숙명여대에 합격한 트랜스젠더 여학생 A씨가 결국 입학을 포기한다는 입장을 밝혔다. 얼마전 A씨의 입학 예정 소식이 알려진 후 트랜스젠더 여학생을 여학생으로 인정할 수 없다는 비난과 혐오의 여론이 일었고, 이에 A씨는 신상 유출과 색출의 두려움을 느껴 입학을 포기할 수밖에 없다고 알렸다.
여자대학교가 만들어진 역사적 배경은 교육에서 소외되어온 여성들에게 교육받을 권리를 보장하기 위함이었다. 트랜스젠더 여성인 A씨가 입학했다면 이는 숙명여대의 설립 목적에 하등의 어긋남 없는 일이었을 것이며 성소수자 차별이 심각한 우리나라에 사회적 울림을 주는 사건이 되었을 것이다. 입학을 포기할 수밖에 없었던 A씨의 상황에 안타까움과 슬픔을 느낀다.
성소수자 학생들은 어린 시절부터 혐오표현과 차별을 경험하고 있다. 학내 괴롭힘으로 인해 학교를 더 이상 다니지 못하고 교육받을 권리를 침해받는 경우도 다수 발생한다. 여전히 대한민국의 학교는 성소수자 학생을 환대하지 못하는 공간으로 머물러 있다는 사실이 이번 사건으로 인해 드러났다. A씨의 입학 포기 결정을 두고 교육 당국은 부끄러움을 느껴야 마땅하다.
2020년 2월 8일 정의당 대변인 강 민 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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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20년 들어 본 글 중에 가장 어이 없는 글. 가장 밑줄에 대변은 '똥'이라는 뜻인가?
Sorry I never told you all I wanted to say... And now it's too late to hold you 'Cause you've flown away so faraway ay-ay-ay-ay
미안해요, 내가 말하고 싶었던 모든 것들을 말하지 않았던 것을.
그래서 이젠 당신을 잡을 수가 없어요.
당신은 너무나 먼 곳으로 가버렸네요.
Never had I imagined living without your smile...
Feeling knowing you hear me it keeps me alive alive...
당신의 미소가 없는 삶이란 상상도 못했어요.
당신이 나의 말을 듣고 있다는 것을 안다는 느낌만이 나를 살아있게 해요.
And I know you're shining down on me from heaven Like so many friends we've lost along the way And I know eventually we'll be together
Together One sweet day...
긴 인생의 여정에서 잃어버리는 그 많은 친구들처럼, 당신이 천국에서 나를 비쳐주는 것을 알아요.
언젠가는 우리는 함께 하겠죠.
같이, 어느 행복한 날에.
Loving you always and I'll wait patiently to see you in heaven
당신을 언제나 사랑하며, 난 당신을 천국에서 만나기를 참고 기다려요.
Darlin' I never showed you (I never showed you)
내 사랑, 난 한 번도 당신에게 보여주지 못했어요.
Assumed you'd always be there (always be there) I thought you'd always be there And I... I... I take (Taken for granted) your presence for granted But I always cared
But I always cared And I miss the love we shared
당신이 언제나 함께 할거라 믿었죠.
당신이 언제나 함께 할거라 생각했어요.
당연히 당신이 언제나 함께 할거라 생각했죠.
그러나 난 언제나 당신을 아꼈죠.
그리고 우리가 나누었던 사랑이 그리워요.
And I know you're shining down on me from heaven Like so many friends we've lost along the way (Lost along the way)
And I know eventually (I know I know) we'll be together We'll be together One sweet day...
천국에서 당신이 나를 비추고 있음을 알아요.
인생의 여정에서 잃어왔던 많은 친구들처럼요.
And all that I know is I'll wait (W-h-o-a...) patiently to see you in heaven
Although the sun will never shine the same I'll always look to a brighter day...
Y-e-a-h... yeah Lord I know when I lay me down to sleep You will always listen as I pray...
And I know you're shining down on me from heaven Like so many (like so many) friends we've lost along the way
And I know (yes I know) eventually (I know) we'll be together Together (Y-e-a-h...) One sweet day (One sweet day one sweet day)
Oh, yeah... And I know you're shining down on me from heaven I'll see you eventually Like so many friends we've lost along the way I know you're lookin' down from heaven And I know... I... know eventually we'll be together (Ooh-ooh) Yes we will One sweet day... One sweet d-a-y...
Patiently to see you in heaven Sorry I never told you (ooh-ooh) All I wanted to say...
양자물리학의 초창기 역사에서 코펜하겐 해석에 대해 아인슈타인과 보어가 벌인 논쟁은 현대 물리학의 역사에서 매우 중요하면서도 흥미진진한 장면이었다.
코펜하겐 해석이란 미시세계에서의 양자의 거동에 대한 내용을 담고 있으며, 주로 이 해석에 담긴 양자적 거동에 대해, 물리학과에서는 양자역학 첫시간에 영의 이중 슬릿 실험을 통해서 이 내용을 배우게 된다(영의 이중슬릿 실험은 일반물리 시간에도 파동의 회절, 입자의 파동성 등의 성질에 대한 부분에서도 배우게 된다).
코펜하겐 해석에서 우리의 상식으로 받아들이기 가장 이상하고 어려운 내용 중의 하나는, 하나의 전자가 두개의 슬릿 구멍 중 어디를 통과할지는 전자의 마음이라는 것이다(양자역학 이전의 뉴톤의 고전역학적 입장은 전자의 초기상태가 주어지면 우리는 그 전자가 두개의 슬릿 구멍 중 어디로 통과할지를 안다는 것이다).
전자의 마음대로라는 용어는 물론 약간은 과장된 측면이 있기는 하지만(전자가 생명이 가진 마음이 있다고 의인화한 면에 있어서 그렇다. 하지만 누가 알겠는가? 진짜 전자란 살아있는 우리 생명과도 같은 것인지?), 슬릿 구멍 중 어디를 통과할지는 "전자의 마음대로"라는 것은 양자역학적 현상을 우리의 일상의 언어로 치환했을 때 진실과 크게 다르지 않다.
이러한 부분에 있어서 아인슈타인은 "신은 주사위 놀이를 하지 않는다"라며 보어와 그의 제자 하이젠베르크가 새로이 구축한 양자역학의 체계를 인정하지 않았다(아이러니 한 것은 광전효과에 대한 설명으로 노벨상을 수상했고, 이를 통해 양자역학이라는 분야를 세우는 데 큰 역할을 한 장본인이 바로 아인슈타인이라는 사실이다. 내로남불까지는 아닐지언정 어떤 면에서는 자기부정이라고나 할까).
그로부터 100여년의 세월이 흐른 현재. 물리학 뿐 아니라 생물, 화학, 지리, 천문, 인지학, 심리학, 진화학 등 다양한 과학 분야의 발전과 기여를 통해 세상에 대한 인간의 이해가 깊어져 갔다. 이에 따라 근대의 위대한 지성- 로크, 데카르트, 뉴턴과 같은 합리적 기계론에 따른 - 에 의해 구축된 결정론적 셰계관은 여기저기에서 균열을 보이며 한계를 보이고 있다.
과학이 종교의 도그마에 억압된 암흑의 베일을 벗겨낸 것은 신의 위세를 등에 업고 세상의 모든 것을 안다고 오만을 떨던 신의 대리인이라 자처하는 이들에게, 무지의 지(너 자신을 알라)라는 고대 현인의 무기를 부활시켰기 때문이다.
과학은 우리가 무엇을 모르는가에서 출발하여, 그 무엇을 구체화하고, 구체화된 것이 어떻게 존재하는지를 밝혀냄으로써 세상을 작동시키는 신의 의도를 인간이 이해할 수 있는 길을 열었다.
과학이 밝힌 신의 의도는 바로 미래는 신을 포함하여 아무도 모른다는 것이었다. 신은 그 자신도 한치 앞의 미래도 예측하지 못하도록 세상을 혼돈의 상태 그 자체로 설계했다는 것을, 두 개의 구멍 중 전자 한개가 어디로 갈지도 모른다는 사실로서 우리에게 밝힌 것이다.
오직 확률적으로만 무수한 전자의 다발들이 모였을 때, 그 주변 조건들(이를 전문적인 용어로는 경계조건-boundary condition-이라 한다.)에 의해 대충의 경향(tendency)정도는 우리가 알 수 있다는 것이다.
그래서 미시의 세계에서는 한치 앞도 알수 없게 설계되어 있는 기저(base)의 집합체인 거시세계는 어느 정도의 경향성이라는 예측 가능한 성질을 통해 미천한 우리 인간들이 그럭저럭 이 세상을 살아갈 수 있는 뒷문 정도를 마련해 두신 것이리라.
이 세상은 한치앞도 알 수 없는 혼돈의 앙상블로 이루어졌으며, 신은 주사위 놀이를 자연의 본성으로 정해놓았지만, 우리가 수 많은 주사위를 던지면 6개의 눈 중 어느 하나가 나올 경향성은 1/6로 수렴되는 것을 아는 것처럼 대충의 방향성이라는 것을 지혜의 눈으로 어림할 수 있는 여지는 남겨놓으셨다.
그러기에 인간은 항상 겸손하며, 우리의 무지의 한계를 겸허히 인정하고 오늘도 우리가 원하는 숫자가 나오기를 기원하며 열심히 주사위를 굴리는 것이다.
Like a movie scene In the sweetest dreams I have pictured us together Now to feel your lips On my fingertips I have to say is even better than I ever thought it could possibly be It's perfect, it's passion, it's setting me free From all of my sadness The tears that I've cried I have spent all of my life
영화의 한 장면 같은 달콤한 순간의 꿈속에서
우리는 함께 사진을 찍고,
나의 손끝으로 당신의 입술을 느끼지.
생각했던 그 어떤 순간보다 지금이 좋아.
내가 지내온 모든 날들속에 날 울게 하던 내 모든 슬픔으로부터
날 자유롭게 해, 정말 완벽하고 정열적이야.
[CHORUS:] Waiting for tonight, oh When you would be here in my arms Waiting for tonight, oh I've dreamed of this love for so long Waiting for tonight
당신이 내 품에 안길 오늘밤을 기다려왔어.
바로 오늘밤 같은 이런 사랑을 정말 오랜동안 꿈꿔왔지.
Tender words you say Take my breath away Love me now, leave me never Found a sacred place Lost in your embrace I want to stay in this forever I think of the days when the sun used to set On my empty heart, all alone in my bed Tossing and turning emotions were strong I knew I had to hold on
당신의 달콤한 속삭임에 나의 가슴은 녹아내려.
지금 나를 사랑해죠, 나를 버려두지 마.
나의 성전을 찾았어요, 당신의 품안에서 난 갇혀버렸죠.
이대로 영원히 있고 싶어요.
요동치던 감정들의 소용돌이 속에서 마음이 텅빈 채로 홀로 지내며,
나는 견뎌내야만 했었죠.
[CHORUS 2x]
Gone are the days when the sun used to set On my empty heart all alone in my bed Tossing and turning Emotions were strong I knew I had to hold on
내부 태양계의 따뜻한 세상 너머에, 가스(Gas) 거인인 목성 너머에, 태양 너머 얼어붙은 세상에 토성이 있습니다.
얼음으로 이루어진 30만 킬로미터의 폭을 가진 고리 덕분에 토성은 독특한 모습을 갖고 있습니다.
셀 수 없이 많은 얼음조각이 중력에 의해 고리를 이루어 태양계의 가장 놀라운 광경을 연출합니다.
토성은 태양계에서 가장 극적인 변화를 겪은 행성입니다.
이 행성은 파괴되었고, 또 생성되었습니다. 이 행성은 오랜 동안 자신의 모습을 숨겨왔습니다.
어쩌면 이 행성은 우리의 두번째 고향이 될지도 모릅니다.
단단한 표면이 없는 세상을 상상해 봅시다. 그저 끝없이 대기만이 펼쳐진
지구와 비교해서 토성은 매우 이질적입니다. 그래서 어떻게 같은 행성 물질들로부터 이런 행성이 생겨났는지를 이해하는 것은 매우 어렵습니다. 그러나 생성 당시의 상황으로 되돌아가본다면, 토성의 생성 과정은 놀랍도록 우리에게 친숙합니다.
토성은 바위와 얼음으로 이루어진 작은 세계로 시작되었습니다. 수성,금성,지구,화성과 마찬가지로 작은 바위와 얼음들이 서로 뭉치면서 덩치를 키워나갔습니다.
그러나, 다른 행성과 달리 우리가 눈의 선(Snow Line)이라 부르는 외곽 경계선을 형성합니다. 태양과 워낙 먼거리였기 때문에 물은 오직 얼어있는 고체 상태로만 존재했고, 이로 인해 셀 수 없이 많은 얼음 입자들은 마치 바위나 돌과 마찬가지로 행성을 만드는 재료와 같은 역할을 합니다.
중력의 영향으로 바위와 얼음들은 서로 충돌하고 섞이고 결합하면서, 어린 토성을 거대한 행성으로 만들어갑니다.
시간이 지나면서 토성은 근본적으로 다른 행성으로 변모해갑니다. 이 어린 행성이 만들어진 장소에는 바위와 얼음보다 훨씬 많은 양의 가스(Gas)가 존재했습니다. 토성은 이제 대기(Atmosphere)를 형성해가기 시작합니다. 그러나 그 스케일은 우리의 상상을 뛰어넘습니다.
지구의 대기를 우주공간에 바라보기 전까지는 얼마나 (그 두께가)얇은지 깨닫지 못합니다.
이 정도의 대기의 모습은 내부 태양계의 다른 행성에서도 비슷합니다.
비교적 얇은 이 대기도 그 아래의 지표면에 상당한 힘을 가합니다. 우리가 아는 대기압이라는 힘입니다.
예를 들어, 수백 미터 높이의 산에서 페트병을 열어 공기를 채우고, 산 아래로 내려오면 페트병이 쪼그라듭니다. 겨우 몇백 미터의 높이의 대기압으로도 병이 쪼그라드는데, 행성 자체가 온통 대기로 이루어져있다면 그 힘은 과연 어느 정도일까요?
수백만 년 동안, 바위와 얼음으로 커질대로 커진 토성은 이제 태양이 남기고 간 수소와 헬륨으로 덩치를 더 키우기 시작합니다. 내부 행성계의 작은 행성들에게는 너무나도 가벼운 기체들이지만, 이미 덩치가 커진 토성은 이런 기체들을 끌어모을 수 있는 충분한 중력을 가지고 있었습니다.
토성은 그 중력으로 어마어마한 양의 가스들을 모아서 덩치를 키워나가게 됩니다. 그리고 이렇게 끌어모은 대기는 토성의 표면을 변화시킵니다.
엄청난 양의 대기는 그 압력으로 기존 토성의 표면을 달궈서 열을 내게 하고 빛을 내게 합니다. 토성은 점점 기체를 끌어모으면서 커나가고, 결국에는 지구의 대기압의 천만배에 이르는 압력까지 올라갑니다. 이런 대기압하에서는 우리가 지구에서 상식처럼 생각하는 고체의 표면은 존재하지 않게 됩니다.
토성의 고체성 표면인 바위와 얼음은 분해되어 토성은 가스 행성으로 진화합니다.
이렇게 생긴 과거의 토성은 지구 5천개 정도를 삼킬 수 있는 크기가 됩니다. 하지만 이렇듯 광활하고 거친 초기의 토성은 현재와는 달랐습니다.
보이저 탐사선은 최초로 토성의 상세한 모습을 우리에게 전송했습니다. 보이저의 자료에 의해서 토성의 상층부 대기가 거의 수소와 헬륨으로 이루어졌다는 것을 확실히 알 수 있었습니다. 이 두 기체는 바로 초기 태양계에서 가장 풍부했던 바로 그것이었습니다.
지구에서 날씨를 변화시키는 에너지는 태양으로부터 옵니다. 태양이 지표면을 가열하면서 공기를 가열하고 가열된 공기의 대류를 통해 지구의 날씨는 변화합니다.
토성에서 받는 태양빛은 지구의 1/100 정도입니다. 이것은 토성의 기후가 다른 에너지원에 의해 변화한다는 것을 의미합니다.
토성 극지방의 상층부 구름과 거대한 폭풍을 통해서, 우리는 토성 대기 아래의 많은 것을 추론할 수 있습니다.
그리고 토성을 움직이는 에너지원이 무엇인지에 대해서도요.
대기권 상층부 아래에는 거대한 물의 구름들이 있습니다. 이 두꺼운 구름층에서는 지구에서보다 10000배 정도 강력한 번개가 발생합니다.
이 번개를 통해 메탄 가스는 거대한 그을음의 구름으로 변화합니다. 이 그을음은 낙하하면서 점점 더 압력을 받게 되고, 어느 한계를 지나면서 거대한 압력은 이 그을음 덩어리들을 결정화시키면서 다이아몬드로 변화시킵니다.
이 다이아몬드 조차 종국에는 토성의 거대한 압력에 굴복하여, 액체화 됩니다.
대기권 상층부에서 4만 킬로미터 못 미쳐서, 토성의 주요 에너지원이 드러납니다. 이 영역의 압력은 워낙 높아서 기체들은 액체금속처럼 움직입니다.
(높은 압력에)액화된 헬륨들은 엄청난 열을 방출하며 수소기체를 통과하게 됩니다.
우리(과학자들)는 이 열이 목성의 기후를 변화시키는 에너지원이라고 생각하고 있습니다.
생성 후 수억 년 간, 토성은 극적인 변화를 겪습니다. 비록 오늘날 우리가 알고 있는 토성과는 많이 다르지만, 초기 몇억 년 이후론 수십억 년 동안 (초기의 변화에 비해)크게 변화하지 않았습니다.
그러나, 그 거대한 크기로 인해 결국에는 한번 더 극적인 변화를 일으킵니다.
카시니(Cassini) 탐사선은 토성과 그 달들 그리고 토성의 고리를 가까이에서 탐사할 목적으로 발사되었습니다. 보이지 탐사선이 단 몇일 간만 토성을 지나쳤던 것과 달리 카시니는 토성의 궤도에 진입하여 수년 동안 토성을 탐사할 목적으로 만들어졌습니다.
35억 킬로미터의 여행끝에 카시니는 토성의 고리를 근접해서 관찰할 수 있었습니다.
카시니는 토성 고리위로 떨어지는 태양계의 먼지를 채집/분석하여 놀라운 사실을 알려주기도 했습니다.
토성의 고리가 수십억 년 전에 만들어진 채로 있어왔다면, 태양계의 먼지로 인해 검게되고, 어두워졌을 것입니다. 하지만 고리는 새로 만들어진 것처럼 선명하고 밝았습니다.
그리고 그 이유는 고리가 생긴지 얼마 안된 것이기 때문이었습니다. 토성 자체보다 고리는 45억년 가까이 어렸습니다.
토성 고리의 생성의 수수께끼는 여전히 연구 중인 테마입니다. 그리고 카시니가 수집한 증거들은 고리의 생성의 비밀이 토성이 아니라 그 위성인 토성의 달에 있다는 힌트를 주었습니다.
토성은 62개의 커다란 달들과 셀 수 없이 많은 작은 달들을 가지고 있으며, 여전히 발견되는 중입니다. 이는 마치 작은 태양계와 같습니다. 행성과 같은 크기의 위성인 타이탄(Titan)에서부터 비정형의 작은 바위덩어리에 이르기까지 크기와 모양에 있어서 다양한 형태를 가지고 있습니다.
마이마스(Mimas)는 데스스타(Death Star, 스타워즈에 나오는 제국군의 행성무기와 닮았다)라고도 불리는데, 거대한 운석구를 볼 수 있으며, 이는 오래전에 엄청난 충돌이 있었음을 보여줍니다. 거의 파괴될 뻔 했다고 보입니다.
이것은 라페투스(Lapetus)라는 달인데, 행성급의 크기로 직경이 1,500km에 달합니다. 그 표면을 보면 절반은 하얗고 절반은 어둡게 보입니다.
라페투스는 사진으로 보듯이 적도 부근을 빙둘러서 능선이 있습니다. 사진으로도 뚜렷이 구분이 될 정도이며, 이는 태양계에서 발견되는 것중 가장 높은 산악지형으로 정상의 해발은 20km에 이릅니다.
이 산악지형은 한때 토성의 고리처럼 라페투스의 고리로 되어 있던 것이 다시 지표면으로 떨어지면서 형성된 것으로 생각됩니다.
카시니는 많은 달들을 상세히 관찰하였습니다. 이 달들은 대부분 얼음으로 이루어져 있으며, 그 중 많은 수가 특이한 형태를 가지고 토성의 고리 안과 부근을 돌고 있습니다.
카시니의 탐사 결과, 토성의 달들과 고리의 성분은 대부분 정확히 같은 물질들도 이루어졌다는 것이 밝혀졌습니다. 토성의 고리와 달들은 밀접한 관계가 있다는 의미입니다.
카시니를 통해 토성과 달들의 운동을 정밀히 관찰한 결과 우리는 무엇인가 부족하다는 것을 알았습니다.
지구에서 공룡이 돌아다니고 있던 1억년 전, 토성에는 현재에는 없는 달이 하나 있다고 생각됩니다.
이 달은 직경 400km의 얼음으로 이루어져 있었습니다. 하지만 이 행성은 사라질 운명이었습니다. 토성의 거대한 중력에 저항하기에는 너무나 가까운 궤도였던 것입니다.
지구에서 파도를 일으키는 조석력(Tidal force)은 달이 지구에 미치는 중력의 차이에 의해 발생합니다(달에 가까운 지역의 바닷물은 끌어당기고, 더 먼곳은 덜 끌어당기는 중력작용의 차이). 마찬가지로 지구도 달에 더 거대한 중력의 영향을 주어 달에 조석력을 발생시킵니다(다만 달 표면에는 물이 없어서 밀물과 썰물과 같은 현상이 생기지 않음).
지구의 중력의 영향이 더 크고, 45억년 전에는 지구와 달 사이의 거리가 현재보다 17배나 가까웠기 때문에 달의 표면의 형상 자체에 지구의 중력이 영향을 주었습니다. 조석력을 통해 달의 표면의 바위가 융기하고 가라앉음으로 인해 산맥이 형성되었으며 현재 우리는 그 결과를 관측할 수 있습니다.
만일 45억년 전에 그보다 더 가까워져서 우리가 로슈 한계(Roche Limit)라 불리는 지점보다 더 가까워졌다면 달은 지구의 중력에 의해 찢어져서 파괴되었을 것입니다.
토성의 이름(Saturn)은 로마신 중 시간과 경작의 신으로, 고대 신화에 의하면 자식들에 의해서 죽을 운명을 피하기 위해 새로 태어난 아이들을 먹어버렸다는 이야기가 전해집니다(그리스 신화에서 우라노스를 거세한 크로노스Kronos이며, 로마신화에서는 Saturnus를 의미한다).
카시니의 관측결과로부터 우리는 토성이 이 신화의 내용과 비슷한 행동을 한 것을 알게 됩니다.
과학자들의 생각은 이렇습니다. 1억년 전에서 1천만년 전 사이에 얼음으로 이루어진 토성의 달 하나가 토성에 가까이 혹은 로슈 한계선 내로 접근합니다.
토성의 강력한 중력은 이 달에 작용하여 달을 찢어버리기 시작합니다. 토성은 그 자식을 삼켜버립니다.
15,000조(15,000x10^12, 혹은 15경) 톤에 이르는 얼음들이 토성의 궤도에 흩뿌려 졌습니다. 얼음의 입자들은 빠른 속도로 궤도로 퍼져서 궤도운동을 합니다.
토성의 특징인 고리가 탄생했습니다. 토성의 중력으로 인해 고리는 거의 완벽한 원형의 형상을 이루고, 고리내부의 바위들은 서로 충돌하면서 점점 납작해집니다. 현재 이 파편들로 이루어진 고리의 지름은 목성의 직경보다 크고, 두께는 평균 10미터 정도입니다. 이런 오랜 과정을 거쳐 토성은 태양계의 보석이 되었습니다.
카시니로 인해 태양계와 토성의 진화에 대해 깊은 지식을 얻을 수 있었습니다. 하지만 카시니의 임무는 아직 끝나지 않았습니다.
토성의 고리 바로 위에서 다른 보물이 발견되었기 때문입니다. 여기에는 우리의 가장 근원적인 질문인 태양계에서의 생명의 가능성과 그 너머에 대한 해답이 있을지 모릅니다.
태양에서 수십조 킬로미터 떨어져, 토성의 고리의 외곽에 엔셀라두스(Enceladus)가 있습니다.
엔셀라두스는 아주 작은 달로, 아이스란드(Iceland)의 크기와 비슷합니다(영화 인터스텔라에 나온 촬영지가 아이스란드로 그 영화에 나온 곳과 비슷하다)
1980년 보이저 1호가 엔셀라두스에 접근했을 때, 우리는 엔셀라두스의 표면에서 작은 방울같은 것을 관찰할 수 있었습니다. 이는 엔셀라두스의 표면에서 무엇인가가 뿜어져나오는 걸로 예측할 수 있습니다. 24년 뒤 카시니가 다시 엔셀라두스에 도착해서 보내온 사진은 놀라웠습니다.
그것은 거대한 수중기 기둥과 얼음이 표면으로부터 분출되는 모습이었습니다. 분석 결과에 따르면 매초 200kg의 물질이 뿜어나오고 있습니다. 하지만 이 물질들은 우주로 흩어지지 않습니다.
토성의 바깥쪽 고리들에 공급되는 것 처럼 보입니다.
이 발견으로 과학자들은 대담한 시도를 생각하게 됩니다. 수십억 킬로미터 떨어져 있던 카시니의 궤도를 조정하여 이 수증기 기둥에 접근하도록 한 것입니다.
카시니는 엔셀라두스의 지표면 48km 지점까지 접근하여, 그 수중기 기둥과 직접 접촉했습니다.
이 근접통과를 통해 얻은 결과는 놀라웠습니다.
이 얼음으로 된 기둥을 이루는 것은 소금물의 입자였습니다. 즉 엔셀라두스의 지표 아래의 대양이 우주로 뿜어져 나오는 것이었습니다.
태양으로부터 엄청나게 멀리 떨어진, 엔셀라두스는 물로 이루어진 바다를 지면 아래에 숨겨두고 있던 것입니다.
이것은 바로 토성의 영향입니다. 엔셀라두스는 토성의 주위를 타원의 궤도로 공전합니다. 그래서 공전 중의 토성으로부터 받는 중력이 계속 변하게 됩니다.
엔셀라두스의 공전궤도에 영향을 주는 또 하나의 큰 달이 있으며, 그것은 다이오네(Dione)입니다.
토성과 다이오네에 의해 지속적으로 변화하는 중력은 엔셀라두스에 잡아당기는(Stretch) 힘과 쥐어짜는(Squeeze) 힘을 작용하면서 그 내부의 얼음에 마찰력을 작용하여 열에너지를 발생시키며 이로 인해 얼음 내부를 녹게 만듭니다.
카시니가 보내준 데이터는 더 놀라운 사실을 알려주었습니다. 수증기 기둥을 더 자세하게 분석한 결과 복잡한 유기 화합물과 규소 입자들이 발견되었습니다. 이것은 뜨거운 물의 방출을 의미합니다.
태양계 외곽의 얼어붙은 영역에 있는 따뜻한 오아시스를 발견한 겁니다. 카시니를 통해 얼음으로 이루어진 엔셀라두스의 지표면 아래에 모습을 우리는 짐작할 수 있습니다.
이러한 뜨거운 물의 존재가 중요한 것은, 지구의 생명의 탄생에 바다에서 뜨거운 물의 용출이 결정적인 역할을 했기 때문입니다. 적절한 유기물질에 풍부한 미네랄과 함께 뜨거운 물이 접촉하면서 전달된 에너지를 통해 활발한 화학작용이 일어나고 이런 일련의 화학작용을 통해 원시적 생명체와 그 양분이 되는 영양가 높은 유기물질들이 만들어 집니다.
즉, 엔셀라두스에는 생명이 탄생할 혹은 탄생했을 가능성이 있습니다.
엔셀라두스에 생명의 가능성이 있다는 사실은 우리를 흥분시킵니다.
엔셀라두스의 오아시스는 생긴지 1억년에서 1천만년 정도일 것으로 보이기 때문에 아직 생명이 생기지 않았거나 혹은 생기는 초기일지도 모릅니다. 다만 풍부한 물과 열에너지를 통해 지구에서 수십억 년의 시간을 통해 생명이 탄생하고 번성해나갔듯이, 엔셀라두스도 수십억 년 후에는 지구와는 별개의 독자적인 생태계를 만들어나갈지도 모릅니다.
토성에 도착한 지 13년이 지난 후, 카시니는 연료가 떨어졌습니다. 나사(NASA)는 이 탐사선을 엔셀라두스의 지표와 충돌하는 리스크를 감수할 순 없었습니다. 왜냐하면 엔셀라두스에 있을지도 모르는 생명체를 오염시킬지도 모르기 때문입니다.
그래서 과학자들은 카시니의 최후의 임무로 토성 내부로의 여행을 결정했습니다. 다시는 돌아오지 못할 여정이었죠.
카시니는 토성과 하나가 되었습니다.
언젠가 우리는 토성에 다시 갈 수 있을것입니다. 그때는 우리가 직접 가서 보고, 머물면서 우주의 아름다움을 더 자세히 지켜볼 수 있을 겁니다.
호모 사피엔스의 발생부터 최근의 과학혁명에 이르기까지 인류의 역사의 주요한 분기점들의 주요한 내용을 통사적으로 다루고 있다.
그 뼈대는 새로울 것이 없어 보이지만, 실제로 다루는 내용은 상당히 새로운 시각으로 가득하다.
읽는 즐거움이 있는 책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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p25
사람들이 흔히 범하는 오류 중 하나는 이들 종을 단일 계보라고 생각하는 것이다. 예컨대 에르가스터가 에렉투스를 낳고 에렉투스가 네안데르탈을 낳고 네안데르탈인이 진화해 오리 종이 되었다는 식이다. 이런 직선 모델은 오해를 일으킨다. 어느 시기를 보든 당시 지구에 살고 있던 인류는 한 종밖에 없었으며, 모든 오래된 종들은 우리의 오래된 선조들이라는 오해 말이다.
사실은 이렇다 2백만 년 전부터 약 1만 년 전까지 지구에는 다양한 인간 종이 살았다. 왜 안 그랬겠는가? 오늘날에도 여우, 곰, 돼지 등 수많은 종이 동시대를 살고 있지 않은가. 몇만 년 전의 지구에는 적어도 여섯 종의 인간이 살고 있었다. 여기에서 이상한 점은 옛날에 여러 종이 살았다는 사실이 아니라 오히려 지금 딱 한 종만 있다는 사실이다. 더구나 이 사실은 우리 종의 범죄를 암시하는 것일지 모른다. 곧 살펴보겠지만, 우리 사피엔스 종에게는 사촌들에 관한 기억을 억압할 이유가 있다.
(개인생각)
인간이 무리 생활을 시작하게 된 결정적 동기는 외부의 위협(공룡, 사자 등과 같은 인간보다 힘이 세고 인간들을 사냥하는 짐승과 같은)으로부터 좀 더 살아남기 용이하게 하기 위해서였을 것이다.(마치 현재의 미어캣처럼)
(주요 호모 속 연표) 인류와 침팬지의 공통 조상이 6백만 년 전, 250만년 전 아프리카에서 호모 속이 진화하고 석기를 사용. 2백만 년 전 인류가 아프리카에서 유라시아로 퍼지고, 다양한 인간 종의 진화, 50만 년 전 유럽과 중동에서 네안데르탈인 진화, 30만년 전 불의 사용, 20만년 전 동아프리카에서 호모 사피엔스 진화, 7만년 전 인지혁명, 언어를 사용하기 시작, 역사의 시작.
p32
일부 학자는 익혀 먹는 화식火食의 등장, 인간의 창자가 짧아진 것, 뇌가 커진 것 사이에 직접적인 연관이 있다고 생각한다. 기다란 창자와 커다란 뇌를 함께 유지하기는 어렵다. 둘 다 에너지를 무척 많이 소모하기 때문이다. 화식은 창자를 짧게 만들어서 에너지 소비를 줄일 수 있게 해주었고, 의도치 않은 이런 변화 덕분에 네안데르탈인과 사피엔스는 커다란 뇌를 가질 수 있었다.
p36
이 논쟁에는 많은 것이 걸려 있다. 진화의 관점에서 볼 때 7만 년 이란 상대적으로 짧은 기간이다. 만일 '교체이론'이 맞다면, 현재 살아 있는 모든 인간은 대체로 같은 유전자들을 지니고 있으며 이들 사이의 유전적 차이는 무시해도 좋은 정도다. 하지만 '교배이론''이 맞다면, 아프리카인, 유럽인, 아시아인 사이에는 수십만 년의 연원을 둔 유전적 차이가 있을 수도 있다. 이 문제는 정치적 화약고로서, 폭발력을 지닌 인종이론의 재료가 될 수 있다.
최근 몇십 년은 교체이론이 이 분야의 상식이었다. 이에 대한 고고학적 증거가 상대적으로 더 확고하며 정치적으로도 더 올바른 것이었다(현대 인구집단들에게 유의미한 유전적 다양성이 있다고 말하면 인종주의라는 판도라의 상자가 열릴 수 있다. 과학자들은 이를 원하지 않았다). 하지만 이런 상황은 2010년에 끝이 났다. 4년간의 연구 끝에 네안데르탈인의 게놈 지도가 발표된 것이다. 유전학자들은 화석에서 충분한 양의 온전한 네안데르탈인 DNA를 얻어서 그것과 현대인의 DNA를 폭넓게 대조해볼 수 있었다.
그 결과는 과학자 사회를 경악하게 만들었다. 오늘날 중동과 유럽에 거주하는 인구집단이 지닌 인간 고유의 DNA 중 1~4퍼센트가 네안데르탈인 DNA로 밝혀졌던 것이다. 이것은 비록 많은 양은 아니지만 중대한 의미가 있다. 그로부터 몇 개월 뒤 두 번째 충격적인 사건이 있었다. 과학자들이 2008년 시베리아 알타이 산맥의 데니소바 동굴에서 발견한 손가락뼈에서 추출한 DNA로 유전자 지도를 만들었는데, 그 결과 현대 멜라네시아인과 호주 원주민의 인간 고유 DNA 중 최대 6퍼센트가 데니소바인의 DNA인 것으로 나타났다.
이런 결과가 유효하다면 - 이런 결론을 강화하거나 수정할 가능성이 있는 추가 연구과 진행 중이라는 사실을 염두에 두는 것이 중요하다 - 최소한 교배이론에 뭔가 근거가 있다는 뜻이 된다. 하지만 그렇다고 교체이론이 완전히 들린 것은 아니다. 네안데르탈인과 데니소바인은 오늘날 우리의 게놈에 아주 작은 양만 기여했기 때문에, 사피엔스와 다른 인간 종의 합병을 이야기하기는 불가능하다. 이들 간의 차이가 번식 가능한 성관계를 완전히 차단할 정도로 크지는 않았다고 해도, 그런 접촉을 매우 드물게 만들 정도이기는 했다.
그러면 우리는 사피엔스, 네안데르탈인, 데니소바인의 생물학적 연관성을 어떻게 이해해야 할까? 이들이 말과 당나귀처럼 완전히 다른 종이 아닌 것은 분명하다. 하지만 불도그와 스패니얼처럼 동일 종의 각기 다른 집단에 불과한 것은 아니다. 생물학적 실체는 흑과 백이 아니다. 회색 지대들도 중요하다. 예컨대 말과 당나귀처럼 하나의 공통 조상에서 진화한 두 종이라면 다들 어느 시기에는 불도그와 스패니얼처럼 같은 종의 두 집단이었다. 그러다가 두 집단이 이미 확연히 달라진 시점, 그러면서도 드물게 서로 성관계를 해서 번식 가능한 후손을 낳을 수 있는 시점이 있었을 것이다. 그후 또 다른 돌연변이가 일어나서 최후의 연결선은 끊어졌고, 집단들은 각기 다른 진화적 경로를 밟게 되었다.
사피엔스와 네안데르탈인, 데니소바인은 약 5만 년 전 이런 경계선에 섰던 것 같다. 그들은 완전히 다른 종은 아니지만 대체로 별개의 종이었다. 다음 장에서 살펴보듯 사피엔스와 네안데르탈인, 데니소바인은 유전부호나 신체 특징만 달랐던 것이 아니라 인지능력, 사회적 능력에서도 차이가 났다. 하지만 사피엔스와 네안데르탈인이 번식 가능한 후손을 낳는 일이 드물게나마 여전히 가능했던 것으로 보인다. 따라서 이들 집단이 합병한 것은 아니고 일부 운 좋은 네안데르탈인의 유전자가 사피엔스 특급에 편승한 것이었다. 우리 사피엔스가 과거 언젠가 다른 종의 동물과 성관게를 하고 아이를 낳을 수 있었다는 생각은 심란하다. 그러나 한편 짜릿하기도 하다.
네안데르탈인과 데니소바인이 사피엔스에 합병된 것이 아니라면 이들이 사라진 이유는 무엇일까? 하나의 가능성은 사피엔스가 이들을 멸종으로 이끌었다는 것이다. 상상해보자, 사피엔스의 한 무리가 발칸 반도의 어느 계곡에 도착했는데, 네안데르탈인이 이곳에서 수십만 년 전부터 살고 있었다. 새로 도착한 사피엔스들은 사슴을 사냥하고 견과류와 장과류를 채취하기 시작했는데, 이것은 네안데르탈인의 주식이기도 했다.
사피엔스는 기술과 사회적 기능이 우수한 덕분에 사냥과 채취에 더 능숙했다. 이들은 번식하고 퍼져나갔다. 이들보다 재주가 떨어지는 네안데르탈인은 먹고 살기가 점점 힘들어졌다. 집단의 크기는 줄어들과 서서히 모두 죽어갔다. 이웃의 사피엔스 집단에 합류한 한두 명의 예외를 제외하면 말이다.
또 다른 가능서도 있다. 자원을 둘러싼 경쟁이 폭력과 대량학살을 유발했다는 것이다. 관용은 사피엔스의 특징이 아니다. 현대의 경우를 보아도 사피엔스 집단은 피부색이나 언어, 종교의 작은 차이만으로도 곧잘 다른 집단을 몰살하지 않는가.
원시의 사피엔스라고 해서 자신들과 전혀 다른 인간 종에게 이보다 더 관용적이었을까? 사피엔스가 네안데르탈인과 마주친 결과는 틀림없이 역사상 최초이자 가장 심각한 인종청소였을 것이다.
==> 최근의 해석은 아프리카에서 발원한 사피엔스가 10만 년 전 최초로 유럽대륙으로 진출을 하려다가 이미 자리를 잡고 있는 월등한 신체적능력을 가진 네안데르탈인에 의해 좌절된다. 3만 년 후, 인지 혁명을 통해 언어를 습득하고 집단의 전투전략을 발전시킨 사피엔스가 다시 유럽대륙 진출을 도모하고 이때, 네안데르탈인 등 다른 호모 속을 제거하면서 다른 대륙으로의 진출을 가속화시킨다라는 연구 결과가 있다.
p41
사피엔스의 성공비결은 무엇이었을까? 우리는 어떻게 생태적으로 전혀 다른 오지의 서식지에 그처럼 빠르게 정착할 수 있었을까? 우리는 어떤 방법으로 다른 인간 종들을 망각 속으로 밀어넣었을까? 튼튼하고 머리가 좋으며 추위에 잘 견뎠던 네안데르탈인은 어째서 우리의 맹공격을 버텨내지 못했을까? 논쟁은 뜨겁게 계속되고 있다. 그리고 가장 그럴싸한 해답은 바로 이런 논쟁을 가능하게 하는 것, 즉 언어다. 호모 사피엔스가 세상을 정복한 것은 다른 무엇보다도 우리에게만 있는 고유한 언어 덕분이었다.
p46
인간의 언어가 진화한 것은 소문을 이야기하고 수다를 떨기 위해서라는 것이다. 이 이론에 따르면, 호모 사피엔스는 무엇보다 사회적 동물이다. 사회적 협력은 우리의 생존과 번식에 핵심적 역할을 한다. 개별 남성이나 여성이 사자와 들소의 위치를 아는 것만으로는 충분치 않다. 그보다는 무리 내의 누가 누구를 미워하는지, 누가 누구와 잠자리를 같이하는지, 누가 정직하고 누가 속이는지를 아는 것이 훨씬 더 중요하다.
40~50명 정도의 사람들 사이에서 수시로 변해가는 관계를 저장하고 추적하는 데 필요한 정보의 양은 어마어마하다(50명으로 구성된 무리에는 1,225개의 일대일 관계가 있으며 이보다 복잡한 사회적 조합이 무수히 많이 존재한다). 모든 유인원은 이런 사회적 정보에 예리한 관심을 나타내지만, 이들에게 효율적으로 소문을 공유할 수단이 부족하다. 네안데르탈인과 원시 호모 사피엔스 역시 소문을 공유하는 데 어려움을 겪었을 것이다.
뒷담화는 악의적인 능력이지만, 많은 숫자가 모여 협동을 하려면 사실상 반드시 필요하다. 현대 샆피엔스가 약 7만 년 전 획득한 능력은 이들로 하여금 몇 시간이고 계속해서 수다를 떨 수 있게 해주었다. 누가 신뢰할 만한 사람인지에 대한 믿을 만한 정보가 있으면 작은 무리는 더 큰 무리로 확대될 수 있다. 이는 사피엔스가 더욱 긴밀하고 복잡한 협력 관계를 발달시킬 수 있다는 뜻이기도 하다.
뒷담화이론은 농담처럼 들릴지 모르지만, 이를 뒷받침하는 연구 결과가 무수히 많다. 심지어 오늘날에도 의사소통의 대다수가 남 얘기다. 이메일이든 전화든 신문 칼럼이든 마찬가지다. 이것은 매우 자연스러운 현상이다. 우리의 언어가 이런 목적으로 진화한 것처럼 보일 지경이다.
p48
우리 언어의 진정한 특이성은 사람이나 사자에 대한 정보를 전달하는 능력에 있는 것이 아니다. 그보다는 전혀 존재하지 않는 것에 대한 정보를 전달하는 능력에 있다. 지금까지 우리가 아는 한, 직접 보거나 만지거나 냄새 맡지 못한 것에 대해 마음껏 이야기할 수 있는 존재는 사피엔스뿐이다.
전설, 신화, 신, 종교는 인지혁명과 함께 처음 등장했다. 이전의 많은 동물과 인간 종이 "조심해! 사자야!"라고 말할 수 있었다면, 인지혁명 덕분에 호모 사피엔스는 이렇게 말할 수 있게 되었다. "사자는 우리 종족의 수호령이다." 허구를 말할 수 있는 능력이야말로 사피엔스가 사용하는 언어의 가장 독특한 측면이다.
오직 호모 사피엔스만이 실제로 존재하지 않는 것에 대해 말할 수 있고, 아침을 먹기도 전에 불가능한 일을 여섯 가지나 믿어버릴 수 있다는 데는 누구나 쉽게 동의할 것이다. 원숭이를 설득하여 지금 우리에게 바나나 한 개를 준다면 죽은 뒤 원숭이 천국에서 무한히 많은 바나나를 갖게 될 거라고 믿게끔 만드는 일은 불가능하다.
p60
인지혁명 이후, 사피엔스는 이중의 실재 속에서 살게 되었다. 한쪽에는 강, 나무, 사자라는 객관적 실재가 있다. 다른 한쪽에는 신, 국가, 법인이라는 가상의 실재가 존재한다. 시간이 흐르면서 가상의 실재는 점점 더 강력해졌고, 오늘날에 이르러서는 강과 나무와 사자의 생존이 미국이나 구글 같은 가상의 실재들의 자비에 좌우될 지경이다.
p68
인지혁명 이후 생물학과 역사의 관계를 요약하면 다음과 같다.
1. 생물학은 호모 사피엔스의 행동과 능력의 기본 한계를 결정한다. 모든 역사는 이런 생물학적 영역의 구속 내에서 일어난다.
2. 하지만 이 영역은 극도로 넓기 때문에, 사피엔스는 엄청나게 다양한 종류의 게임을 할 수 있다. 사피엔스는 픽션을 창조하는 능력 덕분에 점점 더 복잡한 게임을 만들었고, 이 게임은 세대를 거듭하면서 더더욱 발전하고 정교해진다.
3. 결과적으로, 사피엔스의 행동을 이해하려면 우리는 이들의 행동이 역사적으로 진화해온 경로를 서술해야 한다. 우리가 생물학적 속박만을 이야기한다면, 그것은 월드컵 경기를 중계하면서 선수들이 무엇을 하고 있는지를 설명하기보다는 운동장의 상태를 자세히 설명하는 라디오 아나운서와 다를 바 없다.
우리 석기시대 조상들은 역사의 무대에서 어떤 게임을 했을까? 우리가 아는 한, 3만 년 전쯤 슈타델의 사자-남자를 조각한 사람들은 오늘날 우리와 동일한 육체적, 감정적, 지적 능력을 가지고 있었다. 그들은 아침에 일어나면 무엇을 했을까? 아침으로는 무얼 먹었을까? 점심으로는? 그들의 사회는 어떤 모습이었을까? 일부일처제를 맺고 핵가족을 유지했을까? 전쟁은 치렀을까?
p81
가끔은 자기 세력권을 벗어나 새로운 땅을 헤매는 무리들이 있었다. 원인은 자연재해, 폭력적 분쟁, 인구 증가에 의한 압박, 카리스마 있는 지도자의 결단 등이었다. 이런 방랑은 인간이 외부 세계로 팽창한 결정적인 요인이었다. 수렵채집인 한 무리가 40년마다 한 번씩 둘로 나뉘며, 갈라져 나온 집단이 원래 있던 곳보다 1백 킬로미터 동쪽에 있는 새로운 영토로 이주한다고 가정하자. 그러면 동부 아프리카에서 중국까지 1만 년이면 갈 수 있었을 것이다.
p85
모든 시기 대부분의 장소에서 수렵채집은 가장 이상적인 영양소를 제공했다. 놀라운 일이 아니다. 인간은 이런 식단을 수십만 년 동안 먹어왔고, 신체 역시 여기에 잘 적응했다. 고대 수렵채집인은 후손인 농부들보다 굶어 죽거나 영양실조에 걸리는 일이 적었으며, 화석 뼈에 나타난 증거가 시사하는 바에 따르면 키가 더 크고 신체도 건강했을 가능성이 많다. 다만 평균 기대수명은 30~40년에 불과했다. 그러나 그것은 주로 어린이 사망률이 높은 탓이었다. 출생 1년 이내의 영아 사망률이 가장 높았으며, 이 시기를 지난 아이는 60세까지 살 가능성이 높았고 일부는 80세까지 살았다. 현대 수렵 채집인의 경우 45세인 여성은 향후 20년 더 살 것으로 기대되며 구성원의 5~8퍼센트는 60세 이상이다.
수렵채집인은 굶어 죽거나 영양실조에 걸리지 않았다. 이들의 성공비결은 다양한 식단에 있었다. 농부는 매우 제한된 종류의 식품을 먹으며 불균형인 식사를 한다. 특히 현대 이전에 농업인구를 먹여 살린 칼로리의 대부분은 밀이나 감자, 쌀 등 단일작물에서 왔다. 여기에는 일부 비타민, 미네랄을 비롯해 인간이 필요로 하는 여타 영양소가 부족하다. 중국 전통사회의 전형적 농부는 아침, 점심, 저녁에 쌀밥을 먹었다. 운이 좋으면 다음 날도 그렇게 먹을 수 있었다. 이에 비해 고대의 수렵채집인은 수십 가지의 다양한 식품을 규칙적으로 먹었다. 농부의 조상인 수렵채집인은 아침에 각종 베리와 버섯, 점심에 과일 및 달팽이와 거북, 저녁에는 토끼 스테이크에 야생 양파를 곁들여 먹었을 것이다. 다음 날에는 전혀 다른 음식을 먹었을지 모른다. 이처럼 다양한 식품은 고대 수렵채집인이 필요로 하는 영양소를 확실히 섭취하게 해주었다.
게다가 단 한 가지 식량에만 의존하지 않았기 때문에 해당 식량의 공급이 끊어져도 문제가 덜했다. 농경사회는 가뭄이나 화재, 지진 때문에 쌀이나 감자 농사를 망치면 기근에 휩싸인다. 수렵채집 사회도 자연재해를 당하고 결핍과 굶주림의 시기를 겪었지만 대체로 이런 재앙을 좀 더 쉽게 극복할 수 있었다. 주식이 되는 일부 먹을거리를 구하지 못하면 다른 것을 사냥하거나 채집할 수 있었고, 영향을 덜 받은 다른 지역으로 이동할 수도 있었다.
고대 수렵채집인은 전염병의 영향도 덜 받았다. 농경 및 산업사회를 휩쓴 대부분의 전염병(천연두, 홍역, 결핵)은 가축이 된 동물에 기원을 두고 있으며, 이것이 사람에게 전파된 것은 농업혁명 이후부터다. 고대 수렵채집인이 기르는 가축은 개밖에 없었으므로 그들에게는 이런 괴로움이 없었다. 게다가 농업 및 산업 사회 사람들은 인구가 밀집한 비위생적인 거주지에 영구적으로 살았는데, 이는 질병이 퍼지기 이상적인 온상이었다. 수렵채집인들은 떠돌며 생활했는데, 무리도 소규모여서 전염병이 널리 퍼질 수 없었다.
건강에 유익한 음식을 다양하게 먹고, 주당 일하는 시간도 상대적으로 짤브며, 전염병도 드물었으니, 이를 두고 많은 전문가는 농경 이전 수렵채집 사회를 '최초의 풍요사회'라고 불렀다. 하지만 그렇다고 고대인의 삶을 이상적인 것으로 그리면 실수일 수도 있다. 이들이 농업 및 산업 사회 사람 대다수보다 더 나은 삶을 영위하기는 했지만, 그럼에도 삶은 거칠고 힘든 것이었다. 고난과 결핍의 시기가 종종 닥쳤고, 어린이 사망률이 높았으며, 오늘날 같으면 사소했을 사고가 쉽게 사망선고로 이어질 수 있었다. 아마도 대부분의 사람들은 떠돌이 무리 내에서 두터운 교분을 향유했겠지만, 무리 내에서 적개심이나 비웃을 받는 사람들은 끔찍한 고통을 겪었을 것이다.
p111
보온복과 사냥기술이 개선되자 사피엔스는 얼어붙은 지역에 더욱 깊숙이 들어가는 모험을 감행했다. 그리고 이들이 북쪽으로 이동함에 따라 의복, 사냥기술을 비롯한 생존기술은 계속해서 발전했다.
그런데 왜 이런 수고를 무릅썼을까? 도대체 왜 스스로 시베리아로 유배를 갔을까? 일부 무리는 전쟁, 인구 증가의 압박, 자연재해 때문에 북쪽으로 내몰렸을 수도 있다. 그런가 하면 예컨대 동물성 단백질 같은 긍정적인 이유로 북쪽으로 이끌린 집단도 있었을지 모른다. 북극 땅은 순록이나 매머드처럼 군침이 도는 대형동물이 풍부했다. 매머드는 한 마리만 잡아도 엄청난 양의 고기(기온이 낮기 때문에 얼렸다 나중에 먹을 수도 있었다)와 맛있는 지방, 따뜻한 모피, 귀중한 상아를 제공하였다. 숭기르의 유적이 증언하듯, 매머드 사냥꾼들은 북쪽 동토에서 단지 살아남은 것이 아니라 번성했다. 시간이 흐르면서 이들 무리는 매머드와 마스토돈, 코뿔소, 순록을 쫓아 더 멀리 퍼져나갔다.
기원전 14,000년쯤 이 중 일부가 사냥감을 쫓아 시베리아 북동부에서 알래스카까지 가게 되었다. 물론 이들은 자신들이 신세계를 발견했다는 사실을 몰랐다. 매머드에게나 인류에게나 알래스카는 시베리아의 연장에 지나지 않았다. 처음에는 빙하 때문에 알래스카에서 아메리카의 다른 지역으로 가는 길이 막혀 있었다. 더 남쪽을 탐사할 수 있었던 것은 소수의 고립된 개척자들뿐이었을 것이다. 그러던 중 기원전 12,000년쯤 지구 온난화로 얼음이 녹고 좀 더 쉬운 통로가 열렸다. 새로운 통로를 이용해서 인류는 떼를 지어 남쪽으로 이동했고, 대륙 전체로 퍼져나갔다. 원래는 대형동물을 사냥하는 데 적응했던 기업터 터였지만 이들은 곧 극히 다양한 기후와 생태계에 적응했다.
시베리아인의 후예들은 미국 동부의 울창한 숲, 미시시피 삼각주의 늪지대, 멕시코의 사막, 중미의 찌는 듯한 밀림에 정착했다. 아마존 강 유역의 세계에 둥지를 틀었는가 하면 안데스 산맥의 골짜기나 아르헨티나의 대초원에 뿌리를 내리기도 했다. 이 모든 일이 단 1천 년이나 2천 년 만에 일어났다. 기원전 10,000년이 되자 인류는 미 대륙 최남단의 티에라델푸에고 제도에까지 정착했다.
인류의 이런 진격전은 호모 사피엔스의 뛰어난 창의력과 적응력을 증언한다. 다른 동물은 이토록 극단적으로 다양한 서식지들에 사실상 똑같은 유전자를 가진 상태로 그토록 빨리 이주한 예가 전여 없다.
p121
인류가 농업으로 이행한 것은 기원전 9500~8500년경 터키 남부, 서부 이란, 에게 해 동부 지방에서였다. 시작은 느렸고 지리적으로 제한된 지역만을 대상으로 했다. 밀을 재배하고 염소를 가축화한 것은 기원전 9000년경이었다. 완두콩과 렌즈콩은 기원전 8000년경, 올리브나무는 기원전 5000년, 포도는 기원전 3500년 재배가 시작되었고, 말은 기원전 4000년부터 기르기 시작했다. 낙타와 캐슈넛 같은 일부 동식물은 더 나중에 가축과 재배작물이 되었다. 하지만 기원전 3500년이 되자 가축화와 재배작물화의 주된 파도는 지나갔다. 온갖 기술이 발달한 오늘날에도 인류를 먹여 살리는 칼로리의 90퍼센트 이상이 밀, 쌀, 옥수수, 감자, 수수, 보리처럼 우리 선조들이 기원전 9500년에서 3500년 사이에 작물화했던 한줌의 식물들에서 온다. 지난 2천 년 동안 주목할 만한 식물을 작물화하거나 동물을 가축화한 사례가 없었다. 오늘날 우리의 마음이 수렵채집인 시대의 것이라면, 우리의 부엌은 고대 농부의 그것과 다르지 않다.
한때 학자들은 중동의 어느 특정 지점에서 농업이 시작되어 사방으로 퍼져나갔다고 믿었다. 그러나 오늘날 학자들은 중동 농부들이 자신들의 혁명을 수출한 게 아니라 농업은 세계 여러 지역에서 완전히 독자적으로 생겨났다는 생각에 합의하고 있다. 중미 사람들은 중동에서 밀과 완두콩을 재배한다는 사실을 전혀 모른 채 옥수수와 콩을 작물화했다. 남미 사람들은 멕시코나 지중해 지방에서 어떤 일이 일어나는지 모르는 채 감자를 재배하고 라마를 키우는 법을 익혔다. 중국의 초기 혁명가들은 쌀과 수수를 작물화하고 돼지를 가축화했다. 북미의 첫 정원사는 먹을 수 있는 호리병박을 찾아 땅속을 샅샅이 뒤지는 데 진력이 나서 호박을 재배하기로 결심하였다. 뉴기니 사람들은 사탕수수와 바나나를 길렀고, 그동안 서부 아프리카 최초의 농부들은 아프리카 수수, 아프리카 쌀, 수수와 밀을 자신들의 필요에 맞도록 작물화했다. 이들 지역에서 농업은 널리 퍼져나갔다. 기원후 1세기쯤이 되자 세계 대부분의 지역 사람들 대다수가 농민이 되었다.
중동, 중국, 중미에서 일어난 농업혁명이 호주, 알래스카, 남아프리카에서 일어나지 않은 이유는 무엇일까? 이유는 단순하다. 대부분의 식물과 동물 종은 작물화나 가축화에 맞지 않기 때문이다. 사피엔스는 맛 좋은 송로버섯을 캐거나 털이 부숭부숭한 매머드를 사냥할 수는 있었지만, 이를 재배하거나 가축화한다는 것은 불가능한 일이었다. 버섯의 곰팡이는 형체가 너무 불분명했고 야수는 너무 사나웠다. 우리 조상들이 잡거나 채취했던 수천 종의 동물과 식물 중에 농업과 목축업에 맞는 후보는 몇 되지 않았다. 이들 종은 특정 장소에 살았고 그 장소들이 바로 농업혁명이 일어난 지역이다.
p124
진화는 점점 더 지능이 뛰어난 사람들을 만들어냈고, 결국 사람들은 너무나 똑똑해져서 자연의 비밀을 파악하고 양을 길들이며 밀을 재배할 수 있게 되었으며, 그게 가능해지자마자 지겹고 위험하고 종종 스파르타처럼 가혹했던 수렵채집인의 삶을 기꺼이 포기하고 농부의 즐겁고 만족스러운 삶을 즐기기 위해 정착했다는 것이다.
이 이야기는 환상이다. 시간이 흘러 사람들이 더욱 총명해졌다는 증거는 없다. 수렵채집인들은 농업혁명 훨씬 이전부터 자연의 비밀을 알고 있었다. 사냥하는 동물과 채집하는 식물을 잘 알고 있어야 생존할 수 있었기 때문이다. 농업혁명은 안락한 새 시대를 열지 못했다. 그러기는커녕, 농부들은 대체로 수렵채집인들보다 더욱 힘들고 불만스럽게 살았다. 수렵채집인들은 그보다 더 활기차고 다양한 방식으로 시간을 보냈고 기아와 질병의 위험이 적었다. 농업혁명 덕분에 인류가 사용할 수 있는 식량의 총량이 확대된 것은 분명한 사실이지만, 여분의 식량이 곧 더 나은 식사나 더 많은 여유시간을 의미하지는 않았다. 오히려 인구폭발과 방자한 엘리트를 낳았다. 평균적인 농부는 평균적인 수렵채집인보다 더 열심히 일했으며 그 대가로 더 열악한 식사를 했다. 농업혁명은 역사상 최대의 사기였다.
그것은 누구의 책임이었을까? 왕이나 사제, 상인은 아니었다. 범인은 한 줌의 식물 종, 밀과 쌀과 감자였다. 이들 식물이 호모 사피엔스를 길들였지, 호모 사피엔스가 이들을 길들인 게 아니었다.
잠시 농업혁명을 밀의 관점에서 생각해보자. 1만 년 전 밀은 수 많은 잡초 중 하나일 뿐으로서 중동의 일부 지역에만 살고 있었다. 그러다가 갑자기, 불과 몇천 년 지나지 않아 세계 모든 곳에서 자라게 되었다. 생존과 번식이라는 진화의 기본적 기준에 따르면 밀은 지구 역사상 가장 성공한 식물이 되었다. 북미의 대초원 지역 같은 곳에는 1만 년 전 밀이 한 포기도 없었지만 지금은 수백 킬로미터를 걷고 또 걸어도 밀 이외의 다른 식물을 볼 수가 없다. 세계적으로 밀이 경작되는 지역은 225만 제곱킬로미터쯤 되는데 이는 브리튼 섬(잉글랜드, 스코틀랜드, 웨일스 포함)의 열 배에 이른다,
어떻게 이 잡초는 그러그런 식물에서 출발해 어디서나 자라는 존재가 되었을까? 밀은 호모 사피엔스를 자신의 이익에 맞게 조작함으로써 그렇게 해낼 수 있었다. 약 1만 년 전까지 이 유인원은 사냥과 채집을 하면서 상당히 편안하게 살고 있었으나, 이후 밀을 재배하는 데 점점 더 많은 시간을 투자하기 시작했다. 2천 년도 채 지나지 않아 전 세계 많은 지역의 인간은 통이 틀 때부터 해가 질 때까지 밀을 돌보는 것 외에는 거의 아무 일도 하지 않게 되었다.
밀을 키우는 일은 쉽지 않았다. 많은 노동력을 요구하기 때문이다. 밀은 바위와 자갈을 좋아하지 않기 때문에, 사피엔스는 밭을 고르느라 등골이 휘었다. 밀은 다른 식물과 공간, 물, 영양분을 나누는 것을 좋아하지 않기 때문에, 인간은 타는 듯한 태양 아래 온종일 잡초를 뽑는 노동을 했다. 밀은 병이 들기 때문에, 사피엔스는 해충과 마름병을 조심해야 했다. 밀은 자신을 즐겨 먹는 토끼와 메뚜기 떼에 대한 방어책이 없었기 때문에, 농부들이 이를 막아야 했다. 밀은 목이 말랐기 때문에, 인간들은 샘과 개울에서 물을 끌어다 댔다. 밀은 배가 고팠기 때문에, 사피엔스는 밀이 자라는 땅에 영양을 공급하기 위해 동물의 변을 모아야 했다.
사피엔스의 신체는 이런 과업에 맞게 진화하지 않았다. 사과나무에 기어오르고 가젤을 뛰어서 뒤쫓는 데 적응했지, 바위를 제거하고 물이 든 양동이를 운반하는 데 적합한 몸이 아니었다. 인간의 척추와 무릎, 목과 발바닥의 장심이 대가를 치렀다. 고대 유골을 조사한 바에 따르면, 농업으로 이행하면서 디스크 탈출증 관절염, 탈장 등 수많은 병이 생겨났다. 새로운 농업노동은 너무나 많은 시간을 필요로 했다. 사람들은 밀밭 옆에 영구히 정착해야만 했다. 이로써 이들의 삶은 영구히 바뀌었다. 우리가 밀을 길들인 것이 아니다. 밀이 우리를 길들였다. '길들이다, 가축화하다'라는 뜻의 단어 'domesticate'는 '집'이라는 뜻의 라틴어 'domus'가 어원이다. 집에서 사는 존재는 누구인가? 밀이 아니다. 호모 사피엔스다.
밀은 어떻게 호모 사피엔스로 하여금 어느 정도 만족할 만한 삶을 더 비참한 생활과 교환하도록 설득했을까? 무엇을 보상으로 제시했을까? 더 나은 식사를 제공한 것은 아니었다. 명심하자, 인류는 아주 다양한 음식을 먹고사는 잡식성 유인원이다. 농업혁명 이전 식사에서 곡물이 차지하는 비중은 아주 적었다. 곡률르 중심으로 하는 식단은 미네랄과 비타민이 부족하고 소화시키기 어려우며 치주조직에 해롭다. 밀은 사람들에게 경제적 안정을 제공하지도 않았다. 농부의 삶은 수렵채집인의 삶보다 불안정했다. 수렵채집인은 수십 종의 먹을거리에 의지해 생존했기 때문에 설령 저장해둔 식량이 없더라도 어려운 시절을 몇 해라도 견뎌나갈 수 있었다. 특정한 종을 손에 넣기가 힘들어지면 다른 종들을 사냥하고 채집할 수 있었으니까.
농경사회는 극히 최근까지도 대부분의 칼로리를 극소수의 작물을 통해 섭취했다. 오랜 세월 이들 사회는 밀이나 감자, 쌀 등 단 하나의 주식에 의존했다. 비가 내리지 않거나, 메뚜기 떼가 덮치거나, 곰팡이가 주식인 작물을 감염시키면, 농부들은 수천 수백만 명씩 죽어나갔다. 밀은 인간 사이의 폭력에 대한 안정망을 제공하지도 않았다. 초기 농부들은 수렵채집인 조상보다 더하진 않았을지언정 그 못지않게 폭력적이었다. 농부들은 재산이 더 많았으며 경작할 토지를 필요로 했다. 이웃의 습격으로 목초지를 잃는 것은 생사가 걸린 문제였기에, 타협의 여지가 매우 적었다. 수렵채집인 무리는 강력한 라이벌에게 몰리면 보통 다른 장소로 옮길 수 있었다. 힘들고 위험하지만 실행할 수는 있었다.
농촌 마을이 강력한 적의 위협을 당할 경우, 후퇴는 곧 목초지와 집, 곡물창고를 포기해야 한다는 뜻이었다. 많은 경우 이런 피난민들은 굶어 죽었다. 그러므로 농부들은 그 자리에서 버티면서 최후까지 싸우는 경향이 있었다. 많은 인류학적, 고고학적 연구는 부락이나 종족을 넘어서는 정치적 틀이 없는 단순 농경사회에서 사망의 15퍼센트가 인간의 폭력 탓임을 시사한다. 남성의 경우에는 폭력적 사망이 25퍼센트에 이른다. 오늘날 뉴기니를 보면, 농경 부족사회의 다니족에서 남성 사망의 30퍼센트가 폭력 때문이고, 엥가족에서는 35퍼센트가 폭력 때문이다. 에콰도르의 경우 와오란족 성인의 약 50퍼센트가 다른 인간의 폭력으로 죽는다.
시간이 흐르고 도시, 왕국, 국가 등 보다 큰 사회적 틀이 발전하면서 인간의 폭력은 통제받게 되었다. 하지만 이렇게 크고 효율적인 정치체제를 구축하는 데는 수천 년이 걸렸다. 최초의 농부들은 마을에 사는 생활양식 덕분에 야생동물이나 비, 추위로부터 보호받는 등 어느 정도 직접적인 혜택을 누렸다. 하지만 평범한 개인의 입장에서 보면 이익보다 손해가 더 컸을 것이다. 오늘날 번영사회에 사는 사람들로서는 이해하기 어려운 이야기이다. 요즘 우리는 풍요와 안전을 누리고 있고 그 풍요와 안전은 농업혁명이 좋은 기초 위에 세워진 것이기 때문에 우리는 농업혁명이 놀라운 개선이라고 가정한다. 하지만 수천 년의 역사를 오늘날의 관점에서 판단하는 것은 잘못이다.
이보다 훨씬 더 대표성이 있는 관점은 1세기 무렵 중국에서 아버지가 농사에 실패해 영양실조로 죽어가는 세 살짜리 딸의 관점이다. 아이는 과연 "나는 영양실조로 죽어가지만, 앞으로 2천 년 내에 사람들은 먹을거리가 풍부한 세상에서 에어컨이 딸린 큰 집에서 살게 될 테니 나의 고통은 가치 있는 희생이다"라고 말할까?
그렇다면 밀은 영양실조에 걸린 중국 소녀를 비롯한 농업종사자들에게 무엇을 주었을까? 사람들 개개인에게 준 것은 아무것도 없다. 하지만 호모 사피엔스 종에게는 무언가를 주었다. 밀 경작은 단위 토지당 식량생산을 크게 늘렸고, 그 덕분에 호모 사피엔스는 기하급수적으로 늘어날 수 있었다.
기원전 13000년경, 사람들이 야생식물을 채취하고 야생동물을 사냥하면서 먹고살던 시기에 팔레스타인의 여리고(Jericho) 오아시스 주변 지역이 지탱할 수 있는 인구는 기껏해야 1백 명 정도의 건강하고 영양상태가 비교적 좋은 방랑자들이었을 것이다. 기원전 8500년 야생식물이 밀에게 자리를 내어준 뒤, 이 오아시스에는 1천 명이 사는 마을이 생겼다. 마을은 크지만 집은 다닥다닥 붙어 있었고 과거보다 많은 사람이 질병과 영양실조로 허덕였다.
어느 종이 성공적으로 진화했느냐의 여부는 굶주림이나 고통의 정도가 아니라 DNA 이중나선 복사본의 개수로 결정된다. 한 회사의 경제적 성공은 직원들의 행복이 아니라 오직 은행잔고의 액수로만 측정된다. 마찬가지로 한 종의 진화적 성공은 그 DNA의 복사본 개수로 측정된다. 만일 더 이상의 DNA 복사본이 남아 있지 않다면 그 종은 멸종한 것이다. 돈이 없는 회사가 파산한 것과 마찬가지다. 만일 한 종이 많은 DNA 복사본을 뽐낸다면 그것은 성공이며 그 종은 번성하고 있는 것이다. 이런 관점에서 볼 때 1천 벌의 복사본은 언제나 1백 벌보다 좋다.
농업혁명의 핵심은 이것이다. 더욱 많은 사람들을 더욱 열악한 환경에서 살아 있게 만드는 능력, 하지만 이런 진화적 계산법에 왜 개인이 신경을 써야 하는가? 제정신인 사람이라면 호모 사피엔스 DNA 복사본의 개수를 늘리기 위해 삶의 질을 포기할 사람이 있겠는가? 그런 거래에 동의한 사람은 아무도 없었다. 농업혁명은 덫이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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호모 사피엔스는 약 7만 년 전 중동에 도착했다. 그후 5만 년 동안 우리 조상들은 농업 없이 번성했다. 그 지역의 자연자원은 인구를 지탱하기에 충분했다. 사람들은 풍요로운 시절에는 아이를 좀 더 많이 낳았고 궁핍한 시절에는 약간 덜 낳았다. 인간은 다른 많은 포유동물과 마찬가지로 번식을 조절하는 호르몬과 유전자 메커니즘을 지니고 있다. 풍족한 시절에 여자아이는 사춘기가 일찍 오고 임신 가능성이 조금 높아진다. 어려운 시절에는 사춘기가 늦게 오고 번식력이 떨어진다.
이런 자연적 인구조절에 문화적 메커니즘이 추가된다. 아기와 어린이는 동작이 굼뜨고 손이 많이 가기 때문에 방랑하는 수렵채집인들에게 부담이었다. 사람들은 3~4년 터울로 애를 가지려고 노력했다. 여성들은 24시간 내내, 늦은 나이까지 아이에게 젖을 먹임으로써 터울을 두었다. 다른 방법으로는 완전하거나 부분적인 금욕, 낙태, 때로는 유아 살해 등이 있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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사람들은 왜 이렇게 치명적인 계산오류를 범했을까? 역사를 통틀어 사람들이 오류를 범하는 이유와 동일한 이유에서였다. 사람들은 자신의 결정이 가져올 결과를 전체적으로 파악하는 능력을 갖고 있지 않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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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렇다면 왜 계획이 빗나갔을 때 농경을 포기하지 않았을까? 작은 변화가 축적되어 사회를 바꾸는 데는 여러 세대가 걸리고 그때쯤이면 자신들이 과거에 다른 방식으로 살았다는 것을 아무도 기억하지 못하기 때문이다. 인구 증가 때문에 돌아갈 다리가 불타버렸다는 것도 한 이유였다. 쟁기질을 도입함으로써 마을의 인구가 1백명에서 110명으로 늘었다고 가정해보자. 이중 자신들이 자발적으로 굶어 죽는 것을 선택함으로써 나머지 사람들이 과거의 좋았던 시절로 돌아갈 수 있도록 할 열 명이 있었겠는가? 돌아갈 길은 없었다. 덫에 딱 걸리고 말았다.
좀 더 쉬운 삶을 추구한 결과 더 어렵게 되어버린 셈이었고, 이것이 마지막도 아니었다. 오늘날 우리에게도 똑같은 일이 벌어지고 있다. 대학을 졸업한 젊은이 중 상당수는 돈을 많이 벌어 35세에 은퇴해서 진짜 자신이 원하는 것을 하겠다고 다짐하면서 유수 회사들에 들어가 힘들게 일한다. 하지만 막상 그 나이가 되면 거액의 주택 융자, 학교에 다니는 자녀, 적어도 두 대의 차가 있어야 하는 교외의 집, 정말 좋은 와인과 멋진 해외 휴가가 없다면 삶은 살 만한 가치가 없다는 느낌을 갖게 된다. 이들이 뭘 어떻게 할까? 뿌리채소나 캐는 삶으로 돌아갈까? 이들은 노력을 배가해서 노예 같은 노동을 계속한다.
역사의 몇 안 되는 철칙 가운데 하나는 사치품은 필수품이 되고 새로운 의무를 낳는 경향이 있다는 것이다. 일단 사치에 길들여진 사람들은 이를 당연한 것으로 받아들인다. 그다음에는 의존하기 시작한다. 마침낸느 그것 없이 살 수 없는 지경이 된다. 우리 시대의 친숙한 예를 또 하나 들어보자. 지난 몇십 년간 우리는 시간을 절약하는 기계를 무수히 발명했다. 세탁기, 진공청소기, 식기세척기, 전화, 휴대전화, 컴퓨터, 이메일.... 이들 기계는 삶을 더 여유 있게 만들어줄 것이라고 예상되었다. 과거엔 편지를 쓰고 주소를 적고 봉투에 우표를 붙이고 우편함에 가져가는 데 몇 날 몇 주가 걸렸다. 답장을 받는 데는 며칠, 몇 주, 심지어 몇 개월이 걸렸다. 요즘 나는 이메일을 휘갈겨 쓰고 지구 반대편으로 전송한 다음 몇 분 후에 답장을 받을 수 있다. 과거의 모든 수고와 시간을 절약했다. 하지만 내가 좀 더 느긋한 삶을 살고 있는가?
슬프게도 그렇지 못하다. 종이 우편물 시대에 편지를 쓸 때는 대개 뭔가 중요한 일이 있을 때뿐이었다. 머릿속에 처음 생각나는 것을 그대로 적는 것이 아니라 하고 싶은 말이 무엇인지, 어떻게 표현해야 하는지에 대해서 심사숙고했다. 그리고 역시 그렇게 심사숙고 한 답장을 받을 것으로 기대했다. 대부분의 사람은 주고받는 편지가 한 달에 몇 통 되지 않았으며 당장 답장을 해야 한다는 강요를 받지도 않았다. 오늘날 나는 매일 열 통이 넘는 메일을 받고, 상대방은 모두 즉각적인 답을 기대하고 있다. 우리는 시간을 절약한다고 생각했지만, 실은 인생이 돌아가는 속도를 과거보다 열 배 빠르게 만들었다. 그래서 우리의 일상에는 불안과 걱정이 넘쳐난다.
이메일 계정 만들기를 거부하는 신기술 반대론자도 드문드문 있기는 하다. 마친 수천 년 전 농경을 받아들이기를 거부하고 사치품 함정을 비켜갔던 일부 인간들처럼 말이다. 하지만 농업혁명은 해당 지역의 모든 무리의 동참을 필요로 하지 않는다. 중동이나 중미 어느 지역에서든 일단 한 무리가 정착해서 경작을 시작하면 농업은 저항할 수 없는 것이 된다. 농경이 급속한 인구성장의 조건을 만들어준 덕분에, 농부들은 순수한 머릿수의 힘만으로 언제나 수렵채집인들을 압도할 수 있었다. 수렵채집인은 자신들의 사냥터를 들판과 목초지로 내주고 도망치거나 스스로 쟁기를 잡거나 둘 중 하나를 택할 수 있을 따름이었다. 어느 쪽이든 과거의 삶의 방식은 끝난 것이었다.
사치품의 함정 이야기에는 중요한 교훈이 들어 있다. 인류가 좀 더 편한 생활을 추구한 결과 막강한 변화의 힘이 생겼고 이것이 아무도 예상하거나 희망하지 않았던 방향으로 세상을 변화시켰다는 점이다. 일부러 농업혁명을 구상하거나 인간을 곡물 재배에 의존하게 만들려던 사람은 아무도 없었다. 그저 배를 좀 채우고 약간의 안전을 얻는 것을 주된 목표로 삼은 일련의 사소한 결정이 거듭해서 쌓여, 고대 수렵채집인들이 타는 듯한 태양 아래 물이 든 양동이를 운반하는 삶을 살도록 하는 결과를 가져왔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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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러나 드문 진상을 보여주는 단서를 찾아내는 행운을 누리기도 한다. 1995년 고고학자들은 터키 남동부의 괴베클리 테페 지역 유적지를 파내기 시작했다. 가장 오래된 지층에서 정착지, 주거, 일상 활동의 징후가 발견되지 않았다. 하지만 멋진 조각이 새겨진 기둥을 갖춘 기념물이 발견되었다. 개별 돌기둥의 무게는 최대 7톤이었고 높이는 5미터에 달했다. 그 인근의 채석장에서 학자들은 끌로 반쯤 깍다가 만 50톤의 기둥을 발견했다. 모두 합쳐서 열개 이상의 기념비 구조물이 드러났는데, 가장 큰 것의 폭은 30미터에 육박했다.
고고학자들은 세계 도처에 있는 이런 기념비적 구조물과 친숙하다. 대표적인 것이 영국의 스톤헨지다. 하지만 이들은 괴베클리 테페를 조사하면서 놀라운 사실을 발견했다. 스톤헨지는 기원전 2500년의 발달된 농경사회 사람들이 건설한 것이다. 이에 비해 괴베클리 테페의 구조물들은 연대가 기원전 9500년으로 거슬러 올라간다. 그리고 모든 증거가 가리키는 바, 이 구조물은 수렵채집인들이 세운 것이었다. 고고학자들은 처음에 이 발견을 신뢰하지 못했지만, 조사를 거듭할수록 이 구조물의 오랜 연대와 이를 세운 시기가 농경사회 이전이었다는 사실을 거듭 확인했다. 고대 수렵채집인의 능력과 문화적 복합성은 우리가 이전에 추측했던 것보다 훨씬 더 뛰어났던 것 같다.
수렵채집 사회 사람들은 왜 이런 구조물을 세웠을까? 뚜렷한 실용적 목적은 전혀 보이지 않았다. 그곳에는 매머드 도살장도 아니고 비를 긋거나 사자를 피해서 숨는 장소도 아니었다. 뭔가 미스터리한 문화적 이유에서 세워졌다고 볼 수밖에 없다. 고고학자들은 그게 무엇인지 파악하느라 골머리를 앓고 있다. 그러나 이유가 무엇이었든 간에, 수렵채집인들은 거기에 막대한 노력과 시간을 투입할 가치가 있다고 생각했다. 괴베클리 테페를 건설하는 유일한 방법은 여러 무리와 부족에 속한 수천 명의 수렵채집인을 오랫동안 협력하게 만드는 것뿐이었다. 그런 노력을 유지할 수 있는 것은 세련된 종교나 이데올로기 시스템밖에 없다.
괴베클리 테페는 또 하나의 놀라운 비밀을 지니고 있다. 유전학자들은 작물화된 밀의 기원을 오랫동안 추적하고 있었는데, 최근의 발견이 시사하는 바에 따르면, 작물화된 밀의 변종 중 하나인 외알밀은 괴베클리 테페에서 30킬로미터 떨어진 카라사다그 언덕이 발상지다.
이것은 우연이 아닐 것이다. 괴베클리 테페라는 문화적 중심지는 인류에 의한 밀의 작물화, 밀에 의한 인간 길들이기와 어떻게든 연관되어 있었을 가능성이 높다. 이 기념물을 건설하고 이용한 사람들을 먹여 살리기 위해서는 많은 식량이 필요했다. 어쩌면 수렵채집인들이 야생 밀 채취에서 집약적인 밀 경작으로 전환한 목적은 정상적인 식량공급을 늘리기 위해서가 아니라 사원의 건설과 운영에 필요한 식량을 공급하기 위해서였는지도 모른다. 기존에 우리는 개처자들이 처음에 마을을 세우고 이것이 번영하면 그 중앙에 사원을 건설했을 것이라고 보았지만, 괴베클리 테페가 시사하는 바는 그 반대다. 먼저 사원이 세워지고 나중에 그 주위에 마을이 형성되었다.
p163
우리는 사람을 '귀족'과 '평민'으로 구분하는 것이 상상의 산물이라는 말을 쉽게 받아들일 수 있다. 하지만 모든 사람이 평등하다는 사상 또한 신화다. 어떤 의미에서 모든 인간이 서로 평등하다는 것인가? 인간의 상상력을 벗어난 어딘가에 우리가 진정으로 평등한 객관적으로 실재하는 세계가 있단 말인가?
p176
역사를 움직이는 중요한 동인 중 다수가 상호 주관적이다. 법, 돈, 신, 국가가 모두 그런 예다.
상상의 질서를 빠져 나갈 방법은 없다. 우리가 감옥 벽을 부수고 자유를 향해 달려간다 해도, 실상은 더 큰 감옥의 더 넓은 운동장을 향해 달려나가는 것일 뿐이다.
p183
쓰기는 유형이 기호를 통해 정보를 저장하는 방법이다. 수메르의 쓰기 체계는 점토판에 눌러 쓴 두 종류의 기호를 이용했다. 기호의 한 유형은 숫자를 나타냈다. 각각 1, 10, 60, 600, 3,600, 36,000을 나타내는 기호가 있었다(수메르 사람들은 6진법과 10진법을 섞어서 썼다. 6진법은 오늘날 우리에게 중요한 유산을 남겼다. 하루를 24시간으로 나눈다거나 원을 360도로 분할하는 것이 그런 예다). 또 다른 유형의 기호는 사람, 동물, 사유품, 토지, 날짜 등을 나타냈다. 두 유형의 기호를 결합함으로써 수메르인들은 많은 데이터를 보존할 수 있었다. 어떤 한 인간의 뇌가 기억할 수 있는 것보다, 어떤 한 DNA 사슬이 부호화할 수 있는 것보다 훨씬 더 많은 양이었다.
p195
쓰기는 인간의 의식을 돕는 하인으로 탄생했지만, 점점 더 우리의 주인이 되어가고 있다. 컴퓨터는 호모 사피엔스가 어떻게 말하고 느끼고 꿈꾸는지를 이해하는 데 어려움을 겪는다. 그래서 우리는 호모 사피엔스에게 컴퓨터가 이해할 수 있는 숫자 언어로 말하고 느끼고 꿈꾸라고 가르치고 있다. 게다가 이야기는 여기에서 끝나지 않는다. 인공지능 분야는 오로지 컴퓨터의 이진부호에 기반을 둔 새로운 종류의 지능을 만들어내려고 하고 있다. <매트릭스>나 <터미네이터> 같은 SF 영화는 이런 이진부호가 인간이 씌운 굴레를 벗어던지는 날을 이야기하고 있다. 인간이 반항적인 문자체계를 다시 통제하려고 하자, 그 체계들은 그 반응으로 인류를 쓸어버리려고 한다.
p217
하지만 진화에는 목적이 없다. 장기는 어떤 목적을 가지고 진화한 것이 아니며, 그 사용방식은 끊임없이 변화한다. 인체의 장기 중에 그것이 원형 상태로 수억 년 전 처음 등장했을 때 했던 일만을 하고 있는 것은 단 하나도 없다. 장기는 특정기능을 수행하기 위해 진화하지만, 일단 존재하게 되면 다른 용도로 사용되는 방향으로도 적응할 수 있다. 가령 입이 등장한 것은 가장 초기의 다세포 생명체가 영양소를 몸 안으로 섭취할 필요가 있었기 때문이고, 우리는 지금도 그런 용도로 입을 사용하지만, 동시에 키스하고 말하는 데도 사용한다. 람보라면 수류탄 핀을 뽑을 때도 써먹는다. 이런 용도 중 어느 하나라도 부자연스러운 것이 있을까? 벌레 비슷하게 생겼던 6억 년 전의 우리 선조가 입으로 하지 않던 일이라는 이유만으로?
p235
모순이 없는 물리법칙과 달리, 인간이 가진 모든 질서는 내적 모순을 지닌다. 문화는 이런 모순을 중재하려고 끊임없이 노력하며, 이런 과정이 변화에 불을 지핀다.
p237
프랑스 혁명 이래 세계 모든 곳의 사람들은 점차 평등과 개인의 자유를 근본적 가치라고 생각하게 되었다. 하지만 두 가치는 서로 모순된다. 평등을 보장하는 방법은 형편이 더 나은 사람의 자유를 제한하는 것 이외에 없다. 모든 개인이 자신이 원하는 바를 할 수 있도록 보장한다면 필연적으로 평등에 금이 간다. 1789년 이래 세계 정치사는 이 모순을 화해시키려는 일련의 시도로 볼 수 있다.
p245
이데올로기의 관점에서 보자면 이보다 더욱 중요한 발전이 기원전 첫 밀레니엄(기원전 1000년~기원전 1년) 동안 이루어졌는데, 바로 보편적 질서라는 개념이 뿌리를 내린 시점이었다.
p246
기원전 첫 밀레니엄 동안, 보편적 질서가 될 잠재력이 있는 후보 세 가지가 출현했다. 세 후보 중 하나를 믿는 사람들은 처음으로 세계 전체와 인류 전체를 하나의 법 체계로 통치되는 하나의 단위로 상상할 수 있었다. 적어도 잠재적으로는 모두가 '우리'였다. '그들'은 더 이상 존재하지 않았다. 최초로 등장한 보편적 질서는 경제적인 것, 즉 화폐 질서였다. 두 번째 보편적 질서는 정치적인 것, 즉 제국의 질서였다. 세 번째 보편적 질서는 종교적인 것, 즉 불교, 기독교, 이슬람교 같은 보편적 종교의 질서였다.
p249
점차 우세를 차지한 기독교인들은 승리를 축하하기 위해 모스크를 부수고 교회를 지었을 뿐 아니라, 새로운 금화와 은화를 발행하여 십자가와 함께 이교도들과의 싸움을 하느님이 도와주셔서 감사한다는 내용을 새겼다. 하지만 승리자들은 새로운 화폐와 함께 또 다른 종류의 주화도 찍어냈는데, 밀라레스라는 이 주화에는 좀 다른 메시지가 담겨 있었다. 기독교인 정복자들이 찍어낸 사각형 주화에는 유려한 아라비아 문자로 다음과 같은 선언이 새겨져 있었다. "알라 외에 다른 신은 없으며 무함마드는 알라의 사자다." 카톨릭의 멜구에일 주교와 아그데 주교조차도 인기 있는 이 무슬림 주화를 충실히 복제해 발행했고, 신을 두려워하는 기독교인들은 이를 기쁘게 사용했다.
관용은 언덕 너머에서도 넘쳐흘렀다. 북아프리카의 무슬림 상인들은 피렌체의 플로린 금화, 베네치아의 두카트 금화, 나폴리의 기글리아토 은화 같은 기독교 주화를 이용해 사업을 했다. 이교도인 기독교인들을 상대로 성전을 벌였던 무슬림 통치자들조차 경배의 표시로 예수와 성모 마리아를 새겨 넣은 주화로 세금을 받았다.
p274
제국은 인류의 다양성을 급격히 축소시킨 주된 이유의 하나였다. 제국이라는 증기롤러는 수많은 민족의 독특한 특징을 지워버리고(예컨대 누만시아), 그로부터 훨씬 더 크고 새로운 집단들을 만들어냈다.
실제 제국은 지난 2,500년간 세계에서 가장 일반적인 형태의 정치조직이었다. 이 시기에 살던 인류의 대부분은 제국에 속해 있었다. 제국은 매우 안정된 형태의 정부다. 대부분의 제국은 반란을 너무나 쉽게 진압했다. 제국을 무너뜨린 것은 대개 외부의 침공이나 내분에 따른 지배 엘리트의 분열밖에 없었다. 그래서 정복당한 민족이 제국의 지배자로부터 스스로를 해방시킨 기록은 그리 눈에 띄지 않는다. 대부분은 수백 년에 걸쳐 복속 상태로 남아 있었다. 이들은 제국에 서서히 소화되어 고유의 문화가 흐지부지되는 게 보통이었다.
p299
종교는 광범위한 사회정치적 질서를 정당화할 능력이 있지만, 모든 종교가 그 잠재력을 작동시킨 것은 아니었다. 서로 다른 인간 집단들이 사는 광대한 영역을 자신의 가호 아래 묶어두려면, 종교에는 두 가지 추가적인 속성이 필요하다. 첫째, 언제 어디서나 진리인 보편적이고 초인적인 질서를 설파해야 한다. 둘째, 이 믿음을 모든 사람에게 전파하라고 강력히 요구해야 한다. 달리 말해, 종교는 보편적이면서 선교적이어야 한다.
이슬람교나 불교처럼 역사상 가장 잘 알려진 종교는 보편적이고 선교적이다. 그래서 사람들은 모든 종교가 그렇다고 믿는 경향이 있다. 실상 대부분의 고대 종교는 지역적이고 배타적이었다. 신자들은 국지적 신과 영혼을 믿었으며, 인류 전체를 개종시키는 데 아무런 관심이 없었다. 우리가 아는 한 보편적이고 선교적인 종교는 기원전 1000년에 와서야 비로서 등장하기 시작했다. 이들의 출현은 역사상 가장 중요한 혁명의 하나였고, 보편적 제국과 보편적 화폐의 등장과 매우 비슷하게 인류의 통일에 크게 기여했다.
애니미즘이 지배적인 신념체계일 때, 인간의 규범과 가치는 동물, 식물, 요정, 유령 등 다양한 존재들의 관점과 이익을 고려해야 했다. 예컨대 갠지스강 유역의 수렵채집인 무리는 유달리 큰 무화과나무 한 그루를 베지 못하게 하는 규칙을 세웠을지도 모른다. 나무의 정령이 노해서 복수하지 않게 하기 위한 조치다. 인더스강 유역에 살았던 또 다른 수렵채집인 무리는 흰꼬리여우의 사냥을 금지했을지 모른다. 언젠가 흰꼬리여우가 부족의 현명한 노파에게 귀중한 흑요석이 어디에 있는지를 가르쳐주었기 때문이다.
이런 종교는 세계관이 매우 국지적이었고, 특정 장소나 기후현상이 지닌 독특한 측면을 강조하는 경향이 있었다. 대부분의 수렵채집인은 면적 1천 제곱킬로미터도 안 되는 지역에서 평생을 보냈다 살아남기 위해서, 특정 계곡에 사는 사람들은 그 계곡을 지배하는 초인적 질서를 이해하고 그에 맞춰 행동할 필요가 있었다. 먼 곳의 다른 계곡에 사는 사람들에게 똑같은 규칙을 따르라고 설득하는 것은 무의미한 일이었다. 인더스강 유역에 사는 사람들이 갠지스강 유역에 선교단을 보내 흰꼬리여우를 사냥하지 말라고 설득하는 수고를 하진 않았을 것이다.
농업혁명은 종교혁명을 동반한 것으로 보인다. 수렵채집인들이 채집한 식물과 사냥한 동물은 호모 사피엔스와 동등한 지위를 지닌 것으로 볼 수 있었다. 호랑이가 인간을 사냥한다고 해서 인간이 호랑이보다 열등하다고 볼 수 없듯이, 인간이 양을 사냥한다고 해서 양이 인간보다 열등하다고 볼 수는 없었다. 세상에 존재하는 것을은 서로 직접 의사소통을 했고, 자신들이 더불어 사는 거주지를 다스리를 질서에 대해 협의했다. 농부들은 달랐다. 이들은 동식물을 소유하고 조작했다. 자신의 소유물과 협의함으로써 스스로를 격하시킬 수는 없었다. 그러므로 농업혁명이 미친 최초의 종교적 효과는 동식물을 영혼의 원탁에 앉은 동등한 존재에서 소유물로 끌어내릴 것이다.
p327
모든 인본주의자는 인간성을 숭배하지만 그에 대한 정의는 각기 다르다. 기독교의 경쟁 분파들이 신의 정확한 정의를 두고 다투는 것처럼, 인본주의는 '인간성 humanity'의 정확한 정의를 두고 다투는 세 개의 경쟁 분파로 나뉘었다. 오늘날 가장 중요한 인본주의 분파는 자유주의적 인본주의다. 이 사상은 '인간성'은 개별 인간의 속성이며 개인의 자유는 더할 나위 없이 신성하다고 믿는다. 자유주의자에 따르면, 인간성의 신성한 성질은 모든 개별 사피인스의 내면에 갖춰져 있다. 개개인의 내면은 세상에 의미를 부여하며, 모든 윤리적, 정치적 권위의 원천이 된다. 만일 우리가 윤리적, 정치적 딜레마와 마주친다면, 우리는 자신의 내면을 돌아보고 내면에서 울리는 목소리-인간성의 목소리-를 들어야 한다. 자유주의적 인본주의의 주된 계명들은 이런 내면의 목소리가 지닌 자유를 침입이나 손상으로부터 보호하기 위한 것이다. 이런 계명들을 통칭하여 '인권'이라고 부른다.
또 다른 중요한 분파는 사회주의적 인본주의다. 사회주의자들은 '인간성'이 개인주의적인 것이 아니라 집단적인 것이라고 믿는다. 이들이 신성하게 보는 것은 개별 인간의 내면의 목소리가 아니라 전체 호모 사피엔스 종이다. 자유주의적 인본주의가 개개인의 최대한의 자유를 추구하는 데 반해, 사회주의적 인본주의는 모든 인간의 평등을 추구한다. 사회주의자에 따르면 불평등은 인간의 존엄성에 대한 최악의 모독이다. 인간의 보편적 본질이 아니라 주변적 속성에 특권을 부여하는 일이기 때문이다. 가령 부자가 가난한 자에 비해 특권을 누린다는 것은 우리가 부자에게나 가난한 자에게나 똑같이 적용되는 모든 인간의 보편적 본질보다 돈을 더 중시한다는 의미가 된다. 사회주의적 인본주의는 자유주의적 인본주의와 마찬가지로 일신론의 토대 위에 건설되었다. 모든 인간이 평등하다는 사상은 모든 영혼이 하느님 앞에 평등하다는 일신론적 확신의 개정판이다.
전통적 일신론의 속박에서 벗어난 유일한 인본주의는 진화론적 인본주의로, 가장 유명한 예는 국가사회주의, 즉 나치다. 나치가 다른 인본주의 분파와 구별되는 점은 '인간성'에 대해 진화론에 깊이 감화된 좀 색다른 정의를 갖고 있었다는 점이다. 나치는 다른 인본주의자들과 달리 인류를 보편적이고 영원한 무엇이 아니라 진화하거나 퇴화할 수 있는, 변하기 쉬운 종으로 보았다. 인간은 초인으로 진화할 수도, 인간 이하로 퇴화할 수도 있었다.
나치의 주된 야망은 인류의 퇴화를 막고 진보적 진화를 부추기는 것이었다. 나치가 인류의 가장 발전된 형태인 아리아인을 보호육성해야 하고 유대인, 집시, 동성애자, 정신병자 같은 호모 사피엔스의 퇴화된 종류를 격리하거나 심지어 근절해야 한다고 말한 이유가 바로 여기에 있었다.
p338
사실 그 시대를 가장 잘 아는 사람들, 다시 말해 그 시대에 살았던 사람들이야말로 그 시대를 가장 모르는 사람들이다. 사후의 깨달음에 의해 필연적인 것처럼 보이는 것이 정작 그 시대에는 전혀 명백하지 않은 일이었다. 이 역사의 철칙은 오늘날에도 그대로 적용된다. 우리는 글로벌 경제위기에서 벗어난 것인가, 아니면 최악의 위기가 곧 닥쳐올 예정인가? 중국이 성장을 계속해서 선도적 초강대국이 될까? 미국은 헤게모니를 잃을까? 일신론적 근본주의가 급증하는 것은 미래의 파도일까 아니면 장기적 중요성은 별로 없는 국지적 소용돌이일까? 우리는 환경적 재앙으로 향하고 있는가, 아니면 기술적 파라다이스로 향하고 있는가? 어느 쪽이든 이를 뒷받침하는 훌륭한 주장이 존재하지만, 확실히 알 방법은 없다. 그러나 부로가 몇십 년 지나지 않아 사람들은 과거를 돌아보면서 이 모든 질문에 대한 해답은 명백하다고 생각할 것이다.
특히 동시대 사람들에게는 아주 희박해 보였던 가능성이 종종 실현되곤 한다는 사실을 강조할 필요가 있다. 306년 콘스탄티누스 대제가 제위에 올랐을 때, 기독교는 비밀스러운 동방의 분파에 지나지 않았다. 당시에 이 종교가 곧 로마의 국교가 될 참이라고 누가 말했다면, 사람들은 웃다 못해 방 밖으로 뛰쳐나갔을 것이다. 오늘날 당신이 2050년이 되면 힌드교의 하레 크리슈나 교단이 미국의 국교가 될 것이라고 말할 경우 당할 일과 마찬가지로 말이다. 1913년 10월 볼셰비키는 러시아의 작은 급진주의 파벌에 지나지 않았다. 이성이 있는 사람이라면 이 파벌이 불과 4년 내에 이 나라를 접수하리라고는 예측하지 않았을 것이다. 기원후 600년에는 사막에 살던 한 무리의 아랍인이 머지않아 대서양에서 인도에 이르는 광대한 지역을 정복할 것이라는 생각이 더더욱 터무니없었을 것이다. 실제로 만일 비잔틴 제국의 군대가 이슬람의 첫 맹공을 격퇴할 수 있었다면, 이슬람교는 오늘날 한 줌의 전문가들만이 아는 무명의 종교로 남아 있었을 것이다. 만일 그랬다면 학자들은 메카의 중년 상인에게서 내려진 계시를 기반으로 한 신앙이 어째서 널리 퍼질 수 없었는지를 매우 쉽게 설명할 수 있었을 것이다.
이런 결론은 역사가 결정론적이기를 바라는 많은 사람들을 실망시킨다. 결정론은 호소력이 있다. 우리가 사는 세상과 우리의 믿음은, 우리가 국민국가에 살며 자본주의 원리에 따라 경제를 조직하고 인권을 열렬하게 신봉하는 것은 역사의 자연스럽고 필연적인 결과라는 것을 시사하기 때문이다. 역사가 결정론적이지 않다고 인정하는 것은 오늘날 대부분의 사람들이 믿는 민족주의, 자본주의, 인권이 우연에 불과하다고 인정하는 것이나 마찬가지다.
역사는 결정론으로 설명될 수도 예측될 수도 없다. 역사는 카오스적이기 때문이다. 너무나 많은 힘이 작용ㅎ하고 있으며, 이들 간의 상호작용은 너무 복잡하므로, 힘의 크기나 상호작용 방식이 극히 조금만 달라져도 결과에는 막대한 차이가 생긴다. 그뿐만이 아니다. 역사는 이른바 '2단계' 카오스계다. 카오스계에는 두 종류가 있다. 1단계 카오스는 자신에 대한 예언에 반응을 하지 않는 카오스다. 가령 날씨는 1단계 카오스계다. 날씨는 무수히 많은 요인의 영향을 받지만, 우리는 점점 더 많은 요인을 고려하는 컴퓨터 모델을 만들어 점점 더 정확하게 에보할 수 있다.
2단계 카오스는 스스로에 대한 예측에 반응하는 카오스다. 그러므로 정확한 예측이 불가능하다. 시장이 그런 예다. 만일 우리가 내일의 석유 가격을 1백 퍼센트 정호학히 예측하는 컴퓨터 프로그램을 개발하면 어떤 일이 일어날까? 석유 가격은 예측에 즉각 반응할 것이고, 해당 예측은 실현되지 않을 것이다. 현재 가격이 배럴당 90달러인데 내일은 1 백 달러가 될 것이라고 절대적으로 옳은 컴퓨터 프로그램이 예측한다면 어떻게 될까? 겨래인들은 그 예측에 따른 이익을 보기 위해 급히 매입 주문을 낼 것이고, 그 결과 가격은 내일이 아니라 오늘 배럴당 1 백 달러로 치솟을 것이다. 그러면 내일은 어떤 일이 일어날까? 아무도 모른다.
정치도 2단계 카오스계다. 소련 연구가들은 1989년 혁명을 예측하지 못했고, 중동 전문가들도 2011년 '아랍의 봄' 혁명을 예측하지 못했다. 이를 두고 비난하고 혹평하는 사람이 많지만, 이런 비난은 공정하지 못하다. 혁명은 그 정의상 예측이 불가능하다. 예상 가능한 혁명은 결코 발생하지 않는다.
왜일까? 지금이 201년이라고 가정하고 다음과 같은 일을 상상해보자. 천재적인 일부 정치학자들이 컴퓨터 천재들과 손잡고 결코 틀릴 수 없는 컴퓨터 알고리즘을 개발한다. 이 알고리즘을 매력적인 인터페이스와 결합하면 혁명 에측장치로 시장에 내놓을 수 있다. 이들은 많은 선금을 받고 이집트의 호스니 무바라크 대통령에게 이 서비스를 제공한다. 그리고 자신들의 예측에 의하면 이듬해에 틀림없이 이집트에서 혁명이 일어날 것이라고 말해준다. 그러면 무바라크는 어떻게 반응할까? 가장 가능성이 큰 행동은 즉시 세금을 낮추고, 시민들에게 수십억 달러의 지원금을 풀고, 만일에 대비해 비밀경찰을 보강하는 것이다.
이런 선제 조치는 효과를 낸다. 해가 바뀌고 시간이 흘렀지만, 놀랍게도 혁명은 일어나지 않았다. 무바라크는 환불을 요구한다. "당신네 알고리즘은 쓸모가 없어!"그는 정치학자들에게 소리친다. "그 돈을 뿌리지 않았다면 궁을 하나 더 지을 수 있어어!" 정치학자는 반론을 편다. "하지만 혁명이 일어나지 않은 이유는 우리가 그것을 예측했기 때무잉니다." 무바라크는 경호에들에게 그들을 체포하라고 손짓하면서 말한다. "일어나지 않는 일을 예언가라고? 그런 놈이라면 카이로 시장에 가서 거의 공짜나 가까운 값에 열몇 명이나 고용할 수 있겠어지."
그러면 왜 역사를 연구하는가? 물리학이나 경제학과 달리, 역사는 정확한 예측을 하는 수단이 아니다. 역사를 연구하는 것은 미래를 알기 위해서가 아니라 우리의 지평을 넓히기 위해서다. 우리의 현재상황이 자연스러운 것도 필연적인 것도 아니라는 사실을 이해하기 위해서다. 그 결과 우리 앞에는 우리가 상상하는 것보다 더 많은 가능성이 있다는 것을 이해하기 위해서다. 가령 유럽인이 어떻게 아프리카인을 지배하게 되었을까를 연구하면, 인종의 게층은 자연스러운 것도 필연적인 것도 아니며 세계는 달리 배열될 수도 있었다는 사실을 깨달을 수 있다.
p343
점점 더 많은 학자들이 문화를 일종의 정신적 감염이나 기생충처럼 보고 있다. 인간은 자신도 모르는 새 숙주 역할을 하고 있다는 말이다. 바이러스 같은 기생체는 숙주의 몸속에서 산다. 이들은 스스로를 복제하며 숙주에서 숙주로 퍼져나가고, 숙주를 먹고 살면서 약하게 만들고 심지어 죽게 할 때도 있다. 숙주가 기생체를 퍼뜨릴 만큼 오래 살기만 하면, 기생체는 숙주의 상태에 거의 신경을 쓰지 않는다. 바로 이와 같은 방식으로 문화적 아이디어는 인간의 마음 속에 산다. 증식해서 숙주에서 숙주로 퍼져나가며, 가끔 숙주를 약하게 하고 심지어 죽이기도 한다. 기독교의 천상의 천국이나 공산주의자의 지상낙원에 대한 믿음 같은 문화적 아이디어는 인간으로 하여금 그것의 전파를 위해서라면 목숨까지 걸고서 헌신하게 만든다. 해당 인간은 죽지만, 아이디어는 퍼져나간다.
이런 접근법에 따르면, 문화는 다른 사람을 이용하기 위해 일부 사람들이 꾸며낸 음모(마르크스주의자들이 이렇게 생각하는 경향이 있다)가 아니다. 그렇다기보다는 우연히 출현해서 자신이 감염시킨 모든 사람을 이용하는 정신의 기생충에 더 가깝다. 이런 접근법은 때로 문화 구성요소학, 혹은 밈 연구라고 불린다. 유기체의 진화가 '유전자gene'라 불리는 유기체 정보 단위의 복제에 기반을 둔 것과 마찬가지로, 문화적 진화는 '밈meme'이라 불리는 문화적 정보 단위의 복제에 기반을 두고 있다. 성공적인 문화란 그 숙주가 되는 인간의 희생이나 혜택에 무관하게 스스로의 밈을 증식시키는 데 뛰어난 문화다.
대부분의 인문학자들은 밈 연구를 멸시한다. 문화적 과정을 조악한 생물학적 유추를 통해 설명하려는 아마추어적 시도로 보는 것이다. 하지만 그런 학자 중 많은 이가 밈 연구의 쌍둥이 자매 격인 포스트모더니즘을 고수하다. 포스트모더니즘 사상가는 문화를 건축하는 벽돌로서 밈이 아니라 '담론discourse'을 들먹이지만 이들 역시 문화는 인간의 이익과 무관하게 스스로 퍼져나가는 존재라고 생각한다. 이들은 가령 민족주의를 19세기와 20세기에 퍼져서 전쟁, 압제, 증오, 인종청소를 일으킨 치명적 전염병으로 묘사한다. 한 나라의 사람들이 거기 감염되는 순간, 이웃 나라의 사람들도 그 바이러스에 감염될 가능성이 컸다. 민족주의 바이러스는 스스로가 인간에게 혜택이 된다고 포장했지만, 실제로는 주로 자기 자신에게만 이익이 되었다.
사회과학에서 게임이론의 비호 아래 비슷한 주장이 흔히 이야기된다. 게임이론은 다수가 참여하는 게임에서 어덯게 모두에게 해가 되는 시각과 행동 패턴이 뿌리를 내리고 퍼져나가는지를 설명해준다. 유명한 예가 군비 경쟁이다. 군비 경쟁은 참여하는 모든 당사국들을 파산시키는 경우가 많다. 그렇다고 군사력의 균형을 실제로 바꾸지도 못하면서 말이다. 파키스탄이 첨단 항공기를 구입하면, 인도가 동일한 조치로 대응한다. 인도가 핵폭탄을 개발하면, 파키스탄도 그대로 따라한다. 파키스탄이 해군력을 확장하면, 인도가 그에 대응한다. 이 과정의 끝에 다다르면, 힘의 균형은 과거와 크게 달라지지 않는다. 그동안 교육과 의료에 투자할 수 있었을 수십억 달러가 무기의 구입과 개발에 사용되었을 뿐이다.
하지만 군비 경쟁의 역학은 저항하기 힘들다. '군비 경쟁'은 하나의 행동 패턴으로서, 이 나라에서 저 나라로 바이러스처럼 퍼져나가며 모두에게 해를 끼친다. 하지만 스스로에게는 이롭다. 생존과 번식이라는 진화적 기준에서 보면 그렇다(군비 경쟁은 유전자와 마찬가지로 자각이 없다는 점을 기억해두라. 그것이 의식적으로 생존과 번식을 추구하는 것은 아니다. 강력한 역학의 의도치 않은 결과로 그것이 전파되는 것뿐이다).
그것을 무엇이라고 이름 붙이든 - 게임이론, 포스트모더니즘, 밈 연구 - 역사의 역학은 인간의 복지를 향상시키는 방향을 향하고 있는 것은 아니다. 역사상 가장 성공한 문화가 반드시 호모 사피엔스에게 가장 좋은 문화라는 생각은 근거가 없다. 진화와 마찬가지로 역사는 개별 유기체의 행복에 무관심하다. 그리고 개별 인간은 너무나 무지하고 약해서, 대개는 역사가 자신에게 유리한 방향으로 전개되도록 영향을 미치지 못한다.
p376
역사를 통틀어 사회를 고통스럽게 했던 가난은 두 종류였다. 남들은 이용할 수 있는 기회를 나는 이용하지 못하도록 만드는 사회적 가난 그리고 식량과 집이 없어서 개인의 삶을 위험에 빠뜨리는 생물학적 가난이었다. 사회적 가난은 아마도 결코 근절되지 못할 것이다. 하지만 세계의 많은 국가에서 생물학적 가난은 옛말이 되었다. 최근까지만 해도 대부분의 사람들은 생물학적 빈곤선 부근을 떠돌았다. 그 선 이하로 내려가면 목숨을 오래 부지하는 데 필요한 영양이 부족하다는 뜻이다. 약간의 계산 착오나 불운만 생겨도 사람들은 쉽게 그 선 이하, 즉 아사 상태로 빠질 수 있었다. 자연재해와 인간이 만든 재난은 가끔 국민 전체를 나락으로 떨어뜨려 수백만 명의 죽음을 불렀다. 오늘날 세계 대부분의 사람들 발밑에는 안전망이 쳐져 있다. 보험, 국가가 후원하는 사회보장, 아주 많은 지역적, 국제적 NGO들이 사람들을 개인적 불행으로부터 보호하고 있다. 한 지역 전체에 재난이 닥치면 범세계적인 구호 노력이 이어지고, 덕부에 최악의 사태를 피하게 되었다. 사람들은 여전히 수모와 모욕, 가난으로 인한 질병에 시달리지만, 대부분의 국가에선 굶어 죽지는 않는다.
p394
태즈메이니아 원주민은 이보다 더 나쁜 운명을 맞았다. 아주 훌륭한 고립 속에서 1만 년을 살아남았던 이들은 쿡이 도착한 지 1세기도 지나지 않아 마지막 남자, 여자, 어린이에 이르기까지 완전히 제거되었다. 유럽 정착민들은 처음에 이들을 섬의 가장 비옥한 영영에서 몰아냈고, 이어 남아 있는 황무지까지 탐낸 나머지 이들을 체계적으로 사냥하고 살해했다. 몇 되지 않은 생존자들은 기독교 복음주의교파의 강제수용소에 수용되었는데, 이곳에서는 선의를 지녔지만 그다지 열린 마음을 갖지 못한 선교사들이 서구 세계의 방식으로 이들을 가르치려 했다. 태즈메이니아인들은 읽기와 쓰기를 배웠다. 기독교를 배웠으면, 천을 바느질하고 농사를 짓는 등 다양한 '생산적 기술'을 교육받았다. 하지만 이들은 학습을 거부했다. 이들은 계속해서 더욱더 우울해했으며, 아기를 갖지 않게 되고 삶에 대한 관심을 잃었다. 마지막에는 과학과 진보의 세계로부터 탈출하는 유일한 길, 죽음을 선택했다. 아, 과학과 진보는 이들의 사후세계에까지 좇아갔다. 인류학자들과 큐레이터들은 과학의 이름으로 마지막 태즈메이니아인들의 사체를 강탈했다. 그들은 사체를 해부하고, 무게를 재고, 측정하여, 그 분석 결과를 학술지에 실었다. 태즈메이니아 박물관은 1976년에 이르러서야 1백 년 전에 죽은 최후의 태즈메이니아 원주민 트루가니니의 시신을 매장할 수 있도록 내놓았다. 영국 왕립외과대학은 그녀의 피부와 머리카락 표본을 2002년까지 보유했다.
p399
중국인과 페르시아인에게 부족했던 것은 증기기관 같은 기술적 발명이 아니었다(그거라면 공짜로 베끼거나 사들일 수도 있었다). 이들에게 부족한 것은 서구에서 여러 세기에 걸쳐 형성되고 성숙한 가치, 신화, 사법기구, 사회정치적 구조였다. 이런 것들은 빠르게 복사하거나 내면화할 수 없었다. 프랑스와 미국이 재빨리 영국의 발자국을 뒤따랐던 것은 가장 중요한 신화와 사회구조를 이미 영국과 공유하고 있었기 때문이었다. 중국인과 페르시아인은 사회에 대한 생각과 사회의 조직 방식이 달랐던 탓에 그렇게 빨리 따라잡을 수 없었다.
이런 설명은 1500년에서 1850년 사이 시기를 새롭게 조명하게 한다. 이 시기 유럽은 아시아 열강보다 기술, 정치, 군사, 경제의 우위를 누리지 못했다. 그럼에도 독창적 잠재력을 구축했고, 1850년 경이 되자 그 중요성은 갑자기 뚜렷해졌다. 1750년에 유럽과 중국, 이슬람 세계가 외관상 동등해 보였던 것은 신기루일 뿐이었다. 매우 높은 탑을 세우고 있는 두 건축가를 상상해보자. 한 사람은 나무와 진흙 벽돌을, 다른 사람은 강철과 콘크리트를 재료로 쓴다. 처음에는 두 방법 사이에 별로 차이가 없어 보인다. 두 탑이 모두 비슷한 속도로 비슷한 높이에 도달하기 때문이다. 하지만 일단 결정적 문턱을 지나면, 나무와 진흙은 하중을 버티지 못하고 무너진다. 이에 비해 강철과 콘크리트는 시야가 미치는 한 층층이 계속 올라간다.
근대 초기에 유럽은 어떤 잠재력을 개발했기에 근대 후반 세계를 지배할 수 있었을까? 이 질문에는 서로 보완적인 두 가지 답이 존재하는데, 바로 현대 과학과 자본주의다. 유럽인은 기술적 우위를 누리기 전부터도 과학적이고 자본주의적인 방식으로 생각하고 행동하는 습관이 있었다. 그러다가 기술의 노다지가 쏟아지기 시작하자, 유럽인들은 다른 누구보다 그것을 잘 부릴 수 있었다. 따라서 과학과 자본주의가 유럽 제국주의가 21세기 유럽 이후 세상에 남긴 가장 중대한 유산이라는 사실은 결코 우연이 아니다. 유럽과 유럽인은 더 이상 세상을 지배하지 않지만, 과학과 자본의 힘은 나날이 강력해지고 있다.
p403
1969년 7월20일 닐 암스트롱과 버즈 올드린은 달 표면에 착륙했다. 탐험에 앞서 아폴로 11호 우주비행사들은 몇 개월간 달과 환경이 비슷한 미국 서부 사막에서 훈련을 받았다. 이 지역은 여러 아메리카 원주민 공통체의 고향인데, 우주비행사들과 한 원주민과의 만남을 담은 전설 같은 이야기가 전해진다.
어느날 훈련 중이던 우주비행사는 늙은 아메리카 원주민과 우연히 마주쳤다. 남자는 우주비행사들에게 이곳에서 무엇을 하고 있느냐고 물었다. 그들은 달을 탐사하기 위해 곧 떠날 원정대의 대원들이라고 대답했다. 이 말은 들은 노인은 잠깐 침묵했다가 입을 열었다. 자신을 위해 부탁을 하나 들어달라는 것이었다.
"무엇을 원하세요?" 그들은 물었다.
"우리 부족 사람들은 달에 신성한 정령들이 산다고 믿는다오. 그들에게 우리 부족에게 보내는 중요한 메시지를 당신들이 전해줄 수 있을까 해서."
"그 메시지가 뭔데요?" 우주비행사들이 물었다.
남자는 자기 부족의 언어로 뭐라고 말했고, 우주비행사들에게 그 말을 정확히 외울 때까지 계속 되풀이해서 말하게 시켰다.
"그게 무슨 뜻이지요?" 우주비행사들은 물었다.
"그건 말할 수 없어요. 이 말의 뜻은 우리 부족과 달의 정령들에게만 허락된 비밀이랍니다."
기지로 돌아온 우주비행사들은 그 부족어를 말할 수 있는 사람을 수소문한 끝에 마침내 통역할 사람을 찾아내어, 비밀 메시지를 해석해달라고 부탁했다. 이들이 암기한 내용을 되뇌자 통역자는 껄껄 웃기 시작했다. 웃음이 잦아들자 우주비행사들은 무슨 뜻인지 물었다. 통역자는 비행사들이 조심스럽게 암기한 문장을 이렇게 번역했다. "이 사람들이 하는 말은 한 마디도 믿지 마세요. 이들은 당신들의 땅을 훔치러 왔어요."
p407
최초의 근대인은 아메리고 베스푸치였다. 그는 1499년~1504년 사이에 여러 차례 아메리카 탐험대에 참가했던 이탈리아 선원이었다. 1502년부터 1504년 사이, 그 탐험의 내용을 담은 두 건의 문서가 유럽에서 출간되었다. 저자는 베스푸치로 되어 있었다. 이들 문서의 주장에 따르면 콜럼버스가 새로 발견한 섬들은 동아시아 연안의 섬들이 아니라 완전히 새로운 대륙이었다. 성경이나 고전 지리학자나 동시대 유럽인에게 전혀 알려지지 않은 곳이라고 했다. 1507년, 이런 주장을 확고하게 믿은 존경받는 지도 제작자 마르틴 발트제뮐러는 최신판 세계지도를 출간했는데, 그것은 유럽에서 서쪽으로 항해한 선단이 착륙했던 곳을 별개의 대륙으로 표시한 최초의 지도였다. 대륙을 그려 넣은 발트제뮐러는 이름을 부여해야 했다. 그는 그것을 발견한 사람이 아메리고 베스푸치라고 잘못 알고 있던 터라, 이 대륙에 아메리고를 기리는 이름을 붙였다. 아메리카라고. 발트제뮐러의 지도는 인기를 끌었고, 수많은 다른 지도 제작자들에 의해 복제되었다. 그가 새 땅에 부여한 이름도 함께 퍼져나갔다. 세계의 4분의 1에, 즉 일곱 대륙 중 두 곳에 거의 무명이던 이탈리아인의 이름이 붙은 것이다. 그가 유명할 이유라고는 "우리는 모른다"라고 말할 용기가 있었던 점 외에 아무것도 없다. 이 사실에는 어떤 시적 정의가 있다.
아메리카 대륙의 발견은 과학혁명의 기초가 되는 사건이었다. 그것은 유럽인에게 과거의 전통보다 지금의 관찰 결과를 더 선호하라고 가르쳐주었다. 그뿐 아니라 아메리카를 정복하겠다는 욕망은 유럽인들로 하여금 새로운 지식을 맹렬한 속도로 찾아 나서게 만들었다. 방대한 새 영토를 통제하기를 원한다면 신대륙의 지리, 기후, 식물상, 동물상, 언어, 문화, 역사에 대해서 막대한 양의 새로운 정보를 수집해야 했다. 기독교 성경이나 옛 지리서, 고대 구비 전통은 거의 도움이 되지 않았다. 이제 유럽의 지리학자뿐 아니라 거의 모든 학문 분야에서 일하는 학자들은 채워 넣을 공백이 있는 지도를 그리기 시작했다. 그들은 자신의 이론이 완전하지 않으며, 중요한 것들 가운데 아직도 모르는 것이 있다고 인정하기 시작하였다.
p436
만일 신용이 그토록 놀라운 것이라면, 어째서 아무도 좀 더 일찍 그것을 생각해내지 못했을까? 물론 과거에도 생각한 사람이 있었다. 이런저런 종류의 신용 거래는 인류의 모든 문화권에 존재했으며, 그 기원은 최소한 고대 수메르까지 거슬러 올라간다. 옛 시대의 문제점은 아무도 그런 아이디어를 떠올리지 못했다거나 활용할 방법을 알지 못했다는 것이 아니었다. 사람들이 신용을 크게 확장하려는 경우가 드물었다는 점이다. 그것은 미래가 현재보다 나을 것이라고 믿지 않았기 때문이다. 사람들은 보통 자기 시대보다 과거가 더 좋았으며 미래는 현재보다 더 나쁘거나 기껏해야 지금과 같을 것이라고 믿었다.
경제용어로 말하자면, 사람들은 부의 총량이 더 줄지는 않더라도 한정되어 있다고 믿었다. 따라서 사람들은 자기 개인이든, 자신들의 왕국이든, 세계 전체든 앞으로 10년간 과거보다 더 많은 부를 생산하리라고 가정하는 것은 위험한 행태라고 생각했다. 사업은 제로섬 게임처럼 보였다.. 물론 특정 빵집의 이익이 증가할 수는 있지만, 그것은 그 옆 빵집의 희생을 통해서만 가능했다. 베네치아가 번영할 수는 있지만, 이는 오직 제노바를 가난하게 만듦으로써만 가능했다. 영국 왕이 자신을 부유하게 만드는 방법은 프랑스 왕의 것을 훔치는 것밖에는 없었다. 파이를 자르는 방법은 수없이 많지만, 어느 방법도 파이를 더 크게 만들지는 못한다. 수많은 문화권에서 돈을 많이 버는 것을 죄악이라고 결론 내린 이유가 여기에 있었다. 예수가 말했듯 "부자가 천국에 들어가기는 낙타가 바늘구멍을 통과하기보다 어려우니라"였다.
만일 파이의 크기가 정해져 있는데 내가 그중 많은 부분을 가졌다면, 누군가 다른 사람의 몫을 빼앗은 게 분명하다. 부자는 자신의 잉여 재산을 자선에 기부함으로써 악행을 속죄해야 했다. 만일 지구 전체의 파이가 똑같은 크기로 남아 있다면, 신용이 파고들 여지가 없다. 신용은 오늘의 파이와 내일의 파이 간의 차이다. 만일 파이 크기가 늘 같다면 왜 외상을 주겠는가? 당신에게 돈을 빌려달라고 손을 벌리는 제빵사나 왕이 다른 경쟁자의 파이 조각을 훔칠 능력이 있다고 믿지 않는 한, 그런 위험은 감수할 수 없을 것이다.
따라서 근대 이전 세계에서 대출을 받기는 힘들었고, 만일 빌리더라도 소액으로 단기간에 높은 이자를 무는 것이 보통이었다. 새로 시작하는 기업가는 새 빵집을 열기 어려웠고, 왕궁을 짓거나 전쟁을 일으키려는 위대한 왕들은 세금과 관세를 무겁게 매겨서 자금을 조달하는 방법밖에 없었다. 왕은 그래도 상관없었다. 하지만 빵 굽기에 대한 뛰어난 아이디어로 신분상승을 바라는 하녀는 왕궁의 부엌 바닥을 박박 닦으면서 부를 꿈꾸는 것 외에 보통 다른 방법이 없었다.
이것은 모두에게 부정적인 결과였다. 신용이 제한되어 있기 때문에 사람들은 신규 사업의 자금을 조달하는 데 어려움을 겪었고, 신규 사업이 힘들었기 때문에 경제는 성장하지 못했다. 지금까지 성장이 없었으니 사람들은 앞으로도 없을 것이라고 제멋대로 판단했고, 자본을 가진 사람들은 외상 주는 것을 경계했다. 불황에 대한 기대는 자기 실현적이었다.
p456
17세기가 끝나가면서 네덜란드는 뉴욕을 잃었고, 금융 및 제국의 심장이라는 유럽 내에서의 지위도 내놓았다. 여기에는 현상에 안주한 자세도 한몫했고, 대륙전쟁을 치르느라 경비를 너무 많이 지출한 탓도 있었다. 네덜란드가 빠져나간 공백을 놓고 치열한 경쟁을 벌인 것은 프랑스와 영국이었다. 처음에는 프랑스가 훨씬 유리해 보였다. 프랑스는 덩치가 더 크고 자금과 인구도 더 많았으며 경험 많은 군대를 더 많이 보유하고 있었다. 하지만 영국인들은 어떻게 해서든 금융제도의 신뢰를 얻는 데 성공한 데 비해, 프랑스는 스스로 신용할 수 없는 대상임을 드러냈다. 프랑스 왕의 행태는 18세기 유럽 최대의 금융 버블이라 불리는 미시시피 버블 과정에서 특히 악명을 떨쳤다.
이 이야기도 제국을 세운 주식회사와 함께 시작된다. 1717년 프랑스에서 사업승인을 받은 미시시피 사는 미시시피 하류의 연안 지역을 식민지로 만들고 뉴올리언스 시를 건설했다. 야심찬 계획을 실현할 자금을 모으고자, 프랑스 루이 15세의 궁정과 좋은 관계를 맺고 있던 회사는 파리 주식시장에서 주식을 팔았다. 회사 사장이던 존 로는 프랑스 중앙은행 총재이기도 했다. 게다가 왕은 그를 오늘날의 재정부장관과 비슷한 정부 금융 총책 자리에 임명했었다.
1717년 미시시피 하류의 연안 지대는 늪지와 악어를 제외하면 그다지 매력이 없는 곳이었다. 하지만 미시시피 사는 여기에 엄청난 부와 무한한 기회가 있다고 떠벌렸다. 프랑스의 귀족, 사업가, 도시 부르주아 중 둔한 사람들이 이런 환상에 속았고, 회사 주식의 가격은 천정부지로 치솟았다. 애초에 주식은 한 주에 50리브르(프랑스의 옛 화폐단위-옮긴이)에 발행되었다. 1719년 8월 1일에는 2,750리브르에 거래되었다. 8월 30일에는 4,10리브르, 9월 4일에는 5천 리브르가 되었다.
12월 2일이 되자 주식은 한 주당 1만 리브르를 돌파했다. 황홀감이 파리의 거리를 휩쓸었다. 사람들은 가진 것을 모두 팔고 대규모 대출을 받아 미시시피 사의 주식을 샀다. 부자가 되는 손쉬운 방법을 발견했다는 것이 모든 사람의 생각이었다. 며칠 지나지 않아, 공황이 시작되었다. 일부 투자자들은 주식 가격이 완전히 비현실적이며 지속 가능하지 않다는 사실을 깨달았다. 이들은 가격이 정점을 찍을 때 파는 게 좋겠다고 판단했다. 매도 물량이 늘어나자 가격이 내려가기 시작했다. 투자자들은 가격이 떨어지는 것을 보자 빨리 손을 털고 싶었고, 가격은 더욱더 떨어져서 눈사태처럼 무너져버렸다.
프랑스 중앙은행은 가격을 안정시키기 위해 총재인 존 로의 지시에 따라 미시시피 주식을 구매했지만, 영원히 매수를 계속할 수는 없었다. 결국에는 자금이 떨어졌다. 일이 이렇게 되자 정부 재정 총 책임자이기도 했던 존 로는 돈을 더 찍어내도록 인가했다. 중앙은행이 주식을 더 살 수 있게 하기 위해서였다. 이로써 프랑스의 재정시스템 전체가 거품 속으로 들어갔다. 더군다나 그런 금융상의 마법으로도 곤경을 면할 수 없었다. 미시시피 사의 주식값은 1만 리브르에서 1천 리브르로 떨어졌고, 그 다음엔 완전히 붕괴하여 한 푼어치의 가치도 없게 되었다. 이즈음 프랑스 중앙은행과 왕국 재무성은 돈은 한 푼도 없으면서 무가치한 주식만 엄청나게 가지고 있는 상황이었다. 큰손 투기꾼들은 제때 주식을 판 덕분에 대체로 큰 손실 없이 벗어났지만, 개미들은 모든 것을 잃었다. 자살하는 사람이 속출했다.
미시시피 버블은 역사상 가장 극적인 금융붕괴 사태였고, 프랑스의 금융 시스템은 결코 완전히 회복되지 못했다. 미시시피 사가 어떤 식으로 정치적 연줄을 이용해 주가를 조작하고 매수 광풍에 불을 질렀는지 백일하에 드러났기 때문에, 대중은 프랑스 은행 시스템과 프랑스 왕의 현명함에 대해 불신했다. 루이 15세는 신용대출을 받기가 점점 더 힘들어졌다. 이것이 해외의 프랑스 제국이 영국의 손에 떨어진 주요한 이유 중 하나였다.
영국인들은 자금을 저리로 쉽게 빌릴 수 있었던 데 비해, 프랑스인들은 융자를 받기도 어려웠고 높은 이자를 지불해야 했다. 프랑스 왕은 점점 불어나는 빚을 갚기 위해서 점점 더 많은 돈을 더욱더 높은 이자율로 빌려야 했다. 그가 죽자 왕위에 오른(1774년) 손자 루이 16세는 1780년대에 이르러 자신이 파산을 향해 달려가고 있다는 사실을 깨달았다. 연간 예산의 절반이 대출금에 대한 이자 지불금으로 묶여 있었던 것이다. 1789년 그는 마지못해 삼부회(사제,귀족, 제3신분으로 이뤄진 신분제 의회)를 소집한다. 위기의 해법을 찾기 위해 150년 동안 열린 적이 없던 의회를 소집한 것이다. 그리하여 프랑스 혁명이 시작되었다.
p460. 자본의 이름으로.
네덜란드의 인도네시아 국유화(1800년), 영국의 인도 국유화(1858년)가 이루어졌지만, 이로 인해 자본주의와 제국의 포옹이 끝났다고는 볼 수 없다. 오히려 양자의 관계는 19세기에 더 끈끈해졌다. 주식회사는 더 이상 민간 식민지를 개척하고 지배할 필요가 없었고, 이제 사장과 대주주들은 런던, 암스테르담, 파리에서 권력의 끈을 조종했다. 이들은 국가가 자신들의 이익을 지키고 뒷배를 봐주리라고 믿고 있었다. 마르크스를 비롯한 사회 비평가들이 빈정댔듯이, ,서구 정부는 자본주의자들의 노동조합이 되어가고 있었다.
정부가 큰돈을 벌려고 나선 가장 악명 높은 사례가 영국과 중국이 벌인 제1차 아편전쟁(1840~1842)이다. 19세기 전반 영국 동인도회사와 잡다한 영국 사업가들은 마약 수출로 돈을 벌었는데, 특히 중국에 아편을 수출하는 것이 주종이었다. 수백만 명의 중국인이 중독자가 되었고, 나라는 경제적으로나 사회적으로 쇠약해졌다. 1830년대 말 중국 정부는 마약 거래를 금지하고 포고령을 내렸으나 영국 마약 상인들은 법을 완전히 무시했고, 중국 당국은 배에 실려 있던 마약을 압류해 파괴하기 시작했다. 마약 카르텔들은 웨스트민스터와 다우닝 가와 긴밀한 관계를 유지하고 있었다. 실제로 많은 의원과 각료들이 마약 회사의 주식을 보유하고 있었다. 그래서 이들은 정부에게 행동에 나서라는 압력을 넣었다.
1840년대 영국은 '자유무역'이라는 명목으로 중국에 정식으로 전쟁을 선포했다. 전쟁은 식은 죽 먹기였다. 자신감 과잉이던 중국은 증기선, 대구경 대표, 로켓, 신속발사 소총 같은 영국의 신무기에 상대가 되지 않았다. 이어진 평화조약에서,, 중국은 영국 마약 상인의 활동을 제약하지 않겠다고 약속했고 중국 경찰이 마약 상인에게 끼친 피해도 보상하기로 했다. 더구나 영국은 홍콩의 조차租借를 요구해 통치함으로써 그곳을 안전하게 마약 거래 기지로 계속 사용했다(홍콩은 1997년까지 영국의 통치를 받았다). 19세기 말 중국 인구의 10분의 1에 이르는 약 4천만 명이 마약 중독자였다.
이집트 역시 영국 자본주의의 힘을 벗어날 수 없었다. 19세기 프랑스와 영국의 투자자들은 이집트의 지배자들에게 거액을 빌려주었는데, 처음에는 수에즈 운하 프로젝트에 자금을 대기 위해서였고 나중에는 이보다 훨씬 성공적이지 않은 다른 사업들에 자금을 대기 위해서였다. 이집트의 빚은 점점 더 많아졌고, 유럽인 채권자들은 이집트 내정에 점점 더 많이 관여했다. 1881년 이집트 민족주의자들은 더 이상 참지 못하고 반란을 일으켰다. 이들은 모든 외국 채무를 갚지 않겠다고 일방적으로 선언했다. 이것이 불쾌했던 빅토리아 여왕은 1년 후 나일강에 육군과 해군을 파견했고, 이집트는 제2차 세계대전 이후까지 영국의 보호령으로 있었다(보호령으로 유지된 기간은 명목상 1914~1922년이었다. 하지만 영국은 수에즈 운하에 계속 군대를 주둔시키며 제2차 세계대전 내내 이집트를 핵심 전략 기지로 삼았다).
투자자의 이익을 위해 치러진 전쟁이 이것들뿐만은 아니었다. 사실 전쟁 자체가 아편처럼 재화가 될 수 있었다. 1821년 그리스인들은 오토만 제국에 반란을 일으켰다. 이 반란은 영국의 자유주의자 및 낭만주의자 무리에게 큰 공감을 불렀다. 시인 바이런 경은 반란군과 함께 싸우기 위해 그리스에 가기까지 했다. 하지만 런던의 금융인들은 여기서 돈벌이 기회를 보앗다. 이들은 반군 지도자들에게 런던 주식거래소에서 그리스 반군 공채를 발행할 것을 제안했다. 그리스는 전쟁에서 승리해 독립을 쟁취하면 이자를 포함해 채권을 갚기로 했다.
민간인 투자자들은 이윤을 얻기 위해, 혹은 그리스의 명분에 공감해서, 혹은 두가지 이유 모두로 채권을 구매했다. 그리스 반군 채권 가격은 주로 헬라스에서 벌어지는 전투의 승패에 발맞춰 등락을 거듭했다. 점차 터키인들이 우위를 점했다. 반란군의 패배가 눈앞에 다가오자 채권 소유자들은 돈을 잃을 위험헤 직면하게 되었다. 채권 소유자의 이해는 나라의 이해였기에 영국은 국제 함대를 조직했고, 1827년 이 함대는 나바리노 전투에서 오토만 제국의 주력인 소함대를 침몰시켰다. 여러 세기에 걸친 복종을 딛고 그리스는 마침내 자유를 얻었지만, 자유는 엄청난 빚과 함께 왔고 독립 그리스는 이를 갚을 방법이 없었다. 그리스 경제는 향후 수십 년간 영국 채권자들에게 저당 잡힌 신세였다.
자본과 정치의 힘찬 포옹은 신용시장에서 크나큰 의미가 있었다. 어떤 경제가 지닌 신용의 양은 새로운 유전의 발견이나 새 기계의 발명 같은 순수한 경제적 요인뿐만 아니라 체제 변화나 좀 더 대담한 해외정책 같은 정치적 사건들에 따라서도 달라진다. 나바리노 전투 이후 영국 자본주의자들은 해외의 위험한 거래에 돈을 투자할 용의를 더 많이 나타냈다. 외국의 채무자가 변제를 거부한다면 여왕의 군대가 돈을 받아내주는 것을 보았던 것이다.
오늘날 한 나라의 신용등급이 천연자원보다 경제적 복지에 미치는 영향이 훨씬 더 큰 이유가 여기에 있다. 신용등급은 그 나라가 부채를 갚을 가능성을 가리킨다. 순수한 경제적 데이터 외에도 정치, 사회, 심지어 문화적 요인을 고려해서 매겨진다. 석유가 풍부한 나라라도 독재 정부에 전쟁이 만연하고 사법 제도가 부패해 있다면 등급이 낮은 것이 보통이다. 그 결과 이 나라는 상대적 빈곤국으로 남아 있을 가능성이 크다. 석유자원을 최대한 활용하는 데 필요한 자본을 모을 수 없기 때문이다. 거꾸로 천연자원이 없더라도 평화를 유지하며, 사법제도가 공정하고, 자유정부를 가진 나라는 신용등급을 높게 받을 가능성이 크다. 그래서 이 나라는 싼 대가로 많은 자본을 모아 좋은 교육제도를 지원하고 하이테크 산업을 육성하는 데 사용할 수 있다.
p468
기독교나 나치즘 같은 종교는 불타는 증오심 때문에 수백만 명을 살해했다. 자본주의는 차가운 무관심과 탐욕 때문에 수백만 명을 살해했다. 대서양 노예무역은 아프리카인에 대한 인종적 증오에서 생긴 것이 아니다. 주식을 구매한 개인이나 그것을 판매한 중개인, 노예무역 회사의 경영자는 아프리카인에 대해 거의 생각해본 적이 없었다. 사탕수수 농장 소유자들도 마찬가지였다. 많은 농장주들이 농장에서 멀리 떨어진 곳에 살았고, 그들이 원한 유일한 정보는 손익을 담은 깔끔한 장부였다.
대서양 노예무역이 그것만 아니라면 흠이 없었을 기록에 새겨진 유일한 오점이 아니었다는 점도 기억해야 한다. 앞장에서 이야기했던 벵골 대기근 역시 이와 비슷한 역학에 의해 유발되었다. 영국 동인도회사는 벵골인 1천만 명의 삶보다 자기 이익에 더 신경을 썼다. 인도네시아에서 네덜란드 동인도회사가 벌인 군사작전에 돈을 댄 것은 자기 자녀를 사랑하고, 자선사업에 돈을 내고, 좋은 음악과 미술을 즐기는 네덜란드의 정직한 시민들이었다. 하지만 이들은 자바, 수마트라, 말라카 주민들이 겪는 고통은 중히 여기지 않았다. 지구의 한켠에서 현대 경제가 성장하는 데는 수없이 많은 범죄아 악행이 뒤따랐다.
19세기에도 자본주의 윤리를 조금도 나아지지 않았다. 유럽을 휩쓴 산업혁명은 은행가와 자본 소유잘르 더욱 부유하게 만들었지만, 수백만 명의 노동자에게는 비참하고 가난한 삶을 선고했다. 유럽 식민지에서는 사태가 더욱 나빴다. 1876년 벨기에의 왕 레오폴드 2세는 중부 아프리카를 탐사하고 콩고 강 유역의 노예무역과 싸우는 것을 사명으로 내건 비정부 인도주의 기구를 설립했다. 기구에는 도로와 학교와 병원을 건설해 해당 지역 주민의 삶의 질을 개선한다는 책임도 주어졌다. 1885년 유럽 열강들은 이 기구에 콩고강 유역 230만 제곱킬로미터의 통제권을 부여하기로 합의했다. 벨기에 국토의 75배에 이르는 그 땅은 이후 콩고 자유국으로 알려지게 되었다. 그곳에 사는 주민 2천만~3천만 명의 의사를 물어본 사람은 아무도 없었다. 인도주의 기구는 눈 깜빡할 사이에 성장과 이윤이 진정한 목적인 기업으로 변했다. 학교와 병원은 잊혔고, 콩고강 유역은 광산과 농원으로 채워졌다. 그 운영은 대부분 벨기에 관리들이 맡았으며, 이들은 현지인을 무자비하게 착취했다.
고무 산업은 특히 악명 높았다. 고무는 빠른 속도로 중요한 산업 필수품이 되었고, 고무 수출은 벨기에의 가장 중요한 수입원이었다. 고무를 수집하는 아프리카 촌마을 사람들에게는 점점 더 많은 할당량이 주어졌다. 할당량을 채우지 못한 사람에게는 '게으름'을 이유로 잔인한 벌이 주어졌다. 팔을 절단해버리는가 하면 어떤 때는 한 마을 전체를 학살하기도 했다. 가장 보수적으로 추정해도 1885~1908년 성장과 이윤을 추구하는 과정에서 희생된 사람은 6백만 명(콩고 인구의 20퍼센트 이상)에 이르렀다. 일부에선 1천만 명에 육박한다고 추정한다.
1908년 이후, 특히 1945년 이후 자본주의의 탐욕에는 어느 정도 고삐가 죄어졌는데, 여기에는 공산주의에 대한 두려움이 가장 큰 이유였다. 하지만 불평등은 여전히 만연했다. 2014년의 경제적 파이는 1500년보다 크지만, 분배는 너무나 불공평해서 하루 종일 힘들게 일한 아프리카의 농부와 인도네시아의 노동자가 집에 가져오는 식량은 5백 년 전보다 더 적다. 농업혁명과 마찬가지로, 현대 경제의 성장은 거대한 사기로 드러날지도 모른다. 인류와 세계 경제는 성장을 거듭했을지라도 기아와 궁핍 속에서 살아가는 개인은 더욱 많아졌는지도 모른다.
자본주의는 이 같은 비판에 두 가지 대답을 가지고 있다. 첫째, 자본주의는 오직 자본주의자만이 운영할 수 있는 세계를 창조했다. 세상을 다른 방식으로 운영하려 했던 유일하게 진지한 시도는 공산주의였으나, 그것은 거의 모든 면에서 자본주의보다 훨씬 더 나빴기 때문에 다시 시도해볼 배짱이 있는 사람은 아무도 없다. 기원전 8500년의 사람은 농업혁명에 통한의 눈물을 흘렸을 수도 있지만 농업을 포기하기에는 너무 늦어버렸다. 이와 비슷하게 우리는 자본주의를 좋아하지 않을 수도 있지만 그것 없이는 살 수 없다.
두 번째 대답은 우리가 인내심을 더 많이 가져야 한다는 것이다. 자본주의자들은 천국이 눈앞에 와 있다고 약속한다. 인정하건대, 대서양 노예무역이나 유럽 노동계층 착취 같은 실수가 있었던 것은 사실이다. 하지만 우리는 거기서 교훈을 얻었다. 이제 조금만 더 기다리면, 파이가 좀 더 커지도록 놔두면, 모두에게 좀 더 두꺼운 조각이 돌아갈 것이다. 성과가 평등하게 분배되는 일은 영영 없겠지만, 모든 남자와 여자, 어린이를 만족시킬 만큼 충분히 도아갈 것이다. 심지어 콩고에서도.
실제로 긍정적인 신호가 조금 보인다. 최소한 순수한 물질적 기준에서는 - 기새수명, 어린이 사망률, 칼로리 섭취 - 2014년 평균적 인간의 생활수준은 1914년에 비해 상당히 나아졌다. 인구가 지수적으로 늘어났음에도 불구하고 그렇다. 하지만 경제적 파이가 무한히 커질 수 있을까? 모든 파이에는 원자재와 에너지가 필요하다. 어두운 결말을 예언하는 사람들은 호모 사피엔스가 조만간 우리 지구의 원자재와 에너지를 고갈시킬 것이라고 경고한다. 그러면 어떻게 될까?
p481
화학자들이 알루미늄을 발견한 것은 1820년대였지만, 광석에서 이것을 분리해내기는 극도록 힘들었고 비용이 많이 들었다. 수십년간 알루미늄은 금보다 더 비쌌다. 1860년대 프랑스의 나폴레옹 3세 황제는 가장 신분이 높은 손님들 앞에는 알루미늄 식기를 놓으라고 지시했다. 그보다 신분이 떨어지는 사람들 앞에는 금으로 된 나이프와 포크가 놓였다. 하지만 19세기 말 화학자들이 막대한 양의 알루미늄을 값싸게 추출하는 방법을 알아냈고, 오늘날 연간 총 생산량은 3천만 톤에 이른다. 만일 나폴레옹 3세가 자기 백성의 후손들이 샌드위치를 싸거나 남은 음식을 가져갈 때 값싼 알루미늄 호일을 사용한다는 이야기를 듣는다면 정말 놀랄 것이다.
제1차 세계대전 중 독일은 봉쇄를 당해 심각한 원자재 난을 겪었다. 특히 화약을 비롯한 폭발물의 원료가 되는 초석이 부족했다. 가장 중요한 초석 산지는 칠레와 인도에 있었고, 독일 내에서는 전혀 생산되지 않았다. 사실 초석은 암모니아로 대체할 수 있지만 생산 단가가 비싸기는 마찬가지였다. 독일에게는 다행스럽게도, 독일 시민이었던 유대인 화학자 프리츠 하버가 1908년 말 그대로 공기에서 암모니아를 생산해내는 공정을 발견했다. 전쟁이 발발했을 때 독일은 하버의 발견을 이용해 화약을 산업적으로 생산하기 시작했다. 이때의 원자재는 공기였다. 하버의 발견이 없었더라면 독일은 1918년 11월 이전에 항복했을 것이라고 일부 학자들은 주장한다. 하버는 이 발견으로 1918년 노벨상을 수상했다. 화학상이었지만 평화상은 아니다(하버는 전쟁터에서 독가스를 사용하는 분야의 개척자기이도 하다).
p509
현대사회에서도 핵가족은 완전히 사라지지 않았다. 국가와 시장은 경제적, 정치적 역할의 대부분을 가족에게서 빼앗으면서도 일부 중요한 감정적 기능은 남겨두었따. 현대 가족은 국가와 시장이(아직은) 제공할 수 없는 사적인 욕구를 제공하기로 되어 있다. 하지만 가족은 심지어 이 영역에서도 점점 더 많은 개입을 겪고 있다. 시장이 사람들의 연애 및 성생활 방식에 미치는 영향이 점점 더 커지고 있는 것이다. 전통적으로는 가족이 중매쟁이 역할을 맡았지만, 오늘날 연애와 성적 신호를 조종하고 그것을 얻도록 도와주는 것은 시장이다.
다만 그 비용이 비싸다. 옛날에는 신랑과 신부는 집 안의 거실에서 만났고, 한쪽 아버지에게서 다른 쪽 아버지로 돈이 건네졌다. 오늘날 연애는 술집과 카페에서 이루어지고, 돈은 연인의 손에서 웨이트리스에게 건네진다. 이보다 더 많은 돈이 패션 디자이너, 헬스 클럽 매니저, 다이어트 전문가, 미용사, 성형외과 의사의 은행계좌로 건너간다. 이들 모두는 우리가 시장이 제시하는 미의 이상에 가급적 가장 가까운 모습을 하고서 카페ㅔ 도착하다록 도와준다.
국가 역시 가족관계를 예전보다 더 예리하게 주시하고 있는데, 특히 부모와 자식 간의 관계에 주목한다. 부모에게는 아이들을 정부의 학교에 보내 교육받게 할 의무가 있다. 특별히 아이를 학대하거나 폭력을 행사하는 부모는 국가의 저지를 당할 수 있다. 필요한 경우 국가는 심지어 부모를 감옥에 보내고 아이들을 다른 가정에 위탁할 수도 있다.
불과 얼마 전까지만 해도 부모가 자녀를 때리거나 모욕하지 못하도록 국가가 나서야 한다고 누가 주장했다면 말도 안 되고 실행 불가능하다는 이유에서 무시당했을 것이다. 대부분의 사회에서 부모의 권위는 신성한 것으로 간주되었다. 부모에 대한 존경과 복종은 가장 신성한 가치에 속했고, 부모는 거의 모든 행위를 원하는 대로 할 수 있었다. 신생아를 살해하거나, 아기를 노예로 팔거나, 딸을 나이가 두 배가 넘는 남자와 결혼시키는 것이 모두 가능했다. 오늘날 부모의 권위는 완전히 후퇴했다. 젊은이들은 연장자의 말을 따를 의무가 점점 줄고 있고, 이에 비해 부모들은 자녀의 삶에서 무엇이든 잘못된 것이 있으면 비난을 받는다. 엄마와 아빠는 스탈린 치하의 여론조작용 재판에 출석한 피고인처럼, 프로이트의 법정에서 비난을 받는 곤경에 처하게 되었다.
p515
지난 2세기에 걸쳐 일어난 혁명들은 워낙 빠르고 과격한 나머지 사회질서의 가장 근본적인 특성 대부분을 변화시켰다. 전통적으로 사회질서는 단단하고 고정된 무엇이었다. '질서'는 안정성과 연속성을 의미했다. 급격한 사회혁명은 예외였고, 대부분의 사회 변화는 수많은 작은 단계가 축적된 결과였다. 사람들은 사회구조란 확고하고 영원하다고 가정하는 경향이 있었다. 가족과 공동체가 그 질서 내에서 자신이 차지하는 위치를 변화시키려 분투할 수는 있었지만, 스스로 질서의 근본구조를 바꿀 수 있다는 발상은 낯선 것이었다. 사람들은 "이것은 과거에도 늘 그랬고 앞으로도 늘 이렇게 이어질 거야"라고 선언하면서 현재 상태를 어쩔 수 없는 것으로 받아들이는 경향이 있었다.
지난 2세기 동안 변화의 속도는 너무나 빨랐고, 그런 나머지 사회질서는 동적이고 가변적이라는 속성을 지니게 되었다. 이제 그것은 끊임없이 변화하는 상태로 존재한다. 현대의 혁명이라고 하면 우리는 1789년(프랑스 혁명), 1848년(유럽의 연쇄적 민주화 혁명), 혹은 1917년(러시아 혁명)을 생각하는 경향이 있지만, 정확히 말하자면 오늘날은 모든 해가 혁명적이다. 요즘은 심지어 30세밖에 되지 않은 사람도 십대를 향해 "내가 어렸을 때는 세상이 지금과 완전히 달랐어"라고 말할 수 있다. 십대는 그 말을 믿지 않겠지만, 그 말은 사실이다. 예컨대 인터넷이 널리 쓰이게 된 것은 1990년 초반에 이르러서였다. 불과 20년밖에 되지 않은 일이다. 오늘날 우리는 인터넷 없는 세상은 상상할 수가 없다.
그러므로 현대사회의 속성을 규정하려는 모든 시도는 카멜레온의 색을 규정하려는 것과 비슷하다. 우리가 확신할 수 있는 유일한 속성은 끊임없는 변화다. 우리는 여기에 익숙해져, 대부분의 사람들은 사회질서를 바뀔 수 있는 무엇, 우리가 마음대로 가공하고 개선할 수 있는 무엇이라고 생각한다. 현대 이전 지배자들의 주된 약속은 전통적 질서를 수호하겠다거나 심지어 잃어버린 모종의 황금시대로 돌아가겠다는 것이었지만, 지난 2세기 동안 정치에서는 구세계를 파괴하고 그 자리에 더 나은 것을 건설하겠다고 약속하는 것이 기본이었다. 가장 보수적인 정당조차 현상을 그대로 유지하겠다고만 약속하지는 않는다. 모든 사람이 사회 개혁, 교육 개혁, 경제 개혁을 약속하고, 어떤 때는 공약을 실천하기도 한다.
p518. 우리 시대의 평화.
대부분의 사람들은 우리가 얼마나 평화로운 시대에 살고 있는지에 대해 정당하게 평가하지 않는다. 우리 중에 천 년 동안 살아온 사람은 아무도 없으니, 과거 세상이 얼마나 폭력적이었는지를 쉽게 망각한다. 그리고 전쟁이 점점 드물어질수록 한 번 발발하면 더욱 많은 관심을 끈다. 브라질 사람과 인도 사람이 누리는 평화를 떠올리는 사람보다 오늘날 아프가니스탄과 이라크에서 벌어지고 있는 전쟁을 생각하는 사람이 더 많다.
이보다 더욱 중요한 사실이 있다. 우리는 집단 전체보다 개인의 고통에 더욱 쉽게 공감할 수 있다는 점이다. 하지만 거시적 역사 과정을 이해하려면, 개인의 이야기보다 대중의 통계를 검토할 필요가 있다. 2000년에 전쟁으로 인한 사망자는 31만 명, 폭력 범죄로 인한 사망자는 이와 별도로 52만 명이었다. 개별 희생자는 한 명 한 명이 하나의 파괴된 세계이고, 파탄 난 가정이며, 친구와 친척이 평생 안고 살아야 할 상처다. 하지만 거시적 시각에서 보면, 이 83만 명은 2000년의 총 사망자 5,600만 명에서 1.5퍼센트를 차지할 뿐이다. 그해에 자동차 사고로 인한 사망자는 126만 명(총 사망자의 2.25퍼센트), 자살로 인한 사망자는 81만 5천 명(1.45퍼센트)이었다. 2002년의 수치는 더욱 놀랍다. 총 사망자 5,700만 명 중에서 전쟁으로 인한 사망자는 17만 2천 명, 폭력 범죄로 인한 사망자는 56만 9천 명에 불과했다(인간의 폭력에 의한 전체 사망자는 74만 1천 명이었다). 이와 대조적으로 자살자는 87만 3천 명에 이르렀다. 9.11 테러가 일어난 다음 해라 테러와 전쟁에 대한 이야기가 많았음에도 불구하고 한 개인을 죽이는 것은 테러리스트나 군인, 마약상이 아니라 본인 스스로일 가능성이 컸던 것이다.
오늘날 세계 대부분의 지역에서 사람들은 잠자리에 들면서 한밤중에 이웃 부족이 자기 마을을 둘러싸고 모두를 학살할지 모른다는 두려움을 품지 않는다. 부유한 영국 시민은 녹색 옷을 입은 명랑한 강도들이 자신을 습격해 돈을 빼앗아 가난한 자들에게 나눠줄지도 모른다는 두려움 없이 노팅엄에서 셔우드 숲을 지나 런던으로 매일 여행한다. 학생들은 선생의 채찍질을 견디지 않으며, 아이들은 부모가 청구서의 돈을 내지 못해 노예로 팔릴 것을 두려워할 필요가 없다. 여성들은 남편이 자신을 때리거나 외출을 막는 것을 법이 금지한다는 사실을 알고 있다.
세계 도처에서 이런 기대는 점점 더 많이 현실이 되어가고 있다. 폭력이 감소한 것은 대체로 국가의 등장 덕분이다. 역사를 통틀어 대부분의 폭력은 가족과 공동체가 서로 일으키는 국지적 반목의 원인이었다. 앞서 살펴보았듯이 지역 공동체보다 큰 정치 조직을 알지 못했던 초기 농부들은 만연하는 폭력으로 고통받았다.
왕국과 제국이 강력해지면서 공동체의 고삐를 죄자, 폭력은 줄어들었다. 중세 유럽의 지방분권형 왕국의 경우 해마다 인구 10만 명당 20~40명이 살해되었으나, 최근 몇십 년간 국가와 시장이 무소불위의 힘을 얻고 공동체가 소멸하자 폭력의 발생률은 아주 낮아졌다. 오늘날 세계 평균을 보면 연간 10만 명당 피살자는 아홉 명에 지나지 않는다. 그리고 대부분의 살인은 소말리아나 콜롬비아 같은 취약한 국가에서 발생한다. 유럽의 중앙집권적 국가에서는 평균 살인사건 발생률이 연간 10만 명당 한 명에 불과하다.
국가가 권력을 이용해서 자국민을 살해하는 경우가 있다는 것은 분명하며, 이런 사례가 우리의 기억과 두려움에 크게 다가올 때도 종종 있다. 20세기에 자국의 보안 병력에 의해 살해된 국민은 수억 명은 아니지만 수천만 명에 이른다. 그럼에도, 거시적으로 볼 때 국가가 운영하는 법원과 경찰 덕분에 세계 전체의 안전 수준은 아마 높아졌을 것이다. 심지어 가혹한 독재정권 아래일지라도, 어떤 사람이 다른 사람의 손에 목숨을 잃을 가능성은 현대 이전에 비해 훨씬 낮아졌다.
1964년 브라질에서 군사 독재정권이 수립되었다. 그 통치는 1985년까지 계속되었다. 그 20년 동안 수천 명의 브라질인이 정권에 의해 살해되었고, 또 다른 수천 명이 투옥되고 고문을 당했다. 하지만 이 정권 최악의 시기에도 평균적인 리우데자네이루 시민이 다른 사람의 손에 죽을 확률은 와오라니, 아라웨테, 야노마뫼 족의 평균보다 훨씬 더 낮았다. 아마존 밀림 깊은 곳에 사는 이들 토착민에게는 군대도 경찰도 감옥도 없다. 인류학적 연구에 따르면 이 종족 남성의 4분의 1에서 2분의 1가량은 이르든 늦든 재산이나, 여성, 특권을 두고 벌어진 폭력적 충돌로 인해 사망한다.
p526
이처럼 행복한 진전을 설명하기 위해서, 학자들은 우리가 결코 읽어볼 엄두가 나지 않을 정도로 많은 책과 논문을 써서 이 현상에 기여하는 요인을 몇 가지 확인했다.
첫 번째이자 다른 무엇보다, 전쟁의 대가가 극적으로 커졌다. 모든 평화상을 종식시킬 노벨 평화상은 원자폭탄을 개발한 로버트 오펜하이머와 그의 동료들에게 주어졌어야 할 것이다. 핵무기는 초강대국 사이의 전쟁을 집단 자살로 바꾸어놓았으며, 군대의 힘으로 세계를 지배하려는 시도를 불가능하게 만들었다.
둘째, 전쟁의 비용이 치솟은 반면 그 이익은 작아졌다. 역사상 대부분의 기간 동안 정치조직체들은 적의 영토를 약탈하거나 병합함으로써 부를 획득할 수 있었다. 대부분의 부는 들판과 가축, 노예와 금 같은 물질적인 것이었기 때문에 약탈이나 점령이 쉬웠다. 오늘날 부는 주로 인적 자본과 조직의 노하우로 구성된다. 그 결과 이것을 가져가거나 무력으로 정복하기가 어려워졌다. 캘리포니아를 생각해보자. 처음에 그 부의 원천은 금광이었지만, 오늘날은 실리콘과 셀룰로이드를 기반으로 하고 있다. 실리콘밸리와 할리우드의 영화 산업 말이다. 만일 중국이 캘리포니아를 침공해 샌프란시스코 해변에 1백만 명의 병사를 상륙시키고 내륙으로 돌격한다면 어떤 일이 일어날까? 이들이 얻을 것은 별로 없다. 실리콘밸리에는 실리콘 광산이 없다. 부는 구글의 엔지니어들과 할리우드의 대본가, 감독, 특수효과 전문가의 마음속에 있다. 이들은 중국의 탱크가 선셋대로에 진입하기 전에 인도의 방갈로르나 뭄바이로 향하는 첫 비행기에 몸을 싣고 있을 것이다.
가령 이라크의 쿠웨이트 침공처럼 아직도 세상에서 벌어지는 몇 안 되는 국제적 전면전이 구식의 물질적 재화가 부의 척도인 지역에서 벌어진다는 사실은 우연이 아니다. 쿠웨이트의 왕족들은 해외로 달아날 수 있지만, 유전은 그대로 남아 점령되었다. 전쟁의 이익이 전만 못해진 데 비해, 평화는 과거 어느 때보다도 수익성이 좋아졌다. 전통 농업 경제체제에서 장거리 교역과 해외 투자는 부차적인 일이었다. 따라서 전쟁 비용을 피하는 것을 차치하면, 평화는 그다지 수익을 낳지 못했다. 만일 1400년 프랑스와 영국이 평화 관계였다면, 프랑스인들은 무거운 세금을 내지 않아도 되었을 것이고 영국 침략군의 파괴에 고통받지도 않았을 것이다. 하지만 이것을 제외하면 평화가 딱히 프랑스인들의 지갑을 불려주지는 못했을 것이다.
현대 자본주의 경제체제에서 대외 교역과 투자는 매우 중요해졌다. 그러므로 평화는 훌륭한 배당이익을 낳는다. 중국과 미국이 평화를 유지하는 한, 중국인들은 미국에 제품을 파고 월스트리트에서 거래하며 미국의 투자를 받아서 번영할 수 있다.
마지막 요인은 세계 정치 문화에 지각변동이 일어났다는 점이다. 역사상 많은 엘리트들은 - 예컨대 훈 족장, 바이킹 귀족, 아즈텍 사제 - 전쟁을 긍정적인 선으로 보았다. 한편 다른 사람들은 악으로 보기는 했지만 필요악으로 여겼으므로, 자신에게 유리하도록 바꾸는 편이 낫다고 생각했다. 우리 시대는 평화를 사랑하는 엘리트가 세계를 지배하는 역사상 최최의 시대다. 정치인, 사업가, 지식인, 예술가 등은 진심으로 전쟁을 막을 수 있는 악이라고 본다(과거에도 초기 기독교도와 같은 평화주의자가 있기는 했지만, 이들도 드물게 권력을 잡은 경우 "너의 왼뺨을 내밀어라"는 주문을 잊어버리는 경향이 있었다).
세 요인 사이에는 양의 되먹임 고리가 존재한다. 핵무기에 의한 대량학살 위협은 평화주의를 육성한다. 평화주의가 퍼지면 전쟁이 물러가고 무역이 번창한다. 무역은 평화의 수익과 전쟁의 비용을 모두 늘린다. 세월이 흐르면서 이 되먹임 고리는 전쟁에 또 다른 장애물을 만들어내는데, 궁극적으로는 이것이 모든 장애 중 가장 중요한 것으로 판명될지도 모른다. 점점 치밀해지는 국제적 연결망은 국가들의 독립성을 서서히 약화시켜, 어느 한 나라가 일방적으로 전쟁을 일으킬 가능성을 줄인다. 대부분의 국가들이 더 이상 전면전을 벌이지 않는 이유는 단지 그들이 이제 독립적이지 못하기 때문이다. 비록 이스라엘, 이탈리아, 멕시코, 타이 국민들이 독립성이라는 환상을 품고 있을지라도, 사실 그들의 정부는 독립적인 경제, 외교 정책을 수행할 수 없으며 혼자 힘으로는 전면전을 수행할 능력이 없는 것도 확실하다. 3장 <제국의 비전>에서 설명했듯, 우리는 지구 제국의 형성을 목격하고 있는 중이다. 이전의 제국들과 마찬가지로 이번 제국 역시 그 국경 내에서 평화를 강제한다. 그리고 그 국경이 지구 전체를 아우르기 때문에, 세계 제국은 세계 평화를 효과적으로 강제한다.
자, 그렇다면 현대는 제1차 세계대전의 참호와 히로시마의 버섯 구름과 히틀러와 스탈린이라는 잔악한 광인들로 대표되는 무분별한 대량학살, 전쟁, 압제의 시대인가? 아니면 남미에서 파인 적 없는 참호, 모스크바와 뉴욕에서 피어오르지 않은 버섯구름, 마하트마 간디와 마틴 루서 킹의 평화로운 얼굴로 대표되는 평화의 시대인가? 여기에 대한 답은 시기 선택의 문제다. 과거에 대한 우리의 시각이 최근 몇 년간의 사건에 의해 얼마나 크게 왜곡되는지를 깨닫는 것은 정신이 번쩍 드는 일이다. 만일 이 장이 1945년이나 1962년에 쓰였다면, 지금보다 훨씬 더 분위기가 어두웠을 것이다. 이 책은 2014년에 쓰였기에 현대사에 대해 상대적으로 밝은 접근법을 취하고 있는 것이다.
낙관주의자와 비관주의자 모두를 만족시키기 위해서는 다음과 같이 결론 내릴 수도 있겠다. 우리는 천국과 지옥으로 나뉘는 갈림길에 서 있다. 한쪽으로 난 문과 다른 쪽으로 열린 입구 사이에서 초조하게 오락가락하고 있다. 역사는 우리의 종말에 대해 아직 결정 내리지 않았으며, 일련의 우연들은 우리를 어느 쪽으로도 굴러가게 만들 수 있다.
p532
행복의 장기적 역사를 연구한 사람은 드물지만, 거의 모든 학자와 보통 사람이 여기에 대해 막연한 선입견을 가지고 있다. 흔히들 역사가 지속되는 기간 동안 인간의 능력은 계속 커졌다고 생각한다. 인간은 불행을 줄이고 자신의 소망을 충족하는 일에 능력을 사용하는 것이 일반적이므로, 그렇다면 우리는 중세 시대의 선조에 비해 틀림없이 행복할 것이다. 또한 중세 사람은 석기시대 수렵채집인보다 틀림없이 행복했을 것이다. 하지만 이런 진보적 설명은 설득력이 없다. 익히 아는 바대로 새로운 재능, 행태, 기술이 반드시 더 나은 삶을 만들어주는 것은 아니다. 인류가 농업혁명에서 농경을 배웠을 때, 집단으로서 이들이 환경을 바꾸는 힘은 커졌을지 모르지만 수많은 개인의 삶은 더 팍팍해졌다.
농부들은 수렵채집인보다 열심히 일해야 했지만, 먹는 음식은 영양가도 더 적었고 근근이 버틸 양밖에 되지 않았다. 그리고 질병과 착취에 훨씬 더 많이 노출되었다. 이와 비슷한 예로, 유럽 제국의 확대는 아이디어와 기술과 농작물을 이동, 순환시키고 새로운 상업로를 개척한 덕분에 인류의 집단적 힘을 크게 늘렸다. 하지만 수백만 명의 아프리카인, 아메리카 원주민, 호주 원주민에게는 좋은 소식이 아니었다.
인간이 권력을 남용하는 경향이 있다는 사실은 이미 증명되어 있다. 이를 감안하면 사람들이 더 많은 영향력을 누리면 더 행복해질 것이라고 생각하는 것은 순진한 태도로 보인다. 이 견해에 반대하는 사람 중 일부는 정반대 입장을 취하여, 인간의 능력과 행복 사이에는 역관계가 존재한다고 말한다. 권력은 부패하게 마련이며, 인류가 점점 더 많은 힘을 갖게 될수록 우리의 진정한 욕구와는 동떨어진 차가운 기계적 세상이 만들어졌다는 것이다.
그들에 따르면, 진화의 결과 우리의 마음과 신체는 수렵채집인의 삶에 맞도록 주조되었다. 그러나 우리가 처음에 농업으로, 그다음에 산업으로 이행한 탓에, 우리는 부자연스러운 삶을 살 수밖에 없다는 선고를 받았다. 타고난 성향과 본능을 모두 표현할 수 없으므로 가장 깊은 욕구를 만족시킬 수 없는 삶이라는 것이다. 도시 중산층의 안락한 삶을 이루는 어떤 것도 매머드 사냥에 성공한 수렵채집인 무리가 경험한 흥분의 도가니와 형언할 수 없는 기쁨에 근접할 수 없다. 새로운 발명이 하나씩 이루어질 때마다 우리는 에덴의 낙원으로부터 몇 킬로미터씩 떨어질 뿐이다.
하지만 이처럼 모든 발명의 뒤에서 어두운 그림자만을 보려는 낭만적 고집은 진보가 필연이라는 믿음에 못지않게 교조적이다. 우리는 우리 내면의 수렵채집인과 접촉이 끊겼을지도 모르지만, 그게 꼭 나쁘기만 한 것은 아니다. 예컨대 지난 2세기 동안 발전한 현대 의학 덕분에 어린이 사망률은 33퍼센트에서 5퍼센트 이하로 떨어졌다. 이 사실이 의학이 발달하지 않았더라면 사망했을 어린이 본인뿐 아니라 그 가족과 친구들의 행복에 엄청나게 기여했다는 것을 의심할 사람이 과연 있을까?
이보다 좀 더 미묘한 것은 중도를 취하는 입장이다. 과학혁명이 일어나기 전에는 권력과 행복 간에 분명한 상관관계가 없었다. 중세 농부는 실제로 그들의 수렵채집인 조상보다 더욱 비참하게 살았을지 모른다. 하지만 지난 몇 세기 동안 인류는 스스로의 능력을 더욱 현명하게 사용하는 법을 배웠다. 현대 의학의 승리는 한 예에 불과하고, 이외에도 전대미문의 성취가 많다. 폭력은 급격히 줄었고, 국제전은 사실상 사라졌으며, 대규모 기근은 거의 자취를 감추었다.
하지만 이 또한 과도한 단순화다. 첫째, 낙관적 평가의 표본으로 삼은 기간이 너무 짧다. 인류 대다수가 현대 의학의 결실을 누리기 시작한 것은 1850년 이후의 일이고, 어린이 사망률이 급격하게 떨어진 것은 20세기에 일어난 현상이다. 대규모 기근은 20세기 중반까지도 상당 지역에 큰 피해를 입혔다. 1958~1961년 중국 공산당의 대약진운동 당시 1천만~5천만 명이 굶어 죽었다. 국제전이 드물어진 것은 1945년 이후에 와서였는데 대체로 핵무기로 인해 인류가 절멸할 위협이 새로 등장한 덕분이었다. 따라서 판단하기에는 아직 이르다. 최근 몇십 년이 인류에게 전대미문의 황금시대였지만, 이것이 역사의 흐름이 근본적으로 바뀐 것을 대변하는 현상인지 아니면 단명할 행운의 회오리바람에 불과한지 말하기는 이르다. 우리는 현대성을 판단할 때 21세기 서구 중산층의 시각을 취하려는 유혹을 크게 느끼지만, 우리는 19세기 웨일스의 광산 노동자, 중국의 아편 중독자, 태즈메이니아 원주민의 시각을 잊어서는 안 된다. 원주민 트루가니니는 호머 심슨보다 그 중요성이 덜하지 않다.
둘째, 지난 반세기는 짤막한 황금시대였는데 이것조차 미래에 파국을 일으킬 씨를 뿌린 시기였다는 사실이 나중에 확인될지도 모른다. 지난 몇십 년간 우리는 지구의 생태적 균형을 수없이 많은 새로운 방법으로 교란해왔으며, 이것이 끔찍한 결과를 빚고 있는 중인 듯하다. 우리가 무모한 소비의 잔치를 벌이면서 인류 번영의 기초를 파괴하는 중이라는 사실을 가리키는 증거는 많다.
결론적으로, 우리는 다른 모든 동물의 운명을 깡그리 무시할 때만 현대 사피엔스가 이룩한 전례 없는 성취를 자축할 수 있다. 우리는 스스로를 질병과 기근으로부터 보호해주는 물질적 부를 자랑하지만, 그중 많은 부분은 실험실의 원숭이, 젖소, 컨베이어 벨트의 병아리의 희생 덕분에 축적된 것이다. 지난 2세기에 걸쳐 수백억 마리의 동물들이 산업적 착취체제에 희생되었으며, 그 잔인성은 지구라는 행성의 연대기에서 전대미문이었다. 만일 우리가 동물권리 운동가들의 주장을 10분의 1만이라도 받아들인다면, 현대의 기업농은 역사상 가장 큰 범죄를 저지르는 중이라고 말해도 지나치지 않다. 지구 전체의 행복을 평가할 때 오로지 상류층이나 유럽인이나 남자만을 대상으로 하는 것은 잘못이다. 인류만의 행복을 고려하는 것도 마찬가지로 잘못일 것이다.
p543
현실이 그와 같다면, 심지어 영원한 생명도 불만으로 이어질 수 있다. 한번 상상해보자. 모든 질병을 고치는 치료법, 노화를 효과적으로 막아주는 요법, 젊음을 영원히 유지하는 회춘요법 등을 찾아냈다고 하자. 그 직접적인 결과는 분노와 불안이 사상 유례없이 광범위하게 일어나는 현상일 것이다. 새로운 기적의 요법을 받을 돈이 없는 사람 - 대다수의 사람 - 들은 격렬한 분노에 휩싸일 것이다. 역사를 통틀어 가난하고 압박받는 사람들이 스스로를 위안해온 것은 적어도 죽음만은 누구에게나 공평하게 찾아온다는 믿음이었다. 부자나 권력자도 죽을 수밖에 없다는 사실이었다. 가난한 사람들은 자신들은 죽어야 하는데 부자는 영원히 젊고 아름답게 살 수 있다는 생각에 마음이 편치 않을 것이다.
하지만 새로운 요법을 받을 경제적 여유가 있는 극소수의 사람들도 그렇게 희열을 느끼지는 않을 것이다. 걱정해야 할 일이 많이 생길 것이기 때문이다. 새로운 요법이 생명과 젊음을 연장해줄 수는 있지만, 시체를 되살리지는 못한다. 나와 내 사랑하는 이가 영원히 살 수는 있지만 트럭에 치이거나 테러리스트에 의해 산산조각이 나지 않는다는 조건하에서만 그렇다고 생각해보라. 얼마나 끔찍하겠는가. 영원히 살 수 있는 잠재력이 있는 사람들은 심지어 아주 조그만 위험을 무릅쓰는 것도 몹시 싫어하게 될 것이며, 배우자나 자녀, 친한 친구를 잃는 데 따르는 고통을 견딜 수 없게 될 것이다.
p556
그 결과, 대부분의 종교와 철학은 행복에 대해 자유주의와는 매우 다른 접근법을 취했다. 불교의 입장은 특히 흥미롭다. 불교는 행복의 문제를 다른 어떤 종교나 이념보다도 중요하게 취급했다. 불교도들은 지난 2,500년에 걸쳐 행복의 본질은 무엇인가, 무엇이 행복을 가져다주는가를 체계적으로 연구했다. 과학자들 사이에서 불교 철학과 명상법에 대한 관심이 점점 커져가는 이유가 여기에 있다. 행복에 대한 불교의 접근방식은 생물학적 접근방식과 기본적 통찰의 측면에서 일치한다. 즉, 행복은 외부 세계의 사건에서 오는 것이 아니라 신체 내부에서 일어나는 과정의 결과라는 것이다. 하지만 동일 한 통찰에서 시작했음에도, 불교는 생물학과는 매우 다른 결론에 도달한다.
불교에 따르면, 대부분의 사람들은 행복을 즐거운 감정과, 고통을 불쾌한 감정과 동일시한다. 그래서 자신의 느낌을 매우 중요히사며, 점점 더 많은 즐거움을 추구하는 한편 고통을 피하려고 한다. 우리가 살아가면서 하는 모든 일은 다리를 긁든 의자에서 꼼지락 거리든, 세계대전을 치르든 모두 그저 즐거운 감정을 느끼기 위한 시도에 지나지 않는다.
문제는 우리의 감정이 바다의 파도처럼 매 순간 변화하는 순간적 요동에 지나지 않는다는 데 있다. 5분 전에 나는 즐겁고 결의에 차 있었지만, 지금 나는 슬프고 낙담해 있다. 그러므로 만일 내가 즐거운 감정을 경험하고 싶다면, 불쾌한 감정을 몰아내면서 즐거운 감정을 끊임없이 추구해야 한다. 설령 한 번 그러는 데 성공했다 해도 곧바로 모든 것을 다시 시작해야 한다. 그간의 노고에 대한 보상은 전혀 없다.
그토록 덧없는 보상을 받는 것이 뭐가 그리 중요한가? 나타나자마자 곧바로 사라지는 무언가를 달성하기 위해서 그토록 힘들게 분투할 필요가 무엇인가? 불교에서 번뇌의 근원은 고통이나 슬픔에 있지 않다. 심지어 덧없음에 있는 것도 아니다. 번뇌의 진정한 근원은 이처럼 순간적인 감정을 무의미하게 끝없이 추구하는 데 있다. 이 때문에 우리는 항상 긴장하고, 동요하고, 불만족스러운 상태에 놓인다. 이런 것을 추구하기 때문에 우리 마음은 결코 만족하지 못하고, 기븜을 느낄 때조차 만족스럽지 않다. 기쁜 감정이 금방 사라져버릴 것이 두렵고, 이 감정이 이어져 더 강해지기를 갈망하기 때문이다.
사람들이 번뇌에서 벗어나는 길은 이런저런 덧없는 즐거움을 느끼는 것이 아니라 이 모든 감정이 영원하지 않다는 속성을 이해하고 이에 대한 갈망을 멈추는 데 있다. 이것이 불교 명상의 목표이다. 명상을 할 때는 자신의 몸과 마음을 깊이 관찰하여 모든 감정이 끊임없이 일어나고 사라지는 것을 목격하며, 그런 감정을 추구하는 것의 덧없음을 깨달아야 한다. 그런 추구를 중단하면 마음은 느긋하고, 밝고, 만족스러워진다. 즐거움, 분노, 권태, 정욕 등 모든 종류의 감정은 계속해서 일어나고 사라지지만, 일단 당신이 특정한 감정에 대하 추구를 멈추면 어떤 감정이든 있는 그대로 받아들일 수 있게 된다. 어쩌면 일어났을지도 모르는 무언가를 공상하는 대신에 지금 이 순간을 사는 것이다. 그 결과 완전한 평정을 얻게 된다.
평생 미친 듯이 쾌락을 찾아 헤매던 사람들은 상상조차 할 수 없는 수준의 평정이다. 그런 사람은 바닷가에 수십 년간 서 있으면서 모종의 '좋은' 파도를 받아들여 그것이 흩어져버리지 못하도록 애쓰는 동시에 모종의 '나쁜' 파도는 밀어내어 자신에게 가까이 오지 못하게 만들려고 애쓰는 사람과 마찬가지다. 이 사람은 날이면 날마다 해변에 서서 무익한 노력을 거듭하면서 스스로의 마음을 괴롭힌다. 그러다 마침내 그는 모래에 주저앉아, 파도가 마음대로 오고 가게 놔둔다. 얼마나 평화로운가!
현대의 자유주의적 문화의 입장에서 이런 사랑은 너무나 낯설었다. 그래서 서구의 뉴에이지 운동은 불교의 통찰을 처음 대했을 때 이를 자유주의적 용어로 바꿔버렸다. 완전히 꺼꾸로 받아들인 것이다.
뉴에이지 문화는 주로 이렇게 주장했다. "행복은 외적인 조건에 좌우되는 것이 아니다. 오로지 우리 내면의 느낌에 좌우되는 것이다. 부나 지위와 같은 외적 성취에 더 이상 매달리지 말고 내면의 느낌에 귀를 기울여야 한다." 혹은 보다 간결하게 이렇게 주장했다. "행복은 내부에서 시작된다." 이것은 생물학자들의 주장과 정확히 일치하는 슬로건이다. 하지만 부처의 가르침과는 거의 반대라고 할 수 있다. 행복이 외적 조건에 달려 있지 않다고 하는 점에서 부처의 생각은 현대 생물학이나 뉴에이지 운동과 궤를 같이하지만, 부처의 가장 심원하고 중요한 통찰은 따로 있다. 진정한 행복은 주관적 느낌이나 감정과도 무관하다는 점이다. 사실 우리가 스스로의 주관적 느낌을 중요하게 여기면 여길수록 우리는 더 많이 집착하게 되고, 괴로움도 더욱 심해진다. 부처가 권하는 것은 우리가 외적 성취의 추구뿐 아니라 내 내면의 느낌에 대한 추구 역시 중단하는 것이다.
요약하자면, 주관적 안녕을 묻는 설문은 우리의 안녕을 주관적 느낌과 동일시하고, 행복의 추구를 특정한 감정 상태의 추구와 동일시한다. 많은 전통철학과 불교를 비롯한 종교는 이와 반대되는 입장을 취한다. 행복을 얻는 비결은 자신의 진실한 모습을 - 자신이 정말로 어떤 사람인지를 - 파악하는 데 있다는 것이다. 대부분의 사람들은 스스로의 감정, 호불호를 자신과 동일시하는데, 이는 잘못이다. 이들은 분노를 느끼면 '나는 화가 났다. 이것은 나의 분노다'라고 생각한다. 그래서 그들은 어떤 감정을 피하고 또 다른 감정을 추구하느라 일생을 보낸다. 그들은 자신과 자신의 감정은 다르다는 것을 알지 못한다. 특정한 감정을 끈질기게 추구하는 행위는 자신을 고통스럽게 만드는 함정이라는 사실도 모른다.
만일 이것이 사실이라면, 행복의 역사에 대한 우리의 이해 전체는 오도된 것일 수 있다. 사람들의 기대가 충족되었느냐의 여부, 쾌락적 감정을 즐기는가의 여부는 그리 중요하지 않을지도 모른다. 주된 질문은 사람들이 스스로에 대한 진실을 알고 있느냐 하는 것이다. 오늘날의 사람들이 고대의 수렵 채집인이나 중세의 농부보다 이런 진실을 조금이라도 더 잘 이해하고 있다는 증거가 있을까?
p561
하지만 21세기에 이것은 더 이상 사실이 아니다. 호모 사피엔스는 스스로의 한계를 초월하는 중이다. 이제 호모 사피엔스는 자연선택의 법칙을 깨기 시작하면서, 그것을 지적설계의 법칙으로 대체하고 있다.
자동차의 구매(신차,중고차), 정비에 대한 기본 상식 및 카센터 선택에 대한 요령, 보험 상식 등 자동차 전반에 대한 입문서 정도라고 할 수 있을 듯.
자동차를 몰기 시작한 사람들이 읽으면 좋겠다.
(교보문고에서는 정치/사회로 분류되어 있던데, 이 책은 아무리 봐도 경제/경영 분야가 더 어울린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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p21
소비자의 입장에서 가장 좋은 (신차) 구매 방법은 현찰 박치기다. 현찰로 지불하고 차를 사는 것. 가장 고전적이고 깔끔한 방법이다. 추가로 이자를 내야 할 필요가 없으니, 별도의 부담이 없는 것이다. 가게에서 물건 사듯 물건값 지불하고 가져오는 것. 소비자에게 유리한 가장 단순하고 명쾌한 방법이다.
물론 이 경우 영업사원에게서 추가 할인을 받기는 불가능에 가깝다. 할부로 팔아야 금융회사에서 수당을 받고 그 수당 한도 내에서 할인을 기대할 수 있는데 현금으로 차를 사는 고객에게는 할인을 해줄 수 있는 여지가 그만큼 줄어들기 때문이다.
여기서 '신의 한 수'가 있다. 이재에 밝아 땡전 한 푼을 허투루 쓰지 않는 세무사 출신인 후배가 있다. 자린고비까지는 아니지만 알뜰하기가 이루 말할 수 없다. 그런 친구가 차를 샀다. 어떻게 샀을까. 현금으로 차를 사는 것과 같지만 영업사원에게서 기대할 수 없었던 추가 할인 효과를 내는 방법. 바로 카드 일시불이다.
통장에 찻값을 지불할 만큼의 잔고를 채워넣은 뒤 카드로 가볍게 긁어준 것. 사전에 카드사에 연락해 자동차 구매 건으로 카드 사용한도를 풀어달라고 하는 것도 잊지 않았다. 카드 일시불 결제가 현금 결제보다 더 유리한 이유는 바로 카드 포인트에 있다. 그냥 현찰로 가져다줬으면 생기지 않았을 포인트였는데 카드로 결제해 그만큼 이익을 본 것이다. 영업사원이 가격 할인을 해주지 않아도 할인받은 것과 같은 셈이다.
차를 판매하는 입장에서 카드 일시불 고객은 최악의 경우다. 제값 받고 팔아도 카드 수수료만큼 카드 회사에 돈을 줘야 해 그만큼 손해이기 때문이다.
돈을 가졌으면 이렇게 손해를 보지 않고, 추가 부담 없이 차를 살 수 있다. 하지만 돈이 없으면 돈을 가진 금융회사에 손을 벌려 찻값과 돈값을 함께 지불해야 한다. 돈 없는 사람이 더 많은 돈을 써야 하는 세상이다.
p42. 새 차 길들이는 방법
1. 사용설명서 정독
2. 고속주행은 하지 말자 : 2,000km 까지는 최대한 부드럽게, RPM은 2000전후로(최대 3000 이하)
새 차는 출고 후 3개월가량이 지나야 보디 페인트가 완전히 건조되고, 차의 도장이 안정된다. 이 기간에 광택작업(도장 표면을 얇게 박피해서 빤짝거리게 하는 것) 및 자동세차를 피해야 한다. 요즘은 광택작업으로 표면 박피가 아닌 코팅을 하기도 하는데 이 경우도 3개월이 지나서 하는 것이 좋다.
p221
1. 휠베이스(축거)
차의 성능에 실질적으로 영향을 미치는 것은 길이보다 휠베이스다. 휠베이스는 앞바귀 중심과 뒷바퀴 중심 간의 거리다. 길이가 같아도 휠베이스가 길면 차의 움직임이 훨씬 안정적이고, 실내 공간도 더 넓어진다.
2. 트레드(윤거)
트레드와 휠베이스는 승차감에 영향을 준다. 트레드는 좌우측 바퀴 간의 거리로, 뒷바퀴굴림 방식의 스포츠카는 뒤트레드가 넓고, 앞바퀴굴림인 대다수의 차는 앞트레드가 더 넓다. 트레드와 휠베이스가 짧은 엑센트는 좁은 공간에서도 여유있게 움직일 수 있지만, 안정감은 떨어진다. 반면 트레드와 휠베이스가 긴 그랜저는 공간이 넓고 승차감도 우수하다. 다만 회전반경이 길어져 민첩하게 움직일 수 있는 능력은 떨어진다.
3. 압축비
압축비는 실린더 안에서 피스톤이 공기를 압축하는 비율이다. 많이 압축되면 폭발력도 세다. 가솔린 엔진에서 압축비가 너무 높아지면 금속을 망치로 두드리는 것과 같은 소리가 나는 현상(Knocking)이 발생하는 문제가 있다. 그래서 휘발유 엔진 압축비는 대개 11:1을 넘기지 않는다. 디젤엔진은 압축비가 훨씬 높다. 점화플러그가 없고 압축열에 의해 자연폭발시켜야 하는 구조이기 때문이다. 디젤 엔진의 압축비는 15~22:1 정도가 된다.
영화배우 하정우의 두번째 에세이집. 이번 에세이는 몇년 전 영화제에서 수상공약으로 내걸었던 국토종단 공약을 이행하면서 걷기에 빠지게 된 내용을 위주로 주로 걷기와 관련된 에피소드로 이루어져 있다.
가볍게 읽기에 좋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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p26
시간이 지날수록 나는 길 끝에서 느낀 거대한 허무가 아니라 길 위의 나를 곱씹어보게 되었다. 그때 내가 왜 하루하루 더 즐겁게 걷지 못했을까. 다시 오지 않을 그 소중한 시간에 나는 왜 사람들과 더 웃고 떠들고 농담하며 신나게 즐기지 못했을까. 어차피 끝에 가서는 결국 아무것도 없을 텐데.
내 삶도 국토대장정처럼 길 끝에는 결국 아무 것도 없을 것이다. 인생의 끝이 '죽음'이라 이름 붙여진 누구도 피해갈 수 없는 '무無’라면, 우리가 할 수 있는 일은 하루하루 좋은 사람들과 웃고 떠들며 즐겁게 보내려고 노력하는 것뿐일 테다.
많은 사람들이 길 끝에 이르면 뭔가 대단한 것이 있을 거라 기대한다. 나 역시 그랬다. 그러나 농담처럼 시작된 국토대장정은 걷기에 대한 나의 생각을 완전히 바꿔놓았다. 우리가 길 끝에서 발견하게 되는 것은 그리 대단한 것들이 아니었다. 내 몸의 땀냄새, 가까이 있는 사람들의 꿉꿉한 체취, 왁자한 소리들, 먼지와 피로, 상처와 통증.... 오히려 조금은 피곤하고 지루하고 아픈 것들이지 모른다. 그러나 이 별건 아닌 순간과 기억들이 결국 우리를 만든다.
p181. 꼰대가 되지 않는 법
영화감독이란 자리를 비워주는 것이로구나. 각 파트에서 알아서 하게끔, 자연스럽게 굴러가게끔 조율하고 가이드하면 족한 것이구나. 굳이 제일 앞에 나서서 모니터 가려가면서 목청 높이고 스태프들에게 지시할 필요가 없는 거로구나. 새삼스레 감독의 일에 대해 깨달은 것이다.
한 걸음 더 나아가 제작자는 촬영 현장에 놓인 자신의 의자마저 슬쩍 뒤로 빼는 사람이 아닐까 한다. 좋은 제작자는 촬영 현장이나 모니터가 가장 잘 보이는 곳에 자리잡고서 스태프나 배우들을 감시하고 관리하는 사람이 아니다. 좋은 제작자는 자신의 자리를 비우고 뒤로 물러나서 감독, 프로듀서, 배우들에게 스스로 최선의 결과물을 만들어낼 것을 독려하고 그럴 수 있는 분위기를 조성해준다.
그러나 이것은 이상일 뿐, 사실 제작자가 이렇게 뒤로 물러나기는 쉽지 않다. 왜냐하면 자칫 현장에서 본인이 할 일이 없는 것처럼 보이기 때문이다. 배우는 연기를 하고 감독은 연출을 하고 스태프들은 각 파트의 일을 한다. 그런데 제작자는 현장에서 마땅히 할 일이 없다. 이때 인간이라면 누구나 이런 생각이 든다.
'어? 이 영화를 총괄하는 사람은 난데, 왜 내가 할 일이 없지?' '저 사람들이 나를 잊어먹은 거 아냐?'
이때 많은 제작자가 자격지심 때문에 '참견'을 하기 시작한다. 나도 이 현장에서 역할이 있는 중요한 사람이라는 것을 드러내고 싶어서 괜한 잔소리를 툭툭 던지는 것이다.
이렇게 제작자가 불필요한 참견을 하게 될 때, 현장에 있는 사람들은 어떻게 반응할까? 연기에 대해 지적받은 배우는 당연히 마음이 불편해지고, 감독은 "제가 알아서 할게요" 퉁명스럽게 대꾸한다. 이런 순간들이 자꾸 쌓이다보면 제작자는 현장에 있는 스태프들에게 불편한 존재가 된다. 그럼 그 제작자가 이런 분위기를 눈치채고 다음부터 그러지 않으려고 주의할까?
절대 아니다. 사람들의 반응이 냉랭할수록 어떻게든 더 영향력을 행사하려고 목소리를 높인다. 우리는 이런 사람을 '꼰대'라고 부른다.
제작자는 처음부터 자신이 어떻게 포지셔닝해야 할지 잘 알아야 한다. 아무리 영화의 허점과 결점이 눈에 띄더라도 입을 열 타이밍이 따로 있다. 그 타이밍이 오기 전에는 절대 입을 떼면 안 된다. 자신의 이름을 걸고 영화에 뛰어든 각 파트의 스태프와 배우들이 각자의 꽃을 만개할 때까지 기다려주어야 한다. 억지로 꽃봉오리를 벌리고 꿀벌을 밀어 넣어서 될 일이 아니다. 제작자의 사명은 사람들이 스스로 움직일 수 있는 자리를 잘 마련해주고 그 영역을 지켜주는 것이다.
Must have left my house at eight, because I always do My train, I'm certain, left the station just when it was due I must have read the morning paper going into town And having gotten through the editorial, no doubt I must have frowned I must have made my desk around a quarter after nine With letters to be read, and heaps of papers waiting to be signed I must have gone to lunch at half past twelve or so The usual place, the usual bunch And still on top of this I'm pretty sure it must have rained The day before you came
난 늘하듯 8시에 집을 나서겠지.
내가 타는 열차는 늘 예정된 시간에 역을 떠나겠지.
일하러 가는 길에 조간 신문을 읽겠지.
사설란을 훑으면서 틀림없이 얼굴을 찡그리겠지.
9시15분 경에는 업무를 보기 시작하겠지.
읽어야 할 편지들과 사인을 기다리는 서류들이 쌓여있겠지.
12시 30분 쯤에는 점심을 먹으러 나가겠지.
늘 가던 장소, 늘 어울리는 동료들.
그리고 꽤 확신컨데 밖에는 비가 내리고 있었어요.
당신이 오기 전에는요.
I must have lit my seventh cigarette at half past two And at the time I never even noticed I was blue I must have kept on dragging through the business of the day Without really knowing anything, I hid a part of me away At five I must have left, there's no exception to the rule A matter of routine, I've done it ever since I finished school The train back home again Undoubtedly I must have read the evening paper then Oh yes, I'm sure my life was well within it's usual frame The day before you came
2시 반이 지나서 7개피 째 담배를 피겠죠.
당시에 나는 우울하다는 것 조차 인식하지 못했죠.
그날의 업무에 끌려다니고 있었죠.
진정 아무것도 모른 채로, 내 자신을 숨기고 말이죠.
5시가 되면 난 어김없이 회사를 나와요.
일상적 루틴이고, 이건 사회를 나온 후로 항상 그래왔어요.
열차는 다시 집으로 향하고
집에선 어김없이 난 석간 신문을 읽어요.
오 맞아요, 내 인생은 이 일상의 틀 안에서 꽤 괜찮았어요.
당신이 오기 전에는요.
Must have opened my front door at eight o'clock or so And stopped along the way to buy some Chinese food to go I'm sure I had my dinner watching something on TV There's not, I think, a single episode of Dallas that I didn't see I must have gone to bed around a quarter after ten I need a lot of sleep, and so I like to be in bed by then I must have read a while The latest one by Marilyn French or something in that style It's funny, but I had no sense of living without aim The day before you came
8시 정각 정도에 집을 나서요.
그리곤 중국음식을 사러 가곤 하죠.
돌아와선 TV로 뭔가를 보며 저녁을 먹곤 해요.
나는 Dallas(1980년대 인기 드라마)를 한편도 빼놓지 않고 다 봤죠.
10시 15분 경에는 잠자리에 들죠.
난 많은 잠이 필요해서 그때쯤 잠자리에 들려고 하죠.
침대에서 잠시 책을 보죠.
마릴린 프렌치의 최신작이나 그 비슷한 류로 말이죠.
우습죠? 하지만 난 당시 목표가 없는 삶에 대해 자각이 없었어요.
당신이 오기 전에는요.
And turning out the light I must have yawned and cuddled up for yet another night And rattling on the roof I must have heard the sound of rain The day before you came
불을 끄고, 나는 하품을 하고 쪼그려 잠을 청하며 또 하루를 보내요.
지붕에 떨어지는 두둑두둑 거리는 비소리를 들으며 말이에요.
당신이 오기 전에는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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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 노래는 ABBA의 말기의 노래로, 당시 비에른과 아그네사의 이혼의 영향에 의해 우울하며 철학적인 느낌이 강한 곡이다.(이 곡 말고 Winner takes it all도 같은 배경을 가진 곡이다.)
그리고 치과의사로서 공공연히 말하기는 그렇지만 치아 건강을 위협하는 가장 큰 위험인자는 다름 아닌 치과의사입니다. 치아를 한번 뽑아버리면 주위의 치아에도 나쁜 영향을 주어 도미노처럼 여쇄적으로 치아를 상실하게 된다는 사실, 알고 계셨나요? 치아 건강을 위해 찾은 치과에서 생각지도 않게 치아를 뽑게 되는 일이 적지 않습니다. 나이가 든 후에도 인공치아가 아닌 내 치아로 씹고 싶다면, 애초에 이런 도미노 현상이 일어나지 않게끔 되도록 발치를 하지 않아야 합니다. 요즘 조금만 문제가 있어도 치아를 뽑는 치과의사들이 적지 않은데, 다소 문제가 있는 치아라도 치료 시기를 놓치지 않고 적절히 치료하면 충분히 살릴 수 있습니다.
p37
치수(Pulp)는 상아질 내부에 혈관과 신경 등이 분포해 있는 부드러운 조직입니다. 치수는 치아뿌리 끝의 좁은 구멍(치근단공)을 통해 치아 뿌리를 둘러싸고 있는 치조골 속의 혈관과 신경에 연결되어 치아에 영양을 공급해주는 역할을 합니다. 그러나 완전히 다 자란 치아의 치수는 감각기능만을 담당하므로 치수가 없더라도 상관은 없습니다. 그래서 충치가 치수까지 도달하면 치수를 제거하는 처치를 하는데, 이것이 흔히 말하는 '신경치료'입니다. 신경을 제거하면 혈액을 통한 영양분의 공급이 중단되므로 치아가 약해지지만, 치료만 적절히 한다면 신경이 남아 있는 치아와 동일하게 사용할 수 있습니다.
p69
수많은 턱관절증 환자에게 공통적으로 나타난 최대 기여 인자는 무의식중에 위아래 치아를 접촉시키는 버릇인 TCH(Tooth Contacting Habit)였습니다.
위아래 치아는 원래 항상 접촉하고 있다고 생각하는 사람이 많은데, 입을 다물고 있을 때 위아래의 치아가 서로 닿지 않는 것이 정상입니다. 치아는 대화를 하거나 음식물을 씹고 삼킬 때만 접촉합니다. 그것도 순간적이어서 위아래 치아가 접촉하는 시간은 다 합해도 하루에 20분 이내입니다. 그런데 대화나 식사를 하지 않을 때도 위아래의 치아가 계속 닿아 있는 사람이 있습니다. 직접 확인해보면 알겠지만 치아가 서로 닿기만 해도 입을 닫는 근육이 활동을 시작합니다. 이 상태가 오래 지속되면 근육이 피로해지고 턱관절도 눌려 턱관절증이 생기기 쉽지요.
p107
사람의 입 안에는 수백 종류의 세균이 살고 있습니다. 이런 세균을 정상세균총(正常細菌叢) 혹은 상재균(常在菌)이라고 하는데, 충치는 이 중 몇몇 정상세균총과 관련이 있습니다.
하지만 수백 종류의 세균을 모두 알아야 할 필요는 없습니다. 충치 예방이라는 관점에서는 딱 2가지의 충치균만 알면 충분합니다. 충치가 생기는 데 중심적인 역할을 하는 원인균은 뮤탄스균과 유산균입니다. 이들 충치균이 어떻게 충치의 발생에 관여하는지, 제가 30년 전에 환자들을 대상으로 썼던 글을 인용해 설명하겠습니다.
"압 안에는 설탕을 먹는 뮤탄스균이라는 세균이 삽니다. 뮤탄스균은 설탕만 먹고 살며, 텍스트란(dextran)이라는 끈적이는 물질이 치아 표면에 형성합니다. 텍스트란은 침에 녹지 않으며 입을 물로 헹구어도 제거되지 않습니다. 끈적이는 덱스트란 위에 마치 파리 끈끈이에 파리가 들러붙듯이 입 속의 수많은 세균이 들러붙습니다. 이 상태를 치태, 혹은 플라크라고 하지요. 치태는 매우 부드러워서 칫솔로 세게 문지르지 않아도 제거할 수 있습니다.
충치가 시작되는 원인 물질은 치태에 들러붙은 뮤탄스균과 유산균이 음식물 찌꺼기를 먹고 소화해서 만들어내는 젖산(lactic acid)입니다. 치아 표면의 법랑질은 산성에 취약한데, 젖산이 생성되면 pH 7 정도의 약알칼리성이던 입 안의 pH 농도가 pH 5 이하의 산성이 되고 법랑질이 녹고 구멍이 나면서 균이 침투해 충치가 시작됩니다."
원고를 쓴지 30년이 지났지만 충치 발생 메커니즘에 관한 설명은 거의 달라지지 않았을 것입니다. 한 가지 덧붙이자면 뮤탄슈균은 법랑질이 침식되는 충치 초기에, 유산균은 충치가 진행되어 상아질이 침식될 때 활약합니다.
뮤탄스균은 모든 사람의 입 안에 서식하지만 그 균 자체로는 충치가 되지 않습니다. 충치가 진행되려면 뮤탄스균의 먹이인 설탕(자당)이 꼭 필요합니다. 설탕을 전혀 섭취하지 않는다면 이론적으로는 충치에 걸릴 일이 없다고 하겠습니다.
p121
치과 의사에게서 '치아에 병소가 있다'는 말을 들으면 암처럼 전이될까 봐 걱정하는 사람도 있지만, 치아뿌리 끝의 병소는 전이되지 않으니 안심하세요. 그리고 뿌리 끝에 병소가 있다면서 바로 발치를 권하는 치과에는 발길을 끊고 다른 치과를 찾아야 합니다.
치수 부위 신경치료가 잘되면 병소가 제거된 후 주위의 벼가 재생될 수 있으므로 자신의 치아를 계속 사용할 수 있습니다.
p140
A: 치아와 잇몸 경계, 치주낭 안쪽 닦는 법
잇몸고랑을 잘 닦으려면 요령이 필요합니다. 칫솔은 치아 면에 직각이 되게 갖다 대면 고랑에 칫솔모가 잘 닿지 않으므로 칫솔을 조금 기울여서 칫솔질을 시작해야 합니다. 이때 치주낭 속까지 닦이도록 살짝 눌러주듯이 닦으세요 칫솔을 크게 움직이면 치주낭 안에 들어간 칫솔모 끝이 빠져버립니다. 그러므로 칫솔모를 고랑에 끼우듯이 한 상태에서 세밀하게 움직입니다. 한 위치에서 10회 정도 움직이세요.
덜 닦인 부분이 남지 않도록 순서대로 닦는 것이 좋습니다.
p179. 음식물이 자주 끼면 치료를
치주질환의 예방과 관련해 여러분이 꼭 알아야 할 것이 있습니다. 바로 식사를 할 때 치아와 치아 사이에 음식물의 찌꺼기나 섬유질이 끼는 문제입니다. 이것을 내버려 두면 상당히 골치 아픈 일이 벌어집니다.
이웃하는 치아는 서로 접촉점에서 접하고 있습니다.
이 접촉점의 접촉 압력이 낮으면 식사를 할 때 음식물이 접촉점을 넘어서 잇몸에 닿습니다. 이 음식물 찌꺼기가 치태와 결합하여 염증을 일으키고, 그 상태를 방치하면 치조골이 단기간에 소실되고 치주낭도 빠른 속도로 깊어집니다.
접촉점의 강도는 치실이 겨우 통과하는 정도가 좋습니다. 치실이 치아 사이를 아무 저항도 없이 통과한다면 음식물이 낄 가능성이 상당히 높습니다. 이 상태에서 서로 이웃하는 치아가 흔들리지 않는다면 한쪽의 치아를 치료해 음식물이 끼지 않도록 개선해야 합니다. 치조골이 이미 줄어들어서 흔들리는 경우에는 음식물이 더이상 끼지 않도록 두 개의 치아를 연결해야 합니다. 어쨋든 음식물이 치아 사이에 끼면 그 부위에 치주질환이 급속히 진행되고 치아의 수명도 짧아집니다. 이 문제 역시 정기적으로 치과에서 구강검사를 하면 심해지기 전에 발견할 수 있으니 음식물이 낄 때는 반드시 치과치료를 받기를 권합니다.
p195
진정한 명의가 있는 치과에는 입소문과 주위의 소개를 통해 많은 환자가 찾아옵니다. 굳이 선전을 할 필요가 없으니 번듯한 홈페이지가 없는 치과도 많고, 있다고 해도 주소나 전화번호 같은 필수사항과 진료 특징을 간단히 설명한 정도입니다. 이런 병원은 단골 환자가 많고, 마케팅에 신경 쓸 시간에 환자 한 사람의 치료에 더 관심을 가집ㄴ니다. 결국 선전 문구가 요란한 홈페이지나 크고 화려한 간판을 내건 치과, 라디오나 텔레비젼에서 광고를 많이 하는 치과에는 명의가 없을 가능성이 크다고 생각하는 편이 좋겠습니다.
좋은 치과의사를 찾는 7가지 비결
1. 사회적으로 인정을 받고 근거가 확실한 특수 치료를 할 수 있는 치과의사라면 대개 연구 성과를 정리해 논문으로 발표합니다. 최신 치료기술과 진단기술을 습득하는 데 노력을 아끼지 않는 치과의사는 감각에 의존한 아류의 치료법을 싫어하기 때문입니다. 논문을 꾸준히 발표하거나 전문 분야 세미나 참석을 꾸준히 하는 의사인지 확인해보시기 바랍니다.
2. 전문의 자격증이나 졸업대학 수료증을 많이 걸어놓는 치과도 있는데, 사실 이런 정보들은 거의 도움이 안 됩니다. 서양에 비해 일본은 각종 전문의 자격 기준이 엄격하지 않기 때문에, 자격증을 갖고 있다고 해서 높은 수준의 치료를 한다는 보장은 없습니다.
대학 수료증은 그 대학을 졸업했다는 것 이상의 의미는 없습니다. 진정한 명의는 눈에 보이는 허세를 요란하게 부리지 않습니다.
3. 첫 진찰을 받을 때 치과의사의 말이나 행동이 만족스럽지 못하다면 상담 단계에서 끝내고, 되도록 치아를 뽑거나 깍는 치료는 하지 않는 것이 좋습니다. 일단 깍고 뽑아버린 치아는 원래대로 되돌릴 수 없기 때문입니다.
자신의 치아는 스스로 지켜야 합니다. 치아에 있어서만큼은 소위 말하는 '시범 치료'란 없으니 나중에 후회하지 말고, 일단 생각해보겠다고 한 뒤 스스로 정보를 더 알아보기 바랍니다.
4. 애매한 설명화 함께 다짜고짜 치료를 시작하는 치과의사는 말할 필요도 없고, 환자를 의자에 눕힌 채로 일방적으로 설명하는 것 역시 바람직하지는 않습니다. 제대로라면 환자와 마주 앉아 눈을 보고 이야기해야 합니다.
물론 환자도 치과치료에 대한 최소한의 지식은 갖추어야 하고 의문점이 있을 땐 즉각 질문을 해야 합니다. 이 책에 실린 '이것만은 알아두자' 정도의 예비 지식은 치과에 가기 전에 꼭 기억해두세요. 적절한 질문을 하는 환자를 대충 치료하는 간 큰 의사는 없을 것입니다.
5. 화려한 외관, 세련된 인테리어 등 치료와 직접적인 관계가 없는 부분에 많은 돈을 투자한 치과도 잘 살펴봐야 합니다. 진정으로 환자 중심의 치료를 하는지, 돈이 되는 치료로 유도하는 것은 아닌지 말이지요. 물론 진료실이 지저분하거나 정돈되지 않은 곳에서도 양질의 치료를 기대하기는 어렵겠지요.
6. 치과의사가 충치와 치주질환의 예방에 소극적인 것 같다면 이런 치과는 주의해야 합니다. 치과의사는 치료 외에도 공공의 치과의료복지를 위해 공헌해야 하는 사람입니다. 그러니 예방 활동을 열심히 하지 않는다면 좋은 의사라고 할 수 없습니다.
또한 올바른 칫솔질 방법을 지도하거나 치주질환을 관리하는 데 무성의하고, 임플란트 치료의 장점만을 강조하는 치과를 조심하세요. 임플란트는 치아의 모든 문제를 다 해결해주는 꿈의 치료법이 아닙니다.
7. 치과위생사가 너무 자주 바뀌는 치과는 생각해볼 일입니다. 치과위생사는 대학에서 치위생학을 전공한 후 국가시험에 합격하여 면허를 취득한 치과 전문인력입니다. 치과의사를 도와 진료의 전반적인 업무를 할 뿐 아니라, 구강질환 예방을 위한 치석 제거(스케일링), 불소 도포 등을 하고 환자의 구강 관리 습관을 변화시키기 위한 검진과 예방 교육을 담당합니다. 이런 치과위생사가 치과에 갈 때마다 바뀐다면 결코 만족스러운 치료를 받을 수 없을 것입니다.
치과 치료는 치과 전문의와 치과위생사가 함께 하는 팀 치료입니다. 팀워크가 좋지 않은 곳에서 환자 중심의 좋은 치료를 기대할 수는 없겠지요?
p203
현행 건강보험제도는 병명이 붙은 질환에 대해 검사나 처치를 한 경우만 의료비를 지불하는 시스템입니다. 다시 말해 충치나 치주질환처럼 '병명을 가진 질환'에 대해 치료를 했을 때에만 보험에서 의료비가 지불됩니다. 결국 자연치아를 오래 유지하는 데 필요한 예방이나 관리는 질환에 대한 처치가 아니므로 원칙적으로는 보험이 적용되지 않습니다.
진료보수는 행위별 수가제(Free for Service, 의료의 종류와 기술의 난이도에 따라 의료비가 결정되는 형태로, 제공된 의료서비스의 단위당 가격에 서비스의 양을 곱한 만큼 의사에게 보상하는 방식)를 기본 방침으로 하고 있습니다 이제 막 치과의사가 된 신인이든 수십 년 경력의 베테랑 의사든 같은 병명의 질환을 같은 방법으로 치료하면 치료의 질이 아무리 차이가 나더라도 보수는 동일하게 책정됩니ㅏ.
그런데 의사가 처치한 내용에 따라서 보험에서 지급되는 의료비가 달라집니다. 가령 치과의사가 '아직 몇 년은 더 쓸 수 있는 치아니까 남겨둬야겠다'고 진단하고 경과를 관찰하면 검사비만 지불됩니다. 하지만 햇병아리 치과의사가 '내 기술로는 치료하기 어려우니 뽑는 것이 낫겠다'고 판단해 발치하고 브리지나 틀니를 장착하면 보험에서는 검사비뿐만 아니라 발치나 틀니와 브리지의 의료비도 지불됩니다.
즉 건강보험제도의 진료보수체계에는 치과의사의 경험과 기술력이 전혀 반영되지 않습니다. 충치나 치주질환으로 인해 타격을 받은 치아를 뽑지 않고 오래 사용하도록 하려면 치과의사의 임상 경험과 기술이 필요한데도 현행의 보험제도에는 이것을 평가하는 시스템이 존재하지 않습니다.
그 결과, 아이러니하게도 기술력이 없는 치과의사가 의료비를 더 많이 받을 수도 있게 된 것이지요. 치료 횟수나 치료 항목이 늘어날수록 주머니에 들어오는 보수가 그만큼 많아지기 때문입니다. 오해는 없기를 바라지만, 현재의 시스템에서는 치아를 많이 깍고 뽑을수록 더 많은 진료비를 청구할 수 있으니까요. 치과의사가 양심적으로 치료하는 겨우, 즉 치아를 깍거나 뽑지 않는 치료를 하면 할수록 건강보험제도 때문에 경제적으로 불이익을 보게 됩니다.
p207. 발치를 꼭 해야 할 때
현재의 건강보험제도에 따른 보험진료를 받고 있는 분은 치아의 상태가 조금이라도 나빠지면 치아를 깍거나 뽑는 치료를 받을 위험에 노출되어 있다고 해도 과장이 아닐 것입니다. 이것은 일본뿐 아니라 한국도 마찬가지입니다.
따라서 치료를 받으러 간 치과에서 "이 치아는 더는 못 쓰니까 뽑읍시다"라며 결단을 요구할 때는 "지금 당장 결정할 수는 없으니 생각할 시간을 주세요"라고 말하며 치료를 중단하는 것이 좋습니다.
물론 어떤 치과의사가 보더라도 당장 뽑아야 할 치아도 있습니다. 특히 치주낭의 깊이가 10밀리미터가 넘고 치주낭이 치아뿌리 끝까지 도달한 치아는 치료하더라도 씹는 기능을 제대로 하지 못합니다. 물론 이런 치야여도 굳이 서둘러 뽑을 필요는 없다는 것이 제 의견입니다만, 만약 씹을 때 통증이 심하고 씹는 데 방해가 된다면 일찍 발치하는 것이 낫습니다. 씹지 못하는 치아 때문에 제대로 식사를 즐기지 못하고 이런 상태가 지속되면 치아 교합이 어긋나게 될 수도 있으니 말입니다. 게다가 다른 치아에도 문제를 일으키거나 턱관절증이 발생할 가능성도 있습니다.
다만 저는 치아의 상태가 심각하지 않다면 치과의사와 환자가 함께 노력해 몇 년 정도는 더 쓸 수도 있다고 말씀드리고 싶습니다. 결국에는 뽑아야 하더라도 발치한 치아 때문에 발생할 수 있는 도미노 현상을 막고 시간을 벌 수 있을 테니까요.
좋은 치과의사의 특징
'평생 내 치아를 쓰고 싶다'는 환자의 바람에 귀 기울이고 도와주는 치과의사는 다음의 특징을 가지고 있습니다.
1. 언제나 치아를 뽑지 않는 것을 대전제로 하고 진료합니다.
2. 치아를 오래 유지할 수 있도록 정기적인 전문 관리 시스템을 구축해두었으며, 환자에게 적절한 셀프케어 방법을 지도하고 실행하도록 권합니다.
3. 무엇보다도 이런 의료를 십 년, 이십 년씩 지속할 수 있는 치과를 운영합니다.
일반적으로 발치란 그것 말고는 아무 방법이 없을 때 쓰는 최후의 수단입니다. "서둘러 발치하지 않으면 임플란트조차 할 수 없게 된다"라고 치과의사가 말해도 흔들리지 마세요. 며칠 더 생각한다고 해서 급속히 악화되지는 않지만 치아를 한번 뽑으면 결코 돌이킬 수 없으니까요.
시선은 곧 마음이다. 내 시선이 내 생각과 관심을 보여준다는 이야기다. 다른 동물들에 비해 인간 눈의 흰자위가 그토록 큰 이유는 시선의 방향을 드러내기 위해서다. 흰자위와 대비되어 시선의 방향이 명확해지는 검은 눈동자를 통해 인간은 타인과 대상을 공유할 수 있는 능력이 생겼다. '함께 보기 joint-attention' 다. 인간의 의사소통은 바로 이 '함께 보기'에 기초한다. 다른 동물들은 시선의 방향이 명확히 드러나지 않는다. 눈 전체가 거의 같은 색이거나 흰자위가 아주 작다. 소통이 아니라 사냥하기 위해서 진화했기 때문이다. 시선의 방향이 드러나지 않아야 사냥에 더 유리하다.(이제까지 살면서 '눈 적은 사람'이 만만했던 적은 없다. 흰자위가 다 드러나는 '눈 큰 사람'은 대개 참 편안했다. 뭐 내 개인적 편견이다.)
p41
'물때'다 여수에는 전혀 다른 시간이 흐른다. 밀물과 썰물이 하루 두 번씩 반복되는 건 알았지만, 만조와 간조 시각이 매일 정확히 49분씩 늦어진다는 것은 몰랐다. 달이 지구를 공전하는 시간이 24시간 49분이기 때문이다. 매일 물이 들락거리는 속도도 달라지고, 물의 양도 달라진다. 물이 가장 많이 들고 빠지는 때가 '사리'다 물이 가장 조금 들고 빠지는 때는 '조금'이다. 사리 때를 특히 조심해야 한다. 물이 빠지면 수백 미터 앞까지 바닥이 드러나기 때문이다. 아무 생각 없이 배를 끌고 나갔다가는 바다에서 몇 시간을 그냥 떠 있어야 한다.
p44
시간은 기울어져 흐른다. 봄, 여름, 가을, 겨울을 바꿔가며 시간이 흐르는 이유도 지구가 23.5도 기울어져 있기 때문이다. 기울어져 흐르는 시간이 못마땅하다고 지금 당장 기둥을 수직으로 곧추세우면 시간은 흐르지 않는다. 흐르지 않으면 썩는다. 권력도 마찬가지다. 시간의 흐름을 배제한 평등은 가짜다. 50대 50의 공간적 평등은 없다는 이야기다. 흐르는 시간에 따라 권력의 주체가 기울고 바뀌어야 평등하고 공정한 사회다. 이내 또 기울 것을 알아야 겸허해진다.
==> 지구의 자전축은, 지구의 공전궤도의 중심축에 대해 23.5도 기울어져 있다. 때문에 태양을 공전하면서 태양과의 상대적 위치에 따라, 태양에너지를 받는 면적과 시간의 차이가 생기게 된다. 이 차이로 인해서 봄,여름,가을,겨울과 같은 기후변화가 생겨나며, 북반구가 여름일 때(태양에너지를 받는 면적 및 시간이 최대일때) 남반구는 겨울이 된다.(태양에너지를 받는 면적과 시간이 최소).
만일 지구의 자전축이 공전궤도의 중심축과 평행했다면 지구의 적도는 지금보다 훨씬 뜨거웠을 것이고, 남극과 북극은 지금보다 훨씬 차가울 것이다. 이런 차이가 사실 현재보다 더 나쁠지 좋을지는 알 수 없지만 지금과 같은 전지구적인 기후 다양성은 줄어들 가능성이 높다. 기후 다양성이 줄어든다면 아마도 생물의 다양성도 줄어들게 될 것이고, 지구의 모습은 지금과는 아주 많이 다를 것이다.
p57
모든 우려에도 불구하고 섬의 내 작업실 공사는 그해 여름부터 시작되었다. 내 고독한 결정의 기준은 분명했다. '교환가치 Tauschwert'가 아니라 '사용가치 Gebrauchswert'다 카를 마르크스Karl Marx의 사회주의 이데올로기는 망했지만, '사용가치'와 '교환가치'를 구분한 경제학자 마르크스의 가치론은 여전히 유효하고 탁월하다. 각 개인의 구체적 필요에 의해 생산된 물건이 '화폐'라는 '교환가치'에 의해 평가되면서 자본주의의 문제가 시작되었다고 마르크스는 진단한다. 이른바 '사용가치'라는 '질적가치'와 '교환가치'라는 '양적 가치' 사이의 모순이다.
'교환가치'는 내 구체적 필요와는 상관없는, 지극히 추상적 기준일 뿐이다. 한국 사회의 온갖 모순은 무엇보다도 주택이 '사는 곳(사용가치)'이 아니라 '사는 것(교환가치)'이 되면서부터라고 나는 생각한다. 오십 대 후반이 나이가 되도록 난 한 번도 내 구체적 '사용가치'로 결정한 공간을 갖지 못했다. 이 나이에도 내 '사용가치'가 판단기준이 되지 못하고, 추상적 '교환가치'에 여전히 마음이 흔들린다면 인생을 아주 잘못 산 거다. 추구하는 삶의 내용이 없다는 뜻이기 때문이다. 섬 작업실 공사의 경제학적 근거는 이렇게 간단히 정리했다.
'정말 후회하지 않겠느냐'는 걱정에 대해서는 심리학적으로 더욱 간단히 정리했다. 후회는 '한 일에 대한 후회regret of action'와 '하지 않은 일에 대한 후회 regret of inaction'로 구분해야 한다고 미국 노스웨스턴 대학교 심리학과의 닐 로스Neal J. Roese 교수는 주장한다. '한 일에 대한 후회'는 오래가지 않는다. 이미 일어난 일이기 때문에 그 결과가 잘못되었더라도 '그만한 가치가 있었다'고 얼마든지 정당화할 수 있기 때문이다. 그러나 '하지 않은 일에 대한 후회'는 쉽게 정당화되지 않는다. '한 일에 대한 후회'는 내가 한 행동, 그 단 한가지 변인만 생각하면 되지만, '하지 않은 일'에 대한 후회는 '그 일을 했다면' 일어날 수 있는 변인이 너무 많기 때문이다. 심리적 에너지가 너무 많이 소비된다. 죽을 때까지 후회한다는 이야기다. 이루지 못한 첫사랑의 기억이 그토록 오래가는 이유도 바로 그 때문이다.
지금 이 섬의 미역창고에 작업실을 짓지 않는다면 죽을 때까지 '잎새에 이는 바람에도 나는 괴로워'할 것임이 분명하다. 반대로 섬에 작업실이 완공되어 습기와 파도, 바람 때문에 아무리 괴롭고 문제가 많이 생겨도 난 내가 한 행동에 대해 합당한 이유를 얼마든지 찾아낼 것이다. 그리고 내가 이 섬에서 왜 행복한가의 이유를 끊임없이 찾아낼 것이다.
p78
이어폰으로 듣는 음악이 진짜다. 다른 사람의 귀를 의식하는 허세가 사라지는 까닭이다. 스피커로 음악을 들을 때 나는 프란츠 슈베르트Franz Schubert의 <리트Lied>나 요한 제바스티안 바흐Johan Sebastian Bach의 <평균율 Das wohltemperierte Klavier>를 가능한 한 심각한 표정으로 듣는다. 폼 난다. 그러나 '아재용 넥밴드' 이어폰으로 듣는 음악은 죄다 '7080 가요'다 우연은 아니다. 평생 좋아하며 듣게 되는 음악은 청소년기가 끝나고 청년기가 시작되는 20세 전후에 들었던 것이 대부분이라는 심리학 연구 결과가 여럿 있다. 정서적으로 가장 예민한 시절에 듣는 음악인 까닭이다.
p83
'공연한 불안'의 개념화가 어느 정도 진행되면 그 개념들을 '가나다순'으로 다시 한 번 정리해보는 것도 좋다. '가나다순'으로 정리하는 것은 '개념의 개념화', 즉 '메타 개념화'라 할 수 있다. 자신의 '생각에 대한 생각'인 '자기 성찰' 또한 이런 메타 기념화'의 한 형태다. 개념화된 불안을 다시 한 번 상대화하면 불안의 실체가 더욱 분명해진다. 더 이상은 정서적 위협이 되지 않는다. 정리되지 않은 불안은 기하급수적으로 부풀어 오른다. 어느 순간부터는 혼자 힘으로 도무지 감당하기 힘들어진다.
불안과 걱정이 습관처럼 되어버린 이가 주위에 참 많다. 잘나가는 사람일수록 그렇다. 그러나 아무리 돈이 많고 사회적 지위가 높다한들 밤마다 불안해서 잠을 이루지 못한다면 그게 무슨 성공인가. '96퍼센트의 쓸데없는 걱정'에서 자유로워야 성공한 삶이다.
자주 웃고, 잠 푹 자는 게 진짜 성공이다!
p85
수시로 자신의 삶을 규정하고 있는 전제들을 성찰하며 상대화해야 명함이 사라져도 당황하지 않는다. '탈맥락화Dekontextualisierung'해야 한다는 이야기다. '탈맥락화'는 본질에 대한 질문이다. 철학에서는 '자기 성찰'이라 하고, 심리학에서는 '메타 인지meta-cognition'라 한다. 미술에서는 '추상Abstraktion'이라고 한다.
p95
흥미롭게도 프로이트나 아들러 모두 '유대인'이라는 열등감에 시달렸다. 내 일상의 유치한 열등감과는 비교할 수 없는 고통이다. 매일같이 경험하는 인종차별로 인한 뿌리 깊은 열등감의 상처를 유대인들은 저마다의 방식으로 해결했다. 우선 독일인보다 더 철저한 '독일인'이 되는 방식이다. 제1차 세계대전 당시에 독가스를 개발한 유대계 독일인 프리츠 하버Fritz Haber 같은 이다. 암모니아 합성 비료를 발명한 그는 자신의 발명품이 독가스로 사용되는 것에 적극 동조했다. 그의 아내는 이를 반대하며 자살까지 했지만 막을 수 없었다. 그의 독가스는 결국 히틀러에 의해 자신의 유대인 친척까지 살해하는 데 사용되었다.
두 번째는 시오니즘이다. 유럽에서 그토록 멸시받느니 스스로를 격리하여 '유대 국가'를 세우자고 오스트리아 빈의 유대계 작가 테오도어 헤르츨Theodor Herzl은 부르짖었다. 그러나 그의 주장은 오늘날까지 여전히 해결될 기미가 보이지 않는 팔레스타인 문제의 기원이 된다. 시오니즘은 주로 '동유대인Ostjuden'이라 불렸던 동유럽 출신 유대인들에 의해 지지되었다. 그러나 시오니즘이라는 인종 갈등 뒤에는 가난한 '동유대인'과 부유한 '서유대인Westjuden' 사이의 계급 갈등이 숨겨져 있었다. 1980년대 한국 사회의 '계급 모순'과 '민족 모순'을 둘러싼 논쟁처럼 20세기 초반의 유대인 문제는 하나의 차원으로 환원될 수 없는 아주 복잡한 문제였다.
독일인이 되기도 거부하고, 히틀러식 인종주의의 또 다른 극단인 시오니즘도 거부하며 '평화로운 유럽인'이 되고자 했던 유대인들도 있었다. 프로이트와 아들러는 물론 카를 크라우스Karl Kraus, 발터 벤야민Walter Benjamin, 프란츠 카프카Franz Kafka, 슈테판 츠바이크Stefan Zweig와 같은 이들이다. 오늘날까지 영향을 미치는 이들의 깊은 인문학적 사유의 원천은 이들이 끝까지 부둥켜안고 씨름해야 했던 '유대인 열등감'이다. 유대인이 위대한 이유는 노벨상을 많이 받아서가 아니다. 인종적 열등감을 풍요로운 상상력의 원천으로 발전시켰기 때문이다.
열등감에서 벗어나기 위해 '적'을 만드는 것은 가장 게으른 방식이다. 내면을 향한 칼끝을 바깥으로 향하는 것이다. 어떤 사회 이슈든 양극단에 치우친 이들의 이해하기 힘든 공격성과 적개심에는 이같은 '투사Projektion'의 메커니즘이 숨어 있다. 부와 권력을 한 손에 쥐고도 여전히 적을 만들어야 마음이 편해지는 이들이다. 그러다 죄다 한 방에 훅 간다. 열등감은 외부로 투사하여 적을 만드는 방식으로는 결코 극복되지 않는다. '적'은 또 다른 '적'을 부르기 때문이다. 타인들과 공동체를 이뤄 살아가는 한 열등감은 사라지지 않는다. '마음속에 깊이 박힌 대못'처럼 그저 성찰의 계기로 품어야 한다.
p110
'좋은 삶'을 사는 방법은 아주 간단하다. 좋아하는 것을 많이 하고, 싫어하는 것을 줄이면 된다. 제발 '좋은 것'과 '비싼 것'을 혼동하지 말자! 자신의 '좋은 것'이 명확지 않으니 '비싼 것'만 찾는 거다.
p114
나와 아주 비슷한 생각을 하는 저자의 책을 읽었다. 『불행 피하기 기술』의 저자 스위스의 롤프 도벨리Rof Dobelli다. 원어 제목은 '좋은 삶의 비결DSie Kunst des guten Lebens'이다 지구 반대편에 나와 똑같은 생각을 하는 사람이 있다는 것을 발견하면 참 즐겁다. 저자의 주장은 아주 간단명료하다. '좋은 삶guten Leben'이 어떤 것인지 이야기하기는 힘들어도, '나쁜 삶'이 어떤 것인지는 누구에게나 분명하다는거다. '신이 어떻다'고 말할 수는 없지만, '신이 그렇지는 않다'고는 분명하게 말할 수 있다는 중세 '부정의 신학negative theology'의 방법론처럼 우리도 '나쁜 삶'의 요인들을 하나씩 제거하면 행복해지지 않겠냐는 거다.
'좋은 것'을 추상적으로 정의하고, 각론의 부재에 괴로워하기보다는 '나쁜 것', '불편한 것'을 제거하자는 생각은 독일의 오래된 실용주의 전통이다. 1920년대 '바우하우스'에서는 '형태는 기능을 따른다'는 'FFF Form folgt Funktion '의 디자인 원칙이 강조되었다. 삶을 불편하게 하는 불필요한 장식을 죄다 제거하자는 이야기다. 오스트리아의 건축가 아돌프 로스Adolf Loos는 아예 "장식은 죄악이다"라고 했다. 현대 미니멀리즘의 선구자인 디자이너 디터 람스Deter Rams도 자신이 추구하는 디자인을 한마디로 '좋은 디자인gutes Design'이라고 정의했다. "적지만, 더 좋은 Weniger, aber Besser"이라는 그의 디자인 철학은 오늘날 애플의 모든 스마트 기기 디자인에 적용되었다. 여기서 미니멀리즘이란 무조건 줄이는 게 아니다. '나쁜 것'을 줄이는거다!
p130
개별적 사건과 경험들에 대한 기억은 주체적 관심에 따라 서로 연결되며 의식의 차원으로 올라온다. 인간의 의식 또한 '입자'가 아니라 '파동'이다 '입자'와 같은 개별 사건들을 연결하는 그 행위가 바로 '의미 부여'다 개별 사건 자체는 그리 중요하지 않다. 단순한 '팩트'에 불과한 사건들을 연결하는 그 '의미 부여'가 의식의 본질이다.
p139
습관적으로 '나쁜 이야기'만 소셜 미디어로 보내는 이들이 있다. 그들과 '친구'를 맺으면 아주 고통스럽다. 밤새 '나쁜 이야기'만 쌓여 있기 때문이다. 죄다 남 조롱하고 비아냥대는 이야기뿐이다. 희한하게 '사회정의'로 정당화하며 즐거워한다. '나쁜 이야기'에 서로 '좋아요'를 죽어라 눌러댄다. 각자의 소셜 미디어에 쌓이는 '나쁜 이야기'는 기하급수적으로 늘어난다. 모여 앉아도 남 욕하는 이야기가 대부분이다. 도대체 우리는 왜 이러고 사는 걸까?
타인의 관심을 얻기에 '나쁜 이야기'가 훨씬 유리하기 때문이다. 원시시대를 한번 생각해보자. '저기 바나나가 있다'는 정보와 '저기 호랑이가 나타났다'는 정보 중에 내가 지금 살아남는 것과 관련해 어느 이야기가 더 중요할까? 당연히 '저기 호랑이가 있다'는 '나쁜 이야기'다. 바나나는 내일 먹어도 된다. 그러나 호랑이가 나타났다는 이야기를 무시하면 바로 잡아먹힌다. '나쁜 이야기'가 좋은 이야기'보다 생존에 훨씬 더 중욯했다.
우리가 '나쁜 이야기'에 끌리는 이유는 바로 이 원시적 본능이 여전히 작동하기 때문이다. 그러나 이는 잠시만 한눈팔아도 못굼이 날아가던 원시시대 이야기다. 문명화된 사회란 날것의 위험들을 제어할 수 있는 안전장치가 갖춰진 상태를 뜻한다. 그런데도 사방에 '나쁜 이야기'들뿐이다.
'나쁜 이야기'에 끌릴 수밖에 없는 타인의 반응을 통해 자신의 존재를 확인하려는 불안한 인간이 너무 많은 까닭이다. 불안한 이들이 불안을 유포해 혼자만 불안하지 않으려는 아주 웃기는 현상이다.
p144
공연히 불안하면 미술관, 박물관을 찾아야 한다. 그곳은 불안을 극복한 인류의 '이야기'로 가득하기 때문이다. '지금 내가 제대로 살고 있는가'하는 느닷없는 질문으로 조급해진다면 음악회를 찾는 게 좋다. 몸으로 느껴지는 음악은 삶의 시간을 여유롭게 만들어준다.
p171
지난주에는 독일 공영방송인 체데에프ZDF에서 하는 북한 관련 다큐멘터리를 봤다. 최근 북한을 다녀온 사람들이 직접 찍은 영상을 모아 보여주고, 그들의 느낌을 이야기하는 내용이다. 평양의 그로테스크한 풍경은 예상했던 대로였다. 그러나 독일 내레이터의 마지막 코멘트는 충격이었다. 남과 북 모두 '같은 민족'이라며 통일하겠다고 하는데, 도무지 이해할 수 없다고 했다. 저토록 다른데, 도대체 무슨 근거로 '같은 민족'이냐는 거다. 아차 싶었다.
'민족'은 원래 없었다. 단어 자체가 아예 없었다. '민족'은 메이지 시대에 이와쿠라 사절단 일원으로 구미 각국을 여행한 구메 구니타케久米邦武가 1878년 펴낸 『미구회람실기米歐回覽實記』에 처음 나타난 표현이다. 그 후 독일제국의 국가론이 일본에 소개되면서 '민족'은 '국가Nation'와 '종족Volk'이 결합한 뜻으로 본격 사용되기 시작한다. '국민', '민족', '종족'의 의미론은 이때부터 마구 헷갈리기 시작한 것이다.
'가족 메타포'는 아주 기막혔다. 특히 일본에서 고안된 '민족' 개념과 무척 잘 어울렸다. '민족'에 내재한 '가족 메타포'는 동양에선 아주 쉽게 이해되고 실천되었다. 분단의 한반도에서 '민족=가족' 이데올로기의 파워는 더욱 강력해졌다. 서구가 수백 년 걸린 근대화 과정을 수십 년 만에 해치울 수 있었던 그 엄청난 저력도 '흩어진 가족'과 같은 민족의 '한恨'이었다. 어떻게든 돈 많이 벌어 흩어진 가족이 다시 모여야 했다. 그래서 '반만년의 유구한 역사'를 가진 한민족의 분단은 항상 '이산가족'의 슬픔으로 설명되었다. 그러나 이쯤에서 우리 스스로 한번 확인해봐야 한다.
정말 우리가 분단을 이산가족의 슬픔처럼 느끼고 있느냐는 거다. 통일이 되면 북한 사람들을 내 가족처럼 느낄 수 있느냐는 질문이기도 하다. 독일 통일 현장을 경험한 나로서는 지극히 비판적이다. 심리적 통일까지 이루려면 분단만큼의 시간이 흘러야 한다. 과연 우리는 북한 사람들을 위해 칠팔십 년 넘는 세울을 인내할 수 있을까?
더 구체적으로, 김정은이 나타나면 감격해서 발을 동동 구르며 박수 치고 눈물까지 흘리는 저 북한 사람들을 위해 우리 각자는 그 엄청난 '통일세'를 수십 년 동안 기꺼이 낼 수 있을까? 통일 후, 북한 사람들이 남한 사람들의 오만함에 분노하여 '김정은 시절이 더 좋았다'며 '조선노동당'을 다시 창당하면 도대체 무슨 느낌이 들까? 그 '조선노동당'이 북한 지역에서 몰표를 얻어 대한민국 국회의 한구석을 당당히 차지하는 모습을 '가족처럼' 편안하게 지켜볼 수 있을까?(이는 독일에서 실제로 일어났던 일이다.)
이제 남북한 '단일민족'의 이념과 '통일'이라는 '무의식적 전제'들을 '숭고한 멜랑콜리'로 바라볼 때가 되었다. '민족'이라는 '당연한 젼제'를 해체하면 북핵 문제를 둘러싼 한반도 정세는 아주 달라진다. 우리가 취할 수 있는 행동의 옵션도 확연히 넓어진다.
p184
'사회주의적 계몽'은 '자본주의적 욕망'을 결코 이길 수 없다.
p195
은퇴하면 바로 죽었던 시절이 있었다. 그래서 아무 생각 없이 은퇴했다. 지금 우리 사회의 모든 기준이 바로 그 시절의 가치에 맞춰져 있다. 삼십여 년을 더 살아야 하는데 우리 모두가 지금 아무 생각 없다. 바로 앞선 세대의 '노욕老慾'을 보면서, 도대체 왜 저럴까 싶었던 것이 '짤리고 보니' 다 이해된다고도 했다. 특히 정치, 경제권에서 '저렇게까지 하고 싶을까' 했던 선배들에게 주어진 그 '기회'가 부럽다고도 했다. 이렇게 오래 살 줄 아무도 몰랐기 때문이다.
오늘날 한국 사회의 첨예한 갈등 배후에는 죄다 '느닷없는 생명 연장'이 숨겨져 있다. 단순한 이념적 갈등이 아니라는 이야기다. 평균 수명 50세도 채 안 되던 지난 세기의 낡은 사회 설명 모데로 한국 사회를 설명할 수는 없다(이건 정말 중요한 포인트다!). 인류가 한 번도 겪어본 적 없는 이 엄청난 '혁명의 시대'를 살아가기 위해서는 '새로운 시작'에 대한 용기가 필요하다. 어떻게 살아야 하는가에 대한 '롤 모델'도 전혀 없다. 각자 '용감하게' 찾아야 한다. '손'으로 하는 일을 새롭게 시작하는 것도 나쁘지 않다.
프로이트의 '콤플렉스'와 더불어 현대인의 삶을 가장 잘 설명하는 개념이 있다면 마르크스의 '소외Entfremdung'다. 자신이 만든 생산물과는 아무 관계없이, 그저 노동의 대가로 받는 임금으로 살아야 하는 자본주의 시스템은 어떤 방식으로든 인간 심리에 영향을 미치게 되어 있다. 노동의 결과가 전혀 확인되지 않는 삶을 마르크스는 '소외된 삶'이라 했다. 정신이 자연에 변화를 가져와 자아실현이 가능해진다는 헤겔의 낭만적 '외화Entäußerung' 개념을 자본주의라는 역사적 맥락에 맞춰 비판한 것이다. 마르크스의 개념들은 대부분 공허한 것이 되어버렸지만, 심리학적으로 그의 '소외론'은 여전히 통찰력 있고 의미 있다.
사무직에서 일했던 사람일수록 손으로 직접 하는 일을 배우는 것이 좋다. 두 번째 인생에는 노동의 결과를 눈으로 직접 판단하고, 손으로 만질 수 있는 구체적인 일을 해야 심리적으로 소외감을 느끼지 않는다는 이야기다. 교수, 기자, 선생과 같이 말과 글로 먹고 산 사람일수록 손으로 직접 하는 일을 해야 한다. 그래야 말년의 성품이 무난해지며 '꼰대'를 면할 수 있다. 아니면 컴컴한 방에서 혼자 인터넷에 악플이나 달며 삼십여 년을 더 살아야 한다. 달리 할 일이 있는가? 그래서 아직 체력 좋은 범재에게는 '용접 일'이 만장 일치로 추천되었다.(진지하게 나눈 이야기다. 우리 모두 대학 사 년 그렇게 대충 다니고 삼십 년 가까이 잘 먹고 잘살았으면 감사해야 한다. 앞으로 삼십여 년을 더 살려면 뭔가를 처음부터 새롭게 배우는 게 당연하다.)
p201
대도시에 사는 사람들은 자신들이 얼마나 끔찍한 환경에 놓여 있는지 모른다. 내가 서울에서 운전하며 가장 괴로울 때는 차선을 바꿀 때다. 다들 '차선 바꾸겠다는 신호'를 '빨리 달려오라는 신호'로 받아들인다. 잽싸게 달려들어 차선을 바꿀 여유를 절대 안 준다. 어어, 하다 보면 뒤에서 빵빵거리며 난리 난다. 정신이 혼미해지며 그냥 울고 싶어진다. 주로 남자들이 그렇다. 한국 남자들은 자기 자동차 앞을 양보하면 인생 끝나는 줄 안다. 도대체 왜들 이러는 걸까?
자동차 안이 유일한 자기 공간이라 여기기 때문이다. 집의 안방은 아내 차지가 된 지 오래다. 아이들도 이제 안방을 '엄마 방'이라고 한다. 거실은 TV와 뜬금없이 커다란 소파가 차지하고 있다. 아이들은 각자의 방에 틀어박혀 나오지 않는다. 코를 심하게 골아 같이 잠을 못 자겠다는 아내의 불평에 거실 소파에서 잠을 청한 지 이미 수년째다. 수면 무호흡으로 이러다 죽겠다 싶어 새벽에 잠을 깨면 거실 바닥에 널브러져 있다.
그래서 자동차 안이 그렇게 행복한 거다. 한 평도 채 안 되지만 그 누구도 눈치 볼 필요 없는 나만의 공간이다. 밟는 대로 나가고, 서라면 선다. 살면서 이토록 명확한 '권력의 공간'을 누려본 적 있는가? 그러니 도로에서 누가 내 앞길을 막아서면 그토록 분노하는 거다.
p211
더 중요한 자유가 있다. '시선의 자유'다. 이건 한국 사내들에게 매우 절박한 자유다. 평생 '타자의 시선'을 의식하며 살기 때문이다. '타자의 시선을 내면화'하는 것처럼 치명적인 것은 없다.지켜보는 사람이 없는데도 누군가 지켜본다고 생각하며 평생 두려움 속에 살고 있다.
p214
'관찰당하는 것'이 아니라 내 맘대로 '볼 수 있는 자유'가 행복의 핷미이다.
p218
'하염없음'은 시간이 정지되고, 유체 이탈처럼 '또 다른 나'가 공중 부양하며 세상을 내려다보는 것 같은 경험이다. 철학적 '자기 성찰'이란 심리학적으로는 '경외감'과 '하염없음'으로 야기되는 '인지적 전환cognitive shift'이다. 도무지 감당할 수 없는 엄청난 대자연 앞에서 내가 갖고 있는 현재의 인지 체계로는 그 어떠한 설명과 해석도 불가능하다. 남은 방법은 오직 한 가지뿐이다. 내 인지 체계를 통째로 바꾸는 일이다. 인간의 모든 미학적 경험은 이 같은 '인지적 전환'과 깊이 관계되어 있다.
p221
지금 내 삶이 지루하고 형편없이 느껴진다면, 지금의 내 관점을 기준으로 하는 인지 체계가 그 시효를 다했다는 뜻이다. 내 삶에 어떤 감탄도 없이, 그저 한탄만 나온다면 내 관점을 아주 긴급하게 상대화시킬 때가 되었다는 이야기다.
뉴요커는 이민 이후의 생존 경험을 통해, 주변 사람의 부러운 시선이나 허울 좋은 체면치레 같은 것은 생존에 도움이 전혀 안 된다는 것을 안다. 진정한 자유와 존재감은 경제적 자립에서만 온다. 이것이 뉴요커의 행복 공식이다.
우리가 부모 세대의 기대치, 사회의 이목에서 자유로워지는 가장 빠른 방법은, 부모를 포함해서 모든 타인에게 돈 때문에 손 벌리지 않아도 되는 겨엦적 자립이다. 그렇다면 행복의 첫 단추는 질긴 생존력일 것이다. 그렇기 때문에 생존에 도움이 되지 않는 것은 내 행복에도 도움이 되지 않는다는 것. 이것이 뉴요커가 우리에게 주는 첫 번째 인생학 레슨이다.
p27
겉치레가 쌓이면서 인생에 피로라는 때가 끼게 된다.
p30
"하나씩만, 그리고 제대로 하라."
p48
세상에는 머리가 좋아 뛰어난 논문을 발표하는 사람도 있고, 뛰어난 안목으로 인스타그램에 아름다운 사진을 올려 인정받는 사람도 있으며, 개인 방송으로 인기를 끄는 사람도 있다. 돈을 버는데만 재능이 있는 사람이 있는가 하면, 무언가를 만드는 데만 재능이 있는 사람도 있다. 그런 재능도 한눈 팔지 않고 갈고 닦아야 빛이 나고, 그래서 한 가지만 제대로 이루어 내기도 힘들다. 뉴요커는 바로 이러한 점을 인정해주는 것이다.
반면에 학창시절부터 전 과목 점수를 평균 내는 교육 제도에서 수행평가까지 받으며 학교를 다니는 우리 한국인은 잘하는 것보다 못하는 것에 더 집착하는 경우가 많다. 10과목에서 만점이 나와도 한과목의 점수가 낮으면 원하는 대학에 가지 못했기 때문일까? 사람은 원래 잘하는 것보다 못하는 것이 많기 마련인데, 우리 사회는 모두가 성격이 좋고, 외모도 준수하고, 공부도 잘하고, 손재주도 좋고, 노래도 잘하고, 춤도 잘 추는 사람이 되기를 원한다. 그리고 10가지를 잘해도 하나가 부족한 타인을 평가할 때도 잔혹한 잣대를 들이댄다. 타인의 장점보다 단점을 보고 자신도 모든 것을 다 잘하려고 하다 보니 인생이 힘들어질 수밖에 없는 것은 아닐까? 그리고 한 사람이 모든 것을 혼자 다 해낼 수 있는 능력자만 모여 사는 사회가 과연 좋은 사회일까?
세상에 사람은 많다. 그리고 제각각 다른 분야에 남다른 재주가 있다. 그런데 왜 우리는 한 명의 역할이 아닌 10명의 역할을 혼자서 해내야 한다며 불필요한 고생을 사서 하는 걸까? 많은 장점을 가진 타인이 가진 단 하나의 단점만을 보려고 할까? 뉴요커들처럼 인간은 원래 완벽해질 수 없는 존재임을 인정한다면, 하나의 장점에 집중해서 나만의 고집과 집념을 가지고 실행 가능하도록 밀어붙이는 배짱이 생길 것이고 타인의 여러 장점에 집중해 나와 어떻게 서로 보완하며 살 수 있을지 생각하게 되어 다른 사람에게서 더 많은 것을 배우게 될 것이다.
p77
파리와 뉴욕의 예술가들이 추구하는 작품의 성격은 확연히 다르다. 뉴욕과 파리 예술의 차이를 한마디로 대변하는 일화가 있다. 뉴욕 브로드웨이의 유명 작곡가 조지 거슈윈George Gershwin이 파리에서 프랑스 클래식 음악 대가 드뷔시의 공연을 보러 간 적이 있다고 한다. 드뷔시의 절제미와 부드러운 선율에 깊이 감동한 거슈윈은 관계자에게 드뷔시를 만나게 해달라고 청했다. 거슈윈은 드뷔시를 만나자 자기가 지금까지 작곡한 것은 제대로 된 작품이 아니라는 것을 이 공연을 보며 깨달았다며, 견습생으로 들어가 드뷔시 밑에서 레슨을 받고 싶다고 말했다. 잠시 침묵하던 드뷔시는 이런 질문을 던졌다.
"브로드웨이에서 작곡을 하면 얼마나 벌어요?"
거슈윈이 솔직히 대답하자, 드뷔시는 잠시 할 말을 잊었다. 그러고는 이렇게 말했다.
"선생님이 저를 뮤지컬 작곡 제자로 받아주시죠."
물론 이것은 줄리어드 음대생과 교수들 사이에 도는 우스갯소리다. 하지만 이 일화는 세계 예술의 중심지로서 파리와 뉴욕의 차이점을 단순 명쾌하게 말해준다. 뉴욕을 포함한 미국의 예술가들은 수백 년 동안 이어져 내려온 프랑스 예술의 깊이에 무한한 동경심을 가지고 있다. 마돈나와 존 말코비치 같은 할리우드의 예술인도 파리에 자택을 두고 자주 기거하는 경우가 많고, 유럽 안에서도 가장 고전적인 동네에 살아보려고 한다. 그에 비해 프랑스 예술가들은 고지식한 전통에서 벗어나 파격적으로 새로운 것을 추구할 수 있는 뉴욕의 자유로움과, 시장 경쟁에서 이기기만 하면 이런저런 평론가의 잔소리를 듣는 대신 엄청난 보상이 주어지는 뉴욕의 예술시장 시스템에 대한 매력과 판타지를 가지고 있다.
p93
뉴요커의 민간 영웅담은 무법자를 경외의 눈으로 보는 경우가 많다. 그렇다 보니 뉴욕의 명소에는 마피아, 마약 거래, 성매매로 유명해진 장소가 포함되어 있고 DUMBO(Down under the Manhattan Bridge Overpass, 맨해튼 다리의 고가도로 밑)도 그중 하나다. 1989년 마피아 보스인 존 고티John Gotti는 체포되어 수갑을 차고 끌려가면서도 번듯한 새 양복 차림에 여유로운 웃음으로 당시 뉴욕에서 최고의 인기를 모으기도 했다. 또한 150여 년 전에 뉴욕시 전체를 타락시킨 보스 정치의 대명사 윌리엄 트위드William M. Tweed는 지금도 많은 영화에서 카메오로 등장하는 인물로서, 그 역할이 꼭 부정적이지만은 않다. 뉴요커는 이런 사람을 '색채가 강한 인물Colorful Character'로 여겨 그들과 관련된 책이 베스트셀러가 되고 영화는 매진 행렬을 이루기도 한다.
그렇다면 뉴요커의 윤리 나침반이 고장이라도 난 걸까? 그들은 왜 이런 무법자를 좋은 쪽으로 기억하려는 걸까?
그 이유는 뉴요커 중 많은 사람이 법의 보호를 받지 못하던 소수자 출신이라는 점도 있을 것이다. 뉴요커는 낯선 나라에 이민을 와서 어려운 일을 많이 겪은 사연 많은 사람들이다. '절박함 앞에서 인간이 어떤 선택을 하는가?'라는 메시지를 담은 스토리가 뉴욕에서 가장 사랑받는 예술가, 극작가, 영화 감독이 주목하는 스토리 라인이다.
1970년대 브루클린 남부에서 발생한 한 강도 사건은 뉴요커 사이에서 '들어볼 가치가 있다'고 생각되는 사연이 어느 정도나 되는지 보여준다.
1972년, 세 명의 괴한이 브루클린 남쪽에 위치한 체이스맨해튼 은행 지점에 총을 들고 습격해 돈을 요구했다. 이들의 이름은 존 보이토비츠John Woitowicz, 살바토레 나투랄레Salvatore Naturale 그리고 로버트 웨스텐베르그Robert Westenberg다. 웨스텐베르그는 경찰이 출동하자 홀로 도주했다. 나머지 두 명은 14시간 동안 은행 직원들을 인질로 잡고 경찰의 회유와 위협에 저항햇다. 결국 나투랄레는 FBI의 총에 사살되고, 보이토비츠는 체포되어 20년 형을 선고받았다.
이들의 사연은 정말로 기구했다. 보이토비츠는 폴란드계 아버지와 이탈리아계 어머니 사이에서 태어났다. 아마도 보수적인 천주교 가정교육을 받았을 것이다. 청년기에는 베트남전에 참전해 나라를 위해 싸웠고, 은행 지점 창구에서 일한 적도 있다. 22살이 되던 해에 카멘 비풀코라는 여성을 만나 결혼해서 두 명의 아이까지 낳았다. 그렇게 평범하게 살아왔다.
그런데 결혼 4년째가 되던 어느 날, 보이토비츠는 이탈리아계 이민자에게 1년 중 가장 중요한 행사인 산 제나로San Gennaro 축제에 참석했다가 엘리자베스 이든이라는 여성을 만나 사랑에 빠졌다. 그녀와 사귀는 동안 보이토비츠는 점차 자기의 성 정체성에 혼란을 느끼다가 자신이 동성애자임을 자각하게 되었다. 그러나 두 사람의 사랑이 너무나 깊었는지 헤어지지 않으려고 엘리자베스가 성전환 수술을 하기로 결정한다. 하지만 수술비가 없어서 보이토비츠는 수술비를 구하려고 친구들과 모의해 은행을 털기로 한 것이다.
이런 사건이 뉴욕 이외의 지역에서 발생했다면 어땠을까? 반인륜적이고 엽기적인 범죄를 다루는 미디어의 가십면에나 올랐을 것이다. 상식을 가진 사람과는 무관한 엽기적인 사건이라며 무시당하지 않았을까? 보이토비츠의 어리석은 선택을 손가락질하거나 인간 말종이라고 혀를 끌끌 찼을 것이다. "이것 봐, 이민자들은 범죄 가능성이 높다니까" 하면서 이탈리아나 폴라드인의 민족성 또는 종교를 문제 삼는 사람도 많았을 것이다.
하지만 뉴욕의 예술인들은 이 스토리를 세계인의 칭송을 받는 걸작 영화로 만들었다. 뉴욕의 <라이프>지는 존 보이토비츠의 기구한 사연을 상세히 실었다. 그리고 뉴욕에서 활동하던 영화감독 시드니 루멧Sidney A. Lumet은 그 이야기를 <개 같은 날의 오후Dog day afternoon>라는 제목의 영화로 만들었다. 대본을 쓴 프랭크 피어슨은 아카데미 극본상까지 받았다. 물론 할리우드는 보이토비츠에게 그의 인생사를 영화로 만들 권리를 돈으로 샀다. 비극적이게도 보이토비츠의 애인 엘리자베스 이든은 그 돈으로 성전환 수술을 받자 그를 떠나서 다른 사람과 결혼했다고 한다. 그러나 그녀가 에이즈로 사망하자, 보이토비츠가 추도 연설을 했을 만큼 두 사람의 사랑은 특별했다.
p96
참을 수 없이 고통스럽고, 통제 불가능한 상황에서 인간이 어떤 선택을 하는지는 인간의 본질적 모습을 벌거숭이처럼 드러낸다. 이것이 <위대한 개츠비>(살인을 저지른 부자), <렌트Rent>(에이즈로 죽어가는 예술가) 등 뉴욕의 걸작이 가진 공통적 테마다.
p98
이처럼 뉴요커는 기구한 인생을 사랑한다. 그래서 새로운 콘텐츠가 끊이지 않는다. 내가 파리에서 만난 사람들은 파리 외곽에 사는 알제리, 모로코 이민자 출신들을 무시하는 경우가 많았다. 그곳의 높은 범죄율과 문맹률을 보고 "역시 프랑스 사람과 알제리 사람은 달라"라는 식으로 말하는 것을 한두 번 들어본 게 아니다. 프랑스의 주류층은 자기가 비주류와 근본적으로 다르다고 생각하는 것 같았다.
하지만 뉴요커는 인간의 공통점을 믿는다. 극단적인 상황에 많이 처해본 도시에서 뉴요커는 인간이 압박을 받으면 이상한 선택을 한다는 것을 안다. 이것은 사회가 손가락질하는 사람들은 나와 근본적으로 다른 것이 아니라, 그와 내가 처한 상황이 달라서일 뿐이라는 믿음이다. 그렇기 때문에 그들이 극단적인 상황에서 한 선택은 내게도 얼마든지 일어날 수 있다는 시사점을 던져준다.
'역지사지'라는 우리의 옛말처럼, 미국에도 '남의 신발을 신고 1마일을 걸어보기 전에는 남을 판단하지 말라'라는 말이 있다. 하지만 대부분의 사람은 자신과 비슷한 교육수준, 사회계층, 문화권의 사람과는 역지사지 할 수 있지만, 존 보이토비츠와 같은 사람은 사연을 들어볼 가치조차 없다며 무시한다.
만약 내가 알고 있는 스토리가 획일적이이서 창의적인 콘텐츠를 찾기가 어렵고 내 사고가 좁다고 느낀다면 그처럼 비참하고 엽기적인 사연에 귀를 기울이지 못했기 때문일 수 있다. 그 발성되지 않는 목소리들이 바로 우리 사회가 그렇게 갈구하던 '새로운 콘텐츠'인 것이다. 새로운 콘텐츠는 남의 스토리가 나에게 중요할 때 가장 잘 발견된다. 선입견을 내세우지 않고 일단 귀를 여는 것, 이것이 바로 뉴욕 문화 파워의 근원 중 가장 중요한 요소일 것이다.
p123
뉴욕의 사교육 경쟁은 엄마의 임신 때부터 시작된다. 얼마 전에 뉴욕에 사는 내 친척이 아기를 낳았다. 그 엄마는 아기를 임신하는 순간부터 비상이었다. 일단 미국에서는 유급 육아휴직이라는 개념이 없다. 육아휴직 기간에는 급료가 나오지 않는다. 또 회사 지원 의료보험도 정지된다. 그래서 의료보험료로 한 달에 우리나라 돈으로 수백만 원씩 내야 한다. 휴가 기간은 자율적으로 정할 수 있지만, 이런 문제때문에 출산 후에는 가급적 빨리 직장에 복귀한다. 따라서 아기를 보육시설에 맡기기 전까지 아기를 돌봐줄 사람이 필요하다.
그 친척은 양가 부모님이 아직 일을 하고 계셔서 아기를 장기간 대신 맡아줄 형편이 못되었다. 그런데 뉴욕에는 육아를 위탁할 수 있는 시설이 턱없이 부족하다. 뉴욕에서 아기를 괜찮은 보육시설에 보내려면 임신 초기부터 신청하고 대기를 하더라도 엄마의 출산휴가 일정에 맞추어서 입학 허가를 받는다는 보장이 없다. 그래서 중산층 이상은 임신 후 적절한 시기를 보아서 괜찮은 어린이집 여러 군데에 신청을 해둔다. 내 친척은 대기명단에 이름을 올려놓은 어린이집 중 하나에서 입학을 취소한 아이가 생겨 빨리 들어갈 수 있게 되었다고 마치 복권에 당첨이라도 된 듯 좋아했다. 그런데도 입학할 때까지 출산 후 6개월은 기다려야 한다.
게다가 비용도 문제다, 안전하고 교육 프로그램이 좋은 곳에서는 보통 한 달 보육료로 400~700만 원을 받는다. 그 비용에도 아기를 오전 9시부터 오후 6시까지만 돌봐준다. 부모 중 한 명은 칼퇴근을 해야 맡길 수 있는 것이다. 보육료는 수요 공급에 맞추어 변동되기 때문에 이달에는 400만 원이던 것이 다음 달부터는 갑자기 500만 원으로 뛰기도 한다.
이런 열악한 자녀 교육 환경 때문에 많은 사람이 아이를 낳으면 뉴욕에서 나간다. 뉴욕의 좁은 아파트보다 낮은 가격으로 인근 외곽지역의 정원 딸린 집을 사서, 아이들에게 맑은 공기를 마시며 마음껏 뛰어 놀도록 하고 부모는 지하철로 출퇴근을 한다. 하지만 일부 뉴요커는 굳이 아기를 뉴욕에서 키운다. 좁은 집 안에 칸막이를 설치해 아기방을 만들고, 어린이집과 유치원, 초등학교까지 내내 을이 되어 산다.
왜 굳이 그런 선택을 하는 것일까? 나는 궁금했다.
게다가 뉴욕에서는 아이가 10대가 된 후에도 경제적인 고통이 계속된다. 대부분의 뉴욕 부모는 충분한 돈을 벌어 자식을 트리니티나 레지스, 호라스만, 리버데일 가은 검증된 사립 고등학교에 보내고 싶어 한다. 그러기 위해서는 상당한 경제적인 능력이 뒤따라야 한다. 뉴욕에서 가장 좋은 사립학교 중 하나인 트리니티는 졸업반의 1년 학비가 2017년 기준으로 5만 달러(6천만 원)에 이른다. 아마 지금은 더 올랐을 것이다. 뉴욕 상류층 가정 자녀들의 방탕한 삶을 그려 화제가 된 미국 드마라 <가십 걸>은 나이팅게일-밤포드 고등학교에서 일어났던 몇몇 스캔들에서 아이디어를 얻었다고 하는데, 이 학교의 1년 학비는 약 10년 전에 4만 6,500달러였다. 아이비리그 대학교의 학비와 비슷하다. 아이가 학교에 다니면 학비만 내는 것이 아니다. 부수적인 비용도 만만치 않다. 그래서 이 정도 학비라면, 일반 중산층 가정의 맞벌이 부부 수입으로는 엄두를 내기 어렵다.
p136
사회심리학자 리처드 니스벳Richard Nisbett은 아시아인이 서양인에 비해 '인 그룹(나와 잘 아는 사람들의 그룹)'과의 소통에 훨씬 적극적인 반면, '아웃 그룹(나와 사회적으로 관계가 먼 사람들의 그룹)'과의 소통은 서양인에 비해 소극적이라고 <생각의 지도>라는 책에서 쓴 적이 있다.
90년대생들이 젊은 세대로 소비의 주체 및 사회로 진출하기 시작하면서, 그 이전 60~80년대생들과 본질적으로 무언가 다른 점이 있다는 것을 느낀 필자가 몇년 여에 걸쳐서 이 주제를 파고 들면서 준비한 책.
현재 진행형의 변화이기 때문에 정확히 이렇다고 정의할 순 없지만 어느 정도는 90년대생 이후 세대에 대한 정보를 제공해준다.
이 책을 출간 당시에 한 번 봤는데, 문재인 대통령이 직원들에게 권장도서로 추천하면서 다시 유명해졌기에 함 다시 봤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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p29
기간제 일자리는 물론 노동법의 규율에서 벗어난 각종 특수 고용 형태 일자리가 넘쳐나는 세상이 된 지 오래다. 전체 노동자의 46퍼센트가 비정규직인 기형적 고용 구조는 일상이 됐다. 지금 산업계를 지배하는 이데올로기는 일은 시키되 고용 책임은 지지 않으려는 '유노동 무책임'이다. 그러니 1990년대 출생 취업 준비생들이 직업을 고를 때 안정성을 가장 큰 가치로 꼽지 않는다면 되레 이상한 일이다. 그래서 이들에게 가장 합리적인 선택은 직업 안정성이 높은 공무원이나 공기업 같은 국가기관이다.
게다가 최근 조사에 따르면, 공무원은 정년이 보장된 덕에 생애소득이 높아서, 기존의 인식과는 다르게 오히려 대기업보다 많은 소득을 기대할 수 있는 것으로 나타났다. 한국경제연구원에 따르면 재학 중 공무원 시험에 합격한 사람은 퇴직할 때까지 사기업 취업자보다 최소 3억 3,605만 원에서 최대 7억 8,058만 원까지 더 많은 누계 소득을 기대할 수 있는 것으로 조사됐다. 조사에 따르면 공무원의 임금인상율은 연평균 7퍼센트대 수준으로 대기업의 6.2퍼센트보다 높고, 공무원 퇴임 연령 역시 평균 56~59세로 대기업 평균인 52세보다 높다. 이제 공무원은 '가늘고 길게'가 아니라 '굵고 길게'가 된 것이다.
무엇보다도 공무원은 구조조정의 공포가 없다. 한국 정부가 수립된 1953년 이래로 단 한 번도 공무원 구조조정을 진행한 적은 없다. 정부가 가장 모범적인 고용주인 셈이다. 공무원으로서 특별한 결격 사유가 생기지 않는 한 직장을 잃을 걱정은 없는 것이다. 그 공포에서의 해방은 현대 사횡에서 최소한 '먹고살 걱정'은 하지 않아도 됨을 의미한다.
p32.
2008년 두산그룹을 새로운 재단으로 맞이하게 된 중앙대학교의 경우, 구조조정과 함께 교양 필수 과목으로 '회계와 사회'라는 회계학 수업을 개설했다. 학생들이 전공과 상관없이 졸업을 위해서 회계학을 필수적으로 이수해야 하는 상황에서 장덕진 서울대학교 교수는 "기업에서 필요로 하는 학문을 왜 학생들이 자기 돈 내고 배워야 하는가"라고 맹비난했다. 대학이 "학문적 가치가 아닌, 기업에 맞춰진 인재만을 양성하려 한다"는 것이다.
이에 당시 박용성 이사장은 "인문계든 자연계든 대학 졸업후 직장을 얻게 되면 처음 부닥치는 것이 현금 흐름에 대한 이해"라며 "회계학을 필수 교양 과목으로 한 것은 학생들의 장래를 위한 하나의 변화"라고 강조했다. 학생들의 사회 진출이 대부분 기업과 연계되지만, 모든 학생의 진로가 똑같다고 여긴다는 점에서 기업가의 성향과 입김이 학교 운영에까지 적용된 사례다. 하지만 여러 학내의 비판에도 대졸 실업자들의 지속적인 증가는 대학의 직업교육기관화를 부추기고 있다. '2015년 청소년통계'에 따르면 2014년 청소년(9~24세)의 48.6퍼센트가 대학 이상 교육의 주목적이 '좋은 직업을 갖는 것'이라고 답했다. '자신의 능력과 소질개발'은 36퍼센트, '인격이나 교양을 쌓는 것'은 1.8퍼센트에 그쳤다.
p43.
90년대생들은 자신들을 사회 발전의 원동력으로 여기지 않고 특정 이상을 실현할 필요성도 느끼지 못한다. 단지 그들은 현 시대에서 적응하고 살아남기 위해 노력할 뿐이다.
p53.
국내에서는 현재까지도 1980년대생과 1990년대생을 하나로 묶어서 분석하는 경우가 많다. 물론 대한민국의 1980년대생과 1990년대생은 하나의 공통점이 있다. 그것은 바로 기존 세대에 비해서 출생률이 떨어졌다는 것이다. 기존 세대에 비해서 출생률이 떨어졌다는 것은 미국의 밀레니얼 세대와 비교해 굉장히 큰 차이다. 미국의 밀레니얼 세대가 그 숫자를 바탕으로 강력한 소비층으로 성장한 것에 반해 한국은 그렇지 못했기 때문이다. 통상적으로 세대가 이전 세대에서 새로운 세대로 교체될 수 있을 것인지 명확하게 보여주는 지표는 바로 합계 출산율이다. 세대가 교체되는 데에 필요한 대체출산율은 선진국의 경우 2.1명이다. 하지만 미국이 2000년대 후반까지 2.05명 수준을 유지한 것에 반해, 한국은 1983년 2.06명을 나타낸 이후 지금까지 단 한 번도 2.0명을 넘어선 적이 없다.
이러한 현상이 벌어진 이유는 출산 제한 정책 때문이다. 한국은 6.25전쟁 전후인 1955년 합계 출산율이 6.33명을 기록하기도 했다. 1970년 합계 출산율이 4.53명을 기록하는 등 지속적으로 한 가정에서 평균 4명 이상의 아이를 낳기도 했다. 이에 정부는 강력한 출산 억제 정책을 폈다. 정책의 캐치프레이즈는 '둘만 낳아 잘 기르자'에서 '아들 딸 구별 말고 하나만 낳아 잘 기르자'로, 이마저도 다시 '하나씩만 낳아도 삼천리는 초만원'으로 바뀌었다. 1981년에는 인구증가억제 종합시책이 체택되었고, 1985년도에도 자녀 수에 따른 주민세, 의료보험료 등이 차등으로 부과됐다. 이런 정부 정책의 결과였을까? 지금은 현실은 OECD국가중 가장 낮은 출산율을 기록하고 있고, 이에 따라 정부는 출산장려 정책을 적극 추진하고 있는 판국이다. 1970년 이후 한국의 출산율은 지속적으로 하락하여 1984년 최초로 합계 출산율이 2명 이하(1.74명)로 줄어들었다. 그나마 1980년대생들은 둘 이상의 형제자매를 가진 것이 보통이었다. 하지만 1990년대생들은 더 이상 그렇지 않다. 강력한 소비층이 될 밀레니얼 세대의 기본적인 조건을 충족시키지 못한 것이다.
p67.
미국의 인류학자 마거릿 미드Margaret Mead는 반세기 전, 청년이 미래를 선도하는 사회를 전망했다. 기성세대가 청년에게 배워야만 하는 상황이 도래하리라는 것이었다. 증거는 당시 미국의 경험이었다. 미국으로 이주해온 사람들은 세대별로 상이한 적응력을 보였다. 다른 문화권에서 성장하여 이주해온 기성세대(이주 1세대)들은 새로운 환경에 적응하는 데 어려움이 컸지만, 미국에서 성장한 자녀(이주 2세대)들은 부모보다 더 빨리 적응했다. 이런 사실에 착안하여 미드는 과거의 경험에 집착하는 기성세대보다 그로부터 자유로운 청년이 더 빠른 적응력을 보이고, 따라서 젊은 세대에게 삶의 방식을 배워야 할 때가 올 것이라 전망하였다. 살아본 적 없는 미래의 세계에서 우리는 모두 '시간 속의 이주민'인 셈이다. 이제 청년이 스승이 될 수 있다.
<한겨례> 인터뷰에서 "노인들이 저 모양이란 걸 잘 봐두어라"라는 촌철살인으로 화제가 된 채현국 효암학원 이사장은 오늘날이 '먼저 안 게 오류가 되는 시대'라고 말했다. 그는 "농경 사회에서는 나이 먹을수록 지혜로워지는데, 자본주의 사회에서는 지혜보다는 노욕의 덩어리가 될 염려가 더 크다는 겁니다"라며, "지금은 경험이 다 고정관념이고 경험이 다 틀린 시대입니다. 먼저 안 건 전부 오류가 되는 시대입니다. 정보도 지식도 먼저 것은 다 틀리게 되죠"라고 말했다. 그의 말처럼 과거 경험이 이젠 판단의 기초 혹은 가르침의 근거가 되지 못하는 시대가 되었는지도 모른다.
p95.
하지만 미래에도 책이 디지털 미디어 혁명에서 비켜나 있지는 않을 것이다. 출판사와 유통업자들도 디지털 생산과 유통에 따른 경제적 이득을 다른 미디어 회사들이 그랬던 것만큼이나 거부할 수 없을 것이다. 그 이득이란 잉크와 종이를 대량으로 구매하지 않아도 되고, 인쇄 비용이 들거나 트럭에 무거운 책들을 실어 보낼 필요도 없으며, 재고 문제도 없다는 것이다.
비용 절감은 곧 가격 하락으로 이어진다. 전자책이 인쇄된 책의 절반 가격에 판매되는 상황이 드문 일은 아닌데, 이는 일정 부분 전자책 리더기 생산 업체들에 주어지는 보조금 때문이기도 하다. 이 엄청난 할인 혜택은 사람들이 종이에서 픽셀로 옮겨 가도록 하는 강력한 유인책으로 작용했다.
구텐베르크의 발명으로 대중화된 깊이 읽기의 관행은 점차 사라지고 소수의 엘리트만의 영역이 될 가능성이 크다. 다시 말해 우리는 역사적인 표준으로 되돌아가게 될 것이다. 노스웨스턴대학교 교수 그룹은 2005년 <Annual Review of Sociology>에서 우리의 독서 습관에 있어 최근의 변화들은 '대중적인 독서의 시대'가 우리 지적 역사에 있어 짦은 '예외'였음을 암시한다고 했다. 대중적인 독서는 예전의 사회적 기반, 즉 독서 계층이라 부를 수 있는 소수의 것으로 돌아가고 있다는 것이다. 장대익 서울대 교수가 2017년 국회에서 발표한 <독서와 시민의 품격>에서도 이와 비슷하게 사람의 뇌는 본래 독서에 적합하게 진화하지 않았다고 하였다. 독서는 비교적 최근에 생겨났기 때문이다. 진화론적으로 반드시 필요하지 않은 독서를 사람들이 계속하는 이유는 독서가 가져다주는 이득 때문일 뿐이라는 것이다.
아마존의 최고 경영자인 제프 베조스Jeff Bezos는 킨들을 소개할 당시 스스로를 찬향하는 듯이 말했다. "책과 같이 매우 진화한 물건을 택해 개선하는 것은 참으로 진취적인 일이다. 이것은 사람들이 읽는 방식까지 바꿀 것이다." 이는 거의 확실하다. 사람들이 읽고 쓰는 방식은 이미 인터넷을 통해 바뀌었다. 그리고 이 변화는 글이 인쇄된 종이에서 빠져나와 기술의 생태계 속에 정착됨에 따라 계속될 것이다.
p107.
하지만 대부분의 사람들은 매슬로가 말년에 이러한 자신의 주장을 바꿨다는 사실을 모른다. 욕구단계설에서 자아실현의 욕구를 가장 꼭대기에 올려놓았던 매슬로는 말년에 인생 최고 경험을 '자기초월', 즉 자아보다 더 높은 목적을 위한 삶에서 찾았으며, 본인이 종전에 최고 수준의 욕구로 꼽았던 자아실현이 사실은 가장 기본적인 욕구라고 이야기했다.
p154.
기존 세대에게 신입 사원들은 자기들만 생각하는 이기주의자이고, 새로운 세대에게 기존 세대들은 이미 회사에 믿음을 상실했으면서도 어떻게든 살아남기 위해 미련을 버리지 못하고 충성하는 꼰대들로만 보일 뿐이다. 사실 이렇게 회사에 대한 충성심과 관련한 갈등은 어제오늘의 일이 아니고 90년대생들만의 일도 아니다.
미국의 경우 이러한 갈등은 훨씬 이전부터 일어났다. 1965년 이후 출생한 X세대는 1990년대부터 회사에 진출하면서, 이전의 베이비붐 세대와 갈등을 보였다. 이들은 직장에서의 성공과 돈버는 것을 최대의 목표로 삼았던 젊은(Young) 도시의(Urban) 전문직(Professional) 즉 여피 Yuppies과는 다르게 젊고(young), 개인주의적이며(Individualistic), 자유분방하고(Free-minded), 베이비붐 세대에 비해 수도 적은(Few), 즉 이피족 Yiffie으로 불렸다.
이들은 일을 좋아하고 즐기지만 결코 자신을 희생하면서까지 회사에 충성하려 하지 않아, 회사에 대한 충성을 높게 사는 기존 세대나 관리자들이 이를 관리하는 데 어려움을 겪었다고 한다. 이에 따라 미국의 기업들은 이때부터 기존의 전통적인 HR정책에 변화를 두고 새로운 세대에 맞는 인재 관리 방법을 재정립하기 시작하였다.
국내에서도 2000년대 중반부터 1980년대생들이 기업에 유입됨에 따라, 야근과 주말 근무를 요구하는 기존 베이비붐 세대들과 새로운 세대와의 갈등이 일어나곤 했다. 젊은 세대가 새로운 아이디어는 많지만 애사심과 팀워크가 없다는 것이 주된 이유였다. 이에 성과급 제도를 투명하게 운영하고, 신세대의 의견을 경청하고 원대한 기업 철학을 내세움으로써 이들의 관심을 최사로 돌리는 방안들이 제시되었다. 그러나 여기에도 문제가 있었으니, 결국 회사에 충성을 하면 그 대가가 승진과 몸값 상승으로 자연스레 이어질 것이라는 결론을 가정했다는 것이었다.
90년대생들은 회사에 대한 충성이 곧 나의 성장이라는 공식을 배격한다. 새로운 세대는 '회사에 헌신하면 헌신짝이 된다'는 인터넷상의 '직장 계명'에 동의하고, 이를 넘어서 충성의 대상이 '회사'여야 할 이유가 있냐고 반문한다. 찰스 핸디는 <코끼리와 벼룩>에서 오늘날의 충성심이란 것은 "첫째가 자기 자신과 미래에 대한 것, 둘째가 자기 팀과 프로젝트에 대한 것, 마지막이 회사에 대한 것"이라고 말했다.
p157.
믈론 끼니도 제대로 때우지 못하던 가난한 나라를 지금과 같이 일으킨 건 성실한 노동자의 헌신 때문이었다. 그리고 그 바탕에는 회사가 열심히 일한 나를 버리지 않을 것이라는 믿음이 있었다. 하지만 1997년 IMF 이후로 열심히 일해온 많은 이들이 거리로 내팽겨쳐졌고, 2008년 금융위기 이후 상시적으로 구조조정이 일어난다. 그러니 90년대생들에게 근명, 성실을 강조하는 것은 앞뒤가 맞지 않는다.
p169.
2012년에 회사에 신입 사원으로 입사한 배모 씨(1990년생)는 2012년부터 2년간 본인에게 주어진 모든 휴가를 빠지지 않고 모조리 사용했다. 그에게 중요한 가치는 연차 수당과 같은 돈이 아니라 인생의 여유였다.
"본인에게 주어진 휴가를 다 쓰지 않고 휴가를 다녀오지 않은 것이 마치 더 일을 열심히 한 듯이 으스대는 선배들을 볼 때면 얼간이같이 느껴져요. 내 휴가를 내가 사용하는데 누가 뭐라고 하는 것도 이해가 안 되고요. 얼마 전에 팀장님이 지나가는 말로 '휴가가 너무 잦은 거 아닌가?'라고 하는데 기분이 안 좋았죠. 지적하려면 업무적으로 이야기해야 하는 거 아닌가요?"
페이스북에 '젊은 사원의 휴가 사유'라는 이름의 짤이 떠돌았다. 사원이 적은 휴가 사유는 다음과 같았다. "다음 날이 쉬는 날이어서." 이처럼 이들은 본인에게 주어진 휴가 기간을 어떻게 하면 효과적으로 사용할지에 대한 관심이 많다. 만약 황금연휴가 아닐지라도, 징검다리 휴일이 있다면 그들은 휴가를 붙여서 자체적으로 황금연휴를 만들기도 한다. 물론 이에 맞춰서 최근 기업들은 징검다리 연휴가 있는 주는 조직 전체 사원에게 연차나 월차 사용을 권장하고 있다.
p176.
조직학의 대가 아미타이 에치오니 Amitai Etzioni가 지적했듯 사람들은 불확실성에 대한 두려움 때문에 의사결정을 방어적으로 회피하거나 필요 이상의 정보를 수집하며 시간을 끄는 경향이 있다. 그리고 이런 상황에서 의도적인 비효율이 발생할 수 있다. 책임 회피를 위해 꼭 필요한 의사결정을 미루는 경우가 종종 발생하는 것이다. 그러니 대안을 검토하는 하급자는 보고서를 만들고 회의를 거듭하며 불확실성이 사라지길 기다린다. 필요 이상의 복잡한 결재 단계에서 시간을 끌기도 한다. 이는 의사결정을 내려야 하는 상급자도 마찬가지다. 결단이 필요한 순간 보고서의 사소한 오류나 정보 부족을 탓하며 재작업을 지시해 시간을 끈다. '돌다리도 두드려보고 건너라'라는 격언이 '의사결정을 하지 않는 것보다 더 나쁜 의사결정은 없다'라는 격언을 압도하는 것이다.
의사결정을 기다리고 있다고 해서 쉬는 것은 아니다. 모두 정보를 수집하며 바쁘게 뛰고 있다. 보고서 버전은 끝없이 올라간다. 그렇게 돌다리를 두드리던 순간 경쟁사는 이미 그 돌다리를 건너 신제품을 내놓는다. 남은 것은 완벽한, 그러나 이미 쓸모 없는 보고서와 판단이 틀리지 않았다는 씁쓸한 자위뿐이다.
p180.
지금은 종용한 MBC 예능 프로그램 <무한도전>의 2013년 '무도를 부탁해' 에피소드에서 개그맨 박명수는 이렇게 말한다. "꿈은 없고요. 그냥 놀고 싶습니다." 이는 기성세대, 즉 꼰대들에게 귀에 못이 박히도록 들었던 '사람은 꿈이 있어야 한다', '모름지기 꿈은 크게 꿔야 된다'는 말에 대한 반발과 같았다. 90년대생들은 이제 당당하게 이야기한다. '꼭 꿈이 있어야 되나?'
영화 <신과 함께>의 원작자로 유명한 웹툰 작가 주호민 씨는 본인의 2008년작 <무한동력>의 명대사로 꼽혔던 "죽기 직전에 못 먹은 밥이 생각나겠는가, 아니면 못 이룬 꿈이 생각나겠는가?"가 이제는 부끄럽다고 말하기도 했다. "꿈이 꼭 없어도 되는데 너무 꿈을 강요한 건 아니었을까?"라고 말이다. 새로운 세대는 꿈을 좇으라는 기성세대의 충고가 더 이상 효과적이지 않음을 경험을 통해 깨닫고 있다.
p215
스탠퍼드대학교의 심리학자 월터 미셸Walter Mischel은 마시멜로 실험으로 유명하다. 취학 전 어린이들을 상대로 작은 책상에 마시멜로 두 개와 종 하나를 올려놓고 인내심과 순간의 욕구, 성공과의 관계를 알아본 실험 말이다. 그로부터 10년 후 실시된 2차 연구에서, 마시멜로의 유혹을 이겨낸 어린이는 그렇지 않은 어린이들보다 몸매가 날씬하고 사회 적응을 잘하게 됐을 뿐 아니라, SAT에서 210점이나 더 많은 점수를 받았다.
이렇다 보니 마시멜로 이야기는 회사 생활에서 가장 흔한 조언인 '참고 견디라'의 가장 대표적인 근거로 쓰인다. 그런데 정말 마시멜로 이야기가 '참을성이 강하면 성공한다'라는 교훈을 주는 이야기일까? 마시멜로 이야기가 잘 알려진 건 어떠졈 사람들이 재밌어하면서도 가장 궁금해하는 문제, 즉 '성공하는 사람들의 특성은 무엇인가?'라는 문제를 단순한 공식으로 환원했기 때문일 수 있따. 여기서 단순한 공식이란 '성격은 타고난 것'이며 '인내는 미덕'이라는 것이다.
하지만 2013년 로체스터대학교의 홀리 팔메리Holly Palmeri와 리처든 애슬린 Richard Aslin 은 잡지 <코그니션Cognition>에 <합리적 간식 먹기Rational Snacking>라는 논문을 발표했다. 그들에 의하면 "첫 번째 마시멜로를 빨리 먹은 아이들 중 일부는 참을성이 부족했던 것이 아니라 '나중에 돌아오면 하나를 더 주겠다'는 연구원의 말을 의심했기 때문"이다. 그들은 "불안정한 환경에서 자란 아이들은 '먹는 것이 남는 것'이라는 생각을 갖게 된다"며, 안정적인 환경에서 자란 아이들일수록 약속이 지켜질 것이라고 기대하며 좀 더 오래 기다리는 경향이 있다고 주장했다.
이뿐만이 아니라 많은 연구자가 미셸의 실험 결과를 비판하는 논문을 발표했다. 그러나 상당수의 사람들은 복잡한 이야기를 읽으려 하지 않고, 동기부여 강사들이 하는 단순한 이야기를 듣는다. 많은 동기부여 강사들은 마시멜로 실험을 들먹이며 여전히 '네 살짜리도 인생의 성공에 필요한 것이 무엇인지 이해하고 있다. 그것은 참을성이다'라고 소리 높여 외친다.
하지만 오랫동안 참은 대가로 두 번째 마시멜로를 먹은 어린이들이 인생에서 성공했다고 해서 그들이 선천적으로 유혹에 넘어가지 않는 자질을 갖고 있었다고 말할 수는 없다. 로체스터대학교의 연구진이 말한 바와 같이 어떤 어린이는 단지 연구자의 말을 믿지 못해서 오래 기다리지 않았을 수도 있다. 또는 그날따라 배가 고팠을 수도 있다. 복잡한 세상 속에서 단순한 참을성이 인생의 성공 비결일 수는 없다. 세상의 수천 가지 요인들이 우리의 일상에 영향을 미친다.
p220
80년대와 그 이전 출생 세대들은 인생의 목표가 무엇인지 설정하는, 소위 삶의 목적을 추구했다. 그러나 90년대생들은 지금의 인생이 어떤지를 더 중요하게 여기고, 삶의 유희를 추구한다. 이와 함께 이들을 움직일 수 있는 힘도 오로지 '흥미'에서 나온다. 그렇다면 흥미가 중요한 90년대생들에게 회사는 어떠한 의미일까?
"회사에서도 재미가 있었으면 좋겠어요. 이런 잉기를 회식 시간에 팀원들에게 한 적이 있는데, 그때 한 대리님이 '즐거움은 돈을 내고 찾아. 회사는 엄연히 돈을 받고 일을 하러 오는 곳잉. 그런 곳에서 즐거움을 찾는 게 말이 되니?'라고 답하더군요. 회사에서 일을 안 하고 높고 싶다는 뜻이 아니에요. 단지 어차피 할 일이면, 즐겁게 하고 싶다는 말이죠. '열심히 하는 사람도 즐기는 사람을 이길 수 없다'는 말은 잘도 하면서 왜 회사를 즐겁게 만들려는 생각은 안 하는 거죠?"
얼마 전까지 회시에서 즐겁게 지내고 싶다는 말은 임금을 받고 근무하는 회사원의 입장에서 일종의 반동과 같은 것이었다. 즐거움은 돈을 내고 사는 것이고, 이와 반대로 돈을 받은 곳은 절대 즐거움의 장소가 될 수는 없다는 논리였다. 물론 90년대생들에게도 회사란 노동을 하러 오는 곳이다. 다만 그들은 어디에서라도 '유희'를 즐기고 싶을 뿐이다. 유희가 충족되지 않는다면 회사는 일터로서의 매력을 잃게 된다.
p236
글로벌 전자상거래가 점차 발달하면서 2000년대 초에 다나와, 에누리 같은 최저가 비교 사이트들이 등장했다. 가격 비교의 맹점이 해소되기 시작했다. 하지만 이러한 최저가 사이트가 소비자의 생산자 간 정보의 비대칭을 어느 정도 해소해주긴 했으나, 그렇다고 해서 당시 소비자 모두가 최저가로 합리적인 구매를 한 것은 아니었다. 왜냐하면 기업들은 온라인에서조차 소비자의 가격 비교를 방해하는 장치를 마련했기 대문이다. 예를 들어 온라인 사이트에 일부러 제품을 혼란스럽게 설명하고, 비슷해 보이지만 서로 다른 여러 가지 버전의 모델을 등록하여 가격 비교를 더욱 곤란하게 만드는가 하면, 저가형 미끼 상품을 검색 상위에 올리거나 광고 창에 게시하여 소비자를 자기 웹 사이트로 유인한 다음 결국 더 비싼 제품을 사게 만들었다.
p241
보드리야르는 1970년에 발간한 <소비의 사회 La societe de consommation>를 통해 현대 소비사회의 구조와 특징에 대해 설명했다. 그에 따르면 현대 자본주의는 산업 자본주의를 지나며 생산수단과 생산기술의 비약적 발전을 이룬다. 그 결과 자본주의는 과잉생산이라는 구조적 문제를 갖게 된다. 끊임없이 소비하지 않으면 생산은 멈추게 되고 자본주의 역시 멈추게 될 운명을 맞는 것이다. 이러한 '끊임없는 소비'가 필요하게 된 소비 자본주의는 '고객의 니즈를 창출해야 한다'는 구호를 만들어냈다. 이는 달리 말하자면 '없는 소비도 만들어야 한다'는 것이다. 따라서 오늘날 마케터는 소비를 꿈꾸게 하는 것이 지상 과제가 되었다.
p246
하지만 이러한 고객만족도가 곧바로 고객충성도로 이어지지 않는 것으로 보고되었다. 75,0000명을 대상으로 진행한 매튜 딕슨Matthew Dixon, 캐런 프리먼Karen Freeman, 니컬러스 토먼Nicholas Toman의 2010년 연구 결과에 따르면, 고객만족과 브랜드 로열티는 상관관계가 적은 것으로 나타났다. 고객의 기대를 넘어서기 위한 각종 서비스는 충성도 제고에 기여하지 못할 뿐만 아니라 과할 경우 오히려 고객의 기대수준을 높여 충성도를 약화할 수 있다. 나아가 고객의 충성도를 높일 수 있는 것은 제품의 질이나 가치와 같은 핵심 편익이지 부가적인 서비스가 아니며, 고객들이 지닌 핵심 문제를 신속하게 해결해줄 때 고객충성도가 강화된다고 하였다.
연구자들은 2010년 <하버드비즈니스리뷰>에 기고한 글 "고객을 기쁘게 하기 위한 노력을 그만두라 Stop trying to delight your customers"에서 고객충성도 제고를 위한 새로운 측정 지표로 '고객노력지수Customer Effort Score, CES'를 제안했다. 기존 기업들이 관리하고 있는 '고객만족도 지표Customer Satisfaction, CSAT'는 고객의 재구매 및 지출 증가에 대한 예측력이 떨어지는 것으로 나타났다. 그 밖에 2000년대 중반 제너럴일렉트릭 등의 기업들이 체택하면서 인기를 끌고 기존의 고객만족도를 대체할 것으로 기대되었던 '순추천지수Net Promote Score, NPS'는 보통 수준의 예측력을 보여주었다.
CES는 '당신이 처한 문제 해결을 위해 얼마나 많은 노력을 들었느냐?'라는 질문의 답을 5점 척도로 측정해서 관리한다. '거의 노력이 들지 않았다'면 1점을, '매우 많은 노력이 필요했다'면 5점을 체크한다. 점수가 낮으면 낮을수록 고객이 브랜드와 관련하여 불필요하게 소모하는 노력이 적은 것이다. 이는 고객충성도 제고에 이바지하게 된다. 연구 결과에 따르면 노력을 적게 들인 사람들의 94퍼센트가 재구매 의향을 드러냈다고 하니, 고객 충성도에 대한 예측력이 꽤 높은 지표라 할 수 있겠다. 물론 이와 같은 개념이 반드시 90년대생에게만 해당하는 조사 결과는 아니지만, 이와 같은 번거로움의 제거와 최소화는 누구보다 90년대생 소비자들에게 중요한 요소다.
p248
HMR 시장의 급속한 성장과는 반대로, 시장이 겹치게 된 패스트푸드와 패밀리 레스토랑은 점차 HMR 제품과의 경계가 사라짐과 동시에 존폐의 위기를 맞게 되었다. 특히 2000년대 초중반 80년대생들의 마음을 사로잡으며 전성시대를 열었던 패밀리 레스토랑의 경우, 2000년대 중반 이후 경기침체 장기화로 인한 청년 실업 증가와 혼인율, 출산율 저하 등으로 인구구조가 급속히 변화하면서 내리막길을 걷기 시작했다. 특히 90년대생들의 소비 패턴 양극화는 몰락의 결정타가 되었다. 연인이나 가족과의 기념일을 패밀리 레스토랑에서 즐기던 80년대생들과 달리, 90년대생들은 평소에 간단히 끼니를 때우고 특별한 날에는 호텔처럼 더 화려하고 고습스러운 곳을 찾게 된 것이다. 패밀리 레스토랑은 90년대생들에게 더 이상 특별한 장소도 아니고, 간편하게 식사를 해결할 수 있는 장소도 아니게 된 것이다.
p300
그런데 이렇게 배달앱 시장이 성장하게 된 것은 단순히 간편성 때문만은 아니다. 1996생 김모 씨는 이렇게 말했다.
"배달앱은 분명 간편성도 있긴 하지만, 단순히 그것 때문에 배달앱을 사용하는 것은 아닙니다. 배달앱의 가장 큰 특징은 후기를 남길 수 있다는 것입니다. 전화로 주문을 하면 서비스가 엉망인 경우가 많았죠. 쿠폰을 빼먹는 경우도 많고요. 그래서 이제는 꼭 후기를 남깁니다. 소비자인 우리의 피드백이 솔직히 반영된다는 것이 앱을 통한 주문의 이유입니다."
반대의 사례도 있다.. 바로 '인형뽑기방'이다. 2015년부터 본격적으로 생기기 시작한 인형뽑기방은 삽시간에 전국으로 퍼져 2017년에는 전국에 2만 개가 넘을 정도로 높은 성장세를 보였다. 인형뽑기방이 창업 아이템으로 인기를 끈 데에는 적은 비용으로도 개업이 가능하다는 게 한몫을 했다. 공간을 크게 차지하지 않는 데다 대당 200~300만 원대인 경품 기계 몇 대면 손쉽게 창업이 가능했다. 1,000~2,000원이면 연령 제한 없이 누구나 이용할 수 있어 어린이들과 청소년들도 즐겨 찾으며 전국적인 열풍으로 이어졌다.
하지만 불야성을 이루던 인형뽑기방은 이제 파리만 날리는 곳이 많아졌다. 빠른 성장세만큼 폐업도 빨라졌다. 이유는 바로 인형뽑기방에서 '확률을 조작'한다는 것이 밝혀졌기 때문이다. 모든 인형뽑기방이 확률을 조작하지는 않았지만 인기는 급격히 식어버렸다. 게임물관리위원회가 2016년 9월부터 11월까지 전국 144개 뽑기방을 대상으로 한 실태조사에 따르면 101개소(70퍼센트)가 관련 규정 위반 업소로 적발됐다. 이 중 12개소(8.4퍼센트)가 기계 개,변조를 통해 뽑기 확률을 조작했다. 인형뽑기방의 주요 타깃 고객이었던 90년대생들은 이러한 확률 조작 사실을 알고 그 이후로 발길을 끊었다고 한다. 1992년생 김모 씨는 "인형뽑기방이 기계로 장난치는 것을 안 이후에 절대 가지 않습니다. 더 이상 그런 호구가 되기는 싫거든요"라고 말했다.
이와 같이 90년대생들은 직원으로 일하든 소비자로서 제품과 서비스를 구매하든, 가장 중요한 요소로 '신뢰'를 꼽곤 한다. 배달앱의 후기처럼 신뢰를 강제할 수 있는 제도의 개선이 있으면 하나의 큰 성공 요인이 되기도 하지만, 신뢰를 잃어버리면 그 많던 인기도 신기루처럼 사라지기도 한다.
그들은 광고를 차단하기 바쁘다.
스타벅스는 국내에서 가장 매출이 높은 커피 프랜차이즈다. 그렇다면 스타벅스의 매출은 어느 정도일까? 스타벅스의 2017년 매출은 1조 2,634억 원이다. 국내 2위에서 6위까지의 5개 회사(투썸플레이스, 이디야커피, 커피빈, 엔제리너스, 할리스커피)의 매출을 모두 합해도 스타벅스 한 곳에 턱없이 못 미친다. 2~6위 다섯 회사 매출은 모두 합해도 8,200억 원에 불과했다.
이렇게 국내 1위의 커피전문점으로 성장했지만 스타벅스의 광고를 본 사람은 없다. 광고를 하지 않기 때문이다. 국내 기업은 마케팅 예산의 대부분을 제품 광고와 프로모션에 쓴다. 지금까지 마케팅의 목표인 브랜드 인지도와 선호도를 높이거나 시장 점유율과 매출을 늘리는 데에 실제로 광고와 프로모션은 효과가 있었다. 하지만 지금의 90년대생 소비자들은 다양한 방법으로 광고를 차단하기 바쁘다. 어쩌다 노출된 광고 또한 믿을 수 없다고 말한다.
스타벅스의 인사팀에 근무한 경험이 있는 한 담당자는 스타벅스의 성공을 광고와 프로모션이 아닌 브랜딩에 대한 투자와 내부 직원을 첫 번째 고객으로 두고 아끼는 기업문화 때문이라고 말했다. 광고를 하지 않는 대신 브랜딩과 조직 관리에 힘쓴다는 것이다.
차범근 에세이집 2번째. 1권인 슈팅 메시지가 분데스리가 시절의 선수생활 시절의 에피소드 위주였다면, 이번 2권인 그라운드 산책은 귀국 후와 귀국 후 프로팀 감독과 대표팀 감독 시절의 에피소드로 이루어져 있다.
글은 투박하지만, 오랜 축구 생활의 경험과 그 비하인드를 통해 좀 더 축구라는 세계를 깊게 이해할 수 있는 내용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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p29.
스위스에는 생 모리츠와 함께 세계적인 고급 휴양지로 꼽히는 제어마트(Zermatt)라는 스키 휴양지가 있다.
1년 내내 스키를 탈 수 있는 곳이고 마테 호른을 볼 수 있어서 일본이나 미국으로부터 몰려오는 관광객도 꽤 많은 곳인데 겨울이면 스키 손님으로 가장 많이 붐비는 곳이다.
저녁이면 기차역 구내며 골목 등에 벗어서 팽개쳐 놓은 듯한 스키와 부츠 등으로 어지러운데 아무도 집어가는 사람이 없다는 것이다. 처음에 나는 아무래도 미심쩍어서 그곳 경찰관에게 괜찮으냐고 묻기까지 했다.
그러나 며칠이 지나고부터는 우리 식구들도 어느 한 귀퉁이에다가 스키를 벗어놓고 그 다음날 찾아 신을 만큼 곧 익숙해졌는데, 의심하지 않고 서로를 믿을 수 있다는 것은 상당히 기분 좋은 일이었고 바로 그 속에 나도 포함되어 있다는 게 더욱 그랬던 것 같다.
믿을 수 있다는 것은 사람들의 관계를 단순하게 만들어 준다. 그것은 물질에만 국한되어 있는 것이 아니고 말, 생각, 그리고 행동에 이르기까지 내가 상대방을 믿을 수 있을 때 편안한 관계가 유지되고 스트레스도 훨씬 덜 받게 되는 것이다.
이런 면에서 우리 사회는 아직도 불필요한 스트레스를 너무 많이 주고받으면서 살고 있다. 마찬가지다. 우리가 선진국이 되려면 서로가 좀더 믿을 수 있어야 한다.
p72. 콜 독일 수상에 관한 추억
1990년 봄.
동서독이 아직 완전한 통일은 되지 않고 화해의 분위기가 한창 뜨거울 때 드레스덴 시에서는 유적지 보수 기금 마련 자선 축구 대회가 있었다.
나는 그 때 세계 선발로 그 대회에 참가했었는데 드레스덴의 운동장은 초라하다는 생각이 들 정도로 엉성하고 형편없는 수준이었다. 본부석의 자리 역시 널빤지였는데 초대 손님들의 이름이 적힌 종이를 스카치테이프로 붙여 놓으면 그것이 곧 지정석이 되는 것이었다.
내가 앉았던 자리 바로 앞에는 'Dr. Kohl'이라고 이름표가 붙어 있었는데 경기가 시작하기 조금 전에 남녀 수행원 한 명씩과 함께 아무렇지도 않다는 듯이 그 널빤지에 안증ㄴ 사람은 바로 거인처럼 몸집이 큰 독일 수상 콜이었다.
그 후 몇 차례 가까이에서 뵐 기회가 있었지만 그 때는 처음이라서 사실 흥분이 되기도 하고 또 한편으로는 널빤지에 앉은 수상이 이상하게 생각되기도 했다. 우리 식으로 생각한다면 본부석 전체도 고칠 판이지만 다만 널빤지 몇 줄을 걷어내고 안락한 의자 몇 개쯤 갖도 놓는 게 뭐 그리 어려웠을까. 하프타임이 되었을 때 동독의 축구 팬들은 콜 수상에게 사인을 받기 위해서 몰려왔고 그것을 말리는 사람은 아무도 없었다. 거짓말 같은 모습이었다.
윗저고리에서 읷훅하게 사인펜을 꺼내서 옆에 앉은 드레스덴 시장과 함께 담소를 하면서 사인을 해주던 모습이 아줌마 수행원이 조심성이라고는 조금도 없이 떠나갈 듯한 목소리로 응원을 하던 모습과 함께 지금도 믿을 수 없을 만큼 부러운 일로 가끔씩 떠오르곤 한다
언젠가 수상 관저에 초대받은 꼬마 중 하나가 '콜 아저씨'라고 부르는 바람에 그 다음날 신문과 독자들을 상당히 즐겁게 해주었는데 아마도 앞에서 얘기한 콜 수상의 그런 분위기가 그 꼬마에게는 이웃집 아저씨처럼 느껴지게 한 모양이었다.
그 뿐 아니다. 지금은 치매로 독일 국민들을 가슴아프게 하는 전 수상 슈미트 씨의 경우에는 의전 상의 시효가 지나 부인이 1등석을 탈 수 없게 되자 아무렇지도 않다는 듯 남편과 떨어져 비좁은 자리에 앉아 여행하는 당당함.
바로 그런 모습이 초라해 보이기는커녕 지금도 수십 명씩을 끌고 골프장에 행사하는 우리네 힘깨나 쓰는 사람들보다 훨씬 더 강하고 근사해 보이는 것은 내가 외국 생활을 오래했기 때문만은 아닐 것이다.
p73. 축구 열기에 부는 이혼 바람
독일 대사관의 야닉시 부부와 식사를 하는데 로타 마테우스가 두 번째 부인과 또다시 헤어졌다는 얘기를 했다.
남의 얘기니까 서로 부담 없이 낄낄거리며 화제에 올리기는 하지만 사실 급작스럽게 불어닥친 독일 스타플레이어들의 이혼 바람은 우리들 세대에서는 상상하기가 쉽지 않을 정도로 심각한 상태다.
1990년 월드컵 우승 멤버 중 베켄바워 감독을 위시해서 로타 마테우스, 뮐러, 리트바르스키 같은 꽤 많은 인기 선수들이 이혼을 했다고 한다. '1990년 월드컵 챔피언 팀은 이혼도 챔피언이다'는 우스갯소리를 할 정도다.
그런데 문제는 가끔씩 독일을 방문하는 나에게도 발생한다. 운동장에서 마주치면 가족들의 안부를 묻는 게 보통인데도 이제는 "부인과 얘들은 잘 있느냐?"는 인사를 할 수가 없다는 얘기다. 1980년대 내가 선수 생활을 하던 때와 비교하면 분데스리가 선수들의 평균 급여가 3배쯤 늘었다.
거기다 90년 월드컵 우승을 전후해서 이탈리아로 팀을 옮겨간 국가 대표급 선수들은 천문학적인 숫자라고 해도 과언이 아닐 만큼 많은 수입을 올렸다. 물론 내가 선수 생활을 할 때에도 휠첸바인이나 그라보브스키 같은 노장 선수들은 우리 젊은 선수들이 자신들의 시대에 비해 너무 많이 받는다고 노골적으로 불평을 하기도 했지만 최근 5년 동안 불어닥친 연봉의 급등 현상은 가족 관계에까지 이상 현상을 나타낼 만큼 변화가 심했다.
우리는 돈이 아주 많은 사람들이 비정상적인 가족 관계를 유지하는 것을 자주 보게 된다. 생활의 여유가 가정을 파괴하는 원인이 될 수도 있는 모양이다.
우리 젊은 선수들, 앞으로 우리 축구 시장도 분명히 더 좋아지리라고 생각할 때 이런 선례를 알고 자신을 추스르는 것도 해롭지는 않을 것이다.
p84. 삼풍 참사와 코리아 컵 교훈
성수대교가 무너졌을 때 나는 이런 생각을 한 적이 있다. 만약에 어느 건설업자가 다리공사를 1억 원에 입찰 받았다고 하자. 좀더 튼튼한 다리를 놓고 싶은 욕심(?)에 한푼 흘리지 않고 받은 돈을 고스란히 다리 건설에만 사용했다고 할 때 오늘 우리 나라의 현실에서 과연 그 양심적인 업자에게 다시 또 다리를 건설할 기회가 돌아갈까 하는 것이었다.
다리가 무너지기 전까지는 원칙이, 양심이 무시되고 오히려 배척 당하다가 막상 다리가 무너지고 말자 왜 원칙을 지키지 않았느냐고 따진다. 삼풍백화점도 마찬가지다. 자재난에 허덕이던 시점에서 만약에 누군가가 온전한 골재를 사용하지 않으면 위험하다고 버티고 나섰다면 그 융통성 없는 잘난(?) 기술자는 분명히 무시당하거나 멀찌감치 떨려나갔을 것이다.
그러나 백화점이 무너지고 나자 손가락처럼 가는 철근을 억지로 지탱하던 흙 콘크리트를 부서뜨리면서 사람들은 그들이 원칙을 지키지 않았다고 분노하고 나무라는 것이다.
과연 우리가 불편을 감수하면서도 꼭 지켜야만 하는 이 원칙은 사고가 난 후에 책임을 물을 때만 필요한 것인지 이 시점에서 우리는 한 번쯤 깊이 생각해 볼 필요가 있을 것 같다.
...
말하자면 우리의 현실은 옳고 그른 것을 가리는 기준이 원칙에 있는 것이 아니라 그 결과에 따라 달라진다는 것이다. 융통성을 사랑하고 원칙을 배척하는 우리들.
결과만 좋으면 과정이 비도덕적이고 무원칙해도 고쳐져야 할 부분들이 잘한 일로 평가되는 우리 사회. 이제부터라도 우리들이 가장 거추장스럽게 여기는 도덕과 원칙이 이 사회를 지배하지 않는다면 '최고급 백화점이 무너져 내린 한국'이라는 세계인의 비웃음 속에서 우리의 세계화는 정말 요원할 것이다.
==> 2019년 현재의 시점에서 볼 때, 우리 사회의 기조가 결과 지향에서 과정 지향으로 변해간다는 징조들이 사회 곳곳에서 점점 늘어나고 있다. 과정 지향만을 통해 원리와 원칙에 함몰되는 것도 효율이라는 측면에서는 무조건적으로 받아들이는데 리스크가 있다고 생각한다. 70년대부터 2000년대 까지 30여년 간 초압축 성장의 과정 상에서 결과가 옳으면 모든 것이 옳다는 목적 지향의 사회기조는 눈부신 경제발전이라는 큰 성과를 거둔 것이 사실이다.
하지만 그 큰 성과의 뒤안길에서는 소수의 승자를 위해 고통받는 다수의 대중의 알려지지 않은 희생이 있었다. 1998년 IMF와 2008년의 세계 금융위기를 통해 발생한 경제하락의 과정에서는 그간 희생해왔던 다수의 희생이 강요되며, 혜택받던 소수는 이 희생을 피해나가게 되었다. 대중은 경제위기가 표면화되면서, 이러한 비대칭의 경제혜택의 부조리를 목도하게 되었다. 이는 소수의 혜택받은 이들의 모럴 해저드에 대한 대중의 분노를 불러일으키게 되었고, 이는 그간 경시되었던 과정의 윤리와 도덕을 요구하게 되었으며, 결과보다는 과정의 투명성에 대중이 관심을 갖게 된 계기가 되었다.
지난 촛불혁명과, 올해 조국 사태로 촉발된 우리 사회의 교육,경제에 대한 양극화에 국민 전체가 관심을 갖게 된 것도 과정의 투명성이 지켜지지 않는다는 데 대한 대중의 분노가 그 모티브였다. 또한 조국 개인과 그 가족에 대한 검찰의 과도한 월권은 과도한 국가 권력을 민주주의의 원칙에 맞게 제한해야 한다는 국민적인 공감대를 불러일으키고 있다.
p97. 비자금 파문, 공짜 밝히지 말자
처음 서독에 갔을 때 나는 프로 선수들의 쩨쩨함에 놀란 적이 있다. 원정 경기를 멀리 가게 되면 보통 새벽 두세 시경에 집으로 돌아오게 되는데 이때 버스 기사 아저씨에게 수고비를 거둬주는 돈이 1인당 3~5마르크(1500~2500원)였던 것이다.
이 액수는 그곳에서 콜라 한잔 값에 해당되는데 이것도 이긴 날이나 거두지 늘 그렇게 하지는 않았다. 그러나 몇 년이 지나면서 나는 몇 푼 안돼 보이는 그 돈 역시 결코 작은 것은 아니라는 걸 깨달았다. 누구를 막론하고 월급 외에는 단 한푼도 만져볼 수 없는 그곳 사회에서 비록 작은 돈이지만 스물 댓 명이 거두는 그 돈은 그나마 프로 선수들을 상대하기 때문에 만져볼 수 있는 꽤 짭짤한 액수였다.
여기에 비한다면 우리는 그 액수나 범위가 너무 크고 넓다. 어디를 가도 봉투는 가장 보편적인 인사 방법이다. 지금 노태우 전대통령의 4천억, 5천억 비자금 때문에 기를 박박쓰는 사람들도 촌지의 액수가 작으면 쩨쩨하다. 많으면 역시 통이 크고 멋있다고 상대방을 평가해 본적이 없지는 않을 것이다.
그 사람의 월급이나 수입과 비례해서 봉투를 의심하거나 옳지 않다고 생각하지 않는다는 것이다. 통치자금, 정치자금, 비자금, 품위유지비... 이런 돈이 이 땅에서는 꼭 필요하다는 걸 부인할 수 있는 사람은 없다.
나처럼 철저하게 원칙과 도덕을 따지는 사람도 소위 품위 유지비라고 할 수 있는 비자금이 꼭 필요한 사회이기 때문이다. 언제부터인지 나 역시 따로 주머니를 차고 있다. 물론 자금의 출처가 정확한 것이기는 하지만 집안의 생활과 내가 써야하는 돈의 비율이 비등해지는 현실에서 매번 마누라에게 달라고 할 수는 없기 때문이다.
고향에 찾아가 동네사람들이 모여 공을 차는데 한번 들러도 맨손(?)으로는 곤란하고 그 액수 역시 만만치 않은 경우가 허다하다. 바로 이것이 우리의 문화이고 관습이다. 나는 노태우 전 대통령과 비자금으로 야기된 사태를 지켜보면서 좀더 근본적으로 우리가 변하지 않는다면 사람들의 인심과 환심을 사야 하는 정치인들로서는 비자금의 필요성과 유혹을 뿌리치기 어려울 것이라 생각한다. 받는 쪽이 먼저 변해야 이 잘못된 문화는 없어질 수 있고 그 위에 도덕정치가 터를 잡을 수 있을 것이다.
p111. 악습 교정과 선수 기 살리기
지난 올림픽 아시아지역 최종 예선전에서 한국 최고의 골게터인 최용수가 퇴장을 당하는 바람에 온 국민들이 바짝 긴장했던 적이 있다.
일반 팬들의 입장에서는 워낙 중요한 선수가 빠지게 되니까 가슴이 덜컹 내려앉았고 축구를 잘 아는 전문가나 열성팬들의 경우는 중요한 고비에서 팀을 어렵게 만드니 화가 났던 것 같다.
그날 밤도 방송을 하러 MBC에 갔더니 스포츠 보도국의 정국장님이 큼지막하게 써놓고 퇴근한 대본에는 도저히 방송으로 내보낼 수 없는 흥분한 문구로 꽉 차 있었다.
그런데 개인적으로 최용수를 만나면 너무 순진하고 귀여워서 도무지 과격한 행동이 이해가 안 갈 때가 있다. 본인의 변명으로는 투지가 넘치다보니 그게 잘 안된다고 하는데 나는 최용수를 볼 때면 또 생각나는 선수가 있다.
현대 송주석 선수인데 그는 스피드와 기량으로 볼 때 한국 무대에서는 최고의 제목인데도 불구하고 기량만큼 크지 못하는 선수였다.
내가 그만 두고 고재욱 감독이 팀을 맡으면서 주석이의 플레이가 좋아지기는 했는데 마침내 지난 시즌 끝날 무렵에 상대 팀의 라커룸으로 쳐들어가서까지 한바탕하는 사건이 터지고 말았다.
주석이를 데리고 있으면서 여러 명의 상대 선수가 다리가 부러지고 부상을 당해서 나는 아주 강경하게 나와 함께 일하는 동안 주석이는 어딘지 모르게 위축돼 있는 것 같았다.
=> 이런 애매한 문장을 보면 스포츠 신문에 연재할 때 편집자가 없었던 것 같기도 하다. 아마 이런 문맥일 것 같다.
주석이를 데리고 있으면서 그의 거친 플레이로 여러 명의 상대 선수가 다리가 부러지는 등의 부상을 자주 당했다. 나는 이런 사고가 발생할 때마다 강경하게 그를 꾸짖었다. 그때문인지 나와 함께 일하는 동안 주석이는 심적으로 위축돼 있던 것 같다.
내가 주석이의 이런 부분 때문에 고민을 하자 아내는 "만희 씨(현 전북코치) 보고 욕을 빼고 말을 하라고 하니까 당신 앞에서는 말이 잘 안되고 더듬거리잖아요. 똑같은 거지요 뭐!" 하면서 참견을 했는데 그 옆에 있던 최만희 코치의 부인이 "고것이 정답이네요" 하면서 즉각 거들고 나서는 것이었다.
몸에 익힌 습관. 이것은 나이가 들어서 고치기는 힘든 모양이다. 바로 이렇게 힘든 남들의 습관을 꼭 모범 답안으로 고쳐두어야 직성이 풀리는 나의 습관도 상대방 입장에서는 고약하기는 똑깥을 것이다.
p113. 고교 감독은 로비스트(?)
KBS-TV에서 우리 나라 운동선수들의 문제점들을 취재 보도한 적이 있다. 이날 얘기들은 진학에 얽힌 비리에 초점을 맞추면서도 비교적 완곡한 수준에서 취급했다고 할 수 있다.
물론 어느 학생의 증언처럼 "부모님들이 나를 대학 보내는 데까지 그랜저 수십 대 값이 들었다"고 하는 식의 자극적인 증언도 있었지만 왜곡돼 있는 현실과 비교해 본다면 대체적으로 누구나 다 알고 있는 수준이었다고 할 수 있을 것이다.
감독 중 가장 힘든 건 고등학교 감독들이다. 이들 중 상당수는 지도자라기 보다는 차라리 로비스트라고 해야 옳을 만큼 아이들을 가르치는 일보다 어떻게 해서든 대학 감독들과 끈을 맺어서 한 명이라도 더 대학에 보내는 게 중요한 임무가 돼버렸다.
가장 많이 배워야 하는 연령의 아이들을 지도해야 할 감도들의 임무를 생각한다면 한국 축구로서는 이만저만 손실이 아니다. 그러나 대학 진학이 지상 목표가 돼버린 현실에서 부모들 역시도 당연히 이 작업에 적극 동참할 수밖에 없는 일이고 보면 진학 과정이 비리의 온상이 될 수밖에 없는 조건이 이미 완벽하게 갖추어 졌다고 봐야할 것이다.
지금 고등학교 지도자들의 봉급 수준은 몇몇 케이스를 제외하고는 형편없는 평균이하의 수준이다. 1백만 원이 채 안되는 감독들도 부지기수다. 그러나 이들에게 자가용에 핸드폰은 기본일 뿐더러 거의 매일 이어지는 사람 만나기(접대) 비용 역시 이들의 수준을 이미 벗어난 지 오래인 것이다.
물론 이것은 학부모들의 몫이고 어찌 보면 아이를 대학으로 보내기 위한 지원금인지도 모른다. 물론 더러는 이런 현실을 이용해 아주 악질의 지도자가 없지는 않지만 바로 이런 행위를 힘들고 괴로워하면서도 어쩔 수 없이 해야 하는 안쓰러운 감독들도 적지 않다.
내 밑에서 공을 차자 지도자로 나선 선수들도 꽤 있는데 바로 이런 짓(?)이 적성에 맞아 신바람내는 경우도 있는 하면 너무 힘들다고 하소연하는 경우도 있다. 어떤 지도자의 부인은 "우리 아기 아빠는 고스톱을 못하고 술을 못해서 걱정"이라며 걱정 아닌 걱정을 늘어놓기도 한다.
언젠가 운동하는 아들의 뒷바라지를 제대로 못한다는 부담감으로 자살을 했던 아버지도 있었다. 외국에서 볼을 차다가 귀국한 선수들의 부모는 한 달에 수십만 원씩 들어가는 비용에 혀를 내두르기도 한다. 아마도 우리 나라처럼 많은 돈이 들어간다면 축구 선진국이라고 할 수 있는 독일에서는 축구를 시킬 수 있는 부자가 거의 없을 것이다. 그곳에서는 한푼의 돈도 필요 없기 때문이다.
나는 지금 무엇부터 얘기해야 할지조차 모르겠다. "지금 우리 나라의 어느 부문에 손을 대도 썩은 고름이 나지 않는 곳이 없다"는 것이 검찰의 탄식. 그러나 그들에게 벌을 주기 이전에 그렇게 하지 않고는 살아남을 수 없는 '도덕불감증'을 강요당하며 괴로움을 겪고 있는 많은 사람들에게 용기를 주는 깨끗한 사회로의 변화가 더 급하고 바람직하지 않느냐는 생각이다.
p122.
여름, 겨울 휴가를 마친 뒤 한 차례씩은 반드시 열흘 정도의 합숙을 아주 조용한 곳으로 떠났었다. 이 기간은 그야말로 먹고 훈련하고 곯아떨어지는, 더 이상의 아무 생각도 없이 지내야하는 힘든 기간이지만 이 훈련을 마치고 나면 다시 경기를 할 수 있는 몸이 만들어지는 게 처음에는 신기하기도 했었다. 일단 몸이 만들어지면 그 다음부터는 가벼운 반복 훈련만으로도 기능이 유지되는데 그게 바로 매일 운동을 조금씩이라도 하는 사람은 별로 힘들이지 않고 할 수 있는 것과 똑같은 이치다. 이런 훈련이 뒷받침되지 않아서 체력이 불충분하면 근육 사이 이외에 또 하나의 체내 에어지 공급처인 뇌와 간에 축적된 에너지를 우리 몸이 사용하게 되기 때문에 뇌는 상황을 정확하게 인지하고 지시할 수 없고 간은 구토를 일으키기도 하는 것이다.
그런 상태서 기술이나 전술훈련은 아무 의미가 없고 잦은 패스미스 역시도 정신 집중 이외에 바로 이런 부분에서 기인한 것이기도 하다.
p134. 문화 따라 코치 역할도 다르다.
이랜드의 이영무 감독이 올림픽 대표팀의 코치직을 사퇴했다.
개인적으로 나는 비쇼베츠에게도 비교적 호감을 갖고 있을 뿐 아니라 이영무 감독과도 각별한 사이기 때문에 두 사람 모두에게 상처가 돌아가는 이번 일을 지켜보면서 마음이 별로 편하지 않았다.
더구나 문제의 근원이 어느 한 사람에게 있는 것이 아니고 동서양의 문화 차이에서 오는 것이라서 더욱 그랬다. 우리 나라에서는 감독이 자신의 의견보다는 모든 사람과 의견을 나누고 주위의 의견을 잘 받아들일 때 겸손한 감독, 좋은 사람이라는 칭찬을 받는다.
그러나 서양에서의 감독은 자신의 생각이 뚜렷하고 그것을 흔들림 없이 밀고 나갈 때 훌륭한 지도력을 가진 감독으로 꼽는다. 그렇기 때문에 우리 나라에서는 코치의 비중이 높고 그 역할 또한 유럽에 비해 중요한 편이다. 그러나 유럽에서의 코치는 단순한 어시스턴트에 불과할 뿐 어떠한 권한이나 영향력도 갖지 못한다. 바로 여기에서 이영무 감독과 비쇼베츠의 문제가 시작되었다.
감독은 바깥 정치(?)를 주로 하고 코치는 가르치는 일을 해왔던 지금까지의 역할에 익숙한 이영무 감독으로서는 감독이 휘슬을 직접 물고 지도하는 비쇼베츠 감독의 단순한 보조자로서는 자존심이 상할 수밖에 없었을 것이다. 또 혼자서도 능히 올림픽 대표 팀을 끌고 갈 수 있는 이영무 감독의 능력 역시 유럽식 코치의 단순한 임무를 맡기에는 어울리지 않는 것이다.
그러나 비쇼베츠로서는 너무나 당연한 역할 분담이다. 감독의 개성과 지도력, 그리고 자신만의 축구가 없이는 능력 있는 감독으로 평가받을 수 없는 유럽에서 모든 스태프는 감독을 돕기 위해서 존재할 뿐인데 그들의 의견을 꼭 들어야만 한다고는 생각하지 않기 때문이다. 전통적인 우리들의 감독 역할이 유럽 사람들 눈에는 매우 우유부단하고 책임감 없는, 무능한 지도자로 보일 뿐이다.
"잘모르겠는데요."
"한번 의논해 보지요."
바로 이런 말들이 겸손으로 받아들여지는 동양과 무능으로 취급되는 서양의 차이가 이영무 감독의 올림픽 코치직 사퇴를 낳게 한 것이다.
p138. 스포츠 세계화 - 폭력 추방부터
우리는 지금 세계화를 부르짖고 있다.
그 의미가 세계적인 수준과 실력을 겨룰 수 있는 각 분야의 질적 향상도 되겠지만 그 보다는 세계인과 섞여 사는데 무리가 없는 한국이 되는 게 더 먼저인성 싶다.
예의범절, 도덕성, 정직성 그리고 순화된 인성도 세계인이 되는데는 큰 몫을 차지하게 될 것이다. 얼마 전 TV로 보도되는 외국인 근로자들의 호소를 접하면서 일반적인 많은 사람들이 '우리 국민이 저토록 잔인한가?'하는 괴로운 마음을 가진 적이 있었다.
보고 듣기가 민망할 정도의 사건들이 일어나고 있었다. 실제로 나는 우리 나라 국민들이 비교적 성격이 급하고 폭력과 가깝다는 생각을 자주 한다. 특히 세계 스포츠 무대에서 남북한이 번갈아 가며 보여 온 폭력과 비신사적인 행위는 말할 것도 없고 이런 사건들을 별 무게 없이 취급하는 언론 역시도 이 부분에 놀라울 정도로 관대(?)한 편인 것 같다.
83년 본선 진출권을 얻은 북한이 FIFA로부터 징계를 받음으로써 한국의 세계 4강 신화를 이룰 수 있었던 기회를 제공해준 당시 북한 팀의 경기장 난동 장면을 나는 독일에서 신문의 4분의 1을 차지하는 대형 사진을 통해 보았었다. 그러나 귀국 후 보니 우리들 주변에서 너무나 자주 일어나는 그라운드의 폭력이 별 문제시되지 않고 있다.
지난 겨울 일화의 이종화 선수가 월드컵 대표 팀의 전지 훈련에 합류했다가 연습 경기 중 비신사적인 행위를 했다고 해서 FIFA로부터 징계를 받고 국내 리그에도 참여하지 못한 적이 있다. 이것 역시도 우리들의 자체 징계가 아니고 FIFA의 징계였던 것이다.
스포츠가 세계를 움직이는 힘을 갖는 것은 그 바탕이 '페어 플레이'로 정치에서 기대할 수 없는 친선과 교육 효과를 가지고 있기 때문이다.
나는 이런 의미에서 앞으로 세계 무대에 태극기를 달고 나간 우리 선수들 중 어떤 이유에서라도 비신사적인 행위나 폭력을 사용했을 때는 귀국 후 아주 엄한 징계를 주어야 한다고 생각한다. 국제 무대에서의 그런 모습들은 우리가 생각하는 것 이상으로 우리를 깍아 내리고 세계화와는 정반대의 행위이기 때문이다.
p146. 윤정환, 고정수와의 전쟁이 시작되다.
윤정환, 고정수.
지금도 이들 둘만 생각하면 어려운 숙제를 끌어안은 듯 답답함을 느낀다. 앞으로 반 년여 동안 이들 두 녀석을 길들이고 '차범근화'하기 위해 해야 할 기력 소모를 생각하면 올 겨울에는 보약 한 재 정도는 넉넉히 먹어 둬야 하지 않을까 하는 생각도 없지 않다.
이들 둘은 게으르고 꾀가 많은, 사이좋은 선후배 관계다. 그러나 고종수는 좀 나은 편이다. 야단도 맘껏 칠 수 있고 여차하면 볼기짝도 패줄 수 있는, 소위 성격상 다루기가 쉬운 유형에 속하기 때문이다. 그러나 윤정환은 많이 다르다.
말 수도 별로 없는 데다가 붙임성이 좋은 그런 성격이 아니라서 서로 간의 마음을 열 수 있는 통로가 썩 원활하지 못한 케이스다.
선수들 중에는 여러 가지 부류가 있다. 우선 늘 열심이면서 자기 일을 틀림없이 해내는 완전한 프로는 성격의 색깔이 별로 중요하지 않다. 내가 원하는 게 바로 이런 선수들인데 대표팀 선수들이 대부분 여기에 속하고 나 역시 이런 선수들을 중심으로 팀을 만들려고 애쓰는 편이다.
그러나 수 십 명의 선수 중 모두가 다 그럴 수는 없다. 고종수나 김병치처럼 꼭 튀는 선수가 있다. 그나마 이들은 맘껏 야단치고 요리할 수 있어서 목이 아프고 힘은 들지언정 스트레스를 받지 않는다. 그러나 가장 힘들고 신경이 많이 쓰이는 선수는 무엇을 생각하는지 알 수가 없이 늘 얼굴을 찌푸리고 다니는 부류다. 직장이고 어디고 반드시 있을 것이다. 힘든 훈련과 치열한 경쟁으로 주전, 비주전을 가리는 대표팀의 예민한 분위기 속에서 바로 이런 선수들은 감독을 엄청나게 피곤하게 하는 것이다.
그리고 팀 분위기를 망쳐 놓는다. 더구나 고참 급에 속하는 노장 선수가 그렇다면 그것은 대책 없이 피곤해지는 것이다. 이제 윤정환, 고종수와의 전쟁은 시작된 것이나 다름 없다. 지금 이들의 상태로는 내가 쓸 수 없기 때문이다. 앞으로는 한국보다 더 높은 기량을 가진 팀들과의 경기 뿐인데 11로 전원이 자기 몫을 해줘도 기량 면에서 부족한 게 우리들의 현실인데, 자신의 몫을 다른 사람이 대신 해준다는 것은 있을 수가 없는 일이기 때문이다.
이제 둘은 변신에 성공하면 살아남을 것이다. 그러나 그게 아니면 수비가 우선적으로 안정되야 공격력이 살아난다는 축구관을 가진 나로서는 과감하게 도태시킬 수밖에 없다. 이들은 우선 세계적인 팀들의 미드필더들이 얼마나 많이 뛰는지를 TV나 경기 비디오 테이프로 계속 보아야 한다.
그들의 기량이 자신들보다 훨씬 높음에도 불구, 더 나은 자신이 역할을 위해 얼마나 미친 듯이 뛰어다니며 악착을 부리는 지를 진심으로 깨달아야 한다는 것이다. 그게 충분히 인식되고 공감할 수 있으면 그 다음은 훈련장에서 행동으로 옮겨야 한다.
나에게도 그들에게도 힘든 싸움이 될 것이다. 그러나 그들의 인내와 노력으로 이것이 성공한다면 이건 틀림없이 한국 축구와 팬들에게 가장 큰 선물이 될 것이다. 인내하고 참는 것이라면 항상 자신이 있다. 그래서 이미 그들에게 도전장을 던져 놓았다. 성공 여부는 그들의 몫이다. 단단히 마음의 준비를 해야 할 것이다.
p151. 오버래핑을 차단하다.
내가 선수 생활을 하던 때였다.
81독일 선수권 대회의 결승전이 있던 날이었다. 전통적으로 맨투맨 수비를 쓰는 독일에서 최전방 공격수와 전담 마크맨의 1대1 싸움은 경기의 승패를 좌우한다고 할만큼 중요한 전술 부분이다. 이때 상대방의 간판 수비수인 브리겔은 올림픽 10종 경기 국가 대표 출신답게 모든 면에서 뛰어난 선수였는데 거기다 그는 남아도는 힘과 스피드로 공격에 가담해 스스로 득점을 하는 아주 위협적인 존재였다.
경기 전 부흐만 감독은 나에게 특별 지시를 내렸다. 90분 내내 절대 한 자리에만 머무르지 말아라. 공을 차지 않아도 좋으니 국가 대표 수비수인 브리겔을 몰고 전후좌우로 다니면서 브리겔의 공격력을 무력화시키라는 것이었다. 나는 쉬지 않고 움직였고 브리겔은 씩씩거리며 따라다녔다.
결국 이 틈바구니에서 공격수 출신 풀 백인 노이어베르거가 선취 득점을 했고 우리는 2대 0으로 리드할 수 있었다. 그리고 후반 종반 쯤 원래 움직이는 사람보다 따라다니는 게 더 힘든 법이이서 지쳐 있는 브리겔을 따돌리고 내가 점프 헤딩 슛으로 3대 0을 만드는 것까지 성공했다.
이날 경기를 본 사람이라면 치고 달리며 공을 다루는 시간이 적은 내 경기에서 불만이 많았을 것이다. 그러나 감독은 대만족이었다. 물론 브리겔의 체력 저하로 내가 득점까지 얻어내자 작전의 성공에 마침표를 찍을 수 있어서 더욱 통쾌했겠지만 바로 이런 경우 운동장 밖에서 별볼일 없는 선수가 감독에게는 아주 중요한 무기가 되어 주는 것이다.
내가 대표팀을 맡고 노르웨이와 첫 경기를 치르던 날, 독일의 친구들은 노르웨이 풀 백의 오버래핑과 득점은 가공할만하다면서 거푸거푸 주의를 주었다. 덴마크 프로팀 소속으로 독일에 와서 유럽 선수권 대회를 치르는데 슈팅 그 자체가 대표 같았다는 것이었다.
나는 하석주에게 단단히 일렀다. 물론 당시 상황으로는 먹지 않는 게 무엇보다 필요했기 때문이었다. 공격에 가담하지 않아도 좋으니 상대방이 오버래핑하지 못하도록 미리 차단하고 절대로 슈팅 기회를 주어서는 안된다. 석주는 완벽하게 해냈다. 다만 TV에서는 그의 모습을 볼 수 없었을 뿐이었다. 바로 이런 경우 감독에게는 성공하고 선수에게는 실패처럼 보이는 경기가 되고 마는 것이다.
도쿄에서 한일전이 끝나고 나는 고정운에게 많은 칭찬을 해줬다. "너 개인적으로는 만족스럽지 못한 경기였지만 전술적으로는 대단히 만족스럽다. 결과적으로 너는 온르 나에게는 성공한 선수다." 이날 정운이에게는 줄기차게 많이 뛰어서 공격 가담을 늘리는 상대방을 철저히 무디게 하라는 임무를 주었다. 더구나 그곳은 적지였기 때문에 상대방의 기를 살려 놓는다는 것은 기름을 부어 주는 것이었다.
서울에서 보았듯이 같은 팀이지만 정운이가 대퇴부 근육 이상으로 도쿄서만큼 움직여 주지 못하고 서정원이가 반대쪽 공격을 저지해주지 못하자 실점을 한 것이다. 바로 이런 것을 통해 공격수들의 수비 능력이 얼마나 중요하다는 것을 느껴야 한다. 팬들은 치고 들어가서 슈팅을 하고 문전에서 움직이는 그런 모습을 기억해 낸다.
그러나 감독은 바로 저 순간 도와주지 않고 그냥 있는 선수들의 수비 나태가 더욱 불만스러운 것이다. 상대가 강팀일 수록 더욱 그렇다. 그래서 이전의 우리 선생님 한분은 그런 선수를 가리켜 "팬들을 기만하는 선수"라고 혹독하게 야단친 것을 본적이 있다.
팬들을 기만하는 선수는 팀 전력에 실질적인 보탬이 안되기 때문이다. 그럼에도 팬들은 그를 기억하는 게 감독을 고민케 하는 또 하나의 짐이다.
p169.
선수의 부상은 정신력이 흐트러지거나 최고의 컨디션이 아닐 때 자주 나타난다. 나 자신이 아픈 선수나 컨디션이 안 좋은 선수보다는 기량이 좀 떨어지더라도 완전한 몸을 가진 선수를 내보내려고 하는 이유 중 하나도 부상을 염려하기 때문이다.
그래서 지난 우즈베키스탄 전을 마치고 본선 진출이 확정되자 "가능한 이번 경기는 그 동안 뛰지 못했던 선수들에게 기회를 주고 싶다"고 했던 것인데 그것은 "한 번쯤 뛰고 싶다"는 정신력이 지금 상황에서는 어떤 것보다 우위일 것이라는 판단이 되었기 때문이었다.
그러나 그것 역시 쉽지가 않았다. 지난 한 주 내내 훈련 결과가 좋지 않았던 최용수였다. 그러나 홈에서의 마지막 경기에서 그동안 가장 공을 많이 세운 용수에게 주중 훈련이 부실했다고 스타팅에서 제외하고 싶지는 않았다. 물론 목숨을 걸고 이겨야 하는 경우였으면 나 역시 좀 더 냉정했을 것이다.
지금도 경기에 졌기 때문에 용수의 출장이 아쉬운 게 아니라 바로 그런 훈련 상태서 부상 위험이 높다는 사실을 누구보다도 잘 알면서 내보 낸 나의 냉정치 못한 결정이 용수의 코뼈가 부러지는 큰 부상으로 이어지자 바로 그것이 아쉬운 것이다. 고정운의 경우도 마찬가지다. 허리가 아프고 시합 전날도 근육이 한번 뜨끔했다는 얘기를 팀 닥터로부터 전해 들었다. 예전 같으면 어림도 없는 일일텐데 본인이 괜찮다며 기어이 출전하고 싶어하는 것을 보자 "우즈베키스탄 전에서 모처럼 골을 넣었으니 그 뒤풀이도 하고 싶을텐데 한 번 들어가서 소원 풀어봐라"하는 냉정치 못한 판단으로 출장을 허락했다. 근육 이상은 날씨가 추우면 더욱 위험률이 높아진다. 결국 한번 제대로 뛰어보지도 못하고 근육 부상만 악화되는 결과를 얻고 말았다.
p180. 너무나 길고 힘들었던 3년 간
89년 독일에서 선수 생활을 마치고 지도자 교육 과정을 공부하면서 가장 존경하는 스승인 네덜란드의 리누스 미셸 선생님에게 "지도자도 열심히 하면 성공할 수 있는 직업이냐?"고 물은 적이 있다.
당시 나는 지도자 과정을 공부하면서도 한국적 지도자 모습에는 스스로 자신이 없던 터라 귀국 후 꼭 팀을 맡아야겠다는 확신이 서지 않았기 때문이었다. 그 때 선생님은 수 십년 간의 경험에서 오는 확신으로 단호히 얘기해 주셨다. "열심히 일하는 감독만이 성공할 수 있다. 감독이 얼마나 열심히 일하는지는 선수들이 가장 잘 알기 때문이다."
그리고 선생님은 덧붙여 "선수 기용은 절대로 소신대로 정당하게 해야 하며 이것이 무너지면 결국 자살골을 넣게 되고 만다"면서 "특히 너처럼 사람들로부터 많은 사랑을 받는 사람은 책임도 그만큼 크기 때문에 팀을 맡을 때는 주변 정리를 완벽하게 하고 반드시 소신껏 일할 분위기가 되었을 때만 팀을 맡으라"는 충고도 거급거듭 해주셨다.
그리고 1년 후.
내가 현대팀을 맡아 바닥에 있는 팀을 준우승시키면서 감독 취임 첫 해부터 스포츠 서울과 일간 스포츠에서 주는 '올해의 감독' 상을 받을 때만 해도 정말 나는 지금처럼 재미있게 일했다. 큰돈을 들여서 선수들을 사들이는 데는 별 흥미가 없는 나는 어린 선수들이 쑥쑥 크는 재미로 힘든 줄 몰랐고, 당시 단장이셨던 윤국진 현 울산시 축구협회장님은 나의 명예를 걸고 하는 그 일에 신뢰와 지지를 아낌없이 보내주었던 정말 신명나는 한 해였다. 그러나 그해 겨울, '왕회장'님께서 대통령 선거에 출마하시면서 윤국진 단장님이 선거관리 본부책임자로 불려나가시자 나는 한쪽 날개가 완전히 떨어져나가 버린 꼴이 되었고, 그 후 3년은 그야말로 매순간 그만두고 싶었던 너무나도 힘든 그런 시간의 연속이었다.
내가 처음 현대에 발을 들여 놓았을 때 당시 고려대학교 동문회 회장이신 정세영 회장님은 "우리 동문중 가장 자랑스러운 인물인 차범근과 이명박을 현대가 갖게 돼서 너무 영광이다"면서 단장님에게 "잘 도와서 감독으로서도 훌륭히 키워줘야 한다"며 나에 대한 각별한 애정을 보여주었다. 그래서 회사에서도 보통의 감독 대우 이상으로 예우를 해주었던 것은 사실이다.
하지만 단장님이 선거 때문에 떠나자 서울에 볼 일이 있어 올라 갈 때마다 공항으로 내보내주던 회사 차도 "택시 타라고 그래"하면서 끊어버렸고 합숙 중 술담배를 하지 않는 우리 코칭스태프들이 디저트로 먹는 호텔의 2천원짜리 아이스크림마저 "왜 300원짜리를 사다주지 비싼 걸 먹게 하느냐"며 구단 직원들을 윽박지르는 간접 인신 공격과 자존심을 뭉개는 비하는 지금 생각해도 가슴이 아프며 당시의 3년은 너무나 길고 힘들었다는 생각이 든다.
그리고 바로 이런 것들을 해결하지 못하고 이겨내지 못하는 것은 나의 결정적인 약점이기도 하다. 그래서 대표팀 감독을 맡을 때 나는 선생님의 말씀을 기억하면서 주위를 찬찬히 살폈다. 그리고 이상없음을 확인했다. 그리고 너무나 열심히 신명나게 일만했다.
그래서 더욱 행복했다. 카자흐스탄, 우즈베키스탄 원정 경기서 UAE 감독관이 거푸 배정되자 사실 별 것이 아닌데도 "말도 안된다"면서 바꿔달라고 신경질을 부렸다. 협회는 부랴부랴 FIFA에 편지를 보내서 해결해주었다. 왠지 마음이 편했다.
경기가 끝나자 오완건 부회장님, 김원동 부장, 가삼현 부장에게 슬그머니 미안해졌다. 바로 이런 축구협회의 분위기가 우리 선수들과 나에게는 안심하고 최선을 다할 수 있는 가장 큰 힘이 돼주었다.
p212.
'샤덴 프로이데'라는 심리학 용어가 말해주듯이 인간은 남의 불행을 보면 본능적으로 쾌감을 느끼게 되어 있다.
p241.
얼마 전 아들 녀석이 학교에서 선배들과 모여 앉아 잡담을 하면서 "다시 태어나면 무엇을 할까"를 서로 얘기했던 모양인데 녀석은 "다시 태어나도 축구 선수를 하겠다"고 했더니 모두들 "돌았다"고 하더란다.
말하자면 이미 이 연령(고등학생)이 되면 축구를 정말 하고 싶다는 즐거움이 없어져 버린다는 얘긴데 얼마 전 조사된 초등학교 축구 선수들의 경우도 비슷하다는 결론이 나온 모양이다. 초등학교 축구 선수들이 축구를 하기 싫은 첫 번째 이유는 이미 많이 알려진 사실처럼 구타가 무서워서였다고 한다.
두 번째가 훈련이 너무 많아서, 그리고 세 번째는 돈이 너무 많이 들어서였다고 한다.
p254. 운동장도 없는 축구 교실
언젠가도 소외된 자들의 대변인으로서 바른 사회 만들기에 앞장서는 일을 대표적으로 나서서 하던 사람이 불법으로 집을 짓고 마당을 넓히는 등 정작은 옳지 않은 일을 마다하지 않았던 게 문제가 돼 시장이 된지 며칠만에 그만 둔 적이 있었다.
그때도 나는 참담한 기분이었는데 어린이 심장재단에 관여했던 L씨(부연 설명 : 뽀빠이 이상용 씨를 말함. 이 사건은 누명으로 밝혀져서 이상용씨는 법적으로 무죄를 입증했다. 자세한 것은 검색해보면 많이 나온다.)의 경우는 개인적으로도 친분이 있을 뿐 아니라 15~16년 전만 해도 그나 나나 꼬마들의 사랑을 듬뿍 받던 때라 "나중에 너랑 나랑 대통령 선거에 나가서 누가 더 인기가 있는지 알아보자"는 농담을 자주 했을 만큼 어린이들을 사랑하는 사람으로 믿어왔기 때문에 허탈감이 더했다.
그러는 중에도 "단체를 운영하려면 비자금이 반드시 필요하다"는 그 분의 인터뷰 내용은 나도 모르게 쓴웃음이 나올 만큼 공감이 가는 부분이기도 했다.
축구교실 운영을 좀더 체계 있게 하기 위해서 7년쯤 저 사단법인 허가를 신청했을 때의 일이다. 법인 신청을 하기 위해 우리 사무실에서 열심히 준비해서 갖다 준 서류가 특별한 이유도 없이 퇴짜를 맞는 것이었다. 그때 나는 독일에서 귀국한 직후였고 운영 자체가 내 개인의 광고 모델료나 방송 출연료 같은 것으로 되고 있었기에 내가 그들에게 상을 받았으면 받았지 사정(?)을 해야할 이유가 없다는 게 내 생각이었다.
거의 1년여를 '차범근이 직접 오라'면서 끌던 것을 우연히 파티에서 만난 당시 박철언 체육부장관이 '팬'이라면서 반가워하는 바람에 체육부에서 퇴짜를 맞고 있는 서류 이야기를 하고 난 후 일이 일사천리로 끝났던 적이 있다.
그 뿐이 아니다. 아이들이 연습할 운동장을 빌려쓰는 데서부터 어느 한 곳 그냥 지나가는 일이 없는 것이 우리 나라의 현실이다.
얼청난 정부 예산으로 유명 선수 축구교실을 지원하는 경우에도 지도자들의 보수를 지불해서 더 어려운 곳을 개설해 달라는 요청은 무시하고 지난 해에는 현실적으로 별로 도움이 되지도 않는 물품으로 반드시 지불해야 한다면서 운동자도 없는 축구교실에다 기가 막히게도 골대를 지원하겠다고 품목을 적어보냈다.
우리 축구교실에서는 연구 끝에 그 골대를 운동장에 있는 곳에 보내주고 우리는 그 운동장을 빌려 써야겠다고 아이디어를 짜보았지만 1년이 넘는 지금까지 수 차례 독촉에도 골대는 나타나지 않고 올해는 그나마도 1천여 명이 넘는 우리 축구교실에는 그 엄청난 예산 중 공 100개만 지원하겠다는 것이었다. (차범근 감독이 글을 좀 더 조리있게 쓰셨다면 해결될 일이 많았을 지도 모르겠다. 좀 억울한 사연에는 할말은 많은데 마음이 앞서는지 글을 이렇듯 맥락 파악하기가 어렵게 쓰시는 경우가 있다.)
또 몇 달 전 집사람에게 사정사정해서 얻어낸 돈 몇 천만 원으로 여의도에 만들어 놓은 미니 축구장도 납득할 만한 이유도 없이 몇 달째 사용허가가 나지 않고 있다.
바로 이럴 때 원칙만 따지는 사람은 열만 받거나 포기해 버리는 것이고 능력 있는 사람은 비자금을 동원, 매끄럽고 쉽게 처리하는 것이다.
이렇듯 서로가 서로를 못 믿고 손가락질하는 세상에서도 사람들은 자기를 희생하면서 사는 산소 같은 누군가가 존재하기를 바라고 그런 이들을 사랑하고자 한다. 그래서 그들의 생활도 더욱 밝고 투명해야 할 책임이 있다고 나는 믿는다.
바로 이런 대상이 주는 실망. 이것은 세상을 냉소주의에 빠뜨리게 하는 가장 큰 독성을 지닌 혐오스러운 일이 아닐 수 없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