자전적 에세이. 전반부는 성장기의 에피소드 후반부는 사회에 나가서 정치에 입문하기까지의 과정 그리고 정치입문 후의 역경을 다루고 있다.
이재명에 대해 알고 싶으면 함 봐두면 좋을 내용. 사실 인터넷에도 많이 퍼져있는 내용이라 이재명에 관심이 있는 이들이라면 웬만큼은 알만한 내용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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p48
무려 프레스공! '나름 성공한 열다섯이었다.'라고 쓰려다 만다. 성공은커녕 고무기판 연마기에 손이 남아나질 않아 공장을 옮겼더니 더 위험한 샤링기를 만았고, 샤링기에서 떠나니 프레스기 앞에 앉아 있었다.
세상은 소년공의 안전에 아무 관심이 없었다.
대양실업에서는 사흘이 멀다 하고 권투경기가 열렸다. 권투가 인기 있던 시절이었다. 경기는 점심시간 공장창고에서 벌어졌다. 직원 단합이나 복지 차원의 경기는 아니었다. 선수는 신참 소년공들이었고, 선수 지명권은 반장과 고참들에게 있었다. 지명당한 소년공들은 무조건 글로브를 끼고 나가 싸워야 했다. 그리고 고참들은 자기들이 먹을 '부라보콘' 내기를 걸었다. 그리고 그 부라보콘 값은 권투 아닌 격투기에서 진 신참 소년공의 몫이었다.
하고 싶지도 않은 경기를 해야 하는 소년공은 경기에 지면 돈까지 내야 했다. 나도 지목당하면 꼼짝없이 경기에 나갔다. 한달 용돈이 500원인데, 부라보콘은 100원이던가? 경기에서 지면 부라보콘 세 개 값인 하루 일당을 고스란히 빼앗겼다. 정말 '개떡' 같은 경기였다.
나는 그때 이미 왼팔을 제대로 쓸 수 없었다. 벼락같이 떨어지는 육중한 구형 프레스기가 왼쪽 손목을 내리치는 사고를 당한 것이다. 조금만 더 늦게 팔을 뺐다면.... 손목이 부어올랐지만 타박상이려니 하고 빨간약과 안티프라민 연고나 바르고 말았다. 손목뼈가 깨졌을 거란 생각은 하지 못했다.
하지만 부기가 가라앉은 뒤에도 통증은 가시지 않았고 프레스기 작업을 제대로 할 수 없을 만큼 아팠다. 내색하면 프레스공 지위를 잃는다는 생각에 아픈 걸 참고 숨기며 더 열심히 일했다. 그게 평생의 장애가 될지 그땐 몰랐다. 프레스기에서 밀려나지 않는 것만 중요했다.
p71
악착같이 공부하겠다는 마음으로 도금실에서 락카실로 옮겼다. 락카실은 이중으로 밀폐된 구역이어서 방해를 덜 받았다. 나는 최고 속도로 작업 물량을 끝내놓고 남은 시간에 공부했다. 그 시간이 내겐 유일한 도피처였다.
그런데 몸이 자꾸 말썽을 부렸다. 두통이 잦아졌고 코가 헐기 시작했다. 락카실은 독성물질이 배출되지 않아 화공약품 냄새가 지독했다. 결국 나는 그곳에서 후각의 반 이상을 잃었다. 좋아하는 복숭아 냄새를 맡을 수 없게 됐다.
프레스기에 치인 손목도 통증이 심해지고 있었다. 한 해 키가 15센티나 컸는데, 두 개의 손목뼈 중 성장판이 파손된 바깥뼈만 자라지 못하고 있었다. 팔이 눈에 보일 정도로 뒤틀리면서 밤새 끙끙 앓는 날이 많았다.
p76
아버지에 대한 내 감정도 양가적이었다. 비 오는 어느 새벽 아버지와 쓰레기를 치우는데 급기야 일을 못 할 정도로 빗줄기가 굵어졌다. 우리는 시장통 처마 밑에 쪼그리고 앉았다. 비가 잦아들기를 기다리며 꼬박꼬박 조는 내 모습을 본 아버지가 가게 좌판에 누워 눈 좀 붙이라고 했다.
새벽에 누가 깨웠다. 엄마였다. 흠뻑 젖은 작업복을 입고 오들오들 떨며 자고 있는 내 모습을 보고 엄마는 말없이 눈물을 쏟았다. 그때 아버지는 희뿌연 여명 속에서 비를 맞으며 혼자 쓰레기를 치우고 있었다.
"재명이 댈꼬 드감더."
엄마가 소리쳤다. 아버지가 천천히 돌아보더니 들어가라고 손짓했다. 아버지의 그 모습이 문득 아렸다.
생각하면 아픈 것들투성이.
그래도 아버지, 그래서 아버지였다.
p79
손목 통증으로 밤새 끙끙 앓는 날이 많았다. 하지만 치료받을 길은 요원했고 치워야 할 쓰레기는 끝도 없이 나왔다. 밤새 쓰레기를 치우고 오면 나는 젖은 박스처럼 구겨져 잠이 들었다.
어느 날 잠결에 엄마와 아버지가 하는 얘기가 들렸다.
"재맹이가 저러다 평생 빙신이 되머 우야니꺼?"
"돈 벌어서 수술하머 될끼라."
"집 살라꼬 모다돈 돈으로 아 수술부터 시켜야 되잖겠니껴?"
엄마의 말에 의식이 또렷해졌다.
"그 돈은 아무도 손 못 대."
엄마와 아버지의 말이 머릿속에서 수없이 재생됐다. 한창 예민한 열입곱 살이었다. 가난은 아득해 보였고 한 팔을 못 쓰는 사람이 되어서도 살아갈 수 있을지 자신이 없었다. 온갖 절망적인 생각이 나를 삼키고 있었다. 눈물이 베개를 적셨다.
다락에 연탄불을 피우고 수면제를 먹었다. 잠은 쉬 오지 않았다. 세상과의 영원한 작별이었다. 슬프기도 했지만 홀가분하기도 했다.
얼마가 지났을까? 나는 멀쩡하게 눈을 뜨고 다시 깨어났다. 연탄불을 꺼져 있었고 정신은 말짱했다. 공장 친구들은 그 정도면 죽는다고 했는데... 수면제가 부족했던 모양이었다. 다시 기회를 보기로 했다.
다시 약국에 들렀다. 또 수면제를 달라고 하면 이상하게 여길 듯해 이번에는 동생 핑계를 대고 수면제 20알을 샀다. 약사가 잔소리가 많았ㅈ만 귀에 들어오지 않았다.
유서를 썼다. 엄마에게 미안했다. 하지만 달리 방법이 없어 보였다. 너무 지쳤다고 말하고 싶었다. 눈물 때문에 글씨가 잘 보이지 않았다.
다시 연탄불을 붙이고 꾸역꾸역 수면제를 삼켰다.
p.156
나는 승률이 높은 변호사였다. 사건을 치밀하게 분석하고, 법리는 물론 최신 판례까지 샅샅이 뒤져 변론을 준비했기 때문이다. 재밋게도 내가 노동자들을 변론하느라 재판정에서 맞붙었던 회사와 기업주들이 나에게 다른 사건을 의뢰하고 소개하기도 했다. 그들은 나로 인해 패소했지만 그래서 오히려 내가 자기들 변호사였으면 싶은 생각이 들었다는 것이다. 그런 기업들은 노사문제가 아닌 민사사건을 가지고 왔다. 수임료가 괜찮았다.
법률상담도 열심히 했다. 답을 못 찾겠으면 며칠 뒤 다시 오라고 한 뒤, 책 사서 공부하고 판례를 분석해 답을 찾았다.
지금은 인터넷으로 최신 판례를 손쉽게 확인할 수 있지만, 당시에는 책자로 만들어 전국의 변호사 사무실로 팔러 다니는 사람들이 있었다. 성남에서 최신 판례집을 빠짐없이 구입해 탐독하는 건 나뿐이었다.
"돈도 안 받는 무료상담을 왜 그렇게 열심히 하는 거야?"
하루는 무료상담이 끝난 후 이영진이 물었다. 얼굴에 의아함이 가득했다.
"내가 답을 찾아주지 않으면 저 사람들은 성남 어디 가서도 답을 찾지 못할 거야. 성남의 변호사인 내가 해야지."
나의 대답에 대한 감상평이랄까. 이영진은 그 시절의 나에 대해 이렇게 전한다.
"재명이는 늘 공부했어요. 보통 변호사 되고 나면 공부 안 하거든요. 그래서 머리가 굳고 생각도 굳는데, 재명이는 안 그래요. 또 재명이는 질 사건은 맡지 않았어요. 질 게 분명한 걸 가지고 소송하려고 하면 하지 마라, 해도 진다, 시간과 돈만 날린다, 그렇게 얘기했어요. 그런데도 우리 말 안 듣고 기분 나빠하며 다른 사무실 찾아가서 소송한 사람들 어떻게 되었겠어요? 지고 나서 후회하며 우리한테 와서 그때 변호사님 말 들을 걸 그랬다고 후회하죠.
p162
'파크뷰 특혜사건'은 분당 백궁/정자지구의 상업/업부용 토지를 주거용으로 용도변경하고 정/관계 유력인사들에게 특혜분양한 권력형 비리였다. 토지를 용도변경해 아파트를 짓는 일은 건설업자에게 엄청난 차익을 안겨주는 것이었다. 나는 1999년 말부터 용도변경의 부당성을 지적하며 반대운동에 나섰다. 하지만 주민들의 강력한 반대에도 불구하고 성남시는 용도변경했고, 이 땅의 가치는 천정부지가 되었다. 사건을 파헤쳐 나갈수록 배후에 토건업자와 정관계, 검찰, 언론으로 이어지는 막강한 고리가 버티고 있음을 알 수 있었다. 지역의 변호사 한 명과 시민단체가 맞서 싸우기에는 너무나 거대한 상대였다. 주변에서 다친다며 물러서라는 권유가 잇달았다. 무모하다고 했다.
나라고 두렵지 않은 것은 아니었다. 하지만 몰랐다면 모를까 부정이 행해지고 있음을 알게 된 이상 물러서는 것은 옳지 않았다.
결심은 그러했지만 실제의 상대는 예상보다 막강했다.
토건세력은 처음엔 회유책으로 나를 포섭하려 했다. 내가 지역의 노동자와 시민을 위한 언론사를 만들고 싶어한다는 사실을 알아낸 뒤 20억을 투자해주겠다고 제안을 해왔다. 20억, 천만 원도 없어 사무실 개업비용을 빌렸던 내게 20억이라.. 나는 이런 제안이 들어왔다는 사실을 동료들에게 얘기했다. 그리고 이렇게 반문했다.
"우리가 양심을 팔려면 얼마를 받아야 할까?"
돈으로 사람도, 영혼도 살 수 있다고 믿는 세력들이었다. 나는 한 5천억은 받아야 하지 않겠냐고 했다. 성남시민모임과 같은 단체를 전국적으로 2~3백 개쯤 만들어 운영하려면 그 정도는 있어야 하지 않을까 싶었다. 모두가 웃었다. 웃픈 농담. 그들은 이날의 농담을 소문냈다. 이재명이 20억이 적다며 5천억을 요구했다고.... 덕분에 내 양심의 공시지가는 20억에서 5천억으로 급격히 상승했다.
회유가 먹히지 않으니 다음 단계는 협박이었다. 나를 향한 협박까지는 견딜 만했다. 하지만 가족을 해치겠다는 협박에는 나도 힘들었다. 그들은 사무실은 물론 집으로도 전화를 해댔다. 새벽에 전화해서 아내에게 아이들이 다니는 학교와 반까지 대면서 좋지 않을 거라고 했다. 아내가 무척 고통스러워했다. 경찰에 신고해도 소용없었다. 나중에 보니 경찰서 간부도 한패였다.
결국 나는 허가를 받고 6연발 가스총을 구비했다. 양복 주머니에 총을 넣고 다녔다.
상대는 거대한 골리앗이었다. 어떻게 할 것인가? 나는 생의 방향을 결정할 커다란 물음 앞에 서 있었다.
p168
아파트 특혜분양은 곁가지였다. 몸통은 땅의 가치를 천정부지로 뛰게 한 용도변경이었다. 어마어마한 이득이 발생하는 지점. 나는 사건의 본질을 추적하는 KBS '추적 60분' 팀의 취재와 인터뷰에 응했다. 나와 인터뷰 도중, 내 사무실에 오기 전 수차례 검찰을 사칭해 시장 비서진과 통화하며 시장과의 연결을 요청한 KBS 피디에게 시장으로부터 통화하자는 음성메시지가 왔다. 용도변경의 최종 인허가권자였던 성남시장에게 전화한 피디는 자신이 파크뷰 사건 담당검사라며 솔직하게 전모를 털어놓을 것을 종용했다. 당시 성남시장(인터넷 검색해보면 나온다. 김병량 시장이다)은 내막을 털어놓았고, 기자는 통화를 녹취했다.
며칠 후 녹취가 '추적 60분' 방송으로 나갔지만 반향이 없다. 나는 피디에게 통사정해 녹취파일을 받아 기자회견장에서 공개했다.
마침 지방선거와 맞물려 세상이 뒤집혔다. 당황한 성남시장은 피디의 검사사칭 배후로 나를 지목했고, 검찰은 나를 공범으로 기소했다. 억울해서 대법원까지 가며 싸웠지만 결국 유죄로 벌금 150만 원을 받았다. 사칭한 PD는 선고유예였다.
'파크뷰 특혜사건' 싸움은 몇 년에 걸쳐 계속됐다. 무려 499세대를 정관계, 법조계, 언론계의 유력자들에게 특혜분양한 사실이 드러났고, 도움을 주고 돈을 받은 경기도지사 부인, 성남시장, 경찰간부, 언론인, 정치인 등 관계자들이 줄줄이 구속되었다.
돌이켜 생각하면 그 사건은 나와 부동산마피아, 음험한 기득권 세력과의 전선이 구축되는 순간이었다. 이 일을 두고 어떤 평론가는 내가 '부동산 패권주의 세력의 역린을 건드린 것'이라 표현하기도 했다.
문제는 이 싸움이 아직 끝나지 않았다는 것.
부동산투기 세력은 지금까지 면면히 이어지고, 땅을 통한 그들의 이익 추구는 만족을 모른다.
그들은 전방위적인 수단을 동원해 부동산값 상승을 부추기고, 서로 결탁해 범법하며 천문학적 이득을 취한다. 그들은 이기기 어려운 거악이자 우리 사회의 숨은 실력자들이다.
p170
토건마피아와의 싸움은 지금도 계속된다.
대장동 개발사업 또한 다르지 않다. 대장동 건은 이미 2018년 경기도지사 선거 때도 내가 검찰에게 기소당한 사건이다. 검찰은 개발이익금 5,503억 원을 시민 몫으로 환수했다는 내 발언이 허위사실 공표라고 기소했다. 결론은?
'무죄'였다.
검경은 이미 그때 현미경을 들이대듯 대장동 사업을 자세히 들여다보았을 것이다. 내게 부정과 비리가 있었다면 이미 그때 그 점을 문제 삼지 않았겠는가.
원래 LH의 공공개발로 추진되던 대장동 개발사업을 민간개발로 바꿔놓은 것 국민의힘 세력이다.
(대장동 개발사업에 대해 자세히 알고 싶은 사람은 다음 포스팅을 참고하라)
https://lachezzang.tistory.com/1332
https://lachezzang.tistory.com/1333
https://lachezzang.tistory.com/1334
하지만 나는 성남시장이 되면서 민간개발을 막고 성남시 공공개발을 추진했다. 공공개발로 시민 모두의 이익이 돼야 한다는 것이 내 원칙이었다.
국민의힘 세력의 저지로 공공개발이 막히자 공공민간 합동개발이라도 해서 최대한 공익환수를 하기로 했다. 이가 없으면 잇몸이라도 써야 한다. 국민의힘 세력이 장악한 시의회의 반대로 지방채 발행이 막혀 성남시 예산만으로는 개발자금을 조달할 수 없어 민간투자를 받아야 했다. 이에 나는 원칙을 세웠다.
자본은 민간이 댄다. 손해와 위험은 민간이 진다. 성남시는 사업이 어떻게 되든 고정이익을 취한다.
오히려 민간사업자가 계약을 꺼릴만큼 성남시에 일방적으로 유리한 사업방식이었다.
25억을 투자한 성남시는 당초 예상이익의 70%인 4,400억가량을 환수했고 1조 3천억을 투자한 그들은 몫은 30%인 1,800억이었다. 나중에 지가 상승으로 그들의 이익이 2천억가량 늘어났지만 성남시가 업자들에게 1,400억을 더 부담시켜 전체이익의 60% 가량을 환수해 시민들에게 돌린 결과가 됐다. 내가 아니었으면 5,800억도 그들 업자와 정치인, 전직 검사들의 몫이 되었을 것이다.
부동산 투기세력은 나의 기습에 또다시 당한 셈이다. 토건마피아가 지금까지도 결사적으로 나를 반대하는 배경이다.
땅을 통한 그들의 이익 추구는 매일매일 성실히 일하며 살아가는 시민들에게 박탈감을 준다. 상승하는 부동산 가격으로 다수의 사람들을 벼락거지로 만든다. 공동체 전 구성원들로 하여금 이 사회의 공정과 정의를 회의하게 만든다.
불로소득은 누군가의 손실이다. 부동산 불로소득은 누군간의 피눈물이다. 이 적폐를 뿌리 뽑지 않고서는 공정과 정의를 기대하기 어렵다.
세계 10위의 경제대국 대한민국이다. 이제 국가가 국민의 기본권으로서 주거권을 보장할 때다
지역균형발전, 수도권 집중완화, 대규모 주택공급, 기본주택등의 영민한 정책집행이 필요하다. 하기로 작정하고, 용기있게 결정하고, 과감히 실행하면 얼마든지 가능하다. 그런 자신감이 내게는 있다.
국민들의 머릿속에서 집 걱정 사라지게 하는 것이 내 목표 중 하나다. 혼자서는 불가능하겠지만 부정과 불의를 끝내겠다는 백만, 천만 국민의 뜻과 의지가 있다고 믿는다.
p173
대학교 1학년 때 일이다. 1주일의 군사학교 입소훈련을 앞두고(*1988년까지 고등학교, 대학에 교련교육이 있었다. 남자의 경우 대학 1학년때 문무대에 입소해서 1주일간의 기초군사훈련을 받았으며, 2학년때는 전방 군부대에 입소해서 1주일간경계 근무 체험 - GOP에서 철책선 근무, 매복 등 -을 하게 된다. 학생 때 힘든 경험일 순 있는데 문무대 1주일 입소 혜택이 군대 45일 면제, 1주일 군부대 입소가 군대 45일 면제, 합하면 90일, 무려 3달의 군대 기간 면제 혜택이 있었다. 당시 일반적 육군의 복무기간은 30개월이었는데, 이 혜택 여부에 따라서 대학을 나온 후임병장이 그렇지 않은 선임병장보다 먼저 제대를 하는 경우도 있었다. 그런 이유 때문인지 이 당시 대부분의 대학생들은 2학년을 마치고 나서 휴학을 하고 군대를 가는 것이 일반적인 관행이었다) 교련 교관이 장애를 증명하는 진단서를 떼어오라고 했다. 성남의 가장 큰 병원으로 갔다. 진단비가 2만 원이라고 했다. 돈이 없던 나는 발길을 돌렸고, 다음날 어렵게 2만 원을 마련해 들고 갔다. 그런데 병원에선 접수비 1천 원을 더 내라고 하더니 X-선비 1만8천 원도 추가로 요구했다. 무려 3만9천 원이었다. 화가 났다. 다른 병원에 정화를 걸어봤지만 취급하지 않는다는 답변만 돌아왔다.
병원은 에누리 없는 시장논리로 사람을 대하고 있었다. 의료보험 혜택을 받을 수 없어 치료도 포기했던 나였다. 마음이 씁쓸했다. 나는 진단서를 포기했다. 그리고 경험 삼아 입소를 하기로 하고, 다른 친구들과 똑같이 군사훈련을 받았다.
그런 일을 겪으며 의료에서 공공성이 얼마나 중요한지를 깨달았다. 다급한 생명의 문제이지 않은가? 성남시립병원 설립 추진운동은 다수 서민들을 위한 길이었다. 결국 나는 추진위원회의 공동대표를 맡게 됐다.
우리는 시립병원을 세우기 위해 주민발의 조례제정에 나서기로 했다. 주민발의 조례제정은 지방자치에 처음 만들어진 제도였고 교과서에나 있는 것이었다. 그것을 현실에서 실현하겠다고 꺼내 든 것.
지역 정치인들이 비웃었다. 압력을 행사하기 위한 퍼포먼스 정도일 거라 생각하는 사람도 많았다. 하지만 우리는 진심이었다. 나 또한 그때도 지금도 한다면 하지 시늉만 하는 사람은 아니다.
한파가 몰아치는 겨울, 우리는 노상에서 핸드마이크를 들고 주민발의 참여자를 모집하기 시작했다. 노조원들과 성남시민모임뿐만 아니라 변호사 사무실 상근자들까지 달라붙었다. 새벽 2시까지 일하는 날들이 반복됐다.
그렇게 주민발의자 18,595명을 모았다. 주민발의자는 자신의 거주지와 신원을 증명하는 주민증까지 확인해야 한다. 그런 발의자를 3주 만에 2만 명 가까이 모은 것이었다. 설립 지지 성명에는 20만 명이 넘는 시민이 참여했다. 구도심 지역 시민의 절반에 가까운 숫자였다. 시민들의 뜨거운 반응에 우리 모두가 놀랐다.
p176. 47초 만에 무산된 시민의 꿈
마침내 2004년 3월 24일, '성남의료원 설립 및 운영조례안'이 성남시의회에 상정되었다.
당일 시의회 참관인석에 자리 잡은 우리는 시장과 시의원들이 시립의료원을 설립하라는 성남시민의 압도적인 바람과 여론을 쉬 무시하지 못할 거라 여겼다. 하지만 잠시 후 믿을 수 없는 장면이 연출됐다. 단 47초 만에 '심의보류'가 선포된 것이다. 심의보류는 사실상 부결이자 폐기였다. 최소한의 찬반 토론도 없이 그랬다. 경악스러웠다.
유동인구 50만이 넘는 성남 본시가지에 변변한 종합병원은 물론 공공의료시설이 제대로 없었다. 주민들은 가장 필요한 것을 스스로의 노력으로, 또 정당한 권리와 방법으로 요구하고 있었다. 그러나 단 47초 만에 날치기로 묵살당했다. 한나라당이 장악한 성남시의회는 시민을 발끝에 차이는 돌부리만큼도 여기지 않았다. 분노한 우리는 본회의장으로 들어가 강하게 항의했다. 놀란 시의원들은 서둘러 꽁무니를 뺐다.
텅 빈 회의장에 주저앉아 모두 울었다. 그러면 안 되는 것이었다. 주권재민은 사전에만 있는 죽은 언어란 말인가.
일은 그것으로 끝나지 않았다. 성남시의회는 한술 더 떠 시민대표와 나를 특수공무집행 방해로 고발했다. 그것이 시민을 대하는 그들의 태도였다. 나는 체포를 피해 시청 앞 주민교회 지하실에 숨었다. 체포가 두려워서가 아니라 고발당한 시민들에 대한 대책을 마련할 시간이 필요했기 때문이다.
"변호사님, 우리는 이제 어떻게 해야 합니까?"
교회 지하실로 찾아온 인하병원의 노조위원장 정해선이 물었다.
"우리가 만듭시다."
내가 대답했다.
"어떻게요?"
"우리가 시장 합시다. 그리고 우리가 병원 만듭시다."
그 일로 벌금 500만 원을 선고받아 파크뷰 사건에 이어 두번째 전과가 생겼다.
그로부터 10년이 지난 2013년 나는 성남시장으로서 성남시 의료원 착공식에 착공 기념 발파 버튼을 눌렀다.
p180. 이재명 제거 작전
이명박, 박근혜 정권 때 나흘에 3일꼴로 압수수색과 조사, 감사, 수사를 받았다.
집무실과 집에 대한 압수수색은 기본이었고, 검경은 해외출장 시 퉁화한 목록, 어머니가 시청에 출입한 CCTV 기록까지 요구했다. 성남시 공무원 수십 명이 조사를 받기도 했으며, 시청과 집에 50명의 검사와 수사관이 들이닥치기도 했다.
2012년 이명박 정권은 나에 대한 40쪽 분랸의 보고서를 작성했다. 청와대와 행안부, 한나라당 소속 김문수 지사의 경기도가 성남시에 대한 내사에 들어가 2개월에 걸쳐 조사한 결과다.
당시 청와대 내부에서는 나를 물너나게 해야 하며, 성남의 보수 시민단체를 움직여 주민소환 투표를 유도한다는 구체적인 방법론까지 거론됐다고 한다.
최근까지도 크게 다르지 않았다. 문재인 정권이 개혁하려 했던 구태 검찰세력은 나를 잡기 위해 온갖 시도를 했다. 때문에 선출직 공직자 생활 12년 동안 처음 2년을 뺀 나머지 기간 내내 정치적 명운을 건 사법투쟁을 계속해야 했다.
나는 기득권의 표적이며 끝없이 감시받아 왔다.
왜 그러한가. 덤볐기 때문이다. 공익을 위해 덤볐다. 적폐와 손잡지 않았다. 그 과정에서 온갖 의혹이 더해졌고 '아니면 말고' 식의 언론보도로 수없이 고약한 이미지가 덧대졌다. 나는 내가 어항 속 금붕어임을 잘 알고 있다. 호시탐탐 나를 제거하려는 세력은 지금도 매순간 나를 캐고 흔들어댄다. 이는 팩트이다. 그러하니 부패가 내겐 곧 죽음이다.
내가 희망하는 사회는 더불어 함께 사는 세상이다. 그런 세상을 만드는 데 내가 도움이 될 수 있길 희망한다.
하지만 누구나 더불어 함께 잘 사는 그런 세상은 가만히 기다린다고 오는 것이 아니어서, 나의 싸움은 아직 마무리되지 않았다. 다만 혼자 싸워서는 절대 이길 수 없음을 절절히 느낀다. 함께 싸워줄 동지들이 필요하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