We've only just begun to live
White lace and promises
A kiss for luck and we're on our way
(We've only begun)

우린 이제 막 우리의 삶을 시작했어요.
새하얀 레이스와 약속들
행운의 키스와 함께 우리의 길을 걸어가네요


Before the risin' sun, we fly
So many roads to choose
We'll start out walkin' and learn to run
(And yes, we've just begun)

해가 뜨기 전에, 우리는 날아올라
선택할 길들은 많아요
우리는 걸어가면서, 뛰는 걸 배울거에요.


Sharing horizons that are new to us
Watching the signs along the way
Talkin' it over, just the two of us
Workin' together day to day
Together

우리에게 놓여진 새로운 지평선들을 나누고,
길에서 징표들을 보면서,
이야기를 나누어요, 단지 우리 둘 뿐이에요.
매일매일 함께 일해요.


And when the evening comes, we smile
So much of life ahead
We'll find a place where there's room to grow
(And yes, we've just begun)

저녁이 되면, 함께 웃어요.
수 많은 날들이 놓여있어요.
우리는 함께 자라날 곳을 찾게 되겠죠.


Sharing horizons that are new to us
Watching the signs along the way
Talkin' it over, just the two of us
Workin' together day to day
Together
Together


And when the evening comes, we smile
So much of life ahead
We'll find a place where there's room to grow
And yes, we've just begun

 

 

 2016년 트럼프의 당선, 영국의 브렉시트를 천박한 포퓰리즘의 승리로 매도하는 중도 좌/우파의 신자유주의 신봉자들에게 일침을 가하는 내용.

 원제는 The Tyranny of Merit로 능력있는 자들이 독재, 혹은 엘리트들의 독재 정도로 이해하면 될 것 같다.

 번역된 공정하다는 착각은 좀 생각해보면 현재의 능력주의적 신자유주의가 기회의 평등을 신봉하지만 그 자체가 능력에 따른 계급을 고착화시키고 이러한 고학력 지식인들이 교육이라는 매개를 통해 지위를 세습하는 아이러니를 비판한다.

 미국의 양극화-특히 고등교육을 이수한 자와 아닌 자의 차이로 인한-를 자세하고 다루고 있지만, 대한민국의 현실에도 생각할 부분이 많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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p31

  물론 실제로 보면 그렇게 문제가 간단하지 않다. 돈은 뒷문뿐만 아니라 정문 앞에도 떠돈다. 실력대로라고? 사실 실력은 경제적 우위와 구별해서 보기가 어렵다. SAT처럼 표준화된 시험은 그 자체로 능력주의를 의미한다. 따라서 경제적으로 가장 어려운 배경을 가진 학생이라 할지라도 지적인 장래성을 보일 수 있는 시스템이라고 여겨진다. 그러나 실제로 SAT 점수와 수험생 집안의 소득이 비례관계를 나타낸다. 더 부유한 집 학생일수록 더 높은 점수를 얻을 가능성이 크다.

 

p46

 시장친화적이고 기술관료적인 세계화의 개념은 좌우 주요 정당들에게 고스란히 수용되었다. 특히 중도 좌파 정당이 시장 중심적 사고와 시장적 가치를 수용한 일은 무엇보다 의미심장했다. 이는 세계화 프로젝트의 진행에, 그리고 뒤따른 포퓰리즘의 반격에 큰 영향을 미쳤다. 트럼프가 당선될 즈음 민주당은 기술관료적 자유주의 정당으로서 한때 그 지지기반이었던 노동자와 중산층 유권자 대신 전문직업인들에게 한껏 기울어져 있었다. 브렉시트 당시의 영국 노동당, 유럽의 사회 민주당들도 마찬가지였다.

 이런 변화는 1980년대부터 시작되었다. 로널드 레이건과 마거릿 대처는 "정부는 문제이고 시장이 해답이다"라고 주장했다. 그들이 정치 무대에서 물러나자, 미국 빌 클린턴, 영국 토니 블레어, 독일 게르하르트 슈뢰더 등의 중도 좌파 정치친들이 뒤를 이었다. 그들이 시장에 대해 갖는 믿음은 이전의 리더들보다 엷었지만 각자의 사회에서 그 지배를 공고히 하는 데 한몫했다. 그들은 통제받지 않는 시장의 날선 이빨을 어느 정도 무디게 만들었으나, 레이건-대처 시대의 핵심 전제를 건드리지는 않았다. 시장 메커니즘이야말로 공공선을 달성하는 기본 수단이라는 전제였다. 이러한 믿음에 발맞춰 그들은 시장 중심적 세계화를 수용했고 경제가 갈수록 금융화되는 경향을 환영했다.

 

p56

 사실 능력 있는 사람이 통치해야 한다는 생각은 우리 시대의 전유물이 아니다. 공자는 덕이 뛰어나고 유능한 사람이 통치해야 한다고 했다. 플라톤은 공공의 정신으로 무장한 수호자 계급의 지지를 받는 철인왕이 다스리는 사회를 상상했다. 아리스토텔레스는 플라톤의 철인왕에는 반대했으나 그 역시 능력이 뛰어난 자들이 공공 문제에 가장 큰 영향력을 가져야 한다고 보았다. 그에게 정치와 관련된 능력은 부유함이나 좋은 가문이 아니라 시민적 미덕civic virtue과 실천지phronesis(공공선의 문제에 있어서 추론을 잘하는 실천적 지혜)의 탁월함이었다.

 

 미국 '건국의 아버지들'은 스스로를 "능력을 갖춘 사람Men of Merit"이라 불렀다. 그리고 그들처럼 유덕하고 유식한 사람들이 공직을 맡기를 바랐다. 그들은 세습귀족제에 반대했다. 그러나 직접민주주의도 내켜하지 않았다. 선동정치가가 정권을 잡을 가능성을 우려했기 때문이다. 그들은 미연방에 상원을 두고 대통령을 간접선거로 뽑는 등의 제도로 능력주의적 통치를 도모했다. 토머스 제퍼슨은 미덕과 재능에 근거한 '자연 귀족정'을 '부와 출신에 근거한 인위적 귀족정'보다 선호했다. 그는 이렇게 썼다. "그런 정부 형태는, 자연적으로 고귀한 사람들을 정부 공직에 앉힐 수 있는 순수한 선택을 하는 데 최고의 것이다."

 이런 저런 차이가 있어도, 공자에서 미국 공화주의자들까지 이르는 이러한 전통적 능력주의는 통치에 적합한 능력에 도덕적, 시민적 미덕이 포함된다는 점에서 같다. 그들 모두 공동선이란 적어도 부분적이나마 시민의 도덕교육으로 이루어진다고 생각했기 때문이다.

 그러나 우리가 겪고 있는 '기술관료 버전'의 능력주의는 능력과 도덕 판단의 사이의 끈을 끊어버렸다. 이는 경제 영역에서 '공동선이란 GDP로 환산할 수 있는 것'이라고 간단히 정해 버렸으며, 어떤 사람의 가치는 그가 제공할 수 있는 상품이나 서비스의 경제적 가치에 달려 있다고 못박아버렸다. 또한 정부 영역에서는 능력이란 곧 기술관료적 전문성이라고 보았다.

 이는 다음과 같은 현상들에서 분명히 드러난다. 대통령 정책고문으로서 경제학자들의 역할이 점점 커지고 있다. 공동선이 무엇인지 정의하고 그것을 달성하는 일에 시장 메커니즘이 점점 더 많이 적용되고 있다. 정치 논쟁에서 중요한 도덕적, 시민적 문제들 즉 '불평등 증가를 해결하기 위해 무엇을 할 것인가?', '국경 문제에서 살펴야 할 도덕적 부분은 무엇인가?', '일의 존엄은 무엇으로 결정되는가?', '우리는 시민으로서 서로에게 무엇을 해 주어야 하나?' 등이 소외되고 있다.

 

p70

 능력주의 논쟁은 구원을 논의할 때 다시 기독교에서 등장한다. 신앙이 독실한 사람은 교리를 따르고 선행을 함으로써 구원을 얻어낼 수 있는가, 아니면 오직 신이 각자의 생활 태도와 상관없이 구원받을 사람을 자유롭게 선택하는가? 첫 번째가 더 정당해 보인다. 권선징악의 틀에 맞기 때문이다. 하지만 신학적인 문제가 있다. 신의 전능함에 문제가 생기기 때문이다. 구원이라는 게 우리가 노력해서 얻는 것이며 따라서 받아 마땅한 것이라면 신은 거기에 얽매이게 된다. 말하자면 우리의 능력을 인정해야만 하게 된다. 구원은 적어도 어느 정도는 '스스로 구제한다'는 의미가 되며, 따라서 신의 무한한 힘에는 한계가 생기게 된다.

 두 번째는 구원을 노력과 무관한 선물로 보며, 따라서 신의 전능성을 확인하는 것이다. 하지만 그럼으로써 다른 문제를 불러일으킨다. 신이 세상 모든 것의 주재자라면 악의 존재 역시 주재하고 있을 것이다. 그런데 신의 정의롭다면 그의 힘으로 방지할 수 있는 고통과 악이 왜 발생하도록 두는 것인가? 신이 전능함에도 악이 존재한다는 것은 그가 정의롭지 않음을 의미하는 것처럼 보인다. 신학적으로 다음의 세 가지 견해가 병립하기란 (불가능하지는 않을지 몰라도) 매우 어렵다. '신은 정의롭다', '신은 전능하다', '악은 존재한다.'

 

 이 난제를 푸는 방법 하나는 인간의 자유의지를 인정하는 것이다. 이로써 악의 존재에 대한 책임은 신에게서 우리에게로 옮겨진다. 만약 신이 어떤 규범을 세웠을 뿐 아니라 개인에게 그것을 따르거나 따르지 않을 자유를 부여했다면, 우리는 옳은 것 대신 잘못된 것을 선택한 데 대한 책임을 져야 한다. 나쁜 일을 한 자는 현세 또는 내세에서 신의 처벌을 감수해야 한다. 그의 고통은 악이 아니라 위반에 대한 징벌이다.

 

p96

 

 소련의 몰락과 베를린 장벽의 붕괴로, 많은 서구인들은 역사가 자유민주주의와 자유시장자본주의로의 행로를 명백히 드러냈다고 여기게 되었다. 그런 가정에 힘입어 그들은 신자유주의적 세계화의 비전을 실천에 옮겼다. 자유무역협정, 금융 규제 철폐를 비롯한 재화, 자본, 사람의 국가 간 흐름을 쉽게 하는 여러 조치들이 취해졌다. 그들은 글로벌 시장 확대가 글로벌 상호의존성을 높일 것이며, 국가 간 전쟁 가능성은 줄어들고 민족주의 정체성이 완화되며 인권에 대한 존중은 높아질 거라고 믿어 의심치 않았다. 글로벌 경제와 새로운 IT가 가져올 긍정적 효과는 심지어 권위주의적 정권의 힘을 빼고 그들을 자유민주주의로 인도하기까지 하리라 여겨졌다.

 

 일은 그렇게 흘러가지 않았다. 세계화 프로젝트는 2008년 금융위기를 몰고 왔으며, 8년 뒤에는 격렬한 정치적 반동을 일으켰다. 민족주의와 권위주의는 사라지기는 커녕 전 세계적으로 새롭게 힘을 얻었고, 민주 사회들에서도 자유주의적 제도와 규범을 위협했다.

 

p106. 고된 노력과 정당한 자격

 

 나는 능력주의 정서가 점점 짙어지고 있음을 나의 학생들에게서 느낄 수 있었다. 1980년부터 하버드에서 정치철학을 가르쳐온 나는 때때로 학생들에게 해가 지남에 따라 자신의 의견이 바뀐 건 없는지 묻곤 한다. 보통은 그런 질문에 답이 잘 나오지 않는다. 교실에서 내가 가르치는 주제(정의론, 시장과 도덕, 신기술의 윤리학) 아래 논쟁을 벌여 보면 학생들의 도덕 및 정치관은 매우 다양했다. 그런 가운데 크게 의견이 바뀌는 경우는 별로 없었는데, 예외가 하나 있었다. 1990년대에 시작되어 지금까지 이어지는 현상으로, 갈수록 더 많은 학생들이 '자신의 성공은 자신의 덕이며, 자신이 기울인 노력에 따라 얻은 것'이라고 생각한다는 점이었다. 내가 가르치는 학생들 사이에서 이런 능력주의적 신념은 더욱 강해지고 있다.

 

 먼저 나는 이 현상이 학생들의 성장 연령대가 로널드 레이건 시대이고 따라서 당시 유행한 개인주의 철학에 물 들었기 때문 아닐까 하고 생각했다. 그러나 그 학생들 대부분은 정치적으로 보수주의적이지 않았다. 능력주의적 직관은 정치적 성향을 불문하고 널리 퍼져 있었다. 그런 직관이란 대학 입학에서의 소수집단 우대정책과 관련된 토론에서 특히 강하게 불거졌다. 소수집단 우대정책에 찬성하는 학생이든 반대하는 학생이든 '나는 죽어라 노력해서 하버드에 왔으며 따라서 나의 지위는 능력으로 정당화된다'고 여기고 있었다. 그들이 운이나 기타의 통제 불가능 요인으로 입학한 게 아니냐는 말에는 거센 반발이 있었다.

 쉽게 들어가기 힘든 대학의 학생들 사이에서 능력주의 정서가 팽배해지는 현상은 이해하기 어렵지 않다. 1970년대 중반까지만 해도 스탠포드대는 지원자 가운데 거의 삼분의 일을 입학시키고 있었다. 1980년대 초에는 하버드와 스탠포드가 오분의 일을 입학시켰다. 그러나 2019년 이 두 명문대는 이십분의 일도 입학시키지 않았다. 입시 경쟁이 처열해지면서 명문대(그들의 부모가 입학을 열망하는 대학들)를 지망하는 청소년들은 가혹한 경쟁에 뛰어들게 되었다(고급 교과과정에서 요구하는 빡빡한 스케쥴과 막대한 과제물, 심리적 부담, 사설 입시 컨설턴트와 SAT 과외교사, 체육특기를 비롯한 특별활동 강사들의 훈육, 그리고 인턴 이수와 해외 봉사점수 따기 등등 목표 대학의 입학담당자들에게 좋은 인상을 주기 위한 온갖 노력들). 이 모든 것이 자기 아이들에게 '최선'을 선물하려는 극성 부모들 때문에 빚어진 일이었다.

 

 이런 과도한 스트레스와 힘겨운 노력을 겪은 뒤에 얻은 것이, '스스로의 힘으로 쟁취한 것이며 성공은 오로지 자신의 몫'이라고 여겨지지 않기란 힘든 일이다. 그렇다 해서 학생들이 이기적인 사람이 되었다고는 볼 수 없다. 많은 학생들이 많은 시간을 공공 봉사나 그 밖의 선행에 투자하고 있다. 그러나 그런 경험은 그들을 철저한 능력주의자로 만들었다. 과거 청교도 선배들처럼 그들의 성공이 노력의 산물이라 믿는다.

 내가 대학생들 사이에서 능력주의 정서를 느낀 것은 미국에서만이 아니다. 2012년 나는 중국의 남동쪽 해안 지역에 있는 샤먼대에서 강연을 했다. 강연 주제는 '시장경제에 대한 도덕적 제한'이었다. 최근의 신문에서 아이폰과 아이패드를 사느라 자기 신장을 판 중국 10대 학생기사를 읽었던 나는 학생들에게 그 일을 어떻게 생각하느냐고 질문했다. 뒤이은 토론에서 많은 학생들은 자유지상주의적 견해를 나타냈다. 그 10대 학생이 강압이나 협박에 의하지 않고 자유의사에 따라 자기 신장을 팔기로 했다면 아무 문제가 없다는 것이었다. 이 입장에 반대한 일부 학생들은 가난한 사람의 신장을 사서 부자가 생명을 연장하는 일은 불공평하다고 주장했다. 강연이 끝난 뒤 한 학생은 내게 비공식적으로 답을 주었다. 부를 이룩한 사람은 그만한 능력을 입증한 것이며, 따라서 생명을 연장해도 된다는 것이었다.

 나는 이렇게 후안무치한 능력주의 사고의 응용에 깜짝 놀랐다. 돌이켜 보면 이런 주장이나 개인의 건강과 부가 신의 은총의 증표라고 하는 번영 복음 신앙이나 도덕적으로 동색임을 알 수 있다. 물론 내게 그런 답을 들려준 중국 학생은 아마도 청교도 사상이나 섭리론 전통과는 무관할 것이다. 그러나 그와 그의 학우들은 중국이 시장경제로 전환할 때 자라났다.

 

 부유한 사람은 많은 돈을 가질 자격이 있다는 생각은 내가 중국 방문 때 만났던 학생들의 도덕적 직관, 또한 지난 십여 년간 다수의 중국 대학에서 배양된 도덕적 직관에 깊이 뿌리내리고 있다. 문화적 차이에도 불구하고 이 중국 대학생들은 우리 하버드대 학생들처럼 치열한 입시 경쟁을 뚫은 사람들이며, 그 경쟁의 배경에는 치열한 시장사회의 경쟁이 있다. 우리가 성공하는 과정에서 다른 누군가에게 빚을 졌다는 생각에는 저항하는 한편, 우리는 스스로 성공했고 따라서 그럴 자격이 충분하다는 생각 그리고 우리의 노력과 재능에 대해 사회체제가 부여하는 보상이 아무리 크든 문제될 게 없다는 생각에 환호하는 일은 놀랍지 않다.

 

p128

 그래서 '우리 스스로가 운명의 주인'이라는 믿음이 굳건한 미국은 사회민주주의 유럽보다 덜 간대한 복지국가일 수밖에 없는 것이다.

 

p149

 "진짜 문제는 노동자의 지적 능력이 떨어지는 것과 상관없으며, 노동자의 정치적 영향력이 약한 데 있다. 생산에 종사하는 사람들은 그들이 생산한 것에서 자기 몫을 요구할 능력을 잃어가고 있다. 그들이 생산한 것에 대한 소유권을 가진 사람들은 더, 더 많이 챙겨가고 있다. 이 사실을 인식하지 못하는 민주당 사람들은 경제 현실을 제대로 보지 못한다. 그 현실이란 독점산업에서 경제의 금융화, 그리고 노동 관리 시스템에서 찾을 수 있는데, 그들은 대신 그런 현실 모두를 방치하게 만드는 도덕적 환상에 젖어 있을 뿐이다."

 

p159. 대중을 내려다보는 엘리트

 

 인종주의와 성차별주의가 지지받기 힘들 때(힘들지만 완전히 외면되는 것은 또 아닐 때다), 학력주의는 최후의 면책적 편견이 된다. 미국과 유럽에서, 학력이 시원치 않은 사람에 대한 멸시는 다른 부분에서 시원치 않은 집단에 대한 멸시보다 훨씬 두드러진다. 아니면 적어도 훨씬 잘 통용된다.

 

 영국, 네덜란드, 벨기에에서 실시된 일련의 설문조사에서 사회심리학자 연구팀은 대학을 졸업한 응답자들이 다른 약점보다 대학 졸업을 못한 약점이 있는 집단에게 더 반감을 가진다는 사실을 발견했다. 연구자들은 전형적인 차별 대상 집단들 즉 무슬림, 터키 출신 유럽 거주민, 빈곤층, 비만인, 시각장애인, 저학력자 등에 대해 고학력 유럽인들이 보이는 반응을 조사했는데, 그 가운데 저학력자가 가장 기피됨을 알 수 있었다.

 미국에서 실시된 비슷한 조사에서, 연구자들은 유럽과 다른 차별 대상 집단들을 예시했다. 흑인들, 노동계급, 빈곤층, 저학력자였다. 미국인들은 이 가운데 저학력자에 대해 가장 낮은 평가를 했다.

 

 대졸 엘리트가 그보다 못한 교육 수준의 대중을 어떻게 낮춰 보는지를 넘어, 이 연구보고서들의 저자들은 몇 가지 흥미로운 결론을 이끌어냈다. 첫째, 그들은 교육 받은 엘리트가 교육 수준이 낮은 대중보다 깨어 있어서 더 관용적이라는 익숙한 생각이 어긋남을 포착했다. 그들에 따르면 교육 수준이 높은 엘리트는 보다 못한 교육 수준의 대중에 비해 편견이 결코 적지 않다. 다만 편견의 대상이 다를 뿐이다. 더욱이 엘리트는 그런 편견을 부끄러워하지도 않는다. 그들 대부분은 인종주의와 성차별주의에는 반대할지 모르나, 저학력자에 대한 편견에 대해서는 '그러면 어때?'라는 태도를 가지고 있다.

 

 둘째, 대졸 엘리트들이 편견에 거리낌 없는 까닭은 개인 책임을 중시하는 능력주의와 관련이 있다. 엘리트는 가난이나 출신 계층을 따지기보다 학력을 따져 노동계급을 멸시한다. 학력 이외의 것은 적어도 부분적으로 그들이 어쩔 수 없었던 것이라 보기 때문이다. 반대로 낮은 학력은 개인의 노력 부족을 나타낸다고 본다. 그래서 대학에 못 간 것은 그 개인의 책임이라 여긴다. "노동계급과 비교해, 저학력자는 보다 자기 책임이 크고 더 비난받을 만하다 여겨진다. 그들에 대해서는 분노 감정이 많고, 호감이 적다."

 

 셋째, 저학력자에 대한 이런 안 좋은 감정은 엘리트만의 것이 아니다. 저학력자들 스스로도 그렇다. 이는 능력주의적 성공관이 얼마나 사회에 깊이 파고들어 있으며, 대학에 가지 않은 사람들이 그 때문에 얼마나 사기 저하를 겪고 있는지 보여준다. "저학력자들이 자신들에 대한 손가락질에 저항하는 모습을 찾을 수 없다. 반대로 그들은 그런 손가락질을 내면화하는 것처럼 보이기도 한다. 저학력자들은 자신들의 상황이 자업자득이며 욕먹어도 싸다고 여기는 듯하다. 스스로에게도 말이다."

 

 마지막으로 연구자들은 능력주의적 사회에 대학 진학이 계속 강조됨으로써 비대졸자에 대한 사회적 편견이 강화된다고 본다. "교육이야말로 사회문제 해결의 만병통치약이라는 식의 권고는, 사회경제적으로 낮은 지위의 집단이 더욱 부정적으로 평가되면서 능력주의 이데올로기가 강화될 위험성을 키운다." 이는 사람들이 불평등을 더 선뜻 받아들이게 하며, 성공은 능력 나름이라고 믿기 쉽도록 한다. "교육을 개인 책임이라 여기게 되면 교육 격차에 따른 사회적 불평등에 대한 비판이 줄어들 것이다. 교육 성과는 대체로 개인 하기 나름이라 여겨지게 되고, 그에 따른 사회적 성공 및 실패 또한 그렇게 된다.

 

p164

 

 어떤 이들은 고학력 대졸자들이 정부를 이끌어간다면 환영할 일이지 문제될 게 무엇이냐고 할지 모른다. 물론 다리를 지을 때는 가장 유능한 엔지니어를, 맹장수술을 할 때는 가장 숙련된 의사를 원하기 마련이다. 그러면 최고의 대학을 나온 국회의원을 원하면 안 될 까닭이 뭘까? 빵빵한 학력을 갖춘 고학력 리더들이 더 좋은 정책을 개발하고 더 합리적인 정치 담론을 이루지 않겠는가?

 

 아니다. 꼭 그렇지는 않다. 미국 연방의회와 유럽 국회들에서 오가고 있는 정치 담론을 슬쩍만 들어 봐도 그런 말은 나오지 않을 것이다. 좋은 통치는 실천적 지혜와 시민적 덕성을 필요로 한다. 공동선에 대해 숙고하고 그것을 효과적으로 추구할 수 있는 능력이다. 그러나 둘 중 어느 것도 오늘날 대부분의 대학에서는 함양될 수 없다. 최고의 명문대라 할지라도 말이다. 그리고 최근의 역사적 경험은 도덕적 인성과 통찰력을 필요로 하는 정치 판단 능력과 표준화된 시험에서 점수를 잘 따고 명문대에 들어가는 능력 사이에 별 연관성이 없음을 보여준다. '최고의 인재들'이 저학력자 동료 시민들보다 통치를 잘한다는 생각은 능력주의적 오만에서 비롯된 신화일 뿐이다.

 

 러시모어 산의 큰 바위 얼굴로 기념되고 있는 네 사람의 미국 대통령들 중 둘(조지 워싱턴과 에이브러햄 링컨)은 비대졸자다. 또한 마지막 비대졸자 미국 대통령인 해리 트루먼은 미국 최고의 대통령 중 하나로 꼽힌다.

 

 하버드 졸업생인 프랭클린 루스벨트는 여러 배경을 가진 자문단과 뉴딜 정책을 고안하고 실행했다. 그 자문위원들은 최근 민주당 대통령들의 자문위원들보다 더 유능했으나, 학력은 훨씬 떨어졌다. 1930년대에는 경제 관련 전문성이 최근 수십 년처럼 워싱턴의 정책에서 중시되지 않았기 때문이다. 토머스 프랭크는 뉴딜 정책을 만든 사람들이 얼마나 다양한 배경을 가졌는지에 대해 이렇게 설명한다.

 

 "루스벨트가 가장 신임하던 해리 홉킨스는 아이오와 주의 사회복지사였다. 법무장관을 거쳐 대법원 판사에 임명된 로버트 잭슨은 법학 학위가 없는 변호사였다. 루스벨트의 구제금융 정책을 추진한 제시 존스는 텍사스 주의 사업가였는데 유수 금융기관들의 관리자가 되는 데 아무 주저가 없었다. 루스벨트가 연방준비제도이사회 이사장에 선임한 매리너 애클스는 유타주 작은 마을의 은행원이었고 비대졸자였다. 아마 미국 역사상 가장 위대한 농무장관일 헨리 윌리스는 아이오와 주립대에서 학업을 마쳤다.

 

p167

 의회를 고학력자 계층의 전유물로 만들면 정부가 더 효과적인 방향으로 가기 힘들다. 대표성만 더 낮아질 뿐이다. 이로써 노동계급은 주류 정당에서 배제되며 특히 중도좌파 정당에서 그렇게 된다. 그에 따라 정치판은 학력에 따라 양극화된다. 오늘날 정치판을 가르는 가장 깊은 균열 중 하나가 바로 대졸자와 비대졸자 사이의 균열이다.

 

p172

 이런 학력주의 병폐와 가깝게 이어진 것이 기술관료적인 공적 담론의 왜곡이다. 정책 결정이 '스마트하냐 우둔하냐'의 문제로 여겨질수록 '스마트한 사람(전문가나 엘리트)'이 결정하고, 일반 시민들이 토론과 결의를 하는 일은 배제하는 게 옳다고 여겨지기 마련이다. 능력주의 엘리트들에게 '스마트하다'와 '우둔하다'의 담론은 도덕 및 이념적 반대에 대해 비당파적인 대안을 제공한다. 그러나 그런 반대는 민주정치의 핵심에 속한 것이다. 정당정치와 갑론을박을 뿌리치고 정책을 관철하려는 의지가 너무 강하면 정의와 공동선에 대한 질문을 저버린 채 정치를 유명무실화하는 기술관료적 공적 담론으로 밀려갈 수밖에 없다.

 

p179

 그러나 정치적 이견을 단지 액면의 사실로 부정하거나 과학을 부정하는 일이라 여긴다면, 그것은 사실과 의견이 정치적 설득 과정에서 어떤 상호작용을 하는지 이해하지 못하는 것이다.

 정치 이전에 '우리 모두는 어떤 기본 사실에 전원 동의해야 하며, 그 이후에 우리 각자의 의견과 신념을 가지고 토론하면 된다'는 생각은 기술관료적 기만이다. 정치 토론은 종종 의제와 연관된 사실을 어떻게 잡아내고 정의할지에 대해 벌어진다. 어느 쪽이든 사실을 프레임화하는 데 일단 성공하면, 그는 장기적으로 그 논쟁에서 이긴 셈이다. 모이니 한의 말과는 정반대로 우리의 의견은 우리의 인식을 사로잡는다. 의견이란 것은 사실이 명확히 규명되고 정립된 뒤에 비로소 생겨나는 게 아니다.

 

p182

 기술관료적 입장의 매력이면서 동시에 약점은, 그것이 겉보기로는 잡음의 여지가 없는 가치중립성을 띠고 있다는 점이다. '스마트 기술'과 '스마트한 규제 틀' 같은 이야기는 기후변화를 두렵고 어려운 문제로 만드는 도적적, 정치적 질문들 사이를 요리조리 빠져나간다. 화석연료 산업의 외부효과를 억제하기 위해 민주정치는 무엇을 해야 하는가? 우리가 자연을 도구화하도록 부추긴 소비주의적 생활 태도, 프란치스코 교황이 "쓰고 버리는 문화"라고 부른 그런 태도를 재고해야 할 것인가? 탄소 배출을 줄이려는 정부의 행동에 반대하며, '과학을 거부해서가 아니라 정부가 자신들의 이익에 따라 움직이고 있지 않은지, 특히 경제를 대규모로 뜯억치며 특정인들(그런 재편성을 설계하고 실행하는 기술관료적 엘리트들)의 잇속을 채우려 하는 게 아닌지 해서 반대하는' 사람들은 어떻게 대해야 하는가?

 

 이는 전문가들이 대답해야 할 과학적 질문들이 아니다. 권력, 도덕, 권위, 신뢰에 대한 질문들이다. 바로 민주시민을 위한, 민주시민이 할 수 있는 질문들인 것이다.

 지난 40년을 군림해온, 좋은 학력을 자랑하는 능력주의 엘리트의 실수 중 하나는 그러한 질문들을 정치 논쟁의 핵심에 제대로 집어넣지 못한 것이다. 민주주의 규범이 과연 살아남을 수 있을지 걱정하고 있는 이 시점에, 능력주의 엘리트의 오만과 기술관료적 비전의 협소함에 대한 불만은 별 것 아닌 듯 보일 수 있다.

 

 그러나 그런 불만이 지금 이 지경까지 정치를 끌고 온 것이다. 그런 불만을 포퓰리즘적 권위주의자들이 잘도 써먹은 것이다. 능력주의와 기술관료 정치의 실패를 바라보는 일, 그것은 그런 불만을 제대로 접수하고 공동선의 정치를 다시 이미지화하기 위해 필수적인 단계다.

 

p192

 마이클 영은 누군가의 사회적 지위가 우연한 이유로 정해짐을 성찰하는 것이 꽤 득이 된다고 보았다. 덕분에 승자와 패자 모두 자기 인생은 자업자득이라는 인식을 하지 않는다. 덕분에 현행 계급질서를 마냥 옹호하지 않게 된다. 그러나 이는 능력주의 체제에서는 역설적인 효과를 준다. 직업과 기회의 능력에 따라 배분되더라도 불평등은 줄어들지 않는다. 불평등 구조를 능력에 따라 재국축할 뿐이다. 그러나 이런 재구축은 각자가 자기에게 맞는 자리를 가졌다는 생각을 굳힌다. 그리고 이런 생각은 부자와 빈자 사이의 격차를 더 벌려놓는다.

 

 "이제 능력에 따라 계급이 분류된 사람들에게 계급 간 격차는 필연적으로 더 넓어진다. 상류계급은 더 이상 자기 의심이나 자기 비판에 시달리지 않는다. 오늘날 잘나가는 사람들은 그 성공이 단지 자신의 능력에 대한 보상이요, 노력에 따른 대가라고만 여긴다. 그리고 누구도 그 성공에 대해 가타부타할 수 없다고 본다. 그들은 상류계급에 속할 만하니까 속해 있다. 또한 그들은 자신들이 시작할 때부터 유리한 위치에 있었을 뿐 아니라, 타고난 재능을 일류 교육으로 갈고 닦을 수 있었음도 알고 있다."

 

p208

 하이에크는 경제적 보상이 능력의 문제임을 부정함으로써 재분배에 따른 옹호론을 차단했다. 헤지펀드 매니저가 왜 교사보다 많은 돈을 버느냐며 분개하는 사람들을 침묵시킴으로써 말이다. 하이에크는 우리가 비록 교사의 직분이 돈 관리하는 일보다 더 찬양할 만하다 여길지라도, 봉급과 임금은 좋은 인격이나 칭찬할 만한 업적의 보상이 아니며, 시장 참여자들이 내놓은 재화와 용역의 경제적 가치에 따른 보수일 뿐이라고 답변한다.

 

 하이에크와 달리 복지국가 자유주의의 옹호자들은 부자에게 세금을 거둬 빈자를 돕는 일을 선호한다. 그러나 놀랍게도 그들은 소득과 부의 배분이 각자의 능력이나 자격과는 무관해야 한다는 하이에크의 생각을 공유하고 있다.

 

 p210

 롤스는 "차등의 원칙은 '자연적 재능의 분배 상태가 공동 자산이며, 그 분배에서 비롯되는 편익은 무엇이든 공동체적으로 향유되어야 한다'는 합의를 나타낸다. 태어날 때부터 남보다 유리한 능력을 가진 사람은 그가 누구든 가장 불우한 상황에 처한 이들의 조건을 개선하는 한에서 그 행운의 몫을 향유할 수 있다"고 말한다. 사회는 반드시 "우연한 배분이 가장 불운한 사람들에게 이롭도록" 시스템을 구축해야 한다는 것이다.

 

p250

 코넌트는 이런 세습적 엘리트 체제를 뒤집어엎고 능력주의적 체제로 대체하려고 했다. 그의 최종 목표는 르만이 했던 말로 정리된다.

 

 '기존의 비민주적인 미국 엘리트들을 쫓아내고 좋은 머리, 정교한 훈련, 공적인 정신으로 찬 새로운 엘리트가 배경을 불하고 충원되어 그들을 대신하도록 하는 것이었다. 이 사람들(사실 보자면, 남성들)은 이 나라를 이끌어 갈 것이다. 그들은 20세기 말 미국이 창출해낸 대규모의 기술적 조직을 관리할 것이며, 그런 조직을 통해 처음으로 모든 미국인들에게 기회를 제공할 것이다.

 

 말하자면 이는 르만의 표현을 빌면 "이 나라의 리더십 집단과 사회구조에 대담한 변혁을 가져오려는 공학적 시도였다. 다른 말로 하면, 조용한 쿠데타 계획" 이었다.'

 

p253

 코넌트는 모든 장래의 시민을 민주사회 구성원으로서 교육시키는 게 중요하다고 보기는 했지만, 공립학교의 그러한 공적인 목표는 '인재 선별기'로서의 기능에 비하면 뒷전이었다. 젊은이들을 시민으로 육성하는 일보다 중요한 일은 "그들에게 가장 적당하다고 여겨지는 기회의 사다리, 그 첫 단에 발을 디딜 수 잇도록 도와주는 일"이었다. 코넌트는 이러한 인재 선별 역할이 "교육 시스템에 과도한 부담으로 여겨질 수도 있다"는 점을 인지했다. 그러나 그는 공립학교가 "이 특정 목적에 종사하도록 재구성될" 필요를 제기했다. 공립학교는 새로운 능력주의적 엘리트를 널리 모집할 통로가 될 것이었다.

 

p255

 사회적 이동성과 기회의 평등이라고 하면서 모호하게 가리는, 능력주의 시스템의 부정적 측면 두 가지를 조명해준다. 첫째, 능력에 기준한 유동적 사회는 비록 세습적 위계질서와는 상반되지만 불평등과 상반되지는 않는다. 반대로 그것은 출생 대신 능력에 근거한 불평등을 정당화한다. 둘째, '최고의 천재'를 예찬하고 보상하는 시스템은 그 나머지를 격하시키며, 의식적으로든 아니든 '비천한 자들'이라고 멸시하기 쉽다. 비록 후한 장학금 제도를 제안하면서도 제퍼슨은 '스마트한 사람'을 높이고 '우둔한 사람'을 깍아내리는 능력주의 성향을 아주 일찌감치 나타낸 셈이다.

 

p256

 재능을 선별하는 일과 평등을 찾는 일은 두 개의 서로 다른 프로젝트다.

 

p269

 명문대들이 특기생 제도를 두는 종목들 대부분은 부유한 집 자녀들이 선호하는 종목이기 때문이다. 스쿼시, 라크로스, 조정, 요트, 골프, 수상폴로, 펜싱, 심지어 승마 등등.

 

p270

 그러나 오직 현행 시스템의 공정성에만 집중한다면 코넌트의 능력주의 혁명의 핵심에 놓인 더 큰 질문을 놓치게 된다. '대학은 누가 인생의 승자가 될지에 대해 재능을 근거로 사람들을 선별하는 역할을 맡아야 하는가?'

 그래야 한다는 주장에는 적어도 두 가지 의문점이 있다. 첫 번째 의문은 그런 선별 결과 걸러진 사람들에 대해 암울한 낙인을 찍게 되고, 그것은 곧 공동체적 시민 생활에 유해하지 않은가라는 의문이다. 두 번째는 능력주의적 경쟁이 인재 선별에 합격한 사람들에게 미치는 피해, 그리고 인재 선별 임무가 너무 과부하됨으로써 대학의 교육 임무마저 경시될 위험성이다. 간단히 말해 고등교육을 초고도 경쟁을 거친 선별 도구로 삼는 것은 민주주의와 교육 모두에 건전하지 않다는 이야기다.

 

p272

 1961년 출간된 <탁월함 Excellence>이라는 제목의 책에서, 재단 이사장이며 훗날 린드 존슨 행정부 보건교육복지부 장관을 맡게 되는 존 가드너는 새로운 능력주의 시대의 정신에 대해 이렇게 표현했다. "우리는 높은 역량과 앞선 훈련을 갖춘 사람들에 대한 사회적 태도의 혁명을 목격하고 있다. 사상 처음으로 그런 사람들은 아주 열렬하게, 아주 광범위하게 환영받고 있다." 소수가 다스리고 따라서 재능의 낭비가 가능했던 이전 시대와 달리, 현대 기술문명 사회는 복잡한 조직에 의해 다스려지므로 재능 소유자가 끝없이 필요하다. 따라서 그런 사람을 어디에서든 찾아내려고 한다. 이러한 "위대한 재능 사냥"의 긴급성은 이제 교육이 해결해야 할 과제다. "엄격한 선별 처리"를 해줄 필요가 있는 것이다.

 코넌트와 달리 가드너는 능력주의적 선별의 가혹한 면을 잘 알고 있었다. "갈수록 교육이 가장 명민한 젊은이를 꼭대기까지 올려 보내는 효과적 수단이 됨에 따라, 관련된 모든 이들에게 엄격한 인재 선별기 역할을 할 것이다. 학교는 유능한 젊은이들에게 기회의 오아시스가 된다. 그러나 같은 의미에서, 보다 능력이 떨어지는 젊은이들에게는 자신의 한계를 깨닫는 곳이 되기도 한다." 이는 기회의 평등이 가져오는 악영향이다. "이는 모든 젊은이가 돈이나 사회적 지위, 종교나 인종 등의 장애물을 초월해 자신의 능력과 야심이 허용하는 한 성공할 수 있도록 해준다." 그러나 한편으로 "필요한 능력이 없는 사람들에게는 고통"을 준다.

 가드너는 그런 고통은 불가피하며, 재능을 발견하고 개발해야 할 시급성에 비추어 보면 수지가 맞는 비용이라고 생각했다. 그는 대학에서 일부 학생은 학생은 떨어질 때 고통이 가장 심하리라 보았다. "사회가 각자의 재능에 따라 사람들을 효율적이고 공정하게 선별하면, 루저들은 자신의 낮은 지위가 다른 무엇 때문이 아니라 자신이 남보다 못하기 때문임을 절감할 것이다. 이것은 누구에게나 입에 쓴 약이다.

 마이클 영에게 이런 통찰은 능력주의를 반대하는 핵심적 사유였다. 그러나 가드너에게는 불운한 부수적 효과일 뿐이었다. "대학이 특별한 명예를 누리고 있기 때문에" 성공을 좌우하게 되었다고 그는 인정한다. "오늘날 대학에 들어가는 것은 세상의 시각으로 높은 위치에 오르기 위한 필수 코스처럼 되었다. 따라서 우리가 만든 잘못된 가치 틀에 따라, 대학에 들어가지 않으면 의미 있는 인생을 살 수 없게 되었다." 가드너는 다음과 같이 대담한 주장을 펼쳤다. "성취와 그 사람의 가치가 혼동되어서는 안 된다." 그리고 개인은 그 성취와 무관하게 존중받을 가치가 있다. 그러나 그는 그가 추구하던 능력주의 사회가 교육적 성취와 명망 사이에 구별의 여지를 별로 안 둔다는 사실을 알고 있었던 듯하다.

 

  「대학 교육이 대중에 개인적 성취, 사회적 상승, 시장 가치와 자부심의 향상으로 확고히 인식되고 있음은 단순한 사실이다. '존경과 신뢰를 얻기 위해서는 대학에 가야 한다'는 생각에 대다수의 미국 국민이 동의하게 되면, 그러한 국민 의견의 일치가 사실의 일반화를 가져오게 될 것이다.」

 

p276

 경쟁률이 높은 대학과 그렇지 않은 대학의 차이는 점점 벌어진다. SAT 고득점 학생들은 몇 안 되는 대학에 들어가기 위해 아등바등하고, 대학 입시는 '승자독식 게임'이 된다. 비록 '지금의 대학 입학이 과거보다 더 어렵다'고 많이들 이야기하지만, 그것은 일반적인 진술이라 할 수 없다. 지금 미국의 대다수 대학들은 지원하는 학생 대부분을 받아준다.

 오직 극소수의 엘리트 대학들만 최근 수십 년간 합격률이 떨어졌다. 그런 대학들의 사례는 신문 머릿기사를 장식하며 10대 내내 오직 입시 준비에 매진하는 부잣집 자녀들 사이에서 입시 광품이 몰아치도록 만든다. 1972년 '재선별'이 이미 한참 진행되었을 때 스탠포드는 지원자의 삼분의 일을 합격시켰다. 오늘날 그 수치는 5퍼센트로 떨어졌다. 1988년에 지원자의 절반 이상(54퍼센트)을 받아주던 존스홉킨스는 이제 9퍼센트만 받아준다. 대표적으로 합격률이 수직 낙하한 시카고대의 경우 1993년 77퍼센트였던 것이 2019년에는 6퍼센트가 되었다.

 통틀어 46개 대학이 지금 입학 지원자의 20퍼센트 이하를 합격시키고 있다. 이 중 일부 학교는 학생들에게 염원의 대상이며, 그들의 부모가 2019년 입시 부정 스캔들과 같은 일을 저지르게끔 하는 꿈의 목표다. 그러나 미국 대학 학부생 중 겨우 4퍼센트만 그런 경쟁률이 심한 대학에 소속되어 있다. 80퍼센트 이상은 입학 지원자의 50퍼센트 이상을 받아 주는 대학들에 다닌다.

 

p277. 상처 입은 승리자들

 

 고등교육의 승자독식형 재선별은 두 가지 점에서 바람직하지 않다. 첫째, 불평등을 심화시킨다. 높은 경쟁률을 자랑하는 대학들은 일반적으로 부유한 집안 출신 자녀를 압도적으로 많이 뽑기 때문이다. 둘째, 그것은 승자들에게도 피해를 남긴다. 별 문제나 말썽 없이 높은 자리에 오를 수 있었던 과거의 세습적 엘리트와 달리, 새로운 능력주의 엘리트는 힘겨운 투쟁을 거듭해야 높이 올라설 수 있기 때문이다.

 이제는 비록 새로운 엘리트가 세습적 위치까지 차지하긴 했지만, 능력주의적 특권의 되물림은 확정될 수 없다. 그것은 '들어가기'에 성공하느냐에 달려 있다. 이는 능력주의적 성공에 모순적인 도덕 심리학을 부여한다. 명문대에 물밀 듯 몰린 부잣집 자제들을 생각해보면 말이다. 그러나 입시 초고도 경쟁에 뛰어든 사람들에게 성공을 개인의 노력과 성취 이외의 것으로 생각하기란 불가능했다. 이런 경쟁의 승자들은 '스스로의 힘과 노력으로 이를 쟁취했다'고 생각할 수밖에 없었다. 이 믿음은 능력주의적 오만의 일환으로 비판 받을 수 있다. 그것은 개인의 분투 이상의 것을 요구하며, 대가로 주어져야 할 성공 이상을 강요한다는 문제를 안고 있다.

 그러나 그러한 믿음의 강점도 있다. 그것이 고통 속에 담금질되었고 혼을 파괴할 정도의 압박 속에서 젊은이들에게 부과된 능력주의적 고난을 뚫고 왔다는 데서 비롯되는 강점이다. 부유한 부모들은 자제들에게 명문대 입학을 위한 강력한 뒷받침을 해준다. 그들 대부분은 고등학교 생활 내내 엄청난 스트레스, 고민, 불면과 싸우며 모의고사는 물론 공부, 체육, 예체능 실기 과외, 그 밖의 온갖 잡다한 특별활동을 견뎌야 하는 고난의 시간을 겪는다. 종종 과외 선생들에게 지불하는 비용이 예일대 4년 과정보다 더 많이 들기도 한다. 선생들 가운데는 지체장애자 특별 선발을 노려보라고 권하는 경우도 있다. 그 결과 표준화된 시험을 통과하기 위한 더 많은 노력이 요구된다(어느 소득수준이 높은 코네티컷 근교에서는 18퍼센트의 학생이 지체장애 진단을 받아냈다. 그것은 미국 전체 기준보다 6배나 높은 수치였다). 어떤 컨설턴트는 여름방학을 이용한 특별 해외 참가 프로그램에 등록해 대학 지원 자소서를 쓸 때 적당히 써먹을 수 있는 근거를 마련하자고 권하기도 한다.

 이런 능력주의적 군비 경쟁은 부유한 집안 쪽으로 전세를 기울인다. 그리고 부자 부모들이 스스로의 특권을 대물림하기 쉽게 해준다. 이런 식의 특권 대물림은 논란의 여지가 있다. 이런 판에서 유리한 고지를 찾을 수 없는 사람에게는 매우 불공평하며, 이 판에 자식들이 뛰어들어 있는 상황에서는 지나친 압박이 된다. 능력주의적 경쟁은 침략적이고 성취만 쫓으며 과도한 부모의 압박을 불러온다. 10대 청소년에게 과중한 부담을 준다는 말이다. 극성 학부모의 등장은 능력주의적 경쟁이 과열된 시기와 일치한다. 사실 '부모 노릇하다parent'라는 단어는 1970년대에 와서야 동사로서 널리 쓰이게 되었다. 자녀가 공부에서 성공할 수 있도록 돕는 일이 부모의 책임 중 가장 중요한 것이라고 여겨지게 되던 때다.

 

 1976년에서 2012년까지 숙제를 해주는 등 자녀의 학업을 돕는 데 전념하는 부모의 숫자는 다섯 배로 늘었다. 대학 입시가 갖는 의미가 커짐에 따라 조바심 내고 나서기 좋아하는 부모들의 태도도 늘상 있는 일이 되었다. 2009년 11월 <타임> 표지 기사는 이렇게 경고하고 있었다. "과잉 부모 노릇의 폐해 : 엄마 아빠는 왜 이제 잡고 있던 줄을 끊어야 하나." 기사는 다음과 같이 표현한다. "우리는 아이들의 성공에 너무 집착하게 되어버렸다. 그래서 부모 노릇이라는 게 마치 어떤 생산물이 생산 과정처럼 되고 말았다." 이제 아동기에 개입해 일정하게 관리를 하려는 움직임은 전보다 훨씬 빨라졌다. "6~8세의 경우 1981년에 비해 1997년에는 노는 시간이 25퍼센트 감소했다. 그리고 숙제는 두 배로 늘었다."

 

 어느 흥미로운 연구에서 경제학자인 마티아스 되브케와 파브리치오 질리보티는 과보호 학부모의 등장을 경제학적으로 설명했다. 그들이 정의한 표현으로는 "과도하게 개입하고, 막대한 시간을 투입하며, 통제적인 육아 방식을 통해 지난 30년 동안 널리 퍼진 방식"에 대한 설명이었다. 그런 부모 노릇은 불평등이 증가하고 교육으로 인한 보상이 커진 데 따른 합리적 대응이었따. 비록 여러 사회에서 지난 수십 년 동안 한결 같이 부모의 개입이 심해지긴 했으나, 가장 심했던 곳은 불평등이 가장 크게 두드러진 곳이었다. 가령 미국이나 한국 같은 나라였다. 그리고 스웨덴이나 일본처럼 불평등이 비교적 덜 불거진 나라에서는 그러한 극성 부모들도 덜 나타났다.

 이해할 만하기는 하지만, 자녀의 인생을 능력주의적 성공으로 몰고 가려는 부모들의 집착은 심리학적으로 따져봐야 할 문제다. 특히 대입을 앞두고 있는 10대들에게 그렇게 가혹한 강요를 하는 것은 더더욱 그렇다. 2000년대 초 캘리포니아 주의 마린 카운티(샌프란시스코 인근의 풍요로운 교외 지역)에서 젊은이들의 심리 상담을 해온 심리학자 매들린 레빈은 겉으로는 성공적인 여러 유복한 가정의 10대들이 극심한 불행감, 고립감, 무력감에 시달리고 있음을 깨달았다. "사소한 문제에 흥분하며, 그들 다수는 우울하고, 불안하고, 분노에 차 있었다. 그들은 부모, 교사, 코치, 동료의 말에 지나치게 복종적이었으며 어려운 일만이 아니라 일상적인 문제까지도 남들의 말에 무조건 따르는 모습을 보였다." 이들의 문제가 삶의 어려움에서 소외되었기 때문인 것은 아니었다. 매들린은 이들이 '풍요로움과 지나칠 정도의 부모 간섭 때문에 불행하고 깨져 버리기 쉬운 인간이 되었음'을 차차 알게 되었다.

 <특권의 대가 The Price of Privilge>라는 책에서 레빈은 그녀가 "특권층 젊은이들에게 나타나는 정신질환 증후군"이라 부르는 문제에 대해 설명하고 있다. 전통적으로 심리학자들은 '일촉즉발'의 젊은이는 도시빈민굴의 불우한 청소년들이라고 생각했다. 어렵고 용서할 수 없는 환경에서 자라나야만 했던 아이들 말이다. 물론 그런 사람들도 괴롭다. 그걸 부정하는 건 아니지만 레빈은 "미국에서 나타난 새로운 일촉즉발의 젊은이 집단은 부유하고 잘 교육받은 집안의 아이들"이라고 지적했다.

 

 '그들의 사회적, 경제적 우위에도 불구하고 그들이 겪은 경험은 이 나라 동 연령대에서 최고 수준의 절망, 약물 의존, 불안 장애, 신체적 호소, 불행감 등이었다. 연구자들이 사회경제적 스펙트럼을 통틀어 동 연령대 아동들을 살펴본 결과, 가장 심각한 정신적 문제를 가진 아동들이 부유한 가정 출신임을 알 수 있었다.'

 

 레빈은 '상류 및 중류 청년들에 대한 뜻밖의 사실, 가장 유명한 대학을 나오고 미국 최고의 경력을 쌓아온 사람들의 어두운 면'이라는 이름의 연구를 한 수니아 루타의 글을 이용한다. 그들은 동년배 10대보다 높은 감정적 스트레스를 겪으며, 그것은 그들이 대학에 합격한 뒤에도 계속된다. "보통 사람들과 비교할 때 풀타임 등록 대학생들은 2.5배나 높은 약물 의존증을 나타낸다(23퍼센트, 보통 사람은 9퍼센트)." 그리고 풀타임 대학생의 절반은 과도한 음주를 하며 불법적이거나 처방 약물을 사용하고 있다.

 부유한 출신 젊은이들이 과도하게 감정적 스트레스를 겪고 있는 까닭은 무엇일까? 해답은 능력주의적 사명에서 찾을 수 있다. '뭘 해내라', '뭘 이뤄라', '뭘 성공해라' 하며 끊임없이 떨어지는 사명. 투라는 이렇게 썼다. "부모와 자식 모두 언제 어디서나 들려오는 메시지에서 벗어날 수 없다. 그것은 그들의 생애 초기부터 들려오던 것이며 행복으로 가는 길은 오직 하나밖에 없다고 가르치는 목소리다. 돈을 많이 벌어라. 그러기 위해 명문대에 들어가라."

 능력의 전장에서 살아남은 사람들은 승리자다. 그러나 상처 입은 승리자다. 나는 그 사실을 내 학생들을 보고 알았다. 그들은 오랫동안 불타는 고리를 뛰어 통과하는 일을 거듭해왔고, 그 습관을 쉽게 버리지 못한다. 많은 아이들이 아직도 분투하고 있다. 생각하고, 탐구하고, 나는 누구이며 나는 무엇을 해야 가치 있게 살아갈 것인가 숙고하면서 대학 생활을 보내지 못하고, 싸우고 또 싸운다. 놀랄 만큼 많은 아이들이 정신 건강에 이상을 겪고 있다. 능력주의의 호된 시험을 통과하는 데 따르는 심리적 피해는 아이비리그에만 국한되지 않는다. 최근 100개 이상 미국 대학의 학부생 6만 7,000명을 대상으로 이루어진 조사에서는 대학생들이 전례 없는 정신적 고통에 시달리고 있다는 사실이 드러났다. 우울증과 불안증이 치솟고 있다. 대학생 다섯 명 가운데 한 명이 설문 이전 1년 이내에 자살을 고려했다. 그리고 그 가운데 넷은 정신질환자로 진단을 받거나 치료를 받고 있다. 젊은이(20~24세)의 자살률은 2000~2017년 사이 36퍼센트 늘었다. 지금 그들은 살인보다 자살로 더 많이 죽어간다.

 이런 병리학적 상황을 넘어 심리학자들은 이 세대 대학생들의 보다 미묘한 정신적 문제점을 찾아냈다. '완벽주의라는 숨은 전염병'이다. 몇 년 동안이나 불안 속에 분투해온 결과 젊은이의 마음은 약하디 약한 자부심, 그리고 부모, 교사, 입학사정관, 궁극적으로 자기 자신의 냉혹한 한 마디에도 산산조각 날 자의식으로 채워져 버렸다. "실적과 지위와 이미지만이 한 사람의 쓸모와 가치를 정할 수 있는 세계에서, '완벽한 자신'이라는 비이성적 생각이 의미 있는 게 되고 말았다." 4만 명 이상의 미국, 캐나다, 영국 대학생들을 대상으로 연구한 결과물의 공저자 토머스 쿠란과 앤드류 힐의 말이다. 이들은 1989년부터 2016년까지 완벽주의가 가파르게 증가하는 것을 보았다. 사회적인, 그리고 부모의 기대에 매인 완벽주의의 증가세는 32퍼센트에 달했다.

 완벽주의는 능력주의의 대표적인 병폐다. "젊은이들이 끝도 없이 학교, 대학, 직장에 의해 선별되고, 구분되고, 등급이 매겨지는 과정 속에서 신자유주의적 능력주의는 현대 생활의 한복판에서 싸우고, 실적을 내고, 업적을 이루도록 강요한다." 성취 요구에 따라, 성공하느냐 실패하느냐는 개인의 능력과 스스로에게 부여하는 가치를 결정한다.

 능력주의 기계의 레버와 활차 역할을 해온 사람들은 그 때문에 얼마나 많은 인간적 희생이 있었는지 모른다. 번아웃 증후군에 대한 솔직하고 통찰력 있는 글에서 하버드 입학사정관실은 "고등학교와 대학 재학 시절을 불타는 고리를 뛰어넘는 일로만 채워온 사라들이 결국에는 평생 신병훈련소와 같은 틀 안에서 살아가게 되지 않을까" 염려했다. 2000년에 나온 그 글은 아직도 하버드 입학 홈페이지에 일종의 경고용으로 게시돼 있다.

 

p285

 캄핑(comping) 문화의 등장은 대학이 경쟁적 능력주의의 기초훈련장과 같아지기 시작했음을 의미한다. 교육의 목표와 수단이 하나가 되어가는 것이다. 이는 다시 대학 역할이 더 넓은 범위에서 바뀌고 있음을 시사한다. 학력을 부여하는 역할은 이제 너무 커져서 교육을 수행하는 역할을 덮어버렸다. 선별하고 분투하는 일이 가르치고 배우는 일을 넘어버렸다.

 

 p286

 오늘날 기회의 관리자로서 대학의 역할은 아주 확고하기 때문에 도무지 대안을 찾기 어려운 상태다. 고등교육의 역할을 다시 생각해 볼 때가 왔다. 특권을 얻은 사람들의 고장 난 정신 상태를 고치기 위해서만이 아니라, 능력주의적 인재 선별이 낳은 시민생활의 양극화를 고리기 위해서라도 말이다.

 인재 선별기를 뜯어 고치기 위한 방법을 찾으려면, 능력주의 체제가 그 폭력적 지배를 동시에 두 방향으로 뻗치고 있음에 주목해야 한다. 정상에 올라서는 사람들에게 그것은 불안증, 강박적 완벽주의, 취약한 자부심을 감추기 위한 몸부림으로서 능력주의적 오만 등을 심는다. 한편 바닥에 떨어진 사람들에게는 극심한 사기 저하와 함께, '나는 실패자야' 라는 굴욕감마저 심는다.

 이 쌍방향 폭력은 하나의 도덕적 원인을 공유한다. 능력주의의 금과옥조인 '우리는 개인으로서 우리 운명의 책임자다'라는 도덕률이다. 우리가 성공하면 우리가 잘한 덕이며, 실패하면 우리가 잘못한 탓이다. 사기를 올려주는 말 같지만, 개인 책임에 대한 집요한 강조는 우리 시대의 불평등 상승 추세에 대응할 연대 의식이나 연대 책임을 떠올리기 어렵게 한다.

 

 p297

 고등교육은 그 영예의 대부분을 그것이 공언한 고등 목표에서 찾아야 한다. 그것은 학생들이 직업 세계에서 필요한 역량을 갖추게만 하는 것으로 끝나지 않는다. 그들이 도덕적인 인간이자 민주적인 시민으로서 공동선에 대해 숙고할 수 있는 사람이게끔 준비시키는 것도 필요하다. 도덕철학과 정치철학을 가르쳐온 나는 도덕교육 및 시민교육의 중요성을 확신하고 있다. 그러나 왜 4년제 대학들이 그런 임무를 도맡아야 하는가? 시민의 민주주의 교육에 대한 보다 포용력 있는 생각은 대학의 시민교육에만 한정하는 입장에 반대할 것이다.

 

p299

 문화역사학자 크리스토퍼 래시가 본 대로, 19세기에 미국을 찾은 외국인 방문자들은 살므이 구석구석에 배어 있던 평등에 놀랐다. 그 평등이란 부의 평등한 분배도, 심지어 출세의 기회가 평등하다는 것도 아니었다. 모든 시민이 거의 똑같은 기반에서 독립적으로 생각하고 판단할 수 있다는 것이었다.

 

 '시민권이 있다면, 사회의 가장 보잘 것 없는 구성원일지라도 다른 곳에서는 특권층에게만 한정되는 지식과 교양을 저할 기회가 자유롭다. 모두의 복지를 위해 기여하는 노동은 육체뿐 아니라 정신적인 형태로 띤다. 이런 말이 있다. "미국의 기술자들은 무식한 일꾼이 아니다. 개명되고, 사려 깊은 사람들로, 자기 손을 어떻게 쓸지 알 뿐 아니라 원리원칙을 어떻게 쓸지도 알고 있는 사람들이다." 기술자들을 위한 잡지는 이런 성찰적 주제를 계속해서 다룬다.'

 

 래시는 더 넓은 관점에서 바라볼 때, 19세기 미국 사회의 평등주의적 성격은 사회적 이동성이 아니라 지성과 교육이 모든 계층과 직업에 널리 퍼져 있던 데서 나온다고 보았다. 이는 능력주의적 선별이 망쳐버린 평등의 유형이다. 능력주의는 지성과 교육을 고등교육의 상아탑에 온통 몰아넣어 두고서, 누구에게나 그 상아탑에 들어올 공평한 경쟁이 보장되리라고만 약속한다. 그러나 이런 방식의 접근권 배분은 노동의 존엄을 떨어뜨리며 공동선을 오염시킨다. 시민교육은 담쟁이가 넝쿨진 캠퍼스 못지않게 지역사회 대학, 직업훈련소, 노조에서 잘될 수 있다. 향상심 있는 간호사와 배관공들이 야심적인 경영 컨설턴트보다 민주적 논쟁에서 뒤떨어질 까닭은 없다.

 

p301

 풍요로우면서도 경쟁이 치열한 아이들에게 가해지는 능력주의의 폭정을 보면, 내 십대 시절의 두 가지 경험이 떠오른다.

 선별과 등급 구분이 과열되면서 내가 1960년대 말 캘리포니아 주의 퍼시픽 팰리세이드에서 다녔던 중학교와 고등학교까지 내려왔다. 당시 우열반 편성 열기가 얼마나 심했던지, 우리 고등학교에는 2,300명 정도의 학생이 있었지만, 나는 언제나 우등분의 30~40명의 친구들하고만 지내야 했다. 8학년 때 수학 선생님은 그런 우열반 편성을 극단적으로 밀고 갔다. 아마 대수학인지 기하학인지 하는 과목 시간이었는데 정확하게는 기억나지 않는다. 아무튼 성적에 따라 앉는 줄이 달라야 했던 사실은 기억난다. 6개 줄 가운데 3번째 줄까지가 이른바 우등 분반이었고, 그 가운데서도 학생 개인별 성적대로 정확히 차례차례 앉아야만 했다. 그것은 시험이나 쪽지시험을 볼 때마다 앉는 자리가 매번 바뀐다는 뜻이었다. 이 희비극을 최고조로 끌어올리고자 선생님은 개인 시험점수를 나눠주기 전에 자리 재배치부터 시켰다. 나는 수학을 잘했지만 최고는 아니었다. 보통은 두 번째 자리와 네 번째 또는 다섯 번째 자리 사이에 앉고는 했다. 케이라는 이름의 여자아이는 거의 언제나 첫 번째 자리를 차지했다.

 열네 살 먹은 소년으로서 '나는 학교란 게 원래 이런 건가'보다 여길 수밖에 없었다. 잘하면 잘할수록 좋은 자리에 앉게 되는 것. 모두가 누가 가장 수학을 잘하는지 알고 있었고, 이번 또는 저번 시험에서 누가 최고였고 누가 폭탄을 맞았는지 알 수 있었다. 그 때는 알아차리지 못했지만, 이것은 내가 생애 처음으로 능력주의와 마주한 순간이었다.

 우리가 10학년이 되었을 때는 등급 정하고 나누기가 최악에 이르렀다. 첫째 줄에 앉는 학생들은 대부분 성적에 목을 맸으며, 그것은 모두가 마찬가지였다. 우리는 무섭게 경쟁했다. 너무 석차에 열을 올린 나머지 지적 호기심 자체가 증발하는 상황이었다.

 우리 10학년 때 생물 선생님의 이름은 판햄이었다. 늘 인상을 쓰고 나비넥타이를 매고 다녔는데, 수업 시간마다 교실을 뱀, 도마뱀, 물고기, 생쥐 등등의 신기한 야생동물로 채워서 놈들의 말썽으로 정신없게 만들곤 했다. 하루는 그가 우리에게 돌발 퀴즈를 냈다. 종이를 한 장씩 꺼내서 1번부터 15번까지 적고, 답이 맞는지 틀리는지 적으라고 했다. 당황한 학생들이 문제도 없이 어떻게 답을 적으라는 거냐고 묻자, 그는 각자 문제를 생각해서 맞나 틀리나 답을 쓰면 된다 했다. 학생들은 "이 말 같지 않은 시험도 성적에 들어가느냐"고 걱정스레 질문했고, 선생님은 "물론, 당연하지"라고 대답했다.

 그 때 나는 이것이 엽기적인 농담이 아니면 놀이일 뿐이라고 생각했다. 그러나 돌이켜보면 판햄 선생님은 그 나름대로 능력주의의 폭정에 저항했던 것 같다. 그는 우리가 선별과 분투의 도가니에서 한 발 물러나 그냥 지긋이 도마뱀을 바라보기를, 그 동물이 얼마나 신비한 존재인지를 충분히 보고 즐기기를 원했을 것이다.

 

p324

 경제 정책이 궁극적으로 소비를 위해 존재한다는 생각은 오늘날 하도 익숙해져서 그런 생각을 넘어서기가 어려울 정도다. "소비는 모든 생산의 유일한 목표이자 의미다." 애덤 스미스가 <국부론>에서 한 말이다. "그리고 생산자의 이익 추구는 오로지 소비자의 이익을 증진시키는 데 있어야 한다." 존 케인스도 "소비란 모든 경제 활동의 유일한 목표이자 대상이다"라고 함으로써 스미스의 주장에 동조했다. 그리고 이는 지금의 경제학자들 대부분도 동의하는 내용이다. 그러나 더 오래된 전통적 도덕사상과 정치사상은 생각이 다르다. 아리스토텔레스는 인간의 번영이 '우리의 본질을 우리 역량의 배양과 실행을 통해 실현하는 데 있다'고 보았다. 미국 공화주의 전통은 일정한 직업(먼저 농업, 그 다음은 수공업, 그리고 널리 자유노동이라고 이해되는 것)은 시민들의 자기 통치가 가능하도록 미덕을 계발해 주는 것이라고 여겼다.

 20세기에 공화주의 전통의 생산자 윤리는 소비자 중심적 자유 윤리와 경제성장 위주의 정치경제학에 밀려났다. 그러나 복잡한 사회에서도 '일은 시민들을 기여와 상호 인정의 틀 안에 묶어 주는 역할을 한다'는 생각이 완전히 사라지지는 않았다. 때때로 이는 고무적인 표현으로 재인식된다. 테네시 주 멤피스에서 암살 직전 행한 연설에서, 마틴 루터 킹 목사는 청소 노동자들의 존엄을 그들이 공동선에 기여하는 점에 결부시켜 이야기했다.

 '언제가 우리 사회는 청소 노동자들을 존경하게 될 것입니다. 이 사회가 살아남을 수 있다면 말이죠. 따져 보면 우리가 버린 쓰레기를 줍는 사람은 의사만큼이나 소중한 존재입니다. 그가 그 일을 하지 않는다면 질병이 창궐할 테니까요. 모든 노동은 존엄합니다.

 

 1981년 회칙 "인간의 일에 대하여"에서, 교황 요한 바오로 2세는 "일을 통해 사람은 인간으로서 충족되고, 그리하여 '더 인간다운 인간'이 된다"고 밝혔다. 그는 또한 일을 공동체와 결부된 것으로 보았다. "일은 인간의 가장 심층적인 정체성이 국가 전체와 이어지도록 해준다. 그리고 그의 일은 그의 동포와 함께 공동선을 개발하도록 해준다."

 몇 년 뒤 가톨릭 추기경 전국협의회는 경제 관련 사회교육에 대해 가톨릭 교회의 자세한 입장을 담은 <목회 서한>을 내놓았다. 그것은 '기여'에 대한 명백한 정의를 담고 있었다. "모든 사람은 사회생활에서 적극적이고 생산적인 참여자가 될 책임이 있다. 그리고 정부는 경제 및 사회 제도를 정비하여 사람들이 자신들의 자유를 존중받고 노동의 존엄을 인정받을 수 있도록 할 의무가 있다."

 일부 세속 철학자들도 같은 목소리를 냈다. 독일 사회이론가 악셀 호네트는 오늘날 소득과 부의 분배에 대한 논쟁은 인정과 명망에 대한 갈등으로 이해하는 게 가장 적합하다고 보았다. 그는 이러한 생각이 헤겔에게서 연유했다고 밝히긴 했지만, 고액 연봉을 받는 운동선수를 놓고 벌어지는 연봉 논쟁에 참여해 본 스포츠 팬이라면 아마 직관적으로 이해할 것이다. 팬들이 한 선수에게 "이미 수백만 달러를 받고 있으면서 더 달라고 하느냐"고 불평하면 그 선수는 거의 이렇게 대답할 것이다. "돈이 문제가 아닙니다. 존중받느냐가 문제죠."

 이것이 '인정 투쟁'이라는 용어를 통해 헤겔이 말하려던 것이었다. 수요를 효율적으로 충족시키는 시스템을 넘어, 노동 시장은 인정을 부여하는 시스템이라는 게 헤겔의 생각이다. 그것은 단지 소득만으로 노동에 보상하는 게 아니며, 각 개인의 일을 공동선에 대한 기여로 공적 인정을 해준다. 시장 자체는 노동자들에게 기술이나 인정을 부여하지 않으며, 그래서 헤겔은 노동조합이나 길드 같은 기구를 제안한다. 그런 기구는 각 노동자의 기술이 공적 명망을 얻을 만한 기여를 하기에 충분함을 보장해준다. 간단히 말해 헤겔은 그의 시대에 등장한 자본주의적 노동 기구는 오직 두 가지 조건에서 윤리적으로 정당하다 보았다. "첫째, 최저 임금을 보장해야 한다. 둘째, 모든 근로 활동에 있어 공동선에 기여할 수 있도록 구조를 마련해 주어야 한다."

 80년 뒤 프랑스 사회이론가 에밀 뒤르켐은 헤겔의 노동론을 토대로 "노동분업은 사회적 연대의 원천이 되어야 하며, 모든 이들은 공동체에 기여한 실제 가치에 근거해 보상받아야 한다"고 주장했다. 스미스, 케인스, 그리고 어려 현대 경제학자들과 다르게 헤겔과 뒤르켐은 일이 소비만을 위한 수단이라고 여기지 않았다. 대신 그들은 '일은 그 최선에 있어 사회적 통합 활동이며 인정의 장이고, 공동선에 기여해야 한다는 우리의 책임을 명예롭게 수행하는 방식'이라고 보았다.

 

 p330

 시장 사회에서는 우리가 버는 돈과 우리가 공동선에 기여한 내용의 가치를 혼동하기 쉽다. 

 그런 혼동은 단지 생각을 제대로 하지 않은 결과가 아니다. 그 논리적 결함을 지적하는 철학 논증만 하고 만족스러워 할 일도 아니다. 그것은 세상이 '우리는 받을 몫을 받는다'는 식으로 짜여 있다는 능력주의적 희망에서 비롯된 혼동이다. 그런 희망은 구약성서 시대에서부터 오늘날까지 '역사의 옳은 쪽에 서야 한다'는 식의 주장을 하는 섭리론적 사고를 부추긴 희망이기도 하다.

 시장 주도적 사회에서 물질적 성공을 도덕적 자격의 증표로 해석하는 일은 지속성 있는 유혹이다. 그 유혹은 계속해서 우리의 저항을 깨트리려 한다. 효과적으로 저항할 수 있는 한 가지 방법은 논쟁을 하는 것이다. 그리고 방법을 세우는 것이다. 공동선에 우리가 진정으로 가치 있게 기여할 수 있는 것이 무엇인지, 그리고 어디에서 시장의 낙인이 잘못되었는지를 반성하고, 숙고하고, 민주적으로 공동의 대책을 수립하는 것이다.

 그런 논쟁이 어떤 합의를 반드시 낳으리라 본다면 비현실적이리라. 공동선은 불가피하게 논란의 여지를 포함한다. 그러나 일의 존업에 대한 새로운 논쟁은 우리의 당파적 경향을 무너뜨릴 것이고, 우리의 정치 담론을 도적적으로 활성화할 것이며, 우리가 40년 동안 시장의 신앙과 능력주의적 오만에 빠져든 탓에 양극화된 정치 현실을 넘어설 수 있게 해줄 것이다.

 

p335

 금융업계는 2008년 금융위기 때 극적으로 대중의 관심을 끌었다. 이때 불거진 논쟁은 주로 '세금으로 구제금융을 제공해야 되느냐'와 '어떻게 월스트리트를 개혁해서 앞으로의 위기 가능성을 줄이느냐'를 둘러싸고 벌어졌다.

 그보다 훨씬 덜 주목받은 문제는  '지난 수십 년 동안 금융이 경제를 재구성했으며 교묘하게 능력과 성공의 의미 또한 뜯어고쳤다'는 사실이었다. 이런 변화는 일의 존엄성에 큰 영향을 미쳤다. 무역과 이민은 금융에 비해 포퓰리즘의 반 세계화 공격에서 덜 주목 받았다. 그런 것들이 노동계급의 일자리와 지위에 미친 영향은 보다 분명하고 확실해 보였다. 그러나 경제의 금융화야말로 아마도 일의 존엄 감소에 더 큰 영향을 미쳤으며, 노동자들의 사기 저하에도 역시 더 큰 역할을 했으리라 여겨진다. 왜냐하면 그것이 현대 경제에서 시장의 보상과 실제 공동선에의 기여도 사이에 아마도 가장 큰 격차 사례를 제공했기 때문이다.

 오늘날 금융업계는 선긴경제체제에서 중심적 위치에 있으며, 지난 수십 년 동안 비약적인 성장을 했다. 미국의 경우 GDP에서 금융업이 차지하는 비중은 1950년대 이래 세 배로 늘었다. 그리고 2008년 기준 기업 이익의 30퍼센트 이상을 차지했다. 그 고용인들은 다른 업계 비슷한 수준의 노동자들에 비해 70퍼센트 이상 실적을 낸다.

 모든 금융 활동이 생산적이라면, 그리고 그것이 가치 있는 재화와 용역을 생산할 경제 능력을 증진시켜 준다면 문제가 되지 않을 것이다. 그러나 실제로는 그렇지가 않다. 최선을 다 한다고 해도 금융은 그 자체가 생산적일 수가 없다. 그 역할은 자본을 사회적으로 유용한 목적별로(신생 기업 공장, 도로, 공항, 학교, 병원, 가정 등등) 배당함으로써 경제 활동을 돕는 것이다. 그러나 금융이 미국 경제에서 차지하는 비중이 최근 몇 십 년 동안 폭발적으로 증가함으로써 그 투자는 점점 실물경제와 유리되었다. 점점 더 관계자들에게 큰 수익을 창출하는 복합 금융공학과 연계되고 있는데, 이 금융공학이란 경제를 보다 생산적이게 하는 일과는 전혀 무관한 것이다.

 영국 금융서비스 국장 어데어 터너는 이렇게 설명한다. "지난 20~30년 동안 부유한 선진국들에서 금융 시스템의 규모와 복잡성이 증대했는데. 그것이 성장이나 경제 안정에 보탬이 되었다는 명확한 증거는 없습니다. 그리고 금융 활동이 경제적 가치를 높이기보다는 실물경제에서 지대(부당한 불로소득)를 끌어내고 있다고도 할 수 있습니다.

 이 절제된 판단은 1990년대에 클린턴 행정부와 영국 정부가 믿고 있던 지혜, 그에 따라 금융업 규제를 철폐하도록 했던 지혜에 사형선고를 내린다. 무슨 말인가 하면, 간단히 볼 때 월스트리트에서 최근 수십 년 동안 고안해 낸 파생상품들과 기타 금융상품들은 실제로는 경제를 돕기보다 헤치기만 했다는 뜻이다.

 

 p338

 현대 금융이 경제이 미치는 악영향을 우려하는 사람들은 여러 가지 방법으로 금융을 개혁하려 한다. 그러나 나의 관심사는 그 도덕적, 정치적 영향이다. 일의 존엄을 살리려는 정치 어젠다는 세금 제도를 써서 명망의 경제를 재구성해야 할 것이다. 즉 투기자본을 억누르고 생산적인 노동을 상찬해야 할 것이다.

 일반적으로 말해 이는 세금 부담을 일에서 소비로, 그리고 투기로 옮긴다는 뜻이다. 이를 급진적으로 추진하려면 급여세를 대폭 인하하거나 아예 없애버리고 대신 소비세, 부유세, 금융거래세를 통해 세입 부족분을 메워야 할 것이다. 보다 온건하게 가려면 급여세(고용주나 고용자 모두에게 일 관련 비용을 늘리고 있는)를 줄이고 그만큼 줄어드는 세입은 단타 거래(실물경제에 아무 보탬이 안 되는)에 한해 금융거래세를 매겨 충당한다.

 노동에서 소비와 투기로 조세 부담을 넘기려는 이런 저런 수단들은 오늘날의 세금 제도를 좀 더 효율적이면서 좀 덜 누감累減적이게끔 만드는 방법으로 달성될 수 있다. 그러나 이런 고려가 아무리 중요하다고 해도 충분할 수는 없다. 우리는 세금의 표현적인 중요성도 고려해야 한다. 우리는 우리의 공공생활에 어떻게 돈을 대느냐를 통해 성공과 실패, 명예와 인정에 대한 태도를 표출한다. 세금 징수는 세입을 올리는 방법만이 아니다. 한 사회가 과연 무엇을 공동선에 대한 가치 있는 기여로 여기는가에 대한 판단을 제시하는 것이다.

 

p350

 같은 해에 대서양 건너편에서 제임스 애덤스라는 사람이 <미국의 서사시 The Epic of America>라는 이름으로 자신의 조국에 바치는 송가를 썼다. 이 책을 기억하는 사람은 거의 없다. 그러나 그가 그 책의 결론부에서 처음으로 쓴 문구는 모두가 알고 있다. "아메리칸 드림." 우리 시대에서 돌아보면 그가 말한 아메리칸 드림이란 우리가 쓰는 사회적 상승 담론을 의미한다고 생각해버리기 쉽다. 그러나 애덤스가 미국은 "인류에게 내려진 독특하고 유일한 선물"이라고 쓴 까닭은 그 꿈이 "그 땅에서는 모둔 사람에게 더 낫고, 더 부유하고, 더 온전한 삶을 살아갈 기회가 누구에게나 자신의 역량이나 성취에 따라 주어진다"는 것이기 때문이었다. 

 

 '그것은 단지 자동차나 높은 급여에 대한 꿈을 의미하지는 않는다. 모든 사람이 자신의 잠재력을 발휘하여 뭔가를 최상까지 이뤄낼 수 있는, 그리고 태생이나 지위와 관계없이 자기 자신으로서 남들에게 인정받을 수 있는 사회질서의 꿈이다.'

 

 그러나 자세히 읽어 보면 애덤스가 말하는 꿈은 단지 사회적 상승만을 의미하지 않음을 알 수 있다. 그것은 더 폭넓고 민주주의적인 조건적 평등을 말하고 있다. 확실한 예로, 그는 미국 의회도서관을 가리켜 "민주주의가 그 스스로를 위해 무엇을 할 수 있는지에 관한 상징"이라고 말했다. 모든 삶의 영역의 미국인들이 자유롭게 와서 공공 학습을 할 수 있기 때문이다.

 

 '일반 열람실을 보면, 물어볼 필요조차 없이 자유롭게 읽을 수 있는 책이 1만권이나 비치되어 있다. 자리마다 조용히 앉아서 책을 읽는 사람들을 보면 노인도 젊은이도, 부자도 가난뱅이도, 흑인도 백인도, 경영자도 노동자도, 장군도 사병도, 저명한 학자도 학생도 한 데 섞여 있다. 모두가 그들이 가진 민주주의가 마련한 그들 소유의 도서관에서 함께 책을 읽는다.'

 

 애덤스는 "이 장면이야말로 아메리칸 드림이 완벽하게 작용한다는 확실한 사례다. 사람들 스스로가 쌓은 자원으로 마련된 수단, 그리고 그것을 활용할 수 있는 대중 지성. 이 예가 우리 국민 생활의 모든 부분에 그대로 실현된다면 아메리칸 드림은 살아 있는 현실이 되리라"라고 썼다.

 

 p352

 당파주의가 하도 팽배하여 이제 사람들은 신앙이 다른 사람끼리 결혼하는 것만큼이나 지지 정당이 다른 사람끼리의 결혼을 껄끄럽게 보게 되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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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야마다 아키오라는 이름이 십몇 년 전쯤에 회자되던 적이 있었다. 미라이 공업의 창업주로서 유토피아 경영이라고 이름 붙여진 매우 독특한 경영방식으로 유명했던 인물이다. 이름표를 날려서 가장 멀리 날라간 이들을 승진시킨다던가 하는 괴짜스러운 방식으로 화제가 된 적이 있다. 

 

 당시에 다큐로도 제작된 적이 있는데, 꽤 재밋었다. 2014년에 돌아가셨는데 최근에 도올 김용옥의 노자 강의를 들으면서 문득 이 분이 생각났다. 어찌 보면 야마다 사장의 경영 철학은 노자의 사상과 닮은 부분이 많다.

 

 이 책은 2004년 당시 야마다 사장이 화제가 되면서 그 시류를 따라 나온 책으로 보인다. 책의 내용을 보면 의외로 괴짜라기보다는 탄탄하고 성실한 경영철학과 방법론을 보여준다. 제비뽑기로 사람을 뽑는다라는 선정적인 내용이 화제가 됐지만 근저에는 그의 녹록치 않은 인생철학과 경험이 녹아 있는 것이다.

 

 책의 원제는 즐겁게 벌자!(楽して 儲ける!)이다. 원제가 그의 철학을 잘 반영한다. 요즘 감각으로 봐도 원제를 그대로 사용하는게 책의 판매에도 더 도움이 되었을텐데라는 생각이다.

 

 미라이 공업과 야마다 아키오에게 관심이 있는 사람이라면 그의 생각의 원점을 알 수 있을 내용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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p15

 

 일본은 나라 전체의 구조를 크게 개혁할 필요가 있다. 이제는 제도가 바뀐다고 해서, 즉 예전처럼 다시 톱다운(top-down)으로 구조개혁을 한다고 해서 나라의 본질까지 변하는 그런 시대가 아니다.

 

 그런데도 국민 대부분은 여전히 위에서 명령이 내려오기를 기다리고 있을 뿐이다. 그러므로 진정한 개혁을 하기 위해서는 구조체계만이 아니라 국민 개개인의 의식 또한 개혁이 필요하다.

 

 예를 들면 닛산자동차는 카를로스 곤의 지도 아래, 기적이라고도 할 수 있는 V자 회복을 이루어냈다. 이 카를로스 곤은 닛산자동차에 막 들어왔을 때 이 말을 강조했다.

 

 "일본의 노동자는 섬세하고 치밀하며 근면하다. 이것은 정말 귀중한 재산이다. 하지만 일본에 없는 것은 매니지먼트다. 사원들은 닛산에 문제가 있다는 것을 자각하고 있지만 그 문제가 자신이 아닌 다른 곳에 있다고 생각하고 있다."

 

 실제로 분명히 그랬을 것이다. 그래서 곤은 극심한 톱다운으로 말미암아 '관료주의에 빠져있던 닛산의 조직을 과감하게 개선을 했고, 그 덕분에 닛산의 기업체질은 변하게 되었다.

 

 그렇다면 곤만 존재했다면 닛산의 V자 회복은 무조건 가능했던 것일까? 그렇지 않다. 물론 곤의 '전략'이 큰 도움은 되었지만 사원 개개인의 의식이 변하지 않았다면 불가능한 일이었다. 사원의 의식이 변화했기 때문에 회사도 변할 수 있었고, 따라서 닛산은 극적인 V자 회복을 이룰 수 있었던 것이다.

 

 사장이 먼저 변하는 것이 중요하다. 지금까지 해온 것처럼, 그냥 남들과 똑같이 하면 된다는 생각으로 회사를 경영한다면 실적을 늘리기는커녕 살아남는 일조차 불안하다. 어떻게 좋은 '전략'을 세우고, 회사를 '차별화'해 가는가. 그것이 명운을 정한다. 그러나 그것만으로는 안 된다. 사장과 함께 사원도 변해가야 한다. 그렇게 되면 회사가 변하기 시작한다. 사장이 변하면 사원도 변한다. 개인이 변하면 회사가 변하고 나라도 변해간다.

 

 즉 이 나라의 미래는 이마에 송알송알 땀방울을 맺혀가며 열심히 일하는 국민 각자의 노력이 만들어 가는 것이다. 미라이그룹의 사원들도 마찬가지다.

 

 저자의 베스트셀러로 라틴어와 관계된 에피소드 중심의 에세이집.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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p46

 

 저는 소통의 도구로서 언어는 배와 같다고 생각합니다. 배가 항구에 정박되었을 때는 아무런 문제가 없지만 항구를 떠나 먼 바다로 나가면 크고 작은 문제가 일어나기 시작해요. 어쩌면 그것은 배가 지나간 자리에 생기는 물거품 때문이 아닐까 싶어요. 배와 배가 나아가는 방향을 보아야 하는데 물거품을 보는 데서 생기는 문제라는 것이죠. 이는 정작 메시지를 읽지 않고 그 파장에 집중하는 것과 같아요. 그래서 오해가 쌓이고 소통이 되지 않는 것이 아닐까요?

 

 

p56

 

 언어 학습의 목적을 이야기하는 것은 학습의 방향성이 다른 학문들에도 좋은 나침반이 될 수 있기 때문입니다. 지식, 즉 '어떤 것에 대해 아는 것' 그 자체가 학문의 목적이 되어서는 안 됩니다. 학문을 한다는 것은 아는 것에서 그치지 않고, 그 앎의 창으로 인간과 삶을 바라보며 좀 더 나은 관점과 대안을 제시해야 합니다. 이 점이 바로 "우리는 학교를 위해서가 아니라 인생을 위해서 배운다"라는 말에 부합하는 공부의 길이 될 겁니다.

 

 저는 어려서부터 학교와 집에서 "공부해서 남 주냐?"라는 소리를 많이 들었습니다. 그때는 하지 못했던 대답을 지금은 자신 있게 할 수 있습니다. 이제는 정말 공부해서 남을 줘야 할 시대입니다. 지금 우리 사회의 청년들이 더 힘든 것은, 공부를 많이 한 사람들의 철학이 빈곤하기 때문입니다. 자신이 한 공부를 나눌 줄 모르고 사회를 위해 쓸 줄 모르는 사람들이 너무 많아요. 소위 배웠다고 하는 사람들이 자기 주머니를 불리는 일에는 발군의 실력을 발휘하면서도, 다른 사람들이 착취당하며 사회구조적으로 계속 가난할 수밖에 없는 시스템에는 무신경해요. 자신의 개인적인 욕망과 자기 가족을 위해서는 발 빠르게 움직이면서도 어려운 사람들의 신음소리는 모른 척하기 일쑤입니다. 엄청난 시간과 열정을 들여 공부를 한 머리만 있고 따뜻한 가슴이 없기 때문에 그 공부가 무기가 아니라 흉기가 되어버린 것입니다.

 

 

p85

 

 공부하는 과정은 일을 해나가는 과정과 다르지 않습니다. 공부든 일이든 긴장만큼이나 이완이 중요하기 때문에 정말 필요한 순간에 에너지를 쏟아부어야 하죠. 그러자면 스스로의 리듬을 조절해야 합니다. 그리고 다시 이야기하지만 그 과정 중에 끊임없이 스스로를 위로하고 격려할 줄도 알아야 합니다. 이것이 좋은 두뇌나 남다른 집중력보다 더 중요한 자세입니다.

 

 

p87

 

 삶이 그런 것인데도 사람들은 종종 착각해요. 안정적인 삶, 평온한 삶이 되어야 그때 비로소 내가 무엇인가를 할 수 있다고요. 이것은 착각입니다. "지금 사정이 여러모로 안 좋고 마음의 여유가 없어서 이 일을 혹은 공부를 할 수 없어. 나중에 좀 편안해지고 여유가 생기면 그때 본격적으로 할 거야"라고 하지만 그런 시간은 잘 오지 않아요. 아니, 끝내 오지 않을지도 모릅니다. 왔다고 하더라도 이미 필요가 없거나 늦을지도 모르고요.

 

 인간이라는 존재는 어떻게 보면 처음부터 갈등과 긴장과 불안의 연속 가운데서 일상을 추구하는 것이 삶이기도 하고요. 결국 고통이 있다는 것은 내가 살아 있음의 표시입니다. 산 사람, 살아 있는 사람만이 고통을 느끼는데 이 고통이 없기를 바란다면 그것은 모순이 있는 소망이겠지요. 존재하기에 피할 수 없는 고통 속에서 우리는 공부하고 일하며 살아갑니다.

 

 

p96

 

 그리스도교는 스토아 학파와 키케로 등 로마의 법사상가들의 주장처럼 모든 인간이 동일한 도덕적 지위를 가지고 있다고 설파했습니다. 다만 스토아 학파가 인간이 이성을 사용할 수 있는 능력에 근거하여 도덕적 평등을 주장하였다면, 그리스도교는 이웃을 자기 자신처럼 사랑할 줄 아는 능력에 근거하여 모든 인간이 평등하다고 보았다는 점에서 차이가 있습니다.

 

 

p106

 

 1555년 유럽에서 이루어진 종파 간의 화해 원칙인 '아우크스부르크 평화 회의 Pace di Augusta'이든, 1789년 북미 지역에서 행해진 여러 종파의 공존 원칙인 '미국 연방 헌법 제정'이든 역사적으로 최초로 인정된 권리는 바로 종교의 자유에 대한 권리였습니다. 즉 이 권리에 대한 문제는 단순히 종교의 자유의 문제에 머무르지 않고 양심의 문제임을 자각하게 됩니다. 그래서 종교의 자유는 양심의 자유로 확대되고, 이윽고 출판 및 표현에 대한 자유, 집회 및 결사에 대한 자유에까지 그 범위가 넓어지게 되죠. 다시 말해 우리가 오늘날 헌법상 기본권이라고 향유하는 권리는 그 출발이 종교의 자유에서 시작되었다고 할 수 있습니다. 하지만 오늘날 세계의 모든 사람들이 이런 권리와 자유를 누릴 수 있는 것은 아닙니다.

 

 이슬람 사회에서 법, 국가와 종교에 대한 개념은 다소 절대적인 일원론이 지배하고 있습니다. 법률이란 마호메트가 전파한 종교적, 사회적 교리의 실천적인 면 이외에는 아무것도 아니라는 말입니다. 이슬람교에서 인권은 자유로운 이슬람교도 성인에게만 온전히 존재합니다. 비이슬람교도와 노예는 부분적인 보호만 받거나 어떠한 법적(행위) 능력도 갖지 못합니다. 이슬람교도가 이슬람교 원칙에 반대하여 활동하거나 이슬람교 신앙을 포기하면 이슬람 국가의 국적을 잃을 수도 있어요. 배우자와 자신의 종교를 변경하는 일은 그 자체로 혼인 해소, 상속의 포기와 시민권 상실morte civille을 가져올 수도 있고요. 이슬람교는다른 모든 종교의 개종 권유를 거부하면서도 자신들은 타인에게 이슬람교로의 개종을 열렬히 권유합니다.

 

 사우디아라비아와 예멘은 유엔 비정부기구를 통해 세계 인권선언 제18조와 '인권 및 기본적 자유의 보호에 관한 유럽협약' 제9조 1항에 있는 내용이 포함되지 않도록 하기 위해 노력했습니다. 그 선언의 내용은 "모든 사람은 사상, 양심 및 종교의 자유에 대한 권리를 가진다. 이러한 권리는 종교 또는 신념을 변경할 자유와, 단독으로 또는 다른 사람과 공동으로 그리고 공적으로 또는 사적으로 선교, 신앙실천, 예배 및 의식에 따라서 자신의 종교나 신념을 표명하는 자유를 포함한다"라고 규정됩니다.

 

 아프리카에서 이슬람 국가들은 다음과 같습니다. 각 국가 다음에 괄호로 표기한 것은 "이슬람법이 입법의 주요 원천이다"라는 내용이 각 나라 헌법 몇 조에 실려 있는지를 나타냅니다. 알제리(헌법 제4조), 모로코, 튀니지, 이집트(헌법 제1조), 모리타니(헌법 제2조)가 있고, 수단도 이슬람 국가에 포함해야 합니다. 아시아에서는 사우디아라비아(헌법 제5조), 이라크(헌법 제13조), 이란(헌법 제1조), 요르단(헌법 제2조), 말레이시아(헌법 제3조), 파키스탄(헌법 제1조), 시리아(헌법 제2조와 3조)와 예멘(헌법 제3조)이 있습니다.

 

 모든 면에서 이슬람은 국교입니다. 이슬람교가 가진 국교로서의 영향력은 신정神政 체제인 사우디아라비아, 이란과 남예멘에서 최고조에 달하죠. 입법, 교육, 국가의 경영과 정치적 입장 등 대부분의 분야에서 이슬람의 영향력을 느낄 수 있고요. 이슬람 국교의 근본 요소는 "이슬람법이 입법의 주요 원천이다"라고 정의하는 데 있습니다(시리아 헌법 제2조).

 

 

p127

 

 어떤 사람의 성취는 그 자체만으로 평가되어야 한다고 이야기하지만 현실적으로 그건 쉬운 일이 아닙니다. 세상은 관계로 이루어져 있기도 하니까요. 결국 누군가의 생각이나 성취를 인정하더라도 그의 태도에 상처를 받거나 불쾌감을 느낀다면 더 중요하게 보아야 할 것들을 더는 보지 않고 고개를 돌려버리게 됩니다.

 

 

p134. 모든 동물은 성교 후에 우울하다(Post coitum omne animal triste est.)

 

 그가 말한 이 문장은 법의학뿐만 아니라 종교학에서도 사용되는데, 그 의미는 열정적으로 고대하던 순간이 격렬하게 지나가고 나면, 인간은 자기 능력 밖에 있는 더 큰 무엇을 놓치고 말았다는 허무함을 느낀다는 말입니다. 즉 사랑하는 사람이 곁에 있어도 개인적, 사회적인 자아가 실현되지 않으면, 인간은 고독하고 외롭고 소외된 실존과 마주해야 한다는 말로 해석할 수 있습니다. 이렇게 소외되고 고독한 인간, 특히 윤리적 인간이 비윤리적 사회에서 고통받고 방황하는 모습에서 인간은 영적인 동물로서 이성적 인간homo sapiens이자 종교적 인간homo religiosus을 지향하게 된다는 것입니다. 이것이 종교학에서 이 명문을 해석한 내용입니다.

 

 어떤 의미에서 인간은 스스로 인간이라고 자각하고 난 뒤부터 신을 경배하기 시작했다고 할 수 있습니다. 따라서 종교는 인간이 단순히 강력한 절대자에게 순종하기 위해서가 아니라, 그 시대를 지배하는 냉혹한 체제와 부조리한 가치관으로부터 고통받는 삶 속에서 삶의 의미와 가치를 재발견하기 위한 몸부림에서 시작되었다고 말할 수도 있습니다. 즉 초기의 인류는 삶의 가치와 의미를 신神적인 것에서부터 '유추analogia'하려고 했던 것이죠. 신이 인간을 필요로 한 것이 아니라, 인간이 신을 필요로 했다는 말입니다. 여기에서 '만들어진 신'이라는 개념이 등장하게 됩니다.

 

 Deus non indiget nostri, sed nos indigemus Dei.

 

 신이 우리를 필요로 한 것이 아니라, 우리가 신을 필요로 한다.

 

 

p208

 

 무솔리니 건축물의 특징은 파시즘을 상징할 수 있도록 웅장하고 위압적이라는 겁니다. 건축가이자 도시 계획자인 마르첼로 피아첸티니와 함께 바티칸 광장에서부터 콜로세움에 이르는 거대한 도로 건설 프로젝트를 준비하여 바티칸 광장과 콜로세움 두 부분에서 동시에 공사가 진행됐습니다. 그 시대 바티칸 광장 팡에는 여러 건물들이 있어서 광장까지 가기 위해서는 골목들을 지나야 도달할 수 있었는데, 무솔리니는 광장 앞에 있는 건물을 모두 허물고 도로를 내기 시작했어요. 독재자가 사유재산 문제를 해결하는 것은 그리 큰 어려움이 아니었습니다. 공사는 순조롭게 진행되었고, 그 덕에 오늘날 바티칸을 방문하는 사람들은 광장에 이르는 '화해의 거리'라는 뜻의 '비아 델라 리콘칠리아지오네Via della Riconcilazione'를 볼 수 있습니다.

 

 

p220

 

 스피노자는 "예속적인 인간은 자신의 능력으로 활동하지 못하고 그저 운에 따라 이리저리 휩쓸리거나, 자신보다 강한 능력을 지닌 개체에 압도되어 수동적으로 존재할 수밖에 없다. 우리는 예속적일 수록 무엇이 자기에게 유리한 것인지를 판단할 능력을 잃으며, 이로 인해 자신의 능력을 증대시킬 적합한 관계를 형성할 수 없게 된다. 여기서 욕망은 그저 맹목적인 채로 남아 있고, 자신의 능력이나 활동을 확대시키지 못한 채로 무수한 단절과 실패만을 경험하게 되는 것이다.(<에티카> 4부 정리 60 증명)"라고 말합니다.

 

 p244

 

 중세 시대의 대학은 어떻게 설립되었을까요? 대학이 설립되기 이전의 중세 교육은 여러 신학적 주제와 더불어 사도 바오로(바울)의 사상이 지배했습니다. 바오로의 사상에 바탕을 둔 중세의 신학은 그리스도인들에게 한편으로는 믿음과 책임감을 강조하였고 다른 한편으로는 종말론적 세계관을 심어주었습니다. 앞서 8강에서도 이야기했지만 바오로의 사상과 긴밀하게 관련되는 또 다른 문제는 로마서 13장의 '그리스도인과 권위'에서 간단히 언급하고 있는 초창기 교회와 나라 간의 관계에 관한 것이었습니다.

 

 사도 바오로는 현세의 권위는 신이 정해준 것이므로 그리스인들은 합법적인 모든 일에 대해 국가에 복종해야 할 의무가 있다고 주장했는데요, 앞서 말씀드린 것처럼 이 주장의 영향으로 교회의 법령이 일반 시민법보다 더 상위에 자리하게 됐습니다. 그와 동시에 성경이 법률적 차원의 공동 유산이자 공통 규범이 됐고 점차 모든 것의 근원이 되기에 이르죠.

 

 하지만 이미 언급했듯이 시간이 지나면서 사람들은 성경이 현실의 모든 문제를 해결해줄 수 없다는 걸 절감하기 시작했습니다. 이것은 오늘날 그리스도교를 믿는 종교인들에게 시사하는 바가 큽니다. 결국 중세 사람들은 성경의 가치를 변함없이 인정하고 유념하면서도 세속의 학물과 연계해서 문제를 풀고자 했어요. 이것이 유럽에서 대학이 탄생하게 된 배경입니다.

 

 

 

p282

 

 Letum non ominia finit. 죽음이 모든 것을 끝내지 않는다.

 

 Dum vita est, spes est.  살아 있는 한, 희망은 있다.

 

 

 

보고 싶다

이렇게 말하니까 더 보고 싶다

너희 사진을 보고 있어도 보고 싶다

너무 야속한 시간 나는 우리가 밉다 이젠 얼굴 한 번 보는 것조차 힘들어진 우리가


여긴 온통 겨울 뿐이야 8월에도 겨울이 와
마음은 시간을 달려가네 홀로 남은 설국열차
니 손 잡고 지구 반대편까지 가 겨울을 끝내고파

그리움들이 얼마나 눈처럼 내려야 그 봄날이 올까


Friend


허공을 떠도는 작은 먼지처럼 작은 먼지처럼
날리는 눈이 나라면 조금 더 빨리 네게 닿을 수 있을 텐데


눈꽃이 떨어져요 또 조금씩 멀어져요
보고 싶다 (보고 싶다)
보고 싶다 (보고 싶다)


얼마나 기다려야 또 몇 밤을 더 새워야
널 보게 될까 (널 보게 될까)
만나게 될까 (만나게 될까)


추운 겨울 끝을 지나
다시 봄날이 올 때까지 꽃 피울 때까지
그곳에 좀 더 머물러줘 머물러줘


니가 변한 건지 (니가 변한 건지)
아니면 내가 변한 건지 (내가 변한 건지)
이 순간 흐르는 시간조차 미워

우리가 변한 거지 뭐 모두가 그런 거지 뭐


그래 밉다 니가 넌 떠났지만
단 하루도 너를 잊은 적이 없었지 난 솔직히 보고 싶은데
이만 너를 지울게 그게 널 원망하기보단 덜 아프니까


시린 널 불어내 본다 연기처럼 하얀 연기처럼
말로는 지운다 해도 사실 난 아직 널 보내지 못하는데


눈꽃이 떨어져요 또 조금씩 멀어져요
보고 싶다 (보고 싶다)
보고 싶다 (보고 싶다)


얼마나 기다려야 또 몇 밤을 더 새워야
널 보게 될까 (널 보게 될까)
만나게 될까 (만나게 될까)


You know it all
You're my best friend


아침은 다시 올 거야
어떤 어둠도 어떤 계절도 영원할 순 없으니까


벚꽃이 피나봐요 이 겨울도 끝이 나요
보고 싶다 (보고 싶다)
보고 싶다 (보고 싶다)


조금만 기다리면 며칠 밤만 더 새우면
만나러 갈게 (만나러 갈게)
데리러 갈게 (데리러 갈게)


추운 겨울 끝을 지나
다시 봄날이 올 때까지 꽃 피울 때까지
그곳에 좀 더 머물러줘 머물러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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도입부의 철길 위에 귀를 기울이는 장면, 바닷가에서 쓸쓸이 뒤돌아보는 모습, 사각형으로 돌아가는 계단 아래에서 위를 바라보는 모습, 넌 혼자가 아니야라고 쓰여진 녹슨 회전목마, 모든 잎이 떨어진 나무에 걸린 신발 한켤레.

 

뭔가 뭉클한 느낌이 드는 곡.

 

2019년부터 2020년 현재까지의 부동산 시장의 상황에 대한 인사이트와 함께, 부동산에 대한 일반적 이해를 돕는 책이다. 

 

부동산에 대한 내용이긴 하지만 조금만 그 내용을 음미해보면 주식 등 일반적인 투자의 기본에 대한 인사이트에도 적용할 수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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p27

 

 이제 부동산으로 돈 버는 시대는 끝나야 한다고 말한다. 그래서 규제하는 거라는 얘기다. 그럼 대한민국 최초의 부동산 규제책은 언제 나왔을까? 박정희 정부 때인 1967년이다. 보수 정권의 시작이라고 할 수 있는 정부다. 그때 발표한 정책이 '부동산 투기 억제에 관한 특별 조치법'이었다. 양도 차익의 50%를 세금으로 걷어가는 정책이었다.

 그때 박정희 정부는 이런 선언을 한다. "이제 부동산으로 돈 버는 시대는 끝났다!" 그 정책으로 인한 시장의 결과는 어땠을까? 매도자들은 매물을 모두 수거했고 부동산 시세는 1년 동안 80% 폭등했다.

 

 

p109

 

 부동산 상품 중에 실수요만으로도 거래가 이루어지는 것은 거의 없다. 임대 주택 정도를 제외하면, 사적 재산이라고 판단되는 물건은 모두 가수요가 있다. 그래서 시세 전망을 하려면 가수요의 규모를 항상 눈여겨봐야 한다.

 가수요가 실수요보다 많으면 가격이 더 많이 오른다. 가격을 올리는 거래 빈도가 많아지기 때문이다.

 

 

p124

 

 먼저 대량 입주로 일어날 만한 문제를 정리해 보자. 특정 지역에 신규 아파트 공급이 많아지면 지역 수요만으로 입주 물량을 소화하기 어렵다. 그럼 준공 후 미분양, 장기간 미입주 물량이 쌓이게 되고 신규 아파트 가격이 내려간다. 이어 주변 구축 아파트 가격도 내려간다. 결국 시장 전체의 주택 가격이 폭락한다. 이것이 최악의 시나리오다.

 

 그렇다면 대응 전략은 무엇인가? 매우 간단하다. 가격이 폭락한 준공 후 미분양, 미입주 물량 중 입지가 좋은 곳을 선별한다. 폭락 혹은 하락한 가격으로 매매한다. 입주 대란에 대한 전략으로 이보다 효과적인 방법은 없다.

 

 하지만 시장이 그렇게 호락호락하지 않다. 시장 참여자 모두 똑똑한 소비자다. 좋은 물건을 시장에 방치한 채 내버려 둘 리가 만무하다. 헛된 기대를 하기보다는 좀 더 구체적인 전략을 짜야 한다.

 

 입지를 구체적으로 구분해 보자. 주택 보급률이 200%라 해도 공급이 늘 부족한 지역이 있는가 하면, 주택 보급률이 50%밖에 되지 않아도 신규 입주 물량을 소화하지 못하는 지역이 있다. 기존 아파트에서도 충분히 경쟁력 있는 입지가 있고, 구축 아파트 수요는 없고 신규 아파트 수요만 있는 입지도 있다.

 사람들은 계속해서 이사를 하는데, 어떤 조건을 우선적으로 선택하는지 파악해야 한다. 입지 조건만으로 거주지를 선택할 수 있는지, 상품 조건까지 고려해야 하는지 반드시 판단해야 한다.

 이렇게 지역별, 입지별로 입주 대응 전략을 짜는 게 부동산 입지를 공부하는 이유다. 입지 공부를 하다 보면 그 입지에서 필요로 하는 상품까지 알 수 있다. 상품에 대한 적정 가격도 이해된다. 입지, 상품, 가격 모두 중요하다는 의미다.

 미래를 모두 예측하고 대응하는 건 불가능하다. 하지만 어느 정도 예상되는 미래에는 대응할 수 있다. 우려되는 리스크는 낮추고 희망하는 확률은 높일 수 있다. 공급 과잉은 우리가 활용해야 할 부동산 현상이지, 걱정해야 할 문제가 아니다.

 

 

p172

 

 매수 · 매도 타이밍에 절대 법칙이라는 것은 있을 수 없지만, 투자할 때 욕심을 버려야 한다는 것은 언제나 적용된다. 어떤 경우라도 바닥 가격에 사서 머리 가격에 팔 수는 없다. 그건 투기고 욕심이다. 그런 기준으로 투자하면 백전백패한다.

 부동산 차트를 활용하면 부동산 바닥을 알 수 있다고 말하는 사람들이 있다. 물론 그럴 수도 있다. 문제는 그 당시에는 그게 바닥인지 아닌지 절대 알 수 없다는 것이다. 최소 2년 이상은 지나야 바닥이었다고 판단할 수 있다.

 

 머리 시점은 파악하려는 시도 자체가 모순이다. 부동산 시세라는 것이 오르락내리락을 반복하겠지만, 결국 양호한 입지의 경쟁력 있는 상품이라면 우상향 곡선으로 가게 된다. 인플레이션이 진행되는 한 그렇다. 머리 시점을 따지는 것은 의미가 없다는 말이다. 결국 언제 매도할 것인가라는 판단의 문제가 관건이다. 그리고 정답은 없다. 적절한 타이밍이 있을 뿐이다.

 

 그렇다면 적절한 매수 · 매도 시점을 어떻게 선정해야 할까? 먼저 선호하는 입지와 실거주할 만한 상품 수준을 고려해 매수 대상 아파트 단지를 선정해 보자. 인플레이션만큼은 상승할 수 있는 양호한 입지 조건과 경쟁력 있는 상품이라는 것을 전제로 해야 한다. 그 아파트 단지의 시세를 정기적으로 체크해 보자. 가격이 오를 것이다. 내릴 것이다 등의 판단 자체는 금지다. 그저 주변 아파트 혹은 주변 시세 대비 조금 쌀 때 매수하고, 조금 비싸다는 인식이 생길 즈음에 매도한다고 생각하면 된다.

 

 

 

p175

 

 주의할 점이 있다. 복기를 하면 바닥과 머리를 확인할 수 있다. 그렇다고 바닥에서 산 뒤 머리에서 매도하려는 시도를 해서는 안 된다. 모의 투자 시에도 가장 중요한 것은 조금 싼 듯한 시점과 조금 비싸다고 판단되는 시점을 찾는 것이다. 바닥에서 사서 머리에서 팔 수 있다고 제안하는 사람이 있다면 경계해야 한다. 거래만 성사시키고 수수료만 챙기려는 업자일 가능성이 100%다.

 

 매수 · 매도 시점에 대한 의사 결정은 무조건 본인이 해야 한다. 모든 투자의 기본은 무릎에서 사서 어깨에서 파는 것이다. 이 원칙만 지킬 수 있다면 안전하고 확률 높은 매수 · 매도 시점의 선정 기준을 스스로 만들 수 있다.

 

 

p177

 

 2010년 이후 부동산 시장은 완전히 달라졌다. 이전에는 신축이든 구축이든 대부분의 아파트 가격이 상승했다. 2010년 이후에는 재건축 가능 아파트를 제외하면 20년 차 미만 아파트만 올랐다. 2020년 이후에 10년 차 미만 아파트 위주로 상승할 가능성이 높다. 신축 아파트에 대한 로열티를 상승하고, 기축 아파트는 수요가 급감하고 있다.

 

 2000년 이전 부동산 시장처럼 지역별, 상품별 격차가 크지 않은 시장이라면 재건축 연한 연장이 고려해 볼 만한 정책이다. 하지만 지금처럼 신축과 구축의 수요가 급격하게 벌어지는 시장에서는 신축 공급을 줄이면 신축 아파트는 물론 준선축 시세까지 폭등으로 이어진다.

 

 '팩트 폭격'을 하나 더 한다면, 과거 공급 제한으로 2012~2014년 입주 물량이 급감했고 이후 서울 부동산 가격은 상승했다. 2017~2018년 서울 아파트 시세 폭등은 말 그대로 새 아파트 위주였다. 입지 좋은 곳에 새 아파트가 공급됐으니 시세가 오를 수밖에 없었다.

 

 지금처럼 신축과 구축의 가격 차가 두 배 가까이 나는 시장에서 강남 신축 시세를 잡아 타 지역까지 공급을 축소하는 정책은 이후 시장 전개에 악영향을 줄 수밖에 없다.

 

 지역별 상한선은 존재한다. 현재 강남구는 3.3㎥ 당 5,100만 원 전후, 도봉구는 1,400만 원 전후다. 강남구가 1억 원이 되면 도봉구는 3,000만 원이 되리라는 예측은 현재의 시장을 너무 단순하게 판단하는 것이다. 지금은 질적인 시장이다. 입지, 상품, 지역 위상, 입주민에 따라 넘어갈 수 없는 가격대가 있다. 지역마다 지불할 수 있는 가격대가 다르다.

 

 현재 시장을 이해하는 데 가장 중요한 '실수요층'을 고려하지 않은 것 같다. 서울은 전년 대비 거래량이 4분의 1로 줄었다. 투자 수요가 아니라 실수요가 감소했다. 이건 시장에 문제가 발생했음을 의미한다.

 

 정부는 여전히 서울 부동산 시장을 투자층이 주도한다고 판단한다. 지난 50년간 부동산 시장에서 성공한 정책은 실거주층을 위한 정책이었고, 실패한 정책은 대부분 투자자를 타깃으로 했다. 두 집단의 비율 자체가 비교가 안 될 정도다.

 

 게다가 시장을 입지마다 세부적으로 쪼개 보지 않는다. 강남권을 제외하면 서울에서도 시세가 상승하는 지역보다 조정받는 지역이 더 많다. 지방은 상승하는 지역 자체를 찾아보기 힘들다. 과거 정부의 시행착오를 반복하고 있는 게 안타깝다.

 

 재건축 연한을 연장하면 공급이 줄어든다. 기존 입주 물량이 많으니 괜찮다는 전문가도 있다. 그래 봤자 2022년까지다. 이후에는 분명 공급량이 급감한다. 세대수가 증가하는 만큼 공급이 늘지 않으면 공급 축소와 같은 효과가 발생한다.

 정부와 전문가들이 오해하는 게 있다. 단독주택, 다세대 빌라, 오피스텔도 주택이라 생각하는 것이다. 그 주택까지 포함하면 절대 공급이 부족하지 않다고 말한다. 국토교통부에서 매년 실시하는 주거실태 조사 결과를 보라. 현재 거주 유형에 관계없이 아파트 선호가 압도적으로 높고, 특히 신규 아파트 선호도는 매년 증가하고 있다. 현재 시장에서 필요한 건 비아파트도, 구축 아파트도 아닌 신축 아파트다.

 

 서울 부동산 시장은 수요 대비 공급이 적을 수밖에 없다. 이를 부정하는 건 억지일 뿐이다. 그래서 서울 공급을 축소함으로써 서울에 몰린 수요를 비서울 지역으로 분산하려는 정책도 나온다. 하지만 서울 수요층 중에는 비서울 지역으로 절대 가지 않을 수요도 있다. 이들이 많으면 많을수록 가격은 상승한다. 이게 서울 시세 상승의 이유다.

 

 수요 · 공급 문제를 떠나, 강남 집값이 오른다고 그 자체를 없애겠다는 발상은 단기적인 전략이다. 재건축 가능 연한 연장은 궁여지책으로밖에 보이지 않는다. 역효과가 훨씬 클 것이라 예상된다.

 

 재건축 가능 연한이 연장되면 신규 아파트 시세는 더욱 상승하고, 수요가 빠지면 조정장에 진입하던 서울의 기축 아파트까지 오를 수 있다. 아울러 이미 조정장이던 비서울 지역 중 입지 좋은 곳의 부동산도 뜬금없이 상승 전환될 수 있다. 서울의 핵심 지역 대비 시세가 낮은 부동산이 오르면 줄어든 소액 투자 수요가 다시 증가하게 된다.

 2006~2007년과 2015년 전후의 투자, 투기, 거품 시장이 오버랩된다.

 

 가격을 규제하기 위한 정책보다는 수요가 필요한 곳에 공급을 늘려 수요를 분산하고, 교통망을 확충하는 것이 정부의 진짜 역할이라고 생각한다.

 

 

p194

 

 지금 서울 · 수도권에서 필요한 건 무엇일까? 상품 경쟁력이 있는 아파트다. 서울은 상품 경쟁력이 있는 아파트가 공급되고 있을까? 그렇다. 몇 년 전부터 본격적으로 공급되고 있다. 40년 전의 대규모 공급, 30년 전의 대규모 공급 이후 처음으로 대규모 공급되는 시장이다.

 

 40년 전 서초구 반포동, 강남구 압구정동, 개포동, 대치동, 용산구 이촌동, 강동구 고덕동, 송파구 잠실동에 대량으로 공급되었던 상품들이 이제야 새 아파트로 변경되고 있다. 30년 전 양천구 목동, 노원구 상계동에 대량으로 공급되었던 상품들이 이제야 새 아파트로 변경을 준비하고 있다. 서울이라는 입지 좋은 지역에 걸맞은 좋은 상품을 희망하는 수요들이 점점 더 많아지고 있다.

 

 서울에 질적인 상품이 없어서 20년 전 떠났던 수요들도 복귀하고 있다. 이제 1기 신도시가 상품 경쟁력을 잃어 가고 있기 때문이다. 내가 내린 결론은 서울 아파트 시장은 실수요 시장이라는 것이다. 적어도 지금 시장은 말이다.

 

 최근 준공된 새 아파트에 입주하는 실수요층, 건설 중인 새 아파트에 입주하게 될 실수요층, 향후 10년 동안 분양될 새 아파트를 기다리는 실수요층, 이것이 현재 서울이라는 부동산 시장의 주요 구성원이다.

 

 이 서울이라는 지역의 새 아파트를 희망하는 수요들이 투기 세력인가? 적폐인가? 서울에 존재하고 있는 이 수요가 투자 수요일까, 실수요일까? 여러분이 직접 판단해 보기 바란다. 지금부터는 무조건 상품 경쟁력을 따져 봐야 한다.

 

 

p255

 

 수요가 고정된 지역은 더 어렵다. 가격 상승은 공급 대비 수요가 많을 때 발생한다. 추가 실거주 수요가 유입되지 않는 상태에서 특별한 이슈 없이 가격이 상승하면 대체적으로 투자 수요층이 증가했다는 의미다.

 

 실거주 수요층이 고정된 상태에서 투자 수요층이 유입되면 가격은 오른다. 절대 가격이 낮은 지역일수록 더 ㅋ큰 폭으로 오른다. 해당 지역의 적정 가격을 모르는 상태에서 투자가 이루어지기 때문이다. 실수요자들은 상승장 초기에 당황한다. 결국 상승장 후반에 불안한 심정으로 참여하게 된다. 소위 상투를 잡는 것이다.

 

 아파트라는 상품은 실거주가 가능하기 때문에 가격이 상승하든 하락하든 거주한다면 큰 문제는 없다. 다만 어설픈 투자로 상투에서 매수한 투자자에게는 문제가 발생할 수 있다.

 

 현재 투자 메인 지역인 서울 · 수도권의 투자 환경이 어려워지자 지방으로 눈을 돌리는 투자자들이 꽤 많아졌다고 한다. 지방은 대기 수요가 적고, 실거주 수요도 감소하는 지역이 많아 투자 대상으로 부적합한 지역이 많다.

 

 '묻지 마 투자'는 투자가 아니다. 투기꾼들의 희생양이 될 가능성이 높다.

 

 

p259

 

 규제 강도가 높은 투기지역은 수요가 차고 넘치는 곳으로 해석할 수 있고, 투기과열지구는 투기지역 다음으로 수요가 많은 곳으로 판단하면 된다. 조정대상지역은 수요가 많은 듯한데 조금 더 지켜보겠다는 곳이다. 기타 지역은 정부도 알수 없으니 개인 스스로 판단하라는 뜻이다.

 

 투기지역은 다른 말로 하면 현재 부동산 시장에서 입지가 가장 좋다고 인정받는 곳이다. 수요가 차고 넘치기 때문에 공급으로 수요 문제를 해결할 수 없다고 판단한 셈이다. 이곳의 적정 가격은 소비자가 정할 수밖에 없다. 3.3㎡당 3,000만 원이든, 1억 원이든 거품 가격이라는 말을 쓰는 게 의미 없다. 소비자가 받아 주는 한 그 금액이 시장 가격이다. 구입할 만한 가격이라고 판단해 매수하는 것이다.

 

 투기지역을 단순히 '가격이 높은 곳'으로 분석하면 해결책이 나오지 앟는다. 다른 지역에 비해 비싸니 무작정 하락하리라 기대하는 건 난센스다. 3.3㎡당 1,000만 원 시장의 시각으로 5,000만 원 시장을 조정하려면 답이 나오지 않는다. 그 시장이 왜 5,000만 원이 됐는지 이해하기 어렵다면 다른 지역보다 비싼 지역이라고 인정하면 된다. 그게 오히려 투기지역 시장에 대한 전략을 짜는 데 유리하다.

 

 

p293. (6장. 정책 의 서문에 해당하는데 어찌 보면 이 책에서 가장 중요한 내용이라는 생각이 든다. 부동산에 대한 필자의 가장 궁극적인 인사이트가 담겨있다라고 보인다)

 

 

 강남을 중심으로 한 주요 지역 아파트 시세가 다시 상승 기미를 보이자 또다른 정책을 준비하고 있다는 기사들이 나오고 있다. 이에 비해 대부분의 지방 시장 상황은 많이 어렵다. 가격 하락과 거래 감소의 이중고를 겪고 있다. 완화 정책이 필요하다는 분위기가 조성되고 있다.

 

 이렇게 양극단의 모습을 보이는 시장과 관련해서 많은 언론사와 독자들에게 질문을 받는다. 다음 정부 정책은 어떤 방향일지... 그럼 그저 웃음으로 답변을 대신하다. 이제 정부의 부동산 정책에 대해서는 모두들 관심을 거두었으면 한다. 정부가 어떤 부동산 정책을 추진할 것인가에 신경 쓰지 말라는 얘기다. 이번 정부에서는 부동산 규제 위주의 정책만 나올 가능성이 매우 높다. 완화 정책이 나올 것이라는 기대를 하지 않기 바란다.

 

 이전의 어떤 정부와 비교해도 적어도 부동산 쪽으로 이번 정부만의 철학이 확실하다. 철학대로 정책을 만드는 경우 단기적인 시장은 보지 않는다. 결국 지금 시장의 가격이 상승하든 하락하든 이번 정부는 아마도 그동안 생각해 왔던 정책들을 지속적으로 펼쳐 놓을 것이다. 그렇기 때문에 앞으로 나올 정책들에 대해 단기적인 의견을 이야기해도 전혀 도움이 되지 않을 것이다.

 

 하지만 이것만은 확실하게 말해 두고 싶다. 단기적으로 보면 시장이 모두 다를 수 있다. 그러나 장기적으로 보면 결국 유사한 흐름을 보인다. 10년 동안 시세 상승만 놓고 보면 대체적으로 인플레이션 전후로 시세의 증감을 보였다.

 

 다만 지역별로 상품별로 사이클이 조금 다르다. 2009년부터 상승했던 부산 시장은 2016년 조정장이 시작됐다. 경상남도 대부분의 지역이 같은 사이클을 보여주고 있다. 2015년 전국 대세 상승기 때도 움직이지 않던 대전 시장은 최근 들어 조금씩 상승 기운을 보이고 있다. 서울은 2014년 까지 조정장이었다가 2015년부터 2019년까지 지속적으로 상승했다.

 

 서울이라는 시장도 너무 많이 올랐다 싶으면 조정장이 시작될 것이다. 부산이 그랬고 울산이 그랬던 것처럼 말이다. 하지만 많은 사람들이 불안해한다. 샀는데 내리면 어떡하느냐고, 안샀는데 다시 오르면 어떡하느냐고...  어떻게 해야 할까? 정부의 방향성과 시장의 움직임이 자꾸 엇박자가 나는 것 같다. 전문가들의 의견도 모두 다르다. 도대체 어떤 결정을 내려야 할까?

 

 이렇게 제안하고 싶다. 단기적인 시장을 보지 말고 장기적으로 생각해보자고 말이다. 단기적인 가격 상승과 하락을 걱정하지 말고, 내가 지금 매수 여부를 결정해야 하는 아파트가 10년 후에도 수요가 있을지만 따져봐야 한다.

 

 내 집 마련을 하는 것은 결국 주택 관련 고민을 하지 않으려는 것이다. 무주택자로서, 임차인으로서 겪어야 했던 주거 불안 문제에서 벗어나기 위해서 내 집 마련을 하는 것이다. 결국 내 집 마련을 하는 순간 대부분의 문제가 해결된다는 의미다.

 

 샀는데 부동산 시세가 빠지면 어떻게 할까 걱정이다. 빠질 것이 예상되면 매수하지 않으면 된다. 평생 임차로 살아도 된다. 안 샀는데 부동산 가격이 다시 올라서 결국 또 못하게 되면 어떻게 할지 걱정이다. 그러니 내 집 마련을 하라고 수없이 이야기하는 것이다. 입지 좋고, 상품 경쟁력 있고, 남들도 살 만한 가격이면 사도 된다.

 

 부동산 정책 때문에 의사 결정하기가 너무 힘들다는 사람이 많다. 현재의 부동산 정책은 내 집 마련을 지금 하라는 것이다. 투자자들이 집을 사지 못하게 하고 있는 동안 내 집 마련을 하라는 것이다. 그런데 오히려 투자하는 사람들은 걱정이 없고 실수요 주택을 마련해야 하는 사람들이 걱정이 더 많다. 그렇게 스트레스를 받을 사람은 그냥 배우자의 의견에 따르면 된다.

 

 만약 재테크를 하고 싶다면 차라리 예금을 하는 것이 좋다. 연금보험 나쁘지 않다. 손해는 절대 보지 않으니까 말이다. 무주택자가 거주용 집 한 채 사는 것도 투자다. 앞으로 집값이 떨어질 것이 확실하다면 집을 살 이유가 없기 대문이다. 그저 전세나 월세 등의 임차 형태로 집을 선택하면 된다. 그러면 이런 부동산 고민을 할 필요가 없다.

 

 하지만 사람들 대부분이 걱정하는 것은 집값이 빠지는 것이 아니다. 나는 안 샀는데 집값이 더 오를까 봐 걱정하는 것이 대부분이다. 나는 안 사고 남은 샀는데 집값이 오르는 것처럼 속상한 일이 없다.

 

 결국 내 집 마련도 어느 정도 리스크를 감수해야 한다. 투자이기 때문이다. 투자에 100% 확실한 것은 없다. 부동산을 매수하는 것도 마찬가지다. 집 한채를 매수할 때도 하락할 수도 있다는 리스크를 감수하는 것이다. 그런 리스크조차 도저히 감당할 수 없는 사람이라면 아파트를 매수하면 안 된다. 아무리 소형 주택이라도 말이다.

 

 정부는 공짜로 집을 마련해주지 않는다. 나의 보금자리는 나 스스로 마련해야 한다. 부동산 정책은 활용의 대상이지, 경쟁의 대상, 의지의 대상이 아니다. 정책에 대한 확실한 인사이트를 가져야 한다.

 

 

 

p311

 

 역대 정부들은 보수, 진보 의견을 모두 반영하기 위해 여러 노력을 했다. 법인세를 낮추거나 종부세 기준을 완화하는 것은 보수 세력의 이익을 보호하려는 모습이다. 그로 인해 부족해지는 세금을 보충하기 위해 다른 세율을 높이려고 한다. 공공주택을 끊임없이 공급하려고 하면서 민간임대주택도 활성화하려고 한다.

 

 정치인들에게 정권을 유지하는 것이 중요하다. 정권을 유지하기 위해서는 돈과 각종 개발 계획이 필요한데, 그런 지원이 가능한 세력은 일반인이 아니다. 결국 대기업 등 특정 집단의 원조가 필요하다. 대부분의 정부가 친기업적인 정책을 필 수밖에 없는 이유가 여기 있다.

 

 반면 기득권 세력에 반대하는 진보 집단이 많다. 이들은 서민층을 지지 기반으로 한다. 집을 가진 사람들보다 집을 가지지  않는 사람이 상대적으로 많다. 그래서 이 계층에게 이익을 주고자 하는 정책을 많이 제안한다. 기초연금, 무상급식 등이 그런 예가 될 것이다.

 

 진보의 한계는 부동산 정책에서 보수와 크게 차별화되지 않는다는 것이다. 역대 진보 정권도 결국 보수 정권과 같은 방법으로 부동산 문제를 해결하려 했다. 실질적인 문제 해결 방안을 제안하기보다 보수 진영의 정책을 비판하는 것에 초점을 두는 경우가 많다.

 

 진보 진영은 논리적이고 합리적인 비판을 하고 서민을 위한 정책을 제안하기도 한다. 하지만 그들의 주장은 현실에서 실현 불가능한 정책이 많다. 모든 신규 주택을 공공주택으로 제공한다든지, 저렴한 전세를 제공하기 위해 임대 보증금 인상을 억제한다든지 하는 식의 정책 말이다. 조금만 생각해봐도 이 정책들의 한계를 알 수 있다. 저렴한 전세를 대량으로 공급하는 것이 가능할까? 집주인의 사회복지 인식이 뛰어나 시세 차익을 볼 수 없는 집을 잔뜩 사서 저렴하게 전세로 공급해 줄 것을 기대하는 것인가? 아니면 개인 재산권을 제한해 강제로 그렇게 하려는 것인가? 대부분 실현이 불가능한 제안이다.

 

 매매든, 전세든, 월세든 당장 내 살 집을 구해야 하는 일반 국민에게 혼란만 가중시키는 것은 아닌지 따져 봐야 한다. 양 진영의 대립은 부동산 문제를 더 어렵게 한다.

 

 정부는 투표로 선출된 정치인들의 집단이다. 직접 투표로 선출되었던 선출된 사람이 임명했든 정치인들이다. 그들의 목적은 정권을 차지하고 유지하는 것이다. 그들은 투표로써 평가받아야 하므로 많은 사람들이 좋아할 만한 정책을 만들어야 한다.

 

 선거철엔 정책이 남발된다. 대부분 실현되지 않지만, 사람들은 혹시나 하는 심정으로 투표한다. 이명박 정부 당시 뉴타운 정책이 그랬고, 공공임대주택, 행복주택 등의 공공주택 공약이 주요 공약을 차지했다. 선심성 정책은 추진이 잘 되지 않는다. 된다 하더라도 계획만큼 큰 규모로 되는 경우는 많지 않다. 정부는 예산 안에서 움직이기 때문이다.

 

 이것이 정부의 어쩔 수 없는 한계다. 국민이 바라는 것을 정부가 어떻게 해 줄 것이라 기대하지 마라. 정부는 만능이 아니다. 경제 생활은 우리 자신이 하는 것이다. 정부에 많은 제안을 하는 것은 바람직한 일이지만, 제안한 것이 이루어지기를 하염없이 기다리기보다는 자신에게 조금이라도 도움이 되는 행위를 하는 것이 낫다.

 

 정부에 요구하려면 구체적인 요구를 하자. 실현 가능한 내용을 요구하자. 그래야 정부도 국민의 말에 귀를 기울일 것이다. 개인적인 이익을 위한 허황된 주장만 하면 무시할 가능성이 높다. 추진 가능성이 높더라도 정권 유지에 도움이 되지 않으면 정책에 반영될 수 없다. 진보 정권이든 보수 정권이든 마찬가지다.

 

 

p316

 

 부동산 정책은 부동산 경기 흐름에 선행하는 패턴을 보인다. 부동산 완화 정책이 지속되면 부동산 거래는 활성화되고, 부동산 규제 정책이 지속되면 부동산 거래는 축소된다. 정책이 처음 발표되고 추진되는 시기는 그 반대 문제가 발생했을 확률이 높다. 결국 정책을 통해 현재의 부동산 시장과 미래의 부동산 시장을 분석할 수 있다.

 먼저 주택 소유자 또는 주택 구매 의향자의 정책 활용 포인트를 정리해 보자. 규제 정책이 나왔다면 부동산 시세는 상승하고 있을 것이다. 상승 추세를 추종해 부동산을 구매하면 '상투'를 잡을 확률이 높다. 주택을 구입할 바람직한 시기가 아니다. 반면 주택을 매도하려는 사람들에게는 절호의 기회다.

 

 완화 정책이 나왔다면 매도자보다 매수자가 시장 주도권을 가질 확률이 높다. 따라서 실수요층이라면 급매로 구입하거나 매도자와 금액 할인의 협상을 주도할 여지가 크다. 적극적으로 구매하기에 좋은 기회다.

 

 주택을 소유하지 않은 임차 계층의 경우, 부동산 급등 시기에 매매가는 상승하지만 전세가는 안정될 확률이 높다. 시세 하락기에는 역전세 현상이 생길 수 있으므로 집주인의 경제적 능력에 관심을 가져야 한다. '깡통주택' 수준의 대출이 많은 주택은 더 조심해야 한다.

 

 임차 세대들은 대규모 택지개발지구를 노릴 필요가 있다. 택지개발 지구 내 주택이 한꺼번에 많이 공급될 경우, 초기 임대 시세가 낮을 확률이 높다. 따라서 저렴한 가격에 새집에서 거주할 기회가 많다.

 

 이렇듯 시장 판세, 특정 지역의 수요 · 공급에 관심을 가지면 여러모로 좋다. 임차 계층 중 주택 구매 의향이 있는 사람은 자기가 사는 지역의 주택 시세를 파악하고 있어야 한다. 시세 추이를 알면 가격이 싼지 비싼지 감이 생긴다. 그 감은 어떤 전문가의 판단보다 정확한 지침이 된다. 실거주 수요라면 어떤 시기라도 구매해도 좋다.

 

 만약 투자자라면 위에서 설명한 규제 강화와 완화 시기를 구별해야 한다. 규제 판세가 장기간 지속되면 시세가 하락할 확률이 높다. 장기적인 완화 정책이 지속된다면 입지가 좋은 지역은 가격이 상승할 확률이 높다. 이렇듯 시장 예측을 통해 주택을 구입하거나 매도를 하면 된다.

 

 사실 투자자를 어떤 시기든 걱정할 필요가 없다. 현재 투자 수익이 은행 금리보다 높고, 여러 공제금(세금, 부대 비용)을 제외하고도 예 · 적금보다 수익률이 높다면 언제든 구입해도 된다. 이는 실거주 세대와는 다른 투자자만의 방법이다. 그래서 부동산 투자를 하려면 지역과 금리에 관한 지식도 많이 쌓아야 한다.

 

 부동산 정책을 활용하는 수준의 사람들은 여간해선 흔들리지 않는다. 그런 수준의 사람들이 특별한 존재라고 생각지는 말자. 우리 부모들이 그런 사람들이다. 그 지역 부동산은 그 지역민들이 가장 잘 안다. 어떤 전문가도 그 지역 토박이만큼 알 수 없다. 특정 지역의 수요가 공급을 초과하면 그 이유는 현지 주민이 가장 잘 안다. 현지엣허 오래 산 우리 부모, 선배들이 정책을 잘 활용할 확률이 높다.

 

 정책 방향대로 움직이는 사람들 중 이익을 본 사람과 손해를 본 사람, 어느 쪽이 더 많을까? '정책은 부동산 경기에 선행한다'는 말에 정답이 담겨 있다.

 

 박정희 정부 때 강남으로 진출한 사람들, 전두환 정부 때 목동 · 과천으로 진출한 사람들, 노태우 정부 때 분당으로 진출한 사람들, 김대중 정부 때 임대사업자가 된 사람들, 노무현 정부 때 지방에 투자했던 사람들, 이명박 정부 때 보금자리주택을 매수했던 사람들, 박근혜 정부 때 신규 아파트에 투자했던 사람들.... 이들의 공통점은 바로 정부 정책대로 실행했다는 것이다. 이들은 손해를 보지 않았다. 오히려 대부분 엄청난 수익을 얻었다.

 

 문재인 정부의 정책 방향은 규제 쪽이다. 규제 정책이 지속되면 시세는 조정받는다. 과거 김영삼, 이명박 정부 때처럼 모든 지역에서 부동산 가격이 하락하지는 않겠지만, 수요가 업는 비인기 입지의 시세는 조정 폭이 클 것이다. 임대사업자 등록이 보편화될 것이다. 일반 매매 물량은 지속적으로 줄어들 것이다. 결국 실거주 매수든 임차 거주든 현실에 맞게 구입 여부, 임차 여부를 선택해야 할 시점이다.

 

 모르는 건 미덕이 아니다. 부동산 시장은 알면 알수록 도움이 된다. 정보는 돈이 될 수도 있다. 그리고 부동산 관련 정보는 정책을 통해 얻을 수 있다. 그래서 정부의 정책에 주목하라는 것이다.

 

 

 

p339

 

 어떤 강력한 규제가 나온다 해도 원인 진단이 잘못되었기 때문에 처방이 잘못될 수밖에 없다. 더 올라갈 시세를 그나마 정책으로 저지했다고 얘기하는 사람들도 있다. 이 부분은 나의 지난 20년의 경험을 걸고 자신 있게 말할 수 있다. 소비자들은 상품이 아무리 좋아도, 아무리 조급해도, 가치 대비 너무 비싸다고 판단되면 매수하지 않는다. 시장과 소비자들을 너무 만만히 보면 안된다.

 

 규제 정책이 투기 세력을 확실하게 억제하지 않느냐고 하는 사람들도 있다. 나는 생각이 다르다. 2016년 11·3 대책 이후로 서울에 갭 투자 세력은 거의 없어졌다고 생각한다. 정책의 결과가 아니라 매매가와 전세가의 갭이 전세 레버리지 투자를 할 만한 금액이 아니기 때문이다.

 

 결국 정부가 실수요자 보호를 위해 제거 대상으로 지정했던 투기 세력이 실제로는 존재하지 않았던 시장이었다는 것이다. 존재하지 않는 대상을 상대로 규제 정책을 펴고 있는 것이다. 규제 정책이 도대체 누구를 위한 정책인지, 정말 실수요자를 위한 정책인지 다시 생각해 보았으면 한다.

 

 

 인생이란 소모이며, 슬픔의 기억이 쌓여가는 것이다.

 

  이 곡의 원곡인 라트비아 오리지날(1981)과, 그 후 세계적으로 알려지게 된 러시아 버젼(1982)도 물론 좋다. (그 후에 1984년과 1987년에 일본에서도 이 곡을 번안했지만 그저 그렇다)

 

내가 한국사람인 이유가 크겠지만, 그래도 훨씬 뒤에 심수봉 선생께서 가사를 붙이고 부르신 한국 버젼의 맛은 비교가 불가할 정도다. 원래 원곡이 가진 오리지날리티의 힘이란 대단한 것인데, 심수봉의 가창력(가창력이라고밖에는 표현이 안되는데 이 분의 음색은 그런 차원을 한참 뛰어넘는다)이 가진 오리지날리티는 요즘 표현으로 하자면 원곡을 씹어먹는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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먼 옛날 어느 별에서 내가 세상에 나올때
사랑을 주고 오라는 작은 음성 하나 들었지
사랑을 할 때만 피는 꽃 백만송이 피워 오라는
진실한 사랑 할 때만 피어나는 사랑의 장미


미워하는 미워하는 미워하는 마음없이
아낌없이 아낌없이 사랑을 주기만 할 때
수백만송이 백만송이 백만송이 꽃은 피고
그립고 아름다운 내 별나라로 갈 수 있다네


미워하는 미워하는 미워하는 마음없이
아낌없이 아낌없이 사랑을 주기만 할 때
수백만송이 백만송이 백만송이 꽃은 피고
그립고 아름다운 내 별나라로 갈 수 있다네


진실한 사랑은 뭔가 괴로운 눈물 흘렸네
헤어져간 사람 많았던 너무나 슬픈 세상이었기에
수 많은 세월 흐른 뒤 자기의 생명까지 모두 다 준
비처럼 홀연히 나타난 그런 사랑 나를 안았네


미워하는 미워하는 미워하는 마음없이
아낌없이 아낌없이 사랑을 주기만 할 때
수백만송이 백만송이 백만송이 꽃은 피고
그립고 아름다운 내 별나라로 갈 수 있다네


미워하는 미워하는 미워하는 마음없이
아낌없이 아낌없이 사랑을 주기만 할 때
수백만송이 백만송이 백만송이 꽃은 피고
그립고 아름다운 내 별나라로 갈 수 있다네


이젠 모두가 떠날지라도 그러나 사랑은 계속 될거야
저 별에서 나를 찾아온 그토록 기다리던 이 인데
그대와 나 함께라면 더욱 더 많은 꽃을 피우고
하나가 된 우리는 영원한 저 별로 돌아가리라


미워하는 미워하는 미워하는 마음없이
아낌없이 아낌없이 사랑을 주기만 할 때
수백만송이 백만송이 백만송이 꽃은 피고
그립고 아름다운 내 별나라로 갈 수 있다네


미워하는 미워하는 미워하는 마음없이
아낌없이 아낌없이 사랑을 주기만 할 때
수백만송이 백만송이 백만송이 꽃은 피고
그립고 아름다운 내 별나라로 갈 수 있다네


미워하는 미워하는 미워하는 마음없이
아낌없이 아낌없이 사랑을 주기만 할 때

 

 

 

 

 

어느 날 세상이 멈췄어 아무런 예고도 하나 없이
봄은 기다림을 몰라서 눈치 없이 와버렸어
발자국이 지워진 거리 여기 넘어져있는 나
혼자 가네 시간이 미안해 말도 없이, yeah

 

 

오늘도 비가 내릴 것 같아
흠뻑 젖어버렸네 아직도 멈추질 않아
저 먹구름보다 빨리 달려가
그럼 될 줄 알았는데 나 겨우 사람인가 봐
몹시 아프네 세상이란 놈이 준 감기
덕분에 눌러보는 먼지 쌓인 되감기
넘어진 채 청하는 엇박자의 춤
겨울이 오면 내쉬자 더 뜨거운 숨

 

 

끝이 보이지 않아 출구가 있긴 할까
발이 떼지질 않아, 않아 오
잠시 두 눈을 감아 여기 내 손을 잡아
저 미래로 달아나자


Like an echo in the forest
하루가 돌아오겠지
아무 일도 없단 듯이
Yeah, life goes on
Like an arrow in the blue sky
또 하루 더 날아가지
On my pillow, on my table
Yeah, life goes on like this again

 

 

이 음악을 빌려 너에게 나 전할게 (ey)
사람들은 말해 세상이 다 변했대 (yo)
음음음음, 다행히도 우리 사이는 아직 여태 안 변했네
늘 하던 시작과 끝 '안녕'이란 말로
오늘과 내일을 또 함께 이어보자고
(우우우우우) 멈춰있지만 어둠에 숨지 마
빛은 또 떠오르니깐

 

 

끝이 보이지 않아 출구가 있긴 할까
발이 떼지질 않아, 않아 오
잠시 두 눈을 감아 (감아) 여기 내 손을 잡아 (잡아)
저 미래로 달아나자 (오오오)

 


Like an echo in the forest
하루가 돌아오겠지
아무 일도 없단 듯이
Yeah, life goes on
Like an arrow in the blue sky
또 하루 더 날아가지 (날아가지)
On my pillow, on my table
Yeah, life goes on like this again
I remember (oh-oh, ay-yeah-yeah-yeah)
I remember (oh-oh-oh, oh-oh-oh)
I remember (oh-oh, ay-yeah-yeah-yeah)
I remember (oh-oh-oh, oh-oh-oh)

 

 

Some say love, it is a river
that drowns the tender reed.
Some say love, it is a razor
that leaves your soul to bleed.
Some say love, it is a hunger,
an endless aching need.
I say love, it is a flower,
and you it's only seed.

 

사랑은 연약한 갈대를 집어삼키는 강물이라고 합니다.

사랑은 당신의 가슴을 아프게 하는 면도날이라고도 합니다.

사랑은 영원히 채워지지 않는 갈증이라고도 합니다.

저에게는 사랑은 꽃입니다. 당신은 그것을 씨앗일 뿐이라고 하네요.

 

 

It's the heart afraid of breaking
that never learns to dance.
It's the dream afraid of waking
that never takes the chance.
It's the one who won't be taken,
who cannot seem to give,
and the soul afraid of dyin'
that never learns to live.

 

다치는 것을 두려워하면 춤을 출 수가 없습니다.

꿈에서 깨어나기를 두려워하면 기회를 잡을 수가 없습니다.

남에게 줄 수 없는 이들은, 남에게 받을 수 없습니다. 

죽기를 두려워하는 영혼은 절대 삶을 알 수 없습니다.

 


When the night has been too lonely
and the road has been to long,
and you think that love is only
for the lucky and the strong,
just remember in the winter
far beneath the bitter snow
lies the seed that with the sun's love
in the spring becomes the rose.

 

 

지내온 밤이 너무나 외롭고, 가던 길이 너무 멀때,

사랑이 단지 몇몇의 행운아와 강한이들을 위한 것이라 여겨질때,

잠시 기억해보세요.

한 겨울 시린 눈 밑에서 웅크린 저 작은 씨앗이,

태양의 사랑으로 봄에 한 송이 장미꼿을 피우는 것을.

 현대 바둑에서 딱 한 사람을 꼽으라면 만장일치로 이 분이 꼽힐 것이다.

그와 같은 시기를 살던 기사들은 그의 바둑을 보노라면 신운(神雲)이 감돈다고 말했다고 한다.

그의 바둑은 사실 접해보지 않아서 모르지만, 바둑을 알던 시절부터 거의 이야기는 마치 전설처럼 전해져왔던 것이 기억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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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p91

 그 본인방전도 처음에는 제한시간이 13시간 3일제였다. 같은 무렵에 시작된 오청원 · 기타니 도전 십번기의 제한시간도 13시간이다. 제한시간이 길수록 좋은 바둑을 둘 수 있다는 사고방식이 당시는 주류를 이루고 있었다. 주류라고 하는 것은 주로 본인방 일문을 가리키는데 물론 본인방 일분 이외에도 장시간 대국을 지지하는 부류는 있었다. 기타니 미노루의 스승 스즈키 다메지로 등도 그 주장의 으뜸가는 사람이었다. 마이니치신문의 미타니 스이헤이(三谷水平)씨가 나에게 들려준 실화가 있다.

 본인방전의 예선 대국에서 장고파(長考派)인 스즈키의 제한시간이 거의 소비되어 초읽기에 이르자 기록계가 말을 걸었다. 

 "스즈키 선생, 나머지 시간 5분입니다."

 스즈키는 태연히 기록계를 돌아다보고 호통을 쳤다.

 "이 수를 5분에 둘 수 있나!"

 때마침 대국실에 와 있던 미타니는 어안이 벙벙해졌다.

 "두지 않으면 마감 시간이 되어 진다는 것은 스즈키씨도 알고 있었을 것이라 나는 모른 체하고 있었지만 좌우간 이런 분들을 납득시키는 데 힘이 들었지요."

 세월이 한참 흐른 뒤의 이야기이므로 미타니의 회고담에는 옛날을 그리워하는 운치가 있었다.

 그것은 차치하고, 그러한 풍조에 대항하여 일관해서 시간 단축을 주장하고 있던 것이 하시모토 우타로와 오청원의 스승 세고에 겐사쿠이다. 그는 수필집 《바둑과 인생》 중에서 다음과 같은 견해를 피력하고 있다. 

 

 '바둑을 빠르게 잘 두지 않으면 진짜 명인이라고는 말할 수 없다고 생각한다. 몇 시간을 소비하지 않으면 좋은 바둑을 둘 수 없다는 것은 명인의 경지에 이르지 못한 것이다. 씨름의 예를 들면 예전의 히다치야마(常陸山)처럼 상대의 기합 소리에 따라 언제라도 몸을 일으켜 덤비는 절도가 있어야 한다. 그렇지 않고는 진짜가 아니다. 이것이 나의 가문의 기풍이다.

 스즈키씨는 바둑은 숙고하면서 두는 것이라고 가르친다. 여기에 각 가문의 기풍이 새겨서 흥미있는 대조를 이루고 있다. 그런데 시간제를 실시한 후 많이 대국 시간이 단축되었다고는 하지만 역시 습관에 사로잡혀 있는 게 아닌가. 바둑은 그렇게 시간을 쓰지 않으면 명국이 생기지 않는 것일까. 이런 점에 나는 항상 의문을 가지고 있는 것이다.'

 

 세고에의 견해는 대담하고 혁명적이다. 단시간에 명국을 둘 수 있도록 단련하면 관중 앞에서 진검승부를 겨룰 수 있게 된다. 기사는 그러헥 노력해야 한다는 것이다. 이 세고에의 견해는 TV바둑이 시작되지 훨씬 전에 밝힌 것으로 그 선견성에는 새삼 감탄하게 된다.

 세고에가 자기 가문의 기풍이라고 말한대로 하시모투 우타로, 오청원 모두가 시간 단축파이며, 오청원은 《오청원 기담(棋談)》 중에서 구체적으로 각각 6시간씩, 하루에 끝내는 것이 이상적이라고 말하고 있다. 실제로 오청원대 하시모토 우타로의 제1차 도전 십번기에서 오청원이 6시간을 주장하자 하시모토가 흔쾌히 동의했다. 오히려 요미우리신문 측이 당황하여 속기(速棋)로 오해받기 쉽다고 이의를 제기, 결국 각자 7시간으로 타협이 이루어졌다.

 

 전후 본인방전의 제한시간은 각 10시간이 오래 계속되다가 각 9시간으로 되고 다시 각 8시간으로 단축되어 오늘에 이르고 있다. 명인전(名人戰), 기성전(棋聖戰) 등 새로 만들어진 타이틀전도 제한시간은 본인방전을 답습하고 있다. 리그전이나 예선은 각 5시간, 하루에 끝내는 것이 대부분으로 거의 정착되어 있다.

 

p109

 바둑계는 도전 십번기에서 타이틀전으로 자리바꿈 시대에 접어들고 있었다. 슈사이 명인의 은퇴기념 대국에 따라 본인방의 칭호는 타이틀명이 되고 마이니치신문 주최로 모든 기사가 참여하는 본인방전이 시작되어 이와모토 가오루, 하시모토 우타로의 쌍벽 시기에서 다카가와의 연패 시대가 출현하는데, 동시에 요미우리신문에 의거하는 오청원은 도전 십번기를 귀신같이 이겨 나가고 있었다.

 거기서 그 접점을 찾아 마이니치신문은 1962년 다카가와가 본인방이 되자 오청원대 본인방의 3번기를 기획하였다. 십번기와는 관계없이 조건은 호선(互先)으로 덤 4집반, 즉 본인방전의 규정에 따른 대전이다. 여하튼 오청원은 도전 십번기에서 역대 본인방을 차례로 물리쳐 버렸다. 슈사이 명인 시대와는 달라서 도전제를 고집했더라면 양자의 대국은 불가능했을 것이다. 오청원은 조건을 받아들여 거의 해마다 본인방전을 마친 후 마이니치신문 주최의 본인방에 대한 3번기를 두기로 되었다.

 그것은 차치하고, 다카가와 본인방은 오청원과의 3번기에서 제1차 이후 제4차까지 놀랍게도 11연패를 당하고 마는 것이다. 1958년 제4차 3번기 제3국에서 다카가와는 겨우 반격을 하지만 그 사이에 요미우리의 오청원 · 다카가와 도전 십번기가 끼어 있으므로 이 3번기는 오청원의 최강 지위만을 돋보이게 하는 기획이 되고 말았다.

 본인방전을 마치고 한숨 돌리고 있을 때의 3번승부여서 다카가와가 불리한 것은 당연했다. 그러한 동정을 다카가와에게 보내는 말도 나와으나, 물론 그런 동정은 무의미하다. 다카가와가 쓴웃음을 지으면서 나에게 말한 것이 있다.

 "오씨는 어찌 할 도리가 없습니다."

 본인방전과 함께 3번기도 담당하고 있던 마이니치의 미타니 기자도 쓴웃음을 지으면서 나에게 말한 것이 있다.

 "다카가와는 본인방 타이틀을 다시 거머쥐었으니 3번기에서 오씨에게 한수 지도를 받은 셈이지요. 그걸로 족할 것입니다."

 다소 자포자기적으로 들리는 말투였다. 양자의 3번기는 다카가와의 종반 만회로 1961년 2월 제7차가 끝날 때까지 통산 오청원의 14승7패였다. 그해 오청원의 나이 47세였다.

 그해 본인방은 다카가와의 10연패(連覇)를 저지한 사카다 에이쥬(坂田榮壽)로 바뀌었다. 따라서 3번기의 상대도 다카가와로부터 사카다로 바뀐 셈이다. 새로운 3번기의 제1국이 시작된 것이 그해 7월인데 다음달인 8월에 오청원은 뜻밖의 재난을 당했다.

일본 홍만회의 이사회에 출석하려고 친산소(椿山莊)근처인 메지로(目白)거리를 걸어가고 있을 때 오토바이와 부딪쳐서 중상을 입은 것이다. 실신한 채 옮겨진 데가 소시가야(雜司谷)에 있는 동대병원(東大病院) 분원이었다. 진통제 주사만 맞고 일반 병실에 눕혀졌으며 조서를 받으러 온 경찰관에게 병원 측은 대단치 않은 부상이라고 설명하고 X선 사진도 찍지 않았으며 뇌파나 심전도 검사도 하지 않았다.

 밤이 되어 매니저를 맡고 있던 다가야 시노부(多賀谷信乃)가 달려왔을 때 오청원은 오른쪽 다리가 몹시 아프므로 X선 사진 촬영을 요청했다. 그런데 결과는 아무 데도 나쁘지 않다는 것이었다. 놀랍게도 병원이 촬영한 것은 통증이 있는 오른쪽 다리가 아니라 왼쪽 다리였던 것이다. 뢴트겐 기사가 착오를 일으킬 수는 있어도 환자 자신이 좌우를 혼동할 까닭은 없는 것이다. 그러나 세상일에 대범한 오청원은 병원측의 실수조차 전혀 알아차리지 못했다.

(개인적 생각 : 오청원 정도 되시는 분은 다른 이들도 모두 자신처럼 꼼꼼하고 상식적이라 생각하며 사셨을게다. 그러니 내가 오른쪽 다리가 아프다고 얘기했으니 당연히 오른쪽 다리를 찍겠지라고 생각하셨을거라고 본다. 그리고 속세와는 많이 동떨어진 바둑기사의 삶을 사시다 보니, 보통 세상의 인간의 오류라던가 시스템의 오류라는 부분에 민감하지 않았을 것이 아닌가 싶다)

 

겨우 실수를 깨달은 병원측이 뢴트겐을 다시 찍어 오른쪽 발목 골절, 허리뼈의 금 두곳이라는 결과가 나왔다. 다리에 깁스, 허리에 코르셋을 끼우고 두 달간의 입원 생활을 보내게 되는데, 뇌파나 심전도 검사는 끝내 하지 않았다고 한다.

 오청원은 사고시에 실신했었기 때문에 당연히 머리에도 얼마간의 상해를 받았을 것이며 퇴원후에도 두통이 완전히 가시지 않았다. 과연 다음해가 되어 사고의 후유증이 나타났고 때때로 정신착란을 일으켜 일시는 인사불성에 빠져서 입원을 하는 소동이 일어나기도 했다.

 그러한 상태 속에서 새로 발족된 명인전을 비롯하여 다른 여러 기전(棋戰)에도 몸을 달래가면서 어떻게든 대국은 계속했지만 십번기 시대와 같은 승운을 되찾을 수는 없었다. 역시 교통사고는 그의 바둑에 치명상이었다고 하지 않을 수 없었다. 그 때문에 여러 후유증으로 고생하였고 기사 생명에 위협을 받게 된 것이다.

 "나의 부상에 관해서만큼은 천하의 동대병원이 어째서 그와 같은 조잡한 검사로 끝냈는지 아직도 이해가 되지 않는다."

 오청원 자신의 말인데 천하의 유명한 병원이라는 것이 이정도인 것이다. 왼쪽과 오른쪽을 틀리게 뢴트겐 촬영을 하고도 병원은 한마디 사과의 말도 없었다. 오청원의 귀중한 기사 생명을 단숨에 단축한 것이 바둑계에 어떤 손실을 초해하는지 그러한 것은 생각해 보지도 않는 패거리들이다. 즉 오청원은 이때 이중의 재난을 만난 셈이다.

 이야기를 새로운 본인방이 된 사카다와 오청원의 3번기로 돌리자. 그 제2국이 시작된 것은 11월 중반으로 제1국이 끝난 지 3개월이 경과하고 있었다. 말할 필요도 없이 오토바이 사고와 입원에 따른 공백 때문이었다. 이 대국이 선명하게 나의 기억에 남아 있는 것은 그 관전기를 내가 담당했기 때문이다. 더욱이 이 대국의 입회인은 다카가와였다.

 다카가와는 그해 본인방을 사카다에게 빼앗겼지만 분노와 충격은 잊은 뒤였다.

 "입회인을 옆에 두고 대국만 할 때는 몰랐는데 입회인이라는 것은 의외로 화려한 것이군요. 특히 이번은 오씨와 사카다씨의 대국에 입회를 하니까요."

 대국장에서 만났을 때 다카가와가 즐거운 듯이 나에게 한 말이다.

 나는 오청원의 명성에 대해서는 친숙했으나 직접 그 대국을 접한 것은 이때가 처음이었다. 대국장은 하코네 고오라(箱根强羅)의 이시바테이(石葉亭)이며 전날 저녁에 오청원은 간호부의 부축을 받아 도착하였다. 나는 즉시 담당기자인 미타니씨와 함께 오청원의 방에 인사하러 갔다. 오청원은 밤색 목닫이옷 차림으로 각로(脚爐)에 발을 녹이고 있었다.

그때의 인상을 다는 다음과 같은 짧은 문장으로 정리한 적이 있다.

 

 '구름 위의 사람 - 그런 말이 나의 뇌리에 떠올랐다. 뭉구리, 넓은 이마, 높은 코, 윤기 있는 피부, 차분하고 독특한 고성(高聲). 지금까지 나는 이런 속세를 떠난 사람을 본 일이 없었다고 느낀 것이다.

 "다리가 좋지 않아 이런 자세로 실례합니다."

 오씨는 만면에 웃음을 띠고 인사말을 하였다. 이해 여름, 오씨는 교통사고를 당해 오른쪽 다리가 골절되었는데 그것이 완치되지 않아 간호부가 부축하고 있었다. 아마 그러한 정황도 나에게 구름 위의 사람이라는 인상을 강력히 준 원인이겠다.'

 

 나중에 생각해 보니 내가 초면의 오청원에게 이러한 인상을 받은 것은 그가 모든 번기(番棋)를 이겨낸 쇼와 바둑계의 왕자이며 전 바둑사를 통해서도 아마 제1위에 랭크될 기사일 것이라는 나의 동경심 때문이며, 동시에 그 동경심을 배반하지 않는 풍격과 분위기를 의심할 여지 없이 갖춘 인물이었기 때문이라고 생각한다.

 덧붙이면 바둑계의 거봉으로서 그 왕자의 지위는 흔들리지 않을 것으로 생각된 오청원이 50세 전후로 은퇴와 다름없는 처지가 된 것은 교통사고의 후유증이 1년이 지나 갑자기 나타나서 정신장애로 입원을 하는 불행 때문이다. 다행히 건강은 회복되었지만 대단한 긴장의 지속이 요구되는 쟁기의 현장에 나설 수 없게 된 것이다. 유감천만의 사건이었으나 이것도 숙명이라는 것이겠다.

 

 

p152

 이야기는 달라지지만 사카다가 본인방 명인이 되고 곧 《바둑 클럽》에서 문인들을 상대로 하는 지도바둑이 실시된 일이 있따. 곤도 게이타로(近藤啓太郞), 우메사키 하루오(梅崎春生) 등이 매월 한 사람씩 도전하여 마지막에는 노벨문학상 수상자인 가와바타 야스나리가 등장하였다. 이 지도바둑을 기획한 것은 《바둑 클럽》 편집장 고노 나오다쓰(河野直達)인데 그의 의도는 전쟁전에 오청원이 문인에 대한 지도바둑을 실시한 것에 대응시키고 있다.

(개인 감상 : 이 책은 일본에서 1996년 출판된 것으로 한국에는 1997년에 1년이 시차를 두고 출간되었다. 당시는 이창호의 전성기가 시작되던 시기로 한국 바둑 최융성기에 정점에 이르렀던 시기이다. 그래서 바둑책도 꽤 많이 나왔던 걸로 기억한다. 이런 바둑 에세이집이 일본에서 출간된지 1년만에 번역되었다는 것이 그 반증이기도 하다. 어쨋든 이 "오청원"이라는 책의 저자는 일본의 소설가인 에사키 마사노리이다.  마지막 구절인 '지도바둑을 실시한 것에 대응시키고 있다'라는 것은 완전한 일본식 표현의 직역인데 우리나라 사람이야 이걸 이해할 수는 있지만 상당히 어색한 표현이다. 요즘같으면, '지도바둑을 두었던 것에 대한 연장선' 이라거나 '지도바둑을 두었던 것을 부활시켰다' 정도로 표현할 것이다.)

 

 오청원의 지도바둑은 모두 여섯점을 놓고 두었는데 사카다의 지도바둑은 각자의 실력에 따라 치수(置數)를 조정했다. 흥미있는 것은 오청원의 지도바둑에서는 스나고야 서저머의 야마사키 고헤이만이 2집승을 거두었고 사카다의 지도바둑에서는 최후의 단 한사람 가와바타 야스나리가 여섯점 놓고 4집승을 거두었다. 잘 둔 편이다.

 사카다는 지도바둑에서도 쉽게 지지 않는다는 평이 있다. 그런데 내가 아는 한 그만큼 지도바둑에서 조언을 하는 사람은 없다. 그의 문인에 대한 지도바둑에서 조언을 하는 사람은 없다. 그의 문인에 대한 지도바둑에 나는 몇 판이나 입회했는데 "백이 두기 전이라면 바꿔 놓아도 좋아요." 하고 억지로 무르게도 한다. 잡지에 게재하는 바둑이므로 너무 형편없어서는 안되겠다는 배려에서 나왔겠으나 승부에는 특별히 비정하다고 생각되는 그의 다른 일면이 전해지는 듯한 인상을 받았다.

 정상의 인물에게는 각기 고운 마음씨가 있다.

 역으로 보면 고운 마음씨가 없는 사람은 일류가 될 수 없다. 일류란 그 분야에 있어서 뛰어다는 것인데 그를 위해서는 재능뿐 아니라 엄격한 단련과 자기 규제라는 것이 또한 필요하다. 즉 그것은 강인한 정신이라는 것인데 그 엄격성을 지탱하는 것은 그 사람이 가지는 애정 이외에는 없다. 그 내부에 풍부한 정감이 없이 긴 고독한 투쟁에 견딜 수 있는 것이 아니다.

 단지 바둑이 강하다고만 해서는 빛이 나지 않는다. 말로는 표현하기 어려운 것인데 명국이라고 불리는 것은 그것이 고도의 기량에 지탱되고 있음과 동시에 그 기량을 구사하는 기사의 인간성에 의해서 지탱되고 있을 것이다. 전인적(全人的)인 싸움이 있어서 명국이 두어지며 명승부가 탄생한다.

 

 

p181

 예도의 세계에서 다닞 그것이 유행한다는 현상만으로는 황금시대라고 할 수 없다. 그 분야에서 걸출한 인물이 나타나서 그 예능의 수준을 끌어올리며 혹은 새롭게 탈바꿈하는 상황이 생겨야 하는 것이다. 그것이 그 세계에 활기를 가져오고 큰 흐름이 되어 풍부한 인맥이 형성되어 간다.

 

 

 

 

 일단은 소설이라고는 하지만, 에세이와 소설이 혼재해있다.

어떤 에피는 완전히 소설이지만, 어떤 에피는 에세이로 시작해서 거의 에세이로 끝날뻔 하다가 한 패러그래프 정도가 소설로서의 체면치례를 하고 있다.

 

전반부 작품들은 모호하지 않고 꽤 명확한 작가의 생각이 드러나 있다. 친절한 느낌마저 든다.

 

뒤의 3개의 작품(사육제, 시나가와 원숭이의 고백, 일인칭 단수)은 조금은 모호하다.

 

지금까지 봐왔던 하루키의 여러 작품들에서 어디선가 삐져나온 단편들을 모은 듯, 이거 어디선가 봤을듯한 느낌인데 하는 소품들로 구성되어 있다.

예의, 음악이 몇 개 등장하는데 기억에 남는 것은 '사육제'편에 등장한 슈만의 사육제이다. 잠시 유툽으로 들어봤는데 그리 인상적이진 않다.

헤드폰으로 조용히 제대로 함 들어보면 다를지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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p24

 그럼에도 그들은 증인석에 설 준비가 되어 있다. 정직하고 공정한 증인으로서. 그러나 그렇게 인내심 강한 말들을 갖춰서, 혹은 찾아내서 훗날에 남기기 위해 사람은 때로 스스로의 몸을, 스스로의 마음을 조건 없이 내놓아야 한다. 그렇다, 우리의 목을, 겨울 달빛이 내리비치는 차가운 돌베개에 올려놓아야 하는 것이다.

 

p169

 "우린 누구나 많건 적건 가면을 쓰고 살아가. 가면을 전혀 쓰지 않고 이 치열한 세상을 살아가기란 도저히 불가능하니까. 악령의 가면 밑에는 천사의 민낯이 있고, 천사의 가면 밑에는 악령의 민낯이 있어. 어느 한쪽만 있을 수는 없어. 그게 우리야. 그게 카니발이고. 그리고 슈만은 사람들의 그런 여러 얼굴을 동시에 볼 줄 알았어 - 가면과 민낯 양쪽을. 왜냐하면 스스로 영혼을 깊이 분열시킨 인간이었으니까. 가면과 민낯의 숨막히는 틈새에서 살던 사람이니까."

 

 그녀는 사실은 '추한 가면과 아름다운 민낯 - 아름다운 가면과 추한 민낯'이라고 말하고 싶었는지도 모른다. 나는 그때 그렇게 생각했다. 그녀는 필시 자신의 무언가에 대해 이야기하고 있었던 것이다.

 

 "가면을 쓰고 있는 사이 얼굴에 들러붙어서 뗄 수 없어진 사람도 있을 수 있겠네." 내가 말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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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 소설의 네번째 작품인 위드 더 비틀즈(With the Beatles)에는 아쿠타가와 류노스케의 단편 '톱니바퀴'의 일부 구절이 나온다. 그래서 그 작품을 읽어봤는데 의식의 흐름대로 쓴 작품같은 인상이다. 이 작품을 쓴 후 얼마 안있다가 아쿠타카와는 자살을 했다는데 작품 자체에 상당히 쫓기고 있다는 인상이 강하게 풍긴다.

그 소설에 이런 구절이 인상적이었다.

 

 '수릉여자(壽陵如子)라는 말을 떠올렸다. 그것은 조나라의 수도 한단(邯鄲)에서 유행하는 걸음걸이를 배우려다가 자신의 걸음걸이마저 잊어버려 엉금엉금 기어서 귀향했다는 <한비자>속의 청년 수릉의 고사 '한단지보(鄲之步)'와 관련된 말이다.

 

 억만장자인 주식 투자자이자 투자사의 회장, 그리고 애널리스트이다. 이 책은 상당한 인사이트가 녹아있다.

 이 책을 보면 대부분의 주식 투자자들은 성공의 비법은 알아내지 못하더라도, 자신이 왜 꾸준히 실패하고 있는지는 알 수 있을 것 같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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p39

 요즘 사람들이 이렇게 장기 비관론에 빠진 것은 언론이 죽었기 때문이라고 생각한다. 옛날에는 기자가 중량감 있는 직업이었다. 기자가 되려면 좋은 학교를 나와 인턴 과정을 거치면서 6하 원칙(언제, 어디서, 누가, 무엇을 어떻게, 왜)을 배워야 했다. '털사시에서 개가 꽃등심 스테이크를 훔쳐가자 사람이 개를 물었다'라고 쓰고 세부 내용을 서술하면 편집자들이 구석구석을 뒤지면서 군살을 제거한다. 7번째 단락에 적히 개의 품종과 상태(꼬리와 다리 하나가 없는 자주색 페키니즈)가 꼭 필요한 표현인가? 아니라면 삭제한다. 5번째 단락에서 그 남자가 생일 파티를 하고 있었다는 사실도 꼭 언급할 필요가 있는가? 아니라면 삭제한다.

 과거에는 신문이나 잡지의 발행인란에 전속 기자 명단이 실렸다. 대부분 머리가 희끗한, 노련한 기자들이었다. 이들은 조직의 핵심을 구성하는 최고의 인재들이었다. 경험이 풍부한 백전노장들이었다. 젊은 기자가 "와! 이번 기술주 거품이야말로 사상 최대 규모네요. 세상이 끝장나겠어요!"라고 말하면 반백의 베테랑들은 대답한다. "자네는 아는 것이 없어. 1980년 에너지 거품은 그 이상이었다네!" 이들은 경험이 풍부했다.

 이제 전통 언론은 죽어가고 있다. 인터넷 탓이든 케이블 TV 탓이든, 그것은 중요하지 않다. 전통 언론은 적자에 허덕이고 있다. 신문이든 잡지든 발행인란이 사라졌다. 전속 기자는 아마 소수에 불과할 것이며 경력도 대부분 5년 미만일 것이다. 언론은 반백의 베테랑들을 이미 오래 전에 내보내고 지금은 저임금 기자들을 쓰고 있다. SNS에서 공짜로 얻는 금도 부지기수다. 터무니없는 글도 마다하지 않는다. 공짜 SNS 글을 실으면서 양념 삼아 가끔 사설을 긷거나, 통신사 기사를 실으면서 가끔 외부 필자의 글로 구색을 맞추기도 한다.

 요즘의 기자 대부분은 경험이 부족하다. 그래서 큰 흐름을 보는 눈이 없다. 과거의 유사 사례를 경험해본 적이 없으므로 이 난관을 과연 어떻게 헤쳐나갈 것인지 가늠하지 못한다. 세상이 끝날 것처럼 보이는 이유다. 물론 베테랑들도 여전히 남아 있다. 그러나 극소수에 불과하다. 그래서 언론은 최근의 사건조차 기억하지 못한다. 그 결과 언론마저 비관적인 기사를 쏟아낸다. 역사를 기억하지 못하는 애송이 언론 탓에 사람들은 잠시 숨을 돌리면서 '내가 전에도 비슷한 일을 겪지 않았던가?'라고 자문하기가 어려워졌다.

 

p45

 이는 이례적인 시장 흐름이 아니다. 거의 항상 반복되는 지극히 정상적인 흐름이다. 주식은 악재를 선반영해 공식적으로 경기 침체가 시작되지 전에 하락하다. 시장은 최악의 상황이 지나갔다는 것을 알고 있지만 사람들은 최악의 결과만을 상상한다. 이러한 착각과 현실 사이의 괴리에 의해, 주식은 경기가 회복되기 전에 바닥을 치고 급등하기 시작한다.

 표1-1은 이러한 현상을 정확히 보여준다. 약세장과 경기 침체 기간이 항상 겹치는 것은 아니지만, 대부분 겹친다. 대형 강세장과 약세장에서, 주식은 경기보다 앞서서 움직인다. 주식은 경기가 침체하기 전에 하락하고 경기가 회복되기 전에 상승한다. 약세장과 경기 침체가 겹칠 경우 주식은 거의 예외 없이 먼저 상승하며, 그것도 대폭 상승한다. 이것이 정상적인 모습이다.

 

p46

 역사가 말해주는 바는 명확하다. 약세장과 경기 침체 기간이 겹치면, 경기 침체가 끝나기 전부터 주식을 보유하고 있어야 한다. 강세장이 시작되어 경기 침체가 공식적으로 끝날 때까지 평균 수익률이 무려 27.5%에 이른다. 이는 경제 성장의 기미가 보이기 전부터 다가오는 경기 회복이 주가에 반영되기 때문이다.

 그러나 강세장이 오랜 기간 진행되고 나서 경기가 회복기에서 확장기로 접어들 때도 사람들은 여전히 "이번에는 다르다"라고 말한다. 경기가 이미 회복 중인데도 절대 회복되지 않을 것으로 믿기 때문이다. 이것도 정상적인 모습이다.

 

p50

 가격은 예상 못했던 사건이 발생할 때만 큰 폭으로 움직인다.

 

p52

 썰물 뒤에 밀물이 오듯이 경기 침체 뒤에는 경기 확장이 온다. 경기 확장은 경기 침체보다 거의 예외 없이 기간도 길고 강도도 높다. 곤경이 두려워서 평생 웅크리고 산다면 훨씬 더 자주, 더 길게, 더 강하게 나타나는 경기 확장과 강세장을 놓치게 된다.

 

p88

 표 2-3은 미국 강세장 초기의 3개월 수익률과 12개월 수익률을 보여준다. 강세장 초기의 3개월 수익률 평균은 23.1%였다. 단 3개월에 나온 수익률이다! 1년 수익률 평균은 46.6%였다. 강세장 초기 1년 수익률은 강세장 평균 수익률의 약 2배이며, 그 1년 수익률의 절반이 흔히 초기 3개월에 나온다. 물론 항상 그렇다는 말은 아니다. 하지만 강세장 초기 흐름을 절대 놓쳐서는 안 된다. 약세장에서 입은 손실 대부분을 일거에 만회할 절호의 기회이기 때문이다.

 

p93

 그렇다고 약세장 이후 V자 반등 출현 시점에 주목해야 한다는 것은 아니다. 그러한 의미가 전혀아니다. 장기 성장 투자자라면 손익분기점, 고점, 특정 지수대 등 자의적인 기준에 집착해서도 안 되고 지난주, 지난달, 지난해 주가 흐름에 주목해서도 안 된다. 자신의 전략이 장기 성장 투자에 타당한지에 주목해야 한다.

 이러한 V자 반등을 보면 주식시장에서 평균 수익률 따위는 큰 의미가 없음을 알게 된다. 약세장 기간에는 시장에서 빠져나왔다가 정확히 바닥 시점에 다시 들어가고 싶다면, 그러한 생각을 접기 바란다. 시장은 눈 깜짝할 사이에 바닥에서 무섭게 급등하므로 놓치기 십상이기 때문이다. 다만 강세장 전반의 수익률은 평균보다 높아서, V자 반등을 놓치더라도 약세장 손실을 만회하고도 남는다는 사실은 기억하기 바란다.

 

p108

 수익률은 변덕스럽다는 사실만 뼛속 깊이 명심해도 공포나 탐욕에 휘말리지 않을 수 있다. 장기 시장 수익률이 평균 약 10%이고 강세장 수익률이 이보다 더 높으면 연 수익률 10%를 달성하기는 쉬워 보인다. 과연 그럴까? 실제로는 매우 어렵다. 이론적으로는 매우 쉽다. 그러나 심리적으로는 지극히 어렵다.

 사람들은 흔히 시장 초과수익률을 목표로 삼는다. 그러나 대부분은 초과수익률은커녕 시장 수익률 근처에도 미치지 못한다. 시장수익률조차 달성하지 못하는 이유를 제대로 이해할 때 우리는 비로소 장기적으로 실적을 개선해갈 수 있다.

 "나는 초과 실적을 내고 있소"라고 말하는 독자도 많을 것이다. 실제로 그럴지도 모른다. 그러나 보통 사람들이 자신이 평균 이상이라고 생각하는 것처럼 투자자들도 대부분 자신의 실력이 평균 이상이라고 믿는다. 스스로 인정하든 안 하든(정확한 수익률 평가 방법을 모르는 경우도 많다), 독자 대부분은 아마 시장 수익률 근처에도 미치치 못할 것이다.

 

p124

 보통 선물 트레이더들을 투기꾼으로 지칭하기도 한다. 미래의 가격에 돈을 걸기 때문이다. 선물을 거래하는 합당한 이유는 수없이 많다. 기업은 변동성이 큰 상품의 구매 원가를 안정시키기 위해 선물 계약을 이용한다. 항공사는 운항 비용을 안정시키기 위해 기름을 선물로 구매한다. 농부는 사료, 비료 등을 구매하는 데 선물을 활용한다(우리는 농부의 선물 거래가 얼마나 무모한 것인지 알고 있다).

 투기꾼 없는 세상이 궁금하다면, 양파 파동만 봐도 충분하다. 1958년 양파 농가들은 투기꾼이 양파 가격을 후려친다고 주장했고, 이 주장을 믿은 미시간주 하원의원 제럴드 포드(나중에 대통령이 된)는 양파에 대한 선물 계약을 금지했다. 자유시장을 신봉해온 포드가 말이다. 이 금지는 지금도 해제되지 않았다. 포드와 농부들은 투기꾼들이 유동성과 투명성을 제공하는 데 기여한다는 것을 이해하지 못했다. 그들의 시장 참여가 실제로는 변동성을 작게 한다는 것도 알지 못했다.

 유가의 변동성이 크다고 생각하나? 그림 3-2에서 유가와 양파 가격을 비교해보라. 양파 가격이 유가에 비해 등락 빈도가 더 잦고 골과 마루의 진폭도 더 크다. 눈에 보이는 것만 믿으면 안 된다. 표준편차를 계산해보면 2000~2010년 유가는 33.8%였고 양파는 211.4%였다. 주가 변동성의 10배다. 만약 주가 변동성이 이렇게 컸다면 당신은 좋아했을까? 이러한 상황이라면 변동성을 줄일 투기꾼들을 불러들여야 할 것이다. 무지와 오만으로 투기를 금지하고 싶어 하는 정치인들은 내버려 두자.

 

p155

 약세장 '권위자'가 되는 편이 훨씬 쉽다. 그러나 투자 전문가이자 다른 사람의 돈을 운용하는 직업인으로서, 오랜 시간에 걸쳐 강세론자가 되는 것이 수익성에 유리하다(회사에도 그렇고 고객에도 그렇다). 왜 그러한가? 역사적으로 주가 상승률이 플러스인 때가 마이너스인 때보다 더 길기 때문이다. 간단하다. 주가가 장기적으로 상승하는 기간에 '곰'처럼 버틴다면 손실을 보고 고객의 대다수를 잃을 것이다. 대형 운용사에서 약세장 권위자가 적은 이유다. 물론 약세론을 취해야 할 때가 있다. 그러나 붙박이 곰은 결국 뒤처지고 자산운용업계에서 퇴출된다. 약세론을 택할 장세가 있지만 강세론을 택할 장세가 더 많다.

 

p220

 이 때문에 어느 한 범주를 영원히 사랑하면 성과를 얻지 못한다. 특정 범주가 장기에 걸쳐 시장을 선도할 수 있는 것은 사실이다. 많은 사람들이 그 양상이 영원히 지속되리라고 생각할 정도로 긴 기간말이다. 그 기간은 대개 장세가 방향을 뒤집어 약세로 돌아서기 직전까지 지속된다. 그러나 당신의 특정 범주에 대한 선호(전체적으로 잘 분산된 포트폴리오 속의)는 향후 12~18개월, 길게는 24개월 동안 그 범주의 펀더멘털이 왜 좋을지를 내다본 평가의 결과여야 한다. 그 범주가 '단지' 더 괜찮을 것이라는 믿음에 따르면 안 된다.

 

p224

 인류에 대해 나보다 어두운 견해를 지닌 사람들이 있을 것이다. 그러나 나는 이윤 동기가 환경 개선을 비롯한 사회 복리를 달성할 강력한 엔진이라고 믿는다. 역사적으로 자본주의 국가들은 공산주의나 사회주의 국가들보다 환경을 더 깨끗하게 유지해왔다. 자본주의 사회는 더 부유해지면서 더 창의력을 발휘했고 '더 깨끗해졌다'. 엄청난 양의 똥을 치워야 하는 교통수단은 아무도 '좋아하지' 않는다.

 진정으로 환경을 사랑하는 사람들은 미래를 걱정하지 않는다. 그들은 아직까지 상상하지 못한 온갖 혁신이 세계를 더 깨끗하고 빠르고 강력하게 만들어준다는 비전에 고무될 것이다. 그들은 산업을 두려워하는 대신 끌어안을 것이다. 산업이 사회를 더 부유하게 만들어 주기 때문이다. 역사를 보면 더 풍요로운 사회가 환경을 더 잘 보살폈다.

 투자자가 장기 예측을 시도할 때 저지르는 근시안적인 실수도 이와 똑같다. 그들은 현재의 가정에 바탕을 두고 장기 투자를 하는데, 그 가정은 바뀔 수 있고 급변할 수도 있다. 런던은 누군가가 차를 발명한 덕분에 똥으로 뒤덮이지 않았다. 당시에는 아무도 그 가능성을 생각하지 못했다. 마찬가지로 앞으로 5년 뒤, 10년 뒤, 20년 뒤의 다양한 주식시장에 무엇이 영향을 미칠지는 아무도 모른다.

 

p248

 역사를 살펴보면 약세장 바닥을 벗어나는 시기에는 소형주가 좋은 투자 대상이라는 것을 알 수 있다. 물론 이것은 약세장 바닥의 타이밍을 안다는 것을 전제로 한다. 이 타이밍을 알아채는 것이 가능하다면 굳이 소형주로 범주를 좁힐 필요도 없을 것이다. 어찌 되었든 약세장 끝 무렵과 새로운 강세장 초기에는 대개 소형주가 초과수익률을 올린다.

 여기에는 다른 측면이 있는데, 강세장이 성숙기에 접어들면 투자자들이 대형주를 보유하려 한다는 것이다. 이러한 경향은 강세장이 진행될수록 강해진다. 물론 어떤 강세장이 초기인지 아니면 성숙기인지는 역사를 살펴보아도 알 수 없다. 강세장의 기간은 예측이 불가능하기 때문이다. 그러나 초기에 소형주를 보유하다가 강세장이 진행된 다음에 대형주를 보유하는 투자 경향은 역사적으로 선례가 많다.

 역사가 알려주는 또 하나의 사실은 많은 투자자들이 약세장의 끝 무렵에 주가가 크게 떨어진 주식을 보유하려 한다는 것이다. 그러한 주식은 강세장의 초기에 크게 반등하는 경향이 있기 때문이다. 그림 6-8과 6-9는 각 주식 섹터가 지난 두 차례의 약세장 바닥 전후에 보인 수익률을 나타낸다. 약세장 바닥 전 6개월 동안 실적이 최악이었던 섹터가 이후 6개월 동안 최고 수익률을 기록했다. 따라서 약세장의 말미에 있다고 정말 믿는다면 어느 섹터 주식을 매수할지 알 수 있다.

 역사(그리고 펀더멘털)를 돌아보면 일반적으로 수익률 곡선이 평행해질 때, 즉 장기 금리와 단기 금리의 격차가 좁아질 때 성장주가 가치주보다 더 나은 수익률을 보이는 경향이 있다. 반대 상황이면, 즉 이전보다 장단기 금리 차이가 더 벌어지면(수익률 곡선이 가팔라지면) 가치주가 대개 성장주보다 더 괜찮은 수익률을 보인다. 수익률 곡선이 가팔라진다는 것은 장기 금리와 단기 금리의 스프레드가 커진다는 것이고, 이 경우 은행은 대출로 더 많은 이윤을 올릴 수 있다. 스프레드가 커질수록 잠재 이윤도 커지기 때문에 은해은 더 빌려주려고 한다. 은행의 대출 성향이 강해지면 가치주가 수혜를 본다. 가치주 기업은 대개 주식 발행보다 차입으로 자금을 조달하기 때문이다. 기업이 자본을 더 조달하는 것은 성장해서 이윤을 늘리기 위해서다. 가치주 기업은 이것을 선호한다.

 수익률 곡선이 상대적으로 평평해지면 은행은 빌려주고자 하는 의욕이 줄어든다. 가치주 기업은 이 상황을 반기지 않는다. 그러나 투자은행들은 (당연히) 기업의 주식 밣생을 통한 자본 조달을 기꺼이 돕는다. 이 상황에서는 성장주가 유리한데, 왜냐하면 차입이 가능하더라도 주식 발행을 통한 자본 조달이 더 용이한 경우가 많기 때문이다. 따라서 은행의 대출 성향이 약해지면 성장주가 수혜를 보는 경향이 있다.

 

p304

 '인플레이션 벌레'와 경제학자들은 'MV=PQ' 공식을 알 것이다. M은 화폐 공급, V는 화폐의 유통 속도, P는 가격, Q는 거래 횟수다. V는 경제에서 돈이 얼마나 빨리 움직이는지, 달리 말하면 1년에 얼마나 많이 회전하는지를 표시한다. P는 인플레이션이라고 생각해도 된다. 이 공식에 실제 수치를 넣으려 하지 말라. 이 이론은 순수한 이론일 뿐이다. 그러나 밀턴 프리드먼이 "플레이션은 언제 어디서나 화폐적인 현상이다"라는 말을 하게 한 이론이기도 하다. 이 말의 의미는 인플레이션이 '활폐 공급이 너무 많거나, 화폐 유통 속도가 너무 빠르거나, 또는 이 둘의 조합'에 의해 발생한다는 것이다.

 사람들은 인플레이션이 여러 기묘한 요인에 의해 발생한다고 말하며 유가, 무역 적자, 재정 적자 등을 거론한다. 이들 중 어느 것도 화폐 공급이나 유통 속도와 직접 연결되지 않는다. 요약하면 인플레이션은 너무 많은 돈이 시끄럽게 돌아다니지만 경제 활동으로 흡수되지 않을 때 발생한다. 대다수 통화주의자들은 상품보다 화폐를 더 많이 만들어내면 '속도'가 결국 정상으로 느려지면서 인플레이션이 발생한다고 말한다. 

 

p316

 해외 주식을 고를 때는 이미 한참 전에 달궈져 뜨거우진 것을 좇으면 안 된다. 그 주식이 언제나 뜨거우리라는 법은 없다. 정말 사야 하는 범주는(템플턴 경이 그랬던 것처럼) 아직 뜨거워지지 않은 것이다.

 

 원제는 질투의 법칙 : 연예, 결혼, 섹스 이다.

제목처럼 연예, 결혼, 섹스에 대한 저자의 개인적인 생각의 끄적임이다.

아마 제목을 원제와는 별 상관없이 한 이유는 그의 영화 "모두 하고 있습니까”의 유명세를 어느 정도 감안한 타이틀인 듯 하다.

일본에서는 비트 다케시라는 이름으로 유명한 예능인(영화감독, 작가, TV엔터테이너)이다. 일본에서는 굉장한 인기를 구가하고 있다.

최근에 반한적 발언으로 이슈가 됐는데 이 부분은 일본인의 한계라고나 할까? 글로벌한 마인드라든가 역사의식은 부족하다. 일본 사회나 정치의 폐쇄성을 볼 때 개인적 노력이 없이는 글로벌한 마인드가 제대로 박혀있는 일본인이 되기는 어렵다는 점에선 일본인들이 가장 잘 쓰는 변명처럼 '어쩔 수 없는 일'인 것 같다.

근성이라는 측면에선 지극히 일본적인 인물이며, 영화든 책이든 엄청난 다작을 쏟아내는(요즘은 영화는 좀 뜸하지만 책은 꾸준히 내고 있다) 인물이다.

 잡론에 가까운 에세이인데 그의 생각이 일반인과는 좀 동떨어진 스펙트럼에 속하는 것으로 보인다. 거칠지만 굉장히 번뜩이는 지점이 많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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p31

 신주쿠 같은 데서 중년 회사원을 상대로 성매매를 해서 돈을 버는 여고생이 있다. 그 아이에게는 고등학생 남자 친구가 있는데, 그 남자 친구한테는 뽀뽀는커녕 '손도 못잡게' 한다고 한다.

 "우리 사랑은 순수하니까."라면서

 잘은 모르겠지만, '순수한 사랑' 어쩌고 할 만큼 남자 친구를 좋아한다면 뒤에서 절대 그런 짓을 해서는 안되지 않나?

 

 

p36

 흔히 아이들을 보고 순수하다고 한다. 아이들은 어떤 것에 대한 반응을 감추지 않기 때문이다. 예를 들어 맛있는 걸 보면 두 눈이 반짝거린다든가, 용돈을 받으면 곧바로 입이 찢어진다. 그러다가 자랄수록 점점 사회가 규정한 틀과 관습에 얽매여 자신을 억제하는 행동이 늘어간다. 음식을 쩝쩝 소리 내어 먹는 사람은 아주 천박한 느낌이 든다. 볼이 미어터지게 먹는 모습 역시 꼴불견이다. 그런데 아이들은 그렇게 먹는다. 햄버거든 밥이든 뭐든 하지만 어른들은 먹으면서도 주위를 둘러본다. 남들이 자신을 어떻게 보는지를 신경 쓰기 때문이다. 그에 반해 아이들은 그저 먹는 데만 집중한다.

 

p127. 죽어도 좋을 만큼 좋은 것

 '평범한 사고방식'으로 '평범한 삶'을 산다면 결혼은 필수가 아니라 하나의 '수단'일 뿐이다. 평범하지만 안정되고 편안하게 살기 위한 '수단'.

 그런고로 나이가 들면 결혼해야 한다는, 누구나 당연하다고 생각하는 고정관념을 떨쳐내기 위해서는 더 대단한 정열이나 힘이 필요하다. 

 어중간한 노력을 하느니 결혼하는 편이 좋을지도 모르지만, 수단이 되는 결혼관 따위 없앨 정도의 뭔가를 인생에서 찾을 수 있는 사람이라면, 그쪽이 더 좋을지도 모른다. 그러려면 반드시 죽어도 좋을 만큼 좋은 것을 발견해야 한다.

 다시 말해 살면서 "어떻게 하면 삶의 보람을 찾을 수 있을까?"라든가 "어떻게 하면 즐거움을 발견할 수 있을까"라는 질문에 대한 답을 찾을 수 있어야 한다. 이 세상을 살고 있다는 증거를 마음껏 실감할 수 있어야 한다.

 사람들은 마치 천년만년 살 것처럼 하루하루를 의미 없이 흘려보낸다. 결국 죽음에는 아무런 준비도 매뉴얼도 없고, 아무도 '잘 죽는 법'에 대해 얘기하지 않는다. 나는 이게 가장 큰 낭패라고 생각한다.

 예를 들어 연어가 강을 거슬러 올라가는 걸 떠올려보라. '와, 살아 있네.' 하는 느낌이 절로 들 정도로 장관이다.

 그런데 힘겹게 도착한 녀석들은 산란하자마자 바로 죽는다. 그 노력이란 것이 녀석들에게 '죽어도 좋을 만큼 좋은 것'이라는 걸 온몸으로 보여주는 셈이다. 

과연 내게 그런 건 뭘까?

 

==> 교훈이 될 만한 이야기긴 한데, 끝에 비유가 그렇게 좋진 않다. 연어가 강을 거슬러 올라오는 도중에 곰, 인간들에게 잡히는 위험과, 마지막에 자신이 태어난 고향인 강의 상류에 와서 알을 낳고 죽는 것 자체가 모두 생존과 번식의 본능때문이다. 결혼은 사회적 관습이기도 하지만 궁극의 목적은 결국 아이를 낳고 기르는데 있다. 연어도 태어나서 먼 바다로 가 성체가 되어 다시 고향으로 거슬러 올라가는 기간이 인생의 전부이듯이, 인간도 태어나서 짝을 만나 결혼하고 아이를 낳아 평생(요즘은 평균 수명이 길어져서 아이 양육 후에도 20,30년 정도의 인생을 더 살긴 한다) 기르고 결국은 죽음을 맞는다. 

결혼 적령기 이전에 자기의 생의 목적과 목표에서 결혼을 하지 않아야 겠다는 결심이 설 정도는 '신부(사제)'와 '중' 정도의 종교적 이유 외에는 현실적으로 찾기 힘들다. 아마도 결혼이 늦어지거나 때를 놓쳐서 현실적으로 결혼을 못하게 될때 그에 합당한 이유를 찾기 위해 치열한 삶을 사는 경우가 더 많을 것 같다. 대개는 치열한 삶보다는 그저 외로운 삶을 살 경우가 더 많지 않을까 싶다.

 

p155. 누가 보면 콩가루 집안이라고 하겠지만

 

 우리 가족은 설날이나 명절에 아무 데도 가지 않는다. 다들 고향에 가서 부모나 형제자매들을 만나는데, 우리 가족은 그러지 않는다. 아이들에게 아버지는 설날에도 쉬지 않고 일하는 사람이라고 일러두었더니 다들 그러려니 한다.

 대신 여름 방학이나 봄 방학 때 여기저기 데리고 다니며 바람을 쏘인다. 하지만 방학 때도 애들을 데리고 고향에 내려가진 않는다.

 고향에서 형제자매들이 모두 모였던 적이 있기는 하다. 어머니가 아프셔서 입원했을 때, 그때 단 한 번 뿐이었다. 우리 집은 위아래로 대부분 남자 형제들이라서 다들 자기 부인과 자식들을 끌고 왔는데, 대식구가 다 모이니 시끄러워서 견딜 수가 없었다.

 더욱이 다 모여서 한다는 얘기가 고작 유산 문제에 관련된 것이었다. 형제고 뭐고 없이 다들 눈에 쌍심지를 켜고 얘기를 하는데, 얼마나 볼썽사납고 한심했는지. 게다가 어머니가 아직 살아 계신데 만일을 대비해 장례식 이야기까지 서슴지 않고 하는 것이다.

 제일 큰형이란 작자는 "어머니가 돌아가시면 땅은 누가 가질 거냐?" 이따위 소리나 해댄다.

 내겐 "넌 돈 많이 버니까 필요 없지?" 따위의 말을 날리면서. "너는 불효만 했으니까 권리가 없어." 하고, 자체 판단까지 내린다. 이에 질세라 나도 반격한다.

 "그 묘지는 내가 샀어."

 "부엌은 내가 고쳤어."

 이런 소니라 해대고 있으니 거, 참 추한 형제들이다.

 

p282. 상당3 : 매일 같은 일을 하다 보면 진력이 나요.

 

 Q / 저는 지금까지 수도 없이 직장을 옮겼습니다. 지금까지 다녔던 회사 모두 대우도 나쁘지 않았고, 옮기는 곳마다 환영도 받았습니다.그런데도 어느 정도 일을 배우고 나면 의욕이 사라집니다. 매일 같은 일을 하다 보면 진력이 납니다. 지금은 새로운 회사에서 노력하고 있는데, 언제 또 이직 버릇이 고개를 들지 몰라 불안합니다.

 

A / 아직 좋아하는 일을 찾지 못했다면 계속 이직해도 괜찮다. 당신은 기계적인 작업이 싫은 것이다. 처음에는 모르는 걸 배우니까 재미있이서 열심히 하는데, 다 배우고 나면 지루해진다. 그러니까 얼른 그만두고 싶다. 당신에게 그 일이 평생을 걸 만한 일이 아니어서 그렇다. 그렇다면 차라리 이직하는 편이 낫다.

 예를 들어 지출 전표를 정리하는 단조로운 사무라면 앞으로 그 일이 진화할 가능성은 제로다. 들어온 전표를 체크하는 일 말고는 할 것이 없다. 그게 싫으면 역시 그만두는 편이 낫다.

 내 직업관에 따르면, 그 직업에서 성공하느냐 못하느냐는 이차적인 문제다. 선택한 분야에서 전혀 성공하지 못하더라도 만족스러운 직업이 있다. 나는 처음 코미디계로 뛰어들었을 때 아사쿠사의 코미디언으로 만족했다. 인기가 없어도 좋았다. 성공하지 못하고 길바닥에서 객사하더라도 좋았다. 오히려 목숨을 걸고 싶은 직업을 가지지 못한 사람이 불쌍했다.

 어쨌든 그 일에서 성공하느냐 못하느냐 하는 것은 이차적인 문제고, 제일 중요한 건 그 일에 대해 만족하는가다. 선택한 직업에 대한 만족감, 그게 무엇보다 우선이다.

 단순히 취직하는 것과 자기가 좋아하는 일을 하는 것은 구분할 줄 알아야 한다. 남의 돈을 받으려면 자신의 의지와는 상관없는 일을 해야 할 때도 있고, 과도한 노동을 해야 할 때도 있다. 그게 아무리 싫더라도.

 내가 아사쿠사에서 코미디언을 하던 시절에는 밥벌이를 못해서 아르바이트로 육체노동을 하며 돈을 벌어야만 했다. 코미디언을 할 때는 돈을 못 버는 게 당연했다. 인기도 전혀 없었다. 그래도 좋아하는 일을 하니까 돈을 못 벌어도 괜찮았다.

 사람들은 돈과 보람을 동시에 생각하려고 하니까 골치 아픈 것이다.

 돈을 벌기 위해서가 아니라 좋아하는 일을 하고 싶어서라면, 대가가 없을 수도 있다는 것을 각오해야 한다. 그러나 일단 좋아하는 일을 찾고 도전해서 점점 팔릴 만한 가치가 생기면 돈도 벌 수 있게 될 것이다.

 당신은 지금 할 수 있는 한도의 일에서 능력을 파고 있는 셈이다. 그런데다가 하고 싶은 일을 찾으려는 건 좀 그렇다. 먼저 하고 싶은 일을 찾아라. 용돈에 불과한 돈을 버는 일이라도 좋다. 그러면 그 일을 질리지 않고 오래 할 수 있을 것이다.

 딸인 서동주의 에세이집을 보고 나서 흥미가 생겨서 찾아본 작품.

중간중간 약간의 과잉도 보이긴 하지만 그럭저럭 볼만하다. 

 

 원제는 Radioactive(방사능)이다. 극의 주요한 모티브가 마리 퀴리의 이야기이기 때문에 국내 개봉 제목은 마리 퀴리가 됐다(방사능보다는 낫다고 생각한다).

 

 마리 퀴리의 라듐과 폴로늄의 발견이 방사능에 대한 연구의 기폭제가 되긴 했지만, 영화에서처럼 히로시마 원폭, 네바다 원폭 실험, 체르노빌 사건과의 연계로 이어지는 극의 구성은 약간은 과장된 감이 있긴하다.

 

 영화는 꽤 재밋다. 마리퀴리의 과학자로서의 삶의 일면을 상당히 빠른 흐름으로 보여주는데 자칫하면 지루할 수 있는 내용을 위한 팬서비스가 아니었을까 싶다.

 

 주연인 로자문드 파이크의 연기와 분위기는 언제 봐도 독특하다.

 

 저자인 한정훈 씨는 물리학 박사로, 전공은 물질에 대한 위상적 특성이다.

이 분야의 대가로 노벨상 수상자인 데이비드 사울레스의 제자이다. 스승의 노벨상 수상으로 이 분야에 대한 대중의 관심이 높아진 것을 계기로 대중강연과 이 책의 집필을 시작하였다고 본문에 나온다.

물질의 위상적 특성에 대한 관점에서 물질의 양자적 특성에 대한 탐구의 역사를 정리했다.

비전공자에게도 양자적인 감(感)을 갖기에 상당히 유용하며, 전공자들에게는 이 분야의 히스토리와 전체의 그림과 양자역학에 대한 이해력을 높일 수 있는 참고서적으로의 활용도가 높다.

일반인도 이해할 수 있도록 쉽게 썼다고는 하지만 뒤로 갈수록 어렵다. 2,3번은 읽어야 어느 정도 익숙해질 듯p.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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p70

 불과 28세의 나이에 이 권위 있는 교수 자리를 물려받은 톰슨은 재미있게도 그의 수학적 재능이 아니라 실험적 업적인 '전자의 발견'으로 역사에 이름을 남기게 된다(지금 그의 소용돌이 고리 상호작용 이론을 기억하는 물리학자는 아무도 없다). 음극관 실험을 통해 톰슨은 원자보다 1천 배 이상 가볍고 음의 전하를 띤 어떤 입자가 존재한다고 주장했고, 이 입자는 오늘날 전자로 불린다. 원자는 전기적으로 중성이지만 전자는 그렇지 않다. 따라서 원자를 구성하는 요소에는 전자와 반대의 전하를 띤 또 다른 무엇이 있어야 한다. 그 나머지 구성 요소에 대한 수수께끼를 해결해준 인물은 톰슨의 제자이면서 맥스웰-레일리-톰슨에 이어 네 번째로 캐번디시 연구소장을 지낸 러더퍼드였다. 톰슨이 전자의 존재를 발표한 1897년으로부터 14년 뒤인 1911년, 러더퍼드는 그의 제자들과 함께 전자와는 반대 부호의 전하를 가진 원자핵의 존재를 실험적으로 증명했고, 이로써 현대적 원자 모델을 완성하는 데 필요한 조각을 거의 다 찾게 된다. 남은 한 조각, 즉 중성자의 존재는 이번엔 러더퍼드의 제자 채드윅이 증명한다.

 

p83

 전자의 배타성 때문에, 전자들이 모여 사는 사회는 유동성을 잃어버린 셈이다. 우리 주변에 보이는 대부분의 물체는 전기를 통하지 않는다. 전자의 배타성 덕분이다. 우리가 24시간 전기에 감전되는 끔찍한 상황을 피해 생활할 수 있게 해준 전자의 배타성이 오히려 고맙기까지 하다.

 이렇게 까칠한 전자들이 모인 사회에 유동성을 부여하려면 어떻게 해야 할까. 답은 간단하다. 투숙객의 숫자를 조금 줄이면 된다. 방은 1층에 3개, 2층에 7개 있는데 투숙객은 남녀 합해 다섯 쌍이라고 가정해보자. 그럼 손님을 방에 채우는 방법은 여러 가지가 생긴다. 한 방법은 1층에 세 쌍의 전자가 들어가고, 나머지 두 쌍은 2층의 방을 차지하는 것이다. 이 밖에도 남전자, 여전자가 모두 독방을 쓰는 경우 등, 다양한 가능성이 수학적으로 존재한다. 하지만 실제 물질에 해당하는 파울리 호텔에서는 전자들이 기를 쓰고 아래층의 방부터 차지하려고 한다. 그러다 보니 전자 손님을 배치하는 방식도 대단히 간단해진다. '에너지 최소화'라는 전자 세계의 비밀이 작동하는 덕분이다.

 

p126

 그럼 초전도체는 어떤가. 초전도 물질 내부에서 전자기파가 거동하는 방식을 잘 따져 그 운동방정식을 적어보니, 본래의 맥스웰 방정식이 아니라, 약간 변형된 꼴의 파동방정식을 만족한다는 사실을 알게 되었다. 이 변형된 방정식에도 파동의 입자의 이중성 원리를 적용해볼 수 있다. 그럼 흥미롭게도 보통 금속을 지나가는 전자기파, 즉 광자는 질량이 없는 입자의 방정식에, 초전도체를 지나가는 전자기파는 질량이 있는 입자의 방정식에 해당된다는 재미있는 해석이 가능해진다. 즉, 본래 질량이 없는 입자였던 광자가 초전도체 속으로 들어오는 순간 질량이 유한해진다는 뜻이다. 그렇다면 이런 질문을 할 수 있겠다. 왜 광자는 초전도체 속에서 몸이 무거워지는걸까?

 

 이 질문은 물리학의 가장 원초적인 질문 중 하나, 즉 '질량의 근원'에 대한 질문과 서로 일맥상통한다. 본래 질량이 없던 광자가 초전도체 속에서 질량을 얻게 되는 과정을 이해할 수 있다면 온 우주에 있는 전자, 양성자, 중성자 같은 입자가 질량을 갖게 된 이유도 알 수 있지 않을까? 일단 초전도체라는 맥락에서 앤더슨이 제공한 답은 무엇이었는가 살펴보자.

 BCS 이론(Bardeen-Cooper-Schrieffe theory, 초전도체를 이론적으로 설명)에 따르면 초전도체를 표현하는 파동함수, 즉 BCS 파동함수에는 금속의 파동함수에는 없는 새로운 숫자 하나가 등장한다. 이 새로운 숫자의 의미를 잘 따져보면 금속에는 없는 새로운 상태, 그 발견자의 이름을 따서 난부-골드스톤 Nambu-Goldstone 상태 또는 입자라고 부르는 것이 초전도체에는 존재한다는 결론에 다다른다. 초전도체 밖에서 안으로 침투해 들어온 광자는 난부-골드스톤 입자를 만나 서로 상호작용한다. 그 결과는? 광자가 무거워진다.

 

p133

 일단 액화된 물질은 온도를 더 내리면 계속 액체로 남아 있든가, 아니면 고체로 굳어져야 한다. 그러나 특이하게도 절대온도 4도 근방에서 한번 액화된 헬륨은 절대온도 2도 근방에서 또 다른 액체 상태로 바뀐다는 사실이 발견됐다. 액체헬륨이 차가워져 고체가 되는 게 아니라 제2의 액체로 변했다. 굳이 물리학적 훈련을 받지 않아도 기체와 액체가 서로 다른 상태이고, 액체와 고체는 또 다른 상태라는 것을 직관적으로 알 수 있다. 그렇지만 같은 헬륨 원자가 만들어낸 액체에 두 종류가 있다는 건 어떻게 이해해야 할까? 그 당시 최고 수준의 물리학자들도 해결하기 어려운 문제였다. 일단 절대온도 2~4도 사이에 존재하는 액체헬륨을 헬륨1, 그리고 절대온도 2도 미만에서 발견된 새로운 액체를 헬륨2라고 이름지었다. 두 액체의 물성 차이는 여전히 의문으로 남아 있었다.

 때마침 1936년, 레이던의 실험실에서 중요한 단서 하나를 찾아냈다. 헬륨2가 헬륨1에 비해 열전달을 훨씬 잘한다는 사실을 발견했다. 액체 한쪽 끝의 온도를 다른 쪽보다 살짝 높이면 한쪽에서 뜨거워진 액체가 차가운 쪽으로 이동하면서 자연스럽게 열을 전도한다. 열전도가 뛰어나다는 말은 헬륨2가 헬륨1에 비해 훨씬 유동성이 좋다는 의미이다. 그렇다면 다음 질문은 유동성이 과연 '몇 배' 좋은가이다. 러시아에서 이 소식을 전해 들은 카피차는 이 질문에 대한 답을 구하기 위해 새로운 실험을 고안했다. 머리카락보다 가는 관을 만들어 그 속에 액체헬륨을 통과시키는 실험이었다. 그가 발견한 사실은 놀라웠다. 헬륨1은 관을 통해 몇 분 흐르다가 멈추었는데, 헬륨2는 그 흐름이 1천 배 이상 오랜 시간 유지되었다. 마치 벽과의 마찰이나, 헬륨 원자끼리의 충돌이 전혀 없는 것처럼 보였다. 카피차는 초전도 상태의 금속에서 전류가 회로를 따라 지속적으로 흐르는 현상과 그가 발견한 현상이 매우 유사하다는 걸 눈치채고, 헬륨2를 과감하게 초액체 Superfluid라고 이름지었다.

 

p268

 사회현상이나 자연현상 중에는 이렇게 외부에서 주는 자극이 한참 쌓여야 비로소 변하는 사례가 종종 있다. 이런 더딤은 보는 이에게는 답답하게 느껴질 수도 있지만, 다른 한편으론 사회현상, 자연현상의 안정성을 담보하는 장치이기도 하다.

간략한 700만년 전 유인원 발생의 시기부터 호모 사피엔스가 최종적인 인류로 남기까지에 대한 간략한 인류사.

고고학적, 인류학적 근거와 함께 저자의 어느 정도의 상상이 섞여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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p193

 이처럼 약 30만 년 전이 되면 네안데르탈인의 특징을 지닌 형태의 화석이 출토되기 시작한다. 그리고 약 12만 5000년 전의 온난한 간빙기에 접어들자 네안데르탈인의 유적은 급증한다. 약 7만 년 전에 한랭화가 시작되자 유적은 지중해 연안까지 남하했고 그 숫자도 감소했다. 약 6만 년 전에 온난화가 시작되면 유적 숫자는 다시 증가해서 유럽 북부까지 확장된다. 그러나 약 4만 8000년 전의 한랭화로 네안데르탈인의 인구가 줄어들기 시작했고 약 4만 7000년 전에 호모 사피엔스가 유럽에 들어가면서 다시 인구가 회복되지 못했다. 결국 네안데르탈인은 4만 년 전에 멸종했다.

 

p229

 호모 하이델베르겐시스의 일부 집단이 약 40만 년 전에 아프리카를 떠났다. 아프리카 바깥으로 나온 집단의 일부는 유럽으로 이주했다. 그리고 유럽으로 이주한 집단에서 네안데르탈인이 진화했고 아프리카에서 계속 살았던 집단에서 호모 사피엔스가 진화했다. 약 30만~25만 년 전에 일어난 일이다. 이 두 종의 인류는 당분간 만나는 일 없이 유럽과 아프리카라는 각각 다른 장소에서 살았다. 그러나 이후 호모 사피엔스의 일부 집단이 아프리카를 떠났고 그중 유럽으로 향한 집단도 있었다. 그리고 수십만 년의 시간이 지나고 두 종의 인류는 다시 만났다. 약 4만 7000년 전의 일이다.

 

p265

 구소련의 생태학자인 게으로기 가우제(1910~1986)는 '동일한 생태적 지위를 점한 두 종은 동일한 장소에서 공존할 수 없다'라는 가우제 법칙을 증명했다. 두 종의 짚신벌레를 유리관에 넣으면 늘 한 종만 살아남는다. 그리고 유리관 속의 조건을 바꾸면 살아남는 종은 바뀐다.  

 

부담 없이 볼 수 있는 웰메이드 킬링타임 영화.

블록버스트라고 하기에는 조금 스케일이 작지만, 한국판 인디애나 존스라고 할 정도는 되는 것 같다.

캐릭터의 조화도 좋다.

단 하나의 아쉬움은 12세 관람가라서 이제훈과 신혜선의 뽀뽀씬 정도 밖에는 섬씽이 없다는 점이다.

 

오구라 콜렉션에 대한 엔딩의 밑밥이 있는데 속편이 제작될 순 있을까 싶긴 하다. 

만들어지면 꽤 재밋을 것 같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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