https://www.weforum.org/agenda/2020/03/a-visual-history-of-pandemics/

 

A visual history of pandemics

As humans have spread across the world, so have infectious diseases.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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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Even in the modern era, outbreaks are nearly constant, though not every outbreak reaches pandemic level as the coronavirus has.
  • This visualization outlines some of history’s most deadly pandemics, from the Antonine Plague to COVID-19.

Image: Visual Capitalist

The History of Pandemics

Pan·dem·ic /panˈdemik/ (of a disease) prevalent over a whole country or the world.

As humans have spread across the world, so have infectious diseases. Even in this modern era, outbreaks are nearly constant, though not every outbreak reaches pandemic level as the Novel Coronavirus (COVID-19) has.

Have you read?

Today’s visualization outlines some of history’s most deadly pandemics, from the Antonine Plague to the current COVID-19 event.

A Timeline of Historical Pandemics

Disease and illnesses have plagued humanity since the earliest days, our mortal flaw. However, it was not until the marked shift to agrarian communities that the scale and spread of these diseases increased dramatically.

Widespread trade created new opportunities for human and animal interactions that sped up such epidemics. Malaria, tuberculosis, leprosy, influenza, smallpox, and others first appeared during these early years.

The more civilized humans became – with larger cities, more exotic trade routes, and increased contact with different populations of people, animals, and ecosystems – the more likely pandemics would occur.

Here are some of the major pandemics that have occurred over time:

Note: Many of the death toll numbers listed above are best estimates based on available research. Some, such as the Plague of Justinian, are subject to debate based on new evidence.

Despite the persistence of disease and pandemics throughout history, there’s one consistent trend over time – a gradual reduction in the death rate. Healthcare improvements and understanding the factors that incubate pandemics have been powerful tools in mitigating their impact.

Wrath of the Gods

In many ancient societies, people believed that spirits and gods inflicted disease and destruction upon those that deserved their wrath. This unscientific perception often led to disastrous responses that resulted in the deaths of thousands, if not millions.

In the case of Justinian’s plague, the Byzantine historian Procopius of Caesarea traced the origins of the plague (the Yersinia pestis bacteria) to China and northeast India, via land and sea trade routes to Egypt where it entered the Byzantine Empire through Mediterranean ports.

Despite his apparent knowledge of the role geography and trade played in this spread, Procopius laid blame for the outbreak on the Emperor Justinian, declaring him to be either a devil, or invoking God’s punishment for his evil ways. Some historians found that this event could have dashed Emperor Justinian’s efforts to reunite the Western and Eastern remnants of the Roman Empire, and marked the beginning of the Dark Ages.

Luckily, humanity’s understanding of the causes of disease has improved, and this is resulting in a drastic improvement in the response to modern pandemics, albeit slow and incomplete.

Importing Disease

The practice of quarantine began during the 14th century, in an effort to protect coastal cities from plague epidemics. Cautious port authorities required ships arriving in Venice from infected ports to sit at anchor for 40 days before landing — the origin of the word quarantine from the Italian “quaranta giorni”, or 40 days.

One of the first instances of relying on geography and statistical analysis was in mid-19th century London, during a cholera outbreak. In 1854, Dr. John Snow came to the conclusion that cholera was spreading via tainted water and decided to display neighborhood mortality data directly on a map. This method revealed a cluster of cases around a specific pump from which people were drawing their water from.

While the interactions created through trade and urban life play a pivotal role, it is also the virulent nature of particular diseases that indicate the trajectory of a pandemic.

Tracking Infectiousness

Scientists use a basic measure to track the infectiousness of a disease called the reproduction number — also known as R0 or “R naught.” This number tells us how many susceptible people, on average, each sick person will in turn infect.

Measles tops the list, being the most contagious with a R0 range of 12-18. This means a single person can infect, on average, 12 to 18 people in an unvaccinated population.

While measles may be the most virulent, vaccination efforts and herd immunity can curb its spread. The more people are immune to a disease, the less likely it is to proliferate, making vaccinations critical to prevent the resurgence of known and treatable diseases.

It’s hard to calculate and forecast the true impact of COVID-19, as the outbreak is still ongoing and researchers are still learning about this new form of coronavirus.

Urbanization and the Spread of Disease

We arrive at where we began, with rising global connections and interactions as a driving force behind pandemics. From small hunting and gathering tribes to the metropolis, humanity’s reliance on one another has also sparked opportunities for disease to spread.

Urbanization in the developing world is bringing more and more rural residents into denser neighborhoods, while population increases are putting greater pressure on the environment. At the same time, passenger air traffic nearly doubled in the past decade. These macro trends are having a profound impact on the spread of infectious disease.

As organizations and governments around the world ask for citizens to practice social distancing to help reduce the rate of infection, the digital world is allowing people to maintain connections and commerce like never before.

Editor’s Note: The COVID-19 pandemic is in its early stages and it is obviously impossible to predict its future impact. This post and infographic are meant to provide historical context, and we will continue to update it as time goes on to maintain its accuracy.

https://news.joins.com/article/23722866

 

"일본 수의대, 한국인 학생 전원 '면접 0점' 주고 불합격시켜"

오캬야마이과대학 이마바리 캠퍼스에서 실시된 수의학부 A방식 추천입시에서 한국인 응시자 8명 전원을 불합격시켰다.

news.joins.com

 

이 기사 이후의 일본측 취재에 의해 추가로 밝혀진 사실을 보면 명백한 한국인 차별임이 분명하다.

1. 일단 불합격된 한국인 8명 중에, 필기시험 1등이 있었다.

2. 그리고 오카야마 이과대에서 내놓은 변명이 면접에서 일본어를 못해서 0점을 줬다고 했는데, 그 8명 중에는 오카야마 이과대학에서 실시한 일본어 웅변대회에 나가서 우승을 한 사람이 있었다. 

물론 웅변대회 다 외우고 나가서 우승할 수도 있는데, 일본어 회화가 안되는 이가, 필기 시험 만점 받고, 웅변대회 나가서 우승하고. 그럴 가능성이 얼마나 되겠는지?

명백한 인종차별이라 생각된다.

 

 이 책은 초반을 읽다가 상당히 오랜기간 그냥 냅뒀다. 그 이유는 재미가 없기도 하고, 이 뻔한 얘기를 계속 읽어야 하나? 라는 생각 때문이었다. 너무 피상적이기도 하고 알맹이가 없는 얘기를 군더더기처럼 반복하는 탓에 집중을 유지하기 힘들다.

 다행히 6장에서 8장까지는 내용이 괜찮다.

 이 책을 읽는데는 한 3시간쯤이면 될 듯 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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p50. 국민 평균 독서량 166위라는 성적표

 학제 공표가 있고 나서 약 14년 뒤인 1886년 3월, 일본은 '제국대학령'을 반포했다. 한 달 뒤에는 '소학교령'도 반포했다. 이로써 일본은 1차 산업혁명 시대에 살아남을 수 있는 힘을 기를 수 있었다. 이쯤에서 묻고 싶다.

 혹시 당신은 일본에서 누가 서양식 교육혁명을 본격적으로 시작하고 또 완성시켰는지 알고 있는가?

 이토 히로부미다.

 이쯤에서 또 묻고 싶다. 혹시 당신은 누가 21세기 일본 교육혁명을 시작하고 또 완성시키고 있는지 알고 있는가?

 아베 신조다.

 아베 신조가 가장 존경하는 인물은 '정한론征韓論'을 주장한 요시다 쇼인이다. 참고로 요시다 쇼인은 을사늑약과 경술국치를 주도한 이토 히로부미, 야마가타 아리모토, 가쓰라 다로 등을 길러냈다.

 아베 신조가 정치 롤모델로 삼고 있다는 외할아버지 기시 노부스케는 '평화헌법' 개정을 통해 일본을 군사 대국으로 만들어서 '대동아 공영권'을 다시 실현하자는 주장을 펼친, A급 전범이다. 아베 신조는 외할아버지의 유지를 받들어 '평화헌법'을 개정, 일본을 전쟁을 할 수 있는 국가로 만들고자 한다. 그리고 대동아 공영권을 회복하고자 한다. 혹시 당신은 대동아 공영권의 시작이 무엇인지 아는가? 한반도 재식민지화다.

 아베의 대표적 망언은 다음과 같다.

 "아베 내각은 일본의 식민 지배를 사죄한 무라야마 담화를 계승하지 않는다."

 "침략의 정의는 국가 간 관게에 따라 다르다."

 "도쿄 전범 재판은 일본법에 의한 것이 아니다. 연합군이 승자의 판단에 따라 단죄한 것이다."

 "(A급 전법이 합사된 야스쿠니 신사를 참배하면서) 나라를 위해 싸우고 고귀한 생명을 바친 영령들에게 존숭의 뜻을 표하는 것은 당연한 일이다."

 물론 아베 신조가 제2의 이토 히로부미가 될 수는 없을 것이다. 무엇보다 우리가 과거와 다르기 때문이다. 하지만 과연 앞으로도 그럴까?

 지금으로부터 약 165년 전, 일본은 서양의 흑선을 만나고 교육 혁명을 일으켜서 1차 산업혁명이 만든 새로운 시대의 흐름에 올라탔다. 그러고는 이내 군사 대국으로 변신, 대한제국을 멸망시키고 강제 지배를 시작했다.

 이쿠코 츠보야 뉴우에루 일본 국제 바칼로레아 대사는 일본 문부과학성 교육 재건 자문위원회 위원을 맡고 있고, 국제 바칼로레아를 일본 공교육에 도입하는 전반적 계획을 입안 추진하는 역할을 담당하고 있다. 그녀는 <좋은교사>와의 인터뷰에서 이렇게 말했다.

 "4차 산업혁명 시대에는 기존의 주입식 · 획일식 교육으로는 경쟁력을 가질 수 없습니다. (...) 일본에서는 국제 바칼로레아를 19세기에 개항할 수밖에 없도록 만들었던 미국 페리 제독의 흑선黑船이라고 봅니다. 1853년 미국 페리 제독이 흑선을 끌고 도쿄만에 나타나서 개항을 요구했고 이를 계기로 일본은 메이지 유신을 하게 되었습니다. 흑선은 일본에서 외부 충격을 기회로 삼아 내부 혁신을 성공시킨 상징으로 인식됩니다. 흑선이 오지 않았다면 일본은 어떻게 바뀌어야 하는지 상상해본 적이 없기 때문에 그렇게 단시간 내에 개혁을 할 수 없었을 것입니다. 국제 바칼로레아는 현 일본 교육의 대개혁을 성공시킬 수 있는 흑선입니다.

 이쿠코 츠보야 뉴우에루 일본 국제 바칼로레아 대사는 21세기 일본 교육혁명을 가리켜서 일본이 다시 한번 서양의 '흑선'을 만난 것이라고 밝혔다. 아마도 그녀의 말은 사실일 것이다.

 "역사는 반복된다"는 말이 있다. "역사를 잊은 민족에세 미래는 없다"는 말도 있다.

 앞으로 인류는 두 계급으로 나뉜다고 한다. 인공지능에게 지시를 내리는 계급과 인공지능에게 지시를 받는 계급.

 일본은 전자에 속하는 국민을 최대한 많이 배출해서 지금은 비교도 할 수 없는 강대국이 되고자 한다. 그리고 대동아 공영권을 회복하고자 한다. 아베 신조가 이토 히로부미를 본받아 2013년 교육혁명을 일으킨 이유다.

 일본의 국민 평균 독서량은 1년 기준 약 60권으로 미국, 유럽 다음으로 세계 최고 수준을 자랑한다. 이 세계 최고 수준의 독서 국가가 서양의 바칼로레아를 받아들여서 국민 독서의 질을 싱귤래리티대, 하버드 의대, 애드 아스트라 수준으로 올리려고 하고 있다.

 UN이 발표한 바에 따르면 우리나라는 국민 평균 독서량이 세계 166위다(2015년 기준). 16위가 아니다. 166위다. 게다가 우리의 독서 문화는 '단순히 눈으로 읽는' 정도다. 아니 이조차도 제대로 하지 않고 있다. 우리는 도대체 어떤 미래를 맞이하고 싶기에 이렇게 살고 있는가.

 

(개인 감상) 물론 독서량도 중요하지만, 현재 일본의 정책 기조는 역사적으로 부담되는 것은 모두 묻고 가자는 주의다. 후쿠시마도 그렇고, 이번에 코로나19 사태도 그렇고. 제 아무리 바칼로레아라는 교육 시스템이 훌륭하다고 해도 진실을 숨기는 부도덕함이 정당함을 이길 도리는 없다. 공부를 잘하기 전에 인간이 되라는 말이 있듯이, 아무리 우수한 교육 시스템을 들여와도 철학과 비전이 글러먹은 낡아빠진 메이지의 망령에 사로잡힌 아베 신조와 그 정치세력이 존재하는 한 일본의 미래는 매우 어둡다.

 

p69

 다시 알파고 이야기로 돌아가자. 도대체 서양은 왜 한국에서 알파고 쇼를 벌었던 걸까? 눈치 빠른 독자들은 이미 답을 얻었을 것이다. 중국과 일본에 이어 한국에도 인공지능 지식과 기술을 파고 싶어서다. 한국이 국가의 부를 인공지능에 쏟기 시작하면 철도 · 전기 · 자동차 · 선박 · 비행기 · 컴퓨터 · 스마트폰 때 그랬던 것처럼 동남아시아 · 중앙아시아 · 중동 · 아프리카 등도 국가의 부를 인공지능에 쏟게 된다는 사실을 잘 알고 있기 때문이다.

 어떤 독자들은 기분이 상할지도 모르겠다. 나도 이 내용을 쓰면서 기분이 좋지 않다. 아니 피눈물을 흐르는 기분을 느끼고 있다. 하지만 어쩌겠는가. 설령 욕을 먹더라도 작가가 사실을 써야 하지 않겠는가. 그렇게 독자들로 하여금 냉정하게 현실인식을 할 수 있게 도와야 하지 않겠는가. 그래야 독자들이, 아니 우리나라가 잠에서 깰 수 있지 않겠는가.

 만일 우리나라가 잠에서 깨어난다면, 인공지능 시대의 거인이 될 것이다. 자동차 · 선박 · 반도체 등에서 그랬던 것처럼 말이다. 나는 이런 심정으로 앞의 내용을 썼다. 나의 이 마음이 부디 잘 전달되었으면 한다.

 

(개인감상) 알파고 쇼를 한국에서 벌인 이유는 바로 "이세돌"때문이다. 당시 세계 1위는 중국의 "커제"였으며, 세계 랭킹 2위이자 당시 한국 랭킹 1위는 박정환이었다. 당시 이세돌의 한국 랭킹은 3위였으며, 세계 랭킹은 5위에 불과했다(이세돌이 바둑을 그들보다 못둔다는 의미는 아니다. 바둑도 일종의 스포츠라 나이가 들면서 체력이 떨어지면 성적이 떨어진다. 랭킹은 못했어도 당시 이세돌이 세계바둑팬들에게 가장 큰 인기를 얻었던 기사라고 생각한다).

만일 작가의 논리대로 알파고의 개발사인 딥마인드(모기업은 구글이다)가 보유한 인공지능 기술의 판매라는 시장성을 생각했다면 시장이 작은 한국보다는, 당시 바둑 기사 세계 랭킹 1위인 커제를 파트너로 선정하는게 중국이라는 시장을 감안한 훨씬 합리적 선택이었을 것이다.

하지만, 이세돌을 선택한 이유는 그가 가진 바둑 스타일 때문이다. 이세돌이 인기가 있는 이유는 아무리 중요한 기전이라도 자기류를 고집했기 때문이고 그런 자기류로 계속 승리했기 때문이다. 또한 그의 자기류는 다른 기사들이 쉽게 생각하지 못하는 신수,묘수가 많이 나온다. 

딥마인드가 내부적으로 테스트를 완료하고 이제 인간을 넘어섰다고 판단한 시점에서 이세돌을 선택한 이유는 기존의 선입견에 얽매이지 않고 자유로운 사고방식을 가진 그의 천재성에서 알파고의 약점을 발견할 수 있지 않을까 하는 기대감때문이다. 그리고 이세돌의 그러한 천재성이 4국에서 신의 한수라 불리는 78수를 통해 발휘된다(여담이지만 78수도 나중에 프로기사들의 집중적 검토를 통해서 안된다는 것이 밝혀진다. 하지만 대국 당시에는 알파고도 그 대처법을 발견하지 못했으니 당시 전세계 어떤 인간 프로기사들도 발견하지 못했을 것이다. 그 사실 자체로 이세돌의 천재성이 다시 한 번 더 증명된 셈이다)

그러니 대한민국 사람들은 이세돌이 한국의 기사라는 점을 자랑스러워하면 되고, 알파고의 상대로 이세돌이 선정된 것이 당연하다는 것을 알면 된다. 전혀 기분이 상할 필요가 없다.

 

p228

 인공지능 기술이 발달할수록 윤리 · 도덕적 판단이 중요해지는 이유는 인공지능 기술 발달에 따른 윤리 · 도덕적 문제를 해결하지 못하면 인공지능 산업을 크게 일으키기가 어려워지기 때문이다. 구글이 기술 개발을 주도하고 있는 인공지능 자율주행차를 보자. 사실 자율주행차 기술은 거의 완성되었다고 해도 과언이 아닐 정도다. 안정성 등에 있어서도 인간보다 낫다는 평가를 받고 있다. 그런데 우리는 왜 도로에서 자율주행차를 찾아볼 수 없는 것일까? 윤리 · 도덕적 문제가 아직 해결되지 않았기 때문이다.

(첨언) 윤리/도덕적 문제도 물론 심각하지만 자율주행은 자동차만 인공지능이 된다고 되는게 아니다. 더 큰 문제는 자율주행 시스템을 지원할 도로 인프라를 모두 새로 깔아야 할 수 있다는 것이다. 도로의 유도 시스템, 고층 빌딩 사이에 있는 도로들에서 GPS신호가 방해받는 것을 보정해 줘야 할 중계기 등. 이런 인프라 건설에는 돈만 드는게 아니다. 기존 도로 시스템 전체를 갈아엎고 건물에 중계기를 설치하는데는 기존에 거기 살고 있는 주민들과 건물주의 이해 관계가 걸려있다(그래서 북한같은 1인 독재체제인 북한의 평양같은 도시가 자율주행이 가장 먼저 될 수 있는 가능성이 높은 도시로 꼽히는 것이다).

어찌 보면 윤리/도덕적 문제는 보험사가 내어줄 (사망)보험금을 어느 정도로 책정하면 되는가라는 경제적 관점의 대중적 합의로 해결될 가능성도 있다.

 실리콘밸리를 뜨겁게 달궜던 논문, "인공지능 자율주행차가 누군지를 살해하도록 설계되어야 하는 이유"에 나오는 문제를 보자. 이 논문은 영국의 윤리 · 도덕 철학자 필리파 풋이 제안한 '트롤리 딜레마 Trolley dilemma'를 자율주행차에 적용했는데, 다음 세 가지 상황을 가정하고 있다.

 

1. 직진하면 열 명을 치고, 급히 방향을 틀면 한 명을 친다.

2. 직진하면 한 명을 치고, 급히 방향을 틀면 운전자가 중상을 입거나 사망한다.

3. 직진하면 여러 명을 치고, 급히 방향을 틀면 운전자가 중상을 입거나 사망한다.

 

(첨언) 물론 딜레마지만, 지금 이탈리아에서 60세 이상의 노인들은 코로나19의 치료에서 암묵적으로 제외되어 있다. 인간은 위기가 닥치면 결국 생명의 경중을 어떤 기준을 가진(보통 역사적으로 합의되어온) 관례에 따라 결정하게 된다. 자율주행의 시대에 우리는 어쩌면 차에 탑승할 때, 우리의 성별, 나이등이 차량 관제시스템에 입력되게 될 것이다. 그래서 그 탄 사람의 생명의 중요도가 나뉘게 될지도 모른다.

 

 이 상황 앞에서 인공지능은 각각 어떤 판단을 내려야 할까? 여기에 대해 많은 석학들이 의견을 제시했다. 하지만 그 누구도 세 가지 상황이 마주한 윤리 · 도덕적 문제를 완벽하게 해결하지 못했다. 앞으로도 이 문제가 완벽하게 해결되는 일은 없을 것이다. 물론 인공지능 자율 주행차는 이 문제의 해결 여부와 상관없이 도로를 주행하기 시작할 것이다. 하지만 인공지능 자율주행차 제조사들이 여기에 대해 완벽한 답까지는 아니더라도 지금 수준의 답들을 훌쩍 뛰어넘는 어떤 훌륭한 답을 내놓지 못한다면, 인공지능 자율주행차가 전 세계의 도로를 뒤덮는 일은 일어나기 힘들 가능성이 높다. 한마디로 실리콘밸리는 인공지능의 윤리 · 도덕적 문제를 철저히 산업적 관점에서 접근하고 있다. 실리콘밸리에서 철학(윤리 · 도덕적)이 전성기를 맞이하고 있는 것에는 이런 이유도 있다.

 한편으로 이는 무엇을 의미하는가? 미래에는 인공지능이 마주할 윤리 · 도덕적 문제를 미리 헤아려 짐작하고, 이를 해결하는 능력을 가진 기업과 인재가 인공지능 산업의 리더가 되는 것이다. 그래서 구글 · 마이크로소프트 · 애플 등 세계적인 인공지능 윤리연구소등을 세우고 인공지능의 윤리 · 도덕적 문제 해결에 주력하고 있다. 그리고 선진국의 미래형 학교들이 윤리 · 도덕 철학을 교육 과정의 핵심 중 하나로 삼고 있다. 특히 인공지능 산업의 1인자를 키워내고자 하는 목표를 가진 일론 머스크의 애드 아스트라는 아예 교육 과정 전체를 인공지능 중심의 미래 사회에 필요한 윤리 · 도덕적 문제를 미리 예측하고 이에 대한 판단 능력을 기르는 내용으로 도배하다시피 하고 있다.

 실리콘밸리에서 문학은 윤리 · 도덕적 문제를 미리 예측하고 이에 대한 판단 능력을 기르는 도구로 사용되고 있다. 대표적으로 스탠퍼드대 D스쿨의 공동창립자 버나드 로스 스탠퍼드대 교수가, 스탠퍼드대 D스쿨에서 진행하고 있는 존 스타인벡의 《분노의 포도》문학 수업을 보자. 버나드 로스의 《성취습관 The Achievement Habit》에 따르면, 그는 수강생들에게 미국 대공황기에 평범한 미국 가정들이 빈민으로 몰락하는 과정을 사실적으로 그린 소설 《분노의 포도》에서 발췌한 '트랙터 경작'을 읽게 한다.

 내용은 이렇다. 주인공이 감옥에서 나와 집에 돌아와보니 가족들은 물론이고 마을 사람들이 다들 떠날 준비를 하고 있다. 지주地主인 은행이 대리인들을 보내서 앞으로는 기계로 농사를 지으면 되기 때문에 소작농이 필요 없으니 떠나라고 통보했기 때문이다. 실제로 은행은 트랙터 한 대를 보내서 농사를 짓게 하는데, 이 트랙터가 소작농 100명이 하는 일을 해낸다. 한마디로 마을 사람들은 새롭게 발명된 기계 한 대 때문에 졸지에 실업자가 되고, 정든 고향을 떠나야 하는 것이다. 그런데 씁쓸하게도 트랙터의 운전수는 같은 마을 사람이다. 이에 분노한 마을 사람들 중 한 명이 트랙터 운전수에게 왜 이런 일을 하느냐고 따지자, 그는 이렇게 변명한다.

 "하루에 3달러를 주거든요. 나도 처자식이 있는 몸입니다. 식구들이랑 먹고 살아야지요."

 마을 사람이 기막혀 하면서 "자네가 하루 3달러를 버는 통에 스무 집 식구들이 굶고 있고, 100명이 넘는 사람들이 마을을 떠나서 길거리를 헤매는 처지로 전락했다"고 하니까, 트랙터 운전수는 냉정하게 대꾸한다.

 "그런 어쩔 수 없는 일이에요. 시대가 바뀌었다고요. 이제 트랙터가 없으면 농사를 지을 수 없는 시대라고요."

 그러고는 트랙터를 몰고 가서 "당신 집을 무너뜨리고 농지로 만들겠다. 그러면 일당을 더 받을 수 있다"고 협박한다. 마을 사람이 "그러면 난 널 총으로 쏘겠어!"라고 하자 트랙터 운전수는 "그래봤자 소용없다"며 "당신만 살인죄로 교수형을 받을 것이고 은행은 다른 트랙터 운전수를 보내어 당신 집을 무너뜨릴 것이다"라고 대답한다.

(그래서 마르크스는 "전 세계의 노동자들이여 연대하라!"고 외친 것이다) 

아무튼 마을은 이렇게 트랙터 한 대로 초토화되고, 사람들은 입에 풀칠이라도 하고자 타지로 간다. 주인공도 가족과 함께 일자리가 넘친다는 캘리포니아로 떠난다. 하지만 막상 캘리포니아에 도착해보니 또 다른 생존 지옥이 펼쳐진다.

 버나드 로스 교수는 D스쿨 학생들에게 '트랙터 경작'을 읽게 한 뒤 이렇게 질문한다.

 "만일 당신이 소설 속의 트랙터 운전수 같은 상황에 처해 있다면, 그러니까 트랙터를 운전하는 것 말고는 가족을 부양할 더 나은 방법이 없다면 어떻게 하겠습니까? 기꺼이 트랙터를 운전하겠습니까? 아니면 트랙터를 운전하지 않겠습니까? 물론 어떤 선택을 해야 좋을지 몰라 그저 갈팡질팡하고만 있을 수도 있겠지요. 어떻습니까? 당신은 이 세 경우 중 어디에 해당될 것 같습니까?"

 그리고 이렇게 덧붙인다.

 "이 이야기는 전형적인 윤리 · 도덕적 문제를 대변하고 있습니다. 트랙터 운전수는 자신이 하는 일이 마을 사람들의 삶을 파괴하고 있다는 사실을 잘 알고 있지요. 하지만 그도 가족을 부양하기 위해서는 트랙터를 모는 것 말고는 달리 방법이 없습니다. 결국 그는 자기 합리화와 자기 정당화를 선택합니다. 자신이 트랙터를 몰지 않더라도 토지의 소유자인 은행은 다른 누군가를 보내서 트랙터를 운전시킬 거라는 것이지요. 사실 이런 식의 자기 합리화와 정당화는 우리 일상에서 흔히 일어나고 있습니다."

 다음으로 이어지는 것은 인간의 자기 합리화와 자기 정당화를 윤리 · 도덕적으로 어떻게 판단할 것인가에 대한 토론이다. 여기서부터는 우리가 흔히 떠올릴 수 있는 미국 명문 대학의 토론식 수업이 이루어진다고 보면 되겠다.

 

 과거의 데이타와 선입견에 사로잡힌 우리의 잘못된 상식을 교정할 수 있는 책.

최신의 통계를 바탕으로 이 세상은 점점 좋아지고 있다고 내용을 이야기한다.

 저자는 스웨덴 태생의 의사 겸 통계학자로서 20년 이상 아시아와 아프리카에서 근무한 경험을 바탕으로 서양인이 아시아와 아프리카에 가지는 선입견에 의한 왜곡과 그로 인해 발생한 오해와 무지가 얼마나 부정적인 결과를 초래하는지에 대해 이야기한다.

 또한 과거에 유럽이 산업발전을 거치면서 이미 지구에 끼쳐왔던 환경파괴와 같은 해악들을 이유로 중국, 인도와 같은 개발국들에게 하는 무리한 요구의 뻔뻔스러움에 대해서도 이야기한다.

 그리고 그 선입견과 뻔뻔함을 밝히는 수단으로서 데이터의 수집과 정합성 있는 통계적 해석에 힘써왔다.

 2017년 2월에 사망한 저자의 처음이자 마지막 책으로 평생의 역작이라 할만하다. 아마도 더 사셨으면 좋은 책을 더 많이 썼을텐데라는 점에서 아쉬움이 남는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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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장. 간극본능(Gap Instinct)

 

2장. 부정본능(Negativity Instinct)

 

p95. 부정본능

 그런 식의 생각은 대개 부정 본능 때문이다. 좋은 것보다 나쁜 것에 더 주목하는 본능이다. 여기에는 세 가지 원인이 작용한다. 하나는 과거를 잘못 기억하기 때문이고, 또 하나는 언론인과 활동가들이 사건을 선별적으로 보도하기 때문이다. 마지막으로 상황이 나쁜데 세상이 더 좋아진다고 말하면 냉정해 보이기 때문이다.

 

p102. 나쁘지만 나아진다

 부정적 뉴스를 볼 때 더 긍정적 뉴스로 균형을 맞추는 것은 해법이 아니다. 그것은 자신을 기만하고, 안심시키며, 반대 방향으로 호도하는 편향일 뿐이다. 마치 설탕이 너무 많이 들어갔을 때 소금을 잔뜩 넣어 균형을 맞추는 것과 비슷하다. 좀 더 강렬한 맛을 내겠지만 건강에는 좋지 못하다.

 내게 효과 있는 해법은 머릿속에서 두 가지 생각을 동시에 유지하도록 스스로를 설득하는 것이다.

 우리는 상황이 점점 좋아진다는 말을 들으면 '걱정 마, 안심해'라거나 '신경 안 써도 돼'라는 뜻으로 생각하는 경향이 있다. 하지만 내가 상황이 점점 좋아진다고 말할 때는 결코 그런 뜻이 아니다. 세상에서 일어나는 심각한 문제를 외면하자는 뜻이 아니라, 상황이 나쁠 수도 있고 동시에 좋을 수도 있다는 뜻이다.

 세상을 인큐베이터 안에 있는 미숙아라고 가정해보자. 아기의 건강 상태가 극도로 안 좋아 호흡, 심장박동 같은 중요한 신호를 꾸준히 관찰하며 아기를 보살핀다. 일주일이 지나자 상태가 훨씬 좋아진다. 모든 지표에서 나아지고 있지만, 여전히 위험한 상태라 계속 인큐베이터에 있어야 한다. 이런 상황에서 아기가 좋지 않다고도 말할 수 있을까? 물론이다. "상황이 나아지고 있다"고 말할 경우, 만사 오케이니 마음 푹 놓고 걱정하지 말라는 뜻일까? 전혀 아니다. 상황이 나쁜 것과 나아지는 것 중 선택을 해야만 할까? 절대 그렇지 않다. 둘 다 옳다. 상황은 나쁘면서 동시에 나아지고 있기도 하고, 나이지고 있지만 동시에 나쁘기도 하다. 

 세계의 현 상황도 그렇게 생각해야 한다.

 

3. 직선 본능(Straight line instinct)

4. 공포 본능(Fear Instinct)

p163

 2011년 3월 11일, 일본 해안 근처 태평양의 약 29km 해저에서 '지진 단층 파열 현상'이 일어났다. 이로 인해 일본 본토가 약 2.5m 동쪽으로 이동했고, 이때 발생한 쓰나미가 1시간 뒤 일본 해안을 덮쳐 약 1만 8,000명이 목숨을 잃었다. 쓰나미는 후쿠시마 핵발전소를 보호하기 위해 세워놓은 장벽을 넘었다. 후쿠시마는 온통 물로 넘쳤고, 전 세계 뉴스는 신체 손상과 방사능 오염의 공포로 넘쳐났다.

 사람들은 최대한 빨리 후쿠시마를 탈출했지만 이후 1,600명이 더 목숨을 잃었다. 이들을 죽음으로 내몬 것은 방사능이 아니었다. 사람들은 방사능을 피해 도망쳤지만, 방사능 때문에 사망했다고 보고된 사람은 아직 한 명도 없다. 1,600명은 탈출 과정 또는 탈출 후에 사망했다. 이들은 대개 노인이었고, 피난 그 자체나 대피소의 삶에서 오는 정신적 · 신체적 스트레스가 사망 원인이었다. 한마디로 이들을 죽음으로 내몬 것은 방사능이 아니라 방사능 공포였다.(1986년 체르노빌에서 사상 최악의 원전 사고가 일어난 뒤에도 사람들은 사망률이 크게 증가하리라 예상했다. 하지만 세계보건기구의 조사에 따르면, 그 지역에 살고 있는 사람들 사이에서도 그러한 예상을 확신할 근거는 없었다).

 

5. 크기 본능(Size Instinct)

 

p177. 내 눈에 보이지 않는 죽음

 

 1980년대 초, 젊은 의사로 모잠비크에서 일하던 나는 매우 힘든 셈을 해야 했다. 죽은 아이를 세는 일인데, 특히 나칼라Nacala에 있는 우리 병원에 입원했다가 죽은 아이들을 우리 활동 지역 내 가정에서 죽은 아이들 수와 비교해야 했다.

 당시 모잠비크는 세계에서 가장 가난한 나라였다. 내가 나칼라 지방에서 활동한 첫해에 30만 명이 사는 그곳에 의사는 나밖에 없었다. 그리고 다음 해에 두 번째 의사가 합류했다. 스웨덴 같으면 의사 100명이 맡았을 환자를 우리 둘이 돌봤고, 나는 매일 아침 출근길에 나 자신에게 말했다. "오늘 나는 의사 50명 몫을 해야 한다."

 우리는 해마다 상태가 심각한 아이들 약 1,000명을 이 지방의 작은 병원 한 곳에 입원시켰다. 하루에 약 3명꼴이다. 나는 이 아이들의 목숨을 살리려 애썼던 일을 절대 잊지 못할 것이다. 모두 설사, 폐렴, 말라리아 같은 심각한 질병에 시달렸는데, 빈혈과 영양실조도 함께 나타나는 경우가 많았다. 최선을 다했지만, 20명 중 1명꼴로 목숨을 잃었다. 매주 1명씩 죽는 셈인데, 자원과 인력이 더 많았다면 거의 다 치료할 수 있는 아이들이었다.

 우리가 할 수 있는 치료는 가장 기초적 수준인 물과 소금을 이용한 방법과 근육주사였다. 정맥주사는 놓지 않았다. 정맥주사를 놓을 간호사도 없고, 의사가 주사를 놓고 감독하기에는 시가이 너무 많이 걸렸다. 산소통도 거의 없고, 수혈 능력도 제한적이었다. 극도로 빈곤한 나라의 의료 수준은 원래 그랬다.

 한번은 주말레 친구가 우리 집에 묵으러 왔다. 300km 넘게 떨어진 더 큰 도시에 있는, 우리보다 약간 더 나은 병원에서 소아과 의사로 일하는 스웨덴 친구였다. 토요일인 그날 오후 나는 응급실 호출을 받았고, 그 친구도 동행했다. 우리가 도착했을 때 한 엄마가 겁에 질린 눈빛을 하고 있었다. 엄마 품에 안긴 아기는 설사를 심하게 했는데, 힘이 너무 없어 젖을 빨지도 못했다. 나는 아기를 입원시켰고 아기에게 튜브를 끼운 뒤 경구 수액을 투입하라고 지시했다. 그러자 소아과 친구가 내 팔을 붙잡고 나를 복도로 끌고 나갔다. 그는 수준 이하의 내 처치법에 크게 화를 내며, 집에 가서 저녁 먹을 생각에 치료를 건성으로 한다고 나무랐다. 그러면서 정맥주사를 놓으라고 했다.

 나는 그의 이해 부족에 화가 났다. "여기서는 이게 우리 표준 치료법이야. 아이한테 정맥주사를 놓으면 30분은 걸릴 텐데, 그러면 간호가 일을 엉망으로 만들 확률이 높다고. 그리고 맞아. 나도 더러는 집에 가서 저녁을 먹어야 해. 그러지 않으면 나도, 우리 가족도 여기서 한 달 이상은 못 버틸 테니까."

 친구는 여전히 수긍하지 못했다. 그는 혼자 병원에 남아 아기 정맥에 바늘을 꽂느라 여러 시간을 보냈다.

 마침내 그가 집에 돌아오자 토론이 이어졌다. 친구가 주장했다. "병원에 오는 모든 환자한테 할 수 있는 건 다 해야 해."

 내가 대꾸했다. "그렇지 않아. 내 시간과 자원을 이곳에 찾아온 사람을 살리는 데 모두 소진하는 건 비윤리적이야. 내가 병원 밖 서비스를 개선하면 더 많은 아이를 살릴 수 있으니까. 이 지방 '모든' 아이의 죽음이 다 내 책임이라고. 보이지 않는 곳에서 죽어가는 아이들도 내 눈앞에서 죽어가는 아이들과 똑같이."

 대부분의 의사와 마찬가지로, 그리고 어쩌면 대부분의 일반 사람과 마찬가지로 그 친구는 동의하지 않았다. "네 의무는 네가 돌보는 환자한테 모든 수단을 동원하는 거야. 다른 곳에 있는 아이들을 더 많이 살릴 수 있다는 주장은 냉정한 이론상의 추측일 뿐이라고." 나는 몹시 피곤해 언쟁을 그만두고 잠자리에 들었다. 그리고 다음 날 다시 수를 세기 시작했다.

 나는 분만 병동을 관리하는 아내 앙네타 Agneta 와 함께 셈을 했다. 그해 병원에 입원한 아이는 총 946명이고, 대부분이 다섯 살 미만이며, 그중 52명(5%)이 죽었다는 사실을 알고 있었다. 우리는 그 수를 나칼라 지방 전체에서 사망한 아이들의 수와 비교해야 했다.

 모잠비크의 아동 사망율은 당시 26%였다. 나칼라 지방이라고 해서 크게 다를 바 없어 우리는 그 수치를 이용했다. 아동 사망율은 한 해에 사망한 아이 수를 그해 태어난 아이 수로 나누어 구한다.

 따라서 그해 나칼라 지방의 신생아 수를 알면 아동 사망률 26%를 이용해 사망한 아이가 몇 명인지 추정할 수 있었다. 당시 최신 인구조사에 따르면, 나칼라시의 신생아 수는 연간 약 3,000명이었다. 나칼라 지방의 인구는 시 인구의 5배이므로 신생아 수도 약 5배인 1만 5,000명으로 추산했다. 따라서 나는 해마다 26%인 3,900명의 죽음을 막아야 할 책임이 있었고, 그중 52명이 병원에서 죽었다. 내가 맡은 아이들 중 고작 1.3%의 죽음을 직접 지켜보는 셈이다.

 이는 내 육감을 뒷받침하는 수치였다. 설사, 폐렴, 말라리아를 초기에 치료해 생명을 위협하는 수준으로 발전하지 않도록 공동체 기반의 기초 의료를 조직, 지원, 감독한다면 죽음에 임박해 병원을 찾아온 아이에게 정맥주사를 놓을 때보다 더 많은 목숨을 살릴 수 있을 것이다. 나는 인구 다수가 기본 의료 혜택을 받지 못하는 상황에서, 그리고 죽어가는 아이의 98.7%가 병원에 와보지도 못하는 상황에서 병원에 더 많은 자원을 쏟는 건 정말로 비윤리적이라고 생각했다.

 그래서 우리는 마을 의료 인력을 훈련해 최대한 많은 아이에게 예방접종을 하고, (아이들의 목숨을 위협하는 것을) 엄마가 걸어서도 쉽게 갈 수 있는 소규모 의료 시설에서 가급적 초기에 처리하도록 했다.

 눈앞에서 죽어가는 아이들을 외면한 채 보이지 않는 곳에서 죽어가는 익명의 아이들 수백 명에게 주목한다면 언뜻 비인간적으로 느낄 수 있다. 하지만 그것이 극빈층 국가에서의 냉정한 계산법이다.

 콩고와 탄자니아에서 선교하며 간호사로 일하다 내 멘토가 된 잉에게르드 로트Ingegerd Rooth의 말이 생각난다. 로트는 내게 항상 이렇게 말했다. "찢어지게 가난한 상황에서 무엇이든 완벽하게 하려 하면 안 돼요. 그러면 더 좋은 곳에 쓸 자원을 훔치는 꼴이니까요."

 수치보다 눈에 보이는 피해자 개개인에게 지나치게 주목하면 우리 자원을 문제의 일부에만 모두 쏟아부을 수 있고, 따라서 훨씬 적은 목숨을 구할 뿐이다. 이런 원칙은 부족한 자원을 어디에 쓸지 우선순위를 정해야 하는 경우에 모두 해당한다. 목숨을 구하는 문제나 삶을 연장 또는 개선하는 문제를 이야기할 때는 자원을 두고 이러쿵저러쿵하기가 쉽지 않다. 그러면 매정한 사람처럼 보이기 십상이다. 하지만 자원이 무한하지 않은 한(자원은 절대 무한하지 않다) 머리를 써서 지금 있는 것으로 가장 좋은 일을 하는 게 오히려 가장 인간적이다.

 5장은 죽은 아이들과 관련한 데이터로 가득하다. 아이들 목숨을 살리는 것이 이 세상에서 내가 가장 관심을 갖는 일이기 때문이다. 죽은 아이의 수를 세고, 아이의 죽음과 비용 효과를 한 문장에서 동시에 언급하는 것이 매정하고 잔인해 보인다는 것은 나도 안다. 하지만 가만히 생각해보면 최대한 많은 아이의 목숨을 살릴, 비용 효과가 가장 뛰어난 방법을 찾는 것이 가장 덜 매정한 행위다.

 내가 앞에서 통계 이면에 있는 개별 이야기를 보라고 다그쳤듯, 이번에는 개별 이야기 이면에 있는 통계를 보라고 다그쳐야 겠다. 수치 없이는 세계를 이해할 수 없으며, 수치만으로 세계를 이해할 수도 없다.

 

p184

 1, 2단계(1일 소득수준으로 나눈 단계, 1단계 1달러 이하, 2단계 4달러, 3단계 16달러, 4단계 32달러 이상) 나라에서 아이들의 목숨을 살리는 것은 의사나 병실 침대가 아니다. 병실 침대와 의사의 수를 세기 쉽고 정치인은 병원 개원식을 부척 좋아하지만, 아이들의 생존율을 높이는 거의 유일한 방법은 병원 밖에서 해당 지역 간호사, 산파 교육받은 부모 등이 예방 조치를 취하는 것이다. 특히 엄마의 역할이 중요하다. 데이터를 보면 세계적으로 아동 생존율 증가의 절반은 엄마들의 탈문맹에서 나왔다. 지금은 아동 생존율이 더 높아졌다. 처음부터 아에 병에 걸리지 않기 때문이다. 훈련받은 산파가 여성의 임신과 출산을 돕고, 간호사는 아기에게 면역력을 심어준다. 아기는 잘 먹고, 부모는 아기를 늘 따뜻하고 청결하게 관리한다. 그리고 아기 주변 사람들은 손을 씻고, 엄마는 약통에 붙은 지시사항을 읽을 줄 알게 되었다. 따라서 1,2단계에서 보건 의료 발전에 돈을 투자한다면 초등학교, 간호 교육, 예방접종에 투자해야 한다. 휘황찬란한 대형 병원은 조금 미뤄도 상관없다.

 

p187. 큰 전쟁

 베트남전쟁은 내 세대로 치면 시리아 내전 정도에 해당한다.

 1972년 크리스마스 이틀 전, 베트남 하노이에 있는 박마이BachMai 병원에 폭탄 7개가 떨어져 환자와 의료진 27명이 목숨을 잃었다. 당시 나는 스웨덴 웁살라에서 의학을 공부하고 있었다. 스웨덴에는 의료 장비와 노란 담요 등이 풍족했다. 그래서 나와 아내는 이런 것들을 수집해 상자에 담아 박마이 병원으로 보내주었다.

 15년 뒤, 나는 스웨덴 원조 프로젝트를 평가하기 위해 베트남에 갔다. 하루는 점심시간에 베트남 동료 의사인 니엠Niem과 밥을 먹으며 그의 과거를 물었다. 그는 폭탄이 떨어질 때 박마이 병원에 있었고, 그 후 세계 각지에서 온 보급품 상자를 뜯는 일을 했다고 한다. 나는 혹시 노란 담요를 기억하느냐고 물었고, 그가 노란 담요의 무늬를 말하자 소름이 돋았다. 순간 우리 둘이 마치 평생의 친구였던 것 같은 느낌까지 들었다.

 그 주말에 나는 니엠한테 베트남전쟁비를 보여달라고 했다. 그가 물었다. "'대미항전' 말하는 거죠?" 나는 그가 '베트남전쟁'이라는 용어를 쓰지 않는다는 걸 알았어야 했다. 니엠은 나를 태우고 도시 중앙에 있는 공원으로 갔다. 거기에 황동 판이 붙은 1m 정도 높이의 돌이 있었다. 나는 농담이겠지 싶었다. 서양에서는 베트남전쟁 반대 시위가 활동가 세대를 하나로 통합하는 역할을 할 정도였다. 내가 담요와 의료 기구를 보낸 것도 거기에 자극 받았기 때문이었다. 이 전쟁에서 150만 명 넘는 베트남인과 5만 8,000명 넘는 미국인이 목숨을 잃었다. 도시가 그런 대재앙을 기억하는 방식이 고작 이런 식이라니! 내가 실망하는 기색을 보이자, 니엠은 나를 차에 태우고 더 큰 비가 있는 곳으로 향했다. 3.5m가 넘는 대리석 비로, 프랑스 식민 통치에서 독립한 것을 기념하는 것이었다. 나는 여전히 시큰둥했다.

 니엠은 내게 비다운 비를 볼 준비가 되었느냐고 물었다. 그리고 나를 태우고 조금 더 가더니 창밖을 가리켰다. 나무 꼭대기 너머로 금색으로 덮인 거대한 돌탑이 보였다. 100m 가까이 되어 보였다. "여기가 전쟁 영웅을 추모하는 곳이에요. 멋지죠?" 베트남이 중국을 상대로 싸운 전쟁을 기리는 비였다.

 중국과의 전쟁은 싸움과 휴전을 반복하며 2,000년 동안 지속되었다. 프랑스가 점령한 기간은 200년이었다. 대미항전은 고작 20년 지속되었다. 비의 크기는 그런 기간을 완벽하게 반영했다. 나는 여러 개의 비를 비교한 뒤에야 비로소 지금 베트남 사람들에게 베트남전쟁은 상대적으로 의미가 작다는 걸 이해할 수 있었다.

 

p190. 결핵과 신종플루

 뉴스가 비율을 왜곡하는 경우는 곰과 도끼만이 아니다.

 1918년 스페인 독감이 발생해 전 세계 인구의 2.7%가 목숨을 잃었다. 백신이 나오지 않은 독감이 발생할 가능성은 지금도 여전히 위협적이어서 모두가 이를 대단히 심각하게 받아들여야 한다. 2009년에는 처음 몇 달 동안 신종플루로 수천 명이 사망했다. 2주일에 걸쳐 그 소식이 뉴스를 도배했다. 그러나 2014년의 에볼라와 달리 신종플루 사망자는 2배로 증가하지 않았다. 심지어 직선으로 진행되지도 않았다. 나를 비롯한 많은 사람이 신종플루는 처음 경고가 나왔을 때만큼 공격적이진 않다고 결론 내렸다. 하지만 언론은 여러 주 동안 공포심을 계속 자극했다.

 마침내 나는 이런 언론의 히스테리에 신물이 나서 뉴스 보도와 실제 사망자 비율을 계산해보았다. 2주일 동안 신종플루로 사망한 사람은 31명, 구글에서 검색한 관련 기사는 25만 3,442건이었다. 사망자 1명당 기사가 8,176건인 셈이다. 같은 2주일 동안 결핵 사망자는 대략 6만 3,066명이었다. 거의 대부분이 1, 2단계에 사는 사람들이었다. 지금은 얼마든지 치료 가능한 이 병이 1,2단계 나라에서는 여전히 주요한 사망 원인이다. 하지만 결핵은 전염성이 있고 결핵 균주는 약제에 내성이 생길 수 있어, 4단계 사람도 많이 죽을 수 있다. 그런 결핵을 다룬 뉴스는 사망자 1인당 0.1건이었다. 신종플루 사망자가 결핵으로 똑같이 비극적 죽음을 맞은 사람보다 8만 2,000배나 많은 주목을 받은 셈이다.

 

6장. 일반화 본능(Generalization Instinct)

 

p211

 임신하면 대략 2년 정도는 생리를 하지 않는다. 생리대 제조업자에게는 우울한 뉴스다. 따라서 이들은 세계적으로 여성 1인당 출생아 수가 떨어지고 있다는 사실을 알고, 기뻐해야 한다. 집 밖에서 일하는, 교육받은 여성이 늘고 있다는 소식도 마찬가지다. 이런 발전은 현재 2,3단계에 살면서 생리를 하는 여성 수십억 인구 사이에서 지난 여러 해 동안 생리대 시장이 폭발적으로 늘어나는 계기가 되었다.

 그런데 세계적 생리대 제조업체에서 개최한 국제회의에 참석한 나는 서양 제조업체 대부분이 이런 점을 완전히 놓치고 있다는 걸 알았다. 이들은 4단계에서 생리를 하는 여성 3억 명에만 매몰된 채 거기서 새로운 욕구와 새로운 고객을 찾으려 했다. "비키니를 입을 때 사용하는 더 얇은 패드를 내놓으면 어떨가? 라이크라 스판을 입을 때 사용하는 보이지 않는 패드는? 복장마다, 상황마다, 스포츠마다 각각의 경우에 맞는 패드를 만들면 어떨까? 등산용 특수 패드도 좋지!" 모두 패드가 워낙 작아서 하루에도 몇번씩 갈아야 한다면 제조업체에는 이상적일 것이다. 그러나 부유한 소비자 시장이 대부분 그렇듯 기본 욕구는 진작 충족되었고, 생산자는 가뜩이나 작은 분야에서 새로운 수요를 만드느라 헛된 싸움을 할 뿐이다.

 반면 2,3단계에서는 생리를 하는 약 20억의 여성이 생리대를 선택할 여지가 거의 없다. 이들은 라이크라 스판을 입지 않으며, 울트라 슬림 패드에 돈을 쓰지도 않는다. 이들은 밖에서 일할 때 하루 종일 갈지 않고 쓸 수 있는, 믿을 만하고 값싼 패드를 원한다. 그런 제품을 찾을 수 있다면 아마도 평생 한 가지 상표만 고집하면서 딸에게도 같은 상품을 추천할 것이다.

 이런 논리는 다른 많은 소비재에 두루 적용할 수 있다. 나는 업계 지도자를 상대로 수백 회 강연을 하면서 이러한 점을 누차 강조했다. 세계 인구 다수에서 삶의 단계가 천천히 올라가고 있다. 3단계에 사는 사람은 현재 20억에서 2040년에는 40억까지 늘것이다. 세계 거의 모든 사람이 소비자가 되고 있다. 세계 인구 대다수가 물건을 전혀 살 수 없을 정도로 여전히 가난하다고 오해하는 사람은 세계 역사상 가장 큰 경제적 기회를 놓친 채 유럽 대도시에 사는 부유한 힙스터에게 특수 '요가' 생리대를 파는 데 마케팅 비용을 쓸 것이다. 사업 계획을 전략적으로 세우는 사람이라면 사실에 근거한 세계관을 바탕으로 미래의 고객을 찾아야 한다.

 

p215

 한번은 한 여학생이 2단계 삶을 제대로 이해하지 못해 큰 대가를 치를 뻔한 적이 있다. 인도 케랄라주에 있는 8층짜리 멋진 현대식 사립 병원을 찾아갔을 때의 일이다. 우리는 복도에서 아직 오지 않은 학생을 기다렸다. 15분이 지나도 오지 않아 우리끼리 움직이기로 하고 복도를 따라 내려가 대형 승강기를 탔다. 병원 침대가 여러 개 들어갈 정도로 매우 큰 승강기였다. 이번 행사를 주최한 집중치료실 실장이 6층 버튼을 눌렀다. 문히 닫히는 순간, 금발의 젊은 스웨덴 학생이 병원 복도로 뛰어오는 모습이 보였다. "뛰어, 뛰어!" 그 모습을 본 학생의 친구가 소리치며 발을 내밀어 승강기 문을 멈추려 했다. 순식간에 일어난 일이었다. 승강기 문은 여학생의 발을 조이며 계속 닫혔다. 학생은 고통과 공포에 비명을 질렀다. 승강기는 천천히 올라가기 시작했다. 학생은 더 크게 비명을 질렀다. 이러다가는 다리가 부러지겠다 싶을 때, 우리를 안내하던 실장이 뒤쪽에서 튀어나와 빨간색 비상 정지 버튼을 눌렀다. 그러고는 내게 화난 말투로 도와달라고 했다. 우리는 문을 강제로 열어 피가 흐르는 학생의 다리를 빼냈다.

 나중에 그 실장이 내게 말했다. "살다 살다 이런 일은 처음 봐요. 어떻게 그런 바보 같은 학생이 의과대학에 있을 수 있죠?" 나는 스웨덴 승강기에는 자동 감지 장치가 있어 문 사이에 무언가가 끼면 닫히던 문이 저절로 다시 열린다고 설명했다. 인도 의사는 의심스러운 눈으로 말했다. "그런 고도의 기술이 매 순간 작동할 거라고 어떻게 확신하죠?" "그냥 늘 작동해요. 엄격한 안전 규칙이 있고, 정기적으로 점검하니까 잘 작동하겠죠." 좀 어리석은 대답 같았다. 실장은 확신하지 못하는 눈치였다. "흠, 그렇다면 스웨덴이 워낙 안전해서 해외로 나가면 위험하겠군요."

 나는 그 여학생이 그렇게 바보는 아니라고 장담할 수 있다. 어리석게도 4단계 나라에서 승강기를 타던 자신의 경험을 다른 모든 나라 승강기에 일반화했을 뿐이다.

 

7. 운명 본능(Destiny Instinct)

 

p248

 여성 1인당 출생아 수가 역사상 가장 빠르게 감소한 현상은 자유로운 서양 언론에서는 전혀 보도되지 않았다. 이란은 1990년대에 세계 최대 규모의 콘돔 공장이 들어섰고, 신부와 신랑 모두에게 혼전 성교육을 의무화한 나라다. 국민의 교육 수준도 높고, 발전한 공공 의료 시설도 쉽게 이용할 수 있다. 부부는 피임으로 자녀 수를 적게 유지하고, 임신이 어려우면 불임 치료 전문 병원을 찾는다. 적어도 내가 1990년에 테헤란의 한 병원에 가봤을 때는 그랬다. 그때 우리를 안내한 사람은 이란의 가족계획 기적을 설계한 열정적인 호세인 말레크아프잘리 Hossein Malek-Afzali 교수였다.

 오늘날 이란 여성은 미국이나 스웨덴 여성보다 아이를 더 적게 낳으려 한다고 생각하는 서양인이 과연 얼마나 될까? 서양인의 언론의 자유를 너무나 사랑한 나머지, 언론의 자유를 보장하지 않는 정권이 들어선 나라의 발전에는 눈길을 주지 않는 걸까? 적어도 자유로운 언론이라고 해서 세계에서 가장 빠른 문화적 변화를 보도하리라는 보장은 없다는 것만큼은 분명하다.

 거의 모든 종교가 전통적으로 성생활에 관한 규범이 있다. 그러다 보니 많은 사람이 특정 종교를 믿는 여성은 아이를 더 많이 출산하다고 생각하는 것도 쉽게 이해는 간다. 그러나 종교와 여성 1인당 출생아 수의 관계는 곧잘 과장된다. 사실은 소득과 여성 1인당 출생아 수가 훨씬 관계가 깊다.

 

p250

 그렇다면 오늘날은 어떨까? 다음의 물방울 도표는 종교에 따라 세계를 기독교, 이슬람교, 그 밖의 종교로 나눈 것이다. 그런 다음 각 종교에 따라 여성 1인당 출생아 수와 소득을 표시했다. 이번에도 물방울 크기는 인구를 나타낸다. 기독교 인구가 모든 소득수준에 얼마나 고루 퍼져 있는지 보라. 또 1단계 기독교 인구가 아이를 얼마나 많이 낳는지 보라. 그리고 나머지 도표2개를 보라. 유형이 매우 비슷하다. 한마디로 종교에 관계없이 1단계 극빈층 여성이 아이를 많이 낳는다.

 

소득수준 및 종교에 따른 출생아 수

(설명)이 그림은 책의 도표가 종교별로 3개의 그래프로 나뉜 것을 gapminder에 들어가서 한개의 그래프로 통합한 그래프로 대체했다. 물방울이 파란색이 기독교, 녹색이 무슬림, 빨간색이 기타(인도, 중국, 일본등이 포함된 eastern religion, 불교, 유교, 도교등의 동양적 종교 모두를 의미) 종교이다. 

위 그래프는 하기 주소에서 볼 수 있다.

https://www.gapminder.org/tools/#$state$marker$axis_x$domainMin:null&domainMax:null&zoomedMin:null&zoomedMax:null&scaleType=genericLog&spaceRef:null;&axis_y$which=children_per_woman_total_fertility&domainMin:null&domainMax:null&zoomedMin:null&zoomedMax:null&spaceRef:null;&color$data=data_fasttrack&which=main_religion_2008&spaceRef=entities;;;&chart-type=bubbles

 

Gapminder Tools

Animated global statistics that everyone can understand

www.gapminder.org

 

오늘날 이슬람 사회 여성은 아이를 평균 3.1명 낳고, 기독교 사회는 2.7명 낳는다. 세계의 주요 종교별 출생률 차이는 그리 크지 않다.

 

p252

 오늘날 스웨덴 사람은 거의 다 여성의 낙태 권리를 지지한다. 일반적으로 여성의 권리를 적극 옹호하는 것이 이제 우리 문화가 됐다. 내가 지금과는 확연히 다른 1960년대의 학창 시절을 이야기하면 학생들은 입을 딱 벌린다. 그때까지도 낙태는 아주 예외적인 상황 말고는 여전히 불법이었다. 그래서 대학에서는 비밀자금을 모아 임신한 여학생들을 외국으로 보내 무사히 낙태 수술을 받도록 했다. 내가 그 여학생들이 찾아간 곳은 다른 아닌 폴란드라고 말하면 학생들의 입은 더 크게 벌어진다. 폴란드라니? 폴란드는 기독교 국가 아닌가. 그리고 5년이 지나 폴란드는 낙태를 금지하고, 스웨덴은 낙태를 합법화했다. 그러자 젊은 여성들이 정반대로 이도했다. 요컨대 지금 상황이 늘 그랬던 것은 아니라는 이야기다. 문화는 변한다.

 나는 아시아를 여행할 때면 늘 구스타브 할아버지 같은 완고한 노인의 가치와 마주한다. 한 예로, 한국과 일본에서는 많은 여성이 자녀 돌보는 일을 전적으로 책임질 뿐 아니라 시부모도 부양한다. 이런 상황을 자랑스러워하는 남자도 많이 만났다. 그들은 이것을 '아시아의 가치'라고 했다. 하지만 달리 생각하는 많은 여성과도 대화를 나누었다. 그들은 이런 문화를 참을 수 없어 하고, 그런 가치 때문에 결혼에 대한 관심이 줄었다고 말한다.

 

남편 상상하기.

 홍콩에서 열린 금융 콘퍼런스에 참석했을 때 일이다. 저녁 만찬 때 젊고 똑똑한 전문 금융인 옆자리에 않게 되었다. 37세의 꽤 성공한 여성으로, 식사를 하면서 아시아의 현재 이슈와 추세에 관해 내게 많은 것을 얘기해주었다. 얼마 후 우리는 사적인 삶에 대해서도 이야기를 나누기 시작했다. "가족을 꾸릴 계획이신가요?" 내가 물었다. 무례하게 행동할 뜻은 없었다. 우리 스웨덴 사람은 (요즘) 그런 주제를 즐겨 이야기한다. 그리고 이 여성도 내 솔직한 질문을 문제 삼지 않았다. 여성은 웃음 띤 채 내 어깨 너머로 바닷가의 지는 해를 바라보며 말했다. "아이가 있으면 어떨까 날마다 생각해요." 그리고 내 눈을 똑바로 보더니 말을 이었다. "그런데 남편을 상상하면 참을 수가 없어요."

 

나는 그런 여성들을 위로하면서 앞으로 달라질 거라는 확신을 주려고 애쓴다. 최근에는 방글라데시 아시아 여성대학 Asian University for Women에서 젊은 여성 400명에게 강연을 한 적이 있다. 당시 나는 문화가 어떻게 그리고 왜 항상 탈바꿈하는지, 극빈층 탈출과 여성 교육 그리고 피임이 어떻게 잠자리 대화는 늘리고 자녀 수는 줄였는지 이야기했다. 매우 가슴 벅찬 강의였다. 색색의 히잡을 쓴 젊은 여성들이 얼굴에 환한 미소를 지었다.

 강의가 끝나자 아프가니스탄 학생들은 내게 자기 나라 이야기를 들려주고 싶어 했다. 그들은 그런 변화가 아프가니스탄에도 이미 천천히 나타나기 시작했다면서 이렇게 말했다. "전쟁도 문제고 빈곤도 문제지만, 우리 같은 많은 젊은이가 현대적 삶을 계획하고 있어요. 우리는 아프가니스탄 사람이고, 이슬람 여성이에요. 그리고 교수님이 말씀하신 그런 남자를 만나고 싶어요. 우리 말에 귀 기울이고 함께 계획을 세우는 남자 말이에요. 아이는 둘만 낳아서 모두 학교에 보내고 싶고요."

 오늘날 아시아와 아프리카의 많은 나라에서 나타나는 마초적 가치는 아시아의 가치도, 아프리카의 가치도 아니며 이슬람의 가치도 아니고, 동양의 가치도 아니다. 스웨덴에서 60년 전에나 볼 수 있었던 가부장적 가치이며, 스웨덴에서 그랬듯 사회와 경제가 발전하면서 사라질 가치다. 불변의 가치가 결코 아니다.

 

 p255

 사회와 문화는 끊임없이 움직인다. 사소하고 더뎌 보이는 변화라도 시간이 지나면서 계속 축적된다. 연간 1% 성장은 더뎌 보이지만 70년간 축적되면 2배 성장이 되고, 연간 2% 성장은 35년 뒤 2배 성장이 되며, 연간 3% 성장은 24년 뒤 2배 성장이 된다.

 기원전 3세기에 스리랑카의 데바남피야 티샤 Devanampiya Tissa 왕은 세계 최초로 자연보호구역을 공식적으로 지정했다. 그리고 2,000년이 지난 후 웨스트요크셔의 유럽인이 이와 비슷한 생각을 떠올렸고, 그로부터 다시 50년이 지난 후에 미국에 옐로스톤 국립공원이 생겼다. 그리고 1900년에는 지표면의 0.03%가 보호구역이 되었고, 1930년에는 그 수요가 0.2%로 늘었다. 천천히, 천천히 10년이 지나고 또 10년이 지나면서 한 번에 숲 한 곳씩 보호구역이 늘었다. 연간 증가율은 너무 작아서 거의 감지하지 못할 정도다. 하지만 오늘날에는 지표면의 무려 15%가 보호구역이고, 그 수치는 꾸준히 늘고 있다. 

운명 본능을 억제하려면 더딘 변화를 불변과 혼동해서는 안된다. 연간 변화가 1%에 그쳐도, 너무 적고 느리다는 이유로 무시해서는 절대 안된다.

 

p258. 내게는 어떤 비전도 없다

 앞에서 잘 차려입은 무지한 남성 이야기로 7장을 시작했다. 아프리카의 가능성을 내다보는 비전이 부족했던 남성이다. 이제 비슷한 이야기로 7장을 마무리하려 한다. 

 2013년 5월 12일, 나는 '2063년의 아프리카 르네상스와 어젠다'라는 제목의 아프리카연합African Union 학술회의 때 아프리카 대륙 곳곳에서 모인 여성 지도자 500명 앞에서 강연하는 특권을 누렸다. 대단한 영광이었고, 굉장한 설렘이었으며, 내 인생 최고의 강연이었다. 아디스아바바 Addis Ababa에 있는 아프리카연합 본부의 플리너리 홀Plenary Hall에서 나는 30분 동안 소규모 여성 농업인에 관해 수십 년간 진행한 연구를 요약해 말했으며, 아프리카에서 어떻게 20년 안에 극빈층이 사라질 수 있는지를 이 막강한 의사 결정자들에게 설명했다.

 아프리카연합의 사무국장 은코사자나 들라미니주마Nkosazana Dlamini-Zuma가 강단 바로 앞자리에 앉아 있었는데, 내 말을 꽤나 경청하는 듯싶었다. 강연이 끝나자 그는 내게 다가와 감사를 표시했다. 나는 강연이 어땠냐고 물었는데, 그의 대답은 가히 충격이었다.

 "글쎄요, 도표도 훌륭하고 말씀도 잘하시는데, 아무런 비전이 없네요." 자상한 목소리로 그렇게 말하는 게 나한테는 더욱 충격이었다.

 "네? 비전이 부족해요? 아프리카 극빈층이 앞으로 20년 안에 역사 속으로 사라질 거라고 말했는데요?" 나는 기분이 상해 되물었다.

 은코사자나는 어떤 감정이나 동작도 섞지 않은 채 낮은 목소리로 말했다. "맞아요, 극빈층이 사라질 거라고 말했어요. 그게 시작이었고, 거기서 끝났죠. 아프리카 사람들이 극빈층이 사라지는 걸로 만족하면서 적당히 가난하게 사는 정도로 행복해할 거라고 생각하세요?" 그러곤 내 팔을 힘주어 잡고 나를 바라보았다. 화를 내지도 않고, 웃음기도 없었다. 내 단점을 깨닫게 해주겠다는 강한 의지가 엿보였다. 은코사자나는 내 눈을 똑바로 보며 말을 이었다. "강연을 마무리하면서, 교수님 손주들이 우리가 건설할 새로운 고속열차를 타고 아프리카를 여행했으면 좋겠다고 말씀하셨어요. 그게 어떤 비전인가요? 유럽의 낡은 비전과 뭐가 다르죠? '우리' 손주들도 '교수님' 대륙에 가서 '교수님 나라의' 고속열차를 타고 여행하며, 스웨덴 북쪽에 있다는 이국적인 얼음 호텔에 갈겁니다. 물론 오래 걸리겠죠, 아시다시피. 현명한 결단도, 대규모 투자로 많이 필요할 거고요. 하지만 내 50년 비전으로는 아프리카 사람들이 유럽에서, 원치 않는 난민이 아니라 관광객으로 환영받을 겁니다." 은코사자나는 그제야 활짝 웃었다.

 "그래도 도표는 정말 멋졌어요. 자, 가서 커피나 한잔합시다."

 나는 커피를 마시면서 내 실수를 가만히 되새겨보았다. 33년 전 내 첫 아프리카 친구인 모잠비크의 광산 기술자 니헤레와 마셀리나 Niherewa Maselina 와 나눈 대화가 기억났다. 그도 은코사자나와 똑같은 표정으로 나를 쳐다봤다. 그때 나는 모잠비크 나칼라에서 의사로 일했는데, 하루는 니헤레와 함께 해변으로 가족 나들이를 갔었다. 모잠비크 해안은 믿기 어려울 만큼 아름다웠고, 아직 개발되지 않아 주말에 가면 거의 우리밖에 없었다. 그러다가 한번은 1.5km 모래 해변에 15~20가족이 있는 것을 보고 내가 말했다. "오늘은 웬 사람이 이렇게 많아." 그때 니헤레와가 은코사자나처럼 내 팔을 꽉 잡으며 말했다. "한스, 난 정반대 느낌이 들어. 나는 이 해변을 보면 정말 괴롭고 서글퍼. 저기 멀리 있는 도시를 봐. 저곳에 80만 명이 살아. 아이가 4만 명이라는 얘기지. 오늘은 주말이야. 그런데 겨우 40명이 이곳에 왔잖아. 1,000분의 1이야. 내가 동독에서 채굴 교육을 받을 때 주말이면 로스토크Rostock 해변에 가곤 했는데, 사람들로 가득 찼었어. 아이들 수천 명이 재미있게 놀더라고. 나칼라도 로스토크 같으면 좋겠어. 일요일에는 아이들이 들판에서 부모를 도와 일하거나, 슬럼에 앉아 있지 말고 모두 해변으로 나왔으면 좋겠어. 그러려면 오랜 세월이 걸리겠지만, 그게 내 소원이야." 그러고는 내 팔을 놓고 자동차에서 우리 아이들의 수영 장비를 내려주었다.

 그리고 33년이 지난 지금, 아프리카의 학자 및 단체와 일생일대의 공동 연구를 마친 뒤 아프리카 연합에서 강연을 하면서, 내가 그들의 위대한 비전을 공유한다고 철석같이 믿었다. 아프리카의 가능성을 알아본 몇 안 되는 유럽인이라고도 생각했다. 그런데 내 일생에서 가장 소중한 강연을 한 후, 내가 여전히 낡고 정적인 식민지적 사고방식에 갇혀 있다는 걸 깨달았다. 아프리카 친구와 동료들이 여러 해 동안 가르쳐줬는데도 나는 여전히 '그들'이 '우리'를 언젠가는 따라잡으리라고 상상하지 못했다. 나는 여전히 모든 사람, 모든 가족, 모든 아이가 그 목표를 성취하려고 안간힘을 쓰다 보면 언젠가는 해변 나들이를 갈 수 있으리라는 것을 여전히 확신하지 못했다.

 

 

8장. 단일 관점 본능(Single Perspective Instinct)

 

p285. 민주주의도 단일한 해결책이 못된다

 조금 위험하더라도 이 말은 꼭 해야겠다. 나는 자유민주주의가 국가를 운영하는 최선의 길이라고 굳게 믿는다. 나를 비롯해 그렇게 믿는 사람은 민주주의에서 평화, 사회 발전, 보건 의료 발전, 경제성장 같은 좋은 것이 나오고, 심지어 그런 것이 존재하기 위한 필요조건이라고 주장하고 싶은 마음이 굴뚝같다. 하지만 인정하기 어려운 분명한 사실 한 가지가 있다. 증거를 보면 꼭 그렇지만도 않다는 것이다.

 경제와 사회가 크게 발전한 나라라고 해서 다 민주국가는 아니다. (산유국도 아닌) 한국은 어느 나라보다 빨리 1단게에서 3단계로 넘어갔고, 그 시기는 줄곧 군부 독재가 이어졌다. 2012~2016년에 빠른 경제성장을 이룬 나라 열 곳 중 아홉 곳은 민주주의 수준이 낮았따.

 경제성장과 보건 의료 발전에 민주주의가 반드시 필요하다고 주장한다면, 그와 모순되는 현실에 부딛히기 쉽다. 따라서 우리가 좋아하는 다른 어떤 목적을 달성하는 데 민주주의가 우월한 수단이라고 주장하기보다 민주주의 자체를 목적으로 지지하는 편이 더 바람직하다.

 다른 모든 발전을 가늠하는 단 하나의 척도는 없다. 1인당 GDP도, (쿠바에서처럼) 아동 사망률도, (미국에서처럼) 개인의 자유도, 심지어 민주주의도 단일한 척도가 될 수 없다. 한 국가의 발전을 측정하는 단일한 척도는 없다. 현실은 그렇게 단순하지 않다.

 세계는 수치 없이 이해할 수도, 수치만으로 이해할 수도 없다. 국가는 정부 없이 제 기능을 수행할 수 없지만, 정부가 모든 문제를 해결할 수도 없다. 공공 부문도, 민간 부문도 늘 정답일 수는 없다. 좋은 사회에서 나온 척도라도 단일 척도가 모든 사회 발전을 이끌 수는 없다. 이것 또는 저것을 아주 택할 게 아니라, 사안에 따라 이것과 저것을 두루 택해야 한다.

 

9장. 비난 본능(Blame Instinct)

 

p295

 세계의 중요한 문제를 이해하려면 개인에게 죄를 추궁하기보다 시스템에 주목해야 할 때가 많다.

 비난 본능은 일이 잘 풀릴 때도 발동되어 칭찬 역시 비난만큼이나 쉽게 나온다. 일이 잘 풀릴 때 우리는 아주 쉽게 그 공을 개인이나 단순한 원인으로 돌리는데, 이때도 대개는 문제가 훨씬 복잡하다.

 세계를 정말로 바꾸고 싶다면, 세계를 이해해야지 비난 본능에 좌우돼서는 안된다.

 

p298. 언론인

 지식인과 정치인 사이에서는 언론을 손가락질하며 진실을 보도하지 않는다고 비난하는 게 유행이다. 어쩌면 나도 이 책 앞부분에서 그랬을지 모른다.

 우리는 언론인을 손가락질하기보다 이런 질문을 던져야 한다. 언론은 세상을 왜 그렇게 왜곡해 보여주는 걸까? 의도적일까, 아니면 다른 이유가 있는 걸까?

 (의도적으로 만들어낸 가짜 뉴스는 논의하지 않겠다. 그것은 전혀 다른 문제이며, 저널리즘과도 아무런 관계가 없다. 그리고 나는 가짜 뉴스가 우리 세계관을 왜곡하는 주범이라고는 생각하지 않는다. 우리는 세계를 단지 오해하기 시작한 게 아니라 항상 오해하고 있었다는 게 내 생각이다.)

 우리는 2013년 갭마인더 무지 프로젝트 Gapminder's Ignorance Project의 결과를 인터넷에 올렸다. 두 방송사는 우리가 제시한 문제를 자사 사이트에 올려 사람들이 직접 풀어보게 했는데, 살마들의 정답률이 눈 감고 찍은 것보다도 못한 이유를 분석한 수천 개의 짧은 글이 올라왔다.

 그중 우리 주의를 사로잡은 글 하나는 이랬다. "언론 종사자 중 이 테스트를 통과한 사람은 한 명도 없을 거라고 장담한다."

 우리는 이 생각이 퍽 흥미로워 정말 그런지 알아보려 했지만, 여론조사 회사들은 언론인을 집단적으로 접촉하는 게 불가능하다고 했다. 언론사 경영주들이 허락하지 않았다. 물론 이해는 간다. 자신의 권위를 의심받는 게 달가울 사람은 없다. 진지한 뉴스 방송사가 침팬지보다 지식수준이 나을 게 없는 언론인을 고용했다고 알려지면 몹시 당혹스럽지 않겠는가.

 나는 어떤 일이 불가능하다는 말을 들으면 그걸 해보고 싶은 충동이 샘솟는다. 그해 일정에 언론 학술회의가 두 번 잡혀 있었는데, 그때 설문 조사 장비를 챙겨 갔다. 20분이라는 강연 시간은 준비한 질문을 다 던지기에 턱없이 짧았지만, 몇 가지는 물을 수 있었다. 여기에 그 결과를 소개한다. BBC, PBS, 내셔널지오그래픽, 디즈니 등 주요 다큐멘타리 제작자들이 참석한 학술회의에서도 같은 질문을 던졌는데, 그 결과 역시 함께 소개한다.

  

 이들 언론인과 다큐멘터리 제작자는 지식수준이 일반인보다 나을 게 없고, 침팬지보다 못한 것 같았다.

 만약 언론인과 다큐멘터리 제작자가 전반적으로 이런 수준이라면(다른 기자들은 이들보다 지식수준이 높다거나, 이들에게 다른 문제를 냈더라면 더 나은 결과가 나왔으리라고 믿을 만한 이유가 없다) 이들에겐 죄가 없다. 언론인과 다큐멘터리 제작자가 세계를 극적으로 가르거나 '자연의 역습 또는 '인구 위기'라는 식으로 극적인 보도를 하면서 안타까운 피아노 음악을 배경 삼아 심각한 목소리로 이야기할 때, 그들이 거짓말을 하며 우리를 의도적으로 호도하는 것은 아니다. 나쁜 의도가 아니라면 그들을 비난하는 것은 무의미하다. 세계에 관한 정보를 전달하는 대부분의 언론인과 다큐멘터리 제작자도 사실은 세계를 오해하고 있기 때문이다. 언론인을 악마화하지 마라. 그들도 다른 사람들처럼 세계를 크게 오해하고 있을 뿐이다.

 우리 언론은 자유롭고 전문적이며 진실을 추구하겠지만, 언론의 독립성과 그들이 보도하는 사건의 대표성은 다르다. 모든 보도가 그 자체로는 전적으로 진실이라도 기자가 세상에 알리기로 선택한 진실 이야기를 여럿 모으면 오해할 만한 그림이 나올 수 있다. 언론은 중립적이지도 않고, 중립적일 수 없으며, 그걸 기대해서도 안 된다.

 언론인을 대상으로 한 설문 조사 결과는 심각한 재앙이다. 항공기 추락 사고에 견줄 만한 지식수준이다. 하지만 언론인을 비난하는 것은 졸았던 기장을 탓하는 것만큼이나 도움이 안 된다. 그보다는 언론인이 세계를 왜곡된 시각으로 바라보는 이유(답  그들도 극적 본능을 지닌 인간이라서)와 언론 시스템의 어떤 요소가 그들로 하여금 왜곡되고 과도하게 극적인 뉴스를 내보내게 하는지(부분적인 답  소비자의 주의를 사로잡는 경쟁을 해야 하고, 직장을 잃지 말아야 해서) 이해하려고 노력해야 한다.

 이런 것들을 이해한다면 언론을 향해 현실을 제대로 반영한 정보를 제공하도록 이런저런 식으로 변하라고 요구하는 게 대단히 비현실적이고 불공정하다는 걸 알 수 있다. 현실 반영은 언론에 기대할 만한 것이 못 된다. 언론이 사실에 근거해 세계를 보여주길 기대하지 말고, 차라리 베를린의 휴일을 찍은 사진 여러 장을 GPS 삼아 그 도시를 둘러보는 편이 합리적이라고 생각하는게 좋다.

 

p302. 난민

 2015년 난민 4,000명이 고무보트를 타고 유럽으로 가려다 지중해에서 익사했다. 휴양지 해변에 떠밀려온 죽은 아이들 모습은 공포와 연민을 불러일으켰다. 이런 비극이 또 어디 있겠는가. 유럽 등지에서 4단계의 안락한 삶을 즐기던 우리는 생각에 잠겼다. 어떻게 저런 일이 벌어질 수 있는가? 누굴 비난해야 하나?

 우리는 곧 비난 대상을 찾아냈다. 절박한 가족을 속여 1인당 1,000유로를 받고 사람들을 죽음의 고무보트에 태운 잔인하고 탐욕스루언 밀입국 알선자들이 죽일 놈이다. 우리는 여기서 생각을 멈추고, 거친 물살에서 사람들을 구해내는 유럽 구조선의 모습을 보며 안도한다.

 그런데 난민은 편안한 비행기나 여객선을 타지 않고 왜 육지로 리비아나 터키로 가서 다시 저런 부실한 고무보트에 목숨을 맡기는 걸까? 유럽연합 회원국은 모두 제네바 협약에 서명한 터라 전쟁으로 피폐해진 시리아 난민에게 망명 자격을 부여할 의무가 있다. 나는 언론인과 지인에게 그리고 난민 신청 접수와 관련한 일을 하는 사람에게 이에 대해 물었지만, 가장 현명하고 자상한 사람조차 매우 이상한 해명을 내놓았다.

 비행기표를 살 돈이 없어서? 다들 알다시피 난민은 소형 고무보트의 한 자리를 얻으려고 1,000유로를 지불했다. 인터넷을 검색해보니 터키에서 스웨덴, 리비아에서 런던으로 가는 항공권은 50유로 미만으로 나온 게 많았다.

 그렇다면 공항까지 갈 수 없어서? 그렇지 않다. 그중 다수가 이미 터키나 레바논까지 왔으니 그곳 공항을 가기는 쉬웠다. 항공권을 살 형평도 되고, 자리가 없는 것도 아니다. 하지만 탑승 수속 카운터에서 항공사 직원에게 제지당해 비행기를 타지 못한다. 왜 그럴까? 유럽연합 회원국이 불법 이민에 대처하는 규정을 정해놓은 2001년 유럽 이사회 지침 European Council Directive 때문이다. 이 지침에 따르면, 적절한 서류를 갖추지 않은 사람을 유럽으로 들여보내는 모든 항공사와 선박 회사는 그 사람을 본국으로 송환하는 비용을 모두 지불해야 한다. 물론 제네바 협약에 따라 망명 자격을 갖추고 유럽으로 들어오려는 난민에게는 그 조항을 적용하지 않는다. 오직 불법 이민자에게만 적용한다고 명시되어 있다. 하지만 이는 큰 의미가 없다. 탑승 수속 카운터에서 항공사 직원이 45초 만에 제네바 협약에서 인정하는 난민인지 아닌지를 어떻게 가려낼 수 있겠는가? 대사관에서 최소 8개월이 걸리는 일이 아닌가? 그렇다면 불가능하다. 따라서 그 지침은 언뜻 합리적으로 들리지만, 현실에서는 비자 없는 사람은 절대 탑승시키지 않는다. 그리고 이들이 비자를 얻는 것은 거의 불가능하다. 터키와 리비아에 있는 유럽 대사관은 비자 신청을 처리할 자료나 근거가 없기 때문이다. 사정이 이렇다 보니 시리아 난민은 제네바 협약에 따라 이론적으로는 유럽으로 들어갈 권리가 있지만, 현실적으로는 비행기를 탈 수 없다. 결국 바다를 건널 수밖에 없다.

 그렇다면 왜 그렇게 위험한 배를 타야 할까? 사실 이 역시 유럽연합의 정책과 관련이 있다. 유럽연합에 도착하는 난민의 배는 무조건 압수하게 되어 있다. 따라서 배는 한 번밖에 쓸 수 없다. 결국 밀입국 알선자들은 1943년 유대인 난민 7,220명을 며칠 사이 덴마크에서 스웨덴으로 이동시킨 데 동원한 어선처럼 안전한 배에 난민을 태우고 싶어도 그럴 형편이 못 된다.

 유럽의 여러 정부는 전쟁에 짓밟힌 나라의 난민에게 망명 자격을 신청 및 획득할 자격을 주도록 한 제네바 협약을 존중한다고 주장한다. 그러나 그들의 이민 정책은 그런 주장을 웃음거리로 만들고, 밀입국 알선자가 활동하는 운송 시장을 만들어낸다. 이는 공공연한 비밀이어서 생각이 아주 없지 않는 한 이를 모를리 없다.

 우리는 비난할 사람을 찾는 본능이 있지만, 거울을 들여다보려고는 하지 않는다. 똑똑하고 자상한 사람도 난민 익사 사고는 우리의 이민 정책에 책임이 있다는 죄책감을 유발하는 끔찍한 결론을 내놓지 못하는 일이 흔하다.

 

p305. 외국인

 5장에서 인도와 중국이 기후변화의 주범으로 비난받아야 한다는 주장을 설득력 있게 반박한 인도 관리를 기억하는가? 나는 1인당 수치의 중요성을 강조하려고 그 이야기를 꺼냈지만, 비난 대상을 찾다 보면 전체 시스템에 주목하지 못하는 경우를 보여주는 사례이기도 하다.

 인도와 중국을 비롯해 소득수준이 올라간 국가들은 기후변화에 책임이 있으며, 그 나라 사람들은 기후변화 문제를 해결하기 위해 더 빈곤한 삶을 살 수밖에는 없다는 주장이 서양에서는 놀랍게도 기정사실로 받아들여진다. 내가 밴쿠버에 있는 테크대학 Tech University 에서 세계 추세에 관한 강연을 하던 중 한 학생이 절망적인 목소리로 당돌하게 말했다. "그 사람들은 우리처럼 살 수 없어요. 그런 식으로 계속 발전하도록 놔두면 안 돼요. 그렇게 배출하다가는 지구가 죽고 말 거에요." 서양인이 마치 자기 손에 리모컨이 있어 버튼만 누르면 다른 수십 억 인구의 삶을 결정할 수 있다는 식으로 말하는 경우가 얼마나 많은지 정말 기겁할 일이다. 가만히 둘러보니 그 여학생 주변의 학생들은 그 말에 아무런 반응도 보이지 않았다. 다들 같은 생각이었다.

 오늘날 대기에 축적된 이산화탄소 대부분은 현재 4단계 삶을 사는 나라들이 지난 50년간 배출한 것이다. 캐나다의 1인당 이산화탄소 배출량은 중국보다 여전히 2배 많고, 인도보다는 8배 많다. 전 세계 연간 화석연료 사용량 중 가장 부유한 10억 인구가 차지하는 비율이 얼마나 되는지 아는가? 절반이 넘는다. 그리고 두 번째로 부유한 10억 인구가 그 나머지의 절반을 차지한다. 그리고 또 절반, 또 절반으로 이어지면 가장 가난한 10억 인구는 겨우 1%를 차지할 뿐이다.

https://www.gapminder.org/tools/#$state$marker$axis_x$domainMin:null&domainMax:null&zoomedMin:null&zoomedMax:null&spaceRef:null;&axis_y$which=co2_emissions_tonnes_per_person&domainMin:null&domainMax:null&zoomedMin:null&zoomedMax:null&scaleType=genericLog&spaceRef:null;;;&chart-type=bubbles

 

Gapminder Tools

Animated global statistics that everyone can understand

www.gapminder.org

 

위 그래프는 책에 나온것과는 좀 틀린데 이야기하는 바는 동일하다. 연두색의 아메리카 대륙과 노란색의 유럽대륙이 소득수준이 높으며, 소득수준이 높을수록 CO2 배출량이 많다. 즉 선진국일수록 CO2배출로 인한 환경파괴의 책임이 크다.

 

가장 가난한 10억 인구가 1단계에서 2단계로 올라가기까지는 최소 20년이 걸릴 테고, 그동안 전 세계 이산화탄소 배출량에서 이들이 차지하는 비율은 약 2% 증가한다. 그리고 이들이 다시 3단계, 4단계로 올라가는 데는 수십 년이 걸릴 것이다. 

 이런 상황에서 서양인이 자신의 책임을 아주 쉽게 다른 사람에게 떠넘기는 현상은 비난 본능을 보여주는 생생한 증거다. 우리는 '그 사람들'은 우리처럼 살 수 없다고 말한다. 정확히 말하면 "우리는 우리처럼 살 수 없다"가 맞다.

 

외국질병

신체의 가장 큰 기관은 피부다. 현대 의학이 발달하기 전, 상상할 수 있는 최악의 피부병은 매독이었다. 가려운 부스럼으로 시작해 뼈가 드러날 정도로 피부가 썩어 들어가다가 결국 골격이 훤히 드러난다. 이처럼 혐오스러운 모습과 참을 수 없는 고통을 유발하는 질병은 장소에 따라 다른 이름으로 불렸다. 러시아에서는 폴란드 질병, 폴란드에서는 독일 질병, 독일에서는 프랑스 질병, 프랑스에서는 이탈리아 질병이라고 불렀다. 그리고 이탈리아 사람은 비난의 화살을 돌려 프랑스 질병이라고 불렀다.

희생양을 찾으려는 본능은 인간 본성의 핵심이어서, 그 피부병을 스웨덴 사람이 스웨덴 질병이라 부른다거나, 러시아 사람이 러시아 질병이라 부르리라고는 상상하기 쉽지 않다. 인간이 원래 그렇다. 우리에겐 비난할 사람이 필요하고 어떤 외국인 한 명이 그 병을 옮겼다면, 그 외국인이 속한 나라를 주저없이 통째로 비난하곤 한다. 자세한 조사 따위는 필요하지 않다.

 

p311. 사회 기반.

 사회 발전과 경제 발전이 제자리걸음인 국가는 지도자가 대단히 파괴적이고 무력 충돌이 잦은 몇몇 나라뿐이다. 그 밖의 나라에서는 대통령이 아무리 무능해도 사회와 경제가 발전한다. 그렇다면 지도자가 정말 그렇게 중요한지 물어야 한다. 그리고 그 답은 아마도 '아니다'일 것이다. 사회를 꾸려나가는 것은 그 나라 국민인 다수의 사람들이다.

 나는 아침에 세수하려고 수도꼭지를 틀었을 때 마술처럼 따뜻한 물이 나오면, 이런 상황을 가능하게 한 배관공을 소리 없이 칭송할 때가 있다. 그런 기분이 들 때면, 감사해야 할 수많은 사람이 떠올라 종종 가슴이 벅차오른다. 공무원, 간호사, 교사, 변호사, 경찰, 소방관, 전기 기사, 회계사, 안내 데스크에 있는 사람 등등. 모두 사회 기반을 구성하는, 그물처럼 얽힌 서비스를 수행하는 보이지 않는 사람들이며, 일이 잘될 대 우리가 찬양해야 할 사람들이다.

 2014년 에볼라 퇴치를 돕기 위해 라이베리아에 갔었다. 서둘러 손쓰지 않으면 전 세계에 빠르게 퍼져 10억 인구의 목숨을 앗아가고, 이제까지 알려진 그 어떤 유행병보다 심각한 해를 끼칠것으로 우려했기 때문이다. 그런데 치명적인 에볼라 바이러스와의 싸움을 승리로 이끈 주인공은 영웅적 지도자도, 국경 없는 의사회나 유니세프 같은 영웅적 조직도 아니었다. 공무원과 지역보건 의료 종사자들이 나서서 묵묵히 공중 보건 캠페인을 벌여 오랫동안 내려오던 장례 관습을 단 며칠 만에 바꿔놓고 죽어가는 환자를 목숨 걸고 치료하고, 환자와 접촉한 사람들을 모두 찾아내 격리하는 성가시고 위험하고 복잡한 작업을 해냈다. 인내심을 갖고 사회를 움직이는 용감한 사람들, 좀처럼 언급되지 않지만 이 세계의 진정한 구세주들이다.

 

p314. 누구를 비난해야 할까?

 가장 가난한 사람들이 고통받는 질병을 제대로 연구하지 않는 현실과 관련해 비난받아야 할 사람은 사장도, 이사도, 우주도 아니다. 그들을 손가락질해봐야 무슨 이익이 있겠는가?

 마찬가지로 언론이 내게 거짓말을 한다거나(대개는 사실이 아니다), 삐딱한 세계관을 심어준다며(맞는 이야기지만, 대개 고의성은 없다) 매체를 비난할 생각은 버려라. 전문가가 자기들만의 관심과 해당 분야에만 과도하게 초점을 맞춘다거나 상황을 악화시킨다며(그럴 때도 있지만, 대개는 나쁜 의도는 아니다) 그들을 비난할 생각도 버려야 한다. 한마디로, 개인이나 집단을 문제의 원인으로 지목해 비난할 생각을 버려야 한다. 나쁜 사람을 찾아내면 더 이상 고민하지 않는다. 그러나 문제는 거의 항상 그보다 훨씬 복잡하다. 여러 원인이 얽힌 시스템이 문제일 때가 대부분이다. 세계를 정말로 바꾸고 싶다면 누군가의 면상을 갈기겠다는 생각을 버리고, 세계가 어떻게 돌아가는지부터 이해해야 한다.

 

10장. 다급함 본능(Urgency Instinct)

 

p336

 멀리뛰기 선수더러 자신이 뛴 거리를 직접 측정하라고 해서는 안 되듯이, 문제 해결 기관더러 어떤 데이터를 발표할지 직접 결정하라고 해서는 안 된다. 현장에서 문제를 해결하려 노력하는 사람들은 늘 더 많은 돈을 원하기 마련이라 그들이 개선 정도를 측정해서는 안 된다. 그들은 잘못된 수치를 내놓을 수 있다.

 내게 에볼라 위기의 심각성을 알려준 것은 데이터였다. 의심 사례가 3주마다 2배로 늘고 있다는 사실을 보여준 데이터다. 내게 에볼라와 싸우기 위한 조치들이 효과를 내고 있다는 사실을 보여준 것도 데이터였다. 확정 사례가 줄고 있음을 알려준 데이터. 데이터는 절대적인 열쇠였다. 그리고 앞으로도 어떤 일이 터졌을 때 중요한 열쇠가 될 것이어서 데이터의 신뢰성과 그 데이터 생산자의 신뢰성을 보호하는 일은 대단히 중요하다. 데이터는 진실을 말하는 데 사용해야지, 아무리 의도가 좋아도 행동을 촉구하는 데 사용해서는 안 된다.

 

p338. 우리가 '정말로' 걱정해야 할 세계적 위험 다섯 가지

 우리가 대처해야 할 절박한 세계적 위험이 있다는 걸 나도 부인하지 않는다. 나는 세계를 핑크빛으로 보는 낙천주의자가 아니다. 문제에서 눈을 뗀다고 해서 마음이 안정되지는 않는다. 내가 가장 우려하는 다섯 가지는 전 세계를 휩쓰는 유행병, 금융 위기, 제3차 세계대전, 기후변화, 극도의 빈곤이다.

 이 문제들이 왜 가장 걱정되는 것일까? 일어날 가능성이 높기 때문이다. 앞의 세 가지는 예전에 일어났고, 나머지 두 가지는 지금 일어나고 있다. 그리고 다섯 가지 모두 직간접적으로 수많은 사람이 고통받고 인간의 발전을 여러 해 또는 수십 년간 멈출 것이기 때문이다. 이 문제를 막지 못하면 그 어떤 것도 작동하지 않을 것이다. 이 다섯 가지는 거대한 살인마여서 가능하다면 모든 힘을 모아 한 단계씩 차근차근 행동하는 식으로 반드시 문제를 해결해가야 한다. (이 목록에 오를 여섯 번째 후보가 있다. 바로 미지의 위험이다. 우리가 생각해본 적도 없는 일이 발생해 심각한 고통과 황폐화를 초래할 가능성이다. 생각만 해도 정신이 번쩍 든다. 우리가 손쓸 수 없는 미지의 존재를 걱정한다는 게 사실은 무의미하지만, 새로운 위험에도 늘 호기심과 경각심을 유지해 현명하게 대처할 수 있어야 한다)

 

세계적 유행병

 제1차 세계대전의 여파로 전 세계에 퍼진 스페인 독감은 5000만 명의 목숨을 앗아갔다. 4년 동안의 전쟁으로 몸이 쇠약해졌다고는 해도, 독감이 전쟁보다 더 많은 피해자를 내다니! 그 결과 세계 기대 수명이 10년이나 줄어들어 33세에서 23세가 되었다. 이는 2장(83쪽) 도표에서 확인할 수 있다.

 

전염병을 심각하게 바라보는 전문가들은 새로운 지독한 독감이 여전히 전 세계인의 건강에 가장 심각한 위협이 될 수 있다는 데 동의한다. 그 이유는 독감의 전염 경로 탓이다. 독감은 아주 미세한 물방울에 섞여 공기중에 날아다닌다. 감염자 한 사람이 지하철을 탔을 때 그 안에 있는 사람과 전혀 접촉하지 않고도, 심지어 같은 곳을 만지지 않고도 모두에게 전염시킬 수 있다. 독감처럼 매우 빠른 전파력을 갖고 공기 중에 떠다니는 질병은 에볼라나 HIV/에이즈 같은 질병보다 인류에 더 큰 위협이 된다. 전염성이 대단히 강하고 그 어떤 방어막도 간단히 무시해버리는 바이러스로부터 가능한 수단을 모두 동원해 우리를 보호하려는 노력은 쉽게 말해 그만한 가치가 있다.

 세계는 독감에 대처할 준비가 과거보다는 잘되어 있지만, 1단계 사람들은 무섭게 퍼지는 질병에 재빨리 대처하기 어려운 사회에 여전히 살고 있다. 누구나 어디서든 기초적인 의료를 받도록 해서 질병이 발병하면 빠르게 발견할 수 있어야 한다. 그리고 세계보건기구를 건강하고 강한 조직으로 유지해 전 세계의 대응을 조율하도록 해야 한다.

 

금융 위기

 지구촌 시대에 금융 거품의 영향은 치명적이다. 나라 전체의 경제를 망가뜨리고 대량 실업 사태를 일으켜 불만을 품은 시민들이 과격한 해결책을 찾게 만든다. 대형 은행이 무너지면 2008년 미국의 주택 담보대출 사태가 촉발한 세계적 참사보다 더 심각한 사태를 초래해 세계경제 전체가 붕괴할 수 있다.

 경제 시스템은 정확하게 예측하기 어려울 정도로 워낙 복잡해, 세계 최고의 경제학자들도 지난 금융 위기와 이후의 회복 가능성을 예측하지 못했다. 따라서 붕괴를 예측하는 사람이 없다는 이유로 경제가 무너지지 않겠거니 생각해서는 안 된다. 시스템이 더 단순하다면, 시스템을 이해하고 금융 붕괴를 피할 방법을 찾을 수도 있으련만 현실은 그렇지가 못하다.

 

제3차 세계대전

 나는 평생 국적과 문화가 다른 사람들과 친분을 맺기 위해 모든 노력을 다했다. 재미도 재미지만 폭력적 보복을 원하는 인간의 끔찍한 본능에 맞서, 그리고 모든 악 중에 가장 사악한 악인 전쟁에 맞서 세계 안전망을 강화하는 데 필요한 일이다.

 우리는 올림픽, 국제무역, 교육 교류 프로그램, 자유로운 인터넷 등 모든 수단을 동원해 인종과 국경을 뛰어넘어 소통해야 한다. 그리고 세계 평화를 위한 안전망을 강화하고 소중히 여겨야 한다. 세계 평화 없이는 우리의 지속 가능성 목표 중 어느 것도 달성할 수 없다. 과거 폭력 전력이 있는 나라가 현재의 세계 시장에서 영향력을 잃었을 때 자만심과 향수에 빠져 다른 나라를 공격하는 상황을 막는 데는 엄청난 외교적 노력이 필요하다. 우리는 구시대적 서양이 새로운 세계에 평화롭게 통합될 새로운 길을 찾도록 도와야 한다.

 

기후변화

 기후변화의 거대한 위협을 알아본다고 해서 최악의 시나리오만 살펴볼 필요는 없다. 공기처럼 지구가 공유하는 자원을 관리하려면 세계가 존중하는 권위가 있어야 하고, 국제적 기준을 준수하는 평화로운 세계라야 한다.

 얼마든지 가능한 일이다. 전 세계는 이미 오존 파괴 물질과 휘발유에 첨가하는 납을 관리해 지난 20년 동안 그 둘을 거의 제로 수준으로 낮췄다. 여기에는 제기능을 다하는 강력한 국제 공동체(구체적으로 말하면 유엔)가 필요하다. 그리고 소득수준이 다른 사람들의 여러 요구와 필요를 인정하는 국제적 연대 의식도 필요하다. 그러나 국제 공동체가 이산화탄소 배출 총량에는 거의 영향을 주지 않는 1단계 10억 인구의 전기 사용을 막는다면 그런 연대를 바랄 수 없다. 지금까지는 가장 부유한 나라들이 이산화탄소 배출의 주범이니 다른 나라를 압박하느라 시간을 허비하지 말고 자신부터 개선하려고 노력해야 한다.

 

극도의 빈곤

 이제까지 언급한 위험은 미래에 어느 정도는 알 수 없지만 고통을 초해할 가능성이 매우 높은 시나리오다. 그러나 극도의 빈곤은 가능성의 이야기가 아니다. 현실이며, 지금 당장 날마다 일어나는 고통이다. 에볼라가 발생한 지역도 그런 곳이어서, 초기 단계의 의료 서비스도 받기 힘들다. 내전이 일어나는 곳도 마찬가지다. 먹을거리와 일자리가 절실하고 잃을 것도 없는 젊은이들은 잔인한 게릴라 조직에 적극 가담하곤 한다. 악순환이다. 가난이 내전을 불러오고, 내전은 다시 가난으로 이어진다. 아프가니스탄과 중앙아프리카에서 일어난 내전으로 그 지역의 다른 지속 가능성 프로젝트들이 모두 중단된 상태다. 테러리스트들은 몇 군데 남 극도로 빈곤한 지역에 숨어 있다. 멸종위기에 처한 코뿔소가 내전이 일어난 지역의 한가운데에 갇혔다면, 코뿔소를 구하기는 더욱 어려워진다.

 오늘날 비교적 평화로운 시기가 어느 정도 지속되면서 세계는 좀 더 번영할 수 있었다. 극빈층은 그 어느 때보다 줄었다. 그래도 여전히 8억 인구가 극빈층이다. 기후변화와 달리 이 문제에서는 예측이나 시나리오가 필요치 않다. 지금 당장 8억 인구가 빈곤에 시달린다는 사실을 우리는 알고 있으며, 해결책도 알고 있다. 평화, 학교 교육, 보편적 기초 의료 서비스, 전기, 깨끗한 물, 화장실, 피임, 시장의 힘을 가동할 소액 대출 등이 필요하다. 가난을 끝내는 데 혁신 따위는 필요 없다. 다른 모든 곳에서 효과를 본 방법을 쓰면 그만이다. 그리고 빨리 행동할수록 해결할 문제는 더 작다는 사실도 알고 있다. 극빈층에 머무는 한 대가족에서 벗어나기 힘들고, 식구 수는 점점 늘어나기 때문이다. 마지막 남은 약 10억 인구에게 삶다운 삶에 필요한 기본 요건을 빨리 충족해주는 것은 사실에 근거한 우선순위로 볼 때 시급한 과제가 분명하다.

 도움을 주기 가장 어려운 사람들은 정부의 힘이 약한 나라에서 폭력적이고 무질서한 무장 범죄 조직에 시달리며 사는 사람들이다. 이들이 가난에서 탈출하려면 안전된 군대가 필요하다. 무장한 경찰관은 죄 없는 시민을 폭력에서 보호해야 하고, 정부 당국은 교사들이 평화롭게 다음 세대를 교육할 수 있도록 해야 한다. 

 나는 여전히 가능성 옹호론자다. 다음 세대는 매우 긴 계주 경기의 마지막 주자와 같다. 극도의 빈곤을 끝내는 경기는 1800년에 출발 총성이 울린 긴 마라톤이다. 다음 세대에게는 이 일을 마무리할 둘도 없는 기회가 주어졌다. 바통을 건네받고 결승선을 통과한 뒤 두 팔을 치켜들 기회다. 이 프로젝트는 반드시 완수해야 한다. 완수한 뒤에는 성대한 파티를 열어도 좋다.

 무언가가 대단히 중요하다는 사실을 아는 것이 내게는 위안을 준다. 이제까지 말한 다섯 가지 위험은 우리가 힘을 집중해야 할 분야다. 냉철한 머리와 확실하고 객관적 데이터로 접근해야 하며, 국제적 협력과 재원 조달이 필요하다. 극적 조치가 아니라 아기 걸음마 같은 조치와 꾸준한 평가로 접근해야 한다. 그리고 어떤 명분이든 모든 활동가는 이 위험을 존중해야 한다. 너무나 막중한 위험이라 양치기 소년의 실수가 끼어들어서는 절대 안 된다.

 걱정하지 말라는 뜻이 아니다. 걱정할 대상을 제대로 알자는 뜻이다. 뉴스를 외면하라거나 행동을 촉구하는 활동가의 말을 무시하라는 뜻도 아니다. 소음을 무시하고 중요한 세계적 위험에 주목하자는 뜻이다. 두려워하지 말라는 뜻도 아니다. 냉철함을 잃지 말고, 그런 위험을 줄이기 위한 국제적 협력을 지지하자는 뜻이다. 다릅한 본능과 모든 극적 본능을 억제하라. 세계를 과도하게 극적으로 바라보고 상상 속에서 문제를 만들어 스트레스받기보다 진짜 문제와 해결책에 좀 더 집중하다. 

 

11장. 사실충실성 실천하기(Factfulness in Practice)

 

p360

 영업 또는 마케팅과 관련해 유럽이나 미국에서 대기업을 운영하는 사람과 그 직원은 미래에 시장이 성장할 곳은 그들 나라가 아니라, 주로 아시아와 아프리카라는 사실을 이해해야 한다.

 채용과 관련해서는 세계 여러 나라의 직원을 고용할 때 유럽 기업이나 미국 기업이 우위를 누렸던 시대는 지나갔다는 것을 알아야 한다. 예를 들어 구글과 마이크로소프트는 전 세계에서 사업을 하며 '미국다움'을 거의 눈에 띄지 않게 만들었다. 그들이 채용한 아이사와 아프리카 직원들은 진정한 국제기업의 일원이길 바라고, 실제로도 그러하다. 구글의 최고 경영자 순다르 피차이Sundar Pichai와 마이크로소프트의 최고 경영자 사티아 나델라Satya Nadella는 모두 인도에서 태어나고 인도에서 교육받았다.

 나는 유럽 기업에서 강연할 때면 유럽 브랜드라는 이미지를 희석시키고("로고에서 알프스를 빼세요"), 본사를 다른 곳으로 옮기라는 말을 잊지 않는다.

 생산과 관련해서는 세계화가 끝나지 않았다는 것을 알아야 한다. 수십 년 전, 서양 기업은 제조업을 2단계 국가, 이른바 신흥 시장에 아웃소싱해야 한다고 생각했다. 같은 품질의 상품을 절반의 인건비로 생산할 수 있기 때문이다. 그러나 세계화는 일회성 이벤트가 아닌 꾸준한 과정이다. 여러 해 전, 방글라데시와 캄보디아가 2단계로 진입할 때 유럽의 직물업계가 그곳으로 이전했는데, 두 나라가 한 단께 더 부유해지면서 3단계로 진입하자 조만간 다른 지역으로 이전할 가능성이 높아졌다. 만약 아프리카로 이전한다면, 방글라데시와 캄보디아는 사업을 다각화하지 않을 경우 타격을 받을 것이다.

 투자 결정과 관련해서는 과거 식민지 시대에 형성된(그리고 언론 탓에 오늘날까지도 이어진) 아프리카를 바라보는 순진한 시각을 버리고, 오늘날 최고의 투자 기회는 가나, 나이지리아, 케냐에 있다는 것을 알아야 한다.

 업계는 조만간 철자 실수보다는 사실 오해를 바로 잡는 데 신경을 쓰고, 직원과 고객이 세계관을 반드시 정기적으로 업데이트하길 바라지 않을까 싶다.

 

p362

 궁극적으로 세계를 있는 그대로 보여주는 것은 언론인의 역할도, 활동가나 정치인의 목표도 아니다. 이들은 항상 흥미진진한 이야기와 극적인 서사로 우리의 주의를 끌려고 경쟁하게 마련이다. 그러면서 항상 흔한 것보다는 색다른 것에, 느린 변화보다는 새롭고 일시적인 것에 집중한다.

 양질의 뉴스 매체조차 통계 기관처럼 세계를 중립적으로, 그리고 극적이지 않은 모습으로 묘사하는 경우는 보기 힘들다. 그렇게 보도해야 맞겠지만, 그러면 너무 지루할 것이다. 언론에 그 수준까지 바라는 것은 옳지 않다. 그보다는 소비자인 우리가 뉴스를 좀 더 사실에 근거해 소비하고, 뉴스가 세계를 이해하는 매우 유용한 도구는 아니라는 사실을 알아야 한다.

 

 유시민의 여행 에세이. 

유럽 관광의 머스트비인 4개의 도시에 대한 역사적 배경을 주로 다루고 있다.

일반적인 신변 잡기식의 여행기와는 좀 차별화되긴 하는데 그래도 역시 여행 에세이이니만큼 캐쥬얼하다.

가볍고 재밋게 읽을만한 내용.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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p284

 베르사유 궁전 안내서는 건축 과정의 진실을 말하지 않는다. 궁전과 정원을 만든 과정과 방법을 알면 그곳에서 미학적 쾌감을 느끼는 것이 불가능해지기 때문이리라. 베르사유 궁전은 모든 면에서 전제군주제의 폭력적 본성을 증언한다. 루이 14세는 개신교 신자들에 대한 차별을 없앤 앙리 4세의 칙령을 폐지했다. 그러자 부당한 차별에 대한 분노와 두려움 때문에 개신교도 수십만 명이 종교적 관용이 있는 주변 국가로 떠나버렸다. 그런데 그들 중에는 상공업에 종사하던 이가 많아서 프랑스의 산업은 큰 타격을 받았다. 파리를 비롯한 도시의 거리에는 굶어 죽거나 전염병에 걸려 죽은 시신이 즐비했지만, 잦은 전쟁 때문에 국가의 재정이 바닥을 보인 탓에 정부는 적극적인 빈민 구제 사업을 할 수 없었다.

 루이 14세는 이런 상황에서 백성을 강제 동원해 공사를 벌였다. 사고가 나서 사람이 죽으면 아무 보상도 하지 않고 묻어버리게 했다. 그렇게 해서 지은 호화 궁전에 귀족들을 불러 모아 사냥과 승마, 당구와 춤을 즐겼다.

 '태양왕'이라는 별명은 어릴 때부터 발레를 했던 그가 태양신 아폴로 역으로 공연에 출연한 일과 관련이 있다. 그는 1715년 세상을 떠나기 직전 어린 증손자에게 후회가 담긴 유언을 남겼다. "전쟁을 피하고 국민의 고통을 덜어주는 정치를 해라." 루이 14세의 자녀와 손자들이 대부분 천연두와 홍역을 비롯한 전염병으로 일찍 죽었기 때문에 왕위가 증손자에게 바로 내려간 것이다. 프랑스 국민들은 70년 넘게 재위했던 왕의 죽음을 슬퍼하지 않았다.

 

p287

 전염병은 지금도 '공정'하다. 권력자 자신의 생명을 위협하는 공포에서 벗어나려면 만인을 전염병에서 해방해야 한다. 19세 후반 이후 문명국가들은 생물학, 병리학, 공공보건학, 도시계획학, 건축학 등 여러 분야에서 새로운 지식과 정보를 생산하는 전문가들의 능력을 모아 악성 전염병을 퇴치하는 데 성공했다. 그러나 지구촌에는 전염병이 창궐하는 지역이 여전히 많다. 어디선가 전염병이 창궐한다는 뉴스가 들리면 그 지역의 국가조직 자체가 붕괴했거나, 아니면 지극히 무능하거나, 사악하거나 또는 둘 모두인 자들이 권력을 행사하고 있지 않은가 의심해볼 충분한 이유가 된다.

==> 코로나19 정국에 굉장히 시의적절하다.

 

 

1. 코로나19처럼 아직 백신이나 치료 프로토콜이 확정되지 않은 바이러스는 치료약이 나오기 전까지는 확산의 저지가 가장 큰 목표가 된다.

2. 어차피 피부 접촉에 의해 혹은 비말등으로 호흡기로 감염되는 바이러스를 물리적으로 막을 수 있는 방법은 존재하지 않는다. 최대한 접촉을 피해서 감염의 확률을 낮추는 것이 물리적 최선일 뿐이다.

3. 미국과 프랑스의 대통령, 영국과 이탈리아의 수상이 이미 GG를 쳤듯이 지구의 모든 선진 섹터는 코로나19의 완전방역은 포기한 상태이고, 이동제한(lockdown)을 통해 다만 확산을 늦추는데 주력하는 전략으로 나가고 있다.

4. 미국과 유럽의 지도자들은 방역 전문가들의 말을 인용해서, 2020년 12월쯤 연말이 되면 세계 인구의 60~90% 수준에서 코로나19의 감염이 될 것이고, 상당한 숫자의 사상자가 나올 것이라는 코멘트를 내놓고 있다.
- 올해 일단 관광업계는 다 망했다고 봐야 한다.(아.. 쓰벌, 나도 항공 마일리지 소멸때문에 4월말에 유럽행 비행티켓을 끊어놨는데 완존 망했다.. 비행기가 운항한다고 해도 코로나로 초토화된 유럽에 가서 좋은 꼴 보긴 힘들 것 같다.-_-;;;;)

5. 아주 빠르면 연말쯤 백신이나 치료약이 나올 것이다. 현재 최대 7% 정도의 치사율은 0.1% 대로 떨어지면서 코로나19도 결국 일반적 유행성 독감 정도의 레벨로 위험도가 떨어질 것이다.

6. 지금 현재 이탈리아, 이란의 폭발적 증가세는 방역을 손놓고 있던 댓가다. 간단한 산수로 왜 이런 일이 벌어지는 지를 알 수 있다.

수학자들에게는 유명한 2의 배수의 법칙이라는 오래된 일화가 있다.

옛날 어느 왕국에서 큰 위기를 넘기는데 큰 공을 세운 신하에게 왕이 상을 주겠다고 하며 어떤 소원이라도 들어주겠다고 한다.

그러자 신하는 장기판의 81곳(9*9.. 사실 우리나라 현재 장기판은 9*10인데 이 일화가 나온 옛날 그 왕국의 장기판은 9*9인가보다. 이야기 대세에는 별 영향은 없다)에 숫자만큼 쌀알을 달라고 한다.

조건은 첫칸에는 한톨, 2번째는 2톨, 3번째는 4톨 이런식으로 칸을 옮겨가며 그 이전칸의 2배씩.

왕은 너무 소박한 소원이라 들어주기로 하는데 이게 계산을 해나가보니까, 처음에는 너무 소박한 소원이라 생각했는데 마지막에 가면 너무 엄청난 숫자가 나온다.

일단 마지막 81칸에 가면 쌀 몇 톨이 나오냐 하면,

가. 2^80(2의 80제곱) 톨 = 1.20893E24(1.20893x10^24)

사실 이렇게 표현해도 감이 안온다.

좀더 현실적으로 변환하자.

나. 오성과 한음으로 유명한 오성 이항복의 어린 시절, 이항복의 아버지는 빈둥거리는 이항복을 보고는 벌로 창고의 쌀알이 몇 톨이나 되는지 세보라고 한다.

자세한 과정은 생략하고 오성은 통계적 기법을 사용해서 이 미션을 완수하는데, 그 결과 쌀 한가마(80kg)에는 대략 8백만 톨의 쌀알이 들어있다는 것을 알게된다.

저 위의 쌀알 톨수를 8백만으로 나눠서 가마니로 표시해보자.

1.20893E24 톨 / 8백만 톨 = 151,115,727,451,829,000 가마니.
(계산은 엑셀로 하면 쉽게 된다)

그래도 감이 안온다.

다. 대한민국의 2019년 국민들의 평균 쌀 소비량은 1인당 61kg이다. 하지만 귀찮으니 1인당 넉넉히 80kg 한가마니를 소비한다고 치자.

그리고 대한민국의 국민의 숫자는 5,000만명이라고 하자.

그래서 나에서 나온 저 가마니 숫자를 5,000만명으로 나누면 저 쌀의 양이 대한민국 국민이 몇 년간 먹을 쌀의 양인지 알 수 있다.

151,115,727,451,829,000 가마니 / 5,000만 명
= 3,022,314,549 년

대충 앞으로 대한민국 국민이 30억년 동안 먹을 쌀의 양이 나온다.

마찬가지로 바이러스의 감염은 처음에 1명이 2명, 2명이 4명, 4명이 8명으로 확산시키면, 현재 전 세계 인구가 77억명 쯤이라고 하니까, 57단계쯤 가면 지구상에 사는 모든 인간이 감염된다.

단계를 그냥 접촉이 벌어지는 텀(term)으로 보면 되는데 하루 정도로 잡으면 57일 지나면 지구인 전체 감염이다.

그러니 미국이나 유럽의 지도자들이 이야기하는 연말 전세계인 60~90% 감염은 그리 큰 과장이 아니다.

그러니 초반에 한 명, 두 명의 환자가 발생했을때, 뭐 별거 아니겠지하고 넘어가면 1달 쯤 지나서 수백, 수천만 명이 감염되고 사망자가 속출하는 지옥도가 펼쳐지게 된다. 그것이 현재 이탈리아와 이란의 상황이다. 


어서어서 치료법과 백신이 나오기를 빈다.

 

 강남에 30년간 거주중인 50대 주부의 재테크와 인생 경험이 담긴 책. 책 제목은 원색적이라 할 수도 있지만, 저자가 강남에 집을 사고 싶었던 이유들을 이야기하면서, 현재 강남에 집을 사고 싶은 이들에게 해주고 싶은 이야기를 담고 있다. 

저자가 강남과 신도시를 오가며 살아왔던 인생의 경험 - 주로 집 장만과  관련되는 - 이 주된 내용이다.

웬만한 부동산 투자 입문서보다 생생하다. 저자가 살아온 삶과 연결지어서 집을 투자라는 목적만이 아닌, 주거와 생활이라는 실질적인 공간으로서의 가치를 접목한 부분이 다른 부동산 관련 도서와의 차이점이다.

그리고 중간중간 보이는 번득이는 비유에서 저자가 쌓아온 내공이 만만치 않음을 느낄 수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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p49. 다음 사람 먹을 것도 남겨둬야 한다

 '안 팔리는 집은 없다.' 제가 늘 하는 말입니다. 주변에서 집이 안 팔린다고 울상인 분들 보면, 자신이 세운 기준에서 꼼짝도 안 하고, 상대가 와주길 기다리며, 버티느라 못 파는 경우가 많습니다.

 상급지로 갈아타려고 할 때, 내 집은 비싸게 팔고 상급지는 싸게 사고 싶어합니다. 그렇게 하려면 상승기에 팔아서 돈을 들고 있다가 하락기에 다시 사면 좋은데, 그건 현실적으로 불가능합니다. 미래의 일은 그 누구도 알 수 없어서 집을 팔아서 돈을 들고 있을 수 없기 때문입니다. 

 결국 갈아타려고 하면, 상승기에 비싸게 팔고 비싸게 사거나, 하락기에 싸게 팔고 싸게 살 수밖에는 없습니다. 그러나 가능하다면  하락기에 싸고 팔고 싸게 사는 게 좋습니다. 상승기에는 매물을 거두어들이는 사람들이 많아서 돈을 들고 있어도 좋은 매물을 잡기가 어렵고, 상급지는 상승폭이 더 크기 때문입니다.

 그런데, 집값 하락기에는 집이 팔리지 않아서 갈아타지 못하는 경우가 많습니다. 매수자의 요구에 맞추기보다는, 내가 원하는 집값을 받고 싶은 마음이 더 크기 때문입니다.

 그러나, 종양이 3센티면, 수술 부위는 더 넓게 4~5센티 이상 잘라야 안전하듯이, 집 파는 것도 이와 비슷합니다. 하락기에는 더 떨어질 것을 기대하고 관망하는 매수자가 대부분이라 그들의 기대 수준에 맞춰서 적당히 타협을 해야 합니다.

 부부싸움에서도, 아쉬운 사람이 먼저 다가서서 머리를 조아리며 비위 맞출 수밖에 없듯이, 집을 팔 때도 마찬가지입니다. 버티다 보면 하락이 가속화되어 5000만원 싸게 팔면 될 것을, 1억을 낮춰도 안 팔리는 시기가 오게 됩니다. 결국 상승기까지 버텨야 원하는 가격에 근접해서 팔게 되지만, 이미 그때는 상급지가 더 빨리 더 많이 올라서 갈아타기 힘든 경우가 많습니다.

 집을 사는 시기는 내가 정할 수 있지만, 파는 시기는 마음대로 되지 않습니다. 그래서 집은 사는 것보다 파는 게 더 어렵습니다. 그래서, '집을 사는 건 기술, 파는 건 예술'이라는 말이 생겨난 겁니다.

 집을 팔 때는 인도주의(?) 정신이 필요합니다. 악착같이 내가 다 먹고, 다음 사람에게는 빈 껍데기만 넘겨주려 하지 말고, '난 이만큼이면 됐다'는 마음으로 다음 사람에게도 먹을 걸 남겨줘야 합니다. 팔고 난 뒤에 자꾸 돌아보면, 이미 판 집 오르는 걸 아까워하면, 나에게 들어오던 복도 도로 나간답니다.

 '무릎에서 사서 어깨에서 팔아라.'

 '다음 사람 먹을 것도 남겨두어야 한다.'

 

 부동산 고수였던 첫 직장의 선배 동료로부터 들은 말인데, 부동산 초보 시절 머릿속에 강하게 새겨넣었던 말이라, 나의 투자 마인드의 일부로 굳어진 말입니다.

 그래서 그런지, 집을 잘못 사서 고생한 적은 있지만, 집을 못 팔아서 고민한 적은 없습니다. 심지어 부동산 매매가 전혀 되지 않던 IMF 때, 인기 없는 수도권 임대주택용 아파트 3채도 원할 때 팔았습니다. 물론 손절매였습니다. 그것도 분양가의 -10%에 복비를 2배 주고 팔았습니다. 그러나 결코 손해가 아니었습니다. 손절매로 생긴 돈으로 몇 배 더 수익이 나는 곳에 투자했기 때문입니다.

 내가 정해 놓은 가격에 상대가 맞추길 바라는 대신, 상대가 원하는 가격으로 내 기준을 낮춰서 파는 것도 방법입니다. 이렇게 함으로써 마음 고생에서 벗어나고, '시간'과 '기회비용'을 얻을 수 있기 때문입니다.

 집을 사다 보면, 판단을 잘못해서 실수할 때가 있습니다. 부동산 초보뿐만 아니라, 투자 이력이 많은 부동산 고수들도 마찬가지입니다. 이럴 때 중요한 건, 솔루션입니다.

 내 기준만 고집하며 같은 자리를 뱅뱅 맴돌아봤자, 달라지는 건 아무것도 없습니다. 힘든 상황일수록 눈을 크게 뜨고, '세상은 넓고 사야 할 부동산은 많다'는 마인드가 필요합니다. 여기서 잃었어도 다른 곳에서 만회하면 된다는 생각으로 싸게 팔고, 다음 라운드로 넘어가야 합니다. 집을 팔 때도, 최선보다는 차선이 최선이라는 원칙이 적용된다고 할 수 있습니다. 

 

p62

 영화 <기생충>에서 주인공은, '무계획이 계획'이라고 말합니다. 어차피 계획대로 안 될 거니까, 그리고 괜히 계획 세웠다가 또 다른 실망을 낳을까봐, 무계획으로 살아가는 게 최선이라고 말하는 겁니다.

 그러나 영화 마지막 장면, 희망이 없어 보이는 밀폐된 지하 공간에서 주인공은 끊임없이 밖을 향해 신호를 보냅니다. '나는 아직 살아 있다'고, '희망을 버리지 않고 있다'고 타전합니다.

 

p92

 "사람들이 공포감에 빠져 있을 때 욕심을 부려라. 꺼꾸로 사람들이 탐욕을 부릴 때에는 공포를 느껴라. 그러나 자신이 시장보다 더 똑똑해 보인다는 오만함은 버려라." 워렌 버핏의 유명한 명언입니다.

 

p179.  세금 공부가 선행되어야 하는 이유

 최근에 재건축 아파트 이주를 앞두고, 아파트를 매도하신 분이 양도세 폭탄을 맞았다고 합니다. 이유는, 새로운 주택의 매수 시점이 양도세 중과에 걸리는 시기였기 때문입니다. 매도한 아파트가 대형 평형이어서 1+1을 받는 거였는데, 이사 갈 집을 1년 전에 미리 사두고 이주 시점에 맞춰서 매도했다고 합니다. 그런데 1+1은 관리처분 이후 2주택으로 봐서, 일시적 2주택의 비과세 혜택을 보지 못하고 중과세가 적용된 경우입니다.

 최근에 세금 정책이 많이 바뀌었습니다. 그래서 자칫 잘못해서 기존에 알고 있는 기준으로 집을 사고팔았다가는, 위와 같은 상황이 될 수 있습니다.

 우리가 세금에 대해 관심 갖게 되는 건, 어떤 상황이 닥쳤을 때인데, 사실은 다주택자가 되기 전에 미리 공부가 되어 있어야 합니다. 집을 사는 순서나 시기 및 지역에 따라 세금이 많이 차이나기 때문입니다.

 다주택자 중에는 보유세 부담 때문에 팔고 싶지만, 중과세 때문에 팔지 못하고 진퇴양난인 사람들이 많습니다. 그러나 다주택자인데도 세금 때문에 큰 걱정을 하지 않는 사람들도 있습니다. 세금 공부가 선행되어 그에 맞춰서 매매가 이루어졌기 때문입니다.

 당장 집을 소유하거나 팔지 않더라도, 부동산에 관심 있는 분들은, 세금에 관련된 책을 쉬운 거로 두 권 정도 사서 읽으시길 권합니다. 반복해서 읽다 보면, 자신에게 적용되는 부분을 발견하게 되고, 그러면서 서서히 세금에 밝아지게 됩니다. 이것이 다주택자가 되기 위한 선행 과정입니다.

 

p258

 학군 지역 대치동의 분위기를 잘 알려주는 곳이 있습니다. 바로 은마상가 2층에 있는 서점입니다. 거기에서 요즘 학생들이 가장 많이 찾는 교재가 뭐냐고 물어보면, 그 시기에 가장 핫한 교재를 알 수 있습니다. 비슷하게 생긴 주인 몇 분이 목장갑을 낀 채 바쁘게 오가며, 손님들과 눈도 마주치지 않으면서 무심히 원하는 책을 쓱쓱 빼주는 데 단 10초도 안 걸리는 곳, 그곳이 바로 교육의 1번지 대치동입니다.

 

p348. 슈퍼 상승 사이클의 중심에 있는 강남 아파트

 작은 규제, 내성이 생겨버렸다.

 

 이번 정부 들어와서 집값 안정을 목표로, 특히 강남 집값을 잡기 위해 수많은 규제책을 쏟아냈습니다. 그리고 올 4월만 해도 부동산 전문가들은 여러 가지 정부 규제책을 이유로, 집값 하락을 점치는 분들이 많았습니다. 그러나 강남 집값은 수년째 상승과 조정을 반복하며 '슈퍼 상승 사이클'을 지속하고 있습니다.

 원래 뭐든 할 만큼 하면 싫증내거나 지치는 게 순리입니다. 집값 상승도 그렇습니다. 산이 높으면 계곡도 깊은 법입니다. 그러나 이번 상승기는 좀 다릅니다. 한창 정점을 향해 달려갈 만하면 정부 규제가 나와서, 아직 덜 오른 상태에서 집값이 조정되고, 그 집값에 적응하게 합니다.

 그러다 시간이 지나면, 다시 오르기 시작해서 전고점을 가볍게 찍고, 거기서부터 다시 신고가를 찍습니다. 이렇게 정부의 부동산 규제와 수요자(투자자) 사이의 쫓고 쫓기는 게임이 수년째 되풀이되며 상승을 이어가고 있습니다

 부동산 그래프는 크게 보면 계단식으로 상승합니다. 즉, '상승'하다가 어느 시점이 되면 '하락과 조정'이라는 '휴식기'를 갖고, 다시 '상승'하는 양상을 보입니다. 그러나 최근 몇 년간 집값의 추이는 급상승해서 마치 직상승한 것처럼 보입니다. 그래서 추락을 전망하는 사람들도 있습니다.

 하지만 좀 더 자세히 들여다보면, 최근 몇 년간도 계단식 그래프를 그리고 있음을 알 수 있습니다. 다만, 텀이 다른 시기보다 빠르다는 특징이 있습니다. 급상승하다가 중간에 정부의 규제가 쉬어가는 타임을 만들어주었기 때문입니다.

 다시 말하면, 이번 상승기는 급격하게 부풀어올랐다가 한순간 꺼지는 거품이 아니라, 규제를 받아가며 내성을 키운 단단한 상승기라는 겁니다. 그리고 이렇게 길게 상승기를 이어가게 만드는 데에 정부의 규제가 한몫했다고 봅니다.

 이렇게 해서 최근 몇 년간, 강남 아파트값은 거의 두 배 가까이 올랐습니다. 예전처럼 2~3억에서 4~6억으로 오르던 것과는 달리, 18억짜리 아파트가 32억이 되고, 14억짜리 아파트가 28억이 되는 상황은 누구도 예측하기 힘들고 납득하기가 힘듭니다. 이런 와중에 힘들고, 상실감과 허탈감과 상대적 박탈감을 느끼는 사람들이 있습니다. 그들은 바로, 이번 상승장에 올라타지 못한 사람들입니다.

 요즘 유행하는 단어 중에 '영끌'이라는 말이 있습니다. '영혼을 끌어모아 집을 산다'라는 뜻으로, 돈을 모아서 사는 데는 한계가 있어서 자신의 능력 범위 내에서 최대한 융자를 받아서 집을 사는 것을 뜻합니다.

 주택 수요자에게 '실수요자'와 '투자자', 두 부류가 있습니다. 그러나 사실은 이 둘을 명확하게 구분할 수 없습니다. 실수요자라 할지라도, 영끌해서 산 집이 다른 집보다 더 오르기를 바라는 투자자의 성격도 지니고 있기 때문입니다.

 그러나 정부는 이 둘을 명확하게 나누고, 규제의 칼날을 투자자에게 겨누고 있습니다. 이 와중에 영끌해서 집을 사야 할 실수요자도 각종 금융규제로 집 사는 데 제약이 많아서 집 사기가 힘들어졌습니다. 부모가 돈을 보태주거나 빌려줄 수도 없는 흙수저들은 은행이 든든한 백이었는데, 이제는 그 사다리조차 걷어차인 상황입니다. 그래서 수많은 젊은 분들이 비조정지역 재개발이나 분양권 등의 소액투자를 하기 위해 수도권 지도를 열심히 들여다보고 있는 겁니다.

 

p351. 왜 강남 집값만 오를까

 이번 슈퍼 상승기의 가장 큰 특징은 양극화입니다. 예전의 대세상승기에는, 서울 및 수도권 지역의 집값이 적절한 폭의 차이를 두고 함께 상승하는 양상을 보였습니다. 그러나 이번 상승기는 집값 상승의 폭에서 차이가 큽니다.

 서울 내에서도 강남과 비강남의 차이가 크고, 서울과 수도권의 차이가 크며, 신축과 구축의 차이가 큽니다. 올해만 해도, 강남 핵심지 아파트는 신축 구축 가릴 것 없이 대체로 3~5억 정도 올랐는데, 전혀 온기가 전달되지 않는 수도권 지역도 많습니다. 

 이렇게 지역적으로 상승폭의 차이가 나게 한 것도 정부의 규제가 또 한몫했습니다. 보통 상승 초기에는 강남 핵심지 아파트부터 오르기 시작하는 경우가 많고, 그 온기가 차차 외곽으로 퍼져나가면서 식어가는 모습을 보입니다.

 그런데 이번 정부는 강남 아파트에만 칼날의 포커스를 맞추다 보니, 강남 아파트값이 오르는 순간 규제를 쏟아냅니다. 그러면 퍼져나가려던 온기가 차단되어 외곽 지역은 집값이 오르지 않은 채로 정체되게 됩니다.

 이런 상태에서 강남 아파트값은 10이 오르고 2가 내리는 상태로 조정되고, 그 사이 외곽의 아파트는 오히려 떨어지는 경우도 있었습니다. 즉, 온기는 전달되지 않아도 냉기는 그대로 전달되는 겁니다. 그러나 정부는 소폭 조정된 강남 아파트값을 두고 부동산 규제책 성공을 운운합니다.

 그리고 시간이 좀 지나서 사람들이 규제에 익숙해질 즈음이면, 다시 덜 오른 지역부터 상승이 시작되고, 그에 맞춰 강남은 더 빨리 전고점을 찍으며 신고가를 경신하게 됩니다. 남이 차려놓은 밥상에, 강남 아파트가 주인 노릇하는 격입니다.

 그러면 또다시 강남 아파트값을 잡기 위한 정부의 규제가 시작되고 그러면 수도권 외곽으로 아직 온기가 퍼져나가지도 않았는데 상승은 멈추고 다시 조정이 시작됩니다. 이런 과정에서 온기가 전달되지 않은 곳은 늘 발병 인자처럼 호시탐탐 상승 시기를 노리고 있고, 그것이 봉화처럼 상승 사인을 보내면, 강남은 더 빨리 뛰어가는 사이클을 반복합니다.

 쉽게 말해, 강남 아파트는 동물의 왕국에서 빨리 뛰는 사나운 동물입니다. 먹잇감이 나타났다 하면 남보다 빨리 뛰어가서 재빨리 낚아채 사라지고, 뒤늦게 나타난 녀석들이 사냥꾼의 총에 맞는 형상입니다.

 이런 상황이 되풀이되면서, 정부의 부동산 정책은 강남 집값은 잡지 못하고, 집값의 양극화만 부추겼습니다. 예를 들자면, 강남 고가주택 소유주들을 잡기 위해 주택수에 따라 종부세 요율을 조정했는데, 이게 오히려 외곽의 집값만 잡는 효과를 낳았습니다. 2주택 이상인 경우, 하급지 주택을 포기하는 사람이 많기 때문입니다. 그리고 양도세 요건이 강화되면서 장기보유의 형태로 방향을 잡는 다주택자들이 많아서 강남 아파트는 매물이 귀해져 더욱 아파트값이 오르는 현상을 낳았습니다. 

 

p354. 제2라운드 시작

 이 같은 슈퍼 상승 사이클이 오래 지속되면서 더 큰 문제는, '심리적인 제2라운드'로 옮아갔다는 점입니다. 즉, 영끌해서라도 핵심지 가까운 곳으로 이동해야만 온기를 받을 수 있다는 생각에, 무슨 수를 써서라도 상급지로 갈아타려고 하는 겁니다.

 이처럼, 사람들의 '불안한 심리'와 '정부의 규제'가 묘하게 박자를 맞추며, 상승곡선을 길게 이어가고 있습니다. 즉, 한 타임 놓친 사람들의 '좌절감과 불안감'이 '매수 에너지'로 바뀐 상태에서, 정부의 규제로 인한 '조정기'는 그들에게 시장참여자가 되게 하는 기회를 줍니다.

 그래서 좀 늦게 참여해도 얻을 게 있다는 '학습효과'를 낳게 되었고, 여전히 망설이던 사람들도 다음 조정기에는 수요자로 바뀌게 됩니다. 이런 새로운 시장참여자들로 인해, 시장은 도미노처럼 연쇄반응을 일으켜서, 상급지로 갈아타려는 대이동이 일어나고, 그 정점에 강남 아파트가 있는 겁니다.

 게다가 시중에 유동자금이 많은 것도 아파트값이 오르는 중요한 원인입니다. 경기가 나쁘다 보니 정부가 경기부양을 위해 계속 돈을 풀고 있고, 앞으로 제3기 신도시 토지보상금도 풀리면 시중에 통화량이 증가해서, 그 돈들은 주식 아니면 부동산으로 갈 것으로 예상됩니다.

 그런데 지금은 주식시장이 좋지 않아서 안전자산인 부동산으로 돈이 몰리는 상황이고, 특히 강남 아파트로 돈이 몰릴 가능성이 높습니다. 쉽게 말해, 돈의 가치가 계속 떨어지기 때문에 실물 가치를 반영하는 아파트값이 계속 오를 가능성이 높다는 말입니다.

 요즘 주변의 주택 수요자들의 특징을 보면, 크게 세 가지 경우로 파악됩니다.

 첫째는, 무주택자 중에 돈의 가치가 떨어지는 것을 보고 두려움을 느껴서, 집값이 떨어지면 사겠다는 생각을 버리고 영끌해서 집을 구입하려는 분들이 많은 것 같습니다.

 또 하나는, 최근 몇 년간의 경험을 통해 집값 상승폭이 지역마다 현저하게 차이가 나는 것을 확인하고, 기회가 되면 상급지로 갈아타려는 사람들이 많다는 것입니다.

 나머지 하나는, 세금을 낼 때 내더라도 집은 결코 배신하지 않는다는 생각에 다주택으로 입장을 전환해서 기회만 되면 집을 사려는 분들입니다.

 그러나 금융규제 등으로 인해 소액 여유자금밖에 없다 보니 소액 투자 쪽에 너무 많은 투자자가 몰려 있고 과열 현상을 보여서, 상승분을 미리 당겨오는 듯한 느낌을 받게 됩니다.

 이런 이유로 인해, 이번 상승장 초기에는 투자자들이 많이 움직였던 반면, 뒤로 갈수록 금융규제에서 비교적 자유로운 무주택 실수요자나 갈아타는 사람들의 움직임이 커져서, 금융규제에도 불구하고 도니모처럼 집값 상승이 들불처럼 번지는 모습을 보이고 있는 것 같습니다.

 

p356. '이명래 고약'이 필요한 시기

 어릴 때, '이명래 고약'이란 게 있었습니다. '이고약'은 까맣고 진득한 고무찰흙같이 생긴 건데, 몸에 종기가 나면 붙이는 연고였습니다. 적당한 크기로 떼어내서, 성냥불로 살짝 달군 후, 넓게 펴서 종기 환부에 붙이고 기름 종이 같은 것으로 덮는 겁니다.

 

 이 연고의 역할은, 요즘 항생제와 치료 방법이 정반대입니다. 요즘 항생제는 강력한 힘으로 세균을 억제하는 역할을 한다면, '이고약'은 종기를 더욱 빨리 곪게 해서 터지게 만드는 역할을 합니다. 쉽게 말해서 '곪아 터지게' 만드는 거지요.

 '이고약'과 항생제는, 과정은 정반대인데 결과는 같습니다. 그러나 이 둘은 큰 차이점이 있습니다. 항생제는 복용하는 동안 종기를 생기게 하는 포도상균 외에 몸에 유익한 균도 한꺼번에 박멸해서 무균 상태를 만들고, 몸의 면역 환경을 바꿔버립니다. 그리고 위에도 부담을 줘서, 위염을 동반할 수도 있습니다.

 그리고 가장 큰 문제는, '내성'입니다. 잘 치료해서 나으면 되는데, 어설프게 치료해서 덧나면 강도를 높여서 처방해야 합니다. 그럴수록 몸의 세균도 더욱 강한 슈퍼 세균으로 변해 버리고요. 쉽게 말해, 자기면역체계를 망가뜨리는 거죠.

 이에 비해 '이고약'은 좀 지저분하고, 곪아 터지는 과정이 고통스럽기는 해도, 종기 외에는 몸의 다른 부분에 미치는 영향은 없습니다.

 제가 종교인은 아니지만, 우리의 몸을 보면 신이 존재하는 것 같다는 생각을 하게 됩니다. 우리의 몸은 신비합니다. 어느 것 하나 불필요한 부분이 없고, 스스로를 지키는 힘도 지니고 있습니다.

 그러나 자꾸 외부적인 힘에 의지하다 보면, 몸은 역기능이 나는 것 같습니다. 자기면역 능력을 더 이상 쓰지 않고, 외부적인 힘에만 의지하려다 보니 나약해지는 겁니다. 반면 세균은, 강하지만 단순한 항생제의 종류를 감별해서 그에 대응할 준비를 갖춥니다. 사실, 우리 몸이 어떤 세균과 바이러스에 어떻게 대응할 수 있는지 아무도 알지 못합니다.

 어린 시절, 넘어져서 상처가 난 아이 무릎에 처마 밑의 보드라운 흑을 약으로 뿌려주는 엄마도 있었습니다. 그렇게 눈물 그렁그렁한 채 잠든 아이 무릎은, 며칠 후면 까맣게 딱지가 앉고 시간이 지나면 깨끗하게 낫곤 했습니다.

 우리 몸이 이러하듯, 부동산시장도 자가며녁체계를 지니고 있는데, 어설픈 국가의 통제가 걷잡을 수 없다는 상황까지 이르게 만들었고, 이런 상태에서도 정부는 하루가 멀다 하고 또 다른 부동산 규제책들을 준비하고 있는 상황입니다.

 최근 몇 년간 수없이 쏟아져나온 많은 부동산 대책들은 마치 약구에 즐비한 항생제 같다는 생각이 듭니다. 항생제를 쓰려면 정확한 처방으로 후유증까지 고려해서 깨끗하게 치료해야 하는데, 지금의 부동산 시장은 계속 덧나고, 약에도 내성이 생겨서 더 이상 듣지 않는 상황이 된 것 같습니다.

 어설픈 규제가 환경을 교란시켜서 변종이 발생한 건 아닌가 우려가 됩니다. 고스톱 칠 때도 내 패만 보고 이기겠다고 하면 절대 이기지 못하듯이, 정부 정책도 역시, 가끔은 내 걸 버려야 이길 수 있다는 철학이 필요한 시기인 것 같습니다.

 

p363

 얼마 전 만난 한 분은, '은마아파트를 지금 팔아야 하는가' 고민하고 계셨습니다. 그분은, 2006년 최고점에 은마 34평을 최고가를 경신하며 샀다고 합니다. 당시는 대치동 광풍으로, 매물 잡기가 힘든 상황이었습니다. 그래서 계약을 파기하려는 주인 때문에 힘들게 계약을 성사시켰답니다. 그래서 계약을 파기하려는 주인 때문에 힘들게 계약을 성사시켰답니다. 그런데 산 직후부터 가격이 주춤하더니 2010년 이후 긴 하락기를 겪다가 이제 겨우 전고점을 돌파하고 상승하고 있어서 고민이 된다는 겁니다.

 저도 비슷한 경험이 있습니다. 계약 파기를 원하는 매도인과 티격태격하며 무리수를 써서 계약을 강행했는데, 결론은 후회스러운 기억으로 남아 있습니다. 그러면서 얻은 교훈은, '순리가 진리다'입니다.

 집착은 허탈감을 동반합니다. 결과까지 나쁠 경우엔 좌절감마저 듭니다. 그러나 이상하게 안 된다고 하면 더 하고 싶어지고, 지금 놓치면 영원히 기회가 없을 것 같은 느낌이 듭니다. 그러나 지나고 나서 돌아보면, 싸늘하게 식은 욕망덩어리만 부끄럽게 남아 있을 뿐입니다. 

 쇼핑하러 가기 전에, 반드시 밥을 먹고 가라고 합니다. 배고픈 상태에서 쇼핑을 하면 과소비를 하기 때문입니다. 집을 살 때도 마찬가지입니다. 집을 사기 전에 마음의 관성을 제어하는 훈련부터 해야 합니다.

 원할수록 원하지 않는 것처럼, 자기 자신과 밀당을 시작해야 합니다. 집과 나 사이에 적당한 간격을 유지하면서, 순리대로 상황을 받아들일 여유를 지녀야 합니다.

1989년 12월 1일 릴리즈, 작사/작곡 요시키, 간주 기타 솔로는 히데의 작곡. 희대의 명곡.

(직역은 상당히 어색하다. 그래서 나름대로 감정선을 살려 의역함)

I'm walking in the rain
行くあてもなく 傷ついた体濡らし
絡みつく 凍りのざわめき
殺し続けて 彷徨う いつまでも
Until I can forget your love

난 빗속을 걷고 있어요
갈 곳도 없이 지친 몸에 젖어든
빗방울은 얼어붙어 시리게 사각거리고,
지치도록 계속되는 방황은 언제까지라도,
내가 당신의 사랑을 잊을 수 있을 때까지 계속되겠지.


眠りは麻薬
途方にくれた 心を静かに溶かす
舞い上がる 愛を踊らせて
ふるえる身体を記憶の薔薇につつむ
I keep my love for you to myself

잠든다는 것은 마약이야.
어찌할 줄 모르는 마음을 조용히 녹여주며,
날아오르듯 사랑을 춤추게 하고,
떨리는 내 몸을 향기로운 기억의 장미로 감싸주네.

 

Endless rain,
fall on my heart 心の傷に
Let me forget all of the hate,
all of the sadness

끝없이 내리는 비처럼
내 마음에 내려줘, 내 마음의 상처에 내려서,
나의 모든 미움과 슬픔을 씻어가 버려.

 

Days of joy, days of sadness
slowly pass me by
As I try to hold you,
you are vanishing before me
You're just an illusion
When I'm awaken, my tears have
dried in the sand of sleep
I'm a rose blooming
in the desert

즐거움과 슬픔이 가득한 나날들이 나를 스쳐 가네.
당신을 간직하려 할수록, 당신은 나에게서 환영처럼 사라져 가네.
깨어날 땐 언제나, 꿈의 모래속으로 나의 눈물은 사라져가네.
나는 사막에 피어나는 장미와 같아.

It's a dream,
I'm in love with you
まどろみ抱きしめて

당신과의 사랑에 빠져버린 꿈속에서,
어느덧 사라져버리는 당신과의 포옹

Endless rain,
fall on my heart 心の傷に
Let me forget all of the hate,
all of the sadness
I awake from my dream
I can't find my way without you

끝없이 내리는 비처럼
내 마음에 내려줘, 내 마음의 상처에 내려서,
나의 모든 미움과 슬픔을 씻어가 버려.
나는 꿈에서 깨어나지만,
당신 없는 세상에서 어찌할 줄 모르네

The dream is over
声にならない 言葉を繰り返しても
高すぎる 灰色の壁は
過ぎ去った日の思いを夢に写す
Until I can forget your love

꿈은 끝나버리고
이미 대답을 듣지 못할 이야기를 아무리 중얼거려봐도
끝이 보이지 않는 빛바랜 기억의 벽에, 지나가버린 날들의 추억만이 꿈처럼 남아있지.
이젠 지나간 그 사랑을 잊는거 외엔(내게 무엇이 남아있을까?)

Endless rain,
fall on my heart 心の傷に
Let me forget all of the hate,
all of the sadness

끝없이 내리는 비처럼
내 마음에 내려줘, 내 마음의 상처에 내려서,
나의 모든 미움과 슬픔을 씻어가 버려.

 

Endless rain
let me stay evermore in your heart
Let my heart  take in your tears,
take in your memories

끝없이 내리는 빗속에서
언제라도 당신의 가슴 속에 머물게 해줘
나의 가슴이 당신의 눈물과 당신의 기억속에 언제나 머물게 해줘.

Endless rain,
fall on my heart 心の傷に
Let me forget all of the hate,
all of the sadness

Endless rain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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하. 이거 예상외로 상당히 슬픈 가사네. 요시키 25살에 쓴 가사인데..

역시 아티스트의 감성이란, 일반인에 비해서 20,30년 이상 앞서가는 듯.

지금 마스크 배급제가 실시되고 있다. 대한민국의 현재 1일 마스크 생산 능력은 800만장. 마스크가 필요한 활동인구는 4,000만명.  정확히 수요의 1/5의 공급능력을 확보하고 있다.

그래서 개성공단을 이용해서 마스크 생산 능력을 늘리는 등의 방안이 검토되고 있다고 한다.

정부는 궁여지책 끝에 조중동 등 보수언론이 입에 침이 마르게 칭찬을 했던 대만식 배급제를 실시했다.

즉, 마스크 5부제로, 생일 뒷자리를 이용해서 오늘은 1일, 6일, 내일은 2일, 7일 식으로 5일씩 돌아가면서 마스크 장당 1천5백원 정도에 1인당 2개씩 배급(팔고)하고 있다.

그러자 조중동은 또 공산주의식 배급제를 하고 있다고 지랄들이다(조중동의 이 쌩지랄은 하루이틀의 일이 아니니 더 이상 말을 말자)

당연히 사용할 마스크가 부족하니 어느 약국에서 배급을 한다는 정보만 들리면 사람들이 가서 줄을 선다. 그래도 인당 2개씩 밖에는 못사는데 직장을 가느라 못사는 아들,손주를 위해서 할아버지, 할머니들이 가서 줄을 서서 그걸 사는 광경은 눈물겹다.

그래도 여전히 마스크는 부족하다.

사람들은 어떤 방법으로든 마스크를 구하려 하고, 그러다 보니 마스크를 쟁여놓은 이들이 은밀하게 거래를 하는 웃돈이 붙은 마스크도 사람들이 알게 되면 불티나게 팔린다.

좀전에 MBC 뉴스를 보니, 이런 마스크 밀매 현장을 기자가 잠입 취재를 한 내용이 나왔다.

시내 어느 약국에 공적 마스크는 이미 재고가 동이 났지만, 공적 마스크와 동일한 규격의 KF94 마스크(포장만 좀 틀리다)는 구입이 가능하다. 다만 가격은 공적 마스크의 2.5배 정도인 4천원에 판매중이며, 100장이든 200장이든 원하는 수량을 살 수 있다.

그 배경에는 이미 이런 사태가 올 것을 미리 예상한 똑똑한(혹은 약삭빠른) 마스크 판매업자들이 미리 매점해놓은 수 백만장의 마스크를 매입가격(1,000원 수준)의 2배 정도에 중간상에게 넘기고 중간상은 여기에 다시 1,000원 정도의 마진을 붙인다.

소매상(약국, 편의점)에서는 여기에 다시 소매 마진 1,000원을 붙여 소비자에게 판매한다.

이것은 일견 보기엔 악덕 상술이다. 하지만 이런 수요와 공급에 의해 가격이 결정되는 것이 바로 자유시장 경제의 대원칙이자 작동원리이다.

샌델의 정의란 무엇인가라는 책의 초반부에 나오는 자유시장 경제와 도덕적 정의에 대한 딜레마에 대한 예가 이와 똑같다.

미시시피주에 허리케인으로 엄청난 자연재해가 닥쳤다. 이로 인해 미시시피 전역에 홍수가 발생했고, 허리케인이 물러간 이후에도 고인 물을 뺄 수 있는 펌프의 숫자가 턱도 없이 모자랐다.

이에 미시시피의 주민들은 펌프를 사기 위해 온라인 펌프 판매처에서 펌프를 미친듯이 구매하기 시작했고, 펌프의 공급이 딸리자 펌프의 가격은 허리케인 발생 이전 가격의 2배, 3배,.. 결국에는 10배, 20배까지 뛰기 시작했다.

여기서 딜레마는 현대 경제 체제의 가장 근간이 되는 벤덤의 공리주의적 철학-최대 다수의 최대 행복-과 도덕적 판단의 모순을 어떻게 해결할 것인가에 있다.

과거 소련의 붕괴, 그리고 중공이 흑묘백묘를 내세워 사회주의를 포기했을 때, 자본주의자들은 자유경제야 말로 인류가 발명해낸 최상의 발명품이라는 찬사를 보냈다.

하지만 자유경제 지상주의에 취한 서구의 오만은 신자유주의라는 괴물을 만들어내어 세계 경제를 붕괴 직전까지 몰아넣은 전력도 있다.

우리는 자본주의가 최고다, 사회주의가 최고다라는 이념 싸움의 틈바구니 속에 살고 있지만, 실제 이 세계의 균형을 이루는 것은 어떤 주의나 ism이 아니라 그 속에서 우리의 삶이 어떻게 하면 더 윤택해질까라는 실용적 관점을 우리의 시스템 속에 어떻게 구체적으로 녹여내는가에 달려있다.

내 개인적인 생각은 이렇다.

공적 마스크로 하루에 2개씩의 마스크를 구할 수 있다. 보통 4인 가족으로 계산하고 일주일에 5일만 외부 생활을 한다고 하면, 4인*5일=20개의 마스크가 필요하다.

공적 마스크를 통해 8개의 마스크를 확보할 수 있다.
나머지 12개의 마스크는 윗돈이 붙든 뭐가 됐든 구할 수 있다면 구해야된다(안그랬다간 나중에 약값이 더 들어간다).

북한도 식량 위기가 해소된 계기는 식량 생산량의 증가에 의한 것이 아니라, 식량의 거래를 묵인한 암시장의 존재때문이었다.

자본주의의 총아인 미국에서도 현재 강력하게 단속하는 상품이 있다. 마약이다. 마약은 보통 원가가 gram당 100원 미만이다. 하지만 아주 싼 마약도 gram당 1~2만원이 넘어간다.

또한 과거 1920년대 미국은 금주법을 실시한 적이 있다. 미국은 금주법을 통해 술의 생산과 소비가 사라진게 아니라 반대로 밀주 유통이 음성적으로 성장하여 마피아가 성장하는 계기가 되었다.

한국도 성매매를 금지한 이후에 성매매가 사라진게 아니라 도리어 음성화되면서 술집, 클럽, 호텔과 함게 깡패 조직의 주요한 비즈니스 모델이 되어 깡패들이 조직을 키워서 기업형 깡패가 되는 요인 중의 하나가 되었다.

그 해로운 마약과 성매매도 제대로 못 잡고 있다.

과연 마스크 암거래를 막을 수 있겠는가?

되지도 않을 짓은 안하는게 낫다. 차라리 양성화시켜서 공적 마스크의 2배 정도로 가격을 허용하는게 나을 것이라고 본다.

어차피 코로나19는 언젠가 갈것이고, 마스크 생산능력은 더 늘어날 것이다. 언젠가는 마스크를 길거리에 쌓아놔도 아무도 거들떠 보지 않는 그런 날이 조만간 올 것이다.

쓸데 없는 데 힘빼지 말자.

국내 코로나 현황 2020년 3월6일 현황

 

현황 요약, 대구/경북 vs 그외 지역

 

Data 출처 : 질병관리본부, https://www.cdc.go.kr/board/board.es?mid=a20501000000&bid=0015

(감상)

1. 부산, 대구, 경기, 경북 지역 외 사망자 없음

2. 대구/경북(TK)지역의 사망율이 그외 지역 사망율의 2배

3. 주요 감염경로에 대부분 신천지가 관련됨 - 역학조사를 통해서 밝혀야 겠지만, 2017년부터 우한에 설치된 신천지 지회의 교도가 우한에서 청도 대남병원으로 장례식에 조문을 온 시기와 중국에서의 행적을 조사해서 감염경로를 찾을 필요가 있음. 페이션트 제로(Patient Zero)가 이 경로를 통해 국내에 유입되었을 가능성이 높음.

4. 2020년 대한민국에서 발생한 COVID19를 신천지코로나로 부를 것을 제안함.

1918년 스페인독감의 발생지는 스페인은 아니지만 주요하게 발생한 곳이 스페인이었기 때문에 이 이름이 붙여졌음. 이유는 당시 스페인 내전으로 유럽 각지에서 자원/파병으로 모여든 군인들을 통해 스페인독감의 flu-virus가 스페인으로 유입되었음.

마찬가지로 COVID19는 최초로 중국 후베이성의 우한에서 감염자가 발생했지만, 대한민국에서는 신천지로 인해서 청도의 대남병원에서 최초로 유입된 것으로 의심되고, 이후 대구 신천지 교회를 통해 신자들에게 감염이 확산되었으며, 이후 신자들에 의해 대구와 경북 지역에 2차 감염이 확산되었고, 결국은 전국적으로 전염이 시작되는 계기로 작동하였다.

그러므로, 이번 코로나 사태의 추이에 비추어 볼때, 이번의 COVID19의 한국 전염 사태를, '신천지 코로나'라 부르기에 아무런 법적, 도의적 문제가 없다고 사료된다.

COVID19 주요 국가별 사망율, 2020/03/05

 

코로나19 주요 국가별 현황(감염자/사망자/사망율)

1. 한국은 검사자 숫자의 모수가 공개되는데, 다른 나라는 내가 못찾는 것인지 검사 모수를 찾을 수 없다(현재 다른 나라에서도 한국의 Data를 주시하는 이유가 전수조사 자료이기 때문에 신뢰성이 높아서라고 한다)

2. 지금 코로나19로 이슈가 되는 주요 국가중 사망율이 가장 낮다.

예상되는 이유는,
1) 의심증상자를 전수 조사하기 때문에 감염자가 거의 100% 수준으로 필터링 되서 사망자의 모수가 모두 카운팅 되기  때문이다.

2)역시 같은 이유로 다른 나라는 의심증상자를 적극 조사하지 않는다(이유는 국가별로 약간씩 틀리다). 즉 사망자의 모수인 감염자가 전수 카운팅 되지 않고 있다.

3)주요 사망자는 기저질환을 가진 노약자들이 많은데, 이와 같이 지병이 있고 체력이 약한 분들은 초기에 적극적 치료를 받지 못하고 폐렴으로 악화시 사망에 이를 위험도가 증가한다고 보인다. 반대로 평소 체력이 건강한 사람들은 거진 다 낫고 있다. 즉, 감염자를 적극적으로 찾아내는 한국과 달리 증상이 심해서 병원을 찾는 이들만을 검사하는 패시브 정책을 취하는 외국의 경우 초기 진료에 실패해서 사망율이 높아진다(중국의 후베이성이 초기 패닉에 빠진게 이와 같은 정책 실패로 보여진다).

=> 현재로선 한국의 사망율이 가장 정합성이 높은 데이타이다.
추가적으로 전문가들이 역학조사와 임상사례로 사망율에 대한 data를 내놓겠지만, 현재로 봐선 적극 대응시 코로나19의 사망율은 0.6%(1000명에 6명) 수준으로 예상된다.

(추가. 신천지라는 고위험 변수가 없었다면 감염자 숫자와 사망자 숫자는 더 낮았을 것이다. 사망율은 아마도 비슷하겠지만)

3. 마찬가지 이유로 이 질병을 그냥 일반 감기 수준으로 개인 보건 위생의 차원에서 냅두면, 미국처럼 질병 취약 계층(노약자, 노숙자, 저소득층 등)의 피해가 커져서 7~8%에 육박하는 상당히 심각한 사태로 발전할 수 있다.

이런 상황에서 그나마 대한민국에서 살고 있다는 게 다행이라고 생각한다.

 

Mama, take this badge off of me
I can't use it anymore
It's gettin' dark, too dark to see
I feel I'm knockin' on heaven's door

엄마, 이 뱃지를 나에게서 떼어주세요.

내겐 더 이상 필요가 없네요.

점점 어두워져요. 너무 어두워서 보이지가 않아요.

나는 이제 천국의 문을 두드리나봐요.


Knock, knock, knockin' on heaven's door
Knock, knock, knockin' on heaven's door
Knock, knock, knockin' on heaven's door
Knock, knock, knockin' on heaven's door


Mama, put this guns in the ground
I can't shoot them anymore
That long black cloud is comin' down
I feel I'm knockin' on heaven's door

엄마, 내 총들은 땅에 묻어주세요.

난 더 이상 쏠 수가 없어요.

먹구름이 길게 나에게 드리우네요.

나는 이제 천국의 문을 두르리나봐요.


Knock, knock, knockin' on heaven's door
Knock, knock, knockin' on heaven's door
Knock, knock, knockin' on heaven's door
Knock, knock, knockin' on heaven's door

작사/작곡 : 김선민

 

언제나 우리 함께라는 걸, 잊어버리면 안돼. 

눈물 흘려서도 안돼, 날 위해 준비했었던 사랑

말하지마, 니 눈빛을 느낄 수 있어.

이젠, 누구도 믿지 않아

난 오늘을 꿈꿔왔었지, 우리 하나 되는 그날 우우우~~~

내 영혼의 깊은 곳에서, 너를 찾아가네

넌 내 가슴을 몇 번, 이나 열어보고 다시 몇 번을 닫아버린 거니

이젠 나를 믿어줘, 내겐 더 이상 아파할 기억이 남아있질 않아.

 

 


이젠 누구도 믿지 않아, 난 너만을 꿈꿔왔었지

우리 하나 되는 그날 우우우 우우~

내 영혼의, 깊은 곳에서 너를 찾아가네

넌 내 가슴을 몇 번, 이나 열어보고 다시 몇 번을, 닫아 버린 거니

이젠 나를 믿어줘

내겐 더 이상 아파할 기억이 남아있질 않아

 

 

영원히, 널 사랑해

마지막 그날이 와도, 난 너만을 사랑할 수 있어 

언제까지나

 일본의 대표적 지식인인 우치다 타츠루의 무라카미 하루키의 작품론. 무엇보다도 굉장히 재밋다.

무라카미 하루키의 작품은 무언가 아싸리하게 끝나는 맛이 없다는 점이 있다. 사진으로 말하자면 약간은 흐릿하게 핀트가 엇나간 사진을 보는 것 같은 느낌이랄까?

우치다 타츠루의 무라카미 하루키에 대한 작품론과 해석을 보면서 내 그런 느낌이 나만의 것은 아니었구나라는 것과, 그것이 왜 그런지에 대해서 어느 정도 수긍할 수 있었다.

조각에는 양각과 음각이 있다. 양각은 보여주려는 바를 직접적으로 드러나게 하는 것이고, 음각은 그와는 반대로 보여지지 않는 것을 보여주기 위한 기법이다. 

이 책을 통해 나는 하루키는 음각을 통해 이 세상을 보여주려 했다는 것을 알게 되었다.

책머리에는 팬의 입장으로 편애한다고 써놨지만, 내가 보기엔 하루키를 편견없이 바라본 객관적인 글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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p34

 무라카미 하루키의 경우 <바람의 노래를 들어라>, <1973년의 핀볼>, <양을 쫓는 모험> 이라는 초기 3부작은 비슷한 테마를 담고 있습니다. 실제로 그런 사건이 있었는지는 별도로, 이 작품들은 무라카미 하루키의 개인사에 깃든 트라우마적 경험을 써낸 것입니다. 꼭 현실에서 벌어진 사건이 아니더라도 현실 이상으로 실감나는 사건입니다. 심지적인 원풍경이라고 해도 좋고, 심층구조라고 해도 좋습니다. 무언가를 생각하거나 느낄 때 틀 자체를 형성하는 사건이 존재하는데, 그것을 글로 쓰지 않으면 앞으로 나아갈 수 없습니다. 이것이 바로 '트라우마적 경험'입니다.

 트라우마가 문제가 되는 이유는 상처가 아프다는 점보다는 외상적 경험에 대해 '이야기할 수 없다'는 불가능함 자체가 인격의 골격을 이루고 있다는 점 때문입니다. 기묘하게도 우리가 타인을 판단하는 요소는 그 사람이 시시콜콜 이야기하는 주제가 아니라 그 사람이 무엇에 대해 이야기하지 않는가, 어떤 화제를 신경증적으로 기피하는가 하는 점입니다(영화나 드라마에서 자주 나오잖아요. '아이는 있나요?' 하고 누가 물으면 갑자기 부르르 떨며 사람 목을 조르는 놈!).

 

 '트라우마적 경험'이란 그런 것입니다. 그 사람에게 살아갈 의미(와 무의미)가 모조리 '차마 이야기할 수 없는 화제'로 편성됩니다. 그래서 어떤 새로운 사건과 마주치더라도, 어떤 미지의 사항을 입력하더라도, '옛 상처'가 빚어내는 정형화된 반응으로 귀착하고 말지요. 어떤 인간과 만나더라도, 어떤 말을 듣더라도, 어떤 것을 만지더라도, 미지의 것, 이해할 수 없는 것은 아무것도 없습니다. 단지 '모든 것을 이미 알고 있는 세계' 안에 갇힌 채 시간이 멈추는 것, 이것이 트라우마적 증상입니다.

 따라서 '트라우마적 문학' 또는 '문학적 트라우마'가 존재합니다. 그것은 어떤 이야기를 쓰더라도 동일한 틀로 돌아가 자신의 발언에 스스로 동의하는 '혼자만의 끄덕거림'을 되풀이합니다. 독자에게는 '설명'하지 않고 뜻 모를 고유명사를 의미가 있는 것처럼 늘어놓으면서 '너 따위가 내 기분을 어떻게 알겠어?' 하고 소리 지르며 주먹을 휘두릅니다.

 물론 그렇게 해도 작가로서 먹고살 수는 있습니다(아니, 그런 작가는 꽤 많지요. 실명을 거론하면 난처해질 테니까 참겠습니다만). 그렇지만 특정한 독자층만이 사랑하는 작가이기를 포기하고 넓은 '세계'로 나아가기 위해서는 언젠가 트라우마에서 벗어나야 합니다. 자신을 반복적으로 '그곳'으로 돌려보낸는 트라우마적 경험과 단절해야 합니다. 그러려면 어떻게 해야 할까요? 트라우마는 '공허'한 것입니다. '나는 그것을 제대로 언어화할 수 없다'는 불가능의 양태로만 존립하니까요. 술술 언어화할 수 있다면 '트라우마'라고 할 수 없습니다. 

 '트라우마에 대해 남김없이 이야기하는 일'이란 '사실 난 이런 경험을 억압하고 있었다'는 식의 커밍아웃은 아닙니다. 우리가 할 수 있는 일은 어떤 종류의 결락이나 결여에 대해, 다시 말해 돌이킬 수 없는 방법으로 무언가를 상실하고 깊이 훼손당한 나에 대해 이야기하는 것뿐입니다. 그것은 '도넛 구멍'에 대해 이야기하는  것과 비슷합니다. 도넛 구멍 자체를 직접 '이것'이라고 지명할 수는 없습니다. 도넛을 만들어 먹어보지 않으면 도넛 구멍의 맛이나 기능을 이해할 수 없지요. 트라우마적인 경험에 대해 이야기한다는 것은 '도넛 구멍을 포함하고 있는 도넛을 만드는' 작업과 닮았습니다.

 <노르웨이의 숲>에서 무라카미 하루키는 20대까지 자신에게 들러붙어 있던 트라우마적 경험에 대해 이야기하려는 자기 절개切開를 시도했습니다. 마취도 하지 않고 수술하는 것이나 마찬가지니까 상당히 쓰라린 일이었을 것입니다. 그러나 자신을 트라우마로부터 해방시키기 위해서는 어쩔 수 없이 꼭 필요한 작업이었습니다.

 

p64

 무라카미 하루키의 아버지는 매일 아침 전사자들을 향해 기도를 올렸습니다. 그분은 중국 대륙에서 차마 말로 표현할 수 없는 경험을 겪었습니다. 수많은 사람이 아무 의미도 없이 불필요할 정도로 잔혹하게 죽어가는 것을 가만히 보고 있을 수밖에 없는 경험이었습니다. 거의 선친은 자신의 경험을 언어화할 수 없었고, 구태여 언어화하는 것을 자제했습니다. 아마도 언어로 치환해버리면 자신의 경험이 지닌 본래의 '절박함'이 희박해질 것이라고 여겼기 때문일 것입니다. 그래서 그는 빈 동굴처럼 자기 몸에 드리운 '죽음의 그림자'를 순수한 상태로 보존하는 길을 선택하고, 평생 그런 마음을 품은 채 죽었습니다. 무라카미 하루키는 '언어화할 수 없는 것'이야말로 아버지의 'soul'이자 유일무이성을 지켜준 것이 아닐까 생각합니다.

 '언어화할 수 있다'는 것은 타자에게 이해받고 타자와 공유한다는 뜻입니다. 그것은 그 자신이 '그 무엇과도 바꿀 수 없음', '대체 불가능성'이라고 정의한 생명의 정의와 어긋납니다. 우리 한 사람 한 사람의 생명을 형성하는 것은 '언어화할 수 없는 것'이기 때문입니다. 적어도 '언어화하기 지극히 곤란한 것'이기 때문입니다.

 따라서 작가의 일은 생명을 남김없이 기술하는 것이 아닙니다. 생명에 살며시 '다가붙는' 것입니다. 무라카미 하루키 자신의 말을 빌리면 '생명과 생명을 잇는joining souls together' 일입니다.

 무라카미 하루키는 '아버지'를 주제로 글을 쓴 적이 없습니다. 아버지가 왜 '아버지 같은 사람'이 되어버렸는지, 그 과정을 주제로 삼아 묘사한 적이 없습니다. 그만큼 그가 다가붙으려고 하는 알이 취약하다는 말이겠지요.

 무라카미 하루키는 중화요리를 일절 먹지 않습니다. 먹을 수 없습니다. 그는 중국과 관련된 강박관념일지도 모른다고 어느 글에선가 썼습니다. '목구멍으로 삼킬 수 없다'는 것은 두드러지게 상징적인 행동입니다. 그는 중국에 관한 어떤 경험(그것은 자신의 경험도 아닙니다)이 이름 붙여지고, 타인의 이해를 받고, 분류당하고 잊히는 것을 거부하고 있습니다.

 초기의 명작인 <중국행 슬로 보트>는 화자인 '내'가 해를 끼칠 생인인 우치다 타츠루의 무라카미 하루키의 작품론. 무엇보다도 굉장히 재밋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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p34

 

 무라카미 하루키의 경우 <바람의 노래를 들어라>, <1973년의 핀볼>, <양을 쫓는 모험> 이라는 초기 3부작은 비슷한 테마를 담고 있습니다. 실제로 그런 사건이 있었는지는 별도로, 이 작품들은 무라카미 하루키의 개인사에 깃든 트라우마적 경험을 써낸 것입니다. 꼭 현실에서 벌어진 사건이 아니더라도 현실 이상으로 실감나는 사건입니다. 심지적인 원풍경이라고 해도 좋고, 심층구조라고 해도 좋습니다. 무언가를 생각하거나 느낄 때 틀 자체를 형성하는 사건이 존재하는데, 그것을 글로 쓰지 않으면 앞으로 나아갈 수 없습니다. 이것이 바로 '트라우마적 경험'입니다.

 

 트라우마가 문제가 되는 이유는 상처가 아프다는 점보다는 외상적 경험에 대해 '이야기할 수 없다'는 불가능함 자체가 인격의 골격을 이루고 있다는 점 때문입니다. 기묘하게도 우리가 타인을 판단하는 요소는 그 사람이 시시콜콜 이야기하는 주제가 아니라 그 사람이 무엇에 대해 이야기하지 않는가, 어떤 화제를 신경증적으로 기피하는가 하는 점입니다(영화나 드라마에서 자주 나오잖아요. '아이는 있나요?' 하고 누가 물으면 갑자기 부르르 떨며 사람 목을 조르는 놈!).

 

 

 

 '트라우마적 경험'이란 그런 것입니다. 그 사람에게 살아갈 의미(와 무의미)가 모조리 '차마 이야기할 수 없는 화제'로 편성됩니다. 그래서 어떤 새로운 사건과 마주치더라도, 어떤 미지의 사항을 입력하더라도, '옛 상처'가 빚어내는 정형화된 반응으로 귀착하고 말지요. 어떤 인간과 만나더라도, 어떤 말을 듣더라도, 어떤 것을 만지더라도, 미지의 것, 이해할 수 없는 것은 아무것도 없습니다. 단지 '모든 것을 이미 알고 있는 세계' 안에 갇힌 채 시간이 멈추는 것, 이것이 트라우마적 증상입니다.

 

 따라서 '트라우마적 문학' 또는 '문학적 트라우마'가 존재합니다. 그것은 어떤 이야기를 쓰더라도 동일한 틀로 돌아가 자신의 발언에 스스로 동의하는 '혼자만의 끄덕거림'을 되풀이합니다. 독자에게는 '설명'하지 않고 뜻 모를 고유명사를 의미가 있는 것처럼 늘어놓으면서 '너 따위가 내 기분을 어떻게 알겠어?' 하고 소리 지르며 주먹을 휘두릅니다.

 

 물론 그렇게 해도 작가로서 먹고살 수는 있습니다(아니, 그런 작가는 꽤 많지요. 실명을 거론하면 난처해질 테니까 참겠습니다만). 그렇지만 특정한 독자층만이 사랑하는 작가이기를 포기하고 넓은 '세계'로 나아가기 위해서는 언젠가 트라우마에서 벗어나야 합니다. 자신을 반복적으로 '그곳'으로 돌려보낸는 트라우마적 경험과 단절해야 합니다. 그러려면 어떻게 해야 할까요? 트라우마는 '공허'한 것입니다. '나는 그것을 제대로 언어화할 수 없다'는 불가능의 양태로만 존립하니까요. 술술 언어화할 수 있다면 '트라우마'라고 할 수 없습니다. 

 

 '트라우마에 대해 남김없이 이야기하는 일'이란 '사실 난 이런 경험을 억압하고 있었다'는 식의 커밍아웃은 아닙니다. 우리가 할 수 있는 일은 어떤 종류의 결락이나 결여에 대해, 다시 말해 돌이킬 수 없는 방법으로 무언가를 상실하고 깊이 훼손당한 나에 대해 이야기하는 것뿐입니다. 그것은 '도넛 구멍'에 대해 이야기하는 것과 비슷합니다. 도넛 구멍 자체를 직접 '이것'이라고 지명할 수는 없습니다. 도넛을 만들어 먹어보지 않으면 도넛 구멍의 맛이나 기능을 이해할 수 없지요. 트라우마적인 경험에 대해 이야기한다는 것은 '도넛 구멍을 포함하고 있는 도넛을 만드는' 작업과 닮았습니다.

 

 <노르웨이의 숲>에서 무라카미 하루키는 20대까지 자신에게 들러붙어 있던 트라우마적 경험에 대해 이야기하려는 자기 절개切開를 시도했습니다. 마취도 하지 않고 수술하는 것이나 마찬가지니까 상당히 쓰라린 일이었을 것입니다. 그러나 자신을 트라우마로부터 해방시키기 위해서는 어쩔 수 없이 꼭 필요한 작업이었습니다.

 

 

 

p64

 

 무라카미 하루키의 아버지는 매일 아침 전사자들을 향해 기도를 올렸습니다. 그분은 중국 대륙에서 차마 말로 표현할 수 없는 경험을 겪었습니다. 수많은 사람이 아무 의미도 없이 불필요할 정도로 잔혹하게 죽어가는 것을 가만히 보고 있을 수밖에 없는 경험이었습니다. 거의 선친은 자신의 경험을 언어화할 수 없었고, 구태여 언어화하는 것을 자제했습니다. 아마도 언어로 치환해버리면 자신의 경험이 지닌 본래의 '절박함'이 희박해질 것이라고 여겼기 때문일 것입니다. 그래서 그는 빈 동굴처럼 자기 몸에 드리운 '죽음의 그림자'를 순수한 상태로 보존하는 길을 선택하고, 평생 그런 마음을 품은 채 죽었습니다. 무라카미 하루키는 '언어화할 수 없는 것'이야말로 아버지의 'soul'이자 유일무이성을 지켜준 것이 아닐까 생각합니다.

 

 '언어화할 수 있다'는 것은 타자에게 이해받고 타자와 공유한다는 뜻입니다. 그것은 그 자신이 '그 무엇과도 바꿀 수 없음', '대체 불가능성'이라고 정의한 생명의 정의와 어긋납니다. 우리 한 사람 한 사람의 생명을 형성하는 것은 '언어화할 수 없는 것'이기 때문입니다. 적어도 '언어화하기 지극히 곤란한 것'이기 때문입니다.

 

 따라서 작가의 일은 생명을 남김없이 기술하는 것이 아닙니다. 생명에 살며시 '다가붙는' 것입니다. 무라카미 하루키 자신의 말을 빌리면 '생명과 생명을 잇는joining souls together' 일입니다.

 

 무라카미 하루키는 '아버지'를 주제로 글을 쓴 적이 없습니다. 아버지가 왜 '아버지 같은 사람'이 되어버렸는지, 그 과정을 주제로 삼아 묘사한 적이 없습니다. 그만큼 그가 다가붙으려고 하는 알이 취약하다는 말이겠지요.

 

 무라카미 하루키는 중화요리를 일절 먹지 않습니다. 먹을 수 없습니다. 그는 중국과 관련된 강박관념일지도 모른다고 어느 글에선가 썼습니다. '목구멍으로 삼킬 수 없다'는 것은 두드러지게 상징적인 행동입니다. 그는 중국에 관한 어떤 경험(그것은 자신의 경험도 아닙니다)이 이름 붙여지고, 타인의 이해를 받고, 분류당하고 잊히는 것을 거부하고 있습니다.

 

 걱초기의 명작인 <중국행 슬로 보트>는 화자인 '내'가 해를 끼칠 생각도 없는데도 계속하여 무의식적으로 중국인에게 상처를 입히는 몇몇 짧은 스토리로 구성되어 있습니다. 이 작품에는 무라카미 하루키 문학의 '핵'을 이루는 무엇인가가 있습니다. '이름 붙여지고, 타인의 이해를 받고, 분류당하고 잊히는 것을 거부하는 일'이 아버지의 생명 중 일부분을 형성하고 있다는 것, 그리고 '아들'이 그것을 무언중 물려받았다는 것, 적어도 무라카미 하루키는 그렇게 느꼈습니다.

 

p73

 트라무아는 기억이 '바꾸어 쓰기를 거부하는' 증상을 가리킵니다. 어떤 기억의 단편이 어떤 이유에 의해 동일한 형태와 의미(라기보다는 무의미)를 계속 유지하면서 일체의 수정이나 교체도 거부할 때, 우리의 정신은 기능부전機能不全에 빠집니다. 트라우마를 해제시키려면 '강력한 서사의 힘'이 필요합니다. '동일한 형태와 (무)의미를 사수하려고 하는 기억의 단편을 다른 형태, 다른 의미로 '바꾸어 읽는' 힘을 우리에게 주는 것은 바로 '강력한 서사'입니다.

 

p76

 어느 사회집단이든 각자에게 고유한 '그곳의local 아버지'를 갖고 있습니다. '신'이나 '하늘'이라는 이름의 존재이기도 하고, '절대정신'이나 '역사를 관통하는 철의 법칙성'으로 불리기도 하며, '왕'이나 '예언자' 같은 인격적인 모습을 취하기도 합니다. 그 세계에서 일어나는 일(선한 것이든 악한 것이든)을 무언가가 전일적專一的으로 '솜씨 좋게 처리하고manipulate' 있다는 믿음을 가진 사회집단은 그 사실로 인해 '부권제사회'라고 볼 수 있습니다.

 아무리 선의를 품었다 해도 약자나 박해받는 자에게 동정적이라 해도, '이 세상의 악은 조종자manipulator가 조작하고 있다'는 전제를 채용하는 모든 사회이론은 '부권제 이데올로기'입니다. '부권제 이데올로기야말로 모든 악의 근원'이라고 이야기하는 사람은 그렇게 말함으로써 '세계에는 악의 근원이 존재한다'고 '아버지에 대한 믿음'을 선포하는 자가 되어버립니다.

 왜 우리는 '아버지'라는 존재를 요청할까요? 그것은 우리가 '세게에는 질서를 제정한 자가 없다는 '진실'을 여간해서는 견딜 수 없기 때문입니다. 현실에서 우리는 아무런 의미도 없이 불행에 처하고, 이유도 없이 학대당하며, 어떤 교화의 의도도 없이 벌을 받고, 농담처럼 살해당합니다. 천재지변은 선인만 살려주고, 악인의 머리 위에는 벼락이나 화산 바위를 떨어뜨리지 않습니다. 가장 아까운 사람은 요절하고, 살아 있는 것 자체가 재앙처럼 보이는 인간은 남보다 훨씬 건강합니다. 그런 사례를 우리는 질릴 만큼 보아왔습니다.

 자, 그러면 세계는 완전하게 무질서하고, 모든 것은 무원칙하게 일어나고 있을까요? 아니, 그렇지 않습니다. 거기에는 부분적으로 '질서 같은 것'이 있습니다. 세계를 두루 포섭하는 질서를 창조할 수 있는 사람은 아무 데도 없습니다. 하지만 우선 손이 닿는 범위 안에 '질서 같은 것'을 정립할 수는 있습니다.

 사고가 과학적이고, 판단이 공정하고, 신체 감수성이 높고, 상상력의 발동을 아끼지 않는 사람들이 모여 사는 곳이 있다면, 그 작은 집단에서는 상대적으로 '어떤 질서 같은 것'이 '무질서'를 제어할 것입니다.

 물론 그것은 어디까지나 일시적이고 상대적인 승리에 지나지 않습니다. '어떤 질서 같은 것'을 일정 이상의 범위로 확장하는 일은 불가능하니까요. '질서 같은 것'은 그곳에만 있다는 조건을 받아들일 때만 질서답게 기능합니다. 보편성을 요구하는 순간, 무질서 속으로 곤두박질치기 때문입니다. 레비나스가 서술한 것처럼, 정의를 한꺼번에 사회 전체적으로 실현시키려는 운동은 반드시 숙청이나 강제수용소 중 하나를 채용하기 마련입니다. 역사는 오늘날 이 교훈에 예외가 없다는 것을 가르쳐주고 있습니다.

 우리는 '아버지'를 요청해서는 안 됩니다. 그곳의 질서를 확대하고자 할 때, 우리는 한 사람 한 사람의 '손이 닿는 범위'를 산술적으로 더하는 것 이상을 해서는 안됩니다. 무라카미 하루키의 예루살렘 연설을 빌려 표현하자면, '생명과 생명을 잇는' 것 이상을 해서는 안 됩니다.

 나는 '부권제 이데올로기'에 대항하는 축으로서 '그곳의 공생 조직'을 넘어서는 것을 원해서는 안 된다고 생각합니다. 딱히 사변적으로 그렇게 생각하는 것이 아닙니다. 경험이 그렇게 가르쳐주고 있습니다.

 

p92

 레비나스는 《전체성과 무한 Totalite et Infini》(마르티누스, 1961)의 끝부분에서 '아이 갖기'와 '여성화하기'라는 수수께끼 같은 주제를 제시했습니다. 이에 대해 일찍이 나는 다음과 같은 글을 쓴 적이 있습니다.

 

 우리는 에로스의 관계에 놓여 있으며, 죽음이 삶의 꼬리를 물고 있는 우로보로스 뱀과 비슷한 불가사의한 순환구조에 얽혀들어 있다. 왜냐하면 서로 사랑하는 사람들이 관능적으로 지향하는 바는 각 상대방의 관능이며, 상대방의 관능에 생기를 불어넣는 것은 자기 자신의 관능이기 때문이다.

 관능적인 주체의 근거는 사랑하는 사람 안에도 없고, 사랑받는 사람 안에도 없다. 사랑에 관해 에로스의 주체는 '난 ... 할 수 있다'는 기능의 용어로 관능을 이야기할 수 없다. 왜냐하면 사랑을 둘러싸고 내 주체성에 근거를 부여해주는 것은 내가 '사랑받고 있다'는 수동적 상황이기 때문이다.

 

 주체는 자신의 기능을 스스로 행사함으로써가 아니라 사랑받고 있다는 수동성을 통해 자기 동일성을 이끌어낸다.

《전체성과 무한》

 

 이때 주체의 주체성을 구성하는 것은 능동성이 아니라 수동성이며, 자신의 확실함이 아니라 불확실함입니다. 그리고 레비나스는 관능을 둘러싸고 벌어지는 결정적인 주체의 변용을 '여성화'라고 불렀습니다.

 

 주체의 불확실함은 주체의 자기 통제력에 의해서 받아들여질 수 없다. 그것은 주체의 유연화attendrissement, 주체의 여성화effemination 인 것이다. 《전체성과 무한》

 레비나스가 '여성'이라고 이름을 붙인 것은 경험적인 여성이 아니라 존재론적 범주라는 말은 이제껏 몇 번이나 반복해왔다. 이제 그것이 어떤 것인지, 겨우 그 윤곽이 뚜렷해졌다. '여성'이란 수동성을 양식으로 삼는 주체성 - 모든 주체성에 선행하는 주체성 - 의 다른 이름이다.

 우치다 타츠루, 《레비나스와 사랑의 현상학 レヴィナスと愛の現象学》, 세리카쇼보 2001

 

p115

 범속적인 '선악'의 기준이 없는 세계에서 '선'을 행하는 것, '옳고 그름'의 절대적 기준이 없는 세계에서 '정의'를 행하는 것.... 이것이 절망적일 만큼 이루어내기 힘든 일이라는 것은 누구나 알고 있습니다. 그렇지만 세계의 수많은 사람들은 지금 자신이 절망적일 만큼 이루어내기 힘든 일에 직면해 있다는 감각을 공유하고 있다고 믿습니다.

 

p119. 한국 드라마 <겨울 연가>와 《양을 쫓는 모험》의 설화론적 구조

 

 BSJ(배용준 서포터즈 인 재팬)의 주재主宰로 제1회 일본 욘욘 학회가 교토 캠퍼스 플라자에서 개최되었습니다. 그런 으리으리한 자리에 제1회 특별강연자로 나서는 영광을 입었지요. 열기에 휩싸인 회의장은 남성 2명(나와 스태프 한 사람)을 제외하고는 전원 다 여성이었습니다. 우선 개회 인사로 모두들 입을 모아 '안녕하십니까?'를 제창했습니다. 멀리 도쿄에서 참석한 두 사람에게는 '욘욘 순례자'라는 칭호를 주었고, 가장 연장자인 참가자에게는 '오늘의 최고 상궁님'이라는 칭호를 수여했습니다.

 곧바로 학회 발표가 시작되었습니다. 발표 의제는 '용준 가족의 아홉 유형 분석', '<겨울 연가> 1개생의 사랑과 눈물의 나날', '<겨울 연가> 사이드 스토리의 세계적 전개' 이렇게 세 가지였습니다. 나는 벌써 일본 프랑스어 프랑스문학회, 일불日佛 척학회, 일본 영상학회에 등을 돌린 몸입니다(지금 회원 명부에 이름이 남아 있는 학회는 일본유대학회뿐입니다). 어느 학회를 가더라도 나를 듣는 이로 상정해주는 발표를 들을 수 없었기 때문입니다. 내가 아무 흥미도 못 느끼는 주제를 가지고 전혀 이해할 수 없는 방언jargo으로 이야기하는 발표를 듣고 앉아 있는 것은 순전히 소모적일 뿐입니다. 그런 식밖에 안 되는 학회 참여는 그만두어버렸습니다. 따라서 학회 발표를 듣고 무릎을 치며 배꼽을 잡고 웃기는 참으로 오래간만이었습니다. 이토록 비평성과 유머 감각이 넘치는 발표를 듣기는 가뭄에 콩 나듯 아주 드문 일이었지요.

 지적 위신을 내세운다든가, 남의 학설을 폄하한다든가, 박식을 자랑한다는가 하는 '꼴불견'의 동기는 손톱만큼도 없었습니다. 모든 사람이 '각자 배용준에 대한 경험을 통해 어떻게 최대한의 쾌락을 이끌어냈는가' 하는 데 지성과 정서를 힘껏 쏟아붓고 있을 따름이었습니다. 순수한 동기 ... 가히 학술이란 이런 것이어야 할 것입니다.

 발표가 끝나자 내 순서가 돌아와 한 시간쯤 강연을 했습니다. '죽은 자를 어떻게 죽게 할 것인가', 다시 말해 '죽은 자와의 커뮤니케이션'이라는 관점으로 <겨울 연가>를 해석하는 내용이었습니다. 별로 알려지지 않았지만 (내가 어제 막 생각해낸 것이라 당연하지만) <겨울 연가>는 복신 몽환 노能와 동일한 극적 구성을 띠고 있습니다. 어딘가 있을 법한 곳에서 '그림자의 나라에서 온' 인물과 만나는 구조는 이런 키워드로 이야기의 막을 엽니다.

 "왜 당신은 다른 사람처럼 사라지지 않고 여기에 머무르는 것입니까?" 바꾸어 말하면 "왜 당신은 죽은 나라에서 돌아온 것입니까?" 하고 묻는 것이지요. 이 물음에 대하여 주인공은 "그러면 진실을 말씀드리지요" 하는 예고와 동시에 다리에서 모습을 감춥니다(여기에서 막간).

 그다음 막간 노래가 나오고 모습을 바꾼 주인공이 무대에 등장합니다. 다시 몸을 꾸미고 가면을 쓰고 '다른 사람'이 된 주인공이 질문을 던진 사람을 청자로 삼아 트라우마적 경험을 남김없이 털어놓으며 그 경험을 재구성해갑니다. 그리고 그의 '죽음'을 둘러싼 모든 이야기를 마쳤을 때, '그럼 뒷일을 부탁하네' 하며 망령은 황천으로 사라집니다.

 <겨울 연가>에서 이승의 주인공은 민형이고, 저승의 주인공은 준상입니다. 그리고 청자는 유진입니다. 유진이 첫눈이 내리는 서울 거리에서 민형과 만나면서 몽환 노는 시작합니다. 중간의 막간은 민형이 당하는 두 번째 교통사고입니다. 기억을 회복한 준상이 침대에서 갈라진 목소리로 '유진아' 하고 부르는 것이 막간 노래에 해당합니다. 이 한마디 말을 전환점으로 삼아 이야기는 극적인 전개를 이룩합니다. 유진을 청자로 삼은 저승의 주인공은 '자기가 누구인지' 찾아 헤매며 '트라우마적 서사(준상은 왜, 그리고 어떻게 죽었을까?)'를 재구성하는 분석적인 여행을 떠납니다. 저승의 주인공은 자신을 죽인 것이 '어머니'라는 것, 자신을 버린 것이 '아버지'라는 것, 그리고 유진 이외의 모든 친구와 지인이 준상의 죽음(그리고 민형으로 다시 태어남)을 바란다는 것을 알게 되지요. 준상이 죽지 않기를 바란 것은 이 세상에 유진밖에 없었습니다. 오로지 그녀만이 단 한 사람, 세계에 남은 유일한 '올바른 상제喪制'였습니다. 왜냐하면 유진은 준상에 관한 모든 것을 기억하고 있을 뿐 아니라 준상이 죽은 뒤에도 '준상에게 물어보고 싶은 것'이 있었기 때문입니다.

"12월 31일 밤, 넌 내게 무슨 말을 하려고 했던 거야?"

 춘천의 크리스마스트리 앞에서 커피를 들고 돌아온 유진에게 등을 돌린 채 준상이 "하고 싶었던 말이 생각났어...." 하고 말하는 장면에서 나는 계속 엉엉 울었습니다. 그런데 왜 울었는지 이제야 알았습니다. 그 순간에 상제와 죽은 자 사이에 통신 라인이 연결되었기 때문입니다.

 죽은 자의 목소리가 상제에게 닿아 '장례'가 대단원을 맞이하는 장면을 지켜보며 내 몸과 마음의 고층古層에 가로놓여 있던, '인간이 비로소 인간이 되는 순간'의 감동이 되살아나면서 눈물이 흘러넘쳤던 것입니다. 장례를 올바르게 치르면 우리는 죽은 자의 메시지를 똑바로 들을 수 있습니다. 그렇게 믿음으로써 인류의 조상은 다른 영장류와 구별되었습니다. 이 장면에서 우리는 '인간성의 기점을 알리는 표식이 세워진' 그때의 감동을 추체험하고 있는 것입니다. 올바른 장례란 죽은 자와 이야기를 나눌 수 있다고 믿는 것입니다. 그때 죽은 자들은 그들만의 세계로 사라집니다. 죽은 자는 더 이상 이야기를 나눌 수 없다고 생각하면 이 세상에 머물러 갖가지 앙화를 일으킵니다. 그러므로 올바른 상제는 죽은 자를 향해 이렇게 물어야 합니다.

 "당신은 무엇을 하고 싶었던 것입니다?"

 이 물음에는 원리적으로 답이 없습니다. 따라서 이 물은 반드시 영구적입니다. 그것으로 족합니다.

 우리가 죽은 자에게 계속 물음을 던지고 죽은 자의 응답을 기다릴 때, 불현듯 정신을 차려보니 죽은 자는 사라지고 없는 것입니다. 죽은 자에게 묻기를 그치고, 죽은 자는 더 이상 아무 이야기도 할 수 없다고 선언하면(왜냐하면 죽은 자가 무슨 이야기를 할지 우리는 알고 있기 때문에), 죽은 자는 '죽은 자의 나라'에서 돌아옵니다.

 준상이 '그림자의 나라'에서 돌아온 것은 유진 이외의 모든 이가 장례를 잘못 치른 탓입니다. '그의 장례식은 끝났어. 이제는 그를 잊어버리자' 하고 모두들 굳게 결의했기 때문입니다. 따라서 준상=민형은 '유령'으로 돌아왔습니다.

 <겨울 연가>는 '유령'이 유진의 도움으로 '성불'하는 이야기입니다. 노에서는 청자인 인물이 "당신은 무엇을 하고 싶었던 것입니까?" 하고 물으면 "나는 왜 여기로 돌아온 것입니까?" 하며 저승의 주인공이 스스로에게 되묻습니다. 죽은 자 스스로가 "나는 죽었지만 올바른 장례를 경험하지 못한 탓에 아직 제대로 죽지 못하고 있다"는 대답을 찾아낼 때까지 이 문답은 이어집니다. "나는 '내가 이미 죽었다'는 말을 당신에게 전하기 위해 돌아왔다"는 말을 죽은 자 자신이 발견했을 때, 장례는 끝납니다.

 죽은 자 자신이 스스로의 죽음을 인정하지 않으면 이야기는 끝나지 않습니다.

 준산이 겨울 바다에서 모든 추억을 바다에 버리는 대목에서 '트라우마적 기억의 재구성'이라는 분석적 여정이 완료됩니다. 따라서 그 이후의 에피소드는 서사적 구조로 볼 때 불필요하지요. 더 이상 어떤 인위적인 시도도 준상을 산 자의 세계로 데리고 올 수 없습니다.

 드라마의 마지막 편에서 두 사람이 만나는 해변에 지은 집의 풍경은 '그림자의 나라=죽은 자의 나라'에서 준상이 꾸는 '꿈'입니다. 여기에 이르는 기나긴 이야기가 없었다면 준상은 그 '꿈'을 꿀 수 없었을 것입니다. '죽은 준상=민형'은 유진의 올바른 장례를 통해 겨우 죽은 자의 나라에서 그 꿈을 볼 권리를 손에 넣었던 것입니다.

 나는 강연에서 이런 이야기를 했습니다.

 그 자리에 함께 한 '배용준 가족' 여러분은 '준상은 죽은 자'라는 대담한 가설에 어깨를 축 늘어뜨리며 가슴 아파했습니다. 냉정한 분석을 발표하여 송구스러웠습니다. 그러나 서사론의 측면에서는 '이것 말고는 해석의 가능성이 있을 수 없다'고 말씀드리고 싶을 정도로 내 분석은 정합적입니다. 올바른 장례를 치러주지 않은 죽은 자는 상제가 짊어져야 할 산 자의 삶으로 계속 찾아온다는 서사적 유형은 인류의 발생만큼 오래된 것이니까요. 그래서 온갖 문학작품에는 그런 유형이 되풀이하여 나타납니다

 자, 여기까지 읽으면 예감이 스치는 사람도 꽤 많지 않을까요. <겨울 연가>와 아주 닮은 설화구조를 지닌 작품으로 《양을 쫓는 모험》을 떠올릴 수 있다는 것을 말입니다. '쥐'는 '내'가 올바르게 추도하는 데 실패한 죽은 자입니다. 쥐는 제대로 죽을 수 없었습니다. 그 때문에 '나'를 향해 알 수 없는 여러 신호를 보냅니다. '나'는 그 신호를 받아들여 "쥐는 도대체 내게 무슨 말을 하고 싶었을까?" 라는 물음을 스스로에게 던집니다. 최선의 노력을 다해 '쥐'의 메시지를 들으려고 애쓸 대 '올바른 장례'의 집행이 이루어집니다.

그러나 그 메시지가 무슨 의미인지, 물론 '나'는 끝까지 이해할 수 없습니다. 알 수 있는 것은 '그것이 무엇을 의미하는 메시지인지는 이해할 수 없지만, 그것이 메시지라는 것만은 이해할 수 있는 메시지'를 보내는 것은 죽은 자뿐이라는 점입니다.

 '나'는 쥐에게 몇 가지 '심부름'을 명령받습니다. 또는 심부름을 명령받았다는 해석을 채용합니다. 양의 사진을 공개하는 것, 쥐가 맡긴 편지를 그녀에게 전달하는 것, 마지막에 시계의 태엽을 감는 것... 이 모든 심부름에 대해 '나'는 그 의미를 알지 못합니다. '나'는 그저 심부름을 충실하고 성실하게 이행할 뿐입니다. 이를테면 두 사람의 고향인 항구까지 편지를 전달할 때 '나'와 그녀는 이런 대화를 나눕니다.

 "고작 이것 때문에 도쿄에서 일부러 온 거에요?"

 "뭐, 그렇지요."

 "친절하군요."

 "그런 생각은 해본 적이 없는데... 습관적일 뿐이에요. 만약 입장이 바뀌었다면 그 사람도 그렇게 했을 거라고 생각하고요."

 "그 사람이 그렇게 해준 적이 있어요?"

 나는 고개를 저었다. "하지만 우리는 오랫동안 언제나 서로 비현실적인 폐를 깨쳐왔어요. 그것을 현실적으로 처리할지 안 할지는 또 다른 문제지요."

 "그런 식으로 생각하는 사람은 없지 않을까..."

《양을 쫓는 모험》

 

 그녀의 말대로 '그런 식으로 생각하는 사람은 없습니다.' 그것이 '내'가 쥐의 상제로 뽑힌 바로 그 이유입니다. 왜냐하면 '나'는 별달리 편지를 그녀에게 전해달라고 쥐에게 부탁받은 것은 아니기 때문입이다. 누구한테 부탁받지도 않은 일을 해주는 것이 자신의 의무인 것처럼 생각하는 인간만이 장례를 치를 수 있는 법입니다.

 "편지를 갖고 왔어요." 나는 말했다.

 "나한테요?" 그녀가 말했다.

 전화 소리는 너무 먼데다가 혼선까지 일으켜 필요 이상으로 큰 못소리로 이야기해야 했고, 그 때문에 서로가 하는 말은 미묘한 뉘앙스를 잃어버렸다. 비바람 부는 언덕 위에서 코트 깃을 세우면서 이야기하는 듯했다.

 "사실은 내 앞으로 온 편지인데, 어쩐지 당신 앞으로 보낸 것이 아닐까 하는 생각이 들어서요."

 "그런 생각이 들었군요."

 "네, 그래요." 나는 말했다. 그렇게 말해버리고 나니 자신이 아주 멍청한 짓을 하는 것 같았다.

 

 별장에서 '나'와 최후의 이별을 할 때, 쥐는 비로소 그가 보낸 신호와 그 의미에 대해 밝힙니다(그 설명은 사태를 절반쯤밖에 설명하지 못했지만).

 "나는 제대로 된 나 자신으로 너하고 만나고 싶었어. 나 자신의 기억과 나 자신의 연약함을 지닌 나 자신으로서 말이야. 너한테 암호 같은 사진을 보낸 것도 그 때문이었어. 만약 우연이 너를 이곳으로 데려와준다면 나는 마지막으로 구원받을 수 있다고 말이지."

 "그래서 구원은 받았어?"

 "구원받았어." 쥐는 조용히 말했다.

 

 나는 이 대화와 <겨울 연가>의 마지막 장면을 겹쳐놓고 싶다는 욕구를 억누를 수 없습니다. 바다에 잠기는 석양을 바라보면서 서로 껴안을 때, 두 사람이 발화하는 드라마 최후의 언어로서 익것보다 더 어울리는 것은 없을 것입니다.

 "난 계속 그렇게 생각했어. 만약 우연이 너를 이곳으로 데려와준다면 난 마지막으로 구원받을 수 있다고 말이지."

 "그래서 구원은 받았어?"

"구원받았어."

 

p129

 무라카미 하루키는 《해변의 카프카》의 서평에 대해 이런 이야기를 했습니다.

 

 줄거리를 대강 늘어놓은 서평은 좀 곤란하지요. 특히 결말까지 밝혀 버리는 것은 문제가 있습니다. ... 일반론적으로 말해 서평은 사람들의 식욕을 돋우는 것이어야 한다고 생각합니다. 비록 그것이 부정적이라고 해도 '이렇게까지 심한 말을 듣다니, 어떤 작품인지 좀 읽어보고 싶어지는군' 하는 마음이 들도록 해주었으면 합니다. 그것이 서평가의 솜씨가 아닐는지요.

 

 

 반대로 '식욕을 돋우지 않는 비평'이 어떤 것인지를 생각해보면 알 수 있을 것입니다. '줄거리를 줄줄 늘어놓거나 결말까지 밝혀버리는' 비평이 바로 몹쓸 비평입니다. 한마디로 이야기의 표층을 시간 배열 그대로 베끼며 결말까지 더듬어가면 '작가가 하고 싶은 말'이나 '주제'를 알 수 있다고 굳게 믿는 인간이 쓴 글, 그것이 쓸데 없는 비평이지요.

 '식욕을 돋우는 비평'은 그런 것이 아닙니다. 그것은 '수수께끼'를 중심으로 펼쳐 보이는 안내presentaion를 말합니다. 어떤 책 전체를 '수수께끼'로 가득 찬 텍스트로 여기는 독해를 가리킵니다.

 그렇게 책을 읽어내는 사람은 표지를 보면서부터 '오호, 이 표지 색깔에는 무언가 숨은 뜻이 있겠군...' 하며 고개를 갸웃하고 목차를 훑어보고는 설레는 마음으로 "낮 1시에 시작한 면접은 부인 5명을 끝내고 났을 때 저녁 6시가 되었다"는 첫 페이지의 첫 줄에 벌써 감탄의 숨을 몰아쉬며 '흠잡을 곳이 없는 첫머리로군. 이래야 문학이지' 하며 감동합니다. 그리고 서둘러 책을 읽습니다.

 모든 대목에서 툭하면 문학적 감흥의 실마리를 찾아낼 수 있는 독자야말로 '식욕을 돋우는 비평'을 쓸 수 있는 글쓴이일 것입니다. 그런 비평이 좋은 비평입니다.

 지금은 문학에 관한 이야기를 했지만, 다른 분야의 비평에 대해서도 똑같이 말할 수 있습니다. 비평에는 '미지未知'에 초점을 맞춘 비평과 '기지旣知'에 무게중심을 두는 비평, 두 가지가 있습니다. 대상이 문학작품이든 살아 있는 사람이든 별반 다를 바 없지요. 비평하는 인간은 '거기에 있는 미지의 요소'에 마음이 끌리는 동시에 '거기에 있는 기지의 요소'에도 감응합니다. 

 후지산을 보고 '오오, 보자기에 그려진 그림처럼 예쁘구나'하는 비평은 '기지로 환원하는' 비평입니다. 이런 방식을 웃기다고 생각하는 사람도 있는데 '감축減縮하는 비평법'은 때로 필요하며 유용하기도 합니다. '뭐, 그렇지. 세상은 그런거야'하는 뒷방 늙은이 같은 태도도 대체로 감축형 또는 환원형 비평에 속합니다.

 이러한 비평의 대표자로 아가사 크리스티가 형상화해낸 미스 마블을 꼽을 수 있습니다. 이 노파는 태어나 자란 마을에서 한 발자국도 외부에 나간 적이 없는 세상 물정 모르는 여자인데, 경탄할 만한 기억력으로 '옛날 이 마을에서 일어났던 아주 비슷한 사건'과 결부지어 온갖 사건의 진상을 밝혀냅니다.

 인간의 욕망이나 환상의 구조가 대단히 단순한 도식의 조합으로 이루어졌다는 것은 틀리없는 사실입니다. '모든 사건을 기지로 환원하는 비평'은 사실 '인간의 정신은 숙명적으로 빈곤하다'는 통렬한 진리에 입각해 있습니다. 이런 식으로만 인간 세계의 현상을 이야기하는 것은 아무래도 부족합니다.

 '아무리 맛있는 요리도 단지 짐승의 고기와 식물과 기름의 혼합에 지나지 않는다'고 하면 어떻겠습니까? '결국은 ... 에 지나지 않는다'로 끝내는 비평적 어법은 어떤 측면에서는 속이 시원합니다. 그러나 그것으로는 한정된 식재료를 조합하여 훌륭한 요리사만 낼 수 있는 기적의 '맛'에 대해서는 논할 수 없습니다.

 

 p133

 무라카미 하루키는 '문단'에서는 고립되어 있는 작가입니다. 등장할 때부터 순문학의 비평가들은 그를 낮게 평가했지요. '이상할 정도로' 낮게 평가했습니다. 무라카미 하루키를 긍정적으로 받아들이는 층은 《브루투스BRUTUS》나 《보물섬》을 읽는 사람, '대중적이고 가벼운 도시 지향의 경박한 놈들'이라는 고정관념이 나왔고, 그것이 결국 정설이 되어버렸습니다.

 분명 1980년대 고도소비사회라는 분위기 속에서 무라카미 하루키가 등장한 것은 사실입니다. '대중적이고 가벼운' 젊은이들이 열광적으로 지지한 것도 사실일 것입니다. 그렇지만 누구의 지지를 받았느냐에 의해 그 작품의 사회적 성격이 결정된다는 추론은 합리적이지 않습니다. 김정일이 할리우드 영화를 열렬히 좋아한다고 해서 할리우드 영화가 북한 취향이라고 추론하는 사람은 없잖아요.

 그런데도 무라카미 하루키가 어떤 부류의 도시생활자들로부터 '마치 내 이야기를 쓴 것 같다'는 공감(상당할 정도의 착각이라고 해도 좋을)을 얻고 있다고 해서 적지 않은 문예비평가들은 대기업 광고회사인 덴쓰와 최대 대중잡기 출판사인 매거진하우스의 미디어 컨트롤에 의해 선동당하는 어리벙벙하고 머리 나쁜 독자들을 위한 문학이라고 그의 문학을 규정해버립니다. 그러한 판정은 데뷔 이후 사반세기가 지났는데도 무라카미 하루키에게 '저주'처럼 들러붙어 있습니다.

 

 오늘날 무라카미 하루키의 작품은 세계 각국ㄱ의 언어로 번역되어(영어, 불어, 독어는 말할 것도 없고 한국어, 중국어, 러시아어, 폴란드어, 인도네시아어, 아이슬란드어, 터키어에 이르기까지) 해외의 숱한 문학 연구자가 그의 작품에 담긴 매력을 해명하고자 애를 쓰며 무라카미 하루키의 스타일을 모범으로 삼습니다. 이미 영어권을 중심으로 '무라카미 하루키 추종자'까지 출현하기 시작했지요. 《해변의 카프카》는 2005년 뉴욕타임스의 '올해의 베스트 10'에 뽑혔고, 2006년에 그는 '프란츠 카프카상'을 수상했습니다. 그가 현재 노벨문학상에 가장 가까운 일본 작가라는 점에 세간의 의견은 일치하지요. 그럼에도 일본의 비평가들 가운데 무라카미 하루키가 세계적인 대중성을 획득한 이유를 냉정하게 해명하고자 노력하는 사람은 놀랄 만큼 적습니다. 아무리 생각해도 이상한 노릇입니다.

 비평적 지성이란 본성적으로 '잘 설명할 수 없는 것'에 강하게 끌리는 법입니다. 간단하게 설명할 수 있는 것만 골라내어 정형적인 틀에 끼워 맞춘 다음 좋으니 나쁘니 평가를 내리는 것으로 비평이 끝나버린다면, 이 세상에 비평 같은 것이 없어도 아쉬울 사람은 없습니다(적어도 난 아쉬울 것 없어요)

 '무라카미 하루키 문제'는 비평가들에게 이중으로 곤란한 질문을 들이밀고 있다고 생각합니다. 하나는 '어떤 이유로 하루키는 세계적 대중성을 획득할 수 있었는가?'라는 물음이고, 또 하나는 '왜 그것을 일본의 비평가들은 설명할 수 없는가(또는 전혀 설명하려고 하지 않는가)?'라는 물음입니다. 일본의 비평가 중에 내가 납득할 만한 대답을 해주는 사람이 있다면, 그것은 《무라카미 하루키 옐로 페이지》의 필자 가토 노리히로뿐일 것입니다.

 그는 《양을 쫓는 모험》 발표 직후부터 현재에 이르기까지 무라카미 하루키에 대해 무려 수백 페이지에 달하는 비평을 써냈고, 이 책을 포함하여 연구서를 네 권이나 출판했습니다. 가토 노리히로가 작가 한 사람에 대해 연구서를 네 권이나 낸 일은 없지요. 무라카미 하루키는 사반세기에 걸쳐 그에게 매혹적인 '수수께끼'였던 셈입니다.

 가토 노리히로의 《무라카미 하루키 논집》 앞머리에 수록된 <자폐와 쇄국 : 무라카미 하루키의 《양을 쫓는 모험》>은 1982년 《양을 쫓는 모험》이 출간된 직후에 쓰였습니다. 그가 쓴 최초의 무라카미 하루키론이지요. 이 글에서 그는 《양을 쫓는 모험》의 구성적인 하자에 주목하여 꽤 신랄하게 비판했습니다. 그러나 그것은 '그러니까 별 볼일 없다'는 결론을 내리기 위한 비판이 아니었습니다. 만약 무라카미 하루키의 소설이 성립하기 위해 이 결점을 피할 수 없다면, 그것은 어떤 상황적 요청에 의한 것일까라는 물음을 통해 한 단계 더 높은 단계로 나아가기 위한 비판이었습니다.

 나는 이러한 비평적 태도를 높이 삽니다. 작품의 좋고 나쁨을 평가하는 데 급급하지 않을 뿐 아니라 문학의 근본적인 물음을 제기하고 있기 때문입니다. 다시 말해 한쪽에 작품을 쓰지 않고서는 배기지 못하는 저자가 있고, 다른 한쪽에는 그것에 깊이 공감하는 독자가 있을 때, '작가와 독자에게 이런 일이 왜 벌어졌을까?'를 묻는 것입니다.

 작품의 좋고 나쁨에 대한 문학의 판정에는 다양한 기준이 있는 것이 당연합니다. 일찍이 '계급적 관점이 있느냐 없느냐'가 문학작품을 평가하는 기준이었던 시대가 있었지요. 그 후에도 '젠더 의식이 있느냐 없느냐', '피억압자에 대한 양심의 가책이 있으냐 없느냐', '타자와의 소통을 시도하고 있느냐 아니냐' 등등, 문학작품에 여러가지 잣대를 들이댔습니다. 어떤 잣대가 올바른지 나는 알지 못합니다. 각각의 잣대로 문학작품의 좋고 나쁨을 말하는 것은 비평가의 자유에 속하고요. 그러나 어떤 '잣대'를 사용하더라도 어느 작가의 작품이 동시대의 독자에게 우선적으로 선택받는 이유를 해명하는 일은 비평가의 임무입니다.

 

 일본의 비평가들이 무라카미 하루키의 세계성이 어디에서 유래하는지 살피려고 하지 않는 것은 아마도 그러한 물음을 제기하는 것 자체가 비평가들의 '잣대'를 무효화해버리기 때문일 것입니다. '이쪽이 성립하면 저쪽이 성립하지 않는' 상대적인 관계가 양자 사이에 존재한다고 보아야 합니다. 그렇게 생각하지 않으면 무라카미 하루키에 대한 비평가들의 조직적인 '무시'를 설명하기 어렵습니다.

 

p139

 진실로 '예민한 작가'는 그의 시대에 과잉으로 존재하는 것에 대해서는 별로 쓰지 않습니다. 그런 것을 글로 쓴다 해도 소용없기 때문입니다. 배금주의적인 샐러리맨을 실감나게 묘사한다 해도, 정서적 발달이 뒤떨어진 비상식적인 청년들의 일상을 세밀하게 그려낸다 해도, 독자들이 그런 작품에 깊이 감동을 받을 리 없습니다(감동을 보이는 것은 문학상의 심사위원 정도겠지요).

 실로 뛰어난 작가는 그 시대가 심하게 결여하고 있는 대상에 대해, 그것을 결여하고 있다는 것 자체를 의식하지 못하는 대상에 대해, 그것이 결여되어 있다는 것을 알아채지 못한다는 사실로 인해 그 시대의 성격이 규정되는 것에 대해, 글을 씁니다. 예컨대 그 사회의 '그림자'에 대해...

 

p141

 언제나 그렇지요. '지금 실로 혁명적 변동이 엄숙하게 진행되고 있다'고 큰소리로 이야기하고, 거기에 숱한 사람들이 만족스럽게 화답할 때 혁명적 변동이 일어난 일은 역사상 한 번도 없습니다. 지적 의미에서 근본적인 변동이 일어날 때 만약 그것이 진정 근본적인 사건이라면, '무엇인가 일어나고 있지만 그것을 이야기할 언어가 아직 없는' 사태가 벌어집니다. 그리고 '그것을 말로 나타낼 언어가 아직 없다'는 결성적 상황 자체가 주제로 떠오를 것입니다.

 

p144

 우리가 세계의 모든 사람들과 '공유'하고 있는 것은 공유하고 있는 것이 아니라 실은 함께 '결여'하고 있는 것입니다. 비평가들은 이러한 역설을 깨달았습니다. '내가 알고 경험할 수 있는 것은 다른 사람도 알고 경험할 수 있다'는 것을 설명했기 때문에 무라카미 하루키가 세계성을 획득한 것이 아닙니다. '내가 알지 못하고 경험할 수 없는 것은 다른 사람도 알지 못하고 경험할 수 없다'는 것, 오로지 그것만을 이야기했기 대문에 세계성을 획득했습니다.

 우리가 '함께 결여하고 있는 것'이란 무엇일까요? 그것은 '존재하지 않는 것'임에도 우리 산 자의 행동이나 판단 하나하나에 심오하고 강렬하게 관계를 맺는 것, 단적으로 말하면 '죽은 자들의 절박함이라는 결성적 리얼리티입니다.'

 산 자와 산 자가 관계를 맺는 방식은 세계 각지마다 다 다릅니다. 그렇지만 죽은 자가 '존재와는 다른 방식으로autrement qu'etre' 산 자와 관계를 맺는 방식은 세계 어디에서나 똑같습니다. '존재하지 않는 것'은 '존재의 어법'에 의해, 다시 말해 각각의 '맥락'이나 '국어'에 의해 결코 침범당하지 않기 때문입니다.

 무라카미 하루키는 소설의 처음부터 끝까지 죽은 자가 결성적 방식으로 오로지 산 자의 삶을 지배한다는 것만 계속 써왔습니다. 그 이외의 주제를 선택한 적이 없을 만큼 과잉된 절도(이런 것이 있답니다!)야말로 무라카미 하루키 문학의 순도를 높이고, 그의 문학적 세계성을 담보하고 있습니다.

 따라서 가토 노리히로는 최초의 무라카미 하루키론을 통해(아마도 가토 노리히로 자신도 깨닫지 못하는 사이에) 무라카미 하루키 문학의 본질을 꿰뚫는 결정적인 언어를 기술했다고 봅니다. 그는 올바르게도 이곳에는 '인간이 살지 않는다'고 적었던 것입니다.

 

p202

 무라카미 : 걸핏하면서 일본에서도 '무라카미 하루키가 일본 문학을 엉망으로 만들었다'는 이야기를 듣습니다. 솔직히 말하면 나 같은 게 엉망으로 만들 수 있는 문학이라면 처음부터 엉망이 아니었겠느냐고 생각했습니다. 뻔뻔하게 말하자면요.

 

p267

 

《호밀밭의 파수꾼》이라는 소설이 무라카미 하루키에서 미친 가장 큰 영향은 '호밀밭의 파수꾼'이 어떤 인간에게 '천직'으로 느껴진다는 경험이었다고 생각합니다. 무라카미 하루키는 아마도 청년기의 어느 단계에 자기가 하는 일이 '보초', '파수꾼' 또는 '야경꾼night watchman'이라는 것을 어렴풋하게 감지했을 것입니다.

《애프터 다크》는 두 사람의 '보초(다카하시 군과 가오루 씨)'가 '야경'을 돌다가 경계선의 끝까지 와버린 젊은 여자들 중 한 명을 '끝 모를 어둠'에서 데려오는 이야기입니다. 그들의 자그마한 노력 덕분에 몇몇 파탄이 치명적이 되기 전에 봉합되어 세계는 한때의 균형을 회복합니다. 그렇지만 이 불안정한 세계에는 한쪽 진영의 '최종적인 승리'도 없을뿐더러, 천상적인 것의 기적적 개입deus ex machina에 의한 해결도 기대할 수 없습니다. 보초들의 일은 지극히 단순합니다. 그것은 《댄스 댄스 댄스》에서 '문화적 눈 치우기'라고 일컬어진 일과 비슷합니다.

 누구나 하고 싶어 하지 않지만 누군가 하지 않으면 나중에 누군가가 곤란해지는 일을 특별한 대가나 칭찬을 기대하지 않고 혼자서 묵묵히 해두는 것... 이러한 보잘것없는 '눈 치우기'를 말없이 해나가는 것밖에 '사악한 것'의 침입을 저지할 방법은 없습니다.

 정치적 격정이나 시적 법열法悅이나 성적 황홀감은 '사악한 것'의 대립항이 아니라 종종 공범자입니다. 세계에 간신히 균형을 유지시켜준 것은 '보초'들의 '적절한' 행동인 것입니다. 그러니 일은 야무지고 성실하게 합시다.

 의식주는 생활의 기본입니다! 가족은 소중하게 여기고, 고운 말을 씁시다!

 이것이 무라카미 하루키 문학의 '교훈'입니다. 물론 이것만으로는 문학이 되지 못하지요. 하지만 그것이 '초월적으로 사악한 것'에 대항하여 인간이 제시할 수 있는 최후의 '인간적인 것'이라는 지점에 다다르면, 서사는 급작스레 신화적 오라aura를 띠게 됩니다.

 그러면 노동자적 에토스ethos에 바탕을 둔 일상과 우주론은 어떻게 접합하느냐고요? 물론 그것은 '장어'가 나오기 때문이지요(어이쿠, 장어를 모르신다고요? 그러면 곤란한데...)

 어찌 되었든 우리의 평범한 일상 자체가 우주론적 드라마의 '현장'이라는 것을 실감하게 해주기 때문에 사람들은 무라카미 하루키를 읽으면 조금 기운이 나서 청소하거나 다림질하거나 친구에게 전화를 겁니다. 그것은 하늘만큼 땅만큼 중요한 일이라고 생각합니다.

 

p297

 여자들이 '떠난 이유를 짐작하기 어려움'에 대해 가장 잘 와 닿도록 설명한 대목이 <독립기관>에 나옵니다.

 

 모든 여성에게는 거짓말을 하기 위한 특별한 독립기관 같은 것이 선천적으로 갖추어져 있다는 것이 도카이의 개인적 견해였다. 어떤 거짓말을 어디에서 어떻게 할까. 그것은 사람에 따라 조금씩 다르다. 그러나 모든 여성은 어느 시점에 반드시 거짓말을 하며, 그것도 중요한 일에 거짓말을 한다. 중요하지 않는 일에도 물론 거짓말을 하지만 그야 그렇다 치고, 가장 중요한 때 거짓말을 하는 데 주저하지 않는다. 그리고 그때 대부분의 여성은 안색 하나, 목소리 하나 변하지 않는다. 왜냐하면 그것은 그녀가 아니라 그녀에게 갖추어진 독립기관이 멋대로 하는 일이기 때문이다. 그렇기 때문에 거짓말을 함으로써 그녀들의 아름다운 양심이 고통을 받거나 그녀들의 곤한 잠이 방해를 받는 일은 - 특수한 예외를 별도로 친다면  일어나지 않는다.   <여자 없는 남자들>

 

 화자는 "나도 도카이 씨의 의견에 기본적으로 찬성할 수밖에 없다"고 커밍아웃을 합니다. "아마 나와 그는 각기 다른 개별적인 등반 규칙을 더듬어 그리 즐겁지도 않은 똑같은 산꼭대기에 올라갔다는 말이 될 것이다"라고.... 나 역시 도카이 씨와 화자에게 '찬성할 수밖에 없습니다. 그리고 이는 작가 자신을 포함한 모든 남자들이 어느 날 도착하게 될 '산꼭대기'일 것입니다.

 내가 여기에 덧붙이고 싶은 점은 이렇습니다. 그녀들이 그러한 방식으로 거짓말을 하는 까닭은 그것이 어떤 유형의 거짓말보다 남자들이 깊이 상처 입히기 때문이라는 것입니다. 의미 있는 거짓말이라면 이해가 갑니다. 누군가를 함정에 빠뜨리려는 거짓말이라면 그것도 이해할 수 있습니다. 그런 합리적인 거짓말이라면 남자들은 상처를 입더라도 그렇게 심각한 상처를 입지는 않습니다. 여자가 왜 거짓말을 하는지, 그 의미만은 알기 때문이지요. 그녀가 자기가 가진 무엇을 훼손시킬 작정이었는지, 자기로부터 무엇을 빼앗아갈 의도였는지, 자신의 어디를 미워했는지 알기 때문입니다.

 '타깃'만 확인할 수 있다면 거기에 약을 바르든지, 부목을 대든지, 경우에 따라서는 그 부분을 절단함으로써 남자들은 살아남을 수 있습니다. 하지만 '독립기관'이 하는 거짓말에는 합리성이 없습니다. 아무런 의미도 없습니다. 그것은 순수하게 남자를 상처 입히는 효과만 있을 뿐, 거짓말을 하는 여자에게는 어떠한 이익도 가져다주지 않습니다. 아무런 의미도 없고, 아무도 행복하게 하지 않고, 누구도 그 의미를 이해할 수 없는 순수한 악의입니다.

 그런 것이 이 세상에는 있습니다. 확실히 그것은 알아두는 편이 좋습니다. 사실 이제까지 무라카미 하루키는 다양한 작품에서 '순수한 악의'를 그려왔습니다.('어둠'이나 '리틀 피플'이나 '지렁이'나 '와타나베 노보루' 같은 표상을 통해). 그렇지만 이 단편집에 나오는 순수한 악의는 그러한 연극적이고 다채로운 형상을 띠지 않습니다. 여기에서는 대개 그것이 '단순한 여자의 부재'에 지나지 않습니다. 그녀들의 부재는 결정적인 타이밍에, 결정적인 장소에서, 결정적인 방식으로 남자를 한 방에 넘어뜨립니다. 그런 일도 일어날 수 있습니다. 그것도 알아두는 편이 좋습니다.

 그리고 작가는 또 하나 중요한 경험지經驗知를 덧붙이고 있습니다. 상처를 입을 때에는 제대로 상처를 입는 것이 좋다는 것입니다. 울부짖는다든가, 매달린다든가, 원망에 찬 말을 한다든가, 얼굴을 똑바로 쳐다보며 욕을 한다든가, 누군가 '책임자'를 찾아내어 처벌하려고 한다든가... 어쨋든 무엇이든 좋으니 자존심을 잃는 행동을 자제하지 않는 편이 좋습니다. 그런 행동을 끝까지 자제한 남자는 그 사실에 의해 더욱 깊이 상처 입습니다.

 자지가 얼마나 깊이 그 여자오 맺어져 있고, 여자가 떠난 탓에 자신이 얼마나 갈가리 찢겨버렸는지 커밍아웃을 하는 편이 더 낫습니다. 자기가 무너지는 모습이 아무리 꼴 보기 싫어도 몸으로 표현하는 편이 차라리 낫습니다. 자기가 그 여자에게(정확히 말하면 그 여자의 '독립기관'에게) 얼마나 무의미하고 무가치한 존재였는가를 받아들이는 편이 낫습니다. 그런 뜻에서 <독립기관>의 도카이 의사가 상처 입는 방식은 '정통적'입니다('이상적'이라고는 도저히 말할 수 없지만요).

 '여자에게 버림받은 남자들' 중에서는 어떤 의미로 도카이 의사가 가장 올바르게 상처를 받아들였다고 생각합니다. 실제로 그는 그렇게까지 고통스럽지 않게 죽었을 것입니다. 거꾸로 가장 괴로운 경험의 당사자는 <기노>의 주인공 기노입니다. 그는 어디에서 잘못되었을까요?

 

 헤어진 아내나 그녀와 잠을 잔 옛날 동료에 대해 분노나 원망의 마음은 어쩐지 생기지 않았다. 물론 처음에는 강한 충격을 받았고 제대로 생각을 할 수 없는 상태가 얼마 동안 계속되었지만, 나중에는 '이것도 어쩔 수 없는 일이겠지' 하는 식이 되었다. 결국 그런 일을 당하도록 되어 있었던 것이다. <여자 없는 남자들>

 

 '이것도 어쩔 수 없는 일이겠지' 하고 받아들이는 방식은 '순수한 악의'에 대해 너무나도 무방비 상태입니다. 그것은 자제심과 자존심이 강한 남자가 절망에 빠지는 최악의 함정입니다. 그것에 의해 '악의'는 갈 곳을 잃습니다. 받아줄 곳을 잃어버립니다. 그리고 받아줄 곳을 잃은 악의는 증상으로서 계속 돌아옵니다. 영원토록....

 경험적으로 말하면 악의가 몸에 끼칠 때 할 수 있는 '가장 괜찮은' 대응책은 그것을 '잘게 나누어' 치사량이 한 사람에게 작용하지 않도록 주변으로 분산하는 것입니다. '팔방으로 화풀이를 한다'는 것은 이른바 '악의를 여덟으로 쪼개어 하나하나가 치사량에 이르지 않도록 안배한다'는 뜻입니다.

 

 2002년작.

2020년 2월 현재 전세계를 공포로 몰아넣고 있는 코로나(COVID-19) 바이러스에 대한 뉴스를 보던 중이다.

미국 플로리다에 의료장비 회사에 다니는 회사원 남성이 중국 출장을 다녀온 후 기침,고열 증상이 나타나서, 코로나 검사를 받았다. 검사 비용으로 3,270달러가 청구되고, 이중 보험 적용이 되지 않는 금액 1,400달러를 개인비용으로 지출했다는 뉴스였다.

그래서 갑자기 미국 의료보험 제도에 대한 이야기를 하다가, 식코(Sicko)가 생각났고, 뒤이어 이 영화 존큐가 생각났다.

개봉 당시에는 이 영화가 재밋긴 했지만, 그리 감동적이라고는 생각을 못했는데 지금에 와서 보니 상당히 감동적이다.

부모와 자식이라는 혈연이 비정한 상황을 정말로 비장하게 그리고 감동적으로 극복해나가는 과정이 뭉클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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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스포)

 이 영화를 보고 난 후에 생각을 한 부분.

 

존 아치볼트의 아들(10살쯤?) 마이크 아치볼트가 야구 경기 도중 가슴에 통증을 느끼며 기절한다. 병원에 가보니 심장에 이상이 생겨서 언제 죽을지 모르는 상태. 영화에서 나오는 호프 메모리얼 병원의 심장외과 과장 터너 박사는 건강한 심장을 이식 받지 않으면 길어야 몇 달, 짧으면 몇 일내로 아들이 죽을 수 있다고 한다. 

행정을 책임지는 원무과장 레베카 페인은 존에게 심장이식을 받기 위해서는 대기자 명단에 마이크를 올려야 하고, 심장이 생길 때까지(결국은 누군가 심장을 줄 사람이 생겨야 하는데 보통 사고사로 죽는 사람이 생전에 기부자로 등록을 해야 하기 때문에 대기자로 올리더라도 언제 심장 이식을 받을 수 있을지는 알 수 없다) 기다려야 한다고 말하며, 마이크를 병원에서 데리고 나가서 하고 싶은것을 하게 해주고 남은 생을 의미있게 보내는 것도 하나의 방법이라고 제안한다.

존의 아내 데니즈는 충격에 오열을 하고, 존은 터너 박사에게 "당신의 자식이라면 어떻게 하겠느냐?"라고 묻자, 터너 박사는 "물론, 심장을 이식합니다."라고 대답한다.

존은 터너 박사와 레베카 페인에게 그렇다면 내 아들을 대기자 명단에 올리고 심장 이식을 해달라고 얘기한다.

그러자, 레베카 페인은 그게 쉽지 않은 상황이라고 설명하면서, 존의 직장 보험이 아들 마이크의 심장 이식에 대한 비용을 커버하지 못한다고 얘기하며, 보험이 안되는 상황에서는 병원의 규정상 심장이식 수술비 25만 달러를 현금으로 지불해야 하고, 일단 대기자 명단에 올리려 해도 수술비의 30%인 7만 5천달러를 미리 병원에 지불해야만 한다고 얘기해준다.

영화를 보면 알겠지만, 존은 원래의 직장에서 마이크의 심장이식에 필요한 경비를 보장받는 보험에 가입되어 있었다. 하지만 회사의 상황이 악화되면서(아마도) 존이 정규직에서 파트타임업무로 보직이 변경되고, 회사의 규정으로 파트타임 업무를 보는 직원에게는 최대 2만 달러까지만 병원비를 부담하는 보험으로 변경이 된 상태이다.

아마 영화의 극적인 긴장을 높이기 위해 그러한 배경을 설정하겠지만, 미국의 보험 제도가 전 세계에서 가장 비인간적이라는 것은 잘 알려진 내용이다.

존의 아내 데니즈도 마트에서 비정규직 캐셔로 근무하는 상태기 때문에 보험혜택이 없는 상태이다. 또한, 존은 파트타임으로 바뀌면서 수입이 줄어들어, 집과 자신의 차와 아내 데니즈의 차를 살 때 은행에서 빌린 융자금의 월 상환금을 은행에 지불하는데 문제가 생긴 상태이다. 이 때문에 월 상환금의 일부를 지불하지 못해서 영화 초반에 아내인 데니즈의 차가  압류 당하는 장면이 나온다.

존과 아내는 마이크를 살리기 위해 관청과 보험사, 그리고 관련 정부 기관을 수없이 찾아다니며 아들의 병원비를 지원 받을 수 있는 방법을 찾지만 모든 곳에서 거절을 당하고 만다.

결국은 최후의 방법으로 다니던 교회에 사정을 알려서 이웃으로부터 모금을 받고, 가지고 있는 차와 가재도구를 팔기 시작한다. 그래도 선금인 7만 5천달러에는 턱없이 부족한 상태로 아들 마이크는 서서히 심장의 박동이 약해지면서 쇠약해진다. 

그렇게 돈을 구하기 위해 고민하던 어느날 아침, 집에 있던 존에게 병원에서 아들을 간호하던 데니즈로부터 전화가 온다.

"마이크는 죽을거에요", 당황한 존은 아내에게 "무슨 일이야? 여보"라고 묻자, 데니즈는 오열하며, "마이크를 병원에서 쫓아내려 하고 있어요.", "존, 당신은 무언가 해야 해요, 제발 무어라도 당장 해봐요." 라며 울부짖는다.

 

아들을 위해 더 이상 아무것도 할 수 없는 존은 고뇌하고, 결국은 총과 커다란 쇠사슬로 된 자물쇠를 들고 병원으로 향한다.

병원에서 터너 박사를 만난 존은 마지막으로 아들을 살려달라고 부탁한다. 자료를 통해 터너 박사가 1년에 300건의 심장 이식 수술을 한다는 사실을 안 존은 터너 박사에게 단 1건의 수술만 그냥 해주면 안되냐고 눈물로 호소하고, 내가 어떤 일이 있어도 평생 일을 해서 갚겠다며 오열한다. 터너 박사가 끝내 거절하자, 존은 터너 박사를 총으로 위협하고 응급실로 들어가서 응급실에 있는 경비, 직원, 의료진과 찾아온 환자(총 8명쯤?)를 인질로 잡고 응급실을 폐쇄한다.

 

이 영화가 묻고 있는 부분은, 국가가 국민을 위해 만든 제도와 시스템이 도리어 국민의 생명을 위협할 때 과연 개인이 제도에 맞서는 것이 부당한가? 라는 물음을 던진다.

 

이 영화의 결말은 그러한 물음에 대해 어느 정도의 해답을 주긴 한다. 그러나 애초에 그런 불가항력의 상황에 처한 개인을 구제할 방법이 자력구제밖에 없다면 그 사회는 어딘가 잘못 된 것이라고 생각한다. 

 모든 제도는 허점과 불완전한 부분이 있게 마련이다. 이 약점은 시스템을 설계하는 이들이 미처 생각하지 못했거나 소홀히 한 부분에서 발생하거나, 다수의 이해가 상출할 때 그것을 절충하는 과정에서 사각지대가 생기게 마련이다.

 이런 부분은 시간이 지나면서 특별한 상황에 처한 개인들에 의해 드러나게 되면서 개선되는데, 그 개선과정에서 그 상황에 처한 개인의 희생이라는 댓가를 치루게 된다.

 현 교황이신 프란치스코와 전임 교황이신 베네틱토 16세의 실화가 바탕이 된 영화.

 영화는 2005년 당시 교황인 요한 바오로 2세(1984년과 1989년 2차례 한국을 방문한 바 있어서 한국인들에게 친숙한 교황이다)의 사망으로 시작한다. 

 교황이 사망하면 전세계의 추기경들이 모여 새로운 교황을 선출하는 선거(콘클라베)를 시작한다. 콘클라베는 카톨릭의 유명한 이벤트이기도해서 대중적으로도 많이 알려져 있다. 최근의 소설로는 댄 브라운의 천사와 악마에 콘클라베에 대한 내용이 나온다.

 이 콘클라베에서 새로운 교황으로 독일의 요제프 라칭거 추기경이 선출되어서 베네딕토 16세(안소니 홉킨스)가 된다. 베네딕토 16세는 1927년(현재 나이는 94세), 바이마르 공화국(무려 바이마르 공화국, 1918년부터 1933년까지 존속했던 국가로 공식명칭은 독일 공화국이며, 1933년 대통령인 힌덴부르크가 사망하고 34년 나치당수인 히틀러가 새로운 총통으로 등장하면서 막을 내렸다)에서 태어났다.

 2005년 콘클라베에서 베네딕토 16세의 견제세력이었던 진보파의 아르헨티나 부에노스아이레스 출신 호르헤 베르골리오 추기경(조너선 프라이스)은 중간 과정에서 약간의 지지를 얻긴 하지만 교황의 자리는 베네딕토 16세에게 돌아가게 된다.

 영화의 본격적인 시작은 2013년 베네딕토 16세의 비서의 성추문이 세상에 알려지는 시점부터다.

 신앙과 현실과의 괴리에서 고민하던 베르골리오 추기경은 추기경직을 사임하고 일반 교구의 신부로 돌아가려는 결심을 한다. 추기경의 사임은 교황에게 허락을 받아야 하는 사안이라 베르골리오 추기경은 로마로 가는 비행기표를 예약한다.

 비행기표의 예약을 하고 난 직후에, 바티칸으로부터 교황을 만나러 와달라는 연락이 온다.

 바티칸으로 가서 베네딕토 교황을 만나는 베르골리오 추기경. 거기서 교황은 추기경과 신앙에 대한 언쟁을 하면서 그간의 갈등을 드러낸다. 그러한 갈등은 계속된 대화로 어느덧 풀리고, 교황은 추기경에게 성추문 스캔들에 얽힌 비밀을 고백하면서 추기경에게 부탁을 하게 된다.

 

 이 영화는 스토리도 흡인력이 있지만, 두 주연 배우의 연기력 그리고 바티칸(정확히는 로마)의 아름다운 풍광을 보는 재미가 있다.

 헬기의 이동 장면에서 보이는 바티칸 시국의 모습, 콜로세오, 로마의 시가지, 그리고 교황의 별장이 있는 카스텔 간돌포의 모습은 아름답다.

위대한 서커스단 링링, 바넘 앤 베일리 서커스를 모티브로 만든 영화.

 

이 영화는 2011년 20세기 폭스에서 기획되었고, 2016년에 촬영을 시작해서 2017년에 개봉되었다.

 

 행복에 대한 물음으로 시작해서 의식의 질서를 유지하는 상태가 궁극적인 행복에 이르는 길이라는 발견을 한 저자가, 그렇다면 의식의 질서를 유지하는 상태는 어떻게 우리에게 다가오는가에 대한 고민에 대한 30년간의 연구 결과를 정리한 책. 긍정 심리학이라는 분야를 창시한 위대한 저서일 듯 하다.

이번이 3번째 완독인데 읽을 때마다 새로운 깨달음을 주는 책이다.

 이 책을 한마디로 표현하자면, 진지한 인생을 살고자 할 때 어떻게 해야 하는가에 대한 총체적 방법론이라 할 수 있다.

 이 책은 고전으로 남을 것 같다. 사실 이미 고전의 반열에 올랐다고 할 수 있을 듯 싶다.

핵심적인 내용은, 몰입이란 자의식을 가진 상태에서 의식의 질서가 유지된 상태이다(예를 들어 저자의 표현에 의하면 마약을 해도 의식의 질서가 유지되는데, 이것은 자의식을 가진 상태에서 이루어지는 것이 아니다).

의식의 질서(쉽게 말해서 평정심을 가지고 무언가에 집중된 상태를 의미한다)는 외부적 요인(사람, 상황,...)에 의해서 도전을 받게 되면 유지 상태가 깨지면서 혼란,불안과 같은 부정적 감정을 경험한다. 이런 부정적 감정을 극복해 나가면서 자신의 정신적(육체적인 면도 중요하지만 주로 이 책은 정신적인 면을 다룬다)인 평형상태를 유지하면서 자기 목적적인 인생을 구축해나가는 방법론을 다루고 있다.

이 책에서 다루는 몰입의 과정과 그로 인해 얻은 긍정적 효과는 인생의 전 과정에서 반복되는데, 주로 이런 과정을 통해서 몰입의 과정을 통과한 사람은 복합성의 단계를 높여나간다. 복합성은 쉽게 말하자면 RPG게임에서 레벨(업)과 같은 개념으로 보면 된다. 게임 초반에는 게이머의 레벨도 낮지만 해결해야 할 미션 또한 쉽다. 레벨업이 되면서 그에 걸맞게 난이도가 높여진 미션이 나오게 되는 것처럼, 인생의 난관을 극복해나가면서 복합성이 높아진다는 개념이다.

몰입은 자신의 능력에 걸맞는 적절한 난이도의 도전과제가 주어질 때 얻어진다는 측면은 게임의 난이도가 적절해야 게임이 재밋는 것과 비슷하다.

좋은 책에도 여러가지 효용들이 있다. 지식을 효율적으로 전달하는 책, 노하우를 전달하는 책, 인생관을 바꾸는 책 등등.

이 책은 좋은 책의 거의 모든 효용들을 체감할 수 있는 매우 훌륭한 책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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서문 중.

 

 이 책은 행복하게 살 수 있는 단순한 요령 따위를 제시하는 책이 아니다. 사실 그렇게 한다는 것은 불가능하다. 왜냐하면 즐거운 인생이란 어떤 요령을 따라서라기보다는 개개인이 창조적으로 만들어 가야 하는 것이기 때문이다. 이 책은 요령을 제시하기보다는 사람들이 따분하고 무의미한 삶을 기쁨이 충만한 삶으로 바꾸기 위한 일반적인 원리들과 이러한 원리들을 자신의 삶에 접목시킨 구체적인 예들을 제시할 것이다.

 이러한 삶을 만들어 가는 데 지름길은 없다. 그러나 이 주제에 깊은 관심을 가지고 있는 독자라면 틀림없이 이 책에 담겨 있는 이론들을 끄집어 내서 자신의 삶을 변화시키기 위한 정보로 충분히 활용할 수 있을 것이다.

 

1장. 행복, 다시 생각해 보기(Happiness Revisited)

 

p25

 "행복이란 것은 우연히 찾아오는 것이 아니다."

 바로 이것이 나의 '발견'이다. 행복은 운이 좋아서라든지 어쩌다 생긴 기회의 산물이 아니다. 돈이나 권력으로 얻을 수 있는 것도 아니다. 행복은 외부에 있는 사물에 의해서 좌우되는 것이 아니라 오히려 우리들이 이것들을 어떻게 해석하는가에 달려 있다. 실제로 행복은 우리가 준비해야 하고, 마음속에서 키워가야 하며, 사라지거나 빼앗기지 않도록 스스로 지켜내기도 해야 하는 특별한 것이다. 자기 내면의 경험들을 조절할 수 있는 사람들은 삶의 질을 결정할 능력이 있는 것이다.

 그러나 행복은 의식적으로 찾는다고 해서 얻어지는 것은 아니다. "네 스스로에게 지금 행복하냐고 물어보는 순간, 행복은 달아난다"고 철학자 밀은 말했다. 행복을 직접적으로 찾을 때가 아니라 좋든 싫든 간에 우리 인생의 순간 순간에 충분히 몰입하고 있을 때만이 행복은 오는 것이다. 오스트리아의 심리학자 빅터 프랭클은 『삶의 의미를 찾아서』라는 책에서 다음과 같이 말하고 있다.

 "성공에 집착하지 마라. 성공에 집착할수록 성공하지 못할 가능성이 높아진다. 행복과 마찬가지로 성공이란 것도 의식적으로 얻으려 한다고 해서 구해지는 것이 아니다. 성공은 자기 자신의 이해보다 더 큰 목표에 헌신할 때에 얻어지는 부산물일 뿐이다."

 

p28

 자기의 인생을 통제할 수 있는 힘을 갖는다는 것은 절대 쉬운 일이 아닐 뿐더러, 매우 고통스러운 일이 될 수도 있다. 그러나 이러한 최적 경험들을 하나둘씩 축적하다 보면 어느덧 자기가 인생의 내용을 차곡차곡 채워나가는 과정에서 소외되지 않고 주인의 역할을 하고 있다는 느낌을 갖게 될 것이다. 내 인생의 주인공은 나라는 강렬한 자각, 바로 이러한 느낌이 우리가 염원하는 행복에 가장 가까운 상태가 아닐까?

 

p32

 모든 가치 있는 모험이 쉬운 것이 아니듯 지적인 노력 없이, 또 자신의 경험에 대해서 깊이 반성하고 숙고해 보려는 각오 없이는 이 책을 통해서 많은 것을 얻지 못할 것이다.

▶ 책의 내용을 음미하고 곱씹어보고, 내가 겪었던 인생의 경험에 비추어 반추해보고 그것으로부터 얻는 교훈들을 체화하면서 이를 개선하고자 하는 의지를 굳건히 하고 뚜렷한 목표를 세우고 이를 실천하고 피드백, 반성, 개선해나가는 노력이 없이 책만 읽는 것처럼 헛된 것은 없다.

 

p33

 내적 경험의 최적 상태는 의식이 질서를 가지고 움직일 때이다. 이 최적 상태에서는 우리의 심리적 에너지의 주의가 구체적인 목표에 집중적으로 투자되며, 우리가 갖고 있는 기술(능력)이 최적의 상태로 활용된다. 목표를 추구할 때 우리는 주의를 기울이게 되고 목표 외의 다른 것들은 잠시 잊어버리게 된다. 따라서 의식에 질서가 생기게 된다. 이런 까닭에 우리에게 주어진 도전적인 과제들을 완수해 보려고 애썼던 시간들을 우리가 나중에 돌이켜 보면 가장 즐거운 시간이었음을 발견하게 된다(3장). 자기의 심리적 에너지를 통제할 수 있는 능력이 생기고 그 결과 이 에너지를 의식적으로 원하는 목표에 쏟아 넣는 사람들은 성숙한 인간으로 변화해 나갈 것이다. 또한 그가 가지고 있는 기술 수준을 향상시키고 좀더 어려운 과제에 도전함으로써 점차 특별한 인간이 될 수 있다.

 

p35

 어떻게 하면 최적의 플로우 상태를 경험할 수 있는가를 설명하기에 앞서 이를 방해하는 인간의 조건들을 살펴보는 것이 필요하다. 옛날 이야기 속의 주인공들은 '그 이후로는 아주 행복하게 살았다...' 라는 행복한 결말에 이르기 전까지 항상 험난한 고비들을 넘겨야 하는데, 이는 인간의 정신에게도 해당된다. 내가 보기에 인간이 행복을 얻기가 어려운 첫 번째 이유는, 인간이 스스로를 위로하기 위해 창조한 여러 신화들과는 달리, 우주는 우리의 욕구를 만족시켜 주는 방향으로 움직이지 않고 있다는 데에 있다. 좌절은 인생에 깊숙이 관여하고 있다. 또한 우리의 기본적 욕구들이 채워지는 순간 또다시 우리는 다른 것을 원하게 된다. 이런 만성적인 불만족이 우리의 삶을 불행하게 하는 두 번째 이유이다.

 

p41

 인간은 진화 과정을 거치면서 대자연의 변덕스러움과 가공할 만한 위협에 대처하기 위해서 부단히 노력해 왔다. 그것의 한 방법으로 인간은 신화와 종교적 믿음을 발전시켜 왔다. 문화는 어떤 형태로든지 간에 자연의 모습을 이해할 수 있는 논리적 힘과 심리적 위안의 구실을 제공해 주었기 때문이다.

 문화의 핵심적 역할은 그 문화구언에 속한 사람들을 정신적 카오스 상태로부터 보호하고, 자신들이 얼마나 소중한 존재인가를 확신시켜 주는 데 있다. 에스키모 · 아마존 유역의 수렵 인종 · 중국인들 · 나바호 족 · 호주 원주민 할 것 없이 모두들 자신들이 세계의 중심에 있다고 믿었으며, 자신들이 신의 섭리에 따라 미래에는 온 세상의 주인이 될 것이라고 믿었다. 이러한 선민 의식이 없었다면 자연의 시련을 견디기가 힘들었을 것이다.

 신화대로 세상이 움직일 때는 별 문제가 없지만, 때때로 호의적으로 보였던 자연으로부터 얻은 안정감이 위태로워지는 순간들이 있다. 자신이 속한 문화가 신화나 믿음을 통해서 만들어 냈던 사실적이지 못한 방패들이 그 기능을 잃어버리는 순간 믿었던 만큼의 불안감이 엄습해 오는 것이다.

 이런 순간은 대부분 하필이면 그 문화의 운세가 좋아서 마치 자연의 무서운 힘을 통제하기 시작했다고 착각하는 순간에 온다. 문화의 절정기에 그 문화권에 속한 사람들은 선택받았다고 여길 것이며, 어떤 어려움도 두려워할 필요가 없다는 믿음을 갖게 되는 것은 당연할 수 있다. 몇 세기 동안 지중해를 장악해 온 로마 제국도 이런 믿음에 도달했을 것이고, 몽고 제국의 침입을 당하기 전의 중국이 그랬을 것이며, 스페인 사람들이 도착하기 전의 아즈텍 문명 또한 그랬을 것이다.

 원래 인간의 욕망에는 무관심한 것이 우주 자연일진데, 자연이 우리만을 지켜 줄 것이라는 문화적 교만이 문제가 되리라는 것은 명약관화한 사실이다. 결국 보장할 수 없었던 안정감은 뼈아픈 각성을 초래한다. 이제 더 이상 그 변화를 막을 수 없다는 사실을 인정하는 순간, 사람들은 사소한 어려움에도 용기와 결단력을 잃고 만다. 한때 자신들이 그렇게 믿었던 것들이 완전히 허상임을 깨달았을 때 그들이 배워 왔던 그 모든 것들에 대한 믿음은 내팽개쳐지고 만다. 이제 자기들을 지켜 주었었던 전통 문화적 가치들이 사라졌다는 것을 깨닫고는 불안과 무관심 상태에서 허우적거리게 된다.

 

p48

 도대체 왜 이럴까? 우리의 선조들이 꿈꾸지도 못했던 물질적 번영을 누리고 있음에도 불구하고 우리들은 왜 자꾸만 더 무기력해지는 것일까? 답은 간단하다. 그것은 우리 경험의 내용을 증진시키는 방법들에 관해서는 예나 지금이나 별 발전이 없기 때문이다.

 

p49

 "자, 과거의 경험들이 어떠했던 간에 지금 나의 모습을 있는 그대로 인정한다면, 미래를 위해서 내가 해야 할 일은 무엇인가?"

 현대의 삶에서 느끼는 불안과 우울함을 벗어나기 위해서 우리는 사회가 제공하는 당근과 채찍의 달콤한 매력으로부터 독립적인 자세를 취해야 한다. 이러한 자율성을 갖기 위해서는 자기 행동에 대해서 스스로 상도 주고 벌도 내릴 수 있어야 한다. 외적 여건이 어떻든지 간에 스스로 즐거움과 삶의 목적을 발견해 나가는 능력을 개발해야 하는 것이다. 이러한 과제는 쉽다고 할 수도 있고 어렵다고 할 수도 있다. 쉽다는 것은 이렇게 하는 것은 오로지 자기 마음먹기에 달려 있다는 점이고, 어렵다는 것은 어느 시대에서도 쉽지 않을 자기 단련과 인내를 필요로 한다는 점이다. 그러나 무엇보다도 우리가 경험을 통제하기 위해서는 무엇이 인생에서 가장 중요한 것인가에 관하여 자기 삶의 태도를 근본적으로 개혁해야 한다.

 우리는 앞으로 다가올 미래가 지금보다 더 중요하다는 당연한 가르침을 받으며 자랐다. 부모들은 자녀들에게 좋은 습관을 어려서부터 익히면 어른이 되어서 잘 살 수 있을 것이라고 가르친다. 학교 선생도 공부가 지금은 재미없게 느껴질지라도 좋은 직장을 얻기 위해서는 꼭 해야만 하는 것이라고 설득한다. 회사의 간부들도 신입 사원에게 열심히 하면 남보다 빠르게 진급할 수 있다고 부추긴다. 그러나 미래를 위한 현재의 이런 분투를 마칠 때쯤이면, 은퇴의 황혼이 일찌감치 우리에게 손짓하고 있다. 에머슨이 말한 것처럼, "살아가려고 바동대기는 하지만, 정말 삶을 살고 있는 것일까?"

 물론 훗날의 영광을 위해 고진감래하는 것은 어느 정도 필요한 덕목이다. 프로이트를 비롯한 많은 사람들이 말했다시피, 문명이란 것은 사람들의 욕망을 억압한 토대 위에서 만들어진 것이다. 사회 구성원이 좋아하든 싫어하든 간에 사회가 필요로 하는 기술이나 규범을 습득하지 않는다면 사회의 질서나 노동의 분화 등을 유지하기는 불가능할 것이다. 사회화 과정, 즉 인간을 사회의 유용한 구성원으로 변화시키는 것은 피할 수 없는 과정이기는 하다. 사회화의 목적은 그 구성원을 잘 통제할 수 있고, 사회에서 주는 당근과 채찍에 따라서 예측 가능한 반응을 하도록 만드는 데 있다. 가장 잘 된 사회화의 형태는 구성원들이 사회의 질서를 완전히 내면화한 나머지 이를 어기고는 한 순간도 살 수 없게 되는 것이라고 할 수 있다.

 우리를 사회화하는 과정을 적극적으로 도와주는 강력한 연합군들이 있다. 바로 우리의 생존적인 욕구 및 유전자의 희망 사항이다. 사회적 통제라는 것은 궁극적으로는 우리의 생존을 위협해서 이루어진다. 예를 들면 독재 국가에서 독재자에게 복종해야 하는 이유는 말 그대로 '살기 위해서'이다. 그리 멀지 않은 과거에 가장 문명화가 되었다는 영국에서조차도 준법을 강조하기 위해서 사용했던 방법은 태형 · 채찍질 · 능지처참 따위의 야만적인 폭력이었다.

 사회가 처벌만으로 잘 통제되지 않을 때 사용하는 또 하나의 방법은 쾌락이다. 아주 오래전부터 인간의 본성(성적인 욕구 · 공격 본능 · 안정에 대한 요구 · 변화에 적응하고 싶은 마음 등)은 정치인들 · 종교 단체 · 기업 · 광고주들이 선호하는 공략의 대상이었다. 16세기 투르크 제국은 용병을 모집할 때, 정복한 땅의 여성들을 겁탈할 수 있다는 유인책을 제시한 적도 있다. 오늘날에도 미군을 뽑는 광고에는 육군이 되면  '온 세상을 경험할 수 있다'는 문구가 버젓이 적혀 있지 않은가.

 우리가 쾌락을 추구하는 것은 개인의 편익을 위해서라기보다 종족 보전을 위한 유전자의 반사적 반응 때문이라는 것을 깨달아야 한다. 식도락이라는 말도 결국에는 신체에 필요한 자양분을 보충하는 것의 현학적 표현이 아니던다. 이와 마찬가지로 성행위도 우리의 유전자가 자기의 영속성을 위해서 우리 몸에 집어넣은 프로그램의 일종이다. 남자가 여자에게 성적 욕망을 느낄 때, 그는 이것이 본인 스스로가 느낀 관심의 표현이라고 생각할 것이다. 그러나 실상 그의 성적 관심은 보이지 않은 유전적 부호에 의해서 조절되고 있을 뿐이다. 성적 매력을 느끼는 것이 순전히 생물학적 반사라고 한다면, 인간의 의식의 역할은 최소한에 그치고 말 것이다. 물론 이런 유전적 프로그램을 따르고 그 결과를 즐기는 것 자체가 문제가 될 것은 없다. 단지 이제 우리가 쾌락이라는 것의 실체를 파악하고, 쾌락보다 더 중요하다고 여겨 높은 순위를 매긴 자신의 일을 위해서는 쾌락 경험을 통제할 수 있다는 전제하에 말이다.

 

 문제는, '필(feel)'을 느끼는 것만이 본질적인 것이라는 최근의 시대적 흐름이다. 오늘날 많은 사람이 가장 신뢰하는 것이 '본능'이다. 좋은 느낌이 오면, 그리고 그 느낌이 자연스럽고 자발적으로 생겨났다면, 그것은 옳다는 것이다. 그러나 지금껏 우리를 통제해 왔던 사회적이고 유전적인 힘들을 아무 의심 없이 무조건 받아들인다면 어떻게 될까? 그것은 곧 자기의 의식에 대한 통제권을 스스로 포기하는 것이나 마찬가지다. 술과 음식의 유혹을 거절하지 못하거나 섹스에만 온갖 관심이 쏠려 있는 사람은 그의 심리적 에너지를 자유롭게 활용할 수가 없다.

 인간 본성에 관한 이런 '해방된' 입장, 다시 말하면 우리가 자연스럽게 느끼는 본성이나 욕망을 있는 그대로 받아들이고 인정하는 이런 입장은 자칫하면 반동적인 결과를 낳을 수 있다. 현대의 '실재론'은 과거 시절 '운명론'의 변화된 형태라고까지 말할 수 있다. 다시 말하면, 자연스러운 본능을 따라야 하는 운명을 지니고 있다는 모순적 표현이 가능하다는 말인가? 우리는 자연적으로 무지 상태에서 태어난다. 따라서 자연 상태로 있어야만 한다면, 무언가를 배우고 알아서는 안 되는 것일까? 어떤 사람들은 태어날 때부터 남들보다 많은 남성 호르몬을 몸 안에 갖고 있고, 그 결과로 좀더 공격적인 성향을 갖게 된다. 자연스럽게 행동해야 한다면 이 사람들이 폭력을 행사해도 무방하단 말인가? 자연적 현상들을 부정할 수는 없지만, 우리에게 주어진 조건을 넘어서 행동해야 하는 것 아닐까?

 

 유전적 프로그램에 복종하는 것은 매우 위험한 일이다. 이렇게 되면 우리 스스로 무기력해지고 만다. 필요한 상황에서 유전적 지시를 무시할 수 없는 사람은 매우 허약해진다. 개인적 목표에 따라서 어떻게 행동할 것인지를 결정하는 대신에, 자신의 신체에 적용된 프로그램을 따라야 하기 때문이다. 인간은 사회적으로 건강하고 독립된 존재가 되기 위해서는 본능적 욕구를 조절할 수 있는 능력을 가지고 있어야 한다. 그렇지 못하면 이 욕구를 조작하는 남들에게 당하기 쉽다.

 

완전히 사회화가 된 사람은, 다른 사람들에 의해서 결정된 보상을 받고 만족하는 사람이다. 물론 그 보상은 본인이 원했던 게 아니다. 그리고 이런 보상은 종종 그의 유전적 프로그램을 착실히 수행하기 위해서 생긴 본능을 충족시켜 주는 것과 밀접한 관련이 있다. 그는 본인의 마음을 행복하게 충족시켜 줄 수 있는 많은 경험들을 이미 하고 있음에도 불구하고 이것들이 그가 바라는 것이 아니기 때문에 간과하는 것이다. 그는 오직 다른 사람들에 의해 마련된 목록들을 얻는 것에만 관심이 있다.

 복잡다다한 사회에서 여러 가지의 강력한 집단들이 서로 다른 목표들을 우리에게 주입시키려고 노력하고 있다. 한편에서는 학교 · 교회 · 은행등의 집단들이 우리들을 열심히 일하고 절약하는 사람들도 만들기 위해서 노력하고, 다른 한편에선 상인 · 제조업자 · 광고주들이 우리들의 소비를 부추기기 위해서 꼬드긴다. 심지어는 전문 도박꾼 · 포주 · 마약 밀매업자등에 의해서 움직이는 어둠의 세계조차도 우리가 돈만 내면 원하는 것을 다 해주겠다는 똑같은 메시지를 전하지 않던가. 각 집단마다 전하는 메시지의 내요은 약간씩 다르지만, 그 메시지에 복종한 결과는 동일하다. 그것은 우리를 목적 달성을 이루기 위한 도구로 만들어 결국에는 우리들이 그 사회의 시스템에 의존할 수밖에 없게 되는 것이다.

물론 현대와 같이 복잡한 사회에서 생존하기 위해서 외적인 목표를 달성하고 즉각적인 만족을 뒤로 미루는 것은 중요하다. 이것은 사회의 통제에 따라 좌지우지되는 꼭두각시가 되라는 말이 아니다. 정말로 중요한 것은 사회가 제공하는 보상으로부터 자유로워지고, 이를 위해서 어떻게 사회적 보상들을 우리가 통제할 수 있는 보상으로 대체하는가를 배우는 것이다. 사회에서 원하는 일들을 포기하라는 뜻이 아니다. 오히려 이 일들 이외에 우리 스스로의 목표를 만들라는 것이다.

 자신을 사회적 통제로부터 해방시키는 가장 중요한 방법은 무엇일까? 바로 순간 순간에 주어지는 보상을 발견하는 능력을 갖는 것이다. 만약 사람이 경험의 흐름에서 주어지는 의미를 발견하고 즐길 수 있다면, 그의 어깨를 무겁게 누르고 있는 사회적 통제로부터 벗어날 수 있을 것이다. 보상을 자기의 내면에서 찾을 수 있다면, 그 동안 사회에 맡겨 두었던 본인의 힘을 다시 찾을 수 있다. 이젠 더 이상 미래라는 허울 속에 숨어 버리는 목표를 달성하기 위해서 아옹다옹할 이유가 없다. 또한 언젠가는 좋은 일이 일어나겠지 위안하며 매일 따분한 하루를 보낼 필요도 없다. 손에 닿을 듯 말 듯한 목표를 위해서 영원히 노력하는 대신 삶이 주는 참 보상을 수확하기 시작한다.

 

 이런 상태는 우리 스스로를 원초적 욕망에 탐닉하게 함으로써, 그래서 사회의 통제로부터 벗어남으로써 얻어지는 것이 아니다. 우리는 몸이 원하는 것으로부터 독립적이 되어야 하며, 우리 마음속의 조인이 되어야 한다. 고통과 쾌락은 우리 마음에서 일어나며 그 안에서만 존재하는 것이다. 우리의 생물학적 욕구를 이용해 우리를 조절하는 이 사회의 자극-반응 양식에 순종하는 한, 우리는 외부의 힘에 의해서 통제될 뿐이다. 현란한 광고에 침을 흘리고, 직장 상사의 찡그린 얼굴이 우리의 하루를 망치도록 방치하는 한 우리는 스스로의 경험을 결정할 수 없다.

 우리가 경험하는 것이 현실을 만드는 것이다. 따라서 우리의 의식을 통제하고, 외부의 꼬임과 협박으로부터 우리를 자유롭게 함을로써 우리는 이 현실을 변화시킬 수 있다.

 

 로마 제국의 철학자 에픽테토스는 오래전에, "사물 자체가 무서운 것은 아니다. 우리가 어떻게 사물을 지각하는가, 단지 이것이 무서울 뿐이다"라고 했다.

 또한 아우렐리우스 황제도 다음과 같이 말하지 않았던가.

 "네가 외적인 일들로 인해서 마음 고생을 하고 있다면, 그것은 그 일들때문이 아니라 네가 그것들을 어떻게 평가하고 있는가에 의해서다. 그 평가와 판단을 한꺼번에 지워버릴 수 있는 것도 너의 손안에 달려 있다."

 

p55

 프로이트는 우리의 마음을 지배하기 위해서 날뛰는 두 개의 폭군이 있다고 지적했다. 그 하나는 유전자의 지배를 받는, 개인의 본능적 욕구인 이드(id)요, 다른 하나는 사회적 압력의 종인 초자아(superego)이다. 그리고 이들과 맞서는 것이 자신의 본질적 요구를 대변하는 자아(ego)이다.

 

p56

 우리의 의식에 해방을 가져다주는 현명함이라는 지식은 본질적으로 누적되는 것이 아니라는 데 그 첫 번째 이유가 있다. 이것은 공식화되지 못하며, 암기해서 단순하게 적용할 수 있는 것도 아니다. 현명한 정치적 판단, 세련된 미적 감각과 같은 전문적 영역처럼 의식을 해방시키는 방법도 숱한 시행착오를 거쳐서 값지게 얻어야만 하는 것이기 때문이다.

 의식을 통제한다는 것은 단순한 인지적 기술이 아니다. 지능과 비슷하다고 할까. 이것은 감정의 몰입과 의지를 필요로 한다. 이것은 앎이 아니라 행동을 통해서 얻어지는 것이다. 작곡가가 이론적으로 알고 있다고 해도 수많은 연습을 거쳐야 좋은 곳을 쓸 수 있는 것처럼 말이다. 물리학이나 유전공학처럼 가시적인 세계에서의 학문적 진보는 상대적으로 빠를 수 있다. 그러나 우리의 습관과 욕망을 변화시키기 위해서 지식이 활용되어야 하는 이 분야에서의 진보는 고통스러울 정도로 더디기만 하다.

 두 번째 원인은, 우리의 의식을 어떻게 통제할 것인가에 관한 지식은 문화와 시간에 따라서 달라진다는 것이다. 신비주의자, 요가나 선 수행자들의 지혜는 그 시대의 문제를 해결하는 데 최고의 방법이었기 때문에 형성되었을 것이다. 그러나 이들을 현대의 캘리포니아에 그대로 옮겨 놓는다면 그 신비한 힘은 효력을 제대로 발휘할 수 없을 것이다. 이 지혜들은 원래의 환경들과 어울리는 요인들을 반영했을 것이다. 그런데 이런 지엽적인 요인들을 본질적 요인들과 분리하여 받아들이지 못하고 제식적 요소만 빌려 온다면 옛 지혜들은 빈 껍데기에 불과할 것이다.

 의식을 통제하는 것은 제도화될 수 없다. 이것이 사회적 규범이나 제도의 한 부분이 되는 순간 더 이상 그 효력을 발휘할 수 없다. 그러나 불행하게도 이런 기계적인 관례화나 순서화는 곳곳에서 일어나고 있다. 자아(ego)를 억압하는 힘들로부터 해방하자는 프로이트의 노력은 이미 그가 살아 있을 때부터 하나의 고착된 이데올로기로 변화했다. 마르크스의 경우는 더 심하다. 경제적 착취로부터 우리의 의식을 해방하자는 그의 주장은 마르크스 자신도 섬뜩할 정도의 억압적인 사회 제도로 변질되지 않았던가. 또한 토스토예프스키를 비롯한 많은 사람들이 말했듯이, 만약 중세 시대에 예수가 자신이 설파했던 해방의 메시지를 전하기 위해서 다시 돌아왔다고 해도, 예수의 이름을 빌려 권력을 가지고 있던 세속적 종교 지도자는 다시 예수를 십자가로 못 박았을 것이다.

 

2장. 의식에 관해서 알아보기(The Anatomy of Consciousness)

 

p65

 외부의 사물은 우리가 인식하지 않으면 존재하지 않는다. 따라서 의식은 어찌 보면 주관적으로 경험한 현실을 말하는지도 모른다. 우리가 느끼고, 냄새 맡고, 듣고, 기억하는 모든 것들이 의식의 내용을 구성하는 후보들이 될 수는 있다. 그러나 이들 가운데 극히 일부분만이 우리의 의식을 구성한다. 따라서 의식은 - 우리의 신체 안팎에서 무엇이 일어났는가 하는 것을 말해 주는 감각 정보를 반영하는 거울과 같지만 - 선별적으로 반영하고 능동적으로 사건들을 구성하며 이들을 새로운 현실 세계로 인도하는 것이다. 의식을 통해서 반영되는 것이 우리의 삶인 것이다.

 

p67

 우리가 유전적으로 물려받거나 습득한 의도들은 위계를 가지고 있고, 이 위계에 따라서 우선 순위가 정해진다. 저항 운동을 하는 사람에게 정치적 변혁은 생명을 포함한 다른 어떤 것보다도 더욱 소중한 것이고, 이 목표는 다른 어떤 것들보다 우선인 것이다. 일반인들은 이에 비해서 좀더 현실적인 목표들을 가지고 있다. 그것들은 신체적인 욕구 충족을 위한 것(건강하게 장수하는 것, 섹스를 하는 것, 잘 먹고 평한하게 지내는 것 등)과 사회에 의해서 조건화된 것(모범생이 되는것, 열심히 일하는 것, 가능한 한 소비 생활을 많이 하는 것, 타인의 기대에 맞추어 사는 것 등)에 근거하고 있다. 그러나 세계 여러 문화권에서 이런 목표들을 추종하지 않는 예외적인 사례들은 얼마든지 찾아볼 수 있다. 사회적 규범을 초월하거나 일탈한 사람들(영웅 · 성자 · 현자 · 예술가 · 시인 · 광인 · 범죄자 등)은 일반인들과는 다른 삶의 목표를 갖는다. 이런 사람들의 존재는, 우리의 의식이 서로 상인한 목표와 의도들로 순서화될 수 있다는 증거로 볼 수 있다. 우리 모두는 우리 내면의 주관적 세계를 통제할 자유를 가지고 있다.

 

p76

 지금까지의 논의를 참을성 있게 따라와 준 독자라면, 이 시점에서 나의 얘기가 약간 순환론적이지 않는가 하는 생각이 들 수도 있다. 자아라는 것이 의식의 내용물과 목표들의 총합을 나타낸다고 정의하자. 그런데 의식의 내용물과 목표들은 주의에 의해 선택된 결과물이고, 이런 주의는 자아에 의해 통제된다고 한다면, 우리는 인과가 명확하지 않은 체 계속 순환하는 논리 체계를 갖게 된다. 한편으로는 자아는 주의를 통제한다고 말하고, 또 한편으로는 주의가 자아를 결정한다고 하니까 말이다. 그러나 사실상은 두 관점이 다 맞다. 의식은 직선적으로 움직이는 것이 아니고, 순환적 인과 관계가 성립하는 체계인 것이다. 주의는 자아를 형성해 가고, 자아는 주의에 의해 영향을 받는다.

 

p79

 물론 삶은 외적인 일들 - 예를 들어, 복권으로 대박을 터뜨리든지, 자기와 잘 어울리는 배우자를 얻는다든지, 사회 부조리를 개혁하는 데 동참한다든지 - 을 통해서 향상될 수 있다. 그러나 이러한 대단한 일들조차도 삶의 질에 영향을 주기 위해서는 우리의 의식 속에 그 자리를 마련해야 할 것이고, 우리의 자아와도 긍정적으로 관련을 맺고 있어야만 한다.

 

p87

 우리가 가능한 한 자주 플로우를 경험할 수 있도록 의식을 조절하면 삶의 질은 저절로 향상되게 마련이다. 리코나 팸의 경우처럼 직장의 따분한 일상도 목적이 있는 즐거운 경험으로 변화되기 때문이다. 플로우 상태에서 우리는 심리적 에너지를 통제할 수 있다. 그때에는 우리가 하는 어떤 일도 의식의 질서를 더하게 만든다.

 

p88

 플로우 경험을 하고 나면, 이전과 비교해서 우리는 더욱 복합적인 자아로 발전한다. 복합적인 자아가 됨으로써만이 성장할 수 있는 것이다. 복합성(complexity)이라는 것은 두 가지 심리적 과정을 거친 결과인데, 이 두 가지 과정은 각각 분화(differentiation)와 통합(integration)을 말한다. 분화라는 것은 자신의 유일하고 고유한 존재라는 생각으로 나아가려는 움직임이고, 또한 본인을 다른 사람으로부터 분리하는 방향으로 나아려는 경향을 말한다. 한편 통합이라는 것은 그 반대의 경우이다. 즉 다른 사람들이나 다른 아이디어들과 합하려는 경향을 말한다. 복합적 자아란 이러한 두 가지 경향을 성공적으로 결합시킨 자아를 일컫는다.

 

p90

 분화만 되고 통합이 이루어지지 못한 사람은 큰 개인적 성취를 이룰 수는 있을 것이다. 그렇지만 지나친 이기주의가 되기 쉽다. 반대로 통합만 이루어지고 분화가 되지 못한 자아는 다른 사람과의 관계 속에서 소속감과 안전감을 느낄 수는 있을 것이지만, 자율적인 개성은 갖지 못할 것이다. 오직 한 개인이 그의 심리적 에너지를 이 두 가지 과정을 위해서 균등하게 배분할 때에, 그 결과 지나치게 이기적이거나 순응적이지 않을 때 그의 자아는 복합성을 갖추게 된다.

 우리는 플로우를 경험함으로써 복합적인 자아를 갖게 된다. 역설적이게도, 다른 외적 목표를 위해서가 아니라 행위 자체를 즐길 때 우리의 삶이 향상될 가능성이 높아진다는 것이다. 하나의 목표를 수립하고 이를 위해서 최고의 집중력을 보일 때 우리가 무엇을 하든지 즐거움을 느낄 수 있다. 이런 즐거움을 맞보기 시작하면 다시 이를 경험하기 위해서 더 많은 노력을 할 것이고, 이런 과정의 순환을 통해서 우리의 자아는 성장한다.

 

3장. 즐거움을 통해 삶의 질 향상하기(Enjoyment and the Quality of Life)

 

p100

 쾌락은 주는 경험은 즐거움을 줄 수가 있다. 그러나 쾌락과 즐거움이라는 두 가지 정서는 같지 않다. 예를 들어서 맛있는 음식을 먹고 쾌락을 느낄 수 있다. 그러나 음식을 즐기는 것은 좀 다른 문제이다. 식도락가가 음식을 즐기기 위해서는 상당한 관심과 주의를 기울여야 한다. 이 말은 정신적 노력 없이도 쾌락을 느낄 수는 있지만, 즐거움이라는 것은 비범한 주의를 기울여야 느낄 수 있다는 것이다. 즉 사람들은 아무 노력 없이도 - 뇌의 특정 부위가 전기 자극을 받거나, 약물에 의한 화학적 작용을 통해서도 - 쾌락을 느낄 수가 있다는 것이다. 그러나 주의 집중을 하지 않으면 테니스나 독서 그리고 대화를 즐기기란 불가능한 일이다.

 쾌락이 매우 덧없으며 자아가 쾌락 경험에 의해 성장되지 않는 이유가 바로 이 때문이다. 복합성은, 새롭고 또한 상대적으로 도전적인 목표에 심리 에너지를 쏟는 것을 필요로 한다. 이러한 과정은 어린아이들에게서 쉽게 볼 수 있다. 태어난 후로 몇 년 동안 모든 아이들은 새로운 동작과 새로운 말을 매일 시도하는 작은 '학습 기계'가 된다. 아이들이 새로운 능력을 학습할 때 보여 주는 황홀한 표정은 즐거움이란 무엇인지를 우리에게 잘 말해 준다. 이런 즐거운 경험 하나하나가 더해져서 아이들의 자아를 복합적으로 발달시키는 것이다.

 불행하게도, 성장은 곧 즐거움이라는 연관성은 시간이 지나면서 사라지는 것 같다. 아마도 학교 교육을 받기 시작함과 동시에 '학습'이 외부의 요구에 대한 반응이 되어가면서 새로운 능력을 습득한다는 짜릿한 희열이 사라지기 때문일 것이다. 사춘기에는 자신만의 좁은 자아 속에서 안주하는 경향이 있다. 그러나 새로운 곳에 심리 에너지를 투자해 보았자 외적 보상이 주어지지 않는다면 쓸데없는 짓일 뿐이라고 생각하는 순간부터 우리는 더 이상 인생을 즐기지 못하게 될 것이다. 단지 쾌락만이 우리의 기분을 즐겁게 해주는 경험이 될 뿐이다.

 

p103

 즐거움이라는 현상은 여덟 가지의 주요 구성 요소를 갖고 있음을 발견하였다. 사람들이 가장 긍정적인 경험을 할 때 어떠한 느낌을 가졌는지에 대해 반추해 보면 그들은 다음 여덟 가지 요소들 가운데 적어도 한 가지는 언급을 한다물론, 여덟 가지 모두를 말하는 사람도 있다).

 첫째, 그 경험은 일반적으로 본인이 완성시킬 가능성이 있는 과제에 직면했을 때 일어난다.

 둘째, 본인이 하고 있는 행위에 집중할 수 있어야 한다.

 셋째와 넷째, 수행하는 과제에 대한 명확한 목표가 있어야 하고 즉각적인 피드백을 받을 수 있어야 한다.

 다섯째, 일상에 대한 걱정이나 좌절을 의식하지 않고 자연스럽고도 깊은 몰입 상태로 행동할 때이다.

 여섯째, 즐거운 경험은 사람들에게 본인의 행동에 대한 통제감을 느끼도록 해준다.

 일곱째, 자아에 대한 의식이 사라진다. 그러나 역설적으로 플로우 경험이 끝나면 자아감이 더욱 강해진다.

 마지막 여덟째, 시간의 개념이 왜곡된다. 즉 몇 시간이 몇 분인 것처럼 느껴지고, 몇 분이 몇 시간처럼 느껴지기도 한다. 이러한 모든 요소들의 결합이 즐거움을 불러일으키는데, 이것은 너무나 충만한 느낌이기 때문에 사람들은 이를 위해 많은 정력을 쏟을 가치가 있다고 생각한다.

 

 최적 경험의 훨씬 많은 경우가 목표 지향적이고 규칙에 의해 제약을 받는 활동에서 발생한다고 보고되었는데, 그 활동들은 심리 에너지를 요구하며 적절한 기술이 없이는 할 수 없는 것들이었다.

 

p106

 여러 면에서 경쟁은 복합성을 발달시켜 주는 지름길이다. 에드먼드 버크는 "우리와 대적하는 자는 우리의 정신을 강화시켜 주고 우리의 능력을 다듬어 준다. 적은 결국에는 나에게 큰 도움을 주는 자이다"라고 말했다. 경쟁할 때 생기는 도전 의식은 자극적이며 즐겁다. 그러나 상대를 이기려는 마음이 너무 앞서게 될 때 즐거움은 사라지는 경향이 있다. 경쟁은 그것이 자신의 기술을 완성하는 수단이 될 때에만 즐거운 것이다. 경쟁 자체가 목적이 된다면 그것은 더 이상 흥미로운 도전이 아니다.

 

p115

 목표가 명확하게 설정되어 있지 못하는 창의적 활동을 할 때, 사람들은 본인이 의도하는 바가 무엇인지에 대한 강한 개인적 감각을 발달시켜야 한다. 화가는 그림을 그리면서 어떻게 보일지에 대한 시각적 영상을 갖고 있지 않을 수도 있다. 그러나 그림을 어떤 시점에까지 그리게 되면 자기가 원했던 것인지 아닌지를 알아야 한다. 그리고 자기 일을 즐기는 화가는 '좋고, 나쁨'에 대하여 내면화된 기준을 가지고 있어야 한다. 그래서 붓이 가고 난 후 "그래, 바로 이거야. 아니, 이건 아니야"라고 말할 수 있어야 한다. 그러한 내적인 지침이 없다면 플로우를 경험하는 것은 불가능하다.

 

p117

 어떤 종류의 피드백일지라도 만일 그것이 심리 에너지를 쏟았던 목표와 논리적으로 연관이 된다면 즐거운 것이 될 수 있다. 만일 내가 콧등 위에 막대를 세우고자 하는 것이 목적이라면 고개를 뒤로 젖히고는 흔들거리는 막대를 보는 것도 잠시 동안은 즐거움이 될 수 있다. 그러나 우리 모두는 서로 다른 가치를 갖도록 학습되기 때문에 자기에게 중요한 가치를 주는 정보를 더 소중히 생각한다.

 

p118

 생활 속에서 날마다 우리는 의식에서 원하지 않는 강요된 사고와 근심의 포로가 된다. 일반적으로 대부분의 직업과 가정 생활은 잡념이나 불안이 자동적으로 배제될 만큼 집중력을 요구하지 않는다. 결과적으로 일상적인 마음의 상태는 원활한 심리 에너지를 간섭하는 엔트로피의 요소를 포함한다. 바로 이 점이 플로우가 경험의 질을 변환시키고 향상시키는 한 가지 이유이다. 행동에 대한 명확한 요구가 우리의 의식에 질서는 부여하고 무질서의 간섭은 배제하기 때문이다.

 

 p123

 위의 예들이 설명하는 바와 같이 사람들이 즐기는 것은 통제되는 상황속에 존재한다는 느낌이 아니라 어려운 상황에서 스스로 통제력을 발휘하고 있다는 느낌이다. 타성에 박힌 일과의 안전함을 포기하지 않고는 진정한 통제감을 경험할 수 없다. 결과의 성공 여부가 불확실하고 자시이 그러한 결과에 영향을 줄 수 있을 때만 진정 본인이 통제력을 발휘하고 있는지의 여부를 알 수 있는 것이다.

 

 p127

 자의식의 소멸은, 플로우 상에 있는 개인이 심리 에너지에 대한 통제를 포기한다거나 몸이나 마으메서 무엇이 발생하는가에 대한 인식하지 못하는 것을 의미하지 않는다. 사실 그 반대가 성립한다. 사람들이 처음에 플로우 경험을 배울 때 자의식의 결여는 편하게 흘러가는 것, 즉 그냥 자기를 망각해 버리는 것이라고 생각한다. 그러나 사실 최적 경험은 자아의 매우 적극적인 역할을 포함한다. 바이올린 연주자는 악보마다 분석적으로 그리고 전체적인 구상의 측면에서 전체적으로 연주하고 있는 작품의 모든 형식 및 귀에 들리는 음과 함께 손가락의 모든 움직임을 잘 인식해야만 한다. 훌륭한 육상 선수는 전체적인 경기의 전략에서 경쟁 선수의 성적뿐만 아니라 자신의 호흡 리듬, 신체의 모든 관련 근육을 알고 있다. 체스 선수가 그의 기억에서 이전의 위치, 과거의 조합을 마음대로 생각해 낼 수 없다면 경기를 즐길 수 없다.

 

p130

 플로우를 경험할 때 처음에는 자아감을 잃어버리지만 경험한 후에는 자아감이 더욱 충만해지는 것이 모순된 관계처럼 보이기도 한다. 자의식을 버리면 더 강력한 자아 개념을 구축하게 된다. 그 이유는 매우 명확하다. 플로우 상태에서는 최선을 다하도록 도전 받으며 끊임없이 자신의 능력을 향상시켜야 한다. 이런 상황에서 우리는 이러한 노력이 자아와 무슨 관계가 있는지를 성찰할 기회를 갖지 못한다. 자아에 대한 생각을 하는 순간 깊은 몰입에 들어갈 수 없기 때문이다. 그러나 플로우 경험이 끝다고 자의식이 생겨나면서부터 바라보는 자기 자신은 이미 과거의 자기가 아니다. 새로운 능력과 성취에 의해서 풍요로워진 자기를 느끼게 된다.

 

p133

 우리의 의지와 상관없이, 처음에 강요로 인해 시작된 것들 중에서 시간이 지남에 따라 내적인 보상을 받는 결과를 낳는 것도 있다. 몇 년 ㅈㄴ에 사무실에서 함께 일하던 내 친구는 대단한 재능을 가지고 있었다. 일이 지겨워지면 그는 반쯤 감은 눈으로 고개를 살짝 들고서는 음악 작품(바흐 합창곡, 모짜르트의 협주곡, 베토벤의 교향곡 등) 하나를 콧노래로 부르기 시작했다. 그러나 그것은 단순한 콧노래가 아니었다. 그는 특정 소절에 관여하는 주요 악기를 목소리로 흉내를 내며 전체 작품을 노래하였다. 그는 바이올린과 같이 애절한 소리를 내고, 바순처럼 저음을 내며, 바로크 트럼펫 소리까지 낼 수 있었다. 사무실의 동료들은 이 소리를 듣고 무아지경이 되어 생기를 얻고는 하였다. 궁금한 것은 그 친구가 이러한 재능을 개발한 방법이다. 세 살 때부터 그의 아버지는 그를 클래식 음악 콘서트에 데리고 다녔는데, 이것은 말할 수 없을 정도로 지겨웠다고 한다. 그는 자라면서 콘서트와 클래식 음악은 물론이고 아버지마저 싫어하게 되었다. 하지만 그는 이러한 고통스러운 경험을 계속해서 강요받았다. 그러던 일곱 살의 어느 날 모차르트의 오페라의 서곡이 시작되는 동안 그는 놀라운 통찰을 경험하였다. 그때까지 구별이 되지 않던 멜로디들이 선명히 구별되기 시작한 것이다. 그는 갑자기 자신 앞에 열려진 새로운 음악적 세계를 발견했다. 무의식적이든 아니든지 간에 모차르트 음악이 주는 도전을 이해하는 능력이 발견되기까지는 3년의 고통스러운 청취의 세월이 있었던 것이다.

 물론 그는 운이 좋았다. 많은 아이들은 그들이 강요된 활동을 꽃 피우기 전에 영원히 그 활동을 싫어하게 되기도 한다. 부모들이 악기를 연습하도록 강요하여 얼마나 많은 아이들이 클래식 음악을 싫어하게 되었는가? 아이들뿐만 아니라 어른들도 많은 주의가 필요한 활동에 첫 발을 딛기 위해서는 외부적인 동기가 필요하다. 대부분의 즐거운 활동은 자연스러운 것이 아니다. 이러한 활동은 처음에는 내키지 않는 노력을 요구한다. 그러나 일단 상호 작용이 개인의 능력에 대해 피드백을 제공하기 시작하면, 대개 이러한 활동은 냊거으로 보상을 주기 시작한다.

 

p135

 그러나 이미 통제감과 관련된 부분에서 살펴본 바와 같이 플로우와 잠재적인 중독성을 인식해야 한다. 우리는 이 세상의 어떠한 것도 완전히 긍정적인 것은 없다는 사실을 알아야 한다. 모든 힘은 오용될 수 있다. 사랑은 증오로 바뀔 수 있으며 과학을 파괴를 낳고 검증되지 않은 기술은 오염을 낳는다. 최적 경험은 한 형태의 에너지이며 에너지는 도움이 되거나 파괴를 낳을 수 있다. 불은 따뜻하게 만들 수도 있으며 집을 태워버릴 수도 있다. 원자 에너지는 전기를 발생할 수도 있지만 세계를 완전히 날려 버릴 수도 있다. 에너지는 힘이지만 단순한 수단에 불과하다. 에너지가 적용되는 목표는 삶을 풍부하게 할 수도 있으며 고통스럽게 할 수도 있다.

 

 베느탐이나 여러 전쟁터의 참전 용사들은 전선에서 활동을 플로우 경험으로 설명하며, 그에 대한 향수를 가지고 있다. 로켓 발사대 옆의 참호에 앉아 있으면 삶은 매우 명확하게 집중된다. 목적은 적이 나를 죽이기 전에 적을 내가 먹저 죽이는 것이다. 선악은 자명하다. 통제의 수단은 손 안에 있다. 혼란은 없어진다. 전쟁을 싫어한다 해도 전투 경험은 보통의 생활 속에서 접하는 어떠한 것보다도 즐거운 일일 수 있다.

 범죄자들은 종종 다음과 같이 말한다.

 "한밤중에 남의 집에 들어가서 주인을 깨우지 않고 보석을 들고 나오는 것보다 더 재미있는 것을 보여 주기만 한다면 당장 그것을 하겠다."

 청소년 비행이라고 일컫는 대부분의 것(자동차 절도 · 파괴 행위 · 일상의 난폭한 행동)은 일상 생활에서 얻을 수 없는 플로우 경험을 하고자 하는 필요성에 의해 동기화된다. 사회에서 의미 있는 도전에 대면할 수 있는 기회를 제공하지 못하고 또 그러한 도전을 즐길 수 있는 능력을 개발할 기회를 제공하지 못하는 한, 우리는 폭력과 범죄가 사람들을 유혹한다는 사실을 예상해야 한다.

 

p137

 "자유의 대가는 영원한 경계심이다"라는 제퍼슨의 격언은 정치 이외의 분야에도 적용된다. 이는 우리의 습관과 과거의 지식들이 새로운 가능성을 간과하지 않도록 우리가 하고 있는 일을 재평가해야 한다는 것을 의미한다.

 

4장. 플로우의 조건들 알아보기(The Conditions of Flow)

 

p148

 플로우 활동이 성장과 발견을 이끌어 내는 이유는 바로 이 역동적인 특성에 있다. 어느 누구도 같은 수준에서 같은 일을 장기간 할 때 즐거움을 느끼지 않는다. 싫증을 느끼거나 좌절하게 되고, 이후 다시 즐거움을 찾고 싶은 바람에서 자기 기술을 향상시키거나 혹은 그 기술을 사용할 새로운 기회를 발견하려는 행위를 취하려 하기 때문이다.

 

p150

 이른바 '종교'라 불리는 것들은 의식의 질서를 이루려는 가장 오래된 야심찬 시도이기 때문이다. 이러한 면에서 종교 의식은 심오한 즐거움의 원천이라고까지 말할 수 있다.

 오늘날의 미술 · 연국 그리고 일반적인 삶에서 초자연적인 의미는 퇴색되어 버렸다. 과거 인류 역사에서 세상을 이해하고 의미 있게 해주었던 우주 질서는 서로 무관한 단편들로 부서지고 말았다. 대신 인간의 행동 방식을 설명하기 위한 수많은 이데올로기가 등장하고 서로 경쟁을 하고 있다. 공급 · 수용의 법칙과 '보이지 않는 손'의 논리는 우리의 이성적 경제 선택에 대해 설명하고자 한다. 역사적 유물론의 바탕이 되는 '계급 갈등의 법칙'은 인간의 비이성적 정치 행동을 설명하였고, 사회생물학의 기초가 되는 유전적 경쟁 이론은 왜 인간이 어떤 사람들은 도와주고 어떤 사람들은 배척하려는지에 대해 설명해 준다. 심리학의 행동주의 이론은 우리가 인식하지 못한 상태에서도 쾌락 행동을 반복하게 되는 이유를 설명해 준다. 이러한 이론들은 사회과학에 근간을 둔 현대판 '종교'라고 할 수 있다. 그러나 이것들 가운데 어느 하나라도 우주의 질서를 설명했던 과거의 모델만큼 미적인 비전이나 또는 양질의 즐거움을 제공하지는 못하고 있다. 

 

p157

 문화란 우연적이고 임의적인 요인들이 우리 경험에 미칠 영향을 최소화하기 위해 설계된 방어 기제이다. 

 

 문화가 일련의 목표와 규칙을 발전시키는 데 성공하여 사람들이 갖고 있는 기술과 조화를 잘 이루고 그 결과로 구성원들이 보통 이상의 빈도와 강도로 플로우 경험을 하게 되면, 게임과 문화의 유사점은 한층 더 커진다. 이러한 경우에, 전체적으로 문화가 '굉장한 게임'이 된다고 말할 수 있다. 아마도 몇몇 고전 문명은 이러한 상태에서 성공적으로 도달했을 것이다. 아테네 시민들 · 강인함(virtus)을 통해서 행동을 표현했던 로마인들 · 중국의 지식인들 · 인도의(사제,승려 계급이자 최고 계급인) 브라만은, 춤을 통해서 얻는 희열과 같은 즐거움을 다양한 도전을 극복해 가며 경험했을 것이다. 아테네의 폴리스 · 로마의 법률 · 신권(神權)에 토대를 둔 중국의 관료주의 그리고 모든 것을 감싸 안는 인도의 영적 질서는 어떻게 문화가 플로우 경험을 촉진시키는지에 대해서 보여주는 성공적인 사례라고 할 수 있다. 물론 그 사회의 주류를 형성하고 있었던 운 좋은 사람들에게 해당되는 것이지만 말이다.

 

 플로우를 높이는 문화가 도덕적 의미에서 반드시 선한 것은 아니다. 스파르타의 규칙은, 그 당시의 사회 구성원을 동기화시키는 데는 누가 보아도 성공적이었지만, 20세기 관점에서 볼 때는 잔인한 것이다. 유목민인 타타르 족이나 터키의 친위 보병이 전투와 학살을 통해서 쾌락을 얻었다는 것은 전설적인 예다. 1920년대의 혼란스러운 경제와 문화 충격에 당황했던 많은 유럽인들에게 나치 정권과 파시즘 이데올로기는 매력적인 게임의 계획을 제시해 주었다. 즉 단순한 목표들을 제시하였고, 그에 대한 피드백을 명료하게 주었다. 사람들이 다시 새롭게 삷에 몰두하도록 한 것이다. 결국 많은 사람들은 이전의 불안과 절망으로부터 벗어났다고 생각했다.

 

p163

 '과도한 자의식' 역시 플로우 경험을 방해하는 또 하나의 장애 요인이다. 다른 사람이 자신을 어떻게 인식하는지에 대해 끊임없이 걱정하며, 나쁜 인상을 주지는 않을까 혹은 남이 못마땅해 할 일을 하지나 않을까 두려워하는 사람은 진정한 즐거움을 영원히 경험하지 못한다. 지나치게 자기 중심적인 사람들도 마찬가지다. 자기 중심적인 사람은 보통 자기 의식적이지는 않지만, 대신에 무엇이든 사소한 것조차도 그것이 자신의 바람과 얼마나 일치되는가를 따져서 평가한다. 그러한 사람에게는 뭐든지 그 자체로는 가치도 없다고 본다. 자신의 흥미를 끌지 않는 여자나 남자에게는 더 관심을 가질 필요도 없다고 생각한다. 완전히 자신의 목적에 맞추어 자의식이 구조화되어 있으며, 그러한 목적에 부합하지 않는 어떠한 것도 의식 안에 담아두지 않는 것이다.

 자의식적인 사람들은 많은 점에서 자기 중심적인 사람들과는 다르다. 그렇지만 심리적 에너지를 충분히 통제하지 못하여 결국에는 쉽게 플로우 경험을 하지 못하는 점은 똑같다. 두 유형의 사람들 모두에게는 활동 자체를 위하여 요구되는 주의의 융통성이 부족하다. 너무 많은 심리적 에너지를 자기를 위해서 쏟고, 주의를 두는 것 역시도 자아의 욕구에 의해 엄격하게 제한된다. 이러한 조건에 있는 사람들이 상호 작용 그 자체 말고는 어떤 보상도 따르지 않는 자기 목적적 활동에 몰입한다는 것은 어려운 일이다.

 

p165

 사회 병리 상태를 기술하는 두 가지 용어, 즉 '사회적 무질서(anomie)'와 '소외'는 플로우 경험을 어렵게 하는 조건이기도 하다. 먼저 사회적 무질서란 말 그대로 '규칙의 결여'를 의미하는 것으로, 프랑스의 사회학자 뒤르켐이 행동의 규준이 혼란했던 사회 상태를 지칭했던 용어이다. 무엇이 허용되며 허용되지 않는지 더 이상 분명하지 않을 때, 대중의 의견 중 어떤 것이 가치로운지 불확실할 때, 행동은 엉뚱해지고 무의미해진다. 의식의 질서를 유지하기 위해서 사회의 질서에 의존하는 사람들은 불안해지기 시작한다. 무질서 상태는 경제가 붕괴되거나 혹은 한 문화가 다른 문화에 의해서 파괴될 때 일어날 수 있다. 또한 경제나 너무 급속하게 발전할 때나 절약과 근면이라는 가치가 더 이상 예전만큼 의미가 없을 때에도 일어날 수 있다.

 소외는 여러 가지 면에서 무질서 상태와 반대로 해석된다. 즉 소외란, 사람들이 사회 체계에 의해 제한을 받기 때문에 자신의 목표와 부합하지 않는 방식으로 행동하는 상태를 일컫는다. 식구들을 먹여 살리기 위해서 작업장의 조립 라인에서 무의미하고 똑같은 과제를 수백 번씩 반복해야 하는 노동자는 소외를 겪을 수 있다. 사회주의 국가에서 소외를 일으키는 가장 짜증나는 일은, 불가피하게도 여가 시간의 상당 부분을 음식과 옷을 사기 위해서, 공연을 보기 위해서 또는 끝없이 복잡한 허가 절차를 밟기 위해서 줄을 서는 데 써야 한다는 것이다. 사회가 무질서 상태에 있을 때에는, 어떤 것에 심리적 에너지를 쏟는 것이 가치로운지 명료하지 않기 때문에 플로우 경험이 힘들다. 반면에 이와 같은 사회에서 소외가 일어날 때의 문제는, 분명히 바람직한 것이 있는 줄 알면서도 심리적 에너지를 투입할 수 없다는 것이다.

 지금까지 플로우를 방해하는 두 가지 사회적 요인(사회적 무질서와 소외)을 살펴보았다. 그런데 이 두 가지의 사회적 방해 요인은 두 가지의 개인적 병리(주의력 결핍과 자기 중심성)와 기능적으로 동질적인 것이다. 개인과 집단이라는 두 수준에서 플로우 경험을 방해하는 것은, 사회적 무질서와 주의력 장애에서처럼 주의 과정의 분열로 인해서, 또 소외와 자기 중심성에서 볼 수 있는 거서럼 지나친 경직으로 인해서 문제가 된다. 개인적 수준에서 볼 때 무질서는 불안과 일치하는 것이며, 소외는 지루함에 대응되는 것이다.

 

p167

 의식에서 실제에 대한 표상을 하기 위해 많은 외부의 정보를 필요로 하는 사람들은 자신의 정신을 사용하기 위해서 외적인 환경에 더 의존한다. 그들은 자신의 사고에 대한 통제력이 적어지고 결국 이는 그들의 경험을 즐기는 것을 더 어렵게 만든다. 대조적으로, 의식에서 사건들을 표상하기 위해서 단지 소수의 외적 단서를 필요로 하는 사람들은 환경의 영향으로부터 좀더 자유로울 수 있다. 자신의 주의력을 융통성 있게 활용할 수 있기 때문에 외적 경험을 머릿속에 표현하는 것이 쉽고, 그 결과 더욱 자주 최적 경험에 도달하게 된다.

 

p169

많은 연구에 따르면, 부모와 자식의 상호 작용 형태는 아이가 성장해서 어떤 유형의 사람이 되는가에 지속적인 영향을 미친다. 시카고 대학에서 라순디 박사가 실시한 연구를 예로 들어보자. 이 연구에 따르면, 자기 부모와 특정한 유형의 관계를 형성한 10대들이 그렇지 못한 또래보다 대부분의 일상에서 더 행복해하고, 만족하고, 의지가 강한 경향이 있다고 한다. 

 최적 경험을 유발하는 특정 가정 환경 유형의 특징을 다음 다섯 가지로 정리해 볼 수 있다.

 첫 번째는 명료성이다. 아이들은 부모가 자신들로부터 무엇을 기대하는지를 명료하게 알고 있다고 생각한다. 또한 가족의 상호 작용에서 목표와 피드백이 명확하다.

 두 번째는 중심성이다. 즉 이것은 부모가 자녀들이 좋은 대학이나 좋은 직장에 들어가는 것에 관심을 갖기보다는, 지금 현재 자녀들이 하고 있는 일의 구체적인 경험과 감정에 관심을 갖고 있다고 믿는 자녀의 지각이다.

 세 번째로는 선택성이다. 아이들은 무엇을 선택해야 할지에 대해서 그 선택의 결과를 책임질 수 있다면 부모가 세운 규칙도 깰 수도 있다고 생각하며, 다양한 가능성을 갖고 있다고 생각한다.

 네 번째의 특징은 자녀가 부모의 보호 아래 충분히 편안함을 느껴 자기가 관심 있는 어떤 것이든 간에 참여할 수 있도록 하는 부모의 신뢰성이다.

 그리고 마지막은 도전성인데, 이는 자녀들에게 점차 복합적인 행동의 기회를 제공하는 부모의 헌신을 말한다.

 이러한 다섯 가지의 조건은 삶을 즐길 수 있는 이상적인 연습의 기회를 주기 때문에 '자기 목적적 가정 환경'으로 일컬어진다. 분명히 다섯 가지 특징은 플로우 경험의 차원과도 매우 비슷하다. 목표와 피드백의 명료한 제시, 통제감, 당면한 과제에 대한 집중, 내적 동기화 및 도전 의식을 독려하는 가정 환경에서 성장한 아이들은 일반적으로 그렇지 않은 환경의 아이들과 비교해 볼 때, 플로우를 경험할 수 있는 더 나은 기회를 갖는다.

 

 자기 목적적이 아닌 가정의 아이들은 많은 에너지를 끊임없는 협상과 다툼에 소진한다. 아이들은 자기가 아닌 다른 사람들의 목표에 의해서 압도되지 않기 위해, 또한 자신의 연약한 자아를 보호하기 위해 이러한 심리적 에너지를 써 버리는 것이다.

 

 연구에 따르면, 자기 목적적 환경의 아이들은 그렇지 않은 아이보다 더 행복하고, 강하고, 명랑하고, 만족스러워했다. 이 차이는 아이가 혼자서 공부할 때나, 학교에서 공부할 때도 나타났다. 여기서도 중요한 것은, 자기 목적적 가정에서 성장한 아이들이 한층 더 쉽게 플로우 경험을 한다는 사실이다. 하지만 더 중요한 사실이 있다. 아이들이 친구와 함께 있을 때, 자기 목적적 환경의 청소년과 그렇지 않은 아이들 사이에 차이는 없다는 것이다. 즉 가정이 자기 목적적인지의 여부에 상관없이 아이들은 친구와 함께 있을 때 긍정적인 정서를 경험한다.

 

p177

 세상에 대한 관심, 즉 적극적으로 세상과 관계를 맺으려는 욕망이 없다면 사람은 스스로 고립된다. 20세기 가장 위대한 철학자 중 한 명인 버트란트 러셀은 개인적 행복을 성취하는 방법을 다음과 같이 말했다.

 "점점 나는 내 자신과 나의 결점들에 대해 무관심해지는 법을 배웠다. 점차 내 주의의 중심은 외부의 대상, 즉 만물의 상태, 다양한 지식의 영역, 내가 애정을 느끼는 개인들에게 맞추어졌다."

 그는 이처럼, 자기 목적적인 성격을 어떻게 형성할 수 있는지를 짧지만 적절하게 설명해 주었다.

 부분적으로 그러한 성격은 생물학적 유전과 초기의 양육을 통해 얻어진 것이다. 즉 어떤 사람은 신경학적으로 좀더 집중을 잘하고 융통성 있는 능력을 타고났거나, 또 어떤 사람은 운이 좋게도 비자의식적 개인주의를 함양시켜 준 부모가 있었을 것이다. 그러나 이러한 성격은 훈련과 훈육을 통하여 완전하게 숙달할 수 있는 기술, 즉 계발 가능성이 있는 능력이다.

 

p188

 연구 결과, 사람들이 값비싼 물질적 자원이 필요한 여가 활동(값비싼 장비가 있어야 하거나, 자동차 운전 또는 TV 시청처럼 석유나 전기 등의 에너지를 필요로 하는 활동)을 할 때 비용이 많이 들지 않는 여가 활동 때보다 그 즐거움이 훨씬 감소한다는 결론을 얻었다. 사람들이 가장 행복하게 느낄 때는 그저 서로 담소를 나눌 때, 정원을 손질할 때, 뜨개질을 할 때 혹은 여타의 취미 생활을 즐길 때였다. 이와 같은 활동들은 외적 자원이 거의 들지 않지만 상대적으로 고도의 심리적 에너지를 집중해야 하는 일들이다. 반면, 외적 자원을 필요로 하는 여가 활동에는 상대적으로 주의를 덜 집중하기 때문에 기억할 만한 추억이 줄어드는 것이다.

 

p196

 인도 사람들은 고도의 자기 통제 기술에 지나치게 매료된 나머지 자연 환경의 물리적 도전에 대처하는 법을 배우지 못하였다. 그리하여 대다수 국민들 사이에 무력감과 무관심이 팽배해졌고, 결국은 자원의 빈약과 인구 과잉으로 인한 좌절을 맛보아야 했다. 반면에, 물질적 에너지 사용의 극대화를 꾀한 서양은 가능한 모든 자원을 개발하고 급속도로 소모해 왔기 때문에 환경의 고갈을 초래하였다. 정신 세계와 물질 세계의 저화로운 균형을 이루는 사회야말로 완벽한 사회라 할 것이다.

 

 산스크리트어로 요가는 '함께 있게 함'을 의미하는데, 이는 사람과 신을 일체가 되도록 하는 요가의 목적을 나타내는 것이다. 즉, 먼저 신체의 각 부분이 서로 하나가 되도록 하고, 그렇게 하나가 된 육체와 의식이 함께 질서를 찾아나가는 것이다. 약 1,500년 전에 파탄잘리에 의해 집대성 된 요가의 교본에는 이러한 목표에 이르는 여덟 단계가 제시되어 있는데, 각 단계로 올라갈수록 난이도는 점차 증가한다. 윤리적 준비를 하는 처음 두 단계는 각 개인의 태도를 변화시키고자 하는 것이다. 이 단계는 의식을 정리하는 단계라고 말할 수 있다. 즉 정신을 직접적으로 통제하려는 노력을 시도하기 전에 우선 심리적 엔트로피를 최대한 줄이고자 하는 것이다.

 이를 실천하기 위한, 첫 단계인 야마(yama)에서는 거짓말 · 도벽 · 욕망 · 탐욕 등 타인에게 해를 끼칠지도 모르는 생각과 행동을 자제하라고 한다.

 두 번째 단계는 순종을 의미하는 니야마(niyama)이다. 이는 곧 청결과 수련 그리고 신에 대한 순종을 질서 정연한 일과를 따름으로써 예측 가능한 형태로 만들고, 이 과정을 통해서 주의를 통제하기 쉽게 만드는 것이다. 

 그 다음의 두 단계는 육체적 준비를 하는 단계로, 요기라고 불리는 수행자들이 감각의 유혹을 이겨내고, 지치거나 사념에 얽매이지 않고 집중할 수 있게 해주는 습관을 기르는 단계이다.

 세 번째 단계에서는 아사나(asana)라고 하는 다양한 '좌자세'나, 동일한 자세를 오랜 시간 동안 긴장이나 피로에 굴하지 않고 유지하는 것이다. 우리는 천을 두르고 머리를 땅에 대면서 발은 목뒤로 접은 채 꺼꾸로 서 있는 사람을 본 적이 있을 것이다. 바로 이것이 서양에 알려진 익숙한 요가 형태, 즉 아사나이다.

 네 번째는 프라나야마(pranayama), 즉 호흡법으로서 신체의 긴장을 완화하고 호흡의 리듬을 안정시키는 것이 목적이다.

 다섯 번째 단계는 지금까지의 준비 운동과 본격적 요가 수행의 연결 단계로 프라트야하라(pratyahara)라고 한다. 이것은 감각 정보 입력을 통제함으로써 외부 물체로부터 주의를 끊고 궁극적으로는 본인이 의식으로 받아들이고 싶은 것만 보고, 듣고, 느낄 수 있도록 하는 단계를 말한다. 지금까지 살펴본 단계들을 보면, 이번 장에서 설명하는 플로우 활동의 목적, 즉 의식 세계의 통제와 요가의 목적이 얼마나 유사한지를 알 수 있다.

 나머지 세 단게는 지금 우리의 주제와 일치하지는 않지만 - 왜냐하면 나머지 단계에서는 육체적 기술보다는 순수한 정신 작용을 통한 의식의 통제를 다루고 있기 때문이다 - 여기서 맥락을 유지하기 위해, 또 결국에는 이런 정신적 수행이 이에 앞서 행해지는 육체적 수행에 전적으로 바탕을 두고 있기 때문에 계속 설명하기로 한다. 다라나(dharana)는 오랜 기간 동안 단일한 자극 하나에만 집중하는 것으로, 앞 단계인 프라트야하라와 일맥 상통한다고 볼 수 있다. 즉 우선 사물을 의식 밖으로 내보내는 것을 배우고, 그 다음 그것을 의식에 다시 넣는 법을 배우게 되는 것이다. 고도의 명상을 수행하는 드야나(dhyana)가 일곱 번째 단계이다. 이 단계에서는 어떤 것으로부터도 방해 받지 않고, 앞 단계에서와 같은 단일 자극도 필요치 않은 집중 상태에서 자신을 잊는 법을 배우게 된다. 최종적으로 수행자는, 명상하는 사람과 명상의 대상이 하나가 되는 상태인 사마디(samadhi)를 성취하게 된다. 사마디를 성취한 사람들은 이를 그들 생애에서 최고로 행복한 경험으로 묘사한다.

 

p199

 요가와 플로우의 유사성을 뒷받침해 주는 또 다른 점은 해방에 이르는 마지막 단계까지도 수행자가 계속해서 의식을 통제해야 한다는 것이다. 의식의 통제 없이는 자아를 버릴 수 없으며, 자아를 버리는 그 순간조차 의식의 완전한 통제가 있어야 가능하기 때문이다. 본능과 습관 그리고 욕망이 있는 자아를 포기한다는 것은 자연스럽게 이루어지는 일이 아니다. 고도로 자신을 통제하는 사람만이 해낼 수 있는 일이다. 그러므로 요가야말로 가장 오래되고 가장 체계저그로 플로우 경험을 낳는 방법 중의 하나라고 해도 과언이 아니다.

 

p205

  음악은 조직화된 청각적 정보라고 할 수 있다. 음악은 듣는 사람의 마음을 정리해 줌으로써, 심리적 엔트로피 - 즉 관련 없는 정보들이 우리가 목표에 집중하는 것을 방해할 때 경험하게 되는 무질서 - 를 감소시켜 준다. 음악을 들으면 지루함이나 근심 걱정을 떨쳐 버릴 수 있고, 진지하게 감상할 때는 플로우를 경험할 수 있게 된다.

 어떤 이는 기술의 발달로 음악을 언제 어디서나 손쉽게 접할 수 있게 됨으로써 삶의 질이 상당히 향상됐다고 주장할는지도 모른다. 라디오 · 테이프 · CD · 레이저 디스크 등을 통해 선명하게 녹음된 최신 곡들을 하루 종일 들을 수 있게 되었기 때문이다. 이처럼 계속해서 음악을 들을 수 있다는 사실이 우리 삶을 더욱 풍족하게 만들어 주어야 이론에 들어맞는다. 그러나 이런 주장은 흔히 행동과 경험을 혼동하는 데서 나오는 것이다. 녹음된 곡을 며칠이고 계속해서 듣는 것이 몇 주일 동안 고대하던 콘서트에서 단 한 시간 음악을 듣는 것보다 더 즐거울 수도 있고, 그렇지 못할 수도 있다. 삶의 질을 향상시켜 주는 것은 음악이 귀에 항상 가깝게 있다는 사실이 아니고, 우리가 주의를 집중해서 귀를 열고 들을 때만이다. 예컨대 식당이나 가게에서 나오는 배경 음악을 들을 때 그것을 귀기울여 듣는 사람은 거의 없으며, 따라서 그로 인해 플로우를 경험하기는 극히 어려운 것이다.

 다른 것과 마찬가지로 음악도 즐기기 위해서는 주의를 기울여야 한다. 현대인들은 녹음 기술의 발달로 음악을 듣기가 너무 편리해진 나머지 그것을 당연한 것으로 여기게 되었다. 그러나 음악을 통해 즐거움을 얻을 수 있는 우리의 능력도 그만큼 감소될 수 있는 것이다. 녹음 기술이 발명되기 이전에는, 종교 의식에 완전히 통합되어 있던 시절의 음악이 자아내는 것과 같은 경외감을 라이브 음악 공연을 통해 얻을 수 있었다. 교향악단은 물론이요, 마을의 무도회 반주 그룹까지도 이와 같은 조화로운 소리를 만들어 내는 신비한 기술을 잘 보여 주는 좋은 예가 되었다. 당시에는, 한 번의 공연이 유일무이한 것이며 다시 되풀이될 수 없다는 것을 잘 알았기에 사람들이 이런 행사에 거는 기대가 매우 높았던 것이다.

 오늘날 록 콘서트와 같은 라이브 공연의 관객들도 어느 정도는 이와 같은 의식적 행위에 참가하는 것이라고 볼 수 있다. 이러한 경우 말고는 이처럼 많은 사람들이 모여 같은 행사를 보고, 같은 것을 생각하고 느끼며, 동일한 정보를 처리하게 되는 예가 극히 드물기 때문이다. 이와 같이 집단으로 행사에 함께 참여하는 관중들은 뒤르켐이 명명한 '집단적 흥분'을 경험하게 되는데, 이는 어떤 집단에 확고히 소속되어 있다는 존재 의식을 느끼게 되는 것을 말한다. 뒤르켐은 이러한 느낌이야말로 근원적인 종교적 경험이라고 생각했다. 이처럼 라이브 공연은 듣는 이로 하여금 음악에 집중할 수 있는 여건을 만들어 주기 때문에 재생된 음악을 들을 때보다 공연장에서 플로우를 경험할 가능성이 더 높아지는 것이다.

 라이브 연주가 녹음된 음악보다도 원래 더 즐거운 것이라고 주장하는 것은 그와 반대의 경우를 주장하는 것과 마찬가지로 타당성이 희박하다. 듣는 이가 진지한 자세만 갖춘다면 어떤 음악도 즐거움을 줄 수 있다. 사실상, 야쿠이 족의 마술사가 인류학자 카를로스 카스타네다에게 가르쳐 준 바와 같이, 음과 음 사이의 정적까지도 면밀히 들으면 즐거운 것이 될 수 있다.

 많은 사람들이 희귀 음반까지 탐내면서 많은 음악을 수집해 두고 있지만, 그것을 실지로 즐기지는 않는다. 몇 번 음악을 들으면서 음향 시설이 내는 선명한 음에 감탄하고서는, 더 좋은 음향 기기가 나와 그것을 새로 구입할 때까지 잊어버리고 다시는 음악을 듣지 않는다. 이와는 반대로, 음악에 내재한 기쁨의 잠재성을 최대로 살리는 사람들은 그들의 경험을 플로우로 변화시킬 수 있는 나름대로의 방법을 알고 있다. 그들은 우선 일정한 시간을 음악 감상에 할애한다. 그 시간이 되면 불을 끄거나,  제일 좋아하는 의자에 앉거나, 혹은 주의를 집중할 수 있는 자신들만의 어떤 방법을 통해 집중도를 높인다. 그들은 감상할 음악을 미리 신중히 선곡하며, 감상 시간에 맞는 구체적 목표를 설정해 둔다.

 음악 감상은 처음에는 감각적 경험 단계에서 출발한다. 이 단계에서는, 우리 신경계에 유전적으로 내재되어 있는 유쾌한 육체적 반응을 유발시키는 음색에 반응을 보인다. 우리는 전 세계적으로 사랑받는 그런 특정 가락이나, 플루트의 애조를 띤 호소, 또는 활달한 트럼펫의 곡조에 반응을 나타낸다. 우리는 특히 드럼이나 베이스의 리듬에 민감하게 반응을 하는데, 이런 리듬이 록 음악의 기초가 되는 것이며, 누군가는 이와 같은 리듬이 어머니의 자궁 속에서 처음으로 듣게 되는 어머니의 심장 소리를 상기시켜 준다고 하기도 한다.

 다음 단계는 유추적 감상 단게이다. 이 단계에서는 음의 양식에 따라 감정과 이미지를 떠올리는 기술을 갖추게 된다. 음울한 색소폰의 악절은 대평원 상공에서 먹구름이 몰려드는 것을 바라볼 때 느꼈던 경외감을 상기시켜 준다. 또 차이코프스키의 곡은 눈이 가득 덮인 숲 속에서 종을 딸랑거리며 썰매를 달리는 광경을 눈으로 보는 듯하게 해주기도 한다. 대중 가요도 물론 그 노래가 어떤 분위기와 어떤 이야기를 나타내는 곡인가를 가사로 명확히 알게 해줌으로써, 이와 같은 유추적 감상법을 최대로 활용한다고 하겠다.

 음악 감상의 가장 복합적인 단계는 분석적 감상 단계이다. 이 단계에서는 음의 감각적 혹은 서사적 측면보다는 음악의 구조적인 요소에 관심을 기울이게 된다. 감상 기술이 이와 같은 수준이 되면, 그 작품 저변의 양식 및 그와 같은 화성을 이루어 낸 방법을 인식하는 능력을 갖게 된다. 이러한 수준의 감상 기술을 익히게 되면, 각 공연마다 상이한 음향의 질을 비교 평가할 수 있으며, 공연 작품을 그 작곡가의 초기 및 후기 작품과 비교하기도 하고, 동시대의 다른 작가가 만든 작품과도 비교할 수 있다. 또한 같은 관현악단, 지휘자, 악단의 초기 공연과 후기 공연을 비교해 보거나, 다른 악단과 지휘자는 같은 작품을 어떻게 해석했는지를 비교해 볼 수도 있다.

 이처럼 분석적 감상 능력을 가진 사람들은 같은 블루스 곡을 다양하게 변화시킨 편곡 작품들을 서로 비교하기도 하고, "카라얀이 1975년에 지휘한 제7번 교향곡 제2악장이 1963년 공연 당시와 어떻게 다른가 한번 볼까?"라든지, "시카고 교향악단의 금관악기부가 베를린 교향악단보다 정말 더 나은가?"라는 생각들을 염두에 두고 감상을 하기도 한다. 그와 같은 목표를 설정해 놓았기 때문에 듣는다는 직업은 하나의 적극적인 경험이 되는 것이다. 그리고 이러한 경험을 통해, "카라얀이 빠르기를좀 늦추었네"라든지, "베를린 교향악단의 관현악부의 소리는 더 선명하지만 부드러운 맛이 좀 적군"등과 같은 계속적인 피드백을 얻는다. 이와 같은 분석적인 감상 기술을 익혀나가게 되면 음악을 즐길 수 있는 기회가 기하급수적으로 증가한다.

 

p215

 반드시 억제한다고 해서 덕이 되는 것은 아니다. 두려움 때문에 스스로를 억제하는 삶은 필연적으로 위축되게 마련이다. 그러한 사람들은 방어적이고 완고해지고, 자아가 더 이상 성장하지 않는다. 오직 자율적으로 선택한 규율을 통해서만, 인생을 즐기면서도 이성의 한도를 벗어나지 않을 수 있다. 만일 어쩔 수 없어서가 아니라 스스로 원하기 때문에 자신의 본능적 욕망을 조절할 수 있다면, 중독되지 않고도 즐거움을 누릴 수 있다. 음식에 광적으로 집착하는 사람은 맛있는 음식을 거부하는 금욕주의자처럼 스스로에게나 다른 이에게 권태감을 준다. 이러한 양극단 사이에서 삶의 질을 향상시킬 수 있는 여지는 얼마든지 있다.

 

6장. 지적 활동을 통해 플로우 찾기(The Flow of Thought)

p221

 운동 선수들은 어느 한계 이상으로 그들의 성적을 향상시키려면, 먼저 정신을 가다듬는 법부터 익혀야 한다는 사실을 너무도 잘 알고 있다. 그렇게 함으로써 그들이 얻게 되는 내적 보상은 좋은 컨디션뿐만이 아니라 개인적 성취감과 자긍심의 강화까지도 경험하게 되는 것이다. 역으로, 모든 정신적 활동을 위해서 신체적 상태가 중요하다. 예를 들어 체스는 가장 두뇌를 많이 쓰는 게임 중의 하나이지만, 체스의 고수들은 달리기나 수영을 하면서 늘 체력을 다져야 한다. 그들이 육체적으로 건강하지 못하면, 체스 대회에서 장시간 동안 고도로 정신을 집중한 상태에서 오래 버티지 못한다는 것을 잘 알기 때문이다.

 

p223

 우리는 정신을 통제할 수 있는 우리의 능력이 얼마나 미약한지를 잘 깨닫지 못한다. 왜냐하면 습관에 의해 심리 에너지가 너무도 잘 배분되는 까닭에 거침없이 계속 이어지는 것처럼 보이기 때문이다. 아침에 자명종 시계가 울리면 우리는 잠에서 깨어 의식을 찾은 후 목욕탕으로 가서 이를 닦는다. 그러고 나면 문화가 규정해 주는 사회적 역할이 우리의 생각을 정리해 주며, 하루가 저물 때까지 일정한 양식에 따라 자동적으로 행동하다가 밤이 되면 잠을 자면서 의식을 잃어버린다. 그러나 특별하게 할 일이 없는 상태로 혼자 남겨졌을 때는 본능적인 무질서가 드디어 모습을 드러낸다. 별로 할 일이 없으니 이것저것 생각해 보다가 대개는 뭔가 고통스럽고 신경 쓰이는 일에 생각이 멈춘다. 생각을 정리하는 법을 알지 못하는 한, 현재 가장 문제가 되는 일로 관심이 모아진다. 실제 혹은 가상의 고통이나, 최근에 유감스러웠던 일, 또는 오래된 갈등 등에 관심이 쏠린다. 이런 쓸모도 없고 즐겁지도 않은 엔트로피가 바로 정상적인 의식의 상태이다.

 이런 상태를 피하기 위해 현재 손쉽게 얻을 수 있는 정보로 - 그것이 어떤 것이든 간에  머릿속을 채움으로써, 더 이상 부정적인 생각을 하지 않으려고 하는 것은 어쩌면 당연한 일이다. 바로 이러한 이유가, 즐기는 것도 아니면서 사람들이 왜 그렇게 막대한 시간을 텔레비전 보는 일에 소모하는가 하는 의문을 풀어준다. 독서나 다른 사람과의 대화 혹은 취미 활동과 비교해 볼 때, 텔레비전은 심리 에너지를 최소한으로 투자하고도 쉽고 지속적으로 시청자들의 주의를 끌게 해준다. 텔레비전을 보고 있는 동안은 골치 아픈 개인적 문제를 떠올리게 될까봐 염려할 필요가 없다. 일단 사람들이 정신적 혼돈 상태를 극복하기 위해 이런 미봉책을 쓰기 시작하면, 그 습관을 버리기란 거의 불가능하다.

 물론 TV 시청처럼 어떤 외적 자극에 정신을 내맡기기보다는, 습관을 통해서 정신을 통제하는 것이 의식의 혼돈 상태를 피하는 바람직한 방법이다. 그러나 그와 같은 습관을 들이기 위해서는 연습이 필요하며, 플로우 활동에 의레 따르는 목표와 규칙이 있어야 한다. 예를 들어 정신을 이용하는 가장 단순한 방법 가운데 하나로 공상을 들 수 있다. 이는 마음속에서 가상으로 어떤 일련의 사건들을 그려보는 것이다. 그러나 생각을 정리하는 일에 이처럼 쉬워 보이는 방법조차 사용하지 못하는 사람도 많다. 공상 및 정신적 심상에 대해 다른 어떤 학자보다 많은 연구를 한 예일 대학의 싱어 교수에 따르면, 전혀 공상을 할 줄 모르는 아이들도 많다고 한다.

 공상은 유익한 점이 많다. 먼저, 공상 속에서나마 불쾌한 현실을 보상함으로써 - 자신에게 해를 끼친 사람이 벌받는 상황을 상상해 보면서 좌절감이나 적개심을 어느 정도 해소시키는 것처럼 - 감정의 질서를 수립하는 데 도움을 준다. 또한 공상은 의식의 복합성을 높이는 일에도 큰 도움을 줄 수 있다. 예컨대 아이들이 - 어른들도 마찬가지로 - 상상을 통해서 당시 상황을 반복적으로 재현해 봄으로써 지금껏 문제 해결에 최선이라고 생각해 왔던 방법을 수정할 수도 있고, 다른 대안도 생각해 보며, 예상치 않은 결과도 발견할 수 있는 것이다. 기술을 닦는다면 공상도 매우 즐거운 것이 될 수 있다. 

 

p236

 "행복이란 것은 힘이나 돈에 있는 것이 아니다. 행복은 진실과 다양함 속에 존재하는 것이다."

 "유쾌함과 자신감은 최고의 선이다."

 칸트가 끓는 물 속에다 자신의 시계를 집어넣고 손에다는 계란을 들고 계란이 익는 시간을 재려했을 때는, 그의 모든 심리 에너지가 추상적 사고를 조화롭게 정리하는 데 투자되었기 때문으로 볼 수 있다.

 

p237

 내적 상징 체계가 없는 사람은 너무도 쉽게 대중 매체의 포로가 된다. 이들은 선동 정치가들에게 쉽게 현혹되며, 연예인들을 보고 쉽게 기분이 풀리고, 장사꾼들에게 이용당하기 쉬운 사람들이다. 우리가 텔레비전이나 마약 그리고 유창한 정치적 구호나 종교적 구원에 의존하게 되는 것은 의지할 것이 너무 없어서, 즉 모든 해답을 가지고 있다고 주장하는 사람들에게 우리 마음을 빼앗기는 것을 방지해 주는 내적 규칙을 갖고 있지 못하기 때문이다. 스스로 정보를 제공할 능력이 없을 때 우리의 생각은 무질서로 흘러 들어가게 된다. 의식의 질서를 찾기 위해서 자신이 아무런 통제도 할 수 없는 외부로부터의 방법을 사용할 것인가, 아니면 우리의 기술과 지식으로부터 자생적으로 성장하는 내적 방법을 따를 것인가의 여부는 각자의 선택에 달려 있다.

 

p240

 단어를 사용해 우리 삶의 질을 고양시킬 수 있는 훨씬 더 실재적인 방법은, 오늘날에는 거의 잊혀진 '대화의 기술'이다. 지난 200여 년 동안 공리주의 관념에 따라 우리는 대화의 주된 목적이 유용한 정보를 전달하기 위한 것이라고 믿어 왔다. 그래서 오늘날 우리는 실용적 지식을 전달해 주는 간결한 의사 소통을 중시하며, 그밖의 것들은 하찮은 시간 낭비라고 여긴다. 그 결과, 사람들은 직접적으로 관심이나 지식을 갖고 있는 협소한 화젯거리를 벗어나서는 서로 대화를 나눌 수 없게 되었다. 우리들 중에서 "미묘한 대화, 그것이야말로 에덴 동산이다"라고 서술한 알리의 열정을 이해할 수 있는 사람은 거의 없다. 이것은 유감스러운 일이다. 왜냐하면 대화의 주된 기능은 무엇을 성취하는 것이 아니라 경험의 질을 향상시키는 것이기 때문이다.

 

p243

 오늘날에는 다른 많은 의사 소통의 매체가 글을 대신하기 때문에 우리는 글쓰는 습관을 경시하게 되었다. 전화 · 녹음기 · 컴퓨터 · 팩스 등을 통해서 뉴스를 더욱 효율적으로 전할 수 있다. 만일 글을 쓰는 유일한 목적이 정보를 전달하기 위한 것이라면 글쓰는 습관이 쇠퇴하게 되는 것도 당연하다. 그러나 글은 단지 정보를 전달하기 위해서가 아니라 정보를 창조하기 위해 쓰는 것이다. 

 

p255

 수세대를 거치면서 그 제도 자체가 일으킨 문제들이 원래의 목적보다 우선하게 되는 경우를 흔히 볼 수 있다. 예컨대 현대 국가들은 적에 대한 방어 수단으로서 군대를 창설했다. 그러나 곧 군대 자체의 목적과 정치가 생겨났고, 이제는 가장 성공적인 군인이 국가를 가장 잘 수호하는 사람이 아니라 군대를 위해 돈을 가장 많이 얻어오는 사람이 되어 버렸다.

 

p257

 다른 분야에서와 마찬가지로 철학에서도 연구자가 수동적인 소비자의 지위를 뛰어넘어 능동적인 생산자로 발돋움할 수 있는 시점이 온다. 자신이 통찰한 내용을 언젠가 후대에서 경외김을 가지고 있을 것을 기대하며 기록으로 남긴다는 것은 대부분의 경우 지나친 오만이다. 더군다나 그와 같은 '외람됨'이 인간사에 많은 악영향을 미쳐 왔다. 그러나 자신이 당면했던 주된 의문점들을 명료하게 표현하려는 내적 동기로 인해 생각을 기록하고, 자신의 경험을 의미를 이해하는 데 도움이 되는 해결책을 진술하고자 한다면, 그 아마추어 철학자는 가장 어렵지만 보람도 큰 영역에서 기쁨을 얻을 수 있는 법을 이미 배운 것이다.

p260

 

 많은 사람들이 학교를 졸업함과 동시에 배움을 포기하는 이유는, 13~20년에 걸친 교육이 외적 동기에 의해 주어진 것이었기 때문이다. 즉 배운다는 것이 불유쾌한 기억으로 자리잡고 있는 것이다. 학생들의 주의력이 오랜 기간 동안 외부에 의해, 즉 교과서와 교사들에 의해 조종되어 왔기 때문에 그들은 졸업을 첫 자유의 날로 간주해 왔던 것이다.

 그러나 자신의 상징적 기술의 사용을 포기하는 사람은 결코 자유로워질 수가 없다. 그의 사고는 이웃의 의겨니나 신문의 사설 그리고 텔레비전에 의해 좌우될 것이다. '전문가'의 조종을 받게 되는 것이다. 외적 동기에 의한 교육이 종결되는 시점을 내적인 동기로 교육을 받게 되는 출발점으로 만드는 것이 가장 이상적이다. 그 시점에서 공부의 목적은 더 이상 학점을 받거나 졸업장을 타는 것 그리고 좋은 직장을 구하는 것이 아니다. 그보다는, 주변에서 일어나는 일들에 대한 이해를 높이는 것 그리고 자기 경험의 의미를 이해하고 그 질을 높이기 위한 것이 목적이 되는 것이다. 바로 여기서 사상가는 심오한 기쁨을 느끼는 되는 것이다.

 

7장. 일 속에서 플로우 경험하기

 

p277

 다시 말해 유(流)의 신비한 경지에 도달하려면 어떤 초인간적인 대도약이 필요한 것이 아니라 단지 주변에 있는 행동의 기회에 점차로 주의를 집중시켜 나가면 되는 것이다. 그리고 이에 따라 연마되는 기술이 시간이 흘러가면서 너무나 완벽한 수준에 이르러 겉보기에는 자동적이고 초월적인 것처럼 보일 정도가 되는 것이다. 위대한 바이올린 연주가나 훌륭한 수학자들의 성취는 공히 난관 극복과 점진적 기술 연마의 결과임이 확실하지만, 마치 초인적인 것처럼 보인다.

 

p287

 일을 통해 삶의 질을 향상시키기 위해서는 두 가지의 상호 보완적인 전략이 필요하다. 그 하나는 사냥 · 가내 직조 수공업 · 수술 등과 같은 플로우 활동과 최대로 비슷해질 수 있도록 일을 재설계해야 한다는 것이다. 다른 하나는 행동의 기회를 파악하고 기술을 연마하고 합당한 목표를 설정할 수 있도록 하는 훈련을 통해서 사람들이 세라피나와 조 그리고 포정의 경우처럼 자기 목적적 성격을 개발할 수 있도록 돕는 일이다. 위의 두 전략 중 어느 하나만으로는 일을 더 만족스러운 것으로 만들 수 없다. 두 가지가 상호 보완이 되어야만 최적 경험의 창출에 지대한 공헌을 하게 되는 것이다.

 

p292

 이것이 바로 역설적인 상황인 것이다. 직장에서 사람들은 훨씬 많은 기술을 사용하고 직면하는 도전들도 많다고 느끼기 때문에, 스스로 더 행복하고 강하고 창의적이라 느끼며 더욱 큰 만족감을 갖는다. 여가 시간에는 대체로 별로 할 일도 없고 자신의 기술도 많이 쓰이지 않는다는 생각이 들기 때문에 스스로 우울하고 약하고 지루하고 불만족스럽게 느끼는 경향이 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사람들은 일보다는 여가 시간을 더 많이 갖고 싶어하는 것이다.

 이처럼 모순되는 양상이 의미하는 것은 무엇일까? 이에 대한 여러 가지 설명이 있을 수 있겠지만, 부정할 수 없는 분명한 결론이 하나 있다. 일이라고 하면 사람들은 자신의 감각이 내리는 판단을 따르지 않는다는 것이다. 이들은 직접 경험의 질은 무시해 버리고, 일에 대한 깊은 문화적 고정 관념에 의거해 자신의 동기를 결정 짓는다. 일이란 부담이고 구속이며 자신의 자유에 대한 침해이기 때문에 가능한 한 피해야 하는 것으로 여기는 것이다.

 

p294

 연구를 통해서 우리는 미국인들이 자신의 직업에 만족하지 못하는 주된 이유 세 가지를 발견했는데, 세 가지 모두 직장에서 겪는 전형적인 경험과 관련이 있는 것들이었다. 우리가 지금껏 살펴본 바와 같이, 직장에서의 경험이 집에서의 경험보다 더 나은 경우가 많음에도 직업에 대한 불만을 갖게 되는 것이다(일반적인 생각과는 다르게, 봉급이나 다른 물질적 문제는 대체로 이들의 가장 절박한 관심사에 들지 않았다).

 가장 많이 지적되고 어쩌면 가장 중요한 것일 수도 있는 불만족의 첫 번째 원인은 다양성과 도전감의 결여이다. 이것은 모든 사람에게 문제가 될 수 있으나, 특별히 단조로운 작업을 하는 하급 직책을 가진 사람들의 경우에는 더 심각한 문제가 되었다.

 두 번째 불만은 직장에서 겪는 다른 사람과의 갈등, 특히 상관과의 갈등이다.

 세 번째로는 심신의 소모가 지적되었다. 압력과 스트레스를 많이 받고, 자신을 위한 시간이 너무 없다는 것, 그리고 가족과 함께 보내는 시간이 부족하다는 것이었다. 이것은 특히 고위 직급에 있는 사람들, 즉 경영직이나 관리직에 있는 사람일수록 심각하게 느끼는 문제였다.

 이러한 불만들은 객관적인 것들도 있지만, 각자의 의식의 주관적 변화에 따라 좌우되는 것들도 많다. 예를 들어, 다양성이나 도전은 직업이 본연적으로 갖고 있는 특징이기도 하지만, 각자가 기회를 어떻게 파악하는가에 따라 차이가 나는 것들이다. 포정과 세라피나 그리고 조는 대부분의 사람들이 단조롭고 의미가 없다고 생각하는 일에서 도전을 찾아냈다. 어떤 직업이 다양성을 갖추고 있는가는 궁극적으로 볼 때 실질적 노동 조건보다는 그 직업에 대한 각자의 접근 방식에 좌우되는 것이다.

 다른 불만의 원인들도 이와 마찬가지이다. 직장 동료들이나 상사와 잘 지내는 것이 어렵기는 하겠지만, 일반적으로 이ㅘ 같은 일은 노력만 한다면 어느 정도 원만히 해결할 수 있는 문제들이다. 직장에서의 갈등이란 종종 체면이 손상될 것을 우려하여 방어적 심리를 갖게 될 때 발생한다. 자신의 특정 목표에 따라 다른 사람들이 자신을 어떻게 대해 주어야 한다는 기준을 설정해 놓고, 다른 사람들이 그 기준을 따라주기를 기대한다. 그러나 이처럼 계획된 대로 이루어지는 경우는 극히 드물다. 다른 사람들도 나름대로 설정해 놓은 기준과 목표가 있기 때문이다. 이 같은 교착 상태를 피해갈 수 있는 최선의 방법은 상사나 동료들이 그들의 목표를 달성할 수 있도록 도와주면서 자신의 목표를 성취하고자 노력하는 것이다. 단기적인 관점에서는 이 방법이 주변의 상황에는 신경도 쓰지 않고 자신의 이해만을 추구해 나가는 것보다 덜 직접적이고 시간도 많이 들지만, 장기적으로 볼 때 실패하는 확률이 거의 없다.

 최종적으로 스트레스와 압력은 직업에 따르는 가장 주관적인 측면이므로 그만큼 의식의 통제를 받기 쉽다는 점을 생각해 볼 수 있다. 스트레스는 우리가 그것을 느껴야 비로소 존재하게 되는 것이다. 같은 스트레스를 받더라도 완전히 지쳐버리는 사람이 있고, 그것을 도전으로 받아들이는 사람이 있다. 스트레스를 완화하는 방법은 수없이 많다. 조직의 개선, 책임의 위임, 동료나 상사와의 좀더 원활한 의사 소통 등에 의해 해결되는 것들도 있고, 가정 생활의 개선, 여가 활동의 변화와 같이 직업 외적인 요인들이나 초월적 명상과 같은 내적 훈련 등으로 해소할 수 있는 것도 있다.

 이와 같은 단편적인 해결책들도 도움이 되기는 할 것이다. 그러나 직업에서 오는 스트레스에 대처할 수 있는 유일하고도 진정한 대책은 그러한 스트레스를 전반적 경험의 질로 향상시키기 위한 도구의 하나로 보는 것이다. 물론 이것을 말로 하기는 쉽다. 이렇게 하기 위해서는 정신 에너지를 사용해야 하며, 어쩔 수 없이 정신이 산만해지는 상황에서도 자신이 설정해 놓은 목표에만 에너지를 집중해야 한다. 외적 스트레스에 대처하는 다양한 방법은 9장에서 다루기로 하고, 지금은 여가 시간의 활용을 통해 전반적 삶의 질을 어떻게 향상시킬 수 있는가를 살펴보기로 하겠다.

 

p297

 단지 수동적으로, 그리고 자기 지위를 과시하려는 것과 같은 외적인 이유로만 주의를 기울게 된다면, 대중적 여가, 대중 문화, 심지어는 고급 문화까지도 모두 우리 정신을 좀먹는 기생충이 될 수 있다. 그것들은 심리적 에너지만을 흡수할 뿐이며, 그 대가로 어떤 실재적인 힘도 제공해 주지 않는다. 결국 우리들을 이전보다 더욱 지치고 의기소침하게 만들어 줄 뿐이다.

 일이나 여가 시간 모두 우리가 통제하지 못한다면 실망스럽게 마련이다. 대부분의 일과 많은 여가 활동, 특히 대중 매체의 수동적 소비와 관련된 것들은 우리들을 행복하고 강하게 만들어 주지 못한다. 이를 통해 금전적 이득을 보는 사람들은 따로 있다. 우리가 이 상태를 그대로 방치한다면 이러한 것들은 우리 삶의 정수를 모두 고갈시켜 빈 껍데기만 남게 할 것이다. 그러나 다른 것들과 마찬가지로, 일과 여가도 우리 필요에 맞게 조정할 수 있다. 일을 즐길 수 있고, 여가 시간을 낭비하지 않는 사람은 결국 자신의 삶이 전반으로 훨씨 더 가치 있게 되었다고 느끼게 될 것이다. 브라이트빌은 "미래는 교육을 많이 받은 사람의 것일 뿐 아니라, 여가 시간을 현명하게 활용하도록 교육받은 사람의 것이 될 것이다"라고 말하지 않았던가.

 

 

8장. 혼자 있음과 함께 있음을 즐기기(Enjoying Solitude and Other People)

 

p304

 겉으로는 서로 상충되는 것처럼 보이는 이 문제를 해결하는 것은 사실 그리 어려운 일이 아니다. 중요한 다른 어떤 것과도 마찬가지로, 관계도 좋을 때는 우리를 더할 나위 없이 행복하게 해주기도 하고, 나쁠 때는 매우 우울하게 만들어 주기도 한다. 우리가 다루어야 하는 환경 중에서 사람들이 가장 융통성이 많고 가장 변화하기 쉬운 측면을 지니고 있다. 동일한 한 사람이 아침에 기분을 좋게 만들어 주었다가도 저녁에는 비참한 기분으로 만들어 줄 수도 있는 것이다. 우리는 다른 사람들의 애정과 승인에 너무도 많이 의존을 하고 있기 때문에, 다른 사람들이 우리를 어떻게 대해 주는가에 따라 극심한 영향을 받는다.

 그러므로 다른 사람들과 원만히 지내는 법을 배우는 사람은 삶의 질 전반을 크게 향상시킬 수 있다. 이러한 사실은 '친구를 얻고 사람들에게 영향을 주는 방법'과 같은 제목의 책들을 쓰고 또 읽는 사람들에게 잘 알려져 있다. 기업의 경영인들은 더욱 효과적인 경영을 위하여 의사 소통을 좀 더 원활하게 하고자 애쓰며, 사교계에 처음 나서는 사람들은 에티켓에 관한 책을 읽어 그 세계의 사람들로부터 인정을 받으려고 한다. 이러한 관심사들은 다른 사람들의 마음을 움직여 보려는 외적인 욕구를 잘 반영해 주고 있다. 그러나 단지 사람들이 우리 자신의 목표를 달성하는 데 도움을 주기 때문에 중요한 것만은 아니다. 그 자체로서 하나의 소중한 대상으로 대우를 한다면, 사람들은 가장 풍부한 행복의 원천이 된다.

 관계가 갖는 바로 이 같은 융통성으로 인해 불유쾌한 상호 작용이 참을만한 것으로도, 심지어는 흥미로운 것으로도 변화될 수 있다. 우리가 사회적 상황을 어떻게 규정하고 해석하는지에 따라 서로를 어떻게 대하고, 그렇게 하면서 어떤 기분을 느끼는지가 크게 달라질 수 있다.

 

p308

 외롭다는 것은 어째서 그렇게 부정적인 경험이 되는 것일까? 가장 기본적인 대답은 내적인 정신의 질서를 유지하기가 매우 어렵기 때문이라는 것이다. 우리에게는 계속 주의를 집중시킬 수 있는 외적이 목표와 외적 자극 그리고 외적 피드백이 필요하다. 외적 입력이 부족할 때는 주의가 산만해지고 사고의 혼란이 초래되어, 우리가 2장에서 살펴본 '심리적 엔트로피' 상태에 빠지게 된다.

 청소년들이 혼자 있을 때 하는 대표적인 생각은 다음과 같은 것들이다.

 "내 여자친구는 지금 무엇을 하고 있을까? 내 얼굴에 나는 것이 혹시 여드름인가? 수학 숙제를 제시간에 끝낼 수 있을까? 어제 나랑 싸웠던 녀석들이 나를 때릴까?

 다시 말해, 할 일이 없으니, 부정적인 생각들이 머릿속을 차지하는 것을 저지하지 못하게 되는 것이다. 어른들도 의식을 통제하는 법을 배우지 못하면 이와 똑같은 상황을 겪게 된다. 자신의 애정 생활에 대한 염려와 건강 · 투자 · 집 · 직장의 문제들이, 눈앞에 급히 해야 할 일이 없어진 순간부터 머릿속에 떠오르기 시작한다.

 바로 이런 이유 때문에 텔레비전이 그다지도 많은 사람들에게 큰 도움을 줄 수 있는 것이다. 텔레비전 시청이 결코 긍정적 경험이 되지는 못할지라도  일반적으로 사람들은 텔레비전을 보고 있을 때 수동적이고, 힘이 없고, 신경이 예민해지고, 슬픈 기분을 느낀하고 한다 - 최소한 눈앞의 깜박이는 화면이 의식에 어느 정도의 질서를 회복시켜 주는 것이다. 뻔히 예상할 수 있는 줄거리, 눈에 익은 주인공들, 심지어는 반복되는 광고까지도 일종의 안심을 주는 자극이 되는 것이다. 텔레비전 화면은 다루기 쉽고, 제한된 환경의 한 측면으로서 우리의 주의를 끈다. 텔레비전과 상호 작용을 하고 있는 동안은 우리의 머릿속에 개인의 걱정거리가 떠오루지 않는다. 화면을 통해서 전달되는 정보는 불쾌한 걱정들을 우리의 마음속으로부터 차단시켜 준다. 물론 이런 식으로 우울함을 떨쳐버리려 하는 것은 주의의 낭비이다. 크게 얻는 것도 없이 많은 양의 주의력을 소모해 버리기 때문이다.

 습관적 마약의 사용으로부터 끊임없이 집안 청소, 충동적 성해위에 이르는 다양한 강박적 행위들에 의존해 고독의 두려움을 벗어나 보려는 극단적 방법도 있다. 약의 영향을 받게 되면 자아가 심리 에너지를 지휘해야 하는 책임으로부터 해방된다. 그저 느긋하게 앉아서 약이 제공해 주는 생각에 빠져들면 되는 것이고, 무슨 일이 벌어지든 내 알 바가 아니다. 텔레비전과 마찬가지로 마약도 우리가 우울한 생각에 직면하지 않도록 해준다.

 술이나 향정신성 의약들도 최적 경험을 제공해 줄 수는 있다. 그러나 이러한 방법을 통해서는 복합성이 매우 낮은 수준의 경험만을 얻을 수 있을 뿐이다. 많은 전통 사회에서 행해지는 것처럼 고도로 기술적인 제식을 통해 마약을 취하지 않는 한, 실제로 마약은 우리의 판단(성취 가능한 일들은 무엇인가 그리고 우리가 한 개인으로서 무엇을 성취할 수 있는가)을 혼미하게 하는 결과를 초래할 뿐이다. 이것은 기분 좋은 상태이기는 하지만, 행동의 기회와 행동할 수 있는 능력을 '증가' 시킴으로 인해 맛보는 즐거움을 그릇되게 모방한 것에 불과하다.

 마약이 정신에 미치는 영향을 이처럼 설명한 것에 대해 강력히 반론을 제기하는 이들도 있을 것이다. 왜냐하면 우리는 지난 25년 동안 마약이 '의식을 확장시켜 주며' 마약을 사용하면 창의성이 증가한다고 줄곧 들어왔기 때문이다. 그러나 약의 화학 성분이 의식의 내용과 조직을 바꾸어 주기는 하지만, 자아의 통제력을 신장시키거나 증대시켜 주지 못한다는 사실이 입증된 바 있다. 중요한 것은 무언가 창의적인 것을 성취하기 위해서는 바로 그런 통제력이 필요하다는 사실이다. 그러므로 향정신성 의약들은 정상적 감각 조건에서보다는 다양한 정신적 경험을 하게 해주는 것은 사실이지만, 그러한 경험을 효과적으로 통제할 수 있는 능력은 제공해주지 못하는 것이다.

 많은 현대의 예술가들은 콜러리지가 마약에 취해서 집필한 것으로 알려진 <쿠빌라이 칸>과 같이 신비롭고 잊혀지지 않는 작품을 창작하고자 환각제를 사용해 보기도 한다. 그러나 이들은 결국 어떤 종류의 예술 작품이든 그것을 창작하기 위해서는 맑은 정신이 필요하다는 것을 깨닫게 된다. 약의 영향을 받은 상태에서 만들어진 작품은 좋은 예술 작품이 마땅히 갖추어야 할 복합성이 떨어져서 너무나 명백하고 자아 도취적인 경향을 띠게 된다. 화학 물질에 힘입어 예민해진 의식은, 나중에 작가가 명료한 정신으로 돌아와 사용할 수 있는 색다른 이미지나 생각, 감정 등을 낳기도 한다. 그러나 이렇게 되면, 정신을 점차 화학 물질에 의존하게 되어 결국은 스스로 정신을 통제할 수 있는 능력을 상실할 위험이 따르게 된다.

 

p312

 집중이 필요하고 기술을 증진시켜 주며 더 나아가 자아를 성장시켜 주는 활동을 하면서 자유 시간을 보내는 것과 텔레비전을 보거나 마약을 하면서 남는 시간을 때우는 것에는 큰 차이가 있다. 위의 두 전략이 혼돈의 위협에 대처하는 서로 다른 방법으로 보일 수도 있고, 존재론적 불안에 대해 각기 다른 방어 기제로 보일 수도 있다. 하지만 결국, 전자는 성장으로 이끌어 주고, 후자는 정신이 이상해지는 것을 방지하는 역할을 할뿐이라는 점에 그 차이가 있다. 좀처럼 지루함을 느끼지 않고, 외부 환경의 지속적 도움 없이도 순간 순간을 즐길 수 있는 사람은 창의적인 삶의 성취 여부를 판가름하는 시험에 합격했다고 할 수 있다.

 혼자 있는 시간으로부터 도피하지 않고, 그 시간을 활용하는 법을 배우는 것은 특히 젊은 시절에 더욱 중요하다. 혼자 있는 것을 견디지 못하는 청소년들은 나중에 성인이 되었을 때 진지한 정신적 각오를 해야 하는 과업을 수행하지 못한다. 방과 후 집에 돌아와서 가방을 자기 방에 던져 놓고, 냉장고에서 간식을 꺼내 먹은 후, 즉시 전화기를 들고 친구들과 통화를 시작하는 것이 많은 부모들에게 너무도 익숙한 전형적인 십대의 행동이다. 통화가 별 볼일 없어지면 전축이나 텔레비전을 켠다. 혹시라도 책을 펴는 경우가 있더라도 그 결심은 그리 오래가지 못한다. 공부를 한다는 것은 복잡한 형태의 정보에 집중을 하는 것이므로, 아무리 정신력이 강한 사람일지라도 얼마 안 지나 어려운 책의 내용을 떠나 좀더 즐거운 생각을 하려 한다. 그러나 마음대로 즐거운 생각을 떠올리는 것도 결코 쉬운 일이 아니다. 오히려 조직되지 않은 마음에 늘상 떠오르는 그런 생각들이 머리를 채우게 된다. 외모나 인기 그리고 인생의 성공 가능성 등에 관해 염려하기 시작하는 것이다. 이러한 생각을 떨쳐버리기 위해서는 자신의 의식을 점유할 다른 어떤 것이 필요하다. 공부는 너무 어렵기 때문에 별 도움이 안 된다. 이런 잡념을 떨쳐버리기 위해 십대들은 너무 많은 정신 에너지가 소모되는 것만 아니라면 그 어떤 것이라도 하려 든다. 다시 익숙한 음악이나 텔레비전 그리고 함께 시간을 때울 친구를 찾는 것이 이들 청소년들이 대체로 찾는 해결책이다.

 

p314

 의식을 통제하는 법을 배우지 못한 청소년들은 '단련'이 되지 못한 성인으로 성장한다. 이들에게는 경쟁적이고 정보 집중적인 환경에서 살아남기 위해 필요한 복합적인 기술이 결핍되어 있다. 이보다 더 중요한 것은 이들이 삶을 즐기는 법을 전혀 배우지 못했다는 점이다. 숨겨진 성장의 잠재성을 개발하도록 이끌어 주는 도전을 찾아내는 습관을 익히지 못한 것이다.

 그러나 십대의 청소년 시절만이 고독이 주는 기회를 활용하는 법을 배울 수 있는 결정적인 시기는 아니다. 불행하게도 너무나 많은 성인들이 20대나 30대에 이르면 그리고 40대가 되면 예외 없이 이미 자신의 몸에 밴 습관 속에 안주해도 좋다고 생각한다. 이미 경험을 충분히 쌓았으며, 생존에 필요한 책략들을 익혔으니 지금부터는 느긋하게 살아가면 된다고 느끼는 것이다. 결국, 극히 최소한의 내적 단련이 되었을 뿐인 이들에게는 해가 갈수록 엔트로피가 축적된다. 직장에서 느끼는 실망, 신체적 건강의 약화 그리고 일상적인 걱정거리들이 점차로 마음의 평정을 위협하는 거대한 부정적 정보로 쌓이게 된다. 이러한 문제들에 과연 어떻게 대처해 나가야 하는 것일까? 만일 혼자 있을 때 주의력을 통제하지 못하는 사람이라면, 결국 마약, 오락, 재미 등과 같이 정신을 둔화시키거나 주의를 돌려줄 수 있는 손쉬운 외적 해결책에 의존하게 될 것이다. 

 그러나 이 같은 대응 방법은 퇴보적인 것이어서 발전을 가져다주지 못한다. 인생을 즐기면서도 발전할 수 있는 길은, 불가피한 삶의 조건인 엔트로피부터 한층 더 고차원적인 형태의 질서를 창조해 내는 것이다. 즉 살아가면서 어려움에 직면할 때마다 그것을 억압하거나 회피해야 하는 것으로 받아들이지 말고, 배움의 기회로 그리고 기술을 향상시킬 수 있는 기회로 삼는 것이다.

 나이가 들면서 체력이 약해지기 시작했다고 치자. 그러면 그 상황을 피하려고 하지 말고, 에너지를 외부 세계의 정복으로부터 심오한 내적 세계의 탐구로 전환시킬 시기가 되었다는 의미로 받아들이는 것이다. 즉 이제는 스스로 추구해 볼 만한 가치가 있다고 생각되는 것들, 예를 들면 프루스트의 작품을 읽거나 체스를 두기도 하고, 과수를 돌보거나 신에 대한 생각 등을 마침내 해 볼 때가 되었다는 의미이다. 그러나 젊은 시절에 고독한 시간을 활용하는 법을 배우지 못한 사람이 위와 같은 것들 중 하나라도 성취한다는 것은 매우 어려운 일이다.

 

p316

 신까지 되지는 않더라도, 혼자 살려면 다른 사람들이나 직업 · 텔레비전 · 극장 · 레스토랑 · 도서관 등 문명 생활의 도움 없이도 플로우를 성취할 수 있도록 자신만의 정신적 일과를 설정해야 한다.

 

 공간을 조직화하는 것보다 더 중요한 것은 아마도 시간을 조직화하는 일일 것이다.

 

 사람은 고독 속에서도 살아남을 수 있다. 하지만 그러기 위해서는 엔트로피가 정신을 와해시키는 것을 방지하기 위해 주의력을 조직하는 일이 전제되어야만 한다.

 

p319

 쾌락에 의존하는 생활 방식은, 고된 노동과 그러한 노동에서 얻는 즐거움을 기초로 형성된 복합적인 문화와 공생의 형식으로만 가능할 뿐이다. 그러나 이러한 복합적인 문화가 비생산적인 쾌락주의자들, 즉 쾌락에 중독되고 기술과 수양이 부족하여 자활 능력이 결여된 사람들을 더 이상 지원해 줄 수 없거나, 지원할 의사가 없어질 때 그들은 방향을 잃고 무력해지고 마는 것이다.

 

p320

 고독을 즐기는 법을 배우지 않는 한, 생의 많은 부분이 그 부작용을 회피하려는 필사적인 노력으로 점철되고 말 것이다.

 

p322

 각 공국이 두 방법 중 어느 재산상속제를 채택하였는가는 전적으로 우연의 소산이었던 것으로 보이나, 그 선택의 결과는 그들의 경제에 지대한 영향을 끼쳤다(장자상속제를 채택했던 공국들은 자본의 집중이 이루어져 결국 산업화를 이룰 수 있었던 반면, 분할상속제를 채택했던 나라들은 자본의 분산으로 산업화가 저조할 수밖에 없었다).

 

p324

 몇 십 년 전까지만 하더라도 부모와 자녀들이 외적 이유로 인해 관계를 지속할 수밖에 없기 때문에 한집안에서 모여 사는 경향이 있었다. 과거에 이혼율이 극히 낮았던 이유는 부부간의 애정이 오늘날보다 깊었기 때문이 아니다. 남편들은 요리를 하며 살림을 해줄 사람이 필요했고, 아내들은 돈을 벌어다 줄 사람이 필요했으며, 자녀들은 먹고, 자고, 세상살이를 시작하기 위해 부모를 필요로 했기 때문이었다. 어른들이 그렇게도 많은 노력을 기울여 젊은 사람들에게 주입했던 '가족을 중시하는 가치관'은 종교적, 도덕적 명분이 앞세워졌을 때조차도, 결국은 이 같이 단순한 필요성의 반영이었던 것이다. 물론 한때는 가족을 소중히 여기는 가치관이 득세하여 사람들이 그러한 가치관을 배우게 되고, 그것이 가족의 붕괴를 막는 데 큰 몫을 담당했던 것도 사실이다. 그러나 도덕적 규칙은 외부로부터 강제되는 것으로, 그리고 남편, 아내, 자식들을 옭아매는 외적 구속으로 여겨지는 경우가 더욱 흔했다. 그러게 되면 그 가족이 겉으로는 온전한 것처럼 보일 수도 있지만, 사실 내부적으로는 갈등과 증오로 분열되어 있는 것이다. 오늘날 만연하는 가정의 '와해' 현상은 결혼 생활을 지속해야 할 외적 요인들이 서서히 사라지게 된 결과이다. 이혼율이 증가하는 것은 사랑이나 도덕적 힘이 약화되서라기보다는, 여성 인련의 채용 기회 증대로 대표되는 노동 시장의 변화와 노동을 절감해 주는 가사 용품의 보급의 영향을 크게 받았기 때문으로 볼 수 있다.

 그러나 단지 외적인 이유들만으로 결혼 생활을 지속하고 가족의 범주 안에서 함께 살게 되는 것은 아니다. 가정 생활은 가정을 통해서만 경험할 수 있는 기쁨과 성장의 좋은 기회들을 제공해 주며, 이러한 내적 보상들은 과거와 마찬가지로 현재에도 얻을 수 있는 것이다. 실상, 이러한 경험을 하기에는 과거의 어느 때보다도 오늘날이 더 유리하다고 볼 수 있다. 단지 편의만을 위해 함께 사는 전통적 가족 형태가 쇠퇴하는 경향이 있다 하더라도 서로를 사랑하기 때문에 함께 견디는 가정의 수는 점차 증가 추세에 있다. 물론 아직도 외적 요인들이 내적인 보상보다는 훨씬 강력한 영향을 미치는 것이 사실이다. 때문에 앞으로도 한동안은 가정 생활의 분열이 심화될 것처럼 보인다. 그러나 바람직한 가족의 형태를 유지하는 가정들은, 자신의 의사에 반해 어쩔 수 없이 함께 사는 가정들에 비해 각 구성원들의 자아 개발에 훨씬 많은 도움을 줄 수 있다.

 

p327

 키레로는 인간이 완전히 자유로워지기 위해서는 일련의 법규의 노예가 되어야만 한다고 저술한 바 있다. 다시 말해, 제약을 받아들이는 일이 곧 자신을 자유롭게 하는 일이라는 것이다. 예를 들면, 심리 에너지를 일부일처적 혼인에 집중적으로 투자하기로 결심함으로써, 어떠한 문제와 장애가 발생해도 혹은 나중에 다음이 더 끌리는 선택의 여지가 생겨나더라도 심리적으로 흔들리지 않을 수 있다. 전통적 혼인이 요구하는 책임들을 성실히 수행함으로써, 그리고 관례에 따라서 어쩔 수 없어서가 아니라 기꺼이 그렇게 함으로써, 자신이 올바른 결정을 내린 것인가 혹은 다른 사람들은 더 나은 방법을 택한 것이 아닌가 따위를 더 이상 걱정하지 않아도 된다. 그 결과 어떻게 살아야 할 것인가에 관한 고민으로부터 자유로워진 많은 에너지를 삶을 위해서 쓸 수 있는 것이다.

 

p337

 프랜시스 베이컨은, "최악의 고독이란 진실한 친구가 없다는 것이다"라고 하였다. 친구 관계는 가족 관계에 비해서 한결 즐거운 것이 되기 쉽다. 우리가 공통의 관심사와 상호 보완적 목표에 입각해서 친구를 선택할 수 있기 때문이다. 친구와 함께 있기 위해 자신을 변화시켜야 할 필요는 없다. 친구는 우리의 자아 의식을 바꾸려고 하지 않고 오히려 강화해 준다. 쓰레기를 내다버린다거나 마당의 낙엽을 쓰는 일과 같이 집에서는 우리가 받아들여야만 하는 지루한 일들이 많다 그러나 친구와 함께 있을 때는 '재미있는' 일들에만 집중할 수 있다. 일상적 경험의 질에 관해 수차례에 걸쳐 이루어졌던 우리의 연구에서, 친구오 함께 있을 때 가장 긍정적인 기분을 느끼게 된다는 응답이 반복적으로 나왔다. 이는 반드시 십대 청소년들에게만 국한된 사실이 아니다. 젊은 성인들도 역시, 배우자를 포함한 다른 어떤 사람들보다 친구들과 함께 있을 때가 가장 즐겁다고 응답했다. 은퇴한 노인들도 배우자나 가족과 함께 있을 때보다 친구들과 함께 있는 것이 더욱 즐겁다고 했다.

 

p338

 이런 종류의 사교는 친구 사이의 교제를 모방한 것이기는 하지만, 진정한 친구 관계에서 누릴 수 있는 혜택을 거의 제공하지 못한다. 누구나 때로는 잡담을 하면서 시간 보내기를 좋아한다. 그런데 마치 매일 마약 주사를 맞아야 하는 것처럼 이러한 피상적 교제에 극심하게 의존하는 사람들이 많다. 특히 고독을 참지 못하는 사람들이나, 집에서 정서적 지지를 받지 못하는 사람들의 경우 이러한 의존도가 더욱 높아진다. 

 강한 가정적 결속이 결핍된 십대 청소년들은 친구들 그룹에 지나치게 의존하는 나머지 그 그룹 속에 받아들여지기 위해서는 어떤 일이라도 불사하려 든다. 다음은 약 20년 전 애리조나 주의 투산에서 있었던 일이다. 규모가 큰 어느 고등학교 3학년 학생들 모두가, 그 학교를 그만두었으나 자기보다 나이가 어린 학생들과 계속 '우정'을 유지하던 한 나이 많은 퇴학생이 급우들을 죽여서는 시체를 사막에 매장해 왔다는 사실을 알고 있었다. 그러나 그들 중 누구도 이 사실을 경찰에 신고하지 않았다. 그러다가 이 사건은 경찰의 우연한 수사에 의해 밝혀지게 되었다. 모두 유복한 중류 가정의 자녀들이었던 이 학생들은, 친구들로부터 소외당할 것이 두려워 살인을 신고하지 못했다고 한다. 만일 투산의 십대 청소년들에게 강한 가족적 결속이 있었더라면 혹은 이들이 그 지역 사회의 다른 어른들과 강한 유대 관계를 맺고 있었더라면, 친구들로부터 고립되는 것이 그렇게 견디기 힘든 일이 되지는 않았을 것이다. 그러나 그들을 고독으로부터 보호해 주는 것이 또래 친구들밖에는 없었던 것이 분명하다. 불행하게도 이것이 굉장히 희귀한 사건은 아니다. 이따금씩 이와 매우 유사한 사건들이 언론에 보도되곤 한다.

 

p344

 사람들은, 마치 가족의 관계처럼 친구 관계도 저절로 이루어지는 것으로 믿고, 관계에 금이 가더라도 그것은 어쩔 수 없는 일인 것으로 여기며 그저 상심만 하고 만다. 다른 사람들과 함께 나눌 수 있는 관심사가 많고, 관계에 투자할 만한 자유 시간도 많은 청소년기에는 친구를 사귀는 것이 아주 자연스러운 과정처럼 보일 수도 있다. 그러나 그 시기가 지나면 친구 관계는 결코 우연히 이루어지지 않는다. 친구 관계도 직장이나 가정 생활을 꾸려나가는 것처럼 열심히 가꾸어 나가야만 하는 것이다.

 

p345

 불행하게도 공적인 분야에 종사하는 많은 사람들이 높은 복합성을 가진 행위를 하지 못하고 있다. 정치가들은 권력을 좇으며, 박애가들은 명예를 추구하고, 성자가 되려는 사람들은 자신들이 얼마나 정의로운가를 증명하려 한다. 이러한 목표들은 충분한 에너지만 투자한다면 성취하기가 그리 어려운 것들이 아니다. 한층 더 위대한 도전은 자기 자신에게 득이 될 뿐 아니라, 그 과정에서 다른 사람들에게도 도움이 되는 것들이다. 정치가들이 실제로 사회 상황을 변화시키고, 박애가들은 곤궁한 사람들을 도우며, 성자들이 다른 사람들에게도 적용될 수 있는 삶의 전형을 제시하기란 매우 어렵겠지만 그만큼 보람도 큰 일이 될 것이다.

 우리가 단지 물질적인 결과만을 고려한다면, 자신만을 위해 부와 권력을 얻으려 하는 이기적 정치가들을 똑똑한 사람들이라고 생각할 수 있다. 그러나 최적 경험이 인생에 진정한 가치를 부여한다는 사실을 알게 되면, 공동의 선을 실현하기 위해 애쓰는 정치가들이야말로 보다 높은 노력의 목표에 도전함으로써 스스로 진정한 즐거움을 경험할 수 있는 기회를 그만큼 더 많이 가지게 된다는 점 때문에 말이다.

p346

 지난 수세기 동안 경제적 합리주의가 너무도 만연해 왔기 때문에, 우리는 어떠한 인간의 노력이든 그 '결과'를 금전적 가치로 측정해야 한다는 생각을 당연하게 받아들였다. 그러나 인생을 경제적인 관점으로만 접근하는 것은 오히려 합리적이지 못하다. 진정한 가치는 경험의 질과 복합성에 있는 것이기 때문이다.

 좋은 지역 사회의 척도는 기술적 진보나 물질적 풍요가 아니다. 사람들이 자신의 삶을 최대한 여러 측면으로 즐길 수 있는 기회를 제공해 주면서, 이들이 더 높은 도전을 추구하며 자신의 잠재 능력을 개발할 수 있도록 해주는 지역 사회야말로 이상적인 사회라 할 수 있다. 이와 마찬가지로 학교의 가치도 그 명성이나, 삶의 필요에 대처해 나갈 수 있도록 학생들을 훈련시키는 능력에 있는 것이 아니라, 얼마마늠 학생들이 배움을 평생의 즐거움으로 여길 수 있도록 가르치는가에 있는 것이다. 또 반드시 이익을 최대로 올리는 공장이 아니라, 직원들과 소비자들의 삶의 질적 향상에 큰 기여를 하는 공장이야말로 좋은 공장인 것이다. 그리고 정치의 참된 기능도 사람들을 더욱 풍요롭고 안전하게 혹은 강하게 만드는 것이 아니라, 최대한 많은 사람들이 복합성을 증가시켜 가는 삶을 즐길 수 있도록 하는 데 있는 것이다.

 

 그러나 개인이 의식 변화가 선행되지 않고서는 어떠한 사회적 변화도 실현될 수 없다. 한 젊은이가 칼라일에게 어떻게 하면 세상을 개혁할 수 있겠냐는 질문을 했다. 칼라일은 "당신 자신을 먼저 개혁하시오. 그리 되면 세상에서 악당이 한 명 더 줄어들게 되는 것이니까"라고 대답했다. 이 충고는 오늘날에도 여전히 유효하다. 자신의 삶을 통제하는 법을 먼저 배우지도 못했으면서 다른 사람들의 삶을 개선시키려고 노력하는 사람은 결국 사태를 악화시킬 뿐이다.

 

9장. 혼란에서 벗어나기(Cheating Chaos)

 

p350

 물론 구체적인 물질적 조건이 개선되고 나서야 비로소 플로우가 그들 삶의 질적 향상에 도움이 될 수 있을 것이다. 다시 말해, 최적 경험은 건강이나 부와 같이 기본적인 재료로 만들어진 케이크 위의 크림과도 같은 것이어서, 그 자체만으로는 보잘것없는 하나의 장식에 불과할 뿐이다. 더욱 현실적이고 구체적인 현실적 요건 위에서만 플로우가 삶의 주관적 양상을 만족스럽게 변화시켜 줄 수 있는 것 아닌가.

 두말할 필요도 없이 이 책에서 제시하는 이론은 위와 같은 결론을 반박하는 것이다. 주관적 경험은 단지 삶의 한 측면에 불과한 것이 아니라 삶 그 자체이다. 물질적 조건들은 부착적인 것으로 우리에게 간접적인 영향을 미칠 뿐이다. 반면에 플로우는 우리 삶의 질에 직접적인 이익을 준다. 건강, 금전 그리고 다른 물질적인 편의들은 삶을 개선시킬 수도 있고, 그렇지 못할 수도 있다. 심리 에너지를 통제하는 법을 배우지 못한 사람에게는 그러한 물질적 편의도 쓸모 없는 것이 될 가능성이 많다.

 이에 반해, 모진 고난을 겪고서도 그 곤경을 이겨 냈을 뿐 아니라 결국은 자신의 삶을 진정으로 즐길 수 있게 된 사람도 많다.

 

p365

 그러나 혼란을 벗어날 수 있는 능력을 '변형적 대처'라 하고, 이러한 능력을 가진 사람들을 '용기 있는 사람'이라고 일컫는 것만으로는 이 놀라운 재능을 충분히 설명할 수 없다. 수면을 '잠자는 힘'에 의해 야기되는 현상이라고 한 몰리에르 작품 속 인물의 말처럼, 효과적인 대처가 용기라는 미덕에 의해 야기된다는 말 역시 충분한 설명이 되지 못한다. 우리에게 필요한 것은 이름과 설명뿐만이 아니라 그 과정에 대한 이해인 것이다. 불행하게도 이 문제에 대해 우리는 아직도 상당히 무지하다 할 수 있다.

 

p367

 

 사람의 일생을 통해서 좋은 일들만 일어날 가능성은 극히 희박하다. 우리가 바라는 대로 모든 일이 다 이루어질 가능성도 거의 없는 것이나 마찬가지이다. 누구나 언젠가는 실망감, 극심한 질병, 재정적 위기 그리고 결국은 피할 수 없는 죽음 등 자신의 목표와 상충되는 사건들을 겪게 마련이다. 이런 종류의 사건들은 우리의 정신에 무질서를 불러오는 부정적인 피드백들이다. 이 같은 사건들은 모두 자아를 위협하고 그 기능을 저해한다. 그 충격이 몹시 크면 그 사람은 꼭 필요한 목표에 집중할 능력을 상실할 수도 있다. 이러한 상황에 처하면 자아는 이미 그 통제력을 상실하게 되는 것이다. 극심한 타격을 받게 되면 의식이 통제를 벗어나 그 사람의 '정신이 나가게' 되며, 이에 따라 다양한 정신 질환의 증상이 나타난다. 위협을 받던 자아가 살아남기는 하지만 더 이상 성장을 못하게 되는 경우도 있다. 공격을 피하려고 움츠린 채로 대량의 방어 기제를 동원하여 후퇴를 하게 되며, 계속 의심을 벗어나지 못하는 상태에서 무기력하게 지낼 수밖에 없다.

 바로 이 같은 이유 때문에 정신의 소산 구조들이라 할 수 있는 용기, 회복력, 인내, 성숙한 방어 혹은 변형적 대처 등이 절대저그로 필요하다. 이런 것들이 없다면, 우리의 심리는 통제할 수 없는 상태가 되어 끊임없이 혼란을 겪게 될 것이다. 반면에, 우리가 이와 같은 긍정적 전략을 배운다면, 대부분의 부정적 사건들이 최소한 중립적인 것이 될 수 있으며, 더 나아가 자아를 강화시키고 복잡성을 높여 주는 도전으로 활용될 수도 있다.

 

p374

 예전 동료였던 G는 그가 공군에 복무하던 시절에 겪었던 일을 들려준 적이 있다. 그것은 안전에 대한 지나친 염려 때문에 모든 신경을 그 문제에만 집중하여 현실을 망각하게 되는 것이 얼마나 위험할 수 있는가를 잘 보여주는 섬뜩한 사건이었다. 한국전쟁 때 G의 부대가 정규 낙하산 훈련을 하게 되었다. 어느 날 부대원들이 낙하훈련 준비를 하다가 정규 낙하산의 개수가 부족하다는 사실을 발견했다. 그래서 오른손잡이였던 한 병사가 어쩔 수 없이 왼손잡이용 낙하산을 착용할 수밖에 없었다. 병기 담당 하사관이 다음과 같이 말하며 그를 안심시켰다.

 "왼손잡이용 낙하산도 다른 낙하산들과 다를 바 없다. 다만 펼치는 줄이 멜빵의 왼쪽에 달렸을 뿐이다. 어느 손을 사용해도 낙학산을 펼칠 수 있으나, 오른손보다는 왼손을 사용하는 편이 더 쉬울 것이다."

 그 팀이 비행기에 탑승을 하고, 목표 지점 위의 2천 5백 미터 상공에 도달하여 한 명씩 차례로 뛰어내리기 시작했다. 단 한 사람을 제외한 병사 전원이 성공적으로 훈련을 마쳤다. 너무나 안타깝게도 한 명의 낙하산이 펴지질 않았던 것이다.

 G는 조사 팀의 일원이 되어서 그 병사의 낙하산이 펴지지 않은 원인을 조사하도록 파견되었다. 사망한 병사는 왼손잡이용 낙하산을 받은 바로 그 병사였다. 그의 군복에서 정규 낙하산의 줄이 일반적으로 위치하게 되는 가슴 우측 부분은 완전히 찢겨 나가고 없었다. 심지어는 그의 가슴 부위 살점마저도 그의 피묻은 오른손에 의해 뜯겨져 있었다. 왼쪽으로 불과 몇 인치 옆에 바로 낙하산을 펼치는 줄이 있었건만, 그 줄에는 손을 댄 흔적이 없었다. 낙하산 자체에는 아무런 이상도 없었다. 문제는 이 병사가 그 까마득한 높이에서 떨어져 내리는 동안, 낙하산을 펼치려면 자신이 늘 잡아당기던 바로 그 위치에서 낙하산 줄을 찾아야 한다는 생각에 고착이 되어 버렸던 것이다. 그는 극심한 공포를 느낀 나머지 손을 조금만 움직이면 안전하게 낙하할 수 있다는 사실을 그만 잊었던 것이다.

 위협을 느끼는 상황에 처하게 되면, 심리 에너지를 내부로 동원해 위협에 대한 방어로 사용하는 것은 자연스러운 일이다. 그러나 이러한 타고난 대응이 오히려 대처 능력을 손상시키는 경우가 흔히 있다. 즉 본능적 반응이 내적 혼란을 더 악화시키고, 대응의 융통성을 감소시키며, 최악의 경우 그 사람을 외부 세계로부터 고립시켜 홀로 좌절감을 맛보게 할 수도 있다. 반면, 주변에서 벌어지는 상황을 계속 파악하고 있다면, 새로운 가능성들이 생겨나고 새로운 대처 방안을 강구할 수 있다. 그리하여 삶의 흐름에서 완전히 차단될 가능성이 그만큼 줄어드는 것이다.

 

p376

 우리가 살면서 겪는 거의 모든 상황이 성장의 가능성을 제시해 준다. 우리가 살펴본 바와 같이, 실명이나 신체 마비와 같은 절망적 재난들도 즐거움과 복합성을 증대시킬 수 있는 조건으로 변화될 수 있다. 심지어는 다가오는 죽음마저도 절망을 주기보다는 의식 속의 조화를 창조하는 역할을 하기도 한다.

 그러나 이처럼 되기 위해서는 예기치 않은 기회를 파악할 수 있는 준비가 되어 있어야만 한다. 우리들 대부분은 유전적 소인과 사회적 조건화에 의해 형성된 관습적 상례에 너무도 젖어 있어서, 어떠한 다른 진로를 선택할 수 있는 대안을 무시해 버리는 경우가 많다. 모든 것이 순조로울 때는 전적으로 유전적 소인과 사회적 통념만을 따르며 사는 것도 괜찮다. 그러나 생물학적 · 사회적 목표들에 차질이 생기게 되면 - 이것은 장기적으로 볼 때 피할 수 없는 일이기도 하다 - 새로운 목표를 설정하여 자신을 위한 새로운 플로우 활동을 개발해야 한다. 그렇지 않으면 내적 갈등을 겪느라 모든 에너지가 낭비되고 말 것이다. 그렇지만 어떻게 해야 이러한 대체적 전략을 발견할 수 있는 것일까? 그 답은 기본적으로 간단하다. 자의식 없는 자신감을 갖고 주변 환경에 대해 언제나 깨어 있으면서 그 안에서 융통성 있게 대처하면 해결책이 나올 가능성이 큰 것이다.

 인생의 새로운 목표를 찾는 과정은, 예술가가 독창적인 작품을 창장하려 애쓰는 과정과 여러 면에서 유사하다. 독창성이 결여된 화가는 무엇을 그릴 것인지 마음을 미리 정한 후 끝까지 본래의 의도대로 작품을 완성시킨다. 반면, 창의성이 풍부한 화가는 같은 기술적 수준을 지니고 있다 하더라도 마음속 깊이 느낌은 있지만 아직 확정되지 않은 목표를 가지고 작업을 시작한다. 그리고 캔버스에 나타나는 예기치 않은 색과 형태에 따라 그림을 계속 수정해 나가 결국 애초의 의도와는 전혀 다른 창작품을 탄생 시키는 것이다. 만일 화가가 자신의 내적 감정을 잘 살리고, 자신이 원하는 바가 무엇인지를 알며, 캔버스 위의 변화에 관심을 기울인다면, 좋은 작품이 나오기 마련이다. 반면, 완성된 그림이 어떠해야 한다고 미리 생각해 둔 고정 관념에만 집착하고, 자신의 눈앞에 펼쳐지는 형태가 제시하는 여러 가능성들을 무시해 버리는 화가의 그림은 진부한 작품이 되고 만다.

 우리 모두는 인생에서 무엇을 원하는가에 관한 선입견을 가지고 시작한다. 여기에는 생존을 위해 우리의 유전자 속에 내재된 욕구들(음식과 안락함, 성에 대한 욕구 및 다른 동물들보다 우위를 점하려는 욕구들)이 포함되어 있다. 또한 우리의 특정한 문화가 우리에게 주입한 욕구들(날씬하고, 부자이며, 교육을 많이 받고, 다른 사람들이 좋아하는 그런 사람이 되고 싶어하는 욕구들)도 있다. 우리가 이러한 목표들을 채택하고 또 운이 좋다면, 우리가 사는 시대와 장소에서 이상적이라 여겨지는 육체적 · 사회적 이미지를 복제해 낼 수 있을 것이다.

 그러나 과연 이런 것이 우리의 심리 에너지를 최대한 활용하는 길인가? 그리고 만일 우리가 이러한 목표들은 달성하지 못하면 어떻게 되는가? 캔버스에 나타나는 상황에 언제나 주의를 기울이고 살피는 화가처럼, 우리 주변에 일어나는 사건들에 언제나 관심을 기울이며, 그러한 사건들을 선입견에 좌우되지 않고 감정이 느끼는 대로 판단하지 않으면, 우리는 결코 다른 가능성들을 인식하지 못하고 말 것이다. 우리가 자아 성장의 새로운 가능성을 깨닫게 되면 우리에게 이제까지 주입되어 온 생각들은 크게 달라진다. 이를테며, 어떤 사람을 때려주는 것보다는 그 사람을 돕는 것이 더 만족을 주며, 회사 사장과 골프를 치는 것보다 두살박이 꼬마와 이야기를 나누는 것이 훨씬 더 즐거운 일이 될 수도 있다는 사실을 알게 될 것이다.

 

p379

 '자기 목적적 자아'의 소유자는 위협의 소지가 되는 요인들을 즐거운 도전으로 쉽게 변화시킬 수 있다. 이러한 사람들은 쉽사리 권태를 느끼지 않고 좀처럼 근심 걱정에 얽매이지 않는다. 또 주변의 상황에 늘 깨어 있으면서 대부분의 시간 동안 플로우를 경험한다. '자기 목적적 자아'라는 용어는 글자 그대로 '스스로 만들어 낸 목적을 가지고 있는 자아'를 의미한다. 그리고 이런 사람들은 자아에서 만들어지지 않은 목표들을 상대적으로 덜 갖고 있다. 대부분의 사람들은 생물학적 욕구와 사회적 통념에 의해 형성되어지므로, 자기 자아에서 발현된 목표들이 아닌 것이다.

 자기 목적적 자아를 가진 사람은 엔트로피를 유발할 가능성이 있는 경험을 플로우로 변화시킨다. 자기 목적적 자아를 개발할 수 있는 규칙들은 비교적 간단하다. 이 규칙들은 플로우 모델에서 직접 도출된 것들로 다음과 같이 간략하게 요약할 수 있다.

 

1. 목표를 설정하기

 플로우를 경험할 수 있으려면 노력의 대상이 될 분명하고 혁신적인 목표들을 가지고 있어야만 한다. 자기 목적적 자아를 가진 사람은, 결혼을 하거나 작업을 정하는 등 일생 동안의 책임을 수반하는 선택에서부터, 주말 계획을 세운다거나 치과에서 진료 차례를 기다리는 동안 어떻게 시간을 보낼 것인지와 같은 사소한 결정에 이르기까지, 안달하거나 당황함이 없이 선택을 하는 법을 배우게 된다.

 목표의 설정은 어떤 것을 도전으로 인식하는가와 관련이 있다. 만일 내가 테니스를 배우기로 결정을 한다면, 서브하는 법과 백핸드 및 포어핸드 사용법을 배워야 하며 지구력과 반사 능력을 키워야 한다. 혹은 그 반대로, 공을 쳐서 넘기는 것 자체가 좋아서 테니스를 배워야겠다는 목표를 세울 수도 있다. 어떤 경우든 목표와 도전은 서로 불가분의 관계를 가지고 있다.

 목표와 도전을 달성하기 위한 일련의 행동 체계가 규정되면, 그 체계안에서 필요한 기술을 개발해야 한다. 내가 만일 현재의 직업을 그만두고 휴양지의 경영자가 되기로 결정한다면, 호텔 경영 · 재정 관리 · 상업적 위치 선정 등 여러 가지를 배워야 한다. 물론 역순으로 일이 시작될 수도 있다. 자신이 어떠한 기술을 가지고 있는가에 따라 그러한 기술을 활용할 수 있는 특정한 목표를 세울 수도 있다. 즉 본인 스스로 적합한 자격을 갖추고 있다고 생각하여 휴양지 경영인이 되기로 결심할 수도 있는 것이다.

기술을 개발하기 위해서는 자신의 행동의 결과에 주의를 기울여야 한다. 즉 피드백을 관찰해야 하는 것이다. 유능한 휴양지 경영인이 되기 위해서는 사업 자금을 대여해 줄 가능성이 있는 금융인들이 내가 제출한 사업 계획서를 어떻게 생각하는지를 정확히 판단할 수 있어야 한다. 또한 고객이 좋아하는 것들은 무엇이며, 또 그들이 싫어하는 것들은 무엇인지도 알아야만 한다. 피드백에 지속적 관심을 기울이지 않는 사람은 곧 행동 체계로부터 이탈되어 더 이상 기술의 발전을 이루지 못하기 때문에 유능한 경영인이 되기 어렵다.

 자기 목적적 자아를 가진 사람은 자신이 어떤 목표를 추구하고 있든 그 목표를 선택한 사람이 바로 자기 자신이라는 점을 잘 알고 있다. 이는 바로 자기 목적적 자아를 가진 사람과 그렇지 못한 사람에게 나타나는 기본적인 차이점 가운데 하나이다. 이 같은 사실은 서로 상반되는 듯이 보이는 두 가지 결과를 초래한다. 그 하나는, 스스로 내린 결정이라는 점을 주지하고 있기 '때문에 자신의 목표에 더욱 충실해진다는 것이다. 따라서 이 사람의 행동은 믿을 수 있으며, 스스로 통제된다. 또 다른 하나는, 결국 자신의 결정이기 때문에 그 결정 사항을 지켜나가는 것이 더 이상 이치에 만지 않을 때는 언제고 자신의 목표를 수정할 수 있게 되는 것이다. 이런 점에서 자기 목적적인 사람의 행동은 더욱 꾸준하기도 한 동시에 더욱 많은 융통성도 가질 수 있다.

 

2. 활동에 몰입하기

 일련의 행동 양식을 선택하고 나면 자기 목적적 성격을 가진 사람은 자신이 하는 일에 깊이 몰입한다. 전 세계를 무착륙으로 비행하든, 아니면 저녁식사 후 설거지를 하든지 간에 현재 하고 있는 눈앞의 일에 관심을 집중하는 것이다.

 이렇게 되기 위해서는 행동의 기회들과 자신이 보유하고 있는 기술간의 균형을 잘 맞추는 법을 배워야 한다. 어떤 사람들은 세계를 구한다든지, 혹은 스무 살이 되기 전에 백만장자가 된다는 것과 같은 현실적이지 못한 기대를 갖고 시작을 한다. 이러한 희망이 이루어지지 않을 때 대부분의 사람들은 낙담을 하고, 헛된 시도로 인한 심리 에너지의 손실 때문에 그들의 자아는 위축된다. 또 다른 극단으로, 자신에게 잠재된 능력을 스스로 믿지 않아서 침체되는 사람도 많다. 그들은 안전은 하지만 사소한 목적을 선택하여, 최대한 가장 낮은 수준에서 복합성의 성장을 중지시키고 만다. 행도에 몰입할 수 있으려면 환경의 요구와 자신의 활동 능력간의 적절한 균형점을 찾아야 한다.

 예를 들면, 어떤 사람이 사람들로 가득 찬 방으로 걸어 들어가면서 가능한 한 많은 사람들과 사귀며 즐거운 시간을 보내기로 결심을 했다고 치자. 만일 자기 목적적 자아가 결여되어 있다면, 그는 혼자서 사람들과의 상호 작용을 시작할 능력을 갖추고 있지 못하여, 구석으로 가서는 누군가가 자신을 주목해 주기만을 바라고 있을 것이다. 또는 떠들썩하게 행동하거나 지나치게 말솜씨가 좋은 척하여, 결국 이 같은 부적절하고 피상적인 친근감으로 인해 오히려 다른 사람들이 기피하는 존재가 될 수도 있다. 이런 두 전략을 가지고는 성공을 한다거나 즐거운 시간을 보낼 수 있는 가능성이 극히 희박하다.

 반면에 자기 목적적 자아를 가진 사람은 그 방에 들어서자마자 주의를 자신으로부터 파티, 즉 자신이 가담하고 싶은 '행동 체계'로 돌릴 것이다. 그는 파티에 참석한 사람들을 관찰하여 그들 중 자기와 공통적인 관심사를 갖고 있으며 성격 또한 비슷한 사람이 누구인가를 가려내고, 자신이 생각하기에 쌍방 모두가 관심이 있을 듯한 주제로 그 사람과 대화를 시작할 것이다. 만약 피드백이 부정적이라면, 즉 대화가 지루해지거나 어느 한 사람에게 너무 어려워 이해가 되지 않는 주제라면 다른 주제를 택하거나 새로운 대상과 이야기를 나누게 될 것이다. 자신의 행동이 행동 체계의 기회와 걸맞을 때만이 진정한 몰입이 가능하다.

 몰입은 집중력에 의해 크게 촉진된다. 주의력 결핍 증세가 있는 사람이나, 끊임없이 주의가 산만한 사람은 인생의 플로우에서 언제나 제외된 느낌을 받게 된다. 이들은 매순간의 일과성 자극에 큰 영향을 받는다. 자신의 의지와 상관없이 주의가 다른 곳으로 돌려지는 것은 통제력을 갖고 있지 않다는 가장 확실한 증거이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대부분의 사람들이 자신의 주의력을 향상시키려는 노력을 소홀히 한다는 것은 참으로 놀라운 사실이다. 만일 책을 읽는 것이 너무 어렵게 느껴지면, 우리는 집중력을 높이려 하는 대신 습관적으로 텔레비젼을 틀게 마련이다. 그러나 텔레비전 시청에는 최소한의 주의력만 있으면 된다. 더군다나 사실상 그 얄팍한 주의력조차 광고와 알맹이 없는 내용에 의해 분산되고 만다.

 

 3. 주변 상황에 관심을 기울이기

 집중을 하면 몰입을 하게 되며, 이와 같은 몰입은 지속적인 주의력 투입이 있어야만 유지될 수 있다. 육상 선수들은 경기 도중 잠시만 한눈을 팔아도 시합에 진다는 사실을 잘 알고 있다. 중량급 권투 선수가 상대방의 어퍼컷이 들어오는 것을 보지 못한다면 녹아웃되고 말 것이다. 또한 농구선수가 관중들의 함성에 정신이 팔린다면 정확히 슛을 하지 못할 것이다. 복합성의 체계에 참여하고 있는 사람 누구에게나 이와 똑같은 함정이 도사리고 있다. 그 체계 속에 계속 남아 있으려면 심리 에너지를 투자해야만 한다. 자녀의 말을 집중해서 들어주지 않는 부모는 부모와 자식간의 상호 작용을 저해시킬 수 있고, 주의가 산만한 변호사는 소송에서 패소할 수 있으며, 한눈을 파는 외과 의사는 환자를 죽음으로 몰 수도 있는 것이다.

 

 자기 목적적 자아를 지니고 있다는 것은 몰입을 지속할 능력도 갖고 있음을 의미한다. 가장 흔하게 주의를 산만하게 하는 자의식도 자기 목적적 자아를 가진 사람에게는 문제가 되지 않는다. 이러한 사람은 자신이 얼마나 잘하고 있는지, 또한 다른 사람들에게 자신이 어떻게 보이는지에 관해 걱정을 하는 대신 온 마음으로 자신의 목표에 전념할 수 있다. 너무 깊이 몰입을 한 나머니 자의식을 느끼지 못하는 경우도 있고, 이와는 반대로 자의식이 별로 없기에 깊은 몰입이 가능한 경우도 있다. 자기 목적적 성격의 구성 요소는 상호 인과 관계의 고리에 의해 서로 연결되어 있다. 목표 선정, 기술 개발, 집중력의 향상 혹은 자의식을 없애는 일 가운데 어떤 것을 먼저 선택해 시작을 하는가는 그리 중요하지 않다. 플로우 경험이 일단 시작되면 다른 요소들도 취득하기가 훨씬 용이해지므로 어느 것을 먼저 시작해도 상관이 없는 것이다.

 자신에 대해 염려하지 않고 상호 작용에 주의를 집중하는 사람은 역설적인 결과를 얻는다. 더 이상 자신을 독립된 개체로 느끼지 않지만, 동시에 그 사람의 자아가 한층 강화되는 것이다. 자기 목적적인 사람은 심리 에너지를 자신이 포함된 체계에 투자함으로써 개인의 한계를 벗어난 성장을 이룰 수 있다. 이와 같은 개인과 체계간의 결합으로 인해 자아가 복합적인 성장을 이루게 된다. 바로 이런 이유 때문에 사랑을 하고 그 사랑을 잃는 편이 한 번도 사랑을 해보지 않는 것보다 낫다고 할 수 있는 것이다.

 

 모든 것을 자기 중심적 견해에서 파악하는 사람의 자아가 좀더 확고한 것처럼 보일 수도 있다. 그러나 이러한 자아는 기꺼이 헌신을 하고 몰입을 하며 자신의 이익만을 위해서가 아니라 상호 작용을 위해서 주변의 상황에 관심을 갖는 사람의 자아에 비한다면 상대적으로 결핍되어 있다고 볼 수 있다.

 시카고 시청 건너편의 광장에서 열렸던 피카소의 거대한 야외 조각 작품 제막식에서 나는 우연히 옆에 서게 된 개인 상해 전문 변호사와 이야기를 나누게 되었다. 기념 연설이 장황히 지속되고 있을 때, 나는 그가 무엇인가에 집중을 한 표적으로 입술을 달싹거리고 있는 것을 보았다. 무엇을 생각하고 있느냐고 묻자, 만일 아이들이 저 조각 작품에 기어오르려다 다치게 되어 소송을 건다면 시카고시가 지불해야 할 소송 비용을 추산해 보고 있는 중이라고 대답하였다.

 모든 것을 자신의 기술이 해결할 수 있는 직업적 문제로 변화시켜 지속적인 플로우를 경험할 수 있는 이 변호사를 과연 운이 좋은 사람이라 해야 할까? 아니면, 자신에게 이미 익숙한 일들에만 주의를 집중하고, 그 행사의 심미적 · 시민적 · 사회적 의미를 무시함으로써 스스로 성장의 기회를 박탈하는 사람이라 해야 할 것인가? 두가지 해석 모두 일리가 있을 것이다. 그러나 장기적인 관점에서는, 세상을 전적으로 자신의 자아가 감당할 수 있는 협소한 창으로 파악하는 것은 스스로를 제한하게 된다. 명성이 높은 정신과 의사나 미술가 혹은 정치가들조차도, 유일한 관심사가 이 우주 속에서 자신이 맡은 제한적 역할에만 국한될 때는 공허한 존재가 되어 더 이상 삶을 즐길 수 없는 것이다.

 

4. 지금 현재의 경험 즐기는 법 배우기

 자기 목적적 자아를 갖춤으로 해서 - 목표를 설정하는 법을 배우고, 기술을 개발하고, 피드백에 늘 관심을 기울이고, 집중하고 몰입하는 법을 체득함으로써 - 얻을 수 있는 결과는, 객관적 상황이 몹시 좋지 않을 때도 삶을 즐길 수 있다는 것이다. 정신을 통제할 수 있다는 것은 글자 그대로 어떤 일이 발생한다 하더라도 그 일이 즐거움의 원천이 된다는 것을 의미한다. 몹시 더운 날 시원한 산들바람을 느끼는 것, 고층 건물의 유리벽에 반사되는 구름의 모양을 관찰하는 것, 강아지와 노는 아이를 보는 것, 물 한잔을 마시는 것 등 이 모든 것들이 깊은 만족감을 주는 경험이 되어 우리의 삶을 풍부하게 해주는 것이다.

 그러나 이러한 통제력을 얻기 위해서는 결의와 훈련이 전제되어야 한다. 최적 경험은 향락적이거나 안일한 삶의 자세로는 결코 얻을 수 없다. 긴장이 풀린 자유 방임적 태도로 혼란에 대한 충분한 방어가 되지 못한다. 이 책의 초반부에서부터 우리가 살펴본 바와 같이, 읨의적 사건들을 플로우로 변화시키기 위해서는 능력을 신장시키고, 한결 나은 사람이 되게 해주는 기술을 닦아야만 한다.

 플로우는 각 개인이 창의적이고 뛰어난 성취를 이루도록 해준다. 즐거움을 유지하기 위해 고도의 기술을 개발해야 하는 필연성이 있었기에 문화적 진보도 가능한 것이었다. 바로 이러한 필연성으로 인해 각 개인과 문화들이 한층 더 복합적인 존재로 성장할 수 있었다. 경험의 질서를 창조해 냄으로써 얻는 보상이 진화를 촉진시키는 추진력이 되어 왔으며, 우리의 자리를 대신하게 될, 우리들보다 더 현명하고 복합적인 삶을 사는 우리의 후손들을 위한 기반을 마련해 주었다.

 그러나 모든 생활을 플로우로 변화시키기 위해서는 단지 매순간의 의식 상태를 통제하는 법을 배우는 것만으로는 충분치 못하다. 일상의 삶이 의미를 가질 수 있도록 각 목표들의 전후 관계를 파악하는 일 역시 필요한 것이다. 만일 서로 연결되는 질서가 없이 이 플로우에서 저 플로우로 옮겨 다닌다면, 훗날 인생을 정리하는 시기를 맞아 과거를 돌이켜 볼 때 자신의 과거에서 큰 의미를 발견할 수 없을 것이다. 자신이 하는 일이 무엇이든지간에, 그 일에서 조화를 창조하는 것이 최적 경험을 얻고자 하는 사람들에게 플로우 이론이 제시하는 마지막 과제이다. 이는 지속적인 목적 의식을 제공해 주는 통합된 목표들을 추구해 가면서, 삶 전체를 하나의 플로우 활동으로 변화시키는 것을 의미한다.

 

 

10장. 의미 창조하기(The Making of Meaning)

 

p392 

 개인의 관점에서 보면, 일생 동안 심리 에너지의 질서를 창조하기에 충분할 만큼 강한 흥미를 돋우는 것이라면 그 궁극적 목표가 무엇이 되는가는 그리 중요하지 않다. 도전의 목표는 천차만별이다. 주위에서 가장 훌륭한 맥주병들을 수집하여 소장하는 것이 될 수도 있고, 암 치료법을 발견하려는 결의일 수도 있으며, 혹은 살아남아 훌륭히 성장할 자녀를 두는 생물학적인 의무와 관련된 단순한 것일 수도 있다. 분명한 목적과 분명한 행동 규칙 그리고 집중하여 몰입할 수 있는 길을 제공해 주는 한, 어떤 목표가 되든 한 개인의 삶에 의미를 주기에 충분한 것이다.

 나는 지난 몇 년 동안 전기 기술자, 비행기 조정사, 사업가, 교사 등의 직업을 가지고 있는 사우디 아라비아와 그 외 아랍 산유국들 출신의 몇몇 회교도들과 잘 알게 되었다. 나는 그들과 이야기를 나누면서 심한 곤경에 처해 있는 상황에서도 그들 대부분이 느긋한 자세를 보일 수 있다는 사실에 놀라움을 금할 수 없었다. 어떻게 그럴 수 있느냐고 질문을 하자 그들은 한결같이 다음과 같은 요지의 답변을 했다.

 "별거 아니에요. 우리는 우리의 삶이 신에게 달려 있다는 것을 믿기 때문에 그케 동요하지 않습니다. 신이 어떤 결정을 내리든 우리는 그것을 그저 받아들일 뿐이랍니다."

 우리 문화에도 이와 같은 무조건적 신앙이 널리 퍼져 있던 때가 있었는데, 요즈음은 이런 신앙을 찾기가 그리 쉽지 않다. 우리는 전통적 신앙의 도움이 없이 인생에 의미를 줄 목표를 스스로 발견해야 한다.

 

p394

 플로우를 경험하기 위해서는 시합에서 승리하는 것, 어떤 사람과 사귀는 것, 어떤 것을 특정한 방식으로 성취하는 것 등과 같은 자신의 행동 목표가 설정되어 있어야만 한다. 대체로 목표 그 자체는 그리 중요하지 않다. 중요한 것은 목표가 그 사람의 주의를 집중시키고, 성취 가능하며 즐거운 활동에 몰입하도록 해준다는 점이다.

 이처럼 전 생애에 걸쳐서 자신의 심리 에너지를 뚜렷하게 집중시킬 수 있는 사람들이 있다. 각 플로우 활동의 서로 다른 목표들이 모든 것을 총망라하는 일련의 도전 목표들로 통합되어 그 사람이 하는 모든 일에서 의미를 찾을 수 있게 되는 것이다. 이 같은 목표 지향성을 달성할 수 있는 방법들은 서로 큰 차이를 보인다. 나폴레옹은 기꺼이 수십만 명의 프랑스 병사들을 죽음으로 내몰면서까지 오로지 권력 추구에 전 생애를 바쳤다. 테레사 수녀는 신앙에 바탕을 둔 무조건적인 사랑에 삶의 목적을 두고 곤공한 사람들을 돕는 일에 자신의 모든 에너지를 투자했다.

 순수한 심리학적 견지에서 본다면, 나폴레옹이나 테레사 수녀 모두 같은 수준의 내적 목적 의식을 갖고 같은 수준의 최적 경험을 달성했다고 할 수 있다. 그러나 이들이 갖는 명백한 차이점은 한층 더 광범위한 윤리적 문제를 제기해 준다. 즉 당사자의 삶에 의미를 부여해 주었던 이들 두 방식으로 초래된 결과가 무엇이었나 하는 점이다. 나폴레이옹이 수많은 사람들의 삶에 혼란을 불러일으켰던 반면, 테레사 수녀는 많은 사람들의 의식 속에서 엔트로피를 감소시켰다고 결론을 내릴 수도 있다. 그러나 여기서는 행동의 객관적 가치에 대해 어떤 판단도 내리지 않기로 한다. 그 대신 통일된 목적이 개인의 의식에 가져달 줄 수 있는 주관적 질서를 설명하는 일에만 관심을 갖도록 하자. 이런 뜻에서 "삶의 의미란 무엇인가?"라는 수수께끼에 대한 해답은 놀라우리만큼 간단한 것이다. 즉 삶의 의미란 바로 의미라고 할 수 있다. 그것이 무엇이든 어디에서 오는 것이든 통합된 하나의 목적이 바로 삶에 의미를 주는 것이다.

 

 

 

 여러 목표들을 하나로 통일시켜 주는 목적을 찾는 것만으로 부족하다. 목적을 끝까지 달성해야 하며 그에 따르는 어려움들을 극복해 내야 한다. 목적을 위해 각고의 노력을 기울여야 하며 의도한 바가 행동으로 나타나야 한다. 이러한 것을 목표를 달성하기 위한 결의(resolution)라고 해도 좋을 것이다. 그 사람이 처음 설정한 목표를 실지로 달성했는지의 여부는 그리 중요하지 않다. 중요한 것은 자신의 목표 달성을 위해 충분한 노력을 경주하면서 노력을 분산하거나 낭비하지 않는 것이다. "창백한 사고의 그늘에 가리워 결의가 가졌던 본래의 색조가 변하면, 우리의 중요한 진취적 기상은 행동이라는 이름을 잃게 된다"라고 햄릿은 말했다. 무엇을 해야 할지를 정확히 알고 있으나 그것을 하기 위해 충분한 에너지를 집중할 수 없는 사람을 만나는 것만큼 슬픈 일도 드물다. 블레이크는 예의 그 힘찬 필치로 다음과 같이 썼다.

 "바라기는 하되 행동하지 않는 자는 해악을 낳는다."

 

p397

 인간의 역사를 통해서 존재의 의미를 부여해 줄 만한 궁극적 목적을 찾기 위한 시도가 수없이 많이 이루어져 왔다. 이러한 시도의 종류도 다양했다. 예를 들어 사회철학자 한나 아렌트에 따르면, 고대 그리스 문명에서는 남자들이 영웅적인 행위를 통하여 불후의 명성을 얻으려 했다. 아렌트는 궁극적 목적이란 죽음에 관한 문제를 나름대로 해결해 줄 수 있는 것이어야 한다고 말한다. 즉, 죽음 이후에까지 연장될 수 있는 어떠한 목적의식을 사람들에게 심어줄 수 있어야 한다는 것이다. 불후의 명성이나 영생 모두 이 점을 해결해 주시만, 그 방법에는 큰 차이가 있다. 그리스 시대 영웅들은 자신의 용맹스러운 행위가 노래와 전설로 대대손손 전해질 것을 기대하며 동료들의 감탄을 자아낼 수 있는 숭고한 행위를 하였다. 그렇게 되면 후손들의 기억 속에서 영원불멸의 존재가 될 것이기 때문이다. 이와는 대조적으로, 성자들은 후일 신의 곁에서 영원히 살 수 있기를 기대하며 자신들의 생각과 행위가 신의 의지에 부합할 수 있도록 스스로 개인성(個人性)을 포기했다.

 영웅이나 성자들 모두 일생에 걸쳐 일관성 있는 행동을 하도록 해준, 모든 것을 총망라하는 목표에 모든 심리 에너지를 바침으로써 자신들의 삶을 통일된 플로우 경험으로 변화시킨 사람들이라 할 수 있다. 사회의 다른 구성원들은 성자나 영웅의 예에는 미치지 못했지만, 이러한 뛰어난 모델을 본보기로 삼아 자신들의 행위를 규제함으로써 삶에 어느 정도 적절한 의미를 부여할 수 있었다.

 분명 모든 인간의 문화에는 각 개인의 목표들을 정리해 줄 수 있는 망라적 목적의 역할을 하는 의미 체계가 있다. 소로킨은 서양 문명의 다양했던 시대를 세 가지 유형으로 구분하였는데, 2,500년이 넘는 기간 동안 세 유형이 번갈아서 나타났으며 각 유형이 길게는 수백 년 짧게는 불과 수십 년 정도만 지속되었다고 주장한다. 그는 이 유형들을 각각 감각주의적(sensate) · 관념주의적(ideational) · 이상주의적(idealistic) 문화의 시기라고 명명하고, 시기에 따라 서로 다른 삶의 우선 순위들이 존재의 목적을 정당화시켜 주었음을 입증하려 했다.

 감각주의적 문화는 감각을 만족시키도록 고안된 세계관을 중심으로 구성된다. 이러한 문화들은 쾌락주의적 · 공리주의적인 경향을 띠고 있으며, 주로 구체적 욕구에 중점을 둔다. 이 같은 문화에서는 예술 · 종교 · 철학 그리고 일상적인 행위들이 주로 실체적인 경험 위주의 목표들을 찬미하고 정당화시켜 준다. 소로킨에 따르면, 이러한 감각주의적 문화가 기원전 약 440~200년까지 유럽에서 우세하였으며, 기원전 420~400년 사이에 그 절정을 이루었다고 한다. 또한 19세기에도 최소한 선진 산업 민주주의 국가들에서 지배적이었다고 한다. 감각주의적 문화 속에 사는 사람들이 반드시 더 유물론적이지는 않다. 그렇지만 추상적인 원칙들보다는 주로 쾌락과 실용성에 입각해서 목표를 조직하고 행동을 정당화시킨다. 이들의 도전 목표는 전적으로 인생을 더 쉽고, 안락하며, 쾌락적인 것으로 만들려는 것들이다. 이들은 쾌감을 주는 것을 선으로 여기며 이상화된 가치들은 불신한다.

 관념주의적 문화들은 감각주의적 문화와는 상반되는 원칙에 입각하여 조직된다. 즉 실체적인 것들을 경멸하고, 정신적 · 초자연적인 목적들을 위해서 노력한다. 이러한 문화들은 추상적인 원칙들과 금욕주의 그리고 물질저인 관심으로부터의 초월을 강조한다. 예술 · 종교 · 철학 그리고 일상적 행위의 정당화는 이러한 정신적 질서의 구현에 종속되는 경향이 있다. 사람들은 종교나 관념에 관심을 두며 삶을 더욱 쉽게 하려는 목적보다는 내면 세계의 명료함과 확신에 도달하기 위해 도전이 목표를 설정한다. 기원전 600~500년까지 그리스와 기원전 200~서기 40년에 이르는 서유럽에서 이 같은 세계관이 절정을 이루었다고 소로킨은 말한다. 좀더 최근의 유감스러운 예로는, 자치 독일 · 공산 러시아 · 중국 그리고 이란에서의 회교 세력 부활 등을 들 수 있다.

 간단한 예로 감각주의적 문화와 관념주의적 문화의 차이를 설명할 수 있다. 파시스트적 사회는 물론이고 우리의 사회에서도 신체적 건강이 중시되며 인간의 육체적 아름다움이 숭배의 대상이 된다. 그러나 그 이유에는 큰 차이가 있다. 우리의 감각주의적 문화에서는 건강과 쾌락을 위하여 육체를 가꾼다. 관념주의적 문화에서 육체가 중시되는 주된 이유는, '아리안 인종의 우월성' 혹은 '로마인의 용기'와 같은 관념과 관련된 형이상학적 완전성이라는 추상적 원칙의 상징으로 여겨지기 때문이다. 감각주의적 문화에서는 잘생긴 젊은이의 포스터가 상업적인 목적으로 성적 반응을 유발시킨다. 반면, 관념주의적 문화에서는 똑같은 포스터가 이념적인 성명서가 되어 정치적 목적을 위해 이용되는 것이다.

 물론 어느 시대의 어느 민족도 다른 관점은 배제하고 위에서 소개된 경험을 정리하는 두 관점에만 입각하여 목적을 설정하지는 않았다. 다양한 하위 유형들 및 감각주의적 관점과 관념주의적 관점이 복합된 세계관이 같은 문화 안에서, 그리고 심지어는 한 사람의 의식 속에서도 공존할 수 있는 것이다. 예를 들어, 여피적 생활 양식은 주로 감각주의적 원칙에 입각한 것이며, 미국 남부의 신앙이 두터운 바이블 벨트 지역의 근본주의는 관념주의적 전제에 기초를 둔 것이다. 위의 두 형태는 서로 많은 차이점을 보임에도 불고하고 현재 미국 사회 체제 내에서 다소 거북하게나마 공존하고 있다. 그리고 목표 체계로서 기능을 하는 위의 두 방식 모두 삶을 조직화하여 하나의 일관된 플로우 활동으로 변화시키는 데 각각 기여하고 있다.

 문화뿐만 아니라 각 개인들도 역시 이와 같은 의미 체계를 행동으로 구현한다. 기업가다운 확고한 도전 목표들을 중심으로 삶을 살아왔던 아이아코카나 로스 페로와 같은 유수 기업인들은 종종 감각주의적 삶의 특징들을 아주 잘 보여준다. 이보다 더 초보적인 감각주의적 세계관을 잘 보여 준 사람은 휴 헤프너로서, 그의 '플레이보이 철학'은 단순한 쾌락 추구의 극명한 예가 된다. 신의 섭리에 대한 맹목적 신앙과 같은 단순하고도 초월적인 해결책을 주창하는 공상가나 신비주의자들은 무분별한 관념주의적 접근의 대표적인 예이다. 물론 다른 변형된 형태들도 많다. 베이커 부부나 지미 스와거트와 같이 텔레비전을 통해 설교를 하던 복음 전도자들은, 시청자들에게는 공공연히 관념주의적 목표들을 중시하라고 권고하면서 실제 그들은 사치와 감각적 쾌락에 젖은 생활을 했다.

 때로는 서로 완전히 상반되는 위의 두 원칙들을, 양자의 장점은 모두 유지하면서도 각각의 단점들은 최소화시켜 설득력 있는 하나의 통일체로 통합하는 문화들도 있다. 소로킨은 이 같은 문화들을 '이상주의적' 문화라 명명한다. 이러한 문화는 구체적인 감각적 경험을 수용하면서도 정신적 측면에 대한 경외도 가지고 있다. 소로킨의 분류에 따르면, 서유럽에서는 중세 말기와 르네상스 시대가 비교적 가장 이상주의적 문화를 이루었던 시기이며, 14세기 처음 20년 동안이 그 절정기였다고 한다. 말할 필요도 없이, 흔히 순수한 유물사관의 부작용인 무기력함과 많은 관념주의적 체제들의 폐해라 할 수 있는 지나친 금욕주의를 피할 수 있는 이상주의적 해결책이 가장 바람직한 것으로 보인다.

 이처럼 문화를 단순히 삼분하여 해석하는 소로킨의 분류법은 논란의 여지가 있긴 하지만, 사람들이 궁극적 목적을 설정할 때 기준이 되는 일부 원칙들을 설명하는 데는 매우 유용하다. 구체적 도전 목표들에 대응해 나가며 대체로 물질적 목적을 지향하는 플로우 활동을 중심으로 삶의 형태가 이루어지는 감각주의적 삶의 양식은 언제나 인기가 높다. 이 양식이 갖는 장점의 하나는 모든 사람이 규칙을 이해할 수 있으며 피드백이 비교적 명확하다는 것이다. 누구나 건강 · 금전 · 권력 · 성적 만족을 바라는 것은 분명한 사실이다. 그러나 관념주의적 양식 또한 나름대로의 장점들을 갖고 있다. 형이상학적 목표들의 성취가 불가능할 수는 있을지언정 그렇다고 성취에 실패했다는 것도 결코 입증할 수 없다는 점이다. 진정으로 관념주의적 가치를 신봉하는 사람은 언제나 피드백을 왜곡해서 결국 자신이 옳았으며 자신이 선택받은 사람 중의 하나임을 증명하는 데 이용한다. 모든 것을 총망라하는 플로우 활동으로 삶을 통합할 수 있는 가장 만족스러운 방법은 아마도 이상주의적 양식일 것이다. 그러나 물질적 조건을 향상시키는 동시에 정신적 목적을 추구할 수 있는 도전 목표들을 설정한다는 것은 쉬운 일이 아니다. 더군다나 문화의 전반적 성격이 감각주의인 경우에는 그 어려움이 커지게 마련이다.

 각 개인의 행동 양식을 어떻게 설정하는가를 설명할 수 있는 또 다른 방법은 이들이 스스로를 위해 세운 도전 목표의 내용보다는 복합성의 정도에 초점을 맞추는 것이다. 어쩌면 가장 중요한 것은 그 사람이 유물론적인가 혹은 이상주의적이가 하는 사실이 아니라 그가 그런 분야에서 추구하는 목표들이 얼마나 분화되어 있으며 또 통합되어 있는가 하는 문제일 것이다. 2장의 마지막 부분에서 논의한 바와 같이 복합성이란 어떤 체제가 나름대로의 장점과 잠재 능력을 얼마나 잘 개발하는가 그리고 이러한 장점들의 상호 연계가 얼마나 잘 되어 있는가의 여부에 따라 결정되는 것이다. 이런 점에서, 충분히 숙고한 후 결정한 감각주의적 삶의 자세, 즉 다양하고도 구체적인 인간의 경험을 충분히 고려하면서도 내적 일관성을 유지하는 자세가 무분별한 관념주의나 감각주의보다 바람직하다 할 수 있을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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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앞의 설명에서, 복합적인 의미 체계의 구축은 관심을 자아와 타인에게 번갈아 집중시키는 과정을 통해서 이루이즌 것 같다. 첫 번째는, 심리 에너지를 생물학적 욕구에 투자하는 단계로, 이 단계에서 정신적 질서는 곧 쾌락에 해당한다. 이러한 수준에서 잠정적으로 도달하게 되면 지역 사회의 목표들에 관심을 투자하기 시작한다. 그리하여 집단적 가치를 반영한 의미 있는 것들 - 즉 종교와 애국심 그리고 다른 사람들로부터 받는 인정과 존경 등 - 이 내적 질서의 변수가 된다. 다음의 변증법적 단계에서는 관심이 다시 자아로 이동을 한다. 더욱 광범위한 큰 인간 체제에서 소속감을 성취했으므로 이제는 개인적 잠재력의 한계를 인식하고자 하는 것이다. 이는 자아의 실현을 위한 시도들로 이어지며, 이때 각기 다른 기술과 사상 그리고 원칙들을 시험해 보게 된다. 이 단계에서는 쾌락(pleasure)보다는 즐거움(enjoyment)이 주된 보상의 원천이 된다. 그러나 이는 끊임없는 추구의 단계이므로, 한편으로는 중년의 위기, 직업의 변화 그리고 개인적 능력의 한계를 극복하려는 노력 등에 의해 점증하는 스트레스를 경험하게 될 수도 있다. 이 시점부터는 에너지의 방향을 마지막으로 재설정할 준비가 갖추어진다. 자신이 할 수 있는 일이 무엇인지를 알게 되었고, 이보다 더 중요한 사실, 즉 혼자서는 할 수 없는 일들이 무엇인지도 깨닫게 된다. 따라서 궁극적 목적이 한 개인보다는 큰 체계, 즉 명분 · 사상 · 초월적 존재 등에 통합되는 것이다.

 모든 사람들이 이 같은 복합성의 상승 단계를 거치는 것은 아니다. 첫 단계를 넘어설 수 있는 기회를 전혀 얻지 못하는 사람들도 있다. 생존 요구가 집요하게 어어질 때는 그 외의 다른 어떤 것에도 충분한 관심을 기울일 수 없으며, 가족이나 나 더 넓은 지역 사회의 목표들에 투자할 만한 심리 에너지가 남아 있지 않게 된다. 자신의 권익 추구만으로도 인생의 의미를 찾을 수 있다. 아마도 대다수의 사람들은 가족 · 회사 · 지역 사회 혹은 국가의 안위가 주된 의미를 부여해 주게 되는 발달의 두 번째 단계에서 편안하게 머무르고 있을 것이다. 반성적 개인주의의 단계까지 도달하는 사람은 극히 적다. 또한 그 중에서도 한정된 소수만이 보편적인 가치와의 통합을 이룬다. 이러한 단계들은 실제로 반드시 순서적으로 진행된다는 것을 의미하는 것이 아니라, 운이 좋아서 의식을 성공적으로 통제하는 사람이 어디까지 도달할 수 있는가를 보여 준다고 할 수 있다.

 지금까지 개략적으로 소개한 네 단계는 복합성을 서서히 높여감에 따라 각기 다른 의미가 생겨나게 됨을 설명하는 모델들 가운데 가장 단순한 종류에 속한다. 이 과정을 여섯 단계 혹은 심지어 여덟 단계로 나누는 모델도 있다. 몇 단계로 이루어지는가는 별로 중요하지 않다. 중요한 것은, 대부분의 이론들이 이같이 한편으로는 분화를 또 한편으로는 통합을 번갈아 이루는 변증법적인 힘의 균형 상태의 중요성을 모두 인정한다는 것이다. 이러한 관점에서 보면, 각 개인의 인생은 일련의 각기 다른 '게임'들로 이루어지는데, 이 게임들은 서로 다른 목표와 도전들로 갖추고 있으며 개인이 성숙해감에 따라 변화를 거듭하게 된다. 우리들이 이처럼 복합성을 높여 자율적이며, 자립적이고, 자신의 개성과 한계를 의식할 수 있기 위해서는 우리가 본래 가지고 있는 기술들을 더욱 연마하는 일에 에너지를 투자해야 한다. 동시에 우리는 개인적 한계를 능가하는 힘에 적응할 수 있는 방법을 인식하고, 이해하며, 찾아내는 데 에너지를 투자해야 한다. 물론, 우리가 반드시 이와 같은 계획을 따라야 할 필요는 없다. 그러나 만일 그렇게 하지 않는다면 조만간에 후회할지도 모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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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그리고 이들이 이처럼 행동했기 때문에 이들이 세웠던 목표들이 원래 가치가 있는 것들이었는가의 여부와는 관계없이 실제로 보람과 가치가 있는 일들이 되었다. 또한 이들 청교도들의 목표가 헌신을 통해 소중한 것으로 변했기 때문에 이들의 생애에 의미를 부여해 줄 수 있었다.

 어떠한 목표도 진지하게 받아들이지 않는다면 큰 영향을 미치지 못한다. 각 목표에는 일련의 결과들이 수반되는 것이기 때문에 각자가 이러한 결과를 고려할 준비가 되어 있지 않다면 목표는 아무 의미도 없는 것이 되고 만다. 오르기 어려운 봉우리를 정복하려고 결심한 등반가는 자신이 등반을 하는 동안 내내 지칠 것이며 어려움에 처하게 되리라는 사실을 잘 알고 있다. 그러나 만일 그가 너무도 쉽게 포기를 해버린다면 그의 추구는 가치 없는 것이 되고 말 것이다. 모든 플로우 경험도 이와 마찬가지이다. 목표와 그 목표를 위해 기울여야 하는 노력에는 밀접한 상호 관계가 있다. 처음에는 목표들이 그 목표를 위해 기울여야 하는 노력을 정당화해 주지만, 나중에는 바로 그러한 노력들이 목표를 정당화해 준다. 사람들이 결혼을 하는 까닭은 배우자를 자신과 평생을 함께 보낼 만한 사람으로 판단했기 때문이다. 그러나 결혼 후 이 판단이 옳았던 것처럼 행동하지 않는다면, 시간이 지나면서 부부 관계는 가치를 잃게 될 것이다.

 

 모든 것을 조합해 본다면, 인류에게 자신들의 결심을 뒷받침할 만한 용기가 부족했다고는 말할 수 없다. 모든 시대의 모든 문화에서 셀 수 없이 많은 부모들이 자녀들을 위해 희생해 왔으며, 그렇게 함으로써 그들의 인생이 한층 더 의미 깊은 것이 될 수 있었다. 또한 많은 사람들이 자신의 목초지와 가축을 보전하기 위해 모든 에너ㅓ지를 바쳐 왔을 것이다. 종교와 국가 혹은 예술을 위해 모든 것을 희생한 사람들도 헤아릴 수 없이 많다. 고통과 실패에도 불구하고 꾸준히 이렇게 할 수 있었던 사람들은 그들의 인생 전체를 하나의 연장된 플로우로 변화시킬 수 있었다. 즉 이들의 삶은 중심이 확실하고, 집중이 되고, 내적 일관성이 있으며, 논리적으로 정연한 일련의 경험들의 연속이 되었던 것이다. 따라서 이러한 경험들의 내적 질서로 인해 각자가 삶을 의미 깊고 즐겁게 느낄 수 있었던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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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행동과 관조는 서로 보완하고 지지해 주어야 이상적이다. 행동 그 자체는 맹목적이며 관조는 무기력하다. 어떤 목적에 많은 에너지를 투자하기 전에 근본적인 의구심을 가져보는 것이 많은 도움이 된다. 이것이 과연 내가 진정으로 하고 싶어하는 일인가? 이 일을 하면서 나는 즐거운가? 앞으로도 이 일을 즐길 수 있을 것인가? 나와 다른 사람들의 희생을 감수하면서까지 추구할 가치가 있는 목적인가? 이 목적을 달성하고 난 후의 내 자신에게 과연 만족할 수 있을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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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동물들이 인간과 같은 고통을 느끼게 되는 것은 그들에게 생물학적으로 내재되어 있는 목적들이 좌절될 때이다. 그들은 굶주림과 고통 그리고 충족되지 않은 성적 욕구가 주는 괴로움을 느낀다. 인간의 친구가 되도록 길러진 개들은 주인과 떨어져 혼자 있게 되면 불안해한다. 그러나 인간을 제외한 동물들은 자신의 고통을 스스로 야기시킬 만한 위치에 있지 않다. 그들은 모든 욕구가 충족되고 난 후에도 혼란과 절망을 느낄 수 있을 만큼 충분히 진화되어 있지 않다. 외적 요인으로 인한 갈등이 해결되면, 동물들은 자기 자신과의 조화를 이루게 되어 우리 인간들이 플로우라고 부르는 완전한 몰입의 상태를 경험한다.

 인간에게만 독특하게 있는 심리의 엔트로피는 자신이 실지로 성최할 수 있는 것 이상의 일들을 바라고, 여건이 허락하는 것 이상을 성취할 수 있을 것처럼 느끼는 데서 오는 상태라 할 수 있다. 즉 인간이 한 번에 하나 이상의 목표들을 염두에 두고 있어서, 서로 상충되는 욕구들을 동시에 의식할 때만 이러한 상태가 비로소 가능해지는 것이다. 엔트로피는 우리의 정신이 현재의 상태를 아는 것뿐만 아니라 다른 대안이 있으면 어떻게 될 것인가 하는 것까지도 생각하기 때문에 생겨난다. 체계가 복합적일수록 대안의 여지가 많아져서 그만큼 체계 안에서 잘못되어지는 일도 많다. 인간 정신의 진화도 이에 해당되는 경우이다. 인간 정신의 정보 처리 능력이 증대됨에 따라 내적 갈등의 가능성도 그만큼 증가되어 왔다. 욕구와 삶의 선택 사항들과 도전들이 너무 많아지면 우리는 불안해지며, 또 너무 적어지면 지루함을 느낀다.

 

p417

 

 단순한 의식이 아무리 조화로운 것이라 해도 복합적 의식보다 더 낫다고 주장하기는 어렵다. 휴식을 취하고 있는 사지의 평온함, 자신의 운명을 그대로 받아들이는 원시 종족들의 자세, 그리고 현재의 일에만 완전히 몰입할 수 있는 아이들의 단순함에 경탄을 할 수는 있겠지만, 이러한 것들이 우리의 곤경을 해결할 수 있는 모델을 제시해 주지는 못한다. 단순하고 순진함에 기초한 질서는 이미 우리의 손을 떠났다. 이미 선악과를 딴 이상 우리는 영원히 에덴 동산으로 다시 돌아갈 수 없게 된 것이다.

 

 

p419

 두 개념의 차이점을 다음과 같이 설명할 수도 있다. 즉 자신이 발견한 인생의 주제가 있는 사람은 개인적 경험과 선택에 대한 인식에 입각해 자신의 행동을 위한 대본을 직접 쓰는 사람이며, 받아들인 인생의 주제를 가지고 있는 사람은 다른 사람들이 오래전에 이미 작성해 놓았던 대본에 미리 규정되어 있는 역할을 그저 받아들이는 사람이다.

 이러한 두 종류의 인생 주제들 모두 인생에 의미를 주기는 하지만 각각 그 나름대로의 단점을 가지고 있다. 사회 체계가 안정되어 있다면 수용한 인생의 주제도 그 역할을 충분히 해낼 수 있다. 그러나 여건이 그렇지 못한 경우에는 이러한 주제들이 사람을 편협한 목적 속에 가두게 되는 경우가 발생할 수 있다. 냉정하게 수만 명의 사람들을 가스실로 보냈던 나치당원 아이히만은 관료주의적 규칙을 신성시했던 사람이다. 복잡한 열차 운행표를 뒤적이면서, 수량이 부족한 열차를 필요할 때 꼭 사용할 수 있도록 조처하고, 최소한의 비용으로 많은 유태인들을 수송할 수 있는 방법을 강구하면서 그는 아마도 플로우를 경험했을 것이다. 그는 자신에게 내려진 명령이 과연 옳은 일인가 하는 의구심을 한번도 가져보지 않았던 듯하다. 명령을 따르는 동안에 그의 의식은 조화를 이루고 있었다. 그에게 인생의 의미란, 강력하고 조직화된 기관의 일원이 되는 것이었다. 그 외의 다른 어떤 것도 그에게는 중요하지 않았다. 평화롭게 질서가 잘 유지되는 시대였다면 아이히만 같은 사람은 존경받는 사회적 지주가 되었을 수도 있다. 그러나 그가 가졌던 것과 같은 인생의 주제는, 부도덕하고 정신착란 상태인 사람들이 사회의 통제권을 쥐게 될 때 그 취약성을 드러내게 된다. 그렇게 되면 그와 같은 강직한 시민이 자신의 목적을 바꿀 필요도 없이, 또 자신이 하는 행위의 비인간성을 깨닫지도 못한 채 범죄의 공범이 되는 것이다.

 '발견한 인생 주제'의 취약성은 다른 곳에 있다. 이러한 인생의 주제는 인생의 목적을 찾고자 하는 개인적 투쟁의 산물이므로 사회적 정통성이 결여되는 경향이 있다. 또한 새롭고 특이한 것들이기 때문에 다른 사람들이 이를 무모하다거나 파괴적인 것이라고 간주하는 경우도 많다. 가장 강력한 인생의 주제들 중에는 오래된 인간의 목적에 기초한 것들도 있지만 개인별로 이를 다시 새롭게 발견하고 자유롭게 선택한 것들이 대부분이다. 어린 시절 말콤 엑스는 빈민가 젊은이들의 행동 양식을 고스란히 본받고 자라 싸움을 일삼고 마약 거래에도 손을 댔다. 그러나 그는 교도소에 수감되어 있는 동안 독서와 명상을 통해 존엄과 자긍심을 성취할 수 있도록 해주는 또 다른 일련의 목적들을 새롭게 발견하게 되었다. 앞 시대의 사람들이 이루어 놓은 성취의 단편들로 이루어진 것이기는 하지만, 본질적으로 그는 완전히 새로운 정체성을 찾게 되었던 것이다. 마약 업자와 포주가 걷는 길을 계속 답습하는 대신, 그는 흑백을 막론한 다른 많은 주변인들의 삶에 질서를 찾아주는 매우 복합적인 높은 목적을 창안해 냈다.

 

p427

이러한 사람들과 삶의 의미를 찾는 데 성공한 다른 많은 사람들에게서 공통적으로 찾을 수 있는 전략이 있다면, 그것은 너무나 단순한 것이어서 언급하기조차 무색한 것이라 할 수 있다. 그것은 너무나 단순한 것이어서 언급하기조차 무색한 것이라 할 수 있다. 그러나 이것은 종종 많은 사람들에게 너무 쉽게 간과되어 온 게 사실이다. 특히 요즈음은 더욱 그렇기 때문에 여기서 한 번 살펴보는 것은 큰 도움이 될 것이다. 그 전략이란, 옛 세대들이 만들어 놓은 질서 속에서 자신의 마음속의 혼란을 피할 수 있는 것들을 추출해 내는 것이다. 우리의 문화 속에는 이러한 용도로 언제든 사용할 수 있는 많은 지식, 다시 말해 잘 정돈된 정보들이 축적되어 있다. 누구나 위대한 음악 · 건축 · 미술 · 시 · 연극 · 무용 · 철학 · 종교 등을 통해서 혼돈 속에서 조화를 창조해 내는 법을 배울 수 있다. 그러나 너무나도 많은 사람들이 이것들을 간과해 버리고는, 자신들만의 기제로 살믜 의미를 창조해 내고자 한다.

 혼자서 해보겠다는 것은 마치 각 세대마다 맨 처음부터 물질 문화의 구축을 다시 시작하려는 것과 마찬가지라 할 수 있다. 올바른 정신을 가진 사람이라면, 바퀴 · 불 · 전기 그리고 오늘날 우리가 인간의 환경의 일부로 당연시하는 수많은 물체와 과정들을 다시 발명라혀고 하지 않을 것이다. 그 대신 우리는 이러한 것들을 선생님이나 책 그리고 모델등을 통해 배움으로써 과거의 지식으로부터 혜택을 받고, 결국은 그것을 능가하게 된다. 조상들이 축적해 놓은 삶에 대한 지식을 버린다거나 혼자서 실행 가능한 일련의 목표들을 발견하기를 기대하는 일은 잘못된 오만이다. 이러한 일에 성공할 가능성이란, 물리학적 지식과 도구 없이 전자 현미경을 발견하려고 할 때만큼이나 희박한 것이다.

 성인이 되어 일관성 있는 인생의 주제를 발견한 사람들은 흔히 자신의 어린 시절에 부모님이 이야기를 들려주거나 책을 읽어주던 일을 회상하곤 한다. 자신이 신뢰하는 애정 깊은 어른들로부터 동화나 성서 이야기, 역사적 영웅들의 무용담, 실감나는 가족사 등을 들으면서, 아이는 과거의 경험을 바탕으로 의미 있는 질서를 형성해 나가는 첫 경험을 하게 된다. 우리가 조사한 바에 따르면, 이와는 대조적으로 한번도 어떤 목표에 집중해 보지 않았거나 혹은 주변 사회의 목적을 무조건적으로 수용했던 사람은, 어린 시절 부모님이 책을 읽어주거나 이야기를 들려준 기억이 없는 사람들이 대다수였다. 토요일 아침에 텔레비전으로 방영되는 아이들 대상의 무의미한 감각주의적 쇼는 위와 같은 목적을 결코 달성할 수 없다.

 각자의 성장 배경이 어떤 것이든 과거로부터 의미를 끌어낼 수 있는 기회는 인생을 살면서 얼마든지 있다. 복합성을 가진 인생의 주제를 발견한 대부분의 사람들은 자신들이 몹시 존경하여 귀감으로 삼았던 연장자나 역사적 인물을 가지고 있다. 이들은 또한 책을 통해서 새로운 행동의 기회들을 찾아냈던 일들을 기억한다. 예를 들어, 고결한 인품으로 널리 존경을 받는 당대의 한 유명한 사회과학자는 십대 시절에, 『두 도시의 이야기』를 읽으며 디킨스가 묘사한 사회적 · 정치적 혼란상 - 그의 부모가 일차대전 후 유럽에서 겪은 바와 같은 혼란상 - 에 대단히 깊은 인상을 받았다. 그리고 그 자리에서 자신의 평생을 왜 사람들이 서로의 삶을 비참하게 만드는가를 이해하는 데 바치기로 결심을 했다고 한다. 가혹한 고아원에서 자라난 다른 어떤 소년은 호레이쇼 엘저의 이야기를 우연히 읽게 되었다. 그것은 자기와 비슷한 처지의 가난하고 외로운 소년이 열심히 일도 하고, 약간의 운도 따른 덕에 인생에서 성공한다는 이야기였다. 소년은 이 이야기를 일고, "그도 할 수 있었는데, 나라고 왜 못하겠는가?"라는 생각을 했다고 한다. 오늘날 이 소년은 은퇴한 은행가가 되었는데, 자선 사업가로 널리 이름을 떨치고 있다. 플라톤의 『대화론』의 논리적 질서, 혹은 공상과학 소설에 나오는 주인공의 용감한 행위에 감명을 받아 영원히 변모하게 되었다는 사람들도 있다.

 문학에는 행동, 귀감이 되는 목적 그리고 의미 깊은 목적을 푯대 삼아 성공적인 인생을 산 사람들에 관한 정보들이 정리되어 담겨 있다. 삶의 무질서함에 직면해 본 많은 사람들은 과거의 다른 사람들도 자신과 유사한 문제를 겪었으며 결국 그러한 난관들을 극복해 냈다는 사실을 알고 희망을 되찾게 되었다. 이것은 단지 문학의 예일 뿐인데, 음악 · 미술 · 철학 그리고 종교는 또 어떠하겠는가?

 

p430

 마침내 무엇인가 색다른 것을 시도해 보아야 하겠다는 생각이 떠올랐다. 그래서 나는 단테의 『신곡』을 간략히 살펴보는 것으로 세미나를 시작하게 되었다. 내가 아는 한 6백 년도 넘은 이 단테의 운문이 중년의 위기와 그 해결책에 관해 쓰여진 가장 오래된 서술이기 때문이다. 단테는 그의 몹시 길고도 풍부한 이 시의 첫 행에서 다음과 같이 쓰고 있다.

 "우리 인생의 여정 한 가운데서, 나는 어두운 숲 속에 있는 내 자신을 발견하게 되었다. 옳은 길을 완전히 잃어버렸기 때문이다."

 그 다음에는 중년기에 겪게 되는 어려움들을 여러 가지 측면에서 적절히 묘사한 흥미로운 내용이 계속 이어진다.

 우선, 길을 잃어 어두운 숲 속으로 접어들게 된 단테는 세 마리의 사나운 짐승들이 입맛을 다시며 자신을 몰래 뒤쫓아 오고 있음을 알게 된다. 이 짐승들은 사자 · 시라소니 · 늑대였는데, 이들은 각각 야망 · 육욕 · 탐욕을 상징한다. 1988년의 베스트셀러였던 톰 울프의 작품 『허영의 불꽃』에 주인공으로 등장하는 뉴욕의 한 중년 주식 거래인의 경우와 마찬가지로, 단테의 적들은 권력과 성 그리고 돈에 대한 갈망이었음이 드러나게 된다. 그들로부터 해를 입지 않기 위해 단체는 언덕으로 피신하려 한다. 그러나 그 짐승들은 계속 더 가까이 다가오고, 절박한 나머지 단체는 신의 도움을 요청한다. 환영을 통해 그는 기도의 응답을 받는다. 그 환영은 버질(Virgil)의 유령이었는데, 그는 단테가 태어나기 약 천 년 전에 죽은 고대 로마의 시인이었으나, 단테가 그의 현명하고 웅장한 시를 너무도 흠모한 나머지 자신의 스승으로 생각했던 사람이었다. 어두운 숲 속에서 벗어날 수 있는 길이 있다는 희소식을 전하며 버질은 단테를 안심시키려 한다. 그러나 이 길은 지옥을 통과하는 길이라는 좋지 못한 소식도 더불어 전한다. 그들은 서서히 지옥을 통과해 나가면서, 목적을 한 번도 설정하지 않았던 사람들이 겪는 고통을 본다. 또 인생의 목적이 엔트로피를 증가시키는 것이었던 소위 '죄인들'의 더욱 혹심한 운명을 목격하게 된다.

 나는 시간에 쫓기는 기업의 중역들이 이처럼 해묵은 우화를 어떻게 받아들일 것인지가 다소 염려스러웠다. 그들이 자신의 소중한 시간을 낭비하는 것으로 생각할 수도 있음을 우려하였던 것이다. 그러나 이는 지나친 기우였다. 신곡에 관해 이야기를 나누고 난 후부터, 중년의 위기와 중년 이후의 삶을 풍부하게 만들 수 있는 여러 선택들에 관해 그 이전과는 비교할 수 없을 정도로 서로 마음을 열고 진지한 토론을 할 수 있었기 때문이다. 나중에 참석자들 중 몇 사람이 사석에서, 단테의 시로 세미나를 시작하는 것이 매우 좋은 생각이었다고 나에게 이야기를 했다. 단테의 시는 세미나의 주제를 너무도 명료하게 조명해 주어서 나중에 그 주제에 관해 생각하고 이야기하기가 훨씬 용이했던 것이다.

 단테는 또 다른 이유에서도 하나의 중요한 본보기가 된다. 그의 시는 깊은 종교적 윤리의 영향을 받았지만, 그것을 읽는 사람 누구나 단테의 기독교 신앙이 '받아들인' 것이 아니라 '발견한' 신앙임을 분명하게 알 수 있다. 다시 말해, 그가 창조한 종교적 인생 주제는 최상의 기독교적 통찰과 최상의 그리스 철학 그리고 유럽으로 전해진 회교적 지혜의 총합이었던 것이다. 동시에 『신곡』의 지옥편에는 영원한 저주로 고통받는 교황 · 추기경 · 사제들이 매우 많이 등장한다. 그의 첫 번째 안내자인 버질조차도 기독교 성자가 아닌 이교도 시인이었다. 단테는 영적인 질서 체계가 조직화된 교회와 같은 세속적 구조에 좌우되면 엔트로피의 영향을 받기 시작한다는 사실을 인식하고 있었다. 그러므로 신앙 체계로부터 의미를 끌어내기 위해서는, 그 체계 속에 담겨 있는 정보를 자신의 구체적 경험과 비교하여 사리에 맞는 부분만을 취하고 나머지는 거부해야만 한다고 믿었던 것이다.

 

 오늘날에도 우리는 과거로부터 만들어진 위대한 종교의 영적 통찰력에 기초한 내적 질서를 삶으로 보여 주는 사람들을 종종 만날 수 있다. 우리가 매일 신문지상에서 접하는 주식시장의 부도덕성, 군수 산업체들의 부패, 원칙이 결여된 정치계의 소식들에도 불구하고 그와 대조되는 예들도 존재하는 것이다. 또한 고통받는 사람들을 돕는 것이 의미 있는 인생에 있어서 꼭 필요한 부분이라고 믿고, 일정한 시간을 할애해 병원을 찾아가 죽어 가는 환자들과 함께 있어 주는 성공한 기업인들도 있다. 그리고 아직도 많은 사람들이 기도를 통해서 힘과 마음의 평안을 얻고 있으며, 자신만의 의미 있는 신앙 체계를 통해 강력한 플로우 경험을 위한 목적과 규칙들을 얻는 사람들도 많은 것이다.

 그러나 점점 더 많은 대다수의 사람들이 전통적 종교들이나 신념 체계의 도움을 받지 못하고 있음이 분명한 것 같다. 시간이 흐르면서 왜곡되어지고 세속화된 교리 속에서 진리를 찾아내지 못하는 사람들이 많으며, 오류를 용납하지 않는 어떤 교리 덕분에 진리도 함께 거부되고 마는 것이다. 또 다른 사람들은 너무도 절박하게 어떠한 질서를 필요로 한 나머지, 결점이 있는 것일지라도 우연히 접하게 된 신념 체계에 그대로 집착하여 근본주의적 기독교인이나 회교도 혹은 공산주의자가 되기도 한다.

 다음 세대에 살 우리의 자손들이 삶의 의미를 찾는 일에 도움을 줄 수 있도록 새로운 목표와 수단의 체계가 생겨날 가능성은 없는 것일까? 누군가는 기독교가 과거의 영광을 되찾으면 그렇게 할 수 있을 것이라 믿는다. 혹은 아직도 공산주의가 인간 경험의 혼란상을 해결해 줄 것이며, 그 질서가 전 세계로 확산될 것이라고 믿는 사람들도 있다. 현재로서는 이러한 것들이 실현될 가능성이 희박한 것으로 보인다.

 우리가 공감할 수 있는 새로운 신념이 되려면, 우리의 지식과 감정 그리고 우리가 희망하는 것들과 두려워하는 것들을 합리적으로 설명해 주는 것이어어먄 한다. 우리의 심리 에너지를 의미 있는 목표들에게로 인도해주며, 플로우를 경험할 수 있는 삶의 방식에 필요한 규칙들을 제공해 줄 수 있는 신념 체계가 되어야만 하는 것이다.

 이와 같은 신념 체계는 어느 한도까지는 인간과 우주에 관해 과학이 밝혀 놓은 사실들에 입각한 것이 될 것이다. 그러한 기초가 없다면 우리의 의식은 신념과 지식 사이에서 분열되고 말 것이다. 그러나 진정한 도움을 주려면 과학도 변화되어야 한다. 특정한 현실적 측면을 기술하고 통제하기 위한 다양한 원칙들 외에도, 지금까지 알려진 모든 지식을 총괄적으로 통합하여 그것을 인간과 인간의 운명에 연결시킬 수 있어야 하는 것이다.

 진화의 개념을 통해서 이를 성취할 수 있는 길도 있다. 우리는 어디서 왔는가? 우리는 어디로 가고 있는가? 어떠한 힘이 우리의 삶을 결정 짓는가? 선은 무엇이고 악은 무엇인가? 우리는 서로 어떻게 연관되어 있으며, 우주 전체와는 어떤 관계를 갖고 있는가? 우리가 하는 행위의 결과는 무엇인가? 이러한 의문 사항들처럼 우리에게 중요한 모든 것들을 우리가 알고 있는 지식과 나아가서는 앞으로 알게 될 지식들의 관점에서 체계적으로 논의해 보는 것이다.

 이러한 제안에 대해서 전반적 과학은 물론 진화의 과학은 현재의 상태를 다루는 것이지 미래의 당위를 다루는 것이 아니라는 비판을 할 수 있다. 반면에, 신앙과 신념은 옳은 것과 바람직한 것들을 다루는 것이기 때문에 현실성의 제약을 받지 않는다. 그러나 진화론적 신념을 통해 현재의 사실과 미래의 당위를 좀더 밀접하게 통합시킬 수 있다. 우리가 현재의 우리를 만든 것이 무엇인가에 관해 더 깊이 이해를 하고, 본능적 충동 · 사회적 통제 · 문화적 표현 등 우리의 의식의 형성에 기여한 모든 요소들의 기원에 대한 인식을 한층 넓혀 간다면, 우리의 에너지를 바람직하게 사용하는 일이 훨씬 용이해질 것이다.

 또한 진화론적 관점은 우리의 에너지를 투자할 가치가 있는 목표를 지적해 준다. 수십억 년의 세월이 흐르는 동안 점차 복합적 생명 형태가 지구상에 출현하게 되었으며, 결국은 매우 복잡한 인간의 신경 체계까지 탄생하게 되었다는 사실에 관해서는 의문의 여지가 없는 듯하다. 대뇌 피질의 진화로 의식이 생겨나게 되었으며, 현재 이러한 인간의 의식은 마치 대기권만큼이나 지구를 철저히 감싸고 있다. 복합화라는 현실은 현재이기도 하고 미래의 당위이기도 하다. 지금까지 일어나 왔고, 지구를 지배하는 조건들을 고려해 볼 때 앞으로도 일어날 것이 분명한 것이다. 그러나 우리가 계속되기를 원하지 않는다면 지속되지 않을 수도 있다. 진화의 미래를 바로 우리에게 달려 있는 것이다.

 지난 수천 년 동안 - 진화로 볼 때는 눈 깜짝할 시간에 불과하지만 - 인간의 의식의 분화에 놀라운 진보를 이룩해 왔다. 우리는 인간이 다른 생물 형태와는 구별된다는 사실을 깨닫게 되었다. 각 개인이 다른 사람들과 서로 다르다는 사실도 인식하게 되었다. 우리는 또한 추상 개념과 분석 능력도 개발해 냈다. 즉 낙하하는 물체의 속도를 그 무게와 질량으로 측정하는 능력과 같이, 물체의 각 차원과 과정들을 구분 짓는 능력도 갖게 된 것이다. 바로 이와 같은 의식의 세분화 과정 동안 과학과 과학 기술 그리고 인간의 환경을 구축도 하고 파괴도 하는 전례 없는 능력도 생겨나게 되었다.

 그러나 복합성은 분화뿐만이 아니라 통합으로 구성되어 있다. 다음 세대에서의 인간의 임무는 개발되지 않은 정신적 능력을 개발하는 것이다. 우리가 다른 사람들과 환경으로부터 우리 자신을 구별할 수 있게 되었듯이, 이제 우리는 어렵게 얻은 우리의 개인성을 잃지 않으면서도 우리 주변의 존재들과 우리 자신을 재통합할 수 있는 방법을 배울 필요가 있다. 미래의 가장 유망한 신념은, 우주 전체가 불문율에 의해서 서로 연관되어 있으므로 이를 고려하지 않고 우리의 꿈과 열망을 자여에 강제하려 하는 것은 이치에 맞지 않는 일이라는 깨달음에 기초한 것이 될 것이다. 인간의 의지의 한계를 인식하고, 우주 속에서 지배적이기보다는 협조적인 역할을 받아들이게 된다면, 우리는 마침내 고향에 돌아가게 된 유랑자의 안도감을 느끼게 될 것이다. 그렇게 되면 각 개인의 목적이 우주적 플로우에 융합되면서 의미를 찾는 문제도 더불어 해결할 수 있을 것이다.

 

 마돈나의 첫번째 싱글 히트곡 Like a virgin의 MTV  VMA의 공연에 대한 이야기로 서두를 연다.

 

 이 책의 주된 주제는 평균에 매몰되어 모든 이에게 잠재되어 있지만 사장되는 능력의 발현에 관한 이야기다.

 주요한 줄거리는, 평균치라는 대표 데이터(집단)를 자세히 파고 들어 개별의 데이터(개인)에 집중해보니, 고난과 역경을 이기고 성공하는 이들에게 보이는 몇 가지 중요한 지점을 발견하게 되었다는 것이다.

 보면 고개가 끄덕여지는 설득력이 강한 사례들을 통해 저자의 주장에 힘을 실어주고 있고 바로 그러한 지점에서 이 책의 가치가 있다.

 마돈나, 키신저, 카라얀의 사례가 특히 인상적이며 인종, 태생등으로 부터 비롯되는 온갖 사회적 차별로부터 성공을 한 이들을 통해 부정적 신호들을 차단하고 긍정적인 계기를 통해 잠재력을 드러낼 수 있는 계기를 어떻게 하면 가질 수 있을 것인가에 대한 실질적인 지침이 될 만한 내용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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p35

 

 요즘 야구선수들은 이렇게 정신 산만하게 만드는 수많은 요인에 둘러싸여 있다. 그래서 스스로에 대해 잘 알기보다 주변의 반복되는 평가로 자신의 모습을 형성한다.

 반면에 윌리엄스가 선수 생활을 하던 1940년대에는 비행기도 없었기 때문에 10시간 넘게 기차를 타는 일이 다반사였다. 기차 속에서 스마트폰도 없이 서로의 얼굴을 마주보던 선수들은 그 시간의 대부분 타격에 관한 이야기를 진지하게 나눴는데, 그 열차 속에서 야구계의 전설적인 마지막 4할대 타자와 통산 타율 역대 2위 타자, 타격왕들이 쏟아져나왔다. 그중에서도 조 크로닌은 타자들에게서 최고의 감독으로 손꼽혔는데 그는 늘 선수들과 함께 타격에 대해 토론하며 깊은 생각을 유도해 타수로서의 자신을 정비하도록 했다.

 "당시에는 텔레비전도 없었고, 따로 굴리거나 즐길 만큼의 큰돈을 벌지도 못했다. 오직 완벽히 야구에만 전념하게 만드는 환경이었던 것이다." 페드로이아는 윌리엄스의 교훈을 그대로 따랐다. 그는 보스턴 레드삭스 선수들 중 경기장에 가장 먼저 나타나는 선수였으며, 금주는 물론 야구 외의 취미 생활은 아무것도 가지고 있지 않았다. 그는 주변의 자신을 향한 잡음들을 놀라울 만큼 차단했다. 제임스는 말한다.

 "다행스럽게도 페드로이아는 정말 대단한 자신감의 소유자입니다. 다른 사람에게 주눅이 들고 또 다른 사람이 하는 말을 쉽게 듣는 성격이었다면, 그는 아마 스스로를 망치고 말았을 겁니다. 이 친구는 다른 사람 말을 듣지 않았습니다. 고집스럽게 한 우물을 파며 크고 강한 스윙을 계속한 거죠. 그러다 보니 마침내 새로운 일이 일어나기 시작한 겁니다.

 평균적인 운동선수로 일관되게 평가될 때 그는 제임스의 성공 곡선을 그려보며 자신의 은퇴 나이와 합리적인 예상 통장 잔고를 정하느라 분주하지 않았고, 평균적인 야구선수라면 누구나 고민할 시즌 우승 하나당 얼마를 더 벌게 된 것인가도 깊게 고민하지 않았다.

 오히려 페드로이아는 업계에 있던 모든 사람들을 당황시키는 행동을 보였는데  MVP  수상 직후 4,050만 달러 계약서에 대충 사인을 하고는 연습을 마저 하러 경기장으로 돌아가버린 것이다. 훗날 테오엡스타인 단장은 이 계약에 대해 '너무 적은 돈' 때문에 양심의 가책을 느꼈다고 털어놓았다. 그러나 일반인들은 상상도 할 수 없을 수천만 달러를 두고 장기간의 밀고 당기는 연봉 협상은 오히려 그의 정신을 산만하게 만들 뿐이었다.

 한번은 그의 동료인 데이비드 오티스가 새벽 동틀 때 훈련을 나갔는데 경기장에는 페드로이아가 먼저 도착해 방망이를 휘두르고 있었다. 오티스는 결국 인정했다.

 "페드로이아만큼 야구에 완전히 빠져 있는 선수는 제 선수 경력을 통틀어서 본 적이 없습니다."

 잡음을 차단하면 완전하게 전념할 수 있다. 그리고 그 전념은 모두가 '재능 없다'고 단정 지은 것에도 돌을 던질 수 있다. 이것이 윌리엄스의 교훈이다. 페드로이아가 MVP에 오른 뒤 기자들이 뒤늦게 슈퍼스타 탄생의 비결이 뭐냐고 물었을 때 페드로이아는 말했다.

 "당신이 뭘 압니까? 나는 숫자니 통계니 하는 것 따위는 거들떠보지도 않습니다. 내가 신경 쓰는 건 승리의 'W'와 패배의 'L' 뿐입니다. 이것 말고는 나한테 중요한 건 아무것도 없습니다." 페드로이아의 어조는 상당히 직설적이고 공격적이다. 그럼에도 우리는 그의 상처가 엿보이는 인터뷰를 이해할 수가 있다. 페드로이아가 모두의 예상을 꺾고 혜성처럼 등장했을 때 그가 제일 먼저 한 것은 자신의 재능을 별 것 아닌 것으로 분류했던 그의 고향 캘리포니아의 우드랜드를 '쓰레기장'으로 표현해버린 사건이었다.

 "내 말은 내가 책임집니다. 나는 정말 신경 안 써요."

 한편 우드랜드로부터 페드로이아의 재능을 놓쳤던 한 스카우터는 익명을 요구하면서 자신이 놓친 1억 달러의 아쉬움을 털어놓았다.

 "내가 내렸던 평가는 이거다. 페드로이아는 분명 체인지업 기술도 제대로 구사하지 못했고, 그의 경기 능력은 잘 봐주면 평균, 제대로 말하자면 평균 이하인 것들이 많았다. 그런데도 내가 페드로이아를 1회전으로 선발해서 내세운다면, 사람들이 누가 나를 스카우터로서 제정신이라고 생각하겠는가? 내가 페드로이아를 놓친 것은 정말 아쉽지만 페드로이아는 평균 이하였다."

 과연 그럴까? 스카우터는 솔직하게 인정해야 했다. "그래, 이것이 내가 내린 평가였고 그 친구는 해냈단 말이지. 젠장, 그는 해냈다고."

 중요한 지점은 페드로이아가 전문가들의 가혹했던 평가에 신경조차 쓰지 않았다는 사실이다. 그의 이러한 차단은 새로운 성공 곡선을 만들었다. 페드로이아는 MVP로 당당하게 성공했고 스카우터들의 당황한 표정에도 신경 쓰지 않았다. 그에게는 야구공과 배트만이 보였고 그 단순한 집중이 모든 그래프를 뛰어넘어 새로운 그를 만들었다.

 그리고 1억 달러를 거머쥔 다음 날에는 그는 아무 일 없었다는 듯이 모두가 잠든 새벽 다섯 시에 혼자서 연습용 방망이를 휘두르고 있었다.

 

p44

 성공하는 사람들은 연구할수록 노력하려는 개인의 소박한 의지보다는 그들을 둘러싼 긍정적 환경의 신호들이 그들을 순환적으로 더 노력하게 만들었다는 점에 있다.

 

p45

 만약 이 부정적인 신호들을 차단하고 다시 공부를 시작한다면 어떨까? 스틸과 그의 동료들은 학교로 가서 성적이 중간 정도 되는 학생들을 데리고 나왔다. 그리고 학생들을 세 분류로 나눠서 아주 간단한 '환경의 신호'를 던졌다.

 첫 번째 그룹엔 '상위권 학생과 경쟁해야 한다'는 신호를 보냈고, 두 번째 그룹의 경우 상위권과 비교당하던 부정적인 환경 신호들을 차단시켰다. 마지막으로 세 번째 그룹엔 부정적인 환경 신호를 차단하면서 공부는 '자신의 힘을 키우는 의미 있는 경험'이라는 긍정적인 신호를 보냈다. 과연 이 간단한 신호들이 무엇을 바꿀 수 있을까? 스틸의 주장대로 눈으로 바뀐 것은 없다. 학교 선생님은 여전히 같았고, 교과서도 바뀌지 않았으며, 시험지 또한 언제나처럼 객관적이다. 게다가 우리는 공부 못하는 학생들이 열등감을 이야기하는 것을 핑계라고 여긴다.

 그러나 스틸은 누구도 예상하지 못한 결과를 얻었다. 공부를 못하는 학생들로부터 '공부를 못한다'는 주변 신호를 차단하자 전 세계 심리학자들의 눈길을 집중시켰는데, 그들의 성적이 두 배가량 확연하게 뛰어오른 것이다. 특히 마지막 세 번째 그룹의 학생들에게 이러한 반전의 효과가 시간이 지날수록 강해졌다. 변변찮은 주립대학이나 갔을 학생들에게 아이비리그이 입학장이 보였던 것이다. 이 놀라운 연구에서 외형적으로 바뀐 것은 아무것도 없었다. 이 모든 변화는 온전히 학생의 내면에서 일어났다.

 스틸이 최초로 발견한 이 현상에서 더 인상적인 지점은 이러한 변화를 위해 당신의 유전자와 부모님이 어떤 사람인지, 또는 얼마나 공부를 열심히 해왔는지 따위를 꼬치꼬치 캐묻지 않아도 된다는 사실이다. 바로 지금 환경의 신호를 차단하고 목표에 온전히 집중한다면 변화가 일어난다.

 "환경의 신호를 차단하는 것은 가난이나 유전자 등을 바꾸는 것보다 더 현실적이라는 점에서 분명한 이점을 가진다."

 스틸의 이 연구 결론대로,, 부정적인 신호를 차단하는 것은 개인의 내면적 힘에 다가가게 한다. 그리고 하버드대학 심리학자인 헤더 그레이 교수는 스틸의 연구에 이어 긍정적인 환경 신호에도 의문을 품었다.

 열등생들이 부정적 신호 때문에 성적이 떨어진다면 '1등급 학생', '상위 1%'와 같이 긍정적인 환경 신호를 계속 받는 상위권 학생들에게서 이 신호를 차단하면 어떻게 될까?

 하버드대학의 마가렛 쉬 교수는 실험을 통해 상위권 학생들을 향한 성적에 대한 긍정적 신호를 꺼버렸다. 그러자 자신의 우월함을 더는 확인할 수 없는 상황이 된 상위권 학생들이 고난이도 문제를 풀때의 성적이 현저하게 떨어졌다. 그러나 다시 중위권 학생들과 경쟁을 치르게 하자 상위권 학생들의 성적은 눈에 띄게 올라갔다.

 쉬의 연구에서 우리가 놀라게 되는 부분은 중위권 학생들이 가지는 열등감이 상위권 학생에게는 우월감을 느낄 수 있는 연료로 쓰여진다는 점이다. 특히 그 우월감에 대한 신호가 노골적일 때보다 은근하게 배여 있을 때 상위권 학생들의 성적은 눈에 띄게 높아졌다. 마치 자신의 특권을 즐기는 듯이 성적이 올라갔지만 정작 그 연료가 사라지면 상위권 학생들의 성적은 다시 뚝 떨어졌다.

 이 효과는 너무 분명해서 심리학자들의 여러 분야 실험을 통해서도 반복해 증명이 되었다. 누군가의 낮은 위치와 무너진 열등감은 반대의 사람에게는 조용한 우월감과 성취감이 된다. 심리학자들이 관찰하면 할수록 이 환경의 신호가 누군가에게는 선순환이, 또 다른 누군가에게는 악순환으로 이어지는 것이 목격되었다.

 그렇다면 이렇게 거대한 차이는 어디서부터 시작되었던 걸까? 예일대학 심리학 교수인 리처스 니스벳은 우리가 어렸을 때의 아주 사소했지만 결정적이었던 '인지 문화' 에서부터 답을 찾고 있다.

 심리학자들의 관찰 결과 전문직 부모는 시간당 2,000개의 단어를 아이들에게 구사하지만 노동 계층의 부모는 고작 1,300개의 단어를 사용한다. 이것이 세 살만 되어도 전문직 가정의 아이는 3,000만 개의 단어를 듣게 되지만, 노동 계층에서는 2,000만 개 이상은 듣지 못한다. 아이들은 여기서부터 이미 학습량의 상당한 차이를 겪게 된다.

 그리고 이 아이들이 처음으로 부모님의 품을 떠나 교실 문을 밟을 때 교사의 눈에는 3,000만 개의 단어를 접한 미래의 명문대생과 2,000만 개 이하의 단어를 접한 공장에 있을 아이들이 구분된다. 그리고 파리 우에스트낭테르대학의 패트릭 고슬링은 교사들이 제자들의 성적을 어떤 식으로 해명하는지 연구했다. 연구 결과 교사들은 성적 부진의 이유를 주로 가정 환경에서 찾은 반면 우수한 아이의 성적은 하나같이 교육진의 뛰어난 능력 때문이라고 여겼다.

 결국 이 과정에서 아이들의 재능은 상당 부분 무시되고 긍정적 환경의 신호가 사라진다. 그리고 대부분이 중위권 성적의 학생으로 눌러앉게 된다. 그러나 한 번 상위권에 진입한 아이들의 성적은 로즌솔의 손가락으로 '누적'되고 '강화'된다.

 스틸이 바꾼 것은 이렇게 파괴적인 신호들에 대한 차단이었다. 사회심리학자 로랑 베그의 지적처럼 "자기 자신에 대한 생각은 상당 부분 타인의 판단"에서 온다. 스틸은 그 잘못된 판단을 차단시키는 중요성을 처음으로 밝혀냈다.

 이들의 연구 결과는 우리의 의지보다 의지를 만드는 긍정적인 신호들이 훨씬 강력하다는 것을 알려준다. 학생들이 똑같이 연필을 잡아도 왜 어떤 학생들은 끝까지 버티는 반면에 어떤 학생들은 포기해버릴까? 이 질문에 대한 답은 이제 풀렸다. 그것은 각자의 신호가 다르기 때문이다. 당신이 1등이라면 1등처럼 행동할 것이다. 그러나 꼴찌라면 결코 1등처럼 행동하지 않을 것이다. 예일대학 교수인 윌리엄 데레저위츠는 이 부분을 한 하버드대 학생의 논문을 통해 지적한다.

 "하버드대학에 대해 논문을 쓴 4학년 여학생이 있었다. 그 여학생은 논문에서, 모교인 하버드대학이 학생들에게 자기 효능감을 주입하는 데 아주 뛰어나다고 기술했다. '세상 속으로 들어가 자신이 하고 싶은 일은 무엇이든 할 수 있다'는 식으로 말하는 것이다. 또한 학생들 중에는 시험에서 A학점을 받고 '문제가 너무 쉬워서'라고 말하는 아이가 있는가 하면, '내가 똑똑하니까'라고 말하는 아이도 있다고 했다. 잘난 척하는 것처럼 들릴 수도 있지만, 그 여학생이 말하고자 한 바는 하버드대학이 이 중에서 후자처럼 말하는 유형의 학생들을 길러내는 능력이 뛰어나다는 것이었다."

 그러나 이들과 반대로 대부분의 평범한 학생들은 평범해지는 신호를 받는다. 평범한 신호를 받는 학생들은 아무도 "내가 똑똑하니까"라고 말하지 않는다. 반대로 "나는 평범하니까"라고 말하는 데 익숙해진다. 주변의 신호가 1등의 신호가 아니라면 이제 우리는 그 신호부터 차단해야 한다.

 심리학자인 앤크리스틴 포스텐은 환경의 신호는 우리가 그것을 신뢰해야 영향력이 생긴다는 사실을 연구 결과로 밝혀냈다.

 "모든 환경적 신호는 받아들이는 대상이 자기 신호라고 생각해야만 영향을 줄 수 있다. 만약 자신을 향한 부정적인 환경의 신호를 인정하지 않으면, 그 신호의 효과는 적어도 개인에게는 분명하게 차단되는 현상이 발견되었다. 그 어떤 사람이라도 자신을 만드는 환경적 신호를 인정하거나 거부할 수 있고, 그 영향력은 대단하는 것이 연구 결과로 밝혀지고 있다. 인간은 기본적으로 사회 체계를 신뢰하도록 성장해왔기에 개인을 향한 부정적인 환경의 신호도 신뢰하도록 진화해왔다. 그러나 이제 그것을 거절해야 할 이유가 분명하게 밝혀졌다."

 내가 만약 교실에 가서 "너는 외계인" 이라고 학생들에게 말한다면 아무도 나의 말에 반응하지 않을 것이다. 하지만 몇몇 중위권 학생들을 불러내어 "너의 인지 사고력은 다른 학생들에 비해 떨어지는 편"이라고 말한다면 그 학생들의 성적은 현저하게 더 떨어진다. 이것이 바로 사회심리학자들이 발견한 사실이다. 학생들이 내가 던지는 신호를 자신의 것으로 흡수해버리는 것이다. 하지만 그 신호를 차단하는 것도 자신의 선택이라는 것을 알게 된다면 학생들의 성적은 떨어지지 않는다.

 결론적으로 현재의 위치가 자신의 전부가 아니라고 믿는 것은 스틸이 선물한 차단의 막과 같다. 열등감을 가진 학생들이 감정을 끊고 객관적으로 공부의 의미를 다시 새기며 온전히 자신에게 집중하는 것은, 교실 뒷자리에 앉아 있었던 키신저가 하버드에 오로라를 풍겼던 것과 같다. 다시 그에게로 돌아가 똑같은 차단의 법칙이 적용되었는지를 확인해보자.

 

p54

 심리학자 게리 맥퍼슨은 한 악기를 배우던 아이들에게 "여러분이 새 악기를 얼마나 오래 연주할 거라고 생각합니까?" 라고 물어봤다. 그리고 관찰 결과 장기적인 결의를 가지고 있는 아이들이 단기간만 악기를 다루겠다고 한 아이들보다 무려 네 배나 우수한 연주 실력을 가지는 것이 발견되었다. 여기서 아이들의 재능 차이도 고려해야 되지 않을까? 아니, 전혀 고려할 필요가 없었다. 재능이 낮아도 장기간의 결의를 가진 아이들이, 재능이 훨씬 많지만 단기간을 예측한 아이들보다도 비교할 수 없을 만큼의 높은 연주 실력을 얻게 된 것이다. 맥퍼슨은 자신의 연구 결과를 "아주 이른 어떤 시점에 아이들은 자신이 음악가라는 생각을 내면화하는 결정적인 경험""을 하고 있는 것이라고 정리했다. 최근의 신경과학 연구 또한 '결의를 가지고 하는 연습'이 생리적인 효과가 있음을 보여준다. 뇌는 유연하고 그 결의는 연습으로 바뀌는 것이다.

 

p118

 "엘리트 학생들의 평온함, 뛰어난 달성이라는 그 허울 뒤에 숨겨진 것은 분명 두려움이다. 지나치게 까다로운 입학 과정과 살벌하기 그지없는 경쟁 속에서 명문대에 들어간 아이들은 말 그대로 성곡 이외에는 경험한 것이 없다. 성공하지 못할 거라는 예감은 이 아이들을 두려움에 떨게 하고 방향을 잃게 만들며, 좌절시킨다."

 데레저위츠는 말을 이어나간다.

 "설령 일시적인 경험이라 할지라도 기대에 부응하지 못했을 때의 좌절은 단순히 현실적인 문제가 아닌 존재론적인 문제가 되어버린다."

 

p121

 첼시가 소식지 일을 맡았을 때를 경영자 입장에서 판단한다면 더 그러하다. 완벽한 소시지를 만들기 위해 첼시는 모든 글자 하나하나를 꼼꼼히 검토하는 열정을 쏟아부었고 고객들과 동료들 그리고 상사조차도 처음으로 마음에 들게 했다. 하지만 첼시는 중요한 실수를 저질렀다. 극비 사항인 회사 내부용 지방채 평가기준 자료 하나를 실수로 소식지에 실어버린 것이다. 이에 대해 첼시가 방어하는 대화를 살펴보자.

 "그건 회사 기밀이야. 이런 내부 기밀은 어떤 경우에도 고객 상대로 내보내면 안 돼. 외부 유출 자체가 큰 골칫거리라고!"

 "전 그런 줄 몰랐어요. 소식지에 같이 포함시켜야 된다고 생각했거든요."

 "뭐가 어쨌건 간에 포함시켜선 안 되는 거였어!"

 최고 책임자의 호통 앞에서 첼시는 상사가 자신을 옹호해주길 바랐다. 어쨌거나 상사가 자신이 만든 소식지를 최종 확인해야 할 책임이 있었기 때문이다. 첼시에게 상사는 자신을 책임져야 할 선생과 같은 존재였다. 그런데 그 선생이 입을 다물었다. 사회는 실전이었다. 자신의 실수 앞에서 아무도 그녀를 변호해주지 않았다.

 "이 사람들은 내가 뭔 짓거리를 하고 있다고 생각한 거야? 난 아무런 실권이 없다고! 난 그저 다른 사람들이 시키는 것만 하고 있을 뿐이야!"

  첼시가 방금 경험한 것은 회사에서 흔하게 일어날 수 있는 실패다. 누구나 회사에서 이 정도 치욕은 쉽게 경험한다. 하지만 설령 일시적인 경험이라 할지라도 기대에 부응하지 못했을 때 존재론적인 문제가 되어버릴 정도로 성공의 신호만 받았던 엘리트들에게는 큰 실패로 인실될 수 있는 것이다. 그 뒤로 첼시는 평균적인 사람들로서는 이해하기 어려운 모습을 보였다.

 그 일을 겪은 지 며칠 뒤 첼시는 일에서 완전히 거리를 뒀다. 점심 시간을 길게 가졌고 낮 시간에도 미드타운 근처를 오래 걸었다. 비는 시간이면 공책을 꺼내 창업 구상을 하면서 회사 로고를 그려보기도 했다.

 보통 사람이라면 술 한잔ㅇ로 털어버릴 일에, 회사 자체를 그만두려는 모습은 한편으로 지질해 보이기도 한다. 하지만 첼시에게는 존재론적인 문제를 흔드는 일이기에 충분했다. 고개를 들어보니, 처음으로 집단에서 평균 이하의 취급을 당하고 있지 않은가? 그리고 첼시는 근본적으로 집단에서 자신이 별 것 아니라는 감정을 처음으로 느낄 수 있었다. 그레그 스미스는 월스트리트의 날카로움을 이렇게 기록했다.

 "SAT 1,600점을 맞고 하버드대학을 1등으로 졸업한 세상에서 제일 똑똑한 사람도 골드만삭스에서는 완전한 재앙이 되어 입사한 지 1년 안에 해고되었다. 이런 일은 번번하게 일어났다. 판단력은 배울 수 있는 것이 아니기 때문이다. 그리고 그 여름에 최고의 대학을 나온 학생들이 차례대로 쫓겨나기 시작했다."

 하버드대학을 1등으로 졸업하는 것보다 더 중요한 것은 과연 자신의 분야를 향한 '차단된 열정'을 가지고 있는가였다. 그리고 첼시가 확인한 이 분야에서 가장 밝게 빛나던 빛은 블랙 다이아몬드였다. 자신의 빛은 없었다.

 첼시는 결국 자신의 패배를 인정했다.

 "뭐 대단한 반역자처럼 굴려는 건 아니지만, 난 여기 남고 싶지 않아."

 

p160

 그리고 편지를 다시 읽어보자. 편지에는 익숙한 이름이 등장했었다. 자신의 경력을 박살내려 한 푸르트벵글러의 연주회를 관람했다고? 더 인상적인 지점은 카라얀이 베를린 국립가극장의 지휘자가 되고 푸르트벵글러가 본격적으로 경계를 하기 시작할 때도 푸르트벵글러의 음악회에 변장을 하고 찾아가 들었다는 사실이다. 상식적으로 이해가 되지 않는 대목이다. 그는 카라얀의 인새을 망치려 들었다. 이 의문에 카라얀은 보통 사람들의 감정과는 동떨어진 답을 한다.

 "토스카니니와 푸르트벵글러는 지휘에서 최고의 경지에 도달했고, 그 둘의 장점을 하나로 융합하는 것이 저의 최종 목표였으니까요."

 푸르트벵글러는 즉흥적으로 주관적인 영감을 자유로이 해석했다면, 토스카니니는 '지휘자는 작곡가가 창조한 음악의 단순 전달자'라는 생각에 악보에 충실한 음악을 선사했다. 그 두 거장의 뒤를 조용히 밟았던 카라얀은 이들의 중간 접점을 유지하면서 독자적인 음악 세계를 구축하는 것을 최종 목표로 잡았다.

 카라얀이 이 음악적 세계관을 생각했을 때 무언가 무릎이 탁 쳐지는 것이 없는가? 1954년 푸르트벵글러가 죽고, 1955년 그의 뒤를 카라얀이 이은 것은 우연이 아니다. 푸르트벵글러의 다음 차세대 지휘자를 찾던 스카우터들에게 유일한 답안지는 카라얀이었다. 카라얀의 오두막에는 푸르트벵글러라는 들소가 있었던 것이다. 그 들소가 성난 표정으로 자신을 위협하려 들어도 가장 소중한 들소를 바라보던 카라얀의 표정에는 깊은 기다림이 있었다. 성공은 개인의 노력만으로 이뤄지지 않는다. 개인의 재능에 맞는 때가 도래해야 한다. 그 들소가 더는 힘을 쓰지 못하자 카라얀은 조용히 오두막을 나왔다. 결국 그는 때를 자신의 편으로 만들 수 있었다.

 그것은 어느 정도의 경지였는가? 카라얀이 지휘를 하던 도중에 한 오케스트라 단원이 음이 틀려 카라얀에게 사과를 한 적이 있었다.

 "미안해요, 카라얀. 파리 한 마리가 제 악보 위를 돌아다니는군요. 그것 때문에 신경 쓰여서 음이 틀려버렸지 뭐예요."

 그때 카라얀은 모두가 놀랄 한마디를 남겼다.

 "신경 쓰지 말아요. 그 파리도 함께 연주하게 하세요."

 완벽한 환경 신호의 차단과 분명한 집중, 그 속에서 만들어지는 오두막의 힘은 강려가다. 누구나 모든 환경 신호를 차단할 수 있는 오두막을 지을 수 있다. 그리고 남들이 권하는 '장미' 대신에 자신만의 가장 소중한 '들소'를 떠올리는 것, 그것에는 이전과 다른 특별한 힘이 있다. 

 

p207

 혁신은 하버드나 세계적인 기업의 연구소에서만 탄생하는 것이 아니다. 오히려 하버드와 세계적인 명문 대학들은 산업혁명의 거대한 혁신을 유지하기 위한 평범한 엘리트들을 대량 양산하기 위해 만들어졌다는 것이 학자들의 일관된 지적이다. 가장 영향력 있는 교육학자 켄 로빈슨의 지적을 들어보자.

 "19세기 이전에는 세계 어디에도 공교육 제도가 존재하지 않았어요. 산업사회의 수요에 의해서 생긴 것들이지요. 그리고 이 숫자는 폭발적으로 증가하고 있습니다. 유네스코에 의하면, 역대 대학 졸업생 숫자보다 앞으로 30년 동안의 졸업생 숫자가 더 많을 거라고 합니다. 전에는 학사를 필요로 한 직업이 이제는 석사학위를 필요로 하게 되었고, 석사학위를 요구했던 직업들은 이제 박사학위를 요구합니다. 학위 인플레이션이라고 보면 됩니다. 그걸 보면 교육 제도의 전체적인 구조가 변화되고 있다는 것을 알 수 있죠. 저희는 지성을 보는 관점을 많이 바꿔야 됩니다.

 

p222

 세계적인 심리학 권위자인 해리 바릭은 십여 년간의 장기 추적 연구를 통해 <단어 학습의 지속과 간격 효과>를 발표했다. 바릭은 두 그룹으로 학생을 나눴다. 첫 번째 그룹은 사회가 흔히 학생들을 테스트하는 방식대로 1년 정도의 시험 기간을 잡고, 2주마다 26회에 걸쳐서 학습한 것을 암기하게 시켰다. 그리고 두 번째 그룹에서 바릭은 모험을 시도했는데, 무려 4년 동안 두 달에 한 번씩 첫 번째 그룹과 똑같이 26회에 걸쳐 암기하게 시켰다.

 바릭이 이 장시간의 연구에서 풀고자 한 질문은 이것이다.

 "한 분야에 대한 오랜 기간의 학습이 집중 학습을 이겨낼 수 있을까?"

 우리가 바릭의 십 년 연구의 결과를 보기 전에, 첫 번째와 두 번째 그룹이 학습한 총 시간은 완전히 똑같다는 것을 잊어서는 안 된다. 다만 두 번째 그룹이 더 길게 한 분야를 잡고 있었을 뿐이다. 게다가 첫 번째 그룹이 2주에 한 번 적절한 시기에 학습했다는 것을 다시 상기해보자면, 겨우 두 달에 한 번씩 학습을 이어나가는 집단에 대한 연구는 무모해 보인다. 그렇지 않은가?

 그러나 바릭이 발견한 것은 보통 사람들의 예상과는 정반대였다. 2주 간격으로 26회, 딱 평균적인 시험공부에 익숙했던 첫 번째 그룹의 학생들은 5년의 시간이 지났을 때 그들이 학습한 것에 겨우 절반 수준인 56%만 기억했고, 두 달에 한 번씩 그러나 학습 기간을 늘린 학생들은 무려 76%를 기억하고 있었다. 모두의 허를 찌른 연구 결과에 가장 당황한 것을 정작 바릭 본인이었다.

 "누가 예상했겠는가? 정작 이 연구에 십 년을 쏟아부은 나도 전혀 예상하지 못했다. 두 달이 지나면 다 까먹을 줄 알았다."

 바릭의 연구 결과에서 주목할 수밖에 없는 것은 얼마나 한 분야를 오랫동안 포기하지 않는가가 노력의 총 시간보다 더 중요하다는 사실이다. 초반에 최고의 성적을 거둔 학생들이 사회가 만들어주는 배지에 취해 있을 때, 적당한 곳에 흘러들어간 학생이 끝까지 시동을 끄지 않는다면 누가 더 최고의 자리에 오를지를 쉽게 단정할 수가 없다는 것이다. 하버드의 가장 빛나는 지식들도 졸업하고 뒤돌아보지 않으면 절반은 사라져버리는 현상이 발견되기도 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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