이런 글로도 책을 낼 수 있구나, 그리고 이런 책도 베스트셀러가 될 수 있구나라는 점에서 무라카미 하루키라는 브랜드가 대단함을 알 수 있다.

 지극히 가벼운 소품류의 글이다.

 이제 하루키 옹(이제 그도 옹翁이라는 접미어가 어울리는 나이대에 접어들었다)은 더 이상 소설을 내지 않을 작정인가? 싶다. 현재 일본에서 그는 무라카미 라디오라는 라디오 방송을 부정기(약 2달에 한번 정도 한다고)적으로 진행하고 있다.

 가장 최근에 발표한 기사단장 죽이기를 포함해서, 그의 최전성기로 보이는 시기에 발표한 태엽감는 새 이후의 작품은 모두 태엽감는 새의 변주라고 볼 수 있다. 그래서 쭈욱 읽다보면 아! 무라카미의 작품세계는 태엽감는 새 이후에서 더 나아가질 못하고 있구나라는 그런 느낌이 강하다.

 사실 더 나아기지 못한다는 표현은 하루키와 같은 대작가에게는 무례한 표현이긴 하지만 내 개인적인 감상은 그렇다. 뭐랄까 밥도 더 맛있어지고, 반찬도 화려하고 풍성해지고 있긴 하지만 결국은 그것은 화식(和食, 와쇼쿠)이라는 카테고리에서 벗어나지 못한다고 할까?

 이젠 하루키가 만들어주는 갈비찜, 짜장면, 돼지불백, 쌈밥 같은 것도 먹고 싶어지는데 그런 음식에는 아예 관심이 없는 것 아닌가 싶다. 

 밥이라도 맛있게 지어주는 게 어디냐? 라며 감지덕지해야 하는데 배 부른 소리를 하고 있구나 싶긴 하다.

 어찌 보면 하루키의 에세이들은 소설에 비하면 간식 혹은 가벼운 스낵의 개념이라고 볼 수 있을 듯 하다. 그리고 단편소설들은 분식 정도?

 이 책을 그런 기준에서 보면, 영화를 보면서 먹는 팝콘 쯤 되는 것 같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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p115

 갈라파고스에는 바닷물에 들어가 해초를 먹는 진기한 종류의 이구아나가 있는데 이분들은 한 시간 동안 호흡을 하지 않고 바닷속에 머물 수 있다. 체온을 낮춰 혈류를 멈추기 때문에 가능하다고 한다. 이구아나는 초식이지만, 살고 있는 섬에 식물이 자라지 않아서 그렇게 진화했다. 다윈이 그 '바다 이구아나'를 연구해 '진화론'의 한 예시로 삼았다.

 이분들이 한 시간 동안 바다에 들어가 있을 수 있다고 실증한 사람도 다윈이다. 다윈은 십 분 단위로 이구아나를 물속에 넣었고, 칠십 분까지 갔을 때 죽자 "오, 육십 분은 잠수할 수 있구나" 하는 확신을 얻었다. 하지만 생각해 보면 칠십 분 동안 물에 잠겨 있던 이구아나가 너무 불쌍하다. 과학이란 얼마나 비정한 것인지.

 

 난 책의 카테고리를 파악하는데 온라인 교보문고를 주로 이용하는데, 어떤 기준으로 그 카테고리를 나누는지 좀 의문이긴 하다. 이 책은 정치/사회 카테고리로 분류되어 있는데 아무리 읽어봐도 인문으로 분류해야 할 것 같다. 인문적 지식과 통찰이 그리 두껍지 않은 책에 가득 들어있다.

 이 책에서 다루고 있는 통찰들은 비단 대한민국에만 적용되는 것들은 아니다. 케이스들은 다 로칼에 관련되어 있지만 그것들을 아우르는 카테고리적인 내용들은 인류가 지속적으로 리마인드하면서 새겨야 할 주요한 내용들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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p21. 숫자가 말을 하게 해야 한다

 한국 정부는 고위 공직자의 재산 내역을 PDF로 공개한다. 이것을 컴퓨터로 처리하려면 별도의 처리를 거쳐야 한다. 

 PDF는 사람이 보라고 만든 포맷이다. 컴퓨터가 자동으로 처리하려면 별도의 개발이 필요하다. 

 정부가 처음부터 그냥 구조화된 데이터로 주면 그만이기 때문이다.

 미국은 어떻게 하고 있을까? 미국은 데어터법에 아예 포맷을 못박고 있다. 데이터법 정보모델 스키마라고 불리는 이것은 쉽게 말해 정부 예산 보고서를 기계가 읽을 수 있도록 하는 표준 포맷이다. 미 연방정부는 이 포맷을 공개해 다른 정부기관들도 쉽게 쓸 수 있도록 제공한다. 정부가 공개하는 데이터는 '기계가 읽을 수 있어야 한다'는 원칙을 법으로 구현한 것이다. 

 한국 정부는 어떨까? 한국의 지방자치단체들이 수많은 복지 비용을 지출하고 있지만, 각 지자체의 지역사회보장계획은 정책 목표 설정이나 성과 평가를 제대로 하지 못한다. 소득불평등과 빈곤에 대한 자료를 갖고 있지 못하기 때문이다. 국세청의 행정데이터가 공유되고 있지 않은 까닭이다. 정부기관 간에도 그렇다.

 전 국민 재난지원금과 선별 재난지원금은 지금도 가장 뜨거운 이슈 중 하나다. 다 줄 것인가. 선별해서 줄 것인가? 찬반의 소리가 높다. 그런데 사실 우리는 이미 전 국민 재난지원금도, 선별지원금도 지급한 경험이 있다. 그렇다면 효과를 측정해보면 되는 것 아닌가? 십수조 원의 돈이 들어간 일인데, 쓴 다음에 그 효과를 측정해보지도 않는다는 건 아주 이상한 일이다. 하다못해 작은 기업에서 1천만 원의 광고비만 써도 당연히 결과 리포트를 제출한다. 놀랍게도 기획재정부는 아직까지 어떤 보고서도 공식적으로 내놓지 않고 있다. 효과를 측정하지도 않고서 어떤 것이 더 낫다고 말하는 건 근거가 없고, 근거가 없이 십수조 원의 예산을 쓰는 건 무책임한 일이다. 

 정부가 숫자로 된 자료들을 이런 '구조화된' 형태로, 즉 분석가능한 데이터로 공개한다면 어떤 일이 일어날까? 민간의 수많은 전문간들이 데이터를 다각도록 분석하고, 통찰이 빛나는 논문들을 생산할 수 있게 된다. 누구든 수십 년치 숫자를 넣고 시계열 분석을 해 볼 수도 있고, 다양한 개선방안들도 내놓을 수 있을 것이다.

 정부는 데이터가 4차산업혁명시대의 원유라고 한다. 디지털 혁신의 캐치프레이즈도 D.N.A. 데이터, 네트워크, 인공지능이다. 한 해에만 558조가 넘는 돈을 쓰는, 한국경제에서 가장 큰 단일 주체인 정부가 먼저 '데이터에 기반한' 정책을 펴는 게 D.N.A. 성공하는 첩경이 될 것이다.

 

p31

 수감율, 비만, 정신병, 중독 이런 사회적 지표들이 GDP와 관계를 보면 의외로 별 상관관계가 없는 걸로 나온다. 부자 나라인데도 비만율이 높고, 수감률도 높고, 덜 부자인데도 지표가 좋기도 하고.

 그런데 기대수명/문맹률/영아사망률/살인/수감률/미성년자 출산율/사회적 신뢰/비만/정신병/중독/사회적 유동성, 이런 지표들을 빈부 격차순으로 비교하면 거의 Y=X에 맞먹는 아주 강한 상관관계가 나타난다. '코로나에 왜 미국, 영구, 프랑스가 그렇게 맥없이 무너졌지?'라는 부분도 이렇게 보면 상당히 설명이 된다. 'GDP가 핵심이 아니었구나'하는 것이다.

 불평등을 완화해야 성장이 빨라진다는 OECD 공식보고서도 있다. 2014년 OECD는 <불평등과 성장>이라는 이름의 리포트를 내고 낙수 효과가 거짓말이라는 것을 공식적으로 밝혔다. OECD 회원국의 1985년부터 2005년까지의 지니계수와 1990년부터 2010년까지의 누적성장률을 사용해 분석을 했더니, 지니계수가 0.03포인트 악화되면 경제성장률이 무려 0.35%씩 떨어진다는 게 확인이 된 것이다. OECD는 "낙수 효과가 아니라 불평등 해소가 성장의 지름길이라는 사실이 명백해졌다"면서 "불평등을 빨리 해소하는 국가가 빨리 성장할 것"이라고 밝혔다.

 

p35

 현대 한국인의 문해 능력은 세계 최하위 수준에 가깝다. 청취력도 비슷한 수준일 것이다. 상대의 얘기를 제대로 경청한 뒤 토론하고 합의안을 찾는 것, 타협하는 법이 우리의 (입시) 교육에는 빠져 있다.

 도덕적 개인은 가르치되, 합리적인 시민을 가르치지 않는 것, 신독愼獨(*노자에 나오는 말, 공자는 모름지기 신독하여야 한다. 간단히 말해서 홀로 있어도 예를 갖추고 법도에 어긋나서는 안된다는 뜻) 하되 협업하지 않는 것, 현대 한국 사회의 공교육이 놓치고 있는 부분이다. 공교육을 대학까지 정상적으로 다 마쳐도 계약서 한 장을 제대로 못 쓰고, 취업을 위해 애는 쓰지만 노동법은 읽어 본 적도 없고, 딜은 영화에서나 본 적이 있는 교육은 명백히 고장이 나 있따. 사람과 사람이 뉴런처럼 촘촘히 연결된 초연결의 사회에서 이런 결점은 치명적인 걸림돌이다. 도끼를 치우고, 상소문을 던져버리고, 초연결사회를 사는 현대 시민의 옷을 입어야 한다. 상대의 말을 깊이 경청하고, 서로에게 도움이 될 안을 마련해 손을 맞잡는 경험을 어릴 적부터 가르쳐야 한다. 

 

p46. 1996년, 한국영화의 느닷없는 황금기

 한국 영화 얘기를 해보자, 1996년과 2006년 사이에 한국영화가 느닷없는 황금기를 맞는다. 96년 <돼지가 우물에 빠진 날>, 97년 <넘버3> <접속> <초록물고기>, 98년 <8월의 크리스마스>, 99년 <인정사정 볼 것 없다>, 2000년 <공동경비구역 JSA> <박하사탕> <죽거나 혹은 나쁘거나>, 2001년 <소름>, 2002년 <복수는 나의 것>, 2003년 <살인의 추억> <올드보이> <지구를 지켜라>, 2004년 <송환>, 2006년 <괴물> 등등 지금도 이름만 대면 아~ 할 영화들이 봇물 터지듯 쏟아져 나왔다. 게다가 이들 극영화 15편 가운데 무려 8편이 감독 데뷔작이었다. 데뷔작 <플란다스의 개>(2000)로 봉준호 감독이 등장한 것도 이 시기고, 같은 해 박찬욱 감독은 세 번째 연출작 <공동경비구역 JSA>로 존재감을 드러내기 시작했다.

 대체 96년도에 한국에서 무슨 일이 있었던 걸까? 그해에 영화 사전심의가 폐지되었다. 사전 검열이 폐지됐고, 공연윤리위원회도 사라졌다.

 검열이니 사전심의니 하는 것은 말하자면 이런 거다. 조영남의 <불꺼진 창>은 왜 창에 불이 켜져 있어야지 꺼졌느냐고 금지, 이장희의 <그건 너>는 왜 남에게 책임을 떠넘기냐고 금지, 양희은의 <이루어지지 않는 사랑>은 왜 사랑이 이뤄지지 않느냐고 금지했다. 배호가 노래한 <영시의 이별>은 당시 통행금지가 밤 12신데ㅔ 그 시간에 헤어지면 언제 집에 가느냐고 금지곡이 됐다. 그러다가 사전심의가 폐지되고, 뉴런이 사방으로 자유결합을 할 수 있는 길이 열린 것이다.

 그래서? 봉준호 감독의 기생충이 아카데미상을 휩쓸었고, 넷플릭스 상위권을 K드라마가 채우고 있다. 일본은 TV 시리즈 10위 중 절반이 한국 드라마다. <사랑의 불시착>은 일본에서 230일이 넘도록 톱 10이다. 대만은 톱 10 중 9개, 말레이시아는 8개, 베트남은 7개가 한국 드라마인 때도 있다. 리드 헤이스팅스 넷플릭스 최고 경영자가 재미있게 본 한국 드라마로 뽑은 <킹덤> < 사랑의 불시착> <사이코지만 괜찮아> <승리호>들이 끊임없이 리스트를 점령한다. 최근에는 애플도 한국 진출을 서두르고 있다. 올해도 윤여정 씨가 지명되는 영화제마다 여우조연상을 타낸 끝에 봉 감독에 이어 2년 연속 아카데미상으로 화려한 매듭을 지었다.

 

p52

 뉴런의 자유결합이 지능을 만들듯이, 재능의 자유결합이 경제를 꽃피운다. 민주주의는 한국의 경제와 문화를 위로 밀어올리는 최고의 플랫폼이다. 당연한 듯 보이는 이런 K-민주주의는 기실 유리그릇처럼 위태롭다. 사회 곳곳의 인재들을 생각에 따라, 정권의 친소 관계에 맞춰 블랙리스트로 분류하고 갈라치기를 했던 게 불과 몇년 전이다. 번영은 공짜가 아니다.

p84. 왼쪽으로 가는 영국차

 오래전에 영국에서 마차는 왼쪽 통행을 했다. 오른쪽으로 다니면, 대부분 오른손잡이인 마부가 휘두르는 채찍이 자칫 지나가는 행인을 때릴 우려가 있었기 때문이다. 이 때문에 나중에 만들어진 자동차도 자연스럽게 왼편으로 다니게 됐다. 이 '자연스러움'의 결과로 영국과 영연방 일부, 그리고 따라서 채택한 일본 등은 두고 두고 비싼 비용을 치르게 된다. 대부분의 나라들은 오른손으로 수동식 기어를 조작하기 편하게 핸들을 왼쪽에다 뒀기 때문이다.

 우핸들을 좌핸들로 바꾸는 것은 단순히 운전대만 바꿔서 되는 일이 아니라 파워트레인까지 뜯어고쳐야 하는 큰 작업이다. 인테리어도 통째로 바뀐다. 따라서 차를 만들 땐 언제나 수출용 차와 내수용 차, 2개의 라인을 만들어야 한다. 차를 수입하는 건 더 큰 난관이다. 좌측통행용으로 새로 만들어달라고 부탁을 해야 하기 때문이다.

 

p85. 인장제도문화보존연맹

 일본 국회에는 도장 문화를 존중하는 '일본 인장제도문화를 지키는 의원 연맹'이 있다. 얼마 전까지 다케모토 나오키라는 의원이 이 연맹의 회장이었다. 이 양반이 몇 달 전에 과학기술-IT 담당장관이 됐다. 그는 자기 입으로 컴맹이라고 자복한 사람이다. 취임하면서 역사적인 명언을 남겼다. "행정절차의 디지털화와 함께, 서류에 날인하는 일본의 전통적인 도장 문화의 양립을 목표로 한다." 이 명언이 얼마나 비난을 많이 받았던지, 그는 결국 '일본 인장제도문화를 지키는 의원 연맹' 회장직으로 사임해야 했다.

 일본은 세계 최고의 로봇 강국이다. 그 로봇 강국 일본에서 2년쯤 전에 덴소 웨이브와 히타치 캐피털, 히타치 시스템즈 등이 자동 날인 로봇을 개발했다. 

 히타치 캐피털 측은 "산업 현장에서 '날인 작업이 귀찮기 대문에 효율화해 주면 좋겠다'는 의견이 많아 개발했다"고 말했다. "사람 대신 로봇이 서류 뭉치를 분류해 도장을 찍으면 시간을 절약하는 효과가 있고, 이는 사실상 '서류를 전자화'하는 것과 같다."

 'AI가 인류의 미래를 결정지을 것'이라며 인공지능에 엄청난 투자를 하고 있는 소프트뱅크의 손정의 회장은 최근 인터뷰에서 '원격근무 잘하고 있느냐'는 질문에, '원격근무는 잘 하고 있는데, 인감을 찍어야 하는 일이 있어 가끔씩 사무실에 나갈 수 밖에 없다'고 답했다. 천하의 손 회장조차도 인감을 찍어야 돌아가는 일본 사회의 구조에는 어쩔 도리가 없는 것이다.  

 

p100. 한국, 오래된 맛집의 비밀

 몇 해 전 국내 유수의 음식 배달 서비스 회사에서 한국의 오래된 맛집의 비밀을 연구하는 프로젝트를 가동한 적이 있다. 오래된 맛집의 비밀을 알 수 있다면 이것을 잘 정리해 자사의 서비스를 쓰는 자영업자들에게 알려줄 수 있겠다고 생각한 것이다. 막상 연구 결과가 나온 뒤 이 업체는 발표를 하지 못하고 접었다. 비밀을 발견하긴 했는데, 전혀 자영업자들에게 알려줄 만하지가 않았던 것이다. 이 연구결과는 오래된 맛집의 비밀로, 압도적인 단 하나의 변수를 가리켰다. '자가 점포'. 자기 점포에서 영업을 하지 못한 거의 대부분의 맛집들이 장사를 이어가지 못했던 것이다. 

(이 뒤를 이어 잘 나가던 경리단길이 임대료의 급격한 상승으로 젠트리피케이션 현상이 일어난 사례가 나온다)

 임차인이 갖은 노력을 다해서 입소문을 내고, 그래서 손님이 늘어나고 매상이 올라가면 그만큼 혹은 그 이상을 건물주들이 냉큼 임대료로 가져가 버린다는 것이다. 전형적으로 노력을 할수록 벌을 더 받게 되는 구조다. 이런 구조에서 100년 된 노포가 나온다면 그게 기적이지.

 우리의 임대차보호법에 해당하는 게 일본의 차지차가법이다. 

 (일본의 경우는) 임차인이 월세를 제때 내지 못하고 있건, 임차 기간 중 건물에 손상을 입혔다거나 하는 등의 특별한 이유가 아니면 건물주는 임대 연장을 거부하지 못한다고 법으로 못을 박고 있는 것이다.

 주변 비슷한 건물의 임대료와 비교해서 상당히 낮은 경우가 아니면 함부로 임대료를 올리지 못하게 못을 박고 있다. 분쟁이 있으면 재판으로 해결해야 하며, 주변의 임대료가 많이 올랐다는 것도 건물주가 입증해야 한다.

 이런 구조라면 식당 주인이 죽을 힘을 다해서 열심히 할 만하다. 노력의 대가를 고스란히 자신이 가질 수 있기 때문이다. 적어도 열심히 한 결과로 쫓겨가는 일은 없을 것이다.

 

p148

 산업혁명은 역사상 본 적이 없을 정도로 인류의 생산성을 높여 놓았지만, 초기의 90년간 그러니까 거의 한 세기 동안 평균적인 서민의 생활수준은 나락으로 떨어진 채 결코 회복되지 못했다.

 

p155

 얼마 전 애플의 신용카드 발급을 위한 신용등급평가시스템이 동일한 조건의 남성에 비해 여성에게 더 낮은 신용한도를 부여하고 있다는 것이 드러났다. 이 소식은 소셜미디어를 통해 금세 퍼져나갔고, 미 금융당국도 조사에 착수했다. 이 사건은 2가지 점에서 큰 주목을 받았다. 첫 번째, 애플이 사용한 금융 데이터에는 처음부터 고객이 남성인지 여성인지는 들어 있지 않았다. 그러니까 고객이 남자인지, 여자인지를 인공지능은 애초에 알 수가 없었다는 것이다. 두 번째, 애플 스스로도 왜 자신들의 알고리듬이 이런 편향된 결과를 불렀는지를 설명하지 못했다. 그저 인공지능이 저지른 일이었던 것이다. 애플과, 카드발급을 맡은 골드만삭스는 과거의 데이터 자체가 편향되었을 가능성이 있다고 짐작했다.

 

 지난해 아마존은 몇 년간 개발해서 채용에 적용해오던 인공지능 툴을 폐기했다. 최근 10년간의 채용 데이터를 근거로 수많은 채용 후보자 중에서 적합한 사람을 가려내는 툴이었는데, 그 결과가 남성 편향적이었다는 게 드러난 것이다. 지난 10년간 남자직원이 훨씬 많았는데, 인공지능은 이것을 주요한 입력요소로 판단한 것이다. 아마존은 이 편향을 제거할 적절한 방법이 없다고 판단해 결국 툴을 개발해온 팀 자체를 해체했다.

 

p158

 케인즈는 '장기적인 균형'이라는 언술의 허무함을 이렇게 설명했다. "장기적으로 우리 모두 죽는다."

 

 

 

추미애의 인생관, 철학, 법무부장관 1년간의 검찰개혁의 기록, 정치관 등을 두루두루 알 수 있는 대담집 형태의 에세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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p36

 정치의 기본이 무엇입니까? 출세하려고 정치하는 게 아니잖아요. 공공의 목적을 위해 자신을 던지는 일이잖아요. 저는 어떤 선택 앞에서 제 앞날을 고민하며 일한 적이 한 번도 없습니다. 방탄조끼를 입고 일한 적이 없어요. 문제가 있다면 바로 뛰어들었습니다. 판사를 할 때도, 국회의원 준비를 할 때도, 국회의원과 법무부장관을 할 때도 제 자신을 모두 던지면서 살아왔습니다.

p51

 사실 제가 서울 목동에 살면서 인천지법으로 출퇴근하다가 아이를 낳기 위해 남편의 고향인 정읍으로 갔어요. 남편의 의견을 따른 거에요. 그 아이가 태어나기 전해에 대선이 있었는데 그때 김대중 대통령이 선거에서 졌어요. 남편이 너무 속상해하더라고요. 선거에 패배한 이유는 지역주의를 깨지 못한 탓이라며 지역주의 타파를 위해 이 아이는 호남에서 낳아야 한다고 하더라고요. 지금 생각하면 촌스러운 이야기라고 할 수 있지만 그땐 그만큼 호남분들의 절박함이 컸습니다. 그래서 아들을 남편의 뜻에 따라 전북대 병원에서 낳고 전북 주민등록번호를 받았어요.

 아이가 크면서 운동을 좋아했어요. 그래서 스포츠매니지먼트과를 나와서 전북 FC구단에 들어갔어요. 정말 기뻐하더라고요. 그런데 어느 날 왜 자기만 전북산이냐고 물었습니다. "아빠가 널 담보잡은 거란다. 오죽 절절하면 그랬겠냐"라고 그때 이야기를 해줬더니 "처음 들었다"면서 놀라더라고요. 이 아이가 선거 때 저를 많이 도와줬어요. 2016년 선거에서 제가 식도염을 앓았는데 목소리가 잠겨 있으니 아들이 엄마를 대신해 선거 유세차에 올라 유세를 했어요. 청문회 때는 아들도 많이 힘들었는지 술에 취해 들어와서 저한테 한마디 하더라고요. "엄마, 존경해요"라고요.

 오히려 더 미안했습니다. 저는 아들에게 존경한다는 말보다 사랑한다는 말을 듣고 싶었어요. 존경한다는 말은 제가 죽었을 때나 하는 말이라고 생각했거든요. 거리감이 느껴졌어요. 그러고는 이렇게 말하더라고요. "엄마 나 힘들었어요. 열심히 살고 싶었어요. 엄마한테 부담 안 주려고 다리 아픈 것도 관리했고, 운동 많이 하면 다리 아프니까 하고 싶은 운동도 제대로 못 했고, 그런 상태로 군대도 갔고.."라고요.

 아들은 군대 가서 아픈 게 아니라 가기 전부터 아팠어요. 제가 아들에게 말했어요. "엄마가 공인이니까 엄마 때문에 네가 억지로 결정하지 마라. 아프면 순리대로 하자. 그에 맞는 법과 제도가 있으니 솔직하게 아프다고 말하고 그렇게 하자"라고요. 그런데 오히려 아들이 "대한민국 사회에서 군대를 안 가면 엄마한테 시빗거리가 만들어질 것 같다"며 입대했거든요. 정치를 하다 보니 가족의 건강에 신경 쓸 수가 없었어요. 그런 와중에도 스스로 잘 자라주고 엄마 생각해서 아픈 다리를 이끌고 군대까지 갔는데 그런 일이 생겼으니 기가 막힐 노릇이었지요. 제가 병원을 데리고 가줍니까. 먹는 거라도 제대로 챙겨줍니까. 저는 아들에게 항상 미안해요.

 

p77. 겂없는 초등학생

 

추미애 : 제가 1958년 개띠잖아요. 1965년도에 초등학교에 입학했어요. 그 시절 대구도 모두가 가난했어요. 학교 담벼락에 천막집이 다닥다닥 붙어 있었고, 여름엔 검은색 팬티 같은 내의만 입고 학교에 오는 아이들도 많았습니다. 가난이 일상이었지요. 그러나 그때는 가난이 창피한 것도 두려운 것도 아니었어요. 모두가 가난했으니까요. 5학년에서 6학년 올라갈 무렵인 1970년 초반까지 가난의 풍경은 거의 변하지 않았어요.

 1970년도에 6학년에 올라갔어요. 배정된 반을 찾아갔더니 먼저 온 아이들이 모여서 담임선생님 흉을 보는 거에요. "아, 우리가 선생님을 잘못 만났다. 선생님은 부자 아이들만 좋아한다. 학부모에게 촌지를 받고 성적을 높여준다. 이 선생님한테 과외를 받지 않으면 성적을 잘 받을 수가 없다." 뭐 이런 내용이었던 것 같아요. 그 이야기를 듣고 저는 제자리로 갔어요. 누군가 "선생님 온다"라고 하니까 아이들도 후다닥 자리로 가 앉았어요. 그런데 선생님 얼굴이 무척 화가 난 표정이었어요.

 담임선생님이 들어오자마자 "누가 나를 흉봤어? 당장 나와!"라고 소리치니 아이들이 쥐 죽은 듯이 조용하잖아요. 그런데 선생님이 제일 앞에 앉아 있던 아이를 일으켜 세우더니 토끼귀 잡듯이 왼손으로 귀를 잡은 채 오른손으로 아이가 기절할 정도로 막 때리는 거에요. 다른 아이들은 겁에 질려 있었고요.

 선생님이 분을 삭이지 못한 목소리로 "앞으로 너희 같은 놈들은 안 가르쳐. 싫으면 다 나가" 그러는 거에요. 그때 저는 그 선생님한테 더는 배울 것이 없다고 생각했어요. "나가!"라고 하는데 아무도 안 나가면 선생님은 자신이 옳다고 생각할 것 아니에요? 전 그걸 받아들일 수가 없는 거에요. 새로 받은 교과서를 가방에 탁탁 집어넣고 교실 밖으로 나가버렸어요.

 

p100

 전두환 시절이었어요. 1985년 제 첫 부임지는 춘천지방법원이었고요. 그 이듬해인 1986년 10월 28일 대학생 1,500여 명이 참가한 건국대학교 점거농성 사건이 있었습니다. 구속된 학생만 1,000여 명이었고 그 중 400여 명이 국가보안법과 집시법으로 기소되는 상황이 벌어졌어요.

 이른바 불온서적 압수수색이 전국적으로 일제히 시작되었어요. 판사들이 차례로 당직 근무하면서 영장업무를 맡았어요. 사건 관련 검사가 춘천의 제일 큰 서점인 '청구서점'에 대한 압수 수색 영장을 청구했는데, 저는 그 영장청구서를 읽으면서 가슴이 꽉 조여왔습니다.

 압수수색 목록이 기가 막혔어요. 리영희의 <전환시대의 논리> <8억인과의 대화>, 김대중의 <옥중서신>, 조세희의 <난장이가 쏘아올린 작은 공> 등이었는데 왜 이 책을 압수수색하는지 이유를 모르겠더라고요. 국민을 바보로 아는 건가 싶었어요. 영장청구 사유가 경범죄 처벌법상 '유언비어 유포'라가 되어 있었어요. 근거도 없고 법적 정당성도 없었지요. 어떻게 하면 좋을지 고민했어요.

(영장청구, 기각할 생각이셨나요?)

 네, 그렇지요. 어떤 논거로 기각할지 궁리했습니다. 그냥 기각하면 공안정국 분위기로 저를 몰아세울 게 뻔하니 반박하기 어려운 논리를 세워야 했어요. "국민의 알 권리는 헌법상 보장된 기본권이다. 경범죄 처벌법에도 이 법을 남용하여 기본권을 침해해서는 안 된다는 남용 금지 조항이 있다. 영장청구서에는 혐의 사실에 대해 구체적으로 밝히지 않았다. 책을 유언비어라고 볼 근거 자료도 없다." 이것이 제 논리였어요.

 사실 그 다음 일이 경악스러웠어요. 알고 보니 전국 법원에 같은 영장이 접수되었는데 모두 영장이 발부되었더라고요. 저 혼자서만 기각한 거지요.

(무섭지 않으셨어요?)

 두려움보다는 부끄러운 판사로 남지는 않게 되었구나 하고 가슴을 쓸어내렸어요. 그렇게 써놓은 건 그다음 당직 판사가 그걸 참고해서 영장청구 근거로 삼으라는 뜻도 담겨 있었지요.

 (아, 또 다른 영장이 접수되면 기각의 근거로 쓸 수 있는 논리를 남긴 것이기도 하군요.)

 네, 그런데 다음 날 당직 판사에게 전화가 걸려왔어요. 기각된 영장이 다시 접수되었다고요. 기각된 영장을 재청구하려면 지적된 사항을 보완해서 제출해야 해요. 그런데 검사가 마치 처음 청구하는 것처럼 만들어 영장을 접수시켰어요.

(속인 거네요)

 그렇지요. 형사소송법 절차를 무시하고 법원을 속인 겁니다. 이걸 이상하다고 여겨 당직 판사가 확인차 전화를 건 거였는데 결국 그분은 공안정국의 힘에 밀려 영장을 발부할 수밖에 없었다고 해요. 결국 제 뜻대로는 안 되었지만 당시 법원장님은 그 이후로 저를 진지하게 대해주셨어요.

 

p180. 문재인과 추미애의 인연

 

 문재인 대통령은 2012년 대선후보 경선과정에서 만나게 되었습니다. 그때 제가 '민주통합당 대선후보 경선준비 기획단장'이었는데 경선 규칙을 정하려고 후보들 의견을 듣기 위해 한 분씩 만나게 돼요. 손학규, 문재인, 정세균 세 후보 중에 문재인 후보를 가장 마지막에 만났어요. 문재인 후보는 선하고 지성이 넘치는 온화한 풍모셨지요. 수고 많다고 덕담을 먼저 거네시더라고요. 그러면서 본인은 어떤 규칙이라도 상관없다. 당이 하나로 모였으면 좋겠다고 하시면서 경선 과정에서 서로 상처되는 말을 주고받게 되면 응어리지지 않을까 염려를 많이 하셨어요.

 "반민주 세력에게 또다시 정권을 내준다면 불행한 일 아닙니까"라고 결의에 차서 말씀하셨어요. 내부 논란과 분열을 걱정하시면서 "당내 경선이 자칫 네거티브로 흐르면 본선보다 힘들어집니다. 오히려 본선에서는 국민들도 이명박 정권을 끝내야 한다고 생각할 것이기 때문에 단합이 될 수 있어요. 잡음 없이 당내 경선을 치르는 것이 매우 중요합니다. 그러니 경선 규칙에 대해서는 당에 모두 일임하겠습니다"라고 말씀하셨어요. 통 크고 대범한 모습을 보여주셨지요.

 2012년 대선 당시 역할은 국민통합위원장이었습니다. 당시에 캠프가 여러 갈래로 나뉘어져 있었는데 그러다 보니 국민 통합이 대단히 중요한 사안이었고 문재인 후보가 직접 국민통합위원장에 윤여준 전 장관 등 보수 쪽에서 건너오신 분들도 공동으로 참여지시자고 했습니다. 저는 유세 일정을 짜서 전국 유세를 다녔습니다.

 선거운동 마지막 날까지 밤늦게 유세를 마치고 기진맥진햇 서울로 올라왔는데, 결국 패배결과를 보고 실망이 컸지요. 그때 우리 쪽 패착이 뭐냐 하면 선거를 지휘해야 할 당의 중심이 흔들린 거예요. 마지막에 당 안팎에서 문재인, 안철수 후보단일화를 위해 지도부 총사퇴를 해달라고 했어요. 그 당시 이해찬 대표와 제가 최고위원이었는데, 지도부 전원 사퇴를 하게 되니까 당이 선거지원을 제대로 못 하는 거예요. 제가 국민통합위원장이 되어 전국을 다녀보니 공조직은 대부분 팔짱만 끼고 있더라고요. 매우 안타까웠습니다. 선거에서는 당 중심으로 당원과 지지자가 후보를 알리고, 일사분란하게 움직이는 것이 절대적으로 중요하다는 것을 절감한 거지요. 2018년에 문재인 대통령께서 이해찬 대표가 중간에 사퇴해서 2012년 선거에 패배했다고 말씀하시기도 했어요. 그만큼 당의 중심을 바로 세우는 것이 매우 중요했던 것입니다.

(2017년도 대선에서 당 중심 선거를 치러낸 이유가 그런 뼈아픈 경험에서 우러나온 것이군요)

 2012년의 경험이 큰 교훈이 되었지요. 박근혜 대통령 탄핵으로 조기대선을 치루게 되어 선거 준비기간이 짧았던 상황에 차질 없이 정권교체를 완수해야 하는 막중한 입장이었습니다. 그럼에도 처음부터 끝까지 당 중심 선거를 실현해냈어요.

(2012년과 2017년 대선 사이인 2015년에는 전당대회가 있었습니다. 그때 문재인 후보와 박지원 후보의 대결이 첨예했지요. 그 선거가 끝나고 지명직 최고위원이 누가 되는지 모두 궁금해 했는데, 당대표로 선출된 문재인 대표가 뜻밖에 추미애 의원을 지명직 최고위원으로 임명하셨어요)

 사실 처음에는 더 좋은 분을 모셨으면 좋겠다고 사양했습니다. 나중에 들어보니 누군가 문재인 대표에게 저를 강력히 추천했다고 해요. "정치를 몇 선을 하는 동안 처음과 같은 자세로 변하지 않는 유일한 사람이 추미애다. 지명직 최고위원을 시키면 상징적인 의미가 클 것 같다. 여성으로서 통합과 개혁의 이미지가 있고, 여러 세력을 하나로 아우를 수 있는 상징성을 갖고 있다"는 이유였다고 들었어요. 과분한 추천이었습니다. 그래서 저도 선거에서 진 후 생겨난 패배주의를 극복하고 당의 분열을 막기 위해, 반드시 문 대표를 도와서 다음 대선에서 이기겠다는 각오를 세우고 최고위원 지명을 따르게 되었습니다.

 

p193. '의혹'이라는 이름의 인권유린

 (청문회 과정에서 아들 병역 문제가 불거졌어요. 예상하셨나요?)

 전혀 예상하지 못했어요. 병역문제의 경우 대체로 병역 이행 여부를 따졌으니까요. 병역기피 사실이 없으니 생각하지도 않았지요. 예상 질문에도 없었고요.

 청문회 당일에 관련 질문이 나왔을 때 대수롭지 않게 생각했어요. 준비한 자료 중에 진단서 등 증명할 수 있는 것들이 충분해서 덤덤하게 사실 그대로를 말했지요.

 (그런데 문제가 커졌잖아요. 언론이 대서특필하면서 판이 달라졌어요)

 언론의 테러였엉. 교수님과 대담하는 이 순간에도 <문화일보>는 '오후여담'이라는 칼럼(2021.5.6)에서 '공인 의식 파탄자들'이라는 제목으로 문재인 정부의 인사정책을 공격하며 "추장관 아들 탈영의혹"이라고 썼어요. 만기제대한 아들에게 탈영이라 하니 어처구니가 없죠. '의혹'만 붙이면 빠져나갈 수 있다고 생각하나 봐요. 이건 언론이 아니지요. 테러 그 자체에요.

 (언론이 그야말로 공개처형장이 되버렸어요. 무허가 재판을 벌이고 낙인찍어 죄인으로 만들어버리는 겁니다. 인권유린도 이런 인권유린이 없습니다. 조국 전 장관의 경우에는 입시 문제, 추미애 장관의 경우에는 군대 문제를 꺼내, 대한민국에서 보통 사람들이 가장 민감하게 느끼는 덫을 놓은 셈이었어요. 병역기피 사실은 없으니까 군대에서 특권을 누렸다는 식으로 부각했지요)

 처음에는 대응할 가치를 못 느꼈어요. 진실이 너무 확실하니까 저러다 말겠지 생각했어요. 문젯거리가 없으니까요. 그런데 언론은 사실에 관심이 없는 거에요. '의혹'이라고 빠져나갈 단어를 붙인 다음 일방적으로 매도하더군요. 공인은 그런 근거 없는 의심도 문제제기 차원에서 받아들여야 한다는 식이었어요.

 (언론이 아니라 정치공작이라고 할 수 있지요. 방향과 목적을 정해놓고 그걸 이루기 위해 모든 수단을 동원하는 겁니다. 이런 식의 언론은 저널리즘의 본령과 완전히 배치됩니다. 언론이 이렇게 타락하고 부패해버린 현실에 대해 깨어 있는 시민들은 분노를 금치 못하고 있어요)

 그 과정에서 누군가는 엄청난 고통을 겪게 되는 거지요. 가장 기본적인 인권이 무너져요. 방어권을 박탈해버리는 건데. 우리 언론의 현실은 그런 점에서 너무나 처참한 지경입니다.

 (그런 적대적 환경을 뚫고 나아가야 했던 거지요. 그런 과정을 거치면서, 미처 예상하지 못했지만 확실히 보게 된 것들이 있다면 무엇일까요?)

 언론개혁의 필요성을 뼈저리게 느꼈지요. 언론이 하도 크게 부풀려서 아들 병역 문제를 청문회에서 중요하게 다뤘다고 생각하는 분이 많겠지만, 정작 아들 문제는 청문회 현장에서 큰 문제가 아니었어요. 그보다는 제가 낙선한 후 남은 정치자금을 어떻게 처리했느냐, 횡령한 것 아니냐는 문제가 제기되었어요.

 하도 오래된 일이라 횡령이 아니라고 입증하는 증거를 확보하는 데 애먹었어요. 15~16년 전 일인 데다가 액수가 1억 원이나 되었어요. 하지만 결국 입증해냈습니다. 한국백혈병어린이재단과 한국심장병재단에 각각 5,000만 원씩 기부했는데 그 증명 자료를 찾았습니다. 해당 단체에 가서 기부금 영수증을 받아오니까 저를 어떻게 해보려 한 이들이 뻘쭘해졌지요.

 (그런 일은 언론이 보도를 안 해요. 일단 목소리를 크게 해서 상당히 문제가 있는 것처럼 만들어버리는 거지요. 그렇다면 아들 병역 논란은 어떻게 점점 커졌나요?)

 청문회 때 그 문제가 본격적으로 제기되었으면 진단서 등으로 다 해명했을 거예요. 그런데 해명할 기회를 안 주는 거지요. 처음에는 그냥 지나가나 보다 했어요. 그런데 청문회가 끝나고 나니까 법사위 간사인 김도읍 의원이 주도하여 자유한국당(현 국민의힘) 이름으로 고발했어요.

 다 해명된 사안을 고발하니까요. 청문회 때 아들 병역 문제는 가벼운 질문 정도로 나와서 제가 충분히 답변했거든요. 아들이 원래 다리가 아팠었고, 군 복무 중에 수술이 필요해서 절차를 밟아 병가를 얻어 치료를 받았다. 그런데 추가치료가 필요한 상황에서 병가 연장이 안 된다고 하니, 방법을 찾아보다가 개인 휴가를 쓰면 된다고 해서 절차대로 추가 치료를 받고 복귀한 뒤 만기 전역했다고 설명하는 것으로 끝났어요. 그날 본회의에서 공수처법이 통과됩니다. 그러니까 청문회가 진행되는 저녁 무렵에 공수처법이 통과되고, 별다른 심각한 질문 없이 서로 웃으면서 잘 끝났어요. 그런데 그다음 날 바로 고발 조치를 취한 겁니다.

(해명이 다 되었는데, 저쪽은 전혀 다른 생각을 하고 있었던 거잖아요)

 고성이 오가지도 않고 큰 한 방 자체도 없었어요. 그때 김도읍 의원이 야당 간사로서 제 검찰개혁 의지를 여러 차례 확인했고, 어차피 자기들이 반대한다고 임명을 막을 수 있는 것도 아니니 그렇게 나온 게 아닌가 싶었어요. 이후의 이야기지만, 법무부장관 재임 때인 2020년 4월에 채널A 사건이 터지면서 검찰이 엄청나게 흔들렸고, 제가 윤석열 검찰총장에 대한 수사지휘권을 발동하자 엄청난 반발이 있었죠. 바로 그런 상황에서 뜬금없이 아들 병역 문제가 재점화된 거예요. 병역 문제의 불씨가 꺼질까봐 계속 들쑤신 거지요.

 

p197. 인사혁신과 윤석열의 저항

 (채널A 사건이 터지기 전의 상황도 사실 윤석열 검찰총장의 입장에서는 상당히 불편했던 거 아닌가요?)

 그랬을 거예요. 1월에 대검 검사급, 검사장 32명의 인사를 단행했고요. 그때 이른바 '윤석열 사단'이 해체됩니다. 제 개혁 조치 가운에 첫 번째가 '검찰 인사 비정상의 정상화'였어요. 김영삼 대통령이 신군부 세력의 중심인 하나회를 척결한 일에 비교할 수 있겠네요. 2019년 여름, 윤석열은 검찰총장이 되자마자 박상기 법무부장관을 제치고 법무부 윤대진 검찰국장과 청와대 비서관을 시켜 기수를 무시하고 자기 쪽 사람들을 초고속 승진시켰습니다. 이른바 특수통 중심으로 검찰을 장악한 인사 전횡을 저지른 것인데, 그 여파로 70여 명이 검찰을 떠났어요. 그래서 '윤석열 사단'이라는 말이 떠돌았던 것입니다. 인사 정상화를 통해 이런 검찰 내 세도정치를 일차적으로 혁파한 거예요. 연달아 2월에는 중간 간부 인사까지 마무리지었어요.

 (윤석열 총장이 가만 있었을 리 없잖아요.)

 윤 총장은 추 장관이 법무부 인사 내용을 제대로 알 리 없다며 청와대가 배후 조정자라고 판단한 것이 한동훈 검사장의 녹취록에도 드러나지요. 인사발표 며칠 후인 1월 10일 검찰은 청와대를 압수수색해요. 청와대의 울산시장 선거개입 의혹수사를 한다며 대통령이 집무를 보는 청와대 여민관의 자치발권 비서관실에 영장집행을 시도했다가 8시간 만에 철수하는 수사활극을 벌였지요. 얼마나 기가 막힌 일인가요. 저는 인사 정상화를 위해 사전에 치밀하게 조사하고 연구해서 인사 조처했어요. 윤 총장은 청와대 압수수색 이후 곧바로 제 아들 병역 문제를 수사하기 시작했다고 언론에 흘립니다. 그런데 수사할 게 없거든요. 수사에 착수했으면 진단서를 보자고 하는 등의 조사과정이 있게 마련인데, 검찰이 실제로 진단서를 본 때가 8월이에요. 인사에 불만을 품은 윤석열 총장이 저를 겁박하고 여론을 조작하느라 언론 플레이를 했다고 밖에는 볼 수 없지요.

 (인사는 어떻게 한 겁니까?)

 검사장급 인사가 제일 중요하고, 그 다음 고검 검사급 인사를 하지요. 평검사 인사는 법적으로 일정이 정해져 있어요. 2월 첫째 주 월요일에 부임할 수 있도록 해야 하고, 그 10일 전에 인사안을 발표해야 합니다.

 (검찰개혁을 바라는 이들은 검찰의 지휘체계가 정상화될 것이라고 기대했지요. 하지만 청와대 압수수색, 추 장관 아들 병역 문제가 재점화되는 등 개혁에 저항하는 반격이 이어졌습니다.)

 2월에 청와대가 관련되어 있다면서 울산시장 선거개입 의혹사건을 만들고, 이어 유시민 노무현재단 이사장이 연루되어 있다면서 2020년 4.15 총선을 앞두고 신라젠 사건을 터뜨립니다. 한마디로 검찰이 정치공작을 했던 겁니다. 그에 더해 라임 사건을 수사하면서도 청와대 고위직과 여권 정치인들을 엮으려고 했던 것이 한참 후에 김봉현 전 스타모빌리티 회장의 진술로 다 드러나지요. 검찰이 수용자를 압박하고 회유해 사건을 어떻게 조작했는지 말입니다. 검사 술접대 사건이 폭로되었지만 연루된 검사들을 아무 문제 없는 것처럼 처리한 것과는 상반되지요. <뉴스타파>의 심인보, 김경래 기자가 쓴 <죄수와 검사>를 읽어보면 검사들이 사건을 어떻게 조작하는지 자세히 나와요. 당하는 쪽에서는 지옥이지요.

 라임 사건에서는 강기정 수석을 겨냥했고, 옵티머스 사건에서는 임종석 실장을 겨냥했지요.

 (정리하면 법무부장관으로 취임해 인사를 통해 검찰의 지휘체계를 정상화하자 반격이 계속되었던 상황이네요. 지휘체계의 정상화는 결국 인사에서 나오니까요. 조국 전 장관 때도 윤석열 검찰총장이 지휘체계를 교란해 장관을 흔들고 정치검찰의 결속을 다졌지요. 이른바 '검찰의 난' '검란' '검찰 쿠데타'라고 할 수 있는 움직임이 있었습니다. 군대의 쿠데타와는 달리 법과 제도의 영역 안에서 이뤄지기 때문에 일상에서 잘 감지되지 않아 '조용한 쿠데타(Silent Coup)'라고 불리기도 하는데, 국가권력의 핵심을 자신들이 장악하겠다는거지요. 심지어 대통령까지 제압하는 방식을 취합니다. 이를 민주적으로 통제하는 지휘체계를 확립해나가는 것이 검찰개혁의 핵심과제라고 봅니다. 윤석열 총장의 대선 등판은 검찰의 쿠데타를 정치적으로 완결하겠다는 수순으로 판단됩니다. 이를 한국 사회의 지배 카르텔이 합심해 밀고 있고요. 법무부장관 임명 직후부터 이런 엄중한 현실을 인식하셨다고 알고 있는데, 주변 사람들의 판단은 어떠했나요? 간극이 있지는 않았나요?)

 

p239

 수사와 기소를 분리시키면 수사정보를 쥐고 이상한 짓을 못 하게 할 수 있어요. 있는 사건 덮고, 없는 사건 만드는 구조가 깨집니다. "부패검사는 어제는 없는 사건을 만들어서 이름을 얻고, 오늘은 있는 사건을 덮어서 돈을 번다"라는 말도 있잖아요. 이걸 깨야 사법정의, 민생정의가 확보되지요.

 

p292

김민웅 : 그렇지요. 민생과 개혁을 분리하면서, 민생을 소홀히 하고 개혁에 집중했기 때문에 민생이 어려워졌다는 논리를 펴는 것인데, 그건 개혁과 민생이 하나라는 걸 부인하는 것입니다. 개혁의 목표는 민생입니다. 과학기술의 해법에만 집중하다 보면 생태환경에 치명상을 입히는 것처럼, 개혁 없는 민생을 말하면 기득권이 장치해놓은 덫에 걸린 민생의 현실이 보이지 않게 되지요.

추미애 : 저는 개혁과 민생을 별개로 나누는 이분법은 신자유주의적 계략이라고 봅니다. 시장을 지배하는 세력의 계략이지요. 그들은 "개혁은 정치 주제이고 민생은 경제 줒다. 정치가 개혁을 명분으로 경제를 간섭하고 위축시킨다. 따라서 정치와 경제를 분리하고 정치가 경제를 간섭하지 못하도록 하는 작은 정부여야 한다. 정치인은 경제에 무식하고 무능하다"는 논리를 자꾸 퍼뜨리고 주입시킵니다. 정치의 힘을 빼고 자본에 대한 간섭을 못 하게 만들려는 의도입니다.

 

p302

추미애 : 김 교수님의 진단이 바로 현실이에요. 비교적 돈에 덜 쪼들리는 중산층도 자신들의 노후나 자녀 결혼 등을 위해 돈을 불려보려고 주식투자하다가 금융자본 기득권 세력의 먹잇감이 됩니다. 거기에는 또 검피아가 역할을 하지요. 라임이나 옵티머스 사건 같은 경우도 관피아,모피아,검피아가 합세해서 일반 투자자들에게 막대한 피해를 입힌 금융사기 사건이거든요. 이런 금융시장 교란 행위를 바로잡으라고 검찰조직에 증권범죄합동수사단을 만들었던 것인데 거기가 오히려 범죄의 온상이 되어버린 거예요.

김민웅 : 그래요? 그런데 언론을 보면 증권범죄합동수사단이 폐지되어 금융범죄를 신속하게 수사할 수 없다고 비판하잖아요?

( https://www.asiatime.co.kr/article/20210901500321?1=1 , 추미애 장관이 폐지한 증권범죄수사단은 현재 다시 설치됐다)

추미애 : 지난해 초 검찰 조직을 개편할 때, 증권범죄전담수사 기구 자체를 없앤 건 아니었어요. 서울 남부지검의 증권범죄합동수사단 대신 금융조사 1,2부가 금융 증권범죄를 전문적으로 수사하도록 하면서 기존 합동수사단의 카르텔을 허물려고 한 것이지요. 다만 그들이 마치 법무부가 정권수사를 못 하게 하기 위해 증권범죄합동수사단을 폐지한 것처럼 왜곡 주장하는 이유는 그들만의 부패 특권 카르텔을 다시 부활시키고 싶다는 의도예요. 부활시키기 이전에 특권 카르텔을 깨는 장치가 있어야 합니다.

김민웅 : 증권범죄합동수사단은 금융시장 질서 교란을 막기 위해 절대적으로 필요한 조직이라고 사람들이 이해하고 있지 않습니까?

추미애 : 잘 알려지지 않아서 그렇지 비리의 온상이 되었어요. 여러 차례 주가 조작으로 재벌이 된 전관변호사 박OO과 거물사기꾼인 증권자 대표 유OO이 있었어요(http://www.newsfreezone.co.kr/news/articleView.html?idxno=241577, 이 링크를 보면 누군지 알 수 있다).

박 변호사와 유 회장은 저축은행 '상상인'의 대주주이기도 한데, 상상인에서 대출받은 돈으로 '기업사냥'을 해요. 그리고 그 기업에 관한 허위 정보를 흘려 주가 조작을 하고 주가가 올라가 최고점을 찍을 때 주식을 팔아치우는 거지요. 그런 먹튀 수법으로 엄청난 돈을 벌었어요. 전관변호사 박OO은 곧 재벌변호사라고 알려졌지요. 그들이 단숨에 수십, 수백억 원을 가로채는 동안 허위정보를 믿고 투자에 뛰어든 수많은 서민들은 주식이 하루아침에 휴짓조각이 되어 막대한 피해를 입었습니다. 그런 식의 범죄 행각은 2015년부터 2018년 사이에 이루어졌는데, 무려 10개의 회사를 기업사냥했어요. 상상인의 돈이 어느 기업에 멀쩡하게 투자된 것처럼 속이면 주식 가격이 치솟아 고점에 이르렀을 때 팔아치우지요. 그들은 사냥한 기업의 경영에는 애당초 관심이 없었기 때문에 해당 회사자금도 횡령해 부도를 내고 멀쩡한 기업을 고사시켰습니다. 공장 가동이 멈추면서 대량해고가 일어나기도 했습니다.

 자본시장을 어지럽히고 기업을 고사시킨 이 사건들을 관할했던 서울 남부지검 증권범죄합동수사단은 초창기부터 제대로 수사하지 않았어요. 그래서 피해규모와 금액, 피해자의 수가 막대하게 커졌습니다. 2015~2016년 증권범죄합동수사단장은 김OO 부장검사였어요(https://www.mk.co.kr/news/special-edition/view/2015/05/518373/).

 

[토요 FOCUS] 서울남부지검 라인업…문찬석 차장 끌고 김형준 부장 밀고

서울남부지검이 금융·증권범죄 중점 수사청으로 거듭나면서 검찰 내 위상이 한층 높아졌다. 검찰은 몸집이 커진 남부지검 조직에 2차장검사를 신설했다. 1차장검사가 기존 형사1~4부를 담당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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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는 과거 법무부장관을 지냈고 골프장 성추행사건으로 유명해진 전 국회의장의 사위이기도 하지요(https://www.mk.co.kr/news/special-edition/view/2015/05/518373/).

나중에 알고 보니 어이없게도 김 부장검사가 전관변호사 박OO의 범죄를 제대로 수사할 수 없는 처지에 놓여 있었어요. 그는 감옥에 있는 자신의 동창생이자 친구의 뒤를 봐주면서 뇌물도 받았는데, 나중에 뇌물 받은 것이 들통나자 이를 무마시키는 데 필요한 비용을 박OO 변호사가 대주었습니다. 이미 박 변호사의 비리에 대해 수사를 할 수 없을 정도로 엮여버린 것이지요. 현직검사와 전관변호사의 부패로 초기에 금융비리를 막지 못하는 바람에 유사한 피해가 반복 확대된 것입니다.

 나중에 증권범죄합동수사단에서 금융을 잘 아는 수용자를 활용해 불법수사를 했다는 것도 함께 드러났어요. 검사실에 출정시켜 수용자에게 감방을 벗어날 수 있는 편의를 제공하면서, 범죄정보를 얻고 수사표적이 된 수용자의 자백을 유도하는 심부름도 시키고 별건수사를 한 것도 드러났어요. 최근에도 라임 사건에서 김봉현 씨가 66회나 검사실로 불려 다니면서 라임 사건 수사와는 관계 없는 정치권 인사를 대라는 회유를 당했다고 폭로했지요. 검찰은 그런 버릇을 여전히 버리지 못하고 있습니다.

김민웅 : 듣고 보니 더 기가 막히네요. 전쟁이나 전염병으로 민생이 어려워지면 사람들은 정치적 메시아를 찾는 심리에 빠지게 됩니다. 그런 심리적 불안과 공황상태를 이용해 파시스트가 등장한 역사가 있었고 이들이 민주주의의 위기를 초래했지요. 우리도 경제 전문가에 대한 환상으로 이명박을 압도적으로 지지해 대통령으로 선출했고, 지금은 정치검사 윤석열 총장에 대한 환상을 여론으로 부추기고 있지요. 윤석열 총장은 대권수립용으로 속성 과외도 받고 심지어 금융전문성이 있다고 주변에 알리고 있기도 합니다.

추미애 : 경제범죄 전문가라고 하면 모를까 금융사건 수사 경험을 가지고 경제 전문가라고 할 수는 없지요. 금융범죄 전문가라고 하기도 그런 것이 윤석열 전 총장이 서울중앙지검장으로 재직할 때 옵티머스 펀드에 투자했던 정부기관인 전파진흥원이 수사의뢰를 요청했어요. 그런데 당시 중앙지검은 김재현 옵티머스 대표 등에게 무혐의 처분을 내렸어요. 무혐의 처리했던 부장검사가 윤 총장 청문회에 관여했고 이후 핵심보직으로 이동했지요. 옵티머스 변호인도 검찰총장과 긴밀한 관계에 있었던 유명 변호사였어요. 그런데 서울남부지검에서 옵티머스가 투자자금을 횡령했다고 기소했거든요. 만일 중앙지검에서도 무협의로 하지 않고 제대로 기소했었더라면 초기에 큰 피해를 막을 수 있었을 것입니다. 왜냐하면 검찰이 무혐의로 처리해준 이후 마사회나 한국전력 등 공기업도 믿고 투자를 하고 민간투자도 뒤따라 급증하면서 투자금액이 1조 5,000억 원에 이르렀지요.

 옵티머스 자산운용의 금융범죄 진화과정을 살펴보면 기업 편법탈취와 기업사냥이 진행되는 동안, 금융검찰이라 할 금융감독원이 제대로 감독하지 않은 것, 그 위에 모피아라는 금융관료들의 막강한 로비가 있었던 것이지요. 검찰, 법원 등의 수사,기소,재판 단계에서는 전관변호사들의 로비가 이루어진 것인데, 대형 로펌을 중심으로 단계적,체계적으로 이루어진 것임을 알 수 있습니다. 이것이 우리 사회의 가장 지능적 특권층인 최상위 포식자들의 모습이에요. 그런데 3,000억 원 정도는 흔적도 찾지 못했습니다. 이 거대한 규모의 범죄를 누가 설계한 것인지, 전파진흥원이 수사 의뢰할 때도 680억 원 상당을 수사의뢰했는데 중요 사건으로 보고되지 않았던 경위 등도 조사되어야 한다고 봅니다.

김민웅 : 금융시장이 그런 식으로 비리와 범죄의 복마전이 되기도 합니다. 금감원과 검찰이 제 구실을 하기는커녕 범죄를 키운 것 아닙니까.

추미애 : 금융산업을 보호하는 목적은 민생을 윤택하게 하려는 것이잖아요. 그런데 우리 사회 특권 카르텔이 금융산업을 이용해 민생을 고사시키고 있어요.

 

p309

 예를 들어 아파트 1층과 2층 사이의 콘크리트를 21센티미터는 유지해야 층간소음을 줄일 수 있다고 가정하면, 거기서 콘크리트 1센티미터만 줄여도 남는 돈이 어마어마해요. 그 돈이 부패자금으로 조성되는 거고요, 피해는 고스란히 소비자인 입주민들의 몫이고, 그로 인해 이웃 사이에 살인사건까지 일어나기도 하는데, 지금 그걸 누가 감시하고 따지고 처벌하나요? 검찰권력도 이를 봐주면서 부패와 비리의 고리가 서로 짝짜꿍이 되어 손잡고 돌아갑니다. 이명박 정부가 그랬고, 그 휘하에서 큰 검찰이 그 맛에 푹 빠져 성장했고, 그게 오늘날 정치검찰의 물적,정치적 토대가 되었어요. 바로 그게 '스폰서 검사' 문화지요. 스폰서를 둔 검사. 그러니까 부패검사를 말하는데 김학의 전 법무차관 성접대 사건도 건설업자 윤중천이 김학의 스폰서였고, 부산 LCT 비리 사건의 이영복 회장도 검사들의 스폰서였지요. 그래서 김학의 전 법무차관 사건도, LCT 특혜분양 사건도 수사나 기소가 제대로 되지 않았던 것입니다. 윤석열 총장이 "이명박 시절이 제일 쿨했다"고 한 말이 그냥 나온 게 아니라고 봐요. 노무현 대통령은 그런 특권에 온몸으로 저항하고 개혁하려 하시다가 이명박 집권 시기에 대검의 정치공작에 몰려 죽음에까지 이르신 거 아닙니까. 이런 뿌리를 잘라내야 해요. 타워크레인에서 사고가 일어나도 그저 기계조작 잘못, 개인의 잘못, 과실치사, 그것도 업무상 과실치사라고 덮어버립니다. 그러니 검찰의 수사방해, 감찰방해는 그들의 입장에서는 절박했던 거지요. 죄가 다 드러나게 생겼으니까요.

 

p379

김민웅 : 정치지도자는 때로는 국민에게 "이건 아닙니다. 이렇게 생각해야 하지 않을까요?" 라고도 할 수 있어야 하지 않나 싶습니다. 잘난 척하고 가르치려 들기보다는 관성에 빠진 의식에 도전하능 의미로 말이지요. 극작가 출신으로 체코 대통령이 된 하벨은 과거 스탈린주의 정치의 잘못은 체코 시민들에게도 책임이 있다고 말했습니다. 표를 얻어야 하는 정치인으로서는 하기 어려운 말인데, 하벨은 "정치란 진실과 양심을 본질로 삼아야 한다"라고 했어요. 그래야 힘을 합쳐 어두운 베일을 거둘 수 있다고 믿은 거지요. 앞서 언급한 아렌트는 <어두운 시대의 사람들>이라는 책에서 로자 룩셈부르크, 칼 야스퍼스, 발터 베냐민 등 고통을 견디고 어둠을 뚫고 나간 이들의 의식세계를 조명합니다. 기존의 교육과 언론이 왜곡시킨 현실인식의 지층이 너무 두터울 때 용기를 내서 긍정할 것은 긍정하고 부정할 것은 부정해야 하지 않을까 하는 거지요.

 

 

 얼마전에 읽었던 김경수 도지사의 '사람이 있었네'도 그렇고, 한명숙 총리의 '한명숙의 진실'도 그렇고 정치인이 쓴 글은 대부분 정치 섹션으로 분류되는데 난 그것이 마뜩치 않다.

 내용을 보면 이것은 에세이로 분류하는 것이 마땅하다. 정치적 어젠다를 다루는 책들과 달리 이것은 한 개인의 소회와 경험을 쓴 책이기에 더욱 그렇다.

 

 이 책의 마지막 장을 덮으면서 문득 그런 생각이 들었다.

 한국인은 한(恨)의 민족이라고 한다. 전통 민요의 구슬픈 곡조도 그렇고 우리 민족의 내적 정서에는 '恨'이라는 것이 내재되어 있다. 이러한 '恨'의 정서의 배경에는 사회의 부조리가 담겨있다고 나는 생각한다.

 시대와 역사의 흐름에 따라 부당하게 민초의 삶이 일부 기득권에 의해 좌지우지되어 왔던 시절, 그 부당함은 풀길이 없는 원(怨)이 되고 그러한 怨이 쌓이고 쌓여내려오면서 한민족에게는 恨이라는 고유의 정서가 생겨나게 되었다. 

 민주화 시대에 더 이상 이러한 怨이 쌓여 恨이 우리의 가슴속에 응어리지는 역사가 되풀이되는 일만은 없어야겠다라는 생각이 든다.

 

 

교보에서 도서 분류는 정치,사회로 되어 있지만, 사실상 내용은 에세이다. 단지 그 내용에 노무현 대통령과 봉하마을에 대한 이야기와 김경수 도지사의 정치관에 대한 것이 포함되기 때문에 정치로 분류했을 것이다.

 

김경수 도지사가 이번에 네이버 포탈에 대한 영업방해라는 죄로 2년형을 선고받고 구속됐다.

그가 구속된 이유는 그가 가진 정치적 자산 때문이다. 노무현의 마지막 비서관, 문재인의 전폭적인 신뢰를 받고 있으며, 노무현을 존경하는 일반 국민들 사이에서 차기 대권 주자로 인정받는 인물.

기득권의 입장에서 보면 가장 무서운 존재다(이런 비슷한 정치인들이 몇 명 있는데 몇 년 사이에 전부 감옥에 가거나, 가족인질극을 당하고 있거나, 사망하거나 했다).

그러니 무리하게라도 정치적 생명을 끊어둘 필요가 있었던 것이다.

형집행 이후에도 5년간 선거권이 박탈되기 때문에, 그가 정치권으로 복귀할 수 있는 시점은 2028년이나 2029년이 될 것이다. 1967년 생인 그가 환갑이 넘어서야 복귀할 수 있을 것이다.

앞으로 7,8년 후에 대한민국의 정치지형이 어떻게 변할지는 알 수 없지만, 그때는 현재보다 훨씬 큰 인지도를 가진 인물로 되돌아 올 가능성이 높다.

 

2년의 기간동안 몸 건강히 돌아오시길 바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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p184.  이것 또한 지나가리라. 

-랜터 윌슨 스미스-

 

어늘 날 페르시아의 왕이 신하들에게 

마음이 슬플 때는 기쁘게

기쁠 때는 슬프게 만드는 물건을 

가져올 것을 명령했다.

 

신하들은 밤새 모여 앉아 토론한 끝에

마침내 반지 하나를 왕에게 바쳤다.

왕은 반지에 적힌 글귀를 읽고는

크게 웃음을 터뜨리며 만족해했다.

반지에는 이런 글귀가 새겨져 있었다.

'이것 또한 지나가리라.'

 

슬픔이 그대의 삶으로 밀려와 마음을 흔들고

소중한 것들을 쓸어가버릴 때면

그대 가슴에 대고 다만 말하라.

'이것 또한 지나가리라.'

 

행운이 그대에게 미소 짓고 기쁨과 환희로 가득할 때

근심 없는 날들이 스쳐갈 때면

세속적인 것들에만 의존하지 않도록

이 진실을 조용히 가슴에 새기라.

'이것 또한 지나가리라.'

 

 

무라카미의 장편소설 중 유일하게 보다 말았던 작품인데, 도서관에서 하드커버의 양장본을 보고선

이번 기회에 읽어봐야겠다라는 생각으로 빌려서 읽기 시작했다.

읽기 시작하고 얼마 안돼서 왜 여태 이 작품만 읽어보지 않았을까 하는 걸 깨달을 수 있었다.

재미가 없었다. 2주간에 걸쳐서 겨우겨우 꾸역꾸역 읽어나가고 말았다.

결말은 마음에 들지 않는다. 소설 전체적으로 두근두근함이라든가 힘이 잘 느껴지지 않는다.

 

하루키의 작품은 확실히 상실의 시대 이전과 이후로 나뉘는 듯 하다.

 

 새로운 경제 생태계에서 대한민국은 이렇게 나아가야 한다라는 최배근의 방법론을 다루고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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p21

 유럽연합은 한편으로 국경을 없애고 평화와 협력과 화합을 진전시켰지만, 다른 한편으로는 공공부문 축소, 해고, 긴축 경제, 기업의 자유를 방해하는 규제 철폐, 금융자본가들의 천국등 만인의 만인을 위한 무한경쟁의 유럽을 만들어냈기 때문이다. 즉, 협력이나 연대의 빈곤은 유럽연합의 구조의 취약성에서 비롯된 것이라는 점에서 유럽연합이나 유로존은 불완전한 통합체였다.

 

p35

 예를 들어, 의료 파업 와중에 SNS에 회자됐던 어느 의사의 글은 많은 국민을 아연실색하게 만들었다. 길지만 최대한 옮겨본다.

 

 곧 big5 병원 문 닫고 한번 지옥을 경험해볼 것이다. 우리나라 의료가 얼마나 좋았다는 것을... 너희가 의대 들어가는데 돈을 대주었냐? 의대등록금을 대주었어. 용돈을 주었어? 레지던트 수련 받을 때 월급 줬어? 병원 차리는 데 돈 보내줬어? 공공재? 공공재라고 하는 것은 육군사관학교처럼 등록금 다 대주고 학생 때부터 용돈도 주고 하는 사람들한테... 우리도 그렇게 했다면 그냥 찍소리 않고 따라가... 의료보험으로 해주었다? 의료보험 안 받고 우리 마음대로 가격 정하면 어떻게 되는지 알아? (...) 지금 얼마나 좋아? 그래도 정말 합리적인 가격에 좋은 의료서비스를 받고 있지 않나? 우리 의료수준은 세계 최고 수준이야. 그 밑바탕이 뭔 줄 아냐? 국민을 위하는 마음에 그렇게 된 것은 아니고, 최고로 똑똑한 아이들이 big5 병원 스탭으로 있으면서 피 터지게 경쟁해서 나는 2등을 해본 적이 없다는 알량한 자존심 때문에 이렇게 된거다. (...) 왜 국가가 의대교육부터 레시던트 수련, 병원 건립까지 하나 보태준 것도 없으면 xx인지. (...) 업무개시명령을 하고 법적 조치를 할려고 해? 안그래도 우리는 의료를 지킨다고 아무것도 안하고 있는 것이 마음에 계속 걸렸는데... 구속시키고 다 짤라... 상관없어 그래도 나중에 취직하고 일할 데 많아... 걱정하지 마라 기술직이거든...

 

 

 국가가 의사 교육, 병원 건립에 하나 도와준 것도 없이 왜 난리냐고 하고, 의료보험 안 받고 우리가 마음대로 가격을 정하면 어떻게 되는지 아냐며 협박을 한다. 이에 대해 국민은 이렇게 응답했다. "그래요. 그렇게 합시다. 의료보험 받지 말고 니들이 맘대로 정해서 받으세요. 그래서 떼돈을 벌어보세요. 대신, 국가는 이렇게 합니다. 의대 정원을 관리하지 말고 무제한으로 풀어 의사들을 무제한으로 배출하세요. 의대 교수들이 반발하면 외국에서 의사들을 교수로 초빙하고, 어느 나라든 의대를 졸업했으면 의사면허증을 줍시다." 전교 1등만 하고 빅5 병원의 의대교수가 된 분(?)이 의료서비스 시장에 대한 이해 없이 '시장 자유'를 외치고, '자유'라는 개념을 '내 맘대로'와 동의어로 이해하는 '전교 1등'의 수준을 확인하였다. 자신들의 기술(?)을 믿고 국민을 협박하는 '오만함'을 보고, 이들을 더는 '선생'으로 부르고 싶지 않다는 목소리까지 국민의 분노는 들끓었다. 그동안 '마취 후 성폭행하는 의사', '리베이트 받고 대리 수술을 맡기는 의사', '의료사고로 환자가 여러 번 사망했지만, 면허 유지하는 의사' 등이 일부 의사의 모습인 줄 알았는데 대부분 의사가 이를 옹호하는 것이 아니냐는 목소리도 대두되었다.

 의사 스스로가 자신들은 그냥 '천박한 엘리트' 중 하나에 불과하다는 이미지를 드러낸 것이다. 실제로 의사협회가 정부 및 여당과의 합의안에 서명하기에 이른 상황에서 대한전공의협의회(대전협) 지도부는 '건강보험정책심의위원회(건정심) 구조 개편'과 관련한 내용이 빠져 있다는 점을 문제 삼고 공공 의대 문제 등으로 파업을 하며 요구해온 것과는 완전히 결이 다른 건정심 구조 개편 문제를 꺼내듦으로써 의사들(대전협)이 국민 건강권을 볼모로 사익을 추구하는 싸움을 해왔다는 점을 노골적으로 드러냈다. 의사단체가 건정심 위원회 내 의사 위원 몫을 늘려서 의료수가 등 이익과 관련한 각종 현안 논의에서 우위를 점하고 한 것이다.

 이처럼 의료파업으로 드러난 의료진의 민낯은 우리 사회 시스템의 총체적 사망 신고를 보여준 것이다. 의사와 판,검사 등 전교 1등의 '엘리트 괴물'을 양산하는 학교교육시스템이 정통성이 없는 한국 사회 권위 체계의 중심에 있기 때문이다.

  

p136

 게다가 비정규직, 파견직 직원 중에 출근은 했는데 퇴근을 못하고 일터에서 목숨을 잃은 사람들, 이른바 산업재해(산재) 사망노동자의 수가 2018년 2,415명에 달할 정도로 OECD국가 중 대한민국의 산재사망률은 1994년 이후 통계가 제공되는 2016년까지 23년 동안 21회나 1위를 차지했다. 위험업무를 저임금 노동력으로 해결할 수 있기 때문이다. 재해를 낮춰 산재보험료를 감면받고, 이에 따르는 책임까지 회피해 비용을 절감할 수 있는 원청 기업의 이해에 따라 위험업무가 외주화되고 있다. 이러한 위험의 외주화는 수차례 하도급 단계까지 거치면서 노동조건을 더욱 열악하게 만들고, 특히 비용 절감을 꾀하는 하청 업체들이 숙련공이 아닌 초보 기술만 익힌 저임금 (간접고용) 노동자를 고용하면서 산업재해의 위험은 더욱 커지고 있다. 기업은 "중대재해처벌법 같은 처벌강화 입법보다는, 선진국처럼 사전예방 기조로 산업안전 정책을 전환해야 한다"고 주장하지만 비용 절감 때문에 위험을 외주화하는 원청 기업이 안전에 대해 투자하리라 기대하기 어렵고, 안전 투자를 할 역량이 없는 하청 업체에게 떠넘기면 노동조건만 악화될 수 있다는 점에서 설득력이 약하다. 기업의 목소리가 설득력을 가지려면 국가인권위원회가 2019년 10월 권고한 "위험의 외주화 개선, 위장도급(불법파견) 근절, 사내하청노동장의 노동3권 보장 등"을 수용해야만 한다. 국가인권위원회의 권고에 고용노동부 등 정부(기획재정부, 산업통상자원부,국토교통부,중소벤처기업부,과학기술정보통신부,농림축산식품부,해양수산부 등)가 소극적인 이유도 기업의 비용 부담을 고려하기 때문이다.

 

p162

 그런데 경제활동 지원서비스는 일정 규모 이상으로 성장하면 사회에 부정적으로 작용한다.

 미국의 의료서비스를 예로 들어보자. GDP 대비 미국의 의료서비스 시장 규모는 1970년 6.9%에서 2016년에는 17.9%로 성장했고, GDP 대비 미국의 건강비용 지출은 1960년 5.0%에서 2013년에는 17.4%로 지속해서 증가하였고, 미국민의 1인당 건강비용도 1970년 335달러에서 2018년 1만 1,172달러로 31배 증가하였다. OECD에 따르면 2018년 기준 미국 국민 1인당 연 의료비는 1만 586달러로 2위인 스위스의 7.317달러, 3위인 노르웨이의 6.187달러를 크게 앞지르고, 우리 나라는 3,192달러로 미국의 3분의 1 수준에 불과했다. 게다가 65세 노인인구 및 저소득층에 대해서는 메디케어와 메디케이드라는 공적 의료보장체계를 갖추고 있기는 하지만 (백인 중심 사회인) 미국은 '전국민 의료보장체계가 없는 유일한 선진국'이다. 즉 보험시장이 발달한 미국에는 일률적으로 규정하기도 어려울 정도로 다양한 방식의 민간 의료 보험이 존재하며 미국 전체 인구의 60% 정도가 이 같은 민간 의료보험에 가입된 것으로 알려졌다. 문제는 이들 보험의 대부분이 고용주를 통한 보험으로 '실업'에 매우 취약하다는 점이다. 즉 고용상태에서는 고용주가 보험료의 80%, 근로자가 나머지 20%를 각 부담하지만, 실업상태가 되면 고용주는 더는 이 같은 보험료를 부담하지 않는 것은 물론 근로자는 아예 해당 의료보험의 적용을 받을 수도 없다. 세계 최고 수준의 미국민 의료비 지출이 (기대수명이 OECD 국가 중 최하위 그룹에 속할 정도로) 건강 증대로 연결되지 않는 이유이다. 참고로 2017년 미국의 기대수명은 78.6세로 한국의 82.7세는 물론이고 그리스의 81.4세나 포르투갈의 81.5세보다 낮다. 코로나19 사태가 발발한 이후 3개월도 되지 않아 미국에서는 5,000만 명에 이르는 사람들이 일자리를 잃었다. 미국 의료보험체계 상으로는 민간 의료보험제도의 적용을 더는 받지 못하면서도 공적 의료보장도 받지 못하는 '무보험자' 숫자가 급증한 셈이다. 그러다 보니 코로나19에 감염되거나 감염이 의심되는 상황에서도 막대한 의료비용으로 인해 무보험자들은 이를 진단받거나 치료받는 것을 꺼리게 되고, 여기에 마스크 착용이나 사회적 거리 두기, 기본 위생 등에 철저하지 못한 사회문화적 분위기와 맞물려 코로나 사태가 최악으로 치달은 것이다. 문제는 코로나19 이후에도 미국은 근본적 변화를 기대하기 어려울 것 같다는 점이다. 코로나19를 겪으면서도 미국은 의료를 공공성의 관점에서 바라보기보다 여전히 산업과 서비스로 보는 경향에서 벗어나지 못하고 있다. 즉 미국은 자국의 정체된 의료산업 패러다임을 "원격 의료, 소셜 네트워킹, 실시간 커뮤니케이션, 예외적 의료 개입, 셀프서비스 진단 및 자가 관리, AI 및 정보 채팅봇, 유비쿼터스 접근법" 등을 통해 의료의 변화를 촉진하고 결국은 비용 증대를 수반할 수밖에 없고, 비용은 국민과 환자들에게 청구서로 돌아갈 수밖에 없으며, 결국 의료서비스의 사각지대는 구조화될 수밖에 없다.

 

p220

 1997년 11월~2018년 12월까지 공적자금지원 총액은 168조 7,000억 원이며 이 중 116조 8,000억 원이 회수되었다. 즉 회수되지 않은 돈이 약 52조 원이었다. 서민금융의 채무불이행율이나 채무불이행 금액 규모를 문제로 삼는 사람 중 기업이나 은행 지원에 문제 삼는 사람은 거의 없다.

 

p221

 지역공공은행은 중앙정부의 권한만 분산시키면 당장이라도 가능하다. 주요국들과 달리 중앙정부에 권한이 집중된 한국의 경우 지역공공은행 설립의 최대 장애물은 기재부가 가진 승인권이다. 중앙정부 독점권의 약화 때문에 민간 지역은행은 허용하면서 지역공공은행의 설립을 반대하는 것은 기득권 사수와 다름없다. 지역공공은행의 가능성과 필요성에 대한 논리는 다음과 같다. 국가의 조세권이 뒷받침되어 중앙은행이 발행하는 통화(신용)가 법정화폐가 될 수 있었듯이, 지방정부가 가진 조세권을 바탕으로 지역공공은행을 만들 수 있다. 즉 지방정부 및 지역주민의 출자금을 자본금으로 하고, 지자체 예산과 지역주민 예금으로 신용을 창조하며, 지역주민이 직접 관리하고 통제하면 중개수수료와 운용비용도 낮출 수 있다. 미국이나 유럽 등에서 지역공공은행이 뿌리는 내리는 이유도 신용평가 역량이나 운용비용 등에서 상업은행보다 경쟁력이 있기 때문이다. 무엇보다, 지역공공은행은 주민을 위한 공공사업, 예를 들어 사회적이고 공공적인 프로젝트에 자금을 공급함으로써 지역사회의 문제 해결과 혁신에 기여할 수 있을 뿐 아니라 지역의 금융 약자들을 위한 자금 수요에도 적극적으로 대응할 수 있다. 다시 말하자면, 지역공공은행의 장애물을 해결하려면 중앙정부의 허가가 필요하기에, 이는 결국 지방분권의 문제와 관련이 있는 것이다.

조국 장관이 법무부 장관에 오르고 난 후, 검찰과 언론의 잔혹한 사냥을 당했던 2년 간의 기록.

사법개혁의 당위성, 사법 기득권의 반발의 자세한 내막, 검찰과 언론의 막가파식 수사와 가짜뉴스의 공조를 통해

한 가정을 조리돌림하는 잔혹함을 담담하게(하지만 필자인 조국 장관 본인은 굉장히 고통스러웠을 것이다) 기술한다.

이 시대의 화두인 언론개혁과 검찰개혁에 대해 조금이라도 그 진상을 알고 싶다면 읽어보면 좋을 책이다.

중간 중간 가슴 아픈 이야기들도 많고, 사법개혁이 왜 필요한지에 대한 역사적 배경, 제도적 보완점 들을 대한민국 최고 전문가의 관점을 통해서 알 수 있는 좋은 기회이기도 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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p54

 필명 '이소룡'으로 책을 낸 조성식 전 <신동아> 기자의 진단이다.

 

 "윤 총장은 검찰 안팎에서 지지만큼이나 원성도 샀다. 보수 성향이 강한 검사들 눈에는 진보정권에서 출세한 윤 총장이 곱게 보일 리 없었다. 윤 총장으로서는 검사들의 반감을 달래고 조직을 안정적으로 장악할 필요가 있었다. 가뜩이나 여권이 환호하는 적폐수사로 정치적 중립성까지 의심받는 터였다. 윤 총장은 자신의 표현대로 뼛속 깊이 보수주의자다. 검찰에 강한 불신을 가진 진보주의자 조국 전 장관과는 한 상에서 마주 앉을 수 없다. 청와대 민정수석으로서 검찰개혁을 설계하고 주도한 조국은 검사들에게 공공의 적이었다. 그런 점에서 조국 수사는 다목적 카드였다. 친정권 검찰이라는 오해를 벗소, 정의로운 검찰 이미지도 과시하고, 검찰개혁 흐름도 견제하고, 검찰 내부 불만도 다독이고."

 

p91

 

해명 1 : 나는 왜 <죽창가>를 올렸는가

 2019년 7월 26일 민정수석 퇴임 이전, 나는 우리 대법원의 2012년 및 2018년 강제징용 노동자 판결을 옹호하고 일본 정부를 비판한 것 때문에 공격을 받았다. 특히 7월 13일 당시 인기 있던 SBS 드라마 <녹두꽃> 마지막 회를 보다가 <죽창가>가 배경음악으로 나와서 이를 간략히 페이스북에 올렸는데, 장관 지명 후에 공격 소재가 되었다. 이에 항변하지 않을 수 없다.

 일본 정부 입장은 ①일본과 조선은 합법적으로 한 나라가 되었다. ②강제징용 피해자의 손해배상청구권은 1965년 한일청구권협정으로 소멸되었다. ③한국 대법원 판결을 이를 무시했고, 이를 방치한 문재인 정부는 잘못이다. ④이렇듯 한국이 국가 간의 약속을 어겨 일본 기업에 피해를 주므로 '수출규제'를 한다는 것으로 요약된다.

 대법원 판결이 나온 후 민정수석실에서는 이 판결이 미치는 영향과 대책 보고서를 작성해 청와대와 관련 부서에 회람했다. 대법원 판결을 옹호하면서 일본 정부 입장에 맞서야 한다는 취지였다.

 그런데 일부 한국 정치인과 언론은 이러한 일본 정부 입장에 반박하기는 커녕 노골적 또는 암묵적으로 동조하면서 한국 대법원과 문재인 정부를 매도하는 데 앞장섰다. 대법원 판결이 공연히 한일 관계에 분란을 일으켰다고 불만을 표하는 사람도 많았다. 희한하다. 일본의 양심적 법률가들은 한국 대법원의 판결을 지지했는데 말이다. 대표적으로 전영기 <중앙일보> 논설위원의 주장을 보자.

 "요즘 상황은 한국의 대법관들이 첫 단추를 이상하게 끼우는 바람에 비롯된 측면이 있다. 2012년 판결문의 취지 '1919년 한국이 건립되었으니 1919~45년까지 일본의 한반도 지배는 그 자체로 불법이다'는 국제법적으로는 전제 불성립의 오류로서 국제사회에 보편타당하게 받아들여지지 않을 것이다. 민족적 감성을 앞세운 주관주의적인 오류는 다른 곳에서도 나타났다. 한국은 국제법상 일본에 승전국이 아니기에 처음부터 배상권을 행사할 수 없는 관계였다. 사정이 이렇게 명백한데도 2018년의 대법관들은 법적인 배상 청구권을 기어이 행사해야 한다고 주장. 사고는 대법원이 치고 고통은 국민이 속절없이 당하는 형국이다."

 

 어이가 없었다. 일본 극우파의 논리를 한국에 전파하는 책 <반일종족주의>의 공동저자로 <강제징용은 허구>라는 글을 쓴 이우연 낙성대경제연구소 연구위원은 일본의 최대 일간지 <문예춘추> 특별판 '저주받은 한일관계'에 <징용공(徵用工) 판결은 역사 날조다>라는 글을 싫었다. 분노가 일어났다. 통상적으로 '우파'는 '국익'을 최우선으로 하는 법인데, 한국에서는 정반대다. 이러한 사람들을 '토왜(土倭)'가 아니면 뭐라고 불러야 하는가.

 대한민국의 정통성과 (사법)주권이 타국, 특히 과거 우리의 주권 침탈국이었던 일본에 의해 공격받고 있는 상황에서, 일본 정부의 입장에 동조하거나 이를 옹호하는 것을 용납할 수가 없었다. 일본 정부가 수출규제 협박을 하고 있는 상황에서 청와대나 관련 부처가 일본 정부의 입장을 반박하기는 어려웠다. 이에 민정수석 개인자격으로라도 싸움을 벌이고, 이후 문제가 발생하면 책임을 져야겠다고 판단했다. 일본 정부의 경제보복이 예상되었지만, 점검해본 결과 이겨낼 수 있다고 판단했다.

 당시 거의 유일하게 나의 의도적 공격 취지를 알아채고 옹호한 사람은 민주평화당 박지원 의원이었다. 박 의원은 MBC 라디오 '김종배의 시선집중'에서 말했다.

 "(일본에 대한) 공격을 (여당에서) 아무도 안 하니 '열혈 청년' 조 수석이 나선 것이다. 조 수석이 일부 비판을 받는다 해도 조국을 위해서, 대통령을 위해서 한마디한 것이다. 조 수석마저 안하면 지금 (대일 여론전을) 누가 하느냐."

 깊이 감사했다. 당시 내가 페이스북에 올린 일련의 글 가운데 핵심은 다음과 같다. 먼저 7월 20일에 올린 글이다.

 

 "법학에서 '배상(賠償)'과 '보상(補償)'의 차이는 매우 중요하다. 전자는 '불법행위'로 발생한 손해를 갚는 것이고, 후자는 '적법행위'로 발생한 손실을 갚는 것이다. 근래 일부 정치인과 언론은 이 점에 대해 무지하거나 또는 알면서도 문재인 정부를 흔들기 위해 황당한 주장을 펼치고 있다.

 대한민국 대통령의 법률보좌가 업무 중 하나인 민정수석으로서(그 이전에 법을 공부하고 가르쳐온 법학자로서), 이하 세 가지 점을 분명히 하고자 한다.

 1. 1965년 한일협정으로 한국은 일본으로부터 3억 달러를 받았지만, 당시에도 지금도 일본은 위안부, 강제징용 등 불법행위 사실 자체를 부인한다. 그러므로 이는 일본의 전쟁범죄에 대한 '배상'을 받은 것이 아니다.

 2. 2005년 참여정부 시절 민관공동위원회는 ①1965년 한일 협정으로 받은 자금에는 강제징용 피해자들에 대한 정치적 '보상'이 포함되어 있을 뿐, 이들에 대한 '배상'은 포함되어 있지 않고, ②한국 정부가 일본 정부를 대상으로 다시 '보상'을 요구하는 것은 안 되지만, 한국인 개인이 일본 정부의 불법행위에 대해 손해 '배상'을 청구하는 것은 가능함을 확인했다.

 3. 2012년 대법원(제1부, 김능환 대법관 주심)이 "외교 협정으로 개인청구권이 소멸할 수 없다"라는 취지로 파기 환송해 신일본제철(현 일본제철)에 대한 '배상'의 길이 열린다. 이 판결은 양승태 대법원장과 박근혜 청와대 사이의 '사법거래' 대상이 되었으나, 2018년 확정된다.

 1965년 이후 일관된 한국 정부의 입장과 2012년 및 2018년 대법원 판결을 부정, 비난, 왜곡, 매도 하는 것은 정확히 일본 정부의 입장이다. 나는 이런 주장을 하는 한국 사람을 마땅히 '친일파'라고 불러야 한다고 생각한다. 일본 정부가 '경제전쟁'을 도발하면서 맨 처음 내세웠던 것이 한국 대법원 판결의 부당성이었다. "1965년 일본으로부터 거액을 받아 한국 경제가 이만큼 발전한 것 아니냐"라는 식의 표피적 질문을 하기 전에, 이상의 근본적 문제에 대해 한 번이라도 생각해보길 바란다. 일본의 한국 지배의 '불법성'을 인정하느냐가 모든 사안의 뿌리다.

 다음은 7월 22일에 올린 글이다.

 

 "일본 국력, 분명 한국 국력보다 위다. 그러나 지레 겁먹고 쫄지 말자. 외교력 포함 현재 한국의 국력은 1965년 한일청구권 협정 체결 시기와는 비교할 수 없을 정도로 성장했다. '병탄(倂呑)을 당한 1910년과는 말할 것도 없다. 법적, 외교적 쟁투를 피할 수 없는 국면에는 싸워야 하고, 또 이겨야 한다. 국민적 지지가 필요하다."

 

 1965년 한일청구권협정은 당시 양국 정부의 '타협'의 산물이었다. '청구권'이라는 단어를 선택한 것이 단적인 예다. 협정 체결자인 시나 에쓰사부로 당시 일본 외상은 일본 정부가 제공한 5억 달러는 '배상'이 아니라, '독립 축하금'이라고 참의원에서 발언한 바 있다. 일본 정부는 그 이전도 그 이후도 식민지배의 불법성을 인정한 적이 단 한 번도 없다. 덜 알려졌지만, 일본 정부는 미쓰비시가 중국 강제징용 노동자들에 대해 '배상' 성격의 '화해금'을 지급하는 것을 허용했다. 왜 한국 강제징용 노동자에게는 배상을 거부하냐고? 조선 지배의 불법성을 인정하지 않고 '강제징용'도 없었다고 강변하므로 배상할 수 없다는 것이다.

 이러한 점에서 일본의 식민지배와 강제동원이 불법임을 선언한 2012년과 2018년 한국 대법원 판결의 의의는 너무도 중요하다. 이를 부정하는 것은 대한민국의 정체성과 헌법정신을 부정하는 것ㄱ이다. 1965년 협정은 존중되어야 한다. 한일 간 '무역전쟁'의 신속한 종결을 위해 외교와 협상은 당연히 필요하다. 그러나 2012년과 2018년 대법원 판결의 의미를 몰각(沒却), 부정하면 헌법 위반자가 된다.

 당시 일본 정부가 '무역전쟁'을 개시했을 때, 야당과 언론은 한국의 패배를 예견하고 대법원 판결과 문재인 정부를 비난했다. "4개월밖에 못 버틴다" 운운한 <조선일보> 기사가 생각난다. 야당과 언론은 내가 '반일선동'을 한다고 엄청난 공격을 퍼부었다. 일본 언론은 나를 '대일 초강경파'라고 불렀다.

 2년이 지난 지금 한국 경제가 망했는가? 전혀 아닌 것이 확인되었다. 일본의 수출규제 핵심인 불화수소 가운데 액체불화수소는 100% 국산화에 성공했다. 오히려 일본 기업이 타격을 받았다는 일본 내부 평가가 나오고 있다. 물론 '소부장(소재, 부품, 장비)' 국산화의 길은 멀다. 무역을 포함해 일본과의 관계도 더 개방적으로 가야 한다. 그러나 한국의 (사법)주권을 흔드는 일본의 행태에 대해서는 절대 타협이 없어야 한다. 감히 말하자면, 되돌아보아도 당시 나의 '대일 강경노선'이 명분과 실리 모두에서 오류였다고 생각하지 않는다.

 

p283. 검찰은 죽을 때까지 찌른다

 

 장관 사직 후 검찰은 나를 소환조사했다. 서울중앙지검은 2019년 11월 14일과 21일 그리고 12월 11일 나를 소환했는데, 나는 진술거부건을 행사했다. 내가 뭐라고 해명하건 검찰은 정경심 교수의 '공범'으로 기소를 정해두었기에 진술할 필요가 없다는 것이 변호인단의 일치된 권고였다. 오래전 일이고 대부분 내가 제대로 알지도 못하고 관여하지도 않은 일인데, 불완전한 기억에 따라 진술했다가 추후 조금이라도 사실과 다른 점이 나오면 검찰은 언론에 흘려서 "거짓말했다"라는 공격을 받도록 만들 것이라고 경고했다.

 제3장에서 보앗지만, 2019년 12월 국회를 통과한 검찰개혁법안이 2022년 1월 발효되기 전까지 '검사작성 피의자신문조서'의 증거능력은 '번관면전 조서'에 준하는 강력한 효력을 가진다. 검사 앞에서 한 말을 법정에서 변경하면 법정 진술이 우선적으로 인정되는 것이 아니라, '말 바꾸기'한 사람이 되어 신빙성을 의심받게 된다.

 금태섭 전 의원이 2006년 서울중앙지검 검사 시절 <한겨레>에 <현직검사가 말하는 수사 제대로 받는 법>이라는 칼럼을 쓰면서 제1원칙으로 진술거부를 권한 이유도 바로 이 점 때문이었다.

 "조금이라도 유리한 점을 찾아내서 수사에 대응해야 하지 않겠는가. 그러나 그렇게 생각하는 순간 당신은 이미 파멸로 이끄는 길에 한 걸음을 내닫는 것이다. 공개가 원칙인 재판과는 달리 수사를 받는 피의자는 충분한 정보도 없이 어둠 속에서 헤매야 하는 것이다. 아무것도 모르는 상태에서 섣불리 행동하면 상처를 입는다. 수사기관의 행동에 섣불리 대응하지 않고 변호인에게 모든 것을 맡기는 것은 가장 기본적인 피의자의 권리이며 이러한 정당한 권리를 포기하지 않는 것이야말로 현명하게 수사를 받는 제1의 원칙이다."

 

 진술거부권이 헌법적 기본권(헌법 제12조 2항)임은 명백하나 검찰 조사실에서 이를 실천하는 것은 쉬운 일이 아니다. 먼저 진술거부권을 행사하겠다고 의사 표시를 하면 신문을 즉각 중단하는 미국과 달리, 한국의 경우 일본의 예에 따라 몇 시간이고 신문을 감수하고 앉아 있어야 한다. 한국에서 '미란다(Miranda) 원칙'은 체포와 신문 시에 피의자에게 진술거부권을 고지해야 하는 원칙 정도로 이해되고 있지만, 이 원칙의 또 다른 핵심은 피의자가 진술거부권을 행사할 경우 신문이 즉각 중단되어야 한다는 것이다. 서울중앙지검 조사 시 나는 이 점을 밝히며 신문 중단을 요구했으나 거절당했고, 장시간 신문에 진술거부 의사를 반복해서 밝히며 앉아 있어야 했다. 이러한 관행은 헌법 위반이라고 생각한다.

 얼토당토않은 추궁이나 유도 질문을 받으면 피의자는 답변을 하고 싶은 충동이 생기게 되어 중간에 진술거부를 포기하는 경우가 많다. 그렇지만 나는 논문과 강의에서 강조했던 이 권리를 제대로 실천할 순간이 왔다고 판단했다. 이러한 법리적 측면과 별도로, 나는 가족에 대한 전면적/전방위적 저인망 수사에 대한 진술거부를 통해서라도 검찰에 항의해야겠다고 마음먹고 있었다. '멸문'을 꾀하는 수사에 대해 시민으로서 항의할 방법은 진술거부밖에 없었기에.

 내가 진술거부를 했다는 보도가 나오자, 언론과 야당은 일제히 맹비난했다. 자유한국당 황교안 대표가 패스트트랙 사건 경찰 수사에서 진술거부를 했을 때와는 대조적인 분위기였다. 시민이 자신에게 보장된 헌법적 기본권을 행사했다고 비난하는 것 자체가 반헌법적인 행태였다.

 

p286. 사전구속영장 청구

 서울중앙지검은 자신들이 조사한 자료로는 구속영장이 발부되지 않을 거이라고 판단했을 것이다. 그래서 2019년 12월 23일 서울동부지검은 유재수 전 금융위원회 금융정책국장 관련 감찰무마 의혹을 이유로 나에게 '직권남용죄'를 적용해 사전구속영장을 청구했다.

 정경심 교수를 구속하는 데 성공했지만 관련 혐의로 나까지 구속시킬 수는 없을 것 같다고 판단한 검찰은 '유재수 사건'으로 나의 구속을 시도한 것이다. 이 과정에서 대검이 중심이 되어 서울중앙지검과 동부지검의 행보를 조율했을 것이고, 나에 대해 공적 업무상의 비리로 영장을 청구해야 명문이 선다고 판단했을 것이다.

 유재수 사건을 간단히 설명하면 다음과 같다. 2017년 10월 말 11월 초 민정수석실의 박형철 반부패비서관은 청와대 특별감반(이하 '특감반')이 금융위원회 유재수 금용정책국장의 비리 제보를 받았음을 나에게 보고했고, 나는 감찰을 지시했다. 박 비서관으로부터 유 국장이 '구명' 운동을 벌이고 있음을 보고받은 후에도 감찰을 계속하라고 지시했다. 이후 참여정부 인사들과 연이 있는 백원우 민정비서관에게 상황을 점검해보라고 지시했고, 백 비서관은 상황을 점검한 후 나아게 보고했다. 검찰은 이를 유 국장의 '구명 로비'에 백 비서관이 호응한 것이라고 규정했지만, 이는 민정비서관의 통상적 '업무'였다. 만약 내가 유 국장을 봐주려고 생각했다면, 감찰 계속을 지시하지 않았을 것이다. 나와 유 국장은 일면식도 없는 사이며, 내가 이 사람을 봐주어야 할 이유도 봐주어서 얻을 이익도 없었다.

 감찰을 통해 확인했던 유 국장의 비리는 골프채, 골프텔, 기사 딸린 차량 서비스 이용 등이었는데, 이는 2019년 검찰의 강제수사를 통해 밝혀진 비리와 큰 차이가 있었다. 일반적으로는 덜 알려져 있지만, 특감반은 대통령비서실 직제 제7조에 따라 - 강제수사권과 징계권은 없고 - '비리 첩보 수집'과 '사실관계 확인' 권한만을 갖는다. 특감반 조사와 검찰 조사가 차이날 수밖에 없는 이유가 여기에 있다. 그럼에도 검찰과 언론은 이를 무시하고 검찰이 밝힌 것을 청와대가 덮었다는 식으로 비판했다.

 영장청구 소식을 접하고 "검찰은 죽을 때까지 찌른다"는 속언이 떠올랐다. 구속된 상태에서 소환조사를 받게 되면 정신적/육체적으로 위촉/약화되어 결국에는 자포자기하고 검사가 원하는 대로 끌려가는 경우가 많다. 게다가 대중적으로 '구속=유죄'라는 관념이 유포되어 있고, 이러한 인식은 이후 재판에도 영향을 미친다. 구속을 해두어야 이후 수사/기소/재판에서 유리한 고지를 차지할 수 있다고 검찰은 판단했을 것이다.

 2019년 12월 23일 윤도한 청와대 국민소통수석은 나에 대한 사전영장 청구 서면 브리핑에서 밝혔다.

 "당시 민정수석비서관실은 수사권이 없어서 유재수 본인의 동의하에서만 감찰 조사를 할 수 있었고, 본인이 조사를 거부해 당시 확인된 비위 혐의를 소속 기관에 통보했습니다. 그 상황에서 검찰수사를 의뢰할지 소속 시관에 통보해 인사조치를 할지는 민정수석실의 판단 권한이며, 청와대가 이러한 정무적 판단과 결정을 일일이 검찰의 허락을 받고 일하는 기관이 아니라는 입장을 다시 한번 밝힙니다."

 유재수 사건의 출발은 검찰수사관 출신 김태우 전 특별감찰반원의 고발이었다. 김 씨는 청와대 내부 감찰로 자신의 비리가 발견되어 징계 및 수사 의뢰가 이루어지자, "민정수석실에서 민간인을 사찰했다"라는 허무맹라한 주장을 했다. 이에 야당과 보수언론은 청와대에 대해 파상공세를 펼쳤다. 특감반 책임자인 박형철 비서관은 직접 청와대 춘추관에 나가 브리핑을 하면서 억울해 눈물까지 흘렸다.

 야당은 '김용균법'(산업안전보건법) 등 법안 처리르 놓고 민정 수석의 국회출석을 집요하게 요구했다. 이에 문재인 대통령은 "민정수석은 국회에 출석하지 않는 것이 관례이지만, '김용균법'의 연내 통과를 위해서라면 출석하라"라고 지시하셨다. 12월 27일 아침 대통령께서는 국회 상황을 한병도 정무수석에게 보고받은 후, 나에게 짧게 질문하셨다. "나갈 준비되어 있지요?" 나느 답했다. "네, 잘 준비해서 나가겠습니다." 대통령께 "또박또박 답변하면 됩니다"라고 격려해주셨다.

 2018년 12월 31일 국회 운영위원회에 출석하자 야당 의원들이 유재수 사건과 관련해서 '민간인 사찰' '별건 감찰' 여부를 추궁했고, 나는 그런 적이 없다고 단호하게 해명했다.

(2021년 1월 8일, 김태우 씨는 공무상 비밀누설 혐의로 징역 1년, 집행유예 2년의 유죄판결을 받았다. 이 판결로 청와대의 직권남용이 없었음이 확인되었다)

 당시만 해도 유재수 사건은 주변적인 사안이었다. 그런데 2019년 2월 김태우 씨는 유재수 사건을 이유로 나를 고발했다. 김 씨는 유튜브 방송을 통해 문재인 정부 공격에 나섰고, 2020년 4.15 총선에서는 국민의힘 전신인 미래통합당 후보로 출마해 낙선했다. 어떻게 이런 사람이 문재인 정부의 청와대 특감반에 들어올 수 있었을까.

 나는 유재수 사건으로 검찰조사를 받을 것이라고는 전혀 예상하지 못했다. 2017년 10월 이후 청와대 민정수석실 산하 특감반의 감찰이 있은 후 유재수 국장을 사직토록 했기에 상황이 종결되었다고 생각하고 있었다.

 

p290. 사냥의 최종 목표

 특감반이 포착한 비리 가운데 유 국장은 차량 제공만 인정하고 나머지는 대가성을 강력히 부인했고, 이후 감찰에 불응하고 병가를 낸 후 연락을 끈혹 잠적했다. 청와대 특별감찰은 대상자의 동의에 기초해서만 진행되는 것이고, 공직자가 청와대 특별감찰을 거부하는 일은 드물었기에 당황스러웠다. 청와대 특감반은 강제수사권이 없어서 감찰이 사실상 불가능하게 되었다. 이러한 과정에서 유 국장이 감찰을 받고 있고 이후 병가를 냈다는 사실은 금융위원회는 물론 관가에 파다하게 퍼져 있었다. 공무원 사회에서 어떤 사람이 청와대로부터 감찰을 받았다는 것은 순식간에 알려지기 마련이다.

 이 상태에서 나는 박형철 비서관에게 감찰 결과 및 복수의 조치 의견을 보고받았다. 특감반 업무 관례상 조치의견은 감찰이 종결되거나 불능상태에 빠져 마무리할 때 기재된다. 당시 백원우 비서관은 "빨리 잘라 국정부담을 덜어야 한다. 고위직은 옷 벗기는 것이 최고의 징계다"라는 의견을 피력했고, 박형철 비서관은 "검찰에 수사를 의뢰하는 것이 좋겠다"라는 의견을 피력했다. 정치인 출신과 검사 출신 비서관의 감감에는 차이가 있었다.

 나는 두 의견을 청취한 후 유 국장이 현직을 유지하는 것은 곤란하다고 판단하고, 유 국장의 비리와 상응한 인사조치 필요를 금융위원회에 알릴 것을 결정했다. 민정수석실은 유 국장에 대한 징계권이 없으므로, 징계 여부를 금융위원회가 판단할 것이라고 생각했다. 나는 민정수석으로 감찰 '중단'을 지시한 것이 아니라, 대상자의 감찰 불응으로 감찰이 '불능'상태가 된 상황에서 최종 조치를 결정한 것이었다. 특감반은 강제수사권이 없기에 감찰에 불응하는 사람을 특감반이 강제로 추가 조사할 방법은 없고, 만약 그렇게 하면 불법이 된다.

 당시 박 비서관에게 이인걸 특별감찰반장이 조치 결정에 불만을 표시했다는 말을 들었으나, 특감반 업무의 한계로 어쩔 수 없는 일이라고 생각했다. 박 비서관도 자신의 의견이 체택되지 않아 불만이 있었겠지만, 당시에는 특별한 반대 의사를 표시하지 않았다. 특별감찰의 시작/전개/종결에 대한 최종 권한은 민정수석에게 있음을 알고 있었기 때문일 것이다. 박 비서관은 법정 증인신문에서 유재수 사건의 처리 방향에 이견이 있었지만, 최종 판단 권한은 민정수석에게 있었고 민정수석실에는 수사권이 없기 때문에 사표 처리 결정을 수용했다고 진술했다.

 2019년 11월 이후 검찰 수사를 통해 유재수 국장의 비리가 더 드러났지만, 나는 강제수사권이 없는 청와대 특감반의 감찰 결과에 기초해 위의 조치를 하는 것이 나의 정무적 재량 범위 안에 있다고 생각했다. 이것이 '직권남용죄'에 해당할 것이라고는 꿈에도 생각하지 못했다. 2017년 하반기 나의 주된 관심은 국정원/검찰/경찰 등 권력기관 개혁의 청사진을 마련하는 것에 집중되어 있었기에 - 2018년 1월 14일 이 방안을 춘추관에서 내가 직접 발표했다 - 이 사안에 대해서는 큰 비중을 두고 있지도 않았다. 유재수 사건은 당시 민정수석이 결재하는 수많은 사건 가운데 하나에 불과했기에 비중을 두고 처리하지도 않았다.

 결과적으로 보면, 유 국장 감찰 중단 상황에서 박 비서관의 의견에 따라 이 사건을 아예 수사기관에 넘겼다면 문제가 없었을 텐데라는 후회를 한다. 형사처벌은 '최후수단'으로 사용되어야 한다는 소신과 판단이 이후 검찰이 내게 칼을 들이대는 빌미를 제공한 것이다.

 그런데 2019년 9월 6일 법무부장관 인사청문회 종료 후, 검찰이 유재수 사건을 다시 들여다본다는 언론 보도가 나왔다. 미래통합당 김도흡 의원은 2019년 10월 7일 검찰에 대한 국정감사에서 전직 특감반원(김태우 씨)의 진술을 거론하며 유재수 사건을 부각했다. 검사 출신 김 의원의 언동에는 이유가 있었다.

 추후 공판 과정에서 알게 되었지만, 검찰은 감찰반원들을 차례차례 불러 감찰이 강제로 '중단'되었다는 취지의 진술을 얻어내고 있었다. 검찰의 수사 방식은 최종 목표를 정해놓고 밑에서부터 차례차례 올라가면서 최종 목표에 불리한 진술을 확보하는 것이다. 당시 검찰수사관 출신 특감반원들에게 나는 쓸모없는 카드에 불과했을 것이다. 아내는 구속되었고 본인도 피의자가 된 전직 상관이 무슨 필요가 있겠는가.

 이와 같은 특감반 관계자들에 대한 수사내용을 당시에는 알지 못했지만, 분위기가 이상하다는 말이 여기저기서 들려왔다. 검찰 출신 변호사 지인들은 내 가족 관련 수사에서 나온 혐의로는 나에 대해 영장을 청구하기 어려우니, 유재수 사건을 끄집어내 영장을 청구할 것이라고 알려주었다. 한 지인의 말이 오랫동안 뇌리에 남았다.

 "검찰은 특수부 엘리트 검찰 술신으로 윤석열 총장이 아끼던 우병우 민정수석도 구속했다. 따라서 조국 수석 사건은 더 가혹하게 할 것이다."

 검찰이 벌이고 있던 사냥의 최종 목표는 나라는 것이 분명해졌다. 배우자와 동생을 구속시킨 것만으로는 부족했던 것이다. 유재수 사건을 김경수 경남도지사, 윤건영 청외대 국정기획상황실장, 천경득 청와대 총무비서관실 선임행정관 등과 연결하는 보도가 쏟아졌다. 권력형 비리 프레임이 가동된 것이다. 이 세 사람이 기소되지 않았음은 물론이다.

 나에게 영장을 청구한 동부지검의 검사장은 조남관이었다. 그는 노무현 정부 시절 청와대 사정비서관실 특별감찰반에 근무했고 문재인 정부 출범 후 국정원 감찰실장으로 발탁되어 국정원 개혁 과정에서 중요한 역할을 했다. 동부지검에 출석해 조사를 받으면서, '조 검사장이 청와대 특감반 근무를 한 사람이라 특감반 역할과 한계, 민정수석의 권한 등을 잘 알고 있을 텐데' 하는 생각을 했다. [조남관도 윤석열과 별로 다를 바 없는 넘임은 이미 널리 알려져있다. 아는 놈이 이랬으니 참 악랄한 넘이다]

 이런 마음을 주변 법률가 친구와 지인에게 드러냈더니, 그들의 조언은 한결같았다.

 "순진한 생각하지 마라. 검사는 검사일 뿐이다. 조직이 결정하면 집행한다. 기대하면 실망만 커진다."

 내가 2019년 8월 9일 법무부장관으로 지명된 후 검찰은 나를 최종 목표로 가족 전체에 대한 '사냥'을 전개했고, 기필코 나를 '우리'에 가두고자 했다. 어떤 명목으로건 나를 구속시켜 유죄 낙인을 찍고 방어권을 무력화시켜 결국 나를 정신적/심리적으로 붕괴시키려는 검찰의 의지는 분명했다. 검찰이 들이대는 칼날의 번뜩이는 살기를 느낄 수 있었다.

 

p294. 최악의 크리스마스

 영장청구가 예상되는 상황에서 나는 '급난지붕'(急難之朋), 즉 급박한 어려움이 있을 때 도움을 줄 친구와 지인에게 연락을 해야 했다. 이미 배우자가 구속되었는데 나마저 구속된다면, 연로하신 어머니와 자식들을 챙겨줄 사람이 필요했기 때문이었다. 책임질테니 걱정하지 말라고 답을 준 이들에게 다시 한번 감사한다.

 법률가 친구와 지인들은 터무니없는 영장청구이니 발부될 리 만무다하도 위로해주었다. 그러나 불안감은 사라지지 않았다. 수 개월 동안 검찰발 언론 보도를 통해 유죄확증을 각인시키는 여론 재판이 진행되고 있었기 때문이다. 판사도 여론의 영향을 받는다. 최악의 상황을 대비해야 했다. 어머니와 자식들에게는 마음 굳게 먹으라고 당부했다. 12월 24일에는 서울구치소에 수감되어 있는 정경심 교수를 면회하고 창살 너머 사색이 된 얼굴을 보면서 마음을 더 굳게 먹으라고 강조했다. 그렇게 내 삶에서 최악의 크리스마스를 맞았다.

 변론을 맡고 있던 변호사들은 크리스마스 휴일을 반납하고 영장실질심사를 준비해야 했다. 특히 대학 동기인 법무법인 LKB의 김종근 대표변호사는 오래전 예약해둔 가족 해외여행까지 포기하고 영장실질심사 준비를 이끌어주었다.

 12월 26일 아침, 집을 나섰다. 걱정 가득한 어머니와 자식들의 눈길이 뇌리에서 떠나지 않았다. 대학 동기 법무법인 예강의 김진수 대표변호사 사무실에서 동부지검으로 출발했다. 동부지검에 도착해서는 동부지검이 준비한 차를 타고 10시 5분쯤 동부지법 입구에 내려 걸어 들어갔다. 비가 부슬부슬 내리고 있어 김 변호사가 우산을 씌워주었다.

 동부지법 근처는 응원의 목소리와 비난의 목소리가 뒤섞여 난리였다. 걸어 들어가는 왼편에서 "장관님, 힘네세요"라는 우렁찬 소리에 고개를 돌려보니, 프로레슬러로 활발하게 사회활동을 하는 김남훈 씨가 서 있었다. 고마웠다. 눈으로만 인사를 하고 포토라인 쪽으로 걸어 들어가 말했다.

 

 "122일입니다. 첫 강제수사 후 122일째입니다. 그동안 가족 전체를 대상으로 하는 검찰의 끝이 없는 전방위적 수사를 견디고 견뎠습니다. 혹독한 시간이었습니다. 저는 검찰의 영장 신청 내용에 동의하지 못합니다. 오늘 법정에서 판사님께 소상히 말씀드리겠습니다. 철저히 법리에 기초한 판단이 있으리라고 희망하고 그렇게 믿습니다."

 

 권덕진 영장전담 부장판사가 주재하는 영장실질심사는 오전 10시 30분쯤 시작해 점심을 거르고 오후 2시 50분쯤 종료했다. 영장실질심사에서는 검찰 측이 제출한 수사자료가 판사에게 제출되지만, 변호인 측은 이 자료를 보지 못하고 대응해야 하기에 불리한 상황이었다. 검찰의 언론 플레이로 나에 대한 부정적 인식이 담당 판사에게도 전파된 상황이었다. 검찰 측은 집요하게 구속의 필요성을 강조했다. 영장이 발부되어야 자신들이 벌인 수사의 정당성이 인정된다고 생각하는 듯했다.

 변호인단은 검찰 측의 주장이 사실과 다름은 물론 법리적으로도 잘못되었다고 강력히 반박했다. LKB의 김종근, 이승엽 변호사는 수사내용의 법리적 잘못을 하나하나 치밀하게 비판했고, 예강의 김진수 변호사는 과거 유사한 직권남용 사례를 제시하면서 구속의 부당함을 주장했다. 다산의 김칠준 변호사는 누구의 권리가 방해되었는지가 불분명함을 지적했다. 법정은 긴장으로 팽팽했다.

 

p296. '우리'에 갇히다

 심사가 종료된 후 나는 동부구치소로 입감되었다. 동생이 이미 구속되어 있는 장소였다. 동부지법을 떠날 때 변호인들이 "기각될거라고 봅니다. 힘내십시오"라고 말해주었지만, 불안감은 사라지지 않았다. 동부구치소로 들어가 하늘색 수감자용 운동복으로 갈아입고 하얀 고무신을 신었다. 얼마 전 교정업무의 최고책임자였던 전직 법무부장관으로서 참담한 심정이었다. 교정직원들의 표정이 묘했다. 늦은 점심으로 컵라면이 나왔는데, 몇 젓가락 뜨다 말았다. 이후 6층 맨 구석 독방으로 들어갔다. 철문히 닫혔고, 기약 없는 기다림이 시작되었다.

 1993년 6월 23일 국가보안법 위반으로 서울구치소에 갇힌 경험이 있지만, 그때와는 느낌이 달랐다. 구치소 독방 크기는 비슷할텐데, 더 좁게 느껴졌다. 1993년에는 '반정부' 운동 참여로 구속되었고, 2019년에는 고위공무원의 '직권남용' 혐의로 갇힌 것이라 기묘한 감정이 일었다. 1993년에는 검찰 공안라인이, 2019년에는 검찰 특수라인이 영장청구의 주도자였다. 1993년 검찰은 극우 보수적 정치관으로 무장한 채 체제의 수호자로 민주화운동 세력을 탄압하는 선봉에 서 있었다면, 2019년 검찰은 조직의 이익을 수호하기 위해 언론과 야당과 손잡고 문재인 정부와 싸움을 전개하고 있었다.

 6층 독방에서도 동부구치소 주변 찬반 집회 소리가 들렸다. "조국 수호"와 "조국 구속"의 함성이 섞여서 들렸다. 많은 지지자들이 실질심사가 진행되는 내내 구호를 외치고 있음을 알았다. 중간중간 부부젤라 소리가 들려왔다. 답답한 시간이었지만, '이분들의 마음을 생각하자' '무너져선 안 된다'라고 되뇌었다. 집에서 불안과 공포에 떨고 있을 어머니와 자식들을 생각했다. 서울 구치소에서 전전긍긍하고 있을 정경심 교수와 동부구치소 어느 방에서 내 소식을 듣고 마음 졸이고 있을 동생을 떠올렸다. 나를 믿어주고 격려해준 친애하는 벗과 동지들을 생각했다. 추후 동영상을 통해 당일 추운 날씨에 심야까지 나를 응원해주며 고생하신 분들의 모습을 보았다. 가슴이 찡하고 목이 울컥했다. 진심으로 깊은 감사를 표하고 싶다.

 막막한 10시간이 지나고 27일 새벽 1시가 되기 전 영장이 기각되었다는 연락을 받았다. 구겨진 양복을 찾아서 입고 컴컴한 복도를 지나 새벽 1시 30분쯤 구치소를 나왔다. '우리'에서 풀려난 것이다. 나 때문에 늦게까지 수고한 구치소 직원들에게 인사하고 구치소 문을 나서는데, 담장 바깥에서 일부가 나를 향해 쌍욕을 퍼붓고 있었다. 언론사의 카메라 플래시가 터지고 있었다. 평소 이웃으로 친교를 나누던 구승희,구관희 씨 형제가 자동차를 준비하고 기다리고 있었다. 구치소를 빠져나오자, 나를 응원하는 분들의 모습이 보였다. 가슴이 찡했다.

 아파트에 도착하니, 주차장에 동네 주민 몇 분이 나와서 위로와 격려 인사를 해주셨다. 집에서는 어머니와 딸, 아들이 환한 표정으로 기다리고 있었다. 한 번씩 안아주었다. 최악의 상황을 대비해 26일 저녁부터 가족들과 함께 있어 주었던 고마운 사람들이 독주를 준비해놓고 기다리고 있었다. 같이 마셨다. 새벽 3시쯤 그분들이 돌아간 후 잠을 청했다. 그러나 긴장이 풀리지 않은 데다가, 여전히 갇혀 있는 정 교수와 동생을 생각하지 쉽게 잠들지 못했다. 생애 가장 긴 하루가 그렇게 끝났다.

 <한겨레> 이재성 기자가 12월 26일 당일 '인권연대' 소식지에 쓴 글을 나중에 알게 되었다.

 

 "늑대가 된 검찰에게 가장 큰 천적은 이른바 '검찰개혁 세력'이다. 그대로 뒀다간 검찰이 사냥을 못하게 되거나 번식이 불가능해질 수 있기 때문이다. 검찰에게 조국은 호랑이 새끼 같은 존재였다. 더 크기 전에 물어 죽여야 했다. 조국 하나를 잡기 위해 청와대와 총리실, 기획재정부, 경찰청 등 가리지 않고 들이닥쳤다. 전국의 검찰 조직을 총동원해 넉 달 동안 뒤진 끝에 고작 '감찰 무마' 직권 남용 혐의로 구속영장을 청구했다. 채용 비리 혐의를 받은 자유한국당 김성태 의원 등에게는 구속영장의 ㄱ자도 꺼내지 않은 검찰이다. 표적수사이자 문어발식 별건수사일 뿐 아니라 친검 편파 수사로서 검찰 흑역사에 영원히 남을 것이다."

 

p299. 직권 남용죄의 남용

 나에 대한 구속영장이 기각되자 서울중앙지검은 12월 31일 나를 불구속 기소했고, 서울동부지검은 다음 해 1월 17일 추가로 기소했다. 나는 피고인이 되었다. 예정된 수순이었다. 형사법 교수, 민정수석, 법무부장관 등을 역임한 사람이 형사피고인이 된 것이다. 얄궂은 운명이었다.

 2019년 12월 31일 서울중앙지검 기소 후 변호인단은 입장문을 배포했다.

 

 "오늘 서울중앙지검은 조국 전 법무부장관을 공직자윤리법 위반, 형법상 위계공무집행방애 및 업무방해, 뇌물수수, 증거은닉 및 위조 교사 등으로 기소했습니다.

 법무부장관 지명 이후 검찰이 조 전 장관을 최종 목표로 정해놓고 가족 전체를 대상으로 총력을 기울여 벌인 수사라는 점을 생각하면, 초라한 결과입니다.

 이번 기소는 검찰의 상상과 허구에 기초한 정치적 기소입니다. 기소내용도 검찰이 인디언 기우제식 수사 끝에 어떻게 해서든 조 전 장관을 피고인으로 세우겠다는 억지기소로밖에 보이지 않습니다.

 입시비리, 사모펀드 관련한 검찰의 기소내용은 조 전 장관이 배우자인 정경심 교수에 대한 기소내용을 모두 알고 의논하면서 도와주었다는 추측과 의심에 기초한 것입니다. 조 전 장관이 증거은닉과 위조를 교사했다는 혐의와 조 전 장관의 딸이 받은 부산대 의전원 장학금이 뇌물이라는 기소내용도 검찰의 상상일 뿐입니다.

 이제 검찰의 시간은 끝나고 법원의 시간이 시작됐습니다.

 그동안 언론을 통해 흘러나온 수사내용이나 오늘 기소된 내용은 모두 검찰의 일방적인 주장일 뿐이비다. 앞으로 재판과정에서 하나하나 반박하고 조 전 장관의 무죄를 밝혀나가겠습니다.

 끝으로 법치국가에서 범죄혐의에 대한 실체적인 진실과 유무죄는 재판정에 합법적인 증거들이 모두 제출되고, 검사와 피고인이 대등한 지위에서 공방을 벌인 후, 재판부의 판결을 통해서 비로소 확정됩니다.

 그럼에도 그동안 조 전 장관과 가족들은 수사과정에서 아직 확정되지도 않은 사실과 추측이 무차별적으로 보도됨으로써 회복할 수 없는 피해를 입었습니다. 앞으로는 근거 없는 추측성 기사를 자제해주실 것을 다시 한번 당부드립니다.

 2020년 1월 17일 서울동부지검 기소 후 나는 입장문을 발표했다.

 "작년 12월 31일 서울중앙지검에 이어, 오늘은 서울동부지검이 저를 기소했습니다. 법무부장관 지명 이후 시작된, 저를 최종 표적으로 하는 가족 전체에 대한 검찰의 전방위적 총력수사가 마무리된 것입니다.

 검찰의 공소장을 보더라도, 언론이 대대적으로 보도했던, 민정수석의 지위를 활용해 이익을 챙긴 '권력형 비리' 혐의는 없습니다. 그러나 가족 관련 문제에서 '공정의 가치'가 철두철미 구현되지 못한 점이 확인되었던 바, 도덕적 책임을 통감합니다. 사후적으로 볼 때, 민정수석으로서 정무적 판단에 미흡함도 있었습니다. 이유 불문하고, 전직 민정수석이자 법무부장관으로서 국민 여러분께 죄송하고, 국정 운영에 부담을 초래한 점을 자성합니다.

 그렇지만 저의 법적 책임에 대해서는 법정에서 사실과 법리에 따라 철저히 다투고자 합니다. 장관 재직 시 검찰수사에 대해 어떠한 개입도 어떠한 항변도 하지 않고 묵묵히 감수했지만, 이제는 한 명의 시민으로서 자신을 방어할 것입니다.

 '결론을 정해둔 수사'에 맞서 전면적으로 진술거부권을 행사한 혐의에 대해 검찰은 저를 피고인으로 만들어놓았지만, 법정에서 하나하나 반박하겠습니다. 감찰 종료 후 보고를 받고 상대적으로 가벼운 조치를 결정한 것이 직권남용이라는 공소사실에 대해서도 그 허구성을 밝힐 것입니다.

 학자/민정수석/법무부장관으로서 염원하고 추진했던 권력 기관 개혁이 차례차례 성사되고 있기에 기쁘지만, 이를 피고인으로 지켜보아야 하니 만감이 교차합니다. 날벼락처럼 들이닥친 비운이지만, 지치지 않고 싸우겠습니다. 송구하고 삼사합니다."

 

 사실 검찰은 2019년 3월 김은경 환경부장관에 대해서 직권남용 혐의로 구속영장을 청구했고, 이후 2020년 12월 백운규 산업통상자원부장관에 대해서도 구속영장을 청구했다. 두 장관에 대한 영장은 모두 기각되었다. 내 사건의 경우 1심 재판부가 유재ㅜ 사건에 대한 공판을 마무리한 상태다.

 제8장에서 보겠지만, 문재인 정부의 세 장관에 대한 검찰의 태도를 종합하면, 정권교체 후 산하기관 인사에 대한 장관이 개입(김은경), 감찰 종료 후 조치에 대한 민정수석의 재량 판단(조국), 원전 폐쇄에 대한 장관의 정책 판단(백운규) 등에 대해 형사처벌의 칼을 들이대겠다는 것이다." 이러한 검찰의 개입은 전례가 없는 것으로 안다. 검찰에 의한 '직권남용죄의 남용'이었다.

 피고인이 되어 재판을 준비하고 재판에 출석하는 일은 힘들었다. 오래전 일이라 나에게 유리한 증거를 찾을 수 없는 경우도 있었고, 무슨 이유인지 검찰에 가서 사실과 다른 진술을 한 사람들이 있음도 알게 되었다. 걱정도 되었고 화도 났다. 마틴 루터 킹 목사의 금언을 되새기며 결의를 다진다.

 

 "날 수 없다면, 뛰어라, 뛸 수 없다면, 걸어라. 걸을 수 없다면, 기어라.

 모든 수단을 다 써서 계속 전진하라."

 

 현재 나와 내 가족에 대한 재판은 진행 중이다. 정경심 교수는 1심에서 유죄판결을 받았고, 2심이 진행 중이다. 나도 피고인이라는 굴레를 쓰고 1심 재판을 받고 있다. 장관직을 끝까지 고사하고 학교로 돌아갔어야 했다는 후회를 여러 번 한다. 

 그러나 과거는 되돌릴 수 없다. 대법원 판결까지 얼마가 걸릴 지 모르지만, 사실과 법리에 기초해 검찰의 공소사실에 대해 철저히 다툴 것이다. 나의 정무적/도덕적 불찰과 실수는 사과할 것이다.

 

p335. 계속된 문재인 정부 타격 수사

 울산 사건 외에 몇 가지 사건을 더 보자.

 첫째. '라임/옵티머스 사건'이 있다. 검찰은 김봉현 전 스타모빌리티 회장을 회유해, 이강세 전 스타모빌리티 회장을 통해 강기정 청와대 정무수석에게 5,000만 원을 전달했다는 진술을 얻어냈다는 정황이 드러났다. 김 전 회장은 변호인을 통해 "A 변호사가 여당 정치인들과 강기정 수석을 잡아주면 윤석열 검찰총장에게 보고한 후 보석으로 재판받게 해주겠다고 말했다"라는 내용의 입장문을 공개했다.

 강수석은 격분해 이러한 검찰 행태를 강력히 비판했다. 결국 검찰은 강 수석을 기소하지 못했다. 전형적인 표적수사였다. 강 수석은 MBC라디오 '김종배의 시선집중' 인터뷰에서, " 이건을 중심으로 해서 문 재인 대통령의 권력, 민주당 정부와 한번 싸움을 걸어봐서 잘되면 공수처 문제 이런 것도 무력화가 될 거고 안 돼도 최소한의 손해볼 일은 없지 않느냐(라고 검찰이 생각한 것 같다)"라고 분석했다. 강 수석 외에도 김영춘 국회 사무총장, 기동민 더불어민주당 의원 등 여권 인사 연루 의혹이 검찰발로 계속 보도되었다. 이 세 사람에 대해서는 기소가 이루어지지 않았다.

 둘째. 김은경 환경부장관 사건을 '환경부 블랙리스트 사건'으로 규정했다.

 청와대가 밝혔듯이, 문재인 정부 출범 당시 이전 정부에서 임명한 공공기관 임원(공공기관장 330명 + 상임감사 90여 명) 대부분이 임기를 마치거나 적법한 사유와 절차로 퇴직했다. 김은경 장관 사건에서 사표를 제출했다는 환경부 산하 공공기관 임원 13명 역시 상당수가 임기를 끝까지 마쳤다. 문재인 정부가 이전 정부처럼 '블랙리스트'를 만들어 운영했다면, 이런 일이 발생할 수 없다.

 이명박 정부가 들어선 후 2008년 3월, 유인촌 문화부장관은 실명을 거론하면서 노무현 정부에 의해 임명된 산하기관장과 단체장들의 사퇴를 노골적으로 종용했다. "이전 정권의 정치색을 가진 문화예술계단체장들은 스스로 물러나는 것이 자연스럽다. 산하기관장들 가운데 이명박 정부와 이념이나 철학이 맞지 않는 사람들은 스스로 물러나야 한다." 이윤호 지식경제부장관도 "코드가 맞지 않는 사람들이 임기가 남았다고 해서 끝까지 있는 것은 곤란하다"라고 강조했다. 보수언론 역시 사퇴 촉구 사설을 썼다. 유 장관은 한 번도 검찰 조사를 받지 않았다. 그러나 김은경 장관은 환경부 산하 임원교체 과정에 부당하게 개입했다는 이유로 기소되었고 1심에서 유죄가 선고되어 법정구속되었으며 현재 항소심이 진행 중이다.

 셋째. '월성 1호 폐쇄 사건'에서 검찰은 백운규 산업통상자원부장관에게 구속영장을 청구했다. 

 월성 1호 원전의 경제성을 일부러 낮게 평가하도록 만들고 한국수력원자력에 부당한 지시를 내렸다는 혐의였다. 영장은 기각되었으나, 조만간 불구속기소할 것이라는 보도가 흘러나온다. 영장 청구 전후 백 장관 외에 당시 김수현 청와대 사회수석 연루 의혹이 계속 흘러나와 보도되었다. 검찰수사의 최종 목표는 언제나 청와대였다.

 탈원전정책 또는 에너지전환정책이 세계적 추세이자 문재인 정부의 대선 공약으로 산업통상자원부장관은 이를 추진할 의무를 진다는 점, 원전 폐쇄를 결정하는 데는 경제성 외에 안정성 등이 고려되어야 한다는 점 등을 검찰은 전혀 고려하지 않았다. 문재인 정부의 탈원전 정책에 타격을 주기 위한 수사라고 의심하지 않을 수 없다.

 

 넷째, 김학의 전 법무차관의 출국금지 사건이다.

 제 3장에서 보았지만, 은폐되었던 김학의 전 법무차관의 별장 성 접대 의혹이 다시 불거지고 김 전 차관의 출국 시도가 무산되어 결국 유죄판결이 내려진 후, 검찰은 출국금지 절차에서 '불법'이 있었다는 이유로 차규근 법무부 출입국본부장에게 구속영장을 청구했고, 영장이 기각되자 불구속기소했다. 긴박한 상황에서 김학의를 알아보고 제 때 출국을 막아낸 담당자를 칭찬해도 모자랄 상황에 처벌이라니, 주객전도도 이만저만이 아니다.

 검찰은 2021년 4.7 재보궐선거 직전에는 김 전 차관에 대한 수사가 청와대의 기획인 양 언론 플레이를 했다. 2019년 3월 18일 문재인 대통령이 버닝썬 사건과 김 전 차관의 별장 성 접대 의혹 및 고 장자연 씨 사건등 세 사건에 대한 철저한 수사를 지시한 것을 두고, 당시 이광철 민정수석실 선임행정관이 김 전 차관 사건을 부각해 버닝썬 사건을 덮으려 했다는 것이다. 청와대는 이 행정관의 관여가 전혀 없었음을 밝혔다. 문재인 정부 청와대가 불법적 음모를 꾸몄다는 낙인을 찍으려는 것이 검찰의 의도임이 분명했다.

 다섯째. 4.7 재보궐 선거가 끝나자 대전고검은 김상조 전 청와대 정책실장에 대한 재수사명령을 내렸다. 김 전 실장이 공정위원장이던 2018년 3월 유선주 전 공정위 국장이 공정위 전원회의 합의 과정이 담긴 녹음기록(파일)이 파기된 것을 이유로 김 전 실장을 고발했다. 대전지검은 "회의 종료 후에 이뤄지는 '합의'는 회의에 포함되지 않는다. 합의 과정의 녹음은 실무자의 업무 편의를 위한 것이라 녹음기록의 필요성이 소멸한 뒤 폐기하라고 지시한 것이 부당하다고 보기 어렵다"라며 각하했다. 그러나 검찰은 다시 뚜껑을 연 것이다.

 2020년 12월에는 비검찰 출신이기는 하지만, 현직 검사장급 간부가 '검찰 쿠데타론'에 힘을 실었다. 한동수 대검 감찰부장은 윤석열 총장 징계 사유 가운데 하나인 '채널A 사건' 감찰 및 수사 방해 의혹과 관련해 법무부 조사를 받으며 다음과 같이 진술한 것으로 보도되었다.

 "군대에 의한 무력 쿠데타가 아니라 검찰수사를 통한 쿠데타를 의식하고 있는 것 아닌가 하는 생각이 든다. 윤 총장은 총선에서 야당이 이길 것으로 생각한 듯하고 이 사건은 한동훈 검사장 혼자 한 것이 아니라 총장이 같이 한 것이다."

 대검 감찰부장으로서 검찰 내부 상황에 대한 정보를 취합하고 있는 한 부장이 이 정도의 진술을 했다는 것은 무슨 의미인지 심각하게 생각하지 않을 수 없다.

 

p339. 피해자 윤석열?

 보수언론과 야당은 추미애 법무부장관을 비롯한 여권이 윤석열 총장을 감찰하고 징계를 청구하는 등 괴롭혀서 윤 총장이 어쩔 수 없이 정치를 하게 되었다는 논리를 만들어 전파하고 있다. 윤석열은 '피해자'라는 것이다 그러나 이들은 윤 총장이 울산 사건을 위시한 일련의 문재인 정부 공격 수사를 지휘했고, 제3장에서 본 한명숙 총리 관련 모해위증 교사 의혹 사건과 채널A 사건 등에서 드러난 검사 비리에 대한 감찰을 철저하게 막았다는 점은 조명하지 않는다.

 윤 총장은 '조국 수사' 착수 시점에는 '권력형 비리'라고 생각하고 수사를 진행했을 것이라 믿는다.[조국 장관이 말을 곱게 한 것일 뿐이라고 믿는다. 윤 석열은 처음부터 검찰개혁이라는 기치를 들고 법무부장관에 오는 조국을 찍어내려고 마음을 먹고 있었을 뿐이다] 압수수색 후에는 '조국펀드설'이 근거 없음을 알았지만, 일수불퇴를 선택한 것으로 보인다. 검찰 조직의 자존심은 물론 윤 총장의 자존심이 걸린 문제였기 때문이다. 검찰과 검찰총장은 '무오류'여야 하기 때문이다. 그들은 확전에 확전을 거듭했고, 조국 수사를 넘어 문재인 정부를 총공격하는 수사를 벌였다. 수사를 통해 "택군(澤君)의 시간"을 연 것이다. 여당인 더불어민주당과 진보진영이 강하게 비판하는 것은 너무도 당연하다.

 윤석열은 '공격자'였다. 윤 총장은 수구보수진영의 환호와 구애를 받았고, 차츰차츰 검찰총장을 넘어 '미래 권력'으로 자신의 위치를 설정했다고 추론한다. '택군'을 넘어 '군주'가 되기로 한 것이다. 박용현 <한겨레> 전 편집장의 비유를 빌리면, 윤 총장은 스포츠 시즌 중 경쟁 팀 사이에 판정 시비로 다툼이 생기자 한 팀을 위한 편파 판정을 하고는 그 팀의 감독으로 변신했다. 

 일본 '록히드 뇌물 사건' 주임검사로 일본 전후 28대 검사총장을 역임한 요시나가 유스케는 경고한 바 있다.

 "수사로 세상이나 제도를 바꾸려 한다면 검찰 파쇼가 된다. 그건 있을 수 없는 일이다."

그러나 2019년 하반기 이후 한국 검찰은 윤석열 총장의 지휘 아래 이러한 경고를 완전히 무시하는 행태를 보였다. 검/언/정 카르텔을 활용하고 선택적 정의를 집행하면서 검찰은 세상을 들었다 놓았다, 쥐락펴락을 반복했다.

 한국 검찰은 선출된 권력이 아니지만, 수사권과 기소권으로 선출된 권력을 좌지우지할 수 있고 심지어 교체할 수 있다고 생각해왔고, 실천해왔다. 검찰은 '곧 죽을 권력'에 대해서 결정적 일격을 가하고 '새로운 권력'을 세우는 데 일조해 조직의 이익을 보전하는 수사와 기소를 벌여왔다. '곧 죽을 권력'이라고 판단하면, '죽여야 할 권력'이 되는 법이다. 이 과정에서 검/언/정 카르텔이 긴밀하게 소통하면서 공통의 목적을 달성하기 위해 각자의 역할을 했다.

 

p341. 대의민주주의를 위협하는 수사 권력

다른 나라의 예를 보더라도 '검찰,법조 쿠데타'는 새로운 현상이 아니다. 넷플릭스 다큐멘타리 <위기의 민주주의>는 브라질에서 룰라 대통령이 어떻게 구속되는지, 후임자 지우마 대통령이 어떻게 탄핵되는지를 생생히 보여준다. 결정적 역할을 한 세르지우 모루 연방 판사(한국의 검사와 유사한 역할)는 '세차(洗車) 작전'으로 불린 수사를 했다. 이 수사와 기소로 룰라, 지우마 두 대통령이 이끌던 '노동당' 정부가 무너지고, 극우파 정치인 자이르 보우소나루 대통령이 집권했으며 모루는 법무부장관으로 발탁된다. 이후 모루는 보우소나루 대통령과 불화로 사임했고, 현재는 2022년 대선 출마를 고려하고 있다. 고려대 임혁백 명예교수는 다음과 같이 평가했다.

 "브라질 민주주의 위기의 특징은 검찰과 사법부의 법 기술자들이 법적 수단과 장치를 동원해, 보이지도 않고 의식할 수도 없는 가운데 점진적으로 야금야금 민주적 제도와 규범을 침식해 민주주의를 전복시키는 사법 쿠데타라는 것이다. 브라질의 신흥 민주주의는 과거처럼 군부 쿠데타에 의해 전복되는 것이 아니라, 사법권력과 법률지식을 동원한 검찰과 언론에 의해 소리 없이 스텔스적인 방식으로 전복되고 있다."

 룰라는 실형 선고를 받고 복역하다가 대법원 심리에 들어가면서 불구속 상태로 재판을 받게 되었다. 그런데 이후 '세차 작전'에서 모루와 연방검사들이 룰라 기소에 앞서 텔레그램을 이용한 비밀대화를 통해 의견을 조율했다는 내용이 보도되었다. 2021년 3월 브라질 연방대법원은 모루의 재판 진행과 판결이 부당하고 수사과정에서 수집한 룰라 관련 증거를 재판에서 사용해서는 안된다는 판결을 내렸고, 4월 15일 연방대법원 전원회의는 룰라에 대한 실형 선고 무효 결정을 다수 의견으로 재확인했다.

 한편, <한겨레> 정의길 선임기자는 이집트에서 최초로 민주적으로 선출된 무함마드 무르시 대통령이 무바라크 체재에서 자리잡은 검사와 판사들의 집요한 공격에 의해 무너지고 결국 옥사하게 된 상황을 개탄하면서, "조국 사태와 무르시의 죽음에서 기시감"을 느낀다고 했다. 정 기자는 경고했다.

 "장관 청문회 직전에 그 후보자와 가족에 대한 대대적인 수사를 펼치고, 거의 사돈의 팔촌까지 털어서 별건 혐의를 찾았다. 검찰개혁을 초래하게 된 검찰의 행태에 대해서는 한마디 반성의 목소리가 없고, 검찰개혁은 검찰 독립성을 해친다는 집단적임 목소리만 들린다. 급기야, 검찰 수장이 자신의 직위를 놓고 행정 소송을 내면서 대통령과 맞서는 모습을 서슴없이 연출한다. 이 모두가 검찰의 합법적 권한이기는 하다. 또한, 트럼프 세력과 이집트 '법치 세력'들이 보여준 자의적이고 과도한 법적 권한과 수단의 행사이기도 하다. 국가 형벌권에 대한 권한을 자의적이고 과도하게 행사하는 집단의 행태를 제어하지 못한다면, 이 역시 장기간에 걸쳐 진행하는 연성 쿠데타로 귀결될 것이다."

 2019년 하반기 이후 윤석열 검찰이 진행한 수사를 검찰 쿠데타 또는 검란이라고 부르지 않더라도, 검찰이 문재인 정부를 타격하는 수사를 집요하게 벌였음은 아무도 부인하지 못할 것이다.

 나는 브라질이나 이집트의 사례 이외에, 윤석열 총장의 모습에서 미국 FBI 초대국장 존 에드가 후버의 모습을 보았다. 후버는 48년 동안 FBI 국장 자리에 있으면서 트루먼, 닉슨, 케네디 등 대통령을 협박하며 권력을 유지했다. 대통령도 후버의 눈치를 봐야 했다. 트루먼 대통령이 국외 첩보를 전담하는 CIA를 창설한 것도 후버의 막강한 권력을 막기 위함이었다.

 후버는 선출되지 않은 무소불위의 권력자였다. 그는 수사권 남용을 넘어 허위정보를 언론에 흘려 무고한 사람들을 탄압했다. 사회주의 성향의 유명 여배우 진 세버그가 사산한 아이의 생부가 흑인 좌파단체 '블랙 팬더당' 당원이라는 허위정보를 유포해 그녀를 자살하게 만든 사건은 대표적인 악례다(그녀는 아이의 장례식장에 몰려든 기자들에게 관 뚜껑을 열어 죽은 아이의 피부색이 흰색임을 공개해야 했다). 한국은 이제 선진국인데 검찰이 그럴 리가 있겠는가 하는 사람들에게 후버의 예를 보라고 말하고 싶다. 대의민주주의 바깥에 있는 수사권력은 언제든지 대의민주주의를 위협할 수 있다.

 

p353

 권위주의 체제 종식 이후 군부,국정원,기무사,경찰 등 권력 기관은 자신들의 과오로 인해 '외과수술'을 받았다. 그러나 검찰은 개혁의 무풍지대가 되었다. 오히려 검찰은 독접하고 있는 수사권과 기소권을 선택적으로 사용함으로써 막강한 '살아 있는 권력'이 되었다. 검찰의 권한을 건드리지 않는 집권 세력에게는 적극 협조하고, 검찰 출신 법무부장관이나 민정수석의 수사지휘는 군소리 없이 받아들였다. 그러나 검찰개혁을 추진하는 집권세력에 대해서는 '범정'(개검 '수사정보기획관실'의 약칭) 캐비닛을 열어 집요한 수사로 흠집을 내고, 집단으로 저항했다. 영화 <더킹>에서 '전략수사1부' 검사들이 사건 파일로 가득 찬 방에서 수사할 사건을 고르는 장면을 떠올려보라. 검찰권력 관련 사안에서는 선택적 수사와 선택적 기소가 암묵적 행동준칙이었다.

 윤석열 총장은 검찰에 대한 통제가 필요하다는 비판이 일어나자, 2020년 11월 이후 '국민의 검찰론'을 꺼냈다. '국민의 검찰론'의 요체는 검찰은 국민으로부터 '직접' 권한을 수권했기에 국민에게만 '직접' 책임지겠다는 것이다. 여기에는 검찰이 형식적으로 대통령 산하 행정부의 일부지만, 검찰은 대통령이나 법무부장관이 통제를 받아서는 안 된다 또는 받을 필요가 없다는 함의가 숨어 있다. '왕권신수설' 느낌을 주는 '검권민수설'이다.

 이는 극히 위험한 반헌법적 논리다. 대한민국 헌법체제에서 국민으로부터 권한을 '직접' 받은 사람은 대통령과 국회의원 등 선출직 공무원밖에 없다. 그 외의 사람은 아무리 잘나고 똑똑해도 '민주적 정당성'이 없다. 검찰권은 애초에 국민으로부터 직접 부여된 적이 없다. 국민은 검찰총장을 선거로 뽑은 적이 없다. 그는 법무부장관의 제청으로 대통령이 임명한 사람이다. 검찰총장의 정당성은 대통령의 '민주적 정당성'에서 파생했을 뿐이다. 따라서 검찰총장은 국민에게 책임지기 이전에, 대통령과 법무부장관에게 먼저 책임을 져야 한다.

 

p364

 2016년경 나는 <한겨레> 김의겸 기자(현 열린민주당 의원)와 세상 돌아가는 이야기를 나누었다. 김 기자가 나에게 "정권교체가 안 되면 어쩌지요?"라고 물었고, 나는 "그렇다면 15년 연속 보수집권이 되는 건데, 세상과 등지고 책 읽고 논문 쓰면서 살아야지요"라고 답했다. 그러자 김 기자도 "나도 정치부 기자는 그만두고 문화부로 가야겠네요"라고 말했다. 이에 나는 "정약전이 흑산도로 귀양갔을 때 왜 물고기만 연구하며 <자산어보>를 썼는지 이해가 간다"라고 덧붙였다.

 이 역시 자기 예언이었을까. 정권교체를 이루고 민정수석과 법무부장관직을 수행했지만, 2019년 하반기 이후 나는 정약전의 처지가 되었고 그 마음을 생각하며 살아가고 있다. 김의겸 기자는 청와대 대변인으로 근무하던 중 전세금, 부인 퇴직금, 은행대출 등을 모아 흑석동 건물을 샀다가 '부동산투기' 공격을 받고 사퇴했다. 그는 이 건물을 팔고 세금을 낸 후 남은 3억 7,000만 원을 기부했지만, 부동산투기 낙인은 사라지지 않았다. 이 흑석동 건물 앞에서 김 대변인을 규탄하던 국민의힘 의원 가운데 박덕흠 의원이 있었다. 박 의원은 서울 강남 지역 아파트와 상가, 창고, 임야 등을 포함해 총 289억 원(신고가액)의 부동산 자산을 보유하고 있다. 또한 그는 국회 국토교통위원회에서 활동하며 피감기관으로부터 수천억 원대 공사를 수주하고 엄청난 이익을 얻은 정황이 드러나자 국민의힘을 탈당했다. 그렇지만 박 의원에 대한 언론의 조명과 비판은 미미했고, 김 대변인을 향한 '선택적 분노'는 여전했다. 김진애 의원이 서울시장 후보로 나가기 위해 의원직을 사퇴하면서 김 대변인은 의원직을 승계하게 되어 '유배'가 풀렸다. 시련을 이겨낸 김의겸 의원의 활약을 조용히 기원한다. '박근혜, 최순실 국정농단 사건' 특종을 냈던 그가 의정활동에서도 특종을 내리라 믿는다.

 2021년 영화 <자산어보>가 개봉되어 아들과 보러 갔다가, 영화가 끝나자 아들이 말했다. "우리 집 이야기 같네요." '멸문지화' 그리고 이를 극복해가는 일이 남의 일 같지 않았던 것이다. 아들의 등을 두드리며 영화관을 나왔다.

 

박원순 성추행 사건에 대해 손병관 기자가 취재한 내용을 정리한 책. 이 사안의 심각성과 사회적 파장, 페미니즘의 성역화 등으로 인해 기사화되지 못한 내용들을 포함해서 이 사건을 입체적으로 조망할 수 있는 자료들을 폭넓게 제시한다.

이 사건의 전말에 대해 어느 정도의 궁금증을 해소하는 역할을 해준다.

 

이 책을 읽고 난 감상은, 참 더럽게 엮였다라는 생각이다. 박원순도 그렇고 잔디라는 가명의 여성분도 그렇고.

이 세상은 선의만으로 살아가기엔 참 어려운 세상임엔 틀림없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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p30

 많은 사람이 서울시장 자리를 대권으로 가는 징검다리로 생각하지만, 박 시장이 처음부터 대선을 의식했던 것은 아니다. 

 취임 6개월 시점(2012년 4월 26일)에 한 기자가 "이명박 시장 하면 청계천이 떠오르는데, 박 시장은 임기 안에 꼭 이루고 싶은 게 뭐냐"고 묻자 그는 "아무것도 안 한 시장이 되고 싶다"고 답했다.

 박 시장은 2013년 3월 14일 페이스북에 당시 발언의 취지를 구체적으로 설명했다.

 

 이전의 시장들은 임기 중에 뭔가 뚜렷한 사업으로 인상을 남겨서 재선이나 더 큰 선거에 나가고자 했으며, 그러다 보니 무리하게 되어 많은 문제점들이 생기곤 했다. 시민의 삶은 경제부터 문화까지 너무나 다양한 분야가 있다. 시장이 어느 것 하나 소홀하면 안 되는 것인데 한두 개의 업무만 집중하다 보니 다른 분야는 방치하게 되는 것이다.

 

 이 때문에 임기 내내 "한 게 없다"는 비판에 시달렸지만, 박 시장의 이런 안목이 임기 마지막 해에 빛을 발하기도 했다.

 박원순은 시민 처지에서 공공의료 문제를 들여다본 최초의 서울시장이었다. 시민들에게 각인될 '랜드마크'에 집착한 시장이라면 공공의료라는 무형의 가치에 주목하지 않았을 것이다.

 서울시는 공공의료 인프라 차원에서 시립병원 12곳을 운영하는데, 매년 1,000억 원 가까운 세금이 들어간다. 특히 서울의료원에 마련된 격리음압병상은 서울시의회가 열릴 때마다 '혈세 낭비', '활용도가 떨어진다'라는 지적을 받아왔다.

 박 시장은 그런 지적이 나올 때마다 "가난한 사람은 어디서 치료받으란 말이냐", "시립병원들이 적자지만, 시민이 낸 세금을 시민에게 다시 돌려드리는 것이기 때문에 앞으로도 투자를 아끼지 않겠다"고 화답했다.

 그의 선견지명은 코로나19 사태가 터지자 재평가를 받을 수 있었다. 

 서을의 코로나 사태 첫 3개월(1월23일~4월24일) 동안 서울 확진자의 71%(628명 중 446명)를 시립병원 4곳에서 치료했다. 서울의 공공의료 인프라가 받쳐준 덕에 '빅4' 대형병원들도 코로나19 병상 확보의 부담을 느끼지 않고 일상 진료를 지속할 수 있었다.

 

 

p37

 기자는 2017년 12월 8일 박 시장을 인터뷰했다. 그는 3선 도전 질문에 "이미 다 알고 있다면서요?"라며 허허 웃었다.

 박 시장이 마음을 굳히자 시장실 참모들도 "시장에게 여의도 정치가 반드시 겪어야 할 통과의례는 아니다. 박 시장에게는 '박원순의 길이 있는 것 아니냐"며 3선 도전을 돕기로 마음먹었다.

 박 시장은 이듬해 5월 10일 상반기 직원 조례에서 이 문제에 대한 심경을 직접 밝혔다.

 "저도 사실 시장을 한 번 더 해야 하는가에 대한 고민이 많았습니다. 정치적으로 보면, 서울시장을 두 번 하나 세 번 하나 마찬가지이기 때문에 더 이상 할 필요가 없죠. 실제로 많은 분들이 그렇게(3선 불출마) 권했습니다. 그런데, 출마를 고민하게 된 것은 우리가 시작했던 많은 비전과 실험들이 문재인 정부와 더불어 전국화되고 있는데 이런 모멘텀을 이어아야 하지 않나? 비록 나에게는 정치적으로 도움이 안 되더라도 적어도 시민들이 원한다면 (3선 시정을) 완성하는 것이 중요하지 않나 하는 고민을 했습니다."

 그에게는 남모를 고민이 또 있었다. 서울시 산하기관, 유관단체에 터 잡은 일부 참모들은 그가 서울시청을 떠나는 것을 원치 않았고, 이로 인한 무언의 압박도 적지 않았던 것이다.

 더불어민주당의 대표적인 박원순계 박홍근 의원(서울 중랑을)의 말이다.

 "2014년 지방선거 때 박 시장을 따로 만나 대선 나가면 돕겠다고 말씀드린 사이다. 가능성 크지 않은 줄 알면서도 2017년 대선도 도왔고, 2018년 지방선거에도 3선은 나가지 말라고 끝까지 고집했다. 처음에는 찬반 의견 팽팽했는데, 일주일 정도 지나니 시장 마음이 3선으로 기울더라. 박 시장이 내게 전화로 최종 결심을 밝혔을 때 내가 '시장님, 돕기는 하겠지만 대권에서 멀어지신 겁니다'라고 답한 기억이 난다. 지금 일을 생각하면, 내가 그때 확실히 말렸어야 한다는 후회가 든다."

 

p43

 2020년 7월 10일 새벽 서울대병원 장례식장 앞에서 부고 기사를 마감한 뒤 집으로 돌아온 나는 그대로 뻗어버렸다.

 점심 무렵 깨어나 보니 이미 많은 일이 벌어진 상태였다. 인터넷에는 '박원순 서울시장 성추행 전문'이라는 출처 불명의 글이 퍼지고 있었다.

 온라인 공간에서는 진위가 불분명한 루머가 그럴듯한 가공이 입혀지는 가짜뉴스들을 많이 볼 수 있지만, 문제의 글은 서울시청과 시장실 내부 사정을 모르는 사람의 작품치고는 너무 정교했다. 훗날 이 글은 피해자가 법률대리인 김재련 변호사와 함께 작성한 '1차 진술서'라는 것이 밝혀졌다.

 

p44

 박 시장이 2022년 대선 도전을 염두에 두고 기용한 '마지막 비서 실장' 고한석이었다. 재직 기간은 100여 일 남짓에 불과했지만 나와는 뭔가 통하는 구석이 많았다.

 그는 안희정이 충남지사 시절 보수성향의 재향군인회를 우군으로 삼아 충청권의 맹주로 올라선 것에 착안해 박 시장의 역사관을 바꾸 보려고 했다. 내가 "덩샤오핑은 마오쩌둥의 공과를 모두 인정해야 한다고 하지 않았냐"고 하자 고 실장이 "그걸 설득시키기가 참으로 어렵더라"고 말문을 열었다.

 "민주당 사람들에게는 그 부분이 어렵더라. 중국은 마오쩌둥이고, 우리나라는 박정희다. 이른바 민주화 세대가 박정희의 공을 거의 인정 안 하려고 한다. 그 점에서는 안희정이 탁월한 지점이 있었던 거다. 박 시장과도 그 얘기를 오래 했지만, 정책보다 더 어려운 게 역사관을 바꾸는 거였다. 어느 정도 필요성을 수윽하면서도 나아가지 못했다. 자기 입으로 공론화할 경우에 닥칠 파장에 대한 걱정을 많이 했다. 그래도 최근 들어서 시장이 뭔가 달라지고 있다고 생각했는데..."

 

p45

 피해자에 대해 "내 입으로 말해줄 수는 없다"고 버티던 S가 병원담길을 걸어가면서 슬쩍 운을 뗐다. "시장실 데스크 앞에 있던 00이 기억 안 나나? 시장실 자주 왔으면 아마 기억날 텐데."

 그 순간 2018년 지방선거가 끝난 6월 27일 시장을 접견할 때 집무실을 드나들던 비서의 얼굴이 어렴풋이 떠올랐다.

 그 무렵 서울경찰청 여성청소년계 수사관들은 박원순 사건의 참고인으로 불려온 시장실 전/현직 직원들 앞에서 그 비서를 '김잔디'라고 부르기 시작했다. 이제 잔디에 관해 얘기해보려고 한다.

 

p46. '2차 가해' 논란 속에서

 7월 13일은 박 시장의 시신이 서울을 떠나 경남 창녕의 선영에 안장되는 날이었다.

 그날 오전 10시경 박 시장의 유해가 서울추모공원에 도착했다.

 더불어민주당 윤준병 의원과 허영 의원, 민병덕 의원, 문석진 서대문구창과 김주명, 오성규 전 서울시 비서실장 등 박 시장과 인연이 깊었던 6명이 화장로까지 운구를 맡았다.

 그와 동시에 일부 여성단체들이 서울 은평구 여성의전화 사무실에서 기자회견을 연다는 예고 기사들이 나오기 시작했다. 시장의 마지막 길을 전송하려고 모인 조문객들의 얼굴이 하나둘 굳어갔다.

 몇몇 사람이 이때 피해자와 김재련 변호사에게 전화를 걸거나 문자메시지를 남겼다. 송다영 서울시 여성가족정책실장은 11시 40분 경 김 변호사에게 전화를 걸었고, 변호사가 전화를 받지 않자 "통화를 하고 싶다"라는 메시지를 남겼다.

 11시 44분에는 비서실장을 지낸 김주명이 참지 못하고 피해자에게 텔레그램 메시지를 보냈다. 장례 둘째 나에도 김주명은 피해자에게 "필요할 때 힘이 돼주지 못해 미안하다"는 메시지를 보냈고, 피해자도 "저를 나무라시고 원망하실 줄 알았는데 너무 죄송하다"는 답신을 보낸 상황이었다.

 한국여성의전화와 성폭력상담소는 3일 후 발표한 공동 입장문에서 "서울시 전/현직 직원 중 7월 8일 이후 피해자에게 연락을 취하는 이들이 있다"며 "너를 지지한다면서 정치적 진영론에, 여성단체에 휩쓸리지 말라고 '조언'하고 힘들어겠다고 위로하며 기자회견은 아닌 것 같다고 만류했다"라고 폭로했다.

 이 메시지를 보낸 사람이 김주명이었다. 사건 발생 석 달이 지난 후 만난 기자에게 그는 두 사람이 주고받은 메시지를 보여줬다. 장문의 메시지는 시장의 죽음 이후 피해자의 심경을 담고 있다. 사건을 이해하는 데 도움이 될 내용이라 전문을 공개한다.

 

 김주명 : 네가 얼마나 큰 상처와 아픔을 겪었는지 나는 짐작도 할 수 없을 것 같다. 내 무능이 원망스럽기도 하다. 하지만 네가 나를 신뢰한다면 꼭 해주고 싶은 말이 있다. 너를 비난하는 소리 조금도 신경 쓰지 마라. 함께 일했던 사람들은 오히려 네 걱정을 하고 있다. 너를 이용하려는 부추김에도 흔들리지 말아라. 네가 마음의 평화를 얻는 선택을 하렴. 마음의 소리를 따르고 기도의 응답을 구하렴. 꼭 부탁하고 싶은 것은 진영 싸움에 휩쓸려 들어가지 말라는 것이다. 보수/진보 할 것 없이 유불리를 따라 너를 이용할 뿐이다. 네 삶이 끝없는 싸움의 소용돌이에 빠지지 않기를 바란다. 지금 고통이 승화될 길은 마음의 소리를 따르는 것이다.

 특히 오늘 시장님을 보내는 날인데 법률대리인이 기자회견을 한다는 소식은 도저히 믿기지 않는다. 그건 정말 아닌 것 같다. 오늘 시장님을 떠나보래고 한 번 볼 수 있었으면 좋겠다.

 잔디 : 실장님.. 저는 정치도 모르고 진영도 몰라요. 최근에 있었던 일을 아시겠지만, 그 일로 제 트라우마가 폭발했던 것은 맞아요. 실장님께서 어디까지 알고 계시는지 모르겠어요. 제가 시장실에서 이 악물로 참으며 웃으며 지냈던 시간을 누군가 손가락질하는 것이나 저를 살인자 취급하는 사람들 때문에 충동적으로 그러는 것이 아니에요.

 저는 여전히 시장님의 작고가 저의 결정과 무관하길 바라고, 혹여 관계가 있더라도 무책임하게 돌아가실 분이 아니라고 생각하는 마음에서 용기를 내었어요.

 저희 가족은 시장님의 유서 중 '모두'에 저와 제 가족이 포함된다고 믿으려고 해요. 그렇다면 과연 시장님께서 이 일을 묻어두려고 하셨을까요..? 저희 아버지께서는 유서에 제 이름을 남기지 안흔 것조차, 저를 위한 마음이었다고 생각하시는 선한 분이세요. 그런 가족들이 저 때문에 힘들어하잖아요. 유명하고 대단하신 시장님과 그분의 가족들, 지인들만 명예가 있는 것이 아니에요. 보잘것 없는 저희 자고도 지키고 싶은 자존심이라는 것이 있어요.

 저는 어떠한 계획으로 증거를 모은 것도 아니었어요. 참아 내다 힘들 때 겨우 주변에 작은 목소리 한 번씩 내던 거였어요.

 저는 시장님께서 혹여 저의 고소 사실로 그러한 선택을 하셨다고 하더라도 지금 저의 선택을 지지하리라 믿어요. 어쩌면 시장님게서 어디엔가 살아계시고 북녘으로 넘어가셨을지도 모른다는 상상을 해보기도 해요.

 이 일을 시장님과 저 둘만의 문제가 아니었어요. 우리 모두는 미숙했어요. 그걸 바꿔야 한다고 생각해요. 그래야 우리 모두처럼 또 다른 사람들이 상처받지 않을 수 있다고 생각해요.

 저는 절대로 지금도 그때에도 시장님을 해하려고 그런 것이 아니었어요. 악의가 없었어요. 저는 저를 지키려고 한 거였고, 평범하게 살고 싶었어요.

 시장님을 추모하며 두 가지 문구가 떠오르더라고요. 정의가 강물처럼, 함께 꾸는 꿈은 현실이 됩니다. 살아있는 사람들이 시장님을 애도하는 방식은 다양할 수 있다고 생각합니다.

 실장님 죄송해요. 기자회견 이후에도 저를 만나고 싶어 해주시면 좋겠습니다.

 김주명 : 어떤 가족도 보잘것없는 가족은 없어. 가족의 소중함. 너를 보면 느낀 적이 많지. 모든 걸 덮자는 것도 아니야. 다만 오늘 하루만 피하면 안 될까?

 잔디 : 그 일정은 제가 정한 것이 아니라 어려울 것 같아요. 저를 도와주시는 분들께서도 너무 정치적으로 이용되는 것을 염려하셔서 오늘로 정하신 걸로 알고 있어요. 죄송해요.. ㅠㅠ

(개인적감상 : 잔디라는 분의 글에서 보면 심리적으로 거의 패닉에 가까운 상태에서 쓴 글이라는 느낌이 든다. 논리는 거의 찾아볼 길 없고 중언부언만이 있을 뿐이다. 그리고 자신의 생각보다는 주변에 떠넘기거나 의지하는 그런 글이다. 가련한 느낌이 든다)

 

 김주명은 훗날 경찰 조사에서 "그날은 고인을 추모하는 시간이었다. 진상규명이든 뭐든 (기자회견은) 그날 하루만 피하면 되다고 생각했다" 고 회고했다. (개인감상 : 당연한 말이다. 굳이 발인날 기자회견을 해서 무엇을 얻을 수 있을까? 박원순 나쁜놈 정도의 선빵 효과? 정말 진상을 밝히고 싶으면 피고인이 죽은 마당에 그들이 주장하는 확실한 증거를 제출하고 정당한 절차로 재판을 진행하면 될 일이다. 그런 합법적 절차를 마다하고 주요 피의자가 죽은 마당에 굳이 여론전으로 가겠다는 건 그 의도를 의심하지 않을 수 없는 상황이다)

 또 다른 참모 X도 "설령 판도라의 상자가 열리더라도 오늘 하루는 마음껏 울고 싶은 심정이었다"고 말했다.

 오후 2시 기자회견은 예정대로 열렸다. 지금까지도 온 사회를 흔들어놓은 쟁점들이 모두 이 자리에서 배태됐다.

 "피해자는 부서 변경을 요청했으나 시장이 이를 승인하지 않으면 불가능했다. 박 전 시장은 본인의 속옷 차림 사진을 전송하고, 비밀 텔레그램 방을 개설할 것을 요구하고, 음란한 문자를 발송하는 등 점점 수위는 심각해졌고, 심지어 부서 변동이 이뤄진 이후에도 개인적 연락이 지속됐다."(이미경 한국성폭력상담소 소장)

 피해자는 박 시장을 통신매체이용 음란, 업무상위력에 의한 추행 그리고 강제추행 혐의로 고소했다.

(개인감상 : 이후에 난 어떤 매체에서도 이때 주장한 음란한 문자에 대해 증거를 제시했다는 기사를 본 적이 없다)

 

p59

 여성단체들의 요구사항 중 눈에 띄는 것이 더 있었다. "서울시 관계자들은 언론에 피해자에 대한 일방적인 코멘트를 중단하고, 언론 인터뷰 시 전/현직 직급과 부서를 밝히라."

 나는 이것을 언론과 취재원 양쪽에 대한 압박으로 받아들였다. 이 또한 나중에 밝히겠지만, 내가 만난 취재원 중에는 익명을 전제로 시장실 시절 얘기를 해준 경우가 많았다.

 기사 신뢰성을 위해 취재원을 밝히는 것이 합당하지만, 자신을 드러냄으로써 취재원들이 볼 피해에 대해서도 생각하지 않을 수 없었다. 아마도 '신원 공개'의 어려움을 누구보다 잘 알고 있을 피해자 측이 상대방 입장을 고려하지 않고 '신원 공개'를 요구하는 것은 공정하지 않다고 생각한다. 어쨌든 이런 식의 압박은 동시다발로 밀려왔고 나에게도 예외는 아니었다.

 비서실장 반응들을 담은 기사 부제 <"일 잘하고 밝은 친구" 증언도>는 나중에 수정됐다.

 비서실장들은 모두 피해자의 업무 능력 자체는 높이 평가했다. 피해자의 기자회견으로 자신들의 책임론이 제기되는 상황에서 원인 제공자에 대한 호평이 이례적이어서 기사에 "일 잘하고 밝았다", "가장 오랫동안 근무한 비셔였고 시장실에 긍정적인 에너지를 불어넣는 존재"라는 평을 넣었다.

 그런데 노조 공보위를 중심으로 일부 후배 기자들이 "피해자의 성격을 굳이 묘사할 필요가 있냐"는 문제 제기를 편집국장에서 했다고 한다. 나는 이해가 가지 않았다. 굳이 이유를 추론해보자면 ▲ 피해자의 성격을 묘사하는 것을 '2차 가해'의 범주에 들어간 것으로 이해하거나 ▲ 비서실장들의 호평 이면에 '다른 의도'가 있었던 것으로 의심했던 게 아닌가 싶다.

 또한, 공보위는 7월 16일 "사건의 성격, 과거 보도 사례 등을 살펴 볼 때 이번 사건 역시 '피해자'라고 호칭하는 것이 적절하다고 봤다"며 상근기자의 취재, 편집 과정에서는 '피해자' 용어를 사용해달라고 권고했다.

 공보위 권고가 강제성은 없었지만 내 입장도 명확했다. 구체적인 피해 사실을 가해자가 인정하거나 또는 법정에서 확정되지 않는 한 진실을 다투는 사람은 '고소인'으로 통일해야 한다는 것이다.

 

p71. 시장실 사람들, 말문을 열다

 여성단체들의 보이콧으로 서울시 차원의 진상조사는 없던 일이 되어버렸다.

 황인식 서울시 대변인은 7월 22일 오후 "민관 합동조사단 구성은 현실적으로 어려운 상황이 됐다."며 "피해자가 국가인권위원회 진정을 통해 조사를 의뢰할 경우 조사에 적극 협조하겠다"고 발표했다. 김 변호사와 피해자 지원단체들은 7월 28일 오전 서울광장에서 인권위 직권 조사를 촉구하는 '보랏빛 우산 퍼포먼스'를 벌이며 한껏 기세를 올렸다.

 서울시 발표 직전 7월 22일 오전 11시에는 피해자 지원단체의 2차 기자회견이 열렸다. 기자회견의 핵심은 피해자가 시장으로부터 당한 성폭력 피해를 알리며 도움을 구한 서울시 직원이 20명이라는 것.

 "(피해자가) 정확하게 얼마나 자세히 말했냐"는 질문에 김재련 변화사는 "피해자가 (2019년) 부서 이동 전에 17명, 이동 후에 3명에게 말했다. 이 중에는 피해자보다 높은 직급, 이 문제에 대해서 더 책임 있는 사람에게 전달해야 하는 인사담당자가 포함됐다"고 부연 설명했다.

 송란희 여성의전화 사무처장은 "박원순의 개인적인 문제를 넘어 권력에 의해 은폐, 비호, 지속된 조직적 범죄"라고 규정했다.

  이 2차 기자회견으로 박원순 사건은 새로운 국면으로 접어들었다. 종전까지는 박 시장의 은밀한 사생활이거나 설령 그런 일이 있었다 해도 개인의 일탈로 치부될 수 있었는데, 직원들의 피해 호소 묵살은 조직의 문제가 되기 때문이다.

 이 무렵 취재를 거부하거나 '노 코멘트'로 일관하던 시장실 일부 직원들의 태도가 변하기 시작했다. 사태 초기 시장실 직원들은 '수인의 딜레마'에 빠져 있었다.

 박 시장의 갑작스러운 죽음과 함께 피해자의 폭로가 이어지면서 이들은 심리적으로 큰 충격을 받았다. 피해자 주장에 반신반의하면서도 혹시 자신이 모르는 뭔가가 있을지 모른다는 생각에 이들은 극도록 말을 아꼈다. 마치 공범 혐의를 받고 별도로 격리된 두 죄수가 상대방이 무슨 말을 할지 모르는 상황에서 어떤 대처가 현명한 선택인지 몰라서 번민하는 상황이었다.

 서울시장실에서 경력을 쌓거나 박 시장의 정치적 동지를 자처했던 '박원순계' 의원 10명의 상황도 마찬가지였다. 기동민, 김원이, 남인순, 민병덕, 박홍근, 박상혁, 윤준병, 천준호, 최종윤, 허영이 그들이다.

 '윤준병 사태'는 이들을 더더욱 얼어붙게 했다. 윤준병 의원은 서울시에서만 30년 가까이 공무원 생활을 하다가 행정1부시장까지 오른 인물이다. 여러 가지 사업들을 의욕적으로 벌이려는 박 시장에게 '늘공' 입장에서 행정적으로 가능한 것과 불가능한 것을 설명해주는 게 그의 일이었다. 생전 박 시장은 그의 능력을 인정하면서도 "윤준병 말대로만 하면 내가 할 수 있는 게 없어"라고 불편함을 드러냈다.

 윤준병 의원은 2020년 7월 13일 오후 박 시장의 유해를 고향에 묻고 오면서 피해자의 기자회견 뉴스를 접했다.

 윤준병은 페이스북에 "행정1부시장으로 근무하면서 피해자를 보아왔고 시장실 구조를 아는 입장에서 이해되지 않는 내용들이 있었다. 침실,속옷 등 언어의 상징조작에 의해 오해 가능성에 대처하는 것은 남아 있는 사람들의 몫"이라고 썼다.

 이 글을 놓고 "피해자 말을 의심하는 거냐"는 비판 기사들이 쏟아졌다. 2020년 7월 16일 가로세로연구소의 강용석 변호사는 역대 비서실장들을 추행 방조 및 위계에 의한 공무집행 방해로 고발하면서 윤 의원도 끼워 넣었다.

 그렇게 피해자의 '피해 호소 20명' 주장이 나오면서 시장실 사람들은 '성추행 공범' 이미지를 덮어쓰게 됐고, 이들은 더더욱 입단속을 경계하게 됐다. 나의 취재가 더욱 어려워졌음은 물론이다.

 그러나 피해자 지목으로 경찰서를 다녀온 사람들이 하나둘 늘어나자 이들 사이에서 "내가 왜 이런 대우를 받아야 하나", "피해자가 해도 너무 한다"는 비판론이 부상했다.

 시장실에서 1년 6개월간 근무했던 Y는 박 시장이 사망한 직후부터 피해자를 지지하는 쪽이었다. 그가 그로부터 다섯 달이 지난 뒤 해준 얘기다.

 "지금 생각해보면, 가세연 강용석의 고발은 없었다면 좋았겠다는 생각이 든다. 그 일이 많은 사람을 멀어지게 만들었다. 12월 26일 '2차 가해 반대' 공동성명 건으로 잔디와 통화할 일 있었는데, 잔디가 하는 말이 '동료들에게 법적인 책미을 물을 생각은 없었다'고 한다.

 사람들 기억이 100% 정확할 수 없지 않나? 피해자 말에도 사실이 아닌 게 끼어이쏙, 동료들 말도 마찬가지일 거다. 만약 경찰 조사가 아니라 사적으로 만나서 얘기했다면 동료들도 '네 사정이 그런 줄 몰랐다'고 넘어갈 수 있는 문제였다. 그런데 경찰을 매개체로 말이 오가면서 양쪽 모두 전면전으로 갈 수밖에 없게 됐다"

 

기자 : 가세연 고발이 피해자의 뜻과는 무관했다고 보는 거냐?

Y : 그렇다.

기자 : 가세연 고발에 이어 김재련 변호사가 '피해 호소인 20명'을 얘기할 때 사람들은 그걸 피해자의 의지로 받아들였는데?

Y: 그것도 사실이다. 다만, 돌이켜보면 피해자와 지원단체가 그렇게 안 했다면 더 좋았을 것이라는 생각을 지울 수가 없다. 그러나 당시에는 그런 것까지 생각할 수 없었을 거다. 그런면에서 비극적이라고 본다.

 

 어쨌든 그동안 알고 지내던 시장실 사람들도 기자의 전화를 피하는 등 이 시기 취재가 어려웠던 것은 사실이다.

 

p76

 그래서 나는 일반직과 별정직을 가리지 않고 '시장실 직원 20명'을 찾아보기로 했다. 그 결과물이 7월 31일 저녁에 출고된 <서울시청 6층 사람들 "성추행 방조? 난 들은 적 없다">이다. 일단 기사 내용을 전재하겠다.

 

 국가인권위원회가 고 박원순 전 서울시장의 성추행 의혹에 대해 직권조사를 시작한 가운데, 성추행을 방조했다는 혐의로 조사 또는 수사 대상이 될 수 있는 서울시청 '6층 사람들'이 입을 열기 시작했다. 하지만 이들은 방조 의혹에 대해 피해자의 호소를 들은 적 없다고 말했다. 관련 압수수색 영장이 기각되고 유족 측의 요청으로 박 전 시장의 휴대폰 포렌식도 중단된 상태에서 관계자들의 진술이 엇갈리는 상황이라 진상규명에 어려움이 예상된다.

 <오마이뉴스>는 조사 대상이 될 수 있는 이들 입장을 듣기 위해 피해자가 시장실에 근무하기 시작한 2015년 7월부터 올해까지 5년 동안 서울시청 6층에서 근무한 공무원 20명과 접촉했다. 6층은 박 전 시장의 업무를 돕는 시장실, 행정부시장실, 정무부시장실, 정무수석실, 소통전략실, 정책보좌관실, 젠더특보실, 공보특보실 등이 모여있다.

 김재련 변호사와 한국성폭력상담소 등은 13일 기자회견 이후 피해자가 박 전 시장의 성적 괴롭힘, 인사 고충을 호소했음에도 불구하고 전보 조치를 취하기 위한 노력을 하지 않았다며 '6층 사람들'의 추행 방조 혐의를 주장해왔다. 성폭력상담소는 16일 보도자료에서 "2016년 1월부터 매 반기별 인사이동을 요청함. 번번이 좌절된 끝에 2019년 7월 근무지 이동 후, 2020년 2월 다시 비서 업무 요청이 왔다"고 전했고, 김 변호사는 지난 22일 '2차 기자회견'에서 '피해자가 기억하는 내용만 해도 부서 이동 전에 17명, 이동 후에 3명에게 말했다'고 밝혔다. 6층에서 근무하는 시장 보좌진들은 40~50명에 이른다.

<오마이뉴스>가 접촉했던 20명이 피해자 측이 지목한 20명인지는 확인되지 않았다. 다만 피해자와 같은 공간에서 근무했거나 시장 결재 때문에 수시로 얼굴을 볼 수 있었던 관계로, 최소한 참고인 조사가 유력한 인물들이다. 일부는 이미 경찰에서 조사를 받았다. 박 전 시장이 기용한 별정직과 공채 출신의 일반직이 모두 포함돼 있다.

 사건 초기에는 취재에 잘 응하지 않던 이들은 하나둘씩 자신 입장을 밝히기 시작했다. 이들은 모두 피해자가 박 전 시장과의 관계에서 불편함을 호소하거나 그로부터 인사이동을 요청하는 얘기를 들은 바 없다고 말했다. 이에 따라 본격적인 조사 또는 수사 국면에서는 엇갈리는 진술을 넘어서는 증거가 관건이 될 것으로 보인다.

 취재에 응한 이들의 핵심 발언을 추려서 소개하면 다음과 같다.

 △ 김주명(2017년 3월~2018년 7월 비서실장)

"고소인이 불편해하는 낌새를 못 느꼈고, 심지어 (2019년 7월 시장실을) 그만두는 순간까지도 몰랐다."

-비서실장을 그만둔 이후의 상황을 어떻게 아느냐?

"고소인과는 올해 3월까지도 통화를 하는 사이였다. 그(고소인)는 시장실 최장기 근무자였고, 내가 아는 '최고의 비서'였다. 이 정도만 얘기하겠다."

 

△ 오성규(2018년 7월~2020년 4월 비서실장)

"비서에게 그 정도로 심각한 문제가 있었다면 비서실의 최고책임자인 나 같은 사람에게 직접 얘기를 했겠냐. 2019년 11월 14일 안부를 묻는 텔레그램 메시지를 주고받은 이후 내가 고소인에게 연락을 한 적도, 고소인이 내게 연락을 한 적도 없다. 지난 2월 시장실 데스크 여비서 2명을 순차적으로 바꿔야 할 상황이 발생했지만, 그때도 내가 고소인을 찾을 일은 없었다.

△ 박 전 시장의 핵심 참모 A씨(남)

"하루 한두 번은 시장실에 들어갔는데, 지금 같은 얘기가 나올 줄을 까맣게 몰랐다. 고소인이 얼굴을 찌푸리거나 스트레스를 받는다는 느낌은 없었다."

△ 고소인의 직속 상관 B씨(남)

"고소인이 얘기를 하지 않아서 그런 사실을 몰랐다 고소인이 근무하는 동안 데스크에서 함께 일했던 여비서 2명은 계속 바뀌었다. 당사자가 요청하면 바꿔주는데 피해자는 공식적으로 얘기한 적이 없다."

- 혹시 상사가 남자라서, 어려워서 얘기를 못 한 건 아닌가.

"다른 직원들은 나가겠다고 해서 바꿔줬는데, 왜 그 직원만 얘기를 안 했을까? 그 친구로부터 요청받은 게 없었다.

△ 별정직 공무원 C씨(시장실 떠난 후에도 피해자와 가끔 연락하고 만남)

"고소인이 박 시장과의 관계에 대해 어려움을 호소한 적이 없다. 반대로 내 앞에서 자랑한 기억은 난다."

△ 일반직 공무원 D씨

"워낙 오랫동안 근무하다 보니 박 전 시장이 고소인을 편하게 생각했던 것은 맞다. 고소인도 근무 기간에 서울시장의 비서로 일한다는 자긍심을 숨기지 않았다. 데스크는 9급이나 8급이 주로 맡아왔는데 7급으로 승진한 사람을 다시 불러들이는 것은 상식에 맞지 않는다."

△ 서울시 관계자(6급 이하 공무원 인사 담당)

"2월에 시장실로부터 (비서를 고소인으로 충원해달라는) 그런 요청을 받은 바 없다."

△ 윤준병 더불어민주당 의원(2018~2019년 서울시 행정1부시장)

"본부장 시절 박 시장의 결재를 기다리는데 대기시간이 길어지면 피해자가 시장실 안으로 얼굴을 들이밀고 '밖에서 사람이 기다리고 있다'는 사실을 알려주는 센스가 있었다. 예의 바르고 친절했다. 고소인으로부터도 불편하다는 말을 들은 적이 없다."

 

 이 기사를 올린 것은 7월 29일 오전 9시 25분이지만, 최종 출고는 7월 31일 오후 7시 30분에 이뤄졌다. 내부 검토에만 이틀 반이 걸렸다는 얘기다.

 "피해자가 20명에게 피해를 호소했다"는 주장이 처음 나왔을 때 나는 "사실이라면 적어도 내가 아는 사람 몇 명은 그 20명 중에 반드시 끼어있을 것"이라고 확신했다.

 서울시청 6층에는 시장 업무를 돕는 시장실은 물론이고 행정부시장실, 정무부시장실, 정무수석실, 소통전략실, 정책보좌관실, 젠더특보실, 공보특보실 등이 모여있었다. 모두가 시장실과 밀접한 업무 연관성이 있었고, 이들은 집무실 데스크 앞에 있던 피해자의 모습을 기억하고 있었다.

 그러나 모두가 "피해자로부터 박 전 시장과의 관계에서 불편함을 호소하거나 인사이동을 요청하는 얘기를 들은 바가 없다"고 답했다.

 7월 한 달 내내 언론들이 피해자 주장만 대서특필하는 상황이었다. 또한, 피해자가 경찰 조사에서는 피해 사실을 알렸다고 구체적으로 지목한 사람들도 있었던 만큼 사건 초기 이들의 진술을 확보한다는 의미도 있었다.

 기사 한 꼭지를 쓰려고 취재한 20명의 반응을 취합하는 것은 나로서는 전무후무한 시도였다. 7월 29일 오전 기사를 쓴 뒤 봉은사 3재에 참석했던 나를 편집국장은 광화문 회사로 불러들여 "일체의 해설 없이 직원들 얘기만 그대로 보도하자"고 제안했다.

 7월 16일 가세연 강용석의 '강제추행 방조' 고발로 경찰 조사를 받게 된 오성규, 김주명, 윤준병의 경우 "실명으로 보도해도 좋다"는 허락을 어렵사리 받아냈는데 기자의 시각이 반영될 수 있는 일체의 해설을 지우라는 얘기였다.

 

 

 한편, 정치권에서는 박원순 사건과 관련한 엄청난 양의 논평들을 쏟아냈다. 이 중에서 정의당의 논평 몇 건은 기록으로 남기려고 한다.

 "이런 성희롱 사안이 벌어지게 된 서울시의 '구조'를 반드시 밝혀내야 한다고 생각한다. 개인의 일탈로 넘어갈 수 있지만, 그게 아니라 조직화된 구조적 문제라는 생각이 든다. 그런 문제는 사실 광범위하게 법률적으로 의율될 수 있는 범죄가 아니라 서울시 관행의 문제이기 때문에 아주 심각할 것이다. 바로 그 문제를 정확히 조사해야 한다는 것이다.(배복주 여성본부장)

 

 "성폭력 문제는 한 개인의 일탈이 아닌 구조적인 문제인 만큼 여성가족부 장관은 부처의 취지와 목적을 똑바로 인식해 제 역할을 다하길 바란다."

 

 "서울시가 모범적으로 공들여서 성희롱, 성폭력 방지 매뉴얼을 만들었는데 이게 왜 현장에서 먹통이었는지 그 이유를 정확하게 파악해야 한다고 본다. 특히 성희롱, 성폭력 가선처리 매뉴얼이 최고 권력자 앞에서 작동이 멈췄다는 것에 대해서 서울시는 뼈아픈 반성과 보완책 마련이 필요하다고 봅니다.

 

 나는 정의당 사람들을 만날 때마다 "서울시장실 사람들 얘기도 들어보고 판단하라"고 조언했지만, 그들은 내 말을 듣지 않았다.

 해가 바뀌자 김종철 대표가 같은 당 장혜영 의원을 성추행한 것에 책임을 지고 사퇴하는 일이 발생했다. 이 사건을 조사하고 발표한 사람이 배복주였다.

 정의당 주장대로 성폭력은 개인 일탈이 아니라 구조적인 문제일까? 그렇다면, 당 대표의 문제에 대해 정의당에는 어디까지 책임을 물려야 할까?

 

p93

 잔디와 근무 기간이 2년 가까이 겹쳤던 여성 D의 말이다.

 

 "시장실에 들어올 때 마음에 없이 억지로 왔다는 식으로 주장하는 데, 그럴 리 없을 거에요. 시장실 근무는 특별한 경험이기 때문에 오고 싶어 하는 사람은 엄청 많아요. 따라서 오기 싫다는 사람이 들어 올 수가 없다는 것은 나도 경험했죠. 피해자 또래의 시청 직원 중에 '시장실 일이 많아서 꺼림칙했지만 승진과 인사에는 도움 될 것 같아서 경험 쌓는 차원에서 왔다'고 하는 사람이 많았습니다. 일단 시장실에 들어와도 적응 못 하는 사람들은 후임자 정해지는 대로 그때그때 내보내 주곤 했어요."

 D의 얘기는 계속 이어졌다.

 "시장에게 결재받으러 가면 데스크 비서들과 마주칠 수밖에 없어요. 그럴 때마다 잔디는 약간 비음 섞인 목소리로 '어서 오세요, 어서 오세요' 하며 반갑게 맞아줬던 기억이 납니다. 함게 있던 비서들에 대해서는 잔디만큼의 기억이 없어요. 그래서 '비서가 성추행 고소했다'는 뉴스가 처음 나왔을 때 다들 잔디가 아니라 또 다른 친구를 떠올렸을 거에요."

 역시 시장실을 자주 드나들었던 별정직 E와 L, T는 피해자가 박 시장에게 넥타이를 매주는 모습을 기억했다. E의 얘기다.

 "박 시장이 행사 때마다 넥타이를 고쳐 매야 하는데 피해자가 시장 목에 넥타이를 직접 매줬어요. (다름 사람들은 그렇게 안했나요?) 다른 사람들은 자기 목에 넥타이 걸어서 매듭 만든 다음에 시장에게 전해주기만 했죠."

 L의 기억은 이렇다.

 "내가 보고하는 와중에 잔디가 시장에게 '외부행사 나가야 한다'며 넥타이를 매어주는 데 그 모습이 아내가 남편 넥타이 매주는 듯한 느낌이었어요. 또 한번은 잔디가 넥타이 매주려는 것을 시장이 '이건 내가 할 수 있다'고 뿌리치는 것을 봤어요. 그걸 보고 다른 참모들에게 '잔디가 시장실에 너무 오래 있었으니 내보낼 때가 아니냐'는 의견을 준 적이 있습니다.

 

T는 "내가 지켜보는 자리에서도 잔디가 시장의 넥타이를 고쳐매 주더라. 시장 몸에 손댈 수 있는 사람이 누가 있겠나 싶었다"고 말했다.

 B와 C는 시장 관련 영상 촬영 업무를 했다. C의 증언이다.

 "우리 팀이 일을 하다 보면 시장의 몸에 마이크를 장착할 때가 많은데, B가 마이크를 주면 시장이 직접 장착하곤 했어요. 그런데 피해자는 밖에서 다른 일을 하다가도 그걸 보면 달려와서 본인이 시장 몸에 마이크를 채워주곤 했죠."

 어쨌든 2015년 시장실 입성 이후 2016년 하반기까지 피해자가 박 시장과 관련해 특별히 문제 제기한 흔적은 드러나지 않았다.

 2016년 2월 25일 피해자가 박 시장에게 보낸 손편지에는 당시 시장에게 느낀 감정이 고스란히 드러난다.

 

 자랑스러운 박원순 시장님께 드려요.

 시장님~ 생신을 진심으로 축하드립니다.

 작년에 첫 발령을 받고 공무원이 된 지 4개월 만에 시장님을 모시게 되어서 얼마나 무섭고 떨리는 마음이 들었는지 몰라요!

 그런데 시장님게서 늘 잘 가르쳐주시고, 웃음으로 대해주셔서 항상 감사하고 행복한 마음으로 생활하고 있답니다. 서울시 공무원으로서, 또 한편으로는 서울시민으로서 시장님의 생각이나 정책, 사소한 행동들 모두 존경스럽고 그런 부분들을 저도 본받아 좋은 공무원, 좋은 사람이 되고 싶어요.

 시장님이 계시기에, 우리 서울의 미래가, 대한민국의 미래가 기대됩니다.

 그러니까 꼭 건강하셔야 돼요! 비서실, 아니 서울시 통틀어서 제일 건강하시지만, 건강하실 때 관리하셔야돼요.

 시장님 생신 축하드리고 사랑합니다.

 시장실 막내 잔디 올림

 

 그러나 피해자는 "2016년 1월 당시 5급 비서관에게 전보 요청을 했고 같은 해 11월 인사담당자에게 전보를 요청하는 메일을 보냈다"라고 주장하고 있다. 피해자 측은 "인권위와 경찰 등에 증거를 제출했다. 그중 일부"라면서도 구체적인 내용을 공개하진 않았다.

 기자는 박 시장의 수행비서관을 3년 6개월간 지낸 A를 여러 차례 만났다. 일반직 공무원이었더 A는 박 시장이 외부로 출타할 때마다 '그림자'처럼 따라붙었다. 박 시장이 시장실에 머무는 동안에는 피해자가 시장의 일정을 관리하고, 밖에 있을 때는 A가 피해자가 하던 일을 맡았기 때문에 시장실 그 누구보다도 업무 연관성이 높았다. 두 사람이 함께 근무한 기간은 2년 6개월이 겹쳤다. 다음은 A와의 일문일답이다.

 

기자 : 피해자는 6개월마다 부서를 옮겨달라는 요청했다는데, 그 정도 빈도면 수행비서관도 알았을 것 같다.

A : 인사 문제 상담을 자주 한 편이다. 나에게는 자기가 언제 나가는 게 좋을지, 어느 타이밍이 좋을지를 물었다.

기자 : 피해자가 전보를 원했다는 뜻인가?

A : 본인이 남는 게 유리하다고 생각하면 남고, 그게 아니면 떠나는 것 아니냐? 나가고 싶다고 의사를 밝히면 다 내보내 줬다. 시장이 각별하게 생각했던 것은 맞다. 하지만, 아무리 시장이라도 나가겠다고 강하게 얘기하는 직원을 막을 방법이 없다. 옆자리에서 같이 일한 비서 3명은 차례로 다 나갔다. 그 친구들도 안 나갔다면 내가 이런 얘기하지도 않는다.

기자 : 피해자가 일 잘한다고 인정받았고, '시장실 업무를 굉장히 좋아했다'는 얘기를 많이 들었다.

A :  그건 맞다. 시장실 4년 동안 9급에서 7급으로 승진해서 나갔다. 원래부터 7급 달면 나가려고 했었다. 9급, 8급으로 밖에 나가면 허드렛일 하는 부서에서 고생할 수도 있으니까.

 

 한 가지 분명한 것은, 잔디가 시장실 직원들에게 '비서 이상의 비서'로 강렬한 인상을 줬다는 점이다.

 CBS 기자 출신인 김주명 서울시평생교육진흥원장은 2017년 7월부터 박 시장의 미디어 특보(8개월), 비서실장(1년 2개월)으로 잔디와 함께 일했다. 그는 8월 13일 서울시경에서 3시간 30분 동안 이어진 피의자 조사에서 잔디를 이렇게 평가했다.

 "<오마이뉴스> 인터뷰에도 말했지만 '최고의 비서'다. 굉장히 자부심도 있었고 자기 일을 즐거워하면서 했다. 따로 내가 무언가를 지시하거나 주문한 적이 없었던 것으로 기억한다. 시장이 외신 보도를 직접 챙기고 스크랩도 하는 등 자료 관리를 꼼꼼히 하는 편이었다. 시장이 그런 일을 할 때 나는 도와준 적이 없는데 잔디는 자기 일이 아닌데도 시장을 도와드리곤 했다.

 잔디는 내 비서 일도 했다. 내가 '직원들 격려 좀 해야겠다'고 하면 나에게 '어느 부서가 일을 잘해서 좋은 기사가 나갔다'는 식으로 팁을 줬다. 그러면 내가 시장 명의로 피자를 보내곤 했다. 비서실장인 내가 알아야 할 기사가 있으면 텔레그램으로 보내주기도 했다.

 경찰이 '비서실에서 잔디가 하는 일이 뭐냐'고 묻자 김 전 실장은 이렇게 답했다.

 "가장 핵심적인 일은 시장 일정이 원활하게 돌아가게 하는 것이다. 시장의 하루 일정이 20개가 넘는다. 10분 단위로 면담, 회의가 잡혀있다. 그런데 면담자들은 그 10분도 짧게 느껴서 가능한 한 오래 하려고 하는데 그때 누군가 들어가서 면담을 종료시켜야 한다. 저와 잔디, 그리고 같이 일하는 비서 3명이 그 역할을 했다. 그리고 시장 일정이 많으니까 하루에도 방문객들이 아주 많다. 그분들을 응대하는 일들이 저와 비서 2명이 주로 했던 일들이다."

 "박시장이 잔디를 대하는 태도는 어땠나?"

 "신뢰감을 갖고 있었던 것 같다."

 "그렇게 판단하는 이유는?"

 "일정을 중간에 자르는 게 쉽지가 않다. 그런데 그 일을 잘했다. 시장은 일 잘하는 사람에 대한 평가가 좋았고, 그런 사람을 좋아했다."

 

p104

 피해자가 선임으로 올라선 뒤 만난 3명과는 갈등이 적지 않았다고 한다. 6층 동료 직원의 말이다.

 

 "데스크 여비서들과 갈등이 있었던 것은 사실이다. 피해자 스스로 '나는 젊은 꼰대다', '완벽주의자'라는 얘기를 많이 했는데, 윗분들이 그런 스타일을 좋아해도 옆 사람은 굉장히 피곤하겠다는 생각은 들었다. 후임 비서들이 '동기끼리 잘 부탁해요'라는 식으로 편하게 다가가면 피해자는 '내가 선임인데 동기 얘기가 왜 나오냐'고 받아쳤다. 피해자가 내게 '어떻게 선임인 나에게 감히 이런 식으로 대하지'라는 식의 불평을 종종 하곤 했다.

 데스크 비서들을 제외하곤 박 시장은 물론이고 여타 직원들과의 관계는 비교적 원만했던 것으로 보인다. 피해자는 2016년에 이어 2017년 2월 15일에도 시장에게 '생일 축하' 편지를 보냈다.

 

 

 반짝반짝 빛나는 박원순 시장님께

 

 시장님 안녕하세요. 저 잔디에요^^

 시장님을 모시면서 벌써 이렇게 두 번째로 생신을 축하드리게 되었어요.

 제가 2015년 7월에 처음 시장실에 왔으니, 기간은 2년이 채되지 않지만 벌써 세해째 시장님을 모시고 있네요.

 시장님, 항상 정신없고 바쁘신 일정 속에 힘드실텐데도 뵐 때마다 한번이라도 더 웃어주시고, 격려해주시고, 좋은 말씀해주셔서 감사드립니다. 덕분에 얼마나 기쁘고 힘이 나는지 몰라요. 시장님을 곁에서 지켜보면 참으로 힘이 납니다. 더 열심히 살아야겠다는 생각이 들도록 만들어주시는 분이세요.

 아주 짧은 시간이 주어질지라도 모든 일에 집중하시는 능력과 매순간 최선을 다하시는 모습에서 뜨거운 열정과 놀라운 능력을 느낍니다. 또 모든 사람을 똑같이 대하시는 모습에 감동을 받습니다.

 식사도 거르시고 화장실도 못가시며 지키고 계신 우리 서울과 꿈이라는 꽃봉오리. 긴 겨울 지난 곧 활짝 필 때까지 응원하겠습니다. 시장님 생신 축하드려요.

 2017. 2. 15 잔디 올림

 

(... 세상에서 사람이 가장 무섭다.)

 

p106

 2018년 6월 13일 지방선거에서 김문수, 안철수 두 경쟁자를 가볍게 제압한 박 시장은 7월 7일 세계도시정상회의 참석차 3박 4일 싱가포르 출장길에 나선다.

 오성규 전 비서실장이 2020년 12월 3일 국가인권위에 보낸 의견서에 싱가포르 현지의 A와 피해자가 7월 9일 오후에 주고받은 텔레그램 메시지를 공개했다.

 

피해자 : 저 한 번은 데리고 가셔야 하는 것 아니예요? 팀장님이 힘 써주세요... ㅋㅋㅋㅋ 시장님은 백퍼 데려간다고 하는데.. 에스파뇰 몰라~~

A : 국제과에 물어보니 이렇게 준비 중이야. 스페인 어때요?

피해자 : 짱좋 ㅠㅠㅠㅠ 제발 플리즈

A : 세뇨리따~~ 이건 아닌가? ㅋㅋ

피해자 : 승진이고 뭐고 순방 부심 한번 ㅋㅋㅋ

 

의견서 발표 다음날 <중앙일보> 온라인판에 피해자 측의 반박 기사가 실렸다. 김재련은 <중앙일보>와의 통화에서 "피해자는 박 전 시장과 함께 해외 출장을 가게 해달라고 요청한 적이 없다"고 말했다. 

 그는 "이미 박 전 시장과 함께 해외 출장을 떠난 비서관 중 한 명이 출장 사진을 피해자에게 보내며 '너도 다음에 가게 해달라고 하라'라고 해 해외에 간 것에 대한 부러움을 표시했을 뿐"이라고 설명했다. 아울러 그는 이 같은 대화 내용이 들어있는 메시지 내용 앞부분을 오히려 실장 측이 편집했다고 주장했다.

 피해자 측이 편집 의혹을 제기한 만큼 둘의 대화가 어떤 맥락에서 시작됐는지 궁금했다. 그러나 오성규는 "두 사람의 사적 대화이기 때문에 그걸 공개할 수는 없다. 둘이 다른 사람들 험담한 내용도 있는데 그런 걸 어떻게 다 보여주냐"고 반문했다. 그러면서도 그는 말했다.

 

 "대화 내용을 다시 봐라. 부러운 마음에 그냥 한 얘기가 아니라 스페인이라는 목적지까지 구체적으로 언급하고 있잖은가? 편집이라니 황당하다. 지원단체들은 그동안 피해자 측 주장을 내보내면서 자기들이 유리한 방향으로 편집하지 않았나? 우리에게 편집 운운하는 것은 자기들이 그동안 해온 행동을 스스로 부정하는거다."

 어쨌든 A가 피해자에게 알려준 대로 박 시장은 9월 27일부터 9박 11일 동안 스페인이 포함된 해외 출장을 다녀왔다. 그러나 피해자 바람은 이뤄지지 못했다. 박 시장의 해외 출장에 여러 차례 동행했던 서울시 일반직 공무원의 말이다.

 "매년 서너 차례 시장의 해외 순방 일정이 잡히지만, 시장실 늘공 중에서는 수행비서관만 같이 갔다. 해외에서는 시장 일정이 훨씬 촘촘하게 짜이고 수행원들의 업무도 그만큼 세분되는데, 시장실에 배정된 인원은 1명이기 때문이다. 해외 출장은 시장실 아무개가 따라가고 싶다고 해서 갈 수 있는 게 아니고, 시장 마음대로 결정할 수 있는 것도 아니다."

 박 시장이 유럽 출장에 앞서 한 달간 옥탑방살이를 할 때도 피해자는 현장에 모습을 드러냈다. 당시 삼양동에서 시장 부부와 숙식을 함께 하다시피 했던 L은 "2018년 8월 초순 잔디가 퇴근 후 서너 명의 직원들과 함께 작은 화분을 사 들고 찾아온 적이 있다. 삼양동이면 집도 먼 편인데 굳이 올 필요가 있나 싶었다"고 말했다.

 

p115

 그러던 차에 나타난 사람이 일반직 공무원 B(여성)였다. 시장실에서 2년 9개월간 일했던 B는 공무원 선배이자 인생 선배로서 잔디와는 막역한 사이였다.

 시장실의 별정직들은 "우리 얘기보다는 잔디가 마음을 터놓고 얘기했던 일반직 공무원들 얘기를 들어보라"는 조언을 하곤 했다. B는 그런 조건에 부합한 사람이었고, 이번 사건과 관련해 7월 18일 경찰 조사를 마친 상태였다.

 9월 11일 나는 "사건이 터지기 전 잔디가 카카오톡 프로파일에 박 시장과 함께 찍은 사진을 올렸고, 그걸 본 B가 '둘이 너무 가까이에서 찍은 사진 아니냐'는 반응을 보였다"는 얘기를 들었다.

 해가 바뀌자 "박원순이 피해자에게 문자나 사진을 보낸 것이 확인됐다"는 발표가 계속 나왔다.

 

 2021년 1월 14일 서울중앙지법 형사합의31부 조성필 부장판사가 이른바 '4월 사건' 가해자 Z에게 징역형을 선고하면서 "박원순이 서울 시장 근무 1년 반 이후부터 야한 문자와 속옷 차림의 사진 등을 보냈고, (피해자는) '냄새가 맡고 싶다', '몸매가 멋있다', '사진 보내달라'는 등의 문자를 받았다"고 말했고, 같은 해 1월 25일 국가인권위도 "박 시장이 늦은 밤 피해자에게 부적절한 메시지와 사진, 이모티콘을 보낸 것은 사실로 인정 가능하다"고 발표했다. 인권위는 "피해자로부터 들었다거나 메시지를 직접 보았다는 참고인들의 진술이 있었다"고 말했다.

 이 발표로 박원순에게 실망한 사람들이 많았을 것이다. 그렇다면 피해자로부터 피해 사실을 인지한 동료들은 왜 아무런 조치를 취하지 않았을까? 나는 이들의 얘기가 중요하다고 보지만, 판사와 인권위 모두 이 부분은 입을 다물었다.

 결론적으로 얘기하면, 목격자 B는 국가기관들의 발표가 나오기 전에 나의 의문점을 풀어준 사람이다.

 2020년 10월 13일 오전 나는 B에게 전화를 걸었다. '여는 글'에서 나는 취재원 50명의 얘기를 들었다고 밝혔지만, 취재에 불응한 사람들은 뺀 수다. 그중에 여러 차례 설득 끝에 취재에 응하기로 해놓고 만나기로 한 날 인터뷰 장소에 나오지 않은 사람도 있었다. 많은 취재원이 "아직도 그 사건 생각하면 가슴이 콩닥콩닥 뛴다", "당신이 믿을 만한 기자라는 것을 내가 어찌 알겠냐"는 등의 이유를 들어 사양했다.

 다행히도 기자와 면식이 전혀 없는 B는 "시장실에 대해 억측이 많은 상황에서 관련 기사를 꾸준히 쓰는 기자"로 나를 인지하고 있었다. B는 10일 간격으로 두 차례 전화 통화에서 자신의 경험을 얘기해줬다. 다음은 B와의 문답을 정리한 내용이다.

 

B : 박 시장이 3선 출마하려고 사퇴한다(2018년 5월 14일)는 얘기가 나와서 시장실이 어수선한 시기였던 것으로 기억한다. 시청 공무원드른 자체 행정포털망에 접속해서 사용하는 PC용 메신저와 텔레그램 둘 다 사용하는데, 피해자가 사내 메신저로 '잠깐 얘기 좀 할 수 있냐'고 말을 걸었다.

기자 : 잔디가 사내 메신저로 불렀을 때 특별한 얘기를 할 것이라고 생각했나?

B : 그런 건 아니다. 평소에도 고민 상담을 자주 했는데, 그날은 보안을 의식한다는 느낌은 들었다. 6층 접견실에서 얘기할 수도 있지만, 왔다 갔다 하는 사람들이 많은 공간이다. 그래서 사람들이 잘 안 오는 7층의 한적한 공간, 화장실 옆 벤치로 이동했다. 피해자가 내게 텔레그램을 보여주길래 그 내용을 얼핏 봤다.

 그러면서 피해자가 하는 말이 '안희정 사건으로 시끄러운데 다른 사람들이 보면 오해할까 봐 걱정된다. 시장이 나를 손녀딸처럼 예쁘게 생각한다는 것을 나는 아니까 괜찮은데'라고 말했다. 시장의 스마트폰은 다른 사람들도 업무상 볼 수 있지 않냐는 뉘앙스였다. 당시 상황을 떠올리면, 박 시장의 3선 도전 때문에 시장이 의지하던 참모들이 하나둘 떠나고 있었다. 그러나 잔디에 대한 (시장의) 의존 심리가 더 강해졌던 게 아닐까 싶다.

기자 : 다른 사람들이 보면 오해할 수 있는 메시지가 뭐였나?

B : 제일 마음에 걸렸던 표현은 '잔디 냄새 좋아 킁킁'. 또 하나는 업무지시 등의 별다른 이유 없이 밤에 메시지를 보냈다는 점. 그 외 나머지는 친근감을 표현하는 메시지들이었다. 그러나 피해자와 시장이 허물없이 편하게 지낸다는 사실을 알고 있었기 때문에 딱히 거슬리지는 않았다. 시장이 피해자에게 보낸 다른 사진이 있을지는 모르겠지만,, 내가 본 사진은 다른 지인들에게도 보낸 적 있는 러닝셔츠 입은 사진이었다.

기자 : 두 사람의 메시지 전송이 빈번했나?

B : 그런 건 아니라고 생각했다. 피해자가 '메시지를 빈번하게 보낸 날이 있는데, 이날은 시장님이 혹시 술을 드신 게 아닌가 싶어서 아무개 비서관에게 이날 술을 많이 드셨는지 물어봤다'고 했기 때문이다. 거기에 대해 내가 뭐라고 답했는지는 정확한 기억이 없다.

 답을 했다면 '시장실에 오래 근무를 하기도 했으니 부서를 이동하거나, 해외 연수 프로그램에 지원해보는 게 어떠냐'고 하지 않았나 싶다. 피해자 답변도 정확히는 기억하지 못하는데 '알겠다' 정도로 답하지 않았을까? 이런 대화가 10분 안팎으로 이어졌던 것 같다.

기자 : 이때의 대화 내용은 박 시장이 죽은 후 떠오른 거냐. 피해자의 지목으로 경찰 조사를 받게 돼서 떠오른 거냐?

B : 그 전부터 마음 한 구석에 있었던 기억이지만, 크게 담아둔 것은 아니었다.

기자 : 이 문제로 나중에 얘기를 더 하지 않았나?

B : 그게 문제가 됐다면 피해자가 나에게 얘기를 했을 텐데 더 이상 하지 않았다. 이후에도 진로 문제 등 다른 주제로 나와 몇 차례 상담했고, 몇 번 식사도 했는데 그 일에 대해서는 더 이상 내색하지 않았다. 시장이 3선하고 돌아온 후에는 시장실이 엄청나게 바빴다. 바로 옥탑방 한 달 살이 나가셨고, 돌아온 후에는 후속대책 내놓느라고.

 

 B는 시장실을 떠난 이후인 2019년 3월 28일에도 김주명, H 등과 함께 무교동에서 만찬을 한 적이 있다. B는 "우리는 떠난 상황이라 피해자가 시장실 분위기를 전해줬는데, 그때도 박 시장에 대해 안 좋은 얘기를 하지는 않았던 것으로 기억한다"고 전했다.

 B의 "둘의 관계는 두 사람만 아는 거지만 언론이 너무 편향적으로 해석하는 것 같다"며 "이 사건이 권력에 의해 진실이 은폐됐다는 식으로 얘기되지 않았으면 좋겠다. 내가 한 얘기도 '잔디 냄새가 좋아 킁킁' 이런 식으로 제목을 달아주진 말아달라"고 당부했다.

  전화 통화가 끝난 뒤 나는 곰곰이 생각했다. 피해자가 박 시장으로부터 성추행 피해를 당했다고 주장하는 20명을 찾아 나선 후 석 달 동안 내가 만난 시장실 직원들은 "들은 바 없다"라는 부인으로 일관했다. 그런데 처음으로 시장에게 입은 피해로 추정되는 말을 실제로 들은 사람을 찾아낸 것이다. B가 전해준 2018년 잔디의 전언에도 중요한 의미가 담겨있었다.

 그해는 '미두'라는 성폭력 고발 운동이 거세게 일어나던 시기였다. 박 시장이 타운홀 미팅에서 "추석 때 <82년생 김지영> 책을 읽고 눈물을 쏟았다"는 기사를 본 모 시인이 "2014년 박원순 캠프에서 성추행을 당했다"고 2월 28일 페이스북에 글을 올리는 일이 있었다.

 같은 해 3월 5일 안희정 충남지사의 수행비서를 지낸 김지은 씨가 JTBC 인터뷰에서 안 지사의 성폭력을 고발해 큰 파문이 일었다. 3월 10일 박 시장은 시인을 시장실로 불러 위로했고, 그는 이틀 뒤 페이스북에 "시장님을 뵙고 오니 그간 마음고생으로 얻은 상처가 많이 치유됐다"는 글을 올렸다.

 2018년 시장실 직원들 모두가 안희정 사건과 이 사건을 지켜봤고, 이 사건들이 지방선거에 미칠 영향을 예의주시했다. 만약 박 시장이 잔디에게 심각한 성폭력을 저질렀다면 그로서도 용기를 낼 수 있는 타이밍이었다. 그러나 잔디는 B에게 이렇게 말했다.

 "안희정 사건으로 시끄러운데 다른 사람들이 보면 오해할까 봐 걱정된다. 시장이 나를 손녀딸처럼 예쁘게 생각한다는 것을 나는 아니까 괜찮은데"

 박 시장과 잔디 사이에 어떤 일이 있었는지는 당사자들만이 안다. 그러나 당시 잔디가 시장이 자신에게 한 행동이 안희정의 그것과는 다르다. 손녀딸처럼 생각한다고 인식했다는 점은 분명히 드러난다.

 그해 5월 14일은 박 시장의 직무가 정지되고 3선에 도전하기 위해 서울시장 예비후보를 등록한 날이었다. 잔디는 이날 시장에게 이런 편지를 건넸다.

 

 존경하고 사랑하는 박원순 시장님께!

 

 시장님~~ 오랜만에 편지를 드리네요. 오늘은 정말 특별한 날이니까 시장님께 작게나마 제 마음을 전하고 싶어서요~

 

 시장님 순방 기간이 길어봐야 8~9일 정도였는데... 이렇게 한달 동안이나 못 뵌다는 생각을 하니 참 마음이 뻥 뚫린 것같고 가끔은 울컥하는 느낌까지 드네요. 더 나은 서울, 더 나은 미래를 준비하러 나가시는데 개인적인 마음으로는 시장님 몸과 마음의 건강을 가까이서 챙겨드리지 못하고, 또 시장님께서 재미있는 농담을 해주시는 것과 셀카 찍는 일들을 한달 도안 못한다고 생각하니 너무너무 아쉽고 슬퍼요 ㅜ.ㅜ

 그래도 시장님! 저는 소원이 있어요. 제 소원을 꼭 들어주셨으면 좋겠어요. 시장님께서 작년 초에 대선을 준비하실 때 하셨던 말씀이 참 기억에 남아요. 그때 말씀하시길 '5년 후 손주 손을 잡고 광화문광장을 거니는 삶을 살고싶다. 그런 대통령을 꿈꾼다고 하셨거든요.

 시장님. 저는 정말로 제 삶에 있어서 박원순이라는 '시대의 리더'와 함께 했다는 그 사실 하나로 너무 기쁘고 행복하고 감사해요. 그렇지만 제 소원은 여기가 끝이 아니라, 이 시대에 다시 없을 소중한 박원순이라는 존재가 이 세상을 바꾸고, 사람의 마음을 움직이고, 우리 모두가 행복한 시간을 누린 그 이후에.. 정말 역사에 길이 남을, 마지막까지 훌륭한 리더로 인전받고 모두가 존경받는 지도자로 칭송받는 그날을 꿈꿔요.

 시장님은 너무도 현명하고 지혜로우시며 새로운 생각과 놀라운 추진력으로 이미 저명하시잖아요~!! 꼭 반드시 그렇게 되리라 믿습니다!!

 더불어 시장님~ 제 소원 이뤄주시려면 건강도 잘 챙기셔야되는 거 아시지요??? 약 잘 드시고요 차에서 잠깐씩 쪽잠 꼭 주무시고~ 전화는 너무 많이 하지마세요 ㅋㅋㅋ

 시장님, 한달 뒤 옥수수랑 수박 잘 길러놓을게요. 힘내시고! 사랑합니다!

 2018. 5. 14 시장실 잔디 드림

 

민경국이 12월 23일 오후 2시 13분 이 편지를 공개하자 여성단체와 일부 언론은 피해자 이름을 공개했다며 '2차 가해' 공세를 가했다. 민경국은 같은 날 2시 14분에 나를 비롯해 몇몇 기자에게 카카오톡으로 자기 페이스북을 봐달라고 요청했고, 나는 공개된 편지에 이름이 없는 것을 확인했다.

 민경국이 "언론이 기초적인 확인도 하지 않은 채 사실과 다르게 내가 피해자의 실명을 노출한 것처럼 기사화하였고, 본질을 훼손하고 있다"고 항의하자 <한겨레>의 경우 다음날 "피해자 지원단체의 문제제기에 타당한 점이 있다고 판단해 이를 반영했지만 사실관계에 틀린 점이 있었다"며 사과했다.

 이 편지가 논란이 되자 이런 반응도 나왔다.

 "최근 박원순 전 수일시장의 생일을 앞두고 만들었던 롤링페이저와 편지가 사회관계망서비스(SNS)에 올라왔다. 모두가 똑같이 종이에 편지를 써서 고리에 한데 묶은 카드 모음, 그 뻔한 모양의 생일 축하 메시지조차 누군가에게는 특별해 보였나 보다."

 나는 시장실의 몇몇 직원들에게 "박 시장에게 보내는 롤링페이퍼를 쓴 적이 있냐"고 물었다.

 별정직 D는 "박 시장만이 아니라 시장실 떠나는 직원에게 남아 있는 사람들이 돌아가며 이별의 말을 적어주는 경우는 종종 있었다"고 말했고, 같은 별정직 M도 "2018년 말에서 2019년 새해로 넘어가는 시기에 한 번은 써 본 것 같다. 돌아가면서 한 줄 쓰는 거라서 큰 부담은 없었다"고 말했다.

 반면, 같은 시기에 근무했던 R은 "연말연시엔 신년사 작업하느라 그런 것에 응할 짬이 없었고, 시장 생일에는 써 본 기억이 없다"고 말했다.

 이들 중 일부는 "누군가 시장 생일 축하 동영상을 찍자고 제안해서 카메라 앞에서 덕담을 건넨 기억은 있다"고 말했다. 그러나 피해자처럼 박 시장에게 손편지를 써서 전했다는 직원은 나타나지 않았다.

 

p148

 노무현 대통령은 2007년 6월 16일 노사모 총회에 보낸 영상메시지로 유명한 말을 남겼다.

 "민주주의의 최후의 보루는 깨어있는 시민의 조직된 힘입니다."

 곱씹어봐도 명언이라고 생각한다. 하지만, 그의 말대로 민주주의를 지키기 위해서는 시민이 깨어있고, 조직화되어야 한다. 내가 만난 '박원순 시장실 사람들'은 정도의 차이는 있지만 깨어있는 시민들이었다.

 한편으로는 나날이 값이 뛰는 서울의 집은 언제 살 것이고, 자녀 교육은 어떻게 시킬 것이며, 이민 가서 살기 좋은 나라가 어디일까를 꿈꾸는 '소시민들'이었다.

 이들 모두는 "박원순 사건에 대해 부풀려진 얘기들을 바로잡고 싶다"는 대의명분과 "그러한 행동이 나에게 작게나마 불이익으로 돌아오지 않을까? 나 대신 누가 해줬으면..."이라는 도피심리 사이에서 번민했다.

 왜 말과 행동이 따로 노느냐고 그들을 책망할 수도 없다. '20년 기자질' 하는 동안 나는 수많은 유형의 취재원들을 만났다. 각자에게 '소우주'라고 할 만한 사연들이 있었고, 나는 잘잘못을 가리는 판관이 아니었다. 다만, 그들을 관찰하고 기록을 남긴다는 소명을 거스르진 않았다.

 

p143

 박 시장 사건이 논란이 된 후 박 시장과 잔디의 생전 모습이 담긴 동영상들이 잇달아 올라왔다. 9월 17일 <열린공감TV>가 유튜브 채널에 올린 '생일 동영상1', 9월 18일 <고발뉴스TV>가 올린 '생일 동영상 2'와 '재래시장 동영상'이 그것이다.

(생일 동영상1)

 

'생일 동영상 1'에는 2019년 3월 26일 잔디가 시장실에서 박 시장과 함께 생일 케이크를 자르는 모습이 담겼다. 이때 시장 옆에 자리 잡은 잔디가 오성규 비서실장 등 다른 직원들에게도 같이 사진을 찍자고 요청하면서 박 시장의 어깨에 손을 올리는 모습이 화제가 됐다. 20여 명이 이 모습을 지켜봤다. 김우영 정무부시장은 이와 관련해 "내가 구청장을 8년 했지만, 부하 직원이 내 어깨에 손 올린 적이 한 번도 없다. 내가 아무리 편하게 대해도 대부분의 구청 직원들은 나와 거리를 뒀다"고 말했다.

 

(생일동영상2, 재래시장 동영상)

 

'생일 동영상 2'에서 잔디는 시장실 동료들과 함께 "저희는 시장님을 위해 태어난 사람들이에요. 언제나 힘내시구요. 지금처럼 밝고 건강하게 행복하시길 바랍니다"라고 축하 인사를 건넸다.

 '재래시장 동영상'에는 야외공간에 나란히 앉은 박 시장과 잔디가 카메라를 보며 포즈를 취한 모습이 담겨있다.

 C는 이날 현장에 우연히 동행했던 사람이다. 동영상이 촬영된 2018년 10월 29일은 국회 국토교통위원회 국정감사 마지막 날이었다.

 "올해 국감 잘 마무리됐으니 남은 직원들끼리 오랜만에 밥이나 먹자는 얘기가 나왔어요. 우리 방에서는 나만 남아 있다가 시장 일행을 따라갔죠. 그날은 데스크 비서 두 명 포함해서 6~7명이 같이 움지였는데, 박 시장이 시장으로 걸어가면서 '일전에 고쳐놓으라고 했던 보도블록 아직도 안 해놨다'고 한마디 한 기억이 나요."

 C는 틈나는 대로 시장의 일상적인 모습을 사진 또는 동영상으로 찍어서 소셜미디어에 업로드하는 일을 맡았다. 여느 때와 같은 회식 자리였지만, 박 시장을 알아보는 시민들이 많았기 때문에 C는 긴장의 끈을 늦출 수 없었다.

 "지나가던 시민들이 시장에게 계속 인사를 걸었고, 나도 스마트폰을 손에서 뗄 수 없었어요. 그런데 잔디가 갑자기 '시장님, 저의 사진 찍어요'라면서 자연스럽게 시장에게 안기는 포즈를 취했어요. 시장은 30분 정도 우리와 함께 있다가 다른 일정을 이유로 헤어졌습니다."

 

p219

이듬해 1월 14일 열린 1심 선고 공판에서 Z는 징역 3년6개월(법정구속)과 성폭력 치료 프로그램 40시간 이수 명령이라는 중형을 받았다. 이 사건의 성폭력 증거 채취를 위한 정액 검사 결과는 '음성'이었지만, 재판부는 피해자가 사건 당일 깨어나 30분 동안 샤워를 한 점 등을 들어 "Z가 피해자와 강제로 성관계를 하지 않았다고 단정할 수 없다."고 결론 내렸다. Z는 재판 결과에 불복해 항소했다.

[최근 이 항소 2심의 결과가 나왔는데 1심과 동일한 형량을 확정한다. 이 재판결과가 좀 황당한게 성관계를 했다는 확실한 증거가 있는게 아니라, 성관계를 하지 않았다고 단정할 수 없다라고 한 점이다. 즉 피해 사실을 증명한게 아니라, 가해자가 가해를 하지 않았다는 걸 증명할 수 없다라는 논리다. 이런 논리가 통용되는 세상이라면 남자들은 여자를 데리고 모텔을 들어가려면 인생을 걸어야 될 수도 있다. 모텔 들어가기 전에 합의서라도 받아야 되고, 들어가선 동영상으로 증거라도 남겨야 되는 거 아닌가 싶다.]

 

p296

 박원순 사건 후 내가 하도 답답해서 여성단체연합 간부에게 '이런 일이 생기면 가해자로 지목된 사람에게도 확인하는 절차가 있어야 하는 것 아니냐?'고 물었다. 그 간부가 말하길, 단체에서 마련한 성폭력 대응 매뉴얼에 '피해자가 원하지 않으면 가해자에게 확인하지 않는다'고 되어있다고 답하더라. 나도 여성운동을 지지하는 입장이지만, 그 말을 듣고 '그렇다면 그 매뉴얼이 이상하네'라는 말이 내 입에서 나오더라."

 

 우리는 권위주의 정부 시절 검찰, 경찰, 그리고 국정원의 일방적 '주장'을 그래도 받아들여 간첩으로 확정한 사람들이 재심 끝에 혐의를 푸는 시대를 살고 있다. 지금까지 나온 피해자 얘기만 듣고 박원순의 혐의를 확정하기에는 논거가 너무 빈약하다는 게 나의 결론이다.

 사회적 약자에 대한 배려의 시선으로 시작된 '피해자' 호칭은 어떤 식으로든 가해자를 만들어내고 이들을 응징해야 한다는 강박관념으로 이어진다. 이런 상황에서 가해자는 혐의를 따져보기 전에 죄인의 낙인을 받는다.

 시시비비를 가려야 할 언론계가 무책임한 담론을 확대 재생산해 결과적으로 대중의 혼란을 증폭시켰다는 점에서 박원순 사건을 '2020 언론 대참사'라고 명명해도 손색이 없다고 본다. 그런 면에서 일부 기자들이 무비판적으로 수용해온 페미니즘의 서사, '피해자 중심주의'와 '2차 가해', '피해자다움'도 재고해볼 필요가 있다.

 

p312

 1990년대 사회주의 이데올로기의 흥망성쇠를 멀찌감치서 목도한 뒤부터 어떠한 이념 세례도 나에게 특별한 감흥을 주지 못했다. 페미니즘도 예외는 아니었다. 사견이지만, 모든 운동 노선은 '마틴 루서 킹의 길'과 '맬컴 엑스의 길'이 있다고 본다.

 1960년대 미국 흑인들의 온전한 시민권을 회복하는 방안을 놓고 전자는 린드 존슨 대통령이라는 리버럴 성향의 백인들을 포섭해 민권법을 개정하는 길을, 후자는 '흑인 해방'을 위한 흑인 국가의 건설을 대안으로 각각 제시했다.

 그러나 미국 사회의 실질적이고 점진적인 변화를 끌어 낸 것은 마틴 루서 킹의 온건 노선이었지, 맬컴 엑스[멜컴 액스라니가 좀 어색하네.  말콤 엑스로 워낙 많이 들어서]의 '사이다 해법'이 아니었다. "백인들은 죽어도 흑인을 이해하지 못해"라는 식의 언설은 운동의 주체들에게 자기 위안을 줬을지는 모르지만, 운동의 확장에는 별 도움이 되지 못했다. '이데아'가 강한 분들에게는 유쾌하게 들리지 않을 얘기지만, 언젠가는 나의 진심이 전해지길 바란다.

 

 

과학, 건축, 경제, 인문 각 분야의 전문가들과 함께 최근 동향이라든가 현 사회의 문제에 대해서 대담 형식으로 진행한 유툽의 내용을 책으로 옮겼다.

 

개인적으론 유현준 교수과의 건축 및 부동산에 관한 내용이 새로웠다.

 

각 분야에 대한 수준높은 담론보다는 입문의 소양을 갖추는 계기가 될 수 있는 좋은 내용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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첫번째 만남 x 물리학자 김상욱 교수

 

p53

 

제동 : 그런데 그게 의도적인 것인지, 최선을 다했는지 실수한 건지 어떻게 확인하나요?

상욱 : 그렇게 쉽지 않은 일이라서 과학계에서도 아주 중요하게 다뤄지는 실수가 아니면 아예 검증에 안 들어갈 때가 많아요. 그래서 모든 과학자가 다 성실하게 과학의 방법을 쓰고 있다고 생각하지는 않아요. 예를 들어 얀 헨드린 쇈(Jan Hendrik Schoen)이라는 과학자는 2000년부터 2001까지 불과 2년 사이에 유명한 과학저널 「사이언스」와 「네이처」에 연구 논문이 무려 16편이나 실렸어요. 보통 과학자라면 평생 논문 한 편 실리기도 쉽지 않은 저널인데 말이죠. 분자로 된 트랜지스터에 관한 논문이었는데, 데이터를 조작했다는 사실이 곧 들통났죠. 가설에 실험 결과를 꿰맞춘 거였어요.

 그의 논문 수십 개가 다 취소됐어요. 논문에 "철회되었다(retracted)"라고 아주 확실하게 박아놨어요. 문제가 된 논문을 삭제한 게 아니라 그대로 놔두고서 논문이 연구 부정으로 쓰였다고 박제를 한 거에요. 이 사람에게 박사학위를 준 독일의 콘스탄츠 대학교에서는 학교의 수치라며 이 친구의 학위를 박탈했어요.

 연구 부정이 밝혀지면 그 당사자는 과학계에서 살아남을 수 없어요. 과학자 집단은 동료가 진행한 데이터를 믿고, 그 결과가 옳다는 것을 전제로 그 실험을 재현한 다음에 그다음 단계로 나아가니까요. 동료의 어깨를 밟고 올라가는 시스템이기 때문에 거짓말을 하면 그 한 사람 때문에 누군가는 소중한 시간과 자원을 허비학 되잖아요.

 지금도 전세계 수많은 사람들이 코로나 백신 개발을 하고, 관련 데이터를 공유하잖아요. 공유된 정보만 믿고 거기에 맞게 개발하고 있는데, "미안한데, 거짓말이었어." 이렇게 말한다면 인류의 노력이 그냥 물거품이 되는 거죠. 그래서 용서를 못 하는 거에요.

 

p55

상욱 : 민감한 문제라고 생각해요. 그게 지적재산권이잖아요. 백신을 개발한 사람들 입장에서 보면 막대한 비용을 들여서 개발했을 거에요. 물론 지금 분위기에서는 과학자들도 선뜻 특허를 포기할 수 있을 것 같다는 생각도 들긴 하지만, 그렇다고 우리가 그걸 강요할 수 있는지는 고민해 봐야 한다고 생각해요. 만약 이번에 강요하는 전례가 만들어지면 또다른 바이러스가 생겼을 때 사람들이 백신을 개발하려고 할까요?

제동 : 사실 저는 당연히 적당한 보상 원칙이 있을 거라고 생각했어요. 그리고 무엇보다도 우리 사회가 위급할 때를 대비해 얼마만큼의 기반 시설을 닦아 놓느냐의 측면에서 봐야 하는 것 같아요.

상욱 : 시스템에 관한 이야기죠. 리스크 관리를 위해서는 리스크를 관리하는 사람들에 대한 충분한 보상이 있어야 한다고 생각해요. 지금도 우리가 의사들, 간호사들, 질병관리청에 계신 분들에게 박수 보내면서 정말 훌륭한 분들이라고 칭찬하잖아요. 그런데 정작 그분들은 지난 몇 개월 동안 휴가도 못가고 아마 추가 근무까지 했을 텐데 그에 대한 충분한 보상 없이 말로만 훌륭하다고 하는 것은 옳지 않다고 생각해요.

 

p57

상욱 : 서로 논의를 하고 시스템을 구축해나가야 하는 거죠. 이때 시스템이란 완벽한 제도를 만든다는 뜻이 아니라 끊임없이 논쟁과 논의를 할 수 있는 장이 필요하다는 거에요.

 

p63

제동 : 다만 인간으로 살면서 자기 기준을 갖는다는 건 필요하다고 생각해요. 자기 기준이 있어야 일관되게 살 확률이 커지고, 논리적 모순 없이 살기만 해도 다른 사람한테 예측 가능성을 주기 때문에 훨씬 더 믿을 만한 사람이 될 수 있고, 사회 속에서 더불어 살아가기 쉬워질 거라고 생각해요.

 중요한 건, 이때 자기가 세워놓은 기준이 틀릴 수 있다는 사실을 아는 거에요. 이 사실을 알면 자기 기준에 따라서 살다가 뭔가 좀 이상하면 '이게 틀렸나?' 하고 바꿔볼 수 있거든요. 인간의 문제는 오히려 답이 틀릴 수 있다는 것, 내가 항상 옳은 건 아니라는 것, 나아가 본래 절대적으로 옳거나 그른 것은 없다는 것을 아는 것이 중요하다고 생각해요. 최대한 자기 기준을 만들어서 그 기준과 모순 없이 일관되게 살도록 노력하되 끊임없이 점검해나가는 것, 그게 최선이 아닐까 싶어요.

 

p65

제동 : 아, 그래요? 지금 상욱 쌤 얘기가 되게 인상 깊은게, 과학에서는 검증할 수 없다거나 그것은 우리 영역이 아니라고 말하지, 틀렸다고 얘기하지는 않는군요. 지금도 "그런 실험은 좋은데, 문제는 그 실험이 제대로 이루어지지 않은 것으로 안다." 이렇게 얘기하는 태도가 중요한 것 같아요. 그런데도 사람 마음이 희안하게 "영혼의 무게 21 그램이 빠져나가면 어디로 가는 걸까? 이런 데 끌리긴 해요. 저는 그런 쪽에 마음이 더 가요.

 

p67

상욱 : 모르면 모른다고 하는 게 당연하지 않냐고 생각할 수도 있지만, 학문의 역사를 보면 그렇지 않았던 때가 있었어요. 서양의 근대과학이 1600년대쯤에 탄생했다고 믿어지는데, 그전까지는 철학과 신학이 과학의 역하로 담당했어요. 종교적 질문, 우주에 대한 질문, 인간 존재에 대한 질문에 답을 해온 학문은 철학과 신학이었어요. 중세에 기독교를 기반으로 한 서양 문화에서 철학과 신학의 공통점이자 특징은 모든 질문에 답을 할 수 있다고 주장한 거죠.

제동 : 아, 무오류라고...

상욱 : 오늘날 우리의 감각으로 신학은 주로 인간의 도덕과 삶에 관한 이야기를 해야 할 것 같지만 그 당시 신학자들이 별을 이야기하고, 천문 현상과 기상 현상을 이야기했거든요. 심지어 물질을 이루는 근원도 이야기 했잖아요. 누가 무엇을 묻든 "모든 질문에 대한 답은 성경에 있어." 이렇게 말해야지, 성경에도 답이 없는 게 있다고 하는 순간 이단이 되고 죽임을 당할 수도 있었어요. 반면 과학은 시작부터 명확하게 무지를 인정해요. 그리고 객관적이고, 재현 가능한 물질적 근거를 기반으로 얻은 증거로만 이야기하거든요. 그걸 일반화시킨 게 귀납법이죠. 그렇게 해서 얻어진 것만 가지고 이야기하라는 건 그렇지 못한 것에 대해서는 입 다물라는 뜻이죠. 실제로 입 다물어요. 갈레리오는 한 번도 인간의 도덕에 관해 책을 쓴 적이 없어요. 뉴턴도 예술에 대해서 이론을 만든 적이 없고요. 자기가 진행한 실험을 통해 얻은 지식만 가지고 이야기하라는 뜻은, 잘 모르는 분야에 대해서는 모른다고 하라는 의미에요. 그래서 우리 과학자들은 모르는 게 많아요.

 

p113

제동 : 저는 잘 이해가 안 되는 게, 양자컴퓨터로 뭘 할지도 모른다면서 왜 이렇게 많은 나라들이 개발에 뛰어들고 있는 거죠?

상욱 : 왜냐하면 군사적 장점이 있거든요.

제동 : 그럴 것 같더라. 그럴 것 같았어.

상욱 : 이게 기존의 암호체계를 무력화할 수 있어요. 지금 가장 널리 쓰이는 암호체계는 RSA라고, 인터넷뱅킹 등에도 쓰이는 건데 이것을 무력화할 수 있어요. 처음에 그것 때문에 폭발적인 관심을 끌었죠. 거꾸로 양자역학을 이용해 암호를 만들면 절대 안깨져요. 양자역학을 이용한 암호를 사용하면 절대로 도청당하지 않을 수 있거든요. 앞서 얘기한 검색 알고리즘은 아직 갈 길이 멀어요. 데이터베이스가 커지면 너무 힘들어지거든요. 하지만 암호 관련한 것은 군사적 이점이 엄청나니까 연구를 계속하고 있는 거죠. 만약 어느 나라가 이것에 먼저 성공하더라도 얘기를 안 할 거에요.

제동 : 다 들여다볼 수 있게 되는 거네요. 마음만 먹으면 교란할 수도 있고. 혹시 통장에서 돈도 빼갈 수 있어요?

상욱 : 그럴 수도 있겠죠. 암호체계가 무력화될 테니까.

 

두번째 만남 x 건축가 유현준 교수

 

p122. 인구가 감소해도 집값이 떨어지지 않는 이유

 

제동 : 그럼, 어떻게 해야 합니까?

현준 : 수요가 있는 곳에 공급을 늘려야 한다고 봐요. 그런데 보통 많은 분들이 인구론으로 부동산과 집값 문제에 접근하죠. "인구가 줄어드니까 집값이 내려갈 거다." 이런 얘기 많이 들어보셨죠?

제동 : 네. 일본처럼 집값 절벽이 다가올 거라고. 근데 제가 알기로는 일본도 도시 외곽의 집값은 떨어졌지만 도심은 오히려 올랐잖아요.

현준 : 맞아요. 인구가 도심으로 몰리면서 더 올랐죠. 물론 거품이 있던 시절만큼 회복되진 않았지만, 경제가 회복되었다고 하더라도 중심부의 얘기지, 주변은 별로 안 좋은 상태거든요. 그래서 주택 수요를 볼 때는 인구 중심으로 보면 안 돼요.

제동 : 아, 그래요?

현준 : 인구보다 세대를 고려해야 해요. 베이비붐 세대 언저리, 그러니까 인구가 많이 늘었던 세대는 대한민국 사회가 도시화와 핵가족화되는 것을 경험했어요. 시골에 살던 사람들이 도시로, 대부분 서울로 이사를 갔어요. 농업경제 시대에는 도시 인구가 15% 정도밖에 안 됐는데, 지금 대한민국은 전국민의 91%가 도시에 살고 있거든요.

제동 : 굉장히 높네요

현준 : 네, 90%가 넘는 도시화 비율은 전세계에서 딱 세 나라, 홍콩과 싱가포르, 대한민국밖에 없어요. 대단히 독특한 사례죠. 엄청난 인구가 도시로 이동을 했어요. 예전에는 집이 조부모, 부모, 자식 3대가 사는 공간이었다면, 도시로 이동하면서 이제 2대가 사는 공간으로 바뀐 거죠.

제동 : 예전 드라마 「전원일기」에 나오던 그런 구성이었다다가 4인 가족이 된거네요.

현준 : 네. 정부 정책도 '둘만 낳아 잘 기르자'는 방향으로 바뀌기 때문에 4인 가족이 대한민국 중산층의 전형이 된 거죠. 우리나라 5,000만 인구가 4인 가족으로 살려면 집이 1,250만 채가 필요해요. 실질적으로는 4인 가족만 있는 게 아니라, 2인 가족도 있고 7인 가족도 있으니까 대략 2,000만 채가 필요한데, 문제는 1990년대부터 1인 가구의 비중이 급격히 늘어나고 있거든요. 지금 우리나라 전체 가구의 약 30%는 1인 가구고요, 2인 가구까지 합하면 거의 60%에요. 그러니까 당연히 수요는 늘어나는데 집은 아직도 4인 가족이 기준이라고 생각하고 공급을 안 늘린 거에요.

제동 : 아, 주택 수요를 잘못 계산해서 공급에 오류가 생겼다는 얘긴가요?

현준 : 맞아요, 혹시 '쉐어링 하우스'라고 들어보셨어요?

제동 : 네, 같은 집에 살면서 방만 따로 쓰는 그런 주거 형태죠?

현준 : 맞아요. 집값이 너무 비싸니까 많은 젊은 세대들이 내 집을 소유하지 못하고, 오피스텔에서 함께 월세로 살든지, 방은 따로 쓰고 부엌은 같이 쓰는 형태가 나오는 거에요.

제동 : 요즘 1인 가구는 수요가 있잖아요. 그런데도 건설사에서 그런 집을 안짓는 이유는 뭘까요? 경제성이 떨어지기 때문인가요?

현준 : 그렇죠. 아파는 짓는 분들이 청년들을 위한 주택, 그러니까 1,2인 가구를 위한 괜찮은 집을 안 짓는 이유 중 하나는 젊은 친구들이 돈이 없어서에요. 대신 방 3개까지 30평대 아파트를 짓는 거죠. 그래야 오래된 30평대 아파트에 살던 사람들이 그 집을 파고 새 아파트로 이사 갈 테니까요.

 결국에는 지금 아파트를 소유한 사람만 또 아파트를 살 수 있는 거죠. 그러다보니 악순환이 계속되는 거고요. 공급이 필요한 곳에는 돈도 없고 공급도 없는데 특정 지역, 예를 들면 서울 중심부나 강남 일대의 부동산 가격은 기형적으로 계속 올라가고, 그 주변 지역도 덩달아 올라가고 있어요.

 어쨌든 좋은 의도로 집값을 잡기 위해서 15억 원을 초과하는 집을 살 대는 아예 대출을 막았잖아요. 그랬더니 대출을 받아서 16억, 17억 원짜리 집을 사려던 사람들이 15억 원 이하의 집을 살 수밖에 없는 일이 생기는 거에요. 결국 수요가 늘어나면서 15억 원 이하의 집값이 더 올라가게 됐어요. 한 7억, 8억 원 정도면 살 수 잇던 집이 10억 원이 넘어가기 시작하니까 집 없는 사람들의 내 집 마련의 꿈은 더 멀어지는 거죠.

제동 : 악순환이 계속되는 거네요.

 

p132

현준 : 사람들이 자기 집을 갖게 되면 눈에 보이지는 않지만 좋은 점이 있어요. 바로 공동체 형성에 중요한 역할을 한다는 거에요. 1950년대에 미국 세인트루이스에서 프루이트아이고(Pruitt-igoe)라는 아파트 33개 동을 지은 후, 사람들을 이주시켰어요. 그런데 불과 2년 만에 슬럼화가 된 거에요. 마약 밀매와 살인 같은 범죄의 온상이 돼서 지은 지 겨우 20년 만에 다이너마이트로 다 폭파해버렸어요.

제동 : 아니, 왜요?

현준 : 다큐멘타리에서 소개된 자료에 따르면 그 아파트에 입주한 주민 대부분이 월세였던 거에요. 그러다보니 자기 집에 대한 애착이 없거나 적었던 거죠. '돈 벌면 여기서 나가야지' 하는 생각밖에 안 하니까 공동체가 형성이 안 되고 점점 더 슬럼화됐던 거에요. 그런데 똑같은 아파트 형식을 대한민국 강남에 적용했을 때는 부의 상징이 됐잖아요.

제동 : 그건 내 집을 소유할 수 있게 했기 때문인가요?

현준 : 그렇죠. 칠레의 경우처럼 비록 절반만 완성된 집이라더라도 내 집이 되면 정착할 계획으로 주변을 꾸미게 되고, 아이들이 다니는 학교의 학부모들과도 친해져요. 그러면서 자연스럽게 공동체가 만들어지고 자긍심이 생기게 되겠죠. '돈 벌면 떠나야지' 이런 생각을 하는 사람들과는 질적으로 다른 생활을 하게 되는 거에요.

 

제동 : 전세만 하더라도 2년 있다가 나가야 하니까 고치기도 그래요. 괜히 손 댔다가 원상복구 해놓으라고 할까봐 걱정도 되고요. 우리 촌에서도 석양이 뉘엿뉘엿 질 때까지는 논밭에 남아서 일하는 사람들은 거의 다 주인이거든요. 이건 내 논이고, 내 밭이니까 그럴 수 있는 거죠. 내 소유의 공간을 가꾸는 건 재미가 있잖아요.

현준 : 그렇죠. 사실 그건 인간의 본능이죠. 저도 전에 월세로 살 때 집주인 아주머니가 그러셨어요. "나가라고 안 할 테니까 내 집이라고 생각하고 사세요." 그런데 어떻게 월세를 내는 집이 내 집이겠어요? 그건 사실 그렇게 생각한다고 될 문제가 아니거든요. 그래서 저는 개인적으로 '공유경제'라는 말을 싫어해요. 저는 그 말이 교묘하게 사람을 속이는 것이라고 생각하거든요. 사람들을 소작농으로 만들어놓고서 "한 달에 몇십에서 몇백만 원만 내면 좋은 집에서 호텔 같은 서비스를 받고 사는데 굳이 네 집을 가질 이유가 뭐가 있니?" 이렇게 말하는 사람을 조심해야 해요.

제동 : 아, 그렇구나!

현준 : "이제는 회사 차릴 때 사무실 안 사도 돼. 사옥 없어도 돼. 그냥 월세만 내고 써. 그럼 적은 돈으로 어디서든지 창업할 수 있잖아. 좋지?" 이때 누가 돈 법니까? 공유 오피스 같은 회사만 돈 벌어요. 결국 공유경제는 내가 부동산 자산으로 돈 벌 기회를 포기하게 하는 것이고, 궁극적으로 프루이트아이고 사례처럼 공동체를 형성하는 데도 도움이 되지 않는다고 생각해요.

제동 : 정확한지는 모르겠지만 사람도 동물이니까 비슷할 것 같은데, 동물은 자신의 서식지가 안락하거나 먹고살 만큼 기본적인 것들이 갖춰져 있지 않으면 번식을 안 한다고 하더라고요.

현준 : 네, 본능적인거요.

 

p138

제동 : 맞아요. 엄마나 아빠가 밥 먹으라고 부르기 전까지는 그 작은 사회 안에서 놀았던 공통의 추억 때문에 그렇게 전학 가기가 싫고 그랬죠. 지금은 아이 때부터 그런 공동체에 대한 경험이 현저히 줄어들기 때문에 어른이 되면 더 불안해지는 것 같아요. 자기만의 좁은 공간에 점점 더 갇히게 되고 사회로 나가면 더 불안하고..

현준 : 그렇죠. 강 건너편 사람과 이쪽 사람들이 모여서 얘기할 수 있는 중간지대, 조금 어려운 말로 하면 '커먼그라운드(Common Ground)'가 필요해요. 제동 씨도 아침에 현관문 열고 나오면 알겠지만, 지금 우리 주변엔 계속 이동해야 하는 공간밖에 없거든요.

제동 : 맞아요. 멈추서 쉴 수 있는 공간이 많이 없죠.

현준 : 인도를 걷든지 차를 타고 이동을 하든지 움직이는 공간밖에 없어요. 그러니까 어디 가서 않으려면 돈을 내고 카페에 들어가야 해요. 대한민국 서울이 전세계에서 단위 면적당 카페 수가 가장 많거든요. 공원도 적고, 벤치도 없고, 공짜로 않을 데가 없으니까요.

제동 : 유럽에 여행을 가보면 걷다가 아무 성당에나 들어가 앉아 있어도 참 좋잖아요. 반면 우리나라는 걷거나 자전거를 타는 사람들이 점유할 수 있는 공간은 편의점 앞에 있는 의자 정도인 것 같아요.

현준 : 그렇죠. 우리는 그런 공간이 없으니까 별다방에 가든, 빽다방에 가든, 자판기 커피를 마시든 이 사회에서 마주하는 대부분의 공간은 돈을 내야만 쓸 수 있잖아요. 거기서부터 문제가 생기는 거죠. 돈 많은 사람은 비싼 데로 가고, 돈 없는 사람은 싼 데로 가니까 서로 다른 경제적 배경을 가진 사람들이 한 공간에서 공통의 추억을 만들 수가 없는 거에요. 그러면 서로를 이해하기가 힘들어지거든요.

 

p141

현준 : 코로나가 이 사회의 기본 구조를 많은 부분 흔들어놓고 있거든요. 지금까지 해오던 관성이 깨진 거잖아요. 이 얘기는 공간 체계도 그동안 관성으로 해오던 것들이 어느 정도는 와해될 거라는 의미에요. 그러면 '헤쳐 모여'가 되겠죠.

제동 : 충격을 주는 거네요.

현준 : 그렇죠. 예를 들어 그전에도 재택근무를 할 수 있었지만 직장 상사가 싫어해서 안 했잖아요. 온라인 예배도 가능했지만 교회에서 별로 안 좋아하니까 계속 꼬였던 건데, 지금은 전염병 때문에 좋든 싫든 온란인으로 해야 하니까요. 그러면 공간을 통해 권력을 가졌던 사람들이 권력을 내려놓게 되고, 그 구조가 해체되면서 재배치가 될 거에요. 이 기회를 놓치지 말고 빨리 공통의 목표를 정하고, 그 꿈을 이루는 방향으로 사회 구조를 재구성해나가야 한다고 생각해요.

제동 : 쉽사리 내려놓지 않았던 기득권을 어쩔 수 없이 내려놓게 되겠네요.

현준 : 그렇ㄹ죠. 유럽 같은 경우를 보더라도 흑사병이 돌았던 탓에 중세사회를 끝낼 수 있었다고 할 수 있죠. 흑사병이 없었다면 교회의 권력은 계속 유지됐을 거에요.

제동 : 마녀사냥 하고, 문자와 신을 독점하고...

현준 : 그렇죠. 1,000년 넘게 문자와 신을 독점해온 그 시스템을 종식한 게 흑사병이에요. 전염병 창궐에 무기력했던 교회의 권위가 흔들리면서 르네상스라는 새로운 문명의 시대가 열리기 시작했다고 할 수 있죠. 코로나 사태 이후 어쨋든 우리의 생활방식이나 공간 구조를 바꿔야만 하는 상황에서 그것을 어떻게 재배치 하느냐, 이것이 우리가 관심을 가져야 할 부분인 거죠.

 

p147

제동 : 우리나라가 전세계 어느 나라보다 깨끗하고 의료체계도 잘 갖춰져 있잖아요.

현준 : 저는 해외에서도 오래 생활했지만, 우리나라의 의료 시스템에 상당히 자부심을 가지고 있거든요. 정말 다른 어떤 선진국보다도 훌륭하다고 생각해요. 실제로 나라가 발전하려면 제대로 된 도시 모델이 있어야 하는데, 우리나라는 이미 그런 시스템이 갖춰져 있다고 할 수 있어요. 이번에 코로나 방역에 잘 대처했잖아요. 전염병에 강한 도시는 제대로 된 도시 모델이거든요. 도시 모델이라고 하면 복잡하게 많은 요소가 있을 것 같지만 제일 기본적인 게 물 공급이 잘 되고 전염병이 없는 거에요.

제동 : 아, 과거에 로마와 파리가 발전한 것처럼 상하수도 문제가 해결된 도시군요.

현준 : 그렇죠. 거기서 더 나아가 19세기부터는 생명공학의 발전으로 전염병을 상당 부분 통제하기 시작했어요. 예방주사라든지 항생제가 없었다면 인구가 1,000만 명이나 되는 도시는 나올 수 없었을 거에요. 잉카문명이나 마야문명이 멸망한 것도 다 전염병 때문이잖아요. 그래서 결국에는 전염병에 강한 도시 공간 구조를 만드는 것이 국가 경쟁력과도 연결돼요.

 

p148

제동 : 누구나 공기 좋고 물 좋은 데 살고 싶어하잖아요. 집 앞으로는 강이 흐르고 뒤로는 산이 있으면 좋을 것 같지만, 실제로 집을 고를 땐 주변에 편의 시설이 잘 갖춰진 곳을 찾게 되잖아요.

현준 : 그렇죠. 그런 곳으로 모이죠.

제동 : 수도권 집값이 너무 올라가니까 문제긴 하지만, 그렇다고 "도시는 복잡하니까 거기로 모이면 안 돼." 이렇게 접근하면 안 되는 거잖아요? 현준 쎔 얘기는 오히려 사람이 살고 싶은 곳에 더 많은 집을 공급하고, 사람들이 서로 만날 수 있는 건강한 공간을 늘려가야 한다는 거죠?

현준 : 맞아요. 거기서 꼭 필요한 것이 다양성이에요. 예를 들어 강남에 살고 싶어하는 사람들이 많잖아요. 그렇다고 강남의 인구 밀도만 높이면 삶의 질이 높아질 거라고 보지는 않아요. 밀도가 어느 정도 이상 올라가면 오히려 매력이 떨어지겠죠. 그때쯤 누군가가 부산이나 목포처럼 바다가 보이는 어느 지역에 샌프란시스코 같은 도시를 만들었다고 가정해보죠. 이때 사람들이 그곳을 보고 '저기에는 서울에서는 누릴 수 없는 것이 있어'라는 생각 들게 할 수 있다면 또 그쪽으로 이동해가겠죠.

 

p151

현준 : 지난 한 10년간의 도시 재생 사례를 보면 다양성 측면에서 가장 성공적인 곳이 어딘 줄 아세요? 바로 익선동이에요. 낙후돼서 사람들 발길이 뜸했던 동네가 젊은이들이 몰리는 활기찬 동네가 될 수 있었던 가장 큰 이유는 중정(中庭)을 지붕으로 덮어 실내 공간으로 바꿨기 때문이에요.

 이게 원칙적으로는 불법 점유인데, 어차피 나중에 철거될 거니까 관청에서 벌금만 좀 받고 눈감아줬어요. 만약 법대로 건폐율(대지 면적에 대한 건축 면적의 비율)을 적용하면 다 철거해야 하거든요. 그러면 돈 가진 사람만 새 건물을 지을 수 있겠죠. 그런데 중정에 지붕만 덮으면 공사비가 많이 안 들잖아요. 그러니까 자본이 많지 않은 젊은 사람들이 들어와서 창업할 수 있는 공간 구조가 된 거에요. 약간의 아이디어를 보태고 시스템을 조금 바꾸면 되는 거였어요.

제동 : 아,, 그래서 가보면 골목마다 개성이 살아 있고, 젊은이들이 많이 찾나봐요.

현준 : 앞서 제가 다양성이 확보되어야 한다고는 했는데, 다양성이 나오려면 핵심은 소자본 창업이 쉬워야 해요. 그러기 위해서는 시스템을 바꿔야 해요. 지금 있는 규칙을 그대로 둔 상태에서 창업하라고 하면 결국 대자본이 들어와 기존 건물을 다 밀고 쇼핑몰 거리를 만들겠죠. 그러면 소자본 창업 기회는 또 없어지는 거에요.

 

p153

제동 : 현준 쎔 얘기처럼 선택지가 많고 다양성이 있는 공간이 우리 주변에 많이 생기면 좋겠어요. 그런데 이게 안 되는 이유가, 사람들은 저마다 살고 싶은 곳들이 있고 꿈꾸는 데가 있는데 그 꿈마저 다 꺽여버린 세상이 됐기 때문이잖아요. 어디서 봤는데, 싱가포르는 원래 모든 국민이 자기 소유의 집을 갖는 1가구 1주택을 목표로 출발했다던데, 맞나요?

현준 : 네. 싱가포르와 우리나라의 가장 큰 차이점은 주거의 다양성이에요. 싱가포르에서는 똑같이 생긴 아파트 단지를 본 적이 별로 없는 것 같아요. 똑같은 형태의 주거지를 만들지 않도록 하는 법적 장치가 있다고 하더라고요. 우리나라처럼 서울, 대전, 대구, 판교, 세종 할 것 없이 다 똑같이 생긴 아파트가 있는 게 아니에요. 우리나라는 주거지부터 획일화가 되니까 점점 더 가치관이 정량화되는 것 같아요.

제동 : 선택지가 몇 개 없으니까 다른 사람들의 가치를 받아들일 수밖에 없겠네요.

현준 : 그렇죠. 그러니까 그다음부터는 가치를 부여할 데가 돈밖에 없는 거에요. 제동 씨 집이나 저희 집이나 거의 다 비슷하게 생겼잖아요. 그러면 자기만의 독특한 가치가 없어요. 내 집의 가치는 결국 집값밖에 안 남는 세상이 되는 거죠. 그리고 아파트를 똑같은 모양으로 지으면 물물교환이 쉬워지면서 아파트가 화폐 기능을 갖게 되요.

 우리나라 주거 문제를 해결할 수 있는 여러 가지 방법을 각 분야에서 생각해야겠지만, 건축가로서 제가 제안할 수 있는 부분은 이거에요. "집을 다양하게 만들어라. 도시도 다양하게 디자인해라. 다양성을 키워라."

제동 : 그래야 사람들이 한곳으로 몰리지 않고, 각자 원하는 게 다르니 나도 행복하고, 다른 사람도 행복해지겠네요.

현준 : 그렇죠. 만약 100명이 있는데 선택지가 딱 하나밖에 없으면 99명은 경쟁자가 되는 거잖아요. 그런데 반대로 다양성을 10배 늘리면 행복한 사람이 10배 늘어나는 거에요. 우리 주택 문제를 단순 공급으로만 해결하겠다고 하면..., 전 답이 없다고 봅니다. 공급도 당연히 늘려야 하고 한강이 보이는 아파트도 물론 좋지만, 대한민국 5,000만 국민이 다 한강이 내려다보이는 고층 아파트를 좋아할 거라고 생각하지 않아요.

제동 : 맞아요. 고층에서 내려다보는 한강뷰도 너무 오래 보고 있으면 지겨울 수 있거든요.

현준 : 서울이 엄청 넓잖아요. 그러면 정말 살고 싶은 동네가 100군데는 돼야 한다고 생각해요. 독특하고 좋은 동네가 100군데 정도 생기면 주택형태도 다양해지고 인구도 좀 분산되겠죠.

 

 

세번째 만남 x 천문학자 심채경 박사

 

p244

채경 : 지금으로서는 우리나라에서 달 궤도선에 주어진 기회가 단 한 번뿐이거든요. 그 한 번의 기회를 꼭 성공시켜야 한다는 부담감이 있죠.

제동 : 기회가 왜 한 번밖에 없나요?

채경 : 달 탐사 프로젝트에 돈이 많이 들어요. 제가 알기로는 예산이 2,000억 원 이상 되는데, 국민들의 세금으로 얻은 그 기회를 달 과학자들이 함부로 낭비할 수는 없잖아요. "우리 이번에 실패 했는데 2,000억 원 한 번만 더 지원해주세요." 이렇게 말하기도 어려운 거죠. 누군가 "너희가 하고 있는 달 탐사 프로젝트가 그 정도의 부가가치를 만들고 있느냐?"라고 묻는다면 할 말이 없거든요. 텔레비전이나 휴대전화를 만드는 것도 아니고, 사람들이 먹고사는 데 아무런 기여를 안 하는 것처럼 보일 수 있으니까요. 당장 달 탐사 못 한다고 밥을 못 먹는 것도 아니고요.

제동 : 제가 물어보고 싶었는데 채경 쎔이 먼저 얘기해줘서 고마워요. 사실 '지금 당장 달에 가서 무슨 큰 도움이 될까?' 싶은 마음도 있긴 했거든요. 그런데 어떻게 보면 우리 국가 예산 500조 원 중에 2,000억 원 정도 들어가는 거잖아요? 물론 GDP 규모가 다르지만 다른 나라에서 투자하는 비용에 의하면 그렇게 높은 것 같지는 않은데, 그래도 "2,000억 원이면 그게 얼마야?" 싶은 거죠.

 

채경 : 예전에 미국과 구소련이 한창 우주 경쟁을 할 때는 2년 동안 달 탐사선을 20대씩 보냈어요. 그러면 그게 다 성공했느냐? 그렇지 않았거든요. 10대 보내면 2대 성공하던 시절이었죠.

제동 : 그때는 미국과 구소련이 누가 세계를 선도하느냐를 두고 자존심 대결을 하던 때니까요.

채경 : 네. 당시에는 열 번을 실패해도 계속해보라는 분위기였을 거에요. 그런데 우리나라 달 과학자들에게 60,70년이 뒤처진 상황에서 딱 한 번의 기회가 주어진 거에요. 우주 미션은 변수가 많아서 실패할 가능성이 크거든요. 그렇다고 실패해도 좀 봐달라고 합리화하려거나 밑밥을 까는 건 아니고요.

제동 : 밑밥 좀 까세요. 괜찮아요. 실패 경험도 쌓여야 성공 확률도 높아지고, 채경 쌤의 후배들도 그 실수를 토양 삼아서 또 도전할 수 있는 거잖아요.

채경 : 네. 그래야 다음 세대 친구들도 용기를 내서 '달 연구 재밌겠네. 달 탐사해보자.' 이렇게 생각하고 이 길에 뛰어들 수 있을 것 같아요. '왜 그렇게밖에 못해? 왜 자꾸 지연돼?'라고 생각하기보다는 '그만큼 어려운 일에 도전하고 있구나!' 이런 애정어린 시선으로 봐주시면 큰 힘이 되고 감사하죠.

 

 

네번째 만남 x 경제전문가 이원재 대표

 

p375

제동 : 솔직히 저 같은 사람은 신호(기본 소득을 의미함) 안 받아도 삽니다. 하지만 사람들이 웃을 여유가 없으면 제 직업도 의미가 없거든요. 사람들이 분노해 있는데 코미디가 되겠어요? 오히려 어떤 재밋는 얘기를 해도 돌을 던질 가능성이 커요. 제가 진짜 하고 싶은 일은 사람들과 웃으면서 얘기하는 거에요. 사실 돈 받지 않고 강연할 때가 제일 행복해요. 그럼 안 웃겨도 되거든요. 희한한 게 그렇게 할 때가 저도 재밋고, 사람들도 훨씬 재밌어하는 것 같아요. 원래 돈 받고 하면 다 노동이고, 돈 내고 하면 놀이잖아요. 하지만 요즘은 돈 받고 노동도 하고 싶네요.

 

p378

제동 : 우리 사회가 이렇게 갈등이 첨예한 이유 중엔 축제가 적다는 것도 있어요. 축제라고 하면 거창한 것 같지만, 마을의 크고 작은 경조사도 사람들이 모여 오해와 갈등을 푸는 축제 역할을 할 수 있거든요. 그런데 지금은 마을의 자잘한 축제들이 모두 대규모 축제에 잠식당하고, 경조사가 다 기업화돼 버렸어요. 지금은 장례식도 다 상조회사에 맡기잖아요. 예전에는 누가 돌아가시면 동네 주민들이 다 함께 했거든요. 뭐가 더 옳다 그르다를 떠나서 그렇게 바뀌었다는 거죠.

 그때 사흘간 밤새워 음식 하고 상여 메고 하면서도 돈을 받지 않았어요. 그냥 남은 음식 싸 가고, 상여 메시는 분들에게 막걸리 대접하고, 누구도 소외되지 않았던 것 같아요.

 

다섯 번째 만남  x 뇌과학자 정재승 교수

 

재승 : 뇌과학적으로 보면 우리 뇌에 인슐라(insula)라는 영역이 있어요. 뇌섬이라고도 하는데, 역겨움을 표상하고 공정함을 측정하는 뇌 영역이에요. 공정하지 못한 대우를 받거나 그런 상황을 보면 분노 반응을 일으키는 곳이죠.

제동 : 아, 뇌섬이라는 곳에서 분노를 느끼게 하는군요?

재승 : 네, 시상하부와 함께요. 예를 들어 어렸을 때 부모님이 형이나 언니에게만 잘해주거나 막내만 예뻐해서 화가 날 때가 있잖아요. 그 분노의 반응을 만들어내는 뇌 영역이 바로 인슐라에요. 어미 새가 벌레를 물고 와서 딱 한 마리 새끼한테만 계속 벌레를 준다고 생각해보세요. 그때 나머지 새끼 새들의 뇌섬은 난리가 나요. 어미가 첫째에게만 계속 먹이를 준다면 나머지 새들은 자기도 달라고 지저귀어야 하나라도 얻어먹을 수 있잖아요.

 만약 "제가 봐도 첫째가 예쁘니 첫째만 주세요." "먹이가 남거든 그때 주세요." "전 안주셔도 되요" 이렇게 쿨하게 반응하면 굶어죽어요. 불공정함에 대한 분노 반응은 원하는 것을 최대한 얻으려는 전략이기도 한 거죠. 안 그러면 굶어죽을 수도 있으니까요. 그래서 차별과 불공정한 대우를 받는 사람이 내가 되었든 내 주변 사람이 되었든 그것에 분노하는 뇌가 있는 거에요.

제동 : 그게 생존과 관련된 아주 원초적인 욕구인 거네요.

재승 : 그렇죠. 그래서 부모는 "열 손가락 깨물어서 안 아픈 손가락이 어딨어? 다 똑같이 대했어"해도 아이들은 다 기억하고 있는 거에요. 부모가 언제 나를 차별했고 상처를 줬는지를, 왜냐하면 아이들은 그걸 너무나 잘 기억하는 뇌 영역을 가졌기 때문이에요.

 

여섯 번째 만남 x 국립과천과학관 이정모 관장

 

p497

정모 : 네, 처음에는 저도 과학자와 신앙인 사이에서 고민하던 때가 있었는데, 어느 순간 괜찮아졌어요. 복음에 대한 신뢰가 있으면 과학적인 사실을 두려워할 필요가 전혀 없거든요. 신앙인들이 과학적인 사실에 두려움을 갖는다면, 그건 성서에 대한 신뢰가 약해서 그런 거라고 생각해요. 신뢰가 있으면 얼마든지 상상력을 발휘할 수 있고 바꿀 수도 있거든요.

제동 : 그래요? 좀더 자세히 말해줘봐요.

정모 : 예를 들면 옛날 사람들은 천동설을 믿었잖아요. 지동설로 바뀔 때 얼마나 혼란스러웠겠어요. 그런데 지금은 천동설, 지동설로 고민하는 사람은 없잖아요.

제동 : 그렇죠. 갈릴레오 갈릴레이와 같은 과학자들 덕분이죠.

정모 : 1992년 10월 31일이 아주 중요한 날이에요. 혹시 그날 무슨 일이 있었는지 아세요?

제동 : 1992년이면 제가 대학교 1학년인데, 분명 술 먹고 있었을 거에요.

정모 : 그날 요한 바오로 2세 교황께서 갈릴레오와 후손들에게 사과문을 발표합니다. "360여 년 전 우리 로마 교황청이 당신들의 조상인 갈릴레오 갈릴레이 선생님을 부당하게 핍박했습니다. 알고봤더니 지구는 우주의 중심이 아닌 태양계 변방의 작은 행성에 불과하더군요. 용서해주십시요. 그리고 전세계 만방의 카톨릭교도들에게 알려드리오니, 오늘부터 지구의 자전과 공전을 인정합니다."

제동 : 1992년에 그런 발표를 했군요.

정모 : 네, 물론 그전에도 알았지만 그들의 잘못을 고백하면 카톨릭과 교황청의 권위가 무너질 거라고 생각한 거죠. 그런데 만약 교황청에서 아직도 지구가 우주의 중심이라고 주장했다면 누가 교황청의 권위를 인정했겠어요? 교황 요한 바오로 2세가 얼마나 훌륭한 분이었느냐면 지동설뿐 아니라 빅뱅이론과 진화론에 대해서도 받아들이자고 진지하게 권유를 하십니다.

 

p502

제동 : 앞에서 침팬지와 인간의 공통 조상이 있었다고 하셨잖아요.

정모 : 그렇죠. 그 공통 조상은 침팬지도 아니고 인간도 아니에요. 그 조상의 자식 중 하나는 침팬지의 조상이 되고, 다른 자식 중 하나는 인간의 조상이 된 거죠.

제동 : 그러면 침팬지나 오랑우탄이 우리의 조상이라고 할 수는 없는 거네요? 저는 이게 항상 헷갈렸어요.

정모 : 전혀 없죠. 심지어 교과서에 그런 그림 있었잖아요. 네 발로 걷던 침팬지가 점점 두 발로 걷는 사람이 되는 그림이요. 그게 아주 큰 오류인 거에요. 지금이라도 교과서 내용을 바꾸면 후세가 공부하기 편할 텐데, 못 바꾸고 있어요.

 그 그림을 보면 침팬지가 오스트랄로피테쿠스가 되고, 그게 호모에렉투스가 되고, 네안데르탈인이 된다고 그러는데, 우리는 그렇게 직선으로 진화한 게 아니라 계속 갈라서고, 갈라서고, 갈라선 거에요. 나무에서 가지들이 이쪽저쪽으로 갈라져 쫙 뻗어나간 것처럼 그 나뭇가지 끝에는 사람, 침팬지, 원숭이, 지렁이, 풍뎅이 들이 있는 거죠. 지금 살아 있는 생명체는 다 진화의 끄트머리에 있는 거에요. 이제까지 우리는 지렁이는 진화가 덜 된 하등한 생물이라고 생각했잖아요. 우리가 진화에 대한 개념이 없다보니까 다른 동물들을 하찮게 여기는데, 진화를 제대로 이해하면 다른 생명들이 우리와 함게 생태계를 이루고 있는 동반자라는 걸 알게 돼요.

제동 : 듣고보니까 정말로 겸손해지네요.

정모 : 그렇죠. 이 지구의 모든 생명체는 하나의 세포로부터 시작됐어요. 빅뱅의 순간에 수소가 생겨났어요. 또 별에서 다양한 원소가 생성되고, 초신성이 폭발하면서 이 원소들이 다 흩어졌는데 그중 어떤 건 단백질이 되고, 어떤 건 지방이 되면서 우리 몸에 들어와서 생명체를 구성하고 있는 거죠.

제동 : 과학을 제대로 알면 차별하는 마음이 사라지겠네요. 특히 인종차별은 할 수 없을 것 같은데요.

정모 : 과학 논문에서는 'Race'라는 단어를 쓰면 안 돼요. 과학적인 단어가 아니에요. "인종(Race)은 없다. 인종주의(Racism)만 있을 뿐이다." 이런 말도 있죠.

제동 : 와, 좀 멋있는데요? 있어 보이고, 사실이어서 더 좋고요.

정모 : 생물학적으로는 모든 인간이 단일 종인 호모사피엔스에 속한다고 표현하면 되죠. 하지만 찰스 다윈도 'Race'란 단어를 썼어요. 물론 1800년대 얘기죠. 찰스 다윈도 어마어마한 인종차별주의자였다고 알려져 있어요. 그렇다고 지금 우리가 찰스 다윈을 비난하기는 힘들어요. 그 당시 과학 상식의 기준으로 용인됐던 부분이니까요. 당시의 본능과 지식의 한계였던 거죠. 그렇지만 지금은 그 한계를 뛰어넘었기 때문에 내가 존경하는 사람이 그랬다고 나도 그런 태도를 가지면 안 되겠죠.

 

p520

정모 : 의심할 때 중요한 게 숫자에요. 숫자로 의심해야죠.

제동 : 숫자요? 그건 또 무슨 말이에요.

정모 : 2017년에 '살충제 달걀 파동'이 있었잖아요. 일부 양계장에서 피프로닐(Fipronil)이라는 살충제를 막 뿌렸던 거에요. 피프로닐은 간, 신장, 갑상선을 손상시킬 수도 있는 독성 물질이에요. 그 당시 거의 모든 언론이 '달걀이 피프로닐에 오염돼서 큰일이다'라는 식의 보도를 했어요. 그리고 2018년 말에는 신생아들이 맞는 결핵 예방용 백신에서 비소 성분이 검출됐다는 언론 보도가 나오면서 전국의 부모들이 아이들에게 백신을 안 맞히려고 했던 일도 있었어요. 비소가 뭐냐면 사약의 주성분이에요. 그런데 따져봐야죠. 설마 멀쩡한 백신에 비소를 넣었을 리는 없잖아요.

 알고보니 전에도 비소가 있었는데 너무 적은 양이라 있는지도 몰랐다가 과학기술이 발달하면서 그것을 검출할 수 있게 된 거에요. 그만큼 적은 양이었어요. 우리가 매일 먹는 밥에도 비소가 들어 있거든요. 백신에는 밥 한 숟가락에 있는 양만큼의 비소가 들어 있었어요. 제가 지금 50대 중반이고 50년 동안 밥을 먹었지만 아직 비소에 중독되지 않았거든요.

제동 : 대신 밥에 중독되셨잖아요. 

정모 : 그렇죠. 밥에는 중독됐지만, 비소에는 중독되지는 않았어요. 그래서 중요한 건 숫자인데, 피프로닐도 마찬가지였어요. 60g짜리 달걀에 0.002mg쯤 검출됐던 것 같은데, WHO가 정한 일일섭취허용량, 급성독성참고량에 따르면 체중이 60kg인 사람이 평생 매일 5.5개 먹어도 되는 양이에요.

제동 : 하루에 5.5개를 먹어도 아무런 문제가 없다고요?

정모 : 네, WHO 기준으로 계산해보면 체중이 60kg인 사람이 하루에 246개를 먹으면 문제가 생겨요. 그러면 간이나 신장, 갑상선에 독성이 생긴다는 거에요. 그런데 실제로 하루에 달걀 246개를 먹으면 어떻게 될까요?

제동 : 배불러서 죽을 것 같아요.

정모 : 네, 해부학적인 문제가 생겨서 진짜 죽을 수도 있어요. 배 터져 죽는 거죠. 여기서 제가 하고 싶은 말은 달걀이 오염돼도 괜찮다는 게 아니에요. 문제가 생기면 올바른 정보를 알려주고 얼른 조치하면 되지, 온 국민이 패닉에 빠져서 달걀값은 치솟고, 빵집이 망하고, 수십 개의 양계장이 파산해서 그걸 다시 살려내기 위해 어마어마한 세금을 쏟아부을 필요는 없었다는 거죠. 우리가 숫자로만 계산해보면 문제를 좀더 정확하게 파악할 수 있고 불필요한 혼란을 줄일 수 있어요. 물론 돈도 절약할 수 있고요.

 이렇게 과학적 태도의 시작은 의심인데, 의심은 모두에게 해야해요. 좋은 사람도 의심하고 좋은 말도 의심하는 거에요. 이때 그 의심에 답해주는 과학자의 태도는 겸손함인 것 같아요. 저를 포함해서 대부분의 과학자들은 정말 겸손하거든요.

 

p526

제동 : 그런데 호모사피엔스가 잘못하는 것도 많잖아요. 특히 요즘은 자연과 환경 분야에서 죄책감을 느껴야 할 것 같아요. 근데 저번에 관장님이 북극 빙하가 녹는 것과 해수면이 높아져서 도시가 물에 잠기는 건 상관이 없다고 말씀하시는 걸 얼핏 들은 것 같은데, 그건 확실한 겁니까?

정모 : 이런 거에요. 빙하는 해수면 위로 요만큼만 나와 있고, 그 아래 더 많은 부분은 물에 잠겨 있잖아요. 신기하게도 다른 물질은 고체가 되면 부피가 줄어드는데, 물은 고체가 되면 부피가 커져요.

제동 : 그래서 물을 꽉 채워서 얼리면 그릇이 터지죠?

정모 : 네, 터져요. 그러니까 생각해보세요. 대부분의 빙하는 물속에 잠겨 있잖아요. 얼음이 해수면을 높여놨는데 빙하가 녹으면 부피가 줄어들겠죠?

제동 : 그러면 오히려 해수면이 낮아진다는 얘기에요?

정모 : 낮아져야죠.

제동 : 그런데 왜 빙하가 녹아서 해수면이 높아지면 저지대 국가들이 침수된다. 자연재해가 생긴다, 하는 말들이 나올까요?

정모 : 북극 바다에 있는 빙하가 다 녹으면 해수면은 낮아집니다. 문제는 빙하가 바다에만 있는 게 아니에요. 육지에도 어마어마한 빙하가 있고 남극 빙하는 다 육지에 있어요. 그린란드나 캐나다도 마찬가지에요. 이게 녹으면 그대로 바다로 가는 거에요. 그러니까 남극 대륙에 있는 빙하가 녹으면 해수면이 높아지고, 북극의 빙하가 녹으면 오히려 해수면이 낮아지는 거에요.

 

일곱 번째 만남 x 대중문화평론가 김창남 교수

 

p595

창남 : 아, 쉽지 않은 질문이네요. 기본적으로 지금 우리 사회에서는 대학이 취업을 위한 스펙을 쌓는 공간, 그런 서비스를 제공해야 하는 공간으로 인식되지 않나 싶어요. 학생들 역시도 대학에 다니는 기간을 그런 시간으로 인식한다는 생각이 드는데, 나는 대학이 삶의 연습을 마음놓고 해볼 수 있는 시간과 공간이어야 한다고 생각하거든요.

제동 : 불안해하지 않으면서

창남 : 그렇지. 우리는 학생 때 만화책이나 소설을 읽고 있으면 "너 인마, 공부해야지, 왜 쓸데없는 짓 하고 있어?" 이런 얘기를 들어왔잖아요. 나중에 어른이 되어서도 밥벌이 외에 다른 걸 할라치면 또 같은 얘기를 듣게 되요. "왜 일은 안 하고 쓸데없는 짓을 해?" 바로 그 쓸데없는 짓을 맘껏 해볼 수 있는 때가 대학시절인 거죠.

제동 : 그 쓸데없는 짓을 통해 새로운 관계가 만들어질 수도 있고, 삶의 방향을 새롭게 정할 수도 있잖아요.

창남 : 맞아요. 그런데 요즘 보면 많은 대학에서 총학생회도 구성되지 않고, 동아리 활동도 잘 안 돼요. 그런 것들이 당장 토익시험 보고 취업 면접 준비하고 자격증을 따야 하는, 그 도로의 논리에서 보면 쓸데없는 일이 돼버린 건데, 진짜 대학의 의미는 바로 그런 쓸데없는 일을 하는 데 있는 것 같아요. 대학에 있는 동안 비교적 자유롭게, 커리큘럼이나 세속적인 스펙이 요구하지 않는 일들을 하는 과정에서 오히려 자신에 대한 새로운 발견이 이루어질 수 있거든요.

제동 : 우리가 경쟁사회에서 살다보니까 '이러다 낙오되는 것 아닐까?' 하는 두려움 때문에 알면서도 쉽게 시도를 못하는 것 같아요.

창남 : 사회 시스템 자체가 다 함께 맞물려 돌아가기 때문에 쉽지 않죠. '어떻게 하면 두려움 없이 이것저것 도전해보고 시행착오를 겪어볼 수 있는 시간과 공간으로서의 대학을 만들어갈 수 있을까? 학생들을 가르치는 입장에서 나도 이런 고민을 많이 하고 있어요.

제동 : 그렇게 되어야 한다는 것은 지금 그렇지 않다는 말씀인데, 이것이 젊은이들에 대한 비판이나 비난이 되면 또 안 되는 거잖아요.

창남 : 당연하죠. 한국 사회가 그렇게 몰고 간 거니까. 그래서 대학의 기능을 어떻게 회복할 수 있을까 이런 고민을 하게 되는 거죠. 저는 가끔 캠퍼스에서 기타를 메고 다니는 친구들을 보면 반가워요. 기타를 치고 노래 부르는 건 그 친구의 전공이나 스펙과 무관한, 소위 말하는 '쓸데없는 일'일 거에요. 그래도 그 친구는 그것을 하는 거죠.

 

 

 

제동 : 보통 "잔디밭에 들어가지 마시오." "캠퍼스에서 술 먹지 마시오!" 하잖아요. 그런 얘기 들으면서 저는 이런 생각을 했어요. '캠퍼스의 낭만은?' 도대체 세상이 어떻게 될라고...

창남 : 맞아요. 그러니까 요즘 대학생들을 탓할 수가 없는 거죠. 사회 전체가 그렇게 움직여왔고, 대학에 그런 기능을 강요했으니가. 2006년 서울대 입학식에서 신영복 선생님이 그런 말씀을 하신 적이 있어요. "대학시절에는 그릇을 채우려고 하기보다는 그릇 자체를 키우기 위해 노력해야 한다. 먼저 그릇을 비우고 그릇의 크기를 키우는 데서부터 시작해야 한다."

제동 : 신영복 선생님 말씀이 당장 실천하기는 쉽지 않지만 시간이 흐르면 다 맞는 말 같아요.

창남 : 내가 이만큼 살아보니 정말 그런 것 같아요. 물론 내가 가지고 있던 그릇의 크기를 키우는 건 굉장히 힘들죠. 대학에서 그러한 과정을 만들어가고, 그 이후에 그릇을 채우면서 살아야 한다고 하신 건데, 요즘 내가 느끼는 안타까움은 학생들이 자기가 가진 그릇을 비우고 좀더 크고 새롭고 튼튼한 그릇으로 키우는 과정을 잘 경험하지 못하는 것 같은 데서 와요. 그냥 가지고 있는 그릇을 빨리 채우려고 드는 것이 요즘 대학생의 모습이 아닌가 싶을 때가 있어요.

제동 : 사실 학생들이 그럴 수 있으려면 사회에 나갔을 때 어느 정도 안정적인 요건들이 갖춰져 있어야 하잖아요. 앞서 쌤이 말씀하신 것처럼 "내가 이 사회에서 버림받지 않겠구나." 하는 확신이 있어야 불안이 해소되고 그릇을 키우는 그런 경험들을 해나갈 텐데, 또다시 패배주의적인 얘기가 되겠지만 우리가 그런 사회로 나아갈 수 있을까요? 그리고 그게 가능하다면, 문제의식을 느낀 사람은 많은데 왜 안 될까요?

창남 : 글쎄요. 내가 답을 갖고 있는 것은 아니지만, 제동 씨가 말한 것처럼 이 사회와 국가가 나를 버리지 않을 것이라는 믿음을 사회구성원들에게 심어주는 게 핵심이겠죠. 그게 기본소득의 형태가 됐든 보편적 복지 형태가 됐든 어쨌거나 이 사회가 각자도생의 정글이라는 인식을 안 가져도 될 만큼의 최소한 신뢰라도 심어주는 거에요.

제동 : 이 사회가 정글이라는 생각을 '가지지 말라'는 게 아니고, '안 가져도 되게끔' 한다는 게 중요하네요.

창남 : 그렇죠. 불안한 사람에게 "불안해하지 마." 그래봐야 무슨 소용이 있겠어요.

제동 : 사회가 변하고 있다는 신호만 있어도 힘이 좀 될 텐데 그게 없으니까 더 불안한 거죠.

창남 : 예컨대 기본소득만 해도 다양한 방식으로 '이건 안 될 거야'하는 인식을 먼저 심어주잖아요. 언론의 문제일 수도 있고, 이 사회의 담론구조를 장악한 권력 집단, 마이크를 들고 있는 사람들의 문제일 수도 있는데, 그런 사람들이 끊임없이 패배주의적인 생각을 심어주는 건 아닌가. 내가 그래서 젊은 친구들에게 제일 하고 싶은 얘기가 그거였어요. "두려워하지 말자." 두려움은 나 혼자라는 생각에서 비롯되는 거잖아요.

제동 : 맞아요.

창남 : 내 친구가 나와 똑같은 고민을 하고 있다면 같이 방법을 모색해볼 수 있잖아요. 언젠가 우리 학생한테 들은 사례인데, 나 혼자 살면 월세 50만 원을 내야 하지만 친구와 같이 살면 절반만 내도 해결할 방법이 있는 거죠. 그런데 각자 해결하려다보니까 친구도 경쟁자가 되고 승부의 대상이 되는 상황이죠. 신영복 선생님 말씀처럼 여럿이 함께 가면 길은 뒤에 생겨날 거예요. 그렇게 함께 고민하고 방법을 모색할 수 있다는 믿음을 주는 것 또한 대학의 역할이 아닌가 싶어요.

제동 : 저처럼 불안감이 많은 사람도 쌤과의 대화를 통해서 다시 한번 생각해 보게 되듯이 결국은 서로가 서로에게 대학이 될 수 있겠네요.

창남 : "친구가 되지 못하는 스승은 좋은 스승이 아니고, 스승이 되지 못하는 친구는 좋은 친구가 아니다." 신영복 선생님이 돌아가시기 전에 해주신 말씀이에요. 명나라 때 이탁오라는 사상가가 했던 말을 현대식으로 말씀해주신 것인데, 저한테는 굉장히 깊이 남아 있어요. 거의 마지막에 해주신 말씀이거든요. 요즘 친구들을 만나거나 학생들과 대화할 때 이 얘기를 꼭 해요. 결국 가장 좋은 관계는 서로가 서로에게 친구이자 스승이 되는 관계인 거죠.

 

p608

창남 : 신영복 선생님의 표현을 빌리자면 "공부란 머리에서 가슴까지, 그리고 가슴에서 발까지로의 여행"이에요. 머리에서 가슴까지라고 하는 것은 대상을 타자화하고 머리로만 이해하는 것이 아니라 가슴으로 느끼는 걸 의미해요. 공감하는 거죠. 이해에서 공감으로, 이게 아주 힘든 과정이죠.

 

 

 

 IMF 금융위기, 미국발 경제위기등을 겪었지만 여전히 한국의 주류 경제학자는 이미 폐기되고 있는 80년대말의 신자유주의 경제이론에 경도되어 있다. 

 최근 들어 조금씩 그러한 신자유주의 경제의 문제점들에 대해 심층분석하고 한국의 경제가 나아갈 방향을 대중들의 입장에서 바라보는 경제학자들이 늘어나는 것은 반갑고도 바람직한 일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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p21

 연결의 세계는 분리된 세계와 달리 통합 효과(이득)와 전염 효과(피해)라는 새로운 효과를 수반한다. 그리고 연결이 강화될수록 통합 효과 뿐 아니라 전염 효과도 커지므로, 전염 효과의 피해도 규모가 커질 수밖에 없다. 금융위기, 코로나19 재난, 기후위기형 재난 등은 모두 전염 효과의 대규모 피해를 보여준다. 예를 들어, 금융위기는 (세계가 금융을 매개로 촘촘히 연결된) '금융네트워크'의 산물이다. (투자은행은 헤지펀드를, 상업은행은 투자은행을 모방하는 등) 개별 금융회사는 분산투자를 했지만, 모든 금융회사가 같은 자산 보유 구조를 가지고 있기 때문에 하나의 자산에 손실이 발생할 경우 모든 금융회사가 손실을 보는 결과를 초래한 것이다.

p22

 2000년 이후 우리가 경험한 제조업의 쇠퇴(탈공업화), 9.11 테러, 글로벌 금융위기, 일본 동북부 대지진과 후쿠시마 방사능 피해, 호주 산불 사태나 코로나19 재난 등은 서로 관련성이 없을까? 탈공업화와 금융위기는 밀접한 연관성을 갖고 있고, 양쪽을 매개하는 중요한 요인 중 하나가 소득 불평등의 심화인데, 소득 불평등은 9.11 테러나 코로나19 재난 등과도 깊은 관련이 있다. (국가 내, 국가 간) 소득 불평등의 심화는 인간의 생태계 개입을 증대시킨다. 땔감을 구하기 위한 나무 헤손, 경지 확보를 위한 방화, 더 저렴한 자원을 확보하려는 자본의 논리, 개도국의 개발 정책 등은 생태계를 파괴하고, 그 결과 서식지를 잃은 야생동물로부터 사람에게로 인수공통감염병이 전파될 '개연성'을 높인다. 예를 들어, 아프리카 일부 지역에서 단백질 부족을 해결하기 위한 야생동물고기의 소비는 포식자-먹이 균형을 파괴함으로써 새로운 형태의 에이즈 바이러스가 출현할 가능성을 높이고 있다. 에이즈바이러스나 코로나바이러스 등은 이른바 인수공통감염병이다. 자연 파괴로 서식지를 잃은 동물이 인간에게 바이러스를 옮긴 결과이다.

 또한 (기후변화와 코로나19 같은 인수공통감염병의 인과관계가 아직 과학적으로 증명되지 않았지만) 코로나19 재난은 자연 파괴의 결과이고, 자연 파괴와 기후변화의 상관성을 고려할 때 기후변화와 코로나19 재난 역시 무관하지 않다. 즉 기후변화는 가뭄, 홍수, 태풍, 지진 등으로 자연에 영향을 미치고, 자연 재난은 생태계뿐만 아니라 다시 기후변화에 영향을 미친다. 예를 들어, 산불,가뭄,홍수 등의 이상 기후로 숲이 파괴되면서,, 야생동물의 서식지가 훼손돼 이들을 숙주로 하는 바이러스가 인간에게 옮아왔고, 또 숲이 줄어들면서 숲이 저장할 수 있는 이산화탄소가 대기 중에 더 많이 배출되어 기후위기가 심각해지는 악순환에 빠진다.

 이처럼 금융위기나 코로나19 재난은 인간뿐만 아니라 자연의 모든 것이 연결되어 있고 한 살람이나 사회 혹은 자연에 미치는 영향이 다른 사람이나 사회 혹은 자연에도 영향을 미친다는 사실을 보여준다. 서로 간의 상호작용이나 관련성이 커짐에 따라 정규분포의 평균치 근처가 아닌 양극단에서 빈번하게 발생한다. '큰 현상이 일어날 확률이 낮지만, 작은 현상이 일어날 확률은 크다'는 것을 설명하는 팻테일, 롱테일, 블랙스완 등이 회자되는 배경이다. 연결이 강화되면서 대규모 피해나 재난 같은 '새로운 처음' 현상이 자주 발생하는 것이다. 이러한 '새로운 처음'을 우연이라고 생각하면 앞으로 우리는 계속 '새로운 처음'에 맞닥뜨릴 수밖에 없을 것이고, 그때마다 천문학적인 비용을 지불해야 할 것이다. 이것은 인류 사회가 '변화'할 때이며, 그에 따라 근본적인 변화가 진행 될 것임을 의미한다.

 

p35

 코로나19 재난은 미국의 민낯을 드러냈다. 잘 알려져 있듯이 미국의 의료산업 규모와 의료진은 세계 최고다. GDP 대비 미국의 의료서비스 시장 규모가 1970년 6.9%에서 2016년에는 17.9%로 성장했지만, 세계 최고 수준의 미국인 의료비 지출이 (기대수명이 OECD 국가 중 최하의 그룹에 속할 정도로) 미국인의 건강 증대로 연결되지는 않는다. 미국 내 코로나19 확진자와 사망자가 가파르게 늘고 있는 가운데 대통령이란 사람은 코로나19로 10만 명이 사망한다면 "매우 잘하 일(Very good job)"이라고 말해 구설에 오를 정도다. 워싱턴, 캘리포니아, 뉴욕, 뉴저지주 등에서 마스크와 인공호흡기 지급을 연방정부에 독촉하고 있는데, 인공호흡기 3만 개를 원하는 뉴욕주에 400개밖에 지급하지 못하는 실정이다.

 2020년 코로나바이러스 감염증(코로나19)으로 전 세계적인 우려가 커져가는 상황에서 또 하나 시선을 끌었던 것이 미국 독감 사망자 수였다. 미국 질병통제예방센터CDC에 따르면 미국에서 매해 3만 명 이상이 독감으로 사망하고 있는데, 2020년에는 이를 넘길 것으로 전망했다. 2017~18년 독감 시즌에는 6만 1,000명이 숨지고 4,500만 명이 감염되기도 했다. '독감'은 '코로나19'와는 달리 이미 백신이 개발되어 예방할 수 있음에도, 미국에서 독감으로 매해 수만 명이 죽어가고 있다는 소식에 많은 사람이 의아해하곤 한다. 하지만 미국의 열악한 의료시스템을 아는 사람에게는 그리 놀라운 일이 아니다. 미국은 의료버험이 민간보험사에 맡겨져 있고, 보험료가 비싸 저소득층은 의료보험에 가입하기 힘들다. 대부분의 젊은이들은 의료 혜택을 제대로 받을 수 없다. 설령 보험이 있다 해도 본인 부담금이 많게 책정된 경우 병원 문턱을 넘어서기가 힘든 것은 매한가지다. 비싼 의료비로 인해 독감 예방접종을 쉽게 받을 수 없다는 것도 문제다. 특히 질병 취약 연령대인 65세 이상 인구의 독감 예방 백신 접종률은 낮아지는 추세다. 2017~18년 독감 시즌 기간 18세 이상 성인의 독감 예방접종률이 37.1%로 2016~17년보다 6.2% 포인트나 낮아졌다. 65세 이상 인구의 독감 예방 백신 접종률 역시 59.6%로 다른 나라들에 비해 저조한 수치다. 반면 한국에서는 65세 이상 고령자에게는 무료 독감 에방접종을 시행하고 있으며, 2017년 기준 독감 예방접종률이 82.7%였다. 이처럼 미국 의료산업의 사례는 의료산업 규모와 국민의 의료서비스 혜택 간의 상관성이 낮음을 보여준다.

 

p38

 정권 말기에 금융위기가 본격적으로 터지자, 부시 정부는 '글로벌 불균형'을 해결할 목적으로 (세계적 규모의 문제들에 대한 국제 사회의 협동관리를 의미하는) 글로벌 거버넌스의 새로운 형태로서 'G20 정상회담'을 개최한다.

 2010년 G20 서울 정상회담을 통해 미국이 제안한 것은(각국의 경상수지 흑자 또는 적자 규모를 국내총생산 대비 4% 이내로 제한하자는) '경상수지 목표제'였다. 그러나 인위적인 수치 설정에(독일,일본,중국 등) 주요국들이 반대하면서 미국의 목표는 관철되지 못했다. 이에 오바마 정부는 무역보복을 위한 법을 강화해 통화전쟁도 불사할 각오를 내비쳤다. 이른바 '2015년 무역강화 및 무역촉진법' 그것이다.

 2015년 범안의 제7장, 즉 환율조작 부분을 지칭하는 (환율 분야의 '슈퍼 301조'로도 불리는) '베넷-해치-카퍼' 수정 법안은 글로벌 금융위기 이후 늘어나는 미국의 경상수지 적자를 줄이기 위해 만들어진 것으로, 미국 정부가 환율조작국에 직접 제재를 가할 수 있는 법적 근거를 담고 있다. 미국 재무부는 매년 4월과 10월에 '주요 교역 대상국의 환율정책보고서'를 의회에 제출하는데, 이 법안에 따라 2016년 보고서부터 환율조작 의심국도 포함하여 발표했다. 미국 재무부가 '환율조작국'으로 분류하는 '심층분석대상국'의 요건은 1) 미국을 상대로 무역흑자 200억 달러 이상을 내고 있고, 2) 국내총생산 대비 경상수지 흑자 비율이 3% 이상이면서, 3) 달러를 연간 국내총생산 대비 2% 초과 순매수 또는 12개월 중 8개월 이상 순매수한 경우 등 3가지다. 이 3가지 요건 중 2가지를 충족하면 '관찰대상국'으로, 3가지 요건을 모두 충족하면 '심층분석 대상국'으로 지정된다. 관찰대상국으로 지정되면 미국 재무부의 감시 대상이 되며 '심층분석 대상국'으로 지정되면 미국 정부의 직접적인 제재를 받게 된다.

 이처럼 경상수지 흑자 규모는 국내총생산 대비 4% 이상에서 3% 이상으로 고무줄처럼 늘어났다. 나머지 기준인 무역흑자 200억 달러 이상이나 국내총생산 대비 2%를 초과하는 달러 매수 규모 등도 이론적 근거가 없다. 트럼프는 이러한 조치도 효과가 없다며 한 걸음 더 나아간다. 직접 무역보복을 하고 2019년부터는 경상수지 흑자 규모를 국내총생산 대비 3% 이상에서 2% 이상으로 다시 강화한다.

 그리고 3가지 기준 중 1가지만 위반한 중국을 2019년에는 환율조작국으로 지정한다. 국제 경제질서에서 '규칙'은 사라진 것이다.

 

p120

 교육의 어원이 에두케레Educera(끌어내다), 즉 학생들의 잠재력을 끌어내는 것이듯이, 주입식 교육은 진정한 의미의 '교육'이 아니다. 진정한 '교육'은 학생들에게 자유를 주고 스스로 생각할 시간을 주어야 한다. 창의성은 오랜 훈련을 통해서 서서히 세상을 보는 관점이 바뀌어서 생겨나는 문제 해결능력이기 때문이다. 즉 자유와 생각할 시간을 주어야 학생들이 창의적인 아이디어를 낼 수 있고, 문제를 찾아내서, 해결하는 능력을 키울 수 있을 것이다. 아이들의 놀이시간과 자유시간이 감소하는 한국 교육은 시대를 역주행하는 것이다.

 

p127

 먼저, '이기적 개인'을 다수결고 '지배'하는 자유민주주의 제도로는 협력과 호혜성을 발현시키기 어렵다. <미국의 민주주의>를 쓴 알렉시 드 토크빌은 일찍이 민주주의가 단순한 대중의 지배 이상의 것이 되려면 (과도한 개인주의에 경도되고 국가에 대한 수동적 자세, 정치적 무관심을 낳은 자유민주주의를 넘어) 민주적 상호부조의 정신이 있어야 한다고 보았다. 즉 협동할 줄 아는 새로운 민주주의는 이미 오래전에 토크빌이 간파한 민주주의의 본래 정신을 되살리는 것이다.

 문제는 협력이 일상화되기 위해서는 '집단행동의 딜레마'를 해결해야만 한다는 것이다. 개인이 공동이익을 추구하기 위해 집단행동을 할 때 자신의 사익을 추구하기 위해 일탈행동을 하거나 무임승차하려는 성향이 있기 때문이다. 무임승차 문제는 구성원의 자발적 협력 노력이 뒷받침되어야 해결할 수 있다. '집단행동의 딜레마'를 해결하기 위해서는 개인주의나 개인적 자유의 제한, 공동체 구성원으로서 개인의 책임의식 등의 문제를 해결할 수밖에 없다는 점에서 '자율적 인간 Homo Autonomous'에 적합한 정치제제로 민주주의가 재구성되어야 한다.

 다행히 디지털 생태계와 연결의 세계에서는 협력과 네트워크, 관계의 지속이 개인의 이익 극대화에 부합하기에 협력과 관계의 지속을 불가능하게 하는 '무임승차 문제'가 발생할 가능성은 적다. 즉 기회주의적 태도의 잠재적 이득은 협력이 중단되면 소멸하기에 협력은 하나의 규칙이자 규범으로 정착될 수밖에 없다. 그렇기 때문에 개인주의, 배타적 소유권, 위계제 등을 특성으로 하는 자유민주주의가 이익 공유와 협력을 특성으로 하는 플랫폼 경제와 연결의 세계에는 적합하지 않은 것이다. 자유민주주의의 문화적 기반인 개인주의는 자발적 참여를 어렵게 한다.

 

p166

 연결성이 강해지면서 개인주의 문화의 한계가 드러나는 상황에서 자신의 문제를 외부로 돌리는 모습은 자신이 속한 문화가 무력감을 드러내기 때문이다. 예를 들어, 일부 유럽인과 미국인 등이 한국인을 포함한 아시아인을 '코로나'로 부르며 조롱해도 코로나 조롱은 인종차별이 아니라는 치안 당국의 모습은 이들이 최고 가치로 여기는 '개인의 존엄'이 얼마나 허구적인가를 보여준다. 문제의 원인을 자신에게서 찾지 못하고 한국의 방역 성공을 서구 우월주의 관점에서 깍아내리고 사고와 태도는 여전히 '새로운 처음'을 이해하지 못하고 있음을 의미한다. 따라서 '또 다른 위기'가 도래하더라도 전혀 이상하지 않을 것이다. 이는 서구의 위기는 일회서 위기가 아님을 의미한다. 이처럼 서구 사회가 한국의 방역 성공 원인을 개인의 자유 침해에 익숙한 문화 혹은 독재 경험의 산물 등에서 찾는 것은 자유와 자율의 차이가 얼마나 큰지, 그리고 개인주의 문화에 익숙한 사람이 자율성을 갖추는 것이 얼마나 힘든지 보여준다.

 

 

p168

 비슷한 시기에 코로나19 확산으로 인해 큰 고통을 치뤘던 중국은 1분기 성장률 -9.8%(전 분기 대비, 연율 -6.8%)로 한국의 1분기 성장률 -1.4%(전 분기 대비, 연율 1.3%)와 크게 비교된다. 코로나19는 베이징 모델이 새로운 세계의 기준이 될 수 없음을 확인해주었다. 이는 중국인의 무치無恥 문화와 관련이 있다. 중국은 코로나19의 원인 제공을 부인하는 등 국제 사회의 눈총을 무시했다. 이는 치욕 자체를 외면하는 무치 문화에서 비롯한다. 2019년 12월 중국 의사 리원량이 사스증후군 의심환자 7명을 발견하고, 이를 의대동문 단체 채팅방에 공유하며 사회적 논의가 시작되었다. 그러나 이에 대해 중국 당국은 유언비어 유포혐의로 리원량을 소환했다. 즉 입을 틀어 막는 통제(비밀주의) 방식으로 접근하며 초기 진화에 실패했다. 이는 중국 사회의 투명성 결여를 상징한다. 게다가 에이즈 바이러스를 발견한 공로로 2008년 노벨의학상을 받은 뤼크 몽타니 박사가 코로나19 바이러스가 인위적 실험을 통해 생성됐을 가능성을 제기하면서 서방 세계는 중국 정부에 바이러스 기원과 초기 확산을 투명하게 공개할 것을 요구하고 있지만 중국은 이를 무시하고 있다. 코로나19에서 드러난 전체저의적 감시체제와 시민의 자율성 제약, 자민족 중심주의와 민족주의적 고립 등은 중국 사회가 새로운 문화의 중심이 될 수 없음을 보여주었다.

 

p236

 

 '부동산 시장의 정상화'는 한국 사회의 공정성 확립에 필수적 과제다. 부의 대물림으로 인해 기회의 공정성이 작동하지 않고 있기 때문이다. 상,하위 10%는 신분이 거의 대물림되고 있다. '금수저-흙수저'는 괜히 떠도는 얘기가 아니다. 예를 들어, 토지를 소유하지 않은 세대까지 포함한 개인토지의 2018년 지니계수는 0.809로, 현재 토지 소유의 불평등은 조설 말기 토지를 가장 많이 소유했던 지역보다 불평등하다. 2018년 현재 개인 토지는 상위 10% 세대가 68.7%를 차지하고 있는 것으로 나타났다. 이런 불평등한 소유 구조에서 엄청난 불로소득이 발생하면서 신분을 대물림하는 주요 원인으로 작용하고 있다.

 

 

 문재인 정부에서 2년간 최저임금 인상을 빠른 속도로 진행한 결과 저임금 노동자의 소득이 다소 개선됐지만, 부동산 가격의 폭등에 따른 주거비용의 상승으로 최저임금 인상 효과는 대부분 소멸했다.

 

 왜 사람들은 주택과 토지 등을 많이 소유하려고 할까? 높은 기대수익 때문이다. 기대수익은 토지나 주택등을 보유하는 동안 해당 부동산으로부터 발생하는 자본이득(임대소득, 지대소득 등)과 해당 부동산을 처분할 때 발생하는 양도소득으로 구분된다. 두 소득 모두 기본적으로 불로소득이다. 한 추정에 따르면 2007~2016년 10년 동안 해마다 450~510조 원의 부동산 소득이 발생하고, GDP 대비 비율로는 10년 평균이 무려 37.1%에 달했다. 이 중 다른 자산에 투자했을 때 얻을 수 있는 평균 수익을 공제한 나머지를 불로소득이라고 했을 대 그 규모는 같은 기간 동안 해마다 GDP의 22% 이상(264.6~374.6조 원)이었다. 이러한 높은 불로소득의 발생으로 부동산 집중이 심화되는 것이다. 문제는 이 불로소득이 부동산을 소유하지 못하 하위 계층에서 이전된 소득이라는 점에서 경제적 비효율성을 야기할 뿐 아니라 부도덕하다는 점이다.

 

알릴레오에서 이 도서를 다룬 방송을 본 후에 읽기 시작했다. 미국의 민주주의의 역사 그리고 현재의 진행 상황이라고 할 수 있다. 현재 대한민국의 민주주의의 상황에서도 참고할 점이 많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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p49

 간단하게 말해서 미국 사회는 끊임없이 전제주의 위협을 겪었다. 코글린과 롱, 매카시, 그리고 윌리스 같은 인물이 30퍼센트에서 심지어 40퍼센트에 달하는 지지율은 얻은 것은 미국 정치사에서 드문 일이 아니었다. 미국인들은 종종 그들의 정치 문화가 전제주의 위협에서 그들을 안전하게 지켜주고 있다고 주장하지만, 그건 장밋빛 안경을 쓰고 역사를 바라볼 때에만 납득할 수 있는 말이다. 잠재적 독재자의 위협으로부터 미국 사회를 지켜준 것은 민주주의에 대한 국민의 확고한 의지가 아니라 민주주의 문지기, 다시 말해 미국의 정당 체제였다.

 

p52

 이러한 문지기 역할은 미국의 건국 시점으로까지 거슬러 올라간다. 1787년 미국 헌법은 세계 최초로 대통령제를 만들어냈다. 대통령제는 문지기 역할을 중요한 과제로 남겼다. 의원내각제에서 총리는 의회의 일원이며, 다수당이 선출한다. 그렇게 때문에 총리가 되기 위해서는 정치 내부자들의 인정을 받아야 한다. 그리고 내각 수립 과정은 그 자체로 하나의 필터 기능을 한다. 반면 대통령은 의회의 일원이 아니며, 다수당이 선출하지도 않는다. 적어도 이론적으로 대통령은 국민이 뽑느다. 그리고 누구나 대선에 출마할 수 있으며, 최고 득표자가 대통령이 된다.

 건국의 아버지들은 문지기 역할에 주목했다. 그들은 헌법과 선거제도를 설계하는 과정에서 오늘날 미국 사회에 여전히 남아 있는 다양한 딜레마와 씨름했다. 그들은 군주가 아니라 선출된 지도자가 공화국 이념을 존중하고 국민의 뜻을 따르는 대통령제를 추구했다. 그러나 다른 한편 건국자들은 국민이 후보자의 자질을 객관적으로 판단할 수 있다고 완전히 신뢰하지는 않았다. 알렉산더 해밀턴은 대통령 선거제도가 대중의 공포와 무지를 이용해서 선거에 당선되고 난 뒤 본색을 드러내는 독재자에게 쉽게 농락당할 수 있다고 걱정했다. 해밀턴은 <페더럴리스트 페이퍼>에서 이렇게 언급했다. "우리는 처음에 국민에게 아첨했다가, 대중선동가로 변신하고, 결국에는 폭군으로 군림해서 공화국의 자유를 허물어뜨린 인물들의 역사에서 교훈을 얻어야 한다." 해밀턴과 그의 동료들은 대통령을 투표로 선출하기 위해서는 이러한 위험을 걸러내는 특별한 장치가 필요하다고 보았다.

 건국자들이 고안한 장치는 바로 선거인단Electoral College이었다. 해밀턴이 <페더럴리스트 페이퍼> 68편에서 다음과 제시했던 근거에 따라 미 헌법 제2조는 간접선거 방식을 규정하고 있다.

 직접선거는 지위에 어울리는 자질을 분석할 줄 알고, 신중한 판단력 및 합당한 근거와 동기를 조화롭게 갖춘 사람들에 의해 이뤄져야 한다.

 간접선거제에서 각 주의 유명 인사로 구성된 선거인단이 최종적으로 대통령을 선출하는 책임을 진다. 해밀턴은 이러한 시스템에서는 "자격을 갖추지 못한 인물이 대통령 자리에 오르는 일은 없을 것이며", 또한 "음모를 꾸미고 인기에 영합하는 천박한 재능"을 지닌 인물은 걸러질 것이라고 확신했다. 그렇게 선거인단은 미국 정치의 고유한 문지기 역할을 맡게 되었다.

 그러나 이 시스템은 그리 오래가지 못했다. 이유는 건국자들의 고유한 설계에 두 가지 결함이 있었기 때문이다. 첫째, 헌법은 대통령 후보 선출 방식에 대해 아무런 말도 하지 않는다. 선거인단은 국민투표가 모두 끝난 '이후에' 활동을 시작하기 때문에 후보 선정 과정에서는 아무런 역할도 하지 않는다. 둘째, 헌법은 정당에 대해서도 아무런 말을 하지 않는다. 토머스 제퍼슨과 제임스 메디슨은 양당 시스템을 설계하는 과정에서 정당의 존재에 대해 심각하게 고민하지 않았다.

 1800년대 초 정당이 성장하면서 미국 선거제도의 작동 방식이 바뀌었다. 건국자들이 구상했던 것처럼 지역 유명 인사를 대의원 선거인단으로 선출하는 대신, 각 주는 정당 지지자를 선출하기 시작했다. 대의원은 이제 정당의 대리인이 되었고, 이 말은 곧 선거인단이 문지기 역할을 정당에 넘겨주었다는 뜻이다. 이후 정당들은 이러한 시스템을 계속 유지했다. 

 이제 정당은 미국 민주주의의 관리인이 되었다. 정당은 대통령 후보를 선출함으로써 위험한 선동가가 대통령이 되지 못하게 막는 권한(그리고 책임)을 부여받았다. 이러한 점에서 정당은 두 가지 역할 사이에서 균형을 잡아야 한다. 우선 민주주의 관리자로서 유권자의 뜻을 가장 잘 대변하는 후보자를 선출해야 한다. 다음으로 정치학자 제임스 시저가 언급한 '걸러내기' 기능을 해야 한다. 즉, 민주주의에 위협이 되거나 대통령직에 어울리지 않는 인물을 사전에 걸러내야 한다.

 인기 있는 후보를 선택하고, 동시에 선동가를 걸러내야 하는 정당의 두 역할은 때로 상충하기도 한다. 만일 선동가를 선택한다면? 이는 건국시대에서 오늘날에 이르기까지 대선 후보를 선출하는 과정의 핵심 문제이다. 하지만 정당이 문지기 역할에만 집중할 때 후보 선출 과정이 비민주적으로 이루어질 위험이 있다. 즉, 국민은 물론 일반 당원의 뜻을 제대로 반영하지 못하는 보스 정치로 전락할 수 있다. 반대로 '국민의 뜻'에만 집중해도 위험에 빠질 수 있다. 자칫 민주주의를 위협하는 선동가를 후보로 선출할 수 있기 때문이다. 정당이 이러한 상충 관계에서 벗어날 방법은 없다. 문제는 언제나 균형을 잡는 일이다.

 

p86

 '집단적 포기', 다시 말해 민주주의를 위협하는 인물에게 권력을 넘기는 행동은 일반적으로 두 가지 이유 때문이다. 첫째, 잠재적 독재자를 통제하거나 길들일 수 있다는 착각이다. 둘째, 사회학자 이반 에르마코프가 '이념적 공모'라고 부른 개념으로, 이는 집단적 포기를 택한 주류 정치인들의 이해관계가 잠재적 독재자의 이해관계와 맞아떨어지는 경우에 해당된다. 하지만 잠재적 독재자가 등장했을 때 기성 정치인들은 모든 방법을 동원하여 그를 제어함으로써 민주주의 제도를 지켜야 한다. 비록 이를 위해 달갑지 않은 경쟁자와 잠시나마 손을 잡아야 한다고 해도 말이다.

이는 2016년 대선을 앞둔 공화당 인사들에게 더 중요한 말이었다. 그들은 민주주의 기본 규범을 위협하는 트럼프를 어떻게든 저지했어야 했다. 그러나 그 역할을 저버림으로써 미국 민주주의는 위기에 처했다. 민주주의를 잃는 것은 선거에서 패배하는 것보다 훨씬 더 비극적인 일이다. 이러한 사태를 막기 위해서 공화당은 평소에는 생각할 수 없었던 결단, 즉 힐러리 클린턴을 지지하는 과감한 선택을 내렸어야 했다. 미국은 양당체제다. 2016년 대선에서 양당의 두 후보가 맞붙었고, 그중 한 명은 대중선동가였다. 2016년 대선은 공화당의 정치 결단력을 시험하는 중요한 무대였다. 과연 국가의 번영을 위해 단기적인 정치 희생을 기꺼이 감내할 수 있을 것인가?

 앞서 살펴보았듯이 우리는 비슷한 선례를 알고 있다. 2016년 오스트리아 보수 진영은 극우파 급진주의자인 노르베르트 호퍼의 당선을 막기 위해 녹색당 후보 알렉산터 판데어벨렌을 지지하기로 결단을 내렸다. 그리고 2017년 프랑스 보수 진영 후보 프랑스와 피용은 극우파 후보 마린 르펜이 권력을 잡지 못하도록 막기 위해 중도좌파 후보인 에마뉘엘 마크롱을 지지하도록 당원들을 설득했다. 두 사례에서 우파 정치인들은 이념적 경쟁자를 지지했다. 이러한 결정으로 많은 당원들의 불만을 사긴 했지만, 상당수 유권자의 마음을 돌려 극단주의자가 권력의 자리에 오르지 못하도록 막았다.

 

p140

 자제 규범은 특히 대통령제 민주주의에서 그 가치가 높다. 후안 린츠가 설명한 것처럼 의회 분열은 교착 상태와 기능 장애, 그리고 헌법 질서의 위기로 이어질 수 있다. 견제받지 않는 대통령은 사법부를 친정부 인사로 채우고, 행정명령을 남발하여 의회를 우회한다. 반대로 의회가 막강한 힘을 가졌을 경우, 대통령의 모든 제안을 거절하고 예산 권한을 빌미로 행정부를 혼란에 빠트리겠다고 위협할 수 있다. 혹은 석연치 않은 근거를 내세워 대통령 탄핵을 추진할 위험도 있다.

 

p181. 차별로 유지된 민주주의의 종착점

 미국 민주주의 제도는 20세기를 거치는 동안 여러 차례 위협을 받았다. 그러나 매번 위기를 슬기롭게 극복했다. 민주주의 가드레일은 온전히 유지되었고 양당정치인, 때로는 사회 전반이 민주주의를 침해하는 시도에 저항했다. 그 결과 치열한 정쟁에도 불구하고 미국 사회는 1930년대 유럽, 그리고 1960년대와 70년대에 남미의 민주주의가 빠져들고 말았던 '죽음의 소용돌이'를 피할 수 있었다.

 그러나 이제 우리는 경고의 목소리에 귀 기울여야 한다. 미국 정치 시스템을 떠받치는 규범은 사실 인종차별에 의존해왔다. 재건 시대부터 1980년대에 이르기까지 미국 사회의 평화는 그 원죄에 뿌리를 두고 있었다. 다시 말해 1877년 타협과 이후로 이어진 남부 지역의 반민주화 흐름, 그리고 흑인 차별법인 짐 크로 법을 근간으로 남았다. 인종차별은 20세기 미국 정치의 특성을 규정했던 정당의 협력과 태도에 직접적인 영향을 미쳤다. '전통적인 남부'는 민주당 내에서 강력한 보수주의 세력으로 떠올랐고, 시민권에 반대함으로써 공화당과 협력을 가능하게 만드는 역할을 했다. 남부 민주당 인사와 보수주의 공화당 인사 사이의 이념적 친밀도는 정치 양극화를 완화해주었고, 양당 협력을 가능하게 만들어주었다. 하지만 동시에 이는 정치적 논의 테이블에서 흑인 시민권을 치워버리고, 미국 사회를 전면적인 비민주화로 흘러가게 내버려두는 중대한 사회적 희생을 요구했다.

 미국 민주주의 규범은 차별에 근간을 두었다. 정치 공동체가 대부분 백인의 영역으로 제한되었던 동안 민주당과 공화당에는 뚜렷한 공통점이 존재했다. 정당은 서로의 존재를 위협으로 바라보지 않았다. 그러나 제2차 세계대전이 끝나고 시작된, 그리고 1964년 시민권법과 1965년 선거권법을 통해 가속화된 미국 사회의 인종 포섭의 과정은 마침내 미국을 완전한 민주주의 사회로 바꾸어놓았다. 그러나 이러한 민주화 흐름은 미국 사회를 양극화시켰고, 재건 시대 이후로 이어져 내려온 상호 관용과 자제의 규범에 최고의 도전 과제를 안겨다주었다.

 

p217

 그러나 공화당을 극단주의로 내몬 것은 단지 언론과 외부 이익단체만은 아니다. 사회적, 문화적 변화 역시 중요한 역할을 했다. 지난 수십 년 동안 다양성이 꾸준히 높아졌던 민주당과는 달리 공화당은 문화적 차원에서 오랫동안 동질적인 상태로 남아 있다. 이는 대단히 중요한 사실이다. 공화당의 핵심 지지층인 백인 개신교 집단은 그냥 일반적인 유권자가 아니다. 그들은 200년 가까이 미국 유권자의 대다수를 차지했고 정치적, 경제적, 문화적으로 미국 사회에서 우월한 위치를 누렸다. 그러나 이제 백인 개신교 집단은 다수의 지위를 잃었고 그 규모는 계속해서 줄어들고 있다. 그리고 공화당 안에만 틀어박혀 있다.

 1964년 역사가 리처드 호프스태터는 '지위 불안'이라고 하는 개념을 통해서 집단의 사회 지위, 정체성, 소속감이 위협받고 있다고 인식될 때 "미국 정치의 편집증적 성향"이 나타나고, 이는 결국 "과열되고, 상대를 지나치게 의심하고, 과도하게 공격적이고, 극단적이고, 종말론적인" 정치 접근방식으로 이어지게 된다고 주장했다. 그로부터 반세기가 흘러 호프스태터의 주장은 지금의 미국 사회에 더욱 적절한 말로 들린다. 과반의 지위를 잃어버린 오늘날 미국 우파의 특성이라 할 수 있는 극단적인 적개심은 더욱더 활활 타올랐다. 설문 조사 결과는 많은 티파티 공화당 지지자들이 "급격한 사회 변화 속에서 그들이 자라난 '진정한' 미국이 사라져가고 있다"고 믿고 있다는 사실을 말해준다. 사회학자 알리 혹실드가 최근 발표한 책의 제목을 인용하자면, 그들은 스스로를 "자기 땅의 이방인들"이라고 생각하고 있다.

 이러한 인식은 '진정한 미국인'을 진보 진영의 민주당 지지자들과 구분하는 담론이 어떻게 등장했는지 설명해준다. '진정한 미국인'을 미국땅ㅇ 태어나서 영어를 쓰는 백신 개신교 신자로 정의할 때 '진정한 미국인'의 규모가 줄어들고 있다는 것은 분명한 사실이다. 앤 콜터가 냉소적으로 꼬집었던 것처럼 "미국 유권자는 왼쪽으로 이동한 것이 아니라 줄어들고 있는 것이다." 미국이 사라지고 있다는 많은 티파티 공화당 지지자들의 인식을 고려할 때 "미국을 되찾자" 혹은 "위대한 미국을 다시 한번"과 같은 슬로건이 어떻게 큰 호응을 얻을 수 있었는지 이해할 수 있다. 하지만 이러한 사회현상의 위험성은 민주당 지지자를 진정한 미국인이 아니라고 규정함으로써 상호 관용의 규범을 직접적으로 공격한다는 사실에 있다.

 뉴트 깅리치에서 도널드 트럼프에 이르는 공화당 정치인들은 양극화된 사회에서 경쟁자를 적으로 바라보는 관점이 쓸모가 있으며, 정치를 전쟁으로 인식하는 입장이 많은 걸 잃어버릴지 모른다고 두려워한는 유권자의 마음을 비집고 들어갈 수 있게 해준다는 사실을 깨달았다. 상호 관용과 자제의 규범을 향해 더욱 거세지는 공격은(완전히는 아니라고 해도 대부분 공화당 인사들에 의한) 세계의 많은 지역에서 민주주의를 죽음으로 내몰았던 정쟁으로부터 미국 사회를 오랫동안 지켜주었던 연성 가드레일을 흔들고 있다. 2017년 1월 도널드 트럼프가 대통령으로 취임했을 때만 해도 그 가드레일은 그대로 남아 있었다. 그러나 지금은 한 세기에 비해 더욱 심하게 흔들리고 있으며, 그 강도는 점점 더 심해질 것으로 보인다.

 

p249

 민주주의 사회의 시민에게는 정확한 정보에 접근할 기본적인 권리가 있다. 선출된 지도자의 행동에 관한 신뢰할 만한 정보가 나와 있지 않다면 미국 시민은 선거권을 올바로 행사할 수 없다. 미국 대통령이 국민에게 거짓말을 늘어놓을 때 신뢰할 만한 정보에 접근할 수 있는 권리는 위협받게 되고, 정부에 대한 신뢰도는 추락한다(당연한 사실 아니겠는가?). 국민이 선출된 지도자를 신뢰하지 않을 때 대의 민주주의 근간이 허물어진다. 그들이 선택한 지도자를 믿지 못할 때 선거제도의 가치는 사라진다.

 

p263

 힘을 잃거나는 다수민족이 기존의 지배적인 지위를 평화롭게 넘겨준 역사적 사례는 찾아보기 힘들다. 레바논의 경우 지배적인 기독교 집단의 인구가 줄어들면서 15년간의 내전이 시작되었다. 이스라엘의 경우 요르단 강 서안 지구를 사실상 병합함으로써 생긴 인구통계 변화로 그 나라는 두 명의 전직 총리가 인종차별 정책에 비유했던 정치 시스템으로 흘러가고 있다. 그리고 미국의 경우 흑인에 대한 선거권 부여로 촉발된 위협에 대해 남부 민주당은 재건 시대 이후로 한 세기 가까이 아프리카계 미국인에게서 선거권을 박탈하는 방식으로 대응했다. 

 

p272

 그러나 우리 두 저자의 관점에서 볼 때 민주당이 '공화당처럼 싸워야 한다'는 생각은 착각에 불과하다. 첫째, 외국 사례들은 이러한 대응 전략이 오히려 전제주의가 등장할 가능성을 높여주었다는 사실을 보여준다. 일반적으로 이러한 전면적인 전략은 중도 진영을 위협함으로써 야당의 지지도를 떨어뜨린다. 반면 여당 내 반대파조차 야당의 강경한 태도에 맞서 단결하게 함으로써 친정부 세력을 집결하는 역할을 한다. 게다가 야당이 진흙탕 싸움에 뛰어들 때 정부는 이들을 탄압하기 위한 정치 정당성을 확보한다.

 

p273

 설령 민주당이 강경 전술을 통해 트럼프를 무력화하거나 자리에서 끌어내리는 데 성공했다고 해도, 그러한 승리는 상처뿐인 영광이다. 그 이유는 다음 정권이 가드레일이 사라진 민주주의를 물려받게 될 것이기 때문이다. 트럼프 행정부가 야당 공세에 무릎을 꿇는다면 혹은 양당의 합의 없이 탄핵을 당한다면 애초에 트럼프에게 기회를 가져다주었던 당파적 적대감과 규범 파괴는 더욱 고착화될 것이다. 그리고 적어도 미국 국민의 3분의 1은 트럼프 탄핵을 좌파 세력의 거대한 음모라고 혹은 쿠데타라고 여길 것이다. 그러면 미국 정치는 위태로운 상태로 계속해서 부유할 것이다.

 이러한 국면은 웬만해서 해피엔딩으로 끝나지 않는다. 민주당이 상호관용과 자제 규범을 회복하려는 노력을 기울이지 않을 때 다음번 대통령도 수단과 방법을 가리지 않고 그를 끌어내리려는 야당을 상대해야 할 것이다. 그리고 정당 간 갈등의 골이 깊어지고, 성문화되지 않은 규범이 지속적으로 허물어질 때 미국은 트럼프보다 훨씬 더 위험한 대통령을 맞이하게 될 것이다.

 물론 트럼프 행정부의 전제주의 행보에 대해서는 강력하게 대응해야 한다. 하지만 그 과정에서 민주주의 규범을 어기지 않도록 주의해야 한다. 가능하다면 의회와 법원, 그리고 선거를 통해 저항을 해야 한다. 민주주의 제도를 기반으로 트럼프가 실패하게 만들 수 있다면 미국 민주주의 토양은 더욱 단단해질 것이다.

 우리는 저항을 이와 같은 관점에서 바라보아야 하다. 모든 민주주의 사회에서 대중의 저항은 기본적인 권리이자 중요한 책임이다. 하지만 저항의 목표를 관리와 제도를 뒤엎는 것이 아니라 지키기 위한 것이어야 한다.

 

p279

 우리는 미국의 양극화를 고착화하는 두 가지 요인에 집중해야 한다고 생각한다. 두 가지 요인이란 인종적, 종교적 재편, 그리고 점점 더 심각해지는 경제 불평등을 말한다. 이러한 근본적인 문제를 해결하기 위해 우리는 정당이 대변하는 대상이 바뀌어야 한다고 생각한다.

 

p286

 물론 경제 불평등을 해소하기 위한 정책은 어떻게 설계하느냐에 따라 정치 양극화를 완화할 수도, 오히려 심화시킬 수도 있다. 많은 다른 선진 민주주의 국가와는 달리 미국의 사회정책은 소득이나 생활수준이 특정 기준에 못 미치는 사람을 가려내기 위한 자산 조사 방식에 크게 의존해왔다. 그러나 자산 조사를 바탕으로 한 복지 정책은 중산층들 사이에서 가난한 사람만 복지 혜택을 받는다는 인식을 키웠다. 게다가 역사적으로 미국에서는 민족과 빈곤이 상당 부분 중첩되었기 때문에 이러한 복지 정책은 특정 인종을 하위 계층으로 낙인찍는 결과를 낳았다. 이러한 복지 정책에 반대하는 인사들은 일반적으로 인종차별과 관련되 표현들을 사용한다. 가령 로널드 레이건이 언급한 '복지 여왕'이나 식료품 할인 구매권을 가지고 스테이크를 사 먹는 사람들을 의미하는 '영벅스'가 대표적이다. 오늘날 미국에서 '복지'는 경멸적인 표현이 되었다. 그것은 복지 수혜자들이 그러한 혜택을 받을 만한 정당한 자격이 없다는 사회 인식 때문이다.

 반면 북유럽 국가들은 엄격한 자산 조사를 기반으로 한 제한적인 복지 정책이 아니라 보편적인 모델을 추구한다. 이러한 방식의 복지 정책은 정치 양극화 해소에 도움이 된다. 사회보장제도나 메디케어처럼 사회 구성원 대다수에게 혜택을 주는 복지 정책은 사회적 적대감을 누그러뜨리고, 미국의 다양한 유권자 집단을 연결하는 다리의 기능을 한다. 이러한 정책을 장기적으로 추진함으로써 인종 갈등에 따른 역풍은 일으키지 않으면서 소득 불평등을 해소할 수 있다. 대표 사례로 포괄적 의료보험제도를 꼽을 수 있다. 더 나아가 보다 적극적인 사례로 최저임금 상승이나 보편적 기본소득이 있다. 실제로 기본소득 정책은 예전에 진지한 논의가 이뤄졌으며, 닉슨 행정부 시절 하원의 안건이 된 적도 있다. 또 다른 사례로는 '가족 정책'이 있다. 가족 정책이란 부모에게 유급 휴가를 주고, 맞벌이 부부에게는 탁아소 이용을 지원하고, 혹은 대다수 유아를 대상으로 어린이집 교육을 제공하는 정부 프로그램을 말한다. 최근 가족 정책과 관련된 미국 정부의 지출 규모는 선진국 평균의 3분의 1 정도로 멕시코나 터키와 비슷하다. 마지막 방안으로 민주당은 포괄적인 노동시장 정책도 고려할 수 있다. 여기에는 광범위한 직업훈련, 근로자를 교육하고 채용하는 기업에 대한 임금 보조금, 고등학교나 커뮤니티 칼리지 학생을 대상으로 한 실무 경험 프로그램, 해고 근로자를 대상으로 하는 교통비 지원 등이 있다. 이러한 정책은 사회 적대감과 양극화를 자극하는 경제 불평등을 해소할 수 있을 뿐 아니라, 미국 정치를 재편하게 될 광범위하고 지속적인 연합 형성에 기여할 수 있다.

 사회적, 경제적 불평등을 해소하기 위한 이러한 정책을 실행에 옮기는 것은 물론 정치적으로 대단히 힘든 일이다. 부분적인 이유는 이러한 정책을 가로막는 장애물이 바로 양극화(그리고 그에 따른 제도적 정체)이기 때문이다. 우리는 소수민족 집단, 그리고 백인 노동 계층을 아우르는 다민족 연대 형성을 가로막는 장애물이 쉽게 사라질 것이라 기대하지 않는다. 또한 보편적인 복지 정책이 이러한 연합의 근간을 마련해줄 것이라고 확신하지도 않는다. 다만 현재의 자산 조사 방식의 복지 정책보다는 더 나은 결과를 가져다줄 것으로 예상할 뿐이다. 물론 쉬운 일은 아니겠지만, 민주당이 사회 불평등 해소에 기여해야 한다는 것은 시대의 과제다. 결국 그 과제는 단지 사회정의에 관한 문제만은 아니다. 바로 여기에 미국 민주주의의 생존이 달려 있다.

 

p288

 미국의 운명이 위기를 맞았던 제2차 세계대전의 암울한 한 시점에, 작가 E.B. 화이트는 미 연방정부의 '작가 전쟁위원회'로부터 '민주주의란 무엇인가?라는 질문에 짤막한 답변을 들려달라는 요청을 받았다. 이에 화이트는 겸손하면서도 많은 생각을 하게 만드는 대답을 내놓았다. 그의 이야기를 들어보자.

 

 

 물론 위원회는 답을 알고 있을 것이다. 민주주의란 올바른 길로 인도하는 지침이다. 민주주의는 'don't shove(밀지 마세요)'에서 'don't'에 해당하는 말이다. 민주주의는 톱밥을 가득 채운 셔츠에 난 구멍이며, 높은 모자 위에 움푹 들어간 곳이다. 민주주의는 국민의 절반 이상이 절반 이상의 경우에서 옳다는 생각에 대한 끊임없는 의심이다. 투표장에서 느끼는 프라이버시, 도서관에서 느끼는 교감, 곳곳에서 느끼는 활력이다. 민주주의는 편집자에게 보내는 편지이며, 9회 초의 점수다. 민주주의는 아직 반증되지 않은 이념이며, 타락하지 않은 노래 가사다. 민주주의는 핫도그에 바른 머스터드,, 그리고 배급받은 커피에 넣은 크림이다. 민주주의는 전쟁이 한창인 어느 아침에 민주주의가 무엇인지 대답해달라는 전쟁위원회의 요청이다.

 

 

 화이트가 언급한 평등과 예의, 그리고 자유와 공동의 목표에 대한 인식은 20세기 중반 미국 민주주의의 정신이었다. 그러나 그 정신은 오늘날 위기에 처했다. 미국 민주주의를 구하기 위해 이제 미국 국민은 지금껏 그들의 민주주의를 지켜주었던 기본 규범을 되살려야 한다. 그리고 더 나아가 그 규범을 사회 전반으로 확산해야 한다. 규범이 포함하는 범주를 넓혀가야 한다. 미국 민주주의 규범의 핵심은 지금까지 면면히 이어져 내려왔다. 그러나 역사의 많은 시간 동안 인종차별과 함께했고, 또한 그것 때문에 유지될 수 있었다. 이제 그 규범이 인종 평등과 관계 없는 민족 다양성 시대에서도 제대로 기능하도록 만들어야 한다. 지금까지 다민족을 기반으로 한 진정한 민주주의 사회는 없었다. 그것은 이제 미국 사회의 도전 과제로 남았다. 그리고 동시에 기회로 남았다. 미국 국민이 그 과제를 완수한다면 미국은 역사상 진정으로 특별한 나라가 될 것이다.

 

 난 청소년 시절에 독서라는 걸 거의 하지 않았지만, 중학교 시절에 가끔 머리를 식힐 때 헤세의 작품을 읽었던 기억이 있다. 수레바퀴 밑에서를 떠올리면 상큼한 사과쥬스의 향이 여전히 느껴지고,  데미안은 웬지 모르게 수척하고 날카로운 하얀 얼굴이 떠오른다. 헤세라는 작가에 대한 인상은 조금은 나르시스적이며 나약한 지식인이라는 이미지를 갖고 있었는데, 이 작품에선 전혀 다른 느낌을 준다.

 

 기존에 읽었던 작품들이 헤세의 전성기와 그 이후의 작품이었다는 점에서, 나는 헤세의 중후반기에 대한 인상만을 가졌던 것 같다.

 이 작품은 낭만과 아름다움이 가득하다. 고색창연하지만 아직 전쟁(1차 대전)의 위협이 가시화되기 이전, 유럽에 평화가 공기와 같이 감돌고 이러한 여유에 의해 인간과 사랑에 대한 탐구에만 젊음의 고민이 집중되던 시절의 향기를 맡을 수 있다.

 카멘친트의 유소년기부터 중장년기까지의 30~40년 정도를 담아낸 듯 보이지만, 이 소설은 헤세가 26살에 쓴 소설이기에 그 내부에 흐르는 정서는 격렬하면서도 따뜻하다.

 아름다운 작품이다.

 

세계사를 바꾼~~ 이라는 제목들이 최근 히트를 치면서, 이런 제목을 들고 나오는 책들이 많다.

대개 이런 책들은 주제가 정확히 한정되어 있고, 꽤 자세한 에피소드들을 다루고 있기 때문에 

내용이 재미있는 경우가 많아서, 최근에 이런 제목이 보이면 일단 한번 보게 된다. 

 

맥주, 와인, 증류주, 커피, 차 그리고 코카콜라.

인류에게 큰 영향을 미친 6가지 음료의 역사를 다루고 있다.

역사의 흐름에서 음료가 생각 이상으로 큰 영향을 미쳤다는 것을 알 수 있고, 특히 차의 경우가 그렇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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p152

 커피가 아랍 세계를 통해 퍼지면서 - 1510년에는 메카와 카이로까지 퍼졌는데 - 커피가 신체에 미치는 효과에 대해서 많은 논쟁이 발생했다. 커피는 당초의 종교적 연관성을 벗어버리고 사회적인 음료가 되면서 거리에서 시장에서 잔으로 판매되었다. 이후 전문적인 커피하우스가 등장했다. 커피는 많은 무슬림에 의해 알코올에 대한 법적인 대체재로서 수용되었다. 알코올을 팔았던 불법적인 술집과는 달리 커피하우스는 사회적인 지위가 없는 사람들도 출입할 수 있는 장소였다. 그러나 커피의 법적 지위는 모호한 상태였다. 일부 무슬림 학자들은 커피가 중독성이 있어서 선지자 모하메드가 금했던 와인이나 다른 알코올처럼 종교적으로 금지되어야 한다면서 커피의 음용을 반대했다. 종교 지도자들은 1511년 6월 메카에서 새로운 법을 선포했고, 이는 커피의 소비를 금지하는 여러 시도 중 최초의 조치였다. 카이르 베그Kha'ir beg라는 사람이 그 지역의 지도자로 일반 대중의 도덕 관리를 책임지고 있었는데, 그는 문자 그대로 커피를 재판에 회부했다. 그는 법률 전문가로 구성된 위원회를 개최했고 커다란 그릇에 담긴 커피가 피고로 그들 앞에 놓였다. 위원회는 커피의 중독성 효과에 대해 토론한 후 커피의 판매와 소비를 금지해야 한다는 카이르 베그의 주장에 동의했다. 판결 내용은 메카 전역에 공표되었고 커피는 압수되어 길거리에서 불태워졌다. 그리고 커피 판매업자와 그들의 고객 중 일부는 두들겨 맞는 처벌을 받았다. 그러나 몇 달 뒤에 카이로에 있는 더 높은 정부 당국은 카이르 베그의 판결을 뒤집었다. 그리고 커피는 곧 공개적으로 다시 소비되기 시작했다. 권위가 망가진 카이르 베그는 다음해 책임자의 자리에서 교체되었다.

 

p174

 후크는 허풍이 심했고, 논쟁적이었고, 자신의 이야기를 과장하는 것으로 유명했다.

 개러웨이즈에서 후크와의 토론을 마친 후 플램스티드는 자신이 "오랫동안 후크를 관찰한 결과, 그는 닥치는 대로 반대하고, 스스로는 아무것도 판단하지 않고, 입증되지도 않은 주장을 가지고 자신을 방어하려는 성격이 있다"라고 불평했다. 반면, 후크는 플램스티드에 대해 "그는 자신은 잘 알고 있지만 내가 모르는 사물에 대해 내가 무지하다는 사실을 증명하기 위해 많은 말을 동원해 나를 공격했고, 주변 사람들을 설득했다"라고 주장했다.

 그러나 후크가 커피하우스에서 보여준 교만은 과학혁명에 있어서 가장 위대한 책의 출간에 뜻하지 않은 계기가 되었다. 1684년 1월의 어느 날 저녁, 커피하우스에서 후크, 핼리, 렌 사이의 토론은 당시에 커다란 화제가 되고 있었던 중력의 이론으로 옮겨갔다. 핼리는 커피 몇 모금을 마신 후 행성의 궤도가 타원형 모양인 것이 거리의 역제곱 법칙에 따른 중력의 감소와 일치하는 것인지에 대해 궁금해했다. 후크는 그렇다고 단언했고, 역제곱 법칙으로만 행성의 움직임을 설명할 수 있는데, 자신은 이미 수학적으로 증명했다고 주장했다. 그러나 그러한 증명을 시도했지만 실패했던 렌은 확신하지 못했다. 후일 핼리는 렌이 "후크와 나에게 2달을 줄 테니 거기에 대해 확신할 수 있는 증명을 가지고 오라. 만약 두 사람 중 누구라도 그 일을 해낸다면 명예에 추가해서 상금으로 40실링 값어치의 책을 주겠다"라고 제안했다고 회상했다. 그러나 핼리나 후크 두 사람 모두 렌의 도전을 받아들이지 않았고, 그것은 말로 끝나버리게 되었다.

 몇 개월 후 핼리는 케임브리지에 갔고, 거기서 아이작 뉴턴이라는 과학자를 방문했다. 핼리는 커피하우스에서 렌과 후크와 토론을 했던 것을 기억하면서 뉴턴에게 같은 질문을 했다. 혹성의 타원형 궤도는 중력에 대한 역제곱 법칙으로 만들어지는 것인지? 후크처럼 뉴턴도 이미 그것을 증명했다고 주장했다. 그렇지만 핼리가 증명을 요청했을 때 증거를 제시하지는 못했다. 그러나 핼리가 떠난 후 뉴턴은 이 문제를 해결하기 위해 집중했다. .그는 11월에 핼리에게 중력에 대한 역제곱 법칙이 정말로 행성의 타원형 궤도의 원인이라는 것을 증명하는 논문을 보냈다. 그러나 이 논문은 앞으로 다가올 엄청난 일의 맛보기에 불과했다. 핼리의 질문은 뉴턴에게 그가 오랜 시간 동안 작업한 결과들을 체계화할 필요성에 대한 원동력을 제공했고, 그리고 과학의 역사에서 가장 위대한 책들 중 하나이며 일반적으로 <원리Principia>라고 알려진 <자연철학의 수학적 원리 Philosophiae naturalis principia mathematica>라는 책이 탄생하게 되었다. 1687년에 출간된 이 기념비적인 작품은 (아마 지어낸 이야기일 듯한) 떨어지는 사과의 원리에서부터 행성의 궤도에 이르기까지 뉴턴이 발견한 만유인력의 법칙이 어떻게 지구와 천체의 움직임을 설명할 수 있는지를 보여준다. 드디어 뉴턴은 자신의 <원리>를 통해 그리스인의 신빙성 없는 이론들을 대체하면서 물리학의 새로운 토대를 확립했다. 그는 우주를 이성 앞으로 가져왔다. 그는 이러한 탁월한 공적으로 역사상 가장 위대한 과학자로 널리 인정받고 있다.

 후크는 자신이 몇 년 전에 뉴턴과 교환했던 편지에서 뉴턴에게 역제곱 법칙에 대한 아이디어를 제공했다고 주장했다. 그러나 후크는 1686년에 뉴턴이 <원리>의 제1권을 왕립학회에 제출한 이후에 다른 커피하우스에서 벌어진 토론에서 자신의 논리를 전개했지만 그는 동료 과학자들을 설득하는 데 성공하지 못했다. 커피하우스에서 아이디어를 전개하는 것과 그것이 옳다는 것을 정식으로 증명하는 것은 와전히 별개의 문제다. 후크는 자신의 아이디어를 출판하거나 왕립학회에 공식적으로 제출하지 못했다. 그는 누구보다도 먼저 모든 것을 이미 생각하고 있었다고 주장하는 것으로 유명했다. (실제로 많은 경우에 그는 그렇게 행동했었다) 핼리는 "커피하우스로 이동하며"라는 제목으로 뉴턴에게 다음과 같이 편지를 썼다. "미스터 후크는 그 커피하우스에서 그 아이디어는 자신의 것이었고, 그리고 자기가 자네에게 그 이론의 창안에 대한 최초의 힌트를 주었다고 주장하면서 사람들을 설득하려고 노력했다네. 그러나 자네가 창안자로 마땅하다는 것이 모두의 의견이라는 사실을 나는 알고 있네." 후크의 항의에도 불구하고 커피하우스에서 내린 평결은 오늘날까지도 유지되고 있다.

 

 

 기후변화를 막기 위해 핵심적인 온실가스 배출, 즉 제로탄소로 가기 위한 청사진을 담고 있다.

빌 게이츠 정도의 영향력이 있는 인사가 지은 책이기 때문에 그 의의가 있을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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p37

 햇볕이 잘 드는 곳에 차를 주차해본 사람은 이미 작은 규모의 온실효과를 경험한 셈이다. 자동차 앞유리가 햇볕을 받아들이고 자동차 내부에 열을 가둔다. 그래서 자동차 내부의 온도가 외부의 온도보다 훨씬 뜨거워지는 것이다.

 하지만 이 설명에는 더 많은 질문이 뒤따른다. 태양에서 방출된 열이 온실가스를 뚫고 지구에 도달할 수는 있지만, 왜 바로 그 온실가스에 의해 지구 대기권에서 벗어나지 못하고 갇히게 되는걸까? 이산화탄소는 거대한 반투명 거울인가? 그리고 이산화탄소와 메탄이 열을 가둔다면, 산소는 왜 열을 가두지 않는가?

 이 질문들에 대한 답은 화학과 물리학에서 찾을 수 있다. 물리학 수업에서 분자는 진동한다고 배운 것을 기억하는가? 분자는 더 빨리 진동할수록 더 뜨거워진다. 특정 종류의 분자들이 특정 파동의 복사선과 충돌하면 이 분자들은 복사선은 막고 에너지는 흡수하며 더 빠르게 진동한다.

 그렇다고 모든 파장의 모든 복사선이 이런 효과를 내는 것은 아니다. 예를 들어 태양열은 흡수되지 않고 대부분의 온실가스를 그대로 통과한다. 지난 수억 년 동안 그랬던 것처럼 대부분의 햇빛은 지구 표면에 도달해 지구를 따뜻하게 한다.

 문제는 여기에 있다. 이 모든 에너지들은 지구에 영구히 잔존하지 않는다. 만약 그랬다면 지구는 이미 참기 힘들 정도로 뜨거워졌을 것이다. 대신 지구는 이런 에너지의 일부를 다시 방출한다. 이렇게 방출된 에너지 중 파장이 긴 에너지는 온실가스에 흡수된다. 아무런 피해를 끼치지 않고 그저 사라지면 좋겠지만, 이렇게 온실가스에 흡수된 에너지는 온실가스 분자와 충돌하고 이들이 더 빨리 진동하게 만들어 대기의 온도를 높인다. (그럼에도 우리는 온실효과에 감사해야 할 부분이 있다. 온실효과가 없다면 지구는 우리가 살기에 너무 추운 행성이 되었을 것이다. 문제는 필요 이상으로 많은 온실가스가 배출되어 온실화가 과도하게 진행된다는 점이다.)

 

 그렇다면 왜 모든 가스는 이런 방식으로 움직이지 않을까? 질소나 산소와 같이 동일한 원자 두 개로 구성된 분자는 복사선을 그대로 통과시킨다. 이산화탄소나 메탄과 같이 두 개의 다른 원자로 구성된 분자는 복사선을 흡수하고 열을 발산할 수 있는 구조를 가지고 있다.

 

 

p139

 전력을 보다 일관되게 사용하는 방식인 부하 이전load shifting(최대 사용 시간을 피해 전기를 사용하도록 유도하는 수요관리 방식)과 수여 이전demand shifting이 있다. 부하 이전을 대규모로 할 수 있다면 전기에 대한 우리의 생각에 중대한 변화가 될 것이다. 현재 우리는 전기를 사용할 때 생산하는 경향이 있다. 예를 들어 한밤에 도시의 전등을 켜기 위해 발전소를 가동시킨다. 하지만 부하 이전 방식을 사용할 경우 우리는 전기 생산이 가장 쌀 때 전기를 사용한다.

 예를 들어 당신의 온수기는 오후 7시가 아니라 전력 수요가 적은 오후 4시에 전원이 켜질 수 있을 것이다. 또는 집에 도착해서 전기차를 충전기에 연결하면 새벽 4시까지 자동으로 충전을 기다리게 된다. 새벽 4시에는 전기 사용량이 적어서 전기료가 가장 저렴하다. 산업 차원에서 보자면, 폐수 처리나 수소원료 생산과 같이 에너지 집약ㅈ거인 행위들은 전력이 가장 쌀 때 수행될 수 있다.

 부하 이전을 제대로 실행하려면 정책 변화와 기술 발전이 필요하다. 전력회사들은 전기의 수요와 공급을 파악할 수 있도록 실시간으로 전기 가격을 업데이트해야 한다. 그리고 온수기와 전기차와 같이 전기로 구동되는 제품들은 가격 정보에 따라 행동할 수 있도록 '스마트'해야 한다. 극단적인 경우, 전기 공급량이 적을 때는 전기가 가장 필요한 곳(예를 들어 병원 등)에 전기를 먼저 공급하고 중요하지 않은 곳에는 전기 공급을 차단하는 방식으로 수요의 우선 순위를 정해야 한다.

 

p226

 좋은 소식은 우리가 친환경 빌딩 짓는 방법을 알고 있다는 것이다. 그린 프리미엄을 기꺼이 지불할 용의만 있다면 말이다. 극단적인 예는 세계에서 가장 친환경적인 상업용 건물로 알려진 시애틀의 불릿 센터Bullit center 다. 

 불릿 센터는 자연적으로 겨울에는 따뜻하고 여름에는 시원하도록 설계되어 계절에 따라 인위적인 난방이나 냉방을 할 필요가 없다. 그 외에도 초효율적 엘리베이터와 같은 다양한 에너지 절약 기술도 갖추고 있다. 불리 센터는 종종 지붕 위에 설치된 태양광 패널을 사용해 소비하는 에너지보다 60퍼센트나 많은 에너지를 생산하기도 한다. 다만 이 태양광 패널은 시애틀의 전력망에 연결되어 밤이나 특히 구름이 잔뜩 낀 날에 도시 전력망으로부터 전기를 수급받기도 한다.

 불릿 센터에 사용되는 많은 기술은 널리 사용되기에는 아직까지 너무 비싸다(그렇기에 건물이 완공된 지 7년이 지난 지금까지 세계에서 가장 친환경적인 상업용 건물인 것이다). 그래도 우리는 건축가들이 '엔벨로프envelope'라고 부르는 건물용 외피로 건물 안팎의 공기 흐름을 차단해 온도를 유지하고, 좋은 단열재와 3중 유리창, 효율성이 높은 문을 통해 적은 비용으로 집과 사무실의 에너지 효율을 지금보다 높일 수 있다. 나는 방을 시원하게 할 때는 유리창이 자동으로 어두워지고, 반대로 방을 따뜻하게 할 때는 유리창이 더 투명해지는 이른바 스마트 글라스에 흥미를 느꼈다. 새로운 건축법이 제정되면 이 같은 에너지 절약 아이디어를 홍보하는 데 도움이 될 수 있으며, 관련 시장을 확대하고 비용을 줄이는 데도 기여할 수 있을 것이다. 비록 불릿 센터만큼은 아니더라도 지금보다 더 많은 건물의 에너지 효율을 높일 수 있다.

 

p250

 이 모든 비용이 얼마나 될까? 기후변화에 적응하기 위해 우리가 해야 하는 모든 일들에 가격표를 매길 수는 없지 않은가? 하지만 내가 속한 위원회는 다섯 개의 주요 분야(조기 경보 시스템 구축, 기후 회복력이 뛰어난 인프라 구축, 농작물 생산량 증대, 물 관리, 맹그로부 나무 보호)에서 발생한 지출을 분석한 결과, 2020년에서 2030년 사이에 1조 8,000억 달러를 투자하면 7조 달러 이상의 이익을 얻을 수 있다는 사실을 밝혀냈다. 이 금액을 10년에 걸쳐 투자한다고 생각하면, 세계 GDP의 0.2퍼센트를 투자해 거의 네 배에 가까운 수익금을 얻는 셈이다.

 이 투자의 '수익'은 '예방된 나쁜 일'들로 측정할 수 있다. 물 부족으로 인한 내전(시리아 내전의 여러 이유 중 하나는 물 부족이었다), 가뭄이나 홍수로 인한 농작물 파괴, 허리케인으로 인한 도시 파괴, 기후재앙으로 인한 피난민 발생이 일어나지 않았다면, 이 모든 것들을 '수익'이라고 할 수 있다. 아니면 좋은 일로도 측정할 수 있다. 충분한 영양소를 섭취하고 자라는 어린이들, 빈곤에서 벗어나 세계 중산층에 진입한 가정들, 날씨가 계속 뜨거워져도 성장하는 기업, 도시, 국가들로 말이다.

 어떻게 생각하든 경제적으로나 도덕적으로나 우리가 이 일을 왜 해야 하는지는 명확하다. 비록 코로나19로 인해 지금까지 우리가 이룬 많은 성과가 훼손되기는 했어도, 극심한 빈곤을 겪는 인구는 1990년 세계 인구의 36퍼센트에서 2015년 10퍼센트로 지난 25년 사이 급격하게 감소했다. 하지만 기후변화는 이런 발전을 훨씬 더 많이 지워버릴 수 있고 극심한 빈곤을 겪는 인구의 비율을 13퍼센트까지 높일 수 있다.

 기후변화에 가장 많이 영향을 끼친 사람들은 세계의 나머지 사람들이 살아남을 수 있도록 도와야 한다. 우리는 그들에게 많은 빚을 졌다.

 

p324

 코로나19로 가장 큰 고통을 받은 사람들은 가장 선택권이 없는 사람들, 예를 들어 집에서 일하거나 사랑하는 가족을 돌보기 위해 잠시 일을 쉬는 사람들이다. 그리고 이런 사람들 대부분은 저소득 유색인종이다.

 미국에서 흑인과 라틴계 사람들은 다른 인종에 비해 코로나 바이러스에 감염돼 사망할 확률이 불균형적으로 높다. 흑인과 라틴계 학생들은 또한 백인 학생들보다 온라인 수업을 들을 확률이 낮다. 노인 의료 보험 제도의 수혜자들 가운데 가난한 사람들은 코로나19에 감염돼 사망할 확률이 다른 수혜자들보다 네 배나 높다. 이러한 격차를 줄이는 것은 미국에서 코로나19를 통제하는 데 중요한 단서가 될 것이다.

 전 세계적으로 코로나19로 인해 빈곤과 질병 부문에서 인류가 지난 수십 년 동안 이룩한 발전이 무위로 돌아갔다.. 많은 나라들이 예방접종 프로그램을 포함해 다른 우선순위에 배정된 돈과 인력을 팬데믹 대응에 전용해야만 했다. 보건계측 및 평가연구소에 따르면 2020년 예방접종률은 1990년대 수준으로 떨어졌다. 우리는 불과 25주 만에 25년의 발전을 잃은 것이다.

 

 무라카미 하루키의 아버지에 대한 짧은 추억. 그리고 대동아전쟁기를 살아온 아버지의 역사를 이야기한다.

그 아버지의 이야기를 통해 일본인이 겪은 전쟁이 개인들에게 어떠한 영향을 주었는가에 대한 한편의 에피소드를 제공한다.

굉장히 짧은 분량이지만 함축된 메시지는 매우 농밀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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p34

 사람은 누구나 많든 적든 잊을 수 없는, 그리고 그 실태를 말로는 타인에게 잘 전할 수 없는 무거운 체험이 있고, 그걸 충분히 얘기하지 못한 채 살다가 죽어가는 것이리라.

 

p49

 이 시기에 중국 대륙에서는, 초년병이나 보충병을 살인 행위에 길들이기 위해 포로로 잡은 중국 병사를 죽이라고 명령하는 일이 흔했던 것 같다. 요시다 유타카가 쓴 <일본군 병사>에 다름와 같은 문장이 있다.

 

 후지다 시게루는 1938년 말부터 1939년에 걸쳐 기병 제28연대장으로서, 연대 장교 전원에게 '병사를 전장에 적응케 하는 가장 빠른 방법은 살인이다. 즉 담력을 시험하는 것이다. 이에 포로를 사용하면 된다. 4월에 초년병이 보충될 예정이니, 최대한 빨리 기회를 만들어 초년병을 전장에 적응케 하고 강하게 만들어야 한다' '이에는 총살보다 척살刺殺이 효과적이다' 하고 훈시했다고 회상했다.

 

 저항하지 않는 포로를 살해하는 것은 당연히 국제법에 위반되는 비인도적인 행위지만, 당시 일본군에게는 아주 당연한 발상이었던 것 같다. 무엇보다 일본군 전투 부대에는 포로를 관리할 여유가 없었다. 1938년에서 1939년은 아버지가 초년병으로 중국 대륙에 건너가 있었던 바로 그 시기이다. 그 같은 행위를 하급 병사가 강요했다 한들 조금도 이상하지 않다. 그런 살해는 대부분 총검에 의한 척살인 것 같은데, 아버지가 그때 처형에는 군도가 사용되었다고 말했던 것으로 기억한다.

 

 어쨋거나 아버지의 그 회상은, 군도로 인간을 내려치는 잔인한 광경은, 말할 필요도 없이 내 어린 마음에 강렬하게 각인되었다. 하나의 정경으로, 더 나아가 하나의 의사 체험으로 달리 말하면, 아버지 마음을 오래 짓누르고 있던 것을 - 현대 용어로 하면 트라우마를 - 아들인 내가 부분적으로 계승한 셈이 되리라. 사람의 마음은 그렇게 이어지는 것이고, 또 역사라는 것도 그렇다. 본질은 '계승'이라는 행위 또는 의식儀式 속에 있다. 그 내용이 아무리 불쾌하고 외면하고 싶은 것이라 해도, 사람은 그것을 자신의 일부로 받아들이지 않으면 안 된다. 만약 그렇지 않다면 역사의 의미가 어디에 있겠는가?

 

p62

 하지만 당시의 나는, 책상에 들러붙어 주어진 과제를 하고 시험에서 조금이라도 더 좋은 성적을 받는 것보다, 좋아하는 책을 많이 읽고, 좋아하는 음악을 실컷 듣고, 밖에 나가 운동을 하고, 친구들과 마작을 하거나 여자친구와 데이트를 하는 것이 중요한 의미를 지닌 일이라고 생각했다. 물론 그 생각이 옳았다고, 지금은 확신을 갖고 단언할 수 있지만.

 

 

역사학자이며 언론인. 최근에는 SNS에 시사에 대한 비판글을 많이 올리시는데 이 책은 그러한 글들을 모은 것 같다.

페북을 통해서도 자주 이 분의 글을 접하곤 하는데 이렇게 일목요연하게 모아놓으니 편한점이 있다.

인터넷을 통해서 간간히 글을 읽긴 했지만, 이렇게 책으로 읽다보니 왜 이 분의 글이 언론에 거의 노출이 되지 않는지 이해가 된다. 기레기들에게는 거의 이 분의 글 하나하나가 다 비수와 같이 느껴질게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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p197.  부동상 문화재 투기 1

 

 SBS기자가 전화로 이것저것 물어서 대답은 해줬는데, SBS의 이번 보도 태도를 신뢰할 수 없기 때문에 제 이야기를 토대로 '이런 의견도 있다'는 기사를 작성하는 건 무방하지만, 제 이름이나 변조된 목소리가 나가는 건 절대로 허용하지 않겠다고 했습니다. 그래도 어떻게 왜곡돼서 나갈지 모르기 때문에, 미리 질문과 답변의 요점만 간추려서 적겠습니다.

 

 1) SBS 기자들의 취재가 불성실했다고 보는 이유가 뭔가?

 손혜원 의원의 친척, 지인들이 산 집과 집값에만 집착했을 뿐, 그들이 어떤 배경과 맥락에서 해당 건물을 구입했는지에 대해서는 전혀 관심을 기울이지 않았다. 각 지자체의 도시재생사업이 어떻게 진행되고 있으며, 도시재생사업 지구 내 낡은 건물들을 어떻게 처리하고 있는지를 함께 조사했다면, '투기 의혹'이라는 제목을 붙일 수 없었을 것이다.

 지자체가 낡은 건물을 매입해서 리모델링한 후 주민 커뮤니티 센터나 카페로 활용하는 것은 도시재생사업에서 흔히 사용하는 방법이다. 그런 사업을 하면 당연히 해당 지역의 집값도 오르지만, 재개발 '호재'와는 비교조차 할 수 없는 수준이다. 손의원이 목포 구시가지에서 폐가를 매입하고 리모델링해서 카페와 게스트하우스로 바꾼 것은 바로 '지자체의 도시재생 방법'을 개인이 시행한 것이다. 지자체가 하면 '공익사업'이고 개인이 하면 '투기'인가? 각 도시의 도시재생사업에서 지자체가 어떤 일을 하고 있는지 전혀 몰랐기 때문에 이런 보도를 한 것 아닌가? 당신네 보도는 도시재새사업 자체의 정당성마저 공격하는 거다.

2) 자기 이름으로 하지 않고 차명으로 구입한 건 뭔가 숨기려고 했기 때문 아닌가?

 정치인에게는 SNS가 공정인 의사소통 수단이다. 자기 조카에게 목포에 집 사서 살라고 했다는 얘기를 페이스북에 올린 게 언제인데, 그것조차 보지 않고 기사를 썼다는 건가? 조카가 자금을 지원받고 증여세까지 낸 뒤 구입한 건물이고, 그 사실을 이미 주변에 다 밝혔는데, 세상에 그런 차명 매입 방법도 있는가? 손의원에게 조카들만 있을 뿐 자녀가 없다는 사실은 취재 안 했는가? 또 누구처럼 자기가 살지도 않을 집을 자기와 가족 이름으로 사서 소유만 하고 있다면 투기 의혹을 품을 만하지만, 구입자들은 목포에 살면서 해당 건물을 리모델링해서 사용하고 있다. 본인이 이미 사실을 공개했고 구입자가 해당 건물을 실제로 사용하고 있는데, 이걸 차명 투기라고 보는 건 납득되지 않는다.

 

 3) 그 동네를 문화재로 지정하는 데 압력을 행사했을 가능성은 크지 않나?

 다른 뉴스는 체크 안 하나? 박지원 의원이 그건 자기 '공'이라고 이미 얘기했다. 애초에 도시재생사업 지구였던 곳을 문화재 지구로 바꾸자고 국토부 장과과 문체부 장관을 설득한 게 자기라고. 그리고 문화재로 지정되는 건 그린벨트로 지정되는 것보다 재산권 행사에 더 제약 조건이 많다. 자기 건물이 있는 동네를 그린벨트로 지정해 달라고 요구하는 부동산 투기꾼이 세상에 어디 있나? 이미 지정된 곳에 건물을 산 뒤 해제해 달라고 요구하는 경우는 많지만, 그 반대의 경우를 본 적이 있나? 나도 문화재 위원 등으로 문화재 행정에 오래 관여한 사람이지만, '부동산 문화재 투기'라는 말은 처음 듣는다. 개인적으로는 정말 그런 투기가 생겼으면 좋겠다. 그러면 도시의 역사가 무참하게 사라지는 일을 막을 수 있을 거다.

 

p210. 비하

 [단독] 이승만, 박정희 비하, DJ, 盧 칭송 -- 공공기관의 고3 퀴즈(중앙일보 단독)

 중앙일보 기자가 박정희 비하라고 주장한 문제는 "1961년 쿠데타를 주도하여 권력을 장악한 뒤, 1979년 사망할 때까지 18년 동안 장기집권을 이어갔던 인물은?" 입니다.

 중앙일보 기자가 이승만 비하라고 주장한 문제는 "첫 헌법에 따르면 대통령의 임기는 4년, 두 번까지만 할 수 있었다. 그런데 1950년대 내내 한 사람이 대통령 자리에 있었다. 헌법을 바꾸어가면서 12년 동안 권력을 독점했던 이는?"입니다.

 여보세요, 저건 '사실'이지 '비하'가 아닙니다.

 "한 달 후 대한민국"처럼 문재인이 대통령 되면 나라 망한다고 근거 없이 저주하거나, "한국인이어서 미안합니다"처럼 한국인 전체를 모욕하는 글 정도는 돼야 '비하'죠. 모두 중앙일보에 실린 글이군요.

 

p240. 성희롱

 1993년, '서울대 우조교 사건'이라고 불리는 일이 일어났습니다. 지금이라면 '서울대 교수 성희롱 사건'이라고 이름 붙였겠지만, 당시에는 '성희롱'이라는 개념조차 없었습니다. 강간, 강간미수, 준강간, 강제추행만 범죄로 인정되던 때였죠. 당시 가해자의 동료 교수 일부는 "피고소인이 평소 남녀 가리지 않고 옆에 앉은 사람 허벅지를 주무르는 습관이 있었다"며 '성범죄'가 아니라고 두둔하기도 했습니다. 하지만 당시 피해자의 변호를 맡은 박원순 변호사는 '성희롱'이라는 개념을 도입하여 6년 만에 승소했습니다. 변론서는 당시 박원순 변호사와 함께 일했던 이종걸 변호사가 쓴 걸로 아는데, 그는 박 변호사가 "역사에 남을 변론서가 될 테니 정말 잘 써야 한다"고 해서 정말 고심하면서 썼다고 얘기해 줬습니다. 이 사건 이후 '성희롱'이 법적 개념으로 정착했고, 공공과 민간을 막론하고 모든 기관에서 '성희롱 예방 교육'이 시행되었습니다.

 작년 서울북부지방법원 자리에서 서울생활사박물관이 문을 열었습니다. 개관 준비 과정에서 유물 수집과 전시 기획을 도와줬는데, 막상 개관한 뒤에 보니 중요한 전시 주제라고 생각했던 항목이 빠져 있었습니다. 서울 변두리였던 지역 특성상 '종점 동네' 사람들 얘기가 필수적이라고 생각했는데, 버스 차장(안내양) 관련 전시물이 안 보이는 겁니다. 담당자에게 물었더니 젠더자문관이 "버스 안내양 관련 전시는 여성에 대한 왜곡된 인식을 심어줄 수 있다"고 해서 뺐다는 겁니다. 여러 가지 생각이 들었습니다. 실재했던 역사를 지우는 게 '왜곡되지 않은 인식'을 심어주는 방법인가? 젠더자문관이 아무것도 지적하지 않는 것은 직무유기로 비칠 수 있다고 생각해서 가볍게 한 말을 담당자가 너무 민감하게 받아들인 건 아닌가? 공무원으로서 일단 지적 사항이 있으면 조치할 수밖에 없으니 어쩔 수 없었겠다고 생각하면서도, 일종의 '검열' 같아서 기분이 씁쓸했습니다. 하지만 박 시장도 이런 방식이 '검열'로 비칠 수 있다는 걸 모르지 않았을 겁니다. 그런데도 '젠더자문관'이라는 직책을 만들어 서울시의 모든 간행물과 전시물을 젠더 감수성 측면에서 재점검하는 걸 보고는 그가 얼마나 세심하게 여성의 마음을 헤아리려 하는지 알 수 있었습니다.

 제가 알기로, 1986년 부천서 성고문 사건 변론을 맡은 이래 박원순보다 더 여성 인권의 신장에 기여한 변호사는 거의 없었습니다. 박원순보다 더 여성의 안전과 권익을 위해 노력한 지자체장도 없었습니다. 그가 왜 이런 선택을 했는지 판단하기에는, 아직 모르는 일들이 많습니다. 그런데도 그가 해온 모든 일을 '위선'으로 단정하고 비난부터 퍼붓는 사람이 너무 많습니다. 그가 평생 가면을 쓰고 여성을 대해 온 '위선자'일까요? 그가 이 땅의 여성들에게 남긴 모든 것을 다 내다 버려야 하는 것일까요?

 

 

p259. 쓸개

 "이른 새벽 통근차 고동 소리에 고무공장 큰 아기 벤또밥 싼다. 하루 종일 쭈그리고 신발 붙일 제, 얼굴 예쁜 색시라야 감 잘 준다나. 감독 앞에 해죽해죽 아양이 밑천. 고무공장 큰아기 세루치마는 감독나리 사다 준 선물이라네." 일제강점기 세간에서 유행했던 '근대 민요' <고무공장 큰아기>의 가사입니다.

 일제강점기 고무신 공장에서는 기술자들이 고무신 '감'과 접착제에 농간을 부려 여자 직공들을 괴롭히곤 했습니다. 직공이 불량품을 만들면 벌금을 물리는 게 당시 관행이었는데, 하루에 불량품이 한두 켤레만 나와도 일당보다 많은 벌금을 내야 했습니다. 악질 기술자들은 이 관행을 이용해 여자 직공들과 '부적절한 관계'를 맺곤 했습니다.

 악질 기술자들은 먼저 '얼굴 예쁜 색시'에게 나쁜 감을 주어 자주 불량품을 내게 만들었다가, '부적절한 관계'를 맺은 뒤에는 '좋은감'을 주는 수작을 부리곤 했습니다. '얼굴 예쁜 색시라야 감 잘 준다나'라는 가사는 앞의 한 단계가 생략된 셈입니다.

 아베가 수출규제로 한국을 압박하는 게 저 시절의 고무신 공장 악질 기술자가 하던 짓과 똑같습니다. 한국인들을 '부품과 소재'로 협박하고 겁탈하려는 거죠. 지금의 한국인 중에도 악질 기술자가 시키는 대로 고분고분 따르고 '세루치마'라도 한 벌 얻어 입는 게 최고라고 믿는 쓸개 빠진 것들이 많습니다. 저 '쓸개 빠진 것들'을 척결하지 못하면, 일본 우파는 언제까지고 한국인 전체를 노리개 취급 할 겁니다. 토착왜구 척결은, 한국인 전체의 자존에 관련된 문제입니다.

 

p290. 엽기(獵奇)1

 10여 년 전 고등학생이 교외 체험활동에 참가했냐 아니냐를 '법정'에서 따지는 건, 전 세계 재판 역사상 유례를 찾기 어려울 겁니다.

 세계사상 유례가 드문 일에 어울리는 수식어는, '엽기적' 또는 '극도의 몰상식'입니다.

 한국 검찰과 언론의 행태에 어울리는 '수식어'이기도 합니다.

 

엽기2

 매사에 자유한국당을 편드는 뉴스타운이라는 인터넷 언론이 '고유정과 문재인의 닮은 점'이라는 칼럼을 실었습니다. 내용은 너무 극악무도해서 생략합니다.

 그런데도 나경원 씨는 지금이 "문 대통령이 곧 국가인 시대"라며 "문 대통령을 건드리면 반역이 된다."고 주장했습니다. 그러나 문 대통령의 인격을 극악무도한 언사로 분쇄하려는 자들이 공공연히 설치는 현실은, '문 대통령이 곧 국가인 시대'를 증명하는 게 아니라 '나경원 씨의 한결같은 인격'을 보증할 뿐입니다.

 사실 저런 글은 '국가에 대한 반역'을 넘어 '인륜에 대한 반역'입니다. 만약 어떤 언론에 '고유정과 나경원의 닮은 점'이라는 칼럼이 실린다면, 나경원 씨가 어떻게 반응할지는 너무 뻔해서 궁금하지도 않습니다.

 언론이 자국 대통령을 '희대의 엽기 살인마'와 똑같다고 매도하는 글을 유포할 수 있는 나라는, 지구상에 몇 되지 않습니다. 언론 자유도를 최상위로 올려놓은 정권을 '독재정권'이라고 비난하는 자들도, 지구상에 자유한국당 사람들뿐일 겁니다. 한국과 같은 민주국가에서 이런 정당이 제1야당이라는 현실이야말로, '엽기적'입니다. 이런 '엽기성'을 청산하는 일은 이념의 문제가 아닙니다. '보편 인간'의 자격을 얻기 위한 전제입니다.

 

p301. 원순 씨

 49재를 지냈지만, 아직 원순 씨를 보내지 못했습니다.

 그가 평생에 걸쳐 이룬 일들과 '성범죄'는 다른 문제라는 사람도 많지만, 둘은 무관할 수도 없고 무관해서도 안 됩니다. 그가 정말 '성범죄자'이면서 겉으로만 여성 인권을 위해 노력하는 것처럼 행세한 위선자였다면, 그가 이끈 시민운동의 역사도 당당할 수는 없습니다.

 지난 49일간 SNS를 쉬면서 진상을 알아보려 애썼고, 사람들의 얘기에도 귀를 기울였습니다.

 원순 씨의 삶과 인품을 모르는 자들이 죽은 원순 씨를 향해 쓰레기 같은 악담들을 쏟아부을 때도 그러려니 했습니다.

 정의당 국회의원들이 조문 안 가겠다고 선언했을 때도, 대통령에게 누구 편인지 밝히라고 요구했을 대도, 그저 한숨만 나왔습니다.

 강용석이 그를 조롱하고 진중권이 그를 모욕했을 때도 헛웃음이 나왔습니다.

 그러나 권인숙, 정춘숙 등이 그를 '성범죄라'로 단정했을 때는, 절망했습니다.

 30년 넘게 알고 살아온 사람의 인격에 대한 신뢰를 한순간에 패대기치는 그 경박한 단호함에 소름이 끼쳤습니다. "박원순이 그랬다니 믿기지 않는다. 아직 단정하기에는 이른 것 같다." 정도의 반응을 기대한 게 무리였을까요? 원순 씨는 알았을 겁니다. 자기가 아무리 해명해도, 이런 '경박한 단호함'에 맞서 이길 수 없다는 것을. 어떻게든 버틴다 해도 만신창이가 되어 주저앉을 수밖에 없다는 것을.

 원순 씨의 '여성운동 동지' 정춘숙 씨가 <시사인>과 인터뷰하면서 '박원순은 한국 현대 여성운동의 모든 장면에 다 있었다. 박원순이 그럴 리 없다고 생각했지만, 그럴 리 없는 사람은 없다. 이 사건은 박원순을 빼고 봐야 한다'고 했습니다. 저는 이 말에 동의할 수 없습니다. 첫째, '박원순을 빼고 봐야' 보인다면 그건 당연히 박원순을 본 게 아닙니다. "박원순을 빼고" 박원순을 보는 황당한 생각은 하면서 "다른 사람을 넣고" 박원순을 보는 생각은 왜 못 한 걸까요? 둘째, "그럴 리 없는 사람은 없다."는 명제는 왜 원순 씨에게만 일방적으로 향하는 건가요? 한쪽은 언제나 그럴 리 없고, 다른 쪽은 언제나 그럴 리 있다고 보는 태도에 굳이 이념의 태도를 붙이자면, '맹목주의'일 뿐입니다. 맹목주의는, 광기의 일종입니다.

 

p307. 유서

 평생 죽음의 역사를 연구한 프랑스 역사가 필립 아리에스는 자살이 인간의 지성으로 접근하기 어려운 영역에 있다고 했습니다. 죽은 사람의 말을 들을 수는 없으니까요. 어떤 사람이 죽음을 선택한 동기를 알 방법은 '유서'를 분석하는 것뿐인데, 유서를 남기고 자살하는 사람이 적은 데다가 그 유서조차 온전한 '진실'을 담았다고 단정하기는 어렵다는 것이 수많은 유서를 분석했던 그의 견해입니다. 유서를 쓰는 순간의 그가 '본래의 그'였는지, 아니면 '일시적 충동에 사로잡힌 그'였는지를 제대로 판단할 방도는 없습니다.

 하지만 그가 유서에 쓴 내용을 다 믿지는 못하더라도, 유서의 '수신인'이 그의 죽음과 직접 관련된다는 사실까지 부정할 수는 없을 겁니다. 유서는 자기의 죽음으로 인해 가장 큰 영향을 받을 사람들-가족과 가까운 친지-에게 남기는 것이 보통입니다. 간혹 자기 죽음이 '집단 각성'의 계기가 되기를 바라며 불특정 다수에게 쓰는 유서도 있습니다. 을사늑약 직후 민영환의 유서나 독재정권 시절 민주 열사들의 유서가 이에 해당합니다. 그 외에 '남'에게 쓰는 유서는 그 남이 적어도 자기 죽음과 '직접 관련'된다는 증거일 수밖에 없습니다. 몇 해 전 고 성완종 씨가 남긴 메모가 이 경우에 해당할 겁니다.

 자살한 검찰 수사관이 윤석열 총장에게 따로 유서를 남겼답니다. 언론에 보도된 내용은 "윤석열 총장께 면목이 없지만, 우리 가족에 대한 배려를 바랍니다."와 "화장해서 보무님 산소에 뿌려 주십시오."뿐인데, 자기 사후처리 문제까지 부탁한 것으로 봐서는 그가 목숨을 끊음으로써 대신하고자 했던 '말'은 윤석열 총장에게 한 것으로 간주해야 할 겁니다.

 을사늑약 나던 해 연말에는 많은 채무자가 채권자 집 앞에서 스스로 목숨을 끊었습니다. 해를 넘긴 빚을 '묵은 빚'이라고 하는데, 묵은 빚은 탕감해 주는 게 당시 관행이었습니다. 그렇다고 일부러 목은 빚을 만들어서는 안 됐습니다. 묵은 빚을 남기면 새 빚을 얻을 수 없는 것도 관행이었기 때문입니다. 직업을 세습하던 시대에 장사꾼이 새 빚을 얻지 못하면, 본인이 망할 뿐 아니라 자식들 앞길까지 망쳤습니다. 그래서 채무자들은 자기 목숨을 끊음으로써 '채권자의 양심'에 호소하여 남은 가족의 앞날을 부탁했습니다.

 죽기로 작정한 사람이 '가족'을 부탁하는 상대는, 자기가 죽은 뒤에도 자기 가족을 괴롭히거나 그 운명을 좌우할 사람이라고 보는 게 이치에 맞습니다. 자살한 검찰 수사관이 왜 '극단적 선택'을 했는지 정확히 알 도리는 없습니다. 하지만 그 '선택'에 윤석열 총장이 '직접' 관련된다는 점은 상식으로 판단할 수 있습니다. 그가 죽음으로써 호소한 대상은 '윤석열의 양심'이었을 겁니다. 그런데도 검찰은 당사자가 '윤석열 총장에게 죄송하다'는 유서를 남겼다고 사실을 왜곡해서 언론에 알렸고, 언론들은 이 주장을 그대로 보도하면서 이 '선택'의 '배후사정'이 다른 데에 있는 것처럼 사람들은 호도하고 있습니다. 지금 이 사건의 '진실'에 가장 가까이 있는 것은, '윤석열의 양심'일 겁니다.

 

p309. 의義

 의열단은 '의로운 일을 맹렬히 수행한다'는 취지로 붙인 이름입니다. 그런데 그들에게 '의로운 일'은 과연 무엇이었을까요? 마이클 샌델의 <정의란 무엇인가>를 보아도 '정의'가 무엇인지는 알기 어렵습니다. 사실 영어 justice가 한자 '의義'에 정확히 대응하는지도 의문입니다.

 의義는 갑골문자에서부터 나오는 글자로, 한자 중에서도 가장 오래된 글자에 속합니다. 본래 톱날이 달린 창 모양의 제기祭器를 형상화한 글자였다고 합니다. 아마도 악귀를 물리치는 무기였을 겁니다.

 방위로는 서西, 계절로는 가을, 오행으로는 금金에 해당하며 그 기운은 '서늘함'과 '굳건함'입니다. 인仁은 따뜻하고 너그러우나 의義는 싸늘하고 단호합니다. 용서하는 것이 인仁이라면 용서하지 않는 것이 의義입니다. 그러니 인의仁義를 겸한다는 건 매우 어려운 일입니다. 그런데 유교는 왜 이 둘을 겸하라고 주문했을까요? 아마도 청와대 여민관에 걸려 있다는 '춘풍추상春風秋霜'의 의미와 같을 겁니다. 남을 대할 때는 인仁, 자기를 대할 때는 의義.

 의에는 의치義齒, 의수義手, 의족義足처럼 '가짜'라는 뜻도 있습니다. 가짜라기보다는 '본래 자기 것이 아님'이라는 뜻이겠죠. 친형제가 아니라서 의형제이고, 관군이 아니라서 의병입니다. 자기와 자기 가족을 위해서 하는 일에는 '의'자를 붙이지 않습니다. 마지못해 하는 일에도 '의'자를 붙이지 않습니다. 자기가 굳이 나서서 하지 않아도 될 일을 스스로 나서서 하는 게 '의'입니다. 억울한 남을 돕는 일, 위태로운 지경에 빠진 남을 구하는 일이 '의'입니다. 자기와 관계도 없는 약자의 편에 서서 강자의 횡포에 맞서는 게 '의'입니다.

 어떤 분이 의열단에 대비되는 '친일파'에 대해 물었습니다. 저는 이렇게 답했습니다. "친일파는 불의한 세력에 빌붙어 사욕을 채운 자들이었습니다. 지금도 그런 자들이 많습니다. 누구다 의열단원들처럼 살 수는 없습니다. 그러나 의롭게 죽진 못하더라도 더럽게 살진 말아야 할겁니다.

 '의'와 뜻이 반대인 글자는 없습니다. 그래서 '불의'라고 합니다. 하지만 '불의'는, '정의롭지 않다'가 아니라 '더럽다'는 뜻으로 해석해야 할 겁니다.

 

p311. 의료보험법

 우리나라 의료보험법은 1963년에 처음 제정되어 1964년부터 시행됐습니다. 당시 군사정권은 '무상의료'를 자랑하는 북한에 맞서기 위해 '선전용'으로 이 제도를 만들었지만, 임의가입 방식이었기 때문에 가입자는 거의 없었습니다. 고용주와 피고용인이 보험료를 분담하는 강제 가입 방식의 의료보험 제도가 시행된 건 1977년이었습니다. 이때는 공무원, 군인, 교사, 상시 500인 이상을 고용하는 대 기업 노동자만 의료보험에 가입할 수 있었습니다.

 1977년은 유신체제가 종말을 향해 치닫던 때였습니다. 특히 당시 주력 수출산업으로 육성하던 중화학 공업 분야 대기업 노동자들은 극단적인 저임금에 불만이 매우 높았습니다. 대기업에서 파업이 일어나면 '국민경제'에 미치는 영향이 심각하리라고 판단한 박정권은 대기업 노동자들을 회유하는 한편, 공무원 군인 교사 등 정권의 중추를 이루는 사회 세력의 환심을 사기 위해 '특권적 의료보험 제도'를 만들었습니다. 당시 의료보험증은 특권층의 신분증 구실을 했습니다. 으료보험증만 맡기면 어느 술집에서나 외상술을 먹을 수 있을 정도였습니다. 그러니 박정희가 만든 건 빈부를 따지지 않는 한국의 현행 건강보험보다는 일부 사람만 혜택을 받는 '미국식 의료보험'에 가까웠다고 볼 수 있습니다. 박정희가 만든 의료보험을 지금까지 쓰고 있다면, 중소기업 직장인이나 자영업자 절대다수는 코로나에 감염되어도 병원 문턱을 넘을 수 없을 겁니다.

 1987년 6월항쟁 이후, 민정당 노태우는 '전 국민 의료보험 혜택'을 공약으로 내세우지 않을 수 없었습니다. 의료 보험증이 우리 사회의 불평등 양상을 두드러지게 표현하는 '증거물'이었기 때문이죠. 이 '가시적인 불평등의 증거물'을 없애지 않고서는, 6월항쟁으로 뜨겁게 분출한 민주화 열기를 가라앉힐 수 없는 상황이었습니다. 1989년부터 '전 국민 의료보험 제도'가 시행된 건 이 때문입니다.

 현재의 국민 건강보험 제도는 박정희가 준 '선물'이 아닙니다. 우리 국민 스스로 살인적 폭력과 최루탄에 맞서 싸워 만든 제도입니다. 자기 자신이, 또는 자기 부모가 싸워서 얻은 권리를 남이 '선물'한 것으로 생각하면, 허무하게 빼앗기기 쉽습니다. 우리 스스로 만든 것을 누구라도 함부로 훼손하게 놔둬선 안 됩니다. '민영 의료보험증'을 가진 사람이 공공연히 특권층 행세하는 시대로 되돌아가서도 안 됩니다.

 

p312. 의료수요

 1940년 - 527,964명

 1950년 - 633,976명

 1960년 - 1,080,535명

 1970년 - 1,006,645명

 1980년 - 862,835명

 1990년 - 649,739명

 1940년 이후 10년 단위로 본 출생아 수입니다.

 의료 서비스의 주 소비자는 70~80대의 고령층입니다. 지금은 1940~50년대 출생자들이지만 10년 후에는 1950~60년대 출생자, 20년 후에는 1960~70년대 출생자들입니다.

 다른 변수를 제외해도, 당분간 의료수요는 급증하다가 1990년생이 70대가 되는 2060년에야 지금 수준으로 돌아올 겁니다.

 물론 미용성형 소비자는 줄어들겠지만, 생사의 갈림길에 선 위급환자는 지금보다 훨씬 많은 상태로 유지될 겁니다.

 36시간 연속 근무에 시달린다고 호소하는 젊은 의사 여러분, 당신들 밥그릇은 향후 수십 년간 줄어들지 않습니다.

 오히려 당장 의사를 늘리지 않으면 10년 후 당신 후배들은 48시간 연속 근무하면서도 응급실에서 죽어가는 환자 멀뚱히 쳐다보는 잔인한 의사가 될 겁니다.

 그런 잔인한 마음으로 의사가 된 건 아니겠죠.

 의사 늘리는 것 말고, 환자 폭증에 대처할 방법이 있다면 스스로들 제안해 보시기 바랍니다.

 

p324. 

 '정의'는 이성으로 판별하고 감정으로 실천하는 인간의 덕목입니다. 그래서 '정의감'입니다. 근대 이후 일본 역사에서 일본인들이 '정의감'에 기초해 이루어 낸 일이 무엇인지, 알지 못합니다. 그러나 한국인들은 '이성적 계산'만으로는 도저히 대적할 수 없는 상대를 '정의감'으로 물리친 역사를 만들어 왔습니다.

 기회주의자, 사익 지상주의자, 토왜들이 '감정적 대응은 안 된다'고 하는 건, 그들이 이성을 '계산'의 용도로만 쓰기 때문입니다. 정의와 불의를 판별하는 것이 인간 이성의 가장 중요한 용도입니다. 그 정의를 실천할 수 있게 해주는 '정의감'은, 인간만이 가질 수 있는 고귀한 감정입니다.

 '정의감 없는 타산적 이성'이야말로, 인간을 짐승 이하 수준으로 타락시키는 악덕입니다. 토왜들에게 '친일'은 부차적 문제입니다. 그들의 진짜 문제는 '정의감' 없이 '타산적 이성'만 가진 존재라는 점입니다. 저들이 한국 시민들의 일제 불매운동을 편협한 '반일 감정'의 소산이라고 단정하는 것도, '정의감'이 무엇인지 모르기 때문입니다.

 

p326. 이완용1

 '그'는 어려서부터 우봉 이씨 가문에서 가장 똑똑하고 공부 잘하는 아이로 소문났습니다.

 그 덕에 우봉 이씨 가문에서 제일 잘나가던 이호준의 양자가 됐습니다

 나라에서 똑똑한 젊은이들을 모아 육영공원에 입학시켰을 때, 그 학생이 됐습니다.

 우수한 성적으로 졸업하여 초대 주미공사관 참전관이 됐습니다.

 '그'는 공부를 참 잘해서 나라 덕을 많이 보았지만, 나라 팔아먹는 '매국노'가 됐습니다.

 그는 처음 '친미'였으나, 자기 이익을 위해 '친일'로 태도를 바꿨습니다.

 이완용 얘기입니다.

 제 이익만 밝히면서 공부 잘하는 인간보다 세상에 더 해로운 물건은 없습니다.

 

p329. 이해력

 코링크 최고 의사 결정권자는 이봉직, 이창권, 조범동이며 정경심 씨의 돈은 투자금이 아니라 '대여금'이라는 판결이 나왔지만, 일부 언론매체는 '조국 일가 사모펀드'라는 말을 계속 씁니다.

 판결문도 이해하지 못하는 수준의 사람들이 여론을 주무른다는 건, 정말 끔찍한 일입니다.

 

이해충돌

 

 한국에서 최고의 투기 대상이 '부동산'이라는 데에는 거의 이견이 없습니다. 부동산 투기의 성패를 좌우하는 건 당연히 '개발 정보'입니다. 박정희 정권이 강남을 개발할 때 '복부인'이 사회악으로 지목되어 온갖 비난을 받은 적이 있습니다. 그런데 사실 복부인은 '정보'를 받아서 투기를 실행했을 뿐, 진짜 사회악은 '복부인'들에게 정보를 준 그들의 남편이나 친척들이었습니다. 복부인에게 정보를 준 자들은 과연 누구였을까요?

 강남 개발 당시 청와대 경호실장이던 박종규가 서울시 건축과장 윤진우에게 강남땅을 사 모으라고 했다느 얘기는 이미 상식이 됐습니다. 윤진우는 후일 자기 이름으로는 땅 한 평도 사지 않았다고 했지만, 그 정보를 친척이나 친구들에게 누설하지 않았다고는 하지 않았습니다. 저는 그에게 땅 사는 심부름하는 동안 술을 엄청나게 먹었다는 말을 직접 들었는데, 누구와 술을 먹었는지는 밝히지 않았습니다. 어쩌면 그는 술 먹는 데 돈 쓸 필요가 없었을지도 모릅니다. 아마도 그 시절 그와 함게 술을 먹었던 사람들, 술자리에 함께 있었던 종업원들은 그가 가진 '정보'를 알았을 겁니다. 그에게 술 사 줄 기회를 잡으려고 애쓴 사람은 무척 많았을 겁니다. 물론 그의 친척들은 술 사 주지 않고도 알았을 거고요.

 이제껏 부동산 투기를 통해 가장 큰 이익을 본 사람들은 개발계획을 세운 사람들과 그 정보를 남보다 먼저 입수한 사람들입니다. 개발 정보가 위에서 아래로 흘러내리는 피라미드형 경로에서 '기자님'들은 꼭대기 가까운 곳에 있습니다. 중언부언 길게 쓸 필요는 없을 겁니다. '잘 아는' 기자님 덕에 개발 정보를 미리 입수해서 부동산 투기에 성공했다는 사람, 저도 더러 봤습니다. 유력 언론사의 역대 간부들 부동산 거래 내역과 소유 현황을 취재하면, 흥미로운 '단독 특종' 기사가 나올 겁니다.

 유력 언론사 기자님들이 열심히 보도한 덕에 이제 '이해충돌' 문제에 관해서는 국민적 '공감대'가 형성됐습니다. 이참에 정부가 추진 중인 '이해충돌 방지법'을 속히 제정하면 어떨까요? 개발계획을 수립하는 부처의 공무원과 계획을 심의하는 각종 위원회 의원, 국회의원과 지자체 의원, 개발 정보를 먼저 입수하는 기자 및 그들의 가족, 친척, 친지들은 당사자 재직 중 부동산을 매수할 수 없게 하거나, '개발 정보'와 무관하다는 사실을 충분히 소명한 후에야 매수할 수 있도록 하면, '부동산 투기'도 확실히 줄어들 겁니다. 물론 국회에서 이런 법을 만들 리 없고 기자님들이 이런 법을 지지할 리도 없으니, 그저 몽상일 뿐이지만. 20190126.

 

p374. 정정보도문

 "이 기사로 상처를 받은 분과 독자 여러분께 심심한 사과의 말씀을 드립니다. 아울러 본지 보도로 조 전 장관과 정 전 교수의 명예에 누를 끼친 데 대해 깊은 유감을 표합니다."

 조주빈 사진을 넣을 자리에 조국 전 장관 부부 사진을 실었던 세계일보의 '정정보도문'입니다. 한국 언론의 처참한 수준을 잘 보여주는 문장이비다.

 '유감'은 '마음에 꺼림칙한 점이 있다'는 뜻이고 '사과'는 '내가 지나쳤다'는 뜻이며, '사죄'는 '죄를 지었으니 용서해다오'라는 뜻입니다. 조 전 장관 부부에게 '사죄'해도 모자랄 일을 저질러 놓고 '유감'이라니요. 제3자인 독자에게 사과하고 피해 당사자에겐 '유감'? 말을 바로 쓸 책임이 있기에, 언론입니다.

 책임 있는 언론사라면, 이렇게 써야 합니다.

 "본지가 큰 잘못을 저질러 조 전 장관과 정 전 교수의 명예를 심각하게 훼손한 데 대해 깊이 사죄드리며, 합당한 책임을 지겠습니다."

 저런 신문도 언론사라는 사실에, '깊은 유감'을 표합니다.

 

p407. 진영숙

 1960년 4월19일, 한성여중 2학년 열다섯 살 진영숙은 어머니에게 편지를 남기고 시위에 참가했다가 총에 맞아 죽었습니다. 유관순이 삼일운동의 상징이 된 것처럼 진영숙도 4.19의 상징이 될 자격이 충분하다고 봅니다. 아래는 진영숙의 편지 내용입니다.

 

 시간이 없는 관계로 어머님 뵙지 못하고 떠납니다.

 끝까지 부정 선거 데모로 싸우겠습니다.

 지금 저와 저의 모든 친구들, 그리고 대한민국 모든 학생들은

 우리나라 민주주의를 위하여 피를 흘립니다.

 어머니, 데모에 나간 저를 책하지 마시옵소서.

 우리들이 아니면 누가 데모를 하겠습니까.

 저는 아직 철없는 줄 잘 압니다.

 그러나 국가와 민족을 위하는 길이 어떻다는 것을 잘 알고 있습니다.

 저의 모든 학우들은 죽음을 각오하고 나선 것입니다.

 저는 생명을 바쳐 싸우려고 합니다.

 데모하다가 죽어도 원이 없습니다. 

 어머닌 저를 사랑하시는 마음으로 무척 비통하게 생각하시겠지만,

 온 겨례의 앞날과 민족의 해방을 위하여 기뻐해 주세요.

 이미 저의 마음은 거리로 나가 있습니다.

 너무도 조급하여 손이 잘 놀려지지 않는군요.

 부디 몸 건강히 계세요.

 거듭 말씀드리지만 저의 목숨은 이미 바치려고 결심하였습니다.

 시간이 없는 관계상 이만 그치겠습니다.

 

 

p414. 창립기념일

 경향신문은 1906년 천주교에서 창간해 1910년까지 발행했습니다. 일제의 한국 강제병합과 동시에 폐간되었다가 해방 후인 1946년 천주고 서울교구가 같은 제호로 다시 발간했는데, 이때 '속간續刊이 아니라 창간創刊'이라고 선언했습니다. 이름은 계승하나 해방 이전의 역사와는 단절하겠다는 의지를 밝힌 것이라과 봐야 할 겁니다. 이후 경향신문 경영권은 여러 차례 이동했지만, 지금도 경향신문은 1946년 10월 6일을 창간일로 삼습니다.

 3.1운동 이후 서간도에 설립된 신흥무관학교는 수많은 독립투사를 양성했지만, 재정난으로 1년 반 만에 폐교되었습니다. 해방 후 신흥무관학교 부활위원회가 조직되어 1947년 2월 신흥전문학원을 세웠고, 1949년에는 신흥초급대학으로 승격했습니다. 한국전쟁 중이던 1951년, 피난 중이던 부산에서 교무과장이 학교 경영권을 인수해 1960년 경희대학교로 개명했습니다. 지난 2019년 신흥무관학교 설립 100주년 이었지만, 경희대학교는 이를 창립일로 기념하지 않았습니다. 경희대학교가 신흥무관학교의 역사를 계승하지 않는 데에는 나름의 생각이 있겠죠.

 조선일보는 3.1운동 이듬해인 1920년 3월 5일, 친일 경제단체인 대정실업친목회-대정大正은 당시 일본의 연호입니다-가 사이토 마코토 총독의 '민족 분열 통치'에 협조하기 위해 창간한 신문입니다. 창간 1년 뒤에는 다시 초특급 매국노 송병준이 조선일보를 인수해 3년 넘게 운영했습니다.

 조선일보 사옥에 "창간 100년'을 자랑하는 글귀가 걸린 지 꽤 됐습니다. 며칠 후엔 '창간 100주년 기념호'가 나오겠죠. 일제의 민족 분열 책동에 적극 협조한 초특급 매국노의 정신을 '창간 정신'으로 기념하는 것이 자랑스러운 일인지, 생각해보기 바랍니다.

 

 40년에 걸쳐 무역에 종사한 경험과 금융역사에 대한 해박한 지식을 바탕으로 경제현상에 대해 이해하기 쉽게 설명해주는 것이 저자의 최대의 미덕이다.

 코로나19 상황이 어느 정도 정리되어 가는 현재의 투자전략에 대해서도 생각해 볼 수 있는 괜찮은 내용들이 많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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p13

 

 1971년 닉슨쇼크로 금과 달러의 고리가 떨어져 나간 이후 미국은 근원인플레이션이 허용하는 한도 내에서 달러를 무제한으로 발행해 왔다. 이로 인해 노동으로 부가가치를 높이는 GDP보다 금융자산으로 부를 늘리는 자산소득이 서너 배 앞서가는 금융자본주의가 세계 경제와 부를 주도해 왔다.

 1970년만 해도 세계 금융자산의 규모는 세계 총생산 규모의 절반에 불과했다. 그러던 것이 10년 마다 2배씩 증가하여 2000년대 들어서는 세계 금융자산 규모가 세계 총생산 규모의 거의 4배에 육박했다. 심지어 헤지펀드가 주로 운영했던 파생상품 중 신용부도스와프 시가총액은 2007년 말에 62조 달러에 달해 당시 세계 총생산액 54조 달러보다도 커졌다. 인간의 속성이 투기로 치달아 단일 파생상품의 규모가 세계 총생산액보다도 커진 것이다. 이로 인해 터진 게 2008년 글로벌 금융위기였다.

 2008년 글로벌 금융위기의 교훈은 약효가 떨어진 지 오래다. 글로벌 금융위기 이후 양적완화로 유동성이 폭증하자 투기 거래가 급등했다. 2017년 연말 기준 세계 파생상품 시가총액은 무려 544달러에 달해 세계 총생산액 규모 78조 달러, 세계 주식시장 규모 81조 달러, 세계 채권시장 규모 215조 달러보다도 훨씬 더 커졌다. 인간의 탐욕, 특히 월가의 탐욕은 끝을 모른다.

 

p43

 '한 방울이라도 통 속에!'

 1960년에서 1970년대 공중화장실마다 붙어 있던 안내문이다. 학교, 예비군 훈련장, 버스터미널 등의 남자 화장실에는 이런 안내문과 함께 흰색 플라스틱 통이 놓여 있었다. 바로 오줌을 수집하기 위해서였다.

 사람의 오줌 속에 있는 우로키나아제라는 성분은 뇌졸증 치료제를 만드는 주원료다. 당시 우로키나아제는 1kg에 2,000달러였다. 마땅히 수출할 길이 없었던 우리나라에서는 오줌을 모아 화학처리를 한 뒤 일본에 팔아 돈을 벌었다. 그 돈은 1973년에는 50만 달러, 1974년에는 150만 달러에 달했다. 1인당 국민총생산이 1,000달러 남짓하던 시절, 우로키나아제는 상당히 매력적인 고가의 수출품이라 수집 대상에서 제외할 수 없었다. 훌륭한 수출품이었던 소변은 88올림픽으로 화장실 대부분이 수세식으로 바뀌며 수거하기 어려워졌다.

 참고로 우리 녹십자의 경우 중국 소변을 수입해 약을 만들었으나 품질이 낮아 북한 평양에 합작 공장을 설립해 문제를 해결했다. 북한은 에이즈 등 비뇨기성 질환이 거의 없어 좋은 품질의 소변이 수거되었다.

 

p45

 이런 일화도 있다. 담배의 국내 소비를 조금만 줄이면, 그러니까 담배 길이를 1cm만 줄이면 잎담배 1,400만 달러를 수출할 수 있다는 아이디어가 나왔다. 길이를 1cm를 줄이면 국내 소비자가 싫어한다는 의견에 결국 7mm만 줄여 600만 달러어치를 수출한 적도 있었다.

 

p62. 비극의 시작 '자이테크', 일석삼조 돈놀이

 일본 기업의 기세는 내부로부터 무너져 내리기 시작했다. 수출보다는 손쉬운 돈벌이의 유혹에 빠진 것이다. 1980년대 초반 일본 기업들은 '자이테크'라는 자산운용으로 엄청난 수익을 올렸다. 자이테크 수익이 크니 자연히 영업에는 소홀하게 되었다.

 자이테크 투기가 본격화된 것은 일본 기업들이 역외시장인 런던 유로본드 시장에 접근하면서부터였다. 역외시장이란 자국의 규제로부터 벗어나 자유롭게 자금을 조달할 수 있는 금융시장을 가리키는 말이다. 대표적인 역외시장으로는 유로통화시장과 유로채권시장이 있다.

 1981년 일본 대장성은 금융자유화 조치의 하나로 일본기업들이 유로본드시장에서 신주인수권부사채(BW)를 발행할 수 있도록 허용했다. 신주인수권부사채란 신주를 인수할 수 있는 권리가 있는 채권을 말한다. 일본 기업들은 자사 주가가 오를수록 BW채권 값이 따라 올랐기 때문에 아주 낮은 이자율로 채권을 발행할 수 있었다. 게다가 엔화 가치 상승이 지속되는 점을 이용해 달러 표시 BW를 발행한 뒤, 스와프(swap)시장에서 엔화 표시 채무로 바꾸어 엔화 자금을 일본으로 끌어들였다.

 '통화스와프'는 만기에 계약 당시 환율로 원금을 다시 반대 방향으로 매매하는 거래이다. 이에 따라 가치가 떨어지는 달러 대신 가치가 올라가는 엔화를 조달해 만기시점에 환차익까지 덤으로 얻었다. 그리고 통화스와프는 통화의 교환 외에 금리의 교환도 수반되어 양국 간의 금리 차이를 계산했기 때문에 일본 기업들은 자금 조달 과정에서 오히려 마이너스 이자를 지급했다. 곧 돈은 돈대로 빌리면서 오히려 이자를 받았다. 더 나아가 조달할 자금을 주식시장이나 연 8%를 보장하는 증권사 투금 계정에 투자해 막대한 차익을 남겼다. 돈을 빌리면서 되레 이자까지 받고 또 빌린 돈을 예치하고 이자를 받으니 꿩 먹고 알 먹는 셈이었다. 더구나 만기 때 엔화를 달러로 바꾸어 갚으니 환차익까지 남았다. 일석삼조였다.

 게다가 당시 미국은 두 자릿수 인플레이션을 잡기 위해 19%대의 고금리를 운영하고 있었다. 이는 일본 우대금리인 6%보다 3배나 높았다. 일본 투자자 입장에서는 미국 채권에 투자하면 일본에서보다 3배 이상 높은 투자수익률을 올릴 수 있었다. 이로써 일본 기업가들 사이에선 돈 놓고 돈 먹는 일명 '자이테크' 열풍이 분 것이다.

 재테크로 번 돈은 다시 일본 주식시장과 부동산에 투자되어 활황 장세를 이루었다. 그러자 자산 가격이 치솟기 시작했다. 버블이 시작된 것이다. 일본 기업들은 수출로 번 돈을 기업에 재투자하지 않고 주식시장과 부동산에 투자했다. 마침내 일본 주식시장 시가총액이 1987년 미국을 앞섰다. 땅값도 마찬가지였다. 버블이 한창일 당시 도쿄 땅을 팔면 미국 땅 전체를 살 수 있었다. 1988년이 되자 세계 10위권 은행은 모두 일본 차지가 되었다.

 버블의 한가운데 있을 때는 누구도 위기를 예상하지 못했다. 일본의 장기불황은 이렇게 형성된 거품이 붕괴하면서 시작됐다.

 

p95

 '워싱턴 컨센서스'는 1990년 전후로 등장한 미국의 경제체제 확산전략이다. 한마디로 외국의 금융시장과 외환시장 빗장을 강제로라도 열어 미국 자본의 활동무대로 만들겠다는 전략이다.

 외환위기 같은 위기발생을 제3국의 구조조정 기회로 삼아 미국식 시장경제체제인 신자유주의를 심겠다는 미 행정부와 IMF, 세계은행 정책결정자들 사이에서 이루어진 합의다.

 워싱턴 컨센서스는 '거세경제안정화, 경제자유화, 사유화, 민영화'가 그 뼈대이다. 개발도상국들이 시행해야 할 구조조정 내용은 '정부예산 삭감, 자본시장 자유화, 외환시장 개방, 관세인하, 국가 기간산업 민영화, 외국자본에 의한 국내 우량기업 합병/매수 허용, 정부규제 축소, 재산권 보호' 등이다.

 그런데 이런 권고를 수용하지 않을 때는 외환위기가 발생하면 이를 방치함으로써 구조조정 프로그램을 관철하는 기회로 삼는다는 것이다. 이처럼 제3세계의 외환위기를 구조조정의 기회로 삼아 신자유주의를 확산시킨다는 전략이다. 조지 소로스조차 이를 '시장근본주의'라고 비난했다.

 미국은 그때부터 유럽과 동남아 그리고 중남미 국가들을 대상으로 각개격파에 들어갔다. 월스트리트는 미국의 해외시장 개척의 선발대가 되었으며 특히 헤지펀드가 그 선봉장 노릇을 했다. 소로스 등 헤지펀드가 중남미를 시발로 1992~1993년 유럽통화 위기 때 핫머니로 유럽 중앙은행들을 유린하고, 1997년 7월 아시아 외환위기 때 먼저 태국을 초토화시켰다.

 

p140

 무자본 특수법인인 우리나라의 한국은행과는 달리 연준(FRB)은 자본금이 있는 주식회사로 그 지분은 민간은행들이 나누어 갖고 있다. 세계 각국의 주요 유대계 은행들이 대주주라는 것이 통설이다.

 제이피모건을 위시해 세계 금융시장의 큰손 로스차일드 가문의 런던과 베를린의 로스차일드은행, 그리고 석유재벌 록펠러 가문의 제이피모건체이스은행도 연준의 주요 주주다. 그 외에 파리의 라자르브라더스은행, 이탈리아의 이스라엘모세시프은행, 그리고 연준 창립위원장을 역임한 폴 워버그 가문의 바르부르크은행 등이 연준의 주주로 알려져 있다. 1917년 제정러시아를 대체할 새로운 임시정부가 결성되는데 2,000만 달러를 지원했던 쿤뢰브은행도 연준의 주주로 알려져 있다.

 다행스럽게도 세계 기축통화인 달러를 주무하는 기관의 대주주는 세계 각국에 고르게 분산되어 있다.

 

p142

 미국 수도 워싱턴에 위치한 연준 본점에는 이를 대표할 7명의 이사진을 선출해 여기서 추대된 대표 1명에게 관리책임을 맡겼다. 연준 본점에 있는 7명의 이사는 대통령이 지명하고 상원에서 인준하도록 되어 있다. 임기는 14년 단임이고, 일단 임명된 이사와 대표는 누구도 해고할 수 없다. 이는 이사의 독립성을 보장하기 위해서다. 새 이사의 임명 터울은 2년이다. 창립 초기 이사진에는 미국 재무부장관과 감사원장이 7명 이사에 속했다. 그러다 그나마도 민간이사로 교체되면서 연준은 미국 정부와는 완전 별개의 독립적인 기구가 되었다.

 연방준비은행이 생기기 전에는 뉴욕의 은행가들이 뉴욕 지역의 자금만 장악할 수 있었다. 그러나 이제는 국가 전체의 은행 준비금을 주관할 수 있게 되었다.

 

p166

 미국은 전통적으로 채무국가다. 그들은 호황기에는 빚을 내서 소비하고 수입해 즐긴다. 그리고 빚이 턱밑에 차오르면 달러 가치를 인위적으로 떨어뜨려 누적된 외상값, 곧 국제 채무의 대대적 탕감으로 덕을 본다. 이렇든 남의 빚으로 살아가는 국가는 약달러를 지향할 수밖에 없다. 그래야 빚 탕감 효과가 있기 때문이다.

 여기에 미국의 고민이 있다. 세계 기축통화로서의 위상을 지키기 위해서는 강달러를 지향해야 한다는 점이다. 여기서 강달러란 돈의 실질 가치가 높아서가 아니라 국제 결재 통화로서 강한 지배력을 뜻한다. 그러기 위해서는 시장이 달러를 요구하게 만들어야 한다. 방법은 여러 가지다. 특히 위기의 징후가 보이면 세계의 투자자들은 안전자산인 달러로 회귀하는데, 유럽 재정위기가 좋은 예이다.

 미국 곧 세계 기축통화국의 입장에선 세계 경기 위축과 통화 경색을 막기 위해 우선 달러를 많이 풀어야 한다. 그래야 기축통화의 장악력이 유지된다. 미국이 유럽의 재정위기 해결에 적극적으로 나서지 않았던 이유이다. 미국은 기축통화의 권력이 주는 엄청난 시뇨리지 효과를 양보 할 수 없는 입장이다.

 따라서 미국은 국내 재정정책상의 약달러 정책과 국제 기축 통화로서의 강달러 정책을 동시에 유지해야 하는 모순을 안고 있다. 어느 나라가 약한 통화를 외화보유고로 보유하겠는가? 이 모순된 딜레마를 가능한 한 눈치채지 못하도록 끌고 나가는 과정이 '교묘한 달러 곡예의 역사'이다. 이 모순이 바로 암호화폐가 화폐혁명의 불을 지피게 된 원인이기도 하다.

 

(2008 세계 금융위기의 원인)

p212. 과도한 주택 경기 진작 정책

 

 미국은 소비가 GDP에서 차지하는 비중이 70% 내외로 소비가 활발하게 살아나야 성장하는 나라다. 따라서 역대 정권들이 가장 손쉬운 부동산 경기 진작을 통한 경기부흥에 열을 올렸다.

 자기 집을 갖는 것은 모든 미국인의 꿈이었다. 소득세가 도입된 이래 주택 모기지 이자는 소득세 공제대상이라 혜택이 컸다. 그래서 대부분 급여생활자는 소득세와 주택임차료 대신 이를 모기지 이자로 활용해 집을 샀다.

 1987년 로널드 레이건 행정부는 자동차 구입과 신용카드 대출이자에 대한 소득세 공제는 폐지하면서 주택 모기지 이자만은 소득세 공제를 유지했다. 그러자 사람들은 주택을 담보로 모기지를 얻어 자동차 등을 사는 편법을 쓰기 시작해 1994년 주택담보의 68%가 자동차 구입 등 다른 목적에 사용되었다.

 게다가 1997년 빌 클린턴 정부는 경기부양의 하나로 주택건설경기를 진작시키기 위해 부부 합산의 경우 50만 달러 한도로 양도소득세를 폐지했다. 그러자 그때부터 미국인들은 주택을 투기대상으로 보기 시작했다.

 2001년 IT 거품 붕괴와 9/11 테러 이후 연준은 불황을 우려해 금리를 열세 차례나 급격하게 내려 2001년 6.5%였던 기준금리를 2003년 7월까지 1%로 끌어내렸다. 이러한 저금리 정책의 지속은 당연히 유동성 과잉을 불러왔다. 돈이 주체할 수 없을 정도로 많아진 금융기관들은 경쟁적으로 대출을 늘렸다. 그러자 부동산 수요가 늘면서 주택 가격이 슬금슬금 오르기 시작했다.

 

p213. 돈 한 푼 없이 집을 살 수 있는 길이 열리다

 

 조지 부시 대통령은 2004년 10월 재선운동에서 연거푸 내집 마련을 강조했다. 그러자 기다렸다는 듯이 각종 정책지원이 뒤따랐다. 주택이 투자대상으로 떠오르자 2005년에 구입한 주택의 40%는 1가구 2주택이었다.

 여기에 불을 붙인 것이 종잣돈 없이도 집을 살 수 있는 길이 생긴 것이다. 예를 들어 50만 달러짜리 집을 사기 위해서는 적어도 10~15만 달러 정도의 자기 돈이 있어야 했지만 2006년 이런 규정 자체를 아예 없애버려 보증금 없이 집을 살 수 있게 해주었다. 게다가 은행은 집값만 올라가면 된다는 이유로 주택구매자의 신용조사도 약식 처리하거나 생략했다.

 

p214.  대출채권의 증권화로 거의 무한대의 대출 여력이 생기다

 저금리 기조로 유동성이 풍부한 은행권은 대출경쟁에 혈안이 되었다. 게다가 장기주택담보대출을 증권화한 주택담보부증권(MBS)이 개발되었다. 이는 대출금을 조기에 회수하는 효과가 있었다. 이로써 은행들은 주택대출자금을 얼마든지 만들어 낼 수 있게 되면서부터 대출경쟁이 더 치열해졌다.

 이러다 보니 소득, 직업, 재산이 없어도 대출이 되는 NINJA(No Income, No Job or Asset)대출, 이른바 '묻지마 대출'이 기승을 부렸다.

 

p215. '묻지마 대출'을 부추긴 파생상품의 등장

 주택 가격이 계속 상승하든 데다 금리가 낮아 중산층과 서민들이 내 집 마련 대열에 대거 동참해 여러 해 동안 주택건설 호황으로 이어졌다. 이때 머리 좋은 유대금융인들이 대출은행의 불안을 덜어줄 파생상품을 개발했다. 바로 부채담보부증권(CDO)과 신용부도스와프(CDS)라는 신종 파상생품이었다.

 제이피모건의 블라이드 마스터스가 1995년 발명한 신용부토스와프는 금융시장 지형을 바꿔놓았다. 그녀가 개발한 신용부도스와프는 금융시장의 가장 원초적인 공포 곧 돈 떼이는 두려움을 해소시킨 획기적인 발명품이었다.

 원리는 간단하다. 예를 들어 한 금융사가 한 기업의 회사채를 구입한다고 치자. 문제는 리스크다. 기업이 망하기라도 하면 채권매입 금융사는 막대한 손실을 본다. 이럴 때 다른 보험사나 은행이 보험료를 받고 원금을 보장해주는 상품이 바로 신용부도스와프이다.

 집값이 계속 올라가면 문제가 없지만, 만약 떨어지면 연쇄적으로 대출 문제가 생길 수밖에 없는 구조였다. 그러나 은행들은 위험을 덜어 주는 파생상품 덕분에 큰 문제가 없다고 보았다. 단지 그 위험을 떼어내어 위험에 투자하는 제3자에게 전가시키면 된다고 생각했다.

 파생상품 덕분에 리스크 관리가 가능해지자 은행들은 앞다투어 신용등급이 낮은 사라들, 즉 프라임급 이하 비우량급에 해당하는 '서브프라임' 등급의 사람들에게까지도 담보가치 100%로 주택 대출을 해주었다. 이로써 수요가 폭증하면서 투기로 이어지는 부동산 가격 폭등이 나타나 5년 사이에 집값이 무려 75%나 올랐다.

 

p216. 급격한 금리인상의 부작용, 서브프라임 사태

 

 그때서야 연준은 무언가 시장이 심상치 않게 돌아가다고 느꼈다. 그리고 마음이 급해졌다. 과잉유동성에 의한 인플레이션을 우려하게 된 연준은 2004년 6월 이후 정기적으로 금리를 올려 2006년8월 5.25%까지 인상했다.

 금리를 내릴 적에도 쫓기듯 서둘렀는데, 이번에도 단기간에 급격하게 끌어 올렸다. 이것이 실책이었다. 당연히 부작용이 뒤따랐다.

 먼저 시장이 놀라 기준 금리 인상 이상으로 모기지 금리가 올라 주택 수요가 줄어들며 주택 가격이 떨어지기 시작했다. 대출받아 주택을 사서 다시 팔아 이윤을 얻으려 했던 사람들이 대출금조차 갚을 수 없을 만큼 주택 가격이 떨어졌다. 신용등급이 낮았던 서브프라임 대출에서부터 문제가 터졌다.

 

p217. 파생상품 남발이 일으킨 금융위기

 2008년 글로벌 금융위기의 요인은 여러 가지가 있겠지만 그 도화선에 불붙인 건 파생상품이었다. 2007년 장외거래 파생상품 중 신용부도스와프 거래 규모만도 약 62조 달러로 무려 그 무렵 세계 GDP 총액 54조 달러보다도 많았다. 이를 그린스펀은 점잖게 '비이성적' 과열이라 불렀으나 한마디로 미친 짓이었다.

 장외에서 거래되었기 "때문에 누가 누구한테 얼마나 팔았는지 알 수 없어 금융기관 간에 불신으로 돈거래가 막혔다. 곧 신용경색이 일어나 자금 순환에 문제가 생긴 것이 금융위기의 첫 단계였다.

 

-2008년 신용위기의 실체, 과잉유동성

 모든 금융위기의 원인은 '과잉유동성' 때문이었다. 역사적으로 부르는 용어만 조금씩 달랐다. 1907년 공황의 원인은 '과잉자본' 때문이라 했고, 1929년 대공항 원인은 과도한 '통화팽창' 정책의 결과라 했다. 결국 과잉유동성이 버블을 불러 도가 지나치자 터진 것으로 '과잉유동성'은 1907년, 1929년, 2008년 공황을 관통하는 공통의 키워드다.

 그런데 불행하게도 2008년 글로벌 금융위기를 제로 금리와 양적완화를 통해 또 유동성으로 막았다. 부실채권을 처리하지 못하고 돈을 살포해 봉합한 것이다. 금융권에 돈을 풀어 주식시장과 부동산시장 등 자산 가격을 부풀려 나락에 떨어졌던 부실한 은행들과 한계기업들을 구해낸 것이다.

 

p241

 2008년 글로벌 금융위기 와중에 선진국은 천문학적인 규모로 통화량을 증가시켜왔다. 또한 각국 금리도 사상 최저수준이었다. 그렇게 많은 돈이 풀렸음에도 물가가 안정되어 있었고, 일본과 유럽은 오히려 디플레이션을 걱정했다.

 양적완화 곧 금융권을 통한 돈 풀기는 담보력이 있는 상위계층에게 흘러들어가 자산 가격을 올린 반면 가계부채에 시달리는 서민들에게는 흘러가지 않아 소비자 물가는 오르지 않았기 때문이다.

 2020년 경제위기에는 더 많은 유동성이 풀렸다. 미국 경제학자 어빙 피셔는 '화폐수량설'로 물가변동을 명쾌하게 설명했다. 물가수준은 결국 화폐량과 유통속도에 달렸다는 이야기다. 생산품 가격을 P, 생산품 거래총량을 T, 화폐량을 M, 화폐유통 속도를 V라 한다면, 'MV=PT'라는 것이다.

 지금은 투자 대상을 찾지 못한 돈이 중앙은행 금고나 은행에서 자고 있다. 하지만 경기가 본격적으로 좋아지면 문제는 달라진다. 잠자고 있는 돈들이 투자처를 찾아 쏟아져 나오면 통화량의 유통 속도가 빨라진다.

 그러면 시중 유동성이 급격하게 증가하면서 인플레이션이 발생한다. 여기에 놀라 중앙은행이 급격한 계단식 금리인상을 서두르면 탈이 날 수 있다.

 그때는 기업부채 등의 부도사태가 터지면서 시장이 망가지거나 아니면 인플레이션의 쓰나미가 밀려올 가능성이 있다.

 

p251

 이란이 악의 축으로 지목된 이유는 두 가지다. 하나는 이란의 핵보유 의지와 장거리 미사일 개발이다. 이는 이스라엘로서는 묵과할 수 없는 사안이다. 또한 이란에 이러한 기술개발을 공여할 수 있는 나라로 북한이 주목받고 있다. 북한 역시 악의 축으로 불렸던 이유이다. 미국의 북한 견제는 이스라엘 측의 사주로 볼 수 있는 대목이다.

 

p256

 지난 10여 년 중국의 M2 공급량은 세계 최고였다. 그들의 GDP 대비 M2 비중은 2.1배에 달하지만, 미국은 제로 금리에 이어 4차례나 양적완화를 통해 유동성을 풀었음에도 0.9배에 불과하다. 중국이 얼마나 많은 돈을 풀었는지 알 수 있다. 당연히 지금의 중국 경제에 거품이 많이 끼어 있을 수밖에 없다.

 여기에 중국의 고민이 있다. 인민은행은 2019년 초부터 버블이 만연해 있는 중국 사회의 '거품' 빼기에 나설 것임을 분명히 하고 공격적인 긴축정책을 펴왔다. 그러던 차에 무역전쟁이 터지자 순식간에 위기에 봉착했다. 그러지 않아도 긴축으로 인한 자금난에 수출마저 급감하게 되자 상당수 기업이 부도 위기에 내몰렸다. 최근 인민은행이 정책을 바꾸어 시중 은행에 기업들에 대한 유동성 공급을 적극적으로 늘리라고 지시한 것은 중국 정부의 위기감을 보여주는 대표적 사례이다.

 무역전쟁이 격화되자 중국 대기업의 부도가 잇따르면서 중국 경제에 어두운 그림자를 드리우고 있다. 신용등급이 무려 AAA였던 '상하이화신국제' 회사도 부도를 냈다. 중국의 최대 수출국인 미국이 관세 폭탄으로 사실상 시장을 축소하자 상당수 중국 기업이 자금 압박에 휘청거리다 부도를 내기 시작한 것이다.

 

p261. 워싱턴 컨센서스의 목표, 중국의 온전한 개혁

 무역전쟁이 처음 시작되었을 때만 해도 중국은 미국이 무역수지 적자 폭을 줄이기 위한 말 그대로 무역전쟁인줄 알았다. 그런데 무역전쟁이 진행될수록 전선이 다각도로 펼쳐지는 걸 보고서야 이게 단순한 무역전쟁이 아니라 중국 시장을 자유경제체제 곧 개방경제로 만들겠다는 미국의 의도와 더불어 중국 굴기의 꿈을 사전에 봉쇄하려는 패권전쟁임을 인식하게 되었다.

 우선 경제적 측면에서 미국은 중국을 온전한 자유 시장체제 곧 개방경제로 바꾸어 놓겠다는 것이다. 중국이 WTO 가입 때 약속했던 사안들을 포함해 금융시장과 외환시장의 와전개방이 미국의 목표다.

 우선 미국은 보복관세율 부과로 2019년 중국 수입품을 600억 달러어치 줄인 데 이어 올해는 공급망 다변화 정책을 추진 중이다. 중국 제조업에 미국 시장을 맡기지 않고 중국에 진출한 미국 기업의 귀환 독려와 더불어 제조기지의 다변화를 추진하고 있다. 특히 이번 코로나 사태를 계기로 마스크와 인공호흡기 부족 사태를 겪으면서 이의 추진이 더 빨라지고 있다.

 이뿐 아니다. 사회적으로는 인터넷 개방 요구 등 중국의 민주주의를 고양시켜 자유민주주의 사회체제로의 전환을, 군사적으로는 중국의 팽창전략을 더는 좌시하지 않겠다는 경고를 하고 있다. 궁극적으로 중국의 공산당 1당 독재 체제를 끝장내고 민주주의 국가로 재탄생시키겠다는 것이 목표다.

 

p278

 금융자산이 이렇게 많이 늘어난 것은 화폐의 본원적 기능인 거래적 동기에 의한 화폐 수요 증가보다는 투기적 수요가 많이 증가했다는 뜻이기도 하다. 일일 평균 외환거래액이 2004년 3조 달러가 넘어섰다. 이 가운데 상품과 서비스의 무역거래와 장기투자에 필요한 외환은 하루 300억 달러로 1%에 불과했다.

 

p307. 연준의 간접 통화정책

  유동성을 줄이더라도 가능한 일반인들이 눈치 못 채게 연준이 직접 나서지 않고 시중 은행들로 하여금 국채를 사들이게 할 것으로 보인다. 사실 이는 그리 어려운 작업이 아니다. 지금 연준이 하고 있는 일을 반대로만 하면 되기 때문이다.

 연준의 자산 곧 본원통화 발행액은 6월 10일 7조 1,689억 달러로 정점을 찍은 이후 오히려 줄고 있다. 유동성을 거둬들이고 있는 것이다. 그렇다고 공약한 양적완화를 안하는 것은 아니다. 매월 국채와 모기지 증권을 사들이고는 있으나 그 보다 더 많은 돈을 레포 시장과 외국 중앙은행 계좌로부터 거둬들이고 있는 것이다.

 연준이 긴축으로 돌아섰다면, 인플레이션 진행과 달러 하락세가 멈춰야 하는 게 아닌가? 아니다, 연준은 지금 간접적인 방법으로 유동성을 늘리고 있다. 대형 은행들로 하여금 시중에 돈을 풀게 하는 방법이다.

 연준에는 은행들의 지불준비금이 보관되어 있다. 2008년 글로벌 금융위기 이후부터 법정 지불 준비금을 초과하는 부분에 대해서는 연준이 이자를 지급하고 있다. 이를 '초과지급준비금리'(IOER)라고 한다. 이를 기준금리 범위 내에서 운용하고 있다. 지금 연준은 현재 초과지급준비금리를 0.1%로 낮게 운용하고 있다. 은행들이 그 이상의 수익을 원한다면 돈을 연준에 쌓아두지 말고 밖으로 들고 나가 수익을 거두라는 이야기다.

 더구나 연준은 대형은행들의 위험 감수를 억제하는 '보충적 레버리지 비율(SLR)' 곧 자본요건을 2021년 3월31일까지 1년간 일시적으로 완화했다. 연준은 이를 완화해주면서 한마디 보태는 것을 잊지 않았다. '이 돈으로 자사주 매입 등 엉뚱한 곳에 쓰지 마라.'는 경고였다. 즉 초과지불준비금으로 국채를 사라는 이야기다. 실제 위 그래프에서 보듯 대형 은행들이 6월 이후 초과지불준비금을 지속적으로 줄이고 있다. 시중에 돈이 풀리고 있는 것이다.

 

p320. 레이 달리오의 추천

 인플레이션이 발생하고 달러 가치가 하락하고 있는 이런 상황을 투자자들은 어떻게 대처해야 할까? 세계 최대의 헤지펀드를 운용하고 있는 레이 달리오는 지금 단계에서 "현금은 쓰레기."라고 단언하며 '물가 연동체와 금 그리고 원자재'에 나누어 분산투자 할 것을 권한다.

 

p349

 이래저래 투자자들은 혼란스럽다. 지금은 유동성 장세인 만큼 주자자들은 연준의 다음 행보를 유심히 지켜보아야 한다. 그리고 "달러 가치 하락, 광의의 통화 M2의 가파른 상승, 인플레이션 예상, 외환시장 우려, 버블 붕괴의 위험, 연준의 애매한 스탠스 등'의 혼란 속에서 투자자들은 자기 자산을 지켜줄 수 있는 방법을 찾아야 한다.

 포트폴리오에 안전 자산인 금, 은을 필히 추가해야 하는 이유이다.

 

p375

 이런 현상이 벌어지는 이유는 금과 은은 쓰임새가 조금 다르기 때문이다. 금은 장식용 수요가 전체의 절반이고 투기용 수요는 24% 정도, 산업용 수요는 10% 안팎이다. 그런데 은은 산업용 수요가 절반을 넘는다. 전기 전달능력이 뛰어나 컴퓨터, 전자부품, 의료기기 등의 재료로 쓰인다. 항균 능력도 뛰어나 항균제 성분으로도 쓰인다. 그래서 경기불황이 예상되면 산업용은 수요가 줄어들어 은값이 금값보다 더 빨리 내리고 경기회복이 예상되면 반대로 더 빨리 올라간다. 그래서 은값은 금값보다 가격 변동성이 크다.

 

p398

 듀크대 캠밸 하비 교수는 "비트코인 기술은 우리가 생각하는 돈의 개념을 완전히 뒤바꿀 것이며 종이화폐가 사라지는 건 시간문제"라고 말했다. 그에 따르면 모든 거래 내역이 정부의 블록체인에 기록될 수 있기 때문에 범죄자들이 돈을 숨기거나 세탁하는 게 어려워지는 것이야 말로 국가 암호화폐의 장점이라고 주장했다. 그는 연방코인을 "연방정부가 모든 거래 내역을 들여다볼 수 있는 디지털화폐"라고 정의하면서 초기에 자유주의자들이 정부통제를 벗어날 수단으로 생각했던 블록체인기술이 국민들에 대한 완벽한 통제를 가능하게 할 것이라고 했다.

 

p405

 각국 중앙은행이 추진 중인 디지털화폐는 추적 가능한 중앙집권형 화폐이다. 그런데 국민들의 입장에서 자신들의 계좌가 추적 당한다고 생각하면 반발이 클 수밖에 없다. 그래서 중앙은행들은 디지털화폐의 운영체계를 이원화하는 작업을 추진하고 있다. 곧 중앙은행에서 상업은행으로 디지털화폐를 보낼 때는 추적 가능한 디지털화폐를 보내지만, 상업은행과 개인 또는 기업 간 거래에는 추적 불가능한 익명성이 보장된 암호화폐 시스템과의 연동을 검토하고 있다. 중국은 국가주도 블록체인 서비스 네트워크(BSN)에 '허가형' 블록체인 하이퍼레저 패브릭과 이더리움, 이오스 플랫폼을 포함하는 것으로 알려졌다.

 이원화 시스템을 사용하는 이유는 두 가지다. 하나는 중앙은행이 초당 30만 건 이상 거래되는 소매시장까지 관여할 경우 통화관리비용이 너무 많이 든다는 점이고, 또 다른 하나는 소액 거래에서 개인의 익명성을 최대한 보장해주기 위함이다. 다만 이는 무제한의 익명성 보장이 아니라 '관리 가능한 익명성' 보장을 의미한다. 곧 일정액 이상의 큰 금액의 거래는 실명 전자지갑을 통해 거래되어야 하며, 마약, 도막 등 불법거래 자금으로 의심될 경우 정부는 영장을 발부받아 거래를 추적할 수 있다. 정부는 가능한 국민들의 거래 익명성을 최대한 존중하지만 필요시에는 개인의 거래내역을 추적할 수 있다는 말이다. 빅브라더 사회의 본격적 도래이다.

 

 에세이로 분류되어 있지만 내용상 인문으로 봐도 무방할 듯 싶다.

한국인으로서 일본 메이지가쿠인대 교수로 있는 서정민이라는 분이 쓴 에세이집이다.

신변잡기적인 내용도 있지만 한일관계라든가 종교 그리고 철학적인 부분도 혼재되어 있다.

일본에서 교수를 하시는 한국인이라는 점에서 경계인의 시각에서 한일관계의 문제점을 다루는 관점은 참고할 만하다.

제목에 이끌려서 본 책인데 내용이 상당히 좋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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p206

 민족주의는, 고난 받는 민족의 최소한의 민족적 자존을 회복하는 데에만 긍정적으로 유효하다.. 역사에서 자주 보았듯이 우월적, 배타적, 공격적인 민족주의는 피아를 막론하고 배격해야 한다. 이러한 측면에서 한국 민족주의는 '수비적', '고난 받는 민족주의'의 긍정적 테제를 지난 바 있다. 그러나 현황은, 한국 민족주의의 실체는 사라지고 남북한 모두에 유사 민족주의만 존재한다. 그리고 그것을 통해 민족의 과제가 해결될 수 있으리라는 기대도 현저히 상실되었다. 한국내의 민족주의 갈등은 구민족주의를 거짓 민족주의이자 '보수 꼴통'으로, 신민족주의를 사회주의이자 '종북 빨갱이'로 몰아붙이는 상호 불신과 논쟁만 거세다.

 

p211

 지난 번 한국문학기행 중 미당시문학관에서 마주한 서정주의 고백문은 실제로 내게 많은 생각을 더해주었다.

 

 "나에게 친일문인이라고 하는 이들이 있는데, 그것을 부정하지 않는다. 분명히 그것은 잘못된 일이라고 생각한다. 1943년 여름부터 겨울까지 최재서가 경영하던 '인문사'에서 일본어 잡지 '국민문학' 편집 일을 하는 동안 당시 총독부 산하에 소속된 조선국민총력연맹지부 요구대로 작품을 쓴 일이 있다. 쓰라는 대로 쓸 수밖에 없었고, 모든 정보가 차단된 상태에서 해방이 그토록 빨리 오리라 생각한 사람은 아무도 없었을 것이다. 젊은 그 시절 살기 위해 어쩔 수 없었던 그것이 새삼 아픔으로 다가온다. 친일문제는 분명히 잘못된 일이며 깨끗하게 청산되어야 마땅하다. 당시 나의 정신적 실상을 세상을 뜨기 전에 꼭 글로 남기겠다.

 

 이렇게 전제한 서정주는 자신의 친일작품 일부도 인용해 놓았다.

 

 "수백 척의 비행기와 대포와 폭발탄과 머리털이 샛노란 벌레 같은 병정을 싣고 우리의 땅과 목숨을 뺏으러 온 원수 영미의 항공모함을 그대 몸뚱이로 내리쳐서 깨었는가? 깨뜨리며 자네도 깨졌는가. 장하도다. 우리의 육군항공 오장 마쓰이 히데오여"

 

 서정주의 고백 수준이 결코 높거나 만족스럽다고 할 수는 없다. 오히려 누가 보아도 '변명'에 가깝다. "쓰라는 대로 쓸 수밖에 없었고," "모든 정보가 차단된 상태에서 해방이 그토록 빨리 오리라 생각한 사람은 아무도 없었을 것", "살기 위해 어쩔 수 없었던 그것" 등의 표현은 영락없이 구차한 변명으로밖에 들리지 않는다. 그러나 그것도 중요하다. '분명히 잘못된 일'이라고 전제하고, 자신이 남긴 행적을 그대로 증거하는 일 자체가 필요하다. 이보다 훨씬 뒤인 최근의 일이지만, 결코 '역사적 정죄'가 아니라 '역사적 정리'라고 강조한 민족문제연구소의 『친일인명사전』 편찬과정에서 제기되었던 친일인사 후손들의 어불성설 이의제기가 새삼 우리 가슴을 꽉 막히게 한다. 역사의 현장이 실존적인 고뇌 그 자체라는 것은 역사가들 스스로가 더욱 잘 안다. 사실과 고백, 그것처럼 역사인식을 맑게 해주는 기제도 드물다.

 

 

 우리가 익히 알고 있는 좋은 것이라는 생각이 정말 그렇지는 않을 수도 있다는 것을 알려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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p17

 기원전 183년에 카르타고의 장군이었던 한니발은 아편을 이용하여 자살했다. 그리고 클라우디우스 황제의 황후였던 아그리파는 자신이 낳은 아들 네로를 황제로 만들기 위해 열네 살짜리 양아들을 아편으로 독살했다.

 아편에 대한 이야기는 신약 성경에서도 발견할 수 있다. 마태복음 27장 34절에는 예수가 십자가에 매달렸을 때 그를 따르던 사람들이 고통을 줄이기 위해 무언가를 주었다고 기술되어 있다.

 '쓸개 탄 포도주를 예수께 주어 마시게 하려 하였더니 예수께서 맛보시고 마시고자 하지 아니하시더라'

 아편은 쓰기 때문에 포도주나 맥주에 섞어 마시는 경우가 많았다. 성경학자들은 '쓴 것'을 뜻하는 쓸개가 사실은 아편이었을것으로 추정하고 있다.

 

 아편이 중국에 처음 소개된 것은 7세기였다. 처음에는 주로 의학적인 목적으로 사용되었다. 때로는 감미료나 과자에 첨가하기도 했다. 기분 전환용이었던 아편이 포르투갈 사람들이 가져온 담뱃대를 이용해 피우면서 모든 것이 변했다. 중국 사람들은 충분한 아편을 확보할 수 없었다.

 1660년에 영국 회사가 인도에서 중국으로 612kg의 아편을 들여왔다. 1720년에는 1만 5000kg으로 늘었고 1773년에는 7만 5000kg이 되었다. 이로 인해 약 300만 명의 중국인들이 아편 중독자가 됐다. 그러자 중국 정부가 아편 흡연을 금지했지만 금지조치는 별 효과가 없었다.

 놀랍게도 1839년 영국은 2500톤의 아편을 중국에 수출해 적어도 중국인의 25%가 아편에 중독됐다. 어떤 지역에서는 주민의 90%가 중독되기도 했다. 이로 인해 중국 사회가 붕괴 직전에 이르면서 중국 정부는 영국에게 아편 수입의 중단을 요구했다.

 영국이 이를 거절하자 전국적인 중독 현상과 범죄의 확산을 방지하는 데 전력을 기울이던 중국 관원들은 다음 조치에 들어갔다.

 1839년 흠차대신이었던 임칙서가 영국 아편 1200톤을 압수해 폐기했다. 이로 인해 영국과 중국 사이에 전쟁이 일어났다. 1839년과 1860년 사이에 영국과 중국은 두 번의 아편 전쟁을 치ㄹ렀고, 이 두 번의 전쟁에서 중국이 모두 패배했다. 그 결과 중국은 아편 수입을 위해 더 많은 항구를 개방해야 했고, 영국에게 2100만 달러를 보상해야 했으며, 홍콩을 중국에게 조차해야 했다.

 중국은 아편을 합법화했다. 1900년에 중국은 3900톤의 아편을 수입했고, 1300만 명 이상이 중독되었다.

 

p64

 이처럼 버터에서 '심장 건강'에 좋다는 마가린으로 바꿨지만 미국의 심장병 발병율은 오히려 증가했다. 정책 수립자들이 실제로는 마가린이 '심장에 안 좋은 건강 대체품'이라는 것을 알기까지는 수십 년이 걸렸다.

 다음 20년 동안 지방과 심장병의 관계를 밝혀내기 위해 30만 명을 대상으로 1억 달러가 소요되는 본격적인 연구가 진행되었다. 결론은 아무런 관련이 없다는 것이었다. 이 연구 결과에도 공식적인 정부 정책은 바뀌지 않았다. 이 연구를 주도했던 하버드 대학의 의생태학자 월터 윌렛은 격분했다. 그는 '권장 사항을 바꾸기 위해서는 높은 수준의 증명이 필요하다고 말한다. 그것을 만들 때는 높은 수준의 증명이 전혀 없었으면서 그렇게 말하는 것은 역설적이다'라고 말했다.

 알셀 키스와 맥거번 위원회가 지방에 대해 잘못된 결론을 내렸던 것은 모든 지방이 똑같다고 생각했기 때문이다. 그들은 포화지방, 불포화지방, 시스 지방 그리고 가장 중요한 트랜스지방과 같은 여러 가지 형태의 지방에 대해 몰랐다. 이로 인해 미국인들은 무지에 대한 큰 대가를 치러야 했다.

 

p67

 두 가지 지방의 상대적 양을 명확히 알게 된 1980년대 초의 여러 연구들은 포화지방이 심장병 위험을 증가시킨다는 것을 보여 주었다. 이런 연구로 인해 불포화지방은 좋은 것이고 포화지방은 악마라는 인식이 확산되었다. 이에 따라 두 단체가 미국 식품에서 포화지방을 제거하기 위한 운동을 벌였다. 그들이 잘못되었다는 것을 알게 된 것은 훨씬 후의 일이다.

 

p191

 여기에서 배울 수 있는 교훈은 그 시대의 문화와 어울리는 과학적 편견을 경계하라는 것이다. 다시 말해 시대정신을 경계해야 한다는 것이다.

 

p273

 

 하지만 환경보호주의자들은 그렇게 보지 않았다. 레이첼 카슨의 《침묵의 봄》에 의해 고무된 환경보호주의자들은 DDT의 제거를 목표로 했다.

 1969년 위스콘신관 애리조나가 DDT의 사용을 금지했다. 

 역설적인 것은 살아남아 있는 화학물질들이 DDT보다 인간에게 훨씬 더 위험하다는 것이었다.

 살충제에 대한 대중들의 두려움을 알고 있었던 리처드 닉슨 대통령은 농무부에서 적절한 대체 살충제 개발이 가능하지 않을 것이라고 예상했음에도 불구하고 1970년 말까지 미국에서 DDT의 사용을 금지하겠다고 약속했다.

 1972년 새롭게 만들어진 환경보호국 책임자였던 윌리엄 러클하우스가 범미보건기구, 세계보건기구 그리고 많은 미국 공중건강 옹호 단체들의 강력한 반대에도 불구하고 미국에서의 DDT 사용을 금지했다. 다른 나라들도 이에 따랐다.

 공중보건 당국자들은 다가올 재앙을 예견하고 여러 국가들에게 DDT를 계속 생산할 것을 요구했지만 때는 이미 너무 늦었다. 1970년대 중반에 환경보호단체들의 압력을 받아 국제 DDT 저지 프로그램이 사라져버렸다. 《침묵의 봄》에 의해 고무된 사람들이 DDT로부터 모기를 구한 것이다. 대신 모기에 의해 죽어가는 어린이들을 구하지는 않았다.

 

 DDT를 사다리로 삼아 미국은 시궁창을 나올 수 있었고, 학질 모기를 박멸하여 더 이상 시민들이 말라리아로 고통받지 않게 되었다. 그런 다음 환경보호라는 이름으로 미국인들은 사다리를 걷어버렸다. 이로 인해 개발 도상 국가들은 제대로 작동하지 않는 생물학적인 방법이나 그들에게 부담스러운 말라리아 치료제 중 하나를 선택해야 했다.

 환경보호국이 미국에서 DDT 사용을 금지한 1972년 이후 약 5000만 명이 말라리아로 죽었다. 그들 중 대부분은 다섯 살 미만의 어린이들이었다.

《침묵의 봄》이 준 충격의 예는 얼마든지 있따.

 1952년과 1962년 사이 인도에서 DDT 살포로 매년 발생하는 말라리아 환자의 수가 1억 명에서 6만 명으로 줄었다. 하지만 더 이상 이 살충제를 사용할 수 없게 된 1970년대 말에 말라리아 환자의 수는 다시 600만 명으로 늘어났다.

 스리랑카에서 DDT 사용 전에는 280만 명이 말라리아로 고통받았다. DDT 살포를 중지한 1964년에는 단지 17명만이 말라리아에 걸렸다. 그러나 더 이상 DDT를 사용할 수 없게 된 1968년과 1970년 사이에는 스리랑카에서 말라리아가 크게 유행하여 1500만 명이 감염되었다.

 1997년에 DDT 사용을 금지한 남아프리카에서는 말라리아 환자의 수가 8500만에서 4만 2000으로 늘어났고, 사망자도 22명에서 320명으로 늘어났다.

 결국 99개 나라에서 사라진 말라리아 대부분은 DDT를 사용해서 박멸했다. 때문에 작가 마이클 크라이튼은 'DDT의 사용 금지는 20세기에 있었던 가장 수치스러운 사건이다. 우리는 DDT 사용 금지가 가져올 결과에 대해 더 많은 것을 알고 있었지만 DDT의 사용을 금지했고, 이로 인해 세계의 많은 사람들이 죽어가는 것을 방치했다. 우리는 이에 대해 조금도 개의치 않았다'고 했다.

 

 환경보호주의자들은 DDT를 독극물이라고 생각했다. 그들은 DDT의 사용을 금지하면 더 많은 사람들이 말라리아로 죽어 가겠지만, DDT의 사용을 금지하지 않으면 백혈병을 비롯한 여러가지 암뿐만 아니라 다양한 다른 질병으로 고통을 받다 죽어갈 것이라고 주장했다.

 그러나 이런 주장에는 한 가지 문제가 있었다. 《침묵의 봄》에서의 카슨의 경고에도 불구하고 유럽, 캐나다, 미국에서의 연구는 DDT가 간 질환, 조산, 선천성 장애, 백혈병 그리고 그녀가 주장했던 어떤 다른 질병도 유발하지 않는다는 것을 보여주었다. 실제로 DDT 시대에 미국에서 증가했던 암은 흡연으로 인해 발생하는 폐암이었다.

 논란의 여지는 있지만 DDT는 지금까지 발명된 가장 안전한 살충제였다. DDT의 사용이 금지된 후 DDT 대신 사용하는 다른 어떤 살충제보다 DDT가 더 안전하다.

 환경보호주의자들은 지구에 우리만 사는 것이 아니라고 주장한다. 우리는 다른 많은 생명체들과 함께 지구를 공유하고 있다는 것이다. 우리는 그들에게도 책임이 있는 것이 아닐까?

《침묵의 봄》의 마지막 역설은 레이첼 카슨이 DDT가 인간에게 주는 영향을 과장했을 뿐만 아니라 동물의 건강에 주는 영향에 대해서도 과장했다는 것이다.

 

p288

 환경보호국(EPA) 관리들이 DDT의 사용 금지를 결정할 때, 그들은 선택할 수 있는 두 종류의 자료를 가지고 있었다.

 하나는 화학, 독성학, 농경, 환경보건 분야에서 일하는 100명 이상의 전문가들이 만든 수백 개의 그래프와 그림을 포함하고 있는 9000쪽 이상의 보고서였다. 이 보고서는 DDT가 새들을 죽이지 않고, 물고기를 죽이지 않으며, 사람들에게 만성 질병을 유발하지 않는다고 결론짓고 있었다. 이 보고서는 엄청나게 지루했지만 정확했다.

 또 다른 증거는 아름답게 쓰였고, 성서적인 배음으로 가슴을 뛰게 만드는 이야기인 레이첼 카슨의 《침묵의 봄》이었다. 그러나 전문가들의 보고서와는 달리 이것은 충분한 자료를 포함하지 않은 긴 일화였다.

 예를 들면 DDT로 인해 독수리가 죽어간다는 것을 증명하기 위해 카슨은 새 관찰이 취미인 플로리다의 은퇴한 은행가의 관찰에 의존했다.

 결국 DDT의 사용을 금지하기로 한 EPA의 결정은 자료를 기반으로 이루어지지 않았다. 그것은 잘못된 정보로 인한 공포를 기반으로 하고 있었다.

 

p332

 선진국에서는 세균이나 바이러스 감염에 의한 치명적인 질병이 줄어들었지만 천식이나 알레르기와 같은 질병은 오히려 증가했다. 이것을 산업화 탓이라고만 할 수는 없을 것이다.

 위생시설의 예상하지 못했던 문제는 뉴잉글랜드 의학 저널에 실린 '지저분하게 먹어라'라는 제목의 글을 통해서도 알 수 있다.

 개발도상국의 어린이들은 태어날 때부터 세균 폭탄을 맞게 된다. 그 결과 그들의 장에는 선진국에서는 드문 기생충과 독성 물질을 분비하는 세균들이 많이 살게 된다. 이런 기생충이나 세균들로 인해 영양결핍에 걸리거나 죽을 수도 있지만 천식이나 알레르기로 고생할 가능성은 적어진다. 연구자들은 이것을 '위생가설'이라고 부른다.

 핵심은 모든 것에는 항상 대가가 따른다는 것이다. 우리가 해야 할 일은 특정한 기술이 대가만큼의 가치가 있느냐 하는 것을 판단하는 일이다. 그리고 우리는 어떤 기술이 수십 년 또는 수백 년 우리 주위에 있었다고 해서 예외라고 생각해서는 안 된다. 모든 기술은 계속적으로 평가해야 한다. 아마도 가장 좋은 예가 전신마취이다.

 전신마취는 150년 이상 사용되어왔지만 최근에 와서야 몇 년 동안 집중력과 기억력에 영향을 준다는 것이 밝혀졌다. 펜실베이니아 대학의 마취과 교수인 로데릭 에켄호프는 '부분 마취도 문제가 없는 것은 아니다'라고 말했다.

 

p346

 화학적 이름을 가진 물질에 대한 우리의 거부감은 쉽게 없어질 것 같지 않다. 몇 년 전 코미디언 펜과 텔러가 한 가지 실험을 했다. 그들은 캘리포니아에서 열린 박람회에 친구를 보내 일산화이수소 dihydrogen monoxide 가 우리 건강에 나쁘므로 이 화학물질을 금지하자는 청원에 서명을 받도록 했다. 이수 dihydrogen 라는 것은 두 개의 수소 원자를 뜻했고, 일산화 monoxide는 하나의 산소 원자를 뜻했으므로 일산화이수소는 물(H2O)을 의미했다. 그럼에도 화학물질명을 사용하여 그 친구는 수백 명의 사람들이 지구상에서 물을 금지하자는 데 동의하도록 할 수 있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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