한국에서 '엘리트'라는 단어가 갖는 독특한 위상 못지않게, 한국의 교육기관과 기업 역시 다른 나라와는 다른 태도를 보인다. 대표적인 것이 "소수의 인재가 나머지를 먹여 살린다"는 구호다. 우리에게는 너무나 익숙하지만 사실 이 주장은 서구 사회에서는 감히 입 밖에 내놓을 수 없는 '무엄한 말'이다.
이 말은 사실과도 거리가 멀다. 다수의 평범한 시민들로 구성된 사회는 '인재'들이 먹여 살려야 하는 '밥벌레 집단'이 아니라 오히려 그들의 삶을 가능케 해주는 터전이다. 평범한 시민들은 그 '인재'들이 속한 교육기관에 물적,인적 토대를 제공하고, 그들이 일하는 기업에서 생산되는 물건을 사주고 투자하며, 끊임없이 아이디어와 노동력을 공급해주고
있다.
오히려 다수의 평범한 사람들이 소수의 '엘리트'를 먹여 살리는 셈이다. '누가 누구를 먹여 살리는가'의 문제는 단순한 수사학의 차원이 아니다. 이는 한 사회에서 기업과 학교가 져야 할 책임을 규정하는 대단히 중요한 논의이기 때문이다. 기업과 대학이 사회 없이 존속할 수 없다면 그들의 얻은 이익의 '사회 환원'은 '자선 행위'가 아니라 마땅히 되돌려주어야 할 빚을 갚는 일이다.
그러나 현실은 어떠한가? 시민들이 한 달만 물건을 사주지 않아도 도산할 기업들이 도리어 '국민들을 먹여 살린다'고주장하거나 지역사회의 도움 없이는 존속할 수 없는 교육기관들이 지역 주민들을 이방인 취급해오지 않았던가.
감사의 주체와 대상을 구분하지 못하는 이들로부터 사회적 책임을 기대하기는 어렵다.
-나는 스타벅스에서 불온한 상상을 한다 중에서 발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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대한민국은 민주주의 국가라고는 하지만, 단 한번도 제대로 된 시민의 역량을 집중시켜 기득권에 대한 반발을 해 본역사를 갖고 있지 않다. 서구와 차별화 되는 이러한 점이 합리성보다는 情에 치우치는, 진보와 개혁보다는 보수의논리에 치우치는 담론이 상기와 같은 논의를 막고 호도해왔으며, 서민 자신들의 자각이 부족하다는 점에서'엘리트'주의가 대한민국에서 먹히고 있다는 것은 바로 대다수 국민인 '서민' 자신들의 탓이라고 할 수 밖에는 없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