출처 : http://www.y-history.net/appendix/wh1603-083_1.html

 

四月革命(韓国): 사월혁명(한국)

1960年、韓国で独裁政治反対の民衆運動が起こり、李承晩大統領が辞任に追い込まれた。

1960년, 한국에서 독재정치반대의 민중운동이 일어남, 이승만 대통령이 에 몰렸다.

 四・一九学生革命ともいう。1960年4月、大韓民国李承晩大統領の不正選挙に対する抗議行動を行った学生に呼応して、市民・労働者が蜂起して、ついに李承晩を辞任に追い込んだ民主化運動。
4.19 학생혁명이라고도 한다. 1960년 4월 대한민국 이승만 대통령의 부정선거에 대해 항의했던 학생들에게 호응하여, 시민, 노동자가 봉기하였고, 곧 이승만 대통령을 사임케 한 민주화운동.

李承晩大統領退陣

 大韓民国初代大統領李承晩は、朝鮮戦争休戦後、反共姿勢と共に独裁色を強め、民主化を要求する野党指導者を逮捕したり、言論抑圧をくりかえしていた。この年の副大統領選挙でも不正選挙が行われたことに学生が反発、4月19日にはソウルの高麗大学学生を始めとする学生が2万人でデモを行い、それに呼応して全国の群衆約10万人がデモを行った。李承晩大統領はついに辞任し、婦人と共にアメリカに亡命した。
 
대한민국의 초대 대통령 이승만은, 6.25전쟁 휴전후, 반공을 국시로 독재체재를 강화하여, 민주화를 요구하는 야당지도자를 체포하고, 언론업압을 반복하였다. 그 해 부통령 선거에서마저 부정선거가 행해지자 학생들이 반발하여 4월19일에 서울 고려대학 학생들로부터 시작된 학생 2만명의 데모가 있었으며, 그에 호응하여 전국에서 군중 약 10만인이 데모에 참가하였다. 이승만 대통령은 곧 사임하고, 부인과 함께 미국으로 망명했다.
 
참고:4.19 당일 오후 당황한 이승만은 계엄령을 발표하고 군을 투입하여 사태를 진정시키려고 한다. 또한 이정재를 비롯한 정치깡패가 동원되어 대학생 프락치로 활동하며 시위를 폭력사태로 변질시키려고 하면서 희생자가 걷잡을 수 없이 발생하기 시작하자, 대학교수들이 참여하여 정부를 상대로 발포를 멈추고 학생들도 시위의 과격양상을 자제하도록 중재하기 시작했다. 이어 폭력사태가 커지면서 군대의 개입을 우려한 미국이 이승만에게 하야를 권고하였으며, 미국의 방패를 잃은 이승만이 하야후에 미국으로 망명하면서 사태가 일단락된다.
 
 

朴正煕の軍事クーデター

 議会は内閣責任制の新憲法を可決し、第二共和政が成立し、野党指導者であった張勉が首相となり、民主化が開始された。北朝鮮の金日成もそれに対応して、8月に南北連邦制による統一案を提示し、国民にも民族統一の声が強まったが、翌61年の朴正煕による軍事クーデターによって民主化および南北統一の動きは抑えられ、韓国はふたたび反共独裁政権の支配下に置かれることとなった。
 

 의회는 내각책임제의 신헙법을 가결하고, 제2공화국이 시작되었으며, 야당지도자였던 장면이 초대 수상이 되어서, 민주화가 개시되었다. 북한의 김일성도 그에 대응하여, 8월에 남북연방제에 의한 통일안을 제시하였으며, 국민들도 민족 통일에 대한 목소리가 높아져갔다. 그러나 그 다음해인 1961년 박정희에 의한 군사 구데타로 인해 민주화와 함께 남북통일의 움직임이 멈추게 되었다. 한국은 다시 반공독재정권의 지배하에 들어가게 되었다.

Episode 高校生が口火を切った四月学生革命

 1960年の四月革命の口火を切ったのは、2月の大邱での高校生たちのデモだった。日本と同じく六・三・三制の教育が始まった韓国では儒教の伝統もあって急速に教育熱が高まり、高校生の数も45年には19校7819人だったのが60年には640校27万3千人に増えていた。高校生といっても戦乱を含む混乱期で20歳を過ぎた成人も少なからず含まれていた。李承晩政権は副大統領選挙の遊説開始日が日曜であったにもかかわらず高校を登校日とした。選挙演説に高校生が参加できないようにしたのだ。高校生は学園の政治的利用に怒って街頭デモに及んだのだった。この大邱の高校生デモが全国に波及、4月18日から19日にかけての全国での大学生、民衆のデモに拡大した。警察の弾圧は激しく、使者は全国で186名となり「血の火曜日」と言われた。また韓国の四月学生革命は、日本の安保条約改定反対闘争にも大きな刺激を与え、大学生・高校生が街頭デモに多数参加した。
 
1960년 사월혁명의 도화선이 된 사건은, 2월 대구의 고교생들의 데모였다. 일본과 같은 6.3.3제의 교육을 시작한 한국은 유교적 전통이 있어서 급속히 교육열이 높아졌다. 45년 전국 19개교 7819명이었던 고교생의 숫자는 60년에 와서 640개교에 7만3천명으로 증가했다. 고교생이라 해도 전란을 포함해 혼란기여서 20세가 넘은 성인도 적지않았던 시절이다. 이승만 정권의 부통령 선거 유세일의 시작이 일요일이었는데도 불구하고 고교생들을 (강제로) 등교하게했다.
(참고 : 대구 2.28 학생의거라 불리는 이 사건은 부통령 유세때 당시 여당의 이기붕을 반대하는 학생들을 유세에 참가하지 못하도록 대구지역에서 고교생들을 일요일에 강제 등교시킨데 대해 고교생들이 학생을 정치적 목적에 이용하지 말라며 시위에 나선 사건을 말하며, 당시 시위에 참여한 고교생들을 경찰-이 당시 경찰은 대부분 친일파가 그대로 살아남은 친일경찰-이 빨갱이라 하며 무차별로 폭행하게 되고, 이를 본 대구시민들이 왜 아이들을 때리느냐고 항의하면서 시위가 격화된다. 이때 경찰을 120명의 고등학생을 연행했으나 사태가 커질 것을 우려 모두 방면한다.)
 
선거유세에 고교생들이 참가하지 못하도록 되자, 고교생들은 학교를 정치적으로 이용하는데 분노하여 가두데모에 나서게된다. 이 대구의 고교생데모가 전국으로 파급되어 4월18일부터 19일까지 전국의 대학생, 민중의 데모로 확대된다. 경찰의 탄압이 격화되고,  전국적으로 186명의 사상자가 발생한 피의 화요일이라 불리운다. 또한 한국의 4월학생혁명은 일본의 안보조약 개정에 대한 반대투쟁에도 큰 자극이 되어, 대학생, 고교생이 가두데모에 다수 참가하게 된다.
 
<文京洙『韓国現代史』2005 岩波新書 p.93-99>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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