첫째. 이 그래프는 확진자 숫자만을 보여준다. 즉 감염의 발생 상황을 보여주는 것이 아니라 코로나 테스트를 얼마나 실시했는가를 염두에 보고 봐야 한다. 

코로나 초기 상황에서 한국의 확진자가 빠르게 증가할 때, 일본이 확진자가 거의 없었다. 하지만 이는 한국이 일본에 비해 20배 이상의 검사를 시행했기 때문이다.  현재 일본이 검사자 숫자를 늘리자 확진자 숫자는 걱정스러울 정도로 올라가고 있다.

 

둘째. 그래프의 Y축이 로그(log) 스케일인 점을 감안해야 한다. 전염병의 감염 증가는 지수의 법칙을 따른다. 지수법칙으로 증가하는 그래프의 Y축을 선형으로 표시하면 Y값의 증가가 너무 크기 때문에 그래프를 보기가 쉽지 않다. 따라서 보통 Y축을 로그 스케일로 비선형적으로 나타내게 된다. 로그 스케일에서 Y값의 2배씩 증가할 수록 실제의 선형값은 10배씩 증가한다. 그러므로 Y값이 올라갈 수록 그래프 상의 미미한 차이는 실제 수백, 수천, 수만배까지 차이가 날 수 있다는  것을 감안해야 한다.

 

 

셋째. 모집단의 크기, 즉, 국가별 인구수가 감안되어 있지 않다. 만일 룩셈브루크나 아이슬란드와 같이 확진자 숫자로는 미미한 국가를, 인구규모를 감안하여 인구당 확진자수의 관점에서 보면 심각성이 드러나는 것과 같다. 미국과 중국의 경우 인구수를 감안하면 그래프의 상승 곡선이 조금 완만해지는 효과를 보이긴 한다.

하지만, 인구 숫자가 감염율에 크게 영향을 주진 않는다. 인구수를 감안한 통계는 같은 지역(보통 한 국가)내에서 어떤 지역의 감염율이 높은가에 대한 통계를 볼 때 유효하다. 중국의 우한, 미국의 뉴욕이 이와 같은 예이다.

 

네번째. 이 그래프의 X축은 날짜(date)가 아니라 100번째 환자가 나올때부터이다. 이탈리아는 2월 24일, 터키는 3월 19일 이런 식이다. 그러므로 이 그래프에서는 국가간의 감염의 진척 상황을 실시간으로 보여주지 않는다. 

중국에서 수만 명이 감염되고, 이후에 한국, 이탈리아, 이란에서 감염이 발생되기 시작했고, 그 2주후에 미국에서 상황이 시작되었다. 상황이 발생되고 초기에 국가별로 대처방식에 차이가 감염 증가에 큰 원인인 것이 밝혀졌다. 운이 좋은 어떠 나라들은 다른 나라에 비해서 많은 (대비) 시간을 가질 수 있었다. (그래도 그 운을 살린 나라도 많지는 않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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대한민국이 이번 코로나 상황에서 보여준 모든 것들이 정말 원더풀x10000  하다.

 

 

 이 책의 저자인 앤 드루얀의 남편이자 작고한 칼 세이건의 코스모의 후속편이라고 할 수 있다.

최신의 우주 탐사의 내용들부터 시작해서 현재의 기후 문제까지를 다루고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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p40

 우주의 나이에 대한 최신 정보는 유럽 우주국(ESA)의 플랑크 위성이 알아낸 것이다. 플랑크 위성은 1년 넘게 온 하늘을 훑어서 우주가 갓 태어났을 때, 그러니까 대폭발(big bang)으로부터 겨우 38만 년 흐른 시점이었을 때 처음 방출된 빛을 꼼꼼하게 측정했다. 그 데이터는 우리에게 코스모스의 나이가 138.2억 년이라는 사실을 알려주었는데, 이것은 과학자들이 기존에 생각하던 것보다 1억 년 더 많은 숫자였다.

 과학의 멋진 점 중 하나가 이것이다. 약간 더 나이가 든 우주의 증거가 발견되었을 때, 그 정보를 은폐하려고 한 과학자는 아무도 없었다. 새 데이터가 사실로 확인되자마자, 온 과학계가 수정된 지식을 받아들였다. 이처럼 언제까지나 혁명적인 태도, 변화에 대한 열린 태도가 과학의 핵심에 있기 때문에 과학이 이토록 효과적인 것이다.

 

p54

 시신을 떠멘 장례 행렬이 차탈회위크를 떠나 드넓은 아나톨리아 평원으로 나갔을 것이다. 그곳에는 높은 좌대가 기다리고 있었다. 사람들은 좌대에 시신을 올리고, 맹금과 비바람이 그것을 먹어 치우도록 내버려 두었다. 한 사람 정도는 남아서 뼈까지 다 없어지진 않도록 망보았을 것이다. 독수리들이 좌대를 맴돌았고, 비바람이 불어닥쳤다. 시간이 흘렀다. 이윽고 유골만 남았을 때, 사람들의 행렬이 돌아왔다. 이제 유골을 붉은 황토로 장식해 태아처럼 웅크린 자세로 배치한 뒤 자신들이 사는 집 거실 바닥에 묻을 차례였다. 아마도 의례적인 행동이었을 텐데, 사람들은 이따금 발밑의 무덤을 열어 사랑하는 망자의 해골을 꺼낸 뒤 자신들이 사는 공간에 보관했다. 그들이 망자와 맺었던 관계는 아마 우리들보다 더 평화롭지 않았을까.

 

▶ 절(寺)에 가보면 대웅전 앞마당에 있는 탑(塔)에는 부처님의 사리가 모셔져 있다(물론 전국의 모든 사찰에 다 진신사리가 있지는 않다. 우리나라에는 어떤 고승이 부처님의 진신사리를 100여개 들고 와서 전국 사찰에 나눴는데, 이런 진신사리가 모셔진 사찰을 특별히 적멸보궁이라 한다. 그리고 적멸보궁에는 부처님의 진신사리를 모시는 전통적인 규율에 따라 부처상이 없다. 원래 전통 불교에서는 부처님의 상을 만들 수 없게 되어 있다. 부처상을 만든것은 알렉산더 대왕이 인도를 정복 후, 헬레네 문명이 유입되면서 그리스 조각문화가 불교와 결합된 이후이다).

 즉 고대에는 가족 혹은 존경받는 사람들이 죽고 나면, 그 시신의 뼈 혹은 태우고 남은 재를 가정내에 모시는 것이 원초적인 형태였을 것이다. 지금도 일본에서는 장례후 망자의 다비의 일부를 자그마한 단지에 담아 집에 마련된 자그마한 신당에 모시고 매일 아침에 지은 밥을 올리는 의례를 하는 집이 상당히 많다. 이렇듯 우리가 지내는 제사라는 의례는 이렇게 소박한 형태로부터 시작되었을 것이다.

 그저 생각나면 거실 바닥을 파서 돌아가신 이들의 뼈를 보고 생각에 잠기는 행위는 애틋하기도 하고 로맨틱하기도 하다. 어떤 이들은 기괴하다고 여길 수도 있겠지만.

 

p61

 유태인 공동체의 불안은 이해할 수 있다. 그들은 스페인과 포르투갈에서 자신들이 살아온 세상이 악몽처럼 뒤집히는 꼴을 목격했으니, 무엇보다도 지역 사회에 받아들여져서 평온하게 살기만을 바랐을 것이다. 그래도 여기에는 얄궂은 면이 있다. 구약의 기도문은 사람들에게 매일 일상을 영위하는 모든 행동에서 주님을 떠올리라고 가르쳤다. 그런데 스피노자가 한 일이 바로 그것 아니었는가? 그는 사방에서, 만물에서 신을 보지 않았던가? 자신이 무엇을 하는 중이든 자연의 모든 곳에서 신이 있다고 보지 않았던가? 자신이 무엇을 하는 중이든 자연의 모든 곳에 신이 있다고 보지 않았던가?

 스피노자가 기적이라면 질색한 것도 그 때문이었다. 그는 1670년 출간한 『신학-정치론(Theological-Political Treatise)』의 6장을 통째 이 주제에 할애해서, 사람들이 기적에 부여하는 의미를 인정할 수 없는 이유를 꼬치꼬치 설명했다. 스피노자는 이렇게 말했다. 기적에서 신을 찾지 마라. 기적이란 자연 법칙의 위반인 셈이다. 그런데 만약 그 자연 법칙을 쓴 것이 신이라면, 신이야말로 그 법칙을 가장 잘 이해하지 않겠는가? 기적은 자연적인 사건을 인간이 오해한 것뿐이다. 지진, 홍수, 가뭄에 개인적인 의미를 부여해서는 안 된다. 신은 인간의 희망과 두려움이 투사된 존재가 아니라 우주를 존재하게끔 한 창조력일 뿐이고, 우리는 자연 법칙을 연구할 때 그 창조력을 가장 잘 접할 수 있다.

 

p62

 그가 볼 때 국가 공인 종교란 정신적 강압일 뿐이었다. 주요한 전통 종교들이 중요하게 여기는 초자연적 현상은 조직화된 미신일 뿐이었다. 그는 그런 마술적 사고가 자유로운 사회의 시민들에게 위험하다고 믿었다.

 

 

 1920년 11월, 역시 빛에 대한 열정으로 넘치는 또 다른 남자가 스피노자의 철학이 미친 영향력을 기념해 박물관으로 보존된 헤이그의 초라한 작업실을 찾았다. 새로운 자연 법칙을 발견한 업적으로 세계적으로 유명해진 그 과학자는 사람들로부터 종종 신을 믿느냐는 질문을 받았다. 그때마다 그는 이렇게 대답했다. "제가 믿는 신은 만물의 조화에서 그 모습을 드러내는 스피노자의 신입니다." 아인슈타인의 말이다.

 

p63

 식물로 산다는 것은 절대 쉽지 않다. 한자리에 뿌리 박고 있는 존재에게 섹스가 만만찮은 과제다. 데이트는 불가능하다. 그냥 가만히 앉아서 바람에 씨앗을 날릴 뿐, 말 그대로 손 놓고 앉아서, 바람이 불어오기만을 기다려야 한다. 운이 좋다면, 당신이 날려 보낸 꽃가루가 다른 식물의 암 생식기에 해당하는 암술에 가 닿을지도 모른다.

 식물은 이렇게 무턱대고 운에 맡기는 방식을 2억 년 동안 써 왔다. 그러던 중 드디어 큐피드 역할을 해 줄 곤충이 진화했다. 그 결과는 생명 역사상 가장 훌륭한 공진화(coevolution)였다. 곤충은 단백질이 풍부한 꽃가루를 먹으려고 꽃을 찾는다. 그러다 보면 자연히 곤충의 몸에 꽃가루가 좀 묻고 곤충이 다음 식사를 하려고 다른 꽃으로 옮길 때 몸에 묻은 꽃가루도 따라가기 마련이다. 그 꽃가루가 다음 꽃을 수정시켜서, 식물의 번식을 돕는다.

 이것은 꽃에게도 곤충에게도 좋은 거래였고, 여기에서부터 또 다른 진화적 발전이 이어졌다. 식물은 꽃가루 외에 달콤한 꿀도 생산하게 되었다. 이제 곤충은 꽃가루 식사뿐 아니라 디저트까지 먹을 수 있었다. 곤충은 더 통통해졌다. 몸에 복슬복슬 털이 났고, 매일 꽃을 돌아볼 때 다리에 꽃가루를 더 많이 붙일 수 있도록 작은 주머니까지 진화시켰는데, 그것이 바로 꿀벌이었다.

 이 일은 동물계의 또 다른 종에게도 횡재였다. 우리 인간 말이다. 연기 나는 단지를 들고 꿈 따는 사람을 그린 스페인 동굴 벽화를 비롯해 고대의 다른 많은 그림이 알려주듯이, 우리 선조들은 꿀을 좋아했다. 꿀 자체를 즐겼을 뿐 아니라 꿀을 발효시켜서 벌꿀 술로 만들어 취하는 방법까지 알아냈다.

 새와 박쥐도 꽃가루받이 사업에 끼고 싶어 했지만, 곤충만큼 특히 꿀벌만큼 성공하지는 못했다. 우리가 꿀벌에게 고마워해야 할 이유는 그 밖에도 많다. 아름다움도 한 이유다. 식물은 꿀벌의 번식 대행 서비스를 누리려고 경쟁하다가 꿀 이외의 다른 전략도 진화시켰고, 그것이 바로 향기와 색이었다.

 꿀벌의 눈에는 사람처럼 세 가지 광수용체가 있다. 단 기능이 좀 다르다. 우리 눈은 빨강, 파랑, 초록을 인지하는 데 비해 벌의 눈은 자외선, 파랑, 초록을 인지한다. 주황빛이나 노란빛 파장은 붉은빛으로 인지한다.

 우리는 아름다움 외에도 우리의 생존에 더 긴요한 요소를 벌에게 빚지고있다. 여러분이 어떤 음식을 먹든, 이것은 육식 애호가에게도 마찬가지인데, 셋 중 하나는 벌 덕분에 존재할 수 있었던 음식이다. 벌은 우리가 먹을 식량의 총량을 늘려 주기만 한 게 아니었다. 우리의 안정적인 식량 수급을 돕는 생물 다양성도 벌에게 빚진 바가 크다.

 그리고 우리는 이제 이 우화의 슬픈 대목으로 접어들었다. 동물계의 새 구성원이 몰지각하고 욕심 사납고 근시안적인 행동으로 그 오래된 동맹을 망가뜨리는 대목이다. 내가 더 말하지 않아도 여러분은 무슨 말인지 알 것이고, 그 범인이 누구인지도 알 것이다.

 

p71

 현재 과학자들과 공학자들은 인류가 가장 가까운 별로 처음 정찰을 떠나게 될 브레이크스루 스타샷(Breakthrough Starshot) 사업을 준비하고 있다. 자신들이 살아서 그 사업이 완료되는 모습을 볼 수 없으리라는 것을 알면서도.

 약 20년 뒤, 1,000대의 우주선 함대가 지구를 떠날 것이다. 레이저 빛을 돛에 받아서 움직일 성간 우주선은 무게가 1그램밖에 안 된다. 크기가 콩알만하지만, 그 속에는 우리의 첫 성간 우주선이었던 NASA의 보이저 호들이 갖춘 장치는 물론이고 그것보다 훨씬 더 많은 것들이 담겨 있다. 모든 나노(nano)우주선에는 다른 별에 딸린 세계들을 정찰한 뒤 시각적, 과학적 정보를 지구로 보내는 데 필요한 도구들이 다 들어 있다.

 보이저 1호는 시속 6만 킬로미터 속도로 40년 넘게 여행하고 있다. 우리에게는 인상적인 속도이고 보이저 1호가 항해 초기에 거대한 목성을 근접 비행하면서 얻었던 단 한 번의 중력 도움으로 지금껏 날고 있다는 점을 생각하면 더 대단하다. 하지만 그저 은하 하나의 규모에서라고 해도 그것은 꿈속에서 달리는 것처럼 몽롱한 속도다. 빠르기는 해도, 어딘가에 다다르기에는 턱없이 느리다.

 스타샷 나노 우주선은 보이저 호를 나흘 만에 앞지를 것이다. 놀랍지 않은가? 하지만 그 속도마저도 광속의 20퍼센트에 불과하다. 별들은 정말 멀다. 우리에게 가장 가까운 별인 센타우루스자리 프록시마까지의 거리는 4광년이다. 스타샷 우주선이 가는 데만 20년이 걸린다는 계산이다.

 우리가 알기로 센타우루스자리 프록시마의 생명 거주 가능 영역에는 행성이 있다. 어쩌면 그곳에는 물이 흐를지도 모른다. 생명이 꽃피었을지도 모른다. 우리가 미처 발견하지 못한 다른 행성들이 더 있을지도 모른다. 우리의 로봇 사절들은 그 새로운 세계(들)로부터 놀라운 이야기를 보내올 것이다. 데이터는 전파의 형태로 광속으로 날아오므로, 우리에게 도착하기까지 4년이 걸릴 것이다. 지금으로부터 40여 년 후에 그들은 고향에 어떤 이야기를 보내올까?

 

p124

 골드슈미트는 또 감락석이 코스모스에 널리 퍼져 있을지도 모른다는 생각을 떠올렸다. 이것은 우주 화학이라고 불릴 분야의 시작이었다. 하지만 당시 그에게는 좀 더 전통적이지만 훨씬 더 시급한 화학 작업이 있었다. 나치가 노르웨이를 쳐들어오기 전날, 골드슈미트는 보호복을 입고 사이안화물(청산가리) 캡슐을 몇 개 만들었다. 그리고 게슈타포가 잡으러 올 때를 대비해서 캡슐을 늘 몸에 숨겨 지니고 다녔다. 어느 동료가 그에게 자신도 하나 얻을 수 있겠느냐고 묻자, 골드슈미트는 이렇게 대답해싸. "독약은 화학 교수를 위한거라네. 자네는 물리학자니까 밧줄을 쓰게."

 

p142

 1600년 2월 19일 오후 5시, 페루 남부에서 후아이나푸티나(Huaynaputina) 화산이 폭발했다. 돌덩이, 기체, 먼지가 하늘로 치솟아 거대한 연기 기둥을 이뤘다. 역사 기록상 남아메리카 최대의 분화였다. 연기 기둥은 대기를 뚫고 솟았다. 대류권을 뚫고, 성층권을 뚫고, 검푸르다 못해 거의 캄캄한 중간권까지 도달하고서야 비로소 땅으로 떨어졌다. 황산과 화산재가 섞인 불쾌한 연기가 햇빛을 차단했다. 겨울이 왔다. 화산성 겨울(volcanic winter)이었다.

 그해 러시아 사람들은 600년 만에 최고로 가혹한 겨울 날씨를 맞았다. 이후 2년 동안 여름에도 밤에는 기온이 영하로 떨어졌다. 러시아 인구의 3분의 1이었던 200만 명이 이상 기온으로 인한 기근으로 죽었다. 누더기로 얼굴을 동여맨 사람들은 덜덜 떨면서 거대한 구덩이를 파서 시체들을 한데 묻었다. 이 기근은 황제 보리스 고두노프(Boris Godunov)의 실각으로 이어졌다. 모두 1만 3000킬로미터 떨어진 페루에서 분화한 화산 때문이었다. 지구가 하나의 유기체라는 말을 공허한 감상주의로 여기는 사람들이 많지만, 이것은 엄연한 과학적 사실이다.

 

p254

 프리슈는 표시된 벌이 벌집 입구에서 햇빛을 받으며 겉보기에는 무의미한 춤을 씰룩쌜룩 추는 것을 지켜보았다. 그러다가 그 변덕스러워 보이는 춤 동작을 태양의 위치와 함께 공책에 꼼꼼히 기록하기 시작했다.

 그는 벌이 왼쪽으로 돌았다가 오른쪽으로 돌았다가 하면서 춤추는 동작을 하나하나 기록했다. 그러자 의심할 여지가 없는 결론이 떠올랐다. 벌의 안무에는 메시지가 숨겨져 있었다. 벌은 춤 언어로 말하고 있었다. 프리슈는 이것을 독일어로 "tanzsprache"라고 불렀다. 그리고 그 언어는 수학 공식으로 표현될 수 있었다. 프리슈는 벌의 1초(second, s) 동안 씰룩거림(waggle, w)은 1킬로미터의 거리를 뜻한다는 것을 알아냈다. 즉 1sw = 1킬로미터였다. 이 정보에 태양의 위치와 씰룩거리는 방향을 결합하면, 나무로 가득한 숲에서 딱 한 나무를 가리킬 수 있는 확실한 암호가 되었다. 만약 이 공식이 우주 저편에서 날아와서 FAST 망원경에 잡힌다면, 우리는 틀림없이 그것을 외계 지적 생명체가 보낸 메시지라고 해석할 것이다.

 과거 수많은 관찰자가 멍청한 동물의 무의미하고 발작적인 몸짓에 지나지 않는다고 여겼던 것은 사실 정교한 메시지였다. 수학, 천문학, 그리고 시간을 정밀한 단위로 측정할 줄 아는 예리한 능력을 활용한 메시지였다. 벌은 그 모든 지식을 결합해서 자매들에게 알리고 싶은 횡재가 있는 위치를 표현하는 것이었다. 춤꾼은 태양의 각도록 먹이가 있는 방향을 대충 표현한다. 프리슈가 보니, 벌이 위쪽으로 움직이는 것은 "태양을 향해 날아가라."라는 뜻이었다. 반면 반대 아래쪽으로 움직이는 것은 "태양과 반대 방향으로 날아가라."라는 뜻이었다.

 왼쪽이나 오른쪽으로 도는 것은 먹이의 좌표를 좀 더 정확하게 알리는 몸짓으로, 가끔 그 좌표는 몇 킬로미터나 떨어진 곳일 때도 있었다. 춤의 지속 시간은 - 몇분의 1초 단위로 정밀하다. - 친구들이 날아가야 할 시간을 뜻했다. 벌은 심지어 풍속까지 고려해서 메시지를 미세하게 조정했다. 춤은 사시사철 한결같았으며, 어느 벌집의 벌이든 어느 대륙에서 사는 벌이든 다 같은 춤을 추었다. 사회성을 가진 벌이라면 모두 이처럼 공간과 시간을 비행할 때 쓸 방정식을 계산하고 소통할 줄 안다. 서로 다른 지역에서 사는 벌들은 서로 다른 방언을 쓸지도 모르지만, 그렇더라도 통역이 쉽게 이뤄지는 듯하다.

 나는 왜 이 이야기를 서로 다른 문명들이 처음 만난 이야기라고 말했을까? 더 다를 수 없을 듯한 두 종이 - 인간과 꿀벌이 - 수억 년 동안 서로 다른 진화의 길을 밟아 왔다. 그런데도 두 종은 - 그리고 우리가 아는 한 지구에서는 오직 꿀벌과 우리만이 - 물리 법칙에 대한 지식에 근거해서 수학으로 표현한 기호 언어, 즉 과학을 발명해 냈다. 과학자들은 우리가 외계 문명과 공유할 수 있는 언어도 이런 형태의 언어일 것이라고 여긴다.

 

 

p298

 누군가의 꿈이 그 사람과 함께 죽을 때도 있지만, 다른 시대의 과학자들이 그 꿈을 건져내어 달까지, 그리고 그보다 더 멀리까지 데려가는 때도 있다. 유리 콘드라튜크는 자칫 깡그리 잊힐 수도 있었다. 그가 정말로 우주 탐사에 이바지했는가 하는 문제를 두고 논란이 따를 수도 있었다. 하지만 다행히 그를 기억하고 그가 합당한 공을 인정받을 수 있도록 애쓴 사람이 한 명 있었다.

 닐 암스트롱은 달 여행에서 돌아온 이듬해, 우크라이나에 있는 콘드라튜크의 허름한 오도막을 찾아갔다. 그곳에서 암스트롱은 무릎을 꿇고, 떠내도 될 듯한 흙을 좀 떠냈다. 자신이 간직하기 위해서였다. 모스크바로 돌아간 뒤, 암스트롱은 당시 (구)소련이었던 그 나라의 지도자들에게 부디 자신의 신화적인 비행을 가능케 해 준 콘드라튜크를 기려 달라고 간곡히 부탁했다.

 

p343

 H.G. 웰스의 소설을 읽은 사람 중 레오 실라르드(Leo Szilard)라는 젊은 물리학자가 있었다. 1933년 9월 12일, 헝가리에서 망명한 실라르드는 런던의 스트랜드 팰리스 호텔에 묵고 있었다. 그는 막 《타임스》에 실린 어니스트 러더퍼드(Ernest Rutherford) 경의 연설물은 읽고 심기가 거슬린 참이었다. 러더퍼드는 많은 업적 중에서도 특히 한 원소가 다른 원소로 바뀔 때 방사선이 방출된다는 사실을 발견한 일로 핵물리학의 아버지로 일컫어지는 과학자였다. 실리라드가 못마땅한 점은 그 러더퍼드가 우리가 원자 구조에 대한 지식에서 에너지를 얻어낼 가능성은 없다고 단언한 점이었다. 실라르드는 생각할 일이 있을 때 즐겨 쓰는 수단이었던 산책에 나서기로 했다.

 길을 걸으면서, 실라르드는 한가운데에 양성자와 중성자가 모여 있고 그 겉에 휙휙 나는 전자들의 베일이 덮여 있는 원자의 구조를 떠올렸다. 그가 사우샘프턴 가와 러셀 광장이 교차하는 지점에서 신호등이 바뀌기를 기다릴 때, 번뜩 어떤 생각이 떠올랐다. 만약 우리가 중성자 1개를 흡수하고 대신 중성자 2개를 내놓는 원소를 찾아낼 수 있다면, 그것을 사용해 연쇄 핵반응을 일으킬 수 있으리라는 발상이었다. 중성자 2개가 중성자 4개를 낳고, 중성자 4ㄱ개가 중성자 8개를 낳고.... 그렇게 되면 결국에는 원자핵에 갇힌 엄청난 에너지가 풀려날 것이다. 이것은 화학 반응이 아니라 핵반응이었다.

 

 

 레오 실라르드는 기하급수적 증가의 힘을 잘 알았다. 우리가 만약 저 깊은 원자핵의 세계에서 연쇄 핵반응을 일으킬 수 있다면 웰스가 상상한 원자 폭탄 같은 것을 만들 수 있다는 사실도 알았다. 그는 그 파괴적 가능성에 몸서리쳤다. 그러나 그것은 아주아주 오래전에 시작되어 끊임없이 이어진 인류 폭력의 역사에서 가장 최신의 발명일 뿐이었다.

 

p354

 미국 전쟁부가 원자 폭탄 개발 프로젝트의 본부로 낙점한 곳은 뉴멕시코 주 로스앨러모스라는 외딴 장소였다. 그곳을 추천한 사람은 프로젝트 책임자인 물리학자 J. 로버트 오펜하이머였다. 그는 10대 때 요양하느라 그곳에서 지낸 적이 있었다. 그런데 에드워드 텔러에게는 그 원자 폭탄도 성에 차지 않았다. 텔러는 그것보다 더 큰 살해 범위를 가진 무기, 원자 폭탄을 한낱 원자핵으로 이어진 도화선을 당기는 성냥으로 쓰도록 설계된 무기, 나중에 열핵 무기(thermonuclear weapon)라는 이름을 얻을 무기를 꿈꿨다. 그는 애정을 담아서 그 무기를 "슈퍼"라고 불렀다.

 당시 과학계에서 텔러와 극과 극처럼 달랐던 인물을 꼽으라면 조지프 로트블랫(Joseph Rotblat)이었을 것이다. 로트블랫은 폴란드 바르샤바의 부잣집에서 태어났지만, 텔러처럼 모든 것을 잃었다. 나치가 침공해 오기 직전이었던 1939년 여름, 그는 영국 리버풀 대학교에서 연구원으로 오라는 초청을 받았다. 그런데 떠나기 직전에 사랑하는 아내 톨라(Tola)가 응급 맹장 절제술을 받게 되었고, 톨라는 몸이 여행을 견딜 만큼 회복될 때까지 뒤에 남아야 했다. 톨라는 남편에게 자신은 몇 주 뒤면 뒤따라갈 수 있다고 말하면서 그 혼자 미리 가서 살 집을 준비해 두라고 부득부득 우겼다.

 맨해튼 프로젝트에 참여한 과학자들이 풀어야 할 숙제는 실라르드가 런던 산책 중 처음 떠올렸던 연쇄 핵반응을 개시할 화학적 도화선을 찾아내는 일이었다. 과학자들과 공학자들은 자신들이 유례없는 파괴력을 지닌 폭탄을 만드는 것은 그것보다 더 위중한 위험을 피하기 위해서라는 생각으로 스스로를 설득했다. 자신들의 정부는 믿을 수 있다고 믿었다. 다른 나라 정부들과는 달리, 자신들의 정부는 그런 무기를 선제 공격에 쓰지 않으리라고 믿었다.

 그 과학자들은 핵무기를 핵전쟁의 억지 수단으로 보는 관점을 처음 채택한 이들이었다. 그들은 원자 폭탄을 가진 히틀러에 대한 공포를 자신들의 일을 정당화하는 근거로 삼았다. 하지만 독일이 항복하고 히틀러가 죽은 뒤, 폭탄 개발에 참여했던 수천 명의 연합국 과학자 중 자리에서 물러난 사람은 한 명뿐이었다.

 그 한 명이 조지프 로트블랫이었다. 이후 사람들이 그 결정에 관해서 물을 때마다, 로트블랫은 남들보다 그가 더 양심적이었기 때문에 그런 게 아니었느냐는 식의 질문에는 늘 아니라고 답했다. 그저 미소 지으면서, 결국 바르샤바를 떠나지 못하고 전쟁의 회오리 속에서 연락이 끊긴 아내가 몹시 그리웠을 뿐이라고 말했다. 유럽에서 전쟁이 끝나자, 그는 마침내 바르샤바로 돌아가서 아내를 찾아볼 수 있었다. 하지만 찾지 못했다. 찾아낸 것은 사망자 명단에 오른 이름뿐이었다. 톨라는 홀로코스트로 목숨을 잃었다. 베우제츠(벨체크) 절멸 수용소에서 처형되었다. 로트블랫은 이후 60년을 더 살았다. 재혼은 하지 않았고, 핵무기 감축 운동에 끝까지 앞장섰다.

 

 전쟁 중 원자 폭탄 개발에 나섰던 세 나라 중 종전 전에 성공한 나라는 미국뿐이었다. 역사학자들은 미국의 성공 요인 중 하나는 이민자를 많이 받아들였던 것이라고 본다. 맨해튼 프로젝트를 이끌었던 사람 가운데 미국 태생은 2명뿐이었고, 미국에서 박사 학위를 받은 사람은 1명뿐이었다.

 핵무기가 핵전쟁 억지 수단이 되어 주리라는 과학자들의 생각은 잘못 짚은 것이었다. 결국 미군 폭격기가 일본 히로시마와 나가사키에 원자 폭탄을 투하해 제2차 세계 대전을 끝냈다. 두 달 뒤, 트루먼 대통령이 오펜하이머를 치하하고자 그를 집무실로 불렀다. 트루먼의 입장에서는 실망스럽게도, 오펜하이머는 치하받을 기분이 아니었다. 그는 트루먼에게 이렇게 말했다. "대통령 각하, 저는 손이 피로 물든 기분입니다."

 트루먼은 넌더리 난다는 표정으로 오펜하이머를 보며 경멸조로 말했다. "바보처럼 굴지 마시오. 손이 피로 물든 사람이 있다면 그건 나요. 그리고 나는 그 사실이 아무렇지도 않소."

 하지만 오펜하이머는 굽히지 않고 도리어 대통령에게 되물었다. "러시아가 폭탄을 보유하는 데 얼마나 걸릴 것 같습니까?"

 트루먼은 대답했다. "절대 못 가질걸!"

 오펜하이머가 떠나자, 트루먼은 역정 난 얼굴로 보좌관에게 말했다. "저 징징거리는 과하가를 두 번 다시 내 곁에 들이지 마! 알아들었어?"

 그로부터 4년이 채 못 되어, 러시아가 원자 폭탄을 터뜨렸다. 과학자들이 세 통의 편지에서 상상했던 핵무기 경쟁은 더 무시무시한 두 번째 국면으로 접어들었다.

 

 전쟁 후, 살해 범위가 더 큰 무기를 개발하고 싶다는 텔러의 꿈이 현실이 되었다 1950년대 초 미국에서 공산주의자를 색출하는 마녀 사냥이 한창이었들 때, 텔러는 자신의 옛 상사이자 맨해튼 프로젝트를 훌륭하게 이끌었던 로버트 오펜하이머에게 불리한 증언을 기뿐 마음으로 당국에 귀띔했다. 그는 오펜하이머의 비밀 정보 취급 인가를 몰수해야 한다고 주장했고, 그리하여 결국 오펜하이머의 경력을 끝장내는 데 일조했다. 오펜하이머는 텔러가 사랑하는 '슈퍼' 폭탄 제작에 반대하는 입장이었다. 텔러는 또 "핵무기를 유지하고 개량하기 위해서"는 대기권 핵실험이 반드시 필요하다는 거짓 주장을 내세우면서 포괄적 핵실험 금지 조약이 체결되는 것을 막든 데 힘썼다.

 

 

p401

 아니면 약 1,000년쯤 전, 아시아 전역의 사람들이 처음 쌀농사를 했을 때 인류세가 시작되었을까? 그들은 써레질과 이앙법이라는 혁신적인 기술을 써서 물 댄 논에 미리 기른 모종을 옮겨 심기 시작했다. 이 근면한 농부들은 이런 벼농사 기법이 소와 마찬가지로 언젠가 수억 톤의 메테인을 배출하리라는 사실을 알 도리가 없었다. 물 댄 논은 산소를 잃는다. 그러면 눈에 안 보이는 미생물들이 식물성 물질을 소화시켜서 메테인을 내놓는다. 설상가상, 벼잎도 대기로 메테인을 더 내보낸다. 하지만 옛 농부들은 미시 세계에서 무슨 일이 벌어지는지 알 도리가 없었다. 현대 과학이 등장하기 전에는 누구도 알지 못했다. 그들 역시 그저 자신과 가족의 입에 풀칠하려 애쓴 것뿐이었다.

 

p411

 예언이란 트로이 공주의 열렬한 흡소 형태일 수도 있지만, 무미건조한 제목을 가진 과학 논문의 형태일 수도 있다. 「상대 습도의 분포에 따른 대기의 열평형(Thermal Equilibrium of the Atmosphere with a given distribution of relative Humidity)」이라는 제목은 "재앙이 임박했다! 재앙이 임박했다!" 하는 경고로는 들리지 않는다. 하지만 내용은 분명 그런 내용이었다. 마나베와 동료 리처드 웨더럴드(Richard Wetherald)는 인간이 대기로 내놓는 온실 기체가 증가함에 따라 지구 온도가 어떻게 바뀔지 예측했다. 그들이 다가오는 재앙이 어떻게 펼쳐질지 정확히 내다보았다. 우리 시대는 물론이고 그 너머까지, 멀리 볼 줄 알았다. 요즘도 일부 사람들은 기후 변화를 과학적으로 확실히 확인되지 않은 현상이라고 주장하지만, 만약 그렇다며 마나베와 웨더럴드가 어떻게 향후 50년 이상의 지구 온도 증가세를 그토록 정확히 예측할 수 있었겠는가? 그리고 만약 그 변화가 인간이 야기한 것이 아니라면, 그 많은 이산화탄소가 다 어디서 나왔겠는가?

 이후 다른 많은 기후 과학자들은 기후 변화의 영향으로 다음과 같은 일들이 벌어질 것이라고 예측했다. 해안 도시들의 잦은 범람 : 사실. 바닷물 수온 상승으로 산호의 떼죽음 : 사실. 자연 재해 수준의 폭풍이 더 거세어짐 : 사실. 치명적인 무더위와 가뭄과 걷잡을 수 없는 산불이 유례없는 수준으로 벌어짐 : 사실. 과학자들은 분명 우리에게 경고했다.

 

 코로나19가 전세계를 휩쓸고 있는 상황에서 판데믹이라는 주제에 대한 시의적절한 내용. 이낙연 전 총리께서 이 책을 들고 있는 사진을 보고서 읽게 되었다. 이미 판데믹에 대한 여러가지 대비를 전문가들은 준비하고 있었구나라는 걸 알 수 있다. 특히 이 책에 소개된 래리 브릴리언트의 TED강연은 현재의 상황과 맞물려 많은 시사점을 던져준다.

아래 동영상의 내용은 책과 어우러지는 내용이 많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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p23

 인플루엔자를 비롯한 많은 바이러스가 인간 숙주라는 환경과 타협하는 놀라운 능력을 지녔다. 바이러스들은 신속하게 돌연변이를 일으키며, 심지어 유전자 재편성reassortment이라 일컬어지는 과정을 통해 자기들끼리 유전자를 교환하기도 한다. 

 2009년, 나는 물론이고 많은 과학자들이 이런 유전자 재편성을 우려했다. H1N1 바이러스가 세계 곳곳에 폭발적으로 확산되면서, 동시에 사람이나 동물의 체내에서 H5N1을 만난다면 천지개벽을 일으킬 가능성이 적잖이 있기 때문이다. 과학자들은 조기에 이런 가능성을 알아내어 돌연변이를 일으킨 바이러스들이 확산되는 걸 신속히 차단해야 한다. 만약 어떤 사람이나 동물이 두 인플루엔자 바이러스에 동시에 감염된다면, 그는 효과적인 혼합용기mixing vessel가 되어, 바이러스들이 유전자를 교환할 최적의 기회를 제공할 수 있다.

 어떻게 그런 교환이 가능할까? 일종의 유성생식으로 H5N1과 H1N1이 생산하는 모자이크 딸-바이러스는 양쪽 모두의 유전자를 지닐 수 있다. 이런 유전자 재편성은 유사한 성격을 지닌 바이러스들에 의해 복합적으로 감염된 개체에서 얼마든지 일어날 수 있다. 이러한 경우에는 모자이크 딸-바이러스가 H1N1에서는 확산성을 물려받고, H5N1으로부터 치사율을 물려받는다면, 결국 지독한 치사율을 지닌 채 엄청난 속도로 확산되는 바이러스가 될 것이다. 우리가 가장 두려워하는 시나리오가 아닐 수 없다.

 

 판데믹에 대한 신속한 대응은 지난 100년 동안 세계보건정책의 핵심적 과제였다. 소수이지만 목소리가 큰 과학자들과 나는 백신을 확보하고 치료약을 개발하며 행동방식을 수정하는 정도로 판데믹에 대응해서는 안 되며, 그 이상의 대책을 마련해야 한다고 주장해왔다. 인간면역결핍바이러스Human Immunodeficiency Virus, HIV에서 확인되었듯이, 그런 전통적인 대응 방식은 실패작이라는 게 이미 입증되었다. HIV는 처음 발견되고 거의 30년이나 흘렀지만 여전히 확산되고 있으며, 최근의 통계에 따르면 3,300만 명 이상이 감염되었다고 하지 않는가.

 그러나 HIV가 확산되기 전에 우리가 그 바이러스의 존재를 미리 알아냈다면 어떻게 되었을까? HIV는 광범위하게 확산되기 50년 전부터 인간의 몸에 존재했었다. HIV는 확산되기 시작해서 25년이 지난 후에야 프랑스 과학자 프랑수아즈 바레 시누시Francoise Barre-Sinoussi와 뤼크 몽타니에Luc Montagnier에 의해 발견되었고, 그들은 그 공로로 노벨상을 받았다. 만약 HIV가 중앙아프리카를 떠나기 전에 우리가 발견해서 그 확산을 억제했다면, 지금 세상이 얼마나 달라졌겠는가.

 

p38

 새로운 생명체의 발견은 오늘날까지 계속 이어지고 있다. 가장 최근에 발견된 새로운 생명체는 프리온이다. 프리온을 발견한 과학자는 그 공로로 1997년에 노벨상을 받았다. 프리온은 세포도 없고, 지금까지 알려진 지상에 존재하는 모든 생명체가 자신의 청사진으로 사용하는 유전물질인 DNA나 RNA도 없는 기묘한 병원체이다. 하지만 프리온은 분명히 존속할 뿐만 아니라 끊임없이 확산되고 있다. 특히 광우병을 유발하는 병원균으로도 유명하다. 따라서 이제 지상에는 더 이상 새롭게 발견될 생명체가 남아 있지 않다고 말한다면 그보다 오만한 언행은 없을 것이다. 새롭게 발견되는 생명체가 있다면 십중팔구 보이지 않는 세계에 속한 생명체일 것이다.

 

p43

 바이러스가 언제 어떻게 행동을 개시하느냐는 여전히 오리무중이지만, 어떤 결정을 내릴 때 주변의 환경적 변수들을 주기적으로 점검하는 게 거의 확실하다. 단순 헤르페스 바이러스에 감염된 성인들 중 대다수는 스트레스가 입술 헤르페스의 원인 중 하나일 거라고 생각한다. 또 임신이 감염의 원인인 듯하다고 경험적으로 말하는 사람들도 있다. 이런 주장들은 아직 추측의 수준에 불과하지만, 바이러스가 극심한 스트레스나 임신으로 인한 환경적인 변화에 활발하게 반응한다고 해서 놀랄 것은 없다. 극심한 스트레스는 죽음의 가능성을 뜻할 수 있기 때문에 바이러스에게는 확산을 도모할 마지막 기회일 수 있다. 숙주의 죽음은 바이러스에게도 죽음을 뜻하기 때문이다. 한편 임신은 출산 과정에서, 혹은 출산 후에 필연적으로 뒤따르는 입맞춤 과정에서 아기와의 접촉을 통해 바이러스에게 확산될 기회를 제공한다.

 숙주에서 숙주로의 전파는 어떤 감염체라도 본능적으로 바라는 것이며, 일부 감염체는 한 단계 더 나아간다. 예컨대 '플라스모디움 바이박스 히베르난스'라는 말라리아 원충은 계절까지 고려하는 듯하다. 단순헤르페스 바이러스보다 훨씬 큰 말라리아 원충을 비롯한 기생충은 바이러스나 박테리아와 같은 감염체이지만, 특히 이들은 진핵동물에 속한다. 따라서 바이러스나 박테리아보다 동물에 훨씬 가깝다. 모기를 통해 전파되는 플라스모디움 바이박스 히베르난스는 극지방의 기후에서도 끈질기게 생존한다. 그런 추운 지역에서는 계절적으로, 즉 모기들이 부화하는 짧은 여름 동안에만 모기를 감염시킬 수 있다. 이 말라리아 원충은 일 년 내내 후손을 생산하려고 에너지를 낭비하지 않고, 일 년 중 대부분의 시간을 인간의 간에서 잠복한 상태로 보낸다. 그러나 여름이 되면, 생기를 되찾아 후손으로 알을 낳고, 감염된 인간의 피를 통해 확산된다. 말라리아 원충을 깨우는 것이 무엇인지 아직 정확히 밝혀지지는 않았지만, 최근의 연구에 따르면 모기에 물리는 순간이 말라리아 원충에게 확산의 계절이 시작되었다는 걸 알리는 것으로 여겨진다.

 

p64

 HIV의 역사는 상대적으로 단순한 생태학적 상호작용에서 시작된다. 즉 중앙아프리카에서 침팬지가 붉은콜로부스 원숭이를 사냥하면서부터 시작된다. 많은 사람이 HIV가 1980년대에 시작되었다고 생각하지만, 정확히 말하면 약 800만 년 전 우리 유인원 조상이 사냥을 시작한 때부터이다.

 더 정확히 말하면 HIV의 역사는 두 종의 원숭이 - 중앙아프리카에 서식하는 붉은머리 망가베이와 큰흰코원숭이-로부터 시작된다. 두 원숭이의 겉모습은 전 세계를 공포에 몰아넣은 에이즈 판데믹의 중심에 있는 악당처럼 도저히 보이지 않는다. 하지만 두 녀석이 없었더라면 에이즈 판데믹도 일어나지 않았을 것이다. 붉은머리 망가베이는 뺨은 하얗고 머리에 붉은 털이 돋은 작은 원숭이로, 10여 마리가 무리지어 살며 과일을 주식으로 삼는 사회성을 띤 종이다. 또한 개체수가 크게 줄어 멸종위기에 처한 취약종으로 분류되기도 했다. 한편 큰흰코원숭이는 무척 작아서 구세계 원숭이Old World Monkey 중 가장 작은 원숭이 중 하나이다. 수컷 한 마리가 암컷 여러 마리로 구성된 작은 집단을 이루고 살아가며, 포식자의 종류에 따라 경고음을 다른 식으로 낸다.

 두 원숭이의 공통점 중 하나는 자연 상태에서 원숭이면역결핍바이러스Simian Immunideficiency Virus, SIV에 감염된다는 점이다. 하지만 두 원숭이는 각각 이 바이러스의 고유한 변종을 지닌다. 그 원숭이와 조상들이 수백만 년 동안 품고 살았을 변종이다. 두 원숭이의 또 다른 공통점은 침팬지가 그들을 무척 맛있는 먹잇감으로 생각한다는 것이다.

 원숭이면역결핍바이러스는 레트로바이러스retrovirus이다. 달리 말하면 유전암호로 사용하는 DNA가 먼저 RNA로 바뀌고, 다시 우리의 살을 이루는 단백질 단위로 바뀌는 대부분의 생명체와 달리, SIV는 역으로 기능한다는 뜻이다. 이런 이유에서 '레트로' 바이러스라고 불린다. 레트로바이러스군群은 RNA 유전암호로 시작하며, RNA는 DNA로 바뀐 후에야 숙주의 DNA로 들어갈 수 있다. 그 후에 레트로바이러스는 생명주기를 시작해서 후손을 생산하게 된다.

 다수의 아프리카 원숭이가 SIV에 감염된 상태이다. 붉은머리 망가베이와 큰흰코원숭이도 마찬가지이다. SIV가 야생 원숭이들에 미친 영향에 대한 연구는 거의 없는 편이지만, SIV는 원숭이들에게 심각한 피해를 입히지 않는 것으로 추정된다. 하지만 SIV가 다른 숙주로 옮겨가면 그 숙주의 생명에 치명타를 입힐 수 있다.

 2003년 베이트리스 한Beatrice Hahn과 마틴 피터스Martine Peeters의 연구팀이 침팬지 SIV의 진화를 역사적으로 추적한 보고서를 발표했다. 거의 10년 동안, 한과 피터스는 침팬지 SIV의 진화를 밝히기 위해 끈질기게 연구를 거듭했고 마침내 성공을 거두었다. 2003년 그들은 침팬지 SIV가 실제로는 붉은머리 망가베이 SIV의 조각들과 큰흰코원숭이 SIV의 조각들이 뒤썩인 모자이크 바이러스라는 걸 밝혀냈다. SIV는 유전자 조각들을 재조합하거나 교환하는 잠재력을 지녔기 때문에, 침팬지 SIV는 초기 침팬지 조상으로부터 유래한 것이 아니라 침팬지에게서 생겨난 것이라는 결론이었다.

 어떤 침팬지 사냥꾼 한 마리가 사냥한 두 원숭이들로부터 즉시, 혹은 바로 그날 SIV에 감염되면서 발단 환자patient zero-새로운 바이러스가 잠복하게 된 종의 첫 개체-가 되었을 것이란 가정은 상당히 그럴듯하게 들린다. 하지만 다른 가능성도 생각해볼 수 있다. 예컨대 일찌감치 잡종으로 변한 붉은머리 망가베이 바이러스가 침팬지들 사이에서 성행위를 통해 확산되었고, 어떤 침팬지가 다른 침팬지로부터 그 바이러스에 감염된 후에, 사냥을 통해 큰흰코원숭이의 바이러스에 감염되면서 발단 환자가 되었을 가능성도 있다. 혹은 큰흰코원숭이 바이러스와 붉은머리 망가베이 바이러스, 둘 모두가 사냥을 통해 침팬지들에게 전달되고 한동안 침팬지들 사이에서 확산된 후에, 어떤 침팬지 한 마리의 체내에서 두 바이러스의 유전자들이 혼합되는 결과가 닥쳤을 수도 있다. 종을 넘나든 정확한 순서가 무엇이든 간에, 어떤 순간에 침팬지 한 마리가 두 바이러스 모두에 감염되었고, 두 바이러스가 유전물질을 재조합하고 교환하면서 망가베이 바이러스도 아니고 큰흰코원숭이 바이러스도 아닌 완전히 새로운 모자이크 변종을 만들어냈다.

 이 잡종 바이러스는 망가베이 바이러스도, 큰흰코원숭이 바이러스도 혼자서는 해낼 수 없었던 방식으로 침팬지들의 세계에서 지속적으로 확산되었다. 그리고 서쪽으로 코트디부아르부터 동쪽으로는 제인 구달이 1960년대에 연구를 시작했던 동아프리카의 서식지까지 침팬지들을 감염시켰다. 현재는 침팬지에게 별다른 해를 입히지 않는 것으로 알려진 이 잡종 바이러스는 오랫동안 침팬지들의 체내에서 잠복해 있었지만, 19세기 말이나 20세기 초 어떤 시점에 침팬지에게 서 인간에게로 전이되었다. 침팬지가 사냥하는 동물이기 때문에 이 모든 것이 시작된 것이다.

 

p89

 우리 조상이 병원균 청소를 거치는 시기 동안, 유인원 사촌들은 여전히 사냥을 계속하고 새로운 병원균을 받아들였다. 또한 인간 계통에서는 사라졌을 병원균들까지 여전히 보유했다. 인간의 관점에서 보면 유인원 계통들은 인간에게서는 사라진 병원균들의 창고였던 셈이다. 비유해서 말하면 우리 혈통에서 사라진 병원균들을 보존한 노아의 방주라고 할 수 있었다. 오랜 세기가 지난 후 인간 세계가 확대되면서 이 거대한 창고가 인간과 충동하게 된 것이다. 이는 곧 인간에게 중요한 질병을 일으키는 원인이 되었다.

 

p126

 지난 10년간의 연구에서 사람을 감염시키지만 특별한 질병을 야기하지 않는 듯한, 전에는 알려지지 않은 다수의 바이러스가 새롭게 발견되었다. TT바이러스는 감염된 첫 환자, 이름의 머리글자가 T.T인 일본인 환자의 이름을 따서 지어졌다. 지금까지 TT바이러스에 대한 연구는 거의 진행되지 않았지만, 일부 지역에서 상당히 흔한 바이러스이다. 스코틀랜드의 유능한 바이러스 학자 피터 시몬즈Peter Simmonds가 발표한 보고서에 따르면, 유병률이 스코틀랜드 헌혈자의 경우에는 1.9퍼센트에 불과하지만, 아프리카 감비아 국민의 경우는 83퍼센트로 놀라울 정도로 높다. 다행히 TT바이러스는 인체에 해롭지 않은 듯하다.

 GB바이러스도 최근에 발견된 바이러스로 많은 사람에게서 발견되지만 아직은 연구가 거의 되지 않은 상태이다. 이 바이러스는 외과의사 G.베이커의 이름을 따서 지어졌는데, 당시에는 그의 감염이 바이러스 탓이라고 잘못 진단되었다. 나는 TT바이러스와 GB바이러스를 찾아내는 무척 정교한 방법을 사용해서 두 바이러스를 빈번하게 확인했지만, 놀랍게도 우리가 진정으로 찾고자 하는 위험한 요인을 포착해낼 수는 없었다.

 TT바이러스와 GB바이러스는 둘 다 흔하지만 모든 사람을 100퍼센트까지 감염시키지는 않는다. 따라서 그리스 문자에서 유래한 '판데믹'의 정의를 충족하지는 못한다. 세계보건기구WHO는 소수만을 감염시키는 1단계 바이러스로부터 시작해서, 감염이 전 세계로 확산되는 경우인 6단계까지 판데믹을 모두 여섯 단계로 분류했다.

 세계보건기구는 2009년 H1N1을 판데믹으로 규정해서 엄청난 비난을 받았다. 하지만 H1N1은 누가 뭐라 해도 판데믹이었다. H1N1은 2009년 초 소수의 감염자에게서 시작되었지만, 같은 해 말에는 세계 전역으로 확산되었다. H1N1이 판데믹이 아니라면 무엇이란 말인가? 확산되는 병원균을 판데믹으로 규정하느냐 않느냐는 치사율과 관계가 없다. 판데믹은 확산력을 뜻할 뿐이다. 1장에서 논의했듯이 H1N1의 치사율이 50퍼센트에 이르지는 않는다고(실제로는 1퍼센트 이하) 말한 바 있지만, 그것이 100만 명을 죽이지고 못하고 중대한 위협이 되지 않는다는 뜻은 결코 아니다.

 솔직히 내 생각에는 판데믹이 세계를 휩쓸어도 우리가 인지조차 못하는 경우가 있을 수 있다. 예컨대 TT바이러스나 GB바이러스처럼 외부로 나타나는 증상이 거의 없는 바이러스가 오늘 인체에 침입해서 전 세계로 확산되더라도 우리는 전혀 인식하지 못할 것이다. 현재 질병을 탐지하는 전통적인 시스템은 뚜렷한 증상을 나타내는 병원균만을 포착해낼 뿐이다. 따라서 즉각적인 피해를 주지 않는 바이러스는 놓치고 넘어가기 십상이다.

 물론 '즉각적'이란 개념이 '결코'라는 뜻은 아니다. HIV 같은 바이러스가 오늘 인체에 침입해서 전 세계로 퍼지더라도 수년 동안은 탐지되지 않을 것이다. 중대 질병들은 감염되고 상당한 시간이 지난 후에 증세가 나타나기 때문이다. HIV는 곧바로 확산되기 시작하지만, 처음에는 상대적으로 크게 신경 쓰이지 않는 징후로만 나타난다. HIV로 인한 중대 질병인 에이즈는 수년 후에야 나타난다. 따라서 판데믹을 탐지해내기 위한 전통적인 방법들은 주로 증상에 초점을 맞추고 있다. 그러나 소리 없이 확산되는 바이러스는 우리 레이더망에서 벗어나 파괴적인 수준까지 확산된 후에야 인간의 경갃김을 비로소 얻게 된다.

 제2의 HIV를 또다시 놓친다면 공중보건정책의 참담한 실패가 될 것이다. 하지만 새로운 바이러스들이 TT바이러스나 GB바이러스처럼 완전히 무해할 가능성이 높더라도 사람들에게 신속하게 확산된다면 철저하게 감시할 필요가 있다. 1장에서 보았듯이 바이러스는 언제든 변할 수 있고, 언제든 돌연변이를 일으킬 수 있다. 다른 바이러스들과 재조합되고 유전물질을 혼합함으로써 치명적인 새로운 바이러스를 만들어낼 수 있다. 인체에 존재하는 새로운 바이러스가 전 세계로 확산된다면, 우리는 그 바이러스에 대해 속속들이 알아내야 한다. 선과 악의 경계는 백지장 한 장에 불과하기 때문이다.

 

p132

 앞에서 지적했듯이, 향후에 인간을 위협할 새로운 판데믹의 가능성을 지닌 대부분의 병원균은 동물의 체내에 존재한다. 가축화된 동물들도 분명히 위협요인이다. 그러니 가축들에게 원래 존재했던 병원균의 대부분은 이미 인간에게 전이되어 인간의 병원균 레퍼토리를 구성하는 역할을 끝냈다고 보아도 무방하다. 이제 가축으로부터의 위협은 야생동물의 병원균을 인간에게 옮기는 매개 역할을 하는 경우이다. 게다가 가축의 절대 숫자는 상당히 많지만, 우리가 동물의 세계에서 극히 일부만을 가축화했기 때문에 포유동물의 다양성에 비교하면 소수에 불과하다. 따라서 새로운 판데믹에 관한 한 야생동물이 기원일 가능성이 아주 높다.

 

p196

 1993년 6월 옴 진리교도들은 동경 동부의 가메이도 지역에 있는 8층 건물 옥상에서 탄저균Bacillus Anthracis의 현탁액을 살포했다. 세계에서 가장 크고 인구밀도도 높은 도시에 생물학적 테러를 감행한 것이었다.

 다행히 그들의 공격은 실패로 끝났다. 2004년에 쓰인 분석에 따르면, 그들이 상대적으로 양성이었던 데다 세균포자의 밀도가 낮은 탄저균 변종을 선택했고, 살포 방식도 비효율적이었기 때문에 1993년의 사건은 용두사미격인 미풍으로 끝났다. 한 사람도 탄저병에 걸리지 않았지만 일부 애완동물은 목숨을 잃은 것으로 여겨진다.

 그러나 옴 진리교가 더 치명적인 탄저균 변종을 선택해서 조금이라도 더 효과적으로 살포했더라면, 내가 위에서 언급한 시나리오에 가까운 사건이 닥쳤을 것이다. 실제로 그 종말론자들은 탄저균만을 배양하고 있었던 것이 아니다. 그들은 다수의 실험실을 차려놓은 채 보툴리누스 독소, 탄저병, 콜레라, Q열 등 다양한 병원균을 배양하고 있었다. 1993년 그들은 다수의 의사와 간호사를 데리고 콩고민주공화국으로 들어갔다. 표면적으로는 의료봉사를 위한 것이었지만, 실제로는 에볼라 바이러스를 분리한 샘플을 반입하려는 목적 때문이었다.

 

p198

 생물학적 테러의 위험을 과소평가한다면 엄청난 잘못을 저지르는 것이다. 테러집단을 연구하는 학자들의 판단에 따르면, 생물학 무기가 인간에게 사용될 가능성은 시간문제일 뿐이다. 이토록 치명적인 병원균이 합법적인 연구소에서, 혹은 무책임한 테러집단의 작업장에서 배양될 수 있다는 사실은 세계적인 판데믹의 가능성에 또 다른 위협요인이다.

 가능성은 별로 없지만 테러집단이 현재 극소수만 남아 있는 천연두 바이러스 샘플을 손에 넣는다면 그 결과는 엄청날 것이다. 천연두는 자연상태에서 박멸된 지 오래인 반면에, 천연두 바이러스는 단 두 세트만이 안전한 곳에 철저하게 보관되어 있다. 하나는 미국 애틀랜타의 질병통제예방센터에, 다른 하나는 러시아 콜초보의 국립 바이러스학 및 생물학 연구센터VECTOR에 보관되어 있다. 두 곳은 생물학적 안전성에서 최고등급인 4단계 시설을 갖추고 있다. 한때 이곳에 남아 있는 재고마저 없애려는 가능성에 대한 논란이 있었지만, 백신과 치료제의 생산에 이 살아 있는 바이러스의 잠재적인 필요성 때문에 지금까지 결정이 미뤄지는 있는 실정이다.

 흥미롭게도 2004년에 천연두로 의심되는 부스럼 딱지가 뉴멕시코 산타페에서 발견되었다. 예방접종으로 생긴 부스럼 딱지라고 쓰인 봉투에서 발견된 것이었다. 어떤 실험실의 냉동고나 다른 어떤 곳에 상당한 천연두가 존재한다는 가능성을 시사하는 증거였다. 천연두 바이러스가 의도적으로, 심지어 사고로라도 살포된다면 그 결과는 끔찍할 것이다. 천연두는 박멸되었기 때문에 천연두를 예방할 백신이 존재하지 않기 때문이다. 따라서 천연두가 어떤 형태로든 방출된다면 최악의 상황이 닥칠 것이고, 우리에게는 그야말로 재앙이다.

 또 다른 위험은 '바이어에러bioerror'이다. 생물학적 테러bioterror와 달리 바이오레어는 인간의 실수에 의해 병원균이 우연히 방출되어 널리 확산되는 경우이다. 2009년 박사후과정의 지도교수였던 돈 버크가 인플루엔자 바이러스들의 발생에 대한 논문을 발표했다. 그 논문에서 버크는 인간 세계에 확산된 다양한 인플루엔자 바이러스들을 분석했다. 특히 눈에 띄는 사례 중 하나는 1977년 11월 소련과 홍콩 및 중국의 남동부를 강타한 유행성 독감이었다. 문제의 바이러스는 20년 전에 집단 발병했던 유행성 독감의 바이러스와 거의 똑같았지만 그 이후로 바이러스가 발견된 사례가 없었다. 버크와 그의 동료들은 문제의 바이러스를 초기에 추적한 결과, 실험실에 보관되었던 바이러스가 우연히 실험실 직원의 몸에 침입하여 그로부터 확산되었을 거라고 설명할 수밖에 없다는 결론을 내렸다.

 앞으로 수십 년이 지나면 일반대중도 상세한 생물학적 정보와 기법에 접근해서 단순한 병원균들을 배양하는 것이 가능해지기 때문에 생물학적 테러와 바이오에러가 급증할 것이다. 대부분의 사람들이 생물학적 실험은 주로 안전한 연구실에서 진행될 것이라 생각하지만 실제로는 그렇지 않다. 2008년 뉴욕 시에 사는 두 명의 10대 소녀가 한 연구소에 초밥 샘플을 보내왔다. 이 연구소는 유전자 검사를 단순화하고 표준화하려는 프로젝트를 시행하는 곳인 DNA바코드 데이터베이스 프로젝트 센터였다. 두 소녀는 고가의 초밥이 실제 가치보다 비싸게 팔린다는 것을 알아냈고, 동시에 당시 과학자들에게만 허용되던 유전정보를 얻어내는 방법까지 알아냈다.

 요컨대 두 학생은 초밥 연구를 통해서 뉴욕 시의 초밥 장사꾼들이 손님에게 바가지를 씌운다는 사실만을 알아낸 것이 아니었다. 두 소녀의 초밥 연구는 비과학자가 유전정보를 읽어낸 가장 유명한 초기 사례 중 하나였다. 정보기술IT 혁명의 초창기에는 컴퓨터 프로그래머만이 HTML 같은 코드를 읽고 쓸 수 있었다. 그 후에는 프로그래머가 아닌 일반사람들도 코드를 읽고 쓰기 시작했으며, 이제는 누구나 블로그와 위키 및 게임에서 무리 없이 코드를 읽고 쓴다. 정보를 공유하는 모든 시스템이 그렇듯이, 고도로 전문화된 것으로 시작한 것이 어느새 보편적인 것이 된다.

 따라서 멀지 않은 미래에는 직접 생물학적 실험을 시도하는 소규모 집단이 보편화될지도 모른다. 그런 세계에서는 바이오에러를 관리하고 감독해야 할 필요성이 실질적으로 대두될 것이다. 영국왕실협회의 전 회장 마틴 리스Martin Rees 경은 유명한 예언에서, ".... 2020년쯤에는 바이오에러나 생물학적 테러가 현실화되어 수백만 명의 목숨을 빼앗아갈 것이다"라고 경고했다. 파이프 폭탄이나 필로폰 제조공장을 만들던 화학이 바이러스 폭탄을 제조하는 생물학으로 바뀌고 있다.

 

p212

 가축의 수도 깜짝 놀랄 정도로 많지만, 가축이 도축되어 고기로 가공되는 과정도 가축화가 시작된 이후로 행해지던 방법과는 완전히 달라졌다. 역사적으로 한 마리의 동물을 도축하면 한 가족, 많으면 마을 사람 모두가 배불리 먹을 수 있었다. 가공육이 등장하면서부터 우리가 야구경기를 보면서 먹는 핫도그는 다수의 종(돼지, 칠면조, 소)으로 이루어지며, 수백 마리의 동물에게서 얻은 고기로 만든 것일 수 있다. 따라서 그런 핫도그를 먹으면, 수십 년 전이었다면 농장 전체에서 뛰놀던 동물들을 골고루 맛본 셈이 된다.

 다수와 동물 고기를 혼합한 가공육을 만들어 사람에게 유통시키면서 부작용이 뒤따르기 마련이다. 수천 마리의 동물 고기를 수많은 사람에게 나눠준다는 것은, 오늘날 육식을 즐기는 사람이면 평생 수십억 마리의 동물에서 얻은 고기를 조금씩 먹는다는 뜻이 된다. 과거에는 한 사람의 소비자가 한 마리의 동물과 직접적으로 접촉하는 것으로 끝났지만, 이제는 동물의 고깃덩이들과 육식을 하는 사람들이 서로 긴밀하게 연결된 거대한 네트워크를 이루고 있다. 고기가 요리되는 과정에서 많은 위험이 제거되는 건 확실하지만, 무수한 숫자로 구성된 거대한 네트워크에서 못된 병원균 하나가 인체로 전이될 가능성은 상대적으로 높아진 것이다.

 양의 뇌가 광범위하게 파괴되어 스폰지처럼 구멍이 뚫리는 신경질환인 스크래피scrapie, 그리고 일반인들에게 광우병으로 주로 알려진 우해면양뇌증BSE 에서 바로 위의 현상이 일어났던 것으로 여겨진다. BSE는 1장에서 언급했던 프리온으로 알려진 감염균들 중 하나이다. 바이러스와 박테리아와 기생충 등 우리가 알고 있는 여느 생명체와 달리, 프리온에는 생물학적 유전자지도(즉 RNA와 DNA)가 없다. 지금까지 알려진 모든 생명체를 구성하는 유전물질과 단백질의 결합체가 아니라 프리온에는 단백질만이 존재한다. 따라서 어떤 유기적인 역할을 못할 듯하지만, 프리온 역시도 확산될 수 있고 더구나 중대한 질병을 야기할 수 있음은 당연하다.

 BSE는 1986년 11월 처음 확인되었을 때, 이 병에 걸린 소들의 특이한 증상 때문에 소에게 발생하는 신종질환으로 여겨졌다. 병에 걸린 소들은 제대로 서 있거나 걷지도 못하고, 수개월이 지나면 격렬한 경련을 일으키면서 죽어버린다. 아직도 광우병이 소에게 발생한 기원에 대해서는 논란이 많지만, 연구에 의하면 오히려 양이 그 기원으로 여겨진다. 1960년대와 1970년에 소의 사료 제조가 산업화되었을 때, 죽은 양들을 육분과 골분으로 만든 사료가 있었다. 양은 스크래피로 불리는 프리온 질병을 지닌 것으로 오래전부터 알려져 있었다. 따라서 죽은 양을 소의 사료로 가공했기 때문에 그 병원균이 소에게 전이되어 적응한 것으로 여겨진다.

 소에게 전이된 BSE는 다시 사료를 통해 확산된다. 죽은 양처럼 죽은 소도 소의 사료를 만드는 데 이용되기 때문이다. 따라서 프리온이 양에서 소에게로 옮겨갔기 때문에 그 감염된 소를 이용해 가공한 육분과 골분을 통해 다음 세대의 소들에게로 전이된 듯하다. 프리온의 확산은 상당히 놀라웠다. 일부 학자들의 주장에 따르면, 그 기간 동안에 100만 마리 이상의 소가 감염되어 먹이사슬에 유입되었을 것이라 추정된다. 그러나 이런 프리온들이 모두 소에게만 머물렀던 것은 아니다.

 BSE가 처음 확인되고 약 10년 후, 영국 의사들은 프리온에 감염된 쇠고리를 먹어쓸 것이라 판단되는 사람에게서 치명적인 퇴행성 신경질환neurodegenerative disease을 확인하기 시작했다. 환자들은 치매와 격심한 근육경련 및 근육협응 퇴화 등의 증세를 보였다. 환자들의 뇌가 감염된 소들의 뇌와 정확히 똑같은 식으로 구멍이 뚫린 것을 확인할 수 있었던 것이다. 또한 감염된 인간의 뇌 조직을 이식 받은 영장류들에게도 이 질병에 전염될 수 있다는 사실을 실험을 통해 밝혀냈다. 인간 환자들도 BSE에 감염된 것이지만, 똑같은 질병이 인간에게서 발견되면 변종 크로이츠펠트 야곱병vCJD이 된다.

 지금까지는 vCJD 환자가 24명밖에 확인되지 않았지만, 확정적인 진단이 어렵기 때문에 분명히 더 많은 환자가 있을 것으로 보인다. vCJD에 대해서는 아직 많은 부분이 밝혀지지 않았지만, 감염된 사람들은 감염된 소의 조직에 접촉한 것이 확실하며 치명적인 뇌장애로 이어지는 유전적 감수성을 지니는 것으로 여겨진다. 건강한 환자에서 추출한 편도선과 충수를 분석한 결과에 따르면, 영국에서 광우병이 유행하던 동안 그런 소와 접촉한 4,000명 중 한 명꼴로 질병의 징후를 전혀 보이지 않는 보균자가 나왔다. vCJD는 장기이식을 통해서도 전이되는 것으로 이미 입증되었고, 수혈을 통해서 전이될 가능성 또한 있기 때문에 위의 결과는 무척 우려스러운 결과가 아닐 수 없다. 

 

p218

 현재 피츠버그대학교 보건대학원 원장인 돈 버크는 바이러스들의 재조합으로 새로운 판데믹이 발생하는 과정을 경고하는 데 중추적인 역할을 해왔다. 버크는 그 과정을 설명하기 위해서 창발적 유전자emerging gene라는 개념을 도입했다. 역사적으로 바이러스 학자들은 새로운 유행병에 대하여 동물에서 인간에게 전이되는 병원균에서 비롯되는 것이라 생각해왔다. 그러나 HIV와 인플루엔자와 사스에서 보았듯이, 유전자 재조합과 재편성이 새로운 유행병의 근원인 경우가 더 많다. 

기존의 병원균 하나와 새로운 병원균 하나가, 즉 두 병원균은 하나의 숙주에서 일시적으로 존재할 때 서로 영향을 미치며 유전물질을 교환할 수 있다. 여기에서 비롯되는 변형된 병원균은 확산되어 완전히 새로운 판데믹, 따라서 전혀 대비되지 않은 판데믹으로 발전할 수 있다. 이런 경우에 판데믹의 원인은 새로운 병원균이 아니라, 새로이 교환된 유전정보, 즉 창발적 유전자를 지닌 병원균이다.

 앞으로 우리는 판데믹의 위협에 더욱 시달리게 될 것이다. 새로운 병원체가 확산되어 질병을 일으킬 것이다. 우리가 열대우림으로 더 깊이 들어가, 전에는 국제교통망과 단절되어 있던 병원체들과 접촉함에 따라 새로운 판데믹이 끊임없이 출현할 것이다. 높은 인구밀도, 전통음식들, 야생동물 거래 등이 복합되면 이 병원체들이 때를 만난 듯이 확산될 것이다. HIV로 인한 면역결핍으로 새로운 병원체들이 약해진 인간의 몸속에서 쉽게 적응할 위험률이 높아졌기 때문에 유행병의 충격은 더욱 클 것이다. 우리가 동물들을 신속하고도 효율적으로 세계 어느 곳으로든 운송하게 되면서 동물들은 어디에나 새로운 유행병의 씨를 뿌릴 수 있게 되었다.

 과거에는 서로 만난 적조차 없던 병원균들이 어디에서든 만나 새로운 모자이크 병원체를 형성하기도 하며, 부모 세대에서는 꿈도 꾸지 못하던 방식으로 확산될지도 모른다. 요컨대 우리는 앞으로 파도처럼 끝없이 밀려드는 새로운 유행병들을 경험할 가능성이 크다. 앞으로 닥칠 유행병들을 더 효과적으로 예측하고 통제하는 방법을 알아내지 못한다면 우리는 그 유행병들에 속수무책으로 당할지도 모른다.

 

p296

 

 대부분의 사람은 병원균에 대해 생각할 때, 인간과 세균의 전쟁이란 틀에서 벗어나지 못한다. 하지만 조금만 창의적으로 생각하면 병원균들 간의 전쟁을 어렵지 않게 떠올릴 수 있다. 게다가 현실은 그보다 훨씬 더 흥미진진하다. 우리는 무궁무진하게 다양한 병원균들이 형성한 공동체의 일부에 불과하다. 그 공동체에서 병원균들은 자기들끼리, 또 우리와 싸우고 협조하며 살아간다.

 

 우리 몸을 생각해보자. 머리부터 발끝 사이에서 10개의 세포 중 하나만이 인간이다. 나머지 9개는 우리 피부를 뒤덮거나 우리 내장에서 살아가며, 우리 입안에서는 번성하는 박테리아 덩어리들이다. 유전정보의 다양성을 이런 식으로 비교하면, 피부와 체내에 존재하는 1,000개의 유전정보 중 하나만이 인간의 것에 불과하다. 그에 비해 박테리아와 바이러스는 수천 종에 달해 어디에서나 수적으로 인간 유전자를 훌쩍 넘어선다.

 

 우리 몸에 존재하는 박테리아, 바이러스 등 모든 병원균을 합해서 미생물상microbiota이라 칭하고, 그 병원균들의 유전정보를 모두 합해서는 미생물군계microbiome라 칭한다. 5년 전부터 인간 미생물군계를 연구하는 새로운 과학이 눈부시게 발전했다. 수천 종류의 병원균을 개별적으로 배양하는 거의 불가능한 일을 건너뛰게 해주는 새로운 분자 기법들의 등장에 힘입어, 과학자들은 우리 몸 전체에서 인간 세포와 병원균 세포를 구성하는 것들이 무엇인지 신속하고 정확하게 파악하고 있다.

 

 속속 밝혀지는 결과들은 흥미진진하다. 우리 내장은 병원균들의 복잡한 군집들로 가득하고, 대다수의 병원균들이 비유해서 말하면 '장기 거주자'들이다. 그 병원균들은 무임 승객들이 아니다. 우리가 섭취하는 식물성 물질이 소화되려면 박테리아와 박테리아 효소가 필요하다. 인간 효소만으로는 식물성 물질을 소화할 수 없다. 병원균 군집이 어떻게 구조화되느냐에 따라서 결과가 엄청나게 달라진다.

 

 미국의 생물학자 제프 고든Jeff Gordon은 제자들과 박사학위를 취득한 연구자들(그들 중 다수가 지금은 똑ㄱ교수로 활동하고 있따)의 도움을 받아, 우리 내장에 존재하는 병원균 군집들이 무척 중요하다는 걸 입증해냈다. 예컨대 박테로이데테스Bacteroidetes라는 특수한 박테리아군群의 상대적으로 낮은 비율과 관계가 있다는 걸 밝혀냈다.

 

 고든 연구팀은 비만자들의 미생물상이 똑같은 음식에서 얻을 수 있는 열량을 증가시킨다는 것도 입증했따. 게다가 정상적인 생쥐의 장내 미생물상을 비만인 생쥐의 미생물상으로 교체하면, 정상적인 생쥐의 체중이 눈에 띄게 증가한다는 사실까지 밝혀냈다. 간단히 말하면, 우리 내장에 기생하는 박테리아가 비만과 중대한 관련이 있다는 뜻이다. 자궁경부암의 경우에서 보았듯이, 어떤 만성질환의 원인이 병원균이면 그 질환을 상대적으로 쉽게 해결할 수 있는 가능성이 열린 것이다. 언젠가는 우리는 활생균probiotics과 항생물질을 결합함으로써, 우리 내장의 미생물상을 신중하게 교체해서 건강한 체중을 유지할 수 있는 방법을 찾아낼 것이다.

 우리가 치명적인 병원균들에게 영향을 받는 정도에서도 우리 내장에 우글거리는 미생물 군집들이 적잖은 역할을 한다고 해서 놀랄 것은 없다. 식중독의 주된 원인 중 하나인 치명적인 박테리아, 살모넬라균에 의한 식중독의 경우, 가장 큰 위험인자는 안전하지 않은 달걀의 섭취와 항생제의 사용으로 한동안 여겨졌었다. 살모넬라균에 감염된 닭은 달갈까지 감염시킬 수 있기 때문에 달걀의 섭취가 위험할 수 있다고 고개가 끄덕여지지만, 항생제의 사용이 위험인자로 꼽힌 이유는 그야말로 미스터리였다.

 장내 미생물군계에 대한 최근 연구에서 그 미스터리가 조금이나마 풀릴 듯하다. 스탠퍼드대학교의 저스틴 소넨버그Justin Sonnenburg 교수가 그 미스터리를 풀기 위한 중요한 실험을 시작했다. 그는 실험실에서 무균 생쥐들을 키우고 있었는데, 이 무균 생쥐들은 완전히 멸균된 환경에서 살아간다. 녀석들은 압력솥에서 살균되어 병원균이 완전히 제거된 음식만을 섭취한다. 따라서 미생물들이 숙주의 장내에서 다양한 미생물상을 만들어내는 정확한 결정요인들을 찾아내기에 완벽한 표본들이다.

 항생제 사용이 이로운 병원균을 죽이며, 우리의 장내의 병원균들이 살모넬라균처럼 새로운 파괴적인 세균을 대비하는 자연방어막을 허물어뜨린다는 의심은 오래전부터 있었다. 하지만 그 과정이 어떻게 진행되는지는 아직도 명확하지 않다. 소넨버그의 실험실에서 시도되는 작업이 조만간 그 해답을 우리에게 전해주리라 믿는다.

 우리를 돕고 지켜주며, 체내에서 조용히 살면서 아무런 피해를 주지 않는 친절한 병원균들이 있다. 물론 우리 몸밖에도 선량한 병원균들이 있다. 우리 몸 안에, 혹은 자연 환경에 존재하는 어떤 병원균이 우리에게 이롭고, 어떤 병원균이 악당인지 정확히 알아낼 수 있다면 대부분이 뜻밖에 사실에 깜짝 놀랄 것이다. 해로운 병원균이 소수에 불과하다는 게 거의 확실하기 때문이다. 따라서 공중보건이 완전히 멸균된 세계를 목표로 해야 할 이유는 전혀 없다.

 해로운 병원균을 찾아내서 통제하겠다는 목표이면 충분하다. 음흉하고 해로운 병원균들을 척결하는 지름길을 이로운 병원균들을 왕성하게 키워내는 것일 수 있다. 가까운 장래에 우리는 체내에 기생하는 병원균들을 죽이려고 애쓰기보다는, 그런 병원균들을 활성화하는 방식으로 악랄한 병원균들로부터 우리 몸을 지킬지도 모른다.

 

p303

 H1N1 인플로엔자(돼지독감)가 판데믹으로 발전한 초기에는 미국 질병통제예방센터의 글로벌 질병탐지 및 응급대응팀 침장인 스콧 두웰Scott Dowell의 도움을 받아 질병통제예방센터의 상황실을 둘러보았다. 당시 팀원들은 멕시코에서 봇물처럼 밀려드는 보고들에 신속하게 대응하고 있었다. 또 세계보건기구가 판데믹을 비롯해 화급하게 대응해야 할 보건 문제가 닥쳤을 때 사용하는 상황실도 살펴보았다.

 내가 운영하는 조직 '글로벌 바이러스 예보Global Virus Forecasting, GVF'는 세계보건기구 산하에 조직된 집단발병 경보 및 대응을 위한 네트워크Global Outbreak Alert Response Network, GOARN의 일원이다. 안타깝게도 관료주의적인 절차, 불충한데다 들쑥날쑥한 지원, 먹이사슬에서 위에 있는 사람들의 변덕에 따라 걸핏하면 수정되는 목표 때문에 질병통제 예방센터와 세계보건기구는 제 기능을 발휘하지 못하는 실정이다. 이런 조직들이 더 강해져야 한다. 더 많은 지원을 받아 더 좋은 장비로 무장해야 한다. 하지만 그런 때가 오더라도 항상 더 많은 지원과 장비가 필요할 것이다.

 

p305

 생물의 역사에서 초기에 일어난 몇몇 사건들로 바이러스 폭풍을 위한 완벽한 조건이 갖추어졌다. 예컨대 사냥의 도래로 우리의 생물학적 계통에서 어떤 종이 동물들과 접촉하기 시작했고, 그로 인해 새로운 병원균들이 인류 이전의 조상에게 침입하게 되었다. 그리고 거의 멸종에 가까운 사건이 있은 후로 우리가 병원균들에 대처하기에 미흡한 상황이 닥친 듯하다.

 또한 인구가 증가하고 세상이 밀접하게 연결되면서 우리는 조금씩 폭풍의 중심을 향해 다가가고 있다고도 말했다. 동물들의 가축화, 나날이 확대되는 도시화, 경이로운 교통 시스템으로, 지상에서 생명이 탄생한 이후로 모든 개체군이 전례 없이 긴밀하게 연결된 세상이 되었다. 특히 인간은 장기이식과 주사요법을 발명하면서, 병원균이 확산되어 재앙을 불러일으킬 수 있는 완전히 새로운 통로를 열어놓았다.

 

 

 

 미생물학 전문가로서 나는 "감염의 위험을 줄이기 위해서 개인적으로 어떻게 행동하십니까?"라는 질문을 자주 받는다. 첫째로, 귀찮더라도 내 예방 상태에 허점이 없도록 유지한다. 예컨대 말라리아 지역에서 지낼 때는 말라리아 예방주사를 고박꼬박 맞는다. 처음부터 그랬던 것은 아니다. 하지만 호된 홍역을 치른 후에야 예방이 얼마나 중요한지를 깨달았다.

 겨울철에는 호흡기 질환의 전염경로를 항상 염두에 두고, 호흡기 질환에 걸리지 않으려 애쓴다. 대중교통은 많은 사람이 이용하기 때문에 무척 위험하다. 그래서 지하철이나 비행기에서 내린 후에는 손을 씻거나, 알코올을 기반으로 한 간단히 손세정제를 이용한다. 또한 많은 사람과 악수를 나누면 곧바로 손을 씻거나, 쓸데없이 코나 입을 만지지 않으려고 애써 노력한다. 언제나 깨끗한 음식을 먹고 깨끗한 물을 마시는 것이 중요하다. 안전하지 못한 섹스로 인한 위험을 줄이는 것도 중요하다. 물론 어떤 직업에 종사하고 어디에서 사느냐에 따라 대답은 달라진다. 깨끗한 물과 백신, 효과 있는 말라리아 약과 콘돔이 안타깝게도 아직 보편적이지 않다. 이 정도의 안전장치는 모두를 위해서라도 누구나 쉽게 이용할 수 있어야 한다.

 "집단 발병이 발생할 때, 뉴스 보도를 어떻게 받아들이고 위험 정도를 어떻게 판단해야 하는가?"라는 질문도 자주 받는 편이다. 유행병의 몇 가지 특징을 집중적으로 관찰하면 적절한 대답을 구할 수 있을 것이다. 예컨대 병원균이 어떤 식으로 확산되고 있는가? 얼마나 효과적으로 전파되는가? 감염된 사람들의 치사율은 얼마나 되는가? 치사율이 무척 높더라도 확산되지 않는 것처럼 보이면, 이는 반대로 일반적인 치사율이지만 꽤 빠른 속도로 확산되는 판데믹보다는 덜 걱정스러운 일이다. 에볼라 바이러스처럼 무시무시하게 느껴지는 병원균이라고 항상 전세계를 위험에 빠뜨리지는 않는다. 오히려 인간 유두종 바이러스HPV처럼 유순한 바이러스가 때로는 전 세계를 공포에 빠뜨릴 수 있다. 다행히 확산성과 치사율 같은 기본적인 사실만 파악해도 유행병의 위험을 판단하는 데 도움이 된다.

 그러나 당신이 한 곳에서 양질의 삶을 산다고 해서 판데믹의 위험에서 안전할 거라고 생각하면 착각이다. HIV가 전 세계로 확산되면서 인간을 무차별적으로 감염시킨 것은 아니지만, 가난한 사람만이 아니라 부자도 HIV를 피해가지 못했다. HIV는 건강관리를 거의 받지 못하는 사람에게도 악영향을 주었지만, 세계에서 최고의 건강관리를 받는 사람들, 특히 혈우병 환자들에게 치명타를 입혔다. 이처럼 우리 모두는 하나로 이어진 세계에서 살아가고 있다.

 

p310

 미래의 판데믹을 저지하려는 우리 노력을 방해하는 또 하나의 커다란 걸림돌은 위험에 대한 대중의 어설픈 판단이다. 판데믹 에방 분야에서 초석을 놓은 학자 중 한 명이며, 지금도 여전히 판데믹 예방의 중요성을 역설해온 래리 브릴리언트가 2010년 스콜 세계포럼에서 '위험 판단능력risk literacy'의 중요성에 대해 언급했다. '미래의 판데믹을 저지하는 데 작은 도움을 주려는 바람' 덕분에 권위 있는 TED상을 수상한 브릴리언트는, 과거 구글에서, 그리고 지금은 스콜 세계위협요인기금에서 뛰어난 리더십으로 판데믹 예방운동을 출범시키는데 중추적인 역할을 해왔다. 그리고 천연두 박멸 프로그램에서도 핵심적 팀원으로 활동했다. 따라서 '위험 판단능력'의 중요성을 강조하는 데 브릴리언트만큼 적합한 사람은 없다.

 '위험 판단능력'이란 무척 중요한 개념이다. 간단하게 설명하면, 대중이 판데믹에 대한 정보를 이해하고 적합하게 해석할 수 있게 만들자는 개념이다. 따라서 판데믹 예방을 위해서는 대중의 위험 판단 능력이 반드시 필요하다.

 다양한 수준의 위험을 구분하는 능력, 즉 위험 판단능력은 정책결정자에게만 필요한 것이 아니다. 자연재앙에 효과적으로 대응하려면, 무엇보다 대중이 침착성을 유지하며 지시를 충실하게 따라야 한다. 언론이 끝없이 쏟아내는 위협적인 소식에 대중은 만성적인 위험 불감증에 걸린 듯하다. 이런 불감증을 타개할 수 있는 방법은 하나밖에 없다. 모두가 위험을 정확히 인지하고, 여러 형태의 재앙들이 어떻게 다른지 평가할 수 있어야 하며, 각 재앙에 따라 적절히 대응할 수 있어야 한다.

 위험 판단능력이 일반화되면 판데믹을 예측하고 예방하는 데 필요한 정부의 막대한 비용을 국민에게 지원 받기에도 유리할 것이다. 또한 한정된 재원을 어떻게 사용하는 것이 최적의 방법인지 판단하는 데도 도움이 될 것이다. 예컨대 2001년 4월부터 2002년 8월까지 전세계에서 약 8,000명이 테러로 인해 목숨을 잃은 것으로 추정된다. 게다가 이 기간에는 9·11 테러까지 있었다. 2009년 4월부터 2010년 8월까지, 8년 후이지만 같은 기간 동안 H1N1 판데믹만으로 1만 8,000명 이상이 사망한 것으로 확인되었따. 그런데도 대부분이 H1N1을 시시하게 생각한다. 달리 말하면 1만 8,000명이란 숫자가 과소평가되고 있다는 뜻이다. 그렇다고 우리가 위협에 대비할 때 고려해야 할 유일한 변수가 사망자 수라고 주장하는 것은 아니다. 그러나 테러를 예방하기 위해서 투자하는 수조 달러가 실제 위험에 비하면 터무니없이 많은 돈이라는 생각을 지우긴 힘들다.

 

p314

 우리가 어떤 새로운 테크놀로지와 도구를 사용하더라도 현장 정보만큼 중요한 것은 없다.  따라서 우리 작업의 근간은 세계 각지의 현장에서 실시되는 노력들이다. 현재는 동물에게 기생하지만 인간에게 침입할 가능성이 있는 병원균을 찾아내는 것이 현장의 목표이다. 또 우리가 아직 확인하지 못한 방식으로 질병을 유발할 가능성을 지닌 병원균들, 특히 이미 인체에 침입한 병원균들을 추적하는 것도 GVF의 과제이다. 마지막으로 하나를 더 덧붙이면, 새로운 집단 발병과 유행병이 전통적인 보건기구와 미디어 조직의 레이더망에 걸리기 전에 먼저 포착해내는 것도 우리의 과제이다.

 이런 과제를 성공적으로 해내기 위해서 병원과 진료소의 상황을 정기적으로 감시해야 한다. 또한 우리 판단에 '파수꾼' - 탄광의 카나리아처럼 거주지나 고유한 행동 습관 때문에 병원균이 널리 확산되기 전에 남보다 먼저 감염되는 사람 - 이라 생각되는 사람들을 집중적으로 관찰한다. 수렵꾼들을 지속적으로 감시한 덕분에 우리는 과거에 알려지지 않은 상당수의 병원균을 발견한 성과를 거두었다. 힘들게 수집한 이런 감시 자료들을 활용해서, 우리는 인간파보 바이러스 4 human parvovirus 4 처럼 기존에 알려진 바이러스들이 과거에 생각했던 것보다 훨씬 광범위하게 확산되었다는 증거를 객관적으로 제시할 수 있었다.

 새로운 동물 병원균이 판데믹으로 발전하는 과정에 돌입하려면 반드시 거쳐야 하는 관문으로 파수꾼을 연구하는 우리 모델은 무척 성공적이었다는 게 입증되었다. 미국국제개발처의 EPT 프로그램에 함께 참여한 협력 조직들, 국방부와 다른 협력 조직들의 도움을 받아 우리는 현재 20여 개에서 '파수꾼 모델'을 진행 중이다. 하지만 더 많은 노력이 필요하다. 현재 파수꾼 모델을 진행 중인 나라들에서도 동물과 자주 접촉하기 때문에 동물로부터 새로운 병원균에 감염될 가능성이 높은 사람들을 더 폭넓게 감시해야 하고, 더 넓은 지역에서 감시 활동을 펼쳐야 한다. 또한 지금보다 더 많은 나라로 파수꾼 모델을 확대해야 한다. 판데믹의 가능성을 감시하는 작업은 더 큰 관점에서 봤을 때 이제야 첫걸음을 때었을 뿐이다.

 병원균이 동물로부터 인체로 침입하는 지점, 즉 파수꾼을 연구할 뿐 아니라, 병원균이 확산되는 네트워크에서 중추적인 위치에 있는 중요한 개체군을 광범위하게 감시하는 것도 우리의 역할이다. 예컨대 정기적으로 수혈을 받는 사람들을 면밀하게 추적한다. 그들 중 일부는 앞으로도 많은 사람들로부터 수백 번의 수혈을 받아야 하기 때문에, 새로운 질병이 나타난다면 그들이 가장 먼저 감염되어 그와 관련된 징후를 보여줄 것임이 분명하다. 이처럼 네트워크의 중심에 있어 새로운 병원균에 가장 먼저 감염될 확률이 상대적으로 높은 집단들이 많다. 의료 종사자와 항공기 승무원이 대표적인 예이다. 따라서 이런 직업군들을 하나씩 꾸준히 우리 감시 시스템 안에 끌어들이는 것이 무엇보다 중요하다.

 동물들도 무척 중요하다. 9장에서 간략하게 설명했듯이, 나는 GVF의 생태학팀 팀장 매슈 르브르통의 도움을 받아 현장에서 실험실 여과지를 이용해서 동물들로부터 혈액 표본을 다량으로 신속하게 수집하는 방법을 개발했다. 요즘에는 이 방법 이외에 동물의 급격한 사멸animal die-off 까지 면밀히 감시한다. 카메룬에서 유인원들이 탄저병에 쓰러지며 죽어갔듯이, 지상 어딘가에서 매일 일군一群의 야생동물이 죽어간다. 동물세계에서 소규모로 일어나는 집단 발병은 자연계에 어떤 병원균이 있는지 파악할 수 있는 절호의 기회이다.

 동물의 급격한 사멸은 인간에게 곧 닥칠 어떤 집단 발병의 전조일 수 있다. 남아메리카를 휩쓴 황열이 대표적인 예이다. 열대우림에서 원숭이가 죽은 후에 인간 정착민이 치명적인 바이러스에 감염되는 사건이 종종 벌어진다. 하지만 요즘에는 동물의 급격한 사멸이 거의 확인되지 않는다. 세계 전역에서, 특히 생물다양성이 풍부한 숲에서 우리와 함께 일하는 사냥꾼들의 도움으로 동물의 급격한 사멸 현상을 철저하게 감시하는 시스템을 갖추기 시작했다. 세계 어느 곳에서든 어떤 동물이 떼죽음할 때마다 우리가 빠짐없이 안다면 가장 이상적이겠지만, 현재는 그런 중요한 정보를 거의 놓치고 있는 실정이다.

 GVF의 대다수 현장에서는 새로운 병원균을 찾는 데 열중하는 반면에, 일부 현장에서는 이미 알려진 병원균 하나를 집중적으로 탐구한다. 예컨대 서아프리카 시에라리온에서는 GVF의 현장 작업과 실험실 작업을 지휘하는 바이러스 학자이자 현장 유행병학자인 조지프 페어Josepth Fair 가 라사열Lassa Fever로 알려진 치명적인 바이러스를 이해하고 통제하기 위해서 첨단 방법을 동원해 힘든 연구를 진행하고 있다. 라사 바이러스는 설치동물이 인간에게 옮기는 위험하고 흥미로운 바이러스로, 주로 오염된 음식을 통해 전이된다.

 라사 바이러스는 에볼라 바이러스나 마르부르크 바이러스 못지않게 파괴적인 증상을 야기한다. 조지프 페어가 시에라리온의 라사열 현장에서 개발한 모델은 라사 바이러스만이 아니라 에볼라 바이러스와 마르부르크 바이러스까지 파악할 수 있으며, 심지어 그런 바이러스들을 예측해서 대처하기에 최적인 모델이다. 라사열 이외에 모든 출혈열 바이러스들 - 에볼라 바이러스와 마르부르크 바이러스도 여기에 속한다 - 로 인한 전염병은 서아프리카에서 간헐적으로만 발생한다. 그러나 라사열은 서아프리카 지역에서는 일상의 한 부분이다. 간헐적으로만 발생하는 바이러스들까지 철저하게 감시한다는 것은 현실적으로 거의 불가능하기 때문에, 페어는 시에라리온의 곳곳에 설치한 현장을 적극적으로 활용해서 이런 바이러스들이 확산되기 전에 그 바이러스들을 포착하고 통제할 수 있는 최선의 방법들을 연구하며 조금씩 깨달아가고 있다.

 전염병의 집단 발병을 다룬 영화를 좋아하는 사람들에게, 시에라리온의 현장은 흥미진진한 영화처럼 보일 수 있다. 생물학적 오염도가 무척 높은 곳인데다 전문가들이 자신들의 목숨을 도외시한 채 세계인의 목숨을 구하려고 치열하게 경쟁을 벌이는 곳이기 때문이다. 하지만 시에라리온은 그런 의미에서만 중요한 곳이 아니다. 우리가 이곳의 현장에서 라사열을 예측하고 적절하게 대응하는 법을 알아낸다면, 에볼라 바이러스와 마르부르크 바이러스 같은 출혈열 바이러스들까지 통제할 수 있는 방법을 알아낼 수 있으리라 생각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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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우리는 중앙아프리카에서 함께 일하는 야생동물 사냥꾼들에게 새로운 바이러스가 침입하지 못하도록 방법을 찾아ㅐ고자 한다. 중앙아프리카는 HIV가 처음 출현했던 곳이기 때문에, 사냥꾼들은 새로운 바이러스로부터 안전하게 지키는 작업이 무엇보다 중요할 수밖에 없다. 하지만 생각만큼 쉬운 일이 아니다.

 내가 중앙아프리카에 처음 들어가 연구를 시작하며, 사냥꾼들에게 야생동물의 사냥과 도살에서 비롯된 위험을 언급했을 때 그들이 보인 반응을 지금까지 생생히 기억하고 있다. "우리는 오래전부터 그렇게 살았습니다. 우리 부모와 조부모도 똑같은 식으로 살았습니다. 여기에서 우리 목숨을 호시탐탐 노리는 많은 것들만큼 사냥과 도살이 위험하지는 않을 겁니다." 우리가 연구했던 모든 곳에서 사냥꾼들은 내게 그런 식으로 반응했다. 그들의 설명은 틀린 데가 없었다. 말라리아, 비위생적인 물, 빈약한 영양공급 등으로 죽음이 일상사인 환경에서, 동물을 통해 침입하는 새로운 병원균은 사소한 위험에 불과한 듯했다. 사실 어떤 면에서는 지극히 사소한 위험이기도 하다.

 이런 문제는 가난한 사람들이 겪어야 하는 비극이다. 생계형 사냥꾼들이 사냥을 포기할 때 감수해야 할 영양 부족과 그 밖의 대가에 비하면, 새로운 치명적인 질병에 걸릴 위험은 대수롭지 않다. 그러나 지극히 다양한 병원균들로 뒤범벅인 지역에서 수많은 사람들이 야생동물을 사냥한다면, 우리는 새로운 병원균의 출현을 피할 수 없는 상황에 빠져드는 셈이다. 온 세상을 철저하게 파괴할 수 있는 병원균이 출현할지도 모른다. 따라서 위의 문제는 사냥꾼들만의 문제가 아니라, 우리 모두가 머리를 맞대고 함께 해결해야 할 문제이다.

 우리는 사냥에서 비롯되는 위험을 사람들에게 알리려고 노력하지만, 진정한 적은 가난이라는 것도 인정한다. 이 만연된 문제를 해결하기 위해서는 사냥의 위험을 설명하는 수준에 그쳐서는 안 된다. 가난한 지역 주민들이 영양 문제를 실질적으로 해결할 수 있는 방법을 찾도록 도와주는 데도 전력을 다해야 한다. 그들이 위험한 사냥을 대신할 대안을 찾도록 지원해야 한다. 그들이 자기 가족의 배를 채워주기 위해 사냥한 것을 비난할 수는 없다. 우리는 '건강한 사냥꾼 프로그램'을 더 많은 지역으로 확대하는 데 그치지 않고, 개발 및 식량지원조직들과 연대해서 그들에게 실질적인 해결책을 제공해주려고도 노력한다. 

 중앙아프리카, 동남아시아, 아마존 분지 등과 같이 바이러스가 극성인 지역에서 생존을 위한 사냥을 근절할 수 있다면, 우리는 당연히 그렇게 해야만 할 것이다. 야생동물의 사냥은 판데믹의 위험을 고조시키는 데서 그치지 않고, 지구의 생물학적 유산에도 부정적인 영향을 미쳤다. 또한 재생 불가능한 동물성 단백질원을 주식으로 삼는 가난한 집단의 식량 확보에도 부정적인 영향을 미쳤던 것으로 여겨진다.

 하지만 사냥 문제를 해결하기 위해서는 전 지구적 차원의 노력과 지원이 필요하다. 이를 위한 비용을 아깝게 생각해서는 안 된다. 판데믹을 저지하고 생물다양성을 보존하려는 부유한 사람들의 이기적인 목적도 충족시키지만, 세계에서 가장 가난한 사람들이 합리적인 삶을 꾸려갈 수 있도록 도와주는 것이 되기 때문이다. 야생동물고기 문제는 멸종 위기에 처한 종을 구하려는 사람들이 멋에 겨워 제기하는 문제가 아니다. 야생동물고기가 세계인의 건강을 위협한다. 그런데 우리가 어떻게 그 문제를 간과할 수 있겠는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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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에이즈로 인해 면역기능이 떨어지면 새로운 병원균들이 인체에 침입하기가 한결 쉬워진다. 따라서 사냥으로 야생동물들과 자주 접촉하는 오지의 사람들에게까지 에이즈를 억제하는 항레트로 바이러스 제제를 공급할 수 있어야 한다. 실제로 우리는 면역학 전문가인 데비 벅스Debbie Birx와 이 분야의 몇몇 선구자들과 함께 이런 작업을 해왔다. 벅스는 월터리드 육군연구소WRAIR에서 성과가 좋은 연구팀을 감독하며 성공적인 경력을 쌓아왔지만, 지금은 질병통제예방센터에서 글로벌 에이즈 프로그램을 주도하며 항레트로 바이러스 제제를 세계에서 가장 가난한 지역들에게까지 공급하는 기초적인 작업에 집중하고 있다.

 우리 각자가 이 과정을 도울 수 있는 방법은 많다. 우리 모두가 한 마음으로 정책결정자들과 정치인들에게 압력을 가하며, 판데믹 예방을 위한 장기적인 접근 방법을 지원해야 한다. 또한 특정한 위협에 단순히 집중하는 방식보다 미래의 판데믹을 통제하려는 포괄적인 접근방식에 더 많은 연구기금을 지원하라고 정부에 압력을 가해야 한다.

 지금 이 세계가 매우 이상적인 세계라면, 아마도 최근에 판데믹이 있은 직후에 몇몇 선각자들이 제안한 변화를 우리는 받아들여야 했다. 2009년 롱비치에서 열린 TED 회의에서, 엔터테인먼트 법전문가 프레드 골드링Fred Goldring은 우리에게 '안전한 악수'를 시작하자고 제안했다. 손을 맞잡는 대신에 팔꿈치를 맞대는 식으로 악수법을 바꾸자는 제안이었다. 이렇게 하면 손바닥보다 팔뚝에 대고 재채기를 하는 셈이기 때문에 감염성 질환의 확산을 막는 데 크게 도움이 될 것이다. 악수 대신에 한국이나 일본처럼 허리를 굽히는 인사법이 건강에 어떤 영향을 미치는지 연구한 학자는 한 명도 없으리라 생각된다. 분명 한국식의 인사법이 감염성 질환의 확산을 줄이는 효과가 있으리라 예상된다. 또 독감에 걸리면 수술용 마스크를 쓰는 관습도 병원균의 확산을 억제하는 데 효과가 있다. 물론 습관을 바꾸기는 무척 어렵겠지만, 현재의 습관을 유용한 방향으로 대신할 수 있는 대안은 얼마든지 존재한다.

https://www3.nhk.or.jp/news/html/20200423/k10012401871000.html

 

俳優の岡江久美子さんが肺炎で死去 63歳 新型コロナに感染 | NHKニュース

俳優の岡江久美子さんが新型コロナウイルスによる肺炎のため、23日朝、東京都内の病院で亡くなりました。63歳でした。

www3.nhk.or.jp

 

俳優の岡江久美子さんが肺炎で死去 63歳 新型コロナに感染

배우 오에구미토 씨가 폐렴으로 63세로 사망. 신형 코로나에 감염.

はいえん [肺炎] / しきょ [死去] - 사망, 죽음

 

2020年4月23日 18時41分新型コロナウイルス

俳優の岡江久美子さんが新型コロナウイルスによる肺炎のため、23日朝、東京都内の病院で亡くなりました。63歳でした。

배우 오에구미코 씨가 신형 코로나 바이러스로 인한 폐렴으로, 23일 아침, 동경도내의 병원에서 사망했습니다. 63세.

所属 事務所によりますと、岡江さんは今月3日に発熱したあと6日朝に病状が急変して緊急入院し、その後のPCR検査で新型コロナウイルスに感染していることが確認されました。

소속 사무소에 의하면, 오에 씨는 이번달 3일에 발열이 시작된 후 6일 아침 병세가 급격히 나빠져 긴급입원했으며, 이후 PCR검사에서 신형 코로나바이러스에 의해 감염된 것이 확인되었습니다. 

しょぞく [所属] / びょうじょう [病状] / きゅうへん [急変]


その後も集中治療を受けていましたが、23日午前5時20分、肺炎のため亡くなったということです。
63歳でした。

이후에도 집중치료를 받았으나, 23일 오전 5시 20분, 폐렴으로 사망했습니다. 63세입니다.

岡江さんは去年の末に初期の乳がんの手術を受け、ことし1月末から2月半ばにかけて放射線治療を行っていたということで、事務所は免疫力が低下していたことが重症化した原因ではないかとしています。

오에 씨는 작년 말에 초기 유방암으로 수술을 받고, 올해 1월말부터 2월 중순에 걸쳐 방사선 치료를 받아왔습니다. 소속사는 면역력이 저하되었던 것이 중증으로 발전한 원인이 아닌가라고 했습니다.

にゅうがん [乳がん·乳癌] /なかば [半ば] /ほうしゃせん [放射線] /じゅうしょう [重症]



夫は俳優の大和田獏さん、娘も俳優の大和田美帆さんで、それぞれ外出を自粛し、現在症状は出ていないということです。

남편은 배우 오오와다 바쿠 씨, 딸은 배우인 오오와다 미호씨로 모두 외출을 삼가고 있으며, 현재 증상은 나타나지 않고 있습니다.

それぞれ [夫れ夫れ·其れ其れ] 각각, 각기 / 

岡江さんは東京出身で昭和50年にテレビドラマでデビューし、その後、ドラマやバラエティーなど多くの番組に出演していました。NHKの「連想ゲーム」への出演をきっかけに大和田獏さんと結婚しています。平成8年から26年にかけてTBSの「はなまるマーケット」の司会を務め、気さくな人柄で幅広い世代から人気を集めていました。

오에 씨는 동경 출신으로 쇼와50년(1975)년 TV드라마로 데뷰했고, 이후 드라마와 버라이어티 등 많은 방송에 출연해왔습니다. NHK의 「연상 게임」 출연을 계기로 오오와바 바쿠 씨와 결혼했습니다. 헤이세이 8년(1996년)부터 26년(2014년)까지 TBS의 「하나마루 마켓」의 사회를 봤으며, 싹싹한 성격으로 모든 세대로부터 사랑 받아왔습니다.

気さくな人柄 : 싹싹한 인품



事務所によりますと、葬儀の日取りは未定で、後日、「お別れの会」を開く予定だということです。

소속사에 의하면, 장례 일정은 아직 정해지지 않았으며, 이후, 「이별식」을 열 예정이라고 합니다.

そうぎ [葬儀] / みてい [未定] 

 

夫の大和田獏さんと娘の大和田美帆さん コメント

남편 오오와다 바쿠 씨와 딸 오오와다 미호 씨의 코멘트

岡江さんの死去を受けて、夫の大和田獏さんと娘の大和田美帆さんは連名でコメントを発表しました。

오에 씨의 사망을 접하며, 남편 오오와다 바꾸 씨와 딸 오오와다 미호 씨는 같이 코멘트를 발표했습니다.

コメントは、「岡江久美子が4月23日5時20分に新型コロナによる肺炎の為、永眠いたしました事をご報告いたします。今はただ残念で信じがたく、悔しくて悔しくて他は何も考えられない状態です。どうかそっと送って頂きたいと願っています。仕事関係者の方々、ファンの皆様、ご友人の皆様、長いお付き合いを感謝致します。また、全力を尽くして治療にあたって頂いた医療関係者の皆様に心から感謝いたします。ありがとうございました。皆様、コロナウイルスは大変恐ろしいです。どうかくれぐれもお気をつけください」と記されています。

내용은 「오에 구미코가 4월23일 5시 20분에 신형 코로나에 의한 폐렴으로 영면했다는 것을 알립니다. 지금은 원통하고 믿기지 않으며, 너무나도 원통한 마음에 아무것도 생각할 수 없습니다. 부디 편히 보내드리고 싶다는 마음뿐입니다. 일과 관계된 분들, 팬 여러분, 친구 여러분, 오랜 기간 아끼고 사랑해주셔서 감사합니다. 또한, 전력을 다해서 치료해주신 의료 관계자 여러분들께도 마음 깊이 감사드립니다. 고맙습니다. 여러분, 코로나바이러스는 정말 무섭습니다. 모쪼록 부디 조심하십시요」라고 썼습니다.

 

くれぐれも 부디 /しるす [記す·誌す·識す] 쓰다, 기록하다

岡江さんの所属事務所 コメント全文 

오에 씨의 소속 사무소 발표 전문

岡江さんの所属事務所はコメントを発表しました。

弊社所属 岡江久美子(本名:大和田久美子)が、令和2年4月23日午前5時20分、新型コロナウイルス肺炎のため、永眠いたしました。(享年63歳)
ここに生前のご厚誼を深く感謝いたしますとともに、謹んでお知らせ申し上げます。
4月3日に発熱し、4~5日様子を見る様に言われておりましたが、4月6日朝に急変し、某大学病院に救急入院いたしました。
すぐにICUにて人工呼吸器を装着し、その後PCR検査で陽性と判明。懸命な治療を続けましたが、完治に至りませんでした。
昨年末に初期の乳がん手術をし、1月末から2月半ばまで放射線治療を行い免疫力が低下していたのが重症化した原因かと思われます。
ご尽力いただきました医療関係者の皆様には、心より感謝申し上げます。
岡江の入院以来、夫、大和田獏と娘、大和田美帆はそれぞれの家で外出を自粛しております。現在症状は出ておりません。
ただ、ショックが大きく、皆様に対応出来ない状態です。しばらくはご静観ください。
尚、通夜及び葬儀は未定、後日『お別れの会』を実施する予定です。誠に勝手ながら、ご香典、ご供花、ご供物の儀は固くご辞退申し上げます。
関係各社の皆さまにはご迷惑をおかけいたしますが、何卒ご理解いただけますよう、よろしくお願い申し上げます。

 

きょうねん [享年] / こうぎ [厚誼] / つつしんで [謹んで] 삼가 / じんこうこきゅうき [人工呼吸器] / そうちゃく [装着] /

せいかん [静観] 정관, 지켜봄 / なお [尚·猶] 1. 역시, 여전히, 아직 ; 2. 더구나, 오히려, 한층, 더욱 / 

つや [通夜] 장례식장에서 밤샘 / まことに [誠に•真に•実に·真に·実に] 참으로, 정말로, 실로, 매우 / 

こうでん [香典·香奠] 부의, 부조, 조의금 / きょうか [供花] / くもつ [供物] / どうぞ [何卒] 

저희 소속 오에 구미코(본명 : 오오와다 구미코) 가, 쇼와 레이와 2년(2020년) 4월 23일 오전 5시 20분, 신형 코로나 바이러스 폐렴으로 영면하셨습니다. (향년 63세)

생전에 보여주신 후의에 깊이 감사드리며, 삼가 이 사실을 알려드립니다. 

 4월 3일에 발열이 시작되고, 4~5일 동안 상태를 지켜봤지만, 4월 6일에 상태가 나빠져, 모 대학병원에 긴급하게 입원했습니다.

 바로 중환자실에서 인공호흡기를 사용했으며, 이어 PCR 검사에서 양성으로 판명됐습니다. 필사적인 치료를 계속했지만, 완치에는 이르지 못했습니다.

 작년 말에 유방암 초기로 수술을 했고, 1월말부터 2월 중순까지 방사선 치료를 받아 면역력이 떨어진 것이 중증이 된 원인일 걸로 생각됩니다.

 전력을 다해주신 의료관계자 여러분들에게는 마음 깊이 감사드립니다.

 오에의 입원 이후로, 남편, 오오와다 바쿠와 딸, 오오와다 미호는 각기 집에서 외출을 삼가고 있습니다. 현재 증상은 나타나지 않고 있습니다.

 다만, 마음의 충격이 커서, 대중에 나설 수는 없는 상태입니다. 당분간은 지켜봐 주시기 바랍니다.

 아직, 밤샘 조문과 장례는 미정이며, 이후 『이별식』을 실시할 예정입니다. 죄송스럽게도, 부의금, 조화, 조의물품의 의식은 정중히 사절드립니다. 

 관계자 여러분들께는 폐를 끼쳐드리게 되었지만, 부디 이해해 주시기 바랍니다. 부디 부탁드립니다.

(... 하 참 일본의 경어법은 참 어찌 보면 너무 정중해서 한국사람이 어떨 때 보면, 반대로 이거 멕이는거 아냐? 라는 생각이 들 정도다)

 

日本乳癌学会理事長「免疫力低下は考えにくい」

일본 유방암 학회 이사장, 면역력 저하는 생각하기 어려워.

日本乳癌学会の理事長で杏林大学の井本滋教授は「早期の乳がんで手術を受けた後、再発率を下げるために放射線治療を行うことがある。放射線治療を受けた患者で、まれに肺が部分的に炎症を起こすことや、免疫をつかさどる白血球が減少することもあるが、新型コロナウイルスによって重症化する原因になるほど、免疫力が下がるとは考えにくい。同様の治療を受ける患者さんについては感染予防を徹底する必要はあるが、過剰な不安は抱かないでほしい」と話しています。

そのうえで、新型コロナウイルスの感染が拡大する中での治療の在り方について、井本教授は「救命に必要な場合は、予定どおりの手術が行われるべきだが、ごく早期の場合など、ある程度延期をしてもよいと考えられるケースもある。患者の病状や治療、それに地域の感染拡大の状況によって対応も異なってくるので、患者は専門の医師と治療方針について、よく相談してほしい」と話していて、学会では近く治療についての指針を示すことにしています。

 

まれに 드물게, 더러 / つかさどる [司る·掌る] 맡다 / どうよう [同様]

일본유방암 학회의 이사장으로 쿄린대학의 이모토 시게루 교수는 "초기 유방암으로 수술을 받은 후, 재발율을 낮추기 위해 방사선 치료를 했습니다. 방사선 치료를 받은 환자로서, 드물게 폐에 부분적인 염증이 생긴 것이나, 면역을 담당하는 백혈구가 감소한 점도 있지만, 신형코로나바이러스에 의해 상태가 나빠지는 원인이 될 정도로, 면역력이 저하되는 것은 생각하기 어려웠다. 같은 치료를 받은 환자들의 감염예방을 철저히 할 필요가 있으나, 과도한 불안을 갖지 않기를 바란다" 라고 했습니다.

그리고, 신형코로나바이러스 감염이 증가하는 가운데 치료 방법에 대해, 이모토 교수는 "(유방암 상태에 대해)치료에 필요한 경우라면, 예정대로 수술을 해야하는 것이 당연하지만, 아주 초기이거나, 연기가 가능할 정도로 상태가 나쁘지 않은 경우도 있습니다. 환자의 병의 상태와 치료, 또한 코로나 지역 감염의 증가 상황에 따라 대처도 다를 수 있으므로, 환자분들은 전문가와 치료 방법에 대해 사전에 적절한 상담을 받으시길 바랍니다"라고 이야기 했습니다. 학회로서는 가까운 시기에 치료의 방침에 대해 발표하겠다고 합니다.

 

小池知事「自分事として考えて」

東京都の小池知事は記者会見で、「謹んで哀悼の意を表し、心からお悔やみ申し上げる。朝の番組のMCや女優業など、視聴者として親近感を覚えるところも多々あっただけに、新型コロナウイルスで亡くなるというニュースは衝撃だった。多くの同世代の女性もショックを受けたのではないか」と述べました。

そのうえで、「ついこのあいだまで『知人の知人の知人』の話だったのが、だんだん『知人の知人』になり、いまは『知人』になって、どんどん近づいてきている。ひと事ではなく、『その状況をつくっているのは私であり、あなただ』ということで、ぜひ自分事として、自分の家族のこととして考えていただきたい」と呼びかけました。

義兄 大和田伸也さん「最高にかわいい義妹でした」

岡江さんの義理の兄で俳優の大和田伸也さんがTwitterにコメントを投稿しました。

「獏と2人は、自慢のすばらしい夫婦でした。私にとりましても、久美ちゃんは最高にかわいい、いい義妹でした。獏から入院していると聞いた時、まさかこんな日が来るとは思ってもいませんでした。残念です。悔しいです。若い頃からの思い出は尽きません」とつづっています。

岡江さん「あさイチ」ロケで地元住民と交流

岡江さんは去年11月、NHKの朝の情報番組「あさイチ」の撮影で、福島県会津若松市と西会津町を訪れ、多くの住民と交流しました。

伝統工芸の会津木綿をつくる工場や製品を販売する店を訪れ、店の人と気さくに話しながら、気に入ったワンピースやストールを試着したり、着こなしを学んだりしていました。また、会津特産の米粉の料理を地元の人から教わり、味わったり、みずからも購入して家族に料理をふるまったりして、会津の食や文化を満喫していました。

岡江さんが亡くなったことについて、一緒に出演した会津木綿製品を販売する「美工堂」の店主、関千尋さんは「速報で知りました。全く信じられませんし、受け入れられません。福島に来て元気な姿を見せてくださったのがきのうのことのようで、身近な存在だと思っていました。岡江さんが撮影の中で試着した会津木綿のワンピースは、視聴者から『ほしい』という連絡もありました。きれいで輝いていた岡江さんの命を持って行ってしまう新型コロナウイルスがこわいです」と話していました。

ドラマで共演 綿引勝彦さん

民放のドラマ「天までとどけ」でおよそ10年にわたって大家族の夫婦の役で共演した俳優の綿引勝彦さんは「テレビで訃報を知り、大変驚きました。ドラマでご一緒したが、撮影現場はいつも岡江さんの明るさや人柄のよさに包まれていて、10年ほども続けられたのは彼女のおかげだと思っています。数年前にお会いしたときは元気でしたが、体調を崩しているとは知らず、まだ若いのに亡くなったのは非常に残念でことばになりません。本当にありがとうございました」と話していました。

山田邦子さん「…絶句です」

岡江さんが亡くなったことについて、岡江さんと同じく乳がんの治療経験があるタレントの山田邦子さんは、自身の公式ブログで「岡江久美子さんが…絶句です。おそらく乳がん手術は成功したから放射線治療に進んだはずだから、残念すぎます。最後までがんばったんだと思います。つらい、つらすぎます」とつづっています。

片岡鶴太郎さん 悲痛な思いつづる

民放のドラマ「終着駅シリーズ」で夫婦役で共演を続けてきたタレントの片岡鶴太郎さんは、自身の公式ブログで「絶句のまま言葉を失いました!余りに唐突で!余りにショックで!あれだけ御元気な、明るく、快活な、聡明な、健康的な、岡江久美子さんが!!もう何十年も夫婦役で御一緒してきた岡江久美子さんが!!悲し過ぎます!!辛過ぎます!!寂し過ぎます!!信じられません!」などと悲痛な思いをつづっています。

「連想ゲーム」で共演 水島裕さん

岡江さんが亡くなったことについて、NHKの「連想ゲーム」で共演していた声優の水島裕さんは、自身のブログで「僕の対戦相手だった岡江久美子さんが亡くなりました。いつも元気いっぱいで、僕が正解出来ずに落ち込んでると、笑顔で背中を叩いて元気づけてくれるような女性でした。悔しさと驚きで、頭の中が混乱していますが、大和田獏さんやお嬢さんの心労を思うと、心が痛いです。本当に良いご夫婦でした。悔しいです。心から御冥福をお祈り致します」と記しています。

저 멀리, 

화성, 폭풍의 목성, 토성의 고리를 지나면

세상은 달라집니다.

기온은 급락하고, 행성간의 거리는 수백만 킬로미터에서 수십억 킬로미터로 멀어집니다. 

여기에 천왕성(Uranus)이 있습니다.

그리고 태양계의 마지막 행성 해왕성(Neptune)입니다.

여지껏, 우리는 이 행성을 생명이 존재하지 않는 완전히 얼어붙은 곳으로 생각했습니다.

우리는 참으로 무지했습니다.

수성, 금성, 화성, 목성 그리고 토성을 넘어서면 여행에 걸리는 시간은 수개월, 수 년, 수십년 심지어는 그 이상입니다.

 

 

 

태양계의 행성들은 서로 다른 속도로 태양의 주위를 공전합니다. 그리고 175년에 한 번씩 놀라운 일이 벌어집니다. 외행성들의 궤도들이 일직선으로 배열되는 것이죠.

보이저 2호는 바로 그 일직선으로 배열되는 순간에 발사됩니다.

 

2년이 조금 안되서 보이저는 목성에 도착합니다. 다른 모든 태양계의 행성을 합친 무게의 2.5배에 달하는 목성의 중력을 이용해서 보이저는 가속을 합니다.

 

또 다시 2년이 지나 보이저는 태양계의 가장 아름다운 별에 도착합니다. 얼음 고리를 가진 가스 거인인 토성입니다.

 

그리고 계속해서 암흑 속으로 나아갑니다.

 

지구를 떠난지 거의 9년이 지나서 완전히 새로운 행성에 도달합니다.

목성과 토성처럼 이 행성의 상층부 대기는 수소, 헬륨 기체로 대부분 이루어진 소용돌이들로 구성되어 있습니다.

그리고 가려진 그 아래로는 이국적인 모습의 메탄, 암모니아 그리고 물의 혼합체로 이루어진 얼음으로 덮여 있습니다.

다른 가스 거인과는 달리 천왕성은 거의 아무런 특징도 없습니다. 보이저 2호가 관찰하는 동안 겨우 10개의 구름이 형성되는 것만을 볼 수 있었습니다.

 

그 이유는 곧 밝혀졌습니다. 천왕성은 영하 224도의 태양계에서 가장 추운 행성이었습니다.

영원히 얼어붙어 있는 얼음 거인입니다.

보이저 2호는 단지 6시간동안 천왕성을 관찰할 수 있었습니다. 천왕성을 자세하게 들여다볼 수 있게 되자, 거기엔 토성과 같은 고리가 발견됩니다.

 

 

그 고리는 빛을 반사하지 않는 물질로 이루어져 있어서 너무 어둡고 희미했기 때문에 지구에선 볼 수가 없었습니다.

그래서, 1977년까지는 발견되지 않았습니다.

고리는 빛을 반사하지 않는 종류의 물질들로 이루어졌음이 분명했습니다. 토성의 고리와 같은 얼음은 아니었습니다. 

고리는 극단적으로 작고 얇았는데, 그것 역시 수수께끼였습니다. 왜냐하면 고리를 이루는 입자들은 충돌의 연쇄작용 때문에 넓게 퍼지는 것이 일반적(토성에서 발견한 것처럼)일 거라고 생각되었기 때문이죠. 하지만 그렇지 않았습니다.

그렇다면 무언가가 이 고리들을 속박하고 있는 것임에 틀림없습니다. 그 해답은 보이저 2호가 보낸 이 사진에 있었습니다.

여기 엡실론 고리(epsilon ring)라 불리는 밝고 가는 고리를 볼 수 있습니다. 그리고 그 고리의 위와 아래에 2개의 달을 볼 수 있습니다. 내측의 달을 코델리아(Cordelia)라 하고, 외측의 달을 오펠리아(Ophelia)라고 부릅니다.

알아야 될 것은, 천왕성의 궤도에 가까운 달과 고리의 조각들은 먼 곳에 있는 것들보다 늦게 움직인다는 것입니다(참고 : :케플러 2법칙 응용).

엡실론 고리에 있는 조각끼리 충돌을 일으켜서 속도가 떨어진 조각이 속도가 느려지면서 천왕성 방향으로 떨어지게 되면, 코델리아는 이 조각을 가속해서 엡실론 고리로 돌아가게 합니다. 반대로 엡실론 고리의 외곽에 있는 조각이 가속되어 천왕성을 벗어나려고 하면, 오펠리아는 이 조각을 감속시켜서 다시 엡실론 링으로 돌아가가 합니다.

이러한 작용을 통해 이 2개의 달은 고리를 천왕성 궤도에서 아주 가늘고 좁은 지역으로 제한합니다. 

그래서, 이 2개의 달을 양치기 달(shephard moon)이라고 부릅니다.

보이저 2호가 천왕성계에 머문 시간은 고작 몇 시간이었기 때문에, 이 2개의 달 이외에 다른 양치기 달들을 발견하진 못했습니다. 하지만, 천왕성 고리의 다른 부분도 이와 비슷하기 때문에 더 많은 양치기 달들이 천왕성 궤도에 있을 것이라 추정합니다.

아직 발견되지 않은 달들도 천왕성계의 신비한 일들 중 하나이지만, 천왕성이 태양을 도는 공전궤도 역시 특이합니다. 

 

 

태양계 생성 초기에 모든 물질들은 모두 반시계 방향으로 궤도운동을 했습니다. 이 회전운동은 지금까지도 영향을 주고 있으며, 대부분의 행성들이 자전축에 대해 반시계 방향으로 회전운동을 합니다.

하지만 아직까지 정확히 밝혀지지 않은 이유로, 금성과 천왕성은 자전축에 대해 시계 방향으로 회전합니다.

천왕성은 금성보다 더 특이한데, 옆으로 누워있습니다(아래 사진에서 보면 직관적으로 알 수 있음. 천왕성의 자전축은 공전축 대비해서 90도에 가깝게 누워 있음. 참고로 지구는 23.5도 기울어 있음)

 

 아직까지 왜 천왕성의 자전축이 이렇게 누워있는지는 확실치 않습니다. 

예측하기론, 언젠가 다른 행성, 지구 혹은 그보다 더 큰 크기의, 과 충돌해서 옆으로 넘어진 것이 아닌가 생각됩니다.

컴퓨터 시뮬레이션로도 이와 같은 충돌로 천왕성의 옆으로 쓰러지면, 달들과 고리들도 현재와 같이 그 위치가 변화하는 결과를 보이고 있습니다.

 

태양계의 크기는 인간의 지각으로 상상하기가 불가능할 정도입니다. 하지만 척도를 줄이면 시각적으로 표현할 순 있습니다.

 

태양의 직경은 1백4십만 킬로미터입니다. 척도를 6억분의 1로 줄인다면, 아래 보이는 구조물의 크기 정도입니다.

 

그리고 지구와 화성의 크기는 이 손바닥 위에 조약돌의 크기 정도입니다.

 

이런 스케일에서 태양과 가장 가까운 행성 수성(Mercury)는 태양에서 이 정도의 거리가 될 것입니다. 6억분의 1척도에서 태양과 수성은 96미터 정도의 거리입니다. 그리고 그 직경은 1cm가 안됩니다.

그리고 금성(Venus)은 저쯤이겠군요. 

 

태양에서 180미터 떨어진 금성을 지나면, 지구가 보입니다. 꽤 떨어져 있어 보입니다.

 

250미터 떨어진 거리에서 태양의 불빛이 반짝입니다. 지구의 크기는 직경 2cm의 조약돌 정도입니다.

대략 380미터 정도에서 화성을 지나, 암흑 속으로 들어가게 됩니다. 

 

외행성계의 가장자리에 접근하면서 이제 거리와 다가오는 행성들의 크기는 증가합니다.

 

태양계에서 가장 큰 행성인 목성의 지름은 지구의 수십 배에 달합니다. 태양에서 항구를 지나 1.3km 거리에 목성이 보입니다.

 

태양과 목성간 거리의 거의 2배쯤에서 토성에 닿게 됩니다. 이 척도에서 거리는 2.4km 입니다.

이 정도 거리에서 태양빛은 우리가 이른 새벽 혹은 늦은 저녁에 보이는 것 정도의 밝기입니다. 이 정도에서도 토성과 그 고리는 매우 잘 보이는데, 그 이유는 반사율이 높기 때문입니다.  

목성과 토성을 지나서 천왕성에 도착합니다. 30억 킬로미터를 여행한 보이저 덕분에 우리는 마침내 태양계의 끝인 명왕성에 도달하게 됩니다.

 

명왕성은 가스로 이루어진 7.5cm 직경의 크리로, 우리의 척도(6억분의 1)에서 태양으로부터 7.4km 떨어져 있습니다.

 

12년동안의 광막한 우주 여행 끝에 보이저2호는 해왕성에 도착했습니다.

지구 질량의 17배에 달하고, 천왕성보다도 무겁습니다. 

 

자매별인 천왕성과 달리 해왕성의 대기활동은 매우 활발합니다.

해왕성의 기후는 극단적입니다. 높은 고도에서 메탄 가스로 이루어진 구름이 시속 2000km 이상의 속도로 휘몰아칩니다.

이것은 태양계에서 발견된 가장 높은 속도의 바람입니다. 

보이저는 거대한 흑점(Dark spot)를 발견했고, 이는 목성에서 발견된 거대 적점(red spot)과 유사합니다.

지구와 비슷한 크기의 폭풍우인 이 흑점은, 4~5년동안 활동하고 사라졌습니다. 하지만 수년 동안 더 많은 폭풍들이 생성되는 것을 볼 수 있었습니다. 

태양에서 가장 멀기에 태양에너지를 가장 적게 받는 이 행성에서, 태양계에서 가장 거대한 기상활동이 발견되는 것은 미스테리하 일입니다.

더욱이 보이저는 더 이상한 일을 발견합니다. 태양계의 최외각에 있는 이 별이 천왕성보다 더 따뜻합니다. 왜 그런지는 수수께끼입니다. 

 

해왕성은 태양으로터 받는 열의 2.5배에 달하는 열을 발산합니다. 이 내부열의 존재가 거친 폭풍의 발생 이유를 설명해줍니다. 

행성의 중심부에서 발생한 열은 행성 외부로 빠져나가면서 대기 전체를 휘젓게 됩니다. 그로 인해 다른 태양계에서는 볼 수 없는 거대한 바람을 만들게 됩니다. 

바람이 그처럼 강하게 되는 이유는 다음처럼 추측됩니다. 단단한 지표면이 없는 해왕성에서는 액체는 밑으로 가라앉고, 기체는 상승하게 될 때, 그 흐름을 방해할 바위나 산과 같은 단단한 표면이 없기 때문에 유체의 흐름은 방해받지 않고 가속되어 초음속의 속도로 돌게 되는 걸로 생각됩니다. 

 

보이저 2호는 태양계의 장대한 여행의 마지막에 다다르고 있습니다. 조만간 태양계를 떠나 성간(interstellar)으로 진입하게 됩니다. 

그러기 전에 태양계의 마지막 세상에 도달합니다.

 

트리톤(Triton), 미끈한 질소의 얼음으로 뒤덮인 거대한 달. 이 달은 정지상태의 조용한 별로 여겨졌습니다.

하지만 보이저가 도착했을 때 다시 한 번 놀라움을 선사합니다. 

보이저는 이 얼어붙은 동토에서 8킬로나 치솟는 간헐천들을 보게 됩니다. 이 분출은 암흑 물질들을 사방 100킬로 반경까지 퍼뜨립니다.   

 

이 분출현상이 희미하긴 하지만 태양 아래에서 주로 발생한다는 점에서, 다음과 같은 설명이 그 핵심입니다.

태양빛에 의해 얇게 얼어붙은 질소층 아래 깊이 1미터 정도가 가열됩니다. 질소층 아래가 가열됩니다. 이를 통해 생기는 온도차는 단지 4도씨 정도이지만, 이 복사열을 통해 얼어붙은 질소가 기화되면서 가스를 만들게 됩니다. 이 압력은 얇은 지각을 뚫고 나오면서 간철천을 생성합니다. 

 

 

하지만 여전히 설명되지 않는 것이 있습니다.  이 정도의 거친 지형은 더 강력한 힘의 작용이 필요합니다.

그리고 단서는 트리톤의 괴이한 궤도운동에 그 원인이 있습니다. 다른 태양계의 달과 달리 트리톤의 공전 방향은 해왕성의 자전 방향과 반대입니다. 이것은 트리톤과 해왕성이 같은 시기에 생성되지 않았을 가능성이 높다는 것을 말해줍니다. 

즉, 트리톤은 해왕성계가 생기고 난 다음에 찾아온 방문자라는 것입니다. 보이저와 다른 점은 떠나지 않았다는 것이죠.

하나의 가정은 수십억 년 전에 트리톤은 달이 아니었다는 겁니다. 해왕성과 멀리 떨어진 곳에서 트리톤은 자라났던 걸로 보입니다. 바로 카이퍼 벨트입니다. 

카이퍼벨트의 외곽에서 다 자란 트리톤은 해왕성의 중력에 의해 이끌려 갔고, 초기에는 타원궤도를 공전을 시작했습니다. 타원궤도의 운동을 통해 발생한 강력한 조석력이 트리톤의 표면에 작용하면서 강력한 지각변동을 야기했던 것으로 추정됩니다. 이 지각변동으로 인해 현재 우리가 보는 것과 같은 거친 트리톤의 지표면이 생성된 것으로 보입니다. 현재에 트리톤은 해왕성 주위를 원궤도로 공전합니다. 

 

보이저는 임무를 완수했습니다. 보이저는 계속해서 태양계 밖의 암흑속으로 나아가 우리가 도달하지 못한 세상을 보여줄 것입니다. 

 

 

 

앞으로의 탐험은 뉴 호라이즌의 성공에 달려 있습니다. 

3미터가 되지 않는 탐침을 가지고 우주의 심연을 향하고 있는 뉴 호라이즌은 목표지점에 도달할 때까지 전기장치와 비행에 필수적이지 않은 시스템들은 에너지 절약을 위해 꺼져 있습니다.  

48억 킬로미터의 비행 기간 내내 거의 동면 중입니다. 

뉴 호라이즌이 명왕성(Pluto)으로의 여행을 진행하는 내내, 지구상에서는 명왕성에 대해 열띤 논쟁이 있었습니다.

 

카이퍼벨트(Kuiper belt)의 내부 가장자리에 위치한 명왕성은 너무나 멀기 때문에 허블 망원경으로도 흐릿하게 보입니다. 하지만 명왕성은 홀로 있는 것이 아니었습니다. 

조금 떨어진 곳에서 무언가를 발견하기 시작했습니다. 

 

허블 망원경이 명왕성과 크기가 비슷한 것들을 발견하기 시작했습니다.

 

이 발견을 통해 "행성(Planet)"이 무엇인가 하는 정의에 대해 다시 생각할 수 밖에 없게 되었습니다.

국제천문연맹(International Astronomical Union)은 행성에 대해 세가지의 정의를 내렸습니다.

첫째, 태양의 주위를 공전해야 한다. 명왕성은 태양 주위를 248년의 주기로 공전합니다.

둘째, 구의 형상을 할 수 있을만큼의 질량을 가져야 한다. 명왕성은 실제로 거의 구에 가깝습니다.

셋째, 행성의 태양 궤도를 깨끗이 할 수 있어야 한다. 즉, 질량 제약과 같은 개념으로 충분한 중력에 의해 그 행성의 태양 공전 궤도상 자신 외에 다른 천체를 밀어낼 만큼이 되어야 한다.

 

이 세번 째 조건에서 명왕성은 부합하지 않는다. 왜 이런 부가적인 정의가 생겼냐하면 플루토 근처에서 발견된 다른 천체들로 인해 명왕성을 행성에 범주에 넣으면, 수십, 수백(앞으로의 발견에 의해 수천, 수만이 될 지도)의 행성이 태양계에 추가되기 때문이다. 

그러면 이런 것이 문제가 될까요? 내(이 프로의 호스트인 브라이언 콕스) 생각엔 그렇지 않습니다. 

결국, 명왕성은 하나의 세계이고 우리는 그곳을 탐사해야 합니다.

 

 

2015년 7월 우리는 해냈습니다. 9년간의 잠에서 뉴 호라이즌은 깨어났습니다.

 

우리가 탐사한 이래 가장 멀리 있는 세계를 처음으로 보게 된 것입니다.

 

명왕성은 아름다웠습니다. 얼어붙은 특색없는 세상과는 거리가 멀었습니다. 역동적이며 살아있는 행성의 특징을 보여줬습니다.  

표면은 섭씨 영하 230로 춥습니다. 표면은 고체질소로 이루어져있습니다. 허블 망원경에서 검은 반점으로 보였던 부분들은 아주 다양한 지리학적 형태와 구조를 갖고 있음이 밝혀졌습니다. 

 

(이건 지구 사진임. 어디 아이슬란드 정도 되는 듯)

현재까지 가장 주목할만한 곳은 톰바 레지오(Tombaush Regio)라는 지역이며, 명왕성의 심장이라는 이름으로 불립니다. 

 

 이 지역의 서쪽 귓불처럼 생긴 지역을 스푸트니크 플라니시아(Sputnik Planitia)라고 합니다. 

 얼어붙은 질소, 메탄 그리고 일산화탄소의 거대한 평원은 수백만 평방 킬로미터나 펼쳐져 있습니다.

그리고 그 가장자리는 얼음으로 이루어진 높이 6킬로미터의 산맥이 가로막고 있습니다. 

이 지역에는 매우 이상한 점이 있습니다. 이 난장이 행성의 다른 부분과는 확연히 구별되는 점이죠.

스푸트니크 플라니시아의 매끄러운 지역을 제외한, 명왕성의 표면은 우리의 달처럼 수십억 년 동안 일어났던 충돌들로 인해 크레이터와 흉터들로 덮여 있습니다. 

스프트니크 플란시아에는 크레이터가 전혀 없습니다. 

뉴 호라이즌이 보내온 이미지에 의하면 이 지역은 오각형 혹은 육각형 구조의 네트워크로 이루어져 있습니다. 

질소가 얼어붙어 연결된 표면입니다. 이 모습으로부터 어떤 일이 일어났을까를 추정해봅니다. 

이런 종류의 형태는 자연에서 종종 발견됩니다. 태양의 표면, 액체가 가열될 때. 

이 형태는 대류(Convection)의 특징입니다. 가열에 의해 뜨거운 것은 떠오르고 차가운 부분은 가라앉는 대류현상이 일어날 때 이와 같은 형상이 만들어집니다. 

스푸트니크 플란시아 아래에서는 열원이 있어서 그 열원에 의한 대류로 이와 같이 지속적으로 표면이 재생성되는 것으로 보입니다.

가장 적합한 가정은 이 별의 깊은 곳에 방사성 물질이 있어서 그 방사능 붕괴로 인해 열이 발생한다는 이론입니다. 이 열에 의해 태양에너지가 없는 이 차가운 명왕성의 바다에 수십억 년 전부터 물을 존재하게 했을 것입니다.

그렇다면 왜 이 지역만 이런 형태를 보이는 것일까요?

아마도 오래전에 이 지역에 거대한 충돌이 있었고, 그 충돌로 거대한 대양의 밑바닥까지 패였고, 그 구덩이가 질소 얼음으로 서서히 채워졌다고 보여집니다. 

 

뉴 호라이즌의 명왕성의 근거리 접근은 고작 몇 시간 정도였습니다. 

그 시간동안 고작 하나의 반구 정도만을 관찰할 수 있었습니다. 그래서 다른 면(다른 반쪽의 구)은 여전히 미스테리입니다. 

 

명왕성은 마지막 비밀을 간직하고 있었습니다. 뉴 호라이즌이 보여준 마지막 명왕성 사진에서, 어둠속에서 빛나는 명왕성의 대기가 보여집니다.

가늘고 붉은 하늘이 숨겨진 바다위로 보여집니다. 지구에서 48억킬로미터 떨어진 곳에서.

 

 

-Fin-

 

 애널리스트가 쓴 근현대의 주요 경제적 사건에 대한 기록과 그 해석. 책의 목적은 주요 경제 이벤트에 대한 근본적이고 간략한 경제적 해석에 있는 것 같다. 내용이 깊진 않지만 핵심을 짚는다는 점에서 경제 인사이트를 키우는 데 도움이 된다.

 특히 외환위기 등 현대의 경제위기 상황에서 던지는 화두에 대해 핵심원인을 짚어나가는 부분은 많은 도움이 된다. 그리고 논의에 사용된 참고문헌들을 바로 그 챕터 말미에 소개하는데 이 도서들을 보면 경제적 지식을 높이는데 큰 도움이 될 것 같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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p48

 15세기에 유럽에서 산출된 금은 당시 수요에 비해 매우 부족했다. 일부 역사학자들의 추정에 따르면 1400년에 유럽 내부의 금 산출량은 4통을 넘지 않았다. 게다가 동방 무역으로 지속적으로 금이 유출되고 있기에, 이 정도 생산량으로는 경제가 제대로 돌아가기 어려웠다. 돈의 공급량이 부족하면 사람들은 상품과 서비스를 구입하는 데 쓰는 돈을 절약하려 노력하고, 그 결과 물가가 내려간다. 콜럼버스와 바스코 다 가마 등 수많은 모험가가 아프리카 희망봉을 돌아 아시아로 향하고, 인도를 찾아 대서양을 횡단했던 데에는 금을 비롯한 귀금속의 가격 상승이 그 배경으로 작용했던 셈이다.

 

p242

 특히 1979년 2월, 친미 성향의 팔레비 왕조가 무너지고 새롭게 들어선 이란의 이슬람 원리주의 정부가 반미 노선을 강화하면서 국제 유가는 폭등했고, 나아가 이라크의 후세인 정부가 1980년 9월 이란을 침공하면서, 제2차 석유파동이 일어났다. 1979년 1월까지만 해도 석유 가격은 배럴당 14.8달러 내외였지만, 1980년 4월 39.5달러까지 급등했다. 

 그런데 제2차 석유파동의 충격은 오래가지 않았다. 1983년 2월 석유 가격은 배럴당 29.0달러로 떨어졌고, 급기야 1986년 3월에는 12.6달러까지 폭락하고 말았다. 세계 2위와 4위의 매장량을 자랑하는 이란과 이라크의 석유 생산이 1988년까지 사실상 중단되었음에도 불구하고 왜 유가는 폭락했을까?

 가장 직접적인 이유는 미국의 금리, 특히 실질금리가 인상된 것이다. <도표 5-4>에 나타난 것처럼, 미국의 실질 정책금리가 1980년대 초반 8%포인트까지 상승하면서, 달러 자산을 보유할 실익이 확대되었다. 실질 정책금리란, 정책금리에서 소비자물가 상승률을 뺀 것인데 인플레를 감안하고도 수령할 수 있는 실질적인 은행 예금 이자율을 의미한다. 따라서 달러로 수출 대금을 받는 산유국 입장에서는 달러 가치가 상승하면 원유 가격의 인상을 위해 노력할 동기가 사라진다.

 나아가 달러 가치 상승에 대한 기대가 높아질 때, 상품을 비롯한 이른바 비非달러 자산에 대한 투자 매력이 약화되는 것은 당연한 일이다. 1971년 닉슨 쇼크에서 확인되듯, 금을 비롯한 전 세계 상품 가격이 폭등했던 가장 큰 이유는 기축통화로서 달러의 위치가 흔들린 데 있었다. 그러나 반대로 달러의 위상이 다시 예전처럼 굳건해지면, 원유나 금처럼 변동성이 큰 이른바 '위험자산'에 굳이 투자할 이유가 없어진다.

 그렇지만 이 대목에서 한 가지 의문이 제기된다. 1980년을 고비로 국제유가의 급등세가 진정된 것은 이해가 되지만, 실질금리가 하락하던 1983년부터 유가가 하락 흐름을 타게 된 이유는 무엇일까? 이를 이해하려면 상품시장의 특성을 파악할 필요가 있다.

 

p273

 이 대목에서 잠깐 '버블'에 대해 이야기하자면, 자산가격이 어떤 수준에 도달해야 버블인지 정확하게 판단하기 힘들다. 이때 활용하기 좋은 기준이 하나 있는데, 그것은 바로 내부자 입장에서의 판단이다. 내부자 입장에서 주식을 매수하기보다 매도할 유인이 훨씬 강해지는 때가 바로 '버블'이라는 것이다.

 예를 들어 1980년대 말 어느 기업가가 일본 주식시장에 상장을 계획하고 있다고 가정해보자. 그런데 주가수익비율(PER)이 4배에 불과하다면 주식시장에 공개하지 않으려 할 것이다. 주식시장에 상장하는 이유는 결국 자본을 조달하기 위함인데, 회사 한 주의 기대수익률(주당순이익/주가)은 25%인 반면, 당시 일본의 은행 금리는 2.5%에 불과하니 주식을 상징하는 것보다 은행에서 대출받는 게 낫기 때문이다. 이처럼 주식시장이 침체되어 상장 기업들의 PER이 낮을 때에는 기업의 증자나 상장이 크게 줄어든다. 

 반면 주가가 높아지면 이와 반대되는 현상이 나타난다. 예를 들어 1989년 일본처럼, 돈도 제대로 못 버는 별볼일없는 기업의 주식도 PER이 100배에 거래되고 채권 금리가 6%를 넘어선다고 생각해보자. 이 기업 주식의 기대수익률은 1%에 불과한데 채권 금리는 6%를 넘어서고 있다면, 최고경영자가 어떤 선택을 할지 자명하다. 부지런히 증자를 해서 조달한 돈을 채권에 투자하는 게 훨씬 남는 장사가 된다는 것을 누구나 알 것이다.

 지난 2000년 코스닥 버블 때, 많은 정보통신기업이 증자로 유입된 돈을 빌딩 매입에 투자했던 것은 매우 합리적인 행동이라고 볼 수 있다. 즉, 시장금리가 높은 수준까지 상승한 상황에서 주식의 PER이 급격히 상승하면 주식 공급은 무한히 증가하게 되고, 주식 공급이 증가하면 증가할수록, 주식시장은 점점 더 상승 탄력을 잃어버리게 되는 것이다.

 

p288. 자산가격 하락이 장기불황으로 이어진 이유는?

 

 1988년 버블이 붕괴되고 일본 중앙은행이 정책 금리만 공격적으로(200bp 이상) 내렸다면 디플레이션 악순환은 발생하지 않았을 것이다. 일본 정부가 추진했던 재정정책이 경기 하강을 억제하는 데 다소나마 도움을 주긴 했지만, 통화정책과 함께 진행되었다면 더 좋았을 것이다.

 

 예를 들어 지나친 저금리로 인플레가 발생하면 긴축으로 전환하여 해결할 수 있지만, 경기 부양이 너무 늦거나 규모가 약해 디플레이션에 진입하게 되면 경제를 다시 정상 수준으로 되돌릴 방법이 마땅찮다. 따라서 자산가격 버블이 붕괴될 때는 일단 시장 참가자들의 미래 경제에 대한 예상을 바꿔놓을 정도의 공격적인 경기부양이 필요하다.

 

 왜 디플레이션은 퇴치하기 힘들까? '통화정책이 무력화'되기 때문이라는 게 미 연준 이코노미스트들의 지적이다. 물가 상승률이 마이너스로 떨어진 상황에서는 금리를 아무리 낮춰봐야, 실질금리가 더 떨어지지 않는다. 그 단적인 예가 <도표 6-6>의 1994~1995년으로, 소비자물가 상승률이 마이너스로 떨어짐에 따라 일본 중앙은행이 정책금리를 제로 수준까지 인하한 효과가 나타나지 않는 것을 발견할 수 있다.

 

 물론 재정정책을 충분히 그리고 적극적으로 추진한다면 장기불황의 위험을 막을 수 있었을지도 모른다. 그런데 <도표 6-6>에서 1997년을 보면, 갑자기 일본 소비자물가 상승률이 마이너스에서 2%까지 뛰어오르는 것을 발견할 수 있다. 왜 이런 일이 벌어졌냐 하면, 당시 하시모토 정부가 재정적자 문제를 해결하기 위해 소비세를 기존 3%에서 5%로 인상했기 때무이다. 1937년 루스벨트 행정부가 재정 건전화를 위해 재정지출을 삭감한 후 심각한 불황을 겪었던 일을 떠올리게 하는, 이 어처구니 없는 정책 시행으로 일본 경제는 돌이키기 어려운 장기 불황의 악순환에 빠져들었다고 볼 수 있다.

 

p311. 토지개혁, 번영의 초석을 놓다!

 

 낮은 임금과 극단적으로 불평등한 토지 소유 분포, 그리고 저학력이라는 삼중고에 시달리던 우리나라는 어떻게 산업화를 달성할 수 있었을까?

 미 군정이 추진한 두 가지 핵심 정책, 강력한 통치기구 조직과 점진적인 토지개혁에 주목할 필요가 있다. 1945년 8월 말, 미군이 한반도 남쪽에 들어섰을 때, 이미 토지 소유 집중은 심각한 수준이었다. 일제 강점기 동안 일본에서 온 지주와 토착 대지주들이 대규모 토지를 소유한 반면, 토지를 잃은 농민들은 농촌을 떠나 산업 노동자로 전락했다. 문제는 일제 패망으로 원료 공급이 끊기며 제조업 생산이 중단됨에 따라, 도시의 산업 노동자들이 다시 농촌으로 복귀한 것이다. 이에 따라 대지주들은 전통적인 토지 집중적인 농업, 즉 소작 제도를 시행했고, 그로 인해 전체적으로 농업 생산량이 감소하고, 경제는 침체되었다.

 이러한 상황에서 모든 국민의 관심사는 토지 분배에 집중되었다. 미 군정은 이 부분에서 큰 공을 세웠다. 그들은 1946년 소작인이 토지 경작 대가로 지주에게 지불해야 할 소작료를 그해 생산량의 1/3 수준으로 낮추는 한편, 조선 총독부가 보유하고 있던 대규모 토지를 농민에게 팔아넘겼다. 특히 미 군정은 조선총독부뿐만 아니라 일본인 지주들이 보유하던 약 2,780제곱킬로미터의 토지를 인수했는데, 1948년 초에 이 토지를 농민에게 매각함으로써 59만 7,974가구, 즉 농업 인구의 24.1%에 해당하는 농민이 새롭게 토지를 소유하게 되었다.

 당시 미 군정이 불완전하나마 '토지개혁'을 실시했던 이유는 공산화의 위험을 퇴치하기 위함이었다. 당시 토지개혁을 주도했던 울프 라데진스키(Wolf Ladejinsky)는 다음과 같이 당시의 일을 회고한다.

 "나는 1921년 초에 러시아를 떠나기 전에 얻은 교훈 덕분에 이 일(=토지개혁)을 하게 되었습니다. 농민들에게 토지를 돌려줌으로써 단호하게 토지 문제를 해결했다면, 공산주의자들이 절대 권력을 잡지 못했을 것이라는 교훈 말입니다."

 

 1952년 아이젠하워가 대통령에 당선된 다음, 극단적인 반공주의자들이 세력을 얻으면서 울프 라데진스키를 비롯한 토지개혁론자들은 설 자리를 잃어버리게 되었지만, 우리나라는 운 좋게 한국전쟁 직전에 토지 개혁이 완료되어 공산화의 위험에서 벗어날 수 있었다. 참고로 1950년 3월 이승만 정부가 통과시킨 토지개혁법은 '소유주가 직접 경작하지 않는 모든 토지와 3만 제곱미터(약 9,180평)가 넘는 모든 토지'를 재분배 대상으로 규정했다. 이 법안에 따라 정부로부터 토지를 구입한 농민이 지불해야 할 금액은 해당 토지에서 산출된 연간 생산량의 150%로 결정되었다. 그리고 정부가 지주들로부터 토지를 이수하며서 지급한 대금의 상당 부분이 미국의 원조로 충당되었다.

 이 대목에서 잠깐, 토지개혁의 중요성을 강조하는 이유를 살펴보자.

 토지개혁이 가져온 첫 번째 변화는 바로 '경제 성장'이었다. 지주들은 '고리대금업'만으로도 충분히 소득을 얻고 있었기에, 기술 투자에 열의가 없었다. 반면 소작농들은 관개시설에 투자할 여력이 없거니와, 소작 '계약 연장'에 대한 불안감으로 비료를 구입할 수도 없는 상황이었다. 따라서 토지개혁 이전에 우리나라는 인구의 90%가 농업에 종사하는 전형적인 '농업국가'였음에도 식량 자급조차 이뤄지지 못했다. 식량 자급이 이뤄지지 못하니, 미국의 원조가 없을 때에는 대규모 무역수지 적자를 기록할 수밖에 없는 상황이었다. 그러다 토지개혁이 이뤄지며 농업생산성이 극적으로 향상된 것이다.

 <도표 7-2>는 1954년 이후의 농림어업 성장률과 경제성장률이 관계를 보여주는데, 1954~1963년 연평균 농림어업 성장률이 5.1%에 이르러 같은 기간 경제성장률(6.0%)에 근접한 것을 발견할 수 있다. 그리고 1953년 전체 국내총생산에서 농림어업이 차지하는 비중이 48%였다는 점을 감안할 때, 경제성장의 상당 부분이 농업 생산성의 향상에서 비롯되었음을 알 수 있다. 1963년부터 우리나라 경제가 수출 중심의 공업화에 힘입어 고성장한 것은 분명한 사실이지만, 농업 주도의 경제 성장이 '토대'가 되었음을 잊어서는 안 될 것이다.

 토지개혁 이후 농업생산성이 극적으로 개선된 이유는 '동기 유발'에 있다. 아무리 농사를 지어봐야 대부분의 수확물을 지주에게 빼앗기는 상황에서 수확량을 늘리려는 동기가 생기기는 어렵다. 그런데 당시 5인 혹은 6인 이상으로 이뤄진 가족들은 십수 마지기의 토지를 일구는 데 최적화되어 있었다. 노동력이 넘쳐 흐르는 개발 초기 단계의 개발도상국에게 중요한 것은 '효율'이 아니다. 어떻게든 남아도는 노동력을 활용해 최대한 생산을 짜내는 것이다. 1인당 수확량이 형편없다 하더라도, 노동력을 최대한 활용하는 게 더 낫다는 말이다.

 

 물론 우리나라만 토지개혁의 성취를 이룬 것은 아니다. 타이완도 1949년 토지개혁 이후 10년 만에 식량 생산량이 75%나 늘어났다. 그리고 이와 같은 생산성 향상은 곧 농가 소득 증가로 연결되었고, 이는 경제 전체에 무역 불균형을 시정하는 데 큰 기여를 했다. 어쨋든 우리나라는 소득 증가에 힘입어 자녀를 교육시킬 여유를 가지게 되어, 1944년 말 조선의 15세 이상 인구 중 무학력자 비중이 남자의 경우 80%, 여자의 경우 94%였던 것이 1955년에는 남성 50%, 여성 80%로 줄어들었다.

 이후 선순환이 이어졌다. 농업 생산성이 높아짐에 따라, 농촌의 여유 노동력이 도시로 이동할 수 있게 되었고, 기업들은 이들을 고용해 내수시장에서 물건을 팔 기회를 잡을 수 있게 되었다. 그러나 본격적인 경제성장을 위해서는 한 가지 조건이 더 만족되어야 했다. 그것은 제조업의 적극적인 육성이었다.

 

p321

 이상의 사례에서 보듯, 공장을 차리더라도 언제 이익을 낼 수 있을지 확신할 수 없었다. 이러다 보니 군사정변으로 권력을 잡은 박정희 정부가 제조업을 육성하겠다고 선언했지만, 제조업을 하겠다고 나서는 기업가들은 많지 않았다. 이때 우리나라 정부는 아주 효과적인 전략, 즉 '채찍과 당근'을 함께 사용했다. 먼저, 기업가들이 달려들지 않을 수 없는 매혹적인 당근으로 '저금리'를 제시했다. <도표 7-3>은 1960년대 우리 나라의 금리 수준을 보여주는데, 사채금리가 높을 때는 60%, 낮아도 40% 수준이었음을 알 수 있다. 농촌에서 잉여생산물이 생겼다고 해서, 이게 다 저축으로 연결되지는 않았기에 당시 우리나라 경제는 항상 자금 부족에 시달렸다. 이런 상황에서 은행이 수출 기업들에게 제공하는 대출금리를 1966년부터 1972년까지 6%로, 이후 인상되었어도 1976년까지 8% 수준을 유지한 것이다.

 

 이는 수출 실적을 내기만 하면, 시장금리보다 50% 포인트 이상 낮은 저금리로 자금을 장기가 대출해준다는 약속이나 다름없었다. 물론 겉으로 수출용 공장을 만들겠다고 약속하고, 저금리를 이용해 지대를 추구하는 기업인들도 있었다. 실제 1972년 8.3조치(경제 내에 존재하는 사채에 대한 원금 및 이자에 대한 지급을 동결하는 긴급재정명령) 때, 사채 전주의 30% 이상이 기업의 주주나 중역 등인 것으로 나타났다. 수출 기업이라면 은행에서 대출을 받아 이를 다시 다른 기업에 대출해주어 엄청난 차익을 거두는 일이 비일비재했던 것이다.

 그러나 당시 우리 정부는 이 기업이 수출만 제대로 한다면 문제 삼지 않았다. 반면 이들 기업이 수출 실적을 내지 못한다 싶을 때는 강력한 철퇴를 가했다. 이 대목에서 '철퇴'라는 표현을 사용한 건 공장 건설 이후 수출 실적이 나오지 않고 원하는 기준에 미달한다고 판단될 때, 성공적인 기업에 강제로 합병시키거나 국영 금융시스템을 통해 자금을 회수하는 것은 물론 심지어 파산이라는 궁극적인 제재를 가했기 때문이다. 가장 대표적인 조치가 1970년대 후반부터 시작된 '중화학공업 합리화' 조치다. 물론 이런 일은 우리 정부만 한 것은 아니다. 일본은 일찍이 1930년대 독일의 관행을 연구한 후 합병을 통해 여러  제조업 부문을 '합리화'했으며, 2차 대전 이후에는 이를 더욱 가속화했다.

 박정희 정부가 야심차게 추진했던 '수출 주도의 경제성장' 전략이 성공할 수 있었던 또 다른 요인은 운에 있다. 1960년대부터 시작된 베트남 전쟁과 물류혁명이 우리나라 등 동아시아 공업국에게 거대한 시장을 열어주었기 때문이다.

 

p342 

 외환위기 이후 기업들의 재무 상태가 건전해지고, 경제 전체의 이자율이 낮아지는 등 긍정적인 면이 크다는 이야기에 반감을 가지는 독자들이 적지 않을 것이다. 1997년 외환위기 이전에 비해 이후 우리나라 내수경기는 제대로 된 호황을 누린 적이 없기 때문이다.

 왜 경제가 성장하고 기업들의 이익이 개선되었음에도 내수경기는 좋아지지 않았을까? 그 이유는 바로 대규모 경상수지 흑자에 있다. 우리나라 경상수지 흐름을 보여주는 <도표 7-7>을 보면, 1997년 외환위기 이후 단 한 번도 경상수지가 적자를 기록한 적이 없을 뿐만 아니라 2010년 이후에는 국내총생산(GDP) 대비 거의 4~8%의 흑자가 이어지고 있음을 확인할 수 있다. 문제는 이렇듯 경상수지 흑자가 발생할 때, 내수경기가 악화되는 경우가 많다는 데 있다.

 이 문제를 이해하기 위해서는 국내총생산의 구성에 대해 알 필요가 있다.

 

GDP = 소비 + 투자 + 수출 - 수입 (1)

GDP - 소비 = 투자 + 수출 - 수입 (2), 여기서 GDP - 소비 = 저축, 우변의 수출 - 수입 = 경상수지 이므로

저축 = 투자 + 경상수지 (3)

저축 - 투자 = 경상수지 (4)

즉, 대규모 경상수지가 발생하고 있다는 뜻은 저축보다 투자가 적다는 것을 의미한다. 이런 현상이 나타난 이유는 외환위기 이후 가계와 기업 등 경제 주체들이 미래에 대해 불안감을 가져서이다. 한보, 기아, 한양 등 위세를 떨치던 대기업마저 속수무책으로 무너지고, 수많은 실업자가 양산되는 것을 본 '트라우마' 때문에 소비와 투자를 줄인 결과, 대규모 경상수지 흑자가 발생한 것이다.

 하지만 문제는 나의 소비는 다른 사람의 '매출'이라는 점이다. 결국 만성적인 경상수지 흑자가 발생한다는 것은 내수 비중이 높은 기업의 영업 환경이 악화되는 것을 의미하며, 이는 기업의 투자와 고용 위축으로 이어지게 된다. 따라서 최근 겪었던 고용 부진 사태의 원인은, 1997년 외환위기 이후 경제 주체의 적극성이 약화된 탓이라고 볼 수있다.

 그렇다면 이 문제를 어떻게 해결할 수 있을까? 사람들의 심리를 바꾸는 것은 매우 어렵고, 시간도 많이 걸리는 일이기에 확실한 처방을 제시하기는 힘들다. 다만 정부의 재정지출 확대 정책이 대안이 될 수 있을 것이다. 2018년 기준 우리 정부의 GDP 대비 재정수지는 1%대 중반의 흑자를 기록한 것으로 추정되며, GDP 대비 정부 부채도 12.2%에 불과하다. 이렇듯 건전한 재정을 활용해서 정부가 기업들의 투자를 촉진할 다양한 인센티브를 제공하고, 공공부문의 일자리를 만드는 한편 경제 전체의 생산성 향상을 유발할 것으로 기대되는 사회간접자본에 적극적으로 투자할 필요가 있다. 물론 1997년 외환위기의 트라우마 때문에 건전 재정에 대한 집착이 존재하는 것 또한 사실이다. 그러나 GDP 대비 경상수지 흑자 규모가 나날이 늘어나는 등 내수경기의 부진이 장기화되는 것을 방치하면 장기적으로 세수의 기반이 더 축소될 수 있다는 것도 고려할 필요가 있을 것으로 판단된다.

 

 데이터 분석에 관한 에피소드 집. 꽤 재미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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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p39

 사람들은 자신이 적극적으로 선택한 것과 선택하지 않은 것에서 발생하는 결과에 대해 상이한 책임감을 느끼기 때문이라고 합니다. 즉, 부모는 백식을 접종하지 않았을 때 아이가 병에 걸려 사망하게 될 경우 느끼는 책임감보다, 백신에 접종했는데 아이가 부작용으로 사망하게 되었을 경우 느끼는 책임감을 훨씬 더 크게 느낀다는 것이죠. 그래서 백신 접종을 하는 것이 더 바람직함에도 불구하고 이를 피하는 경향이 있고 이것을 '부작위 편향(omission bias)' 또는 '무편향 편향'이라고 명명하였습니다.

 최근 기업들 사이에선 이러한 부작위 편향에 대한 경계가 커지고 있는데, 아마존 최고경영자 제프 베조스의 다음 경구가 이를 잘 웅변하고 있습니다. "사람들은 행동의 오류에 지나치게 집착하고, 기업은 실패의 비용을 지나치게 강조한다. 하지만 실패는 비싼게 아니다. 알아차리기 힘들지만 기업에 있어서 가장 큰 비용은 무행동의 오류다."

 

p178

 시카고 대학과 싱가포르 국립대학의 경제학자들은 이와 관련해서 2015년 <젠더 정체성과 가족 내 상대 소득>이라는 흥미로운 분석 결과를 발표한 바 있습니다. 미국 부부를 대상으로 배우자 간 상대 소득을 조사했더니, 예상대로 남편의 소득이 높은 경우가 더 많았습니다. 하지만 그보다 더 놀라운 사실은 남편이 아내보다 약간 더 버는 경우는 매우 많았으나, 반대로 아내가 남편보다 약간 더 버는 경우는 이례적으로 적었다는 점입니다.

 연구팀은 교육,, 직업 등을 고려할 때 아내가 의도적으로 남편보다 적게 벌려는 행동을 한다는 사실을 실증했습니다. 아내는 남편보다 더 많이 벌 기회가 있더라도 아예 취업을 하지 않거나 노동시간을 줄여 대응하는 경우가 꽤 있었습니다. 남편보다 아내가 더 높은 급여를 받을 수 있다면 아내의 노동시간을 늘리고 남편은 노동시간을 줄여 가사에 더 많은 시간을 쓰는 것이 당연히 '합리적' 행동입니다. 하지만 '남편이 아내보다 더 벌어야 한다'는 고정관념이 남편과 아내 모두에게 자리 잡고 있는 탓에 아내가 소득이 높을 경우 남편은 불편해하고 아내는 미안함을 느껴 오히려 아내가 가사에 쓰는 시간이 더 늘어날 수도 있다고 합니다.

 또한 시카고대학의 경제학자 리어나도 버스틴(Leonardo Bursztyn) 교수가 프린스턴대학과 하버드대학의 경제학자들과 함께 경영대학원 MBA 과정을 다니는 여학생들을 상대로 수행한 연구도 흥미롭습니다. 이들이 2017년 발표한 <아내처럼 연기하기 : 결혼시장 인센티브와 노동시장 투자>라는 논문에 의하면, 미혼 여학생들은 시험이나 숙제성적에 있어서는 기혼 여학생과 아무런 차이가 없었으나 사례연구 경쟁 등 공개된 참여형 과제에선 기혼 여학생에 비해 성적이 낮았다고 합니다. 미혼 여학생들의 경우, 능력과 야망이 시험이나 숙제로는 주변에 잘 드러나지 않지만 공개 참여형 과제에서는 모두에게 드러나게 되므로 동료 남학생(연인 또는 배우자후보)에게 나쁜 신호를 줄 것을 우려했기 때문이라고 합니다. 기혼 여학생들은 이런 시그널 효과를 고려할 필요가 없었고, 남학생들은 시험이든 공개 참여형 과제든 모두 미혼과 기혼 간의 차이를 보이지 않았다고 합니다.

 더 나아가 연구자들은 학생들을 대상으로 학교 경력개발센터에 본인의 희망 연봉, 노동시간, 포부 등을 등록하게 하면서 절반의 학생들에게는 그들이 작성한 내용을 경력개발센터 가이드만 볼 것이라고 알려줬고, 다른 절반의 학생들에게는 가이드뿐 아니라 다른 학생들도 회람할 것이라고 했는데, 결과는 놀라웠습니다. 남학생 및 기혼 여학생들의 경우 회람 공개를 기준으로 나눈 두 그룹이 전혀 차이를 보이지 않았습니다. 그런데 미혼 여학생들의 경우, 가이드만 회람하는 그룹에 비해 다른 학생들도 함께 회람하는 그룹은 희망 연봉을 평균 1만 8,000달러 낮추었고 희망 주당 노동시간도 네 시간 줄였습니다. 이런 사실을 놓고 보면 유리천장은 우리의 일상 의식 속에도 뿌리 깊게 존재하고 있는 것 같습니다. 유리천장이란 법과 제도만으로 바꿀 수는 없는 것이고, 남성과 여성 모두가 일상에서 의식적으로 노력해야만 극복할 수 있다고 생각합니다.

 

p218. 팩트체크가 오히려 가짜뉴스를 부각시킨다?

 

 미국 마트머스대학의 브랜던 나이핸(Brendan Nyhan)과 영국 엑서터대학의 제이슨 라이플러(Jason Reifler) 교수는 팩트체크가 별 효과과 없고 심지어 역효과가 날 수도 있다는 연구 결과를 2010년 <사실 교정이 실패하는 경우>라는 논문으로 발표했습니다. 두 사람은 실험에 참가한 사람들에게 이라크의 대량살상무기 위험을 막기 위해 전쟁에 나서야 한다는 조지 W. 부시 대통령의 메시지(가짜뉴스)를 보여준 뒤, 이 중 한 그룹의 사람들에게는 당시 이라크에 대량살상무기가 존재하지 않았다는 미국 중앙정보국의 보고서 내용을 알려주지 않았습니다. 효과는 사람들의 정치적 성향에 따라 달랐습니다. 애초 이라크전쟁에 더 회의적이었던 진보 성향 사람들의 경우, 예상대로 팩트체크를 통해 가짜뉴스를 신뢰하는 비율이 낮아졌지만(18→3퍼센트), 보수 성향 사람들한테서는 반대로 가짜뉴스를 신뢰하는 비율이 오히려 높아졌습니다(32→64퍼센트). 이외에 '세율 인하가 세수를 더 늘렸다는 주장(가짜뉴스)'과 오히려 '세수를 대폭 줄였다는 사실(팩트체크)'를 놓고서도 유사한 현상이 발견됐습니다.

 

p221. 팩트체크보다 중요한 건 언론의 신뢰 회복이다.

 

 너무 당연한 얘기겠지만 가짜뉴스 확산의 가장 큰 자양분은 기존 언론에 대한 불신입니다. 장기간에 걸친 공영방송의 공정성 하락, 끊이지 않는 '기레기 논쟁'등을 고려할 때 우리는 가짜뉴스 확산에 대해 좀 더 경각심을 가져야 할 것 같습니다. 국제 비교를 조금 살펴보겠습니다. 영국 옥스퍼드대학 부설 로이터저널리즘 연구소의 '뉴스 신뢰도 국제비교'에 의하면, 한국은 조사 대상 28개국 중 그리스와 더불어 최하위였고, 글로벌 여론조사 기관인 퓨리서치센터의 미디어 만족도 조사에서도 37개 대상국 중 36위였습니다. 이뿐 아닙니다. [표 21-4]에서 보듯이 전문 언론기관(기존 언론사, 온라인 언론사 등) 신뢰도와, 내용의 질을 확인하기 어려운 플랫폼(SNS 및 각종 검색 서비스 등) 신뢰도 사이의 격차도 국제적인 기준에서 보면 한국이 낮은 편입니다.

 

p224. 국가의 정책은 부자의 선호도에 달려 있다

 

 민주주의의 가장 중요한 구성 요소는 '1인 1표'라고 하는 보통 · 평등선거입니다. 민주주의 국가에서 국민은 신분, 성별, 재산 등과 무관하게 누구나 한 표를 행사하여 자신을 대변할 정치인 선출에 참여합니다. 만약 불평등이 심해진다면 경제적으로 곤궁하게 된 다수의 유권자들은 불평등을 완화할 정책을 내놓는 정치인을 선출하기 때문에 자본주의의 불평등은 끝없이 진행되는 것이 아니라 적절한 선에서 규율되리라는 믿음이 있었습니다.

 하지만 점차 민주주의의 1인 1표 원칙에도 불구하고, 실제로 모든 사람의 이해가 균일하게 반영되지 않을 수 있다는 의심이 커지기 시작했습니다. 미국의 저명한 헌법학자 로버트 달(Robert A. Dahl)은 1961년 그의 저서 《누가 지배하는가(Who Governs?)》에서 "모든 성인이 투표할 수 있는 나라, 하지만 지식, 재산, 사회적 신분, 관료와의 관계 등 모든 자원이 불균등하게 분배되어 있는 나라, 과연 이런 나라는 누가 지배하는 것일까?"라는 질문을 던진 바 있습니다.

 이 분야 연구에서 최근 화제가 된 인물은 미국 프린스턴대하긔 마틴 길렌스(Martin Gilens)와 노스웨스턴대학의 벤저민 페이지(Benjamin I. Page) 교수였습니다. 이들은 1981~2002년 미국에서 시도된 중요 정책 1,779건 중 현실에서 구현된 것과 그렇지 못한 것을 구분하여 어떤 요인이 정책의 실현에 영향을 미쳤는지를 분석했습니다.

 

 [표 22-1 Ⓐ]를 보면 일반인(중위소득 집단)들의 정책에 대한 지지 여부는 정책의 실현에 아무런 영향을 미치지 못하였습니다. 일반인들이 거의 지지하지 않는 정책이나, 압도적으로 지지하는 정책이나 모두 30퍼센트 정도 실현되었습니다. 반면 부유층(소득 상위 10퍼센트 집단)의 지지가 높은 정책일수록 실현되는 정도가 뚜렷이 높아졌습니다. 이들이 거의 지지하지 않은 정책의 실현 비율은 5퍼센트 정도에 지나지 않았지만, 압도적으로 지지하는 정책은 실현 비율이 60퍼센트 이상으로 치솟았습니다. 이를 통해 미국의 정책은 일반인들이 아니라 부유한 사람들의 선호에 반응하여 결정된다는 것을 확인할 수 있습니다. 

 길렌스와 페이지 교수는 미국의 중요한 이익단체들이 각 정책에 대해 어떤 태도를 취했는지도 조사했습니다. [표 22-1 Ⓑ]를 보면 지지하는 이익단체가 많고 반대하는 이익단체가 적을수록 정책의 실현 가능성이 높아진다는 것을 알 수 있습니다. 더 나아가 재계의 이익단체(예를 들면 미국총기협회)와 대중 이익단체(노조 등)을 구분하여 살펴보았는데, 전자가 압도적으로 영향력이 컸습니다. 이를 통해 미국의 정책에는 이익단체의 영향이 작동하며 그 핵심에 재계 이익단체가 있다는 것도 확인되었습니다.

 

p228

 

 [표22-3]의 기부자 항목을 보시면 상원의원의 정책 성향과 해당 상원의원에게 정치자금을 제공한 기부자의 정책 성향 사이의 거리가 0에 가깝다는 것을 볼 수 있습니다. 이것은 의원과 기부자의 정책에 대한 성향이 거의 동일하다는 것, 즉 의원이 기부자의 정책 성향에 따라 의안 투표를 한다는 것을 보여줍니다. 의원들은 심지어 자신의 지역구에서 실제로 자신에게 투표한 유권자의 정책 성향보다도 기부자의 정책 성향에 더 민감하게 반응했습니다. 그리고 해당 지역의 전체 투표자(즉 다른 후보를 찍은 경우를 포함)의 정책 성향에 대해서는 반영도가 매우 낮아서(즉 거리가 멀어서), 전체 국민의 정책 성향과의 거리와 거의 차이가 없을 정도였습니다.

 이처럼 여러 정치학자들의 분석을 통해서 우리는 미국에서 부유층의 돈이 정치에 더 많이 흘러들어 가고 있고, 이를 통해 의원들이 부자들의 의견을 더 많이 따르게 되며, 그 결과 최종적으로 부유층이 원하는 대로 정책이 결정되는 경향이 매우 크다는 것을 확인할 수 있었습니다. 과연 이러한 현상이 미국만의 일일까요? 유럽의 경우 미국보다는 상대적으로 돈이 정치에 끼치는 영향이 적다고 알려졌습니다. 하지만 미국 텍사스대학의 데릭 엡(Derek A. Epp)과 포르투갈 리스본대학의 인히쿠 보르게투(Enrico Borgehtto) 교수가 진행하고 있는 <유럽의 불평등과 임법 의제>라는 연구에 의하면 유럽에서 불평등이 심화될수록 불평등에 직접적인 영향을 끼치는 경제적 이슈들에 대한 논의는 오히려 줄어든다고 합니다. 이들은 이것이 부유층의 정치적 영향 때문일 것으로 추측하고 있습니다.

 

 부자들의 정치 기부금을 제한하라

 

 한국에서는 금권정치에 대한 본격적인 연구는 거의 찾아볼 수가 없는데, 정치자금이 과거에 주로 불법적인 방식으로 모집되었기에 연구가 어려운 것이 아닐까 생각합니다. 재벌들이 저마다 수백억씩 현금을 내서 한나라당 이회창 후보 캠프에 전달한 초유의 '차떼기' 사건이 있었던 게 2002년이었고, 금액은 크게 차이가 났지만 2002년 대선에서 노무현 캠프도 불법 정치자금에서 자유롭지 못했습니다. 수십 년 동안 한국의 정치자금은 음지에서 움직였습니다.

 그 후 2003년 여야 합의로 대대적인 정치자금법 개정이 이루어졌습니다. 이것을 계기로 정치자금 모금의 한도가 대폭 축소되었고, 법인의 정치자금 기부가 원천적으로 봉쇄되었습니다. 법인의 정치자금 기부를 금지한 나라는 전 세계에서 24퍼센트에 불과합니다. 미국의 경우 공식 통계상으로는 금지된 것으로 분류되지만, 특정 후보를 지지하기 위한 민간단체인 슈퍼정치위원회(super political action committee)등을 통해 우회적으로 얼마든지 법인 자금이 정치권에 흘러들어 갈 수 있습니다. 이런 것을 보면 우리의 정치자금법은 대체로 양질이라고 생각합니다. 물론 불법적인 경로로 전달되는 정치자금에 대해서는 민감하게 감시해야 할 것입니다.

 2018년 노회찬 의원이 안타깝게 세상을 뜬 뒤 일부에서 진보 진영에 불리한 정치자금법을 개혁하자는 얘기가 커지고 있습니다. 저 역시 현재 법이 원외의 정치 신인에게는 일방적으로 불리하고, 국고보조금 배분 시 비교섭 단체를 소홀히 다루기 때문에 손을 볼 여지가 있다고 생각합니다. 다만 혹시라도 정치자금법 개혁을 빌미로 정치자금 총액 한도가 대폭 늘어나거나, 부유층과 기업이 정치 기부금으로 영향력을 행사하지 않도록 해야 할 것입니다. 그것은 재산과 소득의 기울어진 운동장이 정치에 그대로 반영되는 일이고, 아마도 고 노회찬 의원께서 가장 바라지 않는 일일 것입니다.

 

책 서문에서도 밝혔지만, 친일(친일이라기보다 일본 극우파의 논리를 그대로 베껴다 쓴) 서적인 반일종족주의의 허구적 주장을 논박하기 위해 호사카 유지 교수가 쓴 책.

이런 책을 써주신 자체가 고맙기도 하고, 한국인으로서 부끄럽기도 하다. 호사카 유지 교수의 전작인, <아베, 그는 왜 한국을 무너뜨리려 하는가>와 <호사카 유지의 일본 뒤집기>, <대한민국 독도>의 3권의 핵심적인 내용을 요약 집대성 했다고 볼 수도 있다.

강제징용, 위안부, 독도 문제에 대해 일본 극우의 허구적 논리를 논박한다는 부분에서 그 가치가 높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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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

『반일 종족주의』라는 책의 주장 중 핵심 부분은 일본 우파의 주장을 그대로 옮겨놓은 것이라고 해도 과언이 아니다. 그렇다면 우선 앞에서 쓴 세 가지 문제(위안부, 강제징용, 독도)에 관해 일본 우파가 주장하는 논리가 언제 어떤 식으로 만들어졌는지를 알아볼 필요가 있다.

(아래 부분은 호카가 유지 교수의 전작들인 『호사카 유지의 일본 뒤집기』, 『아베, 그는 왜 한국을 무너뜨리려 하는가』에도나오는내용들이다)

 그 시작은 1993년 8월 자민당의 미야자와 정권의 관방장관 고노 요헤이가 '고노 담화'를 발표한 직후였다. '고노 담화'는 '위안부'가 일본군에 의해 강제적으로 동원되었다는 사실을 인정했다. 그리고 일본군 '위안부' 피해자들에게 사과와 반성의 마음도 표했다.

 그러자 자민당 내 극우 세력이 반발하고 나섰다. 그들은 '위안부'가 자발적으로 매춘을 한 여성에 불과하다며, 일본군에 의한 강제연행이나 강제 동원은 없었다고 주장했다. 나아가 '고노 담화' 폐기를 목표로 본격적인 활동을 하기 시작했다.

 그 결과 자민당 내에 '역사검토위원회'가 결성되었고, 우파 논객들을 강사로 초빙해 모임을 지속해서 가졌다. 그러면서 자민당 내에 극우 세력이 대두하기 시작했다.

 그로부터 2년이 지난 1995년 8월15일, 일본 정부는 '종전 50주년'을 맞이해 '무라야마 담화'를 발표했다. '무라야마 담화'는 일본의 침략 전쟁과 과거 식민지 지배에 대해 당시 무라야마 도미이치 총리가 세계 앞에 사과하는 내용을 담고 있었다. 그런데 이에 대해서도 자민당 내 극우 세력이 강하게 반발했다.

 일본 우파의 최종적인 목표는 '고노 담화'와 '무라야마 담화'를 부정하는 데 있었다. 그 목표를 달성하기 위해 그들은 후지오카 노부카쓰 교수 등이 내세운 '자유주의 사관'을 도입했다.

 '자유주의 사관' 학설이란 일본이 침략 전쟁을 일으킨 것이 아니라, 아시아를 백인 지배에서 해방시킨 '해방 전쟁'을 수행한 것이라고 주장한다. 또한 난징 대학살이나 '위안부' 강제연행을 부정하며, 일본이 아시아 국가들을 식민지배하면서 근대화시켰다고 강변한다. 그뿐만 아니라 일본의 과거를 사죄하는 태도를 '자학 사관'적 태도라고 매도하면서, 일본의 사과 외교는 일본의 진보 세력에 의해 만들어진 정치적 행위라고 주장한다.

 1993년 '고노 담화'를 발표한 이후 자민당은 호소카와 내각에 정권을 넘겨주고 말았다. 창당 이래 무려 38년 동안 여당의 지위를 유지했던 자민당이 야당으로 전락한 것이다. 이와 같은 현상이 자민당 내 우파의 위기감을 자극해 우파의 논리 구축을 촉진시킨 결과 '자유주의 사관'을 도입하게 되었다.

 이는 1997년 '새역사교과서를 만드는 모임'과 극우 단체 '일본회의' 결성으로 이어졌고, 일본 내에서 역사 왜곡을 심화시키는 주체적 역할을 해나갔다. 그들은 또한 틈만 나면 '좌경화된 일본인의 의식을 바꾸어 놓아야 한다'고 목소리를 높였다.

 그런데 1998년 한국에서 김대중 정권이 성립된 이후, 한국 내에서도 일본과 비슷한 현상이 일어났다. 바로 진보 세력에 대항하는 '뉴라이드'의 등장이다. 한국의 '뉴라이트'는 2000년경에 등장했는데, 일본과의 유사점은 한국 내 보수 우욱이 1998년 정권을 상실한 것을 계기로, 정권 재창출을 위해 보수 우익의 논리를 추구한다는 데 있다.

 2005년 11월 8일에 뉴라이트 전국연합이 발족되었다. 이때 주최 측은 "역사에 대하 보복 정치로 대한민국의 가능성과 장래성이 소진되는 모습을 더 이상 좌시할 수 없다. 대한민국은 새로운 비전으로 무장하고 이를 실천시킬 수 있는 선진화 세력이 주도해야 한다. 건전한 우파의 가치를 일상적이고 전국적으로 국민에게 확산시켜야 한다"라고 천명했다.

 

 이어서 2006년 안병직 서울대 명예교수가 뉴라이트재단을 창립해 초대이사장으로 취임했다. 이런 일련의 움직임은 뉴라이트의 가치관이 한국 진보 세력의 역사관에 대항하기 위해 만들어진 것이고, 결국은 보수 정권의 재창출을 목표로 했음을 보여준다.

『반일 종족주의』의 대표 저자 이영훈 낙성대경제연구소 이사장은 안병직 명예교수 등과 함께 조선시대부터 현대에 이르는 한국 경제사를 연구해왔다고 한다. 일제강점기 조선 경제를 연구한 것으로 알려진 그는 소위 '식민지 근대화론자'인 셈이다. 특히 그는 "일제강점기 한국이 땅과 식량을 수탈당했다는 한국사 교과서의 저술은 왜곡된 것"이라고 주장하며, "한국인들이 식민지 시대를 아는 집단적 기억은 상당 부분 만들어진 것이고 교육받은 것"이라고 주장해왔다.

 본서에서는 그들의 정치적 색깔을 문제시하는 것이 아니라, 그들의 논리와 주장을 문제로 삼았다. 본서는 특히 강제징용 문제, 일본군 '위안부' 문제, 독도 문제 등에 관한 그들의 논리가 매우 잘못되었음을 입증해 나간다.

 

(5%)

 필자가 분석한 결과, 특히 이영훈과 이우연 낙성대경제연구소 연구원의 글에는 큰 결함과 왜곡과 은폐 등이 다수 발견되었다. '노예근성'으로 가득 찬 잘못된 주장을 대중을 향해 펼치는 것은 정말 위험하다.

 성병을 앓고 있는 환자가 자신이 성병 보균자라는 사실을 모른 채 성관계를 하면 그 피해는 시간이 흐를수록 점점 확산되어 많은 피해자를 양산하게 된다. 하지만 스스로 병을 인지하지 못한 상태에서 벌어진 일이기 때문에 비난할 명문이 크게 약화된다.

 그런데 자신이 성병 보균자라는 사실을 알고 있으면서도 그 사실을 숨긴 채 불특정 다수와 성관계를 가졌다면 상황은 정반대가 된다. 어떤 이유로도 용서될 수 없는 명백한 범죄일 뿐만 아니라, 재론의 여지 없는 '악마' 그 자체라고 할 수 있기 때문이다. 사람들이 생각하는 이영훈이나 이우연은 과연 어느 부류에 속해 있는지 자뭇 궁금해진다.

 

 

(28%)

 먼저 (1), 즉 국제법이나 국제관계에서 식민지배 피해에 대한 배상 같은 건 인정하지 않는다는 주장인데, 이는 가해자인 제국주의 국가들의 논리일 뿐이다. 그리고 이번 대법원 판결은 개인이 국가에 대해 제기한 소송에 대한 판결이 아닌, 개인이 기업에 제기한 소송이므로 기업의 범죄 행위가 인정되면 기업이 개인에게 배상해야 한다는 것은 당연하다.

 실제로 2012년 5월 당시 신 일본제철(현 일본제철)이 패소하면서 4명의 한국인 강제징용 피해자(원고)에게 1억 원씩의 위자료를 지급하라고 한국 대법원이 선고를 내렸을 때, 기업 측은 처음에 그렇게 깨끗이 처리하고 싶다고 밝히기도 했다. 한국 대법원 판결대로 하겠다는 의사 표현을 한 것이다. 하지만 얼마 후 일본 정부가 끼어들어 방해하면서 개인 대 기업의 재판을 마치 나라 대 나라의 재판인 것처럼 왜곡했다. 그러므로 본래의 입장, 즉 개인 대 개입의 입장에서 생각하면 일본 기업은 당연히 한국인 피해자 개인에게 배상해야 마땅하다.

 

 다음은 (2)에서 말한 샌프란시스토 조약은 일본과 연합국이 맺은 조약일 뿐, 한국은 조약의 당사자가 아니다. 그러므로 샌프란시스코 조약의 조문은 기본적으로 한국을 구속하지 못한다. 그리고 샌프란시스코 조약상 한국이 일본에서 분리된 지역으로 규정되었으니 한국이 일본에 배상을 청구할 수 없다는 주장은 참으로 이해하기 어려운 논리다.

 샌프란시스코 조약 4조는 일본국 및 그 국민에 대한 피해국 당국 및 그 주민의 청구권 처리는 일본과 피해국 당국 사이에서 특별히 결정하는 주제로 한다고 밝혔으므로, 일본은 한국의 청구권 문제를 특별히 결정해야 했다. 일본이 각 나라와 개별적으로 협상해야 한다고 연합국과 일본이 합의한 이와 같은 샌프란시스코 조약의 조문으로 한국은 일본에 보상이나 배상을 요구할 수 있다. 한국이 일본으로부터 분리된 지역이므로 배상을 요구할 수 없다는 주익종의 논리가 어디서 나오게 되었는지 이해할 수가 없다.

 

 그리고 (3)의 주장, 즉 한일회담 첫 회의에서 한국 측은 배상이 아니라 한국 측 재산의 반환을 청구한다는 입장을 일본 측에 밝혔기 때문에, 이제 한국은 일본에 배상을 요구할 수 없다는 말도 이상한 논리다. 한국이 일본에 한국 측 재산의 반환을 요구했다고 해도 국민이 그것을 청구한 것이 아니므로 국민 청구권은 남아 있기 때문이다.

 

 (4)에서는 미국이 한국 내의 일본인 재산을 몰수해서 한국으로 인도했으므로, 한국의 대일 청구권은 어느 정도 충족되었다고 주장했다. 그런데 한국 입장에서 볼 때 일본인의 한반도 진출 자체가 침략 행위이자 불법 행위였으므로 한국 내에 남은 일본인 재산은 원래 한국의 재산이고, 그 재산은 당연히 한국으로 귀속되어야 하는 성격을 띤다. 따라서 한국인들이 배상을 요구하는 문제와는 별개다. 더구나 일본은 한국을 35년간이나 불법으로 지배했으므로 몰수한 일본인의 재산으로 충족되는 한국 측 피해는 극히 일부에 불과하다고 할 수 있다. 그러므로 몰수한 일본인의 한국 내 재산으로 배상이 어느 정도 상쇄되었다는 주장은 터무니없는 주장이다.

 

 (5)에서는 일본이 일본 국민과의 형평상 살아 돌아온 생환자에 대한 보상은 불가능하다고 하는 것은 일본 측 입장에 불과하다. 일본은 가해자이기 때문에 살아서 한국으로 돌아온 한국인들에게는 당연히 보상과 배상을 해주어야만 한다. 2018년 10월 한국 대법원의 확정판결은 살아 돌아온 생환잗르이 낸 소송에 대한 선고였다. 일본이 피해당한 한국인에 대해, 특히 생환자에 대해 보상과 배상을 하는 것은 지극히 당연한 일이다. 더구나 1965년 청구권 협정에 생환자의 보상금이나 보상금이 포함되지 않았으니 개인이 기업에 배상금을 청구할 권리는 그대로 남아 있다.

 

 (6)에서는 1965년 4월 17일 이동원 - 시이나 합의로 개인 청구권이 소멸되었다는 주장이다. 하지만 그 합의는 당시 대한민국 정부의 입장일 뿐, 피해를 입은 당사자들의 입장이 아니다. 비록 국가에 의해 국민의 청구권이 소멸되었다고 해도 국민들이 동의하지 않으면 소용이 없다. 국가의 주체는 국민이기 때문이다.

 더구나 한일회담을 통한 국가 대 국가의 교섭에 있어서도 일본 정부는 한국 측에 성실한 태도를 보여주지 않았다. 일본 측은 한일회담에서 당초부터 한국 정부가 증거를 제출하지 않는다면 보상할 수 없다는 태도를 유지했다. 그래서 한국 정부는 법률관계와 사실관계를 밝히기 위해 일본 정부에 피징용자들의 피해 등에 관한 자료 제출을 요구했다.

 실제로 일본 정부는 당시 한일국교정상화를 준비하기 위해 각 기업에 명령하여 피징용자의 미불 임금 등에 대해 조사했다. 그 결과 일본 정부는 1953년 시점에서 각 기업의 피징용자에 관한 정보를 수집한 상태였다. 그 자료는 기업명, 미불금의 종류와 액수, 피징용자 인원수 등에 관한 정보였다.

 하지만 일본 정부는 그 자료를 한국 측에 넘겨주지 않았다. 주익종은 한일회담 당시 '애당초 한국 측이 청구할 게 별로 없었다'고 주장하지만, 그것은 일본 측이 자료를 은닉한 결과였다. 결국 일본 측의 불공평한 태도로 결정된 1965년 한일 청구권 협정 자체가 근본적으로 문제를 안고 있으므로, 일본 측도 1991년에는 개인 청구권이 소멸되지 않았음을 스스로 인정하게 되었다.

 

일본 정부는 개인 청구권을 인정했다.

 

 2018년 10월 한국 대법원의 판결이 확정되었을 때 당시 일본 외무상 고노 타로도 11월 14일 일본 국회 외무위원회에 참석해 개인 청구권이 남아 있음을 인정했다. 그런데 개인 청구권이 법적으로 구제받지는 못한다고 말을 바꾸었다.

 그러나 개인의 배상 문제가 1965년의 청구권 협정에 포함되지 않았음을 일본 정부는 역시 인정했다. 한국 대법원 판결에 대한 일본 정부의 견해는 일본의 국회의사록에서 다음과 같이 확인할 수 있다.

(201년 11월 14일 일본 국회 중의원 외무위원회 회의록 참고)*

 

 이상의 인용문을 보면 2018년 11월 시점에서도 일본 정부는 개인 청구권은 소멸되지 않았고, 배상 문제는 한일 청구권 협정에 포함되지 않았다고 분명히 인정했다. 그런데도 일본 측은 양국이 약속했기 때문에 재판에서 개인은 구제받지 못한다는 또 다른 주장을 내놓았다. 일본 측은 한국이 1965년에 일본과 맺은 약속을 어겼다고 강변하기 시작했다.

 일본 정부의 주장은 항상 국가 대 국가의 약속이라는 말로 마지막을 장식한다. 그러나 개인 청구권이 남아 있다는 뜻은 개인이 해당 기업에 보상이나 배상을 청구할 수 있다는 의미다. 더구나 이번 소송들은 한국인 피해자가 일본이라는 국가를 상대로 제기한 것이 아니라, 개인이 기업을 상대로 소송을 제기했다. 그리고 일제 강점기의 불법성에 의해 기업이 피해자들에게 불법 행위를 저지른 사실에 대한 배상을 대법원이 명령했기 때문에 국가는 이번 판결 문제에서 빠지고, 전범 기업들이 성실히 판결을 이행하는 것이 올바른 순서다.

 기업이 판결을 지키지 않는다면 기업의 한국 내 자산을 압류해 현금화한 뒤 피해자들에게 나눠줘야 한다. 그것만이 답이다. 한국 측의 판결 결과 집행에 대해 일본 정부가 한국에 대한 경제 보복을 다시 시작한다면, 그 결과는 일본의 국제적 고립으로 이어질 뿐이다.

 

 

(32%)

 미군의 포로 심문 보고서에는 다음과 같은 내용도 있다.

 그녀들은 '위안부'가 포로가 되었음을 보도하는 리플릿은 사용하지 말아 달라고 (미군에게) 요망했다. 그녀들이 포로가 되었다고 일본군이 알게 된다면 아마도 다른 곳의 '위안부'들의 생명이 위험해지기 때문이다.

 

 위와 같이 포로가 된 조선인 '위안부'들의 증언은, 군 위안소에 있는 조선인 '위안부'들이 언제라도 일본군에 의해 살해당할지도 모르는 상황에 놓여 있다는 것을 보여준다. 이는 일본이이 아닌 조선인을 비롯한 타민족 '위안부'들의 운명이었다.

 이 심문 보고서 내용은 그녀들이 일본군의 성 착취의 도구였고, 일본군이 적군에 밀리면 언제든지 증거 인멸을 위해 조선인을 비롯한 타민족 '위안부'들을 살해하고 도주할 수 있었다는 사실을 상기시키는 이야기다. 그런데 이영훈은 이런 부분을 인용하지 않고 철저히 외면했다. 그러면서 그는 다음과 같은 억지 주장을 했다.

 

 요컨대 미군의 심문기록은 위안소가 군에 의해 편성된 공창제로서 고노동, 고수익, 고위험의 시장이었음을 더없이 생생하게 뒷받침하고 있습니다.

 

 관련 연구자라면 모름지기 '위안부'들의 상황을 정확하게 파악해야 한다. 여성들은 취업 사기로 속아서 버마로 연행되었고, 본인이 원하지 않은 매춘을 강요당했지만, 전차금 때문에 도망갈 수 없는 상황에서 성을 착취 당했다. 계약 기간이 끝나면 귀국 허가가 나왔다 하더라도 계약 기간 중에는 폐업의 자유가 없었던 '성노예'였다는 것은 엄연한 사실이다.

 그러나 이영훈은 자신의 논리 - '위안부'들은 좋은 대우를 받았고, 돈도 많이 벌었으며, 자유롭게 지내며 폐업도 자유롭게 했으니 성노예가 아니었다 - 라는 논리에 유리해 보이는 부분만 인용했고, 자신의 논리에 맞지 않는 부분은 외면했다. 그와 같은 행위가 학자로서 올바른 태도인지 묻지 않을 수 없다.

 

(35%)

 한편 안병직은 박치근의 1943년 7월 29일 일기 일부분을 거론하며 일본군이 결혼을 위해 '위안부'를 폐업한 여성 2명에게 명령을 내려 다시 '위안부'로 삼은 실제 사례를 소개했다. 다음은 그날의 박치근 일기 전문이다.

 

 1943년 7월 29일 목요일, 흐리고 비

 인센 요마(Yoma) 거리의 무라야마 씨 댁에서 일어나 아침을 먹었다. 아라이 씨와 병참에 가서 콘돔을 배급받았다. 위안부 진료소에 가서 등록되지 않은 2, 3인의 위안부에게도 진찰을 받게 했다. 이전에 무라야마 씨 위안소에 위안부로 있다가 부부 생활하러 나간 하루요(春代)와 히로코(弘子)는 이번에 병참의 명령으로 다시 위안부로서 김천관에 있게 되었다더라. 중국인 거리에 들러 저녁에 인센으로 돌아와 저녁을 먹고 밤 1경에 자다.

 

 안병직은 '위안부'로 있다가 결혼해서 위안소를 나간 두 여성이 병참의 명령으로 다시 '위안부'가 된 사례를 거론하면서 '위안부'들이 자유롭게 폐업할 수 없었다고 인정했다.

 이처럼 '위안부'로 있다가 결혼하게 된 여성들이 병참의 명령으로 다시 '위안부'로 돌아온 경우는 어떤 경우일까. 생각하면 슬픈 일이다. 두 사람은 누구하고 결혼했을까? 다시 '위안부'로 돌아와야 한다고 명령이 내려졌을 때, 그녀들과 그녀들의 남편들은 그 명령을 어떻게 받아들였을까? 여러 생각이 교차하지만, 안병직은 다음과 같이 또 하나의 포로 심문 보고서를 인용하면서 전투지, 최전선에서의 위안소에서 폐업이 어려웠던 사실을 설명했다. 아래 인용문의 큰따옴표 안의 이야기는 미군의 포로 심문 보고서 '연합국 최고사령부 연합번역통역 조사보고'에 나오는 내용의 재인용이다.

 

 그리고 다 같은 버마라고 하더라도 전투지에서는 폐업이 더욱 어려웠던 것으로 보인다. 왜냐하면, 외국에서 일본군의 보호를 받지 못하면 위안부들에게는 위안소의 밖이 바로 지옥이기 때문이다. "어느 여자든 이자를 합하여 그녀의 가족에게 지불한 돈을 갚을 수 있을 때, 그녀는 조선까지의 무료귀환교통권을 받고 자유로운 것으로 간주되었다. 그러나 전쟁 상황 때문에 포로(미군에 체포된 포주)가 데리고 있는 그룹의 어느 누구도 지금까지 위안소를 떠나는 것이 허용되지 않았다. 1943년 6월에 제15군사령부가 빚으로부터 자유로운 그녀들을 고향으로 돌아가도록 주선했지만, 이런 조건을 충족하고 귀환하기를 원하는 여자도 머물러 있도록 쉽게 설득되었다.

 

 위의 인용문으로, 전쟁이라는 특수 상황 때문에 전차금을 다 상환하여 폐업할 수 있는 상황이 되었다 하더라도 '위안부'들은 일본군의 보호를 받지 못하게 될 조선으로의 귀환을 포기할 수밖에 없었다는 사실을 우리는 확인할 수 있다. 1944년 8월 10일 조선인 '위안부' 20명과 함께 미군 포로가 된 일본인 포주들에 대한 심문 보고서가 따로 있고, 그것이 위에서도 인용한 '연합국 최고사령부 연합번역통역 조사보고'인데, 이 보고서에는 그들이 생포되기 전에 "네 명은 여행 중에 죽고 두 명은 일본인 군인으로 오인되어 총살되었다"고 기록되어 있다. 그렇게 생명의 위협이 항상 존재하는 것이 최전선이었다. 그런 상황에 있던 최전선으로 강제연행된 조선인 여성들에 대해 이영훈처럼 단정적으로 '그녀들은 돈을 벌기 위해 갔다'고 말하는 것은 대단히 부적절하다.

 이와 같이 버마의 위안소에 끌려간 '위안부'들의 생활은 이영훈이 말하는 "어디까지나 위안부 개인의 영업"이 절대 아니었다. 이영훈은 이와 같은 내용이 담긴 『일본군 위안소 관리인의 일기』를 출판하기 위해 자신도 연구회에 참여했고, 자신의 연구소에서 출판한 이 책 내용과는 정반대의 주장을 태연하게 책 『반일 종족주의』에 서술하기까지 했다.

 이영훈은 "위안부들 역시 전쟁 특수를 이용하여 한몫의 인생을 개척한 사람들"이었다고 하면서 '위안부'들이 거금을 벌었다는 식으로 주장한다. 그러나 안병직은, 전시 하이퍼인플레이션을 생각할 때 버마에서는 매달 11~14%의 인플레이션이었으므로 가장 많이 벌었다고 일본 우파가 야유하는 버마의 '위안부' 피해자 문옥주 씨의 경우에도 1943년 4월부터 1945년 9월까지 번 돈이 약 26,000엔이었지만 그 금액은 인플레이션으로 결국 500~1,000엔의 가치밖에 없었다고 하면서, 문옥주 씨의 예금통장에 관한 고바야시 히데오 교수의 현재 금액으로의 환산을 소개했다. 안병직은 그런 화폐를 해외에서 조선으로 송금할 때와 조선에서 인출할 때는 상당한 제약이 있었을 것이므로 '위안부'들이 돈을 많이 벌었다고 할 수 없다고 덧붙였다. 그리고 군인들은 위안소를 이용할 때 군표를 사용했는데, 군표가 패전으로 휴지 조각이 되어, 결국 패전까지 '위안부업'을 한 여성들은 한 푼도 벌지 못한 것이 사실이다.

 한편, 문옥주는 그녀가 고생해서 저축해 고향으로 송금한 우체국예금을 끝내 돌려받지 못했다. 문옥주는 그녀를 돕는 모리카와 마치코와 함께 일본의 우정성에 예금 지급을 요구하는 운동을 시작했다. 그러나 우정성은 1965년 한일 청구권 협정으로 모두 끝난 일이라고 해서 예금 지급을 거부했다.

 일본의 우파는 문옥주처럼 위안부들은 돈을 벌기 위해 자발적으로 '위안부'가 된 매춘부라고 주장한다. 이영훈의 주장도 이에 가깝다. 그러나 '제4차 위안단'의 조선인 '위안부'들은 조선총독부의 계획하에 취업 사기로 모집되었고, 부상한 병사를 대상으로 간호사처럼 일한다는 말에 속아서 버마까지 갔다. 그렇게 해서 그녀들은 본인의 의사에 반해 성매매를 강요당했다.

 전차금을 받았기 때문에 그녀들은 구속된 상태였고, 계약 기간 동안 '성노예'였다. 그녀들이 돈을 벌기 위해 해외로 간 것은 사실이지만, 매춘을 하리라고는 전혀 생각하지 않았다. 최전선까지 데려간 후 이제 도망갈 수 없으니 매춘을 해야 한다고 강요하는 수법은 사람으로서 할 짓이 아니다. 일본군과, 군에 고용된 포주들은 태연하게 여성에 대한 인권유린을 저지른 것이다.

 전차금을 모두 상환해서 고향으로 귀국해도 좋다는 허가가 내려져도 그녀들은 최전선이라는 특수 상황 때문에 생명의 위험을 무릅쓰면서까지 귀국할 수는 없었다. 결국 조선인 '위안부'들은 계속 일본군에 구속된 상태가 되었다. 최전선으로 배치된 것이 조선인 '위안부'들의 특징이다. 일본인 '위안부'들은 보다 안전한 후방 지역에 있었다는 다음과 같은 조사 기록이 있다.

 

 후방지역에서는 위안소에 일본인 여자들도 있었는데, 예컨대 메이묘(Maymyo)에는 8개 위안소 중에서 일본인 위안소가 둘이 있었으나, 거기로부터 전방에는 일본인 위안소는 없었다.

 

 위에 인용한 연합군의 조사 기록에 의하면 일본인 '위안부'들은 조선인 '위안부'들보다 안전한 후방 지역에 배치되었다. 모든 지역에서 그랬다면 일본군은 조선인 '위안부'들을 최전선에 배치했다는 민족적 차별을 자행했던 것이다. 아무도 자발적으로 가지 않는 최전선에 일본군과 조선총독부가 선정한 포주들이 조선인 여성들을 취업 사기로 속여서 연행했다는 사실이 조선인 '위안부'가 자발적으로 '위안부'가 된 게 아니라는 진실을 말해주고 있다.

 그런 진실을 왜곡하는 일본 우파나 한국의 신친일파들은 하늘이 용서하지 않을 인권유린주의자들이다.

 

(49%)

 미즈시 시게루는 자신이 그린 만화책 『카란코론 표박기 게게게 선생 만히 말한다』 중에서 「종군위안부」라는 제목으로 8페이지에 걸쳐 파푸나 뉴기니 코코포에서의 경험을 상세히 소개했다.

(해당 만화를 소개한 포탈 글을 Link)

http://m.todayhumor.co.kr/view.php?table=bestofbest&no=401932

 

미즈키 시게루의 종군위안부 만화

미즈키 시게루가 그린 종군위안부 관련 에세이 만화가 있길래, 번역. 소개해 본다.코믹 에세이 종군위안부(従軍慰安婦) (카랑코롱 표박기 中)전시중, 전쟁터의 병사들 사이에서는 종군위

m.todayhumor.co.kr

 

 

(88%)

 문재인 정부는 위안부 합의를 파기하지 않았다.

  『반일 종족주의』 3부 '종족주의의 아성, 위안부'에서 이영훈은 "예컨대 박근혜 정부는 일본 정부와 이 문제를 최종적으로 완전히 청산한다는 협약을 체결하였습니다. 그렇지만 문재인 정부는 이를 파기하였습니다"라고 썼다. 그러나 이 주장은 크게 틀린 말이다. 결론부터 말하면, 문재인 정부는 일본과의 위안부 합의를 파기하지 않았다.

 2018년 1월 9일 문재인 정부는 위안부 합의에 대한 검증을 실시하여 후속 조치를 발표하면서 일본 정부에 파기라든가 재협상을 요구하지 않겠다는 입장을 분명히 했다. 2015년 12월 28일 한일 두 나라가 맺은 위안부 합의가 양국 간의 공식 합의였으므로 이를 일방적으로 파기하거나 재협상을 요구하지 않겠다는 뜻이었다. 그러나 문재인 정부는 이 합의로 위안부 문제가 다 해결되었다고는 생각하지 않는다고도 했다. 이 견해는 위안부 합의 이후 UN 인권위원회가 줄곧 견지해온 견해와 동일하다.

 그 후 2018년 11월 21일 한국의 여성가족부는 위안부 합의헤 의해 설립된 화해치유재단 해산의 법적 절차에 들어간다고 공식 발표했다. 화해치유재단은 한일 위안부 합의에 입각해 '한국 정부가 위안부 피해자들의 지원을 목적으로 하는 재단을 설립하고, 이에 일본 정부가 일본 예산으로 자금을 일괄 거출한다'는 약속에 따라 2016년 7월 서울에 설립되었다.

 일본이 출연한 기금은 10억엔(약 103억원)이었다. 재단의 임무는 위안부 피해자 및 유족에게 현금을 지급하는 것이었고, 재단은 해산 결정 시검에서 피해자 34명, 사망자 58명(유족이 대신 기금 수령)에게 총 44억 원의 '상처 치유금'을 지급했다.

 그런데 문재인 정부가 화해치유재단을 해산한 것은 위안부 합의를 파기하기 위해서가 아니었다. 재단 이사장들과 이사들이 모두 사임하여 5명의 직원만 재단을 지키는 상황에서 재단 유지비용만 들어가는 낭비를 막기 위해서였다. 그런 다음 문재인 정부는 남은 59억 원 정도의 일본 지원금을 일본 정부와 협의해 적절하게 사용하겠다고 발표했다.

 따라서 이영훈의 '문재인 정부가 (위안부 합의를 ) 파기했다'는 주장은 엄연한 거짓이다. 화해치유재단을 해산하여 한일 위안부 합의 파기를 주장해온 것은 문재인 정부가 아니라 '위안부' 피해자 여성들과 지원 단체들이다. 피해자들을 지원하는 나눔의 집은 논평을 통해 "피해자를 철저히 배제한 채 한일 정부가 정치적 야합으로 발족한 화해치유재단의 해산 소식에 나눔의 집 일본군 '성노예' 피해 할머니 모두 기뻐했지만, 일본이 보애 온 10억 엔 처리 문제는 여전히 남아 있다"며 "피해자들 요구대로 일본이 보내온 10억 엔의 조속한 반환을 바라며 이를 바탕으로 2015년 한일 위안부 합의안을 파기 또는 무효로 하는 데 정부가 힘써주기를 바란다"고 밝혔다. 이와 같은 나눔의 집 논평을 봐도 위안부 합의 파기를 원하는 것은 문재인 정부가 아니라 피해자들이었다.

 나눔의 집에 따르면 이옥선 할머니는 "일본의 돈을 받아 재단을 설립한 것은 이전 정부가 할머니들을 도로 팔아먹은 것과 같다. 이제라도 해체돼 다행"이라고 말했고, 강일출, 박옥선 할머니 등도 "일본의 사죄도 받을 수 있도록 정부에서 힘써 주었으면 좋겠다"고 하면서 "일본이 보낸 돈 10억 엔도 하루빨리 돌려주길 바란다"고 했다.

 이영훈은 사실을 왜곡하여 문재인 정부가 위안부 합의를 파기했다고 주장했다. 하나하나 왜 사실대로 정직하게 쓰지 않고 일부분만을 취해서 그럴싸하게 거짓을 만들거나 왜곡시켜 사람들을 현혹시키는 걸까?

 

(89%)

 지금부터는 필자의 일제강점기에 대한 견해를 밝히고자 한다.

 1905년 11월 일본 제국주의는 한국과 강제로 을사늑약을 체결했다. 그로 인해 한국은 일제에 외교권을 박탈당했고, 일본은 한국을 자신들의 보호국으로서 침탈해버렸다. 한국의 많은 역사학자들처럼 필자 역시 을사늑약 자체가 무효라는 입장이다. 을사늑얀에 고종 황제의 옥새가 찍혀 있지 않았기 때문이다.

 당시 대한제국은 국회가 없어서 황제의 윤허로 국가의 대사가 결정되었다. 그러므로 외국과의 조약 승인 절차에는 반드시 황제의 인가가 필요했다. 따라서 인가를 의미하는 옥새가 찍혀 있지 않았다는 것은 그 조약이 무효임을 뜻한다. 또한 을사늑약을 비롯하여 을사늑약 체결이 토대가 되어 조인된 19010년 8월의 한일병합조약도 당연히 무효이다. 원천적으로 무효인 협정이나 조약이 1945년 8월 15일 일본 패전까지 유효인 것처럼 시행되었다.

 일본 측은 독도가 1905년 2월 22일에 시마네현 오키섬에 편입되었으므로 을사늑약 체결 이전의 문제라며 독도가 일본 영토라고 주장한다. 하지만 그것은 일본 국내법으로 볼 때만의 이야기다. 독도가 일본 영토가 되었다고 일본이 한국에 알린 시점이 1906년 3월이었다. 을사늑약 체결 이후이므로 국제법상 독도 편입 자체가 무효다

 1910년 8월 22일 한일병합조약 체결, 8월 29일의 조약 시행 이후 이루어진 한국에 대한 강제 동원, 일본군 '위안부' 강제연행, 침략 전쟁을 위한 한국인 지원병 모집이나 한국인 징병제 등도 모두 원천적으로 무효다. 을사늑약이나 한일병합조약 자체가 불법이자 무효이기 때문이다.

 1965년 6월 22일 체결된 한일기본조약 제2조에는 한국과 일본 간에 "1910년 8월 22일 이전에 체결된 모든 조약 및 협정은 이미 무효"라고 기재되어 있다.

 이 조문은 1910년 8월 22일 체결된 한일병합조약을 비롯해 그 이전에 체결된 한일 간의 모든 조약과 협정이 원천적으로 무효라는 뜻이다. 그러나 일본은 이 조문을 패전한 1945년 8월 15일 이후부터 모든 조약과 협정이 무효라고 해석한다. 그것은 일제강점기를 합법으로 정의하고 싶은 일본의 입장일 뿐이다. 또한 일본 법원은 일제강점기 자체는 합법이라는 입장을 유지한 채 한국인 피해자들이 제소한 재판을 기각하거나 한국 측을 패소하게 만들었는데, 이 역시 일본 측 입장에서 선고된 판결에 불과하다.

 한국 측의 법적 입장은 일제강점기가 어디까지나 '불법'이고, 당시의 조약 및 협정이 원천적으로 무효라는 것이다. 그렇기에 한국 대법원이 일제강점기의 불법성을 거론하면서 일제강점기에 벌어진 한국인 강제 징용자에 대한 일본 기업의 불법성을 이유로 일본의 전범 기업에 유죄를 선고한 것은 당연한 귀결이다. 한국 내의 법적 입장을 반영한 판결이므로 다른 나라가 개입하는 것은 부당하다.

 그리고 일본군 '위안부', 한국인 학도병과 한국인 징병자 문제도 모두 일제강점기에 일제의 침략이 원인이 되어 생긴 문제이므로 죄다 불법이다.

 이처럼 한국의 입장이 분명한데도 신친일파들은 일본 측 입장을 옹호한다. 여기는 한국이다. 당연한 말이지만 한국의 법이나 관습이 통하는 곳이다. 예를 들면 싱가프로에서는 여성에 대한 성폭력 범죄는 태형에 처해진다. 맞다가 엉덩이가 찢어지면 상처가 회복된 후에 다시 형을 속행한다. 외국인에 대해서도 똑같이 형을 집행한다. 이렇듯 어느 나라든 자국의 법이 적용된다.

 한국에는 한국법이 있다. 그런데도 한국에서 일본법을 주장하는 사람들이 있다는 것은 아이러니하다. 자국을 침략한 나라를 옹호해주고 이상한 논리로 침략국을 참싸는 데도 그것이 옳다고 한다면, 자라나는 아이들이 무엇을 배운단 말인가.

 신친일파 청산은 국가의 존망과도 연결된다. 친일 청산은 반드시 이뤄져야 하고 신친일파의 잘못된 사상도 바로잡아야 한다.

 

 

のびた人陰(かげ)を舗道にならべ 夕闇(ゆうやみ)のなかを君と歩いてる
手をつないで いつまでもずっと そばにいれたなら 泣けちゃうくらい
風が冷たくなって 冬の匂いがした
そろそろこの街に 君と近付ける季節がくる
今年, 最初の雪の華を ふたり寄り添って
眺めているこのときに 幸せがあふれだす
甘えとか弱さじゃない ただ, 君を愛してる
心からそう思った

땅거미 진 거리에 길게 드리워진 그림자 두 개, 당신과 함께 걷고 있어요.

꼭 잡은 두 손, 이대로 계속 곁에 있으니, 눈물이 날 정도에요.

차가와진 바람에 겨울의 기척이 느껴져요

슬슬 이 거리에는 당신과 가까와지는 계절이 와요

올해, 첫 눈의 꽃을 둘이서 살포시 함께 바라보고 있는 이 순간에 행복이 넘쳐 흘러요

어리광이랄까, 마음이 약해진 건 아니에요, 단지 당신을 사랑해요

내 마음이 그렇게 말하네요.

 


君がいるとどんなことでも 乗りきれるような気持ちになってる
こんな日々がいつまでもきっと 続いてくことを祈っているよ
風が窓を揺らした 夜は揺り起こして
どんな悲しいことも 僕が笑顔へと変えてあげる
舞い落ちてきた雪の華が 窓の外ずっと
降りやむことを知らずに 僕らの街を染める
誰かのためになにかを したいと思えるのが
愛ということを知った

당신이 있으면 어떤 일이라도 할 수 있을 것 같아요

이런 나날들이 언제까지라도 이어지기를 기원하고 있어요

바람이 창문을 흔들던 밤은 지나보내고,

모든 슬픔도 내가 웃는 얼굴로 바꿔줄게요

흔들리듯 춤추는 눈의 꽃이 창밖에 그칠 줄 모르고 계속 내려 우리들의 거리를 새하얗게 물들여요.

누군가를 위해 무언가를 해주고 싶은 마음이 '사랑'이라는 걸 알아요.

 


もし 君を失ったとしたなら
星になって君を照らすだろう
笑顔も涙に濡れてる夜も
いつもいつでも そばにいるよ

 

만약 당신을 잃게 된다면, 별이 되어 당신을 비추겠어요.

웃는 얼굴도 눈물에 젖은 밤도, 언제나 언제까지나 곁에 있겠어요.

 


今年 最初の雪の華を ふたり寄り添って
眺めているこのときに 幸せがあふれだす
甘えとか弱さじゃない ただ 君とずっと
このまま一緒にいたい 素直にそう思える
この街に降り積もってく 真っ白な雪の華
ふたりの胸にそっと想い出を描くよ
これからも君とずっと

올해, 첫 눈의 꽃을 둘이서 살포시 함께 바라보고 있는 이 순간에 행복이 넘쳐 흘러요

어리광이랄까, 마음이 약해진 건 아니에요,

당신과 언제나 단지 이대로 함께 하고 싶어요. 

이 거리에 내려 쌓인 새하얀 눈의 꽃

우리 둘의 마음 속에 살며시 추억을 그려요

이다음에도 당신과 언제까지나요.

 

가사가 지극히 직설적이지만, 머라이어의 노래는 그 모든 것을 다 상쇄하고도 남는다.

90년대 여성 발라더로서 전세계 No.1 이며, 아마도 우리 세대에서는 이런 가수를 다시 보기란 힘들지 않을까 싶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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There's a hero
If you look inside your heart
You don't have to be afraid
Of what you are

어떤 영웅이 있어요.

당신의 내면을 들여다 볼때, 당신이 어떤 사람인지에 대해 두려워 하지 말아요.

 

There's an answer
If you reach into your soul
And the sorrow that you know
Will melt away

하나의 해답이 있어요

당신의 영혼을 느끼면, 당신이 아는 그 슬픔이 사라질거에요.


And then a hero comes along
With the strength to carry on
And you cast your fears aside
And you know you can survive
So when you feel like hope is gone
Look inside you and be strong
And you'll finally see the truth
That a hero lies in you

그리곤, 이끌어낸 그 강인함과 함께 영웅이 온답니다.

그러면 당신의 공포들은 사라지고, 당신은 살아갈 수 있음을 알게 되요.

그러니 모든 희망이 사라진 것처럼 느껴지면, 당신안을 들여다보고 강해지세요.

그러면 당신은 그 진실을 깨닫게 될 겁니다.

바로 당신안에 한 영웅이 있다는 것을요.


It's a long road
When you face the world alone
No one reaches out a hand
For you to hold
You can find love
If you search within yourself
And that emptiness you felt
Will disappear

기나긴 인생입니다.

세상에 홀로 맞서야 할 때, 아무도 당신에게 손을 내밀지 않아요.

당신 내면을 들여다보면, 당신은 사랑을 찾을 수 있습니다.

그러면 당신이 느끼는 그 공허함이 사라질거에요. 


And then a hero comes along
With the strength to carry on
And you cast your fears aside
And you know you can survive
So when you feel like hope is gone
Look inside you and be strong
And you'll finally see the truth
That a hero lies in you, oh, oh

 

Lord knows
Dreams are hard to follow
But don't let anyone
Tear them away, hey yeah

주님은(여기서 Lord는 주님으로 보는게 맞다고 본다. 보통 미국은 대부분 개신교라고 봐야 한다. 게다가 머라이어 캐리는 교회 성가대 출신이니. 중의적으로 신을 의미하려면 굳이 Lord라는 단어를 사용하지 않았을 것이다. God 혹은 Who라고 했을 것이라는게 개인적 견해이다) 아십니다.

꿈이란 이루기 어렵다는 걸요.

하지만 누구도 당신의 꿈을 앗아가지 못하게 하세요.


Just hold on
There will be tomorrow
In time you'll find the way

버티다 보면, 언젠간 당신은 길을 찾는 때가 올거에요.


And then a hero comes along
With the strength to carry on
And you cast your fears aside
And you know you can survive
So when you feel like hope is gone
Look inside you and be strong
And you'll finally see the truth
That a hero lies in you
That a hero lies in you
Mmm, that a hero lies in you

 기본 포맷은 동물의 왕국과 같다. 세렝게티에서 사자, 개코원숭이(Baboon), 얼룩말, 들개, 코끼리, 하이에나의 여섯 동물의 하나의 무리와 그 중 하나의 중심동물에 포커스를 두고 드라마식으로 이야기가 전개된다.

1부 Destiny, 2부 Conflict, 3부 Invasion, 4부 Misfortune, 5부 Exodus, 6부 Rebirth의 6부작으로 이루어져 있다.

동물의 왕국 좋아하는 사람은 무조건 좋아할 만하며 화면의 퀄리티가 장난 아니게 높다.

스타워즈 시리즈에 출연한 존 보에가의 해설 목소리도 좋다. 이제 슬슬 아텐보로 경은 은퇴할때가 되었나보다.

 

 

 하루키의 초기 3연작의 마지막 작품.

바람의 노래를 들어라, 1973년의 핀볼과 이어지는 작품이다. 연작이긴 하지만 개별 작품마다 완결성을 가지고 있기도 하다.

 

이번이 재독인데 작품의 길이에 비해서 무언가 어정쩡하게 끝나는 느낌이 있다. 내가 읽은 작품은 개정판 이전의 단권으로 나온 책(1995년 출판)인데 2009년 개정판은 무엇이 바뀐 게 있을지 다시 읽어봐야 할 것 같다.

하루키 자신도 양을 쫓는 모험이 나중에 좀 미흡한 느낌이었다라는 이야기를 한 적이 있다고 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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p97

 "어쨌든 그는 그 돈으로 정당과 광고를 장악했고, 그 구조는 지금까지도 이어지고 있지. 그가 표면에 나서지 않는 이유는 나설 필요가 없기 때문이야. 광고업계와 집권 정당의 중추를 장악하고 있으면, 그야말로 불가능한 일이 없거든. 광고를 장악한다는 게 어떤 것인지 자네는 알겠나?"

 "아니."

 "광고를 장악한다는 건  출판과 방송의 대부분을 장악한 게 되는 거야. 광고가 없는 곳에는 출판과 방송이 존재할 수 없지. 물이 없는 수족관과 같다고나 할까. 자네가 보게 되는 정보의 95퍼센트까지가 이미 돈으로 매수되어서 선별된 것이라구."

 "아직 잘 모르겠어"라고 나는 말했다.

 "그 인물이 정보 산업을 장악하고 있다는 데까지는 이해하겠는데 어덯게 그가 생명 보험 회사의 PR지에까지 권력을 행사할 수 있는 거지? 그건 대형 대리점을 통하지 않고 직접 맺은 계약이잖아."

 내 친구는 헛기침을 하고 나서 완전히 식어 버린 보리차를 마셨다.

 "주식이야. 놈의 자금원은 주식이거든. 주식 조작, 매점매석, 탈취, 뭐 그런 거지. 그를 위한 정보를 그의 정보 기관이 수집하고, 그것을 그가 취사 선택하는 거야. 그중 매스컴에 흘러 나오는 것은 극히 일부고, 나머지는 선생꼐서 자신을 위해서 쥐고 있는 거지. 물론 직접적으로는 아니지만 협박 비슷한 짓도 하지. 협박이 통하지 않을 경우에 그 정보는 매치 펌프용으로 정치가에게 흘리는 거야."

 "어느 회사든 약점 한두 가지쯤은 있다 이거군."

 "어떤 회사든 주주 총회에서 폭탄 선언 같은 걸 듣는 건 원치 않거든. 그러니 대개는 하라는 대로 하게 돼 있지. 다시 말해서 선생께서는 정치가와 정보 산업과 주식이라는 삼위 일체 위에 군림하고 있는 셈이지. 이젠 이해하겠지만 PR지 하나쯤 뭉개버린다든지 우리를 실업자로 만드는 일쯤은 그에겐 삶은 달걀 껍질 까기보다도 간단한 일이라구."

 

p101

 우리는 우연의 대지를 정처 없이 방황할 수도 있다. 마치 어떤 식물의 날개 달린 종자가 변덕스런 봄바람에 날려오듯이.

 그러나 그와 동시에 우연성 같은 것은 애당초 존재하지 않는다고도 할 수 있다. 이미 일어나 버린 일은 명확하게 일어나 버린 일이며, 아직 일어나지 않은 일은 아직 명확하게 일어나 버린 일이며, 아직 일어나지 않은 일은 아직 명확하게 일어나지 않은 일이다. 다시 말해서 우리는 배후의 '모든 것'과 눈앞의 '제로' 사이에 끼인 순간적인 존재고, 거기에는 우연도 없고 가능성도 없다는 뜻이다.

 그러나 실제로 그 두 가지 견해 사이에는 별다른 차이가 없다. 그것은(대개의 대립되는 견해가 그렇듯이) 두 가지의 서로 다른 이름으로 불리우는 똑같은 요리 같은 것이다.

 

p157

 나는 두 잔째 위스키를 제일 좋아한다. 첫 잔째의 위스키로 한숨 돌린 기분이 되고, 두 잔째의 위스키로 머리가 정상이 된다. 석 잔째부터는 맛 따위는 없다. 그저 위(胃) 속에 들어부을 뿐이다.

 

p165

 그러나 정직하게 이야기하는 것과 진실을 이야기하는 것은 별개의 문제네. 정직과 진실의 관계는 선두(船頭)와 선미(船尾)의 관계와 비슷하지. 먼저 정직함이 나타나고, 마지막에 진실이 나타나는 거야. 그 시간적인 차이는 배의 규모에 정비례하고, 거대한 사물의 진실은 드러나기 어려운 법일세. 우리가 생애를 마친 다음에야 겨우 나타나는 경우도 있지. 그러니까 만약에 내가 당신에게 진실을 드러내지 않아다고 하더라도, 그것은 내 책임도 당신의 책임도 아니네."

 

p184

 '의지 부분'은 아무도 욕심을 내지 않아. 아무도 이해할 수 없기 때문이지. 이것이 내가 말하고 있는 분열의 의미야. 의지는 분열될 수 없네. 100퍼센트 계승되거나 100퍼센트 소멸되는 것들 중 하날세.

 

p259

 "맞아요. 나는 지금 당신과 이렇게 하고 있는 것만으로도 충분히 만족하고 있고, 만족스러울 때에는 메시지는 오지 않죠. 그러니까 우리는 스스로 양을 찾을 수밖에 없어요."

 

p284

 "근대 일본의 본질을 이루는 어리석음은, 우리가 아시아의 다른 민족과의 교류에서 무엇 하나 제대로 배우지 않았다는 거라네. 양에 대해서도 역시 마찬가지지. 일본에서의 면양 사육이 실패한 이유는 그것이 단지 양모 · 식육의 자급 자족이라는 관점에서만 파악되었기 때문이고, 생활에서의 사상이라는 것이 결여되어 있었던 거네. 시간을 따로 떼어 결론만을 효율적으로 훔쳐내려고 한 거야. 모든 일이 그래. 다시 말해서 발이 땅에 닿아 있지 않은 거지. 전쟁에 지는 것도 무리는 아니지."

 

 

 

 

 

 

 

http://www.fntoday.co.kr/news/articleView.html?idxno=213500

 

유시민 신라젠 주가조작 연루의혹, 해명에도 일파만파 - 파이낸스투데이

유시민 노무현재단 이사장은 3일 '채널A가 검찰과의 유착을 토대로 자신에 대한 비위를 캐려고 했다'는 의혹을 제기한 MBC 보도와 관련해 \"저는 기본적으로 짜고 한 것으로 본다. 다 윤석...

www.fntoday.co.kr

 

얼마전 n번방 사건에 대해, 반일종족주의라는 쓰레기 책을 집필한 어떤 정신나간 인간이 이런 발언을 한 적이 있다.

"내 딸이 n번방 피해자라면 딸의 행동을 반성하겠다"

이런 류의 가해자를 두둔하고 도리어 피해자를 비난하는 것은 흔하진 않지만 종종 사용되는 궤변의 프레임이다.

가장 유명한 것이 2차 대전 당시 나치 독일과 일본의 예이다. 

"나치가 유태인을 학살했던 이유도 유태인의 피가 더러워서 세상을 오염시키기 때문에 신을 대신해서 나치가 유태인을 청소했다."

"일본이 조선을 침략하고 병탄한 것은 문명의 혜택으로 조선인민을 교화하기 위한 것이었고, 조선이 근대화 된 것은 일본의 덕분이다."

 

이런 신물나는 궤변은 대한민국 건국당시 이승만 정권 당시부터 친일 세력이 권력을 잡으면서 자신들의 친일전력을 지우기 위한 목적으로 사용되었다.

 

최근 전 밸류인베스트먼트 대표인 이철씨가 신라젠 이슈와 관련하여 유시민 이사장을 엮기 위해 채널A의 이동재 기자로부터 받은 제안을 MBC뉴스가 폭로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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신라젠, 이철 그리고 유시민, 검찰 시나리오를 쓰다?

최근 신라젠 주가조작 의혹으로 현재 구속수감중인 이철 밸류인베스트먼트 대표에게 채널A의 기자가 접근해서 유시민 노무현 재단 이사장을 엮으려는 시도가 MBC뉴스를 통해서 폭로되었다. 이 사건을 최초부터 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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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 내용을 살펴보면 유시민 이사장을 엮기 위해, 검찰과 언론이 손을 잡고 현재 수감중인 이철씨를 추궁해서 허위 자백을 받아내려고 한 악랄한 범죄행위이다.

이 사건에서 명백히 가해자는 검찰의 한동훈 검사와 채널A이 이동재 기자이고, 피해자는 이철 씨와 유시민 이사장이다.

 

정상적인 사람이라면 가해자가 왜 상대방을 모함했는지를 궁금해한다. 피해자에게 왜 당신은 모함을 당했나요? 라든가 그 모함이 여전히 의심스럽다고 당사자보고 해명하라고 하는 것은 일반 정서에도 법의 원칙에도 맞지 않다.

가해자가 피해자를 칼로 찌르려르다가 미수에 그치면 살인미수라고 한다.

이럴 경우 보통은 가해자에게 왜 피해자를 찌르려 했나요? 라고 묻지 피해자에게 가서 가해자가 왜 당신을 찌르려 했을까요? 당신이 칼맞을 짓을 한게 아닌가요? 라고 하는 경우는 별로 없다.

기자들이 이런 기본적인 인간세상의 예의를 모르고 걸레같은 기사를 싸재끼니까 기레기라 하는 것이다.

최근 신라젠 주가조작 의혹으로 현재 구속수감중인 이철 밸류인베스트먼트 대표에게 채널A의 기자가 접근해서 유시민 노무현 재단 이사장을 엮으려는 시도가 MBC뉴스를 통해서 폭로되었다.

이 사건을 최초부터 시간 순으로 알아보니 검찰의 공작은 이미 최소 지난해 12월정도부터 시작되었다는 것을 느낄 수 있다.

1. 신라젠 주가폭락의 여파로, 밸류인베스트먼트를 통해 비상장 주식인 신라젠에 투자한 소액 투자자 수천 명이 손해를 봤다. 손해액은 다해서 수천억 원대에 이른다.

이에 소액투자자들은 손해를 보게한 투자사 밸류인베스트먼트를 고발하고, 이에 검찰 수사 결과 이철 대표는 구속되고 재판을 받았고, 2019년 12월 12년형을 확정 선고받았으며, 지금 항고심이 진행중이다.

2. 구속된 이철은 노사모(노무현을 사랑하는 모임) 출신으로, 유시민과도 친분이 있어서 투자사 대표시절 사원들 세미나에 유시민을 초빙해서 강연을 부탁했다. 당시 강연료는 30만원을 받았다고 한다(유시민이 강연료 30만원을 받았다고 하면 공짜나 다름없다. 유시민이 공공기관에서 2시간 강의를 해도 100만 원 이상은 받을 것이다)

(*수정: 언론보도 상으로 당시 강연료는 60만원으로 나오고, 4월3일 김종배의 시선집중에 출연한 유시민 이사장 본인의 기록으로는 2시간 강연에 70만원을 현금으로로 받았다고 한다)

검찰로 예상되는 배후조직은 작년 12월, 이철과 유시민을 엮기로 시나리오를 짠다.

내가 이런 생각(혹은 추측)을 하게 된 데는 다음과 같은 배경 이유가 있다.

3. 2019년 12월 노무현 재단의 예금 계좌가 열람되었다(이건 당시 꽤 이슈가 되어서 인터넷 찾아보면 그 전후 사정이 자세하게 나온다). 이 사실을 발견한 유시민 (노무현) 재단 이사장은 해당 은행에 재단 계좌가 누구에게 왜 열람되었는지를 문의한다.

돌아온 은행의 답변은 "알려줄 수 없다."였다. 이 사실로부터 유시민 이사장은 검찰에서 이 계좌를 조사했다는 것을 알게 되고, 검찰에 예금 계좌를 조사했냐고 문의한다. 문의 결과 검찰은 "답변할 수 없다"라는 답변을 회신한다.

노무현 재단의 예금 계좌를 12월에 누가 조사했는지는 공식적인 문서로 정부에 문의하면 6개월 이내에 의무적으로 알려주게 되어 있다. 따라서 2020년 6월이면 어떤 조직에서 누가 이 계좌를 조회했는지 알 수 있다.

4. 1,2,3의 사실을 종합하면, 이런 시나리오가 가능하다.

신라젠 주가 조작에 유시민이 연루되어 있다라는 시나리오를 써서 노무현 재단 예금계좌의 자금 동향과 연결해서 한편의 소설을 쓴다. 여기에 채널A의 기레기를 이용하여 이철에게 접근해서 유시민에 대한 거짓증언까지 확보한다.

그래서 총선(4월15일)에 맞춰 터트려서 현재 여당의 강력한 스피커중 한명인 유시민을 걸레로 만들어서 여당에게 큰 타격을 가한다.

위에서 썼지만 검찰이 노무현 재단의 예금계좌를 조사했는지는 6월달이나 되야 확인이 가능하다. 그러니 4월 총선에 유시민을 걸레로 만들어 여당의 스피커를 망가뜨리려는 목적은 이미 달성한 후이니, 진실이 밝혀져봤자 국민 대다수는 아무도 관심을 가지지 않을 것이다.

이것은 마치 지금 조국사건의 재판이 진행되면서 그간 최성해, 언론, 검찰이 늘어놓은 온갖 거짓말들이 다 확인되고 있지만 대다수 국민들은 아무런 관심도 없고,언론은 침묵하고 있는 것을 보면 알 수 있는 자명한 사실이다.

조국이 맛이 간 이유가 바로 동양대 총장 최성해의 거짓증언부터 시작된 것이다(딸 조민양을 알지도 못하고 표창장도 준 적이 없다). 하지만 여전히 최성해가 조국 사건에 대해 거짓말을 했다는 것에 대해 모르는 국민이 많고, 그 사람들은 지금에 와서 그런일을 알아도 "그게 뭐? 아님 말고" 정도로 별 관심도 없다.

이건 어디까지나 시나리오긴 하다. 굉장히 개연성이 높은 시나리오. 하지만 지금의 검찰 정도의 필력이라면 충분히 이런 작품 하나가 나올만하다고 생각한다.

사법고시 2차는 완전한 논술이다. 검사들의 구라는 참으로 치밀하고 꼼꼼하다. 이런 솜씨로 검사질을 할게 아니라 방송 시나리오나 소설을 쓰면 참 좋을텐데라는 안타까운 마음뿐이다.

 

(보충 : 4월3일 김종배의 시선집중에 출연한 유시민 이사장은 이 내용과 관련하여, 검사를 한동훈 부산고등검찰청의 차장검사이며, 채널A의 기자는 이동재라고 실명을 확인했다)

 

한동훈 검사(윤석열 검찰총장 뒤에서 바라보는 사람)

 

이동재 기자(왼쪽에서 두번째, 2019년8월 이달의 기자상 수상 기념 사진, 채널A제공)

영화 HER는 주인공인 테오도어(호아킨 피닉스)가 연예편지를 쓰는 장면으로 시작된다. 정확히 이야기하면 테어도어의 직업은 연예편지를 대필해주는 사람이다. 근미래를 배경으로 하는 이 영화에서 그가 사용하는 입출력 인터페이스(I/O)는 음성인식 기반이다. 그가 말한 내용을 인식한 A.I는 모니터에 손편지지 모양의 프레임에 손글씨의 폰트를 이용해서 결과물을 만들어낸다.

 

 

1995년 사이버펑크 애니메이션의 기념비적인 작품중의 하나인 오시이 마모루의 공각기동대(Ghost in the shell)에서는 인간들이 강화된 신체(Enhanced body)로 일부 혹은 전체가 사이보그화 되 세계를 그리고 있다.

인간과 컴퓨터간의 여러가지 인터페이스 방법이 나오는데 매트릭스에서처럼 인간의 신체에 코드를 꽂아서 직접적으로 연결하는 방법과, 위의 영상처럼 강화된 손가락을 이용해서 개량된 키보드를 이용하여 입력의 속도를 높이는 방법등이 보여진다.

 

내가 처음 PC를 접한 것은 80년대 후반으로, 당시에 컴퓨터 자판의 입력방법에 대한 이슈가 있었다. 특히 한글 자판 입력에 있어서 두벌식이냐 세벌식이냐라는 문제가 컴퓨터 잡지에 단골로 등장하는 문제였다. 전통적인 두벌식 자판에 대해 세벌식은 한글의 원리에 맞고, 입력의 속도와 효율을 높이는 취지에서 개발되었다고 한다. 

나는 컴퓨터 자판을 익히는 시기에 두벌식으로 배웠다. 그리고 여태까지 세벌식엔 관심을 가져본 일조차 없고 아마도 앞으로도 특별한 일이 없는한 세벌식엔 별 관심을 둘 일이 없을 것이다.

 

영어자판의 경우 쿼터(QWERTY)라고 하는 자판이 가장 널리 사용되는데, 이 자판 역시 입력 효율성의 문제로 영어권에서는 이미 훨씬 효율적인 개량된 자판이 개발되었다. 하지만 한글에서 개량된 세벌식보다는 여전히 두벌식이 더 널리 사용되는 것과 같이, 영어자판 역시 쿼티가 여전히 대세이다.

쿼티가 타수(분간의 입력글자의 숫자로 타자의 속도를 의미)에 비효율적인 면이 있는 이유는 이 자판이 기계식 타자기(Typewriter) 시절에 개발되었기 때문이라는 설이 가장 유력하다. 기계장치로 엮여있는 타자기의 초기자판(쿼티랑 다른)은 너무 빠르게 칠 경우 타이프바가 얽혀서 타이프쨈(Type Jam)과 같이 타자기가 고장나는 경우가 있었다고 한다. 이에 타자를 치는 사람이 너무 빠르게 글자들을 칠수 없도록 하기 위해 자판을 수정한 결과 쿼티 자판이 나오게 된 것이다.

 

기계식 타자기에서 피씨로 입력장치가 바뀌면서 나온 전자식 키보드에서는 기계식에서 있었던 타이프쨈 문제가 자동적으로 해결되었다. 따라서 쿼티 자판처럼 일부러 속도를 제한할 이유가 없기 때문에, 자판의 속도를 더 효율적으로 개선할 수 있는 개량 자판이 나올 수 있는 환경이 만들어졌다.

하지만 쿼티보다 성능이 개선된 개량 자판을 만든 결과는 한글에서 세벌식 자판이 개발됐어도 두벌식이 여전히 사용되는 것과 비슷했다.

사실 그 이유는 매우 자명하다. 기존 자판을 배운 수억(혹은 수십억) 명에 이르는 기존의 사용자들로서는 새로이 수개 월 이상을 투자해서 새로운 자판을 배우는 편익이 불분명하기 때문이다. 아주 전문적으로 타이프를 해야 하는 사람이라면 혹시 필요할 수도 있겠지만, 일반적으로는 분당 200타를 치나 분당 500타를 치나 그리 큰 차이가 없는 것이다. 물론 아주 도전정신이 뛰어나거나 자신의 타이프 속도를 극한까지 끌어올리려는 소명을 느끼는 사람은 아마도 적극적으로 배우려 들 것이긴 하지만.

 

위의 2개의 영상에서 보듯이, 미래에는 두벌식이냐 세벌식이냐 혹은 쿼티냐 개량자판이냐는 문제는 의미가 없어질 것이다. 강화된 신체를 통해서 새로운 입력방법이 신체에 이식되거나, 아예 음성인식을 통해 A.I는 인간이 구술한 것을 우리가 원하는 형태로 입력하고 그대로 출력까지 해줄 것이기 때문이다.

 

기계 문명이 궁극으로 가면 우리는 I/O의 인터페이스에 대한 고민(물론 컴퓨터 아키텍트를 하는 사람은 계속 고민을 하겠지만)은 사라지게 될 것이고, I/O의 대상이 되는 내용물(Contents)에 집중하게 될 것이다.

 

A.I에 대한 많은 논의가 있지만 가장 중요하게 남는 본질은 내용물에 있다. 궁극의 물음은 이 내용물을 과연 A.I가 만들어 낼 수 있느냐이다. 최근에 A.I를 이용한(주로 패턴인식에 따른 머신러닝 기법이 적용된) 작곡, 소설의 창작, 회화에 이르기까지의 다양한 시도들이 있다. 이것은 초보적인 모방으로 볼 수 있다. 모든 창조는 모방으로부터 나온다는 것은 상식적인 일이지만, A.I의 모방이 과연 우리가 알고 있는 그 모방과 같은것인가? 그리고 그 모방으로부터 A.I는 결국 새로움을 창조해낼 수 있을 것인가는 앞으로 지켜봐야 할 문제이다.

 

인류가 문명의 어떤 전환점에 와 있다는 느낌은 매우 강하다. 커즈와일이 이야기한 특이점(Singularity)의 도래를 수십 년 내로 볼 수 있게 될까? 흥미진진하기도, 두렵기도 한 순간이다.

 

 애널리스트이인 홍춘욱의 프랑스 탐방기. 당시 중학생인 아들과 프랑스 여행을 하면서 아들의 질문 내용을 모티브로 쓴 책이다. 손쉽게 읽을 수 있는 가벼운 내용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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p96

 마지막으로 유럽과 동양의 운면을 가른 요인은 '농업'이었습니다. 중세까지는 동아시아나 유럽이나 전체 인구의 90% 이상이 농민이었습니다. 그렇지만 두 지역에서 재배되는 작물은 확연히 달랐습니다.

 유럽은 밀리 주로 재배된 반면 아시아는 벼가 일반적이었죠. 벼는 밀에 비해 훨씬 수확량이 많습니다. 따라서 같은 면적에서 더 많은 인구를 부양할 수 있습니다. 또한 아시아의 벼는 몇 십년간 같은 땅에서 농사를 짓고 2모작이나 3모작이 가능하지만 유럽에서는 같은 땅에서 연이어 농사를 짓지 못합니다. 밀은 지력 고갈이 심한 작물이기 때문입니다.

 이렇게 재배 작물의 생산성에 큰 차이가 발생하다 보니 유럽과 중국의 인구 격차가 끝없이 벌어집니다. 19세기 초반 영국의 인구는 1천 2백만 명 남짓했지만 청나라 인구는 4억을 돌파합니다. 토지가 아무리 넓다 하나 인구가 워낙 많으니 1인당 소득이 낮아집니다. 당연히 저축의 여력도 떨어질 수밖에 없죠.

 물론 사회 전체의 소득은 증가할 수 있습니다. 왜냐하면 워낙 인건비가 싸니 사람을 투입함으로써 생산을 계속 늘려나갈 수 있거든요. 특히 유럽 사람들은 은을 들고 비단과 차, 면직물을 사러오니 가계 소득은 늘어납니다.

 중국이 아주 적은 생산량 증가를 위해 많은 노동력을 투입하는 동안 영국에서는 전혀 다른 변화가 나타났습니다. 원래 인구가 적고 1인당 소득도 높으니 저축 수준도 높습니다. 왜냐하면 사람 몸값이 비싸니까 대신 기계를 써서 고용을 절약하는 게 남는 장사가 되기 때문입니다.

 옥스퍼드 대학교 로버트 앨런 교수는 왜 영국에서 산업혁명이 일어났는가를 설명하려면, 영국의 발명가들이 많은 시간과 돈을 필요로 하는 기계를 만드는 데 몰두했는지 이해해야 한다고 말합니다. 증기기관을 비롯한 값비싼 기계는 노동을 절약할 수 있었죠. 워낙 영국의 인건비가 비쌌기에 기계는 충분히 값을 했습니다. 반면 베이징에서는 이익이 나지 않습니다.

 중국은 인건비가 싸고 사람도 넘치니까 웬만한 일은 그냥 사람을 쓰는 방향으로 갑니다. 반대로 영국은 사람도 적고 인건비도 비싼 편이니 인건비를 절약하는 종류의 기계를 사용하는 데 거침이 없죠. 특히 영국은 발명 특허권이 잘 발달되어 있어 발명가가 큰돈을 벌 수 있었다는 것도 한몫했습니다.

 

 김정운. 직업은 뭐라고 해야 하는지 잘 모르겠다. 원래 대학교수였는데 지금은 그저 김정운 이라는 사람으로 살아가려는 지식인이라고 해야 할까? 

 

 제목처럼 창조란 편집이다라는 주제에 대한 이야기다. 이 사람 시각은 독특한 면이 있다.  난 이 분이 주장하는 내용들이 마음에 든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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p21

 창조적 사고는 이 같은 일상의 당연한 경험들에 대한 '의심'에서 시작된다. 이를 가리켜 러시아 형식주의의 대표적 이론가 시클롭스키Shklovsky는 '낯설게 하기ostranenie' 라고 정의한다. 인간의 가장 창조적 작업인 예술의 목적은 일상의 반복과 익숙함을 낯설게 해 새로운 느낌을 느끼게 만드는 데 있다는 거다.

 우리 삶이 힘든 이유는 똑같은 일이 매번 반복되기 때문이다. 아침마다 '아, 남의 돈 따먹기 정말 힘들다!' 며 출근하고 끝없이 참고 인내해야 하는 삶에는 그 어떤 탈출구도 존재하지 않는다. 창조적이고 싶다면 무엇보다 이 따분하고 지긋지긋한 삶을 낯설게 해야 한다. 우리 삶에 예술이 필요한 이유다.

 

p22

 19세기 말 인상파로부터 20세기 초반의 피카소, 칸딘스키 등의 추상회화에 이르는 과정에서 수천 년간의 회화 표현 방식이었던 재현의 해체가 시작된다. 더 이상은 외부 대상을 모방하지 않겠다는 구상회화의 포기는 '창조적 작업으로서의 예술'을 선언하는 것이기도 했다.

 

p24

 트위터나 페이스북 같은 소셜네트워크를 통해 정보가 공유되고 지식이 구성되는 세상의 변화에 대해 애플의 스티븐 잡스는 이렇게 주장했다.

 "민주주의에는 자유롭고 건강한 언론이 중요하다. ... 뉴스를 모으고 편집하는 조직이 그 어느 때보다 중요하다. 나는 미국이 블로거들의 세상이 되는 것을 원치 않는다. 과거 어느 때보다도 편집자가 중요한 세상이 되었다."

 2010년 《월스트리트저널》 주최로 열린 제8회 'All Things Digital' 컨퍼런스에서 한 이야기다. 에디터, 즉 편집자에게로 권력이 이동하고 있음을 주장하는 거다. 스티브 잡스가 옳다. 더 이상 정보 자체가 권력이 아닌 세상이다. 정보 독점은 이제 불가능하다. 세상의 권력은 정보를 엮어내는 편집자들의 몫이다.

▶ 요즘은 미디어의 발달로 수퍼 콘텐츠 크리에이터(인플루언서를 뛰어넘는 이들, 유발 하라리, 먹방 스타인 쯔양 등)가 직접 SNS등을 통해 직접적으로 독자들과 소통을 하는 경우가 많다. 이들도 수퍼 편집자라 볼 수 있다

신문사의 젊은 기자들은 한결같이 데스크에 앉아 자신들이 작성한 기사에 연필로 밑줄 그어가며 맞춤법까지 문제 삼는 선배들을 욕한다. 편집의 권력을 일방적으로 행사하기 때문이다. 그러나 종이 신문 데스크의 그 막강한 권력도 이제는 인터넷 포털 사이트의 젊고 어설픈 편집자에게 대항하기에는 역부족이다. 포털 사이트의 헤드라인에 올라가는 기사를 선택하는 권력은 전국 종이 신문 데스크 권력을 다 합친 것보다 강하다.

 

p28

 한국 사회의 충격은 실로 엄청났다. 다들 그의 논문이 참인지 거짓인지에만 관심을 가졌다. 국가적 자존심의 훼손만 걱정했다. 그러나 황우석 사건의 본질은 따로 있었다. 지식권력이 이제 더 이상 대학에 있지 않다는 사실이다.

 지식권력인 대학의 붕괴는 이미 여러 곳에서 감지되고 있었다. 그 징조들이 황우석 사건을 통해 폭발한 것이다. 여태까지의 지식은 대학에서 만들어지는 것이었다. 지식은 대학이 정한 절차에 따라 논문이라는 형식으로 만들어졌다. 교수는 지식을 심사하고, 그 결과에 권위를 부여하는 지식권력 시스템의 최정점이었다.

 이 같은 국가 공인의 지식권력이 보장하고, 세계적 지식권력에 의해 검증된 국가적 자부심인 황우석의 논문이 정체불명의 하찮은(?) 네티즌들에 의해 처절하게 붕괴된 것이다. 지식 편집의 독점권을 가진 대학의 붕괴가 황우석 사건의 본질이라는 이야기다. 그런데 이 부분에 관해서는 지금까지 아무도 논하지 않는다.

▶ 황우석 사건이 대중에게 이슈가 되기 시작한 것은 물론 PD수첩에서 방송되고 난 이후다. 하지만 PD수첩에서 방송이 되어 전에 이미 BRIC(Biological Research Information Center), 즉 생물학연구 정보센터라는 생물학 전문가들이 이용하는 인터넷 포럼에서 황우석의 줄기세포 논문이 위조여부가 이슈가 되어서 치열한 논쟁이 벌어지고 있었다. 황우석의 논문이 정체불명의 하찮은 네티즌들이라고 하기에는 과장이 크다. 이 포럼에는 한국의 생명공학, 생물학, 생화학 등의 최고 전문가들이 여전히 활동중이다.

 

p41

 자기 텍스트를 써야 제대로 학문을 하는 거다. 오늘날 인문학 위기를 말하는 이유는 한국의 콘텍스트에 맞는 텍스트 구성의 전통이 없기 때문이다. 서양인들의 텍스트로 서양의 학문을 하니 도무지 상대가 안 되는 거다.

 텍스트는 반드시 해당 콘텍스트에서 생성된다. 하버마스의 비판이론도 프랑크푸르트학파, 실증주의 논쟁, 포스트모더니즘 논쟁이라는 20세기 유럽 지성사의 콘텍스트가 있었기에 가능한 것이다. 언젠가 하버마스가 한국에 와서 강연한 적이 있다. 하버마스를 전공한 국내 학자들이 모두 모였다. 그러나 정작 하버마스는 뜬금없는 이야기만 하다 갔다. 그 내용은 이렇게 요약된다. "한국에도 위대한 정신 · 문화적 전통이 있다. 그 콘텍스트에 근거한 이론이 구성되어야 한다."

 

p57. 검증 가능성 - 반증 가능성 - 편집 가능성

 과학과 비과학을 결정하는 기준으로 논리실증주의자들은 '검증 가능성verifiablility' 을 주장한다. 경험적으로 검증 가능한 이론만이 과학적 지식이 될 수 있다는 주장이다. 포퍼Karl R. Popper는 인간의 경험은 시공간적으로 한계가 있기에 모든 것을 다 경험할 수는 없다며 논리실증주의의 검증 가능성을 비판한다.

 

 포퍼는 과학적 지식과 비과학적 지식의 기준으로 '반증 가능성falsifiability' 을 내세운다. '백조는 희다' 는 가설을 검증하기 위해 세상의 모든 백조를 검증할 수는 없지만, 검은 백조 한 마리만 발견되어도 그 가설은 틀린 것이 된다. 모든 지식은 이렇게 반증의 사례가 발견될 때까지만 한시적으로 옳은 것이고, 과학적 지식은 이렇듯 반증할 수 있는 가능성이 열려 있어야 한다는 뜻이다.

 포퍼에 따르면 마르크스 이론이나 프로이트 이론은 비과학적이다. 반증 자체가 아예 불가능하기 때문이다. 내부의 논리 구조는 그럴듯하지만, 이론의 옳고 그름을 판단할 가능성 자체가 아예 닫혀 있다. 그러나 포퍼의 과학과 비과학을 나누는 반증 가능성에는 시간이라는 요인이 빠져 있다. 시간의 흐름에 따라 구성되고, 변화하는 '구성주의적 세계관' 과는 거리가 먼, 날근 실증주의적 세계관의 변종이다. 주체적 행위의 개입이 불가능한, 인식의 주체와 개체가 철저하게 격리된 세계관일 따름이다.

 21세기에는 지식의 옳고 그름을 따지는 것 자체가 그리 중요한 사안이 아니다. 증명해야 하고, 확인해야 할 '객관적 세계'에 대한 신념 자체가 폐기된 지 오래되었기 때문이다. 지식의 옳고 그름보다는 '좋은 지식'과 '좋지 않은 지식'으로 구분하는 것이 더 구체적이고 실용적이다. 좋은 지식의 기준은 '편집 가능성'에 있다. 현재 진행형의 세계와 상호작용하며 변화를 가능케 하는 주체적 행위가 가능한 지식이 좋은 지식이다. 편집 가능성이 있는 지식이 좋은 지식인 것이다.

 

 

p65

 몽타주 기법의 창시자로 불리는 소비에트의 쿨레쇼프Kuleshov는 소위 '쿨레쇼프 효과'라고 불리는 흥미로운 실험으로 몽타주 기법의 심리적 효과를 확인했다. 그는 소비에트의 유명한 배우인 모주힌Mozzhukhin의 무표정한 얼굴이 찍힌 화면에 각기 다른 세 가지 화면을 이어붙였다. 하나는 김이 모락모락 나는 수프, 또 하나는 관에 누워 있는 여인, 마지막으로 곰 인형을 가지고 노는 어린아이였다.

 흥미롭게도 관객들은 모주힌의 무표정한 얼굴을, 그 뒤에 이어진 화면이 어떤 것이었느냐에 따라 각기 다른 표정으로 받아들였다. 수프가 이어진 장면에서 모주힌이 배고파하며 수프를 먹고 싶어 하는 표정으로 느꼈다. 관에 누워 있는 여인이 이어진 장면에서는 모주힌이 여인의 죽음을 슬퍼하는 것으로, 곰 인형을 가지고 노는 어린아이가 이어진 장면에서는 아이를 예뻐하는 모습으로 보았다. 동일한 배우의 표정이 어떻게 편집되느냐에 따라 각기 다른 의미로 받아들여진 것이다.

 

 

 몽타주 기법의 핵심은 'A장면'과 'B장면'의 합은 'A,B'가 아니라 'C'가 된다는 데 있다. 이는 '부분의 합은 전체가 아니다!'라는 게슈탈트 심리학의 명제와 동일하다. 각각의 부분이 합쳐지면 부분의 특징은 사라지고, 전체로서의 전혀 다른 형태Gestalt가 만들어진다는 뜻이다. 이 같은 몽타주 기법이 작동할 수 있는 이유는 '완결성의 법칙law of closure'이라는 게슈탈트 심리학적 원리 때문이다.

 '폐쇄성의 법칙'으로도 불리는 이 완결성의 법칙은 불완전한 자극을 서로 연결시켜 완전한 형태로 만들려고 하는 인간의 본능적 경향을 의미한다. 예를 들어, 중간중간이 떨어져 있는 원 모양의 띠를 완벽하게 이어져 있는 원으로 인식하는 경우다.

 

p85

 르네상스 시대 원근법의 발견으로 비롯된 주체와 객체의 인식론적 통찰이 의사소통의 문제로 연결되는 이유는 '객관성이란 객관적으로 존재하는 것이 아니기' 때문이다. 객관적 관점이란 각기 다른 인식의 주체들이 '같은 방식으로 보기joint-attention' 로 서로 약속해야 가능하다. 다시 말해 객관성이란 원래 있는 것이 아니라, 상호 합의의 결과라는 것이다. 그래서 오늘날 인문학에서는 객관성이란 단어를 '상호주관성intersubjectivity' 으로 대체한다.

 상호주관성의 시대에는 각 주체들 간의 소통이 중요하다. 그래야 서로 동의할 수 있는 객관적 혹은 상호주관적 시점을 만들어낼 수 있기 때문이다. 세상을 바라보는 퍼스펙티브를, 각 주체들 간 상호 합의의 결과가 아니라 객관적 관점이라고 우기는 사람이 자주 있다. 이때는 반드시 어떤 권력이 개입되어 있다고 의심해야 한다.

 

p116

 독일의 국경은 수시로 변경되었다. 잦은 전쟁으로 승전과 패전을 반복했기 때문이다. 특히 제1차 세계대전의 패전은 뼈아팠다. 전쟁이 끝난 후 이뤄진 베르사유조약으로 인해, 독일은 해외 식민지를 모두 잃고 알자스로렌을 프랑스에 반납하는 등 영토의 13퍼센트를 잃었다. 물론 이 땅들 대부분은 이전의 전쟁에서 빼앗아 온 것이었다. 하지만 패전에 이은 경제적 어려움으로, 영토를 잃은 독일인들의 박탈감은 이루 말할 수 없었다.

 바로 이때 히틀러가 '레벤스라움Lebensraum, 생활권' 이라는 개념을 들고 나타났다. 1924년 뮌헨 반란으로 감옥에 갇혀 있는 동안 집필한 『나의 투쟁』에서, 독일 민족은 유럽 전체를 독일의 레벤스라움, 즉 독일의 생활권으로 만들어야 한다고 히틀러는 주장한다. 그가 사용한 레벤스라움이라는 개념은 19세기 말 독일의 지리학자 프리드리히 라첼Friedrich Ratzel이 'Lebens생활' 과 'Raum공간' 을 합쳐 만든 조어다. 다윈의 진화론을 국가에도 적용해, 국가도 다른 유기체와 마찬가지로 충분히 먹고, 자고, 숨 쉴 수 있는 공간이 있어야 끊임없이 진화하고 발전할 수 있다는 주장이다.

 레벤스라움이 히틀러의 용어가 되는 데는 칼 하우스호퍼Karl Haushofer 라는 인물의 역할이 결정적이었다. 제1차 세계대전 당시 뮌헨 대학의 교수였던 하우스호퍼는 어릴 때부터 부친과 친구였던 라첼로부터 깊은 영향을 받았다. 라첼과 마찬가지로 하우스호퍼도 국경은 생명체의 피부처럼 살아 있는 것으로 생각했다. 이러한 그의 생각을 히틀러에게 전달한 사람은 후에 나치 독일의 2인자가 된 루돌프 헤스Rudolf Hess 였다. 헤스는 뮌헨 대학 재학 당시, 하우스호퍼의 조교였다.

 하우스호퍼의 레벤스라움은 나치 독일에만 영향을 미친 것이 아니다. 일본 제국주의를 합리화하는 이데올로기가 된다. 하우스호퍼는 독일과 일본을 왔다 갔다 하며, 두 나라의 제국주의가 닮은 꼴이 되도록 가교 역할을 했다. 하우스호퍼는 실제 일본이 한반도를 집어삼키기 바로 이전 해인 1909년에 일본에서 1년간 살았다. 한반도를 식민지로 만들어가는 일본 제국주의의 전략을 지켜보며 자신의 레벤스라움 개념을 가다듬었다.

 독일로 돌아온 하우스호퍼는 일본을 극동아시아 레벤스라움의 지배자로 찬양한다. 가는 곳마다 일본을 레벤스라움 이데올로기의 모범적 사례로 소개했다. 그의 활동에 감동한 일본은 하우스호퍼의 레벤스라움을 일본 제국주의의 이론적 토대로 받아들였다. 그를 흉내 낸 개념도 만들었다. '대동아공영권大東亞共榮圈' 이다. 일본의 대동아공영권은 히틀러가 부르짖은 레벤스라움의 변종이라는 이야기다. 이렇듯 히틀러의 레벤스라움은 지구 정반대편에 있는 한반도와도 이토록 깊은 관련이 있다. 그 당시에도 세상은 참으로 좁았다.

 

 하우스호퍼를 통해 레벤스라움을 알게 된 히틀러는 이 개념은 자신의 나치 이데올로기에 바로 적용한다. 베르사유조약으로 영토를 빼앗긴 독일은 인구에 비해 영토가 형편없이 부족하다고 주장한다. 또한 자국민을 먹여 살릴 충분한 영토를 얻기 위해서는 폴란드, 우크라이나, 러시아에 있는 슬라브인들의 땅을 빼앗아야 한다고 선전한다. 그들은 독일의 아리아 민족에 비해 열등하기 때문에 그래도 된다는 것이다. 이때 독일 영토가 지난 수백 년간 어떻게 줄어들었는가를 보여주는 하우스호퍼의 지도는 독일의 레벤스라움이라는 생명체가 어떻게 죽어가고 있는가를 보여주는 아주 효과적인 선전 수단이었다.

 히틀러의 레벤스라움 이데올로기에 영향을 미친 또 한 사람이 있었다. 그도 '공간Raum'을 이야기했다. 소설가 한스 그림Hans Grimme이다. 아프리카를 오가며 장사하는 상인이었던 그림은 제1차 세계대전에 참전하다. 그리고 전쟁이 끝나자 독일에 눌러앉아 작가가 된다. 이때 그가 발표한 소설이 『공간 없는 민족Volk ohne Raum』이다.

 

 1926년에 출판된 그의 소설은 당시 독일의 모든 사회문제는 '공간 부족'때문이라는 내용이다. 따라서 독일이 산적한 문제를 해결하기 위해서는 공간 확장밖에는 해결책이 없다고 주장한다. 당시 독일인들에게 이처럼 인과관계가 명확한 설명은 없었다. 한스 그림의 소설을 히틀러가 사랑하고, 수시로 언급한 것은 당연했다.

 공간 상실에 대한 강박으로 시작한 나치 독일은 또 다시 엄청난 공간 상실로 끝이 났다. 전쟁 후, 동쪽 국격이 오데르-나이세Oder-Neisse 라인으로 그어졌다. 동프로이센을 포함한 독일 고유 영토로 여겨졌던 상당한 크기의 공간을 빼앗긴 것이다. 뿐만 아니다. 남은 독일 영토도 동독과 서독으로 나뉘어 승전국들의 관리를 받게 된다. 독일이 자기 국토를 다시 회복한 것은 채 30년도 되지 않는다.

 

p140

 아동이나 가족, 부부의 개념이 문화적 산물이라면, 보다 보편적인 '개인'과 같은 개념은 어떨까? 이 또한 문화적 구성물일까? 물론이다. 개인 혹은 사회, 문화라는 개념들은 모두 어느날 갑자기 만들어졌다.

 서구의 근대를 가능케 한 'culture' 'society' 'individual'에 조응하는 개념이 과거 동양에는 없었다. 이들 개념의 번역인 '문화' '사회' '개인'과 같은 단어는 일본 메이지 시대 지식인들이 만들어냈다. 이 개념들을 오늘날처럼 자연스럽게 사용하게 된 것은 고작 100여 년에 불과하다.

 

 

 

 한번 생각해보라. 오늘날 우리가 너무나 당연하게 여기는 개인과 사회라는 단어가 없었다는 것이 도대체 상상이 되는가? 개념이 없다는 것은 개인과 사회에 관한 의식 자체가 없었다는 말이다.

 

p141

 문명화civilization의 어원인 'civil'은 원래 '예절 바른'을 뜻한다. '사회적social'이라는 단어와는 거의 동의어로 쓰였다. 문명화란 말 그대로 품위 있고, 예의 바른 행동으로 발전을 뜻한다는 이야기다. 문명화 과정의 핵심 내용인 '합리화rationalization' 란 본능적 감정이 사회적으로 허용되는 세련된 표현으로 자리 잡아가는 과정이라는 것이 노베르트 엘리아스Nobert Elias의 주장이다.

 합리적인 문명사회는 각 개인이 예절 바른 교양인이 되어야 함을 전제로 한다. 서구 근대에서 아동 개념의 탄생은 이러한 교양 교육의 맥락과 깊은 관계가 있다는 것이 아리에스의 주장이다. 그저 '작은 어른'일 따름이었던 아이들이 별도의 교육을 받게 된 가장 큰 이유는 '원시적 감정'을 억제할 수 있는 합리적 성인으로 성장해야 하기 때문이다. 이렇게 합리적인 성인으로 발달하는 과정에 있는 존재를 '아동'이라고 부른 것이다.

 

p143

 아동과 마찬가지로 청소년 또한 교육을 받아야 할 대상이다. 그러나 실제 내용은 아주 다르다. 아동 개념에는 그래도 '사랑스러움'이나 '귀여움'과 같은 긍정적 정서가 동반된다. '사랑과 관심의 공동체'로서의 가족이라는 사회적 표상social representation에는 항상 아동이 부부 사이에 있다. 그러나 청소년은 달랐다.

 청소년은 처음부터 불량한 개념이었다. 청소년의 또 다른 이름 'juvenile'은 거의 청소년 범죄juvenile delinquency'의 축약어로 쓰인다. 스탠리 홀은 이 청소년기를 '질풍노도Strum und Drang'의 시기로 명명하며 그 불안정한 특징을 더 노골화했다. 이 같은 방식으로 청소년 개념을 편집할 사회구조적 필요성이 있었기 때문이다.

 무엇보다도 급격한 산업화 때문이다. 일단 대량생산과 대량 소비를 위해 훈련된 노동력이 급하게 필요했다. 그러나 기존의 소규모 도제제도와 같은 교육 방식으로는 당시 사회가 필요로 하는 대규모 노동력을 키워낼 수 없었다. '사랑의 공동체'가 되어버린 가족 또한 더 이상 교육의 기능을 수행할 수 없었다. 자연스럽게 가족에서 교육의 기능이 떨어져나갔다. 교육은 모두 학교에 맡겨졌다.

 학교는 자신들이 담당해야 할 교육의 필요성을 정당화해야 했다. 바로 이러한 맥락에서 불안하고, 위험하고, 도무지 어디로 튈지 모르는 청소년의  표상이 만들어진 것이다. 즉, '청소년은 매우 불안하고 위험한 존재이기에 반드시 학교에서 교육받아야 한다' 는 이데올로기다.

 한국에서 청소년 개념도 비슷한 경로로 자리 잡았다. 1991년 청소년기본법이 제정된 후 청소년지도사, 청소년상담사와 같은 자격증이 만들어졌다. 아울러 이를 위한 전문 교육기관이 대학에 정식으로 설립되었다. 그러나 '청소년 지도' '청소년 상담' 과 같은 개념은 '청소년은 반드시 지도와 상담이 필요한 불안한 존재'라는 근대적 표상을 전제하고 있다. 그래서 한국어의 청소년 개념 또한 항상 '비행-청소년' 아니면 '청소년-문제'로만 연결되는 것이다. (청소년 개념이 달리 연결되는 것을 보았는가?)

 

 아동과 청소년의 개념은 근대 이후 탄생한 '개인'이 어떠한 방식으로 편집되었는가를 잘 보여준다. 근대적 주체가 그 산업 사회적 존재 양식에 따라 어쩔 수 없이 '객체화'라는 '소외Entfremdung 현상' 을 동반하듯, 근대적 개인은 각 연령에 따라 아동, 청소년과 같은 각 발달단계로 귀속되어 또 다른 형태의 소외된 아이덴티티를 얻게 된 것이다.

 21세기에 들어서는 또 다른 연령대의 개인이 새롭게 편집되기 시작했다. '노인'이다. 이제까지의 발달은 성인이 되면 완성되는 것이었다. 성인이 되어 생산활동을 하다가 은퇴하면 바로 죽었기 때문이다. 평균수명이 그만큼 짧았다. 더 이상의 발달은 필요 없었다. 그러나 이제는 은퇴한 이후에도 수십 년을 더 살아야 한다. 평균수명이 100세에 가까워지고 있다. 개인의 발달이 성인 단계에서 끝나서는 안 된다는 새로운 편집의 내적 필연성이 생긴 것이다. 계속 발달하지 않으면 죄다 '성질 고약한 노인네' 가 되기 때문이다.

 성질 고약한 노인데는 비행 청소년만큼이나 위험하다. 그래서 요즘 발달심리학에서는 '전생애발달life-span-development' 를 이야기한다. 죽을 때까지 끊임없이 발달해야 한다는 거다. 근대 이후 생겨난 개인은 이와 같은 방식으로 필요에 따라 끊임없이 해체되고 재구성되는 편집의 과정을 겪고 있다.

 

 

p145

 역사적 사건은 물론 인식을 가능케 하는 정신의 도구, 즉 개념들이 역사적으로 편집되었다는 관점을 갖게 되면 주체적 행위의 가능성과 한계를 정확히 파악할 수 있다. 이 같은 구성주의 혹은 구조주의적 서술은 실증주의적 역사 서술의 근본 전제를 상대화하는 메타적 방법론이다. 개념들의 '생성'에 관한 엘리아스와 아리에스의 메타적 편집 테크닉은 미셀 푸코Michel Foucault 의 지식계보학 혹은 지식고고학에서 절정을 이룬다.

 실제로 푸코는 아리에스가 없었다면 자신의 책을 출판할 수조차 없었다. 지금도 여전히 현재진행형으로 읽히고 있는 푸코의 대표작 『광기의 역사』 는 당시 대부분의 유명 출판사로부터 퇴짜를 당했던 원고다. 마침 플롱 출판사에서 출판 기획을 맡고 있던 아리에스가 우연히 그의 원고를 읽고, 반대를 무릎쓰며 출판을 고집한다. 그 결과 푸코의 첫 저작인 『광기와 비이성 : 고전주의 시대의 광기의 역사』 가 출간될 수 있었던 것이다.  

 

p148

 현대 심리학의 '일관된 자아' 에 대한 요구는 자아 구성 과정에 관한 무지에서 나온다. 내 안의 나는 항상 많다. 당연히 그런 것이다. 그렇다고 괴로워하거나 노여워하는 것은 '오버'다. 일관된 자아에 대한 오버는 '억압'을 낳는다. 자아에 대한억압된 기억은 타인의 내러티브를 왜곡하고 부정한다.

 

p151

 빌 게이츠의 이야기는 백 번 옳다. 훌륭하다. 그리고 존경할 만하다. 그러나 문제는 하나도 안 재미있다는 거다. 별로 흥미롭지 않다. 안 들어도 다 아는 이야기 같다. 반면 기부나 노블레스 오블리주에 관해 어떠한 이야기도 한 적 없는 스티브 잡스의 이야기는 뭔가 감동이 있다. 울림이 크다. 듣고 싶어진다. 도대체 무슨 차이일까?

 '계몽'이다. 빌 게이츠는 자신의 이야기를 듣는 이들이 스스로 의미를 편집할 수 있는 기회를 빼앗는다. 일방적으로 완성된 이야기를 한다. 그래서 재미없는 거다. 상호작용이 불가능한 내러티브는 진리를 강요할 뿐, 일리一理 의 해석학이 빠져있다. 반면 스티브 잡스의 내러티브는 상호작용적이다. 편집 가능성이 있다는 이야기다.

 잡스의 정서적 · 모순적 · 자극적 내러티브는 듣는 이들의 적극적인 해석을 필요로 한다. 사람들은 그의 이야기가 갖는 의미를 주체적으로 편집해낼 수 있는 기회를 얻는다. 의미는 스스로 만들어낼 때만 의미 있다. 남이 만들어주는 의미는 전혀 의미 없다. 진리를 계몽하던 시대는 지났다. 듣는 이로 하여금 '주체적 편집의 기회'를 제공해야 상대방의 마음을 사로잡을 수 있다.

 한국 기업 CEO의 이야기에서 이런 감동을 얻고, '의미 편집'의 기회를 얻을 수 있어야 진정한 선진국이 되는 거다. 한국 정치인의 연설에서 눈물 흘리며 삶의 가치와 사회변혁의 용기를 스스로 편집해낼 수 있어야 내 나라가 자랑스러워지는 거다.

 

p164

 민족은 근대 이후에야 기능하기 시작한 가공의 이념이다. 그 이전에는 왕의 국가, 신의 국가였을 따름이다. 절대왕권이 사라진 이후, 국가를 지속하게 할 이념으로 민족이라는 '상상의 공동체'가 나타난 것이다. 한국에서도 마찬가지다. 조선왕조가 무너지기 시작했던 1900년대 이후에나 민족 개념이 나타났다. 일본 제국주의에 맞서기 위한 저항의 이념으로 우리의 '민족' 개념은 편집되었다고 보는 게 옳다. 오늘날 세계화의 과정에서 민족이라는 상상 공동체는 해체되고 있다. 민족 개념 자체가 부정적 개념으로 변하고 있다. 그 화용론적 생명이 다했기 때문이다.

 베를린 장벽이 무너졌을 때다. 당시 독일인들은 "우리는 한 민족이다! Wir sind ein Volk!" 라고 장벽 앞에서 외쳤다. 그러나 통일되지 몇 달 전만 하더라도 동독 사람들은 동독 공산당에 민주화를 요구하며 "우리가 바로 그 인민이다! Wir sind das Volk!" 라고 외쳤었다. 공산당의 주체인 바로 그 '인민Volk' 이라는 주장이다.

 정관사 das에서 부정관사 ein으로 바뀌면서, '프롤레타리아의 인민'이 '독일 민족'으로 바뀐 것이다. 당시 독일 지식인들은 독일 민족주의의 부활을 경계하기도 했다. 그러나 독일의 한 민족 즉 'ein Volk'는 세계화라는 대세에 부응해 몇 년 후 유럽연합의 유러피언european으로 변신한다.

 유독 우리나라만 여전히 '반만년 유구한 역사의 한민족'이다. 남북 분단 때문이다. 그래서 빨리 통일이 되어야 하는 거다. 한 민족이 헤어져 살아서는 안 된다는 이산가족의 당위는 더 이상 유효하지 않다. 헤어진 가족을 만났다고 울며불며 기뻐할 수 있는 사람들이 이제 그리 많이 남아있지 않다.

 '이산가족 찾기'라며 전쟁 때 헤어졌던 가족들이 수십 년 만에 다시 만나게 되어 온 나라가 감격했던 적이 있다. 우리 집안에도 그런 일이 있었다. 전쟁 때 사라졌던 아버지의 가까운 친척이 나타난 거다. 감격한 아버지는 내게 생전 처음 보는 이들을 소개하며 삼촌, 형, 동생이라 부르라고 했다. 그러나 그 이후 한동안 우리 가족은 너무 괴로웠다. 그 삼촌이라는 이가 도박 중독, 알코올 중독이었다. 매번 아버지를 찾아와 돈을 내놓으라고 행패부리고 협박했다. 그가 객사한 후에야 우리 가족의 모든 것이 원래대로 돌아왔다.

 물론 드문 예일 수 있다. 그러나 헤어졌던 가족이 다시 만난다고 바로 '그리고 행복하게 오래오래 살았습니다' 와 같은 옛날 이야기가 되는 것은 절대 아니다. 또 다른 방식의 '지지고 볶는 삶이 시작될 뿐이다. 독일의 경우도 마찬가지다. 통일 후, 다시 만난 가족이 지속적으로 왕래하며 행복하게 잘 지내는 경우는 아주 드물다.

 민족 통일의 기쁨은 아주 추상적이고, 체감하는 현실은 지극히 구체적이다. 독일의 민족 개념이 변증법적 해체의 과정을 걷는 것처럼 민족이라는 낡은 이념도 발전적으로 극복하지 못하면, 우리에게 더 이상 새로운 시대가 열리지 않는다. 그래서 빨리 통일이 되어야 하는 거다. 이 낡은 '민족' 개념의 해체를 위해서다.

 저출산 문제는 '아기를 많이 낳자'고 홍보하고, 출산 지원금을 손에 쥐어 준다고 해결될 문제가 아니다. 적극적인 이민 정책으로만 해결 가능한 문제다. 그러나 한민족의 민족주의가 해체되지 않는 한, 적극적 이민정책이 자리 잡기란 그리 쉬운 일이 아니다. 이래저래 통일이 안 되면 대한민국은 참 어려워지게 되어 있다.

 

p166

 미국의 심리학자들은 인간의 내면을 연구하는 대신 '자극input'과 '반응output'이라는 눈에 보이고 통제할 수 있는 요인만을 심리학 연구대상으로 삼는다. 왓슨J.Watson이나 스키너B.F.Skinner의 행동주의 심리학에서는 자극과 반응 사이에 무엇이 일어나는지 알 수도 없고, 알 필요도 없다. 통제할 수도 없고, 객관적으로 증명할 수도 없기 때문이다. 어떤 요인을 건드리면 어떤 행동이 나오는가만 알면 된다.

 행동주의는 러시아의 생리학자 파블로프Ivan Petrovich Pavlov의 그 유명한 '침 흘리는 개'를 획기적으로 변형시킨 이론이다. 먹이를 줄 때마다 종소리를 듣게 하면, 나중에 종소리만 들어도 침을 흘린다는 그 파블로프의 개는 지극히 수동적인 존재다. 그저 묶여서 먹이를 받아먹고, 종소리를 들을 따름이다. 침도 가끔 흘리고.

 반면 '스키너 상자'에 갇힌 쥐는 수동적인 존재가 아니다. 벽의 지렛대를 눌러야만 먹이를 얻어먹을 수 있다. 먹이를 먹으려면 반드시 주인이 원하는 행동을 해야만 한다. 이렇게 보상과 처벌이라는 '강화reinforcement' 시스템을 도입함으로써 유기체의 행동을 통제할 수 있다는 미국식 이데올로기가 확립된 것이다. 심리학에서는 스키너의 이 같은 행동주의를 '조작적 조건화Operant Conditioning' 라고 하여, 파블로프의 '고전적 조건화Classical Conditioning'와는 확실하게 구별한다.

 스키너의 행동주의는 미국식 자본주의의 암묵적 토대가 된다. 즉, 성과에 따른 보상과 처벌을 다양한 방식으로 부여함으로써, 인간의 행동을 통제할 수 있다는 자본주의적 자신감을 심어준 것이다. 느닷없이 나타난 '듣보잡' 미국식 경영학이 오늘날 대학의 최고 인기 분야가 된 것도 바로 이 스키너식 행동주의를 빼고 설명하기 어렵다. 오늘날의 경영학의 중요 영역인 인사관리 시스템이란 그 근본을 들여다보면 스키너의 행동주의에서 크게 벗어나 있지 않다.

 행동주의 심리학이 미국에서 꽃피운 가장 결정적인 이유는, 증명할 수 없는 가설들로 인간 심리를 이해하려 애쓰지 않았기 때문이다. 그저 원하는 행동을 이끌어내는 확실한 방법론을 찾아내려 했을 따름이다. 인간 행동을 수치화하고, 실험실 조작을 통해 행동을 관찰하고 예측할 수 있는 계량화된 방법론이다.

 

p169

 모든 성과를 개인의 능력으로 환원하는 미국식 심리학의 전성시대는 오늘날 '피로사회Mudigkeitgesellschaft'라는 포스트모던 사회의 모순으로 이어진다.

 

p190

 실제로 언어철학에는 객관적 현상이 먼저 존재하고 언어(혹은 개념)는 이 객관적 현상을 '표상representation'할 뿐이라는 실재론적 입장과, 각 언어나 개념에 대응하는 독립적인 실제가 반드시 존재한다고 확인할 수 있는 방법은 없다는 상대주의적 포스트모던 이론이 양극단에서 대립한다.

 

 특히 소쉬르에서 롤랑 바르트로 이어지는 후기구조주의 언어철학은 '언어 없는 실재는 없다'라는 단호한 입장을 취한다. 언어와 대상의 관계는 그 어떠한 내재적 필연 관계도 존재하지 않는, 철저하게 사회 · 문좌적인 약속일 뿐이라는 전제로부터 소쉬르의 '기호학semiology'은 출발한다.

 

p192

 대신 한국인들은 '구강기 고착'의 성격인 듯하다. 입이 거칠다는 말이다. 목소리도 크고, 담배도 많이 피운다. 욕도 정말 다양하게 잘한다.

 실제로 한국 욕의 종류를 정리해보면 세계 최고 수준이다. 일본이나 독일의 욕은 몇 개 안 된다. 미국 사람들도 가만 보면 나름 한다는 욕이 매번 'shit', 'fuck you'가 전부다. 한국처럼 다양하고 화려한 욕설은 세계사의 유례가 없다.

 한국인들에게는 왜 이런 구강기 고착의 퇴행 현상이 나타나는 것일까? 지난 세월 너무나 가난했기 때문이다. 풍요로운 세월이 거의 없었다. 한 번도 제대로 먹어보지 못했다. 오죽하면 풀뿌리, 나무껍질을 벗겨 먹고 살았을까? 당연히 아기들은 엄마의 젖을 충분히 먹을 수 없었다. 입으로 만족할 수 있는 경험이 박탈된 것이다. 빈곤에 의한 구강기 고착 현상은 지형이 거칠고 풍료롭지 못한 지역의 욕이 훨씬 더 다양하고 화려하다는 사실에서도 확인된다. 요즘 북한 사람들의 욕을 생각해보라.

 

p195

 내 이야기가 가능하려면 사용 가능한 데이터가 풍부해야 한다. 그리고 그 데이터를 자유롭게 연결할 때 얻어지는 메타언어에 익숙해져야 한다. 그것이 바로 공부다. 내가 축적한 데이터를 꼭 써야 한다는 강박을 가질 필요는 없다. 데이터를 축적하고 정리하는 과정에서 그 데이터들에 관한 메타언어를 익히게 되면 데이터베이스의 일차적 목적은 달성된 거다. 이를 나는 '커닝 페이퍼 효과'라고 부른다.

 커닝 페이퍼를 준비하다 보면, 어느새 그 내용을 다 숙지하게 된다. 정작 커닝 페이퍼를 사용할 필요는 없어진다. 이와 마찬가지다. 데이터베이스를 만들며 나름의 개념 체계를 만들다 보면, 어느새 전혀 다른 차원의 생각을 하고 있는 나를 발견할 것이다.

 

p196

 '책은 끝까지 읽어야 한다'는 '엄숙한 독서법'을 신앙처럼 교육받아온 이들이 느꼈을, 모독당한 듯한 기분을 이해하지 못하는 바 아니다. 그러나 책을 끝까지 읽는 것은 정말 바보 같은 짓이다. 내 질문이 없고 내 생각이 없으니, 모든 책을 처음부터 끝까지 다 읽고 있는 것이다.

 물론 정말 재미있는 책은 다 읽지 말라고 해도 끝까지 읽게 된다. 그러나 억지로 책을 다 읽다 보면 내 생각은 중간에 다 날아가 버린다. 읽어야 할 자료도 산처럼 쌓여 있다. 어찌 모든 책을 처음부터 끝까지 다 읽을 수 있겠는가.

 

 

 

 목차와 찾아보기는 주체적 독서를 하는 이들을 위한 것이다. '주체적 책 읽기'란 왜 이 책을 읽어야 하는가에 대한 목적이 분명함을 뜻한다. 주체적 책 읽기는 책을 선택하는 과정에서부터 시작한다. 책을 들춰 목차를 볼 때, 내 눈길을 끄는 내념들이 있다면 그 책을 선택하게 된다. 책 내용을 대충 훑어볼 때, 흥미로운 개념이 나타나면 그 부분을 잠시 읽게 된다. 그리고 저자이력이나 찾아보기, 참고문헌 목록을 보며 책의 구입 여부를 결정한다.

 내게 흥미로운 내용은 내게 이미 익숙한 개념과 책에 나타난 개념의 교차 비교 과정에서 확인된다. 독서는 내가 가진 개념과 저자의 개념이 편집되는 에디톨로지 과정이다. 그래야만 저자의 생각이 내 생각의 일부가 된다. 우리는 저자의 생각을 그대로 받아들이기 위해 책을 읽는 것이 절대 아니다.

 

 

 아주 조심스러운 조언으로 책을 끝내려 한다. 정말 꼭 전하고 싶은 이야기다. 자신의 생각을 풍요롭게 편집하려면 무엇보다도 언어가 자유로워야 한다는 것이다. 내가 오십 넘어 새롭게 일본어를 배우는 이유이기도 하다. 고작 영어 자료 하나 소화하는 것만으로는 한참 부족하다. 그 정도는 누구나 하기 때문이다.

 내가 성격적 결함에도 불구하고 한국 사회에서 이만큼이라도 성취하며 살아남을 수 있었던 것은, 영어와 함께 독일어를 할 수 있었기 때문이다. 당연히 읽는 자료의 내용이 남들과 달랐다. 축적된 데이터가 다른 까닭에 생산되는 지식의 내용도 달랐다.

 일본어 자료를 다룰 수 있게 되면서 지식 편집의 가능성은 상상할 수 없이 커졌다. 같은 개념이라도 한국어, 일본어, 독일어, 영어의 설명이 다르다. 전문 개념으로 들어가면 들어갈수록 더 그렇다. 편집에 사용될 수 있는 경우의 수가 기하급수적으로 늘어난다.

 글로벌 시대를 살아가려면 영어 이외에 꼭 한 가지 언어를 더 배워야 한다. 두 개 이상의 외국어와 데이터베이스 관리 습관을 갖추면, 뭘 하든 그리 두려울 게 없다. 아, 물론 전적으로 내 생각이다.

 

p202

 뭔가 새로운 것을 손에 쥐려면, 지금 쥐고 있는 것을 놓아야 한다. 지금 손에 쥐고 있는 것 꽉 쥔 채 새로운 것까지 손에 쥐려니, 맘이 항상 그렇게 불안한 거다.

 

 책 제목과 같이 현 세기를 살아나가는 지식인으로서 자신이 가진 문제의식을 21가지 주제를 가지고 풀어쓴 내용.

맨 뒤의 명상 챕터는 다소 사변적이긴 하지만 어느 정도 이해되기는 한다. 하지만 이것은 니체가 외치는 초인처럼 덧없는 이야기라고 느껴지긴 한다.

그리고 고통만이 실재다라는 부분에 있어서는 그 논의가 깊긴 하지만 다소 너무 간단하게 실체를 정의한 감이 없지않다.

1번만 읽어서는 평가하긴 곤란하긴 하다. 최소 3독은 해야 할 듯 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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p12

 20세기가 끝날 무렵 파시즘, 공산주의와 자유주의 간의 거대한 이념 전쟁은 자유주의의 압도적 승리로 귀결되는 듯 보였다. 민주적 정치와 인권, 그리고 시장자본주의가 전 세계를 정복하도록 예정된 것처럼 보였다. 하지만 늘 그렇듯이, 역사는 예상 밖의 선회를 했고 파시즘과 공산주의가 붕괴한 후 지금 자유주의는 곤경에 처했다. 그러면 이제 우리는 어디로 향하는가?

 이 질문이 특히 통렬하게 다가오는 것은 정보기술과 생명기술 분야의 쌍둥이 혁명이 지금껏 인류가 맞닥뜨려온 최대 과제를 던지는 이 시점에서 자유주의가 신뢰를 잃고 있기 때문이다. 정보기술과 생명기술을 합친 힘은 조만간 수십억의 사람들을 고용 시장에서 밀어내고 자유와 평등까지 위협할 수 있다. 빅데이터 알고리즘은 모든 권력이 소수 엘리트의 수중에 집중되는 디지털 독재를 만들어낼 수 있다. 그럴 경우 대다수 사람들은 착취로 고생하는 것이 아니라 그보다 훨씬 더 나쁜 지경에 빠질 수 있다. 그것은 바로 무관함 irrelevancce 이다.

 정보기술과 생명기술의 융합에 관해서는 이미 전작 《호모 데우스》에서 상세히 논했다. 하지만 그 책은 장기적인 전망 - 수 세기, 심지어는 수천 년의 관점 - 에 초점을 맞춘 반면, 이 책은 당면한 사회적, 경제적, 정치적 위기에 집중한다. 이 책에서 관심은 비유기적 생명의 창조 여부보다는 복지국가, 특히 유럽연합과 같은 제도에 닥친 위협에 있다.

 이 책에서 신기술이 야기할 모든 영향을 다룰 생각은 없다. 특히 오늘날 기술은 많은 놀라운 약속들을 제시하고 있지만, 이 책에서 나의 의도는 주로 그것이 초래할 위협과 위험을 조명하는 것이다. 기술 혁명을 주도하는 기업과 사업가 들은 자신들이 만든 것을 예찬하는 노래를 부르게 마련이다. 따라서 사회학자나 철학자 그리고 나 같은 역사학자가 할 일이란 경고음을 내고 치명적인 잘못을 유발할 모든 가능성에 대해 설명하는 것이다.

 

p15

 하지만 호모 사피엔스에게는 여유가 없다. 철학과 종교, 과학 모두 시간이 다 돼간다. 사람들은 수천 년 동안 인생의 의미를 두고 논쟁해왔다. 그러나 이 논쟁을 무한정 계속할 수는 없다. 다가오는 생태학적 위기, 커져가는 대량 살상무기의 위협, 현상 파괴적인 신기술의 부상은 그런 여유를 허락하지 않을 것이다. 아마도 가장 중요하게는, 인공지능과 생명기술이 인간에게 생명을 개조하고 설계할 힘을 건넬 것이다. 머지않아 누군가 인생의 의미에 관한 명시적이거나 묵시적인 어떤 이야기를 기반으로 이 힘을 어떻게 쓸지 결정해야 할 것이다. 하지만 공학자는 인내심이 평균보다 훨씬 낮고 투자자는 최악이다. 생명을 설계할 힘으로 무엇을 할지 당신이 모른다 해도, 답을 찾을 때까지 1,000년의 시간을 시장 권력이 기다려주지는 않을 것이다. 시장의 보이지 않는 손은 자신의 맹목적인 답을 당신에게 강요할 것이다. 인생의 미래를 분기 수익 보고서에 맡기는 것이 만족스럽지 않다면, 삶이 무엇인지에 대한 생각을 분명히 할 필요가 있다.

 

p22

 하지만 2008년 세계 금융위기가 닥친 이래 전 세계 사람들은 자유주의 이야기에 점점 환멸을 느끼게 되었다. 장벽과 방화벽이 다시 유행이다. 이민자와 자유무역협정에 대한 저항감은 높아만 간다. 겉만 민주적인 정부들은 사법 체계의 독립성을 전복하고, 언론자유를 제한하며, 어떤 반대도 반역으로 몰아간다. 터키와 러시아 같은 나라의 스트롱맨은 새로운 유형의 반자유주의적 민주주의와 노골적인 독재를 실험한다. 오늘날 중국 공산당을 두고 역사의 잘못된 편에 서 있다고 자신 있게 선언할 사람은 드물 것이다.

 영국의 브렉시트 국민투표와 미국의 도널드 트럼프 부상으로 뚜렷이 각인된 해였던 2016년은 이러한 환멸의 파도가 서유럽과 북미의 핵심 자유주의 국가들에까지 가 닿은 순간임을 의미했다. 몇 년 전만 해도 미국인과 유럽인은 이라크와 리비아를 무력으로 자유화하려 애썼지만, 이제는 켄터키와 요크셔 주님의 다수가 자유주의 청사진을 바람직하지 않거나 이룰 수 없는 것으로 보게 되었다. 어떤 이들은 옛날의 계층화된 세상을 다시 그리워하게 되었고, 이제와서 인종적, 민족적, 젠더적 특권을 포기하지 않으려고 한다. 또다른 이들은 (옳든 그르든) 자유화와 세계화라는 것이 결국에는 대중을 제물로 소수 엘리트들에게 힘을 건넨 거대 사기라고 결론 내렸다.

 

 1938년, 사람들에게 주어진 전 지구적 이야기의 선택지는 세 가지였고, 1968년에는 두 가지밖에 없었다. 그러다가 1998년에는 한 가지 이야기만 득세하는 듯 보였다. 급기야 2018년이 우리 앞에는 하나도 남아 있지 않게 되었다. 최근 수십 년 동안 세계의 상당 부분을 지배했던 자유주의 엘리트들이 충격과 혼미의 상태에 빠진 것도 당연하다. 하나의 이야기만 존재한다는 것은 가장 마음이 놓이는 상황이다. 모든 것이 완벽하게 분명하기 때문이다. 하지만 급작스럽게 아무런 이야기도 없어진 상태는 끔찍한 일이다. 아무런 의미도 파악할 수 없게 된 것이다. 흡사 1980년대 소련의 엘리트처럼 지금 자유주의자들은 어떻게 해서 역사가 예정된 경로에서 벗어났는지 이해하지 못하고 있다. 현실을 해석할 대안적인 프리즘도 가진 게 없다. 방향감을 잃은 이들은 마치 역사가 자신들이 머릿속에 그린 해피 엔딩에 이르지 못한 것이 아마겟돈을 향해 돌진하는 일이라도 되는 양 종말론적 사고에 빠져들었다. 현실을 직시하지 못하면 정신은 재앙적 시나리오에 집착하게 된다. 지독한 두통을 치명적인 뇌종양의 신호라고 상상하는 사람처럼, 많은 자유주의자들은 브렉시트와 도널드 트럼프의 부상이 인류 문명의 종언을 예고한다고 우려한다.

 

p27

 생명기술과 정보기술의 혁명ㅇ은 기술자와 기업가, 과학자 들이 만들지만, 이들은 자신들의 결정이 어떤 정치적 함의를 갖는지 거의 알지 못하고, 어느 누구도 대표하지 않는다. 의회와 정당이 알아서 행동을 취할 수 있을까? 현재로서는 그럴 것 같지 않다. 기술의 파괴적 혁신은 정치적 의제에서 우선 사안도 아니다. 그 결과, 2016년 미국 대선 기간에도 파괴적 기술과 관련해 주로 언급된 것은 힐러리 클린턴의 이메일 스캔들이었고, 실직에 관한 온갖 이야기 중에도 자동화의 잠재적 충격 문제는 어느 후보도 언급하지 않았다. 도널드 트럼프는 유권자들에게 그들의 일자리를 멕시코와 중국이 가져갈 것이며, 따라서 멕시코 국경에 장벽을 건설해야 한다고 경고했다. 하지만 알고리즘이 일자리를 가져갈 거라는 경고는 하지 않았고, 캘리포니아 접경에 방화벽을 세워야 한다는 제안도 하지 않았다. 

 

 이것은 자유주의 서방의 심장부에 있는 유권자들조차 자유주의 이야기와 민주적 절차에 대한 신뢰를 잃어가는 한 가지(유일한 것은 아니더라도) 이유가 될지 모른다. 보통 사람은 인공지능과 생명기술을 이해하지 못할 수도 있다. 하지만 자기 옆을 지나가는 미래를 감지할 수는 있다. 1938년 소련과 독일 혹은 미국에 살았던 보통 사람은 삶의 조건이 암울했을 수는 있지만 자신이 세상에서 가장 중요한 존재이며 미래라는 말을 끊임없이 들었다(물론 그가 유대인이거나 흑인이 아니라 '보통 사람'임을 전제로 했을 때 얘기다). 그는 선전 포스트를 보았고 - 여기에는 보통 석탄 캐는 광부, 철강노동자, 영웅적인 포즈를 취한 가정주부가 그려져 있었다 - 그 속에서 자신을 봤다. "저 포스터 속에 있는 건 나야! 나는 미래의 주인공이야!

 하지만 2018년의 보통 사람은 점점 자신이 사회와 무관하다고 느낀다. 수많은 신비한 단어들 - 세계화, 블록체인, 유전공학, 인공지능, 기계 학습 machine learning - 이 테드 강연과 정부 싱크탱크, 하이테크 콘퍼런스 같은 곳에서 신나게 오르내리지만, 보통 사람은 이 중에 자신에 관한 이야기는 아무것도 없다고 의심할 법하다. 자유주의 이야기는 무엇보다 보통 사람에 관한 이야기였다. 어떻게 하면 사이보그와 알고리즘 네트워크의 세계에서도 그런 적실성을 유지할 수 있을까?

 20세기에 대중은 착취에 맞서 봉기를 일으켰고, 경제에서의 핵심적 역할을 정치권력으로 환산하려 했다. 이제 대중은 자신이 사회와 무관해질까봐 두려워한다. 그래서 너무 늦기 전에 자신에게 남은 정치권력을 사용하는 데 필사적이다. 브렉시트와 트럼프의 부상은 전통적인 사회주의 혁명과는 반대되는 궤도의 사례를 보여준 것일 수 있다. 러시아, 중국, 쿠바에서 혁명을 일으킨 것은 경제에서는 핵심적이었으나 정치권력은 누리지 못한 사람들이었던 반면, 2016년 트럼프와 브렉시트를 지지한 것은 아직 정치권력은 누리고 있지만 자신의 경제 가치를 잃는 것이 두려웠던 많은 사람들이었다. 아마도 21세기 포퓰리즘 반란은 사람들을 착취하는 경제 엘리트가 아니라 더 이상 사람을 필요로 하지 않는 경제 엘리트에 맞서는 구도로 전개될 것이다. 이는 지는 싸움이 될 가능성이 높다. 착취에 반대하는 것보다 사회와 무관해지는 것에 맞서 투쟁하기가 훨씬 힘들기 때문이다.

 

p30

 특히 자유주의 이야기는 공산주의로부터 배운 결과, 공감의 반경을 넓혀 자유와 나란히 평등까지 중요한 가치로 받아들였다.

 자유주의 이야기는 초기에만 해도 주로 중산층 유럽 남성의 자유와 특권에만 관심을 가졌을 뿐 노동계급이나 여성, 소수자, 비유럽인의 고충에는 눈을 감은 듯 보였다. 1918년 승전국인 영국과 프랑스가 들떠서 자유에 대해 이야기할 때도 세계 전역에 이르는 제국의 신민들은 염두에 두지 않았다. 예를 들어, 인도가 자치권을 요구했을 때 영국은 1919년 암리차르 대학살로 응징했다. 당시 영국 육군은 비무장 시위대 수백 명을 학살했다.

 2차 세계대전을 겪고 난 후에도 서방의 자유주의자들은 자신들의 이른바 보편적 가치를 비서방 사람들에게 적용하는 데 무던히도 애를 썼다. 그리하여 1945년 네덜란드가 5년에 걸친 야만적인 나치 점령에서 해방됐을 때도, 그들이 거의 맨 처음 한 일은 옛 식민지 인도네시아를 재점령하기 위해 군대를 소집해 세계 절반을 가로질러 파병한 것이었다. 1940년 네덜란드가 나치의 침공을 받았을 때는 개전 4일 만에 독립을 포기했지만, 자신들이 인도네시아 독립을 진압하는 데는 4년이 넘는 길고 격렬한 싸움을 마다하지 않았다. 세계 곳곳에서 일어난 민족해방 운동이 자유의 수호자라고 자처한 서방보다 공산주의 모스크바와 베이징에 희망을 건 것도 놀랄 일이 아니었다

 그렇지만 자유주의 이야기는 조금씩 지평을 넓혀갔다. 적어도 이론상으로는 모든 인간의 자유와 권리를 예외 없이 존중하게 되었다. 자유의 원이 확대되면서 또한 자유주의 이야기는 공산주의식 복지 제도의 중요성에도 눈떴다. 자유도 어떤 유의 사회 안전망과 결합되지 않으면 큰 가치가 없다는 사실을 깨닫게 된 것이다. 사회 민주적 복지국가는 민주주의와 인권과 더불어 국가가 지원하는 교육과 의료를 한데 결합했다. 심지어 초자본주의 국가라 할 수 있는 미국도 자유의 보호에는 최소한 어떤 식으로든 정부의 복지 서비스가 필요하다는 사실을 깨달았다. 굶는 아이에게 자유는 없다.

 1990년대 초까지 사상가들과 정치인들은 하나같이 '역사의 종언'을 반겼다. 확신에 찬 목소리로, 과거의 정치적, 경제적 문제는 다 해결됐으며, 민주주의와 인권, 자유 시장과 정부의 복지 서비스로 재단장한 자유주의 패키지야말로 여전히 유일한 해법이라고 주장했다. 이 패키지는 전 세계로 퍼져나가 모든 장애물을 극복하고 모든 국경을 지우는 한편, 인류를 하나의 자유로운 지구 공동체로 바꿔놓을 운명인 것처럼 보였다.

 하지만 역사는 끝나지 않았다. 프란츠 페르디난트의 순간과 히틀러의 순간, 체 게바라의 순간에 이어 이제 우리는 트럼프의 순간에 처했다. 그렇지만 이번에 자유주의 이야기가 마주한 상대는 제국주의나 파시즘, 공산주의처럼 일관된 이데올로기를 가진 적수가 아니다. 트럼프의 순간은 훨씬 더 허무주의적이다.

 20세기의 주요 운동은 모두 전 인류를 위한 미래 청사진이 있었던 데 반해 도널드 트럼프는 그런 것은 제시하지 않는다. 그와는 정반대다. 그의 주된 메시지는 어떤 지구 차원의 청사진을 만들고 증진하는 것은 미국의 일이 아니라는 것이다. 마찬가지로, 영국 브렉시트 지지자들도 '분리된 영국'의 미래를 위한 별다른 계획이 없다 - 유럽과 세계의 미래는 자신들의 지평을 훨씬 넘는 것이라고 본다. 트럼프와 브렉시트에 찬성표를 던진 사람들 대부분은 자유주의 패키지를 전면 거부한 게 아니다. 주로 세계화에 대한 믿음을 잃었을 뿐이다. 그들은 여전히 민주주의와 자유 시장, 인권, 사회적 책임을 믿는다. 하지만 이런 좋은 생각들도 국경에서는 제한될 수 있다고 생각한다. 실제로 그들은 요크셔와 켄터키에서 자유와 번영을 보존하기 위해서는 국경에 장벽을 세우고 외국인에 대해서는 비자유주의적 정책을 체택하는 것이 최선이라고 믿는다. 

 떠오르는 중국의 슈퍼파워도 거의 거울처럼 닮은 이미지를 보여준다. 중국은 국내 정치 자유화는 경계하면서도, 세계 다른 나라들에 대해서는 훨씬 더 자유주의적인 접근법을 택해왔다. 사실상 자유 무역과 국제 협력에 관한 한 시진핑이야말로 오바마의 진정한 계승자처럼 보인다. 마르크스레닌주의는 잠시 뒤로 제쳐둔 채, 자유주의 국제 질서에 꽤 만족스러워하는 것 같다.

 다시 기승을 부리는 러시아는 자신을 자유주의 세계 질서의 훨씬 강력한 경쟁자로 본다. 하지만 러시아는 군사력은 재편했어도 이념적으로는 파산했다. 블라디미르 푸틴은 러시아와 세계 곳곳의 다양한 우파 운동 진영에서는 확실히 인기가 있다. 하지만 스페인 실직자난 불만에 찬 브라질 국민, 초롱초롱한 눈망울의 케임브리지 학생 들까지 사로잡을 전 지구적 세계관은 갖고 있지 않다.

 러시아는 자유민주주의에 대안적인 모델을 제시한다. 하지만 이 모델은 하나의 일관성을 가진 정치 이념이 아니다. 그보다는 몇몇 올리가르히(과두재벌)들이 국가의 부와 권력 대부분을 독점하고는, 언론 통제를 통해 자신들의 활동을 숨기고 지배를 다지는 정치 관행에 불과하다. 민주주의는 다음과 같은 에이브러험 링컨의 원칙 위에 서 있다. "모든 국민을 잠시 속일 수 있고, 일부 국민을 늘 속일 수 있어도, 모든 국민을 늘 속일 수는 없다." 정부가 부패해서 국민 생활을 개선하지 못하면, 결국 그 사실을 깨닫는 사람이 많아지면서 정부를 대체할 것이기 때문이다. 하지만 정부가 언론을 통제하는 상황에서는 링컨의 논리는 힘을 잃는다. 시민이 진실을 알지 못하도록 막기 때문이다. 집권 과두제는 언론 독점을 통해 모든 정책 실패를 반복해서 남 탓으로 전가하고 국민의 관심을 외부 위협 - 실제든 상상이든 - 으로 돌릴 수 있다.

 그런 과두제 아래 살다보면 늘 이런저런 위기가 국민 의료나 공해 같은 따분한 문제보다 우선한다. 국가가 외부 침략이나 끔찍한 전복 사고에 직면했다는데 누가 과밀 병원과 강물 오염에 대해 걱정할 시간이 있겠는가? 이런 식으로 끝없는 위기의 흐름을 만들어 냄으로써 부패한 과두제는 지배를 무한정 연장할 수 있다.

 하지만 이런 과두제 모델은 실행력에서는 지속성이 있어도 아무에게도 매력을 발휘하지는 못한다. 다른 이데올로기들은 자랑스럽게 자신들의 청사진을 설파하는 데 반해, 올리가르히들은 집권하고 있으면서도 자신들의 통치에 자부심이 없어 다른 이데올로기로 연막을 치는 경향이 있다. 그래서 러시아는 민주주의인 체하고, 지도부는 과두제보다 러시아 민족주의와 정교회의 가치에 대한 충성을 공언한다. 프랑스와 영국의 우익 극단주의자들이 러시아의 지원에 의존하고 푸틴에 대한 흠모를 표시하는 일은 있을 법도 하지만, 두 나라의 유권자들조차 실제로 러시아 모델을 빼닮은 나라 - 고질적인 부패와 각종 서비스 장애, 법치주의 부재, 엄청난 불평등의 나라 - 에서는 살고 싶지 않을 것이다. 통계에 따르면, 러시아는 국부의 87퍼센트가 상위 10퍼센트 부유층 손에 있는, 세계에서 가장 불평등한 나라 중 하나로 꼽힌다. 프랑스 '국민전선'을 지지하는 노동계급 유권자 중에서 이런 부의 분배형을 자국에도 이식하고 싶어하는 사람이 얼마나 될까?

 사람들은 자신의 발로 투표한다. 세계를 여행하는 동안 나는 미국이나 독일, 캐나다, 호주로 이민 가고 싶어 하는 사람은 많이 만나봤다. 중국이나 일본으로 이주하고 싶어 하는 사람도 어느 정도 있었다. 하지만 러시아로 이민 가는 게 꿈이라는 사람은 단 한 명도 보지 못했다.

 

p37

 자유주의의 고장으로 공백이 생기자 잠정적이나마 각 국가의 지나간 황금시절을 그리워하는 환상이 그 자리를 메우고 있다. 도널드 트럼프는 미국의 고립주의에 대한 촉구에다 '미국을 다시 위대하게 만들자'는 약속을 연결했다. 마치 1980년대나 1950년대의 미국이 21세기에도 미국인들이 어떻게든 되살려야 하는 완벽한 사회였다는 듯이. 브렉시트 지지자들 역시 영국을 독립 강국으로 만드는 꿈을 꾼다. 마치 아직도 빅토리아 여왕 시대에 살고 있다는 듯이. 그리고 지난 시절에나 통했던 '영광의 고립'이 인터넷과 지구 온난화 시대에도 실행 가능한 정책이라는 것처럼. 중국 엘리트들은 자신들의 고유한 제국과 유교의 유산에 다시 눈을 뜨면서 그것을 서방에서 수입해온 미심쩍은 마르크스 이데올로기의 보완재나 대용품으로까지 생각한다. 러시아에서 푸틴이 공식적으로 제시하는 청사진도 부패한 과두제의 건설이 아니라 옛 차르 제국의 재건이다. 볼셰비키 혁명이 일어난 지 100년이 지난 지금 푸틴은 러시아 민족주의와 정교회의 신앙심에 힘입은 전제 정부를 통해 옛 제정 시대의 영광을 되찾는 한편 발트해에서 캅카스까지 세력을 확장하겠다고 약속한다.

 이처럼 민족주의적 애착과 종교적 전통을 뒤섞은 향수 어린 꿈은 인도와 폴란드 외에도 수많은 체제의 버팀목이 되고 있다. 하지만 이런 환상의 힘이 중동만큼 극단적인 곳도 없다. 이곳 이슬람주의자들은 1,400년 전 예언자 무함마드가 메디나 시에서 세운 체제를 그대로 모방하고 싶어 한다. 이스라엘의 근본주의 유대교들도 한술 더 뜬다. 2,500년 전 성경 시대로 돌아가려는 꿈을 꾼다는 점에서 그들은 이슬람주의자들마저 능가한다. 이스라엘 집권 연립정부의 각료들은 지금 이스라엘의 국경을 성경 속의 이스라엘에 좀 더 가깝게 확장하려는 희망을 공공연히 밝힌다. 심지어 알아크사 이슬람사원 자리에 고대 예루살렘의 야훼 신전을 재건하려 든다.

 자유주의 엘리트들은 이런 상황을 공포의 눈길로 본다. 그리고 인류가 늦지 않게 자유주의의 길로 복귀해 재난을 피할 수 있기를 희망한다. 2016년 9월 오바마 대통령은 마지막 유엔 연설에서 청중을 향해 "세계가 민족과 부족, 인종, 종교와 같은 해묵은 분할선을 따라 날카롭게 나뉘고 궁극에는 갈등 속으로 퇴보하는 것"을 경계했다. 그는 대신 "자유 시장과 책임 정부, 민주주의와 인권, 국제법의 원칙이 (....) 금세기 인간 진보를 위한 확고한 기반으로 남기"를 기원했다.

 오바마가 자유주의 패키지를 두고 숱한 한계에도 불구하고 다른 어떤 대안보다도 실적이 훨씬 좋았다고 한 것은 옳았다. 대부분의 사람들은 21세기 초 자유주의 질서의 보호 아래 경험했던 것보다 더 큰 평화나 번영을 누려본 적이 없다. 인류 역사상 처음으로 전염병에 의한 사망자가 고령으로 인한 사망자보다 적었으며, 폭력에 의한 사망자가 사고로 인한 사망자보다 적었다.

 

p51

 결국, 우리가 보호해야 할 궁극의 목표는 사람이지 일자리가 아니다. 남아도는 운전사와 의사는 다른 일자리를 찾아야 할 것이다.

 

p58.  새로운 일자리라고?

 

 예술에서 의료에 이르기까지 모든 분야의 전통적인 일자리 다수가 사라지면 새로운 인간 일자리의 창출로 상쇄될 것이다. 알려진 질병을 진단하고 익숙한 치료를 관장하는 데 집중하는 일반 의사들은 AI 의사로 대체될 가능성이 높다. 하지만 바로 그 점 때문에 획기적인 연구를 수행하고 신약이나 수술 절차를 개발하기 위해서는 인간 의사와 연구소 조교에게 훨씬 더 많은 돈을 지급해야 할 것이다.

 AI는 다른 방식으로 새로운 인간 일자리 창출을 도울 수 있다. 인간은 AI와 경쟁하는 대신 AI를 정비하고 활용하는 데 집중할 수 있을 것이다. 드론이 인간 비행사를 대체하면서 일자리가 사라졌지만 정비와 원격 조정, 데이터 분석, 사이버 보안 분야에서는 새로운 기회가 많이 생겨났다. 미군의 경우 무인기 프레데터나 리퍼 드론 한 대를 시리아 상공으로 날려보내는 데 30명이 필요한데, 그렇게 수집해 온 정보를 분석하는 데는 최소 80명이 더 필요한다. 2015년 미 공군은 이 직무를 맡을 숙련자가 부족해, 무인 항공기 운용 인력 부족이라는 역설적인 위기에 직면하기도 했다.

 그렇다면 2050년 고용 시장은 인간-AI의 경쟁보다도 상호 협력이 두드러진 형태가 될 가능성이 높다. 경찰부터 은행 업무에 이르기까지 인간과 AI가 한 팀을 이루면서 인간과 컴퓨터 모두를 능가할 수 있을 것이다. 1997년 IBM의 체스 프로그램인 딥 블루가 세계 챔피온 가리 카스파로프를 꺽은 후에도 인간이 체스를 그만두는 일은 일어나지 않았다. 오히려 AI 트레이너 덕분에 인간 체스 챔피언은 실력이 유례 없이 좋아졌고, 잠시나마 '켄타우로스'로 알려진 인간-AI 팀이 체스에서 인간과 컴퓨터 모두를 능가했다. 마찬가지로 AI는 인간이 사상 최고의 형사, 은행원, 군인으로 단장하는 데도 도움을 줄 수 있을 것이다.

 하지만 문제는, 그렇게 생겨난 새로운 일자리는 모두 고도의 전문성을 필요로 할 가능성이 높고, 따라서 비숙련 노동자의 실직 문제를 해결할 수는 없을 거라는 점이다. 그런 일자리를 실제로 메울 사람을 재교육하기보다 아예 새로운 일자리를 창출하는 것이 더 쉬운 일로 판명될 수 있다. 이전에 자동화 물결이 밀려들었을 때, 사람들은 특별한 기술이 필요 없는 기계적인 작업을 또 다른 비슷한 수준의 일로 바꿀 수 있었다. 1920년 농업이 기계화다하면서 해고된 농장의 일꾼은 트랙터를 생산하는 공장에서 새 일을 찾을 수 있었다. 1980년 공장 노동자는 실직하더라도 슈퍼마켓의 현금출납원을 새 출발을 할 수 있었다. 그런 작업 변화가 가능했다. 농장에서 공장으로, 다시 공장에서 슈퍼마켓으로 옮겨가는 데는 훈련이 많이 필요하지 않았다.

 하지만 2050년에는 현금출납원이나 방직공장 노동자가 로봇에게 일자리를 잃고 나서 암 연구원이나 드론 조종사, 혹은 은행의 인간-AI 팀원으로 새 일을 시작하기란 거의 불가능할 것이다. 필요한 기술을 갖추지 못할 것이기 때문이다. 제1차 세계대전 때 징집돼 온 수백만의 신참 병사에게 기관총을 맡기고 수천 명의 전사자를 낸 것은 그래도 이해할 만하다. 개별 기술이 크게 중요하지 않았기 때문이다. 하지만 오늘날 아무리 드론 조종사와 데이터 분석가가 부족하다 해도 미 공군은 그 자리를 월마트 퇴직원으로 메울 리는 없다. 경험 없는 신병이 아프가니스탄의 결혼 축하 파티를 탈레반의 고위급 회의로 오인하는 사고를 바랄 사람은 없다.

 결과적으로, 인간 일자리가 많이 생긴다 해도 새로운 '무용' 계급의 부상은 불가피할지도 모른다. 실제로는 두 세계의 최악을 함께 겪을 수도 있다. 높은 실업률과 숙련 노동력의 부족이 동시에 닥치는 것이다. 많은 사람이 19세기의 마차 몰이꾼이 아닌 말의 운명을 맞을 수 있다. 마차 몰이꾼은 택시 기사로 전환활 수 있었지만, 말은 점점 고용 시장에서 밀려나기 시작해 결국에는 완전히 퇴출됐다.

 더욱이 남은 인간 일자리도 결코 미래 자동화 위협으로부터 안전할 수 없을 것이다. 기계 학습과 로봇은 계속 개선될 것이기 때문이다. 40세에 실직한 월마트 현금출납원이 초인적인 노력 끝에 간신히 드론 조종사가 됐다 해도 10년 후에는 그는 다시 자기 변신을 해야만 할 수 있다. 그때쯤이면 드론을 날리는 일도 자동화됐을 수 있기 때문이다. 이처럼 직업의 변동성이 커지면서 노조를 조직하거나 노동권을 확보하는 일도 더 어려워질 것이다. 이미 오늘날에도 선진국에서 생겨나는 많은 신규 일자리는 보호받지 못하는 비정규직이거나 자유계약직, 혹은 일회성 업무직이다. 버섯구름처럼 급속하게 생겨났다가 10년도 안 돼 사라지는 직업을 가지고 어떻게 노조를 결성할까?

 마찬가지로 인간-컴퓨터 켄타우로스 팀도 평생 동반자 관계로 정착하는 대신 인간과 컴퓨터 간의 끊임없는 주도권 다툼으로 얼룩질 가능성이 높다. 인간들로만 이뤄진 팀 - 가령, 셜록 홈스와 왓슨 박사 - 은 보통 서로 협력해서 수십 년을 이어갈 항구적인 위계질서와 틀을 잡는다. 하지만 IBM 왓슨 컴퓨터 시스템(2011년 미국 TV쇼 <제퍼디!>에서 우승하며 유명해진 컴퓨터)과 한 조를 이룬 인간 탐정이 겪게 될 정해진 틀이라고는 수시로 찾아드는 파괴적 혁신일테고, 항구적인 위계질서라고는 반복되는 기술 혁명뿐일 것이다. 어제의 (로봇) 조수는 내일의 감독관으로 변신할 가능성이 높은 데다 모든 상호 업무 규약과 지침서는 매년 다시 써야만 할 것이다.

 체스 세계를 꼼꼼히 들여다보면 장기적으로 상황이 어느 방향으로 전개될지 단서를 얻을 수 있다. 딥 블루가 카스파로프를 꺽고 난 후 수년 동안 체스에서 인간-컴퓨터의 협력이 빛을 발한 것은 사실이다. 하지만 최근 몇 년 사이에 컴퓨터의 체스 실력이 너무나 좋아진 나머지 이제 인간 협력자의 가치는 사라졌고, 조만간에는 완전히 있으나 마나 한 존재가 될 상황에 처했다.

 결정적인 이정표가 세워진 날은 2017년 12월 7일이었다. 체스에서 컴퓨터가 인간을 이겼을 때가 아니라, 구글의 알파제로 프로그램이 스톡피시 8 프로그램을 꺽은 순간이었다. 스톡피시 8은 2016년 세계 컴퓨터 체스 챔피언이었다. 수백 년 동안 체스에서 쌓아온 인간의 경험은 물론 수십 년간 누적된 컴퓨터의 경험에 접속할 수 있었고, 초당 7,000만 수를 계산할 수 있는 프로그램이었다. 반면 알파제로는 불과 초당 8만 수의 계산을 수행했을 뿐이었다. 인간 창조자는 알파제로에게 어떤 체스 전술도 가르쳐주지 않았다. 심지어 표준 오프닝 standard opening조차 알려주지 않았다. 그 대신 알파제로는 최신 기계 학습 원리를 자가 학습 체스에 적용해 자신을 상대로 한 시합을 반복했다. 그럼에도 신참 알파제로는 스톡피시를 상대로 모두 100회의 시합을 벌여 28승 72무를 기록했다. 패한 적은 한 번도 없었다. 알파제로는 인간으로부터 배운 것이 없었기 때문에, 시합에서 승리했을 때 알파제로가 구사한 수와 전술의 상당수가 인간의 눈에는 파격적이었다. 완전히 천재적이진 않아도 충분히 독창적이라고 할만했다.

 알파제로가 백지 상태에서 체스를 학습하고 스톡피시를 상대로 한 시합을 준비하며 자신의 천재적 개능을 개발하는 데 걸린 시간이 얼마인지 상상할 수 있겠는가? 네 시간이었다. 오자가 아니다. 수 세기 동안 체스는 인간 지능의 더 없는 자랑거리로 여겨졌다. 하지만 알파제로는 완전 무지 상태에서 네 시간 만에 창의적 완숙의 경지에 도달했다. 그 과정에서 인간이 지도하며 준 도움도 전혀 없었다.

 알파제로 말고는 상상력을 발휘하는 소프트웨어는 더 있다. 이제는 체스 프로그램의 다수가 단순한 수의 계산뿐 아니라 '창의성'에서도 인간 선수를 능가한다. 인간만 출전하는 체스 토너먼트 시합에서 심판은 선수들이 몰래 컴퓨터의 도움을 얻는 속임수를 적발하느라 여념이 없다. 속임수를 적발하는 한 가지 방법은 선수가 구사하는 독창성의 수준을 모니터하는 것이다. 만약 선수가 이례적으로 창의적인 수를 구사하면 심판은 사람의 수일 리가 없다고 의심할 때가 많다. 컴퓨터의 소행으로 추정하는 것이다. 적어도 체스에서는 창의성은 이미 인간보다 컴퓨터의 트레이드마크가 됐다! 따라서 체스가 탄광의 카나리아라면, 우리는 이것을 카나리아가 죽어가고 있다는 경고로 이해해야 한다. 지금 인간-AI 체스팀에 일어나고 있는 일은 앞으로 경찰, 의료, 은행 업무에서 활동할 인간-AI 팀으로도 이어질 수 있다.

 결국, 새로운 일자리를 창출하고 그 자리를 채우기 위해 인간을 재교육하는 일은 단 한번의 노력으로 되지는 않을 것이다. AI 혁명은 일대 분수령을 이룬 뒤에 고용 시장이 새로운 평형 상태에서 안정을 찾는 식의 일회성 사건은 아닐 것이다. 그보다는 점점 커지는 (혁신적) 파괴의 폭포가 될 것이다. 이미 지금도 자신이 평생 같은 일을 할 거라고 보는 사람은 극소수다. 2050년이면 '평생 직장'이 라는 생각뿐 아니라 '평생 직업'이라는 생각까지 원시적이라고 간주될 것이다.

 앞으로 우리가 끊임없이 새로운 일자리를 만들어내고 노동자들을 재훈련할 수 있다 하더라도, 평균적인 인간이 그런 끝없는 격변의 인생을 살아가는 데 필요한 감정의 근력을 유지할 수 있을지 의아해할 수도 있다. 변화는 늘 스트레스로 가득하다. 21세기 초 세계는 미친 듯 바빠지면서 온 지구는 스트레스라는 유행병을 앓고 있다. 고용 시장과 개인 직업의 변동성이 커지는 상황에서 사람들은 현실에 잘 대처해나갈 수 있을까? 아마도 사피엔스의 정신이 나가는 것을 막으려면 지금보다 훨씬 효과가 큰 스트레스 경감기술 - 약물로부터 뉴로피드 백neuro-feedback, 명상에 이르기까지 - 이 필요할 것이다. 2050년 '무용' 계급이 출현하는 원인에는 일자리의 절대 부족이나 관련 교육의 결여뿐 아니라 정신 근력의 부족도 포함될 것이다.

 확실히 지금까지의 이야기는 대부분이 추측이다. 이 글을 쓰는 지금 - 2018년 초 - 도 자동화로 많은 산업이 파괴됐지만 대규모 실업은 발생하지 않았다. 사실 많은 나라에서 미국과 같이, 실업률은 사상 최저를 기록 중이다. 기계 학습과 자동화가 미래에는 달라질 직업들에 어떤 유의 충격을 줄지 아무도 확실히 알 수는 없으며, 시간의 흐름에 따라 관련된 상황이 어떻게 전개될지 구체적으로 추정하기란 극도로 어렵다. 그 이유는 특히 정치적 결정과 문화적 전통이 순전히 기술적인 돌파 못지않게 상황 전개에 영향을 주기 때문이다. 따라서 자율주행 차량이 인간 운전자보다 안전하고 저렴한 것으로 판명난 후에라도 정치권과 소비자들이 수년 동안, 아마 수십 년까지도 변화를 막을 수 있을 것이다.

 하지만 그렇다고 현실에 안주할 수는 없다. 새 일자리가 사라진 일자리를 충분히 메워줄 거라고 가정하는 것은 위험하다. 이전의 자동화 물결 기간에 그런 일이 일어났다고 해서 21세기의 아주 다른 조건 아래서도 같은 일이 반복될 거라는 보장은 없다. 그것이 초래할 수 있는 사회적, 정치적 혼란은 너무나 두려운 것이어서, 시스템 전반에 걸친 대량 실업의 개연성이 낮다 하더라도 우리는 그 문제를 아주 심각하게 생각해야 한다. 

 19세기에 산업혁명은 기존의 사회적, 경제적, 정치적 모델로는 대처할 수 없는 새로운 조건들과 문제들을 야기했다. 봉건주의와 군주제, 전통 종교는 산업화된 대도시와 수백만의 뿌리 뽑힌 노동자, 본성상 끊임없이 변하게 마련인 근대 경제를 경영하는 데 적합하지 않았다. 그 결과 인류는 완전히 새로운 모델 - 자유민주주의와 공산주의 독재, 파시즘 체제 - 을 개발해야 했고, 이 모델들을 실험하여 쭉정이에서 알곡을 가려내고 최선의 해법을 실행하기까지 1세기에 걸쳐 끔찍한 전쟁과 혁명을 겪어야 했다. 디킨스 소설에서 묘사된 탄광의 아동 노동, 제1차 세계대전과 1932~1933년의 우크라이나 대기근은 인류가 치른 수업료의 일부에 불과했다.

 21세기 정보기술과 생명기술이 인류에게 제기한 과제들은 이전 시대에 증기기관과 철도, 전기가 제기한 것들보다 훨씬 더 크다. 우리 문명의 막대한 파괴력을 감안하면 더 이상 실패한 모델이나 세계대전, 유혈 혁명을 용인할 여유가 없다. 이번에는 실패하면 핵전쟁이나 유전공학에 의한 괴물, 생태계의 완전한 붕괴를 초래할 수도 있다. 따라서 우리는 산업혁명에 직면했을 때보다 더 잘해야 한다.

 

p68

 예를 들어 공산주의를 보자. 자동화가 자본주의 시스템을 기반까지 흔들려고 위협함에 따라 혹자는 공산주의가 부활할 거라고 추측할 수 있다. 하지만 공산주의는 그런 종류의 위기를 활용하기 위해 만들어진 이념이 아니다. 20세기 공산주의 사상가들이 프롤레타리아에게 가르친 것은 이들의 막대한 경제적 힘을 정치적 영향력으로 전환하는 방법이었다. 공산주의 정파는 노동 계급에 의한 혁명을 촉구했다. 하지만 대중이 자신들의 경제적 가치를 잃는다면, 그래서 착취가 아닌 자신의 무관함에 맞서 투쟁해야 한다면 그런 교의가 얼마나 의미 있을까? 노동 계급이 없는 상황에서 어떻게 노동 계급 혁명을 시작할까?

 혹자는 인간이 작업장에서 AI와 경쟁할 수 없더라도 소비자로서는 늘 필요할 것이기 때문에 앞으로도 경제적으로 사회와 무관한 존재가 되지는 않을 거라고 주장할 수도 있다. 하지만 미래 경제가 우리를 소비자로서조차 필요한 존재로 여길지는 결코 확실하지 않다. 그 역할도 기계와 컴퓨터가 할 수 있을 것이기 때문이다. 이론적으로는 이런 경제도 충분히 가능하다. 광산 기업이 철을 생산해서 로봇 기업에 팔고. 로봇 기업은 로봇을 만들어 광산 기업에 팔고, 다시 광산 기업은 더 많은 철을 생산하고, 이렇게 생산된 철은 다시 더 많은 로봇을 만드는 데 쓰이고, 이런 식으로 계속된다. 이런 기업들은 은하계 멀리까지 성장하고 확장해갈 수 있다. 이 과정에서 그들에게 필요한 것이라고는 로봇과 컴퓨터뿐이다. 자신들의 생산물을 인간이 사주는 일조차도 필요하지 않다.

 

p78

 보편 기본 지원이 2050년 평균인의 객관적 조건을 개선하는 것을 목표로 한다면 성공할 가능성은 꽤 높다. 하지만 사람들이 자신의 운명에 대해 주관적으로 더 만족하는 것과 사회적 불만을 막는 것을 목표로 한다면 실패할 가능성이 높다.

 그 목표를 진정으로 달성하려면 보편 기본 지원은 스포츠에서 종교에 이르기까지 다른 의미 있는 추구에 의해 보완해야 할 것이다. 아마도 이스라엘에서 행해진 실험이 일 - 이후 세계에서 만족스런 삶을 사는 방법으로는 지금까지 가장 성공적이었을 것이다. 이곳에서는 초정통파 유대교 남성의 약 50퍼센트가 일을 하지 않는다. 이들은 성경을 공부하고 종교 의식을 수행하는 데 삶을 바친다. 그들과 가족들이 굶어 죽지 않는 비결은 흔히 부인들이 일을 하기 때문이기도 하고, 생활에 필요한 기본적인 것들에 부족함이 없도록 정부가 보조금과 무료 서비스를 제공하기 때문이기도 하다. 이것이야말로 '그런 말이 생기기도 전'의 보편 기본 지원이다.

 이 초정통파 유대교 남성들은 가난하고 직업도 없다. 하지만 설문조사를 해보면 삶의 만족도가 이스라엘 사회의 다른 어떤 분파보다 높게 나온다. 이는 공동체의 유대감이 주는 결속력과 더불어, 성경 공부와 의례 수행에서 찾을 수 있는 깊은 의미 때문이다. 열악한 환경 속에서 땀 흘려 일하는 노동자들로 가득한 대형 직물공장보다, 남성들이 함께 모여 탈무드를 공부하는 작은 방에서 더 큰 즐거움과 참여감과 통찰이 생기는 것은 당연하다. 전 세계를 대상으로 삶의 만족도를 묻는 조사에서 이스라엘이 상위권에 오르는 이유도 부분적으로는 이런 무직의 가난한 사람들이 점수를 올려주기 때문이다. 

 비유대교 이스라엘인은 초정통파 유대교인들이 사회 기여도가 낮고 다른 사람의 근로에 기생한다고 극심하게 비판할 때가 많다. 특히 초정통파 유대교인 가족은 자녀가 평균 일곱 명이라는 점을 들어, 그런 삶의 방식은 가능하지 않다고 주장하는 경향이 있다. 아마도 조만간 국가가 그 많은 실업자들을 계속해서 지원할 수는 없을 것이다. 그러면 그들도 일을 해야 할 것이다. 하지만 그 반대가 될 수도 있다. 로봇과 AI가 인간을 구직 시장에서 밀어내면, 오히려 초정통파 유대교인들이 과거의 화석이 아니라 미래의 모델로 보일지도 모른다. 물론 모든 사람이 초정통파 유대교인이 되어 예시바에 가서 탈무드를 공부할 거라는 말은 아니다. 하지만 모든 사람의 삶에서 의미와 공동체의 추구가 구직열을 압도할지도 모른다.

 만약 보편적인 경제 안전망과 더불어 강력한 공동체와 의미 있는 삶의 추구를 결합할 수만 있다면, 우리가 알고리즘에 일자리를 빼앗기는 것이 실제로 축복일 수 있다. 하지만 우리 삶에 대한 통제력을 잃는 것은 훨씬 무서운 시나리오다. 대량 실업의 위험과는 별도로, 우리가 훨씬 더 걱정해야 할 일은 인간의 권위가 알고리즘으로 옮겨가는 것이다. 알고리즘은 자유주의 이야기에 대한 우리의 믿음을 파괴하고 디지털 독재의 부상으로 이어지는 길을 열지도 모름다.

 

p83

 국민투표와 선거는 언제나 인간의 느김에 관한 것이지 이성적 판단에 관한 것이 아니다. 만약 민주주의가 이성적인 의사 결정의 문제라면 모든 사람에게 동등한 투표권을, 혹은 그 어떤 투표권도 줘야 할 이유가 전혀 없다. 어떤 사람들은 다른 사람들보다 훨씬 더 박식하고 이성적이라는 증거는 충분하다. 경제나 정치에 관한 구체적인 질문에 관한 한 확실히 그렇다. 브렉시트 투표가 있고 난 후에 저명한 생물학자 리처드 도킨스는 자신을 포함한 영국 대중의 대다수는 (이 문제를 두고) 국민트표에서 투표하도록 요구받는 일이 없어야 했다면서, 그들에게는 경제학과 정치학의 필요한 배경 지식이 없기 때문이라고 항변했다. "차라리 아인슈타인이 대수학을 맞게 풀었는지 결정하기 위해 국민투표를 실시하거나, 조종사가 어느 활주로에 착륙해야 할지를 두고 승객에게 투표하게 하는 것이 낫겠다."

 

p84

 느낌에 이끌리는 것은 유권자뿐 아니라 지도자도 해당된다. 2016년 브렉시트 국민트표에서 탈퇴 캠페인을 이끈 지도자는 보리스 존슨과 마이클 고브였다. 데이비드 캐머런이 사임한 후 고브는 처음에 존슨을 총리로 지지했다. 하지만 마지막 순간에 고브는 존슨이 부적격자라고 선언하고 자신이 직접 출마하겠다는 의사를 발표했다. 존슨이 기회를 날려버린 고브의 행동을 두고 사람들은 마키아벨리적인 정치적 암살이라고 불렀다. 하지만 고브는 자신의 행동을 변호하는 과정에서 자신의 느낌에 호소하며 이렇게 설명했다. "정치 인생에서 걸음을 옮길 때마다 나 자신에게 한 가지 질문을 해왔다. '무엇이 옳은 일인가? 너의 마음은 네게 뭐라고 하는가?" 고브에 따르면, 그가 브렉시트를 위해 그토록 열심히 싸운 이유도, 그때까지 동지였던 보리스 존슨의 등에 칼을 꽂을 수밖에 없었던 이유도, 자신이 우두머리 자리에 나선 것도 그 때문이었다. 즉, 그의 마음이 그렇게 하라고 했다는 것이다.

 마음에 대한 이런 의존은 자유민주주의의 아킬레스건으로 드러날지도 모른다. 왜냐하면 (베이징이나 샌프란시스코의) 누군가가 인간의 마음을 해킹해서 조작하는 기술력을 얻게 되면, 민주 정치는 감정의 인형극으로 돌변할 것이기 때문이다.

 

p86

 따라서 감정은 합리성의 반대가 아니다. 감정이 체화한 것이 진화적 합리성이다.

 

p96

 2012년 3월 일본 관광객 세 명이 호주 연안의 작은 섬으로 당일 치기 여행을 가기로 했다. 그들은 차를 몰고 가다가 그대로 태평양에 뛰어들었다. 운전을 했던 21세 유주 노다 씨는 나중에 자신은 GPS를 따랐을 뿐이라고 했다. "GPS가 우리한테 그쪽으로 곧장 갈 수 있다고 했엉. 길로 안내해줄 거라고 계속 말하더군요. 그러다 꼼짝없이 빠졌지요." 그와 비슷하게 사람들이 GPS 지시만 믿고 차를 몰고 가다가 호수에 빠지거나 철거된 다리에서 떨어지는 사고가 여러 차례 일어났다. 길 찾기 능력은 근육과 같다. 사용하지 않으면 잃는다. 배우자나 직업을 고르는 능력도 마찬가지다.

 

p106

 우리는 인공지능의 부상이 대다수의 인간을 고용 시장에서 몰아 낼 수도 있다는 사실을 앞에서 봤다. 여기에는 운전자와 교통경찰까지 포함된다(소동을 빚는 인간을 순종적인 알고리즘으로 대체하면 교통경찰은 있으나 마나 한 존재가 된다). 하지만 그때가 되면 철학자에게는 새로운 출구가 생길 수도 있다. 지금까지는 시장 가치가 크지 않았던 철학자의 기량에 대한 수요가 갑자기 치솟을 수 있기 때문이다. 그러니 만일 미래에 좋은 일자리가 보장되는 무언가를 공부하고 싶다면 철학에 운을 걸어보는 것도 나쁘지 않을 것이다.

 

 p113

 20세기 후반 민주주이가 독재를 능가했던 것은 데이터 처리에서 우월했기 때문이다. 민주주의는 정보를 처리하고 결정하는 권한을 사람과 기관에 분산하는 반면 독재는 한곳에 집중했다. 20세기 기술로 보면 너무 많은 정보와 힘을 한곳에 모으는 방식이 비효율적이었다. 그 누구도 모든 정보를 충분히 빠르게 처리하면서 옳은 결정을 내릴 수는 없었기 때문이다. 소련이 미국보다 훨씬 나쁜 결정을 내리고 경제도 훨씬 뒤처진 데에는 이런 점도 작용했다.

 하지만 AI가 등장하면서 조만간 시계추는 반대 방향으로 움직일 수 있다. AI 덕분에 막대한 양의 정보를 중앙에서 모두 처리할 수 있게 됐다. 실제로 AI는 중앙 집중 체계의 효율을 분산 체계보다 훨씬 높일 수 있는데, 기계 학습은 분석할 수 있는 정보가 많을수록  성능이 좋아지기 때문이다. 알고리즘 훈련에 관한 한, 프라이버시 침해 우려는 무시한 채 10억 인구에 관련된 모든 정보를 데이터베이스 한곳에 모으는 편이, 개인 프라이버시를 존중해 100만 명에 관한 부분적인 정보만 데이터베이스에 두는 것보다 훨씬 낫다. 가령, 어떤 권위주의 정부가 모든 시민에게 DNA 스캔을 받게 하고 모든 의료 데이터를 중앙 정부 기관과 공유하도록 명령한다면, 의료 데이터를 엄격하게 사적으로 보호하는 사회보다 유전학과 의학연구에서 엄청나게 유리할 것이다. 20세기 권위주의 정권의 주요 장애 - 모든 정보를 한곳에 집중하려는 시도 - 가 21세기에는 결정적인 이점이 될 수 있다.

 

p124

 재산은 장기 불평등을 낳는 전제 조건이다.

 

 

 하지만 근대 후반에 이르러 평등은 거의 모든 인간 사회에서 이상이 되었다. 여기에는 공산주의와 자유주의라는 새로운 이데올로기의 부상이 일부 작용했지만, 산업혁명이 일어나면서 대중이 전례 없이 중요해진 요인도 있었다. 산업 경제는 평민 노동자 대중에게 의존했고, 산업화된 군대 역시 평민 병사 대중에게 의존했다. 민주주의와 독재 정부 모두가 대중의 건강과 교육, 복지에 대거 투자했다. 생산 라인을 가동할 건강한 수백만 노동자들과 참호에서 싸울 충성스런 수백만 병사들이 필요했기 때문이다.

 그 결과 20세기 역사는 상당 부분 계급과 인종, 성별 간 불평등 감소를 둘러싸고 전개됐다.. 세계가 2000년을 맞았을 때 그때까지도 여전히 계급제의 잔재는 남아 있었지만 1900년의 세계에 비하면 훨씬 평등했다. 21세기에 들어와서도 처음 몇 년 동안 사람들은 평등화의 과정이 계속 이어지고 속도도 더욱 빨라질 것으로 내다봤다. 특히 세계화가 세계 전역에 걸쳐 경제적 번영을 확산시키고, 그 결과 인도와 이집트의 국민들도 핀란드와 캐나다 국민 같은 기회와 권리를 누리게 되기를 바랐다. 모든 세대가 이런 가능성 위에서 자라났다.

 하지만 이제 이 약속은 지켜지지 못할 것 같다. 세계화가 인류의 다수에게 혜택을 준 것은 분명하지만 사회 내부는 물론 사회들 간에도 불평등이 커지는 신호가 뚜렷해지고 있다. 세계화의 과실을 일부 집단이 점점 독점해가는 반면 나머지 수십억은 뒤쳐져 있다. 이미 지금도 최고 부유층 1퍼센트가 세계 부의 절반을 차지하고 있다. 더욱더 놀라운 것은 최고 부유층 100명이 최저 빈곤층 40억명보다 더 많은 부를 가졌다는 사실이다.

 이런 추세는 훨씬 더 심해질 수 있다. 앞 장에서 설명했듯이, AI가 부상하면서 인간 대다수의 경제적 가치와 정치적 힘이 소멸될 수 있다. 이와 함께 생명기술이 발전하면서 경제 불평등을 생물학적 불평등으로 전환하는 일이 가능해질 수도 있다. 슈퍼리치는 마침내 자신들의 엄청난 부에 상응하는 것을 가질 수 있을 것이다. 지금까지는 자신들의 지위를 상징하는 것을 살 수 있었던 반면, 머지않아 생명 자체를 돈으로 살 수 있을 것이다. 수명을 늘리고 육체적, 인지적 능력을 증강하는 새로운 치료를 받는 데 많은 돈이 든다면 인류는 여러 생물학적 계층으로 쪼개질 수도 있다.

 역사적으로 부자들과 귀족들은 언제나 자신들이 다른 모든 사람들보다 우월한 기량을 갖고 있으며 그렇기 때문에 자신드링 지배력을 행사해야 한다고 생각했다. 하지만 우리가 아는 한 사실은 그렇지 않았다. 평균적인 공작의 재능이 평균적인 농민보다 낫지 않았고, 그의 우월함이란 단지 불공정한 법적, 경제적 차별에 힘입은 것이었다. 하지만 2100년에는 부유층이 정말로 빈민촌 거주자들보다 더 재능 있고 창의적이고 똑똑할 수 있다. 일단 부유층과 빈곤층 사이에 실제로 능력 격차가 벌어지기 시작하면 그것을 좁히기란 거의 불가능해질 것이다. 만약 부유층이 우월한 능력으로 자신들의 부를 더 늘리고, 더 많은 돈으로 육체와 두뇌까지 증강할 수 있게 되면, 시간이 갈수록 빈부 격차는 더 커질 수밖에 없을 것이다. 2100년까지 최상의 부유층 1퍼센트는 세계 부의 대부분을 차지하는 데 그치지 않고, 세계의 미美와 창의력, 건강까지 대부분 차지할 수 있을 것이다.

 두 과정이 합쳐지면, 즉 Ai의 부상과 생명공학이 결합되면 인류는 소규모의 슈퍼휴먼 계층과 쓸모없는 호모 사피엔스 대중의 하위 계층으로 양분될 수 있다. 설상가상으로, 대중이 경제적 중요성과 정치적 힘을 잃으면서 국가는 이들의 건강과 교육, 복지에 투자할 동기를 적어도 일부는 잃을 수 있다. 쓸모없어지는 것은 아주 위험하다. 그럴 경우 대중의 미래는 소수 엘리트의 선의에 좌우될 것이다. 그 선의는 수십 년 동안은 유지될 수도 있다. 하지만 위태로운 시기가 닥치면 - 가령 기후 재앙 - 잉여 인간들은 배 밖으로 던져버리고 싶은 유혹이 커질 테고, 그것은 어려운 일도 아닐 것이다.

 프랑스와 뉴질랜드처럼 자유주의 신념과 복지국가 관행이 오랜 전통인 나라에서는 엘리트가 대중을, 그들이 필요없을 때조차 계속해서 돌봐줄지 모른다. 하지만 보다 자본주의적인 미국에서는 미국식 복지국가의 잔여분마저 해체해버릴 첫 기회로 삼을지도 모른다. 훨씬 심각한 문제는 인도와 중국, 남아프리카, 브라질과 같이 인구가 많은 개발도상국들이 겪게 될 것이다. 보통 사람이 경제 가치를 잃고 나면 불평등이 급격히 치솟을 수 있다.

 그 결과 세계화는 세계의 통일로 가기보다 실제로는 '종의 분화'로 귀결될 수도 있다. 인류가 다양한 생물학적 계층 혹은 심지어 다양한 종으로 분화할 수도 있다는 뜻이다. 세계화는 수평적으로는 세계를 통일하고 국경을 없애지만, 동시에 수직적으로는 인류를 분할할 것이다. 미국과 러시아 같은 다양한 나라에서는 과두 지배계층이 뭉쳐 평범한 사피엔스 대중에 맞서 공동 목적을 추구할 수도 있다. 이런 관점에서 보면 현재 포퓰리즘이 '엘리트'에 분개하는 데에는 충분한 이유가 있다. 앞으로 조심하지 않으면 실리콘밸리 재벌과 모스크바 억만장자의 손주들이 애팔래치아 시골뜨기와 시베리아 촌사람의 손주들보다 우월한 종이 될 수도 있다.

 장기적으로 봤을 때, 그런 시나리오가 세계를 탈세계화할 수도 있다. 상위 계층은 자칭 '문명' 내부로 모여들면서 그 둘레에는 성벽과 해자를 만들어 '야만인들' 무리와 격리된 삶을 사는 것이다. 20세기 산업 문명은 값싼 노동력과 원자재와 시장을 얻기 위해 '야만인들'에게 의존해야 했다. 그래서 그들은 정복하고 흡수했다. 반면, 21세기 후기 산업 문명은 AI와 생명공학과 나노 기술에 의존하면서 훨씬 더 자족적이고 자생적이 된다. 그럴 경우 계급 차원을 넘어 나라와 대륙이 통째로 관심 밖의 대상으로 전락할 수도 있다. 드론과 로봇이 지키는 요새 안의 자칭 문명 구역에서는 사이보그들이 논리폭탄으로 경쟁을 벌이는가 하면, 그와 격리된 야만인의 땅에서는 야생의 인간들이 칼과 칼라슈니코프 자동소총으로 싸운다.

 이 책에서 나는 인류의 미래에 관해 이야기하며 1인칭 복수형을 자주 사용했다. '우리의' 문제에 관해 '우리'가 무엇을 해야 하는지에 대해 이야기했다. 하지만 아마도 앞으로 '우리'는 존재하지 않을 것이다. 짐자건대 '우리의' 가장 큰 문제는 다양한 인가 집단이 서로 완전히 다른 미래를 맞게 될 거라는 사실이다. 세계 어떤 지역에서는 자녀에게 컴퓨터 코딩을 가르쳐야 하는 반면, 다른 지역에서는 재빨리 총을 뽑아 명중시키는 법을 가르치는 게 나을지도 모른다.

 

p129

 데이터를 손에 넣기 위한 경주는 이미 시작됐다. 선두 주자는 구글과 페이스북, 바이두, 텐센트 같은 데이터 거인들이다. 지금까지 이 거인들의 다수가 채택해온 사업 모델은 '주의 장사꾼'처럼 보인다. 무료 정보와 서비스, 오락물을 제공해 우리의 주의를 끈 다음 그것을 광고주들에게 되판다. 하지만 데이터 거인들이 추구하는 목표는 이전의 그 어떤 주의 장사꾼들보다 훨씬 높다. 이들의 진짜 사업은 결코 광고를 파는 것이 아니다. 오히려 우리의 주의를 사로잡아 우리에 관한 막대한 양의 데이터를 모으는 것이다. 이것이야말로 그 어떤 광고 수익보다 훨씬 가치가 크다. 그러니까 우리는 고객이 아니라 그들의 생산품인 것이다.

 중기적으로 볼 때 이런 식으로 데이터가 비축되면 근본적으로 다른 사업 모델이 열리는데, 그 첫 희생자는 광고 산업 전체가 될 것이다. 새로운 모델의 기반은 인간의 권위가 알고리즘으로 옮겨가는 것이다. 여기에는 어떤 것을 골라서 구매하는 권위까지 포함된다. 알고리즘이 위를 위해서 뭔가를 고르고 구매하기 시작하면 전통적인 광고 산업은 파산할 것이다. 구글을 보자. 구글이 추구하는 최종 목표는 우리가 구글에 무엇이든 질문할 수 있고, 그게 대한 세계 최선의 해답을 얻는 것이다. 우리가 구글에 '안녕 구글, 네가 차에 대해 아는 모든 것과 나에 대해 아는 모든 것(나의 욕구와 습관, 기후변화를 보는 관점, 중동 정치에 대한 나의 견해까지 포함)을 감안했을 때, 내게 가장 좋은 차는 뭐라고 생각하니?" 라는 질문까지 할 수 있게 되면 어떤 일이 일어날까? 만약 구글이 그 질문에 좋은 답을 제시할 수 있다면, 그리고 우리가 경험은 통해 우리의 쉽게 조종당하는 감정보다 구글의 지혜를 더 신뢰하게 된다면 차량 광고가 무슨 소용이 있을까?

 장기적으로는 충분한 규모의 데이터와 더불어 컴퓨팅 능력이 충분히 커지면 데이터 거인들은 생명의 가장 깊은 비밀까지 해킹할 수 있을 것이다. 그런 다음 그 지식을 사용해 우리 대신 선택을 하고 우리를 조종할 뿐만 아니라, 유기적 생명을 재설계하고 비유기적 생명체를 만들 수도 있을 것이다. 광고 판매는 단기적으로 거인 기업을 유지하는 데 필요할 수 있다. 하지만 이들은 앱과 상품과 기업을 평가할 때도 매출액보다도 그것을 통해 모을 수 있는 데이터를 기준으로 삼는다. 인기 많은 앱이 사업 모델로는 부적격이고 단기적으로는 손실을 초해할 수도 있지만, 데이터를 빨아들이는 것으로 보자면 그 가치는 수십억 달러에 이를 수 있다. 지금 당장은 데이터를 기반으로 어떻게 돈을 벌어야 할지 모른다 해도 가지고 있는 것만으로도 가치는 충분하다. 데이터야말로 미래에 생활을 통제하고 형성하는 데 열쇠가 될 수 있기 때문이다. 나는 데이터 거인들이 얼마나 명확하게 그런 측면에서 이 문제를 생각하고 있는지는 확신할 수 없다. 하지만 그들의 행동을 보면 그들이 단순히 돈보다는 데이터를 모으는 데 가치를 두고 있음을 알 수 있다.

 

p152

 사람들은 이런 변화를 외면할 때가 많다. 자신들의 핵심적인 정치적, 종교적 가치에 관해서라면 특히 더 그렇다. 우리는 우리의 가치가 옛 조상에게서 물려받은 귀중한 유산이라고 고집한다. 하지만 그렇게 말할 수 있는 유일한 근거는 우리의 조상이 오래전에 죽었으며 이제는 스스로 말할 수 없다는 사실이다. 예를 들어 유대인이 여성을 대하는 태도를 보자. 오늘날 초정통파 유대교인들은 공공장소에서 여성 사진을 금지한다. 이들을 겨냥한 게시판과 광고에는 남자와 소년만 묘사돼 있을 뿐 여성과 소녀는 결코 등장하지 않는다.

 2011년 그로 인한 사건이 터졌다. 뉴욕 브루클린의 초정통파 유대교 신문인 디 차이퉁Di Tzeitung이 미국 관리들이 오사마 빈 라덴의 은신처 공습을 지켜보는 사진을 실으면서 디지털 기술로 힐러리 클린터 국무장관을 포함한 모든 여성을 삭제한 것이다. 이 신문은 유대교의 '겸손법'에 따른 불가피한 조치였다고 해명했다. 비슷한 사건은 또 있었다. 이스라엘의 하메바세르HaMevaser 신문이 샤를리 에브도 학살에 항의하는 시위 사진에서 앙겔라 메르켈을 지운 것이다. 애독자들의 마음속에 음탕한 생각이 일어나는 것을 막기 위해서였다. 또 다른 초정통파 유대교 신문인 하모디아Hamodia의 발행인은 이런 정책을 변호하면서 '우리는 수천 년 유대교 전통의 지지를 받고 있다"고 했다.

 유대교 회당만큼 여성의 노출을 엄격하게 제한하는 곳도 없다. 정통파 유대교 회당에서 여성은 남성으로부터 철저히 격리되어 커튼 뒤 제한 구역에 있어야 한다. 남성들이 기도하거나 경전을 읽을 때 우연하게라도 여성의 모습이 눈에 띄지 않게 하기 위해서다. 하지만 이 모든 것이 수천 년 유대교 전통과 변치 않는 신법의 지지를 받고 있다면, 고고학자들이 이스라엘에서 출토한 미쉬나와 탈무드 시대의 예배당 유적에 남녀가 격리된 흔적은 조금도 없었고, 오히려 아름다운 바닥 모자이크 그림과 천정 그림에 여성이 묘사돼 있었으며, 심지어 어떤 여성은 몸을 다 드러내다시피 한 사실은 어떻게 설명해야 할까? 미쉬나와 탈무드를 저술한 랍비들조차 이런 예배당에서 규칙적으로 기도하고 공부했건만, 오늘날 정통파 유대교인들은 그들이 불경스럽게도 옛 전통을 모독했다고 할 것이다.

 옛 전통을 왜곡하는 일은 모든 종교의 공통적인 특징이다. IS는 자신들이 이슬람교의 순수 원형으로 돌아갔다고 하지만 사실은 그들의 해석이야말로 완전히 새로운 것이다. 물론 그들은 유서 깊은 문헌을 많이 인용한다. 하지만 이 과정에서 어떤 것을 취사선택할지, 그것을 어떻게 해석할지를 두고 심혈을 기울인다. 실제로 성스러운 문헌을 해석할 때 이들이 보이는 'DIY Do It Yourself'식 태도야말로 대단히 현대적인 것이다. 전통적으로 경전 해석은 박식한 울라마(카이로의 알아자르 같은 저명한 기관에서 이슬람법과 신학을 공부한 학자)의 독점 영역이었다. IS 지도자들 중에 그런 자격을 갖춘 사람은 거의 없었고, 존경받는 울라마들도 대부분 최고 지도자인 아부 바르크 알바그다디와 그 일당을 무지한 범죄자로 일축해왔다.

 그렇다고 해서 어떤 사람들이 주장하는 것처럼 IS가 '비이슬람적'이거나 '반이슬람적'이라는 것은 아니다. 특히 버락 오바마 같은 기독교인 지도자가 무모하게도 아부 바르크 알바그다디 같은 자칭 무슬림에게 무슬림이 무엇을 뜻하는지 이야기한 것은 역설적이다. 이슬람의 진정한 핵심이 무엇인지를 두고 벌어진 열띤 논쟁은 한마디로 무의미하다. 이슬람교에서는 고정된 DNA가 없기 때문이다. 이슬람교는 무슬림들이 만들어내는 것이다.

 

p173

 사람들이 민족이라는 공동체를 구축하는 수고를 마다하지 않았던 이유는 단일 부족 차원에서는 해결할 수 없는 도전에 직면했기 때문이었다. 

 

p179

 불행히도 우리는 이런 성취에 너무나 익숙해진 나머지 그것을 당연하게 여긴다. 그러다 보니 사람들은 불장난을 방치하기도 한다. 러시아와 미국은 최근에 새로운 핵 군비 경쟁에 착수했다....

 그 와중에 대중은 핵폭탄을 걱정하기는 커녕 오히려 좋아하게 되었다. 혹은 핵폭탄이 존재한다는 사실 자체를 아예 망각했다. 

그러다 보니 주요 핵 강국인 영국의 브렉시트 논쟁에서도 주로 거론된 것은 경제와 이민 문제였을 뿐, 유럽연합이 유럽과 지구적 평화에 어떤 공헌을 하는지는 대체로 무시됐다. 수 세기 동안 끔찍한 유혈 사태를 겪은 후에야 마침내 프랑스와 독일, 이탈리아, 영국이 유럽 대륙의 조화를 보장해줄 장치를 구축했음에도, 이제 와서 영국 대중은 기적적으로 탄생한 이 기계 안에다 공구를 던져 넣어버린 것이다.

 

 

19세기 국가들이 민족주의 게임을 벌이면서도 인류 문명을 파괴하지 않은 것은 사실이다. 하지만 이는 히로시마 시대에나 있던 일이었다. 그 후 핵무기의 등장으로 상황은 더 엄중해졌고 전쟁과 정치의 근본 성격이 바뀌었다. 인류가 우라늄과 플루토늄을 농축하는 법을 알게 된 이상, 어느 특정 국가의 이익보다 핵전쟁 예방을 우선시하는 것에 모두의 생존이 달렸다. "우리 나라 최우선!"이라고 외치는 열혈 민족주의자들은 과연 튼튼한 국제 협력 체제 없이 혼자서 자국은 물론 세계의 핵 파괴를 막을 수 있을지 자문해봐야 한다.

 

p180

 핵전쟁 외에도, 인류는 앞으로 수십 년 안에 1964년 정치 레이더망에는 거의 포착되지 않았던 새로운 실존적 위협에 직면할 것이다. 바로 생태학적 붕괴다. 인간은 여러 면에서 지구 생물권을 불안정하게 만들고 있다. 우리는 자연환경에서 점점 더 많은 자원을 가져오면서도, 자연에는 엄청난 양의 쓰레기와 독성 물질을 쏟아내 흙과 물과 대기의 성분까지 바꿔놓고 있다.

 

 이러한 가공할 실험은 이미 진행되기 시작했다. 핵전쟁이 미래의 잠재적인 위협인 것과 달리, 기후변화는 현재 닥친 실제 상황이다. 인간 활동, 특히 이산화탄소 같은 온실가스 배출 때문에 지구의 기후가 무서운 속도로 변하고 있다는 데는 과학적 합의가 이뤄진 상태다. 회복 불가능한 대재앙을 촉발하지 않는 선에서 이산화탄소를 정확히 어느 정도까지만 대기 중에 쏟아낼 수 있는지 아는 사람은 아무도 없다. 하지만 최선의 과학적 추산으로는 앞으로 20년 안에 온실가스 배출량을 극적으로 줄이지 않으면 지구의 평균 온도는 산업혁명 이전보다 섭씨 2도 이상 올라가는가 하면, 사막의 확장과 만년설의 소멸, 해수면의 상승, 허리케인과 태풍 같은 극단적인 날씨 증가에 직면할 것이다. 이런 변화는 역으로 농업 생산에 지장을 주고, 도시를 침수시키고, 세계의 많은 지역을 살기 어려운 곳으로 만들어 수억 명의 난민이 새로운 보금자리를 찾아 나설 것이다.

 더욱이 지금 우리는 수많은 임계점에 빠른 속도로 접근하고 있다. 이 점을 넘어가면 설사 온실가스 배출을 극적으로 감축한다 해도 지금의 추세를 되돌려 전 세계의 비극을 막기에는 역부족일 것이다. 예를 들어 지구온난화로 극지방의 얼음층이 녹으면서 지구에서 우주 공간으로 반사되는 태양빛의 양이 줄었다. 이 말은 지구가 흡수하는 열의 양이 많아지고, 따라서 기온은 훨씬 더 오르고 얼음이 녹는 속도는 훨씬 빨라진다는 뜻이다. 이런 악순환의 고리가 결정적인 문턱을 넘어가면 불가항력의 탄력이 붙으면서 극지의 모든 얼음이 녹게 된다. 그때 까서는 인간이 석탄과 석유, 가스의 연소를 전면 중단해도 소용없을 것이다. 따라서 지금 우리가 직면한 위험을 인정하는 것만으로는 불충분하다. 바로 지금 그것에 대한 뭔가를 실행하는 일이 다급하다.

 

 이토록 걱정스러운 그림에 민족주이가 들어설 자리가 있겠는가? 생태학적 위협에 민족주의가 나름의 답을 제시할 수 있을까? 아무리 강대국이라 해도 지구온난화를 혼자서 중단시킬 수 있을까? 개별 국가들은 확실히 다양한 녹색 정책들을 채택할 수 있다. 이 중 다수는 환경에는 물론 경제에도 좋다.

 

 민족주의적 고립은 십중팔구 핵전쟁보다 기후변화의 맥락에서 훨씬 더 위험하다. 전면적인 핵전쟁은 모든 국가를 무차별 파괴할 위험이 있기 때문에 그것을 막는 일에서는 모든 국가가 동등한 지분을 갖는다. 반면에 지구온난화가 초래할 충격은 국가마다 다를 가능성이 크다. 어떤 나라는, 특히 러시아는 실제로 혜택을 누릴 수도 있다. 러시아는 해안 지대가 상대적으로 적다. 따라서 해수면 상승에 대한 걱정도 중국이나 키리바시보다 덜하다.

 

p199

  하지만 종교 지도자가 과학자와의 경쟁에서 불리한 상황에 처하게 된 것도 바로 그 해석의 천재성 때문이다. 과학자도 지름길을 찾아내고 증거를 비트는 법을 안다. 하지만 궁극에 가서 과학이 보여주는 특징은, 언젠든지 잘못을 인정하고 다른 방법을 시도하는 것이다. 그래서 과학자는 점점 더 농작물을 잘 키우고 더 나은 의약품을 개발하는 법을 알게 되는 데 반해, 사제와 구루는 더 나은 변명거리를 내놓는 법만 익히게 된다. 수 세기에 걸쳐 참된 신앙인들조차 그런 차이에 주목해왔는데, 바로 그 점 때문에 종교는 기술적인 영역에서 갈수록 권위를 잃어왔다.

 

p205

 이들이 타고 다니는 차도 다를 것이다. 복음주의자는 기름을 많이 먹는 대형 SUV 차량을 몰고 다닐 테지만, 독실한 카톨릭 신도는 미끈한 전기차에 "지구를 태워라, 그리하면 지옥에서 타 죽으리!"라고 적힌 범퍼 스티커를 붙이고 다닐 것이다. 하지만 이들이 아무리 자기 입장을 변호하는 데 다양한 성경 구절을 인용하더라도, 견해 차이의 진정한 원천은 근대 과학 이론과 정치 운동에 있지, 성경에 있지 않다. 이런 관점에서 종교는 우리 시대의 거대한 정책 논쟁에 기여하는 바가 사실상 별로 없다. 카를 마르크스가 주장했듯 종교는 겉치장일 뿐이다.

 

p206

 인간의 힘을 대규모 협동에서 발휘되는데, 대규모 협동을 끌어내려면 그만큼 큰 정체성을 구축해야 한다. 거대한 정체성이 기반으로 삼는 모든 것은 허구의 이야기지, 과학적 사실이나 경제적 필요가 아니다. 21세기에 와서도 인간이 유대인과 무슬림, 러시아인과 폴란드인으로 나뉘어 있는 것은 여전히 종교적 신화에 의거하고 있다. 나치와 공산주의자들은 인간의 정체성을 과학적으로 인종과 계급으로 결정하려 했지만 그것은 위험한 사이비 과학으로 판명되었다. 그 후로 과학자들은 인간의 '자연적인' 정체성이 무엇인지 규정하는 데 도움을 주는 것을 극도로 꺼렸다.

 

p208

 근대 세계에서 전통적 종교가 힘과 중요성을 유지하고 있는 대표적 사례를 들자면 아마도 일본일 것이다. 1853년 미국 함대가 일본을 향해 근대 세계로 문을 열라고 강요했을 때, 일본은 극단적인 근대화를 급속히 추진했고 성공했다. 몇 십 년 걸리지 않아 과학과 자본주의, 최신 군사 기술로 무장한 강력한 관료 국가로 발돋움한 일본은 중국과 러시아를 꺽고 타이완과 한국을 점령한 데 이어, 진주만에서 미군 함대를 격침시키고 극도에서 유럽 제국까지 격파했다. 하지만 일본은 서구의 청사진을 맹목적으로 따르지 않았다. 그들은 자신들의 독특한 정체성을 보호하고, 과학이나 근대성, 그리고 어떤 모호한 지구 공동체가 아닌 일본에 충성을 바치는 나라가 되기 위해 결사적으로 싸웠다.

 그 목적을 위해 일본은 고유 종교인 신도神道를 일본 정체성의 초석으로 고수했다. 사실 신도를 재발명했다. 전통 신도는 다양한 정령과 신령, 귀신에 대한 믿음이 뒤섞인 애니미즘 신앙이었다. 모든 마을과 신사가 자기만의 정령과 지역 관습을 갖고 있었다. 19세기 후반에서 20세기 초에 일본은 국가 공인 신도를 만들면서 수많은 지역 전통들을 억압했다. 이렇게 만들어진 '국가 신도'에는 민족성과 인종이라는 대단히 근대적인 사상이 주입됐다. 일본 엘리트들이 유럽 제국주의에서 따온 요소였다. 불교와 유교, 사무라이 봉건 윤리 등에서도 국가 충성에 도움이 되는 것이라면 모두 가져다 뒤섞었다. 그 위에다 일본의 황제 숭배를 최고 원리로 신성시했다. 이들은 일본 황제를 태양의 여신 아마테라스의 직계 후손이자 살아 있는 신으로 간주했다.

 얼핏 이 이상한 신구의 조합은 급속한 근대화 과정에 착수한 국가로서는 부적절한 선택처럼 보인다. 살아 있는 신? 애니미즘 정령? 봉건 윤리? 근대 산업 강국이 아니라 신석기 족장 이야기처럼 들린다.

 하지만 그것은 마술처럼 통했다. 일본은 숨가쁘게 근대화했고, 동시에 국가에 대한 광신적인 충성을 이끌어냈다. 국가 신도가 성공했음을 보여주는 대표적인 상징은 정밀유도미사일을 개발해 처음 사용한 강대국이 일본이었다는 사실이다. 미국이 스마트 폭탄을 실전 배치하기 수십 년도 전에, 나치 독일이 V-2 로켓 발진을 시작하려던 무렵에 이미 일본은 연합국 군함 10여 대를 정밀유도미사일로 격침했다. 이 미사일은 바로 우리가 아는 가미카제다. 오늘날 정밀유도 무기에서 방향을 인도하는 일은 컴퓨터가 하지만, 카미카제는 일반 항공기에 폭탄을 싣고 인간 조종사가 편도 비행의 임무를 수행하는 식이었다. 이런 결의는 죽음을 각오한 희생정신의 산물이었는데, 바로 국가 신도에서 비롯한 것이었다. 이처럼 가미카제는 첨단 기술과 첨단 종교적 교리 주입의 결합에 의존했다.

 부지불식간에 수많은 정부들이 오늘날 일본의 사례를 따른다. 이들은 근대화의 보편적 도구와 구조를 채택하는 동시에 독특한 국가 정체성을 보존하기 위해 전통 종교에 의존한다. 일본에서 국가 신도가 했던 역할을 러시아에서는 정교회 기독교가, 폴란드에서는 가톨릭이, 이란에서는 시아파 이슬람이, 사우디아라비아에서는 와하비즘이, 이스라엘에서는 유대교가 한다. 종교가 아무리 고리타분해 보여도 약간의 상상력과 재해석을 거치면 최신의 기술 도구와 가장 정교한 근대 제도와도 거의 언제든지 결합할 수 있다.

 어떤 경우에는 국가가 독특한 정체성을 위해 완전히 새로운 종교를 만들 수도 있다. 가장 극단적인 사례가 일본의 식민지였던 북한이다. 북한 정권은 광란적인 국가 종교인 주체사상을 신민들에게 주입한다. 주체사상은 마르크스레닌주의와 고대 한국의 전통, 한국인의 고유한 순수성에 대한 인종주의적 믿음, 김일성 일가의 신격화가 결합된 것이다. 김씨 가문이 태양신의 후손이라고 주장하는 사람은 아무도 없다. 하지만 김씨 일가는 역사 속의 그 어떤 신보다 더 열렬히 숭배된다. 마치 일본 제국이 결국에는 패한 것을 염두에 둔 듯, 북한의 주체사상은 핵 개발을 최고의 희생도 감수할 만한 신성한 의무로 언명하면서, 오랫동안 줄기차게 자신들의 조합물에 핵무기를 추가하려고 애써왔다.

 

p294

 모든 형태의 겸손 중에서도 가장 중요한 것은 아마도 신 앞에서의 겸손일 것이다. 사람들은 신에 관해 이야기할 때는 언제나 자신을 극도록 낮춘다. 하지만 그런 다음에는 신의 이름을 활용해 신도들 위에 군림한다.

 

p317

 물론 모든 도그마가 똑같이 해로운 것은 아니다. 어던 종교적 믿음은 인류를 이롭게 했듯이 마찬가지로 세속주의 도그마들 중에서도 어떤 것들은 이로웠다. 특히 인권의 신조가 그렇다. 우리가 중시하는 권리가 존재하는 유일한 장소는, 이간이 발명하고 서로 주고 받는 이야기 속이다. 이런 이야기들은 종교적 광신과 전제 정부에 맞서 투쟁을 벌여오는 동안 자명한 교리로 신성시하게 된 것들이다. 인간은 태어날 때부터 생명이나 자유의 권리를 갖는다는 것은 진실이 아니어도, 이 이야기에 대한 믿음 덕분에 권위주의 정권의 권력을 억제했고, 소수자들의 피해를 막았으며, 수십억 인구를 빈곤과 폭력의 최악의 결과로부터 보호했다. 역사상 이보다 더 인류의 행복과 복지에 기여한 신조도 없을 것이다.

 하지만 그렇다고 해도 이 역시 도그마일 뿐이다. 그렇기 때문에 유엔 인권 선언은 19조에서 "누구의 의견과 표현의 자유를 누릴 권리가 있다"고 명시했다. 이것을 우리가 정치적 요구 사항("누구나 의견의 자유권을 가져야 한다")으로 이해하는 한에서 이는 전적으로 타당한 말이다. 하지만 모든 사피엔스에게는 태어날 때부터 '의견의 자유권이 주어졌으며, 따라서 어떠한 검열도 자연법에 반하는 것이라고 믿는다면, 우리는 인류에 관한 진실을 놓치게 된다. 자신을 '양도할 수 없는 자연권을 지닌 개인'으로 규정하는 한, 자신이 진정으로 어떤 존재인지 알 수 없을뿐더러, 자신이 속한 사회와 자신의 정신('자연권'에 대한 믿음까지 포함해서)을 규정하는 역사적 힘들을 이해하지 못할 것이다.

 그런 무지는 20세이게는 별로 문제되지 않았을 수 있다. 사람들은 히틀러, 스탈린과 싸우느라 바빴다. 하지만 21세기에는 치명적인 문제가 될 수 있다. 생명기술과 인공지능이 이제 인간성 자체의 의미를 바꾸려 하고 있기 때문이다. 만약 생명권을 신봉한다면, 그 말은 죽음을 극복하기 위해 생명기술을 이용해햐 한다는 뜻까지 함축할까? 만약 자유권을 신봉한다면, 우리의 숨은 욕망을 찾아 읽어내고 그것을 충족시키기 위해 알고리즘에 힘을 부여해야 할까? 만약 모든 인간이 동등한 인간적 권리를 누린다면 초인간은 초인권을 누려도 될까? '인권'이라는 도그마의 믿음을 고수하는 한, 세속주의를 따르는 사람들로서는 그런 질문에 답하기 어려울 것이다.

 인권의 도그마는 이전 세기 동안 종교재판관과 '앙시앵 레짐', 나치, KKK에 맞서 싸우기 위한 무기로 만들어진 것이다. 앞으로 초인간, 사이보그, 초지능 컴퓨터를 다루기에는 맞지 않다. 인권 운동은 종교적 편견과 인간 폭군을 상대로는 아주 인상적인 주장과 방어의 병기들을 개발해왔지만, 이 병기들이 앞으로 닥칠 소비자주의의 범람과 기술 유토피아로부터 우리를 지켜줄 것 같지는 않다.

 

p324

 지난 몇 세기 동안 자유주의 사상은 합리적 개인에 대한 엄청난 믿음을 키워왔다. 개개인을 독립적인 이성적 주체로 그리고는 이런 신화적인 창조물을 근대 사회의 기초로 삼아왔다. 민주주의는 유권자가 가장 잘 안다는 생각 위에 서 있고, 자유시장 자본주의는 고객은 언제나 옳다고 믿으며, 자유주의 교육은 학생들이 스스로 사고하도록 가르친다.

 하지만 합리적 개인을 과신하는 것은 실수다. 탈식민주의 사상가들과 페미니즘 사상가들은 이 '합리적 개인'이야말로 상류층 백인 남성의 자율성과 권력을 찬양하는 서구의 국수주의적 환상일 뿐이라고 지적해왔다. 앞에서 지적했듯이, 행동경제학자들과 진화심리학자들은 인간의 결정은 대부분 이성적 분석보다는 감정적 반응과 어리짐작식의 손쉬운 방법에 기초하고 있다는 사실을 증명해왔다. 우리의 감정과 어림짐작은 석기시대를 살아가는 데는 적합했을지 모른다. 하지만 실리콘 시대에는 한심할 정도로 부적합하다.

 합리성뿐 아니라 개인성 또한 신화이다. 인간은 스스로 생각하는 경우가 드물다. 그보다는 집단 속에서 사고한다. 아이 한 명을 키우는 데 마을이 협력해야 하는 것처럼, 도구를 발명하고 갈등을 풀고 질병을 치료하는 데도 부족이 힘을 모아야 한다. 교회를 짓든 원자폭탄을 만들든 비행기를 띄우든, 어느 한 개인이 그 과정의 모든 것을 알지는 못한다. 호모 사피엔스가 다른 모든 동물들보다 경쟁에서 우위를 보이고 마침내 지구의 주인이 될 수 있었던 것은, 인간 개인의 합리성이 아니라 대규모로 함께 사고할 수 있는 전례 없는 능력 덕분이었다.

 인간 개인이 세상에 관해 아는 것은 창피할 정도로 적다. 더욱이 역사가 진행되가면서 개인이 아는 것은 점점 더 줄어들게 되었다. 석기시대의 수렵 · 채집인은 자기 옷을 만들고 불을 붙이고 토끼를 사냥하고 사자를 피하는 법을 알았다. 오늘날 우리는 그보다 훨씬 더 많이 안다고 생각한다. 하지만 개개인의 차원에서 보면 실제로 우리가 아는 것은 훨씬 적다. 우리는 우리에게 필요한 것 거의 전부를 다른 사람의 전문성에 의존해서 얻는다. 우리를 겸손하게 만드는 한 실험에서 연구진은 먼저 사람들에게 지퍼의 작동 원리를 얼마나 잘 이해하는지 물어봤다. 응답자 대다수는 아주 잘 안다고 자신 있게 답했다. 그도 그럴 것이 지퍼야 우리가 늘 사용하는 것 아닌가. 그런 다음 실험자는 응답자들에게 지퍼가 작동하는 과정을 가능한 한 자세히 묘사해보라고 주문했다. 이번엔 대부분의 응답자들이 답하지 못했다. 이를 두고 스티븐 슬로먼과 필립 페른백은 '지식의 착각'이라고 불렀다. 우리는 우리가 꽤 많이 안다고 생각한다. 사실 개인적으로는 아는 게 미미한데도 다른 사람의 머릿속에 든 지식을 마치 자신의 것이라고 여기기 때문이다.

 이것을 두고 반드시 나쁘다고만은 할 수 없다. 이런 집단사고에 의존한 덕분에 우리는 세계의 주인이 될 수 있었고, 지식의 착각 덕분에 스스로 모든 것을 이해하려는 불가능한 노력에 사로잡히지 않은 채 삶을 헤쳐 나갈 수 있었다. 진화의 관점에서 보면, 남들의 지식을 신뢰한 것이야말로 호모 사피엔스에게 대단히 유리하게 작용했던 것이다.

 하지만 지난 시대에는 통했지만 근대에 와서는 곤란을 초래하는 다른 인간의 특성과 마찬가지로 지식의 착각 역시 부정적인 면이 있다. 세계는 나날이 복잡해지고 있는 반면, 사람들은 세상이 돌아가는 상황에 자신이 얼마나 무지한지 깨닫지 못하고 있다. 그러다보니 기상학과 생물학에 관해서는 아는 것이 거의 없는 사람들이 기후변화와 유전자변형농작물에 관한 정책을 제안하고, 이라크나 우크라이나가 지도 어디에 있는 나라인지도 모르는 사람들이 그 지역의 정책을 두고 극도로 강한 견해를 고집한다. 사람들이 자신의 무지를 헤아리는 경우가 드문 이유는, 자신과 같은 생각을 가진 친구들로 가득한 반향실反響室과 자기 의견을 강화해주는 뉴스피드 안에만 갇혀 있기 때문이다. 이들의 믿음은 계속해서 공고해질 뿐 도전받는 일이 거의 없다.

 

 

 대부분의 우리 견해는 개인의 합리성보다 공동체의 집단사고에 의해 형성된다. 우리가 이런 견해를 고수하는 것도 집단을 향한 충성심 때문이다. 사람들에게 사실을 쏟아 놓고 그들 개인의 무지를 들춰낼 경우에는 오히려 역풍을 맞기 쉽다. 대다수의 사람들은 너무 많은 사실을 싫어한다. 게다가 자신이 멍청하게 느껴지는 것은 더더욱 싫어한다. 티파티Tea Party 운동 지지자들에게 지구온난화에 관한 통계 자료를 보여주고 진실을 믿게 할 수 있다고 생각한다면 오산이다.

 집단사고의 위력은 너무나 만연해서 얼핏 자의적인 것처럼 보이는 믿음도 좀처럼 깨지지 않는다. 가령, 미국에서는 한경오염과 멸종위기종 같은 문제에 관한 한 우파 보수주의자들이 좌파 진보주의자들에 비해 관심이 훨씬 낮다. 보수 지역인 루이지애나 주의 환경 규제가 진보 성향의 매사추세츠 주보다 훨씬 약한 것도 그 때문이다. 이런 상황이 우리에게는 너무나 익숙해서 당연하게 여겨진다. 하지만 이는 실제로 대단히 놀라운 일이다. 말 그대로 보수주의자라면 오랜 생태계의 질서를 보존하고 선조들의 땅과 숲과 강을 보호하는 데 훨씬 많은 관심을 쏟을 거라고 짐작할 것이다. 반면에 진보주의자는 지방을 급진적으로 바꾸는 일에, 특히 그 목표가 사회진보를 앞당기고 인간의 생활수준을 끌어올리는 것이라면 그런 문제에 훨씬 개방적일 거라고 예상할지 모른다. 하지만 실제로는 다양한 역사적 변수에 의해 정당의 노선이 한 번 결정되고 난 결과, 보수주의자들은 으레 하천 오염이나 조류 멸종 같은 문제는 거들떠 보지도 않게 된 반면, 좌파 진보주의자들은 오랜 생태계 질서를 교란하는 것이라면 무엇이든 두려워하는 경향을 보인다.

 심지어 과학자들도 집단사고의 영향력에서 자유롭지 않다. 그래서 사실이 여론을 바꿀 수 있다고 믿는 과학자들 자신도 과학자 집단사고의 희생자가 되기도 한다. 과학 공동체는 사실의 효력을 믿는 집단이다 보니, 이런 공동체에 충직한 학자들은 올바른 사실만 열거해도 공적인 토론에서 이길 수 있다고 줄기차게 믿지만, 경험상 정반대의 경우가 다반사다.

 마찬가지로 개인의 합리성에 대한 자유주의자의 믿음 자체가 자유주의자들이 집단사고의 산물일 수 있다. 몬티 파이튼이 <브라이언의 삶>에 나오는 절정의 장면 중 하나에서 홀딱 반한 신도 무리가 브라이언을 메시아로 착각한다. 브라이언은 제자들에게 "나를 따를 필요가 없다. 어느 누구든 따를 필요가 없다! 너희는 스스로 생각해야 한다! 너희는 모두가 개인이다! 너희는 다 다르단 말이다!"라고 하자 열광하는 무리는 한목소리로 제창한다. "그렇다! 우리는 모두가 개인이다! 그렇다, 우리는 다 다르다!"

 몬티 파이튼의 이 장면은 1960대를 휩쓴 반反문화의 교조주의를 풍자한 것이었지만, 여기서 전하려는 요지는 합리적 개인주의에 대한 믿음 전반에도 적용될 수 있다. 근대 민주 사회를 가득 메운 군중 역시 한목소리로 이렇게 외친다. "그렇다, 유권자가 제일 잘 안다! 그렇다, 고객은 언제나 옳다!"

 

p331

 거대 권력은 블랙홀처럼 주변 공간 자체를 왜곡한다. 그 곁에 가까이 갈수록 모든 것이 더 심하게 뒤틀린다.

 

 

 몇 년 전 나는 베냐민 네타냐후 이스라엘 총리와의 만찬에 초대받은 적이 있다. 내 친구들은 가지 말라고 했지만 나는 유혹을 뿌리칠 수 없었다. 그런 비공개 행사장 안에서 중요한 인사들 사이에서만 새 나오는 어떤 큰 비밀들을 들을 수 있지는 않을까 생각했다. 하지만 실망이 이만저만이 아니었다. 그날 참석자는 한 서른 명쯤 됐는데, 모두가 권력자의 관심을 끌고, 재치 있는 말로 그를 감명시키고, 비위를 맞추고, 그로부터 뭔가를 얻어내려 애를 썼다. 만약 그 중 어느 누구라도 어떤 큰 비밀을 알고 있었다면, 그는 비밀이 누설되지 않도록 하는 데에는 더없는 수완을 발휘한 셈이었다. 이것은 네타냐후의 잘못이라고 보기는 어려웠다. 사실 어느 누구의 잘못도 아니었다. 권력이 갖고 있는 중력 탓이었다.

 진심으로 진실을 바란다면 권력의 블랙홀을 피하고, 중심에서 떨어진 주변부에서 이리저리 방황하며 오랜 시간을 허비할 수 있어야 한다. 혁명적인 지식은 권력의 중심에서 출현하는 경우가 드물다. 왜냐하면 중심은 언제나 존재하는 지식을 토대로 구축되기 때문이다. 구질서의 수호자가 권력의 중심에 다가올 수 있는 자를 결정하는데, 이때 전통에서 벗어난 파괴적 사상을 가진 자는 걸러내는 경향이 있다. 물론 이 과정에서 엄청난 양의 쓸데없는 지식도 걸러낸다. 다보스 세계경제포럼에 초대받았다는 사실이 그 사람의 지혜를 담보해주지는 않는다. 주변부에서 많은 시간을 보낼 필요가 있다는 것도 그런 이유에서다. 다보스 포럼에서 오가는 논의 중에는 어떤 눈부신 혁명적 통찰이 담겨 있을 수도 있다. 하지만 대부분은 정확한 정보에 기초하지 않는 추측과 한물간 모델, 신화적인 도그마, 터무니없는 음모 이론 등으로 가득하다.

 따라서 지도자들은 진퇴양난에 처해 있다. 만약 권력의 중심에만 머물러 있으면 세계를 보는 눈이 극도로 왜곡될 것이다. 그렇다고 주변부로 모험을 감행하면 귀중한 시간을 너무 많이 허비할 것이다. 게다가 문제는 갈수록 악화될 것이다. 앞으로 수십 년 안에 세계가 지금보다 훨씬 더 복잡해짐에 따라, 결과적으로 인간 개개인은 - 장기판의 왕이 됐든 졸이 됐든 - 세계를 구성하는 기술 도구와 경제 흐름, 정치 동학에 훨씬 더 무지해질 것이다. 2,000년도 더 전에 소크라테스가 관찰했듯이, 그런 조건하에서 우리가 할 수 있는 최선은 우리 개개인의 무지를 인정하는 것이다.

 하지만 그럴 경우 도덕과 정의의 문제는 어떻게 해야 할까? 세계를 이해할 수 없다면 어떻게 우리가 옳고 그름과, 정의와 불의의 차이를 분별하길 기대할 수 있을까?

 

p337

 세상이 짜인 방식이라는 게, 알려고 노력하지 않는 사람은 행복한 무지 속에 남아 있을 수 있고, 정작 알려고 애쓰는 사람은 진실을 알기가 대단히 어렵다는 것을 알게 돼 있다. 

 

p338

 근대 역사에서 최대 범죄는 증오나 탐욕이 아니라 무지와 무관심에서 더 많이 나왔다.

 

p340

 지금 세계에서 불의의 대부분은 개인의 선입견보다는 대규모의 구조적 편향에서 나온다. 하지만 우리 수렵 · 채집인의 뇌는 그런 구조적 편향을 감지하도록 진화하지는 않았다. 그런 편향의 적어도 일부에는 우리 모두가 함께 연루돼 있다. 하지만 우리는 그것을 발견할 시간과 에너지가 없다. 이 책을 쓰는 동안 나 자신이 그 교훈을 절실하게 깨달았다. 글로벌 이슈를 논할 때 나는 늘 다양한 소외 집단들보다 글로벌 엘리트들의 관점을 우선시하는 위험에 빠진다. 글로벌 엘리트들은 대화를 주도한다. 그러다 보니 그들의 관점은 놓칠 수가 없다. 반면에 소외된 집단들은 대개 말이 없다. 그러다 보면 그들의 존재마저 잊기 쉽다. 이 모든 게 고의적인 악의가 아니라 순전한 무지에서 생기는 일이다.

 

p348

 어느 편을 지지하든, 우리는 실제로 무서운 탈진실의 시대에 살고 있는 듯 보인다. 비단 특정한 군사적 사건뿐 아니라 전 역사와 민족마저 가짜로 조작될 수 있는 시대다. 하지만 만약 지금이 탈진실의 시대라면 진실의 태평성대는 정확히 언제였나? 1980년대였나 아니면 1950년대? 1930년대? 탈진실의 시대로 넘어가게 만든 것은 무엇이었나? 인터넷인가? 소셜미디어인가? 푸틴과 트럼프의 부상인가?

 역사를 대충 훑어보기만 해도 정치 선전과 거짓 정보는 새로운게 아님을 알 수 있다. 심지어 민족을 통째로 부인하고 가짜 국가를 만드는 습관조차 유서가 깊다. 1931년 일본 육군은 중국 침략을 정당화하려고 자작 모의공격을 벌였고, 그런 다음 괴뢰국가인 만주국을 세워 정복을 정당화했다. 그런 중국 자신은 티베트가 독립국가로 존재했다는 사실을 오랫동안 부인해왔다. 영국은 호주 점령을 '무주지terra mullius 선점'의 법리로 정당화해 사실상 5만 년 원주민의 역사를 지워버렸다.

 20세기 초 시온주의자들은 가장 좋아하는 슬로건으로 '땅 없는 사람(유대인)의 사람(팔레스타인인) 없는 땅으로의' 귀환을 내세웠다. 그 지역에 있던 아랍 사람들의 존재는 자신들의 편의에 따라 무시됐다. 1969년 이스라엘의 골다 메이어 총리가 팔레스타인 사람은 존재하지도 않고 존재한 적도 없다고 한 말은 유명하다. 그런 견해는 지금도 이스라엘 내부에서 아주 흔하다. 존재하지 않는다는 상대와 수십 년째 무력 분쟁을 해왔으면서도 말이다. 가령, 2016년 2월 이스라엘의 국회의원 아나트 베르코는 의회에서 연설하던 중에 팔레스타인 사람들의 실체와 역사를 의문에 붙였다. 그녀가 제시한 증거가 무엇이었는지 아는가? 팔레스타인이라는 단어의 머리글자일 'p'조차 아랍어 철자에는 없다는 것이었다. 그러니 어떻게 팔레스타인 사람이 존재할 수 있겠느냐는 주장이었다. (아랍어에서는 f가 p에 해당한다. 따라서 팔레스타인Palestine을 아랍어로 표기하면 Falastin이 된다.)

 

p350

 사실 인간은 늘 탈진실의 시대를 살아왔다. 호모 사피엔스야말로 탈진실의 종이다. 호모 사피엔스 특유의 힘은 허구를 만들고 믿는 데서 나온다. 석기시대 이래 줄곧 자기 강화형 신화는 인간 집단을 하나로 묶는 데 기여해왔다. 실로 호모 사피엔스가 이 행성을 정복한 것도 무엇보다 허구를 만들고 퍼뜨리는 독특한 능력 덕분이었다. 우리는 수많은 이방인들과도 협력할 수 있는 유일한 포유동물이다. 그것이 가능했던 것도 허구의 이야기를 발명하고 사방으로 전파해서 수백만 명의 다른 사람들까지 그 이야기를 믿도록 납득시킬 수 있었기 때문이다. 모두가 같은 허구를 믿는 한, 우리는 다 같이 동일한 법을 지키게 되고, 그럼으로써 효과적으로 협력도 할 수 있다.

 그러니 무서운 탈진실의 새 시대가 도래한 것을 두고 페이스북이나 트럼프, 푸틴을 탓한다면, 수 세기 전 수백만 기독교인이 자기 강화형 신화의 버블 속에 자신을 가둬둔 사실을 떠올리기 바란다. 그때도 성경의 진위 여부는 조금도 의심하려 들지 않았다. 수백만 무슬림 역시 쿠란을 추호의 의심도 없이 신앙의 대상으로 받아들였다. 옛 1,000년 동안 사람들의 당시 소셜 네트워크에서 '뉴스'와 '사실'로 통했던 것들의 상당수는 기적과 천사, 귀신과 마녀에 관한 이야기들이었다. 그 시대의 대담한 리포터들은 지하세계의 가장 깊은 수렁에서 일어난 일도 생중계하듯 전했다. 하지만 이브가 사탄의 유혹에 빠졌다는 과학적인 증거는 전혀 없다. 모든 불신자는 죽은 후 영혼이 지옥에서 불탄다거나, 브라만 계급과 불가촉천민 계급의 결혼은 우주의 창조주가 싫어한다는 말도 마찬가지다. 그럼에도 수십억 사람들은 수천 년 동안 이런 이야기들을 믿어왔다. 어떤 가짜 뉴스들은 영원히 남는다.

 

p359

 사실, 사람들을 단결시키는 데 거짓 이야기는 진실보다 본질적인 이점이 있다. 만약 자신이 속한 집단의 충성심이 얼마나 강한지 알아보고 싶다면, 시험 삼아 사람들에게 분명히 참인 사실보다 어떤 불합리한 것을 믿어보라고 요구하는 편이 훨씬 낫다. 조직의 보스가 "태양은 동쪽에서 떠서 서쪽으로 진다"라고 말할 때는 굳이 그에 대한 충성심이 없더라도 박수를 칠 수 있다. 하지만 보스가 "태양은 서쪽에서 떠서 동쪽으로 진다"라고 할 때는 진정한 충성파들만 박수를 보낼 것이다. 마찬가지로 당신 주변 사람들 모두가 그런 터무니없는 이야기를 듣고 믿어준다면, 당신이 위기에 처한 순간에도 그들은 당신 편을 들어주리라 신뢰할 수 있다. 공인된 사실만 믿겠다는 사람이라면 그의 충성심을 어떻게 알 수 있겠는가?

 

p361

 대부분의 경우 사람들이 성경이나 베다, 모르몬교 경전을 신성시하기 시작하는 것은 그것을 신성시하는 다른 사람들을 오랫동안 반복해서 접하고 난 다음의 일이다. 우리가 신성한 책을 존중하게 되는 과정이나 지폐를 존중하게 되는 과정이나 알고 보면 정확히 동일하다.

 

p363

 진실과 권력의 동반 여행은 어느 정도까지만 가능하다. 머지않아 각자의 길을 가게 돼 있다. 권력을 바란다면 어느 지점부터는 허구를 퍼뜨리기 시작해야 할 것이다. 반면, 세상에 관한 모든 허구는 배제한 채 진실만을 알고 싶다면, 어느 지점부터는 권력을 단념해야 할 것이다. 그런 경우에는 자신의 동조자를 얻고 추종자를 격려하기 어렵게 만드는 사실들마저 인정해야만 할 것이기 때문이다. 훨씬 더 결정적인 것은, 자신과 지금 자신이 가지고 있는 권력의 원천, 그리고 자신이 더 많은 권력을 바라는 이유에 관한 어떤 불편한 사실들마저 인정해야만 할 것이라는 점이다. 진실과 권력 사이에 이런 간극이 존재한다는 사실은 하등 신비로울 게 없다. 직접 목격하고 싶다면, 전형적인 미국 와스프 WASP를 찾아가 인종 문제를 제기하거나, 주류 이스라엘인을 찾아가 팔레스타인 점령 문제를 화제에 올리거나, 영국의 전형적인 남성bloke 에게 가부장적 문제로 말을 걸어보라.

 호모 사피엔스 종으로서 인간은 진실보다는 힘을 선호한다. 세계를 이해하려고 애쓰기보다 통제하려는 데 훨씬 많은 시간과 노력을 기울인다. 세계를 이해하려고 애쓰는 것도, 그러면 통제하기가 쉬워질 거라는 기대 때문이다. 따라서 진실이 지배하고 신화는 무시되는 사회를 꿈꾼다면 '호모 사피엔스'에게서 기대할 것은 거의 없다. 차라리 침팬지에게 운을 시험해보는 게 낫다.

 

p365

 우리의 편견을 드러내고 정보원을 검증하는 데 시간과 노력을 들이는 것은 우리 모두의 책무다. 앞 장에서 이야기했듯이 우리는 모든 것을 직접 조사할 수는 없다. 하지만 바로 그런 사실 때문에 우리는 적어도 우리가 선호하는 정보원을 세밀하게 따져볼 필요가 있다. 그것이 신문이든, 웹사이트든, 티브이 방송이든, 어떤 개인이든 마찬가지다. 어떻게 하면 세뇌를 피하고, 현실과 허구를 구분할지에 대해서는 20장에서 훨씬 깊이 있게 살펴볼 것이다. 다만 여기서는 개략적인 요령 두 가지만 제시하겠다.

 첫째, 믿을 만한 정보를 얻고 싶다면 그에 합당한 만큼의 돈을 지불해야 한다. 만약 뉴스를 공짜로 얻는다면 당신이 상품이기 쉽다. 어떤 수상한 억만장자가 당신에게 이런 거래를 제시했다고 가정해보자. "당신에게 매월 30달러를 주겠다. 그 대신 당신은 내가 바라는 정치적, 상업적 편견을 당신 머릿속에 심을 수 있도록, 매일 한 시간 당신을 세뇌할 수 있게 해달라." 이런 거래를 받아들이겠는가? 제 정신이라면 그럴 가능성은 희박하다. 그러자 수상한 억만장자는 조금 다른 거래를 제안한다. "매일 한 시간 내가 당신을 세뇌할 수 있도록 허락해달라. 그 대신 이 서비스의 비용을 당신에게 물리지 않겠다." 그러자 갑자기 수억 명의 사람들이 솔깃해 한다. 부디 그런 사례를 따라가지 않기를 바란다.

 두 번째 요령은, 만약 어떤 이슈가 특별히 중요해 보인다면 그것에 관련된 과학 문헌을 찾아 읽으려고 노력하는 것이다. 내가 말하는 과학 문헌이란 동료 평가를 거치는 논문, 저명한 학술 출판사가 낸 책, 명망 있는 기관의 교수가 쓴 저술이다. 과학 역시 나름의 한계가 분명히 있다. 과거에도 많은 오류가 있었다. 그럼에도 과학 공동체는 수 세기 동안 우리가 가장 신뢰할 수 있는 지식의 원천이었다. 만약 당신이 과학 공동체가 어떤 문제에 관해 틀렸다고 생각한다면, 그 또한 충분히 있을 수 있는 일이다. 다만 적어도 당신이 거부하는 과학 이론을 알아야 하고, 당신의 주장을 뒷받침할 경험적 증거를 제공할 수 있어야 한다.

 과학자들은 지금보다 훨씬 자극적으로 공적 토론에 개입할 필요가 있다. 특히 토론 내용이 자신의 전문 영역으로 넘어왔을 때에는 주저하지 말고 자기 목소리를 내야 한다. 분야가 의학이 됐든, 역사 됐든 마찬가지다. 침묵은 중립이 아니다. 그것은 현상 유지를 편드는 것이다. 물론 학문적 연구를 계속 해나가고 그 결과물을 소수의 전문가들만 읽는 대중 과학서를 통해 일반 대중에게 최신 과학 이론을 전파하고 그들과 소통하는 것도 중요하다. 예술과 허구를 능숙하게 활용하는 일도 마다할 이유가 없다.

 과학자가 공상과학 소설SF도 쓰기 시작해야 한다는 말인가? 그것도 사실 나쁘지 않은 생각이다. 예술은 사람들의 세계관 형성에 핵심적인 역할을 한다. 특히 21세기에 와서는 공상과학 소설이야말로 가장 중요한 장르라는 주장도 있다. AI라든가 생명공학, 기후변화 같은 문제에 관한 대다수의 사람들의 이해를 좌우하기 때문이다.

 우리에게 좋은 과학이 필요하다는 것은 분명하다. 하지만 정치적 관점에서 보자면, 좋은 SF 영화 한 편이 <사이언스>나 <네이처>에 실린 논문 한 편보다 훨씨 가치가 크다

  p369

 인간이 세계를 지배하는 것은 다른 어떤 동물보다 협력을 잘할 수 있기 때문이고, 협력을 그토록 잘할 수 있는 비결은 허구를 믿기 때문이다. 그런 점에서 시인과 화가, 극작가는 최소한 군인과 기술자 만큼이나 중요하다. 

 

p370

 사실 우리는 알고리즘으로 증강된 소수의 슈퍼휴먼 엘리트와 무력해진 다수 하위 계층의 호모 사피엔스 간의 갈등을 두려워해야 한다.

 

p373

 오늘날 과학 기술 혁명의 결과가 함축하고 있는 의미는, 진정한 개인과 진짜 현실이 알고리즘과 티브이 카메라에 의해 조종될 수 있다는 것이 아니라 진정성 자체가 신화라는 것이다. 사람들은 상자 안에 갇히는 것을 두려워하면서도 이미 자신들이 상자 - 자신의 뇌 - 안에 갇혀 있으며, 그 상자는 다시 더 큰 상자 - 무수히 많은 기능을 갖춘 인간 사회 - 안에 갇혀 있다는 사실은 깨닫지 못한다. 매트릭슬르 탈출했을 때 발견하게 되는 것은 더 큰 매트릭스일 뿐이다. 1917년 러시아 농부들과 노동자들은 차르에 맞서 반란을 일으켰지만 결국에는 스탈린 체제로 귀결됐다. 세계가 당신을 조종하는 여러 가지 방식을 탐구하기 시작하더라도, 결국 자신의 핵심적 정체성은 뇌신경망이 만들어내는 복잡한 환상이라는 사실을 알게 될 뿐이다.

 사람들은 상자 안에 갇히는 것을 두려워하면서 정작 세상의 모든 경이로움은 놓치고 만다. 네오가 매트릭스 안에 갇혀 있는 한, 그리고 트루먼이 티브이 스튜디오 안에 묶여 있는 한, 그들은 피지 섬도, 파리도, 마추픽추도 갈 수 없을 것이다. 하지만 사실, 우리가 인생에서 경험하는 모든 것은 우리 자신의 몸과 마음에 있다. 매트릭스 밖으로 탈출하든, 피지 섬으로 여행을 가든 그 점에서는 아무런 차이가 없을 것이다. 당신 마음속 어딘가에 '피지 섬에서만 개봉할 것!'이라는 커다란 붉은색 경고문이 적힌 강철 심장이 있어, 남태평양으로 여행을 가서 그 심장을 열었을 때에야 비로소 피지 섬에서만 누릴 수 있는 온갖 특별한 감정과 느낌이 발산되는 것이 아니다. 피지 섬에 가보지 못하면 이런 특별한 느낌을 영원히 누리지 못하게 되는 것도 아니다. 결코 그렇지 않다. 피지 섬에서 느낄 수 있는 것은 무엇이든 세계 어디에서나 느낄 수 있다. 심지어 매트릭스 안에서도 가능하다.

 어쩌면 우리 모두가 '매트릭스' 스타일의 거대한 컴퓨터 시뮬레이션 속에서 살고 있는지도 모른다. 그것은 우리가 믿는 모든 민족적, 종교적, 이데올로기적 이야기와 상출될 것이다. 하지만 그렇다 하더라도 우리의 정신적 체험은 실재하는 것이다. 만약 인류의 역사가 지르콘 행성에서 온 쥐 과학자들에 의해 슈퍼컴퓨터로 운영되는 정교한 시뮬레이션으로 밝혀지면 카를 마르크스와 IS로서는 꽤 당혹스러울 것이다. 하지만 이 쥐 과학자들도 아르메니아 집단 학살과 아우슈비츠 문제에는 책임을 져야 할 것이다. 어떻게 그런 일이 지르콘 대학의 윤리위원회를 통과할 수 있었단 말인가? 비록 가스실이 실리콘칩 찬의 전기 신호에 불과했다해도, 그때 희생자들이 체험한 고통과 공포, 좌절감의 극심함은 조금도 덜하지 않을 것이다. 

 고통은 고통, 공포는 공포, 사랑은 사랑이다. 매트릭스 안에서도 마찬가지다. 우리가 느끼는 두려움이 바깥 세계의 원자가 모여서 일어나는 것이든, 컴퓨터가 조종하는 전기 신호에서 생겨나는 것이든 상관없다. 어떻든 두려움은 실재한다. 따라서 우리 정신의 실체를 탐구하고 싶다면 매트릭스 안에서든 바깥에서든 어디서나 가능하다.

 지금까지 나온 최선의 과학적 이론과 최신의 기술 장비에 따르면 정신은 어떤 경우에도 조작에서 자유롭지 않다. 조작용 껍질 안에서 해방되기를 기다리는 진정한 자아는 없다. 그런데도 대다수 SF 영화는 여전히 케케묵은 이야기를 하고 있다. 이른바 물질에 대한 정신의 승리다.

 

p390

 오늘날 아이들이 배우는 것의 대부분은 2050년이면 별 소용이 없어질 가능성이 크다.

 

p391

 이런 세상에서 교사가 학생들에게 전수해야 할 교육 내용과 가장 거리가 먼 것이 바로 '더 많은 정보'다. 정보는 이미 학생들에게 차고 넘친다. 그보다 더 필요한 것은 정보를 이해하는 능력이고, 중요한 것과 중요하지 않은 것의 차이를 식별하는 능력이며, 무엇보다 수많은 정보 조각들을 조합해서 세상에 관한 큰 그림을 그릴 수 있는 능력이다.

 사실, 이런 능력은 수 세기 동안 서구의 자유주의 교육이 추구해 온 이상이기도 했다. 하지만 지금까지는 서양의 많은 학교들조차 그런 이상을 추구하는 데 오히려 태만했다. 학생들에게는 '스스로 생각하라'고 권장하면서 정작 교사 자신들은 아무렇지도 않게 데이터를 밀어넣는 데만 집중했다. 자유주의 학교들은 권위주의를 너무나 두려워한 나머지 특히 거대 서사에는 질색이었다. 그들은 우리가 학생들에게 많은 데이터와 약간의 자유만 주면 학생들이 자기 나름의 세계상을 만들어낼 것으로 여겼다. 지금 세대는 설명 모든 데이터를 종합해서 세계에 관한 하나의 일관되고 의미 있는 이야기를 만들어내지 못하더라도, 장래에는 훌륭한 종합을 이뤄낼 수 있는 충분한 시간이 있을 것이다. 하지만 지금 우리는 시간이 없다. 다음 수십 년 사이에 우리가 내릴 결정들이 생명 자체의 미래를 결정할 것이다. 또한 우리는 지금 우리가 갖고 있는 세계관을 기초로 해서만 그 결정들을 내릴 수 있다. 지금 세대에 우주에 관한 포괄적인 견해가 없다면 생명의 미래는 무작위로 결정될 것이다.

 

p393

 그렇다면 우리는 학생들에게 뭘 가르쳐야 할까? 많은 교육 전문가들은 학교의 교육 내용을 '4C', 즉 비판적 사고critical thinking, 의사 소통 communication, 협력 collaboration, 창의성 creativity으로 전환해야 한다고 주장한다. 보다 포괄적으로 말하면, 학교는 기술적 기량의 교육 비중을 낮추고 종합적인 목적의 삶의 기술을 강조해야 한다. 무엇보다 중요한 것은 변화에 대처하고, 새로운 것을 학습하며, 낯선 상황에서 정신적 균형을 유지하는 능력일 것이다. 2050년의 세계에 발맞춰 살아가려면 새로운 생각과 상품을 발명하는 데 그쳐서는 안된다. 무엇보다 자기 자신을 반복해서 재발명해야만 할 것이다.

 

p424

 대부분의 이야기는 기초가 튼튼해서라기보다는 지붕의 무게 덕분에 탈 없이 유지된다. 기독교 이야기를 보자. 기초는 엉성하기 짝이 없다. 온 우주의 창조자의 아들이 2,000년 전쯤 은하수 어딘가에서 탄소 기반 생명으로 태어났다는 증거가 어디에 있나? 그런 일이 로마 속주였던 팔레스타인에서 일어났고 그의 어머니는 처녀였다는 증거는 어디에 있나? 그럼에도 전 지구에 걸쳐 막대한 기관들이 그 이야기 위에 세워졌고, 그 무게가 너무도 압도적인 힘으로 내려 누르는 덕분에 그 이야기는 자리를 지키고 있다. 그 이야기에서 단어 하나를 바꾸려는 것을 두고도 전면전이 벌어졌다. 서유럽 기독교도와 동방적교회 기독교도 간에 1,000년 동안 계속된 균열은 최근에는 세르비아인과 크로아티아인 간의 상호 살육전으로 표출되기도 했는데, 애초에 '필리오케filioque'(라틴어로 '또한 성자에게서'라는 뜻)라는 한 단어가 발단이었다. 서유럽 기독교도는 기독교인의 신앙고백 안에 이 단어를 넣고 싶어 한 반면, 동방적교회 기독교도는 격렬히 반대했다.(이 단어를 추가하는 것이 갖는 신학적인 함의는 너무나 불가사의해서 여기서 이해가 되도록 설명하는 것은 불가능한 일이 될 것이다. 궁금하면 구글에게 물어보라.)

 일단 이야기 위에 개인의 정체성과 사회의 전 체계가 구축되고 나면, 이야기를 의심하는 것은 생각할 수 없게 된다. 그것을 뒷받침 하는 증거 때문이 아니다. 그것이 무너지면 개인적, 사회적 대격변이 일어날 것이기 때문이다. 역사를 돌아봤을 때, 때로는 지반보다 지붕이 더 중요하다.

 

p426

 어떻게 하면 그리스도를 신봉자에게 실재하는 것으로 만들 수 있을까? 천주교 사제는 미사를 집전하면서 빵 한 조각과 포도주 한 잔을 들고서는 빵은 그리스도의 살이며 포도주는 그리스도의 피라고 선포한다. 신도는 그것을 먹고 마심으로써 그리스도와의 교감을 얻는다. 그리스도를 실제로 입안에 넣고 맛보는 것보다 무엇이 더 생생할 수 있을까? 전통적으로 사제는 성찬식 때 이런 과감한 선포를 라틴어로 했다. 라틴어는 고대 종교와 법률 그리고 생명의 비밀을 이야기할 때 쓰는 언어였다. 모여 있던 농민들이 놀란 눈으로 바라보는 앞에서 사제는 빵 한 조각을 높이 들고 이렇게 선포했다. "호크 에스트 코르푸스!(Hoc est corpus!. 이것은 몸이다!)" 그러면 아마도 그 방은 그리스도의 살이 되었을 것이다. 하지만 "호크 에스트 코르푸스"라는 라틴어를 몰랐던 까막눈의 농민들 머릿속에서는 그 말이 "호쿠스 포쿠스Hocus pocus!"로 와전됐고, 그 뒤 이것은 개구리를 왕자로 변하게 하고 호박을 마차로 바꿔놓는 강력한 주문으로 거듭났다.

 

p429

 근대 서구에서는 유교가 의식에 집착한 것을 두고 흔히 인간에 대한 얕은 이해와 의고擬古주의를 보여주는 것으로 여겼다. 하지만 사실은 오히려 공자야말로 시대를 뛰어넘어 변하지 않는 인간 본성을 깊이 꿰뚫어 본 것이라고 할 수 있다. 유교 문화 - 중국을 필두로 이웃 나라인 한국과 베트남, 일본 - 에서 극도록 수명이 긴 사회적, 정치적 구조를 만들어냈다는 사실은 아마 우연이 아닐 것이다. 인생의 궁극적인 진실을 알고 싶은 사람에게는 의례와 의식이 거대한 장애물이다. 하지만 공자와 같이 사회의 안정과 조화에 관심이 있는 사람이라면 진실은 골칫거리일 때가 많다. 그런 사람에게는 의례와 의식이야말로 최선의 동맹이다.

 

p431

 모든 의식 중에서도 가장 잠재력이 큰 것은 희생이다. 세상 모든 것 중에 고통이야말로 가장 실감나는 현실이기 때문이다. 이것만은 결코 누구도 무시하거나 의심할 수 없다. 사람들에게 어떤 허구를 정말로 믿게 만들고 싶다면, 그것을 대신해서 희생하는 쪽으로 그들을 유도하라. 누구라도 이야기를 위해 고통을 체험하고 나면 대부분 그 이야기가 실제라고 확신하게 돼 있다.

 

 p437

 이스라엘에서는 공교적인 유대인들이 세속화된 유대인들과 심지어 완전한 무신론자들한테까지 이런 금기를 강요하려 들 때가 많다. 이스라엘 정치에서 정통파 유대교 정당들이 대체로 힘의 결정권을 행사하게 된 뒤로, 안식일에 모든 종류의 활동을 금지하는 법을 대거 통과시켰다. 안식일에 개인 차량을 사용하는 것을 불법화하는 데는 실패했지만, 대중교통 운행을 금지하는 데는 성공했다. 전국에 걸쳐 종교적 희생을 강제한 이 조치는 주로 사회에서 가장 취약한 계층에 타격을 준다. 특히 토요일은 노동계급 사람들이 자유롭게 먼 친척이나 친구를 방문하거나 관광 명소로 여행할 수 있는 유일한 날이기 때문이다. 돈이 많은 할머니야 신형 자가용을 몰고 다른 도시에 사는 손주를 찾아가는 데 아무런 문제가 없지만, 가난한 할머니는 버스와 기차가 모두 운행을 하지 않으니 어디에도 오갈 수가 없다.

 

p443

 악의 문제는 악이 실제 삶 속에서는 반드시 추악하지는 않다는 데 있다. 악은 사실 대단히 아름답게 보일 수 있다. 이 점에 관한 한 기독교는 할리우드보다 현명했다. 전통적 기독교 미술에서는 사탄을 대단히 매력적인 정부情婦로 묘사하는 경향이 있었다. 사탄의 유혹에 저항하기가 그토록 어려운 것도 그 때문이다. 파시즘에 대처하기가 어려운 것도 같은 이유에서다. 파시즘의 거울로 자신을 들여다보면 추악한 것이라고는 조금도 눈에 띄지 않는다. 1930년대에 독일인들이 파시즘의 거울로 자신들을 봤을 때는 독일이 세상에서 가장 아름다운 민족으로 보였다. 지금 러시아인들이 파시즘의 거울을 보면 러시아가 세상에서 가장 아름답게 보일 것이다. 이스라엘인들이 파시즘의 거울을 보면 이스라엘이 세상에서 가장 아름답게 보일 것이다. 그러면 그들 모두 그 아름다운 집합체 속에 자신도 빠져들고 싶다고 생각할 것이다. 

 '파시즘'이라는 단어는 라틴어 'fascis'에서 나왔다. '막대 다발'이라는 뜻이다. 세계사에서 가장 흉포하고 살인적인 이데올로기치고는 별 매력 없는 상징처럼 들린다. 하지만 여기에는 깊고 사악한 의미가 있다. 막대 하나는 대단히 약하다. 누구나 쉽게 부러뜨릴 수 있다. 그렇지만 여러 개를 다발로 묶으면 부러뜨리기가 거의 불가능해진다. 이는 각 개인은 보잘것없는 존재이지만 집단으로 한데 뭉치면 대단히 강력하다는 사실을 함축하고 있다. 그래서 파시스트들은 어떤 개인보다도 집단의 이익이 특권을 갖는다고 믿으며, 어떤 하나의 막대도 다발의 결속을 깨려 들어서는 안 된다고 요구한다.

 

p448

 근대 문화가 부상하면서 상황은 뒤집혔다. 신앙은 점점 정신적 노예처럼 보였고, 의심은 자유의 전제 조건으로 비치게 되었다.

 1599년에서 1602년 사이 어느 시기에 윌리엄 셰익스피어는 《햄릿》이라는 제목으로 더 유명한 자기 나름의 <라이온 킹>을 썼다. 하지만 심바와 달리 햄릿은 생명의 원을 완성하지 않는다. 그는 마지막 순간까지 회의적이고 양면적인 상태로 남아, 인생의 의미가 무엇인지 찾지도 못하고, '사느냐 죽느냐' 둘 중에서 어느 쪽이 나은지 결정도 못 내린다. 이 점에서 햄릿은 전형적인 근대의 영웅이다. 근대는 과거로부터 물려받은 과다한 이야기들을 거부하지는 않아다. 대신 그것들을 파는 슈퍼마켓을 차렸다. 근대 인간은 그 모두를 자유롭게 시식해볼 수 있는데, 자기 입맛에 맞는 것이면 무엇이든 고르거나 조합할 수 있다. 

 어떤 사람들은 그토록 많은 자유와 불확실성을 견디지 못한다. 파시즘 같은 근대 전체주의 운동은 의심에 찬 사상들의 슈퍼마켓에 격렬히 반발했고, 오직 하나의 이야기에 대한 절대적 믿음만 요구하는 데에서는 전통 종교들까지 능가했다. 하지만 대부분의 근대 사람들은 믿음의 슈퍼마켓이 마음에 들었다. 인생의 의미가 무엇인지, 어떤 이야기를 믿어야 할지 모를 때 사람들은 어떻게 할까? 선택의 가능성 자체를 신성시한다. 영원토록 슈퍼마켓 통로에 서서, 원하는 것은 무엇이든 선택할 능력과 자유가 있는 한, 자기 앞에 진열된 상품을 살펴보기만 한다. (...) 그러다 어느 순간 화면 정지, 컷, 끝. 그리고 엔딩 크레디트가 올라간다.

 

p455

 이제는 페이스북과 인스타그램 시대가 되어 이런 개인의 신화 제조 과정을 이전 어느 때보다 더 분명하게 관찰할 수 있다. 왜냐하면 그 과정의 일부야말로 우리 정신이 하던 일을 컴퓨터에 아웃소싱한 것이기 때문이다. 사람들이 온라인에서 완벽한 자아를 구축하고 장식하는 데 무수한 시간을 쏟는 가운데, 점점 자신의 창작물에 고착돼가고, 자신의 실체와 그것을 착각하는 것을 보면 무척 흥미로우면서도 두렵다. 그 덕분에 실상은 교통 체증과 사소한 말다툼, 긴장된 침묵으로 가득할 뿐인 가족 휴가는 아름다운 풍경의 파노라마와 완벽한 저녁식사, 웃음 가득한 얼굴들의 모음으로 둔갑한다. 우리가 실제로 경험하는 것의 99퍼센트는 자아의 이야기에서 누락된다. 

 우리의 실제 경험은 신체적인 데 반해, 우리의 환상 속에서 빚어지는 자아는 아주 시각적이기 쉽다는 사실은 특히 주목할 만하다.

 

 

 그러므로 진정으로 자신을 이해하고 싶다면 페이스북 계정이나 자기 내면에서 하는 이야기와 자신을 동일시해서는 안 된다. 그 대신 몸과 마음의 실제 흐름을 관찰해야 한다. 그러면 이성의 많은 개입 없이도, 그리고 자신의 아무런 지시 없이도 우리의 생각과 감정과 욕망이 스스로 나타났다가 사라지는 것을 보게 된다. 마치 이런 저런 바람이 이곳에서 저곳으로 바뀌어 불면서 머리칼을 헝클어뜨리는 것과 같다. 당신은 바람이 아닌 것처럼, 당신이 체험하는 생각과 감정과 욕망의 혼합체도 아니다. 또한 그것들을 지나오고 난 눈으로 보고 들려주는 세탁된 이야기도 분명히 아니다. 당신은 그 모든 것을 체험했지만 스스로 통제할 수는 없다. 가질 수도 없다. 그 체험들의 합도 아니다. 사람들은 묻는다. "나는 누구인가?" 그런 다음 어떤 이야기를 들으리라 기대한다. 하지만 자신에 대해서 알아야 할 첫 번째 사실은, 당신은 이야기가 아니라는 것이다.

 

p485

 오늘날 모든 나라는 세 가지 주요 과제에 직면했습니다. 이것들은 전 지구적 차원에서만 해결될 수 있습니다. 세 가지 과제란 핵전쟁, 기후변화, 기술 혁신에 따른 파괴입니다.

 

p492

 당신은 어떤 것 - 고통이든 쾌락이든 - 을 경험하면서 그 밖의 것을 바랍니다. 고통을 경험할 때에는 그 고통이 사라지기를 바랍니다. 쾌락을 경험할 때는 쾌락이 강해지고 영원히 지속되기를 바랍니다. 이런 실체의 부정이 모든 괴로움의 뿌리입니다. 우리는 실체를 있는 그대로 받아들이도록 스스로 훈련해야 합니다. 계속해서 고통에서 달아나고 더 많은 쾌락을 쫓아 달려가는 대신, 보다 균형 잡힌 정신을 유지하는 법을 배워야 합니다. 고통과 쾌락에 대해 불필요한 괴로움을 일으지키 않고 둘 다 있는 그대로 경험하는 법을 배워야 합니다.

 

言葉にならない夜は あなたが上手に伝えて
絡み付いた 生温いだけの蔦を 幻(まぼろし)だと伝えて

心を与えて あなたの手作りでいい
泣く場所が在るのなら 星など見えなくていい
呼ぶ声はいつだって 悲しみに変わるだけ
こんなにも醜い私を こんなにも証明するだけ,でも必要として

貴方が触れない私なら無いのと同じだから

말로 형언할 수 없는 밤은 당신이 잘 말해줘요.

은근하게 감겨있을 뿐인 덩굴은 환상이라고 말해줘요.

정성스레 당신이 만들걸로 괜찮아요

눈물 흘릴 곳은, 별 정도는 보이지 않아도 되요.

부르는 소리는 언제나 슬픔이 될 뿐

이렇게도 못난 나를  이렇게라도 보여줄 뿐, 그래도 날 필요로 해줘

당신에게 만져질 수 없는 나라면 없는 것이나 마찬가지니까요

 

曖昧なだけの日々も 何処まで私を孤独(ひとり)に
褪せる時は これ以上 望むものなど 無いくらいに繋いで
想いを称えて 微かな振動でさえ
私には目の前で 溢れるものへと響く
奇跡など一瞬で この肌を見捨てるだけ
こんなにも無力な私を こんなにも覚えて行くだけ
でも必要として
貴方に触れない私なら 無いのと同じだから

애매할 뿐인 나날들과, 언제까지나 나를 홀로 시들게 하는 시간은

더 이상 어떤 바램조차 하지 못할 정도로 나를 조여오네

추억을 그리며 희미한 떨림조차도

나에게는 눈앞에 있는 것 같이 생생해

기적따위는 순간인데 이 내 몸은 그저 흘려보낼 뿐

이렇게나 무력한 나를 이렇게라도 기억해갈 뿐

그래도 필요로 해줘요

당신에게 만져질 수 없는 나라면 없는것이나 마찬가지니까요

 

 

数えきれない意味を 遮っているけれど
美しいかどうかも 分からないこの場所で 今でも
呼ぶ声はいつだって 悲しみに変わるだけ
こんなにも醜い私を こんなにも証明するだけ
でも必要として
貴方が触れない私なら 無いのと同じだから

그 수 많은 의미들이 가로막혀 있지만

이젠 아름다운지 조차 느끼지 못할 이 곳에서 여전히

부르는 소리는 언제나 슬픔이 될 뿐

이렇게도 못난 나를  이렇게라도 보여줄 뿐, 그래도 날 필요로 해줘요

당신에게 만져질 수 없는 나라면 없는 것이나 마찬가지니까요

https://www.ft.com/content/19d90308-6858-11ea-a3c9-1fe6fedcca75

 

Yuval Noah Harari: the world after coronavirus

This storm will pass. But the choices we make now could change our lives for years to come

www.ft.com

유발하라리의 파이낸셜 타임즈 기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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마지막 단락이 이 글의 핵심적 주제이다.

 

Humanity needs to make a choice. Will we travel down the route of disunity, or will we adopt the path of global solidarity? If we choose disunity, this will not only prolong the crisis, but will probably result in even worse catastrophes in the future. If we choose global solidarity, it will be a victory not only against the coronavirus, but against all future epidemics and crises that might assail humankind in the 21st century. 

 

인류는 선택을 해야 한다. 분열의 길로 추락할 것인가, 아니면 전세계적 연대의 길을 선택할 것인가? 우리가 분열을 선택한다면, 이번 위기를 장기화할 뿐만 아니라, 아마도 미래에 더욱 큰 재앙을 야기하게 될 것이다. 우리가 세계적 연대를 선택한다면, 단지 코로나바이러스에 대해서 승리하는 것만 아니라, 21세기에 인류를 괴롭힐 모든 전염병과 위기들에 대한 승리가 될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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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본문 전체)

 

           Yuval Noah Harari: the world after coronavirus

 This storm will pass. But the choices we make now could change our lives for years to come

 

이 폭풍은 지나갈 것이다. 하지만 우리가 내린 선택들은 이제 다가올 수년 동안 우리의 삶을 바꾸게 될 것이다.

  

Humankind is now facing a global crisis. Perhaps the biggest crisis of our generation. The decisions people and governments take in the next few weeks will probably shape the world for years to come. They will shape not just our healthcare systems but also our economy, politics and culture. We must act quickly and decisively. We should also take into account the long-term consequences of our actions. When choosing between alternatives, we should ask ourselves not only how to overcome the immediate threat, but also what kind of world we will inhabit once the storm passes. Yes, the storm will pass, humankind will survive, most of us will still be alive — but we will inhabit a different world. 

 

 인류는 지금 전세계적인 위기에 직면하고 있는 중이다. 아마도 우리의 세대에서 가장 큰 위기일지 모른다. 앞으로 몇 주간 사람들과 정부들이 내리는 결정들은 아마도 다가올 수년 간의 세상의 모양새를 만들게 될 것이다. 그 결정들은 보건 시스템 뿐만 아니라 경제, 정치 그리고 문화에까지 영향을 끼칠 것이다. 우리는 빠르고 결단력 있게 행동해야 한다. 뿐만 아니라 우리의 행동이 미칠 장기적인 결과들도 고려해야 한다. 대안들 사이에서 선택을 해야 할 때, 우리는 당장의 위협들을 어떻게 극복해야 할지와 더불어 이 폭풍우가 지나고 나서 우리가 어떤 세상에서 살게 될지에 대해서도 우리 자신에게 되물어봐야 할 것이다. 그렇다, 이 폭풍우는 지나갈 것이고, 인류는 살아남을 것이며, 우리들 중 대부분은 여전히 살아가게 될 것이다 – 하지만 우리는 지금과는 다른 세상을 살아가게 될 것이다.

 

Many short-term emergency measures will become a fixture of life. That is the nature of emergencies. They fast-forward historical processes. Decisions that in normal times could take years of deliberation are passed in a matter of hours. Immature and even dangerous technologies are pressed into service, because the risks of doing nothing are bigger. Entire countries serve as guinea-pigs in large-scale social experiments. What happens when everybody works from home and communicates only at a distance? What happens when entire schools and universities go online? In normal times, governments, businesses and educational boards would never agree to conduct such experiments. But these aren’t normal times. 

 

 많은 단기적 비상대책들이 우리의 일상이 될 것이다. 이것이 비상상황의 특성이다. 비상상황은 역사의 과정들을 촉진시킨다. 평상시라면 몇 년간의 숙고가 걸릴 결정들이 불과 몇 시간만에 통과된다. 미숙하고 심지어는 위험하기까지 한 기술들이 동원되는데, 아무것도 안하는 위험성이 더 크기 때문이다. 온 나라가 기니피그처럼 거대규모의 사회적 실험으로 사용된다. 모든 사람들이 집에서 일하고 원거리로 소통을 하면 어떻게 될까? 모든 학교와 대학들이 온라인으로 진행된다면 무슨 일이 벌어질까? 평상시라면 정부, 사업 그리고 교육 위원회는 이와 같은 실험을 용납하지 않을 것이다. 하지만 지금은 평상시가 아니다.

 

 In this time of crisis, we face two particularly important choices. The first is between totalitarian surveillance and citizen empowerment. The second is between nationalist isolation and global solidarity. 

 

 이런 위기의 시기에는, 우리는 두가지 까다롭고 중요한 선택들에 직면한다. 첫번째는 전체주의적 감시(통제와 일맥 상통)와 시민 자율권의 사이에서의 선택이다. 두번째는 국수주의적 고립과 전지구적인 연대 사이에서의 선택이다.

 

 Under-the-skin surveillance

 In order to stop the epidemic, entire populations need to comply with certain guidelines. There are two main ways of achieving this. One method is for the government to monitor people, and punish those who break the rules. Today, for the first time in human history, technology makes it possible to monitor everyone all the time. Fifty years ago, the KGB couldn’t follow 240m Soviet citizens 24 hours a day, nor could the KGB hope to effectively process all the information gathered. The KGB relied on human agents and analysts, and it just couldn’t place a human agent to follow every citizen. But now governments can rely on ubiquitous sensors and powerful algorithms instead of flesh-and-blood spooks. 

 

철저한 감시

 전염병을 막기 위해서는, 대중 전체가 가이드라인을 따를 필요가 있다. 여기에는 두 개의 주요한 방법이 있다. 하나는 정부가 사람들을 감시하고 규칙을 어기는 이들을 처벌하는 것이다. 오늘날, 인류역사에서 처음으로, 기술에 의해 모든 사람을 24시간 감시하는 것이 가능하다. 50년 전, KGB는 2억4천만 명의 소비에트 시민들을 하루 24시간 따라다닐 수 없었으며, 모은 모든 정보를 효율적으로 처리할 수도 없었다. KGB는 정보원들과 분석가들에 의존했으며, 모든 시민들에게 정보원을 붙일 수는 없었다. 하지만 지금 정부는 유비쿼터스 센서와 강력한 알고리즘으로 살과 피로 이루어진 첩보원들을 대체할 수 있다.

  

In their battle against the coronavirus epidemic several governments have already deployed the new surveillance tools. The most notable case is China. By closely monitoring people’s smartphones, making use of hundreds of millions of face-recognising cameras, and obliging people to check and report their body temperature and medical condition, the Chinese authorities can not only quickly identify suspected coronavirus carriers, but also track their movements and identify anyone they came into contact with. A range of mobile apps warn citizens about their proximity to infected patients. 

 

코로나 바이러스의 전염에 대항하는 전투에서 몇몇 정부들은 이미 새로운 감시 도구들을 이용하는 중이다. 가장 악명높은 것은 중국의 경우이다. 사람들이 가지고 있는 스마트폰을 엄중하게 감시하고, 수 억개의 안면인식이 가능한 카메라(CCTV)를 이용하고, 사람들에게 자신들의 체온과 몸 상태를 체크하고 보고하도록 한다. 이를 통해 중국 당국은 코로나 바이러스의 보균자로 의심되는 이들은 신속히 특정할 뿐 아니라, 그들의 동선을 추적하고 그들이 접촉하는 이들까지도 파악할 수 있다. 반경안에 있는 시민들에게는 모바일 앱을 통해 감염된 환자가 주위에 있는지 여부까지도 경고한다.

 This kind of technology is not limited to east Asia. Prime Minister Benjamin Netanyahu of Israel recently authorised the Israel Security Agency to deploy surveillance technology normally reserved for battling terrorists to track coronavirus patients. When the relevant parliamentary subcommittee refused to authorise the measure, Netanyahu rammed it through with an “emergency decree”.

이러한 종류의 기술은 동아시아에만 국한되지 않는다. 최근 이스라엘의 벤자민 네탄야후 수상은 이스라엘 첩보국이 테러리스트에 사용하도록 제한된 감시 기술들을 코로나바이러스 환자들에게 사용할 수 있도록 승인하였다. 이를 승인할 국회의 소위원회에서 승인을 거절하자, 네탄야후는 비상령을 발동해서 통과시켰다.

 

 You might argue that there is nothing new about all this. In recent years both governments and corporations have been using ever more sophisticated technologies to track, monitor and manipulate people. Yet if we are not careful, the epidemic might nevertheless mark an important watershed in the history of surveillance. Not only because it might normalise the deployment of mass surveillance tools in countries that have so far rejected them, but even more so because it signifies a dramatic transition from “over the skin” to “under the skin” surveillance. 

 

이런 모든 것들이 별로 새로울 것이 없다고 할 지도 모르겠다. 최근 몇 년간 정부와 기업들은 언제나 더욱 교묘한 기술들을 추적, 감시 그리고 사람들을 조정하는데 사용해왔다. 그러나 우리가 경계하지 않는다면 이번 전염병은 감시의 역사에 주요한 분수령이 될 수 있다. 이로 인해 많은 국가들에서 그간 거부되어온 대중 감시 도구들의 적용이 일상화될 뿐 아니라, 어쩌면 표피적 감시에서 표피하의 감시로 극적인 전환을 의미하게 될 수도 있다.

  

Hitherto, when your finger touched the screen of your smartphone and clicked on a link, the government wanted to know what exactly your finger was clicking on. But with coronavirus, the focus of interest shifts. Now the government wants to know the temperature of your finger and the blood-pressure under its skin. 

  

지금까지는 당신의 손가락이 스마트폰을 터치하고 링크를 클릭할 때, 정부는 당신의 손가락이 정확히 무엇을 클릭하는지를 알기를 원했다. 하지만 코로나바이러스로 인해, 관심의 내용이 바뀌게 되었따. 이제 정부는 당신 손가락의 온도와 당신 몸의 혈압을 알고 싶어한다.

  

The emergency pudding

 

One of the problems we face in working out where we stand on surveillance is that none of us know exactly how we are being surveilled, and what the coming years might bring. Surveillance technology is developing at breakneck speed, and what seemed science-fiction 10 years ago is today old news. As a thought experiment, consider a hypothetical government that demands that every citizen wears a biometric bracelet that monitors body temperature and heart-rate 24 hours a day. The resulting data is hoarded and analysed by government algorithms. The algorithms will know that you are sick even before you know it, and they will also know where you have been, and who you have met. The chains of infection could be drastically shortened, and even cut altogether. Such a system could arguably stop the epidemic in its tracks within days. Sounds wonderful, right?

  

비상상황 푸딩

 

 감시라는 것에 대해 우리가 직면한 문제들 중 하나는 누구도 우리가 어떻게 감시당하고 있는지 정확히 알고 있지 않다는 데 있으며, 앞으로 어떻게 될지도 모른다는 것이다. 감시 기술은 정신이 없을 정도로 발전하고 있는 중이어서, 10년 전 공상과학(소설,영화)에서 보던 것이 지금에 와선 이미 낡은 것처럼 보일 정도이다. 사고 실험으로, 가상의 정부 - 모든 시민들에게 24시간 체온과 심장박동을 관찰하는 생체측정 팔찌를 찰 것을 요구하는 - 를 가정해보자. 이 데이터들은 정부의 알고리즘에 의해 수집되고 분석된다. 이 알고리즘은 심지어 당신이 아픈 것을 자각하기 전에 당신이 아픈 것을 알아내고, 당신이 어디어디에 있었으며, 누구를 만났는지를 안다. 감염의 연결고리는 극적으로  짧아질 수 있고, 심지어는 한 방에 끊을 수도 있다. 이와 같은 시스템은 거의 틀림없이 몇 일내로 고리를 추척하고 전염을 막아낼 수 있을 것이다. 끝내주지 않는가? 

 

The downside is, of course, that this would give legitimacy to a terrifying new surveillance system. If you know, for example, that I clicked on a Fox News link rather than a CNN link, that can teach you something about my political views and perhaps even my personality. But if you can monitor what happens to my body temperature, blood pressure and heart-rate as I watch the video clip, you can learn what makes me laugh, what makes me cry, and what makes me really, really angry. 

반대편(부정적인 면)은, 아마도, 무시무시한 감시 시스템에 합법성을 부여하는 것이 될 것이다. 예를 들어, 당신은 내가 CNN대신에 폭스 뉴스를 클릭하는 것을 안다면, 나의 정치적 견해를 당신에게 알려줄 것이고 어쩌면 나의 퍼스낼러티까지도 알게 될 지 모른다. 그러나, 당신이 내가 비디오 클립을 볼 때, 나의 체온, 혈압 그리고 심박수를 감시할 수 있다면, 당신은 무엇이 나를 웃게 하는지, 울게 하는지, 그리고 무엇이 나를 진심으로 빡치게 하는지를 알게 될 것이다.

 

It is crucial to remember that anger, joy, boredom and love are biological phenomena just like fever and a cough. The same technology that identifies coughs could also identify laughs. If corporations and governments start harvesting our biometric data en masse, they can get to know us far better than we know ourselves, and they can then not just predict our feelings but also manipulate our feelings and sell us anything they want — be it a product or a politician. Biometric monitoring would make Cambridge Analytica’s data hacking tactics look like something from the Stone Age. Imagine North Korea in 2030, when every citizen has to wear a biometric bracelet 24 hours a day. If you listen to a speech by the Great Leader and the bracelet picks up the tell-tale signs of anger, you are done for.

분노, 기쁨, 지루함 그리고 사랑은 열과 기침과 똑같은 생물학적 현상이라는 것을 기억하는 것이 중요하다. 기침을 알아내는 것과 같은 기술이 웃음도 알아낼 수 있다. 기업과 정부가 생체 데이터를 대량으로 수집하기 시작하면, 그들은 우리 자신이 우리를 아는 것보다 더 많이 우리를 알아낼 수 있게 되며, 그들은 단지 우리가 느끼는 것들을 예견하는 것 뿐만 아니라 우리의 감정을 조작하고 그들이 원하는 것을 우리에게 팔 수 있게 된다 - 그것이 상품이든 아니면 정치인이든 간에 말이다. 생체정보의 감시를 통해 캠브리지 아날라티카의 데이타 해킹 전술(기술)은 석기시대의 것이 될 수도 있다. 서기 2030년 모든 시민들이 하루 24시간 내내 생체 팔찌를 차고 있는 북한을 상상해보라. 위대한 지도자의 연설을 듣고 있을 때팔찌가 당신의 숨길 수 없는 분노를 찝어낸다면, 그 사람은 그대로 끝장일 것이다. 

 

You could, of course, make the case for biometric surveillance as a temporary measure taken during a state of emergency. It would go away once the emergency is over. But temporary measures have a nasty habit of outlasting emergencies, especially as there is always a new emergency lurking on the horizon. My home country of Israel, for example, declared a state of emergency during its 1948 War of Independence, which justified a range of temporary measures from press censorship and land confiscation to special regulations for making pudding (I kid you not). The War of Independence has long been won, but Israel never declared the emergency over, and has failed to abolish many of the “temporary” measures of 1948 (the emergency pudding decree was mercifully abolished in 2011). 

아마도 생체 감시는 비상 상황에 임시적인 조치로서 사용될 수도 있을 것이다. 비상 상황이 지나가면 조치도 멈출 것이다. 하지만 임시 조치들은 비상 상황 이후에도 지속되는 역겨운 속성이 있으며, 특히 항상 새로운 위기가 가까이에 잠재해 있을 땐 더욱 그렇다. 내 고향 이스라엘을 예로 들자면, 1948년 독립전쟁 시기의 비상상황에서 발효된 임시조치들, 언론 검열가 토지몰수에서부터 푸딩을 만드는 특별한 규칙에 이르기까지(농담이 아니다), 이 있다. 독립전쟁에서 승리하고 나서도 이스라엘은 비상상황의 종료를 절대 선언하지 않았고, 1948년의 수 많은 "임시" 조치들을 폐기하는데 실패했다(자비롭게도 위기상황의 푸딩 제조법은 2011년에 철폐되었다).

 

Even when infections from coronavirus are down to zero, some data-hungry governments could argue they needed to keep the biometric surveillance systems in place because they fear a second wave of coronavirus, or because there is a new Ebola strain evolving in central Africa, or because...you get the idea. A big battle has been raging in recent years over our privacy. The coronavirus crisis could be the battles tipping point. For when people are given a choice between privacy and health, they will usually choose health.

코로나 바이러스의 감염이 없어져도, 데이터에 굶주린 정부들은 코로나 바이러스의 2차 충격파에 대비하기 위해, 아니면 중앙 아프리카에서 새로운 에볼라 변형이 생겨났기 때문에, 아니면 무엇무엇 때문에,, 당신도 이젠 눈치를 챘을테지만, 갖가지 이유로 생체감시 체계를 계속 유지해야 한다고 주장할 것이다. 최근 수년간 프라이버시에 대한 거대한 전투가 격렬하게 벌어져왔다. 코로나바이러스로 인한 위기상황이 이 전투의 티핑 포인트가 될 수 있다. 프라이버시와 보건 사이에서 사람들은 대개 보건을 선택하게 될 것이다.

 

The soap police

Asking people to choose between privacy and health is, in fact, the very root of the problem. Because this is a false choice. We can and should enjoy both privacy and health. We can choose to protect our health and stop the coronavirus epidemic not by instituting totalitarian surveillance regimes, but rather by empowering citizens. In recent weeks, some of the most successful efforts to contain the coronavirus epidemic were orchestrated by South Korea, Taiwan and Singapore. While these countries have made some use of tracking applications, they have relied far more on extensive testing, on honest reporting, and on the willing co-operation of a well-informed public. 

 

비누 경찰

 프라이버시냐 보건이냐에 대해서 묻는 것 자체가 사실상 문제의 근원이다. 왜냐하면 이것은 그릇된 선택이기 때문이다. 우리는 프라이버시와 보건 둘 다를 향유할 수 있고 또 그래야 한다.  우리는 전체주의적 감시 체졔를 도입하지 않고도, 시민들의 자발적 참여의 장려를 통해, 우리의 건강을 보호하고 코로나바이러스의 전염을 막을 수 있는 길을 선택할 수 있다. 최근 몇주 간, 코로나 바이러스 확산을 저지하는데 가장 성공적인 노력들이 대한민국, 대만, 그리고 싱가포르에서 거의 완벽한 모습으로 보여졌다. 이들 국가들은 일단의 추적 도구들을 사용하면서도, 그에 더하여 광범위한 검사와 투명한 보고를 실시하고, 그리고 훌륭하게 조직된 대중들의 자발적 협조가 이루어졌다. 

 

Centralised monitoring and harsh punishments aren’t the only way to make people comply with beneficial guidelines. When people are told the scientific facts, and when people trust public authorities to tell them these facts, citizens can do the right thing even without a Big Brother watching over their shoulders. A self-motivated and well-informed population is usually far more powerful and effective than a policed, ignorant population. 

중앙집권적 감시와 가혹한 처벌만이 대중들이 공익의 지침을 따르게 하는 유일한 방법은 아니다. 과학적 사실들을 듣고, 이런 사실들을 이야기하는 공권력을 믿을 때, 자신들을 감시하는 빅브라더가 없어도 시민들은 올바르게 행동한다. 자발적이고도 잘 조직된 대중은 제한받고 무지한 대중들보다도 훨씬 강력하고 효율적이다.

Consider, for example, washing your hands with soap. This has been one of the greatest advances ever in human hygiene. This simple action saves millions of lives every year. While we take it for granted, it was only in the 19th century that scientists discovered the importance of washing hands with soap. Previously, even doctors and nurses proceeded from one surgical operation to the next without washing their hands. Today billions of people daily wash their hands, not because they are afraid of the soap police, but rather because they understand the facts. I wash my hands with soap because I have heard of viruses and bacteria, I understand that these tiny organisms cause diseases, and I know that soap can remove them. 

비누로 손을 씻는 경우를 생각해보자. 인류의 위생에 있어서 이것은 가장 위대한 진보중 하나였다. 이 간단한 행동이 매년마다 수백만의 생명을 살린다. 지금은 우리가 당연히 여기지만, 과학자들이 비누로 손씻기의 중요성을 발견한 것은 겨우 19세기에 들어서였다. 그 이전에는 의사와 간호사들도 수술할 때 조차 손씻기를 하지 않았다. 오늘날 수십억 명의 사람들이 매일 손을 씻으며, 이는 그들을 감시하는 비누 경찰때문이 아니라 그들이 왜 그래야 하는지를 이해하기 때문이다. 내가 손을 비누로 씻는 것은 바이러스와 박테리아, 질병을 일으키는 이 작은 유기체가, 비누로 제거될 수 있다는 것을 내가 알고 있기 때문이다.

 

But to achieve such a level of compliance and co-operation, you need trust. People need to trust science, to trust public authorities, and to trust the media. Over the past few years, irresponsible politicians have deliberately undermined trust in science, in public authorities and in the media. Now these same irresponsible politicians might be tempted to take the high road to authoritarianism, arguing that you just cannot trust the public to do the right thing. 

 하지만 이 정도 수준의 규정의 준수와 협조를 얻기 위해서는, 신뢰가 필수적이다. 사람들이 과학을 믿어야 하며, 공권력을 믿어야 하고, 언론을 믿어야 한다. 지난 몇년 간, 무책임한 정치가들은 과학, 공권력 그리고 언론에 대한 신뢰를 교묘하게 훼손해왔다. 이제 이러한 무책임한 정치가들이 대중을 믿을 수 없다며 선동하여 전체주의라는 고속도로(high road, 가장 편한길 혹은 가장 확실한 방법. 대중의 공포를 이용해서 정권을 잡으려 드는 정치인들의 입장에서 이 단어를 사용했던 듯 싶다)를 타려하고 있다. 

Normally, trust that has been eroded for years cannot be rebuilt overnight. But these are not normal times. In a moment of crisis, minds too can change quickly. You can have bitter arguments with your siblings for years, but when some emergency occurs, you suddenly discover a hidden reservoir of trust and amity, and you rush to help one another. Instead of building a surveillance regime, it is not too late to rebuild people’s trust in science, in public authorities and in the media. We should definitely make use of new technologies too, but these technologies should empower citizens. I am all in favour of monitoring my body temperature and blood pressure, but that data should not be used to create an all-powerful government. Rather, that data should enable me to make more informed personal choices, and also to hold government accountable for its decisions. 

보통 오랜동안 훼손된 신뢰를 하루아침에 회복할 수는 없다. 그러나 지금은 보통의 시기가 아니다. 위기의 순간 대중의 마음은 빠르게 변한다. 가족들간에는 듣기 싫은 소리를 하는 경우도 있지만, 위기의 순간이 닥치면, 마음속에 있는 신뢰와 애정으로 아무것도 가리지 않고 서로를 도우러 달려간다. 감시 체계를 세우는 대신에, 과학, 공권력 그리고 언론에 대한 대중들의 신뢰를 회복하는 것이 너무 늦지는 않았다. 명확히 새로운 기술들을 사용해야만 하지만, 이 기술들을 시민들이 자발적으로 사용하게 해야 한다. 나는 내 몸의 체온과 혈압을 감시하는 것에 기꺼이 동의하지만, 이 데이터들이 전지전능한 정부가 되는데 이용되어서는 안된다. 단지 이 데이터가 내가 좀 더 나은 선택을 하게 돕고, 정부의 의사결정을 투명하게 하는데 이용되어야 한다. 

 

If I could track my own medical condition 24 hours a day, I would learn not only whether I have become a health hazard to other people, but also which habits contribute to my health. And if I could access and analyse reliable statistics on the spread of coronavirus, I would be able to judge whether the government is telling me the truth and whether it is adopting the right policies to combat the epidemic. Whenever people talk about surveillance, remember that the same surveillance technology can usually be used not only by governments to monitor individuals — but also by individuals to monitor governments. 

 

나 자신의 의학적 상태를 하루 24시간 추척관리할 수 있다면, 내 자신이 다른 사람들의 보건적 위험이 될지도 알 수 있고, 나의 건강을 유지하는데도 도움이 될 것이다. 그리고 코로나 바이러스 확산에 대한 신뢰할 수 있는 통계치들을 분석한 내용에 접근할 수 있다면, 정부가 나에게 진실을 말하는지 전염병에 올바른 정책을 적용하고 있는지를 판단할 수 있을 것이다. 사람들이 감시에 대하여 이야기할 때면, 똑같은 감시 기술을 정부가 개인들을 감시하는데도 쓸 수 있지만, 개인들도 정부를 감시하는데도 사용할 수 있다는 것을 기억하자.

The coronavirus epidemic is thus a major test of citizenship. In the days ahead, each one of us should choose to trust scientific data and healthcare experts over unfounded conspiracy theories and self-serving politicians. If we fail to make the right choice, we might find ourselves signing away our most precious freedoms, thinking that this is the only way to safeguard our health.

이런 이유들로 이번 코로나바이러스의 창궐은 시민의 자질을 판단하게 되는 중요한 시금석이 될 것이다. 앞으로의 날들은 우리 각각의 모든 이들이, 숨겨진 음모이론들과 이기적인 정치인들이라는 덪을 넘어, 과학적 데이터와 보건 전문가들을 신뢰하는 선택을 해야만 한다. 만일 바른 선택을 하지 않는다면, 우리는 대부분의 귀중한 자유를 포기하는데 동의하면서도, 이것만이 우리의 보건을 지키는 유일한 길이라고 생각하는 과오를 범하게 될 것이다.

 

We need a global plan

The second important choice we confront is between nationalist isolation and global solidarity. Both the epidemic itself and the resulting economic crisis are global problems. They can be solved effectively only by global co-operation. 

우리는 전세계적인 계획이 필요하다.

우리앞에 닥친 두번째 중요한 선택은 국수주의적 고립이냐 아니면 전세계적 연대냐에 있다. 전염과 그로 인해 야기되는 경제위기는 전세계적인 문제이다. 이 두개의 문제는 오직 전세계적 공조에 의해서만 해결될 수 있다.

First and foremost, in order to defeat the virus we need to share information globally. That’s the big advantage of humans over viruses. A coronavirus in China and a coronavirus in the US cannot swap tips about how to infect humans. But China can teach the US many valuable lessons about coronavirus and how to deal with it. What an Italian doctor discovers in Milan in the early morning might well save lives in Tehran by evening. When the UK government hesitates between several policies, it can get advice from the Koreans who have already faced a similar dilemma a month ago. But for this to happen, we need a spirit of global co-operation and trust. 

우선적이며 가장 중요한 것은, 전세계가 이 바이러스를 물리치기 위해 정보를 공유하는 것이다. 이것이야말로 인류가 바이러스에 대항하는 가장 큰 강점이다. 중국의 코로나바이러스든 미국의 코로나바이러스든 인간에게 전염되는 방법은 똑같다. 하지만 중국은 미국에 코로나바이러스와 이 바이러스에 어떻게 대처해야 하는지에 대한 귀중한 가르침을 줄 수 있다. 이른 아침 밀라노에서 이탈리아 의사가 발견한 사실이 저녁에 테헤란에서 누군가의 생명을 살리게 될 수 도 있다. 영국 정부가 몇가지의 조치들 사이에서 주저할 때, 이미 한달 전 비슷한 딜레마에 빠졌던 한국이 조언을 해줄 수도 있다. 하지만 이것이 현실로 나타나기 위해서는, 우리는 국제적 공조와 신뢰의 정신을 가져야 한다.

(좋은 말이지만, 참 너무 이상적이긴 하다. 세상은 이렇듯 아름답게 돌아가진 않는다는게 내 개인적 생각이다. 만약 이말대로 됐다면 코로나19가 이렇듯 글로벌로 퍼지지도 않았을 것이다.) 

 

Countries should be willing to share information openly and humbly seek advice, and should be able to trust the data and the insights they receive. We also need a global effort to produce and distribute medical equipment, most notably testing kits and respiratory machines. Instead of every country trying to do it locally and hoarding whatever equipment it can get, a co-ordinated global effort could greatly accelerate production and make sure life-saving equipment is distributed more fairly. Just as countries nationalise key industries during a war, the human war against coronavirus may require us to “humanise” the crucial production lines. A rich country with few coronavirus cases should be willing to send precious equipment to a poorer country with many cases, trusting that if and when it subsequently needs help, other countries will come to its assistance. 

국가들은 기꺼이 정보를 공개해야 하고, 겸허하게 조언을 구해야 하며, 그들이 받은 데이터와 인사이트들을 믿을 수 있어야 한다. 또한 의료 장비들, 가장 필요한 것은 검사 키트와 호흡 기계들인, 을 생산하고 공급하는데 국제적 노력이 필요하다. 나라별로 각자 지역적으로 필요한 의료기구들을 생산, 공급하고 모든 장비를 비축하려 하는 대신에, 국제적인 공조를 통해 생산속도를 크게 높일 수 있으며, 생명을 살리는 기구들이 더욱 공정하게 배분될 수 있다. 전쟁시 주요 산업들이 국유화되듯이, 코로나바이러스에 대한 인류의 전쟁은 주요한 생산 라인들을 "인간화" 시키는 것이 필요하다. 코로나 바이러스가 별로 발생하지 않은 부자 국가들은 코로나 바이러스가 창궐한 가난한 나라에 기꺼이 귀중한 장비들을 제공해 주어야 한다. 추후에 그들이 필요할 때, 다른 나라들이 기꺼이 도움을 줄 것이라는 믿음을 가지고 말이다.

(참, 이게 주요한 부자나라들이 지금 다 코로나가 창궐하고 있으니 그게 문제다.) 

 We might consider a similar global effort to pool medical personnel. Countries currently less affected could send medical staff to the worst-hit regions of the world, both in order to help them in their hour of need, and in order to gain valuable experience. If later on the focus of the epidemic shifts, help could start flowing in the opposite direction. 

의료원(의사,간호사 등)들의 풀(pool)을 구성하는 국제적 공조도 고려해야 한다. 현재 전염이 적은 국가들은 다른 상황이 나쁜 국가에 의료 스태프들을 보낼 수 있으며, 그렇게 함으로써 그들이 필요할 때 다시 도움을 받을 수도 있고 귀중한 경험을 얻을 수도 있다. 나중에 전염이 그 방향을 튼다는 것을 생각하면, 도움의 방향 역시 반대가 될 수도 있는 것이다.

Global co-operation is vitally needed on the economic front too. Given the global nature of the economy and of supply chains, if each government does its own thing in complete disregard of the others, the result will be chaos and a deepening crisis. We need a global plan of action, and we need it fast. 

국제적 공조는 경제적 전선에 있어서도 필수적으로 필요하다. 경제가 가진 국제적 성격과 공급 체인에 의해, 만일 각각의 정부가 자기만 생각하고 다른 나라들을 고려하지 않는다면, 그 결과는 파괴적이고 위기는 더욱 심각해질 것이다. 국제적인 행동강령이 시급히 필요하다.

 

Another requirement is reaching a global agreement on travel. Suspending all international travel for months will cause tremendous hardships, and hamper the war against coronavirus. Countries need to co-operate in order to allow at least a trickle of essential travellers to continue crossing borders: scientists, doctors, journalists, politicians, businesspeople. This can be done by reaching a global agreement on the pre-screening of travellers by their home country. If you know that only carefully screened travellers were allowed on a plane, you would be more willing to accept them into your country. 

또다른 요구사항은 여행에 대한 국제적 합의를 이루는 것이다. 모든 국제적 이동이 수개월 동안 정지됨으로 인해 광범위한 물자부족을 야기하고 코로나 바이러스에 대한 대응을 어렵게 할 것이다. 국가들은 과학자, 의사, 기자, 정치인, 사업가와 같은 이들의 최소한의 필수인원에 대해 국경을 넘는 것을 허용하도록 공조해야 한다. 이는 그들의 고국에서 여행자들을 사전 선별하는데 대한 국제적 합의를 통해서 가능하다. 신중하게 선별된 여행자들만을 비행기에 태우는 것만이, 각각의 국가 모두가 여행자들을 받아들이는데 꺼리낌이 없어지게 할 수 있다

 

Unfortunately, at present countries hardly do any of these things. A collective paralysis has gripped the international community. There seem to be no adults in the room. One would have expected to see already weeks ago an emergency meeting of global leaders to come up with a common plan of action. The G7 leaders managed to organise a videoconference only this week, and it did not result in any such plan. 

불행히도, 현재 거의 모든 나라가 이와 같이 하고 있지 않다. 국제사회는 집단적 마비 상태이다. 현재 이 사태에 있어서 모든 국가는 성인처럼 행동하지 않는 것처럼 보인다. 이미 몇주 전에 공동의 대응 마련을 위해 전세계의 지도자들이 긴급 회동을 가질거라고 기대되어왔다. 이번주에야 G7 지도자들은 화상회의를 가졌으나, 아무런 계획도 내놓지 못했다.

In previous global crises — such as the 2008 financial crisis and the 2014 Ebola epidemic — the US assumed the role of global leader. But the current US administration has abdicated the job of leader. It has made it very clear that it cares about the greatness of America far more than about the future of humanity. 

이전의 위기들 - 2008년의 금융위기와, 2014년의 에볼라 감염사태 - 에서 미국은 전세계의 지도자의 역할을 수행했다. 하지만 현재 미국의 행정부는 리더로서의 역할을 저버렸다. 미국이 인류의 미래보다는 미국의 위대함에만 관심이 있다는 것이 매우 명백하다.

This administration has abandoned even its closest allies. When it banned all travel from the EU, it didn’t bother to give the EU so much as an advance notice — let alone consult with the EU about that drastic measure. It has scandalised Germany by allegedly offering $1bn to a German pharmaceutical company to buy monopoly rights to a new Covid-19 vaccine. Even if the current administration eventually changes tack and comes up with a global plan of action, few would follow a leader who never takes responsibility, who never admits mistakes, and who routinely takes all the credit for himself while leaving all the blame to others. 

미국 정부는 심지어 가장 가까운 우방마저 져버렸다. 미국이 EU로부터의 입국을 금지했을 때, EU에 어떤 사전 정보도 주지 않았다 - 하물며 급격한 조치에 대해서는 말할 것도 없다. 알려진바에 따르면 독일의 제약회사와는 코비드-19 백신에 대한 독점적 권리를 사기 위해 10억불을 제안했다는 추문이 있었다. 이제와서 미국 정부가 노선을 바꾸고 국제적인 공조를 제안할지라도, 누가 책임감도 없고, 실수도 인정하지 않으며, 다른이들은 비난하면서도 자화자찬만 하는 지도자를 따르겠는가?

If the void left by the US isn’t filled by other countries, not only will it be much harder to stop the current epidemic, but its legacy will continue to poison international relations for years to come. Yet every crisis is also an opportunity. We must hope that the current epidemic will help humankind realise the acute danger posed by global disunity. 

미국이 남겨둔 공백을 다른 나라들이 채우지 못한다면, 현재의 유행병을 막기는 더욱 힘들어질 것이고, 이러한 전례는 앞으로 다가올 시대에 국제적 관계의 악화를 지속시킬 것이다. 하지만 모든 위기가 곧 기회이듯, 현재의 유행병이 인류가 국제 분열이 심각한 위협을 초래한다는 것을 깨닫는 계기가 될 것을 희망해야 한다. 

Humanity needs to make a choice. Will we travel down the route of disunity, or will we adopt the path of global solidarity? If we choose disunity, this will not only prolong the crisis, but will probably result in even worse catastrophes in the future. If we choose global solidarity, it will be a victory not only against the coronavirus, but against all future epidemics and crises that might assail humankind in the 21st century. 

인류는 선택을 해야 한다. 분열의 길로 추락할 것인가, 아니면 전세계적 연대의 길을 선택할 것인가? 우리가 분열을 선택한다면, 이번 위기를 장기화할 뿐만 아니라, 아마도 미래에 더욱 큰 재앙을 야기하게 될 것이다. 우리가 세계적 연대를 선택한다면, 단지 코로나바이러스에 대해서 승리하는 것만 아니라, 21세기에 인류를 괴롭힐 모든 전염병과 위기들에 대한 승리가 될 것이다.

Yuval Noah Harari is author of ‘Sapiens’, ‘Homo Deus’ and ‘21 Lessons for the 21st Century’

 

Copyright © Yuval Noah Harari 202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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