전작 <기사단장 죽이기> 이후 6년만에 나온 신작. 하루키 작품에 익숙한 사람이라면 이 작품의 초반부를 읽으면서 얼마되지 않아 '익숙한 스토리와 구성인데?'라고 생각하게 될 것이다.

도시를 묘사하는 부분에서부터 <세계의 끝과 하드보일드 원더랜드>를 그대로 떠올리게 된다.

소설 말미에 작가후기에서도 이 작품의 모티브가 된 중편 <도시와, 그 불확실한 벽>(1980년 문예지 '문학계' 발표)를 처음 다듬어서 쓴 장편이 1996년에 나온 <세계의 끝과 하드보일드 원더랜드>였다고 밝혀놨다.

작가는<세계의 끝과 하드보일드 원더랜드>와는 다른 대응이 또 있어도 좋지 않을까 하는 생각으로 이 소설을 집필했다고 하는데 속마음으로는 아마도 조금은 미진하거나 걸리는 부분이 있지 않았을까 하는 느낌도 든다.

개인적으로도 1996년에 발표된 작품이지만 <세계의 끝>은 최근(2년 전쯤)에 들어서야 읽어봤는데 별로 재미가 없었다.  다 읽고 나서도 뭔가 빠진 부분이 있다고나 할까?

이 작품도 그리 개운하진 않다. 카페 여주인과의 스토리를 좀 더 이어나갔으면 하는 바램이 있는데 급작스럽게 끊겨버리는 느낌이 없지 않다.

하지만 <세계의 끝>보다는 진일보한 작품이란 건 어느 정도 수긍할 수 있을 것 같다.

작품후기 말미에 작가는 이런 말을 한다.

 

 '호르헤 루이스 보르헤스가 말한 것처럼 한 작가가 일생 동안 진지하게 쓸 수 있는 이야기는 기본적으로 그 수가 제한되어 있다. 우리는 그 제한된 수의 모티프를 갖은 수단을 사용해 여러 가지 형태로 바꿔나갈 뿐이다 - 라고 단언할 수 있는지도 모른다. 

 요컨대 진실이란 것은 일정한 어떤 정지 속이 아니라, 부단히 이행 = 이동하는 형체 안에 있다. 그게 이야기라는 것의 진수가 아닐까. 나는 그렇게 생각할 따름이다.'

 

하루키의 주요한 작품은 크게 3개라고 본다.

1. 양 3연작 시대(초기) - 바람의 노래를 들어라, 1973년의 핀볼, 양을 쫓는 모험

2. 노르웨이의 숲

3. 태엽 감는 새 연대기 이후 

 

특히 <태엽 감는 새 연대기> 이후의 작품은 거의 동일한 모티프의 변주이고 그 중 최고의 작품은 <태엽 감는 새 연대기>라고 개인적으로 생각한다.

 

이번 <도시와 그 불확실한 벽>은 여전히 내겐 2% 정도 부족해보이는데, 70대가 넘는 노작가가 아직도 그의 작품 세계의 결말을 내지 않고 정진하는 모습은 어떤 면에선 감탄을 자아내게 하는 부분도 있다.

신변잡기의 에세이. 탁현민은 책을 쓸수록 갈수록 필력이 좋아지고 있다는 것이 느껴진다.

이 책의 제목이 왜  '사소한 추억의 힘'인지는 마지막 에필로그 말미에 쓰여있는 구절을 보면 알 수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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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북극을 가리키는 나침은 무엇이 두려운지 항상 여읜 바늘 끝을 "떨고 있습니다. 여읜 바늘 끝이 떨고 있는 한 우리는 그 바늘이 가리키는 방향을 믿어도 좋습니다. 그러나 그 바늘 끝이 전율을 멈추고 어느 한쪽에 고정될 때 우리는 그것을 버려야 합니다. 이미 나침반이 아니기 때문입니다.

 - 신영복, <지남철>

 

p7

 스필버그 감독은 1982년 개봉된 영화 <이티>에는 총을 든 경찰관이 어린아이들을 쫓는 장면이 포함돼 있었는데, 20주년을 기념한 재편집 작업에서 총을 든 장면을 무전기를 쥔 장면으로 교체했다고 이야기했다. 하지만 그것이 엄청난 '실수'였다는 회고였다.

 "<이티>는 그 시대의 산물이다. 그 어떤 영화도 현재 시점의 렌즈를 통해 자발적으로든, 강제적으로든 수정되어서는 안 된다. 모든 영화는 영화를 만들었던 당시 우리가 어디에 있었는지, 세상은 어떠했는지, 그리고 이런 이야기들을 세상에 내보냈을 때 세계가 어떻게 받아들였는지 등을 보여주는 일종의 이정표다."

 

p9

 절망과 위로, 그 모든 순간에 그것이 극단으로 치닫게 하지 않는 장치(裝置)가 있다라는 것이다. 바로 성찰과 웃음이었다. 실패를 복기하는 과정은 괴롭지만, 과정의 성찰은 곧 위로였다. 또한 괴롭고 심각한 상황에서도 웃음은 가장 뛰어난 탈출 버튼이었다. 모든 위로의 순간에는 반드시 성찰과 웃음 포인트가 함께 있었다.

 

p19

 내 평생 스승은 "어떤 일에 쓰일 때 자기 능력의 70퍼센트 정도만 해도 되는 자리가 가장 적당한 자리"라는 말씀을 하셨었다. 높은 지위나 원하는 역할에 욕심을 내기보다 주어진 자리에서 적당히 해도 좋은 성과를 내며 즐겁게 일할 수 있다면 그게 자신에게도 조직에도 이상적이라는 말씀이었다.

 청와대에서 처음 일하게 되었을 때 일의 고됨과 책임의 막중함을 자주 토로하기는 했지만 한참 징징거린 후에 돌아서서는 씩 웃기도 많이 웃었다. 한동안 쓰임이 없다가 모처럼 쓰이니 쓰임이 있다는 것만으로도 행복했었다. 하지만 시간이 지나면서 주어진 일에 만족하지 못하고 더 큰 쓰임을 기대하게 되었다. 그것은 나의 욕심이 나의 능력을 넘어서기 시작하면서 시작되었다.

 어떤 사람의 능력치가 100이라 할 때, 그 사람이 60이나 70 정도만 하면 되는 자리에 놓이면 어느 순간부터 욕심이 생긴다. 자신의 능력만큼, 아니 그 이상을 할 수 있을 거라고 생각하게 된다. 부끄럽지만 나 역시 그러했다. 부여된 일보다 더 많은 일을 더 잘할 수 있을 거라는 생각 때문에 더 많은 결정을 할 수 있고, 더 많은 권한이 부여되는 자리와 권한에 욕심을 냈었다. 

 그러나 돌이켜보니 결국 그런 쓰임이 없었다는 것이 저말 다행이었다. 100퍼센트를 할 수 있는 사람이 100퍼센트를 요구받는 자리나 그 이상의 자리에 놓이면 능력치를 최대한 끌어올려야 한다. 그러다 보면 사고(思考)의 여유도 상상력도 발휘하기 힘들어진다. 매번 최선을 다해야 함은 물론이고 최선을 다해 보아도 능력의 한계만 절감하게 된다. 짊어여쟈 할 책임은 무거워져 결국에는 자기 능력의 100퍼센트를 다 채우지도 못하게 된다.

 하지만 능력이 100퍼센트라고 할 때 70퍼센트 정도만 해도 되는 자리에 놓이면 자신을 끝까지 밀어붙이지 않아도 주변의 기대치를 손쉽게 채울 수 있다. 기대치를 채우는 것뿐 아니라 30퍼센틔 여유도 가지게 된다. 

 30퍼센트의 여유, 이것이 단지 술렁술렁 일해도 되니 다행이라는 의미가 아니다. 여기서 생긴 30퍼센트의 여유가 그렇게 간절했던 상상력이 되고, 새로운 시도와 실험을 가능하게끔 해준다. 여러 국가 행사를 기획하고 연출하면서 나름의 상상과 실험을 할 수 있었던 이유가 여기에 있지 않았나 싶다. 좀 더 많은 책임과 부여되었더라면 더 많은 일을 할 수 있지 않았을까 싶었지만, 아쉬운 쓰임이었기 대문에 오히려 여러 일을 성공적으로 무사히 치러낼 수 있었구나 싶다.

 

 

p51(신영복 글)

 "높은 곳에서 일할 때의 어려움은 무엇보다 글씨가 바른지 삐뚤어졌는지 알 수 없다는 사실입니다. 낮은 곳에 있는 사람들에게 부지런히 물어보는 방법밖에는 없습니다." "물은 빈 곳을 채운 다음 나아갑니다. 결코 건너뛰는 법이 없습니다. 차곡차곡 채운 다음 나아갑니다." "나무의 나이테가 우리에게 가르치는 것은 나무는 겨울에도 자란다는 사살입니다. 그리고 겨울에 자란 부분일수록 여름에 자란 부분보다 훨씬 단단하다는 사실입니다."

 

 

p.74 마스터 요다의 가르침

 두려움은 분노를, 분노는 증오를, 증오는 고통을 낳는다(Fear leads to anger, anger leads to hate, and hate leads to suffering).

-<스타워즈 에피소드 1 : 보이지 않는 위협> 중에서,

 마땅찮은 세상을 이겨내기 위해서는 분노가 필요할 것 같지만 그게 꼭 그렇지는 않다. 오히려 좋았던 기억을 떠올리는 편이 분노보다 유용할 때가 많다. 

 현실에서는 저주로 사람이 죽지 않고 증오로 세상이 바뀌지 않는다는 것이다. 특히 타인이나 다른 정치 세력을 탓하는 것만으로는 자신이 바라는 세상은 절대 오지 않는다. 남 탓으로 잠시 웃거나 정신 승리를 할 수도 있지만 그때뿐이다. 세상은커녕 한 개인의 삶도 절대 바뀌지는 않는다. 증오는 결국 자신을 고통스럽게 할 뿐이다.

 살면서 여러 사람을 만났지만, 분노와 증오의 문제에 관해서 김어준만큼 '순수'한 사람을 보지 못했다. 그와 나는 이명박-박근혜 시대를 거쳐 이제는 윤석열 시대를 함께 살고 있다. 그동안 문재인 대통령의 5년을 제외하고는 영 마땅찮은 시절이 훨씬 많았다. 그런데도 그가 이러한 태도를 유지할 수 있는 이유는 아마도 기질 탓이 클 것이다.

 김어준은 어뜻 대충대충 무심해 보이지만 매우 집요한 사람이다. 하지만 무언가를 제안했을 때 상대방의 거절 의사가 분명할 때는 '그럼 할 수 없지' 하며 넘기고 더는 이야기하지 않는다. 뒷담화는 물론 군말도 없다. 믿기 어렵겠지만 생각보다 막말도 쓰지 않는다. '씨바' 정도가 그의 막말 한계선이다. 요즘 그의 방송을 보면 '바보', '멍충이'를 즐겨 쓰는 것 같다.

 나와는 <나는 꼼수다> 콘서트 때부터 인연이었으니, 알고 지낸 지 십 년이 넘었다. 일이 있으면 밤낮 가리지 않고 연락을 주고받지만, 일이 없으면 몇 달씩 서로 연락하지 않는다. 나이는 나보다 네댓 살 위인데도 별로 개의치 않는다. 처음 만날 때부터 지금까지 나를 '탁'이나 '자기'라고 불렀고, 나는 그를 '김어준'이나 '총수'라고 부른다. 그러한 호칭과 관계에 대해서 단 한 번도 불편해하거나 불만을 이야기한 적도 없다. 한마디로 뒤끝이 없다. 그의 순수함은 이런 '뒤끝 없음'에서 기인한 것이 아닐까 싶다. 

 분노가 증오가 되기 딱 좋은 시대다. 모쪼록 그의 순수한 분노를 많이들 배웠으면 좋겠다.

 

p177. 모그바티스

 모그바티스는 촌장이 마을의 대소사는 물론이거니와 여러 분쟁을 조정하고 크고 작은 일들을 결정한다. 촌장의 결정이 법적 효력이나 강제력을 가지는 것은 아니다. 하지만 그가 결정을 내리면 누구도 더는 불만을 갖지 않는다. 사람들은 촌장을 두고 '이편도 저편도 아닌 사람'이라 말한다. 누군가 결정을 내려야 한다면 어느 편도 아닌 사람의 말을 들어야 한다는 것이 여기 사는 이들의 생각이라고 한다.

 나는 촌장에게 물었다. "그건 민주주의도 아니고 대체 뭐죠? 어느 쪽이든 자신의 주장을 펴고 그걸 다수가 받아을이는 것도 아니고, 양쪽의 주장을 듣고 촌장이 결정하는 것 그것은 일종의 독재 아닌가요? 뭔가 이상하네요."

 촌장은 대답했다. "민주주의요? 다수의 의견이 언제나 옳다고 생각하나요? 글쎄요. 민주주의는 종종 엉뚱한 선택을 하곤 하죠. 안 그렇던가요?"

 

p178

 해거름에 해변 모래사장을 헤집으며 느릿느릿 지나는 소 한 마리와 몽이꾼도 보았다. 뭘 하는 것이냐고 묻자 "백사장 아래 묻혀있는 오래된 사람들의 지혜를 찾고 있다"고 했다. 나는 도무지 이해할 수가 없었다. 지혜와 같이 소중한 것을 파도가 조금만 밀려와도 쓸려가는 해변에 묻어 놓다니... 왜 그 소중한 것을 거기에 묻어놓는 것일까 싶었다.

 "당신은 지식과 지혜를 구분할 줄 모르는군요. 지식은 구하는 것이지만, 지혜는 발견하는 것입니다. 모래밭에 지식을 묻어놓으면 언제고 큰 파도에 쓸려 사라지지만, 지혜는 어떤 파도가 와도, 아무리 오랜 세월이 흘러도 그 자리에서 발견되길 기다리고 있습니다."

 

p241. 날짜는 잊어도 날씨는 안다

 종종 날짜를 잊었다. 대체 오늘이 며칠인지, 무슨 요일인지 생각이 나지 않았다. 한갓지던 협재해수욕장이나 금능해수욕장에 차들이 들어차면 그제야 '아, 주말이구나' 싶고, 혜심언니의 게스트하우스나 추의 작은집이 썰렁하게 느껴지면 '아, 월요일쯤 됐겠군' 싶었다. 도시에서 월간, 주간, 일간에 더해 시간 단위로 끊어 살던 기억이 너무도 아득해서 괜히 불안해지기까지 했다.

 그런데 나야 일 없는 여행하는 처지니 그럴 수 있다 쳐도 이곳에 사는 혜심언니나 추나 효주도 별반 차이가 없었다. 간혹 모여 이야기를 하다가 누군가 "오늘이 며칠이지? 무슨 요일이지?" 하면 다들 한참 대답을 못 하고 휴대폰이나 다이어리를 뒤적이곤 했다.

 오늘이 며칠인지를 잊고 산다는 것은 어제와 별반 다르지 않은 오늘과 내일이 이어진다는 것과, 날짜보다 중요한 무엇이 있다는 것인데 날짜를 잊고 사는 사람들에게 중요한 것은 '날씨'였다.

 제주의 변화무쌍한 날짜는 종일 기상청 예보를 살펴보게 했고, 아침저녀그로 꼭 몇 번씩 확인하게 했다. 사람들은 누구라도 날짜는 몰라도 날씨만큼은 분명하게 알고 있었다. 세 시간 간격으로 예보되는 날씨를 확인하는 것은 물론 자신만의 기상 예측도 열심히 했다. 구름의 흐름이나 바람의 세기, 그리고 파도의 높이까지 고려해 각자의 예보를 낼 정도로 날씨에 민감했다.

 아침 바람이 습하고 무거우면 저녁엔 반드시 비가 온다거나, 중산간의 구름이 얼마쯤 지나면 이곳 한림까지 내려온다거나, 제비들이 유난히 낮게 날며 분주하면 오후에 후텁지근할 것이라든지, 매미가, 개구리가, 물색이, 파도가, 석양이, 달무리가, 어떻다는 걸로 어떻게 해서든 날씨를 알아내기 위해 다들 노력했다. 

 날짜를 헤아리며 사는 것과 날씨를 예측하며 사는 삶은 어떻게 다른 걸까?

 도시에서의 삶이란 결국 끝없는 약속과 정해진 기한과 계획과 그것들을 점검함으로써 하루를 보낸다. 날짜와 시간을 몰라서는 이런 것들이 제대로 될 턱이 없다. 하루에도 몇 번 씩 다이어리를 살펴야 하고, 시계를 쳐다봐야 하고, 알람을 울리고 다시 그 알람을 재설정하는 일을 반복한다. 그래야만 실수가 없고, 그래야만 별 탈 없이 살 수 있다.

 하지만 섬에서 날짜와 시간은 그리 중요하지 않다. 예컨대 고기를 잡는 데 특별한 약속과 기한이라는 것은 무의미하다. 그것은 오로지 바다 상태와 날씨에 따라 달라질 뿐이다. 내가 오전 11시에 참돔을 잡겠다고 결심한다고 해서 그게 나오지도 않을뿐더러, 내가 저녁 6시에 금오름에서 해지는 것을 보겠다는 것은 나만의 희망 사항일 뿐이다. 참돔도, 금오름도 그 모든 것은 날씨가 결정한다.

 2박 3일간의 제주도 여행에서 도착하면 한수풀식당에 가고, 오후에는 저지오름에 갔다가, 저녁에는 신창리에서 해지는 풍경을 보고, 다시 아침에는 차귀도에서 잠수함 투어를 하겠다는 야무진 계획을 세워온 커플이 있었는데, 그들은 결국 종일 내리는 비에 어쩔 줄 몰라 하다가 결국 카페에 죽치고 앉아 있다 신경질을 내며 떠나는 모습을 목격한 적도 있다.

 그러니 섬에서는 날짜와 시간보다 날씨가 먼저가 되고, 삶의 태도와 방식이 바뀌게 되는 것이다. 도시에서 웬만한 비가 오거나, 바람이 불거나, 눈이 오거나 해도 큰 걱정이 없다. 큰 태풍이 몰아쳐도 대개는 나와 상관없는 일이 된다. 심심한 재난 영화나 안타까운 뉴스 정도일 뿐이다.

 나 역시 아파트에서 주차장으로, 주차장에서 다시 다른 주차장으로 이동하면서 때로는 비가 아무리 와도 우산조차 필요 없을 때가 많았다 간혹 거리를 걷게 되더라도 여차하면 들어갈 카페나 건물의 처마가 연이어 있었다. 다만 걱정은 약속 시간에 맞출 수 있느냐 없느냐일 뿐이었다. 비가 오면 차가 좀 막히니까.

 섬에서는 비 오는데 나가봐야 고생이다. 우산은 뒤집히고 우비를 입어도 세찬 바람에 금세 젖는다. 그러니 비가 오면 잠시 멈추고 빗소리를 들으며서 집 앞 텃밭을 돌보다가 해가 뜨면 오후 물때에 맞춰 배 타고 나가 고기를 잡는다. 날씨가 좋고 바람이 불면 서둘러 밀린 빨래를 널고, 해 질 녘에 구름이 걷히면 오름에 올라 해지는 풍경과 마주하게 되는 것이다.

 섬사람들의 약속도 대충 그렇다. '저녁이나 먹지'라고 하지 '몇 시에 저녁 먹자'고는 잘 안 한다. '내일 보자'고 하지 내일 몇 시에 보자는 건지는 잘 안 알려준다. 처음엔 그걸 잘 몰라 괜히 저녁밥 때보다 일찍 가서 일없이 빈둥거리거나 때로는 밥때보다 늦어 타박을 듣곤 했다. "대체 저녁을 먹으려면 몇 시에 가야 하느냐"고 묻자 "배고플 때 오면 되지" 했다. 맞는 말이다. 어차피 밥 먹는 게 목적인데 6시든, 7시근 그게 뭐 대수인가, 배고플 때 먹으면 되지.

 시간에 갇혀 사는 것과 날씨에 갇혀 사는 것, 우리, 어떻게 사는 게 더 나은 것일까.

 

p.257

  혼자 지내는 날이 많으니 음식 해 먹는 솜씨도 꽤 늘었다. 한림 수협 마트나 하나로 마트에서 장을 봐 유튜브 영상 레시피를 따라 만들어 먹는다. 김치찌개, 된장찌개, 카레라이스, 오므라이스, 볶음밥 같은 것은 이제 기본이고 돼지주물럭, 청경채 볶음, 두부조림, 오삼불고기, 궁중 떡볶이 최근에는 등갈비찜에까지 이르렀다. 실패도 있었고 시련도 있지만 꾸준히 나아지는 중이다. 다음에는 춘장을 사서 해물짜장을 만들어 보려 한다.

 

p259

 제주에 머무는 동안 내가 생산적이지 않았으면 한다. 좀 더 유약했으면 한다. 매사 별 뜻 없고 의미 없었으면 한다. 온갖 사소한 것들과 함께 유유자적 지낼 수 있으면 한다. 그런 시간이 필요하다. 무언가를 위해서, 다음을 위해서 필요한 것이 아니다. 그냥 필요하다. 대단치 않은 것들, 사소한 것들이야말로 삶에 큰 위로가 되어 주니 그래서 필요하다.

 

대한민국이 다음 단계로 발전하기 위한 조국의 2가지 화두에 대한 제안.

대한민국의 사회권 확대와 경제민주화를 위해서는 독재에 까지 이른 검찰권력의 해체 그리고 재벌 해체의 이유와 그 의미에 대해서 고찰한 내용을 담고 있다.

전작인 가불선진국과 어떤 면에서는 이어지는 내용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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p30

 군사독재 시절에는 물론 '1987년 헌법체제' 아래에서도 검찰은 현재의 "살아 있는 권력"에 충성했다. 2023년 10월 18일 김의겸 민주당 의원은 국회 법사위 국정감사 질문에서 다음과 같이 말했다.

 "YS(김영삼 정부) 때 검찰에 출입했는데, 그때 서울(중앙)지검의 모 차장 검사가 기자들 앞에서 '우리는 개다. 물라면 물고 물지 말라면 안 문다'고 했다. 

 2013년 11월 고 이용마 MBC 기자는 월간지 《참여사회》 11호에서 다음과 같이 일갈했다.

 "검사라면 가장 먼저 떠오르는 생각은 '권력의 사냥개'다. 주인이 "가서 물어!"라고 시키면 물불 가리지 않고 달려가서 무는 존재, 주인이 시키기 전에는 절대 물 수도 없는 존재다.   하지만 최근엔 이런 사냥개 이미지에 한 가지 더 덧붙여졌다. 권력자에게 빌붙어 아양을 떠는 애완견 이미지다. 돈 많고 힘센 권력자들의 무법 행위 앞에서 비굴하게 꼬리를 내리고 기분에 맞추려고 보이는 형태는 빗댄 것이다."

 

 김영삼 정부 출범 후 검찰은 전두환-노태우가 주도한 12·12 쿠데타와 5·17 군사반란에 대해 "성공한 쿠데타는 처벌할 수 없다"는 해괴한 논리로 불기소처분을 했다. 검찰의 정치적 편향을 잘 보여주는 사례인데 자신들의 '부역附逆'을 사후적으로 정당화하는 것이었다. 이 결정의 주임검사를 맡은 서울중앙지검 공안1부 장윤석 부장검사는 후일 참여정부 시절 검찰 게시판에 정부 비판 글을 올리고 사직한 후 국민의힘 전신인 한나라당 국회의원(경북 영주시)이 된다. 물론 이 '성공한 쿠데타 처벌 불가론'은 국민적 공분을 일으켰고, 그 여파는 김영삼 대통령의 특별지시와 군사반란 주모자들에 대한 공소시효를 정지시키는 '5·18 특별법' 제정으로 이어졌다.

 정치적 민주화 이후 검찰은 점점 조직의 외연과 영향력을 넓혀가면서 독자적 '준準정당'으로 변화해 갔다. 개발독재 단계에서는 소수의 조직화된 군부 엘리트가 쿠데타를 일으켜 정권을 잡고 권력을 독점적으로 운영했다면, 개발독재를 벗어나는 시점부터 여러 다른 권력 엘리트 집단이 목소리를 내게 된다. 그들은 정권 초기에는 정치권력과 협력하고 정권 말기에는 미래의 권력에 줄을 대고 현재 정치권력을 공격하면서 독자적 힘을 키워나갔다. 같은 맥락에서 김누리 교수는 "'폭력의 지배Autocracy'에서 '자본의 지배Plutocracy'를 거쳐 '기술관료의 지배Technocracy'로 이행한 것"이라고 분석했다.

 특히 '검사동일체'와 '상명하복'을 조직 운영 원리로 삼고 있던 검찰은 다른 엘리트 집단에 비해 우위에 섰다. 대한민국 검찰은 OECD에 속한 다른 국가의 검찰과 달리 '수사권', '경찰에 대한 수사지휘권', '기소권', '영장청구권' 등을 독점하고 있었기 때문에 다른 엘리트 집단을 손쉽게 제압할 수 있었다. 이러한 '무기'를 가진 검찰은 정치권력과도 힘겨루기를 시작했다. '권력의 사냥개'에 그치지 않고, '주인'인 정치권력이 약해진다 싶으면 '주인'을 물어뜯었다. 이즈음 "정권은 유한하고 검찰은 무한하다"라는 건배사가 검찰내에서 공유되었다.

 군부의 총칼이 최고의 무력이었던 시간이 끝나가면서, 수사권·기소권·영장청구권 등 이른바 '검찰권'이 최고의 무력이 되는 시간이 다가오고 있었다. 법보다 주먹이 앞서는 시대가 끝나가면서, 법이 주먹 같은 역할을 하는 시대가 열린 것이다.

 

p34

 2012년 이명박 정부 말기, 제18대 대통령 선거운동 기간에 국가정보원 소속 심리정보국 요원들이 댓글공작을 전개한다. 당시 야당이었던 민주통합당이 국정원 전현직 관계자로부터 제보를 받고 경찰에 신고했고, 민주통합당과 경찰은 심리정보국 요원 중의 한 명인 김하영 씨가 작업을 하던 오피스텔을 찾아가 대치하는 상황이 벌어진다. 국가정보원이 자행해 온 불법 대선 개입이 발각된 것이다.

 당시 김용판 경찰청장이 권은희 수서경찰서 수사과장에게 전화를 걸어 압수수색영장 신청을 신중히 결정하라는 취지의 말을 했고, 권 과장이 이를 폭로하자 총경 승진에 탈락하고 관악경찰서 여성청소년과장으로 발령이 난다. 이후 2013년 경찰은 이 사건을 국정원의 선거 개입으로 결론을 내리고 기소 의견으로 검찰에 송치했다. 검찰은 윤석열 서울중앙지검 특수1부장(사법연수원 23기)을 팀장으로 특별수사팀을 구성해 수사를 전개했고, 원세훈 국정원장, 김용판 경찰청장 등을 기소한다. 당시 부팀장은 박형철 부장검사(사법연수원 25기)였다. 이후 윤석열은 인사상 불이익을 받았고, 박형철은 검찰을 떠났다. 그렇지만 권력기관 내 국정원의 절대 우위는 무너지게 된다. 10·26 사태 이후 중정이 보안사에 의해 타격을 받았다면 이제는 검찰에 의해 타격을 받았고, 이 검찰 수사는 대중적 지지를 받았다.

 김용판 청장은 이후 2020년 국민의힘의 전신인 미래통합당의 국회의원(대구달서병)으로 당선되는데, 윤석열 검찰총장은 훗날 국민의힘 대선후보가 된 후 김 의원을 만나 "미안하다"고 사과한 뒤 막걸리를 마시며 화해했다고 보도되었다. 나는 이 대목에서 권력을 얻기 위해서는 언제든지 치고, 언제든지 손잡는 정치의 민낯을 보았다. 나는 대체 윤 후보가 김 의원에게 무엇이 미안했던 것인지 의아했다.

 이 국정원 선거 개입 수사 과정에서 국정원과 맞섰던 윤석열, 권은희 두 사람은 대중적 인기를 얻었고, 범진보 진영은 이들에게 열렬한 응원을 보냈다. 나 역시 두 사람에게 박수를 보냈다. 특히 윤석열 국가정보원 댓글사건 특별수사팀장은 2013년 10월 21일 국정감사에서 조영곤 전 서울중앙지검장 등 윗선의 수사 축소 압력을 폭로했고, 이 자리에서 그가 한 말 "저는 사람에게 충성하지 않는다"는 크게 회자되었다. 그런데 이 유명한 말 앞에 이루어진 문답은 제대로 알려지지 못했다. 즉, "조직을 사랑합니까?"라는 당시 여당 새누리당 정갑윤 의원의 질문에 윤 검사는 "네, 대단히 사랑하고 있습니다"라고 답했다. 그의 답변을 종합하면, "사람에 충성하지 않고 검찰 조직에 충성한다"는 뜻이었다.

 박근혜 정권에 의해 인사불이익을 받은 윤석열 검사는 2016년 '최순실 게이트'와 박근혜 정권의 국정농단을 수사하는 박영수 특별검사에 의해 수사팀장으로 발탁된다. 수사팀장으로 내정된 윤 검사가 한 말도 인기를 끈다. "검사가 수사권 가지고 보복하면 그게 깡패지, 검사입니까?"가 그것이었다. 윤석열 검사는 이러한 두 번의 특별수사 과정 속에서 국민적 스타가 되었다. 

 

 

p37

 2017년 촛불혁명은 단지 '진보'의 전유물이 아니었따. '국정농단'이라는 희대의 사태를 맞이해 진보와 중도 보수가 연합해 이루어낸 성과였다. 박근혜 대통령 탄핵도 유승민, 김수성 등 당시 여당 새누리당 안의 '비박非朴' 인사들이 동참했기에 가능했다. 이러한 맥락에서 문재인 대통령과 문재인 정부는 국정농단에 분노하고 박근혜 탄핵에 동참했던 합리적 보수 인사를 포용하기 위해 많은 노력을 기울였다. 문재인 대통령은 취임 직후 2017년 5월 19일 윤석열 검사를 검사장으로 승진시키면서 서울중앙지검장으로 파격 발탁했다. 당시 이 발표를 들은 청와대 출입기자들의 탄성을 기억한다. 당시 범여권 내에서 "윤석열은 검찰주의자일 뿐이다"라는 우려 섞인 지적도 있었지만 대중적으로 윤석열은 검찰 내 '개혁 세력'의 상징적 인물이 되어 있었다.

 문재인 정부는 검찰을 제도적으로 개혁하려 했지만, 수사와 기소에는 일절 관여하지 않았다. 과거 정부는 민정수석비서관을 검찰 고위 간부 출신으로 임명해 주요 사건의 수사와 기소를 검찰 수뇌부와 '조율'한 것으로 알려져 있다. 그러나 검찰개혁 추진을 시대적 사명으로 생각한 문재인 대통령에게 이러한 '거래'는 검찰개혁의 후퇴를 초래할 수 있기에 용납할 수 없는 것이었고, 그래서 학자 출신인 나를 민정수석비서관으로 선택했다. 검사들이 비검사 학자의 '수사지휘'를 들으려 하겠는가. 청와대가 검찰 수사를 막거나 압력을 가했다면 이후 모두 직권남용죄로 기소되었을 것이다. 검찰의 수사와 기소에 청와대가 일절 관여하지 않을 테니, 검찰도 검찰개혁에 관여하지 말라는 것이 문 대통령의 확고한 소신이었다. 나는 민정수석비서관 재직 동안 검찰개혀게도 방안 논의와 검찰 인사 협의를 위해 문무일 총장과 회동을 가진 적은 있지만, 수사와 기소 문제로는 어떠한 검사에게도 연락한 적이 없었다. 그래서 나는 청와대 안팎에서 검찰 수사에 대한 불만을 들어야만 했다. 정부 초기 검찰은 전병헌 정무수석과 김은경 환경부장관에 대한 수사와 기소를 감행했는데, 청와대는 사후 통보를 받았을 뿐이었다. 문재인 대통령 역시 이 수사와 기소에 대해서는 일언반구도 없었다.

 단, 검찰의 '사법농단' 수사가 개시되었을 때 나느 이 수사가 과도하다는 생각을 갖고 있었음을 밝히고 싶다. '사법농단'과 관련 판사들에 대한 법원 내부 징계가 지연되는 상황에서 검찰이 전격적으로 강제수사에 들어간 데에는 이번 기회에 검찰에 대한 거의 유일한 사후통제기관이었던 법원을 길들이려는 검찰의 조직적 목표와 이익이 있었을 것으로 추측된다.

 수사권 조정이 진행되는 과정에서 윤석열 서울중앙지검장은 공수처 신설과 검경수사권 조정합의안에 모두 동의한다는 의사를 박형철 반부패 비서관을 통해 전해왔다. 윤 지검장은 검찰총장 후보 당시 청와대의 검증 인터뷰에서도 같은 뜻을 표명했다. 검찰에 대한 검사의 수사지휘권도 폐지하거나 대폭 축소할 수 있다고 했다. 게다가 검찰총장 후보 청문회에서는 수사와 기소의 '분리'에 대해서도 장기적으로 옳은 방향이라고 답변했다.

 그러나 윤석열 검사장이 검찰총장으로 임명된 후 검찰개혁에 대한 이러한 입장이 180도 바뀌었음은 확인된 사실이다. 2022년 2월 12일 노영민 전 대통령 비서실장은 오마이TV와의 인터뷰에서 "검찰총장 면접 당시엔 윤 후보가 4명의 후보 중에서 공수처의 필요성 등 검찰개혁에 가장 강력하게 찬성했는데 총장이 된 후부터 태도가 바뀌었다"면서, "그때 거짓말을 했다", "정직한 사람이 아니다"라고 비판한 바 있다. 이러한 '거짓말'과 관련해 유시민 작가는 2023년 7월 19일 '매불쇼'에 출연해, 윤석열의 행동양식을 침팬지의 행동양식에 비유해 설명했다. 집단 우두머리가 되고자 하는 수컷 침팬지는 우두머리가 되기 위해 온갖 일을 다 하고, 우두머리가 되면 서열 밑에 있는 침팬지를 괴롭히고 그 위에 군림한다. 유 작가는 윤석열은 "말의 내용이 중요하지 않은 " 사람이기에, 우두머리가 되기 위해서는 무슨 말이든 다 하고 "출제자의 의도"에 맞추어 답을 할 뿐이라고 분석했다. 이에 반해 침팬지와 달리 수평적 관계를 중시하는 다른 유인원 보노보에 가까운 문재인 대통령은 윤석열의 말을 믿었다고 보았다. 

 윤석열 검찰총장이 문재인 정부에 대한 공세를 펼치기 시작한 이후 누가 윤석열을 검찰총장으로 밀었느냐 등에 대한 비판적 문제 제기가 계속되었다. 윤 총장에 대해 당시 집권 세력 전체가 기만당했고 그 결과 오판을 했다. 그러나 누구를 탓하기 전에 단지 고위 공직자 검증을 최종적으로 책임지는 민정수석비서관으로서 윤 검사에 대한 내부 검증을 철저히 하지 못했던 것이 아닌가 자성한다. 민정수석실 내부에서도 윤 검사에 대한 평가가 갈리었는데, '검찰지상주의자'라는 비판을 더 심각하게 생각했어야 했던 것이 아닌지 자책한다. 요컨대, 다름 아닌 내가 최고 인사권자인 문재인 대통령을 보좌하는 역할을 충분히 하지 못했다.

p87

 헌법은 '무죄추정의 원칙'을 규정하고 있으나, 기소되고 나면 일반 사회에서는 '유죄추정의 원칙'이 작동하기에 피고인은 오랫동안 사회적 편견과 낙인에서 벗어나기 힘들다. 2021년 온 사회를 떠들썩하게 했던 윤미향 의원 수사를 생각해 보자.

 언론과 정치권은 '윤 의원이 위안부 할머니들을 이용해 돈을 챙겼다', '공금을 유용해 딸을 유학시켰다', '단체 자금을 유용해 개인 부동산을 구입했다', '안성힐링센터를 헐값에 팔았다', '배우자 회사에 일감을 몰아줬다' 등등 이후 허위로 판명된 수많은 혐의를 부각시키며 몰아세웠다. 그리고 검찰은 보조금관리법 위반, 지방재정법 위반, 사기, 기부금품법 위반, 준사기, 업무상 배임, 업무상 횡령, 공중위생관리법 위반 등 자그마치 8개 혐의로 기소하고 징역 5년을 구형했다. '먼지털이 수사'에 이어 '투망식 기소'를 한 것이다. '투망식 기소'는 수사를 마친 후, 최종적으로는 무죄가 나오더라도 온갖 혐의를 다 모아 일단 기소부터 하는 기법이다. 즉 '투망'을 던져 '뭐든 하나만 걸려라'라는 식의 기소를 뜻한다. 대중에게는 피고인이 수많은 범죄를 저질렀다는 인식을 심어 주고, 법원에는 모든 혐의에 무죄판결을 할 수 없게 심리적 압박을 가하는 효과가 있다.

 그러나 1심 법원은 이 중 7개 혐의에 무죄를 선고하고, '10년 동안 1700만 원을 가져다 썼다'는 업무상 횡령 혐의에만 벌금형을 선고했다(유죄판결이 난 건의 경우 오랜 시간이 흘러 영수증을 확보하지 못한 탓이 컸다). 그렇지만 윤 의원에게 붙은 딱지는 좀처럼 떨어지지 않고 있다. 그는 민주당으로 복당도 하지 못하고 있다. 그에 대해 마녀 사냥을 전개했던 사람들은 전혀 사과하지 않고 있다. 오히려 여전히 회심의 미소를 짓고 있을 것이다.

 

p124

 우리는 '법치', 즉 '법의 지배rule of law'는 '법을 이용한 지배rule by law'가 아니라는 점을 명심해야 한다. '법치'는 단지 권력자가 법을 통해서 통치 또는 지배한다거나, 국민은 그 법을 무조건 준수해야 한다는 의미가 아니다. '법을 이용한 지배'에서 법은 통치의 도구이자 수단일 뿐이다. '법을 이용한 지배'는 조선시대에도, 일제강점기에도, 권위주의 정권, 군사독재 정권하에서도 이루어졌다. 권위주의 정권, 군사독재 정권하에서 제정된 각종 '반민주악법'에 대한 예는 생략하기로 하자. 당시 '법치'는 (노동자 시인 백무산 씨의 시 구절을 빌려 말하자면) 국가권력이 "법대로 테러"하는 것에 불과했다.

 게다가 윤석열 정부는 자신이 내세우는 '법치'가 '법의 지배'가 아니라 '법에 의한 통치'라고 공문서에 명기했다(법무부는 'rule by law'를 '법에 의한 통치'라고 번역했다). 법무부는 세칭 '검수완박법'이라고 불리는 검찰 직접수사권 축소 법률에 대해 헌법재판소에 권한쟁의 심판을 청구했다. 그런데 법무부는 그 청구서에서 "법치주의는 법에 의한(rule by law)  통치를 의미하는 개념"이라고 밝혔다. 이 문서를 접했을 때 나는 내 눈을 의심했다. 그러나 분명히 "rule of law"가 아니라 "rule by law"라고 적혀 있다. 이 문서는 온라인상에서 쉽게 찾을 수 있다. 과거 권위주의 또는 군사독재 정권도 자신들의 '법치'가 '법에 의한 통치' 또는 '법을 이요한 지배'라고 말하지는 않았는데, 윤석열 정부는 노골적으로 이를 표명한 것이다. '법치'가 '법을 이용한 지배'가 될 때 법은 법의 외피를 쓴 폭력이 된다.

 

(검수완박법에 대한 권한쟁의 심판 청구는 법무부장관인 한동훈이 제기했으며, 헌재에서 각하 - 검수완박법은 합헌이다라는 의미 - 됐다)

https://www.newspim.com/news/view/20230323000843

 

[종합] 헌재, '검수완박' 효력 인정…법무부·검찰 권한쟁의는 각하

[서울=뉴스핌] 김신영 기자 = 헌법재판소가 '검수완박(검찰 수사권 완전 박탈)' 입법 과정의 위헌성을 일부 인정했다. 다만 법안 무효확인 청구는 기각해 법안 효력이 유지될 전망이다. 이와 별

newspim.com

 

 

 

p131

 막노동으로 생계를 꾸리던 70대 노인이 뇌경색으로 쓰러진 처의 병 수발 때문에 대한주택공사를 찾아갈 수 없어서 결혼 후 분가한 딸의 명의로 임대차계약을 체결하고 공공임대주택에 입주했다. 처가 사망한 후 노인은 홀로 임대주택에서 살았는데 대한주택공사가 집을 비워달라는 소송을 제기했다. 딸 이름으로 계약이 되어 있었기 때문에 법대로라면 노인은 집을 나가야 했다. 그래서 1심 판결에서는 주택공사가 이겼다. 그런데 제2심 판견은 노인의 손을 들어줬다. 이 사건은 이후 대법원을 거쳐 조정으로 종결됐는데, 제2심 판결문 일부를 소개한다.

 "가을 들녘에는 황금물결이 일고, 집집마다 감나무에 빨간 감이 익어간다. 가을걷이에 나선 농부의 입가에선 노랫가락이 흘러나오고, 바라보는 아낙의 얼굴엔 웃음꽃이 폈다. 홀로 사는 칠십 노인을 집에서 쫓아내 달라고 요구하는 원고(대한주택공사)의 소장에서는 찬바람이 일고, 엄동설한에 길가에 나앉을 노인을 상상하는 이들의 눈가엔 물기가 맺힌다. 우리 모두는 차가운 머리만을 가진 사회보다 차가운 머리와 따뜻한 가슴을 함께 가진 사회에서 살기 원하기 때문에 법의 해석과 집행도 차가운 머리만이 아니라 따뜻한 가슴도 함께 갖고 해야 한다고 믿는다. 이 사건에서 따뜻한 가슴만이 피고들의 편에 서 있는 것이 아니라 차가운 머리도 그들의 편에 함께 서 있다는 것이 우리의 견해이다."

 

 이 판결을 접하면서 뉴욕 시장을 세 번이나 연임했던 이탈리아계 정치인 피오렐로 라과디아Fiorello La Guardia가 떠올랐다. 그는 1930년대 초 대공황 시기에 잠시 뉴욕시 치안판사로 재판을 하게 됐다. 그는 배가 고파 빵을 훔친 어느 노파에게 10달러 벌금형을 선고했다. 이어 그는 이렇게 말했다.

 "배고픈 사람이 거리를 헤매고 있는데 나는 그동안 너무 좋은 음식을 배불리 먹었습니다. 이 도시 시민 모두에게 책임이 있습니다. 그래서 나 자신에게 10달러의 벌금형을 선고하며, 방청객 모두에게 각각 50센트 벌금형을 선고합니다."

 방청객들은 순순히 벌금을 냈고, 라과디아는 이렇게 걷은 57달러 50센트를 노인에게 줬으며, 노인은 10달러의 벌금을 낸 후 47달러 50센트를 갖고 법정을 떠났다.

 

p136

 법률은 하늘에서 떨어진 것이 아니다. 사람이 만드는 것이다. 역사를 돌아보면 법은 대개 특정 사회의 계급·계층·집단의 이익과 욕망, 그리고 꿈이 충돌하고 절충되어 만들어진다. 여기서 '강자' 또는 '가진 자'가 유리한 조건에 서게 됨은 분명하다. 그래서 법학을 제대로 공부하려면 바로 이러한 현실을 직시하는 눈이 피료하다. 각 계급·계층·집단의 요구와 주장과 논변論辯이 무엇인지 꿰뚫어야 한다. 법전을 넘어 현실 세상이 돌아가는 이치를 알아야 한다. 특히 '약자'나 '갖지 못한 자'가 부당하게 대우받는 일을 막아야 한다.

 

 법률은 정치의 자식이다. 정치를 모르고 법률을 알 수 없다. 정치의 논리와 동학動學에 무관심하면 법률의 핵심을 놓치게 된다.

 정치는 투쟁의 영역인 동시에 타협의 영역이다. 각 정당은 자신들의 방향성을 담은 정강정책이나 소속된 정치인의 활동을 통해 그들의 비전과 가치를 확산시키고 이에 따라 사회를 바꾸고자 한다. 이때 치열한 논쟁과 논박論駁은 필연적이며 필수적이다. 이러한 토쟁은 종종 '선 대 악'의 방식으로 전개되지만, 궁극적으로 중간 중간 타협의 이루어질 수밖에 없다. '당동벌이黨同伐異'(옳고 그름은 따지지 않고 뜻이 같은 무리끼리 돕고 다른 무리는 배척한다)가 아니라 '구동존이求同存異'(같은 것을 추구하되 다른 것은 남겨둔다)로 가야 한다. 효율적인 정치는 이러한 타협의 영역을 많이 확보하고 이를 법률에 적극적으로 반영하는 정치다. 정당 사이에 공유하는 영역이 많아지고 이것이 신속한 법률로 마무리된다면 소모적인 정쟁은 줄어든다. '적'의 입장을 이해하고 이견이 있는 부분까지 공감대를 형성한다면 더할 나위 없을 것이다. '구동존이'를 넘어 '구동화이求同化異'(같은 것을 추구하고 이견이 있는 부분까지 공감대를 확대한다)에 이르는 길일테니 말이다.

 그러나 야당을 처벌해야 할 '범죄자' 집단으로 파악하는 윤석열 정권 아래에서는 '구존동이'나 '구동화이'가 이루어질 가능성은 매우 적다. 윤석열 정권 출범 이후 대통령과 야당 대표와의 만남이 이루어지지 않고 있는데, 2022년 정진석 당시 국민의힘 비대위원장은 그 이유를 "대통령이 지금 범죄 피의자와 면담할 때는 아니라고 생각합니다"라고 밝혔다. 2021년 대선 후보 토론회에서 윤 후보는 "제가 이런 사람하고 토론을 해야 되겠습니까? 참 어이가 없습니다. 정말 같잖습니다."라고 말했는데, 이러한 인식이 집권 세력 전체에 공유되어 있는 것이다. 요컨대, 윤석열 정권의 정치 방침은 '당동벌이' 그 자체다.

 

p146

 법률을 해석하는 입장도 시대적 흐름에 따라 달라진다. 소수의견이 다수의견이 되고, 그 반대가 되기도 한다. 시대정신과 헌법정신에 충실한 법 해석은 초기에는 소수의견에 머물지라도 궁극적으로는 다수의견의 지위를 획득한다. 이 점에서, 존재하는 판례를 그저 암기만 하는 것은 법을 제대로 공부하는 것이 아니다.

 이상에서 확인되듯이 법 공부를 잘하려면, 제일 먼저 사람과 세상을 보는 눈을 정립해야 한다. 법학은 '가치지향적 학문'이지 '가치중립적 학문'이 아니다. 어떠한 가치를 중심에 놓을 것인가를 스스로 분명히 하고, 다른 가치와의 소통과 타협을 추구해야 한다. 그리고 법학을 제대로 공부하려면 철학, 정치학, 경제학, 사회학 등 다른 학문을 알아야 한다. 법학은 독자적인 학문체계와 논리를 갖고 있고 또 그래야 하지만, 다른 학문의 시각과 성과를 흡수해야 한다. 그렇지 못하면 법학은 편벽便辟하고 건조한 개념과 논리의 묶음에 머물고 말 것이다.

 

p152

 민주주의 형법은 존재하고 있는 법률의 내용이 정당한지, 실정법률이 국미느이 법 의식이나 법 관행을 초과하는지, 그리고 위반자에게 부과되는 제재가 과도한지 등을 따지고 물어야 한다. 그리고 피치자被治者 국민데 대한 공감과 배려가 필수적이다. 요컨대, 민주주의와 인본주의를 지향하는 사회에서 법의 이념인 정의는 후자의 정의, 즉 "연민의 정의"를 추구해야 한다. "타인의 고통을 목격하면서 지성만이 아니라 몸과 마음으로 그 고통을 함께 느끼는 것", 바로 이것이 정의의 출발점이다.

 

p157

 전통적 정의론에서 강조하는 재화의 공정한 배분 - "각자에게 각자의 것을"이라고 요약되는 '배분적 정의' - 에 집중하는 한편 "지배와 억압"을 문제 삼아야 한다. "공정으로서의 정의"를 막는 것이 바로 지배와 억압이기 때문이다. 16세기 영국에서 사상가이자 대법관으로 활약했던 토머스 모어는 1516년에 쓴 <유토피아>에서 일반 서민들에게만 적용되는 정의인 "쇠사슬에 묶인 채 바닥을 기는 정의"와 군주들의 정의인 "원하는 것은 다 하고, 원하지 않는 것은 하지 않아도 되는 정의"를 대비시켰다. 전자에 대한 후자의 지배와 억압을 해결하지 않으면, 사회적 재화의 공정한 배분은 불가능하다.

 

p192

 나는 정치사상가 샹탈 무페Chantal Mouffe가 민주주의에 대한 경고로 남긴 글의 진짜 의미를 확실히 알게 되었다.

 

 "민주주의는 불확실하고 일어날 법하지 않은 어떤 것이며, 당연한 것으로 받아들여서는 안 된다. 민주주의는 항상 허약한 정복이며, 심화시키는 만큼 방어도 중요하다. 일단 도달했다고 해도 그 지속성을 보증할 민주주의의 문턱 같은 것은 없다."

 

 '검찰독재'와 '경제독재', '검찰공화국'과 '삼성왕국' 모두 무섭고 두렵다. 그러나 민주주의의 핵심 중 하나는 '일인일표제'다. 한 표를 가지 주권자 한 명이 검찰이나 재벌과 싸워 이길 수 없다. 한 표, 한 표가 모이면 달라진다. 또한 민주주의는 '대의민주주의'외 '광장민주주의'를 요구한다. 촛불 하나하나가 모이면 달라진다.

 

p210

 어려운 시절이기에 안토니오 그람시의 유명한 말을 되새긴다. "이성으로 비관하되 의지로 낙관하라." 그는 어린 시절 사고로 꼽추라는 장애를 가진 채 성장했고, 이후 이탈리아의 대표적 공산주의자로 반파시즘 투쟁에 앞장섰다가 20년 징역형을 선고받고 약 11년을 감옥에서 보낸 후 건강 악화로 석방되었으나 얼마 지나지 않아 사망했다. "이성적 비관"과 "의지적 낙관", 이는 재벌공화국을 사는 우리에게 필요한 덕성이다.

 

p212. 사회주의의 진짜 의미

 1987년 헌법체제 이후 여러 번의 민주정부가 들어섰지만, 1997년 'IMF 체제'가 요구한 신자유주의의 요구는 우리 사회의 근본을 바꿔놓았다. 정치적 민주화는 경제적 민주화로 이어지지 못했다. 반독재·민주화운동의 투사들도 심화되는 자본주의의 모순과 싸우는 데는 주저했다. 안착된 줄 알았던 정치적 민주주의도 흔들리고 있다. 소련 등 국가사회주의가 붕괴했지만 자본주의의 모순은 전혀 사라지지 않았다. 오히려 더욱 심화되고 첨예해지고 있다. 지그문트 바우만의 예고는 우리나라 상황에도 딱 들어맞아 공포스럽기까지 하다.

 

 "현재 추세대로라면, 경제 성장은 우리 대부분에게 더 나은 미래를 약속하지 않는다. 오히려 이미 압도적 다수인데도 여전히 그 수가 급증하고 있는 많은 사람들이 지금보다도 더 심각하고 냉혹한 불평등과 더 불안정한 조건 및 더 많은 추락과 원통함과 모욕과 굴욕을 겪게 될 것임을 예고한다. 즉, 사회적 생존을 위한 지금보다 훨씬 더 힘든 싸움을 예고한다."

 

 

 자본주의 모순을 비판하는 최고 이론은 여전히 사회주의다. 그럼에도 우리 사회는 오랫동안 사회주의에 대해 '빨갱이'라는 딱지를 붙이고 악마시하는 데 급급했다. 역사학자 토니 주트의 서술 또한 21세기 한국의 상황과 맞닿아 있다. 

 "사회주의라는 말에 당황스러운 침묵으로 대응하는 것은 오직 미국만의 특수한 현상이다.  미국에서 이루어지는 공공 정책에 대한 논쟁의 방향을 바꾸는 데 필요한 과제 가운데 하나는 '사회주의'의 기미가 보이거나 그 같은 성향을 지닌 것으로 판단될 수 있는 그 무엇에 대해서든 의심부터 하고 보는 미국인들의 뿌리 깊은 성향을 극복하는 것이다."

 

 자본주의의 모순을 해결하는 데 사회주의 논리가 도움이 될 수 있는데도 '냉전의 논리'로 무작정 반대하는 것은 또 다른 폭력이다. 자본주의의 문제점을 지적하고 대안을 마련할 수 있는 사회주의를 비롯한 다양한 이론과 사상을 제대로 공부하지 않고서는 그와 같은 모순을 없애거나 줄일 수 없다. 조지 오웰은 이렇게 말했다.

 "지금은 사회주의가 평등과는 아무런 관계가 없다고 말하는 것이 유행임을 나도 잘 안다. 세계 모든 나라에서 상당한 수의 어용 문사와 말주변 좋은 교수들이 사회주의가 약탈적 동기를 그대로 놓아둔 계획적 국가자본주의에 불과하다는 것을 '증명'하느라 바쁘다. 보통 사람들이 사회주의에 매력을 느끼고 사회주의를 위해 목숨을 거는 이유, 즉 사회주의의 '비결'은 평등사상에 있다.

 자본주의가 온갖 모순을 드러내고 있는 대한민국 사회에서 '평등사상'은 여전히 소중하다. 이 사상을 구현하는 것이 시대적 과제다. 알랭 바디우는 "어떻게 하면 더 많은 사람에게 더 많은 평등한 기회를 부여할 수 있는가에 대한 답을 해야 하는 것이 정치의 고민이다"라고 하지 않았던가. 국가사회주의 붕괴 이후에도 리영희 선생이 공언한 다음과 같은 말씀의 무게는 묵직하다.

 "소위 '신자유주의'라는 무한경재 시장경제의 비인간성, 사회적 다윈이즘의 극단 형태인 사회·경제적 약육강식과 그 무자비성, 윤리성을 상실한 과학·기술 만증주의, 자본의 과학·기술 지배구조로 말미암은 인간과 인류의 미래에 대한 공포 등 사회주의에 대해서 21세기가 거는 요구와 기대는 19세기나 20세기의 소수 국가들에서 보였던 체제로서의 사회주의에 못지않다고 나는 확신하고 있어요."

 

 장하준 교수의 전작인 '나쁜 사마리안'이나 '그들이 말하지 않은 23가지'는 읽다가 말았는데 이유는 재미가 없었기 때문이다. 마치 재미없는 강의를 듣는 듯한 기분 때문에 몇 번이나 시도했다가 포기하고 말았다.

 이 책은 음식이라는 매개체를 이용해 작가가 말하려고 하는 주제로 넘어가는 현란한 기술에 깜빡 속아넘어가는 덕분인지 재밋게 읽었다.

 이 책 덕분에 현대의 주류경제학이 미국이고 미국의 주류경제학은 신고전학파라는 사실도 리마인드하게 됐고, 저자는 이러한 획일주의적 경제학이 싫어서 다양한 경제학 담론이 살아있던 시대의 영국으로 유학을 갔다는 사실도 알게 되었다.

 이 책을 통해 그간 경제학에서 알게 모르게 선입견처럼 가지고 있던 사실에 대해서 다시 생각하게 되는 기회도 갖게 되었다. 장하준 교수의 다른 책도 다시 한번 시도를 해봐야겠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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p35

 많은 이론에서 필수 사회 서비스로 간주하는 의료, 교육, 상하수도, 대중교통, 전기, 주거 등을 민영화해야 한다고 주장하는 이론이 있다면, 그 이론은 '1인1표'라는 미눚 사회의 원칙을 축소하고 '1원1표'라는 시장 논리를 확장하자고 주장하는 것이다.

 

p75

 지난 150여 년에 걸쳐 자본주의가 좀 더 인간적이 된 거은 오로지 자유 시장적 시각으로 자본주의를 옹호하는 사람들이 신성불가침으로 여겼던 자산 소유자들의 경제적 자유를 제한할 수 있었던 덕분이다. 우리는 자산 소유자들의 경제적 자유가 대중의 정치적/사회적 자유와 충돌할 때 후자를 보호하는 제도를 마련했다. 민주 헌법, 인권법, 평화로운 시위에 대한 법적 보호 등이 그 예다. 자산 소유자들의 경제적 자유를 제한하는 수많은 법 - 노예 제도와 연한 계약 노동의 금지, 노동자의 파업 권리 보호, 복지 국가 설립, 공해 물질을 배출할 자유 제한 등 - 을 도입했다.

 

p88. 가난의 근본적 원인

 이처럼 가난한 나라 사람들이 부자 나라 사람들보다 훨씬 더 열심히 일한다면 그들의 빈곤이 근면성 부족 때문일 수가 없다. 문제는 생산성이다. 이들이 부자 나라 국민보다 인생의 훨씬 더 긴 기간, 훨씬 더 오래 일을 하는데도 불구하고 그들만큼 많이 생산해 내지 못하는 것은 생산성이 그만큼 높지 않아서다.

 그리고 이렇게 생산성이 낮은 것은 교육 수준, 건강 등 노동자 개인의 능력이나 조건과 크게 상관이 없다. 노동력의 질은 전문직이나 고도의 기술이 필요한 직종에서는 생산성의 차이를 낼 수 있다. 그러나 대부분의 직종에서 가난한 나라 노동자와 부자 나라 노동자의 개인적 생산성은 큰 차이가 나지 않는다. 이 점은 가난한 나라에서 부자 나라로 이민 온 사람의 생산성이 크게 향상되는 것을 생각해 보면 이해가 될 것이다. 이민을 왔다고 갑자기 없던 기술이 생기거나 건강이 급격히 더 좋아지는 것은 아닌데 그렇다. 그들의 생산성이 가파르게 상승하는 것은 더 양질의 사회 기반 시절 infrastructure(전기, 교통, 인터넷 등)과 더 잘 기능하는 사회적 체제(경제 정책, 법률 체계 등)를 기반으로 해서 더 잘 운영되는 생산 시설(공장, 사무실, 가게, 농장 등)에서 더 나은 테크놀로지를 사용할 수 있게 되었기 때문이다. 영양실조에 걸린 당나귀를 타고 애를 쓰던 기수가 갑자기 좋은 혈통의 경주마를 타게 된 것이나 마찬가지다. 물론 기수의 기술도 중요하지만 누가 경주에서 이기는가는 만흔 부분 기수가 탄 말이 결정한다. 

 가난한 나라들이 왜 덜 생산적인 테크놀로지와 사회 체제를 갖게 되었고, 그 결과로 낮은 생산성밖에 달성하지 못하는가 하는 문제를 이 짧은 장에서 만족스럽게 설명하기에는 너무나 많은 요인이 복잡하게 얽혀 있다. 저부가가치 1차 상품 생산에 특화된 구조를 가지지 않을 수 없게 된 식민주의 역사의 잔재, 만성적 정치 분열, 엘리트 계층의 무능력(비생산적인 지주, 역동적이지 못한 자본가 계급, 비전 없고 부패한 정치 지도자), 부자 나라에 유리하도록 편성된 국제 경제 체제 등은 굵직한 이유들 중에 일부에 불과하다.

 그러나 분명한 것은 가난한 나라의 가난한 사람들이 가난한 것은 역사적/정치적/테크놀로지적 문제 때문이고, 이는 그들이 개선할 수 있는 문제가 아니라는 사실이다. 개개인의 능력이 부족해서도 아니고 그들이 열심히 일할 마음이 없어서는 더더욱 아니다.

 

p99. 페루의 번영을 이끈 작은 생선

 멸치는 풍부한 맛뿐 아니라 한때 풍부한 부를 가져다주는 고마운 생선이기도 했다. 이 작은 생선은 19세기 중반 페루가 누린 경제적 번영의 원인이었다. 페루가 멸치를 수출해서 돈을 번 건 아니었다. 당시 페루는 바닷새의 구아노guano(마른 새똥)을 수출해서 국가적 번영을 누렸다. 구아노는 질산염과 인이 풍부하고 냄새가 그다지 역겹지 않아서 인기 높은 비료였을 뿐 아니라 화약의 핵심 재료인 질산칼륨이 들어 있어서 화약 제조에도 사용되었다.

 페루의 구아노는 태평양 연안의 섬들에 모여 사는 새들인 가마우지와 부비booby(얼가니새)의 배설물이다. 이 새들의 주된 양식은 생선, 특히 칠레 남쪽에서부터 페루 북쪽을 잇는 남아메리카 서쪽 해안의 영양소 풍부한 훔볼트 해류를 타고 이동하는 멸치들이다. 훔볼트 해류는 프로이센 왕국의 과학자이자 탐험가인 알렉산더 폰 훔볼트의 이름을 딴 것이다. 훔볼트는 1902년 에콰도르에서 가장 높은 산인 침보라소 화산(6262미터)을 올라 당시 세계 신기록을 수립했을 뿐 아니라 페루산 구아노의 장점을 최초로 유럽에 알린 사람들 중 하나다. 구아노가 페루 경제에서 너무나 중요한 자리를 차지하기 때문에 경제사를 다루는 사람들은 '구아노기'(1840년대~1880년대)라는 용어를 쓴다.

 구아노가 중요한 역할을 한 나라는 페루만이 아니었다. 1856년 미국 의회는 '구아노제도법Guano Islands Act'을 통과시켜서 아무도 살지 않고 다른 나라 정부의 관할 아래 있지 않다면 전 세계 어디에서나 구아노가 있는 섬은 미국 시민이 점유할 수 있도록 했다. 이 법 덕분에 미국은 태평양과 카리브해의 100개가 넘는 섬을 점거해서 페루산 구아노 무역을 독점하고 있던 영국에 대항할 수 있게 되었다. 영국, 프랑스 등 다른 나라들도 구아노가 쌓인 섬들을 점거했다.

 구아노로 인한 페루의 경제 호황은 오래가지 않았다. 호황이 시작된 지 30여 년쯤 지나자 과다 채취로 인해 구아노 수출이 사양길에 접어들기 시작했다. 그러나 1870년 대규모 칠레 초석(질산나트륨) 매장지가 발견되면서 구아노 수출의 쇠락으로 인한 영향이 한동안 상쇄되었다. 초석은 비료, 화약 제조에 사용될 뿐 아니라 육류 보전에까지 쓰이는 질산염이 풍부한 광물질이다. 그러나 페루의 번영은 초석전쟁Saltpetre War이라고도 부르는 남아메리카 태평양전쟁(1879~1883년)과 함께 끝이 났다. 이 전쟁에서 승리한 칠레는 볼리비아 해안 지역 전부(그 결과 볼리비아는 바다가 없는 내륙국이 되었다)와 페루 남부 해안 지역의 절반 가량을 점령했다. 그 지역에는 대량의 초석이 매장되어 있고 구아노도 많아서 칠레는 엄청나게 부자가 되었다. 

 그러나 그 또한 오래가지 않았다. 1909년 독일의 과학자 프리츠 하버가 공기 중에서 질소를 분리하는 기술을 발명했다. 고압 전류를 사용해 암모니아를 만들고 거기서 인공 비료를 만드는 기술이었다. 말하자면 하버가 글자 그대로 허공에서 인공 비료를 만들어 내는 방법을 개발한 것이다. 그 덕에 그는 1918년 노벨 화학상을 수상했다. 하지만 1차 세계대전 때 사용한 독가스를 개발한 일로 악명이 높아서 그에게 노벨상이 주어졌다는 사실은 점잖은 자리에서는 잘 언급되지 않는다.

 하버가 발명한 기술은 또 다른 독일의 과학자 카를 보슈에 의해 상용화되었다. 보슈가 일하던 '바스프BASF'는 '바덴에 있는 아닐린과 소다 만드는 공장'이라는 뜻의 바디셰 아닐린 운트 소다 파브리크Badische Anilin und Soda Fabrik의 약자로, 하버가 개발한 기술을 사들인 회사다. 오늘날 '하버-보슈법'이라 부르는 이 기술은 인공 비료의 대량 생산을 가능하게 해서 구아노를 비료계의 황제 자리에서 추출하고 말았다. 구아노보다 더 중요한 질산염의 공급원인 초석 또한 가치가 없어졌다. 구아노와 초석에서 추출한 칠레의 천연 질산염 생산량은 1925년 250만 톤이었던 것이 1934년에는 불과 80만 톤으로 줄어들었다.

 

p107

 역사를 살펴보면 높은 생활 수준을 지속적으로 유지 가능하게 하는 방법은 오직 산업화밖에 없다는 결론을 내리게 된다. 다시 말해 혁신과 기술력을 확보할 수 있는 주된 근원인 제조업 분야를 발달시켜야 한다는 의미다.

 산업화를 통해 생산 능력을 더 높이면 자연이 우리에게 가하는 제약을 '마법처럼' 극복하는 것이 가능해진다. 칠흑처럼 새까만 석탄에서 선명하기 그지없는 새빨간 염료를 뽑아내고, 허공에서 비료를 만들어 내는가 하면 다른 나라를 침공하지 않고도 땅을 몇 배로 늘리는 것이 마법 아니고 무엇이겠는가. 거기에 더해 이런 능력을 갖추고 나면 긴 기간 동안 높은 생활 수준을 유지할 수 있다. 초석과 같은 재생 불가능한 광물 천연자원, 또는 멸치를 먹고 사는 새들의 분비물로 만들어진 페루의 구아노처럼 재생 가능하지만 과잉 채취로 결국 늘 '바닥이 나고야 마는' 천연자원과는 달리 한번 습득한 기술이나 능력은 고갈되지 않기 때문이다.

 

p116.  싱크 최대 수출국 일본은 어떻게 경제 강국으로 거듭났을까

 현대에 들어서면서 최대 실크 생산국은 한때 일본이었다. 일본은 7세기에 한국에서 양잠술을 도입한 이래 매우 긴 견직물 방적 역사를 지니고 있었지만 2차 세계대전 직후 이 부문을 크게 키웠다. 1950년대 일본은 세게 최대 실크 수출국이었고, 실크 관련 상품은 일본의 최대 수출 품목이었다.

 일본인들은 거기서 만족하지 않았다. 그들은 미국 및 유럽 국가들과 철강, 조선, 자동차, 화학, 전자를 비롯한 기타 '선진' 공업 부문에서도 대결하고 싶었다. 그러나 당시 기술 면에서 뒤쳐진 일본이 그런 부문에서 국제적으로 경쟁을 하기는 불가능했다. 그래서 일본 정부는 높은 관세, 다시 말해 수입품에 높은 세금을 물리는 한편, 보호 사업 부문에서는 외국 기업들이 일본 내에서 영업하는 것을 금지하는 방법으로 외국과의 경쟁으로부터 국내 제조업자를 보호했다. 이에 더해 당시 정부의 엄격한 규제 아래 있던 은행들로 하여금 수익성이 좋은 주택 담보 대출이나 소비자 금융, 또는 이보다는 수익성이 조금 떨어지지만 이미 확고하게 자리 잡은 실크 산업 부문보다 '선진' 공업 부문의 국내 기업들에 우선적으로 대출하도록 만들었다.

 일본 외부뿐 아니라 내부에서도 이런 정책에 대한 비판의 목소리가 높았다. 이 정책에 반대하는 사람들은 일본은 철강이나 자동차 같은 건 수입으로 조달하고 실크를 비롯한 방직 산업처럼 이미 잘하고 있는 분야에 집중하는 편이 더 나을 거라고 지적했다. 비효율적인 부문의 기업들, 가령 토요타나 닛산 같은 자동차 제조업체를 보호하기 위해 외국산 차에 관세를 부과하면 소비자는 더 나은 외국산 차를 사기 위해 국제 시세보다 더 높은 가격을 지불하거나 품질이 낮고 미운 일본산 차를 사야 하는 손해를 봐야 한다는 것이 그들의 논리였다. 그리고 자동차 생산 기업처럼 비효율적인 산업 부문에 은행 대출을 하도록 정부가 인위적으로 개입을 하면 실크 산업처럼 더 효율적인 부문에 돈을 투자해서 같은 자본으로 훨씬 더 큰 이윤을 낼 수 있는 기회를 박탈하는 것이라는 지적도 나왔다.

 이는 흠 잡을 데가 없이 맞는 주장이다. 한 나라의 생산 능력을 고정된 것이라 생각하면 말이다. 그러나 장기적으로 볼 때 어느 나라든 생산 능력은 변화할 수 있고, 현재 잘하지 못하는 것을 나중에는 잘하게 될 수도 있다.

 이런 변화는 저절로 일어나지 않지만 - 더 나은 기계, 노동자의 기술 습득, 테크놀로지 연구에 투자할 필요가 있다 - 일어날 수 있는 일이다. 그리고 그 변화가 일본의 자동차, 철강, 전자 등 수많은 산업 분야에서 일어났다. 1950년대에는 국제 시장에서 경쟁할 꿈도 꾸지 못했던 산업 분야 중 많은 수가 1980년대에 들어설 무렵에는 세계 1위에 등극해 있었다. 한 나라의 생산 능력에 의미 있는 변화가 일어나는 데는 적어도 20여 년이 걸린다. 이 말은 자유 무역 환경에서는 이런 변화가 생길 수 없다는 뜻이다. 자유 무역 체제에서는 신생 산업 부문의 비효율적인 초보 기업들이 우월하고 규모가 큰 외국 경쟁 업체들에 순식간에 전멸당하고 말기 때문이다.

 

p120

 그렇다고 해서 유치 산업 보호 정책이 반드시 성공적인 경제 발전을 보장한다는 것은 아니다. 어린이들과 마찬가지로 유치 산업 또한 잘못 키우면 '성숙'하는 데 실패할 수 있다. 1960년대와 1970년대에 수많은 개발도상국이 과도한 보호 정책을 쓰는 바람에 국내 기업들이 태만해졌고, 시간이 흐른 후에도 보호 정책을 줄이지 않아 생산성을 향상시킬 동기 부여를 하는 데 실패하고 말았다. 유치 산업 정책을 가장 기술적으로 운용한 일본과 한국 같은 나라는 시간이 흐르면서 보호 정책을 단계적으로 줄여서 그런 위험을 피했다. 자녀가 성장해 감에 따라 보호의 손길을 차차 거두고 더 많은 책임을 자녀에게 주어야 하는 것과 같은 이치다.

 유치 산업을 보호하지 않았다면 한때 경제적 새우였던 나라들 - 18세기의 영국과 19세기의 미국, 독일, 스웨덴, 20세기의 일본, 핀란드, 한국 - 은 오늘날 세계 경제의 고래로 성장하지 못했을 것이다.

 

p230

 복지 국가의 가장 중요한 점은 그 나라의 시민(그리고 장기 거주자) 모두가 동일한 보험 패키지를 대량 구매를 통해 싼값에 에 구입한다는 사실이다. 이 부분을 가장 쉽게 이해하려면 바로 부자 나라 중 보편적 공공 의료 보험 제도가 없는 유일한 나라인 미국과 다른 부자 나라들의 의료 비용을 비교해 보면 된다.

 GDP에 대한 비율로 볼 때 미국인은 비슷한 경제 수준의 다른 부자 나라 시민에 비해 적어도 40퍼센트 이상, 많으면 2.5배 정도를 의료비에 더 쓴다(미국은 GDP 대비 17퍼센트인데 반해 아일랜드는 6.8퍼센트, 스위스는 12퍼센트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미국인의 건강 지표는 선진국 중 최악이어서 다른 부자 나라들에 비해 미국에서는 '건강한 상태'를 유지하는 비용이 훨씬 비싸다는 것을 알 수 있다. 이런 현상을 설명하는 다양한 시각이 있을 수 있지만, 중요한 이유 한 가지는 미국의 의료 시스템이 조각조각 분산되어 있어서 의료 제도가 더 잘 통합되어 있는 다른 나라들에 비해 공동 구매를 통해 얻는 혜택을 보지 못한다는 점일 것이다. 예를 들어 국가 전체 시스템을 통한 '대량 구입' 디스카운트를 받는 대신 모든 병원은 개별적으로 약과 의료 장비를 구입해야 하며, 의료 보험 회사들은(이윤 추구 기업이므로 더 높은 보험료를 부과하는 데 더해) '규모의 경제' 혜택을 볼 수 있는 통합된 시스템 대신 각각 시스템을 운영하는 비용을 들여야 한다.

p246

 불평등에 대한 논의는 너무나 오래도록 잘못된 방향으로 진행되어 왔다. 개인의 필요와 역량은 무시한 채 결과와 기회에만 초점을 맞추어 왔기 때문이다. 좌파는 모든 사람에게 결과의 평등을 보장하는 것이 공평한 일이라 생각한다. 그래서 개인마다 다른 필요와 역량을 가지고 있다는 사실을 무시한다. 반면에 우파는 기회의 평등으로 충분하다고 생각한다. 그래서 진정으로 공정한 경쟁이 되려면 개인 간의 역량이 어느 정도는 균등해야만 한다는 사실을 간과한다. 이것은 부모 세대가 상당한 정도로 결과의 평등을 누려야 가능한데, 그렇게 되려면 소득을 (하향) 재분배하고, 모든 사람에게 양질의 기초 서비스를 제공하고, 시장을 규제해야 한다.

 채식주의자에게 닭고기 기내식을 주는 것이 공평한 일이라 생각하는 항공사를 원하는 사람은 없을 것이다. 그러나 우리는 승객들의 여러 가지 취향과 필요를 모두 맞추어 주는 다양한 기내식을 제공하지만 표가 너무 비싸서 극소수만이 이용할 수 있는 항공사 또한 원치 않는다.

 

p255

 가장 널리 쓰이는 경제 척도인 GDP는 시장에서 교환되는 것만 포함한다. 경제학에서 사용되는 모든 측정법과 마찬가지로 GDP도 여러 문제점이 있지만 가장 큰 문제는 이것이 극도의 '자본주의적' 관점을 기초로 하고 있다는 점이다. 다양한 사람들이 서로 다른 다양한 가치관을 갖고 있기 때문에 뭔가가 사회에서 어떤 가치를 지니는지를 결정할 때 시장에서 어떤 가격에 거래가 되는지를 기준으로 삼을 수 밖에 없다는 관점이다.

 시장활동만을 계산하는 관행은 경제 활동의 엄청나게 큰 부분을 보지 못하는 단점이 있다. 개발도상국에서는 농업 생산물의 큰 부분이 계산되지 않는 경우가 많다. 많은 농민이 가지가 기른 작물을 팔지 않고 일정량을 소비하는데 농산물 생산량에서 이 부분은 시장에서 교환되지 않으므로 GDP 통계에 포착되지 않는다. 가정과 공동체에서 임금을 받지 않고 행해지는 돌봄 노동 역시 이런 식으로 시장에 기초해 생산량을 측정하면 부자 나라와 개발도상국 모두에서 GDP에 포함되지 않는다. 아이를 낳아서 기르고 그들의 학습을 도와주고, 노인과 장애인을 돌보며, 음식을 만들고, 청소와 빨래를 하고, 그에 더해 가정을 꾸려 나가는 일(미국의 사회학자인 앨리슨 대민저Allison Daminger가 '인지 노동cognitive labour'이라고 부르는 활동) 말이다. 이런 활동을 시장 가격으로 환산하면 GDP의 30~40퍼센트를 차지함에도 불구하고 현재는 GDP에 전혀 포함되지 않고 있다.

 간단한 사고 실험으로도 시장 밖에서 벌어지는 돌봄 노동을 경제 활동으로 치지 않는 관행이 얼마나 말이 안 되는지를 실감할 수 있다. 2명의 엄마가 자녀를 교환해서 상대방의 아이를 돌봐 준 다음 베이비시터에게 지불하는 금액을 서로에게 지불한다면(같은 금액을 주고받는다면) 두사람의 재정 상태와 아이 돌보는 시간에는 아무 변화가 없지만 GDP는 올라갈 것이다. 개념적으로 생각해도 돌봄 노동 없이는 경제는 말할 것ㄱ도 없고 애초에 인간 사회 자체가 존재 불가능하다는 사실을 고려하면 이 문제가 얼마나 심각한 것인지 실감할 수 있을 것이다.

 무보수 돌봄 노동을 담당하는 사람 중에는 여성이 큰 비율을 차지한다. 따라서 돌봄 노동을 경제 활동으로 계산하지 않으면 여성이 우리 경제 - 그리고 사회 - 에 하는 공헌이 과소 평가될 수밖에 없다.

 

p281. 시장이나 개인에 맡겨 두어서는 안 된다

 그러나 이 (기후변화를 막기 위한) 모든 기술적 가능성과 모든 생활 방식 변화를 실현하더라도 지방 정부, 중앙 정부, 국제기구가 지역적/전국적인 대규모의 공공사업을 벌이는 동시에 세계적으로 국가 간 협력을 도모하지 않으면 별 소용이 없을 것이다. 시장을 통한 우대나 장려책, 개인적인 선택 등으로는 충분하지 않다.

 기술 개발의 경우 정부가 적극 개입해서 그린 테크놀로지를 장려하는 정책을 시행해야 한다. 그냥 시장에 맡겨 두면 기후 변화와 싸우고 대처하는 데 필요한 수 많은 기술이 개발되지 않고 말 것이다. 이는 민간 기업들이 '사악해서'가 아니라 단기적 성과를 내야 한다는 끊임없는 압박에 시달리고 있기 때문이고, 설상가상으로 이 압박은 금융 규제 완화로 더욱 심해지고 있다. 그린 테크놀로지를 개발하고 사용해도 그 혜택이 가시화되기까지는 몇십 년이 걸리는 경우가 태반이며 심지어 그보다 더 장기전이 될 수도 있다. 그러나 민간 부문의 기업들은 몇 년은 고사하고 분기마다 가시화된 실적을 증명해야 하는 경우가 많아서 그런 기술 개발을 주저하는 것도 이해가 가는 일이다. 

 민간 부문이 이러헥 근시안적으로 경영하는 경향이 심하기 때문에 신기술 개발을 위한 대규모 투자나 그렇게 개발된 신기술을 채용하는 과정에서 전통적으로 항상 정부가 강력한 역할을 수행해야만 했다. 이 방면의 가장 대표적인 예는 IT와 바이오테크놀로지 개발로, 둘 다 초기에는 미국 정부가 저의 전액을 지원했다. 실패할 위험이 매우 크고 수익을 내기까지 오래 기다려야 하는 부문들이었기 때문이다. 미국을 비롯해 유럽의 다수 국가, 중국, 브라질 등에서 태양 발전, 조력 발전 같은 저탄소 에너지 기술이 상당한 규모로 개발되어 사용되어 온 것은 정부 개입 없이는 불가능했을 것이다.

 가난한 나라들이 온실가스를 최소한으로 배출하고 기후 변화로 인한 부작용에 대처하면서 경제를 발전시킬 수 있는 기술을 개발하게 하는 공적 조치도 중요하다. 시장은 1인 1표가 아니라 1원 1표를 원칙으로 움직이기 때문에 내버려 두면 돈을 더 많이 가진 사람들이 원하는 쪽으로 투자가 몰리기 마련이다. 이 말은 가난한 나라들이 가장 필요로 하는 기술들 - 농산물과 공산품 생산에 효율적으로 에너지를 사용할 수 있는 기술이나 '기후 변화 적응' 기술 등 - 에는 상대적으로 적은 돈이 투자될 것이라는 뜻이다. 이런 기술의 개발과 개발도상국으로의 이전을 보조금으로 주거나 심지어 무료로 지원하기 위한 공적 조치가 필요하다. 개발도상국들은 기후 변화를 초래한 장본인이 아닌데도 기후 변화의 여파로 훨씬 더 큰 고통을 받고 있다는 사실을 고려하면 이러한 모든 조치는 '기후 정의climate justice'를 이루는 데 반드시 필요하다. 일부 개발도상국은 글자 그대로 해수면 아래로 사라질 위기에까지 처해 있지 않은가.

 각 개인이 진정으로 환경을 보호하는 생활 방식을 유지 할 수 있으려면 그 선택을 가능하게 만드는 정부 정책의 뒷받침이 있어야 한다.

 어떨 때는 개인적으로 행동을 바꾸고 싶어도 대부분의 사람이 감당할 수 없는 규모의 선행 투자가 없으면 불가능한 경우가 있다. 외벽 단열, 이중 창문, 열펌프 설치 등은 오랜 시간이 지나면 결국 투자 비용을 회수하고도 남겠지만 당장 그 비용을 감당할 수 없는 사람들이 많다. 이런 투자를 하는 데 정부의 보조금과 대출 정책은 큰 도움이 될 것이다. 

 기후 변화와 같은 시스템의 문제를 시장 환경에서 개인이 '올바른' 선택을 해야 한다고 맡겨 두는 것은 불공평할 뿐 아니라 효과적이지 못하기 때문에 때로는 공적 조치가 필요하다. '친환경 식생활greener eating' 운동이 아주 좋은 예다. 식품 판매업자에게 각 상품의 탄소 발자국을 완전히 공개하도록 요구해서 소비자가 '올바른 식료품 쇼핑'을 하도록 유도하고, 공해를 많이 발생시키는 식품을 시장에서 추출하는 것이 이론상으로는 가능하다.그러나 현실적으로 이 방법은 아무것도 하지 않는 것과 진배없다. 우선 그런 정보가 완전 공개가 된다 해도 소비자는 구매하는 식품 하나하나의 탄소 발자국 정보를 모두 이해하고 거기에 맞는 선택을 할 만한 시간이나 정신적 여유가 없다. 어찌 보면 아무것도 하지 않는 것보다 더 나쁠 수도 있다. 정부가 최소한의 환경 기준을 정립해 놓지 않으면 더 심한 오염을 유발하는 판매업자가 더 값싼 식품을 제공해서 경쟁 업체들은 시장에서 몰아내는 식의 '바닥치기 경쟁race to the bottom' 이 벌어질 수 있기 때문이다.

 

p295. 자본주의 발달의 정점, 유한 책임 제도

 이제는 유한 책임제가 일반적 표준이 되었지만 19세기 말까지만 해도 왕 - 절대 왕정이 끝난 다음에는 정부 - 이 허락하는 특권이었고, 오직 국가적 차원에서 매우 중요한 일이지만 위험 부담이 높은 장거리 교역이나 식민지 확장 같은 사업만 이런 지위를 누릴 수 있었다.

 그런 예외적인 경우에만 적용하는데도 유한 책임제에 대해 비판적인 태도를 가진 사람들이 많았다. 대표적인 비판자 중 한 사람이었던 이른바 '경제학의 아버지' 애덤 스미스는 유한 책임 회사 제도가 경영자들이 "다른 사람의 돈"을 가지고 도박을 하도록 허용한다고 비난했다. 이런 식으로 자금을 모은 기업의 경영자들은 기업을 100퍼센트 감당하지 않아도 되기 때문에 과도한 모험을 하려는 성향이 강해질 수밖에 없다는 것이 그의 논리였다.

 흠잠을 데가 없이 완벽한 사실이다. 그러나 중요한 것은 유한 책임제 덕분에 무한 책임을 져야 할 때보다 훨씬 더 큰 규모의 자본을 모으는 것이 가능해졌다는 사실이다. 바로 이 점 때문에 자본주의의 패망을 예상했던 카를 마르크스가 유한 책임 회사야말로 '자본주의의 발달이 정점을 찍어서 나온 제도'라고 칭송했던 것이다. 물론 이 발언에는 자본주의가 더 빨리 발전할수록 사회주의의 도래를 앞당길 수 있으리라는 저의가 깔려 있었다(그의 이론에 따르면 자본주의가 완전히 발달한 다음에야 사회주의가 도래할 수 있다).

 19세기 중반 마르크스가 이런 선언을 한 직후, 대규모 투자 없이는 성장이 불가능한 '중화학 공업' - 제철 및 철강, 기계, 화학 공업, 제약 등 - 이 출현하면서 유한 책임 횟하가 더욱 절실해졌다. 장거리 항해나 식민지 사업뿐 아니라 주요 산업의 대부분에 대규모 투자가 필요해지면서 유한 책임제를 사례별로 심사해서 허용해 주는 것은 더 이상 불가능해졌다. 그 결과 19세기 말 대부분의 나라에서는 유한 책임 회사 설립이 특혜가 아닌 권리로 인정받게 되었다. 그때 이후 유한 책임 회사는 자본주의 발달의 주요 수단으로 자리 잡았다.

 

p296. 성장의 원동력에서 성장의 장애물로

 그러나 한대 경제 성장의 강력한 도구였던 이 제도가 최근에는 성장의 장애물로 변했다. 지난 수십 년에 걸친 금융 규제 완화로 인해 주주들은 자기네가 법적으로 소유한 기업에 장기 투자를 할 필요가 없어졌다. 다른 방식으로 투자해서 수익을 창출한 기회가 너무나 다양해졌기 때문이다. 영국을 예로 들자면 주주들의 주식 보유 기간이 1960년대에 5년이었던 것이 요즘은 1년이 채 되지 않는다. 투자한 돈을 1년도 되기 전에 거둬들이는 사람이 그 기업을 공동으로 소유한다고 할 수 있을까?

 가만히 있지를 못하는 주주들의 요구에 부응하기 위해 전문 경영인들은 배당금과 주식 환매(자사주 매입)등을 통해 기업 이윤 중 극도로 높은 비율을 주주들이 가져갈 수 있도록 했다. 미국과 영국에서 주주들에게 돌아간 기업 이윤 비율은 1980년대에는 절반 이하였지만 지난 10~20년 사이 이 수치가 90~95퍼센트로 치솟았다. 기업의 유보 이윤이 기업 투자의 주된원천이라는 사실을 감안하면 이 변화는 기업의 투자 능력, 특히 장기간을 기다려야 수익을 낼 수 있는 프로젝트에 대한 투자 능력을 심각하게 약화시켰다고 할 수 있다.

 이제는 유한 책임제라는 제도를 개선해서 해로운 부작용은 제한하면서 혜택을 누릴 수 있는 방법을 강구할 때가 되었다.

 무엇보다 유한 책임 제도는 장기간 주식 보유를 장려하는 방향으로 개선되어야 한다. 예를 들어 투표권을 주식 보유 기간과 연동해서 장기 투자를 한 주주들이 더 큰 목소리를 낼 수 있도록 하는 방법이 있는데, 이를 '테뉴어 보팅tenure voting'이라 부른다. 프랑스, 이탈리아 같은 일부 국가에서는 이미 이 제도를 시행하고 있지만 매우 희석된 형태에 그치고 있다. 이 테뉴어 보팅 제도를 훨씬 더 강화해서 주식을 보유한 햇수마다 1표씩 더 주는 방법 등을 강구할 필요가 있다. 장기 투자를 하는 투자자들이 어떤 식으로든 혜택을 볼 수 있어야 한다.

 둘째, 주주들의 권한을 제한해야 한다. 여기에는 주식 장기 보유자들까지 포함된다. 대신 기업의 운명으로부터 큰 영향을 받는 다른 '이해관계자'들이 기업 경영에 목소리를 낼 수 있는 제도적 장치를 마련해야 한다. 노동자, 부품 조달 업체, 기어비 위치한 지역의 지방 정부 등이 모두 해당한다. 주주들의 문제는 장기 투자자라 할지라도 언제든 주식을 팔고 기업을 떠날 수 있다는 데 있다. 주주들보다 움직임이 훨씬 자유롭지 못한 주주 이외에 '이해관계자'들에게 일정 부분 권한을 부여한다는 것은 이른바 기업의 '소유주'들보다 기업의 장기적 미래에 더 큰 관심과 이해관계를 가진 사람들에게 힘을 실어 준다느 의미다.

 마지막이자 앞의 내용 못지않게 중요한 것은 주주들이 자기가 지분을 보유하고 있는 기업의 장기적 미래에 더 관심을 가질 수 있도록 유도하기 위해 그들에게 주어진 선택지를 제한해야 한다는 점이다. 투기 성향이 강한 일부 금융 상품에 대한 규제를 강화해서 '치고 빠지는 식의 투자' 기회를 줄이고 장기 투자를 할 동기 부여를 하는 것도 좋은 방법이다.

 

p308

 자동화로 일자리를 위협받는 건 딸기 수확 노동자만이 아니다. 요즘은 신문, 라디오, TV 어디서든 인간이 하는 일을 로봇이 대체하고, 그 결과 대부분의 사람이 일자리를 잃을 것이라는 보도를 피할 수가 없다. 일자리를 얻을 수 없는 미래에 대한 공포는 인공 지능AI 기술의 발달로 더 고조되고 있다. 기계가 인간의 손과 근육 뿐 아니라 두뇌마저 대체할 것이라는 두려움까지 갖게 되었기 때문이다. 전 세계를 휩쓸고 있는 이 불안감을 잘 보여 주고 있는 예 중 하나가 <파이낸셜타임스>가 2017년 공개한 '로봇이 당신의 일을 할 수 있을까? Can a robot do your job?'라는 앱이다.

 자동화로 일자리가 없어지는 것은 자본주의 체제에 늘, 적어도 지난 2세기 반 동안은 항상 존재해 왔던 현상이다. 그리고 <파이낸셜타임스> 같은 지면에 글을 기고하는 저널리스트, 경제학자, 경제 전문가 등은 줄곧 블루칼라 노동자들이 노동력을 절약하는 기술 도입에 저항하는 것은 경제 발전을 방해하는 짓이라 꾸짖어 왔다. 그랬던 기자들과 논평가들이 왜 이제 와서 갑자기 일자리 자동화의 영향에 대해 걱정을 늘어놓는걸까?

 계급적 위선의 냄새가 진하게 풍겨 오지 않는가? 전문가 계급에 속한 이들은 자기네 일이 자동화의 물결에서 안전하다고 확신할 때는 새 기술의 도입에 거부감을 보이는 블루칼라 노동자들을 '러다이트Luddite'라 쉽게 비난할 수 있었다. 그러나 이제 자동화가 그들과 그들의 친구들 - 의사, 법조인, 회계사, 금융인, 교사, 심지어 저널리스트까지 - 이 속한 화이트칼라 일자리를 위협하기 시작하자 기술 발전으로 인한 실업, 심지어 로봇이 자기네 분야 전체를 완전히 대체해 버릴 수도 있는 미래에 대한 두려움을 뒤늦게 맛보고 있는 것이다.

 

p325

 스위스가 탈산업 경제post-industrial economy의 모범으로 제조업보다는 금융과 고급 관광 상품 같은 서비스 산업을 통해 번영을 이룬 나라라는 것이다. 

 1970년대에 시작된 이 탈산업 시대 담론은 인간은 잘살게 될수록 더 세련된 것을 원할 수밖에 없다는 단순하면서도 강력한 개념에 기초한다. 일단 사람들이 배를 채우고 나면 농업이 사양길에 접어든다. 옷과 가구처럼 다른 필요가 충족된 후에는 더 높은 차원의 소비재, 예를 들면 전자 제품이나 자동차 등으로 눈을 돌린다. 대부분의 사람이 이런 물건들을 가진 후에는 소비자의 수요가 외식, 공연, 관광, 금융 서비스 등의 서비스 부문으로 향한다. 이 시점이 되면 산업 분야는 위축되기 시작하고 서비스 부문이 경제의 주인공이 되면서 인류 경제 발달 단계 중 하나인 탈산업 시대가 도래하는 것이다.

 탈산업 시대에 대한 이런 식의 시각은 1990년대에 힘을 얻기 시작했다. 거의 모든 부자 나라 경제 체제에서 생산과 고용 어느 쪽으로 따져도 제조업의 중요성이 감소하고 서비스 부문의 역할이 커지는 현상이 목격되었기 때문이다. 이 과정을 '탈산업화'라고 한다. 중국이 세상에서 가장 큰 산업 국가로 부상하면서 탈산업 사회를 지지하는 사람들은 제조업은 중국과 같은 저기술, 저임금 국가가 담당하는 산업인 반면 금융, IT,  서비스, 경영 컨설팅 같은 고급 서비스에 미래가 있고, 특히 부자 나라들은 이를 지향해야 한다고 주장했다.

 그리고 이런 논의에서 스위스는 가끔 함께 등장하는 싱가포르와 더불어 서비스 부문을 특화해서 높은 생활 수준을 유지하는 증거로 제시된곤 한다. 이런 논리에 설득당하고 스위스나 싱가포르에서 영감을 얻은 인도, 르완다와 같은 일부 개발도상국은 산업화 과정을 아예 건너뛰고 고부가가치 서비스에 특화해서 이를 수출하는 방법으로 경제를 개발하겠다는 시도를 해 오기까지 했다.

 

탈산업 사회를 옹호하는 사람들에게는 안타까운 일이지만 스위스는 사실 세계에서 가장 산업화 정도가 높은 나라로, 1인당 제조업 생산량 세계 1위를 자랑한다. '메이드 인 스위스'라고 적힌 상품이 많이 보이지 않는 건 부분적으로 스위스가 작은 나라여서이기도 하지만 경제학자들이 '생산재'라고 부르는 기계, 정밀 장비, 산업용 화학 물질 등 우리 같은 보통 소비자가 접할 수 없는 물건들을 주로 생산하기 때문이기도 하다. 이른바 탈산업 사회의 성공담으로 꼽히는 또 다른 나라인  싱가포르가 세계에서 두 번째로 산업화된 국가라는 사실은 흥미로운 일이 아닐 수 없다. 스위스와 싱가포르를 예로 들어 서비스 중심의 탈산업 경제의 장점을 선전하는 것은 뭐랄까, 해변 휴양지를 광고하면서 노르웨이와 핀란드를 모델로 사용하는 것과 비슷하다고 할 수 있겠다.

 

윤석열이 집권한 현재를 난세로 정의하고, 난세에 본인의 일기를 쓴 것이다.

정치적 내용이 일부 있기는 하지만 주로 도올 선생의 평소 관심사와 얽힌 내용이 대부분이고 그것이 일기라는 형식을 빌려 쓰인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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p151 기독교의 역사는 갑질의 역사

 인류문명사에서 기독교의 역사는 "갑질"의 역사이다. 어느 시공에 떨어지든지 자기만이 옳고 타자는 무조건 개종이나 구원의 대상이 되어야 한다는 명제를 폭압적으로 강요하는 십자군신학의 역사이다. 그런데 이러한 논리의 부당성을 기독교신앙을 수용한 이들은 느끼지 못한다. 은재 신석구(1875~1950) 목사는 깊은 유학자의 소양 속에서 이러한 논리의 부당성을 감지한 심오한 신앙인이었다.

 기독교적 삶의 논리는 하여튼 껄끄럽다. 껄끄럽다라는 것은 비인과적이고 비상식적이고 역설적이라는 것이다. 이에 비하면 토착적인 삶은 인과적이고 상식적이고 순리적이라는 것이다.

 

p155 결곡 기독교의 최대 문제는 "배타"

 기독교신학의 최대의 문제는 배타Exclusiveness 이다. 사랑과 용서와 관용을 입으로는 말하면서도 실내용에 들어가면 배타를 떠나지 못한다. 배타의 본질은 독선이다. 나의 생각만이 옳고 타인의 생각은 다 틀리다는 것이다. 그것은 결국 기독교교회 속에서만 구원이 존재한다고 믿는 배타적 구원론으로 골인하게 된다. 그러한 구원론이 지배한 것이 서양의 중세기역사였다. 우리나라에 들어온 것은 실상 기독교가 아니라 서양의 중세기 교리였다. 그래서 제사를 우상숭배로 보는 시각이 생겨났고 많은 유학자 기독인들이 희생되었다. 그러니까 우리나라의 기독교는 배타와 함께 들어왔고 배타로 일관되었다. 그것이 오늘날 매우 폭력적인 대형교회로 발전하였고, 또 친미 정치세력으로 발전하였다. 바이든의 정치이념은 러시아와 중국을 견제하자는 배타의 이념이다. 이러한 이념의 확장의 동반자가 키시다의 일본이고 그 동반자의 말잡이가 윤석열이고, 윤석열의 하수인들이 한국의 친미 대형교회 세력이다.

 

p193. 동서양 신론의 차이

(마테오 릿치, 천주실의 중)

 凡物不能自成, 必須外爲者, 以成之. 樓臺房屋不能自起, 恒成於工匠之手. 知此, 則識天地不能自成, 定有所爲制作者, 卽吾所謂天主也.

 대저 사물이라고 하는 것은 스스로 자기를 이루어나갈 수가 없는 것입니다. 반드시 밖으로부터 작위를 가하는 존재가 있어야만 그것은 이루어질 수 있는 것입니다. 누각 하나 가옥 하나가 스스로 세워지는 것을 본 적이 있습니까? 그것은 항상 목수의 손을 빌어서만 만들어지는 것입니다. 이 명백한 사실을 깨닫는다면 천지가 스스로 이루어질 수 없다는 것을 인식할 수 있고, 반드시 그것을 만든 제작자가 있다는 것을 아실 수 있을 것입니다. 이 제작자가 바로 저 마테오 릿치가 말씀드리는 하느님(=天主)이올시다.

 

(주역, 계사 중)

 그러므로 하느님이라 하는 신묘한 존재는 구체적인 장소에서 고착되지 않으며, 그 변화무쌍한 운동은 실체화될 수 없는 것이다. 그것은 결국 존재자가 아니다. 끊임없이 음과 양이 번갈아 들면서 조화로운 법칙을 만들어가는 것, 그 자체가 궁극적인 하느님의 모습일 뿐이다. 그러므로 우리 인간은 하느님의 도를 나의 실존 내로 계승하여 구현해야 한다. 그것이 바로 선(the Good)이요 도덕(Morality)이다. 그 하느님이 도를 나의 존재 내에서 형성해나가는 것이 나의 본성(Human nature)이다.

故神无方而易无體. 一陰一陽之謂道. 繼之者, 善也; 成之者, 性也.

 

p229

  수운은 아편전쟁으로 이미 중국이 몰락하고 있고, 중국이 몰락하면 조선왕조가 몰락하는 것은 뻔한 이치라고 판단했다. 다산은 끝까지 조선을 살리려 했다. 수운은 조선의 멸망은 조선민중의 구원이라고 생각했다. 왕조는 멸망해도 백성은 멸망하지 않는다. 난군亂君은 있어도 난국亂國은 없다.

 왕조를 멸망시켜야 할 판에 기독교를 수용한다는 것은 왕조보다 더 지독한 억압의 수직구도를 새로 도입하는 것이다. 왕조는 권위의 억압구조를 가지고 있기 때문에 자기갱생을 할 수가 없는 것이다. 민중이 주체가 되는 새로운 평등사회를 만들 수가 없는 것이다. 그런데 기독교의 하나님은 "하늘 꼭대기 옥경대에 앉아있는 상제꼴로서 세상사람들의 삶을 다 관장한다고 말을 하니 허무지설虛無之說 아닐런가!" 또 하나의 픽션이요, 왕보다 더 무서운, 세계 전체를 파멸로 휘몰아갈 수직과 연역의 폭력이다. 이것을 수용하면 이 민족은 개화하는 것이 아니라 파멸의 길로 들어설 뿐이다. 이 세계는 소유주가 있어서는 아니 된다. 릿치가 말하는 천주는 우주의 설계자로서 소유를 주장하고 있다. 여기에 속지 말라!

 다산은 세계를 몰랐다. 수운은 세계를 알았다. 다산은 주어를 도입했고 수운은 주어를 해소시켰다. 다산은 수직적이었고 수운은 수평적이었다. 다산은 기독교교리를 만났지만, 수운은 하느님(=천주天主)을 직접 만났다. 

 

p243 수운의 문제의식 : 수직적 종교사유와 수직적 권력구조의 상응성

 서양의 종교는 "초월적 절대자의 존재성"을 전제하고 그 존재에게 나의 운명을 맡기는 절대적 복속을 "신앙Belief"으로 삼는다. 그러나 동학은 "무위이화無爲而化"를 전제로 한다. 그것은 하느님 자체가 세계와의 관계에서 조작적인 개입(爲)이 없이 스스로 그러한 변화를 추구한다는 것이다. 하느님과 인간은 세계생성의 동반자일 뿐이다. 하느님은 인격적인 존재Being인 동시에 철저히 비인격적인 생성Becoming이다.

 

p246 동학은 인류종교사에서 케리그마가 없는 유일한 종교

 그런데 동학경전은 타 종교경전과 견주어 말할 수 없는 유니크한 특징이 있다. 그거슨 "케리그마Kerygma"의 필터를 거치지 않았다는 사실이다. "케리그마"란 20세기 초 성서신학에서 생겨난 말이긴 하지만, 그것은 모든 종교영역에서 적영될 수 있는 유용한 개념이다. 케리그마는 문자 그대로 "선포Proclamation"라는 뜻인데, 초기신봉자들(초대교회)이 자기들의 교주에 대해 갈망하는 이미지를 선포하기 위하여 경전의 언어를 구성한다는 뜻이다. 예수의 경우, 그 케리그마는 "그리스도" 즉 구세주(=메시아), 혹은 "하나님의 아들"이라는 선포이다. 이 케리그마의 필터를 거치면 인간 예수, 역사적 예수Historical Jesus는 사라지고, 케리그마 즉 그리스도라는 이미지, 즉 초대교회의 갈망만 남는다. 다시 말해서 2천 년 동안의 기독교의 역사는 역사적 예수를 말한 것이 아니라, 초대교회에서 형성된 그리스도를 선포한 것이다. 사실 오늘날의 기독교라는 것은 이런 허구화된 예수를 말하고 있는 것이다. 케리그마가 경전을 지배한 결과인 것이다.

 

케리그마는 허구, 수운의 삶은 시종 있는 그대로

 최수운은 기독교(=천주교=서학)와의 대결에서 모든 신비나 이적이나 예언, 사람을 홀리게 만드는 "조화造化"를 거부하고 "성誠, 경敬, 신信"이라는 상식적 일상도덕의 가르침을 주장했다. 그래서 그는 그의 가르침에 역행하는 신비주의자들의 "흘림"의 위태로움을 잘 알고 있었고, 이들이 초기교단을 형성하게 되면 그의 가르침은 그들의 케리그마에 의하여 왜곡되고 타락되고 신비화되리라는 것을 정확히 예견했다.(「흥비가」). 모든 대각의 종교운동은 초기집단을 노리는 사기꾼들에 의하여 왜곡되는 것이다.

 최수운은 "지식의 허구성"을 잘 알고 있었다. 그의 후계자로서 지식이 출중한 인물은 사도 바울과 같이 오히려 케리그마를 조직적으로 형성하여 동학의 진로를 바꿀 우려가 있었다. 그가 한문으로만 저술을 하지 않고 동시에 한글가사를 지었다는 것도 민중에게 직접 개벽의 복음을 전파해야 한다는 사명을 가졌기 때문이다. 다산이 단 한 건의 한글서한이나 시조 한 수도 남기지 않았다는 사실, 그의 형 약전이 서민을 위한 서민생활의 『자산어보』를 집필하면서도 물고기의 한글이름 한 자도 써넣지 않았다는 것은 그들의 의식구조가 어디까지나 망해가는 조선왕조의 기력회복(목민牧民)에 머물렀다는 것을 의미한다. 수운의 문제의식과는 소양지판이었다.

 

 과학 교양서적을 어느 정도 봐서 그런지 그리 새로울 건 없지만 환원주의적 시각을 인문학에 적용하는 작가의 생각에서는 참고할 부분이 있었다.

 재밋었다. 이 책을 보고 나니 언급된 브라이언 그린의 <엔드 오브 타임>과 몇몇 책을 봐야겠다는 생각이 든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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4.  단순한 것으로 복잡한 것을 설명할 수 있는가 (화학)

p195

 과학자는 드러내 놓고 환원주의 연구 방법을 쓴다. 화학은 물리학으로, 물질은 입자로 거의 완벽하게 환원한다. 그러나 그걸 두고 물리학 패권주의라고 비난하는 사람은 없다. 양자역학 덕분에 화학의 세계는 완전해졌고 화학산업은 더 발전했다. 그러나 인문학자는 환원주의를 배격하기도 한다. 환원주의는 생물학과 인문학의 접점에서 특히 날카로운 마찰을 일으켰다. 우리나라 하계도 예외가 아니다. 2009년 7월 한국과학철학회와 서양근대철학회를 비롯한 여러 학회가 국립과학관에서 '다윈 200주년 기념 연합학술대회'를 열었다. 이 행사는 11월 서울대사회과학연구원/통섭원/한국과학기술학회가 이화여대에서 연 공동 학술 심포지엄으로 이어졌다. 주제는 '부분과 전체 : 다윈, 사회생물학, 그리고 한국'이었다. 여기서 환원주의 논쟁이 불타올랐다. 어떤 인문학자는 아래와 같이 사회생물학을 비판했다.

  

  『인간의 역사과정을 물리적 역사과정에서 분리해야 할 근본적인 차이는 없다. 모든 것은 궁극적으로 물리법칙으로 환원할 수 있다. 인간의 문화도 인과적 설명으로 과학과 연결해야 온전한 의미를 가진다. 사회학은 인류학에, 인류학은 영장류학에, 영장류학은 사회생물학에 포섭된다. 에드워드 윌슨은 이렇게 주장했다. 그렇다면 사회생물학은 왜 물리학에 통합하지 않는가? 사회과학이 사회에서 마음과 뇌로 이어지는 인과적 설명망을 만들어내지 못해서 과학 이론의 본질을 결여하고 있다는 지적이 옳다면, 물질에서 생명으로 이어지는 인과적 설명망을 만들어내지 못하는 사회생물학도 과학 이론의 본질을 결여하고 있는 것 아닌가. 인문학이든 과학이든 학문을 이런 식으로 비판해서는 안 된다. 사회과학자더러 뇌의 전달물질을 연구해 사회 행동이나 문화와 연계하라는 것은 불가능한 일을 하라는 요구다. 사회생물학자더러 물리학을 연구해 물질 수준의 토대에서 동물 행동을 설명하라고 하는 것도 마찬가지다. 게다가 진화의 수준이 변하면 새로운 성질이 <창발(創發, emerge)>하기 때문에 하위 수준을 연구한다고 해서 반드시 상위 수준을 설명할 수 있는 것도 아니다. 인간은 다른 동물과 다른 차원의 언어를 사용하고 차원이 다른 의미를 추구한다. 유전자를 연구해서 문화를 설명할 수는 없다.』

 

 분노의 감정을 드러낸 이 주장의 핵심은 두 문장으로 요약할 수 있다. 첫째, 인문학을 생물학으로 환원할 수 없다. 둘째, 인문학을 과학과 통합할 수 없다. 환원도 통합도 안 될 일이다. 인문학은 인문학이고 과학은 과학일 뿐이다. 그런 뜻이다.여기서 통합이라는 말이 왜 나오는지는 잠시 뒤에 말하겠다. 나는 '지금은' 이 반론이 옳다고 본다. 하지만 '영원히' 맞을 것이라고 생각하지는 않는다. 인간의 어떤 행위도 물리법칙으로 설명하지는 못한다. '아직' 설명하지 못하는지 원리적으로 불가능한지, 나는 판단하지 못하겠다. 인간의 심리와 행동을 물리법칙으로 남김없이 설명할 수 있는 날이 결코 오지 않을 것이라고 확언할 근거는 없으니까.

 

p199

 만사가 그렇듯 환원주의도 위험 요소가 있다. 가장 중대한 위험은 복잡한 것을 설명한다는 원래 목적을 잃어버리는 것이다. 단순한 것을 연구할 가치가 없다는 말이 아니다. 가장 단순한 수소의 원자 구조를 파악하는 일이 중요하다는 걸 누가 부정하겠는가. 그러나 우주의 구조와 운동법칙을 설명할 수 있어야 수소의 원자 구조를 아는 것이 온전한 의미를 가진다는 것 또한 분명하다. 복잡한 것을 설명하는 임무를 수행하려면 연구자가 자신이 몸담은 세부 학문의 경계를 넘어 다른 분야의 연구 성과를 습득하고 다른 분야의 연구자와 소통해야 한다. 설명하려는 대상이 우주든 사회든 사람이든 마찬가지다. 그래야 환원주의가 훌륭한 연구방법론이 될 수 있다. 윌슨은 그런 노력을 가리켜 '통섭(統攝, consilience)'이라고 하면서 다음과 같이 말했다.

 

 『과학과 인문학을 연결하는 것은 지성의 가장 위대한 과업이다. 오늘날 우리가 목겨하는 지식의 파편화와 철학의 혼란은 실제 세계의 반영이 아니라 학자들이 만든 것이다. 통섭은 통일統一(unification)의 열쇠다. 분야를 가로지르는 사실들과 사실에 기반을 둔 이론을 연결해 지식을 '통합'해야 한다. 학문의 갈래를 가로지르는 통섭의 가능성에 대한 믿음은 소수의 과학자와 철학자가 공유하는 형이상학적 세계관에 지나지 않지만 과학이 지속적으로 성공했다는 사실이 그것을 지지해 준다. 인문학에서도 힘을 발휘한다면 더 확실한 지지의 증거가 될 것이다. 통섭은 지적 모험의 전망을 열어 주고 인간의 조건을 더 정확하게 이해하도록 이끈다.』

 

 

 

윤석열의 가장 큰 문제는 말과 행동이 완전히 따로 논다는 거다. 

자유,공정,정의를 외치지만 실제론 가장 자유가 억압받고 불공정한 사회가 바로 지금이다.

윤석열 정부의 실상을 알고 싶은 사람들은 보면 좋을 내용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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p135

이광수 : 경제라는 건 결국 잠재성장률이 굉장히 중요하거든요. 잠재성장률을 높이기 위해선 세 가지가 중요합니다. 하나는 노동인데요, 인구가 증가하면 잠재성장률도 증가하죠. 그런데 한국은 인구가 줄고 있습니다. 두 번째는 자본인데요, 자본의 효과도 우리나라는 제조업 고도화를 넘어서는 단계이기 때문에, 일본 사례처럼 자본을 투입하면 성장률이 나오는 구조가 끝나가고 있다고 봐야 합니다. 세 번째가 생산성, 총요소생산선이라고 하는 건데, 각 요소들이 융합하고 만들어내는 혁신을 통해서 경제가 성장할 수 있다는 겁니다. 혁신이 일어나려면 가장 큰 전제조건이 격차가 적어야 한다는 겁니다. 임금 격차와 빈부 격차가 줄어들어야 하는 거죠. 그래야 혁신이 발생할 수 있습니다. 못 살면 보수화가 되지 않습니까? 그런데 우리는 격차가 점점 더 벌어지는 사회입니다.

 통일부 공무원을 시작으로 30년간 남북 통일을 담당하는 업무를 맡아왔으며, 김대중, 노무현 정권에서 통일부 장관을 지낸 경험을 바탕으로 한 남북의 교류 및 이에 따른 국제외교 관계에 대한 깊은 통찰이 담겨있다.

 남북의 교류를 위해서 대한민국이 나아가야 할 바에 대한 현실적이며 이론적인 지침서라 할 수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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p100

 이승만 대통령이 왕조적 개념이 아직 남아 이썬 전환기의 인물이라는 점도 영향을 미쳤을 거다. 1960년 3월 15일 대통령 선거를 앞두고 내가 중 3이었던 1959년 말인가 1960년 초에 헬기를 타고 전주까지 와서 전주공설운동장에 전주 시민과 학생들을 모아놓고 연설을 할 때였다. 그때 나는 그분 연설을 직접 들었는데, 국민이라는 단어를 써야 할 대목에서 계속 백성이라는 표현을 썼다. 매우 의아했다. 백성? 왕조 시대 임금이나 대신들이 쓰던 말 아닌가? 미국 유학까지 했다면서 백성이라는 말이 입에서 쉽게 나오다니 참 이상하다는 생각을 하지 않을 수 없었다.

 

p102

 이승만 대통령이 다시 한번 북쪽으로 밀고 올라가 압록강, 두만강을 수복해야 한다고 휴전을 하는 바람에 우리가 6.25 전쟁 휴전협정에 서명을 못 했다고 얘기하는 사람도 있다. 하지만 그건 잘 못 알고 있는 거다. 이승만 대통령이 휴전을 반대한 건 사실이지만 전시작전통제권이 없어서 휴전협정에 서명할 자격이 없었기 때문에 서명을 못 한 것이다. 휴전협정이란 원래 군사령관들이 서명하는 법적 권능을 가진 조약이다. 1950년 6월 25일에 전쟁이 터지고 사흘 만에 부산으로 피신했고, 전쟁 발발 19일 만인 7월 14일 유엔군 사령관 모자를 쓴 주한미군 사령관한테 한국군의 전시작전통제권을 넘겨준 사람이 바로 이승만 대통령이다.

 

p104

 박정희 대통령은 자주국방의 기치를 내걸었다. 1970년대 국방부 건물 꼭대기에 쇠로 크게 자주국방이라고 새겨놓았다. 미국은 우리가 진짜 자주국방을 이뤄서 한미동맹 위상이 부차적으로 떨어지면 주한미군을 나가라고 할 수 있다고 여겨서, 이때부터 미국과 박정희 대통령과의 사이가 불편해졌다. 우리가 자주국방으로 갈 수 없도록 만드는 미국의 미사일 사거리 제한 같은 조치도 이때 나왔다.

 

p106

 노태우 정부가 놓치지 않은 국제정세의 변화란 어떤 것이었나? 1980년대 중반부터 소련에서도 개혁-개방Perestroika-Glasnost이 시작되면서 동유럽 국가들의 체제 전환 움직임이 나타나기 시작했다. 소련은 미국과의 우주 경쟁 등을 포기하고 미-소 공존을 모색했다. 연장선상에서 1989년 12월 2~3일 지중해의 몰타섬에서 미국의 조지 부시 대통령과 소련의 미하일 고르바초프 공산당 서기장의 정상회담이 열렸다. 당시 소련의 최고 권력자였더 고르바초프가 미국에 사실상 항복하면서 동서 냉전이 끝나게 됐다. 노태우 정부는 이런 판세를 잘 읽어내고 적시에 움직였기 때문에 1990년 9월 소련, 1992년 8월 중국과 수교하며 북방정책이 결실을 거둘 수 있었다. 더 이상 반북-반공이 정권의 존재 이유와 정당성의 근거로 쓰이지 않게 된 것이다. 국제질서의 변화가 국내 정치의 통치 명분과 통치 구조를 바꾼 사례라고 할 수 있다.

 소련, 중국과의 수교는 경제적 의미가 있을 뿐만 아니라, 두 나라가 군사동맹 수주의 우방국인 북한에게 주는 정치,외교,군사적 지원을 약화시키고 둔화시키는 효과도 있었다. 연결해서 북한으로 인해 발생하는 우리나라의 미국 의존도를 줄이는 효과도 있었다고 할 수 있다. 대표적으로 노태우 대통령이 소련과 수교하면서 빌려 준 차관을 무기로 돌려받은 일을 들 수 있다. 소련에 30억 달러를 차관으로 주기로 약속하고 수교했는데, 1차로 15억 달러를 먼저 지급한 후 그에 대한 원리금 상환이 시작되면 2차로 나머지 15억 달러를 주겠다는 조건이었다. 그런데 소련이 1991년 완전히 쪼개졌고 소련을 승계한 러시아는 경제력이 확 떨어졌다. 세계 최대의 밀 수출국 우크라이나에서 들어오던 돈을 비롯해 소련 시절 연방 가맹 공화국들로부터 오던 돈줄이 끊겨버리자 러시아는 돈이 없다고 차관을 갚지 않았다. 결국 러시아는 1998년 모라토리엄을 선언했다. 돈을 갚지 않은 상황에서 우리나라에 나머지 15억 달러를 마저 달라고 요구했고, 우리는 합의문대로 원리금 상환이 먼저라고 일축했다. 이에 러시아는 고육지계로 군사 장비와 기술로 차관을 상환하겠다고 제안했고 한국 정부가 이를 수락했다. 바로 '불곰사업'이라고 알려진 것이다. 그때 미국에서 난리가 났다. 미국 입장에서는 한국 무기 체계의 대미 의존도를 100퍼센트로 유지하고 싶은데, 러시아 무기가 차관 상환금 대신 한국에 들어오면 한국의 무기 체계에서 미국에 대한 종속성이 떨어지고 10퍼센트든 20퍼센트든 미국 무기 사는 데 쓰는 돈이 줄어드니까, 무기 시장을 잠식당한다는 생각 때문에 미국이 난리를 쳤지만 우리는 결국 미국의 동의 없이 러시아 무기를 들여왔다. 북한의 무기 체계가 결국은 소련의 무기 체계로부터 시작됐기 때문에 북한 무기 체계에 대한 이해를 높인다는 명분과 우리가 빌려준 돈을 받고 러시아에 2차 차관을 제공하겠다는 약속도 지켜야 한다는 논리로 노태우 대통령이 버텨서 실행한 거다.

 노태우 정부 때 북방정책을 추진하는 과정에서 소련 무기를 들여온 것은 우리 무기 체계를 다각화하고, 미국의 의존도를 줄이고, 북한 무기를 직접 파악할 수 있게 되면서 지피지기 원리에 입각해 우리가 상대적으로 북한보다 우위에 설 수 있는, 내지는 견제할 수 있는 능력을 갖추는 결과로 이어졌다. 그 덕에 러시아 무기를 모방하거나 역설계해서 독자적으로 만든 무기도 많이 있다. 러시아가 나로호 발사를 도와준 것도 그 연장선이었을 거다. 미국은 절대 우리게에 로켓 기술을 알려주지 않는다. 노태우 정부가 차관 상환금 대신 러시아의 무기를 받은 것은 일타쌍피 정도가 아니라 일타오피였다.

 하지만 노태우 정부 역시 미국과는 상하관계였다. 군인이었던 박정희, 전두환은 쿠데타로 대통령 자리를 차지했기 때문에 국민 정서상 정통성을 인정받지 못했다. 그래서 미국이 인정해주어야만 그나마 정통성이 생기는 구조였다. 우리 국민은 군사정권을 인정할 수 없지만 미국은 항상 옳고 미국이 인정한다면 우리도 따라갈 수밖에 없다는 인식이 있었다. 국민 의식이 그러니 그때 한미관계는 완전히 상하관계가 될 수밖에 없었다.

 

p123

 1960~1970년대 중국은 아프리카 국가들에 많은 경제원조를 하면서 자기편으로 끌어들이려고 시도했는데 결국 소용없었다. 아프리카 국가들은 과거 식민 종주국이었던 영국이나 프랑스의 품을 떠나지 못하고 있다. 예를 들면 아프리카 대륙 서쪽에 프랑스 식민지였던 말리, 코트디부아르, 니제르, 기니, 모리타니, 부르키나파소 같은 나라들은 다닥다닥 붙어 있는데도 그 나라들끼리 직접 전화 연결이 안 됐었다. 말리와 코트디브아르가 직접 연결이 안 되고 말리에서 프랑스를 거쳐야 코트디브아르로 연결할 수 있었다. 오래된 일이지만 1970년대 말, 발레리 지스카르 데스탱 이 프랑스 대통령일 때 아프리카 국가 대사관에 근무하던 친구에게 들은 얘기가 놀라웠다. 프랑스 대통령이 아프리카 식민지였던 나라들을 쭉 한 바퀴 돌면서 한 해 동안 밀렸던 월급을 다 해결해 준다고 했다. GDP 규모가 크든 작든 국가가 예산을 세우고 국민에게 돌아갈 복지 예산, 공무원 임금 등등을 써야 하는데 자기네 세금으로 월급을 못 줬다는 거다. 그러니까 자기 대통령보다는 프랑스 대통령을 더 모신다는 거다.

 프랑스 식민지였던 아프리카 국가들이 대부분 독립한 지 60년이 넘었지만 프랑스는 그 나라들에 여전히 강압적으로 영향력을 행사하는 것 같다. 원자재 같은 천연자원을 헐값에 가져가는 등 프랑스가 지금까지 얻었던 이익을 지키기 위해서다. 프랑스가 설계하고 프랑스 재정부가 발행하고 통제하는 CFA 프랑을 쓰는 나라가 아프리카에서 10개국이 넘는다. 프랑스는 심지어 자국민의 활폐를 도입하려는 나라에 위조지폐를 뿌려 경제를 붕괴시키도 했다. 프랑스의 지배에서 벗어나려는 지도자들을 주저앉히기 위해 암살하고 반군을 지원하고 학살을 묵인했다. 직접 군대를 보내 이들 정부를 무너뜨리기도 하면서 프랑스는 아프리카에서 영향력을 놓지 않으려 했다. 프랑스가 나쁜 놈들이다. 프랑스 지도층과 결탁해 권력과 이익만 챙기는 아프리카의 지도자들도 문제다. 2006년까지 아프리카에 수출을 가장 많이 하는 나라가 프랑스였고, 2022년 현재 아프리카 55개 나라 중 프랑스어를 공용어로 지정한 나라가 23개국이다. 프랑스는 또한 아프리카 8개국과 방위협정을 맺었고 프랑스 특수부대 1만여명이 차드, 중앙아프리카공화국, 가봉, 세네갈 등지에 주둔하고 있다. 프랑스 품 안에서만 살아서는 안 되겠다고 각성하는 사람들도 아프리카에서는 아직 힘을 갖지 못하는 것 같다.

 영국은 동부 아프리카에서 탄탄한 세력 기반을 갖추고 있다. 케냐에는 주둔군도 나가 있고 7개국의 공식 공용어가 영어다. 아프리카 국가의 수출은 식민 모국과의 관계에 크게 의존하고 있고, 프랑스와 영어, 두 언어를 공용어, 공동 공용어로 지정한 나라가 40개국이 넘는다. 아프리카는 미국의 직접 영향권은 아니지만 아프리카에 지대한 영향력을 가진 프랑스와 영국이 미국 영향권 안에 있다.

 그런데 프랑스가 아프리카에서 민심을 많이 잃고 있다. 중국과 아프리카 국가들의 관계가 급속도로 가까워지고 있다. 중국은 경제면에서 EU에는 뒤지지만 2009년부터 2021년까지 12년 연속 아프리카 최대 무역 파트너의 지위를 유지하고 있다. 2010년대 내내 아프리카 3대 경제대국 중 하나인 남아프리카공화국의 최대 교역국도 중국이었다.

 

p127

 일본이 G2로 미국 GDP에 가장 근접했을 때도 미국 GDP의 40퍼센트 미만이었는데 미국 레이건 정부는 선진국들을 모아 환율을 조정해서 일본을 주저앉혔다. 1985년 '플라자 합의'인데 사실상 미국이 압력을 넣어 환율 조작을 받아들이도록 한 거다. 그런데 중국의 경우는 미국이 제압할 타이밍을 놓쳤다. 미국이 20세기의 우선순위대로 유럽, 중동에 신경을 쓰는 동안 중국이 급속히 커지면서 일본한테 썼던 방식을 쓸 수 없을 지경이 되어버린 거다. 2010년 G2로 올라선 중국이 GDP 면에서 미국을 따라잡는 속도에는 가속도가 붙은 것 같다. 2010년에 미국이 GDP의 40퍼센트를 달성하면서 G2로 올라서더니 2021년에는 74퍼센트까지 치고 올라왔다.

 이렇게 빠른 속도로 치고 올라오는 중국에게 멱살을 잡히지 않기 위해 미국은 총력을 다하고 있으나 혼자 힘으로는 역부족이 되니까 동맹국들을 자꾸 끌어들이고 있다. 2020년 미국, 일본, 호주, 인도를 묶는 4자 안보기구인 쿼드가 생겼고, 미국과 영국이 호주의 핵잠수함 건조를 지원한다면서 2021년 호주, 영국, 미국이 오커스AUKUS라는 삼각동맹을 맺었다.

 이게 전부 중국을 견제하기 위한 미국의 세계 전략 일환이다. 그러다 보니 북핵 문제는 우선순위에서 멀어져 버렸다.

 

p132

 일본몽도 있다. 대동아공영권은 지난 얘기가 아니다. 지금 일본은 자위대의 힘을 키우고 해외 출병이 가능하도록 헌법을 고치려 노력하고 있지 않나. 군사력을 키워놓고 미국의 힘이 빠질 때 그 자리를 차지할 수 있는 나라가 돼야겠다는 거다. 우리는 일본이 밉고 싫지만, 일본의 그런 목표를 비도덕적이다, 비윤리적이다 말할 수 없다. 국제정치도 정치인데 거기에다가 도덕의 잣대를 들이대면 바보다. 국내정치든 국제정치든 정치는 현실이고 현실은 선악이 아니라 결국 유불리로 결정 나는 거다. 그래서 미국도 패권을 잃지 않고 계속 군림하려고 하는 거 아닌가. 정책가가 러시아의 우크라이나 침략을 옳다 그르다로 판단하는 마인드를 가졌다면 제대로 일할 수 없다. 러시아가 영토를 넓히려는 것은 자연스럽다. 힘이 있으면 번영과 권위를 추구할 수 있다는 마인드로 현실을 읽고 국가의 이익에 부합하는 정책을 실행해야 한다. 때때로 정책가의 자리에 앉아 있는 사람들이 국가이익보다는 여론에 휘둘리거나 자기 머릿속에 들어 있는 잣대에 따라 일하려는 경우를 보는데, 그러면 실패한다. 내 나라의 이익을 추구하는 것이 자국 중심성이고 실용 외교다. 내 나라의 안전, 번영, 권위에 도움이 되는가, 해가 되는가를 따지는 것이 자국 중심성이지 내가 옳다고 믿는 나의 윤리에 맞추어서 활동하는 것은 자구 중심성이 아니다.

 그런 식으로 머리가 돌아가기 시작하면 인간적으로 좀 사악해질 수밖에 없다. 정치판에는 의로도 없고, 설령 있다고 해도 도구처럼 쓰이는 것 아닌가.

 정치는 유불리로 움직인다. 선악이 없다. 그리고 유불리를 잘 계산해야 한다. 한쪽에 계속 붙어 있는다고 유리하지 않다.

 

p138

 2021년 9월 미국이 갑자기 호주에게 핵잠수함 기술을 줬다. 중국을 압박하는 데 호주를 앞장세우고 싶은데 호주가 대가 없이 미국의 이익에 장단을 맞춰주지 않아서였을 것이다. 그 바람에 호주에 잠수함 기술을 팔기로 먼저 약속했던 프랑스가 미국한테 뒤통수를 맞았다. 그러자 프랑스가 바로 미국이 하는 일에 어깃장을 놨다. 2022년 미국이 베이징올림픽을 외교적으로 보이콧한다는데도 프랑스 정부 공식 대표단은 베이징올림픽에 간 것이다. 그동안 유럽은 먹고사는 데 미국이 도움이 되고, 유럽에 버티고 있는 5만 명 가까운 나토군을 미국이 통제하며 국제 안보질서를 장악하고 있으니까 함부로 반대하지 못한다. 하지만 프랑스가 결정적인 이해관계를 침범받자 미국과 다른 자기 목소리를 낸 것이다.

 

p139

 중국이 군사력을 강화하고 미국 중심의 국제질서가 흔들릴 수 있는 수준까지 부상하자 불안해진 미국은 아시아에 힘을 쏟기 시작했다. 미국은 외교/군사정책의 중심을 중동에서 아시아로 이동시키겠다는 '피봇 투 아시아' 그리고 아시아에서 미국의 영향력을 확대하겠다는 '리밸런싱 아시아' 정책을 정립했다. '리밸런싱 아시아'는 미국이 중국보다 월등한 우위에 있는 동안 중국은 한참 밑에 있었고, 그것이 미국에게는 정상이었는데 중국이 갑자기 치고 올라오기 시작했으니 다시 찍어 눌러서 미국이 압도적 우위였던 예전 상태로 되돌려 놓겠다는 거다.

 미국의 절대 다수 전문가들은 중국을 무시한다. 팍스 아메리카나는 영원하리라는 오만과 WASP(White Anglo-Saxson Protestant, 미국의 주류 백인 집단)만을 주류로 여기는 편협함 때문이다. 라틴계인 이탈리아, 스페인도 주류로 생각하지 않고 북유럽은 앵글로색슨이 아니라고 구분한다. 게다가 중국이 자신들이 멸시하는 공산독재국가이기 때문에 역설적이게도 더 빠른 속도로 발전하고 있따는 이 불편한 진실을 못 받아들이는 것 같다. 민주국가들은 민주국가는 무한정, 무한대로 발전할 수 있고 믿지만 독재국가는 발전에 한계가 있다고 본다. 환상이고 착각이다. 독재가 좋은 건 아니지만, 독재국가이기 때문에 발휘할 수 있는 잠재력이 따로 있다. 대표적으로 북한은 2005년 9월 미국의 방코델타아시아의 금융 제재만 17년째 받고 있다. 또 2006년 10월 1차 핵실험 이후 6차 핵실험까지 북한에 가해진 유엔 안보리 제재가 15~16개임에도 불구하고 아직까지 체제가 유지되고 있는 것은 불가사의한 일이 아닐 수 없다. 더구나 그런 제재 속에서도 경비가 적지 않게 드는 핵실험과 미사일 개발을 계속하는 것을 보면, 자유민주주만이 경제를 발전시킨다는 믿음은 미국이 믿고 싶은 신화일 뿐이고 대북제재 유지를 정당화하는 명분일 뿐이라는 생각을 하지 않을 수 없다.

 미국은 중국이 더 이상 크지 못하게 막고, 2차대전 이후 동아시아에서 행사해 온 헤게모니를 계속 유지해야겠는데 턱밑까지 치고 올라오는 중국과 무력으로 싸울 수는 없으니 중국 압박을 정당화하는 명분을 자꾸 만들어 낼 수밖에 없다. 민주주의, 자유, 수호, 인권, 동맹 등이 그런 용도로 강조되고 쓰이는 중이다. 미국의 국력이 큰 흐름으로 볼 때 쇠퇴하고 있지만 과거의 영광에 대한 추억은 남아 있다. 현실을 재인식하기보다 어떻게든 동맹국들을 이렇게 저렇게 묶어서 잘 끌고 가면 부상하는 중국을 견제할 수 있고, 자신들의 헤게모니를 계속 유지할 수 있을 것 같다는 생각이 미국의 속내로 보인다.

 

p152

 김대중 대통령이 집권한 후로도 미국은 해오던 대로 한국을 관리하려고 했다. 2001년 1월 취임한 조지 부시 대통령과 그 정부는 2000년 6.15 남북정상회담 후 남북장관급회담이 정례적으로 열리면서 남북관계가 빠른 속도로 진전되는 데에 불편해하는 기색이 역력했다. 2001년 3월 워싱턴에서 열린 한미정상회담에서 부시 대통령이 김대중 대통령을 'this man'이라고 지칭해서 논란이 되기도 했다. 그 자리에서 부시 대통령은 김대중 대통령에게 "나는 김정일 위원장에 대해 '회의적인 생각sceptisism'을 가지고 있다"고 말했다. 김정일 위원장을 어찌 믿고 남북관계를 그리 빨리 끌고 가려 하느냐는 비판을 한 셈이다. 김대중 대통령이 부시 대통령과 가진 첫 한미정상회담에서 부시 대통령의 견제가 있었지만, 그 후에도 남북장관급회담은 정례적으로 열렸다. 그런데 2002년 1월 29일 오전 부시 대통령이 의회 연설에서 "이란, 이라크, 북한은 '악의 축'이다"라고 규정을 하는 '사고'가 났다. 북한과 관계 개선을 통해 한반도 평화를 일궈내려는 김대중 대통령의 햇볕정책이 암초를 만난 것이다. 미국이 협조하지 않거나 방해하면 한반도 평화는 사실상 기대하기 어려운 것이 현실 아닌가. 부시 대통령이 '악의 축' 발언을 한 2002년 1월 29일 통일부 장관 임명장을 받은 나는 난감했다. 미국이 북한을 '악의 축'으로 규정하고 압박을 강화해 나가면 통일부 혼자서 햇볕정책을 밀고 나가기 어렵기 때문이다. 그런데 김대중 대통령이 직접 부시 대통령을 설득해서 미국도 북한과 대화를 하겠다고 공언하게 만들었다. 그날이 2002년 2월 20일이다.

 부시 대통령이 한미정상회담을 하기 위해 한국에 왔고, 2월 20일 오전에 청와대에서 회담이 열렸다. 그리고 오후 3시쯤 남북철도 연결 시발역인 도라산역에서 한미 정상들이 연설을 하게 되어 있었다. 외교, 안보, 통일 분야 장관들과 청와대 참모들이 김대중 대통령과 함께 서울에서 대통령 전용열차를 타고 도라산역으로 갔다. 그런데 불과 21일 전 북한을 악의 축이라고 규정했던 부시 대통령이 연단에 오르더니 전혀 예상 밖의 연설을 했다. '나는 북한을 공격할 의도가 없다. 그리고 김대중 대통령의 권고에 따라 미국도 북한과 대화를 하겠다. 인도적 지원사업도 하겠다'라는 요지의 연설이었다. 부시 대통령이 먼저 연설한 다음 김대중 대통령이 연설을 시작했지만, 김 대통령의 연설을 귀에 들어오지도 않고 부시 대통령의 연설 내용만 귓전을 때렸다. 2002년 2월 20일 오전 정상회담에서 무슨 조화가 일어난 것일까?

 행사가 끝나고 서울로 돌아오는 기차에 앉아 있는데 대통령 수행 경호원이 우리 칸으로 건너와서 "대통령님께서 통일부 장관님 부르십니다" 하길래 대통령 전용칸으로 갔다. 김대중 대통령이 "건너편에 앉으시오" 하시더니 곧장 "아까 부시 대통령 연설 들었소?"라고 물으셨다. 당연히 들었다고 했더니 "정 장관, 오늘 오전 내가 100분 동안 젖 먹던 힘까지 끌어내서 뷔 대통령을 설득했소. 그랬더니 아까 그런 연설을 한 거요. 나는 이제 할 일을 했으니 나머지는 통일부 장관이 알아서 일하시오" 하셨다. 속으로 '아~!' 하는 감탄사가 절로 나왔다. 역시 김대중 대통령이구나 하는 생각을 하면서 자리로 돌아왔다. 김정일 국방위원장에 대해 회의적인 생각을 가지고 있었고 북한을 악의 축으로 규정한 부시 대통령을 설득해 북한을 공격하지 않고, 북한과 대화할 거고, 북한에 인도적 지원도 하겠다는 연설을 하도록 만든 논리와 이론이 궁금했지만 여쭤볼 기회는 없었다. 

 아무튼 김대중 대통령은 부시 대통령도 설득하고 구슬리면서 통일부가 남북관계 개선을 계속할 수 있는 여건을 만들어 주셨다. 외교부나 국방부, 통상교섭본부 등 한미 안보협력이나 경제협력 담당부처도 대통령의 협상력과 설득력의 덕을 많이 보았을 것이다.

 햇볕정책의 첫 번째 성과는 금강산 관광이다. 김대중 대통령 임기 초인 1998년 11월 18일 시작한 금강산 관광은 김대중 대통령의 결기가 아니었으면 엄두조차 낼 수 없는 '사건'이었다. 미국에 물어보지 않고 독자적으로 저질러 버리는 식으로 결행하고 사후에 미국을 설득했다. 그렇게 결국 미국이 어쩔 수 없도록 만들어 끌고 갔던 것이다. 김대중 대통령은 한미관계, 남북관계를 비롯한 국제정치에 대한 공부를 많이 해서 상당히 탄탄한 이론을 갖추고 있었다. 그리고 대통령이 직접 미국 대통령을 설득했다. 그건 대단한 거다. 이론이 아무리 빵빵해도 엄두를 내어 미국 대통령과 마주한 그 자리에서 직접 설득하는 건 또 다른 문제다. 김대중 대통령이 그렇게 할 수 있었던 건 군사정권에서 모질게 시달리면서도 굴하지 않고 자기 입장을 절대 바꾸지 않으며 계속 버텼던 경험, 결국 대통령까지 된 데서 오는 자신감이 바탕이 된 것 같다.

 첫 금강관 관광객을 태운 현대금강호가 금강산 자락 장전항으로 떠난 1998년 11월 18일 클린턴 미국 대통령은 도쿄에 있었고 그 다음다음 날인 11월 20일 청와대에서 한미정상회담이 잡혀 있었다. 클린턴 대통령은 금강산 관광선이 출발하는 장면을 도쿄에서 TV로 보았다면서 이렇게 말했다고 한다. "금강산 관광선 출항 장면은 매우 아름다웠습니다. 축하합니다." 금강산 관광은 그렇게 이루어졌고 이후 미국의 간섭은 없었다. 미리 미국으로 관료들을 보내 구구절절 설명을 하면서 미국의 동의를 구하려고 했다면 당시 국제정세의 상황으로 보아 금강산 관광은 원래 계획대로 시작되지 못했을 것이다.

p172

 북한 입장에서는 전시작전통제권을 가진 한국이 더 무섭다. 그 동안 북한이 위협해도 전시작전통제권을 가진 미국 입장은 국지전도 부담이니 '한 대 맞고 끝내라'였다. 그런데 한국이 전시작전통제권을 가지면 '때릴 수 있는' 것이다. 게다가 한국은 국방비를 매년 8퍼센트 증액하고 있다.

 노무현 정부는 한미연합사령부가 행사하도록 되어 있는 전시작전통제권을 우리나라 합참의장이 지휘하도록 찾아오게 만들어 놓았지만, 이명박 정부는 전시작전통제권의 환수 여부조차 향후에 검토하겠다고 했다. 북한이 밀고 내려올 때 미국이 자동으로 개입하도록 하려면 미군이 전시작전통제권을 가지고 있는 편이 우리한테 더 안전하다는 논리였다. 미군이 199개국에 나가 있지만 주둔한 나라 군대의 전시작전통제권을 가지고 있는 경우는 한 곳밖에 없다. 우리나라, 한국.

 

2장. 우리는 북핵 문제를 어떻게 풀 수 있을까?

 

p215. 북한의 첫 핵실험, BDA 사건

 2003년부터 시작된 6자 회담의 성과라고 할 수 있는 2005년 '9.19 공동성명'에서 북한은 모든 핵무기를 파기하고 NPT, IAEA로 복귀한다는 약속을 했다. 그 대가로 미국은 한반도 평화협정, 단계적 비핵화, 핵무기 불공격, 북미 간의 수교 등을 북한에게 약속했다. 북한이 첫 핵실험을 하기 약 1년 전의 일이다. 그런데 '9.19 공동성명'은 그다음 날 사실상 깨져버렸다. 미국 재무부가 9월 20일 자 관보에 마카오에 있는 방코델타아시아BDA를 북한 불법 자금 세탁의 주요 우려 대상으로 지정했다고 게재한 거다. 미국 국무부와 백악관이 '9.19 공동성명'을 만들었다면 바로 그다음 날 미국 재무부가 북한에 대한 실질적인 금융 제재를 가한 셈이다. 그러자 북한은 미국을 믿을 수 없다, 철석같이 약속해 놓고 그다음 날 약속을 깨는 미국과 이제 협상은 없다, 결국 핵을 보유할 수밖에 없다고 공개적으로 반발하면서 핵 활동 상황을 중계방송하듯이 공개했다. '지금 영변 원자력발전소 가동을 시작했다', '원자로 가동을 일시 중단하고 연료봉을 꺼냈다', '꺼낸 연료봉을 재처리해서 플루토늄을 추출했다.' 그러고는 2006년 7월 4일, 미국 독립기념일에 중거리 미사일 한 발을 발사하더니 "10월 3일부터 10일 사이 좋은 날을 잡아 핵실험을 하겠다"고 공개적으로 선언했다. 그리고 2006년 10월 9일 1차 핵실험을 단행했고 성공했다.

 북한이 핵무기를 만들 수 있따는 가능성을 탐지해서 6자 회담도 하고 '9.19 공동성명'도 합의했지만, 미국은 그때까지도 북한이 실제로 핵실험을 못 할 줄 알았던 것 같다. '북한이 무슨 핵실험까지 해, 뻥이야'라고 생각했는데 막상 일을 벌이고 나니 미국은 놀랐을 것이다. 미국은 '돈 없으면 아무것도 못 한다'고 생각한다. 북한이 핵무기, 미국 본토까지 날라갈 수 있는 ICBM을 못 만들 거라고 판단했을 것이다. 자본주의식으로만 사고하기 때문인데 북한은 다르다는 것을 염두에 두지 않는다. '고난의 행군'은 자본주의를 전제로 삼는 미국인들은 꿈도 꿀 수 없는 생존 방식이다.

 사실 미국이 북한을 상대하는 걸 보면, 작은 나라나 약소국에 대한 편견을 가지고 있는 듯하다. 예컨대 '저것들이 뭘 하겠어, 미국의 막강한 군사력으로 겁을 주고, 동맹국들을 동원해 압박하고, 또 필요하면 유엔을 통해 제재 결의안을 통과시켜서 북한을 제외한 나머지 모든 국가들이 북한 제재에 동참하면 결국은 손 들게 돼 있다' 하는 믿음을 가지고 있는 것 같다. 그런데 그 믿음이 북한한테는 안 통했다. 사람도 그렇지 않나. 잃을 것이 없는 사람이 악을 쓰고 덤비기 시작하면 잃을 것이 많은 사람은 이기지 못한다. "부자 몸조심"이라는 속담도 있지 않나. 북한이 그런 식으로 핵실험을 성공하고 나니까 비로소 미국 부시 대통령이 노무현 대통령한테 BDA 제재 때문에 사실상 파기된 거나 다름없던 '9.19 공동성명'에서 합의한 방식으로 북핵 문제를 풀 수밖에 없다는 것을 고백한 바 있다. 북한이 1차 핵실험을 한 다음 달인 2006년 11월 하노이에서 열린 아세안지역안보포럼에 참석했던 한국 대통령과 미국 대통령이 별도로 정상회담을 하면서 말했던 내용이 그렇다. "북한이 핵실험까지 했는데 그대로 놔두면 2차, 3차, 4차로 이어질 거고 결국 사실상 핵보유국이 된다. 초동 단계에서 막아야겠다. 그러려면 당신과 내가 함께 김정일 국방위원장을 만나서 한국전쟁의 공식적인 종료를 선언하는 문제를 협의하자. 종전선언을 해줘야만 끝날 것 같다." 종전선언을 해준다는 의미는 전쟁협정을 평화협정으로 바꾸는 협상을 시작한다는 의미다. 그리고 평화협정 협상을 한다는 말은 미국과 북한 사이에 적대적인 군사관계를 끝장낸다는 의미고, 평화협정이 마무리되면 미국과 북한이 외교적으로 수교를 할 수 있는 법적 토대가 마련된다는 것이다. 전쟁했던 나라끼리 평화관계를 유지하자하고 합의하면 바로 수교로 건너갈 수 있는 관계로 바뀌는 것이다. '9.19 공동성명'에서 말했던 대로다. 물론 대신 북한이 핵 개발을 포기해야 한다.

 

p272

4장. 우크라이나 사태, 북핵 문제에 영향

 우크라이나 사태는 우리에게 국제정치의 민낯을 보여주었을 뿐만 아니라 북하의 핵 문제를 더욱 긴박한 국면으로 옮겨놓았다. 우크라이나 사태를 지켜본 북한은 더더욱 핵을 포기하려고 하지 않을 거다. 그런 북한을 어떻게 상대할 것인가는 윤석열 정부의 발등에 떨어진 과제다. 이 문제는 한미동맹 강화만으로는 해결이 안 된다.

 

p273. 우크라이나가 믿은 약속

 우크라이나가 미국, 영국, 러시아의 약속을 믿지 않았다면, 즉 국제정치의 냉혹함을 잊지 않았다면 핵을 가지고 있었을 거다.

 우크라이나는 1994년 '부다페스트 안전보장 양해각서'로 미국과 러시아 등 6개국으로부터 핵과 미사일을 내놓으면 확실하게 체제안전을 보장해 주겠다는 약속을 받았다. 소련 해체로 핵무기를 보유하게 된 카자흐스탄과 우크라이나, 벨라루스를 비핵화하기 위해 미국 여야가 공동 발의해서 거의 만장일치로 통과시킨 넌-루가 법에 따라 미국이 돈을 대고 소련이 핵무기 해체 군사기술을 제공하기로 했다. 미국, 러시아에 더해 유럽의 강자인 영국까지 우크라이나에게 수교와 경제 지원, 체제 안전 보장을 약속했다. 인접 국가인 벨라루스, 폴란드도 우크라이나의 보호를 약속했다. 과거 소련 땅이었던 국가들의 약속은 중요하지 않겠지만, 어쨋든 이들도 우크라이나 보호 약속에 동참했다. 

 지난 2022년 2월 우크라이나를 침공한 러시아 군대를 막는 데 결국 누가 나섰나. 미국 다음가는 군사강국인 러시아가 국경을 맞댄 우크라이나를 치고 들어오는데 미국은 최강국이지만 멀리 떨어져 있기 때문에 손을 못 쓴다. 그나마 러시아를 경제적으로 압박한다는 미국의 말에 영국은 적극적으로 동조하지만 프랑스만 해도 한 발 거리를 뒀다. 앞서 말했듯이 프랑스는 미국한테 삐쳤으니까. 호주에 핵잠수함을 팔아먹으려고 했는데 미국이 중국을 압박하는 데 호주를 끌어들이려고 핵잠수함을 호주한테 그냥 주는 바람에 프랑스가 완전히 장사를 망쳐버린 것이다. 프랑스는 미국이 상도의에서 어긋났다는 명분으로 자기 행동을 정당화하고 싶겠지만 사람들은 국제사회가 그런 데인 줄 몰랐냐고 할 거다. 외교라는 게 다 각자 실속 차리는 일이고, 호주가 프랑스한테 의리 지킬 일이 뭐 있나. 호주는 기본적으로 영국 편이고 영국은 미국 편이다. 프랑스의 잠수함 장사가 그만큼 성사됐던 건 어떤 면에서는 그때 운이 좋아서 아니었겠나. 게다가 프랑스는 앵글로색슨이 아니다. 과가에 영국의 식민지였다가 독립하면서 영연방을 구성한 호주, 뉴질랜드 캐나다는 완전히 미국 편이다. 주요 국제정치 문제에서 영연방 국가들은 영국과 보조를 같이하니까 미국은 영국 단추만 잘 누르면 영연방 국가들이 우르르 따라 들어온다. 그나마 믿을 수 있는 계보끼리 움직이는 조폭 세계처럼. 영연방은 동남아와 아프리카에도 있다. 인도, 말레이시아, 싱가포르, 남아프리카 공화국, 케냐 등등. 그러니까 영연방 내지는 앵글로색슨들이 함께 움직여서 손해를 봤던 프랑스나 독일은 때로 미국과 보조를 맞추지 않고 엇박자로 움직인다.

 우크라이나가 무자비하게 짓밟히는데, 러시아가 핵무기를 쓰겠다는데도 미국은 말뿐이지 행동을 못 한다. 그러니 우크라이나가 1990년대 초에 미국과 러시아의 약속을 믿고 그 감언이설에 속아 핵을 내놨던 것이 불행의 원인이 된 것이다.

 더 거슬러 올라가 보자. 영국과 미국의 합작품인 2003년 리비아 핵 개발 계획 포기 사건, 카다피는 핵을 개발하지 않겠다고 약속하면 미국이 경제 지원도 해주고 수교도 해준다는 약속을 믿고 핵 개발을 포기했다. 그리고 경제 지원이 들어왔고 3년 후인 2006년 미국과 수교도 했다. 그러나 수교 이후에 미국 쪽 공작의 결과라고 볼수밖에 없는 반군이 생겨나면서 정부군과 반군이 싸우는 와중에 2011년 10월 20일 카다피는 길거리에서 나토의 지원을 받은 반군의 총에 맞아 죽었다. 카다피는 미국과 영국의 선의를 믿지 않고 계속 핵개발 노력을 했더라면 그런 일은 절대로 없었을 거다.

 우크라이나도 미국과 러시아의 선의, 더 노골적으로는 감언이설에 속아서 150개나 되는 핵폭탄과 1,700개의 미사일을 팔지 않았더라면, 핵폭탄을 10개라도 가지고 있었다면 저런 꼴은 안 당했을 것이다. 미사일이 100개만 있었어도 그렇게 건드리지 못한다. 아무것도 없다고 러시아가 마음 놓고 두들겨 패는 거다.

 

 

 양자역학의 성립의 역사와 가장 근본되는 개념에 대한 입문서.

저자의 이전 작품인 화학 이야기가 꽤 괜찮아서 찾아 읽어봤다. 이 책도 꽤 괜찮다.

입자 이중성에 대한 실험 설명과 쿼크로 들어가면서부터 약간 어려워지긴 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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p34

 어쩌면 영의 이중 슬릿 실험 결과를 광자 개념으로 설명할 수 있을 것이다. 빛 방출기가 기관총처럼 빛을 연속해서 쏘면, 빛 입자들이 공중에서 서로 충돌하여 얼룩말 무늬를 만드는 것은 아닐까?

 이 가설이 맞는지 확인하는 가장 좋은 방법은 광자들이 이중 슬릿을 통과할 때 상호 작용할 가능성을 제것하는 것이다. 광자를 기관총으로 난사하는 대신, 저격용 소총으로 하나씩 하나씩 발사해야 한다.

 이 실험을 구현하기 위한 다양한 방법이 수년간 고안되었는데, 그중 1994년 히타치 직원인 도노무라 아키라가 수행한 실험이 단연 돋보였다. 탱크, 냉장고, 마사지 기계를 생산하는 기업 히타치는 최고로 정밀한 이중 슬릿 실험에 관련된 권리를 소유하고 있다.

 도노무라가 구성한 실험의 세부 내용은 토머스 영이 했던 실험과 상당히 다르지만 목표는 같으므로 여러분이 이해하기 단순하고 편하도록 동일 용어로 설명하려 한다. 실제로는 내가 이야기하는 것처럼 그리 간단하지 않다.

 도노무라의 실험에서 빛 방출기는 두 개의 슬릿을 향해 광자를 발사하며 빛의 세기를 강하거나 약하게 조절할 수 있었다. 방출기 맞은편에 설치된 검출기 스크린은 무언가가 부딪히면 빛을 내는 물질로 만들어져 있어서 광자가 닿는 곳마다 빛의 흔적이 새겨졌다.

 이전에 영이 했던 것처럼 도노무라가 빛을 뭉텅이로 쏘자 예상했던 얼룩말 무늬가 얻어졌는데, 방출기 세기를 낮추어 한 번에 광자 한 알씩 쏘자 심각할 정도로 이상한 결과가 나왔다.

 처음 몇 분 동안은 흥미로운 결과가 나오지 않았다. 광자는 하나씩 날아가 슬릿을 통과하고 검출기 스크린에 무작위로 부딪혔다. 그런데 시간이 흐르면서 스크린 가운데에 점으로 이루어진 띄무늬가 형성되었는데... 어디서 많이 본 것 같지 않은가?

(도노무라 아키라가 이중 슬릿을 향해 전자 한개씩을 방출한 실험 영상)

입자가 하나씩 발사되는 상황에서는 이 같은 무늬가 그려질 수 없다. 얼룩말 무늬는 슬릿을 통과한 광자가 다른 슬릿을 통과한 다른 광자와 섞여야만 나타난다. 광자를 하나씩 발사하면 다른 광자와 섞일 수 없다. 광자를 간섭하는 존재가 없는데, 어떻게 간섭무늬가 형성되는 것일까? 광자는 어떠헤 두 개의 슬릿을 동시에 통과하는 것일까?

 

p41

 전자와 양성자는 반대 전하를 띠고, 반대되는 전하는 서로를 끌어당긴다고 하는데, 원자에서는 왜 전자가 핵을 향해 소용돌이를 그리며 끌려간 끝에 수축되는 현상이 일어나지 않을까? 원자는 왜 파괴되지 않는 것일까?

 이 질문에 보어는 양자 에너지 원리에 위배되기 때문이라고 대답한다. 에너지 준위가 가장 낮은 껍질을 채운 전자, 즉 핵에서 가장 가까운 전자는 에너지 사다리의 가장 아래쪽 가로대에 놓여 있다. 만약 그 전자가 핵을 향해 안쪽으로 서서히 이동하기 시작한다면, 그것은 허용되지 않는 에너지 값을 취하는 것과 마찬가지라는 의미다.

 가장 안쪽 껍질에 자리를 잡고 나서 에너지를 잃는 유일한 방법은 사다리에서 벗어나 원자 밖으로 사라지는 것이다. 전자 입장에서는 핵을 향해 움직이고 싶을 수 있지만, 양자 에너지 원리가 전하의 인력 규칙에 앞선다.

 

p51

 하이젠베르크는 현실 세계의 물리에는 무지하기로 악명 높았는데, 박사학위 중 구두시험에서 간단한 배터리가 어떻게 작동하는지 질문받았으나 전혀 대답하지 못했다고 한다.

 이처럼 물리학에는 재능이 없었지만 수학만큼은 누구보다도 뛰어났던 하이젠베르크는 1920년에 아르놀트 조머펠트에게 고용되었다. 조머펠트는 보어가 원자 이론을 고안하는 데 도움을 준 물리학자 중 한 명이었다.

 조머펠트는 하이젠베르크에게 빛의 분해능에 관한 난제를 수학으로 계산하라는 과제를 주었는데, 하이젠베르크가 2주 만에 그 문제를 해결했다. 그런데 하이젠베르크가 가져온 답이 너무나도 복잡한 나머지 조머펠트는 그렇게 빨리 답을 얻기는 애초에 불가능했을 것이라 판단하고 그 답을 받아들이지 않았다. 이 일이 있고 몇 달 후 하이젠베르크보다 이름이 알려져 있었던 물리학자 알프레트 란데가 그와 정확히 같은 답을 발표해 명성을 얻었다.

 이러한 일을 겪고 나서 하이젠베르크는 양자 연구의 세계적인 요새로 빠르게 성장한 덴마크의 코펜하겐 연구소로 자리를 옮겨 닐스 보어와 함께 일하기 시작했다. 아마도 하이젠베르크는 조머펠트가 자신의 능력을 인정해주지 않아 실망했거나, 그게 아니라면 단순히 노벨상 수상자들과 함께 일하기를 꿈꾸었을 것이다. 이유가 어찌 되었든, 자리를 옮긴 후 하이젠베르크는 보어의 수제자이자 가장 가까운 친구가 되었다.

 

 안타깝게도 하이젠베르크 인생의 후반기에는 다양한 논란이 불거졌다. 나치즘이 유럽 전역에 퍼지자 많은 과학자가 공습을 피해 미국으로 이주했다. 하지만 하이젠베르크는 유럽에 남아 나치에 고용되어 원자 폭탄 제조를 도왔다.

 일부 역사학자는 하이젠베르크가 내부에서 원폭 제조를 방해했다고도 주장한다. 전쟁 후에 진행된 인터뷰에서 하이젠베르크가 원자 폭탄을 어떻게 제조하는지 정확하게 알고 있었다고 밝혔기 때문이다. 결론적으로 나치는 원폭 제조에 실패했다. 어쩌면 하이젠베르크는 원폭 제조에 관한 모든 것을 알았지만, 나치의 노력을 물거품으로 만들기 위해 입을 다물고 있었는지도 모른다.

 그러나 하이젠베르크와 보어가 주고받은 편지들이 2002년에 공개되면서, 두 사람에게 어두운 그림자가  드리워졌다. 편지 내용상 하이젠베르크는 순탄하게 원폭 제조를 연구하고 있었으나 그와 함께 일할 유능한 팀원들이 없고(훌륭한 과학자들은 미국에 있었다), 하이젠베르크 자신은 연구실 사정에 밝지 않아 프로젝트에 실패한 것으로 보인다. 짐작건대 실험실의 모든 장비가 배터리로 작동했을 것이다.

 이 시기의 하이젠베르크가 윤리적 측면에서 어떠한 입장이었는지는 아무도 모른다. 그는 유대인 물리학자 알베르트 아인슈타인의 연구 업적을 알리다가 곤경에 처했지만, 어머니 덕분에 심각한 상황에 빠지지 않을 수 있었다. 알다시피 하이젠베르크의 어머니는 나치 친위대장 하인리히 힘러의 어머니인 힘러 여사와 가까운 사이였는데, 하이젠베르크가 곤경에 처하자 친구 힘러 여사에게 전화를 걸어 "내 아들 좀 내버려 두라고 네 아들에게 전해!"라는 의견을 효율적으로 전달했다.

 

p210

 칼 앤더슨은 우주에서 끊임없이 지구로 떨어지는 입자 파편인 우주선cosmic ray을 연구하면서 지구 표면에 도달하는 전자를 세고 있었다. 계산한 결과, 입자 대부분은 예측한 대로 정확하게 거동했으나 이들 입장 중 15개는 자석 주변에서 예상과 다르게 움직였다. 앤더슨이 관찰한 그 입자 15개가 양전하를 띤 전자였다. 우주에서 온 반물질.

 반전자는 '양전자positron'로 명명되었다. 하지만 반대 전하를 지닌 양성자와 중성자는 실망스럽게도 반양성자anti-proton와 반중성자anti-neutron로 불렸는데, 중성자가 어떻게 반대 전하를 지닐 수 있는지 궁금할 것이다. 반중성자에 관해서는 다음 장에서 논할 예정이다.

 QED덕분에 우리 현실은 훨씬 더 복잡해졌다. 다루어야 할 입자와 장이 각각 일곱 개나 생겼기 때문이다. 양성자, 반양성자, 중성자, 반중성자, 전자, 양전자, 광자.

 광자는 반물질이 없는데, 이는 파인만이 말한 시간 역행 관점에서 보면 완벽하게 이치에 맞는다. 반물질이 시간을 거슬러 가는 일반 물질과 같다면, 광자는 시간을 경험하지 않으므로 광자의 반입자는 자기 자신이다.

 이미 특수상대성이론에서 보았듯이, 시간은 우주에서의 제한속도에 도달할 때까지 느려지는데 광자는 이미 그 제한속도로 움직이고 있으므로 시간 개념을 갖지 않는다. 광자가 시간의 순행을 느끼지 못한다는 것은, 시간의 역행도 느끼지 못함을 의미한다. 

 

p223

 쿼크는 겔만이 개념을 제안하고 수년이 지난 후 렙톤(전자, 뮤온, 타우온)을 중성자에 쏘아 경로를 추적하는 실험 도중 발견되었다. 중성자가 '중성자장'의 단일 물질 덩어리라면, 전자는 날카로운 각도로 튕겨 나올 것이다. 그런데 겔만이 예상한 대로 중성자가 하위 입자인 쿼크로 구성되어 있다면, 렙톤은 쿼크의 부분 전하에 의해 궤도를 벗어나며 굴절될 것이다.

 실험 결과는 겔만의 예측과 일치했고, 그 과정에서 새로운 종류의 입자와 핵을 다루는 양자장 이론이 제안되었다.

 양정자와 중성자는 세 개의 쿼크로 이루어져 있는데, 하이젠베르크의 불확정성 원리에 따르면 그 주변으로 수천 개의 가상 쿼크가 생긴다. 여기서 일정하게 유지되는 세 개의 쿼크를 '드러난 쿼크valence quarks'라 부르며 이들이 입자의 전체적인 정체성을 결정한다.

 쿼크에는 전하가 있으므로 광자장과 상호 작용한다는 것은 안다. 하지만 양전하인 두 개의 위 쿼크가 왜 서로 밀어내지 않는지는 의문이다. 또, 같은 전하를 지닌 두 개의 입자는 절대로 붙어 다니지 않는다. 그런데 왜 모든 원자의 핵은 형성되는 순간 저절로 산산조각 나지 않는지 궁금해진다.

 일본 물리학자 유카와 히데키는 전자기력보다 훨씬 강하고, 양성자와 중성자를 한데 묶을 뿐만 아니라 양성자를 하나의 입자로 유지해주는 힘을 제안했다. 이 힘은 상당히 강해서 전하 반발력도 이겨낼 수 있으므로, 유카와는 그 힘에 '강력strong force'이라는 이름을 붙였다.

 전자기력과 강력은 힘의 규모에 어마어마한 차이가 있따. 전자기적 상호 작용은 원자 주위의 전자를 이동시키거나 화학 반응, 이를테면 불을 붙이는 반응을 일으킨다. 반면 강력에서 비롯된 에너지는 원자핵 중심부에서 움직이는 양성자, 중성자와 관련 있다. 강력은 핵폭발을 일으킨다.

 전자기력은 모든 입자가 광자장에 결합하고 가상 광자를 통해 소통하는 것과 관련된다. 그러니 논리적으로 강력도 쿼크가 결합할 수 있는 고유의 장을 가져야 한다. 겔만은 이를 글론장gluon field이라 불렀다.

 그럼 이제 글루온장에 어울리는 특성이 필요하다. 입자가 광자장에 결합하는 능력을 우리는 전하라고 부른다. 겔만은 쿼크가 글루온장에 결합하도록 해주는 특성의 명칭을 정해야 했다. 그리고 그는 이해에 별 도움이 되지 않는 '색colour'이라는 이름을 선택했다.

 파인먼의 전자와 광자에 관한 양자장 이론은 양자전기역학이었으므로, 겔만은 쿼크와 글루온을 다루는 자신의 이론에 색상을 의미하는 그리스어 '크로마chroma'를 따서 '양자색역학quantum chromodynamics'이라는 이름을 붙였다.

 

p238

 이론물리학자들은 어느 가설에 연구할만한 가치가 있는지 어떻게 알아낼까? 입자와 입자장, 그리고 그들 사이의 상호 작용은 너무 많은데 누군가 제안한 방정식이 이치에 맞는지 어떻게 알 수 있을까? 새로운 물리학 법칙을 만드는 과정에 기반이 되는 법칙이 있을까?

 답은 '그렇다'이다. 그 궁극의 법칙은 역사상 가장 탁월한 물리학자였으나 충격적일 정도로 이름이 알려지지 않은 물리학자가 세웠다. 아말리에 에미 뇌터Amalie Emmy Noether.

 뇌터는 20세기 초 독일 에를랑겐대학에서 청강 허가를 받은 두 여성 중 한 명이었는데, 듣고 싶은 수업이 있을 때마다 강사에게 허락을 받아야 했다. 뇌터의 성별은 그녀가 수학 공부하는 것을 막지 못했고, 뇌터가 발표한 탁월한 논문은 존경받는 수학자 다비트 힐베르트의 관심을 끌었다.

 뇌터는 힐베르트의 도움을 받아 괴팅겐대학에서 강사 자리를 얻을 수 있었고, 그 대학의 유일한 여성 직원이 되었다. 직책상 무보수로 일해야 했으며 힐베르트의 이름으로 된 강의에서만 가르칠 수 있었으나, 어쨌든 그녀는 학계에 발을 들여놓았다.

 마침내 상황이 반전된 것은 뇌터가 이론물리학에서 가장 중요한 지침이 되는 원리인 '뇌터의 정리Noether's theorem'을 고안한 이후다. 어떤 면에서 애석한 일이지만, 여성인 뇌터가 다른 학자와 동등한 대우를 받으려면 세상의 모든 남성 물리학자로부터 승리를 거두어야만 했다. 그런 상황은 그녀를 더욱 강하게 만들었다. 남성 물리학자들에게 충분히 인정받지 못했던 뇌터는 QED와 QCD의 주춧돌로 작용하며 학계에 광범위한 영향을 준 뇌터의 정리를 발표해 모든 남성 물리학자들보다 한 수 위임을 보였고, 아인슈타인 조차 규명하지 못한 상대성이론의 퍼즐을 풀었다. 

 뇌터의 정리는 물리학자들이 '대칭성'이라 부르는 개념을 발견한 것이다. 사람들은 그 개념을 막연하게 생각해왔다. 어떠한 사건이나 입자를 연구할 때 우리는 운동에너지(이동)와 위치에너지(장에너지의 에너지)를 알려주는 방정식을 쓴다. 이 두 에너지의 차이를 라그랑지안(Lagrangian)또는 라그랑쥬 함수라 하는데 모든 물리학 법칙에 이 개념이 포함되어 있다.

 우리는 연구하는 대상이나 조건을 언제든지 바꿀 수 있다. 강한 자석 근처에서 실험하거나 입자의 질량을 변화시킨다면, 라그장지안은 그대로이거나 변화할 것이다. 우리가 일으킨 변화가 라그랑지안을 바꾸지 않는다면 모든 방정식도 같은 형태로 남을 것이며, 우리는 이 상황을 이론에 '대칭성이 있다'라고 표현한다. 그런데 우리가 일으킨 변화가 라그랑지안에 변화를 준다면 방정식 역시 변화할 것이고, 우리는 그 이론에 '깨진 대칭성broken symmetry이 있다'라고 말한다.

 뇌터의 정리는 이론에 대칭성이 있다면, 입자에도 마찬가지로 보존되는 특성이 있어야 한다고 말한다.

 가령 여러분이 입자를 들고 살펴보다가 오른쪽으로 1미터 이동했다고 치자. 입자도 여러분과 함께 이동할 것이다. 여기서 우리의 이론에는 위치 대칭성이 있다.

 뇌터의 정리에 따르면 이 같은 위치 변화는 추진력이 있는 입자가 한 장소에서 다른 장소로 이동한 결과인데, 추진력은 보존되어야 하며 생성/파괴될 수 없다. 또 서로 충돌하는 입자들은 상대에게 운동량을 전달하지만, 충돌 전후의 운동량 총량은 어떠한 일이 있어도 보존된다.

 뇌터의 정리는 또한 우리가 시간의 흐름에 따라 입자를 전진시켜도 물리 법칙은 변화하지 않는다고 말한다. 물리 법칙은 시간에 대칭적이므로 그 시간 흐름을 따라가며 보존되는 특성이 있어야 하는데, 그 특성이 에너지인 것으로 밝혀졌다. 에밀리 뒤샤틀레가 에너지는 생성/파괴되지 않는다는 것을 이미 증명했지만, 뇌터의 정리가 보다 근본적인 근거를 제시했다.

 전하도 마찬가지로 보존량이며 입자의 파동함수가 진동하는 과정에서 발생한다. 그래서 빛을 구성하는 광자는 언제나 물질과 반물질 입자를 동시에 생성한다. 전하가 보존량이므로, 전하를 지니지 않는 광자는 전자를 생성할 때마다 반전자도 생성해 전체 전하를 0으로 유지한다. 이들은 보존량의 일부 사례에 불과하다.

 뇌터의 정리는 물리 법칙 테두리 안에서 우리가 변화시킬 수 있거나, 그럴 수 없는 특성이 무엇인지 가르쳐준다. 따라서 양자장 이론이 어떻게 작동해야 하는지 알아내려 한 디랙, 파인만, 겔만에게는 뇌터의 정리가 꼭 필요했다. 뇌터가 물리학 법칙을 떠받치는 법칙을 가르쳐주었으며, 그 법칙이 얼마나 중요한지는 아무리 과장해도 지나치지 않다. 

 하지만 안타깝게도 뇌터는 유대인이었기 때문에 나치즘이 대두되는 동안 독일에서 추방당해 미국으로 이주했다. 그런데 이주한 뒤에 그녀를 여왕처럼 생각하고 좋아해주는 과학계로부터 받아들여졌다는 긍정적인 측면도 있다. 많이 늦긴 했지만 뇌터는 인정받게 되었으며 그녀가 세상을 떠난 뒤 아인슈타인은 <뉴욕 타임스> 부고문에서 "여성이 고등교육을 받기 시작한 이래 가장 훌륭한 천재 수학자"라고 평가했다.

탁현민 비서관의 경우는 정치인도 아니고 이 책의 내용도 정치와는 거리가 멀다.

일종의 회고록이므로 에세이로 분류하는 것이 맞다.

난 도서의 분류를 할때 교보문고 사이트의 분류를 참고하는데 회고록 류의 도서를 분류할때의 분류를 보면 어이가 없을 정도다.

예를 들어서 이건희 회고록은 경제/경영으로 분류가 되고, 이해찬 회고록은 정치, 김지하 회고록은 에세이로 분류가 된다.

이 기준을 보면 인물에 의해서 도서의 카테고리가 정리되는 것이다. 그럼 조용필이 회고록을 쓰면 연예로 분류가 되고 차범근이 회고록을 쓰면 스포츠로 분류가 되나? 웃기는 일이다.

책의 내용은 문재인 대통령 재임 5년간 의전비서관으로 크고 작은 국가행사와 대통령 행사를 준비하면서 겪은 뒷 얘기들로 이루어져있다. 대부분의 에피소드에서 비서관 시절 의전을 준비하면서의 고민의 과정들이 진솔하게 소개되어 있으며 문재인 대통령에 대한 탁 비서관의 애정과 존경이 담겨 있다.

이 책을 요약해서 설명하자면 대한민국 대통령 의전에 대한 입문서이자 대한민국의 지금이 있기까지의 영웅들에 대한 헌사라 할 수 있다.

 그리고 마지막으로 이 책의 가장 큰 덕목은 재밋다는 점이다. 사실 누군가에 대한 애정을 가지고 쓴 책은 남들이 보기엔 재미가 없고 아부성으로 비칠 위험이 큰데 실제로 일어난 일의 뒷 이야기보니 위화감이 없이 재밋고 간혹 감동적인 구석이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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p26 탄소 중립 선언 흑백 연설 - 방송법 위반 고발 사건

2020년 10월 방영된 대한민국 탄소중립선언 방송으로 이 영상을 보면 문재인 대통령이 연설을 하는 장면 초입에서 컬러로 흑백으로 화면이 서서히 바뀌어간다.

이 영상의 의도는 컬러 화면 대비 1/4의 데이터를 소모하는 흑백 화면을 통해 온실가스를 덜 소비하자는 탄소 중립 의지를 환기시키려는 것이었다.

그런데 이 흑백 영상을 트집잡아서 국힘이 탁 비서관을 방송법 위반 혐의로 고발했다. 책에 이에 대한 구구절절한 설명이 있긴 한데 말도 안되는 억지라 굳이 소개하지 않는다. 국힘의 억지 고발,고소가 대한민국 사회에 엄청난 비용을 유발하고 있으며 선의와 창의력을 제약하고 있다. 쳐죽일 넘들이다.

 

p33 대통령의 '퇴근길 맥주 한잔'

 

 문재인 대통령 재임 기간 가장 많이 제안됐던 일정은 바로 '퇴근길 한잔'이었다. 저간의 사정을 잘 모르기는 대통령도 마찬가지여서 이따금 "왜 퇴근길 한잔 일정을 준비하지 않느냐"는 야단도 여러 번 맞았다.

 그러던 어느날, 기적처럼 대통령이 '한잔'할 수 있는 날을 잡을 수 있었다. 그 주는 신기하게도 정무적으로 큰 부담이 없는 한 주였다. 북한이 미사일을 쏘지도 않았고, 외교적인 문제도 없었고, 격렬한 시위도 없었고, 민생과 관련한 이렇다 할 큰 이슈도 없던 날이었다. 그날 '퇴근길 한잔'의 장소로 직장인들이 많은 광화문의 어느 호프집을 선택했다.

 수입 맥주만 파는 호프집이라는 점이 마음에 좀 걸리긴 했지만, 그것까지는 어쩔 도리가 없었다. 경호처도 사전에 점검할 시간을 충분히 가져 꼭 대통령과 근접하지 않아도 될 정도의 안전을 확보했고, 가게 사장님과도 이야기가 잘 되어 우리 때문에 손해 보게 될 매출은 행사가 끝난 뒤 비서관들이 가서 벌충해 주기로 했다.

 원활한 대화를 위해서 회사원, 구직자, 공무원, 직장맘 등 다양한 사람을 선별해 초청했고 현장에서 동석을 원하는 사람들이 있으면 합석하는 것으로 계획했다. 약속한 시간이 되어 대통령이 등장했고, 조마조마했지만 초청한 사람들과 맥주를 마시며 이야기가 시작됐다. 분위기가 좋아서 이내 옆 테이블과 가게 앞으로 사람들이 모여들었고 다들 대통령과의 '퇴근길 한잔'을 신기하게 쳐다보았다.

 우리는 주변 사람들에게 합석을 원하시면 함께하자고 권유했고, 실제로 꽤 많은 사람이 대통령 주변에 앉아 함께 이야기를 나누며 맥주잔을 기울였다. 주로 최저임금 문제, 워라벨에 대한 고민, 노동시간 단축에 대한 이야기들이 시민들의 주 관심사였던 것으로 기억한다. 다행히 일정은 큰 사고 없이 다들 기분 좋게 한잔하고 끝이 났다.

의전팀과 경호팀은 내내 식은땀을 흘렸지만, 대통령도 참석자들도 모두 즐거운 자리였다며 마지막 잔을 하고 헤여졌다. 그리고 대통령은 떠나면서 한 말씀하셨다.

 "그래 이렇게 만나서 한잔씩 하면 좋지요. 매달 한 번은 합시다."

 경호처장은 딴 곳을 바라보았고, 우리는 조용히 고개를 숙여 인사를 드렸다. 그리고 맥줏집 매상을 올려 주기 위해 오래도록 자리에 앉아있었다.

 

p38 남수단에서 온 유소년 축구단

 이 영상에서 남수단 유소년 축구단을 접견하는 일정은 이 날 당일 보고를 받은 문 대통령이 바쁜 일정 중간에 잠시 접견 후 기념 사진 촬영을 하는 아주 짧은 일정이었는데, 축구단 아이들이 깜짝 공연을 준비한다. 이에 문 대통령이 화답으로 잠시 격려 말씀을 해주시는데 문제는 남수단 아이들은 아이들은 알아듣지 못한다는데 있었다

(본문 발췌)

 노래가 끝나자 대통령은 박수를 치셨다. 다행히 크게 당황하신 것은 아닌 것 같았다. 속으로 '그래 이만하면 큰 사고는 아니니 다행이다' 생각하며 대통령에게 말씀드렸다.

 "이제 이동하셔야 합니다."

 그런데 갑자기 대통령이 말씀을 하기 시작했다. 아마 노래 선물을 받았으니 뭔가 격려 말씀을 해야겠다고 생각하신 모양이었다.

 "대한민국도 전쟁의 아픔을 겪었지만 힘겨운 과정을 이겨내고 오늘에 이르렀습니다. 저는 이태석 신부님이 나온 경남고등학교 선배고, 이 신부의 업적을 기리는 동상이 설치됐는데 저도 그 동상 설치에 참여했습니다. 이 신부가 봉사의 삶을 바친 남수단 어린이들을 만나 반갑습니다. 열심히 해서 세계 많은 나라, 어린이들에게 희망이 되어주길 바랍니다."

 이때까지도 뭔가 잘못되고 있다는 것을 전혀 눈치채지 못하고 있었다. 그런데 대통령이 말씀을 마쳤는데도 선수들은 아무런 반응이 없었다.

 '아.... 통역이 없었다.'

 원래 사진 촬영만 예정되어 있어 근접 통역을 배치할 이유가 없었고, 그래서 현장에 대통령 말씀을 남수단어로 통역할 사람이 없었던 것이다. 갑자기 식은땀이 흘렀다. 대통령은 우리를 바라보고, 우리는 감독님을 바라보고, 감독님은 신부님을, 신부님은 다시 우리를 바라보았다. 너무나 길게 느껴진 몇 초가 흐르고, 우리는 유일한 희망인 신부님을 바라보며 말했다.

 "신부님, 대통령님 말씀을 전해주시죠."
 "...."

 모두가 신부님을 쳐다보았다. 그러자 신부님이 조심스럽게 선수들을 향해 말했다.

 "땡큐 베리 머치, 씨 유 어게인."

 다시 몇 시간 같은 몇 초가 흘렀고, 대통령에게 말씀드렸다.

 "대통령님, 이제 이동하셔야 할 시간입니다."

 

p154 육군 중사 김기억 - 2018년 63주년 현충일 추념식

 국가 기념식의 첫 번째 과제는 '그날'의 의미를 잊지 않도록 하는 것에 있다. 의미를 잊지 않기 위해서는 그날에 담긴 이야기가 무엇인지 찾아서 국민에게 보여주어야 한다. 이야기에 공감하는 국민이 많을수록 그날의 의미는 잊히지 않고 기억되며 살아 숨 쉬게 된다.

 그러나 60년이 넘는 세월 속에 사람도, 이야기도 다 흘러갔다. 단단했던 슬픔도 씻기고 기억도 이내 사라져갔다. 현충일을 다시 공감할 수 있는 날로 만들기 위해서는 슬픔의 이야기를 찾아야 했다.

 이전까지 현충일 추념식은 대부분 서울 현충원에서 열렸다. 변화를 주고자 전국 국립묘지들을 살펴보았다. 

 대전 현충원을 답사하던 중 현충원장의 안내에 따라 무연고 묘역을 둘러보게 됐다. 무연고 묘역은 다른 묘역과는 달리 울긋불긋한 꽃들이 묘비마다 꽂혀 있었다. 오히려 더 화려해 보이는 그곳이 무연고 묘역일지는 전혀 몰랐다. 그런데 가까이서 보니 그 꽃들은 모두 조화였다. 현충원장은 찾아와서 헌화하는 사람들이 없으니 조화라도 꽂아두었다고 설명했다. 그래서 멀리서 보면 가족이 찾아오는 묘역보다 더 화려하게 보였던 것이다.

 대전 현충원장은 화려한 조화가 있던 어느 비석 앞으로 우리를 안내했다. 비석 앞에 서자마자 현충원장의 설명을 듣기도 전에 울컥했다. 묘비에 각인된 글자 때문이었다.

 육군중사 김기억,
 1931년에 태어나 1953년 5월 3일 양구에서 전사

 단단한 묘비에 더 단단하게 새겨져 있는 글자 하나하나가 우리를 때렸다. 고 김기억 중사는 스물세 살이 되던 해 전사했다. 그의 생몰 연도와 전사 기록이 묘비 측면에 새겨져 있었다. 그의 이름도 자신을 기억해 달라는 듯 단단히 새겨져 있었다. 그러나 세월이 흐르면서 그의 부모와 가족은 모두 사망하고, 이제는 아무도 돌보지 않는 무연고 묘가 되었다.

 

p159 오희옥 애국지사의 올드 랭 사인

'70년간 이어져온 국가 기념식이기에 의전에 있어서 바꿀 수 있는 부분은 많지 않았다.  포상자인 독립지사 중 사연이 있는 분을 찾던 중 오희옥(당시 92세) 지사를 추천받았다. 식 초입에 애국가를 제창하게 되는데 이 선창을 애국지사가 하면 의미가 있겠다 싶었다. 행사 전날 리허설 시간에 지사님에게 애국가를 불러봐달라고 부탁을 했다.
원래는 오케스트라 반주에 맞춰 연습 겸 해볼 요량이었는데 마침 국방부 관현악단이 잠시 휴식 중이라 연주를 할 수가 없었다. 

"지사님, 지금 반주가 없는데 몇 소절만 그냥 해보실래요?"
"어, 그럼 애국가 부르면 되는거지?"

오 지사는 숨도 고르지 않고 바로 애국가를 부르기 시작했다. 갑자기 가슴이 쿵쾅쿵쾅 뛰었다. 망치로 머리를 한 대 맞은 듯한 기분이 들었다. 오희옥 애국지사가 부른 애국가는 안익태가 작곡한 애국가가 아니라 올드 랭 사인 애국가였다. 우리 애국가에 곡조가 없을 때 스코틀랜드 민요에 가사를 붙여 불렀던 애국가, 독립운동가 애국가로 알려진 그 멜로디였다.'

(감상)

일의 의미를 곰곰히 되새기고, 그 의미를 찾아나가는 과정에서 그 의미를 상징하는 결정적 장면들이 연출된다. 
탁현민 비서관은 이 책에서 또 방송에서 이런 내용을 이야기한 적이 있다.
"문재인 대통령은 일의 과정을 요구하지, 그 결과를 요구하진 않는다."
요즘 대한민국이 시끄러운 것은 리더가 과정을 무시하고 결과만을 요구하기 때문이다. 결과를 정해놓고 과정을 거기에 끼워맞추다 보니 거기선 우리의 상식과 논리에 부합하는 어떤 의미도 찾을 수가 없고 감동은 커녕 수긍도 되지 않는다.
이러한 문제의 근본에는 대한민국 교육의 문제가 있다고 난 생각한다. 교육의 진짜 의미는 답을 찾는 스킬을 익히는 것이 아니라 답을 찾아나가는 과정에 있다.
이 세상 현실에서 발생하는 주요한 문제들은 모두 기존의 문제들이 복합적으로 얽힌 것들이다(아주 드물게 패러다임을 바꾸는 정말 새로운 문제가 튀어나올 때도 있는데 보통 그러한 새로운 문제는 시대의 패러다임을 바꾸는 천재들에 의해 해결된다).
문제를 풀어나가기 위해서는 문제의 의미와 맥락을 찾아내서 상황에 맞는 과정을 밟아나가야 한다. 그래야 합리적이고 상황에 맞는 올바른 답을 찾아나갈 수 있다.
하지만 답을 찾는 스킬만 익힌 질 낮은 교육을 받은 사람들은 기존의 방법론만을 답습하다가 운이 좋을때는 답을 찾을 때도 있겠지만, 보통은 어이없는 답을 찾아 상황을 망칠 뿐이다. 
치열한 의미의 성찰과 그 과정을 통해 의미있는 답을 찾아나가는 과정이야말로 의미있는 인생이 거쳐나가야 할 유일한 왕도이고, 그것이 바로 교육이 추구해야 할 모범이다.

오 지사는 숨도 고르지 않고 바로 애국가를 부르기 시작했다. 갑자기 가슴이 쿵쾅쿵쾅 뛰었다. 망치로 머리를 한 대 맞은 듯한 기분이 들었다. 오희옥 애국지사가 부른 애국가는 안익태가 작곡한 애국가가 아니라 올드 랭 사인 애국가였다. 우리 애국가에 곡조가 없을 때 스코틀랜드 민요에 가사를 붙여 불렀던 애국가, 독립운동가 애국가로 알려진 그 멜로디였다.'

p169 어린이날 100주년 - 대통령 특별 지시 사항

행사가 끝나자 국민소통수석실과 몇몇 기자들의 연락을 받았다. '대통령 메시지'가 없다는 지적이었다. 반드시 들어가야 했을 대통령 당부라든지, 어린이날 복지와 교육 문제 같은 정책 사안들에 대한 언급 없이 그냥 놀기만 하면 어떻게 하느냐는 말을 들었다.

 하지만 우리도 알고 있었다. 마지막 놀이가 끝나고 함께 둘러앉아 꿈과 미래를 이야기했어야 했다. 문재인 정부가 가지고 있는 어린이 정책 같은 것을 할아버지 버전으로 이야기하는 그런 대목이 있어야 했다. 아마 그것이 저녁 뉴스가 됐을 것이다. 우리도 대통령이 이야기하는 모습이 필요하다고 보고를 드렸었다. 그러나 행사 며칠 전 대통령은 그러한 계획을 다 들으시더니 이렇게 말씀하셨다.

 "다 알겠는데, 한 가지는 하지 마세요. 내가 아이들 앞에서 뭔가 연설을 한다거나 이야기를 한다거나 하는 거는 하지 맙시다. 좋아하지도 않을 거고 나도 하루 아이들과 놀면 충분합니다. 같이 하루 즐겁게 놀면 됐습니다. 절대 내가 말을 해야 하는 순서는 넣지 마세요."

 

p203 피스메이커 - 73주년 국군의날 기념식

백문이 불여일견. 기념식 대미인 피스메이커 작전을 보면 정말 국뽕이 차오른다.

 

p218 청년의 날(with BTS) - 2020년 제1회 청년의 날

 

첫 번째 청년의 날 메신저로 누구를 선정해야 할까? 많은 의견과 토론, 조사를 거쳤지만 결과는 같았다. BTS였다. 많은 의견과 토론, 조사를 거쳤지만 결과는 같았다. BTS였다. 가장 성공한 아이돌, 세계적인 아티스트, 한국 문화를 세계 문화로 확장한 아이콘, 대한민국 청년을 대표하는 데 이만한 인물이 없었다. 

 하지만 우려되는 지점도 있었다. 바로 그 완벽함이 걱정이었다. 그들의 성공이 오늘날 청년의 현실을 반영할 수 있을까? 동시대 청년이 겪고 있는 여러 문제를 그들이 이해할 수 있을까? 성공한 이들의 모습을 보는 청년의 마음이 과연 좋기만 할까? 서로 너무 다른 세상에 사는 사람들은 아닐까? 여기에 더해 바쁜 일정을 소화하고 있는 BTS가 과연 행상에 올 수는 있을까? 행사에 와서 노래하는 것이 아닌 자신들의 이야기를 해달라고 하면 아티스트가 부담 없이 그걸 받아들일 수 있을까?

 여러 고민과 의문이 꼬리를 물었다. 하지만 고민을 해결할 방법은 문제와 마주하는 것이니 일단 그들을 찾아가 묻기로 했다. 아니나 다를까 그들은 무척 바빴다. 일정을 조정하는 것조차 쉽지 않았다. 하지만 일정을 조정하기 전에 그들이 메신저로 나서 준다면 어떤 메시지를 던질 수 있을지부터 정리해야 했다.

 "완벽한 성공, 멋진 현실과 미래를 가진 BTS가, 어렵고 힘들어하는 청년에게 어떤 메시지를 내놓을 수 있을까요?"

 그들이 이 질문을 두고 즉답을 피했던 이유에는 일정 문제도 있었겠지만, 행사 참석으로 인한 효과와 파장은 어떠할지 고민도 있었을 것이다. 얼마 후 BTS 측에서 다시 연락이 왔다.

 "우리의 성공을 이야기하는 것이 아니라 우리의 과정을 이야기하면 될 것 같습니다. 우리는 정답을 찾아서 온 것이 아니라 정답을 만들기 위해서 노력했을 뿐이거든요. 그 노력과 과정에 대해 멤버들의 생각을 정리해 볼까 합니다."

 

p223 세월은 흘러가도 산천은 안다

 이명박, 박근혜 정부 내내 외면받던 5.18 민주화운동 기념식이 문재인 정부가 들어서고 정상화됐다. 임기 첫해부터 대통령은 5.18 기념식에 참석했다. 그 자리에서 대통령은 아버지를 잃은 딸이 편지 읽는 모습을 지켜보다가 자리에서 일어나 그 딸을 안아주었다. 생방송 중이었고 아무도 예상하지 못한 행동이었지만, 참석자들과 시청하던 국민들은 그 모습에 박수를 보내며 함께 울었다.

 

p231 영웅에게 - 70주년 6.25 전쟁 기념식

 누군가 "문재인 정부 5년 동안 연출적으로 가장 완벽했던 행사는 무엇이었나요?"라고 묻는다면 주저 없이 "70주년 6.25 전쟁 기념식 <영웅에게> 입니다"라고 답할 것이다.

 

 기념식 시작은 전 세계 정상들의 6.25 70주년 기념 영상 메시지부터였다. 아마도 건국 이래 처음이었을 것이다. 미국,영국, 캐나다, 터키, 호주, 필리핀, 태국, 룩셈부르크, 네덜란드, 콜롬비아, 그리스, 뉴질랜드, 에티오피아, 벨기에, 프랑스, 남아공 등 모든 참전 국가와 의료 지원 국가의 대통령, 총리 등 국가수반의 영상 메시지를 받았다.

 정상들의 영상 메시지 다음은 6.25 전사자들의 유해를 싣고 온 공군 공중 급유기와 드론을 사용한 '미디어 파사드'였다. 미디어 파사드는 건물 외벽에 빔프로젝터로 영상을 구현하는 것을 말하지만, 이날은 유해를 싣고 온 비행기 동체에 영상을 투사하고 비행기 위로 드론을 연출해 입체감을 더했다. 투사된 영상은 70년의 세월을 거쳐 이제야 조국 땅에 도착한 6.25 전사들의 여정이었다.

 

 유해 안치가 끝난 후 6.25 참전 용사이자 고인들과 함께 싸웠던 이등중사 유영봉 님의 복귀 신고가 있었다. 147분의 유해 앞에서 유영봉 님의 목소리는 떨렸다. 그러나 고인들을 대신해 힘찬 목소리로 대통령과 국민에게 복귀 신고를 했다.

 "이등중사 유영봉 외 147명은 조국으로 복귀를 명 받았습니다. 이에 신고합니다."

 행상 프로그램에 이제 막 군에서 제대한 20대 배우 유승호의 편지를 넣었던 까닭은 기념식을 준비하며 전사자들의 나이를 확인했기 때문이다. 스무 살, 스물한 살, 스물세 살.... 겨우 20대 초반에 나라를 위해 가족과 헤어져 전쟁 한가운데로 뛰어든 이들의 마음은 어떠했을까? 두렵고 무섭지 않았을까? 춥고 배고프지 않았을까? 도대체 무엇이 이들을 용감하게 만들고 목숨을 다해 싸우게 했을까? 알 것도 같고 끝내 모를 것도 같았다. 이 들을 수 없는 대답을 같은 나이의 청년을 통해 묻고 싶었다.

 그래서 유승호 배우에게 그들에게 보내는 편지를 부탁했다. 돌아가신 할아버지에게 보내는 것이 아닌 당신과 같은 20대 청년에게 보내는 편지를 써달라고 부탁했다.

 "허락하신다면 나는 당신을 친구라고 부르고 싶습니다. 나와 같은 나이에 전쟁터로 갔던 친구여."

 

 애석하게도 당시 야당이었던 국민의힘과 몇몇 보수  매체들은, 행사에 쓰인 공군기가 실제 유해를 실어 온 기체와 다르다며, 행사를 위해 유해를 욕보였다고 헐뜯기 바빴다. 그러나 사실은 해외 수송 후 방역을 위해 기체를 바꾸었을 뿐이다.  비난 중 압권은 애국가 도입부에 쓰인 변주가 북한의 애국가와 비슷하다는 허무맹랑한 주장이었다. 그 대목에서 더 이상 아무 말도 하고 싶지 않았다. 그저 한 집단의 정치 수준과 음악 수준은 같구나 싶은 생각이 들었다.

 

p250 102년만에 다시 외친 대한독립 만세 - 102주년 3.1절 기념식

(이 날 비가 엄청 왔다)

 대통령 옆자리에 앉아 계시던 임우철 애국지사 담요가 비에 젖은 바닥에 떨어지는 일도 있었다. 그것을 본 대통령이 자리에서 일어나 임우철 지사에게 새 담요를 가져다드리라고 하셨고, 얼른 뛰어가 임우철 지사에게 새 담요를 덮어드렸다. 임우철 지사는 그해 세상을 떠나셔서 그날 기념식이 지사님의 마지막 3.1절 기념식이 됐다.

 

 그즈음 독립유공자 후손에 대한 폄훼 사건이 일어나기도 했다. '독립유공자 후손들은 사회 부적응자'라는 허무맹랑한 비난이었다. 많은 사람이 분노했고, 국가를 위해 헌신한 분들의 후손을 제대로 예우해야 한다는 여론도 높았다. 우리는 행사 사회자로 전문 진행자와 함께 독립유공자 가족인 이재화 씨를 선정했다. 이재화 씨는 <빼앗긴 들에도 봄은 오는가>로 알려진 시인 이상화 선생의 후손이었다.

(다시 한번 이상화 님의 이 시를 음미해보았다. 슬프고도 비장하며 아름다운 시다

『지금은 남의 땅―빼앗긴 들에도 봄은 오는가?

나는 온몸에 햇살을 받고
푸른 하늘 푸른 들이 맞붙은 곳으로
가르마 같은 논길을 따라 꿈 속을 가듯 걸어만 간다.

입술을 다문 하늘아 들아
내 맘에는 나 혼자 온 것 같지를 않구나
네가 끄을었느냐 누가 부르더냐 답답워라 말을 해 다오.

바람은 내 귀에 속삭이며
한 자욱도 섰지 마라 옷자락을 흔들고
종다리는 울타리 너머 아가씨같이 구름 뒤에서 반갑다 웃네.

고맙게 잘 자란 보리밭아
간밤 자정이 넘어 내리던 고운 비로
너는 삼단 같은 머리를 감았구나 내 머리조차 가뿐하다.

혼자라도 가쁘게나 가자
마른 논을 안고 도는 착한 도랑이
젖먹이 달래는 노래를 하고 제 혼자 어깨춤만 추고 가네.

나비 제비야 깝치지 마라
맨드라미 들마꽃에도 인사를 해야지
아주까리 기름을 바른 이가 지심매던 그들이라 다 보고 싶다.

내 손에 호미를 쥐어 다오
살찐 젖가슴 같은 부드러운 이 흙을
팔목이 시도록 매고 좋은 땀조차 흘리고 싶다.

강가에 나온 아이와 같이
짬도 모르고 끝도 없이 닫는 내 혼아
무엇을 찾느냐 어디로 가느냐 우서웁다 답을 하려무나.

나는 온몸에 풋내를 띠고
푸른 웃음 푸른 설움이 어우러진 사이로
다리를 절며 하루를 걷는다 아마도 봄 신령이 잡혔나 보다.

그러나 지금은―들을 빼앗겨 봄조차 빼앗기겠네.』 )

 

 비는 기념식이 진행되면서 더욱 거세졌지만 우리는 준비한 모든 순서를 빠짐없이 진행했다.

 3.1 운동과 애국지사들을 위해 첼리스트 홍진호의 특별한 연주도 준비했다. <대니 보이의 아리랑>이라는 곡이었다. <대니 보이의 아리랑>은 아일랜드 민요 <대니 보이>와 우리 민요 <아리랑>을 엮은 곡이었다. 굳이 <대니 보이>를 엮은 이유는 이 곡이 일제강점기에 희생된 위인, 열사, 무명 영웅 들을 추도하는 노랫말이 붙여져 <선현추도가>로도 불린 바가 있기 때문이었다.

 기념식 마지막 순서는 가수 정인과 헤리티지 합창단의 <대한이 살았다> 합창과 각 대학 의과대학생들의 만세 삼창이었다. 내리는 빗줄기 속에서 탑골공원에 모인 사람들이 함께 만세를 불렀다. 대한독립 만세! 대한독립 만세! 그렇게 101년 만에 탑골공원에 만세 소리가 울려 퍼졌다.

 

p268 하와이에서 서울로 - 2021년 한미유해상호인수식(영웅의 귀환)

 

 애초 2021년 한미유해상호인수식에 대통령의 참석은 고려되지 않았었다. 그 기간에 대통령은 뉴욕에서 재임 중 마지막 유엔총회에 참석할 예정이었기 때문이다. 총회 참석뿐만 아니라 다른 정상들과의 정상회담, 경제 관련 회의, 대한민국 백신 허브 국가 관련 일정 등이 준비되고 있었다.

 또한 UN총회에서 전 세계 정상들을 대표해 대한민국 대통령이 기조연설을 하게 됐기 때문에 하와이 일정은 아무래도 어려운 상황이었다.

 게다가 유엔총회 참석 일정 중에는 미래 세대를 위한 대통령 특사로 임명된 BTS도 함께 방미해 유엔에서 전 세계 청년들을 대표해 연설할 계획이 있었다. 아울러 대통령과 함께 미국 언론과 인터뷰할 계획도 있었다.

 하지만 대통령은 한미유해상호인수식 참석을 결정하셨다. 뉴욕 일정을 조정해 하루를 줄이고, 밤늦게 하와이에 도착한 후 다음 날 인수식을 끝내자마자 서울로 돌아오자는 것이었다. 이 경우 대통령이 쉴 수 있는 시간이 너무 부족해 여러 비서관이 반대했었다. 하지만 대통령은 한미 상호 간 유해 인수인계 준비가 끝났고, 마침 미국에 있는데 직접 가서 그분들을 모시지 않는 것은 도리가 아니라며 하와이 일정을 결정하셨다.

 이 일정은 실무적인 부담도 컸다. 유엔과 뉴욕 일정을 준비하는 것도 만만치 않은데 별도로 한 팀을 더 꾸려 하와이 일정까지 준비해야 했다. 서울에 도착해 대통령을 현충원으로 모실때까지 국내 행사와도 일정을 연계해야 했다.

 

 처음 기획 단계에서는 현지 행사가 끝나면 대통령은 공군 1호기로 복귀하고, 유해는 우리 공군 공중급유기를 통해 모셔올 계획이었다. 하지만 계획을 수정해야 했다. 하와이로 출발하기 직전 인수받은 68구 유해 중 고 김석주 일병과 고 정환조 일병 두 분의 신원이 확인됐기 때문이다. 기적 같은 일이었다. 두 분 모두 6.25 전쟁 당시 미 7사단 카투사로 복무하다 함경남도 개마고원 장진호 전투에서 전사한 것으로 확인됐다. 우리는 이 두 분을 서울에서 온 유족과 함께 대통령 전용기인 공군 1호기에 모시기로 했다.

 

 유해가 기내에 오르자 공군 1호기 기장은 기내 방송을 통해 이렇게 말했다.

 "특별히 김석주, 정환조 일병 두 분 영웅과 유가족을 고국으로 모시게 되어 영광입니다. 오늘을 기다리셨을 두 분의 안전한 귀환을 위해 최선을 다하겠습니다. 두 분의 영웅을 모신 공군 1호기는 잠시 후 하와이 히캄 공군기지를 출발,대한민국 서울공항에 도착할 예정입니다."

 대통령은 1호기가 이륙하자 잠시 후 유해를 모신 좌석을 찾아가 아무 말씀 없이 태극기가 관포된 관을 바라보셨다. 유해를 운구하러 고 김석주 일병의 외증손녀인 김혜수 소위와 잠시 이야기를 나누기도 하셨다. 그렇게 두 분의 유해를 모신 공군 1호기와 나머지 유해를 모신 공중 급유기는 약 10시간 비행 뒤 한국방공식별구역에 진입했다. 그리고 다시 한번 기내 방송이 나왔다.

 "공군 1호기는 잠시 후 대한민국 영공에 진입할 예정입니다. 영웅들의 귀환을 맞이하기 위해 대한민국 공군 전투기 편대가 호위 비행을 시작하겠습니다."

 공군 1호기 옆으로 F-15K 4대가 공중 호위 비행을 실시했다. 경례와 함께 4대의 엄호기에서는 영웅들의 귀환을 환영하는 21발의 플레어가 발사됐다.

 "영웅의 귀환을 마중하게 되어 영광입니다. 선배님들의 헌신과 희생이 있었기에 지금의 대한민국이 있습니다. 국가 수호 임무는 후배들에게 맡기시고 고국의 품에서 편히 잠드시길 바라겠습니다. 지금부터 대한민국 공군이 선배님들을 안전하게 호위하겠습니다. 필승."

 

p274 장국의 귀환 - 여천 홍범도 장군 유해 봉환식과 안장식

(이 공식영상 외에 홍범도 장군 귀환의 맞추어 조정웅 배우의 나레이션으로 진행되는 다큐가 있다. 그 영상도 추천한다)

 대한독립군 총사령관인 여천 홍범도 장군 유해 봉환은 서거 101주년만에 이루어졌다.

 실은 이전 정부에서도 유해를 봉환받으려는 노력이 없지는 않았다. 김영삼 정부 시절, 홍범도 장군 유해 봉환을 카자흐스탄에 요청한 적이 있었으나 당시 북한과의 관계를 고려한 카자흐스탄이 거절했고, 이후 북한 정부가 홍범도 장군 유해를 봉환해 달라고 요청했으나 대한민국 정부 입장을 고려해 거절했다는 말을 카자흐스탄 관계자에게서 들었다. 

 그러던 중 2019년 4월 문재인 대통령 카자흐스탄 국빈 방문이 있었다. 문재인 대통령은 카심-조마르트 토카예프 카자흐스탄 대통령에게 홍범도 장군 유행 봉환을 다시 한번 공식적으로 요청했고, 토카예프 대통령은 흔쾌히 그 요청을 수락하면서 홍범도 장군 유해 봉환 사업은 결실을 보는 듯 했다.

 그러나 코로나19 대유행으로 인해 카자흐스탄 국경이 봉쇄되고 국내 사정도 어려워지면서 홍범도 장군 유해 봉환은 미룰 수밖에 없었다. 하지만 코로나19 상황이 어느 정도 관리되기 시작하면서 2021년 8월 토카예프 대통령 국빈 방문이 재추진됐다. 봉환 사업도 다시 빠르게 진행될 수 있었다. 

 

 이날 추모곡은 가수 하현상이 불렀다. <바람이 되어>였다. 이 곡은 독립운동과 의병 역사를 다룬 드라마 <미스터 션샤인> OST중 한 곡이었다. "바람이 되어 그대 곁에 머물겠다"는 가사가 불릴 때, 마침 불어오는 바람에 관을 덮은 태극기가 펄럭이던 장면은 우연이라 하기에는 너무나 드라마 속 장면 같았다.

 

p373 최고의 순방, 최고의 회담 - 2021년 조 바이든 대통령 초청 미국 공식 방문

 

미국 명예훈장 수여식에 양국 정상이 참석했던 장면도 큰 화제가 됐다.

명예훈장은 미국 군인이 받을 수 있는 최고 무공 훈장이다. 처음 미국으로부터 이 일정을 제안받았을 때는 감이 오지 않았다. 우리 태극무공훈장 수여식에 미국 대통령이 참석하는 것과 같았기 때문이다. 전례 없는 일이었다. 하지만 훈장을 받는 분이 누구인지 들으니 우리도 양국 대통령이 함께 참석하는 것이 좋겠다는 생각이 들었다.

 훈장을 받게 된 랠프 퍼켓 쥬니어 대령은 한국전의 영웅이었다. 청천강 전투 때 미 특수부대 제8레인저 중대를 지휘했다고 한다. 게다가 이날 수여식은 바이든 대통령이 취임 후 처음 갖는 1호 훈장 수여식이기도 했다. 그런 의미 있는 자리에 한국 대통령과 함께 하고 싶다는 것은 대단히 사려 깊은 제안이었다. 미국은 그 자리에서 우리 대통령의 연설도 부탁했다. 

 "대령님은 아까 제게, 당시 한국은 모든 것이 파괴되어 있었다고 말씀하셨습니다. 그렇습니다. 한국은 전쟁의 폐허에서 다시 일어섰고, 한국의 평화와 자유를 함께 지켜준 미국 참전 용사들의 그 힘으로 오늘의 번영을 누릴 수 있었습니다. 랠프 퍼켓 대령님이 우리 곁에 오래 머물러 주시기를 기원합니다."

 

p400 휘모리 - 2021년 유럽 순방

 행사 가제 '휘모리'는 로마 교황청 방문, G20, COP26, 헝가리 국빈 방문, V4(비셰그라드 4개국 그룹 : 폴란드, 체코, 슬로바키아, 헝가리)까지 총 7박 9일간의 여정이었다.

COP26

 제26차 유엔 기후변화협약 당사국총회(COP26), 120개 나라 정상과 국제기구 수장이 참여한 역대급 국제회의다. 거기서 겪었던 일들을 떠올리면 지금도 아찔하다.

 오전 8시 개회식부터 당일 저녁 영국 보리스 존슨 총리 주최 리셉션까지 참석해야 하는 종일 일정이었다. 모든 일정을 마치면 밤 10시가 되어야 숙소로 돌아갈 수 있을 것 같았다. 대통령의 체력적인 부담이 엄청났다. 게다가 당일 아침 개회식에 참석하려면 아침 식사도 거른 채 출발해야 시간을 맞출 수 있었다.

 주최 측은 회의장 안에 정상들이 식사할 수 있도록 준비해 놓았다고 설명했지만, 믿기 어려웠다.

 '정상들을 포함해 500명 정도가 그 안에 있을 텐데 개회식 끝나고 30분 이내에 500명의 식사가 가능하다고?'

 부속비서관과 상의해 도시락을 준비해 가기로 했다.

 새벽부터 회의장은 아수라장이었다. 정상들이 얼마나 많은지 여기저기서 정상들에 걸려 넘어지는 사람들 천지였다. 그 틈을 비집고 가까스로 라운지 테이블 하나를 차지하고 앉았다. 대통령도 이런 상황이 처음이고, 평생을 외교관으로 살았던 정의용 장관도 마차가지였다.

 "아이고, 이거 정말 대단하네."

 다들 처음 보는 풍경에 놀랐다. 시간이 되어 대통령은 개회식 참석을 위해 자리를 떠나셨고, 주최 측이 준비했다던 음식을 찾기 시작했는데 보이지 않았다. 잠시 후 누군가 메뉴가 적힌 종이를 하나 주고 갔다. 거기에는 음식 메뉴가 1번부터 10번까지 적혀있었다. 주문하면 가져다준다는 설명이었다. '주문하면 그때부터 조리해서 30분 이내에 500명을 먹일 수 있다고?' 말도 안되는 계획이었다.

 "장관님, 이거 음식 지금 주문해도 절대 시간 못 맞출 것 같아요."

 "어, 그래. 내가 봐도 그러네. 어떻게 하지."

 "일단 도시락 가져왔으니까 이거부터 꺼내 놓고 주문은 주문대로 하죠."

 "그래 뭘 주문하지. 대통령이 뭘 좋아하시지?"

 "아뇨, 그냥 1번부터 10번까지 다 주문하죠. 뭐든 먼저 한두가지는 나오겠죠."

 우리는 10가지 음식을 모두 주문해 놓고 대통령을 기다렸다. 잠시 후 개회식을 마친 대통령이 나오셨다. 다음 세션까지는 30분 정도 시간이 남아있었다. 여기저기서 의전비서관들과 외교부 장관들이 분주했다. 어떻게든 자국 정상을 챙겨야 하는데 음식이 나오지 않으니 다들 어쩔 줄 몰라 하고 있었다.

 우리는 준비해 온 도시락을 조용히 꺼냈다. 옆 테이블의 캐나다, 콜롬비아 그리고 또 다른 몇 개의 나라들이 일제히 우리를 쳐다보았다. 우리는 준비해 온 음식들과 보욘병에 가져온 차를 따라 대통령에게 드렸다. 그리고 잠시 옆에 비켜서 있었는데, 뒤에서 누군가 물었다.

 "그 음식들, 그거 어디서 난 건가?"

 "우리는 음식이 늦을 것 같아 도시락을 싸 왔다."

 "아, 우리도 싸 올 걸 그랬다. 좋겠다."

 "어, 부럽지. 부러울 거야."

 정상들은 잠시 후 다시 세션에 들어가야 했고, 그때까지도 음식은 제대로 나오지 않았다. 음식은 첫 번째 세션이 시작될 때 쯤에야 나오기 시작했다. 많은 나라 정상이 굶은 채로 회의장으로 향했다. 정상들이 회의장에 들어가자 각 나라 의전비서관들이 원망스러운 눈빛으로 음식을 바라보며 앉아있었다. 어느 나라나 똑같았다. 우리 자리에도 대통령이 들어가시고 나서야 10가지 음식이 쌓였다. 마치 한정식처럼.

 COP26 마지막 일정은 보리스 총리 주최 리셉션이었다. 회의장과 리셉션 장소가 떨어져 있어 정상은 단체 버스로, 수행원은 별도 버스로 이동하도록 안내받았다. 아침부터 개회식과 세션 등으로 정상들은 다들 지쳐있는 상태였다. 영국으로서는 주최국이어서 리셉션을 개최할 수밖에 없었겠지만, 너무 무리한 계획이었다.

 게다가 다들 수행원과 떨어져 버스를 타라니 그에 대한 불만도 적지 않았다. 어쩔 수 없이 대통령만 혼자 버스에 모셔드리고, 통역, 경호와 함께 버스 옆에 서 있었다. 버스가 출발하고 나면 우리도 뒤따라갈 생각이었다. 다른 정상들도 하나, 둘 버스에 올랐다.

 그때 대통령이 탄 버스에서 큰 소리가 났다. 어느 정상 한 분이 통역도 버스에 못 태운다고 하니 버럭 화를 낸 것이었다. 당황한 영국 담당자가 "그럼 통역을 태우세요"라고 했지만 이미 그 나라 통역은 먼저 따로 이동한 다음이었다. 우리는 그 북새통에 슬며시 우리 통역 손을 잡아끌어 버스에 태웠다. 이따 보자는 말과 함께.

 지친 정상들의 리셉션 기념 촬영이 끝나고, 각국은 눈치껏 자리를 빠져나가기 시작했다. 우리는 처음 리셉션 장소에 도착했을 때, 영국 담당관과 이야기해서 차량을 이미 바깥쪽에 주차해 놓았었다. 담당관들은 영국 공무원들이지만 마치 우리 수행원처럼 일해주었다. 눈치도 빠르고 '척'하면 알아들었다.

 리셉션이 끝나면 이 많은 정상이 한꺼번에 나가려고 할 텐데, 그렇다면 승패(?)는 차량의 주차 위치에 달려 있다고 생각했다. 먼저 빠져나가려면 바로 움직여야 했다. 조금만 늦어도 다른 정상들 차량이 우리 차 앞을 막을 것 같았다. 대통령에게 가서 말씀드렸다.

 "차를 빼놓았습니다. 지금 움직이셔야 합니다."

 대통령도 힘드셨는지 바로 따라나섰다. 대통령 뒤로 유엔 사무총장과 여러 정상이 따라나섰다. 차량 대기 지점에 도착하자마자 우리 차량이 곧 도착한다는 안내가 나왔다. 대기 지점에서는 이미 몇몇 정상들이 나오지 않는 차량을 기다리고 있었다.

 도착 순서와 달리 우리 차량이 먼저 나온다는 안내가 나오자, 우리보다 먼저 와 있던 아세안 국가 어느 총리가 자국 의전관(인 듯)을 정말 가혹하다 싶을 정도로 구박하기 시작했다. 저분 이러다 오늘 어떻게 되는 거 아닌가 싶을 정도였다. 괜히 미안했다. 그때 뒤에서 따라오던 어느 국제기구 수장도 우리 대통령을 보며 말했다.

 "정말 힘드네요. 한국에서 했으면 이렇게 힘들게 안 했을 텐데..."

 우리 대통령 들으라고 한 말이겠지만 듣기는 좋았다. 대통령도 그 수장에게 오늘 고생 많으셨다며 인사를 했다. 이윽고 가장 먼저 우리 차량이 도착했다. 우리는 뿌듯한 마음으로 대통령을 차량으로 모셨다. 차를 타고 나오는데 100대가 넘는 차량이 주차장 입구에 뒤엉켜 있는 모습을 보았다. COP26  마지막 밤이었다. 차량 불빛들이 아름다웠다. 

 

p414 마지막 순방 샤프란 - UAE, 사우디아라비아, 이집트

 중동과 아프리카 순방은 수행원들의 무덤이라느 말이 있다. 절대로 계획한 대로 되지 않는다는 의미다. 대통령의 2022년 마지막 순방은 UEA, 사우디아라비아, 이집트로 확정됐다. 시작부터 예감이 좋지 않았다.

 출발 전 국힘의힘에서 순방 관련 일정을 논평 형식으로 발표했다. 공동 발표일이 정해져 있음에도 일방적으로, 그것도 정부 공식 발표가 아니라 특정 정당에서 일정을 공개한 것은 대단히 심각한 외교적 결례였다. 상대 국가에서 문제 삼을 수도 있을만한 사안이었다.

 

 

 사우디에서는 대통령도 여사님도 최악의 컨디션이었다. 특히 여사님은 몸이 심각하게 좋지 않아 일정을 전부 취소해야 할 정도였다. 하지만 여사님은 주치의에게 약을 타 드시면서까지 일정을 소화하셨고, 결국 사우디를 떠나기 전날 크게 앓아누우셨다. 어디에다가 말할 수도 없으니 더 답답했고 여사님께도 죄송했다.

 

 중동-아프리카 국가들의 국빈 행사가 이런 식(협의된 일정의 변경 등 돌발 상황이 잦음, 주로 윗 사람의 기분에 좌우)이라면, 마지막 남은 순방지인 이집트가 정말 걱정이었다. 이집트 카이로에 도착한 것은 현지 시간으로 늦은 오후였다. 도착하자마자 여사님의 건강 상태를 확인하니 역시 좋지 않았다. 2부속 비서관과 여사님 일정을 취소하자는 이야기를 하고, 마지막 이집트 일정을 점검했다.

 우려했던 대로 현지 선발대는 애를 먹고 있었다. 이집트 측은 사소하지만 사전에 합의한 내용에서 달라진 것들을 이야기해 주지 않았다. 그것 때문에 크고 작은 일정들에 혼선이 생겼다. 하지만 이집트에서는 한 가지만 해결된다면 의전 관련한 것들이야 얼마든지 양보할 수 있었다. K9 자주포 수출 건이었다.

 그것 때문에 방사청장이 전에 없이 공식 수행원이 되어 함께 온 것이고, 이집트는 대통령 방문 중에 결정하겠다는 약속도 했던 터였다. 실제로 관련 계약 체결을 위한 행사 장소까지 우리와 협의를 끝낸 상태였다. 하지만 이집트가 정말로 계약서에 서명하기 전까지는 아무것도 결정되지 않은 것이라고 생각하고 있었다.

 한-이집트 정상회담 양측 기자회견과 공식 오찬이 어어지는 동안 이집트와 우리의 협상은 엎치락뒤치락했다. 나중에 들으니 양 정상은 정상들대로, 실무자들은 실무자들대로 협상하고 있었는데, 협상이 깨졌다가 붙었다가를 되풀이했다고 한다. 이틀 내내 그런 상황이 반복됐다.

 그 와중에 이집트는 피라미드를 가지 않겠다는 우리에게 방문을 집요하게 권했다. 자신들에게는 가장 자랑스러운 유적이고 이제껏 모든 해외 정상이 방문했는데, 왜 가지 않으려는지 이해하지 못하겠다는 눈치였다. 우리는 어쩔 수가 없었다. 피라미드 방문이 한가하게 여행이나 다닌다고 비난받을 소지가 있기도 했지만, 대통령은 회담과 협상으로 시간을 낼 수가 없었고, 여사님은 건강 상태가 매우 좋지 않아 공개 일정을 할 수 없다고 판단했다. 그러나 이집트가 끝까지 강권하자 결국 여사님은 아픈 몸을 이끌고 피라미드를 방문했다.

 순방을 마치고 돌아온 후 여사님의 피라미드 방문을 두고 국민의힘과 보수 매체들이 떠들 때, 그때라도 사정을 말했어야 하는데 그래 봐야 믿지도 않을 테니, '그래, 그냥 아무 말이나 해라'하고 내버려 둘 수밖에 없었다.

 

(당시 조중동을 보수언론에서 김정숙 여사 피라미드 방문을 두고 엄청 씹었었다. 쓰레기들이다. 윤석열이 2022년 6월 나토 정상회의 참석시 김건희의 지인이 미리 프랑스 파리를 거쳐 대통령 순방단에 합류했던 사실이 있고, 그 이후 김건희 까르띠에 팔찌등 명품에 대한 논란이 있었는데 김건희 지인이 프랑스에 미리 가서 명품 쇼핑을 대신해준게 아니냐는 의혹이 있었다. 그런 소식에 대해서는 조중동은 함구한다. 조중동이 쓰레기인 이유는 꼴통들의 의혹에 대해서는 입을 쳐닫으면서 진보측의 티끌만한 의혹에도 소설을 써대는 그 얄량함 때문이다)

https://www.joongang.co.kr/article/25045470#home

 

김정숙 여사 피라미드 방문…청와대, 이집트에 비밀 요청 | 중앙일보

청와대가 일정을 일부러 공개하지 않은 것으로 파악됐다.

www.joongang.co.kr

 

 대통령은 떠나는 날까지 우리에게 주의를 주었다. 방사청장에게 부담 주는 말을 절대 하지 말라는 말씀이었다. "어려운 협상을 하고 있는데, 대통령 순방 성과를 내야 하니 결론을 달라고 채근하면 그게 다 부담이다. 그러니 아예 아무 말 하지 말라"는 것이었다.

 뜨끔했다. 사실 "대통령이 이집트까지 갔는데 계약을 하지 못하면 빈손으로 귀국했다고 할 게 뻔합니다. 여기까지 와서 그냥 돌아갈 수는 없습니다. 어떻게든 결론을 지어 주십시오"라고 말할 생각이었다.

 하지만 대통령이 그렇게 정색하고 주의를 주시니, 아무 소리 못 하고 그저 '방사청장님 파이팅'만 할 수밖에 없었다. 결국 K9 자주포 수출 건은 우리가 이집트를 떠날 때까지 결론을 못 낸 체 돌아오게 됐다. 방사청장은 침울해했고, 우리는 돌아가서 시달릴 일이 걱정이었다.

(어떤 협상이든 급한 쪽이 손해를 보게 되어 있다. 만약 문재인 대통령이 이때 본인의 치적에만 급급해서 방사청장 등 관계자에게 계약을 독촉했다면 우리는 불리한 조건에 계약을 했을 것이 불을 보듯 뻔하다. 본인의 치적보단 국익을 우선시한다면 이런 자세가 당연하다. 하지만 석열이는? 이 새끼는 그런 걸 모른다는 걸 지난 10개월간 적나라하게 보여줬다. 이 새끼는 대한민국의 국익은 어떻게 됐든 자신의 치적과 겉모냥에만 급급한 천박한 새끼다)

 1월22일 10시 21분, 공군 1호기가 서울공항에 도착했다. 마지막 순방이 끝났다는 안도보다는 곧 야당에 시달릴 일을 예감하며 서둘러 짐을 챙겨 사무실로 들어갔다. 사무실에 들어가자마자 방사청장에게 연락이 왔다.

 "지금 이집트에서 연락이 왔는데 다시 와 달랍니다. 아마 계약이 될 것 같습니다."

 "정말이요? 아, 참 할 말이 없네요. 그럼 다시 가셔야겠네요."

 "내일 다시 이집트로 갑니다. 이번에는 어떻게든 되겠죠."

 "네, 청장님. 정말 고생 많으십니다. 파이팅."

 아니나 다를까 돌아온 다음 날부터 국민의힘과 보수 매체들은 "대통령 빈손 귀국, 빈손 외교"라며 신나게 떠들었다. 하지만 우리는 그냥 내리는 비를 맞고 서 있을 수밖에 없었다. 그리고 귀국한 지 일주일쯤 지난 어느 날, 카이로에서 기다리던 소식이 날아왔다.

 'K9 자주포 이집트 수출 마침내 성사, 사상 최대 2조 원 계약 체결.'

 

이 책의 에필로그는 청와대 직원들이 준비한 조촐한 서프라이즈 퇴임 행사에 대한 이야기로 마무리된다.

 

 문재인 대통령 임기 마지막 날 자정에 청와대를 개방하겠다는 윤석열의 만행으로 문대통령은 그날 처음으로 퇴근을 하셨고, 일반 시민들이 그 자리에 함께 하며 대통령을 배웅해 드렸다. 

"이제 대한민국 대통령께서 퇴장하시겠습니다. 모두 자리에서 일어나 환송해 주시기 바랍니다."

 주기율표를 주제로 원소의 성질에 대한 초보적인 양자역학적 설명을 곁들인 부담없이 읽을 수 있는 교양과학 서적.

 내용은 고등학교 물리,화학 정도의 상식으로 어느 정도까지는 이해 가능한 수준이지만 곳곳에 꽤 높은 수준의 통찰을 요하는 설명들을 발견할 수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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p80

 입은 맛뿐만 아니라 온도도 감지하여 우리가 너무 뜨거운 음식을 먹지 않도록 막는다. 우리 몸의 열 감지기는 'TRPV1 수용체'라고 부르는데 혀와 소화관 내부에 많이 있다. 어떤 화학물질은 우연히 열 감지기를 작동시켜 실제로는 그 부위가 차갑지만 뇌에는 뜨겁다는 신호를 보낸다. 이러한 혼란이 빚어낸 감각을 우리는 '매운맛'으로 인식한다.

 1912년 미국 과학자 윌버 스코빌은 음식의 매운맛을 수학적으로 측정하는 방법을 고안했고, 오늘날에도 이 시험법이 사용된다. 매운 화학물질을 시험 대상자가 느낄 수 없을 때까지 계속 희석한다. 대상자가 매운맛을 느끼지 못할 때까지 희석한 횟수가 스코빌 지수(SHU)로 환산된다.

 혀는 미량의 물질에도 민감하게 반응하기 때문에 일반적은 SHU값은 매우 크게 나온다. 할라페뇨 고추기름은 8,000회 희석후에 맛이 느껴지지 않으므로 스코빌 지수가 8,000 SHU이며 타바스코 소스는 5만 SHU에 가깝다.

 세계에서 가장 매운 고추는 웨일스 향신료 전문가 마이크 스미스가 육종한 드래곤 브레스다. 드레곤 브레스의 스코빌 지수는 240만 SHU에 이른다. 이 수치는 후추 스프레이에 맞먹는다. 드래곤 브레스는 너무 매워서 먹으면 과민성 쇼크를 일으킬 수 있다. 그러나 세계에서 가장 매운 화학물질인 레시니페라톡신에 비하면 아무것도 아니다.

 식물 백각기린 유액에서 추출한 성분인 레시니페라톡신은 급성독성이 있고 피부에 심한 화상을 입힌다. 이 때문에 누구도 이 물질로 미각 실험을 한 적은 없다. 따라서 우리는 이 물질의 스코빌 지수를 간접적으로 계산해야 한다.

 1989년 헝가리 병리학자 아르파드 살라시는 (쥐를 대상으로) 수행한 연구에서 캡사이신보다 레시니페라톡신이 TRPV1 스용체에 1,000배에서 1만 배 더 잘 결합한다는 것을 발견했다. 캡사이신의 스코빌 지수가 1,600만 SHU이므로 레시니페라톡신은 대략 160억 ~ 1,600억 SHU일 것이다. 우리를 죽이기에 충분한 매운 맛이다.

 

p135

 원자번호가 커질수록 양성자 수가 증가하므로 양성자를 제대로 붙잡아 두려면 중성자 수도 늘어나야 한다. 그런데 복잡한 문제가 생겼다. 양성자 사이에 졵재하는 반발력은 끝없이 증가하지만 중성자의 접착력은 무한하지 않다.

 거대 원자 안에서 반발력이 승리하는 것은 시간문제며 반발력은 원자 구조를 불안정하게 만든다. 크기가 클수록 원자는 깨지기 쉬워지고, 충분한 시간이 흐르면 결국 산산조각이 날 것이다.

 푸른빛을 내는 원소 악티늄은 양성자가 89개인 거대 원자핵을 지닌다. 악티늄 덩어리는 20년 이내에 절반 정도가 다른 원소로 붕괴될 것이다. 반면 루비듐의 원자핵은 양성자가 37개에 불과할 정도로 작다. 루비듐 덩어리의 절반이 붕괴되려면 490억 년이 걸린다. 

 방사성 붕괴로 생성신 원소의 핵에는 다른 원소가 일반적으로 가지지 않는 독특한 개수로 중성자가 존재한다. 이러한 '딸daughter' 원자핵은 방사성 붕괴로만 발생한다. 암석에 포함된 모mother 원자핵과의 비율을 측정하면 언제 붕괴가 시작했는지, 그리고 얼마나 오랫동안 붕괴 반응이 지속되었는지 알 수 있다.

 이 기술로 미국 화학자 클레어 패터슨은 지구의 나이를 계산하여 대략 45억 세인 것을 확인했다.

 

우리가 들어서 많이 알고 있는 법의 근본사상을 이루는 고전들에 대해 그 핵심을 설명한 책.

재밋고 유익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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p20 

 정치 참여는 '의무'



 루소는 <사회계약론> 1부 도입부에서 정치 참여의 당위성을 강조합니다. 그때나 지금이나 시민이 정치에 관심을 갖는 것을 비난하는 사람들이 있었나 봅니다. "네가 뭔데 정치 이야기를 해?"라는 식이죠. 루소는 다음과 같이 말합니다.

 '나는 군주도 아니고 입법자도 아니다. 그리고 바로 그렇기 때문에 정치에 관한 글을 쓴다. 내 의견이 공적인 일에 미칠 수 있는 영향력이 아무리 미미하다고 해도 나는 한 자유국가의 시민이자 주권자의 한 사람으로 태어나 그것[공무]에 관해 투표할 수 있는 권리를 가졌으므로 거기에 대해 알아야 한다는 의무 역시 당연히 갖게 된다.'

 권위주의 체제 시절에는 시민들이 정치를 이야기하면 "네 일이나 잘해"라는 말을 들어야 했습니다. 교사들이 정치 이야기를 하면 "학생들이나 잘 가르치지"라는 야유를 받았죠. 노동자들이 정치 이야기를 하면 "물건이나 잘 만들어 팔지"라는 구박이 돌아왔습니다. 정치적 민주화가 이루어진 이후에도 크게 바뀌지는 않았습니다. 저의 경우는 정치 과정에 참여한 이후 "교수가 전공 강의나 하지 왜 정치 이야기를 해?"라는 비난을 많이 들었습니다. '폴리페서'라는 딱지도 붙었죠.

 만약 이런 식으로 '네 일이나 잘하라'는 요청을 따르기만 한다면 어떻게 될까요? 제가 정치에 관심을 끊고 학교 캠퍼스에 틀여박혀 있거나 노동자가 공장에서 일만 하고 농민이 논밭에서 농사만 지으면 어떻게 될까요? 그러면 정치는 특성 사람, 특정 집단의 전유물이 되어버립니다. 우리나라 대한민국은 "민주공화국'입니다. 민주공화국은 이 나라의 주인이 바로 우리라는 뜻입니다. 나라 운영의 원리와 방향을 정하는 것이 정치인데, 나라의 주인이 그러한 정치에 관심을 갖는 것은 너무나 당연합니다. 루소는 이 점을 분명히 했습니다.

 한편 "정치에 관심을 갖지 마!"라는 윽박지름과 함께 "정치가 너와 무슨 상관이야?"라는 어리석은 질문도 있습니다. 루소가 살던 시대에도 그랬나 봅니다. 루소는 이렇게 답합니다.  

 '누군가가 나랏일에 관해 "그게 나랑 무슨 상관이야?"라고 말하는 순간 그 나라는 끝장난 것으로 간주되어야 한다.'

 나라의 주인이 나랏일에 상관이 없다고 생각하면, 그 나라는 망한다는 것이죠. 정치는 한 나라의 운명과 주권자 국민의 삶의 방향을 좌우합니다. 예를 들면 정치는 납세자, 즉 우리에게 얼마의 세금을 걷을지 결정합니다. '슈퍼리치'로 불리는 '초부자'들을 대상으로 증세를 할지 감세를 할지 정합니다. 부동산 문제가 심각한데, 다주택자에 대한 '종합부동산세'를 유지할지 아니면 폐지할지도 결정합니다. 재벌 등 대기업이 내는 법인세를 인상할지 인하할지도 정합니다. 최근 유럽연합은 석유,천연가스,석탄을 생산/정제하는 기업들이 에너지 가격 급등으로 막대한 이윤을 얻게 되자 1400억 유로(약 200조 원) 규모의 횡재세(windfall tax)를 부과하기로 결정했습니다.

 정치는 또한 우리가 내는 세금의 사용처를 정합니다. 예컨대 4대강 사업에 돈을 쓸지, 아니면 '무상급식', '무상보육', '전국민고용보험' 실시에 돈을 쓸지 결정하는 것입니다.


 세금을 냈는데 4대강 사업에 쓰여 강을 '녹차 라테'로 만들어 버리면 화가 나죠. 이명박 정부가 추진한 자원외교는 깡통이 되었습니다. 거기에 몇조 원이 들어갔다는 것 아닙니까? 4대강, 자원외교, 방산비리 등을 다 합한 액수를 우리나라 인구로 나눠보니 1인당 200만 원, 가구당 약 1000만 원을 부담한 셈이더군요. 박근혜 정부 시절 청와대에 쓰레기통을 구입했는데, 한 개에 약 90만 원이었습니다. 이런 것들이 다 우리가 낸 세금으로 이뤄지는 일입니다.

 

p75

 삼권분립의 의미

 

 권력을 가진 자는 모두 그것을 함부로 쓰기 마련이다. 이 점을 지금까지의 경험이 알려주는 바이다.  사람이 권력을 남용하지 못하게 하기 위해서는 사물의 본질에 따라 권력이 권력을 저지하도록 해야 한다.

 

p81

 몽테스키외는 법관의 역할을 제한하려고 했습니다.

 판결은 명백히 정해져 있는 법률 조문에 불과할 정도로 일정해야 한다. 만약 판결이 한 재판관의 개인적 견해라면 사람들은 책임져야 할 의무가 무엇인지도 모르는 채 사회생활을 하는 것이나 다름없다. 사법권은 이를테면 없음이나 다름없다. 인민의 재판관은 앞에서 말한 것처럼 법의 문구를 선언하는 입에 불과하다.

p84

 <범죄와 형벌>에서 베카리아는 배심제에 대해 다음과 같이 말합니다.

 무지한 자는 감각으로 판단하지만, 전문가는 학설과 의견으로 판단한다. 전자의 판단이 후자의 판단보다 더 믿을 수 있는 안내자이다. 재판관은 유죄판결에 익숙해져 있으며, 모든 것을 그의 전문지식에서 빌려온 인위적 개념요소로 환원하는 경향이 있다. 이러한 재판관의 학식보다는 보통 사람의 상식이 증거판단을 잘못할 가능성이 더 적다. 법을 아는 일이 전문 학문이 아닌 나라는 얼마나 행복한가! 누구나 그와 동등한 이웃 시민들로부터 재판받도록 하고 있는 법제는 정말 경탄할 만하다.

 

p88

 <법의 정신> 제29편 '법을 만드는 방법'에서 중요한 부분을 발췌해 정리했습니다. 몽테스키외는 그리스, 로마, 프랑스의 예를 들면서 여러 가지 중요한 원칙을 제시합니다. 차례로 보겠습니다.

 첫째, "입법자의 의도에 어긋나는 법"을 만들어선 안된다. 입법자는 입법의 목적과 결과가 반대로 나올 수 있음을 직시해야 한다.

 둘째, "법의 문체는 간단해야 한다." "법의 문체는 쉬워야 한다."

 셋째, "법의 말은 모든 사람들에게 똑같은 관념을 불러 일으키는 것이 중요하다." "어떤 법에서 사물의 관념을 확정했을 때는 결코 모호한 표현으로 되돌아가서는 안 된다."

 법의 표현이 모호하고 불명확하면 필연적으로 해석을 둘러싼 분쟁이 일어납니다. 그리고 법을 준수해야 하는 시민의 입장에서는 무엇이 금지되고, 무엇이 허가되는지 판단하기 어렵습니다. 결과적으로 법을 집행하는 권력이 재량을 갖게 되고, 시민의 자유는 위태로워집니다. 이 원칙은 현대 법률용어로 '명확성의 원칙'이라고 합니다. 이 원칙은 베카리아의 <범죄와 형벌>에서도 강조됩니다.

 

p94

 법은 만들어지지만 풍속은 제시된다. 후자는 좀 더 일반 정신에서 유래하고, 전자는 좀 더 특수한 제도에서 유래한다. 풍속이나 생활양식을 바꾸고자 할 때에는 그것을 법에 따라서는 안 된다는 것이다. 그것은 너무도 전체적으로 보일 것이다. 그것은 다른 풍속, 다른 생활양식에 따라서 변경하는 편이 낫다. 그러므로 군주가 그 국민에게 큰 변화를 일으키고자 할 때엔, 법으로써 설정된 것은 법에 따라 개혁하고, 생활양식으로 형성된 것은 생활양식에 따라 변경해야 한다. 생활양식으로 바꿔야 할 것을 법에 따라서 변경한다는 것은 매우 나쁜 정책이다.

 '법'과 '풍속'을 구분하면서, 법을 통해 생활양식을 바꾸려는 시도는 하지 말라는 충고입니다. 그러면서 서구식 근대화와 강력한 국가 건설을 추진했던 러시아의 표토르 1세가 사람들이 도시에 들어갈 때 입는 옷의 길이를 무릎까지로 제한한 법을 만든 것은 "폭정과도 같았다"라고 비판합니다.

 남의 일이 아닙니다. 우리의 과거 권위주의 정권 시절에 남성이 장발이거나 여성이 미니스커트를 입으면 경범죄처벌법상 '범죄'로 규정되었습니다. 경찰관들이 거리에서 가위와 자를 들고 지나가는 남성들의 머리카락 길이를 재고, 여성들의 치마 길이를 쟀어요. 머리와 치마 길이가 규정을 초과하면 경찰서로 끌려갔습니다. '폭정'이라고 하지 않을 수가 없습니다.

 

p169

 베카리아는 '범죄'와 '종교적 죄악'이 다르다고 선언합니다. 여기서 근대 형법학이 출발합니다. 기독교, 불교, 이슬람교 등에서 '죄악'이라고 비난하는 행위가 있잖아요? 종교별로 '죄악'의 범위에 차이는 있습니다. 그런데 이러한 '죄악'중 형법상 '범죄'인 것이 있고, 아닌 것이 있습니다.

 예를 들어 살인, 절도, 강간 등은 '죄악'이기도 하고 '범죄'이기도 합니다. 그런데 배우자가 있는 사람이 배우자가 아닌 사람과 성교를 하는 간통adultery은 '죄악'으로 분류되지만, 현대 민주주의 국가에서는 '범죄'가 아닙니다. 중세에는 간통도 '범죄'로 처벌받았습니다.

 우리나라에서도 간통은 오랫동안 범죄로 규정되었지만 2015년 헌법재판소의 위헌결정으로 폐지되었습니다. 간통을 도덕적으로 비난할 수는 있겠지만 범죄로 처벌해서는 안되다는 것입니다. 배우자와의 사랑이 식고 혼인이 파탄으로 가는 상태에 있는 사람이 새로운 사랑을 찾아 혼외성교를 한 것을 범죄로 규정하고 처벌하는 것이 맞는가에 대해 오랜 논쟁이 있었는데, 드디어 마무리된 것입니다.

 한편 중세 기독교에서는 '자살', 미혼 남녀의 성교인 '사통私通 fornication'을 '죄악'으로 분류했고 당시 이 행위는 '범죄'로 처벌되었지만, 현대 민주주의 국가에서 이를 '범죄'로 규정하는 나라는 없습니다. 물론 혼전순결 서약을 하는 사람들의 의사는 존중되어야 합니다. 

 근대 형법의 기본은 종교와 법의 구별, 죄악과 범죄의 구별, 도덕과 법의 구별입니다. 베카리아가 바로 이 점을 갈파했던 것입니다. "종교적 죄악은 신이 벌하는 영역이다"라는 말에 핵심이 들어 있습니다. '종교적 죄악'은 같은 종교 공동체에서 비난을 받습니다. 신부님, 목사님, 스님이 질책을 하실 것이고, 동료 신도들이 책망을 할 것입니다. 그러나 '범죄'는 국가가 바로 개입합니다. 경찰, 검찰 등 수사기관이 체포, 구속, 압수, 수색 등 강제처분을 하고, 검찰이 기소하면 법원이 판결해서 형벌을 부과하죠. 이 모든 과정은 국가 기록으로 남습니다. '종교적 죄악'과 '범죄'를 구분하지 못하면, 전자의 경우에도 국가가 강제력을 행사해 개입하게 됩니다. 이는 다원주의를 지향하는 민주주의 국가에서는 있을 수 없는 일입니다.

 

p285

 -존스튜어트 밀-

 진리란, 스스로 사색하지 않고 오로지 타인의 주장에 맹종할 뿐인 사람들의 진실한 의견에 의해서가 아니라, 적절한 연구와 준비를 통해 스스로 생각하는 사람들의 오류에 의해 더 많은 것을 얻게 된다.

 

 우리에게 말하는 것 같지 않습니까? 제가 재직하고 있는 서울대는 머리 좋고 성실하고 시험 잘 치는 젊은이들이 공부하는 곳입니다. 저는 수업 중에 농반진반으로 이렇게 말합니다. 

 "여러분이 북한에서 태어났다면, 대부분 '주체사상'에 따라 성실하게 생활하면서 북한에서 제일 좋은 대학인 김일성 종합대학에 성공적으로 입학해 아침저녁으로 '수령님'께 감사한 마음으로 공부에 매진하고 있을 것입니다."

 

p294

 밀은 "개성에 대한 일반인의 무관심", "집단 속에 매몰된 개인"이라는 현상, "모든 개인을 공인된 표준에 합치시키려고 노력하는 경향"을 개탄합니다. 그는 당시 영국 사람들이 타인에 관련된 사항만이 아니라 자신과 관련된 사항에 대해서도 "나는 무엇을 좋아하는가? 무엇이 나의 성격과 성향에 맞는가? 또는 무엇이 내 속에 있는 최고 최선의 것으로 하여금 공정하게 그 힘을 발휘하게 하여 그것을 성장 발달하게 하는 것일까?"라고 묻지 않고, 반대로 "무엇이 나의 지위에 적합한가? 나와 같은 신분으로 같은 수입을 얻는 사람이 하는 일은 무엇인가? 또 (더욱 나쁘게도) 나보다 높은 신분과 재산을 가진 사람들이 보통 어떤 일을 하는가?"를 자문하고 있다고 평합니다.

 지금 우리가 살고 있는 한국 사회도 마찬가지 아닐까요? 인간은 각자 자신만의 기질, 취향, 꿈, 욕구, 욕망이 있습니다. 그런데 국가나 여론이 이를 특정 기준에 따라 획일화하고, 그 기준에 맞지 않는 것은 억압하려는 경향이 있습니다. 어른에 대해서는 물론이고 어린이에 대해서도 그런 경향에 따라 훈육하는 일이 이루어집니다. 붕어빵 찍듯이 사람을 찍어내고 싶은 것입니다. 일제의 지배와 권위주의 정권의 통치 경험이 있다 보니 이런 현상이 고착된 게 아닌가 싶습니다. 밀은 말합니다.

 

 인간성을 위협하는 위험은 개인적 충동과 선호의 과다에 있는 것이 아니라, 그 결핍에 있다. 진보의 원칙은, 그것이 자유를 사랑하는 형태든 개량을 사랑하는 형태든, 관습의 지배에는 반대하고, 적어도 관습의 속박으로부터 해방을 요구한다. 하나의 인민은, 일정 기간 진보적이었다가 그 다음에는 정지한다. 언제 정지하는가? 그것은 개성을 갖지 못할 때다.

 

p298

청중 : 책을 읽으면서 잘 이해가 되지 않는 점이 있습니다. 일은 개인의 자유가 타인에게 피해를 주지 않는 이상, 자유를 보장받아야 한다고 했는데요, 우리나라에서 촛불 집회/시위가 열렸을 때 참여하지 않은 사람들에게 어느 정도 피해를 줬다고도 할 수 있을 것 같거든요. 그런 상황에서는 표현의 자유, 집회의 자유가 억압받아도 되는 걸까요?

 

조국 : 중요한 쟁점입니다. 법률적 용어를 사용하면, '기본권의 서열'이라는 확립된 법리가 있습니다. 최상위는 생명입니다. 그다음 순위는 양심과 사상의 자유, 표현의 자유 등 정신적 자유입니다. 그다음은 신체의 자유이고, 그 아래는 재산권입니다. 이 서열에서는 위의 것을 위해서는 아래의 것을 제한할 수 있습니다. 촛불 집회/시위가 열리면 그 주위에 있는 상인들이 장사를 못하거나 방해받을 수 있습니다. 그분들의 재산적 이익도 소중합니다. 그러나 법리에 따르면 상인 분들이 감수해야 합니다. 물론 집회/시위 참가자가 이 상점에 불을 지르거나 물건을 파손했다고 하면 사정이 달라집니다.

나온지 꽤 된 소설이고 출간 당시에는 베스트셀러였다. 집에 굴러다닌지 오래된 책인데 책정리 차원에서 버리기 전에 읽어봤다.

책의 초반부는 흥미를 일으킬만한 요소가 있지만 중후반 이후로 힘이 확 떨어진다. 책은 읽어보지 않았지만 존 그리샴의 다른 작품을 영화화한  펠리컨 브리프를 보면서도 비슷한 느낌을 받았다.

그저그런 킬링타임용 스릴러물 정도라고나 할까?

출간 당시에는 모르겠지만 지금은 굳이 읽어볼만한 소설은 아니다.

 

 원제는 Belonging : A German reckons with history and home. 으로 소속 : 역사와 가계에 대한 한 독일인의 생각 이다.

 독일인들에게 나치(Nazi)란 원죄와 같은 집단적인 트라우마이자 항시 자신들을 경계하는 절대적인 지침이다.

 이 책은 성인이 된 후 독일인으로서의 정체성을 찾아가는 과정에서 자신의 가계를 거슬러 올라가며 독일인들에게 목에 가시처럼 박혀있던 나치의 그림자를 밝혀나가는 과정을 담담하게 다루고 있다.

 일종의 다큐형식으로 개인적인 가계를 자료들과 조부모와 부모님의 친척과 지인들의 증언을 통해 거슬러 올라가는 방식이라 약간 산만한 감도 없지는 않다. 하지만 크게 거슬리는 수준은 아니다.

 문재인 대통령의 추천으로 재조명 된 책인데 그저 재미로 볼만한 내용은 아니다. 

 처음의 프롤로그에서 이 책의 성격을 가늠할 수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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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나는 친구의 아파트 건물 루프탑에 서 있었다. 그때까지 뉴욕에서 아는 사람이라고는 그 친구 하나뿐이었다. 나는 베를린을 떠나온 지 얼마 안 된 유학생이었다. 아는 사람이라곤 없었고, 나를 아는 사람도 있지 않았다.

 무한한 가능성이 펼쳐져 있었다. 안락의자에 앉아 있던 한 노부인이 우연히 우리 대화를 들었다.

 "어디서 왔어요?" 그녀가 물었다. 

 "독일에서요."

 "그런 것 같았어요."

 "독일에 가보신 적 있으세요?" 내가 물었다.

 "네, 아주 오래전에요."

 그녀는 내 눈을 피했다. 그 순간 나는 알았다.

 그녀는 강제수용소에서 살아남은 자신의 사연을 들려줬다. 여자 간수 하나가 최후의 순간 가스실에서 열여섯 번을 구해줬다고 한다.

 그 간수는 수용소에 있던 다른 사람들에게 가혹하기 그지없어서 벌을 준답시고 걸핏하면 포로들의 머리를 서로 박치기하게 했는데 자기에게는 남몰래 연정을 품었던 것 같다고 그녀는 말했다.

 

유시민 작가님의 추천사를 듣고 보게 된 책.

아버지의 장례식이라는 모티브를 통해 딸과 빨치산 출신의 아버지가 인생의 기나긴 갈등을 치유하고 회복하는 과정을 굉장히 드라마틱하고 재밋고 그리고 감동적으로 그려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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p136

 구례는 아버지의 고향이기도 하지만 아버지의 전장이기도 했다. 아버지의 친척과 친구가 있는 곳이기도 하지만 아버지를 적으로 아는 사람도 있는 곳이라는 의미다. 그런데도 아버지는 고향에서 사는 데 거리낌이 없었다. 몇년에 한번씩 바뀌는 정보과 담당 형사들과도 허물없이 농을 주고받으며 두루두루 잘 지냈다. 감시하는 형사와 술잔을 나누고 싶냐는 내 비아냥도.

 "순겡은 사램 아니다냐?"

 아버지는 대수롭잖게 받아넘겼다.

 "몰르는 사람잉게 총질을 해대제 구례 사램들끼리는 안 그랬어야. 뽈갱이든 퍼랭이든 노상 얼굴 보고 살았는디 총이 겨놔지가니. 구례는 해방 직후에 친일파 숙청도 지대로 못했당게."

 고씨 집안사람 하나가 친일파였다. 친일로 제법 돈을 모았고, 일본에 헌납도 한 모양이었다. 해방 직후 면의 젊은이들이 그를 당산나무 아래로 끌고 왔다. 쳐 죽이라는 고함이 터져 나왔다. 혈기왕성한 젊은이 하나가 낫을 들고 다가가자 누군가 빽 소리를 쳤다. 젊은이의 어머니였다.

 "그 어른이 아니었으면 니가 시방 산 목심이 아니어야!"

 젊은이가 어린 시절 이질로 죽어갈 때 고씨가 병원비를 댄 것이다. 사람들이 한마디씩 보태기 시작했다.

 "우리 애기 학벵 끌레가게 생겼는디 고씨 어른이 손을 써줬그마요."

 고씨 성토장이 이내 미담장으로 변했다. 쳐 죽이자고 했던 젊은이들도 그만 머쓱해져서 흐지부지 흩어지고 말았다.

 "민족이고 사상이고, 인심만 안 잃으면 난세에도 목심은 부지허는 것이여."

 자신도 고씨처럼 인심을 잃지 않았으니 빨갱이라도 고향서 살 수 있다는 의미인 듯했다. 한때 적이었던 사람들과 아무렇지 않게 어울려 살아가는 아버지도 구례 사람들도 나는 늘 신기했다. 잘 죽었다고 침을 뱉을 수 있는 사람과 아버지는 어떻게 술을 마시며 살아온 것일까? 들을 수 없는 답이지만 나는 아버지의 대답을 알 것 같았다. 긍게 사램이제. 사람이 어떻게 그럴 수 있냐고 내가 목소리를 높일 때마다 아버지는 말했다. 긍게 사램이제. 사람이니 실수를 하고 사람이니 배신을 하고 사람이니 살인도 하고 사람이니 용서도 한다는 것이다. 나는 아버지와 달리 실수투성이인 인간이 싫었다. 그래서 어지간하면 관계를 맺지 않았다. 사람에게 늘 뒤통수를 맞는 아버지를 보고 자란 탓인지도 몰랐다.

 

 

퇴임 후에 문재인 대통령은 SNS를 통해 개인적 활동과 관심사를 간간히 포스팅을 하시는데 그 중에서도 꾸준하게 읽은 책에 대한 감상과 소개를 올리시고 있다.

그 중에 최근 하얼빈을 읽었고, 뒤이어서 본 책이 <지극히 사적인 네팔>이다. 

사실 네팔하면 히말라야, 나마스테, 그리고 네팔 음식 정도를 알 뿐이고 그것마저도 영상으로 본 것이 대부분이다.

네팔이라는 나라와의 교류가 그닥 많은 것이 아니기 때문에 일반인들은 네팔에 대해서 알 기회가 거의 없다.

이 책은 네팔에서 태어나 고등학생 시절까지 보낸 저자가 한국에서 10년 이상을 보내면서 양국의 문화와 사회를 어느 정도 알고 난 사람이기에 우리가 알아야 할 그리고 네팔인의 입장에서 한국사람들이 이것만은 알았으면 하는 내용들로 채워져 있다. 저자의 말처럼 개인적인 면에 치우쳐 있을지는 모르지만 네팔에 대한 정보가 거의 없는 입장에서는 네팔 입문서로 괜찮을 내용이다. 

최근 급격한 원/달러 환율 상승으로 달러에 대한 관심이 높아지고 있다.

그래서 본 책. 저자가 샐러리맨에서 투자를 시작하면서 수백억대의 자산가가 되었다고 하는데 사실 책의 내용이 다른 투자서에 비해서 특별하다고 보기는 어렵다. 단지 달러투자라는 단일 이슈로 된 책은 이 책이 유일한 듯 하다.

달러 실무적 투자에서 입문서로 괜찮은 것 같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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p16

 여기서 해외여행을 위해 환전할 때 유용한 팁 하나를 주겠다. 우리나라에서 원화를 바로 현지 통화로 바꾸기보다 원화를 달러로 바꾼 뒤 현지에서 현지 통화로 환전하는 것이 유리하다는 것이다. 베트남이나 필리핀 같은 동남아시아로 여행할 때는 특히 그렇다. 베트남 여행을 계획 중이라면, 우리나라에서 원화를 베트남 동으로 바로 바꾸지 말고, 원화를 달러로 바꾼 후에 베트남에 가서 달러를 동으로 바꾸는 것이 훨씬 좋다.

 가뜩이나 귀찮은 환전을, 그것도 2번이나 해야 한다니 의문이 생길 것이다. 그냥 원화를 가져가 현지에서 바꾸면 환전 수수료도 아낄 수 있으니 더 낫지 않을까 싶을 수 있다. 하지만 내가 이 방법이 훨씬 유리하다고 말한 이유는 2가지 때문이다. 첫째, 환전 수수료를 아낄 수 있다. 원화를 달러로 환전할 때는 최대 90%의 환전 수수료 우대율이 적용되는데, 원화를 달러 이외의 외국 통화로 환전할 경우, 심지어 그게 엔화나 위안화, 유로화처럼 환전 수요가 많지 않은 동남아시아 지역의 돈이라면 우대율이 50% 이하로 대단히 낮다. 둘째, 해외에서는 우리나라 돈, 즉 원화보다 미국 돈, 즉 달러의 가치를 훨씬 높게 인정해준다. 

 

p18

 달러를 매수할 때는 약간의 거래 비용이 발생한다. 환전 수수료가 바로 그것이다. 이는 현금 기준으로, 기준 환율과 살 때와 팔 때로 구분되는 데, 이 3가지 형태의 가격엔 보통 1.75% 정도의 차이가 있다. 즉, 기준 환율이 1,000원이라면, 살 때의 환율은 17.5언이 비싼 1,017.5원이고, 팔 때의 환율은 17.5원이 싼 982.5원이다. 돈으로 돈을 사면 제로섬이어야 하지만 환율이 변하지 않는다고 전제해도 사고파는 행위로만 살 때 1.75%, 팔 때 1.75%, 도합 3.5%의 손실이 발생한다는 것을 알 수 있다. 투자의 세계에서 3.5%의 수수료는 거의 살인적인 수준이라고 할 만큼 크다. 증권 거래세 0.3%와 비교하면 10배가 넘고, 2020년 기준 은행의 1년 만기 정기 예금 이자보다도 훨씬 높은 수준이다.

 만약 이 무지막지한 크기의 환전 수수료를 부담해야 한다면, 차라리 투자를 하지 않는 편이 현명하다고 할 수 있다. 하지만 은행도 양심은 있는지, 이 환전 수수료를 모두 챙기지는 않는다. '환전 수수료 우대율'을 적용해 주는 것이다. 만약 환전 수수료 우대율 90%를 적용받는다면, 환전 수수료는 3.5%가 아니라 0.35%가 된다. 이는 주식 투자시 증권사 거래수수료와 증권 거래세를 합한 수준과 비슷하다. 돈으로 돈을 사는 환전은 아무것도 사지 않은 것 같은 안전한 일이긴 해도 비싼 환전 수수료를 부담해야 한다면, 투자의 성공 확률도 그만큼 낮아질 수밖에 없다. 따라서 달러 투자에서 가장 중요한 시작은 이 환전 수수료를 가능한 한 낮추는 것이라고 할 수 있다.

 

p21

 원/달러 가격이 하락했다. 이런 결과가 달러 가치의 하락으로 일어난 것인가, 달러 가격이 떨어져서 일어난 것인가? 이를 구분할 줄 알아야 한다. 원/달러 환율의 하락은 2가지 원인으로 일어날 수 있기 때문이다.

 1. 달러의 가치가 하락해서

 2. 그냥 달러 가격이 하락해서

 

 이러한 일이 벌어지는 이유는 달러의 가치 역시 다른 나라 돈과의 비율에 영향을 받아 정해지기 때문이다. 조금 복잡하게 들리겠지만, 원/달러 환율이 달러 대비 원화의 교환 비율을 뜻하듯 달러의 가치도 여러 다른 나라의 돈 대비 달러의 교환 비율을 의미한다. 이것이 바로 '달러 지수'다. '달러 인덱스 지수'라고도 불리는 달러 지수는 절대적 가치라고 할 수 있다. 그래서 이를 기준으로 원화의 가치에 따라 원/달러 환율의 상승과 하락이 결정된다. 기억해야 할 것은 원/달러 환율은 어떤 '값' 이 아닌 '비율'이라는 사실인데, 달러 지수 역시 '비율'이다. 달러 지수는 1973년 3월을 기준 100으로 하여 세계 주요 6개국 통화 대비 미국 달러의 평균 가치를 비율로 산정해 지수화한 지표로, 미국연방준비제도에서 작성하고 발표한다. 이때 그 기준이 되는 통화의 비중은 유로화 57.6%, 일본의 엔화 13.6%, 영국의 파운드 11.9%, 캐나다의 달러 9.1%, 스웨덴의 크로나 4.2%, 스위스의 프랑 3.6%다.

 유로화가 절반 이상의 비중을 차지하기에, 달러 대비 유로화의 가치가 상승하면 달러 지수는 하락하는 구조다. 따라서 달러 투자는 기본적으로 미국의 경제 발전에 베팅하는 투자라고 할 수 있다. 반대로 미국의 달러 약세에 베팅한다는 것은 곧 유럽의 경제 발전에 투자하는 것이다.

  

p23

 

p64

 티끌 모아 티끌

 작은 돈을 열심히 모아봤자 여전히 작은 돈일 뿐이다. 자본가가 되려면 일단 자본이 있어야 한다. 티끌을 모아 자본을 만들어 내겠다는 생각은 어리석은 욕심이다. 나는 요즘 낮잠으로 하루의 절반을 보내고 있다. 하지만 이 같은 나날은 지난 시절 치열한 노력과 고생의 보상이다. 사회초년생 시절, 퇴근 시간은 분명 오후 6시였지만 내겐 저녁식사 시간일 뿐이었다. 밤 10시에 회사를 나설 때도 조기 퇴근처럼 느껴졌다. 새벽 5시에 퇴근해서 대충 씻고 다시 출근하는 경험이 쌓인 끝에 이제는 낮잠도 자는 행운을 얻엇다. 인생이든 스타크래프트든 '초반 러시'가 중요하다는 말이다. 미네랄을 캐는 고생과 입구를 막는 수고도 없이 배틀 크루저를 뽑아낼 수는 없다. 티끌로 태산을 만다는 건 적어도 한 판에 3,600% 수익률을 내는 카지노 도박으로나 가능한 일이다. 난 달러 투자로 약 0.3%의 수익률을 거두고도 만족할 수 있었는데, 이는 투자 원금이 300억 원에 가까웠기 때문이다. 눈덩이를 굴리면 비교적 쉽게 더 큰 눈덩이가 되지만, 티끌을 모으면 그냥 티끌일 뿐이다. 연 3%의 수익률로 10만 원의 자본 소독을 만들려면 300만 원의 자본과 1년의 기다림이 필요하다. 하지만 하루 이틀의 노동이면 10만 원을 바로 만들어 낼 수도 있다. 물론, 한 달에 1만원만 아껴도 비슷한 효과를 얻을 수 있다.

 자본가가 되려면 일단 유의미한 자본을 만들어야 한다. 이는 재테크와 투자의 기술을 연마하는 것이 아닌, 열심히 일하고 절약하는 것으로 가능하다. 돈 공부는 눈덩이를 굴리기 위한 것이지 티끌을 태산으로 만드는 마법을 부리기 위해서 하는 것이 아니다. 하지만 티끌이 눈덩이가 되기 전까지는 작은 투자의 성공을 되도록 많이 경험하는 것이 중요하다. 지금 나의 최소 투자 단위는 1만 달러이지만, 내게도 몇천원 수익에 기뻐하던 시절이 있었다. 그것이 시작이었다. 첫술레 배가 부를 수는 없다. 열심히 일하고 절약하며 작은 투자 성공 경험을 쌓아가다 보면 티끌이 눈덩이가 되어 마침내 태산이 되는 기적도 경험할 수 있다. 하지만 이 셋 중 어느 하나라도 충족시키지 않는다면 '행복한 낮잠 시간' 같은 건 결코 오지 않는다.

p70

 

p71

 성공적인 투자의 기본 메커니즘은 다음과 같다.

 첫째, 좋은 자산을 싸게 산다.

 둘째, 수익을 확정시킬 수 있을 때까지 기다린다.

 이 간단한 원리를 지켜내기란 그리 쉬운 일이 아니다. 좋은 자산을 구별해 낼 능력도 부족하고, 적정 가격도 모르며, 인내심과 멘탈 또한 약하기 때문이다. 그래서 내가 한 것은 투자 대상을 나누고 투자 시점을 나누고 투자 금액을 나눈 것이다. 투자의 고수들은 실력이 더 좋은 플레이어가 승리하는 '승자의 게임'을 하지만, 나를 포함한 대부분의 평범한 투자자들은 실수가 잦은 플레이어가 패하는 '패자의 게임'을 한다. 그러니 우리의 전략은 비범한 결정을 내리기 위해 노력하기보다 실수를 줄이기 위해 노력하는 것이어야 한다.

 투자는 곱하기 게임과도 같다. 단 한 번의 '0'이나 마이너스 숫자만 곱해도 전체의 결과가 없거나 마이너스가 되는 게임 말이다. 그러니 성공적인 결과를 만드는 데 더욱 효과적인 것은 더 잘하려는 노력보다 실수하지 않으려는 노력이다.

 

 

 이 소설을 읽고 나서 우리가 안중근이 이토에게 총을 쏜 사건의 의미를 얼마나 피상적으로만 알고 있었는지를 재삼 깨달을 수 있었다. 

 이 소설은 안중근이 이토를 쏜 후, 사형을 당하기까지의 짧은 기간동안 일본, 한국의 정치적 현실 그리고 한국 천주교의 입장, 한국 민중들의 반응에 대해 입체적으로 농밀하게 묘사함으로써 안중근 의사가 가지고 있는 역사적 의미를 재조명하는데 그 의의가 있다.

 뒤로 갈수록 가슴이 너무나 먹먹해지고 답답해진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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p17

 제2차 한일협약 때, 병력으로 조선 황궁을 포위하고 조선 황제와 대신들을 헌병으로 협박하기는 했지만, 병력을 부딪치지 않고 도장을 받아내서 오백 년이 넘은 나라의 통치권을 인수한 이토의 역량을 메이지가 모르지는 않았을 것이었다. 러시아를 도모할 때까지도 이토는 그것이 도장으로 가능하리라고는 생각할 수 없었으나, 그후 조선 사대부들과 자주 상종할수록 이토의 뜻은 도장 쪽으로 기울었다. 왕권의 지근거리에서 세습되는 복락을 누린 자들일수록 왕조가 돌이킬 수 없이 무너져갈 때는 새롭게 다가오는 권력에 빌붙으려 한다는 사실을 이토는 점차 알게 되었다. 도장의 힘은 거기서 발생하고 있었다. 도장으로 해결할 수 있다면 살육을 피할 수 있고, 조선에서 밀려나는 서양 여러 나라들의 간섭을 막을 수 있고, 사후 처리가 원만할 것이었다. 도장을 찍어서 한 나라의 통치권을 스스로 넘긴다는 것은 보도 듣도 못한 일이었으나, 조선의 대신들은 국권을 포기하는 문서에 직함을 쓰고 도장을 찍었다.

 도장의 힘은 작동되고 있었으나, 조약 체결을 공포한 후 분노하는 조선 민심의 폭발을 이토는 예상하지 못했다. 지체 높은 사대부들이 비통한 글을 남기고 잇달아 자결했다. 그들은 독약을 마셨고 물에 뛰어들었다. 조선 황제는 자살한 신하들에게 표창을 내려서 충절을 기렸다. 오백 년을 지탱해온 나라의 관리와 식자 몇 명이 치욕을 못 견디어 자결하는 것은 있을 수 있는 일이었다. 이토는 이 죽음에 따른 민심의 동태를 주시하면서도 못 본 체했다. 이 동시다발적인 죽음들은 무력하기는 했으나 충忠의 반열에 올랐다.

 이토는 조선 사대부들의 자결이 아닌 무지렁이 백설들의 저항에 경악했다. 왕권이 이미 무너지고 사대부들이 국권을 넘겼는데도, 조선의 면면촌촌에서 백성들은 일어나고 또 일어섰다.

 

p69

 안중근이 서울에 도착하기 며칠 전에 한국 통감 이토는 한국 군대를 해산했다. 강제해산 당한 한국군이 일본군과 도심지에서 싸우고 있었다. 이토는 한국 대신들을 겁박했고, 대신들은 황제를 몰아붙여서 군대 해산의 윤허를 받아냈다. 주둔군 사령관 하세가와가 무장해제의 과정을 지휘했다. 하세가와는 맨손체조 훈련을 하겠으니 서울의 한국군 병력은 모두 비무장 상태로 훈련원으로 모이라고 명령했다. 부대 지휘관들이 맨손의 병력을 인솔해서 훈련원에 모였다. 무장한 일본군이 맨손의 한국군을 에워싸고 해산을 통고했다. 훈련원에서 일본군 대대장의 구령에 따라 해산식이 진행되는 동안에 일본 군대가 병력이 없는 한국군 부대를 접수해서 무기를 가져갔다. 황제가 조서를 내려 군인들을 달랬다.

 - 너희들은 나의 뜻을 헤아려서 각자 맞는 일거리를 찾아서 살아라.

 황제는 이어 내각에 지시했다.

 - 군대를 해산시킬 때 폭동에 미리 대비하라. 혹시 폭동을 진압할 일이 있으면 이토 통감에게 의지하고 부탁하라.

 이토는 전국의 한국군 지방 병력을 해산시키라고 각 도의 경찰관서에 지시했다. 여러 고을의 연병장에서 한국군 병력이 총검을 내려놓고 맨손체조를 하는 동안에 경관들이 무기를 수거했다.

 군대가 해산되기 한 달 전에, 고종 황제가 헤이그에 밀사를 보낸 사실을 대한매일신보가 보도했다. 이토는 고종을 꾸짖어 퇴위시키고 그 아들 순종을 황제에 자리에 앉혔다. 새 황제가 해산하는 군인들에게 은사금을 내렸다. 하사에게 팔십원, 일 년 이상 근무한 병사에게 오십원, 일 년 미만자에게 이십오원이었다. 병사들이 돈을 찢으면서 통곡했다.

 시위侍衛 1연대 1대대장 박승환이 명을 받지 않고 자살했다. 참위 남상덕이 부대원을 이끌고 거리로 나가서 일본군과 싸웠다. 일본군이 숭례문 문루에 기관총을 걸어놓고 쏘았다. 거리에 시체가 쌓였다. 한국군 병사들이 흩어져서 민가로 숨었다. 일본 군인들이 일본 여자를 앞세워서 민가의 내실을 수색했다. 잡히는 자들은 그 자리에서 때려죽였다. 달아나던 한국군 병사들은 고립된 일본 군인들을 만나면 묶어놓고 때렸다. 때려서 죽였다. 일본군이 대궐 문 양쪽에 기관포를 설치하고 한국 대신들의 집에 헌병을 세웠다. 일본군은 일본인 밀집 거주지역인 진고개의 경비를 강화했다. 한국 고관들이 가족들을 진고개 안쪽으로 옮겼다. 해산된 군인들이 의병 부대에 가세했다. 의병들은 전국 산골, 도회지, 섬에서 싸우다 죽었다. 져서 자살했고, 잡혀가 죽임을 당했다.

 

p78

 이토는 후임 통감에게 주는 문서를 비서관에게 맡기고 나서, 경시총감을 불러서 지시했다. 

 - 위생에 관한 명령이다. 서울 도성 안 거리에서 방분, 방뇨를 금하라. 아동들도 포함시켜라. 집안의 분뇨를 길에 버리지 못하게 하라. 분뇨는 반드시 수거해서 처리장에 버리도록 행정을 조직해서 시행하라. 걸인과 부랑자들의 문전걸식을 금한다. 이들을 도성 밖에 수용하라. 훈령으로 알리고 병력으로 단속하라. 같은 명령이 반복되면 권위가 훼손되어서 시행하기 어려워진다. 분뇨의 문제는 거듭 말하지 않겠다. 이번에 엄단해서 통감의 뜻을 보여라.

 이토는 서울에 처음 부임했을 때 똥냄새에 질겁을 했다. 어른과 아이들이 길바닥에서 엉덩이를 까고 앉아 똥을 누었고, 집집에서 아침마다 요강을 길바닥에 쏟았다. 장마 때는 변소가 넘쳐서 똥덩이가 떠다녔다. 똥냄새는 마을 골목마다 깊게 배어 있었고 남대문 거리, 정동 거리에도 똥 무더기가 널려 있었다. 통감부 직원들이 밤길을 돌아다니다가 똥을 밟고 미끄러졌다는 얘기를 이토는 요정에서 술 마시다가 기생들한테 들었다. 

이토는 덕수궁에서 만난 조선 대신들을 불러 세우고 거리의 똥을 치우라고 말했다. 통감이 똥 문제를 이야기하자 조선 대신들은 얼굴을 돌렸다.

 - 통감 각하의 살피심이 이처럼 세밀하시니 두렵습니다.

 - 분뇨의 문제는 인의예지에 선행하는 것이오. 이것이 조선의 가장 시급한 당면 문제요. 즉각 시정하시오.

 이토는 통감부와 조선 조정을 거듭 다그쳤으나 거리는 여전히 똥바다였다. 똥은 틀어막을 수가 없었고, 먹고 누는 일을 금할 수가 없었다. 통감부를 떠나면서 이토는 서울 도심에 공중변소를 늘리고 분뇨를 길에 버리는 자들을 엄단하라고 거듭 지시를 내렸다. 목숨의 안쪽에서 발생하는 것이므로 똥이란 당하기 어렵다... 라고 이토는 속으로 중얼거렸다. 날마다 새 똥이 거리에 널려 있었다.

 

p127

 전쟁의 결과가 섬멸적인 압승일수록 제삼국의 개입을 차단하기가 쉽고 새로운 판도를 기존 질서로 정립시키기가 쉽다는 것을 이토는 청일전쟁이 끝나고 서양 여러 나라들과 외교 분쟁을 겪으면서 알게 되었다. 그것은 수십만의 주검을 치르고 얻은 피의 교훈이었다.

 

p184

 범인이 안중근이라는 말을 들었을 때 뮈텔은 황해도 산골에서 길을 안내하던 안중근과 대학교를 세워달라고 들이대던 안중근을 떠올렸다. 이토가 죽은 뒤에 안중근이 천주교인인가를 묻는 기자들의 질문에 뮈텔은 안중근은 이미 천주교인이 아니라고 대답했다.

 개인들의 영성이 꽃처럼 피어나면 그 꽃들이 모여서 문명을 이루고 하느님의 나라가 그 위에 세워지는 평화의 구도를 뮈텔은 아직도 이 황잡한 세상에 필 수가 없었다. 적개심에 가득찬 자에게 평화를 말할 수는 없었다.

 총으로 쏘아 죽이는 방식으로 증오를 표출한 천주교인의 죄악에 뮈텔은 상심했다. 백 년이 넘는 박해의 세월을 견디면서 죽음에 죽음을 잇대는 순교의 피 위에 세속의 거점을 겨우 확보한 조선 교회가 또다시 세속 권력과 충돌한다면 교회의 틀이 위태로워질 것을 뮈텔은 걱정했다. 뮈텔은 자신의 걱정을 신부와 신도들에게 말할 수가 없었다. 안중근은 사제를 능멸했고 교회의 가르침을 배반했으며, 교회 밖으로 나가서 살인의 대죄를 저질렀으므로, 그가 비록 영세를 받았다 해도 더이상 교회의 자식이 아니라고 뮈텔은 하느님께 고했다. 하느님은 세속의 일에 관하여 대답하지 않았다.

 

p196. 19장.

 이토의 영결식은 11월 4일 도쿄 히비야 공원에서 열렸다. 이토의 관은 아침 일찍 아카사카 레이난자카의 관저를 떠났다. 기마헌병대, 군악대, 의장대가 운구 대열의 선두를 이끌었다. 그 뒤로 대령급 군인 열두 명이 이토가 받은 훈장 스물네 개를 받들었고, 이토의 관 둘레를 육군 해군 장성들이 경위했다.

 장례위원회는 통나무를 새로 벌목해서 히비야 공원에서 임식 막사 마흔 동을 새로 지었다. 껍질 벗긴 새 나무의 향기가 식장에 가득찼다.

 이토의 관이 중앙에 놓이고 그 앞에 훈장 스물네 개가 늘어섰다. 법의를 걸친 승려들이 독경했고 러시아정교회의 주교가 금빛 십자가를 들고 입장했다. 일본 황태자 내외의 어사, 한국 태황제의 어사, 한국 황제의 어사, 한국 황태자의 어사들이 차례로 입장했다. 보병, 기병, 포병 2개 사단이 식장 외곽을 경비했고 해군이 의장을 맡았다.

 메이지는 이토의 장례 절차와 규모에 대해서 소상히 보고받고 윤허했다. 메이지는 이토의 장례식에 참석하지 않았다. 메이지는 이토의 죽음에 대한 자신의 심회를 발설하지 않았다. 대신들은 메이지의 침묵 앞에서 침묵했다. 시종들은 멀리서 메이지의 눈치를 살피며 입을 다물었다.

 같은 날 서울 장충단에서 한국 황실과 내각과 민간인들이 합동으로 관민 추도회를 열었다.

 흰 베로 장막을 치고 그 안에 이토의 위폐를 모셨다. 위패에 '문충공文忠公'의 시호를 써붙였다. 황족과 각부 대신, 고위 관리, 한성부민회 임원들, 각 지역 대표들이 이토의 위패에 절했다. 서울의 모든 학교가 수업을 중지했다. 교사들이 학생을 인솔해 와서 절했다. 수도 거주민들은 대문 앞에 삼베를 감은 반기半旗를 걸었다. 이토의 위패 앞에는 조선의 예법에 따라서 이쪽에서 저쪽까지 밥, 국, 떡, 육포, 푸성귀, 나물, 과일, 생선, 고기가 펼쳐져 있었다.

 

p204

 이토의 장례식을 치르기 전부터, 서울에 이토의 송덕비와 동상을 세우자는 건의들이 통감부에 접수되었다. 통감부는 허가하지 않았따. 통감부는 건의한 자들을 불러들여서 충정은 이해하나 바닥 민심이 어수선하니 경거망동을 삼가라고 경고했다.

 이토의 동상을 세운다고 모금을 해서 돈을 떼어먹으려던 자들이 경시청에 검거되었다. 한국 황제의 어명을 받은 조문 사절을 사칭하는 자들이 대련으로 건너가서 이토의 관을 실은 배를 향해서 절했다.

 

 지방 군수와 서생들 중에서 힘있는 자들이 사죄단, 위문단을 구성해서 일본으로 가면서 그 여행 비용을 주민들에게 걷었다. 뜻있는 자들이 모여서 이토의 죽음을 사죄하러 일본에 가려고 13도 인민 도일渡日 대표단을 결성했다.

 도쿄의 한국 황태자 이은은 태사인 이토의 죽음을 애도해서 삼 개월 복을 입고 식음을 간소히 했다.

 서울의 무당 수련은 태황제의 총애를 입어서 궁녀들의 부축을 받으며 대궐을 드나들었다. 수련은 원구단에서 가까운 자리에 굿판을 벌이고 노래하고 춤추어서 총 맞아 죽은 이토의 혼백을 위로하고 극락왕생을 빌었다. 태황제는 늘 수련에게 상금 명목으로 많은 돈을 주었다. 이날 굿판에 육백여 명이 모여서 먹고 마셨는데, 비용은 모두 수련이 자비로 부담했다.

 

 일본 신문들은 이토의 죽음을 맞은 도쿄 화류계의 슬픔을 소상히 보도했다. 슬픔은 고요하고 단정했다. 도쿄 아카사카의 게이샤 우메코梅子는 이토의 여행길을 여러 번 모셔서 화류계의 선망을 받아왔다. 이토가 죽은 다음날, 우메코는 요정으로 몰려온 기자들을 만나지 않고 방안에서 나오지 않았다. 요정의 늙은 마담이 기자들 앞에 나와서

 - 우메코는 어른을 모신 일을 발설하지 않는다. 우메코는 지금 화장을 지우고 슬픔에 잠겨 있다. 인터뷰에 응할 수 없는 슬픔으로 인터뷰를 대신한다.

 라고 말했다. 기자들은 우메코의 슬픔의 품격을 평가하는 기사를 썼다. 이 요정의 주방장 아베는

 - 어른의 식성은 늘 깔끔했다. 요란한 상차림을 싫어하셨다. 생선회, 은행구이, 야채 절임과 된장국 정도였다. 계절에 민감하시어, 철마다 생선을 바꾸어 드렸다. 기름진 생선은 드시지 않았다.

 라고 말했다. 기자들이 이토의 식성을 기사로 썼다.

 진자의 게이샤 하나코는 

 - 십여 년 전에 연회에서 처음 뵌 후 자주 사랑받았다. 저의 누추한 집에도 가끔 오셨다. 술 드시면서 늘 서화와 문장을 말씀하셨다. 많이 취하시면 야한 말씀도 잘하시고 저를 간지럼 태우면서 노셨다.

 라고 말했다.

 교토 화류계의 슬픔은 더 깊고 우아했다.

 ..... 이토 공작 각하께서는 국사로 바빠서 주로 도쿄에 계셨지만 공작 각하의 마음은 늘 교토의 풍류를 그리워하시었고, 틈만 나면 교토에 오셔서 저희들을 사랑해주시었다.... 공작 각하께서는 저희들 앞에서 국사를 말씀하지 않으셨지만, 나라의 일이 순조롭게 잘 풀릴 때는 포도주를 드시고 나라의 일이 어렵게 꼬일 때는 위스키를 드신다는 것을 저희들은 눈치로 알고 있었다.... 공작 각하께서 저희들의 교태에 눈길을 주지 않으시고, 깊은 시름에 잠겨서 독한 위스키를 거푸 드시면 저희들은 마음이 아팠다..... 이런 속마음의 깊이는 풍류의 본향이 교토의 게이샤가 아니면 알 수가 없다..... 라고 기온의 늙은 게이샤가 말했다고 지방신문이 인물란에 썼다.

 

p229

 재판 과정에서 안중근의 정치적 동기를 현실에 대한 무지에서 비롯된 것으로 드러내 보이고, 문명한 절차에 따라 사형에 처한다는 것이 일본 외무성의 방침이었다. 우덕순에 대한 사법적 처리도 이 방침 안에 있었다. 외무성은 이 방침을 관동도독부 고등 법원에 전문으로 지시했다. 외무성의 전문은 재판이 시작되기 전에 미리 도착했다. 고등법원은 외무성의 방침을 지방법원에 구두로 하달하고 전보로 접수한 공문을 극비로 보관했다.

 재판장 마나베는 안중근과 우덕순 사이에 지휘 복종의 관게를 설정하기가 어려웠다. 검찰관 미조부치가 법원에 제출한 신문조서에서도 그 관계는 분명하지 않았다. 우덕순은 안중근의 제안에 따라 범행에 가담했지만 하수인이라고 보기는 어려웠고, 자신의 동기를 논리적으로 진술하지도 않았다.

 재판장 마나베가 안중근에게 물었다.

 - 이 일을 하기 위해 우에게 뭐라고 말했나?

 - 이토가 하얼빈에 오는데, 함께 가서 죽이자고 말했다.

 - 그것이 언제인가?

 - 우라지를 출발하기 이틀 전이다.

 - 우는 동의했나?

 - 동의했다.

 - 다른 의견을 말하지 않았는가?

 - 다른 말은 없었다.

 - 떠나기로 결정한 것은 언제였나?

 - 그날 밤이었다.

 - 그래서 즉시 떠났는가?

 - 다음날 역으로 갔더니 기차가 이미 떠나서 그다음날 출발했다.

 

 마나베는 우덕순에게 물었다.

 - 그대는 안중근과 나랏일을 이야기한 적이 있는가?

 - 없다.

 - 그대는 안중근과 한국의 독립에 관해 이야기한 적이 있는가?

 - 없다.

 - 그대는 안과 동행하기로 약속했는가?

 - 나는 이토를 죽일 목적이었다.

 - 안은 왜 이토를 죽이려 했는가?

 - 그것을 안중근에게 들을 필요는 없었다. 모든 한국인이 이토를 증오하고 있다.

 - 안의 제안에 대해서 그대는 뭐라고 말했나?

 - 다만, 함께 가자고 했다.

 - 그 밖에 그대의 의견을 말하지 않았나?

 - 어떤 상의도 하지 않았다.

 - 안중근은 의병으로서 한 일이라고 하는데, 그대는 의병과 관련이 있는가?

 - 나는 다만 일개의 국민으로서 했다. 의병이기 때문에 하고, 의병이 아니기 때문에 하지 않는다는 것은 있을 수 없다.

 - 그대는 안의 명령에 따른 것인가?

 - 아니다. 나는 안에게 명령을 받을 의무가 없다. 또 명령을 받을 의무가 있다 하더라도 이런 일은 명령으로 할 수 있는 일이 아니다. 나는 내 마음으로 한 것이다.

 - 이토 공은 고관으로 수행원과 경호원이 많은데, 그대는 암살에 성공할 수 있으리라고 생각했는가?

 - 그것은 사람의 결심 하나로 되는 일이다. 결심이 확고하면 아무리 경호가 많아도 성공할 수 있다고 믿었다.

 

 통역관이 우덕순의 진술을 일본말로 옮겼다. 방청석이 고요했다.

 마나베는 자신의 질문이 허물어지고 있는 것을 느꼈다. 우덕순은 마음속의 사실을 들이대며 질문에 답했고, 사실을 들이대며 질문을 부수었다. 우덕순은 행위와 관련된 사실을 말했고, 동기와 관련된 사실을 말했다. 우덕순은 마나베의 질문이 미리 설정한 틀에 갇히지 않았다.

 안중근의 진술과 우덕순의 진술을 행위의 미세한 대목까지 일치했다. 마나베는 두 피고인의 진술의 상이점을 찾아내서 그 틈새를 파고들려 했으나 쉽지 않았다. 마나베는 안중근에게 물었다.

 - 그대는 공명정대한 일을 한다면서 어째서 검찰관 신문 때 공모자 우덕순의 일을 숨기고 말하지 않았는가?

 - 우덕순이 말하기 전에 내가 말할 필요가 없다고 생각했다. 나는 내 일만 말하면 그것으로 그만이라고 생각한다.

 질문이 피고인에게 접수되지 않은 채 튕겨져 나왔다. 마나베는 동기의 정치성을 부수는 쪽으로 방향을 돌렸다.

 마나베는 안중근에게 물었다.

 - 어디를 겨누었는가?

 - 심장을 겨누었다.

 - 거리는?

 - 십보 정도였다.

 - 이토 공의 수행원에게도 쏘았는가?

 - 누가 이토인지 몰랐기 때문에 이토의 오른쪽으로도 쏘았고 그다음에 왼쪽으로 쏘았다.

 - 성공하면 자살할 생각이었는가?

 - 아니다. 한국의 독립과 동양 평화를 위해서는 단지 이토를 죽인 것만으로는 죽을 수 없다.

 - 그런 원대한 계획이었다면 범행 후 체포당하지 않으려 했을 텐데, 도주할 계획을 세웠는가?

 - 아니다. 나쁜 일을 한 것이 아니므로 도주할 생각은 없었다.

 

 질문이 답변을 누르지 못했다. 질문과 답변이 부딪쳐서 부서졌고, 사건의 내용을 일정한 방향으로 엮어나가지 못했다. 답변이 질문 위에 올라탈 기세였다. 피고인은 자신에게 불리한 진술을 힘주어 말했다. 진술은 유불리를 떠나 있었다.

 마나베는 검찰관 미조부치가 신문 과정에서 안중근에게 처자의 사진을 보여주었다는 기록을 떠올렸다. 마나베는 그것이 실속 있는 신문 기법이라고 생각했다. 마나베는

 - 그대의 범죄와는 관계없지만 참고로 알려준다.

 라고 서두를 꺼내고, 김아려와 어린 분도가 이미 미조부치의 신문을 받았다고 안중근에게 말했다.

 - 그대의 처는 그대와 부부 사이라는 것을 끝내 부인했다. 그러나 그대의 아이는 그대의 사진을 보고 아버지라고 말했다. 그대의 처는 끝까지 부인하고 있지만 나는 그들이 그대의 처자라는 것을 알고 있다.

 마나베는 안중근의 얼굴을 쳐다보며 사건과 관련 없는 사실이라고 다시 한번 강조했다. 안중근은 천장을 쳐다보고 있었다. 마나베는 검찰에서 넘어온 증거물을 제시했다. 안중근과 우덕순은 증거물들을 자신의 것이라고 인정했다.

 마나베가 말했다.

 - 유리한 증거가 있으면 말하라.

 안중근이 말했다.

 - 없다.

 우덕순이 말했다.

 - 없다.

 안중근이 이어서 말했다.

 - 나는 헛된 일을 좋아해서 이토를 죽인 것이 아니다. 나는 이토를 죽인 이유를 세계에 발표하는 수단으로 이토를 죽였다.   ... 이제부터 그 사유를 말하고자 한다.

 마나베는 더이상 재판을 공개하면 공공의 안녕질서를 해할 우려가 있다고 선언하고 방청객에게 퇴정을 지시했다. 변호사가 마나베에게 안중근의 의견을 서면으로 접수해달라고 요청했다. 

 마나베가 안중근에게 말했다.

 - 그대의 정치적 의견을 서면으로 제출하면 어떤가?

 - 나는 말하기 좋아서 여러 말을 하는 것이 아니다. 나의 거사는 의견을 진술할 기회를 얻기 위한 것이다. 공개를 금지한 이상 진술할 필요는 없다.

 - 앞으로도 진술하지 않겠는가?

 - 방청객이 없으면 진술하지 않겠다.

 

 - 그렇다면 앞으로 진술할 필요가 있다고 생각하는 바를 지금 진술하라.

 - 나의 목적은 동양 평화이다. 무릇 세상에는 작은 벌레라도 자신의 생명과 재산의 안전을 도모하지 않는 것은 없다. 인간 된 자는 이것을 위해서 진력하지 않으면 안 된다.

 이토는 통감으로 한국에 온 이래 태황제를 폐위시키고 현 황제를 자기 부하처럼 부렸다. 또 타국민을 죽이는 것을 영웅으로 알고 한국의 평화를 어지럽히고 십수만 한국 인민을 파리 죽이듯이 죽였다. 이토, 이자는 영웅이 아니다. 기회를 기다려 없애버리려고 생각하고 있었는데 이번에 하얼빈에서 기회를 얻었으므로 죽였다.

 검찰관은 내가 이토를 오해해서 죽였다고 말하는데, 나는 검찰관이 나를 오해하고 있다고 생각한다. 나는 오해해서 죽인 것이 아니다. 검찰관이 내 다섯 살 난 아들에게 내 사진을 보여주니까 아버지라고 말했다고 조서에 썼다. 그 아이가 세 살 때 내가 집을 떠났으니 아이가 내 얼굴을 알 방도가 없다. 이로써 검찰 취조가 엉터리임을 알 수 있다.

 - 유리한 증거가 있으면 말하라.

 - 나는 증거물에 대해서는 의문이 없다. 다만 나의 목적에 대해서 할말이 있다.

 - 대개 진술하지 않았는가?

 - 그렇지 않다. 십분의 일도 말하지 못했다.

 - 여기는 의견을 재판하는 자리가 아니다. 사실관계에 있어서 말할 필요가 있다면 간추려서 말하라. 사실관계 이외의 말을 하면 제지시키겠다.

 - 필요한 몇 가지를 말하겠다. 내가 이토를 죽인 까닭은 이토를 죽인 이유를 발표하기 위해서다. 오늘 기회를 얻었으므로 말하겠다. 나는 한국 독립전쟁의 의병 참모중장 가격으로 하얼빈에서 이토를 죽였다. 그러므로 이 법정에 끌려 나온 것은 전쟁에서 포로가 되었기 때문이다. 나는 자객으로서 신문을 받을 이유가 없다. 이토가 한국 통감이 된 이래 무력으로 한국 황제를 협박하여 을사년 5개 조약, 정미년 7개 조약을 체결하였다. 이것을 알기 때문에 한국에서 의병이 일어나서 싸우고 있고 일본 군대가 진압하고 있다. 이것이야말로 일본과 한국의 전쟁이라 하지 않을 수 없다....

 - 그렇게 깊이 나간다면 공개를 제지할 수밖에 없다. 방청인들은 모두 퇴정....

 

 진술을 제지하고 방청객들을 내보낼 때마다 마나베는 위기를 느꼈다. 사실관계를 파고들수록 정치성이 드러나고 있었고, 외국 언론들의 관심은 높아졌다. 마나베는 서둘러서 모든 일을 끝냈다. 

 

 안중근과 우덕순은 정치범이 아니고 사전 공모에 따라 범행한 살인범이라고 미조부치는 결론지었다. 미조부치는 안중근에게 사형을, 우덕순에게 징역 이 년을 구형했다.

 

  마나베는 안중근이 이토를 살해한 죄에 사형을 선고하고, 이미 사형을 결정했으므로 안중근이 이토의 수행원에 대해 저지른 세 건의 살인미수죄에 대해서는 형을 과하지 않는다고 선고했다. 또 우덕순에게는 법이 정한 범위 내에서 비교적 가벼운 삼 년 형에 처한다고 선고했다. 수사와 재판은 모두 끝났다.

 간수가 안중근과 우덕순에게 용수를 씌우고 마차에 실어서 여순감옥으로 끌고 갔다. 마차가 법원 마당을 떠날 때 방청객들이 몰려와서 구경했고, 기자들이 사진을 찍었다.

 

 

최근 영화 한산을 보고 생각이 나서 다시 한번 읽어봤다. 읽은지 10년이 넘어가고 이순신 장군에 대한

마음가짐이 달라진 탓인지 소설의 내용이 더욱 절절히 마음에 와닿는다.

 

문장의 농밀함과 문맥에 흐르는 힘은 김훈 작가의 글솜씨 덕분이기도 하겠지만, 이순신 장군님의 인생에 흐르는 비장함에 기인한 바도 적지 않을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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p107

 임진년에 여러 포구에서 이겼을 때, 매번 적병의 숫자를 장계에 써보낸 것이 오 년이 지난 정유년에 조정에서 문제가 되었다. 전공을 허위로 보고해서 임금을 기만하고 조정을 능멸했다는 것이었다. 그것이 내가 죽어야 할 죄목의 하나였다. 견내량에서 이겼을 때부터 나는 장계의 적병의 숫자를 적지 않았다. 그날 견내량 싸움을 끝내고 한산 통제영으로 돌아와 장계를 쓸 때, 나는 그 숫자가 어느 날 나를 죽이게 되리라는 예감에 몸을 떨었다. 그날 밤 나는 종사관을 물리치고 밤새도록 혼자 장계를 썼다. 한산 통제영에서 장계를 쓰던 임진년의 여름밤은 달이 밝았다. 나는 내 무인된 운명을 깊이 시름하였다. 한 자루의 칼과 더불어 나는 포위되고 있었고 세상의 덫에 걸려 있었지만, 이 세상의 칼로 이 세상의 보이지 않는 덫을 칠 수는 없었다. 한산 통제영에서 그리고 그후의 여러 포구와 수영에서 나는 자주 식은땀을 흘렸고, 때때로 가엾고 안쓰러워서 칼을 버리고 싶었다.

 

p108

 명량의 장계를 보낸 지 두 달 만에 논공행상이 내려왔다. 선전관은 오지 않고, 조정의 명을 받을어 도원수부가 시행됐다. 거제 현령 안위가 정삼품 통정대부의 품계를 받았고 전투에 참가했던 여러 읍진 수령과 군관들이 승진했다. 나에게는 상금으로 은전 스무 냥을 보내왔다. 스무 냥의 무게와 질감은 섬뜩했다. 그 스무 냥 속에서 남쪽 바다를 들여다보는 임금의 눈은 가늘게 번뜩이고 있었다.

 스무 냥이 내려온 지 이틀 뒤에, 임금이 보낸 선전관 이원길이 목포 앞바다 고하도 수영에 도착했다. 이원길은 수하를 거느리고 병영 막사 공사장까지 나를 찾아왔다. 서울 출신 문관인데, 바다를 평생 처음 본다고 했다. 몸매가 가냘폈고 흰 손가락이 길었다. 먼 길을 온 사람 같지 않게 그는 의관이 번듯했고 여독의 기색이 없었다. 수군 병영의 온갖 너저분한 풍경에 그는 자주 눈살을 찌푸렸다. 나는 공사장 천막에서 그를 맞았다. 나는 인사했다.

- 객고가 크시겠소, 전하께서 수군을 이처럼 염려하여주시니 감읍할 뿐이오.

- 전하의 근심이 실로 깊소이다. 달아난 배설 말이오.

 명량 전투 직전에 탈영 도주한 경상 우수사 배설을 체포해서 끌고 가는 것이 임무라고 그는 밝혔다. 그가 데리고 온 부하들 중에는 무관들이 섞여 있었다. 배설은 이미 수군에서 도망쳤는데, 배설을 체포하는 일로 선전관이 남해의 수군 수영에까지 온다는 것은 이해할 수 없는 일이었다.

- 배설은 이미 달아났지 않소? 배설을 잡으려면 이리로 오실게 아니라 그의 본가 마을로 가셔야 하지 않겠소? 경상도 성주 말이오.

- 통제공, 그게 그리 간단치가 않소이다. 성주에도 군사들을 보냈으나 잡지 못했소. 배설이 성주에 들어온 흔적도 찾지 못했소. 배설이 비록 달아났다 하나 본래 담력 있는 무장이었소. 따르던 장졸들도 많았던 것으로 아오. 이자가 달아나서 대체 무슨 짓을 하려는 것인지. 전하의 근심이 실로 여기에 있는 것이오.

 나는 겨우 알았다. 임금은 수군통제사를 의심하고 있는 것이다. 명량 싸움의 결과가 임금은 두려운 것이다. 수영 안에 혹시라도 배설을 감추어놓고 역모의 군사라도 기르고 있는 것이나 아닌지, 그것이 임금의 조바심이었다.

 이원길은 열흘 동안 수영에 머물렀다. 이원길은 데리고 온 수하들을 풀어 병영 안을 모두 뒤졌고 수영 인근 백성들의 마을 헛간까지 뒤졌다. 이원길은 명량 전투 이전과 이후의 장졸들의 숫자를 점검했고 각 읍진의 탈영자 숫자를 확인했다. 이원길의 수하들이 수영의 모든 군관들을 불러서 배설의 탈영 경위와 탈영 직전 상황을 수사했다. 이원길의 수사의 초점은 배설이 수영에서 탈영했느냐 아니냐에 맞추어져 있었다. 이원길은 귀로에 우수영, 벽파진, 삼지원까지 뒤지고 돌아갔다.

 

 

 이원길이 돌아간 지 보름 뒤에 임금이 보낸 면사첩(免死帖)을 받았다. 도원수부의 행정관이 면사첩을 들고 왔다. '면사' 두 글자뿐이었다. 다른 아무 문구도 없었다. 조정을 능멸하고 임금을 기만했으며 임금의 기동출격 명령에 따르지 않은 죄에 대하여 죽음을 면해주겠다는 것이었다. 면사첩을 받던 날은 하루 종일 비가 내렸다. 나는 '면사' 두 글자를 오랫동안 들여다보았다. 죄가 없다는 것도 아니고 죄를 사해주겠다는 것도 아니고 다만 죽이지는 않겠다는 것이었다.

 너를 죽여 마땅하지만 죽이지는 않겠다. 고 임금은 멀리서 그렇게 말하고 있었다. '면사' 두 글자 속에서, 뒤척이며 돌아눕는 임금의 해소기침 소리가 들리는 듯했다. 글자 밑의 옥새는 인주가 묻어날 듯이 새빨갰다. 칼을 올려놓은 시렁 아래 면사첩을 걸었다. 저 칼이 나의 칼인가 임금의 칼인가. 면사첩 위 시렁에서 내 환도 두 자루는 나를 베는 임금의 칼처럼 보였다.

 그러하더라도 내가 임금의 칼에 죽으면 적은 임금에게 갈 것이었고 내가 적의 칼에 죽어도 적은 임금에게도 갈 것이었다. 적의 칼과 임금의 칼 사이에서 바다는 아득히 넓었고 나는 몸 둘 곳이 없었다.

 

 

 종사관 김수철이 저녁때 막사 신축 공정과 수군 징모 실적을 보고하는 일로 내 숙사에 들었다. 서안을 사이에 두고 마주앉은 김수철은 실눈을 뜨고 담벽에 걸린 면사첩을 들여다보았다. 김수철의 얼굴이 하얗게 질렸다. 내가 한산 통제영에서 체포되었을 때 김수철은 내 함거의 뒤를 따라 서울까지 걸어서 올라왔었다. 내가 하옥되었을 때, 김수철은 임금을 대면했다. 일개 지방 수영의 종사관에 불과한 그가 어떻게 임금을 대변할 수 있었는지 나는 모른다. 아마 영의정 류성룡이 길을 열어주었을 것이다. 김수철은 임금 앞에서 이마로 대전 마루를 찧으며 울었다. 나를 심문하던 위관들이 김수철의 일들을 말해주었다. 그때 김수철은 울면서 말했다고 한다.

- 전하. 통제공의 죄를 물으시더라도 그 몸을 부수지 마소서. 전하께서 통제공을 죽이시면 사직을 잃으실까 염려되옵니다.

 임금이 대답했다.

- 너희들이 남쪽 바다에서 사직을 염려했느냐?

 김수철은 수영을 이탈한 죄로 곤장 쉰 대를 맞고 풀려났다.

 김수철의 시선은 오랫동안 면사첩에 박혀 있었다. 그가 눈물을 떨구었는데, 그의 얼굴은 흔들리지 않았다. 그가 환갑연의 덕담 같은 목소리로 말했다.

- 나으리. 오래오래 사십시오.

- 알았다. 내 그럴 작정이다.

- 보고는 내일로 미루리다. 편히 주무십시오.

- 그래라. 피곤하니 물러가라.

 김수철은 들고 왔던 문서 두루마리를 펼치지 않은 채 그대로 들고 나갔다.

 

p253

 정탐이 돌아가던 날 저녁에 남해도 현감의 급보가 수영에 도착했다. 명의 도사부都司府 담종인이 나에게 보낸 문서가 남해도에 도착했다는 것이었다. 남해 현감은 배를 탄 전령을 띄워 담종인의 문서를 나에게 전했다. 전령을 태운 협선은 열 명이 노를 저어 급히 수영에 도착했다.

 명군의 통신 축선이 적이 일부를 장악한 남해도에까지 닿아 있고 명군의 문서 연락병들이 남해도에까지 드나들고 있다는 것은 놀라운 일이었다. 붉은 비다으로 싼 그 두루마리는 개전 이후 명군 최고사령부가 나에게 보낸 최초의 문서였다. 종사관 김수철을 방안으로 불러들여 문서를 함께 읽었다.

 

  이제 일본군 수뇌부들이 속속 귀순하고 있으니 그 마음이 실로 어여쁘다. 왜는 본래 인간의 언어를 알아듣지 못하는 종자들이거니와, 우리 천자의 크고 깊은 교화의 덕이 저 금수와도 같은 왜에게까지 미쳐 일본군은 이제 군사를 거두어 돌아가려 하고 있으니 실로 천자의 덕이 아니고서야 바랄 수 없는 일이다. 그러므로 너희는 이제 함대를 해산하도 군사를 풀어헤쳐서 고향으로 돌아가거라. 인간은 인간이므로 마땅히 고향으로 돌아가야 한다. 그럿이 창생의 슬픔과 고통을 지극히 헤아리는 천자의 뜻이다. 이제 너희는 일본군 진영에 가까이 가서 공연한 싸움을 일으키지 말고 천자의 변방 남쪽 바다를 소란케 하지 말라. 내, 너희들의 수영을 한번 들여다보고 스다듬어주고 싶은 마음 간절하나 멀어서 가지 못하고 이제 글을 전하니 내가 친히 너희에게 간 것과 무엇이 다르랴. 대저 천자의 무장은 정한을 가벼이 드러내는 일을 삼가는 것이다. 그러니, 그리 알라.

 

 읽기를 마치고 김수철은 말없이 창밖으로 시선을 돌렸다. 썰물은 갯벌 위에 새들이 내려앉고 있었다. 바람과 물결이 함께 먼 바다로 몰려나가서 바다는 비어 있었다. 섬 너머 수평선 쪽에서 바람 속을 날뛰는 물결이 하얗게 일어섰다. 빈 바다에는 시간의 흔적이 없었고, 지나간 싸움의 흔적이 없었다. 내가 알지 못하는 내 마음의 오지에서 징징징 칼이 울었다.

 - 수철아, 고향으로 돌아가겠느냐?

 김수철의 시선은 바다 쪽에서 돌아오지 않았다. 바다를 바라보는 그의 눈에 물기가 번졌다.

 - 나으리, 이미 돌아갈 고향이 없습니다..

 - 일본군과 명군은 돌아갈 고향이 있을 것이다.

 김수철이 내 쪽으로 시선을 돌렸다.

 - 나으리, 이 문서는 장졸들에게 발설치 마십시오.

 - 너도 발설치 마라. 조정이 가엾구나. 우리는 가엾지 않다.

 

 

작게는 재일 조선인의 디아스포라. 넓게는 소외받는 모든 이들은 위한 찬가.

 세계인 모두에게 공감받을 수 있는 무언가가 이 작품에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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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권.

p21

 하숙인들은 가게에 갔다가 신문을 읽을 줄 아는 남자들한테서 들었다며 대공황인지 뭔지가 전 세계를 덮쳤다는 이야기를 식사 시간에 자주 꺼냈다. 불쌍한 미국인들이 가련한 소련인들과 중국인들 못지않게 굶주림에 허덕이고 있다는 이약였다. 심지어 천황의 은총 아래 무탈하게 지내던 일본인들도 배를 곯는다고 했다. 그러니 그 겨울에 살아남은 사람들은 약삭빠르고 강인한 이들이 틀림없었다. 하지만 차마 입에 담을 수 없을 정도로 참혹한 소식들이 너무나 많았다. 어린 아이들은 잠자리에 들었다가 다시는 잠에서 깨어나지 못했고, 여자 아이들은 국수 한 그릇에 몸을 팔았으며, 노인들은 젊은이들이라도 먹고 살 수 있게 죽을 곳을 찾아 남몰래 떠나버렸다.

 

p69

 "어디를 가든 썩어빠진 사람들이 있어. 그들은 좋은 사람들이 아니야. 아주 나쁜 사람을 보고 싶니? 그럼 평범한 사람은 상상도 못할 성공을 안겨줘 봐. 언제든지 하고 싶은 대로 할 수 있게 되었을 때, 어떤 행동을 하는지 한번 보는 거야."

p249

 선자는 항상 밭이 있으면 좋겠다고 생각했다. 고향에서 어머니의 하숙집에는 부엌 뒤쪽에 작은 텃밭이 있어서 하숙인들이 내는 돈보다 두 배는 더 많이 먹을 때도 음식을 제공할 수 있었다. 신선한 식품의 가격은 계속 올랐고, 노동자들은 가장 기본적인 것들을 살 여유도 없었다. 최근에는 몇몇 손님들이 김치 한 포기를 통째로 살 수가 없어서 반으로 쪼개서 조금만 살 수 있는지 묻기도 했다

p267

 조선인들이 일본이 승리하기를 바란다고? 천만의 말씀이다. 하지만 일본의 적이 이긴다면 조선인들에게 무슨 일이 일어날까? 조선인들이 스스로를 구할 수 있을까? 분명 그렇지 않을 것이다. 그러니 내 밥그릇이나 잘 챙기자는 것이 조선인들이 남모래 품고 있는 속마음이었다. 가족을 구하고, 자기 배를 채우고, 관리자들을 경계하자. 조선의 독립주의자들이 나라를 되찾지 못한다면 아이들에게 일본어를 가르쳐 출셋길을 열어주자. 적응해서 살자. 이만큼 간단한 것이 또 어디 있겠는가? 조선의 독립을 위해 싸우는 모든 애국자나 일본을 위해서 싸우는 재수 없는 조선인 개자식이나 다들 먹고 살려고 애쓰는 만 명의 동포 중 하나일 뿐이었다. 결국 굶주림을 이길 수 있는 것은 아무것도 없었다.

 

p271

 그러나 노아가 이 모든 비밀들보다 더 비밀스럽게 품고 있는 은밀한 소망은 일본인이 되고 싶다는 것이었다. 이카이노에 살면서 절대 조선으로 돌아가지 않는 것은 아무에게도 말할 수 없는 노아의 가장 큰 꿈이었다.

 

p280

 공장주인 시마무라는 비품실 크기만 한 유리로 된 사무실에 앉아 있었다. 투명한 유리창 덕분에 소녀들이 일을 잘하고 있는지 감시할 수 있었다. 일을 잘 못하는 여자아이를 발견하면 요셉을 불러 들여서 그 아이에게 주의를 주라고 시켰다. 두 번 주의를 받으면 6일 동안 열심히 일해도 주급을 받지 못했다. 시마무라는 파란 천으로 장정한 원장에다 소녀들의 이름을 기입해놓고 그 옆에 경고 횟수를 기록해두었다. 감독관인 요셉은 직원들에게 벌을 주기 싫어했지만 시마무라는 그것이 조선인의 약한 기질을 보여주는 또 다른 증거라고 생각했다. 시마무라는 모든 아시아 국가를 일본인의 효율성과 치밀함, 높은 조직 수준으로 다스린다면 아시아 전체가 번영하고 발전해서 저 무도한 서구를 물리칠 수 있다고 믿었다. 게다가 다른 대부분의 친구들과는 달리 외국인 노동자를 고용하는 자신이 아무 마음씨 좋고 공정한 사람이라고 생각했다. 친구들이 외국인 노동자들은 흐리멍덩하게 일을 한다고 지적하면 시마무라는 일본인들이 그들에게 무능과 태만을 혐오하라고 가르치지 않으면 그들이 뭘 배우겠냐고 반박했다. 뿐만 아니라 후세를 위해서 규범을 지켜야 한다고 생각했다.

 노아가 딱 한 번 공장에 들어온 적이 있었는데 시마무라는 그것을 탐탁지 않아 했다. 한 일 년 전에 경희가 열병으로 시장에서 기절을 하자 노아가 요셉을 데리러 왔었다. 시마무라는 마지못해서 요셉에게 아내를 돌봐주라고 했지만, 다음 날 아침 다시는 그런 일이 있으면 안 된다고 요셉에게 말했다. 기계로 돌아가는 공장 두 개를 유능한 정비공 없이 어떻게 돌릴 수 있겠냐는 것이 그 이유였다. 요셉의 아내가 또 아프거나 하면 그때는 동네 사람이나 다른 가족에게 도움을 청해야 했다. 요셉은 근무 시간에 공장을 떠날 수 없었다. 비스킷 생산은 전쟁 명령이었고, 전쟁 명령은 즉각 수행해야 했다. 남자들이 목숨을 바쳐 나라를 위해 싸우고 있으니 모든 가족이 희생을 감수해야 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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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권.

p326

 "그래, 멍청이들은 계속 널 건드리고 네 아버지가 파친코 주인이라는 걸 알아차릴 거야. 사람들이 어떻게 그걸 알겠어?"

 "전 말한 적 없어요."

 "모두 다 알고 있어, 솔로몬. 일본에서는 부자 조선인, 아니면 가난한 조선인이야. 네가 부자 조선인이라면 파친코와 관련이 있는 거지."

 "아버지는 훌륭한 분이세요. 믿을 수 없을 정도로 정직하고요."

 "그래, 분명 그런 분일거야." 가즈는 여전히 가슴 위로 팔짱을 끼고서 솔로몬을 똑바로 쳐다보았다.

 솔로몬이 주저하다가 결국 이야기했다. "아버지는 폭력배가 아니에요. 나쁜 짓을 하지 않아요. 평범한 사업가죠. 세금을 모두 내고 모든 일을 규칙대로 처리해요. 그런 사업을 불법적으로 하는 사람들도 있지만 아버지는 한 치도 틀림없이 정확하게 일을 처리하고 도덕적인 분이에요. 파친코를 세 개 운영하고 있지만 그건...."

 가즈가 안심하고 말하라는 듯이 고개를 끄덕였다.

 "아버지는 자기 것이 아닌 것은 아무것도 받지 않아요. 돈에도 크게 관심이 없어요. 많은 돈을 기부하고...."

 애쓰코는 모자수가 직원들 몇 명을 위해서 양로원 비용을 지불해줬다고 말했다.

 "솔리, 솔리. 그러지마. 변명할 필요 없어. 조선인들에게는 일반적인 일을 할 수 있는 기회가 많지 않아. 너희 아버지는 다른 선택의 여지가 없어서 파친코를 선택한 게 분명해. 아마 훌륭한 사업가겠지. 네 포커 기술이 무에서 나왔다고 생각해? 네 아버지는 후지나 소니에서 일할 수 있었을지도 몰라. 하지만 그런 회사에서는 조선인을 고용하지 않잖아. 알지? 어이, 컬럼비아 대학생 청년, 사실 너도 고용해줄지도 의심스러워. 일본의 많은 곳에서 아직도 조선인들을 교사와 경찰, 간호사로 고용하지 않아. 넌 돈을 많이 버는데도 도쿄에서 방을 빌릴 수도 없잖아. 빌어먹을 1989년! 뭐, 네가 그 모든 것을 공손하게 받아들일 수도 있겠지만 그건 잘못된 거야. 난 일본인이지만 멍청하지 않아. 미국과 유럽에서 오랫동안 살았어. 일본인들이 이 땅에서 태어난 조선인들과 중국인들에게 하는 것은 미친 짓이야. 완전히 제정신이 아니야. 너희들은 혁명을 일으켜야 해. 그런데 그다지 항의를 하지 않잖아. 너와 네 아버지는 이 나라에서 태어났어. 그렇지?"

 솔로몬은 가즈가 왜 저렇게 열을 올리는지 모르겠다고 생각하면서도 고개를 끄덕였다.

 "네 아버지가 청부 살인자라 해도 난 신경 안 써. 네 아버지를 고발하지 않을 거야."

 "하지만 청부 살인자가 아닌데요."

 "어이, 애송이. 그거야 당연히 아니지." 가즈가 미소 지으며 말했다. "여자친구한테 가봐. 여자친구가 매력적이고 똑똑하다며, 그건 잘된 일이야. 결국에는 머리가 조흔 게 생각보다 훨씬 더 중요하거든." 가즈가 웃으며 말했다.

 가즈는 택시를 불러서 솔로몬에게 먼저 타고 가라고 했다. 다들 가즈가 일반적인 상사 같지 않다고 했는데 그 말이 진짜라고 솔로몬은 생각했다.

 

p340

 "아버지도 가게를 파는 게 어때요? 은퇴하는 거죠. 아버지도 이제 그럴 때가 되지 않았어요? 파친코는 일이 너무 많잖아요."

 "뭐라고? 사업을 그만두라고? 파친코 사업으로 식탁에 음식을 올리고 널 학교에 보냈어. 난 은퇴하기에는 아직 젊어!"

 솔로몬이 어깨를 으쓱했다.

 "게다가 내 가게를 팔면 어떻게 되겠니? 직원들이 해고될지도 몰라. 그럼 나이 든 직원들이 어디로 가겠니? 우리는 기계를 만드는 사람들에게 일자리를 주고 있어. 일본에서 파친코는 자동차 제조업보다 큰 사업이야."

p360

 피비가 전화를 받지 않아서 솔로몬은 하나가 있는 병원으로 갔다. 하나는 깨어 있었다. 라디오에서 팝 음악이 흘러나오고 있었다. 방은 여전히 어두웠지만 댄스음악 덕분에 나이트클럽처럼 생기가 돌아싸.

 "벌써 돌아왔어? 진짜 내가 그리웠던 모양이네. 솔로몬."

 솔로몬은 하나에게 모든 이야기를 다 했고, 하나는 끼어들지 않고 가만히 들어주었다.

 "넌 아버지 사업을 물려받아야 해."

 "파친코를?"

 "그래, 파친코. 안 될 게 뭐 있어? 파친코에 대해서 나쁜 소리를 해대는 멍청이들은 부러워서 그러는 거야. 네 아버지는 정직한 사람이야. 사기를 쳤다면 더 큰 부자가 될 수 있었겠지. 하지만 그렇게 하지 않았어도 부자가 됐잖아. 고로도 좋은 사람이야. 야쿠자일지도 모르지만 그게 무슨 상관이야? 난 상관 안 해. 고로가 야쿠자가 아니더라도 야쿠자에 대해서 잘 알 거야. 이 세상은 더러워, 솔로몬. 깨끗한 사람은 아무도 없어. 살아가는 건 더러워지는 거야. 좋은 가문 출신 IBJ(일본산업은행, BOJ(일본은행)에서 일하는 근사한 사람들을 많이 만나봤어. 그 인간들은 침대에서 구역질이 나는 짓을 하는 걸 좋아해. 많은 사람들이 사업을 하면서 나쁜 짓을 하지만 잡히질 않지. 내가 만났던 대부분의 인간들은 기회가 있을 때마다 남의 것을 훔쳤어. 그 인간들은 너무 겁이 많아서 진짜 야망을 품지도 못해. 잘 들어, 솔로몬. 여기서는 아무것도 변하지 않을 거야. 알겠어?"

 "그게 무슨 말이에요?"

"아이고 이 멍청아." 하나가 웃으며 말했다. "그래도 넌 나의 멍청이지."

 하나가 놀리자 솔로몬은 우울해졌다. 솔로몬은 예전에 이토록 지독한 외로움을 느낀 적이 있었는지 기억나지 않았다.

 "일본은 절대 변하지 않아. 외국인을 절대 받아들이지 않을 거야. 내 사랑, 넌 언제나 외국인으로 살아야 할 거라고. 저래 일본인이 되지 못해. 알겠어? 자이니치는 여행을 떠날 수 없는 거 알지? 하지만 너만 그런 게 아냐. 일본은 우리 엄마 같은 사람들도 다시 받아주지 않아. 나 같은 사람들을 절대 받아들이지 않지. 우리는 일본인인데도 말이야! 난 병에 걸렸어. 오래된 무역회사를 운영하는 어떤 일본인 남자한테서 옮은 병이야. 그 남자는 죽었어. 하지만 아무도 신경 쓰지 않지. 여기 의사들도 내가 떠나버리기를 바라고 있어. 잘 들어, 솔로몬, 넌 여기 머물러야 해. 미국으로 돌아가서는 안돼. 네 아버지 사업을 물려받아야 해. 부자가 되면 무엇이든 원하는 걸 할 수 있어. 하지만 아름다운 솔로몬, 저들은 우리가 괜찮은 사람이라는 생각을 절대 하지 않아. 내 말 무슨 말인지 알겠어?" 하나가 솔로몬을 노려보았다. "내가 말한 대로 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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