현대 바둑에서 딱 한 사람을 꼽으라면 만장일치로 이 분이 꼽힐 것이다.

그와 같은 시기를 살던 기사들은 그의 바둑을 보노라면 신운(神雲)이 감돈다고 말했다고 한다.

그의 바둑은 사실 접해보지 않아서 모르지만, 바둑을 알던 시절부터 거의 이야기는 마치 전설처럼 전해져왔던 것이 기억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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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p91

 그 본인방전도 처음에는 제한시간이 13시간 3일제였다. 같은 무렵에 시작된 오청원 · 기타니 도전 십번기의 제한시간도 13시간이다. 제한시간이 길수록 좋은 바둑을 둘 수 있다는 사고방식이 당시는 주류를 이루고 있었다. 주류라고 하는 것은 주로 본인방 일문을 가리키는데 물론 본인방 일분 이외에도 장시간 대국을 지지하는 부류는 있었다. 기타니 미노루의 스승 스즈키 다메지로 등도 그 주장의 으뜸가는 사람이었다. 마이니치신문의 미타니 스이헤이(三谷水平)씨가 나에게 들려준 실화가 있다.

 본인방전의 예선 대국에서 장고파(長考派)인 스즈키의 제한시간이 거의 소비되어 초읽기에 이르자 기록계가 말을 걸었다. 

 "스즈키 선생, 나머지 시간 5분입니다."

 스즈키는 태연히 기록계를 돌아다보고 호통을 쳤다.

 "이 수를 5분에 둘 수 있나!"

 때마침 대국실에 와 있던 미타니는 어안이 벙벙해졌다.

 "두지 않으면 마감 시간이 되어 진다는 것은 스즈키씨도 알고 있었을 것이라 나는 모른 체하고 있었지만 좌우간 이런 분들을 납득시키는 데 힘이 들었지요."

 세월이 한참 흐른 뒤의 이야기이므로 미타니의 회고담에는 옛날을 그리워하는 운치가 있었다.

 그것은 차치하고, 그러한 풍조에 대항하여 일관해서 시간 단축을 주장하고 있던 것이 하시모토 우타로와 오청원의 스승 세고에 겐사쿠이다. 그는 수필집 《바둑과 인생》 중에서 다음과 같은 견해를 피력하고 있다. 

 

 '바둑을 빠르게 잘 두지 않으면 진짜 명인이라고는 말할 수 없다고 생각한다. 몇 시간을 소비하지 않으면 좋은 바둑을 둘 수 없다는 것은 명인의 경지에 이르지 못한 것이다. 씨름의 예를 들면 예전의 히다치야마(常陸山)처럼 상대의 기합 소리에 따라 언제라도 몸을 일으켜 덤비는 절도가 있어야 한다. 그렇지 않고는 진짜가 아니다. 이것이 나의 가문의 기풍이다.

 스즈키씨는 바둑은 숙고하면서 두는 것이라고 가르친다. 여기에 각 가문의 기풍이 새겨서 흥미있는 대조를 이루고 있다. 그런데 시간제를 실시한 후 많이 대국 시간이 단축되었다고는 하지만 역시 습관에 사로잡혀 있는 게 아닌가. 바둑은 그렇게 시간을 쓰지 않으면 명국이 생기지 않는 것일까. 이런 점에 나는 항상 의문을 가지고 있는 것이다.'

 

 세고에의 견해는 대담하고 혁명적이다. 단시간에 명국을 둘 수 있도록 단련하면 관중 앞에서 진검승부를 겨룰 수 있게 된다. 기사는 그러헥 노력해야 한다는 것이다. 이 세고에의 견해는 TV바둑이 시작되지 훨씬 전에 밝힌 것으로 그 선견성에는 새삼 감탄하게 된다.

 세고에가 자기 가문의 기풍이라고 말한대로 하시모투 우타로, 오청원 모두가 시간 단축파이며, 오청원은 《오청원 기담(棋談)》 중에서 구체적으로 각각 6시간씩, 하루에 끝내는 것이 이상적이라고 말하고 있다. 실제로 오청원대 하시모토 우타로의 제1차 도전 십번기에서 오청원이 6시간을 주장하자 하시모토가 흔쾌히 동의했다. 오히려 요미우리신문 측이 당황하여 속기(速棋)로 오해받기 쉽다고 이의를 제기, 결국 각자 7시간으로 타협이 이루어졌다.

 

 전후 본인방전의 제한시간은 각 10시간이 오래 계속되다가 각 9시간으로 되고 다시 각 8시간으로 단축되어 오늘에 이르고 있다. 명인전(名人戰), 기성전(棋聖戰) 등 새로 만들어진 타이틀전도 제한시간은 본인방전을 답습하고 있다. 리그전이나 예선은 각 5시간, 하루에 끝내는 것이 대부분으로 거의 정착되어 있다.

 

p109

 바둑계는 도전 십번기에서 타이틀전으로 자리바꿈 시대에 접어들고 있었다. 슈사이 명인의 은퇴기념 대국에 따라 본인방의 칭호는 타이틀명이 되고 마이니치신문 주최로 모든 기사가 참여하는 본인방전이 시작되어 이와모토 가오루, 하시모토 우타로의 쌍벽 시기에서 다카가와의 연패 시대가 출현하는데, 동시에 요미우리신문에 의거하는 오청원은 도전 십번기를 귀신같이 이겨 나가고 있었다.

 거기서 그 접점을 찾아 마이니치신문은 1962년 다카가와가 본인방이 되자 오청원대 본인방의 3번기를 기획하였다. 십번기와는 관계없이 조건은 호선(互先)으로 덤 4집반, 즉 본인방전의 규정에 따른 대전이다. 여하튼 오청원은 도전 십번기에서 역대 본인방을 차례로 물리쳐 버렸다. 슈사이 명인 시대와는 달라서 도전제를 고집했더라면 양자의 대국은 불가능했을 것이다. 오청원은 조건을 받아들여 거의 해마다 본인방전을 마친 후 마이니치신문 주최의 본인방에 대한 3번기를 두기로 되었다.

 그것은 차치하고, 다카가와 본인방은 오청원과의 3번기에서 제1차 이후 제4차까지 놀랍게도 11연패를 당하고 마는 것이다. 1958년 제4차 3번기 제3국에서 다카가와는 겨우 반격을 하지만 그 사이에 요미우리의 오청원 · 다카가와 도전 십번기가 끼어 있으므로 이 3번기는 오청원의 최강 지위만을 돋보이게 하는 기획이 되고 말았다.

 본인방전을 마치고 한숨 돌리고 있을 때의 3번승부여서 다카가와가 불리한 것은 당연했다. 그러한 동정을 다카가와에게 보내는 말도 나와으나, 물론 그런 동정은 무의미하다. 다카가와가 쓴웃음을 지으면서 나에게 말한 것이 있다.

 "오씨는 어찌 할 도리가 없습니다."

 본인방전과 함께 3번기도 담당하고 있던 마이니치의 미타니 기자도 쓴웃음을 지으면서 나에게 말한 것이 있다.

 "다카가와는 본인방 타이틀을 다시 거머쥐었으니 3번기에서 오씨에게 한수 지도를 받은 셈이지요. 그걸로 족할 것입니다."

 다소 자포자기적으로 들리는 말투였다. 양자의 3번기는 다카가와의 종반 만회로 1961년 2월 제7차가 끝날 때까지 통산 오청원의 14승7패였다. 그해 오청원의 나이 47세였다.

 그해 본인방은 다카가와의 10연패(連覇)를 저지한 사카다 에이쥬(坂田榮壽)로 바뀌었다. 따라서 3번기의 상대도 다카가와로부터 사카다로 바뀐 셈이다. 새로운 3번기의 제1국이 시작된 것이 그해 7월인데 다음달인 8월에 오청원은 뜻밖의 재난을 당했다.

일본 홍만회의 이사회에 출석하려고 친산소(椿山莊)근처인 메지로(目白)거리를 걸어가고 있을 때 오토바이와 부딪쳐서 중상을 입은 것이다. 실신한 채 옮겨진 데가 소시가야(雜司谷)에 있는 동대병원(東大病院) 분원이었다. 진통제 주사만 맞고 일반 병실에 눕혀졌으며 조서를 받으러 온 경찰관에게 병원 측은 대단치 않은 부상이라고 설명하고 X선 사진도 찍지 않았으며 뇌파나 심전도 검사도 하지 않았다.

 밤이 되어 매니저를 맡고 있던 다가야 시노부(多賀谷信乃)가 달려왔을 때 오청원은 오른쪽 다리가 몹시 아프므로 X선 사진 촬영을 요청했다. 그런데 결과는 아무 데도 나쁘지 않다는 것이었다. 놀랍게도 병원이 촬영한 것은 통증이 있는 오른쪽 다리가 아니라 왼쪽 다리였던 것이다. 뢴트겐 기사가 착오를 일으킬 수는 있어도 환자 자신이 좌우를 혼동할 까닭은 없는 것이다. 그러나 세상일에 대범한 오청원은 병원측의 실수조차 전혀 알아차리지 못했다.

(개인적 생각 : 오청원 정도 되시는 분은 다른 이들도 모두 자신처럼 꼼꼼하고 상식적이라 생각하며 사셨을게다. 그러니 내가 오른쪽 다리가 아프다고 얘기했으니 당연히 오른쪽 다리를 찍겠지라고 생각하셨을거라고 본다. 그리고 속세와는 많이 동떨어진 바둑기사의 삶을 사시다 보니, 보통 세상의 인간의 오류라던가 시스템의 오류라는 부분에 민감하지 않았을 것이 아닌가 싶다)

 

겨우 실수를 깨달은 병원측이 뢴트겐을 다시 찍어 오른쪽 발목 골절, 허리뼈의 금 두곳이라는 결과가 나왔다. 다리에 깁스, 허리에 코르셋을 끼우고 두 달간의 입원 생활을 보내게 되는데, 뇌파나 심전도 검사는 끝내 하지 않았다고 한다.

 오청원은 사고시에 실신했었기 때문에 당연히 머리에도 얼마간의 상해를 받았을 것이며 퇴원후에도 두통이 완전히 가시지 않았다. 과연 다음해가 되어 사고의 후유증이 나타났고 때때로 정신착란을 일으켜 일시는 인사불성에 빠져서 입원을 하는 소동이 일어나기도 했다.

 그러한 상태 속에서 새로 발족된 명인전을 비롯하여 다른 여러 기전(棋戰)에도 몸을 달래가면서 어떻게든 대국은 계속했지만 십번기 시대와 같은 승운을 되찾을 수는 없었다. 역시 교통사고는 그의 바둑에 치명상이었다고 하지 않을 수 없었다. 그 때문에 여러 후유증으로 고생하였고 기사 생명에 위협을 받게 된 것이다.

 "나의 부상에 관해서만큼은 천하의 동대병원이 어째서 그와 같은 조잡한 검사로 끝냈는지 아직도 이해가 되지 않는다."

 오청원 자신의 말인데 천하의 유명한 병원이라는 것이 이정도인 것이다. 왼쪽과 오른쪽을 틀리게 뢴트겐 촬영을 하고도 병원은 한마디 사과의 말도 없었다. 오청원의 귀중한 기사 생명을 단숨에 단축한 것이 바둑계에 어떤 손실을 초해하는지 그러한 것은 생각해 보지도 않는 패거리들이다. 즉 오청원은 이때 이중의 재난을 만난 셈이다.

 이야기를 새로운 본인방이 된 사카다와 오청원의 3번기로 돌리자. 그 제2국이 시작된 것은 11월 중반으로 제1국이 끝난 지 3개월이 경과하고 있었다. 말할 필요도 없이 오토바이 사고와 입원에 따른 공백 때문이었다. 이 대국이 선명하게 나의 기억에 남아 있는 것은 그 관전기를 내가 담당했기 때문이다. 더욱이 이 대국의 입회인은 다카가와였다.

 다카가와는 그해 본인방을 사카다에게 빼앗겼지만 분노와 충격은 잊은 뒤였다.

 "입회인을 옆에 두고 대국만 할 때는 몰랐는데 입회인이라는 것은 의외로 화려한 것이군요. 특히 이번은 오씨와 사카다씨의 대국에 입회를 하니까요."

 대국장에서 만났을 때 다카가와가 즐거운 듯이 나에게 한 말이다.

 나는 오청원의 명성에 대해서는 친숙했으나 직접 그 대국을 접한 것은 이때가 처음이었다. 대국장은 하코네 고오라(箱根强羅)의 이시바테이(石葉亭)이며 전날 저녁에 오청원은 간호부의 부축을 받아 도착하였다. 나는 즉시 담당기자인 미타니씨와 함께 오청원의 방에 인사하러 갔다. 오청원은 밤색 목닫이옷 차림으로 각로(脚爐)에 발을 녹이고 있었다.

그때의 인상을 다는 다음과 같은 짧은 문장으로 정리한 적이 있다.

 

 '구름 위의 사람 - 그런 말이 나의 뇌리에 떠올랐다. 뭉구리, 넓은 이마, 높은 코, 윤기 있는 피부, 차분하고 독특한 고성(高聲). 지금까지 나는 이런 속세를 떠난 사람을 본 일이 없었다고 느낀 것이다.

 "다리가 좋지 않아 이런 자세로 실례합니다."

 오씨는 만면에 웃음을 띠고 인사말을 하였다. 이해 여름, 오씨는 교통사고를 당해 오른쪽 다리가 골절되었는데 그것이 완치되지 않아 간호부가 부축하고 있었다. 아마 그러한 정황도 나에게 구름 위의 사람이라는 인상을 강력히 준 원인이겠다.'

 

 나중에 생각해 보니 내가 초면의 오청원에게 이러한 인상을 받은 것은 그가 모든 번기(番棋)를 이겨낸 쇼와 바둑계의 왕자이며 전 바둑사를 통해서도 아마 제1위에 랭크될 기사일 것이라는 나의 동경심 때문이며, 동시에 그 동경심을 배반하지 않는 풍격과 분위기를 의심할 여지 없이 갖춘 인물이었기 때문이라고 생각한다.

 덧붙이면 바둑계의 거봉으로서 그 왕자의 지위는 흔들리지 않을 것으로 생각된 오청원이 50세 전후로 은퇴와 다름없는 처지가 된 것은 교통사고의 후유증이 1년이 지나 갑자기 나타나서 정신장애로 입원을 하는 불행 때문이다. 다행히 건강은 회복되었지만 대단한 긴장의 지속이 요구되는 쟁기의 현장에 나설 수 없게 된 것이다. 유감천만의 사건이었으나 이것도 숙명이라는 것이겠다.

 

 

p152

 이야기는 달라지지만 사카다가 본인방 명인이 되고 곧 《바둑 클럽》에서 문인들을 상대로 하는 지도바둑이 실시된 일이 있따. 곤도 게이타로(近藤啓太郞), 우메사키 하루오(梅崎春生) 등이 매월 한 사람씩 도전하여 마지막에는 노벨문학상 수상자인 가와바타 야스나리가 등장하였다. 이 지도바둑을 기획한 것은 《바둑 클럽》 편집장 고노 나오다쓰(河野直達)인데 그의 의도는 전쟁전에 오청원이 문인에 대한 지도바둑을 실시한 것에 대응시키고 있다.

(개인 감상 : 이 책은 일본에서 1996년 출판된 것으로 한국에는 1997년에 1년이 시차를 두고 출간되었다. 당시는 이창호의 전성기가 시작되던 시기로 한국 바둑 최융성기에 정점에 이르렀던 시기이다. 그래서 바둑책도 꽤 많이 나왔던 걸로 기억한다. 이런 바둑 에세이집이 일본에서 출간된지 1년만에 번역되었다는 것이 그 반증이기도 하다. 어쨋든 이 "오청원"이라는 책의 저자는 일본의 소설가인 에사키 마사노리이다.  마지막 구절인 '지도바둑을 실시한 것에 대응시키고 있다'라는 것은 완전한 일본식 표현의 직역인데 우리나라 사람이야 이걸 이해할 수는 있지만 상당히 어색한 표현이다. 요즘같으면, '지도바둑을 두었던 것에 대한 연장선' 이라거나 '지도바둑을 두었던 것을 부활시켰다' 정도로 표현할 것이다.)

 

 오청원의 지도바둑은 모두 여섯점을 놓고 두었는데 사카다의 지도바둑은 각자의 실력에 따라 치수(置數)를 조정했다. 흥미있는 것은 오청원의 지도바둑에서는 스나고야 서저머의 야마사키 고헤이만이 2집승을 거두었고 사카다의 지도바둑에서는 최후의 단 한사람 가와바타 야스나리가 여섯점 놓고 4집승을 거두었다. 잘 둔 편이다.

 사카다는 지도바둑에서도 쉽게 지지 않는다는 평이 있다. 그런데 내가 아는 한 그만큼 지도바둑에서 조언을 하는 사람은 없다. 그의 문인에 대한 지도바둑에서 조언을 하는 사람은 없다. 그의 문인에 대한 지도바둑에 나는 몇 판이나 입회했는데 "백이 두기 전이라면 바꿔 놓아도 좋아요." 하고 억지로 무르게도 한다. 잡지에 게재하는 바둑이므로 너무 형편없어서는 안되겠다는 배려에서 나왔겠으나 승부에는 특별히 비정하다고 생각되는 그의 다른 일면이 전해지는 듯한 인상을 받았다.

 정상의 인물에게는 각기 고운 마음씨가 있다.

 역으로 보면 고운 마음씨가 없는 사람은 일류가 될 수 없다. 일류란 그 분야에 있어서 뛰어다는 것인데 그를 위해서는 재능뿐 아니라 엄격한 단련과 자기 규제라는 것이 또한 필요하다. 즉 그것은 강인한 정신이라는 것인데 그 엄격성을 지탱하는 것은 그 사람이 가지는 애정 이외에는 없다. 그 내부에 풍부한 정감이 없이 긴 고독한 투쟁에 견딜 수 있는 것이 아니다.

 단지 바둑이 강하다고만 해서는 빛이 나지 않는다. 말로는 표현하기 어려운 것인데 명국이라고 불리는 것은 그것이 고도의 기량에 지탱되고 있음과 동시에 그 기량을 구사하는 기사의 인간성에 의해서 지탱되고 있을 것이다. 전인적(全人的)인 싸움이 있어서 명국이 두어지며 명승부가 탄생한다.

 

 

p181

 예도의 세계에서 다닞 그것이 유행한다는 현상만으로는 황금시대라고 할 수 없다. 그 분야에서 걸출한 인물이 나타나서 그 예능의 수준을 끌어올리며 혹은 새롭게 탈바꿈하는 상황이 생겨야 하는 것이다. 그것이 그 세계에 활기를 가져오고 큰 흐름이 되어 풍부한 인맥이 형성되어 간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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