애널리스트가 쓴 근현대의 주요 경제적 사건에 대한 기록과 그 해석. 책의 목적은 주요 경제 이벤트에 대한 근본적이고 간략한 경제적 해석에 있는 것 같다. 내용이 깊진 않지만 핵심을 짚는다는 점에서 경제 인사이트를 키우는 데 도움이 된다.

 특히 외환위기 등 현대의 경제위기 상황에서 던지는 화두에 대해 핵심원인을 짚어나가는 부분은 많은 도움이 된다. 그리고 논의에 사용된 참고문헌들을 바로 그 챕터 말미에 소개하는데 이 도서들을 보면 경제적 지식을 높이는데 큰 도움이 될 것 같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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p48

 15세기에 유럽에서 산출된 금은 당시 수요에 비해 매우 부족했다. 일부 역사학자들의 추정에 따르면 1400년에 유럽 내부의 금 산출량은 4통을 넘지 않았다. 게다가 동방 무역으로 지속적으로 금이 유출되고 있기에, 이 정도 생산량으로는 경제가 제대로 돌아가기 어려웠다. 돈의 공급량이 부족하면 사람들은 상품과 서비스를 구입하는 데 쓰는 돈을 절약하려 노력하고, 그 결과 물가가 내려간다. 콜럼버스와 바스코 다 가마 등 수많은 모험가가 아프리카 희망봉을 돌아 아시아로 향하고, 인도를 찾아 대서양을 횡단했던 데에는 금을 비롯한 귀금속의 가격 상승이 그 배경으로 작용했던 셈이다.

 

p242

 특히 1979년 2월, 친미 성향의 팔레비 왕조가 무너지고 새롭게 들어선 이란의 이슬람 원리주의 정부가 반미 노선을 강화하면서 국제 유가는 폭등했고, 나아가 이라크의 후세인 정부가 1980년 9월 이란을 침공하면서, 제2차 석유파동이 일어났다. 1979년 1월까지만 해도 석유 가격은 배럴당 14.8달러 내외였지만, 1980년 4월 39.5달러까지 급등했다. 

 그런데 제2차 석유파동의 충격은 오래가지 않았다. 1983년 2월 석유 가격은 배럴당 29.0달러로 떨어졌고, 급기야 1986년 3월에는 12.6달러까지 폭락하고 말았다. 세계 2위와 4위의 매장량을 자랑하는 이란과 이라크의 석유 생산이 1988년까지 사실상 중단되었음에도 불구하고 왜 유가는 폭락했을까?

 가장 직접적인 이유는 미국의 금리, 특히 실질금리가 인상된 것이다. <도표 5-4>에 나타난 것처럼, 미국의 실질 정책금리가 1980년대 초반 8%포인트까지 상승하면서, 달러 자산을 보유할 실익이 확대되었다. 실질 정책금리란, 정책금리에서 소비자물가 상승률을 뺀 것인데 인플레를 감안하고도 수령할 수 있는 실질적인 은행 예금 이자율을 의미한다. 따라서 달러로 수출 대금을 받는 산유국 입장에서는 달러 가치가 상승하면 원유 가격의 인상을 위해 노력할 동기가 사라진다.

 나아가 달러 가치 상승에 대한 기대가 높아질 때, 상품을 비롯한 이른바 비非달러 자산에 대한 투자 매력이 약화되는 것은 당연한 일이다. 1971년 닉슨 쇼크에서 확인되듯, 금을 비롯한 전 세계 상품 가격이 폭등했던 가장 큰 이유는 기축통화로서 달러의 위치가 흔들린 데 있었다. 그러나 반대로 달러의 위상이 다시 예전처럼 굳건해지면, 원유나 금처럼 변동성이 큰 이른바 '위험자산'에 굳이 투자할 이유가 없어진다.

 그렇지만 이 대목에서 한 가지 의문이 제기된다. 1980년을 고비로 국제유가의 급등세가 진정된 것은 이해가 되지만, 실질금리가 하락하던 1983년부터 유가가 하락 흐름을 타게 된 이유는 무엇일까? 이를 이해하려면 상품시장의 특성을 파악할 필요가 있다.

 

p273

 이 대목에서 잠깐 '버블'에 대해 이야기하자면, 자산가격이 어떤 수준에 도달해야 버블인지 정확하게 판단하기 힘들다. 이때 활용하기 좋은 기준이 하나 있는데, 그것은 바로 내부자 입장에서의 판단이다. 내부자 입장에서 주식을 매수하기보다 매도할 유인이 훨씬 강해지는 때가 바로 '버블'이라는 것이다.

 예를 들어 1980년대 말 어느 기업가가 일본 주식시장에 상장을 계획하고 있다고 가정해보자. 그런데 주가수익비율(PER)이 4배에 불과하다면 주식시장에 공개하지 않으려 할 것이다. 주식시장에 상장하는 이유는 결국 자본을 조달하기 위함인데, 회사 한 주의 기대수익률(주당순이익/주가)은 25%인 반면, 당시 일본의 은행 금리는 2.5%에 불과하니 주식을 상징하는 것보다 은행에서 대출받는 게 낫기 때문이다. 이처럼 주식시장이 침체되어 상장 기업들의 PER이 낮을 때에는 기업의 증자나 상장이 크게 줄어든다. 

 반면 주가가 높아지면 이와 반대되는 현상이 나타난다. 예를 들어 1989년 일본처럼, 돈도 제대로 못 버는 별볼일없는 기업의 주식도 PER이 100배에 거래되고 채권 금리가 6%를 넘어선다고 생각해보자. 이 기업 주식의 기대수익률은 1%에 불과한데 채권 금리는 6%를 넘어서고 있다면, 최고경영자가 어떤 선택을 할지 자명하다. 부지런히 증자를 해서 조달한 돈을 채권에 투자하는 게 훨씬 남는 장사가 된다는 것을 누구나 알 것이다.

 지난 2000년 코스닥 버블 때, 많은 정보통신기업이 증자로 유입된 돈을 빌딩 매입에 투자했던 것은 매우 합리적인 행동이라고 볼 수 있다. 즉, 시장금리가 높은 수준까지 상승한 상황에서 주식의 PER이 급격히 상승하면 주식 공급은 무한히 증가하게 되고, 주식 공급이 증가하면 증가할수록, 주식시장은 점점 더 상승 탄력을 잃어버리게 되는 것이다.

 

p288. 자산가격 하락이 장기불황으로 이어진 이유는?

 

 1988년 버블이 붕괴되고 일본 중앙은행이 정책 금리만 공격적으로(200bp 이상) 내렸다면 디플레이션 악순환은 발생하지 않았을 것이다. 일본 정부가 추진했던 재정정책이 경기 하강을 억제하는 데 다소나마 도움을 주긴 했지만, 통화정책과 함께 진행되었다면 더 좋았을 것이다.

 

 예를 들어 지나친 저금리로 인플레가 발생하면 긴축으로 전환하여 해결할 수 있지만, 경기 부양이 너무 늦거나 규모가 약해 디플레이션에 진입하게 되면 경제를 다시 정상 수준으로 되돌릴 방법이 마땅찮다. 따라서 자산가격 버블이 붕괴될 때는 일단 시장 참가자들의 미래 경제에 대한 예상을 바꿔놓을 정도의 공격적인 경기부양이 필요하다.

 

 왜 디플레이션은 퇴치하기 힘들까? '통화정책이 무력화'되기 때문이라는 게 미 연준 이코노미스트들의 지적이다. 물가 상승률이 마이너스로 떨어진 상황에서는 금리를 아무리 낮춰봐야, 실질금리가 더 떨어지지 않는다. 그 단적인 예가 <도표 6-6>의 1994~1995년으로, 소비자물가 상승률이 마이너스로 떨어짐에 따라 일본 중앙은행이 정책금리를 제로 수준까지 인하한 효과가 나타나지 않는 것을 발견할 수 있다.

 

 물론 재정정책을 충분히 그리고 적극적으로 추진한다면 장기불황의 위험을 막을 수 있었을지도 모른다. 그런데 <도표 6-6>에서 1997년을 보면, 갑자기 일본 소비자물가 상승률이 마이너스에서 2%까지 뛰어오르는 것을 발견할 수 있다. 왜 이런 일이 벌어졌냐 하면, 당시 하시모토 정부가 재정적자 문제를 해결하기 위해 소비세를 기존 3%에서 5%로 인상했기 때무이다. 1937년 루스벨트 행정부가 재정 건전화를 위해 재정지출을 삭감한 후 심각한 불황을 겪었던 일을 떠올리게 하는, 이 어처구니 없는 정책 시행으로 일본 경제는 돌이키기 어려운 장기 불황의 악순환에 빠져들었다고 볼 수 있다.

 

p311. 토지개혁, 번영의 초석을 놓다!

 

 낮은 임금과 극단적으로 불평등한 토지 소유 분포, 그리고 저학력이라는 삼중고에 시달리던 우리나라는 어떻게 산업화를 달성할 수 있었을까?

 미 군정이 추진한 두 가지 핵심 정책, 강력한 통치기구 조직과 점진적인 토지개혁에 주목할 필요가 있다. 1945년 8월 말, 미군이 한반도 남쪽에 들어섰을 때, 이미 토지 소유 집중은 심각한 수준이었다. 일제 강점기 동안 일본에서 온 지주와 토착 대지주들이 대규모 토지를 소유한 반면, 토지를 잃은 농민들은 농촌을 떠나 산업 노동자로 전락했다. 문제는 일제 패망으로 원료 공급이 끊기며 제조업 생산이 중단됨에 따라, 도시의 산업 노동자들이 다시 농촌으로 복귀한 것이다. 이에 따라 대지주들은 전통적인 토지 집중적인 농업, 즉 소작 제도를 시행했고, 그로 인해 전체적으로 농업 생산량이 감소하고, 경제는 침체되었다.

 이러한 상황에서 모든 국민의 관심사는 토지 분배에 집중되었다. 미 군정은 이 부분에서 큰 공을 세웠다. 그들은 1946년 소작인이 토지 경작 대가로 지주에게 지불해야 할 소작료를 그해 생산량의 1/3 수준으로 낮추는 한편, 조선 총독부가 보유하고 있던 대규모 토지를 농민에게 팔아넘겼다. 특히 미 군정은 조선총독부뿐만 아니라 일본인 지주들이 보유하던 약 2,780제곱킬로미터의 토지를 인수했는데, 1948년 초에 이 토지를 농민에게 매각함으로써 59만 7,974가구, 즉 농업 인구의 24.1%에 해당하는 농민이 새롭게 토지를 소유하게 되었다.

 당시 미 군정이 불완전하나마 '토지개혁'을 실시했던 이유는 공산화의 위험을 퇴치하기 위함이었다. 당시 토지개혁을 주도했던 울프 라데진스키(Wolf Ladejinsky)는 다음과 같이 당시의 일을 회고한다.

 "나는 1921년 초에 러시아를 떠나기 전에 얻은 교훈 덕분에 이 일(=토지개혁)을 하게 되었습니다. 농민들에게 토지를 돌려줌으로써 단호하게 토지 문제를 해결했다면, 공산주의자들이 절대 권력을 잡지 못했을 것이라는 교훈 말입니다."

 

 1952년 아이젠하워가 대통령에 당선된 다음, 극단적인 반공주의자들이 세력을 얻으면서 울프 라데진스키를 비롯한 토지개혁론자들은 설 자리를 잃어버리게 되었지만, 우리나라는 운 좋게 한국전쟁 직전에 토지 개혁이 완료되어 공산화의 위험에서 벗어날 수 있었다. 참고로 1950년 3월 이승만 정부가 통과시킨 토지개혁법은 '소유주가 직접 경작하지 않는 모든 토지와 3만 제곱미터(약 9,180평)가 넘는 모든 토지'를 재분배 대상으로 규정했다. 이 법안에 따라 정부로부터 토지를 구입한 농민이 지불해야 할 금액은 해당 토지에서 산출된 연간 생산량의 150%로 결정되었다. 그리고 정부가 지주들로부터 토지를 이수하며서 지급한 대금의 상당 부분이 미국의 원조로 충당되었다.

 이 대목에서 잠깐, 토지개혁의 중요성을 강조하는 이유를 살펴보자.

 토지개혁이 가져온 첫 번째 변화는 바로 '경제 성장'이었다. 지주들은 '고리대금업'만으로도 충분히 소득을 얻고 있었기에, 기술 투자에 열의가 없었다. 반면 소작농들은 관개시설에 투자할 여력이 없거니와, 소작 '계약 연장'에 대한 불안감으로 비료를 구입할 수도 없는 상황이었다. 따라서 토지개혁 이전에 우리나라는 인구의 90%가 농업에 종사하는 전형적인 '농업국가'였음에도 식량 자급조차 이뤄지지 못했다. 식량 자급이 이뤄지지 못하니, 미국의 원조가 없을 때에는 대규모 무역수지 적자를 기록할 수밖에 없는 상황이었다. 그러다 토지개혁이 이뤄지며 농업생산성이 극적으로 향상된 것이다.

 <도표 7-2>는 1954년 이후의 농림어업 성장률과 경제성장률이 관계를 보여주는데, 1954~1963년 연평균 농림어업 성장률이 5.1%에 이르러 같은 기간 경제성장률(6.0%)에 근접한 것을 발견할 수 있다. 그리고 1953년 전체 국내총생산에서 농림어업이 차지하는 비중이 48%였다는 점을 감안할 때, 경제성장의 상당 부분이 농업 생산성의 향상에서 비롯되었음을 알 수 있다. 1963년부터 우리나라 경제가 수출 중심의 공업화에 힘입어 고성장한 것은 분명한 사실이지만, 농업 주도의 경제 성장이 '토대'가 되었음을 잊어서는 안 될 것이다.

 토지개혁 이후 농업생산성이 극적으로 개선된 이유는 '동기 유발'에 있다. 아무리 농사를 지어봐야 대부분의 수확물을 지주에게 빼앗기는 상황에서 수확량을 늘리려는 동기가 생기기는 어렵다. 그런데 당시 5인 혹은 6인 이상으로 이뤄진 가족들은 십수 마지기의 토지를 일구는 데 최적화되어 있었다. 노동력이 넘쳐 흐르는 개발 초기 단계의 개발도상국에게 중요한 것은 '효율'이 아니다. 어떻게든 남아도는 노동력을 활용해 최대한 생산을 짜내는 것이다. 1인당 수확량이 형편없다 하더라도, 노동력을 최대한 활용하는 게 더 낫다는 말이다.

 

 물론 우리나라만 토지개혁의 성취를 이룬 것은 아니다. 타이완도 1949년 토지개혁 이후 10년 만에 식량 생산량이 75%나 늘어났다. 그리고 이와 같은 생산성 향상은 곧 농가 소득 증가로 연결되었고, 이는 경제 전체에 무역 불균형을 시정하는 데 큰 기여를 했다. 어쨋든 우리나라는 소득 증가에 힘입어 자녀를 교육시킬 여유를 가지게 되어, 1944년 말 조선의 15세 이상 인구 중 무학력자 비중이 남자의 경우 80%, 여자의 경우 94%였던 것이 1955년에는 남성 50%, 여성 80%로 줄어들었다.

 이후 선순환이 이어졌다. 농업 생산성이 높아짐에 따라, 농촌의 여유 노동력이 도시로 이동할 수 있게 되었고, 기업들은 이들을 고용해 내수시장에서 물건을 팔 기회를 잡을 수 있게 되었다. 그러나 본격적인 경제성장을 위해서는 한 가지 조건이 더 만족되어야 했다. 그것은 제조업의 적극적인 육성이었다.

 

p321

 이상의 사례에서 보듯, 공장을 차리더라도 언제 이익을 낼 수 있을지 확신할 수 없었다. 이러다 보니 군사정변으로 권력을 잡은 박정희 정부가 제조업을 육성하겠다고 선언했지만, 제조업을 하겠다고 나서는 기업가들은 많지 않았다. 이때 우리나라 정부는 아주 효과적인 전략, 즉 '채찍과 당근'을 함께 사용했다. 먼저, 기업가들이 달려들지 않을 수 없는 매혹적인 당근으로 '저금리'를 제시했다. <도표 7-3>은 1960년대 우리 나라의 금리 수준을 보여주는데, 사채금리가 높을 때는 60%, 낮아도 40% 수준이었음을 알 수 있다. 농촌에서 잉여생산물이 생겼다고 해서, 이게 다 저축으로 연결되지는 않았기에 당시 우리나라 경제는 항상 자금 부족에 시달렸다. 이런 상황에서 은행이 수출 기업들에게 제공하는 대출금리를 1966년부터 1972년까지 6%로, 이후 인상되었어도 1976년까지 8% 수준을 유지한 것이다.

 

 이는 수출 실적을 내기만 하면, 시장금리보다 50% 포인트 이상 낮은 저금리로 자금을 장기가 대출해준다는 약속이나 다름없었다. 물론 겉으로 수출용 공장을 만들겠다고 약속하고, 저금리를 이용해 지대를 추구하는 기업인들도 있었다. 실제 1972년 8.3조치(경제 내에 존재하는 사채에 대한 원금 및 이자에 대한 지급을 동결하는 긴급재정명령) 때, 사채 전주의 30% 이상이 기업의 주주나 중역 등인 것으로 나타났다. 수출 기업이라면 은행에서 대출을 받아 이를 다시 다른 기업에 대출해주어 엄청난 차익을 거두는 일이 비일비재했던 것이다.

 그러나 당시 우리 정부는 이 기업이 수출만 제대로 한다면 문제 삼지 않았다. 반면 이들 기업이 수출 실적을 내지 못한다 싶을 때는 강력한 철퇴를 가했다. 이 대목에서 '철퇴'라는 표현을 사용한 건 공장 건설 이후 수출 실적이 나오지 않고 원하는 기준에 미달한다고 판단될 때, 성공적인 기업에 강제로 합병시키거나 국영 금융시스템을 통해 자금을 회수하는 것은 물론 심지어 파산이라는 궁극적인 제재를 가했기 때문이다. 가장 대표적인 조치가 1970년대 후반부터 시작된 '중화학공업 합리화' 조치다. 물론 이런 일은 우리 정부만 한 것은 아니다. 일본은 일찍이 1930년대 독일의 관행을 연구한 후 합병을 통해 여러  제조업 부문을 '합리화'했으며, 2차 대전 이후에는 이를 더욱 가속화했다.

 박정희 정부가 야심차게 추진했던 '수출 주도의 경제성장' 전략이 성공할 수 있었던 또 다른 요인은 운에 있다. 1960년대부터 시작된 베트남 전쟁과 물류혁명이 우리나라 등 동아시아 공업국에게 거대한 시장을 열어주었기 때문이다.

 

p342 

 외환위기 이후 기업들의 재무 상태가 건전해지고, 경제 전체의 이자율이 낮아지는 등 긍정적인 면이 크다는 이야기에 반감을 가지는 독자들이 적지 않을 것이다. 1997년 외환위기 이전에 비해 이후 우리나라 내수경기는 제대로 된 호황을 누린 적이 없기 때문이다.

 왜 경제가 성장하고 기업들의 이익이 개선되었음에도 내수경기는 좋아지지 않았을까? 그 이유는 바로 대규모 경상수지 흑자에 있다. 우리나라 경상수지 흐름을 보여주는 <도표 7-7>을 보면, 1997년 외환위기 이후 단 한 번도 경상수지가 적자를 기록한 적이 없을 뿐만 아니라 2010년 이후에는 국내총생산(GDP) 대비 거의 4~8%의 흑자가 이어지고 있음을 확인할 수 있다. 문제는 이렇듯 경상수지 흑자가 발생할 때, 내수경기가 악화되는 경우가 많다는 데 있다.

 이 문제를 이해하기 위해서는 국내총생산의 구성에 대해 알 필요가 있다.

 

GDP = 소비 + 투자 + 수출 - 수입 (1)

GDP - 소비 = 투자 + 수출 - 수입 (2), 여기서 GDP - 소비 = 저축, 우변의 수출 - 수입 = 경상수지 이므로

저축 = 투자 + 경상수지 (3)

저축 - 투자 = 경상수지 (4)

즉, 대규모 경상수지가 발생하고 있다는 뜻은 저축보다 투자가 적다는 것을 의미한다. 이런 현상이 나타난 이유는 외환위기 이후 가계와 기업 등 경제 주체들이 미래에 대해 불안감을 가져서이다. 한보, 기아, 한양 등 위세를 떨치던 대기업마저 속수무책으로 무너지고, 수많은 실업자가 양산되는 것을 본 '트라우마' 때문에 소비와 투자를 줄인 결과, 대규모 경상수지 흑자가 발생한 것이다.

 하지만 문제는 나의 소비는 다른 사람의 '매출'이라는 점이다. 결국 만성적인 경상수지 흑자가 발생한다는 것은 내수 비중이 높은 기업의 영업 환경이 악화되는 것을 의미하며, 이는 기업의 투자와 고용 위축으로 이어지게 된다. 따라서 최근 겪었던 고용 부진 사태의 원인은, 1997년 외환위기 이후 경제 주체의 적극성이 약화된 탓이라고 볼 수있다.

 그렇다면 이 문제를 어떻게 해결할 수 있을까? 사람들의 심리를 바꾸는 것은 매우 어렵고, 시간도 많이 걸리는 일이기에 확실한 처방을 제시하기는 힘들다. 다만 정부의 재정지출 확대 정책이 대안이 될 수 있을 것이다. 2018년 기준 우리 정부의 GDP 대비 재정수지는 1%대 중반의 흑자를 기록한 것으로 추정되며, GDP 대비 정부 부채도 12.2%에 불과하다. 이렇듯 건전한 재정을 활용해서 정부가 기업들의 투자를 촉진할 다양한 인센티브를 제공하고, 공공부문의 일자리를 만드는 한편 경제 전체의 생산성 향상을 유발할 것으로 기대되는 사회간접자본에 적극적으로 투자할 필요가 있다. 물론 1997년 외환위기의 트라우마 때문에 건전 재정에 대한 집착이 존재하는 것 또한 사실이다. 그러나 GDP 대비 경상수지 흑자 규모가 나날이 늘어나는 등 내수경기의 부진이 장기화되는 것을 방치하면 장기적으로 세수의 기반이 더 축소될 수 있다는 것도 고려할 필요가 있을 것으로 판단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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