조선의 군대의 체제는 육군 위주로 이루어져 있었다. 또한 공격보다는 방어를 위해 산성을 쌓고 수비를 하는 전술이었기 때문에 군사의 수 또한 많지 않았다.(이이의 10만 양병설)

임진왜란 발발후 일본은 초기 3천척의 군함에(세키부네, 아카부네) 20만의 군사를 이끌고 부산, 울산, 김해에 상륙하여 육로로는 3곳을 통해 한양으로 진격하고, 수군은 남해를 통해 서해로 북진하여 전쟁군수품을 보급하는 전략을 구상하고 실행하였다.

왜군은 육지에서는 상륙후 20일만에 파죽지세로 한양에 당도하였다. 당시 200년 이상 전쟁을 겪지 않았던 조선에서는 전쟁을 대비하여 성을 쌓고 민간의 장정을 동원하는데 민간의 불만이 팽배하였다.(마치 지금 대한민국에서 전쟁난지 70년밖에 지나지 않았는데도 민방위 사이렌이 울리면 사람들은 귀찮아한다. 200년동안 태평성대를 누렸으니 사람들이 얼마나 전쟁이라는 것에 무심했겠는가?)

이런 상황속에서 조정에서 아무리 지방에 전쟁에 대비하라는 지시가 내려왔어도 모두들 설마하는 분위기속에서 마침내 전쟁이 터지고 말았지만, 부산,동래,울산,김해의 1차 저지선이 뚫리고 왜적이 올라온다는 소식이 들리자, 임금을 비롯해서 조선 전체는 패닉에 빠지고 모두들 살기에 바빠 북쪽으로 피난을 떠나는데 급급할 뿐이니 나라를 지킬 군인이 있을리 만무했다.

이런 상황에서 한양도성까지 일본군은 거의 아무런 저항없이 그대로 밀고 올라올 수 있었다.

그래도 나라의 운이 다하지 않았던지 이순신의 사람됨을 잘 알고 있던 유성룡의 천거로, 임진왜란이 발발하기 3년전 이순신은 전라도 지방에 정읍현감으로 부임한다. 이후 유성룡의 힘과 선조의 결단으로 2년만에 7계급 특진하여 전라좌도 수군절도사가 되어 전라도 지역의 수군을 총괄하게 된다.(선조는 임진왜란 당시 자신의 명령에 번번히 반기를 든 이순신을 미워는 하지만 무관으로서 그의 역량은 이미 알고 있었던 것이다. 그래서 임진왜란 발발전과, 정유재란 발발후등의 급박한 시기에는 사적인 감정을 버리고 그에게 높은 직위를 제수했던 것이다.)

전라도 지방에서 1년간 혹독하게(당시 전라도 사람들에게 이순신은 원망의 대상이었다. 왜 나지도 않을 전쟁을 대비해서 이렇게도 심하게 주민들을 징발해서 군사훈련을 하고, 거북선과 판옥선을 건조하며, 화포를 생산하는 등 당시 전라도민들에겐 전쟁에 미친놈이 우리 동네에 왔다라는 원망이 자자하였다.) 해군을 조련하여 임진왜란 발발 바로 하루전 신형 돌격전함인 거북선의 진수식을 마치고 왜군의 침입에 만반의 준비를 마친 이순신에 의해 서해로의 공격과 보급이 완전히 막히게 된다.


 이순신은 당시 개인적인 정보망을 동원하여서도 일본에 대한 정보를 지속적으로 수집하였고, 유성룡에 의해서 국가의 중요한 고급정보도 얻을 수 있었기에, 일본이 침략준비를 하고 있다는 사실을 3년전부터 미리 알고 있었다.


 즉, 일본의 침략 바로 하루전 거북선과 신식 화포의 시험을 마친 것은 우연이 아니라 그가 일본 침략의 D-day를 이미 사전에 알고 거기에 맞춰서 군사훈련의 계획을 짰던 것을 의미한다.


 하지만, 1592년 임진왜란 발발 시기부터 1598년의 전쟁 종료시까지 이순신의 사령관으로서의 삶이 순탄했던 시기는 단 하루도 없었다.

1. 수군은 당시 육군에 비해서 천대를 받았으며(조선은 육군 위주의 편재), 수군의 병역의 부과는 연좌제였다(나라에서 그리 정했다. 경국대전에 명시. 전제군주국인 조선에서 왕이 법으로 정해 까라면 깔뿐). 할아버지가 수군이면, 아버지, 아들, 손자 모두 대대손손 수군이었다.(한번 해군은 영원한 해군이다. 니미럴~~) 육군에 비해 혜택도 적은데다가 한번 수군이 되면 영원히 자신들의 후손까지도 수군이 되야 하는 것도 억울한데 전쟁까지 나서, 아버지가 만약 징병당해서 죽으면, 그 자식이 또 징병당해서 나가서 죽어야 하는 지경이 되었다. 

 그래서?
 

 수군에 탈영병이 줄을 이었으며, 그 탈영병들은 모두 집으로 가서 가족들을 데리고 도망을 가게 되었다. 어느 정도나? 10명에 8,9명 정도가 그랬다 한다. 그래서 전쟁 내내 탈영병이 너무 많아서 탈영병을 잡아서 목을 벤 것이 연병장 세바퀴가 넘는다 한다.


2. 전쟁 도중, 이순신이 역모혐의로 투옥됐을때 경상과 전라 수군절도사를 겸임한 원균은 이순신이 그간 피땀으로 모아놓은 수 백척의 조선수군을 데리고 일본과 근접 백병전을 벌여서 완벽하게 조선수군을 궤멸시키는 일본의 일등공신이 된다.(즉, 조선의 일급 역적이 된다. 그래도 전쟁후 선조는 원균과 이순신을 동급으로 놓고 포상을 한다.)

 이순신의 전술은 언제나 원거리 포격에 의해 일본전함을 파괴시키는 것이었다. 조선의 화포의 사거리는 1km, 조선의 활은 300~500m, 일본의 조총은 50~100m의 사거리를 가지고 있었다. 당시 일본 해군에서 사용한 배는 100% 해적들의 배였다. 즉, 그들은 약탈을 목적으로 하는 전술을 갖고 있던 해적의 부대와, 전국시대의 피비린내나는 육상전투 경험을 갖고 있던 사무라이 부대를 합친 형태였다. 따라서 원거리에서 싸워서 배를 파괴시키는 것이 아니라, 상대방의 배에 근접하여 쇠갈고리를 걸고 널판지로 가교를 세워 상대방의 배에 넘어가서 낫이나 일본도로 상대방과 백병전을 하는 것이 기본적인 전투형태였다.

이순신은 이것을 잘 알고 있기에, 조선에 유리한 원거리 포격 전투를 기본전술로 사용하고(학익진은 아군이 적군의 배를 빙 둘러싸고 가운데 있는 적선을 향해 원거리 포격을 집중하는 형태의 전투형태이다. 이는 세계 최초의 원거리 포격 해전의 형태로, 이 전술의 기본 원리는 이후 일본, 영국, 미국이 주요 해전에서 사용하여 큰 승리를 거두는데 사용한다.), 일본배가 접근하면 거북선이나 판옥선 같은 외골격이 든든한 조선배의 강점을 이용하여 일본배를 들이받아서 파괴시키는 전술을 혼합하여 사용했다. 명량에서와 같이 적의 숫자가 20,30배가 되어서 이런 전투로 일본배를 침몰시키고도 남은 배들이 조선의 배로 올라탈때 어쩔 수 없이 백병전을 치르게 되는 것이다.

그런데 원균은 워낙 다혈질에 왜군의 목을 베어서 그간 이순신에 뒤져있던 자신의 전쟁공헌도를 높이기 위해 조선수군이 가장 약한 근접 백병전을 자행하여 조선수군을 일본군의 아가리에 쳐넣어주는 최악의 이적행위를 하고 자신도 그 해전에서 비참하게 뒈지고 말았던 것이다.

어쨋든 이런 상황에서 선조는 이순신을 다시 백의종군으로 전라도로 내려보내기는 하나 큰 기대는 하지 않고 있었다. 그를 내려보내고 나서 곧 교지를 내려 배도 없고 병사도 얼마 되지 않으니 그 남은 병력을 이끌고 한양으로 올라와 육군과 합세하여 선조를 지키는데 힘써라라는 지시를 한다. 이에 이순신 장군은 신에게 아직 12척이 있사옵니다라는 눈물없이는 볼 수 없는 장계를 선조에게 올린다.

앞서도 말했지만 조선은 육군 위주의 편재로 되어 있고, 전통적으로 수군을 중요하게 여기지 않았다.(역사적으로 침략은 중국쪽에서만 있었으며, 왜구쪽에서는 전쟁이 아닌 노략질 수준의 침입이 있었고 세종 이후에는 상호 경제 교류를 통해 일본의 위협이 200년간이나 없었기 때문이다.)
그래서 1번과 같이 수군 자체의 운용도 힘든 마당에, 엎친데 덮친 격으로 전쟁시 육군의 보충을 위해 수군에서 물자와 병사들을 차출하는 일이 빈번하였다. 심지어는 이순신이 일본과의 전투를 위해 바다로 나가 있는 도중에 좌수영에 있는 군량미와 물자 그리고 병사들을 육군에서(물론 이순신보다는 계급인 위인 자들의 명령에 의해) 이순신에게 알리지도 않고 가져가는 일마저 있었다. 
이에 빡친 이순신은 선조에게 이 같은 행위가 얼마나 수군의 사기와 전쟁에 악영향을 미치는지에 대해 간곡하게 장계를 올린 것이 수 십차례에 이르지만 이 행태는 전쟁중에 전혀 개선되지 않았으며, 임진왜란 이후에는 이순신이 애써 이루어놓은 조선해군의 주요 인프라가 모두 해체되기에 이른다.(거북선은 임진왜란 이후에 사라졌다.)

3. 선조와 이순신간의 대립은 이미 잘알려져있다. 하지만 더 치명적 대립이 하나 더 있는데 그것은 광해군과의 대립이다. 선조와 달리 광해군은 임진왜란당시 육상에서 부대를 이끌고 왜군과의 전투에서 많은 공을 거둔다. 광해군도 당연히 전투를 치루면서 물자와 인원 보급에 어려움을 겪게 된다. 이에 수군에서 가장 큰 공을 이루고 있는 이순신에게 물자와 인원 보급에 대한 요청을 많이 하지만, 1,2의 상황에서 자신도 피똥을 싸고 계시던 이순신 장군으로서는 광해군의 요청을 들어줄 여력은 고사하고 그에게 서운한 마음까지 가질 지경이었다. 이로 인해 광해군은 이순신에 대해 선조보다 더한 반감을 가지고 있었던 것으로 보인다. 왜란 종전 이후 선조가 그래도 유성룡등의 요청으로 원균과 비슷한 수준에서 이순신에게 포상을 하지만, 그 이후 집권한 광해군은(이미 유성룡도 죽었고) 집권 기간중 이순신에 대한 어떠한 포상도 집행한 적이 없다. 이순신 장군의 공적이 재평가 된 것은 광해군 이후 남인의 주도로 인조반정으로 인조가 등극한 이후이다.
즉, 이순신은 당시 조선 최고의 권력인 왕과 그 왕세자 둘 모두에게 찍혀있던 상태라는 것이다.

이 책을 읽고 나서 1,2,3의 사정을 알고 나니.... 이순신 장군에 대해 내가 익히 알고 있던 기존의 지식으로 가늠했던 그분의 위대함이 얼마나 피상적이고 초라했던 것이라는 것을 알겠다.

이순신 장군의 임진왜란에 거치셨던 그 역경과 파란만장함은 마치 예수가 갈릴리지방에서 말씀들을 남기시고, 골고다에서 십자가를 지고 오르시던 그 처연함에 전혀 뒤지지 않는다는 것이 내 개인적인 감상이다.

마치 유대민족에게 예수가 있었다면, 우리 한민족에겐 이순신이 있었다고나 할까.

+ Recent posts