암사자가 몇 마리의 새끼 사자를 낳아서 기르는 몇년 간의 기간을 촬영한 동물 다큐를 본 적이 있다.
사냥을 위해 사냥감이 되는 동물들의 이동과 함께 사자 무리도 이동을 하는 중에, 새끼 사자 중 한 마리가 도중에 다리가 부러지는 사고를 당했다.
어미는 뒤처지는 새끼 사자를 애처롭게 몇 번을 뒤돌아보다가 결국은 버려둘 수 밖에는 없었다.
고고학자들이 선사 시대의 인류의 유적지를 발굴하다가, 두개골의 뒷쪽이 함몰된 해골들을 보는 경우가 종종 있다고 한다.
보통은 나이가 든 여인들일 경우가 많다고 한다.
사인死因은 정착생활을 하기 이전, 수렵과 채집을 위해 이동을 해야하는 생활을 하던 때, 이동능력이 떨어지는 노인들, 특히 약한 여인들의 머리를 석기 등으로 가격했던 흔적으로 학자들은 예상한다고 한다.
유교적 공통의 전통을 가지는 동양(특히 한,중,일)에서는 충忠과 효孝라는 개념을 중시한다. 그 중에 효는 서양과 대비되는 개념으로 동양적 인간관계에 있어서 가장 근원적인 개념이다.
공자孔子에게 제자가 효가 무엇인지에 대해 물었던 적이 있다.
이때 공자는 이런 대답을 한다.
"그저 자식이 어찌될까, 항상 전전긍긍하는 부모의 마음이다."
부모를 애지중지하는 내리사랑은 자연스럽게 자식을 감화하고, 자식이 부모를 공경하고 사랑하며, 더 나아가 그 자식이 다시 자식을 낳아서 부모와 마찬가지로 자식을 애지중지하는 마음으로 이어져 내려오게 된다.
우리는 부모가 자식을 사랑하는 이러한 관계를 당연시하지만, 역사의 기록으로만 봐도 부모가 자식을 사랑하는 것은 그저 본능에 기인한 것만은 아니라는 것을 알 수 있다.
예를 들어 동서양을 막론하고 역사적인 전염병이나 대기근이 덮친 때에, 자식이 부모를 버리고, 부모가 자식을 잡아먹는 일이 비일비재했다는 잔인한 기록을 찾아볼 수 있다.
인간도 생존이 위협받게 되면, 야만의 본능이 살아나 짐승이 될 수 있다.
인류가 야만을 벗어나, 문명을 이룬 삶의 정수精髓는, 비싼 집에 살며, 멋진 옷을 입고, 폼나는 차를 타고 나가 훌륭한 식당에서 맛난 요리를 즐기는 외형적인 삶에 있지 않다.
인류가 이룬 문명의 진정한 위대함은, 대부분 위대한 사상 혹은 그들의 작품 속에 집약되어 있다.
예수, 석가모니, 공자, 뉴턴, 아인슈타인, 레오나르도 다빈치, 추사 김정희, Queen, 등등..
이 중에서도 동,서양의 위대한 사상가인 예수, 석가모니, 공자와 같은 성현들이 베푼 가르침의 근본은
바로 자신이 옳다고 믿는 궁극적 가치에 헌신하고, 생명을 무엇보다 소중히 하며, 생존의 본능을 뛰어넘어 약자를 보호한다는 이타적 박애를 인류기 지켜야 할 궁극의 가치로 삼았다는 것이다.
과연 현대를 사는 우리는 이러한 가치들을 수천 년 전에 설파한 그들이 살고 있던 시대에 비해 더 소중히 여기고 있는가?