불복종에 관하여(On Disobedience)중에서 4편의 에세이를 발췌했다. 번역이 매끄러워 이해하기 좋다.
특히 인류여 번성하라는 인본주의에 대한 헌사와도 같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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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 심리적 · 도덕적 문제로서의 불복종
p13
자신의 양심에, 또 인본주의와 이성의 법칙에 복종하기 위해, 종교와 자유와 과학의 모든 순교자는 그들에게 재갈을 물리려는 자들에게 불복종해야 했다. 어떤 사람이 오로지 복종만 할 수 있고 불복종은 할 수 없다면 그는 노예다. 오로지 불복종만 할 수 있고 복종은 할 수 없다면 그는 반항꾼이다. 혁명가와 반항꾼은 다르다. 반항꾼은 분노와 실망, 억울함에 추동되어 행동할 뿐 신념이나 원칙의 이름으로 행동하지는 않는다.
p18
만약 어떤 사회적, 정치적, 종교적 시스템이 자유를 주창하면서 불복종을 억압한다면, 그것은 진실을 말하는 것일 수 없다.
p19
"감히 알고자 하라 sapere aude"는 원칙과 "모든 것을 의심하라 de omnibus est dubitandum"는 원칙은 '아니오'라고 말할 수 있는 역량을 갖추고 더욱 키워나가게 해주는 태도의 핵심적인 특징이었다.
아돌프 아히히만은 우리의 상황을 상징적으로 보여주는 사례이며, 예루살렘의 법정에서 그를 고발한 사람들이 제기한 바를 훨신 넘어서는 중요성을 가진다. 아히히만은 조직인組織人, organization man의 상징이다. 남자, 여자, 아이 할 것 없이 인간을 숫자에 불과한 것으로 여기게 된, 소외된 alienated 관료의 상징이다. 그는 우리 모두의 상징이다. 우리는 아이히만에게서 우리 자신의 모습을 볼 수 있다. 그런데 그와 관련해 가장 무서운 사실은, 그가 저지른 일이 낱낱이 다 드러났고 심지어 그것을 본인 스스로 인정했는데도 그가 완전히 진심으로 자신이 무죄라고 주장할 수 있었다는 점이다. 같은 상황에 다시 처해진다면 분명히 그는 같은 짓을 다시 저지를 것이다. 우리도 그럴 것이다. 사실, 지금 우리가 그렇다.
조직인은 불복종의 역량을 잃은 사람이다. 그는 자신이 복종하고 있다는 사실조차 인식하지 못한다. 역사의 현 시점에, 의심하고 비판하고 불복종하는 능력이야말로 인류의 미래냐 문명의 종말이냐를 가를 모든 것일지 모른다.
2장. 예언자와 사제
p42
하지만 과학이 삶에서 가치를 주는 순간들을 박탈한다면, 아무리 영리하고 정교하게 작동하더라도 그것은 인간을 절마의 길로 이끄는 것이며 존중받을 가치가 없는 것이다.
p50
사람들 사이의 구분 중에 삶을 사랑하는 사람과 죽음을 사랑하는 사람의 구분보다 더 뚜렷한 것은 없을 것이다. 죽음 애호는 인간만이 획득하는 특질이다. 인간은 지루함을 느끼게 될 수 있고 죽음을 사랑하게 될 수 있는 유일한 동물이다. 불능(성적 불능을 말하는 것이 아니다)인 사람은 생을 창조할 수 없지만 생을 파괴함으로써 그것을 초월할 수는 있다. 삶 가운데서 죽음을 사랑하는 것은 궁극적인 도착증이다. 어떤 사람들은 진실로 죽음을 애호한다. 이들은 자신의 진짜 동기를 인식하지 못해서 자신의 야망이 생, 명예, 자유를 위한 것이라고 합리화하지만, 실은 죽음을 애호하기 때문에 전쟁에 환호하고 전쟁을 촉진한다. 이런 사람은 아마 소수이겠지만, 삶과 죽음 사이에서 선택을 내리지 않는 사람은 아주 많다. 이 선택에 직면했음으로 외면하기 위해 일상의 바쁨 속으로 숨는 사람들 말이다. 이들은 파괴를 환영하지는 않지만 생을 환영하지도 않는다. 전쟁에 열정적으로 반대하려면 꼭 필요한 생의 기쁨이 이들에게는 없다.
3장. 인류여 번성하라
p63
오늘날 우리의 정치사상은 영적인 뿌리를 잃었고, 생활수준을 높이는 데 도움이 되는지, 더 효율적인 정치 행정에 도움이 되는지 아닌지로만 판단되는 편의적 방편의 문제가 됭ㅆ다. 정치사상은 인간의 심성과 열망 속에 자리 잡고 있었던 뿌리를 잃고 공허한 껍데기가 되었고 편의에 따라 언제든 버려질 수 있는 것이 되었다.
p66
마르크스는 다음과 같이 말한 바 있는데, 실로 옳은 말이다. "모든 육체적, 정신적 감각은 이 모든 감각의 자기 소외에 의해, 즉 소유의 감각게 의해 잠식되었다.... 사적 소유는 우리를 너무나 멍청하고(생성의 능력에 있어서) 무력하게 만든 나머지 우리가 어떤 사물을 소유할 때만 그것이 우리의 것이 되게 한다. 그것이 우리에게 자본의 형태로 존재할 때만, 그리고 우리가 그것을 소유했을 때만, 우리가 먹었을 때만, 우리가 마셨을 때만, 우리가 사용했을 때만 우리의 것이 되는 것이다. .... 우리는 이 모든 부를 가지고서도 가난하다. 많이 소유하고는 있지만 우리의 존재가 너무나 하찮기 때문이다."
p70
하지만 어떤 용어를 쓰든 옛 자본주의와 새 자본주의 사이에는 기본적인 공통점이 있다. 연대와 사랑이 아니라 개인주의적이고 이기적인 행동이 모두에게 최선의 결과를 가져다줄 것이라는 원칙, 인간의 의지와 비전과 계획이 아니라 비인격적 메커니즘인 시장이 사회의 삶을 조절해야 한다는 믿음 등이 그렇다. 자본주의는 사물(자본)을 삶(노동)보다 우위에 둔다. 권력은 행동이 아니라 소유에서 나온다.
p72
마르크스주의적 형태와 그 밖의 많은 형태에서도 19세기 사회주의는 모든 이가 존엄한 인간적 존재로 살아갈 수 있 물질적 조건을 만들려 했다. 자본이 노동을 이끌게 하기보다 노동이 자본의 방향을 설정하게 만들려 했다. 사회주의에서 노동과 자본은 단지 두 개의 경제적 범주가 아닝ㅆ다. 노동과 자본은 두 개의 원칙을 의미했다. 하나는 자본, 즉 축적된 사물, 소유의 원칙이고, 다른 하나는 노동, 즉 삶과 인간의 힘, 존재하고 되어가는 것의 원칙이다. 사회주의자들은 자본주의 체제에서는 사물이 삶을 이끌고 소유가 존재보다 우위에 놓이며 과거가 현재를 이끈다는 것을 깨달았고, 그 관계를 뒤집고자 했다. 사회주의의 목적은 인간 해방이었다. 인간이 소외되거나 훼손되지 않고 다시 개인이 되기를, 인간이 동료 인간과, 또 자연과 새롭고 풍성하고 자생적인 관계에 들어갈 수 있기를 바랐다. 사회주의의 목적은 인간이 자신을 묶은 속박과 비현실과 허구를 벗어버리고, 느끼고 사고할 수 있는 자신의 힘을 사용해 스스로를 재창조할 수 있는 존재가 되게 하는 것이었다. 사회주의는 인간이 독립적이 되기를, 자신의 발로 설 수 있게 되기를 원했다. 마르크스가 말했듯이, 그것은 인간이 "자기 존재를 자기 자신에게 의존할 때만", 그가 "보고 듣고 냄새 맡고 맛보고 느끼고 사고하고 의지하고 사랑하는, 즉 세계와 맺는 모든 관계에서 전인격적 인간으로서 자신의 개인성을 긍정할 때만", 간단히 말해서, 인간이 "자신의 개인성의 모든 장기와 기관들을 긍정하고 표현할 때만" 가능하다고 보았다." 사회주의의 목적은 인간과 인간, 인간과 자연의 융합이었다.
4장. 인본주의적 사회주의
p89
현재의 중앙 집중적인 국가에서 완전하게 탈중심화된 사회 형태로 이행하려면 과도기가 필요하며 과도기에는 몇몇 중앙 계획과 국가의 개입이 불가피하다. 그러한 중앙 계획과 국가 개입이 관료주의를 심화하고 개인의 통합과 주도권을 약화하게 될 위험을 피하려면 1) 국가가 실질적으로 시민의 통제 아래 있어야 하고, 2) 기업의 사회적, 정치적 권력이 깨뜨려져야 하며, 3) 탈중심적이고 자발적인 연합의 형태로 이뤄지는 모든 생산과 교역, 그리고 지역에서의 사회적, 문화적 활동들은 모두 (과도기가 끝난 다음에 시작하는 것이 아니라) 처음부터 촉진되어야 한다.
p92
탈중심화는 사회 전체의 삶을 규율하는 근본 원칙들을 벗어나지 않는 한에서 의사 결정을 소규모로 그리고 지역적인 수준에서 거주자의 손에 최대한 맡기고자 노력해야 함을 의미한다. 하지만 우리가 어떤 형태를 찾아내든 간에 (최면과 암시로 통제되는 로봇화된 대중이 아니라) 정보를 바탕으로 책임 있게 참여하는 시민들이 자신의 의지를 표현하는 과정으로서의 민주적 과정을 지어야 한다는 것이 늘 본질적인 원칙이어야 한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