싯다르타는 부처님의 출생시의 이름이다. 


이 책이 뒷부분을 보면 헤세가 이 책을 쓴 이유로 다음과 같은 말을 남겼다.


진리는 가르칠 수 없다는 것. 이 깨달음을 나는 일생에 꼭 한 번 문학적으로 형상화하고자 했다. 그 시도가 바로 싯다르타이다.


이 책은 고타마 싯다르타(Siddhārtha Gautamamm) - 고타마는 성이며, 싯다르타는 이름이다 - 싯다르타는 모든 소원을 다 성취한 사람이라는

뜻이며(당연히 국왕인 그의 아버지가 지어준 것이며, 아들의 이름을 좋은 뜻으로 짓는 것은 당연하다.)


(역사적 싯다르타에 대한 배경 설명) - 소설에는 나오지 않으나 이 배경을 알면 소설을 보는데 도움이 된다.

싯다르타는 28세에 고귀한 신분으로서 약속된 미래의 부귀영화를 버리고, 출가후 7년의 고행을 시작한다. 

이 7년간의 고행이후 육체적 고행만을 통해서는 진정한 깨달음을 얻얼 수 없다는 사실을 깨닫고나서 고행으로 지친 몸을 추스리고, 

40일간 보리수 밑에서 명상을 통해 대각을 한다. 35세에 대각을 얻은 싯다르타는 45년간 인도를 유랑하며 자신이 얻은 깨달음을

주로 이야기를 통해 설법으로 남긴다. 부처가 남긴 이 설법은 당시의 언어인 산스크리트말로 구전된다. 즉 입에서 입으로 전승되었다.

그리고 300년 정도가 지난후 인도에서 스리랑카 지역으로 전승되면서 스리랑카 지역언어인 팔리어로 비로서 필사되어 기록된다.

그래서 부처님의 설법은 최초로는 산스크리어가 아닌 팔리어로 기록되었다.(이건 전문적인 이야기이므로 별로 알 필요는 없지만

알아둬서 나쁠 것도 없다.) 이 팔리어로 남겨진 부처님의 육성 설법 내용이 바로 아함경이다. 이 팔리어 기록은 영국 식민지 시절에

발견되었다(즉, 1900년대 초반에 발견되었다.). 그래서 영국의 학자들이 달라붙어 수십년간 이 아함경을 처음으로 번역해서 세상에

알렸고, 이후 동양에서는 일본의 석학 한분이 이 영어 번역과 팔리어 원본을 참고하여 일본어로 아함경을 번역하였다.

이후 한국에서도 고익진과 같은 학자에 의해 1980년대 이후 이 아함경이 번역되어 소개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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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감상)


헤르만 헤세는 젊은 시절(1911년 34살)에 3개월에 걸쳐 인도차이나 반도여행을 한 적이 있다. 즉, 인도를 직접 방문한 일은 없다.

헤세의 할아버지와 아버지 모두 중국과 인도철학에 조예가 깊었던 것으로 알려져 있기 때문에 그 영향으로 헤세도 불교에 대한 내용을

접했을 것이라 짐작된다.


하지만 이 소설에서는 불교의 교리가 직접적으로 언급되는 것은 없다. 아트만이라는 용어는 나오지만 그것에 대해 불교적 해설이 구체적으로

나오지도 않는다.


그리고 이 소설은 불교에 대해서 몰라도 상관은 없을 것이라 본다.


소설의 주인공인 싯다르타는 어느날 출가를 결심하고 그의 시종이자 절친인 고빈다와 유랑을 시작한다. 소설의 초반에는 고빈다는 그저 싯다르타를 사랑하고 존경하는 친구역할로만 보이지만, 후에 고타마라는 깨달은 사람 즉, 부처를 만나면서부터는 싯다르타, 고타마, 고빈다의 관계는 하나의 인물에 대한

현재와 미래, 그리고 과거를 의미하는 것으로도 볼 수 있다.


소설의 마지막 부분에서 싯다르타는 고행도 헛되고, 인생사의 쾌락과 명성 그리고 부유함 모든 것이 헛되다는 자각을 한 후에 강가에서 뱃사공인 바주데바를 만나서 뱃사공의 일을 하며 단순한 삶을 영위하면서 삶의 터전인 '강'으로부터 지혜를 깨달아나가기 시작한다.

강을 통해 싯다르타는 유유히 흐르는 강물에서 어떤 장소에도 그대로 머물지 않는다는 덧없음, 그리고 끝없는 변화, 그리고 이어지는 물의 흐름을 통해서

과거와 현재 그리고 미래가 통시적으로 연결되어 있다는 깨달음에 도달한다.

이미 미래의 부처였던 고타마는 설법을 통한 인생을 마치고 있고, 과거의 부처인(즉 고뇌하는 인간인) 고빈다는 그런 고타마의 입적을 보기 위해 가던 길에 강가에서 깨달음을 얻은 싯다르타를 다시 재회한다. 고타마 부처를 본 적이 있던 고빈다는 싯다르타를 통해 고타마의 모습을 다시 보고 감격하며 그에게 눈물을 흘리며 절을 한다.

불교의 연기란 통시적 공간에서의 인과론을 의미한다. 윤회나 열반과 같은 개념적 설명보다도 모든 만물이 시간과 공간의 고리속에서 모두 얽혀서 무한의 관계를 맺고 있는 것을 깨닫게 되면 자연스럽게 '아'니 '무아'니 하는 것들을 벗어나 길가에 풀한포기와 구르는 돌 하나에서도 '나'의 의미를 찾을 수 있다는 가르침이 그안에 있다.

헤세가 이 작품을 쓸 때, 1부가 마무리 된 시점에서 2부는 시간을 두고 썼다고 한다. 아마도 그의 불교에 대한 이해의 바탕을 넓히는 시간이 필요했던 것으로 보인다. 이 작품은 하나의 성장소설로서 봐도 무방하다. 하지만 조금 더 그 깊은 내용을 음미하고 싶다면 불교의 기본적이 교리에 대한 이해를 어느 정도 안 이후에 보면 좋을 것 같다.

불교의 기본 교리에 대한 이해는 무슨 딱딱한 책을 보는 것은 더 도움이 안된다.

추천하는 책은 도올이 쓴 달라이라마와 도올의 만남과 그 1권의 해설에 해당하는 도올의 불교강의(27강인가? 된다.)를 들으면 불교의 핵심적 내용은

어느 정도 알 수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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