책 제목과 같이 현 세기를 살아나가는 지식인으로서 자신이 가진 문제의식을 21가지 주제를 가지고 풀어쓴 내용.

맨 뒤의 명상 챕터는 다소 사변적이긴 하지만 어느 정도 이해되기는 한다. 하지만 이것은 니체가 외치는 초인처럼 덧없는 이야기라고 느껴지긴 한다.

그리고 고통만이 실재다라는 부분에 있어서는 그 논의가 깊긴 하지만 다소 너무 간단하게 실체를 정의한 감이 없지않다.

1번만 읽어서는 평가하긴 곤란하긴 하다. 최소 3독은 해야 할 듯 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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p12

 20세기가 끝날 무렵 파시즘, 공산주의와 자유주의 간의 거대한 이념 전쟁은 자유주의의 압도적 승리로 귀결되는 듯 보였다. 민주적 정치와 인권, 그리고 시장자본주의가 전 세계를 정복하도록 예정된 것처럼 보였다. 하지만 늘 그렇듯이, 역사는 예상 밖의 선회를 했고 파시즘과 공산주의가 붕괴한 후 지금 자유주의는 곤경에 처했다. 그러면 이제 우리는 어디로 향하는가?

 이 질문이 특히 통렬하게 다가오는 것은 정보기술과 생명기술 분야의 쌍둥이 혁명이 지금껏 인류가 맞닥뜨려온 최대 과제를 던지는 이 시점에서 자유주의가 신뢰를 잃고 있기 때문이다. 정보기술과 생명기술을 합친 힘은 조만간 수십억의 사람들을 고용 시장에서 밀어내고 자유와 평등까지 위협할 수 있다. 빅데이터 알고리즘은 모든 권력이 소수 엘리트의 수중에 집중되는 디지털 독재를 만들어낼 수 있다. 그럴 경우 대다수 사람들은 착취로 고생하는 것이 아니라 그보다 훨씬 더 나쁜 지경에 빠질 수 있다. 그것은 바로 무관함 irrelevancce 이다.

 정보기술과 생명기술의 융합에 관해서는 이미 전작 《호모 데우스》에서 상세히 논했다. 하지만 그 책은 장기적인 전망 - 수 세기, 심지어는 수천 년의 관점 - 에 초점을 맞춘 반면, 이 책은 당면한 사회적, 경제적, 정치적 위기에 집중한다. 이 책에서 관심은 비유기적 생명의 창조 여부보다는 복지국가, 특히 유럽연합과 같은 제도에 닥친 위협에 있다.

 이 책에서 신기술이 야기할 모든 영향을 다룰 생각은 없다. 특히 오늘날 기술은 많은 놀라운 약속들을 제시하고 있지만, 이 책에서 나의 의도는 주로 그것이 초래할 위협과 위험을 조명하는 것이다. 기술 혁명을 주도하는 기업과 사업가 들은 자신들이 만든 것을 예찬하는 노래를 부르게 마련이다. 따라서 사회학자나 철학자 그리고 나 같은 역사학자가 할 일이란 경고음을 내고 치명적인 잘못을 유발할 모든 가능성에 대해 설명하는 것이다.

 

p15

 하지만 호모 사피엔스에게는 여유가 없다. 철학과 종교, 과학 모두 시간이 다 돼간다. 사람들은 수천 년 동안 인생의 의미를 두고 논쟁해왔다. 그러나 이 논쟁을 무한정 계속할 수는 없다. 다가오는 생태학적 위기, 커져가는 대량 살상무기의 위협, 현상 파괴적인 신기술의 부상은 그런 여유를 허락하지 않을 것이다. 아마도 가장 중요하게는, 인공지능과 생명기술이 인간에게 생명을 개조하고 설계할 힘을 건넬 것이다. 머지않아 누군가 인생의 의미에 관한 명시적이거나 묵시적인 어떤 이야기를 기반으로 이 힘을 어떻게 쓸지 결정해야 할 것이다. 하지만 공학자는 인내심이 평균보다 훨씬 낮고 투자자는 최악이다. 생명을 설계할 힘으로 무엇을 할지 당신이 모른다 해도, 답을 찾을 때까지 1,000년의 시간을 시장 권력이 기다려주지는 않을 것이다. 시장의 보이지 않는 손은 자신의 맹목적인 답을 당신에게 강요할 것이다. 인생의 미래를 분기 수익 보고서에 맡기는 것이 만족스럽지 않다면, 삶이 무엇인지에 대한 생각을 분명히 할 필요가 있다.

 

p22

 하지만 2008년 세계 금융위기가 닥친 이래 전 세계 사람들은 자유주의 이야기에 점점 환멸을 느끼게 되었다. 장벽과 방화벽이 다시 유행이다. 이민자와 자유무역협정에 대한 저항감은 높아만 간다. 겉만 민주적인 정부들은 사법 체계의 독립성을 전복하고, 언론자유를 제한하며, 어떤 반대도 반역으로 몰아간다. 터키와 러시아 같은 나라의 스트롱맨은 새로운 유형의 반자유주의적 민주주의와 노골적인 독재를 실험한다. 오늘날 중국 공산당을 두고 역사의 잘못된 편에 서 있다고 자신 있게 선언할 사람은 드물 것이다.

 영국의 브렉시트 국민투표와 미국의 도널드 트럼프 부상으로 뚜렷이 각인된 해였던 2016년은 이러한 환멸의 파도가 서유럽과 북미의 핵심 자유주의 국가들에까지 가 닿은 순간임을 의미했다. 몇 년 전만 해도 미국인과 유럽인은 이라크와 리비아를 무력으로 자유화하려 애썼지만, 이제는 켄터키와 요크셔 주님의 다수가 자유주의 청사진을 바람직하지 않거나 이룰 수 없는 것으로 보게 되었다. 어떤 이들은 옛날의 계층화된 세상을 다시 그리워하게 되었고, 이제와서 인종적, 민족적, 젠더적 특권을 포기하지 않으려고 한다. 또다른 이들은 (옳든 그르든) 자유화와 세계화라는 것이 결국에는 대중을 제물로 소수 엘리트들에게 힘을 건넨 거대 사기라고 결론 내렸다.

 

 1938년, 사람들에게 주어진 전 지구적 이야기의 선택지는 세 가지였고, 1968년에는 두 가지밖에 없었다. 그러다가 1998년에는 한 가지 이야기만 득세하는 듯 보였다. 급기야 2018년이 우리 앞에는 하나도 남아 있지 않게 되었다. 최근 수십 년 동안 세계의 상당 부분을 지배했던 자유주의 엘리트들이 충격과 혼미의 상태에 빠진 것도 당연하다. 하나의 이야기만 존재한다는 것은 가장 마음이 놓이는 상황이다. 모든 것이 완벽하게 분명하기 때문이다. 하지만 급작스럽게 아무런 이야기도 없어진 상태는 끔찍한 일이다. 아무런 의미도 파악할 수 없게 된 것이다. 흡사 1980년대 소련의 엘리트처럼 지금 자유주의자들은 어떻게 해서 역사가 예정된 경로에서 벗어났는지 이해하지 못하고 있다. 현실을 해석할 대안적인 프리즘도 가진 게 없다. 방향감을 잃은 이들은 마치 역사가 자신들이 머릿속에 그린 해피 엔딩에 이르지 못한 것이 아마겟돈을 향해 돌진하는 일이라도 되는 양 종말론적 사고에 빠져들었다. 현실을 직시하지 못하면 정신은 재앙적 시나리오에 집착하게 된다. 지독한 두통을 치명적인 뇌종양의 신호라고 상상하는 사람처럼, 많은 자유주의자들은 브렉시트와 도널드 트럼프의 부상이 인류 문명의 종언을 예고한다고 우려한다.

 

p27

 생명기술과 정보기술의 혁명ㅇ은 기술자와 기업가, 과학자 들이 만들지만, 이들은 자신들의 결정이 어떤 정치적 함의를 갖는지 거의 알지 못하고, 어느 누구도 대표하지 않는다. 의회와 정당이 알아서 행동을 취할 수 있을까? 현재로서는 그럴 것 같지 않다. 기술의 파괴적 혁신은 정치적 의제에서 우선 사안도 아니다. 그 결과, 2016년 미국 대선 기간에도 파괴적 기술과 관련해 주로 언급된 것은 힐러리 클린턴의 이메일 스캔들이었고, 실직에 관한 온갖 이야기 중에도 자동화의 잠재적 충격 문제는 어느 후보도 언급하지 않았다. 도널드 트럼프는 유권자들에게 그들의 일자리를 멕시코와 중국이 가져갈 것이며, 따라서 멕시코 국경에 장벽을 건설해야 한다고 경고했다. 하지만 알고리즘이 일자리를 가져갈 거라는 경고는 하지 않았고, 캘리포니아 접경에 방화벽을 세워야 한다는 제안도 하지 않았다. 

 

 이것은 자유주의 서방의 심장부에 있는 유권자들조차 자유주의 이야기와 민주적 절차에 대한 신뢰를 잃어가는 한 가지(유일한 것은 아니더라도) 이유가 될지 모른다. 보통 사람은 인공지능과 생명기술을 이해하지 못할 수도 있다. 하지만 자기 옆을 지나가는 미래를 감지할 수는 있다. 1938년 소련과 독일 혹은 미국에 살았던 보통 사람은 삶의 조건이 암울했을 수는 있지만 자신이 세상에서 가장 중요한 존재이며 미래라는 말을 끊임없이 들었다(물론 그가 유대인이거나 흑인이 아니라 '보통 사람'임을 전제로 했을 때 얘기다). 그는 선전 포스트를 보았고 - 여기에는 보통 석탄 캐는 광부, 철강노동자, 영웅적인 포즈를 취한 가정주부가 그려져 있었다 - 그 속에서 자신을 봤다. "저 포스터 속에 있는 건 나야! 나는 미래의 주인공이야!

 하지만 2018년의 보통 사람은 점점 자신이 사회와 무관하다고 느낀다. 수많은 신비한 단어들 - 세계화, 블록체인, 유전공학, 인공지능, 기계 학습 machine learning - 이 테드 강연과 정부 싱크탱크, 하이테크 콘퍼런스 같은 곳에서 신나게 오르내리지만, 보통 사람은 이 중에 자신에 관한 이야기는 아무것도 없다고 의심할 법하다. 자유주의 이야기는 무엇보다 보통 사람에 관한 이야기였다. 어떻게 하면 사이보그와 알고리즘 네트워크의 세계에서도 그런 적실성을 유지할 수 있을까?

 20세기에 대중은 착취에 맞서 봉기를 일으켰고, 경제에서의 핵심적 역할을 정치권력으로 환산하려 했다. 이제 대중은 자신이 사회와 무관해질까봐 두려워한다. 그래서 너무 늦기 전에 자신에게 남은 정치권력을 사용하는 데 필사적이다. 브렉시트와 트럼프의 부상은 전통적인 사회주의 혁명과는 반대되는 궤도의 사례를 보여준 것일 수 있다. 러시아, 중국, 쿠바에서 혁명을 일으킨 것은 경제에서는 핵심적이었으나 정치권력은 누리지 못한 사람들이었던 반면, 2016년 트럼프와 브렉시트를 지지한 것은 아직 정치권력은 누리고 있지만 자신의 경제 가치를 잃는 것이 두려웠던 많은 사람들이었다. 아마도 21세기 포퓰리즘 반란은 사람들을 착취하는 경제 엘리트가 아니라 더 이상 사람을 필요로 하지 않는 경제 엘리트에 맞서는 구도로 전개될 것이다. 이는 지는 싸움이 될 가능성이 높다. 착취에 반대하는 것보다 사회와 무관해지는 것에 맞서 투쟁하기가 훨씬 힘들기 때문이다.

 

p30

 특히 자유주의 이야기는 공산주의로부터 배운 결과, 공감의 반경을 넓혀 자유와 나란히 평등까지 중요한 가치로 받아들였다.

 자유주의 이야기는 초기에만 해도 주로 중산층 유럽 남성의 자유와 특권에만 관심을 가졌을 뿐 노동계급이나 여성, 소수자, 비유럽인의 고충에는 눈을 감은 듯 보였다. 1918년 승전국인 영국과 프랑스가 들떠서 자유에 대해 이야기할 때도 세계 전역에 이르는 제국의 신민들은 염두에 두지 않았다. 예를 들어, 인도가 자치권을 요구했을 때 영국은 1919년 암리차르 대학살로 응징했다. 당시 영국 육군은 비무장 시위대 수백 명을 학살했다.

 2차 세계대전을 겪고 난 후에도 서방의 자유주의자들은 자신들의 이른바 보편적 가치를 비서방 사람들에게 적용하는 데 무던히도 애를 썼다. 그리하여 1945년 네덜란드가 5년에 걸친 야만적인 나치 점령에서 해방됐을 때도, 그들이 거의 맨 처음 한 일은 옛 식민지 인도네시아를 재점령하기 위해 군대를 소집해 세계 절반을 가로질러 파병한 것이었다. 1940년 네덜란드가 나치의 침공을 받았을 때는 개전 4일 만에 독립을 포기했지만, 자신들이 인도네시아 독립을 진압하는 데는 4년이 넘는 길고 격렬한 싸움을 마다하지 않았다. 세계 곳곳에서 일어난 민족해방 운동이 자유의 수호자라고 자처한 서방보다 공산주의 모스크바와 베이징에 희망을 건 것도 놀랄 일이 아니었다

 그렇지만 자유주의 이야기는 조금씩 지평을 넓혀갔다. 적어도 이론상으로는 모든 인간의 자유와 권리를 예외 없이 존중하게 되었다. 자유의 원이 확대되면서 또한 자유주의 이야기는 공산주의식 복지 제도의 중요성에도 눈떴다. 자유도 어떤 유의 사회 안전망과 결합되지 않으면 큰 가치가 없다는 사실을 깨닫게 된 것이다. 사회 민주적 복지국가는 민주주의와 인권과 더불어 국가가 지원하는 교육과 의료를 한데 결합했다. 심지어 초자본주의 국가라 할 수 있는 미국도 자유의 보호에는 최소한 어떤 식으로든 정부의 복지 서비스가 필요하다는 사실을 깨달았다. 굶는 아이에게 자유는 없다.

 1990년대 초까지 사상가들과 정치인들은 하나같이 '역사의 종언'을 반겼다. 확신에 찬 목소리로, 과거의 정치적, 경제적 문제는 다 해결됐으며, 민주주의와 인권, 자유 시장과 정부의 복지 서비스로 재단장한 자유주의 패키지야말로 여전히 유일한 해법이라고 주장했다. 이 패키지는 전 세계로 퍼져나가 모든 장애물을 극복하고 모든 국경을 지우는 한편, 인류를 하나의 자유로운 지구 공동체로 바꿔놓을 운명인 것처럼 보였다.

 하지만 역사는 끝나지 않았다. 프란츠 페르디난트의 순간과 히틀러의 순간, 체 게바라의 순간에 이어 이제 우리는 트럼프의 순간에 처했다. 그렇지만 이번에 자유주의 이야기가 마주한 상대는 제국주의나 파시즘, 공산주의처럼 일관된 이데올로기를 가진 적수가 아니다. 트럼프의 순간은 훨씬 더 허무주의적이다.

 20세기의 주요 운동은 모두 전 인류를 위한 미래 청사진이 있었던 데 반해 도널드 트럼프는 그런 것은 제시하지 않는다. 그와는 정반대다. 그의 주된 메시지는 어떤 지구 차원의 청사진을 만들고 증진하는 것은 미국의 일이 아니라는 것이다. 마찬가지로, 영국 브렉시트 지지자들도 '분리된 영국'의 미래를 위한 별다른 계획이 없다 - 유럽과 세계의 미래는 자신들의 지평을 훨씬 넘는 것이라고 본다. 트럼프와 브렉시트에 찬성표를 던진 사람들 대부분은 자유주의 패키지를 전면 거부한 게 아니다. 주로 세계화에 대한 믿음을 잃었을 뿐이다. 그들은 여전히 민주주의와 자유 시장, 인권, 사회적 책임을 믿는다. 하지만 이런 좋은 생각들도 국경에서는 제한될 수 있다고 생각한다. 실제로 그들은 요크셔와 켄터키에서 자유와 번영을 보존하기 위해서는 국경에 장벽을 세우고 외국인에 대해서는 비자유주의적 정책을 체택하는 것이 최선이라고 믿는다. 

 떠오르는 중국의 슈퍼파워도 거의 거울처럼 닮은 이미지를 보여준다. 중국은 국내 정치 자유화는 경계하면서도, 세계 다른 나라들에 대해서는 훨씬 더 자유주의적인 접근법을 택해왔다. 사실상 자유 무역과 국제 협력에 관한 한 시진핑이야말로 오바마의 진정한 계승자처럼 보인다. 마르크스레닌주의는 잠시 뒤로 제쳐둔 채, 자유주의 국제 질서에 꽤 만족스러워하는 것 같다.

 다시 기승을 부리는 러시아는 자신을 자유주의 세계 질서의 훨씬 강력한 경쟁자로 본다. 하지만 러시아는 군사력은 재편했어도 이념적으로는 파산했다. 블라디미르 푸틴은 러시아와 세계 곳곳의 다양한 우파 운동 진영에서는 확실히 인기가 있다. 하지만 스페인 실직자난 불만에 찬 브라질 국민, 초롱초롱한 눈망울의 케임브리지 학생 들까지 사로잡을 전 지구적 세계관은 갖고 있지 않다.

 러시아는 자유민주주의에 대안적인 모델을 제시한다. 하지만 이 모델은 하나의 일관성을 가진 정치 이념이 아니다. 그보다는 몇몇 올리가르히(과두재벌)들이 국가의 부와 권력 대부분을 독점하고는, 언론 통제를 통해 자신들의 활동을 숨기고 지배를 다지는 정치 관행에 불과하다. 민주주의는 다음과 같은 에이브러험 링컨의 원칙 위에 서 있다. "모든 국민을 잠시 속일 수 있고, 일부 국민을 늘 속일 수 있어도, 모든 국민을 늘 속일 수는 없다." 정부가 부패해서 국민 생활을 개선하지 못하면, 결국 그 사실을 깨닫는 사람이 많아지면서 정부를 대체할 것이기 때문이다. 하지만 정부가 언론을 통제하는 상황에서는 링컨의 논리는 힘을 잃는다. 시민이 진실을 알지 못하도록 막기 때문이다. 집권 과두제는 언론 독점을 통해 모든 정책 실패를 반복해서 남 탓으로 전가하고 국민의 관심을 외부 위협 - 실제든 상상이든 - 으로 돌릴 수 있다.

 그런 과두제 아래 살다보면 늘 이런저런 위기가 국민 의료나 공해 같은 따분한 문제보다 우선한다. 국가가 외부 침략이나 끔찍한 전복 사고에 직면했다는데 누가 과밀 병원과 강물 오염에 대해 걱정할 시간이 있겠는가? 이런 식으로 끝없는 위기의 흐름을 만들어 냄으로써 부패한 과두제는 지배를 무한정 연장할 수 있다.

 하지만 이런 과두제 모델은 실행력에서는 지속성이 있어도 아무에게도 매력을 발휘하지는 못한다. 다른 이데올로기들은 자랑스럽게 자신들의 청사진을 설파하는 데 반해, 올리가르히들은 집권하고 있으면서도 자신들의 통치에 자부심이 없어 다른 이데올로기로 연막을 치는 경향이 있다. 그래서 러시아는 민주주의인 체하고, 지도부는 과두제보다 러시아 민족주의와 정교회의 가치에 대한 충성을 공언한다. 프랑스와 영국의 우익 극단주의자들이 러시아의 지원에 의존하고 푸틴에 대한 흠모를 표시하는 일은 있을 법도 하지만, 두 나라의 유권자들조차 실제로 러시아 모델을 빼닮은 나라 - 고질적인 부패와 각종 서비스 장애, 법치주의 부재, 엄청난 불평등의 나라 - 에서는 살고 싶지 않을 것이다. 통계에 따르면, 러시아는 국부의 87퍼센트가 상위 10퍼센트 부유층 손에 있는, 세계에서 가장 불평등한 나라 중 하나로 꼽힌다. 프랑스 '국민전선'을 지지하는 노동계급 유권자 중에서 이런 부의 분배형을 자국에도 이식하고 싶어하는 사람이 얼마나 될까?

 사람들은 자신의 발로 투표한다. 세계를 여행하는 동안 나는 미국이나 독일, 캐나다, 호주로 이민 가고 싶어 하는 사람은 많이 만나봤다. 중국이나 일본으로 이주하고 싶어 하는 사람도 어느 정도 있었다. 하지만 러시아로 이민 가는 게 꿈이라는 사람은 단 한 명도 보지 못했다.

 

p37

 자유주의의 고장으로 공백이 생기자 잠정적이나마 각 국가의 지나간 황금시절을 그리워하는 환상이 그 자리를 메우고 있다. 도널드 트럼프는 미국의 고립주의에 대한 촉구에다 '미국을 다시 위대하게 만들자'는 약속을 연결했다. 마치 1980년대나 1950년대의 미국이 21세기에도 미국인들이 어떻게든 되살려야 하는 완벽한 사회였다는 듯이. 브렉시트 지지자들 역시 영국을 독립 강국으로 만드는 꿈을 꾼다. 마치 아직도 빅토리아 여왕 시대에 살고 있다는 듯이. 그리고 지난 시절에나 통했던 '영광의 고립'이 인터넷과 지구 온난화 시대에도 실행 가능한 정책이라는 것처럼. 중국 엘리트들은 자신들의 고유한 제국과 유교의 유산에 다시 눈을 뜨면서 그것을 서방에서 수입해온 미심쩍은 마르크스 이데올로기의 보완재나 대용품으로까지 생각한다. 러시아에서 푸틴이 공식적으로 제시하는 청사진도 부패한 과두제의 건설이 아니라 옛 차르 제국의 재건이다. 볼셰비키 혁명이 일어난 지 100년이 지난 지금 푸틴은 러시아 민족주의와 정교회의 신앙심에 힘입은 전제 정부를 통해 옛 제정 시대의 영광을 되찾는 한편 발트해에서 캅카스까지 세력을 확장하겠다고 약속한다.

 이처럼 민족주의적 애착과 종교적 전통을 뒤섞은 향수 어린 꿈은 인도와 폴란드 외에도 수많은 체제의 버팀목이 되고 있다. 하지만 이런 환상의 힘이 중동만큼 극단적인 곳도 없다. 이곳 이슬람주의자들은 1,400년 전 예언자 무함마드가 메디나 시에서 세운 체제를 그대로 모방하고 싶어 한다. 이스라엘의 근본주의 유대교들도 한술 더 뜬다. 2,500년 전 성경 시대로 돌아가려는 꿈을 꾼다는 점에서 그들은 이슬람주의자들마저 능가한다. 이스라엘 집권 연립정부의 각료들은 지금 이스라엘의 국경을 성경 속의 이스라엘에 좀 더 가깝게 확장하려는 희망을 공공연히 밝힌다. 심지어 알아크사 이슬람사원 자리에 고대 예루살렘의 야훼 신전을 재건하려 든다.

 자유주의 엘리트들은 이런 상황을 공포의 눈길로 본다. 그리고 인류가 늦지 않게 자유주의의 길로 복귀해 재난을 피할 수 있기를 희망한다. 2016년 9월 오바마 대통령은 마지막 유엔 연설에서 청중을 향해 "세계가 민족과 부족, 인종, 종교와 같은 해묵은 분할선을 따라 날카롭게 나뉘고 궁극에는 갈등 속으로 퇴보하는 것"을 경계했다. 그는 대신 "자유 시장과 책임 정부, 민주주의와 인권, 국제법의 원칙이 (....) 금세기 인간 진보를 위한 확고한 기반으로 남기"를 기원했다.

 오바마가 자유주의 패키지를 두고 숱한 한계에도 불구하고 다른 어떤 대안보다도 실적이 훨씬 좋았다고 한 것은 옳았다. 대부분의 사람들은 21세기 초 자유주의 질서의 보호 아래 경험했던 것보다 더 큰 평화나 번영을 누려본 적이 없다. 인류 역사상 처음으로 전염병에 의한 사망자가 고령으로 인한 사망자보다 적었으며, 폭력에 의한 사망자가 사고로 인한 사망자보다 적었다.

 

p51

 결국, 우리가 보호해야 할 궁극의 목표는 사람이지 일자리가 아니다. 남아도는 운전사와 의사는 다른 일자리를 찾아야 할 것이다.

 

p58.  새로운 일자리라고?

 

 예술에서 의료에 이르기까지 모든 분야의 전통적인 일자리 다수가 사라지면 새로운 인간 일자리의 창출로 상쇄될 것이다. 알려진 질병을 진단하고 익숙한 치료를 관장하는 데 집중하는 일반 의사들은 AI 의사로 대체될 가능성이 높다. 하지만 바로 그 점 때문에 획기적인 연구를 수행하고 신약이나 수술 절차를 개발하기 위해서는 인간 의사와 연구소 조교에게 훨씬 더 많은 돈을 지급해야 할 것이다.

 AI는 다른 방식으로 새로운 인간 일자리 창출을 도울 수 있다. 인간은 AI와 경쟁하는 대신 AI를 정비하고 활용하는 데 집중할 수 있을 것이다. 드론이 인간 비행사를 대체하면서 일자리가 사라졌지만 정비와 원격 조정, 데이터 분석, 사이버 보안 분야에서는 새로운 기회가 많이 생겨났다. 미군의 경우 무인기 프레데터나 리퍼 드론 한 대를 시리아 상공으로 날려보내는 데 30명이 필요한데, 그렇게 수집해 온 정보를 분석하는 데는 최소 80명이 더 필요한다. 2015년 미 공군은 이 직무를 맡을 숙련자가 부족해, 무인 항공기 운용 인력 부족이라는 역설적인 위기에 직면하기도 했다.

 그렇다면 2050년 고용 시장은 인간-AI의 경쟁보다도 상호 협력이 두드러진 형태가 될 가능성이 높다. 경찰부터 은행 업무에 이르기까지 인간과 AI가 한 팀을 이루면서 인간과 컴퓨터 모두를 능가할 수 있을 것이다. 1997년 IBM의 체스 프로그램인 딥 블루가 세계 챔피온 가리 카스파로프를 꺽은 후에도 인간이 체스를 그만두는 일은 일어나지 않았다. 오히려 AI 트레이너 덕분에 인간 체스 챔피언은 실력이 유례 없이 좋아졌고, 잠시나마 '켄타우로스'로 알려진 인간-AI 팀이 체스에서 인간과 컴퓨터 모두를 능가했다. 마찬가지로 AI는 인간이 사상 최고의 형사, 은행원, 군인으로 단장하는 데도 도움을 줄 수 있을 것이다.

 하지만 문제는, 그렇게 생겨난 새로운 일자리는 모두 고도의 전문성을 필요로 할 가능성이 높고, 따라서 비숙련 노동자의 실직 문제를 해결할 수는 없을 거라는 점이다. 그런 일자리를 실제로 메울 사람을 재교육하기보다 아예 새로운 일자리를 창출하는 것이 더 쉬운 일로 판명될 수 있다. 이전에 자동화 물결이 밀려들었을 때, 사람들은 특별한 기술이 필요 없는 기계적인 작업을 또 다른 비슷한 수준의 일로 바꿀 수 있었다. 1920년 농업이 기계화다하면서 해고된 농장의 일꾼은 트랙터를 생산하는 공장에서 새 일을 찾을 수 있었다. 1980년 공장 노동자는 실직하더라도 슈퍼마켓의 현금출납원을 새 출발을 할 수 있었다. 그런 작업 변화가 가능했다. 농장에서 공장으로, 다시 공장에서 슈퍼마켓으로 옮겨가는 데는 훈련이 많이 필요하지 않았다.

 하지만 2050년에는 현금출납원이나 방직공장 노동자가 로봇에게 일자리를 잃고 나서 암 연구원이나 드론 조종사, 혹은 은행의 인간-AI 팀원으로 새 일을 시작하기란 거의 불가능할 것이다. 필요한 기술을 갖추지 못할 것이기 때문이다. 제1차 세계대전 때 징집돼 온 수백만의 신참 병사에게 기관총을 맡기고 수천 명의 전사자를 낸 것은 그래도 이해할 만하다. 개별 기술이 크게 중요하지 않았기 때문이다. 하지만 오늘날 아무리 드론 조종사와 데이터 분석가가 부족하다 해도 미 공군은 그 자리를 월마트 퇴직원으로 메울 리는 없다. 경험 없는 신병이 아프가니스탄의 결혼 축하 파티를 탈레반의 고위급 회의로 오인하는 사고를 바랄 사람은 없다.

 결과적으로, 인간 일자리가 많이 생긴다 해도 새로운 '무용' 계급의 부상은 불가피할지도 모른다. 실제로는 두 세계의 최악을 함께 겪을 수도 있다. 높은 실업률과 숙련 노동력의 부족이 동시에 닥치는 것이다. 많은 사람이 19세기의 마차 몰이꾼이 아닌 말의 운명을 맞을 수 있다. 마차 몰이꾼은 택시 기사로 전환활 수 있었지만, 말은 점점 고용 시장에서 밀려나기 시작해 결국에는 완전히 퇴출됐다.

 더욱이 남은 인간 일자리도 결코 미래 자동화 위협으로부터 안전할 수 없을 것이다. 기계 학습과 로봇은 계속 개선될 것이기 때문이다. 40세에 실직한 월마트 현금출납원이 초인적인 노력 끝에 간신히 드론 조종사가 됐다 해도 10년 후에는 그는 다시 자기 변신을 해야만 할 수 있다. 그때쯤이면 드론을 날리는 일도 자동화됐을 수 있기 때문이다. 이처럼 직업의 변동성이 커지면서 노조를 조직하거나 노동권을 확보하는 일도 더 어려워질 것이다. 이미 오늘날에도 선진국에서 생겨나는 많은 신규 일자리는 보호받지 못하는 비정규직이거나 자유계약직, 혹은 일회성 업무직이다. 버섯구름처럼 급속하게 생겨났다가 10년도 안 돼 사라지는 직업을 가지고 어떻게 노조를 결성할까?

 마찬가지로 인간-컴퓨터 켄타우로스 팀도 평생 동반자 관계로 정착하는 대신 인간과 컴퓨터 간의 끊임없는 주도권 다툼으로 얼룩질 가능성이 높다. 인간들로만 이뤄진 팀 - 가령, 셜록 홈스와 왓슨 박사 - 은 보통 서로 협력해서 수십 년을 이어갈 항구적인 위계질서와 틀을 잡는다. 하지만 IBM 왓슨 컴퓨터 시스템(2011년 미국 TV쇼 <제퍼디!>에서 우승하며 유명해진 컴퓨터)과 한 조를 이룬 인간 탐정이 겪게 될 정해진 틀이라고는 수시로 찾아드는 파괴적 혁신일테고, 항구적인 위계질서라고는 반복되는 기술 혁명뿐일 것이다. 어제의 (로봇) 조수는 내일의 감독관으로 변신할 가능성이 높은 데다 모든 상호 업무 규약과 지침서는 매년 다시 써야만 할 것이다.

 체스 세계를 꼼꼼히 들여다보면 장기적으로 상황이 어느 방향으로 전개될지 단서를 얻을 수 있다. 딥 블루가 카스파로프를 꺽고 난 후 수년 동안 체스에서 인간-컴퓨터의 협력이 빛을 발한 것은 사실이다. 하지만 최근 몇 년 사이에 컴퓨터의 체스 실력이 너무나 좋아진 나머지 이제 인간 협력자의 가치는 사라졌고, 조만간에는 완전히 있으나 마나 한 존재가 될 상황에 처했다.

 결정적인 이정표가 세워진 날은 2017년 12월 7일이었다. 체스에서 컴퓨터가 인간을 이겼을 때가 아니라, 구글의 알파제로 프로그램이 스톡피시 8 프로그램을 꺽은 순간이었다. 스톡피시 8은 2016년 세계 컴퓨터 체스 챔피언이었다. 수백 년 동안 체스에서 쌓아온 인간의 경험은 물론 수십 년간 누적된 컴퓨터의 경험에 접속할 수 있었고, 초당 7,000만 수를 계산할 수 있는 프로그램이었다. 반면 알파제로는 불과 초당 8만 수의 계산을 수행했을 뿐이었다. 인간 창조자는 알파제로에게 어떤 체스 전술도 가르쳐주지 않았다. 심지어 표준 오프닝 standard opening조차 알려주지 않았다. 그 대신 알파제로는 최신 기계 학습 원리를 자가 학습 체스에 적용해 자신을 상대로 한 시합을 반복했다. 그럼에도 신참 알파제로는 스톡피시를 상대로 모두 100회의 시합을 벌여 28승 72무를 기록했다. 패한 적은 한 번도 없었다. 알파제로는 인간으로부터 배운 것이 없었기 때문에, 시합에서 승리했을 때 알파제로가 구사한 수와 전술의 상당수가 인간의 눈에는 파격적이었다. 완전히 천재적이진 않아도 충분히 독창적이라고 할만했다.

 알파제로가 백지 상태에서 체스를 학습하고 스톡피시를 상대로 한 시합을 준비하며 자신의 천재적 개능을 개발하는 데 걸린 시간이 얼마인지 상상할 수 있겠는가? 네 시간이었다. 오자가 아니다. 수 세기 동안 체스는 인간 지능의 더 없는 자랑거리로 여겨졌다. 하지만 알파제로는 완전 무지 상태에서 네 시간 만에 창의적 완숙의 경지에 도달했다. 그 과정에서 인간이 지도하며 준 도움도 전혀 없었다.

 알파제로 말고는 상상력을 발휘하는 소프트웨어는 더 있다. 이제는 체스 프로그램의 다수가 단순한 수의 계산뿐 아니라 '창의성'에서도 인간 선수를 능가한다. 인간만 출전하는 체스 토너먼트 시합에서 심판은 선수들이 몰래 컴퓨터의 도움을 얻는 속임수를 적발하느라 여념이 없다. 속임수를 적발하는 한 가지 방법은 선수가 구사하는 독창성의 수준을 모니터하는 것이다. 만약 선수가 이례적으로 창의적인 수를 구사하면 심판은 사람의 수일 리가 없다고 의심할 때가 많다. 컴퓨터의 소행으로 추정하는 것이다. 적어도 체스에서는 창의성은 이미 인간보다 컴퓨터의 트레이드마크가 됐다! 따라서 체스가 탄광의 카나리아라면, 우리는 이것을 카나리아가 죽어가고 있다는 경고로 이해해야 한다. 지금 인간-AI 체스팀에 일어나고 있는 일은 앞으로 경찰, 의료, 은행 업무에서 활동할 인간-AI 팀으로도 이어질 수 있다.

 결국, 새로운 일자리를 창출하고 그 자리를 채우기 위해 인간을 재교육하는 일은 단 한번의 노력으로 되지는 않을 것이다. AI 혁명은 일대 분수령을 이룬 뒤에 고용 시장이 새로운 평형 상태에서 안정을 찾는 식의 일회성 사건은 아닐 것이다. 그보다는 점점 커지는 (혁신적) 파괴의 폭포가 될 것이다. 이미 지금도 자신이 평생 같은 일을 할 거라고 보는 사람은 극소수다. 2050년이면 '평생 직장'이 라는 생각뿐 아니라 '평생 직업'이라는 생각까지 원시적이라고 간주될 것이다.

 앞으로 우리가 끊임없이 새로운 일자리를 만들어내고 노동자들을 재훈련할 수 있다 하더라도, 평균적인 인간이 그런 끝없는 격변의 인생을 살아가는 데 필요한 감정의 근력을 유지할 수 있을지 의아해할 수도 있다. 변화는 늘 스트레스로 가득하다. 21세기 초 세계는 미친 듯 바빠지면서 온 지구는 스트레스라는 유행병을 앓고 있다. 고용 시장과 개인 직업의 변동성이 커지는 상황에서 사람들은 현실에 잘 대처해나갈 수 있을까? 아마도 사피엔스의 정신이 나가는 것을 막으려면 지금보다 훨씬 효과가 큰 스트레스 경감기술 - 약물로부터 뉴로피드 백neuro-feedback, 명상에 이르기까지 - 이 필요할 것이다. 2050년 '무용' 계급이 출현하는 원인에는 일자리의 절대 부족이나 관련 교육의 결여뿐 아니라 정신 근력의 부족도 포함될 것이다.

 확실히 지금까지의 이야기는 대부분이 추측이다. 이 글을 쓰는 지금 - 2018년 초 - 도 자동화로 많은 산업이 파괴됐지만 대규모 실업은 발생하지 않았다. 사실 많은 나라에서 미국과 같이, 실업률은 사상 최저를 기록 중이다. 기계 학습과 자동화가 미래에는 달라질 직업들에 어떤 유의 충격을 줄지 아무도 확실히 알 수는 없으며, 시간의 흐름에 따라 관련된 상황이 어떻게 전개될지 구체적으로 추정하기란 극도로 어렵다. 그 이유는 특히 정치적 결정과 문화적 전통이 순전히 기술적인 돌파 못지않게 상황 전개에 영향을 주기 때문이다. 따라서 자율주행 차량이 인간 운전자보다 안전하고 저렴한 것으로 판명난 후에라도 정치권과 소비자들이 수년 동안, 아마 수십 년까지도 변화를 막을 수 있을 것이다.

 하지만 그렇다고 현실에 안주할 수는 없다. 새 일자리가 사라진 일자리를 충분히 메워줄 거라고 가정하는 것은 위험하다. 이전의 자동화 물결 기간에 그런 일이 일어났다고 해서 21세기의 아주 다른 조건 아래서도 같은 일이 반복될 거라는 보장은 없다. 그것이 초래할 수 있는 사회적, 정치적 혼란은 너무나 두려운 것이어서, 시스템 전반에 걸친 대량 실업의 개연성이 낮다 하더라도 우리는 그 문제를 아주 심각하게 생각해야 한다. 

 19세기에 산업혁명은 기존의 사회적, 경제적, 정치적 모델로는 대처할 수 없는 새로운 조건들과 문제들을 야기했다. 봉건주의와 군주제, 전통 종교는 산업화된 대도시와 수백만의 뿌리 뽑힌 노동자, 본성상 끊임없이 변하게 마련인 근대 경제를 경영하는 데 적합하지 않았다. 그 결과 인류는 완전히 새로운 모델 - 자유민주주의와 공산주의 독재, 파시즘 체제 - 을 개발해야 했고, 이 모델들을 실험하여 쭉정이에서 알곡을 가려내고 최선의 해법을 실행하기까지 1세기에 걸쳐 끔찍한 전쟁과 혁명을 겪어야 했다. 디킨스 소설에서 묘사된 탄광의 아동 노동, 제1차 세계대전과 1932~1933년의 우크라이나 대기근은 인류가 치른 수업료의 일부에 불과했다.

 21세기 정보기술과 생명기술이 인류에게 제기한 과제들은 이전 시대에 증기기관과 철도, 전기가 제기한 것들보다 훨씬 더 크다. 우리 문명의 막대한 파괴력을 감안하면 더 이상 실패한 모델이나 세계대전, 유혈 혁명을 용인할 여유가 없다. 이번에는 실패하면 핵전쟁이나 유전공학에 의한 괴물, 생태계의 완전한 붕괴를 초래할 수도 있다. 따라서 우리는 산업혁명에 직면했을 때보다 더 잘해야 한다.

 

p68

 예를 들어 공산주의를 보자. 자동화가 자본주의 시스템을 기반까지 흔들려고 위협함에 따라 혹자는 공산주의가 부활할 거라고 추측할 수 있다. 하지만 공산주의는 그런 종류의 위기를 활용하기 위해 만들어진 이념이 아니다. 20세기 공산주의 사상가들이 프롤레타리아에게 가르친 것은 이들의 막대한 경제적 힘을 정치적 영향력으로 전환하는 방법이었다. 공산주의 정파는 노동 계급에 의한 혁명을 촉구했다. 하지만 대중이 자신들의 경제적 가치를 잃는다면, 그래서 착취가 아닌 자신의 무관함에 맞서 투쟁해야 한다면 그런 교의가 얼마나 의미 있을까? 노동 계급이 없는 상황에서 어떻게 노동 계급 혁명을 시작할까?

 혹자는 인간이 작업장에서 AI와 경쟁할 수 없더라도 소비자로서는 늘 필요할 것이기 때문에 앞으로도 경제적으로 사회와 무관한 존재가 되지는 않을 거라고 주장할 수도 있다. 하지만 미래 경제가 우리를 소비자로서조차 필요한 존재로 여길지는 결코 확실하지 않다. 그 역할도 기계와 컴퓨터가 할 수 있을 것이기 때문이다. 이론적으로는 이런 경제도 충분히 가능하다. 광산 기업이 철을 생산해서 로봇 기업에 팔고. 로봇 기업은 로봇을 만들어 광산 기업에 팔고, 다시 광산 기업은 더 많은 철을 생산하고, 이렇게 생산된 철은 다시 더 많은 로봇을 만드는 데 쓰이고, 이런 식으로 계속된다. 이런 기업들은 은하계 멀리까지 성장하고 확장해갈 수 있다. 이 과정에서 그들에게 필요한 것이라고는 로봇과 컴퓨터뿐이다. 자신들의 생산물을 인간이 사주는 일조차도 필요하지 않다.

 

p78

 보편 기본 지원이 2050년 평균인의 객관적 조건을 개선하는 것을 목표로 한다면 성공할 가능성은 꽤 높다. 하지만 사람들이 자신의 운명에 대해 주관적으로 더 만족하는 것과 사회적 불만을 막는 것을 목표로 한다면 실패할 가능성이 높다.

 그 목표를 진정으로 달성하려면 보편 기본 지원은 스포츠에서 종교에 이르기까지 다른 의미 있는 추구에 의해 보완해야 할 것이다. 아마도 이스라엘에서 행해진 실험이 일 - 이후 세계에서 만족스런 삶을 사는 방법으로는 지금까지 가장 성공적이었을 것이다. 이곳에서는 초정통파 유대교 남성의 약 50퍼센트가 일을 하지 않는다. 이들은 성경을 공부하고 종교 의식을 수행하는 데 삶을 바친다. 그들과 가족들이 굶어 죽지 않는 비결은 흔히 부인들이 일을 하기 때문이기도 하고, 생활에 필요한 기본적인 것들에 부족함이 없도록 정부가 보조금과 무료 서비스를 제공하기 때문이기도 하다. 이것이야말로 '그런 말이 생기기도 전'의 보편 기본 지원이다.

 이 초정통파 유대교 남성들은 가난하고 직업도 없다. 하지만 설문조사를 해보면 삶의 만족도가 이스라엘 사회의 다른 어떤 분파보다 높게 나온다. 이는 공동체의 유대감이 주는 결속력과 더불어, 성경 공부와 의례 수행에서 찾을 수 있는 깊은 의미 때문이다. 열악한 환경 속에서 땀 흘려 일하는 노동자들로 가득한 대형 직물공장보다, 남성들이 함께 모여 탈무드를 공부하는 작은 방에서 더 큰 즐거움과 참여감과 통찰이 생기는 것은 당연하다. 전 세계를 대상으로 삶의 만족도를 묻는 조사에서 이스라엘이 상위권에 오르는 이유도 부분적으로는 이런 무직의 가난한 사람들이 점수를 올려주기 때문이다. 

 비유대교 이스라엘인은 초정통파 유대교인들이 사회 기여도가 낮고 다른 사람의 근로에 기생한다고 극심하게 비판할 때가 많다. 특히 초정통파 유대교인 가족은 자녀가 평균 일곱 명이라는 점을 들어, 그런 삶의 방식은 가능하지 않다고 주장하는 경향이 있다. 아마도 조만간 국가가 그 많은 실업자들을 계속해서 지원할 수는 없을 것이다. 그러면 그들도 일을 해야 할 것이다. 하지만 그 반대가 될 수도 있다. 로봇과 AI가 인간을 구직 시장에서 밀어내면, 오히려 초정통파 유대교인들이 과거의 화석이 아니라 미래의 모델로 보일지도 모른다. 물론 모든 사람이 초정통파 유대교인이 되어 예시바에 가서 탈무드를 공부할 거라는 말은 아니다. 하지만 모든 사람의 삶에서 의미와 공동체의 추구가 구직열을 압도할지도 모른다.

 만약 보편적인 경제 안전망과 더불어 강력한 공동체와 의미 있는 삶의 추구를 결합할 수만 있다면, 우리가 알고리즘에 일자리를 빼앗기는 것이 실제로 축복일 수 있다. 하지만 우리 삶에 대한 통제력을 잃는 것은 훨씬 무서운 시나리오다. 대량 실업의 위험과는 별도로, 우리가 훨씬 더 걱정해야 할 일은 인간의 권위가 알고리즘으로 옮겨가는 것이다. 알고리즘은 자유주의 이야기에 대한 우리의 믿음을 파괴하고 디지털 독재의 부상으로 이어지는 길을 열지도 모름다.

 

p83

 국민투표와 선거는 언제나 인간의 느김에 관한 것이지 이성적 판단에 관한 것이 아니다. 만약 민주주의가 이성적인 의사 결정의 문제라면 모든 사람에게 동등한 투표권을, 혹은 그 어떤 투표권도 줘야 할 이유가 전혀 없다. 어떤 사람들은 다른 사람들보다 훨씬 더 박식하고 이성적이라는 증거는 충분하다. 경제나 정치에 관한 구체적인 질문에 관한 한 확실히 그렇다. 브렉시트 투표가 있고 난 후에 저명한 생물학자 리처드 도킨스는 자신을 포함한 영국 대중의 대다수는 (이 문제를 두고) 국민트표에서 투표하도록 요구받는 일이 없어야 했다면서, 그들에게는 경제학과 정치학의 필요한 배경 지식이 없기 때문이라고 항변했다. "차라리 아인슈타인이 대수학을 맞게 풀었는지 결정하기 위해 국민투표를 실시하거나, 조종사가 어느 활주로에 착륙해야 할지를 두고 승객에게 투표하게 하는 것이 낫겠다."

 

p84

 느낌에 이끌리는 것은 유권자뿐 아니라 지도자도 해당된다. 2016년 브렉시트 국민트표에서 탈퇴 캠페인을 이끈 지도자는 보리스 존슨과 마이클 고브였다. 데이비드 캐머런이 사임한 후 고브는 처음에 존슨을 총리로 지지했다. 하지만 마지막 순간에 고브는 존슨이 부적격자라고 선언하고 자신이 직접 출마하겠다는 의사를 발표했다. 존슨이 기회를 날려버린 고브의 행동을 두고 사람들은 마키아벨리적인 정치적 암살이라고 불렀다. 하지만 고브는 자신의 행동을 변호하는 과정에서 자신의 느낌에 호소하며 이렇게 설명했다. "정치 인생에서 걸음을 옮길 때마다 나 자신에게 한 가지 질문을 해왔다. '무엇이 옳은 일인가? 너의 마음은 네게 뭐라고 하는가?" 고브에 따르면, 그가 브렉시트를 위해 그토록 열심히 싸운 이유도, 그때까지 동지였던 보리스 존슨의 등에 칼을 꽂을 수밖에 없었던 이유도, 자신이 우두머리 자리에 나선 것도 그 때문이었다. 즉, 그의 마음이 그렇게 하라고 했다는 것이다.

 마음에 대한 이런 의존은 자유민주주의의 아킬레스건으로 드러날지도 모른다. 왜냐하면 (베이징이나 샌프란시스코의) 누군가가 인간의 마음을 해킹해서 조작하는 기술력을 얻게 되면, 민주 정치는 감정의 인형극으로 돌변할 것이기 때문이다.

 

p86

 따라서 감정은 합리성의 반대가 아니다. 감정이 체화한 것이 진화적 합리성이다.

 

p96

 2012년 3월 일본 관광객 세 명이 호주 연안의 작은 섬으로 당일 치기 여행을 가기로 했다. 그들은 차를 몰고 가다가 그대로 태평양에 뛰어들었다. 운전을 했던 21세 유주 노다 씨는 나중에 자신은 GPS를 따랐을 뿐이라고 했다. "GPS가 우리한테 그쪽으로 곧장 갈 수 있다고 했엉. 길로 안내해줄 거라고 계속 말하더군요. 그러다 꼼짝없이 빠졌지요." 그와 비슷하게 사람들이 GPS 지시만 믿고 차를 몰고 가다가 호수에 빠지거나 철거된 다리에서 떨어지는 사고가 여러 차례 일어났다. 길 찾기 능력은 근육과 같다. 사용하지 않으면 잃는다. 배우자나 직업을 고르는 능력도 마찬가지다.

 

p106

 우리는 인공지능의 부상이 대다수의 인간을 고용 시장에서 몰아 낼 수도 있다는 사실을 앞에서 봤다. 여기에는 운전자와 교통경찰까지 포함된다(소동을 빚는 인간을 순종적인 알고리즘으로 대체하면 교통경찰은 있으나 마나 한 존재가 된다). 하지만 그때가 되면 철학자에게는 새로운 출구가 생길 수도 있다. 지금까지는 시장 가치가 크지 않았던 철학자의 기량에 대한 수요가 갑자기 치솟을 수 있기 때문이다. 그러니 만일 미래에 좋은 일자리가 보장되는 무언가를 공부하고 싶다면 철학에 운을 걸어보는 것도 나쁘지 않을 것이다.

 

 p113

 20세기 후반 민주주이가 독재를 능가했던 것은 데이터 처리에서 우월했기 때문이다. 민주주의는 정보를 처리하고 결정하는 권한을 사람과 기관에 분산하는 반면 독재는 한곳에 집중했다. 20세기 기술로 보면 너무 많은 정보와 힘을 한곳에 모으는 방식이 비효율적이었다. 그 누구도 모든 정보를 충분히 빠르게 처리하면서 옳은 결정을 내릴 수는 없었기 때문이다. 소련이 미국보다 훨씬 나쁜 결정을 내리고 경제도 훨씬 뒤처진 데에는 이런 점도 작용했다.

 하지만 AI가 등장하면서 조만간 시계추는 반대 방향으로 움직일 수 있다. AI 덕분에 막대한 양의 정보를 중앙에서 모두 처리할 수 있게 됐다. 실제로 AI는 중앙 집중 체계의 효율을 분산 체계보다 훨씬 높일 수 있는데, 기계 학습은 분석할 수 있는 정보가 많을수록  성능이 좋아지기 때문이다. 알고리즘 훈련에 관한 한, 프라이버시 침해 우려는 무시한 채 10억 인구에 관련된 모든 정보를 데이터베이스 한곳에 모으는 편이, 개인 프라이버시를 존중해 100만 명에 관한 부분적인 정보만 데이터베이스에 두는 것보다 훨씬 낫다. 가령, 어떤 권위주의 정부가 모든 시민에게 DNA 스캔을 받게 하고 모든 의료 데이터를 중앙 정부 기관과 공유하도록 명령한다면, 의료 데이터를 엄격하게 사적으로 보호하는 사회보다 유전학과 의학연구에서 엄청나게 유리할 것이다. 20세기 권위주의 정권의 주요 장애 - 모든 정보를 한곳에 집중하려는 시도 - 가 21세기에는 결정적인 이점이 될 수 있다.

 

p124

 재산은 장기 불평등을 낳는 전제 조건이다.

 

 

 하지만 근대 후반에 이르러 평등은 거의 모든 인간 사회에서 이상이 되었다. 여기에는 공산주의와 자유주의라는 새로운 이데올로기의 부상이 일부 작용했지만, 산업혁명이 일어나면서 대중이 전례 없이 중요해진 요인도 있었다. 산업 경제는 평민 노동자 대중에게 의존했고, 산업화된 군대 역시 평민 병사 대중에게 의존했다. 민주주의와 독재 정부 모두가 대중의 건강과 교육, 복지에 대거 투자했다. 생산 라인을 가동할 건강한 수백만 노동자들과 참호에서 싸울 충성스런 수백만 병사들이 필요했기 때문이다.

 그 결과 20세기 역사는 상당 부분 계급과 인종, 성별 간 불평등 감소를 둘러싸고 전개됐다.. 세계가 2000년을 맞았을 때 그때까지도 여전히 계급제의 잔재는 남아 있었지만 1900년의 세계에 비하면 훨씬 평등했다. 21세기에 들어와서도 처음 몇 년 동안 사람들은 평등화의 과정이 계속 이어지고 속도도 더욱 빨라질 것으로 내다봤다. 특히 세계화가 세계 전역에 걸쳐 경제적 번영을 확산시키고, 그 결과 인도와 이집트의 국민들도 핀란드와 캐나다 국민 같은 기회와 권리를 누리게 되기를 바랐다. 모든 세대가 이런 가능성 위에서 자라났다.

 하지만 이제 이 약속은 지켜지지 못할 것 같다. 세계화가 인류의 다수에게 혜택을 준 것은 분명하지만 사회 내부는 물론 사회들 간에도 불평등이 커지는 신호가 뚜렷해지고 있다. 세계화의 과실을 일부 집단이 점점 독점해가는 반면 나머지 수십억은 뒤쳐져 있다. 이미 지금도 최고 부유층 1퍼센트가 세계 부의 절반을 차지하고 있다. 더욱더 놀라운 것은 최고 부유층 100명이 최저 빈곤층 40억명보다 더 많은 부를 가졌다는 사실이다.

 이런 추세는 훨씬 더 심해질 수 있다. 앞 장에서 설명했듯이, AI가 부상하면서 인간 대다수의 경제적 가치와 정치적 힘이 소멸될 수 있다. 이와 함께 생명기술이 발전하면서 경제 불평등을 생물학적 불평등으로 전환하는 일이 가능해질 수도 있다. 슈퍼리치는 마침내 자신들의 엄청난 부에 상응하는 것을 가질 수 있을 것이다. 지금까지는 자신들의 지위를 상징하는 것을 살 수 있었던 반면, 머지않아 생명 자체를 돈으로 살 수 있을 것이다. 수명을 늘리고 육체적, 인지적 능력을 증강하는 새로운 치료를 받는 데 많은 돈이 든다면 인류는 여러 생물학적 계층으로 쪼개질 수도 있다.

 역사적으로 부자들과 귀족들은 언제나 자신들이 다른 모든 사람들보다 우월한 기량을 갖고 있으며 그렇기 때문에 자신드링 지배력을 행사해야 한다고 생각했다. 하지만 우리가 아는 한 사실은 그렇지 않았다. 평균적인 공작의 재능이 평균적인 농민보다 낫지 않았고, 그의 우월함이란 단지 불공정한 법적, 경제적 차별에 힘입은 것이었다. 하지만 2100년에는 부유층이 정말로 빈민촌 거주자들보다 더 재능 있고 창의적이고 똑똑할 수 있다. 일단 부유층과 빈곤층 사이에 실제로 능력 격차가 벌어지기 시작하면 그것을 좁히기란 거의 불가능해질 것이다. 만약 부유층이 우월한 능력으로 자신들의 부를 더 늘리고, 더 많은 돈으로 육체와 두뇌까지 증강할 수 있게 되면, 시간이 갈수록 빈부 격차는 더 커질 수밖에 없을 것이다. 2100년까지 최상의 부유층 1퍼센트는 세계 부의 대부분을 차지하는 데 그치지 않고, 세계의 미美와 창의력, 건강까지 대부분 차지할 수 있을 것이다.

 두 과정이 합쳐지면, 즉 Ai의 부상과 생명공학이 결합되면 인류는 소규모의 슈퍼휴먼 계층과 쓸모없는 호모 사피엔스 대중의 하위 계층으로 양분될 수 있다. 설상가상으로, 대중이 경제적 중요성과 정치적 힘을 잃으면서 국가는 이들의 건강과 교육, 복지에 투자할 동기를 적어도 일부는 잃을 수 있다. 쓸모없어지는 것은 아주 위험하다. 그럴 경우 대중의 미래는 소수 엘리트의 선의에 좌우될 것이다. 그 선의는 수십 년 동안은 유지될 수도 있다. 하지만 위태로운 시기가 닥치면 - 가령 기후 재앙 - 잉여 인간들은 배 밖으로 던져버리고 싶은 유혹이 커질 테고, 그것은 어려운 일도 아닐 것이다.

 프랑스와 뉴질랜드처럼 자유주의 신념과 복지국가 관행이 오랜 전통인 나라에서는 엘리트가 대중을, 그들이 필요없을 때조차 계속해서 돌봐줄지 모른다. 하지만 보다 자본주의적인 미국에서는 미국식 복지국가의 잔여분마저 해체해버릴 첫 기회로 삼을지도 모른다. 훨씬 심각한 문제는 인도와 중국, 남아프리카, 브라질과 같이 인구가 많은 개발도상국들이 겪게 될 것이다. 보통 사람이 경제 가치를 잃고 나면 불평등이 급격히 치솟을 수 있다.

 그 결과 세계화는 세계의 통일로 가기보다 실제로는 '종의 분화'로 귀결될 수도 있다. 인류가 다양한 생물학적 계층 혹은 심지어 다양한 종으로 분화할 수도 있다는 뜻이다. 세계화는 수평적으로는 세계를 통일하고 국경을 없애지만, 동시에 수직적으로는 인류를 분할할 것이다. 미국과 러시아 같은 다양한 나라에서는 과두 지배계층이 뭉쳐 평범한 사피엔스 대중에 맞서 공동 목적을 추구할 수도 있다. 이런 관점에서 보면 현재 포퓰리즘이 '엘리트'에 분개하는 데에는 충분한 이유가 있다. 앞으로 조심하지 않으면 실리콘밸리 재벌과 모스크바 억만장자의 손주들이 애팔래치아 시골뜨기와 시베리아 촌사람의 손주들보다 우월한 종이 될 수도 있다.

 장기적으로 봤을 때, 그런 시나리오가 세계를 탈세계화할 수도 있다. 상위 계층은 자칭 '문명' 내부로 모여들면서 그 둘레에는 성벽과 해자를 만들어 '야만인들' 무리와 격리된 삶을 사는 것이다. 20세기 산업 문명은 값싼 노동력과 원자재와 시장을 얻기 위해 '야만인들'에게 의존해야 했다. 그래서 그들은 정복하고 흡수했다. 반면, 21세기 후기 산업 문명은 AI와 생명공학과 나노 기술에 의존하면서 훨씬 더 자족적이고 자생적이 된다. 그럴 경우 계급 차원을 넘어 나라와 대륙이 통째로 관심 밖의 대상으로 전락할 수도 있다. 드론과 로봇이 지키는 요새 안의 자칭 문명 구역에서는 사이보그들이 논리폭탄으로 경쟁을 벌이는가 하면, 그와 격리된 야만인의 땅에서는 야생의 인간들이 칼과 칼라슈니코프 자동소총으로 싸운다.

 이 책에서 나는 인류의 미래에 관해 이야기하며 1인칭 복수형을 자주 사용했다. '우리의' 문제에 관해 '우리'가 무엇을 해야 하는지에 대해 이야기했다. 하지만 아마도 앞으로 '우리'는 존재하지 않을 것이다. 짐자건대 '우리의' 가장 큰 문제는 다양한 인가 집단이 서로 완전히 다른 미래를 맞게 될 거라는 사실이다. 세계 어떤 지역에서는 자녀에게 컴퓨터 코딩을 가르쳐야 하는 반면, 다른 지역에서는 재빨리 총을 뽑아 명중시키는 법을 가르치는 게 나을지도 모른다.

 

p129

 데이터를 손에 넣기 위한 경주는 이미 시작됐다. 선두 주자는 구글과 페이스북, 바이두, 텐센트 같은 데이터 거인들이다. 지금까지 이 거인들의 다수가 채택해온 사업 모델은 '주의 장사꾼'처럼 보인다. 무료 정보와 서비스, 오락물을 제공해 우리의 주의를 끈 다음 그것을 광고주들에게 되판다. 하지만 데이터 거인들이 추구하는 목표는 이전의 그 어떤 주의 장사꾼들보다 훨씬 높다. 이들의 진짜 사업은 결코 광고를 파는 것이 아니다. 오히려 우리의 주의를 사로잡아 우리에 관한 막대한 양의 데이터를 모으는 것이다. 이것이야말로 그 어떤 광고 수익보다 훨씬 가치가 크다. 그러니까 우리는 고객이 아니라 그들의 생산품인 것이다.

 중기적으로 볼 때 이런 식으로 데이터가 비축되면 근본적으로 다른 사업 모델이 열리는데, 그 첫 희생자는 광고 산업 전체가 될 것이다. 새로운 모델의 기반은 인간의 권위가 알고리즘으로 옮겨가는 것이다. 여기에는 어떤 것을 골라서 구매하는 권위까지 포함된다. 알고리즘이 위를 위해서 뭔가를 고르고 구매하기 시작하면 전통적인 광고 산업은 파산할 것이다. 구글을 보자. 구글이 추구하는 최종 목표는 우리가 구글에 무엇이든 질문할 수 있고, 그게 대한 세계 최선의 해답을 얻는 것이다. 우리가 구글에 '안녕 구글, 네가 차에 대해 아는 모든 것과 나에 대해 아는 모든 것(나의 욕구와 습관, 기후변화를 보는 관점, 중동 정치에 대한 나의 견해까지 포함)을 감안했을 때, 내게 가장 좋은 차는 뭐라고 생각하니?" 라는 질문까지 할 수 있게 되면 어떤 일이 일어날까? 만약 구글이 그 질문에 좋은 답을 제시할 수 있다면, 그리고 우리가 경험은 통해 우리의 쉽게 조종당하는 감정보다 구글의 지혜를 더 신뢰하게 된다면 차량 광고가 무슨 소용이 있을까?

 장기적으로는 충분한 규모의 데이터와 더불어 컴퓨팅 능력이 충분히 커지면 데이터 거인들은 생명의 가장 깊은 비밀까지 해킹할 수 있을 것이다. 그런 다음 그 지식을 사용해 우리 대신 선택을 하고 우리를 조종할 뿐만 아니라, 유기적 생명을 재설계하고 비유기적 생명체를 만들 수도 있을 것이다. 광고 판매는 단기적으로 거인 기업을 유지하는 데 필요할 수 있다. 하지만 이들은 앱과 상품과 기업을 평가할 때도 매출액보다도 그것을 통해 모을 수 있는 데이터를 기준으로 삼는다. 인기 많은 앱이 사업 모델로는 부적격이고 단기적으로는 손실을 초해할 수도 있지만, 데이터를 빨아들이는 것으로 보자면 그 가치는 수십억 달러에 이를 수 있다. 지금 당장은 데이터를 기반으로 어떻게 돈을 벌어야 할지 모른다 해도 가지고 있는 것만으로도 가치는 충분하다. 데이터야말로 미래에 생활을 통제하고 형성하는 데 열쇠가 될 수 있기 때문이다. 나는 데이터 거인들이 얼마나 명확하게 그런 측면에서 이 문제를 생각하고 있는지는 확신할 수 없다. 하지만 그들의 행동을 보면 그들이 단순히 돈보다는 데이터를 모으는 데 가치를 두고 있음을 알 수 있다.

 

p152

 사람들은 이런 변화를 외면할 때가 많다. 자신들의 핵심적인 정치적, 종교적 가치에 관해서라면 특히 더 그렇다. 우리는 우리의 가치가 옛 조상에게서 물려받은 귀중한 유산이라고 고집한다. 하지만 그렇게 말할 수 있는 유일한 근거는 우리의 조상이 오래전에 죽었으며 이제는 스스로 말할 수 없다는 사실이다. 예를 들어 유대인이 여성을 대하는 태도를 보자. 오늘날 초정통파 유대교인들은 공공장소에서 여성 사진을 금지한다. 이들을 겨냥한 게시판과 광고에는 남자와 소년만 묘사돼 있을 뿐 여성과 소녀는 결코 등장하지 않는다.

 2011년 그로 인한 사건이 터졌다. 뉴욕 브루클린의 초정통파 유대교 신문인 디 차이퉁Di Tzeitung이 미국 관리들이 오사마 빈 라덴의 은신처 공습을 지켜보는 사진을 실으면서 디지털 기술로 힐러리 클린터 국무장관을 포함한 모든 여성을 삭제한 것이다. 이 신문은 유대교의 '겸손법'에 따른 불가피한 조치였다고 해명했다. 비슷한 사건은 또 있었다. 이스라엘의 하메바세르HaMevaser 신문이 샤를리 에브도 학살에 항의하는 시위 사진에서 앙겔라 메르켈을 지운 것이다. 애독자들의 마음속에 음탕한 생각이 일어나는 것을 막기 위해서였다. 또 다른 초정통파 유대교 신문인 하모디아Hamodia의 발행인은 이런 정책을 변호하면서 '우리는 수천 년 유대교 전통의 지지를 받고 있다"고 했다.

 유대교 회당만큼 여성의 노출을 엄격하게 제한하는 곳도 없다. 정통파 유대교 회당에서 여성은 남성으로부터 철저히 격리되어 커튼 뒤 제한 구역에 있어야 한다. 남성들이 기도하거나 경전을 읽을 때 우연하게라도 여성의 모습이 눈에 띄지 않게 하기 위해서다. 하지만 이 모든 것이 수천 년 유대교 전통과 변치 않는 신법의 지지를 받고 있다면, 고고학자들이 이스라엘에서 출토한 미쉬나와 탈무드 시대의 예배당 유적에 남녀가 격리된 흔적은 조금도 없었고, 오히려 아름다운 바닥 모자이크 그림과 천정 그림에 여성이 묘사돼 있었으며, 심지어 어떤 여성은 몸을 다 드러내다시피 한 사실은 어떻게 설명해야 할까? 미쉬나와 탈무드를 저술한 랍비들조차 이런 예배당에서 규칙적으로 기도하고 공부했건만, 오늘날 정통파 유대교인들은 그들이 불경스럽게도 옛 전통을 모독했다고 할 것이다.

 옛 전통을 왜곡하는 일은 모든 종교의 공통적인 특징이다. IS는 자신들이 이슬람교의 순수 원형으로 돌아갔다고 하지만 사실은 그들의 해석이야말로 완전히 새로운 것이다. 물론 그들은 유서 깊은 문헌을 많이 인용한다. 하지만 이 과정에서 어떤 것을 취사선택할지, 그것을 어떻게 해석할지를 두고 심혈을 기울인다. 실제로 성스러운 문헌을 해석할 때 이들이 보이는 'DIY Do It Yourself'식 태도야말로 대단히 현대적인 것이다. 전통적으로 경전 해석은 박식한 울라마(카이로의 알아자르 같은 저명한 기관에서 이슬람법과 신학을 공부한 학자)의 독점 영역이었다. IS 지도자들 중에 그런 자격을 갖춘 사람은 거의 없었고, 존경받는 울라마들도 대부분 최고 지도자인 아부 바르크 알바그다디와 그 일당을 무지한 범죄자로 일축해왔다.

 그렇다고 해서 어떤 사람들이 주장하는 것처럼 IS가 '비이슬람적'이거나 '반이슬람적'이라는 것은 아니다. 특히 버락 오바마 같은 기독교인 지도자가 무모하게도 아부 바르크 알바그다디 같은 자칭 무슬림에게 무슬림이 무엇을 뜻하는지 이야기한 것은 역설적이다. 이슬람의 진정한 핵심이 무엇인지를 두고 벌어진 열띤 논쟁은 한마디로 무의미하다. 이슬람교에서는 고정된 DNA가 없기 때문이다. 이슬람교는 무슬림들이 만들어내는 것이다.

 

p173

 사람들이 민족이라는 공동체를 구축하는 수고를 마다하지 않았던 이유는 단일 부족 차원에서는 해결할 수 없는 도전에 직면했기 때문이었다. 

 

p179

 불행히도 우리는 이런 성취에 너무나 익숙해진 나머지 그것을 당연하게 여긴다. 그러다 보니 사람들은 불장난을 방치하기도 한다. 러시아와 미국은 최근에 새로운 핵 군비 경쟁에 착수했다....

 그 와중에 대중은 핵폭탄을 걱정하기는 커녕 오히려 좋아하게 되었다. 혹은 핵폭탄이 존재한다는 사실 자체를 아예 망각했다. 

그러다 보니 주요 핵 강국인 영국의 브렉시트 논쟁에서도 주로 거론된 것은 경제와 이민 문제였을 뿐, 유럽연합이 유럽과 지구적 평화에 어떤 공헌을 하는지는 대체로 무시됐다. 수 세기 동안 끔찍한 유혈 사태를 겪은 후에야 마침내 프랑스와 독일, 이탈리아, 영국이 유럽 대륙의 조화를 보장해줄 장치를 구축했음에도, 이제 와서 영국 대중은 기적적으로 탄생한 이 기계 안에다 공구를 던져 넣어버린 것이다.

 

 

19세기 국가들이 민족주의 게임을 벌이면서도 인류 문명을 파괴하지 않은 것은 사실이다. 하지만 이는 히로시마 시대에나 있던 일이었다. 그 후 핵무기의 등장으로 상황은 더 엄중해졌고 전쟁과 정치의 근본 성격이 바뀌었다. 인류가 우라늄과 플루토늄을 농축하는 법을 알게 된 이상, 어느 특정 국가의 이익보다 핵전쟁 예방을 우선시하는 것에 모두의 생존이 달렸다. "우리 나라 최우선!"이라고 외치는 열혈 민족주의자들은 과연 튼튼한 국제 협력 체제 없이 혼자서 자국은 물론 세계의 핵 파괴를 막을 수 있을지 자문해봐야 한다.

 

p180

 핵전쟁 외에도, 인류는 앞으로 수십 년 안에 1964년 정치 레이더망에는 거의 포착되지 않았던 새로운 실존적 위협에 직면할 것이다. 바로 생태학적 붕괴다. 인간은 여러 면에서 지구 생물권을 불안정하게 만들고 있다. 우리는 자연환경에서 점점 더 많은 자원을 가져오면서도, 자연에는 엄청난 양의 쓰레기와 독성 물질을 쏟아내 흙과 물과 대기의 성분까지 바꿔놓고 있다.

 

 이러한 가공할 실험은 이미 진행되기 시작했다. 핵전쟁이 미래의 잠재적인 위협인 것과 달리, 기후변화는 현재 닥친 실제 상황이다. 인간 활동, 특히 이산화탄소 같은 온실가스 배출 때문에 지구의 기후가 무서운 속도로 변하고 있다는 데는 과학적 합의가 이뤄진 상태다. 회복 불가능한 대재앙을 촉발하지 않는 선에서 이산화탄소를 정확히 어느 정도까지만 대기 중에 쏟아낼 수 있는지 아는 사람은 아무도 없다. 하지만 최선의 과학적 추산으로는 앞으로 20년 안에 온실가스 배출량을 극적으로 줄이지 않으면 지구의 평균 온도는 산업혁명 이전보다 섭씨 2도 이상 올라가는가 하면, 사막의 확장과 만년설의 소멸, 해수면의 상승, 허리케인과 태풍 같은 극단적인 날씨 증가에 직면할 것이다. 이런 변화는 역으로 농업 생산에 지장을 주고, 도시를 침수시키고, 세계의 많은 지역을 살기 어려운 곳으로 만들어 수억 명의 난민이 새로운 보금자리를 찾아 나설 것이다.

 더욱이 지금 우리는 수많은 임계점에 빠른 속도로 접근하고 있다. 이 점을 넘어가면 설사 온실가스 배출을 극적으로 감축한다 해도 지금의 추세를 되돌려 전 세계의 비극을 막기에는 역부족일 것이다. 예를 들어 지구온난화로 극지방의 얼음층이 녹으면서 지구에서 우주 공간으로 반사되는 태양빛의 양이 줄었다. 이 말은 지구가 흡수하는 열의 양이 많아지고, 따라서 기온은 훨씬 더 오르고 얼음이 녹는 속도는 훨씬 빨라진다는 뜻이다. 이런 악순환의 고리가 결정적인 문턱을 넘어가면 불가항력의 탄력이 붙으면서 극지의 모든 얼음이 녹게 된다. 그때 까서는 인간이 석탄과 석유, 가스의 연소를 전면 중단해도 소용없을 것이다. 따라서 지금 우리가 직면한 위험을 인정하는 것만으로는 불충분하다. 바로 지금 그것에 대한 뭔가를 실행하는 일이 다급하다.

 

 이토록 걱정스러운 그림에 민족주이가 들어설 자리가 있겠는가? 생태학적 위협에 민족주의가 나름의 답을 제시할 수 있을까? 아무리 강대국이라 해도 지구온난화를 혼자서 중단시킬 수 있을까? 개별 국가들은 확실히 다양한 녹색 정책들을 채택할 수 있다. 이 중 다수는 환경에는 물론 경제에도 좋다.

 

 민족주의적 고립은 십중팔구 핵전쟁보다 기후변화의 맥락에서 훨씬 더 위험하다. 전면적인 핵전쟁은 모든 국가를 무차별 파괴할 위험이 있기 때문에 그것을 막는 일에서는 모든 국가가 동등한 지분을 갖는다. 반면에 지구온난화가 초래할 충격은 국가마다 다를 가능성이 크다. 어떤 나라는, 특히 러시아는 실제로 혜택을 누릴 수도 있다. 러시아는 해안 지대가 상대적으로 적다. 따라서 해수면 상승에 대한 걱정도 중국이나 키리바시보다 덜하다.

 

p199

  하지만 종교 지도자가 과학자와의 경쟁에서 불리한 상황에 처하게 된 것도 바로 그 해석의 천재성 때문이다. 과학자도 지름길을 찾아내고 증거를 비트는 법을 안다. 하지만 궁극에 가서 과학이 보여주는 특징은, 언젠든지 잘못을 인정하고 다른 방법을 시도하는 것이다. 그래서 과학자는 점점 더 농작물을 잘 키우고 더 나은 의약품을 개발하는 법을 알게 되는 데 반해, 사제와 구루는 더 나은 변명거리를 내놓는 법만 익히게 된다. 수 세기에 걸쳐 참된 신앙인들조차 그런 차이에 주목해왔는데, 바로 그 점 때문에 종교는 기술적인 영역에서 갈수록 권위를 잃어왔다.

 

p205

 이들이 타고 다니는 차도 다를 것이다. 복음주의자는 기름을 많이 먹는 대형 SUV 차량을 몰고 다닐 테지만, 독실한 카톨릭 신도는 미끈한 전기차에 "지구를 태워라, 그리하면 지옥에서 타 죽으리!"라고 적힌 범퍼 스티커를 붙이고 다닐 것이다. 하지만 이들이 아무리 자기 입장을 변호하는 데 다양한 성경 구절을 인용하더라도, 견해 차이의 진정한 원천은 근대 과학 이론과 정치 운동에 있지, 성경에 있지 않다. 이런 관점에서 종교는 우리 시대의 거대한 정책 논쟁에 기여하는 바가 사실상 별로 없다. 카를 마르크스가 주장했듯 종교는 겉치장일 뿐이다.

 

p206

 인간의 힘을 대규모 협동에서 발휘되는데, 대규모 협동을 끌어내려면 그만큼 큰 정체성을 구축해야 한다. 거대한 정체성이 기반으로 삼는 모든 것은 허구의 이야기지, 과학적 사실이나 경제적 필요가 아니다. 21세기에 와서도 인간이 유대인과 무슬림, 러시아인과 폴란드인으로 나뉘어 있는 것은 여전히 종교적 신화에 의거하고 있다. 나치와 공산주의자들은 인간의 정체성을 과학적으로 인종과 계급으로 결정하려 했지만 그것은 위험한 사이비 과학으로 판명되었다. 그 후로 과학자들은 인간의 '자연적인' 정체성이 무엇인지 규정하는 데 도움을 주는 것을 극도로 꺼렸다.

 

p208

 근대 세계에서 전통적 종교가 힘과 중요성을 유지하고 있는 대표적 사례를 들자면 아마도 일본일 것이다. 1853년 미국 함대가 일본을 향해 근대 세계로 문을 열라고 강요했을 때, 일본은 극단적인 근대화를 급속히 추진했고 성공했다. 몇 십 년 걸리지 않아 과학과 자본주의, 최신 군사 기술로 무장한 강력한 관료 국가로 발돋움한 일본은 중국과 러시아를 꺽고 타이완과 한국을 점령한 데 이어, 진주만에서 미군 함대를 격침시키고 극도에서 유럽 제국까지 격파했다. 하지만 일본은 서구의 청사진을 맹목적으로 따르지 않았다. 그들은 자신들의 독특한 정체성을 보호하고, 과학이나 근대성, 그리고 어떤 모호한 지구 공동체가 아닌 일본에 충성을 바치는 나라가 되기 위해 결사적으로 싸웠다.

 그 목적을 위해 일본은 고유 종교인 신도神道를 일본 정체성의 초석으로 고수했다. 사실 신도를 재발명했다. 전통 신도는 다양한 정령과 신령, 귀신에 대한 믿음이 뒤섞인 애니미즘 신앙이었다. 모든 마을과 신사가 자기만의 정령과 지역 관습을 갖고 있었다. 19세기 후반에서 20세기 초에 일본은 국가 공인 신도를 만들면서 수많은 지역 전통들을 억압했다. 이렇게 만들어진 '국가 신도'에는 민족성과 인종이라는 대단히 근대적인 사상이 주입됐다. 일본 엘리트들이 유럽 제국주의에서 따온 요소였다. 불교와 유교, 사무라이 봉건 윤리 등에서도 국가 충성에 도움이 되는 것이라면 모두 가져다 뒤섞었다. 그 위에다 일본의 황제 숭배를 최고 원리로 신성시했다. 이들은 일본 황제를 태양의 여신 아마테라스의 직계 후손이자 살아 있는 신으로 간주했다.

 얼핏 이 이상한 신구의 조합은 급속한 근대화 과정에 착수한 국가로서는 부적절한 선택처럼 보인다. 살아 있는 신? 애니미즘 정령? 봉건 윤리? 근대 산업 강국이 아니라 신석기 족장 이야기처럼 들린다.

 하지만 그것은 마술처럼 통했다. 일본은 숨가쁘게 근대화했고, 동시에 국가에 대한 광신적인 충성을 이끌어냈다. 국가 신도가 성공했음을 보여주는 대표적인 상징은 정밀유도미사일을 개발해 처음 사용한 강대국이 일본이었다는 사실이다. 미국이 스마트 폭탄을 실전 배치하기 수십 년도 전에, 나치 독일이 V-2 로켓 발진을 시작하려던 무렵에 이미 일본은 연합국 군함 10여 대를 정밀유도미사일로 격침했다. 이 미사일은 바로 우리가 아는 가미카제다. 오늘날 정밀유도 무기에서 방향을 인도하는 일은 컴퓨터가 하지만, 카미카제는 일반 항공기에 폭탄을 싣고 인간 조종사가 편도 비행의 임무를 수행하는 식이었다. 이런 결의는 죽음을 각오한 희생정신의 산물이었는데, 바로 국가 신도에서 비롯한 것이었다. 이처럼 가미카제는 첨단 기술과 첨단 종교적 교리 주입의 결합에 의존했다.

 부지불식간에 수많은 정부들이 오늘날 일본의 사례를 따른다. 이들은 근대화의 보편적 도구와 구조를 채택하는 동시에 독특한 국가 정체성을 보존하기 위해 전통 종교에 의존한다. 일본에서 국가 신도가 했던 역할을 러시아에서는 정교회 기독교가, 폴란드에서는 가톨릭이, 이란에서는 시아파 이슬람이, 사우디아라비아에서는 와하비즘이, 이스라엘에서는 유대교가 한다. 종교가 아무리 고리타분해 보여도 약간의 상상력과 재해석을 거치면 최신의 기술 도구와 가장 정교한 근대 제도와도 거의 언제든지 결합할 수 있다.

 어떤 경우에는 국가가 독특한 정체성을 위해 완전히 새로운 종교를 만들 수도 있다. 가장 극단적인 사례가 일본의 식민지였던 북한이다. 북한 정권은 광란적인 국가 종교인 주체사상을 신민들에게 주입한다. 주체사상은 마르크스레닌주의와 고대 한국의 전통, 한국인의 고유한 순수성에 대한 인종주의적 믿음, 김일성 일가의 신격화가 결합된 것이다. 김씨 가문이 태양신의 후손이라고 주장하는 사람은 아무도 없다. 하지만 김씨 일가는 역사 속의 그 어떤 신보다 더 열렬히 숭배된다. 마치 일본 제국이 결국에는 패한 것을 염두에 둔 듯, 북한의 주체사상은 핵 개발을 최고의 희생도 감수할 만한 신성한 의무로 언명하면서, 오랫동안 줄기차게 자신들의 조합물에 핵무기를 추가하려고 애써왔다.

 

p294

 모든 형태의 겸손 중에서도 가장 중요한 것은 아마도 신 앞에서의 겸손일 것이다. 사람들은 신에 관해 이야기할 때는 언제나 자신을 극도록 낮춘다. 하지만 그런 다음에는 신의 이름을 활용해 신도들 위에 군림한다.

 

p317

 물론 모든 도그마가 똑같이 해로운 것은 아니다. 어던 종교적 믿음은 인류를 이롭게 했듯이 마찬가지로 세속주의 도그마들 중에서도 어떤 것들은 이로웠다. 특히 인권의 신조가 그렇다. 우리가 중시하는 권리가 존재하는 유일한 장소는, 이간이 발명하고 서로 주고 받는 이야기 속이다. 이런 이야기들은 종교적 광신과 전제 정부에 맞서 투쟁을 벌여오는 동안 자명한 교리로 신성시하게 된 것들이다. 인간은 태어날 때부터 생명이나 자유의 권리를 갖는다는 것은 진실이 아니어도, 이 이야기에 대한 믿음 덕분에 권위주의 정권의 권력을 억제했고, 소수자들의 피해를 막았으며, 수십억 인구를 빈곤과 폭력의 최악의 결과로부터 보호했다. 역사상 이보다 더 인류의 행복과 복지에 기여한 신조도 없을 것이다.

 하지만 그렇다고 해도 이 역시 도그마일 뿐이다. 그렇기 때문에 유엔 인권 선언은 19조에서 "누구의 의견과 표현의 자유를 누릴 권리가 있다"고 명시했다. 이것을 우리가 정치적 요구 사항("누구나 의견의 자유권을 가져야 한다")으로 이해하는 한에서 이는 전적으로 타당한 말이다. 하지만 모든 사피엔스에게는 태어날 때부터 '의견의 자유권이 주어졌으며, 따라서 어떠한 검열도 자연법에 반하는 것이라고 믿는다면, 우리는 인류에 관한 진실을 놓치게 된다. 자신을 '양도할 수 없는 자연권을 지닌 개인'으로 규정하는 한, 자신이 진정으로 어떤 존재인지 알 수 없을뿐더러, 자신이 속한 사회와 자신의 정신('자연권'에 대한 믿음까지 포함해서)을 규정하는 역사적 힘들을 이해하지 못할 것이다.

 그런 무지는 20세이게는 별로 문제되지 않았을 수 있다. 사람들은 히틀러, 스탈린과 싸우느라 바빴다. 하지만 21세기에는 치명적인 문제가 될 수 있다. 생명기술과 인공지능이 이제 인간성 자체의 의미를 바꾸려 하고 있기 때문이다. 만약 생명권을 신봉한다면, 그 말은 죽음을 극복하기 위해 생명기술을 이용해햐 한다는 뜻까지 함축할까? 만약 자유권을 신봉한다면, 우리의 숨은 욕망을 찾아 읽어내고 그것을 충족시키기 위해 알고리즘에 힘을 부여해야 할까? 만약 모든 인간이 동등한 인간적 권리를 누린다면 초인간은 초인권을 누려도 될까? '인권'이라는 도그마의 믿음을 고수하는 한, 세속주의를 따르는 사람들로서는 그런 질문에 답하기 어려울 것이다.

 인권의 도그마는 이전 세기 동안 종교재판관과 '앙시앵 레짐', 나치, KKK에 맞서 싸우기 위한 무기로 만들어진 것이다. 앞으로 초인간, 사이보그, 초지능 컴퓨터를 다루기에는 맞지 않다. 인권 운동은 종교적 편견과 인간 폭군을 상대로는 아주 인상적인 주장과 방어의 병기들을 개발해왔지만, 이 병기들이 앞으로 닥칠 소비자주의의 범람과 기술 유토피아로부터 우리를 지켜줄 것 같지는 않다.

 

p324

 지난 몇 세기 동안 자유주의 사상은 합리적 개인에 대한 엄청난 믿음을 키워왔다. 개개인을 독립적인 이성적 주체로 그리고는 이런 신화적인 창조물을 근대 사회의 기초로 삼아왔다. 민주주의는 유권자가 가장 잘 안다는 생각 위에 서 있고, 자유시장 자본주의는 고객은 언제나 옳다고 믿으며, 자유주의 교육은 학생들이 스스로 사고하도록 가르친다.

 하지만 합리적 개인을 과신하는 것은 실수다. 탈식민주의 사상가들과 페미니즘 사상가들은 이 '합리적 개인'이야말로 상류층 백인 남성의 자율성과 권력을 찬양하는 서구의 국수주의적 환상일 뿐이라고 지적해왔다. 앞에서 지적했듯이, 행동경제학자들과 진화심리학자들은 인간의 결정은 대부분 이성적 분석보다는 감정적 반응과 어리짐작식의 손쉬운 방법에 기초하고 있다는 사실을 증명해왔다. 우리의 감정과 어림짐작은 석기시대를 살아가는 데는 적합했을지 모른다. 하지만 실리콘 시대에는 한심할 정도로 부적합하다.

 합리성뿐 아니라 개인성 또한 신화이다. 인간은 스스로 생각하는 경우가 드물다. 그보다는 집단 속에서 사고한다. 아이 한 명을 키우는 데 마을이 협력해야 하는 것처럼, 도구를 발명하고 갈등을 풀고 질병을 치료하는 데도 부족이 힘을 모아야 한다. 교회를 짓든 원자폭탄을 만들든 비행기를 띄우든, 어느 한 개인이 그 과정의 모든 것을 알지는 못한다. 호모 사피엔스가 다른 모든 동물들보다 경쟁에서 우위를 보이고 마침내 지구의 주인이 될 수 있었던 것은, 인간 개인의 합리성이 아니라 대규모로 함께 사고할 수 있는 전례 없는 능력 덕분이었다.

 인간 개인이 세상에 관해 아는 것은 창피할 정도로 적다. 더욱이 역사가 진행되가면서 개인이 아는 것은 점점 더 줄어들게 되었다. 석기시대의 수렵 · 채집인은 자기 옷을 만들고 불을 붙이고 토끼를 사냥하고 사자를 피하는 법을 알았다. 오늘날 우리는 그보다 훨씬 더 많이 안다고 생각한다. 하지만 개개인의 차원에서 보면 실제로 우리가 아는 것은 훨씬 적다. 우리는 우리에게 필요한 것 거의 전부를 다른 사람의 전문성에 의존해서 얻는다. 우리를 겸손하게 만드는 한 실험에서 연구진은 먼저 사람들에게 지퍼의 작동 원리를 얼마나 잘 이해하는지 물어봤다. 응답자 대다수는 아주 잘 안다고 자신 있게 답했다. 그도 그럴 것이 지퍼야 우리가 늘 사용하는 것 아닌가. 그런 다음 실험자는 응답자들에게 지퍼가 작동하는 과정을 가능한 한 자세히 묘사해보라고 주문했다. 이번엔 대부분의 응답자들이 답하지 못했다. 이를 두고 스티븐 슬로먼과 필립 페른백은 '지식의 착각'이라고 불렀다. 우리는 우리가 꽤 많이 안다고 생각한다. 사실 개인적으로는 아는 게 미미한데도 다른 사람의 머릿속에 든 지식을 마치 자신의 것이라고 여기기 때문이다.

 이것을 두고 반드시 나쁘다고만은 할 수 없다. 이런 집단사고에 의존한 덕분에 우리는 세계의 주인이 될 수 있었고, 지식의 착각 덕분에 스스로 모든 것을 이해하려는 불가능한 노력에 사로잡히지 않은 채 삶을 헤쳐 나갈 수 있었다. 진화의 관점에서 보면, 남들의 지식을 신뢰한 것이야말로 호모 사피엔스에게 대단히 유리하게 작용했던 것이다.

 하지만 지난 시대에는 통했지만 근대에 와서는 곤란을 초래하는 다른 인간의 특성과 마찬가지로 지식의 착각 역시 부정적인 면이 있다. 세계는 나날이 복잡해지고 있는 반면, 사람들은 세상이 돌아가는 상황에 자신이 얼마나 무지한지 깨닫지 못하고 있다. 그러다보니 기상학과 생물학에 관해서는 아는 것이 거의 없는 사람들이 기후변화와 유전자변형농작물에 관한 정책을 제안하고, 이라크나 우크라이나가 지도 어디에 있는 나라인지도 모르는 사람들이 그 지역의 정책을 두고 극도로 강한 견해를 고집한다. 사람들이 자신의 무지를 헤아리는 경우가 드문 이유는, 자신과 같은 생각을 가진 친구들로 가득한 반향실反響室과 자기 의견을 강화해주는 뉴스피드 안에만 갇혀 있기 때문이다. 이들의 믿음은 계속해서 공고해질 뿐 도전받는 일이 거의 없다.

 

 

 대부분의 우리 견해는 개인의 합리성보다 공동체의 집단사고에 의해 형성된다. 우리가 이런 견해를 고수하는 것도 집단을 향한 충성심 때문이다. 사람들에게 사실을 쏟아 놓고 그들 개인의 무지를 들춰낼 경우에는 오히려 역풍을 맞기 쉽다. 대다수의 사람들은 너무 많은 사실을 싫어한다. 게다가 자신이 멍청하게 느껴지는 것은 더더욱 싫어한다. 티파티Tea Party 운동 지지자들에게 지구온난화에 관한 통계 자료를 보여주고 진실을 믿게 할 수 있다고 생각한다면 오산이다.

 집단사고의 위력은 너무나 만연해서 얼핏 자의적인 것처럼 보이는 믿음도 좀처럼 깨지지 않는다. 가령, 미국에서는 한경오염과 멸종위기종 같은 문제에 관한 한 우파 보수주의자들이 좌파 진보주의자들에 비해 관심이 훨씬 낮다. 보수 지역인 루이지애나 주의 환경 규제가 진보 성향의 매사추세츠 주보다 훨씬 약한 것도 그 때문이다. 이런 상황이 우리에게는 너무나 익숙해서 당연하게 여겨진다. 하지만 이는 실제로 대단히 놀라운 일이다. 말 그대로 보수주의자라면 오랜 생태계의 질서를 보존하고 선조들의 땅과 숲과 강을 보호하는 데 훨씬 많은 관심을 쏟을 거라고 짐작할 것이다. 반면에 진보주의자는 지방을 급진적으로 바꾸는 일에, 특히 그 목표가 사회진보를 앞당기고 인간의 생활수준을 끌어올리는 것이라면 그런 문제에 훨씬 개방적일 거라고 예상할지 모른다. 하지만 실제로는 다양한 역사적 변수에 의해 정당의 노선이 한 번 결정되고 난 결과, 보수주의자들은 으레 하천 오염이나 조류 멸종 같은 문제는 거들떠 보지도 않게 된 반면, 좌파 진보주의자들은 오랜 생태계 질서를 교란하는 것이라면 무엇이든 두려워하는 경향을 보인다.

 심지어 과학자들도 집단사고의 영향력에서 자유롭지 않다. 그래서 사실이 여론을 바꿀 수 있다고 믿는 과학자들 자신도 과학자 집단사고의 희생자가 되기도 한다. 과학 공동체는 사실의 효력을 믿는 집단이다 보니, 이런 공동체에 충직한 학자들은 올바른 사실만 열거해도 공적인 토론에서 이길 수 있다고 줄기차게 믿지만, 경험상 정반대의 경우가 다반사다.

 마찬가지로 개인의 합리성에 대한 자유주의자의 믿음 자체가 자유주의자들이 집단사고의 산물일 수 있다. 몬티 파이튼이 <브라이언의 삶>에 나오는 절정의 장면 중 하나에서 홀딱 반한 신도 무리가 브라이언을 메시아로 착각한다. 브라이언은 제자들에게 "나를 따를 필요가 없다. 어느 누구든 따를 필요가 없다! 너희는 스스로 생각해야 한다! 너희는 모두가 개인이다! 너희는 다 다르단 말이다!"라고 하자 열광하는 무리는 한목소리로 제창한다. "그렇다! 우리는 모두가 개인이다! 그렇다, 우리는 다 다르다!"

 몬티 파이튼의 이 장면은 1960대를 휩쓴 반反문화의 교조주의를 풍자한 것이었지만, 여기서 전하려는 요지는 합리적 개인주의에 대한 믿음 전반에도 적용될 수 있다. 근대 민주 사회를 가득 메운 군중 역시 한목소리로 이렇게 외친다. "그렇다, 유권자가 제일 잘 안다! 그렇다, 고객은 언제나 옳다!"

 

p331

 거대 권력은 블랙홀처럼 주변 공간 자체를 왜곡한다. 그 곁에 가까이 갈수록 모든 것이 더 심하게 뒤틀린다.

 

 

 몇 년 전 나는 베냐민 네타냐후 이스라엘 총리와의 만찬에 초대받은 적이 있다. 내 친구들은 가지 말라고 했지만 나는 유혹을 뿌리칠 수 없었다. 그런 비공개 행사장 안에서 중요한 인사들 사이에서만 새 나오는 어떤 큰 비밀들을 들을 수 있지는 않을까 생각했다. 하지만 실망이 이만저만이 아니었다. 그날 참석자는 한 서른 명쯤 됐는데, 모두가 권력자의 관심을 끌고, 재치 있는 말로 그를 감명시키고, 비위를 맞추고, 그로부터 뭔가를 얻어내려 애를 썼다. 만약 그 중 어느 누구라도 어떤 큰 비밀을 알고 있었다면, 그는 비밀이 누설되지 않도록 하는 데에는 더없는 수완을 발휘한 셈이었다. 이것은 네타냐후의 잘못이라고 보기는 어려웠다. 사실 어느 누구의 잘못도 아니었다. 권력이 갖고 있는 중력 탓이었다.

 진심으로 진실을 바란다면 권력의 블랙홀을 피하고, 중심에서 떨어진 주변부에서 이리저리 방황하며 오랜 시간을 허비할 수 있어야 한다. 혁명적인 지식은 권력의 중심에서 출현하는 경우가 드물다. 왜냐하면 중심은 언제나 존재하는 지식을 토대로 구축되기 때문이다. 구질서의 수호자가 권력의 중심에 다가올 수 있는 자를 결정하는데, 이때 전통에서 벗어난 파괴적 사상을 가진 자는 걸러내는 경향이 있다. 물론 이 과정에서 엄청난 양의 쓸데없는 지식도 걸러낸다. 다보스 세계경제포럼에 초대받았다는 사실이 그 사람의 지혜를 담보해주지는 않는다. 주변부에서 많은 시간을 보낼 필요가 있다는 것도 그런 이유에서다. 다보스 포럼에서 오가는 논의 중에는 어떤 눈부신 혁명적 통찰이 담겨 있을 수도 있다. 하지만 대부분은 정확한 정보에 기초하지 않는 추측과 한물간 모델, 신화적인 도그마, 터무니없는 음모 이론 등으로 가득하다.

 따라서 지도자들은 진퇴양난에 처해 있다. 만약 권력의 중심에만 머물러 있으면 세계를 보는 눈이 극도로 왜곡될 것이다. 그렇다고 주변부로 모험을 감행하면 귀중한 시간을 너무 많이 허비할 것이다. 게다가 문제는 갈수록 악화될 것이다. 앞으로 수십 년 안에 세계가 지금보다 훨씬 더 복잡해짐에 따라, 결과적으로 인간 개개인은 - 장기판의 왕이 됐든 졸이 됐든 - 세계를 구성하는 기술 도구와 경제 흐름, 정치 동학에 훨씬 더 무지해질 것이다. 2,000년도 더 전에 소크라테스가 관찰했듯이, 그런 조건하에서 우리가 할 수 있는 최선은 우리 개개인의 무지를 인정하는 것이다.

 하지만 그럴 경우 도덕과 정의의 문제는 어떻게 해야 할까? 세계를 이해할 수 없다면 어떻게 우리가 옳고 그름과, 정의와 불의의 차이를 분별하길 기대할 수 있을까?

 

p337

 세상이 짜인 방식이라는 게, 알려고 노력하지 않는 사람은 행복한 무지 속에 남아 있을 수 있고, 정작 알려고 애쓰는 사람은 진실을 알기가 대단히 어렵다는 것을 알게 돼 있다. 

 

p338

 근대 역사에서 최대 범죄는 증오나 탐욕이 아니라 무지와 무관심에서 더 많이 나왔다.

 

p340

 지금 세계에서 불의의 대부분은 개인의 선입견보다는 대규모의 구조적 편향에서 나온다. 하지만 우리 수렵 · 채집인의 뇌는 그런 구조적 편향을 감지하도록 진화하지는 않았다. 그런 편향의 적어도 일부에는 우리 모두가 함께 연루돼 있다. 하지만 우리는 그것을 발견할 시간과 에너지가 없다. 이 책을 쓰는 동안 나 자신이 그 교훈을 절실하게 깨달았다. 글로벌 이슈를 논할 때 나는 늘 다양한 소외 집단들보다 글로벌 엘리트들의 관점을 우선시하는 위험에 빠진다. 글로벌 엘리트들은 대화를 주도한다. 그러다 보니 그들의 관점은 놓칠 수가 없다. 반면에 소외된 집단들은 대개 말이 없다. 그러다 보면 그들의 존재마저 잊기 쉽다. 이 모든 게 고의적인 악의가 아니라 순전한 무지에서 생기는 일이다.

 

p348

 어느 편을 지지하든, 우리는 실제로 무서운 탈진실의 시대에 살고 있는 듯 보인다. 비단 특정한 군사적 사건뿐 아니라 전 역사와 민족마저 가짜로 조작될 수 있는 시대다. 하지만 만약 지금이 탈진실의 시대라면 진실의 태평성대는 정확히 언제였나? 1980년대였나 아니면 1950년대? 1930년대? 탈진실의 시대로 넘어가게 만든 것은 무엇이었나? 인터넷인가? 소셜미디어인가? 푸틴과 트럼프의 부상인가?

 역사를 대충 훑어보기만 해도 정치 선전과 거짓 정보는 새로운게 아님을 알 수 있다. 심지어 민족을 통째로 부인하고 가짜 국가를 만드는 습관조차 유서가 깊다. 1931년 일본 육군은 중국 침략을 정당화하려고 자작 모의공격을 벌였고, 그런 다음 괴뢰국가인 만주국을 세워 정복을 정당화했다. 그런 중국 자신은 티베트가 독립국가로 존재했다는 사실을 오랫동안 부인해왔다. 영국은 호주 점령을 '무주지terra mullius 선점'의 법리로 정당화해 사실상 5만 년 원주민의 역사를 지워버렸다.

 20세기 초 시온주의자들은 가장 좋아하는 슬로건으로 '땅 없는 사람(유대인)의 사람(팔레스타인인) 없는 땅으로의' 귀환을 내세웠다. 그 지역에 있던 아랍 사람들의 존재는 자신들의 편의에 따라 무시됐다. 1969년 이스라엘의 골다 메이어 총리가 팔레스타인 사람은 존재하지도 않고 존재한 적도 없다고 한 말은 유명하다. 그런 견해는 지금도 이스라엘 내부에서 아주 흔하다. 존재하지 않는다는 상대와 수십 년째 무력 분쟁을 해왔으면서도 말이다. 가령, 2016년 2월 이스라엘의 국회의원 아나트 베르코는 의회에서 연설하던 중에 팔레스타인 사람들의 실체와 역사를 의문에 붙였다. 그녀가 제시한 증거가 무엇이었는지 아는가? 팔레스타인이라는 단어의 머리글자일 'p'조차 아랍어 철자에는 없다는 것이었다. 그러니 어떻게 팔레스타인 사람이 존재할 수 있겠느냐는 주장이었다. (아랍어에서는 f가 p에 해당한다. 따라서 팔레스타인Palestine을 아랍어로 표기하면 Falastin이 된다.)

 

p350

 사실 인간은 늘 탈진실의 시대를 살아왔다. 호모 사피엔스야말로 탈진실의 종이다. 호모 사피엔스 특유의 힘은 허구를 만들고 믿는 데서 나온다. 석기시대 이래 줄곧 자기 강화형 신화는 인간 집단을 하나로 묶는 데 기여해왔다. 실로 호모 사피엔스가 이 행성을 정복한 것도 무엇보다 허구를 만들고 퍼뜨리는 독특한 능력 덕분이었다. 우리는 수많은 이방인들과도 협력할 수 있는 유일한 포유동물이다. 그것이 가능했던 것도 허구의 이야기를 발명하고 사방으로 전파해서 수백만 명의 다른 사람들까지 그 이야기를 믿도록 납득시킬 수 있었기 때문이다. 모두가 같은 허구를 믿는 한, 우리는 다 같이 동일한 법을 지키게 되고, 그럼으로써 효과적으로 협력도 할 수 있다.

 그러니 무서운 탈진실의 새 시대가 도래한 것을 두고 페이스북이나 트럼프, 푸틴을 탓한다면, 수 세기 전 수백만 기독교인이 자기 강화형 신화의 버블 속에 자신을 가둬둔 사실을 떠올리기 바란다. 그때도 성경의 진위 여부는 조금도 의심하려 들지 않았다. 수백만 무슬림 역시 쿠란을 추호의 의심도 없이 신앙의 대상으로 받아들였다. 옛 1,000년 동안 사람들의 당시 소셜 네트워크에서 '뉴스'와 '사실'로 통했던 것들의 상당수는 기적과 천사, 귀신과 마녀에 관한 이야기들이었다. 그 시대의 대담한 리포터들은 지하세계의 가장 깊은 수렁에서 일어난 일도 생중계하듯 전했다. 하지만 이브가 사탄의 유혹에 빠졌다는 과학적인 증거는 전혀 없다. 모든 불신자는 죽은 후 영혼이 지옥에서 불탄다거나, 브라만 계급과 불가촉천민 계급의 결혼은 우주의 창조주가 싫어한다는 말도 마찬가지다. 그럼에도 수십억 사람들은 수천 년 동안 이런 이야기들을 믿어왔다. 어떤 가짜 뉴스들은 영원히 남는다.

 

p359

 사실, 사람들을 단결시키는 데 거짓 이야기는 진실보다 본질적인 이점이 있다. 만약 자신이 속한 집단의 충성심이 얼마나 강한지 알아보고 싶다면, 시험 삼아 사람들에게 분명히 참인 사실보다 어떤 불합리한 것을 믿어보라고 요구하는 편이 훨씬 낫다. 조직의 보스가 "태양은 동쪽에서 떠서 서쪽으로 진다"라고 말할 때는 굳이 그에 대한 충성심이 없더라도 박수를 칠 수 있다. 하지만 보스가 "태양은 서쪽에서 떠서 동쪽으로 진다"라고 할 때는 진정한 충성파들만 박수를 보낼 것이다. 마찬가지로 당신 주변 사람들 모두가 그런 터무니없는 이야기를 듣고 믿어준다면, 당신이 위기에 처한 순간에도 그들은 당신 편을 들어주리라 신뢰할 수 있다. 공인된 사실만 믿겠다는 사람이라면 그의 충성심을 어떻게 알 수 있겠는가?

 

p361

 대부분의 경우 사람들이 성경이나 베다, 모르몬교 경전을 신성시하기 시작하는 것은 그것을 신성시하는 다른 사람들을 오랫동안 반복해서 접하고 난 다음의 일이다. 우리가 신성한 책을 존중하게 되는 과정이나 지폐를 존중하게 되는 과정이나 알고 보면 정확히 동일하다.

 

p363

 진실과 권력의 동반 여행은 어느 정도까지만 가능하다. 머지않아 각자의 길을 가게 돼 있다. 권력을 바란다면 어느 지점부터는 허구를 퍼뜨리기 시작해야 할 것이다. 반면, 세상에 관한 모든 허구는 배제한 채 진실만을 알고 싶다면, 어느 지점부터는 권력을 단념해야 할 것이다. 그런 경우에는 자신의 동조자를 얻고 추종자를 격려하기 어렵게 만드는 사실들마저 인정해야만 할 것이기 때문이다. 훨씬 더 결정적인 것은, 자신과 지금 자신이 가지고 있는 권력의 원천, 그리고 자신이 더 많은 권력을 바라는 이유에 관한 어떤 불편한 사실들마저 인정해야만 할 것이라는 점이다. 진실과 권력 사이에 이런 간극이 존재한다는 사실은 하등 신비로울 게 없다. 직접 목격하고 싶다면, 전형적인 미국 와스프 WASP를 찾아가 인종 문제를 제기하거나, 주류 이스라엘인을 찾아가 팔레스타인 점령 문제를 화제에 올리거나, 영국의 전형적인 남성bloke 에게 가부장적 문제로 말을 걸어보라.

 호모 사피엔스 종으로서 인간은 진실보다는 힘을 선호한다. 세계를 이해하려고 애쓰기보다 통제하려는 데 훨씬 많은 시간과 노력을 기울인다. 세계를 이해하려고 애쓰는 것도, 그러면 통제하기가 쉬워질 거라는 기대 때문이다. 따라서 진실이 지배하고 신화는 무시되는 사회를 꿈꾼다면 '호모 사피엔스'에게서 기대할 것은 거의 없다. 차라리 침팬지에게 운을 시험해보는 게 낫다.

 

p365

 우리의 편견을 드러내고 정보원을 검증하는 데 시간과 노력을 들이는 것은 우리 모두의 책무다. 앞 장에서 이야기했듯이 우리는 모든 것을 직접 조사할 수는 없다. 하지만 바로 그런 사실 때문에 우리는 적어도 우리가 선호하는 정보원을 세밀하게 따져볼 필요가 있다. 그것이 신문이든, 웹사이트든, 티브이 방송이든, 어떤 개인이든 마찬가지다. 어떻게 하면 세뇌를 피하고, 현실과 허구를 구분할지에 대해서는 20장에서 훨씬 깊이 있게 살펴볼 것이다. 다만 여기서는 개략적인 요령 두 가지만 제시하겠다.

 첫째, 믿을 만한 정보를 얻고 싶다면 그에 합당한 만큼의 돈을 지불해야 한다. 만약 뉴스를 공짜로 얻는다면 당신이 상품이기 쉽다. 어떤 수상한 억만장자가 당신에게 이런 거래를 제시했다고 가정해보자. "당신에게 매월 30달러를 주겠다. 그 대신 당신은 내가 바라는 정치적, 상업적 편견을 당신 머릿속에 심을 수 있도록, 매일 한 시간 당신을 세뇌할 수 있게 해달라." 이런 거래를 받아들이겠는가? 제 정신이라면 그럴 가능성은 희박하다. 그러자 수상한 억만장자는 조금 다른 거래를 제안한다. "매일 한 시간 내가 당신을 세뇌할 수 있도록 허락해달라. 그 대신 이 서비스의 비용을 당신에게 물리지 않겠다." 그러자 갑자기 수억 명의 사람들이 솔깃해 한다. 부디 그런 사례를 따라가지 않기를 바란다.

 두 번째 요령은, 만약 어떤 이슈가 특별히 중요해 보인다면 그것에 관련된 과학 문헌을 찾아 읽으려고 노력하는 것이다. 내가 말하는 과학 문헌이란 동료 평가를 거치는 논문, 저명한 학술 출판사가 낸 책, 명망 있는 기관의 교수가 쓴 저술이다. 과학 역시 나름의 한계가 분명히 있다. 과거에도 많은 오류가 있었다. 그럼에도 과학 공동체는 수 세기 동안 우리가 가장 신뢰할 수 있는 지식의 원천이었다. 만약 당신이 과학 공동체가 어떤 문제에 관해 틀렸다고 생각한다면, 그 또한 충분히 있을 수 있는 일이다. 다만 적어도 당신이 거부하는 과학 이론을 알아야 하고, 당신의 주장을 뒷받침할 경험적 증거를 제공할 수 있어야 한다.

 과학자들은 지금보다 훨씬 자극적으로 공적 토론에 개입할 필요가 있다. 특히 토론 내용이 자신의 전문 영역으로 넘어왔을 때에는 주저하지 말고 자기 목소리를 내야 한다. 분야가 의학이 됐든, 역사 됐든 마찬가지다. 침묵은 중립이 아니다. 그것은 현상 유지를 편드는 것이다. 물론 학문적 연구를 계속 해나가고 그 결과물을 소수의 전문가들만 읽는 대중 과학서를 통해 일반 대중에게 최신 과학 이론을 전파하고 그들과 소통하는 것도 중요하다. 예술과 허구를 능숙하게 활용하는 일도 마다할 이유가 없다.

 과학자가 공상과학 소설SF도 쓰기 시작해야 한다는 말인가? 그것도 사실 나쁘지 않은 생각이다. 예술은 사람들의 세계관 형성에 핵심적인 역할을 한다. 특히 21세기에 와서는 공상과학 소설이야말로 가장 중요한 장르라는 주장도 있다. AI라든가 생명공학, 기후변화 같은 문제에 관한 대다수의 사람들의 이해를 좌우하기 때문이다.

 우리에게 좋은 과학이 필요하다는 것은 분명하다. 하지만 정치적 관점에서 보자면, 좋은 SF 영화 한 편이 <사이언스>나 <네이처>에 실린 논문 한 편보다 훨씨 가치가 크다

  p369

 인간이 세계를 지배하는 것은 다른 어떤 동물보다 협력을 잘할 수 있기 때문이고, 협력을 그토록 잘할 수 있는 비결은 허구를 믿기 때문이다. 그런 점에서 시인과 화가, 극작가는 최소한 군인과 기술자 만큼이나 중요하다. 

 

p370

 사실 우리는 알고리즘으로 증강된 소수의 슈퍼휴먼 엘리트와 무력해진 다수 하위 계층의 호모 사피엔스 간의 갈등을 두려워해야 한다.

 

p373

 오늘날 과학 기술 혁명의 결과가 함축하고 있는 의미는, 진정한 개인과 진짜 현실이 알고리즘과 티브이 카메라에 의해 조종될 수 있다는 것이 아니라 진정성 자체가 신화라는 것이다. 사람들은 상자 안에 갇히는 것을 두려워하면서도 이미 자신들이 상자 - 자신의 뇌 - 안에 갇혀 있으며, 그 상자는 다시 더 큰 상자 - 무수히 많은 기능을 갖춘 인간 사회 - 안에 갇혀 있다는 사실은 깨닫지 못한다. 매트릭슬르 탈출했을 때 발견하게 되는 것은 더 큰 매트릭스일 뿐이다. 1917년 러시아 농부들과 노동자들은 차르에 맞서 반란을 일으켰지만 결국에는 스탈린 체제로 귀결됐다. 세계가 당신을 조종하는 여러 가지 방식을 탐구하기 시작하더라도, 결국 자신의 핵심적 정체성은 뇌신경망이 만들어내는 복잡한 환상이라는 사실을 알게 될 뿐이다.

 사람들은 상자 안에 갇히는 것을 두려워하면서 정작 세상의 모든 경이로움은 놓치고 만다. 네오가 매트릭스 안에 갇혀 있는 한, 그리고 트루먼이 티브이 스튜디오 안에 묶여 있는 한, 그들은 피지 섬도, 파리도, 마추픽추도 갈 수 없을 것이다. 하지만 사실, 우리가 인생에서 경험하는 모든 것은 우리 자신의 몸과 마음에 있다. 매트릭스 밖으로 탈출하든, 피지 섬으로 여행을 가든 그 점에서는 아무런 차이가 없을 것이다. 당신 마음속 어딘가에 '피지 섬에서만 개봉할 것!'이라는 커다란 붉은색 경고문이 적힌 강철 심장이 있어, 남태평양으로 여행을 가서 그 심장을 열었을 때에야 비로소 피지 섬에서만 누릴 수 있는 온갖 특별한 감정과 느낌이 발산되는 것이 아니다. 피지 섬에 가보지 못하면 이런 특별한 느낌을 영원히 누리지 못하게 되는 것도 아니다. 결코 그렇지 않다. 피지 섬에서 느낄 수 있는 것은 무엇이든 세계 어디에서나 느낄 수 있다. 심지어 매트릭스 안에서도 가능하다.

 어쩌면 우리 모두가 '매트릭스' 스타일의 거대한 컴퓨터 시뮬레이션 속에서 살고 있는지도 모른다. 그것은 우리가 믿는 모든 민족적, 종교적, 이데올로기적 이야기와 상출될 것이다. 하지만 그렇다 하더라도 우리의 정신적 체험은 실재하는 것이다. 만약 인류의 역사가 지르콘 행성에서 온 쥐 과학자들에 의해 슈퍼컴퓨터로 운영되는 정교한 시뮬레이션으로 밝혀지면 카를 마르크스와 IS로서는 꽤 당혹스러울 것이다. 하지만 이 쥐 과학자들도 아르메니아 집단 학살과 아우슈비츠 문제에는 책임을 져야 할 것이다. 어떻게 그런 일이 지르콘 대학의 윤리위원회를 통과할 수 있었단 말인가? 비록 가스실이 실리콘칩 찬의 전기 신호에 불과했다해도, 그때 희생자들이 체험한 고통과 공포, 좌절감의 극심함은 조금도 덜하지 않을 것이다. 

 고통은 고통, 공포는 공포, 사랑은 사랑이다. 매트릭스 안에서도 마찬가지다. 우리가 느끼는 두려움이 바깥 세계의 원자가 모여서 일어나는 것이든, 컴퓨터가 조종하는 전기 신호에서 생겨나는 것이든 상관없다. 어떻든 두려움은 실재한다. 따라서 우리 정신의 실체를 탐구하고 싶다면 매트릭스 안에서든 바깥에서든 어디서나 가능하다.

 지금까지 나온 최선의 과학적 이론과 최신의 기술 장비에 따르면 정신은 어떤 경우에도 조작에서 자유롭지 않다. 조작용 껍질 안에서 해방되기를 기다리는 진정한 자아는 없다. 그런데도 대다수 SF 영화는 여전히 케케묵은 이야기를 하고 있다. 이른바 물질에 대한 정신의 승리다.

 

p390

 오늘날 아이들이 배우는 것의 대부분은 2050년이면 별 소용이 없어질 가능성이 크다.

 

p391

 이런 세상에서 교사가 학생들에게 전수해야 할 교육 내용과 가장 거리가 먼 것이 바로 '더 많은 정보'다. 정보는 이미 학생들에게 차고 넘친다. 그보다 더 필요한 것은 정보를 이해하는 능력이고, 중요한 것과 중요하지 않은 것의 차이를 식별하는 능력이며, 무엇보다 수많은 정보 조각들을 조합해서 세상에 관한 큰 그림을 그릴 수 있는 능력이다.

 사실, 이런 능력은 수 세기 동안 서구의 자유주의 교육이 추구해 온 이상이기도 했다. 하지만 지금까지는 서양의 많은 학교들조차 그런 이상을 추구하는 데 오히려 태만했다. 학생들에게는 '스스로 생각하라'고 권장하면서 정작 교사 자신들은 아무렇지도 않게 데이터를 밀어넣는 데만 집중했다. 자유주의 학교들은 권위주의를 너무나 두려워한 나머지 특히 거대 서사에는 질색이었다. 그들은 우리가 학생들에게 많은 데이터와 약간의 자유만 주면 학생들이 자기 나름의 세계상을 만들어낼 것으로 여겼다. 지금 세대는 설명 모든 데이터를 종합해서 세계에 관한 하나의 일관되고 의미 있는 이야기를 만들어내지 못하더라도, 장래에는 훌륭한 종합을 이뤄낼 수 있는 충분한 시간이 있을 것이다. 하지만 지금 우리는 시간이 없다. 다음 수십 년 사이에 우리가 내릴 결정들이 생명 자체의 미래를 결정할 것이다. 또한 우리는 지금 우리가 갖고 있는 세계관을 기초로 해서만 그 결정들을 내릴 수 있다. 지금 세대에 우주에 관한 포괄적인 견해가 없다면 생명의 미래는 무작위로 결정될 것이다.

 

p393

 그렇다면 우리는 학생들에게 뭘 가르쳐야 할까? 많은 교육 전문가들은 학교의 교육 내용을 '4C', 즉 비판적 사고critical thinking, 의사 소통 communication, 협력 collaboration, 창의성 creativity으로 전환해야 한다고 주장한다. 보다 포괄적으로 말하면, 학교는 기술적 기량의 교육 비중을 낮추고 종합적인 목적의 삶의 기술을 강조해야 한다. 무엇보다 중요한 것은 변화에 대처하고, 새로운 것을 학습하며, 낯선 상황에서 정신적 균형을 유지하는 능력일 것이다. 2050년의 세계에 발맞춰 살아가려면 새로운 생각과 상품을 발명하는 데 그쳐서는 안된다. 무엇보다 자기 자신을 반복해서 재발명해야만 할 것이다.

 

p424

 대부분의 이야기는 기초가 튼튼해서라기보다는 지붕의 무게 덕분에 탈 없이 유지된다. 기독교 이야기를 보자. 기초는 엉성하기 짝이 없다. 온 우주의 창조자의 아들이 2,000년 전쯤 은하수 어딘가에서 탄소 기반 생명으로 태어났다는 증거가 어디에 있나? 그런 일이 로마 속주였던 팔레스타인에서 일어났고 그의 어머니는 처녀였다는 증거는 어디에 있나? 그럼에도 전 지구에 걸쳐 막대한 기관들이 그 이야기 위에 세워졌고, 그 무게가 너무도 압도적인 힘으로 내려 누르는 덕분에 그 이야기는 자리를 지키고 있다. 그 이야기에서 단어 하나를 바꾸려는 것을 두고도 전면전이 벌어졌다. 서유럽 기독교도와 동방적교회 기독교도 간에 1,000년 동안 계속된 균열은 최근에는 세르비아인과 크로아티아인 간의 상호 살육전으로 표출되기도 했는데, 애초에 '필리오케filioque'(라틴어로 '또한 성자에게서'라는 뜻)라는 한 단어가 발단이었다. 서유럽 기독교도는 기독교인의 신앙고백 안에 이 단어를 넣고 싶어 한 반면, 동방적교회 기독교도는 격렬히 반대했다.(이 단어를 추가하는 것이 갖는 신학적인 함의는 너무나 불가사의해서 여기서 이해가 되도록 설명하는 것은 불가능한 일이 될 것이다. 궁금하면 구글에게 물어보라.)

 일단 이야기 위에 개인의 정체성과 사회의 전 체계가 구축되고 나면, 이야기를 의심하는 것은 생각할 수 없게 된다. 그것을 뒷받침 하는 증거 때문이 아니다. 그것이 무너지면 개인적, 사회적 대격변이 일어날 것이기 때문이다. 역사를 돌아봤을 때, 때로는 지반보다 지붕이 더 중요하다.

 

p426

 어떻게 하면 그리스도를 신봉자에게 실재하는 것으로 만들 수 있을까? 천주교 사제는 미사를 집전하면서 빵 한 조각과 포도주 한 잔을 들고서는 빵은 그리스도의 살이며 포도주는 그리스도의 피라고 선포한다. 신도는 그것을 먹고 마심으로써 그리스도와의 교감을 얻는다. 그리스도를 실제로 입안에 넣고 맛보는 것보다 무엇이 더 생생할 수 있을까? 전통적으로 사제는 성찬식 때 이런 과감한 선포를 라틴어로 했다. 라틴어는 고대 종교와 법률 그리고 생명의 비밀을 이야기할 때 쓰는 언어였다. 모여 있던 농민들이 놀란 눈으로 바라보는 앞에서 사제는 빵 한 조각을 높이 들고 이렇게 선포했다. "호크 에스트 코르푸스!(Hoc est corpus!. 이것은 몸이다!)" 그러면 아마도 그 방은 그리스도의 살이 되었을 것이다. 하지만 "호크 에스트 코르푸스"라는 라틴어를 몰랐던 까막눈의 농민들 머릿속에서는 그 말이 "호쿠스 포쿠스Hocus pocus!"로 와전됐고, 그 뒤 이것은 개구리를 왕자로 변하게 하고 호박을 마차로 바꿔놓는 강력한 주문으로 거듭났다.

 

p429

 근대 서구에서는 유교가 의식에 집착한 것을 두고 흔히 인간에 대한 얕은 이해와 의고擬古주의를 보여주는 것으로 여겼다. 하지만 사실은 오히려 공자야말로 시대를 뛰어넘어 변하지 않는 인간 본성을 깊이 꿰뚫어 본 것이라고 할 수 있다. 유교 문화 - 중국을 필두로 이웃 나라인 한국과 베트남, 일본 - 에서 극도록 수명이 긴 사회적, 정치적 구조를 만들어냈다는 사실은 아마 우연이 아닐 것이다. 인생의 궁극적인 진실을 알고 싶은 사람에게는 의례와 의식이 거대한 장애물이다. 하지만 공자와 같이 사회의 안정과 조화에 관심이 있는 사람이라면 진실은 골칫거리일 때가 많다. 그런 사람에게는 의례와 의식이야말로 최선의 동맹이다.

 

p431

 모든 의식 중에서도 가장 잠재력이 큰 것은 희생이다. 세상 모든 것 중에 고통이야말로 가장 실감나는 현실이기 때문이다. 이것만은 결코 누구도 무시하거나 의심할 수 없다. 사람들에게 어떤 허구를 정말로 믿게 만들고 싶다면, 그것을 대신해서 희생하는 쪽으로 그들을 유도하라. 누구라도 이야기를 위해 고통을 체험하고 나면 대부분 그 이야기가 실제라고 확신하게 돼 있다.

 

 p437

 이스라엘에서는 공교적인 유대인들이 세속화된 유대인들과 심지어 완전한 무신론자들한테까지 이런 금기를 강요하려 들 때가 많다. 이스라엘 정치에서 정통파 유대교 정당들이 대체로 힘의 결정권을 행사하게 된 뒤로, 안식일에 모든 종류의 활동을 금지하는 법을 대거 통과시켰다. 안식일에 개인 차량을 사용하는 것을 불법화하는 데는 실패했지만, 대중교통 운행을 금지하는 데는 성공했다. 전국에 걸쳐 종교적 희생을 강제한 이 조치는 주로 사회에서 가장 취약한 계층에 타격을 준다. 특히 토요일은 노동계급 사람들이 자유롭게 먼 친척이나 친구를 방문하거나 관광 명소로 여행할 수 있는 유일한 날이기 때문이다. 돈이 많은 할머니야 신형 자가용을 몰고 다른 도시에 사는 손주를 찾아가는 데 아무런 문제가 없지만, 가난한 할머니는 버스와 기차가 모두 운행을 하지 않으니 어디에도 오갈 수가 없다.

 

p443

 악의 문제는 악이 실제 삶 속에서는 반드시 추악하지는 않다는 데 있다. 악은 사실 대단히 아름답게 보일 수 있다. 이 점에 관한 한 기독교는 할리우드보다 현명했다. 전통적 기독교 미술에서는 사탄을 대단히 매력적인 정부情婦로 묘사하는 경향이 있었다. 사탄의 유혹에 저항하기가 그토록 어려운 것도 그 때문이다. 파시즘에 대처하기가 어려운 것도 같은 이유에서다. 파시즘의 거울로 자신을 들여다보면 추악한 것이라고는 조금도 눈에 띄지 않는다. 1930년대에 독일인들이 파시즘의 거울로 자신들을 봤을 때는 독일이 세상에서 가장 아름다운 민족으로 보였다. 지금 러시아인들이 파시즘의 거울을 보면 러시아가 세상에서 가장 아름답게 보일 것이다. 이스라엘인들이 파시즘의 거울을 보면 이스라엘이 세상에서 가장 아름답게 보일 것이다. 그러면 그들 모두 그 아름다운 집합체 속에 자신도 빠져들고 싶다고 생각할 것이다. 

 '파시즘'이라는 단어는 라틴어 'fascis'에서 나왔다. '막대 다발'이라는 뜻이다. 세계사에서 가장 흉포하고 살인적인 이데올로기치고는 별 매력 없는 상징처럼 들린다. 하지만 여기에는 깊고 사악한 의미가 있다. 막대 하나는 대단히 약하다. 누구나 쉽게 부러뜨릴 수 있다. 그렇지만 여러 개를 다발로 묶으면 부러뜨리기가 거의 불가능해진다. 이는 각 개인은 보잘것없는 존재이지만 집단으로 한데 뭉치면 대단히 강력하다는 사실을 함축하고 있다. 그래서 파시스트들은 어떤 개인보다도 집단의 이익이 특권을 갖는다고 믿으며, 어떤 하나의 막대도 다발의 결속을 깨려 들어서는 안 된다고 요구한다.

 

p448

 근대 문화가 부상하면서 상황은 뒤집혔다. 신앙은 점점 정신적 노예처럼 보였고, 의심은 자유의 전제 조건으로 비치게 되었다.

 1599년에서 1602년 사이 어느 시기에 윌리엄 셰익스피어는 《햄릿》이라는 제목으로 더 유명한 자기 나름의 <라이온 킹>을 썼다. 하지만 심바와 달리 햄릿은 생명의 원을 완성하지 않는다. 그는 마지막 순간까지 회의적이고 양면적인 상태로 남아, 인생의 의미가 무엇인지 찾지도 못하고, '사느냐 죽느냐' 둘 중에서 어느 쪽이 나은지 결정도 못 내린다. 이 점에서 햄릿은 전형적인 근대의 영웅이다. 근대는 과거로부터 물려받은 과다한 이야기들을 거부하지는 않아다. 대신 그것들을 파는 슈퍼마켓을 차렸다. 근대 인간은 그 모두를 자유롭게 시식해볼 수 있는데, 자기 입맛에 맞는 것이면 무엇이든 고르거나 조합할 수 있다. 

 어떤 사람들은 그토록 많은 자유와 불확실성을 견디지 못한다. 파시즘 같은 근대 전체주의 운동은 의심에 찬 사상들의 슈퍼마켓에 격렬히 반발했고, 오직 하나의 이야기에 대한 절대적 믿음만 요구하는 데에서는 전통 종교들까지 능가했다. 하지만 대부분의 근대 사람들은 믿음의 슈퍼마켓이 마음에 들었다. 인생의 의미가 무엇인지, 어떤 이야기를 믿어야 할지 모를 때 사람들은 어떻게 할까? 선택의 가능성 자체를 신성시한다. 영원토록 슈퍼마켓 통로에 서서, 원하는 것은 무엇이든 선택할 능력과 자유가 있는 한, 자기 앞에 진열된 상품을 살펴보기만 한다. (...) 그러다 어느 순간 화면 정지, 컷, 끝. 그리고 엔딩 크레디트가 올라간다.

 

p455

 이제는 페이스북과 인스타그램 시대가 되어 이런 개인의 신화 제조 과정을 이전 어느 때보다 더 분명하게 관찰할 수 있다. 왜냐하면 그 과정의 일부야말로 우리 정신이 하던 일을 컴퓨터에 아웃소싱한 것이기 때문이다. 사람들이 온라인에서 완벽한 자아를 구축하고 장식하는 데 무수한 시간을 쏟는 가운데, 점점 자신의 창작물에 고착돼가고, 자신의 실체와 그것을 착각하는 것을 보면 무척 흥미로우면서도 두렵다. 그 덕분에 실상은 교통 체증과 사소한 말다툼, 긴장된 침묵으로 가득할 뿐인 가족 휴가는 아름다운 풍경의 파노라마와 완벽한 저녁식사, 웃음 가득한 얼굴들의 모음으로 둔갑한다. 우리가 실제로 경험하는 것의 99퍼센트는 자아의 이야기에서 누락된다. 

 우리의 실제 경험은 신체적인 데 반해, 우리의 환상 속에서 빚어지는 자아는 아주 시각적이기 쉽다는 사실은 특히 주목할 만하다.

 

 

 그러므로 진정으로 자신을 이해하고 싶다면 페이스북 계정이나 자기 내면에서 하는 이야기와 자신을 동일시해서는 안 된다. 그 대신 몸과 마음의 실제 흐름을 관찰해야 한다. 그러면 이성의 많은 개입 없이도, 그리고 자신의 아무런 지시 없이도 우리의 생각과 감정과 욕망이 스스로 나타났다가 사라지는 것을 보게 된다. 마치 이런 저런 바람이 이곳에서 저곳으로 바뀌어 불면서 머리칼을 헝클어뜨리는 것과 같다. 당신은 바람이 아닌 것처럼, 당신이 체험하는 생각과 감정과 욕망의 혼합체도 아니다. 또한 그것들을 지나오고 난 눈으로 보고 들려주는 세탁된 이야기도 분명히 아니다. 당신은 그 모든 것을 체험했지만 스스로 통제할 수는 없다. 가질 수도 없다. 그 체험들의 합도 아니다. 사람들은 묻는다. "나는 누구인가?" 그런 다음 어떤 이야기를 들으리라 기대한다. 하지만 자신에 대해서 알아야 할 첫 번째 사실은, 당신은 이야기가 아니라는 것이다.

 

p485

 오늘날 모든 나라는 세 가지 주요 과제에 직면했습니다. 이것들은 전 지구적 차원에서만 해결될 수 있습니다. 세 가지 과제란 핵전쟁, 기후변화, 기술 혁신에 따른 파괴입니다.

 

p492

 당신은 어떤 것 - 고통이든 쾌락이든 - 을 경험하면서 그 밖의 것을 바랍니다. 고통을 경험할 때에는 그 고통이 사라지기를 바랍니다. 쾌락을 경험할 때는 쾌락이 강해지고 영원히 지속되기를 바랍니다. 이런 실체의 부정이 모든 괴로움의 뿌리입니다. 우리는 실체를 있는 그대로 받아들이도록 스스로 훈련해야 합니다. 계속해서 고통에서 달아나고 더 많은 쾌락을 쫓아 달려가는 대신, 보다 균형 잡힌 정신을 유지하는 법을 배워야 합니다. 고통과 쾌락에 대해 불필요한 괴로움을 일으지키 않고 둘 다 있는 그대로 경험하는 법을 배워야 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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