원제목처럼 세계사를 크게 움직인 13가지의 식물에 대한 이야기다. 저자가 식물학자이기 때문에 식물 자체에 대한 과학지식과 함께 이 식물에 얽힌 역사적 움직임을 재미있게 기술하고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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p82
포르투갈과 스페인은 탐험 과정에 자주 부딪혔고 툭하면 분쟁과 마찰로 이어졌다. 사실 두 나라는 콜럼버스가 신대륙을 탐험하기 이전부터 치열한 패권 다툼을 벌여왔다. 그들은 자국의 배가 닿는 곳이라면 그곳이 어디든 분쟁을 멈추지 않았다. 두 나라 사이에 끊임없이 분쟁과 반목이 이어이자 마침내 카톨릭 교황이 이 문제를 해결하기 위해 중재에 나섰다. 이때 교황이 제시한 중재안이 토르데시야스 조약(Treaty of Tordesillas : 지구의 바다를 둘로 갈라 스페인과 포르투갈의 국경선을 정한 조약)이다.
이 조약은 콜럼버스가 신대륙을 탐험하고 2년 뒤 체결되었다. 이 조약으로 대서양에는 경계선이 그어졌는데 서경 46도 37분 경계선 동쪽에서 새로 탐험한 땅은 모두 포르투갈령, 경계선 서쪽에서 탐험한 땅은 스페인령으로 삼기로 했다. 결국 포르투갈은 지배력을 다져가던 아프리카를 손에 넣었고 스페인은 이제 막 탐험한 땅으로 문명과 거리가 있던 아메리카 대륙을 손에 넣었다. 그렇게 포르투갈과 스페인은 세계를 둘로 나누어 지배하기 시작했다.
교황의 중재 노력으로 문제가 표면적으로 해결된 것처럼 보였으나 실상은 그렇지 않았다. 다른 유럽 국가들이 보기에 이는 공정하지 않은 처사였기에 전 유럽이 부글부글 들끓었다. 포르투갈, 스페인 독주 체제에 불만을 품고 카톨릭 질서에 반기를 드는 나라들이 등장하기 시작했다. 가장 먼저 카톨릭에서 멀어진 것은 네덜란드와 영국이었다.
이후 스페인은 아메리카 대륙을 야금야금 식민지로 만들기 시작했다. 스페인이 잉카제국을 정복한 시기도 이 무렵이었다. 그 탓에 지금도 중남미의 많은 나라가 스페인어를 사용하는데 남미에서는 유일하게 브라질만 포르투갈어를 사용한다. 그 이유는 포르투갈 탐험대가 정복한 브라질이 경계선 동쪽에 있었기 때문이다. 토르데시야스 조약에 따라 포르투갈은 브라질을 식민지로 삼은 것이었다.
아메리카 대륙을 제패한 스페인의 야욕은 거기서 멈추지 않았다. 이 나라는 서방항로 개척에 더욱더 박차를 가하여 아시아에 진출하려는 계획을 세웠다. 이 무렵 아메리카 대륙에서 태평양을 건넌 인물이 바로 페르디난드 마젤란이다. 묘하게도 인류 역사상 최초로 세계를 일주하여 지구가 둥글다는 이론을 증명한 마젤란은 포르투갈 사람이면서 스페인 왕의 명령을 받아 태평양을 횡단했다. '태평양'과 '마젤란해협'은 마젤란의 세계 일주 덕분에 붙여진 이름이다. 마젤란은 탐험 도중에 벌어진 필리핀 막탄섬 부족과 싸움에서 사망하는 바람에 임무를 완수하지는 못했으나 그의 부하들이 장장 3년이 넘는 긴 항해 끝에 꿈에 그리던 세계 일주 임무를 완수해냈다.
p90
후추는 고기를 오래 보존하는 데 필요했으나 단지 이 용도 때문에 그렇게 비싼 가격에 팔린 것은 아니었다. 사실 사치스러운 식생활을 즐긴 귀족들은 마음만 먹으면 언제든 신선한 고기를 먹을 수 있었다. 가축의 먹이만 충분히 확보해두면 굳이 가축을 미리 도축해 보관해둘 필요가 없었기 때문이다. 귀족이나 상류층에서 후추의 인기가 치솟고 그에 따라 엄청난 가격이 형성된 데는 사실 실용적인 목적보다는 자신의 높은 지위와 부를 과시하기 위한 상징적 목적이 더 크게 작용했다. 이는 설탕이 귀하던 시절에 사람들이 설탕을 부와 권력의 상징으로 여기던 것과 비슷한 현상이었다.
항해 기술이 발달하면서 후추를 대신할 만한 여러 종류의 향신료가 유럽으로 들어왔다. 그러자 과거에 금과 맞먹는 엄청난 가격에 팔리던 후추 가격은 급격히 하락하기 시작했다. 또다시 수요 vs. 공급 법칙에 따라 공급이 넘쳐나면 가격은 내려가기 마련이다.
후추 가격이 내려가고 대중화하면서 동인도회사는 후추를 대신할 돈벌이 수단으로 삼을 만한 새로운 교역품을 찾는 일에 혈안이 되었다. 그 과정에 동인도회사가 찾은 것이 바로 동양의 '차'다.
p139
차가 유행하기 전 영국에서는 아라비아반도에서 들여온 커피를 즐겨 마셨다. 당시 거리의 커피하우스는 거의 전적으로 남성 전유물이었다. 당시 거리의 커피하우스는 거의 전적으로 남성 전유물이었다. 그러자 커피하우스에 갈 수 없었던 여성들 사시에 티파티 열풍이 들불처럼 번져 나갔다. 이윽고 커피하우스를 대신해 여성들을 위한 '티가든'이 등장했다. 남녀 간의 만남을 원한 남성들이 티가든에 드나들면서 커피하우스는 차츰 손님이 줄다가 결국 문을 닫게 되었다.
p145
독립운동의 주축을 이룬 이들은 어떤 지역 어떤 계층의 사람들이었을까? 그전까지 차를 즐겨 마시던 부유한 미국 북부 사람들이었다. 미국 남부는 산업혁명으로 발달한 영국의 면직물 산업 덕분에 면화 수출로 짭짤한 재미를 보고 있었다. 당시 미국 남부 경제는 영국 없이는 오래 지탱하기 어려운 구조였다. 이에 따라 영국 의존에서 벗어난 경제적 자립을 목표로 하는 북부와 면화 재배를 지속하기 위해 영국과의 유대관계를 강화하고자 했던 남부 사이에 대립의 골이 점점 더 깊어졌다.
그 갈등이 폭발한 사건이 1861년 발발한 남북전쟁이다. 영국에서 홍차를 수입할 수 없었던 미국은 남부지역을 중심으로 자국에서 차를 생산하려 했으나 남북전쟁 때문에 차 재배는 어중간한 시도로 끝나고 말았다.
p149
열대 지방은 병충해가 많은 편이라 아삼종은 항균작용을 지닌 카페인 함유량이 많다. 녹차는 아미노산의 감칠맛을 즐기는 음료이고 홍차는 카페인의 씁쓸한 맛을 음미하는 음료이므로 아삼종은 홍차에 적합하다.
p158. 인간의 중노동을 먹고 자라는 잔혹한 식물, 사탕수수
사탕수수가 재배되기 전 대부분 농업은 노예를 필요로 하지 않았다. 그러나 사탕수수는 달랐다. 사탕수수를 수확하는 일은 엄청난 강도의 노동을 수반하는 일이었기 때문이다. 기존의 다른 농업에도 어느 정도 중노동이 필요하기는 했다.
벼농사를 예를 들어보자. 논에 벼를 심어 쌀을 생산하자면 모를 심기 전 과정만 해도 땅을 갈아엎어야 하고 갈아엎은 논바닥을 평평하게 고르거나 흙덩이를 잘게 부수어야 했다. 이런 일을 사람이 직접 하려면 엄청난 중노동이 될 것이었다. 그러나 인류는 일찌감치 소와 같은 힘센 가축의 힘을 빌려 쟁기질하고 써레질함으로써 혹독한 노동에서 벗어날 수 있었다.
3미터에 달하는 거대한 식물 사탕수수는 벼와 다르다. 수확할 때 만만치 않은 중노동이 요구되지만 벼농사에서처럼 가축을 동원할 수 없었다. 모종을 심는 일에서부터 기르고 수확하는 일에 이르기까지 모든 과정을 사람의 힘과 노력으로 해내야 했다. 20세기 들어서서 기계를 개발할 때까지 사탕수수 농사에 들어가는 노동력은 고스란히 인력으로 충당해야 했다.
사탕수수 농업은 농사 자체에도 엄청난 노동력이 들어가지만 수확이 끝난 뒤 설탕을 정제하는 과정에도 만만치 않은 노동력이 요구되었다.
사탕수수 줄기 안에는 설탕 성분을 저장한 부분이 있다. 수확하고 나면 줄기 안의 그 부분이 차츰 딱딱하게 굳어간다. 처음에 농부들은 사탕수수 줄기가 굳기 전 신선한 상태에서 가열 과정을 거쳐 추출해야 한다고 생각해 수확한 사탕수수를 다발로 묶어 보관하지 않았다.
그들은 대량의 사탕수수를 한꺼번에 수확해 한 차례 정제 과정을 거쳐 설탕으로 만드는 작업을 했다. 그러자니 사탕수수를 한번에 수확하기 위해 노동력을 집중적으로 투입해야 했다. 한꺼번에 수확하고 한꺼번에 정제해야 하는 이런 특성 때문에 사탕수수는 쉬엄쉬엄 재배할 수 없는 작물이었다. 여기에 더해 이 녹록지 않은 과정을 수시로 반복해야 했다.
이는 여유롭고 느긋하게 일하며 전원생활을 즐기는 목가적인 농업과는 거리가 먼 생산 방식이다. 이 작업을 효율적으로 진행하기 위해 사람들은 사탕수수밭을 대규모로 조성했다. 무엇보다 수확한 다음 곧바로 정제해야 했기에 다른 작물처럼 시장에 판매하고 난 뒤 가공을 기다릴 여유가 없었다.
결국 사탕수수를 생산과 동시에 정제하는 공장이 세워졌다. 공장이 문을 열자 쉴 새 없이 설탕을 생산하는 일만 남았는데 이 일련의 과정을 플랜테이션이라 부른다.
플랜테이션이 대량의 집중적이고도 지속적인 노동력이 필요했다. 그런 터라 플랜테이션 농장주들은 처음에 전쟁 포로를 사탕수수 농업 및 정제 과정에 투입했다. 그러다가 전쟁 포로로는 엄청난 일손을 감당할 수 없게 되자 점차 노예 노동력으로 대체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