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독 : 내용은 대강 파악. 제대로 논리적 구조를 파악하려면 1번 더 읽어야 하겠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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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자유로부터의 도피》는 중세 사회의 붕괴로 생겨난 인간의 불안이라는 현상을 분석한 책이다. 중세 사회에는 많은 위험이 존재했지만, 인간은 그 안에서 보호를 받으며 안전하다고 느꼈다. 수백 년 동안 열심히 노력한 끝에 인간은 꿈도 꾸어보지 못했던 물질적 부를 쌓아올리는 데 성공했다. 인간은 세계 곳곳에 민주주의 사회를 건설했고, 최근에는 전체주의의 새로운 책동에 맞서 자신을 지키는 데 성공했다. 하지만 《자유로부터의 도피》에서 내가 분석하여 보여주려는 것은 근대인이 아직도 불안하다는 것이다. 불안한 인간은 온갖 부류의 독재자드레게 자신의 자유를 넘겨주거나, 스스로 기계의 작은 톱니가 되어 호의호식하지만, 자유로운 인간이 아니라 자동인형 같은 인간이 되고 싶은 유혹에 사로잡힌다.
p12
우리가 직면한 중대한 어려움은 인간의 지적 능력 발달이 감정 발달을 훨씬 앞지른다는 사실에 있다는 것이 인간과 현 상황에 관심이 많은 사람들에게 점점 분명해지고 있다. 인간의 두뇌는 20세기에 살고 있지만, 대다수 사람들의 심장은 아직도 석기시대에 살고 있다. 대다수 사람들은 아직 독립적이고 합리적이고 객관적일 수 있을 만큼 성숙하지 못했다. 인간은 혼자이고 ,인간 자신을 빼고는 삶에 의미를 부여하는 권위 따위는 존재하지 않는다는 사실을 견뎌내려면 그들에게는 신화와 우상이 필요하다. 인간은 파괴성과 증오, 시샘과 복수심같은 무분별한 열정을 억누르고 힘과 돈, 독립 국가와 민족을 숭배한다. 인간은 인류의 위대한 정신적 지도자들 - 부처, 구약의 예언자들, 소크라테스, 예수, 무함마드 - 의 가르침에 말로만 경의를 표하면서, 그 가르침을 미신과 우상 숭배의 정글로 바꾸어버렸다. 지적 · 기술적 조숙과 감정적 퇴보 사이의 괴리로 말미암아 자신을 파괴할 위기에 놓인 인류는 그 위기에서 어떻게 자신을 구할 수 있을까?
내가 보기에 해결책은 하나뿐이다. 우리의 사회생활에서 가장 본질적인 사실들에 대한 인식을 강화하는 것이다. 그 인식은 우리가 돌이킬 수 없는 어리석은 짓을 저지르는 것을 막아주고, 객관성과 이성을 유지할 수 있는 능력을 조금이나마 높여준다. 가슴이 저지르는 대부분의 어리석은 짓과 그것이 우리의 상상력과 사고에 미치는 악영향을 겨우 한 세대 만에 극복하기를 바랄 수는 없다. 인간이 수십만 년에 걸친 인류 출현 이전의 역사에서 벗어나려면 아마 천 년은 걸릴 것이다. 하지만 이 중대한 순간, 조금만 통찰력 - 객관성 - 을 강화하려면 인류의 생사에 중요한 영향을 미칠 수 있다. 이런 이유 때문에 과학적이고 역동적인 사회심리학의 발달이 매우 중요하다. 물리학과 의학의 진보에서 생겨나는 위험에 대응하기 위해서는 사회심리학의 진보가 반드시 필요하다.
자유로부터 도피하려는 전체주의적 경향의 이유를 이해하는 것이 전체주의 세력을 극복하려는 모든 행위의 전제이기 때문이다.
p21
처음에는 권위주의 체제의 승리가 소수의 광기 때문이고, 그 광기 때문에 그들은 조만간 몰락할 것이라고 생각하면서 위안을 얻는 사람이 만핬다. 이탈리아인과 독일인은 민주주의를 충분히 오랫동안 훈련하지 못했고, 따라서 그들이 서구 민주주의 국가들만큼 정치적으로 성숙해지는 것을 흐뭇하게 지켜보면서 기다리면 된다고 우쭐대는 사람들도 있었다. 히틀러 같은 자들은 오로지 권모술수만으로 거대한 조직체인 국가를 지배하는 권력을 얻었고, 그들과 그들의 추종자들은 순전히 힘으로만 나라를 통치하고 있으며, 국민은 의지라고는 전혀 업는 배신과 테러의 대상일 뿐이라는 생각도 당시 널리 퍼져 있던 환상, 어쩌면 모든 환상 중에서 가장 위험한 환상이었다.
그 후 세월이 흐르면서 이런 주장의 오류가 분면해졌다. 수백만의 독일인은 그들의 선조가 자유를 위해 싸운 것만큼 열정적으로 자유를 포기했다는 것, 그들은 자유를 원하기는커녕 자유로부터 벗어날 길을 찾았다는 것, 나머지 수백만의 독일인은 거기에 무관심했으며 자유를 지키는 일이 싸우다 죽을 만한 가치가 있다고는 생각지 않았다는 것을 우리는 인정할 수밖에 없었다. 민주주의의 위기는 이탈리아나 독일에만 특유의 문제가 아니라 모든 근대국가가 직면한 문제라는 것도 우리는 인정한다. 인간의 자유를 위협하는 적들이 어떤 상징을 택하는지도 중요하지 않다. 노골적인 파시즘의 이름이 아니라 반파시즘의 이름으로 자유를 공격한다고 해서 자유가 덜 위태로운 것은 아니다.
존 듀이는 이렇게 말하고 있다. "우리의 민주주의를 심각하게 위협하는 것은 해외에 있는 전체주의 국가가 아니다. 우리 자신의 개인적 태도와 우리 자신의 제도 속에는 외적인 권위와 규율, 획일성, 외국의 지도자에 대한 의존이 승리를 거둘 수 있게 해준 조건들이 존재하고, 바로 그것이 우리의 민주주의를 심각하게 위협한다. 따라서 싸움터는 이곳, 우리 자신과 우리 제도의 내부에도 존재한다.
p25
파시즘이 권력을 잡았을 때, 대다수의 사람들은 이론적으로나 실제적으로나 준비가 되어 있지 않았다. 그들은 인간이 악에 대한 성향과 힘에 대한 욕망을 그렇게 노골적으로 드러낼 수 있다는 것을 믿을 수가 없었다. 인간이 약자의 권리를 그렇게 무시하고 복종을 갈망할 수 있다는 것도 믿을 수 없었다. 화산이 분출하기 전에 땅이 울리는 것을 알아차린 사람은 극소수뿐이었다. 니체는 19세기의 자기만족적인 낙관주의를 흔들어놓았고, 마르크스도 다른 방식으로 낙관주의를 뒤흔들었다. 또 다른 경고는 조금 나중에 프로이트한테서 나왔다. 확실히 프로이트와 그의 제자들 대다수는 사회에서 일어나는 일에 대해 지극히 소박한 생각밖에 갖고 있지 않았고, 그가 사회 문제에 심리학을 적용한 경우에는 대부분 그 해석이 오해를 불러일으킬 소지를 가지고 있었다. 하지만 프로이트는 개인의 정서적 장애와 정신적 불안이라는 현상에 관심을 기울여, 우리를 화산 꼭대기로 데려가 부글부글 끓고 있는 분화구를 들여다보게 해주었다.
프로이트는 인간 행동의 여러 부분을 결정하는 비합리적이고 무의식적인 힘을 관찰하고 분석하는 일에서 그 전의 누구보다도 앞서 있었다. 근대 합리주의는 인간성을 이루는 비합리적이고 무의식적인 부분의 존재를 도외시했지만, 근대 심리학에서 프로이트와 그의 후계자들은 그 비합리적이고 무의식적인 부분을 드러냈을 뿐만 아니라, 그 비합리적인 현상이 일정한 법칙을 따르기 때문에 합리적으로 이해할 수 있다는 것도 보여주었다. 프로이트는 인간 행동의 비합리성만이 아니라 꿈의 언어와 신체적 증상을 이해하는 법도 우리에게 가르쳐주었다. 프로이트는 개인의 성격 구조 전체만이 아니라 이런 비합리적인 행동들도 개인이 외부 세계에서 받은 영향, 특히 어린 시절에 받은 영향에 대한 반응이라는 사실을 발견했다.
하지만 프로이트는 그가 속해 있던 문화의 정신으로 가득 차 있어서, 그것이 정해놓은 어떤 한계를 넘어서지 못했다. 이 한계는 환자에 대한 그의 이해까지도 제한하게 되었고, 그가 정상적인 개인을 이해하고 사회생활에서 일어나는 비합리적인 현상을 이해하는 데도 걸림돌이 되었다.
이 책은 사회 과정 전반에서 심리적 요소들이 맡고 있는 역할을 강조하고, 이 분석은 프로이트의 기본적인 발견 - 특히 인간의 성격에서 무의식적인 힘들이 어떻게 작용하는지, 그 힘들이 외부의 영향에 얼마나 의존하는지에 관한 발견 - 에 바탕을 두고 있기 때문에, 우리의 접근방식의 일반적인 원칙은 무엇이고, 이 원칙과 프로이트의 고전적인 개념은 어떻게 다른지를 처음부터 알려주는 편이 독자들에게 도움이 될 것 같다.
프로이트는 인간의 본성이 약하다는 전통적인 학설만이 아니라 인간과 사회를 기본적으로 양분하는 전통적인 믿음도 받아들였다. 인간은 근본적으로 반사회적이라고 그는 생각했다. 사회는 인간을 길들여야 하고, 인간이 생물학적 - 따라서 근절할 수 없는 - 충동을 직접 만족시키는 것을 어느 정도는 허락해야 한다. 하지만 대체로 사회는 인간의 기본적인 충동을 정화시키고 노련하게 억제해야 한다. 타고난 충동을 사회가 이렇게 억압하면, 그 결과 기적적인 일이 일어난다. 즉 억압당한 충동이 문화적으로 가치 있는 노력으로 바뀌고, 그리하여 문화의 인간적 토대가 되는 것이다. 프로이트는 억압이 문화적 행동으로 바뀌는 이 이상한 변화를 승화(昇華)라고 불렀다. 억압의 정도가 개인이 승화시킬 수 있는 한계를 넘으면 개인은 신경증에 걸리고, 억압을 줄이는 것을 허락할 필요가 있다. 하지만 일반적으로, 개인의 충동을 만족시키는 것과 문화 사이에서 반비례 관계가 존재한다. 그러니까 억압이 강할수록 문화가 발달한다(그리고 신경 장애에 걸릴 위험도 더 높아진다). 프로이트의 이론에서 개인과 사회의 관계는 본질적으로 고정적이다. 개인은 사실상 변하지 않는 상태로 남아 있고, 사회가 개인의 자연스러운 충동에 더 강한 압력을 행사하거나(그래서 더 많은 승화를 강요하거나) 더 많은 만족을 허용하거나(그래서 문화를 희생시키거나) 할 때에만 개인도 변한다.
이전의 심리학자들이 인정한 이른바 인간의 기본적 본능과 마찬가지로, 인간 본성에 대한 프로이트의 개념은 본질적으로 근대인에게서 볼 수 있는 가장 중요한 충동들을 반영한 것이었다. 프로이트에게는 그의 문화권에 속하는 개인이 인간을 대표했고, 근대 사회에 사는 인간 특유의 열정과 불안은 인간의 생물학적 구조에 뿌리를 내린 영원한 힘으로 여겨졌다.
우리는 이 점을 실증하는 예를 많이 들 수 있지만(예를 들어 오늘날 현대인에게 널리 퍼져 있는 적개심의 사회적 토대, 오이디푸스 콤플렉스, 여성들의 이른바 거세 콤플렉스 등), 인간을 사회적 존재로 보는 개념 전반과 관련되어 있기 때문에 특히 중요한 실례를 한 가지만 더 제시하고 싶다. 프로이트는 언제나 개인을 타인들과 관련지어 생각한다. 하지만 프로이트가 생각하는 이 관계는 자본주의 사회에 사는 타인들과 맺고 있는 독특한 경제적 관계와 비슷하다. 각자는 자기가 책임지고 개인주의적으로 자신을 위해 일하지 기본적으로 타인과 협력하여 일하지는 않는다. 하지만 그는 로빈슨 크루소가 아니다. 그는 고객이나 고용주나 고용인이 될 타인을 필요로 한다. 그는 물건을 사고팔아야 하고, 남들과 주고받아야 한다. 상품 시장이든 노동 시장이든, 시장이 이 관계를 규제한다. 따라서 주로 혼자이고 자급자족할 수 있는 개인은 한 가지 목적 - 물건을 팔거나 사는 것 - 을 위한 수단으로 타인들과 경제저 관계를 맺는다. 인간관계에 대한 프로이트의 개념도 본질적으로는 이와 같다. 개인은 반드시 충족시킬 필요가 있는 생물학적 충동들은 충분히 갖추고 있는 듯하다. 그 충동들은 만족시키기 위해 개인은 다른 '객체'와 관계를 맺고, 따라서 다른 개인들은 언제나 자신의 목적을 이루기 위한 수단일 뿐이다. 그 목적은 개인이 타인들과 접촉하기 전에 원래 자신에게서 비롯된 욕구를 충족시키는 것이다. 프로이트가 말하는 의미에서의 인간관계가 이루어지는 현장은 시장과 비슷하다. 이것은 생물학적으로 주어진 욕구를 서로 충족시켜주는 것이고, 여기서 타인과의 관계는 언제나 목적을 이루기 위한 수단일 뿐, 결코 그 자체가 목적은 아니다.
이 책에서 제시된 분석은 프로이트의 관점과는 대조적이다. 심리학의 주요 문제는 이런저런 본능적 욕구 자체를 충족시키거나 좌절시키는 문제가 아니라 세계에 대한 개인의 관계가 구체적으로 어떤 종류의 것이냐의 문제라는 가정, 그리고 인간과 사회의 관계는 고정적인 게 아니라는 가정이 이 책에 제시된 분석의 기본 바탕이다. 한쪽에는 어떤 충동을 타고난 개인이 있고, 또 한쪽에는 개인과는 별도로 개인의 타고난 성향을 충족시키거나 좌절시키는 사회가 존재하는 것은 아니다. 식욕 · 갈증 · 성욕처럼 모든 인간에게 공통된 욕구는 존재하지만, 사랑과 미움, 권력욕과 복종심, 관능적 쾌락에 대한 욕망 또는 두려움처럼 사람들의 성격에 차이를 가져오는 충동들은 모두 사회 과정의 산물이다. 인간의 가장 추악한 성향만이 아니라 가장 훌륭한 성향도 생물학적으로 고정된 인간 본성이 아니라 인간을 만들어내는 사회 과정의 결과다. 다시 말하자면 사회는 개인을 억압하는 기능만이 아니라 - 물론 그 기능도 갖고 있기는 하지만 - 창조적인 기능도 갖고 있다. 인간의 본성, 열정과 불안은 문화적 산물이다. 사실 인간 자체가 인류의 부단한 노력이 낳은 가장 중요한 창조물이자 성취이고, 그 기록을 우리는 역사라고 부른다.
역사에서 일어나는 이러한 인간의 창조 과정을 이해하는 것이 바로 사회심리학의 과제다. 하나의 역사 시대에서 다음 역사 시대로 넘어갈 때 인간의 성격에 어떤 뚜렸한 변화가 일어나는 까닭은 무엇인가? 르네상스 정신은 왜 중세 정신과 다른가? 독점자본주의 시대 인간의 성격 구조는 왜 19세기 인간의 성격 구조와 다른가? 사회심리학은 좋든 나쁘든 새로운 능력과 새로운 열정이 생겨나는 이유를 설명해야 한다. 그리하여 예를 들면 르네상스 시대부터 오늘날까지 인간은 명성을 얻으려는 불타는 야망으로 가득 찼지만, 오늘날에는 지극히 자연스러워 보이는 이 욕망이 중세 사회의 인간에게는 거의 존재하지 않았다는 사실을 우리는 알게 된다. 또한 전에는 인간이 가지고 있지 않았던 자연의 아름다움에 대한 감각도 같은 시대에 발달했다. 북유럽 국가에서는 16세기부터 인간이 일하고 싶은 욕망에 거의 강박적으로 사로잡혔다. 그 전에는 노예가 아닌 자유민은 일을 하고 싶어 하지 않았다.
하지만 인간은 역사에 의해 만들어질 뿐만 아니라 역사를 만들기도 한다. 얼핏 모순되어 보이는 이 문제를 해결하는 것이 사회심리학의 영역이다. 열정과 욕망과 불안이 사회 과정의 '결과'로 어떻게 변화하고 발전하는지를 보여주는 것만이 아니라, 그렇게 구체적인 형태를 이루게 된 인간의 에너지가 어떻게 '사회 과정을 형성하는 생산력'이 되는지를 보여주는 것도 사회심리학의 과제다. 따라서, 예컨대 명성과 성공을 얻고자 하는 갈망과 일하고 싶은 욕구는 근대 자본주의를 발달시킨 원동력이다. 이것이 없었다면 근대 자본주의는 발달할 수 없었을 것이며, 이 원동력과 그 밖에 인간이 가지고 있는 수많은 힘이 없었다면 인간은 근대 상공업 체제의 사회적 · 경제적 요구에 따라 행동할 있는 추진력이 부족했을 것이다.
p38
인간의 본성이란 생물학적으로 고정되어 있는 타고난 충동들의 총화도 아니고, 또한 순조롭게 적응해가는 문화 유형의 생명 없는 그림자도 아니다. 인간의 본성은 인간 진화의 산물이지만, 어떤 고유한 메커니즘과 법칙도 갖고 있다. 인간의 본성에는 고정 불변의 요소들이 있는데, 생리적 요구를 충족시켜야 할 필요성, 고립과 정신적 고독을 피해야 할 필요성이 그것이다. 개인은 어떤 사회 특유의 생산과 분배 체제에 뿌리를 둔 생활양식을 받아들여야 한다는 것을 우리는 알았다. 문화에 역동적으로 적응하는 과정에서 개인의 행동과 검정을 유발하는 강력한 충동들이 수없이 생겨난다. 개인은 이 충동들을 의식할 수도 있고 의식하지 못할 수도 있지만, 어쨌든 그 욕구들은 강력하고 일단 생겨나면 충족시켜줄 것을 요구한다. 그것들은 강력한 영향력이 되어, 이번에는 반대로 사회 과정을 형성하는 데 영향을 미친다. 경제적 · 심리적 · 이념적 요인들이 어떻게 상호작용을 하고 이 상호작용에 관하여 어떤 일반적 결론을 내릴 수 있을지는 나중에 종교개혁과 파시즘을 분석하는 과정에서 논할 것이다. 이 논의는 언제나 이 책의 주요 주제를 중심으로 전개될 터인데, 이 책의 ㅈ요 주제는 인간이 타인이나 자연과의 원초적 일체감에서 벗어난다는 의미에서 자유를 얻으면 얻을수록, 인간이 '개인' 되면 될수록, 자발적인 사랑과 생산적인 일을 통해 자신과 세계를 결합시키거나 아니면 자신의 자유와 개체적 자아의 본래 모습을 파괴하는 끈으로 세계와 자신을 묶어서 일종의 안전보장을 추구할 수밖에 없다는 것이다.
p40
개인이 원시적 유대관계에서 차츰 벗어나는 과정, 즉 '개체화(individuation)'라고 부를 수 있는 과정은 종교개혁부터 현재에 이르는 수세기 동안의 근대사에서 절정에 달한 듯하다.
p44
개체화 과정의 다른 측면은 '고독의 증대'다. 원초적 유대는 외부 세계와의 기본적인 통합과 안도감을 준다. 아이가 그 세계에서 벗어날수록 자기가 혼자라는 것, 다른 모든 존재와 분리된 별개의 존재라는 것을 의식하게 된다. 개인의 존재에 비하면 압도적으로 강하고 힘센 세계, 때로는 위협적이고 위험하기도 한 세계와 이렇게 분리되는 것은 무력감과 불안감을 낳는다. 개별 행동의 가능성과 책임을 모른 채 세계의 일부로 남아 있는 동안은 세계를 두려워할 필요도 없었다. 그런데 개인이 되면 혼자 서서, 세계가 지니고 있는 위험하고 압도적인 측면과 맞서야 한다.
자신의 개성을 포기하고 외부 세계에 완전히 잠겨서 고독감과 무력감을 극복하고 싶은 충동이 일어난다. 하지만 이 총동과 거기에서 생겨나는 새로운 유대는 성장 과정 자체에서 끊어진 원초적 유대와는 다르다. 아이가 육체적으로는 결코 어머니 자궁으로 돌아갈 수 없듯이, 심리적으로는 절대로 개체화 과정을 뒤집을 수 없다. 그렇게 하려는 시도는 필연적으로 복종의 성격을 띠고, 권위와 거기에 복종하는 아이 사이의 기본적인 모순은 결코 제거되지 않는다. 아이는 의식적으로는 안도감과 만족감을 느낄지 모르지만, 무의식적으로는 자아의 본래 모습과 힘을 포기하는 값비싼 대가를 치르고 있다는 것을 깨닫는다. 따라서 복종의 결과는 과거와는 정반대다. 복종은 아이의 불안을 늘리는 동시에 적개심과 반항심을 불러일으킨다. 아이가 적개심과 반항심을 품는 대상은 아이가 계속 의존하는, 또는 새로 의존하게 된 바로 그 사람이기 때문에 더욱 놀랍다.
하지만 복종은 고독과 불안을 피하는 유일한 방법이 아니다. 또 다른 방법, 생산적일 뿐만 아니라 해소할 수 없는 갈등으로 끝나지 않는 유일한 방법은 '인간 및 자연과 자발적인 관계'를 맺는 것이다. 이 관계는 개성을 없애지 않으면서 개인을 세계와 이어준다. 이런 종류의 관계 - 이 관계의 가장 중요한 표현은 사랑과 생산적인 이리다 - 는 인격 전체의 통합과 그 힘에 뿌리는 두고 있다. 따라서 자아 성장의 한계가 이 관계를 지배한다.
p46
분리와 개체의 방향으로 한 걸음 나아갈 때마다 자아도 그만큼 성장한다면, 아이는 조화롭게 성장할 것이다. 하지만 실제로 이런 일은 일어나지 않는다. 개체화 과정은 자동적으로 일어나는 반면, 자아의 성장은 수많은 개인적 · 사회적 이유로 방해를 받는다. 이 두 경향의 차이는 참을 수 없는 고립감과 무력감을 낳고, 이것은 나중에 '도피의 메커니즘'으로 논할 심리적 메커니즘으로 이어진다.
p47
인간은 태어났을 때는 모든 동물 가운데 가장 무력하다. 자연에 대한 인간의 적응은 본능의 결정이 아니라 본질적으로 학습 과정에 바탕을 두고 있다. "본능은 .... 고등동물, 특히 인간에게는 사라지는 범주는 아니라 해도 약해지는 범주다."
p53
다른 측면 - 인간 본성의 악함을 강조하고, 개인의 무의미함과 무력함, 개인이 외적인 힘에 종속되어야 할 필요성 - 은 무시된다. 개인은 무가치하고 기본적으로 자신에게 의존할 수 없고 외적인 힘에 복종할 필요가 있다는 이 생각은 히틀러 이데올로기의 주제이기도 하다. 하지만 이 히틀러의 이념은 개신교에 내재하는 고유의 자유와 도덕 원리를 강조하지는 않는다.
p65
이 사실은 중세 사회에서 개인의 위치를 이해하는 데 가장 필수적인 요점으로 우리를 데려간다. 카톨릭교회의 교리만이 아니라 세속의 법률에도 표현되어 있던 '경제 활동'에 관한 '윤리적 견해'가 그것이다. 이 점에 대해 우리는 토니의 견해를 따르고자 한다. 그의 견해는 중세를 이상화하거나 낭만화하려 든다고 의심받을 여지가 없기 때문이다. 경제생활에 대한 기본적인 가정은 두 가지였다. "경제적 이익은 인생의 진정한 사업인 구원에 종속된다는 것. 경제활동은 인간 행위의 한 측면이며 인간 행위의 다른 부분들과 마찬가지로 도덕률에 묶여 있다는 것"이다.
p69
루터는 1524ㄴ녀에 <상거래와 고리대금업>이라는 팸플릿에서 독점 기업에 대한 중소 상인의 울분과 분노를 생생하게 표현했다. "그들은 모든 상품을 장악하고 앞에서 언급한 모든 수법을 노골적으로 행사한다. 그들은 상품 가격을 마음대로 올리거나 내리고, 마치 자기들이 신의 창조물 위에 군림하고 믿음과 사랑의 법칙에서 자유롭기라도 한 것처럼, 강꼬치고기가 물속의 작은 물고기들을 괴롭히듯이 모든 중소 상인을 억압하고 파멸시킨다." 루터의 이 말은 오늘날에도 적용될 수 있을 것이다. 15세기와 16세기에 중산층이 부유한 독점가들에게 느꼈던 공포와 분노는 우리 시대에 중산층이 독점 기업과 강력한 자본가들에게 보이는 태도를 특징짓는 감정과 비슷한 점이 많다.
p88
루터에게서 찾아볼 수 있듯이, '확실성을 강박적으로 추구하는 것은 진정한 믿음의 표현이 아니라 참을 수 없는 회의를 극복하려는 욕구에 뿌리박고 있는 행동이다.' 루터의 해결책은 오늘날 수많은 개인에게서 찾아볼 수 있지만, 그들은 루터와는 달리 신학적으로 생각하지 않을 뿐이다. 즉 그들은 고립된 개별적 자아를 제거하고, 개인 밖에 있는 압도적으로 강한 힘의 손에 쥐어진 도구가 됨으로써 확실성을 찾으려 한다. 루터에게 이 힘은 선이었고, 그는 절대적인 복종으로 확실성을 추구했다. 그는 이런 방법으로 자신의 회의를 어느 정도 침묵시키는 데 성공햇지만, 그 회의가 정말로 사라진 것은 아니었다. 그는 죽는 날까지 회의의 공격을 받았고, 복종하려는 노력을 거듭하여 그 회의를 극복해야만 했다. 심리학적으로 믿음은 전혀 다른 두 가지 의미를 갖고 있다. 믿음은 인류와의 내적 관계와 삶에 대한 긍정의 표현일 수도 있고, 개인의 고독과 삶에 대한 부정적 태도에 뿌리를 둔 근본적인 회의감을 억제하려는 반작용의 형성일 수도 있다. 루터의 믿음은 그런 보상적 성질을 갖고 있었다.
p107
'양심'이란 인간이 스스로 자기 마음속에 앉혀놓은 노예 감독에 불과하다. 양심은 인간이 자신의 것이라 믿는 소망이나 폭표에 따라 행동하도록 몰아세우지만, 사실 그 소망이나 목표는 외부의 사회적 요구가 내면화한 것이다. 양심은 가혹하고 잔인하게 인간을 몰아붙이고, 쾌락과 행복을 금지하고, 이해할 수 없는 죄를 속죄하는 데 평생을 바치게 한다.
봉건사회라는 중세적 제체의 붕괴는 모든 사회 계급에서 한 가지 중요한 의미를 지니고 있었다. 그것은 개인이 홀로 남겨지고 고립되었다는 것이다. 개인은 이제 자유로워졌다. 이 자유는 두 가지 결과를 낳았다. 인간은 그때까지 누렸던 안전성과 의심할 여지없는 소속감을 박탈당했고, 경제적으로나 정신적으로 안전을 추구하는 그를 만족시켰던 세계로부터 강제로 떨어져나왔다. 그는 고독과 불안을 느꼈다. 하지만 그는 자유롭게 행동할 수도 있었고 독립적으로 생각할 수도 있었다. 스스로 자신의 주인이 되어, 남이 시키는 대로 하지 않고 자기가 원하는 대로 자신의 삶을 꾸려나갈 수도 있었다.
하지만 이 두 종류의 자유는 여러 사회 계급의 실제 생활 형편에 따라 서로 다른 무게를 가졌다. 사회에서 가장 성공한 부류만이 대두하는 자본주의의 혜택을 받아, 진정한 부와 권력을 얻을 수 있었다. 그들은 자신의 활동과 합리적인 계산의 결과로 사업을 확장하고 정복하고 지배하고 재산을 축적할 수 있었다. 이 신흥 유산 귀족은 기존의 문벌 귀족과 함께 새로운 자유의 열매를 누릴 수 있는 위치에 있었고, 개인이 주도권을 잡고 세상을 지배하는 새로운 느낌을 얻을 수도 있었다. 따라서 그들의 입장도 근본적인 불안전과 불안에서 결코 자유롭지 못했다. 하지만 이 신흥 자본가에게는 대체로 자유의 소극적인 의미보다 적극적인 의미가 더 지배적이었다. 그것은 새로운 귀족 사회의 토양에서 번영한 르네상스 문화에 잘 표현되어 있다. 르네상스 예술과 철학에는 물론 절망과 회의주의도 자주 표현되었지만, 인간의 존업성과 의지와 지배력이라는 새로운 정신이 표현되었다. 이처럼 개인의 활동과 의지의 힘을 강조한 것은 중세 말기에 카톨릭교회의 신학적 가르침에서도 찾아볼 수 있다. 당시의 스콜라 철학자들은 권위에 저항하지 않고 그 지도를 받아들였다. 하지만 그들은 자유의 적극적인 의미를 강조했고, 인간이 자신의 운명을 결정하는 데 참여할 권리, 인간의 힘과 존엄성 그리고 의지의 자유를 강조했다.
한편 하층계급인 도시 빈민과 특히 농민들은 자유에 대한 새로운 추구, 점점 심해지는 경제적 · 인간적 압박에서 벗어나고 싶은 열렬한 소망에 사로잡혔다. 그들은 잃을 것이 거의 없었지만 얻을 것은 많았다. 그들은 교리상의 시시콜콜한 면에는 관심이 없었고, 그보다는 성서의 기본 원칙인 우애와 정의에 관심이 많았다. 그들의 소망은 초기 기독교 특유의 비타협적 정신을 특징으로 하는 종교 운동과 수많은 정치적 반항에 적극적으로 표현되었다.
하지만 우리의 주요 관심사는 중산층의 반응이었다. 자본주의의 발흥은 그들의 독립성과 자주성을 강화하는 데에도 도움이 되었지만, 사실 그들에게는 큰 위협이었다. 중산층에 속하는 개개인은 16세기 초에는 아직 새로운 자유에서 힘과 안전을 많이 얻지 못했다. 자유는 힘과 자신감보다는 오히려 개인이 보잘것없는 존재라는 느낌과 고독감을 가져왔다. 게다가 중산층은 로마 교회의 성직자를 비롯한 유산계급의 사치와 권력에 대한 불타는 분노로 가득 차 있었다. 프로테스탄티즘은 개인의 무의미함과 부유층에 대한 분개를 표현했으며, 신의 무조건적인 사랑에 대한 믿음을 파괴했으며, 자신과 타인을 경멸하고 불신하도록 가르쳤으며, 인간을 목적이 아닌 수단으로 만들었다. 프로테스탄티즘은 세속 권력 앞에 굴복했으며, 세속 권력이 도덕적 원칙에 어긋나면 단지 존재한다는 이유만으로 정당화되지는 않는다는 원칙을 포기했다. 그렇게 함으로써 프로테스탄티즘은 유대-기독교 전통의 기초가 되었던 요소들을 버리고 만 것이다. 프로테스탄티즘의 교리가 제시한 개인과 신과 세계의 모습에서는, 개인이 느끼는 무의미함과 무력감은 인간이 본래 지니고 있는 성질에서 유래한 것이므로 '마땅히' 그렇게 느껴야 한다는 믿음으로 그 느낌을 정당화했다.
이렇게 새로운 종교적 교리는 평균적인 중산층의 느낌을 표현했을 뿐만 아니라, 이 태로를 합리화하고 체계화하여 그 느낌을 더욱 확대하고 강화했다. 하지만 이 새로운 교리는 그 이상의 일을 했다. 즉 불안에 대처하는 방법도 개인에게 알려주었다. 자신의 무력함과 본성의 사악함을 인정하고, 자신의 생애를 그 죗값으로 여기고, 극도로 자신을 비하하고 끊임없이 노력하면 회의와 불안을 극복할 수 있다고 가르친 것이다. 또한 신에게 완전 복종하면 신의 사랑을 받을 수 있고, 적어도 신이 구원하기로 결정한 사람들 가운데 자기도 속해 있을 거라는 희망은 가질 수 있다고 가르쳤다. 프로테스탄티즘은 겁먹고 뿌리째 뽑혀 고립된 개인, 새로운 세계와 관계를 맺고 거기에 적응해야 하는 개인의 인간적 욕구에 대한 해답이었다. 경제적 · 사회적 변화로 생겨났고 종교적 신조로 더욱 강화된 새로운 성격 구조가 이번에는 꺼꾸로 사회적 · 경제적 발전을 촉진하는 중요한 요인이 되었다. 이 성격 구조에 뿌리를 두고 있던 바로 그 자질들 - 일하려는 충동, 절약하려는 열정, 가외의 개인적 힘을 얻기 위해 자신의 삶을 기꺼이 도구로 삼으려는 태도, 금욕주의, 강박적 의무감 - 은 자본주의 사회에서 생산력이 된 성격 특성들이었다. 그것이 없었다면 근대의 경제 발전과 사회 발전은 생각할 수도 없는 일이었다. 인간의 에너지가 구체적인 형태로 형성된 것이 바로 그 특징들이었다. 그 특정한 형태를 취함으로써 인간의 에너지는 사회 과정에서 생산력의 하나가 되었다. 새로 형성된 성격 특성에 따라 행동하는 것은 경제적 필요라는 관점에서 보면 유리했다. 그런 행동은 이 새로운 성격 유형의 요구와 불안에 대응했기 때문에 심리적으로도 만족스러웠다. 이 원칙을 좀 더 일반적인 말로 표현하면 다음과 같아질 것이다. 사회 과정은 개인의 생활양시, 즉 타인 및 일과의 관게를 결정함으로써 그의 성격 구조를 형성한다. 종교적이든 철학적이든 정치적읻든, 새로운 이념은 성격 구조의 이런 변화를 낳은 결과이고, 이렇게 바뀐 성격 구조에 호소하여 그것을 강화하고 충족하고 안정시킨다. 새로 형성된 성격 특성은 다시 경제 발전을 촉진하는 중요한 요인이 되고, 사회 과정에 영향을 미친다. 원래 그 성격 특성들은 새로운 경제력의 위협에 대한 반응으로 생겨난 것이지만, 서서히 새로운 경제 발전을 촉진하고 강화하는 생산력이 되는 것이다.
p115
예를 들면 우리는 신앙의 자유가 자유의 최후 승리라고 믿는다. 신앙의 자유는 자신의 양심에 따라 신을 숭배하는 것을 허락하지 않은 교회와 국가 권력에 대한 승리지만, 근대인은 자연과학의 방법으로 개연성이 입증되지 않은 것을 믿는 내적 능력을 대부분 잃어버렸다는 사실을 우리는 충분히 인식하지 못하고 있다.
p120
중세의 사회 체제에서 자본은 인간의 하인이었지만, 근대의 사회 체제에서는 인간의 주인이 되었다. 중세의 세계에서 경제 활동은 목적을 이루기 위한 수단이었다. 목적은 삶 자체, 또는 카톨릭교회가 이해한 바와 같이 인간의 영적 구원이었다. 경제 활동은 필요한 것이고, 재물도 신의 목적에 이바지할 수 있지만, 모든 외적 활동은 삶의 목적을 촉진하는 경우에만 의미와 존엄성을 갖는다. 그 자체를 위한 경제 활동과 소유욕은 중세 사상가에게는 비합리적인 것으로 여겨졌지만, 근대 사상가에게는 오히려 그런 활동과 욕망이 없는 것이 비합리적인 것으로 생각되었다.
자본주의에서 경제 활동과 성공과 물질적 획득은 그 자체가 목적이 된다. 자신의 행복이나 구원을 위해서가 아니라 경제 체제의 발전에 기여하고 자본을 축적하는 것 자체를 목적으로 삼는 것이 인간의 운명이 된다. 인간은 경제라는 거대한 기계의 톱니 - 그가 자본을 많이 갖고 있다면 중요한 톱니가 되고, 자본을 갖고 있지 않다면 하찮은 톱니가 된다 - 가 되었지만, 항상 외부의 목적에 이바지하는 톱니다. 인간을 초월한 목적에 자신을 이토록 기꺼이 바치도록 마음의 준비를 시킨 것은 사실 프로테스탄티즘이었다. 물론 경제 활동의 이 같은 우월성을 인정하는 것만큼 루터나 칼뱅의 정신과 동떨어진 것은 없었지만, 그들은 신학적 가르침 속에서 인간의 정신적 척추인 존엄감과 자존심을 꺽어버리고 활동의 목적은 자기 자신 외에는 존재하지 않는다고 가르침으로써, 상황이 이런 식으로 발전할 토대를 마련해주었다.
앞 장에서 살펴보았듯이, 루터의 가르침에서 주된 요점의 하나는 그가 인간성의 사악함을 강조하고, 인간의 의지와 노력이 아무 쓸모도 없다는 것을 강조한 것이었다. 칼뱅도 인간의 사악함을 강조했고, 인간은 최대의 자신의 자존심을 굴복시켜야 한다는 생각을 그의 사상 체계의 중심에 놓았다. 더 나아가 인간 생활의 목적은 신의 영광을 위한 것이지 자기 자신을 위한 것은 아니라고 설파했다. 그렇게 루터와 칼뱅은 심리적으로 인간이 근대 사회에서 맡아야 할 역할 - 자신이 무의히하다고 느끼고, 자신의 목적이 아닌 목적을 위해서만 자신의 삶을 종속시킬 각오를 하는 것 - 을 준비시켰다. 인간은 일단 정의도 사랑도 상징하지 않는 신의 영광을 위한 수단에 불과한 존재가 되면, 경제적 기계 - 그리고 결국에는 '총통' - 의 하인 역할도 충분히 받아들일 수 있게 된다.
경제적 목적을 위한 수단으로 개인을 경시하는 것은 자본 축적을 경제 활동의 목적으로 삼는 자본주의적 생산 방식의 특성에 바탕을 두고 있다. 사람은 이익을 위해 일하지만, 그가 얻은 이익은 소비되지 않고 새 자본으로 투자된다. 이렇게 늘어난 자본은 새로운 이익을 가져오고, 이 이익은 다시 투자된다. 이익과 투자는 이렇게 다람쥐 쳇바튀 돌 듯 계속된다. 물론 사치를 위해 돈을 쓰거나 '과시적인 낭비'로 돈을 쓰는 자본가들은 언제나 존재했다. 하지만 자본주의의 전형적인 대표자들은 소비가 아니라 일을 즐겼다. 자본을 소비하는 대신 축적하는 이 원칙은 우리의 근대 산업 체제가 이룩한 위대한 업적의 전제다. 사람이 일에 대해 금욕적인 태도를 갖고 있지 않았다면, 또한 경제 체제의 생산력을 발달시키기 위해 자신의 성과를 투자하려는 욕망을 갖고 있지 않았다면, 우리는 자연을 통제하는 일에서 이렇게 많은 진보를 이룩하지 지 못했을 것이다. 우리가 물질적 욕구를 충족시키기 위한 끊임없는 투쟁이 마침내 막을 내리게 될 미래를 역사상 처음으로 마음속에 그릴 수 있게 된 것도 사회의 생산력이 이렇게 증대했기 때문이다. 하지만 자본 축적 자체를 위해 일한다는 원칙이 객관적으로는 인류의 진보에 엄청난 가치를 갖고 있다 해도, 주관적으로는 인간으로 하여금 초개인적인 목적을 위해 일하게 만들었고, 인간을 자기가 만든 기계의 하인으로 전락시켰으며, 그리하여 자기가 보잘것없고 무력하다는 느낌을 인간에게 안겨주었다.
p127
근대인은 자아를 최대한 주장하는 것이 특징인 것 같지만, 실제로 그의 자아는 약해져서 전체 인격의 다른 부분은 모두 제외하고 전체 자아의 일부인 지성과 의지력으로 축소되었다.
자연에 대한 인간의 지배력은 놀랄 만큼 강해졌지만, 사회는 자기가 창조한 그 힘을 통제하지 못하고 있다. 우리의 생산 체계는 기술적 측면에서는 합리적이지만 사회적 측면에서는 비합리적이다. 경제 위기, 실업, 전쟁이 인간의 운명을 지배한다. 인간은 자신의 세계를 건설했다. 공장과 집을 세우고, 자동차와 옷을 생산하고, 곡식과 과일을 지배한다. 하지만 인간은 자신의 손으로 만든 생산품에서 멀어졌다. 인간은 이제 더 이상 자기가 만든 세계의 주인이 아니다. 반대로 인간이 만든 시계가 그의 주인이 되었고, 그 주인 앞에 인간은 고개를 숙이고, 될 수 있는 한 아양을 떨며 속이려 애쓴다. 인간의 손으로 만든 것이 인간의 신이 되었다. 그는 자기 이익에 휘둘리는 것 같지만, 실제로는 모든 구체적 능력을 가진 그의 전체적인 자아는 그의 손으로 만들어진 그 기계의 목적을 달성하기 위한 하나의 도구가 되었다. 인간은 여전히 자기가 세상의 중심이라는 환상을 품지만, 일찍이 선조들이 신에 대해 의식적으로 느꼈던 무력감을 온몸으로 느끼고 있다.
p129
경제적 관계만이 아니라 인간적 관계도 이런 소외의 성격을 띤다. 그 관계는 인간 사이의 관계가 아니라 사물 사이의 관계와 같은 성격을 띤다. 하지만 서로 상대를 수단으로 이용하고 소외시키는 것은 이런 정신을 보여주는 실례 가운데 가장 중요하고 가장 파괴적인 것은 아마 개인과 그 자신 사이의 관계일 것이다. 사람은 상품을 팔 뿐만 아니라 자신까지 팔고, 자신이 상품이라고 느낀다. 육체노동자는 자신의 육체적 에너지를 팔고, 상인과 의사와 사무원은 '인격'을 판다. 그들이 생산품이나 용역을 팔기 위해서는 '인격'을 갖고 있어야 한다. 이 인격은 남의 마음에 드는 것이어야 하지만, 그 밖에도 소유자는 수많은 요구를 충족시켜야 한다. 그는 에너지와 창의성, 그 밖에 자신의 특별한 지위가 요구하는 이런저런 것들을 갖추어야 한다. 다른 상품과 마찬가지로 이런 인간적 자질들의 가치, 나아가 그 존재 자체까지 결정하는 것은 시장이다. 어떤 사람이 제공하는 자질들이 아무 쓸모도 없으면 그는 쓸모없는 사람이다. 설령 사용 가치를 지니고 있더라도 시장에서 팔리지 않는 상품은 무가치한 것과 마찬가지다. 따라서 자신감이나 '자아의식'은 남들이 그 사람을 어떻게 생각하는지를 알려주는 표시일 뿐이다. 시장에서의 인기나 성공과는 관계없이 그의 가치를 확신하는 것은 '그'가 아니다. 남들이 그를 원하면 그는 쓸모 있는 인간이고, 인기가 없으면 쓸모없는 인간이다. 자기 평가가 이처럼 '인격'의 성공에 달려 있는 것이야말로 인기가 근대인에게 그토록 엄청난 중요성을 갖는 이유다. 어던 실제적인 문제에서 남보다 앞서가느냐 아니냐뿐만 아니라, 자존심을 유지할 수 있느냐 없느냐 또는 열등감의 구렁텅이에 빠지느냐 아니냐도 인기에 달려 있다.
p147
이 점을 좀 더 분명히 하기 위해 '신경증적(neurotic)'이라는 용어와 '정상적인(normal)' 또는 '건강한(healthy)'이라는 용어를 잠깐 검토하는 것이 유용할 듯싶다.
'정상적인' 또는 '건강한'이라는 용어는 두 가지로 정의할 수 있다. 첫째, 기능을 제대로 발휘하는 사회의 관점에서 보면 그 사회에서 맡아야 할 사회적 역할을 수행할 수 있는 사람은 정상적인 또는 건강한 사람이라고 부를 수 있다. 좀 더 구체적으로 말하면, 이것은 그가 그 특정한 사회에서 요구되는 방식으로 일할 수 있다는 것을 의미하고, 한 걸음 더 나아가 사회의 재생에 참여할 수 있다는 것, 즉 가정을 꾸릴 수 있다는 것을 의미한다. 둘째, 개인의 관점에서 보면 우리는 건강 또는 정상적인 상태를 개인의 성장과 행복의 최고 단계로 생각한다.
주어진 사회의 구조가 개인이 행복해질 수 있는 최고의 가능성을 제공했다면, 두 관점이 일치할 것이다. 하지만 우리 사회를 포함하여 우리가 아는 대부분의 사회는 그렇지 않다. 개인의 성장이라는 목표 달성을 어느 정도나 촉진시키는지는 사회마다 다르지만, 사회의 원활한 기능과 개인의 완전한 발전이라는 두 가지 목표는 일치하지 않는다. 이런 사실 때문에 건강에 대한 두 개념을 뚜렷이 구별할 필요가 있다. 하나는 사회적 필요의 지배를 받고, 또 하나는 개인 생활의 목표에 관한 규범과 가치관의 지배를 받는다.
불행하게도 이 차이는 종종 무시된다. 정신과 의사들은 대부분 그들의 사회 구조를 너무나 당연하게 받아들이기 때문에, 사회에 적응하지 못하는 사람을 가치가 떨어지는 존재로 생각한다. 반면에 잘 적응하는 사람은 인간적 가치 척도의 관점에서 더 쓸모 있는 사람으로 여긴다. 우리가 정상적이라는 개념과 신경증적이라는 개념을 구별해서 보면 다음과 같은 결론에 도달할 것이다. 즉 잘 적응한다는 점에서 정상적인 사람이 인간적 가치라는 면에서는 신경증적인 사람보다 덜 건강한 경우가 많다. 그는 사회에 잘 적응한다 하더라도 어떻게 해서든 남들의 기대에 부응하는 사람이 되기 위해 자아를 포기하는 대가를 치르고 있는 것이다. 진정한 개성과 자연스러움은 모두 사라졌을 것이다. 반면에 신경증적인 사람은 자아를 지키기 위한 싸움에서 완전히 굴복할 준비가 되어 있지 않은 사람으로 그 특징을 묘사할 수 있다. 물론 자신의 개체적 자아를 구하려는 그의 시도는 성공하지 못했고, 그는 자신의 자아를 생산적으로 표현하는 대신 신경증적 증상을 통해, 그리고 환상적인 생활로 물러가 그 속에서 구원을 추구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그는 인간적 가치라는 관점에서 보면 개성을 완전히 잃어버린 정상적인 사람보다는 덜 불구자다. 말할 나위도 없는 일이지만, 신경증 환자가 아니면서도 적응 과정에서 개성을 잃지 않은 사람도 있다. 하지만 신경증적인 사람에게 찍혀 있는 낙인은 아무 근거도 없는 것 같고, 신경증 환자를 사회적 효율성이라는 관점에서 생각할 때만 그 낙인이 정당회되는 듯하다. 사회 전체에 관해서 말하면, '신경증적'이라는 용어는 이 후자의 의미로는 쓰일 수 없다. 사회 구성원들이 사회적으로 기능을 발휘하지 않으면 그 사회는 존재할 수 없기 때문이다. 하지만 인간적 가치라는 관점에서 보면, 그 구성원들이 인격의 성장 과정에서 심각한 손상을 입고 기능을 제대로 발휘하지 못하는 사회는 그런 의미에서 신경증적이라고 부를 수 있다. '신경증적'이라는 용어는 사회적 기능의 결핍을 나타낼 때 자주 쓰이기 때문에, 사회가 신경증적이라고 말하기보다는 인간의 행복과 자기실현에 불리한 사회라고 말하는 편이 낫다.
p159
프로이트는 오랫동안 이성적 공격이라는 현상에 거의 관심을 두지 않았지만, 알프레드 아들러는 우리가 여기서 논하는 경향을 그의 사상 체계의 중심에 놓았다. 하지만 그것을 가학-피학증으로 다루지 않고 '열등감'과 '권력욕'으로 다루었다. 아들러는 이런 현상의 합리적인 측면만 보고 있다. 우리는 자신을 비하하고 하찮게 만드는 비합리적인 경향에 대해 말하지만, 그는 열등감을 어린아이의 일반적인 무력함과 신체적 열등감 같은 실제적 열등성에 대한 적절한 반작용으로 생각한다. 그리고 우리는 권력욕을 타인을 지배하려는 비합리적인 충동의 표출이라고 생각하는 데 대해 아들러는 그것을 완전히 합리적인 결정 너머에 있는 것을 못 보고 있다. 그는 동기 부여의 복잡성에 대한 귀중한 통찰에 이바지했지만 항상 표면에만 남아 있을 뿐, 프로이트가 했던 것처럼 비합리적 충동의 심연 속으로 결코 내려가지 않았다.
p170
확실히 사람들을 지배할 수 있는 힘은 순전히 물질적인 의미에서 우월한 힘의 표현이다. 내가 다른 사람을 죽일 수 있는 힘을 갖고 있다면, 나는 그보다 '강한'것이다. 하지만 심리적 의미에서 보면 '권력욕은 강함이 아니라 오히려 약함에 뿌리를 박고 있다.' 그것은 개체적 자아가 홀로 서서 살아갈 수 없다는 표현이다. 그것은 진정한 힘이 부족할 때 2차적인 힘을 얻으려는 필사적인 노력이다.
p178
하지만 권위주의적 성격자가 권위에 맞서 싸우는 것은 본질적으로 반항이다. 그것은 권위와 싸움으로써 자신을 주장하고 자신의 무력감을 극복하려는 노력이다. 하지만 복종에 대한 갈망은 의식적으로든 무의식적으로든 여전히 존재한다. 권위주의적 성격자는 결코 '혁명가'가 아니다. 나는 그를 '반역자'라고 부르고 싶다. '급진주의'에서 극단적인 권위주의로 뭐라고 설명할 수 없게 표변하여 피상적인 관찰자를 당혹하게 만드는 개인과 정치 운동이 많다. 심리학적으로 보면 이들은 전역적인 '반역자'다.
p202
가짜 생각이 완벽하게 논리적이고 합리적일 수도 있다. 그것의 허위성이 반드시 비논리적인 요소로 나타나는 것은 아니다. 어떤 행동이나 감정을 실제로 결정하는 것은 비합리적이고 주관적인 요소들이지만, 그것을 합리적이고 현실적인 근거에서 설명하려는 합리화에서 이것을 고찰할 수 있다. 합리화는 사실이나 논리적 사고의 법칙과 모순될 수도 있다. 하지만 합리화 그 자체는 논리적이고 합리적인 경우가 많을 것이다. 그렇다면 그것의 비합리성은 어떤 행동을 유발한 것처럼 위장한 동기가 실은 진짜 동기가 아니라는 사실에 있을 뿐이다.
따라서 어떤 사람의 진술의 논리성을 판단하는 것만으로는 그것이 합리화인지 아닌지 알 수 없고, 그 사람의 내면에서 작동하는 심리적 동기도 고려해야 한다. 결정적으로 중요한 점은 '무엇'을 생각하느냐가 아니라 '어떻게 생각하느냐 하는 것이다. 적극적 생각의 결과인 사고는 항상 새롭고 독창적이다. 독창적이라는 말은 다른 사람이 이제껏 생각해본 적이 없다는 의미에서가 아니라, 생각하는 사람이 자신의 외부 세계에서나 내부 세계에서 뭔가 새로운 것을 발견하는 수단으로 사고를 이용했다는 의미에서 독창적인 것이다. 합리화에는 본질적으로 이같은 발견과 폭로의 자질이 결여되어 있다. 합리화는 단지 자신 속에 존재하는 감정적 편견을 확인해줄 뿐이다. 합리화는 현실을 통찰하는 수단이 아니라, 자신의 소망을 기존의 현실과 조화시키려는 사후의 시도다.
p224
1918년에 전승국들이 독일을 너무 가혹하게 대한 것이 나치즘이 대두한 주요 원인의 하나라고 말하는 사람들이 많았다. 그러나 이 주장에는 단서가 필요하다. 독일인 대다수가 강화조약이 부당하다고 느껴지만, 중산층은 몹시 분통하다는 반응을 보인 반면에 노동자 계급은 별로 억울해하지 않았다. 그들은 구체제에 반대해왔으며, 그런 그들에게 패전은 구체제의 패배를 뜻했다. 그들은 전쟁 때 용감하게 싸웠던 만큼 부끄러워할 이유는 전혀 없다고 느꼈다. 한편 군구제의 패배 덕분에 가능했던 혁명의 승리는 그들에게 경제적 · 정치적 · 인간적 이익을 가져다 주었다. 베르사유 조약에 대한 분노는 하류 중산층에 토대를 두고 있었는데, 그 국가주의적 분노는 사회적 열등감을 국가적 열등감에 투영한 하나의 합리화였다.
이런 투영은 히틀러 개인의 성장 과정에도 분명하게 드러나 있다. 그는 전형적인 하류 중산층의 대표자였고, 성공할 기회나 미래가 전혀 없는 보잘것없는 존재였다. 그는 낙오자의 신세를 아주 뼈저리게 느끼고 있었다. 《나의 투쟁》에서 그는 젊은 시절 자기가 '보잘것없는 인간', '이름도 없는 인간'이었다고 자주 말하고 있다. 이것은 본질적으로 그 자신의 사회적 지위 때문이었지만, 그는 그것을 국가의 상징 속에서 합리화시킬 수 있었다.
p239
강자에 대한 사랑과 무력한 약자에 대한 증오는 가학-피학적 성격의 전형적인 특징이고, 이것은 히틀러와 그 추종자들의 정치적 행동을 대부분 설명해준다.
p249
교육의 진정한 목적이 아이들의 내적 독립성과 개성, 성장과 본래 모습을 발전시키는 것이라면, 훈련이 반드시 자발성을 억압하는 결과로 이어지지는 않는다. 이런 교육이 성장기 아이들에게 부과할 수밖에 없는 제약은 일시적인 조치일 뿐이고, 사실은 그것도 성장과 발전 과정을 뒷받침하는 조치다.
p251
우리 사회에서 감정은 전반적으로 억압되어 있다. 창의적 사고가 - 다른 어떤 창조적 활동도 마찬가지지만 - 감정과 불가분의 관계를 갖는 것은 의심할 여지가 없지만, 감정 없이 생각하고 감정 없이 생활하는 것이 하나의 이상적인 태도가 되어버렸다. '감정적'인 것이 불안정하거나 정신적으로 불균형한 것과 같은 뜻이 되어버렸다. 이 기준을 받아들였기 때문에 개인은 매우 약해졌다. 그의 생각은 빈곤해지고 단조로워졌다. 한편 감정은 완전히 죽일 수 없기 때문에 인격의 지적인 측면과는 완전히 동떨어진 곳에 존재해야 한다. 그 결과는 값싸고 가식적인 감상성인데, 이 김상성을 가지고 영화와 대중가요는 감정에 굶주진 수백만 명의 소비자를 만족시키는 것이다.
우리 시대는 죽음을 부인하고, 그렇게 함으로써 삶의 근본적인 측면 한 가지를 부인하고 있다. 우리 시대는 죽음과 고통에 대한 인식을 가장 강력한 삶의 자극제이자 인류가 서로 단결하는 토대로 삼고, 기쁨과 열정이 강렬함과 깊이를 갖기 위해서는 반드시 겪어야 할 경험으로 삼기는커녕 개인에게 그 인식을 억압하도록 강요하고 있다. 하지만 억압이 항상 그렇듯이, 억압된 요소는 시야에서 사라져도 존재하기를 그만두는 것이 아니다. 따라서 죽음의 공포는 우리 사이에 불법으로 존재한다. 죽음의 공포는 아무리 그것을 부인하려고 애써도 여전히 살아 있지만, 억압되어 있기 때문에 불모 상태로 남아 있다. 그것은 다른 경험들이 단조로워지는 원인이고, 삶에 널리 퍼져 있는 불안감의 원인이기도 하다. 감히 말하건대, 그것은 미국 국민이 장례식에 터무니없이 많은 돈을 쓰는 이유를 설명해준다.
p255
오늘날 쓰이는 교육 방법 가운데 독창적인 생각을 실제로 방해하는 몇 가지를 잠깐 언급하고 싶다. 하나는 사실에 대한 지식, 아니 그보다는 정보를 강조하는 것이다. 사실을 많이 알수록 현실도 잘 알 수 있다는 한심한 미신이 널리 퍼져 있다. 아무 상관도 없는 산발적인 사실 수백 개를 학생들의 머릿속에 주입한다. 학생들은 점점 더 많은 사실을 배우는 데 시간과 정력을 빼앗기기 때문에 생각할 짬이 거의 없어진다. 물론 사실에 대한 지식이 없는 생각은 공허하고 허구적이다. 하지만 '정보'만으로는 정보가 없는 것만큼이나 생각을 방해할 수 있다.
독창적인 생각을 방해하는 또 하나의 방법은 모든 진실을 상대적인 것으로 보는 것이다. 진실은 형이상학적 개념으로 이해되고 누군가가 진실을 발견하고 싶다고 말하면 오늘날의 '진보적인' 사상가들은 그를 시대에 뒤떨어졌다고 생각한다. 진실은 전반적으로 주관적인 문제, 거의 취향에 따른 문제라고 주장된다. 과학적인 노력은 주관적인 요소에서 분리되어야 하고, 그 노력의 목적은 열정이나 관심을 배제하고 세계를 바라보는 것이다. 과학자는 마치 의사가 환자에게 접근할 때처럼 손을 소독하고 사실에 접근해야 한다. 상대주의는 경험주의나 실증주의라는 이름으로 나타나는 경우가 많고, 단어의 정확한 용법에 관심이 많다고 스스로 자랑하기도 하지만, 이 상대주의의 결과는 생각이 그 본질적인 자극 - 생각하는 사람의 소망과 관심 - 을 상실하는 것이다. 그 대신 생각은 '사실'을 기록하는 기계가 된다. 실제로 생각이 일반적으로 물질생활을 지배해야 할 필요성에서 발달해온 것처럼, 진실의 탐구도 개인과 사회 집단의 이해관계와 욕구에 뿌리를 두고 있다. 이런 이해관계가 없다면 진실을 찾기 위한 자극제가 없어질 것이다. 진실에서 더 많은 이익을 얻는 집단은 항상 존재하는데, 그들의 대표는 인류 사상의 선구자였다. 반대로 진실을 감추어야만 더 많은 이익을 얻는 집단도 존재하는데, 이 경우에만 이해관계가 진실을 잡는 데 해가 된다. 따라서 문제는 이해관계가 걸려 있다는 것 자체가 아니라, '어떤 종류'의 이해관계가 걸려 있느냐 하는 것이다. 진실에 대한 갈망이 모든 인간에게 어느 정도 존재하는 것은 모든 인간이 진실에 대한 욕구를 가지고 있기 때문이라고 말할 수 있다.
자신의 대한 환상은 혼자 걸을 수 없는 사람에게는 유익한 지팡이가 될 수 있다. 하지만 지팡이는 사람을 더욱 약하게 만들 뿐이다. 개인의 가장 큰 힘은 자신의 인격을 최대한 완성시키는 데 바탕을 둔다. 그것은 자신에게최대한 투명성을 유지하는 것을 의미하기도 한다. "너 자신을 알라"는 말은 이간의 힘과 행복을 겨냥한 근본적인 명령의 하나다.
p263
지도자가 흥분을 약속하고 개인의 삶에 의미와 질서를 준다는 정치적 기구와 상징을 제시하기만 하면, 어떤 이념이나 지도자도 기꺼이 받아들이는 것, 그것이 바로 우리 문화를 토대부터 위협하는 위험이다. 자동인형 같은 인간의 절망은 파시즘과 정치적 목적을 키우기 좋은 비옥한 토양이다.
p265
우리의 분석은 자유에서 새로운 의존으로 이어지는 불가피한 순환이 존재한다는 결론을 내릴 것인가? 모든 원초적 유대로부터의 자유는 개인을 너무 고독하고 고립된 존재로 만들기 때문에, 어쩔 수 없이 그는 새로운 유대 속으로 도피해야 할 것인가? '독립'은 '고립'과 같고 자유는 두려움과 같은 것일까? 혹은 개인이 독립된 자아로 존재하지만 고립되지는 않고 세상이나 타인이나 자연과 결합한 상태로 남아 있는 적극적인 자유라는 상태가 존재할까?
우리는 긍정적인 대답이 있다고 믿는다. 자유가 성장하는 과정은 악순환을 이루지 않고, 인간은 자유로우면서도 외롭지 않을 수 있고, 비판적이지만 의심으로 가득 차지 않을 수도 있고, 독립적이지만 인류를 구성하는, 없어서는 안 될 일부일 수도 있다고 믿는다. 인간은 자신의 자아를 실현하고 자기 자신이 됨으로써 이 적극적인 자유를 얻을 수 있다. 그러면 자아의 실현이란 무엇인가? 관념론 철학자들은 지적인 통찰을 통해서만 자아를 실현할 수 있다고 믿었다. 그들은 인간의 본성을 이성이 억누르고 감시할 수 있도록 인격을 분할해야 한다고 주장했다. 하지만 이렇게 분할한 결과 인간의 감정생활만이 아니라 지적 능력까지도 제대로 기능을 발휘하지 못하게 되었다. 이성은 자신의 죄수인 본성을 감시하는 간수가 됨으로써 그 자신도 죄수가 되어버렸다. 그리하여 인격의 두 측면인 이성과 감정은 둘 다 절름발이가 되었다. 자아의 실현은 사고 작용만이 아니라 인격 전체의 실현을 통해, 즉 감정적 잠재력과 지적 잠재력을 적극적으로 표현함으로써 이루어진다고 우리는 믿는다. 이 잠재력은 모든 사람에게 존재하지만, 겉으로 표현되는 만큼만 현실이 된다. 다시 말하면 '적극적인 자유는 통합된 인격의 자발적인 활동에 있는 것이다.'
p268
자발적인 활동이 어째서 자유라는 문제의 해답이 될 수 있는가? 앞에서 우리는 소극적인 자유가 개인을 고독한 존재로 만들고, 그래서 개인과 세계의 관계는 멀어지고 불신으로 가득 차며, 개인의 자아는 약해지고 끊임없이 위협받는다고 말햇다. 자발적인 활동은 인간이 본래 모습을 희생하지 않고 고독의 공포를 극복할 수 있는 한 가지 방법이다. 자아를 자발적으로 실현함으로써 인간은 자신을 다시 세계와 - 인간과 자연 및 자신과 - 통합하기 때문이다. 사랑은 그런 자발성을 이루는 가장 중요한 요소다. 이 사랑은 자신을 다른 사람 속에 용해시키는 것으로서의 사랑도 아니고, 다른 사람을 소유하는 것으로서의 사랑도 아니다. 다른 사람을 자발적으로 긍정하는 것으로서의 사랑, 개체적 자아를 보존하는 것을 토대로 하여 그 개인을 다른 사람과 결합시키는 것으로서의 사랑이다. 사랑의 동적인 성질은 바로 이 양극성에 있다. 사랑은 분리를 극복하고 싶은 욕구에서 생겨나 완전한 일체로 이어진다. 하지만 개인이 제거되지는 않는다. 일은 자발성을 이루는 또 하나의 구성요소다. 이 일은 고독에서 벗어나기 위한 강방적 활동으로서의 일도 아니고, 부분적으로는 자연을 지배하고 부분적으로는 인간의 손으로 만든 생산품을 숭배하고 그 생산품으로 자연을 노예화하는 관계로서의 일도 아니고, 인간이 창조 행위를 통해 자연과 하나가 되는 창조로서의 일이다. 사랑과 일에 적용되는 것은 모든 자발적 행동에도 적용된다. 감각적 쾌락을 자각하는 것이든 공동체의 정치 활동에 참여하는 것이든 자발적 행동에는 모두 적용된다. 그것은 자아의 개별성을 확인하는 동시에 인간과 자연을 자아와 결합시킨다. 자유에 내재하는 기본적인 양분성, 즉 개성의 탄생과 고독의 고통은 인간의 자발적인 행동으로 더 높은 차원에서 해소된다.
p271
인간은 평등하게 태어나지만 서로 다르게 태어나기도 한다. 이 차이의 토대는 부모에게 물려받은 생리적 · 정신적 장비다. 인간은 그 장비를 가지고 삶을 시작하고, 살아가면서 마주치는 수많은 상황과 특별한 경험을 거기에 덧붙인다. 인격의 이러한 개인적 토대는 두 유기체가 육체적으로 결코 같지 않듯이 다른 누구와도 거의 같지 않다. 자아의 진정한 성장은 항상 이 특별한 토대 위에서의 성장이다. 그것은 유기적 성장이고, 오직 이 한 사람에게만 특유한 세포핵이 펼쳐지는 것이다.
p282
민주주의의 실현을 위한 조건을 확립하는 데 가장 큰 어려움의 하나는 계획 경제와 각 개인의 적극적인 협력이 상충하는 데에 있다. 큰 규모의 산업 체계처럼 넓은 범위의 계획 경제는 엄청난 규모의 중앙집권을 요구하고, 그 결과 이 집중화된 기구를 관리할 관료 체계가 필요해진다. 한편 각 개인과 전체 체계의 가장 작은 단위들이 적극적으로 관리하고 협력하려면 많은 분권화가 필요하다. 상부의 계획이 하부의 적극적인 참여와 융합되지 않으면, 또한 사회생활의 물줄기가 밑에서 위로 끊임없이 흐르지 않으면 계획 경제는 다시 민중을 조종하는 체제로 변할 것이다. 중앙집권화와 분권화를 결합하는 이 문제를 해결하는 것은 사회의 주요 과제 가운데 하나다. 하지만 그것은 우리가 이미 해결하여 자연을 거의 완전히 제어할 수 있게 해준 기술적 문제 못지않게 충분히 해결할 수 있는 문제인 것은 확실하다. 하지만 그 문제는 우리가 그렇게 해야 할 필요성을 분명히 인식하고, 또한 사람들에 대한 신뢰를 가지고 그들이 인간으로서 자신의 진정한 이익을 돌볼 능력이 있다고 믿어야만 해결될 수 있을 것이다.
인간이 사회를 제어하고 경제 기구를 인간의 행복이라는 목적에 종속시킬 때에만, 또한 인간이 사회 과정에 적극적으로 참여할 때에만 인간은 지금 자신을 절망에 빠뜨리고 있는 고독과 무력감을 극복할 수 있다. 인간은 오늘날 가난에 시달리기보다는 오히려 자기가 큰 기계의 톱니나 자동인형이 되어버렸다는 사실, 삶이 공허해지고 무의미해졌다는 사실 때문에 괴로워한다. 민주주의가 후퇴하지 않고 공세를 취하여 지난 수백 년 동안 자유를 위해 싸운 사람들이 목표로 삼았던 것을 실현해야만 모든 권위주의 체제를 이길 수 있을 것이다. 민주주의는 인간 정신이 가질 수 있는 가장 강한 하나의 신념, 생명과 진리에 대한 신념, 그리고 개체적 자아의 적극적이고 자발적인 실현으로서의 자유에 대한 신념을 사람들에게 심어줄 수 있어야만 허무주의의 세력을 이겨낼 수 있을 것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