저출산, 고령화를 바라보는 여러가지 시점을 통해 왜 이런 현상이 발생하는지에 대한 원인들을 다각도로 보여주는 내용.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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열정 혹은 감정을 나타내는 영어 단어 passion과 '수동적이다'를 뜻하는 단어 passive는 어원이 같습니다. 고대 서양 철학자나 현인들은 감정을 인간의 탁월한 능력, 즉 생각의 힘을 무력화하는 일종의 방해꾼으로 보았습니다. 감정에 휩싸이면 냉철한 판단이나 자기 통제가 불가능해지는 매우 수동적인 존재로 인간이 전락한다고 생각한 것이죠. 고대 사상가들로부터 내려오는 감정에 대한 경계의 메시지, 혹은 부정적 편견의 흔적은 많은 심리학 이론에도 녹아 있습니다. 합리적 사고와 비합리적 감정이 맞붙은 대결에서 합리성에 판정승을 내려주는 경우가 많았던 것이죠. 하지만 이 시각이 최근에는 바뀌고 있습니다. 좀 더 큰 관점에서 보면 합리적 사고력보다 감정 시스템의 역할이 오히려 생존과 더 밀접하게 관련있을 수 있다고 여러 학자가 주장하고 나선 것입니다.
그래서 최근 사회심리학에서도 감정의 중요성에 주목하고 있습니다. 인간도 정말 중요한 결정은 무의식적이고 감성적인 수준에서 처리하고, 이성적 생각은 큰 방향이 정해진 뒤 거기에 그럴듯한 설명을 붙이는 경우가 많다는 사실이 밝혀졌습니다. 이미 사랑에 빠진 뒤 상대의 장점을 손꼽아보는 모습과 비슷합니다. 이때 상대방이 좋은 이유를 차분히 생각해서 조목조목 나열해보도록 하면, 이 커플은 오히려 헤어질 가능성이 더 높아질 수도 있습니다.
유명한 심리학 연구를 하나 소개해드리겠습ㄴ다. 사회심리학 실험에 참여한 피험자들에게 수고의 보상으로 몇 개의 추상화를 보여준 뒤, 하나를 집에 가져가도록 했습니다. 한 조건(이유 조건)에서는 선택한 추상화가 왜 좋은지를 설명한 뒤 가져가도록 했습니다. 다른 조건(느낌 조건)에서는 아무 이유를 달지 않고 그냥 가지 느낌에 좋은 그림을 가져가도록 했지요. 몇 주 뒤, 연구자들이 피험자들에게 전화해서 이렇게 말했습니다. "혹시 지난번에 가져간 추상화가 마음에 들지 않으면 와서 바꾸어 가셔도 돼요." 흥미롭게도, 그냥 느낌이 좋아서 그림을 가져갔던 사람들보다 왜 그 그림이 좋은지를 설명해야 했던 사람들이 더 많이 그림을 바꾸어 갔습니다. 즉, 인간의 결정과 선택에 강력한 힘을 발휘하는 것은 사실 생각보다 감정입니다. 그림 선택만이 아니라 출산과 같은 중대한 결정에도 해당됩니다.
이유와 논리는 감정이 내린 선택을 그럴듯하게 포장하는 역할을 하는 경우가 많습니다. 그러나 이런 감정의 위력을 우리는 잘 의식하지 못해요. 그래서 논리와 합리적 생각이 우리의 행동을 지배한다고 착각합니다. 그렇지만 어쩌면 정작 선택의 밥상을 차려 놓은 것은 감정적 느낌이고, 여기에 슬며시 수저를 올려놓는 것이 이성일 수 있습니다. 우리가 의식을 하든 못하든 감정적 경험은 우리 일상에 막대한 영향력을 행사하는데, 거기에는 그럴 만한 이유가 있습니다. 감정은 긴 진화의 여정에서 습득한 생존 지혜를 담고 있기 때문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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매년 OECD 가입국을 대상으로 실시하는 행복 조사에 이런 문항이 있습니다. "당신은 어려움에 처할 때 도움을 청할 사람이 있습니까?" 이 질문에 "Yes"라고 대답하는 비율이 가장 낮은 국가가 한국입니다. 왜 이런 안타까운 현상이 발생할까요? 한 가지 중요한 이유로, 개개인의 관심과 따뜻한 심성이 가족을 비롯해 가까운 몇 사람에게 과하게 편중된다는 점을 들 수 있습니다. 일상에서 마주치는 대부분의 사람은 이 울타리 밖의 사람들인데, 그들에 대해서는 철저히 무관심하거나, 위협이나 경쟁의 대상으로 생각하는 경우가 많아요. 상호 신뢰가 바탕이 되는 사회적 자본이 축적되기 어려운 분위기죠. 또 다른 이유로는 과도하게 타인 중심적인 삶을 산다는 사실을 들 수 있습니다. 항상 남을 평가하고, 또 남의 평가에 쉽게 위축되기 때문에 관계에서 즐거움보다는 스트레스를 느끼는 경우가 더 많지요. 이런 사회적 분위기에서는 서로 친구가 되기 어렵습니다.
바로 이런 부분에서 행복감이 높은 국가들은 정반대의 모습을 보입니다. 가령, 스칸디나비아 국가들에는 사회적 금기가 하나 있다고 합니다. 타인의 삶을 함부로 평가하지 않는 것, 그저 서로 다른 삶을 각자 사는 것뿐인데, 주제넘는 참견을 하지 말자는 것이죠. 다양한 삶을 인정하는 열린 태도로 관계의 기본을 지키고 존중하는 사회입니다. 이런 사회 분위기가 높은 출산율을 이끌어냅니다. 덴마크 코펜하겐 시내의 특이한 장면 중 하나가 인도에 가지런히 세워진 유모차 행렬입니다. 유모차 속에서 아기가 잠이 든 사이, 부모는 카페에 들어가 커피를 마십니다. 행복한 사회의 단면입니다.
예전에 읽은 에릭 에릭슨이라는 유명한 발달심리학자의 말을 떠올리게 됩니다. "좋은 엄마가 되려면 단지 좋은 사람이기만 해서는 부족하다. 행복한 사람이 되어야 한다." 아이를 낳아 키우는 여정은 보람과 의미가 있지만, 고되고 힘든 순간들도 분명 찾아옵니다. 행복은 이 긴 여정을 시작할 용기뿐 아니라, 어려움을 이기며 순항하는 지혜와 힘도 준다고 생각합니다.
p106
그 누구도 완벽한 엄마일 필요는 없고, 실제로 완벽한 엄마가 될 수 없겠지만, 많은 사람이 아이에게 완벽한 환경을 제공해줄 자신이 없어 출산을 주저합니다. 즉, 정말 아이를 원하지 않아서가 아니라 '아직 집을 마련하지 못해서' '아직 내 인생도 잘 살지 못해서' ' 아직 부모로서 소양을 덜 갖췄기 때문에'와 같이 아이를 낳을 수 없다며 출산 결심을 지연하거나 비출산을 결정합니다.
그러나 이는 심리학적으로 아주 틀린 이야기입니다. 부모는 그저 최적의 좌절을 제공할 최상의 상태를 유지하면 됩니다. 예상되는 장애물들을 미리 제거해두고 아이의 욕구가 언제나 즉각 충족될 수 있는 무균실과 같은 환경을 제공해주는 것은 아이가 결국 스트레스에 취약해지는 결과를 낳습니다. 아이가 깊은 수준의 자기 통찰을 할 수 있으며 회복탄력성과 유연성을 갖춘 꽤 괜찮은 성인으로 자라는 과정에서, 부모의 불완전함은 아이에게 좋은 시험대를 제공해줄 것입니다. 즉 좋은 주 양육자는 '그럭저럭 괜찮은 엄마'면 됩니다. 정작 필요할 때에는 없어서 화가 나기도 하지만 문득 돌아보면 계속 그 자리에 있어주는 사람 말이죠. 그래서 소아정신건강 분야의 권위자인 아주대 병원 조선미 교수는 '살아만 있으면 좋은 엄마'라고 종종 말합니다. 그러니 너무 많은 책임감과 완벽주의적 기대를 가지고 출산과 비출산을 결정하지는 말아주세요.
다만 우리는 좋은 개인이 되어야 하고, 좋은 커플이 되어야 합니다. 많은 학생, 그리고 내담자가 종종 이런 이야기를 합니다. "우리 엄마가 정말 불행해하면서 모든 자원을 투입해 만든 게 저에요. 그런데 제가 그렇게까지 행복하지는 않아요. 저는 엄마처럼 할 자신도 없는데, 그럼 제 아이는 얼마나 더 불행하겠어요? 우리 엄마는 왜 그렇게까지 애쓰면서 살았을까 생각하면 또 너무 안됐고요." 다시 말하자면 애초에 부모 세대가 가족 내 생활에서 편안한 행복감을 느껴왔다면 청년들의 비혼이나 비출산 문제는 지금과 다른 양상이었을 것입니다. 하지만 안타깝게도 그러지 못했어요. 시집살이와 친척들의 과도한 간섭, 경제적 문제, 가부장제 문화에서 마주하는 다양한 문제와 억압, 불합리한 허식들이 성인과 성인의 진솔한 정서적 교류를 막았습니다. 그래서 기혼자들이 모인 곳에서는 결혼생활의 고통을 과장되게 토로하고 불행을 경쟁했으며 미디어에서는 이를 희화하하기 일쑤였지요.
그러나 부모가 그럭저럭 유쾌하고 행복하다면 자녀는 비혼을 결심할 때 부정적 감각의 부당한 영향 없이 이성적으로 자기 삶의 방향을 정할 수 있을 것입니다. 아이들에게 제일 좋은 아빠는 '엄마한테 잘하는 아빠'라고 합니다. 부부가 재미있게 잘 지내는 것마으로 자녀들의 행복감은 높아집니다.
그러므로 지금까지 말씀드렸던 개인의 심리적 요인들을 고려할 때, 복지 시스템의 보완만으로 비혼, 비출산 결정을 내린 사람들의 행동 변화를 이끌어내기란 쉽지 않을 것입니다. 다만 그럭저럭 좋은 개인 혹은 그럭저럭 좋은 부부와 같은 모습을 젊은 세대에게 보여주고 기다리는 것이 자연스러운 태도 변화를 가져올 것입니다. '저렇게 살아도 괜찮겠구나' '내 삶에 아이가 한 명쯤 있어도 괜찮겠구나' 하는 생각이 조금씩 들도록 말이죠.
(탁) 만찬장에서는 실은 독도새우는 큰 화제가 되지 않았다. 오히려 미국의 주요 수행원들이 관심이 있었던 것은 360년 된 씨간장으로 만든 한구구이였다. 360년 묵은 간장을 먹어도 되는거냐고 미심쩍어했고, 충분히 괜찮다고 설명했지만 먹기를 꺼려해서, 많이 남았고 만찬장에 들어오지 못하는 수행직원들의 방자상(수행원들을 방자로 표현, 옛날에 조선의 임금이 식사를 남기면 수라간 상궁과 궁녀들이 그 남은 음식으로 식사를 했는데 비슷한 개념을 방자상이라는 은어로 표현)으로 내려갔다.
(에피소드 2. 각본없는 대통령 기자회견)
과거 정부와 달리 사전 각본 없이 즉석에서 기자가 질문하고 대통령이 즉석에서 답변하는 방식의 기자회견을 실시.
기자들도 엄청 긴장했다(아래 영상에서 보면 첫질문은 하는 기자가 손을 떠는 모습을 볼 수 있다). 너무들 긴장을 해서 현장에서 대중음악을 틀며 긴장을 풀어주려고 했다.
(에피소드 3. 기업인 초대 맥주 미팅)
문재인 대통령 취임 후 첫 여름, 재벌기업 회장단을 청와대에 초청해서 잔디밭에서 호프 미팅을 갖는 기획.
일주일전부터 기사로 나며 화제가 됐는데, 기사가 나가고 나서 탁현민 비서관에게 맥주회사에서 자기들 맥주를 써달라고 계속 로비 전화가 와서 만나달라고 했음.
(탁) 만나면 안되잖아요.
(김어준) 그럴 때 만나서 뒷돈 받는 건데.
(탁) 그래서 수제맥주 만드는 회사를 찾기 시작했고, 조그만 회사 하나를 찾게 되었다. 작은 회사였는데 나중에 꽤 잘됐다고 들었다. 처음엔 사장님이 당황하셨고, "살다보니 이런 날도 다 오는군요"라고 말씀하신 기억이 난다.
[감상]청와대라는 곳이 비서관 정도의 직책은 돈 먹으려 맘만 먹으면 이런 행사 스폰서 선정으로 수억씩 뒷돈으로 받는 건 일도 아닐 듯 싶다. 대통령의 도덕성, 그리고 그 주변인의 도덕성이 중요한 이유다.
(에피소드 4. 비효율적인 회의문화?)
처음에 어공(어쩌다 공무원)이 되서 청와대에 들어가니 트럼프 대통령 방문시 정상에게 줄 비공개 선물(정상에게 주는 선물은 비공개가 원칙. 공개될 경우 어떤 의미가 내포되어 있나에 대한 뒷말이 나올 수가 있고 외교적으로 문제가 발생할 가능성을 사전에 차단)을 결정하기 위한 선물자문회의가 열리니 참석해달라는 요청을 문체부에서 받았다. 비서관이 그런 회의까지 가야하나 싶어서 꼭 참석해야 하냐고 물어보니 의전담당 비서관이 주재하는 회의라고 해서 할 수 없이 참석했다.
참석해보니 20여명이 넘는 각 부서 담당자가 참석했다. 외교부, 문체부, 문체부 산하 외청, 학예사들, 심지어 경호처까지. 도대체 이 사람들이 왜 다 참석했지 생각하며 짜증이 나면서 이게 다 허례허식이라는 생각이 들었다.
주재자로서 모두발언을 하게 됐는데 잘됐다고 생각해서 이런 불필요한 회의에 여러분과 저같은 실무자들이 시간을 뺐겨선 안된다. 비공개 선물정도에 이렇게 행정력을 낭비해서 되겠냐며 질책성 발언을 하고 일단 모였으니까 빨리 하고 끝내자고 했다. 분위기가 일순 싸해지고 당시에는 내가 장악했다고 생각을 했는데 지금 돌아보면 "에휴 저 새끼 저거" 하고 속으로 욕 많이 먹었을 것 같다.
회의가 진행되면서 토론을 하는데 생각보다 진지하고 외교부, 문체부, 경호처 나름대로 다 선물들에 대해서 고려하는 타당한 사유들이 있었다. 그 각각의 나름의 이유들을 들으면서 아 내가 틀리고 이 사람들이 맞구나 하는 깨달음이 오면서 많이 반성을 하게 됐다.
공무원 조직이 밖에서 보면 낭비가 많아 보이지만, 그 낭비처럼 보이는 것이 실제로는 사고를 막는 역할을 하는 경우가 많은 것을 보게 되면서 공무원 조직이 효율만으로 움직이는 것은 아닐 수 있겠구나라는 생각을 하게 됐다.
도쿄기담집이 약간은 기묘한 이야기를 수록했다는 느낌으로 지은 제목인 것 같긴 한데 그렇게 기묘하지는 않다.
그리고 읽고 나서 그렇게 기억이 나는 작품도 없다. 그 중에서 그래도 가장 기묘한 작품으로 기억나는 것은 시나가와 원숭이편인데 주인공이 어느 지방 산속(후지산이 있는 야마나시인가?)에 있는 여관에 묵었다가 시나가와에서 온 원숭이가 시중을 든 경험을 기록한 형식의 작품이다. 이 단편은 일본 드라마 기묘한 이야기 시리즈에 한번 나와도 괜찮을 듯 싶다.
하루키 원작의 하나레이베이와 구성과 스토리는 거의 동일하지만 영화쪽이 훨씬 풍성하며 디테일이 살아있다.
원작소설에서는 그리 큰 주제의식같은 건 느껴지지 않는데, 영화에선 아들과의 애증, 그리고 아들이 하와이 하나레이 베이에서 사고로 죽은 후 그 애증이 해소되는 10년간의 과정이 설득력 있게 그려진다. 특히 죽은 아들(이름이 타카시)의 갈등해소의 모티브로 등장하는 또 다른 젊은 청년 타카하시(원작에선 뚱보라고 이름도 없다)의 비중이 원작보다 크며 이 장치로 인해 극의 설득력이 높아진다.
하루키의 작품은 읽고나도 선뜻 이 작품의 의도나 주제를 캐치하기가 어려운데 그것은 그의 작품이 물과 같은 성격을 갖기 때문이다. 모호함 속에서 작품을 읽어나가다 보면 무언가 드러나는 듯 하다가도 다 읽고 나면 그것이 무엇인지 여전히 애매한 그런 안개속을 걷는 기분을 느끼는데 이 영화도 역시 그런 하루키의 느낌을 잘(?) 살려냈다.
그래도 하루키의 작품보다는 감독의 손길이 훨씬 세밀하며 친절하다. 마지막 엔딩 장면에서 바닷가에 서있던 사치가 뒤돌아보면서 눈물을 머금은 얼굴로 환하게 미소를 짓는 장면은 감독의 친절한 마음을 대변한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