통일부 공무원을 시작으로 30년간 남북 통일을 담당하는 업무를 맡아왔으며, 김대중, 노무현 정권에서 통일부 장관을 지낸 경험을 바탕으로 한 남북의 교류 및 이에 따른 국제외교 관계에 대한 깊은 통찰이 담겨있다.

 남북의 교류를 위해서 대한민국이 나아가야 할 바에 대한 현실적이며 이론적인 지침서라 할 수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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p100

 이승만 대통령이 왕조적 개념이 아직 남아 이썬 전환기의 인물이라는 점도 영향을 미쳤을 거다. 1960년 3월 15일 대통령 선거를 앞두고 내가 중 3이었던 1959년 말인가 1960년 초에 헬기를 타고 전주까지 와서 전주공설운동장에 전주 시민과 학생들을 모아놓고 연설을 할 때였다. 그때 나는 그분 연설을 직접 들었는데, 국민이라는 단어를 써야 할 대목에서 계속 백성이라는 표현을 썼다. 매우 의아했다. 백성? 왕조 시대 임금이나 대신들이 쓰던 말 아닌가? 미국 유학까지 했다면서 백성이라는 말이 입에서 쉽게 나오다니 참 이상하다는 생각을 하지 않을 수 없었다.

 

p102

 이승만 대통령이 다시 한번 북쪽으로 밀고 올라가 압록강, 두만강을 수복해야 한다고 휴전을 하는 바람에 우리가 6.25 전쟁 휴전협정에 서명을 못 했다고 얘기하는 사람도 있다. 하지만 그건 잘 못 알고 있는 거다. 이승만 대통령이 휴전을 반대한 건 사실이지만 전시작전통제권이 없어서 휴전협정에 서명할 자격이 없었기 때문에 서명을 못 한 것이다. 휴전협정이란 원래 군사령관들이 서명하는 법적 권능을 가진 조약이다. 1950년 6월 25일에 전쟁이 터지고 사흘 만에 부산으로 피신했고, 전쟁 발발 19일 만인 7월 14일 유엔군 사령관 모자를 쓴 주한미군 사령관한테 한국군의 전시작전통제권을 넘겨준 사람이 바로 이승만 대통령이다.

 

p104

 박정희 대통령은 자주국방의 기치를 내걸었다. 1970년대 국방부 건물 꼭대기에 쇠로 크게 자주국방이라고 새겨놓았다. 미국은 우리가 진짜 자주국방을 이뤄서 한미동맹 위상이 부차적으로 떨어지면 주한미군을 나가라고 할 수 있다고 여겨서, 이때부터 미국과 박정희 대통령과의 사이가 불편해졌다. 우리가 자주국방으로 갈 수 없도록 만드는 미국의 미사일 사거리 제한 같은 조치도 이때 나왔다.

 

p106

 노태우 정부가 놓치지 않은 국제정세의 변화란 어떤 것이었나? 1980년대 중반부터 소련에서도 개혁-개방Perestroika-Glasnost이 시작되면서 동유럽 국가들의 체제 전환 움직임이 나타나기 시작했다. 소련은 미국과의 우주 경쟁 등을 포기하고 미-소 공존을 모색했다. 연장선상에서 1989년 12월 2~3일 지중해의 몰타섬에서 미국의 조지 부시 대통령과 소련의 미하일 고르바초프 공산당 서기장의 정상회담이 열렸다. 당시 소련의 최고 권력자였더 고르바초프가 미국에 사실상 항복하면서 동서 냉전이 끝나게 됐다. 노태우 정부는 이런 판세를 잘 읽어내고 적시에 움직였기 때문에 1990년 9월 소련, 1992년 8월 중국과 수교하며 북방정책이 결실을 거둘 수 있었다. 더 이상 반북-반공이 정권의 존재 이유와 정당성의 근거로 쓰이지 않게 된 것이다. 국제질서의 변화가 국내 정치의 통치 명분과 통치 구조를 바꾼 사례라고 할 수 있다.

 소련, 중국과의 수교는 경제적 의미가 있을 뿐만 아니라, 두 나라가 군사동맹 수주의 우방국인 북한에게 주는 정치,외교,군사적 지원을 약화시키고 둔화시키는 효과도 있었다. 연결해서 북한으로 인해 발생하는 우리나라의 미국 의존도를 줄이는 효과도 있었다고 할 수 있다. 대표적으로 노태우 대통령이 소련과 수교하면서 빌려 준 차관을 무기로 돌려받은 일을 들 수 있다. 소련에 30억 달러를 차관으로 주기로 약속하고 수교했는데, 1차로 15억 달러를 먼저 지급한 후 그에 대한 원리금 상환이 시작되면 2차로 나머지 15억 달러를 주겠다는 조건이었다. 그런데 소련이 1991년 완전히 쪼개졌고 소련을 승계한 러시아는 경제력이 확 떨어졌다. 세계 최대의 밀 수출국 우크라이나에서 들어오던 돈을 비롯해 소련 시절 연방 가맹 공화국들로부터 오던 돈줄이 끊겨버리자 러시아는 돈이 없다고 차관을 갚지 않았다. 결국 러시아는 1998년 모라토리엄을 선언했다. 돈을 갚지 않은 상황에서 우리나라에 나머지 15억 달러를 마저 달라고 요구했고, 우리는 합의문대로 원리금 상환이 먼저라고 일축했다. 이에 러시아는 고육지계로 군사 장비와 기술로 차관을 상환하겠다고 제안했고 한국 정부가 이를 수락했다. 바로 '불곰사업'이라고 알려진 것이다. 그때 미국에서 난리가 났다. 미국 입장에서는 한국 무기 체계의 대미 의존도를 100퍼센트로 유지하고 싶은데, 러시아 무기가 차관 상환금 대신 한국에 들어오면 한국의 무기 체계에서 미국에 대한 종속성이 떨어지고 10퍼센트든 20퍼센트든 미국 무기 사는 데 쓰는 돈이 줄어드니까, 무기 시장을 잠식당한다는 생각 때문에 미국이 난리를 쳤지만 우리는 결국 미국의 동의 없이 러시아 무기를 들여왔다. 북한의 무기 체계가 결국은 소련의 무기 체계로부터 시작됐기 때문에 북한 무기 체계에 대한 이해를 높인다는 명분과 우리가 빌려준 돈을 받고 러시아에 2차 차관을 제공하겠다는 약속도 지켜야 한다는 논리로 노태우 대통령이 버텨서 실행한 거다.

 노태우 정부 때 북방정책을 추진하는 과정에서 소련 무기를 들여온 것은 우리 무기 체계를 다각화하고, 미국의 의존도를 줄이고, 북한 무기를 직접 파악할 수 있게 되면서 지피지기 원리에 입각해 우리가 상대적으로 북한보다 우위에 설 수 있는, 내지는 견제할 수 있는 능력을 갖추는 결과로 이어졌다. 그 덕에 러시아 무기를 모방하거나 역설계해서 독자적으로 만든 무기도 많이 있다. 러시아가 나로호 발사를 도와준 것도 그 연장선이었을 거다. 미국은 절대 우리게에 로켓 기술을 알려주지 않는다. 노태우 정부가 차관 상환금 대신 러시아의 무기를 받은 것은 일타쌍피 정도가 아니라 일타오피였다.

 하지만 노태우 정부 역시 미국과는 상하관계였다. 군인이었던 박정희, 전두환은 쿠데타로 대통령 자리를 차지했기 때문에 국민 정서상 정통성을 인정받지 못했다. 그래서 미국이 인정해주어야만 그나마 정통성이 생기는 구조였다. 우리 국민은 군사정권을 인정할 수 없지만 미국은 항상 옳고 미국이 인정한다면 우리도 따라갈 수밖에 없다는 인식이 있었다. 국민 의식이 그러니 그때 한미관계는 완전히 상하관계가 될 수밖에 없었다.

 

p123

 1960~1970년대 중국은 아프리카 국가들에 많은 경제원조를 하면서 자기편으로 끌어들이려고 시도했는데 결국 소용없었다. 아프리카 국가들은 과거 식민 종주국이었던 영국이나 프랑스의 품을 떠나지 못하고 있다. 예를 들면 아프리카 대륙 서쪽에 프랑스 식민지였던 말리, 코트디부아르, 니제르, 기니, 모리타니, 부르키나파소 같은 나라들은 다닥다닥 붙어 있는데도 그 나라들끼리 직접 전화 연결이 안 됐었다. 말리와 코트디브아르가 직접 연결이 안 되고 말리에서 프랑스를 거쳐야 코트디브아르로 연결할 수 있었다. 오래된 일이지만 1970년대 말, 발레리 지스카르 데스탱 이 프랑스 대통령일 때 아프리카 국가 대사관에 근무하던 친구에게 들은 얘기가 놀라웠다. 프랑스 대통령이 아프리카 식민지였던 나라들을 쭉 한 바퀴 돌면서 한 해 동안 밀렸던 월급을 다 해결해 준다고 했다. GDP 규모가 크든 작든 국가가 예산을 세우고 국민에게 돌아갈 복지 예산, 공무원 임금 등등을 써야 하는데 자기네 세금으로 월급을 못 줬다는 거다. 그러니까 자기 대통령보다는 프랑스 대통령을 더 모신다는 거다.

 프랑스 식민지였던 아프리카 국가들이 대부분 독립한 지 60년이 넘었지만 프랑스는 그 나라들에 여전히 강압적으로 영향력을 행사하는 것 같다. 원자재 같은 천연자원을 헐값에 가져가는 등 프랑스가 지금까지 얻었던 이익을 지키기 위해서다. 프랑스가 설계하고 프랑스 재정부가 발행하고 통제하는 CFA 프랑을 쓰는 나라가 아프리카에서 10개국이 넘는다. 프랑스는 심지어 자국민의 활폐를 도입하려는 나라에 위조지폐를 뿌려 경제를 붕괴시키도 했다. 프랑스의 지배에서 벗어나려는 지도자들을 주저앉히기 위해 암살하고 반군을 지원하고 학살을 묵인했다. 직접 군대를 보내 이들 정부를 무너뜨리기도 하면서 프랑스는 아프리카에서 영향력을 놓지 않으려 했다. 프랑스가 나쁜 놈들이다. 프랑스 지도층과 결탁해 권력과 이익만 챙기는 아프리카의 지도자들도 문제다. 2006년까지 아프리카에 수출을 가장 많이 하는 나라가 프랑스였고, 2022년 현재 아프리카 55개 나라 중 프랑스어를 공용어로 지정한 나라가 23개국이다. 프랑스는 또한 아프리카 8개국과 방위협정을 맺었고 프랑스 특수부대 1만여명이 차드, 중앙아프리카공화국, 가봉, 세네갈 등지에 주둔하고 있다. 프랑스 품 안에서만 살아서는 안 되겠다고 각성하는 사람들도 아프리카에서는 아직 힘을 갖지 못하는 것 같다.

 영국은 동부 아프리카에서 탄탄한 세력 기반을 갖추고 있다. 케냐에는 주둔군도 나가 있고 7개국의 공식 공용어가 영어다. 아프리카 국가의 수출은 식민 모국과의 관계에 크게 의존하고 있고, 프랑스와 영어, 두 언어를 공용어, 공동 공용어로 지정한 나라가 40개국이 넘는다. 아프리카는 미국의 직접 영향권은 아니지만 아프리카에 지대한 영향력을 가진 프랑스와 영국이 미국 영향권 안에 있다.

 그런데 프랑스가 아프리카에서 민심을 많이 잃고 있다. 중국과 아프리카 국가들의 관계가 급속도로 가까워지고 있다. 중국은 경제면에서 EU에는 뒤지지만 2009년부터 2021년까지 12년 연속 아프리카 최대 무역 파트너의 지위를 유지하고 있다. 2010년대 내내 아프리카 3대 경제대국 중 하나인 남아프리카공화국의 최대 교역국도 중국이었다.

 

p127

 일본이 G2로 미국 GDP에 가장 근접했을 때도 미국 GDP의 40퍼센트 미만이었는데 미국 레이건 정부는 선진국들을 모아 환율을 조정해서 일본을 주저앉혔다. 1985년 '플라자 합의'인데 사실상 미국이 압력을 넣어 환율 조작을 받아들이도록 한 거다. 그런데 중국의 경우는 미국이 제압할 타이밍을 놓쳤다. 미국이 20세기의 우선순위대로 유럽, 중동에 신경을 쓰는 동안 중국이 급속히 커지면서 일본한테 썼던 방식을 쓸 수 없을 지경이 되어버린 거다. 2010년 G2로 올라선 중국이 GDP 면에서 미국을 따라잡는 속도에는 가속도가 붙은 것 같다. 2010년에 미국이 GDP의 40퍼센트를 달성하면서 G2로 올라서더니 2021년에는 74퍼센트까지 치고 올라왔다.

 이렇게 빠른 속도로 치고 올라오는 중국에게 멱살을 잡히지 않기 위해 미국은 총력을 다하고 있으나 혼자 힘으로는 역부족이 되니까 동맹국들을 자꾸 끌어들이고 있다. 2020년 미국, 일본, 호주, 인도를 묶는 4자 안보기구인 쿼드가 생겼고, 미국과 영국이 호주의 핵잠수함 건조를 지원한다면서 2021년 호주, 영국, 미국이 오커스AUKUS라는 삼각동맹을 맺었다.

 이게 전부 중국을 견제하기 위한 미국의 세계 전략 일환이다. 그러다 보니 북핵 문제는 우선순위에서 멀어져 버렸다.

 

p132

 일본몽도 있다. 대동아공영권은 지난 얘기가 아니다. 지금 일본은 자위대의 힘을 키우고 해외 출병이 가능하도록 헌법을 고치려 노력하고 있지 않나. 군사력을 키워놓고 미국의 힘이 빠질 때 그 자리를 차지할 수 있는 나라가 돼야겠다는 거다. 우리는 일본이 밉고 싫지만, 일본의 그런 목표를 비도덕적이다, 비윤리적이다 말할 수 없다. 국제정치도 정치인데 거기에다가 도덕의 잣대를 들이대면 바보다. 국내정치든 국제정치든 정치는 현실이고 현실은 선악이 아니라 결국 유불리로 결정 나는 거다. 그래서 미국도 패권을 잃지 않고 계속 군림하려고 하는 거 아닌가. 정책가가 러시아의 우크라이나 침략을 옳다 그르다로 판단하는 마인드를 가졌다면 제대로 일할 수 없다. 러시아가 영토를 넓히려는 것은 자연스럽다. 힘이 있으면 번영과 권위를 추구할 수 있다는 마인드로 현실을 읽고 국가의 이익에 부합하는 정책을 실행해야 한다. 때때로 정책가의 자리에 앉아 있는 사람들이 국가이익보다는 여론에 휘둘리거나 자기 머릿속에 들어 있는 잣대에 따라 일하려는 경우를 보는데, 그러면 실패한다. 내 나라의 이익을 추구하는 것이 자국 중심성이고 실용 외교다. 내 나라의 안전, 번영, 권위에 도움이 되는가, 해가 되는가를 따지는 것이 자국 중심성이지 내가 옳다고 믿는 나의 윤리에 맞추어서 활동하는 것은 자구 중심성이 아니다.

 그런 식으로 머리가 돌아가기 시작하면 인간적으로 좀 사악해질 수밖에 없다. 정치판에는 의로도 없고, 설령 있다고 해도 도구처럼 쓰이는 것 아닌가.

 정치는 유불리로 움직인다. 선악이 없다. 그리고 유불리를 잘 계산해야 한다. 한쪽에 계속 붙어 있는다고 유리하지 않다.

 

p138

 2021년 9월 미국이 갑자기 호주에게 핵잠수함 기술을 줬다. 중국을 압박하는 데 호주를 앞장세우고 싶은데 호주가 대가 없이 미국의 이익에 장단을 맞춰주지 않아서였을 것이다. 그 바람에 호주에 잠수함 기술을 팔기로 먼저 약속했던 프랑스가 미국한테 뒤통수를 맞았다. 그러자 프랑스가 바로 미국이 하는 일에 어깃장을 놨다. 2022년 미국이 베이징올림픽을 외교적으로 보이콧한다는데도 프랑스 정부 공식 대표단은 베이징올림픽에 간 것이다. 그동안 유럽은 먹고사는 데 미국이 도움이 되고, 유럽에 버티고 있는 5만 명 가까운 나토군을 미국이 통제하며 국제 안보질서를 장악하고 있으니까 함부로 반대하지 못한다. 하지만 프랑스가 결정적인 이해관계를 침범받자 미국과 다른 자기 목소리를 낸 것이다.

 

p139

 중국이 군사력을 강화하고 미국 중심의 국제질서가 흔들릴 수 있는 수준까지 부상하자 불안해진 미국은 아시아에 힘을 쏟기 시작했다. 미국은 외교/군사정책의 중심을 중동에서 아시아로 이동시키겠다는 '피봇 투 아시아' 그리고 아시아에서 미국의 영향력을 확대하겠다는 '리밸런싱 아시아' 정책을 정립했다. '리밸런싱 아시아'는 미국이 중국보다 월등한 우위에 있는 동안 중국은 한참 밑에 있었고, 그것이 미국에게는 정상이었는데 중국이 갑자기 치고 올라오기 시작했으니 다시 찍어 눌러서 미국이 압도적 우위였던 예전 상태로 되돌려 놓겠다는 거다.

 미국의 절대 다수 전문가들은 중국을 무시한다. 팍스 아메리카나는 영원하리라는 오만과 WASP(White Anglo-Saxson Protestant, 미국의 주류 백인 집단)만을 주류로 여기는 편협함 때문이다. 라틴계인 이탈리아, 스페인도 주류로 생각하지 않고 북유럽은 앵글로색슨이 아니라고 구분한다. 게다가 중국이 자신들이 멸시하는 공산독재국가이기 때문에 역설적이게도 더 빠른 속도로 발전하고 있따는 이 불편한 진실을 못 받아들이는 것 같다. 민주국가들은 민주국가는 무한정, 무한대로 발전할 수 있고 믿지만 독재국가는 발전에 한계가 있다고 본다. 환상이고 착각이다. 독재가 좋은 건 아니지만, 독재국가이기 때문에 발휘할 수 있는 잠재력이 따로 있다. 대표적으로 북한은 2005년 9월 미국의 방코델타아시아의 금융 제재만 17년째 받고 있다. 또 2006년 10월 1차 핵실험 이후 6차 핵실험까지 북한에 가해진 유엔 안보리 제재가 15~16개임에도 불구하고 아직까지 체제가 유지되고 있는 것은 불가사의한 일이 아닐 수 없다. 더구나 그런 제재 속에서도 경비가 적지 않게 드는 핵실험과 미사일 개발을 계속하는 것을 보면, 자유민주주만이 경제를 발전시킨다는 믿음은 미국이 믿고 싶은 신화일 뿐이고 대북제재 유지를 정당화하는 명분일 뿐이라는 생각을 하지 않을 수 없다.

 미국은 중국이 더 이상 크지 못하게 막고, 2차대전 이후 동아시아에서 행사해 온 헤게모니를 계속 유지해야겠는데 턱밑까지 치고 올라오는 중국과 무력으로 싸울 수는 없으니 중국 압박을 정당화하는 명분을 자꾸 만들어 낼 수밖에 없다. 민주주의, 자유, 수호, 인권, 동맹 등이 그런 용도로 강조되고 쓰이는 중이다. 미국의 국력이 큰 흐름으로 볼 때 쇠퇴하고 있지만 과거의 영광에 대한 추억은 남아 있다. 현실을 재인식하기보다 어떻게든 동맹국들을 이렇게 저렇게 묶어서 잘 끌고 가면 부상하는 중국을 견제할 수 있고, 자신들의 헤게모니를 계속 유지할 수 있을 것 같다는 생각이 미국의 속내로 보인다.

 

p152

 김대중 대통령이 집권한 후로도 미국은 해오던 대로 한국을 관리하려고 했다. 2001년 1월 취임한 조지 부시 대통령과 그 정부는 2000년 6.15 남북정상회담 후 남북장관급회담이 정례적으로 열리면서 남북관계가 빠른 속도로 진전되는 데에 불편해하는 기색이 역력했다. 2001년 3월 워싱턴에서 열린 한미정상회담에서 부시 대통령이 김대중 대통령을 'this man'이라고 지칭해서 논란이 되기도 했다. 그 자리에서 부시 대통령은 김대중 대통령에게 "나는 김정일 위원장에 대해 '회의적인 생각sceptisism'을 가지고 있다"고 말했다. 김정일 위원장을 어찌 믿고 남북관계를 그리 빨리 끌고 가려 하느냐는 비판을 한 셈이다. 김대중 대통령이 부시 대통령과 가진 첫 한미정상회담에서 부시 대통령의 견제가 있었지만, 그 후에도 남북장관급회담은 정례적으로 열렸다. 그런데 2002년 1월 29일 오전 부시 대통령이 의회 연설에서 "이란, 이라크, 북한은 '악의 축'이다"라고 규정을 하는 '사고'가 났다. 북한과 관계 개선을 통해 한반도 평화를 일궈내려는 김대중 대통령의 햇볕정책이 암초를 만난 것이다. 미국이 협조하지 않거나 방해하면 한반도 평화는 사실상 기대하기 어려운 것이 현실 아닌가. 부시 대통령이 '악의 축' 발언을 한 2002년 1월 29일 통일부 장관 임명장을 받은 나는 난감했다. 미국이 북한을 '악의 축'으로 규정하고 압박을 강화해 나가면 통일부 혼자서 햇볕정책을 밀고 나가기 어렵기 때문이다. 그런데 김대중 대통령이 직접 부시 대통령을 설득해서 미국도 북한과 대화를 하겠다고 공언하게 만들었다. 그날이 2002년 2월 20일이다.

 부시 대통령이 한미정상회담을 하기 위해 한국에 왔고, 2월 20일 오전에 청와대에서 회담이 열렸다. 그리고 오후 3시쯤 남북철도 연결 시발역인 도라산역에서 한미 정상들이 연설을 하게 되어 있었다. 외교, 안보, 통일 분야 장관들과 청와대 참모들이 김대중 대통령과 함께 서울에서 대통령 전용열차를 타고 도라산역으로 갔다. 그런데 불과 21일 전 북한을 악의 축이라고 규정했던 부시 대통령이 연단에 오르더니 전혀 예상 밖의 연설을 했다. '나는 북한을 공격할 의도가 없다. 그리고 김대중 대통령의 권고에 따라 미국도 북한과 대화를 하겠다. 인도적 지원사업도 하겠다'라는 요지의 연설이었다. 부시 대통령이 먼저 연설한 다음 김대중 대통령이 연설을 시작했지만, 김 대통령의 연설을 귀에 들어오지도 않고 부시 대통령의 연설 내용만 귓전을 때렸다. 2002년 2월 20일 오전 정상회담에서 무슨 조화가 일어난 것일까?

 행사가 끝나고 서울로 돌아오는 기차에 앉아 있는데 대통령 수행 경호원이 우리 칸으로 건너와서 "대통령님께서 통일부 장관님 부르십니다" 하길래 대통령 전용칸으로 갔다. 김대중 대통령이 "건너편에 앉으시오" 하시더니 곧장 "아까 부시 대통령 연설 들었소?"라고 물으셨다. 당연히 들었다고 했더니 "정 장관, 오늘 오전 내가 100분 동안 젖 먹던 힘까지 끌어내서 뷔 대통령을 설득했소. 그랬더니 아까 그런 연설을 한 거요. 나는 이제 할 일을 했으니 나머지는 통일부 장관이 알아서 일하시오" 하셨다. 속으로 '아~!' 하는 감탄사가 절로 나왔다. 역시 김대중 대통령이구나 하는 생각을 하면서 자리로 돌아왔다. 김정일 국방위원장에 대해 회의적인 생각을 가지고 있었고 북한을 악의 축으로 규정한 부시 대통령을 설득해 북한을 공격하지 않고, 북한과 대화할 거고, 북한에 인도적 지원도 하겠다는 연설을 하도록 만든 논리와 이론이 궁금했지만 여쭤볼 기회는 없었다. 

 아무튼 김대중 대통령은 부시 대통령도 설득하고 구슬리면서 통일부가 남북관계 개선을 계속할 수 있는 여건을 만들어 주셨다. 외교부나 국방부, 통상교섭본부 등 한미 안보협력이나 경제협력 담당부처도 대통령의 협상력과 설득력의 덕을 많이 보았을 것이다.

 햇볕정책의 첫 번째 성과는 금강산 관광이다. 김대중 대통령 임기 초인 1998년 11월 18일 시작한 금강산 관광은 김대중 대통령의 결기가 아니었으면 엄두조차 낼 수 없는 '사건'이었다. 미국에 물어보지 않고 독자적으로 저질러 버리는 식으로 결행하고 사후에 미국을 설득했다. 그렇게 결국 미국이 어쩔 수 없도록 만들어 끌고 갔던 것이다. 김대중 대통령은 한미관계, 남북관계를 비롯한 국제정치에 대한 공부를 많이 해서 상당히 탄탄한 이론을 갖추고 있었다. 그리고 대통령이 직접 미국 대통령을 설득했다. 그건 대단한 거다. 이론이 아무리 빵빵해도 엄두를 내어 미국 대통령과 마주한 그 자리에서 직접 설득하는 건 또 다른 문제다. 김대중 대통령이 그렇게 할 수 있었던 건 군사정권에서 모질게 시달리면서도 굴하지 않고 자기 입장을 절대 바꾸지 않으며 계속 버텼던 경험, 결국 대통령까지 된 데서 오는 자신감이 바탕이 된 것 같다.

 첫 금강관 관광객을 태운 현대금강호가 금강산 자락 장전항으로 떠난 1998년 11월 18일 클린턴 미국 대통령은 도쿄에 있었고 그 다음다음 날인 11월 20일 청와대에서 한미정상회담이 잡혀 있었다. 클린턴 대통령은 금강산 관광선이 출발하는 장면을 도쿄에서 TV로 보았다면서 이렇게 말했다고 한다. "금강산 관광선 출항 장면은 매우 아름다웠습니다. 축하합니다." 금강산 관광은 그렇게 이루어졌고 이후 미국의 간섭은 없었다. 미리 미국으로 관료들을 보내 구구절절 설명을 하면서 미국의 동의를 구하려고 했다면 당시 국제정세의 상황으로 보아 금강산 관광은 원래 계획대로 시작되지 못했을 것이다.

p172

 북한 입장에서는 전시작전통제권을 가진 한국이 더 무섭다. 그 동안 북한이 위협해도 전시작전통제권을 가진 미국 입장은 국지전도 부담이니 '한 대 맞고 끝내라'였다. 그런데 한국이 전시작전통제권을 가지면 '때릴 수 있는' 것이다. 게다가 한국은 국방비를 매년 8퍼센트 증액하고 있다.

 노무현 정부는 한미연합사령부가 행사하도록 되어 있는 전시작전통제권을 우리나라 합참의장이 지휘하도록 찾아오게 만들어 놓았지만, 이명박 정부는 전시작전통제권의 환수 여부조차 향후에 검토하겠다고 했다. 북한이 밀고 내려올 때 미국이 자동으로 개입하도록 하려면 미군이 전시작전통제권을 가지고 있는 편이 우리한테 더 안전하다는 논리였다. 미군이 199개국에 나가 있지만 주둔한 나라 군대의 전시작전통제권을 가지고 있는 경우는 한 곳밖에 없다. 우리나라, 한국.

 

2장. 우리는 북핵 문제를 어떻게 풀 수 있을까?

 

p215. 북한의 첫 핵실험, BDA 사건

 2003년부터 시작된 6자 회담의 성과라고 할 수 있는 2005년 '9.19 공동성명'에서 북한은 모든 핵무기를 파기하고 NPT, IAEA로 복귀한다는 약속을 했다. 그 대가로 미국은 한반도 평화협정, 단계적 비핵화, 핵무기 불공격, 북미 간의 수교 등을 북한에게 약속했다. 북한이 첫 핵실험을 하기 약 1년 전의 일이다. 그런데 '9.19 공동성명'은 그다음 날 사실상 깨져버렸다. 미국 재무부가 9월 20일 자 관보에 마카오에 있는 방코델타아시아BDA를 북한 불법 자금 세탁의 주요 우려 대상으로 지정했다고 게재한 거다. 미국 국무부와 백악관이 '9.19 공동성명'을 만들었다면 바로 그다음 날 미국 재무부가 북한에 대한 실질적인 금융 제재를 가한 셈이다. 그러자 북한은 미국을 믿을 수 없다, 철석같이 약속해 놓고 그다음 날 약속을 깨는 미국과 이제 협상은 없다, 결국 핵을 보유할 수밖에 없다고 공개적으로 반발하면서 핵 활동 상황을 중계방송하듯이 공개했다. '지금 영변 원자력발전소 가동을 시작했다', '원자로 가동을 일시 중단하고 연료봉을 꺼냈다', '꺼낸 연료봉을 재처리해서 플루토늄을 추출했다.' 그러고는 2006년 7월 4일, 미국 독립기념일에 중거리 미사일 한 발을 발사하더니 "10월 3일부터 10일 사이 좋은 날을 잡아 핵실험을 하겠다"고 공개적으로 선언했다. 그리고 2006년 10월 9일 1차 핵실험을 단행했고 성공했다.

 북한이 핵무기를 만들 수 있따는 가능성을 탐지해서 6자 회담도 하고 '9.19 공동성명'도 합의했지만, 미국은 그때까지도 북한이 실제로 핵실험을 못 할 줄 알았던 것 같다. '북한이 무슨 핵실험까지 해, 뻥이야'라고 생각했는데 막상 일을 벌이고 나니 미국은 놀랐을 것이다. 미국은 '돈 없으면 아무것도 못 한다'고 생각한다. 북한이 핵무기, 미국 본토까지 날라갈 수 있는 ICBM을 못 만들 거라고 판단했을 것이다. 자본주의식으로만 사고하기 때문인데 북한은 다르다는 것을 염두에 두지 않는다. '고난의 행군'은 자본주의를 전제로 삼는 미국인들은 꿈도 꿀 수 없는 생존 방식이다.

 사실 미국이 북한을 상대하는 걸 보면, 작은 나라나 약소국에 대한 편견을 가지고 있는 듯하다. 예컨대 '저것들이 뭘 하겠어, 미국의 막강한 군사력으로 겁을 주고, 동맹국들을 동원해 압박하고, 또 필요하면 유엔을 통해 제재 결의안을 통과시켜서 북한을 제외한 나머지 모든 국가들이 북한 제재에 동참하면 결국은 손 들게 돼 있다' 하는 믿음을 가지고 있는 것 같다. 그런데 그 믿음이 북한한테는 안 통했다. 사람도 그렇지 않나. 잃을 것이 없는 사람이 악을 쓰고 덤비기 시작하면 잃을 것이 많은 사람은 이기지 못한다. "부자 몸조심"이라는 속담도 있지 않나. 북한이 그런 식으로 핵실험을 성공하고 나니까 비로소 미국 부시 대통령이 노무현 대통령한테 BDA 제재 때문에 사실상 파기된 거나 다름없던 '9.19 공동성명'에서 합의한 방식으로 북핵 문제를 풀 수밖에 없다는 것을 고백한 바 있다. 북한이 1차 핵실험을 한 다음 달인 2006년 11월 하노이에서 열린 아세안지역안보포럼에 참석했던 한국 대통령과 미국 대통령이 별도로 정상회담을 하면서 말했던 내용이 그렇다. "북한이 핵실험까지 했는데 그대로 놔두면 2차, 3차, 4차로 이어질 거고 결국 사실상 핵보유국이 된다. 초동 단계에서 막아야겠다. 그러려면 당신과 내가 함께 김정일 국방위원장을 만나서 한국전쟁의 공식적인 종료를 선언하는 문제를 협의하자. 종전선언을 해줘야만 끝날 것 같다." 종전선언을 해준다는 의미는 전쟁협정을 평화협정으로 바꾸는 협상을 시작한다는 의미다. 그리고 평화협정 협상을 한다는 말은 미국과 북한 사이에 적대적인 군사관계를 끝장낸다는 의미고, 평화협정이 마무리되면 미국과 북한이 외교적으로 수교를 할 수 있는 법적 토대가 마련된다는 것이다. 전쟁했던 나라끼리 평화관계를 유지하자하고 합의하면 바로 수교로 건너갈 수 있는 관계로 바뀌는 것이다. '9.19 공동성명'에서 말했던 대로다. 물론 대신 북한이 핵 개발을 포기해야 한다.

 

p272

4장. 우크라이나 사태, 북핵 문제에 영향

 우크라이나 사태는 우리에게 국제정치의 민낯을 보여주었을 뿐만 아니라 북하의 핵 문제를 더욱 긴박한 국면으로 옮겨놓았다. 우크라이나 사태를 지켜본 북한은 더더욱 핵을 포기하려고 하지 않을 거다. 그런 북한을 어떻게 상대할 것인가는 윤석열 정부의 발등에 떨어진 과제다. 이 문제는 한미동맹 강화만으로는 해결이 안 된다.

 

p273. 우크라이나가 믿은 약속

 우크라이나가 미국, 영국, 러시아의 약속을 믿지 않았다면, 즉 국제정치의 냉혹함을 잊지 않았다면 핵을 가지고 있었을 거다.

 우크라이나는 1994년 '부다페스트 안전보장 양해각서'로 미국과 러시아 등 6개국으로부터 핵과 미사일을 내놓으면 확실하게 체제안전을 보장해 주겠다는 약속을 받았다. 소련 해체로 핵무기를 보유하게 된 카자흐스탄과 우크라이나, 벨라루스를 비핵화하기 위해 미국 여야가 공동 발의해서 거의 만장일치로 통과시킨 넌-루가 법에 따라 미국이 돈을 대고 소련이 핵무기 해체 군사기술을 제공하기로 했다. 미국, 러시아에 더해 유럽의 강자인 영국까지 우크라이나에게 수교와 경제 지원, 체제 안전 보장을 약속했다. 인접 국가인 벨라루스, 폴란드도 우크라이나의 보호를 약속했다. 과거 소련 땅이었던 국가들의 약속은 중요하지 않겠지만, 어쨋든 이들도 우크라이나 보호 약속에 동참했다. 

 지난 2022년 2월 우크라이나를 침공한 러시아 군대를 막는 데 결국 누가 나섰나. 미국 다음가는 군사강국인 러시아가 국경을 맞댄 우크라이나를 치고 들어오는데 미국은 최강국이지만 멀리 떨어져 있기 때문에 손을 못 쓴다. 그나마 러시아를 경제적으로 압박한다는 미국의 말에 영국은 적극적으로 동조하지만 프랑스만 해도 한 발 거리를 뒀다. 앞서 말했듯이 프랑스는 미국한테 삐쳤으니까. 호주에 핵잠수함을 팔아먹으려고 했는데 미국이 중국을 압박하는 데 호주를 끌어들이려고 핵잠수함을 호주한테 그냥 주는 바람에 프랑스가 완전히 장사를 망쳐버린 것이다. 프랑스는 미국이 상도의에서 어긋났다는 명분으로 자기 행동을 정당화하고 싶겠지만 사람들은 국제사회가 그런 데인 줄 몰랐냐고 할 거다. 외교라는 게 다 각자 실속 차리는 일이고, 호주가 프랑스한테 의리 지킬 일이 뭐 있나. 호주는 기본적으로 영국 편이고 영국은 미국 편이다. 프랑스의 잠수함 장사가 그만큼 성사됐던 건 어떤 면에서는 그때 운이 좋아서 아니었겠나. 게다가 프랑스는 앵글로색슨이 아니다. 과가에 영국의 식민지였다가 독립하면서 영연방을 구성한 호주, 뉴질랜드 캐나다는 완전히 미국 편이다. 주요 국제정치 문제에서 영연방 국가들은 영국과 보조를 같이하니까 미국은 영국 단추만 잘 누르면 영연방 국가들이 우르르 따라 들어온다. 그나마 믿을 수 있는 계보끼리 움직이는 조폭 세계처럼. 영연방은 동남아와 아프리카에도 있다. 인도, 말레이시아, 싱가포르, 남아프리카 공화국, 케냐 등등. 그러니까 영연방 내지는 앵글로색슨들이 함께 움직여서 손해를 봤던 프랑스나 독일은 때로 미국과 보조를 맞추지 않고 엇박자로 움직인다.

 우크라이나가 무자비하게 짓밟히는데, 러시아가 핵무기를 쓰겠다는데도 미국은 말뿐이지 행동을 못 한다. 그러니 우크라이나가 1990년대 초에 미국과 러시아의 약속을 믿고 그 감언이설에 속아 핵을 내놨던 것이 불행의 원인이 된 것이다.

 더 거슬러 올라가 보자. 영국과 미국의 합작품인 2003년 리비아 핵 개발 계획 포기 사건, 카다피는 핵을 개발하지 않겠다고 약속하면 미국이 경제 지원도 해주고 수교도 해준다는 약속을 믿고 핵 개발을 포기했다. 그리고 경제 지원이 들어왔고 3년 후인 2006년 미국과 수교도 했다. 그러나 수교 이후에 미국 쪽 공작의 결과라고 볼수밖에 없는 반군이 생겨나면서 정부군과 반군이 싸우는 와중에 2011년 10월 20일 카다피는 길거리에서 나토의 지원을 받은 반군의 총에 맞아 죽었다. 카다피는 미국과 영국의 선의를 믿지 않고 계속 핵개발 노력을 했더라면 그런 일은 절대로 없었을 거다.

 우크라이나도 미국과 러시아의 선의, 더 노골적으로는 감언이설에 속아서 150개나 되는 핵폭탄과 1,700개의 미사일을 팔지 않았더라면, 핵폭탄을 10개라도 가지고 있었다면 저런 꼴은 안 당했을 것이다. 미사일이 100개만 있었어도 그렇게 건드리지 못한다. 아무것도 없다고 러시아가 마음 놓고 두들겨 패는 거다.

 

 

 양자역학의 성립의 역사와 가장 근본되는 개념에 대한 입문서.

저자의 이전 작품인 화학 이야기가 꽤 괜찮아서 찾아 읽어봤다. 이 책도 꽤 괜찮다.

입자 이중성에 대한 실험 설명과 쿼크로 들어가면서부터 약간 어려워지긴 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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p34

 어쩌면 영의 이중 슬릿 실험 결과를 광자 개념으로 설명할 수 있을 것이다. 빛 방출기가 기관총처럼 빛을 연속해서 쏘면, 빛 입자들이 공중에서 서로 충돌하여 얼룩말 무늬를 만드는 것은 아닐까?

 이 가설이 맞는지 확인하는 가장 좋은 방법은 광자들이 이중 슬릿을 통과할 때 상호 작용할 가능성을 제것하는 것이다. 광자를 기관총으로 난사하는 대신, 저격용 소총으로 하나씩 하나씩 발사해야 한다.

 이 실험을 구현하기 위한 다양한 방법이 수년간 고안되었는데, 그중 1994년 히타치 직원인 도노무라 아키라가 수행한 실험이 단연 돋보였다. 탱크, 냉장고, 마사지 기계를 생산하는 기업 히타치는 최고로 정밀한 이중 슬릿 실험에 관련된 권리를 소유하고 있다.

 도노무라가 구성한 실험의 세부 내용은 토머스 영이 했던 실험과 상당히 다르지만 목표는 같으므로 여러분이 이해하기 단순하고 편하도록 동일 용어로 설명하려 한다. 실제로는 내가 이야기하는 것처럼 그리 간단하지 않다.

 도노무라의 실험에서 빛 방출기는 두 개의 슬릿을 향해 광자를 발사하며 빛의 세기를 강하거나 약하게 조절할 수 있었다. 방출기 맞은편에 설치된 검출기 스크린은 무언가가 부딪히면 빛을 내는 물질로 만들어져 있어서 광자가 닿는 곳마다 빛의 흔적이 새겨졌다.

 이전에 영이 했던 것처럼 도노무라가 빛을 뭉텅이로 쏘자 예상했던 얼룩말 무늬가 얻어졌는데, 방출기 세기를 낮추어 한 번에 광자 한 알씩 쏘자 심각할 정도로 이상한 결과가 나왔다.

 처음 몇 분 동안은 흥미로운 결과가 나오지 않았다. 광자는 하나씩 날아가 슬릿을 통과하고 검출기 스크린에 무작위로 부딪혔다. 그런데 시간이 흐르면서 스크린 가운데에 점으로 이루어진 띄무늬가 형성되었는데... 어디서 많이 본 것 같지 않은가?

(도노무라 아키라가 이중 슬릿을 향해 전자 한개씩을 방출한 실험 영상)

입자가 하나씩 발사되는 상황에서는 이 같은 무늬가 그려질 수 없다. 얼룩말 무늬는 슬릿을 통과한 광자가 다른 슬릿을 통과한 다른 광자와 섞여야만 나타난다. 광자를 하나씩 발사하면 다른 광자와 섞일 수 없다. 광자를 간섭하는 존재가 없는데, 어떻게 간섭무늬가 형성되는 것일까? 광자는 어떠헤 두 개의 슬릿을 동시에 통과하는 것일까?

 

p41

 전자와 양성자는 반대 전하를 띠고, 반대되는 전하는 서로를 끌어당긴다고 하는데, 원자에서는 왜 전자가 핵을 향해 소용돌이를 그리며 끌려간 끝에 수축되는 현상이 일어나지 않을까? 원자는 왜 파괴되지 않는 것일까?

 이 질문에 보어는 양자 에너지 원리에 위배되기 때문이라고 대답한다. 에너지 준위가 가장 낮은 껍질을 채운 전자, 즉 핵에서 가장 가까운 전자는 에너지 사다리의 가장 아래쪽 가로대에 놓여 있다. 만약 그 전자가 핵을 향해 안쪽으로 서서히 이동하기 시작한다면, 그것은 허용되지 않는 에너지 값을 취하는 것과 마찬가지라는 의미다.

 가장 안쪽 껍질에 자리를 잡고 나서 에너지를 잃는 유일한 방법은 사다리에서 벗어나 원자 밖으로 사라지는 것이다. 전자 입장에서는 핵을 향해 움직이고 싶을 수 있지만, 양자 에너지 원리가 전하의 인력 규칙에 앞선다.

 

p51

 하이젠베르크는 현실 세계의 물리에는 무지하기로 악명 높았는데, 박사학위 중 구두시험에서 간단한 배터리가 어떻게 작동하는지 질문받았으나 전혀 대답하지 못했다고 한다.

 이처럼 물리학에는 재능이 없었지만 수학만큼은 누구보다도 뛰어났던 하이젠베르크는 1920년에 아르놀트 조머펠트에게 고용되었다. 조머펠트는 보어가 원자 이론을 고안하는 데 도움을 준 물리학자 중 한 명이었다.

 조머펠트는 하이젠베르크에게 빛의 분해능에 관한 난제를 수학으로 계산하라는 과제를 주었는데, 하이젠베르크가 2주 만에 그 문제를 해결했다. 그런데 하이젠베르크가 가져온 답이 너무나도 복잡한 나머지 조머펠트는 그렇게 빨리 답을 얻기는 애초에 불가능했을 것이라 판단하고 그 답을 받아들이지 않았다. 이 일이 있고 몇 달 후 하이젠베르크보다 이름이 알려져 있었던 물리학자 알프레트 란데가 그와 정확히 같은 답을 발표해 명성을 얻었다.

 이러한 일을 겪고 나서 하이젠베르크는 양자 연구의 세계적인 요새로 빠르게 성장한 덴마크의 코펜하겐 연구소로 자리를 옮겨 닐스 보어와 함께 일하기 시작했다. 아마도 하이젠베르크는 조머펠트가 자신의 능력을 인정해주지 않아 실망했거나, 그게 아니라면 단순히 노벨상 수상자들과 함께 일하기를 꿈꾸었을 것이다. 이유가 어찌 되었든, 자리를 옮긴 후 하이젠베르크는 보어의 수제자이자 가장 가까운 친구가 되었다.

 

 안타깝게도 하이젠베르크 인생의 후반기에는 다양한 논란이 불거졌다. 나치즘이 유럽 전역에 퍼지자 많은 과학자가 공습을 피해 미국으로 이주했다. 하지만 하이젠베르크는 유럽에 남아 나치에 고용되어 원자 폭탄 제조를 도왔다.

 일부 역사학자는 하이젠베르크가 내부에서 원폭 제조를 방해했다고도 주장한다. 전쟁 후에 진행된 인터뷰에서 하이젠베르크가 원자 폭탄을 어떻게 제조하는지 정확하게 알고 있었다고 밝혔기 때문이다. 결론적으로 나치는 원폭 제조에 실패했다. 어쩌면 하이젠베르크는 원폭 제조에 관한 모든 것을 알았지만, 나치의 노력을 물거품으로 만들기 위해 입을 다물고 있었는지도 모른다.

 그러나 하이젠베르크와 보어가 주고받은 편지들이 2002년에 공개되면서, 두 사람에게 어두운 그림자가  드리워졌다. 편지 내용상 하이젠베르크는 순탄하게 원폭 제조를 연구하고 있었으나 그와 함께 일할 유능한 팀원들이 없고(훌륭한 과학자들은 미국에 있었다), 하이젠베르크 자신은 연구실 사정에 밝지 않아 프로젝트에 실패한 것으로 보인다. 짐작건대 실험실의 모든 장비가 배터리로 작동했을 것이다.

 이 시기의 하이젠베르크가 윤리적 측면에서 어떠한 입장이었는지는 아무도 모른다. 그는 유대인 물리학자 알베르트 아인슈타인의 연구 업적을 알리다가 곤경에 처했지만, 어머니 덕분에 심각한 상황에 빠지지 않을 수 있었다. 알다시피 하이젠베르크의 어머니는 나치 친위대장 하인리히 힘러의 어머니인 힘러 여사와 가까운 사이였는데, 하이젠베르크가 곤경에 처하자 친구 힘러 여사에게 전화를 걸어 "내 아들 좀 내버려 두라고 네 아들에게 전해!"라는 의견을 효율적으로 전달했다.

 

p210

 칼 앤더슨은 우주에서 끊임없이 지구로 떨어지는 입자 파편인 우주선cosmic ray을 연구하면서 지구 표면에 도달하는 전자를 세고 있었다. 계산한 결과, 입자 대부분은 예측한 대로 정확하게 거동했으나 이들 입장 중 15개는 자석 주변에서 예상과 다르게 움직였다. 앤더슨이 관찰한 그 입자 15개가 양전하를 띤 전자였다. 우주에서 온 반물질.

 반전자는 '양전자positron'로 명명되었다. 하지만 반대 전하를 지닌 양성자와 중성자는 실망스럽게도 반양성자anti-proton와 반중성자anti-neutron로 불렸는데, 중성자가 어떻게 반대 전하를 지닐 수 있는지 궁금할 것이다. 반중성자에 관해서는 다음 장에서 논할 예정이다.

 QED덕분에 우리 현실은 훨씬 더 복잡해졌다. 다루어야 할 입자와 장이 각각 일곱 개나 생겼기 때문이다. 양성자, 반양성자, 중성자, 반중성자, 전자, 양전자, 광자.

 광자는 반물질이 없는데, 이는 파인만이 말한 시간 역행 관점에서 보면 완벽하게 이치에 맞는다. 반물질이 시간을 거슬러 가는 일반 물질과 같다면, 광자는 시간을 경험하지 않으므로 광자의 반입자는 자기 자신이다.

 이미 특수상대성이론에서 보았듯이, 시간은 우주에서의 제한속도에 도달할 때까지 느려지는데 광자는 이미 그 제한속도로 움직이고 있으므로 시간 개념을 갖지 않는다. 광자가 시간의 순행을 느끼지 못한다는 것은, 시간의 역행도 느끼지 못함을 의미한다. 

 

p223

 쿼크는 겔만이 개념을 제안하고 수년이 지난 후 렙톤(전자, 뮤온, 타우온)을 중성자에 쏘아 경로를 추적하는 실험 도중 발견되었다. 중성자가 '중성자장'의 단일 물질 덩어리라면, 전자는 날카로운 각도로 튕겨 나올 것이다. 그런데 겔만이 예상한 대로 중성자가 하위 입자인 쿼크로 구성되어 있다면, 렙톤은 쿼크의 부분 전하에 의해 궤도를 벗어나며 굴절될 것이다.

 실험 결과는 겔만의 예측과 일치했고, 그 과정에서 새로운 종류의 입자와 핵을 다루는 양자장 이론이 제안되었다.

 양정자와 중성자는 세 개의 쿼크로 이루어져 있는데, 하이젠베르크의 불확정성 원리에 따르면 그 주변으로 수천 개의 가상 쿼크가 생긴다. 여기서 일정하게 유지되는 세 개의 쿼크를 '드러난 쿼크valence quarks'라 부르며 이들이 입자의 전체적인 정체성을 결정한다.

 쿼크에는 전하가 있으므로 광자장과 상호 작용한다는 것은 안다. 하지만 양전하인 두 개의 위 쿼크가 왜 서로 밀어내지 않는지는 의문이다. 또, 같은 전하를 지닌 두 개의 입자는 절대로 붙어 다니지 않는다. 그런데 왜 모든 원자의 핵은 형성되는 순간 저절로 산산조각 나지 않는지 궁금해진다.

 일본 물리학자 유카와 히데키는 전자기력보다 훨씬 강하고, 양성자와 중성자를 한데 묶을 뿐만 아니라 양성자를 하나의 입자로 유지해주는 힘을 제안했다. 이 힘은 상당히 강해서 전하 반발력도 이겨낼 수 있으므로, 유카와는 그 힘에 '강력strong force'이라는 이름을 붙였다.

 전자기력과 강력은 힘의 규모에 어마어마한 차이가 있따. 전자기적 상호 작용은 원자 주위의 전자를 이동시키거나 화학 반응, 이를테면 불을 붙이는 반응을 일으킨다. 반면 강력에서 비롯된 에너지는 원자핵 중심부에서 움직이는 양성자, 중성자와 관련 있다. 강력은 핵폭발을 일으킨다.

 전자기력은 모든 입자가 광자장에 결합하고 가상 광자를 통해 소통하는 것과 관련된다. 그러니 논리적으로 강력도 쿼크가 결합할 수 있는 고유의 장을 가져야 한다. 겔만은 이를 글론장gluon field이라 불렀다.

 그럼 이제 글루온장에 어울리는 특성이 필요하다. 입자가 광자장에 결합하는 능력을 우리는 전하라고 부른다. 겔만은 쿼크가 글루온장에 결합하도록 해주는 특성의 명칭을 정해야 했다. 그리고 그는 이해에 별 도움이 되지 않는 '색colour'이라는 이름을 선택했다.

 파인먼의 전자와 광자에 관한 양자장 이론은 양자전기역학이었으므로, 겔만은 쿼크와 글루온을 다루는 자신의 이론에 색상을 의미하는 그리스어 '크로마chroma'를 따서 '양자색역학quantum chromodynamics'이라는 이름을 붙였다.

 

p238

 이론물리학자들은 어느 가설에 연구할만한 가치가 있는지 어떻게 알아낼까? 입자와 입자장, 그리고 그들 사이의 상호 작용은 너무 많은데 누군가 제안한 방정식이 이치에 맞는지 어떻게 알 수 있을까? 새로운 물리학 법칙을 만드는 과정에 기반이 되는 법칙이 있을까?

 답은 '그렇다'이다. 그 궁극의 법칙은 역사상 가장 탁월한 물리학자였으나 충격적일 정도로 이름이 알려지지 않은 물리학자가 세웠다. 아말리에 에미 뇌터Amalie Emmy Noether.

 뇌터는 20세기 초 독일 에를랑겐대학에서 청강 허가를 받은 두 여성 중 한 명이었는데, 듣고 싶은 수업이 있을 때마다 강사에게 허락을 받아야 했다. 뇌터의 성별은 그녀가 수학 공부하는 것을 막지 못했고, 뇌터가 발표한 탁월한 논문은 존경받는 수학자 다비트 힐베르트의 관심을 끌었다.

 뇌터는 힐베르트의 도움을 받아 괴팅겐대학에서 강사 자리를 얻을 수 있었고, 그 대학의 유일한 여성 직원이 되었다. 직책상 무보수로 일해야 했으며 힐베르트의 이름으로 된 강의에서만 가르칠 수 있었으나, 어쨌든 그녀는 학계에 발을 들여놓았다.

 마침내 상황이 반전된 것은 뇌터가 이론물리학에서 가장 중요한 지침이 되는 원리인 '뇌터의 정리Noether's theorem'을 고안한 이후다. 어떤 면에서 애석한 일이지만, 여성인 뇌터가 다른 학자와 동등한 대우를 받으려면 세상의 모든 남성 물리학자로부터 승리를 거두어야만 했다. 그런 상황은 그녀를 더욱 강하게 만들었다. 남성 물리학자들에게 충분히 인정받지 못했던 뇌터는 QED와 QCD의 주춧돌로 작용하며 학계에 광범위한 영향을 준 뇌터의 정리를 발표해 모든 남성 물리학자들보다 한 수 위임을 보였고, 아인슈타인 조차 규명하지 못한 상대성이론의 퍼즐을 풀었다. 

 뇌터의 정리는 물리학자들이 '대칭성'이라 부르는 개념을 발견한 것이다. 사람들은 그 개념을 막연하게 생각해왔다. 어떠한 사건이나 입자를 연구할 때 우리는 운동에너지(이동)와 위치에너지(장에너지의 에너지)를 알려주는 방정식을 쓴다. 이 두 에너지의 차이를 라그랑지안(Lagrangian)또는 라그랑쥬 함수라 하는데 모든 물리학 법칙에 이 개념이 포함되어 있다.

 우리는 연구하는 대상이나 조건을 언제든지 바꿀 수 있다. 강한 자석 근처에서 실험하거나 입자의 질량을 변화시킨다면, 라그장지안은 그대로이거나 변화할 것이다. 우리가 일으킨 변화가 라그랑지안을 바꾸지 않는다면 모든 방정식도 같은 형태로 남을 것이며, 우리는 이 상황을 이론에 '대칭성이 있다'라고 표현한다. 그런데 우리가 일으킨 변화가 라그랑지안에 변화를 준다면 방정식 역시 변화할 것이고, 우리는 그 이론에 '깨진 대칭성broken symmetry이 있다'라고 말한다.

 뇌터의 정리는 이론에 대칭성이 있다면, 입자에도 마찬가지로 보존되는 특성이 있어야 한다고 말한다.

 가령 여러분이 입자를 들고 살펴보다가 오른쪽으로 1미터 이동했다고 치자. 입자도 여러분과 함께 이동할 것이다. 여기서 우리의 이론에는 위치 대칭성이 있다.

 뇌터의 정리에 따르면 이 같은 위치 변화는 추진력이 있는 입자가 한 장소에서 다른 장소로 이동한 결과인데, 추진력은 보존되어야 하며 생성/파괴될 수 없다. 또 서로 충돌하는 입자들은 상대에게 운동량을 전달하지만, 충돌 전후의 운동량 총량은 어떠한 일이 있어도 보존된다.

 뇌터의 정리는 또한 우리가 시간의 흐름에 따라 입자를 전진시켜도 물리 법칙은 변화하지 않는다고 말한다. 물리 법칙은 시간에 대칭적이므로 그 시간 흐름을 따라가며 보존되는 특성이 있어야 하는데, 그 특성이 에너지인 것으로 밝혀졌다. 에밀리 뒤샤틀레가 에너지는 생성/파괴되지 않는다는 것을 이미 증명했지만, 뇌터의 정리가 보다 근본적인 근거를 제시했다.

 전하도 마찬가지로 보존량이며 입자의 파동함수가 진동하는 과정에서 발생한다. 그래서 빛을 구성하는 광자는 언제나 물질과 반물질 입자를 동시에 생성한다. 전하가 보존량이므로, 전하를 지니지 않는 광자는 전자를 생성할 때마다 반전자도 생성해 전체 전하를 0으로 유지한다. 이들은 보존량의 일부 사례에 불과하다.

 뇌터의 정리는 물리 법칙 테두리 안에서 우리가 변화시킬 수 있거나, 그럴 수 없는 특성이 무엇인지 가르쳐준다. 따라서 양자장 이론이 어떻게 작동해야 하는지 알아내려 한 디랙, 파인만, 겔만에게는 뇌터의 정리가 꼭 필요했다. 뇌터가 물리학 법칙을 떠받치는 법칙을 가르쳐주었으며, 그 법칙이 얼마나 중요한지는 아무리 과장해도 지나치지 않다. 

 하지만 안타깝게도 뇌터는 유대인이었기 때문에 나치즘이 대두되는 동안 독일에서 추방당해 미국으로 이주했다. 그런데 이주한 뒤에 그녀를 여왕처럼 생각하고 좋아해주는 과학계로부터 받아들여졌다는 긍정적인 측면도 있다. 많이 늦긴 했지만 뇌터는 인정받게 되었으며 그녀가 세상을 떠난 뒤 아인슈타인은 <뉴욕 타임스> 부고문에서 "여성이 고등교육을 받기 시작한 이래 가장 훌륭한 천재 수학자"라고 평가했다.

탁현민 비서관의 경우는 정치인도 아니고 이 책의 내용도 정치와는 거리가 멀다.

일종의 회고록이므로 에세이로 분류하는 것이 맞다.

난 도서의 분류를 할때 교보문고 사이트의 분류를 참고하는데 회고록 류의 도서를 분류할때의 분류를 보면 어이가 없을 정도다.

예를 들어서 이건희 회고록은 경제/경영으로 분류가 되고, 이해찬 회고록은 정치, 김지하 회고록은 에세이로 분류가 된다.

이 기준을 보면 인물에 의해서 도서의 카테고리가 정리되는 것이다. 그럼 조용필이 회고록을 쓰면 연예로 분류가 되고 차범근이 회고록을 쓰면 스포츠로 분류가 되나? 웃기는 일이다.

책의 내용은 문재인 대통령 재임 5년간 의전비서관으로 크고 작은 국가행사와 대통령 행사를 준비하면서 겪은 뒷 얘기들로 이루어져있다. 대부분의 에피소드에서 비서관 시절 의전을 준비하면서의 고민의 과정들이 진솔하게 소개되어 있으며 문재인 대통령에 대한 탁 비서관의 애정과 존경이 담겨 있다.

이 책을 요약해서 설명하자면 대한민국 대통령 의전에 대한 입문서이자 대한민국의 지금이 있기까지의 영웅들에 대한 헌사라 할 수 있다.

 그리고 마지막으로 이 책의 가장 큰 덕목은 재밋다는 점이다. 사실 누군가에 대한 애정을 가지고 쓴 책은 남들이 보기엔 재미가 없고 아부성으로 비칠 위험이 큰데 실제로 일어난 일의 뒷 이야기보니 위화감이 없이 재밋고 간혹 감동적인 구석이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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p26 탄소 중립 선언 흑백 연설 - 방송법 위반 고발 사건

2020년 10월 방영된 대한민국 탄소중립선언 방송으로 이 영상을 보면 문재인 대통령이 연설을 하는 장면 초입에서 컬러로 흑백으로 화면이 서서히 바뀌어간다.

이 영상의 의도는 컬러 화면 대비 1/4의 데이터를 소모하는 흑백 화면을 통해 온실가스를 덜 소비하자는 탄소 중립 의지를 환기시키려는 것이었다.

그런데 이 흑백 영상을 트집잡아서 국힘이 탁 비서관을 방송법 위반 혐의로 고발했다. 책에 이에 대한 구구절절한 설명이 있긴 한데 말도 안되는 억지라 굳이 소개하지 않는다. 국힘의 억지 고발,고소가 대한민국 사회에 엄청난 비용을 유발하고 있으며 선의와 창의력을 제약하고 있다. 쳐죽일 넘들이다.

 

p33 대통령의 '퇴근길 맥주 한잔'

 

 문재인 대통령 재임 기간 가장 많이 제안됐던 일정은 바로 '퇴근길 한잔'이었다. 저간의 사정을 잘 모르기는 대통령도 마찬가지여서 이따금 "왜 퇴근길 한잔 일정을 준비하지 않느냐"는 야단도 여러 번 맞았다.

 그러던 어느날, 기적처럼 대통령이 '한잔'할 수 있는 날을 잡을 수 있었다. 그 주는 신기하게도 정무적으로 큰 부담이 없는 한 주였다. 북한이 미사일을 쏘지도 않았고, 외교적인 문제도 없었고, 격렬한 시위도 없었고, 민생과 관련한 이렇다 할 큰 이슈도 없던 날이었다. 그날 '퇴근길 한잔'의 장소로 직장인들이 많은 광화문의 어느 호프집을 선택했다.

 수입 맥주만 파는 호프집이라는 점이 마음에 좀 걸리긴 했지만, 그것까지는 어쩔 도리가 없었다. 경호처도 사전에 점검할 시간을 충분히 가져 꼭 대통령과 근접하지 않아도 될 정도의 안전을 확보했고, 가게 사장님과도 이야기가 잘 되어 우리 때문에 손해 보게 될 매출은 행사가 끝난 뒤 비서관들이 가서 벌충해 주기로 했다.

 원활한 대화를 위해서 회사원, 구직자, 공무원, 직장맘 등 다양한 사람을 선별해 초청했고 현장에서 동석을 원하는 사람들이 있으면 합석하는 것으로 계획했다. 약속한 시간이 되어 대통령이 등장했고, 조마조마했지만 초청한 사람들과 맥주를 마시며 이야기가 시작됐다. 분위기가 좋아서 이내 옆 테이블과 가게 앞으로 사람들이 모여들었고 다들 대통령과의 '퇴근길 한잔'을 신기하게 쳐다보았다.

 우리는 주변 사람들에게 합석을 원하시면 함께하자고 권유했고, 실제로 꽤 많은 사람이 대통령 주변에 앉아 함께 이야기를 나누며 맥주잔을 기울였다. 주로 최저임금 문제, 워라벨에 대한 고민, 노동시간 단축에 대한 이야기들이 시민들의 주 관심사였던 것으로 기억한다. 다행히 일정은 큰 사고 없이 다들 기분 좋게 한잔하고 끝이 났다.

의전팀과 경호팀은 내내 식은땀을 흘렸지만, 대통령도 참석자들도 모두 즐거운 자리였다며 마지막 잔을 하고 헤여졌다. 그리고 대통령은 떠나면서 한 말씀하셨다.

 "그래 이렇게 만나서 한잔씩 하면 좋지요. 매달 한 번은 합시다."

 경호처장은 딴 곳을 바라보았고, 우리는 조용히 고개를 숙여 인사를 드렸다. 그리고 맥줏집 매상을 올려 주기 위해 오래도록 자리에 앉아있었다.

 

p38 남수단에서 온 유소년 축구단

 이 영상에서 남수단 유소년 축구단을 접견하는 일정은 이 날 당일 보고를 받은 문 대통령이 바쁜 일정 중간에 잠시 접견 후 기념 사진 촬영을 하는 아주 짧은 일정이었는데, 축구단 아이들이 깜짝 공연을 준비한다. 이에 문 대통령이 화답으로 잠시 격려 말씀을 해주시는데 문제는 남수단 아이들은 아이들은 알아듣지 못한다는데 있었다

(본문 발췌)

 노래가 끝나자 대통령은 박수를 치셨다. 다행히 크게 당황하신 것은 아닌 것 같았다. 속으로 '그래 이만하면 큰 사고는 아니니 다행이다' 생각하며 대통령에게 말씀드렸다.

 "이제 이동하셔야 합니다."

 그런데 갑자기 대통령이 말씀을 하기 시작했다. 아마 노래 선물을 받았으니 뭔가 격려 말씀을 해야겠다고 생각하신 모양이었다.

 "대한민국도 전쟁의 아픔을 겪었지만 힘겨운 과정을 이겨내고 오늘에 이르렀습니다. 저는 이태석 신부님이 나온 경남고등학교 선배고, 이 신부의 업적을 기리는 동상이 설치됐는데 저도 그 동상 설치에 참여했습니다. 이 신부가 봉사의 삶을 바친 남수단 어린이들을 만나 반갑습니다. 열심히 해서 세계 많은 나라, 어린이들에게 희망이 되어주길 바랍니다."

 이때까지도 뭔가 잘못되고 있다는 것을 전혀 눈치채지 못하고 있었다. 그런데 대통령이 말씀을 마쳤는데도 선수들은 아무런 반응이 없었다.

 '아.... 통역이 없었다.'

 원래 사진 촬영만 예정되어 있어 근접 통역을 배치할 이유가 없었고, 그래서 현장에 대통령 말씀을 남수단어로 통역할 사람이 없었던 것이다. 갑자기 식은땀이 흘렀다. 대통령은 우리를 바라보고, 우리는 감독님을 바라보고, 감독님은 신부님을, 신부님은 다시 우리를 바라보았다. 너무나 길게 느껴진 몇 초가 흐르고, 우리는 유일한 희망인 신부님을 바라보며 말했다.

 "신부님, 대통령님 말씀을 전해주시죠."
 "...."

 모두가 신부님을 쳐다보았다. 그러자 신부님이 조심스럽게 선수들을 향해 말했다.

 "땡큐 베리 머치, 씨 유 어게인."

 다시 몇 시간 같은 몇 초가 흘렀고, 대통령에게 말씀드렸다.

 "대통령님, 이제 이동하셔야 할 시간입니다."

 

p154 육군 중사 김기억 - 2018년 63주년 현충일 추념식

 국가 기념식의 첫 번째 과제는 '그날'의 의미를 잊지 않도록 하는 것에 있다. 의미를 잊지 않기 위해서는 그날에 담긴 이야기가 무엇인지 찾아서 국민에게 보여주어야 한다. 이야기에 공감하는 국민이 많을수록 그날의 의미는 잊히지 않고 기억되며 살아 숨 쉬게 된다.

 그러나 60년이 넘는 세월 속에 사람도, 이야기도 다 흘러갔다. 단단했던 슬픔도 씻기고 기억도 이내 사라져갔다. 현충일을 다시 공감할 수 있는 날로 만들기 위해서는 슬픔의 이야기를 찾아야 했다.

 이전까지 현충일 추념식은 대부분 서울 현충원에서 열렸다. 변화를 주고자 전국 국립묘지들을 살펴보았다. 

 대전 현충원을 답사하던 중 현충원장의 안내에 따라 무연고 묘역을 둘러보게 됐다. 무연고 묘역은 다른 묘역과는 달리 울긋불긋한 꽃들이 묘비마다 꽂혀 있었다. 오히려 더 화려해 보이는 그곳이 무연고 묘역일지는 전혀 몰랐다. 그런데 가까이서 보니 그 꽃들은 모두 조화였다. 현충원장은 찾아와서 헌화하는 사람들이 없으니 조화라도 꽂아두었다고 설명했다. 그래서 멀리서 보면 가족이 찾아오는 묘역보다 더 화려하게 보였던 것이다.

 대전 현충원장은 화려한 조화가 있던 어느 비석 앞으로 우리를 안내했다. 비석 앞에 서자마자 현충원장의 설명을 듣기도 전에 울컥했다. 묘비에 각인된 글자 때문이었다.

 육군중사 김기억,
 1931년에 태어나 1953년 5월 3일 양구에서 전사

 단단한 묘비에 더 단단하게 새겨져 있는 글자 하나하나가 우리를 때렸다. 고 김기억 중사는 스물세 살이 되던 해 전사했다. 그의 생몰 연도와 전사 기록이 묘비 측면에 새겨져 있었다. 그의 이름도 자신을 기억해 달라는 듯 단단히 새겨져 있었다. 그러나 세월이 흐르면서 그의 부모와 가족은 모두 사망하고, 이제는 아무도 돌보지 않는 무연고 묘가 되었다.

 

p159 오희옥 애국지사의 올드 랭 사인

'70년간 이어져온 국가 기념식이기에 의전에 있어서 바꿀 수 있는 부분은 많지 않았다.  포상자인 독립지사 중 사연이 있는 분을 찾던 중 오희옥(당시 92세) 지사를 추천받았다. 식 초입에 애국가를 제창하게 되는데 이 선창을 애국지사가 하면 의미가 있겠다 싶었다. 행사 전날 리허설 시간에 지사님에게 애국가를 불러봐달라고 부탁을 했다.
원래는 오케스트라 반주에 맞춰 연습 겸 해볼 요량이었는데 마침 국방부 관현악단이 잠시 휴식 중이라 연주를 할 수가 없었다. 

"지사님, 지금 반주가 없는데 몇 소절만 그냥 해보실래요?"
"어, 그럼 애국가 부르면 되는거지?"

오 지사는 숨도 고르지 않고 바로 애국가를 부르기 시작했다. 갑자기 가슴이 쿵쾅쿵쾅 뛰었다. 망치로 머리를 한 대 맞은 듯한 기분이 들었다. 오희옥 애국지사가 부른 애국가는 안익태가 작곡한 애국가가 아니라 올드 랭 사인 애국가였다. 우리 애국가에 곡조가 없을 때 스코틀랜드 민요에 가사를 붙여 불렀던 애국가, 독립운동가 애국가로 알려진 그 멜로디였다.'

(감상)

일의 의미를 곰곰히 되새기고, 그 의미를 찾아나가는 과정에서 그 의미를 상징하는 결정적 장면들이 연출된다. 
탁현민 비서관은 이 책에서 또 방송에서 이런 내용을 이야기한 적이 있다.
"문재인 대통령은 일의 과정을 요구하지, 그 결과를 요구하진 않는다."
요즘 대한민국이 시끄러운 것은 리더가 과정을 무시하고 결과만을 요구하기 때문이다. 결과를 정해놓고 과정을 거기에 끼워맞추다 보니 거기선 우리의 상식과 논리에 부합하는 어떤 의미도 찾을 수가 없고 감동은 커녕 수긍도 되지 않는다.
이러한 문제의 근본에는 대한민국 교육의 문제가 있다고 난 생각한다. 교육의 진짜 의미는 답을 찾는 스킬을 익히는 것이 아니라 답을 찾아나가는 과정에 있다.
이 세상 현실에서 발생하는 주요한 문제들은 모두 기존의 문제들이 복합적으로 얽힌 것들이다(아주 드물게 패러다임을 바꾸는 정말 새로운 문제가 튀어나올 때도 있는데 보통 그러한 새로운 문제는 시대의 패러다임을 바꾸는 천재들에 의해 해결된다).
문제를 풀어나가기 위해서는 문제의 의미와 맥락을 찾아내서 상황에 맞는 과정을 밟아나가야 한다. 그래야 합리적이고 상황에 맞는 올바른 답을 찾아나갈 수 있다.
하지만 답을 찾는 스킬만 익힌 질 낮은 교육을 받은 사람들은 기존의 방법론만을 답습하다가 운이 좋을때는 답을 찾을 때도 있겠지만, 보통은 어이없는 답을 찾아 상황을 망칠 뿐이다. 
치열한 의미의 성찰과 그 과정을 통해 의미있는 답을 찾아나가는 과정이야말로 의미있는 인생이 거쳐나가야 할 유일한 왕도이고, 그것이 바로 교육이 추구해야 할 모범이다.

오 지사는 숨도 고르지 않고 바로 애국가를 부르기 시작했다. 갑자기 가슴이 쿵쾅쿵쾅 뛰었다. 망치로 머리를 한 대 맞은 듯한 기분이 들었다. 오희옥 애국지사가 부른 애국가는 안익태가 작곡한 애국가가 아니라 올드 랭 사인 애국가였다. 우리 애국가에 곡조가 없을 때 스코틀랜드 민요에 가사를 붙여 불렀던 애국가, 독립운동가 애국가로 알려진 그 멜로디였다.'

p169 어린이날 100주년 - 대통령 특별 지시 사항

행사가 끝나자 국민소통수석실과 몇몇 기자들의 연락을 받았다. '대통령 메시지'가 없다는 지적이었다. 반드시 들어가야 했을 대통령 당부라든지, 어린이날 복지와 교육 문제 같은 정책 사안들에 대한 언급 없이 그냥 놀기만 하면 어떻게 하느냐는 말을 들었다.

 하지만 우리도 알고 있었다. 마지막 놀이가 끝나고 함께 둘러앉아 꿈과 미래를 이야기했어야 했다. 문재인 정부가 가지고 있는 어린이 정책 같은 것을 할아버지 버전으로 이야기하는 그런 대목이 있어야 했다. 아마 그것이 저녁 뉴스가 됐을 것이다. 우리도 대통령이 이야기하는 모습이 필요하다고 보고를 드렸었다. 그러나 행사 며칠 전 대통령은 그러한 계획을 다 들으시더니 이렇게 말씀하셨다.

 "다 알겠는데, 한 가지는 하지 마세요. 내가 아이들 앞에서 뭔가 연설을 한다거나 이야기를 한다거나 하는 거는 하지 맙시다. 좋아하지도 않을 거고 나도 하루 아이들과 놀면 충분합니다. 같이 하루 즐겁게 놀면 됐습니다. 절대 내가 말을 해야 하는 순서는 넣지 마세요."

 

p203 피스메이커 - 73주년 국군의날 기념식

백문이 불여일견. 기념식 대미인 피스메이커 작전을 보면 정말 국뽕이 차오른다.

 

p218 청년의 날(with BTS) - 2020년 제1회 청년의 날

 

첫 번째 청년의 날 메신저로 누구를 선정해야 할까? 많은 의견과 토론, 조사를 거쳤지만 결과는 같았다. BTS였다. 많은 의견과 토론, 조사를 거쳤지만 결과는 같았다. BTS였다. 가장 성공한 아이돌, 세계적인 아티스트, 한국 문화를 세계 문화로 확장한 아이콘, 대한민국 청년을 대표하는 데 이만한 인물이 없었다. 

 하지만 우려되는 지점도 있었다. 바로 그 완벽함이 걱정이었다. 그들의 성공이 오늘날 청년의 현실을 반영할 수 있을까? 동시대 청년이 겪고 있는 여러 문제를 그들이 이해할 수 있을까? 성공한 이들의 모습을 보는 청년의 마음이 과연 좋기만 할까? 서로 너무 다른 세상에 사는 사람들은 아닐까? 여기에 더해 바쁜 일정을 소화하고 있는 BTS가 과연 행상에 올 수는 있을까? 행사에 와서 노래하는 것이 아닌 자신들의 이야기를 해달라고 하면 아티스트가 부담 없이 그걸 받아들일 수 있을까?

 여러 고민과 의문이 꼬리를 물었다. 하지만 고민을 해결할 방법은 문제와 마주하는 것이니 일단 그들을 찾아가 묻기로 했다. 아니나 다를까 그들은 무척 바빴다. 일정을 조정하는 것조차 쉽지 않았다. 하지만 일정을 조정하기 전에 그들이 메신저로 나서 준다면 어떤 메시지를 던질 수 있을지부터 정리해야 했다.

 "완벽한 성공, 멋진 현실과 미래를 가진 BTS가, 어렵고 힘들어하는 청년에게 어떤 메시지를 내놓을 수 있을까요?"

 그들이 이 질문을 두고 즉답을 피했던 이유에는 일정 문제도 있었겠지만, 행사 참석으로 인한 효과와 파장은 어떠할지 고민도 있었을 것이다. 얼마 후 BTS 측에서 다시 연락이 왔다.

 "우리의 성공을 이야기하는 것이 아니라 우리의 과정을 이야기하면 될 것 같습니다. 우리는 정답을 찾아서 온 것이 아니라 정답을 만들기 위해서 노력했을 뿐이거든요. 그 노력과 과정에 대해 멤버들의 생각을 정리해 볼까 합니다."

 

p223 세월은 흘러가도 산천은 안다

 이명박, 박근혜 정부 내내 외면받던 5.18 민주화운동 기념식이 문재인 정부가 들어서고 정상화됐다. 임기 첫해부터 대통령은 5.18 기념식에 참석했다. 그 자리에서 대통령은 아버지를 잃은 딸이 편지 읽는 모습을 지켜보다가 자리에서 일어나 그 딸을 안아주었다. 생방송 중이었고 아무도 예상하지 못한 행동이었지만, 참석자들과 시청하던 국민들은 그 모습에 박수를 보내며 함께 울었다.

 

p231 영웅에게 - 70주년 6.25 전쟁 기념식

 누군가 "문재인 정부 5년 동안 연출적으로 가장 완벽했던 행사는 무엇이었나요?"라고 묻는다면 주저 없이 "70주년 6.25 전쟁 기념식 <영웅에게> 입니다"라고 답할 것이다.

 

 기념식 시작은 전 세계 정상들의 6.25 70주년 기념 영상 메시지부터였다. 아마도 건국 이래 처음이었을 것이다. 미국,영국, 캐나다, 터키, 호주, 필리핀, 태국, 룩셈부르크, 네덜란드, 콜롬비아, 그리스, 뉴질랜드, 에티오피아, 벨기에, 프랑스, 남아공 등 모든 참전 국가와 의료 지원 국가의 대통령, 총리 등 국가수반의 영상 메시지를 받았다.

 정상들의 영상 메시지 다음은 6.25 전사자들의 유해를 싣고 온 공군 공중 급유기와 드론을 사용한 '미디어 파사드'였다. 미디어 파사드는 건물 외벽에 빔프로젝터로 영상을 구현하는 것을 말하지만, 이날은 유해를 싣고 온 비행기 동체에 영상을 투사하고 비행기 위로 드론을 연출해 입체감을 더했다. 투사된 영상은 70년의 세월을 거쳐 이제야 조국 땅에 도착한 6.25 전사들의 여정이었다.

 

 유해 안치가 끝난 후 6.25 참전 용사이자 고인들과 함께 싸웠던 이등중사 유영봉 님의 복귀 신고가 있었다. 147분의 유해 앞에서 유영봉 님의 목소리는 떨렸다. 그러나 고인들을 대신해 힘찬 목소리로 대통령과 국민에게 복귀 신고를 했다.

 "이등중사 유영봉 외 147명은 조국으로 복귀를 명 받았습니다. 이에 신고합니다."

 행상 프로그램에 이제 막 군에서 제대한 20대 배우 유승호의 편지를 넣었던 까닭은 기념식을 준비하며 전사자들의 나이를 확인했기 때문이다. 스무 살, 스물한 살, 스물세 살.... 겨우 20대 초반에 나라를 위해 가족과 헤어져 전쟁 한가운데로 뛰어든 이들의 마음은 어떠했을까? 두렵고 무섭지 않았을까? 춥고 배고프지 않았을까? 도대체 무엇이 이들을 용감하게 만들고 목숨을 다해 싸우게 했을까? 알 것도 같고 끝내 모를 것도 같았다. 이 들을 수 없는 대답을 같은 나이의 청년을 통해 묻고 싶었다.

 그래서 유승호 배우에게 그들에게 보내는 편지를 부탁했다. 돌아가신 할아버지에게 보내는 것이 아닌 당신과 같은 20대 청년에게 보내는 편지를 써달라고 부탁했다.

 "허락하신다면 나는 당신을 친구라고 부르고 싶습니다. 나와 같은 나이에 전쟁터로 갔던 친구여."

 

 애석하게도 당시 야당이었던 국민의힘과 몇몇 보수  매체들은, 행사에 쓰인 공군기가 실제 유해를 실어 온 기체와 다르다며, 행사를 위해 유해를 욕보였다고 헐뜯기 바빴다. 그러나 사실은 해외 수송 후 방역을 위해 기체를 바꾸었을 뿐이다.  비난 중 압권은 애국가 도입부에 쓰인 변주가 북한의 애국가와 비슷하다는 허무맹랑한 주장이었다. 그 대목에서 더 이상 아무 말도 하고 싶지 않았다. 그저 한 집단의 정치 수준과 음악 수준은 같구나 싶은 생각이 들었다.

 

p250 102년만에 다시 외친 대한독립 만세 - 102주년 3.1절 기념식

(이 날 비가 엄청 왔다)

 대통령 옆자리에 앉아 계시던 임우철 애국지사 담요가 비에 젖은 바닥에 떨어지는 일도 있었다. 그것을 본 대통령이 자리에서 일어나 임우철 지사에게 새 담요를 가져다드리라고 하셨고, 얼른 뛰어가 임우철 지사에게 새 담요를 덮어드렸다. 임우철 지사는 그해 세상을 떠나셔서 그날 기념식이 지사님의 마지막 3.1절 기념식이 됐다.

 

 그즈음 독립유공자 후손에 대한 폄훼 사건이 일어나기도 했다. '독립유공자 후손들은 사회 부적응자'라는 허무맹랑한 비난이었다. 많은 사람이 분노했고, 국가를 위해 헌신한 분들의 후손을 제대로 예우해야 한다는 여론도 높았다. 우리는 행사 사회자로 전문 진행자와 함께 독립유공자 가족인 이재화 씨를 선정했다. 이재화 씨는 <빼앗긴 들에도 봄은 오는가>로 알려진 시인 이상화 선생의 후손이었다.

(다시 한번 이상화 님의 이 시를 음미해보았다. 슬프고도 비장하며 아름다운 시다

『지금은 남의 땅―빼앗긴 들에도 봄은 오는가?

나는 온몸에 햇살을 받고
푸른 하늘 푸른 들이 맞붙은 곳으로
가르마 같은 논길을 따라 꿈 속을 가듯 걸어만 간다.

입술을 다문 하늘아 들아
내 맘에는 나 혼자 온 것 같지를 않구나
네가 끄을었느냐 누가 부르더냐 답답워라 말을 해 다오.

바람은 내 귀에 속삭이며
한 자욱도 섰지 마라 옷자락을 흔들고
종다리는 울타리 너머 아가씨같이 구름 뒤에서 반갑다 웃네.

고맙게 잘 자란 보리밭아
간밤 자정이 넘어 내리던 고운 비로
너는 삼단 같은 머리를 감았구나 내 머리조차 가뿐하다.

혼자라도 가쁘게나 가자
마른 논을 안고 도는 착한 도랑이
젖먹이 달래는 노래를 하고 제 혼자 어깨춤만 추고 가네.

나비 제비야 깝치지 마라
맨드라미 들마꽃에도 인사를 해야지
아주까리 기름을 바른 이가 지심매던 그들이라 다 보고 싶다.

내 손에 호미를 쥐어 다오
살찐 젖가슴 같은 부드러운 이 흙을
팔목이 시도록 매고 좋은 땀조차 흘리고 싶다.

강가에 나온 아이와 같이
짬도 모르고 끝도 없이 닫는 내 혼아
무엇을 찾느냐 어디로 가느냐 우서웁다 답을 하려무나.

나는 온몸에 풋내를 띠고
푸른 웃음 푸른 설움이 어우러진 사이로
다리를 절며 하루를 걷는다 아마도 봄 신령이 잡혔나 보다.

그러나 지금은―들을 빼앗겨 봄조차 빼앗기겠네.』 )

 

 비는 기념식이 진행되면서 더욱 거세졌지만 우리는 준비한 모든 순서를 빠짐없이 진행했다.

 3.1 운동과 애국지사들을 위해 첼리스트 홍진호의 특별한 연주도 준비했다. <대니 보이의 아리랑>이라는 곡이었다. <대니 보이의 아리랑>은 아일랜드 민요 <대니 보이>와 우리 민요 <아리랑>을 엮은 곡이었다. 굳이 <대니 보이>를 엮은 이유는 이 곡이 일제강점기에 희생된 위인, 열사, 무명 영웅 들을 추도하는 노랫말이 붙여져 <선현추도가>로도 불린 바가 있기 때문이었다.

 기념식 마지막 순서는 가수 정인과 헤리티지 합창단의 <대한이 살았다> 합창과 각 대학 의과대학생들의 만세 삼창이었다. 내리는 빗줄기 속에서 탑골공원에 모인 사람들이 함께 만세를 불렀다. 대한독립 만세! 대한독립 만세! 그렇게 101년 만에 탑골공원에 만세 소리가 울려 퍼졌다.

 

p268 하와이에서 서울로 - 2021년 한미유해상호인수식(영웅의 귀환)

 

 애초 2021년 한미유해상호인수식에 대통령의 참석은 고려되지 않았었다. 그 기간에 대통령은 뉴욕에서 재임 중 마지막 유엔총회에 참석할 예정이었기 때문이다. 총회 참석뿐만 아니라 다른 정상들과의 정상회담, 경제 관련 회의, 대한민국 백신 허브 국가 관련 일정 등이 준비되고 있었다.

 또한 UN총회에서 전 세계 정상들을 대표해 대한민국 대통령이 기조연설을 하게 됐기 때문에 하와이 일정은 아무래도 어려운 상황이었다.

 게다가 유엔총회 참석 일정 중에는 미래 세대를 위한 대통령 특사로 임명된 BTS도 함께 방미해 유엔에서 전 세계 청년들을 대표해 연설할 계획이 있었다. 아울러 대통령과 함께 미국 언론과 인터뷰할 계획도 있었다.

 하지만 대통령은 한미유해상호인수식 참석을 결정하셨다. 뉴욕 일정을 조정해 하루를 줄이고, 밤늦게 하와이에 도착한 후 다음 날 인수식을 끝내자마자 서울로 돌아오자는 것이었다. 이 경우 대통령이 쉴 수 있는 시간이 너무 부족해 여러 비서관이 반대했었다. 하지만 대통령은 한미 상호 간 유해 인수인계 준비가 끝났고, 마침 미국에 있는데 직접 가서 그분들을 모시지 않는 것은 도리가 아니라며 하와이 일정을 결정하셨다.

 이 일정은 실무적인 부담도 컸다. 유엔과 뉴욕 일정을 준비하는 것도 만만치 않은데 별도로 한 팀을 더 꾸려 하와이 일정까지 준비해야 했다. 서울에 도착해 대통령을 현충원으로 모실때까지 국내 행사와도 일정을 연계해야 했다.

 

 처음 기획 단계에서는 현지 행사가 끝나면 대통령은 공군 1호기로 복귀하고, 유해는 우리 공군 공중급유기를 통해 모셔올 계획이었다. 하지만 계획을 수정해야 했다. 하와이로 출발하기 직전 인수받은 68구 유해 중 고 김석주 일병과 고 정환조 일병 두 분의 신원이 확인됐기 때문이다. 기적 같은 일이었다. 두 분 모두 6.25 전쟁 당시 미 7사단 카투사로 복무하다 함경남도 개마고원 장진호 전투에서 전사한 것으로 확인됐다. 우리는 이 두 분을 서울에서 온 유족과 함께 대통령 전용기인 공군 1호기에 모시기로 했다.

 

 유해가 기내에 오르자 공군 1호기 기장은 기내 방송을 통해 이렇게 말했다.

 "특별히 김석주, 정환조 일병 두 분 영웅과 유가족을 고국으로 모시게 되어 영광입니다. 오늘을 기다리셨을 두 분의 안전한 귀환을 위해 최선을 다하겠습니다. 두 분의 영웅을 모신 공군 1호기는 잠시 후 하와이 히캄 공군기지를 출발,대한민국 서울공항에 도착할 예정입니다."

 대통령은 1호기가 이륙하자 잠시 후 유해를 모신 좌석을 찾아가 아무 말씀 없이 태극기가 관포된 관을 바라보셨다. 유해를 운구하러 고 김석주 일병의 외증손녀인 김혜수 소위와 잠시 이야기를 나누기도 하셨다. 그렇게 두 분의 유해를 모신 공군 1호기와 나머지 유해를 모신 공중 급유기는 약 10시간 비행 뒤 한국방공식별구역에 진입했다. 그리고 다시 한번 기내 방송이 나왔다.

 "공군 1호기는 잠시 후 대한민국 영공에 진입할 예정입니다. 영웅들의 귀환을 맞이하기 위해 대한민국 공군 전투기 편대가 호위 비행을 시작하겠습니다."

 공군 1호기 옆으로 F-15K 4대가 공중 호위 비행을 실시했다. 경례와 함께 4대의 엄호기에서는 영웅들의 귀환을 환영하는 21발의 플레어가 발사됐다.

 "영웅의 귀환을 마중하게 되어 영광입니다. 선배님들의 헌신과 희생이 있었기에 지금의 대한민국이 있습니다. 국가 수호 임무는 후배들에게 맡기시고 고국의 품에서 편히 잠드시길 바라겠습니다. 지금부터 대한민국 공군이 선배님들을 안전하게 호위하겠습니다. 필승."

 

p274 장국의 귀환 - 여천 홍범도 장군 유해 봉환식과 안장식

(이 공식영상 외에 홍범도 장군 귀환의 맞추어 조정웅 배우의 나레이션으로 진행되는 다큐가 있다. 그 영상도 추천한다)

 대한독립군 총사령관인 여천 홍범도 장군 유해 봉환은 서거 101주년만에 이루어졌다.

 실은 이전 정부에서도 유해를 봉환받으려는 노력이 없지는 않았다. 김영삼 정부 시절, 홍범도 장군 유해 봉환을 카자흐스탄에 요청한 적이 있었으나 당시 북한과의 관계를 고려한 카자흐스탄이 거절했고, 이후 북한 정부가 홍범도 장군 유해를 봉환해 달라고 요청했으나 대한민국 정부 입장을 고려해 거절했다는 말을 카자흐스탄 관계자에게서 들었다. 

 그러던 중 2019년 4월 문재인 대통령 카자흐스탄 국빈 방문이 있었다. 문재인 대통령은 카심-조마르트 토카예프 카자흐스탄 대통령에게 홍범도 장군 유행 봉환을 다시 한번 공식적으로 요청했고, 토카예프 대통령은 흔쾌히 그 요청을 수락하면서 홍범도 장군 유해 봉환 사업은 결실을 보는 듯 했다.

 그러나 코로나19 대유행으로 인해 카자흐스탄 국경이 봉쇄되고 국내 사정도 어려워지면서 홍범도 장군 유해 봉환은 미룰 수밖에 없었다. 하지만 코로나19 상황이 어느 정도 관리되기 시작하면서 2021년 8월 토카예프 대통령 국빈 방문이 재추진됐다. 봉환 사업도 다시 빠르게 진행될 수 있었다. 

 

 이날 추모곡은 가수 하현상이 불렀다. <바람이 되어>였다. 이 곡은 독립운동과 의병 역사를 다룬 드라마 <미스터 션샤인> OST중 한 곡이었다. "바람이 되어 그대 곁에 머물겠다"는 가사가 불릴 때, 마침 불어오는 바람에 관을 덮은 태극기가 펄럭이던 장면은 우연이라 하기에는 너무나 드라마 속 장면 같았다.

 

p373 최고의 순방, 최고의 회담 - 2021년 조 바이든 대통령 초청 미국 공식 방문

 

미국 명예훈장 수여식에 양국 정상이 참석했던 장면도 큰 화제가 됐다.

명예훈장은 미국 군인이 받을 수 있는 최고 무공 훈장이다. 처음 미국으로부터 이 일정을 제안받았을 때는 감이 오지 않았다. 우리 태극무공훈장 수여식에 미국 대통령이 참석하는 것과 같았기 때문이다. 전례 없는 일이었다. 하지만 훈장을 받는 분이 누구인지 들으니 우리도 양국 대통령이 함께 참석하는 것이 좋겠다는 생각이 들었다.

 훈장을 받게 된 랠프 퍼켓 쥬니어 대령은 한국전의 영웅이었다. 청천강 전투 때 미 특수부대 제8레인저 중대를 지휘했다고 한다. 게다가 이날 수여식은 바이든 대통령이 취임 후 처음 갖는 1호 훈장 수여식이기도 했다. 그런 의미 있는 자리에 한국 대통령과 함께 하고 싶다는 것은 대단히 사려 깊은 제안이었다. 미국은 그 자리에서 우리 대통령의 연설도 부탁했다. 

 "대령님은 아까 제게, 당시 한국은 모든 것이 파괴되어 있었다고 말씀하셨습니다. 그렇습니다. 한국은 전쟁의 폐허에서 다시 일어섰고, 한국의 평화와 자유를 함께 지켜준 미국 참전 용사들의 그 힘으로 오늘의 번영을 누릴 수 있었습니다. 랠프 퍼켓 대령님이 우리 곁에 오래 머물러 주시기를 기원합니다."

 

p400 휘모리 - 2021년 유럽 순방

 행사 가제 '휘모리'는 로마 교황청 방문, G20, COP26, 헝가리 국빈 방문, V4(비셰그라드 4개국 그룹 : 폴란드, 체코, 슬로바키아, 헝가리)까지 총 7박 9일간의 여정이었다.

COP26

 제26차 유엔 기후변화협약 당사국총회(COP26), 120개 나라 정상과 국제기구 수장이 참여한 역대급 국제회의다. 거기서 겪었던 일들을 떠올리면 지금도 아찔하다.

 오전 8시 개회식부터 당일 저녁 영국 보리스 존슨 총리 주최 리셉션까지 참석해야 하는 종일 일정이었다. 모든 일정을 마치면 밤 10시가 되어야 숙소로 돌아갈 수 있을 것 같았다. 대통령의 체력적인 부담이 엄청났다. 게다가 당일 아침 개회식에 참석하려면 아침 식사도 거른 채 출발해야 시간을 맞출 수 있었다.

 주최 측은 회의장 안에 정상들이 식사할 수 있도록 준비해 놓았다고 설명했지만, 믿기 어려웠다.

 '정상들을 포함해 500명 정도가 그 안에 있을 텐데 개회식 끝나고 30분 이내에 500명의 식사가 가능하다고?'

 부속비서관과 상의해 도시락을 준비해 가기로 했다.

 새벽부터 회의장은 아수라장이었다. 정상들이 얼마나 많은지 여기저기서 정상들에 걸려 넘어지는 사람들 천지였다. 그 틈을 비집고 가까스로 라운지 테이블 하나를 차지하고 앉았다. 대통령도 이런 상황이 처음이고, 평생을 외교관으로 살았던 정의용 장관도 마차가지였다.

 "아이고, 이거 정말 대단하네."

 다들 처음 보는 풍경에 놀랐다. 시간이 되어 대통령은 개회식 참석을 위해 자리를 떠나셨고, 주최 측이 준비했다던 음식을 찾기 시작했는데 보이지 않았다. 잠시 후 누군가 메뉴가 적힌 종이를 하나 주고 갔다. 거기에는 음식 메뉴가 1번부터 10번까지 적혀있었다. 주문하면 가져다준다는 설명이었다. '주문하면 그때부터 조리해서 30분 이내에 500명을 먹일 수 있다고?' 말도 안되는 계획이었다.

 "장관님, 이거 음식 지금 주문해도 절대 시간 못 맞출 것 같아요."

 "어, 그래. 내가 봐도 그러네. 어떻게 하지."

 "일단 도시락 가져왔으니까 이거부터 꺼내 놓고 주문은 주문대로 하죠."

 "그래 뭘 주문하지. 대통령이 뭘 좋아하시지?"

 "아뇨, 그냥 1번부터 10번까지 다 주문하죠. 뭐든 먼저 한두가지는 나오겠죠."

 우리는 10가지 음식을 모두 주문해 놓고 대통령을 기다렸다. 잠시 후 개회식을 마친 대통령이 나오셨다. 다음 세션까지는 30분 정도 시간이 남아있었다. 여기저기서 의전비서관들과 외교부 장관들이 분주했다. 어떻게든 자국 정상을 챙겨야 하는데 음식이 나오지 않으니 다들 어쩔 줄 몰라 하고 있었다.

 우리는 준비해 온 도시락을 조용히 꺼냈다. 옆 테이블의 캐나다, 콜롬비아 그리고 또 다른 몇 개의 나라들이 일제히 우리를 쳐다보았다. 우리는 준비해 온 음식들과 보욘병에 가져온 차를 따라 대통령에게 드렸다. 그리고 잠시 옆에 비켜서 있었는데, 뒤에서 누군가 물었다.

 "그 음식들, 그거 어디서 난 건가?"

 "우리는 음식이 늦을 것 같아 도시락을 싸 왔다."

 "아, 우리도 싸 올 걸 그랬다. 좋겠다."

 "어, 부럽지. 부러울 거야."

 정상들은 잠시 후 다시 세션에 들어가야 했고, 그때까지도 음식은 제대로 나오지 않았다. 음식은 첫 번째 세션이 시작될 때 쯤에야 나오기 시작했다. 많은 나라 정상이 굶은 채로 회의장으로 향했다. 정상들이 회의장에 들어가자 각 나라 의전비서관들이 원망스러운 눈빛으로 음식을 바라보며 앉아있었다. 어느 나라나 똑같았다. 우리 자리에도 대통령이 들어가시고 나서야 10가지 음식이 쌓였다. 마치 한정식처럼.

 COP26 마지막 일정은 보리스 총리 주최 리셉션이었다. 회의장과 리셉션 장소가 떨어져 있어 정상은 단체 버스로, 수행원은 별도 버스로 이동하도록 안내받았다. 아침부터 개회식과 세션 등으로 정상들은 다들 지쳐있는 상태였다. 영국으로서는 주최국이어서 리셉션을 개최할 수밖에 없었겠지만, 너무 무리한 계획이었다.

 게다가 다들 수행원과 떨어져 버스를 타라니 그에 대한 불만도 적지 않았다. 어쩔 수 없이 대통령만 혼자 버스에 모셔드리고, 통역, 경호와 함께 버스 옆에 서 있었다. 버스가 출발하고 나면 우리도 뒤따라갈 생각이었다. 다른 정상들도 하나, 둘 버스에 올랐다.

 그때 대통령이 탄 버스에서 큰 소리가 났다. 어느 정상 한 분이 통역도 버스에 못 태운다고 하니 버럭 화를 낸 것이었다. 당황한 영국 담당자가 "그럼 통역을 태우세요"라고 했지만 이미 그 나라 통역은 먼저 따로 이동한 다음이었다. 우리는 그 북새통에 슬며시 우리 통역 손을 잡아끌어 버스에 태웠다. 이따 보자는 말과 함께.

 지친 정상들의 리셉션 기념 촬영이 끝나고, 각국은 눈치껏 자리를 빠져나가기 시작했다. 우리는 처음 리셉션 장소에 도착했을 때, 영국 담당관과 이야기해서 차량을 이미 바깥쪽에 주차해 놓았었다. 담당관들은 영국 공무원들이지만 마치 우리 수행원처럼 일해주었다. 눈치도 빠르고 '척'하면 알아들었다.

 리셉션이 끝나면 이 많은 정상이 한꺼번에 나가려고 할 텐데, 그렇다면 승패(?)는 차량의 주차 위치에 달려 있다고 생각했다. 먼저 빠져나가려면 바로 움직여야 했다. 조금만 늦어도 다른 정상들 차량이 우리 차 앞을 막을 것 같았다. 대통령에게 가서 말씀드렸다.

 "차를 빼놓았습니다. 지금 움직이셔야 합니다."

 대통령도 힘드셨는지 바로 따라나섰다. 대통령 뒤로 유엔 사무총장과 여러 정상이 따라나섰다. 차량 대기 지점에 도착하자마자 우리 차량이 곧 도착한다는 안내가 나왔다. 대기 지점에서는 이미 몇몇 정상들이 나오지 않는 차량을 기다리고 있었다.

 도착 순서와 달리 우리 차량이 먼저 나온다는 안내가 나오자, 우리보다 먼저 와 있던 아세안 국가 어느 총리가 자국 의전관(인 듯)을 정말 가혹하다 싶을 정도로 구박하기 시작했다. 저분 이러다 오늘 어떻게 되는 거 아닌가 싶을 정도였다. 괜히 미안했다. 그때 뒤에서 따라오던 어느 국제기구 수장도 우리 대통령을 보며 말했다.

 "정말 힘드네요. 한국에서 했으면 이렇게 힘들게 안 했을 텐데..."

 우리 대통령 들으라고 한 말이겠지만 듣기는 좋았다. 대통령도 그 수장에게 오늘 고생 많으셨다며 인사를 했다. 이윽고 가장 먼저 우리 차량이 도착했다. 우리는 뿌듯한 마음으로 대통령을 차량으로 모셨다. 차를 타고 나오는데 100대가 넘는 차량이 주차장 입구에 뒤엉켜 있는 모습을 보았다. COP26  마지막 밤이었다. 차량 불빛들이 아름다웠다. 

 

p414 마지막 순방 샤프란 - UAE, 사우디아라비아, 이집트

 중동과 아프리카 순방은 수행원들의 무덤이라느 말이 있다. 절대로 계획한 대로 되지 않는다는 의미다. 대통령의 2022년 마지막 순방은 UEA, 사우디아라비아, 이집트로 확정됐다. 시작부터 예감이 좋지 않았다.

 출발 전 국힘의힘에서 순방 관련 일정을 논평 형식으로 발표했다. 공동 발표일이 정해져 있음에도 일방적으로, 그것도 정부 공식 발표가 아니라 특정 정당에서 일정을 공개한 것은 대단히 심각한 외교적 결례였다. 상대 국가에서 문제 삼을 수도 있을만한 사안이었다.

 

 

 사우디에서는 대통령도 여사님도 최악의 컨디션이었다. 특히 여사님은 몸이 심각하게 좋지 않아 일정을 전부 취소해야 할 정도였다. 하지만 여사님은 주치의에게 약을 타 드시면서까지 일정을 소화하셨고, 결국 사우디를 떠나기 전날 크게 앓아누우셨다. 어디에다가 말할 수도 없으니 더 답답했고 여사님께도 죄송했다.

 

 중동-아프리카 국가들의 국빈 행사가 이런 식(협의된 일정의 변경 등 돌발 상황이 잦음, 주로 윗 사람의 기분에 좌우)이라면, 마지막 남은 순방지인 이집트가 정말 걱정이었다. 이집트 카이로에 도착한 것은 현지 시간으로 늦은 오후였다. 도착하자마자 여사님의 건강 상태를 확인하니 역시 좋지 않았다. 2부속 비서관과 여사님 일정을 취소하자는 이야기를 하고, 마지막 이집트 일정을 점검했다.

 우려했던 대로 현지 선발대는 애를 먹고 있었다. 이집트 측은 사소하지만 사전에 합의한 내용에서 달라진 것들을 이야기해 주지 않았다. 그것 때문에 크고 작은 일정들에 혼선이 생겼다. 하지만 이집트에서는 한 가지만 해결된다면 의전 관련한 것들이야 얼마든지 양보할 수 있었다. K9 자주포 수출 건이었다.

 그것 때문에 방사청장이 전에 없이 공식 수행원이 되어 함께 온 것이고, 이집트는 대통령 방문 중에 결정하겠다는 약속도 했던 터였다. 실제로 관련 계약 체결을 위한 행사 장소까지 우리와 협의를 끝낸 상태였다. 하지만 이집트가 정말로 계약서에 서명하기 전까지는 아무것도 결정되지 않은 것이라고 생각하고 있었다.

 한-이집트 정상회담 양측 기자회견과 공식 오찬이 어어지는 동안 이집트와 우리의 협상은 엎치락뒤치락했다. 나중에 들으니 양 정상은 정상들대로, 실무자들은 실무자들대로 협상하고 있었는데, 협상이 깨졌다가 붙었다가를 되풀이했다고 한다. 이틀 내내 그런 상황이 반복됐다.

 그 와중에 이집트는 피라미드를 가지 않겠다는 우리에게 방문을 집요하게 권했다. 자신들에게는 가장 자랑스러운 유적이고 이제껏 모든 해외 정상이 방문했는데, 왜 가지 않으려는지 이해하지 못하겠다는 눈치였다. 우리는 어쩔 수가 없었다. 피라미드 방문이 한가하게 여행이나 다닌다고 비난받을 소지가 있기도 했지만, 대통령은 회담과 협상으로 시간을 낼 수가 없었고, 여사님은 건강 상태가 매우 좋지 않아 공개 일정을 할 수 없다고 판단했다. 그러나 이집트가 끝까지 강권하자 결국 여사님은 아픈 몸을 이끌고 피라미드를 방문했다.

 순방을 마치고 돌아온 후 여사님의 피라미드 방문을 두고 국민의힘과 보수 매체들이 떠들 때, 그때라도 사정을 말했어야 하는데 그래 봐야 믿지도 않을 테니, '그래, 그냥 아무 말이나 해라'하고 내버려 둘 수밖에 없었다.

 

(당시 조중동을 보수언론에서 김정숙 여사 피라미드 방문을 두고 엄청 씹었었다. 쓰레기들이다. 윤석열이 2022년 6월 나토 정상회의 참석시 김건희의 지인이 미리 프랑스 파리를 거쳐 대통령 순방단에 합류했던 사실이 있고, 그 이후 김건희 까르띠에 팔찌등 명품에 대한 논란이 있었는데 김건희 지인이 프랑스에 미리 가서 명품 쇼핑을 대신해준게 아니냐는 의혹이 있었다. 그런 소식에 대해서는 조중동은 함구한다. 조중동이 쓰레기인 이유는 꼴통들의 의혹에 대해서는 입을 쳐닫으면서 진보측의 티끌만한 의혹에도 소설을 써대는 그 얄량함 때문이다)

https://www.joongang.co.kr/article/25045470#home

 

김정숙 여사 피라미드 방문…청와대, 이집트에 비밀 요청 | 중앙일보

청와대가 일정을 일부러 공개하지 않은 것으로 파악됐다.

www.joongang.co.kr

 

 대통령은 떠나는 날까지 우리에게 주의를 주었다. 방사청장에게 부담 주는 말을 절대 하지 말라는 말씀이었다. "어려운 협상을 하고 있는데, 대통령 순방 성과를 내야 하니 결론을 달라고 채근하면 그게 다 부담이다. 그러니 아예 아무 말 하지 말라"는 것이었다.

 뜨끔했다. 사실 "대통령이 이집트까지 갔는데 계약을 하지 못하면 빈손으로 귀국했다고 할 게 뻔합니다. 여기까지 와서 그냥 돌아갈 수는 없습니다. 어떻게든 결론을 지어 주십시오"라고 말할 생각이었다.

 하지만 대통령이 그렇게 정색하고 주의를 주시니, 아무 소리 못 하고 그저 '방사청장님 파이팅'만 할 수밖에 없었다. 결국 K9 자주포 수출 건은 우리가 이집트를 떠날 때까지 결론을 못 낸 체 돌아오게 됐다. 방사청장은 침울해했고, 우리는 돌아가서 시달릴 일이 걱정이었다.

(어떤 협상이든 급한 쪽이 손해를 보게 되어 있다. 만약 문재인 대통령이 이때 본인의 치적에만 급급해서 방사청장 등 관계자에게 계약을 독촉했다면 우리는 불리한 조건에 계약을 했을 것이 불을 보듯 뻔하다. 본인의 치적보단 국익을 우선시한다면 이런 자세가 당연하다. 하지만 석열이는? 이 새끼는 그런 걸 모른다는 걸 지난 10개월간 적나라하게 보여줬다. 이 새끼는 대한민국의 국익은 어떻게 됐든 자신의 치적과 겉모냥에만 급급한 천박한 새끼다)

 1월22일 10시 21분, 공군 1호기가 서울공항에 도착했다. 마지막 순방이 끝났다는 안도보다는 곧 야당에 시달릴 일을 예감하며 서둘러 짐을 챙겨 사무실로 들어갔다. 사무실에 들어가자마자 방사청장에게 연락이 왔다.

 "지금 이집트에서 연락이 왔는데 다시 와 달랍니다. 아마 계약이 될 것 같습니다."

 "정말이요? 아, 참 할 말이 없네요. 그럼 다시 가셔야겠네요."

 "내일 다시 이집트로 갑니다. 이번에는 어떻게든 되겠죠."

 "네, 청장님. 정말 고생 많으십니다. 파이팅."

 아니나 다를까 돌아온 다음 날부터 국민의힘과 보수 매체들은 "대통령 빈손 귀국, 빈손 외교"라며 신나게 떠들었다. 하지만 우리는 그냥 내리는 비를 맞고 서 있을 수밖에 없었다. 그리고 귀국한 지 일주일쯤 지난 어느 날, 카이로에서 기다리던 소식이 날아왔다.

 'K9 자주포 이집트 수출 마침내 성사, 사상 최대 2조 원 계약 체결.'

 

이 책의 에필로그는 청와대 직원들이 준비한 조촐한 서프라이즈 퇴임 행사에 대한 이야기로 마무리된다.

 

 문재인 대통령 임기 마지막 날 자정에 청와대를 개방하겠다는 윤석열의 만행으로 문대통령은 그날 처음으로 퇴근을 하셨고, 일반 시민들이 그 자리에 함께 하며 대통령을 배웅해 드렸다. 

"이제 대한민국 대통령께서 퇴장하시겠습니다. 모두 자리에서 일어나 환송해 주시기 바랍니다."

 주기율표를 주제로 원소의 성질에 대한 초보적인 양자역학적 설명을 곁들인 부담없이 읽을 수 있는 교양과학 서적.

 내용은 고등학교 물리,화학 정도의 상식으로 어느 정도까지는 이해 가능한 수준이지만 곳곳에 꽤 높은 수준의 통찰을 요하는 설명들을 발견할 수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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p80

 입은 맛뿐만 아니라 온도도 감지하여 우리가 너무 뜨거운 음식을 먹지 않도록 막는다. 우리 몸의 열 감지기는 'TRPV1 수용체'라고 부르는데 혀와 소화관 내부에 많이 있다. 어떤 화학물질은 우연히 열 감지기를 작동시켜 실제로는 그 부위가 차갑지만 뇌에는 뜨겁다는 신호를 보낸다. 이러한 혼란이 빚어낸 감각을 우리는 '매운맛'으로 인식한다.

 1912년 미국 과학자 윌버 스코빌은 음식의 매운맛을 수학적으로 측정하는 방법을 고안했고, 오늘날에도 이 시험법이 사용된다. 매운 화학물질을 시험 대상자가 느낄 수 없을 때까지 계속 희석한다. 대상자가 매운맛을 느끼지 못할 때까지 희석한 횟수가 스코빌 지수(SHU)로 환산된다.

 혀는 미량의 물질에도 민감하게 반응하기 때문에 일반적은 SHU값은 매우 크게 나온다. 할라페뇨 고추기름은 8,000회 희석후에 맛이 느껴지지 않으므로 스코빌 지수가 8,000 SHU이며 타바스코 소스는 5만 SHU에 가깝다.

 세계에서 가장 매운 고추는 웨일스 향신료 전문가 마이크 스미스가 육종한 드래곤 브레스다. 드레곤 브레스의 스코빌 지수는 240만 SHU에 이른다. 이 수치는 후추 스프레이에 맞먹는다. 드래곤 브레스는 너무 매워서 먹으면 과민성 쇼크를 일으킬 수 있다. 그러나 세계에서 가장 매운 화학물질인 레시니페라톡신에 비하면 아무것도 아니다.

 식물 백각기린 유액에서 추출한 성분인 레시니페라톡신은 급성독성이 있고 피부에 심한 화상을 입힌다. 이 때문에 누구도 이 물질로 미각 실험을 한 적은 없다. 따라서 우리는 이 물질의 스코빌 지수를 간접적으로 계산해야 한다.

 1989년 헝가리 병리학자 아르파드 살라시는 (쥐를 대상으로) 수행한 연구에서 캡사이신보다 레시니페라톡신이 TRPV1 스용체에 1,000배에서 1만 배 더 잘 결합한다는 것을 발견했다. 캡사이신의 스코빌 지수가 1,600만 SHU이므로 레시니페라톡신은 대략 160억 ~ 1,600억 SHU일 것이다. 우리를 죽이기에 충분한 매운 맛이다.

 

p135

 원자번호가 커질수록 양성자 수가 증가하므로 양성자를 제대로 붙잡아 두려면 중성자 수도 늘어나야 한다. 그런데 복잡한 문제가 생겼다. 양성자 사이에 졵재하는 반발력은 끝없이 증가하지만 중성자의 접착력은 무한하지 않다.

 거대 원자 안에서 반발력이 승리하는 것은 시간문제며 반발력은 원자 구조를 불안정하게 만든다. 크기가 클수록 원자는 깨지기 쉬워지고, 충분한 시간이 흐르면 결국 산산조각이 날 것이다.

 푸른빛을 내는 원소 악티늄은 양성자가 89개인 거대 원자핵을 지닌다. 악티늄 덩어리는 20년 이내에 절반 정도가 다른 원소로 붕괴될 것이다. 반면 루비듐의 원자핵은 양성자가 37개에 불과할 정도로 작다. 루비듐 덩어리의 절반이 붕괴되려면 490억 년이 걸린다. 

 방사성 붕괴로 생성신 원소의 핵에는 다른 원소가 일반적으로 가지지 않는 독특한 개수로 중성자가 존재한다. 이러한 '딸daughter' 원자핵은 방사성 붕괴로만 발생한다. 암석에 포함된 모mother 원자핵과의 비율을 측정하면 언제 붕괴가 시작했는지, 그리고 얼마나 오랫동안 붕괴 반응이 지속되었는지 알 수 있다.

 이 기술로 미국 화학자 클레어 패터슨은 지구의 나이를 계산하여 대략 45억 세인 것을 확인했다.

 

우리가 들어서 많이 알고 있는 법의 근본사상을 이루는 고전들에 대해 그 핵심을 설명한 책.

재밋고 유익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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p20 

 정치 참여는 '의무'



 루소는 <사회계약론> 1부 도입부에서 정치 참여의 당위성을 강조합니다. 그때나 지금이나 시민이 정치에 관심을 갖는 것을 비난하는 사람들이 있었나 봅니다. "네가 뭔데 정치 이야기를 해?"라는 식이죠. 루소는 다음과 같이 말합니다.

 '나는 군주도 아니고 입법자도 아니다. 그리고 바로 그렇기 때문에 정치에 관한 글을 쓴다. 내 의견이 공적인 일에 미칠 수 있는 영향력이 아무리 미미하다고 해도 나는 한 자유국가의 시민이자 주권자의 한 사람으로 태어나 그것[공무]에 관해 투표할 수 있는 권리를 가졌으므로 거기에 대해 알아야 한다는 의무 역시 당연히 갖게 된다.'

 권위주의 체제 시절에는 시민들이 정치를 이야기하면 "네 일이나 잘해"라는 말을 들어야 했습니다. 교사들이 정치 이야기를 하면 "학생들이나 잘 가르치지"라는 야유를 받았죠. 노동자들이 정치 이야기를 하면 "물건이나 잘 만들어 팔지"라는 구박이 돌아왔습니다. 정치적 민주화가 이루어진 이후에도 크게 바뀌지는 않았습니다. 저의 경우는 정치 과정에 참여한 이후 "교수가 전공 강의나 하지 왜 정치 이야기를 해?"라는 비난을 많이 들었습니다. '폴리페서'라는 딱지도 붙었죠.

 만약 이런 식으로 '네 일이나 잘하라'는 요청을 따르기만 한다면 어떻게 될까요? 제가 정치에 관심을 끊고 학교 캠퍼스에 틀여박혀 있거나 노동자가 공장에서 일만 하고 농민이 논밭에서 농사만 지으면 어떻게 될까요? 그러면 정치는 특성 사람, 특정 집단의 전유물이 되어버립니다. 우리나라 대한민국은 "민주공화국'입니다. 민주공화국은 이 나라의 주인이 바로 우리라는 뜻입니다. 나라 운영의 원리와 방향을 정하는 것이 정치인데, 나라의 주인이 그러한 정치에 관심을 갖는 것은 너무나 당연합니다. 루소는 이 점을 분명히 했습니다.

 한편 "정치에 관심을 갖지 마!"라는 윽박지름과 함께 "정치가 너와 무슨 상관이야?"라는 어리석은 질문도 있습니다. 루소가 살던 시대에도 그랬나 봅니다. 루소는 이렇게 답합니다.  

 '누군가가 나랏일에 관해 "그게 나랑 무슨 상관이야?"라고 말하는 순간 그 나라는 끝장난 것으로 간주되어야 한다.'

 나라의 주인이 나랏일에 상관이 없다고 생각하면, 그 나라는 망한다는 것이죠. 정치는 한 나라의 운명과 주권자 국민의 삶의 방향을 좌우합니다. 예를 들면 정치는 납세자, 즉 우리에게 얼마의 세금을 걷을지 결정합니다. '슈퍼리치'로 불리는 '초부자'들을 대상으로 증세를 할지 감세를 할지 정합니다. 부동산 문제가 심각한데, 다주택자에 대한 '종합부동산세'를 유지할지 아니면 폐지할지도 결정합니다. 재벌 등 대기업이 내는 법인세를 인상할지 인하할지도 정합니다. 최근 유럽연합은 석유,천연가스,석탄을 생산/정제하는 기업들이 에너지 가격 급등으로 막대한 이윤을 얻게 되자 1400억 유로(약 200조 원) 규모의 횡재세(windfall tax)를 부과하기로 결정했습니다.

 정치는 또한 우리가 내는 세금의 사용처를 정합니다. 예컨대 4대강 사업에 돈을 쓸지, 아니면 '무상급식', '무상보육', '전국민고용보험' 실시에 돈을 쓸지 결정하는 것입니다.


 세금을 냈는데 4대강 사업에 쓰여 강을 '녹차 라테'로 만들어 버리면 화가 나죠. 이명박 정부가 추진한 자원외교는 깡통이 되었습니다. 거기에 몇조 원이 들어갔다는 것 아닙니까? 4대강, 자원외교, 방산비리 등을 다 합한 액수를 우리나라 인구로 나눠보니 1인당 200만 원, 가구당 약 1000만 원을 부담한 셈이더군요. 박근혜 정부 시절 청와대에 쓰레기통을 구입했는데, 한 개에 약 90만 원이었습니다. 이런 것들이 다 우리가 낸 세금으로 이뤄지는 일입니다.

 

p75

 삼권분립의 의미

 

 권력을 가진 자는 모두 그것을 함부로 쓰기 마련이다. 이 점을 지금까지의 경험이 알려주는 바이다.  사람이 권력을 남용하지 못하게 하기 위해서는 사물의 본질에 따라 권력이 권력을 저지하도록 해야 한다.

 

p81

 몽테스키외는 법관의 역할을 제한하려고 했습니다.

 판결은 명백히 정해져 있는 법률 조문에 불과할 정도로 일정해야 한다. 만약 판결이 한 재판관의 개인적 견해라면 사람들은 책임져야 할 의무가 무엇인지도 모르는 채 사회생활을 하는 것이나 다름없다. 사법권은 이를테면 없음이나 다름없다. 인민의 재판관은 앞에서 말한 것처럼 법의 문구를 선언하는 입에 불과하다.

p84

 <범죄와 형벌>에서 베카리아는 배심제에 대해 다음과 같이 말합니다.

 무지한 자는 감각으로 판단하지만, 전문가는 학설과 의견으로 판단한다. 전자의 판단이 후자의 판단보다 더 믿을 수 있는 안내자이다. 재판관은 유죄판결에 익숙해져 있으며, 모든 것을 그의 전문지식에서 빌려온 인위적 개념요소로 환원하는 경향이 있다. 이러한 재판관의 학식보다는 보통 사람의 상식이 증거판단을 잘못할 가능성이 더 적다. 법을 아는 일이 전문 학문이 아닌 나라는 얼마나 행복한가! 누구나 그와 동등한 이웃 시민들로부터 재판받도록 하고 있는 법제는 정말 경탄할 만하다.

 

p88

 <법의 정신> 제29편 '법을 만드는 방법'에서 중요한 부분을 발췌해 정리했습니다. 몽테스키외는 그리스, 로마, 프랑스의 예를 들면서 여러 가지 중요한 원칙을 제시합니다. 차례로 보겠습니다.

 첫째, "입법자의 의도에 어긋나는 법"을 만들어선 안된다. 입법자는 입법의 목적과 결과가 반대로 나올 수 있음을 직시해야 한다.

 둘째, "법의 문체는 간단해야 한다." "법의 문체는 쉬워야 한다."

 셋째, "법의 말은 모든 사람들에게 똑같은 관념을 불러 일으키는 것이 중요하다." "어떤 법에서 사물의 관념을 확정했을 때는 결코 모호한 표현으로 되돌아가서는 안 된다."

 법의 표현이 모호하고 불명확하면 필연적으로 해석을 둘러싼 분쟁이 일어납니다. 그리고 법을 준수해야 하는 시민의 입장에서는 무엇이 금지되고, 무엇이 허가되는지 판단하기 어렵습니다. 결과적으로 법을 집행하는 권력이 재량을 갖게 되고, 시민의 자유는 위태로워집니다. 이 원칙은 현대 법률용어로 '명확성의 원칙'이라고 합니다. 이 원칙은 베카리아의 <범죄와 형벌>에서도 강조됩니다.

 

p94

 법은 만들어지지만 풍속은 제시된다. 후자는 좀 더 일반 정신에서 유래하고, 전자는 좀 더 특수한 제도에서 유래한다. 풍속이나 생활양식을 바꾸고자 할 때에는 그것을 법에 따라서는 안 된다는 것이다. 그것은 너무도 전체적으로 보일 것이다. 그것은 다른 풍속, 다른 생활양식에 따라서 변경하는 편이 낫다. 그러므로 군주가 그 국민에게 큰 변화를 일으키고자 할 때엔, 법으로써 설정된 것은 법에 따라 개혁하고, 생활양식으로 형성된 것은 생활양식에 따라 변경해야 한다. 생활양식으로 바꿔야 할 것을 법에 따라서 변경한다는 것은 매우 나쁜 정책이다.

 '법'과 '풍속'을 구분하면서, 법을 통해 생활양식을 바꾸려는 시도는 하지 말라는 충고입니다. 그러면서 서구식 근대화와 강력한 국가 건설을 추진했던 러시아의 표토르 1세가 사람들이 도시에 들어갈 때 입는 옷의 길이를 무릎까지로 제한한 법을 만든 것은 "폭정과도 같았다"라고 비판합니다.

 남의 일이 아닙니다. 우리의 과거 권위주의 정권 시절에 남성이 장발이거나 여성이 미니스커트를 입으면 경범죄처벌법상 '범죄'로 규정되었습니다. 경찰관들이 거리에서 가위와 자를 들고 지나가는 남성들의 머리카락 길이를 재고, 여성들의 치마 길이를 쟀어요. 머리와 치마 길이가 규정을 초과하면 경찰서로 끌려갔습니다. '폭정'이라고 하지 않을 수가 없습니다.

 

p169

 베카리아는 '범죄'와 '종교적 죄악'이 다르다고 선언합니다. 여기서 근대 형법학이 출발합니다. 기독교, 불교, 이슬람교 등에서 '죄악'이라고 비난하는 행위가 있잖아요? 종교별로 '죄악'의 범위에 차이는 있습니다. 그런데 이러한 '죄악'중 형법상 '범죄'인 것이 있고, 아닌 것이 있습니다.

 예를 들어 살인, 절도, 강간 등은 '죄악'이기도 하고 '범죄'이기도 합니다. 그런데 배우자가 있는 사람이 배우자가 아닌 사람과 성교를 하는 간통adultery은 '죄악'으로 분류되지만, 현대 민주주의 국가에서는 '범죄'가 아닙니다. 중세에는 간통도 '범죄'로 처벌받았습니다.

 우리나라에서도 간통은 오랫동안 범죄로 규정되었지만 2015년 헌법재판소의 위헌결정으로 폐지되었습니다. 간통을 도덕적으로 비난할 수는 있겠지만 범죄로 처벌해서는 안되다는 것입니다. 배우자와의 사랑이 식고 혼인이 파탄으로 가는 상태에 있는 사람이 새로운 사랑을 찾아 혼외성교를 한 것을 범죄로 규정하고 처벌하는 것이 맞는가에 대해 오랜 논쟁이 있었는데, 드디어 마무리된 것입니다.

 한편 중세 기독교에서는 '자살', 미혼 남녀의 성교인 '사통私通 fornication'을 '죄악'으로 분류했고 당시 이 행위는 '범죄'로 처벌되었지만, 현대 민주주의 국가에서 이를 '범죄'로 규정하는 나라는 없습니다. 물론 혼전순결 서약을 하는 사람들의 의사는 존중되어야 합니다. 

 근대 형법의 기본은 종교와 법의 구별, 죄악과 범죄의 구별, 도덕과 법의 구별입니다. 베카리아가 바로 이 점을 갈파했던 것입니다. "종교적 죄악은 신이 벌하는 영역이다"라는 말에 핵심이 들어 있습니다. '종교적 죄악'은 같은 종교 공동체에서 비난을 받습니다. 신부님, 목사님, 스님이 질책을 하실 것이고, 동료 신도들이 책망을 할 것입니다. 그러나 '범죄'는 국가가 바로 개입합니다. 경찰, 검찰 등 수사기관이 체포, 구속, 압수, 수색 등 강제처분을 하고, 검찰이 기소하면 법원이 판결해서 형벌을 부과하죠. 이 모든 과정은 국가 기록으로 남습니다. '종교적 죄악'과 '범죄'를 구분하지 못하면, 전자의 경우에도 국가가 강제력을 행사해 개입하게 됩니다. 이는 다원주의를 지향하는 민주주의 국가에서는 있을 수 없는 일입니다.

 

p285

 -존스튜어트 밀-

 진리란, 스스로 사색하지 않고 오로지 타인의 주장에 맹종할 뿐인 사람들의 진실한 의견에 의해서가 아니라, 적절한 연구와 준비를 통해 스스로 생각하는 사람들의 오류에 의해 더 많은 것을 얻게 된다.

 

 우리에게 말하는 것 같지 않습니까? 제가 재직하고 있는 서울대는 머리 좋고 성실하고 시험 잘 치는 젊은이들이 공부하는 곳입니다. 저는 수업 중에 농반진반으로 이렇게 말합니다. 

 "여러분이 북한에서 태어났다면, 대부분 '주체사상'에 따라 성실하게 생활하면서 북한에서 제일 좋은 대학인 김일성 종합대학에 성공적으로 입학해 아침저녁으로 '수령님'께 감사한 마음으로 공부에 매진하고 있을 것입니다."

 

p294

 밀은 "개성에 대한 일반인의 무관심", "집단 속에 매몰된 개인"이라는 현상, "모든 개인을 공인된 표준에 합치시키려고 노력하는 경향"을 개탄합니다. 그는 당시 영국 사람들이 타인에 관련된 사항만이 아니라 자신과 관련된 사항에 대해서도 "나는 무엇을 좋아하는가? 무엇이 나의 성격과 성향에 맞는가? 또는 무엇이 내 속에 있는 최고 최선의 것으로 하여금 공정하게 그 힘을 발휘하게 하여 그것을 성장 발달하게 하는 것일까?"라고 묻지 않고, 반대로 "무엇이 나의 지위에 적합한가? 나와 같은 신분으로 같은 수입을 얻는 사람이 하는 일은 무엇인가? 또 (더욱 나쁘게도) 나보다 높은 신분과 재산을 가진 사람들이 보통 어떤 일을 하는가?"를 자문하고 있다고 평합니다.

 지금 우리가 살고 있는 한국 사회도 마찬가지 아닐까요? 인간은 각자 자신만의 기질, 취향, 꿈, 욕구, 욕망이 있습니다. 그런데 국가나 여론이 이를 특정 기준에 따라 획일화하고, 그 기준에 맞지 않는 것은 억압하려는 경향이 있습니다. 어른에 대해서는 물론이고 어린이에 대해서도 그런 경향에 따라 훈육하는 일이 이루어집니다. 붕어빵 찍듯이 사람을 찍어내고 싶은 것입니다. 일제의 지배와 권위주의 정권의 통치 경험이 있다 보니 이런 현상이 고착된 게 아닌가 싶습니다. 밀은 말합니다.

 

 인간성을 위협하는 위험은 개인적 충동과 선호의 과다에 있는 것이 아니라, 그 결핍에 있다. 진보의 원칙은, 그것이 자유를 사랑하는 형태든 개량을 사랑하는 형태든, 관습의 지배에는 반대하고, 적어도 관습의 속박으로부터 해방을 요구한다. 하나의 인민은, 일정 기간 진보적이었다가 그 다음에는 정지한다. 언제 정지하는가? 그것은 개성을 갖지 못할 때다.

 

p298

청중 : 책을 읽으면서 잘 이해가 되지 않는 점이 있습니다. 일은 개인의 자유가 타인에게 피해를 주지 않는 이상, 자유를 보장받아야 한다고 했는데요, 우리나라에서 촛불 집회/시위가 열렸을 때 참여하지 않은 사람들에게 어느 정도 피해를 줬다고도 할 수 있을 것 같거든요. 그런 상황에서는 표현의 자유, 집회의 자유가 억압받아도 되는 걸까요?

 

조국 : 중요한 쟁점입니다. 법률적 용어를 사용하면, '기본권의 서열'이라는 확립된 법리가 있습니다. 최상위는 생명입니다. 그다음 순위는 양심과 사상의 자유, 표현의 자유 등 정신적 자유입니다. 그다음은 신체의 자유이고, 그 아래는 재산권입니다. 이 서열에서는 위의 것을 위해서는 아래의 것을 제한할 수 있습니다. 촛불 집회/시위가 열리면 그 주위에 있는 상인들이 장사를 못하거나 방해받을 수 있습니다. 그분들의 재산적 이익도 소중합니다. 그러나 법리에 따르면 상인 분들이 감수해야 합니다. 물론 집회/시위 참가자가 이 상점에 불을 지르거나 물건을 파손했다고 하면 사정이 달라집니다.

나온지 꽤 된 소설이고 출간 당시에는 베스트셀러였다. 집에 굴러다닌지 오래된 책인데 책정리 차원에서 버리기 전에 읽어봤다.

책의 초반부는 흥미를 일으킬만한 요소가 있지만 중후반 이후로 힘이 확 떨어진다. 책은 읽어보지 않았지만 존 그리샴의 다른 작품을 영화화한  펠리컨 브리프를 보면서도 비슷한 느낌을 받았다.

그저그런 킬링타임용 스릴러물 정도라고나 할까?

출간 당시에는 모르겠지만 지금은 굳이 읽어볼만한 소설은 아니다.

 

 원제는 Belonging : A German reckons with history and home. 으로 소속 : 역사와 가계에 대한 한 독일인의 생각 이다.

 독일인들에게 나치(Nazi)란 원죄와 같은 집단적인 트라우마이자 항시 자신들을 경계하는 절대적인 지침이다.

 이 책은 성인이 된 후 독일인으로서의 정체성을 찾아가는 과정에서 자신의 가계를 거슬러 올라가며 독일인들에게 목에 가시처럼 박혀있던 나치의 그림자를 밝혀나가는 과정을 담담하게 다루고 있다.

 일종의 다큐형식으로 개인적인 가계를 자료들과 조부모와 부모님의 친척과 지인들의 증언을 통해 거슬러 올라가는 방식이라 약간 산만한 감도 없지는 않다. 하지만 크게 거슬리는 수준은 아니다.

 문재인 대통령의 추천으로 재조명 된 책인데 그저 재미로 볼만한 내용은 아니다. 

 처음의 프롤로그에서 이 책의 성격을 가늠할 수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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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나는 친구의 아파트 건물 루프탑에 서 있었다. 그때까지 뉴욕에서 아는 사람이라고는 그 친구 하나뿐이었다. 나는 베를린을 떠나온 지 얼마 안 된 유학생이었다. 아는 사람이라곤 없었고, 나를 아는 사람도 있지 않았다.

 무한한 가능성이 펼쳐져 있었다. 안락의자에 앉아 있던 한 노부인이 우연히 우리 대화를 들었다.

 "어디서 왔어요?" 그녀가 물었다. 

 "독일에서요."

 "그런 것 같았어요."

 "독일에 가보신 적 있으세요?" 내가 물었다.

 "네, 아주 오래전에요."

 그녀는 내 눈을 피했다. 그 순간 나는 알았다.

 그녀는 강제수용소에서 살아남은 자신의 사연을 들려줬다. 여자 간수 하나가 최후의 순간 가스실에서 열여섯 번을 구해줬다고 한다.

 그 간수는 수용소에 있던 다른 사람들에게 가혹하기 그지없어서 벌을 준답시고 걸핏하면 포로들의 머리를 서로 박치기하게 했는데 자기에게는 남몰래 연정을 품었던 것 같다고 그녀는 말했다.

 

유시민 작가님의 추천사를 듣고 보게 된 책.

아버지의 장례식이라는 모티브를 통해 딸과 빨치산 출신의 아버지가 인생의 기나긴 갈등을 치유하고 회복하는 과정을 굉장히 드라마틱하고 재밋고 그리고 감동적으로 그려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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p136

 구례는 아버지의 고향이기도 하지만 아버지의 전장이기도 했다. 아버지의 친척과 친구가 있는 곳이기도 하지만 아버지를 적으로 아는 사람도 있는 곳이라는 의미다. 그런데도 아버지는 고향에서 사는 데 거리낌이 없었다. 몇년에 한번씩 바뀌는 정보과 담당 형사들과도 허물없이 농을 주고받으며 두루두루 잘 지냈다. 감시하는 형사와 술잔을 나누고 싶냐는 내 비아냥도.

 "순겡은 사램 아니다냐?"

 아버지는 대수롭잖게 받아넘겼다.

 "몰르는 사람잉게 총질을 해대제 구례 사램들끼리는 안 그랬어야. 뽈갱이든 퍼랭이든 노상 얼굴 보고 살았는디 총이 겨놔지가니. 구례는 해방 직후에 친일파 숙청도 지대로 못했당게."

 고씨 집안사람 하나가 친일파였다. 친일로 제법 돈을 모았고, 일본에 헌납도 한 모양이었다. 해방 직후 면의 젊은이들이 그를 당산나무 아래로 끌고 왔다. 쳐 죽이라는 고함이 터져 나왔다. 혈기왕성한 젊은이 하나가 낫을 들고 다가가자 누군가 빽 소리를 쳤다. 젊은이의 어머니였다.

 "그 어른이 아니었으면 니가 시방 산 목심이 아니어야!"

 젊은이가 어린 시절 이질로 죽어갈 때 고씨가 병원비를 댄 것이다. 사람들이 한마디씩 보태기 시작했다.

 "우리 애기 학벵 끌레가게 생겼는디 고씨 어른이 손을 써줬그마요."

 고씨 성토장이 이내 미담장으로 변했다. 쳐 죽이자고 했던 젊은이들도 그만 머쓱해져서 흐지부지 흩어지고 말았다.

 "민족이고 사상이고, 인심만 안 잃으면 난세에도 목심은 부지허는 것이여."

 자신도 고씨처럼 인심을 잃지 않았으니 빨갱이라도 고향서 살 수 있다는 의미인 듯했다. 한때 적이었던 사람들과 아무렇지 않게 어울려 살아가는 아버지도 구례 사람들도 나는 늘 신기했다. 잘 죽었다고 침을 뱉을 수 있는 사람과 아버지는 어떻게 술을 마시며 살아온 것일까? 들을 수 없는 답이지만 나는 아버지의 대답을 알 것 같았다. 긍게 사램이제. 사람이 어떻게 그럴 수 있냐고 내가 목소리를 높일 때마다 아버지는 말했다. 긍게 사램이제. 사람이니 실수를 하고 사람이니 배신을 하고 사람이니 살인도 하고 사람이니 용서도 한다는 것이다. 나는 아버지와 달리 실수투성이인 인간이 싫었다. 그래서 어지간하면 관계를 맺지 않았다. 사람에게 늘 뒤통수를 맞는 아버지를 보고 자란 탓인지도 몰랐다.

 

 

퇴임 후에 문재인 대통령은 SNS를 통해 개인적 활동과 관심사를 간간히 포스팅을 하시는데 그 중에서도 꾸준하게 읽은 책에 대한 감상과 소개를 올리시고 있다.

그 중에 최근 하얼빈을 읽었고, 뒤이어서 본 책이 <지극히 사적인 네팔>이다. 

사실 네팔하면 히말라야, 나마스테, 그리고 네팔 음식 정도를 알 뿐이고 그것마저도 영상으로 본 것이 대부분이다.

네팔이라는 나라와의 교류가 그닥 많은 것이 아니기 때문에 일반인들은 네팔에 대해서 알 기회가 거의 없다.

이 책은 네팔에서 태어나 고등학생 시절까지 보낸 저자가 한국에서 10년 이상을 보내면서 양국의 문화와 사회를 어느 정도 알고 난 사람이기에 우리가 알아야 할 그리고 네팔인의 입장에서 한국사람들이 이것만은 알았으면 하는 내용들로 채워져 있다. 저자의 말처럼 개인적인 면에 치우쳐 있을지는 모르지만 네팔에 대한 정보가 거의 없는 입장에서는 네팔 입문서로 괜찮을 내용이다. 

최근 급격한 원/달러 환율 상승으로 달러에 대한 관심이 높아지고 있다.

그래서 본 책. 저자가 샐러리맨에서 투자를 시작하면서 수백억대의 자산가가 되었다고 하는데 사실 책의 내용이 다른 투자서에 비해서 특별하다고 보기는 어렵다. 단지 달러투자라는 단일 이슈로 된 책은 이 책이 유일한 듯 하다.

달러 실무적 투자에서 입문서로 괜찮은 것 같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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p16

 여기서 해외여행을 위해 환전할 때 유용한 팁 하나를 주겠다. 우리나라에서 원화를 바로 현지 통화로 바꾸기보다 원화를 달러로 바꾼 뒤 현지에서 현지 통화로 환전하는 것이 유리하다는 것이다. 베트남이나 필리핀 같은 동남아시아로 여행할 때는 특히 그렇다. 베트남 여행을 계획 중이라면, 우리나라에서 원화를 베트남 동으로 바로 바꾸지 말고, 원화를 달러로 바꾼 후에 베트남에 가서 달러를 동으로 바꾸는 것이 훨씬 좋다.

 가뜩이나 귀찮은 환전을, 그것도 2번이나 해야 한다니 의문이 생길 것이다. 그냥 원화를 가져가 현지에서 바꾸면 환전 수수료도 아낄 수 있으니 더 낫지 않을까 싶을 수 있다. 하지만 내가 이 방법이 훨씬 유리하다고 말한 이유는 2가지 때문이다. 첫째, 환전 수수료를 아낄 수 있다. 원화를 달러로 환전할 때는 최대 90%의 환전 수수료 우대율이 적용되는데, 원화를 달러 이외의 외국 통화로 환전할 경우, 심지어 그게 엔화나 위안화, 유로화처럼 환전 수요가 많지 않은 동남아시아 지역의 돈이라면 우대율이 50% 이하로 대단히 낮다. 둘째, 해외에서는 우리나라 돈, 즉 원화보다 미국 돈, 즉 달러의 가치를 훨씬 높게 인정해준다. 

 

p18

 달러를 매수할 때는 약간의 거래 비용이 발생한다. 환전 수수료가 바로 그것이다. 이는 현금 기준으로, 기준 환율과 살 때와 팔 때로 구분되는 데, 이 3가지 형태의 가격엔 보통 1.75% 정도의 차이가 있다. 즉, 기준 환율이 1,000원이라면, 살 때의 환율은 17.5언이 비싼 1,017.5원이고, 팔 때의 환율은 17.5원이 싼 982.5원이다. 돈으로 돈을 사면 제로섬이어야 하지만 환율이 변하지 않는다고 전제해도 사고파는 행위로만 살 때 1.75%, 팔 때 1.75%, 도합 3.5%의 손실이 발생한다는 것을 알 수 있다. 투자의 세계에서 3.5%의 수수료는 거의 살인적인 수준이라고 할 만큼 크다. 증권 거래세 0.3%와 비교하면 10배가 넘고, 2020년 기준 은행의 1년 만기 정기 예금 이자보다도 훨씬 높은 수준이다.

 만약 이 무지막지한 크기의 환전 수수료를 부담해야 한다면, 차라리 투자를 하지 않는 편이 현명하다고 할 수 있다. 하지만 은행도 양심은 있는지, 이 환전 수수료를 모두 챙기지는 않는다. '환전 수수료 우대율'을 적용해 주는 것이다. 만약 환전 수수료 우대율 90%를 적용받는다면, 환전 수수료는 3.5%가 아니라 0.35%가 된다. 이는 주식 투자시 증권사 거래수수료와 증권 거래세를 합한 수준과 비슷하다. 돈으로 돈을 사는 환전은 아무것도 사지 않은 것 같은 안전한 일이긴 해도 비싼 환전 수수료를 부담해야 한다면, 투자의 성공 확률도 그만큼 낮아질 수밖에 없다. 따라서 달러 투자에서 가장 중요한 시작은 이 환전 수수료를 가능한 한 낮추는 것이라고 할 수 있다.

 

p21

 원/달러 가격이 하락했다. 이런 결과가 달러 가치의 하락으로 일어난 것인가, 달러 가격이 떨어져서 일어난 것인가? 이를 구분할 줄 알아야 한다. 원/달러 환율의 하락은 2가지 원인으로 일어날 수 있기 때문이다.

 1. 달러의 가치가 하락해서

 2. 그냥 달러 가격이 하락해서

 

 이러한 일이 벌어지는 이유는 달러의 가치 역시 다른 나라 돈과의 비율에 영향을 받아 정해지기 때문이다. 조금 복잡하게 들리겠지만, 원/달러 환율이 달러 대비 원화의 교환 비율을 뜻하듯 달러의 가치도 여러 다른 나라의 돈 대비 달러의 교환 비율을 의미한다. 이것이 바로 '달러 지수'다. '달러 인덱스 지수'라고도 불리는 달러 지수는 절대적 가치라고 할 수 있다. 그래서 이를 기준으로 원화의 가치에 따라 원/달러 환율의 상승과 하락이 결정된다. 기억해야 할 것은 원/달러 환율은 어떤 '값' 이 아닌 '비율'이라는 사실인데, 달러 지수 역시 '비율'이다. 달러 지수는 1973년 3월을 기준 100으로 하여 세계 주요 6개국 통화 대비 미국 달러의 평균 가치를 비율로 산정해 지수화한 지표로, 미국연방준비제도에서 작성하고 발표한다. 이때 그 기준이 되는 통화의 비중은 유로화 57.6%, 일본의 엔화 13.6%, 영국의 파운드 11.9%, 캐나다의 달러 9.1%, 스웨덴의 크로나 4.2%, 스위스의 프랑 3.6%다.

 유로화가 절반 이상의 비중을 차지하기에, 달러 대비 유로화의 가치가 상승하면 달러 지수는 하락하는 구조다. 따라서 달러 투자는 기본적으로 미국의 경제 발전에 베팅하는 투자라고 할 수 있다. 반대로 미국의 달러 약세에 베팅한다는 것은 곧 유럽의 경제 발전에 투자하는 것이다.

  

p23

 

p64

 티끌 모아 티끌

 작은 돈을 열심히 모아봤자 여전히 작은 돈일 뿐이다. 자본가가 되려면 일단 자본이 있어야 한다. 티끌을 모아 자본을 만들어 내겠다는 생각은 어리석은 욕심이다. 나는 요즘 낮잠으로 하루의 절반을 보내고 있다. 하지만 이 같은 나날은 지난 시절 치열한 노력과 고생의 보상이다. 사회초년생 시절, 퇴근 시간은 분명 오후 6시였지만 내겐 저녁식사 시간일 뿐이었다. 밤 10시에 회사를 나설 때도 조기 퇴근처럼 느껴졌다. 새벽 5시에 퇴근해서 대충 씻고 다시 출근하는 경험이 쌓인 끝에 이제는 낮잠도 자는 행운을 얻엇다. 인생이든 스타크래프트든 '초반 러시'가 중요하다는 말이다. 미네랄을 캐는 고생과 입구를 막는 수고도 없이 배틀 크루저를 뽑아낼 수는 없다. 티끌로 태산을 만다는 건 적어도 한 판에 3,600% 수익률을 내는 카지노 도박으로나 가능한 일이다. 난 달러 투자로 약 0.3%의 수익률을 거두고도 만족할 수 있었는데, 이는 투자 원금이 300억 원에 가까웠기 때문이다. 눈덩이를 굴리면 비교적 쉽게 더 큰 눈덩이가 되지만, 티끌을 모으면 그냥 티끌일 뿐이다. 연 3%의 수익률로 10만 원의 자본 소독을 만들려면 300만 원의 자본과 1년의 기다림이 필요하다. 하지만 하루 이틀의 노동이면 10만 원을 바로 만들어 낼 수도 있다. 물론, 한 달에 1만원만 아껴도 비슷한 효과를 얻을 수 있다.

 자본가가 되려면 일단 유의미한 자본을 만들어야 한다. 이는 재테크와 투자의 기술을 연마하는 것이 아닌, 열심히 일하고 절약하는 것으로 가능하다. 돈 공부는 눈덩이를 굴리기 위한 것이지 티끌을 태산으로 만드는 마법을 부리기 위해서 하는 것이 아니다. 하지만 티끌이 눈덩이가 되기 전까지는 작은 투자의 성공을 되도록 많이 경험하는 것이 중요하다. 지금 나의 최소 투자 단위는 1만 달러이지만, 내게도 몇천원 수익에 기뻐하던 시절이 있었다. 그것이 시작이었다. 첫술레 배가 부를 수는 없다. 열심히 일하고 절약하며 작은 투자 성공 경험을 쌓아가다 보면 티끌이 눈덩이가 되어 마침내 태산이 되는 기적도 경험할 수 있다. 하지만 이 셋 중 어느 하나라도 충족시키지 않는다면 '행복한 낮잠 시간' 같은 건 결코 오지 않는다.

p70

 

p71

 성공적인 투자의 기본 메커니즘은 다음과 같다.

 첫째, 좋은 자산을 싸게 산다.

 둘째, 수익을 확정시킬 수 있을 때까지 기다린다.

 이 간단한 원리를 지켜내기란 그리 쉬운 일이 아니다. 좋은 자산을 구별해 낼 능력도 부족하고, 적정 가격도 모르며, 인내심과 멘탈 또한 약하기 때문이다. 그래서 내가 한 것은 투자 대상을 나누고 투자 시점을 나누고 투자 금액을 나눈 것이다. 투자의 고수들은 실력이 더 좋은 플레이어가 승리하는 '승자의 게임'을 하지만, 나를 포함한 대부분의 평범한 투자자들은 실수가 잦은 플레이어가 패하는 '패자의 게임'을 한다. 그러니 우리의 전략은 비범한 결정을 내리기 위해 노력하기보다 실수를 줄이기 위해 노력하는 것이어야 한다.

 투자는 곱하기 게임과도 같다. 단 한 번의 '0'이나 마이너스 숫자만 곱해도 전체의 결과가 없거나 마이너스가 되는 게임 말이다. 그러니 성공적인 결과를 만드는 데 더욱 효과적인 것은 더 잘하려는 노력보다 실수하지 않으려는 노력이다.

 

 

 이 소설을 읽고 나서 우리가 안중근이 이토에게 총을 쏜 사건의 의미를 얼마나 피상적으로만 알고 있었는지를 재삼 깨달을 수 있었다. 

 이 소설은 안중근이 이토를 쏜 후, 사형을 당하기까지의 짧은 기간동안 일본, 한국의 정치적 현실 그리고 한국 천주교의 입장, 한국 민중들의 반응에 대해 입체적으로 농밀하게 묘사함으로써 안중근 의사가 가지고 있는 역사적 의미를 재조명하는데 그 의의가 있다.

 뒤로 갈수록 가슴이 너무나 먹먹해지고 답답해진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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p17

 제2차 한일협약 때, 병력으로 조선 황궁을 포위하고 조선 황제와 대신들을 헌병으로 협박하기는 했지만, 병력을 부딪치지 않고 도장을 받아내서 오백 년이 넘은 나라의 통치권을 인수한 이토의 역량을 메이지가 모르지는 않았을 것이었다. 러시아를 도모할 때까지도 이토는 그것이 도장으로 가능하리라고는 생각할 수 없었으나, 그후 조선 사대부들과 자주 상종할수록 이토의 뜻은 도장 쪽으로 기울었다. 왕권의 지근거리에서 세습되는 복락을 누린 자들일수록 왕조가 돌이킬 수 없이 무너져갈 때는 새롭게 다가오는 권력에 빌붙으려 한다는 사실을 이토는 점차 알게 되었다. 도장의 힘은 거기서 발생하고 있었다. 도장으로 해결할 수 있다면 살육을 피할 수 있고, 조선에서 밀려나는 서양 여러 나라들의 간섭을 막을 수 있고, 사후 처리가 원만할 것이었다. 도장을 찍어서 한 나라의 통치권을 스스로 넘긴다는 것은 보도 듣도 못한 일이었으나, 조선의 대신들은 국권을 포기하는 문서에 직함을 쓰고 도장을 찍었다.

 도장의 힘은 작동되고 있었으나, 조약 체결을 공포한 후 분노하는 조선 민심의 폭발을 이토는 예상하지 못했다. 지체 높은 사대부들이 비통한 글을 남기고 잇달아 자결했다. 그들은 독약을 마셨고 물에 뛰어들었다. 조선 황제는 자살한 신하들에게 표창을 내려서 충절을 기렸다. 오백 년을 지탱해온 나라의 관리와 식자 몇 명이 치욕을 못 견디어 자결하는 것은 있을 수 있는 일이었다. 이토는 이 죽음에 따른 민심의 동태를 주시하면서도 못 본 체했다. 이 동시다발적인 죽음들은 무력하기는 했으나 충忠의 반열에 올랐다.

 이토는 조선 사대부들의 자결이 아닌 무지렁이 백설들의 저항에 경악했다. 왕권이 이미 무너지고 사대부들이 국권을 넘겼는데도, 조선의 면면촌촌에서 백성들은 일어나고 또 일어섰다.

 

p69

 안중근이 서울에 도착하기 며칠 전에 한국 통감 이토는 한국 군대를 해산했다. 강제해산 당한 한국군이 일본군과 도심지에서 싸우고 있었다. 이토는 한국 대신들을 겁박했고, 대신들은 황제를 몰아붙여서 군대 해산의 윤허를 받아냈다. 주둔군 사령관 하세가와가 무장해제의 과정을 지휘했다. 하세가와는 맨손체조 훈련을 하겠으니 서울의 한국군 병력은 모두 비무장 상태로 훈련원으로 모이라고 명령했다. 부대 지휘관들이 맨손의 병력을 인솔해서 훈련원에 모였다. 무장한 일본군이 맨손의 한국군을 에워싸고 해산을 통고했다. 훈련원에서 일본군 대대장의 구령에 따라 해산식이 진행되는 동안에 일본 군대가 병력이 없는 한국군 부대를 접수해서 무기를 가져갔다. 황제가 조서를 내려 군인들을 달랬다.

 - 너희들은 나의 뜻을 헤아려서 각자 맞는 일거리를 찾아서 살아라.

 황제는 이어 내각에 지시했다.

 - 군대를 해산시킬 때 폭동에 미리 대비하라. 혹시 폭동을 진압할 일이 있으면 이토 통감에게 의지하고 부탁하라.

 이토는 전국의 한국군 지방 병력을 해산시키라고 각 도의 경찰관서에 지시했다. 여러 고을의 연병장에서 한국군 병력이 총검을 내려놓고 맨손체조를 하는 동안에 경관들이 무기를 수거했다.

 군대가 해산되기 한 달 전에, 고종 황제가 헤이그에 밀사를 보낸 사실을 대한매일신보가 보도했다. 이토는 고종을 꾸짖어 퇴위시키고 그 아들 순종을 황제에 자리에 앉혔다. 새 황제가 해산하는 군인들에게 은사금을 내렸다. 하사에게 팔십원, 일 년 이상 근무한 병사에게 오십원, 일 년 미만자에게 이십오원이었다. 병사들이 돈을 찢으면서 통곡했다.

 시위侍衛 1연대 1대대장 박승환이 명을 받지 않고 자살했다. 참위 남상덕이 부대원을 이끌고 거리로 나가서 일본군과 싸웠다. 일본군이 숭례문 문루에 기관총을 걸어놓고 쏘았다. 거리에 시체가 쌓였다. 한국군 병사들이 흩어져서 민가로 숨었다. 일본 군인들이 일본 여자를 앞세워서 민가의 내실을 수색했다. 잡히는 자들은 그 자리에서 때려죽였다. 달아나던 한국군 병사들은 고립된 일본 군인들을 만나면 묶어놓고 때렸다. 때려서 죽였다. 일본군이 대궐 문 양쪽에 기관포를 설치하고 한국 대신들의 집에 헌병을 세웠다. 일본군은 일본인 밀집 거주지역인 진고개의 경비를 강화했다. 한국 고관들이 가족들을 진고개 안쪽으로 옮겼다. 해산된 군인들이 의병 부대에 가세했다. 의병들은 전국 산골, 도회지, 섬에서 싸우다 죽었다. 져서 자살했고, 잡혀가 죽임을 당했다.

 

p78

 이토는 후임 통감에게 주는 문서를 비서관에게 맡기고 나서, 경시총감을 불러서 지시했다. 

 - 위생에 관한 명령이다. 서울 도성 안 거리에서 방분, 방뇨를 금하라. 아동들도 포함시켜라. 집안의 분뇨를 길에 버리지 못하게 하라. 분뇨는 반드시 수거해서 처리장에 버리도록 행정을 조직해서 시행하라. 걸인과 부랑자들의 문전걸식을 금한다. 이들을 도성 밖에 수용하라. 훈령으로 알리고 병력으로 단속하라. 같은 명령이 반복되면 권위가 훼손되어서 시행하기 어려워진다. 분뇨의 문제는 거듭 말하지 않겠다. 이번에 엄단해서 통감의 뜻을 보여라.

 이토는 서울에 처음 부임했을 때 똥냄새에 질겁을 했다. 어른과 아이들이 길바닥에서 엉덩이를 까고 앉아 똥을 누었고, 집집에서 아침마다 요강을 길바닥에 쏟았다. 장마 때는 변소가 넘쳐서 똥덩이가 떠다녔다. 똥냄새는 마을 골목마다 깊게 배어 있었고 남대문 거리, 정동 거리에도 똥 무더기가 널려 있었다. 통감부 직원들이 밤길을 돌아다니다가 똥을 밟고 미끄러졌다는 얘기를 이토는 요정에서 술 마시다가 기생들한테 들었다. 

이토는 덕수궁에서 만난 조선 대신들을 불러 세우고 거리의 똥을 치우라고 말했다. 통감이 똥 문제를 이야기하자 조선 대신들은 얼굴을 돌렸다.

 - 통감 각하의 살피심이 이처럼 세밀하시니 두렵습니다.

 - 분뇨의 문제는 인의예지에 선행하는 것이오. 이것이 조선의 가장 시급한 당면 문제요. 즉각 시정하시오.

 이토는 통감부와 조선 조정을 거듭 다그쳤으나 거리는 여전히 똥바다였다. 똥은 틀어막을 수가 없었고, 먹고 누는 일을 금할 수가 없었다. 통감부를 떠나면서 이토는 서울 도심에 공중변소를 늘리고 분뇨를 길에 버리는 자들을 엄단하라고 거듭 지시를 내렸다. 목숨의 안쪽에서 발생하는 것이므로 똥이란 당하기 어렵다... 라고 이토는 속으로 중얼거렸다. 날마다 새 똥이 거리에 널려 있었다.

 

p127

 전쟁의 결과가 섬멸적인 압승일수록 제삼국의 개입을 차단하기가 쉽고 새로운 판도를 기존 질서로 정립시키기가 쉽다는 것을 이토는 청일전쟁이 끝나고 서양 여러 나라들과 외교 분쟁을 겪으면서 알게 되었다. 그것은 수십만의 주검을 치르고 얻은 피의 교훈이었다.

 

p184

 범인이 안중근이라는 말을 들었을 때 뮈텔은 황해도 산골에서 길을 안내하던 안중근과 대학교를 세워달라고 들이대던 안중근을 떠올렸다. 이토가 죽은 뒤에 안중근이 천주교인인가를 묻는 기자들의 질문에 뮈텔은 안중근은 이미 천주교인이 아니라고 대답했다.

 개인들의 영성이 꽃처럼 피어나면 그 꽃들이 모여서 문명을 이루고 하느님의 나라가 그 위에 세워지는 평화의 구도를 뮈텔은 아직도 이 황잡한 세상에 필 수가 없었다. 적개심에 가득찬 자에게 평화를 말할 수는 없었다.

 총으로 쏘아 죽이는 방식으로 증오를 표출한 천주교인의 죄악에 뮈텔은 상심했다. 백 년이 넘는 박해의 세월을 견디면서 죽음에 죽음을 잇대는 순교의 피 위에 세속의 거점을 겨우 확보한 조선 교회가 또다시 세속 권력과 충돌한다면 교회의 틀이 위태로워질 것을 뮈텔은 걱정했다. 뮈텔은 자신의 걱정을 신부와 신도들에게 말할 수가 없었다. 안중근은 사제를 능멸했고 교회의 가르침을 배반했으며, 교회 밖으로 나가서 살인의 대죄를 저질렀으므로, 그가 비록 영세를 받았다 해도 더이상 교회의 자식이 아니라고 뮈텔은 하느님께 고했다. 하느님은 세속의 일에 관하여 대답하지 않았다.

 

p196. 19장.

 이토의 영결식은 11월 4일 도쿄 히비야 공원에서 열렸다. 이토의 관은 아침 일찍 아카사카 레이난자카의 관저를 떠났다. 기마헌병대, 군악대, 의장대가 운구 대열의 선두를 이끌었다. 그 뒤로 대령급 군인 열두 명이 이토가 받은 훈장 스물네 개를 받들었고, 이토의 관 둘레를 육군 해군 장성들이 경위했다.

 장례위원회는 통나무를 새로 벌목해서 히비야 공원에서 임식 막사 마흔 동을 새로 지었다. 껍질 벗긴 새 나무의 향기가 식장에 가득찼다.

 이토의 관이 중앙에 놓이고 그 앞에 훈장 스물네 개가 늘어섰다. 법의를 걸친 승려들이 독경했고 러시아정교회의 주교가 금빛 십자가를 들고 입장했다. 일본 황태자 내외의 어사, 한국 태황제의 어사, 한국 황제의 어사, 한국 황태자의 어사들이 차례로 입장했다. 보병, 기병, 포병 2개 사단이 식장 외곽을 경비했고 해군이 의장을 맡았다.

 메이지는 이토의 장례 절차와 규모에 대해서 소상히 보고받고 윤허했다. 메이지는 이토의 장례식에 참석하지 않았다. 메이지는 이토의 죽음에 대한 자신의 심회를 발설하지 않았다. 대신들은 메이지의 침묵 앞에서 침묵했다. 시종들은 멀리서 메이지의 눈치를 살피며 입을 다물었다.

 같은 날 서울 장충단에서 한국 황실과 내각과 민간인들이 합동으로 관민 추도회를 열었다.

 흰 베로 장막을 치고 그 안에 이토의 위폐를 모셨다. 위패에 '문충공文忠公'의 시호를 써붙였다. 황족과 각부 대신, 고위 관리, 한성부민회 임원들, 각 지역 대표들이 이토의 위패에 절했다. 서울의 모든 학교가 수업을 중지했다. 교사들이 학생을 인솔해 와서 절했다. 수도 거주민들은 대문 앞에 삼베를 감은 반기半旗를 걸었다. 이토의 위패 앞에는 조선의 예법에 따라서 이쪽에서 저쪽까지 밥, 국, 떡, 육포, 푸성귀, 나물, 과일, 생선, 고기가 펼쳐져 있었다.

 

p204

 이토의 장례식을 치르기 전부터, 서울에 이토의 송덕비와 동상을 세우자는 건의들이 통감부에 접수되었다. 통감부는 허가하지 않았따. 통감부는 건의한 자들을 불러들여서 충정은 이해하나 바닥 민심이 어수선하니 경거망동을 삼가라고 경고했다.

 이토의 동상을 세운다고 모금을 해서 돈을 떼어먹으려던 자들이 경시청에 검거되었다. 한국 황제의 어명을 받은 조문 사절을 사칭하는 자들이 대련으로 건너가서 이토의 관을 실은 배를 향해서 절했다.

 

 지방 군수와 서생들 중에서 힘있는 자들이 사죄단, 위문단을 구성해서 일본으로 가면서 그 여행 비용을 주민들에게 걷었다. 뜻있는 자들이 모여서 이토의 죽음을 사죄하러 일본에 가려고 13도 인민 도일渡日 대표단을 결성했다.

 도쿄의 한국 황태자 이은은 태사인 이토의 죽음을 애도해서 삼 개월 복을 입고 식음을 간소히 했다.

 서울의 무당 수련은 태황제의 총애를 입어서 궁녀들의 부축을 받으며 대궐을 드나들었다. 수련은 원구단에서 가까운 자리에 굿판을 벌이고 노래하고 춤추어서 총 맞아 죽은 이토의 혼백을 위로하고 극락왕생을 빌었다. 태황제는 늘 수련에게 상금 명목으로 많은 돈을 주었다. 이날 굿판에 육백여 명이 모여서 먹고 마셨는데, 비용은 모두 수련이 자비로 부담했다.

 

 일본 신문들은 이토의 죽음을 맞은 도쿄 화류계의 슬픔을 소상히 보도했다. 슬픔은 고요하고 단정했다. 도쿄 아카사카의 게이샤 우메코梅子는 이토의 여행길을 여러 번 모셔서 화류계의 선망을 받아왔다. 이토가 죽은 다음날, 우메코는 요정으로 몰려온 기자들을 만나지 않고 방안에서 나오지 않았다. 요정의 늙은 마담이 기자들 앞에 나와서

 - 우메코는 어른을 모신 일을 발설하지 않는다. 우메코는 지금 화장을 지우고 슬픔에 잠겨 있다. 인터뷰에 응할 수 없는 슬픔으로 인터뷰를 대신한다.

 라고 말했다. 기자들은 우메코의 슬픔의 품격을 평가하는 기사를 썼다. 이 요정의 주방장 아베는

 - 어른의 식성은 늘 깔끔했다. 요란한 상차림을 싫어하셨다. 생선회, 은행구이, 야채 절임과 된장국 정도였다. 계절에 민감하시어, 철마다 생선을 바꾸어 드렸다. 기름진 생선은 드시지 않았다.

 라고 말했다. 기자들이 이토의 식성을 기사로 썼다.

 진자의 게이샤 하나코는 

 - 십여 년 전에 연회에서 처음 뵌 후 자주 사랑받았다. 저의 누추한 집에도 가끔 오셨다. 술 드시면서 늘 서화와 문장을 말씀하셨다. 많이 취하시면 야한 말씀도 잘하시고 저를 간지럼 태우면서 노셨다.

 라고 말했다.

 교토 화류계의 슬픔은 더 깊고 우아했다.

 ..... 이토 공작 각하께서는 국사로 바빠서 주로 도쿄에 계셨지만 공작 각하의 마음은 늘 교토의 풍류를 그리워하시었고, 틈만 나면 교토에 오셔서 저희들을 사랑해주시었다.... 공작 각하께서는 저희들 앞에서 국사를 말씀하지 않으셨지만, 나라의 일이 순조롭게 잘 풀릴 때는 포도주를 드시고 나라의 일이 어렵게 꼬일 때는 위스키를 드신다는 것을 저희들은 눈치로 알고 있었다.... 공작 각하께서 저희들의 교태에 눈길을 주지 않으시고, 깊은 시름에 잠겨서 독한 위스키를 거푸 드시면 저희들은 마음이 아팠다..... 이런 속마음의 깊이는 풍류의 본향이 교토의 게이샤가 아니면 알 수가 없다..... 라고 기온의 늙은 게이샤가 말했다고 지방신문이 인물란에 썼다.

 

p229

 재판 과정에서 안중근의 정치적 동기를 현실에 대한 무지에서 비롯된 것으로 드러내 보이고, 문명한 절차에 따라 사형에 처한다는 것이 일본 외무성의 방침이었다. 우덕순에 대한 사법적 처리도 이 방침 안에 있었다. 외무성은 이 방침을 관동도독부 고등 법원에 전문으로 지시했다. 외무성의 전문은 재판이 시작되기 전에 미리 도착했다. 고등법원은 외무성의 방침을 지방법원에 구두로 하달하고 전보로 접수한 공문을 극비로 보관했다.

 재판장 마나베는 안중근과 우덕순 사이에 지휘 복종의 관게를 설정하기가 어려웠다. 검찰관 미조부치가 법원에 제출한 신문조서에서도 그 관계는 분명하지 않았다. 우덕순은 안중근의 제안에 따라 범행에 가담했지만 하수인이라고 보기는 어려웠고, 자신의 동기를 논리적으로 진술하지도 않았다.

 재판장 마나베가 안중근에게 물었다.

 - 이 일을 하기 위해 우에게 뭐라고 말했나?

 - 이토가 하얼빈에 오는데, 함께 가서 죽이자고 말했다.

 - 그것이 언제인가?

 - 우라지를 출발하기 이틀 전이다.

 - 우는 동의했나?

 - 동의했다.

 - 다른 의견을 말하지 않았는가?

 - 다른 말은 없었다.

 - 떠나기로 결정한 것은 언제였나?

 - 그날 밤이었다.

 - 그래서 즉시 떠났는가?

 - 다음날 역으로 갔더니 기차가 이미 떠나서 그다음날 출발했다.

 

 마나베는 우덕순에게 물었다.

 - 그대는 안중근과 나랏일을 이야기한 적이 있는가?

 - 없다.

 - 그대는 안중근과 한국의 독립에 관해 이야기한 적이 있는가?

 - 없다.

 - 그대는 안과 동행하기로 약속했는가?

 - 나는 이토를 죽일 목적이었다.

 - 안은 왜 이토를 죽이려 했는가?

 - 그것을 안중근에게 들을 필요는 없었다. 모든 한국인이 이토를 증오하고 있다.

 - 안의 제안에 대해서 그대는 뭐라고 말했나?

 - 다만, 함께 가자고 했다.

 - 그 밖에 그대의 의견을 말하지 않았나?

 - 어떤 상의도 하지 않았다.

 - 안중근은 의병으로서 한 일이라고 하는데, 그대는 의병과 관련이 있는가?

 - 나는 다만 일개의 국민으로서 했다. 의병이기 때문에 하고, 의병이 아니기 때문에 하지 않는다는 것은 있을 수 없다.

 - 그대는 안의 명령에 따른 것인가?

 - 아니다. 나는 안에게 명령을 받을 의무가 없다. 또 명령을 받을 의무가 있다 하더라도 이런 일은 명령으로 할 수 있는 일이 아니다. 나는 내 마음으로 한 것이다.

 - 이토 공은 고관으로 수행원과 경호원이 많은데, 그대는 암살에 성공할 수 있으리라고 생각했는가?

 - 그것은 사람의 결심 하나로 되는 일이다. 결심이 확고하면 아무리 경호가 많아도 성공할 수 있다고 믿었다.

 

 통역관이 우덕순의 진술을 일본말로 옮겼다. 방청석이 고요했다.

 마나베는 자신의 질문이 허물어지고 있는 것을 느꼈다. 우덕순은 마음속의 사실을 들이대며 질문에 답했고, 사실을 들이대며 질문을 부수었다. 우덕순은 행위와 관련된 사실을 말했고, 동기와 관련된 사실을 말했다. 우덕순은 마나베의 질문이 미리 설정한 틀에 갇히지 않았다.

 안중근의 진술과 우덕순의 진술을 행위의 미세한 대목까지 일치했다. 마나베는 두 피고인의 진술의 상이점을 찾아내서 그 틈새를 파고들려 했으나 쉽지 않았다. 마나베는 안중근에게 물었다.

 - 그대는 공명정대한 일을 한다면서 어째서 검찰관 신문 때 공모자 우덕순의 일을 숨기고 말하지 않았는가?

 - 우덕순이 말하기 전에 내가 말할 필요가 없다고 생각했다. 나는 내 일만 말하면 그것으로 그만이라고 생각한다.

 질문이 피고인에게 접수되지 않은 채 튕겨져 나왔다. 마나베는 동기의 정치성을 부수는 쪽으로 방향을 돌렸다.

 마나베는 안중근에게 물었다.

 - 어디를 겨누었는가?

 - 심장을 겨누었다.

 - 거리는?

 - 십보 정도였다.

 - 이토 공의 수행원에게도 쏘았는가?

 - 누가 이토인지 몰랐기 때문에 이토의 오른쪽으로도 쏘았고 그다음에 왼쪽으로 쏘았다.

 - 성공하면 자살할 생각이었는가?

 - 아니다. 한국의 독립과 동양 평화를 위해서는 단지 이토를 죽인 것만으로는 죽을 수 없다.

 - 그런 원대한 계획이었다면 범행 후 체포당하지 않으려 했을 텐데, 도주할 계획을 세웠는가?

 - 아니다. 나쁜 일을 한 것이 아니므로 도주할 생각은 없었다.

 

 질문이 답변을 누르지 못했다. 질문과 답변이 부딪쳐서 부서졌고, 사건의 내용을 일정한 방향으로 엮어나가지 못했다. 답변이 질문 위에 올라탈 기세였다. 피고인은 자신에게 불리한 진술을 힘주어 말했다. 진술은 유불리를 떠나 있었다.

 마나베는 검찰관 미조부치가 신문 과정에서 안중근에게 처자의 사진을 보여주었다는 기록을 떠올렸다. 마나베는 그것이 실속 있는 신문 기법이라고 생각했다. 마나베는

 - 그대의 범죄와는 관계없지만 참고로 알려준다.

 라고 서두를 꺼내고, 김아려와 어린 분도가 이미 미조부치의 신문을 받았다고 안중근에게 말했다.

 - 그대의 처는 그대와 부부 사이라는 것을 끝내 부인했다. 그러나 그대의 아이는 그대의 사진을 보고 아버지라고 말했다. 그대의 처는 끝까지 부인하고 있지만 나는 그들이 그대의 처자라는 것을 알고 있다.

 마나베는 안중근의 얼굴을 쳐다보며 사건과 관련 없는 사실이라고 다시 한번 강조했다. 안중근은 천장을 쳐다보고 있었다. 마나베는 검찰에서 넘어온 증거물을 제시했다. 안중근과 우덕순은 증거물들을 자신의 것이라고 인정했다.

 마나베가 말했다.

 - 유리한 증거가 있으면 말하라.

 안중근이 말했다.

 - 없다.

 우덕순이 말했다.

 - 없다.

 안중근이 이어서 말했다.

 - 나는 헛된 일을 좋아해서 이토를 죽인 것이 아니다. 나는 이토를 죽인 이유를 세계에 발표하는 수단으로 이토를 죽였다.   ... 이제부터 그 사유를 말하고자 한다.

 마나베는 더이상 재판을 공개하면 공공의 안녕질서를 해할 우려가 있다고 선언하고 방청객에게 퇴정을 지시했다. 변호사가 마나베에게 안중근의 의견을 서면으로 접수해달라고 요청했다. 

 마나베가 안중근에게 말했다.

 - 그대의 정치적 의견을 서면으로 제출하면 어떤가?

 - 나는 말하기 좋아서 여러 말을 하는 것이 아니다. 나의 거사는 의견을 진술할 기회를 얻기 위한 것이다. 공개를 금지한 이상 진술할 필요는 없다.

 - 앞으로도 진술하지 않겠는가?

 - 방청객이 없으면 진술하지 않겠다.

 

 - 그렇다면 앞으로 진술할 필요가 있다고 생각하는 바를 지금 진술하라.

 - 나의 목적은 동양 평화이다. 무릇 세상에는 작은 벌레라도 자신의 생명과 재산의 안전을 도모하지 않는 것은 없다. 인간 된 자는 이것을 위해서 진력하지 않으면 안 된다.

 이토는 통감으로 한국에 온 이래 태황제를 폐위시키고 현 황제를 자기 부하처럼 부렸다. 또 타국민을 죽이는 것을 영웅으로 알고 한국의 평화를 어지럽히고 십수만 한국 인민을 파리 죽이듯이 죽였다. 이토, 이자는 영웅이 아니다. 기회를 기다려 없애버리려고 생각하고 있었는데 이번에 하얼빈에서 기회를 얻었으므로 죽였다.

 검찰관은 내가 이토를 오해해서 죽였다고 말하는데, 나는 검찰관이 나를 오해하고 있다고 생각한다. 나는 오해해서 죽인 것이 아니다. 검찰관이 내 다섯 살 난 아들에게 내 사진을 보여주니까 아버지라고 말했다고 조서에 썼다. 그 아이가 세 살 때 내가 집을 떠났으니 아이가 내 얼굴을 알 방도가 없다. 이로써 검찰 취조가 엉터리임을 알 수 있다.

 - 유리한 증거가 있으면 말하라.

 - 나는 증거물에 대해서는 의문이 없다. 다만 나의 목적에 대해서 할말이 있다.

 - 대개 진술하지 않았는가?

 - 그렇지 않다. 십분의 일도 말하지 못했다.

 - 여기는 의견을 재판하는 자리가 아니다. 사실관계에 있어서 말할 필요가 있다면 간추려서 말하라. 사실관계 이외의 말을 하면 제지시키겠다.

 - 필요한 몇 가지를 말하겠다. 내가 이토를 죽인 까닭은 이토를 죽인 이유를 발표하기 위해서다. 오늘 기회를 얻었으므로 말하겠다. 나는 한국 독립전쟁의 의병 참모중장 가격으로 하얼빈에서 이토를 죽였다. 그러므로 이 법정에 끌려 나온 것은 전쟁에서 포로가 되었기 때문이다. 나는 자객으로서 신문을 받을 이유가 없다. 이토가 한국 통감이 된 이래 무력으로 한국 황제를 협박하여 을사년 5개 조약, 정미년 7개 조약을 체결하였다. 이것을 알기 때문에 한국에서 의병이 일어나서 싸우고 있고 일본 군대가 진압하고 있다. 이것이야말로 일본과 한국의 전쟁이라 하지 않을 수 없다....

 - 그렇게 깊이 나간다면 공개를 제지할 수밖에 없다. 방청인들은 모두 퇴정....

 

 진술을 제지하고 방청객들을 내보낼 때마다 마나베는 위기를 느꼈다. 사실관계를 파고들수록 정치성이 드러나고 있었고, 외국 언론들의 관심은 높아졌다. 마나베는 서둘러서 모든 일을 끝냈다. 

 

 안중근과 우덕순은 정치범이 아니고 사전 공모에 따라 범행한 살인범이라고 미조부치는 결론지었다. 미조부치는 안중근에게 사형을, 우덕순에게 징역 이 년을 구형했다.

 

  마나베는 안중근이 이토를 살해한 죄에 사형을 선고하고, 이미 사형을 결정했으므로 안중근이 이토의 수행원에 대해 저지른 세 건의 살인미수죄에 대해서는 형을 과하지 않는다고 선고했다. 또 우덕순에게는 법이 정한 범위 내에서 비교적 가벼운 삼 년 형에 처한다고 선고했다. 수사와 재판은 모두 끝났다.

 간수가 안중근과 우덕순에게 용수를 씌우고 마차에 실어서 여순감옥으로 끌고 갔다. 마차가 법원 마당을 떠날 때 방청객들이 몰려와서 구경했고, 기자들이 사진을 찍었다.

 

 

최근 영화 한산을 보고 생각이 나서 다시 한번 읽어봤다. 읽은지 10년이 넘어가고 이순신 장군에 대한

마음가짐이 달라진 탓인지 소설의 내용이 더욱 절절히 마음에 와닿는다.

 

문장의 농밀함과 문맥에 흐르는 힘은 김훈 작가의 글솜씨 덕분이기도 하겠지만, 이순신 장군님의 인생에 흐르는 비장함에 기인한 바도 적지 않을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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p107

 임진년에 여러 포구에서 이겼을 때, 매번 적병의 숫자를 장계에 써보낸 것이 오 년이 지난 정유년에 조정에서 문제가 되었다. 전공을 허위로 보고해서 임금을 기만하고 조정을 능멸했다는 것이었다. 그것이 내가 죽어야 할 죄목의 하나였다. 견내량에서 이겼을 때부터 나는 장계의 적병의 숫자를 적지 않았다. 그날 견내량 싸움을 끝내고 한산 통제영으로 돌아와 장계를 쓸 때, 나는 그 숫자가 어느 날 나를 죽이게 되리라는 예감에 몸을 떨었다. 그날 밤 나는 종사관을 물리치고 밤새도록 혼자 장계를 썼다. 한산 통제영에서 장계를 쓰던 임진년의 여름밤은 달이 밝았다. 나는 내 무인된 운명을 깊이 시름하였다. 한 자루의 칼과 더불어 나는 포위되고 있었고 세상의 덫에 걸려 있었지만, 이 세상의 칼로 이 세상의 보이지 않는 덫을 칠 수는 없었다. 한산 통제영에서 그리고 그후의 여러 포구와 수영에서 나는 자주 식은땀을 흘렸고, 때때로 가엾고 안쓰러워서 칼을 버리고 싶었다.

 

p108

 명량의 장계를 보낸 지 두 달 만에 논공행상이 내려왔다. 선전관은 오지 않고, 조정의 명을 받을어 도원수부가 시행됐다. 거제 현령 안위가 정삼품 통정대부의 품계를 받았고 전투에 참가했던 여러 읍진 수령과 군관들이 승진했다. 나에게는 상금으로 은전 스무 냥을 보내왔다. 스무 냥의 무게와 질감은 섬뜩했다. 그 스무 냥 속에서 남쪽 바다를 들여다보는 임금의 눈은 가늘게 번뜩이고 있었다.

 스무 냥이 내려온 지 이틀 뒤에, 임금이 보낸 선전관 이원길이 목포 앞바다 고하도 수영에 도착했다. 이원길은 수하를 거느리고 병영 막사 공사장까지 나를 찾아왔다. 서울 출신 문관인데, 바다를 평생 처음 본다고 했다. 몸매가 가냘폈고 흰 손가락이 길었다. 먼 길을 온 사람 같지 않게 그는 의관이 번듯했고 여독의 기색이 없었다. 수군 병영의 온갖 너저분한 풍경에 그는 자주 눈살을 찌푸렸다. 나는 공사장 천막에서 그를 맞았다. 나는 인사했다.

- 객고가 크시겠소, 전하께서 수군을 이처럼 염려하여주시니 감읍할 뿐이오.

- 전하의 근심이 실로 깊소이다. 달아난 배설 말이오.

 명량 전투 직전에 탈영 도주한 경상 우수사 배설을 체포해서 끌고 가는 것이 임무라고 그는 밝혔다. 그가 데리고 온 부하들 중에는 무관들이 섞여 있었다. 배설은 이미 수군에서 도망쳤는데, 배설을 체포하는 일로 선전관이 남해의 수군 수영에까지 온다는 것은 이해할 수 없는 일이었다.

- 배설은 이미 달아났지 않소? 배설을 잡으려면 이리로 오실게 아니라 그의 본가 마을로 가셔야 하지 않겠소? 경상도 성주 말이오.

- 통제공, 그게 그리 간단치가 않소이다. 성주에도 군사들을 보냈으나 잡지 못했소. 배설이 성주에 들어온 흔적도 찾지 못했소. 배설이 비록 달아났다 하나 본래 담력 있는 무장이었소. 따르던 장졸들도 많았던 것으로 아오. 이자가 달아나서 대체 무슨 짓을 하려는 것인지. 전하의 근심이 실로 여기에 있는 것이오.

 나는 겨우 알았다. 임금은 수군통제사를 의심하고 있는 것이다. 명량 싸움의 결과가 임금은 두려운 것이다. 수영 안에 혹시라도 배설을 감추어놓고 역모의 군사라도 기르고 있는 것이나 아닌지, 그것이 임금의 조바심이었다.

 이원길은 열흘 동안 수영에 머물렀다. 이원길은 데리고 온 수하들을 풀어 병영 안을 모두 뒤졌고 수영 인근 백성들의 마을 헛간까지 뒤졌다. 이원길은 명량 전투 이전과 이후의 장졸들의 숫자를 점검했고 각 읍진의 탈영자 숫자를 확인했다. 이원길의 수하들이 수영의 모든 군관들을 불러서 배설의 탈영 경위와 탈영 직전 상황을 수사했다. 이원길의 수사의 초점은 배설이 수영에서 탈영했느냐 아니냐에 맞추어져 있었다. 이원길은 귀로에 우수영, 벽파진, 삼지원까지 뒤지고 돌아갔다.

 

 

 이원길이 돌아간 지 보름 뒤에 임금이 보낸 면사첩(免死帖)을 받았다. 도원수부의 행정관이 면사첩을 들고 왔다. '면사' 두 글자뿐이었다. 다른 아무 문구도 없었다. 조정을 능멸하고 임금을 기만했으며 임금의 기동출격 명령에 따르지 않은 죄에 대하여 죽음을 면해주겠다는 것이었다. 면사첩을 받던 날은 하루 종일 비가 내렸다. 나는 '면사' 두 글자를 오랫동안 들여다보았다. 죄가 없다는 것도 아니고 죄를 사해주겠다는 것도 아니고 다만 죽이지는 않겠다는 것이었다.

 너를 죽여 마땅하지만 죽이지는 않겠다. 고 임금은 멀리서 그렇게 말하고 있었다. '면사' 두 글자 속에서, 뒤척이며 돌아눕는 임금의 해소기침 소리가 들리는 듯했다. 글자 밑의 옥새는 인주가 묻어날 듯이 새빨갰다. 칼을 올려놓은 시렁 아래 면사첩을 걸었다. 저 칼이 나의 칼인가 임금의 칼인가. 면사첩 위 시렁에서 내 환도 두 자루는 나를 베는 임금의 칼처럼 보였다.

 그러하더라도 내가 임금의 칼에 죽으면 적은 임금에게 갈 것이었고 내가 적의 칼에 죽어도 적은 임금에게도 갈 것이었다. 적의 칼과 임금의 칼 사이에서 바다는 아득히 넓었고 나는 몸 둘 곳이 없었다.

 

 

 종사관 김수철이 저녁때 막사 신축 공정과 수군 징모 실적을 보고하는 일로 내 숙사에 들었다. 서안을 사이에 두고 마주앉은 김수철은 실눈을 뜨고 담벽에 걸린 면사첩을 들여다보았다. 김수철의 얼굴이 하얗게 질렸다. 내가 한산 통제영에서 체포되었을 때 김수철은 내 함거의 뒤를 따라 서울까지 걸어서 올라왔었다. 내가 하옥되었을 때, 김수철은 임금을 대면했다. 일개 지방 수영의 종사관에 불과한 그가 어떻게 임금을 대변할 수 있었는지 나는 모른다. 아마 영의정 류성룡이 길을 열어주었을 것이다. 김수철은 임금 앞에서 이마로 대전 마루를 찧으며 울었다. 나를 심문하던 위관들이 김수철의 일들을 말해주었다. 그때 김수철은 울면서 말했다고 한다.

- 전하. 통제공의 죄를 물으시더라도 그 몸을 부수지 마소서. 전하께서 통제공을 죽이시면 사직을 잃으실까 염려되옵니다.

 임금이 대답했다.

- 너희들이 남쪽 바다에서 사직을 염려했느냐?

 김수철은 수영을 이탈한 죄로 곤장 쉰 대를 맞고 풀려났다.

 김수철의 시선은 오랫동안 면사첩에 박혀 있었다. 그가 눈물을 떨구었는데, 그의 얼굴은 흔들리지 않았다. 그가 환갑연의 덕담 같은 목소리로 말했다.

- 나으리. 오래오래 사십시오.

- 알았다. 내 그럴 작정이다.

- 보고는 내일로 미루리다. 편히 주무십시오.

- 그래라. 피곤하니 물러가라.

 김수철은 들고 왔던 문서 두루마리를 펼치지 않은 채 그대로 들고 나갔다.

 

p253

 정탐이 돌아가던 날 저녁에 남해도 현감의 급보가 수영에 도착했다. 명의 도사부都司府 담종인이 나에게 보낸 문서가 남해도에 도착했다는 것이었다. 남해 현감은 배를 탄 전령을 띄워 담종인의 문서를 나에게 전했다. 전령을 태운 협선은 열 명이 노를 저어 급히 수영에 도착했다.

 명군의 통신 축선이 적이 일부를 장악한 남해도에까지 닿아 있고 명군의 문서 연락병들이 남해도에까지 드나들고 있다는 것은 놀라운 일이었다. 붉은 비다으로 싼 그 두루마리는 개전 이후 명군 최고사령부가 나에게 보낸 최초의 문서였다. 종사관 김수철을 방안으로 불러들여 문서를 함께 읽었다.

 

  이제 일본군 수뇌부들이 속속 귀순하고 있으니 그 마음이 실로 어여쁘다. 왜는 본래 인간의 언어를 알아듣지 못하는 종자들이거니와, 우리 천자의 크고 깊은 교화의 덕이 저 금수와도 같은 왜에게까지 미쳐 일본군은 이제 군사를 거두어 돌아가려 하고 있으니 실로 천자의 덕이 아니고서야 바랄 수 없는 일이다. 그러므로 너희는 이제 함대를 해산하도 군사를 풀어헤쳐서 고향으로 돌아가거라. 인간은 인간이므로 마땅히 고향으로 돌아가야 한다. 그럿이 창생의 슬픔과 고통을 지극히 헤아리는 천자의 뜻이다. 이제 너희는 일본군 진영에 가까이 가서 공연한 싸움을 일으키지 말고 천자의 변방 남쪽 바다를 소란케 하지 말라. 내, 너희들의 수영을 한번 들여다보고 스다듬어주고 싶은 마음 간절하나 멀어서 가지 못하고 이제 글을 전하니 내가 친히 너희에게 간 것과 무엇이 다르랴. 대저 천자의 무장은 정한을 가벼이 드러내는 일을 삼가는 것이다. 그러니, 그리 알라.

 

 읽기를 마치고 김수철은 말없이 창밖으로 시선을 돌렸다. 썰물은 갯벌 위에 새들이 내려앉고 있었다. 바람과 물결이 함께 먼 바다로 몰려나가서 바다는 비어 있었다. 섬 너머 수평선 쪽에서 바람 속을 날뛰는 물결이 하얗게 일어섰다. 빈 바다에는 시간의 흔적이 없었고, 지나간 싸움의 흔적이 없었다. 내가 알지 못하는 내 마음의 오지에서 징징징 칼이 울었다.

 - 수철아, 고향으로 돌아가겠느냐?

 김수철의 시선은 바다 쪽에서 돌아오지 않았다. 바다를 바라보는 그의 눈에 물기가 번졌다.

 - 나으리, 이미 돌아갈 고향이 없습니다..

 - 일본군과 명군은 돌아갈 고향이 있을 것이다.

 김수철이 내 쪽으로 시선을 돌렸다.

 - 나으리, 이 문서는 장졸들에게 발설치 마십시오.

 - 너도 발설치 마라. 조정이 가엾구나. 우리는 가엾지 않다.

 

 

작게는 재일 조선인의 디아스포라. 넓게는 소외받는 모든 이들은 위한 찬가.

 세계인 모두에게 공감받을 수 있는 무언가가 이 작품에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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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권.

p21

 하숙인들은 가게에 갔다가 신문을 읽을 줄 아는 남자들한테서 들었다며 대공황인지 뭔지가 전 세계를 덮쳤다는 이야기를 식사 시간에 자주 꺼냈다. 불쌍한 미국인들이 가련한 소련인들과 중국인들 못지않게 굶주림에 허덕이고 있다는 이약였다. 심지어 천황의 은총 아래 무탈하게 지내던 일본인들도 배를 곯는다고 했다. 그러니 그 겨울에 살아남은 사람들은 약삭빠르고 강인한 이들이 틀림없었다. 하지만 차마 입에 담을 수 없을 정도로 참혹한 소식들이 너무나 많았다. 어린 아이들은 잠자리에 들었다가 다시는 잠에서 깨어나지 못했고, 여자 아이들은 국수 한 그릇에 몸을 팔았으며, 노인들은 젊은이들이라도 먹고 살 수 있게 죽을 곳을 찾아 남몰래 떠나버렸다.

 

p69

 "어디를 가든 썩어빠진 사람들이 있어. 그들은 좋은 사람들이 아니야. 아주 나쁜 사람을 보고 싶니? 그럼 평범한 사람은 상상도 못할 성공을 안겨줘 봐. 언제든지 하고 싶은 대로 할 수 있게 되었을 때, 어떤 행동을 하는지 한번 보는 거야."

p249

 선자는 항상 밭이 있으면 좋겠다고 생각했다. 고향에서 어머니의 하숙집에는 부엌 뒤쪽에 작은 텃밭이 있어서 하숙인들이 내는 돈보다 두 배는 더 많이 먹을 때도 음식을 제공할 수 있었다. 신선한 식품의 가격은 계속 올랐고, 노동자들은 가장 기본적인 것들을 살 여유도 없었다. 최근에는 몇몇 손님들이 김치 한 포기를 통째로 살 수가 없어서 반으로 쪼개서 조금만 살 수 있는지 묻기도 했다

p267

 조선인들이 일본이 승리하기를 바란다고? 천만의 말씀이다. 하지만 일본의 적이 이긴다면 조선인들에게 무슨 일이 일어날까? 조선인들이 스스로를 구할 수 있을까? 분명 그렇지 않을 것이다. 그러니 내 밥그릇이나 잘 챙기자는 것이 조선인들이 남모래 품고 있는 속마음이었다. 가족을 구하고, 자기 배를 채우고, 관리자들을 경계하자. 조선의 독립주의자들이 나라를 되찾지 못한다면 아이들에게 일본어를 가르쳐 출셋길을 열어주자. 적응해서 살자. 이만큼 간단한 것이 또 어디 있겠는가? 조선의 독립을 위해 싸우는 모든 애국자나 일본을 위해서 싸우는 재수 없는 조선인 개자식이나 다들 먹고 살려고 애쓰는 만 명의 동포 중 하나일 뿐이었다. 결국 굶주림을 이길 수 있는 것은 아무것도 없었다.

 

p271

 그러나 노아가 이 모든 비밀들보다 더 비밀스럽게 품고 있는 은밀한 소망은 일본인이 되고 싶다는 것이었다. 이카이노에 살면서 절대 조선으로 돌아가지 않는 것은 아무에게도 말할 수 없는 노아의 가장 큰 꿈이었다.

 

p280

 공장주인 시마무라는 비품실 크기만 한 유리로 된 사무실에 앉아 있었다. 투명한 유리창 덕분에 소녀들이 일을 잘하고 있는지 감시할 수 있었다. 일을 잘 못하는 여자아이를 발견하면 요셉을 불러 들여서 그 아이에게 주의를 주라고 시켰다. 두 번 주의를 받으면 6일 동안 열심히 일해도 주급을 받지 못했다. 시마무라는 파란 천으로 장정한 원장에다 소녀들의 이름을 기입해놓고 그 옆에 경고 횟수를 기록해두었다. 감독관인 요셉은 직원들에게 벌을 주기 싫어했지만 시마무라는 그것이 조선인의 약한 기질을 보여주는 또 다른 증거라고 생각했다. 시마무라는 모든 아시아 국가를 일본인의 효율성과 치밀함, 높은 조직 수준으로 다스린다면 아시아 전체가 번영하고 발전해서 저 무도한 서구를 물리칠 수 있다고 믿었다. 게다가 다른 대부분의 친구들과는 달리 외국인 노동자를 고용하는 자신이 아무 마음씨 좋고 공정한 사람이라고 생각했다. 친구들이 외국인 노동자들은 흐리멍덩하게 일을 한다고 지적하면 시마무라는 일본인들이 그들에게 무능과 태만을 혐오하라고 가르치지 않으면 그들이 뭘 배우겠냐고 반박했다. 뿐만 아니라 후세를 위해서 규범을 지켜야 한다고 생각했다.

 노아가 딱 한 번 공장에 들어온 적이 있었는데 시마무라는 그것을 탐탁지 않아 했다. 한 일 년 전에 경희가 열병으로 시장에서 기절을 하자 노아가 요셉을 데리러 왔었다. 시마무라는 마지못해서 요셉에게 아내를 돌봐주라고 했지만, 다음 날 아침 다시는 그런 일이 있으면 안 된다고 요셉에게 말했다. 기계로 돌아가는 공장 두 개를 유능한 정비공 없이 어떻게 돌릴 수 있겠냐는 것이 그 이유였다. 요셉의 아내가 또 아프거나 하면 그때는 동네 사람이나 다른 가족에게 도움을 청해야 했다. 요셉은 근무 시간에 공장을 떠날 수 없었다. 비스킷 생산은 전쟁 명령이었고, 전쟁 명령은 즉각 수행해야 했다. 남자들이 목숨을 바쳐 나라를 위해 싸우고 있으니 모든 가족이 희생을 감수해야 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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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권.

p326

 "그래, 멍청이들은 계속 널 건드리고 네 아버지가 파친코 주인이라는 걸 알아차릴 거야. 사람들이 어떻게 그걸 알겠어?"

 "전 말한 적 없어요."

 "모두 다 알고 있어, 솔로몬. 일본에서는 부자 조선인, 아니면 가난한 조선인이야. 네가 부자 조선인이라면 파친코와 관련이 있는 거지."

 "아버지는 훌륭한 분이세요. 믿을 수 없을 정도로 정직하고요."

 "그래, 분명 그런 분일거야." 가즈는 여전히 가슴 위로 팔짱을 끼고서 솔로몬을 똑바로 쳐다보았다.

 솔로몬이 주저하다가 결국 이야기했다. "아버지는 폭력배가 아니에요. 나쁜 짓을 하지 않아요. 평범한 사업가죠. 세금을 모두 내고 모든 일을 규칙대로 처리해요. 그런 사업을 불법적으로 하는 사람들도 있지만 아버지는 한 치도 틀림없이 정확하게 일을 처리하고 도덕적인 분이에요. 파친코를 세 개 운영하고 있지만 그건...."

 가즈가 안심하고 말하라는 듯이 고개를 끄덕였다.

 "아버지는 자기 것이 아닌 것은 아무것도 받지 않아요. 돈에도 크게 관심이 없어요. 많은 돈을 기부하고...."

 애쓰코는 모자수가 직원들 몇 명을 위해서 양로원 비용을 지불해줬다고 말했다.

 "솔리, 솔리. 그러지마. 변명할 필요 없어. 조선인들에게는 일반적인 일을 할 수 있는 기회가 많지 않아. 너희 아버지는 다른 선택의 여지가 없어서 파친코를 선택한 게 분명해. 아마 훌륭한 사업가겠지. 네 포커 기술이 무에서 나왔다고 생각해? 네 아버지는 후지나 소니에서 일할 수 있었을지도 몰라. 하지만 그런 회사에서는 조선인을 고용하지 않잖아. 알지? 어이, 컬럼비아 대학생 청년, 사실 너도 고용해줄지도 의심스러워. 일본의 많은 곳에서 아직도 조선인들을 교사와 경찰, 간호사로 고용하지 않아. 넌 돈을 많이 버는데도 도쿄에서 방을 빌릴 수도 없잖아. 빌어먹을 1989년! 뭐, 네가 그 모든 것을 공손하게 받아들일 수도 있겠지만 그건 잘못된 거야. 난 일본인이지만 멍청하지 않아. 미국과 유럽에서 오랫동안 살았어. 일본인들이 이 땅에서 태어난 조선인들과 중국인들에게 하는 것은 미친 짓이야. 완전히 제정신이 아니야. 너희들은 혁명을 일으켜야 해. 그런데 그다지 항의를 하지 않잖아. 너와 네 아버지는 이 나라에서 태어났어. 그렇지?"

 솔로몬은 가즈가 왜 저렇게 열을 올리는지 모르겠다고 생각하면서도 고개를 끄덕였다.

 "네 아버지가 청부 살인자라 해도 난 신경 안 써. 네 아버지를 고발하지 않을 거야."

 "하지만 청부 살인자가 아닌데요."

 "어이, 애송이. 그거야 당연히 아니지." 가즈가 미소 지으며 말했다. "여자친구한테 가봐. 여자친구가 매력적이고 똑똑하다며, 그건 잘된 일이야. 결국에는 머리가 조흔 게 생각보다 훨씬 더 중요하거든." 가즈가 웃으며 말했다.

 가즈는 택시를 불러서 솔로몬에게 먼저 타고 가라고 했다. 다들 가즈가 일반적인 상사 같지 않다고 했는데 그 말이 진짜라고 솔로몬은 생각했다.

 

p340

 "아버지도 가게를 파는 게 어때요? 은퇴하는 거죠. 아버지도 이제 그럴 때가 되지 않았어요? 파친코는 일이 너무 많잖아요."

 "뭐라고? 사업을 그만두라고? 파친코 사업으로 식탁에 음식을 올리고 널 학교에 보냈어. 난 은퇴하기에는 아직 젊어!"

 솔로몬이 어깨를 으쓱했다.

 "게다가 내 가게를 팔면 어떻게 되겠니? 직원들이 해고될지도 몰라. 그럼 나이 든 직원들이 어디로 가겠니? 우리는 기계를 만드는 사람들에게 일자리를 주고 있어. 일본에서 파친코는 자동차 제조업보다 큰 사업이야."

p360

 피비가 전화를 받지 않아서 솔로몬은 하나가 있는 병원으로 갔다. 하나는 깨어 있었다. 라디오에서 팝 음악이 흘러나오고 있었다. 방은 여전히 어두웠지만 댄스음악 덕분에 나이트클럽처럼 생기가 돌아싸.

 "벌써 돌아왔어? 진짜 내가 그리웠던 모양이네. 솔로몬."

 솔로몬은 하나에게 모든 이야기를 다 했고, 하나는 끼어들지 않고 가만히 들어주었다.

 "넌 아버지 사업을 물려받아야 해."

 "파친코를?"

 "그래, 파친코. 안 될 게 뭐 있어? 파친코에 대해서 나쁜 소리를 해대는 멍청이들은 부러워서 그러는 거야. 네 아버지는 정직한 사람이야. 사기를 쳤다면 더 큰 부자가 될 수 있었겠지. 하지만 그렇게 하지 않았어도 부자가 됐잖아. 고로도 좋은 사람이야. 야쿠자일지도 모르지만 그게 무슨 상관이야? 난 상관 안 해. 고로가 야쿠자가 아니더라도 야쿠자에 대해서 잘 알 거야. 이 세상은 더러워, 솔로몬. 깨끗한 사람은 아무도 없어. 살아가는 건 더러워지는 거야. 좋은 가문 출신 IBJ(일본산업은행, BOJ(일본은행)에서 일하는 근사한 사람들을 많이 만나봤어. 그 인간들은 침대에서 구역질이 나는 짓을 하는 걸 좋아해. 많은 사람들이 사업을 하면서 나쁜 짓을 하지만 잡히질 않지. 내가 만났던 대부분의 인간들은 기회가 있을 때마다 남의 것을 훔쳤어. 그 인간들은 너무 겁이 많아서 진짜 야망을 품지도 못해. 잘 들어, 솔로몬. 여기서는 아무것도 변하지 않을 거야. 알겠어?"

 "그게 무슨 말이에요?"

"아이고 이 멍청아." 하나가 웃으며 말했다. "그래도 넌 나의 멍청이지."

 하나가 놀리자 솔로몬은 우울해졌다. 솔로몬은 예전에 이토록 지독한 외로움을 느낀 적이 있었는지 기억나지 않았다.

 "일본은 절대 변하지 않아. 외국인을 절대 받아들이지 않을 거야. 내 사랑, 넌 언제나 외국인으로 살아야 할 거라고. 저래 일본인이 되지 못해. 알겠어? 자이니치는 여행을 떠날 수 없는 거 알지? 하지만 너만 그런 게 아냐. 일본은 우리 엄마 같은 사람들도 다시 받아주지 않아. 나 같은 사람들을 절대 받아들이지 않지. 우리는 일본인인데도 말이야! 난 병에 걸렸어. 오래된 무역회사를 운영하는 어떤 일본인 남자한테서 옮은 병이야. 그 남자는 죽었어. 하지만 아무도 신경 쓰지 않지. 여기 의사들도 내가 떠나버리기를 바라고 있어. 잘 들어, 솔로몬, 넌 여기 머물러야 해. 미국으로 돌아가서는 안돼. 네 아버지 사업을 물려받아야 해. 부자가 되면 무엇이든 원하는 걸 할 수 있어. 하지만 아름다운 솔로몬, 저들은 우리가 괜찮은 사람이라는 생각을 절대 하지 않아. 내 말 무슨 말인지 알겠어?" 하나가 솔로몬을 노려보았다. "내가 말한 대로 해."

 

개인적으론 그리 재밋게 본 작품은 아니다. 추리소설 장르긴 하지만 무릎을 탁 치게 만드는 플롯의 기교라든가 스토리의 기발함같은 맛은 느끼기 어렵다. 작품 자체는 평범한데 무슨 대상 수상작이라고 해서 보게 된 바가 크다.

이번에 아야세 하루카 주연으로 드라마화가 되었는데 드라마화 하기에는 좋을 수도 있다고 보인다.

소설은 평범하지만 작가의 이력은 그리 평범하지 않다.

작가인 신카와 호타테(新川帆立)는 1991년생으로 도쿄대 법학부를 나온후 24살에 사법고시에 합격해서 변호사가 되었다. 고등학교 시절 나쓰메 소세키의 <나는 고양이로소이다>에 감명을 받아 작가를 꿈꿨다고 한다. 

이제 32살밖에 안됐지만 신카와 작가의 약력을 보면 나이에 비해 꽤 파란만장(?)한 생애를 보냈다.

고등학교 시절에 바둑부 활동을 했으며 전국대회에 출전한 경력이 있고, 마작에도 흥미를 가졌고 이후 성인이 된 후에 프로마작선수 시험에 합격해서 1년간 프로마작 선수로 활동한 바가 있다.

고등학교 시절 작가를 꿈꾸면서 작가가 되기 위해서 오랜 시간이 필요하다는 것을 염두에 두고 전문직을 갖는 것을 목표로 했다고 한다. 그래서 바둑과 마작에 관심을 가졌던 것 같고 마작에는 소질이 있어서 프로마작선수로도 활동했던 것 같다.

도쿄대학교 의학부에 전기에 지원했으나 떨어지고, 후기에 법학부에 합격한다. 학부와 대학원을 졸업하고 24살에 사법시험에 합격하고 사법연수원을 들어가는데, 이 사법연수 기간에 프로마작 선수로 합격해서 1년간 프로마작 선수로도 활동한다.

2017년에 변호사가 되서 법률사무소에서 들어간다. 법률사무소에서 월 150시간이 넘는 잔업(1주일에 6일 근무라고 쳐도 하루에 6시간 잔업이니까 하루 평균 14시간 근무를 한다는 얘기니까 아무리 젊은나이라고 해도 장난이 아님)을 하던 중에 쓰러지게 된다. 이를 계기로 법률사무소를 관두고 요양을 겸하면서 본격적으로 작가수업을 시작한다.

어쨋든 밥은 먹고 살아야 하니 기업의 법무팀에 취직해서 샐러리맨으로 살아가면서 작가의 꿈을 키워나가다가 2020년 '이 미스테리가 대단해'라는 출판사 주최 미스테리 소설대회에 <전남친의 유언장>을 투고해서 대상을 수상한다.

2021년 <전남친의 유언장>이 출간되서 베스트셀러에 오르고 이를 계기고 회사를 관두고 전업작가로서의 삶을 살고 있다. 현재 국내에는 <전남친의 유언장>만 번역,출간되어있지만, 일본 현지에서는 이 작품의 후속작으로 <파산상속 그녀(倒産続きの彼女)>, <켄모치 레이코의 하룻밤 추리(剣持麗子のワンナイト推理>를 발표했으며, <켄모치 레이코의 하룻밤의 추리>의 경우는 현재 일본 추리소설 베스트셀러에 올라가 있다.

작가 본인이 동경대 법대 출신에 사법고시를 패스한 변호사 출신이라는 이력 자체가 화제성이 어느 정도 있고, 작품 자체도 꽤 재밋기 때문에 이를 일본 출판계에서 띄워주는 마케팅이 성공한 케이스라고 본다.

결혼을 했으며 남편도 같은 동경대 법학부 출신의 변호사다. 작가의 이름인 신카와 호타테는 필명인데 본명은 공개하지 않고 있다.

킬링타임용으로 부담없이 읽을 만한 소설이다. 

 

 청소년기는 급격하게 심신이 성장하는 기간이다. 대부분은 성장통을 겪게 된다. 신체적으로 몸이 커지고, 동시에 성장, 성 등에 대한 호르몬이 휘몰아치면서 심신이 왕성해지면서 소위 '질풍노도의 시기'를 보내게 된다. 생각이 많아지면서 고민도 많아지고, 여기저기 몸이 아프기도 하고, 살이 트고 몸의 균형이 무너지는 상황이 벌어지는 경우가 있다. 그럴 때는 음식 섭취를 골고루 하고, 적절한 휴식, 적절한 운동, 적절한 교우와 대화, 독서, 음악/영화 감상 등과 같은 다양한 개인/사회/문화적 활동을 통해 한 인간으로서 심신의 균형을 잡아나가며 사회적으로 균형 잡힌 성인으로서 성장해나가게 된다.

 이 책은 대한민국이라는 국가가 이제 성인의 문턱에 다다랐는데, 여기저기 불안정한 부분에 대해 어떻게 균형을 잡을 수 있는가에 대한 방법들을 이야기하고 있다. 

 그 화두가 연대와 공존을 통해 더불어 살아갈 수 있는 나라를 만들어 갈 것인가에 대한 조국 장관의 생각을 담고 있다.

 조국 장관의 가족의 현실을 감안할 때 참 가슴이 아프고, 그런 와중에 이런 책을 쓰셨다는 점에 고마운 마음이 든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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p20

 나는 박 의장이 던진 질문 "그래서 우리는 선진국이 된 것일까?"에 대하여 긍정의 답을 하면서도, 지속 가능한 선진국이 되기 위해서 '사회권'을 강화하는 사회 경제적 제도 개혁이 긴급함을 말하고자 한다.

 사회권은 우리나라에 여전히 익숙하지 않은 개념이다. 헌법학에서는 단결권, 단체교섭권, 단체행동권 등 노동 3권, 근로의 권리, 인간다운 생활을 할 권리, 주거권, 보건권 또는 건강권 등을 사회권으로 분류한다. 국제적으로 유엔의 '경제적, 사회적, 문화적 권리에 관한 국제 협약'에 규정되어 있는 권리다. 풀어 말하면 노동, 주거, 복지, 생계, 의료 등의 분야에서 사회/경제적 약자가 인간으로서의 존엄과 행복을 유지하고 살아갈 수 있도록 보장받아야 할 권리를 말한다. 그런데 우리나라에서 사회권은 시민의 '권리'가 아니라 국가의 '시혜'인 것처럼 인식되고 있다. 이 점에서 이 책은 박태웅 의장과 다른 측면에서 선진국 대한민국이 부족한 면을 지적하고 해결해야 할 과제를 제시하고자 한다.

 

p21

 선진국 대한민국은 사회/경제적으로 취약한 계급/계층/집단의 희생에 기초하여 이루어졌고, 불평등과 양극화라는 심각한 문제점을 내포하고 있다. 선진국이라는 칭호는 이러한 문제점에도 불구하고, 한국이 이런 문제를 해결할 것이라고 기대하면서 미리 당겨 받은 칭호다. 이 점에서 대한민국은 '가불 선진국'이다. 나는 교수로 재직하던 2017년 <사회권의 현황과 과제>라는 책을 엮으면서 다음과 같이 말했다.

 "OECD와 G20 가입 국가로서 복지국가를 실현할 물적 토대를 이미 다 갖추고 있다. 이에 반해 OECD 가입 국가 중 한국의 복지 수준이 가입 국가의 최저 수준인바, 한국은 '복지 저개발 국가', '사회권 저개발 국가'라 불러 마땅하다.

 선진국이 되었다고 시쳇말로 "국뽕이 차오른다!"라고 기뻐할 수만은 없는 상황이다. 이러한 문제점을 그대로 두면 선진국 한국의 지속 가능성은 약해진다.

 

p22

 20세기 초중반 아르헨티나는 세계 10대 부국에 속했다. 수도 부에노스 아이레스는 '남미의 파리'라고 불렸는데, 화려한 바로크식 건물이 즐비했으며 1913년에 지하철이 운행되기 시작했다. 아르헨티나는 유럽 여러 나라 노동자들이 이민 가고 싶어하는 나라였다. 

 그러나 1976년 쿠데타로 집권한 비델라 군부 정권이 반대파 탄압을 위해 벌인 '더러운 전쟁'과 최저임금 폐지, 해고 자유화 등 '신자유주의' 정책의 폐해, 1989년 정치적 민주화 이후 발생한 경제 위기 등으로 아르헨티나는 선진국에서 완전히 멀어졌다. 

 우리는 대한민국이 식민지, 전쟁, 그리고 군사독재와 권위주의 체제를 겪은 후 선진국이 되었음에 자부심을 가져도 좋다. 그러나 충분한가? 아니다 '외연적 발전'을 넘어 '내포적 발전'을 이룩하기 위한 사회 개혁이 필요하다. '국뽕'을 넘어 선진국 대한민국에 필요한 사회/경제적 제도 개혁을 고민해야 한다. 심각해지는 자산 및 소득 격차를 해소하지 않으면 지속적 발전과 국민 통합은 어렵다. 확보된 '자유권' 보장은 기본으로 하면서 '사회권' 보장을 '자유권' 보장 수준으로 높여야 한다. 그래야만 선진국 반열에 오르기 위해 '가불'했던 '빚', 그래서 여전히 남아 있는 '빚'을 갚을 수 있다.

 

 p29

 문재인 정부 말기가 되니, 보수 야당과 언론은 문재인 정부를 폄훼하는 데 여념이 없었다. 이들은 과거 김대중, 노무현 정부에 대해서도 그랬다. 임기 내내 나라가 망한다고 비난과 저주를 퍼부었는데, 임기 종료 후 비로소 그 성과를 인정하는 것이 이들의 행동 유형이다. 그들에게는 죽은 김대중과 죽은 노무현만 좋은 김대중, 좋은 노무현이다. 지금은 두 분 대통령을 '존경'한다고 하는 보수 야당과 언론이 두 분 생존시에 내뱉었던 비방, 악담, 저주를 생각해보라.

 문재인 정부는 촛불혁명의 정신에 기초하여 국정을 운영했고 대한민국을 최초로 '선진국' 대열에 진입시킨 정부다. 문재인 정부의 최고 성과는 외교, 안보, 방역에 있다. 세계적으로 한국의 위상이 높아지고 한국 정부의 발언권도 강해졌다는 것, 남북 사이에 군사적 긴장이 거의 느껴지지 않을 정도로 최소화되어 '코리아 디스카운트'라는 말이 사라졌다는 것은 주지의 사실이다.

 2021년 독일잡지 <투리투에디션turi2edition>은 2021년을 결산하는 특집 기사로 '2021년의 승리자들'을 뽑았다. 국가로는 유일하게 한국을 선정하면서, 그 이유를 다음과 같이 밝혔다.

 아시아의 선도적인 문화국가 한국은 2021년을 접수했다. K-팝은 세계를 정복했고 <서바이벌> 잔혹극 <오징어 게임>은 넷플릭스의 모든 신기록을 깼다. 이것으론 충분하지 않다는 듯, 한국은 판데믹 방역에서도 진정한 모범국이다.

 코로나 위기 이후 한국 보수 야당과 언론은 백신 효능에 의문을 제기하고 문재인 정부의 방역을 줄기차게 비난했지만, 한국의 방역은 세계적인 찬사를 받고 있다. 미국의 방역학자 빈센트 라즈쿠마는 2021년 11월 7일 트위터에 다음의 글과 표를 올렸다. "한국은 역학의 교과서적 원칙을 따랐다. 인구의 75퍼센트가 백신을 완전히 접종할 때까지 사망률을 40배 낮게 유지했다. 이것이 성공이다."

 2020년 12월 국제표준화기구는 한국의 감염병 진단 기법을 국제 표준으로 지정했다. 2021년 11월 23일 <블룸버그>는 한국과 노르웨이, 덴마크, 핀란다, 아랍에미리트, 캐나다, 스위스 7개국을 "코로나 19 방역 MVP"라고 평가했다. 또한 2021년 12월 독일의 '베텔스만 재단'은 'C19 국가 비상 시기 국가 위기관리 능력 순위'를 발표했는데 1위 뉴질랜드, 2위 대한민국, 3위 스웨덴, 4위 덴마크, 5위 독일, 6위 아일랜드, 7위 캐나다, 8위 스위스, 9위 그리스, 10위 핀란드 순이었다.

 그러나 2021년 12월 한국에서 코로나 발생자가 급증한 반면 일본에서는 급감하자, 한국의 일부 교수와 저자는 "K-방역은 실패했다", "J-방역을 배워야 한다" 등의 주장을 쏟아냈다. 그러다 2022년 1월 초 일본의 코로나 신규 확진자가 60배 폭증하여 하루 6,000명을 돌파하자 이들은 침묵했다. 이들은 2019년 아베 정권이 무역 전쟁을 선포했을 때 한국 정부와 대법원을 비난했다. 이들에게는 '넘버 원 일본' 하고가 뿌리 깊게 박혀 있다.

 

p32. 연성 독재? - 완전한 민주주의

 보수 야당과 언론, 그리고 일부 자칭 '진보' 지식인은 문재인 정부를 "연성 독재", "파시즘으로 가는 단계" 운운하며 비판했다. 예컨대 윤석열 후보는 "총과 칼만 안 들었을 뿐 연성 독재, 연성 전체주의를 시도"한다고 비난했다. '좌파' 지식인 중 진중권 씨는 문재인 정부를 "연성 독재"라고 비방했고, 권경애 변호사는 "문재인 정권은 나치즘과 거의 흡사하다"라고 매도했다. 안철수 후보는 문재인 정부로 인하여 한국이 "전체주의 국가가 되가고 있다"라고 주장했다. 모두 객관적 현실에 부합하지 않는 정치적 선동에 불과하다.

 영국 <이코노미스트>가 매년 발표하는 <민주주의 지수>에 따르면 한국은 '완전한 민주국가'다. 문재인 정부 동안 표현의 자유 등 정치적 민주주의는 최고 수준으로 보장되었다. 단적인 예가 문 대통령을 "공산주의자"라고 부른 고영주 전 방송문화진흥회 이사장에게 대법원이 명예훼손죄 무죄 취지로 파기환송했고, "문재인은 간첩", "문재인이 대한민국의 공산화를 시도했다"라고 연설한 전광훈 목사에게 1.2심 재판부가 무죄 판결을 내린 것이다. 대통령에 대한 저열하고 극단적인 비방조차 형사처벌에세 사실상 자유로워졌다.

 '국경없는 기자회'가 발표하는 '언론자유지수'는 2016년 180개 국가 중 70위였으나, 2018년 43위, 2019년 41위, 2020년 42위, 2021년 42위를 기록하여 3년 연속 아시아권 1위를 지키고 있다. 문재인 정부는 언론에 대하여 어떠한 개입이나 압박도 하지 않았다. 현재 언론이 정부가 무서워 기사를 쓰지 못한다는 얘기는 들어보지 못했다. 여당인 더불어민주당이 '징벌적 손해배상' 도입 등을 내용으로 하는 언론 개혁 법안을 준비하자 보수 야당과 언론은 거칠게 비판했다. 그러나 이는 언론의 자유를 침해하는 것이 아니라 언론의 고의,중과실에 대하여 책임을 묻는 것일 뿐이다. 영국 옥스포드대 부설 로이터저널리즘연구소의 보고에 따르면, 한국언론의 신뢰도는 2017년 이후 2020년까지 4년 연속 꼴찌를 기록했다. 한국 언론은 누리는 자유만큼 책임도 져야 하지 않을까.

 한편 대한민국 건국 후 70여 년 동안 유지된 권력기관의 구조가 개혁되었다. 불법적 정치 개입과 민간인 사찰을 금지하기 위해 업무 범위에서 국내 보안 정보를 삭제하고 대공 수사권을 경찰에 이관하는 국가정보원 개혁이 이루어졌다. 댓글 공작, 세월호 민간인 사찰, 계엄령 문건 작성 등 불법을 범했던 기무사령부를 순수한 방첩 보안 기관으로 바꾸는 안보지원사령부 신설도 이루어졌다. 그리하여 과거 정권하에서 음습한 공작을 일삼던 정보기관의 행태는 자취를 감추었고, 이명박, 박근혜 정부가 자행한 민간인 사찰은 완전히 사라졌다. 이제 평범한 시민이 국정원이나 안보지원사령부를 두려워하지 않는 세상이 되었다.

 반면 2021년 12월 14일, 윤석열 후보는 관훈클럽 토론회에서 자신이 대통령이 되면 국정원과 검찰 등을 동원하여 인사 검증을 하겠다는 경악스러운 발언을 했다. 문재인 정부하 국정원 개혁이 이루어지면서 북한, 간첩, 산업스파이 등과 관련된 민간인 외에는 국정원의 인적 정보 수집이 금지되었다. 국정원 국내 정보담당원도 모두 철수했다. 그런데 윤석열 후보가 이를 재개하겠다고 한 것이다.

 수사, 기소 기관의 구조 개혁도 이루어졌다. 해방 후 계속 유지되어온 검찰의 권한 독점과 압도적 우위가 해체되었다. 검찰과 경찰 간의 견제와 균형을 보장하는 검경수사권 조정이 성사되었고, 검사의 범죄를 수사하고 기소할 수 있는 독립적 부패 수사 기구인 고위공직자범죄수사처(공수처)가 설치되었다.

 이러한 개혁에 대하여 검찰과 이를 후원하는 보수 야당과 언론은 막무가내로 비난했고 격렬하게 저항했다. 이들은 수사권 조정이 이루어지면 형사사법체계가 붕괴하고 중국식 공안 경찰이 탄생하여 세상을 쥐락펴락할 것이라고 흑색선전을 벌였지만, 그런 일은 일어나지 않았다. 공수처 관할 사건 외에는 기소권을 독점하고 있는 특수 수사 분야에 대한 직접 수사권을 보유한 검찰의 힘은 여전히 강력하다.

 공수처는 원래 시민단체나 법무부가 제시했던 구도에 비하여 현저히 적은 규모(현재 광주지검 순천지청 규모)로 출범했다. 법 제정 당시 패스트트랙에 법안을 올리기 위해 보수 야당의 동의를 얻어야 했기 때문이었다. 그 결과 인력과 경험 부족으로 인하여 큰 성과를 내지 못하고 있다. 특히 공수처가 존재 이유를 입증할 수 있었던 '고발 사주 의혹 사건'에서 성과를 내지 못하자 실망감이 커졌다. 이에 윤석열 후보는 공수처 폐지를 주장했다. 검찰총장 출신으로 검찰 개혁의 상징물인 공수처를 없애고, 자신과 관련된 수사도 막고 싶은 것이다. 그러나 공수처는 '보강'해야지 '폐지'할 조직은 아니다. 검찰의 범죄를 철저히 수사하고 막강한 검찰 조직을 견제할 수 있는 조직이 공수처다. 비판은 하되 재정비의 시간을 주어야 한다. 그리고 인전/물적 지원을 확대해야 한다.

 아울러 1차적 수사권을 보장받는 경찰 수사의 독립성을 훼손하지 않도록 국가수사본부(국수본)도 설치되었다. 검찰의 보완 수사 요구가 보장되기에 국수본 수사의 효율성과 완결성에는 미흡함이 있지만, 국수본은 빠르게 자리 잡을 것으로 예상한다. 그리고 경찰 조직의 비대화를 막기 위하여 광역 단위에서 자치경찰제가 전국적으로 실시되었다. 자치경찰은 생활 안전, 교통, 경비 등 주민밀착형 치안 서비를 제공한다. 그리하여 경찰은 국가경찰, 국수본, 자치경찰 등 3개로 분립되었다.

 공수처, 국수본, 자치경찰 등 세 기구는 이제 갓 걸음마를 내디뎠다. 일정 기관 뒤뚱거림과 넘어짐이 있을 것이다. 그러나 권력기관의 분산과 상호 견제라는 대원칙을 포기할 수는 없다. 대한민국 정부 수립 시기부터 공유되었던 검찰 개혁의 최종 목표인 '수사와 기소의 분리(검찰청의 '기소청'으로의 개편)'는 다음 정부의 과제로 미루어졌지만, 이상과 같은 권력기관의 구조 개혁은 역대 어느 정부도 이루지 못한 역사적 성과였다.

 그런데 대선 과정에서 윤석열 후보는 공수처 관할 사건도 검찰이 수사하도록 하고, 법무부 장관의 수사지휘권은 폐지하며, 검찰총장에게 독자 예산권을 부여하겠다고 공약했다. 문재인 정부의 검찰 개혁 이전보다 훨씬 더 강한 검찰 권력을 만들겠다는 야심을 드러낸 것이다. 비유하자면 국방부 장관의 통제에서 자유로운 육군참모총장을 만들겠다는 것이다. 대한민국 역사에서 법무부 장관의 수사지휘권은 폐지된 적이 없으며, 검찰총장이 독자 예산권을 가진 적도 없다. 문재인 정부의 검찰 개혁으로 '검찰 공화국'이 약화되자, 윤 후보는 아예 '검찰 왕국'을 건설하려 하는 것이다. 물론 이는 국회에서 법률이 통과되어야 가능하다. 다수당인 더불어민주당이 이를 동의할리 만무하다. 그러나 윤 후보는 포기하지 않을 것이다. 대통령이 되면 집요하게 검찰 권력을 강화하기 위해 음양의 노력을 다할 것이다.

 

p39. 인사 실패에 대한 변명

 2017년 촛불혁명은 적폐 청산과 국민 대통합을 동시에 요구하고 있었다. 그리하여 문 대통령은 정부가 출범한 후 포용적인 인사 선택을 했다. 예컨대 2017년 5월 문 대통령은 박근혜 정부 청와대에서 기획비서관으로 일한 홍남기 씨를 초대 국무조정실장으로 임명했다. 2018년 3월에는 박근혜 대통령이 임명한 이주열 한국은행 총재를 연임시켰다. 1978년 이후 40년 만에 이루어진 연임 사례였다. 문 대통령은 야당 소속이라고 하더라도 박근혜 탄핵에 찬성한 합리적 보수 인사를 내각에 포함하려고 진지한 노력을 했다. 예를 들면 비극적으로 고인이 된 정두언 의원이 있다. 인사 문제는 공개해서는 안되지만, 대상자 스스로 고사를 했다고 생전에 밝힌 바 있다.

 장관급 후보자의 경우 인사청문회에서 본인은 물론 전 가족의 신상이 다 털리고 망신을 당하는 일이 계속되어, 적임자라고 판단된 사람들이 손사래를 치고 고사하는 경우가 매우 많았다. 툭하면 야당은 인사청문회 경과보고서 체택을 거부했다. 특히 윤석열, 최재형 두 사람의 대권 출마 사태 이후 진보,개혁 진형 내에서는 인사권자인 문재인 대통령에 대한 비판 또는 불만이 나왔다. 그런데 당시 문 대통령을 포함해 그 누구도 이들이 '태극기 부대' 수준의 사고를 가진 사람인지 알지 못했다. 당시 인사 검증을 맡았던 청와대 민정 수석실은 두 사람에 대하여 비판적 의견을 냈다. 하지만 민정수석실이 확보한 자료로는 두 사람이 이 정도일 것이라고 판단하지 못했다. 민정수석실 책임자로서 이 점에 대한 비판을 달게 받을 것이다.

 2017년 문재인 정부 출범 전후에는 진보,개혁 인사 대부분이 당시 윤석열 검사를 호평하고 있었다. 그는 박영수 국정농단 특별 검사팀 수사팀장으로 활약하였기에 촛불혁명의 '공신' 또는 '우군'으로 인식되었다. 예컨대 2019년 검찰총장 인사청문회에서 윤석열 후보는 문재인 대통령의 측근으로 알려진 양정철 전 민주정책연구원장을 여러 번 만났고, 총선 출마 제안을 받았다고 말했다. 당시 양 전 원장은 윤석열 검사에 대하여 우호적 평가를 하고 있었기에 그런 제안을 했을 것이다. 2017년 대선 당시 이재명 후보는 대선 공약 1호로 윤석열 검사를 검찰총장으로 임명하겠다고 밝히기도 했다.

 문재인 정부 출범 전후 극소수의 사람을 제외하고는 윤 검사에게 검찰총장을 넘어 대통령을 노리는 야심이 있었음을 어찌 감지했겠는가. 단, 당시 최강욱 전 공직기강비서관(현 더불어민주당 최고위원)이 밝혔듯 공직기강비서관실은 윤석열 총장 후보자에 대한 불가 보고서를 세 번이나 올렸다. 검증 보고서 작성 시 심각한 문제점이 있는 부분은 붉은색으로 표시하는데, 윤석열에 대한 보고서는 온통 빨강이었다. 윤석열 검찰은 최 비서관이 얼마나 미웠으면 이후 검찰과 국민의힘 합작으로 최 의원에 대한 고발사주를 감행했다. 그 결과 최 의원은 세 개의 사건에서 피고인이 되어 재판을 받는 수모를 겪고 있다. 그리고 애초부터 윤석열 검사에 대한 비판적 시각을 견지하고 있던 한상진 기자 등 <뉴스타파>팀은 인사청문회에서 윤 후보자가 윤우진 전 용산세무서장(윤대진 검사의 친형)의 변호인 선정에 도움을 주는 육성 녹음을 공개한 후, 진보층으롭터 공격을 받고 많은 후원 회원이 탈퇴하는 등 곤욕을 치렀다.

 노영민 전 대통령 비서실장은 언론 인터뷰에서 윤석열 후보에 대하여 다음과 같이 말했다. 문재인 정부 인사들의 마음을 대변한 것이 아닌가 싶다.

 저런 사람이 정말 모든 주변 사람을 속이고 이렇게 한 거 아니겠어요? 어떻게 보면 배신의 칼을 가슴속에 품고 세상을 속였다. 저는 이제 그런 거 아닌가... 이런 생각을 하고요.

 검찰총장 면접 당시엔 윤석열 후보가 4명의 후보 중에서 공수처의 필요성 등 검찰 개혁에 가장 강력하게 찬성했는데, 취임하자마자 180도 다른 모습을 보였다. 그때 거짓말을 했다.

 윤석열 검사의 마음속에 권력욕의 씨앗을 심어준 '마녀'는 누구였을까? '대호 프로젝트' 운운하며 '윤석열 대통령 만들기'에 나선 이들은 누구였을까. 서울중앙지검 시절 만났다는 <조선일보> 방상훈 회장과 <중앙일보> 홍석현 회장이 포함될 것이다. 윤석열 개인에게 충성했던 '윤석열 라인' 전현직 정치 검사 등도 유사한 역할을 했을 것이라 추측한다. 홍 회장과의 만남에서 동석한 관상가, 김건희 씨와 연을 맺고 있었던 건진 법사 등 여러 주술가도 바람을 잡지 않았을까 싶다.

 

p134. 사법 기관을 지방으로

 국민의힘은 사법기관을 지방으로 이전하자는 제안을 하지 않았고 과거 '신행정수도' 건설에도 반대했기에 이 정책에 반대할 것이다.

 반면 노무현 정부는 행정수도로서의 세종시를 건설하는 역사적 업적을 쌓았다. 대선 과정에서 더불어민주당에서는 사법기관을 지방으로 분산하거나 '사법수도'를 신설하자는 제안이 나왔다.

 나는 여권 초선 의원 모임인 '처럼회'의 획기적 제안에 주목한다. 2021년 7월 더불어민주당 김남국, 김승원, 김용민, 문정복, 민병덕, 민형배, 윤영덕, 이수진, 장경태, 최혜영, 홍정민, 한준호, 황운하 의원과 최강욱 당시 열린민주당 대표는 검찰/사법 개혁의 정점을 찍는 방안으로 사법기관의 지방 분산 배치를 제안했다. 처럼회는 "사법 선진국 독일은 대법원과 헌법재판소가 수도에 있지 않고 전국에 분산, 사법 권력과 정치권력의 분리를 통해 실질적 권력분립을 ㅣ루고 있다"라며, "대법원을 대구로, 헌법재판소를 광주로, 대검찰청을 세종으로 이전"하겠다고 선언했다. 이는 공공기관 지방 이전의 효과를 가져옴과 동시에, 사법 권력을 정치권력으로부터 물리적/심리적 거리를 둘 수 있는 곳으로 떨어뜨려 놓아 정치적 중립성과 독립성 그리고 공정성을 확보하겠다는 구상이다.

 대법원 재판은 법리 판단만 하므로 당사자의 출석이 필요 없다. 대검찰청은 검찰청장을 보좌하고 지검의 수사와 기소를 지휘하지 직접 수사를 담당하지 않는다. 헌법재판소는 하위 기관이 없는 단출한 기관ㅇ다. 따라서 세 기관이 서울에 있을 이유가 없다. 대법원 이전을 위해서는 법원조직법 개정이 필요하고, 헌법재판소 이전을 위해서는 헌법재판소법 개정이 필요하지만, 대검찰청 이전은 대통령령 개정으로 족하다.

 한편 더불어민주당 대권 후보였던 김두관 의원은 헌법재판소, 대법원, 서울중앙지방법원 등을 지방 도시 한 곳에 이전하여 사법 수도를 만들자는 제안을 하고, 법안을 제출했다. 이는 남아프리카 공화국의 사례를 참조한 것인데, 남아공의 행정수도는 프리토리아, 입법수도는 케이프타운, 사법수도는 블룸폰테인으로 나누어져 있다.

 김 의원은 2021년 6월 28일 자신의 SNS에 "법조 카르텔의 지리적 기반"인 서울 서초동을 해체해야 한다고 주장했다. 그는 "경찰과 법원으로 이뤄진 법조 세력의 최상층부는 권위주의 정부 이후에 정치까지도 사법의 영역으로 포섭해 영향력을 발휘했다"라며 대법원 주변의 수많은 변호사, 법무사 등 관련 업계가 세력을 형성하면서 이들이 부동산, 교육, 소비 등 모든 면에서 '강남공화국'을 굳건히 떠받치고 있다고 보았다. 이런 맥락에서 그는 '법조 카르텔의 시스템, 즉 구고적인 해체도 필요하지만 거점의 해체와 재구성도 필요하다"라고 주장한 것이다. 비법률가 정치인의 날카로운 통찰이었다.

 처럼회 안과 김두관 안 중 어느 것을 택할지는 국회 논의가 필요할 것이다. 나는 지역 균형의 관점에서 사법기관을 한 개 도시에 모으는 것보다는 분산하는 것이 타당하다고 보기에 처럼회 안에 동의한다. 이런 변화가 이루어지면 메가시티 발전에도 큰 도움이 될 것이 분명하다.

 

p148. 노동시간 단축 - 주 4.5일 노동제를 도입할 시간이다

 2003년 근로기준법이 개정되면서 한국도 '주 40시간 주 5일 노동제'가 법제화되었다. 단, 당사자 합의에 따라 주 최대 12시간 '연장 근로'가 허용되고, '탄력적 근로시간제'에 합의하는 경우 주 40시간 - 주 5일 노동제의 원칙에 대한 예외가 허용된다. 지금은 당연히 받아들이고 있는 주 40시간 주 5일 노동제가 시행되기 전 경제계와 보수 언론은 이 제도를 실시하면 생산성이 저하하고 임금이 상승하여 경제가 어려워질 것이라고 강하게 반대했다. 그러나 그런 일은 발생하지 않았다.

 2021년 8월 OECD가 발표한 통계에 따르면, 2020년 한국의 연간 평균 노동시간은 1,908시간으로, OECD 38개국 중 세 번째다. OECD 평균 노동시간은 1,687시간이다. 한국 노동자가 OECD 국가 평균보다 221시간 더 많이 일하고 있다. 연장 근무나 야근 수당을 받아 노동 소득을 올리기 위하여, 또는 제시간에 퇴근하기가 쉽지 않은 조직 문화 때문에 '연장 근로' 또는 '탄력적 근로'를 하게 된다. 1970년 영미권에서 사용된 용어인 '워라벨'이 근래 한국에서도 회자했지만, 현실은 아직 멀었다.

 노동운동가들이 흘린 피와 땀의 결과 '하루 8시간 노동제'는 20세기 초 국제 노동 기준으로 자리 잡았다. 그러나 이는 최소 기준이다. 이후 OECD 나라에서는 노동시간을 더 줄이는 시도가 계속되고 있다. 대표적인 나라의 예를 보자.

 먼저 독일은 1967년 주 40시간 노동제를 도입했는데, 1995년부터는 전 산업군에 걸쳐 '주 38.5시간 노동제'를 시행했다. 자동차, 기계, 철강 등 제조업 직군에서는 '주 35시간 노동제'를 시행하고 있다. 이에 더하여 초과 노동시간을 저축해서 휴가 등으로 활용할 수 있는 '근로시간 저축 계좌제'를 도입했다. 벤츠, 보쉬 등 독일의 대표적인 세계적 기업이 모여있는 독일 바덴뷔르템베르크주는 2018년부터 '주 28시간 노동제'를 도입했다. 이 주의 노동자들은 자신의 희망에 따라 최대 2년간 주 28시간만 근무할 수 있다.

 프랑스는 2000년 '주 35시간 하루 7시간 노동제'를 통과시켰다. 연장 근로는 연간 총량 220시간으로 제한되며, 이를 초과하는 경우 직업별 단체협약 또는 근로감독관의 사전 승인이 있어야 한다. 2004년 프랑스 노동부는 이 제도를 시행함으로써 35만 개의 일자리가 새로 창출되었다고 발표했다.

 스페인은 2021년 3월 200~400개 기업의 신청을 받아 임금 삭감 없이 주 4일 노동제를 시험 도입한다는 방침을 발표하고, 이후 3년간 실시하고 있다. 제도 도입으로서 발생하는 기업의 비용은 정부가 첫해에는 100퍼센트, 2년 차에는 50퍼센트, 3년 차에는 33퍼센트를 보전해준다.

 스웨덴 등 북유럽 국가의 기업들은 하루 6시간 노동제를 시행하고 있다. 예컨대 스웨덴의 디지털 미디어 제작 회사인 백그라운드AB, 애플리케이션 개발사인 필리문두스, 토요타 서비스 센터, 살그렌스카 대학 병원 등이 6시간 노동제를 시행 중이다. 아이슬란드는 2015년부터 2019년까지 4년간 유치원 교사, 회사원, 사회 복지사, 병원 종사자 등 여러 직군을 대상으로 주 4일 노동제를 국가 차원에서 시범 운영하는 실험을 했다. 아이슬란드 전체 노동 인구 중 1퍼센트가 이 실험에 참여했는데, 실험 종료 후 참가자 10명 중 8명이 근무 시간이 더 짧은 회사로 이직했다.

 미국의 경우 1930년대 초 켈로그사의 소유주 켈로그와 사장 루이스 브라운은 기존 8시간 3교대 대신 6시간 4교대제를 도입했다. 그 결과 작업장 사고율이 50퍼센트 줄었고, 5년 뒤에는 40퍼센트에 달하는 인력이 추가 고용되었으며, 여가 확보로 인하여 노동자들의 삶의 질도 달라졌다. 그러나 켈로그가 경영에서 물러난 후 새 경영진은 1985년 8시간 노동제를 복구시켰다.

 사실 하루 6시간 노동제의 원조는 토머스 모어다. 그는 명저 <유토피아>에서 지금 봐도 놀라운 비전을 제시했다.

 유토피아 사람들은 하루 24시간 중 여섯 시간만 일에 할당합니다. 이들은 오전에 세 시간 일하고 점심을 먹습니다. 점심 식사를 한 후에는 두 시간 정도 휴식을 취하고 다시 나머지 세 시간 일을 하러 갑니다. 그 후에 식사를 하고 8시에 취침하여 여덟 시간을 잡니다.

(실제로 유럽의 여러나라 특히 스페인이 이렇게 산다. 내 개인적으로 겪기도 했고, 주변인들에게 들어본 것이니 그리 특별한 경우는 아닐 것이다. 9시에 업무시간이 시작되면 삼삼오오 모여서 커피를 마시고 담소를 나눈다. 10시쯤 업무를 보기 시작하고 12시 점심시간이 되면 칼처럼 밥을 먹으러 간다. 급한 업무가 있는 사람들은 회사내에 있는 스낵바같은데서 햄버거나 간단한 스낵으로 끼니를 떼우는 경우도 있지만, 대다수는 차를 타고 밖으로 나간다. 마드리드 같은 대도심의 다운타운은 건물이 밀집해있어서 한국의 일반도시처럼 주변에 걸어서 갈 거리에 식당들이 많이 있지만 차로 30분 정도만 나가도 5층 이하의 건물이 펼쳐친 광활한 배후지역이기 때문에 걸어서 갈만한 거리에 식당이 있는 경우는 드물다.

 점심도 느긋하게 먹다 보면 1시간은 훌쩍 넘기는 경우가 대부분이다. 회사로 돌아오면 거의 2시 남짓이 되고 또 커피 한잔을 마시면서 오후 업무를 시작한다. 5시가 되면 하나둘 퇴근을 시작하고 보통 사무실에 남는 사람은 일이 남아 있는 한국사람들 뿐이다. 그들은 겉으로는 한국 사람들이 열심히 일을 한다고 칭찬하지만 속마음으로는 왜 저렇게 살까?라는 것이 그들의 일반적인 생각이다.

 평일에는 퇴근 후 식구들과 저녁 식사와 담소를 나무며 2시간 정도를 보내고, 보통 10시쯤에는 잠자리에 든다. 금요일에는 가까운 친지 혹은 이웃들을 초청해서 새벽까지 파티를 하거나, 젊은이들의 경우는 시내로 나가서 친구,연인과 새벽까지 불금을 즐긴다.

 이런 여유로운 생활을 옆에서 지켜보다 보면 이 인간들은 정말 행복하게 사는구나 싶었다.)

 

 오랜 시간이 흐른 후 2021년 12월 미국 민주당 소속 마크 타카노 하원 의원은 13명의 민주당 의원과 함께 '주 32시간 근무법'을 공동 발의한다. 1938년 시행된 공정근로기준법을 개정해 표준 근로시간을 현행 주 40시가에서 32시간으로 단축하고, 이 시간을 초과해 근무할 경우 시간당 근무 수당을 별도로 지급해야 한다느 것이 요지다. 타카노 의원은 자신의 홈페이지를 통해 다음과 같이 말했다.

 나는 노동시간을 주 32시간으로 줄이기 위해 이 법안을 제출한다. 그 어느 때보다 사람들은 임금이 정체된 상태에서 더 긴 노동시간을 일해야 하기 때문이다. 우리는 이를 우리의 현실로 계속 받아들일 수 없다. 주 4일 노동을 실험해본 많은 나라와 기업은 이 제도가 압도적으로 성공적이라는 점을 확인했다. 생산성은 높아졌고 임금은 증가했다. 코로나19라는 세계적 유행병이 수백만 명의 미국인을 실업 상태 또는 일이 충분하지 않은 상태로 남겨놓은 후, 줄어든 주 노동시간은 더 많은 사람이 더 좋은 임금으로 노동시장에 참여할 수 있도록 만들 것이다.

 이러한 흐름 속에 아랍에미리트는 세계 최초로 2022년 1월 1일부터 주 4.5일 노동제를 도입했다. 이에 따라 아랍에미리트의 모든 정부 기관은 월요일부터 목요일까지 평일에는 오전 7시 30분부터 오후 3시 30분까지 8시간 근무하고, 금요일은 오전 7시 30분에 일을 시작해서 정오에 마치게 된다.

 한편 한국에서는 농부 철학자 윤구병 대표가 경영하는 '보리 출판사'가 선도적으로 하루 6시간 노동제를 시행했다. 연장 근무를 너무 오래 허용하게 되면서 6시간 근무제가 의미 없어지니, 연장 근무 시간을 월 18시간 이내로 제한했다. 노동시간은 줄었지만 월급은 줄이지 않았다. 보리출판사는 주 5일 노동제가 우리나라에 정식으로 도입되기 3년 전인 2001년부터 주 5일 노동제를 이미 실시했다. 노동시간을 단축해야 가족 관계와 사회 공동체가 개선되고 노동자의 건강과 삶의 질이 향상될 수 있다는 윤 대표의 철학이 구현된 것이다. 윤 대표는 말한다.

 

 노동시간이 길어지면서 한 식구가 밥상머리에 모여 앉아 식사할 시간도 없어지고 가정생활이 깨졌다. 국가정책으로 6시간 노동제가 시행돼야 한다. 우리 사회가 소수 부자에게 부를 집중하는 일에만 관심이 있지, 고루 나누는 데에는 관심이 없기 때문에 노동시간이 길어지게 됐다. 청년 실업 문제 해결을 위해서도 노동시간을 줄여야 한다. 부모들 중엔 자식을 교육시키고, 먹고 살려고 하루 10시간 넘게 일하는 분들이 있지만, 그게 역설적으로 자녀들 일자리를 뺏는 결과로 나타났다.

 2022년 1월에는 대기업인 CJ에서 큰 변화를 시작했다. CJ ENM 엔터테인먼크 부문은 2022년 매주 금요일 오후를 사무 공간 밖에서 자율적으로 외부 활동을 하는 '비아이 플러스Break for invention plus'를 시행한다. 이에 따라 직원들은 주 4.5일(36시간)만 사무실에서 근무하게 된다. 매주 금요일 4시간의 오전 업무가 종료되면 별도의 신청 없이 일괄적으로 업무용 PC가 종료된다.

 

p159

 중대재해처벌법은 2022년 1월 27일부터 시행되었다(상시근로자가 50인 미만이거나 공사 금액이 50억 원 미만이면 3년 뒤인 2024년 1월 27일부터 법이 적용된다). 중대재해처벌법 적용 1호 기업은 삼표산업이 되었다. 고용노동부가 2022년 1월 29일 경기도 양주시 소재 삼표산업 양주 사업소에서 발생한 노동자 매몰 사망 사고를 '중대재해처벌법 1호'로 적용 사고로 판단하고 수사에 착수했다.

 중대재해처벌법 시행을 앞두고 고용노동부는 중대 재해 발생 등 산재 예방 조치 의무를 소홀히 한 사업장 1,243개소의 명단을 공개됐다. 명단에 포함된 곳은 중대 재해 발생 등으로 산업안전감독관이 수사,송치해 법원에서 형이 확정된 사업장, 산재 은폐 또는 미보고로 과태료가 부과된 사업장, 중대 산업 사고 발생 사업장 등이었는데, 절반 이상이 건설업이었다.

 중대재해처벌법 시행을 앞두고 여러 기업은 대응을 마련하여 시행했다. 예컨대 현대건설은 안전 관리 우수 협력사에 포상 물량을 총 5,000억 원 규모로 확대하는 '안전 보건 인센티브 5,000억 원' 제도를 실시했다. 삼성물산 건설 부문도 2021년 우수 제보자 포상, 위험 발굴 마일리지 적립 등 6개월간 1,500명, 약 1억 6,600만원의 인센티브를 지급했고, 공사에 차질이 빚어지면 협력사의 손실을 보전해주는 제도를 운용 중이다. 포스코건설은 2021년부터 '무재해 달성 인센티브 제도'를 도입했는데, 상반기 중에 전사에 중대 재해가 발생하지 않은 경우 직원들에게 50만 원을 지급하며, 하반기에도 중대 재해가 발생하지 않으면 추가로 100만 원을 지급한다. 이러한 긍정적 변화는 중대재해처벌법의 덕분이다.

 한편 주요 기업들과 일부 건설사들은 대표이사인  CEO의 책임을 면하기 위해 앞다투어 '최고안전보건책임자 Chief Safety Officer CSO'라는 자리를 만들었다. CSO는 대표이사에 준하는 안전 보건에 관한 조직과 인력, 예산을 총괄하고 권한과 책임을 갖는다. 예컨대 현대건설, GS건설, 포스코건설, 대우건설, 롯데건설, 삼성물산 건설 부문, 한화건설 등은 안전 전담 조직을 확대하고 임원급 CSO를 선임했다. 호반건설은 안전 담당 대표이사를 신설했다. CEO가 처벌받지 않기 위해 '빨간 줄 임원'을 선임한 속셈이 엿보이지만, 이러한 조직 구도 속에는 중대 재해가 발생할 경우 CSO가 법적 책임을 지게 되므로 CSO는 산업재해 예방에 진력할 수밖에 없을 것이다.

 

p162

 둘째, 노동자의 '작업중지권'을 확대해야 한다. 작업중지권은 산업안전보건법과 중대재해처벌법에 규정되어 있는데, 노동자가 산업재해 또는 중대 재해가 발생할 '급박한 위험이 있는 경우' 작업을 중지할 수 있는 권리다.

 2021년 2월 포스코의 최정우 회장은 작업중지권을 적극적으로 알리고 사용되도록 할 것을 지시했고, 포스코건설은 노동자에게 '위험작업 거부권'을 부여했다. 이는 노동자가 현장에서 안전시설이 미비하거나 불안정한 상황이 발생해 작업을 진행할 수 없다고 판단될 경우 작업 중지를 요청할 수 있는 권한이다. 이 권리는 협력사와 모든 현장 근로자를 포함해 누구라도 현장의 안전 담당자에게 연락해 즉시 행사할 수 있으며, 이에 따른 불이익은 전혀 없다. 2021년 12월에는 서울시설공단이 산하 24개 사업장 근로자에게 위험작업 거부권을 전면 보장키로 했다고 발표했다. 서울시설공단은 서울어린이대공원, 지하도상가, 고척스카이돔, 청계천, 서울월드컵경기장, 공공자전거 따릉이 등을 운영하고 있다.

 2021년 3월 삼성물산은 '작업 중지 권리 선포식'을 열고, 이를 확대해 '급박한 위험'이 아니더라도 근로자가 안전하지 않은 환경이나 상황이라고 판단할 경우 작업중지권을 적극적으로 사용할 수 있도록 보장했다. 2021년 8월 삼성물산은 작업중지권을 전면 보장한 이래 월평균 약 360건의 작업중지권이 행사됐다고 밝혔다. 국내외 84개 현장에서 총 2,175건의 작업중지권이 행사됐으며, 이 가운데 98퍼센트(2,127건)가 작업 중지 요구 후 30분 내 조치가 이뤄졌다.

 

p168

 그렇지만 향후 기본소득의 범위와 신복지의 범위를 결정하는 과정에서 긴장이 재현될 것이다. 류덕현 중앙대 경제학과 교수의 의견을 경청할 필요가 있다.

 기본소득 제도의 취지를 기존 복지 제도를 확충해 실현할 수도 있다. 가령, 월 10만 원의 기본소득을 전 국민에게 지급한다면 소요되는 재원은 60조 원인데 이는 2021년 복지,보건,노동, 부분 예산 199조 원의 30퍼센트 수준을 차지할 정도의 큰 규모다. 이와 비슷한 규모의 재원이 있다면 기존 복지 제도를 충분히 두텁게 하고 중산층 및 청년 세대에게 돌아갈 혜택을 크게 늘리는 방식으로 사용하는 것이 보다 효과적이다. 예를 들면, 저소득층에 대한 소득 보장 확대에 15조 원, 전국민고용보험제도 도입에 15조 원 등을 투입할 경우 현행 복지 제도의 포용성은 크게 확대될 수 있다.

 한편 더불어민주당 대선 후보였던 김두관 의원의 '기본 자산' 제안이 잊혀 아쉽다. 김 의원은 신생아 때부터 1인당 3,000만 원의 기본 자산을 지급하고, 기본 자사 예금액에 대한 예금이자 금리는 연 4퍼센트 단일 금리를 적용하도록 하는 '기본 자산에 관한 법률'을 대표 발의했다. 방법은 다르지만 더불어민주당 이용우 의원이 대표 발의한 '청년 기본 자산 지원에 관한 법률'도 같은 취지다. '청년 기본 자산' 기획의 내용은 출생 시점부터 청소년기까지 월 20만 원을 국가가 적립하고, 적립금 통합 기금 운용을 통해 성인(18세)이 되었을 때 약 6,000만 원의 기본 자산을 마련하며, 고등교육, 주거, 창업 등 용도에만 한정 지급하도록 한다는 것이다. 이러한 기본 자산 제도가 안착되면 청년들이 사회에 진출할 때 서게 되는 출발선이 상당 수준 같아질 것이고, 청년 빈곤이나 저출산 문제도 크게 해결될 수 있을 것이다.

 요컨대 기본소득, 신복지, 기본 자산 등의 구상과 계획을 상호 배제적으로 생각하지 말고, 현 단계 국민의 필요와 국가 재정을 고려하여 적정하게 절충, 조합해야 한다. 그것이 정치의 역할이다.

 

p182

 협력이익공유제는 2020년 6월 법안까지 마련했으나 성사되지 못했다. 협력이익공유제에 대하여 국민의힘과 재계는 위헌이라고 반대했고, 정의당은 한계가 있는 제도이므로 부자 증세로 가야 한다고 주장했다.

 사실 협력이익공유제는 김종인 전 국민의힘 총괄선대위원장이 박근혜 후보를 도우면서 제창했던 경제민주화의 일환이다. 현행 헌법 제119조 2항은 "국가는 균형 있는 국민경제의 성장 및 안정과 적정한 소득의 분배를 유지하고, 시장의 지배와 경제력의 남용을 방지하며, 경제 주체 간의 조화를 통한 경제의 민주화를 위하여 경제에 관한 교제와 조정을 할 수 있다"라고 규정하고 있다. 문재인 대통령은 이 조항은 더 구체화하여 개헌안에 담았다. 즉, 경제민주화는 경제 주체 간의 조화뿐만 아니라 상생을 통해서도 실현될 수 있으므로 경제민주화 조항에 '상생'을 추가했고, 양극화 해소, 일자리 창출 등 공동 이익과 사회적 가치 실현을 위해 상호 협력과 사회 연대를 바탕으로 경제활동이 이루어지는 사회적 경제가 활성화 될 수 있도록 국가에 사회적 경제의 진흥 의무를 부과했다.

 국가는 균형 있는 국민경제의 성장 및 안정과 적정한 소독의 분배를 유지하고, 시장의 지배와 경제력의 남용을 방지하며, 경제 주체 간의 상생과 조화를 통한 경제의 민주화를 실현하기 위하여 경제에 관한 규제와 조정을 할 수 있다. (제125조 제2항)

 국가는 중소기업과 소상공인을 보호 육성하고, 협동조합의 육성 등 사회적 경제의 진흥을 위하여 노력해야 한다. (제130조 제1항)

 개헌안도 법안도 통과되지 못한 상황에서 남양유업은 2020년 1월 협력이익공유를 시행했다. 사상 처음 있는 일이었다. 대리점 대상 물량 밀어내기와 수수료 갑질로 손가락질을 받고 공정거래위원회의 조사를 받던 남양유업이 상황 타개를 위해 자진 시정 방안으로 시작한 것이다. 남양유업은 2013년 대리점 동의 없이 제품을 강매하고 영업 직원이 대리점주에게 폭언을 퍼붓는 등 갑질을 한 것으로 드러났다. 본사가 주문 시스템을 조작해 대리점주가 주문한 양의 두 배를 대리점에 떠넘겼고, 대리점은 '울며 겨자 먹기'로 유통기한이 임박한 상품을 처리하기 위해 '1+1 행사'를 하거나 자체 폐기 처붆게 되었다. 이로 인하여 국민적 분노가 폭발하고 불매운동이 벌어지지, 남양유업은 물러섰다.

 

p200

 동성애자에 대한 차별 중 제일 예민한 것은 '동성혼' 인정 여부다. 현행 법률과 판례는 동성혼을 인정하지 않고 있다. 동성 커플은 법적 혼인을 할 수 없고, 일상생활에서 이성 커플이 공기처럼 누리는 혜택을 누릴 수 없다. 예컨대 가족수당, 세금, 연금, 보험, 병원 면회권, 상속 등에서 혜택을 받을 수 없다. 2021년 2월 국민건강보험공단을 상대로 동성 배우자를 건강보험 직장 가입자의 피부양자로 인정해달라는 소송을 제기했다가 패소했던 소성욱 씨는 말한다.

 사람들은 '우리가 언제 차별했어'라고 따져 묻는다. 하지만 당연히 누리는 그들의 권리가 우리에게는 주어지지 않는다는 사실은 잘 모른다. 우리는 평생을 같이 살아도 한 사람이 세상을 떠났을 때 장례 절차에 개입할 권리가 법적으로 보장되지 않는다. 유산상속도 안되고, 임차인 승계권도 없다. 모든 권한은 (법적) 원가족에게 돌아간다.

 그래서 동성 커플은 유언장, 사전 의료 지시서, 임의 후견인 제도 등 '3종 세트'를 준비해야 한다. 레즈비언 작가 김규진 씨가 2019년 발표한 에세이집 <언니, 나랑 결혼할래요?>에서 밝혔듯이, 국내 항공사 마일리지의 가족 결합도 동성 커플에는 적용되지 않는다. 김 씨가 미국 맨해튼에서 혼인신고를 하고 이 혼인 증명서를 국내 항공사에 제출하여 가족 결합 혜택을 따냈다는 점을 읽으면서 쓴웃음이 났다. 해나 아렌트의 유명한 개념을 빌리자면, 동성애자는 시민임에도 '권리들을 가질 권리'가 보장되지 않고 있다.

보수적 유교 전통이 자리 잡고 있고 보수적 기독교의 발언권이 강한 한국 사회에서 동성혼 합법화는 쉽지 않을 것이다. 해외에는 최초로 동성혼을 합법화한 네덜란드(2001년)을 위시한 서구의 여러 나라와 2019년 아시아 최초로 동성혼을 합법화한 대만 등의 예가 있다. 하지만 동성혼을 당장 인정하는 것이 부담된다면, 미국 버몬트주, 뉴욕주 등 6개 주와 워싱턴D.C. 및 다수의 유럽 국가처럼 '시민 결합'이라는 별도의 제도를 도입하여 동성애 커플의 삶을 보호해줄 수 있다. 일본의 경우 법률은 아니지만 이바라키현 등 다섯 군데 광역자치단체에서 조례로 '동성 파트너십'을 인정하고 있다.

 2022년 1월 7일 서울 행정법원 행정6부(재판장 이주영)는 앞에서 언급한 김용민, 소성욱 커플의 소송에 대하여 패소판결을 내리면서 이렇게 밝혔다.

 구체적인 입법이 없는 상태에서 개별 법령의 해석만으로 곧바로 혼인의 의미를 동성 간 결합으로까지 확대할 수는 없다. - 호주나 유럽연합 여러 나라가 동성혼을 인정하고 있고, 이탈리아 등 여러 나라가 동성 동반자 제도를 두는 등 세계적으로 혼인할 권리를 이성 간으로 제한하지 않는 것이 점진적 추세다. 결혼 혼인 제도 인정 여부는 개별 국가 내 사회적 수요와 합의에 따라 결정될 일이기 때문에 원칙적으로 입법의 문제다.

 그런데 노동운동 차원에서 중대한 변화가 일어났다. 2021년 12월 국내 최대 산업별 노동조합 전국금속노동조합(이하 금속노조)가 회사 내 성적 지향, 성별 정체성에 따른 차별금지 조항을 포함하는 모범 단체협약안을 승인한 것이다. 이 안은 '배우자'를 '법률상 혼인 여부와 상관없이 사실혼 관계의 배우자 및 동거인을 포함'하는 개념으로 정의했고, '가족'도 법률상 혼인에 국한되지 않고 성적 지향, 성별 정체성 등을 고려한 여러 가족 형태를 포함하도록 했다. 이에 따라 본인과 배우자 경조사 휴가, 가족 돌봄 휴직등이 사실혼 동거 관계에 있는 동성 커플을 포함한 다양한 가족에게 적요외는 길이 열리게 된 것이다. 이러한 모범 단체협약안 개정 이후 주한민국대사관은 2021년 12월 22일 공식 페이스북 계정에 "한국 내 다양한 가족 형태의 고용주로서, 금속노조가 모든 조합원에게 동등한 혜택을 주는 것을 지지하게 되어 기쁘게 생각한다"라는 글을 올리고, 지지 의사를 표명했다.

 금속노조는 시민 결합 제도를 노조 차원에서 수용한 것이다. 인류 역사에서 동성애는 존재해왔고, 앞으로도 존재할 것이다. 자신의 도덕관, 종교관과 별도로, 동성애 시민도 이성애 시민이 누리는 시민으로서의 혜택을 누릴 수 있어야 한다는 것이 인권의 기본 원칙이다. 인권의 '인人'을 성적 지향을 이유로 갈라쳐서는 안 된다.

최근 뜨고 있는 한국사 강사 출신 황현필씨의 작품. 이 책의 내용을 기반으로 하는 유튜브 강의도 있다.

이순신 장군의 임진왜란과 정유재란 시기 7년간의 전투기록 위주의 내용이다.

내부 모함에 의해 파직, 고문 그리고 백의종군까지의 과정을 보면 말 그대로 피눈물이 난다.

전투시 지형지도와 아군과 적의 배치 등을 그림과 도표가 삽입되어 전투상황을 입체적으로 이해하기 쉽다는 점이 몰입감을 높여준다.

 

저출산, 고령화를 바라보는 여러가지 시점을 통해 왜 이런 현상이 발생하는지에 대한 원인들을 다각도로 보여주는 내용.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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p56

 열정 혹은 감정을 나타내는 영어 단어 passion과 '수동적이다'를 뜻하는 단어 passive는 어원이 같습니다. 고대 서양 철학자나 현인들은 감정을 인간의 탁월한 능력, 즉 생각의 힘을 무력화하는 일종의 방해꾼으로 보았습니다. 감정에 휩싸이면 냉철한 판단이나 자기 통제가 불가능해지는 매우 수동적인 존재로 인간이 전락한다고 생각한 것이죠. 고대 사상가들로부터 내려오는 감정에 대한 경계의 메시지, 혹은 부정적 편견의 흔적은 많은 심리학 이론에도 녹아 있습니다. 합리적 사고와 비합리적 감정이 맞붙은 대결에서 합리성에 판정승을 내려주는 경우가 많았던 것이죠. 하지만 이 시각이 최근에는 바뀌고 있습니다. 좀 더 큰 관점에서 보면 합리적 사고력보다 감정 시스템의 역할이 오히려 생존과 더 밀접하게 관련있을 수 있다고 여러 학자가 주장하고 나선 것입니다.

 

 그래서 최근 사회심리학에서도 감정의 중요성에 주목하고 있습니다. 인간도 정말 중요한 결정은 무의식적이고 감성적인 수준에서 처리하고, 이성적 생각은 큰 방향이 정해진 뒤 거기에 그럴듯한 설명을 붙이는 경우가 많다는 사실이 밝혀졌습니다. 이미 사랑에 빠진 뒤 상대의 장점을 손꼽아보는 모습과 비슷합니다. 이때 상대방이 좋은 이유를 차분히 생각해서 조목조목 나열해보도록 하면, 이 커플은 오히려 헤어질 가능성이 더 높아질 수도 있습니다.

유명한 심리학 연구를 하나 소개해드리겠습ㄴ다. 사회심리학 실험에 참여한 피험자들에게 수고의 보상으로 몇 개의 추상화를 보여준 뒤, 하나를 집에 가져가도록 했습니다. 한 조건(이유 조건)에서는 선택한 추상화가 왜 좋은지를 설명한 뒤 가져가도록 했습니다. 다른 조건(느낌 조건)에서는 아무 이유를 달지 않고 그냥 가지 느낌에 좋은 그림을 가져가도록 했지요. 몇 주 뒤, 연구자들이 피험자들에게 전화해서 이렇게 말했습니다. "혹시 지난번에 가져간 추상화가 마음에 들지 않으면 와서 바꾸어 가셔도 돼요." 흥미롭게도, 그냥 느낌이 좋아서 그림을 가져갔던 사람들보다 왜 그 그림이 좋은지를 설명해야 했던 사람들이 더 많이 그림을 바꾸어 갔습니다. 즉, 인간의 결정과 선택에 강력한 힘을 발휘하는 것은 사실 생각보다 감정입니다. 그림 선택만이 아니라 출산과 같은 중대한 결정에도 해당됩니다.

 이유와 논리는 감정이 내린 선택을 그럴듯하게 포장하는 역할을 하는 경우가 많습니다. 그러나 이런 감정의 위력을 우리는 잘 의식하지 못해요. 그래서 논리와 합리적 생각이 우리의 행동을 지배한다고 착각합니다. 그렇지만 어쩌면 정작 선택의 밥상을 차려 놓은 것은 감정적 느낌이고, 여기에 슬며시 수저를 올려놓는 것이 이성일 수 있습니다. 우리가 의식을 하든 못하든 감정적 경험은 우리 일상에 막대한 영향력을 행사하는데, 거기에는 그럴 만한 이유가 있습니다. 감정은 긴 진화의 여정에서 습득한 생존 지혜를 담고 있기 때문입니다.

 

p71

 매년 OECD 가입국을 대상으로 실시하는 행복 조사에 이런 문항이 있습니다. "당신은 어려움에 처할 때 도움을 청할 사람이 있습니까?" 이 질문에 "Yes"라고 대답하는 비율이 가장 낮은 국가가 한국입니다. 왜 이런 안타까운 현상이 발생할까요? 한 가지 중요한 이유로, 개개인의 관심과 따뜻한 심성이 가족을 비롯해 가까운 몇 사람에게 과하게 편중된다는 점을 들 수 있습니다. 일상에서 마주치는 대부분의 사람은 이 울타리 밖의 사람들인데, 그들에 대해서는 철저히 무관심하거나, 위협이나 경쟁의 대상으로 생각하는 경우가 많아요. 상호 신뢰가 바탕이 되는 사회적 자본이 축적되기 어려운 분위기죠. 또 다른 이유로는 과도하게 타인 중심적인 삶을 산다는 사실을 들 수 있습니다. 항상 남을 평가하고,  또 남의 평가에 쉽게 위축되기 때문에 관계에서 즐거움보다는 스트레스를 느끼는 경우가 더 많지요. 이런 사회적 분위기에서는 서로 친구가 되기 어렵습니다.

 바로 이런 부분에서 행복감이 높은 국가들은 정반대의 모습을 보입니다. 가령, 스칸디나비아 국가들에는 사회적 금기가 하나 있다고 합니다. 타인의 삶을 함부로 평가하지 않는 것, 그저 서로 다른 삶을 각자 사는 것뿐인데, 주제넘는 참견을 하지 말자는 것이죠. 다양한 삶을 인정하는 열린 태도로 관계의 기본을 지키고 존중하는 사회입니다. 이런 사회 분위기가 높은 출산율을 이끌어냅니다. 덴마크 코펜하겐 시내의 특이한 장면 중 하나가 인도에 가지런히 세워진 유모차 행렬입니다. 유모차 속에서 아기가 잠이 든 사이, 부모는 카페에 들어가 커피를 마십니다. 행복한 사회의 단면입니다.

 예전에 읽은 에릭 에릭슨이라는 유명한 발달심리학자의 말을 떠올리게 됩니다. "좋은 엄마가 되려면 단지 좋은 사람이기만 해서는 부족하다. 행복한 사람이 되어야 한다." 아이를 낳아 키우는 여정은 보람과 의미가 있지만, 고되고 힘든 순간들도 분명 찾아옵니다. 행복은 이 긴 여정을 시작할 용기뿐 아니라, 어려움을 이기며 순항하는 지혜와 힘도 준다고 생각합니다.

 

p106

 그 누구도 완벽한 엄마일 필요는 없고, 실제로 완벽한 엄마가 될 수 없겠지만, 많은 사람이 아이에게 완벽한 환경을 제공해줄 자신이 없어 출산을 주저합니다. 즉, 정말 아이를 원하지 않아서가 아니라 '아직 집을 마련하지 못해서' '아직 내 인생도 잘 살지 못해서' ' 아직 부모로서 소양을 덜 갖췄기 때문에'와 같이 아이를 낳을 수 없다며 출산 결심을 지연하거나 비출산을 결정합니다. 

 그러나 이는 심리학적으로 아주 틀린 이야기입니다. 부모는 그저 최적의 좌절을 제공할 최상의 상태를 유지하면 됩니다. 예상되는 장애물들을 미리 제거해두고 아이의 욕구가 언제나 즉각 충족될 수 있는 무균실과 같은 환경을 제공해주는 것은 아이가 결국 스트레스에 취약해지는 결과를 낳습니다. 아이가 깊은 수준의 자기 통찰을 할 수 있으며 회복탄력성과 유연성을 갖춘 꽤 괜찮은 성인으로 자라는 과정에서, 부모의 불완전함은 아이에게 좋은 시험대를 제공해줄 것입니다. 즉 좋은 주 양육자는 '그럭저럭 괜찮은 엄마'면 됩니다. 정작 필요할 때에는 없어서 화가 나기도 하지만 문득 돌아보면 계속 그 자리에 있어주는 사람 말이죠. 그래서 소아정신건강 분야의 권위자인 아주대 병원 조선미 교수는 '살아만 있으면 좋은 엄마'라고 종종 말합니다. 그러니 너무 많은 책임감과 완벽주의적 기대를 가지고 출산과 비출산을 결정하지는 말아주세요.

 다만 우리는 좋은 개인이 되어야 하고, 좋은 커플이 되어야 합니다. 많은 학생, 그리고 내담자가 종종 이런 이야기를 합니다. "우리 엄마가 정말 불행해하면서 모든 자원을 투입해 만든 게 저에요. 그런데 제가 그렇게까지 행복하지는 않아요. 저는 엄마처럼 할 자신도 없는데, 그럼 제 아이는 얼마나 더 불행하겠어요? 우리 엄마는 왜 그렇게까지 애쓰면서 살았을까 생각하면 또 너무 안됐고요." 다시 말하자면 애초에 부모 세대가 가족 내 생활에서 편안한 행복감을 느껴왔다면 청년들의 비혼이나 비출산 문제는 지금과 다른 양상이었을 것입니다. 하지만 안타깝게도 그러지 못했어요. 시집살이와 친척들의 과도한 간섭, 경제적 문제, 가부장제 문화에서 마주하는 다양한 문제와 억압, 불합리한 허식들이 성인과 성인의 진솔한 정서적 교류를 막았습니다. 그래서 기혼자들이 모인 곳에서는 결혼생활의 고통을 과장되게 토로하고 불행을 경쟁했으며 미디어에서는 이를 희화하하기 일쑤였지요.

 그러나 부모가 그럭저럭 유쾌하고 행복하다면 자녀는 비혼을 결심할 때 부정적 감각의 부당한 영향 없이 이성적으로 자기 삶의 방향을 정할 수 있을 것입니다. 아이들에게 제일 좋은 아빠는 '엄마한테 잘하는 아빠'라고 합니다. 부부가 재미있게 잘 지내는 것마으로 자녀들의 행복감은 높아집니다.

 그러므로 지금까지 말씀드렸던 개인의 심리적 요인들을 고려할 때, 복지 시스템의 보완만으로 비혼, 비출산 결정을 내린 사람들의 행동 변화를 이끌어내기란 쉽지 않을 것입니다. 다만 그럭저럭 좋은 개인 혹은 그럭저럭 좋은 부부와 같은 모습을 젊은 세대에게 보여주고 기다리는 것이 자연스러운 태도 변화를 가져올 것입니다. '저렇게 살아도 괜찮겠구나' '내 삶에 아이가 한 명쯤 있어도 괜찮겠구나' 하는 생각이 조금씩 들도록 말이죠.

 

 

 

주로 경제적 관점에서 대한민국의 기득권의 성립기원과 그들의 사고방식 그리고 왜 민주정부를 흔들고 있는가에 대한 것을 설명한다.

일독의 가치가 충분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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p85

 서구 사회에서 '보수'는 현재의 질서를 유지하면서 점진적인 발전을 도모하는 세력으로 상대적으로 부유층의 입장을 대변하는 반면, '진보'는 현재 체제를 급진적으로 개혁하자는 논리로 상대적으로 힘없고 가난한 사람들의 처지를 대변한다. 근대 산업사회 이후에도 계급적 구분이 선명하게 남아 있는 서구 사회에서 계급적 이해관계의 차이로 보수와 진보의 차이를 만든 것은 자연스럽다. 그런데 자민족 중심주의 연장선에서 제국주의적 성향이 있었던 서구 사회는 식민지 경험이 없다. 따라서 서구 사회에서는 보수가 유지해야 할 질서는 외세로부터 국가 이익을 수호해야 한다는 대전제가 밑에 깔려 있다. 국가 이익이 보장되지 않는 한 부유층(기득권자)의 이익도 보장될 가능성이 없기 때문이다. 이 점은 서구 사회의 진보 역시 마찬가지다. 국가 이익이 훼손되는 상황에서 힘없고 가난한 사람들의 이익이 먼저 약화할 가능성이 크기 때문이다. 2차 세계대전 이후 프랑스에서 나치 부역자들에 대한 철저한 처벌에 보수와 진보의 견해차가 없었던 것도 같은 맥락에서 이해할 수 있다.

 

대한민국에 '보수'가 존재하지 않는 이유

 그러나 한국 사회는 특수한 상황에 놓여 있었다. 특히 한국 현대사에서 2차 세계대전 이후 전개된 냉전체제와 그것의 산물로서 탄생한 반공은, 미국의 영향력 아래 있던 남한에서 가장 중요한 이데올로기가 될 수밖에 없었다. 반공은 사실상 '국시國是'였다. 일본과 남한에서 반공은 민족주의 색채를 가진 보수도 일부 공유했으나, 기본적으로 일본에서는 제국주의 전범 집단인 극우세력이, 남한에서는 친일세력이 주도했다. 이들이 미국에 없었다면 일본과 남한에서 각각 '전범'과 '친일 부역자'라는 측면에서 청산대상이 될 수밖에 없었기에 미국의 냉전 전략에 자신을 더욱 일체화시켰다. 이러한 이유로 동북아에서 냉전체제는 (사라졌어야 할) 일본의 극우세력과 그것의 쌍생아인 남한의 친일세력을 정치적으로 부활시킨 것이다. 차이라면 일본에서는 극우세력이 공산주의 세력과 공존한 것이고, 남한에서는 공산주의나 사회주의 등 좌파가 발을 붙일 공간이 없었다는 점이다. 한국전쟁 후 한반도에서는 좌파와 우파(극우 친일세력)가 물리적으로 분리된 것이나 마찬가지기 때문이다. 이후 민족주의적 색채를 갖는 보수와 극우가 절대적 지배 블록을 형성했다. '이승만-박정희-전두환-노태우' 정권은 기본적으로 극우세력이고, 그들을 이어온 '김영삼-이명박-박근혜' 정권은 민주주의 색채를 가진 보수와 극우가 결합한 정권이거나 극우세력이 주도한 정권이었다. 양자는 '반공'이라는 이데올로기를 공유했다.

 이처럼 한국 보수세력의 뿌리를 거슬러 올라가면 기본적으로 친일이라는 기원에 도달하게 된다.이런 이유로 엄밀하게 서구 사회를 설명하는 '보수'로 '한국 보수'를 정의할 수 없다. 일본의 극우세력이나 서구 사회의 극우세력 등과도 또 다른 한국의 보수세력은 자신의 사익을 국익이나 공동체 이익보다 우선하는 매판적 성격을 띤 집단이다. 한국의 보수세력이 공적 자원을 자신의 사익 추구에 스스럼없이 활용하거나 부정부패에 대한 죄의식이 없는 이유도 친일세력의 후예라는 '원죄'를 갖고 있기 때문이다.

 

p88

 한국 보수세력의 기득권은 박정희 정권에서 구조화되기 시작했다. 장기집권에 대한 박정희의 권력욕은 부정부패와 불공정한 부패로 얼룩진 경제성장으로 이어졌다. 한일 수교와 베트남 파병의 대가로 얻은 수출과 경제성장, 정치권력과 자본권력(재벌)의 유착을 동반한 경제성장은 한국 사회에 불공정을 공공하게 구조화했다. 손실은 사회화(국민에게 부담)시키고 이익은 사유화한 전형적인 '정실자본주의crony capitalism'였다.

 박정희는 장기집권을 위해 완벽한 국민 통제가 필요했고, 이를 위해 군사적 관점으로 국가와 사회를 재구성했다. 이른바 병영국가다. 병영국가의 효과적 작동을 위해서는 관료 통제가 필수였다. 많은 민주화운동 인사들을 '빨갱이'로 낙인찍는 등 정부를 비판하는 이들을 비국민, 반국민으로 규정해 사회적으로 철저히 고립시켰다. 또한, 주민등록번호와 국민교육헌장 도입, 영화 상영시 애국가 제창 등 '국민의 의식과 정신 개혁'이란 목표 아래 국민의 자유를 통제 대상으로 설정했다. 사회 공동체에 대한 연대감이나 정의감 등을 위축시켜 사회 공동체를 파편화시킴으로써 국민을 자신과 가족(의 안위)만 생각하는 동물로 만들려고 한 것이다. 게다가 심한 처벌을 매개로 한 집중적인 교화와 주입식 교육 방식은 독특함을 가진 고유한 존재들을 공장의 상품처럼 똑같은 인간으로 찍내는 방식이었다. 인간의 자발성을 완전히 거세해 지배하는 '총체적 지배' 방식이었다. 이렇게 국민은 파편화, 원자화됐다. 민주화 이후 꾸준히 개선됐다고는 하나 4차 산업혁명 시대에 필요한 협력, 타인에 대한 신뢰, 연대감, 창의적 아이디어, 차이와 다양성, 소통과 공감 역량의 빈곤이라는 문제의 기원도 따지고 보면 이때부터 시작된 것이다.

  문제는 군사정권의 종언 후 김영삼 정부에서 경제 운용을 정부 주도에서 시장 주도로 전환하면서 '군부독재'(국가 통제)를 '시장독재'로 치환시켰다는 점이다. 그 결과 '사회 자산'인 재벌기업이 재벌총수라는 개인의 배타적 소유물로 전환됐다. 또 1994년 재무부와 경제기획원을 재정경제원으로 통합함ㅇ로써 경제관료의 권한을 크게 강화했고, 외환위기의 원인인 '자발적 금융화'(세계화)로 금융 자본의 세상이 되면서 (사실상 내치와 관련된 모든 것을 할 수 있을 정도로 권한이 집중/강화된) 경제관료가 금융자본의 도구로 전락했다. 금융 자본의 논리가 경제정책을 결정하는, 이른바 '모피아 문제'가 부상한 것도 이 같은 배경에서 기원한다. 요컨대, 군부독재의 종언으로 (군부 권력의 목표를 실해하던 도구에서 벗어나 법치 공간의 '자율성'을 확보한) 경제관료 그리고 (국민과 여론 통제의 수단 역할을 했던) 검찰과 사법부, 언론, 하계 등이 (국가 통제에서 해방된) 재벌자본을 중심으로 새로운 지배구조로서 재구성된 것이다. 2005년 노무현 대통령이 "이미 권력은 시장으로 넘어간 것 같다."라고 언급한 것도 같은 맥락으로 이해할 수 있다.

 

p124

 한국은 2020년 2분기에 -3.25%로 OECD 회원국 중 성장률 면에서 사실상 1등을 했다. 2020년 1분기 -1.3%에 이어 성장률이 곤두박질친 이유는 수출이 1년 전과 비교해 20.3%나 감소하며 성장률을 -6.3%나 끌어내렸기 때문이다. 이때 수출 급락을 방어한 것은 전 국민 재난지원금이 중심이 된 내수였다. 민간소비 0.5% 증가를 바탕으로 내수를 1.1% 끌어올렸다. 재난 상황에서 사람들의 소비가 위축되면서 소비-유통-생산 등으로 연결된 경제 생태계가 파괴되는 와중에 소멸성 지역화폐 방식의 전 국민 재난지원금이 민간소비를 끌어올린 것이다.

 소멸성 지역화폐는 경제 효율성, 소득 재분배, 지역경제 활성화등 '일석삼조' 효과를 만들어냈다. 특히 피해를 가장 많이 입은 소상공인의 매출(수입)을 지원했다. 전 국민 재난지원금 지급을 반대하며 선별 지급을 주장하는 이들의 대표적 논리가 피해를 본 계층에 집중적으로 지원하는 것이 더 정의롭다는 주장이다. 

 

 소멸성 지역화폐에 의한 전 국민 지원금은 최종적으로 소상공인의 주머니로 들어간다는 점에서 자영업자에 대한 실질적인 선별 지원 효과도 강화한다. 게다가 선별 지원도 충분하지 않았다. 소상공인은 영업 제한으로 임대료 등 비용 측면과 매출 감소라는 수입 측면에서 양쪽의 손실이 발생하지만, 정부의 선별 지원금은 비용 측면의 지원에만 집중됐다. 이러한 상황에서 '우리 지역에서 기한 내 소진해야 하는' 소멸성 지역화폐에 의한 전 국민 지원금은 모두 소상공인의 수입으로 연결된다는 점에서 소상공인의 손실에 대한 지원 효과가 확실하다.

 

p125. 전 국민 재나지원금을 막으려는 '그들'의 진짜 속내

 사실 지역화폐 자체는 우리가 처음은 아니지만, 소멸성 지역화폐는 사실상 우리가 처음이다. 유례없는 팬데믹에 대응한 새로운 경제 문법으로 이재명 전 지사에 의해 경기도에서 최초로 시행된 정책이다. 소멸성 지역화폐의 효과를 과소평가하는 경제 전문가들은 팬데믹 이전 세상과 이후 세상이 전혀 다르다고 떠들면서도 여전히 팬데믹 이전 세상을 위해서 만들어진 고릿적 경제정책의 관점으로 소멸성 지역화폐를 바라본다. 21세기형 재난에 따른 경제충격을 20세기 경기침체 때 처방책으로 바라보는 것이다. 그런데 20세기 경기침체 처방책이 효과가 있었다면, 이를테면 천문학적 재정지출과 중앙은행의 통화량 공급 등에도 2020년 2분기 전통적인 선진국들의 성장률이 곤두박질친 것을 뭐라 설명할 수 있는가?

 이처럼 효과가 검증된 전 국민 재난지원금을 부패 기득권세력은 왜 반대하는 것일까? 바로 K-방역을 무너뜨리려는 이유와 정확히 같다. 전 국민 재난지원금이 다수 국민에게 보편복지나 기본소득의 효용성을 상기시키기 때문이다. 이 말을 이해하기 위해서는, 전 국민 재난지원금이 본질적으로 '돈의 배분' 문제라는 점을 잊어서는 안 된다. 서구 사회에서 1970녀대 후반부터 복지국가는 위기를 맞았다. 금융자본의 논리로 경제뿐만 아니라 사회 전체를 재구성하려는 금융자본은 (어려운 사람에게 집중적으로 지원하는 것이 경제적 효용성이 좋다는 논리를 도덕적으로 포장해) 선별복지를 전면화했다. 그러나 선별복지의 진짜 목적은 정부 재정지출의 최소화에 있다. 인류 역사에서 어려운 사람에 대한 지원이 충분히 이루어진 적은 없다. 정부 재정지출을 최소화하면 세금도 줄일 수 있고, 그로 발생한 감세의 혜택이 부유층에게 집중된다. 즉, 선별복지는 경제적 약자층에 대한 지원을 늘리고 부유층에 대한 지원을 없애자는 논리지만, 역설적으로 부유층에 대한 혜택을 크게 늘려주는 결과로 이어진다. 보편복지로 부유층이 입는 혜택보다 보편복지의 재원 마련에 부유층이 부담해야 하는 세금이 더 크기 때문이다. 공적 자원조차 사익 추구에 활용하는 한국의 보수세력이 보편복지를 싫어하는 궁극적인 이유다. 개혁 정부의 재정자원 사용을 싫어하는 논리와 똑같다.

 전 국민 지원금을 (부유층을 배제하고) 선별해 지원하자는 말은 논리적 정당성도 없다. 선별 지원을 내세우는 쪽은 소득이 높거나 부유한 사람까지 왜 국가가 지원해야 하느냐는 것이다. 일편 그럴싸해 보이지만, 이는 기만적인 주장이다. 핵심은 현실 세계에서 코로나19 재난 이전에도 소득이나 자산 불평등은 존재했고, 재난이 끝난 이후에도 존재할 것이다. 그렇다면 재난 이후에도 소득이 낮은 계층에게 지원금을 정기적으로 지급할 것인가? 또한 선별 지원의 기준이 되는 88% 혹은 심지어 80% 수치에 대해 어떠한 근거도 제시하지 못한다. 왜일까? 이들의 진짜 목적이 수치 자체에 있는 것이 아니라, 선별복지 논리가 무너지지 않게 방어하는 것에 있기 때문이다. 실제로 선별 지원 기준에 포함되는 사람 중에는 코로나19 재난 상황에서도 소득 감소가 없는 대기업 정규직-공무원-공기업 정규직 노동자들이 포함돼 있다. 선별 지원 논리에 따르면 이들에게 왜 지원해야 하는지 설명하지 못한다. 심지어 선별 지원에 포함되지 않은 사람 중에 코로나19 재난 상황으로 오히려 소득이 감소한 사람이 있는데, 이들의 소득이 조금 높다는 이유로 배제하는 것이 정당한 것인지도 설명을 하지 못한다. 선별 기준이 갖는 모호함이나 기술적 어려움, 지급 후 소득의 역전 등 무수한 문제가 있음에도 '선별'을 방어해야만 하는 것이다. 이재명 전 지사의 "재원이 문제라면 지원 기준의 문제가 있는 88%에게 25만 원 지급하는 것 말고 모두에게 22만 원 지급하자."라는 제안이 무시된 이유다. 요컨대, 전 국민 지원과 선별 지원이 대립적 관계가 아니라 보완적 성격을 갖고 있음에도, 선별 지원이 논리적 타당성을 갖추지 못했음에도, 또 전 국민 재난지원금이 어느 면으로 보나 효율적임에도 반대하는 이유는 보편복지나 기본소득의 논리가 강화되고, '재정지출 최소화' 원칙이 무너지는 것을 막기 위한 것이다. 기본소득이 세금을 거두어 납세자인 국민에게 바로 돌려준다는 점에서 재정자원의 독점 권한을 갖는 재정 관료의 이해와 충돌할 수밖에 없다. 또한, 기득권층에게 부유층의 부담이 증가하는 보편복지가 달가울 리 없다.

 

p130

 일본에서 아베노믹스(구로다의 양적/질적 완화)가 시작될 때 일본 은행의 자산은 GDP 대비 32.8%였던 데 비해, 2021년 2분기 132%까지 증가했다. 2018년부터 일본은 줄곧 돈을 찍어내도 경제 규모가 성장하지 못하는 함정에 빠져 있다. GDP 대비 정부채무의 이자 부담만 해도 이미 경상성장률(=실질 성장률+물가 상승률)을 웃돌고 있다. 미국 연준의 자산 규모도 금융위기 전 GDP 대비 5.9%에서 팬데민 직전인 2019년 말 19.5%로, 그리고 팬데믹 이후 2021년 2분기에 36.7%까지 증가했다. 만약 한 번 더 새로운 감염병이 발발한다면 연준 자산 규모는 어느 정도까지 올라갈까? 문제는 천문학적 규모의 돈을 아무리 풀어도 보통사람에게 돌아가지 않는다는 점이다. 불평등이 개선되지 않기 때문이다. 게다가 미국 정부가 동원할 자원이 고갈된 상황에 이르렀다. 아프가니스탄 철군의 진짜 이유도 군비 부담을 감당하기 어려웠기 때문이다. 만약 한 번 더 새로운 감염병이 유행한다면 급전직하하는 성장률로 정부채무의 이자 부담을 훨씬 더 감당하기 어려울 것이다.

 

p158

 금융과 재정은 밀접한 관계를 맺고 있다. 금융의 영역에서는 '1원 1표'의 시장원리가 작동하기에 사회적 통제가 없으면 공공성(자금중개 기능)이 약화하고, 빈익ㅂㄴ 부익부를 심화시키는 도구로 전락한다. 게다가 금융과 달리 '1인 1표'의 민주주의 원리가 작동해야 하는 재정이 선출 권력에 의해 작동하지 않을 때 금융의 탈선과 불평등 열차는 폭주한다. 따라서 한국 사회에서 재정 민주화를 추진한다는 것은 재정자원의 배분 권한을 독점하고 있는 기재부의 권한을 재조정하는 것을 의미한다. 기재부는 사실상 모든 권한을 장악하고 있다. 기재부 권한으로 규정돼 있는 '중장기 국가발전전략 수립'은 기재부가 사실상의 청와대임을 의미한다. 내치를 담당하는 국무총리의 손발 노릇을 하는 국무조정실장(차관급)을 항상 기재부 출신이 장악하는 것도 그 때문이다. 세계 어느 나라에도 없는 권한이다. 재정자원 확보의 핵심수단인 세금 업무와 재정자원의 배분 권한인 예산과 기금에 대한 모든 권한(편성, 집행, 성과 관리)을 갖고 있다. 부동산 정책에 절대적인 부동산 세제나 공공임대주택 관련 기금이 모두 모피아의 영향력 아래 있는 것이다.

 이러한 권한 집중은 군부독재가 종식되는 과정에서 일어났다. 군부 독재 체제에서는 경제기획원과 재무부 이원체제였다. 경제기획원은 국가의 경제,사회 발전을 위한 종합계획의 수립,운용과 투자 계획의 조정,예산의 편성과 그 집행의 관리, 중앙행정기관의 기획 조정과 집행의 심사 분석, 물가안정 시책 및 대외 경제정책의 조정에 관한 사무를 관장했다. 이와 비교해 재무부는 화폐,금융,국채,정부 회계,조세,외국환,대외 경제협력,국유 재산 및 전매에 관한 사무를 관장했다. 그러던 것이 김영삼 정부 출범 후 경제기획원(1994년 12월 폐지)과 재무부가 재정 경제원으로 통합됐다. 문제는 청와대로 가야 할 경제기획원이 재무부로 넘어간 것이다. 단일한 경제관료 세력이 공적 자원과 권한을 사유화시킬 수 있게 된 것이다. 권한을 독점한 경제관료는 자신의 사익 추구를 위해 시장의 자본과 결탁했다. 한편, 김영삼 정부에서 경제기획원 폐지와 더불어 한국은행 독립성 강화도 동시에 진행됐는데, 이는 한국은행을 시장자본에 넘긴 것이다. 한국은행의 권한을 가진 금융통화위원 7인 중 3인이 기재부 그리고 1인이 자본에서 결정된다는 점에서 한국은행 역시 시장자본에 넘어간 것이다.

 공적 자원과 권한이 엘리트의 사익 추구와 시장자본의 소유물로 전락하면서 재정자원은 기업(자본) 중심으로 배분되고, 조세체계는 부유층에 대한 혜택이 집중되는 한편, 금융 시스템에서 공공성은 사라져 오직 수익성만 추구하는 등 보통사라의 삶을 피폐화시켰다. 여기에 한국 은행은 재벌과 금융 자본을 지원하는 역할에 집중해왔다. 금융 안정(금융 불균형)의 핵심 문제로 지적되는 소득 불평등에 관심 없는 것도 이때문이다. 경제관료 엘리트에게 집중된 권한은 정부조직의 장악으로 이어지고, 퇴임 후 민간 금융회사나 로펌이나 재벌기업 등에 재취업해 로비스트로 활동한다. 실제로 이들은 퇴임 후 은행연합회, 저축은행중앙회, 보험협회, 여신금융협회, 한국거래소 등에 재취업해 사실상 정책 로비 및 외풍 차단기 노릇을 수행한다. 삼성전자나 대형 로펌 등에도 마찬가지로 진출한다. 따라서 기재부와 금융위 그리고 한국은행 등이 본래의 공적 역할을 하도록 하는 것이 재정 및 금융 민주화의 출발점이고, 이를 통해 보통사람이 재정 및 금융자원에 접근할 기회를 확대해야 한다. 이러한 조치가 없는 한 경제적 취약계층이 채무 노예에서 벗어날 수 있는 길은 없을 뿐 아니라 가계채무와 부동산시장의 경착률은 불가피하다.

 

p162

 2019년 기준 토지를 소유한 법인기업의 상위 1%가 기업이 소유한 전체 토지의 73.3%를 가졌다는 것만 봐도 이 형태가 잘 드러난다.

 이 같은 부의 축적 방식은 가계도 예외가 아니다. 한편으로는 혁신 역량의 부족으로, 다른 한편으로는 부동산의 높은 기대수익으로 상위층 가계도 부동산에 뛰어든다. 상위 1% 가계가 전체 토지의 30%, 상위 5%가 전체 토지의 절반이 넘는 55.4%를, 그리고 상위 10% 가계가 전체 토지의 69.1%를 차지할 정도로 토지 소유의 불평등은 절망적이다. '절망적'이라 표현한 이유는 하위 약 40%는 토지 1평도 가지고 있지 못하기 때문이다. 토지 소유의 지니계수만 0.8이 넘어선 지경이다. 토지 소유의 불평등은 토지 소유의 집중이 심했던 19세기 조선 말 사회보다 훨씬 심하다. 지속 불가능한 수준에 이르렀다.

 

p181

 기재부가 전 국민 재난지원금 지급을 결사반대하는 것은 대한민국 특권층의 뿌리를 흔들기 때문이다. 그 이유는 첫째, 전 국민 재난지원금이 팬데믹 재난 상황에서 일회성으로 그쳤다면 한국 사회의 특권층이 결사반대하지 않았을 것이다.  전 국민 재난지원금이 기본 소득으로 발전하는 것이 두렵기 때문ㅇ다. 기본소득은 보편복지의 성격을 갖는다. 보편복지는 (부유층이 지지하는) 재정지출 최소주의와 항상 충돌해왔다. 금융화와 신자유주의 바람이 본격적으로 불기 시작한 1970년대 후반에 보편복지가 공격을 받으면서 서구의 복지국가는 위기를 맞이했다. 그런 상황 속에서 전국 차원의 기본복지인 '21세기형 보편복지'가 한국에서 부활한 것이다. 기본소득은 여러 장점 중에서도 최저임금 인상률 부담을 완화할 수 있는 장점이 있다. 한국의 경우 사회임금(정부이전소득)이 턱없이 낮고 시장임금에 대한 의존도가 높다 보니 저임금노동자의 생계 조건을 고려했을 때 최저임금 인상률을 높일 수밖에 없다. 그런데 자영업을 포함한 저임금에 의존하는 저부가가치 사업장이 광범위한 상태에서 높은 최저 임금 인상은 이들의 어려움을 고조시킬 수밖에 없다. 따라서 기본소득이 저임금노동자에게 소득을 보전해주는 역할을 함으로써 최저 임금 인상률을 완화할 수 있는 효과를 불러온다.

 둘째, 기본소득이 21세기형 보편복지인 이유는 기본소득 자체가 재정 민주주의와 조세 시스템의 개혁을 의미하기 때문이다. 현대 사회에서 재정은 중앙집중식 배분 시스템에 기초한다. 중앙정부나 지방정부 등이 거둔 세금을 정부나 의회 등이 배분을 결정하고 있다. 지금까지 한국 사회에서 재정자원의 배분은 기재부의 권한이었고, 이 권한으로 기재부는 정부조직에서 가장 힘이 강한 조직이 될 수 있었으며, 심지어 (지역구 예산 배정을 받아야 하는) 국회(의원)까지 조종(?)할 수 있었다. 그런데 기본소득은 징수한 세금을 모두 국민에게 균등하게 지급한다는 점에서 기재부의 과도한 재정자원 배분 권한을 줄여준다. 이런 측면에서 기본소득은 기재부의 기득권에 반하는 것일 뿐만 아니라 재정자원의 배분 권한을 국민이 회수한다는 의미를 갖는다. 국가적 차원에서의 기본소득 도입은 세계 최초의 재정 민주주의를 의미하는 것이다.

 셋째, (지역사회의 소상공인에게만 사용할 수 있는) 지역화폐는 재벌(유통) 자본의 이익과 충돌한다. 앞에서 지적했듯이, 시장에서 힘이 센 자본의 이해를 대변하는 모피아에게 지역사회의 소상공인은 구조조정의 대상일 뿐이다. 자본보다 더 자본의 관점에서 사고하는 모피아에게 지역화폐는 거추장스러운 대상일 뿐이다. 실제로 1차 전국민 재난지원금이 지급되었을 때 대형유통업체는 매출이 감소했다. 2차 지원금이 1차와 같은 방식으로 지급되는 것에 대한 우려를 드러냈던 사실상의 이유다. 반면에 자영업자 단체는 적극 지지했다. 기존의 어느 골목상권 보호 대책보다 효과가 뛰어났기 때문이다. 지역화폐는 기재부나 한국은행 등에서도 기피한다. 기재부는 기존에 사용하는 온누리상품권이 위축될 것을 우려했다. (전통시장을 중심으로 사용하는) 온누리상품권보다 사용 범위가 넓은 지역화폐 사용이 확산할 경우 온누리상품권 사업은 타격을 받을 수밖에 없기 때문이다. 왜, 온누리상품권에 애착을 갖는 것일까? 온누리상품권과 지역 화폐의 차이의 본질은 중앙정부 발행의 상품권이라는 점에 있다.중앙정부가 발행하는 한 그에 필요한 재정자원의 배분 권한을 장악하고 있는 기재부의 권한임을 의미한다. 실제로 온누리상품권 발행 기관인 소상공인시장진흥공단은 중소벤처기업부 산하의 준정부기관이지만 현재의 조봉환 이사장은 기재부 국장 출신이다. 온누리상품권 예산 배분 권한을 이용해 타 부서(중소벤처기업부) 산하 공공기관장 자리까지 챙기는 기재부의 권한을 보여주는 사례다.

 무엇보다 지역화폐의 효능감이 확산할수록 지역사회의 부가 지역 밖으로 유출되는 것을 막기 위해 (지역 공공은행 같은) 지역 금융의 수요가 증대할 수 있다. 이는 (지역에서 금융자원을 추출해 서울 등 대도시에 투입하는) 기존 금융자본의 이익 축소로 이어질 뿐 아니라, 한국은행의 통화공급 독점력도 약화시킬 수 있다. 기재부가 조세재정 연구원이나 한국개발연구원 등 산하 국책기관에 기획용역을 발주해 전 국민 재난지원금과 지역화폐 효과를 부정적으로 평가한 이유도 같은 맥락에서 해석할 수 있다. 그러나 체감을 통해 효과를 확인한 많은 국민은 전 국민 재난지원금을 지지하고 있는 것이 팩트다. 기본소득에 대한 지지가 단기간 내에 빠르게 확산할 수 있었던 것도 같은 맥락으로 이해할 수 있다.

 

p188

 국가채무가 증가하면 또다시 외환위기가 올 수 있다는 겁박을 반복하는 것이다. 그런데 한국이 외환위기를 당했던 1997년 국가채무, 정확히 표현하면 정부채무는 GDP 대비 10%에 불과했다. 외환위기 전후로 한국의 국가신용등급은(S&P기준으로) AA-에서, 투자를 권유할 수 없을 뿐 아니라 매우 투기적인 수준의 B+로 추락했다. 무려 10등급이 하락한 것이다. 그런데 외환위기 이후 한국의 신용등급은 AA로 위에서 3번째 등급까지 상승했다.

 여기서 주목해야 할 사실은 국가신용등급이 11단계나 올라가는 동안 정부채무가 거의 5배 수준까지 올라갔다는 점이다. 국가신용등급과 정부채무 간 상관성이 없다는 사실은 주요 선진국뿐 아니라 싱가포르 같은 개방도가 높고 경제규모가 작은 나라에도 해당한다. 싱가포르는 정부채무가 급증했으나 항상 최고등급인 AAA를 유지하고 있다. 싱가포르 정부채무는 1990년대 70% 미만에서 현재는 거의 2배 수준인 130%대까지 증가했다. 경상수지 흑자 기조가 지속하고, 외환보유고를 높은 수준으로 유지하고 있기 때문이다. 외국인 투자자 관점에서 볼 때 투자금을 회수하지 못할 확률이 거의 없다고 보는 것이다. 반대로 한국이 외환위기를 겪은 이유는 경상수지 적자가 증가하는 상황에서 적자 부분을 금융시장 개방으로 유입된 외화로 막았는데, 그렇게 금융시장에 투자했던 외국인이 자금을 일시에 회수하면서 외화 유동성에 급격한 위기가 왔기 때문이다.

 

p192

 매년 5월에는 국가재정전략회의가 대통령 주재로 열린다. 재정은 국가를 경영하는 데 있어서 핵심 자원이다. 국정 방향이나 목표 등에 따라 재정 운용이 결정된다. 2019년 국가재정전략회의에서 대통령이 '과감한 재정정책'을 주문하자 이 자리에서 홍남기는 "GDP 대비 국가채무 비율의 마지노선을 40%로 본다."라며 신중한 접근이 필요하다며 반론을 제기했다. 이를 두고 보수언론에서는 장관이 대통령에게 '고언'을 드렸다고 두둔했는데, 특권층 카르텔의 공동전선을 펼친 것일 뿐이다. 이에 대해 문재인 대통령은 "미국은 107%, 일본은 220%, OECD 평균이 113%인데, 우리나라는 40%가 마지노선인 근거가 무엇이냐?"고 되물었다. OECD 평균 수치를 언급하지 않았다면 미국과 일본 등은 기축통화국이라 우리와 사정이 다르다며 반박했을 것이다. 대통령의 질문은 합리적이었다. 40%라는 수치는 경제학의 족보는 물론이고 세계 어느 나라에서도 사용한 적이 없는 수치이기 때문이다. 마지노선이라 완강하게 주장했던 40% 선이 일찍이 무너졌는데 대한민국에는 아무 일이 일어나지 않고 있다.

 

p199. '나랏돈'이 쌓인다는데, 무엇이 문제일까?

 모피아는 왜 재정지출 최소화에 목매는 것일까? 이를 이해하기 위해서는 모피아의 탄생 배경을 알아야 한다. 한국의 고동성장기는 군부독재의 통치 기간이었다. 당시 경제 엘리트 관료는 군부독재라는 물리적 폭력에 기반한 권력의 도구 역할을 충실히 수행했다. 그런데 문민정부를 표방한 김영삼 정부가 집권하면서 구도에서 주요한 3가지 변화가 발생했다.

 첫째, 군부독재를 청산하고 문민화를 진행하면서 국가 주도를 '악'으로 규정하고, 경제의 국가 주도를 시장 주도로 전환했다. 이 과정에서 사회적 자산인 재벌기업을 재벌총수의 배타적인 개인 소유물로 전락시켰다. 재벌기업은 대주주뿐만 아니라 (한국의 고도성장에서 정책금융이 결정적 역할을 했듯이) 사회 전체가 키운 것이었다. 기업경영이 부실화될 때 재정이나 한국은행의 특별융자 등이 투입된 것은 잘 알려진 사실이다. 그래서 군부 권력이 공공연히 재벌에게 정치자금을 요구할 수 있던 것이다. 재벌이 재벌 총수의 개인 소유물이 아니라 권력이 만들어주었다는 인식이 깔려 있던 것이다. 이후 김영삼 정부는 재벌기업에 대한 사회적 통제를 포기하고, 권력을 시장에 넘기기 시작했다. 그리고 고삐가 풀린 재벌자본이 시장 권력의 중심이 되는 것은 자연스러운 결과물이다. 자본이 수익을 추구하는 것은 자연스러운 성향이지만, 한국의 자본은 기존의 주요 선진국들이 그랬던 것과 비교해 부의 축적에서 정당성이 부족하다. 실제로 선진국의 자본은 '혁신'이 부의 축적에서 차지하는 지분이 꽤 있으나, 한국의 자본은 재벌을 생각하면 '정경유착' 이미지가 연상되듯이 혁신보다는 불공정한 방식으로 부를 축적한 것이 사실이다. 불공정은 국민의 희생으로 이어졌다. 한국의 재벌 중심 경제 시스템의 특징을 '이익의 사유화와 손실의 사회화'로 규정하는 이유다.

 둘째, 세계화로 알려진 '자발적 금융화'를 추진했다. 미국 월가와 워싱턴이 추진한 자본자유화와 그에 따른 금융시장 개방 압박이 한국에도 1980년대 후반부터 밀려왔다. 압박을 받은 군부 정권에서는 점진적 개방을 추진했는데, 김영삼 정부에서는 '압박'에 의한 개방이 아니라 '필요'에 의해 적극적 개방으로 방향을 전환했다. '자발적 금융화'라고 표현한 이유다. 당시 추진했던 OECD 가입도 적극적 금융시장 개방과 관련이 있다. 그러나 김영삼 정부는 지나치게 금융에 대해 무지했고, 그 결과로 외환위기라는 값비싼 대가를 치러야만 했다. 자발적 금융화와 더불어 외환위기 이후 사실상 금융시장의 완전 개방으로 한극의 금융 부분은 월가(자본) 논리로 재구성됐다. 시장 권력이 국내 재발자본과 해외 금융자본으로 재편됐다.

 셋째, 김영삼 정부는 국가 주도로 경제를 운영할 때 군부 권력의 목표를 기획할, 즉 국가의 중장기 발전전략을 수립하는 역할을 경제기획원을 해체하고, 재무부에 통합시켰다. 중장기 발전전략부터 예산과 기금 배분, 세제, 화폐와 외환 등 경제와 관련된 모든 권한을 가진 공룡 경제관료 조직인 재정경제원이 등장한 것이다. 경제 중심의 국가 운영에서 재정경제원은 사실상 내치와 관련된 대부분 권한을 장악했다. 군부 권력처럼 자신들을 통제했던 국가권력이 없어진 상황에서 새롭게 부상한 시장 권력인 재벌자본 및 금융자본과 결합했다. 재벌 대기업과 금융자본 등의 이해 논리가 경제관료에게 내재화됐고, 이들이 바로 '모피아'로 발전한 것이다. 현직에 있을 때 재벌 대기업과 금융자본의 이익을 위해 복무하던 경제관료는 퇴임 후 재벌 대기업이나 민간 금융기관 그리고 이들을 고객으로 삼고 있는 대형 로펌 등으로 이동해서 로비스트 역할을 수행한다. 은행자본의 이익단체인 은행연합회 회장, 2금융권의 대표적인 저축은행 이익단체인 저축은행중앙회 회장, 카드회사들의 이익단체인 여신전문협회 회장, 손해보험협회 회장, 심지어 자본시장 이해관계자들을 회원사로 가진 한국거래소 이사장 등이 모두 기재부 혹은 기재부와 사실상 한 몸인 금융위원회 출신이다. 재벌 대기업도 다를 바가 없다. 김영삼 정부 때 재정경제원 장관을 하고, 이명박 정부에서 국무총리를 한 한승수나 노무현 정부에서 재정경제원 장관을 한 한덕수 등은 김앤장의 사실상 로비스트 역할을 하는 고문직을 수행한 것을 상기하면 된다. 김영삼 정부에서 재경원 출신으로 강만수와 더불어 (시민단체 등으로부터) 외환위기 주범 중 한 명으로 지목됐던 윤중현은 김앤장 고문으로 있다가 이명박 정부에서 기재부 장관으로 화렿게 돌아왔다. 또한, 이명박 정부에서 정무수석, 국정기획수석, 노동부 장관, 기재부 장관을 하며 이명박과 처음과 끝을 같이 했던 박재완은 공직을 떠난 후 (이건희 사면의 공로를 인정받아?) 현재 삼성전자 이사회 이사장직을 수행하고 있다. 이처럼 모피아는 새로운 권력인 재벌 및 금융자본과 사실상 한 몸이 되어 엘리트 카르텔형 부패구조의 중심에 있다. 모피아가 재정지출 최소주으(재정안정주의)를 추구하는 이유도 자본의 이해를 대변하기 때문이다.

 

물리학의 궁극의 이론으로 가는 여정을 다룬 책.

고대의 물질의 근본인 원자, 그리고 우주에 대한 질문으로부터 시작된 물리학에 대한 탐구의 역사.

근대에 들어 뉴턴 역학과 전자기학, 아인쉬타인의 상대론 그리고 현대의 양자론에 이르러 만물의 힘을 통일하기 위한 과학자의 노력들과 현재까지 이르른 곳에 대한 이야기다.

본인이 초끈 이론의 대가인 과학자인 미치오 카쿠는 현대 물리학의 궁극적 모습에 대해 가장 많이 이해하고 있는 사람 중의 하나일 것이라 생각된다.

훌륭한 교양과학 서적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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p99

 훗날 프린스턴의 물리학자 존 휠러는 솔베ㅣ학회를 회상하며 말했다. "나는 그날 오갔던 대화가 인류 역사상 가장 위대한 논쟁이었다고 생각한다. 그 후로 30년이 흘렀지만, 그날처럼 심오한 문제를 도마에 올려놓고 그토록 위대한 대가들이 그토록 심오한 결론을 도출한 사례는 한 번도 본 적이 없다.

 

p102

 슈뢰딩거의 고양이 역설을 시원하게 풀어줄 해결책은 아직 나오지 않은 상태이다. 지금도 물리학자들은 이 문제가 거론될 때마다 갑론을박을 벌이곤 한다[관측을 실행하여 파동함수가 붕괴되어야 고양이의 실체가 드러난다는 닐스 보어의 해석(이것을 '코펜하겐 해석'이라 한다)은 과거보다 입지가 좁아졌다. 그 사이에 나노기술이 발달하여 개개의 원자를 다루는 실험을 실행할 수 있게 되었기 때문이다. 사실은 보어의 확률해석보다 다중세계 가설이 더 그럴듯하다. 이 가설에 의하면 상자의 뚜껑을 여는 순간 당신의 우주는 '고양이가 살아 있는 우주'와 '고양이가 죽은 우주'로 갈라진다].

p109

 독일에서는 당대 최고의 유명세를 누리던 베르너 하이젠베르크가 나치의 원자폭탄 개발 프로젝트의 총책임자로 임명되었다. 한 역사가에 의하면, 하이젠베르크의 명성을 익히 알고 있었던 연합군 지휘부가 그를 제거하기 위해 CIA의 전신인 OSS에 암살 계획을 의뢰했다고 한다. 이 임무를 맡은 사람은 한때 브루클린 다저스의 포수였던 모 버그였는데, 그는 1944년에 취리히에서 개최된 하이젠베르크의 강연회에 참석하여 정보를 수집하는 등 적극적인 스파이 활동을 펼쳤다. 그때 OSS에서는 '독일의 핵무기 개발계획이 완성 단계에 이르렀다고 판단되면 하이젠베르크를 암살하라'는 지령을 내렸으나, 모 버그는 아직 걱정할 수준이 아니라며 그를 살려두었다고 한다(이 이야기는 니컬러스 다비도프의 책 <스파이가 된 포수The Catcher was s Spy>에 자세히 나와 있다.

p128

 입자가속기로 가속된 양성자빔을 목표물을 향해 발사하면 그 안에 들어 있는 양성자와 충돌하면서 온갖 입자들이 튀어나온다. 과학자들은 이 과정을 통해 이제껏 발견된 적 없는 새로운 입자를 무더기로 발견할 수 있었다(사실 입자빕으로 양성자를 때리는 것은 매우 둔탁한 방법이다. 비유하자면 피아노를 창밖으로 던져서 부서지는 소리를 분석하여 피아노의 세부구조를 추적하는 것과 비슷하다. 그러나 원자핵과 양성자의 내부구조를 탐색하려면 이 방법밖에 없다).

p223. LHC를 넘어서

 일본의 과학자와 정치가들은 직선 튜브 안에서 전자빔을 발사하여 반전자빔과 충돌시키는 국제선형충돌기International Linear Collider(ILC)의 건설을 적극적으로 검토하고 있다. 일단 승인이 떨어지면 12년 안에 완성될 것이다. ILC의 장점은 양성자가 아닌 전자를 사용한다는 점이다. 양성자는 세 개의 쿼크가 글루온을 통해 결합된 복합입자여서, 한번 충돌하면 구성입자뿐만 아니라 잡다한 부산물이 무더기로 쏟아져 나온다. 반면에 전자는 복합입자가 아닌 소립자면서 양성자보다 훨씬 가볍기 때문에, 많은 에너지를 투입할 필요가 없고 충돌 결과도 훨씬 깔끔하다(전자를 입사입자로 사용하면 250GeV에서 힉스보손을 만들어낼 수 있다).

 한편, 중국은 원형 전자-양전자 충돌기Circular Electron Positron Collider(CEPC)에 관심을 갖고 있다. 이 프로젝트는 2022년에 착수하여 2030년경에 끝날 예정인데, 둘레는 약 100km에 출력은 240GeV이고 총 건설 비용은 50억~60억 달러쯤 된다.

 CERN(유럽 입자물리연구소)의 과학자들도 이에 뒤실세라 LHC의 뒤를 잇는 미래형 원형 충돌기Future Circular Collider(FCC)를 설계 중이다. 둘레가 약 100km인 이 장치의 예상 출력은 무려 100TeV(=100,000Gev)에 달한다.

 이 야심 찬 계획이 성공적으로 마무리된다는 보장은 없지만, 물리학자들은 LHC를 뛰어넘는 차세대 가속기에서 암흑물질이 검출되기를 간절히 바라고 있다. 암흑물질의 구성입자가 발견되면 끈이론의 예측과 비교하여 이론의 타당성을 부분적으로나마 검증할 수 있다.

 초대형 가속기가 완성되면 끈이론에서 예측된 미니블랙홀의 존재 여부도 확인할 수 있다. 끈이론은 중력과 소립자를 모두 포함하는 만물의 이론이므로, 물리학자들은 가속기에서 미니블랙홀이 발견되기를 기대하고 있다(미니블랙홀은 진짜 블랙홀과 달리 에너지가 입자 몇 개 분량밖에 안 되기 때문에 아무런 해를 끼치지 않는다. 오히려 매순간 지구로 쏟아지는 우주선의 에너지가 미니블랙홀보다 훨씬 크다. 그런데도 지구는 멀쩡하니까, 미니블랙홀이 지구를 삼킬 걱정은 붙들어 매도 된다).

p226. LISA

 '레이저 간섭계 우주 안테나 Laser interferometer space antenna(LISA)'로 명명된 이 프로젝트가 완료되면 빅뱅의 순간에 발생한 진동까지 감지할 수 있을 것이다. LISA의 한 가지 버전은 세 개의 인공위성을 삼각형 대열로 배치해놓고 레이저로 연결된 형태인데, 한 변의 길이가 거의 150만 킬로미터나 된다. 빅뱅이 발생한 중력파가 이 감지기에 도달하면 레이저빔이 미세하게 흔들리면서 그 존재를 확인하는 식이다(물론 엄청나게 민감한 장치들이 일사분란하게 작동해야 한다).

 LISA의 궁극적인 목표는 빅뱅의 충격파를 시간대별로 기록한 후 테이프를 꺼꾸로 되돌려서 빅뱅 이전에 발생한 복사를 최대한 정확하게 재현하는 것이다. 이 데이터는 끈이론에서 예견된 값과 비교할 수도 있지만, 그 자체만으로도 엄청나게 값진 자료이다.

 LISA보다 더 강력한 장비를 구축하면 아기우주의 사진을 찍을 수 있을지도 모른다. 운이 좋으면 아기우주와 모태우주 사이를 연결했던 탯줄의 흔적이 발견될 수도 있다.

 

 

 

1997년에 출판된 도서를 10년 후인 2007년에 개정판으로 내놓은 것.

일부 에피소드에 10년 후의 조수미의 개인적 감상이 덧붙여진 내용들이 있다. 예를 들어 1997년에 어떤어떤 것들을 소망하거나 예사했는데, 10년 후에 다시 되돌아보니 이루어졌드라 하는 내용들이다.

조수미에 대해 관심있는 분들에게는 흥미로운 내용일 듯.

음악적인 내용 위주로 쓰여져있지만 카라얀과의 만남 등 신변잡기적인 내용이라 쉽게 읽힌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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