CSI 드라마가 유행하던 2010년 초에 나왔던 책. 당시까지는 유명인이 되기 전인 경찰대학 교수 시절의 표창원 씨가 저술한 책이다.
책의 내용은 과학수사의 기본적인 개념과 필요성을 실제 미제 사건 사례와 함께 소개하기 때문에 꽤 흥미롭다.
특히 오제이 심슨 사건과 김성재 살해 사건에 대해서 자세한 수사와 재판의 경위가 정리되어 있어서 자극적인 언론의 내용과는 차별화되는 지식을 얻을 수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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p74
기계에 의한 자동 검색, 각종 잠재 지문 현출 장비의 출현 속에서 '지문 전문가'의 역할을 무엇인가?
지문을 컴퓨터 자료로 관리하고 그 자료를 자동으로 검색하는 장비를 개발하면서부터 지문 전문가의 중요성이 다소 떨어지는 것 같다. 지문 자동 식별 시스템(AFIS) 프로그램을 활용하는 기초 지식만 습득하면 활용 여부에 따라서 누구나 지문 전문가가 될 수 있다. 컴퓨터는 등록한 지문을 토대로 특징점을 추출해 주기 때문에 사용자는 육안으로 관찰한 후 맞지 않는 부분만 체크하면 되고, 컴퓨터가 입력된 값을 토대로 시스템에 등록된 자료와 비교 검토한 후 판단 결과를 보여 준다. 지문에 관심이 있다면 누구나 단시간 내에 동일한 작업을 반복할 수 있다. 또한 자동 검색 시스템의 프로세스가 계속 개선되기 때문에 입력한 사람과 관계없이 프로그램의 정확도도 매우 높아진다.
잠재 지문 현출 장비도 비슷하다. 사람에 관계없이 동일한 결과를 보여 준다. 한 예로 LUVIS를 들 수 있다. 현장에서 잠재 지문을 찾고자 할 경우, 기기를 작동시키고 매뉴얼에 있는 방법대로 조작한 뒤 현장을 돌아다니면 된다. 그럼 지문 전문가의 역할이 될까? '컴퓨터에 넣을 지문을 얼마나 좋은 품질로 현출해 내는가'다 현장에 제아무리 좋은 지문이 남겨져 있다 한들 그걸 체취하는 데 실패한다면 차후에 이루어지는 확인 과정은 무의미해질 것이다. 결국 첨단 장비를 개발해 현장에서 활용한다고 해도 사람이 수집한 증거물에 의해서 모든 과정이 진행되므로 지문 전문가의 역할은 항상 중요하다. 물론 지문 전문가가 자만심에 빠져서 최신 정보를 받아들이지 않은 채 노력과 연구를 게을리 한다면 이미 지문 전문가의 자격을 잃은 셈이다.
북유럽 방식의 보편복지로 가기 위해 보편증세가 선제적으로 이루어져야 한다는 주장을 차근차근 풀어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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p35
이처럼 1990년대 스웨덴 노인들의 삶의 질이 상승한 것은 기업과 은행이 연쇄 도산을 하고 실업자가 발에 치이는 와중에 벌어진, 어떻게 보면 매우 비상식적인 사건이다. 모두 알다시피, 한국의 자살률이 IMF 사태 이후 오랫동안 OECD 1위에 머문 것은 끔찍하게 치솟은 노인 자살률 때문이다. 경제위기 이후 극명하게 갈린 두 나라 노인들의 삶을 통해 한국 사회가 얻을 교훈이 있으리라 생각한다. 하지만 그런 것을 생각하기에 앞서 착잡함에 할 말을 잃게 된다. 우리 사회의 가난한 노인들이 겪어야 했고, 또 지금도 변함없는 그 딱한 처지가 떠오르기 때문이다.
p43
세금과 복지의 선진국이란, 사회구조적으로 구성한 한 명 한 명이 서로 긴밀한 도움을 주고받는 연대적 관계로 맺어지는 사회를 의미한다. 물론 이런 사회라고 해서 사악한 행동과 이기적 인간 군상이 없는 것은 아니다. 사회연대의 손길이 미치지 못하는 사각지대도 남아 있다. 하지만 이러한 사회에선 구성원 대다수가 상호 도움을 주고받는 사회구조에 편입되어 있다. 바꿔 말하면, 세금과 복지를 발전시킨 나라에서는 '선의 평범성'이 사회구조에 따라 자동적으로 실현된다. 한 사회에 속한 개인의 취향이나 가치관과는 맞지 않더라도 사회구조가 그러하기에 따라야 할 삶의 규율이 제대로 작동하고 있는 것이다.
반대로 세금과 복지의 후진국은, 거기에도 선한 행동과 이타적인 사람들이 없는 것은 아니지만 '악의 평범성'이 사회구조에 따라 자동적으로 발현된다. 대부분의 사회 구성원이 연대적 관계를 맺지 못한 채 도움이 필요한 동료들을 비정하게 방치한다. 한국은 이를 극명하게 보여주는 사례다.
나는 나와 당신의 세금이 우리 모두의 삶을 책임지는 사회를 희망한다. 이것은 사회의 모든 문제가 말끔히 해결된 그런 유토피아가 아니다. 세금과 복지를 튼튼히 한다는 것은 '기본을 해놓자'는 의미이지 이것만 잘되면 만사가 문제없다는 만병통치론이 아니다. 하지만 대한민국 사회가 이 기본에 충실할 때, 우리들의 세금은 짜증과 스트레스의 요인이 아닌 우리 삶의 든든한 버팀목이 될 수 있을 것이다.
p63
OECD 주요국 거의 모두가 한국에 비해 '1인당 GDP 대비 1인당 고등교육비'가 한결 높다는 것은 '한국의 등록금이 비싸다'는 인식에 오류가 있음을 보여준다. 이 고등교육비는 정부든 가계든 누군가는 비용을 치러야 한다. 만약 개별적인 학비 지출이 적고 정부 부담 교육비가 많은 유형의 나라들에서 한국처럼 각자 알아서 학비를 내는 방식으로 전환한다면, 이들의 높은 '1인당 GDP 대비 1인당 고등교육비'를 고려할 때 부담 없이 싼 가격으로는 고등교육을 이수할 수 없다. 결국, 한국의 등록금이 비싸다는 것은 세금을 인상해 학비를 공동으로 지불하는 방식을 택하지 않기 때문이지, 정말로 등록금이 터무니없이 비싸기 때문은 아니다.
그동안 밑도 끝도 없이 일어났던 수준 미달의 대학들과 한국의 유달리 높은 대학 진학률, 그리고 지나치게 낮은 '1인당 GDP 대비 1인당 고등교육비'는 서로 연결되어 있다. 이런 점에서 무턱대고 등록금 인하를 주장해온 한국의 대학생 및 시민단체들은 관점을 교정할 필요가 있다. 그들은 보편적인 세금인상을 터부시하는 가운데 본디 비싸기 마련이며, 여타 국가들에 비해 비싸다고 보기도 어려운 '학비'를 내려야 한다고 다분히 억지를 부려왔던 것이다. 여기에 정치권은 등록금이 비싸다는 아우성만을 받아들여 등록금 인상을 간접적으로 억제함으로써 고등교육의 수준을 떨어뜨리는 데 일조했다. 우리 사회는 아예 철저한 미국식을 택해 등록금과 학자금 대출이 천정부지로 치솟도록 내버려둠으로써 대학의 질적 향상을 도모하든가, 아니면 복지강국의 방식을 택하여 세금을 더 걷는 대신 개별 교육비 지출을 최소화하고 고등교육에 대한 공적 투자를 늘리는 방식으로 가야 한다.
한국의 후자의 방식을 택하려 한다면 대학 구조조정이 필수이다. 유달리 많은 한국의 대학생들에게 여타 국가에 준하는 '1인당 GDP 대비 1인당 고등교육비'를 투입하는 것은 곤란하기 때문이다. 이는 세금의 누수이고 고등교육의 낭비이다. 증세를 통한 개별 학비의 최소화하는 대학 구조조정, 세금과 복지의 총체적인 개혁, 나아가 노동시장의 정상화까지 모두 한 세트로 추진돼야 한다.
p66
연 30조 원대의 사교육비가 쓰이는 것이 현실이다.
이런 대규모의 사교육비는 한국의 이례적인 소비 행태다. 막대한 사교육비가 전부 세금으로 납부돼야 할 필요까진 없겠지만, 이로부터 일정 부분 보편 증세가 이뤄질 수 있고 또 그렇게 되어야 올바르다. 웬만해서 사교육비를 쓰지 않고 그것이 가구의 여유소득이 되며, 그 여유소득 중 일부를 세금으로 내어 복지를 발전시키는 사회가 합리적이다. "사교육에 지출하고 나면 남는 것도 없고 노후도 대비하지 못할 지경"이라는 사연이 언론의 단골 기사로 올라오는 현실은 기괴하기 짝이 없다. 이런 자해적인 소비 행태를 지속하느니 세금을 더 내고 복지 발전을 요구하는 것이 당사자에게도 모두에게도 이득이다. '사교육비 때문에 버겁다'는 헬조선적 션실이 아득한 추억이 될 수 있도록 사교육비의 일부는 필히 세금으로 전환돼야 한다.
p155. 저급 정치인들은 조세저항을 먹고 자라난다
상품이나 서비스의 구매자가 저렴한 비용을 지불할 때와 고액의 대가를 치를 경우 기대하는 품질은 천양지차다. 쉬운 예로 특별한 날을 기념하고자 수십만 원대의 고급 음식점을 찾는 손님은 위생, 맛, 직원의 서비스, 장소의 시원함이나 따듯함, 쾌적하고 기분 좋은 인테리어와 분위기 등등 여러 가지 까다로운 기준을 가지고 품질을 평가한다. 반면에 길거리 포장마차에서 간단한 요깃거리를 사 먹는다면, 위생 상태에 예민해하지도 않고 추운 날씨도 개의치 않으며 기막힌 맛이나 호사스러운 서비스를 기대하지도 않는다.
세금 역시 마찬가지다. 많은 세금을 내는 국민은 그만큼 정치를 대하는 눈높이가 높아지고, 제발 정치에 관심 좀 가지라고 누가 타이르고 보채지 않아도 알아서 야무지게 정치를 감시하게 된다. 고가의 재화를 구입하는 소비자가 그에 상응하는 고품질을 깐깐하게 따지듯, 높은 세금에 부응하는 고품질의 정치를 엄격하게 따지는 것이다. 이렇게 다져진 냉철하고 단호한 정치의식은 뛰어난 정치를 이끌어내는 거대한 압력으로 작용한다.
최정상의 복지국가에서 평범한 국민은 소득세, 사회보험료 등 수입에서 원천 징수되는 세금에다 소비할 때 납부하는 간접세를 더해, 세금이 충실하게 복지로 돌아오지 않을 경우 생활수준이 현저히 떨어질 만큼 무거운 부담을 진다. 세금이 잘못 쓰여 복지에 차질이라도 생긴다면, 나라가 발칵 뒤집힐 만한 정치 지형이 조성돼 있다.
반면 한국인들은 직접세에 간접세까지 죄다 더해도 어느 소득계층이건 자신의 소득 단계가 달라지지는 않게끔 세금을 낸다. 세금이 작으니 복지도 작고, 복지강국과는 달리 세금과 복지에 따라 삶의 조건이 좌우되지도 않는다. 사람들은 늘 세금이 줄줄 새고 복지가 부족하다고 불만이지만, 콕 집어 이 때문에 정치판을 갈아엎기는 어려운 정황이다. 국민으로서는 이래저래 답답한 환경이지만 저급 정치인들에겐 한국 같은 꿀단지가 따로 없다. 높은 조세저항과 낮은 세금은 팍팍한 삶의 근원인 동시에, 정치에 대한 허술한 감시망의 토양이기 때문이다.
세금을 올리는 일은 흔히 '고양이 목에 방울 달기'로 비유되곤 한다. 하지만 조세 문명이 발달한 현시대에 이런 사고는 업그레이드될 필요가 있다. 정치의 기강을 바로잡는 세금의 위력을 감안할 때 증세는 '호랑이 목에 방울 달기'가 될 수 있고 또 그래야 한다. 언제 어느 때나 정치는 국민을 두려워해야 하고, 그들에게 있어 '얼마든지 세금을 늘리라는 국민'처럼 무섭고 불편한 존재도 찾기 힘들다. '진짜' 세금폭탄을 얻어맞는 복지강국의 국민은 사소한 낭비나 비리에도 냉혹한 심판을 내린다. 한국 국민도 만만찮은 세금 출혈을 감수한다면 복지가 잘 굴러가는지, 정치인들이 일을 똑바로 하는지 '날마다 일상에서, 그냥 저절로, 두 눈을 시퍼렇게 뜨고' 지켜보게 된다. 돈이 아까워서라도 정치에 대한 단속을 게을리하기 어려워진다. 결국, 조세저항을 극복한 국민의 등장은 한국의 구태 정치인들에게 청천벽력 같은 소식이다.
물론, 세금이 폭증해야만 불량 정치인들이 철퇴를 맞고 정치 선진국으로 발전하는 것은 아닐 것이다. 그러나 고질적인 정치 후진국 한국에서 정치를 제자리로 돌려놓고 또 그 상태를 유지하기 위해 세금은, 이미 앞선 국가들에서 검증을 마친, 더할 나위 없이 확실한 대안이다. 평범한 소득층마저 '살벌하게' 세금을 내고 대다수 인생의 성패가 복지의 성패에 달려 있다면, 이것은 분명 우수한 정치를 안착시키는 단단한 기반이 된다.
p160. '낙수효과'와 '부자증세'는 거울에 비친 듯 닮아 있다.
'낙수효과'의 기본 논리는 부자가 막대한 부를 자유로이 쓰도록 내버려둘 때 이들의 소비와 투자가 늘어나 나머지의 후생이 증대된다는 것이다. 반대로 '부자증세'는 낙수효과란 허구이므로 부자의 막대한 부를 세금으로 걷어 유용한 곳에 써야 한다는 입장이다. 이처럼 낙수효과와 부자증세는 서로 상반된 주장을 한다. 하지만 이는 표면적인 대립일 뿐 실제로 이 둘은 공통된 성격과 목표를 가지고 있다. 조세저항을 기저에 깔고 고약한 '대기주의'를 종용하며 자잘한 세수 증대를 내세운다. 복지 발전이 관심사가 아니라는 점도 이들이 만나는 지점이다.
부자증세가 왼쪽 버전의 '수동적 대기주의'라면 낙수효과는 그 오른쪽 버전의 쌍둥이다. 우측에서 수동적 대기주의를 조장하는 이들은 '부자나 기업이 돈을 풀어야 일자리가 창출되므로 그때까지 사람들은 참고 기다리는 게 상책'이라고 주장한다. 복지를 명분으로 세금을 올리거나 하면 경제 활력을 해치니까 괜한 간섭은 삼가라는 것이다. 낙수효과가 실현될 때까지 이제나저제나 인내력을 발휘하는 것이 사람들이 지켜야 할 덕목이다.
낙수효과란 이름의 조세저항을 뒷받침하기 위해 근거가 빈약하거나 협박이나 다름없는 논리까지 동원된다.
"분배는 성장을 저해한다."
"세금으로 일자리를 늘리다간 나라 망한다."
"일자리는 민간에서 나오지 정부에서 나오는 게 아니다."
"부자의 세금이 오르면 투자 의욕이 감퇴되어 일자리가 사라지고 애꿎은 서민만 피해를 입는다."
"부자와 기업이 투자를 확대해 경제가 성장하면 자연히 세수가 증가하니(이렇게 늘어난 세금이 얼마 되지 않는다는 건 내 알 바 아니고) 억지로 세금을 인상할 이유가 없다."
이 모든 주장들을 관통하는 것은 (부유층의) 조세저항이고, 낙수효과의 출발점도 조세저항의 정당성을 보이는 것이다.
부자증세에 몰두하는 이들은 낙수효과와 반대 방향에서 시작하지만, 결론에서는 낙수효과와 똑같이 '수동적 대기주의'를 조장하고 (부자가 아닌 이들의) 조세저항을 옹호한다. 소수의 상위층만을 추궁하는 부자증세파는 '탐욕스러운 부자와 대기업이 내놓을 때까지 나머지는 나서지 말라'고 설교한다. 부유층에서 복지재원을 빼내 와야 사회정의가 실현되니 이에 어긋나는 행동은 자중해야 한다는 것이다. 이때는 부자증세로 조세 정의가 구현될 때까지 부자와 기업의 허물만을 욕하며 기다리는 것이 미덕이 된다.
부자증세파는 흔히 부자와 기업을 악랄한 수탈자로, 나머지는 순결하고 가련한 피수탈자로 묘사한다. 하지만 이는 허상이지 사실이 아니다. 물론, 부자와 기업에게 많은 과오가 있는 것은 사실이고 노블레스 오블리주가 됐든 뭐가 됐든 사회적 책무를 다하지 않는 것도 분명하다. 하지만 그렇다고 대다수의 한국인이 날마다 실천하고 있는, 나보다 조금이라도 약자를 착취하는 이기적인 생활양식이 가려지지는 않는다.
사실상 부자증세파는 복지는 핑계고 단지 부자의 세금을 올리는, 그 자체에 함몰된 성격이 짙다. 부자증세로 걷히는 세금으로는 강력한 복지를 구축하는 데 턱없이 모자라다는 사실이 이들에게는 하나도 중요하지 않다. 또한 이들은 보편 증세가 윤리적으로 옳지 않다고 비판한다. 이들이 보기에 모두가 세금 분담에 협력하여 복지를 강화하는 것은 서민층과 중산층에 대한 강탈에 지나지 않는다. 이 같은 부자증세의 윤리를 맹종하다 보면, 연대를 추구하는 자유의지에 따라 같이 사는 세상을 앞당기는 데 일익이 되고 싶을지라도 부자가 아니라면 그것은 부도덕한 행동이 된다.
표면적으로 '낙수효과'와 '부자증세'는 대립하는 입장이다. 그러나 '가만 있으라'를 종용하여 사람들의 삶을 해친다는 측면에서 이 둘은 다르지 않다. 조세저항을 무리하게 두둔하기 위해 여러 가지 해로운 논리를 전파한다는 점에서도 서로 닮아 있다. 충분한 세금의 확보를 가로막으며 복지 발전을 방해 한다는 점도 동일하다.
낙수효과가 부유층의 조세저항을 합리화한다면, 부자증세는 부자가 아닌 이들의 조세저항에 정당성을 부여한다. 여기에 중첩되어 조세 정의의 확립을 명분으로 하는 또 다른 조세저항 합리화 논리가 완고하게 형성돼 있다. 무작정 세금 인상에 반대하는 것은 옳지 않지만, 조세 정의가 미흡한 상황에서 증세를 거부하는 것은 지당하다는 논리이다. 물론 세금이 올바르게 걷히고 쓰이는 일은 이루 말할 수 없이 중요하다. 하지만 이를 절대적인 선결 과제로 내세우는 것은 도리어 조세 정의를 저해하는 발상이다. 누구나 증세에 동참하여 세금에 대한 주인의식이 고양될 때, '눈먼 돈'이 줄기 마련이고 '숨은 돈'도 드러나게 된다.
세금에 대한 여론조사를 보면 언제나 부자와 대기업을 타겟으로 한 '부자증세'가 압도적인 지지를 얻는다. 여기에는 내 돈은 허투루 쓰일지 모른다며 증세를 반대하는 이들이 부자의 돈은 그러거나 말거나 개의치 않는다는 의미도 담겨 있다. 이런 인식으로는 조세 정의에 불만을 갖는 이들이 흡족해 할 만큼 그것이 개선될 리 만무하다.
세금과 복지의 증대에 찬성하지만 그러기엔 신뢰가 부족하므로 보편 증세는 불가하다는 이들은, 애초에 세금이나 복지를 내심 반기지 않는 이들과 자신들을 다르다고 여길 것이다. 그러나 종내에는 양측의 입장이 만나 서로 의기투합을 한다. 한국에서는 오직 각자도생만이 살길이라는 생각을 간직한 채 말이다.
p168
문제는 현 정부 여당에게 미래에 대한 계획이 없다는 것이다. 국제적으로 볼 때 한국의 가장 부실한 분야 중 하나는 조세와 복지인데, 현 정부 여당의 가장 취약점 중 하나도 바로 이 분야다. 장래 한국의 세금과 복지를 어떻게 발전시킬 것인지 개연성 있는 구상이 나온 게 없다. 앞으로 세금과 복지가 몰라보게 나아질 것이라는 기대를 사람들에게 전혀 주지 못하고 있다. 세금과 복지는 사회구조의 문제이자 삶에 직결되는 제도이므로 이 부문에 대한 기대가 미약하면 실제로 내 삶과 사회가 나이질 것이라는 기대도 위축된다.
복지에 우호적인 입장을 가진 최대 정파가 제자리를 찾고 중심을 잡아야 한다. 나의 삶도, 그리고 타인의 삶도 세금과 복지를 활용한다면 정말 달라질 것이라는 확실한 근거를 제시해 줄 수 있어야 한다.
p170
문 대통령은 취임 2개월을 맞았을 때 "증세를 하더라도 대상은 초고소득층과 초대기업에 한정될 것'이며, "일반 중산층과 서민들, 중소기업에게는 증세가 전혀 없을 것"이라고 밝힌 바 있다.
"이는 5년 내내 계속될 기조"이니, "중산층과 서민, 중소기업이 불안해하지 않도록 해달라"는 당부도 덧붙였다. 그렇다고 문 대통령의 증세 화살표가 초고소득층과 초대기업으로만 향하는 것은 아니다. 그는 "대기업과 부자들의 세 부담부터 늘리고 그래도 부족하다면 국민의 동의를 얻어서 보편 증세로 나가는 것이 순서"라는 입장을 가지고 있다. 보편 증세로 나아가는 시기가 언제일지는 아무도 모른다는 맹점이 있기는 하나, '선 부자증세, 후 보편 증세'는 종종 볼 수 있는 단계적 증세론의 하나다.
문재인 대통령이 '초고소득층과 초대기업'에 대한 증세를 언급하자, 추미애 당시 민주당 대표는 이에 대해 "초대기업과 초고소득자 스스로 명예를 지키며 사회적 책임을 다하는 '명예과세'"라고 명명했다. 김태년 당시 정책위의장은 "법인세 더 내면 기업이 사랑받을 수 있으니 '사랑과세'가 어떠냐"고 말했다. 그는 "초고소득자 증세로 세금을 더 내면 부자들이 국민으로부터 존경받는 '존경과세'는 어떠냐"고도 덧붙였다.
나는 이들의 말에 공감하지 않는다. 내가 바라는 사회는 돈이 없어도 누구나 병을 고치고 공짜로 대학원까지 갈 수 있는 복지강국이 아니다. 그렇게 풍성한 삶의 자유가 모두에게 보장되기 위해 모두가 성큼 자기 몫을 내어놓는 나라가, 내가 희망하는 세상이다. 그러한 복지 권리가 모두에게 부여되기 위해 일부 부유층만이 그 밑천을 내놔야 한다고 다그치는 나라는 별 울림도 끌림도 없다.
나는 이제껏 가난한 이들까지 번듯한 집에서 살 수 있는 그런 복지를 원한 적이 없다. 노인들에게 80~90만 원씩 노후 연금을 지급하하는 복지국가 또한 내가 그려온 세상이 아니다. 요람에서 무덤까지 온갖 혜택을 선물해주는 나라가 아니라, 누구나 인간다운 삶을 살 수 있도록 누구든 힘을 보태는 나라야말로 내가 희망하는 세상이다. 부자가 아니면, 나눔과 연대를 일단 모른 척하라고 닦달하는 사회는 흉하고 슬프다.
더 많이 나누고, 더 많이 연대하며 살고자 하는 인간의 자유의지는 더 가진 이든, 덜 가진 이든 다 같이 대등하고 소중하다. 세금을 더 내고 복지를 늘리는 일에 부자가 아니니까 빠지라는 주문은, 빈부와 무관하게 고결한 이타심과 희생정신을 가진 모든 인간에 대한 모독이다. 한국인들도 사람인데, 그래서 내 몫을 더 내어놓고 같이 살고픈 욕망을 품고 있을 텐데, 한국에는 그런 인간다운 본성을 거세하려는 자들이 판을 친다.
먼저 대단한 상류층으로 성공부터 하라고, 그래야 세금을 더 낼 명예도 존경도 얻는 거라고 차별하는 자들이 득세한다. 세상이 아무리 삭막하게 시들어가도 무슨 갑부가 아니라면 그저 자기 것을 꽉 부여잡고 있으라고 쪼아대는 자들이 난무한다. 당신들은 부자가 아니니까 나누고 연대할 자격이 없는 거라고 천시하는 자들이 권세를 누린다. 그토록 집요한 혹세무민에 파묻힌 한국인들은 그들도 인간이기에 지닌 존엄한 연대심을 끊임없이 억눌리며 살아간다.
p180
무상복지는, 그것을 성토하는 이들과 별개로, 복지를 표상하기에 적합한 표현이 아니다. 우선, 처음부터 복지는 무상일 수 없다. 우리는 도로와 다리, 공원을 이용할 때 일반적으로 개별 요금을 내지 않지만 무상도로, 무상다리, 무상공원 같은 말을 전혀 쓰지 않는다. 세금이라는 비용이 들어갔기 때문이다. 무상국방과 무상치안을 논하지 않는 것처럼, 무상보육이니 무상급식이니 구태여 무상이라는 사족을 가지고 왈가왈부할 이유는 조금도 없다. 공보육, 공공의료, 국공립 어린이집, 급식비 지원 확대 등으로 표현한다고 큰일이 나는 것은 아니다.
p182
복지가 값진 것은 무상이라서가 아니라 세금이라는 무거운 대가를 치르기 때문이다. 복지의 한 단면에 불과한 '무상'을 복지의 정수인 양 규정하는 것은 올바른 복지의 의미를 정립하는 데 하등의 도움이 되지 않는다.
p191
그런데 특히 자원이 한정되어 있을 경우 저소득자와 실업자에게만 급여를 지급하는 것이 더 낫다는 견해가 종종 사회민주당 내에서도 제기되었다. 이런 방법으로 하면 어려운 사람들을 집중적으로 지원할 수 있고 그들이 원하는 것들을 실제로 보장해줄 수 있다는 것이다. 그런데 이러한 주장은 소득이 많고 어떠한 사회적 혜택도 받지 못할 것 같은 사람들이, 가장 어려운 사람들을 대대적으로 지원하기 위해 기꺼이 세금을 낼 수 있을 것이라고 가정하고 있다. 하지만 많은 경험들은 일이 이런 식으로 돌아가지는 않는다는 것을 말해주고 있다. 오히려 많은 연구들은 보편적 복지시스템이 자산조사를 중시하는 복지시스템보다 실제로 더 많은 혜택을 사회적으로 어려운 집단들에게 제공하고 있다는 것을 보여주고 있다.
만약에 가장 어려운 사람들만이 아동수당, 무상의료 또는 무상교육의 혜택을 받는다면, 나머지 사회집단들은 그러한 혜택이 가능한 한 값싸게 지급되는 데 관심을 가질 것이다. 그들은 온갖 이유를 들면서 급여의 비용을 줄이려 할 것이다. 왜냐하면 이 급여는 자신들은 받지 못하는 것이고, 또 여기서 제공되는 서비스의 질이 나쁘다고 해도 자기들에게는 직접적인 영향이 미치지는 않기 때문이다(카를손. 잉바르 · 린드그랜. 안네마리네 2009/1996 : 139~141)
책 서문에서도 밝혔지만, 친일(친일이라기보다 일본 극우파의 논리를 그대로 베껴다 쓴) 서적인 반일종족주의의 허구적 주장을 논박하기 위해 호사카 유지 교수가 쓴 책.
이런 책을 써주신 자체가 고맙기도 하고, 한국인으로서 부끄럽기도 하다. 호사카 유지 교수의 전작인, <아베, 그는 왜 한국을 무너뜨리려 하는가>와 <호사카 유지의 일본 뒤집기>, <대한민국 독도>의 3권의 핵심적인 내용을 요약 집대성 했다고 볼 수도 있다.
강제징용, 위안부, 독도 문제에 대해 일본 극우의 허구적 논리를 논박한다는 부분에서 그 가치가 높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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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
『반일 종족주의』라는 책의 주장 중 핵심 부분은 일본 우파의 주장을 그대로 옮겨놓은 것이라고 해도 과언이 아니다. 그렇다면 우선 앞에서 쓴 세 가지 문제(위안부, 강제징용, 독도)에 관해 일본 우파가 주장하는 논리가 언제 어떤 식으로 만들어졌는지를 알아볼 필요가 있다.
(아래 부분은 호카가 유지 교수의 전작들인 『호사카 유지의 일본 뒤집기』, 『아베, 그는 왜 한국을 무너뜨리려 하는가』에도나오는내용들이다)
그 시작은 1993년 8월 자민당의 미야자와 정권의 관방장관 고노 요헤이가 '고노 담화'를 발표한 직후였다. '고노 담화'는 '위안부'가 일본군에 의해 강제적으로 동원되었다는 사실을 인정했다. 그리고 일본군 '위안부' 피해자들에게 사과와 반성의 마음도 표했다.
그러자 자민당 내 극우 세력이 반발하고 나섰다. 그들은 '위안부'가 자발적으로 매춘을 한 여성에 불과하다며, 일본군에 의한 강제연행이나 강제 동원은 없었다고 주장했다. 나아가 '고노 담화' 폐기를 목표로 본격적인 활동을 하기 시작했다.
그 결과 자민당 내에 '역사검토위원회'가 결성되었고, 우파 논객들을 강사로 초빙해 모임을 지속해서 가졌다. 그러면서 자민당 내에 극우 세력이 대두하기 시작했다.
그로부터 2년이 지난 1995년 8월15일, 일본 정부는 '종전 50주년'을 맞이해 '무라야마 담화'를 발표했다. '무라야마 담화'는 일본의 침략 전쟁과 과거 식민지 지배에 대해 당시 무라야마 도미이치 총리가 세계 앞에 사과하는 내용을 담고 있었다. 그런데 이에 대해서도 자민당 내 극우 세력이 강하게 반발했다.
일본 우파의 최종적인 목표는 '고노 담화'와 '무라야마 담화'를 부정하는 데 있었다. 그 목표를 달성하기 위해 그들은 후지오카 노부카쓰 교수 등이 내세운 '자유주의 사관'을 도입했다.
'자유주의 사관' 학설이란 일본이 침략 전쟁을 일으킨 것이 아니라, 아시아를 백인 지배에서 해방시킨 '해방 전쟁'을 수행한 것이라고 주장한다. 또한 난징 대학살이나 '위안부' 강제연행을 부정하며, 일본이 아시아 국가들을 식민지배하면서 근대화시켰다고 강변한다. 그뿐만 아니라 일본의 과거를 사죄하는 태도를 '자학 사관'적 태도라고 매도하면서, 일본의 사과 외교는 일본의 진보 세력에 의해 만들어진 정치적 행위라고 주장한다.
1993년 '고노 담화'를 발표한 이후 자민당은 호소카와 내각에 정권을 넘겨주고 말았다. 창당 이래 무려 38년 동안 여당의 지위를 유지했던 자민당이 야당으로 전락한 것이다. 이와 같은 현상이 자민당 내 우파의 위기감을 자극해 우파의 논리 구축을 촉진시킨 결과 '자유주의 사관'을 도입하게 되었다.
이는 1997년 '새역사교과서를 만드는 모임'과 극우 단체 '일본회의' 결성으로 이어졌고, 일본 내에서 역사 왜곡을 심화시키는 주체적 역할을 해나갔다. 그들은 또한 틈만 나면 '좌경화된 일본인의 의식을 바꾸어 놓아야 한다'고 목소리를 높였다.
그런데 1998년 한국에서 김대중 정권이 성립된 이후, 한국 내에서도 일본과 비슷한 현상이 일어났다. 바로 진보 세력에 대항하는 '뉴라이드'의 등장이다. 한국의 '뉴라이트'는 2000년경에 등장했는데, 일본과의 유사점은 한국 내 보수 우욱이 1998년 정권을 상실한 것을 계기로, 정권 재창출을 위해 보수 우익의 논리를 추구한다는 데 있다.
2005년 11월 8일에 뉴라이트 전국연합이 발족되었다. 이때 주최 측은 "역사에 대하 보복 정치로 대한민국의 가능성과 장래성이 소진되는 모습을 더 이상 좌시할 수 없다. 대한민국은 새로운 비전으로 무장하고 이를 실천시킬 수 있는 선진화 세력이 주도해야 한다. 건전한 우파의 가치를 일상적이고 전국적으로 국민에게 확산시켜야 한다"라고 천명했다.
이어서 2006년 안병직 서울대 명예교수가 뉴라이트재단을 창립해 초대이사장으로 취임했다. 이런 일련의 움직임은 뉴라이트의 가치관이 한국 진보 세력의 역사관에 대항하기 위해 만들어진 것이고, 결국은 보수 정권의 재창출을 목표로 했음을 보여준다.
『반일 종족주의』의 대표 저자 이영훈 낙성대경제연구소 이사장은 안병직 명예교수 등과 함께 조선시대부터 현대에 이르는 한국 경제사를 연구해왔다고 한다. 일제강점기 조선 경제를 연구한 것으로 알려진 그는 소위 '식민지 근대화론자'인 셈이다. 특히 그는 "일제강점기 한국이 땅과 식량을 수탈당했다는 한국사 교과서의 저술은 왜곡된 것"이라고 주장하며, "한국인들이 식민지 시대를 아는 집단적 기억은 상당 부분 만들어진 것이고 교육받은 것"이라고 주장해왔다.
본서에서는 그들의 정치적 색깔을 문제시하는 것이 아니라, 그들의 논리와 주장을 문제로 삼았다. 본서는 특히 강제징용 문제, 일본군 '위안부' 문제, 독도 문제 등에 관한 그들의 논리가 매우 잘못되었음을 입증해 나간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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필자가 분석한 결과, 특히 이영훈과 이우연 낙성대경제연구소 연구원의 글에는 큰 결함과 왜곡과 은폐 등이 다수 발견되었다. '노예근성'으로 가득 찬 잘못된 주장을 대중을 향해 펼치는 것은 정말 위험하다.
성병을 앓고 있는 환자가 자신이 성병 보균자라는 사실을 모른 채 성관계를 하면 그 피해는 시간이 흐를수록 점점 확산되어 많은 피해자를 양산하게 된다. 하지만 스스로 병을 인지하지 못한 상태에서 벌어진 일이기 때문에 비난할 명문이 크게 약화된다.
그런데 자신이 성병 보균자라는 사실을 알고 있으면서도 그 사실을 숨긴 채 불특정 다수와 성관계를 가졌다면 상황은 정반대가 된다. 어떤 이유로도 용서될 수 없는 명백한 범죄일 뿐만 아니라, 재론의 여지 없는 '악마' 그 자체라고 할 수 있기 때문이다. 사람들이 생각하는 이영훈이나 이우연은 과연 어느 부류에 속해 있는지 자뭇 궁금해진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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먼저 (1), 즉 국제법이나 국제관계에서 식민지배 피해에 대한 배상 같은 건 인정하지 않는다는 주장인데, 이는 가해자인 제국주의 국가들의 논리일 뿐이다. 그리고 이번 대법원 판결은 개인이 국가에 대해 제기한 소송에 대한 판결이 아닌, 개인이 기업에 제기한 소송이므로 기업의 범죄 행위가 인정되면 기업이 개인에게 배상해야 한다는 것은 당연하다.
실제로 2012년 5월 당시 신 일본제철(현 일본제철)이 패소하면서 4명의 한국인 강제징용 피해자(원고)에게 1억 원씩의 위자료를 지급하라고 한국 대법원이 선고를 내렸을 때, 기업 측은 처음에 그렇게 깨끗이 처리하고 싶다고 밝히기도 했다. 한국 대법원 판결대로 하겠다는 의사 표현을 한 것이다. 하지만 얼마 후 일본 정부가 끼어들어 방해하면서 개인 대 기업의 재판을 마치 나라 대 나라의 재판인 것처럼 왜곡했다. 그러므로 본래의 입장, 즉 개인 대 개입의 입장에서 생각하면 일본 기업은 당연히 한국인 피해자 개인에게 배상해야 마땅하다.
다음은 (2)에서 말한 샌프란시스토 조약은 일본과 연합국이 맺은 조약일 뿐, 한국은 조약의 당사자가 아니다. 그러므로 샌프란시스코 조약의 조문은 기본적으로 한국을 구속하지 못한다. 그리고 샌프란시스코 조약상 한국이 일본에서 분리된 지역으로 규정되었으니 한국이 일본에 배상을 청구할 수 없다는 주장은 참으로 이해하기 어려운 논리다.
샌프란시스코 조약 4조는 일본국 및 그 국민에 대한 피해국 당국 및 그 주민의 청구권 처리는 일본과 피해국 당국 사이에서 특별히 결정하는 주제로 한다고 밝혔으므로, 일본은 한국의 청구권 문제를 특별히 결정해야 했다. 일본이 각 나라와 개별적으로 협상해야 한다고 연합국과 일본이 합의한 이와 같은 샌프란시스코 조약의 조문으로 한국은 일본에 보상이나 배상을 요구할 수 있다. 한국이 일본으로부터 분리된 지역이므로 배상을 요구할 수 없다는 주익종의 논리가 어디서 나오게 되었는지 이해할 수가 없다.
그리고 (3)의 주장, 즉 한일회담 첫 회의에서 한국 측은 배상이 아니라 한국 측 재산의 반환을 청구한다는 입장을 일본 측에 밝혔기 때문에, 이제 한국은 일본에 배상을 요구할 수 없다는 말도 이상한 논리다. 한국이 일본에 한국 측 재산의 반환을 요구했다고 해도 국민이 그것을 청구한 것이 아니므로 국민 청구권은 남아 있기 때문이다.
(4)에서는 미국이 한국 내의 일본인 재산을 몰수해서 한국으로 인도했으므로, 한국의 대일 청구권은 어느 정도 충족되었다고 주장했다. 그런데 한국 입장에서 볼 때 일본인의 한반도 진출 자체가 침략 행위이자 불법 행위였으므로 한국 내에 남은 일본인 재산은 원래 한국의 재산이고, 그 재산은 당연히 한국으로 귀속되어야 하는 성격을 띤다. 따라서 한국인들이 배상을 요구하는 문제와는 별개다. 더구나 일본은 한국을 35년간이나 불법으로 지배했으므로 몰수한 일본인의 재산으로 충족되는 한국 측 피해는 극히 일부에 불과하다고 할 수 있다. 그러므로 몰수한 일본인의 한국 내 재산으로 배상이 어느 정도 상쇄되었다는 주장은 터무니없는 주장이다.
(5)에서는 일본이 일본 국민과의 형평상 살아 돌아온 생환자에 대한 보상은 불가능하다고 하는 것은 일본 측 입장에 불과하다. 일본은 가해자이기 때문에 살아서 한국으로 돌아온 한국인들에게는 당연히 보상과 배상을 해주어야만 한다. 2018년 10월 한국 대법원의 확정판결은 살아 돌아온 생환잗르이 낸 소송에 대한 선고였다. 일본이 피해당한 한국인에 대해, 특히 생환자에 대해 보상과 배상을 하는 것은 지극히 당연한 일이다. 더구나 1965년 청구권 협정에 생환자의 보상금이나 보상금이 포함되지 않았으니 개인이 기업에 배상금을 청구할 권리는 그대로 남아 있다.
(6)에서는 1965년 4월 17일 이동원 - 시이나 합의로 개인 청구권이 소멸되었다는 주장이다. 하지만 그 합의는 당시 대한민국 정부의 입장일 뿐, 피해를 입은 당사자들의 입장이 아니다. 비록 국가에 의해 국민의 청구권이 소멸되었다고 해도 국민들이 동의하지 않으면 소용이 없다. 국가의 주체는 국민이기 때문이다.
더구나 한일회담을 통한 국가 대 국가의 교섭에 있어서도 일본 정부는 한국 측에 성실한 태도를 보여주지 않았다. 일본 측은 한일회담에서 당초부터 한국 정부가 증거를 제출하지 않는다면 보상할 수 없다는 태도를 유지했다. 그래서 한국 정부는 법률관계와 사실관계를 밝히기 위해 일본 정부에 피징용자들의 피해 등에 관한 자료 제출을 요구했다.
실제로 일본 정부는 당시 한일국교정상화를 준비하기 위해 각 기업에 명령하여 피징용자의 미불 임금 등에 대해 조사했다. 그 결과 일본 정부는 1953년 시점에서 각 기업의 피징용자에 관한 정보를 수집한 상태였다. 그 자료는 기업명, 미불금의 종류와 액수, 피징용자 인원수 등에 관한 정보였다.
하지만 일본 정부는 그 자료를 한국 측에 넘겨주지 않았다. 주익종은 한일회담 당시 '애당초 한국 측이 청구할 게 별로 없었다'고 주장하지만, 그것은 일본 측이 자료를 은닉한 결과였다. 결국 일본 측의 불공평한 태도로 결정된 1965년 한일 청구권 협정 자체가 근본적으로 문제를 안고 있으므로, 일본 측도 1991년에는 개인 청구권이 소멸되지 않았음을 스스로 인정하게 되었다.
일본 정부는 개인 청구권을 인정했다.
2018년 10월 한국 대법원의 판결이 확정되었을 때 당시 일본 외무상 고노 타로도 11월 14일 일본 국회 외무위원회에 참석해 개인 청구권이 남아 있음을 인정했다. 그런데 개인 청구권이 법적으로 구제받지는 못한다고 말을 바꾸었다.
그러나 개인의 배상 문제가 1965년의 청구권 협정에 포함되지 않았음을 일본 정부는 역시 인정했다. 한국 대법원 판결에 대한 일본 정부의 견해는 일본의 국회의사록에서 다음과 같이 확인할 수 있다.
(201년 11월 14일 일본 국회 중의원 외무위원회 회의록 참고)*
이상의 인용문을 보면 2018년 11월 시점에서도 일본 정부는 개인 청구권은 소멸되지 않았고, 배상 문제는 한일 청구권 협정에 포함되지 않았다고 분명히 인정했다. 그런데도 일본 측은 양국이 약속했기 때문에 재판에서 개인은 구제받지 못한다는 또 다른 주장을 내놓았다. 일본 측은 한국이 1965년에 일본과 맺은 약속을 어겼다고 강변하기 시작했다.
일본 정부의 주장은 항상 국가 대 국가의 약속이라는 말로 마지막을 장식한다. 그러나 개인 청구권이 남아 있다는 뜻은 개인이 해당 기업에 보상이나 배상을 청구할 수 있다는 의미다. 더구나 이번 소송들은 한국인 피해자가 일본이라는 국가를 상대로 제기한 것이 아니라, 개인이 기업을 상대로 소송을 제기했다. 그리고 일제 강점기의 불법성에 의해 기업이 피해자들에게 불법 행위를 저지른 사실에 대한 배상을 대법원이 명령했기 때문에 국가는 이번 판결 문제에서 빠지고, 전범 기업들이 성실히 판결을 이행하는 것이 올바른 순서다.
기업이 판결을 지키지 않는다면 기업의 한국 내 자산을 압류해 현금화한 뒤 피해자들에게 나눠줘야 한다. 그것만이 답이다. 한국 측의 판결 결과 집행에 대해 일본 정부가 한국에 대한 경제 보복을 다시 시작한다면, 그 결과는 일본의 국제적 고립으로 이어질 뿐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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미군의 포로 심문 보고서에는 다음과 같은 내용도 있다.
그녀들은 '위안부'가 포로가 되었음을 보도하는 리플릿은 사용하지 말아 달라고 (미군에게) 요망했다. 그녀들이 포로가 되었다고 일본군이 알게 된다면 아마도 다른 곳의 '위안부'들의 생명이 위험해지기 때문이다.
위와 같이 포로가 된 조선인 '위안부'들의 증언은, 군 위안소에 있는 조선인 '위안부'들이 언제라도 일본군에 의해 살해당할지도 모르는 상황에 놓여 있다는 것을 보여준다. 이는 일본이이 아닌 조선인을 비롯한 타민족 '위안부'들의 운명이었다.
이 심문 보고서 내용은 그녀들이 일본군의 성 착취의 도구였고, 일본군이 적군에 밀리면 언제든지 증거 인멸을 위해 조선인을 비롯한 타민족 '위안부'들을 살해하고 도주할 수 있었다는 사실을 상기시키는 이야기다. 그런데 이영훈은 이런 부분을 인용하지 않고 철저히 외면했다. 그러면서 그는 다음과 같은 억지 주장을 했다.
요컨대 미군의 심문기록은 위안소가 군에 의해 편성된 공창제로서 고노동, 고수익, 고위험의 시장이었음을 더없이 생생하게 뒷받침하고 있습니다.
관련 연구자라면 모름지기 '위안부'들의 상황을 정확하게 파악해야 한다. 여성들은 취업 사기로 속아서 버마로 연행되었고, 본인이 원하지 않은 매춘을 강요당했지만, 전차금 때문에 도망갈 수 없는 상황에서 성을 착취 당했다. 계약 기간이 끝나면 귀국 허가가 나왔다 하더라도 계약 기간 중에는 폐업의 자유가 없었던 '성노예'였다는 것은 엄연한 사실이다.
그러나 이영훈은 자신의 논리 - '위안부'들은 좋은 대우를 받았고, 돈도 많이 벌었으며, 자유롭게 지내며 폐업도 자유롭게 했으니 성노예가 아니었다 - 라는 논리에 유리해 보이는 부분만 인용했고, 자신의 논리에 맞지 않는 부분은 외면했다. 그와 같은 행위가 학자로서 올바른 태도인지 묻지 않을 수 없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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한편 안병직은 박치근의 1943년 7월 29일 일기 일부분을 거론하며 일본군이 결혼을 위해 '위안부'를 폐업한 여성 2명에게 명령을 내려 다시 '위안부'로 삼은 실제 사례를 소개했다. 다음은 그날의 박치근 일기 전문이다.
1943년 7월 29일 목요일, 흐리고 비
인센 요마(Yoma) 거리의 무라야마 씨 댁에서 일어나 아침을 먹었다. 아라이 씨와 병참에 가서 콘돔을 배급받았다. 위안부 진료소에 가서 등록되지 않은 2, 3인의 위안부에게도 진찰을 받게 했다. 이전에 무라야마 씨 위안소에 위안부로 있다가 부부 생활하러 나간 하루요(春代)와 히로코(弘子)는 이번에 병참의 명령으로 다시 위안부로서 김천관에 있게 되었다더라. 중국인 거리에 들러 저녁에 인센으로 돌아와 저녁을 먹고 밤 1경에 자다.
안병직은 '위안부'로 있다가 결혼해서 위안소를 나간 두 여성이 병참의 명령으로 다시 '위안부'가 된 사례를 거론하면서 '위안부'들이 자유롭게 폐업할 수 없었다고 인정했다.
이처럼 '위안부'로 있다가 결혼하게 된 여성들이 병참의 명령으로 다시 '위안부'로 돌아온 경우는 어떤 경우일까. 생각하면 슬픈 일이다. 두 사람은 누구하고 결혼했을까? 다시 '위안부'로 돌아와야 한다고 명령이 내려졌을 때, 그녀들과 그녀들의 남편들은 그 명령을 어떻게 받아들였을까? 여러 생각이 교차하지만, 안병직은 다음과 같이 또 하나의 포로 심문 보고서를 인용하면서 전투지, 최전선에서의 위안소에서 폐업이 어려웠던 사실을 설명했다. 아래 인용문의 큰따옴표 안의 이야기는 미군의 포로 심문 보고서 '연합국 최고사령부 연합번역통역 조사보고'에 나오는 내용의 재인용이다.
그리고 다 같은 버마라고 하더라도 전투지에서는 폐업이 더욱 어려웠던 것으로 보인다. 왜냐하면, 외국에서 일본군의 보호를 받지 못하면 위안부들에게는 위안소의 밖이 바로 지옥이기 때문이다. "어느 여자든 이자를 합하여 그녀의 가족에게 지불한 돈을 갚을 수 있을 때, 그녀는 조선까지의 무료귀환교통권을 받고 자유로운 것으로 간주되었다. 그러나 전쟁 상황 때문에 포로(미군에 체포된 포주)가 데리고 있는 그룹의 어느 누구도 지금까지 위안소를 떠나는 것이 허용되지 않았다. 1943년 6월에 제15군사령부가 빚으로부터 자유로운 그녀들을 고향으로 돌아가도록 주선했지만, 이런 조건을 충족하고 귀환하기를 원하는 여자도 머물러 있도록 쉽게 설득되었다.
위의 인용문으로, 전쟁이라는 특수 상황 때문에 전차금을 다 상환하여 폐업할 수 있는 상황이 되었다 하더라도 '위안부'들은 일본군의 보호를 받지 못하게 될 조선으로의 귀환을 포기할 수밖에 없었다는 사실을 우리는 확인할 수 있다. 1944년 8월 10일 조선인 '위안부' 20명과 함께 미군 포로가 된 일본인 포주들에 대한 심문 보고서가 따로 있고, 그것이 위에서도 인용한 '연합국 최고사령부 연합번역통역 조사보고'인데, 이 보고서에는 그들이 생포되기 전에 "네 명은 여행 중에 죽고 두 명은 일본인 군인으로 오인되어 총살되었다"고 기록되어 있다. 그렇게 생명의 위협이 항상 존재하는 것이 최전선이었다. 그런 상황에 있던 최전선으로 강제연행된 조선인 여성들에 대해 이영훈처럼 단정적으로 '그녀들은 돈을 벌기 위해 갔다'고 말하는 것은 대단히 부적절하다.
이와 같이 버마의 위안소에 끌려간 '위안부'들의 생활은 이영훈이 말하는 "어디까지나 위안부 개인의 영업"이 절대 아니었다. 이영훈은 이와 같은 내용이 담긴 『일본군 위안소 관리인의 일기』를 출판하기 위해 자신도 연구회에 참여했고, 자신의 연구소에서 출판한 이 책 내용과는 정반대의 주장을 태연하게 책 『반일 종족주의』에 서술하기까지 했다.
이영훈은 "위안부들 역시 전쟁 특수를 이용하여 한몫의 인생을 개척한 사람들"이었다고 하면서 '위안부'들이 거금을 벌었다는 식으로 주장한다. 그러나 안병직은, 전시 하이퍼인플레이션을 생각할 때 버마에서는 매달 11~14%의 인플레이션이었으므로 가장 많이 벌었다고 일본 우파가 야유하는 버마의 '위안부' 피해자 문옥주 씨의 경우에도 1943년 4월부터 1945년 9월까지 번 돈이 약 26,000엔이었지만 그 금액은 인플레이션으로 결국 500~1,000엔의 가치밖에 없었다고 하면서, 문옥주 씨의 예금통장에 관한 고바야시 히데오 교수의 현재 금액으로의 환산을 소개했다. 안병직은 그런 화폐를 해외에서 조선으로 송금할 때와 조선에서 인출할 때는 상당한 제약이 있었을 것이므로 '위안부'들이 돈을 많이 벌었다고 할 수 없다고 덧붙였다. 그리고 군인들은 위안소를 이용할 때 군표를 사용했는데, 군표가 패전으로 휴지 조각이 되어, 결국 패전까지 '위안부업'을 한 여성들은 한 푼도 벌지 못한 것이 사실이다.
한편, 문옥주는 그녀가 고생해서 저축해 고향으로 송금한 우체국예금을 끝내 돌려받지 못했다. 문옥주는 그녀를 돕는 모리카와 마치코와 함께 일본의 우정성에 예금 지급을 요구하는 운동을 시작했다. 그러나 우정성은 1965년 한일 청구권 협정으로 모두 끝난 일이라고 해서 예금 지급을 거부했다.
일본의 우파는 문옥주처럼 위안부들은 돈을 벌기 위해 자발적으로 '위안부'가 된 매춘부라고 주장한다. 이영훈의 주장도 이에 가깝다. 그러나 '제4차 위안단'의 조선인 '위안부'들은 조선총독부의 계획하에 취업 사기로 모집되었고, 부상한 병사를 대상으로 간호사처럼 일한다는 말에 속아서 버마까지 갔다. 그렇게 해서 그녀들은 본인의 의사에 반해 성매매를 강요당했다.
전차금을 받았기 때문에 그녀들은 구속된 상태였고, 계약 기간 동안 '성노예'였다. 그녀들이 돈을 벌기 위해 해외로 간 것은 사실이지만, 매춘을 하리라고는 전혀 생각하지 않았다. 최전선까지 데려간 후 이제 도망갈 수 없으니 매춘을 해야 한다고 강요하는 수법은 사람으로서 할 짓이 아니다. 일본군과, 군에 고용된 포주들은 태연하게 여성에 대한 인권유린을 저지른 것이다.
전차금을 모두 상환해서 고향으로 귀국해도 좋다는 허가가 내려져도 그녀들은 최전선이라는 특수 상황 때문에 생명의 위험을 무릅쓰면서까지 귀국할 수는 없었다. 결국 조선인 '위안부'들은 계속 일본군에 구속된 상태가 되었다. 최전선으로 배치된 것이 조선인 '위안부'들의 특징이다. 일본인 '위안부'들은 보다 안전한 후방 지역에 있었다는 다음과 같은 조사 기록이 있다.
후방지역에서는 위안소에 일본인 여자들도 있었는데, 예컨대 메이묘(Maymyo)에는 8개 위안소 중에서 일본인 위안소가 둘이 있었으나, 거기로부터 전방에는 일본인 위안소는 없었다.
위에 인용한 연합군의 조사 기록에 의하면 일본인 '위안부'들은 조선인 '위안부'들보다 안전한 후방 지역에 배치되었다. 모든 지역에서 그랬다면 일본군은 조선인 '위안부'들을 최전선에 배치했다는 민족적 차별을 자행했던 것이다. 아무도 자발적으로 가지 않는 최전선에 일본군과 조선총독부가 선정한 포주들이 조선인 여성들을 취업 사기로 속여서 연행했다는 사실이 조선인 '위안부'가 자발적으로 '위안부'가 된 게 아니라는 진실을 말해주고 있다.
그런 진실을 왜곡하는 일본 우파나 한국의 신친일파들은 하늘이 용서하지 않을 인권유린주의자들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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미즈시 시게루는 자신이 그린 만화책 『카란코론 표박기 게게게 선생 만히 말한다』 중에서 「종군위안부」라는 제목으로 8페이지에 걸쳐 파푸나 뉴기니 코코포에서의 경험을 상세히 소개했다.
『반일 종족주의』 3부 '종족주의의 아성, 위안부'에서 이영훈은 "예컨대 박근혜 정부는 일본 정부와 이 문제를 최종적으로 완전히 청산한다는 협약을 체결하였습니다. 그렇지만 문재인 정부는 이를 파기하였습니다"라고 썼다. 그러나 이 주장은 크게 틀린 말이다. 결론부터 말하면, 문재인 정부는 일본과의 위안부 합의를 파기하지 않았다.
2018년 1월 9일 문재인 정부는 위안부 합의에 대한 검증을 실시하여 후속 조치를 발표하면서 일본 정부에 파기라든가 재협상을 요구하지 않겠다는 입장을 분명히 했다. 2015년 12월 28일 한일 두 나라가 맺은 위안부 합의가 양국 간의 공식 합의였으므로 이를 일방적으로 파기하거나 재협상을 요구하지 않겠다는 뜻이었다. 그러나 문재인 정부는 이 합의로 위안부 문제가 다 해결되었다고는 생각하지 않는다고도 했다. 이 견해는 위안부 합의 이후 UN 인권위원회가 줄곧 견지해온 견해와 동일하다.
그 후 2018년 11월 21일 한국의 여성가족부는 위안부 합의헤 의해 설립된 화해치유재단 해산의 법적 절차에 들어간다고 공식 발표했다. 화해치유재단은 한일 위안부 합의에 입각해 '한국 정부가 위안부 피해자들의 지원을 목적으로 하는 재단을 설립하고, 이에 일본 정부가 일본 예산으로 자금을 일괄 거출한다'는 약속에 따라 2016년 7월 서울에 설립되었다.
일본이 출연한 기금은 10억엔(약 103억원)이었다. 재단의 임무는 위안부 피해자 및 유족에게 현금을 지급하는 것이었고, 재단은 해산 결정 시검에서 피해자 34명, 사망자 58명(유족이 대신 기금 수령)에게 총 44억 원의 '상처 치유금'을 지급했다.
그런데 문재인 정부가 화해치유재단을 해산한 것은 위안부 합의를 파기하기 위해서가 아니었다. 재단 이사장들과 이사들이 모두 사임하여 5명의 직원만 재단을 지키는 상황에서 재단 유지비용만 들어가는 낭비를 막기 위해서였다. 그런 다음 문재인 정부는 남은 59억 원 정도의 일본 지원금을 일본 정부와 협의해 적절하게 사용하겠다고 발표했다.
따라서 이영훈의 '문재인 정부가 (위안부 합의를 ) 파기했다'는 주장은 엄연한 거짓이다. 화해치유재단을 해산하여 한일 위안부 합의 파기를 주장해온 것은 문재인 정부가 아니라 '위안부' 피해자 여성들과 지원 단체들이다. 피해자들을 지원하는 나눔의 집은 논평을 통해 "피해자를 철저히 배제한 채 한일 정부가 정치적 야합으로 발족한 화해치유재단의 해산 소식에 나눔의 집 일본군 '성노예' 피해 할머니 모두 기뻐했지만, 일본이 보애 온 10억 엔 처리 문제는 여전히 남아 있다"며 "피해자들 요구대로 일본이 보내온 10억 엔의 조속한 반환을 바라며 이를 바탕으로 2015년 한일 위안부 합의안을 파기 또는 무효로 하는 데 정부가 힘써주기를 바란다"고 밝혔다. 이와 같은 나눔의 집 논평을 봐도 위안부 합의 파기를 원하는 것은 문재인 정부가 아니라 피해자들이었다.
나눔의 집에 따르면 이옥선 할머니는 "일본의 돈을 받아 재단을 설립한 것은 이전 정부가 할머니들을 도로 팔아먹은 것과 같다. 이제라도 해체돼 다행"이라고 말했고, 강일출, 박옥선 할머니 등도 "일본의 사죄도 받을 수 있도록 정부에서 힘써 주었으면 좋겠다"고 하면서 "일본이 보낸 돈 10억 엔도 하루빨리 돌려주길 바란다"고 했다.
이영훈은 사실을 왜곡하여 문재인 정부가 위안부 합의를 파기했다고 주장했다. 하나하나 왜 사실대로 정직하게 쓰지 않고 일부분만을 취해서 그럴싸하게 거짓을 만들거나 왜곡시켜 사람들을 현혹시키는 걸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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지금부터는 필자의 일제강점기에 대한 견해를 밝히고자 한다.
1905년 11월 일본 제국주의는 한국과 강제로 을사늑약을 체결했다. 그로 인해 한국은 일제에 외교권을 박탈당했고, 일본은 한국을 자신들의 보호국으로서 침탈해버렸다. 한국의 많은 역사학자들처럼 필자 역시 을사늑약 자체가 무효라는 입장이다. 을사늑얀에 고종 황제의 옥새가 찍혀 있지 않았기 때문이다.
당시 대한제국은 국회가 없어서 황제의 윤허로 국가의 대사가 결정되었다. 그러므로 외국과의 조약 승인 절차에는 반드시 황제의 인가가 필요했다. 따라서 인가를 의미하는 옥새가 찍혀 있지 않았다는 것은 그 조약이 무효임을 뜻한다. 또한 을사늑약을 비롯하여 을사늑약 체결이 토대가 되어 조인된 19010년 8월의 한일병합조약도 당연히 무효이다. 원천적으로 무효인 협정이나 조약이 1945년 8월 15일 일본 패전까지 유효인 것처럼 시행되었다.
일본 측은 독도가 1905년 2월 22일에 시마네현 오키섬에 편입되었으므로 을사늑약 체결 이전의 문제라며 독도가 일본 영토라고 주장한다. 하지만 그것은 일본 국내법으로 볼 때만의 이야기다. 독도가 일본 영토가 되었다고 일본이 한국에 알린 시점이 1906년 3월이었다. 을사늑약 체결 이후이므로 국제법상 독도 편입 자체가 무효다
1910년 8월 22일 한일병합조약 체결, 8월 29일의 조약 시행 이후 이루어진 한국에 대한 강제 동원, 일본군 '위안부' 강제연행, 침략 전쟁을 위한 한국인 지원병 모집이나 한국인 징병제 등도 모두 원천적으로 무효다. 을사늑약이나 한일병합조약 자체가 불법이자 무효이기 때문이다.
1965년 6월 22일 체결된 한일기본조약 제2조에는 한국과 일본 간에 "1910년 8월 22일 이전에 체결된 모든 조약 및 협정은 이미 무효"라고 기재되어 있다.
이 조문은 1910년 8월 22일 체결된 한일병합조약을 비롯해 그 이전에 체결된 한일 간의 모든 조약과 협정이 원천적으로 무효라는 뜻이다. 그러나 일본은 이 조문을 패전한 1945년 8월 15일 이후부터 모든 조약과 협정이 무효라고 해석한다. 그것은 일제강점기를 합법으로 정의하고 싶은 일본의 입장일 뿐이다. 또한 일본 법원은 일제강점기 자체는 합법이라는 입장을 유지한 채 한국인 피해자들이 제소한 재판을 기각하거나 한국 측을 패소하게 만들었는데, 이 역시 일본 측 입장에서 선고된 판결에 불과하다.
한국 측의 법적 입장은 일제강점기가 어디까지나 '불법'이고, 당시의 조약 및 협정이 원천적으로 무효라는 것이다. 그렇기에 한국 대법원이 일제강점기의 불법성을 거론하면서 일제강점기에 벌어진 한국인 강제 징용자에 대한 일본 기업의 불법성을 이유로 일본의 전범 기업에 유죄를 선고한 것은 당연한 귀결이다. 한국 내의 법적 입장을 반영한 판결이므로 다른 나라가 개입하는 것은 부당하다.
그리고 일본군 '위안부', 한국인 학도병과 한국인 징병자 문제도 모두 일제강점기에 일제의 침략이 원인이 되어 생긴 문제이므로 죄다 불법이다.
이처럼 한국의 입장이 분명한데도 신친일파들은 일본 측 입장을 옹호한다. 여기는 한국이다. 당연한 말이지만 한국의 법이나 관습이 통하는 곳이다. 예를 들면 싱가프로에서는 여성에 대한 성폭력 범죄는 태형에 처해진다. 맞다가 엉덩이가 찢어지면 상처가 회복된 후에 다시 형을 속행한다. 외국인에 대해서도 똑같이 형을 집행한다. 이렇듯 어느 나라든 자국의 법이 적용된다.
한국에는 한국법이 있다. 그런데도 한국에서 일본법을 주장하는 사람들이 있다는 것은 아이러니하다. 자국을 침략한 나라를 옹호해주고 이상한 논리로 침략국을 참싸는 데도 그것이 옳다고 한다면, 자라나는 아이들이 무엇을 배운단 말인가.
신친일파 청산은 국가의 존망과도 연결된다. 친일 청산은 반드시 이뤄져야 하고 신친일파의 잘못된 사상도 바로잡아야 한다.
저자의 일본 생활(어느 정도 살았는지에 대한 정보는 책에서 찾을 수는 없다.)에서 경험한 일본의 표리부동한 면과 아베 정권 이후 극우로 흐르는 일본의 분위기를 전하는 점에서 의의가 있을 듯 싶다.
뒤로 갈수록 계속 하던 말을 반복적으로 하며 내용은 빈약해지는 감이 있다. 아마도 물들어 올 때 노젓는다는 심정으로 쓴게 아닐까 싶게 뒤로 갈수록 마무리가 아쉽다.
요즘 한일 갈등 국면에서는 그래도 일독의 가치가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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p22. 일본에게 대한민국은 철저한 을이다.
일본이 다른 나라에게 절대 사과하지 않는 두 번째 이유, 이른바 '갑을 문화' 때문이다. 일본은 갑과 을로 관계를 명확히 가르는 성향이 있다. 말 그대로 갑은 을에게 어떤 행위를 해도 용납이 되는 이른바 '갑질'의 주체라고 할 수 있다. 반대로 을은 갑의 의사에 반하는 어떤 행동도 해서는 안된다. 설사 갑의 의견 혹은 요구가 틀린 것이라고 해도 말이다. 이처럼 일본에는 을에게 불합리한 선택과 행동을 강요하는 특유의 갑을 문화가 존재한다. 이는 세계에서 오직 일본인만이 갖고 있는 '종특', 다시 말해 종족 특성이다.
일상에서 흔히 접할 수 있는 예를 들어보자. 일본인은 식당에서 나이에 상관없이 종업원에게 무조건 반말을 한다. 아주 어린 청년이 흰머리가 성성한 어르신에게 손가락으로 메뉴를 가리키며 거만한 태도로 "고레초다이(이거 저)"라고 외친다.
우리로서는 전혀 이해하지 못할 상황이지만 일본에서는 흔히 볼 수 있는 모습이다. 아이러니한 사실은 종업원도 그것에 대해서 전혀 불편해하지 않고 당연하게 생각한다는 점이다. 손님과 식당 종업원이라는 '갑을 관계'가 확실히 성립이 됐기 때문이다.
손님, 즉 '갑'으로서 식당을 방문한 이들도 자신들의 일터에서는 '을'로 취급받는 걸 당연하게 생각한다. 식당에서 어르신에게 "초다이"를 외치던 청년들은 자신들이 일하는 식당에서 똑같이 대우를 받는 걸 거리낌 없이 받아들인다. 손님의 언사를 아니꼬워하거나 자신보다 어린 학생에게 '왜 반말을 하느냐'고 따져 묻지 않는다. 한국, 아니 전 세계 어디에서도 볼 수 없는 일본만의 문화다.
한 가지 더, 일본 남성은 부인 혹은 여자친구를 '오마에お前‘라고 부른다. '오마에'는 '너'라는 뜻으로 상대방을 하대할때 사용하는 단어다. 조금 더 자세히 설명하면 '앞 전 前'자를 써서 한국말로 하면 "어이, 거기 앞에 있는 놈"이라는 의미를 갖고 있다. 그런데 일본 남성은 부정적인 의미를 가진 '오마에'를 부인이나 여자친구를 부를 때 일반적으로 사용하는 것이다.
이는 전통적으로 남자가 갑이고, 여자를 을로 취급한 일본 역사에서 그 이유를 찾을 수 있다. 일본 남성과 여성은 오래 전부터 갑을 관계가 확실히 정해져 있었다. 그래서 남성이 여성을 하대하는 걸 당연하게 생각한다. '잃어버린 10년'이라고 부르는 '버블시대' 당시 잠시 페미니즘이 득세했지만 그건 말 그대로 잠깐일 뿐이었다. 여자들 역시 자신이 '오마에'라고 불린다고 해서 그것을 전혀 불편하게 생각하지 않는다. 여자들도 자신이 을의 입장에 있다는 걸 인정하는 것이다.
일본은 사장이 직원에게 함부로 대하는 것에 대해서도 당연하게 생각한다. 직원들은 별다른 불만을 얘기하지 않는다. 정치인들이 시행하는 정책에 대해서 크게 반대하지 않는 이유 역시 같은 맥락이다. 사장이든 정치인과 같은 '높으신 분'이든 그들 문화에서는 철저한 갑의 위치에 있는 사람이기 때문이다.
제2차 세계대전에서 일본이 패망했을 때 한 미군 병사가 쓴 편지를 인터넷에서 읽은 적이 있다. 당시 일본은 가미가제 특공대를 필두로 끝까지 저항했기 때문에 미군 병사는 점령군으로서 일본에 상륙하면서도 굉장한 두려움을 갖고 있었다. 혹시 누군가 폭탄을 품에 안고 미군 주둔지에 오지는 않을까 밤에 잠을 자지 못했다고 한다.
그런데 막상 일본에서 만난 일본인들은 너무나 예의 바르고 깍듯했다. 품 속 폭탄은커녕 자신들이 숨겨두 꿀단지까지 내놓을 만큼 납작 엎드린 태도를 보인 것이다. 전쟁에서 승리한 미군과 패망한 일본 사이에 '갑을 관계'가 형성된 까닭이다.
만약 같은 상황에서 우리나라가 패했다면 미국은 우리의 철천지원수가 됐을 것이다. 우리나라 도시에 핵폭탄 두 방을 쏘는 바람에 죄 없는 수많은 시민들이 죽었다고 가정한다면 미국과는 평생 한 하늘을 이고 살지 못할 터다. 하지만 일본은 '찍소리'조차 하지 않는다. 전쟁에 이긴 미국은 갑이고 패배한 일본은 을이기 때문에 아무 말 없이 매우 친절하게 미군을 '받들어 모신 것'이다.
이렇게 갑을 관계를 확실히 하는 일본인의 특성을 봤을 때, 일본이 우리에게 진정한 사죄를 하지 않는 서글픈 이유를 짐작할 수 있다. 과거 제국주의를 표방한 일본은 강력한 나라, 즉 갑이었다. 일본이 식민지로 삼았던 우리나라를 비롯한 아시아의 많은 국가들은 약한 나라, 즉 을이었다. 일본인이 생각하는 갑을 관계에서 한국은 철저한 을이기 때문에 강력한 갑이었던 일본에게 불만을 얘기할 수 없다고 생각하는 것이다.
물론 일본인이 다른 나라에 사죄를 하지 않는 것은 '섬'과 '갑을 문화' 외에도 여러 가지 이유가 있을 것이다. 하지만 나는 이 두 가지야말로 근본적인 이유라고 확신한다. 일본인 기저에 깔린 가장 강한 본성이 바로 거기에서 비롯되는 것이라고 생각한다.
p31. 반려동물 살처분 세계 1위
최근 우리나라에서는 모 동물권 단체 대표가 유기견을 무분별하게 안락사한 사실이 밝혀져 큰 충격을 안긴 사건이 발생했다. 반려동물 1000만, 관련 시장 5조 원 이상의 규모를 자랑하는 우리나라는 물론 반려문화가 완벽하게 정착된 미국과 해외 여러 나라에서도 한 생명의 삶을 인위적으로 끝내는 안락사에 대한 논란은 여전히 뜨겁다.
그런데 일본은 안락사도 아닌 '살처분'을 세계에서 가장 많이 하는 나라로 악명이 높다. 일본에서는 한 해에 개 10만 마리, 고양이 20만 마리가 살처분된다. 매년 30만에 이르는 무고한 생명이 강제로 자신의 삶을 강탈당하는 것이다. 전 세계 어느 나라와도 비교할 수 없을 만큼 압도적인 수치다.
참고로 우리나라는 모든 동물을 합쳐 약 2만 마리, 영국은 7000여 마리, 독일은 놀랍게도 0마리라고 한다. 여담이지만 독일에 비교하면 아직 우리나라의 반려동물 문화도 갈 길이 멀다고 생각한다.
p36. 농약사용량 세계 1위
전 세계에서 농약을 가장 많이 사용하는 나라는 어디일까? 언뜻 중국이나 미국을 떠올리기 쉽지만 일본이 농약을 가장 많이 사용한다. 좁은 땅덩어리에서 미국의 20배에 달하는 농약을 살포한다. '농약범벅'이라는 표현이 어울릴 정도다.
아이러니하지만 우리나라 사람들은 이렇듯 농약으로 키워 가공한 일본 식품의 안전성을 강하게 신뢰하려는 경향이 있다. 쉽게 말해 '일본산 제품은 품질이 좋은 것'이란 막무가내식 편견에 사로잡혀 있는 것이다.
물론 농약을 사용하는 것이 무조건 나쁘다고 할 수는 없지만, 무분별하게 사용하는 것은 많은 위험성을 내포하고 있는 것이 사실이다. 잠재적 위험에 대해 무관심으로 일관하는 일본의 또다른 이중성을 엿볼 수 있는 대목이다.
p61.
일본에서는 '탕 목욕 문화'가 일반적이다. 매일 탕에 따뜻한 물을 가득 채워 목욕을 하는 문화가 발달한 것이다.
나는 시간이 오래 걸리고 과정이 복잡한 일본 탕 목욕 문화의 배경이 '청결함'에 있다고 생각했다. 하지만 일본인은 생각보다 청결하지 않다. 지금까지 점심시간에 양치를 하는 일본인을 본 적이 없다. 한국인은 점심식사 후 너도나도 양치를 하는 데 반해 일본인은 곧바로 업무에 들어간다. 여름철 대중교통을 이용할 때면 땀으로 범벅이 돼 매캐한 체취를 풍기는 사람들 때문에 눈물이 날 정도다.
일본에서 탕 목욕 문화가 발달한 이유는 바로 비효율적인 난방 시스템 때문이다. 전기세가 높고 난방 시설이 미흡해서 따뜻한 물은 채운 욕조에 몸을 담그는 문화가 일반적으로 자리 잡은 것이다. 비싼 난방 비용을 감당하지 못해 선택한 궁여지책이다. 누군가 목욕을 마치고 나오면 "이제 몸이 따뜻해졌어?"라고 묻는 것도 같은 맥락이다.
일본은 세계적으로도 손꼽히는 고물가 나라 중 하나다. 물론 아주 저렴한 프랜차이즈 덮밥집 같은 곳도 있지만 괜찮은 일본 레스토랑에서 한 끼 식사를 하는 비용을 원화로 계산해보면 깜짝 놀랄 정도로 비싼 경우가 많다. 2019년 현재는 한국의 일본 불매운동으로 인해 순위가 '떡락'했지만 지난해까지 '한국인이 선호하는 연휴 광광지 1위'에 선정된 오사카에서는 150그램도 안 되는 스테이크 한 덩이를 무려 4천 엔(약 4만 원)에 팔고 있을 정도다. "시간만 있으면 유럽을 가겠다"는 볼멘소리가 나오는 이유다.
경제주의를 체택하고 있는 나라는 모두 마찬가지겠지만, 일본은 특히 돈이 없으면 최소한의 인간적인 삶을 유지하기 힘든 곳이다. 돈으로 생활의 질이 결정되는 일본인들이 새삼 안타까워지는 순간이다.
p69.
나는 일본 도박의 현재가 '제2차 세계대전'과 맞닿아있다고 나름대로 결론을 내렸다. 일본이 전쟁에서 패배하고 미국 맥아더 장군이 일본에 상륙하는 동시에 GHQ(General Headquarter)라는 이름의 연합군 최고 사령부가 설치되었다. 이후 GHQ에서는 일본의 우민화 정책으로 여러 가지 방안을 내놓는데 그 중 '3S 정책'이 일본에 도박이 만연해진 역사와 관련이 있다.
3S는 'Sex, Sports, Screen'을 의미하는데, 스크린에는 영화나 드라마뿐만 아니라 그 외 모든 오락도 포함된다. 즉, 도박 역시 3S 정책의 핵심 중 하나였던 것이다.
미국의 3S 정책이 본격적으로 시행되자 일본인은 한층 더 국가에 순응하게 됐다. 도박을 유연하게 받아들인 것 역시 같은 맥락이다. 패전 후 어떤 방식으로든 경제를 살려야 했기에 국가 차원에서도 도박을 장려할 수밖에 없었다. 이래저래 도박 산업이 발전할 수밖에 없는 상황이었다.
한 가지 놀라운 점은 200조 원에 이르는 일본 파친코 시장의 90% 이상을 점유하고 있는 게 바로 재일교포들이라는 사실이다. 일제강점기 시대에 일본으로 건너간 사람들로부터 역사가 시작된 재일교포는 직업을 선택할 때 제한을 받았다. 공무원은 물론이고 대기업은커녕 작은 기업에 취직하는 것도 낙타에게 바늘구멍처럼 극도로 힘들었다. 생존을 고심하던 재일교포들은 선택의 여지없이 파친코 업계에 뛰어들었다. 소프트뱅ㅋ크 창업자인 손정의 집안도 파친코를 경영했다. 당시 대다수 재일교포들은 주로 직업 선택의 제한 때문에 파친코를 비롯해 대부업, 연예계, 스포츠 등 일반적이지 않은 직업을 울며 겨자 먹기로 선택 할 수밖에 없었다.
그런데 당시 재일교포들의 불가항력적인 파친코 업종 선택은 현재 아이러니한 상황으로 이어졌다. 파친코 사업으로 막강한 재력을 거머쥔 일본 재일교포들은 새로운 종교단체인 창가학회를 만들었고, 이를 기반으로 이후 공명당 창당에까지 이른 것이다. 현재 공명당은 일본 보수정당인 자민당과 연립정권을 세워 막강한 권력을 자랑하고 있다.
일본 우익이 한국과 재일교포를 싫어함에도 불구하고 결코 무시할 수 없는 이유가 바로 여기에 있다. 미군의 우민화 정책과 재일교포의 불가피한 파친고 산업 투신이 비정상적인 현재로 이어진 모양이다.
일본에서 도박 산업은 결코 사라지지 않을 것이다. 중독과 같은 위험성 여부를 떠나 일본 경제 자체를 지탱하는 기둥 중 하나인 까닭이다. 분명한 것은 일본의 도박 산업에서 우리나라가 배울 점은 단 하나도 없다는 사실이다.
p94. 여성이라는 이유로 야유받은 정치인의 눈물
일본 도쿄도 의원인 시오무라 아야카는 위원회에서 여성의 임신과 출산에 대한 의견을 말하는 도중 남성 의원들에게 집중적인 야유 세례를 받았다. 다른 남성 도의원들이 "그렇게 남자가 좋으면 너나 결혼해라", "그 나이에 임신은 가능하냐?"와 같이 선을 넘은 야유를 퍼부은 것이다. 결국 시오무라 아야카는 자신이 준비한 것을 모두 풀어내지도 못하고 눈물을 흘리며 단상에서 내려올 수밖에 없었다.
*(보충)2014년 6월14일 일본 지방의회에서 야당 소속의 시오무라 아야카 의원의 발언 도중 자민당 측에서 나온 야유성 발언으로 이슈가 됨(하기 해당 동영상), 이후 자민당에서 공식 사과를 했음.
시오무라 아야카(塩村 文夏), 1978년 7월6일생, 그라비아 아이돌 출신으로 탤런트, 방송작가를 거쳐 정치에 입문. 이 사건으로 아이러니하게 지명도를 얻었으며 올해(2019년) 참의원선거에서 입헌민주당 소속으로 당선됨.
이후 시오무라 아야카는 자신의 트위터에 "여성으로서 안타까운 야유를 들었습니다."라는 내용의 글을 올렸다. 하지만 이 게시물에도 남성들의 무차별적인 비아냥이 이어졌다. 국민이 뽑은 도의원이지만 남성과 여성이라는 성별 차이가 사회적 위치의 상하 가름으로 이어진 어처구니없는 사건이다.
일본인의 이런 인권유린 사태는 비단 여성에게만 국한되지 않는다. 일본에서 장애인과 같은 사회적 약자에 대한 처우는 '인권 최빈국'이라는 평가조차 아깝게 느껴진다. 일본에는 구 우생보호법旧 優生保護法(1948년 제정, 1996년 모체보호법이라는 명칭으로 바뀜.) 이라는 말도 안 되는 법률이 20여 년 전까지 존재했다. 구 우생보호법은 제2차 세계대전 패전 후 베이비 붐으로 인구가 급격하게 늘어나며 식량 및 각종 물자가 부족해짐에 따라 유전병과 지적장애를 가진 아이를 출산할 가능성이 높은 사람을 대상으로 강제로 불임이나 낙태를 시킬 수 있는 근거로 사용했다. 쉽게 말해 '장애인 출산 가능성이 있는 사람에 대해 강제적으로 불임 및 낙태 수술을 시행할 수 있다'는 국가의 인식이 반영된 최악의 인권유린 법안인 셈이다.
이로 인해 1945년부터 1996년까지 약 2만 5000명이 불임수술이나 중절수술, 정관수술을 받아야만 했다. 특히 이 중 1만 6500명 이상은 본인 동의 없이 국가가 강제적으로 각종 수술을 시행했으며 여기에는 9살 어린이도 포함되었다.
일본이 아닌 다른 나라에서 이런 말도 안 되는 법률이 시행됐다면 진즉 폭동 수준의 강렬한 시위가 전국적으로 일어났을 것이다. 하다못해 소송을 통한 거액의 피해보상이라도 받을 수 있었을 터다.
하지만 일본에서는 지난해 여성 피해자 2명의 소송으로 불거진 구 우생보호법 관련 재판의 판결이 엉뚱하게 나왔다. 한 사람당 7천만 엔(약 7억 원)을 배상해달라는 소송에 대해 일본 법정은 "구 우생보호헙은 행복을 추구하는 권리 등을 정해놓은 헌법 13조를 위반한 위헌이지만 국가의 배상 책임은 인정하지 않는다."는 판결을 내렸다. (일본의 사법체계를 그대로 따라온 대한민국의 사법부가 개판인 이유)
P100
현재 일본 취업시장이 호황인 건 사실이다. 하지만 결코 아베노믹스 효과 때문은 아니다.
일본에서는 '단카이 세대'라고 부르는 1945년 전후 출생자의 은퇴가 수년 전부터 이어지고 있다. 이들은 이른바 '베이비부머 세대'에 해당하며 매년 200만 명가량 은퇴를 하고 있다. 일할 사람이 물리적으로 부족해진 것이다.
반면 매년 취업시장에 유입되는 젊은 층의 수는 100만 명 정도에 불과하다. 은퇴하는 단카이 세대의 절반 수준이다. 기업에서는 당장 2명의 직원이 필요한데 뽑을 수 있는 후보자가 1명뿐이니 능력이나 인성과는 상관없이 일단 채용하고 보는 것이다. '구직 희망자'가 품귀현상을 보이는 현재 일본에서는 누구나 쉽게 취업할 수 있다. 통계의 허점을 아베 정부가 교묘하게 자신들에게 유리한 방향으로 이용한 것이다.
이 같은 현상은 앞으로 더욱 심화될 전망이다. 일본의 인구는 날이 갈수록 줄고 있다. 출생자보다 사망자가 월등히 많을 정도다. 인구 감소는 곧 국가 경쟁력 하락으로 이어질 가능성이 높기 때문에 많은 전문가는 일본의 경제력 또한 점차 악화될 것이라는 예측을 내놓고 있다.
수년 사이에 일본으로 입국하는 해외 노동자가 급격히 늘어난 것도 같은 맥락이다. 별다른 스펙이 필요하지도, 뛰어난 능력을 요구하지도 않는 현재 일본은 취업에 힘겨워하는 해외 젊은층이 훌륭한 차선책으로 여기고 있다. 내가 교수로 재직했던 사이타마현의 모 대학교에는 수년째 취업률 99% 이상을 기록하고 있다. 한국, 중국, 베트남 등 국적을 가리지 않고 내가 직접 가르친 유학생들 모두 예외 없이 취업에 성공했다. 성적표를 C로 도배해도 취직에는 아무 문제가 없다. 과장을 조금 보태면, 정신적으로 문제만 없으면 무조건 취직이 된다고 표현해도 될 정도다.
한국에서는 목숨처럼 여기는 스펙도 필요치 않다. 내가 담당한 학생들은 토익시험을 본 적도 없다. 유학생은 JPT, JLPT 2급만 따도 취업이 되고, 1급을 따면 좋은 조건으로 회사가 '모셔가는' 수준으로 채용이 된다.
일본의 취업 기준은 한국에 비해 굉장히 낮다. 일본 대학 중 수준이 낮은 곳의 토익 평균은 겨우 400점대다. 600점만 되면 대기업 취직이 가능하다. 한국에서는 800점은 넘어야 겨우 명함을 내민다고 하는데, 일본에서는 800점을 넘으면 거의 미국인과 동급으로 대우받을 수 있다.
컴퓨터를 다루는 능력도 턱없이 부족하다. 집에 컴퓨터가 없는 대학생도 흔할 정도다. 스마트폰으로 타이핑한 후 학교 컴퓨터로 프린트를 해서 과제를 제출하는 학생들도 많이 봤다.
한국에서는 평균 스펙을 가진 대학생도 일본에 오면 엘리트로 인정받는다. 그만큼 대부분의 분야에서 수준이 매우 낮다.
게다가 일본 청년들은 성공에 대한 의욕도 없고, 돈을 벌고 싶은 마음도 없다. 설사 대기업에 취직을 해도 해외 주재원이 되는걸 꺼린다. 적은 급여로 힘겨워도 자신만의 루틴으로 이뤄진 일상을 유지하면 된다는 '적당주의'가 팽배해 있는 까닭이다.
물론 모든 직장이 대기업처럼 복지나 급여가 만족스러운 것은 아니다. 일부 열악한 조건의 직장에 취업하는 경우도 꽤 많다. 하지만 우리나라처럼 취업 자체가 힘든 것은 아니다.
문제는 취업 후에 직면한다. 일본 평균 초봉은 약 20만 엔 선, 우리나라 돈으로 200만 원 정도다. 세금을 제외하면 17만 엔 정도가 신입사원 손에 쥐어진다.
만약 부자 부모 덕분에 자가로 사회생활을 시작한 경우가 아니라면, 매달 일정 금액의 월세를 감당해야 하는 팍팍한 삶이 기다리고 있다. 도쿄 시내에서는 정말 코딱지만 한 원룸도 월세가 최소 5~6만 엔이다. 세금과 월세를 빼면 12만 엔(약 120만 원) 정도가 통장에 남는 셈이다.
p152.
그런데 왜 일본은 우리나라 영토를 대상으로 자꾸 분쟁을 일으키는 것일까? 꽤나 많은 부분을 정치적 이유가 차지하겠지만, 일본인 중에는 독도가 실제로 자기네 영토라고 생각하는 사람이 많다. 우리나라가 완벽하게 실효지배하고 있는 독도가 국내법적으로는 전혀 문제가 없는데, 왜 일본은 존재하지도 않는 문제를 애써 만들어내는 것일까?
숨겨진 속내는 국내 법적으로 한국이 실효지배하고 있는 독도를 분쟁지역화해서 국제적 문제로 키우고자 하는 것이다. 국제적 분쟁을 담당하는 국제사법재판소ICJ(International Court of Justice)에 소속된 전/현직 일본인 재판관은 이와사다 유지, 오다 시게루, 다나카 코타로, 오와다 히사시 등 무려 4명이다. 특히 마지막으로 언급한 오와다 히사시란 사람은 현재 일본 왕비인 마사코의 친아버지로, 2012년까지 국제사법재판소 소장을 역임했고 이후 2018년까지 재판관으로 재임했다. 이처럼 국제사법재판소에서 일본의 영향력은 굉장히 크다. 일본이 국제사법재판소에 많은 자금을 지원하고 있기도 하다. 이에 비해 한국은 아직까지 국제사법재판소의 재판관을 배출하지 못했다.
바로 이것이 일본이 국제사법재판소로 독도영유권 문제를 끌고 가려는 의도다. 일본은 장기적인 관점에서 한국의 독도를 분쟁지역화라혀는 다향한 프로젝트를 꾸준히 추진하고 있다.
국내 법적으로 실효지배를 하고 있다면 아무 문제가 없지만, 영토분쟁의 상대 국가가 계속 이의를 제기하면 해당 지역이 '점유지'가 된다는 사실을 파고든 것이다. 일본이 지금처럼 끊임없이 독도에 관한 논란을 일으키면 '실효지배'가 아니라 '점유지'로 인식되기 때문에 국제사법재판속의 판단을 받아야 할 경우가 생길 수도 있다.
국제사법재판소에서 강력한 영향력을 행사하는 일본이 독도를 자꾸 국제적 문제로 키우려고 하는 수작인데, 우리가 이에 반응하면 일본의 의도대로 되는 것이다. 나는 이러한 일본의 독도 분쟁지역화 시도에 대해 '무반응'으로 일관하는 게 좋다고 생각한다.
p175.
경제보족 조치는 종교적으로도 악영향을 끼쳤다. 앞서 '도박 천국 일본'에서 다룬, 아베 총리와 자민당과 함께 연립여당을 구성한 '공명당'의 모체는 창가학회(Soka Gakkai International)라는 종교단체다. 창가학회는 세계 평화를 기본 철학으로 삼는다. 특히 한일관계와 평화를 중시하는 창가학회는 '일한관계', '일한평화'와 같이 일본을 단어 앞에 놓는 다른 일본인들과 달리 '한일관계', '한일평화'처럼 한국을 우선한다. 한국을 존경해야 하는 형님과 같은 존재라고 생각하는 것이다. 이처럼 한국에 우호적인 이유는 창가학회의 기둥이 재일교포에 있기 때문이다. 창가학회는 재일교포의 재력과 노력으로 유지되고 있는 종교단체라고 할 수 있다.
우리나라 불매운동의 시작점인 '유니클로'의 야나이 회장은 대표적인 창가학회 신자다. 야나이 회장은 한국에 굉장한 호감을 가진 인물로 유명하다. 실제로 일본 본사에서 한국인 직원을 많이 뽑고 있으며 야나이 회장은 아베 정권에 대해 비판적인 의견을 내고 있는 사람이다. 다이소 역시 창가학회 계열의 기업이다.
물론 "유니클로나 다이소의 회장은 한국을 사랑하는 창가협회와 공명당의 회원이니까 불매운동을 하지 마라"라는 말을 하겠다는 게 절대 아니다. 개인적으로는 현재 한국이 불매운동을 적극적으로 지지하고 있다는 걸 분명히 밝힌다.
다만 이들 기업이 한국에서 입는 경제적인 피해를 연립여당인 공명당이 대변할 가능성이 있다는 점을 설명하고자 한다. 공명당은 원래부터 자민당이 헌법을 개헌해 전쟁이 가능한 나라를 만드려는 시도를 극렬하게 반대한 정당이다. 공명당과의 연정 덕북에 자민당이 현재의 힘을 가졌지만, 반대로 공명당이란 존재 덕분에 자민당의 폭거를 막을 수 있었던 것이다.
만약 한국의 불매운동이 이들 기업에게 더 큰 피해를 입힌다면, 공명당에서는 어떤 방식으로든 자민당을 압박할 가능성이 높다. 부가적으로 창가학회 회원들의 지지도 떨어져 나갈 게 뻔하다. 다시 말해 우리의 불매운동은 계속돼야 한다는 의미다.
일본에서는 재일교포의 힘이 매우 강하다. ABC 마트의 창업자 미키 마사히로도 재일교포로 본명이 강정호로 밝혀졌다. 이외에도 재일교포 자본의 일본계 회사는 다 열거하기 힘들 정도다. 소비자 금융(대부업), 도박산업, 서비스산업 등 일본에서 재일교포들의 경제력은 엄청나다. 일본의 돈줄을 쥐고 있다는 표현이 그리 틀리지 않다.
이번 경제보복 조치로 인해 발동한 불매운동 탓에 재일교포들이 피해를 입게 됐고, 이들이 한목소리로 아베 정권에 불만을 내뱉을 가능성이 높아지고 있다. 아베의 현재 상황은 그야말로 사면초가다.
학부는 도쿄대 금속공학과를 들어갔으나, 대학 재학 시절중 명성황후 시해사건을 알고 이로부터 일본이 왜 아시아를 침략했는가에 대한 주제에 의문이 생겼다고 한다. 대학졸업후 고려대 한국어학당에 들어간 후, 고려대 정치학과에 편입한다. 이후 동 대학원의 석/박사 과정을 마치고 정치학 박사가 된다. 이후 세종대 교수가 되고 독도문제 연구소 소장에 이른다.
한일 근대사에 대한 전문가이며, 개인적으로는 김어준의 다스뵈이다와 뉴스공장을 통해 접하게 되어서 알게 되었다.
이 책은 아베정권의 뿌리와 그로부터 현재 한일갈등에 이르기까지를 일본 근대사의 계보로부터 그 연원을 풀어나가는 내용으로 현재의 한일 갈등에 대한 근본을 풀어주는 내용으로 관심이 있는 사람에게는 필독의 내용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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p25.
'제1차 세계대전 후의 독일인들이 왜 히틀러와 나치당을 지지하게 되었는가'라는 의문에 대해서는, 1934년 6월 미국의 사회학자 세어도 아벨이 실시한 연구 성과가 좋은 시사점을 제공해준다. 그는 히틀러가 정권을 장악하기 이전에 이미 나치당원이 된 581명에 대해 작문 형식의 조사를 실시했다. 그 결과물을 1975년 미국 캘리포니아 대학의 마클 교수가 다시 조사해 발표했다.
'왜 자신이 나치당원이 되었는가'라는 물음에 대해 약 30%가 '독일이라는 질서의 와해에 대한 충격과 독일 내 혁명론자들에게 반론하기 위해서'였다고 대답했다. 독일 내 혁명론자란 황제 제도를 폐지하여 독일을 공화제로 바꾼 사람들을 가리킨다. 다음은 어느 나치당원의 글이다.
"1918년 11월9일(독일혁명으로 황제가 퇴위해 독일공화국이 성립된 날), 그날을 나는 결코 잊을 수 없고 앞으로도 그럴 것이다. 그것이 얼마나 혐오스러운 일이 되어 나를 습격했는지, 나는 표현조차 할 수 없다. 비애국자들이 갑자기 고향에 주둔해 있던 군인들을 끌어내리고 완장을 찢어버렸고, 그동안 전쟁의 공로로 얻은 훈장을 가슴에서 떼어내버렸다. 그들은 수백만의 독일인이 그 아래에서 싸워 목숨을 바친 우리의 흑,백,홍의 국기를 하수구로 내던지고 있었다. 이런 독일 국민 모두에게 신성하고 자랑스러운 상징들을 모욕하는 사람들과는 평생 어떤 공통점도 갖지 못할 것이라고 나는 마음속 깊이 다짐했다."
p27.
독일이 제1차 세계대전에 패해반 후 연합국으로부터 받은 제재에 비하면, 일본이 태평양 전쟁에 패배한 후 연합국으로부터 받은 제재는 상당히 적은 편이었다. 그런 조치는 제2차 세계대전에서 다시 패배한 독일에 대해서도 마찬가지였다. 연합국들이 영토에 대해 야심을 드러내지 않았고, 일본에 대해서는 고대로부터 일본 영토만을 인정했고 연합국으로서 배상금을 요구하지 않았다. 그런 일연의 조치는 제1차 세계대전 후의 히틀러와 나치당과 같은 괴물이 다시 탄생하지 않도록 하는 연합국의 배려였다.
그러나 일왕은 인간 선언으로 '살아 있는 신'에서 인간으로 내려왔고, 절대군주에서 국민 통합의 상징으로 권력을 빼앗겼다. 이에 극우파를 중심으로 일왕을 다시 절대군주로 복귀시키려는 움직임이 일어났다. 패전 후 도쿄재판에서 A급 전범 23명이 결정되었는데, 그들 중 7명에 대해서는 사형이 집행되었고 7명은 옥사했다. 이후로도 일본에는 전범이 없다면서 A급 전범의 복권을 주장하는 세력들이 나타났다.
p29.
제1차 세계대전에서 패배한 후의 독일인처럼 일본 극우세력은 전쟁 패배로 빼앗긴 대일본제국의 제체와 신사들, 호전적인 교과서 등의 상징물을 모두 부활시키려 하고 있고, 이에 반대하는 한국에 적대감을 드러내며 일본 국민들을 선동하여 혐한 감정을 확산시키고 있다.
제1차 세계대전 후의 독일과 같은 국가적 분위기를 만들어 히틀러를 출현시키는 것이 그들의 목적이다. 그들에게 있어 정치적, 혈통적으로 보아 아베 신조만큼 이에 적합한 인물은 없다.
p32.
이런 상황에서 관료들은 총리나 총리 주변이 좋아할 일을 무조건 해야만 한다. 반대로 총리 관저의 불평을 살 우려가 있는 일은 아예 하지 않는다. 그 결과 총리에게 정확한 정보가 올라오지 않게 될 우려가 커졌다. 나라의 최고 책임자가 현실에서 유리되어버린 셈이다. 이것이야말로 인사권을 ㅌ오한 공포 지배를 실시한 국가에 대한 진정한 위협이다.
p45.
차기 총리 후보 중 한 사람인 현직 자민당 국회의원 이시바 시게루가 2019년 8월23일 자신의 블로그에 다음과 같은 글을 올렸는데, 넷우익들에게 심한 공격을 받았다.
"한일 관계는 문제 해결의 가망이 전혀 없는 상태에 빠져버렸습니다.(중략) 우리나라(일본)가 패전한 후 전쟁 책임과 제대로 마주 보려 하지 않았던 것이 많은 문제의 뿌리가 되어 그것이 오늘날 여러 가지 형태로 표출된 것 같습니다."
이에 인터넷에서는 '이시바는 매국노다', '절대로 총리로 뽑으면 안 된다'는 과격한 댓글들이 넘쳤다. 일본은 지금 혐한 여론에 반대 의견을 제기하면 매국노 취급을 받는 이상한 나라가 되었다.
p48.
"전후 70년이나 되었는데, 한일 관계를 악화시킨 아베 정권의 죄는 크다. 피해를 준 측이 그 사실을 잊거나 무신경한 발언을 하고 피해자들의 분노를 증폭시키고 있다. 조부모 세대의 분노는 그다음 세대로 오히려 증폭되어서 계승되어간다. 그러므로 일본 시민들의 역사를 바라보는 관점이 중요하다. 현재 전쟁을 모르는 세대는 조선이나 대만에 대한 식민 지배도 모르는 사람들이 대다수다. 역사 수정주의 분위기가 만연되어 있다."
미즈시마 아사호 와세다대 교수는 아베 정권과 일본의 혐한 분위기를 이와 같이 비판한다. 이런 양심적인 생각을 가지는 일본인들이 많이 필요한 시점이다.
p53.
아베 아키에 총리 부인이 2018년 4월21일 오사카에서 열린 차별 주의 단체 재특회(재일 한국인에 대한 특권을 인정하지 않는 모임)가 일으킨 시위에 '편향 보도에 지지 마라! 아베 정권 힘내라 대행진 in 오사카!'에 뜨거운 응원 메시지를 보낸 것이 데모 주최자에 의해 밝혀졌다. 일본 총리의 부인이 배외주의를 호소하는 차별주의자들을 지지했을 뿐만 아니라 개별적으로 메시지를 보내 응원했다면, 총리 부인이 차별주의 단체 리더들과 깊은 관계에 있다는 이야기다. 아키에 여사가 차별주의적 사고에 가까운 생각을 갖고 있다는 것은 이미 널리 알려져 있다. 그러나 재특회라는 차별주의자와도 친하다고 하면 넘어서는 안 될 선을 완전히 넘어선 셈이다.
내각총리 부인이라는 일본의 퍼스트레이디가 차별주의 단체 재특회의 교토 지부장인 우치코시 젠지로가 주도한 시위에 '아베 정권을 응원해준다'는 이유로 무분별한 응원 메시지를 보낸 것이다. 이는 국가로서 차별을 용인하고, 차별주의 단체에 보증을 주는 행위이며, 근대 국가에서는 있을 수 없는 행위다. 우치코시 젠지로라는 인물은 이전부터 재일 한국인의 '특권'이 있고 그것을 일소하자는 차별주의 단체 재특회가 조작한 유언비어를 신봉하는 차별주의자이다.
p54.
2016년 3월18일 참의원 예산 위원회에서 당시 민주당의 아리타 요시오 의원이 아베 총리에게 다음과 같은 질문을 했다. 이것을 보면, 재특회를 비롯한 일본의 혐한 세력들이 나치 독일과 똑같다는 것을 알 수 있다.
아리타 : 재특회 회장 사쿠라이 마코토 씨가 인터넷상에서 특정 민족에 대해 헤이트 스피치에 해당하는 언동을 반복하고 있는데 이것은 용납되는가? [예를 들어] 2013년 2월17일 도쿄 신 오쿠보에서 혈린 혐한 시위에서는, 그들의 플래카드에 '집단 학살'을 상기시키는 혐한 표현들이 많았다. 지역에서도 나치 독일의 깃발 하켄크로이츠를 들고 시위를 하는 모습을 전국 여러 곳에서 볼 수 있다. '가스실을 만들라'라는 말까지 외치고 있었다. 오사카의 츠루하시에서는 "츠루하시 대학살을 하자"라고 당시 열네 살의 소녀가 외치고 있었다.(후략)
아베 정권은 내셔널리즘을 부추겨서 한일 관게를 의도적으로 악화시켜 내정 문제 등에 대한 국민들의 비판을 다른 나라로 돌리게 하는 것이 목적이다.
또 아베 신조가 재특회를 이용해 재일 한국인이나 조총련 등에 강하게 대처하는 것처럼 꾸며 자민당 신봉자나 우익 보수주의자들이나 국수주의자들을 늘려 미국과의 전쟁에 가담시키거나, 최종적으로는 아시아에서 전쟁을 일으키게 하는 것이 목적으로 보인다.
p56.
구한말 대한제국이 일본에 병합당하는 과정에서 최초의 친일단체로 거론되는 '일진회'가 결성되었다. 일진회 구성원 중에는 서재필이 만든 독립협회 인사들이 상당수 포함되어 있었다. 그들은 독립협회와 민중들의 염원이었던 민회 설립 운동을 테러로 무자비하게 파괴해버린 고종 독재 정권으로는 도저히 제대로 된 나라를 만들 수 없다며 깊은 절망감에 빠져 있었다. 그러므로 그들이 생각한 것은 '일본과의 연합을 통한 새로운 국가 만들기'였다.
당시 일본 세력은 대한제국의 지식인들에게 "일본과 대한제국이 대등한 입장에서 합방하자"고 회유했고, 일본의 다루이 토키치라는 학자는 새로운 나라를 '대동(大東)'이라고 명명하자고 제안하기도 했다. 일진회 회원들은 그런 일본 측 전략에 말려들어갔다. 일진회로 대표되는 일부 한국인들은 고종 정권이 타도되고 일본과 한국이 대등한 입장에서 합방한다면 좀더 나은 나라에서 살 수 있다고 믿었던 것이다.
그러나 결과는 대등한 '합방'이 아니라 일본이 대한제국을 속국으로 만드는 '병합'으로 바뀌어 버렸다. 이에 분노한 일진회 회장 이용구는 억울한 나머지 분사했고, 많은 일진회 회원들이 일본인 회원들에게 거짓 주장의 책임을 지고 할복할 것을 요구하기도 했다.
일진회의 잘못은 새로운 나라에 대한 정확한 비전이 결여된 데다, 새 국가 건설의 동기 자체가 일본을 무비판적으로 긍정하고 대한제국의 절망적인 상태를 너무 비관한 데서 비롯됐다. 더불어 일본의 교활함을 간파하지 못한 결과이기도 했다.
p58.
현재 일본 내의 극우파 단체들은 친일파 지원 기금 제도를 만들어 한국인을 적극적으로 지원하기도 한다. 유명한 단체는 사사가와 재단(현, 니폰 재단)이다. 이런 극으파 단체들의 돈을 받고 사실상 일본의 논리를 한국 사회에 침투시키려는 일본 앞잡이가 된 한국인들이 의외로 많다.
어떤 학자는 1년에 30번 정도 일본을 출입국 한다. 일본 측에서 부르기 때문이다. 부르는 사람들은 일본 정부 모 부처, 공안, 일본 보수 단체 등 여러 곳이다. 그들은 주로 비공개 회의에 참석시켜서 질의응답 방식으로 이야기를 하게 한다고 한다. 그는 교통비, 체재비뿐만 아니라 사례비로 한 회당 500~1,000만 원을 받는다고 한다. 그렇게 일본을 왕래하면서 1년에 적게는 1억5,000만 원 정도, 많게는 3억 원 정도를 버는 셈이 된다.
이런 유혹에 빠지면 일본의 부당한 행위에 대해 비판력을 상실해 버릴 것이다. 혹은 일본의 망언이나 경제 보복 같은 사건이 일어나도 그런 한국인들은 오히려 일본을 옹호하는 편에 설 가능성이 있다.
심지어는 일본의 주장을 그대로 담은 도서를 발간하고, 유튜브 방송 등을 통해 일본 측 논리를 퍼뜨리기도 한다.
p81.
일본이 위안부 피해자에게 지불하려는 10억 엔은 배상금이 아니라 보상금이었다. '보상'이라는 것은 합법적인 과정에서 일어난 손해를 보존해주는 것이다. 보상에는 '합법적'이라는 전제가 깔려 있다. 따라서 일본이 보상금을 지불한다는 것은 위안부 문제는 사실상 합법적이었다는 것을 인정하는 꼴이다 박근혜 정권은 위안부 합의로 위안부 문제가 합법적이었다는 데 합의하고 말았다.
필자는 이때 두 정부 사이에 뒷거래가 오갔을 것이라고 추정한다. 아베 정권은 박근혜 정권에 위안부 문제를 보상 수준으로 해결해주지 않으면 경제 보복을 가하겠다고 계속 협박했을 것이다. 최근의 한일 관계를 보면 충분히 이해할 수 있는 대목이다. 그때까지 지속적으로 법적 책임과 배상 책임을 강하게 요구해오던 박근혜 정권이 한순간에 인도적 책임 정도로 문제를 일단락하려고 한 정황은 아베 정권이 '경제 보복'으로 박근혜 정권을 협박했다고밖에 설명할 수 없다.
이때부터 일본 아베 정권은 박근혜 정권을 친일 정권으로 보기 시작했다. 실제로 박근혜 정권은 2016년 한일 군사정보보호협정(GSOMIA) 체결 등 일본의 요구를 대부분 수용했다. 위안부 합의 이후 박근혜 정권과 아베 정권은 관계가 꽤 좋아졌다.
p82.
문재인 정권은 위안부 합의를 검증했고 외교적 문제는 없지만, 피해자들의 의견을 무시해서 맺은 합의였다고 밝혔다. 파기나 재협상을 요구하지는 않지만, 위안부 합의로 위안부 문제가 해결되지 않았다는 결론을 내린 것이다. 이 합의에는 이면 합의로 일본 대사관 앞에 세워진 '평화의 소녀상'을 철거한다는 내용이 포함되어 있어 많은 사람들의 공분을 샀다. 그리고 위안부 합의를 이행하기 위해 설립된 화해,치유재단 이사들의 사임으로 인해 운영이 중지되었고 2019년 7월 해산 절차를 모두 끝내 정식으로 해산되었다.
p97.
한국 정부의 한일 지소미아 파기에 대해 한국 내에서는 보수 언론을 중심으로 우려를 나타냈고, 진보 언론들은 환영했다. 이렇게 의견이 양분되는 근본적 원인은 한일 지소미아에 대한 이해 부족에서 비롯된 것이다. 그러므로 우리는 지소미아가 무엇인지를 먼저 이해해야 한다.
우선 한일 지소미아는 한일 군사동맹으로 가는 첫 번째 단계라는 사실을 알아야 한다. 2016년 지소미아를 체결하는 이유로 거론된 것은 한일 간에 북한 관련 정보를 공유하기 위해서라는 내용뿐이었다. 마치 그것이 지소미아 목적의 모든 것인양 보도되었다. 그러나 북한 관련 정보 교환은 한일 지소미아의 극히 일부분에 불과하다. 북한 관련 정보는 지소미아 체결 이전에도 한,미,일 간에 공유되어 왔다. 즉, 북한 정보 교환은 지소미아가 아니더라도 가능하다.
한일 지소미아의 본질은 한일 악사(ACSA)와 함께 보면 쉽게 이해된다. 악사란 군사 물자 교환 협정이다. 이것은 전쟁터나 분재 지역에서 한국군과 일본 자위대가 무기를 비롯한 여러 군사 물자를 교환할 수 있도록 하는 협정이다. 한때 남수단에서 한국군이 일본 자위대로부터 만발 정도의 탄환을 공급받은 적이 있었는데, 한일 간의 협정이 없는 상황인데도 공급을 받았기 때문에 비판의 대상이 되었다.
2009년 이명박 대통령 시절에는 한일 지소미아와 한일 악사 체결이 한꺼번에 추진된 적이 있었다. 이 두 가지가 체결되면 누가 봐도 한일 양국이 군사동맹으로 간다는 것을 알 수 있었다. 그러므로 이명박 정권은 국민들의 반발을 고려해서 체결 1시간 전에 전격적으로 서명을 보류하기로 했다. 그런 경위가 있어서 박근혜 시절에는 지소미아와 악사를 분리해서 체결을 추진하기로 한 것이다. 한일 지소미아 체결 다음은 한일 악사 체결이 순서가 되었다.
박근혜 대통령 당시 미국은 오바마 정권이었는데, 오바마 정권은 아시아 재균형 전략이라 칭하면서 북한과 중국 포위망을 구축해 나갔다. 그 일환으로 한국에 사드를 배치했고, 사실상 한,미,일 군사동맹 구축을 추진했다.
한,미,일 군사동맹으로 가는 단계가 한일 지소미아와 한일 악사인데, 결국 이 두 개의 협정은 무력으로 북한과 중국을 굴복시키려는 목표를 갖고 있다고 해도 과언이 아니다. 그때 가장 피해를 입을 나라가 바로 대한민국이다.
일본 아베 정권은 제2의 6.25가 일어나면 다시 일본의 경제적 도약을 기대할 수 있어 한,미,일 군사동맹에 반대할 이유가 없다. 그러나 한,미,일 군사동맹으로 일본이 목표로 삼은 것은 미일 군사동맹에 예속되는 한국의 지위다. 이제는 한국을 경제적으로 망가뜨리는 것뿐 아니라 제2의 6.25로 아예 남북한을 무너뜨려서 자신들만의 이익을 목표로 한다는 악마의 생각을 가지고 있는 것이 아베 정권을 비롯한 일본의 극우 세력이다.
한일 지소미아는 유사시 일본 자위대와 한국군의 전시 암호체계를 교환하는 내용이 포함되어 있다. 그러므로 한국군과 일본 자위대는 유사시 하나의 군대처럼 움직일 수 있게 설계할 수 있다.
박근혜 정부 시절 한일 지소미아가 체결된 지 이틀 후인 2016년 11월25일, 일본이 한국에 요구한 첫 번째 군사정보는 '부산 한국군의 배치도'였다. 북한 정보와 아무런 관계가 없는 부산 한국군의 정보를 왜 일본이 첫 번째 군사정보로 한국에 요구했을까? 한국 내 한국군의 배치도 전체가 일본 측에 넘어간다면 일본이 본격적으로 한국의 적성국가가 될 경우 큰 문제가 될 수 있다."
p105. 한일청구권 협정
최근 한일 외교 관계를 최악의 상황으로 몰아넣은 시발점이 된 사건이 있다. 바로 강제 징용자 판결 문제이다. 일본은 한국에 대한 수출을 규제하려는 이유가 경제 보복이 아닌 안보 문제 또는 한국의 수출 관리 문제뿐이라고 계속해서 말을 바꾸며 둘러대고 있지만, 사실 한국 대법원에서 내린 강제 징용자 판결 문제가 직접적인 이유라는 걸 상식적인 사람이면 누구나 알고 있다.
실제로 세코 히로시케 일본 경제 산업성장관은 지난 7월1일 트위터에 "구조선 반도 출신 노동자(강제 징용 피해자) 문제에 대해 G20까지(한국정부가) 만족할 만한 해결책을 제시하지 않아 신뢰 관계가 현저히 손상됐다."는 취지의 글을 남겼다. 사실상 경제 보복을 인정한 증거를 트위터에 손수 남긴 것이다.
아베 총리와 스가 관방장관도 강제 징용자 판결 문제로 한일 양국의 신뢰 관계가 깨졌기 때문에 한국에 대한 수출 규제를 실시한다고 분명히 언급했다.
1965년 한국과 일본은 국교를 정상화하기 위해 한일기본조약과 4개의 한일협정을 체결했고, 그중 하나가 한일청구권 협정이었다. 이때 일본 정부는 한국 정부에게 무상으로 3억 달러, 유상으로 2억 달러를 지급하는 데 최종적으로 합의했다. 당시 한국에서는 굴욕적인 협정이라며 대학생과 시민들을 중심으로 한일기본조약 반대 시위가 심하게 일어났다. 더군다나 일본 정부는 우리에게 현금을 직접 주기보다는 사람들의 노동력이나 기자재 등을 제공하고 이것을 돈으로 환산하는 식으로 보상 처리를 했다. 그런데 여기서 중요한 점은 합계 5억 달러 지불의 명목이 경제 협력이었지 배상은 아니었다는 점이다.
[한일 청구권 협정 제2조 일부] 양 체결국은 ... 양 체결국 및 그 국민 간의 청구권에 관한 문제가 ... 완전히 그리고 최종적으로 해결되었음을 확인한다.
일본 정부는 한일청구권 협정문에서 이 문장을 근거로 삼아 국민간의 청구권, 즉 일본과 한국의 모든 국민이 가진 청구권이 1965년 6월22일 최종적으로 해결되었다고 주장한다. 그래서 2018년 10월 한국 대법원의 강제 징용 피해자, 즉 원고의 승소 판결에 반발하고 나선 것이다. 아베 정권은 1965년에 이미 끝난 문제를 들춰내서 일본 정부에게 돈을 내라고 요구했으니, 이것은 한국과 일본 간의 조약을 위반하는 행위라고 강조한다. 그렇다면, 한국 정부가 주장하는 바는 무엇일까?
먼저 이번 판결은 사법부의 판단이므로 행정부가 관여할 수 없다는 것이 한국 정부의 기본 입장이다. 그리고 이번 소송 자체가 강제 징용 피해자들이 일본 기업을 상대로 낸 소송이지 한국이라는 국가가 일본이라는 국가에게 배상을 요구한 것이 아니므로 국가가 개입할 문제가 아니라는 것이 한국 정부의 입장이다. 피해자였던 개인이 가해자였던 일본 기업(기업도 법적으로 개인에 속함)을 상대로 낸 소송이므로 1965년 체결한 한,일 청구권 협정의 결론에 전혀 구애받지 않는다는 것이다. 따라서 무엇보다도 국가는 이번 강제 징용 배상 판결에 개입할 수 없다고 주장했다.
하지만 일본 쪽의 반달이 끊이지 않자 한국 정보는 한 가지 대안을 제시했다. 2019년 6월19일까지 나온 판결에 대해 일본 기업이 성실하게 배상을 한다면 이후에는 한일 관련 기업들이 기금을 조성해 강제 징용 피해자를 구제하자는 제안을 한 것이다. 하지만 일본 정부는 이 제안을 거절했다. 그리고 한국 내 피해자들도 그렇게 하면 근본적인 해결이 되지 않는다고 오히려 한국 정부의 해결방안에 반대하고 나섰다.
그런데 이 재판의 본질적 쟁점은 '1965년 한일청구권 협정으로 한국인의 개인 청구권까지 소멸되었는가?'에 있다. 사실 이 문제에 대해 일본은 이미 1991년에 답을 내렸다. 그때 일본 국회에서 당시 일본 외무성의 조약국장은 세 번에 걸쳐 똑같은 답변을 내놓았다.
"국가로서 갖고 있는 외교보호권을 포기했음을 확인한 것이고 소위 개인의 재산,청구권 자체를 국내법적인 뜻으로 소멸시킨 것이 아니다."
이 답변의 의미는 1965년 한,일 청구권 협정문에 국민의 청구권이 해결되었다고 적혀 있지만 그것은 국가가 개인을 보호하는 외교보호권의 소멸을 뜻하는 것이지, 개인 청구권 자체가 소멸되었다는 말은 아니라는 것이다.
2018년 10월 한국 대법원의 판결이 확정되었을 때 일본 외무상인 고노 타로도 11월14일의 일본 국회 외무위원회에서 개인 청구권이 남아 있다는 점을 인정했다. 그런데 일본 정부는 개인 청구권이 남아있으나 구제를 받지 못한다고 말을 바꿨다. 그러나 개인의 배상 문제가 1965년 청구권 협정에 포함되지 않았다는 점은 인정했다. 한국 대법원 판결에 대한 일본 정부의 견해를 살펴보자.
고쿠타 위원(일본 공산당 고쿠타 게이지 의원) : ... 한국 대법원의 판결은 전 징굥공의 개인 청구권은 소멸되지 않는다고 판정했습니다. 이 개인의 청구권에 대해서 일본 정부는 국회 답변 등에서 청구권 협정에 의해 한일 양국 간 청구권 문제가 해결된다고 하더라도 피해를 입은 개인의 청구권을 소멸시킬 수 없다고 공식적으로 표명해 왔습니다. ..,
고노 다로 외상 : 개인 청구권이 소멸되었다고 말씀드린 것은 아닙니다만, 개인 청구권을 포함해 한일 간 재산 청구권 문제는 한일청구권 협정에 의해 완전하고 최종적으로 해결되었습니다. ... 한일 청구권 협정에 있어서 청구권의 문제는 완전하고 최종적으로 해결되고, 개인의 청구권은 법적으로 구제되지 않는다는 것이 일본 정부의 입장입니다. ...
고쿠타 위원 : .. 한국 대법원 판결은, 원고가 요구한 것은 미지불 임금이나 보상금이 아니라 한반도에 대한 일본의 불법적 식민지 지배와 침략 전쟁 수행과 직결된 일본 기업의 반인도적 불법 행위를 전제로 한 강제 동원에 대한 위자료, 이것을 청구한 것이라고 돼 있다. 그리고 한일청구권 협정 교섭 과정에서 일본 정보는 식민지 지배의 불법성을 인정하지 않았고 강제동원 피해의 법적 배상을 근본적으로 부정했다고 지적하고 이런 상황에서는 강제 동원 위자료 청구권이 청구권 협정의 적용 대상에 포함되었다고 볼 수 없다고 했습니다.
[현 일본] 정부는 한일청구권 협정 체결 시 한국 측으로부터 제출 받은 대일 청구 요강, 이른바 8개 항목에 피징용 한국인의 미수금, 보상금 및 기타 청구권이라고 기술되어 있고, 합의 의사록에는 이 대일 청구 요강의 범위에 속하는 모든 청구가 포함돼 있다고 하는데, 그 안에 위자료 청구권은 들어 있습니까?
미카미 정부 참고인(외무성 국제법 국장) : 대답해 드립니다. 그런 청구권도 포함해서 전부 대상이 되었다는 입장입니다. ...
고쿠다 위원 : 언제부터 그렇게 범위가 확대되었나요? 그런 이야기는 안 쓰여 있는데요. [외무성의] 야나이 조약 국장은... "쇼와 40년(1965년) 이 협정을 체결해서 그것으로 우리나라[일본]에서 한국과 한국 국민의 권리, 여기서 말하는 '재산, 권리 및 이익'에 대해 일정한 것을 소멸시키는 조치를 취한 것이지만 그런 것들 중에 이른바 위자료 청구라는 것이 들어 있었다고는 기억하지 않습니다."라고 분명히 위자료 청구라는 것이 들어 있지 않았다, 들어 있었다고는 기억하지 않는다고 대답했습니다. 따라서 개인의 위자료 청구권은 청구권 협정 대상에 포함되지 않았다는 것이 분명하지 않습니까... 어쨋든 간에 쇼와40년(1965년) 이 협정을 체결해서 우리나라(일본)에서 한국과 한국 국민의 권리, 여기에 말하는 재산,권리 및 이익에 대해서 일정한 것을 소멸시키는 조치를 취한 것인데, 그런 것들 중에 이른바 위자료 청구라는 것이 들어 있었다고는 기억하지 않는다고, 그래서 분명히 이 일련의 청구권 협정과 관련된 협상 과정에서 이뤄진 문제에 대해 위자료 청구권은 들어있지 않았다는 것을 몇 차례 분명히 했다. 이것이 그동안의 답변 아닌가요? 그 답변을 부정한다는 말씀입니까?
미카미 정부 참고인 : ... 야나이 국장의 답변을 부정할 생각은 없습니다. 일본 내에서 법률을 만들어서 그 실체적인 재산,권리,이익에 대해서는 소멸시킨 것입니다. 그러니 청구권이라는 것은 그런 재산,권리,이익과 같은 실체적 권리와 다른 잠재적인 청구권이기 때문에 그것은 국내법으로 소멸되지 않았다는 것을 야나이 국장은 말했다고 생각합니다.
국내법으로 소멸시킨 것은 실체적인 채권이라든가, 이미 그 시점에서는 확실한 재산, 권리 , 이익이므로 그 시점에서 실체화되지 않았던 청구권은 여러 가지 불버 행위라든가 재판을 해보지 않으면 모르는 것도 포함되어 있으니까, 그런 것에 대해서는 소멸되지 않았다. 따라서 처음 말씀드렸듯이 권리 자체는 소멸되지 않았다. 그러나 재판에 갔을 때 그것은 구제받지 않는다. [구제는] 실현되지 않는다는 것을 양국이 약속했다고 생각합니다.
고쿠다 위원 : ... 분명히 이 문제 대해서는 위자료 청구권은 들어 있지 않았다는 것은 지금 답변으로 지극히 명백해졌스니다. 게다가 당시의 답변은 그대로였다는 것을 확인해 두고 싶습니다.
이상의 인용문을 보면 2018년 11월 시점에서도 일본 정보는 개인 청구권은 소멸되지 않았고 배상 문제는 한일청구권 협정에 포함되지 않았다고 분명히 인정했다. 그런데도 재판에서 개인은 구제를 받지 못한다고 궤변을 늘어놓은 것을 알 수 있다. 그러면서 한국이 1965년에 일본과 맺은 약속을 어기고 있다고 강변했다.
하지만 한국은 한일청구권 협정의 약속을 지키고 있고 그때 소멸되었다는 외교보호권을 발동하지 않았다. 단지 국가가 아니라 한국의 개인이 남아 있는 개인 청구권을 행사하고 있을 뿐이다. 그런데도 최근 일본 정부에서 내놓는 답변이나 의견 자체가 상당히 왜곡이 심각하다고 할 수 있다. 그런데 한국 언론조차도 이에 대한 비판에 그다지 적극적으로 나서지 않고 있다는 것이 큰 문제다.
p116. 개인 청구권 효력의 유지
최근 한일청구권 협정을 두고 일본 정부의 말 바꾸기 문제가 심각하다. 따라서 객관적으로 남아 있는 자료를 통해 과연 진실이 무엇인지 깊이 파헤쳐 보도록 하자.
일본 국회 회의록을 보면, 1965년 한일청구권 협정에서 개인 청구권이 아니라 국가의 외교보호권이 소멸되었다는 내용이 정확하게 기재되어 있다. 다음은 1991년 8월 27일 국회에서 나눈 질문과 답변의 일부를 원문 그대로 옮긴 것이다. 당시 일본 정부의 대표자가 다음과 같이 말했다.
야나이 순지 조약국장 : 양국 간의 청구권 문제는 최종적으로 완전히 해결되었다. 그 의미는 한,일 양국간의 국민의 청구권을 포함해서 해결했다는 것이지만, 이것은 한,일 양국이 국가로서 갖고 있는 외교보호권을 상호 포기했다는 뜻이다. 이에 따라서 개인 청구권 자체를 국내법적인 의미로 소멸시킨 것은 아니다. 양국 정부가 개인 청구권 자체를 국낸법적인 의미로 소멸시킨 것이 아니다. 양국 정부가 개인 청구권을 외교보호권을 행사하여 거론할 수는 없다는 의미이다.
이와 같은 발언을 같은 해 12월5일에 역시 국회에서 야나이 순지 일본 외무성 조약국장이 한 번 더 같은 내용의 말을 했다.
야당 의원 : 한,일 간에는 목돈을 들여서 일단 국가 차원에서는 처리한 경위가 있다. 그러나 개인과 국가의 관계는 그것으로 끝난 게 아니다. 개인 청구권을 국내법적인 의미로 소멸시킨 것이 아니다. 예를 들면, 한,일 청구권 협정에서 한,일 양국이 국가로서 갖고 있는 외교보호권을 상호 포기했지만 개인 청구권 자체를 국내법적인 의미로 소멸시킨 것은 아니다. 따라서 청권권이 남아 있다는 것이 일본 정부의 입장이다.
야나이 순지 조약국장 : 청구권의 포기가 의미하는 바는 외교보호권의 포기다. 따라서 한국 정부가 한국 국민의 청구권에 대해 일본 정부에 청구할 수는 없다. 그러나 개인 청구권이 국내법적인 의믜로 소멸하지 않았다는 것은 말씀하신 대로다.
같은 해 12월13일에도 일본 국회에서 야나이 순지 조약국장이 이 문제를 정확하게 지적했다.
이들 규정은 양국 국민 간의 재산,청구권 문제에 있어서 한,일 양국이 국가로서 갖고 있는 외교보호권을 포기했음을 확인한 것이고 소위 개인의 재산,청구권 자체를 국내법적인 뜻으로 소멸시키는 것이 아니라는 것은 그동안 말씀드린 대로다. 이것은 소위 조약상의 처리의 문제다.
위의 자료처럼 일본 정부는 한,일 청구권 협정에서 개인의 청구권이 소멸되지 않았다는 것을 인정할 수밖에 없었다. 그래서 일본 정부는 일본 국내에서만이라도 한국인의 개인 청구권을 소멸시키는 국내법을 만들기로 결정했다. 이것이 1965년 일본의 국내법 법률 제144호로 이른바 '재산권 조치법'이라고 불린다.
[법률 제144호] 1. (전략) 대한민국 또는 그 국민의 재산권이자, 재산 및 청구권에 관한 문제 해결 및 경제 협력에 관한 일본국과 대한민국 사이에 협정 체 2조3의 재산,권리 및 이익에 해당되는 것은 1965년 6월22일에 소멸되었다.
이 법률에 있는 1965년 6월22일은 한,일 청구권 협정이 체결된 날짜이다. 이때 한국인의 개인 청구권이 소멸되었다고 자기들끼리 국내법을 만들어 정해버렸다. 전술하 바와 같이 2018년 11월14일 일본 중의원 외무위원회에서 일본 정부 외무성 국제법 국장 미카미 씨는 "일본 내에서 법률을 만들어서 그 실체적인 재산,권리,이익에 대해서는 소멸시킨 것입니다."라고 말한 것은 이 법률 제144호를 뜻한다. 그러나 이 법률에서도 소멸시킨 것은 한국인의 '재산,권리 및 이익에 해당되는 것'으로 불법 행위에 관한 배상금이나 위자료는 포함되어 있지 않다.
여기서 또 하나 지적해야 할 사항은 이 법률로 일본 정부는 일본인의 개인 청구권은 소멸시키지 않았다는 점이다. 일본 정부는 자국 국내법으로 대한민국 국민의 재산,권리 및 이익에 해당되는 개인 청구권만 소멸시키고 일본인의 개인 청구권은 그대로 남겨놓았다. 이런 면에서 이 국내법은 매우 불공평하다고 평가할 수 있다.
한편, 대한민국은 자국의 국내법으로 한국인은 물론 일본인의 개인 청구권을 소멸시키지 않았다. 이와 관련한 국내법 자체가 존재하지 않는다. 따라서 대한민국 국내에서는 개인 청구권을 활용해 충분히 배상을 청구할 수 있는 상황이 계속되는 것이다. 2005년 노무현 정권 때 가동한 청구권 협정에 관한 관민합동위원회에서도 재산,권리 및 이익에 관한 보상문제는 1965년 청구권 협정으로 종결되었으나 개인의 배상문제는 해결되지 않았다고 명시했다. 이러한 관점에서 볼 때, 2018년 10월 내려진 일본 기업에 대한 배상 명령, 즉 한국인 강제 징용 피해자에 대한 배상 명령은 정당한 사법적 판단이었다.
p120.
우선 22018년 10월 한국 대법원은 일본 기업이 일제강점기 강제 징용 피해자들에게 배상금을 지급해야 한다고 판결했다. 그러면서 다음과 같이 선고했다.
"일제강점기는 불법이며, 불법 강제 노동에 대한 개인의 손해배상은 청구권 협정에 포함되지 않는다."
이 선고에 따르면 1965년 청구권 협정에서는 일본이 '배상금'이 아닌 '보상금'을 낸 것이다. 보상금과 배상금은 비슷해 보이지만 전혀 다른 개념이다. 한국 대법원은 일제강점기가 불법이었고, 불법으로 강제 노동에 동원했으므로 손해배상을 해야 한다고 판결을 내렸다. 강제 징용자, 여자 근로 정신대 등 일제강점기의 피해자에 대해서 일본 기업은 위자료를 지급하라고 명령을 내렸다. 위자료는 배상금의 개념이다. 1965년 청구권 협정 때나 2015년 위안부 합의 때 일본에서 한국 쪽에 건넨 돈은 모두 보상금이었다.
여기서 보상금과 배상금의 개념을 다시 정리해보자. 보상금이라는 것은 적법 행위 과정에서 손해가 생기면 그것에 대해 지급하는 금전이고, 보상금을 지급하는 것은 당연히 해야 하는 행위이다. 그런데 보상금은 전체적인 과정은 합법이었다고 주장하면서 내는 돈이다. 하지만 배상금이라는 것은 전체적인 행위 자체가 위법 행위였고, 그 과정에서 손해가 발생해서 지급하는 금전을 말한다. 지금까지도 일본은 일제강점기를 합법이라고 주장하면서 한국 측에 단 한 번도 배상금을 지급한 적이 없었다. 이는 큰 문제가 아닐 수 없다.
물론 일본이 항상 일제강점기를 합법이라고 주장한 것은 아니다. 가장 최근의 사례를 보면 1998년 10월 한,일 양국은 파트너십을 선언했다. 이 파트너십 선언에서 일본은 과거에 한국에 피해를 입힌 가해자였다고 인정했고, 일본 정부는 한국 정부에 정식으로 사과했다. 이처럼 서로 인정하고 사과한 내용을 공식 문서에 적었다. 일본이 가해자였고 한국이 피해자였음을 선언하는 것은 일본이 위법 행위를 했다고 인정한 것이고, 따라서 일제 강점기는 불법이었다는 사실을 인정하는 행위였다. 이런 의미에서 1998년 한,일 파트너십 선언문은 일제강점기가 불법이었다는 하나의 근거가 되는 문서이다.
그러나 현재 일본 아베 정권은 일제강점기가 불법이었다는 사실을 전혀 인정하지 않고 있다. 오히려 강제 징용자 판결 문제에 대해 적절한 조치를 취하지 않으면 보복 조치를 취하겠다고 여러 번 언급했다. 이러한 발언 자체가 일본 기업들에게 한국 대법원의 판결을 따르지 말아야 한다는 강압적 메시지로 작용하고 있다. 이는 1991년 당시 일본 정부가 스스로 인정한 외교보호권의 소멸을 지금은 인정하지 않고 오히려 외교보호권을 발동하고 있어 문제가 크다. 2012년 5월 한국대법원이 신일본제철에 배상금 지급을 명령했을 때 신일본제철 측은 처음 한국 법원의 판결을 따르겠다는 취지의 발언을 했다. 하지만 일본 정부는 그렇게 하지 못하도록 뒤에서 계속 막아왔다. 이러한 행위 자체가 부당한 외교보호권의 발동이라고 할 수 있다.
2019년 7월1일부터 시작된 아베 정권의 경제 보복도 외교보호권의 부당한 발동으로 볼 수 있다. 실제로 2019년 3월13일 아소 다로 부총리는 일본 국회 중의원 재무금융위원회에서 강제 징용자 판결로 인해 일본 기업에 피해가 생길 경우 "관세를 올리는 일에 한정하지 말고 한국으로의 송금 정지, 비자 발급 정지 등 여러 가지 보복 조치가 있을 수 있다"고 발언했다.
한국 대사를 역임했지만 대표적인 혐한파로 알려진 무토 마사토시는 2018년의 한국 대법원 판결 직후 한국에 수출하는 반도체 핵심 부품을 규제한다든가, 한국에서 일본으로 수입하는 제품에 관세를 올리겠다는 주장을 서슴지 않고 했다. 이들 중 반도체 핵심 부품은 이미 수출규제가 되었다. 이런 모든 것들이 일본이 부당한 외교보호권을 강하게 발동시키는 것이라 할 수 있다. 그렇다면 1991년 일본 정부가 스스로 입 밖으로 낸 사실, 즉 1965년 청구권 협정으로 한일 양국의 외교보호권이 소멸되었다는 사실을 스스로 어기는 셈이 된다. 한,일 청구권 협정을 위반하는 나라는 다름 아닌 일본인 것이다.
반면 한국 정부는 개인이 기업을 상대로 제소한 재판 결과에 대해 기본적으로 개입하지 않는 방침을 고수해왔다. 이는 삼권 분립의 원칙을 지키는 올바른 자세이기도 하다. 그런데 현재 일본 아베 정권은 자국도 아닌 타국, 즉 한국의 사법주가 내린 판단에 개입하려 하고 있다. 이는 한국을 국가로 인정하지 않으려는 행위와 마찬가지이고 있을 수 없는 무례한 태도라 하지 않을 수 없다.
그러므로 한국은 한국의 정당함과 일본의 부당함을 계속 세계에 알려야 한다. 앞으로 일본의 보복 행위 자체를 막는 계기를 마련하기 위해서라도 한국은 일본에 그리고 국제 사회에 일본의 부당성과 한국의 정당성을 정확하게 알려주어야 한다.
p129.
2005년 정부가 강제 징용 피해자 문제를 해결하기 위해 만든 관민 합동위워뇌의 자료를 확인해보면 '한일청구권 협정은 채권,채무 관계를 해겨라기 위한 것이었다. 반인도적 불법 행위는 청구권 협정으로 해결된 것으로 볼 수 없고, 일본 정부의 법적 책임이 남아 있다'고 되어 있고 당시 백서에는 '피해자 개인들이 일본에 배상을 청구하는 것은 가능하다'라고 명기되어 있다.
2005년 관민합동위 자문 위원이었던 조시현 씨는 "일본 정부와 기업이 책임질 때까지 피해자의 고통을 경감시킬 인도적인 필요가 있기 때문에, 그에 따른 보상조치를 실시하는 것이 맞다라고 생각하는 조치였다."고 당시 한국 정부가 피해자들에게 배상금이 아닌 위로금을 지급했다고 2019년 7월17일 MBC 뉴스에서 밝히기도 했다.
따라서 대법원의 2018년 판결은 정당하고, 2005년 노무현 정권의 입장과 전혀 어긋나지 않는다는 것이 팩트이다.
그런데 놀랍게도 조선일보 등은 2019년 7월, 1965년 한일기본조약과 한일청구권 협정으로 보상은 이미 끝났고, 이 내용은 노무현 정부에서도 확인했다는 기사를 냈다. 이 기사의 결론은 한국이 일본에 더 이상 보상을 요구하면 안 된다는 함의가 들어 있다. 아무리 보상이 끝났다는 말이 옳다고 치더라도 조선일보 등은 '배상'문제는 남아 있다는 점을 밝히지 않았다. 그리고 이런 기사를 일본어판 신문에도 게쟇했다. 남아 있는 '배상' 문제를 숨기고 일본 정부의 판단이 옳다는 잘못된 기사를 왜 태연하게 일본어로도 발신했는지 그들의 의도를 의심하지 않을 수 없다.
p137
태평양 전쟁 초기에는 일본이 우세했지만 미드웨이 해전(1942)을 계기로 전세가 미국으로 기울었다. 결국 히로시마와 나가사키에 원자폭탄이 각각 투하되면서 1945년 8월15일 일본은 미국을 비롯한 연합국에 무조건 항복했다. 패전 후 연합국의 점령 통치를 받던 일본은 1951년 연합국과 샌프란시스코 강화조약을 체결해 패전과 전범을 정한 국제재판의 판결을 인정하는 대신 주권을 회복할 수 있었다. 1952년 4월 샌프란시스코 강화조약 발효와 동시에 미,일 안전보장조약을 체결한 일본은 미국과 동맹 관계를 맺고 반공 진영에 편입되었다.
일본에서 이러한 샌프란시크코 강화조약을 수용한 세력이 바로 '보수 본류'이다. 보수 본류는 기본적으로 세 가지 특징을 보인다. 첫째, 샌프란시스코 체제를 받아들인다. 다시 말해, 일본이 침략 국가이자 전범국가였다는 사실을 인정하는 것이다. 보수 세력이라고 해도 보수 본류는 일본이 전쟁을 일으킨 나라임을 기본적으로 인정한다. 둘째, 평화헌법을 지키려고 한다. 1946년 미국의 주도로 제정된 일본국헌법은 평화헌법이라고 불리는데 그 이유는 제9조에 일본이 전쟁을 포기하고 전쟁의 수단으로서 군대를 가질 수 없도록 규정했기 때문이다. 보수 본류는 특히 헌법 제9조를 지키려고 한다. 그리고 보수 본류는 마지막으로 미국과 협력하려 한다는 특징이 있다.
여기서 전후 일본의 정치를 이해하려면 '55년 체제''라는 개념을 짚고 넘어가야 한다. 1950년대 전반 보수 정당의 일부 국회의원들이 전쟁 포기를 규정한 평화헌법을 개정하자고 주장하기 시작했다. 그러자 1955년 사회당의 좌파와 우파는 평화헌법 유지와 미,일 안전보장조약 강화 반대를 내걸고 다시 손을 잡아 사회당을 통합했다. 이에 대항해 일본의 보수 세력이었던 자유당과 일본 민주당도 자유민주당(자민당)으로 통합되었다.
일본 국민들은 보수 정당인 자민당과 진보 정당인 사회당이 서로 견제하는 양당 체제를 이루게 되었다고 기대했다. 하지만 자민당이 압도적으로 우위를 차지했고, 사회당이나 공산당 등 야당은 정치의 중심에서 소외되었다. 이러한 정치 체제를 '55년 체제'라고 부른다. '55년 체제'는 자민당 1당 우위 체제였다. 그런데 1993년 자민당 보수 본류에 속하는 의원들이 대거 탈당하면서 자민당이 참의원 선거에서 참패해 '55년 체제'는 38년 만에 붕괴되었다.
일본 보수에는 보수 본류와 대비해서 또 하나의 세력인 '보수 비주류'가 있다. 현재 자민당에서 아베 신조를 중심으로 주류를 이루고 있는 극우파 세력이 원래는 보수의 비주류였다. 보수 비주류의 대표적인 인물은 기시 노부스케(岸信介, 1896~1987)이다. 현재 일본 총리인 아베 신조의 외조부이기도 한 기시 노부스케를 일본 보수 비주류, 즉 극우파의 시작으로 본다. 지금은 비주류를 '극우파'라고 부른다.
극우파는 보수 본류와는 정반대의 내용을 주장해 왔다. 우선 극우파 사람들은 일본이 침략 국가였다는 사실을 부정한다. 이들은 '역사 수정 주의자'로 불리며 역사를 상당히 왜곡시킨다는 비판을 받고 있다. 극우파는 샌프란시스코 체제도 변경하고자 한다. 샌프란시스코 체제가 일본을 전범국가 또는 적성국가로 규정하고 있는 내용을 바꾸겠다는 생각을 계속해서 가져왔다. 또 평화헌법을 개정해 자위대가 아닌 정식 군대인 '일본군'을 부활시키고자 한다. 마지막으로 미국과 협력하려고 한다. 이 부분은 보수 본류와 일치하기는 하지만 협력하고자 하는 내용에서 큰 차이를 보인다. 그들은 미국과 함께 전쟁을 치르려고 한다.
p148.
1996년 6월 자민당은 사회당과의 연립 내각을 탄생시켰다. 이때 자민당-사회당 연립정권의 총리는 당시 사회당 당수 무라야마 도미이치(村山富市, 1924~)였다. 자민당은 사회당을 끌어들여서 다시 정권을 잡을 수 있었는데, 사회당이 캐스팅 보드를 쥐고 있었기 때문에 사회당에서 총리가 탄생한 것이다. 자민당-사회당 연립정권에서는 자민당의 국회의원 수가 압도적으로 많았지만, 연립정권으로 정권을 잡을 계획으로 사회당의 의석 수를 빌릴 수 밖에 없었다. 그 과정에 사회당의 당수였던 무라야마 도미이치가 총리가 되었다. 이제 자민당 단독으로 정권을 잡을 수 있는 시대는 지나 이후 연립 여당으로 자민당은 정권을 잡게 된다.
하지만 무라야마 도미이치는 사회당 출신으로 상당히 리버럴한 사상을 소유한 사람이었다. 그러므로 무라야마 총리는 '무라야마 담화'를 발표하게 되었다. 무라야마 도미이치는 1995년 8월15일 전후 50주년 기념식에서 일본의 '식민지 지배'와 '침략'에 대해 세계를 향해 공식적으로 사과했다. 이 담화는 일본의 침략 전쟁과 식민 지배에 대한 가장 적극적인 공식 사죄로 평가되었다.
식민지 지배와 침략으로 아시아의 여러 나라에 많은 손해와 고통을 안겨주었습니다. 의심할 여지없는 역사적 사실을 겸하하게 받아들여 통절한 반성의 뜻을 표하며 진심으로 사죄의 말씀을 올립니다.
하지만 자민당 내 극우파 세력은 이 담화에 격렬하게 반발하기 시작했다. 극우파들은 당 내에 역사검토위원회를 조직해 일본이 일으킨 전쟁은 침략 전쟁이 아니라 아시아를 백인 지배하에서 구원한 '해방 전쟁'이라는 주장을 역설하기 시작했다. 자민당 안에 많이 남아 있었던 비주류 세력이 이제 자민당 내 주류가 되어 자신들의 목소리를 높이기 시작한 것이다.
자민당 내 역사검토위원회는 1995년 8월15일 무라야마 담화 발표에 맞춰서 [대동아전쟁의 총괄]이라는 책을 출간하기에 이르렀다. 이 책에서 자민당 내 극우파 사람들은 위안부의 존재 자체를 부정하고, 일본은 침략 전쟁이 아닌 해방 전쟁을 했으며 일본은 절대 전범국가가 아니라는 터무니없는 주장을 피력했다.
p180.
한편 불행하게도 간 나오토 정부 시절 일본에서 큰 자연재해가 발생했다. 2011년 3월 일본 동북부 태평양 연안에서 규모 9.0의 대지진이 발생한 것이다. 이때 거대한 쓰나미가 발생하면서 연안 지역은 큰 인명 피해를 입었다. 일본 정부의 통계에 따르면, 동일본 대지진으로 사망자는 약 2만 명, 실종자는 약 2,500명에 이른다. 쓰나미로 큰 피해를 입은 도시 가운데 하나가 이와테현(岩手県)이다.
이와테현 앞바다에서 지진이 발생해 쓰나미가 일어났는데 가장 높은 쓰나미는 15미터에 이르렀다고 한다. 반면 이와테현 바닷가의 제방 높이는 10미터에 그쳤다. 이와테현에는 예부터 쓰나미가 자주 발생했고 그동안 쓰나미의 최고 높이는 5.7미터였기 때문에 10미터 제방으로 충분히 쓰나미 피해를 예방할 수 있다고 현의 당국자들은 생각했다. 그런데 10미터를 넘는 거대한 쓰나미가 제방을 넘어 도시 전체를 휩쓸어버렸다. 이렇게 동일본 대지진은 일본 역사상 유례없는 최악의 재난이었다.
엎친 데 덮친 격으로 대규모 지진과 쓰나미에 의해 이와테현 남쪽에 위치한 후쿠시마 원자력 발전소 시설이 파손되어 방사능이 누출되는 사고가 발생했다. 이 원전 사고로 다량의 방사성 물질이 누출되면서 지금까지도 일본에서 큰 문제가 되고 있다. 후쿠시마 원전 사고는 그 피해의 등급이 국제 원자력 사고 등급의 최고 레벨인 7이었다. 1986년 발생한 구소련의 체르노빌 원전 사고의 등급과 같다.
지금은 우크라이나에 속해 있는 체르노빌에서 발생한 원전 사고로 방사능 피해가 사방 약 600킬로미터에 미친다고 했다. 그러므로 당시 구소련은 체르노빌 원전을 콘크리트로 막았다. 따라서 같은 레벨인 후쿠시마 원전 사고도 사방 약 600킬로미터에 방사능 피해를 준다고 볼 수 있다. 후쿠시마에서 도쿄까지가 약 300킬로미터 떨어져 있고, 오사카까지 약 600킬로미터 떨어져 있으니 사실상 일본열도 중 매우 넓은 영역에서 방사능이 문제가 되지 않을 수 없다.
구소련에서는 체르노빌의 원전을 콘크리트로 모두 막아서 밀폐시킨 후 100년 이상 지나야 방사능 문제가 어느 정도 해결된다고 진단했다. 지금까지도 체르노빌은 주변 30킬로미터 내에는 출입 금지구역으로 되어 있다. 그런데 후쿠시마 원전은 콘크리트로 막는 조치를 시행하지 않았다. 그리고 후쿠시마에서는 원전의 반경 20킬로미터 내를 출입 금지구역으로 지정했다. 콘크리트로 막지도 않았는데 출입 금지구역이 체르노빌보다 좁다.
일본 정부는 체르노빌처럼 사람들이 후쿠시마 원전 주변에 다시 살지 않을 것을 우려한 것이다. 그래서 일본 정부는 원전을 콘크리트로 막아버리는 대신 방사능 수치를 낮추는 작업을 시작했다. 여기서부터 간 나오토 정부의 실책이 많아지기 시작했다. 일본 국민들이 후쿠시마 원전 사고에 대한 정부의 조치에 계속 불안을 느끼면서 간 나오토 정부의 지지율도 계속 떨어졌다.
p190.
메이지유신을 성공시킨 사람 중 한 사람으로 기도 다카요시(木戸孝允, 1833~1877)라는 인물이 있따. 이 사람은 사이고 다카모리(西郷隆盛, 1828~1877), 오쿠보 도시미치(大久保利通, 1830~1878)과 함께 메이지유신을 일으킨 '메이지유신 삼걸'로 불린다.
기도 다카요시는 한국과도 관련이 깊다. 1875년 일본은 운요호사건을 일으켜 이듬해에 강화도조약을 강제로 체결했는데, 기도 다카요시는 운요호사건을 주도한 인물이다. 기도 다카요시는 1868년 메이지 정부를 성립시킨 후 "조공하지 않는 조선에 위약의 죄를 물어 공격해야 한다"라고 주장한 원조 정한파다. 요시다 쇼인의 왜곡된 사상의 영향으로 기도 다카요시는 에도시대에 12번 조선에서 일본으로 파견된 조선통신사를 조공사로 착각하고 있었다.
이토 히로부미(伊藤博文, 1841~1909)도 초슈번 출신 인물이다. 이토 히로부미는 일본의 메이지 헌법을 기초하는 데 중심적인 역할을 했기 '때문에 일본 헌정사의 아버지로 불린다. 당시의 일본 국회읜 제국의회를 개설하는 공로를 세웠으며, 무려 여섯 번이나 총리를 역임했다. 따라서 일본에서는 국민적 영웅이었지만, 말년에 한국에 건너와서 을사늑약을 강요한 조선 침략의 원흉이 되었다. 1909년 10월26일 이토 히로부미는 하얼빈역에서 안중근 의사에 의해 사살되었다. 당시 일본에서의 영웅들은 한국이나 아시아에 있어서는 침략자들이었다.
이토 히로부미와 매우 가까웠떤 이노우에 가오루(井上馨, 1836~1915)는 청.일 전쟁 당시 조선 공사로 부임했다. 그는 일본을 위해 조선에서 공작 활동을 주도한 인물이었다. 그리고 이노우에 가오루의 추천으로 미우라 고로(三浦梧楼, 1846~1926)라는 군인이 그의 후임으로 조선 공사로 부임했다.
미우라 고로는 일본공사관 밖으로 나가지 않는 조용한 인물로 당시 조선 조정에서는 인식하고 있었는데 그는 1895년 명성황후 시해를 주도했다. 친로파가 된 명성황후 때문에 대한제국이 러시아로 넘어갈 우려가 있다고 생각한 일본은 이토 히로부미-이노우에 가오루-미우라 고로 라인에서 명성황후 시해를 결정해 실행에 옮겼다. 그러나 그들은 명성황후 시해 계획에 대해서는 철저하게 문서를 남기지 않는 작전을 썼기 때문에 을미사변으로 불리는 이 사건은 아직도 밝혀지지 않는 내용들이 많다.
p197.
요시다 쇼인의 핵심 주장에는 아시아 대륙을 침략하기 위해서는 조선을 발판으로 삼아야 한다는 내용이 포함되어 있다. 다. 그는 저서 [유수록(幽囚錄)}(1854)에서 정한론(征韓論)과 대동아공영론(大東亞共榮論)등을 주창해 일본 메이지 정부의 팽창주의 형성에 큰 영향을 미쳤다. 다음은 [유수록]에 나오는 내용의 일부다.
무력 준비를 서둘러 군함과 포대를 갖추고 즉시 에조(蝦夷=훗카이도)를 개척하여 제후를 봉건하여 캄차카와 오호츠크를 빼앗고, 유구(琉球=오키나와)에 말하여 제후로 만들고 조선을 책하여 옛날처럼 조공을 하게 만들고 북으로는 만주를 점령하고, 남으로는 대만과 필리핀 루손 일대의 섬들을 노획하여 옛날의 영화를 되찾기 위한 진취적인 기세를 드러내야 한다.
p201. 야스쿠니 신사의 기원, 초슈번 초혼장.
초슈번의 젊은 지도자들은 스승 요시다 쇼인의 뜻에 따라 전쟁을 오래 지속하기 위해 고안한 것이 초슈번 무사들의 위령제였다. 이 위령제는 현재 야스쿠니 신사의 기원이 되었다. 위령제를 고안한 인물은 요시다 쇼인이 가장 아꼈던 애제자 다카스키 신사쿠(高杉晋作, 1839~1967)였다. 그는 근대 일본군의 모체가 된 기병대를 만들고 지휘했고, 에도막부 타도를 주도하기도 했다.
다카스키 신사쿠는 아베 신조와도 관련이 깊다. 아베 신조(安部晋三)의 이름에서 '신(晋)'은 다카스키 신사쿠의 이름에서 따왔다. 아베 신조는 다카스키 신사쿠처럼 자신도 요시다 쇼인의 첫 번째 제자라는 생각을 갖고 활동한다고 이야기해 왔다. 아베 신조의 아버지 아베 신타로(安部晋太郎) 역시 다카스키 신사쿠의 이름에서 '신'을 따왔다. 아베 신타로도 스스로를 쇼인의 첫 번째 제자라고 생각했는데, 아들 신조가 아버지의 입장을 그대로 이어받은 것이다.
메이지 유신을 단행하는 과정에서 초슈번의 군대와 에도막부 군이 불가피하게 수많은 전투를 치러야 했다. 전투가 거듭될수록 희생되는 초슈번의 무사들이 많이 나올 수밖에 없었다. 다카스키 신사쿠는 죽은 초슈번 무사들의 영혼을 기리기 위해 위령제를 거행했다. 위령제를 거행하는 장소인 초혼장은 초슈번 안에 시모노세키의 사쿠라야마 초혼장을 비롯해 총 열여섯 군데나 있었다. 이 초혼장들을 운영했던 중심 인물이 다카스키 신사쿠였다.
초슈번에서는 쉬지 않고 위령제를 지내 죽은 무사들의 영혼을 달랬다. 위령제의 주된 목적은 에도막부와의 전쟁에서 초슈번 사람들의 사기가 떨어지지 않도록 하는 데 있었다. 마침내 초슈번과 사쓰마번은 에도막부를 타도해 메이지 정부를 세우게 되었고, 메이지 2년이 되는 해인 1869년 초슈번 사람들은 초슈번에 있던 초혼장을 모체로 도쿄에 큰 초혼장을 건립했다. 이렇게 해서 도쿄 초혼사(招魂社)가 만들어졌다. 10년 뒤인 1879년 도쿄 초혼사는 야스쿠니 신사(靖国神社)로 명칭을 바꿨다. 따라서 야스쿠니 신사의 기원은 초슈번의 초혼장인 셈이다. 초슈번 계열인 아베 신조가 야스쿠니 신사참배를 계속 주장하는 이유가 여기에 있다.
p298.
아베 신조와 혐한 세력, 그리고 일본회의들은 다음과 같이 말한다.
"일본은 침략 국가가 아니었다. 백인 지배하에 놓인 아시아를 해방해 줬을 뿐이다. 일본군은 범죄 행위를 저지르지 않았다. 위안부 제도는 합법적인 제도였고 일본 병사들이 현지 여성들을 강간하지 않도록 만든 훌륭한 제도였다. 위안부는 모두 자발적으로 위안부가 된 상업적 여성들이었다. 강제 연행이나 강제 동원은 거짓말이다. 난징 대학살은 연합군이 만든 날조다. 일본군은 어디로 가도 환영받았다. 앞으로도 일본군은 적극적 평화주의로 아시아에 평화를 실현할 것이다. 그리고 대일본제국은 식민지였던 조선이나 대만을 근대화해 주었다. 조선인이나 대만인을 평등하게 대해주었고 교육했고 차별 같은 것은 전혀 없었다.
그런데 이런 진실을 왜곡하는 사람들이 있다. 특히 한국인들이다. 그들은 일본이 한국을 침략했다고 강조하고 여성들을 강제 연행해서 위안부라는 이름의 성 노예로 만들었다고 거짓말을 한다. 그리고 한국인을 강제적으로 동원해 보상금이나 배상금을 버는 비즈니스를 하고 있는 것이다. 한국인들은 '아름다운 일본'을 '더러운 일본'으로 왜곡, 날조해 가는 사람들이고 그들은 있으면 안 되는 존재다. 그들을 일본에서 쫓아내야 하고 한국에서도 못 살게 만들어야 한다. 그런 다음 일본에 머리 숙여 굴복하도록 만들어야 한다. 그들에 대한 혐한은 당연한 행위다. 혐한을 진실을 밝히는 정당행위다. 그리고 일본 국민들이 갖는 불만의 분출구로 한국과 한국인을 이용해야 한다.... "
극우파들은 계속 외친다.
"일본의 아래에 있어야 할 한국이 요새 너무 성장해 버렸다. 다 일본 덕분인데 은혜도 모르고 이제 일본을 경제적으로나 문화적으로나 추월하려고 한다. 용납할 수 없다. 제2의 한국전쟁을 일으켜서라도 한국을 무너뜨려야 한다. 한국은 항상 아름다운 일본의 아래에 있어야 한다."
이런 극우파들을 결국 심판할 사람들은 양식이 있는 일본인들일 것이다. 그런데 일본인들은 너무 행동력이 없다. 국민의 50%는 정치에 무관심한 사람들이다. 그러나 시위를 해도 조금밖에 모이지 않는다. 그러나 극우파가 일본을 망가뜨렸다고 깨달은 일본인들이 조만간 나타나 선거에서 자민당을 패배시켜 아베 신조를 총리 자라에서 끌어내릴 것이다. 그러나 일본의 극우파들은 이제 거대한 세력이 되었다. 아베 신조의 정책 집단이자 행동 부대인 일본회의를 구성하는 요소 중 하나인 신사 본청은 국가의 승인을 받으면 다시 45년까지의 국가신도로 복원된다. 야스쿠니 신사도 국가신도의 중심적인 전쟁 수행 신사로 거듭난다. 혐한 분위기는 계속 확대되어 한국의 신친일파들을 동원하면서 한국인의 정신을 교란시킬 것이다.
이런 일본의 도전에 적절히 대응하려면 한국에도 거대한 대(對) 일본 네트워크가 필요하다. 이러한 정세를 깨달은 한국인들이 그런 네트워크를 조속히 만들어 나가야 할 것이다. 그 네트워크는 일본에 관한 남남 갈등을 해결해야 하고 일본의 극우파 논리를 극복해 그들을 굴복하게 만들어야 한다. 그 일은 체계적으로 이루어져야 한다. 이것은 하루이틀의 일이 아니다. 일본은 러일전쟁 전후로부터 한국에 친일파를 양성해 왔다. 우리 대한민국은 120년의 적폐를 청산해 나가야 한다.
보수라는 이름을 앞세워 대한민국을 농락하고 있는 세력(보통 이 계보를 조선시대 노론->식민시대 친일파->해방이후 척결되지 않고 사회곳곳에서 미군의 힘을 업고 살아남은 친일후손들)들이 만만치 않다는 반증이기도 하다.
그 이전에 새누리의 대선후보였던 반기문은 대선후보로서의 검증작업이 시작되기도 전에 꼬리를 내렸지만, 그래도 이 세력들이 반기문을 띄우는 사전작업으로 책 2권을 낸게 있었는데 그것도 베스트셀러 상위에 오른바 있다.
이 책의 내용은 지극히 상식적이다. 그리고 진솔해 보인다.(내가 이 사람 개인적으로 알수가 없기에 그게 사실인지 보장할 수 없다.) 그러나 남자의 나이 60이 넘으면 그 사람이 어떻게 살아왔는지가 어느 정도 얼굴에 보인다. 이 사람은 지금 허허거리고 웃는 얼굴이지만 그리 우스운 사람이 아니다.
특히 노무현이 어떻게 갔는지를 옆에서 지켜봤기에 지금의 새누리와 그 잔당들은 이 사람이 대통령이 될까봐 좌불안석일 것이다.(최근 영화 더킹에서 노무현만 안되기를 바랐던 검찰수뇌부처럼 말이다)
플라톤은 스승인 소크라테스의 죽음을 보고, 2000년전에 이미 우매한 대중에 의한 민주주의란 것이 얼마나 국가를 피폐하게 하는 위험한 정치제도란 것을 간파하고 있었다. 열망에 의한 대중의 지지란 것은 정말로 위험한 것이다. 마치 사랑하는 연인이 사랑이 식으면 남보다 못한 사이가 되듯이.
우리가 정치인을 뽑는 행위는 무슨 연예인 투표같은게 아니다. 회사에서 경력직 사원을 뽑는 것과 비슷하다. 만일 그런 마음으로 우리 국민들이 대통령을 뽑았다면 아마도 이명박이나 박근혜를 뽑지는 않았을 것이다.
2000년전 플라톤이 했던 대중민주주의에 대한 부정적 분석이 촛불과 박근혜의 탄핵으로 현대에 와서 희망적 대중민주주의를 보는 계기가 될 수 있을 것 같다. 그 유종의 미가 19대 대선으로 완성될 수 있을지가 기대된다.
그런 의미에서 과연 유력한 대선 후보중 1인인 그에 대해 알고 싶은 이들은 봐두면 좋을 책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