일본 최고의 헬스 트레이너(라고 한다.)인 저자가 중년 이후의 몸 관리를 위해서

식사를 어떻게 관리해야 하는가에 대해서 쓴 책.


주요한 문장은, '몸매 관리의 9할은 식사에 달려있으며, 운동은 1할정도밖에 되지 않는다.' 이다.


저자는 아래의 일본책 표지처럼 일본인처럼 생겼다.

일본어 책 제목은 「나이가 들면서 살빼기가 힘들어졌다」고 생각하는 사람일수록 성공하는, 

식사 10할(100%)로 대사(신진대사)를 올려라.

로 책의 내용을 아주 함축적으로 담고 있다.




전체 4개의 장으로 이루어져있고,

1장에서는 몸에 대해서 다루고 있으며, 20대와 40대를 비교하여 신진대사의 차이를 설명하고

신진대사를 올리는 식사와 낮추는 식사를 비교한다.

2장에서는 영양을 올리면서 체중을 줄일 수 있는(대사를 올리는) 식사법을 제시하며,

3장에서는 대표적인 잘못된 식사법들에 대해

그리고 마지막 4장은 실 사례를 통해 컨설팅한 예를 가지고 설명하고 있다.


주요 내용은 결국 양질의 단백질과 지방의 섭취를 늘이고, 당질류를 줄이라는 것이다.

또는 단백질을 충분히 늘리기 힘든 상황인 경우는 밥과 같은 양질의 탄수화물로 당질을 섭취하고 지방을 줄이는 

방법도 제시한다.(책에 왜 그런 조합이 나오는지에 대해서 설명한다.)


나이가 들어서 아무리 운동을 해도 살이 빠지지 않는다라거나 물만 먹어도 살이 찐다와 같은 느낌을 갖고 

있는 살빼기 힘든 사람들이 보면 도움이 될 내용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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당질과 지방을 같이 섭취하면 당질대사 모드가 우선되기 때문에 지방대사가 멈추고 대사되지 않는 지방까지 그대로

체내에 축적된다. '당질x지방'은 비만을 만드는 황금 콤비라는 사실을 기억해두자.

==> 삼겹살과 맥주(소주는 당질이 적긴 하지만 많이 먹으면 마찬가지), 삼겹살과 밥.. 이런 꿀조합이 안좋다는 뜻.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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고탄수화물 식사를 하는 경우에는 기본적으로 반드시 지방을 억제해야 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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상대론에 대해 공부를 하려는 중에 눈에 띄어 읽어봤다.

아인슈타인에 대한 아주 간략한 전기. 상대론과 양자역학에 대한 아인슈타인의 업적 역시 간략히 나와있다.

아인슈타인에 대한 입문서로 딱 좋을 내용.




인류의 미래에 위협요인이 되는 대표적인 3가지 - 핵, 바이러스, 탄소 - 에 대해 가상 시나리오와 함께 

현재의 문제점들을 간략하게 보여주는 내용.



핵은 특히 후쿠시마 원전폭발로 인한 프롤로그의 내용이 매우 디테일해서 후쿠시마 원전에서 일어났던 일을

자세히 알고 싶은 사람에게 꽤 도움이 될 내용이다.


교양으로 읽어두면 좋을 듯.


프랑스인의 시각에서 본 일본의 어두운 이면을 현실감 있게 그리고 있다. 르포작가인 레나 모제가 그의 남편이자 사진작가인

스테판 르멜과 5년에 걸쳐 일본 곳곳을 돌아다니며 인터뷰하고 조사한 내용으로 이루어져 있다.


일본인의 체면과 명예를 중요시하는 가치관, 그로 인해 실패와 실수를 용납하지 않는 경직된 사회분위기.

부락민이라는(과거 조선의 백정과 같은 천민계급) 막부시대의 계급적 차별이 아직까지 존재하는 현실.

1998년의 세계 경제위기, 2008년의 경제위기로 인해 타격받은 서민들의 삶.

그리고 2011년 동일본 대지진과 이로 인한 후쿠시마 원전폭발과 그 후 여기서 파생된 동일본 지역민들의 

어두운 삶의 단면들을 제3자의 입장에서 담담하게 담고 있다.


일본의 화려한 이면에 감춰진 부끄러운 속살이랄까? 그런 것들에 대해 쉽게 알 수 없던 사실을 알려주는

귀한 내용이다.


이 분 책중에 몸이 먼저다를 읽고 나서, 한 권 더 볼까해서 고른 책.

이런 류의 자기 계발 서적은 옆에 두면서 , 두고두고 보면서 계속 리마인드 해야 할 내용들이 많다.

한 권쯤 소장할 만한 책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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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인상 깊었던 내용들 발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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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절벽 가까이로 나를 부르셔서 다가갔습니다. 절벽 끝에 더 가가이 오라고 하셔서 더 다가갔습니다. 그랬더니 절벽에 겨우 발붙이고 서 있는 나를 절벽 아래로 밀어 버리시는 것이었습니다. 물론 나는 그 절벽 아래로 떨어졌습니다. 그런데 나는 그때까지 내가 날 수 있다는 사실을 몰랐습니다."

로버트 슐러의 말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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고전 저술가로 활발한 활동을 하는 고미숙 씨도 비슷한 고백을 한다. "내가 그 살벌한 무림에서 살아남을 수 있었던 건 무엇보다 텅 비어 있었기 때문이다. 아무것도 가진 것이 없었기에 나는 스펀지가 물을 흡수하듯 무조건 배우고 또 배웠다. 다른 사람 말에 열심히 귀를 기울였다. 공부를 위해서는 지식의 양보다 자신을 진정으로 비울 수 있느냐는 것이 중요하다. 배움에 있어 가장 불리한 것은 겸손을 가장한 자기비하. 이미 획득한 지식에 갇혀 새로운 흐름을 받아들이지 못하는 경직성이다. 지식의 양이 많건 적건 비움은 배움의 필수적 조건이다. 끊임없이 비울 수 있어야 큰 앎이 흘러들 수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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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지혜가 커지면 지식은 줄어든다. 구체적인 지식은 모두 원칙 속에 포함되기 때문이다. 중요한 지식은 그때그때 얻을 수 있지만 지혜를 얻기 위해서는 잘 알고 있는 원칙을 적극적으로 활용하는 습관이 필요하다." 알프레스 화이트헤드의 말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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고수는 몰입할 수 있어야 한다. "병사가 잊어야 할 세 가지가 있다. 전쟁에 나가라는 명령을 받고는 가정을 잊고, 싸움에 임해서는 부모를 잊고, 진격의 북소리를 듣고는 자신을 잊어야 한다." 사마천의 <사기>에 나오는 말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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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하는 일에 대해 생각하는 힘을 길러서는 안 된다. 오히려 정반대여야 한다. 문명은 무엇을 하는지 생각하지 않고 행동할 때 그리고 그런 횟수가 많아질 때 진보해 왔다." 위대한 철학자 화이트 헤드의 말이다. 매 순간 무언가를 의식하고 행동하면 너무 많은 에너지를 사용하게 된다. 무의식적인 나름의 의식이 필요하다. 좋은 습관과 이를 실천할 수 있는 루틴이 핵심이다. 매일 아침 뭔가를 하기로 결심한다면 그 자체로 이미 실패다. 억지로 하는 결심은 에너지를 빼앗기 때문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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나폴레온 힐 <놓치고 싶지 않은 나의 꿈 나의 인생>, 카네기 <인간관계론>, 치알디니 <설득의 심리학>.

글래드웰 <티핑포인트>- 임계점, <블링크>, <아웃라이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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고수들의 생각 정리법

생각의 탄생 인용

관찰->형상화->추상화(단순화)->패턴인식->패턴형성->유추->몸으로 생각하기->감정이입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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칼릴 지브란은 이런 말도 했다. "두 사람이 일체가 되더라도 그 속에 공간을 만들어 두어라." 또한 로버트 프로스트는 "좋은 담장이 좋은 이웃을 만든다"는 말을 남겼다. 가깝게 지내되 적당한 거리를 두어라. 끈끈함도 좋지만 느슨함을 유지하라. 인맥 형성에서 잊지 말아야 할 말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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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고독과 고립은 다르다. 고독은 의도적인 것이고 고립은 의도하지 않은 것이다. 물리적으로 혼자 있어도 다른 사람의 마음속에 살아 있고, 연결되어 있으면 고립된 사람이 아니다. 반대로 북적대는 사람들 속에 있어도 정신적으로 연결고리가 없으면 고립된 사람이다. "일이 잘 안 풀려 궁색할 때는 홀로 자기 몸을 닦는 데 힘쓰고, 일이 잘 풀릴 때는 세상에 나가 좋은 일을 하라." 窮卽獨善其身 遠卽兼善天下 맹자의 말이다. 일이 꼬이고 잘 풀리지 않을 때는 죽치고 혼자만의 시간을 가져야 한다. 혼자 산을 타면서 스스로를 들여다보아야 한다. 그러다 보면 해결책이 나온다. 일이 꼬이는 것은 쓸데없이 돌아다니면서 별 도움이 안 되는 사람을 만나 쓸데없는 얘기를 듣기 때문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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무라카미의 2번째 작품. 바람의 노래를 들어라와 시기적으로도 내용적으로도 이어진다.

아마도 무라카미 자신의 2가지의 반대적인 성향을 의미하는 주인공과 적은

이 소설에선 거의 접점 없이 각자의 이야기를 전개한다.


내용은 중편에 가깝다. 어렵진 않지만 그 내용의 구체성이 아직까진 내 마음속에 정리가 되지 않는다.


한 번 쯤 더 읽어봐야 할 듯 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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p18.


눈을 떴을 때 양 옆에 쌍둥이 자매가 누워 있었다.

=> 태엽감는 새에 쌍둥이 자매가 나온다. 그 자매의 원형일까?


아다치식의 동문서답의 형태. 일본 문학의 특징?


쌍둥이는 타인이 믿거나 인정하지 않는 나라는 존재의 진실. 자신은 

솔직히 이야기하고 있지만 선입견, 사회적 편견으로 인정하지 않거나 믿지 않는 뻔한 사실들.

마치 어머니도 한때는 방황하는 여자요 인간이라는 사실이 낯선 것처럼


p54.

그리고 여름 햇살이~빨려 들어갔다.

->

쥐의 특징. 여름이라는 청춘의 시기를 지나니 사라지는 신비한 광채. 나이 먹기를 거부하는 젊음의 패기가 사라진

아집과 욕망만이 남은 추한 모습. 혹은 젊음의 빛이 사라지고 그 빛을 다른 무언가로 채우지 못한 폐허의 스산함.


p58. 

전화국에서 배전반을 교체하러 온 사람


=> 주인공과 쌍둥이를 발견.

이해 관계와 선입견이 없는 완전히 낯선 타인이 나의 진실에 더 가깝게 접근이 가능.


p72. 

소년 시절 쥐는 ~ 아무 데도 없어 보였기 때문이다.

=>

성장기, 미래가 불안한 시기. 가장 위안이 되는 광경을 보기 위해 찾아간 등대. 다시 현실 세상으로 돌아올 때의 슬픔, 막막함, 두려움.


배전반의 장례식.

=> 세상의 알맹이가 업어진 형식만 남은 커뮤니케이션에 대한 조종을 울리다? 





몸이 전부다라는 책을 읽고 난 후 읽게 된 책.


저자는 경력이 특이한게, 공대를 다니고,유학가서 박사까지 딴 후 대기업 연구원으로 들어갔다가 경영 컨설턴트가 되기 위해

경영쪽으로 석사학위를 다시 받은 사람이다.


기업경영 컨설턴트를 업무를 하는 듯 하다.


이 책 외에도 꽤 많은 책을 쓴 사람이다.


우리가 사실 몸보다는 정신이나 지식을 추구하는 삶을 살아왔는데 그것이 얼마나 잘못된 생각인지에 대해서 이야기해준다.


건강한 정신은 건강한 몸에 깃든다라는 것은 만고의 진리이다.


좋은 내용.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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조지 쉬언 <달리기와 존재>


 


암(癌) : 한자를 보면 '입 구 口'가 세 개 있다. 세 개의 입으로 아무거나 산더미처럼 먹어서 오는 질병일나 의미이다.

=> 다른 해석도 가능하다, 인간의 신체에서 입처럼 입력이 되는 기관은 입(口), 눈(眼), 귀(耳)가 있다.

    입으로 나쁜 것들을 먹고, 눈으로 나쁜 것을 보고, 귀로 나쁜 것을 들어서 그것이 산처럼 쌓이면 몸에 병이 난다. 그것이 암.


(다른 블로그에서 찾아본 것)

입으로 하는 일이 세가지, 먹고, 마시고, 호흡하는 것. 나쁜 것을 먹고, 나쁜 것을 마시고, 나쁜 것을 호흡하여 그것이 산처럼 쌓이면 암이 걸린다.

마찬가지로 좋은 것을 먹고, 좋은 것을 마시고, 좋은 것을 호흡하면 그 암이 낫는다. 원인과 치료법이 이 한자에 다 들어가 있다.

(좋은 해석이다)



p132. 저녁시간을 확보하라.


 일주일쯤 지나자 회사생활에 회의가 들었다. 개인시간이 전혀 없었다. 시간이 지날수록 더 심해졌다. 회사에 내 인생을 올인해야만 했다.

평생 그렇게 살 자신이 없었다. 동료들에게 힘들지 않느냐고 물어봤더니 의외의 답이 돌아왔다. "집에 가면 뭐해요. 오히려 회사에 있는게

편해요." 사람들은 이미 그런 생활에 익숙해진 상태였다. 위로 올라갈수록 증세는 심했다. 다들 회사에 오래 남아 있는 걸 힘들어하지 않고

오히려 즐기는 분위기였다. 난 달랐다. 정시에 퇴근했다. 작년 그 회사 임원들에게 강의를 했는데 예전의 부하직원이 이런 말을 했다. "이사님

하면 한가지가 기억나요." 뭐냐고 물어보자, "오후 6시가 되면 열쇠를 돌리면서 휘바람을 불면서 퇴근하는 모습이요"라고 말했다. 그만큼

그들에겐 임원의 정시퇴근이 낯설어 보였던 거다.


 임원이 된 후 일산으로 이사를 갔다. 본사는 부평이었다. 출근이 문제였다. 당시는 행주대교 입구에 병목현상이 심했다. 오전 6시10분 정도가

임계점으로, 그 전에는 소통이 원활했다. 이후는 1분에 수십 대씩 차량이 몰렸다. 6시 반쯤 되면 거기를 통과하는 데 이삼십 분이 걸렸다.

할 수 없이 새벽에 출근했다. 김밥을 한 줄 싸서 눈만 뜨면 나왔다. 회사 앞 사우나에서 목욕하고 6시 반쯤 출근했다. 24시간 가동 중인 공장을

한 바퀴 돌고, 밀린 결재를 하고, 직원 면담하고, 회의할 것 하고, 온갖 것을 다 처리해도 점심 전이었다. 오후가 되면 할 일이 별로 없었다.

퇴근시간까지 기다리는 것도 고역이었다. 물론 노사문제나 중요한 회의가 있을 때는 달랐다. 그런데 상사는 그걸 못마땅해했다. 말로는 

자유롭게 근무하라고 했지만 실제로는 은근히 압박했다. 회사생활은 재미있었다. 배우는 것도 많았다. 사람들 만나는 것도 좋았다. 하지만 

비효율성은 정말 싫었다. 쓸데없이 오래까지 사람을 잡아두는 문화가 너무 싫었다. 그 회사는 지금 외국인 손에 넘어갔고 현재는 다들 칼퇴근을

한다.


 한국인은 열심히 일한다고 한다. 내 생각은 다르다. 열심히 일하는 게 아니고 '오래' 일한다. 좋은 회사는 근무시간에 관한 간섭이 없다. 얘들도

아니고 성인인데 알아서 하는 거다. 그래도 직원들은 자기가 알아서 업무에 올인한다. 나쁜 회사는 근무시간만 엄청 길다. 몸만 회사에 있지 

업무에 몰입하지 못한다. 아니, 안 한다. 몰입을 하나 안 하나 별 차이가 없는데 무엇 때문에 그 긴 시간 집중해서 일하겠는가?


 매력적인 회사를 만들기 위해서는 경영진들이 생각을 바꾸어야 한다. 일은 근무시간에만 하는 것이란 사실을 분명히 해야 한다.

쓸데없이 야근하는 사람들에게 오히려 불이익을 주어야 한다. 오래 일하는 사람이 충성스럽고 일 잘하라는 사람이라는 생각을 버려야 한다.

그들에게 잃어버린 저녁을 돌려주어야 한다. 내가 바라는 대한민국 직장의 모습이다.



=> 할일 없이 일을 질질 늘여가면서 회사에 오래 남고, 주말에도 별일 없이 회사에 나와서 서성거리며 회사밥을 축내고.

하지만, 실제의 세상은 이런 사람들이 더 오래 회사에서 살아남고 더 위로 올라가는 것이 일상적이다. 그것은 결국 누구도 회사에서

내가 주인이라는 의식이 없기 때문인 면도 있고, 리더의 위치와 오너의 위치에 있는 사람들이 아래 사람들을 동료가 아니라 아랫사람으로

여기기 때문인 면이 크다. 의식이 깨임이 없이는 그 어떤 물리적인 외연적 확장도 심리와 정신적인 내연적 확장이 불가능하다.

대부분의 회사가 엄청난 노력과 의지, 그리고 인적 자원의 효율적 사용과 격변하는 사업환경과 같은 온갖 우여곡절을 겪고 1류기업이 되어도

거기서 다시 초일류기업으로 도약하여 확고한 지위를 유지하는 것은 이러한 의식의 개혁이 이루어지지 못해서 인 경우가 허다하다.



토니 슈어츠 <무엇이 우리의 성과를 방해하는가>


베르나르 올리비에 <나는 걷는다>


박용철 <감정은 습관이다> 





이 책을 처음 보면서 든 느낌은, 웬 의사가 왜 이리 글을 잘 써? 였다.

저자인 폴 칼라티니는 1977년생으로(2015년 우리 나이로 39살, 만일 암에 걸리지 않았으면, 

레지던트를 마치고, 스탠포드 대학병원에서 신경외과 외래와 연구교수직을 맡았을 한 마디로 이제부터

인생의 고생이 다 끝나고 창창한 앞날이 바로 펼쳐질 그 순간에 닥친 일이다.)

책의 맨 뒤 사진과 책의 내용을 보니 인도계 미국인으로 보인다.


스탠포드에서 영문학 석사학위를 받았으며, 영문학 교수가 될 꿈도 꾸었으나 문학,철학,과학,생물학등

여러 방면에 가지고 있던 관심을 충족시킬 수 있는 의대를 택하여 의사의 길을 걸었다.


이 책은 오바마 대통령이 휴가에서 읽고 추천을 한 것으로 이슈가 되었다고 들었으나, 책을 보면 그런 추천이

없었어도 확실히 뜰 수 밖에 없는 책이라고 느껴진다.


인생의 최정점을 바로 눈 앞에 두고 자신이 가장 잘아는 암에 걸린 이후, 겪는 고뇌, 일상의 변화, 인생에대한 반추,

존재에 대한 성찰, 가족의 소중함, 새로운 생명 탄생에 대한 경이와 기쁨, 담담히 죽음을 받아들이는 모습등이

짧지도 길지도 않은 분량에 밤하늘에 뿌려진 별과 같이 반짝거리며 녹아있다.


지하철에서 이 책의 말엽을 보게 되었는데, 병세가 악화되면서 시작되는 책의 말미와, 

더 이상 그 뒤의 내용을 자신이 잇지 못할 때, 부인이자 그의 평생의 동반자였던

루시가 써내려간 에필로그는 눈시울을 붉어져, 황망히 책장을 덮고 눈을 감으며 마음을 추스릴 수 밖에 없었다.


타인의 죽음을 통해 나의 생의 소중함을 느끼는 것은 죄스럽고 미안한 마음이 들지만, 저자는 그것까지 예상하듯

독자를 따스하게 품어주는 글귀들을 이 책 곳곳에 남겨놓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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프롤로그의 서문)


죽음 속에서 삶이 무엇인지 찾으려 하는 자는

그것이 한때 숨결이었던 바람이란 걸 알게 된다.

새로운 이름은 아직 알려지지 않았고,

오래된 이름은 이미 사라졌다.

세월은 육신을 쓰러뜨리지만, 영혼은 죽지 않았다.

독자여! 생전에 서둘러

영원으로 발길을 들여놓으나.


-브루크 풀크 그레빌 남작 <카엘리카 소네트 83번>-


=> 책의 서문은 매우 중요하다. 저자는 서문을 그냥 멋으로 쓰는 것이 아니다. 서문의 짧은 몇 줄의 문장으로 이 책에서 저자가

이야기하려는 관통하는 주제가 무엇인가를 독자에게 보여주려고 한다.


이 서문은 인생의 허무함속에 영속하는 인간의 존재에 대한 통찰을 보여주고 있다.

(이 풀크 그레빌이라는 이의 시집은 국내에 번역된 것이 없다. 한 번 보고 싶은데 말이다.)


이 글을 보니 내가 좋아하는 에머슨의 다음과 같은 시의 귀절이 생각난다.


잠은 잠이 아니고, 죽음도 죽음이 아니다.

죽은 것 같은 사람도 살아 있으니, 내가 태어난 집과 소꿉친구들, 노인들, 아가씨들.

하루의 수고와 그 보상마저도, 언젠가는 사라지는 허망한 이야기일 뿐.

그 어느 것도 머물지 않으니.

-랠프 월도 에머슨-


김어준이 쓰던 표현으로 하자면, 인생 뭐 있냐? 좃도 없어. 쫄지마 씨바.. 이런 이야기다.

(좀 더 성스러운 표현으로 하자면, 천국이 가까웠으니, 회개하라!도 비슷한 뉘앙스다)



1장의 서문)


주님의 손이 나에게 내리셨다.

그분께서 주님의 영으로 나를 데리고 나가시어,

넓은 계곡 한가운데에 내려놓으셨다.

그곳은 뼈로 가득 차 있었다.

그분께서는 나를 그 뼈들 사이로 두루 돌아다니게 하셨다.

그 넓은 계곡 바닥에는 뼈가 대단히 많았는데,

그것들은 바싹 말라 있었다.

그분께서 내게 말씀하셨다.

"사람의 아들아, 이 뼈들이 살아날 수 있겠느냐?"


-에제키엘서 37장 1~3절-


=> 이 이후의 내용을 보면 이 구절이 인용하는 당시의 저자의 마음이 어느 정도 이해가 된다.


이후의 내용)

내가 "주 하느님, 당신께서 아십니다."하고 대답하자,

그분께서 또 나에게 말씀하셨다. 

"이 뼈들에게 예언하여라. 이렇게 말하여라. '너희 마른 뼈들아, 주님의 말을 들어라

주 하느님이 뼈들에게 이렇게 말한다. 나 이제 너희이게 숨을 불어넣어 너희가 살아나게 하겠다.


=> 저자는 기독교 집안에서 태어나서(인도계가 아닌가?) 어릴때부터 교회를 다녔지만 과학에 관심을 가지면서

신에 대한 회의로 종교에서 멀어지게 되었다. 하지만, 암에 걸리고 죽음을 앞두고서는 신과 종교에 대해 관점을

바꾼다.(이 부분이 약간 미묘한데, 책에 내용에 나오니 그 부분에서 다시 이야기하겠지만, 그는 신의 존재를 믿는다라는

관점보다는 인간적인 면에서 신을 믿는 것이 낫다?.. 어렵다. 다시 그 부분에서 이야기해야겠다.)


이 부분에서는 죽음을 앞둔 그가 하느님께 절실하게 무언가를 갈구하는 그런 마음이 느껴진다.


p200~


 대학 입학 이후 오랫동안 하느님과 예수에 대한 내 생각은 점잖게 말하자면 좀 심드렁했다. 철저한 무신론자였던 시절, 나는

경험적 근거가 없다는 논리로 기독교 신앙을 공격했다. 기독교의 가르침보다는 계몽된 이성이 더 논리 정연한 우주를 보여주었다.

(중략)


 비록 나는 밤마다 기도하고 성경을 읽는 독실한 기독교 집안에서 자랐지만, 과학 연구에 종사하는 사람들 대부분이 그렇듯 신이나

영혼, 긴 옷을 입고 흰 피부에 수염을 기른 남자 같은 구시대적인 개념을 배제한, 완벽한 형이상학을 완성해줄 궁극의 과학적인 세계관,

물질적인 개념의 현실이 가능하다고 믿게 되었다. 나는 이십 대의 많은 시간을 이런 생각의 틀을 짜는 데 바쳤다. 하지만 결국 문제가

분명하게 드러났다. 과학을 형이상학의 결정권자로 보면 세상에서 신뿐만 아니라 사랑, 증오,의미도 함께 사라져버리고, 이런 의미가 

모두 사라진 세상은 결코 우리가 살고 있는 이 세상이라 할 수 없다. 그렇다고 인생의 의미를 믿으면 반드시 신도 믿어야 한다는 뜻은

아니다. 하지만 과학이 신에 대해 어떤 근거도 제공할 수 없다면, 마찬가지로 인생의 의미에 대한 근거도 마련해주지 못할 것이다.

그리고 결국은 인생 자체에 아무런 의미도 없다는 결론에 다다를 것이다. 다시 말해, 실존적 주장은 아무런 무게도 지니지 못하게 되고

과학적 지식이 곧 모든 지식이 되어버리고 만다.


 하지만 역설적이게도 과학방법론은 인간이 만든 산물이기에 영원불변의 진리에 도달할 수 없다. 우리는 세상을 체계적으로 정리하고 

손쉽게 조작하기 위해, 현상을 다루기 쉬운 단위들로 축소하기 위해 과학 이론을 만든다. 과학은 재현 가능성과 인위적인 객관성에

기반을 둔다. 그래서 물질과 에너지에 대해 이런저런 주장을 내세울 때는 탁월하지만, 고유하고 주관적이며 예측할 수 없는 인생의 

실존적이고 본능적인 성질에 과학 지식을 적용하는 건 불가능하다.

 

 과학은 경험적이고 재현 가능한 정보를 체계화하는 데 가장 유용한 방식일지도 모르지만, 그러한 과학의 능력은 역설적으로 인생의

가장 중심적인 측면들(희망, 두려움, 사랑, 증오, 아름다움, 질투, 명예, 나약함, 부단한 노력, 고통, 미덕)을 포착하지 못하는 데서

비롯된다.

(중략)


 많은 무신론자들이 즐겨 인용하는, 노벨상 수상자이자 프랑스 생물학자인 자크 모노의 말은 이런 계시적인 측면과 상충된다. 

"고대의 계약은 산산조각났다. 인간은 우연히 생겨난 우주라는 냉혹한 광대무변함 속에 가지 혼자라는 사실을 마침내 알게 되었다."

(중략)


 나는 예수가 전하려던 주된 메시지는 자비가 항상 정의를 이긴다는 것이라고 믿었다.

(중략)


 또한 원죄의 기본적인 메시지는 "늘 죄책감을 느끼라"는 것이 아니다. 그보다는 이런 맥락일 것이다. "우리 모두는 선하다는 게

어떤 의미인지 알고 있지만, 항상 거기에 맞춰 살지는 못한다." 결국 이것이 신약성경의 메시지이다. 설사 당신이 구약성경의

<레위기>를 잘 안다 해도 그대로 따르며 살 수는 없다. 불가능할 뿐만 아니라 어리석은 일이다.


=> 길지 않은 분량이지만, 저자의 인생 전반에 걸쳐 믿음에 대한 가치관, 생각등의 변화에 대해 이야기하고 있고 음미할 만하다.


p204


 결국 우리 각자는 커다란 그림의 일부만 볼 수 있을 뿐이다. 의사가 한 조각, 환자가 다른 조각, 기술자가 세 번째, 경제학자가

네 번째, 진주를 캐는 잠수부가 다섯 번째, 알코올 중독자가 여섯 번째, 유선방송 기사가 일곱 번째, 목양업자가 여덟 번째, 인도의

거지가 아홉 번째, 목사가 열 번째 조각을 보는 것이다. 인류의 지식은 한 사람 안에 담을 수 없다. 그것은 우리가 서로 맺는 관계와

세상과 맺는 관계에서 생성되며, 결코 완성되지 않는다. 그리고 궁극적인 진리는 이 모든 지식 위 어딘가에 있다.


 씨 뿌리는 이가 수확하는 이와 함께 기뻐하게 되었다. 과연 "씨뿌리는 이가 다르고 수확하는 이가 다르다."는 말이 옳다. 

 나는 너희가 애쓰지 않은 것을 수확하라고 너희를 보냈다. 사실 수고는 다른 이들이 하였는데, 너희가 그 수고의 열매를 

 거두는 것이다.


=> 이 책의 내용중 가장 마음에 드는 부분 중 하나다.


p214

(아직 갓난 아기인 딸 케이디에게 보내는 폴의 마지막 인사,,,, 눈물이 앞을 가려서 몇 줄 되지 않는 문장을 읽는데 힘이 들었다.)


 네가 어떻게 살아왔는지, 무슨 일을 했는지, 세상에 어떤 의미 있는 일을 했는지 설명해야 하는 순간이 온다면, 바라건대

네가 죽어가는 아빠의 나날을 충만한 기쁨으로 채워줬음을 빼놓지 말았으면 좋겠구나. 아빠가 평생 느껴보지 못한 기쁨

이었고, 그로 인해 아빠는 이제 더 많은 것을 바라지 않고 만족하며 편히 쉴 수 있게 되었단다. 지금 이 순간, 그건 내게

정말로 엄청난 일이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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장작의 불꽃은 사그라들기 직전에 가장 밝게 타오른다고 한다. 저 밑바닥 침묵과 고요의 심연에 놓여있던 신비한 영혼의 속삭임이

이 밝음에 의해 잠시나마 드러났다가 이 세상에서 사라져갔음에 감사한다.






사회적 인간으로 살아가면서 사람에게 가장 중요한 하루하루의 문제는 무엇을 하느냐(Doing)의 문제이다.

그러나 실제로 인간이 주체로 살아가기 위해서는 어떻게 살아가느냐(Being)가 중요하다.


이 책은 책의 말엽에서 저자가 썼듯이 Doing에 의해 지친 몸과 마음을 추스려 Being의 중요성을 깨닫고 

자기 자신을 찾는 것이야말로 최고의 휴식이 된다는 것을 이야기하고 있다.


책의 구성은 가상의 인물들로 롤플레잉을 진행하면서 저자의 의도를 드러내는 형식을 취하는데(내가 제일 싫어하는)

그런 형식이 빠지기 쉬운 인위적 어색함이 많이는 느껴지지 않아서 그럭저럭 읽을만했다.


명상, 선이라는 동양적이며 추상적일 수 있는 것을 서양적 합리성과 신체와 뇌에 미치는 구체적 작용으로 전환하여

내용을 이해하는데 많은 도움을 받을 수 있다.







원제인 風の歌を聴け를 그대로 직역한 무라카미 하루키의 첫 작품이다.


이 책의 서문에도 밝히고 있고, 여기저기 무라카미 하루키에 관련된 에피소드에서 단골로 등장하듯이 그가 29살때 메이지 진구구장에서 맥주를 마시며, 프로야구 경기를 보고 있을 때 문득 나를 위한 글을 써야겠다는 생각이 떠올라, 그때부터 당시 경영하던 카페가 문을 닫은 후 새벽시간에 카페에 앉아서 소설을 썼고, 그것을 군조에 응모하여 신인상을 받았던 바로 그 소설이다.


첫 작품인 만큼 그 후에 그가 선보인 여러가지 작품에 비해서 구성, 내용등에 있어서 빈약한 느낌을 주는 것은 사실이지만, 문장속에서 드문드문 그만의 언어들이 드러나 보이는 것을 발견 할 수 있다.


이 소설은 29살의 작가가 21살의 자기의 젊은 시절을 회상하며 그린 작품이라고 해석된다.


주인공은 21살의 나(책의 딱 한 부분에서 주인공의 이름이 나온다. 제로라고). 그리고 그의 친구 쥐.

나는 도쿄에서 대학을 다니며 생물학을 전공하고 있고, 그의 친구는 대학을 다니다 자퇴를 한 상태다.


이 소설의 배경은 이 둘의 고향인 바닷가 마을로 나오는데, 무라카미의 고향은  芦屋市(아시야시)라고 고베와 오사카의 중간쯤에 위치한 바닷가 마을이다.  


소설의 전체적인 분위기는 한 여름 조용한 바닷가 마을의 고즈넉함과 열기, 간혹 내리는 소나기같은 것들이 어우러진 싱그러움을 품고 있지만, 젊은 청춘의 주인공들의 대사는 젊음의 현실에 대한 알수 없는 짜증과 번뇌를 드러내고 있다.


주인공이 나와 친구 쥐는 사실상 무라카미 하루키 자신의 2가지 양태를 반영하는 것으로 보인다.


나는 현실이 어느정도 짜증나기도 하고 번거롭기도 하지만 그런데로 그 토대위에서 자신의 힘으로 서려고 하는 젊음을 의미하고,

쥐는 그런 현실에서 완전히 도피해서 이상향을 찾고자 하는 나약한 이상주의자의 모습을 보여주고 있다.


이러한 추정은 책의 내용으로부터 추측되는 것으로, 대표적으로 쥐가 쓰는 소설은 섹스가 등장하지 않고 사람이 죽지 않는 2가지 큰 특징을 계속 유지한다는 묘사가 있는데, 이것은 바꿔 말하면 현실처럼 시간이 흐르는 것을 거부하고, 인간의 원초적 욕망으로서의 섹스를 거부하는 이상주의 혹은 부적응자의 모습을 보여준다.


또한 쥐의 아버지에 대한 묘사에서는 전후 일본을 부흥시킨 기성세대에 대해 경제적 부흥을 일으켰을진 모르나, 그 경제적 부흥의 이면에 숨어있는 부도덕성과 인간에 대한 기본적인 예의같은 것들에 대한 멸시에 대한 것을 통해 기성세대에 대한 부정적 이미지를 보여주고 있다.(사실 이건 젊은 시절의 하나의 특질이기도 하다)


그의 첫소설이니만큼 글을 쓴다는 것에 대한 고심이랄까, 젊은 시절의 고민같은 부분이 많이 묻어난다.


1. 

그러나 정직하게 얘기하는 것은 여간 어려운 일이 아니다. 내가 정직해지려고 하면 할수록 정확한 언어는 어둠 속 깊은 곳으로 가라앉아 버린다.

=> 언어의 한계라고 할까, 아니면 사유의 한계라고 할까. 이러한 느낌은 글을 쓰면 쓸수록 더욱더 답답해지는 그런 주제중 하나이다. 무언가 내게 확실하다고 생각되었던 것들, 계시와 같이 명징한 사항들을 글로 표현하려고 하면 도리어 그 광채와 확실성을 잃고 언어의 모호성에 사로잡히고 마는 그러한 경험들..



잘만 되면 먼 훗날에, 몇 년이나 몇십 년 뒤에 구원받은 자신을 발견할 수 있을지도 모른다 말이다. 그리고 그때가 되면 코끼리는 평원으로 돌아가고, 나는 더 아름다운 말로 세계를 이야기하기 시작할 것이다.

=> 그가 단편집 회전목마위에서 데드히트에서 이야기했듯이, 초기에 이런 나이브한 생각은 나이가 들수록 점점 부정적인 견해로 바뀐 듯 하다.


만약 당신이 진정한 예술이나 문학을 원한다면 그리스 사람이 쓴 책을 읽으면 된다. 참다운 예술이 탄생하기 위해서는 노예 제도가 꼭 필요하기 때문이다. 고대 그리스에서는 노예가 밭을 갈고 식사를 준비하고 배를 젓는 동안, 시민은 지중해의 태양 아래서 시작(詩作)에 전념하고 수학과 씨름했다. 예술이란 그런 것이다.

 모두가 잠든 새벽 세 시에 부엌의 냉장고를 뒤지는 사람은 이 정도의 글밖에는 쓸 수 없다. 

 그게 바로 나다.

=> 약간은 비틀은 듯한데, 그리스의 문학, 이상적인 내용 그리고 사회적인 계몽을 위해서 쓴 그런 내용따위엔 관심없다. 나는 찌질한 나의 현실의 기반위에서 찌질하더라도 나의 글을 쓸거다라는 그런 느낌이다.


7. 

"옛날 옛날에 아주 마음씨 착한 산양이 살고 있었단다."

 멋진 첫마디였다. 나는 눈을 감고 마음씨가 착한 산양을 상상해 보았다.

 "산양은 항상 무거운 금시계를 목에 걸고 헉헉거리며 돌아다녔지. 그런데 그 시계는 너무 무거운 데다가 고장이 나서 움직이지도 않았어. 그래서 친구인 토끼는 이렇게 물었지. '이봐, 산양. 왜 자네는 자기도 않는 시계를 늘 목에 매달고 다니는 건가? 무겁기만 하고 아무 쓸모도 없는 걸 말이야." 산양은 '그야 물론 무겁지. 하지만 익숙해졌거든. 시계가 무거운 것에도, 움직이지 않는 것에도 말이야' 하고 대답했지"

=> 산양이란 존재는 시지푸스를 생각나게 한다. 올려도 올려도 다시 내려오는 돌을 영원히 다시 굴러올리는 영원한 허무의 챗바퀴를 도는.


"네가 산양이고 내가 토끼, 그리고 시계는 네 마음이란다."

=> 주인공은 시지푸스, 의사는 약삭빠른 세상, 시계는 허무함으로 가득찬 마음.


30. 

고등학교를 졸업할 무렵에 나는 마음속의 생각을 절반만 입 밖으로 내야겠다고 결심했다. 이유는 잊어버렸지만 나는 몇 년 동안 그 결심을 실행했다. 이유는 잊어버렸지만 나는 몇 년 동안 그 결심을 실행했다. 그러다가 어느 날, 나는 나 자신이 생각한 것을 절반밖에 얘기하지 못하는 인간이 되어버린 사실을 발견했다. 

 그것이 쿨한 것과 어떤 관계가 있는지는 잘 모른다. 그러나 1년 내내 서리제거제를 넣어주어야 하는 구식 냉장고를 쿨하다고 부슬 수 있다면, 나 또한 그렇다.

=> 자기 꾀에 자기가 넘어가는. 자기의 의지로 살아가고 있다고 생각하지만 결국은 환경의 제약을 받는 나약한 인간.


31. 

그리고 이렇게 생각하지. 매미나 개구리, 거미, 그리고 여름 풀이나 바람을 위해서 뭔가를 쓸 수 있다면 얼마나 멋질까 하고 말이야.

=> 세상에 있는 가장 구체적인 것, 그러나 우리의 눈에 잘 띄지 않는 하찮은 것. 그러나 그 무엇보다 중요한 것. 우리가 잃어버린 파라다이스에 대해 쓰고 싶다는 욕망을 표현하지만 그것이 쉽지 않으리라는 것을 예감한다.




하지만, 잘 생각해 보라구. 조건은 모두 같아. 고장난 비행기에 함께 탄 것처럼 말이야. 물론 운이 좋은 녀석도 있고 나쁜 녀석도 있겠지. 터프한 녀석이 있는가 하면 나약한 녀석도 있을 테고, 부자고 있고 가난뱅이도 있을 거야. 하지만 남들보다 월등히 강한 녀석은 아무 데도 없다구. 모두 같은 거야. 무엇인가를 가지고 있는 자는 언젠가는 그것을 잃어버리지 않을까 겁을 집어먹고 있고, 아무것도 갖지 못한 자는 영원히 아무것도 가질 수 없는 게 아닐까 걱정하고 있지. 모두 마찬가지야. 그러니까 빨리 그걸 깨달은 사람은 아주 조금이라도 강해지려고 노력해야 해. 시늉만이라도 좋아. 안 그래? 강한 인간 따윈 어디에도 없다고. 강한 척할 수 있는 인간이 있을 뿐이야.

=> 어차피 다 죽는 인간. 그 냉혹한 진리위에서 그래도 발버둥이라도 치고 가야지. 안그래? 인터스텔라에서 나왔던 딜런 토마스의 시와 일맥상통한다.




34.

그러나 만일 우기가 1년 내내 쉴 새 없이 지껄여대면서 그것도 진실만 말한다며, 진실의 가치는 없어져 버릴지도 모른다.

=> 이 문장을 보고 든 생각은, 진실이 그 자체로 가치나 의미가 없거나 적을때 우리는 그것을 감추거나 부풀리기 위해 거짓으로 진실을 포장하기도 한다라는 것이다.


진실의 과잉. 세상에 가치가 있는 것은 그것이 진정 소중한 것이거나 희귀해서이다. 결국 가치가 있다는 의미는 희귀한 것이라는 의미이다.



35.

"사람은 왜 죽는걸까?"


"진화하기 때문이지. 개체는 진화의 에너지를 견뎌낼 수 없어서 세대교체를 하거든. 물론, 이건 하나의 가설에 지나지 않지만 말이야."

=> 아담과 이브가 선악과를 따먹지 않았다면 신도 인류도 없었을 것이다. 아직도 이 지구에는 아담과 이브만이 아무런 수치심도 욕망도 그리고 의지도 없이 순수함만을 간직한 채 충실감만이 가득한 아름다운 세상에서 영원을 향유하며 살아가고 있었을 것이다. 말 그대로 그것은 영원한 순수의 시대라 할 수 있었을 것이다.



마지막 문장은 젊음의 치기이긴 하나 그것이 항상 빛나는 이유를 드러내 준다고 보인다.


40.

그의 묘비에는 유언에 따라 다음과 같은 니체의 말이 인용되어 있다.


"한낮의 빛이 밤의 어둠의 깊이를 어찌 알겠는가?"



과연 무라카미 답다고 해야 할까? 거장의 첫 작품으로서 모자람이 없다는 느낌이다.


위대하다고 하는(소위 요즘 핫하다는 유명인들, 위대까지는 모르겠지만, 세속적인 관점에서 현재 미국,유럽,아시아에서 성공한)

인물을 보통 거인이라 해서 타이탄으로 표현한다. 저자가 타이탄으로 꼽는 인물들의 성공비결에 대해서 핵심적인 요소를

뽑아서 소개한 책이다.


그런데 저자의 글솜씨가 빼어난 덕분인지 꽤 책의 내용이 좋다. 사실 이런 책들은 매우 뻔한 내용일 수 있는데

그런 뻔한 내용속에서도 무엇인가 반짝거리는 진실이 보인다.


평점은 별5개중의 4개.



어린 시절부터 뚱뚱했던 몸이 컴플렉스였던 저자가 40대 중반을 넘어서면서 계속 찌는 살로 고민하던중,

딸아이의 "아빠, 뱃살 좀 빼지?"라는 말에 자극되어 시작된 운동과 이것을 계기로 몸짱 식스팩으로 거듭나기까지의

과정중에 깨달은 것들과 에피소드에 대한 내용이다.(사실 교보문고에서도 건강으로 분류되어 있긴 한데, 자기계발에 가깝다)


제대로 된 운동을 위해 PT를 신청하고, 6개월간의 기간동안 제대로 된 운동과 식이요법으로 책에도 나와있는 멋진 몸매로

프로필 사진을 찍었다는 자체로도 신선한 자극이 된다.


책의 내용은 그러한 노력으로 몸이 변화한 후에 오는 것들은 저자의 관점에서 정리한 것이지만, 상식적으로도 수긍이

가는 것들이 많이 있다. 


4장에서 목표의 시각화와 시각화된 목표를 달성하기 위한 피나는 노력, 그리고 그 힘든 노력을 계속 유지할 수 있는

긍정적인 피드백에 대한 내용이 좋았으며, 5장에서도 비우는 삶, 몸의 중요성, 계획과 실천, 그리고 루틴의 중요성등이

기억에 남는다.


책의 말미 대학에 나오는 수신(修身)이라는 말로 끝맺음을 하는 것도 인상적이다.


이 책의 모티브가 되는 한근태 박사의 '몸이 먼저다'는 이 책을 보고 나니 꼭 봐야 할 것 같다.(알고보니 베스트셀러다)

칼 비테에 대한 책을 보려던 중 마침 이지성 작가가 이 주제로 새책을 내놨기에 보게 된 책.

칼비테-페스탈로찌-프뢰벨로 이어지는 유럽의 근대 교육의 계보를 처음 알게 됐다.

책의 내용은 아마 칼 비테 교육법의 핵심적인 방향 정도만을 제시하는데 그치지 않았나싶다.

아이를 제대로 교육시키기 위해서는 무엇보다도 부모의 관심과 노력이 중요하다는 것이 이 책의 핵심이다.


아버지는 돈을 벌어다 주고, 그 돈으로 엄마는 아이를 하루종일 학원으로 돌리는 그따위 교육으로는

앞으로의 세상에서 아이의 밝은 미래란 존재하지 않을 것이라는 것이 나의 생각이다.

실제 내가 50이 되서, 회사를 나와보니 처음엔 시간 자체가 주체가 되질 않는 면이 있었다.

또한 갑자기 일을 놓는데서 오는 불안감같은 것도. 내가 생각해서 자발적으로(완전히라고 얘기하기에는

좀 애매한 면도 있지만) 회사를 나왔어도 이런데, 만일 짤리거나 연한이 차서 정년 퇴직을 하는 경우에는

그 정신적 압박감이 대단할 듯 하다.

이 책은 1935년생인 저자가 2011년에 쓴 책으로 계산해보면 76에 쓴 책이다.

원제는 55歳からの一番楽しい人生の見つけ方 - 55부터 가장 즐거운 인생을 찾는 방법이다.

말 그대로 정년 퇴직을 한 중장년을 대상으로 은퇴를 한 사람(주로 남자의 입장에서 쓰여져있다.)이

어떻게 은퇴후의 가족과 지역사회로의 인생에서 즐거움을 찾아갈것이냐에 대해 다루고 있다.

필자 자신이 이미 겪은 경험을 위주로 책을 저술했기 때문에 많은 부분 공감이 간다.

이 책은 중고로 구입을 했는데, 지금 현재는 절판된 도서이다. 굳이 소장할 필요까지는 없으니

도서관에서 빌려보면 될 듯.


상식적이지만 굉장히 강력한 돈 모으는 방법에 대한 정석이 무엇인지를 여실히 보여주는 책이다.

제대로 된 수입원이 있는 사람에게는 이 사람의 방법대로만 하면 10년 정도면 어느 정도의 소득자산을

보유하는 것이 가능하리라 생각한다.


이 책을 보고 개인연금, 변액연금 등 사업비가 들어가는 모든 금융상품이 쓰레기라는 것만 깨달아도 

그 자체로 개이득이다.

자산관리의 정석을 보여주며, 부록에 있는 자산관리에 대한 몇 가지 checklist도 매우 가치가 있다.


현직 MBC PD인 저자의 영어회화 정복기에 대한 개인적인 경험에 대해서 쓴 자기계발서라기보단 에세이집.

영어든, 수학이든 과학이든 모든 공부의 기본은 암기다라는 것을 다시 한 번 일깨워주는 책.

책의 내용은 좋고 일독의 가치가 충분하다.



도올 선생께선 사실 글을 쉽게 접할 수 있게 쓰시진 않는다. 특히 용어적인 부분에서 한학자이시다보니

한자용어가 꽤 나오는 편이며 사서삼경을 배웠을리가 없는 일반인들이 대하기에는 이해가 안되는 용어도 꽤 있는

편이다. 그리고 문체는 현대적이라고 보기엔 힘들고 어느 정도는 올드하다고 봐야할 것이다.

그래도 다른 책들에 비해선 사랑하지 말자, 중국일기, 시진핑을 말한다(이건 차이나는 클라스에서 강의하신 내용을

기본으로 저술하신 책)와 같은 수필 및 역사서는 노자,맹자,논어,중용보다는 훨씬 재밋고 읽기가 쉽다.


계림수필은 자택에서 키우기 시작한 닭(봉혜)을 관찰하시면서 느끼는 일상의 감상과, 당시의 정치적 현황, 그리고

한학을 공부하시면서 떠오르는 생각들로 집필한 내용이다.


도올 선생의 일상적인 생각들을 접할 수 있는 얼마 안되는 중요한 편린이 모여있는 책이라, 선생을 좋아하는 이들에게는

추천하고 싶다. 






경제와 부동산에 대해서 상대적으로 비관적인 전망을 내놓는다는 인상을 주는 선대인이

일의 미래라는 주제로 집필한 내용이다.

주로 이 사람이 부동산 전망에 대해서는 대세 하락이라는 포지셔닝을 취하는 것은 장기적으로는

신뢰성이 높은 예측이며, 우리와 10~20년의 시차를 두고 앞서가는 일본을 봐서도 실현성이 높은 시나리오이다.

다만, 지난 10년간 보수정권에서 부동산 경기를 부양시키기 위해서 많은 노력을 해왔던 배경이 크게 작용한 탓도 있고

전세계적으로도 메트로폴리스에는 인구가 몰리면서 서울등 대도시권과 신도시의 부동산 경기가 몇 년간 활황인 탓에

이 사람의 부동산 하향 대세론이 설득력을 많이 잃은 부분이 있긴 하다.

하지만 인구감소가 본격화되는 2020년부터 향후 10년간을 내다볼땐 이 사람의 주장을 허투로 볼 수는 없을 것이다.

다만 대한민국의 부동산의 60% 이상을 2주택자 이상 보유자들이 소유하고 있는 현실에서 자산가들이 부동산 하락움직임이

보여도 쉽게 집을 매매하진 않을 것이기 때문에(60% 이상의 매물이 한꺼번에 시장에 나올리도 없고), 대한민국의 전반적인

부동산 하락세는 한 번 방향성만 잡히면, 가랑비에 옷이 젖듯이 꾸준하게 지속적으로 내려갈 가능성이 클 것으로 예상한다.


일단 다시 이 책으로 돌아가서, 이 책은 소위 최근 이슈화되는 산업혁명 4.0의 프레임에서 일의 미래라는 주제를 살펴본 내용이다.


크게 2개의 부분으로 나뉘어져 있으며, 1부에서는 일의 미래에 대해서 현재 영향을 크게 주는 4가지의 트렌드에 대해서 이야기한다.

그 트렌드 4개는 

1. 저성장 시대 - 이제는 저성장이 뉴노말로 자리잡았듯이 과거와 같은 20% 이상대의 고성장은 기대하기 힘들다

2. 인구 감소 - 인구절별 --> 소비절벽, 인구 감소로 인해 인구의존형 산업은 내리막길일 수 밖에 없다. 노령인구의 증가로 노령층에 대한 

산업니즈가 늘긴 하지만, 이것도 역시 어느 순간 정체를 맞을 수 밖에는 없다.

3. 기술 빅뱅 - 산업구조의 개편, 전기자동차와 같은 산업전반의 파급력이 큰 신사업의 등장, SNS등 신매체에 의해 제품의 이슈화가 엄청

 빠르며, 제품의 사이클 또한 과거에 비해 수십배 빨라졌다.

4. 로봇과 인공지능 - 한국은 세계에서 산업에서 로봇이 차지하는 밀도가 가장 높은 국가이며, 전 세계적으로 인공지능과 로봇으로 인해 

중급의 난이도 의 일자리는 급격하게 감소중이다.


2부에서는 이러한 트렌드에서 어떻게 하면 살아남을 수 있는가에 대해, 기업,개인과 국가적인 시각에서 바라보았다.

1. 기업

   - 어떤 산업이 부상하고 있고, 미래의 일자리를 어디에 있는가

   - 자원이 남아있을때 다음 단계의 미래 사업을 구상하고 준비해야 한다

   - 기존 역량이 미래 사업에 활용될 수 있는지를 검토하라

   - 언제라도 산업환경이 바뀔 수 있다. 강자가 아닌 약자의 관점에서 전략을 수립하라.

2. 개인

   - 직장이 아닌 직업의 관점으로 접근

   - 미래 사회에 필요한 일에 대하여

   - 여러 번의 생애 전환기에 대비하라(40세,60세 ... 최소 2번 이상의 이직을 계획하라)

   - 자산구조와 소득구조를 바꾸고, 금융지능을 키워라 : 버는 것만으로는 힘들다. 있는 자산을 최대한 활용하라.

3. 한국사회

  - 대한민국에 필요한 기업 생태계

  - 불평등 사회에서 일자리가 만들어지지 않는다.

    : 조세제도 개혁, 공공이전 소득, 기본 소득제와 로봇세 도임

  - 기본자본 또는 공유자본 도입

  - 일의 미래를 바꾸기 위해서 가장 중요한 것은 교육이다. 현재의 입시 위주의 교육은 아무런 의미가 없다.


(감상)

최근 이런 종류의 책이 말 그대로 쏟아져 나오고 있다. 이 책이 다른 책과 차별화되는 부분은 한국기업에 대한 내용중,

삼성과 현대같은 대기업의 예를 들면서 2세,3세 경영으로 인해 실제 기업의 미래 먹거리보다는 2세,3세의 경영권 승계나

오너의 독단에 의한 기업경영의 리스크로 인해 삼성과 현대같은 대기업도 10년 이내에 어찌 될지 모르는 변동성이 크다는

우려를 나타내는 것과 그 우려에 대해서 어느 정도는 수긍이 간다는 부분이다.

지금 대한민국에서 기업의 경쟁력 재고를 위해서 가장 중요한 부분중의 하나가 부정부패의 척결과 이를 통한 대기업들이

기업 본연의 경쟁력을 높이는 노력을 한층 높여야 한다는 부분이다.

물론 대기업의 경쟁력이 높아지고 매출의 증가등으로 기업의 실적이 좋아지더라도 앞으로 대기업은 산업혁명 4.0의 영향으로

신규 일자리는 도리어 줄어들 가능성이 훨씬 클 것이라는 예상이 있다.

이를 위해 기본소득제라든가, 기본자본/공유자본을 도입하여 심화되고 있는 부의 불평등을 해소하는 노력을 국가적으로 소홀히

하지 않으면 부의 불평등으로 인해 도리어 경제 전체의 순환이 되지 않아 경제위기에 빠질 수 있는 위험에 대해서도 논의하고 있다.

그럭저럭 볼만한 내용이다.



총 2권으로 이루어져있으며, 1권 현현하는 이데아, 2권 전이하는 메타포 모두

굉장히 직접적인 부제를 갖고 있다.


전작인 해변의 카프카, 태엽감는새, 1Q84와 비슷한 구조를 가지면서도 차별화되는 부분은

주인공이 하나이며, 1인칭 시점으로 소설이 진행되는 점이다. 

그의 대부분의 전작이 2인(때로는 3인)의 복수의 주인공의 이야기가 개별적으로 병렬 진행하다가,

그 스토리가 어떤 순간에 이어지는 구성을 사용하기 때문에 보통 소설을 1번만 읽어서는 그 구조와 스토리를

정확히 파악하기가 어려운 면이 있다. 

하지만, 이번 소설은 화자인 주인공 한 명이 스토리를 이끌고 가므로 그러한 병렬구조상에서 이야기가 이어지기 전까지는

그 흐름을 놓치기 쉬운 세부적 스토리때문에 재독이 필요한 부분이 많이 줄어들었다고 볼 수 있다.(그래도 이 소설도 

2번 정도 봐야 명확해지는 부분이 역시 있다.)


또한 그의 특징인 시각적 효과를 극대화시키는 세부묘사가 더욱 명징해진 탓에(또한 소설의 이야기가

그림이라는 매개체를 진행되는 부분이 있기에 더욱 그렇다), 이야기를 따라가는 것이 전작에 비해 쉬우며

그리 꼬인부분이 없어서 쉽게쉽게 이해가 되는 측면이 있다.


이데아로 표현되는 기사단장, 그리고 이어서 2권에 이어지는 긴얼굴이라 불리우는 메타포는 

무라카미 소설의 특징인 환상적인 상징을 표현하는 하나의 양식인데 그 치환되는 의미는 매우 다중적이긴 하지만

이번 소설에서는 몇 가지의 카테고리로 압축된다.


인상적인 부분은 1Q84에서 아오마메(실질적인 주인공)가 아기를 임신한 상태로 허구의 세계를 덴고와 탈출하는데,

이번편에서는 축복의 의미로 주인공의 아내인 유즈가 무로라는 아이를 출산하는 결말이다.


이 소설은 국내 발매전에 일본 현지에서 소설속에 묘사했던 난징 대학살과 관련된 이야기때문에 이슈가 되었다.

우리 입장에서는 그리 이슈될 게 없다고 보이는 면도 있지만, 군국주의 시대 일본이 타국민들뿐 아니라 군국주의에

동조하지 않는 자국민들까지도 얼마나 차별하고 괴롭혔나하는 야만의 모습이 생생히 드러난다는 점에서 일본의 과거

치부를 드러낸 면이 물론 있다.

일본이라는 나라는 대동아전쟁(2차 대전)이후, 그 내부적으로 몰락을 자초하는 리스크가 존재해 왔다. 그 리스크는 다름 아닌

과거에 대한 부정과 역사에 대한 왜곡이다. 

과거를 잊은 민족(개인)에게 미래는 없다는 말처럼, 인간은 실수를 통해서 발전한다. 실수와 잘못에 대한 반성을 통해서

인간은 성숙해지고, 발전하며 개인이 아닌 사회와 국가 세계의 구성원으로서의 자신의 위치를 파악해나가게 된다.

일본은 그러한 사회적, 국가적 성숙이 없이 2차 대전 이후 아이러니하게도 자신을 패전시킨 미국의 전폭적인 지원과 주변국들의

상황(6.25 전쟁, 러시아와 중국 그리고 미국간의 냉전)의 틈바구니속에서 수 십년간 경제부흥에만 집중할 수 있었으며 그로 인해

한때는 미국에 이어 세계 2위 규모의 무역대국으로 오르기도 했다.(지금도 일본은 세계 3,4위의 무역대국이다.)

하지만 일본의 과거사에 대한 왜곡과 부정 그리고 세계 속에서 그만한 경제적 지위에도 불구하고 그에 걸맞는 세계 사회에서의

기여도를 보여주지 못해서 경제적 동물(economic animal)이라는 멸시적 용어까지 들어야만 했다.

(이 소설에 대한 감상에서 더 이상 이 곁다리로 나가기는 어려우니 그만하고)


또한, 이 소설의 말미에서는 2011년 동일본 대지진의 아픔을 어루만져주려는 작가의 따스함이 말미에 어느 정도 드러난다.

(전작인 신의 아이들은 모두 춤춘다에서 고베 대지진에 대한 작가의 위로가 포함되어 있는 것과 비슷한 뉘앙스이다)


개인적으로 매우 기대했던 작품이었던 탓인지, 전작과의 차별화를 이루지 못한 것이 아닌가 하는 아쉬움이 있다.

이미 그도 세계적인 거장으로서 나이가 든 탓이리라. 그래도 작품속에 녹아든 노작가의 따스함은 더욱 상냥해진듯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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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스토리 요약)

주인공인 나(주인공의 이름은 소설 전체를 통해서 한 번도 나오지 않는다.)는 미대 출신으로 초상화를 그리며 살아간다. 

조그마한 사무실을 다니는 아내인 유즈와는 6년전에 결혼을 해서 도쿄 시내의 맨션에서 살고 있다.

초상화를 그리는 것은 직업이지만 자신의 예술적 재능을 갉아먹으면서 살고 있다는 생각을 갖고 있으며, 언젠가는 자신의 그림을

그리고 싶다는 막연한 생각을 하며 살아가고 있다.

그러던 어느 봄비가 내리던 3월말의 일요일 아침, 아내인 유즈는 그에게 더 이상 당신과 살 수 없다는 말을 한다.

나는 잠시 유즈와 대화를 나눈 후 그대로 차에 몇 가지 짐을 싣고 집을 나온다. 그후 도쿄 시내를 하루 종일 방황하다가,

그대로 일본 동북부와 훗카이도 지역을 2달여에 걸쳐 방랑을 하는 생활을 한다.

방랑을 마치고 도쿄로 돌아와 미대 동기인 아마다 마사히코를 만나서 지금의 사정을 이야기한다.(마사히코는 아내인 유즈와도 아는 사이이다)

마사히코의 아버지인 아마다 도모히코는 유명한 일본의 화가로서 오다와라의 산속의 저택에 거주하고 있는 중이다.

현재는 부인을 여의고 혼자 살고 있으며, 치매 증상이 나타나 이즈의 고급요양원에 입소한 상태이다.

그래서 비게 된 오다와라의 주택에 살지 않겠느냐는 마사히코의 제안에 나는 오다와라의 도모히코 저택에서 지내게 된다.

도모히코의 저택은 산속에 위치해 있어서 차가 없으면 접근하기가 어려우며, 도모히코의 저택이 있는 산등성이와 건너편에는

고급관료와 자산가들의 오래된 고급 저택과 별장들이 드문드문 있는 지역이며, 산과 산 사이로 드러난 남쪽의 좁은 틈으로는

태평양이 보이기도 한다.


오다와라에 살게 되면서, 마사히코의 부탁으로 시내 미술학원의 강사를 맡게 되어 일주일에 두 번 시내의 미술학원에 출강을 하게 된다.

어느날 저녁 집안 천장쪽에서 무슨 소리가 들려 소리의 근원지를 찾아 천장을 올라가는 문을 발견하게 된 나는, 천장에 올라가 

하얀 수리부엉이와 하얀 천에 쌓여진 체 천장 구석에 놓여있던 캔버스를 발견하게 된다. 그 캔버스에는 오래된 색바랜 라벨이 하나

붙어있었고, 거기엔 기사단장 죽이기(騎士団長殺し)라는 제목이 붙어있었다. 그림의 내용은 모짜르트이 오페라 돈지오반니의

초반부의 내용으로 기사단장이 딸인 안나의 애인에게 칼로 찔리는 장면을 모티브로 한 것이었으며, 도모히코는 그 내용을 일본 아스카

시대를 배경으로 일본화시켜 놓은 작품이었다. 이 작품에는 돈지오반니의 내용대로 기사단장, 딸인 안나, 그의 애인이자 기사단장을

칼로 찌르는 젊은이, 그리고 젊은이의 시종(하인)의 4인이 등장하는데, 이상하게도 그림 구석에서 땅밑에서 뚜껑을 열고 머리를 내밀어

이 장면을 몰래 쳐다보는 존재도 그려져 있었다. 나는 이 그림을 보면서 감탄하면서도 모종의 호기심-이 훌륭한 그림을 왜 도모히코씨는

천장에 숨겨뒀을까? 그리고 이 그림이 의미하는 바는 무얼까?-을 느끼게 된다. 


오다와라에서 지낸지 1달여가 지난 어느날 예전 초상화를 그리던 시기, 작업의뢰를 하던 도쿄의 에이전시로부터 연락이 왔다.

누군가 나에게 초상화 의뢰를 해왔던 것이다. 유즈와의 결별 이후 방랑을 시작하던 초기에 이미 초상화를 더 이상 그리지 않겠다는

의사를 에이전시에 밝혔기에 다시 정중하게 거절을 하려 했지만, 초상화를 의뢰했던 이는 상상할 수 없는 거액을 제시했다는 

사실을 알고, 경제적 이유와 호기심(누가 왜 그리 큰 돈을 들여서 나에게 초상화를 그리려 하는 것일까?)때문에 그 의뢰를 수락하게

된다. 


의뢰를 수락한 다음날 도모히코의 저택을 어느 남자가 재규어 세단을 타고 방문한다. 그의 이름은 멘시키(免色, 색을 면하다. 이 캐릭터에 

대한 느낌은 마치 색채가 없는 다자키 츠쿠루와 그의 순례의 해에서 다자키 츠쿠루가 순례를 떠나지 않고 그대로 나이를 먹었을 때를

연상케 한다.)

IT관련 사업으로 큰 돈을 벌고, 지금은 오다와라의 숲속 저택(도모히코의 저택에서 마주보는 반대편 산등성이에 하얀 대저택)에서 홀로

살고 있는 50대 중반의 남성이다. 그는 내 초상화 작품을 우연히 보게 됐고, 그 이후 내가 그린 초상화 몇점을 수소문해서 보고 난 후

나에게 초상화를 의뢰하게 되었다고 이야기한다. 그 이후 몇 번에 걸쳐 멘시키씨를 만나면서 나는 그의 초상화를 그리게 된다.


멘시키씨를 만나고 얼마 되지 않아서, 나는 새벽녁에 정체 불명의 방울소리를 듣고 잠에서 깨게 된다. 그 이튿날 새벽에도 같은 시각

방울소리가 나고, 난 집밖으로 나가서 그 방울소리의 근원을 찾아간다. 방울소리는 저택 뒤 공터에 있는 자그마한 사당의 뒷편 돌무더기

아래에서 나고있었다. 그 다음날 나는 이 사실을 멘시키씨에게 상담하게 되고, 그는 방울소리가 나는 새벽시간에 맞춰 우리집으로 

오겠다고 한다.

멘시키씨는 12시 조금 넘어서 우리집으로 왔고, 같이 거실에서 이야기를 나누는 도중 새벽 2시가 되자 다시 방울소리가 들린다.

멘시키씨 역시 방울소리를 듣고, 그와 함께 사당뒷편의 소리가 나는 위치를 재확인한다. 멘시키씨는 주변에 아는 조경업자에게 의뢰하여

중기계와 인부들을 불러서 소리가 나는 사당뒷편의 돌무더기를 치우고 난후 지름 1미터 정도의 깊이 3미터가 되는 동그란 구멍을 발견한다.

구멍속에는 아무도 없었고, 오직 방울만이 발견된다.


사당뒤 구멍속에서 방울을 가져온 후, 더 이상 방울소리는 들리지 않게 되었다. 그러던 어느날 주인공인 나에게 간혹 무슨 사람의 목소리가

환청처럼 간혹 들리는가 싶더니 토모히코의 그림 기사단장 죽이기에서 칼에 찔린 기사단장(피는 흘리지 않고 칼도 찔리지 않은)을 한 형상이

눈앞에 나타나게 되었다. 기사단장은 자기를 이데아라고 소개하며 사당뒷편에 돌무더기를 치워준 덕분에 자신이 해방되었다고 한다. 

기사단장은 하루에 1시간 정도로 형체화할 수 있으며, 그 후로 간혹 가다가 내 앞에 나타나곤 했다. 나는 이 사실을 멘시키씨 뿐 아니라 그 누구에

게도 이야기 하지 않았다.


얼마 있지 않아서 나는 멘시키씨의 초상화를 완성하는데 그것은 여태까지 내가 그렸던 일반적인 초상화와는 다른 매우 추상적인 작품이었다.

하지만 멘시키는 그 그림에 대해 매우 만족해하며 그것을 자기 집으로 가져가서 자신의 서재에 걸어두게 된다.


어느날 멘시키는 자기의 30대 시절 만나다가 헤어진 여자의 이야기를 해주었고, 그 여자는 자신과 헤어진 후 멘시키의 딸일지도 모르는 

아이를 나았다는 이야기를 해주며, 그 여자아이가 바로 현재 미술학원에서 내가 가르키는 아키가와 마리라는 것을 이야기해준다.

그러면서 멘시키는 나에게 마리의 초상화를 그려줄 것을 부탁하게 된다. 이후 학원에서 스케치 실습을 핑계로 마리를 모델로 칠판에

스케치를 하게 된 나는 그녀의 내면에서 어떤 흥미로운 부분을 발견하고 그녀의 초상화를 그리게 된다.


그러던 어느날 마리가 실종되고, 마리의 실종이 기사단장과 모종의 관계가 있음을 예감한 나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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스토리를 적다보니 확실히 느끼는 것은 무라카미 소설의(아마도 대부분의 소설이 그렇겠지만) 힘은 디테일에 있는것이 아닐까 한다.

내가 스토리를 적다보면서 느끼는 것은 정말 이야기가 밋밋하다는 것이다. 그러나 실제 이 소설을 읽어보면 이렇게 스토리가 밋밋하지는

않다. 아주 조용한 가운데서도 긴장감이 있는 곳은 긴장감이 있고, 무언가 나올것 같은 예감이 들고, 다음 이야기는 어떻게 될까라는 기대감이

있다. 그러한 것은 역시 작가의 문체와 디테일의 힘일 것이다.


(감상) - 당연히 스포일러 포함.

전작 1Q84에서 서문은 소설 전체의 맥락을 파악하는데 매우 중요한 역할을 했다. 

이 작품 역시 작가가 의도하는 바를 명확히 드러내는 장치로서 서문이 존재하는 듯 하다. 프롤로그의 마지막 구절이다.

"하지만 그러려면 시간이 필요하다. 시간을 내 편으로 만들어야 한다."

또한 이 작품은 마지막 구절도 매우 중요한 역할을 한다.

마지막 장면에서 주인공은 잠든 딸 무로(室)를 보면 이렇게 이야기한다.

"기사단장은 정말로 있었어." 나는 옆에서 곤히 잠든 무로를 향해 말했다. "너는 그걸 믿는게 좋아"


내가 이 책을 읽고 가장 먼저 떠올린 핵심적인 개념은 "희생"이다. 기사단장으로 표현되는 이데아, 아리스토텔레스적 표현에

의하면 순수한 이상으로서의 기사단장과 현실에 발을 딛고 육신을 통해 실제의 삶을 사는 현실의 2 개체의 "희생"과

긴 얼굴의 메타포가 안내하는 지난하고 위험한 길을 통과하는 불가능에 가까운 "노력"의 의해서만 인간은 구원에 이를 수 있다라는

주제를 드러내려는 것이 작가의 주된 의도가 아니었나 하는 느낌이다.

무라카미는 소설 내에서도 이것은 무엇도 무엇도 아니다 라던가와 같은 불명확한 비유를 통해 언어로 표현할 수 없는 것들에 대한

막연한 느낌을 어떤 시각적 이미지를 통해서 드러내려는 의도를 소설에서 많이 드러낸다. 이것은 사실상 작가 개인의 내밀한 경험들의

축적에 의해 어느 순간 팟하고 떠오르는 계시와 성찰같은 것이기 때문에 독자로서는 그것을 100% 명확히 파악하기란 불가능한것이다.

(아마 그것은 작가 자신도 마찬가지일 것이다. 우리도 개인적 경험을 통해서 누구에게도 말할 수 없는 성찰과 계시를 경험하지만 그것을

쉽게 몇 마디 말로는 표현하기 불가능한 것 처럼)

그래도 무라카미 하루키의 작품을 읽어나가면서 그의 스타일과 그간의 경험을 어느 정도 공유하게 되면 생기는 상호주관적 경험이 축적되면서

그게 무엇인지는 명확하진 않지만, 해변의 카프카, 태엽감는 새, 1Q84로 이어지는 무언가 그만의 특유의 스타일이 있다는 것은 아마

그의 애독자라면 공감할 수 있는 부분일 듯 하다.


소설의 프롤로그의 마지막 구절에서는 여러가지 다양한 의미가 있을 수 있지만 내가 파악하는 바는 이렇다.

"시간이 필요하다"라는 부분은 일반적인 자연법칙과 같은 의미이다. 어떠한 일이든 당연히 과정에서 결과에 이르는 시간은 필요하다.

그 뒷 문장인 "시간을 내 편으로 만들어야 한다."는 시간의 흐름에 인간인 자신은 어떻게 해야 할 것인가에 대한 당위의 문제를 다루고

있다. 시간을 내 편으로 만든다는 것은 능동적으로 무엇을 한다는 의미이며 시간의 경과를 따르기는 하지만 그 경과속에 무언가

자신의 흐름을 만들겠다는 의지의 표현이며 그것은 끊임없는 노력에 대한 표현일 것이다.

자신의 어린 딸을 보면서 말하는 주인공의 대사는 맥락적으로 쉽게 표현하자면 이런 것과 같다.

"산타클로스는 정말로 있었어. 너는 그걸 믿는게 좋아.", 여기에 산타클로스는 그 다음의 그 무엇도 좋을 것이다.

예수 그리스도, 팅커벨, 루돌프 사슴코.. 등등. 우리는 찬란한 꿈들과 신비한 동화 그리고 사랑과 모험으로 가득찬 동심의

꿈나라로부터 시기와 질투, 경쟁과 탐욕, 권태와 이기로 가득찬 세상으로 내동댕이치는 거대한 폭력을 경험하면서 어른으로

성장해간다. 그 삶의 장면장면을 거치면서 우리는 삶의 진실을 알아간다고 여기지만 실상 남는 것은 끝간데 없는 암흑과

그 암흑을 끝없이 직시할 수 밖에 없는 공포스러운 현실속에서 점점 육신과 영혼을 갈아먹으며 하루하루를 살아갈 뿐이다.

그러한 어른으로서의 보기에는 평화롭지만 그 내면에는 여러가지의 허무와 권태등의 보이지 않는 악덕속에서 하루하루를

보내던 결혼생활 6년차의 어느날, 아내의 예기치 않은 외도로 인해 급작스럽게 아내로부터 결별통보를 받는 주인공은

약 1년간의 별거생활을 하게 된된다. 이 별거생활동안 생긴 에피소드를 통해 주인공이 깨달은 삶의 중요한 메시지를 그는

어린 딸에게 몇 년후에 "기사단장은 정말로 있었다."라는 말로 전해준 것이다. 


전작 1Q84에서 작가는 이상(ideal)혹은 꿈에 대해서 인간의 의지적 부분에 대해 이야기했다.

(이 부분 역시 1Q84의 서문으로 쓰인 paper moon의 가사일부에서 그대로 드러난다. 

‘여기는 구경거리의 세계/ 처음부터 끝까지 모두 다 꾸며낸 것/ 하지만 네가 나를 믿어준다면/ 모두 다 진짜가 될 거야.’

즉, 이것이 실제든 허상이든 상관없이 그것을 받아들이는 본인의 의지와 믿음이 중요하다는 의미이다.)

여기서는 한발 더 나아가서, 그것을 믿는 것이 더 좋다라는 작가의 의견을 피력했다고 본다. 

일단 소설은 전작에 비해서 훨씬 읽기 쉽고 재밋다. 아마도 그것은 단일 주인공으로 이야기를 끌고 가는 단선적 구조인 탓이 클 것이다. 해변의 카프카 이후로 주로 2명의 이야기가 평행하게 나아가면서 어느 지점에서 만나게 되는 병렬적 구조인 탓에 줄거리나 은유등에 대해 앞의 내용을 다시 참조해야 하는 경우가 많았는데 비해 이번 편은 거의 한번만에 줄거리가 확실히 정리가 되는 측면이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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무라카미 하루키의 소설 세계가 다른 작가들과 차별화되는 지점은 자유도에 있는 것 같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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기사단장은 나치독일에 의해 흡수되어 멸망하는 오스트리아, 그리고 돈 조반니는 나치, 안나는 도모히코의 오스트리아 애인 정도로

치환해서 보면 될 듯 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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전작 사피엔스가 사피엔스의 출현과 현재까지를 다루고 있다면, 이 책은 현재부터 과학적발전이 궁극에 이룬

인류의 미래를 다루고 있다. 미래에 대한 문제이다 보니 사실에 기반한 부분이 있긴 하지만, 결국은 주로 현재

저자가 경험한 바를 토대로 미래에 대한 자신의 생각과 예상으로 책의 내용이 진행되고 있다.

그런 면에서 사피엔스보다는 조금 더 급진적인 내용이 많으며 공감되는 내용만큼 공감하기 힘든 내용도 있다.

하지만, 현재까지의 인류의 역사에 대한 지식과 그간의 이 분야의 경험, 미래를 엿볼 수 있는 과학기술 및 이의

이용에 대한 인류의 접근방법에 대한 통찰로 어느 정도는 수긍이 가는 부분이 많은 것이 사실이다.

이 책을 보면서 확실히 느끼는 바는 우리는 이미 그간 우리가 미래라고 이야기했던 세상에 발을 담그고 있다는 것이다.

좋든 싫든 그것을 바탕으로 이제 우리에게 다가온 미래라는 토대위에서 인간은 과연 어떻게 해야 하는가에 대해

진지하게 생각해야하는 시기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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