세계사를 바꾼~~ 이라는 제목들이 최근 히트를 치면서, 이런 제목을 들고 나오는 책들이 많다.

대개 이런 책들은 주제가 정확히 한정되어 있고, 꽤 자세한 에피소드들을 다루고 있기 때문에 

내용이 재미있는 경우가 많아서, 최근에 이런 제목이 보이면 일단 한번 보게 된다. 

 

맥주, 와인, 증류주, 커피, 차 그리고 코카콜라.

인류에게 큰 영향을 미친 6가지 음료의 역사를 다루고 있다.

역사의 흐름에서 음료가 생각 이상으로 큰 영향을 미쳤다는 것을 알 수 있고, 특히 차의 경우가 그렇다.

----------------------------------------------

p152

 커피가 아랍 세계를 통해 퍼지면서 - 1510년에는 메카와 카이로까지 퍼졌는데 - 커피가 신체에 미치는 효과에 대해서 많은 논쟁이 발생했다. 커피는 당초의 종교적 연관성을 벗어버리고 사회적인 음료가 되면서 거리에서 시장에서 잔으로 판매되었다. 이후 전문적인 커피하우스가 등장했다. 커피는 많은 무슬림에 의해 알코올에 대한 법적인 대체재로서 수용되었다. 알코올을 팔았던 불법적인 술집과는 달리 커피하우스는 사회적인 지위가 없는 사람들도 출입할 수 있는 장소였다. 그러나 커피의 법적 지위는 모호한 상태였다. 일부 무슬림 학자들은 커피가 중독성이 있어서 선지자 모하메드가 금했던 와인이나 다른 알코올처럼 종교적으로 금지되어야 한다면서 커피의 음용을 반대했다. 종교 지도자들은 1511년 6월 메카에서 새로운 법을 선포했고, 이는 커피의 소비를 금지하는 여러 시도 중 최초의 조치였다. 카이르 베그Kha'ir beg라는 사람이 그 지역의 지도자로 일반 대중의 도덕 관리를 책임지고 있었는데, 그는 문자 그대로 커피를 재판에 회부했다. 그는 법률 전문가로 구성된 위원회를 개최했고 커다란 그릇에 담긴 커피가 피고로 그들 앞에 놓였다. 위원회는 커피의 중독성 효과에 대해 토론한 후 커피의 판매와 소비를 금지해야 한다는 카이르 베그의 주장에 동의했다. 판결 내용은 메카 전역에 공표되었고 커피는 압수되어 길거리에서 불태워졌다. 그리고 커피 판매업자와 그들의 고객 중 일부는 두들겨 맞는 처벌을 받았다. 그러나 몇 달 뒤에 카이로에 있는 더 높은 정부 당국은 카이르 베그의 판결을 뒤집었다. 그리고 커피는 곧 공개적으로 다시 소비되기 시작했다. 권위가 망가진 카이르 베그는 다음해 책임자의 자리에서 교체되었다.

 

p174

 후크는 허풍이 심했고, 논쟁적이었고, 자신의 이야기를 과장하는 것으로 유명했다.

 개러웨이즈에서 후크와의 토론을 마친 후 플램스티드는 자신이 "오랫동안 후크를 관찰한 결과, 그는 닥치는 대로 반대하고, 스스로는 아무것도 판단하지 않고, 입증되지도 않은 주장을 가지고 자신을 방어하려는 성격이 있다"라고 불평했다. 반면, 후크는 플램스티드에 대해 "그는 자신은 잘 알고 있지만 내가 모르는 사물에 대해 내가 무지하다는 사실을 증명하기 위해 많은 말을 동원해 나를 공격했고, 주변 사람들을 설득했다"라고 주장했다.

 그러나 후크가 커피하우스에서 보여준 교만은 과학혁명에 있어서 가장 위대한 책의 출간에 뜻하지 않은 계기가 되었다. 1684년 1월의 어느 날 저녁, 커피하우스에서 후크, 핼리, 렌 사이의 토론은 당시에 커다란 화제가 되고 있었던 중력의 이론으로 옮겨갔다. 핼리는 커피 몇 모금을 마신 후 행성의 궤도가 타원형 모양인 것이 거리의 역제곱 법칙에 따른 중력의 감소와 일치하는 것인지에 대해 궁금해했다. 후크는 그렇다고 단언했고, 역제곱 법칙으로만 행성의 움직임을 설명할 수 있는데, 자신은 이미 수학적으로 증명했다고 주장했다. 그러나 그러한 증명을 시도했지만 실패했던 렌은 확신하지 못했다. 후일 핼리는 렌이 "후크와 나에게 2달을 줄 테니 거기에 대해 확신할 수 있는 증명을 가지고 오라. 만약 두 사람 중 누구라도 그 일을 해낸다면 명예에 추가해서 상금으로 40실링 값어치의 책을 주겠다"라고 제안했다고 회상했다. 그러나 핼리나 후크 두 사람 모두 렌의 도전을 받아들이지 않았고, 그것은 말로 끝나버리게 되었다.

 몇 개월 후 핼리는 케임브리지에 갔고, 거기서 아이작 뉴턴이라는 과학자를 방문했다. 핼리는 커피하우스에서 렌과 후크와 토론을 했던 것을 기억하면서 뉴턴에게 같은 질문을 했다. 혹성의 타원형 궤도는 중력에 대한 역제곱 법칙으로 만들어지는 것인지? 후크처럼 뉴턴도 이미 그것을 증명했다고 주장했다. 그렇지만 핼리가 증명을 요청했을 때 증거를 제시하지는 못했다. 그러나 핼리가 떠난 후 뉴턴은 이 문제를 해결하기 위해 집중했다. .그는 11월에 핼리에게 중력에 대한 역제곱 법칙이 정말로 행성의 타원형 궤도의 원인이라는 것을 증명하는 논문을 보냈다. 그러나 이 논문은 앞으로 다가올 엄청난 일의 맛보기에 불과했다. 핼리의 질문은 뉴턴에게 그가 오랜 시간 동안 작업한 결과들을 체계화할 필요성에 대한 원동력을 제공했고, 그리고 과학의 역사에서 가장 위대한 책들 중 하나이며 일반적으로 <원리Principia>라고 알려진 <자연철학의 수학적 원리 Philosophiae naturalis principia mathematica>라는 책이 탄생하게 되었다. 1687년에 출간된 이 기념비적인 작품은 (아마 지어낸 이야기일 듯한) 떨어지는 사과의 원리에서부터 행성의 궤도에 이르기까지 뉴턴이 발견한 만유인력의 법칙이 어떻게 지구와 천체의 움직임을 설명할 수 있는지를 보여준다. 드디어 뉴턴은 자신의 <원리>를 통해 그리스인의 신빙성 없는 이론들을 대체하면서 물리학의 새로운 토대를 확립했다. 그는 우주를 이성 앞으로 가져왔다. 그는 이러한 탁월한 공적으로 역사상 가장 위대한 과학자로 널리 인정받고 있다.

 후크는 자신이 몇 년 전에 뉴턴과 교환했던 편지에서 뉴턴에게 역제곱 법칙에 대한 아이디어를 제공했다고 주장했다. 그러나 후크는 1686년에 뉴턴이 <원리>의 제1권을 왕립학회에 제출한 이후에 다른 커피하우스에서 벌어진 토론에서 자신의 논리를 전개했지만 그는 동료 과학자들을 설득하는 데 성공하지 못했다. 커피하우스에서 아이디어를 전개하는 것과 그것이 옳다는 것을 정식으로 증명하는 것은 와전히 별개의 문제다. 후크는 자신의 아이디어를 출판하거나 왕립학회에 공식적으로 제출하지 못했다. 그는 누구보다도 먼저 모든 것을 이미 생각하고 있었다고 주장하는 것으로 유명했다. (실제로 많은 경우에 그는 그렇게 행동했었다) 핼리는 "커피하우스로 이동하며"라는 제목으로 뉴턴에게 다음과 같이 편지를 썼다. "미스터 후크는 그 커피하우스에서 그 아이디어는 자신의 것이었고, 그리고 자기가 자네에게 그 이론의 창안에 대한 최초의 힌트를 주었다고 주장하면서 사람들을 설득하려고 노력했다네. 그러나 자네가 창안자로 마땅하다는 것이 모두의 의견이라는 사실을 나는 알고 있네." 후크의 항의에도 불구하고 커피하우스에서 내린 평결은 오늘날까지도 유지되고 있다.

 

+ Recent posts