범죄심리학적 견지에서 이 사건은 기획되었다는 전문가의 의견.

 

5년간 침묵했던 박용철씨의 유가족들의 증언.

여기서 어떤 사람이냐는 것은 박지만(?)을 의미하는 것으로 예상됨.

 

 

박용철씨는 가족과 함께 캐나다로 이민을 갔다가, 박근혜 대통령이 한나라당 대표로 17대 대선의 경선에 나갔던 2007년도부터 박근혜의 경호업무등의 일을 도와주러 귀국함. 

박정희의 둘째딸이자 박근혜의 동생인 박근영씨는 2007년 초 당시 백석대 교수였던 14살 연하의 신동욱씨와 약혼을 한다. 이후 당시 육영재단의 이사였던 박근영씨와 함께 신동욱씨가 육영재단의 일에 관여하면서 박근혜,박지만씨와 박근영씨와의 관계가 매우 악화되었다. 이로 인한 갈등은 폭력사태를 가져왔으며 그 폭력사태를 주도한 것이 바로 박지만 혹은 박근혜의 사주를 받은 것으로 예상되는 박용철씨였다. 

 

 

그러니까 한마디로 박용철은 권력을 등에 업은 조폭이었음.

장부상으로는 그냥 휴지조각인 재단인 것 처럼 나오지만 실제 육영재단은 자산가치 2조 이상이 되는 엄청난 부를 축적하고 있음.

 

건물만 해도 수천억은 족히 넘게 생겼음.

현재는 육영재단의 운영상 아무런 문제가 없다는 서울시 교육청의 아주 한가하신 관계자분과의 인터뷰. 이런 한심한 새끼들한테 우리의 세금이 들어간다는 생각이 들때마다 참 가슴이 아프다 정말.

내가 육영재단이나 어린이 대공원을 한번도 놀러가보질 못했는데 이 건물 보니 함 가서 봐야겠다는 생각이 든다. 봄에는 육영수씨가 좋아했다는 백목련이 장관이라고 한다던데.

 

2008년부터 박근혜씨의 미니홈피에 박씨남매를 비난하는 신동욱씨의 글이 계속적으로 올라왔다고 한다. 내가 볼때 이때 신동욱씨가 아마 박씨 남매가 얼마나 무서운 사람인지 모르는 상태로 까불었던 듯.

 

이 당시 부인 박근영을 믿고 까부는 신동욱을 손보기 위해 박용철을 필두로 조직폭력배가 동원되어 육영재단을 쑥대밭으로 만들어 박근영과 신동욱을 육영재단에서 축출했으며 이에 공이 있는 박용철이 1년 정도 육영재단의 관장을 시키기도 했으나, 깜이 되지 않았던지 곧바로 다른 이에 의해 교체되었다. 이에 서운함을 느낀 박용철이 주위에 불만을 이야기하고 돌아다니기 시작했다.

 

 

신동욱을 제거하기 위해 공작이 들어감. 박근영과 약혼한지 몇 달 안된 때 신동욱씨한테 박근혜 캠프에서 박근혜가 중국 재경부장관을 만나러 가는데 동행하자는 제안이 들어옴.

약혼자인 박근영은 무언가 꺼림칙한걸 느꼈는지 가지말라고 적극적으로 만류했는데 신동욱씨는 제안을 받아들이고 중국으로 감.(예나 지금이나 남자는 여자 말을 잘 들어야 함)

 

신동욱을 중국 청도로 데려가서 곧바로 술집으로 데려가서 거기서 마약류를 섞은 술로 만취하게 만듬. 그리고 만취한 신동욱을 술집여자가 호텔로 데려갔으며 그 이후 박용철이 신동욱을 죽이러 호텔방을 급습했으나 중간에 정신을 차린 신동욱씨는 생명의 위협을 느껴 호텔창문을 통해 탈출해서 목숨을 건짐. 그러니까 박근혜,박지만 측에서 육영재단을 둘러싼 이권문제로 박근영의 약혼자이자 미래의 남편일 신동욱씨를 죽이려 했다는 추정을 할 수 있음. 

 

 

신동욱은 이후 박지만을 자신을 살해교사했다는 혐의로 고소했고, 박지만은 무고 및 명예훼손으로 신동욱을 맞고소한 상태. 그러나 증거부족으로 신동욱이 도리어 감방에 갈 위기에 처했고 이때 박용철이 박지만으로부터 팽 당한후 이에 앙심을 품고 신동욱 사건때 자신이 가지고 있는 결정적 증거인 (박지만과의 통화내용으로 추정되는) 녹취록을 가지고 있다고 법원에서 증언함.

그리고 그 녹취록을 가지고 박지만과 막후 협상을 시도(20억을 달라고 했다는 박용철 변호인의 증언이 아래에 있음)

 

 

신동욱씨의 변호인측에서는 박용철씨를 증인으로 신청했고 그가 녹취록을 밝히겠다고 해서 그의 증인출석을 재차 요구하여 차기 재판일정인 9월27일을 기다리는 중 9월7일 박용철씨가 사건으로 사망함.

 

 

박용수씨가 사건 일주일전부터 아주 고민이 많고 수심이 가득찬 얼굴이었더라는 여관 주인 및 주변인들의 증언.

 

경찰에서는 사고 직후 유가족에게 박용철씨의 태블릿PC와 휴대폰을 조사차원에서 증거로 확보하였으며 조사후 유족에게 돌려준다고 했는데, 최종적으로 태블릿 PC는 돌려줬으나 녹취록등이 있을 것으로 보이는 휴대폰은 원래부터 발견되지 않았다고 함.

(예상)

1. 실제 박용철/박용수를 살해기획한 제3자가 수거해감.

2. 경찰이 확보후 빼돌리고 돌려주지 않음.

3. 북한산 산신령이 가져감.

 

이 집안 사람들이 어법이 좀 우주의 운을 좋아해서 그런지 잘 알아듣기가 힘든데 어쨋든 박용철의 사망과 자기 박지만과는 관련이 없다고 하는 이야기 인 듯 함.

그래서 박지만씨한테 무언가 할 말이 있는지 물어보려고 찾아가봄. 그러나 문전박대

 

 

여기서 새로운 제보자 등장. 취재진은 두바이로 날라간다. 두바이에서 웬지 예전 김어준의 파파이스에서 듣던 내용이 다시 생각났다.

주진우와 김어준이 보인다. 이 취재는 원래 주진우가 계속 팠던 내용으로 김어준의 파파이스에서 가장 먼저 소개되었다.

그러니까 박용철씨가 녹취록으로 박지만을 협박하여 돈을 뜯어내려 할때 그 협상을 했던 이는 박지만 본인이 아니라 바로 최순실의 전남편인 정윤회라는 것.

 

 

또 하나의 결정적 제보. 박용철이 죽기전에 자신이 가지고 있던 핵심 증거를 조선족 지인들에게 맡겨놓았으며 그것의 현재 소재를 알고 있는 인물이 나타남.

 

 

박용철이 실제 박지만과 협상당시 신변의 위협을 느껴서 옆에 조폭들을 신변안전을 위해 끼고 다녔는데 이때 다녔던 조폭중에서도 질이 안좋아서 개인적으로도 가까이 하지 않아야 할 놈을 가족들에게 얘기해줌.

박용철이 사망전에 보디가드로 데리고 다니던 사람들이 박용철 사망후에 참고인 조사를 받았고 이때 박용철과 박용수가 서로 사이가 안좋았다고 증언한 참고인들은 모두 방송국 인터뷰 요청을 거절함. 

또한 가장 질이 안좋았던 조폭이었던 사람은 방송국에서 추적한 결과, 박용철 사망후 1년정도 되는 시점에서 사망했는데 사망사유가 컵라면을 먹다가 평소 앓고 있던 천신이 발작해서 급작스럽게 사망했다고 함. 사람이 죽을라면 접시물에 코를 박고도 죽을 수 있다지만 이 사건에는 왜 이리 사람들이 이리 쉽게 죽는지 참. 기가 안좋은가?

 

하여간 참으로 많은 관련자들이 모두 입을 다물거나, 이상한 이유로 죽거나.. 모 그럼

 

3부에서 계속.

 

 

 

 

 

 

 

 

 

 

내용이 상당히 복잡함. 완전한 이해를 위해서는 원본 동영상을 볼 것을 추천함.

 

2011년 9월6일 새벽.

키 185센티, 100킬로그램의 거구의 남자가 북한산 수유분소 입구에서 칼에 난자당한 후 둔기로 머리가 내려쳐진 상태의 처참한 시체로 발견됨.

 

발견된 시체는 박용철씨(당시 50)로 당시 한나라당 대표였던 박근혜 위원의 경호원이기도 했었음.

 

또한 당일 박용철의 시체 발견 지점에서 3킬로미터 떨어진 북한산 용암문 근처에서 박용철의 사촌형인 박용수(당시 52세)가 목을 맨체 발견됨. 박용수는 키 168정도에 몸무게 55킬로 정도의 호리호리한 체격.

 

박용철과 박용수는 박정희 대통령의 둘째형인 박무희의 증손자로 서로 사촌지간이며, 박근혜에게는 오촌조카임.

 

목을 멘 박용수의 가방에서는 회칼이 발견되며, 박용수의 하의에서는 혈흔이 발견되고 이후 수사에서 이 혈흔은 박용철의 것으로 밝혀짐.

평소 박용수씨가 9개월 전부터 박용철씨를 죽여버린다는 이야기를 했다는 조사결과가 있었다는 담당형사.

박용철씨가 박용수씨한테 1억여원 정도를 빌려썼다고 하는 지인의 증언.

여기까지는 돈문제로 생긴 불화로 인한 사촌간의 다툼으로 인해 발생한 우발적인 살인사건의 모양새임.

 

법의학자등 각종 전문가의 분석을 통해 이 사건이 일반적 사건과 다름을 설명.

 

평소 박씨 사촌형제 2명을 다 잘아는 육영재단 관계자의 증언.

박용철을 육영재단 사태에서 폭력사태에 개입했던 폭력배 출신으로 유도등의 운동으로 다져진 건장한 체격. 박용수씨는 완전 샌님 스타일로 돈도 없이 독신으로 여관방을 전전하며 살던 사람. 1억이라는 돈을 빌려줄 능력도 없음. 또한 박용철과 박용수는 사촌지간으로는 드물게 매우 친하게 지냈다는 친척들의 증언이 있음.

 

사건 당일 저녁에 술을 먹은 두 사람을 태우고 박용철의 차를 몬 대리운전 기사의 증언.

원래는 박용철의 집인 일산으로 가려다 중간에 방향을 바꿔서 4.19탑쪽으로 행선지를 바꿈.

4.19탑 근처 수유동에 있는 여관에 박용수씨가 장기투숙을 했었음. 아마 여관으로 행선지를 바꾸려고 했던 것일 수도 있을 듯. 

(예상 살해 시나리오)

1. 박용수씨가 술에 취한채 참든 박용철씨를 차안에서 8번을 찔러서 살해후에, 차안에서 끌어내서 아스팔트 바닥에 눕힌 후 망치로 머리를 수 차례 가격하여 마무리.(아래 사진의 설명처럼 외소한 체격의 박용수씨가 할만하지 않다.)

2. 박용수씨가 차안에 있는 박용철씨를 찌르자, 박용철씨가 잠에서 깨면서 차밖으로 도주. 이것을 따라가면서 찔러서 살해후 망치로 머리를 가격하여 마무리.

- 박용철씨는 조직폭력배 출신으로 싸움이라고는 전혀 못하는 박용수씨가 아무리 칼을 들고 있다고 해도 쉽게 제압하기는 상식적으로 어려울 듯.

2개의 시나리오 모두 상식적으로는 이해하기 어려운 상황.  

박용철의 부검결과 알콜 이외 졸피뎀과 디아제팜이라는 강력한 신경안정제(수면제등으로 사용) 성분이 검출됨. 그러니 이 사람이 아무리 싸움에 날고 겨도 강력한 신경안정제를 코끼리도 잠들만큼 먹었으니 저항을 할 수 없는 상태라는게 이해됨.

 

그런데, 이 신경안정제를 가해자로 추정되는 박용수씨도 먹었음!! 게다가 신경안정데 먹고 사람 죽이고, 새벽의 산길을 1시간 걸어가 목을 매고 자살함. 졸려 죽겠는데 그냥 박용수 죽인 그 근처로 산 입구라 목을 맬 나무가 많은데 1시간 넘게 산길을 고생스럽게 올라가서 자살함. 힘들게?

또한 둘이 같이 술을 먹었다고 하는 강남구의 룸싸롱이라는 스텝이라는 상호의 바가 없음.

 

2차로 간 노래방은 실제로 있었고 거기 업주랑도 인터뷰함.

박용수에게서 발견되는 박용철의 혈흔, 그리고 박용철의 손톱등에서 발견되는 혈흔 이런 것으로 봐선 박용수가 박용철을 죽였다는 정황상의 증거는 충분해서 법의학적으로는 제3자가 있다는 추론을 할 필요는 없다고 하는 법의학자의 증언.

그런데 박용철의 혈액검사에서 발견된 졸피뎀으로 봐선 아무리 칼로 쑤셔도 이 사람이 반항을 할 수 있는 상태가 아니었다고 한다면 박용철의 손톱에서 혈흔이 발견된 것도 생각해보면 이상한 것임. 즉 이 사건 자체가 여기저기 이상한 의문 투성이임.

박용수씨가 거주한 여관주인과 자주 이용한 세탁소 주인의 증언을 통해 박용수씨가 자살을 할만한 그런 인상이 전혀 없었다고 함.

 

 

프로파일러를 통한 조사 및 범죄심리학자의 의견등 자살에 대해 상당한 의문을 가지게 함.

박용수씨가 자살한 위치는 용암문. 박용철씨의 시체 발견 장소는 여기 지도에는 안나오는데,

4.19탑 근처 아카데미 하우스쪽의 수유분소에 위치함. 거리상으로 산길로 3킬로 정도이며 보통 날씨좋은 날 건장한 성인이 가도 1시간30분정도 걸리는 거리. 게다가 이 사람이 간 시간은 새벽시간으로 깜깜해서 사람이 일단 잘 안가는 시간.

 

 

실제 박용수씨의 유서에 대한 필적감정 결과 본인의 것인지 확실치 않다고 국과수에서 결론내림

 

또한 자신의 시체의 화장을 매형에게 부탁한다고 해놨는데, 그 매형이라는 사람과는 수년간 전혀 연락도 안한 사이라는 점.

 

 

또한 자살한 박용수씨의 위장에서 체 소화되지 않은 알약이 나왔는데 그 용도는 소화제였음.

캡슐알약은 먹자마자 위액에 녹기 때문에 저렇게 위액에 녹지 않고 부검후 나왔다는 것은 목을 메기 직전 10분내로 소화제를 먹었다는 이야기가 됨. 자살하려는 사람이 속이 더부룩해서 소화제를 먹고 목을 맸다? 사람은 워낙 복잡한 동물이니까.. 뭔들 말이 안되겠냐마는... 자살하려는 사람이 속이 더부룩할걸 걱정해서 사람을 죽인후에 소화제를 챙겨서 산길을 1시간반을 올랐다?

 

 

여하튼 이런 모든 의혹이 있음에도 불구하고 당시 이 사건을 지휘한 강북경찰서에서는 이례적으로 본 건을 신속하게 처리하여 1달후인 10월7일 이 사건을 박용수가 박용철을 살해후, 자신은 산으로 올라가서 자살한 것으로 종결하고 시체는 화장하여 처리함. 이후 당시 강북경찰서장이었던 김영일은 이 사건을 조속히 처리한 공로를 인정받았던 건지(?) 2012년 총선에서 새누리의 공천을 받고 전북 익산(갑)에 출마했으나 낙마한다. 

 

이후부터는 이 사건의 의혹에 관해 파헤쳐본다.

-2편에서 계속-

청년들이 한국을 떠나는 문제는 단순히 일자리가 없기 때문만은 아니다.

가장 중요한 희망이 보이지 않기 때문이다.

아무리 힘들게 스펙을 쌓고 경쟁에서 이겨 대기업을 들어가는 소위 승자도, 그리고 그러한

경쟁에서 뒤져 계약직, 아르바이트를 하는 패자도 사회 전체에 팽배한 부조리와 불합리한

시스템에 내몰려 승자도 패자도 착취를 당하는 대한민국의 현재속에서 자신들의 미래가

보이지 않기에 자신의 미래를 치열하게 생각하는 젊은이들일수록 좀 더 정당한 시스템이 구축되어 있고 노동의 가치를 인정해주는 곳으로 탈출하려 하는 것이다.














정부가 후쿠시마 지역 오염제거 작업에 지급하는 노동자 일당은 4만6천엔. 실제 5차 하청업체 직원인 나카무라씨가 받은 임금은 1만2천엔. 75%를 중간단계에서 착취함. 이에 항의하자 곧바로 짤림.


뷰가 좋아서 그냥 삽입. 일본의 도쿄도가 넓긴 넓은 듯.


1998년 금융위기때, 외환을 벌어들이는 기업(대기업)이 돈을 벌 수 있도록 하는 조치를 정부에서 취함. 고용요건 완화로 정규직이 비정규직으로 전환되기 시작하고, 국민의 세금을 늘리고 사회보장을 줄임. 현재 대한민국도 이와 같은 길을 걷고 있는 중.

도쿄 신쥬쿠 중앙공원. 매주 1차례 여러 사회단체가 연합하여 저녁을 무료로 제공함. 근처 노숙자 등 무료저녁을 먹기 위해 인산인해. 노숙자 뿐 아니라 해고노동자, 학생등 어려운 사람들이 모여듬.


아키코씨와 함께 당시 해고당한 3명의 동료.


이 여성 초등학교 교사는 일주일에 2일만 파트타임으로 일함. 이 학교의 여교사 12명중 7명이 파트타임으로 놀랍게도 그중엔 교장도 포함됨.


1980년대 경기불황으로 네덜란드도 높은 실업율과 연일되는 시위로 사회가 불안해짐.


노동자는 임금을 억제하는 대신, 기업은 파트타임을 활성화해서 일자리를 늘리고 정부는 파트타임으로 일자리를 늘리는 기업에 세금을 감면해줌. 또한 일자리를 잃은 노동자에게는 실업급여와 함께 재교육을 통해 재취업을 할 수 있도록 도와줌.


네덜란드의 슈퍼. (네덜란드는 무염무당의 크래커가 정말 진리, 삼겹살도 싸고 맛있고..)


법대 4학년인 아눅. 현재 장학금으로 학비는 충당하고 생활비를 벌기 위해 2년전부터 이 슈퍼 빵집에서 빵을 오븐에서 꺼내 포장하는 일을 담당.


1980년대 아시아의 4마리 용으로 불리던 한국,대만,홍콩,싱가포르.. 그 중에 현재 용으로 승천 가능성이 그나마 보이는 유일한 나라는 싱가포르 뿐.


싱가포르도 1960년대는 찢어지게 가난했음.

이광요가 총통에 취임하면서 강력한 경제드라이브 정책과 반부패를 통해 깨끗한 정치적 토대에서 경제적 번영을 성취.(이광요가 독재를 한 부분이 싱가포르의 미래에 불안한 요소 중 하나)



이광요의 최측근 중 한 사람인 태 치왕완이 2천8백만원의 뇌물사건에 연류되어 조사를 받게 되었음. 치왕완은 이광요에게 면담을 요청했으니 이광요는 만나주지 않음. 결국 태 치왕완은 자살함.


1900년대 초 영국 산업혁명의 흐름을 이어받아 미국은 비약적인 산업화를 이룩함. 이때 산업 각 분야에서 절대적인 강자들이 나타나게 되고, 이러한 강자들이 합병 및 Trust등으로 더욱 몸집을 키워 분야별 독점적인 행태를 띄게 됨. 이로 인해 시장에 신규로 진입하는 후발기업들은 펴보지도 못하고 지는 등 독점의 폐해가 발생.



스웨덴도 1930년대 높은 실업률로 경제가 피폐하고 사회가 불안해짐.

동일노동 동일임금을 통해 동일 업종간의 임금격차 해소. 

이로 인해 경쟁력이 없는 기업들은 퇴출되게 됨. 기업경쟁력 강화.

퇴출기업에 의해 실업자는 발생하나 이것을 정부의 사회복지망에 의해 구제해줌.

현재 우리는? 누가 봐도 우리의 미래는 일본의 방향임.

국민들이 넋놓고 새누리와 민주당의 정치놀음에 놀아난다면 방향은 일본이고 미래의 모습은 멕시코 정도가 될 듯.

2014년 신년특집. 부국의 조건으로 당시 국가는 왜 실패하는가라는 책의 내용에서 모티브를 얻어 제작되었음.

위 사진의 왼쪽이 멕시코 노갈레스시, 오른쪽의 경계가 보이는데 이 철제벽을 사이에 두고 오른쪽이 미국 노갈레스시. 1970년대까지는 자유롭게 교류도 해왔지만, 경제적인 격차를 보이면서 국경검문이 강화되고 교류가 끊기게 됨. 양쪽의 수입은 평균적으로 3배정도 미국쪽이 높으며, 그외 사회 인프라등에서 차이가 심하고 특히 멕시코 쪽이 빈부의 격차가 매우 심해서, 빈민가에 사는 사람은 수도와 전기의 혜택을 거의 받지 못하고 있음.



2013년 포브스가 뽑은 멕시코 10대 부패인물에는 정부의 고위층 인사로 채워져 있음.(우리가정신 안차리면 이게 대한민국의 미래일 수 있음)

경찰은 200페소 현찰로 받고 그냥 보내줌.(내 기억으로는 김영삼 들어서면서부터 우리나라에서 부패가 많이 줄어들기 시작했음. 우리도 불과 20년전에 길거리에서 이런거 많이 봤음)

우리도 김대중, 노무현의 문민정부 시절 투명성 지수가 15위 정도에 이를 정도로 좋아졌지만, 이명박과 박근혜의 정권을 거치면서 45위로 곤두박질. 종합적으로 보면 대한민국은 진정 1980년대로 돌아가는 것이 느낌이 아니라 사실이라는게 무서운 일.

멕시코의 최대 갑부. 멕시코 모바일 회장 슬림.


그럼 이러한 정치적 풍토는 어디서부터 유래되었는가에 대해 식민지 시대로 돌아가본다.


멕시코를 처음 발견한 스페인의 코르테즈는 당시 이 대륙의 지배자였던 아즈텍 문명을 테노치틀란에서 만나게 됨. 순진했던 지배세력과 그 원주민을 총,균,쇠(이 책 보면 자세하게 나옴)로 아작을 내고 멕시코를 접수함. 원주민을 노예로 삼고 남미 대륙을 수탈하여 스페인의 부를 축적함.(여담으로 남미의 금은보화로 인해 스페인의 왕가는 막대한 부를 쌓게 되는데 이로 인해 스페인에 인플레가 발생하고 이를 통해 스페인의 국력이 약화되고, 스페인 왕가가 몰락하는 아이러니가 발생)

코르테즈는 가장 좋은 위치에 아즈텍 문명의 건축물을 부순 건자재로 호화 별장을 지어놓고 살고.(일제시대 일본놈들이 우리한테 한 짓이랑 다를 바 없음)



멕시코의 탁스코 지역은 은의 산지로 유명하여 당시 주된 수탈 대상지였음.


정리하자면, 멕시코에는 금은보화 및 천연자원등 수탈할게 아주 풍부했기 때문에 스페인의 식민지배자들이 멕시코에서 막강한 화력을 통해 원주민을 노예로 부려먹었고, 이러한 독재방식의 부의 집중의 문화가 부지불식간에 멕시코 지배층에도 전해져있음. 한마디로 식민지 근성.

이러한 부정부패는 민중이 범국가적으로 들고 일어나서 기득권층에게 피의 저항을 통해 쟁취하지 않는한 절대 바뀌지 않음. 그래서 멕시코가 계속적으로 나빠지는 중이라고 보임.


영국이 지배한 아메리카 대륙의 경우 당시 척박한 땅으로 알려졌기 때문에(멕시코 처럼 아즈텍 문명같은 수준높은 문명이 없었기 때문에 개발 자체가 안되어 있었음.. 인디언들이 활쏘기 하는 수준이었으니. 어찌 보면 이것도 운이고 그래서 인디언들은 결국 멸망당한 거고) 실제 영국에서도 미국으로는 살기 어려운 사람들(소위 필그림)이 깡만 가지고 간거고 이 사람들이 미국의 개척정신이라는 것을 만들게 됨.


다시 이야기는 멕시코로. 멕시코의 모바일 서비스에 빡친 젊은이.

20년전 멕시코 국영 전화국인 텔멕스를 민영화(말은 민영화지만 슬림이라는 개인에게 몰빵). 결국 독점에 서비스는 개판.


독일, 영국, 미국등 소위 선진국이라는 나라는 독점의 폐해를 뻐져리게 알고 있기에 이를 방지하기 위해 제독적으로 반독점에 대한 법이 제대로 정비되어 있고, 국민 대다수에게도 독점은 부패와 동의어로 받아들여짐.


못사는 나라는 자원이 없어서, 국민이 게을러서, 지리적 여건이 안좋아서 이런건 모두 구라고, 결국 사회시스템이 투명하고 제대로 돌아가면 국민들은 다 잘 살 수 있는 형태로 돌아가게 됨.

결국 부정부패와 독점이야말로 국가경제와 국민의 삶을 짓밟는 반국가,반민족 행위임.



로마시대 무역선이 지중해 연안에 난파한 난파선의 수를 비교해보면 공화정에서 황제정으로 넘어가는 시기를 분기점으로 난파선의 수가 줄어든다.(교역이 줄었다는 뜻)


또한, 남극대륙에서 빙하를 이용하여 과거의 대기를 분석해보면 같은 시기에 공기중 납성분이 줄어드는 것을 발견할 수 있음. 납은 과거 로마시대에 은화를 주조하기 위해 은을 제련할때 많이 나오던 성분임. 즉 황제정으로 넘어오면서 은의 주조가 줄어들기 시작함.(경제적은 몰락) 


공화정 시절은 현대의 선진국의 민주주의처럼 개방과 포용으로 사회가 활력이 넘쳤음.



카이사르가 공화정에서 일인 독재로 로마의 정권을 바꾸면서부터 로마의 몰락이 시작.

독재를 유지하기 위해 재정이 많이 들어가는데 도리어 경제가 위축되므로 가짜 은화를 주조하여 인플레를 유발.



2대 황제인 티베리우스 시절, 어떤 장인이 유리 가공기술을 개발하여 잘 깨지지 않는 유리잔을 만드는 기술을 가지고 티베리우스 황제에게 찾아옴.


황제는 그 기술이 상용화될 경우 금,은과 같은 귀금속의 가치가 떨어질 것을 두려워하여 그 장인을 처형하고 기술을 사장시킴.





베네치아는 중동과 유럽을 잇는 중계무역으로 부를 축적하지만, 기득권 귀족들이 자신의 정치권력을 독점하기 위해 무역을 독점하면서 중계무역이 쇠퇴하면서 결국 국가가 쇠락하기 시작.


스페인도 식민지 건설이후 부의 축적을 한 왕가가 자신들이 부를 독점하기 위해 모든 무역에 대해 스페인 정부가 감독을 시작하면서 영국에게 무역을 뒤지기 시작함.


또한, 무역에서 주변국과의 경쟁에서 독점권을 유지하기 위해 잦은 전쟁을 치루면서 경제적으로 더욱 어려워짐.



구 소련의 경우도 계획경제로 인해 정부가 모든 경제문제를 독점함으로 인해 자유로운 경쟁이 없는 활력이 없는 시스템으로 점차 몰락의 길을 걸어감. 고르바쵸프가 페레스트로이카로 꺼져가는 불꽃을 살리려 했으나 너무 늦었음.




베네수엘라는 1960년대 말 푼토피호라는 당시 유력 3당간의 협약을 통해 상호 상생의 정치를 하기로 협약.


하지만, 점차 그들만의 정치적 권력이 커지면서 3당의 야합이 이루어졌으며, 이러한 야합에 거부한 사회당이 탈퇴하면서 남은 2개의 당이 권력을 독점하며 사실상의 독재가 이루어짐.

(우리나라 현재 새누리와 민주당도 내가 생각하기엔 비슷함.)



정경유착으로 인해 국영기업에 대해 정치적 고려에 의한 보조금이 지급되고 이로 인해 세계에서는 도리어 기업의 경쟁력이 하락하여, 베네수엘라는 석유와 보조금이 지급되는 몇몇 기업 이외에는 다른 모든 산업이 사양길로 접어듬.


이 와중에 세계 금융위기가 터지고, 원유값이 금락하면서 베네수엘라 정부는 현재의 화폐를 1/7로 평가절하하는 화폐개혁을 단행하고, 공공요금이 하루만에 2배로 오르는 등 하이퍼 인플레이션 상황이 발생하여, 지방 도시인 카라카소에서부터 폭동이 발생. 이를 정부군이 진압하는 과정에서 정부 공식 통계 3천명의 사망자가 발생(비공식적으로는 더 죽었을 듯)


이후 2당 독재에 신물이 난 국민에 의해 차베스가 1999년 대통령이 되지만, 그도 역시 독재적인 폐쇄정치를 단행. 정부는 생필품에 대해 가격을 매기고 그 가격 이하로만 물건을 팔도록 고시하고, 기업은 최소한의 양만 생산해야만 적자가 줄어드는 구조가 되버림. 그래서 베네수엘라에서는 생필품을 구하는 것이 하늘의 별따기임. 애기 엄마가 아이들 우유를 사기 위해 1주일을 여기저기 뛰어다니는 장면이 나옴.


부국이 되기 위한 조건은 인종,문화,지리적 여건, 이런 것과는 상관이 없음.

정치권력이 부패하지 않고, 그 권력이 독점화되지 않도록 하는 장치가 필연적으로 있어야 하며(삼권분립은 기본), 권력은 항상 부패한다는 전제를 가지고 국민이 견제할 수 있는 장치가 항상 있어야만 하며 독재를 노리는 기득권층의 탐욕을 견제해야 함.(간혹 독재나 왕권하에서도 요순이나 세종대왕 같은 성군이 있을때는 그것이 가능하지만 그건 말 그대로 복권이나 다를바가 없음. 정치인이나 지도자는 다 냅두면 도둑놈이 된다는 마음가짐으로 감시해야 함.)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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