영화 HER는 주인공인 테오도어(호아킨 피닉스)가 연예편지를 쓰는 장면으로 시작된다. 정확히 이야기하면 테어도어의 직업은 연예편지를 대필해주는 사람이다. 근미래를 배경으로 하는 이 영화에서 그가 사용하는 입출력 인터페이스(I/O)는 음성인식 기반이다. 그가 말한 내용을 인식한 A.I는 모니터에 손편지지 모양의 프레임에 손글씨의 폰트를 이용해서 결과물을 만들어낸다.

 

 

1995년 사이버펑크 애니메이션의 기념비적인 작품중의 하나인 오시이 마모루의 공각기동대(Ghost in the shell)에서는 인간들이 강화된 신체(Enhanced body)로 일부 혹은 전체가 사이보그화 되 세계를 그리고 있다.

인간과 컴퓨터간의 여러가지 인터페이스 방법이 나오는데 매트릭스에서처럼 인간의 신체에 코드를 꽂아서 직접적으로 연결하는 방법과, 위의 영상처럼 강화된 손가락을 이용해서 개량된 키보드를 이용하여 입력의 속도를 높이는 방법등이 보여진다.

 

내가 처음 PC를 접한 것은 80년대 후반으로, 당시에 컴퓨터 자판의 입력방법에 대한 이슈가 있었다. 특히 한글 자판 입력에 있어서 두벌식이냐 세벌식이냐라는 문제가 컴퓨터 잡지에 단골로 등장하는 문제였다. 전통적인 두벌식 자판에 대해 세벌식은 한글의 원리에 맞고, 입력의 속도와 효율을 높이는 취지에서 개발되었다고 한다. 

나는 컴퓨터 자판을 익히는 시기에 두벌식으로 배웠다. 그리고 여태까지 세벌식엔 관심을 가져본 일조차 없고 아마도 앞으로도 특별한 일이 없는한 세벌식엔 별 관심을 둘 일이 없을 것이다.

 

영어자판의 경우 쿼터(QWERTY)라고 하는 자판이 가장 널리 사용되는데, 이 자판 역시 입력 효율성의 문제로 영어권에서는 이미 훨씬 효율적인 개량된 자판이 개발되었다. 하지만 한글에서 개량된 세벌식보다는 여전히 두벌식이 더 널리 사용되는 것과 같이, 영어자판 역시 쿼티가 여전히 대세이다.

쿼티가 타수(분간의 입력글자의 숫자로 타자의 속도를 의미)에 비효율적인 면이 있는 이유는 이 자판이 기계식 타자기(Typewriter) 시절에 개발되었기 때문이라는 설이 가장 유력하다. 기계장치로 엮여있는 타자기의 초기자판(쿼티랑 다른)은 너무 빠르게 칠 경우 타이프바가 얽혀서 타이프쨈(Type Jam)과 같이 타자기가 고장나는 경우가 있었다고 한다. 이에 타자를 치는 사람이 너무 빠르게 글자들을 칠수 없도록 하기 위해 자판을 수정한 결과 쿼티 자판이 나오게 된 것이다.

 

기계식 타자기에서 피씨로 입력장치가 바뀌면서 나온 전자식 키보드에서는 기계식에서 있었던 타이프쨈 문제가 자동적으로 해결되었다. 따라서 쿼티 자판처럼 일부러 속도를 제한할 이유가 없기 때문에, 자판의 속도를 더 효율적으로 개선할 수 있는 개량 자판이 나올 수 있는 환경이 만들어졌다.

하지만 쿼티보다 성능이 개선된 개량 자판을 만든 결과는 한글에서 세벌식 자판이 개발됐어도 두벌식이 여전히 사용되는 것과 비슷했다.

사실 그 이유는 매우 자명하다. 기존 자판을 배운 수억(혹은 수십억) 명에 이르는 기존의 사용자들로서는 새로이 수개 월 이상을 투자해서 새로운 자판을 배우는 편익이 불분명하기 때문이다. 아주 전문적으로 타이프를 해야 하는 사람이라면 혹시 필요할 수도 있겠지만, 일반적으로는 분당 200타를 치나 분당 500타를 치나 그리 큰 차이가 없는 것이다. 물론 아주 도전정신이 뛰어나거나 자신의 타이프 속도를 극한까지 끌어올리려는 소명을 느끼는 사람은 아마도 적극적으로 배우려 들 것이긴 하지만.

 

위의 2개의 영상에서 보듯이, 미래에는 두벌식이냐 세벌식이냐 혹은 쿼티냐 개량자판이냐는 문제는 의미가 없어질 것이다. 강화된 신체를 통해서 새로운 입력방법이 신체에 이식되거나, 아예 음성인식을 통해 A.I는 인간이 구술한 것을 우리가 원하는 형태로 입력하고 그대로 출력까지 해줄 것이기 때문이다.

 

기계 문명이 궁극으로 가면 우리는 I/O의 인터페이스에 대한 고민(물론 컴퓨터 아키텍트를 하는 사람은 계속 고민을 하겠지만)은 사라지게 될 것이고, I/O의 대상이 되는 내용물(Contents)에 집중하게 될 것이다.

 

A.I에 대한 많은 논의가 있지만 가장 중요하게 남는 본질은 내용물에 있다. 궁극의 물음은 이 내용물을 과연 A.I가 만들어 낼 수 있느냐이다. 최근에 A.I를 이용한(주로 패턴인식에 따른 머신러닝 기법이 적용된) 작곡, 소설의 창작, 회화에 이르기까지의 다양한 시도들이 있다. 이것은 초보적인 모방으로 볼 수 있다. 모든 창조는 모방으로부터 나온다는 것은 상식적인 일이지만, A.I의 모방이 과연 우리가 알고 있는 그 모방과 같은것인가? 그리고 그 모방으로부터 A.I는 결국 새로움을 창조해낼 수 있을 것인가는 앞으로 지켜봐야 할 문제이다.

 

인류가 문명의 어떤 전환점에 와 있다는 느낌은 매우 강하다. 커즈와일이 이야기한 특이점(Singularity)의 도래를 수십 년 내로 볼 수 있게 될까? 흥미진진하기도, 두렵기도 한 순간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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