작게는 재일 조선인의 디아스포라. 넓게는 소외받는 모든 이들은 위한 찬가.

 세계인 모두에게 공감받을 수 있는 무언가가 이 작품에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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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권.

p21

 하숙인들은 가게에 갔다가 신문을 읽을 줄 아는 남자들한테서 들었다며 대공황인지 뭔지가 전 세계를 덮쳤다는 이야기를 식사 시간에 자주 꺼냈다. 불쌍한 미국인들이 가련한 소련인들과 중국인들 못지않게 굶주림에 허덕이고 있다는 이약였다. 심지어 천황의 은총 아래 무탈하게 지내던 일본인들도 배를 곯는다고 했다. 그러니 그 겨울에 살아남은 사람들은 약삭빠르고 강인한 이들이 틀림없었다. 하지만 차마 입에 담을 수 없을 정도로 참혹한 소식들이 너무나 많았다. 어린 아이들은 잠자리에 들었다가 다시는 잠에서 깨어나지 못했고, 여자 아이들은 국수 한 그릇에 몸을 팔았으며, 노인들은 젊은이들이라도 먹고 살 수 있게 죽을 곳을 찾아 남몰래 떠나버렸다.

 

p69

 "어디를 가든 썩어빠진 사람들이 있어. 그들은 좋은 사람들이 아니야. 아주 나쁜 사람을 보고 싶니? 그럼 평범한 사람은 상상도 못할 성공을 안겨줘 봐. 언제든지 하고 싶은 대로 할 수 있게 되었을 때, 어떤 행동을 하는지 한번 보는 거야."

p249

 선자는 항상 밭이 있으면 좋겠다고 생각했다. 고향에서 어머니의 하숙집에는 부엌 뒤쪽에 작은 텃밭이 있어서 하숙인들이 내는 돈보다 두 배는 더 많이 먹을 때도 음식을 제공할 수 있었다. 신선한 식품의 가격은 계속 올랐고, 노동자들은 가장 기본적인 것들을 살 여유도 없었다. 최근에는 몇몇 손님들이 김치 한 포기를 통째로 살 수가 없어서 반으로 쪼개서 조금만 살 수 있는지 묻기도 했다

p267

 조선인들이 일본이 승리하기를 바란다고? 천만의 말씀이다. 하지만 일본의 적이 이긴다면 조선인들에게 무슨 일이 일어날까? 조선인들이 스스로를 구할 수 있을까? 분명 그렇지 않을 것이다. 그러니 내 밥그릇이나 잘 챙기자는 것이 조선인들이 남모래 품고 있는 속마음이었다. 가족을 구하고, 자기 배를 채우고, 관리자들을 경계하자. 조선의 독립주의자들이 나라를 되찾지 못한다면 아이들에게 일본어를 가르쳐 출셋길을 열어주자. 적응해서 살자. 이만큼 간단한 것이 또 어디 있겠는가? 조선의 독립을 위해 싸우는 모든 애국자나 일본을 위해서 싸우는 재수 없는 조선인 개자식이나 다들 먹고 살려고 애쓰는 만 명의 동포 중 하나일 뿐이었다. 결국 굶주림을 이길 수 있는 것은 아무것도 없었다.

 

p271

 그러나 노아가 이 모든 비밀들보다 더 비밀스럽게 품고 있는 은밀한 소망은 일본인이 되고 싶다는 것이었다. 이카이노에 살면서 절대 조선으로 돌아가지 않는 것은 아무에게도 말할 수 없는 노아의 가장 큰 꿈이었다.

 

p280

 공장주인 시마무라는 비품실 크기만 한 유리로 된 사무실에 앉아 있었다. 투명한 유리창 덕분에 소녀들이 일을 잘하고 있는지 감시할 수 있었다. 일을 잘 못하는 여자아이를 발견하면 요셉을 불러 들여서 그 아이에게 주의를 주라고 시켰다. 두 번 주의를 받으면 6일 동안 열심히 일해도 주급을 받지 못했다. 시마무라는 파란 천으로 장정한 원장에다 소녀들의 이름을 기입해놓고 그 옆에 경고 횟수를 기록해두었다. 감독관인 요셉은 직원들에게 벌을 주기 싫어했지만 시마무라는 그것이 조선인의 약한 기질을 보여주는 또 다른 증거라고 생각했다. 시마무라는 모든 아시아 국가를 일본인의 효율성과 치밀함, 높은 조직 수준으로 다스린다면 아시아 전체가 번영하고 발전해서 저 무도한 서구를 물리칠 수 있다고 믿었다. 게다가 다른 대부분의 친구들과는 달리 외국인 노동자를 고용하는 자신이 아무 마음씨 좋고 공정한 사람이라고 생각했다. 친구들이 외국인 노동자들은 흐리멍덩하게 일을 한다고 지적하면 시마무라는 일본인들이 그들에게 무능과 태만을 혐오하라고 가르치지 않으면 그들이 뭘 배우겠냐고 반박했다. 뿐만 아니라 후세를 위해서 규범을 지켜야 한다고 생각했다.

 노아가 딱 한 번 공장에 들어온 적이 있었는데 시마무라는 그것을 탐탁지 않아 했다. 한 일 년 전에 경희가 열병으로 시장에서 기절을 하자 노아가 요셉을 데리러 왔었다. 시마무라는 마지못해서 요셉에게 아내를 돌봐주라고 했지만, 다음 날 아침 다시는 그런 일이 있으면 안 된다고 요셉에게 말했다. 기계로 돌아가는 공장 두 개를 유능한 정비공 없이 어떻게 돌릴 수 있겠냐는 것이 그 이유였다. 요셉의 아내가 또 아프거나 하면 그때는 동네 사람이나 다른 가족에게 도움을 청해야 했다. 요셉은 근무 시간에 공장을 떠날 수 없었다. 비스킷 생산은 전쟁 명령이었고, 전쟁 명령은 즉각 수행해야 했다. 남자들이 목숨을 바쳐 나라를 위해 싸우고 있으니 모든 가족이 희생을 감수해야 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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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권.

p326

 "그래, 멍청이들은 계속 널 건드리고 네 아버지가 파친코 주인이라는 걸 알아차릴 거야. 사람들이 어떻게 그걸 알겠어?"

 "전 말한 적 없어요."

 "모두 다 알고 있어, 솔로몬. 일본에서는 부자 조선인, 아니면 가난한 조선인이야. 네가 부자 조선인이라면 파친코와 관련이 있는 거지."

 "아버지는 훌륭한 분이세요. 믿을 수 없을 정도로 정직하고요."

 "그래, 분명 그런 분일거야." 가즈는 여전히 가슴 위로 팔짱을 끼고서 솔로몬을 똑바로 쳐다보았다.

 솔로몬이 주저하다가 결국 이야기했다. "아버지는 폭력배가 아니에요. 나쁜 짓을 하지 않아요. 평범한 사업가죠. 세금을 모두 내고 모든 일을 규칙대로 처리해요. 그런 사업을 불법적으로 하는 사람들도 있지만 아버지는 한 치도 틀림없이 정확하게 일을 처리하고 도덕적인 분이에요. 파친코를 세 개 운영하고 있지만 그건...."

 가즈가 안심하고 말하라는 듯이 고개를 끄덕였다.

 "아버지는 자기 것이 아닌 것은 아무것도 받지 않아요. 돈에도 크게 관심이 없어요. 많은 돈을 기부하고...."

 애쓰코는 모자수가 직원들 몇 명을 위해서 양로원 비용을 지불해줬다고 말했다.

 "솔리, 솔리. 그러지마. 변명할 필요 없어. 조선인들에게는 일반적인 일을 할 수 있는 기회가 많지 않아. 너희 아버지는 다른 선택의 여지가 없어서 파친코를 선택한 게 분명해. 아마 훌륭한 사업가겠지. 네 포커 기술이 무에서 나왔다고 생각해? 네 아버지는 후지나 소니에서 일할 수 있었을지도 몰라. 하지만 그런 회사에서는 조선인을 고용하지 않잖아. 알지? 어이, 컬럼비아 대학생 청년, 사실 너도 고용해줄지도 의심스러워. 일본의 많은 곳에서 아직도 조선인들을 교사와 경찰, 간호사로 고용하지 않아. 넌 돈을 많이 버는데도 도쿄에서 방을 빌릴 수도 없잖아. 빌어먹을 1989년! 뭐, 네가 그 모든 것을 공손하게 받아들일 수도 있겠지만 그건 잘못된 거야. 난 일본인이지만 멍청하지 않아. 미국과 유럽에서 오랫동안 살았어. 일본인들이 이 땅에서 태어난 조선인들과 중국인들에게 하는 것은 미친 짓이야. 완전히 제정신이 아니야. 너희들은 혁명을 일으켜야 해. 그런데 그다지 항의를 하지 않잖아. 너와 네 아버지는 이 나라에서 태어났어. 그렇지?"

 솔로몬은 가즈가 왜 저렇게 열을 올리는지 모르겠다고 생각하면서도 고개를 끄덕였다.

 "네 아버지가 청부 살인자라 해도 난 신경 안 써. 네 아버지를 고발하지 않을 거야."

 "하지만 청부 살인자가 아닌데요."

 "어이, 애송이. 그거야 당연히 아니지." 가즈가 미소 지으며 말했다. "여자친구한테 가봐. 여자친구가 매력적이고 똑똑하다며, 그건 잘된 일이야. 결국에는 머리가 조흔 게 생각보다 훨씬 더 중요하거든." 가즈가 웃으며 말했다.

 가즈는 택시를 불러서 솔로몬에게 먼저 타고 가라고 했다. 다들 가즈가 일반적인 상사 같지 않다고 했는데 그 말이 진짜라고 솔로몬은 생각했다.

 

p340

 "아버지도 가게를 파는 게 어때요? 은퇴하는 거죠. 아버지도 이제 그럴 때가 되지 않았어요? 파친코는 일이 너무 많잖아요."

 "뭐라고? 사업을 그만두라고? 파친코 사업으로 식탁에 음식을 올리고 널 학교에 보냈어. 난 은퇴하기에는 아직 젊어!"

 솔로몬이 어깨를 으쓱했다.

 "게다가 내 가게를 팔면 어떻게 되겠니? 직원들이 해고될지도 몰라. 그럼 나이 든 직원들이 어디로 가겠니? 우리는 기계를 만드는 사람들에게 일자리를 주고 있어. 일본에서 파친코는 자동차 제조업보다 큰 사업이야."

p360

 피비가 전화를 받지 않아서 솔로몬은 하나가 있는 병원으로 갔다. 하나는 깨어 있었다. 라디오에서 팝 음악이 흘러나오고 있었다. 방은 여전히 어두웠지만 댄스음악 덕분에 나이트클럽처럼 생기가 돌아싸.

 "벌써 돌아왔어? 진짜 내가 그리웠던 모양이네. 솔로몬."

 솔로몬은 하나에게 모든 이야기를 다 했고, 하나는 끼어들지 않고 가만히 들어주었다.

 "넌 아버지 사업을 물려받아야 해."

 "파친코를?"

 "그래, 파친코. 안 될 게 뭐 있어? 파친코에 대해서 나쁜 소리를 해대는 멍청이들은 부러워서 그러는 거야. 네 아버지는 정직한 사람이야. 사기를 쳤다면 더 큰 부자가 될 수 있었겠지. 하지만 그렇게 하지 않았어도 부자가 됐잖아. 고로도 좋은 사람이야. 야쿠자일지도 모르지만 그게 무슨 상관이야? 난 상관 안 해. 고로가 야쿠자가 아니더라도 야쿠자에 대해서 잘 알 거야. 이 세상은 더러워, 솔로몬. 깨끗한 사람은 아무도 없어. 살아가는 건 더러워지는 거야. 좋은 가문 출신 IBJ(일본산업은행, BOJ(일본은행)에서 일하는 근사한 사람들을 많이 만나봤어. 그 인간들은 침대에서 구역질이 나는 짓을 하는 걸 좋아해. 많은 사람들이 사업을 하면서 나쁜 짓을 하지만 잡히질 않지. 내가 만났던 대부분의 인간들은 기회가 있을 때마다 남의 것을 훔쳤어. 그 인간들은 너무 겁이 많아서 진짜 야망을 품지도 못해. 잘 들어, 솔로몬. 여기서는 아무것도 변하지 않을 거야. 알겠어?"

 "그게 무슨 말이에요?"

"아이고 이 멍청아." 하나가 웃으며 말했다. "그래도 넌 나의 멍청이지."

 하나가 놀리자 솔로몬은 우울해졌다. 솔로몬은 예전에 이토록 지독한 외로움을 느낀 적이 있었는지 기억나지 않았다.

 "일본은 절대 변하지 않아. 외국인을 절대 받아들이지 않을 거야. 내 사랑, 넌 언제나 외국인으로 살아야 할 거라고. 저래 일본인이 되지 못해. 알겠어? 자이니치는 여행을 떠날 수 없는 거 알지? 하지만 너만 그런 게 아냐. 일본은 우리 엄마 같은 사람들도 다시 받아주지 않아. 나 같은 사람들을 절대 받아들이지 않지. 우리는 일본인인데도 말이야! 난 병에 걸렸어. 오래된 무역회사를 운영하는 어떤 일본인 남자한테서 옮은 병이야. 그 남자는 죽었어. 하지만 아무도 신경 쓰지 않지. 여기 의사들도 내가 떠나버리기를 바라고 있어. 잘 들어, 솔로몬, 넌 여기 머물러야 해. 미국으로 돌아가서는 안돼. 네 아버지 사업을 물려받아야 해. 부자가 되면 무엇이든 원하는 걸 할 수 있어. 하지만 아름다운 솔로몬, 저들은 우리가 괜찮은 사람이라는 생각을 절대 하지 않아. 내 말 무슨 말인지 알겠어?" 하나가 솔로몬을 노려보았다. "내가 말한 대로 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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