정경심 교수가 옥중에서 쓴 글 모음. 시집이라고 봐야 할 듯. 

절절한 마음이 그대로 느껴진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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p66. 오늘 밤

 여보
 오늘 밤은 각자의 슬픔을 
 슬퍼합시다
 내 슬픔이 너무 커서
 당신 슬픔도 너무 클 것을 알기에
 오늘 밤은 나 혼자 슬퍼하겠습니다
 당신도 슬픔에 겨워 어쩔 줄 모를 테니까요

 여보
 우리가 오늘 밤
 큰 슬픔을 슬퍼하며
 홀로이 그 슬픔을 이겨 냈음을
 잊지 맙시다
 당신과 나보다 더 아픈 마음이
 오늘 밤엔 없었음을 기억합시다

 

p78. 결국, 사람이다

 죽음의 길을 가지 않은 것은
 사람 때문이다
 결코 그 길을 가지 않으리라고 확신했던
 그가 버티고 있었고
 나를 그 길로 보내 버릴 수 있었던 아이들이
 집요하게 내 죽음의 멱살을 붙잡고 싸워 주었다
 자신도 버티기 힘든 각자의 무게 위에 서로의 무게까지
 우리는 어깨와 어깨를 맞대어
 무게를 떠안고 분산시켰다
 그리고 이곳에 이름 모를 수많은 이들이 어깨를 
 들이밀고 우리의 어깨가 흐트러지는 것을 막아 주었다
 우리를 지탱시킨 것은 우리를 살린 것은
 결국, 사람이다

 

p135. 좀 더 좋은 사람이 되고 싶다

 세상은 주고받는 것이 아니다
 받은 만큼 주는 것도 아니고
 준 만큼 받는 것도 아니란 걸
 이제야 깨닫는다

 내가 많이 준 친구는 더 달라 하고
 내게 받은 적 없는 이는 조건 없이 주려 하는
 이 불가사의에 가끔 어리둥절하다
 그리고 반문한다

 나는 누군가에게 조건 없이 얼마나 주었나
 나는 누군가를 조건 없이 얼마나 믿었나
 그리고 이제,
 나는 좀 더 좋은 사람이 되고 싶다

 

 

p139. 마음의 대화

 오늘, 당신을 만났습니다
 찬찬히 보니 주름이 많아졌습니다
 왜 아니 그렇겠습니까
 그 마음을 미루어 짐작하고도 남습니다
 아이들까지 다 내려놓은 지금
 뭐가 그리 안달복달할 게 있겠습니까
 이 일이 있기 전까진 내 속으로 낳았어도
 그리 단단한 줄 알지 못했습니다
 시련이 성숙시켰을까요
 나는 아이들만 보며 살겠습니다
 당신은 훨훨 자신의 길로 나아가세요

 오늘, 당신을 만났습니다
 자세히 보니 없던 흰머리가 셀 수 없습니다
 왜 아니 그렇겠습니까?
 우리를 가두었던 그 세월이 그러고도 남습니다
 우리 모두 다 내려놓은 지금
 광야에 헐벗고 선 듯하여 춥고 아픕니다
 이 일이 있기 전까진 감히 상상조차 못 한 일

 우리가 이리 잘 버틸 줄 알지 못했습니다
 시련이 서슬 퍼런 칼날로 닥쳤지만
 당신과 아이들이 버티어 주어
 내가 살아 있습니다

 조금만 더 힘내 주세요, 다 와 갑니다
 적어도 이 모든 일의 시작도 끝도
 당신이 잡고 있으니 매듭도 풀어 주세요
 나는 당신 옆을 지키겠습니다

 

p146. 여행

악몽을 꾸었다
여행을 가기 위해 모인 우리는
각자 비행기표를 끊었으므로
각자의 게이트로 나아갔다
제일 먼저 내가 I-50이라는 게이트를 향해 나갔지
I-50을 보고 표지판대로 길을 따라갔는데
나의 게이트는 존재하지 않았다
우왕좌왕하다 보딩 시간이 지났고
비행기를 놓쳤다 낭패한 표정으로
재발권을 위해 발권 데스크로 갔다
발권 데스크가 방금 눈앞에 있었는데
신기루처럼 사라졌다
나의 세 친구도 보이지 않는다
이제 공항 건물에는 덩그러니
두리번거리면서 나 혼자 남았다
사방을 둘러봐도 출구가 없는 공간
나는 밤새도록 출국를 찾아 헤매다 깼다
왜 악몽은 늘 기억이 나는지
나도 알고 싶다
언젠가는 꿈에 멋지게 비행기를
타고 여행을 가고 싶다
그리고 깨어나면 꼭 그 꿈을 기억하고 싶다

 

p150. 그대의 배반

그대는 진실을 티끌처럼 버리고
나를 순식간에 웃음거리로 만들며
장막 뒤에서 웃지
그대를 믿는 사람들이
하이에나가 되어 킬킬거릴 때
세상의 공기는 끈적하다
서서히 폐에 스며들어
매캐하게 질식시키는 안개처럼
그대는 진실을 그렇게 버리고
어찌 세상과 마주하는가
그 어떤 변명도 그대를 용서할 수 없다는 것을
시간이 알고 있는데

 

p157. '그냥' 말고

나는 지금 나의 시련이 그대의 생명일지
모른다고 생각합니다
그대보다는 내가 내성이 강하니까요

그대는 부디 살아 주세요
'그냥' 말고 건강하게 살아 주세요
지금 나의 시련을 위해서

나는 지금 나의 시련이 견딜 만합니다
내 시련 위에 그대의 생명이 자라고
그 생명 위에 나의 미래가 의지하고 있어서

'그냥' 말고 기꺼이 견딜 만합니다.

 

p163. 침묵

내게 성가신 일이 생겼지만
침묵하기로 한다
내게 오해가 생겼지만
침묵하기로 한다

너와 나는 서로 다른 존재
우리가 무한히 열린 마음으로
서로 사랑하며 믿지 않는다면
말보다 침묵이 더 큰일을 하기에

내게 화난 일이 있었지만
내 감정에 침묵하라고 한다
내게 슬픈 일이 있었지만
내 가슴에 침묵하라고 한다

결국은 침묵이 이겨 낼 것을 알기에

 

p169. 나는 왜 몰랐을까

나는 왜 평생 문학 공부를 하고도
몰랐을까
약속에 늦은 이가
차 사고로 늦었어요 하면
'핑계일 뿐이야, 차 사고는 개뿔'
이라고 생각하는 대신
"큰 사고는 아니었어?
안 다쳤어?
전화하고 미루지 왜 왔어?"
걱정을 쏟아 냈는지
그게 보통의 반응이라고 생각하며 살아온
나는 왜 몰랐을까
사람들은 면피를 위해 거짓말을 밥 먹듯 하고
그보다 더한 양심도 팔 수 있음을
정말 나는 왜 몰랐을까

 

p183. 아직은 충분하지 않아

아이야 울어도 된다
울지 않고 의연한 네 모습이 더욱 아프구나
세상은 그런 거라고 말하지 않으련다
세상은 그래서는 안 되니까

아이야 힘내 다오
제발 버티어 다오
지금은 그들의 시간이나
반드시 역전의 날이 올 것이다

내 육십 년의 시간이 말해 주니
반드시 너의 억울함을
이 모든 부당함을 밝혀 줄 시간이
올 것이다

그저 기다림의
그저 견딤의
그저 긍정의
마음으로 주저앉지 말거라

아이야
하늘도 우리를 결코 외면하지 않으리니
눈물을 닦고 당당하게 나아가자
아직 갈 길이 멀지 않니

그래도 너의 가는 길 걸음마다
너를 붙잡아 줄 작은 들꽃 하나
너의 은신처가 될 작은 동굴 하나
너의 추락을 막아 줄 작은 바위 하나

그러니 너는 굽이굽이 길을 돌 때마다
그저 마음만 먹어도 너에게 작은 도움을
내일 사람으로 가득했으니
그러나 나는 아직은 충분치 않아

이 길 다 걸으면 길 끝에 내가 서 있으리니
그곳에서 너의 눈물을 닦아 주고 너를 다시 세우리니
그때까지는 그 어떤 것도 충분치 않아
너에 대한 나의 계획은 아직 갈 길이 멀었으니까

 

p187. 기도2

기도는 하느님의 마음을 바꾸지 못한다
기도하는 사람의 마음을 바꿀 뿐이다

     - 쇠렌 키르케고르

 

저는 아마도 많이 부족했던가 봅니다
제게 지워 주신 십자가
너무 무거워서 견딜 수 없을 것 같았습니다
그런데 이제 제 옆에 예수님이 함께
이 길을 걷고 계심을 확신합니다
엠마우스까지 가는 길을 동행했던
그분에 기대며 끝까지 가 보겠습니다
이 십자가 끝에서
제가 조금 더 나은 사람이 되게 하여 주세요

 

p199. 손톱깍이 쓰는 날

오늘은 손톱깍이 쓰는 날
일주일에 한 번이니
늘 옆에 두고 수시로 쓰는
아들과 남편이 여기에 없는 것 또한
다행이고 감사하다
알코올 솜과 함께 지급되어
몇 분간 쓸 수 있는 손톱깍이
내 손톱에는 W023번이 잘 맞는다
발견하기까지 시간이 걸렸지만
아주 작은 쾌적함이
때로는 큰 만족을 주기도 한다
인생처럼.

 

 

p200. 길 없는 길

'길 없는 길'을 걷겠다고 한다
나는 그 길을 오래 생각했다
그대에게 묻지 않았다
물어보아야 할 이유를 찾지 못했다
그대가 그 길을 찾으면
묻지 않아도 알게 될 테니까

그대가 어떤 길을 가도 괜찮다
나는 괜찮다
그 길이 어떤 길이든
그대 곁에 있을 것이니
그대는 매인 곳 없이
자유롭기를 저 하늘의 구름처럼
가볍기를
영원하기를

 

p202. 뿌리 깊은 들품

창틀까지 웃자란 풀을 보고
고개를 갸웃합니다
제초기로 싹쓸이한 게 언제였더라?
엊그제 아니었나?
들풀의 생명력이 새삼스럽습니다
아무리 아무리 싹둑 잘려도
여봐라 문제없다 숨 가쁘게 올라옵니다
그 모든 노력을 잘라 내는 칼날이
가차 없을수록
치고 솟아나는 들풀의 의지도 가차 없습니다
'망연자실할 필요 없어요,
뿌리가 깊으면 문제 될 게 없어요"
칼날의 무자비함을 비웃고 있습니다.

 

p216. 땡큐, 끝까지 간다

사람들이 그런다
절망과 분노와 억울함으로
형편없을 줄 알았는데
꽤 괜찮은 듯해 좀 놀랐다고
내가 무심하게 뱉는다

마지막까지 다 빼앗겼는데
이제 지킬 것이 있어야
애걸복걸이라도 하지 않겠냐고
이제 남은 게 없는데 이제 미련도 없이
홀가분한데 뭐 울 일이 있겠느냐고

땡큐, 이렇게 완벽하게 정리해 줬으니
땡큐, 돌아볼 것 하나도 남기지 않았으니
땡큐, 다시 시작할 수밖에 없게 해 줬으니
땡큐, 끝까지 갈 수 있게 해 줬으니
땡큐, 땡큐, 땡큐

내 몸 하나만 가볍게 맨손으로
앞만 보고 끝까지 간다
그래 봤자 죽기밖에 더하겠나
땡큐, 땡큐, 때땡큐
끝까지 간다

 

p222. 진통제

통증이 날카로우면
진통제가 혈관을 퍼져 나가는 감각 하나하나가 느껴진다
약한 진통제는 전신에 퍼지는 데 삼십 분 걸리고
그보다 강한 놈은 십 분이면 제 할 일을 한다
내 몸은 강한 녀석을 원하지만
내 마음은 인내하라고 한다
너무 아플 때는 인내가 소용없어지고 결국
강한 놈을 불러야 하지만
마음은 늘 약한 놈 먼저 불러
삼십 분을 견딘 후 강한 놈에 의지한다
한두 번 한 일이 아닌데도
마음에는 관성이 있나 보다
어쩌지 못하는 관성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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