봄, 이라고 하면 벚꽃(왕벚꽃)이다. 은은한 핑크색 꽃이 흐드러지게 만개한 모습도, 남김없이 지는 덧없는 모습도, 요샛말로 하자면 죽여준다. 만남과 이별의 이 시기에 글자 그대로 꽃을 곁들인다. 이 벚꽃에 이변이 발생하고 있는 것 같다. "꽃보다 경단"의 기자가 추적해봤다.
【写真】まるで空爆「炎の竜巻」が襲った町 世界でも異常気象
(사진) 실로 공중폭격과 같은 "은은한 용솟음"이 일어나고 있는 마을. 세계 곳곳에서도 일어나고 있는 이상기온.
"초,중학교의 입학식은 만개한 벚꽃 나무 밑에서 사진을 찍었지"라며 그리워하는 선배의 말에 "잠깐만요"라며 생각하게 된다. "지금은 입학식 때는, 지지 않아?" 조사해보니, 후쿠오카현에서는 지난 40년간 개화일은 9일이 빨라지고, 개화부터 만개까지 걸리는 일수도 길어졌다. 기후변동 탓이다.
큐슈대 명예교수(기상학)인 이토 히사노리 씨(73세)는 "꽃이 피는 것에는 겨울의 추위가 중요하다"라고 설명했다. 관건은 '휴면타파'라고 하는 메커니즘인데, 10도 이하의 추위에 일정기간 노출된 꽃눈은 동면에서 깨어나서, 꽃을 피울 준비를 하게 된다. 겨울이 너무 따뜻해지면, '휴면타파'가 작용하지 않게 되어 꽃을 피우기가 어려워진다. "벚꽃 전선이 북상한다"라는 설명이 틀리게 된 배경에는 큐슈남부의 겨울이 따뜻해진데 그 이유가 있다.
카츠키 씨는 따뜻한 기후와 환경이 벚꽃에 어떤 영향을 끼치는가를 연구하고 있다. 현내 각지역의 벚꽃의 고정 카메라를 설치, 줄기에 레벨을 붙혔다. 꽃을 관찰하는 것 외에도, 낙엽과 토양의 상황을 현내 각지역에서 장기적으로 분석중이다. "예를 들면 계절을 벗어난 잘못된 시기에 꽃이 피는 것은 여름의 건조함의 영향이라고 생각됩니다. 우선은 계속해서 관찰하며 지켜볼 생각입니다". 예측으로만 알 수 없는 실상은 확실한 검증이 필요합니다.
말이 나온 김에, 벚꽃이 없으면 안될 꽃구경문화도 언급하고 싶습니다. 중국으로부터 전해진 매화, 복사꽃을 감상하는 궁중행사를 시작으로, 일본에서는 헤이안시대에 시작되었다고 알려져있습니다. 야생종의 산벚나무가 대상이었으나, 메이지시대의 왕벚꽃나무가 단숨에 보급되면서 현재에 이르고 있다고 알려져 있습니다. 우아한 역사를 알고나니, 경단에 음주나 즐기는 자신이 부끄러워지네요.
국민적 인기의 벚나무가 온난화가 점점 진행되면 어찌 될까요? 꽃이 피지 않고, 예컨대 피어도 만개하지 않는 초라한 모습이 늘어나 "가고시마, 시고쿠, 키이반도남부에는 50년후 벚꽃이 사라지지 않을까요"라고 카츠키 씨는 말합니다. "그렇게나 빨리요?"라고 저절로 되묻게 됩니다. 남은 인생을 아이들과 손자들과 화려한 꽃구경을 하고 싶은데 말입니다.
벚나무는 일본에 야생종으로 10종, 재배종은 대략 100종이 있다. 큐슈에는 야생종의 산벚꽃과 츠쿠시 산벚꽃이 핀다. 왕벚꽃은 에도시대에 생긴 재배종이다. 접목으로 늘어난 "클론'덕에, 거의 전국에서 키우며, 꽃을 피우기까지 5년 정도 걸린다. 후쿠오카 지역 기상대에 의하면 1953년부터 2020년까지 관측을 통해, 왕벚꽃의 개화일은 큐슈,야마구치현에서 10년 간 1일, 후쿠오카에서는 1.8일이 빨라졌다고 한다.
춘분인 21일, 오키나와 본섬지역의 전선의 영향으로 날씨가 맑았다 흐렸다 합니다. 야에야마 지방은 비가 올 것 같습니다. 기온은 타케토미쵸의 이리오모테섬에서는 올해 최고인 27도를 기록하는 등 여름날씨인 곳도 많았습니다.
나하시의 오오이시 공원에는 공원내의 백향나리를 보기에 알맞은 시기를 맞고 있습니다. 따스한 햇살 아래, 공원에 놀러온 아이들, 미풍에 흔들리는 나리를 보며 "이쁘다"라는 탄성이 터져나옵니다. 오키나와 기상대에 의하면 대륙으로부터 전선이 이어져오면서, 22일에는 본섬(일본 본토)에도 비가 올 것으로 전망됩니다.
あまぞら [雨空] 비가 올 때의 하늘, 비가 올 듯한 하늘
みごろ [見ごろ·見頃] (꽃 따위를) 보기에 알맞은[딱 좋은] 시기.
ぽかぽか 1.따뜻하게 느끼는 모양: 따끈따끈. 2.여기저기 눈에 띄는 모양: 군데군데, 여기저기. 3.계속해서 때리는 모양: 딱딱.
연예계는 이번 여름 이후, 7월18일 미우라 하루마(향년 30세), 9월14일 아시나 세이(향년 36세), 같은 달 20일에는 후지키 타카시(향년 80세), 그리고 9월27일에는 다케우치 유우코(향년 40세) 마저, 자살로 보이는(타케우치 유우코의 경우는 최근 가족들의 증언으로는, 자살이 아닌 심장마비로 알려지고 있음) 보도가 이어지고 있다. 전례없는 사태에 대해 '동경받고 화려한 연예계에 무슨 일이 벌어지고 있는가?'라는 의아한 목소리들이 나오고 있는 것은 당연할 것이다.
'단역의 경우에는 "어쩔 수 없다"라고 할수라도 있지만, 주역을 해왔던 배우정도의 자부심이 있는 이들은, 초조해지기 쉽다. 잘알려진 유명배우는 "최근 TV를 보지 않고 있다"라고 이야기합니다. "자신은 일이 끊겼는데, 동년배의 배우가 나오는 걸 보면 너무 비참해지기 때문" 이라고 한다'
톱 여우인 타케우치 씨이지만, 이후의 드라마와 영화 예정이 없었다고 한다. '마찬가지로 아이를 키우는 중인 시로하라 료코(47세) 씨나 우에토 아야(35세) 씨가 코로나 상황에서도 방송 활동을 잘 해나가고 있는 것을 보며, 경쟁심이 강한 다케우치 씨가 태연할 수 있었을까' (연예 관계자)라고 보는 의견이 적지 않다.(연예 찌라시가 카더라가 많기에 이 부분은 뇌피셜이 많이 작용했을거라고 보임)
아시나 씨의 경우는, 4월에 월급제에서 커미션(활동 건당으로 수입을 받는)으로 바뀌었다고 한다. 속옷 차림의 그라비아 일도 시작할 참이었다고 한다.(일본에서 그라비아로 시작해서 얼굴을 알리고 연예계에 진출하는 경우가 꽤 있다. 그래도 그라비아 출신이라는 딱지가 붙으면 그 선입견을 깨기가 힘들고 탑 배우로 크는데 지장이 될 경우도 있다.)
작년, TV방송국 전체의 광고수입은 전년 대비 551억 엔이 줄은 1조 8612억 엔 입니다. 그에 비해 인터넷 광고비는 3459억 엔이 증가한 2조 1048억 엔에 달합니다. 마침내 인터넷이 TV를 누른거죠. 광고주에게 주된 전쟁터는, 이미 TV가 아닌겁니다. 배우들은 이런 영향을 직집적으로 받고 있습니다.
'다음 분기(일본은 3개월마다 드라마의 분기가 바뀐다. 1~3월, 4~6월, 7~9월, 10~12월. 즉 이 기사에서는 다음 분기 2021년 1~3월을 이야기한다)의 드라마 제작비는 "지금까지의 절반"이라는 대폭적 삭감을 하는 방송국도 있습니다. 후지지(TV)의 게츠구(후치TV는 일본 드라마의 역대급 작품을 많이 내놓는 방송국. 특히 월요일 9시 프라임타임의 드라마를 게츠구라고 하여 방송국의 간판 드라마이다)는 1회당 제작비 5000만 엔에서 2500만 엔으로 줄인다고 합니다. 당연히 배우의 개런티도 대폭 조정될 겁니다.
일찍이 연예계는, '도심에 사는 일부의 선택된 이만이 화려한 생활을 보낸다'라는 특별한 세계였습니다. 하지만, 유튜브의 등장으로 상황이 변했죠. 일본 어디에 있는 누구라도 "스타"가 될 기회가 있습니다. 시류에 맞춰, 점점 때맞춘 "유명인"이 등장하고, 짧은 유통기한이 지난 유명인들이 퇴출되는 것은 어쩔 수 없습니다.
예전이라면, 가수는 한곡의 대히트를 날리고, 배우는 드라마나 영화로 대히트작을 만듭니다. 그렇게 되면, 그 이후는 쭈욱 '스타'로 불리며 살아가게 됩니다. 생활 수준을 낮추지 않으려고 고생하는 사람도 있지만, 그래도 어느 정도는 수준을 유지합니다. 하지만 지금은, 라이벌이 계속 나오고, 유행이 끝나는 사이클이 점점 빨라지면서, "연예인"이 내일은 연예계에서 없어질지도 모르는 굉장히 불안정한 직업이 되고 있습니다.
(일본의 상황이긴 하지만, 한국 연예계의 상황에서도 꽤 참고가 될 만한 내용이다. 특히 일본은 한국에 비해 코로나 상황이 더 심각하기 때문에 연예계의 충격도 더 클 수 밖에는 없을 것이다)
오에 씨는 동경 출신으로 쇼와50년(1975)년 TV드라마로 데뷰했고, 이후 드라마와 버라이어티 등 많은 방송에 출연해왔습니다. NHK의 「연상 게임」 출연을 계기로 오오와바 바쿠 씨와 결혼했습니다. 헤이세이 8년(1996년)부터 26년(2014년)까지 TBS의 「하나마루 마켓」의 사회를 봤으며, 싹싹한 성격으로 모든 세대로부터 사랑 받아왔습니다.
気さくな人柄 : 싹싹한 인품
事務所によりますと、葬儀の日取りは未定で、後日、「お別れの会」を開く予定だということです。
소속사에 의하면, 장례 일정은 아직 정해지지 않았으며, 이후, 「이별식」을 열 예정이라고 합니다.
そうぎ [葬儀] / みてい [未定]
夫の大和田獏さんと娘の大和田美帆さん コメント
남편 오오와다 바쿠 씨와 딸 오오와다 미호 씨의 코멘트
岡江さんの死去を受けて、夫の大和田獏さんと娘の大和田美帆さんは連名でコメントを発表しました。
오에 씨의 사망을 접하며, 남편 오오와다 바꾸 씨와 딸 오오와다 미호 씨는 같이 코멘트를 발표했습니다.
내용은 「오에 구미코가 4월23일 5시 20분에 신형 코로나에 의한 폐렴으로 영면했다는 것을 알립니다. 지금은 원통하고 믿기지 않으며, 너무나도 원통한 마음에 아무것도 생각할 수 없습니다. 부디 편히 보내드리고 싶다는 마음뿐입니다. 일과 관계된 분들, 팬 여러분, 친구 여러분, 오랜 기간 아끼고 사랑해주셔서 감사합니다. 또한, 전력을 다해서 치료해주신 의료 관계자 여러분들께도 마음 깊이 감사드립니다. 고맙습니다. 여러분, 코로나바이러스는 정말 무섭습니다. 모쪼록 부디 조심하십시요」라고 썼습니다.
일본유방암 학회의 이사장으로 쿄린대학의 이모토 시게루 교수는 "초기 유방암으로 수술을 받은 후, 재발율을 낮추기 위해 방사선 치료를 했습니다. 방사선 치료를 받은 환자로서, 드물게 폐에 부분적인 염증이 생긴 것이나, 면역을 담당하는 백혈구가 감소한 점도 있지만, 신형코로나바이러스에 의해 상태가 나빠지는 원인이 될 정도로, 면역력이 저하되는 것은 생각하기 어려웠다. 같은 치료를 받은 환자들의 감염예방을 철저히 할 필요가 있으나, 과도한 불안을 갖지 않기를 바란다" 라고 했습니다.
그리고, 신형코로나바이러스 감염이 증가하는 가운데 치료 방법에 대해, 이모토 교수는 "(유방암 상태에 대해)치료에 필요한 경우라면, 예정대로 수술을 해야하는 것이 당연하지만, 아주 초기이거나, 연기가 가능할 정도로 상태가 나쁘지 않은 경우도 있습니다. 환자의 병의 상태와 치료, 또한 코로나 지역 감염의 증가 상황에 따라 대처도 다를 수 있으므로, 환자분들은 전문가와 치료 방법에 대해 사전에 적절한 상담을 받으시길 바랍니다"라고 이야기 했습니다. 학회로서는 가까운 시기에 치료의 방침에 대해 발표하겠다고 합니다.
대한민국의 초대 대통령 이승만은, 6.25전쟁 휴전후, 반공을 국시로 독재체재를 강화하여, 민주화를 요구하는 야당지도자를 체포하고, 언론업압을 반복하였다. 그 해 부통령 선거에서마저 부정선거가 행해지자 학생들이 반발하여 4월19일에 서울 고려대학 학생들로부터 시작된 학생 2만명의 데모가 있었으며, 그에 호응하여 전국에서 군중 약 10만인이 데모에 참가하였다. 이승만 대통령은 곧 사임하고, 부인과 함께 미국으로 망명했다.
참고:4.19 당일 오후 당황한 이승만은 계엄령을 발표하고 군을 투입하여 사태를 진정시키려고 한다. 또한 이정재를 비롯한 정치깡패가 동원되어 대학생 프락치로 활동하며 시위를 폭력사태로 변질시키려고 하면서 희생자가 걷잡을 수 없이 발생하기 시작하자, 대학교수들이 참여하여 정부를 상대로 발포를 멈추고 학생들도 시위의 과격양상을 자제하도록 중재하기 시작했다. 이어 폭력사태가 커지면서 군대의 개입을 우려한 미국이 이승만에게 하야를 권고하였으며, 미국의 방패를 잃은 이승만이 하야후에 미국으로 망명하면서 사태가 일단락된다.
의회는 내각책임제의 신헙법을 가결하고, 제2공화국이 시작되었으며, 야당지도자였던 장면이 초대 수상이 되어서, 민주화가 개시되었다. 북한의 김일성도 그에 대응하여, 8월에 남북연방제에 의한 통일안을 제시하였으며, 국민들도 민족 통일에 대한 목소리가 높아져갔다. 그러나 그 다음해인 1961년 박정희에 의한 군사 구데타로 인해 민주화와 함께 남북통일의 움직임이 멈추게 되었다. 한국은 다시 반공독재정권의 지배하에 들어가게 되었다.
1960년 사월혁명의 도화선이 된 사건은, 2월 대구의 고교생들의 데모였다. 일본과 같은 6.3.3제의 교육을 시작한 한국은 유교적 전통이 있어서 급속히 교육열이 높아졌다. 45년 전국 19개교 7819명이었던 고교생의 숫자는 60년에 와서 640개교에 7만3천명으로 증가했다. 고교생이라 해도 전란을 포함해 혼란기여서 20세가 넘은 성인도 적지않았던 시절이다. 이승만 정권의 부통령 선거 유세일의 시작이 일요일이었는데도 불구하고 고교생들을 (강제로) 등교하게했다.
(참고 : 대구 2.28 학생의거라 불리는 이 사건은 부통령 유세때 당시 여당의 이기붕을 반대하는 학생들을 유세에 참가하지 못하도록 대구지역에서 고교생들을 일요일에 강제 등교시킨데 대해 고교생들이 학생을 정치적 목적에 이용하지 말라며 시위에 나선 사건을 말하며, 당시 시위에 참여한 고교생들을 경찰-이 당시 경찰은 대부분 친일파가 그대로 살아남은 친일경찰-이 빨갱이라 하며 무차별로 폭행하게 되고, 이를 본 대구시민들이 왜 아이들을 때리느냐고 항의하면서 시위가 격화된다. 이때 경찰을 120명의 고등학생을 연행했으나 사태가 커질 것을 우려 모두 방면한다.)
선거유세에 고교생들이 참가하지 못하도록 되자, 고교생들은 학교를 정치적으로 이용하는데 분노하여 가두데모에 나서게된다. 이 대구의 고교생데모가 전국으로 파급되어 4월18일부터 19일까지 전국의 대학생, 민중의 데모로 확대된다. 경찰의 탄압이 격화되고, 전국적으로 186명의 사상자가 발생한 피의 화요일이라 불리운다. 또한 한국의 4월학생혁명은 일본의 안보조약 개정에 대한 반대투쟁에도 큰 자극이 되어, 대학생, 고교생이 가두데모에 다수 참가하게 된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