 자발적인 행동으로 더 높은 차원에서 해소된다.

 

p271

 인간은 평등하게 태어나지만 서로 다르게 태어나기도 한다. 이 차이의 토대는 부모에게 물려받은 생리적 · 정신적 장비다. 인간은 그 장비를 가지고 삶을 시작하고, 살아가면서 마주치는 수많은 상황과 특별한 경험을 거기에 덧붙인다. 인격의 이러한 개인적 토대는 두 유기체가 육체적으로 결코 같지 않듯이 다른 누구와도 거의 같지 않다. 자아의 진정한 성장은 항상 이 특별한 토대 위에서의 성장이다. 그것은 유기적 성장이고, 오직 이 한 사람에게만 특유한 세포핵이 펼쳐지는 것이다.

 

p282

 민주주의의 실현을 위한 조건을 확립하는 데 가장 큰 어려움의 하나는 계획 경제와 각 개인의 적극적인 협력이 상충하는 데에 있다. 큰 규모의 산업 체계처럼 넓은 범위의 계획 경제는 엄청난 규모의 중앙집권을 요구하고, 그 결과 이 집중화된 기구를 관리할 관료 체계가 필요해진다. 한편 각 개인과 전체 체계의 가장 작은 단위들이 적극적으로 관리하고 협력하려면 많은 분권화가 필요하다. 상부의 계획이 하부의 적극적인 참여와 융합되지 않으면, 또한 사회생활의 물줄기가 밑에서 위로 끊임없이 흐르지 않으면 계획 경제는 다시 민중을 조종하는 체제로 변할 것이다. 중앙집권화와 분권화를 결합하는 이 문제를 해결하는 것은 사회의 주요 과제 가운데 하나다. 하지만 그것은 우리가 이미 해결하여 자연을 거의 완전히 제어할 수 있게 해준 기술적 문제 못지않게 충분히 해결할 수 있는 문제인 것은 확실하다. 하지만 그 문제는 우리가 그렇게 해야 할 필요성을 분명히 인식하고, 또한 사람들에 대한 신뢰를 가지고 그들이 인간으로서 자신의 진정한 이익을 돌볼 능력이 있다고 믿어야만 해결될 수 있을 것이다.

 

 

인간이 사회를 제어하고 경제 기구를 인간의 행복이라는 목적에 종속시킬 때에만, 또한 인간이 사회 과정에 적극적으로 참여할 때에만 인간은 지금 자신을 절망에 빠뜨리고 있는 고독과 무력감을 극복할 수 있다. 인간은 오늘날 가난에 시달리기보다는 오히려 자기가 큰 기계의 톱니나 자동인형이 되어버렸다는 사실, 삶이 공허해지고 무의미해졌다는 사실 때문에 괴로워한다. 민주주의가 후퇴하지 않고 공세를 취하여 지난 수백 년 동안 자유를 위해 싸운 사람들이 목표로 삼았던 것을 실현해야만 모든 권위주의 체제를 이길 수 있을 것이다. 민주주의는 인간 정신이 가질 수 있는 가장 강한 하나의 신념, 생명과 진리에 대한 신념, 그리고 개체적 자아의 적극적이고 자발적인 실현으로서의 자유에 대한 신념을 사람들에게 심어줄 수 있어야만 허무주의의 세력을 이겨낼 수 있을 것이다.

 

 

 

 

 북유럽 방식의 보편복지로 가기 위해 보편증세가 선제적으로 이루어져야 한다는 주장을 차근차근 풀어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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p35

 이처럼 1990년대 스웨덴 노인들의 삶의 질이 상승한 것은 기업과 은행이 연쇄 도산을 하고 실업자가 발에 치이는 와중에 벌어진, 어떻게 보면 매우 비상식적인 사건이다. 모두 알다시피, 한국의 자살률이 IMF 사태 이후 오랫동안 OECD 1위에 머문 것은 끔찍하게 치솟은 노인 자살률 때문이다. 경제위기 이후 극명하게 갈린 두 나라 노인들의 삶을 통해 한국 사회가 얻을 교훈이 있으리라 생각한다. 하지만 그런 것을 생각하기에 앞서 착잡함에 할 말을 잃게 된다. 우리 사회의 가난한 노인들이 겪어야 했고, 또 지금도 변함없는 그 딱한 처지가 떠오르기 때문이다.

 

p43

 세금과 복지의 선진국이란, 사회구조적으로 구성한 한 명 한 명이 서로 긴밀한 도움을 주고받는 연대적 관계로 맺어지는 사회를 의미한다. 물론 이런 사회라고 해서 사악한 행동과 이기적 인간 군상이 없는 것은 아니다. 사회연대의 손길이 미치지 못하는 사각지대도 남아 있다. 하지만 이러한 사회에선 구성원 대다수가 상호 도움을 주고받는 사회구조에 편입되어 있다. 바꿔 말하면, 세금과 복지를 발전시킨 나라에서는 '선의 평범성'이 사회구조에 따라 자동적으로 실현된다. 한 사회에 속한 개인의 취향이나 가치관과는 맞지 않더라도 사회구조가 그러하기에 따라야 할 삶의 규율이 제대로 작동하고 있는 것이다.

 반대로 세금과 복지의 후진국은, 거기에도 선한 행동과 이타적인 사람들이 없는 것은 아니지만 '악의 평범성'이 사회구조에 따라 자동적으로 발현된다. 대부분의 사회 구성원이 연대적 관계를 맺지 못한 채 도움이 필요한 동료들을 비정하게 방치한다. 한국은 이를 극명하게 보여주는 사례다.

 나는 나와 당신의 세금이 우리 모두의 삶을 책임지는 사회를 희망한다. 이것은 사회의 모든 문제가 말끔히 해결된 그런 유토피아가 아니다. 세금과 복지를 튼튼히 한다는 것은 '기본을 해놓자'는 의미이지 이것만 잘되면 만사가 문제없다는 만병통치론이 아니다. 하지만 대한민국 사회가 이 기본에 충실할 때, 우리들의 세금은 짜증과 스트레스의 요인이 아닌 우리 삶의 든든한 버팀목이 될 수 있을 것이다.

 

p63

 OECD 주요국 거의 모두가 한국에 비해 '1인당 GDP 대비 1인당 고등교육비'가 한결 높다는 것은 '한국의 등록금이 비싸다'는 인식에 오류가 있음을 보여준다. 이 고등교육비는 정부든 가계든 누군가는 비용을 치러야 한다. 만약 개별적인 학비 지출이 적고 정부 부담 교육비가 많은 유형의 나라들에서 한국처럼 각자 알아서 학비를 내는 방식으로 전환한다면, 이들의 높은 '1인당 GDP 대비 1인당 고등교육비'를 고려할 때 부담 없이 싼 가격으로는 고등교육을 이수할 수 없다. 결국, 한국의 등록금이 비싸다는 것은 세금을 인상해 학비를 공동으로 지불하는 방식을 택하지 않기 때문이지, 정말로 등록금이 터무니없이 비싸기 때문은 아니다.

 그동안 밑도 끝도 없이 일어났던 수준 미달의 대학들과 한국의 유달리 높은 대학 진학률, 그리고 지나치게 낮은 '1인당 GDP 대비 1인당 고등교육비'는 서로 연결되어 있다. 이런 점에서 무턱대고 등록금 인하를 주장해온 한국의 대학생 및 시민단체들은 관점을 교정할 필요가 있다. 그들은 보편적인 세금인상을 터부시하는 가운데 본디 비싸기 마련이며, 여타 국가들에 비해 비싸다고 보기도 어려운 '학비'를 내려야 한다고 다분히 억지를 부려왔던 것이다. 여기에 정치권은 등록금이 비싸다는 아우성만을 받아들여 등록금 인상을 간접적으로 억제함으로써 고등교육의 수준을 떨어뜨리는 데 일조했다. 우리 사회는 아예 철저한 미국식을 택해 등록금과 학자금 대출이 천정부지로 치솟도록 내버려둠으로써 대학의 질적 향상을 도모하든가, 아니면 복지강국의 방식을 택하여 세금을 더 걷는 대신 개별 교육비 지출을 최소화하고 고등교육에 대한 공적 투자를 늘리는 방식으로 가야 한다.

 한국의 후자의 방식을 택하려 한다면 대학 구조조정이 필수이다. 유달리 많은 한국의 대학생들에게 여타 국가에 준하는 '1인당 GDP 대비 1인당 고등교육비'를 투입하는 것은 곤란하기 때문이다. 이는 세금의 누수이고 고등교육의 낭비이다. 증세를 통한 개별 학비의 최소화하는 대학 구조조정, 세금과 복지의 총체적인 개혁, 나아가 노동시장의 정상화까지 모두 한 세트로 추진돼야 한다.

 

p66 

 연 30조 원대의 사교육비가 쓰이는 것이 현실이다.

 이런 대규모의 사교육비는 한국의 이례적인 소비 행태다. 막대한 사교육비가 전부 세금으로 납부돼야 할 필요까진 없겠지만, 이로부터 일정 부분 보편 증세가 이뤄질 수 있고 또 그렇게 되어야 올바르다. 웬만해서 사교육비를 쓰지 않고 그것이 가구의 여유소득이 되며, 그 여유소득 중 일부를 세금으로 내어 복지를 발전시키는 사회가 합리적이다. "사교육에 지출하고 나면 남는 것도 없고 노후도 대비하지 못할 지경"이라는 사연이 언론의 단골 기사로 올라오는 현실은 기괴하기 짝이 없다. 이런 자해적인 소비 행태를 지속하느니 세금을 더 내고 복지 발전을 요구하는 것이 당사자에게도 모두에게도 이득이다. '사교육비 때문에 버겁다'는 헬조선적 션실이 아득한 추억이 될 수 있도록 사교육비의 일부는 필히 세금으로 전환돼야 한다.

 

 

 

p155. 저급 정치인들은 조세저항을 먹고 자라난다

 

 상품이나 서비스의 구매자가 저렴한 비용을 지불할 때와 고액의 대가를 치를 경우 기대하는 품질은 천양지차다. 쉬운 예로 특별한 날을 기념하고자 수십만 원대의 고급 음식점을 찾는 손님은 위생, 맛, 직원의 서비스, 장소의 시원함이나 따듯함, 쾌적하고 기분 좋은 인테리어와 분위기 등등 여러 가지 까다로운 기준을 가지고 품질을 평가한다. 반면에 길거리 포장마차에서 간단한 요깃거리를 사 먹는다면, 위생 상태에 예민해하지도 않고 추운 날씨도 개의치 않으며 기막힌 맛이나 호사스러운 서비스를 기대하지도 않는다.

 세금 역시 마찬가지다. 많은 세금을 내는 국민은 그만큼 정치를 대하는 눈높이가 높아지고, 제발 정치에 관심 좀 가지라고 누가 타이르고 보채지 않아도 알아서 야무지게 정치를 감시하게 된다. 고가의 재화를 구입하는 소비자가 그에 상응하는 고품질을 깐깐하게 따지듯, 높은 세금에 부응하는 고품질의 정치를 엄격하게 따지는 것이다. 이렇게 다져진 냉철하고 단호한 정치의식은 뛰어난 정치를 이끌어내는 거대한 압력으로 작용한다.

 최정상의 복지국가에서 평범한 국민은 소득세, 사회보험료 등 수입에서 원천 징수되는 세금에다 소비할 때 납부하는 간접세를 더해, 세금이 충실하게 복지로 돌아오지 않을 경우 생활수준이 현저히 떨어질 만큼 무거운 부담을 진다. 세금이 잘못 쓰여 복지에 차질이라도 생긴다면, 나라가 발칵 뒤집힐 만한 정치 지형이 조성돼 있다.

 반면 한국인들은 직접세에 간접세까지 죄다 더해도 어느 소득계층이건 자신의 소득 단계가 달라지지는 않게끔 세금을 낸다. 세금이 작으니 복지도 작고, 복지강국과는 달리 세금과 복지에 따라 삶의 조건이 좌우되지도 않는다. 사람들은 늘 세금이 줄줄 새고 복지가 부족하다고 불만이지만, 콕 집어 이 때문에 정치판을 갈아엎기는 어려운 정황이다. 국민으로서는 이래저래 답답한 환경이지만 저급 정치인들에겐 한국 같은 꿀단지가 따로 없다. 높은 조세저항과 낮은 세금은 팍팍한 삶의 근원인 동시에, 정치에 대한 허술한 감시망의 토양이기 때문이다.

 

 세금을 올리는 일은 흔히 '고양이 목에 방울 달기'로 비유되곤 한다. 하지만 조세 문명이 발달한 현시대에 이런 사고는 업그레이드될 필요가 있다. 정치의 기강을 바로잡는 세금의 위력을 감안할 때 증세는 '호랑이 목에 방울 달기'가 될 수 있고 또 그래야 한다. 언제 어느 때나 정치는 국민을 두려워해야 하고, 그들에게 있어 '얼마든지 세금을 늘리라는 국민'처럼 무섭고 불편한 존재도 찾기 힘들다. '진짜' 세금폭탄을 얻어맞는 복지강국의 국민은 사소한 낭비나 비리에도 냉혹한 심판을 내린다. 한국 국민도 만만찮은 세금 출혈을 감수한다면 복지가 잘 굴러가는지, 정치인들이 일을 똑바로 하는지 '날마다 일상에서, 그냥 저절로, 두 눈을 시퍼렇게 뜨고' 지켜보게 된다. 돈이 아까워서라도 정치에 대한 단속을 게을리하기 어려워진다. 결국, 조세저항을 극복한 국민의 등장은 한국의 구태 정치인들에게 청천벽력 같은 소식이다.

 물론, 세금이 폭증해야만 불량 정치인들이 철퇴를 맞고 정치 선진국으로 발전하는 것은 아닐 것이다. 그러나 고질적인 정치 후진국 한국에서 정치를 제자리로 돌려놓고 또 그 상태를 유지하기 위해 세금은, 이미 앞선 국가들에서 검증을 마친, 더할 나위 없이 확실한 대안이다. 평범한 소득층마저 '살벌하게' 세금을 내고 대다수 인생의 성패가 복지의 성패에 달려 있다면, 이것은 분명 우수한 정치를 안착시키는 단단한 기반이 된다.

 

 

p160. '낙수효과'와 '부자증세'는 거울에 비친 듯 닮아 있다.

 

 '낙수효과'의 기본 논리는 부자가 막대한 부를 자유로이 쓰도록 내버려둘 때 이들의 소비와 투자가 늘어나 나머지의 후생이 증대된다는 것이다. 반대로 '부자증세'는 낙수효과란 허구이므로 부자의 막대한 부를 세금으로 걷어 유용한 곳에 써야 한다는 입장이다. 이처럼 낙수효과와 부자증세는 서로 상반된 주장을 한다. 하지만 이는 표면적인 대립일 뿐 실제로 이 둘은 공통된 성격과 목표를 가지고 있다. 조세저항을 기저에 깔고 고약한 '대기주의'를 종용하며 자잘한 세수 증대를 내세운다. 복지 발전이 관심사가 아니라는 점도 이들이 만나는 지점이다.

 부자증세가 왼쪽 버전의 '수동적 대기주의'라면 낙수효과는 그 오른쪽 버전의 쌍둥이다. 우측에서 수동적 대기주의를 조장하는 이들은 '부자나 기업이 돈을 풀어야 일자리가 창출되므로 그때까지 사람들은 참고 기다리는 게 상책'이라고 주장한다. 복지를 명분으로 세금을 올리거나 하면 경제 활력을 해치니까 괜한 간섭은 삼가라는 것이다. 낙수효과가 실현될 때까지 이제나저제나 인내력을 발휘하는 것이 사람들이 지켜야 할 덕목이다.

 낙수효과란 이름의 조세저항을 뒷받침하기 위해 근거가 빈약하거나 협박이나 다름없는 논리까지 동원된다.

 

 "분배는 성장을 저해한다."

 "세금으로 일자리를 늘리다간 나라 망한다."

 "일자리는 민간에서 나오지 정부에서 나오는 게 아니다."

 "부자의 세금이 오르면 투자 의욕이 감퇴되어 일자리가 사라지고 애꿎은 서민만 피해를 입는다."

 "부자와 기업이 투자를 확대해 경제가 성장하면 자연히 세수가 증가하니(이렇게 늘어난 세금이 얼마 되지 않는다는 건 내 알 바 아니고) 억지로 세금을 인상할 이유가 없다."

 

 

 이 모든 주장들을 관통하는 것은 (부유층의) 조세저항이고, 낙수효과의 출발점도 조세저항의 정당성을 보이는 것이다.

 부자증세에 몰두하는 이들은 낙수효과와 반대 방향에서 시작하지만, 결론에서는 낙수효과와 똑같이 '수동적 대기주의'를 조장하고 (부자가 아닌 이들의) 조세저항을 옹호한다. 소수의 상위층만을 추궁하는 부자증세파는 '탐욕스러운 부자와 대기업이 내놓을 때까지 나머지는 나서지 말라'고 설교한다. 부유층에서 복지재원을 빼내 와야 사회정의가 실현되니 이에 어긋나는 행동은 자중해야 한다는 것이다. 이때는 부자증세로 조세 정의가 구현될 때까지 부자와 기업의 허물만을 욕하며 기다리는 것이 미덕이 된다.

 부자증세파는 흔히 부자와 기업을 악랄한 수탈자로, 나머지는 순결하고 가련한 피수탈자로 묘사한다. 하지만 이는 허상이지 사실이 아니다. 물론, 부자와 기업에게 많은 과오가 있는 것은 사실이고 노블레스 오블리주가 됐든 뭐가 됐든 사회적 책무를 다하지 않는 것도 분명하다. 하지만 그렇다고 대다수의 한국인이 날마다 실천하고 있는, 나보다 조금이라도 약자를 착취하는 이기적인 생활양식이 가려지지는 않는다.

 사실상 부자증세파는 복지는 핑계고 단지 부자의 세금을 올리는, 그 자체에 함몰된 성격이 짙다. 부자증세로 걷히는 세금으로는 강력한 복지를 구축하는 데 턱없이 모자라다는 사실이 이들에게는 하나도 중요하지 않다. 또한 이들은 보편 증세가 윤리적으로 옳지 않다고 비판한다. 이들이 보기에 모두가 세금 분담에 협력하여 복지를 강화하는 것은 서민층과 중산층에 대한 강탈에 지나지 않는다. 이 같은 부자증세의 윤리를 맹종하다 보면, 연대를 추구하는 자유의지에 따라 같이 사는 세상을 앞당기는 데 일익이 되고 싶을지라도 부자가 아니라면 그것은 부도덕한 행동이 된다.

 표면적으로 '낙수효과'와 '부자증세'는 대립하는 입장이다. 그러나 '가만 있으라'를 종용하여 사람들의 삶을 해친다는 측면에서 이 둘은 다르지 않다. 조세저항을 무리하게 두둔하기 위해 여러 가지 해로운 논리를 전파한다는 점에서도 서로 닮아 있다. 충분한 세금의 확보를 가로막으며 복지 발전을 방해 한다는 점도 동일하다.

 낙수효과가 부유층의 조세저항을 합리화한다면, 부자증세는 부자가 아닌 이들의 조세저항에 정당성을 부여한다. 여기에 중첩되어 조세 정의의 확립을 명분으로 하는 또 다른 조세저항 합리화 논리가 완고하게 형성돼 있다. 무작정 세금 인상에 반대하는 것은 옳지 않지만, 조세 정의가 미흡한 상황에서 증세를 거부하는 것은 지당하다는 논리이다. 물론 세금이 올바르게 걷히고 쓰이는 일은 이루 말할 수 없이 중요하다. 하지만 이를 절대적인 선결 과제로 내세우는 것은 도리어 조세 정의를 저해하는 발상이다. 누구나 증세에 동참하여 세금에 대한 주인의식이 고양될 때, '눈먼 돈'이 줄기 마련이고 '숨은 돈'도 드러나게 된다.

 세금에 대한 여론조사를 보면 언제나 부자와 대기업을 타겟으로 한 '부자증세'가 압도적인 지지를 얻는다. 여기에는 내 돈은 허투루 쓰일지 모른다며 증세를 반대하는 이들이 부자의 돈은 그러거나 말거나 개의치 않는다는 의미도 담겨 있다. 이런 인식으로는 조세 정의에 불만을 갖는 이들이 흡족해 할 만큼 그것이 개선될 리 만무하다.

 세금과 복지의 증대에 찬성하지만 그러기엔 신뢰가 부족하므로 보편 증세는 불가하다는 이들은, 애초에 세금이나 복지를 내심 반기지 않는 이들과 자신들을 다르다고 여길 것이다. 그러나 종내에는 양측의 입장이 만나 서로 의기투합을 한다. 한국에서는 오직 각자도생만이 살길이라는 생각을 간직한 채 말이다.

 

p168

 문제는 현 정부 여당에게 미래에 대한 계획이 없다는 것이다. 국제적으로 볼 때 한국의 가장 부실한 분야 중 하나는 조세와 복지인데, 현 정부 여당의 가장 취약점 중 하나도 바로 이 분야다. 장래 한국의 세금과 복지를 어떻게 발전시킬 것인지 개연성 있는 구상이 나온 게 없다. 앞으로 세금과 복지가 몰라보게 나아질 것이라는 기대를 사람들에게 전혀 주지 못하고 있다. 세금과 복지는 사회구조의 문제이자 삶에 직결되는 제도이므로 이 부문에 대한 기대가 미약하면 실제로 내 삶과 사회가 나이질 것이라는 기대도 위축된다.

 복지에 우호적인 입장을 가진 최대 정파가 제자리를 찾고 중심을 잡아야 한다. 나의 삶도, 그리고 타인의 삶도 세금과 복지를 활용한다면 정말 달라질 것이라는 확실한 근거를 제시해 줄 수 있어야 한다. 

 

p170

 문 대통령은 취임 2개월을 맞았을 때 "증세를 하더라도 대상은 초고소득층과 초대기업에 한정될 것'이며, "일반 중산층과 서민들, 중소기업에게는 증세가 전혀 없을 것"이라고 밝힌 바 있다.

 "이는 5년 내내 계속될 기조"이니, "중산층과 서민, 중소기업이 불안해하지 않도록 해달라"는 당부도 덧붙였다. 그렇다고 문 대통령의 증세 화살표가 초고소득층과 초대기업으로만 향하는 것은 아니다. 그는 "대기업과 부자들의 세 부담부터 늘리고 그래도 부족하다면 국민의 동의를 얻어서 보편 증세로 나가는 것이 순서"라는 입장을 가지고 있다. 보편 증세로 나아가는 시기가 언제일지는 아무도 모른다는 맹점이 있기는 하나, '선 부자증세, 후 보편 증세'는 종종 볼 수 있는 단계적 증세론의 하나다.

 문재인 대통령이 '초고소득층과 초대기업'에 대한 증세를 언급하자, 추미애 당시 민주당 대표는 이에 대해 "초대기업과 초고소득자 스스로 명예를 지키며 사회적 책임을 다하는 '명예과세'"라고 명명했다. 김태년 당시 정책위의장은 "법인세 더 내면 기업이 사랑받을 수 있으니 '사랑과세'가 어떠냐"고 말했다. 그는 "초고소득자 증세로 세금을 더 내면 부자들이 국민으로부터 존경받는 '존경과세'는 어떠냐"고도 덧붙였다.

 나는 이들의 말에 공감하지 않는다. 내가 바라는 사회는 돈이 없어도 누구나 병을 고치고 공짜로 대학원까지 갈 수 있는 복지강국이 아니다. 그렇게 풍성한 삶의 자유가 모두에게 보장되기 위해 모두가 성큼 자기 몫을 내어놓는 나라가, 내가 희망하는 세상이다. 그러한 복지 권리가 모두에게 부여되기 위해 일부 부유층만이 그 밑천을 내놔야 한다고 다그치는 나라는 별 울림도 끌림도 없다.

 나는 이제껏 가난한 이들까지 번듯한 집에서 살 수 있는 그런 복지를 원한 적이 없다. 노인들에게 80~90만 원씩 노후 연금을 지급하하는 복지국가 또한 내가 그려온 세상이 아니다. 요람에서 무덤까지 온갖 혜택을 선물해주는 나라가 아니라, 누구나 인간다운 삶을 살 수 있도록 누구든 힘을 보태는 나라야말로 내가 희망하는 세상이다. 부자가 아니면, 나눔과 연대를 일단 모른 척하라고 닦달하는 사회는 흉하고 슬프다.

 더 많이 나누고, 더 많이 연대하며 살고자 하는 인간의 자유의지는 더 가진 이든, 덜 가진 이든 다 같이 대등하고 소중하다. 세금을 더 내고 복지를 늘리는 일에 부자가 아니니까 빠지라는 주문은, 빈부와 무관하게 고결한 이타심과 희생정신을 가진 모든 인간에 대한 모독이다. 한국인들도 사람인데, 그래서 내 몫을 더 내어놓고 같이 살고픈 욕망을 품고 있을 텐데, 한국에는 그런 인간다운 본성을 거세하려는 자들이 판을 친다.

 먼저 대단한 상류층으로 성공부터 하라고, 그래야 세금을 더 낼 명예도 존경도 얻는 거라고 차별하는 자들이 득세한다. 세상이 아무리 삭막하게 시들어가도 무슨 갑부가 아니라면 그저 자기 것을 꽉 부여잡고 있으라고 쪼아대는 자들이 난무한다. 당신들은 부자가 아니니까 나누고 연대할 자격이 없는 거라고 천시하는 자들이 권세를 누린다. 그토록 집요한 혹세무민에 파묻힌 한국인들은 그들도 인간이기에 지닌 존엄한 연대심을 끊임없이 억눌리며 살아간다.

 

 

p180

 무상복지는, 그것을 성토하는 이들과 별개로, 복지를 표상하기에 적합한 표현이 아니다. 우선, 처음부터 복지는 무상일 수 없다. 우리는 도로와 다리, 공원을 이용할 때 일반적으로 개별 요금을 내지 않지만 무상도로, 무상다리, 무상공원 같은 말을 전혀 쓰지 않는다. 세금이라는 비용이 들어갔기 때문이다. 무상국방과 무상치안을 논하지 않는 것처럼, 무상보육이니 무상급식이니 구태여 무상이라는 사족을 가지고 왈가왈부할 이유는 조금도 없다. 공보육, 공공의료, 국공립 어린이집, 급식비 지원 확대 등으로 표현한다고 큰일이 나는 것은 아니다.

 

p182

 복지가 값진 것은 무상이라서가 아니라 세금이라는 무거운 대가를 치르기 때문이다. 복지의 한 단면에 불과한 '무상'을 복지의 정수인 양 규정하는 것은 올바른 복지의 의미를 정립하는 데 하등의 도움이 되지 않는다.

 

p191

 그런데 특히 자원이 한정되어 있을 경우 저소득자와 실업자에게만 급여를 지급하는 것이 더 낫다는 견해가 종종 사회민주당 내에서도 제기되었다. 이런 방법으로 하면 어려운 사람들을 집중적으로 지원할 수 있고 그들이 원하는 것들을 실제로 보장해줄 수 있다는 것이다. 그런데 이러한 주장은 소득이 많고 어떠한 사회적 혜택도 받지 못할 것 같은 사람들이, 가장 어려운 사람들을 대대적으로 지원하기 위해 기꺼이 세금을 낼 수 있을 것이라고 가정하고 있다. 하지만 많은 경험들은 일이 이런 식으로 돌아가지는 않는다는 것을 말해주고 있다. 오히려 많은 연구들은 보편적 복지시스템이 자산조사를 중시하는 복지시스템보다 실제로 더 많은 혜택을 사회적으로 어려운 집단들에게 제공하고 있다는 것을 보여주고 있다.

 만약에 가장 어려운 사람들만이 아동수당, 무상의료 또는 무상교육의 혜택을 받는다면, 나머지 사회집단들은 그러한 혜택이 가능한 한 값싸게 지급되는 데 관심을 가질 것이다. 그들은 온갖 이유를 들면서 급여의 비용을 줄이려 할 것이다. 왜냐하면 이 급여는 자신들은 받지 못하는 것이고, 또 여기서 제공되는 서비스의 질이 나쁘다고 해도 자기들에게는 직접적인 영향이 미치지는 않기 때문이다(카를손. 잉바르 · 린드그랜. 안네마리네 2009/1996 : 139~141)

 

 

 장르는 소설의 형식을 취하지만 내용은 논픽션이다.

읽는 느낌은 무라카미 하루키의 도쿄기담집과 매우 유사하다. 그만큼 재밋기도 하다.

이 소설집은 선생께서 여기저기에 부탁 등을 받고 써주었던 당시의 소회, 에피소드를 모은 것으로, 책 말머리에도 쓰여 있지만 본인도 이 글을 내가 썼던건가 갸우뚱 거릴 정도로 본인에겐 잊혀진 글이라고 한다. 

무라카미도 장편을 쓰고 난 후의 휴식기에 정신적 휴식을 취하는 시기에 단편을 쓰거나 번역일을 하는 등의 가벼운 작업을 한다고 하는 것과도 일맥상통한다고 하겠다.

그래서 글들의 내용은 에피소드 지향적으로 논픽션이라는 점을 빼면 소설 그 자체의 성격을 가진다.

가볍게 읽을 만한 내용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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p76

 두 번째로 품은 닭이 "낙서落書"였다. 낙서는 봉혜의 7대손인데 태어나면서부터 아주 고생을 했다. 봉혜의 씨가 말라, 봉혜의 적손들이 사는 지눌의 집에서 입양을 해왔는데, 기존의 패거리들에게 엄청 "왕따"를 당했다. 어려서부터 쪼임을 당했고, 모이를 먹을 때도 모이통에 대등하게 머리를 디밀지 못했다. 딴 놈들이 먹으면서 흐트러놓은 모이가 주변의 땅바닥에 떨어지면 빙글빙글 돌면서 재빨리 주워 먹곤 했다. 성경에도 시로페니키아의 여인이 상에서 떨어진 빵 부스러기라도 먹게 해달라고 간청하는 장면이 있다(막7:28). 그 광경은 정말 가슴이 아팠다. 일본의 중 · 고등학교 여학생들 사이에서 유행하는 극심한 왕따현상, 결국 우리나라까지 오염되고 말았지만, 그 왕따현상은 일본사회의 독특한 문화에서 유래하는 기풍이 아니라, 동물세계에서 아주 흔하게 목격되는 원초적 생리라는 것을 깨닫게 된다.

 동물세계의 원초성이 인간세의 도덕성보다 더 순박하고 아름다운 측면도 있지만, 인간세의 발전은 바로 약자를 도태시키는 것이 아니라 보호한다고 하는 협동의 국면으로부터 그 새로운 전기를 마련한 것이다. 그 전기는 이미 수렵 · 채집경제사회로부터 시작된 것이다. 수렵은 공동체 성원의 협력(cooperation)이 없이는 불가능하다. 수렵으로부터 문명이 시작되었다 해도 과언은 아니다. 그러니까 타인에 대한 복지나 관회關懷가 없으면 그것은 문명이라 말할 수 없다. 닭사회의 수준으로 전락하는 것이다. 문명이 극도로 발전한 자유민주주의 사회에서 오히려 협력을 거부하는 문명 이전의 상태로 퇴락하는 현상이 발생하는 것은 인류사회의 한 아이러니라고 말할 수 있다. 신자유주의는 문명퇴폐의 한 극상極相이다.

 

p147

 그러나 그 험난한 등반여정의 중간 길목에 있는 "깔딱고개"를 코앞에 쳐다보고 있는 느낌이다. 깔딱고개만 넘으면 그래도 나머지 등반이 수월하게 이루어질 수 있겠다는 생각이 든다. 그런데 깔딱고개는 너무도 숨이 차서 못 넘을 수도 있다. 그러면 결국 도로나무아미타불이 되고 마는 것이다. 깔딱고개란 본시 숨이 차도 무리해서라도 내친 걸음으로 힘차게 행보해야만 넘을 수 있는 것이다.

 

p198

 씨렉은 씨 섹션 c. section의 줄임말이다. 그런데 씨 쎅션의 씨(c)는 "씨세리안cesarian"이라는 말의 줄임말이다. 그런데 이것은 로마의 황제 "씨이저"라는 말의 형용사형이다. 「마태복음」 22장에 보면 "가이사의 것은 가이사에게"라는, 정치와 종교의 분리를 암시하는 아주 애매한 예수의 말이 나오고 있다. 여기 "가이사"는 영어 "씨이저"의 로마 원발음에 가까운표기이다. 이 "가이사"를 중국인들은 "개살凱撒"이라고 표기했다. 이것을 북경만다린으로 읽으면 "카이사"가 된다. 그래서 우리 아버지 때만 해도 "씨쎅"이라는 말은 없었고 "개왕절개"라는 말만 있었다. 개왕凱王은 곧 씨이저를 말하는 것이다. 그리고 때때로 "제왕절개"라는 말도 썼다. 개왕凱王은 로마의 황제였으므로 "제왕帝王"이라고 표현했던 것이다. 그레코-로망 세계를 나이브한 공화체제에서 전 세계를 지배하는 제국체제로 전환시킨 가이우스 줄리우스 씨이저Gaius Julius Ceaser라는 인물이 과연 씨쎅으로 태어났는가? 씨쎅의 발상은 얼마든지 가능한 것이지만, 19세기까지만 해도 씨쎅은 과도한 출혈과 패혈증으로 반드시 산모의 죽음을 초래하는 것이었다. 줄리우스 씨이저는 기원전 100년 7월 12일에 태어났다. 7월을 "줄라이July"라고 부르는 것은 씨이저의 탄생을 기념하여 그의 이름을 본따서 명명한 달력 때문인 것이다. 그런데 줄리우스 씨이저는 아버지는 조실했지만 훌륭한 어머니 밑에서 성장하였다. 다시 말해서 씨이저의 산모는 죽지 않았던 것이다. 따라서 개왕절개의 신화는 엉터리인 것이다. 의학사학자들은 로마의 고래로부터 내려오는 관습에 애기 낳다가 죽은 여자는 반드시 복부를 칼로 갈러보고 매장하는 전통이 있었는데 이것이 후대에 로마황제 씨이저의 칙령으로 되었기 때문에 그래서 "개왕절개"라는 말이 생겨나게 되었다고 추론하기도 한다.

 

 

p371

 나를 떠받쳐 주었던 물리적 관계가 전혀 나의 존재를 보장해주는 실상이 아닌 허상이었다는 자각에 함몰한다. 그 자각의 결론은 심각한 고독감이다. 그런데 고독이란 인간의 관계없이는 불치의 병이다.

 

 

 일본 최고의 정리 컨설턴트. 어린 시절부터 정리에 마음을 쓰며 살아온 결과 정리 컨설턴트라는 장르를 개척해냈다.

이 책은 정리의 방법론을 다루고 있지만, 어찌 보면 인생의 방법론을 다루고 있는 것이나 마찬가지다.

우연히 읽게 됐는데 내용이 좋아서 저자의 유튜브 채널까지 찾아보게 됐다. 정리를 하고 싶다는 마음은 무언가 지금의 내가 마음에 들지 않는다는 반증일지도 모른다. 

 내 주변의 정리건, 내 마음의 정리 혹은 인생에 있어서 정리가 필요한 때 읽으면 좋을 책이다.

 

 한국어 번역본은 인생이 빛나는 정리의 마법인데, 원제는 인생이 설레는 정리의 마법이다. 별 차이가 없다고 느껴지겠지만, 책을 읽어보면 원어 그대로 '설레는' 이라는 표현을 그대로 유지하는 것이 훨씬 좋았을 것이라는 데 동의할 것이다.

 

 

1985년 여름 유러피언 차트 No.1

Na na na na na,
Na na na na na, 
Na na na na na,  
Na na na na na

Life (na na na na na)
Life is life (na na na na na)
Labalab bab bab life (na na na na na)
Life (na na na na na)

When we all give the power
We all give the best
Every minute of an hour
Don't think about the rest
And you all get the power
You all get the best
When everyone gets everything
And every song everybody sings

And it's life (na na na na na)
Life is life (na na na na na)
Laba laba laba laba life (na na na na na)
Life (na na na na na)

Life is life when we all feel the power
Life is life come on, stand up and dance
Life is life when the feeling of the people
Life is life is the feeling of the band

When we all give the power
We all give the best
Every minute of an hour
Don't think about the rest
Then you all get the power
You all get the best
When everyone gives everything
And every song everybody sings

And it's life (na na na na na)
Life is life (na na na na na)
Laba laba laba laba life (na na na na na)
Life is life (na na na na na)

Daba dab daba dab doo (na na na na na)
(Na na na na na)
(Na na na na na)
(Na na na na na)

Life (na na na na na)
Life is life (na na na na na)
Laba laba laba laba life (na na na na na)
Live is life (na na na na na)

And you call when it's over
You call it should last
Every minute of the future
Is a memory of the past
'Cause we all gave the power
We all gave the best
And everyone gave everything
And every song everybody sang

(Life is life) yeah

 동학 혁명, 3.1 독립만세 운동, 4.19 의거, 5.18 광주 민주항쟁에 이르기까지 한반도에서 일어난 민중의 봉기와 그에 따른 희생은 만만치 않았다.

 

 하지만 서구의 혁명과 다른 점은 우리의 민중항쟁에서 그 결과로 항쟁의 원인이 된 권력자에 대한 처단이 이루어진 적이 없다(4.19 당시에도 이승만은 처벌받지 않고 하와이로 망명했을 뿐 아니라, 죽고나서는 국립묘지에 묻히기 까지 한다).

 

 민주주의는 민중의 피를 먹고 자라지만, 그 마무리는 혁명의 원인이 된 부폐한 권력자의 처단으로 완성된다.

 

 한국은 '정情'이라는 개인적 미덕을, 혁명이라는 지극히 공적 이벤트에 적용하는 우愚를 범함으로 인해 제대로 된 혁명의 완성이 이루어진 적이 없다.

 

 그러므로 향후 대한민국의 적폐 청산에는 필수적으로 해당 적폐에 대한 제대로 된 '처벌'이 이루어져야 한다.

 

제대로 된 '처벌'이란 최소한 법에 의해 선고된 형량(그것이 사형이든, 무기징역이든)에 대해 '정'에 치우친 주저함이 없이 냉엄한 사법적 절차를 엄정하게 진행하는 것을 의미한다.

100%의 최선을 다해도 되지 않는 일들이 많다.

그러면 200%, 300%, ... 1000%의 노력을 바쳐 헌신한다.

그래도 벽에 부딪히면, 조용히 무릎을 꿇고 겸허한 마음으로 '신'에게 빈다.

"포기하지 않게 해달라고"

 

경제전문 기자 박종훈과 애널리스트이자 경제전문가 홍춘욱의 대담집. 밀레니얼 세대가 맞이할 경제환경에 대해 교육, 취업, 재테크 - 저축, 주식, 보험, 부동산 -, 2명의 전문가의 의견을 교환하는 내용으로 이루어져 있다.

홍춘욱 씨의 책은 몇 권 읽어봤는데, 현업에서의 경험을 녹여낸 현상의 분석과 미래 예측에서는 배울 바가 많다. 이번 대담집의 파트너인 박종훈 기자도 홍춘욱 씨 못지 않은 내공이 느껴진다.

두 사람이 같은 사안에 대해 서로 다른 결의 해석을 보여주면서 균형이 잘 잡힌 분석이 이루어지고 있다는 생각이 들었다. 

경제/경영서들이 잘못하면 꽤 딱딱하고 지루해지기 쉬운데, 이 2명의 대담자는 현재 밀레니얼 세대가 처한 여러가지 경제상황의 딜레마들에 대해서, 서로의 의견을 개진하면서, 상호보완을 통해 구체적인 방향과 전략적 지침을 제시하고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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p25

 기술이 노동생산성을 압도하는 시대로의 전환

 

 홍춘욱 : 그런데 밀레니얼 세대가 사회에 진입한 최근에는 기술 혁신의 속도가 사람을 압도하기 시작햇어요. 지난 20~30년간 저희 세대가 축적해온 지식과 생산성을 현재의 세대가 따라잡기 힘들어진 거에요. 학계에서는 이런 시대를 '숙련편향적 기술 진보Skill-Biased Technical Change-SBTC' 의 시대라고 부릅니다. 이 숙련편향적 기술 진보로 인해 기존의 단순노무나 사무직 일자리는 점점 사라지고 정보통신기술ICT 분야 등의 고숙련 일자리만 증가하게 됩니다.

 정보통신혁명으로 저숙련 노동자들, 특히 일반 사무직이 실직과 임금 하락이라는 피해를 고스란히 받게 되었어요. 2006년 데이비드 오토 매사추세츠공대 경제학과 교수는 그의 유명한 논문에서 1990~2000년 숙련 수준을 기준으로 양극단의 일자리는 모두 증가하고 중간 단계의 숙련도를 보이는 사무직 일자리만 줄어들었음을 입증했습니다. 실제로 이것이 2000년대 미국 중산층의 붕괴 원인으로 작동했다고도 하죠.

 증권 업계만 봐도, 예전에는 경영학과나 경제학과 출신을 많이 뽑았지만 지금은 공과대 출신을 굉장히 선호해요. 파이썬, R 같은 통계 프로그램과 프로그래밍 언어를 사용할 줄 알면 기업에서 앞다투어 데려간다는 말이죠. 이런 분들이 가는 대기업, 금융권, IT기업들은 20년 전에 비해 생산성이 엄청나게 높아졌고, 당연히 연봉도 높겠죠. 그런데 이런 분들이 많지는 않아요. 아주 일부죠. 이런 인재가 되려면 준비하고 배워야 하는 것이 너무 많거든요.

 예전에는 웬만한 대학의 졸업장만 가지고 있어도 기업을 골라 들어갈 수 있었어요. 그리고 취업에 성공한 이후에는 빠르게 회사내에서 업무 생산성을 높여갈 수 있었고요. 그런데 이제는 그렇지 않은 시대가 되었습니다. 정보통신혁명에 이어, 4차 산업혁명이 시작되었다는데 왜 한국의 대학 졸업자들은 어려운 세상을 맞이하게 되었을까요? 그 이유는 '공급 과잉'에 있습니다. 1990년대부터 시작된 대학 정원의 확대, 더 나아가 새로운 대학의 설립으로 인해 대학 진학률이 60%까지 치솟았거든요.

 그 결과 대졸 임금 프리미엄은 계속 떨어지는 중입니다. 임금 프리미엄이란 고졸자에 비해 대졸자가 얼마나 많은 임금을 받는지를 측정한 것인데 최근에는 30% 이내로 줄어들었습니다. 결국 졸업장보다는 숙련편향적인 기술을 지니고 있는지, 더 나아가 쉽게 습득하는 능력을 가지고 있는지가 중요해진 것이죠.

 이렇게 밀레니얼 세대가 사회에 진입하는 시기에 취업의 문이 좁아졌습니다. 더불어 취업 준비가 기간과 비용도 높아졌고요. 밀레니얼 세대가 갖는 압박감과 박탈감은 여기에 기인하는 것이죠. 이런 상황에서 이들은 일부 정치인이나 재벌의 특혜 또는 채용 비리 등에 정말 민감할 수밖에 없습니다. 밀레니얼 세대가 그토록 부르짖는 '공정함'에 대한 요구는 이런 맥락에서 이해할 수 있습니다.

 밀레니얼 세대는 '58년 개띠'로 대표되는 베이비붐 세대의 자녀 세대로서 역사상 가장 풍요롭게 자라났지만 마찬가지로 가장 치열한 경쟁을 치르는 세대이기도 합니다. 사실상 그들의 부모 세대는 경험한 적이 없는 레이싱을 치르고 있죠. 그래서 이제 갓 사회에 진출한 밀레니얼 세대에게는 국가 전체가 '3배' 더 잘살게 되었다는 사실보다는 눈앞의 냉혹한 경쟁 사회가 더욱 실감나는 것입니다.

 그들이 보기에는, 지식 기반 경제로 전환되던 시기에 사회에 진입한 부모 세대, 혹은 저희 같은 2차 베이비붐 세대는 '운이 좋았다'고밖에 생각되지 않는 지점이 있습니다. 그러니 '우리 때는 정말 열심히 했어. 너희들은 그러면 안 돼'라는 소리를 하는 사람은 '꼰대'로 보일 수밖에 없는 것입니다.

 

p70

 홍춘욱 : 내년에는 전체 인구 중 외국인 노동자의 비율이 5%를 넘어설 거에요. 왜냐하면 2018년 단 한 해에만 외국인 순이동(유입-유출)이 무려 15만 6,000명에 이르렀거든요. 이들이 주 40시간씩 연 52주 연속으로 일했다고 치고, 최저 임금을 적용해보면 퇴직금까지 포함해서 약 2만 달러의 연 소득이 나와요. 최저 임금 인상의 수혜자는 역설적이게도 외국인 노동자일 가능성이 높습니다. 아시아에서 이 정도 소득이면 한국, 일본, 대만 다음 가는 수준이거든요. 결국 한국의 저숙련 노동시장이 외국인 노동자들에게는 상당히 매력적으로 부각되고 있습니다.

 

p95

 박종훈 : 이런 점을 생각하면 국내 IT 산업의 미래가 상당히 밝을 것 같죠? 그런데 안타깝게도 저는 그렇게 보지 않습니다. 

 바로 신규 산업에 대한 정부 정책에 여러 가지 문제점들이 있기 때문입니다. 특히 IT 산업과 관련해서 제가 주목하는 부분은 2007년에 제정된 '파견 근로자 보호법'입니다. 이 법의 취지는 '3D 업종'의 파견 근로자들을 보호하자는 것인데, 이 파견 근로자에 해당하는 업종(대통령령이 정하는 업종)에 희안하게도 IT 업계의 꽃이라는 '컴퓨터 관련 전문가'가 들어가 있어요. 이상해 보이죠?

 이렇게 된 원인은 간단합니다. 2007년 법이 제정될 당시 각 기업들에서 컴퓨터 관련 전문가, 특히 소프트웨어 엔지니어에 대한 수요가 폭증하고 있었거든요. 당연히 이들의 몸값이 천정부지로 치솟았습니다. 그러자 관련 업계에서 정부 측에 지속적으로 요구했어요. 파견 근로 업종에 이들을 포함시켜달라고요.

 그 결과는 어땠을까요? 이 법으로 인해 컴퓨터 프로그래밍 전문인력들의 임금 수준이 박스에 갇히게 됩니다. 저임금 3D 업종이 되어버린 거죠. 이들이 파견 근로가 가능한 업종이 되면서 기업은 낮은 임금으로 인재들을 고용할 수 있게 되었습니다. 그리고 상상을 초월하는 이들의 살인적인 업무시간에 대해선 많이들 들어보셨을 거에요. 오죽하면 엔지니어를 '갈아서' 프로그램을 개발한다고 하겠어요.

 그런데 미국 실리콘밸리의 애플이나 구글에서 일하는 소프트웨어 엔지니어들의 연봉은 평균 15만 달러에서 많게는 30만 달러를 훨씬 상회합니다. 근무시간도 그리 길지 않고요. 그러다 보니 아이러니하게도 국내에선 프로그래밍 인재를 조기에 양성하겠다며 초등학생들을 대상으로 코딩 교육 열풍이 불었는데, 정작 우수한 소프트웨어 엔지니어들은 모두 한국 기업을 떠나고 싶어하는 상황이 펼쳐졌습니다.

 

 

 국내 대기업과의 불공정 거래 관행도 문제입니다. 제가 수년간 기업 취재를 해왔잖아요. 그런데 제조 스타트업이나 중소기업은 대부분 대기업에 납품을 하거든요. 열심히 상품을 제작해서 납품을 하면 대기업이 설계도까지 내놓으라고 강요하는 상황이 적지 않습니다. 최악의 경우는 설계도를 해당 대기업의 자회사에 넘겨서 생산하게 하는 것입니다. 애써 개발한 중소기업의 독자 기술이 헐값에 대기업으로 넘어가는 거죠. 이런 불공정 거래 행위가 발각되면 미국의 경우 징벌적 배상제도를 통해 천문학적인 액수의 배상을 하게 됩니다. 하지만 우리나라는 중소기업이나 스타트업의 기술력을 보호하는 법과 제도가 상당히 부실해요. 현장에는 정말 안타까운 상황들이 많습니다.

 

p173

 박종훈 : 그리고 저는 이 지점이 이전 세대와 밀레니얼 세대를 구분 짓는 특징적인 성향이라고 봅니다. 이들에게는 소비든 취향이든 '주류'가 없어요. 그래서 국내 기업의 마케팅이 어려워지는 거죠. 뭔가가 '대세'라고 규정되는 순간, 그에 대한 열기가 가라앉죠. 대중적인 것을 선호하지 않는 '구별짓기 distinction'가 아주 활발하게 일어나거든요.

 예전에는 '골프 붐'이라고 하면 모두가 골프 연습장에 등록하고 골프채를 사서 필드로 나갔습니다. 그런데 밀레니얼 세대는 자신만이 알아보는 어떤 취향이 대중에게 번지는 걸 본 순간 오히려 그걸 그만두죠. '휘소가치揮少價値'가 사라지기 때문이에요. 그들은 희소가치가 아니라 휘소가치, 즉 휘발되어버리는 가치를 더 선호하죠. 아무리 경리단길이 '힙'해도 주변 사람들이 모두 그곳을 찾는다 싶으면 익선동으로 발길을 옮기고요. 그래서 일시적으로는 인기 있는 제품이나 분야가 생기겠지만 유행 주기가 짧기 때문에, 어느새 다른 쪽으로 인기가 넘어가요. '600만 명의 밀레니얼이 있으면 600만 개의 취향이 있다'라는 말이 나온 것도 그래서고요.

 

▶이러한 밀레니얼의 심리의 원인은 내 개인적인 생각으로는 이럴 것 같다.

1. 자신들만이 발견한 힙한 곳이란 일단 가성비와 가심비가 높은 곳이다. 아직 잘 알려지지 않은 그들만의 아지트. 하지만 대중에 노출되면서 사람들이 몰리고 가격이 올라간다. 그러면서 가성비와 가심비는 떨어진다. 그러면 밀레니얼들에게는 매력적이지 않은 곳이 된다.

2. 경리단길 등 소위 힙했던 곳도 대중이 몰리면서 대형 마케팅의 대상이 되버린다. 그러면 원래의 아기자기했던 그곳의 다양성이 사라지고, 왁자지껄한 메트로폴리탄의 화려하고 값 비싼 마케팅의 대상이 되버리면서 소위 젠트리피케이션이라는 현상이 일어난다. 즉, 본래 그 장소의 가치를 힙하게 만들었던 가게들이 밀려나게 되는 것이다. 이러한 현상에 특히 밀레니얼 들은 고개를 돌리는 것이 아닌가 싶다.

 

p175

 홍춘욱 : 개별화된 취향들이 수면 위로 올라와서 일종의 취향 공동체 같은 비즈니스가 인기를 끌기도 합니다. 대표적인 곳이 취향이 비슷한 사람들끼리 '돈을 내고' 함께 책을 읽는 커뮤니티인 트레바리죠. 이제는 동창회도, 동기 모임도 없는 시대인데, 나이, 출신 지역, 직업, 결혼 여부 등과 관계없이 오로지 취향을 중심으로 모이는 사람들, 그것을 비즈니스 모토로 삼은 것이 정확하게 먹힌 겁니다. 그래서 밀레니얼 세대에게 일종의 '살롱 문화'를 발견하는 시각들도 많거든요. 그들은 자신들만의 아지트를 찾는 세대라는 거에요. 독서 커뮤니티 스타트업인 트레바리는 창업 3년 차인데 벌써 50억 원의 투자를 유치했습니다. 앞으로도 취향 기반 비즈니스는 꾸준한 성장세를 보일 거에요.

 

p185

 박종훈 : 미국 최최의 사회보장제 수혜자로 기록된 이다 메이 풀러Ida May Fuller는 1939년 은퇴한 다음 1975년 100세로 사망할 때까지 연금으로 생활하셨다고 해요. 이분이 납입한 사회보장세는 단 24.75달러였지만, 평생 받은 혜택은 총 2만 2,889달러였다고 합니다. 본인이 낸 돈의 무려 924배에 달하는 금액이었죠. 어떻게 이런 일이 가능했을까요?

 결론적으로 예측과 설계가 부실했기 때문입니다. 당시 미국의 연금제도는 연방보험료법에 따라 세율을 정했는데 이 연방보험세율이 1930년에는 2%였습니다. 고용인과 피고용인이 1%씩 분담하는 구조였죠. 2013년에는 이 세율이 15.3%까지 인상됩니다. 안타깝게도 이처럼 대부분의 국가에서 공적연금은 첫 세대가 가장 큰 이득을 보도록 설계되어 있습니다. 국민연금연구원의 논문에 의하면, 우리나라도 1928년생 여성의 경우 수익비가 무려 72배, 즉 자신이 낸 돈의 72배를 가져간다고 합니다. 1948년생의 국민연금 기대 수익률은 27.2%로, 세계적인 투자가 워런 버핏의 연평균 수익률(24%)을 능가하는 수준입니다. 그런데 1990년생 여성으로 내려오면 수익비가 3.14배로 뚝 떨어지고, 평균 수명이 여성보다 짧은 1990년 남성은 1.62배로 다시 반토막이 납니다.

 모든 국가가 이와 같은 상황에 직면한 것은 무엇보다 처음에 연금구조 자체를 후하게 설계한 탓도 있고, 출산율과 경제성장률에 대해 지나치게 낙관적으로 예측한 탓도 있습니다. 우리나라의 국민연금 설계는 전두환 대통령 시절로 거슬러 올라갑니다. 1988년 1월 전두환 대통령은 선심성 국민연금을 내놓았습니다. 고작 소득의 3%, 직장인의 경우 1.5%만 내면 기존 소득의 무려 70%를 60세 이후 평생 보장하겠다는 것이 골자였습니다. 그러나 눈앞의 세대에게 베푼 선심성 정책의 부메랑을, 밀레니얼 세대, 더 나아가 Z세대를 포함한 미래 세대가 맞게 되었습니다.

 물론 당시에는 지금과 같은 상황을 예측하기 어려웠겠죠. 지금 우리나라는 합계 출산율이 급속히 하락하고 있고 예전과 같은 경제성장도 어려워졌지만, 당시의 정부와 국민연금은 이런 상황을 예측하기 힘들었던 거죠. 현재 국민연금 장기재정추계에 의하면, 2060년에는 소득의 29.3%를 납입해야 지금의 국민연금 체제가 유지된다고 합니다. 그런데 이 추계는 합계 출산율을 1.05로 계산한 것입니다. 2019년을 기준으로 합계 출산율은 0.977로 떨어졌습니다. 결국 소득의 30%를 납입해야 하는 시기는 2060년보다 앞당겨 질 거라는 추산이 나옵니다.

 

 그런데 소득의 30%까지 국민연금을 내야 한다는 것은 상당히 부담되는 일입니다. 더구나 세금도 내야 하고 건강보험료도 내야 하잖아요. 이렇게 되면 본인이 연금과 건강보험료를 100% 부담해야 하는 자영업자들 같은 경우, 돈을 벌어서 세금과 사회보험료를 내다가 끝난다는 소리가 나오게 되는 거죠. 게다가 고령화가 진행되면서 건강보험료도 갈수록 가파르게 오를 겁니다. 끔찍한 예측이지만 2060년대에 경제활동을 하는 국민연금 납부 대상자들은 소득의 3분의 2를 세금과 사회보험료로 내는 시대를 살게 될지도 모릅니다. 이런 예측들 때문에 밀레니얼 세대 사이에서 국민연금에 대한 불신과 냉소가 터져 나오는 겁니다.

 결국 국민연금 개혁 논의가 빠르게 진행되어야 이 상황을 조금이라도 연착륙시킬 수 있을 것입니다. 독일의 경우 현재 소득의 20% 수준으로 연금을 납입합니다. 우리가 미래 세대를 위한 사회적 타협을 통해 현재의 9%대 납입률을 독일 수준으로 끌어올리는 것이 최선이라는 의미죠. 그게 아니라면, 소득 대체율을 기준의 40% 수준에서 25% 수준으로 낮출 수밖에 없을 겁니다. 연금구조의 현실화가 빠른 시일 내에 이루어져야 합니다. 2000년대 이후 국민연금을 개혁하기 위한 수차례의 시도들이 있었지만 매번 정권들은 민심 이반이라는 값비싼 대가를 치러야 했습니다. 2007년 노후연금 지급액을 소득 대체율 60%에서 40%(2028년 기준)로 낮춘 덕분에 그나마 밀레니얼 세대의 미래 부담을 줄일 수는 있었지만, 그 대가로 노무현 정부는 당시 386 지지층에게 외면당했습니다. 결국 정부와 국민연금 개혁 당사자들이 보험료율 인상의 불가피성을 설명하고 사회적인 대타협을 이루는 일이 시대적 과제로 남았습니다.

 앞머리에 밀레닝ㄹ 세대 역시 국민연금의 수혜를 받을 수 있는가라는 질문에 대해 저는 "그렇다"라고 답했는데요, 이 대답을 좀 더 정확하게 표현하면, "이전 세대보다 보험료는 더 내고 연금은 덜 받게 되겠지만, 어쨋든 연금을 받을 수는 있다"가 제가 드릴 수 있는 대답입니다. 혹시라도 이 대답이 실망스러워서 국민연금에 가입하지 말아야겠다고 생각한 독자들에게 제가 꼭 드리고 싶은 말씀이 있어요. 국민연금은 대한민국이라는 국가가 보장하는 사회보장제도이자 가장 안전한 금융상품입니다. 장기적으로 어느 민영 금융 회사가 국가보다 안전할까요? 심지어 연금이 일부 줄어들어도, 국민연금의 수익률은 민영 연금보다 월등히 높거든요. 직장인이라면 더더욱 가입이 유리합니다. 회사가 절반을 부담해주기 때문에 납입 금액 대비 혜택의 비율이 더 높은 셈이니까요.

 다만 한 가지 유의하실 점은, 현 제도가 소득 대체율 40% 수준을 보장하지만 이마저도 국민연금 가입 기간이 40년인 분들을 기준으로 계산한 수치입니다. 요새 같은 상황에서는 대부분의 직장인들이 길어야 25년 정도 연금을 납부하거든요. 그럼 소득 대체율은 25% 정도밖에 안 된다는 말입니다. 100만 원을 벌던 사람이 25만으로 살 수 있겠습니까? 국민연금으로만 노후 자금을 계획하면 안 되는 거죠. 그러므로 밀레니얼 세대는 국민연금과 함께 개인연금과 퇴직연금이라는 삼각 포트폴리오를 꾸려갈 수밖에 없습니다.

 

 

p227

 홍춘욱 : 제가 서울의 아파트를 구매하고 싶어하는 후배들한테 종종 해주는 이야기인데요, 일단 주택시장이 하나의 단일한 시장이라는 생각을 버려야 해요. 제가 보기에 아파트 시장은 네 가지로 나뉩니다.

 첫째는 지금도 좋고 미래에도 좋을 시장이에요. 대표적인 곳이 강남입니다. 용산 일부 지역까지도 포함되죠. 왜냐하면 앞에서 박기자님이 언급했듯이 좋은 일자리가 모여 있는 곳에 고소득자들이 살거든요. 일종의 클러스터를 형성하면서 사람들을 끊임없이 끌어당기는 힘을 갖고 있습니다. 강남(반포, 압구정, 도곡 등)이 180만 명, 광화문이 60~80만 명, 용산~마포가 30~40만 명 정도의 고소득자 클러스터를 형성하고 있다고 보고요. 당연히 그 주변은 최고의 거주지가 됩니다. 시장의 원리상 가격 또한 높게 형성되어 있습니다.

 두 번째는 지금까지는 굉장히 좋았는데 미래 상황은 다소 불투명해 보이는 시장입니다. 대표적인 케이스가 일산, 평촌, 산본, 중동, 동탄 등과 같은 1,2기 신도시들입니다. 현재는 매우 살기가 좋습니다. 아파트 단지 내에 커뮤니티가 잘되어 있고, 교육 여건도 좋습니다. 그런데 밀레니얼 세대가 결혼도 적게 하고 아이도 적게 낳는다는 사실에 비추어보면, 특히 맞벌이 비중이 계속 높아지는 추세를 감안하면 비교적 도심과 멀어서 미래 가치를 높게 평가하긴 힘든 거죠. 비록 광역철도 등으로 접근성이 개선된다 하더라도 말이죠. 게다가 일산이나 분당 같은 1기 신도시는 이미 주택 노후화가 진행 중입니다. 그런데 재건축이 가능할까요? 변수가 너무 많고 상당한 시간을 필요로 하는 대규모 사업이 되겠죠. 판단은 각자의 몫입니다. 저는 밝지는 않다고 봅니다.

 세 번째는 과거에는 저평가되었지만 지금부터는 괜찮아질 수도 있는, 미래 가치가 비교적 높은 시장입니다. 대표적인 지역이 30년이 넘은 대단지 아파트들이 밀집해 있는 재건축 대상자들입니다. 목독, 상계동, 좀 더 확장하면 마포구와 금천구의 노후 아파트들이 여기 해당됩니다. 생각보다 이 지역들이 교통이 좋습니다. 신도시들과 다르죠. 게다가 재건축 사업의 조건이 준공 40년 이상의 아파트로 까다로워졌어도 상대적으로 그 기간에 임박한 지역들입니다. 그래서 미래 가치가 높아질 수 있다는 것이죠. 주거 환경이 개선되면 교통이 좋기 때문에 충분히 시장가치가 뜁니다. 비록 지금은 노후 지역이지만 주머니가 넉넉하지 않은 밀레니얼 세대가 이 유형의 아파트 단지들을 공략하면 좋겠다 싶습니다.

 마지막으로 네 번째는 과거에도 좋지 않았고 미래에도 가능성이 별로 없는 시장입니다. 이 케이스는 굳이 설명하지 않아도 되겠죠. 이 유형의 아파트만 고르지 않으면 됩니다.

 당연히 제가 밀레니얼 세대에게 주목하라고 권하고 싶은 시장은 세 번째가 되겠죠. 

 

 

p233

 박종훈 : 소위 '특공'이라고 부르는 신혼부부특별공급은 무주택 신혼부부가 일반 공급과의 청약 경쟁 없이 별도의 아파트를 분양받을 수 있는 제도입니다.

 그런데 문제가 있습니다. 항간에 신혼부부 특공을 '부잣집 막내아들 특공'이라고 부르거든요. 왜냐하면 신혼부부 특공의 신청 자격이 너무나 비합리적이기 때문입니다. 우선 혼인신고한 날로부터 만 7년 이내의 부부들 중에 전 세대원이 무주택자이면서 부부합산 소득이 전년도 기준으로 도시 근로자 월평균 소득의 100%, 맞벌이의 경우 120% 이하를 충족해야 합니다. 그래야 우선공급에 신청할 수 있습니다. 2018년 3인 이하 가구의 평균 소득은 세전 540만 1,814원(맞벌이 648만 2,177원)입니다. 연봉으로 게산할 겨우 외벌이는 약 6,500만 원, 맞벌이는 합산하여 약 7,600만 원 이상이면 신혼부부 우선공급을 신청할 수 없는 거죠. 그런데 현재 대졸 신입사원의 초임 연봉이 평균 3,200만 원 정도이고, 요새 결혼들을 늦게 하니까 결혼할 당시의 연봉은 당연히 더 올랐을 겁니다. 이런 분들이 맞벌이를 하면 소득 구간을 훌쩍 넘어버려서 청약 자격이 없습니다.

 게다가 최근 분양하는 아파트 가격이 어지간히 비싼 게 아니거든요. 7억 원짜리 아파트를 분양받는다고 가정해보죠. 그리고 결혼과 동시에 만 7년 동안 열심히 벌어서 아이도 한 명 낳고, 부부 합산 소득이 월 600만 원 수준을 유지하고 있다고 칩시다. 그중 절반만 쓰고 7년을 모은다고 해도 자산이 2억 6,000만 원 정도밖에 안 됩니다. 그럼 7억 원짜리 아파트 청약을 받으려면 대체 대출 비율이 어떻게 되는 거죠? 그리고 대출은 어떻게 갚아나가죠? 제도의 취지를 생각할 때 상식적이지 않은 설계라는 거죠. 결국 누가 혜택을 볼 수 있을까요? 부모로부터 증여받은 자산이 있는 부잣집 아들이나 혜택을 보는 특공이라는 말이 그래서 나온 겁니다.

 

 홍춘욱 : 이 청약제도의 신청 자격 조건을 설계한 정책입안자들은 정말 반성해야 합니다. 2019년 상반기를 기준으로 서울 인기 지역의 당첨 가점은 70점을 넘어섰습니다. 제가 보기에도 이건 말이 안 되는 제도에요. 과한 표현일 수도 있지만 저는 이 제도 자체가 '꼰대스럽다'고 생각합니다.

 이 제도는 최소 조건만 갖추면 모두 신청할 수 있게 해서 '추첨방식'으로 선정하는 게 낫다고 봅니다. 그리고 소득으로 조건을 만들 것이 아니라 오히려 자산 조건을 걸어야죠. 적어도 이런 특공에 '금수저'들이 당첨되는 건 사회 정의에 맞지 않잖아요.

 그리고 결혼 여부나 자녀 유무에 대한 조건도 조금 풀어줘야 합니다. 이제 우리 사회에도 동거 커플이 늘어나고 비혼을 결심한 분들도 많아졌는데, 이들을 배제할 어떤 법적 근거도 없잖아요. 다만 이렇게 당첨되어서 아파트를 구매한 경우, 전매 제한 기간을 장기로 설정하면 투기나 시세 차익 우려도 사실상 사라지게 될 겁니다.

 이렇게 되면 자격을 갖춘 분들이 엄청나게 늘어나겠죠? 그래서 실제로 '로또'처럼 지금보다 더 심한 광풍이 일 수도 있어요. 그런 문제를 해결하는 것은 오히려 간단합니다. 정부가 공공 분양 아파트를 더 많이 건설하면 되는 거죠. 그건 결국 건설 경기를 호전시키고 일자리를 제공하는 역할도 하겠지요.

 조건이 되면 청약으로 집을 구매하고 싶은 분들이 엄청나게 많은데, 이렇게 허들을 잔뜩 높여놓으면 다들 포기하고 구축 아파트 시장으로 이동하게 됩니다. 그래서 정부가 그토록 붙잡고 싶어하는 서울아파트 가격 상승세가 멉추지 않았던 겁니다. 참 답답한 제도에요.

 

p247

  홍춘욱 : 한국의 부문별 부채 흐름을 살펴보면, 한눈에 가계부채가 급격히 늘어난 것을 발견할 수 있습니다. 2008년 명목 GDP의 74%에서 2018년에는 98%까지 늘어났죠.

 이게 뭘 의미하는 걸까요? 단순히 가계부채가 증가했다는 사실 뿐만 아니라, 기업과 정부의 부채가 늘어나지 않았다는 점에도 주목할 필요가 있습니다. 한국은행이 기준 금리를 인하하며 경지 부양 신호를 보냈더니 가계 부문만 집을 사기 위해 대출을 받고 기업이나 정부는 별로 돈을 안 썼다는 거죠. 결국 2015~2018년에는 집값 상승, 그리고 가계부채 증가로 경기의 급격한 위축을 막았다고도 볼 수 있겠습니다.

 물론 경제 전체의 부채 규모가 급증하면 문제가 될 수 있습니다. 그러나 국가별 부채 규모를 살펴보면 한국은 높은 편이 아닙니다. 지금 가장 문제가 되는 나라는 중국이죠. 중국의 가계부채와 기업부채는 2008년 142%에서 2018년 254%로 급증했습니다. 이 때문에 최근 IMF는 다음번 금융위기가 발생할 때 가장 취약한 곳으로 중국의 기업 부문과 은행 부문을 지목한 바 있습니다.

 제가 말씀드리고 싶은 것은 가계부채가 사상 최대로 늘어났다는 것이 아니라 정부부채나 기업부채와의 밸런스가 좋지 않다는 점입니다. 정부가 시장의 숨통을 터줄 재정 정책을 펴는 동시에 기업의 투자 환경을 만들어야 해요. 경기 부양을 위해 경직성 예산, 즉 매년 증액되는 공무원 호봉과 같은 비용 말고 비경직성 예산, 즉 경기 여건에 따라 탄력적으로 줄이고 늘릴 수 있는 예산을 더 키워야 한다는 거에요. 최근에 국토부가 경기도 신도시에 추진하고 있는 GTX 사업이 그런 예가 되겠죠.

 

p253

 홍춘욱 : 특히 문제를 더욱 악화시킨 것은 중국 위안화의 평가절하입니다. 1달러에 대한 중국 위안화 환율이 7을 넘어서면서, 아시아 통화가 동반 약세를 보일 가능성이 높아진 것입니다. 중국이 위안화 환율을 인상(위안화 평가절하)한 이유는 '무역 분쟁' 때문입니다. 미국이 중국의 대규모 무역 흑자에 항의해 대규모 관세를 부과하자, 중국은 환율 조정으로 맞선 것이죠. 예를 들어 관세를 10% 부가했다면, 미국에서 중국산 제품의 가격은 10% 오르게 됩니다(물론 수입 업체가 제품 가격의 인상을 허용하지 않고 마진을 축소할 수도 있다). 이때 중국이 위안화 환율을 10% 인상해버리면, 중국 기업들은 관세 부과분만큼 달러로 표시된 제품 가격을 인하할 여력이 생기지 않겠습니까? 따라서 미중 무역 분쟁이 격화될수록 중국의 위안화 가치가 약세를 보일 가능성이 높고, 이는 한국 원화를 비롯한 아시아 통화의 가치를 떨어뜨리는 힘으로 작용할 수 있습니다.

 이럴 때 밀레니얼 세대에게 권하는 것은 일정 비율의 해외 투자입니다. 가장 손쉬운 방법은 달러를 사두는 거죠. 매달 일정 금액을 사둘 수도 있고, 은행에서 달러예금을 가입할 수도 있습니다. 

 

p267

 박종훈 : 그런데 기본적으로 암호화폐가 갖는 장기적인 약점은 상속이 불투명하다는 점입니다. 당연하게도 부동산은 물론, 예금이나 보험금 등 대부분의 자산은 얼마든지 상속이 가능합니다. 우리나라의 '안심 상속 원스톱 서비스'처럼 대부분의 나라가 돌아가신 분의 재산을 상속할 방법을 마련해놓았기 때문입니다. 그런데 암호화폐는 가상지갑에만 넣어둔 경우 완전히 공중에서 사라질 수도 있습니다. 실제 사례도 많고요.

 2013년 8월, 26세의 매슈 무디라는 청년이 경비행기를 타다가 추락 사고로 사망했습니다. 아버지인 마이클 무디는 아들이 생전에 비트코인 채굴에 열중했음을 알고 있었고, 수십, 수백억 원에 이르는 자산을 갖고 있을 것으로 추정했습니다. 하지만 아버지는 아들의 비트코인을 끝까지 차지 못했습니다.

 또 2018년 4월에는 저명한 암호화폐 투자자인 머튜 멜론이 사망했는데요, 그는 사망 직전 <포브스>지가 선정한 암호화폐 억만장자 순위에서 5위에 오르기도 했습니다. 당시 <포브스>지가 추정한 그의 암호화폐 자산은 10억 달러, 우리 돈으로 1조 2,000억 원 정도였습니다. 그런데 그가 암호를 누구에게도 알려주지 않고 갑작스럽게 사망하는 바람에 이 돈은 영영 찾을 수 없게 되었습니다. 암호화폐 전문 분석 회사인 체이널리시스는 이 같은 이유로 이미 비트코인의 25%가 영원히 사라졌을 거라는 추정을 내놓았죠.

 비트코인은 64자리에 이르는 복잡한 키파일이 한 번만 발급됩니다. 다른 사이트처럼 비밀번호를 기억하지 못할 때 개인정보를 입력하는 방식으로 재발급을 받는 것도 불가능합니다. 또한 생전에 가족등 타인에게 비밀번호를 알려주는 것도 쉽지 않습니다. 암호만 알려주면 암호화폐의 특성상 언제든 돈을 빼갈 수 있고, 추적이나 반환이 어렵기 때문입니다. 암호화폐는 그 이름처럼 암호가 가장 중요하기 때문에 암호를 알려주는 순간 사실상 증여를 해준 것이나 다름없거든요.

 결국 예고된 죽음이 아니면 상속이 매우 까다롭고 암호화폐 자산은 영원히 가상세계에만 남아 있을 수도 있다는 것이죠. 이에 대한 보완책을 연구하고 있다고는 하지만, 암호화폐가 세대를 넘어 영속적인 자산으로 계속 계승되어나갈 수 있을지 의구심이 생기는 대목입니다.

 

 

p299

 박종훈 : 정년제도라는 것이 청년층의 일자리 창출을 위해 독일의 명재상 오토 폰 비스마르크가 고안한 제도라는 점을 생각하면 현재의 상황이 참 아이러니하게 느껴집니다. 1880년 당시 독일은 100만 명이 넘어가던 극빈층 문제로 골머리를 앓았거든요. 그런데 가난한 고령층이 계속 일을 하면서 청년층이 노동시장에 진입하기가 힘든 상황이었어요. 그래서 비스마르크 재상이 정년을 65세로 제한하는 대신 연금을 지급하고 청년층에게 일자리를 만들어주겠다고 선언했습니다. 다만 당시 독일의 평균 수명이 65세 미만이었기 때문에 이 제도의 설계에는 약간의 정치적 술수가 담겨 있기는 합니다.

 그런데 우리나라는 반대죠. 박근혜 정부 시절 정년을 60세로 늘린 것이 치명적인 문제를 야기했습니다. 앞에서 제가 언급하기도 했습니다만, 사실 정년이 적용되는 직장은 공기업과 대기업 생산직 정도라고 합니다. 일부 경제연구소나 언론에서 이전 세대는 주로 구산업에 종사하고, 청년들은 첨단IT기업에 종사하기 때문에 정년 연장으로 청년들의 손해는 없다는 주장을 합니다. 그런데 바로 정년이 보장되는 '그 직장'들이 청년들이 원하는 직장이잖아요. 그런 직장은 정년이 연장되면 청년을 적게 뽑을 수밖에 없습니다. 그러니 정년 연장으로 청년들의 손해는 없다는 주장은 정말 무책임한 것이죠.

 사실 정년 연장이 현실화되면 2차 베이비붐 세대에 속하고 공기업에 근무하는 저는 제일 수혜를 받는 사람 중에 한 명이 되겠죠. 그런데 그 대가로 제 자녀 세대의 미래가 희생당할 것이 정말 두렵습니다. 기성세대가 정년이 보장되는 좋은 직장을 계속 독점하게 되면, 결국 청년들의 몫이 줄어들 수밖에 없습니다. 이처럼 정년 연장에는 치열한 세대 갈등의 요소가 있기 때문에 저는 정년 연장이나 연금 지급 시기 문제가 앞으로 유럽처럼 첨예한 사회 갈등 요소가 되리라고 생각합니다.

 

통통 튀는 트렌디 드라마처럼 시작했다가, 한자와 나오키 같은 비즈니스 심리 스릴러로 끝난다.

이 맥락의 변화가 너무 생경해서 같은 소설인가 싶을 정도다.

그래도 전반적으로 꽤 재밋었다.

워라벨이라는 주제는 그저 구색일 따름이고, 회사 생활에서 일어나는 관계와 심리에 촛점이 맞춰져 있고 그것이 꽤 사실적이다. 한국적 사고로는 이해하기 쉽지 않은 부분도 있지만, 한국이나 일본이나 회사 생활이라는 것은 비슷한 면이 꽤 많구나라는 것도 알 수 있다.

 

 

NHK의 히트 다큐인 "욕망의 자본주의"의 2019년도 버젼을 정리한 내용.

책보다도 다큐멘타리쪽의 내용이 좀더 이해하기도 쉽고(편집의 영향) 핵심적인 내용에 접근성도 좋다.

자본주의 경제하에서 미래의 변화를 여러 명의 전문가의 인터뷰를 통해서 구성한다.

책에는 5명의 패널들만 나오는데, 실제 다큐에서는 더 많은 인물이 나와서 이야기를 하는데 개인적으론 다큐 쪽이 더 좋다.

 

(NHK 욕망의 자본주의 2019 링크)

이 다큐의 나레이터의 목소리는 상당히 일본적이라고나 할까? 나레이터는 야쿠시마루 에츠코라는 여성으로 일본에서 꽤 유명한 싱어송라이터이자 음악가이다. 상당히 많은 음악가들과의 콜라보로도 유명하다.

https://www.dailymotion.com/video/x7010c0

 

BS1スペシャル「欲望の資本主義2019(前編)~偽りの個人主義を越えて~」20190103 - 動

後編 https://dai.ly/x7017yt 「ネット界の四天王」と呼ばれるGAFAを巡る議論が熱い。強大な力に国家の枠組み前提の市場経済が揺れている。仮想通貨をめぐる議論も沸騰、バーチャル経済時代の�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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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S1スペシャル「欲望の資本主義2019(後編)~偽りの個人主義を越えて~」(後編)20190103 - 動画 Dailymotion

前編 https://dai.ly/x7010c0 「ネット界の四天王」と呼ばれるGAFAを巡る議論が熱い。強大な力に国家の枠組み前提の市場経済が揺れている。仮想通貨をめぐる議論も沸騰、バーチャル経済時代の資本主義はどこへ行く?2017年富を生むルールの変化を捉え2018年社会構造に地殻変動が起きている現実に迫ってきた番組は次のステージへ。テクノロジーが社会を変える今、格差、分断を越え自由への道は?切迫感ある今問う、自由の形と資本主義の行く末は? 【出演】安田洋祐,スコット・ギャロウェイ,ユヴァル・ノア・ハ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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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 현대 자본주의 앞에는 어떤 미래가 기다리는가 ___ 유발 하라리 012

 

p26

 공산주의는 이용 가능한 재화와 서비스의 수급을 단일한 중앙 관리자가 결정합니다. 하지만 자본주의는 선택을 개개인의 자유에 맡깁니다. 사람들이 스스로 결정한 자유를 가진 것, 이것이 자본주의의 성공 비결입니다.

 

p31

 일이 사라지는 것 자체는 문제가 되지 않습니다. 솔직히 노동자의 입장에서 모든 일이 항상 특별한 가치를 지니는 건 아니거든요. 실제로 많은 사람들이 하고 싶지 않아도 먹고살려면 돈을 벌어야 하니까 일을 합니다. 하루에 10시간씩 슈퍼마켓 계산대 앞을 지키는 일이 꿈의 직업이라고 말하는 사람은 많지 않을 거에요.

 저는 인공지능에 맞서 인간의 일을 지켜야 한다고는 생각하지 않습니다. 로봇에게 계산대 일을 빼앗겨도 괜찮아요. 오히려 이런 시대가 오면, 우리가 지켜야 할 것은 '일'이 아니라 '인간'일 것입니다.

 생계를 위해 어쩔 수 없이 했던 일들을 더 이상 하지 않아도 된다니, 상상만 해도 멋지지 않습니까? 다음 두 문제가 해결된다면 말이죠. 하나는 직업을 잃은 사람들을 어떻게 지탱할 것인가 하는 문제입니다. 보편적 기본 소득제universal basic income 같은 대안들이 논의될 수 있겠죠.

 다른 하나는 인생의 의미와 관련된 문제입니다. 이제 당신은 매일같이 공장에 출근해 10시간씩 일하지 않아도 됩니다. 의식주에도 부족함이 없습니다. 그럼 남아도는 시간엔 대체 무엇을 해야 할까요? 저는 해결책이 있다고 생각합니다. 삶의 기쁨과 의미를 일 대신 예술, 스포츠, 종교, 명상, 인간관계, 공동체 등에서 충족시키는 모델로 생각해볼 수 있습니다.

 그러므로 인간이 구직 시장에서 밀려나는 일로 갑론을박할 필요는 없습니다. 알고리즘에 맞서 인간의 실직을 막겠다는 계획은 실제 성공하기도 어려울 테고요. 오히려 인간의 기본적인 필요를 충족시키고 사람들의 사회적 지위와 자존감을 지켜주는 방법을 고민하는 쪽이 더 현명합니다.

 일이 없는 세계를 대비하는 건 필요합니다. 보편적인 경제 안전망을 통해 최소한의 생활 수준을 지탱해주는 방안 등을 마련하지 않고 모든 것을 시장의 힘에 맡겨두면 심각한 사태가 벌어질 테니까요. 아마 부와 권력이 한 줌의 엘리트들에게 집중되고 사람들 대부분은 빈곤에 빠져 하루하루가 아주 힘들 겁니다. 위기가 본격적으로 분출하는 걸 막기 위해서라도 뭐든 해야 합니다. 그게 뭐가 되었든 지키는 대상은 일이 아니라 인간이어야 합니다.

 

p34

 기술 자체는 나쁘지 않아요. 다만 기술이 너무 큰 힘을 갖게 되어 우리가 그 노예로 봉사하게 두어서는 안 됩니다. 크게는 인간을 위해 기술을 봉사하는 방향으로 나아가야죠. 정부 차원에서는 유전자 조작 기술, 자유 무기 체계 Autonomous Weapon System AWS 같은 위험한 기술 개발을 규제해야 합니다. 개인 수준에서도 가령 스마트폰이 자신의 생활을 지배하고 있는 건 아닌지 점검하고 자신의 존재와 삶에 대한 통제권을 알고리즘에 쉽사리 넘겨주지 말아야 합니다.

 새로운 지식과 기술이 가능하게 만든 미래 사회 시나리오는 여러 가지가 있습니다. 하지만 가능하다고 해서 반드시 그래야만 하는 건 아닙니다. 우리 앞에는 다양한 선택지가 놓여 있습니다. 그리고 완전한 선택권은 아닐지 몰라도, 우리는 그중에서 고를 수 있습니다.

 

 

2. 거대 디지털 기업들은 세계를 어떻게 바꿀 것인가 ___ 스콧 갤러웨이 040

 

p49

 아마존 같은 기업은 연방 정부나 주 정부로부터 세제 우대나 보조금 지원 등의 각종 혜택을 누리고 있습니다. 하지만 그곳에서 일하는 직원들은 저임금 · 고강도 노동에 시달리면서 생계 지원을 받을 정도로 가난합니다. GAFA(Google, Apple, Facebook, Apple)의 주인들은 세계에서 가장 부유하면서도 지나치게 낮은 임금으로 노동자를 쥐어짜고, 그 와중에 보조금과 세금 감면을 받으려고 분주히 뛰어다니면서 이익을 챙기고 있습니다. 그럼에도 그들은 세계 최고의 혁신가로 칭송받고 있지요.

 하나의 기업이 거대해져서 지나치게 큰 영향력을 갖게 되면 온갖 부정이 일어나게 됩니다. 최근 이슈가 되고 있는 것이 세금 회피 문제입니다. 미국에서 2008년 금융 위기 이후 10년간 월마트가 낸 법인세는 640억 달러였지만, 아마존은 14억 달러에 불과했습니다. 아마존은 장기 비전으로 투자자들을 매료시켜 막대한 자금을 저렴하게 빌리고, 벌어들이는 수익을 다른 사업에 재투자함으로써 법인세로 빠져나가는 돈을 절약해왔습니다.

 세계에서 가장 성공한 기업들이 내야 할 세금을 내지 않으면 소방관, 군인, 공무원 들에게 어떻게 월급을 주죠? 거대 IT 기업이 세제 지원 혜택을 누리는 동안, 작은 기업들이 더 많은 세금을 내면 됩니다! 세금 제도의 역진성逆進性 문제가 발생하는 거죠. 이런 상황은 자본주의는 물론이고 미국의 정신에도 반하지만, 엄연한 현실입니다.

 

p50

 많은 사람들이 GAFA가 고용을 창출한다고 말하지만 실제로는 그렇지 않습니다. 엄밀히 말해 GAFA는 '소수의 고용'을 창출하고 '다수의 고용'을 파괴합니다. 페이스북과 구글이 230억~250억 달러 규모의 수익을 추가로 내는 데는 2만 8000명의 고용이 더 필요합니다. 고학력 · 고스펙 친구들이 탐내는, 돈벌이가 좋은 고급 일자리입니다.

 한편 전 세계적으로 광고 산업은 몇 년째 성장하지 못하고 제자리걸음을 하고 있습니다. 덴츠나 IPG, WPP 같은 업계 대기업들이 부진을 면치 못하고 있는데요, 이들이 250억 달러라는 수익을 올리기 위해서는 약 25만 명의 인원이 필요합니다.

 페이스북과 구글이 2만 8000명을 고용해서 벌어들인 250억 달러는 다른 광고 기업의 성장을 저해하고, 25만 명의 고용을 사라지게 만들었습니다. 이 상황은 마치 5만 명을 수용하는 양키스타디움 다섯 곳에 크리에이티브 디렉터Creative Director와 미디어 플래너Media Planner, 카피라이터Copywriter 등을 모이게 한 뒤, 페이스북과 구글이 "이제 당신들의 일자리는 없습니다"라는 해고 통지서를 내미는 것과 같습니다.

 이것이 '고용의 파괴'가 의미하는 바입니다. 전통적인 일자리들이 새로운 기술 직군에세 산 채로 잡아먹히고 있어요. GAFA는 고용의 창출자가 아니라 오히려 고용의 파괴자입니다

 

==> 이 주장은 사실 과거 산업혁명 당시의 러다이트 운동의 사상과도 비슷하다. GAFA가 전통적인 일자리를 파괴하는 것은 맞지만 그것이 의도된 것이라기보다는 혁신을 통해 시장의 원리가 바뀌고 있다고 봐야 한다. 기존 체제의 파괴가 꼭 나쁜 것만은 아니다.

 

 

 오늘날 기업가에게 가장 큰 어려움은 자금 조달이 매우 힘들다는 점입니다. 전자 상거래, 검색 엔진, 소셜 미디어, 컴퓨터 하드웨어 같은 분야에서 새로운 사업을 시작하려고 해도 투자자들이 'GAFA와 경쟁하기란 불가능하다'고 생각하기 때문입니다. 그렇게 자금을 조달받지 못해서 하루살이처럼 사라지는 신생 기업들이 의외로 많습니다.

 많은 사람이 혁신의 시대를 살아간다고 생각할지 모르지만, 사실 우리는 혁신이 없는 시대에 살고 있습니다. 이것은 최근 40년 동안 매일 생겨나는 새로운 비즈니스의 숫자가 절반가량 줄었다는 점만 봐도 알 수 있어요. 놀랍게도, 지금보다 1970년대에 훨씬 더 많으 새로운 비즈니스가 등장했습니다.

 독점 기업은 혁신을 저해합니다. 이들은 투자자 자본과 세계 최고의 인재들을 블랙홀처럼 빨아들입니다. 훗날 본인들을 성가시게 할 것 같은 잠재적 경쟁자는 매수해버립니다. 이런 현실에서 작은 회사가 성장하기란 거의 불가능에 가깝죠.

 

 자본주의에서 기업은 고령자의 곤궁한 삶이나 사람들의 마음속 평안에는 관심이 없습니다. 죽음을 앞둔 사람에게 도움의 손길을 내미는 것도, 화성을 탐사하는 것도 기업의 역할이 아닙니다. 모든 기업의 목적은 이윤을 창출하고 주주 가치를 높이는 것입니다.

 GAFA도 마찬가지입니다. 그런데 사람들은 GAFA가 내세우는 이미지, 즉 진보적이고 혁신적인 가치를 옹호하며 공익을 추구한다는 이미지를 곧이곧대로 믿습니다. 그들은 자기네 제품과 서비스가 세상을 더 나은 곳으로 만들고 있다고 주장합니다. 수많은 추종자들은 그들을 본보기로 삼아야 하고 그들에게 무한한 관용을 베풀어야 한다고 말합니다.

 하지만 인류 구제 등의 숭고한 비전을 내세운들 그런 이미지는 '환상'에 지나지 않습니다. GAFA의 본질은 기업입니다. 오히려 그들은 수익 창출에 방해가 되는 사회적 책임은 교묘히 피하고 있습니다. 세계 최고의 두뇌들과 세계 최대 규모의 자본이 한데 모여 인류의 미래를 고민하는 대신 시가 총액을 높이고 돈을 벌어달 줄 아이템을 궁리하는 일에 몰두하고 있어요.

 

p65

 미국은 다소 길을 잃었습니다. 미국은 일찍부터 기회의 땅이었고, 경제 정책은 여러 백만장자millionaire를 만드는 걸 목표로 했습니다. 하지만 지금은 극소수의 조만장자trillionaire를 만들어내는 쪽으로 목표가 바뀐 것 같습니다. 그렇게 되면 한 명의 승자가 꿈같은 생활을 누리고 어마어마한 권력을 휘두르는 반면, 나머지 99명은 그 풍요로움을 눈으로만 구경하면서 한 줌의 부스러기를 두고 쟁탈전을 벌이겠죠.

 그럼에도 사람들은 자기 자식이 다음 세대의 스티브 잡스라고 맹신하는 것처럼 보여요. 일종의 '대박'을 꿈꾸는 기묘한 복권 경제에 빠져 있는 거죠. 저는 그들에게 이렇게 말합니다. "이보세요, 당신의 아이는 스티브 잡스가 되지 못한다고 생각하는 편이 훨씬 현실적인 전망입니다. 대신 우리는 1퍼센트가 엄청난 혜택을 독점하는 사회가 아니라, 나머지 99퍼센트가 일정 수준 이상의 생활을 영위할 수 있는 사회를 만들어야 합니다."

 안타깝게도 우리 사회는 '아주 불편한 사회'가 되어가고 있습니다. 에이브러햄 링컨이 말했듯, 이전의 미국은 보통 인간들을 사랑했습니다. 지금의 미국은 더 이상 그들을 사랑하지 않습니다. 현실에서 우리 대부분은 평범합니다. 그런데 이 사람들에게 상황이 너무 나쁘게 돌아가고 있어요. 승자 독식 경제에서 평범한 우리는 하잘것없는 존재로 전락해버린 거에요.

 예를 들어 원래 정부는 중소기업을 우대해 그들이 대기업으로 성장할 수 있는 환경을 만들어줘야 합니다. 하지만 지금 미국에서는 정반대 일이 일어나고 있어요. 정부 지원금이 신생 기업이 아니라 GAFA에게 흘러들어가고 있습니다. 마치 복권에 당첨된 사람에게 '축하합니다. 당첨금을 배로 드리지요' 하는 식입니다. 우리는 3억 5000만 명의 농노가 300만 명의 영주에게 종속된 사회를 향해 돌진하고 있습니다.

 

p67

 도를 넘은 소득의 불평등은 바람직하지 않습니다. 좋은 소식은, 역사를 보면 극단적인 소득의 불평등은 반드시 스스로 수정되었다는 것입니다. 나쁜 소식은, 극도로 심한 소득의 불평등을 수정해온 것은 전쟁, 기아, 혁명 중 하나였다는 사실입니다. 모두 피하고 싶은 일들이죠.

 오늘날 세계 경제는 이 세 가지 메커니즘 주 하나가 작동할 수 밖에 없는 상태로 가고 있습니다. 미국에서는 실제로 '느린 혁명'이 일어나고 있다고 생각해요. 극소수가 누리는 '멋진 삶'에서 배제된 수많은 사람들이 울분을 토해내기 시작했고, 그들의 외침은 결국 위험한 선동 정치가를 대통령으로 선출하기에 이르렀죠. 유럽의 상황도 이와 비슷합니다. 우리 미래가 아주 위험한 방향으로 흘러가지 않도록 지금부터 대책을 세워야 합니다.

 

 그 외침이 당선시킨 도널드 트럼프 대통령을 교수님은 어떻게 평가하십니까?

 

 동맹국은 미국이 무엇을 하려는지 이해할 수 없는 상태에 빠졌습니다. 가장 중요한 유럽과 일본 등과의 관계에 있어서, 일관성 없는 메시지로 인해 신뢰가 약해지고 말았죠. 미국은 고립주의를 표명하면서 다른 나라의 영향을 받지 않는 '닫힌 사회'를 지향하기로 결정했습니다. 그것이 어떤 문제를 일으킬 수 있는지 수많은 사람들이 '진실'을 말해도, 그 진실은 더 이상 의미를 갖지 못하고 있어요.

 저는 이런 현실이 참으로 우려스럽습니다. 우리의 동맹 관계는 세계의 평화를 지켰고 세계의 소득을 증가시켰으며 세계의 기아를 줄여왔습니다. 미국과 유럽, 아시아가 함께 쟁취한, 훌륭한 성과입니다. 그러나 지금은 그 파트너십이 위기에 노출되어 있습니다.

 

 

p71

 적어도 미국은 거대 IT 기업의 혜택을 누리고 있습니다. 고용 파괴나 납세 회피, 반경쟁적 행위, 소셜 미디어의 정치적 이용과 가짜 뉴스 등 부정적인 측면이 있긴 하지만, 그들 기업에겐 긍정적인 면도 있거든요. 예를 들어 거대 IT 기업이 만들어내는 고급 일자리는 세계에서 가장 똑똑하고 유능한 사람들이 미국으로 이주하게 되는 이유입니다. 덕분에 미국이라는 나라의 경쟁력은 한층 올라가게 됩니다. 미국 기업이 세계 시장의 선두 자리를 차지하고 있다는 자부심 역시 무시 못하죠.

 하지만 미국 밖에 있는 나라들은 이런 혜택을 전혀 누리지 못합니다. 예를 들어 일본의 대학이나 병원 중 구글이나 페이스북의 이름으로 지어진 시설은 거의 없다고 알고 있는데요. 거대 IT 기업들이 일본에서 막대한 돈을 벌어들이는 만큼, 일본 정치인은 이들이 자국에게 이익이 되는지를 면밀히 따져볼 필요가 있습니다. 그리고 시민들은 '거대 IT 기업이 일본에게 이익이 되는 정책'을 추진할 국회의원을 선출해야 합니다.

 최근 중국의 행보는 흥미롭습니다. 중국은 거대 IT 기업을 자국에 유치해 지식과 기술을 훔친 후 유사한 회사를 설립하고 있습니다. 독자적인 검색 엔진과 독자적인 소셜 미디어 회사를 만들어서 국내에서 생기는 이익을 확보하는 방법인데요. 이 수법은 유럽에서 비판을 받았지만 저는 가까운 미래에 유럽도 중국과 같은 수법으로 데이터 유출을 방어하려 들 거라고 예상합니다.

 참고로 영국은 거대 IT 기업이 총수익(매출액)에 과세하는 일명 '디지털세Digital Tax'를 실시하기로 결정했습니다. 구글은 영국에서 매년 70억 파운드를 벌어들였다고 추정되었으나, 그 대부분을 아일랜드에 있는 구글 유럽 본사로 귀속시켜서 법인세를 회피했다는 비판을 받았습니다. 법인세는 물리적 고정 사업장이 있어야 과세가 가능하다는 점을 이용한 거죠. 이 때문에 영국은 자국 내에서 실제 발생하는 총수익에 과세한다는 결정에 이르렀습니다. 다른 나라들도 유사한 대책을 세워야 합니다.

 

 

3. 암호화폐는 어떻게 잠들어 있는 부를 깨우는가 ___ 찰스 호스킨슨 074

 

p90

 그럼 어떻게 우버와 에어비앤비를 없앨 수 있을까요? 이런 중개자는 블록체인을 이용한 '스마트 콘트랙트 smart contract' 로 간단하게 없앨 수 있어요. 스마트 콘트랙트란 '프로그래밍된 조건이 모두 충족되면 계약 내용이 자동 이행되는 시스템'으로, 제3자 없이 개인 간 직접 거래를 가능하게 해줍니다. 그렇게 되면 시장을 독점하고 운전기사를 착취하는 중앙 집권화된 기업은 소멸하고 말 거에요.

 아무리 잘 나가는 사업이어도 새로운 기술의 등장을 간과해서는 안 됩니다. 신문업계가 좋은 사례입니다. 신문은 오랫동안 미디어 시장에서 큰 지배력을 가지고 있었습니다. 하지만 1990년대 출현한 인터넷이, 신문사들이 따라온 전통적인 수익 및 유통 모델과 정면으로 충돌했지요. 처음에는 신문업계는 인터넷을 대수롭게 생각하지 않았습니다. 매달, 매년 구독률이 떨어지고 나서야 자신들이 낡은 방식을 고수하고 있었다는 걸 깨달았죠. 광고 수익과 구독 수익이 줄어든 신문사들은 현재 심각한 경영 위기를 겪고 있습니다.

 저는 '블록체인 기술이 반드시 GAFA를 무너뜨릴 것이다'라고는 생각하지 않습니다. GAFA는 영리하며 적응력이 탁월합니다. 하지만 블록체인 기술의 등장으로 인해 이들 기업은 자신들과 고객과의 관련성을 재고하지 않을 수 없을 겁니다.

 

p92

 하지만 이제 개인 정보와 사생활 보호에 관한 권리 의식이 높아지면서 '프라이버시'가 새로운 사업 모델로 부상할 것입니다. 이 지점에서 최근 주목할 만한 게 하나 있습니다. 바로 '브레이브 Brave'라는 웹브라우저인데요. 프로그램 언어인 자바스크립트의 아버지 브렌던 아이크 Brendan Eich 가 개발했습니다.

 브레이브는 보안과 프라이버시에 특화되어 있습니다. 그것은 사이트 접속 정보나 구매 이력, 검색 이력을 서버에 저장하지 않으며 광고 추적기를 차단해 사용자의 익명성을 보장합니다. 광고를 허용함으로써 자신의 데이터를 제공하는 이용자에게는 보상으로 토큰을 줍니다. 이용자의 관심을 갖는 가치를 인정하고, 웹브라우저의 광고 수익을 나누는 것이죠. 브레이브는 최근 등장했지만 엄청난 속도로 성장해 이미 수백만 명이나 이용하는 웹브라우저가 되었습니다. 조만간 구글의 크롬이나 모질라의 파이어폭스 같은 선발 주자들을 앞지를 것으로 보입니다.

 이 새로운 기술이 5년 후, 10년 후에 가져올 변화에 기업들은 주목해야 합니다. 예를 들어 브레이브가 성공적으로 안착한다면 다른 웹브라우저 회사들은 브레이브가 가진 능력과 제공하는 서비스를 받아들일 필요가 있습니다. GAFA도 살아남기 위해 자신들이 제공해온 서비스의 바람직한 면은 그대로 두면서도 사용자가 포기할 것을 적게 만드는 방법 아니면 일시적으로 포기하더라도 탈퇴 시에는 사용자 권리를 되돌려주는 방법을 고안해내야 할 겁니다.

 계정을 삭제함과 동시에 프로필을 비롯해 나의 모든 디지털 흔적이 삭제되는 세계, 즉 '잊힐 권리가 있는 세계'를 요구하는 사람들이 많아지고 있습니다. 그리고 블록체인 기술은 고객이 더 많은 권한을 갖는 새로운 세계를 만들어낼 잠재력을 갖고 있습니다.

 

 

4. 좋은 사회를 만드는 새로운 경제학이란 무엇인가 ___ 장 티롤 106

 

p131

 저는 암호화폐가 사회에 무익하다고, 아니, 무익한 정도가 아니라 유해하다고 봅니다. 이유는 세 가지를 꼽을 수 있습니다. 

 첫째, 암호화폐는 돈세탁, 탈세, 암거래 등에 악용될 수 있기 때문입니다. 하지만 현재로서는 이런 불법 행위에 대해 정부가 통제할 제도적, 법적, 기술적 기반이 부족한 상태입니다.

 둘째, 암호화폐 때문에 통화를 발행하는 중앙은행의 시뇨리지seigniorage(화폐 주조 차익)가 줄어듭니다. 각국 중앙은행은 화폐를 발행할 때 이익을 얻고, 이것이 공공 부문의 수익이 되는데요. 간단히 설명하면 중앙은행은 민간 은행으로부터 국채를 사들이고 대금을 민간 은행에 지불하는 형태로 화폐를 발행합니다. 이때 국채에는 금리가 붙지만 현금에는 금리가 붙지 않는데 그 차액이 중앙은행의 이익이 됩니다. 그런데 비트코인 등의 암호화폐가 확산되면 중앙은행에서 얻는 시뇨리지가 줄어들어서 공공 부문의 수익이 감소합니다.

 마지막은 금융 정책의 훼손 가능성입니다. 제가 가장 우려하는 점인데요, 2008년 세계 금융 위기 때는 각국 중앙은행이 시장에 통화를 대량으로 유통, 발행함으로써 유동성 위기를 극복했습니다. 하지만 민간이 발행하는 암호화폐는 그 누구도 공급을 제어할 수 없습니다. 따라서 암호화폐가 주거래 화폐인 상황에서는 이런 부양책을 쓸 수 없습니다.

 

 암호화폐는 거품이라고 하셨느데요. 현재 각국 통화도 금이나 은 등의 실물로 보증되지 않으며 고유의 내재 가치가 없는 불환 지폐입니다. 그럼 사실상 모두가 거품 아닌가요? 둘은 어떻게 다릅니까?

 

 둘 다 거품이라고 해도, 불환 지폐는 공급이 통제되며, 실제 사용에 의해 뒷받침됩니다. 다시 말해, 각국의 불환 지폐는 실물 경제에 깊이 뿌리 내리고 있습니다.

 민간이 발행하는 암호화폐는 그렇지 않습니다. 비트코인으로 상품과 서비스의 값을 치르거나 세금을 납부한다고 하면 모를까요. 개인적으로는 부디 그럴 일이 없기를 바랍니다. 가치의 등락이 너무 심해서 하루 사이 세수가 배로 늘었다가 반으로 줄어드는 일이 발생할 수도 있으니까요. 지금의 암호화폐는 실물 경제와 연동되어 있지 않고 섣부른 기대까지 더해 있어서 매우 불안정합니다. 그에 견주면 불환 지폐는 그 역사가 길고 가치도 비교적 안정적이죠. 둘은 근본적으로 달라요. 

 

p136

 그런데 많은 사람들이 자유가 경제의 전부이고, 시장 실패는 경제의 아주 작은 부분에 지나지 않는다고 오해하는 듯합니다.

 

 시장이 잘 기능하면 경제학은 필요가 없습니다. 경제학자들은 대부분의 시간을 시장 실패를 연구하는 데 씁니다. 우리는 여러분이 생각하는 것만큼 시장을 사랑하지 않습니다. 시장은 사람들의 기호를 정확하게 측정해주는 도구지만, 그렇다고 그것이 훌륭한 도구라는 말은 아닙니다.

 경제학자들이 가장 중요하게 생각하는 것은 공익입니다. 시장은 공익에 이바지하는 하나의 수단으로서 가치를 지닙니다. 따라서 공익에 해가 되는 시장에는 규제가 이뤄져야 맞습니다.

 자유방임주의와 자유주의는 같은 생각이 아닙니다. 제가 그리는 자유주의에선 자유에 책임이 수반됩니다. 우리는 자신이 한 행동의 결과를 책임져야 해요.

 예를 들어 자유주의를 지지한다고 해서, 환경 보호도 개인의 자유에 전적으로 맡겨야 할까요? 오히려 경제학자들은 그런 자유방임주의가 적절하지 않다고 주장합니다. 자유주의에서는 오염 제공자에게 책임을 물어야 합니다. 그래서 경제학자들이 탄소세를 지지하는 거죠.

 문제는 시장 실패를 교정하려는 정부의 시도가 방해를 받고 있다는 점입니다. 예를 들어 트럼프 대통령은 금융 시장에서 규제를 철폐하고 상품 시장에서 보호주의와 고립주의를 강화하는 정책을 펼치고 있는데요, 이것은 잘못된 정치 개입의 전형입니다.

 사실 미국 대통령뿐만 아니라 대부분의 정치인들이 단기적으로밖에 생각을 못 합니다. 트럼프의 경우, 길어 봐야 2년 정도 내다볼 걸요? 그들은 장기적인 시야로 정책을 보는 데 관심이 없어요. 오로지 다음 선거에 당선되는 것에만 관심이 있습니다. 

 

 

5. 탈진실의 시대에 가치의 위기를 어떻게 극복할 것인가 ___ 마르쿠스 가브리엘 144

 

p152

 잊어서는 안 될 사실은 우리가 이런 기업들에게 착취당하고 있다는 점입니다. 우리는 매일 인터넷을 통해 메일을 주고받거나 뉴스를 읽거나 검색을 하거나 쇼핑을 하거나 동영상을 보거나 음악을 듣는데, 이 모든 행위는 부가 가치를 가진 데이터를 생성한다는 점에서 사실은 '노동'에 가깝습니다. 덕분에 수십억 달러의 돈이 캘리포니아의 계좌로 들어가게 됩니다. 

 소셜 미디어는 카지노와 같습니다. 사람들은 인터넷에 글을 쓰거나 사진을 올리고 '좋아요'를 클릭함으로써 '도박'에 참여합니다. 열심히 자기 팔로워를 모으고 게시물의 클릭 수나 조회 수를 올려서 '잭팟'을 터뜨리는 사람들도 있지요. 실제로 페이스북 인플루언서, 인스타그램 스타, 유명 유튜버는 큰돈을 법니다.

 하지만 가장 많은 이익을 얻는 것은 도박 참가자가 아니라 도박판의 운영 관리자입니다. 카지노에서 가장 돈을 많이 버는 사람이 카지노 주인인 것과 똑같은 이치죠. 게다가 소셜 미디어는 전 세계 어느 카지노보다도 불공평한 카지노입니다. 어떤 더러운 카지노보다 GAFA가 훨씬 더럽습니다.

 

p155

 진정한 저널리즘이란 쉬이 보이지 않는 진실을 백일하에 밝혀내는 것인데 지금은 비판적이지 않은 저널리즘이 횡행하고 있습니다. 

 이것이 인터넷 사회가 낳은 저널리즘의 위기입니다. 트럼프나 시진핑 같은 사람들이 언론에 비판적이어서 그런 말이 나오는 게 아니에요. 그리고 저널리즘의 위기는 곧 민주주의의 위기이기도 합니다. 저널리즘의 힘을 통해 진실을 규명하려는 자세가 실종된 민주주의는 이미 민주주의로서 기능하지 않기 때문입니다.

 정리하면 인터넷에서 뉴스를 읽거나 메일을 보내는 '노동'이 배후에 숨어 보이지 않는 '누군가'에게 저널리즘을 위기에 빠뜨리는 원동력으로 이용되며, 우리는 이 모든 사실을 알아차리지 못하고 충분한 정보를 얻었다면 좋아합니다. 이러한 구조가 현대 사회를 위태롭게 하고 있어요.

 

 가짜 뉴스가 만연하여 탈진실 post truth 이 일어나고 있는 상황을 어떻게 생각합니까?

 

 우리는 사실과 진실을 알기 어렵다고 생각하는데, 그것이야말로 탈진실을 만들어내는 원인입니다. 물론 진실을 규명하는 일은 어렵습니다. 전략적으로 진실을 숨기려고 하는 사람이 있기 때문이죠. 그러나 설령 그러한 상황에 있더라도 '진실은 존재하지 않는다'고 단정 짓는 것은 잘못되었습니다.

 오늘날 정치는 탈진실로 신음하고 있습니다. 원래 민주주의 시스템은 '재화나 특권 등의 분배가 실현 가능하다고 믿으며, 그 실현 방안을 논의로 정하는 것'입니다. 하지만 현실에서 민주주의는 이렇게 작동하지 않죠. 따라서 가치의 분배에 불만을 가진 사람들이 항의하거나 봉기할 수 있는데, 그런 상황을 막기 위해 의사 결정을 '숨길' 스토리가 필요합니다. 그것이 바로 탈진실입니다. 객관적인 사실보다 주관적인 감정에 호소함으로써 본질을 흐리는 일종의 속임수죠.

 이것은 다른 의미로 '완벽한' 속임수이기도 합니다. 거짓은 진실을 전제로 하므로 '진실은 존재하지 않는다'는 말은 '속임수도 존재하지 않는다'라는 말이 되거든요. 덕분에 정치인들은 마음껏 거짓말을 하고 의도적으로 사실을 왜곡합니다.

 

p162

 트럼프 대통령과 미국에 대해서 좀 더 구체적으로 말씀해주시겠어요?

 

 지금 미국에는 두 종류의 이데올로기밖에 없어요. 바로 자연주의와 종교인데요. 트럼프는 그 둘을 완벽하게 구현한 사람이에요. 먼저, 그는 기독교 원리주의자(근본주의자)입니다. 또 진화론을 부정하고 우주는 신에 의해 창조되었다고 믿는 창조론자입니다.

 의외라고 생각할지도 모르지만, 기독교는 유물론적 자연관과 이어져 있습니다. 이것은 막스 베버Max Weber가 말한 세계의 '탈주술화Entzauberung'라는 명제를 떠올리게 합니다. 기독교를 포함한 유일신 종교에서는 오직 신만이 불가사의한 힘을 지녔다고 가르칩니다. 신이 우주를 창조했으며 그 안에서 벌어지는 모든 일들은 신이 만든 자연법칙에 따라 일어난다고요. 고전적인 자연주의는 '신'과 '세계' 사이에 큰 질적 차이가 있다고 주장하고, 현대의 자연주의는 '신은 이제 존재하지 않는다'라고 주장하지만, 둘은 근본적으로 같은 선상에 있는 이데올로기입니다. 다시 말해 전자는 신을, 후자는 세계 자체를 자연주의에 입각해 고찰하고자 했습니다.

 신이 세계를 창조했다는 말은 완전히 틀린 주장입니다. 이러한 입장 위에서 세계를 이해할 수 없어요. 미국 문화는 이렇게 틀린 자연관을 바탕으로 합니다.

 왜 그렇게 되었는지 원인은 분명합니다. 미국의 청교도 문화는 아메리카 원주민을 무자비하게 학살하면서 시작했습니다. 원주민은 완전히 다른 자연관을 갖고 있었습니다. 그들은 땅을 어머니로, 모든 동식물을 형제로 봤어요. 하지만 그들의 의미 있고 아름다운 자연관은 철저히 파괴되었고, 공허하고 어두운 유물론적 자연관만이 남았죠. 예를 들면 그랜드캐니언이 그 모델입니다.

 미국인에게 현실이란 그랜드캐니언 같은, 이른바 '의미 없는 거대한 구멍'과 같습니다. 자연주의적 자연관이 허무주의nihilism으로 이어지는 겁니다. 미국인의 행동 패턴은 이러한 '의미 없는 구멍'에 무언가 '의미'를 부여하기 위해 전력을 다하는 것입니다.

 미국 문화는 일반적인 이미지보다 훨씬 종교색이 강하고, 그 정치 형태도 기독교 원리주의의 영향을 강하게 받고 있습니다. 제가 볼 때는 미국이나 이슬람 원리주의 아래 있는 이란이나 비슷해요.

 

 

 경제와 관련해 자연주의와 가장 큰 문제점은 무엇인가요?

 

 시장에서 경쟁력이 있으려면 인건비를 줄이기 위해 새로운 기계를 만들어내야 하고 그러려면 학문상 발견, 즉 지식이 필요합니다. 이런 의미에서 학문과 기술은 이어져 있는 셈인데요. 학문상의 공적에 의해 새로운 기계가 만들어지고 이것이 경제를 위해 쓰입니다.

 경제 활동의 존속과 제조 합리화를 목적으로 지식이 연구되는 셈인데요, 이때 가격으로는 나타낼 수 없는 다른 형태의 앎이 존재한다는 사실이 간과되고 있습니다. 가격으로는 나타낼 수 없는 앎이란, 우리들의 실재 체험입니다.

 

p165

 예를 들어 텔레비전 드라마를 시청하는 것과 고전 소설을 읽는 것은 모두 만족감을 줍니다. 하지만 드라마는 보는 즉시 만족감을 주는 상품입니다. 그에 비해 고전 소설은 읽는 데 시간이 오래 걸립니다. 하지만 그만큼 자유와 우연을 향유할 수 있다는 점에서 곧바로 얻는 만족감과는 질적으로 큰 차이가 있는 만족감을 선사하죠.

 자연주의가 사회에 위험한 이유는 그 세계관이 자유나 우연의 입지를 위태롭게 하기 때문입니다. 자연주의적 세계관에서 자유는 찾아볼 수 없습니다. 우연은 양자론에서 말하는 소립자 수준에서나 존재합니다. 자연주의는 우리 인간을 이해하지 못한 사고 방식입니다.

 실생활에서 일어나는 우리의 체험을 자연주의는 고찰 대상으로 삼지 않았습니다. 그 체험을 자연과학적으로 탐구하려면, 그림을 보고 감동하거나 친구와 즐겁게 시간을 보내는 중에 우리 뇌에 전극을 꽂고 뇌파나 영상을 확인해야 합니다. 하지만 현실에서 인간의 경험이란 그렇게 시각화해서 측정한 것 이상입니다.

 예를 들어 세 살 난 딸이 "숫자 3이 뭐야?" 하고 묻는다면 저는 손가락 세 개를 펴서 보여줄 겁니다. 그럼 딸은 "아, 그렇구나. 하나, 둘, 셋. 이게 3이구나"라고 대답할 거에요. 하지만 자연주의의 관점에서 보면 제 손가락 세 개는 '3'이 아닙니다. 세포, 소립자, 에너지 같은 이야기로 흘러가죠. 그러나 '세 개의 손가락'이 제게 의미하는 내용, 예를 들어 세 살 난 딸에게 나이를 가르쳐주었을 때의 추억 등은 현상을 구성 요소로 쪼개서 분석하는 방법으로 탐구할 수 있는 대상이 아닙니다.

 어떠한 현상을 자연과학적으로 탐구한다는 건 잘게 분해한다는 말과 같습니다. 실험이란 어떤 측면에선 파괴하는 행위입니다. 대형 하드론 충돌형 가속기LHC 안에서는 항상 물체가 기본 입자 수준으로 잘게 파괴됩니다. 그러나 현실은 그렇게 분해할 수 있는 성질의 것이 아닙니다. 현실은 '상황'이라는 큰틀 안에서 성립하기 때문입니다.

 

p167

 자연주의가 경제와 밀접하게 관계를 맺는 현대에 인간은 자신을 지키기 위해 무엇을 해야 합니까?

 

 철학의 관점에서 말하면 우선 개념에 신경 쓰라고 조언하고 싶군요. 특히 자연주의에서 '사실을 가리려고 사용하는 단어'들의 진정한 의미를 제대로 파악해야 합니다. 이것은 철학의 역할이기도 합니다.

 예를 들어 '포퓰리즘populism'이라는 단어가 있습니다. 이 단어가 '뭔가 위험하다'고 생각하면서도 진짜 의미를 이해하는 사람은 거의 없습니다. 이 단어는 사실 키워드이지 개념이 아닙니다. 참고로 개념과 키워드는 달라요. 개념은 진실에 가깝고, 키워드는 무기 같은 겁니다. 정치 토론을 보면 이런 키워드들이 상대를 공격하거나 비방하는 데 쓰입니다. 하지만 토론의 궁극적인 목적은 평화를 만들어내느 거게요. 따라서 개념을 잘 이해해서 진실에 다가가려고 노력하는 게 첫걸음이 되어야 합니다.

 철학은 사고방식을 바꿈으로써 현실을 바꿉니다. 특히 우리는 같은 현상을 다른 각도에서 보고 파악하는 방법을 배워야 합니다. 눈에 보이는 대로, 귀에 들리는 대로 현실을 인식하다간 세간에 떠도는 이데올로기의 희생양이 되고 말 거에요.

 표면적인 이데올로기의 진정한 의미를 알기 위해서는 변증법이 효과적일 수 있습니다. 어떤 '예측'에 대해 우선은 반대 방향에서 살펴보세요. 처음에는 보이지 않았던 다른 측면이 보일지도 모릅니다. 그렇게 '진실이라고 굳게 믿는 것'의 숨겨진 일면을 탐색해야 합니다.

 트럼프를 예로 들어볼까요? 이 내용을 설명하는 데 트럼프만큼 완벽한 소재는 없거든요.

 글로벌 자본주의를 대표하는 존재가 백악관에 앉아 있습니다. 덕분에 미국 경제는 잘 굴러가고 있지요. 트럼프는 세계적인 스타입니다. 전 세계 미디어가 앞다퉈 연일 트럼프에 관한 뉴스들을 송출하는 가운데 우리는 트럼프라는 인물을 충분히 아는 듯한 느낌을 받습니다.

 그러나 그 뉴스 대부분이 정말인지 고개를 갸웃하게 만드는 정보들입니다. 트럼프는 제대로 일을 하고 대통령직을 수행하고 있는데, 매일 귀에 들리는 뉴스는 '트럼프는 정치를 하지 않는다', '트럼프는 골프 삼매경에 햄버거를 먹으며 텔레비전을 보고 있다' 라고 말합니다. 하지만 그건 사실이 아닙니다. 실제로 그런 일은 있을 수 없어요.

 흥미로운 사실은 대통령 자신이 이런 얼토당토않는 이야기들을 사람들이 진실이라고 믿기를 바란다는 점입니다. 미국에서는 아무도 정치를 하지 않는다고 생각하게 만드는 거죠.

 사물의 본질과 표면은 같지 않습니다. 표면에서는 '놀고먹는 트럼프'가 우리에게 보입니다. 하지만 다른 관점에서 보면 백악관이 의도적으로 그런 이미지를 심으려고 한다는 걸 할 수 있습니다. 이런 사고가 바로 변증법입니다. 그러므로 정보를 곧이곧대로 받아들여서는 안 됩니다.

 

p171

 오늘날 우리는 인간적인 삶이 완전히 파괴될 위기에 직면해 있습니다. 100년 넘게 위험한 상태가 이어지고 있어요. 현재의 소비문화를 앞으로도 계속 이어나가기란 불가능합니다. 커피와 빨대, 자동차와 휴대전화 등을 100억 명이 모두 원한다면 지구가 남아나겠습니까? 현 사회 모델이 지속 가능한 것이 아니라는 사실은 누구나 알고 있습니다.

 

p180

 뒤르켐은 '각자가 자신의 성격에 맞는 역할을 가지고 진정한 용역의 교환이 이루어지는 것'이야말로 '분업'이라고 말하다.

 

p182

 그러나 이에 대해서 재미있는 '다른 의견'이 있다. '신자유주의의 이론적 지주'이자 '시장 경제의 최대 옹호자' 하이에크가 애덤 스미스의 인간관을 어떻게 해석했는지, 다음을 보자.

 

 애덤 스미스와 그의 추종자들이 말한 개인주의에 대해 현재 퍼지고 있는 오해를 가장 잘 나타내는 예는 아마도 다음과 같은 것이다. 그것은 애덤 스미스는 '경제인'이라는 요정을 발명했다는 것이다. 그리고 그들의 결론은 엄밀히 합리적인 행동이라는 그들의 가정 혹은 일반적으로 잘못된 합리주의적 심리학으로 인해 그 가치를 해치고 있다. 물론 애덤 스미스는 이러한 종류는 가정하지 않았다. 그의 견해에서는 인간은 원래 태만하고 게으르고 경솔하며 낭비를 좋아하는 존재로, 인간으로 하여금 목적과 수단을 합치시키고 경제적으로 혹은 주의 깊게 행동하게 할 수 있는 것은 환경의 힘뿐이라고 말하는 편이 진실에 가까울 것이다. 그러나 이렇게 말한 것조차 그가 가지고 있던 매우 복잡하고 현실적인 인간관에 대해서는 적절하지 않다.

 (중략) 스미스의 주된 관심은 인간이 최선의 상태에 있을 때 우연히 달성할 수 있는 것이 아니라, 인간이 최악의 상태일 때 해를 끼칠 기회를 되도록 적게 하는 것에 있었다. 스미스와 그의 동시대 사람들이 옹호한 개인주의의 주요 장점은 그 체제 아래서는 악인이 최소의 해밖에 끼칠 수 없다는 데 있다고 말해도 과언이 아닐 것이다. 그것은 그 체제를 운용할 선인을 우리가 발견하는지 아닌지에 따라 그 기능이 좌우되는 사회 체제가 아니며, 또 모든 인간이 현재 그 이상으로 선량한 사람일 때 비로소 기능하는 사회체제도 아니다. 그렇지 않고 그것도 모든 사람을 있는 그대로의 다양하고 복잡한, 때로는 선량하고 때로는 악인인, 또 때로는 총명하면서도 더 자주 어리석은 모습을 그대로 활용하는 사회 체제다. 스미스가 목표로 하는 것은 동시대 프랑스 사람들이 바란 것처럼 '선인과 현인'에게만 자유를 한정하는 것이 아니라 모든 사람에게 자유를 인정할 수 있는 체제였다.

 - 프리드리히 하이에크, 「개인주의와 경제질서」 -

 

p185

 뒤르켐은 120년도 더 전에 위기감을 표명한 대상은 산업사회뿐만 아니라 산업사회가 만드는 그림자, 즉 이미지이기도 했다. 그는 기계화와 산업화가 진행되는 가운데 생산라인의 이미지가 사람들에게 사고의 양식마저 심어주는 것을 경고했다. 그는 이런 부정적인 현상을 극복하기 위해 본래의 도덕적인, 유기적 연대의 중요성을 설파했다.

 

 

 

 이 책은 우치다 타츠루가 한국에서 2014년부터 매년 1차씩 한국을 방문하면서 한 8개의 강연의 내용을 묶어서 출간한 것이다. 교육관련 단체인 에듀니티가 주관을 하고 주로 초중고 교사를 대상으로 한 강연이었기 때문에 교육과 관련된 우치타 타츠루의 견해를 중심으로 그 내용이 이루어져 있다.

각 강연이 유튜브로 올라와 있어서 같이 참고하면 좋다.

 

주로 한국의 교육현실에 대해 저자는 일본의 부정적 상황을 예로 들면서, 이렇게 하지 않는 것이 좋다라는 반면교사적 내용 위주의 이야기가 진행된다.

교육에 대한 의견 자체도 있지만, 일본의 현재의 사회나 정치 상황에 대해서도 참고할 만한 내용이 많다. 

 

 

(강연 Link)

2014 첫 번째 이야기.

1. 어른이 없는 사회에서 어른이 된다는 것

 

2. 교육은 실패라는 말을 허용하지 않는다

 

2015. 두 번째 이야기

 

3. 동아시아의 평화와 교육

 

4. 우치다식 공생의 필살기

 

2016/2017 세 번째 이야기

 

5. 교사단의 관점에서 교육 낯설게 보기

 

2018. 네 번째 이야기

6. 미래교육 어떻게 디자인할 것인가

 

2019. 다섯 번째 이야기

7. 교육과 계급 : 이 · 생 · 망 동지들에게

 

 

8. 어른을 찾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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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14 첫 번째 이야기.

1. 어른이 없는 사회에서 어른이 된다는 것.

p23

 일본과 한국에서 동시에 아이들의 성숙 문제가 전면에 등장한 것은, 이것이 세계적인 문제라는 것을 의미합니다. 우리는 지금 성숙 모델을 잃어버린 사회에 살고 있습니다. 특히 남성의 경우가 더욱 심각한데, 남자의 성숙에 참고할 만한 롤모델을 거의 상실했습니다. 그중에서도 가장 극적으로 변화한 것은 가정 내 아버지의 역할입니다. 전 세계 모든 나라에서 비슷한 일이 일어나고 있으리라 생각하는데, 가정에서 아버지의 지위가 극도록 낮아졌습니다. 할리우드의 유명 제작이자 뛰어난 배우인 클린트 이스트우드가 최근 20년간 딸에게 미움받는 역할을 연기한 것으로도 느껴지는 사실이지요. 바깥에서는 슈퍼 히어로인 남성들이 가정 안에서는 충분한 존경도 애정도 못 받는 것은 이미 세계적인 경향인 듯합니다. 가정에서 아버지는 점점 중요하지 않은 사람이 되어가고 있습니다.

 

p29

 아이러니하게도 부권제 사회에서는 아버지가 미성숙하거나 인간성에 대한 이해다고 낮을수록 아이가 잘 성장했습니다. 정말 잘 만들어진 시스템이죠. 아버지가 미성숙하고 아이들에 대한 이해가 부족한, 상상력이 부족한 인간일수록 아이들은 성장할 기회를 얻었던 겁니다. 그러나 가정에서 아버지의 권한이 사라짐과 동시에 아이들은 망설일 자유를 잃어버렸습니다. 

 

p31

 아이들은 갈등 속에서 성장합니다. 아이들에게는 서로 다른 성숙 프로그램을 제공하는 다양한 어른이 있어야 합니다. 서로 전혀 다른 육아 전략을 지닌 어른들과 마주해야 합니다.

 

p33

 성숙의 반대말은 미숙이 아닌 트라우마입니다. 동일한 경험을 반복적으로 체험하는 것, 아무리 새로운 일을 경험해도 과거의 기억이 변하지 않는 것이 트라우마입니다.

 성장이라는 말에 여러분 중 대다수는 앞을 향해 나아간다는 이미지를 갖고 계실 것 같은데요, 사실 그렇지 ㅇ낳습니다. 성장을 뒤를 돌아보면서 나아가는 것입니다. 한 걸음 걸을 때마다 자신이 걸어온 길의 의미가 변하는 것. 풍경이 변하고, 자신이 경험한 일의 의미가 달라지는 것, 그것이 성장입니다.

 그렇다면 어떻게 뒤를 보고 걸어갈 수 있을까요? 바로 등으로 느끼는 겁니다. 자신을 부르는 목소리를 듣는 것입니다. 영어로는 콜링Calling 또는 보케이션vocation이라고 하는데 두 단어 모두 '소명'이라고 번역할 수 있습니다. 눈에 보이지는 않아도 들을 수 있는 것이 있습니다. 소명은 그렇게 등 뒤에서 부르는 소리를 듣고 자기를 부르는 곳을 향해서 걸어가는 걸 말합니다. 성숭하는 아이란 여러 어른이 해주는 다양한 이야기 속에서 자신이 들어야 할 목소리를 가려내 그 방향으로 걸어가는 아이입니다. 목소리가 하나밖에 들리지 않는 경우, 어른이 한 명뿐이거나 다른 어른들이 모두 침묵하는 상황은 결코 아이를 성장시키지 못합니다.

 

2. 교육은 실패라는 말을 허용하지 않는다.

 

p40.  교육은 사회공통자본이다.

 세상에는 종사자들의 멘탈리티가 변하지 않는 직업이 몇 가지 있습니다. 사법과 의료는 정권의 변화나 경제 상황의 변화에 휩쓸리면 안 됩니다. 정권이 교체되었다고 사법적 판단이 바뀌면 안 됩니다. 경기가 좋아지거나 나빠짐에 따라 의료 내용이 달라지면 곤란합니다. 교육과 종교도 그렇습니다.

 인간이 살아가기 위해서, 집단이 살아남기 위해서 꼭 있어야 하는 것을 사회공통자본이라고 하지요. 첫 번째 사회공통자본은 자연환경입니다. 공기나 대지, 바다와 강, 숲 등입니다. 이게 없으면 인간은 살아갈 수 없습니다. 이런 것들을 정치 권력이나 기업에 맡길 수는 없습니다. 누구도 사유해서는 안 됩니다. 두 번째는 사회 인프라입니다. 교통망, 상하수도, 통신망 등이 여기 해당합니다. 전기나 가스 같은 라이프라인도 마찬가지입니다. 이 또한 없어서는 살아갈 수 없습니다. 인간이 살아가기 위해 필수불가결한 이런 것들은 정치나 경제에 종속되어서는 안 됩니다. 우리가 직접 관리하지 않으면 안 됩니다. 정치적 목적에 이용되어선 안 됩니다. 사회공통자본은 전문가가 전문적인 지식에 기초해서 관리해야 합니다. 세 번째는 앞서 이야기한 사법, 의료와 교육입니다. 당연히 사회공통자본인 교육은 전문적인 사람에게 맡기지 않으면 안 됩니다. 그 전문가란 교사입니다.

 학교교육은 정치나 경제, 미디어 등과 다른 시간의 흐름 속에 있습니다. 학교교육의 시간은 굉장히 느리게 흐릅니다. 정치가 한 사람의 신념이나 정치적 입장으로 인해 바뀔 수 있는 것이 아니지요. 그래서 오사카 시장에게 교육에 관여하지 말아달라고 말했던 것입니다.

 교육이라는 사회공통자본의 특징은 실패라는 말이 허용되지 않는다는 것입니다. 어떤 교육정책을 실행해보고 몇 년뒤에서야 틀렸다는 말은 용납하지 않습니다. 틀렸으니 이번엔 다른 교육정책을 실시해보자는 태도는 허용할 수 없습니다. 왜냐하면 이미 그 교육을 받은 아이들이 있기 때문입니다. '너희들은 잘못된 교육을 받은 실패작'이라고 말할 수는 없습니다. 공장이라면 그럴 수도 있습니다. 특정 제품에 대해서라면 '제작법이 잘못되었다. 불량품이다'하고 폐기할 수 있습니다. 하지만 교육에서는 그럴 수 없습니다.

 

 

2015. 두 번째 이야기

2. 동아시아의 평화와 교육

 

p72

 구체저긴 미군 기지 축소 프로그램이나 동아시아 공동체 계획의 문제가 아니라 그런 생각 자체가 금기입니다. 미국에서 그렇게 하라고 강요한 것도 아니고, 일본인 스스로 한 일입니다. 만약 미국에서 대놓고 실각을 요구하면 내정간섭이 되지만 일본의 경우는 내정간섭조차 필요없습니다. 미국 대통령의 기분이 나빠지겠다 싶은 말을 총리대신이 꺼내면 온 일본의 관료들이 들고 일어나 발목을 잡으니까요. 하토야마 씨의 발목을 잡은 건 외무성과 방위성입니다. 미국은 공문서를 금방 공개해주는데, 당시 미일공동위원회의 자료를 보면 외무성의 한 관료가 "조만간 하토야마 총리가 미군기지 축소 이야기를 꺼낼지도 모르니 절대 응하지 말아달라"라고, 일본 외무성의 관료가 미군에게 말했다는 기록이 있습니다.

 한국 언론에서는 거의 보도되지 않았을 거라고 생각합니다만, 하토야마 씨를 끌어내릴 때 일본 언론의 공격은 굉장했습니다. 요미우리, 아사히, 마이니치라는 일본 3대 신문사를 비롯해서 수많은 언론이 사설을 통해 '하토야마는 머리가 이상하다'는 식의 발언을 쏟아냈습니다. 저는 당시 하토야마 총리의 실각 과정을 보면서 일본이 상당히 이상해졌다고 생각했습니다. 종속국으로서 주권의 회복, 국토의 회복을 바라서 그랬다고 하면 그래도 이해할 수 있었겠지만, 일본인은 주권이나 국토 회복을 바라지 않습니다. 저는 이런 현상이 일본인이 안고 있는 근본적인 병이라고 생각합니다. 미국이 지시하지 않아도 미국의 이익을 위해서 발 멋고 나서는 모습이 일본 전체에 만연해 있습니다.

 

p75

 안전보장 관련법은 미국을 위해 전쟁하겠다는 법률입니다. 자위대원이 아프가니스탄이나 시리아나 수단에 가서 전쟁하면 일본에는 아무런 도움이 되지 않지만 미국의 국익은 올라갑니다. 자국 청년들 대신 일본 병사가 죽어주고 군비 부담도 해주니, 미국 사람들 입장에서는 일본이 왜 이런 제안을 하는지 이해하기 어려울 것 같습니다. 일본의 이익이 되지 않는데도 그렇게 하고 싶다는 사람이 많습니다. 그렇게 해서 자기 이익을 추구하는 건데, 아베 정권의 경우 미국을 위해 최선을 다한다는 인상을 주어 장기 집권을 약속받았죠. 이건 미국이 동아시아에서 계속 시행해온 전략입니다. 미국의 이익을 위해 힘쓴다면 어떤 정권이라도 지지해줍니다. 필리핀의 마르코스Ferdinand Emmanuel Edralin Marcos(임기:1965~1986), 인도네시아의 수하르토Haji Mohammad Soeharto(임기:1967~1998), 베트남의 응오딘지엠Ngo Dinh Diem(임기 : 1955~1963)처럼 명백하게 비민주적인 정권들은 미국은 계속 지지해왔습니다. 그들의 통치 형태는 민주제도 아니었고, 미국의 건국이념과 공유할 만한 가치관도 전혀 없었습니다. 아베 역시 이번 안전보장 관련법의 채택으로 마르코스나 수하르토, 응오딘지엠과 똑같은 정치가가 된 것입니다. 자국민을 배신하고 자국의 이익을 희생하더라도 자신의 정권을 유지하고 싶어 하는 정치가 말입니다. 일본에서는 지금 국민의 40퍼센트가 그런 정치가를 지지하고 있습니다. 아마도 많은 일본인에게 그렇게 살아도 된다는 인식이 생겼기 때문일 겁니다. 장기적인 관점에서 본 일본의 국제적 위상보다 당장 눈앞의 이익을, 국민이나 미래 세대보다도 현재 자신의 사적 이익을 우선시하는 거죠.

 

p77

 TPP라는 게 있습니다. 일본은 이를 받아들이려 하고 있는데 그게 실현되면 일본 농업은 괴멸할 겁니다. 일본의 농산물 가격이 국제 시장의 평균 가격보다 높기 때문입니다. 이대로 협정이 체결되면 일본 사람들은 일본 농산물을 사지 않고 외국산 농수산물을 구매할 것입니다. 저는 좀더 비관적으로 생각합니다만, 낙관적으로 봐도 일본 농업의 40퍼센트가 사라질 것이라고 합니다. 그런데도 언론이나 정치가, 재계인은 외국의 값싼 농수산물이 들어오면 소비자들이 이익을 얻을 거라고 떠들어댑니다. 단기적인 면에서는 그럴지 몰라도 장기적인 리스크는 어떻게 회피할 생각인지 모르겠습니다.

 여러분도 아시는 대로 멕시코는 캐나다, 미국과 FTA협약을 맺고 자유무역 체제가 되어 관세가 철폐되었습니다. 멕시코의 주식은 옥수수입니다. 그런데 미국산 옥수수가 멕시코산보다 훨씬 쌉니다. 당연히 멕시코의 소비자들은 미국산 옥수수를 선택했습니다. 계속 싼 물건이 들어오니 소비자들은 이익을 봤지만 대신 멕시코의 옥수수 농가는 괴멸했습니다. 얼마 후, 바이오매스 연료의 재료로 옥수수를 쓸 수 있다는 사실이 밝혀졌습니다. 옥수수 가격이 폭등했고, 멕시코 사람들은 옥수수를 살 수 없게 되었습니다. 국내에서 더 이상 옥수수를 생산하지 않았기 때문입니다. 주식을 먹을 수 없게 된 것이죠. 이게 2008년에 일어난 일입니다. 똑같은 일이 어디서든 일어날 수 있습니다.

 농수산물은 상품으로 보이지만 실은 상품이 아닙니다. 그것 없이 사람은 살아갈 수가 없습니다. 돈으로 살 수 있느냐 없느냐 하는 차원에서 논할 수 없는 것이 바로 '식량'입니다. 만약 이대로 일본의 농업이 괴멸하더라도 당장은 자동차 산업 등 다른 산업으로 번 돈으로 쌀이든 밀가루든 사먹을 수 있을 겁니다. 그런데 만약 사먹을 수 없게 되면 어떻게 될까요? 미래에 무슨 일이 일어날지는 아무도 모릅니다. 전쟁이 일어나질도 모릅니다. 전염병이 퍼질 수도 있고, 테러가 있을 수도 있고요. 어쩌면 일본 경제력이 완전히 떨어져서 농수산물 수입이 불가능해질 수도 있습니다. 미래에 무엇이 일어날지는 아무도 모릅니다. 다른 공업제품이라면 수입을 못하더라도 불편한 정도로 끝납니다. 전자제품이나 자동차가 들어오지 못하더라도 불편한 걸로 끝입니다. 하지만 국내 농산물 생산이 중단되 상태에서 해외로부터의 유입이 끊어진다면 사람들은 굶게 됩니다. 식량을 두고 싸움이 벌어집니다.

 TPP 논의에서 가장 화나는 부분이, 먹을거리를 상품으로 여긴다는 점입니다. 식량은 상품이 아닙니다. 식량이라는 것은 공급히 윤택할 때는 상품으로 보이지만, 공급량이 일정 이하로 떨어지는 순간 상품이 아니게 됩니다. 어느 정도 경제가 잘 돌아갈 때는 상품으로 보이지만 경제활동이 침체되는 순간 살기 위해 서로 빼앗게 되는 것이 식량입니다. 그런 것들을 상품으로 다루어서는 안 됩니다. 아무리 국제가보다 높은 비용이 들더라도 자급자족하지 않으면 안 되는 것이 식량입니다. 농수산업 같은 1차 산업은 국미이 지키지 않으면 안 됩니다. 국제 가격보다 싸다 비싸다가 문제가 아닙니다. 식량의 자급자족은 생존을 위한 보증입니다.

 식문화는 기본적으로 기아, 배고픔을 기준으로 생각해야 합니다. 나라마다 다양한 식문화가 있지만, 어느 나라든 식문화의 기본은 기아에서 벗어나는 겁니다. 식문화의 역사는 먹지 못하는 것을 먹을거리로 만들기 위한 궁리의 역사라고 할 수 있습니다. 이런 걸 어떻게 먹나 싶은 것들을 다양한 궁리를 통해 먹을 수 있게 만들어온 과정입니다. 삶거나, 굽거나, 말리거나, 찌거나, 다지거나.... , 여러 방법을 동원해 먹을 수 있게 만든 것이 인류학적인 식문화의 역사입니다. 또한 인류는 집단마다 다른 것을 주식으로 삼아왔지요. 저쪽 집단이 고구마를 먹으면 이쪽이 바나나를 먹고, 이쪽이 밀을 먹으면 조쪽은 쌀을 먹는 식이죠. 기상 조건 등 여러 이유가 있겠지만 가장 중요한 이유는 하나의 대상에 모든 욕망이 집중되지 않도록 하기 위해서입니다. 만약 모든 인류가 밀을 주식으로 하는 상황에서 밀이 흉작이면 밀을 빼앗기 위한 살육이 일어날 겁니다. 그러나 고구마가 바나나, 콩 등을 주식으로 삼는 사람들이 있으면 그것으로 대체해 굶주림을 피할 수 있습니다.

 식료품을 상품으로 취급하기 시작하면 식문화의 다양성이 파괴됩니다. 전 세계 사람들이 같은 것을 먹으면 식품을 생산하는 기업의 생산 비용이 낮아집니다. 식문화의 획일화 또한 자본주의의 영향으로 인한 현상인 겁니다. 글로벌화가 진행되면서 세계가 평평해진다고들 하는데, 평평해지는건 경제만이 아닙니다. 식생활도 평평해집니다. 일본이 TPP에 가입하면 일본 농수산업은 괴멸 상태에 빠질 텐데 그에 대한 위기감을 이야기하는 사람이 거의 없습니다. 식료품 유입이 끊어졌을 때, 기근이 일어났을 때 어떻게 리스크를 피할 지 논의하자는 사람이 아무도 없습니다. 앞서 평화보케, 70년의 평화에 젖어버린 현재 일본의 정치가나 관료에 대해 이야기했습니다만, 이 경우도 똑같습니다. 우리들이 우선적으로 지성을 활용해야 할 부분은 아무 일도 없을 때 어떻게 이익을 높이느냐가 아닙니다. 카타스트로프적인, 파국적인 상황이 찾아왔을 때 살아남을 방법입니다.

 

 

4. 우치다식 공생의 필살기.

p120 

 어른이라는 것은 결국 누가 무슨 말을 하든 '그럴 수도 있지'하며 상대의 말에 이해와 공감을 표할 수 있는 사람이라고 생각합니다. 박애주의자여서라거나 다른 사람에게 뭔가 줄 것이 있어서 타인을 받아들이는 건 아닙니다. 다른 사람과 공생하는 것, 타인을 받아들이는 것 자체가 기본이 되어야 합니다. '공생할 수 있는 능력'이라는 게 굉장한 노력을 요한다는 생각, 예외적인 소수만이 획득할 수 있다는 식의 발상은 상당히 위험합니다.

 

p122

 여러 먼에서 자신과 다른 집단이나 개인과 조우했을 때 다투지 않고 살아가는 지혜가 바로 공생의 매너라고 생각합니다. 이것이 갖추어져 있지 않으면 집단과 집단이 만났을 때 싸움이 일어나고, 개인의 경우 배제당하게 됩니다. 가치관이나 언어, 종교 등이 전혀 다른 상대와도 공생할 수 있는 능력, 이런 능력은 어렸을 적부터 반드시 개발하지 않으면 안 되는 능력입니다.

 하지만 애석하게도 현대 사회에서는, 세계 어느 나라에서든 마찬가지일 거라 생각합니다만, 공생의 매러를 가르치고 있지 않습니다. 모든 나라에서 아이들의 자기다움, 오리지널리티 등에 이상할 정도로 높은 가치를 두고 있습니다. 아이들이 어린 시절부터 공생의 매너를 배울 기회를 잃고, 어른들은 그걸 가르쳐야 한다는 문제의식조차 없다는 것이 이 시대에 일어나는 커다란 불행들의 원인입니다. 인간의 마음이 병들어갈 때 나타나는 특유의 정신 상태가 있습니다. 무언가에 집착하고, 프라이드를 내세우고, 내가 가져야 할 것을 누군가에게 빼앗기고 있다는 피해의식을 보입니다. 사회 전체가 정신병자를 만들고 있는 건데 가장 먼저 나타나는 것이 집착이죠. '이렇게 되지 않으면 안 된다'는 압박감입니다. 지금의 사회는 옷, 음식, 수집품 등에 대한 집착을 상당히 높게 평가합니다. 아마 사회적 요구 때문에 이렇게 된거라 생각합니다. 사람들이 무언가에 집착할수록 소비활동이 활발해지기 때문이겠죠.

 

p126

 사람들이 자신의 자아, '나다움'을 어떻게 설계할지 정할 때, 첫 단추를 잘못 끼우고 있다는 생각이 듭니다. 여러분처럼 어린아이들부터 중학생, 고등학생까지의 학생들을 가르치는 선생님들이 제일 먼저 가르쳐야 할 것은 역시 '자기 내면에 다양한 것이 혼재해도 괜찮다'라는 생각일 겁니다. 어느 아이에게도 품위 있는 면과 비루한 면모가 있고, 용감한 면과 비열한 면이 있으며, 향상심 있는 부분과 방종한 부분이 있고, 선량한 면과 사악한 면이 있습니다. 인간이 원래 그런 거라고, 그래도 괜찮다고 가르쳐야 합니다. 개성이란 것이 항상 수미일관적으로, 똑같은 것을 하는 게 아니라는 점을 알려줘야 합니다.

 자아의 깊이라거나 넓이, 풍부함이야말로 개성이라는 것을 먼저 가르치는 것. 나는 이런 스타일의 옷밖에 입지 않는다거나 이런 음악밖에 듣지 않는다는 사람은 스스로를 개성적이라고 생각할지도 모르지만, 실제로는 대량 생산된 상품을 그저 소비하고 있는 것에 불과합니다. 실제로 자신의 내면에 풍부한 개성의 단편을 지닌 아이들이야말로 이윽고 성숙한 시민이 되어 다양한 문화권으로부터 찾아오는, 다른 사회에서 방문하는 타자들에게 관대할 수 있는 기본적인 힘을 갖출 수 있을 거라 생각합니다.

 

 

2016 / 2017 세 번째 이야기.

5. 교사단의 관점에서 교육 낯설게 보기

 

p169

 작년 10월, 미국의 외교전문지 <Foreign Affairs>에 '일본 대학교육의 실패'라는 장문의 기사가 게재되었습니다. 이 기사에서는 지난 25년간 일본에서 시행된 교육행정의 실패 증거가 제시돼 있었습니다. 교육행정을 담당하는 일본 관료들의 특징은 자신의 실패를 인정하지 않는 것입니다. 프로젝트가 실패하면 얼른 잊고 다음으로, 그것마저 실패하면 또다음으로 넘어가며 실패한 이유의 검증 작업은 하지 않습니다. 그 결과 동아시아 최고 수준이었던 일본의 고등교육은 중국, 타이완, 한국에 모두 뒤쳐져 선진국 최하위로 전락했습니다.

 각 나라의 연구력, 학술적 발신력을 평가할 수 있는 가장 확실한 지표는 인구당 논문 수입니다. 이전 일본의 인구당 논문 수는 동아시아 최고였습니다. 그런데 2015년의 통계로는 OECD 37위, 선진국 최하위로 떨어졌습니다. 또 자주 비교되는 지표가 GDP 중 교육투자 비율, 교육계의 공적 지출 비용입니다. 여기서도 일본은 연속해서 선진국 최하위에 머물고 있습니다. 5년 연속 최하위입니다. 작년에 한 등수 올라서 최하위가 헝가리였는데 이번에 다시 일본이 최하위가 됐습니다. 나라가 고등교육에 투자할 생각을 하지 않기 때문입니다. <Foreign Affairs>의 기사에서는 이런 수치를 나열하며 일본의 학교교육, 고등교육이 이 정도로 추락한 이유로 여러 의견을 제시했습니다.

 그중 가장 큰 이유로 꼽은 것이 비평적 사고Critical Thinking의 결여였습니다. 비평적 사고란 세상을 비평적으로 보고 생각하며 주어진 명령이나 지시가 불합리하다고 생각하면 '아니'라고 말할 수 있는 능력입니다. 그런데 일본의 대학은 '예스맨'만 키워낸다는 거죠. 두 번째가 이노베이션, 혁신이 없다는 것입니다. 혁신이란 남들이 하지 않는 일을 하는 것입니다. 아무도 관심 갖지 않는 부분에 흥미를 갖는 지적 태도가 혁신을 만들어냅니다. 그런데 일본의 대학은 창의적 고안도 전통적인 기술들을 깨부술 힘도 없이 하나의 분야에서 경쟁할 것을 요구하고 있다는 거죠. 세 번째는 아이러니하게도 글로벌 마인드가 없다는 것입니다. 여기서 글로벌 마인드란 것은 전 세계 다양한 사람들과 커뮤니케이션해서 공동으로 작업하고 일할 수 있는 능력을 말합니다.

 <Foregin Affairs>는 일본의 학교교육이 이 세 가지가 결여된 채 정치 안정성, 사회 안정성을 위해서만 기능하고 있다고 지적합니다. 윗사람 말에 무조건 따르고 비판적으로 세상을 보지 않으며 아무것도 발명하지 않고 자기들끼리만 모여서 굳어지는, 그런 인간들을 만들고 있다는 겁니다. 그래서 일본 고등교육기관의 학술적 발신력, 연구력이 선진국 최하위까지 떨어졌다는 거죠. 정말 단기간에 일어난 일입니다. 앞서 말씀드린 1990년대의 대학설치기준 대강화에 의해 대학들에게 자유선택권이 주어지기는 했지만 등급을 매기지 않으면 안 된다는 이유로 모든 대학이 서로 모방하고, 비슷한 연구에, 교육내용을 체택해 정밀한 등급 매기기를 반복한 결과 일어난 일입니다.

 

p173

 저는 대학 교단에서 일본 대학의 학술적 생산력이 굉장히 높았던 시절과 완전히 사라진 시대를 모두 경험했습니다. 양쪽을 본 사람으로서 확실하게 말씀드릴 수 있는 것은, 등급 매기기에 몰두하는 일은 집단이 가진 힘을 저하시키는 최고의 방법이라는 점입니다. 등급 매기기는 객관성과 정밀도를 요구합니다. 반면에 다양성은 부정됩니다. 모든 경쟁 상대가 똑같은 조건으로 출발해야 하기 때문이죠. 결과적으로 비평적인 사고도, 혁신적인 발상도, 자신과 생각이 다른 사람들과 커뮤니케이션하는 능력도 사라지게 됩니다. 

 

p174

 교육 이외의 분야나 다른 나라, 특히 한국에서 뚜렷하게 나타날 거라 생각하는 현상이 있는데요, 젊은 사람들 쪽에서 정밀한 등급 매기기를 요구하는 겁니다. 

 일본에서는 지방에 사는 젊은 사람들이 도쿄로 몰려듭니다. 한국의 경우는 서울이겠죠. 도쿄는 공기도 안 좋고 물가도 높으며 고용환경조차 결코 좋다고 할 수 없습니다. 그런데도 젊은 사람들은 도쿄로 몰려듭니다. 모두 그렇게 하기 때문입니다. 경쟁 상대가 많으면 많을수록 평가의 정밀도가 높아지기 때문입니다.

 시골 마을에서는 '너는 센스가 탁월하다'라는 소리를 들어도 납득하지 못합니다. 뮤지션이나 배우, 패션 디자이너가 되고 싶은 수많은 사람이 격렬한 경쟁을 반복하는 환경에 스스로 뛰어듭니다. 남들이 하지 않는 일이 아닌 모두가 하는 일이 젊은이를 끌어들이는 겁니다. 보통 무슨 일을 하고 싶냐고 물으면 '모처럼 태어난 인생이니 나만이 할 수 있는 하고 싶다'라고 할 법도 한데, 실제로 그렇게 생각하는 젊은이는 드뭅니다. 다들 남들이 하는 일을 하고 싶어 합니다. 경쟁 상대가 많은 곳에 들어가고 싶어 합니다. 그러면 정밀하고 객관적인 평가를 받을 수 있으니까요. 신기하게도 등급이 낮아도 그렇습니다. 그들이 원하는 것은 '높은 평가'가 아니라 '정확한 평가'인 겁니다. 본인이 동세대에서 어느 정도 위치에 있는지, 어떤 사회적 지위를 요구할 수 있을지, 얼마의 수입을 기대할 수 있고, 어느 정도 수준의 배우자를 얻을 수 있는지 최대한 정확하게 알고 싶어 하죠.

 지금의 일본에서는 '가난한 사람은 가난한 사람답게 행동해라'라는 사회적 압력이 존재합니다. 사실 부모가 가난하고 말고는 아이의 개성과는 아무 관계가 없습니다. 어느 싱글맘에게 들은 이야기인데요, 아이가 학교에서 주변으로부터 받는 압력 때문에 늘 어두운 표정을 짓는다고 했습니다. 아이 본인의 개성은 그게 아닌데 말이죠. 가난한 집 아이는 가난뱅이답게 어두운 표정을 지으라는 사회적 압력이 굉장히 강한 겁니다. 빈곤층이 쾌활한 성격이나 오픈 마인드를 갖는 것을 주변에서 용납하지 않는 것이지요. 이처럼 오늘날의 일본인들은 사회적 지위에 대한 정밀한 등급 매기기를 요구하고, 자신의 지위에서 무엇을 요구할 수 있는지를 빨리 알고 싶어 합니다.

 저는 일본이 가난한 시기에 태어나고 자랐습니다. 당연히 지금보다 훨씬 가난한 사람을 수없이 봐왔습니다. 그런데도 아이들은 각자 개성이 있었고, 집이 가난하니까 음울하다거나 위축된다거나 하는 일은 없었습니다. 1950년대의 아이들, 청년들 중에는 자신의 정확한 사회적 위치라든지 요구할 수 있는 지위, 가져도 될 야심, 기대할 수 있는 수입에 대해 빨리 알고 싶어 하는 사람은 없었습니다.

 지금의 일본은 그때보다 훨씬 윤택합니다. 그런데도 요즘 아이들은 자신의 사회적 지위, 추구할 수 있는 삶의 방식에 대해 훨씬 좁은 가능성밖에 생각하지 못합니다. 나라가 쇠퇴하고 경제력이 약해진다고 해서 이런 일이 일어날 것이라고는 21세기가 되기 전까지만 해도 예상하지 못했습니다. 인구가 감소하거나 경제 성장이 멈춰 정체되는 상황이 반드시 오리라는 것은 예상했습니다만, 실제로 일어난 사회 변화는 제 상상을 아득히 뛰어넘는 것이었습니다. 한정된 자원을 분배하기 위해 객관적이고 정밀한 등급 매기기를 요구하고, 이를 위해 모두 똑같은 일을 하는 사회가 출현한 겁니다.

 결국 일본의 문제는 인구 감소라든지 경제 성장의 침체와 같은 역사적 과정 속에서 어떻게 국력을 다시 높일지를 고미하는 방향이 아닌 등급 매기기와 차별, 균일화의 길로 달렸다는 점에 있습니다. 지금의 일본은 인구 감소 문제에서든 성장의 정체에 있어서든 세계에서 가장 심각한 상태라고 생각합니다. 세계에서 가장 빨리 초고령화 사회에 진입했으니 말이죠. 당연히 경제 성장도 더이상은 없습니다. 몇 년 후면 한국이나 중국에서도 마찬가지로 한정된 자원을 어떻게 공평하게 분배하느냐를 놓고 '정밀한 등급 매기기를 하자'는 주장이 반드시 나올 것입니다. 그리고 가장 비용이 적게 드는 식별 지표로 영어 회화 능력에 의한 차별화를 채택할 것입니다.

 영어 회화 능력을 중시하는 것은 그게 유용한 능력이라서가 아니라 간단히 차별화할 수 있는 지표이기 때문입니다. 등급 매기기라는 것은 하나의 병폐입니다. 등급 매기기에 몰두하다 보면 사회의 활력이 점점 떨어집니다. 안 그래도 인구가 감소하고 경제가 정체되는 상황에서 한층 국력을 저하시키는 그런 해결책을 택해서는 결코 안 됩니다. 일본의 실패 사례를 통해 여러분께 전하고 싶은 게 바로 이 부분입니다. 저출산화, 고령화, 경제 침체..... 그런 상황 속에서 호흡하기 편한 사회를 유지하고 유쾌하고 살고자 한다면 가능한 다양한 삶의 방식을 허용해야 합니다. 경쟁해서는 안 됩니다.

 

2019 다섯 번째 이야기

 

교육과 계급 : 이 · 생 · 망 동지들에게

 

p243

 현재 한일관계가 지극히 악화된 원인의 99퍼센트는 일본 측에 있다고 생각합니다. 일본에 만연한 혐한 감정을 지탱하는 가장 기본적인 감정은 한마디로 질투심입니다. 현재 일본에서는 버블 경제 이후 30년에 걸쳐 계속 국력이 저하되고 있습니다. 경쟁력이 정점에 달했던 1988년에는 일본의 1인당 GDP가 세계 2위였는데 30년이 지난 2018년에는 세계 26위였습니다. 2위에서 26위까지 일직선으로 급강하한 거죠. 그 외에도 대부분의 주요 경제 지표가 일본의 국력 저하를 증명하고 있습니다. 그중에서도 특히 두드러지는 것이 교육에 대한 투자, GDP 대비 공교육 지출입니다. 이 항목에서 일본은 거의 20년간 OECD 최하위를 기록하고 있습니다. 학술적 발신력의 지표로 자주 거론되는 인구당 논문 수 또한 한국, 대만, 중국, 싱가폴에 뒤쳐졌습니다. 국제 사회에서 일본의 영향력, 문화적 발신력이나 미래 사회에 대한 리더십이 뚝 떨어진 겁니다. 한마디로 미래 비전력이 완전히 쇠퇴했습니다.

 

p245

 1980년대 말의 일본인들은 돈으로 주권을 되사고 속국 신분에서 벗너알 수 있지 않을까 꿈꾸기 시작했습니다. 물론 입 밖으로 꺼내지는 않았지만 당시 대부분의 일본인은 그런 꿈을 품고 있었습니다. 실제로 요구하지는 않았지만, 일본 측에서 괌이나 티니안 등 태평양에 있는 섬에 비행장을 비롯한 제반 시설을 마련해줄 테니 오키나와 미군기지를 철수시켜달라고 요구할 만큼 경제력이 실제로 있었으니까요. 1980년대 일본인만큼 돈의 전능성을 맹신했던 집단도 드물 겁니다. 일본인이 탐욕적이라든지 수전노라는 이야기가 아니라, 돈의 힘으로 국가주권을 되산다는 역사상 어느 나라도 이루지 못한 위업을 달성할 수 있지 않을까 하는 꿈을 품고 있었다는 뜻입니다.

 주권이나 국토를 전쟁이나 수완 좋은 외교적 교섭으로 회복한 사례는 있어도 돈으로 구입했다는 사례는 역사상 한 번도 없었습니다. 1960년대와 1970년대의 고도 경제 성장 이후 일본인들이 경제 동물이라는 말을 들을 정도로 돈벌이에 필사적이었던 것은 풍족한 삶보다는 주권 회복을 바랐기 때문일 겁니다. 일본은 '일본국 헌법 제9조 2항'에 의해 전쟁을 포기한 상태였으며, 외교적인 힘도 없었습니다만, 돈만큼은 있었습니다. 그러니 돈으로 주권을 회복한단느, 미국을 제치고 세계 최고의 경제 대국이 되어 자국의 역량을 행사한다는 선택지밖에 없었을 것이고, 이에 대해 전 국민의 암묵적 합의가 있었으리라 생각합니다. 하지만 일본의 버블 경제는 1992년에 붕괴해버렸고, 급격한 경제 성장도 거기서 멈춰버렸습니다. 그 후로도 일본은 2010년까지 20년 가까이 GDP 세계 2위를 유지했습니다만, 우리는 이 시기를 '잃어버린 20년'이라고 부릅니다. 중국에게 GDP에서 뒤쳐진 것이 2010년의 일입니다. 겉으로는 십수년에 걸쳐 세계 2위의 경제 대국이라는 자리를 유지하고 있었지만, 사실 일본은 표류 중이었습니다. 어떻게 하면 좋을지 몰랐던 거죠. 일본인들이 1960년대에서 1980년대까지 30년에 걸쳐 유지해온 '어쨋든 부자가 되자', '우선 부자가 돼서 미국으로부터 독립하자'라는 암묵적 비전을 잃어버린 겁니다. 그러던 중 일본에 고이즈미 준이치로라는 총리대신이 등장했습니다. 그의 인기는 굉장했습니다. 내각 수립 직후의 지지율이 90퍼센트를 넘었습니다. 일본 국민들은 과연 그에게 무엇을 기대한 걸까요? 고이즈미 준이치로가 제시한 것은 정치 대국이 되어서 미국과 대등한 관계even partner를 맺자는 전략이었습니다. 돈의 힘으로 국가주권을 회복하는 것이 불가능해졌으니, 이번에는 국제 사회에서의 지위를 높임으로써 세계적인 대국이 되자고 생각한 거죠. 그러나 유감스럽게도 일본에게 국제 사회를 향해 발신할 만한 메시지가 없었습니다. 세계가 어떻게 흘러가야 하는지, 이상적인 국제 사회를 어떻게 구축할 수 있는지, 일본은 이를 위해 무엇을 할 수 있는지 등에 대해 한마디도 할 수 없었던 겁니다. 결국 고이즈미 내각이 세계적인 정치 대국이 되기 위해 선택한 방법은 '미국의 모든 정책을 무조건적으로 지지한다'는 전략이었습니다.

 당시 미국의 대통령이 조지 W. 부시라는 역사적으로 손꼽히는 무능한 권력자였다는 점은 고이즈미 준이치로에게 행운이었습니다. 부시 지지율은 30퍼센트도 안 됐고, 그가 제시하는 정책에 대한 국제 사회의 평가 또한 지극히 낮았습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부시를 지지한 사람이 바로 고이즈미 준이치로였죠. 부시에게 있어서 고이즈미는 미국의 모든 정책을 지지해주는 극히 예외적이고 고마운, 보기 드문 파트너였습니다. 그리고 미국은 자신의 파트너인 일본이 정치 대국으로 우뚝 서서 국제적 지위를 획득하는 것을 바라게 되었습니다.

 2005년, 일본은 미국의 강력한 지지를 받으며 UN 안전보장이사회의 상임이사국에 입후보했습니다. 이들 상임이사국은 중국, 프랑스, 러시아, 영국, 미국의 5개국인데, 이를 확대하여 독일, 일본, 브라질을 추가시키자는 제안이 나왔고 일본이 여기에 응한 겁니다. 이 안은 결국 기각되었는데, 결정적인 이유는 일본이 상임이사국 취임을 지지하는 국가가 아시아에 거의 없었다는 점이었습니다. 한국도 중국도 일본을 지지하지 않았지요. 당시 많은 나라가 일본의 상임이사국 취임에 반대한 이유는 일본이 상임이사국이 되어봤자 미국 표가 하나 늘어날 뿐이기 때문이었습니다. 일본은 미국의 정책을 모두 수용함으로써 어떻게든 상임이사국이 되어보려 했지만, 국제 사회는 미국과 똑같은 말밖에 하지 않는 나라가 상임이사국이 되는 것이 의미가 없다고 판단했습니다. 세계 각국이 모델로 삼고자 하는 리더십이란 나름의 꿈이나 이상을 갖고 이를 실현하고자 노력하는 나라에서 나온 리더십일 겁니다. 강대국에 붙어서 아부하는 나라에서 그런 리더십을 찾을 수 있을 리가 없죠.

 이 2005년의 참패, UN 안전보장이사회 상임이사국 진입 실패라는 사건은 일본인에게 있어 또 하나의 트라우마가 되었습니다. 세계 최고의 경제 대국이 된다는 꿈과 굴지의 정치 대국이 되어 많은 나라에게 리더로 존경받는다는 꿈, 두 개의 꿈이 동시에 사라진 겁니다.

 그 후 15년 가까이 지났지만, 일본의 경제력이 회복될 기미도 국제적 위신을 확립하고 일본 고유의 리더십을 인정받을 만한 메시지도 보이지 않습니다. 돈도 없고, 미래에 대한 비전도 없습니다. 이것이 지난 15년간 일본의 국력이 급격하게 저하된 원인이라고 저는 생각합니다. 

 

p258

 미국이라는 나라는 기본적으로 동맹국에게 미눚제를 강요하지 않으며, 미국의 뜻에 따르기만 하면 통치 형태가 독재든 아니든, 얼마나 부패했든 일절 상관하지 않는다는 사실은 베트남의 괴뢰 정권이나 필리핀, 인도네시아, 칠레, 일본, 한국 등의 사례를 봐도 명백합니다. 민주적인 정치 체제는 동맹국의 조건이 아니며, 미국의 말만 잘 들으면 국내 통치를 어떤 형태로 하든 관여하지 않는 겁니다. 오히려 그 나라의 이익에 반하는 요구도 무리해가며 추진할 수 있는 강권적인 독재 체제를 선호할 수 있습니다.

 

 이런 상황을 고려해보면 지금 일본에서 이상할 정도로 만연한 혐한 감정, 특히 정부가 솔선해서 부추기고 있는 혐한 운동이 단순히 정서적인 문제가 아니라 나라의 방향성을 정하기 위한 국가 전략이라고 분석할 수 있습니다. 따라서 일본의 언론이 '한국은 민주화에 실패했다'거나 '경제가 붕괴했다', '문재인 대통령이 국민의 지지를 잃고 있다', '한국인들이 이분화되고 있다'는 등의 혐한 언설을 필사적으로 보도하는 것은 민주화와 시장 경제의 조합으로는 성공할 수 없다ㅡㄴ 메시지를 일본 국민에게 전하기 위함입니다.

 

p274

 주식회사라는 형태는 유한책임 체제입니다. 도산하면 끝이고, 경영자는 그 이상 책임을 추궁당하지 않습니다. 그런데 국가의 도산이란 있을 수 없는 일입니다. 지도자의 실수로 국부를, 국토를, 주권을 잃고 국가가 붕괴한 다음에 '죄송하다'는 말로 끝낼 수는 없으니까요. 주식회사는 경영 방침이 잘못되더라도 도산하면 끝이지만 국가 정책이 잘못되었을 경우 나라가 갑자기 사라지는 것이 아니니 국민 모두가 수십, 수백 년에 걸쳐 그 대가를 치러야 합니다. 국가는 무한책임입니다. 그러므로 주식회사를 모델로 지자체나 학교, 국가 등의 제도를 설계해서는 안 됩니다.

 

 

어른을 찾습니다.

 

 

p292

 포퓰리즘의 근본은 현재 사회가 겪고 있는 불행이 단일한 원인으로 인한 것이라는 발상입니다. 이 단일한 원인, 제악의 근원을 제거하면 다시 사회 질서를 회복하고 풍요로운 삶을 되찾을 거라 생각하는 겁니다. 이런 사고방식을 단순주의simplism나 음모사관(음모사론, Conspiracy Theory)이라고도 합니다.

 근대 음모사관은 프랑스혁명 직후에 태어났습니다. 프랑스혁명으로 특권을 빼앗긴 왕족이나 귀족들은 영국으로 도망쳤고, 이들은 매일 밤 런던의 클럽에 모여 '우리가 왜 이렇게 되었을까?', '영원할 것 같던 부르봉 왕조가 어떻게 하룻밤 만에 몰락했을까?'라는 주제로 논의를 계속했습니다. 그들에게 다양한 정치적, 경제적, 사상적 요인으로 인해 수많은 '재도적 피로'가 쌓이다가 동시에 터짐으로써 복수의 요소가 상호 작용하여 혁명적인 사건이 일어났다는 식의 해석은 불가능했습니다. 혁명이란 상황만 놓고 보면 단순한 하나의 정치적 사건에 불과하지만, 거기에 관여하는 요소는 무수히 많다는 것을 이해하지 못하기 때문이죠. 그들이 알 수 있었던 것은 '온갖 분야에서 동시에 이변이 일어났고, 그 징후를 경찰도 군대도 파악하지 못했다'는 사실뿐이었습니다. 이런 사실로부터 그들이 추론해낸 것은 정치, 경제, 언론, 학술 등 모든 분야에 영향을 미치며 혁명이 일어나기 직전까지 아무런 자취도 남기지 않고 활동을 계속할 수 있는, '하룻밤 만에 체제를 뒤집을 수 있을 만큼 거대한 비밀결사'가 존재한다는 가설이었습니다. 부르봉 왕조을 무너뜨린 비밀결사가 존재한다는 하나의 스토리가 탄생한 겁니다. 그 뒤로는 비밀결사의 정체가 무엇일까에 대한 논의가 이어졌습니다. 프리메이슨, 일루미나티, 성당기사단(템플나이츠) 그리고 유대인 등이 흑막으로 지목됐습니다. 실체가 드러나지 않은 존재라는 조건만 맞으면 뭐든 상관없었을 겁니다. 실제로 프랑스혁명 후 결과적으로 가장 많은 이익을 얻은 것은 유대인이었습니다. 프랑스혁명 이후 유대인은 차례차례 무대의 전면에 등장하기 시작했습니다. 프리메이슨이나 일루미나티, 템플나이츠는 나타나지 않았지만 유대인은 실제로 나타나서 경제, 재계, 언론으로 진출하며 두각을 드러냈습니다. 프랑스혁명으로 가장 큰 혜택을 받은 것이 프랑스에 살던 유대인이라는 사실은 틀림이 없습니다. 이를 근거로 18,19세기의 이론가들은 프랑스혁명으로 이익을 본 것이 유대인이니 프랑스혁명을 계획한 것도 유대인이라는 식의 추론을 했습니다. 어떤 정치적 변화로 혜택을 본 집단이 존재한다는 사실과 그들이 변화를 계획하고 실행했다는 주장 사이에는 아무런 논리적 근거가 없지만, 당시 사회 이론가들은 이 지극히 단순한 이론을 채택했습니다. 이것이 음모사관의 기본적인 구조입니다. 18세기 프랑스인들의 이런 망상이 훗날 홀로코스트까지 이어져 600만 명에 이르는 유대인의 학살로 귀결된 셈이니, '망상에 불과하다'라며 가볍게 볼 수 없다는 것은 명백합니다.

 이런 음모사관을 비판하기 어려운 이유는 언뜻 무작위하게 보이는 모든 사상의 배후에 하나의 단일 의지가 존재한다는 그들의 주장이 일신교의 사고 구조와 일치하기 때문입니다. 따라서 이런 반유대주의는 기본적으로 일신교 문화권에만 존재합니다. 이슬람교라든지 힌두교, 유교 등 다양한 문화권이 있습니다만, 폭력적이라고 해야 마땅할 반유대주의가 존재하는 것은 대표적인 일신교 기독교 문화권뿐입니다. 랜덤으로 보이는 사상의 배후에 단일 의지가 존재한다는 것은 인간에게, 특히 일신교적 사고관을 가진 사람에게 있어 지극히 당연한 발상입니다. 사실 정치적인 사건이든 경제적 변화든 문화적 사건이든 우리가 경험하는 것들은 무수히 많은 요소의 상호 작용으로 일어나고, 단일한 작자author가 모든 것을 컨트롤하기란 현실적으로 불가능하지만 그렇게 믿음으로써 '단일한 작자'가 존재한다고 생각하면 지적인 부하가 상당히 줄어듭니다. 따라서 현재 세계적으로 포퓰리즘이 만연하며 단순한 발상을 취하는 사람들이 늘어나고, 단일한 작자나 사악한 의지를 가진 흑막이 모든 악행을 일으킨다는 음모론이 횡행하는 이유는 원인이 너무 복잡해 알 수가 없기 때문입니다.

 인간에게는 어느 정도 지성이 있기 때문에, 변수가 늘어나면 그에 맞추어 자신의 방정식을 다원화하게 됩니다. 다차원방정식으로 다양한 변수를 풀어낼 수 있도록 진화하는 겁니다. 그러나 변수의 종류가 한계를 넘어서면 수중에 있는 방정식으로는 해석할 수가 없습니다. 그러면 자신의 방벙식을 복잡화하려는 노력을 그만두고 지적 부하를 덜어내기 위해 단일의 작자가 모든 것을 지배한다는, 사실은 본인도 믿지 않는 주장을 펼치며 가장 단순한 일차방정식으로 회귀하게 됩니다. 그러므로 일본과 한국을 포함해서 현재 전 세계적으로 포퓰리즘이 만연하며 굉장히 단순한, 예를 들어 일본이라면 '전부 한국 탓이다', 유럽의 경우 '이슬람 난민이 만악의 근원이다', 영국은 'EU가 원인이다', 미국에서는 '멕시코 난민 탓이다'라는 식의 믿을 수 없을 정도로 단순한 해답에 많은 사람들이 사실은 밎지 않으면서도 지지를 보내며 모여들고 있습니다. 세상 사람들이 유아화되면서 어른이 사라지는 것처럼 보이는 이유는 엄밀하게 보자면 사람들이 어리석어서 그런 것이 아니라 세상이 너무 복잡해지고 있기 때문입니다. 세계의 변화가 완만하게 일어나며 변수가 차근차근 늘어난다면 인간도 거기에 맞추어 스스로를 복잡화시키고 지성을 고도화함으로써 문제에 대처할 수 있지만, 변수의 증가가 일정 수준을 넘어 가속하기 시작하면 개인의 노력으로는 해결할 수 없게 됩니다.

 

p298

  현재 일본의 인구는 약 1억 2700만 명인데, 81년 후인 2100년에는 5000만으로 감소할 것이라 예상되고 있습니다. 81년 만에 7700만 명, 해마다 약 90만 명이 줄어드는 거죠. 동시에 고령화도 진행되고 있습니다. 인구 5000만 명 중 4할은 노년층일 것입니다. 그게 어떤 사회일지 예측조차 할 수 없습니다. 한국도 곧 일본을 뒤따라서 고령화와 인구 감소가 시작될 것입니다. 중국은 현재 인구가 약 14억에 달합니다만, 앞으로 수년 내에 15억을 정점으로 급격한 인구 감소가 시작되어 2050년 정도에는 7억 명으로까지 줄어들 것으로 보입니다. 지금 중국은 인구와 함께 경제력이 늘어나며 아시아에서의 군사적 지위도 점점 높아지고 있습니다만, 얼마 뒤면 고령화와 인구 감소로 내수 시장이 절반으로 줄어들 것입니다. 여기에 대해 중국 공산당이 어떻게 대처할지는 모르겠습니다만, 아마 아직 아무 계획이 없을 거라고 생각합니다.

 

p302

 어느 경제학자의 정의에 따르면, 윤택한 사회란 필요한 것이 필요한 시점에 필요한 장소에서 손에 넣을 수 있는 사회입니다. 굳이 경제가 성장하지 않더라도, 인구가 늘어나지 않더라도 필요한 것을 적절한 시기에 적합한 장소에서 손에 넣을 수만 있다면 그곳은 윤택한 사회이고, 그런 사회를 어떻게 설계하고 유지할지를 고민하면 됩니다.

 

 

p306

 대안적 사실 altenative facts 이라는 단어가 탄생하게 된 트럼프 대통령 취임식 사건을 기억하십니까? 트럼프 대통령 취임식에 참여한 청중이 오바마 대통령 때보다 적다는 여론이 일자 백악관에서 이를 부정하며 많은 청중이 참여했다는 증거로 가짜 사진과 수치를 근거로 제시했다가 발각된 사건입니다. 한 인터뷰에서 왜 금방 들통날 거짓말을 했을까 묻는 기자의 질문에 보도관이 "거짓말이 아니라 대안적 사실을 제시한 것"이라고 대답해서 조롱거리가 됐죠. 이런 대답의 배경에는 다음과 같은 사고방식이 있습니다. '세상을 보는 방식에는 여러 가지가 있는데, 당신에게 세상이 그렇게 보이는 것은 어디까지나 당신의 주관적인 관점에 불과하다. 물론 내가 보는 것도 주관적인 관점에 불과하다는 것을 나는 인정한다. 당신은 당신의 세계를, 나는 나의 세계를 각자의 방식으로 보고 있기 때문에 어느 쪽이 진실이라고 단정할 수는 없다.'

 이와 같은 사고방식에 대해 흥미로운 설명을 하고 있는 책이 있습니다. 일본계 미국인 사회학자 미치코 가쿠타니의 <진실의 끝>인데요, 현재 미국이 언론 상황을 날카롭게 비판한 이 책에서 그는 1970년대에 유행한 포스트모더니즘의 영향을 이야기합니다. 포스트모더니즘이 가져온 것은 우리가 보고 있는 세계가 각자의 성별이나 국적, 종교, 이데올로기 등에 따라 다를 수 있다는 관점입니다. 실제로 인간의 모든 인식은 계급이나 성별, 종교, 인종에 따라 치우칠 수밖에 없지요. 여기서 객관적 현실은 존재하지 않는다는 결론이 나옵니다. 모든 사람이 공유하는 객관적 사실이라는 것은 이 세상에 존재하지 않는다는 거죠. 계급이나 성별, 이데올로기나 종교에 의한 편견으로 인해 특히나 더 비틀린 세계상을 가진 사람도 있겠지만, 우리 모두가 왜곡된 세계를 보고 있으니 전부 평등하다는 겁니다. 누구나 '그건 네 주관이야. 나한테 그렇게 안 보여'라고 반박할 수 있다는 것이죠.

 이게 포스트모더니즘이 탄생시킨 무시무시한 사고방식인데, 논리적으로는 맞는 말이긴 합니다. 이런 사고방식이 퍼지면서 타인의 의견을 개인의 주관에 불과한 것으로 치부하는 것이 비판으로서 성립한다고 믿게 되었습니다. 그런데 객관적인 사실을 분명하게 알아서 주관적인 의견에 대해 틀렸다고 비판할 수 있는 사람은 없습니다. 포스트모더니즘적인 발상에 기초한 '진실은 없다'는 원리주의에 저항할 방법이라고는 '당신이 하고 싶은 말은 알겠는데... 뭔가 좀 이상하다'는 식의 반응뿐입니다. 맞는 말이기는 한데 듣다 보니 닭살이 돋았다든지, 속이 쓰리다는 비판밖에 할 수 없는 거죠. 포스트모더니즘에 의해 진실이 사라진 상황에서 우리가 기댈 수 있는 곳은 그런 지극히 신체적인 반응뿐입니다.

 

인구 감소 시대를 맞은 일본의 미래에 대해 각 분야 전문가의 의견과 대담을 모은 책.

일본의 인구감소는 이미 시작되었으며, 한국보다 20년 앞서 이런 경향이 나타나기 시작하고 이미 현실로 진행중이라는 점에서 한국의 미래를 예측할 수 있는 지침이 된다.

대부분은 공감이 가는 내용이다.

하지만, 맨 마지막인 뜨거운 근대는 끝났다에서 동아시아 평화에 대한 저자의 생각은 매우 편협하고, 일본 중심적이다.

동아시아의 평화를 위해 일본 주도의 외교전략 외에는 생각하지 못하는 일본의 근시안적 사고는 2019년부터 본격화된 남북 화해와 북미협상의 장에서 일본이 표면적으로나 물밑으로나 협상의 훼방을 놓은 부분에서도 알 수 있듯이 실제로는 동아시아의 평화에 전혀 도움이 되지 않고 있다.

즉, 일본은 진보나 보수나 북한 핵문제와 이와 관련한 외교적 해법에 있어서, 일본이 주도해야 한다는 아집에 여전히 사로잡혀 있는 듯 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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목차

p9  서론 문명사적 규모의 문제에 직면한 미래 예측 _ 우치다 타츠루

p47. 1. 인류는 어떻게 살아왔는가 - 호모사피엔스의 역사로 살펴보는 인구동태와 종의 생존 전략 _ 이케다 기요히코

p77 2. 두뇌자본주의가 온다 - 저출생보다 심각한 인공지능시대의 문제 _ 이노우에 도모히로

p107 3. 인구 감소의 실상과 미래의 희망 - 간단한 통계수치로 '공기'의 지배에서 탈출할 수 있다 _ 모타니 고스케

p135 4. 인구 감소가 초래하는 윤리 대전환의 시대 - 무연의 세계에 유연의 장소를 만들자 _ 히라카와 가쓰미

p159 5. 축소사회는 하나도 즐겁지 않다 - 유럽의 사례로 보는 미래 세대를 위한 대책 _ 브레디 미카코

p183 6. 건축이 도시와 지방을 살릴 수 있다 - 따뜻하고 번잡한 거리 만들기 프로젝트 _ 구마 겐고

p201 7. 젊은 여성에게 인기가 없는 자치단체는 사라진다 - 문화를 통한 사회포섭의 권유 _ 히라타 오리자

p225 8. 도시와 비장, 먹거리로 연결되다 - '관계인구'를 창출한 공동체 혁명 _ 다카하시 히로유키

p253 9. 인구 예측 그래프의 덫 - 저출생을 둘러싼 여론의 배경에 존재하는 '경영자 시선' _ 오다지마 다카시

p271 10. 뜨거운 근대는 끝났다 - '사양의 일본'을 위한 현명한 안전보장 전망 _ 강상중

 

 

p19

 "파국적 사태(catastrophe)가 과거 한 번도 일어나지 않았다는 것은, 파국적 사태가 미래에도 결코 일어나지 않는다는 근거가 될 수 없다"는 명제는 (데이비드 흄David Hume 이후) 분명히 영미 지성인의 내면 깊이 자리 잡고 있습니다. '지금까지 일어나지 않은 일'은 앞으로도 일어나지 않을 개연성이 높습니다. 그러나 그것은 어디까지나 개연성에 불과합니다. 개연성의 전망에 주관적인 희망을 개입시켜서는 안 된다는 것이 앵글로 · 색슨 문화권의 지성인이 생각하는 '상식'입니다. 그러나 일본에서는 상식이 아닙니다. 일본의 상황은 정반대입니다. 일어날 확률이 낮은 파국적 사태에 대해서는 '생각하지 않기로 한다'가 일본의 전통입니다.

 

p23

 극동국제군사재판에서 25명의 피고인 전원은 "나는 전쟁을 일으키는 것을 원하지 않았다"고 주장했습니다. 만주사변에 대해서도, 중국과의 전쟁에 대해서도, 태평양전쟁에 대해서도, 피고인들은 "다른 선택안이 없었다"는 말로 책임을 회피했습니다. 예를 들어 고이소 구니아키小磯國昭는 만주사변, 중국에서의 군사행동, 3국 동맹, 미국과의 전쟁에 대해서 전부 개인적으로는 반대했다고 증언했습니다. 이에 기가 막힌 검찰관은 그렇다면 어째서 당신은 본인이 반대하는 정책을 집행하는 정부기관에서 잇달아 중요한 직위로 나아갈 수 있었냐고 추궁했습니다. 그러자 고이소는 다음과 같이 대답했습니다.

 "우리 일본인의 방식은 자신의 의견은 의견, 논의는 논의입니다. 만약 국가정책이 결정되었다면, 그 국가정책에 따라 노력하는 것이 우리에게 부과된 종래의 관습이며 또한 존중받는 방식입니다."

 마루야마 마사오丸山眞男는 이 증언을 인용하면서 이렇게 말했습니다.

 "위와 같은 사례를 통해서 얻을 수 있는 결론은 '현실'이라는 대상을 진행형으로 만들어내거나 만들어가는 것이라 생각하지 않고, 이미 만들어지 것, 아니 좀더 구체적으로 표현하면 어디선가 발생해서 찾아온 것이라고 생각한다는 점이다.

 피고인들은 전쟁지도부라는 중요한 지위에 있으면서도 자신들이 전쟁이라는 현실을 만들어냈다는 사실을 완강히 거부했습니다. 그들은 전쟁을 인간의 능력을 초월한 천재지변처럼 '어디선가 발생해서 찾아온 것'으로 받아들였습니다. 그렇기 때문에 그 압도적인 현실에 적응하는 것 말고는 "선택 안이 없었다"고 변명한 것입니다.

 전쟁이 통제할 수 있는 정치적 행위라면, 어떤 이념과 계획에 의거하여 전쟁을 시작했는지에 대한 정치적 책임이 발생합니다. 그러나 '어디선가 발생해서 찾아온' 천재지변과 같은 종류의 파국이라면, 누구에게도 어떠한 정치적 책임도 발생하지 않습니다. 때문에 다소 부정적으로 해석해보면, 저는 패색이 짙어진 이후에는 전쟁지도부 사람들은 오히려 '전쟁이 제어 불능 상태에 빠지는 것'을 무의식적으로 바라고 있었다고 생각합니다.

 1942년 미드웨이 해전에서 일본 해군은 주력 부대를 잃어 이미 전쟁 수행 능력을 상실한 상태였습니다. 때문에 그 시점에서 강화교섭을 시작하는 것이 합리적인 선택지였습니다(실제로 기도 고이치木戶幸一와 요시다 시게루吉田茂 등은 평화공작을 시작했습니다). 그러나 예를 들어 강화 조건으로 일본제국의 존속을 인정해주는 대신, 만주 · 한반도 · 대만 등 식민지를 포기하라는 요구를 받았다면 어떤 일이 일어났을까요? "누가 무엇을 위해서 이런 무모한 전쟁을 시작했는가? 국익을 손상시킨 자는 누구인가?" 라는 엄중한 책임추궁이 이루어졌을 것입니다. 통치기구가 제대로 기능하고, 국민 생활이 일상적으로 이루어지고, 언론이 아직 살아 있다면 전쟁지도부에게 책임을 물었을 것입니다. 그리고 극동국제군사재판에서 피고석에 세워진 사람의 상당수는 일본인이 직접 재판했을 것입니다.

 그러나 전쟁이 제어불능 상태가 되고, 통치기구가 와해되고, 사람들이 전쟁을 피해 우왕좌왕 도망가고, 정치적 의견을 논할 기회나 대화의 기회도 사라지면 사태가 너무나 파국적이기 때문에 일본인이 직접 전쟁 책임을 추궁할 기회는 사라집니다. 사람들은 일단 파국적 현실에 적응해 살아남기 위해서 전력을 다할 수밖에 없습니다. 그리고 국가의 운명이 결정된 이상, '자신의 의견은 의견, 논의는 논의'로서 한쪽으로 치워둔 채, 살아남은 사람끼리 손을 맞잡고 국가를 재건하는 사업에 착수하는 것이 '부과된 종래의 관습이며 또한 존중받는 방식'이 됩니다. 일억총참회一億總懺悔'는 그런 의미입니다. 지금의 파국은 천재지변이니 그런 아수라장에서 "누구의 책임이다"라는 천박한 이야기는 하지 말라는 뜻입니다.

 직접 패전 처리를 할 수 있는 여력이 있을 때는(책임을 추궁당하기 때문에) 아무것도 하지 않습니다. 그저 천재지변과 같은 파국이 찾아올 때까지(또는 '가미카제神風'의 도움으로 지도부의 무위무책에도 불구하고 일본군의 승리가 찾아올 때까지) 손을 쓰지 않고 기다립니다. 이러한 병적인 심리기제는 태평양전쟁 패전 무렵에만 나타난 특징이 아닙니다. 지금도 여전합니다. 그대로 일본 사화에 남아 있습니다. 실제로 지금도 일본의 지도층은 인구 감소가 어떤 '최악의 사태'를 초해라며, 그 피해를 최소화하기 위해서 지금 어떤 일을 시작해야 하는지 아무것도 생각하고 있지 않습니다. 비관적인 미래를 생각하면 사고가 정지해버리기 때문입니다. 자신이 처한 상황은 알고 있습니다. 그보다는 근거 없는 이상행복감에 가까운 망상에 빠져 있는 편이 '오히려 낫다'고 판단할 뿐입니다.

 낙관적인 상태가 유지되는 동안에는 통계자료를 유리하게 해석하거나, 위험 가능성을 낮게 예측하거나, 거짓말을 하거나, 다른 사람에게 죄를 덮어씌우는 '지혜'가 잘 돌아가기 때문입니다. 그렇게 적당한 거짓말이나 변명이 생각나는 한, 얼마 동안 자기 자신은 지위를 보전할 수 있고 이익도 확보할 수 있습니다. 그러나 비관적인 미래를 예측하고 입에 담는 순간, 그때까지의 실패와 부작위에 대한 책임을 추궁당하고 필요한 대책을 세울 것을 강요당합니다. 그런 책임을 지고 싶지 않고 그런 일을 떠맡고 싶지도 않기 때문에 비관적인 일은 생각하지 않습니다. 빨리 실패를 인정하고 사회 전체에 피해가 미치지 않도록 노력한 인가에게 오히려 책임을 추궁합니다. 집중적으로 비난 공격을 쏟아 붓고, 사죄와 해명을 요구하고, '확실하게 책임'을 지라며 위협합니다. 이것이 일본 사회의 방식입니다. 사회 전체를 위해서는 '좋은 일'을 했지만 개인에게는 전혀 '좋은 일'이 아닙니다. 그렇다면 실패는 인정하지 말고, "모두 최상의 상태입니다"라고 계속 거짓말을 하면서 책임을 뒤로 미루는 편이 '오히려 낫다'고 생각하게 됩니다.

 이런 현상은 거품경제 시절의 은행경영에서도 볼 수 있습니다. 은행경영자는 불량채권의 위험성을 알고 있었습니다. 그러나 본인의 재임 기간에 사건화되어 책임을 추궁당하는 것을 원하지 않았습니다. 그들은 문제를 뒤로 미루고 퇴직금 전액을 받아 도망쳐 은행이 파산할 때까지 문제를 방치했습니다. 빨리 실패를 인정하고 피해를 최소화하는 것보다 실패를 인정하지 않고 피해를 파국적으로 만드는 편이 '자신의 이익을 확보하는 데 유리'하다고 판단한 것입니다.

 모든 사화에는 이렇게 이기적인 인간이 어느 정도 존재합니다. 이런 인간은 결코 사라지지 않습니다. 그러나 '그런 인간'들이 통치기구의 요직을 차지하는 체계는 분명히 병들어 있습니다. 그런 의미에서 현대 일본 사회는 심각하게 병들어 있습니다.

 

p53

 재미있는 사실은 살아남아 현대인의 선조가 된 것은 호모사피엔스 여성과 네안데르탈인 남성의 혼혈이라는 점이다. 호모사피엔스 남성과 네안데르텔인 여성의 혼혈 계열과 순수혈통을 유지한 호포사피엔스 집단(만약 실제로 존재햇다면)은 멸종되었다. 이런 사실을 알 수 있는 이유는 현대인에게 당시 네안데르탈인의 미토콘드리아 DNA 흔적이 발견되지 않기 때문이다. 미토콘드리아 DNA는 어머니에게서만 물려받는다. 현대인의 모계를 거슬러 올라가도 네안데르탈인 여성은 나오지 않는다. 모계를 거슬러 올라가면 모두 호모사피엔스 여성에게 귀착된다. 한편 핵 DNA에 네안데르탈인에서 물려받은 인자가 들어 있는 것은 우리 조상에게 네안데르탈인 남성과 호모사피엔스 여성의 혼혈이 존재하기 때문이다. 갓난아이는 어머니가 소속된 집단에서 자랐을 것이다. 호포사피엔스 남성과 네안데르탈인 여성의 혼혈로 태어난 자손은 네안데르탈인의 멸망과 운명을 함께했음에 틀림없다.

 

p68

 자본주의는 비용과 이익의 차이를 극대화하는 방향으로 움직인다. 노동자의 임금은 가장 중요한 비용이기 때문에 자본가는 가능한 이것을 싸게 억제하기 위해서 노력을 기울였다. 그렇게 얻은 이윤은 자본가의 부로 축적된다. 결과적으로 자본가와 노동자의 빈부격차가 벌어지기 때문에, 정치권력이 개입하지 않는 한 소수의 자산가와 대다수의 가난뱅이라는 사회구조가 진행되는 것은 피할 수 없다.

 대부분의 경우, 정치권력은 자본가와 결탁해 이러한 과정을 추진하는 정치제도를 정비하는 데 노력을 쏟았다. 그러나 국민국가가 성립되고 민주주의적 정치제도가 조금이라도 갖춰진 국가에서는 선거권을 가진 대다수의 국민이 노동자이기 때문에 자본가의 이윤을 극대화하는 체계는 상당한 통제를 받게 된다. 당연히 자본가는 국민국가의 속박에서 벗어나기를 원한다. 구체적인 내용을 생략하고 간단히 요약하면 그 결과 세계자본주의가 등장하게 되었다. 국가체계의 방해를 받지 않고 자유롭게 자본을 움직여 자원과 노동자를 최저 비용으로 쓰고 싶었기 때문이다. 

 그런데 세계자본주의가 성립되기 위해서는 인구와 자원이 계속 증가해야 한다. 자원 중에서도 가장 중요한 것은 에너지이다. 국경에 얽매이지 않고 노동력과 물자를 자유롭게 움직이기 위해서는 풍족한 에너지가 필요하다. 농업도 어업도 제조업도 에너지 없이는 성립될 수 없다. 그렇기 때문에 세계자본주의는 에너지 확보에 혈안이 되어 있다.

 그렇다면 인구는 어떨까? 싼 노동력을 손에 넣기 위해서는 노동인구가 많을수록 좋다. 현재 대부분의 선진국 정권은 세계자본주의의 앞잡이가 되어 세계자본주의에게 봉사하는 일만 생각하고 있다. 일본에서도 아베 정권이 "저출생이 진행되면 일본은 소멸한다. 원자력발전을 중단하면 에너지 부족으로 생활이 불가능해진다"고 국민을 협박하며 세계자본주의의 연명을 꾀하고 있다. 일본에서는 국가 또는 국민을 지킨다는 표어 아래 실은 국민과 함께 일본이라는 나라를 세계자본주의에 팔아넘기기 위한 정교한 속임수가 진행되고 있다.

 

p94 순수 기계화 경제와 제2의 대분기

 제4차 산업혁명은 벽에 부딪힌 성숙 단계 국가의 경제 성장을 해결해줄지 모른다. 범용 인공지능을 비롯해 인공지능 · 로봇 등의 기계가 인간 노동의 대부분을 대체하면 <도표 4> (인공지능과 로봇에 기술을 입력하여 기계를 운용하여 생산하고 이 생산품이 소비되는 공급 체인, 즉 인간을 인공지능과 로봇이 대체) 와 같은 생산 구조가 되기 때문이다.

 투입요소는 인공지능 · 로봇을 포함한 기계뿐이며 노동은 더 이상 필요하지 않다. 프랑스의 경제학자 토마 피케티는 이러한 경제를 '순수 로봇 경제'라고 불렀지만 여기에서는 '순수 기계화 경제'라고 부르도록 하겠다.

 순수 기계화 경제에서는 기계만 직접 생산 활동에 참여한다. 그러나 인간의 역할이 완전히 사라지는 것은 아니다. 새로운 상품과 기술의 개발, 생산 활동의 경영관리 등은 여전히 인간의 일로 남아 있다.

 

 순수 기계화 경제에 대한 수리모형(AK모형)을 만들어 분석해보면 성장률 자체가 매년 상승한다는 결과를 얻을 수 있다. 기계화 경제의 정상定常상태에서는 매년 거의 일정한 비율로 1인당 소득이 성장하지만, 순수 기계화 경제에서는 성장률 자체가 매년 성장한다.

 따라서 만약 범용인공지능을 도입한 국가와 그렇지 않은 국가가 있다면 <도표 5>(인공지능 도입국가의 경제 성장률이 그렇지 않은 국가보다 점점 높아지게 되는)에 나타난 것처럼 경제 성장률에 차이가 발생하게 된다. 

 4차 산업혁명기에 나타나는 이러한 분기를 '제2차 대분기'라고 부르겠다. 

 

p97 제4차 산업혁명에서 뒤처지는 위험성

 최초의 대분기에서 일본은 늦게나마 상승노선을 걸을 수 있었다. 덕분에 20세기를 풍요롭게 생활할 수 있었다. 미래에 일어날 수 있는 제2의 대분기에서도 상승노선을 걸어야 하지 않을까? 제4차 산업혁명이 일어났을 때, 앞서 나가는 다른 국가들에게 선두를 뺏긴다면 경제적 수탈의 대상이 될 가능성도 있다.

 제3차 산업혁명에서 일본은 열세에 몰렸다. 그래서 일본인은 현재 구글이나 MS, 애플, 아마존, 페이스북 등의 미국 기업의 서비스를 이용하고 있으며 많은 수익이 미국 기업으로 흘러들어가고 있다. 그러나 제4차 산업혁명에서는 더 많은 수익을 빼앗길 가능성이 있다. 공업과 서비스업 등의 모든 산업에서 인공지능 · 로봇이 이용될 것이기 때문이다.

 

 경제적 수탈보다 더 위험한 것은 군사력의 차이가 벌어지는 일이다. 일본의 제2의 대분기에서 정체노선을 걷고 주변 국가들은 상승노선을 걷게 될 경우, 결과적으로 군사력에서도 현격한 차이가 발생한다. 그렇게 되면 일본의 국토와 국민을 방어하는 일은 대단히 어려워질 것이다.

 

 

 제4차 산업혁명에서는 지력이 관건이다. 

 

 딥마인드Deep Mind는 원래 영국 회사였지만 2014년에 구글이 4억 달러가 넘는 가격에 사들였다. 

 

2014년 당시 딥마인드의 사원은 100명도 되지 않았다. 보유한 공장이나 자산도 없었다. 창업자 데미스 하사비스Demis Hassabis를 비롯한 사원들의 두뇌에 4억 달러 이상의 가치가 있었던 것이다.

 

p126

 첫째, ①이 ② 보다 작아진 국가는 일본만이 아니다. - ① 2010년 시점에서 살고 있던 10~14세 인구, ② 2010년 시점에서 살고 있던 60~64세 인구, 새로 태어나는 인구가 고령화 인구에 비해 적다는 것을 의미한다. - 다음에 제시하는 통계수치는 국제연합 인구부의 홈페이지에 공개된 세계 각국의 2015년 인구추계와 향후의 예측(중위 추계, 이민을 받는 사례)에 준거해 조사했다. 세계 최대의 인구를 거느린 중국도 몇 년 전부터 동일한 상태에 돌입했다. 한국과 대만도 마찬가지다. 미국, 유럽, 동남아시아도 동북아시아 정도로 급속한 전개는 아니지만 저출생 경향이 시작되고 있다. 여전히 명확하게  ①이 ② 보다 큰 국가는 인도에서 중근동, 아프리카에 걸친 지역뿐이다. 그러나 그들도 생활 수준이 향상되면 유럽이나 동북아시아처럼 변해갈 것이다.

 

 참고로 2020년 이후에는 세계적으로 다음과 같은 일들이 일어날 것이다. 일본은 세계 최초로 고령자 절대인구수의 증가가 멈춘다(수도권은 유일하게 계속 증가하지만 지방은 일제히 감소하기 시작한다). 이에 비해 구미 국가들은 여전히 증가하고 중국, 한국, 대만은 구미 국가들의 규모를 크게 상회하는 급증이 계속된다. 한편 생산연령인구의 경우 일본은 세계 다른 국가들보다 20년 이상 일찍 1995년에 정점을 맞이했지만, 중국, 한국, 대만도 2015년을 정점으로 감소로 전환되고, 구미 국가들도 증가가 거의 정지한다. 일본만 상황이 나쁘다는 말은 이제 옛날이야기가 될 것이다. 그러나 '공기'가 사실과 연동되어 개선될지는 다른 차원의 문제다.

 세상에는 "이민을 받아들이면 아이가 늘어날 것이다"라는 공기가 존재한다. 그러나 현실은 대량의 이민을 받아들이고 있는 미국과 싱가포르에서도 이미 어린이의 절대인구수가 감소하기 시작했다. 육아에 돈이 드는 출생률이 낮은 지역으로 이민을 온 이민자는 그곳의 선주자와 마찬가지로 아이를 낳지 않게 되는 것이다. 도쿄에서 저출생이 진행되는 것과 같은 이유다. 그러나 왠지 "이민자는 아무리 어려운 조건에서도 아이를 낳아 수가 늘어난다"는 공기 같은 선입견이 존재한다. 우리는 현실을 직시하고 그러한 그릇된 견해를 고치도록 주의해야 한다.

 세계는 자동적인 저출생, 그 결과로 만들어진 인류사회의 지속 가능성을 향상시키는 방향으로 돌아서고 있다. 승자는 지구환경과 그것에 뿌리를 둔 미래 세대, 패자는 인구 증가에 의존하며 불로소득을 늘려온 금융투자가가 될 것이다.

 

p129

 이번에는 2015년 국세조사의 실제 수치를 살펴보자. 먼저 일본 전체의 차세대 재생력은 68퍼센트다(각 지역에 1~2퍼센트 미만으로 존재하는 연령미회답자는 연령회답자의 비율에 따라 나누었다). 다시 말해 일본에서는 대략 신세대의 3분의 2 정도만 아이가 태어난다. 매년 출생수는 현재 약 100만 명이다. 신세대가 30퍼센트 감소하는 30년 뒤에도 이러한 출생 상황이 계속된다고 가정하면, 출생수는 70만 명 미만이 된다는 계산이다. 대단히 대략적인 계산이지만, 70만 명의 출생자의 평균수명을 80년으로 가정하면 70만 명 X 80년 = 5,600만 명. 다시 말해 출생자수 70만 명/년이라는 것은 일본의 총 인구가 6천만 명 이하로 줄어드는 수준이다. 참고로 단카이 주니어가 태어난 1970년대 전반에는 매년 200만 명의 신생아가 태어났다. 현재 상태는 딱 그 절반, 30년 이후에는 3분의 1이라는 계산이 된다.

 

 <도표 4>에는 각 행정구역의 차세대 재생력을 나타냈다. 오키나와의 93퍼센트를 필두로 명확히 서쪽지방이 높고 동쪽지방이 낮은 모습을 보인다.

 도표에는 들어가 있지 않지만 대도시 가운데 가장 상황이 나은 곳은 히로시마시(75퍼센트)로 기타큐슈시가 뒤를 잇고 있다. 그 밖의 도시는 60퍼센트 전후의 수준으로 정체되어 있다. 도쿄특별구는 52퍼센트다. 일본 전국에서 모여든 젊은 세대가 자신들의 절반 정도 다음 세대를 남기지 않는 진정한 블랙홀 상태다.

 그러나 도쿄가 망해도 일본이 망하는 것은 아니다. 차세대 재생력이 100퍼센트가 넘는 지역자치단체, 다시 말해 신세대의 인구수와 비슷하거나 또는 그 이상으로 아이들이 태어나는 지역이 일본 전국에 오키나와현을 중심으로 40곳이나 있다. 차세대 재생력이 90퍼센트라도 당장 문제는 발생하지 않는다(24세 이하와 40세 이상도 출산하기 때문에 합계특수출생률은 2에 가깝다). 90퍼센트까지 기준을 내리면 110곳의 지역이 해당된다. 그런데 그 상당수는 멀리 떨어진 외딴섬이나 산간과소지역이다. 과소지역은 아이들이 적다는 안이한 선입견이 있다. 물론 그런 과소지역도 많이 있지만, 한편으로는 아이를 소중히 여기는, 다시 말해 아이를 키우는 젊은 세대를 소중히 여기는 과소지역도 분명히 존재한다.

 똑같은 일본인이 만들어가는 현대 일본 사회 속에서 이렇게 큰 차이가 발생하고 있다. 이것이 의미하는 바는 무엇일까? 물론 일본인의 DNA에 어떤 변화가 일어나고 있다는 이야기를 하려는 것은 아니다. 중요한 것은 생활방식과 생활환경의 변화다. 생활환경만 바로잡으면 아이는 다시 늘어난다. 왜냐하면 DNA는 원래 그렇게 되어 있기 때문이다. 이 'DNA 본래의 잠재력'을 완전히 무시하고 있기 때문에 인구 감소를 불필요하게 비관적으로 생각하는 착각에 빠지는 것이다.

 생활환경의 개선이라고는 했지만, 오키나와처럼 아이들이 많이 태어나고 있는 지역도 인터넷이 보급되어 있고 24시간 영업점도 많다. 모든 변화가 나쁜 것은 아니다. 종종 오해를 받는 부분인데 "여자는 결혼해야지"라는 사회적 압박 정도의 경우, 아키타현을 필두로 전통이 강하게 남아 있다고 여겨지는 동북지방은 출생률이 낮고, 결혼에 대한 압박이 적은 오키나와는 수치가 높다. 이런 사실에서도 추론할 수 있듯이 사회적 압박은 관련이 없기는커녕 오히려 역효과를 내고 있다. 고쳐야 할 부분만 개선해나가면 자유와 인권도 완전히 지키면서 다음 세대가 성장할 환경을 부활시킬 수 있다.

 그렇다면 어떻게 해야 차세대를 재생할 수 있을까? 한마디로 말하면 해결책은 원하는 사람이 원하는 만큼 아이를 가질 수 있는 사회구조를 만드는 것이다. 아이를 낳지 않아도 상관없다. 남의 아이를 자기 아이로 키우는 부모가 늘어나도 차세대 재생력은 올라간다. "모든 여성이 아이를 두 명씩 낳는다"가 아니라 세 명이라도 네 명이라도 원하는 만큼 아이를 낳아 기르는 부모가 늘어나는 것이 평균 출생률을 끌어올린다. 그러기 위해서는 많은 아이들을 키울 때 생기는 부담을 경감시켜주는 제도가 필요하다. 남서지역 섬들을 필두로 서일본에 많이 분포되어 있는 차세대 재생력이 높은 자치단체에는 다자녀가정을 성심껏 도와주는 사회적 기풍이 남아있다. 아무래도 도시지역과 동일본은 이와 같은 서로 돕는 전통이 상대적으로 줄어들었다고 추론된다.

 도쿄의 차세대 재생력을 높이기 위한 노력은 당연히 이루어져야 한다. 그러나 앞으로 수십 년 동안 후기고령자의 절대인구수가 계속 증가할 것이라는 사실을 고려하면 대폭적인 개선은 기대하기 어렵다. 인력도 예산도 잉여토지도 전부 고령자 의료복지 쪽으로 돌리고 있는데다가, 처음부터 식비와 집세와 교육비가 너무 비싸서 아이를 한 명 더 낳는 비용이 막대하기 때문이다.

 유요한 방법은 원하는 만큼 아이를 많이 낳을 수 있는, 생활비가 저렴하고 서로 돕는 기풍이 남아 있는 지방으로 아이를 원하는 강한 의지를 가진 젊은이들을 많이 보내는 것이다. 이것만이 일본의 소멸을 가능한 뒤로 미룰 수 있으며, 언젠가는 역전의 인구 증가를 가능하게 만들 수 있는 비책이다.

 

p143

 인구 감소는 문제가 아니라 경제발전과 근대화의 귀결로 이해해야 한다.

 

p147

 결혼 연령의 상승과 태평양전쟁 이후에 전개된 가족 형태의 변화(권위주의적 대가족에서 핵가족으로) 및 시장화의 진전 사이에는 밀접한 상관관계가 있다는 것이 나의 가설이다. 구체적으로 말하면 시장화의 진전이야말로 가족 형태의 변화를 초해란 요인이었다. 시장화와 핵가족화는 결혼해서 가족을 만드는 것을 당연하게 여기던 일본인의 가족관을 바꿔놓았다. 돈만 있으면 가족에게 의지하지 않아도 자유롭게 살 수 있는 시대가 된 것이다. 가족은 사람이 살아가는 데 필요한 안전보장이었다. 그러나 시장화의 진전으로 많은 사람들은 돈이야말로 안전보장이라고 생각하게 되었다.

 반대로 말하면 시장화의 진전을 통해서 권위주의와 속박에서 벗어나 자유로워진 개인이 활약할 수 있는 공간이 확보되었다. 시장화는 일본 민주주의의 진전을 후원한 주역이었다고 할 수 있다. 그런 의미에서 만혼화는 자유와 발전의 대가라고 볼 수 있다.

 시장화는 무연화無緣化이기도 하다. 이는 유연有緣 공동체의 윤리 개념이 미치지 않는 공간이 확장된다는 뜻이다. 사람들이 결혼을 기패해서 결혼이 늦어지는 것이 아니다. 가족을 포함한 유연공동체에서 자청해서 도망가고 있는 것이가. 그 결과 유연공동체인 일본의 권위주의적 직계가족의 해체가 진행되었다.

 또 다른 이유는 소비사회의 진전으로 결혼의 득실을 계산하는 윤리가 정착했다는 점이다. 이것이 글의 주제와 관련이 있다. 이해타산만 생각하면 주부는 타산이 맞지 않는 직업이라고 생각하는 젊은 사람들이 늘고 있다. 이해타산만 따지면 결혼해서 아이를 낳아 학비와 식비 지출이 늘어나는 것은 수지가 맞지 않을지도 모른다.

 그러나 이유가 어떻든 결혼 연령의 상승은 태평양전쟁 이후에 전개된 발전(무연화 · 시장화)의 귀결이다. 나는 결혼 연령 사승에 대한 대책으로 일본의 권위주의적 직계가족으로 돌아가라고 주장할 생각은 없다. 설령 그럴 생각이 있어도 그것은 불가능한 논의다.

 하지만 결혼은 수지 타산이 맞지 않는 '주부'라는 직업을 선택하는 것이라는 이해타산적 윤리는 바꿀 수도 있다.

 

 

저출생 대책

 

 만약 만혼화에서 조혼화로 방향을 전환하기 어렵다면 가능한 저출생 대책 정책은 하나밖에 없다. 결혼하지 않아도 아이를 낳을 수 있는 환경을 만드는 것이다.

 

 저출생을 둘러싼 상황을 저출산이 개선되지 않는 일본과 한국, 어느 정도 제어에 성공한 유럽을 비교해 살펴보면 현저한 차이점을 발견하게 된다. 그것은 바로 혼외자녀의 비율이다. 프랑스와 스웨덴의 혼외자녀 비율은 50퍼센트가 넘는다. 유럽 국가들 중에서 일본과 비슷한 가족 형태를 가지고 있다는 독일의 경우도 35퍼센트다.

 이에 비해 일본의 혼외자녀 비율은 아예 자릿수가 다르다. 겨우 2.3퍼센트에 불과하다. 한국은 더 낮은 1.9퍼센트다. 다시 말해 유교적 윤리에 사로잡힌 아시아에서는 법률혼을 하지 않고 아이를 낳는 일이 거의 금기와 같은 취급을 받고 있다. 

 일본의 저출생 대책은 혼인장려와 육아지원을 중심으로 이루어진다. 프랑스와 스웨덴의 저출생 대책은 일본과 한국과는 반대 방향으로 진행되었따. 법률혼으로 태어난 아이가 아니어도 동등한 법적보호와 사회적 신용을 부여받을 수 있도록 했다. 혼인장려와 육아지원과 같은 개인생활 분야에는 정치권력이 개입해서는 안된다고 생각하기 때문이다. 저출생 문제를 해결하는 열쇠는 오히려 인권확대와 생활권 확보 쪽에 있는 것이다.

 그렇다고 유럽 선진국이 혼외자녀의 출산을 장려한다는 의미는 아니다. 유럽에서는 법률혼으로 묶이지 않은 새로운 가족공동체가 현실화되고 있다. 법률혼의 보호를 받지 못하는 가족의 권리를 법적으로 인정하고 사회에 그들의 자리를 마련하려고 하는 것이다.

 

 

 프랑스 다음으로 혼외자녀 비율이 높은 스웨덴에서는 1987년 시점에서 동거인을 보호하는 동거법Sambolagen이 성립되었다. 프랑스와 스웨덴의 경우 모두 결혼 연령이 내려가서 인구 감소가 멈춘 것이 아니다. 프랑스의 여성 초혼 연령은 30세가 넘으며 계속 떨어지지 않고 있다. 스웨덴도 마찬가지다. 다시 말해 그들은 외적인 강제 또는 촉진을 통해서 결혼 연령을 끌어내리는 일은 불가능에 가깝고, 정치권력이 할 일도 아니라고 생각한다.

 

 혼외자녀 비율이 50퍼센트가 넘어가면 출생률과 결혼의 상관관계는 지극히 희박해진다. 그러나 일본과 한국처럼 혼외자녀 비율이 대단히 낮다면 출생률은 평균 결혼 연령과 강한 상관관계를 갖게 된다.

 일본의 경우, 가족형태는 유교적 가치관이 농후한 권위주의적 대가족이 붕괴되고 핵가족화되었지만, 혼외자녀를 낳는 것을 금기시하는 가치관만은 계속 남아 있다. 이것은 근본적으로 동성애자에 대한 차별이나 부부별성夫婦別姓에 대한 뿌리 깊은 거부감과 비슷한 문제다.

 

 일본과 한국에서 인구 감소에 제동을 걸거나 또는 정상화된 사회로 연착륙하기 위해서는 무엇이 필요할까? 나는 그것이 육아지원이나 육아급부금처럼 대중요법적인 대처(이런 대처를 추진하는 자체는 두 팔 벌려 찬성하지만 그것은 다른 이유 때문이다)는 아니라고 생각한다. 사회 구조(가족구성)와 그것을 뒷받침하는 윤리의 변화가 바로 그 열쇠다.

 그렇다면 사회 구조와 윤리의 변화를 추진하는 원동력은 무엇일까? 나는 저출생이라는 현상 그 자체가 사회 구조를 바꾸고 윤리를 변화시킬 것이라고 예측하고 있다. 하지만 그렇다고 아무것도 하지 않고 그저 자연에 맡겨둬서는 안 된다. 왜냐하면 저출생과 고령화는 생산성의 저하를 가져오기 때문에 이해타산에 지배당하고 있는 사람들이 효율화를 위해서 사회를 분석해 비효율적인 부분을 잘라버림으로써 결과적으로 비관용적인 격차사회를 만들어낼 가능성을 배제할 수 없기 때문이다. 그리고 그런 움직임은 이미 시작되고 있다.

 

p154

 현대 사회의 문제는 원래 유통되는 것이 가장 중요했던 돈이라는 부富가 한 곳으로 집중되어, 국가에 의한 분배기능이 작동하지 않게 된 것이다. 전미 하위 50퍼센트의 총 자산이 최고소득자 세 명의 합계자산에 미치지 못하는 상황은 확실히 정상이라고 할 수 없다. 전계게의 하위 50퍼센트의 자산이 최고소득자 여덟 명의 자산과 거의 비슷하다는 상황 역시 화폐경제의 혹독하고 무자비한 폭력성을 나타내고 있다. 세계 화폐경제의 가장 큰 특징은 누구도 그것을 통제할 수 없다는 점이다.

 화폐경제의 윤리와 교환경제의 윤리가 부의 편재偏在(쏠림 현상)를 촉진하고, 사회를 분단시키고, 사람을 고립시키는 벡터를 갖는다면, 부를 편재遍在(널리 퍼짐)하게 만들고, 사회를 포섭하고, 사람들을 연결하는 벡터로 대치시킬 필요가 있을 것이다. 과연 어떻게 해야 할까?

 물론 이에 대한 간단한 해답은 없지만 문제를 풀 열쇠라면 있다. 열쇠는 화폐경제 이전의 윤리다.

 마르셀 모스Marcel Mauss의 <증여론Essai sur le don>에 따르면 화폐경제 이전의 경제 윤리는 현재의 등가교환의 윤리와는 전혀 달랐다. 오히려 반대라고도 할 수 있다. 예를 들어 전체적인 급부체계를 채용하고 있는 문명화 이전의 부족사회에서는 다른 사람의 물건은 자신의 것이라는 윤리, 증여를 받으면 등가물로 답례를 주어서는 안 된다는 윤리가 일반적이었다. 오늘날에도 국가가 없는 로마족(집시)은 타인의 물건은 자신의 것이기도 하다는 인식을 공유하고 있다고 한다. 이누이트족은 등가교환적인 개념보다 잡은 사냥감을 함께 나누는 것이 당연하다고 생각한다. 그들의 세계에서는 사유제와 등가교환성이 만들어내는 윤리는 통용되지 않는다.

 

 주목해야 할 것은 이러한 화폐경제 이전의 전체적인 급부의 윤리가 현대 일본 사회에도 남아 있다는 점이다. 어쩌면 이렇게 '살아남은 윤리'가 미래 세계의 희망이 될지도 모른다.

 현대 사화에서는 통용되는 등가교환의 윤리는 예를 들어 "다른 사람의 물건을 훔쳐서는 안 된다" 또는 "빌린 것은 갚아야 한다" 등이다. 그러나 부모자식 관계나 절친한 친구 사이에서는 이러한 윤리가 채용되지 않은 채 답례 없는 증여가 빈번히 이루어지고 있다. 만약 피를 나눈 가족 사이에 등가교환의 윤리를 채용한다면 부모 자식 관계는 상당히 불편해질 것이다.

 부모는 자식에게 아무렇지 않게 생전증여를 한다. 심지어 부모가 자식을 무상으로 양육하는 것은 의무다. 현대인은 이러한 무상증여의 윤리를 등가교환의 윤리와 구분해서 사용하고 있다.

 부모자식과 형제라는 혈연가족이나 강한 동료의식으로 이루어진 공동체의 내부에서는 무상증여의 윤리가 일반적이고, 외부와의 교환에는 등가교환의 윤리를 사용한다. 실은 우리는 우리가 어째서 윤리를 구분해서 사용하고 있는지 이유를 잘 모르고 있다.

 

 

 있는 그대로 말하면 그것은 '관계'다. '빚'을 진 상태는 청산이 이루어지지 않은 상태이기에 청산될 때까지는 빌려준 사람과 빌린 사람은 관계가 유지된다는 의미다. 꺼꾸로 말하면 청산이 끝났다는 것은 관계가 끝났다는 것이다. 끊임없는 관계의 청산이야말로 자본주의의 원동력이다. 관계의 청산은 상품과 화폐의 거래이며, 이 거래를 늘려나가는 것이 경제적 성장이기 때문이다. 대차관계를 그대로 유지하는 것은 거래의 정지를 의미한다.

 

 

 공동체의 운영기준은 득실이 아니라 규칙이다. 규칙을 따르지 않는 인간은 배제되어 공동체 밖으로 추방당한다. 그렇게 쫓겨난 사람들이 살아갈 수 있는 유일한 장소가 시장市場이었다. 현대사회의 문제는 도피처였던 시장의 가치관이 유연有緣의 장소를 잠식해버렸다는 것이다. 오래된 규칙을 해체하며 합리적인 판단을 우선으로 여기는 사회를 만든다는 것은 근대화의 다른 이름이기도 하다. 그러나 이때의 합리성은 바로 금전합리성이다. 자연 속에서 살아가는 것을 최적화하는 합리성이 아니다. 금전합리성을 추구하면 결국 우리가 살고 있는 '장소' 그 자체를 훼손하게 될지도 모른다. 공해와 온난화는 그 결과물 가운데 하나일 것이다.

 

 시장화는 무연화와 거의 같은 뜻이다. 공동체 내부에는 시장이 생기지 않는다. 인간사회는 원래 공동체적이고 상호부조적이었다. 공동체적이라는 것은 이해타산이 아닌 다른 가치관에 의해서 운영된다는 뜻이다.

 무연의 세계의 유연의 장소를 만드는 것이 인구 감소 사회의 유일한 사회 설계일 것이다. 우선은 민영화되면서 파괴된 사회공통자본을 재생시킨다. 도시지역에 가족을 대체할 수 있는 공생장소를 만든다. 인류사적인 상호부조의 윤리를 다시 세운다.

 이것들이 이루어진다면 인구 감소 문제는 더 이상 문제가 아닐 것이다.

 

p174

 "경제가 성장하지 않는 국가는 빚을 갚을 수 없다"는 토마 피케티의 말과도 호응한다. 그렇다면 어째서 일부 정치가들은 '투자보다는 지출 삭감'으로 나랏빚을 갚을 수 있다고 생각할까?

 폴 크루그먼은 그것이 단순한 착각 때문이라고 말한다. 크루그먼은 "가정 형편이 어려울 때는 가계 씀씀이를 줄이듯이, 국가 경제가 침체에 빠졌을 때도 재정을 줄이는 것이 왕도"라고 일반인은 물론이고 지식인까지 맹목적으로 믿고 있다고 지적한다. "경제가 어려울 때 금융완화와 재정지출을 실시하면 고용이 창출되어 수요가 확대된다"는 것은 경제학적 기본 상식이다. 그러나 "쓰는 것보다 모은 것이 경제적으로 좋은 상태"라는 가계 씀씀이 감각으로 국가 재정을 생각하는 사람이 많기 때문에, 정치가는 설사 그 생각이 잘못됐다고 알고 있어도 지지를 얻기 위해서 그런 말을 꺼내는 경향이 있다는 것이다.

 또한 "재정의 균형을 맞춰서 나랏빚을 갚는다"라는 듣기 좋은 표현은 작은 정부를 지향하는 구실이 된다. 다시 말해 신자유주의(=작은 정부)를 추진하기 위한 그럴듯한 핑계다. 대부분의 영국 경제학자가 긴축재정은 경제 성장을 방해한다고 주장하고 있음에도 대기업의 지도자들은 정반대 입장을 취한다. 가능한 정부가 작아져서 시장의 일은 시장에서 마음대로 하게 내버려두기를 바라는 것이 대기업의 본심이기 때문이다. 긴축재정을 추진하는 보수당의 전통적 지지기반이 부유층과 대기업인 것은 우연이 아니다.

 이렇게 '왠지 도덕적으로 바람직하게 보이는 빚을 갚기 위한 정치'는 사실 신자유주의를 추진하는 데 가담하고 있다. "미래 세대를 위해서 빚을 남기지 않기"는 커녕 반대로 늘리고 있다는 모순된 결과를 낳고 있는 것이다.

 

p176

 1929년 월가의 대폭락이 불러일으킨 세계대공황을 접한 두 나라는 완전히 정반대의 경제정책을 실시했다. 독일의 바이마르 정부는 불황으로 세수가 감소하므로 재정균형을 지향해야 한다고 맹신하고 계속 재정지출을 삭감했다. 따라서 불황이 멈추지 않고 많은 실업자를 만들어냈다. 그런 상황에서 대규모 정부지출로 국민의 고용을 창출할 것을 약소하는 나치스가 등장해서 국민을 열광시켰다. 어째서인지 지금도 많은 사람이 하이퍼인플레이션이 나치스를 낳았다고 믿고 있지만, 실은 바이마르 정권이 지폐를 지나치게 많이 찍어내서 발생한 하이퍼인플레이션은 1920년대 중반쯤 진정되었다. 나치를 낳은 것은 디플레이션과 긴축재정이었다.

 한편 미국은 같은 시기에 금융정책과 재정지출로 경제를 확대시키는 뉴딜정책을 실시했다. 불황이라고 재정지출을 줄이지 않고, 반대로 대규모 공공투자를 통해서 국민의 고용을 창출하는 대담한 반 긴축적 정책을 취했다. 나치스의 경제정책과 뉴딜정책의 유사성은 세계적으로 논의되어 왔다. 다시 말해 독일의 바이마르 정권이 불황에 대응하는 경제정책에 실패했기 때문에 파시스트가 대두하게 된 것이다.

 

p188 1970년대의 반전

 

 그러나 유감스럽게도 성장 확대의 시대가 영원히 계속되는 일은 역사상 한 번도 일어나지 않았다. 미국에서는 베트남 전쟁(1960~1975)이 20세기 체계의 종언을 상징했고, 일본에서는 오사카 만국박람회(1970)가 종언의 지표가 되었다. 1970년을 경계로 다양한 사회적 지표가 반전되기 시작했다. 인구 증가 곡선이 반전되고, 저출생 · 고령화의 조짐이 나타나고, 제조업을 대신해 서비스업이 대두하고, 여성의 사회 진출이 시작되었다. 현대의 저성장 · 저출생 · 고령화 사회는 이미 1970년대에 조짐이 나타났던 것이다.

 그러나 미국과 일본은 다른 전개를 맞이했다. 미국에서 중후장대산업은 일찌감치 주역의 자리에서 내려와 조연이 되었다. 그러나 일본이라는 곳은 과거 시대를 선도한 주역을 언제까지나 대접해주는 미적지근한 곳이었다. 무사를 온존하는 풍토가 그래도 20세기가 되도록 잔존하고 있었다.

 일본의 건설한업은 1970년대 이후에도 조연으로 밀려나지 않았다. 경제의 주역이었던 그들은 정치와의 결탁을 통해서 70년대 이후에도 주역의 자리를 차지하고 있었다. 무사집단의 결속력과 집단주의는 강력한 득표장치로 기능하며 1970년대 이후의 일본 정치에서 주역의 자리를 지키고 있었다. 이러한 득표장치가 장기적으로 계속 가능하려면 건축공사를 끊임없이 발주해야만 한다. 이것이 1970년대 이후로 일본 정치의 숨겨진 목표가 되었다.

 건설을 위한 명목은 시대와 함께 변했다. 1970년대 이전에는 경제 성장과 주택공급이 명목이다. 1990년대 이후에는 복지, 환경, 안전, 안심이었다. 각각의 시대에 걸맞은 듣기 좋은 명목이 선택되었다. 그러나 득표 체계의 존속 자체가 목적이기 때문에 어찌 보면 명목은 무엇이 되어도 상관없다. 그 명목으로 무엇인가를 건설하는 행위가 정당화 될 수 있다면 무사는 행복할 뿐이다. 무사는 그렇게 성장과 확대의 시대가 종언된 1970년대 이후에도 에도시대의 무사가 정치와 결탁한 것돠 마찬가지로 시대의 정치와 성공적으로 공모하면서 사회 지도자라는 자리에 매달려 있었다.

 게다가 우연까지 무사의 셩명 연장을 도와주었다. 1995년 한신 대지진, 2011년 동일본대지진이라는 두 번의 대지진이 일본을 덮쳤다. 대지진 피해의 복구와 부흥이 국가 목표가 되면서 무사는 새로운 활약의 기회를 부여받았다. 게다가 2020년 도쿄올림픽까지 겹쳤다. 우연이 몇 번이나 무사의 편을 들고 있다.

 

 

p209

 선진국의 노숙자는 태어날 때부터 노숙자인 사람은 없다. 어떤 이유 때문에 사회에서 도중에 낙오된 사람들이 대부분이다. 물론 경제적인 이유가 큰 부분을 차지하지만, 경제적 이유만으로는 노숙자가 되지 않는다. 이유가 그것뿐이라면 생활보호를 받으면 된다. 어떤 정신적 이유가 더해져 사람들은 세상을 등지고 노숙자가 된다.

 그런 사람들이 예술이나 운동을 접하고 1천 명 가운데 세 명이나 다섯 명이라도 살아갈 기력과 노동의욕을 되찾는다면, 이것은 대단히 저렴한 노숙자 대책이다. 무료급식만으로는 당장의 목숨을 구할 수는 있어도 발본적인 문제 해결은 되지 않는다. 노숙자를 만들어내는 원인의 하나가 인간 정신적인 측면에 있는 이상, 그것을 개선하지 않으면 영구적인 해결이 될 수 없다.

 노숙자 프로젝트는 내 주변의 문제로 받아들이기 어려울 수도 있지만, 예를 들어 다음과 같은 사례도 있다.

 내가 경영하는 고마바 아고라극장은 몇 년 전부터 고용보험 수급자에게 대폭적인 할인을 실시하고 있다. 실은 이것도 유럽의 모든 극장과 미술관에서 당연히 시행되고 있는 정책이다. 학생 할인과 장애인 할인이 있는 것과 마찬가지로 '실업자 할인'이 존재한다. 

 하지만 일본에서는 지금까지 이와는 반대의 정책을 실시하고 있었던 것이 아닐까? 고용보험 수급자가 평일 낮에 극장이나 영화관을 찾으면 구직활동을 게을리 하고 있다는 이유로 고용보험 지급을 중단해 버리는 정책. 또는 생활보호세대의 구성원이 극장에 가면 뒤에서 손가락질을 당하는 사회 분위기.

 

p212

 그렇기에 우리는 사고방식을 바꿔나가야 한다. 실업 중인 사람이 평일 낮에 영화관이나 극장에 찾아주면 "실업 중인데도 극장을 찾아줘서 고마워요. 사회와 관계를 맺고 있어서 고마워요. 그렇게 하는 편이 최종적으로 행정과 사회의 비용도 위험요소도 경감되니까요"라고 말이다. 또한 생활보호세대가 콘서트홀에 오면 "생활이 어려운데도 음악을 들으러 와줘서 고마워요. 집에 틀어박혀 있지 않아서 고마워요"라고 생각하는 사회를 만드는 편이 최종적으로 사회전체의 부담이 경감된다.

 이러한 사고방식을 '문화를 통한 사회포섭'이라고 부른다.

 일본은 예로부터 지연과 혈연이 강한 사회였다. 그러나 그러한 사회체계는 태평양전쟁 이후에 붕괴되었고 기업 사회가 그것을 대체했다. 사택에 살고, 사원운동회에 참가하고, 사원여행을 즐기고, 기업연금의 보장을 받으면서 사람들은 일생을 마친다고 믿었다. 그러나 1990년대 이후에 세계화가 진행되면서 기업은 이제 노동자를 지킬 필요가 없어졌다.

 기업사회 또는 그에 대한 믿음은 붕괴되었다. 뒤돌아보면 옛날의 좋았던 지연 · 혈연형 사회(라는 것도 역시 환상)도 존재하지 않았다. 이것이 한때의 유행어였던 '무연사회'의 정체다.

 게다가 일본에는 마지막 안전망인 종교도 없다. 유럽의 노숙자는 정말 힘들 때는 교회를 찾을 수 있지만 일본에는 그런 종교조차 존재하지 않는다. 한마디로 일본은 세계 선진국 중에서 가장 인간이 고립되기 쉬운 사회가 되어버렸다.

 

 

p229

 애초에 지금의 먹거리 가격이 적당하다고 할 수 있을까?

 먹거리의 생산 현장에서는 1차 산업으로는 먹고 살 수 없다는 이유로 농부와 어부가 점점 줄고 있다. 먹거리를 만드는 사람이 먹고 살 수 없다니, 정말 이상한 이야기다. 식의 세계화가 진행되면서 싼 가격을 강요당하자, 생산자가 충분한 이익을 얻지 못하는 상태가 오래 이어졌다. 먹거리 가격이 내려가면 소비자에게는 기쁜 일임에 틀림없다. 그러나 생산자가 계속 줄어든다면 결국 일부 부유층만이 일본 국내산을 아이들에게 먹일 수 있게 될 것이다.

 실제로 먹거리 가격이 지나치게 내려가면 국민의 생명과 건강도 위협받게 된다. 끊이지 않는 식품 위조 문제의 근원에는 1엔이라도 저렴한 음식을 선택하는 소비 행동이 생산과정이 보이지 않는 먹거리의 대량 제조를 초래한다는 부분도 부정할 수 없다. 2007년 식품가공회사 미트호프의 가공육 위장 사건이 세상에 알려졌을 때, 회사 사장이 기자회견에서 "반액 할인을 좋아하는 소비자에게도 문제가 있다", "싼 냉동식품을 좋다고 구매하는 소비자도 나쁘다"고 말해 세간으로부터 집중 공격을 당했다,

 확실히 위조는 나쁜 일이고 비판받아 마땅하다. 그러나 미트호프 사장의 발언은 우리가 먹거리를 선택할 때 '저렴함'을 판단기준으로 삼은 것이 생산과정의 블랙박스화를 초래했음을 여실히 보여주었다. 먹거리의 안전을 위한 비용을 소비자가 이해하지 못하면 식품 위조 문제는 반복될 것이다.

 2017년 구마모토에서 만난 여의사는 병원을 찾는 환자를 줄이기 위해서 채소 소믈리에 자격을 취득했다고 말했다. 현대인은 평소 식생활을 신경 쓰지 않고, 안전을 위한 돈도 쓰지 않는다. 그러다 어느 순간 병에 걸려 거액을 의료비로 쓰다가 결국 병상에 누워 비참한 최후를 맞이하는 사람도 많다. 이왕 같은 돈을 쓴다면 부정적 비용이 아니라 안전한 먹거리를 구매하는 긍정적 비용을 선택해 건강 수명을 늘리는 것이 좋지 않을까? 우리 자신의 소비 행동을 바꾸는 것은 백세시대에 걸맞은 저비용의 의식동원醫食同源 사회 만들기로 이어진다.

 

p238

 내가 태어나기기 얼마 전인 1970년 1,035만 명이었던 농업종사자는 2016년에 192만 명으로 줄어들었다. 

(참고 대한민국 현황 http://www.hani.co.kr/arti/economy/economy_general/741226.html)

 

192만 명 가운데 65세 이상의 고령자가 125만 명, 39세 이하는 겨우 12만 명 뿐이다. 또한 연령별로 살펴봤을 때, 이농비용이 가장 높은 연령은 39세 이하다.

 내가 현의원으로 재직하던 때부터 이러한 감소 현상은 계속되고 있다. 이런 수치가 눈앞에 제시하는 현실을 현장에서 보고 들으면서, 지금까지 먹거리의 생산에 관한 문제를 남의 일처럼 생각하던 자신을 깨달았다. 인간은 먹지 않으면 살알갈 수 없다. 다시 말해 모든 국민은 식생활 문제의 당사자이지만, 1차 생산에는 전혀 관심이 없었다.

 먹거리가 없어져 곤란한 쪽이 소비자라면, 생산자 혼자 머리를 싸매고 후계자 부족 문제를 고민하는 것이 아니라 소비자도 당사자라는 의식을 가질 필요가 있지 않을까? 가격을 판단 기준으로 삼아 소비행동을 해온 우리는 1차 산업을 쇠퇴시긴 간접적인 가해자라는 생각이 들었다.

 그렇게 낙농과 쌀농사 등의 현장을 체험하면서, 인간이 통제할 수 없는 자연의 영향력 아래서 생며을 키우는 것이 얼마나 힘든 일인지 통감했다. 생물이기 때문에 병에 걸리고 죽기도 한다. 악천후로 인해 그동안의 막대한 노력이 물거품이 되는 경우도 있다. 따지고 보면 우리는 농부 덕분에 살아가고 있다는 경외심이 저절로 생겨났다.

 농부는 자연에서 배운다. 자연과 함께 살아가는 지혜 · 기술 · 판단력을 지니고 있다. 그렇게 지역 사람들이 지금까지 축적한 지혜 · 기술 · 판단력이라는 경험치는 일종의 과학이기도 하다. 농부의 경험치를 활용한 생산활동은 자연을 인간의 먹거리로 바꾸기 위한 작은 과학small-science이다.

 그러나 태평양전쟁이 끝나고 일본인은 농촌을 떠났다. 뜻대로 되지 않는 자연과 타인, 지역사회 등의 번거로운 관계를 버리고 도시로 흘러들었다. 그러나 번거로움에서 해방되는 대신, 자연이나 지역사회와의 관계 속에서만 얻을 수 있는 지혜 · 기술 · 판단력을 포기했다. 생활의 풍요로움을 원자력발전과 유전자공학 등의 거대과학big-science에 맡기고, 행정 · 과학기술 · 경제에 모든 것을 일임한 채, 관객석 위에서 강 건너 불구경을 하기로 했다.

 그런 삶에는 공동체의 생활을 자신의 지혜와 창의적 노력으로 만들어가는 기쁨과 감동이 존재하지 않는다. 모두 함께 지혜를 모아 지역의 과제를 해결하는 마음가짐을 잃고, 사회를 만들어가는 당사자가 아니라 '손님'이 되어버렸다.

 주인 의식을 상실한 1억 총관객사회에 활력이 생겨날 리가 없다. 생산인구는 줄어들고, 수요부족으로 경제가 침체되고, 세수입도 줄어들었다. 어쩔 수 없이 행재정 자원이 축소되고, 고령자 부양이라는 부담이 핵가족을 덮치던 그때, 풍요의 기반이었던 원자력이라는 거대 과학이 폭주해서 우리를 당황하게 만들었다. 지나치게 성장을 추구한 결과, 오히려 근원적 위험요소를 구조적으로 떠안아버리는 사회는 사회학자 울리히 벡Ulrich Beck이 말하는 '위험사회'의 개미지옥 자체다.

 지역과 관계를 맺지 않고 '혼자 살아가는' 1억 총관객사회는 '고비용 사회'이기도 하다. 고립이 진행될수록 1인당 생활유지 비용이 증가한다. 이러한 문제들을 해결하기 위해서 다시 경제와 과학기술의 힘에만 의존한다면, 좀더 심각한 '위험사회'의 수렁으로 빠져들 수밖에 없다.

 그렇다면 어떻게 해야 할까? 생활과 사회에서 '관계의 힘'을 되살려야 한다.

 자연과 타인, 지역사회와의 관계를 되살리는 것은 우리가 관객석에서 무대로 내려와 각자 생활의 주인공이 되는 것을 의미한다. 자신의 힘으로 사회를 만들어나가는 쪽으로 돌아간다. 어쩔 수 없이 억지로 내려가는 것이 아니다. 무대 위에서 연기하는 편이 훨씬 즐겁기 때문에 내려가는 것이다.

 자신을 둘러싼 환경에 주체적으로 참가하며 살아가는 농부들의 모습은 직접 생활을 만들어나가는 기쁨과 감동을 깨닫게 해주었다. 그것은 우리 사회를 되찾는 일임과 동시에 재해 · 경제 위기 · 질병 등의 요소에 취약한 '위험사회'에 대비하는 일이다. 생산자와의 교류를 통해서 이런 생각을 하기 시작한 그때, 2011년 동일본 대지진이 일어났다.

 

 

p277

 19세기 중반 에도시대 말기의 인구는 약 3,000만 명, 1870년대 메이지시대 초기는 약 3,500만 명이었다. 메이지유신 이후 150년 동안, 전쟁으로 인한 감소가 있었지만 일본의 인구는 세 배 이상으로 불어났다.

 영국과 프랑스가 같은 기간에 약 1.5배 증가했음을 고려하면 일본의 인구 증가율이 얼마나 높은 수치인지 알 수 있다. 일본과 비슷한 근대화 과정을 거쳤으며 전쟁도 체험한 독일의 경우도 영국과 프랑스보다는 증가율이 높지만 일본 정도는 아니다.

 미국은 이민국이기 때문에 일본의 단순 비교 대상이 될 수 없다. 일본의 증가율을 월등히 상회하는 국가는 한국이다. 그러나 한국은 '압축 근대'라는 이름이 붙을 정도로 '뜨거운 근대'를 단기간에 편파적인 형태로 통과했다. 그러다보니 출생률은 일본보다 낮아 저출생 · 고령화 속도가 상당히 빠른 편이다.

 결국 메이지유신 이후 150년 동안, 세계적으로도 미국을 제외한 주요 선진국들은 인구 감소 경향으로 변하고 있다.

 마가 복음을 베이스로, 예수 1인칭 관점을 가정하여 쓴 예수의 공생애 일대기.

당연히 저자인 김용옥 선생이 바라보는 예수에 대한 관점이 녹아들어 있다. 

도올 선생의 과거 기독교 저작들과 영상 강의를 들어본 이들에게는 익숙한 이야기들이 있다.

예수에게서 신화적 부분을 싸악 걷어내고 인간적인 관점과 심리에서 접근했다고 보면 이해가 된다.

사람의 아들로 태어나서, 신의 자식으로 죽은 자의 이야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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p35

 20세기의 서구의 가장 위대한 성서신학자라고 말할 수 있는 루돌프 불트만은 이와같이 말했습니다: "바울의 담론을 통해서도, 어떠한 복음서의 기술을 통해서도 역사적 예수Historical Jesus에 관한 진실은 알려질 길이 없다. 그 모든 담론이 이미 초대교회의 케리그마적 담론이며, 초대교회는 종말론적인 회중이다. 이미 신화 속에 갇힌 사람들이다." 세상사람들이 불트만을 진보적 신학자로서 평가하는 이유는 그가 철저히 성서의 신화적 기술을 비신화하려 했기 때문입니다. 2천 년 전의 신화적 세계관을 오늘 과학적 세계관 속에서 사는 사람들에게 강요할 수 없다는 합리주의정신을 표방했기 때문입니다.

 

p44

 내가 세례 요한을 만난 이야기를 하기 전에 나에 관한 기본적인 정보 몇 가지를 얘기해둘 것이 있습니다. 나는 갈릴리 나자렛에서 태어났습니다. 나의 어머니 마리아는 매우 평범한 여인이며, 결코 성모聖母라고 컬트화 될 수 있는 그런 여인이 아닙니다. 여러분들이 중동 지역 길거리에서 만날 수 있는, 까만 보자기를 쓴 보통의 여인, 그 이상 아무것도 아닙니다. 나의 그리스도됨을 원한다면 그 신령성을 나의 삶 속에서 찾아야 할 것입니다. 나의 가족을 장식물로 삼아 이야기를 구성하는 것은 너무 어리석은 짓입니다. 마리아는 아람어로 마리암Mariam인데 그것을 희랍어로 적으면 마리아Mαρια가 됩니다.

 나의 엄마 마리아는 나의 아버지 요셉과 결혼하여 아들을 다섯 명, 딸을 셋 낳았습니다. 나는 8남매 중 둘째입니다. 그러니까 맏형이 있습니다. 그러니까 처녀잉태 같은 것은 애초에 말이 되지 않는 것입니다. 그것은 로마문명의 로컬 컬트와 결합되면서 다양한 이야기를 지어냈습니다. 그것은 그것대로 하나의 문화전통이니까 부정 · 긍정의 논란의 대상이 될 필요가 없겠지요. 그러나 나 예수를 정직하게 바라보고, 진지하게 이해하고 싶어하는 사람들은 그런 유치한 논의에 사로잡혀서는 안됩니다.

 

p66

 마가는 세례 요한의 사상과 나의 사상의 다른 점을 단적으로 "물의 세례"와 "성령(프뉴마 πνεμα)의 세례"라는 말로 표현하였습니다(1:8). 마태는 "성령의 세례"라는 말 대신에 "성령과 불(퓌르 πνρ)의 세례"라는 말을 썼습니다(마 3:11). 누가도 "성령과 불의 세례"라는 표현을 썼습니다(눅 3:16).

 "프뉴마"라는 것은 본시 "숨"을 의미합니다. 동양언어에도 "기氣"라는 말이 있습니다. 기는 신령한 그 무엇이면서도 우주 전체에 깔려있는 물질의 기초이기도 합니다. 그런데 기는 결국 숨breath입니다. 숨은 콧구멍을 들락거리는 공기, 바람이기도 하죠. 숨은 곧 생명의 근원, 증거이기도 합니다. 내가 쓰는 헬라문명권 언어의 이 프뉴마는 동양의 기와 매우 유사합니다. 그것은 숨이며, 바람이며, 호흡이며, 생명이며, 신적 영감 divine inspiration이며, 신의 영이며 사람의 영입니다. 물의 세례는 매우 구체적인 물질적 접촉을 통하여 이루어지는 세례를 의미하지만, 영의 세례, 즉 기의 세례는 생명의 토탈한 뒤바뀜, 전 인격의 변화를 의미합니다.

 "불"은 물질을 대변한 말이 아니라, 프뉴마의 신생新生의 뜨거움을 대변하는 말입니다. 물의 세례보다는 불의 세례 한 차원 높은 어떤 영적 트랜스포메이션spiritual transformation을 나타내고 있습니다. 즉 나의 사상과 세례 요한의 사상에 균열이 생겼다는 것을 의미하기도 하지요. 균열이 생기면 결국 이별하게 됩니다. 이별하게 된다는 것은 나 예수가 새로운 길을 개척하게 되었다는 것을 의미하지요.

 아주 쉽게 말하자면 나는 세례 요한 밑에서 공부하면서 세례 요한보다 더 상위권의 비젼을 획득하고 그와는 다른 길을 개척하였다는 것을 의미하겠지요. 그 시점이 아주 오묘했습니다. 내가 세례 요한과 결별하게 되는 시점 그 즈음에 안티파스는 세례 요한을 마캐루스성채의 감옥에 가두었습니다. 세례 요한의 세례운동은 통치자 안티파스를 위협할 정도의 사회적 셰력을 형성하였고, 그것은 그의 전성기를 의미하는 동시에 몰락을 의미하는 것이었습니다. 나는 세례 요한의 터무니없는 몰락을 목격하면서, 나의 영적 세례운동은 정치적 세력을 형성해서는 아니된다는 교훈을 얻었습니다.

 

p125

 그런데 마가는 또 이런 말을 했습니다 : "예수는 천국의 비밀을 사람들이 함부로 쉽게 알아차릴 수 없도록 비유로 말하였다."(4:11). 마가는 훌륭한 작가이지만, 이 말만은 매우 그릇된 생각의 결과물이라고 말할 수밖에 없습니다. 나는 그 호반에 앉아있던 수천 명의 사람들이 누구든지 쉽게 알아들을 수 있도록 비유로 말한 것입니다.

 

9장. 비유는 상식적 민중의 담론이다.

 

 우선 비유가 무엇일까요? 비유는 헬라말로 "파라볼레παραβολη"라고 하는 것인데, "파라"는 "나란히", "함께"라는 뜻이고, "볼레"는 "던지다"라는 동사에서 파생된 말입니다. 다시 말해서 한 가지 말을 하고 있는데 또 하나의 말이 동시에 나란히 던져지고 있다는 뜻이지요. 여태까지 나는 파라볼레의 어법을 계속 활용해왔습니다. "새 술은 새 부대에," "어찌 사탄이 사탄을 궤멸시킬 수 있겠는가," "잔치집에 온 신랑친구들이 어찌 신랑과 함께 있는 단식을 할 수 있으랴!"는 등등, 한 가지 말의 이면에 또 하나의 말이 있었다는 얘기지요.

 "씨 뿌리는 자의 이야기"를 했는데 그 이면에 "천국의 비밀"이 같이 얘기되고 있었다는 것이죠. 그런데 비유담론은 감추기 위한 것이 아니라 더 복합적으로 많은 의미를 드러내기 위한 것이죠.

 비유는 민중의 언어입니다. 조선말에 "속담"이라는 말이 있지요. "속담"이란 "세속의 이야기"라는 뜻이죠. 즉 "민중의 이야기 방식"이라는 뜻이죠. 속담은 짧은 경구警句라 할지라도 파라볼레가 아닌 것이 없습니다. 속담의 특징은 적재적소에  쓰이면 누구든지 쉽게 알아듣는다는 것이죠. 그것은 "카이로스(타이밍)의 예술"이지요.

 

p230

 먼저 성전에 오는 사람들은 제사를 지내야 했습니다. 그런데 제사를 지낸다고 하는 것은 정결한 코셔기준the kosher requirements에 맞는 동물을 희생으로 써야 합니다. 그런데 희생 동물은 순례자가 아무리 깨끗이 길러서 가지고 와도 코셔검사를 통과할 수가 없습니다. 그러니까 결국 성전회랑에서 파는 동물을 살 수밖에 없습니다. 이것이 바로 부패구조 때문이죠.

 사실 성실한 본인이 잘 키운 것이 제일 깨끗할 텐데 그러면 성전에는 우수리가 안 떨어집니다. 성전회랑에는 파는 동물은 자기가 기른 것이나 시중에서 파는 것의 보통 몇 배를 호가합니다. 터무니없이 비싸지만 그 가격을 안 낼 수가 없습니다. 제사를 지낼 수가 없기 때문입니다. 제사를 못 지내면 야훼의 축복을 못 받는다고 생각하는 것이죠. 일년 동안 집안운수가 꽝이 된다고 생각하니 안 낼 수도 없죠. 10원에 해결될 것을 100원에 내야만 하는 곳이 바로 예루살렘성전입니다. 90원을 착복한 상인의 이문의 대부분은 다시 제사장들, 사두개인, 서기관, 그리고 궁극적으로 산헤드린의 주머니 속으로 빨려 들어갑니다.

 환전상이라 하는 것도 마찬가지입니다. 성전에서 쓰는 돈은 세속적인 로마화폐를 쓸 수가 없습니다. 모든 튀리안화폐the Tyrian currency로 바꾸어야 합니다. 이 튀리안화폐가 있어야 성전세를 낼 수 있고 또 성전에서 행하는 여러가지 활동을 할 수가 있습니다. 이 환전하는 데도 상식적인 환율의 몇 배가 되는 환율이 적용되는 것이죠.

 한번 생각해보십시오! 헤롯성전이 AD 66년에 완성되었을 때, 그해 유월절에만 자그마치 25만 5천 6백 마리의 양이 희생되었다고 합니다. 예수살렘성전의 제식규모를 알 수 있을 것입니다. 그리고 그 과정에서 이루어지는 환전과 희생동물매매의 수익은 천문학적 숫자에 달합니다. 나는 이 부패의 연결고리를 방관할 수가 없었습니다. 갈릴리 민중의 고초의 근본원인이 이러한 종교조직과 율법과 그릇된 신관에 그 뿌리가 있다는 것을 깨달았기 때문이었습니다.

 내가 예루살렘을 향한 것은 바로 이러한 종교혁명, 정치혁명, 사회혁명의 한 고리라도 내 힘으로 달성해야겠다는 신념, 그 신념을 고취시키는 하나님의 소리가 있었기 때문이었습니다. 그 어는 누구도 이 나의 갈망을 이해하지 못했습니다. 세례 요한처럼 맥없이 죽을 수는 없었습니다. 민중의 마음에 확고한 씨를 뿌리지 않으면 내가 말하는 천국은 도래할 길이 없었습니다. 그 첩격이 갈릴리 촌구석에서 행하는 이적에 있는 것이 아니라, 예루살렘의 성전을 뒤엎는 사회적 행위, 상식적 행위, 사람들의 마음을 경이롭게 만드는 의로운 거사에 있다는 것을 나는 깨닫고 있었습니다. 힐링이 기적이 아니라 힐링을 가능케 하는 민중의 마음이 기적이라고 나는 말했습니다. 그 믿음의 궁극적 행태는 율법의 전승 그 자체를 단절시키는 것이었습니다.

 

 모든 종교적 하이어라키를 전복시켜야 평등한 세상이 오고 심령이 가난한 자, 애통하는 자가 복을 받습니다. 나는 갈리리 촌놈에 불과합니다. 나는 서른댓 살의 청년에 불과합니다. 나를 마술사로 그리고, 나를 수염이 덥수룩하게 난 노인처럼 그리는데 정말 나에 대한 그릇된 이미지만을 세상은 만들고 있습니다. 나는 피 끓는 청년이고, 근원적인 사회변화를 꾀하는 운동가입니다.

 나는 그 거대한 헤롯성전에 들어서자마자 닥치는 대로 사고 팔고 하는 모든 사람들을 내쫓으며 환전상들의 탁자를 다 엎어버리고, 비둘기장수들, 희생양을 파는 사람들의 의자를 둘러 엎었습니다(11:15). 그리고 제사기구들을 나르느라고 성전뜰을 왔다갔다 하는 것도 금지시켰습니다. 이것은 성전제사 자체를 금지시키는 반유대교적 행동이었습니다.

 생각해보십시오! 나는 갈릴리 촌놈입니다. 아무리 메시아 운운한다 할지라도 로마병정의 칼자루에 간단히 목이 날아갈  그런 연약한 존재입니다. 어떻게 갈릴리 촌놈인, 서른댓 살의, 아무 조직배경도 없는 청년이 이 무시무시한 대성전에서 이러한 난동을 부릴 수 있단 말입니까? 어떻게 이런 행위가 용인될 수 있었고 가능할 수 있었겠습니까? 나는 채찍까지 휘둘렀습니다. 폭력적인 힘까지 휘둘렀습니다. 그리고 이렇게 크게 소리쳤습니다.

 

 "성서에 하나님께서 '내 집은 만민이 기도하는 조용한 집이 되어야 하느니라'라고 말씀하시지 아니하였느냐? 그런데 너희는 이 집을 강도의 소굴a den of robbers로 만들었구나!"

 

 나는 이 거대한 예루살렘성전을 "강도의 소굴"이라 규정하였습니다. 어떻게 이러한 나의 언행이 용납될 수 있었을까요?

 만약 이 예루살렘성전이 로마군대가 직접 관장하는 곳이었다고 한다면 나는 초반에 바로 살해당하였을 것입니다. 그런데 로마는 다신론적 문화를 가지고 있었기 때문에 식민지 지역의 총교생활에 관해 매우 관용적 태도를 취했습니다.

 그리고 로마는 헤롯왕가를 통한 간접통치방식을 취했습니다. 팔레스타인 지역은 반자치구역이었습니다. 그러므로 내가 제기한 반종교적 행위는 로마권력자들의 입장에서는 강 건너 불이었습니다.자기들이 직접 다룰 문제가 아니었습니다. 그러나 당연히 유대교 당국의 입장에서 보면 나의 행위는 반역이었습니다. 마가는 이렇게 적고 있습니다.

 

 "제사장들과 서기관들은 예수의 언행을 듣고 어떻게 해서라도 예수를 죽여야 한다고 모의하였다."

 

 그런데 왜 목 죽였을까요? 여기에 복음서가 기록하지 않은 중요한 사실들이 있습니다. 나는 처음부터 군중에게 둘러싸여 있었습니다. 종교적 당국은 내가 민중의 마음을 얻고 있다는 것을 잘 알고 있었습니다. 마가는 이렇게 썼습니다.

 "민중이 예수의 가르침에 감탄하였다"(11:18)

 

 다시 말해서 나의 성전전복행위는 나 홀로 한 일이 아니었습니다. 민중이 마음으로 성원했고 나와 같이 행동했습니다. 생각해보세요. 내가 환전상들의 탁자를 뒤엎어 동전이 여기저기 흩어질 때 그들의 마음이 얼마나 통쾌했겠습니까? 마가는 이렇게 썼습니다.

 

 "저녁때가 되어 석양이 뉘엿뉘엿할 때야 예수와 제자들은 성밖으로 나갔다."

 

다시 말해서 나의 전복행위는 하루종일 계속된 것입니다. 그 35에이커 면적을 커버하는 회랑을 뒤엎는 작업은 하루종일 진행된 민중항쟁의 대사건이었습니다. 나느 성공했습니다. 나는 이제 진정한 패션Passion의 길을 걸을 수 있게 되었습니다. 이제 나는 죽을 수밖에 없는 운명의 사나이가 되었습니다. 그러나 나는 두렵지 않았습니다. 이 땅에 태어난 사명을 다한 것입니다. 천국이라는 새로운 약속의 임재를 위하여 구약을 말소시키는 깨끗한 청소를 단행한 것입니다. 이것이 나의 예루살렘 이틀째의 하룻일이었습니다. 나는 이날 밤도 베다니에서 잤습니다.

 

 

 

 

寵利毋居人前 德業毋落人後

총리무거인전 덕업무락인후

受享毋踰分外 修爲毋減分中

수향무유분외 수위무감분중

 

총애(寵愛)와 이익(利益)에는 남의 앞에 나서지 말아야 하고, 덕을 쌓는 일에는 남의 뒤에 처지지 말아야 한다

남에게 받아서 누릴 때에는 분수 밖으로 넘지 말아야 하고, 수양(修養)할 때는 분수 안으로는 줄이지 말아야 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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