그냥 갑자기 문득 읽고 싶어져서 읽어봤다.


어쩌다 걸린게 이 책(푸른숲 주니어, 박상은 역)인데 청소년용으로 축약을 한건가 싶긴하다. 아마도 완역본이랑 내용의 차이는 없을 것 같다. 헤밍웨이의 하드보일드한 문체를 생각하면 완역과 거의 대동소이하지 않을까 싶다.


워낙 유명한 소설이고 내용이 잘 알려져있다 보니 이 책을 어릴때 읽었는지 아닌지도 잘 기억이 나지 않는다. 


노인 산티아고가 바다에 나가 거대한 청새치 한마리를 잡고 돌아오는 길에 상어떼에게 습격을 받아 뼈만 남은 청새치를 가지고 귀환한다는 지극히 단순하기 그지 없는 플롯이다. 그러나 이 작품을 쉬이 여길 수 없는 이유는 당대의 대 문호인 헤밍웨이의 마지막 작품이며 또한 그에게 퓰리처와 노벨상을 안겨준 작품인 탓이다.


이 작품을 읽은 감상은 나이든 어부의 단 하루의 에피소드에 인생의 핵심을 압축했다는데 있다. 그러므로 이 작품을 어릴때 읽는 것은 아마도 별 감흥이 없을 것이다. 적어도 30대쯤에나 이르면 인생경험이 아주 풍부한 20대나 겨우 이 작품의 맛을 조금이나마 느낄 수 있을 듯 하다.


이 작품의 백미는 누가 뭐라 해도 인생의 모든 산전수전을 겪은 산티아고가 이제껏 자기가 쉬이 가보지 않은 먼 바닷가로 이끌려, 이제껏 그 오랜 고기잡이를 하면서도 한 번도 접해보지 못한 5.5미터 길이의 대형 청새치가 낚시줄에 걸리면서 시작되는 물고기를 잡아 돌아오는 과정에서 겪는 것들-기다림, 고통, 배고픔, 피곤함, 보이지 않는 물고기와의 교감, 신에 대한 기도, 자신을 기다리는 유일한 존재인 소년 마놀린에 대한 그리움, 상어에 대한 분노, 공포, 체념, 그리고 아무것도 남지 않았지만 무사히 귀환한데 대한 신에 대한 감사 - 에 대한 헤밍웨이의 잔인하리만치 무미건조한 1인칭 묘사이다.


헤밍웨이는 내내 눌러왔던 노인에 대한 감정을 마놀린을 통해서 간략히 표현한다.


"소년은 노인이 숨을 쉬는지 살펴보고 나서, 노인의 두 손을 보고는 그만 울음을 터뜨렸다. 소년은 커피를 가져 오기 위해 조용히 밖으로 나갔다. 소년은 언덕길을 내려가는 내내 울었다."


노인과 바다는 말할 것도 없이 인간의 삶에 대한 메타포이다.


노인과 소년은 삶의 끝 그리고 시작에 대한 은유이자, 인간의 그 삶을 이어나가는 방식을 뜻한다. 소년은 노인의 상처난 두손과 구리빛으로 그을린 피부와 말라비틀어진 근육과 뼈가 드러난 등을 바라보며 인생의 고달픔을 그리고 사내의 의지를 마음으로 배우게 된다.


그러나 우리 대부분은 일반적으로 인생에 대해 그렇게 깊게 생각하지 않는다.


이 작품을 읽는 아주 많은 사람들의 입장을 헤밍웨이는 마지막 부분에 주점을 찾은 여자 관광객을 통해서 보여준다는 생각이 든다. 


백사장에 버려져 파도에 흔들리는 거대한 꼬리와 기다랗고 하얀 물고기의 뼈를 바라보며 여자는 "저게 뭐죠?'라고 묻는다. 이에 술집의 종업원은 티뷰론이라는 상어의 일종이라는 대답을 한다.

여자는 "상어가 저렇게 멋지고 아름다운 꼬리를 갖고 있는 줄은 몰랐네요."


술집의 종업원은 오고가는 선원들의 이야기를 통해 산티아고 노인이 고기를 잡고 돌아오는 길에 일을 당해서 뼈만 남은 고기를 가져온 사실을 들었을 것이다. 그러나 그 뼈를 본 여자 관광객이 알고 싶은 것은 그 뼈에 얽힌 사연보다는 그 외연만이 궁금할 뿐이다. 


그저 한 인생 살다갈 뿐인 여행객인 우리에겐 한사람 한사람의 역사를 마주할 여유보다는 그저 슬쩍 보이는 외피에서 유추되는 얕은 호기심만 충족되면 그뿐, 노인과 물고기의 사연따위는 별로 알고싶지 않은 것이다.


이 책을 보면서 만약 마놀린과 같이 눈물을 흘려줄 수 있다면 그 따뜻한 가슴으로 인생에 대한 이야기를 써 봐도 좋지 않을까라는 생각이 든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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