대한민국의 교육의 문제는 해방후 70년이 지났지만 여전히 일제시대의 교육시스템의 잔재를 그대로 가지고 있다는데 그 문제점이 있다.

식민지 국민으로서 우리의 교육은 그들이 원하는 인재의 양성, 즉 시키면 시키는데로 한다는 인간을 만들기 위한 교육을 그 원형으로 한다. 

소위 말하는 주입식교육을 현재의 사회의 주역인 7080세대까지도 그대로 수정없이 받아왔다. 

경제 발전기에 대학교육을 받은 인재에게 요구되는 가장 큰 덕목은 지혜로운 노동자보다는 지식이 있고, 자기의 분야에 대해서 제대로 이해하며, 야근과 주말근무등을 마다하지 않을 성실(?)한 노동자였다. 


사측에서 시키면 별 토를 달지 않고, 묵묵히 지시를 따르고 과제를 수행하는 인재를 이 사회는 원했던 것이고, 교육은 그 요구에 잘 부응해왔다.


그러다가 경제와 사회가 발전하면서 지속적으로 기업과 사회는 업그레이드된 퀄리티의 인재를 요구하게 된다. 이에 따라 석사와 박사 그리고 유학을 갔는냐 안갔느냐에 의해 사회적 지위가 결정되는 고학력 요구사회로 변모해왔다. 이러한 세태는 90년대 이후 가속화되기 시작했으며 90년대말과 2000년대 중반 2차례의 경제위기를 겪으면서 고급일자리는 줄어들기 시작하면서 학력인플레라는 말이 생길 정도로 우리사회의 고학력자가 넘쳐나기 시작했다.


대한민국은 80년대 말 이후부터 교육의 근간이 되는 대학입시 시스템을 불과 몇 년의 주기로 파행적으로 변경해오고 있다. 그 행태는 파행적이긴 하나, 그 방향은 2가지로 요약된다. 

대학이 면접시 고등학교에서의 성적인 내신과 수능성적으로 평소의 학습능력에 검증하고, 입시과정에서 논술로 사고의 역량을 검증하는 방향이다.


중,고교 과정을 통해 사지/오지선다형의 선택형 문제의 정답을 외우는 기술및 지식습득 방식에 익숙해진 학생들에게 얼마나 자신의 역량으로 사회의 여러가지 문제를 해결해 나갈 수 있느냐는 사고의 힘의 중요성을 인식한 결과이지만 아직도 초,중,고등학교 교육은 생각의 힘보다는 지식의 축적에 포커스 되어 있는 것이 현실이다.

특목고가 됐든, 일반고가 됐든, 중/고교를 입시제를 부활하든, 아니면 모두 뺑뺑이를 돌리든 그 형식은 별 문제가 되지 않는다.

고등학교를 졸업하면 최소한 소크라테스의 '너 자신을 알라', 혹은 공자의 "예(禮)", 또는 맹자의 "인(仁)"이라는 말이 무슨 의미인지에 대해서 친구랑 충분히 토론하고 자신의 생각을 정리할 수 있는 정도의 역량을 가진 인간을 만드는데 주안점을 두는 교육이라면 충분하다.

1+1=2라든가, 미적분이라든가, 뉴톤의 법칙, 영어의 5형식, 화학의 공유결합, DNA와 염기서열, 이런 과학적 지식에 대해서는 이미 대학교육의 AP(전단계)로서의 교육은 충분히 넘칠 지경으로 우리의 학생들이 배우고 있다.

그런데도 아직도 대한민국에서 그 흔한 노벨물리,화학,의학 상 수상자가 한명도 안나오는 이유는 소위 '성공한 인생'을 위하여 열심히 공부해서 '의대'를 가는 똑똑한 아이들은 많으나, 나는 무엇을 하며 나의 인생을 살아가야 할까?를 고민하는 지혜로운 아이들이 거의 없기 때문이다.


민주주의의 가장 큰 미덕은 다양성 속에 통합된 민의를 도출하는데 있다(unity in diversity). 


지구상의 모든 생물이 수 십억년 전부터 진화의 흐름을 이어오며 꾸준히 생존하고 있는 있는 근본 바탕에는 종내(種來) 혹은 종간(種間)의 다양성을 통해 생존에 필요한 것은 받아들이고, 해로운 것은 제거해가는 자연선택의 원리가 있다. 


다윈이 발견한 자연선택의 원리는 인간이 규율로서 정해놓은 의도적인 옳고 그름, 즉 선과 악에 의해 결정되는 것은 아니다. 


진화란 자연속에서 종이 가지고 있는 여러가지 유전자 풀에서 대립인자들간의 경쟁을 통해 어떤 대립인자가 사느냐 죽느냐의 결과가 확률적으로 이루어지게 된다. 그러한 확률적 축적에 의해 거대한 분기의 방향이 결정되며, 분기의 축적을 통해 지금과 같은 생물의 다양성이 확보된 것이다.

 

인류의 문명은 생물학적 진화에 덧붙여 문명적 진화라는 개념이 더해진다. 도킨스가 <이기적 유전자>에서 인류의 문명은 '밈(meme)'이라는 문화적 유전자들이 대중문화의 Pool속에서 가장 대중의 지지를 획득하는 문화적 결정들에 의해 분기된 문명의 결정들의 축적이라고 했다.

오늘의 탄핵 결정은 그간 대한민국의 문명적 발달과정에서 '친일'과 '독재', 그리고 '반민주'와 '부정부패'라는 문명의 어두운 '밈'들에 대항해 '정의'와 '자유', 그리고 '진리'라는 '밈'들이 또 한 번 승리한다는 문명사의 자연선택을 확인시켜 준 사건이다. 





물( water)이 대부분의 물질에 대해 수용액으로 작용하는 이유를 파고들어가보면 분자구조상의 이유때문이다. 수소원자와 산소원자는 고등학교 화학시간에 배웠던 기억을 더듬어보면 공유결합(covalent bonding)이라는 것을 한다. 화학식으로 나타내자면 H-O-H의 결함을 이루는데 글에서 보이는 것과는 달리 실제의 결합구조를 보면 수소와 수소원자 104.5도(그림 참고)를 이루도록 되어 있다. 원자의 최외각을 도는 전자로 인해서 생기는 차이 때문이다.(양자역학적 표현으로는 전자는 확률분포로 이루어진다. 더 이상의 자세한 설명은 생략한다. ㅋㅋㅋ -_-;;). CO2와 같이 카본계 공유결합은 구조상으로도 직선(linear)하기 때문에 전체적인 전하의 balance가 공간적으로도 중성을 가지게 되지만, H2O는 굽은(bent)된 구조(+전자의 운동)에 의해 물분자 전체적으로 봤을때 (+)전하와 (-)전하가 국지화(localized)되어 쌍극자(dipole)을 형성하게 된다. 이러한 쌍극자에 의해 대부분의 (친수성)물질에 대해 O원자가 가지는 (-)전하는 물질의 (+)전하에, H원자가 가지는 (+)전하는 물질의 (-)전하를 끌어당김으로 인해서 소금(NaCl, 이온결합)과 같은 물질을 녹이게 된다.





우리가 알고 있는 대부분의 상식적이면서도 생명을 유지시키는 가장 근본적인 메카니즘에는 이렇듯 가장 초미세한 세계에서 이루어지는 근본원리가 담겨져 있는 것이 대부분이다. 아인쉬타인은 그간 물리학에서 밝혀진 4개의 힘(강력,약력,전자기력,중력)에 대한 대통합 이론(GUT)를 위해 말년의 20여년간을 힘써왔으나 결국 성공하지 못했다. 그 이후 여러학자들의 노력으로 강력,약력,전자기력까지의 통합은 이루어졌지만 아직까지는 중력의 통합을 증명해내지 못한 상태이다.

아인쉬타인이 GUT에 매달린 이유중 하나는, 코펜하겐학회로부터 물리학계에서 인정된 미세세계의 양자역학적 해석(통계가 불가분 들어갈 수 밖에 없다)에 대해, "신은 주사위 놀이를 하지 않는다."라는 자신의 신념에 대한 학자적 양심을 지키기 위해서였다.

그는 우주상수를 도입하는 등 기존의 물리학적 체계(아이러니하게도 그 체계의 아주 중요한 일부를 그가 세웠는데도 불구하고)에 대한 사고를 넓히기 위해 씨름해왔지만 결국은 이에 실패하고는 말년을 꽤 우울하게 보냈던 것 같다.

노자에, 천지불인(天地不仁)이라는 말이 있다. 하늘과 땅은 인자하지 않다. 그 뒤에 이어지는 글이 이만물위추구(以萬物爲芻狗)라 하여
만물을 대하는데 있어 똥강아지풀을 대하듯이 한다로 합쳐 풀어보면, 천지(신)는 (인간의 관점에서 보면) 인자한 구석이 없다. 모든 만물을 대하기를 다 풀강아지처럼 업신(혹은 꺼꾸로 다 공경한다고 해석할 수도 있는데, 개울가에 핀 똥강아지풀을 귀하게 여기는 것은 문맥상 어색하니까 업신여긴다고 보는게 이해하기 편하다)여긴다는 것으로, 모든 만물의 귀천을 두지 않는다는 의미이다.


최근에 종영된 '찬란하고 쓸쓸하神 도깨비'라는 드라마에서 도깨비가 되기 전 고려의 상장군인 김신(공유가 맡은 역)에게 이미 죽은 선왕(先王)이 자신의 병세가 깊어 살날이 얼마 남지 않았음을 알고 유언을 남긴다. 유언의 내용은, 자신의 이복동생이자 앞으로 왕위를 잊게 될 왕여(이동욱이 맡은 역)를 자신이 항상 홀대하였는데 그 뜻은 "내가 돌보지 않음으로 돌보았다 전하라"였다. 이 말은 그가 나의 이복동생이지만 내가 그를 마음으로는 사랑하였으나 권모와 술수가 난무하는 궁궐에서(왕인 본인도 결국은 오랜 시간동안 서서히 독살당해왔다.) 그 사랑하는 마음을 표했다가는 어떤 변을 당할지 염려스러워 부러 거리를 둔 것이다.

(도깨비의 상왕의 유언장면, 이 분 여기 한컷 나오신다. 묵념)


신이 만약 있다면, 이 세상을 움직이는 단 하나(혹은 몇개 정도의) 근본적인 원칙만을 세워두고 이 세상을 스스로 움직이게 놔뒀을 것이라는 것이 노자의 천지불인에 담겨진 사상이다. 서양은 하나님이라는 신의 존재를 인격신으로 주로 묘사하는 것에 익숙한 문화이다. 이런 배경속에서 자연스럽게 하나님이 인간의 모습으로 등장하는 인격신의 개념의 이야기들이 많다. 


2003년 개봉한 짐캐리 주연의 '브루수 올마이티<Bruce Almighty>' 같은 영화에서 보면, 하나님(모건 프리먼)이 잠시 휴가를 간 사이 그의 업무를 대신 맡은 짐 캐리가 세상 모든 사람의 기도를 다 들어주는 에피소드가 등장한다. 그로 인해 복권 1등 당첨된 사람이 부지기수로 등장해서 결국 복권1등 당첨이라는 것이 아무 소용없는 것이 되어버리게 된다.

(브루스 올마이티의 명장면, 커피로 모세가 홍해를 가르는 장면을 패러디)


이미 니체가 근대에 와서 이야기했듯이 "신"은 너무나도 복잡해지고 다양해졌으며 발전한 세계에 관여하기에는 너무나 낡고 유약한 개념이 되어버린 것이다.

인간(혹은 만물)이 주인이 되는 세상에서 신이란 그 인간(혹은 만물)이 살아갈 세상이 존재할 단초만을 제공하는 어떤 씨앗으로만 존재하는 것이 가장 신다운 행위라고 생각한다.

신은 있다, 없다의 문제에서 다툴 쟁점이 아니라, 이제는 그가 던진 단초로부터 파생된 문제들에 대해 만물이 수십억년간 이룩해온 결과와 업적만으로도 이 세상엔 너무나도 알아야하고, 해야할 일들이 많다.


유명한 매슬로의 인간의 욕구 5단계설에서 상위의 욕구인 4단계가 존경욕구, 5단계가 자아실현욕구라고 한다.

4단계의 존경욕구는 사회적 관계에 의해서 충족되는 욕구이다. 일반적으로 40대 이상이 되면  자기가 속한 집단내에서 어느 정도 위치에 오르고 선임자로서의 존경과 가족에게도서 가장으로의 권위등을 갖게 되어 자연스럽게 이러한 욕구가 충족되어진다.

더욱이 선출직인 국회의원, 시장, 도지사등을 통해 정치에 길에 나서게 된 이들은 아주 강력한 자부심을 갖게 될것이다. 그러한 선출 자체를 통해 얻는 자부심과 기쁨은 4단계의 존경욕구와 5단계의 자아실현욕구에 대한 충족감은 일반적인 회사에서 승진하는 것과는 비교과 안되는  말 그대로 하늘을 찌를 듯할 기쁨일 것이다.

이러한 정신적 충족감은 삶의 엄청난 모티베이션이 된다. 실로 이 정도의 강력한 정신적 충일감은 마약을 복용하는 순간과도 비교될 것이다.

마라토너들이 나이가 들어가며 격한 운동이 주는 육체적 손상(무릎연골 파손, 부정맥, 심근 손상, 폐손상)의 위험으로 의사가 더 이상 마라톤을 하지 않는게 좋겠다는 권유를 한다. 그래도 이를 무시하고 진통약을 먹어가면서까지 마라톤을 계속하는 이들이 많다.


그 이유는 마라토너들이 말하는 런너스 하이라는 현상때문이라고 한다.


고통스러운 뜀뛰기의 고통이 지속적으로 축적되어 몸이 생존을 위해 고통의 극한치를 높여나가게 된다. 그런데 이 누적된 고통이 후반에 이르러 어떠한 사점(dead point)를 지나게 되면 이때는 도리어 몸은 비상사태를 감지하고 뇌에서 고통을 이겨내는 천연 호르몬인 엔돌핀을 분비하기 시작한다. 이 시점이 되면 고통은 기쁨으로 바뀌며, 천근만근이던 몸은 달리기를 처음 할때보다 훨씬 가벼운 상태로 변하는 런너스 하이(runner's high)를 경험하게 된다.

마라톤은 말 그대로 자기와의 싸움이기 때문에 해당하는 거리를 자신의 힘으로 완주하는 것만으로도 런너스 하이에 이르게 된다. 그런데 갑자기 이 마라톤 선수가 이번 대회가 내 생애 마지막이라는 생각으로 내가 1등을 해야겠다는 말도 안되는 비정상적인 목표를 잡게 되면 어떤 일이 벌어질까.

평소 마라콘 풀코스를 4시간 정도 되야 들어오는 선수가 세계기록인 2시간대를 목표로 말 그대로 전력질주를 하다가 런너스 하이는 커녕 초반 몇 킬로를 뛰다가 심장이 터져서 죽고 말 것이다.

보통 이걸 무협적인 용어로는 주화입마라고 한다.

남들에게 존경받고, 자아를 실현하려는 욕구는 지극히 정상적인 것이다. 하나 그 욕구에 앞서 하나의 단서가 있는데 그것은 자신이 누구인지 그리고 내 능력이 어디까지인지를 명확히 아는 것이다.

진인사 대천명이라는 말은 내 모든 에너지를 다 쏟아붓는데 있지만 그 에너지를 넘어서 쏟아부으면 대천명을 하기 전에 자기의 수명 자체가 없어지고 마는 것이다.

박근혜의 탄핵이 임박해진 지금, 2017년 대선이 기정 사실화 되가고 있는 시점에서, 여기 저기서 내가 이번 레이스에서 1등을 하겠다고 이미 주화입마에 빠져있는 정치인들이 보인다. 


그 사람들의 평소에 행보를 보면서 저 사람만은 망가지지 않을거라 생각했던 이들마저도 대통령이 된다는 생각만으로도 저렇게 휘청거리는 걸  보면 대한민국 대통령이라는 자리가 가진 마성이 엄청나구나 하는 걸 느끼게 된다.

나는 정상적인 마라톤 경기를 보고 싶을 뿐이다. 그 누구도 아스팔트 위에서 피를 토하며 죽어 나가는 모습을 보고 싶진 않다. 아마 대부분의 국민들이 그런 마음이지 않을까?


진인사 대천명의 마음으로 레이스에 나가기 전에 시장통에 가서 민심도 좀 읽고, 내가 냉정하게 몇 등 정도 할 수 있는지, 그리고 그 등수라도 유지하려면 내가 어떻게 뛰어야 할지를 사우나 냉탕에 들어가서 머리를 푹 식히며 차분하게 생각들 하는 기회를 가졌으면 한다.


So you have to trust that the dots will somehow connect in your future.


스티브 잡스의 유명한 스탠포드 졸업식의 연설문의 내용중 하나이다. 행동들 혹은 사건들(dots)은 당시에는 혹은 미래에 어떤 의미를 가지게 될지에 대해서 우리는 제대로 알 수가 없다(cannot know how to connect these dots). 단지 미래가 되었을때 과거를 회상하며 그 점들이 어떻게 연결되어 있는가를 알 수가 있을뿐이다.


여기서 중요한 것은 미래가 되는 시점에서 현재의 중첩들에 의해 의미를 갖게 되는 점들의 집합체에 대해 우리가 connecting을 하여 그 의미를 부여하는가에 있다.


우리가 그 꽃을 불러주었을때 비로서 꽃이 의미를 가지듯이, 우리 자신들만의 인생의 의미도 역시 기억의 편린들과 사건의 모음들로서 흩어진 무수히 많은 우리 인생의 점들(dots)을 연결함으로써만이 인생의 의미가 구체화되는 것이다.


하루하루가 바쁘다는 핑계로 나의 소중한 의미들을 그저 기억의 저편으로 쓸어담기에 바쁜 나날이 계속되는 한 인생의 의미란 것은 그저 헛될뿐이다.


 난 개인적으로 진보적 철학을 가지고 있다. 그게 뭐 그리 거창하진 않고 단순하게 2가지다. 

첫째, 국가라는 공동체의 최선의 운영을 위해서는 소위 노블리스 오블리제 -  정치/경제/사회적 상류층이 자신의 명예를 소중히 여기는 마음이 발로가 되어 공적으로 어렵고 힘든일에 솔선수범해야 한다는 정신이라고 개인적으론 정의한다 - 가 바탕이 되어야 하며,

둘째, 북유럽의 복지정책과 같이 어렵고 힘든 이들이 최소한 이땅에서 밥은 굶지 않고 미래에 대한 기회를 박탈당하지 않을 정도의 의/식/주와 교육에 대한 혜택을 제공해야 한다는 생각을 가지고 있다. 

80년대의 젊은 시절부터 권력에 아부하고, 실제로 옳은 말을 해야하는 때에는 침묵했던 비겁한 언론들을 난 별로 좋아하지 않으며, 그런 이유에서 조중동(조선,중앙,동아일보)과 매일경제같은 기회주의 적 매체들을 그렇게 달가와 하진 않는다.(요즘은 그들과 대척점에 서있는 한겨레같은 진보에서 좌파적으로 변질된 언론도 별로 좋아하지 않는다.)

그렇다고 내가 중도보수는 아니고 위에 써놓은 관점도 그렇고 사회의 건전성을 유지하기 위해서 지속적으로 사회는 변화해 나가야 한다는 입장이다.


오늘자 매일경제의 1면 탑 기사를 보니 군대의 보직에 대한 금수저 논란에 대해 다루고 있었다. 기사의 내용은 현실의 세태를 그대로 반영하고 있고 그리 논란거리가 될 것이 없는 것도 같다. 그런데 잠시 생각을 해보면 이런 일을 과연 뉴스로 해야 할 만큼 새로운 일인가?라는 부분에 대해 의문이 들었다. 

과연 언론의 역할은 무엇일까? 그저 사실만을 전달하는 것일까? 

여기서 뉴스가 되기 위한 기본적 요건을 찾아보면 

1. 이상성(異常性) : 정상적이지 않은 것

2. 사회성 : 사회적 영향을 미치는 것

3. 새로운 것인가 : 이미 알려져 있지 않은 것.


그럼 현재 군대에 가는 젊은이중 가족/친지중에서 소위 끗발이 좋은 이들은 군대를 면제받거나 좋은 보직에 가고, 그렇지 않은 이들은 힘든 보직을 받아 군 생활 내내 뺑이를 친다는 것은 과연 1면 탑 뉴스로 합당할까?

1. 이상성 : 이상한건 맞다. 그런데 웬지...

2. 사회성 : 사회에 영향을 미치는가? 그렇다 많이 미친다. 소위 있는 집 자제들은 군대도 빠지고 군대를 가도 아주 꿀보직에 가서 탱자탱자하면서 군대에서 쉬었다 오는데 그렇지 않은 흑수저들은 있는 뺑이 없는 뺑이 다치고 오니 그런 불만들은 사회적으로 큰 갈등의 요인이 된다. 그래서 유승준이 15년이 지난 지금까지 대한민국에 입국이 금지되고, 발치몽은 10년이 다되가도록 티비는 커녕 음반도 제대로 못 내고 있는 것이 아닌가?

3. 새로운것인가? 새로울게 전혀 없다. 아마도 최소 20년전부터 대한민국 국민들은 모두가 알고 있던 사실이다. 이것에 의해서 1. 이상성 측면에서도 이상한 건 맞지만 이미 온 국민이 대한민국은 그렇게 흘러가고 있는 세상이란 걸 알고 있는 이상하지만, 현실적으론 안 이상한 정상적 사건이다.

즉, 뉴스의 요소로 봐서 별로 뉴스거리가 되지 못하는 쓰레기라는 이야기다. 

근데 왜 이런 쓰레기 기사를 우리나라의 유력 일간지, 그것도 경제뉴스를 전문으로 하는 매일경제가가 일면으로 실었을까?

내가 어린시절에 썬데이 서울이라는 성인잡지가 있었다. 그 잡지는 표지에 야한 언니들이 그 당시의 기준으론 야한 옷을 입고, 눈을 치켜뜨고, 입술은 반쯤 벌린 고혹적인 모습으로 지나가는 사람들을 유혹하고 있는 모습으로 신문가판대에 꽂혀있었다. 난 중학시절 어쩌다 아버지나 집에 찾아오는 손님들이 보다가 놓고 간 썬데이 서울을 보면 내 방에다 숨겨놓고 몰래 보곤 한 기억이 있다. 

그 잡지에는 표지의 언니가 표지보다 훨 헐벗은 옷을 입고 찍은 대형브로마이드 사진이 한 장 있고 그 나머지 수백페이지는 말 그대로 가십기사로 채워져있었다. 어떤 유부남 연예인이 어떤 처녀 연예인이랑 바람이 났다는 둥, 강남의 제비는 어떻게 사모님들을 캬바레에서 꼬신다던지, 재벌의 총수가 요즘 가장 인기 있는 연예인에게 몸이 달아 수 많은 보석을 갖다 바치고, 집도 사줬다는 등, 그리고 재벌만을 터는 대도와의 인터뷰등 공중파나 일간지에서 다루지 않는 별의 별 흥미로운 뒷골목 이야기들이 그득해서, 그 이야기에 빠져들다 보면 시간이 어떻게 가는지도 모를 지경이었다. 그 잡지에는 일단 이것이 사실(fact)인가는 별 문제가 아니었다. 누구도 그 잡지의 기사를 심각하게 생각하지 않았고 별로 심각한 내용도 아니었으며 그저 그렇게 소모되는 소위 선정성만을 가진 내용이었기 때문이다. 

지금 매일신문이 1면 탑기사로 실은 군대의 비리 문제가 바로 이런 것과 같은 맥락이다. 이미 온국민이 알고 있는 이상한 사회성 있는 기사를 선정적으로 실어본 것이다. 언론, 저널리즘의 주요 목적은 사회적으로 영향력이 있는 새로운 비정상적 상황을 보도하여 그것이 가진 사회적 리스크를 줄여주는데 있다. 지금 이 군대의 문제에 대한 기사에서 사회적 리스크를 줄이는 방향은 이론적으론 3가지가 있다.

1. 이상성 을 해결한다. => 이상하지 않게 만든다

2. 사회성 을 해결한다. => 영향력이 없게 한다.

3. 새로운 것을 해결한다. => 새롭지 않게 만든다.

 정상적인 사회라면 현실적으로 가능한 방법은 1번뿐이다. 금수저든 흑수저든 똑같이 군대 가면 뺑이치게 만들어야 하며 복불복으로 좋은 보직과 나쁜 보직에 공평하게 뽑히고, 군대에서 공평하게 같은 확률로 다치고 병신되고 하면 된다.

근데 대한민국 사회의 시스템이 워낙 거지같고 기득권이 가진 힘이 워낙 막강하여 1번이 해결되지 않았다. 그래서 기득권은 불문율처럼 이런 특권을 계속하여 누려왔으며 언론을 통제하여 이러한 치부가 국민들에게 전달되지 않도록 하여 2. 사회성을 제거/축소시켜 왔으며, 이런 부정은 기득권이 가진 또 하나의 특권이 되어왔고 수십년의 세월이 흘러 이 이상한 군대비리가 이상한건 맞는데 대한민국에선 누구나 다 "세상이 뭐 그렇지"라고 받아들이는 정상인 일이 되어버렸다.

그러면 지금 이 시점에서 1면 헤드에 이런 기사를 실은 매일의 프런트는 왜 이 기사를 실은걸까? 더 이상은 군대비리를 놔두면 안된다는 정의감이 생긴걸까? 

난 예전 썬데이 서울에서 봤던 그 이쁜 언니들 생각만 난다.  




조선일보를 보자.

매티스 미 국방장관은 황교안 국무총리 -현재에는 탄핵으로 업무중지중인 박근혜를 대신하여 대통령 대행을 하고 있는 - 와 만난 자리에서 누구도 한.미 관계를 이간할 수 없다라고 했다는 이 뉴스는 지금의 상황에서 얼마나 시의적절한가를 따져 보자.

1. 이상성 : 한국과 미국을 누구도 이간 할 수 없다라는 말 뒤에는 한국과 미국을 누군가 이간하고 있다라는 뉘앙스가 느껴진다. 누가? 중국,러시아,일본,북한... 최근에 누가 미국 대통령이라도 만나서 한국은 나쁜 나라이니 우리랑 친하게 지내자라고 했다는 말은 들은바가 없다. 정 따지자면 트럼프가 취임전 대통령 선거전에서 한국의 주한미군 주둔에 대해 언급한 것이 2가지다. 하나는 주한미군의 주둔에 따른 미국의 비용을 전액 한국에 부담시키겠다라는 것과, 단계적으로 주한미군을 한국에서 철수시키겠다라는 것이다. 즉, 현재 기존 한.미 관계의 가장 큰 위협은 바로 새로 취임한 트럼프 미국 대통령이다. 그러니 혹시 미국에선 한국이 불안해할까봐 미국방장관이 날라와서 립서비스를 날리고 있는 것이다. 즉 별로 이상한 것 없다.

2. 사회성 : 영향력이 없진 않겠으나 뭐 현재까지와 같은 상황인데 뭔 사회성이 있겠나.

3. 새로움 : 별로.. 6.25 이후 미국은 우리의 변함없는(?) 우방이었다. 


차라리 커피숍서 자녀의 고교선생을 살해한 엄마가 1면 헤드로 오는게 맞겠다라는 생각이 든다.



그 외에 주요 일간지의 1면도 같이 함 실어봤다. 나로선 어느 일간지나 1면 탑으로 그 무게감이나 사회적 영향력같은 건 느껴지지 않는다. 그냥 이럴바엔 이쁜 언니들 사진이나 실어줬으면 하는 바램이다. 

신문은 뉴스를 전달하는 매체이기도 하지만 각 신문마다의 논조라는 것도 있고 그 논조라는 것에 의해 같은 뉴스의 중요도 역시 다르게 평가될 수 있는 부분이 있다. 

하지만 논조라는 것이 뉴스의 색깔이나 성격 자체를 바꿀 수 있는 것이 아니다. 논조에 의해 파란 것을 빨갛다라고 하고 빨간 것을 파랗다라고 하면 그것은 이미 논조라기보다는 왜곡이며 날조인 것이다. 일단 빨간건 빨갛다 하고 파란건 파랗다 하는 사실을 전달하고 그 사실 위에서 이것이 얼마나 사회적으로 영향을 미치는 것이며, 정상에서 벗어난 것인가 그리고 새로운 것인가를 판단하여야 하고, 그 뉴스가 미치는 사회적 리스크는 무엇인가와 가능하다면 그러한 리스크를 제거하거나 줄일 수 있는 올바른 방법까지를 제시하는 것이 바로 언론이 해야 하는 기본적인 역할일 것이다.

언론은 사회를 살피는 X-ray, CT, 혹은 MRI와 같은 것이다. 어딘가 이상한 부분이 있으면 그 부분을 제대로 조명하고 밝히며 알려주어 국민들이 그것을 알고 고치려는 행동을 할 수 있게 해주어야 한다. 

그런게 힘들면 그냥 썬데이 서울이나 만들면 된다.

 몇 일전 지하철 5호선 김포공항 역에서 30대 초반의 젊은 직장인이 사고로 사망하는 사고가 있었다. 

 이 젊은이가 죽기 직전에 남긴 말은 "아 회사에 늦게 간다고 전화해야 하는데" 였다고 한다. 그는 불과 죽기 수 십초전에도 그가 내려야 하는 지하철 역에서 지하철 출입구와 스크린도어의 불과 한뼘 정도 되는 공간에 갖힌 채 죽을 수 있을지 모른다는 공포와 걱정보다는 회사에 늦는게 더 걱정스러웠던 모양이다. 


 지하철에서 출입구에 몸이나 옷, 가방이 끼어서 나는 사고는 심심치 않게 일어나곤 한다. 나도 회사에 다니던 때에는 1년에 서너번씩은 출퇴근길에 실제로 그런 사고상황을 목격하기도 하지만 다행히 인명피해로 이어지는 일은 겪어 본 적은 없다.

 실제로 이번 사고도 그 정황을 살펴보면 1,2가지의 에러와 이 회사원이 스크린 도어가 열리지 않는 상황에서 굳이 그 회사가 있는 김포공항역에 내리려 고집하지 말고 지하철 문이 열렸을 때 지하철로 다시 들어가서(어차피 회사 좀 늦으면 되지라는 마음으로) 다음 역까지 가는 여유만 가졌어도 충분히 발생하지 않을 수도 있는 사고였다. 그렇다고 이를 회사에 늦으면 안된다는 마음으로 스크린도어가 열리겠지라는 마음으로 기다렸던 이 젊은이가 미련했던 탓이라 할 수도 없는 일이다.

 또한, 지하철을 모는 기관사의 입장에서 보면 승객의 신고가 들어온 시점에서 지하철 출입구를 30여초간 열어놨으며, 이미 스크린 도어가 닫혀있는 상황에서 승강장을 모니터링하는 CCTV는 정상으로 보이니, 당연히 승객이 지하철안으로 다시 들어갔겠지라는 마음으로 문을 닫고 지하철을 운행했다는 것도 충분히 이해가 가는 지점이다.(운행 매뉴얼상 실제 사고가 발생했던 현장을 실제로 기관사 혹은 역무원이 가서 확인을 해야 하는 지침이 있느냐 하는 것은 확인중이라 한다.)


 기관사 입장에서는 수많은 승객이 타고 있는 러시아워시의 지하철 운행이라는 측면과 CCTV를 통해서는 이상이 없다는 부분을 확인하고 출발한 부분에서도 내 개인적으론 충분히 공감이 되는 부분이다.


지하철이 계속 확장되고 서울지하철 공사(요즘은 이것도 복잡해서 어디는 도시고속철도 공사라는데서 관리하는 곳도 있는 모양이다)는 지하철공사의 재정이 지속적으로 나빠지고 있어서(지하철 공사 비용이 많이 들어서 그 비용에 대한 이자를 내느라 그렇게 됐다고 하는데 이것도 사실상 믿을 순 없는 이야기다), 이러한 재정상태의 개선을 위하여 그간 20년간 이상의 구조조정을 거쳤다고 한다. 그 결과, 주로 인원감축 및 외주화, 비정규직 증가(우리나라의 대부분이 기업에서 이루어지고 있는 구조조정이라는 것이 바로 이것을 의미한다)를 통한 인건비 절감을 이루었다고 한다.

 그래서 그런지 돈은 절감되었는지는 모르겠으나, 과거 출퇴근 러시아워시 승강장에 보이던 역무원들은 다들 사라지고, 그 자리를 스크린도어라는 것으로 대부분 대체한 상태이다. 그나마 있는 역무원들도 대부분은 승객의 안전을 위한 승강장의 순찰 같은 업무가 아닌, 부정승차에 대한 감시를 위해 개찰구에서 누가 태그 안하고 그냥 출입하는 사람들은 없나를 보기 위해 가뜩이나 피곤한 눈에 핏대를 세워 사람들을 두리번 거릴 따름이다.

 즉, 이번 사고는 현대의 기업화된 모든 조직에서 최상의 명제가 된 "효율적인 운용" - 여기서 효율이란 결국 최소비용에 의한 최대의 부가가치 창출이라는 경제적인 효율을 의미한다. - 이라는 시스템의 철학(?)하에서 인간의 목숨이란 것이 얼마나 하찮은 것인가를 보여주는 일화일 뿐이다.

 1년에 1,2명 죽는 사람의 목숨보다는 기업의 이익 수십억이 훨씬 중요한 것이 바로 비정한 현대사회의 현실이다. 그러한 한 가정의 가장이 사망한다면 그가 운좋게도(?) 그에 대한 대안으로 보험회사의 생명보험에라도 가입이 되어 있다면 그 사람의 남은 목숨값 10~20여억원이 그 가족에게 전달되는 것이 자본주의가 개인의 사망에 보내는 최대의 조의가 되버린 것이다.

이것은 한,두사람의 최고 권력자 혹은 기업의 최고 경영자들이 만든 것이 아니다. 그 시스템을 인정하고 그러한 철학을 받아들이고 그것에 기반한 사회를 건설하는데 참여한 바로 우리 모두가 그에 대한 책임자이다. 나도 이러한 사회를 만드는데 일조한 하나의 개인으로서, 지하철에서 뜻하지 않게 운명을 달리하게 된 그 젊은이에게 심심한 조의를 보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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