원제인 風の歌を聴け를 그대로 직역한 무라카미 하루키의 첫 작품이다.


이 책의 서문에도 밝히고 있고, 여기저기 무라카미 하루키에 관련된 에피소드에서 단골로 등장하듯이 그가 29살때 메이지 진구구장에서 맥주를 마시며, 프로야구 경기를 보고 있을 때 문득 나를 위한 글을 써야겠다는 생각이 떠올라, 그때부터 당시 경영하던 카페가 문을 닫은 후 새벽시간에 카페에 앉아서 소설을 썼고, 그것을 군조에 응모하여 신인상을 받았던 바로 그 소설이다.


첫 작품인 만큼 그 후에 그가 선보인 여러가지 작품에 비해서 구성, 내용등에 있어서 빈약한 느낌을 주는 것은 사실이지만, 문장속에서 드문드문 그만의 언어들이 드러나 보이는 것을 발견 할 수 있다.


이 소설은 29살의 작가가 21살의 자기의 젊은 시절을 회상하며 그린 작품이라고 해석된다.


주인공은 21살의 나(책의 딱 한 부분에서 주인공의 이름이 나온다. 제로라고). 그리고 그의 친구 쥐.

나는 도쿄에서 대학을 다니며 생물학을 전공하고 있고, 그의 친구는 대학을 다니다 자퇴를 한 상태다.


이 소설의 배경은 이 둘의 고향인 바닷가 마을로 나오는데, 무라카미의 고향은  芦屋市(아시야시)라고 고베와 오사카의 중간쯤에 위치한 바닷가 마을이다.  


소설의 전체적인 분위기는 한 여름 조용한 바닷가 마을의 고즈넉함과 열기, 간혹 내리는 소나기같은 것들이 어우러진 싱그러움을 품고 있지만, 젊은 청춘의 주인공들의 대사는 젊음의 현실에 대한 알수 없는 짜증과 번뇌를 드러내고 있다.


주인공이 나와 친구 쥐는 사실상 무라카미 하루키 자신의 2가지 양태를 반영하는 것으로 보인다.


나는 현실이 어느정도 짜증나기도 하고 번거롭기도 하지만 그런데로 그 토대위에서 자신의 힘으로 서려고 하는 젊음을 의미하고,

쥐는 그런 현실에서 완전히 도피해서 이상향을 찾고자 하는 나약한 이상주의자의 모습을 보여주고 있다.


이러한 추정은 책의 내용으로부터 추측되는 것으로, 대표적으로 쥐가 쓰는 소설은 섹스가 등장하지 않고 사람이 죽지 않는 2가지 큰 특징을 계속 유지한다는 묘사가 있는데, 이것은 바꿔 말하면 현실처럼 시간이 흐르는 것을 거부하고, 인간의 원초적 욕망으로서의 섹스를 거부하는 이상주의 혹은 부적응자의 모습을 보여준다.


또한 쥐의 아버지에 대한 묘사에서는 전후 일본을 부흥시킨 기성세대에 대해 경제적 부흥을 일으켰을진 모르나, 그 경제적 부흥의 이면에 숨어있는 부도덕성과 인간에 대한 기본적인 예의같은 것들에 대한 멸시에 대한 것을 통해 기성세대에 대한 부정적 이미지를 보여주고 있다.(사실 이건 젊은 시절의 하나의 특질이기도 하다)


그의 첫소설이니만큼 글을 쓴다는 것에 대한 고심이랄까, 젊은 시절의 고민같은 부분이 많이 묻어난다.


1. 

그러나 정직하게 얘기하는 것은 여간 어려운 일이 아니다. 내가 정직해지려고 하면 할수록 정확한 언어는 어둠 속 깊은 곳으로 가라앉아 버린다.

=> 언어의 한계라고 할까, 아니면 사유의 한계라고 할까. 이러한 느낌은 글을 쓰면 쓸수록 더욱더 답답해지는 그런 주제중 하나이다. 무언가 내게 확실하다고 생각되었던 것들, 계시와 같이 명징한 사항들을 글로 표현하려고 하면 도리어 그 광채와 확실성을 잃고 언어의 모호성에 사로잡히고 마는 그러한 경험들..



잘만 되면 먼 훗날에, 몇 년이나 몇십 년 뒤에 구원받은 자신을 발견할 수 있을지도 모른다 말이다. 그리고 그때가 되면 코끼리는 평원으로 돌아가고, 나는 더 아름다운 말로 세계를 이야기하기 시작할 것이다.

=> 그가 단편집 회전목마위에서 데드히트에서 이야기했듯이, 초기에 이런 나이브한 생각은 나이가 들수록 점점 부정적인 견해로 바뀐 듯 하다.


만약 당신이 진정한 예술이나 문학을 원한다면 그리스 사람이 쓴 책을 읽으면 된다. 참다운 예술이 탄생하기 위해서는 노예 제도가 꼭 필요하기 때문이다. 고대 그리스에서는 노예가 밭을 갈고 식사를 준비하고 배를 젓는 동안, 시민은 지중해의 태양 아래서 시작(詩作)에 전념하고 수학과 씨름했다. 예술이란 그런 것이다.

 모두가 잠든 새벽 세 시에 부엌의 냉장고를 뒤지는 사람은 이 정도의 글밖에는 쓸 수 없다. 

 그게 바로 나다.

=> 약간은 비틀은 듯한데, 그리스의 문학, 이상적인 내용 그리고 사회적인 계몽을 위해서 쓴 그런 내용따위엔 관심없다. 나는 찌질한 나의 현실의 기반위에서 찌질하더라도 나의 글을 쓸거다라는 그런 느낌이다.


7. 

"옛날 옛날에 아주 마음씨 착한 산양이 살고 있었단다."

 멋진 첫마디였다. 나는 눈을 감고 마음씨가 착한 산양을 상상해 보았다.

 "산양은 항상 무거운 금시계를 목에 걸고 헉헉거리며 돌아다녔지. 그런데 그 시계는 너무 무거운 데다가 고장이 나서 움직이지도 않았어. 그래서 친구인 토끼는 이렇게 물었지. '이봐, 산양. 왜 자네는 자기도 않는 시계를 늘 목에 매달고 다니는 건가? 무겁기만 하고 아무 쓸모도 없는 걸 말이야." 산양은 '그야 물론 무겁지. 하지만 익숙해졌거든. 시계가 무거운 것에도, 움직이지 않는 것에도 말이야' 하고 대답했지"

=> 산양이란 존재는 시지푸스를 생각나게 한다. 올려도 올려도 다시 내려오는 돌을 영원히 다시 굴러올리는 영원한 허무의 챗바퀴를 도는.


"네가 산양이고 내가 토끼, 그리고 시계는 네 마음이란다."

=> 주인공은 시지푸스, 의사는 약삭빠른 세상, 시계는 허무함으로 가득찬 마음.


30. 

고등학교를 졸업할 무렵에 나는 마음속의 생각을 절반만 입 밖으로 내야겠다고 결심했다. 이유는 잊어버렸지만 나는 몇 년 동안 그 결심을 실행했다. 이유는 잊어버렸지만 나는 몇 년 동안 그 결심을 실행했다. 그러다가 어느 날, 나는 나 자신이 생각한 것을 절반밖에 얘기하지 못하는 인간이 되어버린 사실을 발견했다. 

 그것이 쿨한 것과 어떤 관계가 있는지는 잘 모른다. 그러나 1년 내내 서리제거제를 넣어주어야 하는 구식 냉장고를 쿨하다고 부슬 수 있다면, 나 또한 그렇다.

=> 자기 꾀에 자기가 넘어가는. 자기의 의지로 살아가고 있다고 생각하지만 결국은 환경의 제약을 받는 나약한 인간.


31. 

그리고 이렇게 생각하지. 매미나 개구리, 거미, 그리고 여름 풀이나 바람을 위해서 뭔가를 쓸 수 있다면 얼마나 멋질까 하고 말이야.

=> 세상에 있는 가장 구체적인 것, 그러나 우리의 눈에 잘 띄지 않는 하찮은 것. 그러나 그 무엇보다 중요한 것. 우리가 잃어버린 파라다이스에 대해 쓰고 싶다는 욕망을 표현하지만 그것이 쉽지 않으리라는 것을 예감한다.




하지만, 잘 생각해 보라구. 조건은 모두 같아. 고장난 비행기에 함께 탄 것처럼 말이야. 물론 운이 좋은 녀석도 있고 나쁜 녀석도 있겠지. 터프한 녀석이 있는가 하면 나약한 녀석도 있을 테고, 부자고 있고 가난뱅이도 있을 거야. 하지만 남들보다 월등히 강한 녀석은 아무 데도 없다구. 모두 같은 거야. 무엇인가를 가지고 있는 자는 언젠가는 그것을 잃어버리지 않을까 겁을 집어먹고 있고, 아무것도 갖지 못한 자는 영원히 아무것도 가질 수 없는 게 아닐까 걱정하고 있지. 모두 마찬가지야. 그러니까 빨리 그걸 깨달은 사람은 아주 조금이라도 강해지려고 노력해야 해. 시늉만이라도 좋아. 안 그래? 강한 인간 따윈 어디에도 없다고. 강한 척할 수 있는 인간이 있을 뿐이야.

=> 어차피 다 죽는 인간. 그 냉혹한 진리위에서 그래도 발버둥이라도 치고 가야지. 안그래? 인터스텔라에서 나왔던 딜런 토마스의 시와 일맥상통한다.




34.

그러나 만일 우기가 1년 내내 쉴 새 없이 지껄여대면서 그것도 진실만 말한다며, 진실의 가치는 없어져 버릴지도 모른다.

=> 이 문장을 보고 든 생각은, 진실이 그 자체로 가치나 의미가 없거나 적을때 우리는 그것을 감추거나 부풀리기 위해 거짓으로 진실을 포장하기도 한다라는 것이다.


진실의 과잉. 세상에 가치가 있는 것은 그것이 진정 소중한 것이거나 희귀해서이다. 결국 가치가 있다는 의미는 희귀한 것이라는 의미이다.



35.

"사람은 왜 죽는걸까?"


"진화하기 때문이지. 개체는 진화의 에너지를 견뎌낼 수 없어서 세대교체를 하거든. 물론, 이건 하나의 가설에 지나지 않지만 말이야."

=> 아담과 이브가 선악과를 따먹지 않았다면 신도 인류도 없었을 것이다. 아직도 이 지구에는 아담과 이브만이 아무런 수치심도 욕망도 그리고 의지도 없이 순수함만을 간직한 채 충실감만이 가득한 아름다운 세상에서 영원을 향유하며 살아가고 있었을 것이다. 말 그대로 그것은 영원한 순수의 시대라 할 수 있었을 것이다.



마지막 문장은 젊음의 치기이긴 하나 그것이 항상 빛나는 이유를 드러내 준다고 보인다.


40.

그의 묘비에는 유언에 따라 다음과 같은 니체의 말이 인용되어 있다.


"한낮의 빛이 밤의 어둠의 깊이를 어찌 알겠는가?"



과연 무라카미 답다고 해야 할까? 거장의 첫 작품으로서 모자람이 없다는 느낌이다.

+ Recent posts